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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B%A4%EB%A5%B4%EA%B8%B0%EC%9D%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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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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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기인(, )은 다게스탄 공화국에 살고 있는 캅카스계 민족이다. 때때로 러시아어 복수형 표현을 따라서 다르긴인()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고유 언어인 북동캅카스어족의 다르기어를 사용한다. 오래 전부터 오늘날의 거주 지역에 살던 다게스탄의 원주민족으로서 인근의 체첸인, 아바르인 등과도 먼 친연 관계이다. 인구는 약 60만 명으로 추산되며 다게스탄 내에 그 중 425,526명이 거주하여 다게스탄에서 아바르인 다음의 제2민족이다. 종교는 대다수가 수니파 이슬람을 믿는다. 러시아의 민족 다게스탄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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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9C%EB%85%95%20%28%ED%9B%84%EC%A1%B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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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녕 (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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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녕(太寧)은 중국 후조(後趙) 무제(武帝)의 두 번째 연호이다. 349년 한 해 동안 사용하였다. 349년 4월에 무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폐제(廢帝) 제공(齊公) 석세(石世)가 1개월 동안 이어서 사용하였으며, 5월에 석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폐제(廢帝) 팽성왕(彭城王) 석준(石遵)이 7개월 동안 이어서 사용하였다. 11월에 석준의 뒤를 이어 즉위한 폐제(廢帝) 의양왕(義陽王) 석감(石鑒)이 2개월 동안 이어서 사용하였으며 350년에 개원하였다. 같은 시기에 사용된 다른 연호로는 동진(東晉)에서 사용한 영화(永和 : 345년 ~ 356년), 전량(前凉)에서 사용한 건흥(建興 : 314년 ~ 361년), 대(代)에서 사용한 건국(建國 : 338년 ~ 376년)이 있다. 연대대조표 관련항목 다른 왕조의 같은 연호 동진(東晉) 태녕(323년 ~ 326년) 북제(北齊) 태녕(561년 ~ 562년) 중국의 연호 후조의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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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A0%EC%9E%90%EB%8A%94%20%EC%88%B2%EC%86%8D%EC%9D%98%20%EB%AF%B8%EB%8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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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속의 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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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속의 미녀( - 美女, , , )는 고전 동화이다. 샤를 페로의 동화집 및 그림 동화에 수록되었다. 페로는 1697년 《어미 거위 이야기》에 이 동화를 수록했다. 페로 이전인 1634년에 발간된 잠바티스타 바실레의 《Pentamerone》 중 39장 〈해, 달, 그리고 탈리아〉(Sole, Luna e Talia)에도 이 이야기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1812년 그림 형제는 독일 북부 포메라니아 지방의 전래 동화를 바탕으로 이 이야기를 자신들의 저서에 수록하였다. 톨킨 교수는 페로의 문화적 존재감은 굉장히 보편적이라, 만약 동화를 이름 대라고 질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페로의 모음집 중의 9개의 이야기 중 하나를 인용할 것이라 언급하였다. 그러나 톨킨의 세대 이후, 가장 유명한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가 되었고, 이는 페로의 원작에 기초를 둔 차이콥스키의 발레만큼이나 주목을 받았다. 줄거리 그림 동화 아이를 간절히 원하던 어느 왕과 왕비가 귀여운 딸을 얻게 되었다. 공주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왕은 나라안의 마법사를 초대하기로 했다. 손님을 대접할 황금 접시가 12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왕은 열두 명의 마법사밖에 초대할 수가 없었다. 초대받은 마법사들은 한 사람씩 공주에게 마법을 걸어 아름다움, 지혜 등 훌륭한 선물을 주었다. 11번째의 마법사까지 선물을 주었을 때, 초대받지 못한 13번째 마법사가 나타나 "공주는 물레 바늘에 찔려 죽을 것이다" 라고 저주를 걸었다. 미처 선물을 주지 않았던 12번째 마법사는 그 저주를 풀 수는 없었지만 대신 죽음이 아닌 100년 동안의 깊은 잠이 들도록 바꾸었다. 왕은 나라안의 모든 물레를 불태우도록 했고,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공주는 무럭무럭 자라나 15세가 되었다. 혼자서 성을 돌아다니던 공주는 탑 꼭대기에서 실을 잣는 노파를 발견했고, 물레바늘에 손을 찔려 깊은 잠에 빠졌다. 공주뿐만 아니라 왕과 왕비,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잠이 들었고 성안은 가시덤불이 에워싸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왕자들이 공주를 구하기 위해 성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00년이 지난 후 근처를 지나가던 한 왕자가 소문을 듣고 성을 찾아왔고, 그는 성으로 들어가 공주에게 키스를 했다. 잠에서 깨어난 공주는 왕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 페로 동화 페로의 동화에서는 마법사 대신 여덟 명의 요정이 등장한다. 공주가 잠이 든 후 슬픔에 빠진 왕과 왕비는 성을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만이 요정의 마법에 의해 잠이 든다. 또한 공주는 왕자의 키스가 아닌 100년의 시간이 흘러 저절로 잠에서 깨어난다. 또한 페로의 버전에서는 결혼한 공주가 두 아이를 얻지만 시어머니인 왕비가 아이들을 잡아먹으려다가 실패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그림 동화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되었다. 번안 아동문학가인 고 소파 방정환 선생이 일본 도요대학교에서 특별청강생으로 공부를 하던 때인 1923년에 펴낸 《사랑의 선물》에 《잠자는 왕녀》라는 제목의 동화로 번안을 하였다. 번안은 다른 언어로 쓴 문학작품을 우리말로 옮길 때에 번역하는 국가의 전통이나 문화에 맞게 옮김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번안을 한 《잠자는 왕녀》는 독일의 언어학자들인 그림 형제가 소개한 동화를 조선의 어린이들이 읽기 좋게 쓴 동화이며, 에세이에서 펴낸 《방정환 동화집》에 실려있다. 각주 외부 링크 Little Briar-Rose and other variants from SurLaLune Fairy Tale site Perrault's version discussed by Waller Hastings in "The sleeping beauty in the woods" Perrault's version also discussed by Waller Hastings in "Sol, Luna, e Talia" Free audio story of The Sleeping Beauty at Storynory Audio of The Sleeping Beauty Part Two (The Queen Ogre) at Storynory Sleeping Beauty by Jacob and Wilhelm Gimm 숲속의 잠자는 공주1870 illustrated scanned book via Internet Archive 일러스트 및 한국어 버전 가공의 왕녀 그림 동화 샤를 페로의 작품 잠을 소재로 한 작품 1697년 단편소설 왕녀를 소재로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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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A%B8%EA%B5%AD%EC%A0%9C%EB%8F%84%EC%84%9C%EC%A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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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도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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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도서전은 1995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행사이다. 1954년에 서울 도서전으로 시작한 것을 1995년에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국제 도서전으로 규모를 확장하여 지금에 이른다. 2008년부터 주빈국을 지정하여 주빈국의 도서작품 등을 특별 전시하며, 2009년에는 입장료를 유료화하였다. 개요 2006년 이전 전시회는 생략함. 2007년 기간 : 2007년 6월 1일 ~ 6월 6일 장소 : 코엑스 A홀, B홀(구 태평양홀, 인도양홀) 주최 : 2007 서울국제도서전 조직위원회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 재단법인 한국 출판문화 진흥재단, 한국 서점조합 연합회 협찬 : 네이버(NHN) 2008년 기간 : 2008년 5월 14일 ~ 5월 18일 장소 : 코엑스 A홀, B홀(구 태평양홀, 인도양홀) 주최 : 2008 서울국제도서전 조직위원회 주관 : 대한출판문화협회, 코엑스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 출판문화 진흥재단, 한국 서점조합 연합회 협찬 : 네이버 2009년 기간 : 2009년 5월 13일 ~ 5월 17일 장소 : 코엑스 A홀, B홀(구 태평양홀, 인도양홀) 주최 : 대한출판문화협회 주관 : 대한출판문화협회, 문화방송, 코엑스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협찬 : 다음, 좋은책신사고, 한국 삐아제, 한국 슈바이처, 예림당 2010년 기간 : 2010년 5월 12일 ~ 5월 16일 장소 : 코엑스 A홀, B홀 주최 : 2010 서울국제도서전 조직위원회 주관 : 대한출판문화협회, 코엑스, 문화방송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역대 주빈국 2008년 : 중국 2009년 : 일본 2010년 : 프랑스 외부 링크 서울국제도서전 홈페이지 대한민국의 전시회 도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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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국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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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국제공항(, )는 오사카부 도요나카시와 이케다시, 효고현 이타미시에 걸쳐 있는 공항이다. 