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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989%EB%85%84%20%ED%95%9C%EA%B5%AD%ED%94%84%EB%A1%9C%EC%95%BC%EA%B5%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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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한국프로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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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한국프로야구는 한국프로야구가 여덟 번째 해를 맞는 순위 등을 올린 것이며, 1988년과 달리 108경기에서 12경기 늘어난 120경기를 하였다. 1989년에 있었던 팀은 해태 타이거즈, 빙그레 이글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OB 베어스, MBC 청룡, 롯데 자이언츠가 있다. 해태가 5번째 우승을 하게 되었고 또, 4년 연속 우승을 하였다. 1989년부터 전·후기 리그 제도가 폐지되고 단일 리그 제도가 시행됨으로써, 1988년까지 시행되었던 전·후기 리그를 치러서 전·후기 1,2위팀이 모두 다른 경우에 전기리그 1위팀과 후기리그 2위팀, 후기리그 1위팀과 전기리그 2위팀이 플레이오프를 치른 뒤 승리팀끼리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규칙과, 한 팀이 전·후기 리그의 2위 안에 들면 그 팀은 곧바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규칙이 없어지고, 그대신 정규시즌 3·4위팀이 3전 2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를 치르고, 그 승리팀이 정규시즌 2위팀과 5전 3선승제의 플레이오프를 치른 뒤에, 플레이오프의 승자가 정규시즌 1위팀과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규칙이 생겨났다. 1989년 프로 야구 순위 1989년 포스트 시즌 경기 득점 기록에서 기울임은 홈팀을, 진하게는 승리팀을 나타냅니다. 1989년 준플레이오프 기간:10월 8일 - 10월 11일 정규리그 3위팀 태평양 돌핀스 VS 정규리그 4위팀 삼성 라이온즈 태평양 2-1 승 10월 8일 - 태평양 3, 삼성 0 10월 9일 - 삼성 4, 태평양 3 10월 11일 - 태평양 2, 삼성 1 1989년 플레이오프 기간:10월 14일 - 10월 17일 정규리그 2위팀 해태 타이거즈 VS 준플레이오프 승리팀 태평양 돌핀스 해태 3-0 승 10월 14일 - 해태 10, 태평양 1 10월 15일 - 해태 1, 태평양 0 10월 17일 - 해태 5, 태평양 1 1989년 한국시리즈 기간:10월 26일 - 11월 1일 정규리그 1위팀 빙그레 이글스 VS 플레이오프 승리팀 해태 타이거즈 5차전은 중립구장이므로 홈팀 없음 해태 4-1 승 10월 26일 - 빙그레 4, 해태 0 10월 27일 - 빙그레 4, 해태 6 10월 29일 - 해태 2, 빙그레 0 10월 30일 - 해태 6, 빙그레 2 10월 31일 - 빙그레 1, 해태 5 1989년 팀별 기록 순위 1989년 팀별 타율 순위 1989년 팀별 평균자책 순위 1989년 팀별 득점 1989년 팀별 실점 1989년 팀별 홈런 개수 1989년 주요 기록 1989년 최고 기록 1989년 투수 부문 최고 기록 1989년 타자 부문 최고 기록 1989년 수상 내역 1989년 골든 글러브 수상자 1989년 한국프로야구 관중 현황 1989년 진기록 명기록 역대 경기 최소 타석을 OB와 해태가 기록하였다. 역대 경기 최소 타수를 OB와 태평양 가 기록하였다. 최초 한 이닝 선발전원 득점을 삼성이 MBC전에서 기록하였다. 같이 보기 1989년 한국시리즈 1988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 199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 외부 링크 한국야구위원회 한국야구위원회 구단 홈페이지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1989년 야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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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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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C%A7%84%EC%A0%84%EC%9E%90%ED%86%B5%EC%8B%A0%EA%B3%A0%EB%93%B1%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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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전자통신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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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전자통신고등학교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84년 2월 6일 : 학교법인 대진대학교 설립인가 1996년 3월 5일 : 대진전자공업고등학교 제1회 입학식 1997년 3월 1일 : 대진전자정보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1999년 2월 11일 : 제1회 졸업식 2001년 3월 31일 : 정보통신특성화 고등학교 지정 2002년 3월 2일 : 대진정보통신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2016년 2월 12일 : 제18회 졸업식 292명, 총누계 졸업생 7,352명 2016년 3월 1일 : 대진전자통신고등학교로 교명변경 및 학과개편 2018년 2월 13일 : 제20회 졸업식 2019년 3월 4일 : 제24회 입학식 2020년 9월 1일 : 제5대 이창우 교장 취임 설치 학과 전기전자과 산업디자인과 스마트콘텐츠과 컴퓨터소프트웨어과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대진전자통신고등학교 홈페이지 부산 금정구의 고등학교 전문계 고등학교 부산광역시의 사립 고등학교 1996년 개교 특성화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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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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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7%80%EB%A7%88%EA%B0%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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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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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마개는 시끄러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도록 소음을 방지하거나 물놀이 등에서 귓속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할 목적으로 귓속에 꽂는 조그만 물건이다. 역사 귀마개 사용에 관한 최초 언급은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있다. 1907년, 독일의 기업 Ohropax는 독일의 발명가 Max Negwer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주로 왁스 형태의 귀마개를 생산하게 된다. 레이와 Cecilia Benner는 형을 만들 수 있는 순수 실리콘 귀마개를 1962년 발명하였다. 이 귀마개는 방수가 가능하고 해로운 소음을 막아주는 것을 시도하는 까닭에 수영 선수들에게 가치가 있었다. 외부 링크 Royal National Institute for Deaf people National Institute for 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 Hearing Protector Device Compendium NIOSH Science Blog: NIOSH HPD Well-Fit™: The Future is Fit-Testing 청각 보호 장비 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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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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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A9%ED%83%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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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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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태는 대한민국 민법의 개념으로 사람의 정신작용에 기하는 것을 뜻한다. 크게 외부적 용태와 내부적 용태로 나뉜다. 용태랑 대비되는 개념은 사건으로 사람의 정신작용과 관련 없는 출생, 사망 등이 있다. 외부적 용태 사람의 정신작용에 기한 행위가 외부에 표현되는 것을 나타낸다. 적법행위와 위법행위로 나뉜다. 적법행위: 의사표시와 준법률행위로 나뉜다. 위법행위: 채무불이행, 불법행위 등이 있다. 내부적 용태 심리작용은 있으나 그것이 행위로 외부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크게 관념적 용태와 의사적 용태가 있다. 관념적 용태: 선의나 악의 등이 있다. 의사적 용태: 점유의 의사, 소유의 의사 등을 나타낸다. 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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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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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9D%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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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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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음 또는 어금닛소리는 어금니에서 나는 소리라는 뜻으로 전통적 음운학에서 두자음들을 분류하였던 말. 오음의 하나. 훈민정음 초성 체계 훈민정음 초성 체계에서는 'ㄱ'애미 뒤집 토이스토리 현대 음성학에서 전청은 무기 무성음, 차청은 유기 무성음, 전탁은 경음, 불청불탁은 유성음 가운데 비음, 유음, 마찰음, 두자음 없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것을 나타낸다. 중국 음운학 중국 음운학에서 성모를 분류한 오음 중의 하나다. 현대 음성학에 있어서 연구개 파열음, 비음에 해당된다. 중국어 중고음의 성모을 표기하는 삼십육자모에서 다음과 같이 분류되어 있다. 현대 음성학에서 전청은 무기 무성음, 차청은 유기 무성음, 전탁은 유성음 가운데 파열음, 마찰음, 파찰음, 차탁은 유성음 가운데 비음, 유음, 반모음, 영성모을 나타낸다. 훈민정음 음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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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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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8%B0%ED%9B%88%20%28%EC%87%BC%ED%8A%B8%ED%8A%B8%EB%9E%99%20%EC%84%A0%EC%88%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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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 (쇼트트랙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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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은 대한민국의 은퇴한 쇼트트랙 선수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동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다. 리라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스케이트를 시작하여 경기고등학교와 단국대학교와 단국대학교대학원 석사, 한국체육대학교대학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생애 1988년 캘거리 동계 올림픽에 시범 종목으로 열린 쇼트트랙 종목에 출전하여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 올림픽에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쇼트트랙 종목에 출전하여 1000m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동계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이어 5000m 계주에서도 금메달을 따서 2관왕이 되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 다시 1000m에서 금메달을 땄다. 1998년 동계체전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현재 울산과학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 경력 2011.12~ 울산과학대학교 사회체육과 교수 2010.03 ISU 쇼트트랙 세계선수권대회 대표팀 감독 2010.01 밴쿠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 2007 울산과학대학 사회체육과 교수 2010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 2007 울산과학대학교 사회체육과 교수 2002 쇼트트랙 남자대표팀 코치 2002 쇼트트랙 주니어대표팀 감독 1998~1999 쇼트트랙 국가대표 상비군 지도자 1998 조흥은행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 금메달 1993 쇼트트랙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공동 3위 1992 쇼트트랙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우승. 전종목 석권 5관왕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 금메달, 5000m 계주 금메달. 1991 쇼트트랙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2위 1991 동계 유니버시아드 4관왕 1989 쇼트트랙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2위 1989 동계 유니버시아드 3관왕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금메달 1985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 각주 외부 링크 김기훈 - 국제 빙상 연맹 김기훈 - Olympedia 김기훈 - Sports Reference 1967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대한민국의 남자 쇼트트랙 선수 대한민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올림픽 쇼트트랙 메달리스트 1992년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1994년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대한민국의 올림픽 쇼트트랙 참가 선수 1988년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참가 선수 1992년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참가 선수 1994년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참가 선수 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 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 아시안 게임 쇼트트랙 메달리스트 1986년 동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1990년 동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1986년 동계 아시안 게임 쇼트트랙 참가 선수 1990년 동계 아시안 게임 쇼트트랙 참가 선수 대한민국의 유니버시아드 금메달리스트 대한민국의 유니버시아드 동메달리스트 유니버시아드 쇼트트랙 메달리스트 1989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메달리스트 1991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메달리스트 1989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쇼트트랙 참가 선수 1991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쇼트트랙 참가 선수 체육훈장 청룡장 수훈자 체육훈장 맹호장 수훈자 체육훈장 거상장 수훈자 서울특별시 출신 스포츠인 함창 김씨 리라초등학교 동문 배재중학교 동문 경기고등학교 동문 단국대학교 동문 단국대학교 대학원 동문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 동문 대한민국의 불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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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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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2%BD%EC%84%B1%EC%97%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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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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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역은 다음의 역을 말한다. 서대문역 - 1901년부터 1905년까지 ‘경성역’으로 불렸으며, 지금의 서울역보다 북쪽에 있었던 폐역이다. 서울역 - 1923년부터 1947년까지 ‘경성역’으로 불렸으며, 서대문역의 폐지 이후 서울특별시의 대표역이다. 승암역 - 경성군에 있는 함경선의 철도역 원래 경성역이었으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군청이 이전하여 역명이 변경되었다. 경성역 - 함경북도 경성군의 철도역이다. 원래의 역명은 주을역이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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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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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B%B8%94%EB%A1%9C%20%EC%B9%B4%EC%82%B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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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카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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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블로 꺼절스 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출생한 첼로 연주자이자 지휘자이다. 카탈루냐어 본명은 빠우 꺼절스 이 데필료이다. 프랑스에 주로 거주한 그는 "현대 첼로 연주의 아버지"로 불린다. 소년 시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헌책방에서 발견하고 초연한 바 있다. 개요 현대의 첼로 연주법을 확립한 역사적인 명가이며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의 진가를 처음으로 세상사람에게 알려준 공적은 매우 크다. 첼로의 신이라고도 불리며, 현대의 첼리스트이면 누구나 직접·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에스파냐 카탈로니아 지방에서 태어나, 호세 가르시아에게 사사하였으며, 1919년에는 바르셀로나 관현악단을 창립하여 지휘자로서도 활약하였다. 티보, 코르토와 함께 카살스 3중주단을 결성한 것은 유명하다. 1936년 에스파냐내란으로 수립된 프랑코 정권을 피하여 조국을 떠나, 1950년부터 남프랑스의 프라도에서 살면서 매년 카살스 음악제를 열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중남미의 푸에르토리코에서 살며 카살스 음악제·카살스 첼로 콩쿠르를 열었으며, 본의 베토벤의 집이나 국제연합과 같은 특정한 연주회와 마르보로 등 소수의 음악제에 한해서만 출연했다. 작곡도 하였으며, 만년의 작품으로 오라토리오가 있다. 대표적인 음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936년-1939년, 엔젤/EMI 같이 보기 스즈키 신이치) 마크 오코너 각주 스페인의 지휘자 스페인의 클래식 첼로 연주자 프랑스의 지휘자 1876년 출생 1973년 사망 프랑스에 거주한 스페인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교수 바르셀로나 대학교 교수 파리 대학교 교수 푸에르토리코 대학교 교수 19세기 클래식 작곡가 20세기 클래식 작곡가 스페인의 클래식 작곡가 그래미 평생 공로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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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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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D%83%9D%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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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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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기는 대한민국의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호는 성담, 본관은 강릉이다. 강원도 동해에서 태어났다. 약력 서울교동초등학교 졸업 중앙중학교 졸업 중앙고등학교 졸업 1987년 고려대, 국민대, 한국외국어대, 강원대학교 강의 1991년 동부애트나생명보험주식회사 사장 1992년 동부고속주식회사사장 1993년 한국자동차보험주식회사 사장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2000년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 2000년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위원 2001년 국회 재정관련3법 법안심사소위원회 위원 2001년 국회 기후변화협약대책특별위원회 위원 2002년 새천년민주당 기획조정위원회 위원장 2003년 열린우리당 정강정책위원회 위원장 2005년 강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 2006년 열린우리당 탈당 2008년 1월, 한나라당에 입당하려 했으나 한나라당 강원도당에서 입당을 보류했다. 그러나, 3월에 한나라당의 제18대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 받아 한나라당 입성에 성공했다. 선거 운동 도중 금품 살포 등을 선관위에 적발돼 후보직을 사퇴하고 공천권도 반납했다. 가족 관계 아버지: 김진만 형: 김준기 자녀: 본인과 전처 이양희사이에 1남 1녀 역대 선거 결과 참고자료 각주 외부 링크 195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동해시 출신 강릉 김씨 중앙고등학교 동문 서울교동초등학교 동문 중앙중학교 동문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중앙대학교 교수 고려대학교 교수 국민대학교 교수 강원대학교 교수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당원 새천년민주당 당원 열린우리당 당원 한나라당의 정치인 강원특별자치도의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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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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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2%85%EC%98%81%20%28%EC%B2%A0%ED%95%99%EC%9E%9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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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영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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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영은 대한민국의 철학자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와 한국학대학원 사회학 전공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프랑스 프로방스 대학에서 사회학, D.E.A. 학위를 받았고 1993년 파리 8대학에서 정치사회학-정치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 1994. . 백의. 1994. . 백의. 1995. . 백의. 1997. . 백의. 1998. . 백의. 2001. . 새물결. 2001. . 새물결. 2002. . 새물결. 2004. . 새물결. 2005. . 새물결. 2008. . 새물결 역서 1995. . 알랭 바디우. 백의. 1997. . 루이 알튀세르. 백의. 2001. . 알랭 바디우. 동문선. 2002. . 실뱅 라자뤼스. 새물결. 2002. . 삐에르 끌라스트르. 변지현과 공역. 울력. 2006. . 알랭 바디우. 새물결. 외부 링크 대한민국의 철학자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살아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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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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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B%82%9C%EA%B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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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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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혹은 완구는 놀이에 사용되는 물건이다. 장난감들은 주로 어린 아이들과 가정동물에 관련된 물건으로 여겨지지만 청소년과 성인과 노인과 야생 동물들도 장난감과 놀기도 한다.어떤 장난감들은 오직 수집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포유류에 속하는 어린 동물들은 솔방울, 음식, 돌을 장난감으로 삼으며, 애완견도 인형이나 공같은 장난감을 갖고 놀 수 있다. 인간들은 선사 시대때부터 장난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인더스 문명,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돌과 찰흙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장난감은 아이들에게 인지력과 창조력을 길러 주는 역할을 한다. 인형, 미니카, 퍼즐, 수집용 장난감과 육체적 활동을 할 때 사용되는 장난감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역사 최초의 장난감들은 바위, 막대, 점토와 같은 천연 물질로부터 만들어졌다. 수천년 전, 이집트의 어린이들은 돌, 도토, 나무로 만든 가발 및 이동식 팔다리가 있는 인형을 갖고 놀았다. 아동용 완구 아동용 완구를 교육적 입장에서 대별하면 정서교육 완구와 과학교육 완구로 나눌 수 있다. 집짓기 장난감 따위는 전자에 속하고, 금속제의 자동차나 기차 따위는 후자에 속한다. 창조 능력의 개발을 위해서는 전자가 알맞고, 여러 가지 과학지식을 주입시키는 데는 후자가 적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시판되고 있는 완구에 관한 분류이다. 더욱 넓게는 모래사장에서나 소꿉놀이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는 모두가 어린이들의 창작력을 북돋우는 완구가 되는 것이다. 유아의 지혜를 발달시키는 완구의 대표적인 것은 집짓기 따위의 구성완구이다. 구성완구는 아동의 창의와 연구심을 길러 줄 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움직이는 완구의 대표적인 것은 전차나 자동차 따위 금속제 완구이다. 그 대다수가 동력으로 전동기·용수철 등을 이용하였고, 동력의 전달 방법은 톱니바퀴의 결합이다. 성인용 완구 성인들의 마음을 끄는 완구는 그만큼 내용에서 깊이가 있어야 한다. 성인이 즐기는 완구의 공통점의 하나는 구성력과 상상력을 지닌 완구이고, 또 하나는 상식에 도전하는 이른바 의외성을 지닌 완구이다. 15숫자 맞추기라는 완구가 예의 하나다. 차례차례로 빈자리를 메우는 손질을 거듭함으로써 어떤 순열에서 다른 순열로 되도록 손쉽게 변환시키는 데 목적을 둔 완구이다. 6개 팀을 한줄로 세우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까지 생각하도록 이끌어 나간다. 종류 완구는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공 모형 만들기 재료 인형, 동물, 축소 모형 조종 가능한 모형 퍼즐 운동 기구 수집 도구 전자 완구 기타 완구 제조 업체 아카데미과학 옥스퍼드 마텔 반다이 교쇼 타미야 이탈래리 LEGO 하스브로 영실업 옥스포드 초이락컨텐츠컴퍼니 같이 보기 놀이터 놀이 바비 보드게임 인형 피겨 장난감을 소재로 한 영화 토이 스토리 토이 스토리 2 토이 스토리 3 토이 스토리 4 각주 외부 링크 일본 완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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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A1%9C%ED%83%80%EA%B3%A0%EB%9D%BC%EC%8A%A4%20%28%EB%8C%80%ED%99%94%ED%8E%B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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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타고라스 (대화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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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타고라스》는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의 하나이다. 개요 이 글은 소피스트로서 유명한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와의 덕에 관한 대화이다. 덕이란 무엇이며 과연 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일까라는 문제가 음미된다. 소크라테스는 절제·경건·용기·정의·지혜라고 하는 여러 가지 덕이, 그것들이 정말로 덕이라고 할 수 있는 공통된 덕의 본질을 문답 형식으로 탐구해 나간다. 만약 이러한 여러 덕의 본질이 지식임을 안다면 덕은 가르쳐진다고 해도 좋으며, 덕은 지식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한편 프로타고라스는 덕은 가르쳐지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덕이 지식이라는 점을 부정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프로타고라스는 정의·용기·절제 등 여러 덕이 마치 얼굴 가운데서 코나 눈이나 입처럼 각각 다른 것이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경건한 태도를 갖지만 바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든지, 지혜롭지는 못하지만 사려가 깊다고 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덕이 황금의 일부분처럼 동일하다고 한다면 용기·절제·경건 등등으로 구별되는 것은 무엇에 의해서인가. 결론으로서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은 지식이지 않느냐, 그러므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암시가 전체를 통하여 풍기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여, 정의에 마음을 쏟았다"라고 하였는데 이 경우 그 보편적인 것에 해당하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지식이라 해도 좋다. 그가 말하는 지식이란 머리에서 생각만 하는 이론적인 지식은 아니다. 그것을 가지면 악을 저지를 수 없는 체득적 지식이라 하겠다. 그러한 지식을 얻는 것이 덕이며 사람들의 행복으로 연결되어 간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이른바 "지는 덕"이며 "덕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윤리가 이 대화편에 암시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등장인물 소크라테스 · 무명친구 프로타고라스 · 프로디코스 · 히피아스 · 히포크라테스 · 알키비아데스 · 칼리아스 · 크리티아스 대화시기와 장소 대화시기: 기원전 약 433년 대화장소: 칼리아스의 집 대화의 형식 아테네를 방문하여 칼리아스의 집에 묵고 있는 프로타고라스를 소크라테스가 찾아가 그곳에 모여 있는 여러 사람들을 청중으로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자신 사이에 있은 대화를 무명친구에게 이야기해 주는 이른바 틀대화이다. 대화의 주제 덕을 가르칠 수 있는가? 각주 읽어보기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 라케스/ 메논 - 원제 Platonis Opera 3》, 박종현, 서광사, 2010. 《프로타고라스 - 원제 Protagoras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2》, 강성훈, 이제이북스, 2012. 《고르기아스 / 프로타고라스 - 소피스트들과 나눈 대화 원제 Gorgias Protagoras》, 천병희, 도서출판 숲, 2014.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플라톤의 대화편 사고 실험 철학에 관한 사고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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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9D%8C%EC%9D%8C%EA%B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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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음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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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음음계는 다섯 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음계이다. 계면조 펜타토닉 메이저 펜타토닉 마이너 음계 명수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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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95%BC%EC%9E%90%EC%99%80%20%EA%B2%90%EC%A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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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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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는 이와테현 출신의 일본의 문인이자 교육자, 에스페란티스토이다. 향토애가 짙은 서정적인 필치의 작품을 다수 남겼으며, 작품 중에 다수 등장하는 이상향을 고향인 이와테의 에스페란토식 발음인 ihatovo라고 명명하였다. 지주들의 수탈로 가난에 허덕이던 농촌의 비참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인 《은하철도의 밤》을 짓는 등의 문학활동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사후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점점 높아져 국민작가의 이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널리 읽히고 있다. 생애 1896년 이와테 현 하나마키에서 태어나, 모리오카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단가를 짓고, 법화경을 읽었다. 1921년에 문필에 의한 대승불교 포교를 결의하고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26년에는 라스지인협회를 설립하여 농촌운동에 나섰다. 그러다가 건강이 안 좋아져 쓰러졌고 회복과 악화를 반복하다 결국 1933년 9월 21일 급성 폐렴으로 37세에 세상을 떠났다. 저서 쥐돌이 쳇 주문 많은 음식점 바람의 마타사부로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은하철도의 밤 첼로 켜는 고슈 카이로 단장 우리말 번역 박정임 옮김, 《미야자와 겐지 전집 1~3》, 너머, 2018년 8월 7일 정수윤 옮김, 《봄과 아수라》, ITTA, 2018년 4월 13일/2022년 12월 9일 미디어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 - 익스트림 서프라이즈》은하철도의 밤 EBS 《지식채널 e》 은하철도의 밤 같이 보기 방정환 1896년 출생 1933년 사망 이와테현 출신 일본의 작가 일본의 소설가 일본의 교육학자 일본 제국 사람 일본의 에스페란티스토 일본의 불교 신자 이와테 대학 동문 20세기 시인 일본의 시인 이와테현립 모리오카 제1고등학교 동문 법화계 불교도 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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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I%20Believe%20%28%EC%9D%B4%EC%88%98%EC%98%81%EC%9D%98%20%EC%9D%8C%EB%B0%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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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lieve (이수영의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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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lieve》는 가수 이수영의 데뷔 음반이다. 발매 당시 대형 빌딩의 전광판 및 신문 등을 이용한 대대적인 홍보를 하였다. 음반명이자 타이틀 곡명인 〈I Believe〉는 동양적 분위기의 발라드 곡이다. 후속곡 〈Goodbye My Love〉의 오케스트라 버전이 나오면서 오케스트라 버전과 〈I Believe〉의 뮤직비디오 영상을 추가하여 앨범이 재발매되었다. 1집은 〈I Believe〉 단 한곡을 제외하면 이수영의 색깔로 알려진 여린 음색의 반가성과는 정반대의 창법인 고음을 강조한 진성 창법이 구사된 곡들로 채워져있으며 창법이 본격적으로 정비되기전 녹음한 곡들로 수록되었다. 본 음반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MGR은 첫 앨범부터 가수의 방향성을 제시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대중적인 곡들로 노래를 채웠다고 말했다. 특히 이 음반은 당시 가요음반들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최종 마스터링을 일본에서 해왔다. 제작자가 음반의 퀄리티에도 상당히 신경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록곡들 가운데 〈나무〉는 영화 《흑수선》의 OST로 사용되었다. 수록곡 정식 버전 재발매 버전 1999년 음반 이수영의 음반 1999년 데뷔 음반 대한민국의 팝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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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7%81%ED%86%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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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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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통, 직통 운전, 직통 운행은 다음 뜻을 가리킨다. 직결 운행 급행 운행 장거리를 이동하는 버스 등에서 중간에 정차하는 정류소가 없거나 최소화하여 목적지까지 운행하는 것을 일컫는 말.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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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A%A8%EC%9A%A9%EB%A1%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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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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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용론 혹은 수용론은 문학 감상 및 비평의 관점 중 하나로서 외재적 관점에 속한다. 효용론은 문학 작품에서 작품과 독자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관점이다. 이때 작품의 수용자는 ‘능동적 참여자’로서, 그 해석은 수용자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으며 문학 작품의 의미는 이러한 수용자의 해석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일부에서는 효용론과 수용론의 정의를, 효용론은 제3자의 입장에서 독자의 반응을 고려할 때의 비평으로, 수용론은 독자의 입장에서 수용할 때의 비평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효용론과 수용론은 같은 개념으로 여긴다. 같이 보기 반영론 표현론 절대주의론 외재적 관점 문학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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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B0%B0%EC%8B%9D%EB%AC%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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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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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식물은 식물의 가장 흔한 집단이다. 이에는 나무와 양치식물, 이끼 그리고 다양한 녹조 유지 식물을 포함하고 있다. 모두는 특수한 재생 기관을 지닌 복잡한 다세포 진핵생물이다. 소수를 제외하고, 유배식물은 광합성을 통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그리고 이산화탄소로부터 영양분을 합성한다. 유배식물은 다세포 조류를 사용하는 남조류와 구별된다. 게다가 유배식물의 일부는 수상에 살지만, 주로 육지에 산다. 따라서 이들을 육지식물 또는 육상식물로 부르기도 한다. 하위 분류 비관다발식물 지의문 각태식물문 선태식물문 † 호르네오피톤강 관다발식물 † Rhyniophyta † Zosterophyllophyta 석송문 † Trimerophytophyta 양치식물문 종자식물상문 † 양치종자식물문 구과식물문 소철문 은행나무문 마황문 속씨식물문 계통 분류 각주 식물 식물분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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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B%A5%B4%EB%A9%94%EB%A5%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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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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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메르는 이집트 제1왕조의 초대 파라오이며, 나르메르의 뜻은 호루스 이름으로 "공격하는 메기"라는 뜻이다. 상이집트, 하이집트를 통일한 첫번째 파라오로 알려져 있다. 나르메르의 유적 나르메르와 관련된 중요한 유적은 바로 나르메르 팔레트이다. 이 짙은 녹색 팔레트 조각은 고대 이집트의 기념물 중 역사적 기록이 담긴 최초의 기념물이다. 첫 번째 팔레트에서 나르메르는 상이집트의 상징인 백관을 쓴 채 상대방의 앞머리를 잡고 몽둥이로 내려 치려는 듯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장면은 서양 역사에서 왕의 정복장면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두 번째 팔레트에서는 하이집트의 상징인 적관을 쓴 채로 병사들의 사열을 지켜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양 쪽의 왕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다른 유적인 나르메르의 지팡이 머리에는 파라오의 왕위 갱신제인 헤브-세드를 기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헤브-세드가 대체적으로 왕이 된 지 30년이 된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보아, 나르메르는 30년 이상을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 마네토의 기록에 의하면 나르메르는 메네스와 같은 인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그가 상·하이집트의 통일자이자, 호르-아하의 전대 파라오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 문헌 피터 클레이턴 저, 정영목 역, 《파라오의 역사》, 까치, 2004 외부 링크 The Narmer Catalog 이집트 제1왕조의 파라오 기원전 32세기 파라오 기원전 31세기 파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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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B9%98%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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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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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기 놀이는 한국에서 아이들이 마당이나 골목 등에서 긴 막대로 짧은 막대를 치며 노는 놀이로 메뚜기치기·오둑테기·막대·마때라고도 한다. 주로 겨울철에 많이 즐기던 놀이로서 오늘날에는 자치기하는 아이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준비물 긴 막대를 채라 하는데 20-30cm 가량이고, 알 또는 메뚜기라고 하는 짧은 막대는 7-10cm 가량으로 양끝을 뾰족하게 깎아 사용한다. 방법 시작하는 때, 몇 동 내기를 할 것인지 미리 정한 다음, 채를 쥐고 공격하는 편을 포수, 수비하는 편을 범이라 한다. 땅바닥에 약간 구멍을 파서 알을 비스듬히 세워 놓고 떠 있는 쪽을 채로 쳐서 공중으로 튀어오르면 힘껏 쳐낸다. 알이 날아가면 그 거리를 재어 승부를 결정하거나, 짐작으로 거리를 부르고 확인해서 승부를 정하기도 한다. 공격과 수비 두 편으로 나눈다. 공격은 흙바닥에 작은 구멍을 파고, 큰 자로 작은 자를 날린다. 수비가 날아온 자를 공중에서 잡으면 된다. 수비가 받지 못한 작은 자까지의 거리를 큰 자로 세어, 그 숫자만큼 점수로 택한다. 한국의 민속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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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6%AC%EC%B9%B4%EC%9D%B4%ED%91%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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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이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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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이푸는 중화민국 출신의 기업인이자 전산학자이다. 2005년 7월에서 2009년 9월까지 구글 차이나의 사장직을 맡았었다. 그로 인해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1년간 법정 공방을 벌였다. 그가 2000년 마이크로소프트 미국 본사로 발령받아 컴퓨터 사용자가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더 용이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데 필요한 전략을 감독하는 업무였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랙티스 서비스 부분 부사장으로 일하기 시작할 때 작성한 경쟁 금지 조항 때문이었다. 출신배경 리카이푸는 중화민국 타이페이에서 리티엔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카이푸의 아버지 리티엔민은 중국 쓰촨성 출신의 대만 의회 국민당 의원이자 정치역사학자였다. 경력 학력 1973년, 리카이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테네시주 오크 리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1983년 컬럼비아 대학교 컴퓨터 과학 학부를 최우등로 졸업하였다. 카네기 멜론 대학으로 옮겨 박사학위 과정까지를 계속하였다. 학술 연구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 리카이푸는 기계 학습과 패턴 인식 분야를 연구했다. 1986년 그와 산제이 마나한은 "빌"이란 이름의 베이시안 러닝 기반 시스템을 제작하였다. 이 시스템은 1989년 미국 컴퓨터 오델로 보드 게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 1988년, 그는 그의 스핑크스라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박사 논문을 작성하였다. 스핑크스는 최초의 라지-보커뷸러리, 화자-독립적, 연속 음성 인식 시스템 이었다. 리카이푸는 음성 인식 분야에 있어서 두 권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그 외에 6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의 박사 논문은 1988년 Kluwer monograph, Automatic Speech Recognition: The Development of the Sphinx Recognition System 로서 발표되었다. 카네기 멜론 대학의 연구자였던 알렉스 와이벨과 함께, 리카이푸는 Readings in Speech Recognition 를 편집하였다. 애플, SGI, 마이크로소프트 카네기 멜론에서 조교수로 2년 일한 뒤, 1990년에 리카이푸는 애플에 입사하였다. 연구 개발 임원 자리였다. 애플에서 근무하는 기간 동안, 그는 플레인톡, 애플 뉴튼, 퀵타임, 퀵타임 VR 등을 개발한 R&D 부서의 장으로 일했다. 리카이푸는 1996년 실리콘 그래픽스 사로 옮겼다. 1년동안 VRML 부서 코스모 소프트웨어의 부서장으로 일했다. 1998년년 리카이푸는 마이크로소프트로 회사를 옮겼다. 중국 베이징으로 옮겨가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 디비전을 구성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 중국는 훗날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 아시아로 성장한다. 리카이푸는 2000년 미국으로 돌아가 2005년까지 인터랙티브 서비스 부문의 부사장으로 일했다. 구글로 전직 2005년 7월, 리카이푸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떠나 구글로 옮겨갔다. 2005년 7월 19일, 마이크로소프트는 워싱턴주 주법원에 구글에 대한 송장을 냈다. 구글이 인터랙티브 부문의 부사장이었던 리카이푸로 하여금 마이크로소프트에서 1년도 못 채우게 함과 동시에 경쟁 금지 조항을 어기게 하고 구글로 스카우트해갔다는 내용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리카이푸가 구글에서 업무를 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영업 비밀의 불가피한 정보 공개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7월 28일 워싱턴주 대법원 판사 스티븐 곤잘레스는 리카이푸가 마이크로소프트와 경쟁이 일어날 수 있는 구글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을 재판 추정 기한인 2006년 1월 9일까지 금지하도록 하는 가처분 명령을 내렸다. 9월 1일, 법정 심리 후, 곤잘레스 판사는 리카이푸가 구글에서 일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경쟁 금지 조항이 1년 만료가 되는 2006년 7월까지, 리카이푸로 하여금 일부 기술적인 프로젝트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단서를 달았다. 리카이푸는 대신 구글 차이나의 인력들을 충원하고, 라이선싱 등에 대해 중국 관료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웹 검색이나 음성 인식 등의 기술 분야에 있어서는 업무를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리카이푸는 또한 예산 계획 수립, 급여 조정, 연구 관리 등의 업무 등에 대해서도 2006년 7월까지 금지되었다. 2005년 12월 22일,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는 5개월간 이어진 이 법정 다툼을 종결시키는 화해에 이르렀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화해의 내용은 비밀로 부쳐졌다. 직업 약력 회사 부사장, 자연 인터랙티브 서비스 디비전), 마이크로소프트 코퍼레이션 2000년 - 2005년 7월 설립자.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 아시아, 차이나, 1998년-2000년 사장, 코스모 소프트웨어 사장,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 비즈니스 유닛, 실리콘 그래픽스 Inc. 부사장 & 제너럴 매니저, 웹 제품, 실리콘 그래픽스 Inc. 부사장, 이터랙티브 미디어 그룹, 애플, 1990년-1996년 조교수, 카네기 멜론 대학 학력 박사. 컴퓨터 과학 전공, 카네기 멜론 대학, 1988년. 학사. 컴퓨터 과학 전공, 컬럼비아 대학, 1983년. 회원 IEEE 펠로우 100인 위원회 멤버 각주 외부 링크 리카이푸의 학생 네트워크 구글에 대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소송 CNET News.com: Microsoft sues over Google hire CNET News.com: Who in the world is Kai-Fu Lee? New York Times: Google Official Says Frustration Drove Him From Microsoft Seattle Times: Judge rules former Microsoft executive Lee can recruit for Google - contains archives of documents from ruling CNET News.com: Microsoft settles with Google over executive hire 1961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만계 미국인 마이크로소프트 사람 구글 직원 카네기 멜런 대학교 동문 컬럼비아 대학교 동문 타이베이시 출신 미국의 블로거 중국에 거주한 미국인 테네시주 출신 작가 IEEE 석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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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9C%84%EC%B4%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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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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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총은 고려의 문신이다. 1170년 정중부 등이 무신의 난을 일으켜 전국이 혼란에 빠졌다. 1174년 병부상서와 서경유수를 겸하고 있던 조위총은 무신 세력들이 의종을 시해하고 많은 문신들을 죽이니 이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서북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선동하자, 절령 이북의 40여 성이 이에 호응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윤인첨이 이끄는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조위총은 이를 대파하고 개경 근처까지 진출하였으나, 이의방 군대에게 패하여 서경으로 후퇴하였다. 