공항의 대부분이 이타미시에 속하므로 이타미 공항()이라고도 불린다. 간사이 국제공항이 개항하기 전에는 국제선도 같이 운항해 왔으나, 간사이 국제공항이 개항하면서 오사카 국제공항은 국내선만 운영한다. 역사 이타미 국제공항은 제2오사카 비행장으로 1939년 개장했다. 이타미 국제공항의 개장에 앞서 오사카는 기주 강 어귀에 있었던 함선 부두로서 사용되었었다. 1931년 오사카 자치정부가 야마토 강 어귀에 오사카 제1공항 건설을 계획하였다. 이 공항은 초기에는 주로 군용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말기에 미군은 이 비행장을 인도받고, 이타미 공군기지로 이름을 바꾸었다. 1954년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가 허니문을 위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1956년에 사요나라란 영화의 배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타미 국제공항이 오사카 국제공항으로 개명된 것은 1958년 일본에 반환된 이후에 1960년부터 국제공항으로 공식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음 문제로 인해 인근 주민들과 갈등이 빚어지고 그로 인해 운항시간이 12시간으로 단축되었다. 1994년 간사이 국제공항이 오사카 만의 인공섬 위에 개항을 하였다. 그 후 오사카 국제공항은 국내선 전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1999년 일부 터미널을 공사해 정원을 만들기도 했다. 2008년 7월 간사이 국제공항에 항공 각사로부터 감편이 잇따르자, 오사카부 지사는 7월 31일에 오사카 국제공항의 폐지도 고려하여 간사이 3 공항의 본연의 자세의 검토를 한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공항을 관리하는 국토교통성은 폐지는 곤란하다라는 견해를 나타냈고, 2009년 1월에 오사카 국제공항 폐지론을 철회함과 동시에 간사이 국제공항의 활성화를 중시해, 간사이 3 공항의 일체적 운영에 관해서는 장래적인 과제로 남겨두었다. 하지만 간사이 국제공항의 이용객이 지속적으로 감소되고 있고 재무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2011년 일본 국회에 간사이 국제공항과 통합 법인이 승인되었다. 운항 노선 북부 터미널 남부 터미널 교통 철도 오사카 공항역 - 오사카 고속철도 오사카 모노레일 선 버스 오사카부 (오사카역, 신오사카역, 난바 역, 아베노 역, 간사이 국제공항, 이타미 시 교통학과) 효고현 (이타미 역, 고베역 ) 교토부 (교토역) 도로 한신 고속도로 : 한신 고속도로 11호 이케다 선 NEXCO 서일본 : 주고쿠 자동차도 도도부현도 : 오사카부도 제11호 오사카 국제공항 선 통계 여담 오사카 국제공항에서는 2006년부터 쌍발기 외 다른 항공기들의 이착륙은 특별 전용기, 소형 항공기 제외 전 기종의 이착륙을 제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일본공수나 일본항공 등은 대량 수송용 쌍발기 운항을 촉진하기 위해 보잉 777, 보잉 787, 에어버스 A350 등으로 대체되고 있는 추세다. 같이 보기 간사이 국제공항 고베 공항 사진 각주 외부 링크 공식 사이트 1939년 설립 긴키 지방의 공항 도요나카시의 건축물 도요나카시의 교통 이케다시의 건축물 이케다시의 교통 이타미시의 건축물 이타미시의 교통 1939년 개항한 공항 오사카부의 공항 효고현의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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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AC%EB%8F%84%20%EA%B8%B0%EB%AF%B8%EC%95%BC%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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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 기미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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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 기미야스(, 1963년 5월 5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아이치현 나고야시 쇼와구(현: 덴파쿠구) 출신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투수였다. 현역 시절 14차례의 리그 우승, 11차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고 세이부, 다이에, 요미우리 등 3개 구단에서 일명 ‘우승 청부사’()라고 불린다. 또한 일본 시리즈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보유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간 야구 해설자와 평론가로서 활동했고 2015년부터 2021년까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을 맡았다. 인물 프로 입단 전 나고야 전기고등학교 시절에는 야마모토 고지와 함께 배터리를 구성했고 1981년 제63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이 대회의 2차전 상대인 나가사키니시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역대 18번째이자 19번째(금속 방망이를 채택한 이후 처음)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4대 0)하면서 팀의 4강 진출을 이끌었다. 같은 해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구마가이구미로의 취직을 발표하면서 프로 입단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밝혔지만 세이부 라이온스가 6순위로 지명을 강행했고 그 후 구단의 설득을 거쳐 입단했다(당시 언론에서는 ‘6순위로 지명되면서 1살 위인 1순위 지명을 받은 이토 쓰토무보다 고액의 계약금과 연봉’을 보장받은 걸로 추정했다). 세이부에 입단할 당시의 배경에 대해서는 구단 관리부장인 네모토 리쿠오가 주도했던 지명으로 입단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지자, 일반적으로 ‘네모토 매직’, ‘야구계의 책사’ 등으로 불렸던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오랫동안 회자됐다. 구도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곤 있었지만 2012년에 슈칸 분슌에서 구도가 2011년 당시 히로오카 다쓰로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네모토는 구도의 입단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입단시키려 했던 사람은 당시 세이부 감독이었던 히로오카였다고 한다. 세이부 시절 입단 1년차인 1982년부터 감독인 히로오카 다쓰로에게서 ‘꼬맹이’라고 불릴 정도의 귀여움을 받으며 중간 계투로 기용됐다. 그 해에는 27경기에 등판하여 1승 1패, 평균 자책점 3.41의 좋은 성적을 남겼는데 히로오카에게서는 엄격한 지도를 받으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같은 해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에 등판하여 2차전에서는 에나쓰 유타카와의 투수전 끝에 승리 투수가 됐다. 참고로 퍼시픽 리그 전·후기제 시절의 플레이오프는 이 때가 마지막이었다. 1983년에는 중간 계투의 주축으로서 기용됐지만 2경기에 선발로 등판했고 평균 자책점도 3점 대를 기록하여 이 해에도 호투하는 활약을 보였다. 입단 3년차인 1984년에는 9경기 등판에만 그쳤고 히로오카의 명을 받아 미국의 싱글A 팀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에서 메이저 리그의 야구를 관전했던 것이 전환기가 됐고 이후엔 귀국하여 미야타 유키노리의 지도를 받고 팀의 주력 투수로 성장했다. 198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선발로 전향했는데 이 해에는 8승 3패를 기록했는데도 자신의 첫 타이틀이 되는 최우수 평균 자책점을 획득했다. 이듬해 1986년에는 프로 입문 후 처음이자 두 자릿수 승리가 되는 11승을 올렸고 완투 수도 10회를 기록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맞대결을 펼친 일본 시리즈에서는 세이부가 1차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후 내리 3연패를 당했는데 5차전에서는 연장 12회, 투수인 구도가 타석에 들어서며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다. 그 후 세이부는 3연패를 당한 뒤 4연승을 기록하여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1승 2세이브를 기록한 자신도 일본 시리즈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1987년에는 시즌 15승을 올린 것 외에도 시즌 최다인 23차례의 완투를 기록해 통산 두 번째가 되는 최우수 평균 자책점, 그리고 최고 승률과 베스트 나인 타이틀도 나란히 선정됐다. 하지만 그해 MVP는 팀의 우승 경쟁에 들어간 후반기에 9승 1패로 활약한 히가시오 오사무가 선출됐다. 그럼에도 그 해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한 차례의 완봉을 포함한 2승 1세이브의 성적으로 전년도에 이어 2년 연속 MVP를 수상, 명실공히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좌완 투수가 됐다. 1988년에는 개막전에서 완봉승을 따냈지만 제구력 난조로 인해 부진이 계속되자, 6월에 2군으로 내려갔다. 1군 복귀 후에는 컨디션을 되찾으면서 10승 10패 1세이브를 남겼지만, 11차례의 완투를 기록하면서 3년 연속 두 자릿수 완투를 기록했다. 1989년에는 컨디션 난조와 제구력이 무너지면서 4승(2선발) 8패 2세이브라는 부진한 성적을 남겼고 중간 계투로서 등판하기도 했는데 최종적인 등판 수는 33차례였다. 1990년에는 부상에 의한 전력 이탈이 있었지만 9승을 올렸다. 그러나 1984년 이래가 되는 투구 이닝이 100이닝 미만으로 시즌을 마쳤다. 1991년에는 개인 최고 성적인 16승(15선발승)(본인의 최다 선발승 타이)을 올리면서 부활을 이뤘고 동시에 최고 승률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듬해인 1992년에도 11승을 올리는 등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큰 기여를 했고 1993년에는 15승 3패의 시즌 성적과 최우수 평균 자책점, 최고 승률, 베스트 나인 등을 수상했고 본인으로서는 처음이 되는 퍼시픽 리그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1993년 시즌 종료 후 그 해에 처음으로 도입된 FA 권리를 취득했지만 세이부에 잔류했다. 1994년에는 시즌 11승을 올리면서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지만 그해 가을에 있은 재계약 협상에서 지금까지 노후화 되고 있던 연습 설비와 시설 개선을 해달라고 계속 호소했지만 구단측으로부터 뚜렷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FA권을 행사했다. 