이후에도 관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맡은 김존심이 배반하여 윤인첨에게 항복함으로써 실패하였다. 다시 서언을 보내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금나라에 할양하기로 하고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금나라 황제는 이를 거부하고 서언을 잡아 고려 조정으로 보내 버렸다. 1176년 관군의 공격으로 서경이 함락되고, 관군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했다. 조위총이 등장한 작품 《무인시대》 KBS, 배우 : 최동준 같이 보기 조위총의 난 각주 고려의 문신 생년 미상 1176년 사망 무신정권 고려의 반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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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A5%EA%B5%AC%EC%84%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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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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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선은 전라북도 군산시의 군산옥산신호장과 옥구역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으로, 군산항선의 지선이다. 영업거리표에는 등재되어 있으나 수년 전부터 화물, 여객 어느 것도 취급하지 않는 영업 중지선으로 노선 관리도 하지 않는 사실상 폐선 상태였으며, 2011년 4월 1일부터 정기적으로 화물취급을 재개하였다가 군산항선 공사를 진행함에 따라 2017년부터 2020년 12월 9일까지 선로가 단절되어 운행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2020년 12월 10일 운행이 재개되었다. 노선 정보 노선 거리 : 7.9 km 운영 기관 : 한국철도공사 궤간 : 1,435mm 통행 방식 : - 역 수 : 2 복선 구간 : 없음 전철화 구간 : 없음 보안 장치 : 없음 역 목록 역사 개요 옥구선은 UN군의 군산비행장 보급품 수송을 목적으로 한 군사적 목적의 철도이다. 옥구선의 건설은 1952년 5월 20일에 UN군에 의해서 착공되었으며, 이후 1953년 2월 25일에 완공되었다. 한때는 비둘기호가 운행됐으나 1990년대 이후 여객 취급은 중단되었다. 개통 당시의 노선 이름은 군산비행장선이었으며, 1955년 9월 1일부터 옥구선으로 개칭되었다. 연혁 1952년 5월 20일 : UN군에 의해 군산비행장선 착공 1953년 2월 25일 : 군산비행장선 완공 1955년 9월 1일 : 옥구선으로 개칭 1970년 : 여객 취급 중단 2000년 11월 15일 : 옥구선 열차 운행 중단 2011년 4월 1일 : 열차 운행 재개 2017년 : 군산항선 공사 관계로 선로 당북리 부근 단절됨과 동시에 당북리~군산화물역 구간 또는 군산화물역~대야역 구간 사실상 폐선, 열차 운행 일시 중단 2019년 4월 17일 : 철도 노선번호 변경에 따라 30804로 변경 2019년 5월 3일 : 철도 노선번호 변경에 따라 30803로 변경 2020년 11월 24일 : 사용 개시 고시 2020년 12월 10일 : 열차 운행 재개. 기점을 군산옥산신호장으로 변경 및 11.6 km에서 7.9 km로 단축. 각주 같이 보기 한국철도공사 군산항선 1953년 개통한 철도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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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2%BD%EC%9D%B8%EB%A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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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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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로는 1936년 10월 23일에 개통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 숭의로터리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서울교 북단을 연결하는 도로이다. 국도 제46호선의 일부로 지정되어 있다. 영등포역 인근은 상습 정체 구간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도로는 마포대교를 지나 종로를 이어주는 도로이고, 숭의동부터 이 도로의 종점까지 경인선의 남쪽을 쭉 따라가며 부천시 구간의 경우 버스전용차로가 따로 개설되어있다. 이 도로의 전구간은 국도 제46호선의 일부이다. 역사 1936년 10월 23일 : 경인로 개통 1차 도로명주소 시 경인로를 현재 신광사거리까지 연장 2차 도로명주소 부여하면서 숭의로터리로 기점을 정정 2009년 7월 10일 : 2개 이상 시·도에 걸쳐 있는 도로로 경인로를 고시 주요 경유지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남동구 간석동 - 부평구 경기도 부천시 서울특별시 구로구 - 영등포구 노선 주요 건물 및 시설 다우림아파트 미추홀구청 별관, 숭의보건지소 인천투민힐스빌아파트 제물포역 해피타운아파트 더젠시티아파트 미래홈타운오피스텔 한국공업직업전문학교 나산아파트 인천도화초등학교 복사꽃도서관 도화한승미메이드아파트 올레오아파트 주안애팰리스아파트 주안시민회관 국민연금공단 남인천지사 주안지웰에스테이트아파트 인천주안4동우편취급국 인천축산농협 KT 인천지사 인천경원초등학교 남인천우체국 간석오피앙오피스텔 간석오거리역 인천교통공사 백운우편취급국 부평삼거리역 신성미소지움아파트 동수역 인천성동학교 인천부평6동우체국 동산운수 남부천우체국 KCC엠파이어타워오피스텔 심곡본동동도센트리움아파트 경원여객 부천역차고지 부천역전우체국 부성힐하우스아파트 소사역, 소사지구대 부성파인오피스텔 한국가스안전공사 경기서부지사 홈플러스 부천소사점 유한대학교 e편한세상온수역아파트 유한공업고등학교 성원빌라 화랑아파트 동진빌라 서울가든빌라 대형상운 한국교통안전공단 구로자동차검사소 동선아파트 시티월드아파트 칸타빌레5차오피스텔 서울한영대학교 개봉치안센터 경인중학교 개봉어린이도서관 삼환로즈빌아파트 한마을아파트 벽산블루밍아파트 구로소방서 구로성심병원 고척스카이돔 동양미래대학교 CJ제일제당 영등포공장 구로치안센터 안성빌딩 신도림팰러티움아파트 신도림푸르지오3차아파트 라마다 서울신도림호텔 신도림SK뷰아파트 신도림동아2차아파트 신도림1차푸르지오오피스텔, 홈플러스 신도림점 디큐브시티아파트, 현대백화점 디큐브시티점, 쉐라톤 서울 디큐브시티호텔 신도림역 서울영등포초등학교 문래지구대 서울남부지방법원 등기국 에이스하이테크시티 구로세무서 영등포우체국 영등포역,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같이 보기 국도 제42호선 국도 제46호선 서울특별시도 제60호선 경인옛로 간석지하차도 갤러리 각주 외부 링크 인천광역시의 도로 서울특별시의 도로 국도 제42호선 국도 제46호선 부천시의 교통 국도 제39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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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A%B7%80%EC%A1%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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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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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은 1910년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일본 제국 정부가 일본의 화족 제도를 준용하여 대한제국의 고위급 인사들에게 봉작하고자 창출한 특수 계급이다. 1910년 8월 29일에 〈한일 병합 조약〉 제5조에 수반하여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이 공포되면서 신설되었고, 1947년 5월 2일에 일본 황실령 제12호 〈황실령과 부속법령 폐지의 건〉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형성 1910년 8월 29일에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이 공포되면서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 황족이 아닌 종친, 문지, 훈공이라는 기준에 따라 선정된 고위급 인물들을 후작, 백작, 자작, 남작에 봉작하였다. 한일 병합 당시에 작위를 받은 76명의 수작자, 1924년에 추가로 수작한 이항구, 수작자의 작위를 계승한 81명의 습작자, 총 158명이 조선귀족으로서 작위를 받았다. 1910년에 작위를 받은 76명 가운데 작위를 거절하거나 반납한 사람은 8명으로 김석진, 윤용구, 홍순형, 한규설, 민영달, 조경호, 조정구, 유길준이다. 이들을 제외한 68명의 수작자는 같은 해 10월 7일에 수작영식과 1911년 2월 22일에 작기본서 봉수식에 참석하였으며, 1911년 1월 12일에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공채본권 교부식에 참석하여 작기와 은사공채권을 수령하였다. 1911년 9월 9일에는 일본의 화족회를 모방하여 박영효를 초대 회장으로 하는 조선귀족회를 설립하였다. 특권 조선귀족은 〈조선귀족령〉에 근거하여 일본 화족과 동일한 예우를 향유할 권리, 법규로서 구속력을 갖는 가범을 제정할 권리, 작위 세습의 권리를 보장받았다. 1897년의 칙령 제10호 〈서위조례〉와 1926년의 칙령 제325호 〈위계령〉에 의거하여 작위에 따라 위계를 하사받았다. 공적인 의식에서의 좌석 순서를 뜻하는 궁중석차를 작위와 위계에 따라 조선귀족에게 수여하였다. 작위에 따른 대례복의 착용이 허용되었으며, 조선귀족의 자제는 무시험으로 경성유치원과 가쿠슈인에 입학할 수 있었고, 결원이 발생할 경우 무시험으로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조선귀족은 강점 초기에는 귀족원 구성에서 배제되었지만 1932년에 가서야 박영효가 칙선의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조선귀족의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고자 일본 정부는 은사공채증권을 교부하였다.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되는 것이며, 연리 5%의 이자는 매년 3월과 9월에 조선은행 또는 우체국에서 지불되었다. 조선귀족회 차원에서 조합을 설립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 및 삼림 불하 과정에서 무상 대부 및 불하를 받았다. 또한 조선귀족의 경제적 몰락을 방지하고자 1927년에 〈조선귀족세습재산령〉을 제정·공포하여 세습재산을 설정해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1928년에는 〈조선귀족보호자금령〉을 공포하고 재단을 설립하여 궁핍한 귀족들에 대한 구제 사업을 전개하였다. 통제 화족이 일본 궁내성의 감독을 받는 것과 다르게 조선귀족은 조선총독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있었으며, 조선총독은 일본 황실령 제15호 〈조선에 재주하는 귀족에 관한 건〉을 통하여 감독권을 행사하였다.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는 1924년 10월 7일에 남작의 작위를 받았는데 조선귀족이 창출된 이래 일제강점기 동안 새로이 수작한 유일한 사례이다. 조선귀족 중에 승작한 자는 이완용, 송병준, 고희경이 있다. 수작자 중에 일부는 반일적인 활동이나 충순을 결여한 행위를 이유로 하여 작위가 박탈되거나 습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사준은 독일과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한 원조를 받고자 비밀 조약을 체결하려던 중한의방조약안 관련 사건에 연루되어 1915년에 실형을 선고 받고 작위를 상실하였다. 김가진은 1919년에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탈출시키려 하였던 대동단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1920년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다. 김가진의 작위는 박탈되지 않았으나 습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용직과 김윤식은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실형을 선고 받고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습작자 중에는 윤치호가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3년에 작위가 박탈되었고, 민태곤은 1941년 12월에 도쿄에서 조선민족독립운동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마약, 도박 등으로 인한 형사범은 조선귀족으로서의 결격사유에 해당되어 작위가 박탈되었다. 민영린과 김병익은 아편 흡입죄로 실형을 선고 받아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이지용은 도박으로 실형을 선고 받아 1912년에 예우가 정지되었다가 1915년에 해제되었다. 조민희는 도박으로 파산을 선고 받고 예우가 정지되었으며, 조동희는 집안 내의 재산 분쟁으로 예우 정지와 해제를 두 차례 반복하였다. 평가 조선귀족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있어서 효용가치가 높은 최상위 협력층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 문화 통치로 전환한 식민정책과 더불어 다양한 계층의 지식인 집단이 성장하면서 정체되고 무능력한 조선귀족을 적극적 협력자로 활용하려는 목적이 많이 희석되었다. 192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조선귀족들이 속출하자 조선총독부는 1929년에 창복회를 설립하여 궁핍한 조선귀족들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귀족들은 일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각종 통치기구나 사회단체, 수탈기구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집필 활동을 통해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귀족의 수작자와 습작자는 1948년 9월에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제2조와 제4조 제1항에 의하여 당연범으로 처벌대상이 되었다. 2004년 3월에 대한민국 국회에서 제정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는 수작 및 습작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의거하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141명을 귀족 분야의 조사대상자로 심의하여 총 139명을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하였다. 2009년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작위 거부·반납자 및 상실자, 민족운동 참여자를 제외한 조선귀족 137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여 수록하였다. 수작 및 습작자 목록 각주 같이 보기 화족 친일파 708인 명단 - 조선귀족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 매국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 수작/습작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 정치 외부 링크 조선귀족령 - 대한민국 국가법령정보센터 조선귀족령안 - 일본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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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B%A6%BC%EC%97%AC%EC%9E%90%EC%A0%95%EB%B3%B4%EA%B3%BC%ED%95%99%EA%B3%A0%EB%93%B1%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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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림여자정보과학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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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림여자정보과학고등학교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67년 12월 30일 : 재단법인 삼문재단 설립 1976년 3월 23일 : 이사장 김기병 선생 취임 1978년 10월 26일 : 학교법인 삼문학원으로 조직변경 1990년 12월 28일 : 미림여자전산고등학교 설립인가 1991년 2월 28일 : 제1대 교장 유혜덕 선생 취임 2001년 7월 13일 : 미림여자정보과학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인가 2003년 4월 12일 : 학교법인 미림학원으로 변경 2004년 7월 21일 : 특성화고등학교 선정 2008년 2월 12일 : 마이스터고등학교 선정 2010년 3월 2일 : 마이스터고등학교 개교 2015년 9월 1일 : 제5대 교장 이형원 선생 취임 2017년 12월 4일 : 고교학점제 연구학교 선정 2021년 1월 28일 : 제28회 졸업식 설치 학과 뉴미디어디자인과 뉴미디어소프트웨어과 뉴미디어웹솔루션과 학교 동문 같이 보기 미림여자고등학교 참고 자료 외부 링크 미림여자정보과학고등학교 홈페이지 서울 관악구의 고등학교 서울특별시의 사립 고등학교 대한민국의 여자 고등학교 1991년 개교 마이스터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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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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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3%8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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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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ㅘ는 한글 낱자 ㅗ와 ㅏ가 합쳐진 것이다. IPA로는 [wɐ]이다. 한국어의 모음 조화에 따라 [wɐ] 발음은 같은 양성모음인 ㅗ가 양성모음인 ㅏ 앞에 붙게 된다. 코드값 ㅗ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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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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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84%EA%B8%B0%20%EB%B3%B4%EB%8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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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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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 보나 또는 토키 포나는 캐나다의 번역가이자 언어학자인 소냐 엘렌 키사가 고안한 인공어이다. 2001년 중반에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었다. 도기 보나는 14개의 음소와 120개의 낱말로 이루어져 있고, 최소한의 복잡도로 최대한의 표현을 할 수 있도록 고안했다. 도기 보나는 국제어가 아니라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논리어이다. 문법 음운론 음소 도기 보나는 14개의 적은 음소로 구성되어 있다. 각 음소의 기본적인 발음을 국제음성기호로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k, p, s, t등의 발음은 무성음 또는 유성음으로, l은 [r]이나 [ɹ]로 발음해도 무방하다. 음절구조 도기 보나의 음절은 '초성+모음' 또는 '초성+모음+n'으로 이뤄진다. 단어의 맨 처음 음절일 경우 '모음' 또는 '모음+n'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 음소배열론 한 단어에서 모음과 모음사이에는 하나 이상의 자음이 있어야한다. ->ma Nijon) i앞에 t나 j가 오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ti는 si로, ji는 i 또는 wi로 고쳐쓴다.->ma Tawi) o나 u앞에 w가 올수없다. 종성 n은 비음 앞에 올 수 없고, 종성 n을 빼서 고쳐쓴다. ->jan Ana) 강세 강세는 언제나 단어의 첫음절에 온다. 구문론 도기 보나는 SVO 형식을 쓴다. 문장 = 주어 + + 술부 주어 = 명사 또는 명사구 복합주어 = 명사 + en + 명사 술부 = 동사 또는 동사구 복합술부 = 동사 + li + 동사 명사구 = 명사 + 형용사 동사구 = 동사 + + 목적구 = e + 명사구 일반 문장의 예 sina sona e toki pona. 주어 + 술부 [동사 + 목적구 {}] 대명사 문장의 대명사가 mi거나 sina라면, 주어와 술부를 나누는 li를 쓰지 않는다. 다만 mi mute이거나 sina mute일 경우에는 li를 사용한다. 수식어 도기 보나의 명사구는 명사가 먼저 나오고 이를 수식하는 단어가 나중에 나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jan은 "사람", pona는 "좋다"라는 뜻이고, jan pona는 "좋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친구"라는 뜻이 된다. 이 뒤에 "보고 있다/보인다"라는 뜻의 lukin을 붙인 jan pona lukin은 "보고 있는 친구"라는 뜻이 된다. 수식하는 순서는 pi로 바꿀 수 있다. jan pona lukin라고 하면 lukin이 jan pona를 수식하여, "보고 있는 친구"라는 뜻이 되지만, jan pi pona lukin이라고 하면 pona lukin 전체가 jan을 수식하는 꼴이 되어 "좋아 보이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지시사, 수사, 소유격 대명사는 다른 형용사 뒤에 쓰인다. 동사 전치사로도 쓸수있는 동사단어들은 자기자신뒤에 자신과 같은 단어가 전치사로 나올경우 그 전치사는 생략한다. 예 tawa:'가다,움직이다'라는 용법의 동사로 쓸수있고 '~로,~에게,~를 위해,~까지'라는 용법의 전치사로 쓸수도 있다.'~로 가다'라고 할때는 tawa tawa라고 하지 않고 tawa라고 한다. lon:'있다,존재하다'라는 용법의 동사로 쓸수 있고 '~에,~에서'라는 용법의 전치사로도 쓸수있다'~에 있다'라고 할때는 lon lon이라고 하지 않고 lon이라고 한다. tan:'기원하다'라는 용법의 동사로 쓸수 있고 '~에서,~에서부터,~로부터'라는 용법의 전치사로 쓸수있다 '~에서 기원하다'라고 할때는 tan tan이라고 하지 않고 tan이라고 한다. kepeken:'~로,~를 써서'라는 용법의 전치사로도 쓸 수 있고 '사용하다,이용하다'라고 할 때는 kepeken e라고 하지 않고 kepeken이라고 한다. 기타 전치사로도 쓸 수 있지만 자기 자신 뒤에 자신과 같은 단어가 전치사로 나오지 않는 단어들 poka:'옆'이라는 용법의 명사로 쓸수 있고 '~의 옆에,~와,~와 함께'라는 용법의 전치사로도 사용할 수 있다. sama:'~와 같다'라는 용법의 동사로 쓸수 있고, '~처럼,~같이'라는 용법의 전치사로도 사용할 수 있다. 어휘 137개 낱말이 고안되었는데, 영어, 톡피신어, 핀란드어, 조지아어, 네덜란드어, 아카디아 프랑스어, 에스페란토, 크로아티아어, 중국어에서 왔다. 혼동할 수 있는 낱말은 다른 낱말로 교체했다. 예를 들어 iki가 ike와 비슷하다 해서 ona로 바뀌었다. 색 기본적으로 loje, jelo, laso, walo, pimeja의 어휘가 있으며 그 외의 색들은 위 단어들을 같이 사용하여 표현한다. laso jelo loje walo 그리고 색들을 따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리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en'을 사이에 집어넣는다. loje en laso laso jelo en loje 수 wan , tu , luka , ala , ali / ale , mute의 단어가 있으며 그 외의 수는 이 단어들을 여러번 사용하여 표현한다. tu wan tu tu luka tu tu 역시 수들을 따로 나열하고 싶으면 'en'를 사이에 넣는다. tu en ala luka tu tu en tu wan ali / ale와 mute는 큰 수를 뜻하지만 ali /ale가 mute보다 큰 수이다. ale ale ale mute 하지만 도기 보나는 많은 수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 음수는 표시를 안하지만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ala 도기 보나의 대부분의 단어 뜻은 포괄적이다. anpa ala 고유명사 형용사 뒤에 비공식 단어를 붙이면 고유 명사가 된다. ma Kanata jan Kanata jan Lisa . 커뮤니티 키사의 보고에 따르면 적어도 100명의 유창한 도기보나 화자가 있으며, 몇백명의 사람이 도기보나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다고 짐작된다. 도기보나 메일링리스트와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들은 수백명 이상의 사람들이 도기보나에 손을 대본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2006년 8월, 사라예보에서 열린 국제 에스페란토 청년회 당시, 도기보나 화자들의 특별모임이 있어 12명이 참가했다. 예문 mama pi mi mute Pije/Jopi번역 mama pi mi mute o, sina lon sewi kon. nimi sina li sewi. ma sina o kama. jan o pali e wile sina lon sewi kon en lon ma. o pana e moku pi tenpo suno ni tawa mi mute. o weka e pali ike mi. sama la mi weka e pali ike pi jan ante. o lawa ala e mi tawa ike. o lawa e mi tan ike. tenpo ali la sina jo e ma e wawa e pona. Amen. ma tomo Pape jan Siwen번역 jan ali li kepeken e toki sama. jan li kama tan nasin pi kama suno li kama tawa ma Sinale li awen lon ni. jan li toki e ni: "o kama! mi mute o pali e kiwen. o seli e ona." jan mute li toki e ni: "o kama! mi mute o pali e tomo mute e tomo palisa suli. sewi pi tomo palisa li lon sewi kon. nimi pi mi mute o kama suli! mi wile ala e ni: mi mute li lon ma ante mute." jan sewi Jawe li kama anpa li lukin e ma tomo e tomo palisa. jan sewi Jawe li toki e ni: "jan li lon ma wan li kepeken e toki sama li pali e tomo palisa. tenpo ni la ona li ken pali e ijo ike mute. mi wile tawa anpa li wile pakala e toki pi jan mute ni. mi wile e ni: jan li sona ala e toki pi jan ante." jan sewi Jawe li kama e ni: jan li lon ma mute li ken ala pali e tomo. nimi pi ma tomo ni li Pape tan ni: jan sewi Jawe li pakala e toki pi jan ali. jan sewi Jawe li tawa e jan tawa ma mute tan ma tomo Pape. wan taso 어두운 틴에이져 시 ijo li moku e mi. mi wile pakala. pimeja li tawa insa kon mi. jan ala li ken sona e pilin ike mi. toki musi o, sina jan pona mi wan taso. telo pimeja ni li telo loje mi, li ale mi. tenpo ale la pimeja li lon. 외부 링크 공식 도기 보나 페이지 비공식 도기 보나 페이지 - 도기 보나를 쓰는 여러 종류의 문자 소개. 비공식 도기 보나 페이지 - 판그램, 음소 빈도 분석, 에스페란토로 쓰인 강좌, 링크 제공. 야후! 그룹의 도기 보나 그룹 언어에 관한 문서 프리노드의 도기 보나 IRC 채널 - #tokipona 도기 보나 커뮤니티 at LiveJournal.com 한국도기보나모임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인공어 분석어 고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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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B%9E%98%EA%B8%B0%EA%B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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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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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기는 노래기강의 절지동물을 일컫는다. 배각류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향랑각시라고도 하였다. 몸은 길며,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으로 나뉜다. 몸의 단면은 원형이나 활 모양의 삼각형 또는 편평한 반원형이다. 몸통 부분의 체절은 거의 모두 두 개씩 겹쳐진 겹체절을 이루고 있으며, 거기에 두 쌍의 발이 나와 있다. 호흡은 기관으로 하며, 기문은 일반적으로 아랫면의 걷는발이 붙어 있는 자리 가까이에 열려 있다. 대부분 땅 속의 부식질을 먹고 생활한다. 36개의 다리를 지닌 종부터 1,000개 이상의 다리를 지닌 종까지 있다. 고생대 실루리아기부터 출현하였으며 전 세계 16개 목, 140개 과에 약 12,000여 종 이상이 기록되어 있으며, 지구상에 약 80,000여 종이 서식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래기·왕노래기·공노래기·민달팽이노래기·붉은반점노래기 등이 이에 속한다. 또 노래기의 경우는 길이와 다리가 많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모양이 거의 지네와 비슷하여 지네로 혼동하기가 쉽다. 하위 분류 털보노래기아강 또는 촉악아강 Latreille, 1831 털보노래기목 Lucas, 1840 순악아강 오각노래기하강 또는 오대하강 Brandt, 1833 글로메리데스무스목 Latzel, 1884 구슬노래기목 Leach, 1814 스파이로테리니움목 Brandt, 1833 긴노래기하강 또는 유연충하강 Pocock, 1887 땅노래기준강 - 측계통군? 땅노래기목 Gervais, 1844 넓적노래기목 또는 장님노래기목 DeSaussure, 1860 Siphonocryptida Siphonophorida Hoffman, 1980 진악준강 각시노래기상목 갈퀴노래기목 또는 각시노래기목 Brandt, 1833 나사창살노래기목 나사노래기목 질삼노래기상목 칼리푸스목 Bollman, 1893 끈노래기목 Koch, 1847 스템미울루스목 Pocock, 1894 시포니울루스목 Cook, 1895 띠노래기상목 띠노래기목 Pocock, 1887 같이 보기 지네 그리마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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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B5%ED%95%AD%EC%B2%A0%EB%8F%84%20%28%EA%B8%B0%EC%97%8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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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철도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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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철도주식회사는 인천국제공항철도를 운영하는 철도 회사이자 KB금융그룹의 관계사이다. 개요 계획 당시 대한민국 철도청의 주관 하에 공영철도로 건설하려 한 인천국제공항철도가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와 함께 민자사업으로 지정되어 설립된 컨소시엄을 모태로 하는 기업이다. 민간 사업자가 건설 후 30년간 운영한 뒤 국가에 반납하는 수익형 민자사업 방식을 채택한,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민간 철도운영사이기도 하다. 노선 차량 공항철도 1000호대 전동차 공항철도 2000호대 전동차 역사 2001년 3월 23일 현대건설을 최대주주로 하여 보수마계인천국제공항철도주식회사라는 사명으로 설립되었으며, 2006년 6월 29일에 공항철도주식회사로 사명이 변경되었다. 이후 2009년, 잘못된 수요 예측에 따른 계속되는 적자가 문제시되어, 민자 사업으로는 사업을 영위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공기업인 한국철도공사에 인수되고, 상호가 코레일공항철도주식회사로 변경되었다. 2015년 6월 23일 KB금융그룹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공항철도주식회사로 사명이 환원되었다. 1998년 7월 21일: 인천국제공항철도 민자사업단 결성 2001년 3월 23일: 인천국제공항철도주식회사 설립 2006년 6월 29일: 회사명을 공항철도주식회사로 변경 2009년 9월 17일: 한국철도공사와 지분 매도 대표자인 현대건설과의 지분 88.8% 인수계약 체결 2009년 11월 30일: 코레일공항철도로 사명 변경 2015년 6월 23일: JP공항철도사모특별자산투자신탁에서 인수, 공항철도주식회사로 사명 환원 외부 링크 2001년 설립된 기업 대한민국의 철도 기업 대한민국의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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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3%98%ED%84%B0%EC%8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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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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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사는 1970년 4월 월간 《샘터》를 모태로 단행본과 아동서를 펴내는 출판사다. 김재순 의원이 창립한 이후 김성구 대표가 그 뜻을 이어받아 경영 중이다. 1972년부터 단행본출판을 시작, 법정, 피천득, 최인호, 이해인, 정채봉 등의 작품들을 출판하였다. 특히 정채봉은 샘터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수십 년 동안의 소중한 가치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다채로운 주제의 잡지와 책을 다수 펴냈다. , 시리즈와 , 시리즈 등 평범한 삶의 감동과 행복을 찾아가는 책을 필두로,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인문교양 시리즈 ‘아우름’을 새롭게 론칭해 청소년들의 행복한 삶을 위한 쉽고 재미있는 인문교양서를 개발하고 있다. 그 밖에 샘터파랑새소극장을 설립 및 샘터갤러리를 운영한 이력이 있으며, 다방면에서 국내 문화사업에 기여하고 있다. 각주 외부 링크 샘터사 홈페이지 샘터사 네이버 블로그 샘터사 네이버 포스트 샘터사 인스타그램 샘터사 페이스북 샘터사 트위터 대한민국의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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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B0%EA%B5%90%EC%97%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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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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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교역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에 위치한 중앙선의 신호장이었다. 중앙선 원주 - 제천 구간의 선로용량 포화로 인하여 1977년 신설되었으며, 2021년 1월 5일에 서원주 - 제천 구간 복선 전철화가 완료되어 폐역되었다. 연혁 1977년 3월 1일 : 신호장으로 영업 개시 1995년 8월 10일 : 유인신호장으로 승격 2005년 4월 1일 : 무인신호장으로 변경 2021년 1월 5일 : 폐역 각주 대한민국의 신호장 충청북도의 폐지된 철도역 1977년 개업한 철도역 제천시의 교통 제천시의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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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88%EB%9F%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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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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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은 야구나 소프트볼에서 담장을 넘겨서 점수를 따거나 타자가 타격을 한 뒤 한번에 모든 루를 통과하여 홈으로 돌아와 자신의 힘으로 득점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홈런 유형 일반 홈런 홈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타구가 경기장의 외야 펜스 밖으로 넘어간 홈런을 말한다. 대다수의 타구는 외야 관중석이나 전광판 등의 공간으로 떨어진다. 단, 확실히 홈런으로 인정되려면 타구가 좌우 파울 라인 연장선인 양쪽 파울 폴 안쪽으로 들어가야 되며, 타구가 파울 폴에 직접 맞는 것까진 홈런으로 인정된다. 심판의 수신호는 타구가 날아간 선심의 오른팔을 수평으로 원을 그리며 돌린다. 장외 홈런 장외 홈런은 타구가 외야 펜스뿐이 아닌, 관중석을 지나 경기장 건물 밖으로 넘어간 홈런이다.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은 야구장 필드 안으로 타구가 떨어진 상태에서 기록되는 홈런이다. 즉, 타구가 외야 펜스를 넘지 않은 페어 존에 떨어진 후, 그 타구를 야수들이 처리하기 전에 홈으로 들어오는 경우다. 상대 야수의 플레이 중 실책이 포함되면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실책의 요소가 전혀 없는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은 매우 희귀하다. 대한민국에서는 "그라운드 홈런", 일본에서는 "러닝 홈런"으로 많이 불린다. 상황별 홈런 솔로 홈런 솔로 홈런은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기록한 것으로서 한 점짜리 홈런을 말한다. 홈런 중 가장 득점이 적은 홈런이다. 타자에게 1안타 1홈런 1타점 1득점이 부여된다. 투런 홈런 투런 홈런은 타자를 포함한 2명의 주자가 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홈런이다. 타자에게 1안타 1홈런 2타점 1득점이 부여된다. 주자에겐 1득점이 부여된다. 스리런 홈런 스리런 홈런은 타자를 포함한 3명의 주자가 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홈런이다. 타자에게 1안타 1홈런 3타점 1득점이 부여되며, 두 명의 주자에겐 각각 1득점이 부여된다. 만루 홈런 만루 홈런은 타자를 포함한 4명의 주자가 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홈런이다. 미국에서는 그랜드슬램이라고 하며 타자에게 1안타 1홈런 4타점 1득점이 부여되며, 세 명의 주자에겐 각각 1득점이 부여된다. 끝내기 홈런 끝내기 홈런은 9회말 또는 연장말 공격에 홈런으로 경기를 끝내는 홈런을 말한다. 예를 들어 1:0 스코어에서 1루에 주자가 있는 상황에 2점홈런을 치면 1:2로 스코어가 역전된다. 1:0 스코어에서 1루, 2루에 주자가 있는 상황에 3점홈런을 치면 1:3로 스코어가 역전된다. 특성상 말 공격을 하는 팀만이 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말 공격은 홈팀이 한다. 연타석 홈런 연타석 홈런은 한 선수가 두 타석 연속으로 홈런을 치는 것을 말한다. 리드오프 홈런 리드오프 홈런은 첫 이닝, 팀의 1번 타자가 치는 홈런이다. "선두 타자 홈런"이라고도 한다. 백투백 홈런 랑데부 홈런이라고도 한다. 앞선 타자가 홈런을 친 뒤 바로 다음 타자가 홈런을 치는 경우이다. "연속 타자 홈런"이라고도 한다. 사이클링 홈런 사이클링 홈런은 한 경기에서 개인 또는 팀이 솔로 홈런, 2점 홈런, 3점 홈런, 만루 홈런 네 가지를 다 치는 것을 말한다. 사이클링 홈런은 한국식 표현이며, 미국에서는 홈런 사이클이라고 불린다. 개인이 사이클링 홈런을 기록하기는 매우 어려운데, 그 이유는 한경기에서 한 사람이 홈런 4개를 몰아서 치는 것도 힘들며 홈런이 나올 때마다 적당한 수의 주자가 나가는 상황이 함께 발생해야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KBO 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를 통합하여 1군 무대에서 사이클링 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아직까지 없다. 다만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더블 A 리그 경기에서 트레블러스의 타이론 혼이 사이클링 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다. 사이클링 홈런에 근접하였으나 결국 달성하지 못한 선수는 몇몇 있다. 대한민국 프로 야구의 경우 마해영 선수가 삼성 라이온즈 시절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1회 2점, 3회 솔로, 4회 3점 등 3연타석 홈런을 기록하였지만 만루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다. 2009년에는 이범호 선수가 한화 이글스 시절 LG 트윈스를 상대로 2회 만루홈런, 6회 솔로홈런, 7회 3점홈런을 기록했지만 2점홈런을 치지 못하면서 기록 달성에 실패했다. 2015년에는 에릭 테임즈 선수가 소속팀NC 다이노스에서 두산베어스를 상대로 2회 만루, 4회 3점, 6회 솔로 등 3연타석 홈런을 기록했지만 7회 대수비 때 조평호와 교체 아웃되면서 기록 달성에 실패했으며, 같은 해 박석민 선수가 소속팀삼성 라이온스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1회 2점, 3회 3점, 5회 만루 등 3연타석 홈런을 기록했지만 솔로홈런을 치지 못하면서 기록 달성에 실패했다. 2017년에는 윌린 로사리오 선수가 소속팀한화 이글스에서 KT 위즈를 상대로 2회 2점홈런, 5회 솔로홈런, 6회 3점홈런을 기록한 데 이어 7회 솔로홈런마저 달성하면서 4연타석 홈런을 기록함과 동시에 5연타석 홈런과 사이클링 홈런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지만 만루홈런을 치지 못하면서 두 기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018년에는 고졸루키 강백호선수가 소속팀KT 위즈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4회 2점, 6회 솔로, 8회 3점 등 3연타석 홈런을 기록했지만 만루홈런을 치지 못하면서 기록 달성에 실패했다. 미국 대학 야구에서 1999년 5월 10일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의 미샬 멕두걸이 6연타석 홈런을 치는 진기록을 세웠지만 만루홈런을 못 쳐서 기록 달성에는 실패했다. 2010년 9월 18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 선수가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상대로 4회 2점홈런, 6회 만루홈런, 8회 솔로홈런을 기록했지만 3점홈런을 치지 못하면서 기록 달성에 실패했다. 대한민국 프로 야구의 경우, 팀 사이클링 홈런은 총 19번 있었다. 삼성 라이온즈가 4번의 사이클링 기록을 세웠으며, 최초의 팀 사이클링 홈런도 삼성 라이온즈가 기록한 것이다. 기록 당시 홈런을 친 당사자는 장태수, 류중일, 김성래, 이만수였다. 가장 최근의 사이클링 홈런은 SK 와이번스가 2018년 10월 10일 두산 베어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제이미 로맥이 만루,2점홈런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면서 사이클링 홈런을 기록하였으며, 프로야구 역사상 1이닝동안 사이클링 홈런을 달성한 예는 이전에는 없었다. 사이클링 홈런 중에서도 가장 드문 것으로는 한 이닝에 사이클링 홈런을 기록하는 것으로, 이는 한 이닝에 개인 또는 팀이 1, 2, 3, 4점 홈런을 모두 쳐내야 하기 때문이다. KBO 리그 야구 홈런 기록 및 명단 개인 통산 최다 홈런 2022년 8월 현재 한 시즌 최다 홈런 2021년 1월 현재 팀 사이클링 홈런 2015년 9월 현재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 22, 김봉연, 해태 타이거즈, 1982년 27, 이만수, 삼성 라이온즈, 1983년 30, 김성한, 해태 타이거즈, 1988년 35, 장종훈, 빙그레 이글스, 1991년 41, 장종훈, 빙그레 이글스, 1992년 42, 타이론 우즈, OB 베어스, 1998년 54, 이승엽, 삼성 라이온즈, 1999년 56, 이승엽, 삼성 라이온즈, 2003년 역대 통산 홈런 신기록 선수 일본 1,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868개 미국 25,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762개 한국 36, 이승엽, 삼성 라이온즈 626개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 일본 일본 프로야구 기록 2, 후지무라 후미오, 오오사카 타이거스, 야마시타 미노루, 한큐군, 후루야 구라노스케, 나고야 긴고군, 1936년 가을 4,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 교진군, 마쓰키 겐지로, 오사카 타이거스, 1937년 봄 6, 다카하시 요시오, 고라쿠엔 이글스, 1937년 가을 10, 나카지마 하루야스, 도쿄 교진군, 1938년 가을 20, 오시타 히로시, 세네터즈, 1946년 25, 아오타 노보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가와카미 데쓰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1948년 46, 후지무라 후미오, 오오사카 타이거스, 1949년 일본 프로야구 기록 51, 고츠루 마코토, 쇼치쿠 로빈스, 1950년 55,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4년 60, 블라디미르 발렌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2013년 일본 프로야구 기록 43, 벳토 가오루, 마이니치 오리온스, 1950년 52, 노무라 가쓰야, 난카이 호크스, 1963년 55, 터피 로즈,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2001년 미국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기록 5 조지 홀,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876년 9 Charley Jones, 보스턴 레드스타킹스, 1879년 14, Harry Stovey,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 1883년 27, 네드 윌리엄슨,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 , 1884년 29, 베이브 루스, 보스턴 레드삭스 , 1919년 54, 베이브 루스, 뉴욕 양키스 , 1920년 59, 베이브 루스, 뉴욕 양키스 , 1921년 60, 베이브 루스, 뉴욕 양키스 , 1927년 61, 로저 메리스, 뉴욕 양키즈 , 1962년 70, 마크 맥과이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98년 73,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2001년 홈런 이모저모 두산 베어스는 안타, 실책, 볼넷, 폭투, 아웃, 더블플레이 등을 했을 때마다 잠실야구장의 전광판 그래픽에서는 항상 파란색 한글로 표기된다. 이는 평소 야구의 홈팀으로서 전광판 그래픽이 나오는 그대로다. 하지만 홈런을 쳤을 경우에는 전광판에서는 그래픽이 나오나, 정작 파란색 한글로 홈런이 나오지 않고 빨간색 영어의 HOME RUN으로 나온다. 실제로 유일하게 2015년부터 2016년까지 두산 베어스가 잠실야구장에서 홈런을 쳤을 경우 잠실야구장 전광판에 빨간색 영어로 표기되었다. 그리고 2017년부터는 두산베어스의 전광판 홈런 그래픽이 글자색깔만 파란색으로 바뀌었고 정작 영어 그대로 HOME RUN으로 표기되었다.. 5월 28일에 오재일이 홈런을 쳤을 때에 전광판에 파란색으로 영어 홈런으로 표기되었다. 각주 야구 용어 야구 규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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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1%B4%EB%9E%A8%ED%9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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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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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램프는 일본의 여성 만화가 집단이다. 오오카와 나나세, 모코나, 네코이 츠바키, 이가라시 사쓰키로 구성되어 있다. 클램프는 1980년대 중반 오사카에서 동인지 서클로 시작되었다. 초기 멤버는 현재 멤버를 포함하여 아키야마 타마요, 히시카 소우시, 오쿈, 나카모리 카즈에, 이노우에 유즈루, 나나오 세이, 오미 신야, 세이 리자로 모두 12명이었다. 1989년에 상경하여 《사우스》 3호에 《성전》을 게재하면서 데뷔하였는데 상경하기 전에 5명이 탈퇴하여 7명이 되었고 《성전》을 작업하던 도중 아카야마 타마요와 나나오 세이, 세이 리자도 탈퇴하여 현재의 4명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아카야마 타마요와 세이 리자는 독자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2004년에 데뷔 15주년을 기념하여 멤버 모두가 필명을 바꾸고, 작품을 망라한 잡지 형식의 작품집인 《클램프의 기적》을 발행하였다. 오오카와는 이전 필명으로 돌아갔으나 다른 멤버는 변경한 필명을 유지하고 있다. 멤버 오카와 나나세 전 필명 : 오카와 나나세 ⟶ 오카와 아게하 1968년 5월 2일에 오사카부에서 태어났다. 클램프의 리더이자 원작자이다. 편집자와 협상하고 판매를 계획하는 것도 오오카와의 역할이다. 클램프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의 각본에 참여하기도 한다. 모코나 전 필명 : 모코나 아파파 1968년 6월 16일에 교토부에서 태어났다. 클램프의 대부분의 시리즈의 작화를 담당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클램프하면 모코나의 화려한 그림체를 떠올린다. 모코나는 작품에 등장하는 토끼와 비슷한 캐릭터 이름이기도 한데 《마법기사 레이어스》에서 처음 등장했고 현재 《츠바사 크로니클》과 《xxx홀릭》에도 등장하고 있다. 네코이 츠바키 전 필명 : 네코이 밋쿠 1969년 1월 21일에 교토부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모코나의 어시스턴트를 하지만 《위시》, 《좋으니까 좋아》, 《합법 드러그》에서 작화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작품에 나오는 SD 캐릭터는 네코이 츠바키가 그린 것이다. 이가라시 사츠키 전 필명 : 이가라시 사츠키 1969년 2월 8일에 교토부에서 태어났다. 모코나와 네코이 츠바키의 어시스턴트를 하고 있으며, 단행본을 디자인하고 있다. 요리 담당이기도 하다. 작품 목록 1989년 《성전》 《20면상에게 부탁해》 1990년 《동경 바빌론》 1991년 《학원특경 듀칼리온》 1992년 《백희초》 《CLAMP 학원 탐정단》 《엑스》 《신춘향전》 1993년 《REX 공룡이야기》 《이상한 나라의 미유키》 《내가 사랑하는 사람 》 《마법기사 레이어스》 1995년 《마법기사 레이어스 2부》 《위시》 1996년 《카드캡터 사쿠라》 1997년 《클로버》 1999년 《좋으니까 좋아》 《엔젤릭 레이어》 2000년 《합법 드러그》 《쵸비츠》 2003년 《츠바사 크로니클》 《xxx홀릭》 2006년 《코바토.》 2011 《게이트 세븐》 2013 《xxx홀릭:려》 2014 《츠바사 월드 크로니클》 2016 《카드캡터 사쿠라 -클리어 카드 편-》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일본의 만화가 집단 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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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B0%BD%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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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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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은 대한민국 전라북도 서남부에 있는 군이다. 군청 소재지는 고창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13면이다. 지리 고창군은 전라북도의 서남단에 위치한다. 서북쪽은 황해와 접하며, 동남쪽으로는 노령산맥이 이어지면서 전라남도와 도계를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구릉지가 넓고 충적지가 좁다. 군의 북부에는 선운산 도립공원이 위치해 있다. 동경은 126도 26분으로부터 126도 46분에 이르고, 북위는 35도 18분으로부터 35도 34분이다. 고창군의 길이는 동서로 31km, 남북으로 31.5km이다. 동북쪽으로 정읍시, 북쪽으로 부안군, 동남쪽으로 전라남도 장성군, 남쪽으로 영광군과 인접한다. 서북부 일대는 황해에 접하고 있다. 기후 고창군의 평균 기온은 14.3도, 강수량은 1003.6mm로 강수량이 적은 지역이다. 평균 최고 기온은 18.8도이며, 평균 최저 기온은 8.01도이다. 지질 고창군은 지체 구조적으로 옥천 습곡대의 남서부에 위치하지만 고창군의 지질은 대부분 중생대에 관입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강암은 침식에 약해 고창군에서 넓은 평야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고창군 서부 지역에는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편암, 화강 편마암이 분포하며 신원면, 아산면, 부안면 일대에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화산암류가 분포한다. 선캄브리아기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암석은 고창군 서부의 상하면, 해리면, 그리고 송림산과 장사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분포한다. 편암은 고창 지역의 최하부 기반암이며, 고창군 동부 고수면 두평리 지역에 조금, 고창군 서부 해리면과 공음면 일대에 송림산을 중심으로 그리고 조지산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고창 지역의 편암류는 인접한 영광 지역의 영광 지질도폭에서 시대 미상의 옥천계 암석으로 기재한 바 있으나, 이들 편암류가 상당히 높은 변성 작용을 받았고 화강암질 편마암에 의해 관입된 양상으로 보아 옥천계 암석 보다는 오래된 암석으로 생각되어 선캄브리아 암석으로 설정되었다. 화강암질 편마암은 엽리의 발달이 우세한 전형적인 미그마타이트의 특성을 보이며, 기질은 대부분이 흑운모가 우세한 흑운모 편암과 유사하나, 광범위한 화강암질 물질의 유입에 의한 화강암화 작용이 우세하게 관찰된다. 이 암석은 고창군 동부 고창읍 동남부의 노동리, 내동리 동부, 화산리, 월산리 서부 및 고수면 상평리 일대에 그리고 고창군 서부 해리면 방축리, 왕촌리-상하면 검산리 경계, 송곡리 서부, 장사산 일대, 상하면 하장리-공음면 두암리 경계 지역에 서로 떨어져 분포한다. 각섬암은 송림산 일대 지역 편암 내에 소규모의 암맥상으로 산츨하며, 무장면 송계리 산정 부근에 비교적 큰 노두가 분포한다. 이 밖에 수 cm 두께의 소규모 암맥들은 편암의 엽리와 상호 조화적인 관계를 이루며 불연속적으로 발달한다. 중생대 화강암 중생대에 관입한 대보 화강암은 고창군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암상에 따라 엽리상 반상 화강암, 흑운모 화강암, 반상 화강암으로 구분된다. 대보 화강암 엽리상 반상 화강암은 김제-정읍-고창-영광 지역에 강하게 발달하는 후기 쥐라기 시대의 전단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화강암 복합체의 가장 오래된 관입암체로 생각된다. 이 암석은 고창읍 북부 및 북동부 지역인 신월리, 성두리 북부 및 신림면 동부 일대에 주로 분포하며, 비교적 신선한 노두가 고창읍 신월리 및 신림면 자포리 일대에서 관찰된다. 이 암석은 엽리의 발달이 현저하며, 대부분이 정장석, 사장석, 석영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정장석 반정이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반상 조직을 보이는 조립의 화강암이다.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유색 광물을 포함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짙은색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대보 화강암 흑운모 화강암은 대산면, 공음면 동부, 무장면, 성송면과 고수면의 북서부, 고창읍 중부, 아산면 남부, 부안면 운양리와 사창리 동부, 흥덕면, 성내면 등 고창군의 대부분 지역에 걸쳐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선캠브리아 변성암 및 엽리상반상화강암을 관입하고, 복운모화강암과 반상화강암에 의해 관입되어 있다. 또한 아산면-해리면 북부에서는 백악기 화산암체에 의해 피복되어 있다. 이 암석은 전반적으로 풍화에 약해 대부분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며 선명한 노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암석은 중립 내지 조립의 균질한 괴상암체로서 주로 등립질의 암회색 석영 및 담회색 장석으로 구성되며, 유색광물로 흑운모를 포함한다. 흑운모 화강암의 저어콘에 대한 U-Pb 연대는 흑운모 화강암이 중기 쥐라기인 1억 7천만년 전에 관입한 암체임을 지시한다. 