결국 네모토가 구단 사장, 오 사다하루가 감독으로 취임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이적했는데 세이부의 황금 시대를 이끌었던 아키야마 고지와 다시 팀메이트가 되면서 팀의 재건을 맡게 됐다. 다이에 시절 1995년, 이적 후 첫 등판은 친정팀 세이부와의 개막전 선발 등판했는데 이 경기는 난타전을 벌이면서 구도 자신도 4이닝 8실점을 내줬지만 경기는 다이에가 승리하면서 패전은 면했다. 6월에는 한 달 정도의 부상 이탈은 있었지만 시즌 성적은 12승 5패, 평균 자책점 3.64로 세이부 시절과 다르지 않는 안정감을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으로서는 처음이자 팀이 B클래스(4위 ~ 6위)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이듬해 1996년에는 29경기에 선발 등판해 9차례의 완투와 8승을 올렸는데도 15패라는 성적을 남기며 부진했지만 시즌 최다인 178개의 탈삼진을 기록하여 자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했다. 1997년에는 2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가 되는 11승을 올렸다. 1998년에는 부상으로 인한 전력 이탈이 있어서 시즌 성적은 7승에 그쳤지만 팀은 다이에가 구단을 인수한 이후 처음이 되는 A클래스(1위 ~ 3위) 진입에 성공하여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공동으로 3위를 차지했다(당시 다이에와 오릭스의 시즌 승률은 5할). 구도 자신도 세이부 시절이던 1994년 이후 4년 만에 A클래스를 경험했다. 이듬해 1999년에는 구도가 에이스로서 11승을 올리는 등 통산 네 번째가 되는 최우수 평균 자책점과 통산 두 번째인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연거푸 획득했다. 다이에가 후쿠오카로 연고지를 이전한 이후 첫 리그 제패에 큰 공헌을 하여 시즌 MVP에 선정됐다. 주니치와 맞붙은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 선발 등판해 일본 시리즈 신기록이 되는 13개의 삼진을 빼앗아 완봉승을 거둔 이 경기에서 자신의 일본 시리즈 통산 탈삼진수를 86으로 늘렸고, 이나오 가즈히사가 갖고 있던 기록(84개)을 넘어섰다. 주니치의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적을 칭찬하는 것은 싫지만, 구도는 우리 팀을 0점으로 막아냈기 때문에 굉장한 투수다”라고 분한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구도 자신은 훗날 자신의 저서에서 이 경기의 투구를 “생애 최고의 경기였다”라고 평가하며 삼진을 빼앗은 것과 땅볼을 치게 하는 것도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였다고 밝혔다. ‘주니치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라는 하마평 속에서 구도의 완봉승으로 기세를 탄 다이에는 4승 1패의 성적으로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구도 자신도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해 한때는 주니치 드래곤스나 메이저 리그 이적에 얽메였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이적이 결정됐는데 4년 계약을 포기하고 단년 계약을 맺었다. FA에 대해서는 “(다이에에서)좀더 있고 싶었다”라고도 말했다. 2008년에 슈칸 베이스볼과의 인터뷰에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부터 오퍼가 있었던 사실을 밝혔다. 결과적으로 일본을 택한 것은 같이 상담했던 노모 히데오에게서 조언을 받은 것 때문이라고 한다. 이적을 앞두고 후쿠오카에서는 구도의 잔류를 바라는 팬들이 서명 활동을 주도했고 17만 3,000명이 넘는 서명이 모였다. 구도는 이적 후, 서명에 참가한 팬 전원에게 주소와 이름을 친필로 적어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이 감사의 편지를 보내는 데는 약 7년이 걸렸다고 한다. 요미우리 시절 이적 1년차인 2000년에는 ‘우승 청부사’로서 투수진을 끌어들이며 시즌 초반부터 순조롭게 승리를 이어가는 등의 활약으로 전반기에서만 10승을 올리는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시즌 종반에 오른쪽 장딴지 부상으로 한동안 전력에서 이탈했지만 12승을 거두면서 요미우리의 리그 우승에 기여하여 최우수 투수에 선정됐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1차전에 선발 등판해 전년도까지 활약했던 친정팀 다이에를 누르고 팀은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구도 자신으로서는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듬해 2001년에는 왼쪽 어깨 부상으로 고전하면서 5경기 등판에만 그쳤다. 2002년에는 9승을 남기면서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친정팀 세이부와 맞대결을 펼친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선발로 나오면서 첫회에 알렉스 카브레라에게 선제 적시타를 맞았지만 3회 이후에는 무안타로 막아내면서 8이닝 동안 2실점 8탈삼진의 호투를 보였다. 팀은 그대로 이기면서 자신도 승리 투수가 됐고 자신이 가진 일본 시리즈에서의 탈삼진 일본 신기록을 102까지 늘렸다. 2003년에는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적도 있어 7승 6패와 평균 자책점 4.23의 성적으로 끝났다. 2004년 8월 17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2실점 완투 승리를 거두며 개인 통산 200승(당시 194선발승)을 달성(통산 200선발승은 2005년 5월 19일 소프트뱅크 호크스전 4실점 완투승으로 기록)했다. 일본 프로 야구 역대 23번째이자, 41세 3개월에서의 200승은 당시로서는 사상 최고령 기록이다. 또한 이 경기에서 프로 첫 홈런을 기록했는데 41세 나이에 프로 생활 23년 만에 첫 홈런을 때린 것 또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고령 기록이다. 단지 타자로서는 2000년부터 2002년까지 84타석 연속 무안타라는 센트럴 리그 기록을 남겼다(일본 기록은 사가 겐시로의 90타석). 자신의 저서에서 “예전 일본 시리즈에서 생긴 이미지가 있는 탓인지, 요미우리로 이적했을 때 ‘배팅도 기대하겠어’라는 얘기를 들었으나 중간부터 ‘배팅은 이제 됐으니 번트만 확실하게 쳐달라’라는 말을 듣게 됐다”라고 밝혔다. 그 해에는 평균 자책점이 4점 대이면서도 4년 만의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다. 2005년 5월 19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 센트럴 리그 최고령 완투승리 기록(당시)을 경신했고 같은 해 8월 26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최고령 두 자릿수 승리 기록(당시)을 경신했다. 훗날 최고령 200승을 비롯해 모두 야마모토 마사가 기록을 경신했다. 이 해에는 팀이 개막 이후부터 침체를 겪었고 구원 투수진 역시 부진을 보였다. 선발진에서는 베테랑 구와타 마스미는 이 해에 단 한 번도 승리를 올리지 못했고 에이스인 우에하라 고지는 컨디션에 기복을 보였으며 다카하시 히사노리도 과거 2년 만큼 부진을 겪진 않았으나 기복이 극심할 정도의 침체를 겪었다. 우에하라와 다카하시 히사노리는 규정 투구 이닝을 채웠지만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 해에 구도는 11승을 올렸지만 규정 투구 이닝에는 도달하지 못했고 팀 투수진 가운데 규정 투구 이닝을 채웠음에도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둔 투수는 없었다. 이듬해 2006년에는 시즌 전반기에 3승을 올렸고 7월에는 오노 유타카를 뛰어넘으며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43세 2개월 이상의 현역 좌완 투수가 됐다. 하지만 6 ~ 7월 두 경기에서 총 20실점을 기록했고 더 나아가 어깨 통증도 발병하여 1군 등록이 말소됐다. 최종적으로 3승 2패, 평균 자책점 4.50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12월에 있은 재계약 협상에서 한도폭을 넘는 연봉 삭감 제시를 받고 보류했는데 해를 넘겨서 전지훈련지인 미국으로 출국했다. 오프에는 요미우리의 젊은 유망주 3명(아이다 유시, 야마구치 데쓰야, 기무라 쇼타)을 애리조나 자율 훈련에 대동시켜 프로로서의 사생활이나 트레이닝의 중요함을 처음부터 지도해나가며 재능을 향상시켰다. 이 자율 훈련 기간 중에 가도쿠라 겐이 FA로 이적했던 것에 따른 인적 보상으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이적이 결정됐다. 요코하마 시절 2007년 1월 7일, 요코하마로부터 FA로 요미우리에 이적한 가도쿠라 겐의 인적 보상 보호 범위 28인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판명된 것과 또한 거기에 대한 요코하마는 215승을 기록한 좌완 투수의 경험을 평가하여 획득 후보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있는 것 등이 언론에서 이를 앞다퉈 보도했다. 또한 요미우리 프런트측은 원래 비밀리에 진행될 예정이었던 협상이 언론에서 먼저 보도된 것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1월 9일에 요코하마의 이적이 최종 결정됐다. 자신이 FA 이적을 하면서 동시에 FA의 인적 보상이 된 것은 2006년의 에토 아키라에 이은 두 번째 사례이며 2000년에 에토는 구도와 똑같이 요미우리에 FA로 입단했다. 요코하마에 이적한 후에도 등번호는 47번으로 정해졌다. 언론에서는 트레이드 당시 구도와 함께 요코하마로 이적한 니시 도시히사와 함께 요미우리와의 ‘인연의 대결’로 기대를 모았으나 1월 11일에 방송된 보도 스테이션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프런트였다면 43세의 선수를 보호 범위에는 넣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여 자신이 소속된 구단의 팀 사정에 이해한다는 모습을 보였으며, “날 원한다고 해준 구단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요코하마 구단에는 “밝은 이미지를 가진 구단이다. 단순히 공을 던지는 것 이상의 팀을 공헌하고 싶다”라는 각오를 밝혔고 “훈련지에서 크룬을 만났다”며 팀 동료들에 대한 메시지를 보냈다. 2007년 1월 19일에 가진 입단 기자회견에서 “하마()의 뭐라고 불리고 싶으냐”라는 TBS 아나운서인 아오키 유코의 질문에 대해 “그러면 하마의 아저씨가 좋겠다”라며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대답했다. 연봉은 전년도 2억 9,000만 엔에서 2억 엔이 삭감된 9,000만 엔(여기에 최고 5,000만 엔의 성과급)으로 프로 야구 사상 최대 감봉액(당시)이 됐다(금액은 추정치). 2007년 4월 1일, 요미우리전에 등판하여 1군에서의 실제로 뛴 통산 경력이 26년에 달하면서 노무라 가쓰야가 세운 프로 야구 최장 기록에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나 시즌 개막 초에는 불안정한 투구가 눈에 띄면서 3연패를 당하는 등 스스로 2군행을 지원하여 조정에 들어갔고 5월 11일 히로시마전에서 9회에 구원 등판하여 1군에 복귀했다. 구원으로 등판한 것은 9년 만의 일이다. 5월 23일 세이부전에 선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됐는데 요네다 데쓰야가 수립한 22년 연속 승리 기록을 경신하고 23년 연속 승리를 달성했다. 또, 44세 넘은 선수가 승리 투수가 된 것은 역대 두 번째 기록이다. 2007년 7월 12일 주니치전에서 6회말에 나카타 겐이치로부터 중전 안타를 날려 44세 2개월의 나이로 센트럴 리그 최고령 안타 기록을 수립했다. 