대보 화강암 반상 화강암은 고창군 동부, 고창읍과 고수면, 성송면의 남동부 산악 지역에 분포하며 선캄브리아기의 편암 및 화강 편마암과 쥐라기의 흑운모 화강암을 관입하고 있다. 이밖에 다수의 암주상 관입암체가 흑운모 화강암 분포지역에 나타나는데, 비교적 큰 규모의 암주가 해리면 고성리-무장면 송현리 경계 지역에 위치한 한제산, 무장면 신촌리-공음면 신대리의 왕제산, 무장면 신촌리-공음면 용수리-선동리 경계 지역, 무장면 옥산리의 월봉산, 무장면 고라리-옥산리-공음면 건동리 경계 지역, 아산면 성산리-무장면 원촌리-강남리 간 망치산, 송계면 반정리, 흥덕면 흥덕리의 배풍산 등의 지역에 소규모 분포한다. 이 암석은 중심부를 따라 비교적 압쇄엽리가 잘 발달하는데 대체로 편암 포획체의 분포방향과 일치하는 엽리의 방향을 보인다. 반상 화강암 내에는 다수의 고철질 마그마 포획체가 흔히 관찰된다. 이 암석은 대부분이 조립질의 반상 화강암으로 정장석 반정이 특징적으로 관찰되며, 주로 정장석, 사장석, 석영으로 구성된다. 반상 화강암의 SHRIMP U-Pb 저어콘 연대는 167.2∼168.7 Ma 로 중기 쥐라기에 관입한 암체임을 지시한다. 세립 흑운모화강암은 부안면 검산리에 위치한 수강산을 중심으로 고창군 부안면 송현리, 봉암리, 수양리에 걸쳐 분포한다. 세립 흑운모화강암은 수 km 크기의 암주형으로 흑운모화강암과 반상화강암을 관입하고 선운산 화산암체의 기반암을 이루며, 흑운모 화강암과 반상 화강암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험준하고 높은 능선을 형성한다. 주로 석영, 정장석, 사장석으로 구성되는 이 화강암은 담회색을 띠고 세립 내지 중립의 등립질 조직을 갖는 괴상의 암체이며, 상대적으로 흑운모 화강암 보다 세립이고 반상 화강암과 같은 반상 조직이 나타나지 않아 야외에서 다른 화강암과 쉽게 구별된다. 206Pb/238U 연대는 이 화강암이 중기 쥐라기에 관입한 것임을 지시한다. 중생대 백악기 화산암 고창군 북부, 아산면 중·북부와 심원면 동부, 부안면 남서부 지역에는 선운산을 중심으로 응회암류와 유문암 등 화산암이 분포한다. 이 타원형의 화산암 분포지역은 화강암 평야 지대와 뚜렷히 구분되는 산악 지대를 구성하고 있어 위성 사진으로도 그 분포 지역을 알 수 있다. 고창군 동부, 신림면과 고창읍, 장성군의 경계 지역에는 방장산과 방문산을 중심으로 산악 지대에 '내장사 화산암체'라고 명명된 화산암류가 분포한다. 중생대 백악기에, 한반도는 유라시아판 아래로 섭입하는 해양판 이자나기판의 영향으로 인해 광역적인 좌수향의 주향이동 단층 운동을 받게 되었으며, 이 단층 운동에 수반하여 다수의 퇴적 분지 형성과 화산활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구조동시성 화산활동은 다양한 조성의 그리고 수많은 화산 분출 작용에 의해 복잡한 화산쇄설암 및 용암류로 구성된 화산암체를 형성하였다. 1·2차 화산쇄설암, 용암류 그리고 관입암 등의 복합층으로 구성된 선운산 화산암체와 부안군 변산반도 지역에 분포하는 화산암들은 이 지역에 다양하고 복잡한 화산 분출 작용이 활발히 일어났고, 이들은 백악기 해양판의 섭입과 관련된 구조동시성 화산 활동의 산물로 판단된다. 비슷한 분출시기 임에도 불구하고 각 화산암체간의 독립적인 암상 분포 양상은 여러 개의 독립적인 화산체가 존재하였음을 지시하며, 이는 후기 백악기에 이 지역이 광역적인 화산 지대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장성군, 신림면, 고창읍의 경계 지역에 위치한 방문산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내장사 화산암체 응회암은 신선한 노두에서는 회백색을 띠며 장석립과 석영립이 다량 함유되어 있으며, 풍화면에서는 담회색 내지 회백색을 띠는 경우가 많다. 본 암석의 하부에서는 안산암편 혹은 셰일의 암편을 소량 함유한다. 한편 이 응회암 내에는 적색의 셰일층 및 역암층인 퇴적암이 협재된다. 방문산 상원사 뒤편 노두에서 이 협재된 퇴적암이 관찰된다. 선운산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화산암체는 선운산 화산암체라 불린다. 선운사 화산암체는 장석반암, 경수산 응회암, 유문암, 용결응회암, 소요산 응회암, 검산리 응회암, 연기제 응회암, 선운리 응회암, 상등리 응회암, 굴치 응회암, 먹방제 응회암, 오산리 용결응회암, 용산리 유문암, 규장암, 안산암 등 여러 지층으로 구분된다. 경수산 응회암에서 분리된 저어콘에 대한206Pb/238U 연대는 84.9±1.0 Ma이며, 연기제 응회암에서 분리된 저어콘에 대한 206Pb/238U 연대는 86.5±1.7 Ma 으로 분출 시기는 백악기 후기 상파뉴절임을 지시한다. 규장암에서 분리된 저어콘에 대한 206Pb/238U 연대는 84.9±1.0 Ma 이다. 단층 고창군에는 선캄브리아기 암석, 중생대 화강암류, 선운산 화산암체 내에 다수의 단층이 발달한다. 단층면들은 고각의 것이 대부분인데, 운동 성향은 정단층, 역단층 그리고 주향 이동 단층운동등의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음이 나타난다. 선운사 화산암체 내에 있는 북북서, 북동 및 동-서 방향의 단층들은 화산 활동 중이나 혹은 화산 활동 이 후에 이 화산암체에 작용한 변형 운동이다. 지질 도폭에서는 단층의 이름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지질도에 표시된 단층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해리면 왕촌리-공음면 두암리 간 단층 : 북북서 주향에 중생대 흑운모 화강암을 절단하고 장사산 북동부의 선캄브리아기 화강암질 편마암 분포지역을 통과한다. 연장 4.7 km 심원면 주산리-해리면 안산리 간 단층 : 선캄브리아기 화강암질 편마암, 선운사 화산암체 응회암을 절단하며 궁산저수지를 통과하는 남-북 주향의 단층이다. 이 단층을 따라 중생대 백악기의 산성맥암류가 관입하고 있다. 연장 3.8 아산면 삼인리-무장면 삼화리 간 단층 : 선운사 화산암체 응회암과 선캄브리아기 편암 분포 지역, 해리면 면소재지 지역을 통과하는 북북동 주향의 단층이다. 연장 9.5 km 아산면 삼인리-아산면 학전리 간 단층 : 선운사 화산암체 유문암을 절단하고 응회암 분포지역을 통과하는 북서 주향의 수직 단층이다. 연장 5.3 km 아산면 계산리-아산면 학전리 간 단층 : 선운사 화산암체 유문암과 응회암을 절단하는 북동 주향의 단층이다. 연장 2.6 km 아산면 반암리-아산면 상갑리 간 단층 : 선운산 화산암체 유문암과 응회암을 절단하는 북서 주향의 수직 단층이다. 남서측 지괴가 상승하고 북동측 지괴가 하강했다. 연장 7.0 km 아산면 용계리 화시산-부안면 운양리 간 단층 : 선운산 화산암체 장석반암, 응회암, 유문암, 용결응회암을 절단하는 동-서 주향의 단층이다. 연장 1.7 km 신림면 자포리-고창읍 율계리 간 단층 : 세곡삼거리 부근에서 율계리까지 이어지는 북동 주향의 단층이다. 연장 2.6 km 고창읍 성두리-고창읍 화산리 간 단층 : 엽리상 반상 화강암과 흑운모 화강암 분포지역, 고창읍 소재지를 통과하고 선캄브리아기 화강암질 편마암을 절단하는 북북서 주향의 단층이다. 연장 6.6 km 신림면 반룡리-고창읍 노동리 노동저수지 간 단층 : 엽리상 반상 화강암과 흑운모 화강암 분포지역을 통과하고 노동저수지 북측에서 중생대 흑운모 화강암과 선캄브리아기 화강암질 편마암 간 경계를 구성하는 북북동 주향의 단층이다. 연장 5.0 km 고창읍 월암리-고창읍 석정리 간 단층 : 엽리상 반상 화강암과 흑운모 화강암 분포지역을 통과하는 동-서 주향의 단층이다. 이 단층 남측에 선캄브리아기 편암이 분포한다. 연장 1.7 km 부안군 고사포해수욕장-심원면 연화리 간 단층 : 부안군 변산면 고사포해수욕장에서 남남동쪽으로 지방도 제736호선과 일치하게 말재와 곰소만 해저를 지나 고창군 심원면 연화리 아산면으로 15 km 이상 연장되는 북북서 주향의 이 단층은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에서 고원생대 기반암 내에 북동-남서 방향으로 관입되어 있는 선운산 화산암의 규장암을 400 m가량 좌수향으로 수평 이격시켰다. 규장암이 고각의 관입암이므로 단층의 실제 변위량은 최소한 수평 이격량인 400 m 보다는 클 것이다. 연장 17.5 km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흥덕면 사천리 간 단층 : 상서면 청림리에서 곰소만 동부를 지나 선운산 나들목 부근까지 이어지는 북북서 주향의 단층이다. 연장 20.2 km 부안면 상암리-부안면 검산리 간 단층 : 수강산 서측에서 계곡을 따라 발달하는 북북동 주향의 단층이다. 연장 5.0 km 광산과 지하자원 고창 지역에는 쥐라기의 화강암류들이 많은 부분을 점하고 있어 화강암류와 관계된 고령토, 규사 및 규석이 등록된 광구이나 현재 가행하는 광산은 없다. 행정 구역 고창군의 행정 구역은 1읍 13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창군의 면적은 607.72km2이다. 2013년 12월 31일 기준 주민등록 인구는 28,414세대 60,522명이고, 그 중 36.6%가 고창읍에 거주한다. 과거에는 195,603명의 인구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군청 현재 고창군청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위치하고 있다. 출신 인물 자매결연도시 고창군은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나 기관 등은 다음과 같다. 각주 외부 링크 고창군청 역사 1895년 고창군, 무장군, 흥덕군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전라남도 고창군·무장군·흥덕군 1906년 고창군, 무장군, 흥덕군이 전라북도로 이속되었다. 1914년 4월 1일 고창군, 무장군, 흥덕군을 고창군으로 통폐합하였다. 17면 - 고창면, 고수면, 오산면, 아산면, 무장면, 석곡면, 공음면, 상하면, 해리면, 성송면, 대산면, 심원면, 흥덕면, 성내면, 신림면, 벽사면, 부안면 1935년 3월 1일 오산면, 석곡면, 벽사면을 폐지하여 인접 면에 분할 편입하였다. 1955년 7월 1일 고창면을 고창읍으로 승격하였다. 전라북도의 군 1895년 설치 1914년 폐지 1914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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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5%B9%EA%B8%B0%EC%97%B0%EB%A7%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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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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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연맹은 일제강점기의 민간 단체이다. 개요 녹기연맹의 전신은 1930년에 경성천업청년단과 묘관동인회를 통합하여 1930년에 결성된 녹기동인회이다. 중일 전쟁 발발 전까지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일본의 국가주의 사상 생활하를 추진하는 수양단체였다. 그러나 1937년부터 내선일체를 이론화한 현영섭 등 조선인이 가입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다. 내선일체의 이념과 실천이 조직의 중심 목표가 되면서 정치적 색채가 크게 강화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황민화 시책에 호응하면서 대외 활동도 활발해졌다. 조선총독부의 외곽 정보 조직으로 기능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주요 활동은 출판 및 강연을 통하여 대중적 사상 운동을 펼치고 친일 이론을 연구한 것이며, 기관지 《녹기》를 발행했다. 녹기연맹이 펼친 사상 운동의 핵심은 현영섭의 '조선어 전폐론'으로 대표되는 급진적인 내선일체 이념으로, 조선인의 민족적 성격을 완전히 없애려는 시도로 요약된다. 연혁 1925년 1월 : 경성제국대학 입정회 조직 1925년 2월 : 경성천업청년단 부흥식 1927년 : 경성천업청년단 《묘관》 발행 1928년 4월 : 묘관동인회 결성 1930년 5월 : 묘관동인회와 경성천업청년단 통합으로 녹기동인회 발족 1933년 2월 : 녹기동인회 확대 개편으로 녹기연맹 출범 1938년 1월 : 현영섭의 《조선인의 나아갈 길》 출간 1938년 : 녹기연맹 산하 녹기연구소를 녹기일본문화연구소로 개칭 1939년 5월 : 제7차 총회에서 '내선일체의 실천'을 조직의 목표로 공식화 1940년 1월 : 일본식 성명 강요 정책에 따른 창씨 상담소 개설 1945년 : 태평양 전쟁 종전으로 해체 같이 보기 내선일체 참고자료 일제강점기의 단체 1933년 설립 1945년 폐지 친일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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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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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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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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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는 603보다 크고 605보다 작은 자연수이다. 수학 합성수로, 그 약수는 1, 2, 4, 151, 302, 604이다. 과학 기타 날짜: 6월 4일 연도: 604년 기원전 604년 6e02 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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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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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957%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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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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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후주 현덕 4년 요 응력 7년 일본 덴랴쿠 11년 / 덴토쿠 원년 남한 건화 15년 후촉 광정 20년 남당 보대 15년 북한 천회 원년 기년 후주 세종 4년 요 목종 7년 고려 광종 8년 사건 탄생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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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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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B%93%A4%20%ED%8C%8C%EC%9B%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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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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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 파워 또는 중견국은 국제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를 설명하는 용어이다. 이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고, 중재와 중개 기능을 강조하여 중개국이라고도 부른다. 국내에서도 일정한 번역어가 없으며, 일부 학자들은 중간정도 되는 국가라는 중간국의 잘못된 뉘앙스를 우려하며, 강대국에 못미치는 국가를 일컫는 정의를 고려하여 중간국이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으나 미들파워라는 표현 자체는 명확히 정해진 것이 없는 표현이다. 현재의 중간국 각주 외부 링크 post.queensu.ca The Middle Power. books.google.com Weak States in the International System. By Michael I. Handel. Middle Power Leadership on Human Security. By Ronald M. Behringer, Department of Political Science, University of Florida Government of Canada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South African Foreign Policy and Middle Power Leadership UBC Press Relocating Middle Powers: Australia and Canada in a Changing World Order Middle Power Internationalism From Middle to Model Power: Recharging Canada's Role in the World Canada in Transition Facing the Shift from Global Middle Power to Senior Regional Power Emerging Powers: Governance in a Changing Global Order, a Queen’s Centre for International Relations annual report Canada in the 21st century: beyond dominion and middle power. Cyberschool unsc permanent five 국력별 나라 국제 관계 정치학 용어 16세기 신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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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AF%BC%EC%B0%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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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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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창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이민창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이다. 이민창은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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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C%A3%BC%20%EC%A1%B0%EC%95%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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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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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기타 천체를 포함한 외기권의 탐색과 이용에 있어서의 국가 활동을 규율하는 원칙에 관한 조약은 국제우주법에 기초한 조약이다. 대한민국은 1967년 10월 13일 서명하였다. 주요 내용 외기권의 탐색과 이용의 자유 제1조에서 규정된다. 천체를 포함한 외기권의 탐색 및 이용은 모든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국제법에 따라 전 인류가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 영유의 금지 제2조에서 규정. 천체를 포함한 외기권에 대하여, 모든 국가는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평화이용 원칙 제4조에서 규정. 핵무기 따위의 대량살상무기를 운반하는 물체을 지구를 도는 궤도에 올리거나, 외기권에 배치하지 말 것. 또한, 달과 기타 천체는 오직 평화목적을 위해서 이용되며, 군사이용은 일체 금지된다. 국가에 대한 책임집중원칙 제6조, 7조에서 규정. 우주활동을 행하는 것이 정부기관인지 비정부단체인지에 상관 없이, 자국에 의해 행해지는 활동에 대해서는 국가가 국제적 책임을 진다. 발사체가 타국에 손해를 주는 경우, 발사국에는 무한의 무과실책임이 발생한다. 같이 보기 우주법 1967년 체결된 조약 1967년 발효된 조약 냉전기의 조약 미국-소련 관계 1967년 군사사 1967년 우주 개발 196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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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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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99%EC%84%B1%EB%8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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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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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는 강감찬이 태어난 곳으로,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번지에 위치해 있다. 낙성대는 그가 태어날 때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다. 강감찬 이 태어난 낙성대를 보존하고, 강감찬을 기리기 위해 조성하였는데 1973년 11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 6월 10일에 공원 조성이 완료되었다. 면적은 3만 1,350m2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출생지에 큰 별이 떨어졌다는 의미로 낙성대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는 강감찬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마했다고 전하면서 강감찬의 관상은 귀인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는 송나라 사신과 관련하여 전하길, 어느 날 키 크고 잘생긴 선비를 관리 복장을 하게 하고 강감찬은 허름한 옷을 입고 그 뒤에 섰는데, 사신은 한눈에 강감찬을 알아봤다고 한다. 송나라의 사신이 가난한 선비를 보고, “용모는 비록 크고 위엄이 있으나 귀에 성곽이 없으니, 필연코 가난한 선비다.” 하고, 강감찬을 보고는 두 팔을 벌리고 엎드려 절하며, “문곡성이 오랫동안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에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기록이다. 《고려사》는 강감찬을 가리켜 문곡성의 화신이라 했고, 《용재총화》는 염정성의 화신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구전되는 설화이라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등장하는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운을 주관하고 5번째 별인 염정성은 형살을 주관한다는데 북두칠성은 국자 모양의 맨 앞별에서부터 차례로 탐랑성∙거문성∙녹존성∙문곡성∙염정성∙무곡성∙파군성으로 붙여져 있다.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신이면서도 거란을 물리친 무장의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문곡성∙염정성이 등장한 것같다. 중국에서는 문곡성의 화신을 판관 포청천으로 봤고 문곡성이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왔으니 송나라의 사신이 큰 절을 올렸던 것이다. 안국사 1973년~1974년에 걸쳐 409m의 담장을 쌓고, 영정을 모신 안국사를 지어 일대를 공원을 조성하였다. 안국사는 외삼문인 안국문을 거쳐, 내삼문 안에 건축되었는데, 사당 안에는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공원 면적은 31,350m²이고, 안국사의 면적은 237.6m²이다. 내부에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과 안국사 앞에는 원래 낙성대 터에 있던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3층 석탑을 배치해 두었다. 이 탑은 1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탑의 높이는 4.48m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석탑의 위 층을 빼내어 탑의 높이를 한 층 낮추고, 탑안에 보물을 훔쳐갔다는 일화가 전하며, 탑 주위의 병풍바위와 선돌바위도 모두 부수고, 탑의 동쪽 구릉을 파내어 땅의 혈맥을 끊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탑에 연유하여 옛날에는 주변 마을을 탑골이라고 하였다. 낙성대유지 1974년 8월 21일 지정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호로 관악구 봉천동 218-4에 위치한다. 이곳은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로, 출생지임을 나타내기 위해 사리탑식3층 석탑을 세우고 후세에 전하여 왔다. 1973년 낙성대를 정비하면서, 이 석탑을 안국사의 경내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1974년 따로 높이 2m의 유허비를 세워 사적지임을 표시하였다. 낙성대 날조 논란 고려 공신의 후손이라고 하여 조선 시대에 피박을 받은 진주 강씨 문중에서는 1964년 장군의 묘를 발견하였다. 그 이후 문중에서는 이 강감찬 출생지가 가짜라는 이유로 강감찬 장군의 제사는 충북 옥산면 국사리 묘터에서 옮겨서 지낸다? 관련 문화재 낙성대 삼층석탑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 같이 보기 낙성대역 낙성대공원 강감찬 생가터 각주 참고 문헌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이수건 저, 일조각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 관악구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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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9%94%ED%83%88%EB%A0%88%EC%9D%B4%EC%A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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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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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레이지》는 게임하이에서 개발 및 배급하는 메카닉 TPS 온라인 게임이다. 2008년 12월 30일부터 2009년 1월 5일까지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월 13일 오픈베타 서비스를 개시하여 게임하이와 넷마블에서 채널링으로 접속할 수 있었다. 2011년 1월 14일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8가지 서로 다른 기체중 한가지를 고를 수 있고, 총 여덟 가지 게임모드를 제공하며 최대 32대를 지원했었다. 2014년 8월 29일에 마지막 타이완 서버까지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세계관 배경 스토리 21세기, "위협 확산방지 조약"이 체결되고, 가입국들의 필두로서 활동하는 임시 국가로 "DH-G"가 설립된다. 그때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오스트로니카"는 "초강대국 경제 군사 협력 조약" 를 설립. 세계 13개국이 지니고 있는 핵무기를 전부 회수하여, 중립국가적 위치에 있는 DH-G를 통해 전부 우주로 폐기하게 된다. 이 후, "위협 확산방지 조약"이 계획대로 진행된걸 확인한 AU는그들의 경제적 우수성을 지키기 위해 반AU성향의 국가를 침략하기 시작했으며, 얼마되지 않아 UN에서 AU가입국이 빠져 나가면서 UN은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어 버린다. 한편 AU의 침략을 받던 국가들은 브린토니쉬를 중심으로 "선진국 동맹 조약" 을 체결하여 AU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로 뭉친다. 이로서 세계는 AU와 WAL로 나뉘게 된 것이다. 이후 DH-G는 UN관계자들과 뜻 있는 사람들이 보여서 극비리에 어느 계획을 진행 중이었고, 나중에 가서는 극비리에 건설하던 달의 6번째 채광기지를 공식적으로 가동하고 국가명을 "그루니티아"로 하여,AU와 WAL에게서 독립하기로 하면서 이 나라는 양측의 골치거리가 된다. 본격적으로 움직인건 AU가 먼저였다. AU는 주변국을 돕는다/독립시켜 준다면서 그루니티아의 주변국가를 공격하면서 그루니티아를 고립시키기 시작했고, 그루니티아에서는 달의 새로운 채광기지에서 얻은 금속으로 만든 새로운 합금 페레즈 "Fe-Z"를 이용하여 비밀 프로젝트 鐵鬼를 진행시킨다. 한편 이러는 사이 AU는 WAL을 국사적으로 거의 완전하게 제압. 서서히 WAL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 후 그루니티아의 유일한 동맹국인 "스위젠"이 AU의 침공을 받게 되고, 그루니티아는 "鐵鬼 프로젝트"의 결실인 전투용 컴뱃 매커드로 구성한 아머드 포스와 특수 부대 "72 METAL RAGE"를 투입하여 이를 격파했고, AU는 압도적으로 패배하고 휴전과 함께 컴뱃 매커드에 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와중 철귀 프로젝트의 핵심멤버였던 페레즈 박사는 관련 자료와 도면을 가지고 AU로 "귀국"해 버리고, 그가 가져온 자료를 바탕으로 AU에서도 "블랙 어설트"라는 컴뱃 매커드를 만들기 시작한다. AU의 이런 행동에 위협을 느낀 그루니티아와 WAL은 동맹을 맺게 된다. 그 후 AU가 다시금 제3세계로의 침공을 시작하자, 그루니티아의 설득에 응한 WAL이 움직이면서 다시금 AU와 WAL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메탈 레이지 프로젝트 메탈 레이지를 통해 실용화된 그루니티아의 컴뱃 매커드. 이하에 소개되는 72 메탈 레이지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72 메탈 레이지 그루니티아의 컴뱃 매커드를 사용한 "아머드 포스" 소속의 특수 부대. 크기는 중대. 책임자는 "제임스 브라이트 소령"으로 그는 상부의 부대 창설 명령에 따라 300여명에 가까운 인원을 선발하여 훈련시키기 된다. 구성원은 군인부터 죄인, 의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2년의 훈련후에 낙오되지 않고 끝까지 버틴 72명의 병사들이 소속되면서 이 부대는 "72 메탈 레이지"라고 불리게 된다. 참고로 발대식에 있던 인터뷰에서 한 대원은 "내 인생 최악의 실수는 제임스 소령에게 속아서 여기 온것"이라고 했다. 블랙 어설트 AU에서 만드는 컴뱃 매커드, 그리고 AU소속의 컴뱃 매커드 부대의 특수 부대. 메탈 레이지의 라이벌. 아이언 고스트 메탈 레이지에 대항하기 위해서 AU에서 만든걸로 추정되는 특수 비밀 부대. 이쪽도 영어를 직역해서 한자로 만들면 鐵鬼가 된다. 게임상 유저의 소속은 72 메탈 레이지 아니면 아이언 고스트로 되어 있다. 병과 크게 전투형과 지원형의 두 병과로 나뉘어 있으며 각 병과마다 4가지 다른 기체가 존재한다. 전투형으로는 소형, 중형, 강습형, 저격형이며 지원형으로는 화력형, 공병형, 관측병, 정비병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형은 280의 체력과 좋은 기동성을 가지고 있다. 주무기로는 반줌 기능이 있는 기관총, 탄창이 기관총의 2배정도되나 사격전에 공회전이 필요한 발칸, 차지공격이 가능하고 중형의 전면부 총탄방어력을 무시하는 레이저가 있다. 보조무기2개와 부스터를 장착할 수 있다. 레전드 기체의 능력은 부스터게이지의 소모율을 감소시킨다. 그러나 체력이 너무 적어 화력전에서는 사용을 권장하지 않는다.소형의 레전드 기체 이름은 레이븐이다. 중형은 450의 체력과 총탄류에 대하여 추가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포탄 계열 무기에 추가 데미지를 입는다. 주무기로는공격력이 높은 1열포, 전체적으로 벨런스가 잡힌 2열포, 연사가 빠른 3열포, 1발의 강한 미사일을 발사하는 apcr과 2발을 연달아 발사하는 IMR이 있다. 보조무기 2개와 부스터를 장착할 수 있다. 중형 전용 보조무기가 존재한다. 레전드 기체의 능력은 박치기시 자신이 받는 대미지 감소와 상대가 받는 대미지 증가이다. 빠르지 못한 기동력을 대처하기 위한 부스터는 순간부스터보단 기본부스터나 나노엔진부스터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서든데스에서는 날아오는 MR-4를 피하기 위한 순간부스터 사용이 절대적이다. 중형의 레전드 기체 이름은 발퀴레이다. 강습형은 268의 체력과 방패를 가지고 있다. 방패는 전면부에 70%의 추가방어력이 적용된다. Hook-9의 방패는 불강습의 방패보다 방어력이 높다.. 주무기는 사거리가 짧지만 좌우 공격이 가능한 톱이 있다., 사거리가 긴 화염방사기, 한번에 강한 공격을 하는 무기가 있다. 주무기의 종류에 따라 방패의 방어력이 달라진다. 보조무기 2개와 부스터를 장착할 수 있다. 레전드 기체의 능력은 방패 여닫는 속도가 0.15초 감소한다.그러나 대부분의 유저들은 느끼지 못하는 정도이다.강습의 레전드 기체 이름은 크루얼 매서커이다. 강습은 주무기를 망치로 장착시에 방어력이 상당히 올라가서 268의 체력이 아닌 1080으로 상당히 오래 버틸수 있는 깡패 이미지로 많이 굳어졌다. 화력형의 곡사포를 5번이나 버틸수 있는 체력으로 중형유저들에게 많은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 저격형은 높이가 낮지만 옆으로 크며 4족 보행으로 움직인다. 전 기체중 가장 낮은 255의 체력을 가지고 있다. 타 fps의 저격을 생각하면 된다. 기본적으로 줌은 1단계밖에 지원하지 않고 특수한 상황이 아닌 한 원킬은 불가능하다. 보조무기 2개를 장착할 수 있고 부스터는 착용할 수 없다. 레전드 기체는 이동속도가 약간 상승한다저격의 레전드 기체 이름은 팬텀이다. 화력형은 300의 체력을 가지고 있다. 기본무기로 4연장 개틀링건을 사용한다. 4연장 포나 곡사포,산탄곡사포로 바꿀 수 있다. 주무기를 선택하면 약간의 모션을 거친 후 사용이 가능해 지는데 이때 전면부에 강습형의 방패와 맞먹는 추가 방어력이 생긴다. 그러나 이때는 이동이 불가능해 지고 약 120도밖에 회전하지 못한다. 때문에 뒤를 잡히면 속수무책으로 얻어 맞을 수밖에 없다.보조무기 2가지를 장착할 수 있고 부스터는 사용할 수 없다. 레전드기체는 주무기의 변경 속도를 단축시킨다.화력의 레전드 기체 이름은 조디악이다. 공병은 333의 체력과 지뢰, 쉴드를 설치할 수 있다. 주무기는 바운드탄이 있다. 바운드탄은 벽이나 땅에 맞으면 튕겨나가는 효과가 작용하며 종류에 따라 탄속, 튕겨나가는 정도등에 차이가 있다. 보조무기를 1가지만 장착할 수 있고 부스터도 사용할 수 없다. 전용 보조무기로 지뢰가 있는데 설치하면 보이지 않고 적이 근접하면 자동적으로 발동하는 AI지뢰와 직접 발동시켜야 하는 설치형 지뢰가 있다. 모든 지뢰는 공격에 의해 파괴될 수 있으면 AI지뢰의 경우 관측형의 스카우터에 의하여 제거될 수도 있다. 또 각 지뢰는 최대 설치 한도라는 게 정해져 있어서 그 이상 설치하는 경우 가정 먼저 설치한 지뢰가 자동적으로 파괴된다.쉴드의 경우 고정되어 있어 다른 보조무기로 바꿀 수 없다. 또 게임 내부에서 보면 왼클릭은 설치, 오른클릭은 쉴드생성이란 말을 볼 수 있는데 설치 기능은 PVE모드중에서도 스위젠에서만 쓸 수 있는 기능이어서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쉴드는 반투명하여 건너편을 볼 수 있고 모든 종류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 또 공격을 많이 맞는다고 빨리 부서지는 게 아니라 정해진 시간이 지나야지만 사라진다. 또 설치된 쉴드를 기체들은 아무 문제 없이 뚫고 지나갈수 있다. 레전드 기체의 능력은 쉴드 설치 시간 단축이다.공병의 레전드 기체 이름은 록산느이다. 관측형은 283의 체력과 전 기체 중 가장 빠른 이동속도를 가진다. 기본무기로 스카우터를 사용한다. 스카우터는 적의 지뢰나 적 기체를 탐지하거나 자폭으로 피해를 줄 수 있다. 스카우터 사출시 본체는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며 스카우터가 본체에서 일정거리 이상 멀어지면 화면에 노이즈가 생긴다. 2개의 보조무기와 부스터를 창착할 수 있다. 전용보조 무기로 EMP와 STATIC-B가 있다. EMP는 차지 후 발사하면 맞은 적은 화면에 노이즈가 생기고 부스터를 사용할 수 없다. STATIC-B는 발사시 붉은 안개가 발생하며 안개 속에서 정비병의 터렛이 동작하지 않는다.또 전 기체중 유일하게 4번기능이 있다. 4번은 타겟팅을 할 수 있는 무기로 타겟팅이 된 적은 타겟팅이 되어있는 동안 방어력20%가 저하된다. 아군의 레이다에 30초간 빨간 점으로 위치가 표시되게 된다. 관측형은 적이 타겟팅이 되어있지 않아도 모든 적이 레이다에 빨간 점으로 표시된다.. 레전드 기체의 능력은 스카우터의 노이즈 없이 활동할 수 있는 거리의 증가이다. br>관측의 레전드 기체의 이름은 스펙터이며 블루비틀이라는 유저가 유명했다. 정비병은 280의 체력을 가진다. 기본무기로 터렛을 일정한 모션을 거친 후 설치한다. 터렛의 설치 개수는 5개로 제한되어 있으며, 이미 설치한 터렛은 같은유저가 다른곳에 터렛을 설치할 경우 먼저 설치된 터렛이 파괴된다. AI에 의해 사격제어가 되므로 연막속에서도 적을 공격할 수 있다. 그러나 최대 사거리가 존재하고 100%명중이 아닌데다 전방 180도만 공격할 수 있고 수리가 불가능하다. 1가지의 보조무기를 장착할 수 있고 부스터는 장착할 수 없다. 고정된 보조무기로 정비팔이 있는데 대미지를 입은 아군을 치료할 수 있다. 수리 게이지가 100이 차 있고 수리를 할 때마다 게이지가 일정량씩 줄어든다. 게이지가 0이 되면 수리를 할 수 없게 되지만 잠시 기다리면 다시 게이지가 차오른다. 레전드 기체의 능력은 수리게이지를 20 늘려준다.정비의 레전드 기체의 이름은 펜리스이다. 100%명 중 터렛의 이름은 데드라인이다. 메탈레이지 후반 망치강습의 스왑이 극성을 달리며 서바이벌에 능한 정비병들이 미끼 역할을 자처하며 깡패 강습을 유인해서 같이 싸워서 5초의 시간을 버는 방식으로 상대하였다. 위에 적었다 싶이 강습의 체력은 268이 맞으나, 망치를 들었을시에 1080으로 올라간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데드라인에 적중시에 방패의 방어력에 영향을 받지 않기에 268이 맞다.데드 라인의 경우, 정비병이 있어야 터렛이 공격을 하며 사정거리도 상당히 짧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게임 모드 현재 팀 데스매치 모드, 서든 데스 모드, 안테나 모드, 점령 모드, 폭파 모드, 탈취 모드, 보스 모드, 레이지모드, 캠페인 모드 등 9가지를 지원한다. 팀 데스매치모드는 제한 시간 동안 목표 격파수에 도달하거나 목표 수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더 많이 격파한 팀이 승리한다. 예전에는 10분당 100킬이었으나 달성이 힘들다는 것을 이유로 2009년 3월 8일 현재는 20분당 150킬로 수정되었다. 서든데스모드는 적을 모두 격파시키거나 제한 시간이 끝날 때 생존한 유저수가 많은 팀이 라운드에서 승리한다. 이를 반복해서 먼저 목표 라운드수에 도달하는쪽이 승리한다. 한 라운드에서 격파당할 경우 다음 라운드까지 기다려야 한다. 점령모드는 점령 지점에서 일정 시간 동안 점거하면 점령한다. 레드는 A,B,C,D,E를 순서대로 점령시키면 승리하고, 블루는 제한 시간 동안 엄호하면 승리한다. 한 지점이 점거될 때마다 제한 시간이 3분 늘어난다. 폭파모드는 레드팀이 행성 송신기를 발견하여 행성 송신기에 근접한 후 F키를 누르면 행성 송신기를 설치하는 것이다. 블루팀은 레드팀이 설치한 행성 송신기를 역시 F키를 눌러 해체해야한다. 레드는 A, B 지역 중 한 곳에만 행성 송신기를 설치 가능하며, 블루는 제한 시간내에 레드가 설치한 행성 송신기를 해체해야한다. 두 팀 모두 서로 다른 팀의 모든 유저를 죽이면 승리한다. 탈취모드는 제한시간 동안 에너지 공급기를 더 많이 가져간 쪽이 승리하는 모드다. 에너지 공급기가 두 개란 걸 빼면 깃발전과 동일하다. 에너지 공급기를 탈취되고 나면 계속해서 생성된다. 보스모드은 레드팀은 보스를 호위하고 블루는 보스를 파괴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제한 시간 동안 레드는 보스를 호위해 적기지까지 도달하면 승리하고, 블루는 제한 시간 내에 보스를 파괴시키면 승리한다. 레이지모드는 승,패,킬,데스가 기록되지 않고 출격수와 공헌도만 기록되며 게임 플레이시간은 1시간이다. 레이지모드는 돌발미션이 존재한다. 적 기체 파괴나, 지정된 병과를 격파하는 것, 적 에이스를 격파하는 것 등이 있다. 성공할 경우 공격력 상승, 방어력 상승, 탄환 무한, 이속 증가, 내구도회복의 5가지 효과 중 하나가 무작위로 나타난다. 또한 연속적으로 대미지를 입거나 리스폰되는 유저를 위해 '분노모드'가 존재한다. 연속적으로 사망할 경우 분노모드가 발동되는데, 화면이 변하고 공격력과 방어력이 상승된다. 분노모드시 사망할 경우 분노모드가 해제된다. 게임 중간에 나가도 퇴장 페널티가 없으며, 나가는 시점까지 축적된 포인트와 경험치는 그대로 받아간다. 캠페인 모드는 PVE모드로도 불리며 기지 안에 있는 코어를 인공지능로봇으로부터 파괴를 저지해야 한다. 그러나 3번밖에 기체가 지급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고 SP가 적정량에 이르면 공격력 증가, 방어력 증가, 탄충전,코어 EMP, 레이지모드를 쓸 수 있습니다 또 설정에 따라 적 전함,전투기,가드타운 터렛이 포함된다. 업데이트 설정에 따라 3개의 미션으로 주어진다. 스위젠, 블레이즈, 밴디드, 퀴니에 등의 맵이 있다. 난이도는 초급, 중급, 고급으로 설정가능하며, 난이도에 따라 등장하는 AI기체의 수나, 대미지가 차이난다. 맵 팀 데스매치 - 로스트시티, 크로스로드, 필그림, 데저트스톰, 샌드 힐, D골든게이트, 이클립스, 글렌 폭파 미션 - 팬텀하우스, 네이블베이스, 루인시티, 노스폴 서든 데스 - 프레이즈, 다크사이트, 씨포트 점령 미션 - 사일로, MOON-6, 스피어밸리 탈취 미션 - 골든게이트, 테이큰 보스 미션 - D-DAY 레이지 미션 - 얼라이브, R샌드힐, R크로스로드 캠페인 - 스위젠, 블레이즈, 밴디드, 퀴니에 카드 시스템 메탈레이지에서는 새로이 '카드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카드 시스템은 4개의 시즌과 20개의 카드 모음집이 있으며 20개를 다 채우셨다면 '레전드 기체'가 지급된다. 이 지체에는 크루얼 메서커,팬텀,조디악,발퀴레,레이븐,록산느,스팩터가 있고 이들은 기체마다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많은 유저들이 선호하는 기체이다. 그러나 카드가 중복되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참조 중형은 가장 많은 체력을 가지고 있으나 방어력이 없다. 1월 30일자 패치로 VS총탄류 방어력을 버프했으나 여전히 취약점이 많다. 이 부분은 다른 형태의 패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관측의 EMP는 유용하긴하나 적은 공헌도를 얻기 때문에 대다수의 관측 유저는 EMP를 쓰지 않는다. 보스전의 경우 처음에는 다른 모습의 보스와 맵이 있었다. 그러나 패치로 수정되었고, 그 다음에는 보스호위인 레드팀이 보스를 공격할 경우 체력이 감소하는 버그를 수정하였고, 보스를 공격할 시 '아군의 신형병기입니다 호위하십시오'라는 글귀가 뜨도록 수정되었다. 그리고 2009년 3월 28일 현재 보스의 주포 격인 레이저캐논이 레드를 공격하지 않고 블루쪽으로 공격하도록 수정되었고, 미사일 발사도 수정되었다. 그러나 만일 레드팀유저가 블루팀쪽으로 갈 경우 보스의 미사일발사에 섬멸당할 우려도 있으니 조심해야한다. 메탈레이지에 GM레이지슈가 있는데 금요일마다 유저와함께 게임을 즐기고 있다. 각주 외부 링크 게임하이 메탈레이지 사이트 넷마블 메탈레이지 사이트 일본 게임야로우 메탈레이지 사이트 메탈레이지 Facebook 2009년 비디오 게임 슈팅 게임 윈도우 게임 넷마블의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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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9%B8%EB%BF%94%EC%86%8C%EC%9E%90%EB%A6%AC%20V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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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뿔소자리 V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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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뿔소자리 V838은 외뿔소자리에 있는 변광성으로 지구에서 약 2만 광년 떨어져 있다. 이 별은 2002년 초에 큰 폭발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이 폭발을 전형적인 신성 폭발 현상으로 여겼으나, 이후 신성과는 다른 성질의 폭발임을 알게 되었다. 폭발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았으나 몇 가지 이론이 제기된 상태이다. 예로써 항성이 죽어가는 과정이거나, 동반성 혹은 행성들을 빨아들여 생긴 현상이라는 것 등이 있다. 폭발 2002년 1월 10일 외뿔소자리에서 예전에 안 보이던 별이 밝아지는 것이 관측되었다. 새로운 변광성이었기 때문에 이 별에는 '외뿔소자리 내에서 838번째 변광성'이라는 의미로 외뿔소자리 V838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보통 별과 백색 왜성으로 이루어진 쌍성계에서, 보통 별 표면에서 흘러나온 수소가 백색 왜성의 표면에 충분한 양이 쌓이면 폭발이 일어나는데 이 현상을 신성이라고 한다. 838의 광도 곡선은 처음 관측 때는 보통의 신성과 비슷했기 때문에 '외뿔소자리 신성 2002'라는 명칭을 얻었다. 이 별은 2002년 2월 6일 겉보기 등급 +6.75로 가장 밝아진 뒤 예상했던 대로 빠르게 어두워졌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초 838은 다시 밝아졌으며, 이때 적외선 영역에서 크게 광도가 상승하였다. 이후 신성 현상을 보이기 전의 밝기 15.6등급으로 다시 어두워진 후 4월 초 이 별은 다시 적외선 영역에서 크게 밝아졌다. 이 과정에서 838이 보여 준 광도곡선의 양상은 이전 사례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 별은 폭발할 때 밝기가 태양의 백만 배 정도였으며, 이는 우리 은하에 있는 가장 밝은 별들 순위에 낄 수준이었다. 밝기의 증가는 별 외곽부가 급격하게 팽창했기 때문이다. 팔로마시험대 간섭계로 측정한 반지름은 태양의 약 1,570배였다. 만약 태양계에 태양 대신에 이 별을 갖다 놓으면 목성 궤도까지 이르는 크기로, 이는 이전에 간접적 방법으로 계산한 수치와 들어맞았다. 838이 부풀어 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몇 달 정도로 매우 빠른 속도를 보여주었다. 열역학 법칙에 따르면 기체의 표면 온도는 부풀어 오르면 식는다. 따라서 838은 부풀어 오르면서 표면 온도가 크게 낮아지면서 붉은 색을 보여주게 된다. 일부 천문학자들은 838의 스펙트럼이 분광형 L 갈색왜성과 비슷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838은 첫 번째 분광형 L 초거성의 사례가 될 것이다. 비슷한 사례 외뿔소자리 V838이 보여 준 폭발과 비슷한 사례는 몇 개 없다. 1988년 안드로메다 은하 내 적색 거성이 폭발하는 것이 관측되었다. 이 별은 M31-RV로 명명되었으며 가장 밝았을 때 절대복사등급이 -9.95로 태양 밝기의 약 750만 배 정도였다. 이후 1994년 우리 은하 내 궁수자리 V4332가 비슷한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 이전의 별의 상태 외뿔소자리 V838이 폭발을 일으키면서 몇 가지 이 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밝혀졌다. 폭발로 생겨난 '빛의 메아리' 현상을 연구한 결과, 이 별과 지구 사이 거리는 1,900에서 2,900광년으로 나왔다. 폭발하기 전의 사진으로 측정한 겉보기 등급을 적용하면 838의 본체는 어두운 F형 주계열성으로, 우리 태양과 비슷한 존재였다. 이후 더 정확한 측정 결과, 실제 거리는 훨씬 멀어서 약 20,000광년이었다. 따라서 이 별은 태양보다 훨씬 무겁고 , 밝은 존재였다. 여기서 나온 반지름은 태양의 약 5배이며, 표면 온도는 4,700~30,000K였다. 단 이 값들은 매우 불확실하다. 2005년 천문학자 무나리가 이끄는 연구진은 838의 질량이 태양의 65배이며 따라서 극대거성이라고 주장했다. 무나리는 이 항성의 나이를 약 4백만 년 정도로 추산했다. 다시금 838의 스펙트럼을 통하여 이 별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동반성은 B 분광형의 주계열성으로, 질량이 838과 큰 차이가 없으며 심지어 838보다 약간 질량이 클 가능성도 있음이 밝혀졌다. 반성은 838과는 달리 주계열 단계에 막 들어선 상태로 보인다. 무나리 연구진이 동반성의 광도를 측정하여 시차를 계산한 결과, 이 항성계와 지구의 거리는 이전에 나온 값보다 훨씬 더 먼 36,000광년이었다. 빛의 메아리 신성이나 초신성처럼 빠르게 밝아지는 천체 주변에서는 '빛의 메아리' 현상이 나타난다. 천체에서 곧장 나온 빛은 가장 빨리 우리 눈에 도착한다. 그런데 만약 지구와 천체 사이에 성간 구름 등의 방해물이 존재할 경우 빛 중 일부가 이 구름 등에 반사된다. 반사됨으로 인하여 빛이 지구까지 오는 경로가 길어지기 때문에 구름에 반사된 빛은 뒤늦게 지구에 도착하며, 이 때문에 폭발한 천체 주위에 둥근 가스구름이 퍼지는 모양을 보여주게 된다. 그런데 838의 가스구름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퍼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838이 만든 빛의 메아리는 전례가 없는 현상이었으며, 허블 우주 망원경은 이 빛이 퍼지는 모습을 기록으로 충실히 남겼다. 이 메아리가 중심부 항성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관련이 있다면 이는 별이 파국을 맞는다는 가정 하에 세워진 여러 이론들과는 달리, 더 이른 시기에 일어난 폭발로 생긴 결과일 것이다. 838 항성계의 나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젊고, 838이 자신이 태어난 성운 내에 아직 자리잡고 있는 것임이 확실하기 때문에, 항성 진화의 끝에서 보여주는 현상은 아닐 것으로 보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별이 폭발했을 당시의 빛의 파장은 짧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허블 망원경이 찍은 사진에서 메아리 가장 바깥 테두리 부분은 푸른 빛을 띠고 있다. 이론들 지금까지 외뿔소자리 V838 폭발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이 나왔다. 특이한 신성 폭발 V838의 폭발은 매우 특이한 신성 폭발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신성 폭발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백색 왜성이 있어야 하고 항성계의 나이도 많아야 하는데, 젊고 질량이 큰 B 분광형 주계열성이 있는 등 838 항성계가 오래 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이론은 설득력을 잃었다. 신성 폭발을 위해서는 백색 왜성 표면에 동반성에서 흘러나온 수소가 일정량 쌓여야 하며, 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죽어가는 별의 맥동 현상 V838은 후점근거성가지 단계의 항성으로 죽음 직전에 있으며, 빛의 메아리로 불리는 성운은 이 별이 맥동 현상을 보이면서 외부로 방출한 물질로, 과거에도 비슷한 폭발이 있었고 그 결과가 '빛의 메아리'라는 이론이다. 838이 밝아진 원인은 헬륨 섬광 현상 때문으로, 질량이 작은 별이 죽어가면서 핵에서 갑작스럽게 탄소 융합 작용을 일으킨 결과라는 것이다. 이 헬륨 섬광은 항성을 불안정하게 만들지만 파괴하지는 않는다. 이런 사건은 '사쿠라이의 천체'에서도 발생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여러 관측 자료를 통한 결과 메아리를 이루는 먼지는 항성 주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간 물질임이 밝혀졌다. 외곽 대기를 날려 보낸 죽음 직전의 별은 표면온도가 매우 뜨겁지만, 관측된 증거로 볼 때 838은 젊은 별일 가능성이 높다. 무거운 초거성 내부의 열핵 반응 일부 증거에 따르면 838은 질량이 매우 큰 초거성으로, 폭발 현상은 탄소 섬광이라는 것이다. 탄소 섬광은 항성 내 헬륨층에서 갑자기 연소반응이 일어나서 탄소 융합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는 현상이다. 질량이 매우 큰 초거성들은 이런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서 주계열성 시절 갖고 있던 질량의 절반 정도를 잃게 되고, 종국적으로 울프-레이에별로 진화하게 된다. 항성 주위 뚜렷한 먼지층은 이러한 이론과 들어맞는다. 838은 우리 은하 원반과 은하 중심부에서 먼 곳에 있다. 은하 원반과 중심부에서 떨어진 주변 지대일수록 항성이 잘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838처럼 질량이 큰 별이 은하 외곽에서 생겨날 수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아주 젊은 성단 루프레흐트 44나 400만 년 된 NGC 1893과 같은 예외도 존재한다. 항성끼리의 융합 838의 폭발은 소위 '흡수폭발'로, 각각 태양질량 8배와 0.3배에 해당하는 주계열 및 전주계열성이 서로 합쳐져서 발생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쌍성계는 단독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과, 838 항성계의 나이가 젊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가설은 신빙성이 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도 흡수 가설은 가능성이 있음이 밝혀졌다. 시뮬레이션은 두 구성원 중 질량이 작은 쪽의 외곽 대기가 부풀어 올라서 폭발현상을 일으켰다는 결과를 냈다. 또한 이 이론에 따르면 광도곡선 상에서 급격히 밝아지는 부분은 이 흡수폭발로 인한 결과물로 설명할 수 있다. 행성 흡수 838 폭발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특이한 이론으로, 838이 주변을 돌던 가스행성을 흡수하여 폭발을 일으켰다는 것이 있다. 만약 838의 행성이 어머니 항성의 외곽 대기와 마찰을 일으킬 경우, 공전 속도에 제동이 걸리면서 행성은 나선을 그리면서 항성 내부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행성이 항성 대기로 깊이 들어가면서 마찰이 점차 커지고 운동 에너지가 항성으로 빠르게 전달된다. 이로 인해 항성의 외곽 대기층은 중수소 융합을 할 수준까지 가열되면서 급격하게 팽창하게 된다. 또한 이 이론은 838의 밝기가 두 번째로 밝아진 원인이, 행성 두 개가 외곽 대기에 추가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으로 본다. 행성흡수를 주장하는 천문학자들은 우리 은하에서 태양과 비슷한 별의 경우 연간 0.4건, 838과 같이 무거운 별의 경우 연간 0.5~2.5건의 행성 흡수 사건이 발생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읽어보기 항성 진화 각주 외뿔소자리 특이변광성 L형 초거성 M형 초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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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A%B8%EC%A7%80%EB%B0%A9%EA%B3%A0%EC%9A%A9%EB%85%B8%EB%8F%99%EC%B2%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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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방고용노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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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방고용노동청은 대한민국 고용노동부의 소속기관이다. 2010년 7월 5일 발족하였으며, 서울특별시 중구 삼일대로 363 장교빌딩에 위치하고 있다. 청장은 고위공무원단 나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으로 보한다. 직무 보안·관인관리, 문서의 수발, 예산·회계 및 결산, 공무원의 임용·급여, 그 밖의 인사사무 고용보험료의 체납처분 및 결손처분의 승인과 고용보험 관련 과태료의 부과에 관한 사항 직업능력개발훈련 및 직업능력개발사업에 관한 사항 「근로기준법」의 적용 및 위반에 대한 조치 등 근로감독에 관한 사항 사업장의 재해예방에 관한 지도 및 산업안전보건에 관한 법령의 위반에 대한 조치 등 산업안전보건에 관한 사항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의 적용과 남녀고용차별의 개선 등 여성근로자에 관한 사항 구인·구직 및 취업알선 등 직업안정에 관한 사항 국내취업 외국인근로자의 고용허가 및 관리에 관한 사항 실업급여 지급, 고용안정사업 및 고용보험 피보험자격 관리에 관한 사항 노사분규의 예방과 수습, 노사협력의 증진과 그 밖에 노사관계의 합리적 개선에 관한 사항 소속 지청에 대한 업무의 지휘·감독 연혁 1964년 1월 1일: 노동청 서울산업재해보상보험사무소 설치. 1968년 6월 25일: 노동청 소속으로 서울제1직업안정소·서울제2직업안정소 및 영등포산업재해보상보험사무소 설치. 1970년 4월 7일: 서울제1직업안정소·서울제2직업안정소를 서울직업안정소·영등포직업안정소로 개편. 1972년 2월 16일: 노동청 소속으로 성동산업재해보상보험사무소 설치. 1972년 12월 19일: 서울·영등포·성동산업재해보상보험사무소를 서울중부·서울동부·서울남부산업재해보상보험지방사무소로 개편. 1974년 10월 2일: 산업재해보상보험지방사무소와 직업안정소를 통합하여 서울중부·서울동부·서울북부·서울남부·서울관악지방사무소로 개편. 1978년 6월 9일: 서울서부지방사무소 설치. 1981년 4월 8일: 노동부 소속으로 변경. 1987년 5월 15일: 서울중부지방사무소를 서울지방사무소로 승격하고, 서울동부·서울서부·서울남부·서울북부·서울관악지방사무소를 소속기관으로 편입. 1987년 12월 9일: 서울지방사무소를 서울지방노동청으로 개편. 소속 지방사무소를 지방노동사무소로 개편. 1995년 5월 1일: 서울중부지방노동사무소 설치. 2000년 4월 17일: 서울중부지방노동사무소를 폐지하고 서울강남지방노동사무소를 설치. 2006년 3월 2일: 지방노동사무소를 고용노동지청으로 개편. 2007년 7월 16일: 현 청사로 종합센터의 통합 이전. 2010년 7월 5일: 고용노동부 소속 서울지방고용노동청으로 개편. 강원도 소재 지청 또는 출장소를 중부지방고용노동청으로 이관. 관할구역 서울특별시 중구·종로구·서초구·동대문구 조직 청장 지역협력과 고용관리과 부정수급조사과 노사상생지원과 근로문화개선지원과 근로개선지도제1과 근로개선지도제2과 근로개선지도제3과 광역근로감독과 광역중대재해관리과 산재예방지도과 건설산재지도과 서울고용센터 취업지원총괄과 실업급여과 국민취업지원과 기업지원과 직업능력개발과 서초고용센터 소속기관 지청장은 서기관 또는 기술서기관으로, 고용센터 소장은 서기관·기술서기관·행정사무관·통계사무관·공업사무관·보건사무관·시설사무관·전산사무관 또는 행정주사로 보한다. 각주 외부 링크 2010년 설립 대한민국 고용노동부 서울 중구 소재의 관공서 특별지방행정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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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734%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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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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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4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연호 청 옹정 12년 일본 교호 19년 후 레 왕조 롱득 3년 기년 류큐 쇼케이왕 22년 청 세종 옹정제 12년 조선 영조 10년 후 레 왕조 순종 3년 사건 탄생 5월 23일 - 독일의 의사 프란츠 안톤 메스머. 사망 6월 12일 - 영국 귀족 출신의 프랑스 원수 베릭 공작 1세 제임스 피츠제임스 6월 17일 - 프랑스 대원수 빌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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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9E%9C%EB%93%9C%20%ED%8E%9C%EC%9C%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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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펜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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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펜윅 공국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작가인 레널드 위벌리가 만든 가상의 대공국으로써, 1955년에 나온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에 처음 등장한다. 소설에서, 위벌리는 단지 희극적인 면을 넘어서, 국가의 크기를 39 제곱 킬로미터로 만들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위치는 현시대의 정치와 사건을 풍자적으로 만들어주는 장치가 되었다. 이 공국은 스위스와 프랑스의 알프스 국경지대에 있으며, 글로리아나 12세 대공녀가 지배하고 있다. 공국은 공국땅에서 나는 뛰어난 그랜드 펜윅와인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혁명 전의 경제체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공국의 이름은 1370년경에 그의 추종자와 함께 프랑스에 고용된 영국 기사였고, 대공령의 창시자인 로저 펜윅경의 이름에서 따왔다. 로저 펜윅경으로 인해서, 공국의 표준어는 영어가 되었다. 또한, 천하무적 그랜드 펜윅때 개정된 헌법때문에, 그랜드 펜윅은 군에서 모든 신형 무기대신에, 장궁만을 사용해야 했다. 공국의 문장 공국의 문장은 로저 펜윅 경이 옥스퍼드 대학교를 다니면서 배운 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선 "그렇지"가 "아니지"로 변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펜이 칼보다 강한건 사실이지만, 칼이 더 우렁차고 큰 소리를 낸다. 소설에서의 그랜드 펜윅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에서, 공국은 미국에서 만드는 가짜 그랜드 펜윅 와인을 문제삼아 미국과 전쟁상태를 선포하게 된다.그랜드 펜윅은 미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후에, 즉각적으로 패배를 선언하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낼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랜드 펜윅의 공식적인 항의서한이 국무부의 공무원에게 접수되었을때, 이 공무원은 이 서한을 누가 장난친것으로 판단한다. 그러자 실제로 사슬갑옷과 장궁으로 무장한 공국의 군대는 경계경보령이 내리던 뉴욕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들은 항복할만한 상대를 찾지 못하였다. 결국 그들은 포로들을 데리고 다시 그랜드 펜윅으로 돌아오게 된다. 포로 중 한명이 Q-폭탄이라는 어마어마한 무기의 발명가였고, 그랜드 펜윅 군대는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엄청난 무기의 소유주가 되어버렸고, 그랜드 펜윅은 이 무기로 "작은 20개국"이라 불리는 약소국가와의 동맹을 맺게 되고, 그리고 이 폭탄을 세계 평화를 얻기 위해 이용하게 된다. 62년에 나온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에서, 그랜드 펜윅은 최고급 와인 속에 들어 있던 신비한 혼합물을 이용한 새로운 로켓 연료로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69년도에 출판된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월스트리트 원정기에서 공국은 전 세계 경제를 흔들어놓게 된다. 공국이 미국 원정하고 받은 돈으로 세운 껌공장의 엄청난 로열티를 써버리기 위해서, 글로리아나 대공녀는 주식에 모든 로열티를 쏟아붇게 되고, 이 돈에 대한 루머와 합병으로 인해서, 공국은 재계의 큰손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70년대 중반의 에너지 위기중에 씌여진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석유시장 쟁탈기에서, 공국이 어마어마한 석유 매장지였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참고 문헌 가공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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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FC%20%EC%97%90%EB%84%A4%EB%A5%B4%EA%B8%B0%20%EC%BD%A7%EB%B6%80%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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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에네르기 콧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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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에네르기 코트부스는 독일 동부 콧부스에 위치한 슈타디온 데어 프로인트샤프트 경기장을 근거지로 하는 축구 클럽이다. 이 축구단은 동독 시절인 1966년 창단 되었다. 동독에 속해있던 팀 중 유일하게 분데스리가에 속해 있다가 08-09시즌을 16위로 마감 하면서, 2부 리그로 강등 되었다. 외부 링크 FC 에네르기 콧부스 공식 홈페이지 1966년 설립된 축구단 독일의 축구단 브란덴부르크주의 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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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6%AC%EB%93%AC%20%EC%95%A4%20%EB%B8%94%EB%A3%A8%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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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 앤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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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 앤 블루스 또는 알앤비는 흑인의 생활 양식에 맞도록 녹음된 블루스 보컬이나 밴드 연주의 대중음악을 총칭한다. 나른한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며 가성을 많이 섞어 부르기도 한다. 1940년대 말~1950년대 초, 블루스가 스윙 같은 댄스풍 재즈와 섞여 태어난 흑인 음악이다. 블루스보다 댄스 비트가 강하고 리듬 멜로디도 대중적이다. 가사도 고단한 삶을 노래하던 블루스와 달리 쾌락적으로 흘렀다. 보통 줄여서 R&B 라고 많이 불리는데, 현대에서 R&B라는 단어는 컨템포러리 알앤비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외부 링크 영어계 외래어 블루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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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3%A8%ED%8A%B8%EB%B9%84%ED%9E%88%204%EC%84%B8%20%28%EC%8B%A0%EC%84%B1%20%EB%A1%9C%EB%A7%88%20%ED%99%A9%EC%A0%9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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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4세 (신성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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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4세은 1294년부터 1301년까지 바이에른의 대공이었고 1314년부터 독일의 왕이었다. 1328년부터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다. 별칭은 바이에른인. 독일의 국왕으로는 루트비히 5세로 불린다. 비텔스바흐가 출신의 루트비히는 합스부르크가 출신으로 처음 독일의 왕에 오른 루돌프 1세의 외손자이다. 그는 친할머니 팔츠의 아그네스의 가문인 벨프가 조상으로도 로타르 3세와 하인리히 4세의 후손도 된다. 아비뇽 교황과의 대립 아비뇽으로 떠난 교황은 로마왕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반항으로 루트비히 4세는 고위성직자가 아닌 로마 총독 시아라 콜론나에게 대관받아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에 올랐다. 교황 요한 22세는 로마 시 전체와 황제를 함께 파문했다. 1328년 황제는 교황에 대항하기 위해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를 선출했다. 루트비히 4세는 이탈리아에서 그다지 얻은 것이 없는 상태로 1330년에 독일로 돌아왔다. 각주 외부 링크 1282년 출생 1347년 사망 신성 로마 황제 바이에른 공작 라인 궁정백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뮌헨 출신 네덜란드의 역사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파문된 사람 비텔스바흐가 이탈리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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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4%B1%EC%97%B4%20%28%EC%95%BC%EA%B5%AC%EC%9D%B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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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열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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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열은 전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내야수, 외야수, 지명타자이자, 현 KBO 리그 kt wiz의 육성군 타격코치이다. 선수 시절 LG 트윈스 시절 순천효천고등학교 졸업 후 2003년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원래 포수였으나 외야수로 전향했으며 2008년 6월 3일에 두산 베어스와의 2:2 트레이드로 포수 최승환과 함께 두산 베어스로 이적했다. 두산 베어스 시절 2009년 9월 8일 히어로즈전에서 김수경을 상대로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KBO 리그 역대 5번째 대타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이었다. 2009년 시즌 후 포수로 복귀했으나 양의지에게 밀려 다시 외야수로 복귀했고 종종 포수로 기용됐다. 2010년 시즌 초반에 주로 3번 타자로 출전했지만 곧 6번으로 내려갔다. 2010년 시즌 129경기에 출전해 2할대 타율, 24홈런으로 팀의 중심 타선으로 자리잡으며 데뷔 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김경문이 2011년 시즌 중 사퇴했고, 감독 대행이었던 김광수가 나간 후 김진욱이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외야 주전 자리를 정수빈에게 넘겨줬다. 2012년 7월 9일에 당시 넥센 히어로즈 소속이었던 오재일과 1:1 트레이드를 통해 이적하였다. 넥센 히어로즈 시절 2012년 7월 9일 트레이드 후 맞트레이드 상대였던 오재일과 마찬가지로 이적하자마자 1군 엔트리에 등록됐고, 7월 11일부터 출전했다. 이적 후 첫 홈런은 8월 26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임경완을 상대로 기록했으며, 이는 결승 홈런이었다. 그 이후 3홈런을 더 치며 시즌을 마감했고, 시즌 개막전부터 박지훈을 상대로 홈런을 쳐 냈고, 4월 3일 LG전에서 이동현, 류택현을 상대로 시즌 첫 연타석 홈런을 쳐 냈다. 시즌 초반에 홈런왕 경쟁을 했으나 후반기에 들어서며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졌고, 변화구에 헛스윙을 하며 삼진왕이 됐다. 2013년에는 팀 창단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는데 당시 주장이었던 이택근은 그가 두산 베어스와의 준플레이오프 키플레이어라고 지목했다. 2014년 시즌 후 계약금 없이 2년간 총액 5억원에 FA 계약을 체결하며 잔류했다. 한화 이글스 시절 선발이 난무한 넥센 히어로즈와 좌타 거포 부재와 조인성의 부상으로 인해 공백이 생긴 팀 사정으로 인해 2015년 4월 8일 당시 넥센 히어로즈 소속이었던 그와 허도환, 한화 이글스 소속이었던 양훈과 2:1 트레이드를 통해 이적하였다. 트레이드 당일 이적 후 첫 타석에서 1타점 2루타, 두 번째 타석에서 역전 홈런을 쳐 냈다. 2017년 6월 22일 넥센전에서 김상수를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기록했다. 2018년 9월 26일 삼성전에서 정인욱을 상대로 데뷔 첫 30홈런을 기록했다. 이 해에 30홈런-세 자릿수 타점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고 팀의 가을 야구 진출에 공헌했다. 2019년 시즌 후 FA 자격을 취득해 2년 총액 14억원에 잔류했다. 2021년 8월 28일에 은퇴를 선언했다. 야구선수 은퇴 후 2021년 시즌 후 한화 이글스의 2군 전력분석원으로 활동할 예정이었으나 무산됐고, 2022년부터 kt wiz의 2군 타격코치로 활동한다. 별명 큰 스윙으로 계속 삼진을 당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홈런을 쳐 내 뽕에 취하게 한다고 해 '뽕열'이라고 불린다. 출신 학교 순천효천고등학교 순천이수중학교 순천북초등학교 통산 기록 각주 외부 링크 1984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순천시 출신 KBO 리그 포수 KBO 리그 외야수 KBO 리그 좌익수 KBO 리그 우익수 KBO 리그 내야수 KBO 리그 1루수 KBO 리그 지명 타자 LG 트윈스 선수 두산 베어스 선수 넥센 히어로즈 선수 한화 이글스 선수 순천북초등학교 동문 순천이수중학교 동문 순천효천고등학교 동문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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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8%81%ED%83%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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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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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태는 다음 사람을 가리킨다. 김영태는 대한민국의 조직폭력배이다. 김영태는 대한민국의 비전향 장기수이다. 김영태는 대한민국의 시인 겸 예술평론가, 화가이다. 김영태는 경제기획원 차관을 지낸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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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D%9D%AC%EB%A0%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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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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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련은 일제강점기의 교육인 출신 관료이다. 생애 출신지는 평안북도 태천군이다. 경성부에 유학하여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를 1912년에 졸업하였다. 학교 졸업 후 훈도로 근무하다가 1914년에 조선인 판임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군서기로 임명되면서 관리로 전직했다. 고향인 태천군과 의주군 서기를 거쳐 창성군 재무계 주임을 지내다가 1925년에 총독부 군수로 승진했다. 이후 평안북도 철산군과 삭주군, 선천군, 의주군 군수를 차례로 지냈다. 군수로 재직하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1933년 훈6등 서보장을 수여받는 등 1935년을 기준으로 종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조선인사흥신록》에는 “명민한 두뇌와 탁월한 수완의 소유자”라고 적혀 있으며, “교육계에 들어간 이후 이미 25년 동안 원숙한 인격과 빼어난 수완을 가지고 부하들을 잘 통제하였다”라는 인물평이 실려 있다.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참고자료 각주 1887년 출생 몰년 미상 20세기 한국 사람 일제강점기의 교육인 일제강점기의 관료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태천군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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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84%EB%8F%84%ED%8A%B9%EC%84%A4%EB%8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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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특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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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특설대 또는 간도특설부대는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동북항일연군· 팔로군· 조선의용군 등 중국 공산당 휘하의 조직 등 만주에 존재하던 기타 항일 조직을 토벌하기 위해 1938년 조선인 중심으로 조직하여 1939년부터 본격적인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한 800~900여 명 규모의 대대급 부대였다. 개요 간도 특설대는 당시, 간도에서 중국공산당 휘하의 동북항일연군 등의 반일-반만주국 투쟁에 의해 곤경에 빠진 만주국-일본 당국에 의해 설립되었다. 만주국의 참의원을 지낸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설립하여 대대장 등 몇몇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명칭도 이에 유래하였고,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에 소속되었다. 동북항일연군 등 다수의 항일조직은 군대, 관헌 등의 단속과 집단주거 마을건설에 의해 주민과 격리된채 은신하면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맞서 간도 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다. 간도특설대는 1939년에서 1942년까지는 만주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저우바오중 여단장이 지휘하던 동북항일연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1944년 1월 15일 러허성으로 옮겨갔다. 1944년 가을부터 1945년 1월까지는 러허성밀원현 석갑진일대에서, 1945년 1월부터 특설부대가 해산되기까지는 하북성 난남현 팔로군에 대한 토벌을 했다 44~45년 거리상 조선의용군 조우했을가능성이 있다 활동 주요 토벌 대상은 한족과 조선인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일원인 양징위 저우바오중가 지휘자로 있는 동북항일연군 김두봉 김무정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중국공산 혁명군 팔로군이었다. 부정적 활동사례 1939년 5월 특설부대는 일본수비대를 배합하여 안도현 서북차에서 야간 토벌을 진행하던 중 산림 속에서 불빛을 발견하고 체포를 하고 보니 산나물을 뜯는 부근 마을의 백성이었다. 그런데도 염천 대대장과 산천 중대장은 무고한 백성들을 죽여서 불에 태워버렸다. 1939년 7월 1일 특설부대는 천보산 광산이 항일연군의 습격을 받았다는 급보를 받고, 도문 일본군 수비대와 협동 작전을 하여 천보산을 토벌했다. 교전 중 항일연군 전사 한 명이 희생되었는데 특설부대는 특설부대의 충혼비에 제를 지내기 위해 항일연군 전사자의 배를 가르고 간장을 꺼내 빈 통조림통에 넣었다. 그런데 그것을 메고 가던 민부가 허기를 달래려고 통조림인 줄로 알고 훔쳐서 먹다가 생고기인지라 버렸다고 한다. 1941년 겨울 특설부대의 3개 중대는 원부시 대대장의 지휘 아래 안도, 돈화, 화전 등 3개 현에 대한 토벌을 진행, 제2중대와 기포중대의 3명 대원이 변복한 항일군 2명을 체포하였다. 하나는 제1중대의 취사반에서 잡일을 하게 하고, 하나는 기포련에서 말을 먹이게 하였는데, 취사반에 있던 사람이 도망을 한 것을 도목구에서 다시 붙잡아다가 부대를 명월구 공동묘지 앞에 집합 시키고, 총부의 부관 옥량 중위가 군도로 머리를 베고 시체 옆에서 목을 들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1941년 1월 특설부대는 안도현 대전자에서 동쪽으로 약 30리 떨어진 산림에서 항일연군 여전사 4명을 체포, 압송 도중 강간을 시도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하였다. 1942년 8월 특설부대 제1중대는 변의대를 조직하여 차조구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는 중 논밭에서 일하는 농민 두 사람이 양민증이 없다는 구실로 형벌을 감행한 후 체포하였다. 1944년 1월 15일 열하성으로 옮겨갔다. 1944년 가을부터 1945년 1월까지는 열하성 밀원현 석갑진일대에서, 1945년 1월부터 특설부대가 해산되기까지는 하북성 난남현 팔로군에 대한 토벌을 했다. 교전 중 전사한 이들에게는 《16용사 기념비》를 세웠으며, 만주국 국무원에서는 전사자 중 반장 오현상에게는 경훈장, 남일록 등 15명에게는 주국장을 발급하였고, 생존자 중 끝까지 저항했던 현학춘에게는 3급 무공장을 수여하였다. 역대 간도특설대장 초대 染川一男 소교 2대 渡辺捨五郎 소교 3대 園部市二郎 소교 4대 佐々木五郎 소교 5대 柴田清 소교 6대 藤井義正 소교 부대가 1939년 12월부터 1945년에 해산될 때까지 부대가로 불렀던 노래는 간도특설대의 정신을 잘 말해준다. 조선인 군인 150여명의 조선인이 간도특설대의 장교로 복무를 했다. 이중 알려진 인물은 다음과 같다. 봉천군관학교 출신 강재호 김백일 송석하 김석범 신현준 김홍준 백선엽 간도특설대 43년 2월~광복 기타 출신 이용 윤춘근 박창암 마동악 최남근 이들중 백선엽, 신현준, 김석범, 김백일, 송석하, 김홍준 등 6명이 국군 창군 원로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이들은 2009년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각주 참고 자료 신주백, 「滿洲國軍 속의 조선인 군인들」, 2002 류연산의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살림꾼》, 신명식, 역사공간, 2010년 11월 30일, ISBN 10-8990848741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1》,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1997년 8월 31일, ISBN 10-8976962176 1938년 설립 1945년 폐지 친일단체 만주국의 군사 반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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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D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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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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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P, Dap, dap는 다음 뜻을 가지고 있다. 다운링크 비행 파라미터의 약자 DAP 디지털 오디오 플레이어의 약자 DAP 디렉터리 접근 프로토콜의 약자 DAP SpeedBit의 다운로드 가속기 Download Accelerator Plus의 약자 DAP 독일 노동자당의 약자 D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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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C%9C%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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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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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또는 가르침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등을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이다. 교육은 개인이나 집단이 가진 지식, 기술, 기능, 가치관 등을 대상자에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이다. 또는, 교육은 피교육자가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또한 그로 인하여 사회가 유지·발전될 수 있도록 피교육자가 갖고 있는 능력을 끌어내고, 새로운 지식이나 기능을 습득하게 하는 활동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넓은 의미로는, ‘개인의 정신, 성격, 능력의 형성에 영향을 주는 모든 행위와 경험’을 교육으로 보기도 한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지식과 문화를 전수하고 발전시켜 왔다. 교육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사와 같은 가르치는 사람, 학생과 같은 피교육자, 그리고 교과서와 같은 교육할 내용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산업혁명으로 인한 서양문물의 급속한 확산과 세계화, 정보화 기기의 발달로 일어난 이른바 정보화 시대에 이르러 지식의 공유와 확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피교육자와 가르치는 사람의 구분이 점점 희석되고 있으며, 이제는 학교나 학원 등 기존에 교육기관으로 인정되었던 집단이 정보의 핵심을 갖고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습득한 지식이나 문화가 스스로 전달되고 발전되는 이른바 잠재적 교육과정의 부분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상기에 서술된 좁은 의미의 교육인 '새로운 지식이나 기능을 습득하게 하는 활동'이 특별한 교육자 없이도 빈번히 벌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어원 교육이란 말은 본래 맹자의 '得天下英才而敎育之'라는 글에서 유래하였다. 각 한자의 기원을 살펴보면, ‘가르칠 교’ 자는 회초리로 아이를 배우게 한다는 뜻이고, ‘기를 육’ 자는 갓태어난 아이를 기른다는 뜻이다. 영어의 'education', 독일어의 'Erziehung', 프랑스어의 'éducation'은 모두 라틴어 educare 또는 educatio에서 유래하였다. 라틴어 educare는 '양육한다'라는 의미로, 이는 능력을 끌어낸다는 뜻의 educere, 지도한다는 뜻의 ducere와 관련이 있다. 한편, 영어의 'pedagogy'는 그리스어 paidagogos에서 기원한 것으로, '어린아이를 바른곳으로 이끌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pedagogy는 어린이, 학습자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학습자의 내부상태가 교육 작용의 기초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잠재능력이나 소질을 계발시켜 주는 작용을 의미한다. 한국어에서 가르치다의 어원은 고어인 'ㄱㆍㄹㆍ치다'로 원래는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ㄱㆍㄹㆍ', 'ㄱㆍㄷ다', 'ㄱㆍㄹㅎㆍㅣ다' 등의 다의적 의미를 갖게 되었었다. 역사 최초의 교육과 제도는 성년식을 통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착 생활로 인해 성년식 대신 교육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문자의 발명에 따른 복잡한 사회제도의 탄생이 다시 교육의 주된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등장한 고대 그리스의 교육 사상은 유럽의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 고대 그리스의 교육이란 그리스의 폴리스였던 아테네에 의해 발전된 것을 말한다.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도 학교가 있었지만 오늘날 학교의 설립 목적과 큰 차이가 있었으며 따라서 나중에 등장한 그리스 문명의 학교가 현대 교육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후에 마케도니아가 전성기를 맞고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쇠망하면서 고대 그리스 문명은 지중해를 낀 모든 나라들이 공유하는 문명이 되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교육은 국가나 종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닌 범세계적인 것이 되었다. 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랬던 것처럼 로마는 그 속국의 주민들에게 로마의 제도와 문화를 전파하는 정책을 썼다. 이렇게 로마가 속국에 대한 지배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에 교육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5세기 북방의 야만족들에게 로마가 멸망하면서 로마 제국 전역에서 문법과 수사학을 가르쳤던 여러 도시의 공공학교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북방의 야만족이 기독교 영향권에 들어오면서 고대 문명은 어느 정도 보존되었으며 야만족들은 과거의 지식들을 자기들 것으로 만들었고 그들의 능력에 따라 그 지식을 더 발전시키게 되었다. 교회가 교육을 제공하고 지도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으나 세속 학문이 종교적 의무 수행에 필요하다고 보았던 생각에 따라 교회가 세속 학문을 가르치게 되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다다르면서 교육은 두 가지의 경향을 두고 갈등하게 되었다. 중세의 교육을 청산하고 새롭게 등장한 문학과 철학, 과학을 가르칠 건지, 과거로 돌아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학에서 교육 내용을 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르네상스는 이후의 문학, 철학, 과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초기에는 이는 먼 미래의 일이었으므로, 당시에는 기존의 교육을 고수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 방법 중 하나가 고전을 가르치는 것이었고 이는 인문주의가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14세기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간 인문주의는 당시의 문학적 관심에 기반하고 있었다. 북부 유럽에 비해 이탈리아 지방은 르네상스 정신을 받아드리는 데 마찰이 적었는데, 이는 다른 유럽의 경우 교회의 성직자가 교사를 맡고 있는 것과 달리 이탈리아는 일반인들이 교사를 맡고 있어 새로운 정신에 대한 거부감이 덜 했기 때문이다. 17세기 종교개혁에 이은 종교적 갈등은 위그노 전쟁과 독일의 30년 전쟁, 영국의 시민전쟁으로 피폐해진 지역 사회는 교육이나 일상적인 사회 활동을 위한 여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예수회가 계속 확장하면서 부와 세력을 모은 반면, 개신교를 받아들인 교회는 재정적, 행정적인 부족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속적인 성향으로 학교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빈약한 학교 시설과 부족한 교사 대우로 인해 교육의 질이 저하되어 17세기 말에는 북부 유럽과 서부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교육이 침체되었다. 스코틀랜드와 독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민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교사의 교육 수준도 높지 않아 산수는 교육 과정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경향은 18세기에도 이어졌다. 의의 에른스트 크리크나 피터 페테르센은 넓은 의미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교육 작용은 의식적·계획적·계속적으로 해야 되는 것으로 한정되지도 않으며, 또한 연령이 높은 자가 낮은 자에 대하여 행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사회가 스스로를 유지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자연적,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으로 사회적 기능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사회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어른만이 어린이나 미성년자를 교육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나 미성년자도 어른이나 성인을 교육할 수 있다. 영향 교육을 실시함으로 인해 교육을 받은 개인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교육 효과라고 한다. 교육이 미치는 효과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좁은 의미로는 일반적으로 학교 교육을 중심으로 학력의 향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학교 교육과 관련하여 학력을 시험으로 측정하며 특히 순위로 학업성취도를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에 대해서 오랜 세월동안 강한 비판이 계속되어 왔지만, 수험 현장에서는 지표로서 필수적인 상황이 된 것 또한 현실이다. 그 외, 정치면에서는, 각국에 있어 교육 연수가 긴 만큼 대개 개인주의적, 혁신적 가치관을 가지는 사람이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며, 학력이 높을수록 투표율이 높아지는 반면, 정치에 대한 만족도는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교육 효과에 관한 논의는, 교육 내용이나 교육 방법 등을 개선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지만, 교육의 본래 목적은 간과되고 측정 가능한 효과만으로 이해하기 쉬우므로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사회적 기능 교육이 사회에 대해서 어떤 영향을 주는지, 또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사회적 기능이라 할 수 있다. 교육의 사회적 기능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알아 본다. 그 외 사회적 측면에 있어서는, 교육의 보급이 성평등 또는 사회계급의 평등에 기여한다는 견해나, 교육 수준의 상승이 유아 사망률을 낮추거나 위생 상태를 개선하는 데 기여한다는 견해 등이 있다. 다만, 교육이 가져오는 이러한 긍정적인 기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개발 도상국에서 기초적인 교육의 실시로 기대되는 효과들이 반드시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미셸 푸코는 학교를 군대, 병원, 감옥 등과 같이 근대 특유의 권력 장치라고 보았고, 루이 알튀세르는 학교 교육이 근대사회에 지배적인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보았다. 피에르 부르디외, 바실 번스타인, 새뮤얼 보울스, 허버트 진티스 등은 교육이 문화적, 계급적, 사회적인 불평등이나 격차를 재생산 또는 고정화하는 기능을 한다고 하였다. 여성주의적 입장에서는 교육이 가부장제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보며, 다문화주의적 입장에서는 교육이 사회 다수파의 문화로써 억압하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논의들은 오늘날에도 격차 사회와 관련하여 논의되고 있는 것들이다. 교육의 기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그러한 시각들이 특정한 교육 내용과 교육 방법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교육 내용이나 방법을 개선하는 것으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다. 종류 공교육과 사교육 유아 교육 유아 교육이란 유아의 정신적 신체적 성장과 발달을 도움으로써 유아의 잠재력을 신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다. 유치원의 등장 역사는 200여 년에 지나지 않지만 유아 교육에 대한 관심은 그리스, 로마, 팔레스타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유아 교육의 중요성을 언급하였으며 중세의 루소는 학습 지식을 암기시키는 것보다 학습 방법을 학습시키는 것을 강조했다. 페스탈로치에 접어들어 부유층 자제뿐만 아니라 일반 어린이들에게도 유아 교육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생겨났고 페스탈로치의 학교를 직접 관찰하고 평가한 프리드리히 프뢰벨은 18세기 교육 사상을 유아 교육으로 발전시켰다. 유아는 자신이 경험하는 물리적, 사회적, 개인적 세계를 조화시킴으로써 학습한다. 유아 교육의 발달적 측면에서 프로이트와 에릭 에릭슨은 성격 형성의 기초가 유아기에 형성되며 이 유아기 때 흔들린 성격 형성의 기초는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교육적 측면에서 유아기는 환경에 가장 민감하고 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시기이므로 교육받아야 할 시기를 지켜야 한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기혼 여성의 사회활동 증가, 가정의 교육적 기능 약화, 현대 사회의 도덕성과 가치관 정립이라는 면에서 유아교육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초등 교육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사원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구매하면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면죄부를 발행하여 신도들에게 판매하였다. 이에 문제의식을 느낀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반박분을 발표하여 면죄부의 불합리성을 비판하고 신자는 오직 성서와 신앙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의 구원이 가능하다며 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비판하였다. 이를 위해 신도들은 성서를 읽어야 했으나 기존의 성서는 모두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루터는 대중을 위하여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이에 모든 사람들이 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껴 초등교육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를 위시한 세계화가 진행된 이후 사회적, 정치적 불안정성을 유발하는 빈곤, 불평등, 소외가 확장되기 시작했고 교육이 이에 대한 대책으로 거론됐다. 1990년 있었던 태국 세계 교육 컨퍼런스가 이와 같은 국제적인 문제를 지적한 이래로 EFA와 같은 국제적 운동은 초등 교육의 세계적 적용에 있어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중등 교육 13~19세 사이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으로, 2차교육이라고도 한다. 나라에 따라 중학교 한 기관에서 5년 ~ 6년을 가르치기도 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를 분리하여 운영하기도 한다. 중학교가 의무교육에 포함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중학교 과정을 거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검정고시와 같은 학력 인정 시험을 두기도 한다. 일부 중고등학교에는 기숙사가 있다. 고등 교육 중세에 등장한 고등 교육은 신학, 의학, 법학을 중심으로 가르치며 정치 엘리트 형성과 전통 문화 전승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산업혁명 이후 근대에 들어선 고등 교육에게는 교육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만들어내는 연구의 기능이 요구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는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에 바탕을 둔 실용주의적 이념의 영향을 받아 사회 전체에 대해 봉사해야 한다는 대학의 기능이 요구되었다.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1980년대 들어서는 고등 교육의 경제성, 효과성, 효율성과 같은 교육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평생교육 평생 교육이란 "개인의 출생에서부터 죽을 때까지 전 생애에 걸친 교육과 학교 및 사회 전체 교육의 통합"이라고 말함으로써 교육의 통합성과 종합적 교육 체계를 강조하는 것을 말한다. 평생 교육이란 말 그대로 평생에 걸쳐서 행하여지는 교육을 의미하는 것으로, 연령과 사회의 한계를 벗어난 일생에 걸친 교육을 의미한다. 이것은 '평생 학습의 실현'이라는 의미에서 기존에 있었던 '학교 중심의 교육'이라는 교육의 관념적 한계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생각의 일환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생 교육은 자신의 자아 실현과 만족을 위한 자기 주도적 학습인 '평생 학습'과 유사한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본다면 이런 평생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학습의 과정과 환경 등을 체계적으로 수립한 일반 교육 과정 및 체계를 이르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 교육의 목적은 삶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평생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이는 기존에 있었던 교육에 대한 담론을 더 광의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교육 제도 중세 서구의 경우 교회가 교육의 책임을 맡았다. 따라서 국가가 교육에 개입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 1763년 의무교육 제도를 공포하면서 가장 일찍 의무교육을 도입했고 다른 국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 중 스웨덴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세 말부터 교육 제도가 발전하기 시작해 종교 개혁에 접어들어 크게 발달했다. 영국의 경우에는 근대 국가가 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교회와 국가가 교육권을 두고 싸워왔다. 19세기에 처음으로 헨리 8세가 성공회를 등장시키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육권을 빼앗았으나 성공회의 지도로서 교육 내용에 간섭했을 뿐 교육 재정을 감독하는 등 근대적인 교육권을 행사했다고 볼 순 없었다. 미국의 경우에도 1820년대까지만 해도 교회가 상당한 교육권을 갖고 있었으나 이후 보통선거권 운동이 성공하면서 교회의 학교 운영권이 크게 위축되고 공교육이 발달하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지적, 사회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 중 교육이 근대화를 수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1872년 근대적 학교 제도가 확립되었고 1907년 6년제 소학교가 확립되었다. 중국의 경우 초기에는 양무파, 다음에는 변법유신파가 주도하던 교육 근대화 운동이 의화단 사건을 거치면서 10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과거가 사라지고 프랑스의 학제와 유사한 일본의 학제를 모방하여 서구형 학제를 도입했다. 교육과 법 교육에 관한 법률을 교육법이라고 한다. 교육법에 조례 등을 포함하는 이르는 경우에는 교육법령이라고 한다. 교육법 체계에는 각 나라별로 큰 차이가 있으며, 교육법령에 의해 교육에 관련된 권리와 의무가 구체화된다. 교육과정 은 교육 과정을 뜻하는 커리큘럼은 라틴어의 경주로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즉, 거쳐야 하는 과정을 뜻하는 것이다. 초기의 교육 과정은 거쳐야 하는 정해진 교과목의 모음을 뜻했다. 하지만 존 듀이는 이러한 견해를 반박하며 학습 경험을 교육 과정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1950년대 들어서면서 교육 과정과 수업을 각각 목표와 수단으로 보고 이를 이원화하는 동시에 교육과정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닌 문서를 통해 기록, 제시되는 계획이라는 견해가 들어서게 되었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에서는 교육의 책무성이라고 불리었던 교육에 대한 일종의 자기 비판적 운동이 일어났다. 즉, 교육 과정을 교육자나 학습자가 외부의 사물이나 사건을 경험하는 일련의 체험과 반성의 과정으로 보게 된 것이다. 교육 평가 교육 평가는 교육의 목적이 적절한지, 학습 경험이 타당한지, 평가 방법은 양호한지에 관해 반성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다. 톰 R. 타일러는 교육 평가를 교육 과정 및 수업 프로그램에 의해 교육 목표가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를 평가하는 과정이라 정의했다. 교육 평가는 절대기준 평가와 상대비교 평가로 나뉘는데, 절대기준 평가는 미리 정해 놓은 기준에 도달했는지를 알아보는 평가이며 상대비교 평가는 집단 내의 상대적인 위치, 집단의 평균점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방법이다. 상대비교 평가는 심리 측정의 영향을 받았는데 심리 측정은 직접 측정이 불가능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측정하기 위해 개인 간 변별을 극대화하는 문항을 작성한 뒤 그것을 하나의 검사로 제작하여 인간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려는 접근 방법을 가진다. 지능 검사, 학력 검사 등이 이러한 접근 방법을 가진 상대비교 평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비교 평가는 집단 안에서의 평균점 만이 가치 평가의 기준이 되므로 수업의 목표가 제대로 달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학생들을 인위적으로 서열화하고 구분함으로써 학업 성취라는 의미가 퇴색될 소지가 크다. 이에 반해 절대기준 평가는 미리 정해진 수행 기준에 따라 학생의 학업 성취를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자료 수집과 분석이 잘 이뤄진다면 학습이 개선될 여지가 많고 효과적인 교육이 이러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수행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이 있다. 교육과 시민단체 현대에 들어와 교육이 더 이상 학교에 한정될 수 없는 상황이 됨에 따라 각종 시민단체가 제도권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확산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는 멋쟁이사자처럼과 같이 보다 시대에 맞는 교육 소재를 제공하고자 하는 접근과 디자인 싱킹과 같이 새로운 교육법을 적용하고자 하는 접근, MOOC와 같이 교육기회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접근과 프로젝트 위기와 같이 개개인의 교육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접근 등이 있다. 파생 학문 교육학 교육철학 교육 과학이 사실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면 교육 철학의 탐구 대상은 교육의 의미이다. 교육 철학은 교육의 하위 영역 중 하나로 철학적 개념과 방법론으로 교육의 의미와 행위를 탐구하는 분야이다. 1870년대 프래그머티즘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관념론과 실재론이 전통적으로 교육을 탐구하는 방향이었다. 대표적인 관념론자인 플라톤은 교육이란 현실적인 감각 세계의 허상만을 지각할 수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초현실적인 이성 세계의 표상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실재론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을 인간의 타고난 본성. 사회적 습관 그리고 정신적 통찰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여 공동체 안에서 개성 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이끄는데 있다고 보았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등장한 프래그머티즘은 철학 내용으로서의 주제보다는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에 초점을 두게 되는데 대표적인 학자로 존 듀이와 같은 학자가 있다. 20세기 들어서 다양한 교육 사상과 교육 철학이 등장했는데 이는 교육 사상의 다원주의라고 불렸다. 20세기 전반에는 진보주의, 본질주의, 항존주의, 재건주의 등이 있었고 후반에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을 통해 등장한 실존주의, 분석철학, 비판 이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으로 교육 철학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교육경제학 찰스 S. 벤슨은 교육경제학이란 교육과 관련된 현상 또는 교육활동에 대해 경제적인 분석을 하는 학문이라 정의했다. 그는 교육경제학의 분석대상은 교육문제이며 교육경제학을 교육문제에 대해 경제학적 접근방법을 적용하여 연구하는 학문으로 보았다. 1950년대 게리 베커가 노동경제학, 범죄경제학 등과 함께 처음으로 교육경제학을 제창한 이후 인간자본론, 교육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연구가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역사가 짧은 만큼 분명한 학문 영역이 정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다. 교육심리학 교육심리학은 교육적인 조직과 교육의 과정 속에서 학습자의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교육심리학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페스탈로치, 프뢰벨,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가 교육에 심리적인 접근을 시작한 때부터 과학적인 교육심리학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20세기 이전은 교육심리학의 태동기로써 이 시기 교육심리학의 주축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존 로크의 경험주의적 견해였다. 데카르트의 경우 지식이 경험에 의해서가 아닌 태어날 때부터 지니게 되는 이성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 주장했고 로크의 경우 모든 학습이 경험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후 페스탈로치는 루소와 함께 자연주의에 기반한 유아 교육을 주장하면서 직관에 의한 감각교육을 강조했다. 헤르바르트의 경우 교육의 목적을 윤리학에서, 교육의 방법을 심리학에서 구하려고 했다. 또한 《일반교육학》을 저술하여 교육학을 체계화하려고 하였다. 1880년에는 헤르바르트의 이론을 계승한 제자 스트럼펠에 의해 《심리학과 교육학》이 출간되었다. 빌헬름 분트가 라이프치히에 심리실험실을 개설함으로써 심리학을 철학으로 분리시킨 가운데 빌헬름 분트의 제자 에른스트 모이만이 아동의 심리적 심성을 구체화함으로써 교육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고 교육학과 심리학의 결합을 추구한 실험교육학입문을 저술하기도 했다. 20세기 들어 이반 파블로프와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와 같은 학자들은 행동주의를 바탕으로 한 학습이론에 영향을 주었다. 에드워드 손다이크의 경우 교육심리학이라는 3권의 책을 통해 이전까지의 교육심리학에 대한 연구를 체계화시켰다. 때문에 에드워드 손다이크를 교육심리학의 창시자로 보기도 한다. 20세기 후반에는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에 대한 자극으로 장 피아제, 레프 비코츠키, 제롬 브루너를 중심으로 한 수업 설계와 새로운 교육과정 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반면 행동주의에 대한 반발로 에이브러햄 매슬로, 칼 로저스, 코움즈 등의 인본주의 교육 사조가 등장하기도 했다. 비교교육학 비교교육학은 비교적 방법을 통해서 2개 이상의 국가 또는 2개 이상의 지역에서 실시되고 있는 교육제도 및 교육적 활동을 비교분석함으로써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한 뒤 이를 과학적으로 해석하여 교육의 본질을 해명하려는 활동이라 정의된다. 이는 대체적으로 중립적인 성격이 강하며 몰가치적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비교교육학의 경우 막스 베버를 위시한 ‘가치판단으로부터의 자유’를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비판하기도 한다. 20세기 비교교육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됨에 따라 교육제도의 발달을 위해 다른 나라의 교육 제도를 분석한다는 과제는 여전히 유지되었으나 I. 캔델, 한스 N. 바일러, F. 슈나이더와 같은 학자들은 비교교육학을 하나의 학문 분야로 발전시키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았고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브라이언 홈즈나 존 듀이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비교교육학에 사회과학적 접근을 시도하며 비교교육학을 교육과학으로 조직하는 것이 주 관심사가 되었다. 특히 존 듀이는 비교교육학에 사회과학의 실험적 연구 방법을 도입하였다.20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며 과학적 연구방법으로 비교교육학을 연구하는 경험주의적 연구방법이 비판받고 그 사회의 정치경제와 같은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연구하는 것이 교육의 본질과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연구 방향이 제시되기 시작했다. 1982년 알트비하, 케리, R. F. 어노브가 저술한 비교 교육학에서 국가 단위가 아닌 제 1세계와 제 3세계의 차이같은 세계체제의 시각에서 교육 문제를 비교교육학적으로 연구해야 함이 주장되었다. 같이 보기 교육 과정 인재 개발 학습 언어 교육 성인 교육 전자 학습 학교 교사 교수법 보육 각주 참고 자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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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1%B4%EC%96%91%EB%8C%80%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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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양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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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양대학교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시와 대전광역시 서구에 소재한 대한민국의 사립 대학이다. 1991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사립대학이다. 건양대학교는 1991년 개교한 후 "참된 인성을 갖춘 창의적 인재양성"을 건학이념으로 삼고, "가르쳤으면 끝까지 책임진다."는 설립자 김희수 박사의 정신을 바탕으로 교육을 실시한다. 연혁 1988년 12월 19일, 학교법인 건양학원은 대학 설립을 준비하고, 1990년 11월 28일, 건양대학을 설립한다. 이듬해 3월 2일 개교하였고, 1992년 4월 1일, 건양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한다. 1999년 10월, 건양대학교병원을 설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8년, 교육부 등의 대학기본역량진단 결과 역량강화대학으로 선정된 바가 있다. 교육편제 다음은 2022년 기준 건양대학교의 학부 과정 일람이다. 창의융합캠퍼스 창의융합캠퍼스는 기존 건양대학교의 본교 캠퍼스 부지로, 인문학, 사회과학, 기계학 등 다양한 전공이 편제되어 있다. 창의융합대학, 재활복지교육대학, 글로벌경영대학, 군사경찰대학 등 4개 단과대학 아래 4학부, 20학과, 6전공을 설치하고 있다. 메디컬캠퍼스 메디컬캠퍼스는 건양대학교의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등 의학 및 유관 학문 교육을 위한 캠퍼스이다. 의과대학, 간호대학, 의과학대학, 의료공과대학 등 4개 단과대학 아래 16학과를 설치하고 있다. 대학원 건양대학교의 대학원 과정은 6개 대학원이 설치되어 있으며, 일반 1개원, 특수 5개원으로 구성한다. 일반대학원의 경우, 석사 10과정, 박사 14과정을 제공하고 있다. 특수대학원으로 경영사회복지대학원, 보건복지대학원, 군사경찰행정대학원, 상담대학원, 바이오융합대학원이 설치되어 있다. 캠퍼스 풍경 건양대학교는 충청남도 논산시와 대전광역시에 캠퍼스를 둔 사립 일반대학이다. 창의융합캠퍼스의 경우 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교통 등 접근성이 좋은 편이고, 메디컬캠퍼스는 외곽에 도심 외곽에 위치하고, 대학 병원 등으로 인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창의융합캠퍼스의 경우 충청남도 논산시 내동에 위치해있으며, 약 20만m2의 교지가 있다. 