더 나아가 9월 26일 한신전에서 5회말에 하시모토 겐타로로부터 좌전 안타를 날리는 활약을 보이며 44세 4개월에 자신의 기록을 경신했다. 7월 24일 요미우리전에 선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면서 사상 최초로 긴테쓰를 비롯한 전체 13개 구단으로부터 승리를 거둔 투수가 됐다. 개막 당초에는 실투를 하는 등의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가는 수모를 겪었지만 1군에 복귀한 이후에는 안정된 투구를 계속 보여줬다. 시즌 종료 후에 있은 재계약 협상에서 2,000만 엔이 상승한 연봉 1억 1,000만 엔으로 재계약을 맺었다. 이듬해 2008년 4월 1일 야쿠르트전에 선발 등판하여 프로 통산 27년이 됐는데 노무라의 프로 통산 26년을 경신하여 역대 단독 1위가 됐지만 팔꿈치 통증으로 인해 이 한 경기만으로 2군에 내려갔다. 9월 9일 닛폰햄 - 쇼난(가마가야) 16차전에 선발로 나와 5이닝을 던져 이스턴 리그 최고령 승리 투수가 됐다. 하지만 1군에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했고 1984년 이래 24년 만에 1군에서의 단 한 번도 승리 투수가 되지 못한 채로 시즌을 마쳤다. 같은 해 재계약 협상에서 야구 협약에 정해져 있던 감액 제한을 넘어선 약 55%나 감소된 연봉 5,000만 엔 플러스 실적에 따른 지급으로 갱신했다. 2009년에는 대명사가 된 등번호 47번을 착용했던 햇수가 26년에 달하면서 프로 야구 신기록이 됐다. 4월 8일에 친정팀인 요미우리전에 선발 등판하여 자신이 갖고 있던 프로 통산 기록을 28년으로 경신했다. 이 경기에서는 8실점을 내주며 패전 투수가 되면서 그 후 2군에서의 조정을 거친 뒤 팀의 방침에 따라 구원 투수로 전향했다. 구도가 본격적으로 구원 투수가 된 것은 1989년 이래 20년 만이었다. 5월 5일 요미우리전에서 자신의 첫 홀드를 기록했다. 같은 해 5월 25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에서는 팀의 4번째 투수로서 9회초에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팀이 역전 끝내기 승리에 의해 자신이 갖고 있던 44세 4개월에서의 센트럴 리그 최고령 승리 기록을 46세 20일로 경신했다. 이 승리로 통산 223승(217선발승으로 통산 선발승 9위)이 되면서 무라야마 미노루를 넘는 단독 13위가 됐다. 또 40세 이후 37승째가 되면서 36승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던 와카바야시 다다시(당시 다이마이 오리온스 소속)를 넘는 단독 1위가 됐다. 7월 1일 야쿠르트전에서 1대 2로 뒤지고 있던 6회초 2사부터 등판하여 타자 1명을 불과 4개로 막아냈고 그 후 팀이 역전하면서 9대 5로 승리했기 때문에 통산 224승째를 올렸다. 이 경기는 지방에 소재하고 있는 야마나시 고세 구장에서 열렸기 때문에 팬서비스도 겸해서 등판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이 프로 생활에 있어서의 마지막 승리가 됐다. 9월 15일, 팀의 미래를 위해서 젊은 선수들의 기용을 도모했던 구단 본부로부터 전력외 통보와 자유 계약이 되는 취지의 통보를 받았다. 현역에서 계속 뛰겠다는 의사를 나타내면서 친정팀인 세이부가 영입 의사를 나타냈다. 세이부로 복귀 2009년 11월 14일, 구도는 “가족 회의 결과, 세이부에서 신세를 지는 일로 결정했다”고 밝히면서 16년 만에 친정팀 세이부로 복귀하게 됐다. 프로 데뷔 이래 거의 해마다 착용했던 등번호 47번은 주축 좌완 투수였던 호아시 가즈유키가 착용했다. 호아시는 “(등번호 47번은)원래 구도 선배의 번호였다. 구도 선배가 원한다면 기꺼이 돌려 드리겠다”라는 의향을 내비쳤지만 구도 본인이 “젊은 선수한테 그런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진 않다”라고 말해 이를 고사했다. 11월 16일에 등번호는 ‘55’번으로 정했다. 이듬해 2010년 7월 18일, 전반기 종료 직전에 복귀 후 처음으로 1군에 등록됐다. 7월 20일 소프트뱅크전(야후 돔)에서 7회말에 선발 노가미 료마의 뒤를 이어 팀의 두 번째 투수로 등판, 자신이 가진 프로 통산 기록을 29년으로 경신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10경기에서 0승 2패, 평균 자책점 10.50의 성적을 남겼고 8월 25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동점인 상황에 등판 기회를 얻었으나 역전타를 허용하여 28일에 1군 등록이 말소됐다. 9월 27일에 구단으로부터 전력외 통보를 받고 10월 1일에 퇴단했다. 세이부 퇴단 후·은퇴 표명 세이부에서 퇴단한 이후에도 현역으로 계속 뛰고 싶다는 뜻을 표명했으나 이듬해 2011년 시즌에는 구도를 영입하겠다고 나서는 구단이 없어서 트레이닝을 계속하면서 메이저 리그 도전도 염두에 두고 1년간 무적선수 신분으로 있었다. 현역 속행을 향한 트레이닝에 전념하는 한편으로 분카 방송의 게스트 해설자도 맡았다. 이 무렵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장례식에 얼굴을 내밀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고 한다. 같은 해 7월, 가을에 메이저 리그 트라이아웃에 참가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후술대로 어깨 부상이 낫지 않은 탓에 트라이아웃 참가는 무산됐다. 2011년 11월 22일 스포츠 호치의 취재에 응했는데 견관절에 염증이 일어나는 등 어깨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다고 언급하면서 본인 입에서 은퇴를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최종적인 거취 판단은 가족들과 의논한 다음 그때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그 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를 매수한 DeNA측으로부터 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12월 5일에 협상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채 결렬된 것으로 알려졌다. 12월 9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어깨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서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결심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구도가 은퇴한 후에는 주니치의 야마모토 마사가 일본 프로 야구의 최고령 선수가 됐다(만 50세 나이인 2015년 시즌 끝으로 은퇴). 1988년 시즌 끝으로 매각된 한큐 브레이브스·난카이 호크스로부터 승리한 경험이 있는 마지막 현역 선수이기도 했다. 2012년 4월 7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세이부 - 소프트뱅크전의 경기에 앞서 구도에 의한 시구식과 은퇴식이 거행돼 구도와 함께 세이부이 황금기를 이끌었던 세이부의 와타나베 히사노부 감독(당시)이 포수를 맡았고 소프트뱅크의 감독 아키야마 고지가 타석에 들어섰다. 구도가 던진 완만한 커브를 원바운드로 쳐냈는데 “마운드에서 던진 공이 닿지 않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 후 2012년부터는 닛칸 스포츠 평론가, 분카 방송 《라이온스 나이터》의 해설자로서 활동했다. TV 아사히의 《보도 스테이션》에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의 감독으로 취임한 구리야마 히데키의 후임으로 프로 야구 담당 캐스터로서 정기적으로 출연했다. 또, 2011년까지 구리야마가 맡았던 아사히 방송 《열투! 고교 야구 네비게이터》를 맡았는데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의 예선·본선 대회 기간 중에는 프로 야구의 해설·평론 활동과 병행하면서 아사히 방송이 제작하는 대회 관련 프로그램(《속보! 고시엔으로의 길》, 《열투 고시엔》 등)으로 사회나 취재를 담당했다. 2013년 7월 19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쓰쿠바 대학 대학원에 합격한 사실을 밝혔고 이듬해 2014년 4월, 동 대학원 인간종합과학연구과에 니시 도시히사, 요시이 마사토와 함께 입학했다. 소프트뱅크 감독 시절 2014년 11월 1일, 세이부와 다이에의 선배이기도 한 전임 감독인 아키야마 고지가 용퇴했고 아키야마의 후임으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으로 취임하는 것이 결정되면서 오 사다하루 구단 회장이 동석한 취임 기자회견을 가졌다. 투수 출신의 호크스 감독은 스기우라 다다시 이래 26년 만이다. 또한 감독 취임에 맞춰 구도의 등번호는 당초 오 사다하루가 다이에·소프트뱅크 감독 재임 시절에 착용했던 ‘89’번을 붙인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지만 전임 감독인 아키야마가 착용했던 ‘81’번을 이어받게 됐다. 2015년 ~ 2016년 2015년 정규 시즌에서는 특히 교류전에서 12승 6패, 선두 닛폰햄과 반 경기차이로 2위가 됐지만 6월 16일 한신 - 닛폰햄전에서 닛폰햄이 패하여 소프트뱅크의 교류전 승률 1위가 확정됐다. 팀 타율 2할 8푼 7리, 팀 홈런 23개, 90득점은 모두 12개 구단 가운데 1위였다. 후쿠오카로 연고지를 이전한 이후 가장 빠른 매직 넘버 38이 되면서 9월 6일 라쿠텐전에서 5대 3으로 승리해 3위 이내의 성적이 확정됨에 따라 양대 리그에서 가장 먼저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이 확정됐다. 9월 17일, 홈구장인 후쿠오카 야후오크! 돔에서 열린 세이부전에서 승리해 퍼시픽 리그 사상 최단 기간에 리그 우승을 결정하여 취임 1년차 감독으로서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퍼스트 스테이지 승리 팀인 지바 롯데와 맞붙었는데 3연승을 기록하여 어드밴티지 1승을 포함해서 4승 무패의 성적으로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맞붙은 일본 시리즈에서 10월 29일에 열린 5차전에서는 5대 0 상황에서 마지막 정규 이닝인 9회에 마무리 투수 데니스 사파테가 막아내면서 취임 1년차에 정규 시즌, 클라이맥스 시리즈, 일본 시리즈 3개 부문에서의 완전 우승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듬해 2016년 1월 18일,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그 해에는 최대 11경기 반차이로 역전되면서 결국엔 2위에 그쳤다. 야수 종합 순회 코치에 세키카와 고이치를 기용했지만 경기 중 작전면과 불펜과의 연계, 또한 선수의 1군 승격과 2군으로 내려가는 등에서 시행 착오를 되풀이하는 등 세키카와는 그 해에 해임됐다. 2017년 ~ 2018년 2017년에는 참모 역할에 다쓰카와 미쓰오를 수석 코치로 초빙한 후 모리 히로유키를 작전 겸 배터리 코치로 발탁하는 등 코치진을 강화했다. 2위인 세이부에게 13경기 반차이로 따돌리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라쿠텐에게 4승 2패, 일본 시리즈에서는 DeNA를 4승 2패로 누르고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선수로서 3개 구단에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기에 이를 계기로 ‘우승 청부사’라고 불렸다. 현역 시절에 영양가가 높은 식사를 하거나 녹즙을 마시는 등 컨디션 관리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렇게 하게 된 이유는 부인 마사코와 결혼한 이후에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매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숙취에 절어 등판하는 등 불규칙한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이 누적되면서 1988년 시즌 도중에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고 이듬해 1989년에는 간기능 장애가 일어났다. 