메디컬캠퍼스의 경우, 대전광역시 서구 관저동에 위치하며, 창의융합캠퍼스보다 다소 작은 17만m2의 교지가 있다. 대학병원 및 기타 대학 시설 건양대학교는 의과대학을 설립하며 수련병원으로 건양대학교병원을 대전메디컬캠퍼스에 설치했다. 2000년 개원하여, 충남대학교병원과 같이 대전권역응급의료센터로 지정되어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충청남도 계룡시, 공주시 외 4개군과 전라북도 일부의 권역 응급의료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저명한 동문 같이 보기 건양대학교 병설 건양고등학교 건양대학교 병설 건양중학교 건양대학교병원 각주 외부 링크 1990년 설립 충청남도의 대학교 대전광역시의 대학교 논산시의 학교 대전 서구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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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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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932%EB%85%84%20%EB%8F%99%EA%B3%84%20%EC%98%AC%EB%A6%BC%ED%94%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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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동계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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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동계 올림픽은 1932년 2월 4일부터 15일까지 미국 뉴욕주 레이크플래시드에서 개최된 제3회 동계 올림픽이다. 참가국 1932년 동계 올림픽에는 다음과 같은 국가가 참가하였다. 지난 대회에서 25개국이었던 참가국이 17개로 줄었다. 아르헨티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멕시코, 리투아니아, 네덜란드, 유고슬라비아는 선수단을 내보내지 않았다. 종목 노르딕복합 봅슬레이 스키점프 스피드스케이팅 아이스하키 크로스컨트리 피겨스케이팅 시범 종목 개썰매 컬링 메달 집계 |-style="background:#ccccff" | 1 ||align=left| || 6 || 4 || 2 || 12 |- | 2 ||align=left| || 3 || 4 || 3 || 10 |- | 3 ||align=left| || 1 || 1 || 5 || 7 |- | 4 ||align=left| || 1 || 2 || 0 || 3 |- | 5 ||align=left| || 1 || 1 || 1 || 3 |- | 6 ||align=left| || 1 || 1 || 0 || 2 |- | 7 ||align=left| || 1 || 0 || 0 || 1 |- | 8 ||align=left| || 0 || 1 || 0 || 1 |- | 9 ||align=left| || 0 || 0 || 2 || 2 |- | 10 ||align=left| || 0 || 0 || 1 || 1 |} 미국에서 개최된 국제 스포츠 대회 1932년 2월 1932년 종합 스포츠 경기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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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9%84%EB%A5%B4%EC%8A%A4%EB%A6%AC%EA%B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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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스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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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스리가는 라트비아의 최상위 축구 리그이다. 2019년부터 후원사의 명칭을 붙여 공식적으로 옵티뱃 비르스리가로 명명하고 있다. 1992년 구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다음 해부터 리그가 시작되었다. 리그는 매년 4월에 시작하여 11월 초에 끝이 난다. 여타의 다른 유럽 리그와는 달리 러시아처럼 추운 날씨 때문에 1년을 주기로 겨울엔 경기가 없도록 리그를 진행하고 있다. 2007 시즌까지는 여덟 팀으로 리그를 진행해왔다. 홈에서 두 경기, 원정에서 두 경기씩 치러 총 28라운드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2008 시즌부터는 1부 리그의 우승 팀과 준우승 팀을 승격시켜 열 개 팀으로 확장하여 리그를 진행하고 있다. 2008 시즌은 두 개의 라운드로 진행되었는데, 첫 번째 라운드에서는 각 팀별로 두 번씩 경기를 하여 팀마다 18경기씩을 치르는 리그 방식이다. 두 번째 라운드는 두 개의 "미니리그"로서 상위 여섯 팀끼리 두 경기씩 경기를 하고, 하위 네 팀끼리 두 경기씩 치르게 한다. 이렇게 하여 상위 여섯 팀은 리그 우승 팀을 가리게 되고, 최하위팀은 1부리그로 강등되고, 9위팀은 1부리그 2위팀과 플레이오프를 펼쳐 강등 여부를 결정하게 하는 방식이다. 구단 각주 내용주 참조주 1927년 설립된 스포츠 리그 라트비아의 축구 리그 유럽의 축구 1부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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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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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C%A0%9C%EB%A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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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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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류는 발굽이 있는 포유류 동물을 말한다. 유제류가 실제 진화상으로 같은 군에 속하는지, 아니면 표현형만이 같은지는 이견이 있다. 유제류는 다음 분류를 포함한다: 고래목 - 고래, 돌고래 등 말목 - 말 등 바다소목 바위너구리목 우제목/경우제목 - 소, 양, 염소 등 장비목 - 코끼리 관치목 도약땃쥐목 계통 분류 각주 칼 폰 린네가 명명한 분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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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85%ED%9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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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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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하는 24절기중 하나로, 양력 5월의 절기이다. 태양 황경이 45도가 되는 때이며, 여름이 시작되는 날이다. 양력으로는 5월 5일경에 든다. 생태 쥐참외가 나온다. 풍속 곡우에 마련한 못자리도 자리가 잡혀 농사일이 바빠지고, 여러 가지 해충이나 잡초를 제거하기에 여념이 없을 때이다. 기타 지구에서 봤을 때, 태양의 궤적은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태양이 춘분점이나 추분점에 있을 때 적도에 있으며, 하지점에 있을 때 북회귀선 에 도달하며, 동지점에 있을 때 남회귀선에 도달한다. 태양이 북위 약 11.7°, 즉 적도와 북회귀선의 가운데에 있을 때는 입하, 입추가 아니라, 곡우, 처서이다. 천문학적으로는 춘분, 하지, 추분, 동지 등 4개만 큰 의미가 있을 뿐, 나머지 20개는 특별한 명칭과 의미가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천문학에서는 춘분점, 하지점, 추분점, 동지점 등 4개만 있고, 나머지 20개에 대응하는 명칭이나 용어가 없다. 각주 같이 보기 절분 분점 여름 참고 문헌 정인지, 《고려사》 권 제20, 조선초 외부 링크 절기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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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4%91%ED%9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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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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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환~1756년 2월 1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사상가, 철학자이다. 본관은 여주이고, 자는 휘조, 호는 청담·청화산인이다. 음서로 출사하여 통덕랑으로 재직 중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가 되고 그 해 승문원 부정자, 승문원 정자를 역임하였다. 이후 부사정 등을 거쳐 1716년 목호룡 등과 함께 숙빈 최씨의 묘지를 선정하러 전국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1717년 김천도찰방, 1719년 승정원 주서, 1720년 춘추관사관, 성균관 전적, 1722년 병조정랑, 성균관전적, 1723년 병조정랑, 부사과를 역임했다. 그러나 경종 때 목호룡이 노론 4대신이 경종을 폐출하려 한다고 고변한 신임옥사 이후 소론계로부터는 노론에게 협력하였다는 이유로 공격당했고, 영조 즉위 후에는 노론으로부터 신임옥사 당시 그가 목호룡에게 말을 빌려 준 것을 문제삼아 공격당했다. 목호룡 고변 관련자들을 국문할 때 함께 체포되어 구금, 국문당한 뒤 파면되었다. 이후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전국을 다니면서 지리·사회·경제를 오래 연구하여 《택리지》를 저술하였다. 1753년 통정대부에 임명되었으나 요직에 중용되지는 못하였다. 1701년에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이진휴의 아들이다. 성호 이익의 문인이자 그의 재종손이었다. 당색으로는 남인이었다. 생애 생애 초반 이중환은 1690년 12월 25일 충청도 공주 출생으로 정확한 출생지는 전하지 않는데, 백마강 북쪽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이고, 아버지는 충청도관찰사와 참판을 지낸 이진휴이며, 어머니는 오상주의 딸이다. 성호 이익의 재종손으로, 재종조부인 이익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성호 이익의 학풍을 물려받아 인문학 연구에 전념하였는데, 그는 안정복, 신후담의 공서파와 권철신, 권일신 등의 신서파와는 달리 천주교 수용여부보다는 사회와 인문, 지리학에 관심을 두었다. 이후 그는 자연 환경과 인간의 생활 방식 간의 관계를 오래도록 연구하였다. 1704년 강릉부사로 부임한 아버지 이진휴를 따라 강릉에 갔다가 1708년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이 되었으며, 1710년 부친상을 당한 뒤 과거 시험에 전념하였다.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1713년 통덕랑으로 재직 중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가 되고 그 해 승문원 부정자, 승문원 정자를 역임하였다. 그의 과거 급제 동기 중 윤순, 조문명 등은 소론계 인사였다. 그는 친우인 오광운, 이인복과 함께 남인의 강경파인 청남의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부사정 등을 거쳐 1716년에는 목호룡과 같이 숙빈 최씨의 묘지를 구하기 위해서 황해도와 충청도, 경상도 등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1717년 김천의 도찰방을 지냈으며, 신임사화 후 병조좌랑을 지냈다. 1719년에는 승정원 주서를 거쳐 그 1720년 춘추관사관, 성균관 전적 등을 역임하고, 1722년 병조정랑, 성균관전적을 거쳐 1723년 병조정랑, 부사과에 임명되었다. 1722년 노론 대신들이 세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경종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모의했다는 목호룡의 고변이 있었다. 이때 그는 장인인 목일임의 친족인 목호룡에게 말을 빌려주었다가 후에 옥사에 연루된다. 1723년 6월 소론계 오명항은 그가 노론 계열이 주도한 신임옥사에 관련되었다며 노론계 인사들과 엮어서 탄핵당하기도 하였다. 형문과 유배 1723년 병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었다가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 목호룡이 1722년의 신임사화에 관련되었다 하여 영조 즉위 후 1726년 목호룡 일파가 사형되자 그는 목호룡에게 말을 빌려주었다는 이유로 심문당했다. 이후 백망의 사건에 연좌되어 그의 일당과 함께 이듬해 절도로 유배형을 받았다가, 1727년 풀려나왔다. 의금부에 투옥된 이후 1725년 2월부터 4월까지 네 차례나 형을 받았다. 이중환은 이 사건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유배형을 받고 1726년 12월 섬에 유배되었다가, 1727년 10월에 석방되었으나 그 해 12월에 사헌부의 탄핵으로 다시 유배령이 내려졌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정치참여의 자격이 박탈돼 전국을 유랑하며 지내야 했다.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고향 공주로 물러났다. 그는 몰락한 사대부가 되어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전국을 떠돌아 다니는 불우한 신세가 되었다. 전국 답사와 학문 활동 이후 사헌부의 거듭된 탄핵으로 다시 유배령이 내려졌으나 철회되었다. 그 후 30년간을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리·사회·경제 등을 연구하였다. 성호 이익의 제자로서 그 학풍을 계승하여 인문 지리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1751년부터 택리지를 저술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정한 거처도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세상의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살았다 한다. 그는 조선 전역 강토를 두루 답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당시 전국의 인심과 풍속 및 물화의 생산지, 집산지 등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를 간략하게 기록으로 남겼다가 후에 택리지 등을 저술하는데 참고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저술하면서 스승이자 재종조부인 이익에게 자문하였고, 이익은 1751년 완성된 그의 책 택리지의 책의 원고를 읽고 나서 내용을 교열, 수정해주고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였으며,택리지의 서문과 발문을 직접 써주기도 했다. 사대부로서의 신분적 위치와 서민적 현실생활의 괴리에서 무척 고민하였던 실학자였으며 박지원, 박제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1753년 특명으로 은전을 받고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최후 《택리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인문지리서였다. 1756년에 사망하였다. 정확한 사망연대는 전하지 않아 일설에는 1760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묘소는 황해도 금천군 설라산에 안장되었다. 저서 《택리지》 등. 사상과 학문 그는 실용적인 학문과 생산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생산활동에 지리적 환경을 이용할 것과 상업적 농업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장사에 대한 편견, 금전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을 지양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원활한 생산활동을 위해서는 수송 수단의 발달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지리학 택리지의 '복거총론'에서 그는 기본적인 주거조건으로 네 가지를 들고 이를 근거로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그가 지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보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찍이 풍수지리학에도 조예가 깊던 그는 목호룡 등이 숙빈 최씨의 묘자리를 간택할 때 그도 참여하였다.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좋은 길지를 찾으면서 그는 길지를 선정하는 기준으로 교통편이 용이하고, 인심과 산천이 좋은 곳이어야 하며, 경제적 교류가 좋은 곳이었는데 자신의 저서 택리지를 통해 이러한 신념을 남겼다. 그는 지리 생리 인심 산수 가운데 인문적 주거조건에 해당하는 생리와 인심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이중환은 '풍속이 좋지 않으면 자손에게도 해를 미친다'고 하여 풍속이 아름답고 인정이 넘치는 곳을 강조했다.지역 주민들의 수준, 인심 등도 거주지를 마련할 때 반드시 살펴볼 점으로 제시했다. 그는 택리지에서 당쟁의 폐해에 따른 인심 타락상을 경고하는 한편,당쟁의 원인과 경과를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기도 했다. 택리지에서 그는 각 지역의 지형, 사람, 인심, 습속, 경제 등 다양한 방면에 대한 의견을 남겨두었다. 그는 여기서 당시의 정치와 경제 및 문화 등 각 방면에 주목할 만한 많은 견해를 피력해 놓기도 했다. 사대부 특권론 비판 그는 사대부의 특권을 비판하였다. 이중환에 의하면 원래는 사대부란 것이 따로 없고 모두 민으로 되어 있었으며, 다만 성인과 현인들의 말과 뜻을 따르는 자들을 특별히 사대부라 칭했을 뿐이라 한다. 그는 민에는 네 가지가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평등하다고 하는 평등론을 주장하였다. 계급이 발생하게 된 유래는 사회적 환경에 불과하다고 봤다. 사대부란 옛 성인의 법도를 잘 지키고 예를 숭상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하였다. 그는 사대부와 기타 계층을 구분한 사농공상의 등분은 단순히 직업상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직업의 귀천은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특권을 전면 부정하였다. 경제관 경제관은 인간의 생산 활동을 중시하였다. 그는 사대부의 무위도식을 조롱하였는데, 인간은 그들 스스로를 위한 생산활동에 의해 의식을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그는 실용적이지 못한 학문에 집착하는 사대부들을 아무런 이득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존재들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지리적 환경을 가장 잘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지론이었다. 가장 좋은 지리적 환경이란 기름진 땅이 제일이고, 배·수레와 사람 및 물자가 모여들어 필요한 것을 바꿀 수 있는 곳이 다음이라는 것이다. 그는 물자의 유통과 관련된 생리를 주거조건으로 매우 중시하여 배와 수레 사람 물자가 모여들어,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꿀 수 있는 곳이 살기에 적합하다고 하였다.그 예로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위치한 공주 및 안동 지역 일대를 지목하였다.그리고 평양, 충주, 상주, 대구, 진주 등 도회지는 대부분 강을 끼고 있어 하천을 이용한 수운이 편리하고 많은 도로가 결집돼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곳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교통의 용이성, 상업이 발달하고 유통 경제가 활성화되던 당시의 변화되는 상황을 주목하면서 이를 주거조건 선정에 반영하기도 하였다. 그는 특정 부농과 지주들의 재원 독점을 지적하고 이 문제를 조정이 나서서 해결할 것을 역설하였다. 수전의 벼 생산량이나 각 지방의 특수농작물에 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다. 즉, 부농들이 진안의 담배밭, 전주의 생강밭, 임천·한산의 모시밭, 안동·예안의 왕골밭등을 매점해서 금전적, 재정적 폭리를 취하는 자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개혁론 그는 상업을 천시하지만 말고 상업을 이용하는 방안을 비전으로 제시하였다. 상업적 농업도 중시해 상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도시의 발전과 교역의 증대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상업이 천하다고 해도 경제적 이윤이 없다면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조선의 금강, 한강, 예성강, 대동강, 섬진강 등 상선의 운영과 무역선의 유입에 좋은 지리적 조건들을 각지에 갖추고 있으나, 상업을 천시 여겨 이것을 최대한 이용하지 못하고 조선술의 미발달 때문에 운송수단으로는 수레보다도 불리한 말로써 물자와 사람을 운송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운반수단의 개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당색은 다르지만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던 노론 북학파인 박지원, 박제가 등에게도 수용되어 배·수레의 제조, 활용론을 제기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가족 관계 증조부 : 이숭진 조부 : 이영 조모 : 동래정씨, 정만호의 딸 아버지 : 이진휴 어머니 : 함양 오씨 부인 : 사천 목씨 외조부 : 오상주 장인 : 목임일 평가 인문 지리학의 선구자라는 평가가 있다. 30년간 전국을 돌면서 지리와 사회·경제를 연구해 를 지음으로써 인문지리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는 시각도 있다. 30년간 전국을 돌면서 지리와 사회·경제를 연구해 를 지음으로써 인문지리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풍수지리적인 경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는 한계점도 지적된다. 이는 주로 시대적인 한계와 사회적인 한계, 세대의 한계에서 온 것이었고 정치, 사회, 경제적 관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또한 신분제를 전면 철폐하자는 것에는 반대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양반이라는 신분적인 한계도 지적된다. 같이 보기 택리지 풍수지리학 이익 윤선도 김정호 신임사화 관련 서적 박경남, 《이중환, 유토피아를 묻다》 이중환, 《이중환:택리지》 한영우, 《한국사 인물 열전 2》 각주 참고 문헌 이중환의 국토편력과 지리사상 1690년 출생 1756년 사망 음서 과거 급제자 조선의 문신 조선의 정치인 조선의 실학자 조선의 지리학자 조선의 성리학자 조선의 철학자 풍수지리학자 사상가 조선의 작가 여주 이씨 공주시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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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9%84%EC%9A%B4%EB%8F%99%EA%B6%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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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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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동권이란 2000년 이후 진보적, 보수적 학생운동과 무관한 '비정치적'인 대학 분위기를 추구하는 학생들을 지칭한다. ‘운동권’이라고 널리 불리는 한총련 등 계열의 학생운동 진영에 반대해 나타난 것으로, 처음에는 보수적 학생운동 진영을 포괄하는 표현이었으나 현재는 반운동권과는 분리해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비운동권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합의는 없다. 보수적 학생운동 진영을 포괄하기도 하며, 보수적 학생운동을 따로 '반운동권'이라고 부르며, 어떠한 학생운동과도 무관한 세력만이 '비운동권'이라는 정의도 있다. 비운동권 학생들은 학생운동 세력들과는 달리 특별한 기반단체는 없으며, 2002년 현재 전국 주요대학 총학생회의 약 50%가 '비운동권'을 표방하고 있다. 보수적 학생운동이 아닌 '비운동권'의 경우 일부는 학교의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운동권 학생회의 지나친 정치 색깔에 반감으로 등장한 경우도 많다. 같이 읽기 학생운동 운동권 반운동권 논포리 비정치주의 각주 정치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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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D%BC%ED%8F%AC%EB%A8%BC%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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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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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는 공연, 연주, 수행, 성능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퍼포먼스 - 1970년대에 제임스 폭스와 믹 제거가 나온 영화 퍼포먼스 아트: 육체의 행위를 음악·영상·사진 등을 통하여 표현하려는 1970년대에 시작된 예술 양식 과학에서 실험의 실행. 성능의 뜻은 성능을 참조하세요.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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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3%81%EC%9B%90%EC%82%AC%20%28%ED%8F%89%EC%B0%BD%EA%B5%B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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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평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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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는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월정사의 말사이다. 역사 신라 33대 성덕왕 23년에 건립되었다. 신라시대의 유물로는 국보로 지정된 상원사 동종과 대리석 탑이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광복 후에 개축한 것이다. 1951년 1·4 후퇴 때 연합 사령부가 월정사와 함께 상원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승려들의 저항으로 문만 떼어내서 불태웠다는 일화가 있다. 문화재 상원사 동종 국보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구리종으로 725년에 주조되었으며, 높이는 1.7m이다. 천판의 명문에 의하면 휴도리라는 귀부인이 기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무늬대는 모두 당초문과 반원형으로 구획지은 속에 천인상으로서 장식되었고, 종신에는 당초문 띠를 바깥에 두른 연화문 당좌와 두 병좌주악천인상을 두 군데 배치하고 있다. 전체의 모습이나 무늬의 수법, 특히 바람에 날리는 천의자락의 선 등이 봉덕사종에 비해 부드럽고 단아하며, 여러 점에서 현존하는 신라종의 백미라고 하겠다.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국보 제2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세조 12년에 조성되었다. 조각수법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불상에서 조선시대로 넘어가는 불상 조성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수인은 미타수인 등에서 볼 수 있는 구품인을 나타내고 있으며 결가부좌 대신 반가부좌를 하고 있다. 복장유물은 월정사에 있다. 상원사 중창권선문 국보 제292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어 있다. 1괄 51점이 있다. 1984년 7월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에서 발견된 유물로 석탑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듯이 불상에도 사리를 장치하고 복장을 만들어 넣은 매우 보기 드문 예이다. 평창 상원사 영산전 석가삼존ㆍ십육나한상 및 권속 강원특별자치도의 유형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되어 있다. 1711년 작품이다. 참고 자료와 각주 같이 보기 월정사 강원특별자치도의 절 평창군의 건축물 대한불교조계종의 절 오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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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A9%EA%B8%88%EC%8B%A0%EB%B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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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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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신부》는 2007년 6월 23일부터 2008년 2월 3일까지 방영된 SBS 주말극장이다. 기획 의도 베트남에서 시집 온 누엔진주와 그녀의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등장 인물 주요 인물 이영아 : 누엔진주 역 베트남 국적의 신라이따이한. 베트남 결혼정보회사 글로벌 웨딩의 통역사. 영롱하고 순수하며 단단한 아가씨.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의 눈이 멀기 전에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친아버지를 보게 해 주겠다는 소원 하나만으로 한국행을 결심하고 준우와 결혼한다. 자신을 거부하던 준우를 지극정성으로 치료해 당당한 사회인으로 만들어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자신을 부정했던 친아버지 성일을 용서하고, '예원'에서 갈고 닦은 노력으로 '전통 떡' 사업을 일궈낸다. 송창의 : 강준우 역 영세 식품업체인 소망식품의 외아들. 명석하고 이지적인 두뇌와 누구보다 따뜻한 감성이 함께 숨쉬는 일등 신랑감. 서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군복무를 하던 중, 애인이었던 지영의 배신으로 충격을 받고 공황장애를 앓게 된다.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폐인이 되지만, 진주와 결혼하여 병을 극복하고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깨달아 나간다. 송종호 : 김영민 역 성일과 옥경의 맏아들. 집안을 책임지고 가업을 계승할 든든한 맏아들 노릇을 해 왔다. 시카고의 대학에서 MBA를 하던 중 역시 유학 중인 지영에게 반해 적극적인 프로포즈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한치의 실수도 용납치 않은 완벽주의자. 결벽증 증세까지 있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리는 지영의 과거에 실망하고 이혼을 선택한다. 최여진 : 옥지영 역 준우의 전약혼녀이자 영민의 아내. 대기업체 회장의 운전기사로 근무한 아버지 밑에서 외동딸로 귀하게 자라 상류사회에 대한 동경이 크다. 준우를 사랑했지만 준우가 군복무 중인 공백기에 조건이 좋은 영민이 나타나자 흔들리고, 준우를 처참하게 버린다. 준우와의 과거가 파탄나면서 위기를 맞게 되고, 상류사회 품위 유지를 위해 다니던 '예원'에서 준우의 부인 진주와 대립한다. 준우네 김미숙 : 정한숙 역 준우의 어머니. 성일의 옛 애인이다. 평생 작업복을 벗지 못하는 부끄러운 남편 대신 자식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 허영과 오만까지 가지지만 자식들은 모두들 기대에 저버린다. 준우의 병으로 인해 진주를 어쩔 수 없이 며느리로 맞지만 진주의 진심 어린 태도에 감복, 진주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강신일 : 강우남 역 준우의 아버지. 영세 식품업체인 소망식품의 사장. 촌스럽고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고 가족을 위한다.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지만 진주만이 시부를 위로하고 한 편이 되어 합심으로 '전통 떡'을 부활시키려 한다. 홍은희 : 강원미 역 준우의 누나이자 푼수끼 넘치는 노처녀. 엄마의 등살로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졸업 후 오케스트라에 뽑힐 실력도 못되어 동네 어린 아이들의 레슨 선생으로 간간히 용돈이나 벌면서 살아간다. 양쪽 집안의 반대에도 연하남 고시생 동구와 거짓 임신을 빌미로 결혼한다. 안미나 : 강세미 역 준우의 여동생이자 모델학과 재학생. 환상적인 미모와 S라인의 소유자이자 귀여운 바람둥이. 나이트클럽의 인기녀. 막상막하 유흥계의 지존이자 작업의 고수인 영수와 사랑에 빠져, 원수 사이인 어머니들의 반대에도 동거 생활에 돌입한다. 진주와 성일의 관계를 알게 되자 영수와 헤어지지만, 외국에 간 영수를 잊지 못하고 4년 후에 재회한다. 박미선 : 강군자 역 우남의 늦둥이 동생. 뭐 하나 신통하게 풀리지 않는 애물단지. 남자에 대한 상처로 남성불신에 퉁명스럽고 가진 건 힘뿐이다. 오빠 회사에서 경리를로 첫 출근을 하지만 경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라이벌 벽수와 사사건건 부딪힌다. 미운 정이 들어 결국 벽수와 결혼한다. 영민네 임채무 : 김성일 역 국내 굴지의 식품회사 '웰빙후드' 대표. 영민, 영수의 아버지. 한숙과 연인 사이로 발전하나 두 사람의 편지 배달을 하던 옥경의 적극적인 대시에 옥경과 결혼한다. 겉으로는 멋지고 낭만적인 모범가장이자 재력가지만, 알고 보면 애정 전과자이자 바람둥이이다. 베트남에서 리엔 팜과의 짧은 사랑 끝에 낳은 친딸 진주를 부정하며 매정하게 외면하지만, 가정이 풍비박산 나자 후에 참회한다. 견미리 : 양옥경 역 성일의 아내이자 영민, 영수의 어머니. 한숙의 고교후배이자 교회동생으로 친언니처럼 한숙을 따랐지만, 한숙의 애인이었던 성일을 짝사랑하여 가로채고 만다. 동창회 때마다 한숙의 기를 죽이며 남편의 애정공세를 자랑하고, 아들대에 얽힌 구원으로 웬수 사이가 깊어진다. 지영이 준우와 과거 애인이었던 사실과 성일이 진주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김희철 : 김영수 역 영민의 동생. 강남의 전설적인 작업남. 깜찍한 된장녀 세미에게 필이 꽂혀 양쪽 집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동거에 돌입한다. 빈털터리로 내팽겨진 잔혹한 현실 앞에 점차 철이 들어간다. 아버지의 과거에 충격을 받고 옥경과 외국으로 떠난다. 4년 후, 자신을 기다려준 세미와 감동적인 재회를 한다. 그 외 인물 정혜선 : 허복례 역 성일의 이모이자 고급 요리 강습소 '예원'의 주인. 상류층 며느리를 대상으로 돈을 벌지만 마음속으로는 돈지랄이라며 비웃는 괴팍한 노인네. 자신의 문하생이자 라이벌로 맞붙은 지영과 진주의 요리 대결을 보며 장인으로서의 흐뭇함을 맛본다. 김경식 : 허동구 역 세미의 복학생 선배이자 무늬만 고시 준비생. 세미를 쫓아다니며 물량 공세를 퍼붓는다. 이를 막기 위해 팔 걷고 나선 세미의 언니이자 연상의 여인인 원미와 사랑에 빠지고, 한숙과 만덕의 필사적인 반대에도 원미와 결혼에 골인한다. 고시에 합격하여 4년 후 어엿한 검사가 된다. 권해효 : 차벽수 역 수줍음과 섬세함을 겸비한 소녀 같은 남자. 빨래, 요리, 뜨개질, 십자수 놓기가 취미이자 특기인 섬세한 남자. 육남매의 맏이로 우남 밑에서 일을 배우며 동생들을 뒷바라지 한다. 라이벌 군자와 밥그릇을 놓고 대결을 하게 되고 결국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뉴꾸인 : 리엔 팜 역 진주의 생모. 성일과의 짧은 사랑 끝에 진주를 낳고, 과거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평생을 미혼모로 진주를 키운다. 평생 소원은 남편을 살아생전 다시 만나는 것. 망막세포변성증으로 시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자 진주가 엄마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한국행을 결심, 아빠를 수소문한다. 마지막회에 인공 망막 수술을 받게 된다. 김지영 : 맹만덕 역 허동구의 어머니. 강원도 산골에서 아들 하나 잘 키운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사는 할머니. 한숙과 마찬가지로 아들 동구와 원미의 결혼을 극구반대한다. 원미에게 호된 시집살이를 시키려 하나 늘 허탕을 치고 역으로 본인이 당한다. 김웅 : 연기 역 미스테리 인물. 복려의 곁에서 비서 같이 지키며 동반자로 동거동락한다. 각 분야에 뛰어난 지식을 겸비한 이지적인 인물로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있다. 말을 하지 못해, 필담과 수화로 한다. 후에 진주에게 심적으로 도움을 준다. 공현주 : 차인경 역 준우의 대학 후배로 지영과도 친분이 있다. 대학 시절 준우를 짝사랑하며 멀리서 지켜만 보았다. 준우가 자신이 일하는 회사에 들어오자 아내 진주를 무시하고 준우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여 진주를 괴롭게 하는 인물. 진주에 대한 준우의 사랑이 깊다는 것을 깨닫고 40회에 뉴욕 본사로 근무하러 가는 설정으로 하차한다. 김청 : 지영 모 역 지영의 어머니로 파탄적인 모성을 보여주는 인물. 남자에게 속아 전 재산을 사기당한 세상물정 모르는 여자로 알코올 중독 증세까지 있다. 사기죄로 형무소에서 복역을 하고 나와 지영의 시댁 식구들에게 접근하여 지영의 결혼 생활을 뒤흔들어 놓는다. 옥경에게 지영의 이혼을 설득하겠다는 핑계로 돈을 챙긴 후 50회에 미국으로 출국하며 하차한다. 후에 외국인과 재혼한다. 차재돌 : 강우주 역 진주와 준우의 아들. 준우의 '우'와 진주의 '주'를 따서 지은 이름. 4년이 흐른 마지막회에서 등장한다. 손범규 : 방송진행자 역 서주성 : 채문석 역 김희라 시청률 AGB닐슨 미디어리서치에 따르면, 1회 시청률 11.8%로 출발한 황금신부는 방송 4회만에 21.6%를 기록하며 20%를 돌파했다. 30.2%의 시청률로 종영하였으며 평균 시청률은 22.1%, 최고 시청률은 31.1%이다. 결방과 연장 2007년 8월 18일 : 8시 45분부터 FIFA U-17 월드컵 중계 편성으로 결방 2007년 9월 9일 : 6시 50분부터 FIFA U-17 월드컵 결승전 중계 편성으로 결방 2007년 12월 27일 : 황금신부 방영 분량이 50부작에서 14회 연장되어 64부작으로 변경, 확정되었다. 수상 2007년 SBS 연기대상 연속극 부문 남자 연기상 임채무 2007년 SBS 연기대상 연속극 부문 여자 연기상 견미리 2007년 SBS 연기대상 특별상 뉴꾸인 2007년 SBS 연기대상 10대 스타상 이영아, 송창의 2007년 SBS 연기대상 뉴스타상 송종호, 최여진 2008년 제3회 서울 드라마 어워즈 우수작품상 - 장편 작품상 참고 사항 단순한 선악구도와 지나친 우연의 남발 등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눈물 설정과 감초 인물들의 코믹한 활약을 균형 있게 끌고 가는 저력을 보여줬고,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주제를 시종일관 부각시키며 안방 팬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김청의 2년 만의 안방극장 복귀작이다. 김경식은 95년 개그드라마 이후 해당 작품을 통해 SBS 정극 고정 출연을 했는데 권해효 는 에서 김경식과 호흡을 맞췄다. 방송 내내 한국으로 시집온 베트남 며느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제작진은 종방연에서 성금 700여만 원을 모아 한국에 살고 있는 형편이 어려운 베트남인에게 전달하였다. 경쟁 프로그램 행복한 여자 며느리 전성시대 엄마가 뿔났다 문희 깍두기 천하일색 박정금 각주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전회차 무료보기 2007년 드라마 2008년 드라마 SBS 주말극장 올리브나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족 드라마 박현주 시나리오 작품 200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2007년에 시작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2008년에 종료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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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5%BC%20%EC%88%AB%EC%9E%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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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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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숫자는 콜럼버스 이전의 시대에 마야 문명에서 쓰였던 20진법을 기반으로 한 숫자와 그 숫자를 사용한 기수법이다. 0에서 19까지에서는 점 하나가 1을 가로 막대 하나는 5를 나타내게 된다. 숫자에 사용된 기호는 0을 뜻하는 조개 모양의 기호 과 기본 단위를 뜻하는 점 , 그리고 기본 단위의 다섯 배를 뜻하는 가로 막대 로 이루어져 있다. 19 이하의 수 마야 숫자는 기호를 조합하여 0에서 19까지를 하나의 숫자로 표기하였다. 각 숫자의 기호와 이름은 아래의 표와 같다. 20 이상의 수 20 이상의 수는 아라비아 숫자와 같이 자리수를 달리하여 나타내었다. 아라비아 숫자에서 자리수마다 이름이 있는 것처럼 마야 숫자도 자리수마다 이름이 있다. 예를 들어 아라비아 숫자의 두번째 자리 이름은 십이고 21은 이십일로 읽는다. 이와 같이 마야 숫자의 두번째 자리 이름은 칼이고 20에 해당하는 은 훈칼, 40에 해당하는 은 카칼로 읽는다. 한편, 21에 해당하는 은 훈투칼, 22에 해당하는 는 카투칼과 같이 자리수가 작은 수부터 먼저 읽는다. 세번째 자리 이름은 바크이고, 는 400을, 는 800을 뜻한다. 20진법에서 두번째 자리는 가 추가 될 때마다 20씩 늘어나게 되므로 은 40을, 은 100을 의미하게 된다. 은 셋째 자리에서 을, 넷째 자리에서는 을 의미하게 된다. 이와 같이 마야 숫자에서는 자릿수가 늘어나면 기호가 뜻하는 수는 기호가 뜻하는 첫째자리 수에 20의 거듭제곱을 한 수가 된다. 아래의 표는 마야 숫자를 십진법으로 변환한 사례이다. 연산 마야 숫자의 덧셈과 뺄셈은 숫자를 이루는 기호를 가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야인들은 분수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달력과 영 마야인들은 마야 달력을 제작하면서 자리수의 표기를 위해 0을 고안하였다. 기원전 36년에 제작된 치아파데코르소의 석조 달력에서는 조개 모양의 상형문자를 사용하였다. 마야의 달력은 한 달을 20일, 1년은 18개월로 구성이 되어 있었으며 연말에 5일의 휴일을 두어 1년의 길이는 365일이 되게 하였다. 마야인들은 초기에는 1년을 360일로 보아 달력을 제작하였으나, 천문학적 기술이 발전하면서 1년의 길이가 약 365.2422 일인 것을 발견한 뒤 1년의 길이를 수정하였다. 참고 문헌 Coe, Michael D. . The Maya ed.). London; New York: Thames & Hudson. . OCLC 15895415. Díaz Díaz, Ruy . "Apuntes sobre la aritmética Maya" . Educere 10 : 621–627. ISSN 1316-4910. OCLC 66480251. Diehl, Richard . The Olmecs: America's First Civilization. London: Thames & Hudson. . OCLC 56746987. Thompson, J. Eric S. . Maya Hieroglyphic ting; An Introduction. Civilization of the American Indian Series, No. 56 . Norman: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 OCLC 275252. 각주 외부 링크 Maya Mathematics 숫자 마야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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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8D%EC%A7%84%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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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 (동음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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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홍진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홍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홍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5대 주석이다. 홍진은 홍역을 가리키는 한방 용어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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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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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D%8A%B8%EB%82%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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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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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약칭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국가이다. 주요 도시로는 하노이, 호찌민시, 다낭, 하이퐁, 호이안, 사파, 후에 등이 있다. 북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 서쪽으로는 라오스 및 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남중국해에 접해 있다. 면적은 약 33만 341km2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로 최근 인구 통계에서는 9,649만 명으로 조사되어, 세계에서 15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다. 나라의 명칭인 비엣남은 1945년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베트남 북부와 중국 남부를 지배하였던 옛 베트남 왕조인 남월의 명칭을 거꾸로 쓴 것이다. 베트남의 수도는 하노이이고, 정부형태는 사회주의 공화제이며 공산당이 유일당이다. 고대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938년 박당 전투에서 응오 왕조의 시조인 응오꾸옌이 오대 십국의 하나인 남한과 싸워 이겨 독립하였다. 독립 이후 베트남의 왕조들은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안을 따라 남쪽으로 국경을 넓혀갔으며, 이러한 영토 확장은 청나라와의 청불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 지배 기간 동안 계속하여 독립 운동을 벌였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하노이의 바딘 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프랑스와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베트남에 개입하였으며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 지역에 투하하였고 막강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하였으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일어난 전 세계와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전쟁 후 베트남은 전후 복구와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1979년 크메르 루주와 전쟁을 치렀고,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1992년 베트남 공산당은 도이 머이를 시작하여 혼합 경제를 도입하였고, 2000년에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었다. 명칭 베트남의 국명 비엣남은 베트남 북부에서 중국 남부에 이르렀던 기원전 2세기의 고대 국가 남비엣에서 유래하였다. 비엣은 백월족을 뜻하는 말이다. 비엣남이란 낱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 베트남의 시인 응우옌빈끼엠의 시 삼짱찐이다. 이후 비엣남은 점차 베트남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 되어, 1905년 베트남의 판보이쩌우와 중국의 량치차오가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월남의 식민지화에 대해 나눈 대담은 《월남망국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비엣남은 1945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 이후 공식적인 국명이 되었다. 한국어권에서는 윁남과 베트남이라는 표기가 쓰이고 있는데, 한국어를 사용하는 대한민국 표준어에서는 1965년까지 비에트남과 베트남으로 불렸으나, 이 중 베트남이라는 표현이 관습상 용례로 인정되어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반해 문화어에서는 이곳의 언어에 대해 윁남어란 표현을 사용한다. 역사 선사 시대 베트남에는 구석기 시대 이래 인류가 살아왔으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인도네시아 제도에 이르는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석기 문화 유적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 베트남의 건국신화인 락롱꿘, 어우꺼 신화는 약 4,500년 전 락롱꾸언과 어우꺼가 결혼하여 많은 베트남 부족들의 선조가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고대 베트남에 세워진 최초의 문명은 동선 문화이다. 동선 문화는 기원전 300년 경 청동기 문명으로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였으며 베트남 북부를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 여러 곳을 지배하였다. 마강과 홍강 유역에서 기원전 1200년 경의 습식 벼농사와 정교하게 만든 북과 같은 청동 주물들이 발견되었다. 동선 문화의 청동 무기, 도구, 북과 같은 유물들을 만든 청동 주물 기술은 동남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동선 문화는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를 이루었고, 홍방 왕조는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을 세웠다. 기원전 257년 홍방 왕조가 무너지고 툭판 왕조가 세워졌으며, 툭판 왕조는 다시 기원전 208년 남비엣에게 멸망당하였다. 기원전 111년 중국의 한나라의 무제는 남비엣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111년부터 10세기 초까지 대부분의 시기 동안 베트남은 중국 왕조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쯩 자매와 바찌에우와 같은 산발적인 독립운동은 짧은 기간 성공하기도 하였으나 중국의 무력에 곧 진압되었다. 중세 938년 박당 전투에서 응오 왕조의 시조인 응오꾸옌이 오대 십국의 하나인 남한과 싸워 이겨 독립하였다. 그러나 응오 왕조는 오래 가지 못하였고, 딘 왕조가 그 뒤를 이었다. 이후, 베트남에서는 전 레 왕조, 리 왕조, 쩐 왕조, 호 왕조와 같은 왕조들이 그 뒤를 이었다. 호 왕조는 1406년부터 1407년까지 이어진 명나라의 침공을 막지 못하였고, 베트남은 역사상 네 번째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근대 1418년 농민들을 규합하여 독립 전쟁을 벌인 후 레 태조는 명나라를 축출하고 1428년 대월국의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세워진 후 레 왕조는 잠시 막 왕조에게 멸망하기도 하였으나 부흥 운동에 성공하여 1778년까지 베트남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부흥 운동 이후의 후 레 왕조는 사실상 독립적인 정부를 구성하는 두 가문인 찐 주와 응우옌 주의 남북조로 분리되어 있었다. 1777년 격화되는 농민 항쟁을 막지 못한 후 레 왕조는 결국 멸망하고 떠이선 왕조가 세워졌다. 후 레 왕조가 멸망한 후 남부 실권자였던 응우옌 주는 떠이선 왕조를 격파하고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응우옌 왕조의 2대 황제 민망제가 로마 가톨릭 선교사 박해사건을 일으키자, 영국과 경쟁하여 일찍부터 인도차이나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로마 가톨릭 탄압을 구실로 삼아, 1858년 다낭을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그 후 프랑스는 베트남의 북부 및 중부를 공략하여 1884년에는 베트남의 전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되었다. 청나라와의 청불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베트남을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강점하였다. 현대 항불전쟁 세계 전쟁의 1882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민족의 독립을 표방하는 반프랑스운동이 강력히 추진되었고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중화민국·일본 등지에 그들의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남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공산당은 그 후 각파의 정치세력을 규합하여 비엣민을 설립하고 2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맞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많은 민족주의 세력 중 가장 조직력이 뛰어났던 공산주의 계열은 베트남 독립연맹을 결성하였다. 일본의 통치는 최소 40만 명이 착취로 인하여 사망할 정도로 베트남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 제국은 동북아와 달리 동남아를 개발할 생각이 없었고 베트남의 경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비엣민을 중심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전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다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는 호찌민이 지도하는 민족 세력인 비엣민과 남북으로 대립하게 된다. 이로 인해 1946년 말부터 양국 사이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다. 1954년 3월 13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대승을 거두고 프랑스군이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은 독립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은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을 다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시켰고, 약속하였던 전국 선거를 거부한 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왕으로 내세워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응오딘지엠의 쿠데타로 붕괴하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져 남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월남전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고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은 미국에 맞서서 베트남 전쟁을 치러야 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주장하며 베트남에 개입하였으며 통킹만 사건이라는 자작극을 벌여 베트남 전쟁을 개시하였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것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북베트남 지역에 투하하였고 막강한 화력과 인력을 동원하였으나, 베트남의 끈질긴 저항과 전쟁을 계속하는 동안 일어난 전 세계와 미국 내의 반전 여론에 밀려 결국 1973년 파리 협정을 맺고 철군하였다. 1975년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하였고, 1975년 베트남의 전 지역을 점령하므로써 베트남은 공산주의 체제인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전후 시대 전쟁 후 베트남은 전후 복구와 계획 경제체제를 통한 발전을 도모하였으나, 1979년 크메르 루주와 전쟁을 치렀고,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1992년 베트남 공산당은 도이 머이를 시작하여 혼합 경제를 도입하였고, 2000년에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와 수교를 맺었다. 자연 환경 지리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에 동단에 남북으로 약 1,600km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동해에 면해 있으며 최대 너비는 약 650km로 이 길이는 라오스와 맞닿은 북부 국경에서 통킹 만에 이르는 거리이다. 국토는 크게 북부 고원 지대, 홍강 삼각주, 안남산맥, 해안 저지대, 메콩강 삼각주의 다섯 지역으로 이루어진다. 