의사로부터 “불규칙한 생활 습관이 계속되면 선수 생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다”라고 전해들을 정도의 상태가 심각했고 1989년 시즌에는 몇 번이고 2군에 내려가는 일이 반복되자, 4승 8패와 평균 자책점 4.96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겨 전력외 통보까지 각오했다고 한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부인 마사코와 결혼할 때 프로포즈는 ‘(야구를 그만두고)산에 틀어박혀서 살자’였지만 부인이 “남편이 다시 한 번 야구를 할 수 있는 몸을 갖추고 야구로 기쁨을 느끼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은퇴를 고심하고 있던 구도를 설득해 부부가 이인삼각으로 체질개선에 나섰다고 한다. 구도는 그 후 1년 간의 재활 훈련을 거쳐 부활했고 이후 컨디션 관리에 세심한 신경을 쓰게 됐다. 1987년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에게 승리하기 직전 1루를 지키고 있던 기요하라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많이 알려진 에피소드였지만 이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9회까지 투구를 했던 사람은 구도였다. 구도는 기요하라를 보면서 ‘타자는 좌타자였던 시노즈카인데, 기요하라는 눈물 때문에 공이 잘 보이질 않아 인코스를 끌어당겨 타구가 1루로 향하게 되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1루수에게 타구가 날아오지 못하도록 하여 아웃코스로 승부하는 것을 택했다. 시노즈카를 바깥쪽의 슬라이더를 던지며 중견수 플라이로 잡고 헹가래 투수가 됐다. 이에 대해 구도를 형처럼 따랐던 기요하라는 본인의 저서에서 “울보인 동생에게 어디까지나 상냥한 성격을 가진 형이었다”, “경기가 종료되는 순간, 구도와 서로 부둥켜 안으면서 마음껏 울었다”라고 감사를 표하는 내용을 적었지만 구도 자신은 경기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앞으로 남은 아웃카운트가 원 아웃이면 헹가래 투수였기에)승리의 포즈를 어떻게 취해야할지 마운드 위에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기요하라가 우는 바람에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라고 대답하면서도 “그 눈물은 정말로 아름다웠다”라고 말했다. 다이에에서는 투수진의 일원으로서 활약함과 동시에 다케다 가즈히로와 함께 조지마 겐지를 일본을 대표하는 포수로 키워냈다. 특히 리드면에 관해서는 경기 도중 벤치 앞에서 조지마에게 리드한 의도에 대해 캐묻는 모습이 여러번 있었고 안타를 맞을 것을 알면서도 조지마의 사인대로 왜 맞게 됐는지를 마운드에서 말하게 했을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구도는 “경기 도중이 가장 좋다. 경기가 끝난 후에 그 공은 이랬다 저랬다고 말해도 이미 늦어버리니까”라고 말하면서 구도의 이러한 체계적인 지도로 조지마를 키워냈다. 조지마 자신도 경기 후에 구도가 묵고 있는 호텔방까지 찾아가, 그날 볼배합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요청하는 등 탐욕적인 향상심을 보였는데 그러한 덕택으로 조지마는 팀의 주전 포수로 정착하게 됐다. 1999년 시즌 개막 당시, 구도는 조지마에게 “올 한 해는 네가 내는 사인에 고개를 젓지 않을 테니까 자신감을 갖고 사인을 보내달라”고 말했다. 그해 다이에는 구단 첫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일본 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후 마운드에서 구도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린 조지마와 포옹했다. 구도·조지마 배터리는 시즌 종료 후에 최우수 배터리상을 수상했다. 요미우리 이적 1년째인 2000년에는 ‘우승 청부사’로서 투수진을 이끌며 시즌 초반부터 순조롭게 승점을 올려나갔고, 전반기에서만 10승을 거두는 활약을 보였다. 7월 14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6회까지 무볼넷 피안타 1개로 잘 막아내다가 7회에 들어가면서 원 아웃 주자 1, 2루 상황의 위기를 맞았는데 상대 타자 로베르토 페타지니와 후루타 아쓰야가 보인 미세한 시선의 움직임과 배팅의 궤도, 앞선 타석까지의 결과 등을 바탕으로 몸쪽에 노릴 것임을 간파하고 바깥쪽으로 나즈막하게 날아가는 스트레이트 3구로 승부를 걸어 3구 삼진으로 잡아냈다. 당시 감독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는 이 피칭에 감동하여 다음 경기도 있고 하니 이번 이닝에서 교체해 달라고 요청한 구도에게 “어이. 구도, 다음 경기는 됐으니 이 경기만큼 끝까지 던져 달라. 이렇게 멋진 피칭을 보여줬는데, 여기서 자네를 내려오게 할 순 없다. 팬분들에게도 미안한 일이다”라고 눈을 빛내면서 설득했다. 나가시마의 기개에 감명을 받은 구도는 9회까지 던져서 1대 0으로 완봉승을 거두었고 나가시마 감독으로서는 이 경기를 ‘2000년 페넌트레이스의 베스트 경기’라고 극찬했다. 프로에 입문한 후에는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적은 없었다. 아깝게 놓친 경기로 1986년 7월 13일과 1999년 9월 11일 모두 긴테쓰와의 경기에서 전자는 9회 1사까지, 후자는 8회까지 노히트 노런으로 막아냈지만 두 경기 모두 스즈키 다카히사에게서 안타를 맞았다. 에피소드 1980년대 당시 야구 선수들의 일반적인 옷차림은 조금 큰 소매의 골프 셔츠, 조끼, 좁은 바지, 에나멜 구두, 헤어스타일은 네모나게 짧은 머리, 펀치파마가 당연했지만 구도는 DC브랜드, 청바지, 스니커를 맵시있게 신었고 히어로 인터뷰에서 미소를 짓거나 우승이 결정됐을 때 헹가래를 치는 것에 참여하지 않고 카메라를 향해서 장난치는 등의 퍼포먼스를 종종 보여주었다. 그 때문인지 선배들에게서 호된 비판을 받는 일도 있었지만 1986년 신어·유행어 대상에서는 그 해의 유행어인 ‘신인류’()를 대표해 기요하라 가즈히로, 와타나베 히사노부와 함께 선정되면서 야구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선구자로 급부상했다. 또 와타나베와는 이듬해 1987년 춘계 스프링 캠프 무렵에 TV 아사히 《뉴스 스테이션》에서 ‘구도짱 나베짱의 캠프 프라이데이’()라는 코너를 맡았던 적도 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 ‘나의 야구학원’()이라는 소년 야구 지도 코너를 오랜 세월에 걸쳐 게재된 적이 있어서 미래의 야구 선수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전했다. 전국의 야구 소년으로부터 질문이 쇄도할 정도의 인기 코너로 급부상하자, 데이터로 축적된 양이 방대해졌다. 구도는 2006년에 같은 타이틀의 서적을 고단샤로부터 간행했다. 이적 후에도 요코하마 구단 홈페이지에 데이터·권리가 인계됐다.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활동 프로그램인 ‘꿈의 과외 수업’의 발기인으로서 2000년부터 전국의 초등학교를 방문하고 있다. 매년 시즌 종료 후에 신궁의 실내 구기장에서 하고 있는 자선 키즈 야구 스쿨도 2009년까지 15차례나 개최됐다(주최는 21세기 클럽). 인간 관계 요코하마 시절의 팀 동료였던 가토 고스케는 구도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공부하고 요코하마에서 방출된 이후 한신으로 이적했을 때 그 활약의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구도 자신도 《보도 스테이션》 2013년 7월 12일 방송분에서 가토의 분투하는 모습을 극찬하는 발언을 했다. 상세 정보 출신 학교 나고야 전기 고등학교 선수 경력 세이부 라이온스(1982년 ~ 1994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1995년 ~ 199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2000년 ~ 2006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2007년 ~ 2009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2010년) 지도자·기타 경력 지도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2015년 ~ ) 해설자 닛칸 스포츠·분카 방송 야구 해설자(2012년 ~ 2014년) 수상·타이틀 경력 타이틀 최우수 평균 자책점 : 4회(1985년, 1987년, 1993년, 1999년) 최고 승률 : 3회(1987년, 1991년, 1993년) 최다 탈삼진 : 2회(1996년, 1999년) 수상 MVP : 2회(1993년, 1999년) 최우수 투수 : 1회(2000년) 베스트 나인 : 3회(1987년, 1993년, 2000년) 골든 글러브상 : 3회(1994년, 1995년, 2000년) ※투수로서는 가장 유일하게 양대 리그에서 수상 월간 MVP : 1회(1991년 4월) JA 전농 Go·Go상 : 1회(최다 탈삼진상 : 2002년 5월) 일본 시리즈 MVP : 2회(1986년, 1987년) ※2년 연속 수상은 나가시마 시게오, 호리우치 쓰네오에 이은 역대 3번째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 2회(1991년, 1999년) 최우수 배터리상 : 2회 1991년 : 이토 쓰토무 1999년 : 조지마 겐지 쇼리키 마쓰타로상 : 4회(1987년, 2015년, 2018년, 2019년) ※현역 선수·감독에서의 양쪽 모두 수상은 오 사다하루, 아키야마 고지 다음으로 역대 3번째 IBM 플레이어오브더이어상 : 1회(1999년) 퍼시픽 리그 최우수 감독상 : 1회(2015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2016년) 야나세 자이언츠 MVP상 : 1회(2004년) 신어·유행어 대상 유행어 부문 금상(1986년, ‘신인류’) ※기요하라 가즈히로, 와타나베 히사노부와 공동 수상 빅 스포츠상 슈퍼 베이스볼상(2011년) 주요 기록 첫 기록 투수 기록 첫 등판 : 1982년 4월 10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전기 1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6회초 2사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1/3이닝 무실점 첫 탈삼진 : 상동, 6회초에 웨인 케이지로부터 첫 승리 : 1982년 8월 31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후기 9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5회초 2사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3과 1/3이닝 무실점 첫 선발 : 1983년 8월 4일, 대 난카이 호크스 16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3과 1/3이닝 2실점 첫 선발 승리·첫 완투 승리 : 1985년 7월 9일, 대 난카이 호크스 12차전(오사카 구장), 9이닝 2실점 첫 완봉 승리 : 1986년 6월 18일, 대 난카이 호크스 11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첫 세이브 : 1988년 6월 5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11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9회초에 4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이닝 무실점 첫 홀드 : 2009년 5월 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4차전(도쿄 돔), 7회말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1이닝 무실점 타격 기록 첫 안타·첫 타점 : 2000년 4월 11일, 대 한신 타이거스 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6회초에 