북부 고원 지대 북서부에 있는 산악 지대로 중국과 라오스 영토 안까지 뻗어 있다. 이 지역의 산들은 대부분 숲이나 밀림으로 덮여 있어 인적이 드물거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다.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산인 판시팡산도 이 지역에 있으며, 몽족 등 소수민족이 경작하는 계단식 논과 판시팡산으로 운행하는 케이블카가 있는 사빠 등이 위치한 라오까이성도 있다. 홍강 삼각주 북부 고원 지대에서 통킹 만까지 뻗어 있으며 거의 전역이 해발 3m 이하의 저지대이다. 홍강 삼각주는 베트남 북부에서 주요한 농경 지대로 옛부터 베트남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안남산맥 북부 고원 지대에서 서부 지역을 가로질러 호찌민시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지점까지 뻗어 있다. 중부 지역은 대부분이 안남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야는 해안에 접해서 대상으로 좁게 달리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산맥이 해안으로 바싹 다가서 있으므로 좋은 항만이 없다. 이 산맥의 고지에는 타이족 이외에 먀오족·모이족·몬타냐족 등 많은 부족이 살고 있다. 해안 저지대 베트남의 중동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산지에서 남중국해 쪽으로 비스듬히 비탈져 있고 송코이강 삼각주에서 메콩강 삼각주까지 펼쳐져 있다. 해안 저지대 거의 전역에서 쌀을 생산한다. 해안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한다. 메콩강 삼각주 베트남의 남부 지역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메콩강 삼각주는 해발 3m 요 농업 지대이다. 베트남 민족은 17세기에 들어와서 선주민인 크메르족을 쫓아내고 이 미래의 곡창 지대를 지배하게 되었다. 기후 열대 계절풍으로 5월부터 10월까지는 많은 비를 몰고 오며, 11월부터 4월까지는 동북 건조기간이 된다. 북부 일부 지역은 사계절이 나타나고 습도가 90%의 비중을 차지한다. 남부 지방은 일년 내내 건조하고 여름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린다. 중부 지방에는 베트남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과 가장 습한 지역이 자리잡고 있다. 산악 지방은 삼각주나 해안 저지대보다 대체로 기온이 낮고 비가 더 많이 온다. 정치 옛 월맹은 1969년 호찌민이 세상을 떠난 뒤 쯔엉찐 국민의회 상임위 주석, 레주언 베트남 공산당 제1서기, 팜반동 총리 등 3인을 중심으로 집단지도 체제를 채택했다. 구 월맹은 월남이 공산주의 국가가 된 후 월남 임시혁명정부와 함께 1여 년간의 남북통일 준비작업을 끝내고 1976년 4월 25일 30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최고 권력기구인 492석의 남북단일 국민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로 인구 10만 명당 1석을 기준으로 하는 배분원칙에 따라 북베트남에서 249석, 남베트남에서 243석을 선출했다. 남북 베트남의 18세 이상의 유권자들이 참가한 총선은 남북 베트남의 공산주의 정권이 전국의 노동자·농민·여성·산악부족 및 그 밖의 소수인종에서 선정한 후보자 중에서 국민의회 대표들을 선출했으며 야당후보는 없었다. 총선거를 통해 구성된 남북베트남단일국민의회는 1976년 7월 역사적인 통일 베트남 수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하였다. 수도는 하노이로 정하는 한편 초대 주석으로 구 월맹의 마지막 주석 똔득탕을, 그리고 2명의 부주석으로는 응우옌르엉방 및 응우옌흐우토를 선출하였다. 또한 옛 월남 수도 사이공을 호찌민시로 개칭하고 국기는 종래의 월맹기였던 금성홍기를 그대로 쓰기로 하였다. 국민의회는 통일 베트남의 새 헌법을 마련할 36명의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는 동시 새 헌법이 공포될 때까지 1959년도 월맹 헌법을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입법기관으로 국민의회가 있고 각 성에 각급 인민회의가 있다. 단원제이며 임기는 5년, 매년 2회 소집된다. 주석, 부주석과 간부의원 15명으로 구성되는 상임위원회가 실질적인 입법기능을 행사한다. 1991년 6월 제7차 당대회에서 도이모이 건의에 중심 역할을 해온 도므어이가 총서기로 선출됐으며, 동 8월의 내각개편에서 개혁파인 보반끼엣 총리로 선출됐다. 1996년 6월의 공산당 전당대회에서도 ‘도이모이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을 재확인했다. 2001년 4월 농득마잉 서기장이 취임했다. 행정 구역 베트남의 행정 구역은 63개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인 하노이를 포함하여 껀터, 다낭, 하이퐁, 호치민은 성과 같은 급의 직할시이다. 베트남 정부는 가끔씩 지방을 8개의 지역으로 구분짓는다. 이러한 지방 구분은 항상 사용되는 것은 아니며, 대체 분류로 가능하다. 사법 베트남 사법부의 최정점에는 상소심과 사법심사를 담당하는 최고인민법원이 있고 베트남 의회에 보고를 하는데, 의회는 사법부의 예산을 통제하고 대통령이 제안한 최고인민법원 판사 후보와 대검찰청 검사 후보를 확정한다. 대검찰청은 체포영장을 발부하는데, 때로는 소급적용을 하기도 한다. 최고인민법원 산하에, 지방법원과 군사법원, 행정, 경제, 노동법원이 있다. 지방법원은 제1심을 관할하는 법원이다. 국방부는 군사법원을 관할하는데, 일반법원과 같은 절차를 적용한다. 군 판사와 담당 직원들은 국방부와 최고인민법원이 선출하는데 감독책임은 최고인민법원에게만 있다. 헌법에는 판사와 담당 직원들의 독립성을 규정하고 있으나, 미국 국무부는 베트남의 사법부의 독립성이 부족하며 이것은 부분적으로, 베트남 공산당이 판사를 선택하고 그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욱이, 공산당은 국가나 당의 지배적인 지위를 위협할 만한 판결의 결과에 영향을 주기 위해 모색한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향상할 목적으로, 정부는 지방법원을 법무부에서 최고인민법원으로 2002년 9월에 이관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앞서 말한 목적이 실제로 이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베트남 사법부는 또한 법조인의 부족과 초보적인 재판절차로 인하여 방해받고 있다. 사형 집행은 부패 또는 마약밀매 사건의 경우 자주 집행되고 있다. 베트남의 형법은 전통적인 유교 사상, 나폴레옹 법전 그리고 호치민 사상이 영향을 끼친 결과이다. 일본이 베트남과 협력하여 베트남의 법제를 정비하고 법률가 양성시스템을 선진국형으로 구축하여 지원한 사업은 현재까지 대단히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대외 관계 2007년 12월 기준, 베트남은 172개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9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스프래틀리 군도 영유권을 놓고 분쟁이 있었다. 미국과는 1975년 이후 계속되어 왔던 대 베트남 금수조치가 1994년 2월 해제되고, 1995년 1월 양국간에 상호연락사무소가 개설된 데 이어 동 7월 11일에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 또 1995년 1월 독일과 정치·경제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동 4월에는 오스트리아와 4개 경제협정을 체결했다. 대한민국과는 1992년 수교했다. 수단과는 1969년 8월 26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한편 유엔 등 국제기구들에 대한 외교도 활발히하여 1976년 9월 국제통화기금 및 세계은행에 가입했으며 1995년 7월에는 아세안의 7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군사 베트남의 군사조직은 육군, 해군, 공군, 그리고 국경 수비대로 구성되어 있다. 1950년 이후 인도차이나 전쟁을 통해 프랑스, 미국, 중국 등 열강에 승리를 거두었고, 캄보디아와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군사력을 증명하였다.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지만 국방비가 없어서 힘든 상황이다. 베트남 해군은 킬로급 잠수함 등을 운용 중이다. UAV 연구제작 프로젝트에서 5종의 UAV를 개발하였고 대량 양산에 들어갈 것이다. 경제 베트남은 정부개발원조와 외국투자가 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공산화 이후 경제 기반이 무너져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1986년 "도이 머이"라는 슬로건 하에 실용주의적 경제 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말부터, 외국인의 재산 투자를 보호하는 여러 법이 개정되었고, 1990년대에는 ASEAN 등 국제 사회에 편입되기 시작하였다. 이 개혁 기간동안 10%에 가까운 경제 성장률을 거듭하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침체기가 되었다. 세계금융위기로 일시적으로 추락하였던 GDP의 성장율은 2009년 5.3%, 2010년 6%로 안정적인 성장이 지속되고 있다. 베트남의 GDP는 1,446억 달러이며 1인당 GDP는 1,700달러다. 중국의 인건비가 상승기조에 있는 점 때문에, 새로운 투자대상국으로서 근년에 주목되고 있다. 이리하여, WTO가입이 정부에 의하여 중요한 목표가 되어 2007년 1월에, 마침내 WTO에 가입하였다. NEXT11과 VISTA의 일원으로서도 손꼽히고 지금 이후부터 한층 경제의 발전이 예상되고 있다. 노동인구의 66%가 농업 등 제1차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근년에는 제2차, 제3차산업이 급성장하고 있다. 관광업의 신장세가 특히 현저하여, 중요한 외화획득원이 되고 있다. 베트남은 쌀, 후추, 커피의 세계 3대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대한민국과의 무역도 활발하다. 베트남은 중화인민공화국, 태국 등과 더불어 미래에 매우 유망한 나라 중 하나이다. 경제사 1975년에 공산화 통일된 베트남은 오랜 전쟁 탓에 국토는 황폐하고 공산주의 이식 실패에 따라 경제 기반이 무너져 베트남 국민들의 가난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북부 베트남의 주요 수출품은 석탄·목재·해산물·차 등이었고, 석탄·철광석·인회석·크롬·주석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남부 베트남의 주요 수출품은 쌀·고무·새우·차 등이었다. 1980년에는 태풍으로 역사상 최대의 인명 피해가 발생해 베트남 경제가 타격을 받았다. 이후 1990년대부터 베트남 정부는 국민들의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계획경제 작업을 중지하고, 새로운 경제 정책, 《도이 머이》를 추진하여 실행하였다. 1992년 12월 베트남 공산당 제12차 전당대회에서, 부분적인 혼합경제제도를 도입하는 실용주의 경제정책 《도이 머이》를 실행하여 중국과 사실상 마찬가지로 개혁, 개방노선으로 전환하였다. 제4차 5개년 계획 의 골간으로 1992년까지 2,300만 톤의 식량 생산, 5년간 70%의 수출증대를 선정하는 등 경제의 개방화를 적극 추진했다. 1992년 12월 《외국인 투자법》 이 공표되었고, 1993년에는 《토지법》이 개정되어 토지상속권과 담보권, 사용권이 인정되었다. 다만 토지의 소유권은 공적인 의미에서 계속 국가가 보유하는 것으로 하였다. 1994년에는 《파산법》 이 발효되었고, 2000년 1월에는 기업법이 발효되었다. 1996년의 베트남 공산당 제8회 대회에서는 2020년까지는 공업국으로 진입한다는 목표로, "공업화와 현대화"를 2대 전략으로 하는 정치보고를 채택하였다. 또한 1995년 ASEAN 및 AFTA 가입을 시작으로, 1998년에는 APEC에 가입하였고, 2000년 7월에는 베트남-미국 무역협정에 서명하였다. 2000년 7월에는 호치민시에 최초로 〈증권거래센터〉가 개설되었으며, 2005년에 하노이로 확대 개설되었다. 2007년 1월에는 WTO에 정식으로 가입되었고, 2008년 12월에는 베트남-일본 경제연대협정에 공식 서명을 하였다. 《도이 머이 정책》 이후 베트남 경제는 1992년 이래 연평균 8%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달성했으며 1995년, 1996년에도 9% 이상의 고속성장을 지속했다. 2008년의 GDP 성장률은 6.23%로 최저 성장을 기록하였고, 2009년은 5%로 하향조정하였으나, 세계 경제의 침체로 인해 더욱 낮아질 전망이다. 현재는 옛날의 가난에서 크게 벗어났으며 빠르게 경제 발전을 하고 있지만 빠른 경제 발전의 후유증도 같이 겪고 있다. 2004년부터 빠르게 물가가 상승하여, 2008년에는 22.97%로 최고의 물가 상승률을 기록하였다. 더욱이 국제 원자재 가격의 급등과 베트남 동화의 평가절하 등으로 인플레이션율이 2008년 25%를 초과할 정도로 상승하면서 위기의 상황이 오기도 하였다. 토지의 사유화 및 농지의 전용이 가능해진 이후 골프장 건설과 같은 개발 사업이 크게 늘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2010년 기준 베트남의 골프장 개발 허가 수는 140여 곳에 달한다. 경작지 감소와 그에 따른 고용 감소를 우려한 베트남 정부는 2008년 이후 농지 전용 억제 정책을 펴고 있다. 산업 베트남의 주요 산업은 2008년 GDP 기준으로 39.91%를 차지하는 제조, 건설업 즉, 2차 산업이며, 농림, 수산업의 1차 산업은 21.99%에 이른다.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은 38.10%로 높은 성장률을 이루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노동인구의 53.9%가 농림, 수산업에 종사를 하며 이들은 쌀, 고무, 사탕수수, 커피, 열대 과일 등과 새우 등의 수산물 등을 생산하고 있다. 메콩 삼각주에서 생산되는 쌀이 국민의 주식인 동시에 수출품목의 대종을 이루었다. 1992년 자급을 달성한 이래,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을 이어 3대 쌀 생산국이다. 남부에서는 2년 7모작이 이뤄지며, 세계 2위 쌀 수출국이기도 하다. 그 외에 커피와 차, 향신료도 유명하다. 커피는 현재 브라질에 이어 세계 제 2위의 생산량에 달하고 있다. 대부분이 인스탄트 커피, 캔과 펫트병에 들어가는 청량음료, 제과 용도로 사용되는 값이 싼 로브스타 종인데, 레귤러 커피에 사용되는 고급품인 아라비카 종의 재배도 시작되고 있다. 또한 현지에서는 기본적으로 식민지 지배를 받아 프랑스의 방식을 따른 베트남 커피가 음용되고 있다. 베트남은 석탄, 석유를 중심으로 한 동력자원, 주석을 중심으로 한 광물자원의 혜택을 입고 있다. 북부 하롱에서 산출되는 석탄은 상질의 무연탄으로, 19세기말부터 홍게이탄으로서 채굴이 시작되었다. 2003년 시점의 채굴량은 1,670만톤이다. 베트남은 중국과 서방 세계와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석유개발을 통해 산유국이 되어 1,660만톤의 원유를 생산한다. 천연가스의 채취량은 126천조 줄이다. 광물자원은, 북부 삼각주 주위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생산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 제4위의 주석이다. 아연, 금, 크롬, 철, 납, 인도 산출된다. 무역 주요한 수출품목은 원유, 의류, 농수산물이다. 수출품목의 제1위는 석유로서, 2002년 시점에는 수출총액의 19.6%를 차지하였다. 쌀은 450만톤을 수출함으로써 타이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수출국이었으나, 현재는 수출 일부 제한 조치를 하고 있다. 커피는 2008년 20억 달러 이상을 수출한 세계 제2위의 수출국이며, 후추는 2008년을 기준으로 115만톤을 수출하여 세계 1위의 수출국이기도 하다. 유통업 베트남 유통업태는 특히 도시지역에서 과거 몇 년 동안 전통적인 재래시장으로부터 현대화된 수퍼마켓과 쇼핑센터로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수입상품의 취급확대를 촉진하고 있다. 1999년 2개의 대형수퍼마켓에서 2004년에는 전국적으로 85개가 넘는 현대화된 수퍼마켓이 운영되고 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한국은 2008년을 기준으로 9위의 수출국이며, 5위의 수입국이자, 6위의 교역국이기도 하다. 2008년을 기준으로 투자국 순위로는 4대 투자국이며, 베트남에 투자건수는 총 9,494건이며, 총 등록액은 1,320억 달러였다. 서비스업 2009년 말 현재 베트남의 전화 가입자수는 모두 1억3,040만여명으로 이 가운데 85%가 휴대전화 서비스 가입자로 집계됐으며, 비엣텔 등 일부 선도 회사들은 매년 30% 이상의 높은 신장세를 보여왔다. 정보통신부는 2009년 8월, 8번째 서비스업체로 인도차이나 텔레콤에 대해 사업허가를 승인했고, 2010년 6월에는 VTC가 정부로부터 이통 서비스 허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베트남 이동통신 시장은 비나폰, 모비폰, 비엣텔, S-Fone 등 선발 4개업체들과 EVN텔레콤, 베트남모빌, 비라인, 인도차이나텔레콤, VTC 등 후발 5개사들 간에 치열한 고객확보 경쟁이 벌어질 전망이다. 교통 베트남의 현대적 교통 체계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수확한 농산물울 운송할 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베트남 전쟁의 결과 파괴된 교통 체계를 재건하고 현대화하였다. 가장 일반적인 교통 수단은 도로 운송이며, 도시 간 이동에 일반 시외버스와 오픈 투어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2,654km의 단선 철도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연결이 되며 하노이와 호찌민시 간을 연결하는 철로가 중요하다. 베트남의 차량은 우측통행을 하며 2륜차가 매우 많다. 사회 베트남은 2006년 '5대 부정부패' 사건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교통부 고위 관리들이 외국의 자금을 지원받아 도로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700만달러를 사적으로 유용해 파장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교통부 장관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도 했다. 베트남 교통경찰과 토지 등록 사무소, 세관 및 세무서에서도 흔히 뇌물을 요구하거나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주민 베트남의 인구는 약 8,162만으로, 그 90%가 베트남인이다. 그 밖에 타이인·중국인·크메르인 등이 있으며 산악지대에는 미오·랭이·몬타냐 등 많은 부족이 살고 있다. 베트남은 다민족 국가로서 베트남 정부가 공인하는 민족의 수가 54개에 이른다. 최대 민족은 킨족 또는 비엣족으로 보통 베트남인이라고 할 때 다수종족인 이 킨족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킨족은 베트남 전체의 86.2%를 차지한다. 므엉족과 같은 대부분의 소수 민족은 킨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국토의 2/3를 덮고 있는 산악지대에서 발견된다. 킨족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과 정체를 거친 북부인과 남부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인 신체적 특징과 정치, 경제적 대립의식을 갖고 있다. 각각의 소수민족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참족과 같이 역사상 독립국가였다가 베트남에 흡수된 민족도 있고, 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산간지역에서 생활을 하는 민족도 있다. 호아족과 크메르 크롬은 저지대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킨족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소수 민족은 몽족, 다오족, 따이족, 그리고 눙족이 있다. 1978년에서 1979년에 45만명의 중국계 소수 민족이 베트남을 떠났다. 아울러, 근래 대한민국의 베트남에 대한 투자가 급증함에 따라서 한인동포의 수도 비례적으로 급증하여 베트남 정부가 2012년 기준으로 추산한 자료에 따르면 13만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증가추세에 있다. 언어 베트남의 공식 언어는 베트남어이며 로마자로 적는다. 베트남어는 단철어로 성조에 6성이 있다. 중국의 영향으로 한자가 사용되고 있었으나, 19세기부터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가 추진되어 현재 한자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 꾸옥 응으로 불리는 이 로마자 표기는 16세기부터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현지어를 로마자로 옮겨 적으려는 작업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예수회의 알렉상드르 드 로드는 포르투갈어 철자법을 바탕으로 최초의 안남어 사전을 만들어냈다. 베트남어는 민난어처럼 동아시아의 언어들 중에서 중국어와 유사한 문자 체계에서 로마자로 변경한 흔치 않은 언어 중 하나이다. 이 로마자 표기법은 현지인들의 교육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1945년 이후 베트남이 독립한 뒤 공식 표기법이 되었다. 베트남에서는 15세기 말에 한자와 비슷한 문자인 쯔놈이 발생하였지만, 그 사용은 한문에 익숙한 일부 지식인층에 국한되었고, 널리 보급되지 않았으며 20세기 이후에는 사용이 끊어졌다. 이는 프랑스의 식민 정책과 관련이 있다. 프랑스 식민통치자들은 베트남을 지배할 때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꾸옥 응으를 사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으로 로마자에 거부감을 표시하던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은 베트남 민중들에게 새로운 지식과 근대사상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한문이나 쯔놈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여 로마자의 편의성을 인정하고, 이후 로마자를 베트남어의 새 문자로 적극 받아들여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한자문화를 완전히 대체하였다. 베트남은 55종에 달하는 언어의 다양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다시 6, 7개 정도의 언어 집단으로 나뉜다. 외국어로는 영어를 가장 많이 선호하며, 일부 엘리트 층들은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을 구사한다. 현재 프랑스어는 식민 지배에 대한 반감 및 프랑스어의 쇠퇴 등으로 인해 거의 감소 추세에 있지만, 베트남은 이미 프랑스어사용국기구의 정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다. 교육 초등교육은 5년제의 의무교육이다. 중등교육은 전기 4년제, 후기 3년제이다. 베트남의 대학에는 국가대학, 국립대학, 전문대학, 민립 대학이 있으며, 1학기 등록금이 현재 600만동인 약 30만원 선이다. 문화 지방의 문화차이 중국 남부 지방과의 오랜 교류로 인하여, 베트남 문화를 특징짓는 한 가지 요소는 재정적 책임이다. 베트남에서 교육과 자수성가는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과거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이 베트남 사람이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유일한 것이었다. 베트남이 오늘날의 영역으로 통합된 것은 근대의 일로, 그 전에는 유교 및 한문화의 영향을 받은 북부와 베트남의 주 종족인 킨 족외에 인종적으로 말레이계에 속하는 참파인의 국가였던 참파가 있었던 중부문화권, 그리고 크메르 제국의 영역에 속했던 남부 등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북부, 중부, 남부의 차이는 언어 및 풍속,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존재한다. 중국의 유교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베트남에서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상하 개념은 없고, 서로 스스럼없이 대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영향 공산주의 시대에 베트남의 문화적 삶은 정부가 통제하는 미디어와 공산주의적 프로그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수십 년동안 외국 문화의 영향은 차단되고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북한 등 공산주의 국가의 문화를 음미하고 공유하는 것이 강조되었었다. 1990년대 이래로, 베트남은 일본, 유럽, 미국의 문화와 미디어에 대폭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베트남에는 1945년 9월 2일에 하노이에서 설립된 국영방송국인 베트남의 소리가 있다. 이름 베트남인의 이름은 성, 가운데 이름, 그리고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과 사실상 마찬가지로 그들의 성씨 제도는 중국에서 도입된 것이다. 한자가 폐지되면서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쓸 수 있는 베트남인은 소수이지만, 이름 뒤에는 한자의 의미가 숨어 있다. 결혼 후에도 자신의 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문학 18세기의 작가 응우옌 주에 의해 저술된 대서사시 쭈엔 끼에우는 베트남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6.8조의 연서체로 분량은 총 3,254행에 달한다. 특히 이 작품은 쯔놈으로 쓰여진 자료중의 최대의 것으로 베트남의 국민문학으로 불린다. 의상 베트남의 민속 의상 중 가장 대중적인 것은 여성들이 입는 아오 자이이다. 아오 자이는 현재에는 명절이나 결혼 등 행사, 일상의상 등으로 입는다. 흰색 아오 자이는 베트남 전역에서 여학생의 교복으로 지정된 경우가 많고 학생 이외에는 다양한 색상의 원단으로 아오 자이를 만들어 입는다. 예전에는 성별 구분 없이 아오 자이를 입었으나 현재에는 여성용 의복으로 한정된다. 단, 전통 문화 행사에서는 남성이 입는 경우도 있다. 요리 주 요리의 재료는 대개 쌀과 간장, 생선 소스 등이다. 대체적으로 음식의 맛은 달거나 맵거나 시거나 감칠맛이 나며 향채 풀로 인한 민트향과 바질향이 나기도 한다. 유명한 음식은 베트남 쌀국수이다. 고수를 넣어 먹기도 한다. 음악 베트남의 음악은 세 지역, 북부, 중부, 남부 지방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북부 지방의 전통 음악은 베트남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음악이고, 보다 전통적이며 엄격한 형식을 가진다. 베트남의 전통 음악은 몽골의 침입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의 경극 극단을 붙잡아 두었다. 중부 지방의 전통 음악은 우울한 멜로디 등 참파 문화의 영향을 보여 준다. 남부 지역의 음악에서는 자유방임적인 삶의 태도가 묻어난다. 베트남의 전통 현악기인 단 짜인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현은 철제이고, 각각의 V자 모양으로 된 다리에 의해 지지되어 있다. 종교 베트남의 종교로는 불교, 기독교 등이다. 베트남은 대승불교권 국가이다. 그 외에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 같은 신흥 종교도 있다. 까오다이교는 1926년 베트남 남부의 터이닌에서 응오반쩨우에 의해 창시된 불교, 기독교와 토속신앙이 혼합된 유일신 사상이며, 호아하오교는 베트남 남부에서 기원한 불교에 바탕을 둔 신흥 종교이다. 1939년 후인 푸 소가 창시하였다. 발원지인 메콩 강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대략 200만명의 신자가 있다고 추산된다. 베트남은 과거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지만 예로부터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가 중국, 인도의 영향을 받은 불교였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만은 탄압하지 못했다. 현재는 극히 제한적인 종교 활동은 허용되고 있는데, 정부의 허가 없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불법이며, 집회는 사전 신고를 하여야 하고 선교는 불법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의 종교 정책이 탄압 정책에서 종교를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실용 정책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 대승 불교권인데도 부처님 오신 날은 음력 4월 15일이다. 생활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개인 별 소득 차가 크지 않다. 남녀 평등 사상이 확산되고, 보통 자녀 수가 많다.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농촌에 거주한다. 여성의 사회 활동이 활발하고 여성 노동자의 고용을 장려하고 있다. 가사 노동을 부부가 분담하며 유교 전통이 드러난다. 연애 결혼이 증가 추세에 있다. 공휴일 베트남에는 1월 말~2월 초에 뗏이라 해서 최장 7일 간의 연휴가 있으며 음력 공휴일은 음력 3월 10일에 있는 훙왕 기일 하나뿐이고 1년의 마지막 공휴일은 9월 2일 독립기념일이다. 즉, 10월부터 12월까지 공휴일이 없는 셈이다. 양력 4월 30일 남부 해방 기념일과 양력 5월 1일은 노동자의 날도 공휴일이다. 같이 보기 베트남 관련 문서 색인 각주 외부 링크 베트남 정부 포털 주베트남 대한민국 대사관 주호치민 대한민국 총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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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C%A0%95%ED%98%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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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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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호는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였다. 종족은 프로토스였으며, KT 롤스터 소속이었다. 역사 2007년 하반기 드래프트에서 KTF 매직엔스의 1차 지명으로 입단하였다. 초창기에는 뛰어났던 실력에 비해 방송 경기에 긴장을 많이하여,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었다. 그러나 강도경 코치는 우정호를 특훈 교육시켰고 그 결과 성적이 눈부시게 향상되었다. 08-09시즌 프로리그에서 9연승을 기록했다. 10-11 시즌부터 KT 롤스터의 주장을 맡았으나, 저조한 성적으로 인해 박정석에게 주장 자리를 넘겼다. 빅파일 MSL 2010 32강에서 가장 떨어질 것 같은 후보 2위로 뽑혔지만, 김윤중과 전상욱을 이겼다. 그러나, 같은 팀 이영호와 16강에서 2:0으로 패했다. 바로 다음 시즌인 피디팝 MSL 2010 서바이버 토너먼트에서는 최종전 끝에 1승 2패로 탈락하며 MSL 진출에 실패했다. 2011년 1월 26일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아 프로게이머 생활을 잠시 중단했다.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기 직전 위너스리그에서 3킬을 2번 연속 기록하며 경기력은 상승세였다. 팬들은 그를 위해 헌혈증을 모았고, KT 게임단 선수들 또한 모두 헌혈을 하여 헌혈증을 전달하였다. 이외에도 화승 OZ, 웅진 스타즈, 삼성 갤럭시 등 다른 팀 선수들도 헌혈에 동참하였다. 2011년에 1차 이식 수술을 잘마쳐 회복되는 듯 보였다. 투병 중이어서 경기 출전은 불가능했지만, 소속팀 KT는 엔트리에 항상 우정호를 포함시켜 선수와 소속팀간의 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2012년 중으로 프로게이머로 복귀할 수 있다고 트위터를 통해 근황을 알리기도 했다. 2012년 8월에 KT 롤스터는 공식 페이스북을 통해 골수 이식을 받았으나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인해 면역력이 0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다고 밝혔다. 결국 2012년 8월 23일 백혈병 합병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당시 나이는 겨우 25살이었다. 유해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추모관에 안치되었다. 한편, KT 사무국과 한국 e스포츠협회에서는 우정호 선수를 영원히 KT 롤스터의 선수로 임명한다고 밝혔다. 전적 프로게이머 시절 최종 통산전적 기록 우정호는 08-09 프로리그에서 9연승을 달성했다. 이번에 우정호가 세운 기록은 역대 KTF와 KT 소속으로 출전한 프로토스 가운데 프로리그에서 거둔 가장 많은 개인전 연승 횟수다. 우정호가 경신하기 전 기록을 갖고 있던 선수는 박정석. 박정석은 개인전 8연승 기록을 세웠다. 특이 사항 우정호는 KT 롤스터의 라이벌팀인 SK텔레콤 T1에 유독 강한 모습을 보였다. 이동통신사 더비 매치에서 SK텔레콤 T1을 8번 만나 8전 전승이었다. 이로 인해 "티원슬레이어"라는 별명이 붙었다. 우정호 선수의 사망으로 인해 SK텔레콤 T1과의 승률은 100%로 마감되었다. 2009년 5월 23일 우정호 승 vs 김택용 패 2009년 11월 9일 우정호 승 vs 박재혁 패 2009년 12월 30일 우정호 승 vs 도재욱 패 2010년 5월 2일 우정호 승 vs 김택용 패 2010년 7월 3일 우정호 승 vs 도재욱 패 2010년 8월 7일 우정호 승 vs 고인규 패 2010년 10월 16일 우정호 승 vs 고인규 패 2010년 12월 15일 우정호 승 vs 정명훈 패 수상 경력 2007년 제28회 커리지 매치 입상 2008년 곰TV TG삼보-인텔 클래식 2008 시즌1 16강 2008년 인크루트 스타리그 2008 36강 2009년 곰TV TG삼보-인텔 클래식 2008 시즌3 16강 2010년 빅파일 MSL 2010 16강 2010년 박카스 스타리그 2010 36강 2010년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9-10 우승 2010년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 우승 2011년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10-11 준우승 2011년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우승 2012년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시즌1 정규시즌 준우승 2012년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2 프로리그 시즌2 특별상 2013년 2012 대한민국 e스포츠 대상 우정상 1988년 출생 2012년 사망 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 안양시 출신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백혈병으로 죽은 사람 단양 우씨 KT 롤스터의 선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프로토스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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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채널 텔레비전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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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채널 텔레비전 사운드는 NTSC 형식의 음성 반송파에 3가지의 부가적인 음성 채널을 부호화하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MTS 라고도 부르며 때로는 이것을 만든 기관의 이름을 따서 BTSC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 MTS는 1984년 FCC에서 미국의 스테레오 텔레비전 전송 표준으로 채택되었다. MTS 기술 개발의 시작은 1975년 텔레소닉 사가 시카고의 방송국 WTTW와 접촉하면서 시작되었다. WTTW는 음악 쇼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고, 지역 FM 방송국으로 스테레오 동시 송출하고 있었다. 텔레소닉과 WTTW는 FM 스테레오와 비슷한 TV용 음성 다중 시스템을 개발하기로 하였고, WTTW 쪽 기술자 12명이 합류하였다. 1979년 WTTW는 그래스 밸리 사에서 제작한 스테레오 마스터 컨트롤 스위처를 설치하였고, 마이크로파 스튜디오 트랜스미터 링크에 추가 오디오 채널을 추가하였다. 이 시기 WTTW 기술자들은 비디오 레코더에 스테레오 오디오를 기록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오디오 트랙 헤더를 두 개로 나누었고, 돌비 NR을 사용하여 음악 쇼 프로그램을 녹음하고 전자적으로 편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추가적으로 24트랙 오디오 레코더를 음악 프로덕션 및 믹싱에 사용하였다. 이 방송을 재송출하려고 하는 PBS 구성 방송국들에게는 4개 트랙으로 구성된 스테레오 테이프가 제공되었다. FCC 인증 과정에 여러 기관들이 참가하였고, EIA와 일본 EIA는 승인 과정에 각 조직의 구성원을 참가시키길 원했다. WTTW 기술자들은 주파수 응답, 채널 분리, 스펙트럼 사용에 관한 표준을 만들고, 방송을 실험하기 위한 프로그램 원본을 제공하는 데 협력하였다. 3M에서 제작한 24트랙 오디오 레코더를 사용하여 동시에 12개의 스테레오 프로그램 송출을 시험하였다. 시카고 서부에 있는 마쓰시타 퀘이사 TV 제작 공장 및 연구소에서 시스템 실험이 이루어졌다. 실험 과정에서 일부 과정의 적합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두 번째 실험이 시작되었다. WTTW는 1983년 10월에 스테레오 모듈레이터를 설치하였고, FCC가 BTSC 시스템을 확정하기 이전의 텔레소닉 시스템으로 스테레오 송출을 시작하였다. EIA와 FCC의 권유에 따라서 모듈레이터 특성을 조정하였고, 1984년 8월 모든 시간대로 스테레오 방송이 확장되었다. 1984년 7월 26일 NBC에서 스테레오 방송이 시작되었으나, 당시에는 뉴욕에 있는 송신소에서만 스테레오 방송이 송출되었다. 1985년 초기에 모든 프로그램의 스테레오 송출이 시작되었다. ABC와 CBS는 각각 1986년과 1987년에 스테레오 방송을 시작하였다. FOX는 1990년에 스테레오 방송을 시작하였다. BTSC 스테레오 송출 기능이 추가된 TV 수신기는 1984년에 최초로 출시되었다.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중반 및 2000년대 일부에는 스테레오 방송을 송출하기 시작할 때 "In stereo "라는 문구를 송출하였고, 방송국마다 문구 스타일은 조금씩 달랐다. 채널 구성 첫 번째 채널은 스테레오 차이로, 기존의 모노 음성에 스테레오 음성을 추가하기 위해 사용된다. 스테레오 정보는 잡음을 제거하여 신호 대 잡음비를 높이기 위해 DBX 부호화 과정을 거친다. 이 신호는 모노 반송파 위에 송출된다. 두 채널을 더하면 왼쪽 채널이 나오고, 위상을 반전시켜 빼면 오른쪽 채널이 나온다. 이상적인 상황에서 MTS는 VHF FM 스테레오보다 1.5db 더 좋은 성능을 가지며, 두 방식 모두 채널 간 간섭이 존재하여 스테레오 분리가 완벽하지는 않다. 세컨드 오디오 프로그램도 역시 표준의 일부로 외국어 음성, DVS와 같은 화면 해설 서비스는 물론 캠퍼스 라디오나 날씨 정보와 같은 전혀 별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다. 세 번째 PRO 채널은 방송국 내부용으로 사용되며, 음성이나 데이터를 다룰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뉴스 방송 중에 전자 뉴스 취재용으로 사용되며, TV 방송국의 원격 링크를 통해 외부 사람과 얘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채널을 수신할 수 있는 수신기는 일반적으로 방송 전문가에게 판매된다. MTS 신호가 송출되면 15.734KHz 파일럿 톤이 같이 송출된다. MTS 파일럿은 영상 송출을 잠글 때 사용하는 수평 동기화 신호에서 유도되거나 잠긴다. 따라서 수평 동기화 신호에서 위상 변화나 주파수 변화가 생기는 경우 오디오에 영향을 끼친다. 1984년에 사용된 UHF 송신기들은 수평 동기화 신호의 품질이 좋지 않아서 스테레오 방송을 송출할 수 없었으며, 이후 나온 송신기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라이선스 DBX 압신 기법의 사용으로 인해 MTS를 복호화하는 아날로그 회로를 사용하는 모든 텔레비전은 초기에는 DBX 사에 로열티를 지불하였고, 1989년에는 분사된 THAT 사에 로열티를 지불하였다. THAT 사는 1994년에 특허를 인수하였고, 2004년에 특허권이 만료되었다. THAT 사는 디지털 MTS 구현에 관한 특허를 소유하고 있으나, 2007년 NTIA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모든 아날로그 및 일부 디지털 MTS 구현에 대해서 로열티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미국의 디지털 전환 NTSC 표준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2009년 6월 12일 미국의 디지털 전환 이후 MTS는 미국의 광역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저전력 송출 방송국 및 아날로그 케이블 방송에서는 계속 사용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 기금으로 제공되는 셋톱박스는 RCA 커넥터를 사용하여 스테레오 음성을 출력할 수 있어야 하나, MTS는 선택 사항으로 남겨졌다. MTS가 선택 사항이 된 이유는 비용 절감 때문이라고 밝혔으나 THAT 사의 로열티 지불을 피해 가기 위해서라는 측면도 있다. THAT 사는 이후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DTV 전환과 MTS에 대한 페이지를 만들었다. 이 사이트에서는 RF 전용 커넥터를 대부분 사용하며 MTS는 셋톱박스에서 선택 사항이기 때문에 디지털 셋톱박스를 사용하는 대부분 사용자들은 모노 음성만 들을 수 있다고 밝혔다. 도입 아날로그 음성 다중에 MTS 방식을 사용하는 나라는 다음과 같다. 중화민국: NTSC 멕시코: NTSC 브라질: PAL-M 아르헨티나: PAL-N 칠레: NTSC 캐나다: NTSC 필리핀: NTSC 참조 같이 보기 NICAM A2 스테레오 텔레비전 기술 방송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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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B%A4%EC%9A%B4%EB%A1%9C%EB%93%9C%EB%8B%B7%EC%BB%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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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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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닷컴은 1996년부터 CNET 사에서 운영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자료실 웹 사이트이다. 정식 명칭은 CNET Download.com이다. 다운로드닷컴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뉘며, 이를테면 소프트웨어, 음악, 게임, 마지막으로 비디오가 있다. 다운로드닷컴의 자료들은 FTP로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며, 비디오나 음악은 스트리밍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모두 10,000 여개가 넘는 프리웨어, 셰어웨어로 제공되는 소프트웨어를 다운로드해 볼 수 있는데, 가끔 일부 소프트웨어의 경우 편집자 리뷰나 스크린숏이 같이 제공되며, 방문자들도 모든 소프트웨어에 별점을 매기거나 리뷰를 쓸 수 있다. 외부 링크 다운로드닷컴 다운로드닷컴 뮤직 다운로드닷컴 비디오 파일 호스팅 음악 웹사이트 CBS 인터랙티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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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B%9E%9C%EB%93%9C%20%EA%B3%B5%EA%B5%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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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랜드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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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랜드 공국은 영국 서퍽주 근해에 있는 마이크로네이션이다. 1967년에 건국한 이래 스스로 공국임을 선언하고 있으며 공작이 통치한다. 역사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해안 방위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4개의 해상 요새와 다수의 해상 벙커를 건설하였다. 시랜드 공국이 영토로 삼고 있는 러프 요새는 원래 영국에서 10km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에 위치한 해상 요새로, 1942년에 건설되었다. 전시중에는 150~300명의 병력이 상시 거주하고 있었으나, 전쟁 종료 이후에 요새는 방치되었다. 그러던 것이 1967년 9월 2일 원래 영국 육군 소령이었으며 해적방송의 운영자였던 패디 로이 베이츠가 당시 영국의 영해 밖에 존재하고 있던 이 요새에 독립선언을 발표하여 이 요새를 시랜드라고 이름짓고 자신도 로이 1세라고 명명하였다. 영국은 재판을 걸었으나, 1968년 11월 25일에 나온 판결에 의하면, 시랜드 공국이 위치한 러프 요새는 영국의 영해 밖에 존재하며, 주변국들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영국의 사법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당시에는 3해리의 바다만 국가의 소유였으며 현재는 12해리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시랜드를 독립 국가로 인정한 나라나 정부는 없으며, 국제적으로 시랜드 공국은 인정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 국가는 여권, 화폐는 물론 축구 국가대표팀도 있다. 베이츠가 시랜드 공국을 선포한 이듬해인 1968년 영국 해군이 시랜드에 접근해 강제 퇴거를 시도했으나 베이츠가 경고 사격을 하는 등 강력히 대응하여 그냥 돌아갔다. 1967년에 패디 로이 베이츠는 시랜드 공국을 독립국으로 선언하고 자신을 공작이라 칭하여 자신의 가족들과 시랜드 공국의 주민을 자처한 20여명의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러프 요새의 안에는 로이 1세의 가족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1년 후에 러프 요새의 근처를 지나던 영국 해군의 함정이 요새의 해상 벙커에서 많은 주민들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위협을 느낀, 로이 1세의 아들인 마이클 베이츠가 영국 해군의 함정에 총격을 가하였다. 당황한 영국 해군은 군사를 모아 시랜드 공국이 있는 러프 요새에 진입하고 강제로 로이와 그의 가족 및 시랜드 공국의 주민들을 강제 퇴거시키려고 하였으나, 이에 대한 영국 법원은 '시랜드는 영국 영해 밖 공해상에 있기 때문에 영국의 사법권이 미칠 수 없다'라고 판결을 내리면서 영국 해군에게 회항하도록 하여 일단 내렸다. 이렇게 시랜드 공국은 끈질기게 독립을 지켜내었다. 외자의 난 외자의 난은 1978년에 시랜드 공국에서 일어난 유일한 내전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시랜드 공국은 독립에 대한 진지함을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배경 1978년에 시랜드 공국에 알렉산드르 아헨바흐라는 독일인과 한 독일 사업가와 네덜란드 사업가가 찾아왔다. 돈이 많은 그들은 여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였고, 시랜드 섬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 위하여 당시 시랜드의 공작이었던 로이 1세가 잠시 요새를 떠난 사이 그의 아들인 마이클 베이츠를 포로로 잡고 무단으로 시랜드 안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점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로이 1세와 당시 시랜드 공국의 주민으로 등록되어 있던 20명의 사람들이 총출동하여 그들을 진압하고, 그 사업가들을 포로로 삼아 독일 정부와 포로협상을 벌였다. 결국 사업가는 떠나고 시랜드는 독립을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 중 네덜란드 사업가는 시랜드의 총리였다. 시랜드 공국에서는 사건을 '외자의 난'이라고 부르고 있고 이 사건은 시랜드 공국의 유일한 독립 운동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현재 상황 1999년 로이 1세의 양위로 아들 마이클이 2대 공작이 되었다. 한때는 시랜드 공국에서 발행한 여권이 위조 되어 국제경찰이 범인을 찾고 있으나 아시아를 비롯 전 세계에서 마약밀매 등에 사용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시랜드 공국의 여권이 범죄에 인기인 것은 영국인들도 시랜드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위조해도 들킬 가능성이 적다는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2006년 6월 23일, 노후화된 발전기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당시 상주하고 있던 단 한 명의 병사는 영국 공군에 의해 구조되었다. 화재 후 국토는 폐허가 되었다. 그 후 시랜드의 구조물을 재건하는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2006년 11월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이 공사로 인해 재정난에 시달리던 2대 공작인 마이클 베이츠는 2007년 1월에 시랜드 공국의 공작위와 영토를 통째로 매물로 내놓았다. 이 같은 사실이 잠시 큰 화제가 되었고, 이에 한 일본인이 시랜드 공국을 매입할 의사를 밝혔으나, 교통 불편 등의 이유로 매입 의사를 철회하였다. 지리 이 나라는 인공 구조물인 러프 요새에 세워져 있으며, 북종쪽으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영국의 서퍽주와 접하고 있다. 러프 요새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건설된 콘크리트 구조의 해상 요새로 면적은 550 m²으로 집계되어 있다. 정치 이 나라는 공작이 통치하는 군주제 국가이다. 영국과는 달리 총리가 없으며, 국민이라고해야 2대 공작인 마이클 베이츠, 그리고 이들의 가족과 이들에 의해 고용된 일부 사람들이 전부이므로 사실상 전제군주제가 실시되고 있다. 본래 한화로 약 9만원의 가격으로 백작의 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가, 이후에 한화 약 4만 5천원으로 가치가 하락했다. 스포츠 시랜드 공국이 이렇게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자체 축구 국가대표팀을 선발한 적이 있다. 각주 외부 링크 시랜드 공국 웹사이트 시랜드 공국의 재건을 진행한 처치 앤 이스트 사 웹사이트 1967년 설립 서퍽주 인공섬 영국의 마이크로네이션 영국의 분리주의 북해 마이크로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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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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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D%99%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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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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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박홍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박홍은 대한민국의 성직자이며 서강대학교 교수, 총장을 역임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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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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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A2%85%ED%95%9C%20%28%EC%8B%9C%EC%9D%B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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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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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한은 한국의 시인이다. 호는 고구려의 재상 을파소의 이름에서 따온 을파소이다. 생애 함경북도 경성 출생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니혼 대학 예술과를 졸업했다. 도쿄에서 시 동인지에서 활동하면서 순수시를 쓰기 시작했다.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민요풍의 순수시인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을 당선시켰다. 1939년 《문장》에 시인 정지용의 추천으로 시를 실으면서 정식 등단하였다. 이후 《인문평론》과 《매일신보》의 기자를 지냈고, 《국민문학》에는 편집인으로 참여했다. 1943년 시집 《수유근지가》와 《설백집)》을 펴냈으나, 이듬해 한국 시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던 중 31세의 나이에 폐병으로 요절했다. 김종한은 짧은 기간 동안 활동했지만 친일 매체인 매일신보의 기자로 근무한데다 집중적으로 창작 활동에 참여한 기간이 태평양 전쟁 시기와 겹치면서 친일 시를 많이 창작했다. 194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4년 동안 전쟁을 아름다운 낙화에 비유한 〈살구꽃처럼〉 을 포함한 친일 시 9편과 전사한 군인의 유가족을 찾아가 만난 뒤 쓴 〈영예의 유가족을 찾아서〉 등 총 22편의 친일 저작물을 발표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김종한의 시는 속도감, 공간성을 활용한 기교적인 면모와 함께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념성과 거리를 두면서 섬세한 언어와 민요조의 전통적 정서에 중점을 두는 작풍은 스승인 정지용과 박목월, 박두진이 구성한 청록파와 유사하다. 작가들이 정치적 압박을 받으며 창작한 일제강점기 말기의 친일 시들이 일반적으로 선동성에 치중한 나머지 품격이 떨어지는데 반하여, 김종한의 친일 시는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다는 평도 있다. 김종한은 문단의 괴짜로 알려져 있었으며, 소설가 최정희에 대한 끈질긴 구애 사건도 유명하다. 참고자료 각주 1914년 출생 1944년 사망 일제강점기의 시인 안동 김씨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함경북도 출신 니혼 대학 동문 20세기 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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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C%93%B0%EB%9D%BC%20%EB%8B%A4%EB%A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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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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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 다로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제11, 13, 15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고, 대만협회학교를 창립하여 초대 교장을 지냈다. 다로는 통칭이며 본명은 기요즈미이다. 자작에서 공작까지 승작한 불세출의 인물이다. 생애 1848년 나가토국 아부군 하기정 태생 조슈 번사로서 오에노 히로모토와 가쓰라 모토즈미의 후손이다. 1860년 번 정부의 서양식 훈련에 참가하였다. 1868년에는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에 활약하였고, 보신 전쟁에 참전하여 적정 정찰과 정찰 임무, 연락책 등의 후방 지원을 담당하여 메이지 유신의 출발에 기여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부터 1873년 사이에는 요코하마 어학학교를 거쳐 독일로 자비 유학, 국방 과학을 수학했으며, 1875년부터 1878년, 1884년부터 1885년에는 독일의 일본 대사관 주재 무관으로 복무했다. 귀국 후 야마가타 아리토모 아래에서 군제를 배워 1886년에는 육군 차관이 되었다. 청일전쟁에서는 제3사단장이 되었고, 황해 동북 연안으로부터 해성까지 진격, 잉커우 시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896년 6월 2일부터 1896년 10월에는 제2대 타이완 총독직을 맡았다. 이후 1898년 ~ 1901년에는 이토 히로부미 내각,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 야마가타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했다. 1901년 6월 2일 총리로 취임하였고, 이후 사이온지 긴모치와 교대로 총리대신직을 수행하여 게이엔 시대로 불린다. 1901년 6월 ~ 1906년, 1908년 7월 ~ 1911년 8월, 1912년 12월 ~ 1913년 2월에 총리직을 역임하여 총 2,886일 동안 총리직을 맡았다. 1905년 7월 29일에는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2차 내각에서는 한일 합방을 성사시켰다. 1913년, 가쓰라 3차 내각이 열렸다. 그러자 가쓰라를 비판하며 헌정 옹호 운동이 일어났고, 급기야 2월 10일에는 민중들이 의회를 둘러싸고 어용 신문사와 경찰을 습격했다. 결국 가쓰라는 퇴진했고, 내각은 붕괴했다. 이것은 일본 역사상 최초로 민중이 내각을 무너뜨린 예가 되었다. 그는 이로부터 몇 달 뒤인 1913년 10월, 도쿄에서 사망했다. 사후 공작위는 장손 고타로가 습작하였다. 평가 가쓰라는 경험이 많은 정치인이었지만 군비 확장과 대외 세력 확대에만 열중했다. 또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오른팔 노릇을 하면서 그 정적 이토 히로부미에게 접근하고, 한편으로는 사이온지 긴모치와도 신을 잡는 등 눈치 빠른 정치인으로, 현대 일본 자민당의 눈치 정치·파벌 정치의 원형이 되었으며, 조선 식민화를 주도한 등의 대외정책은 일본에 큰 화근을 남겼다. 