후지카와 규지로부터 좌전 적시타 첫 홈런 : 2004년 8월 17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0차전(도쿄 돔), 7회말에 제이슨 베벌린으로부터 우월 결승 2점 홈런 기록 달성 경력 통산 1000투구 이닝 : 1991년 6월 1일, 대 롯데 오리온스 8차전(미야기 구장) ※역대 241번째 통산 1000탈삼진 : 1992년 8월 6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17차전(후지이데라 구장), 2회말에 앨빈 데이비스로부터 ※역대 85번째 통산 100승 : 1993년 9월 4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1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9이닝 1실점 완투 승리 ※역대 109번째 통산 100선발승: 1994년 7월 17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6차전(후쿠오카 돔), 9이닝 완봉승 통산 1500투구 이닝 : 1994년 7월 17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6차전(후쿠오카 돔) ※역대 138번째 통산 1500탈삼진 : 1996년 6월 29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14차전(후쿠오카 돔), 5회초에 미즈구치 에이지로부터 ※역대 39번째 통산 2000투구 이닝 : 1997년 6월 10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0차전(후쿠이 현영 구장) ※역대 75번째 통산 150승 : 1998년 9월 9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23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 선발 등판으로 7과 1/3이닝 4실점(3자책점) ※역대 43번째 통산 150선발승: 1999년 6월 8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10차전(후쿠오카 돔), 선발 등판으로 8이닝 선발승 통산 2000탈삼진 : 1999년 9월 23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25차전(그린 스타디움 고베), 1회말에 후지이 야스오로부터 ※역대 16번째 통산 2500투구 이닝 : 2000년 8월 17일, 대 한신 타이거스 22차전(도쿄 돔) ※역대 41번째 통산 500경기 등판 : 2004년 4월 21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2차전(도쿄 돔), 선발 등판으로 4와1/3이닝 7실점(3자책점) ※역대 73번째 통산 2500탈삼진 : 2004년 6월 4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9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말에 빌리 마틴으로부터 ※역대 8번째 통산 200승 : 2004년 8월 17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0차전(도쿄 돔), 9이닝 2실점 완투 승리 ※역대 23번째 통산 3000투구 이닝 : 2005년 5월 12일, 대 오릭스 버펄로스 3차전(도쿄 돔) ※역대 25번째 통산 200선발승 : 2005년 5월 19일, 대 소프트뱅크 호크스 인터리그 경기(야후 돔), 9이닝 4실점 완투승 통산 600경기 등판 : 2009년 7월 9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2차전(도쿄 돔), 8회말 1사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2/3이닝 무실점 ※역대 34번째 정규 시즌 현역 통산 29년(역대 1위) 연령별 최다승(42세에 11승, 44세에 7승) 40세 이후 두 자릿수 탈삼진 경기수 23년 연속 승리(역대 1위 타이) 일본 시리즈 출장 횟수 : 14회(시리즈 타이 기록) 통산 탈삼진 : 102(시리즈 기록) 한 경기 탈삼진 : 13(1999년 1차전) ※일본 시리즈 기록 이닝 3자 3구 삼진(1994년 2차전 3회) ※일본 시리즈 사상 최초 양대 리그 승리 투수(역대 3번째) 퍼시픽 리그(8승) : 세이부에서 7승, 다이에에서 1승, 센트럴 리그(1승) : 요미우리에서 1승 기타 한 이닝 4탈삼진 : 1996년 8월 2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7차전(후쿠오카 돔), 7회초 ※NPB 역대 3번째 최고령 홀드 : 46세 4개월 - 2009년 9월 20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3차전(나고야 돔), 8회말 1사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2/3이닝 무실점 올스타전 출장 : 10회(1986년, 1987년, 1991년, 1993년, 1995년, 1997년, 1999년, 2000년, 2004년, 2005년) 등번호 47(1982년 ~ 1994년, 1997년 ~ 2009년) 21(1995년 ~ 1996년) 55(2010년) 81(2015년 ~ 2021년) 21번을 착용한 다이에 시절의 1995년과 1996년 이외에는 2009년까지 47번을 계속 짊어져왔기에 47번은 구도, 또는 좌완 투수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등번호가 됐다. 2010년에는 등번호를 55번으로 했다. 1995년 다이에 이적 당시 세이부 시절과 같은 등번호 47번을 희망했지만 1994년 시즌 도중부터 케빈 라이머에게 주어졌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21번을 착용했다. 그 후 1995년 시즌 종료 후 라이머가 방출됐지만 1996년에는 스콧 라이디가 47번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적 3년째인 1997년에 그토록 바라던 47번이 주어졌다. 21번은 세이부 시절의 선배이자 프로 선수의 마음가짐을 가르쳐 준 히가시오 오사무의 현역 시절과 같은 등번호로, 세이부 소속 당시의 팀 동료이기도 한 와타나베 히사노부가 1998년에 야쿠르트에 이적했을 때도 구도와 마찬가지로 등번호 21번을 착용했다. 21을 착용했던 2년간은 상당한 위화감을 가질 정도의 기억하고 있었다고 하며 1999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에 이적할 때도 47번을 희망했다. 당시 47번을 달고 있던 오노 히토시는 13번으로 변경했다. 요코하마에 이적할 때도 등번호 47번을 착용했고 전년도까지 47을 달고 있던 쓰쓰미우치 다케시는 36번으로 변경했다. 등번호 47번이 좌완 투수에게 부여된 사례로서 다이에는 구도의 퇴단 후에 입단한 좌완 스기우치 도시야에게 구도의 등번호인 47번을 주었지만 두 사람에겐 좌완이라는 것 외에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면서도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점과 커브가 주무기인 점, 격년마다 컨디션이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는 등의 공통점이 있었다. 또한 입단 당시 스기우치는 구도를 존경하고 있으며 자신의 롤모델로 삼고 있는 선수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스기우치는 2012년에 요미우리로 이적했을 때에 등번호 18번을 배정받았다(47번을 착용하고 있었던 선수는 좌완 투수 야마구치 데쓰야였다). 세이부에서 후배에 해당되는 좌완 호아시 가즈유키는 2001년에 입단한 이래 몇 차례나 47번을 변경해달라고 요구한 끝에 2006년이 돼서야 47번을 착용하게 됐다. 그 후 호아시는 2009년 시즌 종료 후에 구도가 세이부에 복귀한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등번호 47번을 구도에게 돌려줄 의향을 보였지만 구도는 이를 고사하면서 55번을 선택했다. 참고로 호아시는 2012년에 소프트뱅크로 이적하면서 등번호를 11번으로 정했지만,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등번호 47번을 착용했다. 2009년 11월 16일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입단 기자회견을 가졌을 때 등번호 55번을 택한 이유로서 다이에 시절의 팀 동료이자 현역으로 활약 중이던 2000년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후지이 마사오가 생전에 착용했던 등번호 15를 의식하여 “후지이의 등번호 가운데 5번이 들어있었기에 좋다고 생각한다. 그의 못다 이룬 몫만큼 야구를 계속해나가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고 말했다. 또 “아이들로부터 ‘기세좋게 고고’라고 들었으며, 자신의 생일도 5월 5일”이라고 말하는 등 등번호 55번에 대한 의미를 표현했다. 연도별 투수 성적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붉은색 글씨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 성적. 통산 2,852탈삼진은 역대 탈삼진수 7위, 통산 224승은 역대 13위 타이 기록 수립.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 정규 시즌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포스트 시즌 성적에서의 굵은 글씨는 승리한 것을 나타냄. ※1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는 6경기제이며 먼저 4승을 한 팀은 일본 시리즈에 진출, 리그 우승 팀에게는 1승의 어드밴티지가 주어짐 ※2 어드밴티지의 1패를 포함. ※3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퍼스트 스테이지를 치르지 않고 정규 시즌 1위 팀과 2위 팀간의 파이널 스테이지만으로 치르게 되면서 당초의 일정을 변경했기 때문에 4전 3선승제로 축소하여 개최. 저서 저술 《나의 야구학원: ‘생각하는 힘’이야말로 최강의 무기 ()》(고단샤, 2006년 3월, / 고단샤+α분코, 2011년 5월, ) 《현역력: 스스로는 아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PHP 연구소, 2009년 3월, ) 《47번의 투구론 ()》(베스트셀러스, 2009년 3월, ) 《한계를 만들지 않는 삶의 방법: 2009년, 46세의 시즌 ()》(겐토샤, 2010년 1월, ) 《탐구력.: 인간 ‘구도 기미야스’로부터의 메시지 ()》(소에이샤, 2010년 3월, ) 《구도 기미야스의 10 km/h 빨라지는 투구술 ()》(별책 다카라지마, 2011년 4월, / 결정판, 2012년 2월, ) 《무너지지 않는 마음을 지탱하는 말 ()》(겐토샤, 2012년 1월, ) 《야구의 진실, 모두 파헤쳐보자! ()》(다카라지마샤, 2012년 7월, ) 《야구의 플레이에 ‘우연’은 없다: TV 중계·구장에서 관전을 즐기는 29가지 시점 ()》(칸젠, 2013년 4월, ) 《‘10년 전의 나’를 만든다 ()》(KADOKAWA, 2013년 10월, ) 공저 《40세부터 진화하는 마음과 몸 ()》(세이슌 출판사(세이슌 신서), 2013년 3월, ) ※시라사와 다쿠지와의 공저 감수 《구도 기미야스의 피칭 바이블: DVD로 마스터 ()》(칸젠, 2012년 6월, ) 관련 서적 《ON 대결 첫 경기 구도 기미야스 86구에 담은 싸움!: 전력분석원의 눈으로부터… ()》(요시미 다케아키 저, 산세이도 스포츠소프트, 2000년 10월, ) 《구도 기미야스 ‘42세에 146 km’의 진실: 식탁에서 시작하는 육체 개선 ()》(구로이 가쓰유키 저, 고단샤+α분코, 2006년 1월, ) 《구도 기미야스 아침식사는 최강의 몸을 만든다!: 식사를 바꾸면, 몸이 편해진다! 강해진다! 