같이 보기 제1차 가쓰라 내각 제2차 가쓰라 내각 제3차 가쓰라 내각 가쓰라 태프트 밀약 다쿠쇼쿠 대학 각주 참고 자료 외부 링크 「가쓰라 다로」, 《브리태니커 백과》 1848년 출생 1913년 사망 가쓰라 다로가 일본 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일본 육군 대장 일본의 대장대신 일본의 외무대신 일본의 내무대신 일본의 문부대신 일본의 육군대신 일본 귀족원 의원 일본의 공작 일본의 후작 일본의 백작 일본의 자작 청일 전쟁 관련자 일본의 러일 전쟁 관련자 보신 전쟁 관련자 동양척식주식회사 관련자 대만 총독 야마구치현 출신 막말 조슈번 사람 나가토국 사람 금척대훈장 수훈자 공3급 금치훈장 수훈자 대훈위 국화대수장 수훈자 대십자 적수리 훈장 수훈자 대훈위 국화장경식 수훈자 훈1등 욱일대수장 수훈자 훈1등 서보장 수훈자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 훈장 수훈자 다쿠쇼쿠 대학 교수 다이쇼 시대의 내각총리대신 메이지 시대의 내각총리대신 일본의 원로 대학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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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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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9%98%EA%B2%BD%20%EB%B9%84%EC%9D%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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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경 비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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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경 비음은 자음의 하나로 이나 잇몸에서 조음되는 비음이다. 특징 조음 방법은 조음기관 내의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여 만드는 파열음이다. 발성 기관 속의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고, 일부를 코로 흐르게 했다가 내는 비음이다. 혀를 치조나 그 주변에 대는 치경음이다. 조음할 때 성대가 울리는 유성음이다. 코와 입을 통하여 공기가 빠져나가는 비강음이다. 기류가 혀 옆이 아니라 중앙으로 빠져나가는 중설음이다. 발성 방법은 인후나 입이 아니라 폐로부터 발성기관으로 공기가 빠져나가는 폐장기류음이다. 발음의 예 한국어: ㄴ 뒤에 /i, j/가 오지 않을 때, 뒤에 초성 'ㄴ'이 오는 받침 'ㄷ'이 이 소리가 난다. 일본어: 'な'행의 모든 소리, t, d, n 앞에 오는 'ん'이 이 소리가 난다. 유럽어: désin, ancore, español처럼, 'n'이 비모음, 연구개화, 경구개화하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n'이 이 소리가 난다. 중국어: 병음 'n'이 이 소리가 난다. 러시아어: Н가 이 소리가 난다. 치음 후치경음 치경음 비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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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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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A0%EC%9D%B8%EC%B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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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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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인채는 이자가 붙지않지만 채권가격이 액면가격보다 낮은 채권이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때 처음 등장한 이후로 계속 이용된 이자 지급 방법이며, 한국에서 할인채가 적용되는 대표적인 예로는 1년 만기 은행채, 통화안정증권, 장기신용채 등이 있다. 공식 약정 액면가/n 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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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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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C%8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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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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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동사는 사람이나 사물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품사이다. 동사는 추위로 인한 죽음이다. 《동사》는 조선 중기 허목이 지은 역사 책이다. 《동사》는 조선 후기 이종휘가 지은 역사 책이다. 동사는 충청남도 서산시에 있는 절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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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A6%AC%EC%8A%A4%EC%96%B4%EC%9D%98%20%EC%97%AD%EC%8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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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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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의 역사는 그리스어와 관련된 역사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이다. 기원 그리스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론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한 이론은 원시 그리스어 화자들이 그리스 반도로 이주하면서 그리스어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기원전 2500년경부터 기원전 1700년경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본다. 또다른 이론은 원시 그리스어 이전 시기에 그리스로의 이주가 이루어졌으며 그리스어의 특징적인 소리 변화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선형문자 B 그리스어를 기록하는 데 쓰였다고 최초로 알려진 문자는 선형문자 B 음절문자이다. 이 문자는 고대 미케네 방언을 기록하는 데 쓰였다. 미케네 문명의 몰락 이후에 약 500여 년 동안 아무런 기록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 이 시기에 남겨진 기록은 나오지 않았다. 초기 고전 시기 이후부터는 그리스어는 페니키아 알파벳에서 유래한 그리스 알파벳으로 쓰여왔다. 이러한 알파벳의 도입은 호메로스 시기 즈음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시에서 선형문자 B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짤막한 언급이 있다. 고대 그리스어 방언 고대 그리스어기와 고전 그리스기 동안에 그리스어에는 3개의 주된 방언이 있었다. 이것은 아이올리스 방언과 이오니아 방언, 도리아 방언이며, 이것은 그리스의 3개 주요 부족과 대응한다. 아이올리스인들은 주로 에게해의 섬지역과 스미르네 북쪽의 소아시아 서해안에서 주로 거주했다. 그리고 이오니아 인들은 주로 스미르네와 그 남쪽지역의 소아시아 서해안에 정찰했으며 도리아인들은 스파르타, 크레타와 같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안가나 소아시아의 최남단 서해안에서 주로 살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이오니아 문장체의 한 종류로 쓰였으나 여기에 다소 다른 방언에서의 차용어도 들어있다. 그래서 이오니아 방언은 후기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인들의 등장 이전까지 고대 그리스어의 주된 문학어였다. 도리아어는 핀다로스와 그리스 비극 합창곡과 같은 그리스 서정시의 기준이기도 했다. 아티카 그리스어 아티카 그리스어는 이오니아 방언의 하위 방언으로 수세기 동안 아테네인들의 언어였다. 대부분의 현존하는 고전 그리스 문학은 아티카 방언으로 쓰였는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작가의 글들도 여기에 포함되며 고전 시기부터 기록된 형태로 남아서 전해 내려온다. 헬레니즘 그리스어 - 코이네 그리스어 그리스인들이 소아시아와 이집트, 중동 지역을 식민지화하면서 그리스어는 다양한 방언들로 나누어 발전하기 시작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러한 방언들을 모아 합쳐서 코이네 그리스어를 만들게 했다. 하나의 공통된 언어를 강제함으로써 알렉산더의 연합 군대는 내부적으로 다른 방언을 쓰는 출신끼리 소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코이네 그리스어는 알렉산더가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도 배우게 되면서 코이네 그리스어는 헬레니즘 세계의 공용어가 되었다. 그리스어는 알렉산더 이후에도 헬레니즘 시기 동안 계속해서 쓰였다. 이 시기 동안 히브리 성서의 그리스 번역본인 70인역 성서가 등장했다. 수세기 동안 그리스어는 로마 제국의 동쪽 반 부분에서 링구아 프랑카였다. 신약성서가 등장한 것은 로마제국 시기였으며 코이네 그리스어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만들어진 가장 유명한 문학작품의 이름을 따서 '신약성서 그리스어'로 불렸다. 중세 그리스어 그리스어는 1453년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할 때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공식 언어였다. 오스만 투르크가 지중해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던 시기에 그리스 지역에는 문맹률이 증가하였고 이것은 그리스어가 각기 나뉜 교육 학파들의 언어로 분화되는 것을 막게 했다. 현대 그리스어 1829년 그리스가 독립 국가로서 성립한 이후, 카타레부사가 그리스의 유일하게 용인되는 그리스어, 즉 국가의 공식 언어로 결정되었다. 카타레부사는 그리스 정교에서 쓰이던 형태로서 비잔티움 제국 시기부터 언어를 정화하려는 의도로 쓰이던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리스 정부가 고대 그리스의 문화 유산을 이용하려는 노력에 따른 것이기도 하였으며, 이 시기 많은 서방 지식인들이 그리스인들이 독립하고자 분투한 데 느낀 공감에 부응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는 전쟁과도 비견할만한 언어에 대한 토론과 파벌 싸움으로 이어졌다. 이 당시의 파벌은 '디모티키스테스'라고 하는 민중 그리스어를 지지하는 측과 '로이이이'또는 '카타레부샤니'라고 하는 '정화된 언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민중 그리스어는 공식적인 업무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카타레부사 사용은 페리클레스의 고대 아테네부터 현대 아테네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인들의 말과 사고방식이 계속 이어져왔다는 생각을 강조하는 것이 당시 정부 방침이었다. 그래서 민중 그리스어를 공식적인 발표나 문서에서 쓰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런데 1974년의 임시정부가 붕괴하고 메타폴리테프시의 시기를 끝나면서 민중 그리스어는 일상 언어인 동시에 그리스 정부가 공인하는 공식 언어로 인정받게 된다. 참조 Geoffrey Horrocks, Greek: A History of the Language and Its Speakers . Addison Wesley Publishing Company, 1997. 같이 읽기 라틴어의 역사 외부 링크 이야니스 프시카리스의 전기와 그의 영향에 대한 책 "나의 여행" : 통속적 언어와 정화된 언어에 대한 논쟁 카르카비트사스의 짧은 전기 그리스어에 대한 간략한 역사 각주 헬레니즘 언어와 방언 그리스어 언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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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6%90%EC%98%A4%EA%B3%B5%20%28%EB%93%9C%EB%9E%98%EA%B3%A4%EB%B3%B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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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 (드래곤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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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은 토리야마 아키라의 만화 드래곤볼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다. 서유기의 손오공으로부터 딴 이름이다. 애니메이션 모두 제1화로부터 등장한다. 부제는 어느 쪽이나 "부르마와 손오공"이다. 애니메이션의 일본판 성우는 노자와 마사코이다. 한국어 비디오판 및 투니버스판 김환진 극장판 고 백순철 드래곤볼 카이부터 김영선이 맡고있다 북미 영어 더빙판은 숀 셰멀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드래곤볼 에볼루션'의 배우는 져스틴 채트윈으로, 더빙은 야마구치 캇페이이다. 캐릭터 개요 신장 175 cm, 체중 62kg이며, 탄생년도는 AGE 737년, 취미는 강한 상대를 찾아 대련하는 것이다. 딱히 싫어하는 음식은 없다. 드래곤볼의 주인공으로, 한 때 잠시 동안 아들인 "손오반"이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한 적이 있었으나 마지막엔 다시 주인공의 자리를 돌려받는다. 키워준 양할아버지 "손오반", 거북선인, 선묘 "카린", 지구의 신, 북의 "계왕" 등, 작중 가장 많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도복의 유파마크도 시기에 따라 변화하였다. 태어나자마자 지구로 파견된 전투민족 '사이어인'으로, "오공"을 주워서 키워준 "손오반"에 의하면 갓난아기일 무렵엔 성격이 너무도 포악해서 손을 대지도 못할 지경이었으나, 어느 날 실수로 머리를 크게 부딪친 후로는 성격의 난폭함이 사라지고 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이어인의 본성'만은 그대로 남아있기에 강한 상대와 싸우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고 있어서 소년시절부터 많은 동료와 라이벌 등을 만나 싸우면서 성장해왔다. 일본 원작에서 "오공"은 일인칭을 "오레"가 아닌 "오라"로 하는 등 동북편 쪽의 사투리를 쓰고 있으며, 처음 초사이어인이 되었을 당시에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 것을 통해 성격이 변했음을 나타내었으나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의 수련 이후에서는 변신 후에도 평상심을 유지하게 되어 동북편 쪽의 사투리를 쓴다. 사이어인 이름 사이야인에서 사이야는 채소를 뜻하는 일본말인 야채에서 생겨난 말로 채소의 한자의 순서를 뒤집어서 표기한 것이다. 즉, 사이어인은 채소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사이어인은 전부 채소와 관련되어있다. "손오공"은 "카카로트"라는 이름의 사이어인으로 태어났는데, 이 이름은 당근을 뜻하는 영어 단어 'carrot'에서 나왔다. 처음에 손오공은 자신이 다른 행성들을 파괴하고 다니는 사이어인들과 동족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만 그는 프리저와 싸우는 도중에 이를 인정하게 된다. "손오공"을 "카카로트"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몇몇 사이어인들 뿐이다. 베지터는 "손오공"이 자신의 혈통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를 카카로트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려 한다. "손오공"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족들의 이름도 전부 식물의 뿌리에서 나왔다. "오공"의 형 "라디츠"는 무를 뜻하는 영어 단어 radish, 아버지 "버독"은 우엉을 뜻하는 영어 단어 burdock이 어원이다. 인물상 밝고 명랑한 성격이며,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있다. 매우 착한 성품을 지니고 있다. 항상 전투나 긴급시에는 주변에 사는 생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엄격하게 대응하는 면이 있다. 솔직하고 착한 성격 때문에, 전투불능의 상대에게는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는 않고 '이 곳에서 떠나 돌아가라'며 충고한다. 식욕이 매우 왕성하고 대식가이며, 몇 십인 분의 요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워버린다. 강한 상대를 찾아 싸우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하여, 그 압도적인 전투능력과 맑고 깨끗한 마음에 의해 지구, 나아가서는 전 우주를 구원한다. 전투는 좋아하지만 상대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대를 꺾는다.'를 목표로 한다. 이러한 면은 거북선인의 가르침과 일치되기도 한다. 싸움에 임하는 자세가 시기에 따라 변화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엔 사투에 관해서는 일대 일을 바라지만, 지구, 나아가서는 우주 전체를 말려들게 하는 강적과의 투쟁에서는 총력전도 실시한다. 사망력 본편에서는 2번 죽었었다. 그의 첫번째 죽음은 "라데츠"를 쓰러트리기 위해서 "피콜로"의 '마관광살포'를 "라데츠"를 붙잡은 채로 맞아 관통 당해 죽은 것, 그리고 2번째는 "손오반"에게 당하자 끝에 지구를 길동무 삼아 자폭하려한 "셀"의 저지에 의한 것으로, 모두 지구에 중대한 위기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판단한 결과에 의한 것이다. 연표 AGE 737 '혹성 베지터'에서 사이어인의 하급전사 버독과 기네에 차남으로 AGE737년 탄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이어인 반란 전쟁'에 의해 혹성 베지터는 프리저에 의해서 AGE737년에 소멸 당한다. 거의 모든 사이어인이 죽고, 마지막까지 단신으로 저항한 손오공의 아버지 버독도 이때 전사 한다. 지구로 간 손오공은 손오반에게 주워진다. 손오반에게 발견됐을 때 처음엔 식욕도 많고 발광하고 있어 어찌할 도리가 없었지만, 어느날 실수로 골짜기로부터 떨어져 머리를 강타당해 기억의 일부를 잃으면서 얌전해진다. 그 때의 상처 자국은 성장해도 머리에 남아 있다. AGE 737 ~ 749 만월의 밤은 괴물이 나오기 때문에 결코 밖에 나와선 안된다고 손오반에게 듣는다. 어느 날, 손오공은 소변을 보기 위해서 밖에 나오고 만월을 보고 거대원숭이 오자루로 변신 후, 양할아버지인 "손오반"을 밟아 죽여 버린다. 이후, 손오공은 유품인 4성구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산속에서 홀로 살게 된다. AGE 749 ~ 750 드래곤볼을 찾으러온 소녀 '부르마'와 만나, 모든 드래곤볼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을 계속하며 '거북선인'이나 '야무치', '치치'등을 만난다. 드래곤볼 찾기가 끝난 뒤, '크리링'과 함께 거북선류에 입문한다. AGE 750~751 8개월간의 수련을 받고, 제21회 천하제일 무도회에 출장. 결승에서 거북선인이 변장한 '잭키 춘'에게 져 준우승을 한다. 무도회 종료 후, 할아버지의 유품인 4성구를 다시 찾기 위해 레드리본군과 싸우면서 다시 여행을 한다. AGE 753 제22회 천하제일 무도회에 출장해, 천진반에게 져서 또 다시 준우승을 한다. 대회 종료 후, "크리링"이 '피콜로'의 부하 '탬버린'에게 살해당하자 탬버린을 추적 야지로베와 만난 후 피콜로를 만나지만 패배하고 만다. 그 후 카린탑에서 '초신수'를 마셔 파워업을 한 후, 피콜로 대마왕을 쓰러트리고 천계에다가 드래곤볼을 부활시켜 동료들을 환생시킨 후 그대로 천계에서 수행을 한다. AGE 756 제23회 천하제일 무도회에 출장해 치치와 재회 후 결혼한다. 피콜로 대마왕의 아들이자 환생인 '마쥬니어'와 사투 후 그를 쓰러트려 처음 우승하지만, 그에게 선두를 먹이고 풀어준다. AGE 757 아들 손오반을 낳는다. AGE 758 ~ 761 지금까지 자신은 지구인이라고 생각했으나 형인 "라데츠"와 만나, 자신이 '사이어인'이라는 우주의 '전투민족'이라고 하는 출생을 알게 된다. 지구에 오는 사이어인에 대항하기 위해 저 세상에서 '계왕'에게 수련을 받는다. AGE 762 지구로 귀환한 오공은 사이어인과 싸우고 있는 동료들의 곁으로 향한다. '야무치', '천진반', '차오즈', '피콜로' 모두 살해당한 것을 본 오공은 내퍼를 쓰러트리고 '베지터'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지만 '손오반', '크리링', '야지로베'의 협력을 얻어 간신히 해치운다. 이 때 크리링이 베지터를 야지로베의 검으로 죽이려 하나 그를 저지한다. 베지터와의 전투 이후 죽은 동료들을 환생시키기 위해 손오반, 크리링, 부르마와 나메크성으로 향한다. 가장 친한 친구였던 크리링이 프리저에게 공중폭발 분해에 의한 죽음을 당하자 '전설의 전사'라고 전해지던 '슈퍼사이야인'으로 각성하고 프리저를 쓰러트린다. AGE 762 ~ 766 '기뉴특전대'의 우주선으로 나메크성을 탈출해 야드래트성에서 순간이동을 습득한다. 이후, 지구로 돌아와 미래에서 온 소년 '트랭크스'가 복수하러온 프리저 일당을 쓰러트렸단 이야기와 트랭크스가 과거로 오게 된 이야기, 인조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수행에 돌입한다. AGE 767 인조인간 "19호", "20호"와의 전투 중 심장병의 발작이 일어나 자택에서 휴양, 그 이후, 인조인간이나 새롭게 나타난 "셀"을 쓰러트리기 위해 "오반"을 데리고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수련한다. 이때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수련을 했기에 신체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 수행 이후에는 셀게임 개최사실을 듣고 그 동안은 자택에서 "오반","치치"와 함께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셀게임에서는 자폭하려는 "셀"을 저지하려다 사망한다. AGE 767 ~ 774 손오반이 셀을 저지하는 것을 보고, 슈퍼사이야인2를 자력으로 습득, 손오반의 친구 비델과 베지터도 나오는 천하제일 무도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1일간 귀환하여 이승에 친구들과 싸우려 특훈. AGE 774 점쟁이 "바바"의 힘에 의해 1일간 이승으로 돌아와 제25회 천하제일 무도회에 출장하지만, "마인부우" 소동에 말려든다. 이때 '슈퍼사이야인 3'를 처음 선보인다. 후에 "노계왕신"의 생명을 받아 "오천크스"를 흡수한 부우에게 밀리는 오반을 도우러 다시 소생한다. 베지터와의합체는 풀리고 계왕신계어서의 싸움 끝에 지구인 전부의 원기를 모은 원기옥으로 "마인부우"를 쓰러트린다. 이때 "오공"은 '다음엔 꼭 착한 녀석으로 환생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염라대왕"이 이를 생각하고 지구 남쪽 섬의 아이로 환생시킨다. AGE 776 프리저의 부하인 아보&카도가 지구를 찾아와 복수하려고 하자 저지한다. AGE 778 파괴신 비루스에 의해 자신이 몰랐던 슈퍼사이야인 갓의 경지를 체득. AGE 779년 경 프리저 잔당들이 프리더를 되살려 지구에 찾아와 더욱 더 강해진 프리저를 저지한다. AGE 780년 경 무의식의 극의를 힘의 대회에서 징조부터 완성형까지 발동시켰다. 브로리와 대면했고 브로리를 베지터와 상대해 원래 살던 별로 보냄. AGE 784 제28회 천하제일 무도회에 출장해, 본선 1회전에서 "부우"의 환생인 "우부"와 대전. 이 후, "우부"와 함께 수련여행을 떠난다. 손오공의 기술 카메하메하 거북선류의 간판기술, 거북선인이 50년을 걸쳐 개발했다고 하며. 이 후에도 "오공"은 이를 트레이드마크로 사용한다. 비권 무의식의 극의 상태에서 사용한 기술. 매우 빠르게 주먹을 날려 풍압으로 상대에게 타격을 주는 기술이다. 파이널 에네르기파 드래곤볼 슈퍼에 자주 등장하는 기술로 "베지터"의 파이널 플래시라는 기술과 에네르기파가 합쳐진 기술로써 에네르기파에 파이널 플래시가 둘러지는 것과 동시에 엄청 강력한 빔을 동시에 쏘는 기술이다. 초 에네르기파 손오공이 "신님"과 미스터 포포와 특훈하며 발명한 기술. 말그대로 에네르기파의 위력을 훨씬 웃도는 거대판. 발 에네르기파 "오공"이 에네르기파를 독자적으로 개량한 기술. 말 그대로 에네르기파를 손이 아닌 발로 사용하는 기술이다. 양손 유도 에네르기파 양손에서 에네르기파를 구체형으로 하나씩 발사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기술 가위바위보 권법 양할아버지인 "손오반"의 기술. 말 그대로 가위 바위 보를 이용해 공격한다. 등장부터 소년기에는 많이 사용하였으나 레드리본군편을 마지막으로 이 기술이 등장한 적은 없다. 잔상권 고속으로 이동하여 잔상을 남겨, 상대에게 자신의 위치를 오인시킨다. 발생시키는 잔상의 수에 의하여 '삼중잔상권'.'다중잔상권'이라고 불린다."재키 츈"[거북선인]이 처음 선보이고 "오공"이 이후에 바로 습득 후 따라한다. 마주니어와의 싸움 때만 해도 가끔 쓰였지만, 사이야인과의 싸움부터는 거의 등장하지 않음. 프리저와의 최종전에서 한번 프리저의 기원참을 피하는데 그침. 광권 광견과 같이 상대에게 달려들어 놀라게 하고, 상대를 공격한다. 원권 원숭이를 흉내 내는 권법 팔수권 손이 8개로 보일정도로 민첩하게 손을 움직인다. "천진반"의 사요권에 대항하기 위해 "차파왕"의 기술을 흉내 내어 사용 태양권 체내의 기운을 발광시켜. 상대의 눈을 잠시 동안 멀게 하는 기술. 원래는 "학선류"의 기술이지만, 제23회 천하제일 무도회에서 '"천진반", 네 기술 좀 빌릴게!'라고 하면서 사용했다. 충격파 제23회 천하제일 무도회에서 첫 선보인다. 지구의 신에게 전수받은 기술로 맹렬한 기세로 내보인 주먹으로부터 방출해내는 기술이다. "피콜로"가 '마족에 가까운 기술'이라고 말하였다. 메테오 콤비네이션 제23회 천하제일 무도회에서 "피콜로"와의 결승전에서 첫 선보인 기술 '준비, 땅!'이라는 구령과 함께 스타트 대시의 자세로 돌격해, 연속공격을 퍼부은 뒤 상대방의 바로 위로 도약후 에네르기파를 발사한다. 원기옥 산, 동물, 바다 등, 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에게로부터 조금씩 에너지를 나누어 받아, 그 에너지를 구체 모양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북쪽의 신 "계왕"이 개발해낸 기술로 기술을 시전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이 상당히 길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만큼 파괴력은 어마어마하다. 눈으로 적을 찾아 맞추는 것이 아닌 적의 사악한 기운을 잡아내어 맞힌다. 원기옥은 3종류가 있다. 소형 원기옥, 소형 원기옥은 직접 손바닥에 기를 모운후 발사한다. 적을 맞추면 그 주위로 강력한 천둥번개가 치며 이후 적의 몸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특대 원기옥, 소형 원기옥가 달리 모은 에너지를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고 하늘위에 모은다. 한 별이 아닌, 여러 근처의 별의 에너지를 함께 빌려쓰거나, 조금이 아닌 쥐어짜낼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 공격할 수 있다. 초 원기옥, 특대 원기옥을 발사한 뒤 자신에게 남은 힘을 원기옥을 향해 발사하여 원기옥에 위력을 더한다. 하지만, 이 기술은 원기옥을 발사한 뒤 옆에 "덴데"와 같은 용족치유형 나메크성인이 있어야 가능하거나 드래곤볼로 소원을 빌어 기를 바로 회복해야만 가능하다. 계왕권 온 몸의 기를 컨트롤하여, 일시적으로 통상의 몇 배에 달하는 파워, 스피드, 방어력을 발휘시킨다. 2배, 3배, 4배... 계속하여 늘릴 수 있으나 발동시에는 몸에 매우 큰 부담이 가기 때문에, 사용자의 역량 이상의 파워업은 매우 위험하다, 매우 고도의 컨트롤이 요구되어 기술을 고안해낸 북의 "계왕"조차 제대로 사용하진 못하고, "오공"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사용시에는 전신이 붉게 빛을 내며 근육이 커진다. 20배까지 올릴순 있었어도 너무 기소모가 심해서 슈퍼사이언인의 변신이 가능하게 된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았다.드래곤볼 슈퍼에 넘어오면서 슈퍼사이어인 블루에 10배, 20배 계왕권을 중첩시켜 쓴다. 메테오 스메쉬 프리저에게 사용한 연속 공격 순간이동 알고 있는 사람의 기를 느껴서, 눈 깜짝할 새에 그 장소로 이동한다. 그 때문에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장소로는 이동할 수가 없다. 본래 야드래트성인들의 일족전승 기술이다. 기를 느끼기 위해서 손가락을 이마에 대면 집중이 잘되며 다른 별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기가 작은 일반인이거나 멀리 떨어진 별까지는 이동이 힘들다. 순간이동 에네르기파 순간이동과 에네르기파를 병행한 기술로 "셀"과의 격전 때 첫 선보인다. 무공술 전신의 기를 컨트롤 하면서 방출하는 것에 의해서, 공중을 비행한다. 원래는 "학선류"의 독자적인 기술이지만, 작중 등장하는 전사의 대부분이 이 기술을 체득을 했다. 오공이 첫 선보인 것은 제23회 천하제일 무도회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 후 "비델","손오천"이 "손오반"에게 배웠다. 사이코 메모리 상대방의 머리에 손을 올리는 것만으로 기억, 과거, 전투력을 읽을 수 있다. 나메크성에서 사용 현실읽기 꿈속에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보게 된다. 인조인간과의 전투에서 심장병이 발병하여 자택에서 혼수중일 때 사용하고 있었다. 기원참 기를 원반 모양으로 된 기술, 날카로운 모양으로 만들어 물체를 절단하는 기술로, "크리링"이 독자적으로 개발해낸 기술이다. 마인 부우편에서 1번 씀. 메테오 블러스트 순수 "마인부우"에게 사용한 연속공격, 연속공격을 내보낸 후 에네르기파를 발사한다. 메테오 임팩트 순수 "마인부우"에게 사용한 연속공격, 상대를 양 다리로 차고 양손을 껴 두드려 떨어트려, 가까운 거리로 에네르기파를 발사한다. 용권 드래곤볼 극장판 13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GT에서도 세 번 썼던 기술, 용이 튀어나와 상대방을 뚫으는 기술이다. 초사이어인 1 전투력이 300만이상의 사이어인이 극도의 분노나 슬픔 또는 죽을 고비를 넘기면 강해지는 사이어인의 특성에 의해 변신하는데 손오공은 크리링이 프리저에게 죽었을 때 처음 사용했다. 초사이어인 2 변신조건은 초시이어인 1의 경지에 도달한 사이어인이 분노로 각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손오공과 베지터는 수련으로 초사이어인 2에 도달한것을 보아 분노가 필수요소는 아닌거 같다. 외형은 머리카락1가닥을 제외하고 나머지 머리카락은 강하게 위를 향하고 있고 아우라 주변에 스파크가 튄다. 손오반이 인조인간 16호가 죽었을 때 처음 사용했다. 초사이어인 3 노란색 머리가 허벅지까지 내려오고, 눈썹 근육이 비대해져서 눈썹이 사라졌다. 손오공이 마인부우와 싸우기 위해 24시간 부활했을 때 처음 사용했다. 하지만 에너지 소모가 커서 이승제한시간이 급격히 줄었다. 초사이어인 4 초사이어인 4는 꼬리가 있는 사이어인이 보름달을 보면 거대원숭이가 되는데 원숭이+초사이어인=황금 거대 원숭이에서 이성을 잃지 않으면 초사이어인 4 가 된다. 외형은 이전 변신들과 달리 무성한 흑발이고 몸은 빨간 털로 뒤덮여 있으며, 꼬리가 있어서 거대 원숭이의 힘을 인간 상태에서 사용 가능하다. 초사이어인 갓 옛날에 사이어인들이 악과 싸울 때 다섯명의 선한 마음을 가진 사이어인이 힘을 한명에게 모아 만들었다. 손오공은 비루스와 싸울 때 사용했다. 80분이라는 지속시간이 있다. 초사이어인 블루 손오공과 베지터가 부활의 F에서 골든프리저와 싸울 때 처음 사용했다. 초사이어인 블루 계왕권 드래곤볼 슈퍼에서 손오공이 히트와 싸울때 슈퍼사이어인 블루에다 10배를 중첩시켜 사용하였고 후에 힘의 대회에서 지렌,케프라와 싸울때 20배를 중첩시켜 사용했다. 무의식의 극의 사람은 눈으로 보고 신경을 지나 뇌를 통해 명령 하지만 무의식의 극의는 싸움의 극에 도달해서 몸이 반응한다. 지렌에게 원기옥을 발사하다 지렌의 힘과 원기옥이 서로 부딫혔을 때 그 충격으로 원기옥의 기를 모두 흡수해 발동시켰다. 무의식의 극의 징조 상태와 다르게 머리색이 모두 은색이고 눈색과 눈썹 색도 은색이고 변신도 오래 유지할 수 있으나 리스크가 매우 크다. 수백년동안 살아온 파괴신들도 할 수 없지만 손오공이 도달해냈다.이건 천사들의 기술이다.위스같은 천사들은 항상 무의식의 극의를 사용하고있다. 참조 드래곤볼의 등장인물 가공의 무술가 사이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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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8%B8%20%28%EA%B0%80%EC%88%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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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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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대한민국의 음악가이다. 주요 사항 힙합 듀오였던 리쌍에서 랩과 보컬을 맡았으며, 주로 보컬 위주로 활동했다. 허니 패밀리 시절 킬이라는 예명으로 데뷔했으나, 후에 길로 고쳤으며, 예명은 자신의 성씨에서 따왔다. 학력 1985년~1991년 서울언주초등학교 1991년~1993년 영동중학교 1993년~1996년 과천외국어고등학교 독일어과 활동 1997년 엑스틴의 객원 멤버로 데뷔하였다. 1999년 힙합 그룹 허니 패밀리를 거쳐 이후 2002년부터 개리와 함께 리쌍으로 활동하였다. 현재는 개리와 따로 활동을 하고 있다. 무한도전을 하고 있을때 정형돈과 함께 음악 그룹 뚱's로 잠깐 활동했다. 2000년 같은 허니패밀리 멤버였던 디기리, 개리와 함께 그룹 '리쌈 트리오' 멤버로 잠시 활동하였다. 2009년 5월부터 2014년 4월까지 MBC의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 출연해 초창기 멤버로써 활동하였다. 2012년과 2013년에 보이스 코리아의 코치로 활동하였다. 2016년 리쌍컴퍼니의 하위 레이블이자 자신의 솔로 레이블인 매직 맨션을 설립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쇼미더머니 시즌 5의 프로듀서로 출연하였다. 무한도전의 前 멤버이며 군대는 면제로써 군복무를 전혀 안했던 사람이다. 면제 이유는 생계비가 없고 빈곤한 가정이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빈곤한 가정에서 성장을 해왔다. 생계비를 벌기 힘든 환경에서 성장했다 최근에 최보름과 결혼을 하여 외동아들 길하음을 분만하여 잘 키우고 있다. 종교는 개신교이며, 서울특별시 출신의 힙합 가수이자 방송인이다. 음반 솔로 음반 2015년 EP 《R.O.A.D PROJECT #1》 2016년 싱글 〈냉장고〉 참여 음반 Double K 1집 [Positive Mind] 사생결단 OST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OST MBC 무한도전 뚱's 《Go칼로리》 박명수 - Fyah 정인 1st EP 앨범 《정인 From Andromeda》 조문근 - 너라는 걸 brilliant is 정인 2nd EP 앨범 [Melody Remedy] BMK - [BMK & GOOD FELLAZ] 김진표 - [사랑따위 Part.2] MC 몽 - [The Way I Am] 백지영 4집 [Smile] 린 2집 [Can U See The Bright] 홍채린 2집 [+1] 《무한도전 올림픽대로 듀엣가요제》 《무한도전 서해안고속도로 가요제》 《박명수의 어떤가요》 《무한도전 자유로 가요제》 왁스 7집 《여자는 사랑을 먹고》 룰라 9집 《A9ain - Again》 《Blue Brand: 12 Doors》 MBC 무한도전 뚱스 〈쩔어〉 출연 작품 출연중/출연 예정 프로그램 종영 혹은 중도 하차한 프로그램 KBS 2TV 《해피선데이 - 꼬꼬 관광 싱글♥싱글》 - 고정 출연자 MBC 《무한도전》 - 카메오 → 정식 구성원 MBC 《놀러와》 KBS 2TV 《밤샘 버라이어티 야행성》 - 고정 MC MBC 《개그쇼 난생처음》 - 고정 MC TRENDY 《길의 뷰티 프로젝트 미인道》 KBS 2TV 《위기탈출 넘버원》 - 고정 MC MBC 《우리들의 일밤》 - 출연 Mnet 《텐트 인 더 시티》 tvN 《뉴턴》 Mnet 《보이스 코리아》 Mnet 《보이스 코리아 2》 Mnet 《Show Me The Money 5》 - 프로듀서로 출연 Mnet 《슈퍼스타K 2016》 - 심사위원 채널A 《아빠본색》 - 고정출연 영화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 상하이역 불량배 2 역 《댄싱퀸》 ... 슈퍼스타K 심사위원 역 뮤직비디오 조문근 - 〈너라는 걸〉 싸이 - 〈GENTLEMAN〉 이효리 - 〈Bad Girls〉 광고 2009년 하이트진로 맥스 2010년 피쉬&그릴 2010년 신한금융그룹 2010년 동아제약 모닝케어 2010년 JC엔터테인먼트 프리스타일 2011년 삼성화재 다이렉트 마이애니카 2012년 디아블로 3 2013년 브라이니클 2013년 소니 MDR 2013년 돈톡 2013년 현대자동차 Brilliant 홍보대사 2005년 대구 오리온스 홍보대사 2007년 한국권투위원회 프로복싱 홍보대사 수상 경력 2009년 제3회 Mnet 20s Choice 핫 버라이어티 스타상 2009년 MBC 방송연예대상 버라이어티부문 남자 신인상 2010년 제5회 에이 어워즈 이노베이션 부문 사건·사고 2010년 1월 25일에 일밤 - 에코하우스 녹화를 위해 경기도 양평으로 이동하던 도중 달려오는 트럭에 의해 교통사고를 당하여 부상을 입었고, 전치 5주의 진단을 받았다. 2014년 4월 23일, 0시 30분쯤 음주운전 혐의가 적발되어 면허가 취소되었다. 이에 대해 길 본인이 깊이 반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계속됐으며 결국 무한도전 9주년을 앞두고 자진 하차의 뜻을 밝혔다. 다만 공개적인 발언은 하지 않고, 측근이 대신 발표하였다. 복귀/근황 2014년 4월, 음주 운전으로 인해 모든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차하였고 1년 간의 자숙 후, 자숙 기간 동안 만든 디지털 싱글의 타이틀곡인 ‘주마등’의 발표를 통해 복귀하였다. 단, 방송을 통한 복귀는 아니었다. 노홍철과 마찬가지로 '언제 《무한도전》에 복귀하냐'라는 팬들의 댓글이 빗발쳤지만, 길 본인은 무도에 복귀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그러던중 2016년 《Show Me The Money 5》에 프로듀서로 2년 만에 방송 복귀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또 한번의 음주운전 행위가 적발된 관계로 또 다시 모든 활동을 중단했고 특히 이보다 앞선 2004년과 2014년, 2017년까지 총 3회의 음주운전 행위로 인해 법원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받고 6개월간 복역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전의 음주운전 사건으로 인해 행정안전부에서 음주운전을 한 길에게 KBS·EBS·MBC·JTBC·MBN·TV조선 영구출연정지 처분을 내렸으며 그 이후에는 SBS·채널A에서도 출연정지 명단에 오르는 수모를 겪었으나 SBS와 채널A에서는 출연정지가 전부 해제되었다.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2017년 5월 9일에 9살 연하의 여성과 결혼했고, 혼인신고까지 했다는 추측설이 기사를 통해서 전해졌다. 이에 대해 길은 실제와 무관하다고 밝혔으나 6개월 후에 득남까지 했다는 소식이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으며 항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기타 사항 보컬 위주의 포지션으로 인한 오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리쌍에서 길은 보컬만 한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가끔씩 랩도 한다. 현재도 리쌍극장에서 가끔씩 랩을 하는 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과거 X-Teen과 허니패밀리 멤버로 있을 때 랩을 맡았다. 다만 2002년 리쌍 1집 이후로 랩은 안하고 주로 보컬에만 집중했다. 사람들은 가끔 길의 랩을 듣기 위해 1집을 듣기도 하는데 길이 1집에서 랩을 했던 곡은 다음과 같다. 3집에서도 개리와 같이 ’개리와 기리’에서 랩을 했고, 또한 5집에서도 개리와 같이 랩을 한 적이 있는데 그 곡의 제목은 ’사람이어라...’다.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개리와 같이 부른다. 비의 〈깡〉 작곡 2020년 들어 인터넷 밈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비의 〈깡〉을 작곡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참고 사항 물의를 일으킨 것 때문인지 행정안전부가 음주운전을 한 길에게 KBS·EBS·MBC·JTBC·MBN·TV조선 영구출연정지 처분을 내렸으며 그 이후에는 SBS·채널A 출연정지 명단에 오르는 수모를 겪었다. 각주 외부 링크 1977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무브먼트 허니 패밀리의 일원 리쌍의 일원 대한민국의 작사가 대한민국의 작곡가 대한민국의 힙합 프로듀서 대한민국의 힙합 음악가 보이스 코리아 서울특별시 출신 음악가 서울언주초등학교 동문 영동중학교 동문 과천외국어고등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루터교도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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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8B%9C%EB%A6%AC%EC%95%84%EC%9D%98%20%EA%B5%AD%EA%B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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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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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람마 노래는 아시리아인이 부르는 노래이며 사실상 아시리아인의 민족가이다. 이 노래는 스웨덴 거주 아시리아인들의 축구 클럽인 아쉬리스카 푀레닝엔의 찬가이기도 하다. 요시프 베트 요시프가 독립 운동을 위해 작사했고 네부 주엘 이사베이가 작곡하였다. 가사 ܩܵܐ ܪܘܼܡܪܵܡܵܐ ܕܫܸܡܵܐ ܪܵܡܵܐ ܕܐܘܼܡܬܲܐ ܐܵܬܘܿܪ ܟܵܠܲܚ ܒܫܠܵܡܵܐ ܗܿܝ ܕܗܘܸܐ ܠܵܗܿ ܕܲܪܓܘܼܫܬܵܐ ܕܡܲܪܕܘܼܬܵܐ ܩܵܐ ܐܝܼܩܵܪܵܐ ܕܐܲܒܼܵܗܵܬܲܢ ܐܵܢܝܼ ܕܦܪܸܣܠܗܘܿܢ ܠܡܸܬ ܥܲܡܪܵܢܝܼܬܵܐ ܐܵܢܝܼ ܕܡܗܘܼܪܝܵܐ ܠܗܘܿܢ ܐܵܗ ܒܲܪܢܵܫܘܼܬܵܐ ܕܥܵܡܪܵܐ ܗܘܵܐ ܒܫܠܵܡܵܐ ܗܲܠ ܐܵܒܵܕܘܼܬܵܐ ܕܚܲܝܘܿܗܿ ܥܵܒܼܪܝܼ ܗܘܵܘ ܒܪܘܵܚܲܢܝܘܼܬܵܐ ܕܝܵܪܡܵܐ ܗܘܵܐ ܒܡܵܪܝܵܐ ܓܵܘ ܥܸܠܵܝܘܼܬܵܐ 한국어 음역본 카 룸람마 드시마 람마 둠탄 아투르 칼라크 브슬람마 아이 드빌라 다르구스타 드마르두타 콰 이카라 다바하탄 아네이 드프리슬룬 이미탐라니타 아네이 드무댤룬 아 바르나수타 담라와 브슬람마 할 아바두타 드카요 오리와 브르와카니유타 드 야르마바 드 마르야 구 엘라유타 한국어 번역본 우리는 우리 조국 아시리아를 존경하리. 우리는 우리 조상께 경의를 표하리. 다른 나라와 함께 붙어있는 조국이여. 평화와 번영, 그리고 주를 위하리. 외부 링크 국가 아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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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면활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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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면활성제는 물에 녹기 쉬운 친수성 부분과 기름에 녹기 쉬운 소수성 부분을 가지고 있는 화합물이다. 이런 성질 때문에 비누나 세제 등으로 많이 활용되어 왔다. 계면활성제는 일정 농도 이상에서 계면활성제 분자들끼리 모여 미셀이라는 구조를 형성한다. 미셀은 계면활성제의 농도가 임계 미셀 농도 이상이고 온도가 임계 미셀 온도 이상에서 형성된다. 미셀이 물에서 형성될 때, 계면활성제의 소수성 부분은 중심부에 모여 핵을 형성하고 친수성 부분은 물과 접촉하는 외곽 부분을 형성한다. 기름과 같이 소수성 물질은 미셀의 안쪽 부분에 위치하게 되어 안정화 되고 물에 녹게 되는데 이를 용해화라 하며 이는 세제 작용의 기본 원리이다. 개요 계면이란 기체와 액체, 액체와 액체, 액체와 고체가 서로 맞닿은 경계면이다. 계면활성제란 이런 계면의 경계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계면이 가지고 있던 표면장력은 약해진다. 하나의 분자 내에 친수성과 친유성을 가진 화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계면활성제는 세제용도에 많이 사용되는 것외에도 식품과, 화장품의 유화제, 보습제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계면활성제는 약간의 화학구조를 변형시킨 것만으로도 특성이 크게 달라져 종류도 다양하다. 대체로 계면활성제는 물에서 해리되었을 때 친수성 부분의 전하에 따라 음이온성, 양이온성, 양쪽성, 비이온성, 특수계면활성제로 분류할 수 있다. 용도 계면활성제는 세제로서의 용도 외에도 유화성이나 발포성, 그 밖의 특성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먼저 유화작용에 대해 예를 들어보면, 우유는 물 속에 젖의 단백질과 지방질이 아주 작은 입자 상태로 분산된 이른바 유탁액이라고 불리는 상태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상태가 비교적 안정한 것은, 우유에 함유되어 있는 어떤 종류의 단백질이 계면활성제로서 작용하여 지방질을 미립자로서 안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탁액'이란 얼른 보아서는 균일한 것처럼 보이나 실은 아주 작은 입자로서 분산되어 있는 것을 말하며, 이보다 굵은 입자로서 분산되어 있는 것을 현탁액이라고 한다. 이 밖에 크림·유액이라고 하는 화장품도 모두 물과 기름이 작은 입자상태로 되어 섞여 있는 것인데 거기에는 계면활성제가 작용하고 있다. 또 공장에서 염화비닐의 중합과 같이 유화한 상태에서 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도 대량의 계면활성제가 필요한 것이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용해되어 융합하지 않는 것도 유화하여 분산시킴으로써 유동성이 증가하고 표면에 잘 퍼지는 등의 좋은 성질을 얻을 수 있다. 이 때 물과 기름의 혼합비에 의해서도 그 성질에 많은 차이가 생긴다. 바니싱크림은 소량의 기름이 다량의 물속에 분산된 형태의 것으로, 'O/W유탁액'이라고 한다. 콜드크림은 이와 반대로 'W/O유탁액'이라고 한다. 계면활성제의 또 하나의 기능인 발포성을 이용한 것으로는 먼저 흡착을 들 수 있다. 액체와 기체의 계면에 계면활성제의 분자가 배열하여 막을 만들면 이 막은 작은 고체를 흡착하기 쉬운 성질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성질이 있기 때문에 세탁을 할 때 거품이 일어서 때가 빠진다. 광산에서 선광을 할 때 시행하는 부유선광법도 이 계면활성제의 발포성을 이용한 것이며, 광석을 분쇄한 다음 계면활성제와 함께 물을 흘려 보내면 광물의 미립자가 거품에 흡착되므로 이것을 모아 광물을 회수한다. 계면활성제의 발포성은, 발포제로 만들어서 소화에도 응용되고 있다. 화재가 났을 때 발포제로 연소물의 표면의 공기를 차단하여 불을 끄게 된다. 소화에 사용되는 발포제는 냉열성이 강하고 적당한 점성이 있어야 할 것이 요구되므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현재는 단백질을 분해하여 만든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발포성과는 반대로 거품이 이는 것을 방지하는 소포제도 계면활성제의 하나로서 만들어지고 있다. 실리콘유는 그 한 예로, 거품이 이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는 곳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또 물과 잘 섞이게 하는 역할과는 반대로 물을 배척하는 것도 계면활성제의 한 역할인데, 실리콘도료나 실리콘유를 유리 등의 표면에 바르면 물을 배척하는 성질이 있어, 자동차의 유리나 안경알이 뿌옇게 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계면활성제의 종류 음이온계 계면활성제 - 비누, 세탁세제 등 물 속에서 해리될 때 음이온이 된다. 친수기로 카르복시산염, 술폰산염 또는 인산염 구조를 가진 것이 많다. 카르복시산염계로 비누의 주성 분인 지방산 나트륨이나 술폰산염계로 합성 세제에 많이 사용되는 알킬벤젠술폰산 나트륨과 폴리아크릴아미드 전기 영동에 이용되는 로릴 황산 나트륨 등이 있다. 여기서 R은 작용기, M은 금속 원자를 의미한다. 비누 RCOO - Na + 모노알킬 황산염 ROSO3 - M + 알킬폴리옥시에틸렌 황산염 ROmSO3- M+ 알킬벤젠술폰산염 RR'CH2CHC6H4SO3-M+ 모노알킬인산염 ROPO O-M+ 양이온계 계면활성제 물속에서 해리될 때 양이온이된다. 호로옹N+3X- 디알킬디메틸암모늄염 RR'N+2X- 알킬벤질메틸암모늄염 RN+2X- 양성 계면활성제 분자 내에 음이온 가능 부위와 양이온 가능 부위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용액의 pH에 따라 양이온 혹은 음이온이된다. 화장품에 사용된다. 알킬설포베타인 RR'R"N +nSO3 알킬카르복시베타인 R2N+CH2COO- 비이온성 계면활성제 친수부가 비전해질, 즉 이온화하지 않는 친수성 부분이 있는 것으로 알킬글리콜 같은 저분자 계열 또는 폴리에틸렌 글리콜과 폴리비닐 알코올과 같은 고분자 계가 존재한다. Triton X, Pluronic, Tween 등의 상품명으로 판매되고있다. 폴리옥시에틸렌알킬에테르 ROmH 지방산 솔비탄에스테르 지방산 디에탄올아민 RCON2 알킬모노글리세릴에테르 ROCH2CHCH2OH 같이 보기 HLB값 미셀 비누 참고 문헌 외부 링크 환경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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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A%BD%EA%B3%A8%EA%B3%A0%EC%9B%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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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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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고원은 몽골과 중화인민공화국에 걸쳐 북서와 서부는 알타이, 북동은 야블로노이, 동쪽은 다싱안링, 남쪽은 인산의 여러 산맥으로 둘러싸인 고원이다. 중부로부터 동부는 목축이 성한 초원, 북부 산맥에는 러시아 시베리아 지방으로 이어지는 삼림대를 볼 수 있다. 북쪽으로 흐르는 여러 강은 러시아의 바이칼호로 들어간다. 항가이 산맥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하천의 일부는 고원상의 요지로 흘러들어 호수를 형성하고 있다. 북쪽 끝에 후브스굴호 등 담수호가 있고, 북서쪽 끝에 우브스호 등의 염호가 있다. 기후는 대륙성이며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하다. 연강수량은 적으며 여름에 집중되는데, 1년 내내 강수량이 없는 해도 때때로 있다. 참고 자료 중국의 고원 러시아의 고원 몽골의 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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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7%9B%EB%A6%AC%EB%B2%84%20%EA%B3%B5%EA%B5%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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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리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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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리버 공국은 1970년부터 2020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에 존재했던 마이크로네이션이다. 퍼스에서 북쪽으로 517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공국의 이름은 공국을 지나는 헛강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개요 1970년 레너드 캐슬리는 밀 생산량을 둘러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 정부와의 분쟁에 시달렸다. 당시 캐슬리가 소유하고 있던 밀 농장은 약 4,000㏊에 달했으며 밀 수확을 앞둔 시점에서 잦은 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1970년 4월 21일 캐슬리는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며 자신을 레너드 1세 공임을 선언하였다. 1980년대 초반에는 스스로를 왕국이라 자처한 적도 있었지만 다시 공국의 형태로 돌아왔다. 전체 인구는 50명이며 면적은 75km2이다. 헛리버 공국에서는 자체 발행한 통화인 헛리버 달러가 통용되고 있다. 현재 헛리버 공국은 2020년 1월 30일 부로 국경을 폐쇄했다. 그리고, 2020년 8월 3일,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으로 재가입을 선언하면서 헛리버 공국이 소멸하였다. 역사 헛리버 공국을 세운 레너드 캐슬리는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 캘굴리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철도 회사인 코먼웰스 레일웨이에서 엔진 화부로 근무하였다. 14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선박 회사에서 일했으며, 이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1950년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서부에서 농장을 꾸려 살아 왔다. 밀 수확을 앞둔 1969년 11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폭락한 밀값을 상승시키기 위해 이른바 '밀 쿼터제'를 도입했다. 이는 정부에서 할당 받은 양 만큼만 판매하도록 하는 것이다. 당시 캐슬리의 농장은 46t을 할당받았다. 하지만, 캐슬리가 소유하고 있던 농장은 약 4,000㏊에 달했으며, 정부로부터 할당받은 양 또한 생산량의 500분의 1로,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거기에다가 은행 빚으로 인해 파산위기에 놓이면서 농장은 파산 위기에 처했고,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된다. 이후 그는 정부하고 잦은 마찰을 빚게 되었다. 법안 통과 직전 캐슬리는 자신의 부당함을 알리며 법안에 강력히 반대했으나, 그 법안은 고로 통과되었다. 어느 날 한 의원을 찾아갔는데, 그 의원이 "당신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민이라면 당연히 이 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고 말했다고 한다. 어느 날, 캐슬리는 이 말을 떠올렸는데, 여기서 반대로 생각해서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 아니면 따를 필요가 없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후 1970년 4월 21일 '헛리버 왕국'의 건국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독립했음을 선언했다. 이후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총리였던 존 고턴에게 독립을 선언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보냈는데, 당시 정부가 이를 무시하고 독립을 인정하지 않자 계속 보냈다. 이듬해인 1971년 윌리엄 맥마흔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새 총리로 취임했지만, 새 정부도 헛리버 왕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캐슬리는 돌연 자신을 왕에서 왕자로, 부인 셜리를 왕비에서 공주로 직위를 낮추고, 이후 헛리버 왕국에서 공국으로 지위를 낮추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정부에 "당신이 우리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고 이렇게 위협하면 반역죄로 처벌할 수 있다."라는 내용이 담긴 한 장의 문서를 전달하게 된다. 그가 최후로 꺼내든 수는 다름 아닌 영국의 《1495년 반역법》이었다. 이는 영국 군주 또는 영국 연방 국가의 일정 직위에 있는 사람에게 위협을 가한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인데, 변호사 출신으로 법률에 능통했던 그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 연방 국가라는 사실을 이용했다. 이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에게 헛리버 공국이 영국 연방에 속한 국가임을 선언했으며, 영국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1972년 어쩔 수 없이 헛리버 공국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원래는 헛리버 왕국의 왕이었으나, 대공으로 직위를 내렸다. 즉위 이후 헌법을 개정하고, 독자적인 우표, 화폐, 비자 제도를 만들었으며, 자식과 손주, 증손주 등 50여 명의 가족을 공국의 국민으로 선언했다. 헛리버 공국은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관광객들에게 시민권을 발급하고 있는데, 그 수만 무려 2만여 명에 달한다. 7명의 자녀와 20명의 손주, 32명의 증손주가 있다. 부인은 헛리버 공국의 공주 셜리 캐슬리이며, 2013년 7월 7일 사망했으며 6년 후인 2019년 2월 13일에 레너드 1세가 향년 9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초대 공작은 레너드 1세가 1970년 4월 21일부터 2017년 2월 11일까지 재위했으며, 그레미 1세가 공작직을 물려받았다 멸망 초대 공작인 레너드가 세상을 떠난 후, 현재 헛리버 공국은 호주 국세청과 소득세 분쟁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리고, 2010년 이후, 농작물과 관광 수입이 감소되어 아주 어려움에 빠졌었다고 한다. 헛리버 공국은 2020년 1월 30일, 국경이 폐쇄되었고, 결국 2020년 8월 3일부로 공국은 해체를 선언하였으며, 공국의 땅은 50년간 미납된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매각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각주 외부 링크 헛리버 공국 정부 홈페이지 헛리버 공국 국방부 홈페이지 1970년 설립 2020년 폐지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의 지리 오스트레일리아의 분리주의 오스트레일리아의 마이크로네이션 마이크로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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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1%9C%EB%8F%84%EB%A5%B4%20%EC%98%88%EB%A9%9C%EB%A6%AC%EC%95%BC%EB%84%A8%EC%BD%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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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예멜리야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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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블라디미로비치 예멜리야넨코는 러시아의 종합격투기선수다. 