젊어진다! ()》(마쿠우치 히데오 저, 미카사쇼보, 2006년 4월, ) 《구도 기미야스 프로페셔널의 긍지 ()》(구로이 가쓰유키 저, 신초샤, 2006년 10월, ) 《강타자 구도 기미야스가 말하는 18.44미터 건너편의 라이벌들 ()》(이이오 데쓰지 저, 다케쇼보, 2015년 3월, ) 각주 외부 링크 재단법인 야구 전당 박물관 - 구도 기미야스 고교 야구 정보.com 독점 인터뷰 - 구도 기미야스 선수(2009년 4월 18일 ~ 2009년 4월 24일) 196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야구 선수 일본 프로 야구 투수 세이부 라이온스 선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선수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선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선수 일본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 일본의 야구 감독 일본의 야구 해설가 일본 야구전당 헌액자 명구회 아이치현 출신 아이치현의 야구 선수 20세기 일본 사람 21세기 일본 사람 미국에 거주한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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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3%B5%ED%86%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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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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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통(腹痛, 또는 배탈, )이란 배가 아픈 것을 말한다. 질병에 의하여 생길 수도 있으나 대부분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거나 상한 음식을 먹었을 때 많이 일어난다. 여름철 복통과 가을 복통이 다른 경우가 있다. 병태생리학 내장성 통증 내장이나 고형 장기의 벽에 있는 신경말단의 신전(대부분), 장기의 초기허혈, 염증반응 태생학적 기원이 같은 장기에서 국소화 앞창자(위, 십이지장, 간담도계): 심와부 통증 중간창자(소장, 충수돌기, 결장): 배꼽주위 통증(periumbilical pain) 뒤창자(대장, 복강 내 비뇨생식기): 하복부 통증 복강 내 장기들은 대칭적인 신경지배를 받으므로 해부학적 위치가 Rt./Lt. 여부에 관계없이 중심부 통증을 호소 (보기: 맹장염의 경우 초기에 배꼽주위 통증을 보임) 신체성 통증 통증 자극의 바로 위 부분의 감각지배 영역에 위치가 한정. 기저 질환의 진행에 EK라 내장성 통증은 신체성 통증의 압통과 근성방어 등의 증상 나타냄 연관통 손상기관과 같은편에 위치. 발생학적 기원에 따른 통증유형보임(예: 급성 요로 폐쇄에 의한 통증시 고환통) 임상양상. 분류 복강 내 위장성: appe, biliary tract ds, 소장 장애, 췌장염, 게실염 비뇨생식기: 신장부 통증, 급성 요정체, 급성 음낭 산부인과 관련: 골반 내 염증(PID), 자궁외 임신 혈관성: 복부 대동맥 비대증, 장간막 허혈, 허혈성 대장염 복강 외 심혈관 복벽: 탈장, other abd. wall SDs 대사성, 독성: 독성(감염성, 중독성), 대사성 신경성 비특이성 복통(응급실 내원환자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 병력상의 특징 통증의 성질 위치, 양상, 정도, 시작시간, 지속 시간, 악화 또는 완화 요인,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 연관증상 소화기 계통 : 식욕부진. N/V, --non specific 비뇨생식기 계통 : 배뇨기능의 변화(배뇨곤란, 빈뇨, 혈뇨 잔뇨감, 요실금) 부인과 계통: 생리통, 성교방법, 질 분비물, 최근의 성교통, 임신횟수, 분만횟수, 유산, 자궁외임신, 물혹, 섬유종, 골반내 염증 복강경수술여부 혈관 계통: 특히 노인환자에서 MI, 허혈성 심질환, 심근이상, AF, 항응고제상용, CHF, 말초혈관질환, 대동맥류의 가족력 과거병력 이학적 진찰 일반적 요소 복통의 정도는 질환의 경중과는 무관(예: 초기의 장간막 허혈은 막연한 복부 불쾌감) 내장성 통증의 특성을 갖는 산통의 경우 가만히 누워있지 못하지만, 복막염환자들은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생체징후 누운 상태에서 앉아 1분 후 맥박이 30회 이상 증가 or 실신—1L의 혈액부족, 3L의 등장성 용액의 투여필요. 혈압의 변화는 심박출량 유지위한 빈맥으로 보상못할 때 나타나는 후기의 변화이다. 복부 시진 : 공기 또는 액체에 의한 팽만의 여부, 흉터, 종괴 청진 : 장음감소나 소실은 임상적으로 유용하지못함(소화성궤양천공 1/2에서 정상 / 증가) 소장폐쇄때 증가된 장음만이 임상적 유용성있음(그러나 25%에서는 감소 / 소실) 촉진 : 2-3개의 손가락으로 통증부위에서 먼 곳으로부터 부드럽게 만짐 자발적인 복부 근육 강직 완화 - 무릎구부림, 환자손으로 배 누름. 최근의 연구에서 몇몇 저자들은 기침으로 인한 통증(cough pain)과는 달리 RT는 무가치결론(비특이적놀람 반응) 급성복통의 원인 : 비특이적복통(34%), 충수돌기염(28%), 담도질관(10%) 50세 이상: 담도질환(21%), 비특이적복통(16%), 충수돌기염(15%) 일반혈액검사 : WBC 11000이상시 appe 확률2배, 이하시 확률 1/2 진단 장기에 따른 복강내 진단 소화기계 맹장염 충수돌기염 배제 : RLQ pain 없음, 이전의 유사통증, 전형적인 RLQ로의 통증이동 없음 임상적으로 충수돌기염을 배제하는 것은 없어야 하는 증상혼합 or 상대적으로 강하게 의심되는 다른 진단이 있어야 설득력이 있다. 간담도계질환 응급실 50세 이상에서 가장 흔함 많은 수가 fever 없었고 40%에서 leukocytosis 없었다 식사 후 등쪽으로 방사되는 상복부 통증(but 1/3이상의 환자는 단지 RUQ pain, 2/3은 RUQ 압통, 나머지 대부분은 상복부 미만성통증) 소장폐쇄 이전의 복부 수술, 이따금씩 콕콕 쑤시는 듯한 통증, 복부팽만, 장음증가 급성 췌장염 80%가 술과 담석때문, 꾸준히 그리고 점점 심해지는 통증, 구토 적은 경우에서만 통증이 해부학적 위치에 국한, 반수가 상복부를 넘어서 존재( 염증을 한정짓는 막의 부재, 복부 깊숙한 위치, 후 복막을 포함하는 병리를 국소화시키기 힘듦) 정상 혈중 lipase의 위 한계치의 두배를 양성 검사로 정함으로써 amylase보다 두 배 정확 게실염 동통은 하복부 또는 LLQ에 한정되는 경우가 일반적. 비뇨생식기 신산통=요관결석, 신결석 한쪽 방향의 옆구리, 갑자기시작, 쿡쿡 쑤시는 통증, 서혜부로 방사, 혈뇨. 요방광접합부의 stone은 RLQ or LLQ pain 급성뇨긴장 하복부 동통과 중앙 복부의 덩어리(방광팽만)--도뇨관삽입 급성음낭 진단의 전략의 초점은 고환의 경색확인하고 제외. 염전보다 부고환염에 맞는 특징으로는 열, 오한, 배뇨불편감, 농뇨 고환자체와 분리, 뒤쪽이 부어있고, 동통부 고환의 통증의 지역한정. 부인과적통증 PID 비정상적인 질 분비물 자궁외임신 파열된 자궁외 임신시 복통이 전체적으로 나타남 혈관성 복통 복부 대동맥류 저혈압, 복통, 등쪽통증, 박동성 복부종괴 (그러나 3/4이상에서 정상혈압) 복부의 통증과 압통이 없는 경우 우복강으로 실혈을 의미 장간막허혈증 연령과 연관된 이행률,소장허혈시간은 2-3시간,초기증상은 압통이 없이 국소화되지 않는 내장성통증, 경색이 생기면 통증은 순간적으로 감소 허혈성대장염 노인, 전반적인 or 하부의 복통(80%), 설사(60%), 종종 혈변 복강외적인 요인 심폐계통의 요인 상복부 통증 호소시 특히, 압통의 유무와 관계없이 우상복부나 좌상복부에 국한된 통증시 폐실질이나 흉막의 병변여부위한 검사 필요 심와부통증시 심질환 병력청취와 심전도 역학 응급실에 내원하는 성인 중의 복통호소 비율 44/1000 각주 외부 링크 증상 소화계통 및 복부의 증상 및 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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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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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84%EC%97%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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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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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연(林衍, ?~1270년)은 고려 후기의 무신(武臣), 권신(權臣), 정치가(政治家)이다. 본관은 진천(鎭川). 1268년부터 1270년까지 2년 동안 고려 왕조의 실권을 맡았다. 생애 1231년 임연은 제1차 고려-몽골 전쟁 때 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는데, 고려의 대장군인 송언상이 고향 땅인 진천으로 오게 되었으며 진짜 전쟁처럼 지휘를 하며 놀고 있었다. 대장군 송언상이 이를 보고 비범하게 여겨 그에 의해 개경으로 가 그의 종이 되었고 또한 학문과 무예를 배웠으나 그가 병사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홀로 학문과 무예를 익혔다. 1234년에 몽골병을 격퇴한 공으로 대정(隊正)이 되었다. 후에 임연은 김준과 함께 최우, 최항을 섬겼으며 김준을 따르면서 양자로 불리기도 하였다. 1258년(고종 45년) 류경, 김준 등과 함께 최의를 죽이고 왕권을 회복시킨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다. 1268년에는 김준을 죽였으며, 원종을 폐하여 영종을 옹립하는 한편 교정별감이 되어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원종 폐립 사건으로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과 충돌하여 원종을 복위시켰으나, 원나라의 친조(親朝) 요구를 거부했다. 원종이 몽골에서 귀국하기 전에 출륙환도(出陸還都)와 권신의 제거를 약속했다. 원종이 몽골병과 함께 귀국하려 하자, 임연은 야별초를 각 지방에 보내어 백성의 해도입거(海島入居)를 명하고, 몽골에 항전할 태세를 갖추었으나 1270년 등창으로 죽었다. 차남 임유무가 뒤를 이었다. 가계 부인 : 미상 장남 : 임유간(林惟幹) 차남 : 임유무(林惟茂 1248 ~ 1270) 삼남 : 임유인(林惟栶 1252 ~ 1270) 사남 : 임유거(林惟柜) 오남 : 임유제(林惟提) 임연이 등장한 작품 《무신》(MBC, 2012년~2012년, 배우:안재모) 같이 보기 고려 원종 대몽항쟁 김준 최우 최항 최의 임유무 참고 자료 박영규 저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웅진닷컴 각주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 고려의 무신 한국의 섭정 무신정권 쿠빌라이 칸 진천 임씨 병사한 사람 생년 미상 1270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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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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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B%A5%B4%EC%95%BC%EB%B8%8C%EC%A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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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야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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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아브 주(Fāryāb Velāyat, , 다리어: ولایت فاریاب)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주이다. 주를 아시아 고속도로 76호선(카불 - 헤라트간)이 달린다. 면적 20,292.79 km2, 인구 970,300명(2004년). 주도는 마이마나(Maimana=Meymaneh). 