출생과 가족관계 표도르 예멜리야넨코는 1976년 9월 28일에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루한스크주 루비즈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는 가스전기 용접공이고, 어머니 올가 표도로브나는 현재 전문대학교 교사이다. 3남 1녀 중에서 둘째로 태어난 표도르는 2살까지 부모 및 누나인 마리나와 같이 우크라이나 SSR에서 살았으며, 1978년에 러시아 SFSR 벨고로드주 스타리 오스콜로 이사했다. 표도르 밑으로 두 명의 남자 형제인 알렉산드르와 이반이 있고, 1999년에 옥사나와 결혼하여 딸 마샤를 낳았다. 데뷔무대와 경기들 표도르는 룰 없는 싸움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러시아 유도, 삼보 프로 팀원이었으나 러시아 경기에서 불공평한 심판과 보상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다른 일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룰 없는 싸움은 표도르에게 세계적인 명예를 받고 남 부럽지 않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에 표도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기계기사 또는 전기기사 솜씨를 습득하며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집에서 조금이라도 돈을 보태기 위해서 체육학교에서 경비원 아르바이트를 했다. 1995년에 입대했을 때 표도르는 무게가 70kg에 불과했으나, 2년 동안 장거리 달리기, 바벨 운동을 함으로써 체중을 93kg까지 올렸다. 1998년에 그는 삼보 선수권을 취득하고 러시아 경기 우승자가 되었다. 2000년에 표도르는 링스 스포츠 클럽에 왔고, PRIDE에서 데뷔를 하기 전 거기서 11 경기에 나섰다. 링스 KOK 2000 블록 B경기에서 표도르는 코사카 츠요시와 싸우며 유일한 패배를 하게 된다. 하지만 경기 녹음을 다시 보면 표도르 눈썹에 간 금은 코사카가 경기 시작되자마자 금지되어 있는 팔꿈치 타격을 가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원칙적으로는 경기결과가 무효 경기로 나와야 되는데 표도르 입장에서는 억울한 패배를 당했다고 할 수 있다. 2002년부터 표도르는 프라이드에 출전한다. 첫 대결에서 표도르의 상대는 그 후에 K-1 경기 우승자가 된 세미 슐트였다. 심판 판정으로 이긴 표도르는 이 대결이 가장 어려운 경기 중에서 하나라고 회고하였다. 표도르의 다음 상대는 2001년에 프라이드 첫 경기에 출전하여 안토니우 호드리구 노게이라에게 진 히스 헤링이 되었다. 표도르는 헤링의 별명인 텍사스의 미친 말을 능숙한 기수처럼 다루어 챔피언 경기 기회를 잡는다. 2003년에 표도르는 노게이라에게 승리하여 프라이드 두 번째 우승자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이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그 해에 표도르는 동생 알렉산드르와 함께 러시안 탑 팀에서 레드 데블 스포츠 클럽으로 옮겼다. 2004년에 표도르는 16명의 파이터가 챔피언 벨트를 확보하기 위하여 싸우는 토탈 엘리미네이션, 크리티컬 카운트다운 앤드 파이널 컨플릭트 그랑프리 경기에 참가하였다. 먼저 표도르는 UFC 중후급 우승자이면서 2000년 그랑프리 대회 챔피언인 마크 콜먼에게 승리하고, 그 친구인 케빈 랜들맨도 승리하게 된다. 4강에서 표도르는 일본의 유명한 유도 선수 오가와 나오야를 54초 만에 꺾고, 결승전에서 브라질 선수 노게이라와 다시 만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기 제1라운드에서 그들이 서로 머리를 맞부딪친 바람에 표도르는 눈썹에 금이 갔다. 전투는 무효 경기로 선언되고 2004년 새해 전날에 개최된 쇼크웨이브까지 연기되었다. 그 경기에서 표도르는 다시 노게이라를 심판 판정으로 이겼다. 2005년 프라이드 부시도 토너먼트에서 표도르는 다시 코사카 츠요시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하고, 당년 8월에 최고 라이벌인 미르코 크로캅과 싸우게 된다. 표도르는 2003년에 게리 굿리지와의 경기에서 당한 팔 부상에도 불구하고 크로캅에게 승리하게 된다. 새해 전날 프라이드 경기에서 표도르는 줄루징요와의 전투를 마치고 나서야 드디어 팔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큰 경기에 출전하면서 표도르는 전투삼보 토너먼트에도 계속 참가하였다. 2005년 10월에 그는 전투삼보 세계경기 3회의 우승자가 되었다. 10월 13일에 표도르는 벨고로드 주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도요타 "캠리" 자동차를 받게 된다. 공식 시상식은 고향인 스타리 오스콜에서 행해졌으며, 표도르는 축사를 받으며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고 맹세했다. 2006년에 표도르는 팔 수술 때문에 두 경기 밖에 나서지 못했지만, 10월에 마크 콜먼을 이기고 12월에 마크 헌트와 싸워서 타이틀을 유지했다. 2007년 표도르는 보도그 파이트 토너먼트에 참가하며 맷 린들랜드에게 승리를 거둔다. 12월 31일에 표도르는 일본의 연말 대회인 야렌노카! 오오미소카! 2007에서 한국의 최홍만 선수를 상대로 1라운드 암바로 승리한다. 2008년 미국의 의류회사 어플릭션이 개최한 어플릭션 - 밴드에서 전 UFC 챔피언 팀 실비아를 상대로 1라운드 초크로 승리를 거둔다. 이어진 2009년 1월 어플릭션 - 심판의 날에서 역시 전 UFC의 챔피언 안드레이 알롭스키를 상대로 KO 승리를 거두게 된다. 2009년 여름 어플릭션 3회 대회에서 조쉬 바넷과 경기를 가질 예정이었지만, 조쉬 바넷의 참전이 무산되며 대회 자체가 취소된다. 이후 미국의 종합 격투기 단체인 스트라이크포스와 계약하였다. 2015년 9월 신생 프라이드 FC인 라이징 파이팅 패더레이션과 계약을 체결한다. 은퇴 2012. 09. 22,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2012 M-1 글로벌 대회"에서 페드로 히조를 1라운드 1분 24초만에 KO승을 거두면서 은퇴경기를 마쳤다. 3년만의 복귀선언 2015년 9월 신생 프라이드 FC인 라이징 파이팅 패더레이션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3년만의 복귀를 선언한다. 훈련 표도르는 보통 레드 데블 스포츠 클럽의 다른 선수들, 특히 로만 젠초프, 세르게이 골랴예프, 동생인 알렉산드르 및 이반과 같이 스타리 오스콜 근처에 위치한 스포츠 센터에서 경기 준비를 하곤 한다. 훈련은 장거리 달리기, 타격기술 연습, 격투기 및 특별준비를 포함한다. 아침 7시 반에 일어나서 식사 후 2시간 휴식, 9시 반부터 9 km 거리 달리기 또는 "섀도우 파이팅"등의 복싱 연습, 그 후 점심 식사 및 휴식, 저녁에 4 km 거리 달리기, 복싱 및 격투기 연습, 누워있는 상태에서 타격 기술 연습을 하고, 마지막으로 철봉, 수평봉, 스포츠기계를 이용하여 체력을 키운다. 외부 링크 셔독 프로필 Fedor Emelianenko "The Last Emperor" Official Website: news, fights, videos, photos. 표도르 예멜리야넨코 한국 공식 웹사이트 표도르 예멜리야넨코 한국 공식 옛 웹사이트 표도르 예멜리야넨코 러시아 공식 웹 사이트 표도르 예멜리야넨코 일본 공식 웹 사이트 1976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러시아의 종합격투기 선수 러시아의 삼보 선수 헤비급 종합격투기 선수 루한스크주 출신 러시아의 동방 정교도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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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IBM%20PC%20%ED%98%B8%ED%99%98%EA%B8%B0%EC%A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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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 PC 호환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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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 PC 호환기종은 현재 개인용 컴퓨터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컴퓨터의 한 종류이다. 데스크톱 컴퓨터, 노트북 컴퓨터 등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인텔의 x64 또는 호환CPU를 사용한다. IBM PC를 기반으로 하며, 대부분의 컴퓨터 제조업체가 제작하는 컴퓨터는 IBM PC 호환 기종이다. 심지어 일반 사용자가 직접 제작도 가능하다. IBM PC 호환 기종에 속하지 않는 컴퓨터에는 아미가, MSX, Apple에서 만든 여러 컴퓨터 등이 있다. Apple은 예전에 PowerPC CPU를 사용하였으나, 최근에는 x86 CPU를 사용한 제품을 내놓고 있어서, 여기서는 부트 캠프를 사용해 윈도우로 시동할 수 있다. 기원 IBM은 1980년에 저가 단일 사용자 컴퓨터를 가능한 조속히 마케팅하기로 결정했다. 1981년 8월 12일, 최초의 IBM PC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이 컴퓨터를 위한 3개의 운영 체제가 있었다. 가장 저렴하고 가장 저명한 것이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개발한 PC DOS였다. IBM의 계약 조건상 마이크로소프트는 IBM이 아닌 컴퓨터를 위해 자신만의 버전인 MS-DOS를 판매할 수 있었다. IBM에 독점적인 오리지널 PC 아키텍처의 유일한 부품은 BIOS였다. IBM은 먼저 개발자들에게 컴퓨터의 하드웨어 주소에 직접 접근하는 소프트웨어를 작성하는 것을 삼가는 대신 하드웨어 의존 동작을 수행하였던 BIOS 기능에 대한 표준 호출을 만들 것을 요청하였다. 이 소프트웨어는 MS-DOS나 PC-DOS를 사용하는 모든 머신에서 동작하였다. 표준 호출을 만드는 대신 하드웨어 주소에 직접 접근하는 소프트웨어는 속도는 더 빨랐으나 이는 특히 게임에 적합하였다. IBM의 승인 없이 제조된 호환 컴퓨터인 "lookalike"의 루머가 IBM PC 출시 직후 퍼지기 시작했다. 인포월드는 IBM PC의 1주년에 이렇게 썼다: 1983년 6월 PC 매거진은 PC 클론을 "IBM PC로부터 디스크 홈을 취하는 사용자를 수용하고 방을 가로지르며 이를 외부 머신에 연결하는 컴퓨터"로 정의하였다. 그 해 IBM PC의 부족 사태로 인해 수많은 고객들이 클론을 대신 구매하였다. 컬럼비아 데이터 프로덕츠는 1982년 6월 중에 IBM PC 표준과 어느 정도 호환되는 최초의 컴퓨터를 개발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글 컴퓨터가 그리하였다. 컴팩은 1982년 11월 최초의 IBM PC 호환 컴퓨터 컴팩 포터블을 발표하였다. 같이 보기 IBM PC는 IBM이 내놓은 컴퓨터의 상품명이며 초기 IBM 호환 컴퓨터의 일종이다. ISA 버스 PCI 버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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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6%91%EC%A0%95%EA%B3%A0%EB%93%B1%ED%95%99%EA%B5%90%20%28%EB%B6%80%EC%82%B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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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고등학교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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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고등학교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55년 2월 28일 : 학교법인 성신학원 설립인가 1973년 10월 27일 : 신길수 이사장 취임 1986년 4월 25일 : 양정고등학교 설립계획 승인 1986년 9월 9일 : 양정고등학교 기공식 1987년 1월 12일 : 양정고등학교 30학급 설립인가 1987년 3월 1일 : 초대 황의중 교장 취임 1987년 3월 2일 : 개교 및 1987학년도 제1회 신입생 입학식 1989년 2월 16일 : 신길부 이사장 취임 1990년 2월 13일 : 제1회 졸업식 1998년 12월 30일 : 무산학원으로 법인 명칭 변경 2000년 3월 1일 : 양정고등학교 골프부 창단 2003년 3월 1일 : 신관 건물 증축 완공 2004년 3월 21일 : 디지털도서관 재개관 운영 2006년 3월 1일 : 학교 급식소 개소 2010년 3월 1일 : 학급감축 2020년 3월 2일 : 제10대 이성학 교장 취임 2021년 1월 29일 : 다목적 강당 ‘수성관’ 준공 2022년 2월 10일 : 제33회 졸업식 2022년 3월 2일 : 입학식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양정고등학교 홈페이지 부산광역시의 고등학교 부산 부산진구의 고등학교 1987년 개교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골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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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2007%EB%85%84%201%EC%9B%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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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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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31일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운영 체제인 윈도우 비스타가 발매되었다. 쿠바에서 카스트로의 병세가 위중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요코 이야기》 수업이 마침내 중단되었다. 2007년 1월 30일 ‘김하나’라는 가명으로 지금까지 16억통의 스팸메일을 발송한 20대 두명이 경찰에 검거됐다.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 긴급조치 위반사건 재판에 관여한 판사들의 실명이 포함된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분석보고서"를 예정대로 공개한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의 외무장관 보리스 타라시크가 사임했다.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 지역의 대표적 인터넷 신문인 디트뉴스24가 지역 인터넷 신문으로서는 전국 최초로 청와대 출입 신문사로 정식 등록되었다. 2007년 1월 27일 레바논에서 대학유혈사태로 30여 명이 다치고 4명이 사망했다. 헝가리에서 폐사한 오리에서 AI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 2007년 1월 24일 안산역 1층 남자 장애인 화장실에서 신원미상인 여성의 토막사체가 발견되었다. 1주일 정도 지난 후에 용의자는 체포되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에서 번역 출판된 《요코 이야기》가 판매 중지되었다. 2007년 1월 23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2007년 1월 22일 새 10000권 및 1000권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의 총선거에서 세르비아 급진당이 승리하였지만, 과반수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일본 간사이 테레비에서 ‘낫토가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다’고 했지만, 이 방송이 날조된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스리랑카에서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서 전투가 일어나 40명이 사망했다. 2007년 1월 21일 세르비아에서 총선거가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수 유니가 목을 매 자살했다. 인도네시아 북부 테르나테에서 130킬로미터 떨어진 해저에서 리히터 규모 7.3의 지진이 일어났다. 2007년 1월 20일 강릉시 서쪽 27킬로미터 지점에서 리히터 규모 4.8의 지진이 일어났다. 서울, 경기, 충청, 경북 일부 지역에서도 지진이 감지되었다. 천안시에서 조류 인플루엔자 발병이 확인되었다. 2007년 1월 19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의결함으로써 "전효숙 사태"으로 지속되어온 헌법재판소장 공백 사태가 127일 만에 종결되었다. 대한민국 서울 남부지법이 열린우리당 기간당원 11명이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낸 "당헌개정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다고 발표함으로써 열린우리당의 비상대책위원회가 추진하려던 "기초당원제"안이 좌절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열린 제6차 한미자유무역협정 협상이 종료되었다. 북서 유럽에선 시릴이라고 불리는 폭풍이 발생해서, 유럽에선 27명이 사망했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판해 온 아르메니아계 터키 언론인인 흐란트 딩크가 이스탄불에서 대낮에 10대 소년에게 총격을 받고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07년 1월 18일 로보트 태권 V 복원판이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세상에서 젤 잘생긴 김정훈이 태어났다 2007년 1월 17일 석유 분쟁을 끝낸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이번에는 설탕 분쟁에 휘말렸다. 현대중공업 직원들이 나이지리아에서 무장괴한들에게 피습을 당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 한국인이 일본 소녀를 강간했다는 내용을 담은 책 요코이야기가 미국에서 교재로 채택되어 논란이 일어났다. 이 책은 대한민국에도 번역·출판되었다. 2007년 1월 16일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후보로 거론되던 고건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대한민국 대검 중수부는 비자금을 조성하고, 회삿돈을 횡령하였으며 계열사에 손실을 끼쳐 배임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정몽구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 회장에게 징역 6년을 구형했다. 2007년 1월 15일 5일간의 일정으로 대한민국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 제6차 협상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중간첩 혐의로 사형당한 이수근에 관한 사건 조사에 대해 "당시 남북한 체제 경쟁으로 개인의 생명권이 박탈당한 대표적인 비인도적·반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으로 결론지었다'고 밝혔다. 1995년 성균관대학교측의 입시 문제 오류를 지적했다가 이듬해 재임용에서 탈락한 뒤 복직을 요청하는 소송을 냈으나 재판에서 패소한 전직 교수가 석궁으로 화살을 발사해 담당 판사에게 상해를 입힌 사건이 일어났다. 2007년 1월 13일 피랍되었던 한국인 근로자 9명이 납치 61시간만에 무사히 석방되었으며 모두 건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요금소 부근에서 5중 추돌사고가 일어났다.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이 레알 마드리드에서 미국 프로축구 무대로 이적할 것이라고 알려졌다. 2007년 1월 10일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한국인 근로자 9명이 무장단체에 의해 납치됐다고 외교통상부 당국자가 밝혔다. 경기도 화성시에서 또 1명의 여성이 실종된 것으로 추가로 확인되어, 한달 사이에 실종된 중년 여성이 모두 3명으로 늘어났다.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원유분쟁이 타결되었다.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김형은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2007년 1월 9일 서울시립대 김영욱 교수가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6세기 백제시대 사면목간에서 가장 오래된 향찰 표기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의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4년 연임제로 헌법을 개정할 것을 제안했다. 2007년 1월 8일 롯데월드가 전면 개보수를 위해 휴장하였다. 2007년 1월 4일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석유로 인해 분쟁이 발생했다. 2007년 1월 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 백남순이 사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현대자동차의 "연말 성과급 지급 축소"에 노동조합이 반발하여 시무식 행사에서 노사가 충돌하였다. 2007년 1월 1일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유럽 연합의 새로운 회원국이 되었다. 반기문이 유엔 사무총장이 되었다. 슬로베니아가 유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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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98%EB%9F%B0%20%ED%8F%BC%ED%8E%98%EC%98%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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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런 폼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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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런 폼페오는 골든 글로브 상에 후보로 올랐었고, 미국 배우 조합상에서 수상한 미국 배우이다. ABC의 의학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주인공 메러디스 그레이의 역을 맡고 있다. 생애 어린시절 회사원인 조지프 폼페오와 케이틀린의 딸로 매사추세츠주 에버렛에서 태어났다. 폼페오는 아일랜드계와 이탈리아계의 후손으로, 기독교인으로 키워졌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그가 4살 때 죽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 후에 곧 재혼했다. 그의 별명은 마른 체형 때문에 연필 또는 Straciatella 였다. 마이애미에서 2년이상 칵테일 서빙을 할 때, 패션 사진작가인 앤드루 로젠달을 만났다. 1996년에 그가 광고제의를 에이전트로부터 받았을 당시에, 그는 뉴욕 시에 있는 한 바에서 바텐더를 하고 있었다. 그 후에 그는 시티은행과 로레알의 광고에 출현했다. 《스트레인저스 위드 캔디》 와 《로 앤 오더》와 같은 작품의 조연으로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연기생활 연기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2001년에 로스앤젤레스로 왔다. 2002년에 브래드 실버링이 감독한 영화 《문라이트 마일》 에서 제이크 질런홀의 동정심어린 사랑을 받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연기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데어데블》에서 주인공 맷 머독의 비서 캐런 페이지로 출연했지만, 극장 개봉작에서는 대부분의 장면이 삭제되었다. 2002년과 2003년에는 《캐치 미 이프 유 캔》과 《올드 스쿨》에 출연했다. 《로 앤 오더》와 《프렌즈》의 에피소드에서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2004년엔 《이터널 선샤인》에서 짐 캐리의 전여자친구 나오미 역을 맡았다. 비록 출연한 장면들이 영화에서는 편집되었지만, 감독인 미셀 공드리에게 자신을 그의 영화에 출연할 수 있도록 해주어서 고마움을 느낀다고 하였다. ABC의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주인공이자 일류 병원의 외과 인턴으로 나오는 메러디스 그레이라는 역할은 그녀가 처음으로 맡은 주연급 역할이다. 이 드라마는 시즌 4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2007년에 그는 골든 글로브 상의 드라마 부문의 최우수 여배우 상의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같은 해에 재계약을 했는데, 편당 출연료가 200,000달러에 달한다. 사생활 그는 2007년 11월 9일에 뮤직 프로듀서인 크리스토퍼 아이베리와 뉴욕시청에서 시장인 마이클 블룸버그가 증인이 되어 준 결혼식을 치렀다. 그들은 2003년에 친구의 소개로 만나 6개월 후에 연애를 시작했다. 현재 그들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다. 작품 리스트 각주 외부 링크 1969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미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미국의 여자 영화 배우 미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매사추세츠주 출신 배우 이탈리아계 미국인 아일랜드계 미국인 잉글랜드계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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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D%94%84%EB%8A%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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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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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늄은 화학 원소로 기호는 Hf, 원자 번호는 72이다. 은회색의 광택이 있는 전이 금속으로, 화학적으로 지르코늄과 비슷하고 지르코늄을 함유한 광석에서 함께 발견된다. 1869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가 하프늄의 존재를 처음으로 예상하였고 1923년 발견되어 안정한 원소 중에서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발견된 원소가 되었다. 원소가 발견된 도시인 코펜하겐의 라틴어 지명 하프니아에서 이름을 땄다. 하프늄은 필라멘트와 전극 등에 사용되며, 중성자를 잘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 지르코늄 합금과 함께 원자로의 제어봉에 사용된다. 하프늄 산화물은 반도체 제조 공정에 사용되기도 한다. 나이오븀, 티타늄, 텅스텐 등과 혼합하여 특수한 목적의 초합금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특성 하프늄은 은회색 광택이 있는 전이 금속으로, 연성이 좋고 부식에 강하다. 화학적으로는 지르코늄과 비슷하다. 하프늄의 물리적인 특성은 불순물로 첨가된 지르코늄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데, 하프늄과 지르코늄은 그 화학적 특성이 매우 비슷하여 분리하기가 가장 힘든 혼합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프늄의 밀도는 지르코늄 밀도의 약 2배 정도이다. 하프늄은 공기 중에서 산소와 반응하여 표면에 얇은 보호막을 형성하여 부식을 방지한다. 보통 산과 염기에는 반응하지 않으나 할로젠에 의해 산화되거나 공기 중에서 연소하여 산화되기도 한다. 고운 분말 형태에서는 스스로 발화한다. 동위 원소 현재까지 원자량 153에서 186까지 최소 34종류의 하프늄 동위 원소가 발견되었다. 자연에 존재하는 안정한 동위 원소는 176Hf,177Hf,178Hf,179Hf,180Hf이다. 방사성 동위 원소 중 가장 안정한 것은 174Hf으로 반감기가 약 1015년이다. 존재 하프늄은 지각에 질량비로 약 5.8ppm 정도 함유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에서는 순수한 형태로 발견되지 않고 주로 지르코늄과 혼합된 형태로 발견된다. 특히, 지르콘에는 전체 지르코늄 함량 중 약 1~4% 정도가 하프늄으로 치환되어 있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증가에 따라 하프늄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 10년 이내에 하프늄이 고갈될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 1869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티타늄과 지르코늄보다 무거운 원소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914년 헨리 모즐리는 X선 분광학을 통해 원자 번호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고 원자 번호 43, 61, 72, 75에 발견되지 않은 란타넘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발견되지 않은 원소를 찾기 위한 이른바 '원소 사냥'이 벌어지게 되었다. 한편, 모즐리의 발견이 있기 이전인 1907년에 위르뱅은 희토류 금속에 속하는 72번 원소를 발견했다고 주장했고, 1911년 '셀튬'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나중에 발견된 하프늄의 선 스펙트럼이나 화학적 성질과는 큰 차이가 있었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모즐리의 X선 분광학 조사를 통해 위르뱅이 발견한 원소는 72번 원소가 아님이 밝혀졌다. 1923년 초반에는 일부 화학자와 물리학자들이 72번 원소는 지르코늄과 성질이 비슷할 것이며, 희토류 금속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했다. 이는 모즐리의 X선 분광학과 보어의 원자 모형에 바탕을 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과 1922년 위르뱅이 1911년에 발견한 것이 원자 번호 72번의 희토류 원소가 맞지 않았느냐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면서 코스테르와 죄르지 헤베시는 지르코늄을 포함한 광석에서 72번 원소를 찾아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마침내 1923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두 사람은 하프늄을 발견하였고, 이는 멘델레예프가 1869년에 예측한 성질과도 잘 들어맞았다. 이는 나중에 노르웨이에서 X선 분광학 연구를 통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이후, 원소가 발견된 곳인 코펜하겐의 라틴어식 지명 '하프니아'에서 이름을 따 ‘하프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용도 원자로 제어봉 하프늄 동위 원소들의 원자핵은 한 개당 중성자 여러 개를 흡수할 수 있다. 이 성질을 이용해 원자로에서 제어봉에 사용된다. 하프늄 원자핵이 중성자를 흡수하는 비율은 지르코늄보다 약 600배 정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부식에 강한 성질은 가압수형 원자로의 극한 조건에서도 잘 견디게 해주어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합금 하프늄은 철, 티타늄, 나이오븀, 탄탈럼 등 여러 가지 금속과의 합금으로 사용된다. 또, 니켈이 주성분인 합금에 소량의 하프늄이 첨가되면 잘 산화되지 않아 부식에 강해진다. 주의사항 미세한 분말 형태의 하프늄은 공기 중에서 스스로 발화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취급 시 주의가 필요하다. 또, 하프늄 화합물은 눈, 피부, 점막 등에 자극을 줄 수 있으며 간 손상을 유발할 수도 있다. 각주 외부 링크 하프늄 - WebElements.com 전이 금속 화학 원소 1923년 과학 장소 이름이 포함된 화학 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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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MQ-1C%20%EA%B7%B8%EB%A0%88%EC%9D%B4%20%EC%9D%B4%EA%B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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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Q-1C 그레이 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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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Q-1C 그레이 이글은 미국 육군이 MQ-5 헌터 무인기를 대체하기 위해서 도입하게 된 MQ-1 프레데터 무인기의 개량형 무인기이며, Extended-Range Multi-Purpose 계획으로 미육군의 지원 하에 제네럴 아토믹스가 개발하였다. 개발 2002년 미 육군은 기존의 MQ-5 헌터 무인기를 대체하기 위한 장거리 다목적 무인기 경쟁입찰을 실시했고 이 입찰에 MQ-5 헌터의 개량형과 그레이 이글 무인기가 입찰했다. 2005년 8월 미육군은 그레이 이글이 이 계약의 승자임을 발표하고 2억1400만 달러 상당의 개발과 성능입증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미육군은 총 11개의 그레이 이글 시스템을 구입할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각 시스템은 12기의 그레이 이글 무인기와 5개의 지상통제 스테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계획의 총액은 10억달러의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원래의 명칭은 MQ-12가 될 예정이었으나 국방부의 결정으로 MQ-1C로 변경되었다. 구형 프레데터인 MQ-1 프레데터는 최대이륙중량이 1톤인데, 그레이 이글은 1.6톤이다. 구형은 헬파이어 미사일 2발이었는데, 4발로 증가했다. 최신 2008년 6월 2대의 선행 시제품 그레이 이글이 이라크로 평가를 위해 배치되었다. 주한미군 주한미군 2사단 2항공여단에 무인기를 배치할 계획이다. 2015년 군산 공군기지에서 최초로 시험비행했다. 2016년 말까지 주한미군에 배치될 계획이다. 2015년 12월, 미국 위스콘신대 부설 융합기술연구소 소속 연구원들은 드론에 핵무기, 화학무기, IED, 지뢰 등을 탐지할 수 있는 기술 시스템을 소형화해 이를 장착하는 데 성공했다. 2017년 4월에 실전배치될 계획이다. 2017년 3월 13일, 미국 국방부는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군산 공군기지에 공격드론을 영구적으로 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제원 일반 특성 승무원: 무인 길이: 28 ft 날개폭: 56 ft 높이: 6.9 ft 최대이륙중량: 3,600 lb 엔진: 1 × Thielert Centurion 1.7 Heavy-Fuel Engine, 165 HP 성능 최고속도: 150 knots 지속시간: 30 시간 최대고도: 29,000 ft 무장 하드포인트: 4개 미사일: 4 × AGM-114 헬파이어 또는 8 × AIM-92 스팅어 폭탄: 4 × GBU-44/B 바이퍼 스트라이크 항법장비 AN/ZPY-1 STARLite Radar 참고사항 외부 링크 General Atomics Sky Warrior page US Army Warrior UAV US Army ERMP Program UAV Sensor Applications MQ-1C on vectorsite.net which is declared in public domain by its author 미국의 무인 항공기 2004년 첫 비행한 항공기 저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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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50%EC%97%94%20%EB%8F%99%EC%A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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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엔 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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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엔 동전은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동전의 하나이다. 1955년부터 최초로 발행된 니켈 동전 가운데에는 구멍이 없었지만 1959년부터 니켈 동전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채로 발행되었다. 1967년부터 지금과 같은 백동화가 통용되고 있으며 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소재는 백동이며 무게는 4.0g, 지름은 21.0mm, 구멍의 크기는 4mm이다. 테두리에는 톱니무늬 120개가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일본국과 50엔을 뜻하는 글이 쓰여져 있고 국화가 그려져 있다. 뒷면에는 50엔을 뜻하는 아라비아 숫자 "50"과 제조년도가 쓰여져 있다. 1987년부터 50엔 동전은 일본 조폐국에서 판매하는 화폐 세트에만 포함되어 있고 시중에 유통되지는 않았다. 발행 매수는 775,000개로 매우 희소한 편이다. 연혁 1955년: 50엔 니켈화 발행 개시. , 분동, 구멍 없음) 1959년: 50엔 니켈화 발행 개시. , 구멍 있음) 1967년: 50엔 백동화 발행 개시. ) 역대 동전 특이 사항 5엔 동전과 더불어 버스 토큰 형태의 주화로 이루고 있는 일본에서 단 둘뿐인 동전이기도 한다. 특이하게도 이 돈이 버스 토큰으로 오해받는 느낌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기묘한 이야기가 나올 법하기도 한다. 실제 50엔 주화의 가치는 대한민국의 500원 동전 하나에 맞먹는 가치로 보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50원 동전과 달리, 중간에 구멍이 뚫려 있는 특색을 두고 있다. 같은 가치를 가진 대한민국의 주화는 500엔 동전의 위변조의 장본인으로 널리 알려진 500원 동전과 거의 상당하다. 그래서 500원 동전은 50엔 동전 하나의 가치를 가지고 있고, 참고로 500엔 동전은 대한민국의 5000원 지폐와 거의 상당하다. 일본 엔 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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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STS-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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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S-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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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S-124는 우주 왕복선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디스커버리 우주왕복선을 사용하였다. 2008년 5월 31일에 발사하여 이틀 뒤에 국제우주정거장에 도킹하게 되었다. 이 우주 왕복선 임무는 일본의 키보 모듈을 싣고 조립하였다. 2008년 6월 15일 에 착륙하였다. 우주왕복선 임무 일본의 우주 개발 2008년 우주 개발 2008년 5월 2008년 6월 2008년 발사된 우주선 2008년 재진입한 우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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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90%EB%A8%B8%EB%A6%AC%20%EC%84%B1%EC%9A%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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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 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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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 성운은 오리온자리의 암흑 성운이다. 오리온의 벨트 가장 동쪽 별인 오리온자리 제타 알니탁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지구로부터 약 1,500광년 떨어져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크기는 3.5광년 정도이다. 하늘에서 가장 알아보기 쉬운 성운 중 하나로, 말 머리 모양으로 유명하다. 1888년 윌리어미나 플레밍이 사진을 정리하다가 발견하였다. 뒤쪽의 발광 성운 IC434를 가리는 성운이다. 각주 암흑성운 오리온자리 오리온자리 분자운 복합체 항성 형성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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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B%B2%A0%ED%8A%B8%EB%82%A8%20%EA%B4%80%EA%B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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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베트남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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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1956년 대한민국과 베트남 공화국의 수교로 시작되었으며, 1975년 사이공 함락으로 단교하였으나, 1992년 대한민국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재수교하였다.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베트남 공화국은 대한민국과,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단독으로 수교하고 있었으나, 사이공 함락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수교만 유지되었다. 줄여서 한베 관계 또는 한월 관계라고도 불린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베트남 정부가 사회주의에 입각한 경제 정책을 과감하게 자본주의 기반 정책으로 고쳐나가면서 많은 발전을 하고 있는데, 특히 아시아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룩해낸 대한민국을 그 모델로 삼고 있다. 때문에 현재의 대한민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21세기 포괄적 동반자 관계"로 불리고 있으며 특히 유전개발과 CDMA 이동통신 분야에서의 교류협력등에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베트남은 대한민국을 모델로 한 경제개발을 추구하고 있어서, 베트남과 대한민국 간에 활발한 경제적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베트남 수출은 96억52,07만 USD, 베트남의 대대한민국 수출은 33억3081만USD에 달하여, 베트남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9위의 수출국, 제28위의 수입국이다. 고려 베트남과 한국의 역사적인 관계는 13세기초 고려 고종의 치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트남에 쩐 왕조가 들어서자 멸망한 리 왕조의 왕자 이용상이 고려로 피난와 귀화하여 화산군이라는 봉작을 받고 화산 이씨로 살았다고 한다. 이용상은 고려를 여러모로 도와주고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식읍도 하사받았고 후손도 퍼뜨려 화산 이씨의 세보를 한반도에 정착시킨 것이다. 그는 정권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베트남에 남아 있던 씨족이 멸절되었을 때 한반도에서 온전히 혈연을 보존해 끊길 뻔한 베트남 리씨 왕통의 혈연을 약 800년간의 세월을 건너뛰어 베트남에 전해주었다.장준섭, 〈베트남 경제발전과 한국-베트남 동반성장 전략에 대한 연구〉 한양사이버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학위논문 82쪽. “이 보다 약 70여년[13세기] 앞서서 베트남 리 왕조의 이양혼이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불만을 품고 표류하다가 정선에 도착, 정선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우리나라 기록도 존재한다.” 1308년 쩐 왕조의 학자인 막정지가 원나라 대도에서 고려 사신과 만나 우정을 나눴고, 고려 사신의 권유로 고려에 잠시 살다 고려에 후손을 두고 귀국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1460년 조선의 학자인 서거정이 당시 후 레 왕조의 사신으로 명나라 통주관에서 만난 양여곡과 50여일을 함께 지내고, 곧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시로 속정을 나눴다고한다. 1597년 진위사 로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베트남의 후 레 왕조에서 온 풍극관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이나 함께 머물렀다.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고국에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베트남 공화국과의 수교, 그리고 베트남 전쟁 1945년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독립하였으며,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베트남국으로 나뉘었다. 베트남국은 응오딘지엠의 정변으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진다. 베트남 공화국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미국과 프랑스 제4공화국에 의해 자유 진영에 편입되었으며, 대한민국은 1956년에 정식으로 베트남 공화국과 수교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대한민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남베트남과 자유 진영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기도 하였으며, 여전히 고엽제 피행 등 후유증을 안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의 여러 대통령들이 베트남을 방문하였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사과를 표명하였다.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친 박정희 정부 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군을 파병한 사건을 말한다. 미국의 요청 등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전세가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5년부터 휴접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파병하였고 1965년 의무중대 등 후방지원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가 파병되었고, 1966년에는 "브라운 각서"의 조인으로 백마부대가 추가 파병되어 베트남전 참전 8년간 총 31만 2천853명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외화획득 등 많은 경제적 이익과 전투 경험을 얻은 반면, 대한민국군 32만명이 파병되어 5천명이 전사하고 31만명이 생존 귀국하였으며, 고엽제 및 화공약품 후유증으로 귀국후 병사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이 파병기간 도중 미군의 밀라이 학살사건과 비슷한 파월 한국군에 의한 빈호아사 커우 마을 학살사건 등의 민간인 학살들이 있었다. 월남전 참전의 대가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지원받았고,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으로 일부 충당되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2005년 8월 26일 정부가 베트남전 관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좀 더 정확한 역사적 검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문서에는 브라운 각서의 이행 상황과 1970년 2월 24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주한 미국 대사인 포터의 증언 내용과 한국의 대응과정이 자세히 담겨 있었다. 한편 이대용 공사는 사이공 함락 직전 먼저 탈출한 대사를 대신해 국군 장병과 건설인력의 안전한 철수 귀국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서 애쓰다가 탈출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공산군에 붙들려 투옥된 후,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북한행을 거부하며 5년간 복역하다가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과의 수교 1992년 4월 2일 연락대표부의 상호개설 양해각서에 서명하고, 1992년 8월 17일 주베트남 연락대표부 공식업무가 개시되었으며, 1992년 12월 22일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현재 하노이에 상주 대사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호찌민 시에는 총영사관이 설치되어있다. 1993년 포 반 키엣 수상이 방한하였으며, 1996년에는 김영삼 대통령, 1998년 김대중 대통령,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였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였을때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유감 발언을 하였으며 2001년 8월에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의 방한 방문에서는 "우리는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공식 사과 하였다. 이에 대한 대한민국의 베트남참전전우회에서는 "망언"이라고 반발하였으며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경솔한 말이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대한민국의 인권단체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범죄라는 과거사에 대해 솔직하게 사과한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에 대한 규명과 범국민적 사과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10월 10일 오후 한·베트남 정상회담에 이어 판 반 카이 총리와 농 득 마잉 당서기장을 잇따라 만나 경제협력 증진과 양국관계에 대해 환담했다. 노 대통령과 카이 총리는 이날 베트남 투자여건 개선 자원, 에너지, 정보통신 분야의 협력 등 경제협력을 증대하는 방안에 대해 주로 협의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베트남 공산당사를 방문해 농득마인 당서기장을 만나 한반도 평화와 양국의 협력관계 증진을 위한 당의 지원과 협조를 요청했다. 2020년 코로나 이후 대한민국-베트남 관계/2020년대 참조. 대사관 및 대사 주월남 공화국 대한민국 대사관은 베트남 공화국 사이공에 1958년 4월 1일 공사관에서 승격되었다가,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대사관이 폐쇄되었다. 1992년 12월 22일 하노이에 주베트남 대한민국 대사관이 개설되었고, 호찌민시에 주호찌민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개설되었다. 주한 월남 공화국 대사관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1958년 3월 1일 공사관에서 승격되었다가, 1975년 5월 17일 사이공 함락으로 대사관이 폐쇄되었다. 교통 한국과 베트남 간에는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베트남 항공 등이 서울, 부산과 하노이, 호치민에 운항 중이다. 문화 안산시 원곡동 안산역 건너편에서 시작해 원곡본동사무소에 이르는 300~400m의 "국경 없는 마을"에는 4개의 베트남 음식점이 있다. 각주 같이 보기 주한 베트남 대사관 주베트남 대한민국 대사관 주호찌민 대한민국 총영사관 주다낭 대한민국 총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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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D%95%98%EB%9D%BC%20%EC%9D%B4%EB%82%A8%20%EC%95%84%ED%94%84%EB%A6%AC%EC%B9%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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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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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지역, 또는 전체/부분으로 사하라 남쪽에 위치한 아프리카 국가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지역은 아랍 세계의 일부인 북아프리카와 대비된다. 사헬은 사하라와 열대 사바나 사이의 점이지대이다. 아프리카의 뿔과 수단의 넓은 지역은 지리적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일부이지만, 강한 중동의 영향을 보이는 아랍 세계의 일부이기도 하다. 사하라 이남 지역은 그곳의 흑인 인구와 관련하여 블랙 아프리카로도 알려져 있다. 특징 이 지역에 위치한 국가 대부분은 유엔에 의해 후진국으로 지정되어 있다. 나라 및 지역 목록 중앙아프리카 ECCAS CEMAC 동아프리카 동북아프리카 아프리카의 뿔 동남아프리카 EAC 남아프리카 SADC 수단 서아프리카 ECOWAS UEMOA 같이 보기 프랑카프리크 - 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의 프랑스 영향권 지역들 아프리카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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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AC%EC%9A%B0%EC%A3%BC%EB%A8%B8%EB%8B%88%EA%B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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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주머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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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주머니과는 말피기아목의 과이다. 예전에는 대극과 밑의 여우주머니아과로 분류하였으나, 계통 분석 결과 여우주머니과로 분리하였다. 56속 1725종을 거느린다. 나무도 있고 풀도 있으며, 주로 열대 지방에 분포한다. 하위 분류 안티데스마아과 여우주머니아과 분류 불확실 코노켄트룸속 계통 분류 각주 식물의 과 1820년 기재된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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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B%94%94%EC%96%B4%EC%98%A4%EB%8A%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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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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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은 대한민국의 주간지이다. 1989년 1월 17일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에서 창간하였다. 창간 당시의 제호는 언론노보였으나 1995년 5월 17일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2014년 5월 21일에 주간신문 950호를 발행했으며, 현재 대표이사는 이희정이다. 편집국 기자는 10여명 내외다. 현재 편집국장은 이재진이다. 미디어오늘은 대한민국의 미디어비평 전문매체다. 주로 언론의 문제점을 비평하고 기성 언론이 다루지 않는 사회문제를 조명하며 한국사회 언론권력의 문제점을 지적해왔다. 논란 엠바고 관련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인질의 구출작전인 아덴 만 여명 작전을 진행하면서 국방부는 작전에 대한 엠바고를 요청했다. 작전 돌입 사실이 보도되면 인질들이 위험에 처하고, 작전도 실패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부산일보와 미디어오늘은 국방부의 엠바고 요청이 언론에 대한 통제라고 판단해 군사작전을 보도했다. 군의 요청 이후 곧 기사를 내린 부산일보와는 달리 미디어오늘은 끝까지 기사를 내리지 않았다. 긴급회의를 가진 국방부 출입 기자단은 선원의 안전한 구출이 먼저라는 판단 아래 엠바고를 계속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국방부는 미디어오늘의 출입등록을 취소했고, 이에 미디어오늘은 지면을 통해 반발했다. 최상재 당시 언론노조위원장은 "부산일보를 통해 이미 보도된 상황에서 엠바고를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며, 엠바고는 종료됐다고 봐야 함에도 이를 인용 보도한 매체마저 중징계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며 해당 징계가 부당함을 지적했다. 미디어오늘은 2012년 9월에도 외교부의 엠바고를 깼다. 당시 외교부는 제미니호 장기피랍 사태를 보도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미디어오늘은 장기피랍사태가 보도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후 시사인과 KBS 을 통해 관련 내용이 보도되었으며, 외교부는 엠바고를 풀었다. 미디어오늘 보도 이후 100일 뒤 제미니호 피랍선원은 전원 구출되었다. 각주 같이 보기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외부 링크 미디어오늘 대한민국의 신문 1989년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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