하위 행정구역 가르지완 구 다울라타바드 구 마이마나 구 불치라그 구 시린타가브 구 안드후이 구 알마르 구 카람쿨 구 카르간 구 쿠히스탄 구 카이사르 구 파슈툰쿠트 구 하니차르바그 구 흐와자사브즈푸슈왈리 구 아프가니스탄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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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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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9C%EC%96%91%EC%A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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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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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절(太陽節,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1912년 4월 15일에 김일성이 출생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태양절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대 명절로, 각종 전시회와 체육대회, 노래 모임, 주체사상 연구토론회, 사적지 참관, 결의대회 등의 행사가 열린다. 개요 1997년 7월 8일 김일성의 3년상 탈상에 맞추어 선포된 〈김일성 동지의 혁명 생애와 불멸의 업적을 길이 빛내일데 대하여〉라는 결정서에 의거한 것이다. 이 때, 주체연호도 함께 채택되었다. 김일성의 생일은 이전부터 ‘4·15 명절’ 등으로 불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대의 명절이었으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의 5개 기관이 공동으로 발표한 이 결정서에 의해 한 단계 더 격상되어 태양절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같이 보기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4월의 봄 인민예술축전 만경대상국제마라손경기대회 김일성화축전 김정일화축전 금수산태양궁전 천황탄생일 주체연호 주체사상 외부 링크 4월의 기념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휴일 국가원수의 생일 김일성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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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A9%EC%A2%85%EB%A5%A0%20%28%EC%A0%95%EC%B9%98%EC%9D%B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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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률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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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률(黃鍾律, 일본식 이름: 光田矗顯, 1909년 9월 3일 ~ 1972년 1월 21일, 서울)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관료 겸 정치인이다. 생애 한성부 출신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고, 만주국 대동학원을 거친 뒤 뒤 만주국에서 관리로 근무했다. 직책은 만주국 경제부 금융사의 금융과 사무관으로, 경제 분야 관료였다. 태평양 전쟁 종전으로 만주국이 소멸하자 미군정 지역으로 들어왔다. 연희대학교 교수를 잠시 지내다가, 다시 경제 관료로 복귀했다. 제3공화국에서 대한민국 재무부와 대한민국 체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70년 금융통화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1971년에 민주공화당 비례대표로 제8대 국회의원에 선출되었으나, 국회의원 임기 중 사망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에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해외 부문에 선정되었다. 약력 1935년 : 규슈 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만주국 경제부 사무관 1945년 : 연희대학교 교수 1947년 : 주 일본 공관장 1952년 : 외자구매처장 겸 외자관리청장 1959년 : 동국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1960년 ~ 1961년 : 충청북도 도지사 1963년 : 재무부 장관 1966년 :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 1966년 ~ 1967년 : 무임소 장관 1967년 : 체신부 장관 1968년 : 재무부 장관 1971년 ~ 1972년 : 제8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참고 자료 각주 외부 링크 1909년 출생 1972년 사망 만주국 관련자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대한민국의 재무부 장관 대한민국의 무임소장관 대한민국의 체신부 장관 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 충청북도지사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규슈 대학 동문 서울특별시 출신 평해 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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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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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응인(韓應寅, 1554년 ~ 1614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84년부터 1599년까지 14년간 북경에 네 차례, 연경에 한 차례 다녀오는 등 외교 분야에서 활약을 하였으며 선조가 죽기 전, 영창대군을 부탁한 고명칠신(顧命七臣) 중 한 사람이다.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 , 본관은 청주이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한확의 후손이며 한경남(韓敬男)의 아들로, 어머니는 직제학 김천령(金千齡)의 손녀 김임정(金壬貞)이다. 생애 1576년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577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승정원주서, 사헌부감찰, 형조좌랑을 거쳐서 인제현감으로 외직에 나갔는데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을 하다가 1590년 신천군수(信川郡守)로 부임했는데 정여립의 모반을 가장 먼저 고변한 공로로 평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벼슬은 호조참의에 올랐다. 이후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예조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정벌하기 위해 길을 내달라고 요구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진주사로 명으로 향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임진왜란 발발 사실을 전해듣고 선조의 어가를 호종해 평양에 이르렀다. 선조는 한응인은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임진강을 방어하게 했다.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의주로 향했고, 이후 좌참찬을 거쳐서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이 원군으로 파견되었을 때에는 그의 접반사로 이덕형과 함께 선발되기도 했다. 1595년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진 뒤, 세자 책봉의 주청을 위한 주청사 자격으로 명으로 향했으나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탄핵을 받기도 했다. 1605년에는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으로 봉해지고 벼슬은 병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을 거쳐서 우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 즉위 후에 유영경이 영의정 자리에서 바로 퇴출된 것과 달리 한응인은 우의정의 자리를 지키다가 곧 물러났고 그 뒤에 광해군의 원로대신에 대한 예우로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이후 이항복의 천거로 좌의정 자리와 영의정 자리에도 유력한 후보로 검토되었으나, 유영경과 연관되면서 1611년에 대북세력의 탄핵으로 마침내 관직이 삭탈되었다. 이후 직첩을 되돌려 받았으나 계축옥사로 다시 삭탈관직되었다. 선조는 죽기 전 한응인을 비롯한 일곱 명의 대신들을 불러 영창대군을 부탁했는데 이 일이 빌미가 되어 광해군 때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추증되었다. 사후 《한응인묘역》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 있다. 부인 전주 이씨와의 합장묘이고 봉분 아랫부분에는 2단으로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멀리서도 묘가 있음을 알 수 있게 돌기둥)과 문인석이 1쌍씩 있다. 묘역 오른쪽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우던 비)가 세워져 있는데, 김류가 비문을 짓고 한인급이 글씨를 써서 인조 20년(1642)에 세운 것이다. 1995년 8월 7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평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한응인에 대하여 사람됨이 관후하고, 문장으로 이름이 났지만 일 처리에 있어 태도가 분명하지 않고 임기응변으로 처리했다고 평가했다. 가족관계 부친 :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경남(韓敬男) 모친 : 김임정(金壬貞, 1532 ~ ?) - 경주 김씨 김만일(金萬鎰)의 3녀 여동생 : 한성희(韓聖姬, 1562 ~ ?) 남동생 : 한응굉(韓應宏, 1570 ~ ?) 부인 : 이종이(李從伊, 1554 ~ ?) - 이담령(李聃齡)의 딸 장남 : 한덕급(韓德及) 며느리 : 광산 김씨 - 김장생의 딸 손자 : 한수원(韓壽遠) 손자 : 한지원(韓智遠) 손자 : 한지원(韓志遠) 손녀 : 이여홍(李汝洪)의 처 손녀 : 김민성(金敏成)의 처 손녀 : 이시정(李時楨)의 처 아들 : 한신급(韓信及) 손자 : 한기원(韓器遠) 아들 : 한인급(韓仁及) 손자 : 한진원(韓振遠) 손자 : 한명원(韓命遠) 손녀 : 이호징(李好徵)의 처 장녀 : 청주 한씨 사위 : 전주 이씨 이건(李楗, 1570 ~ ?) - 감찰(監察), 증 승지(贈 承旨) 외손자 : 이문형(李文炯, 1590 ~ ?) 외손녀 : 이정(李正, 1592 ~ ?) 외손자 : 이문병(李文炳, 1596 ~ ?) 외손자 : 이문환(李文煥, 1599 ~ ?) 외손자 : 이문정(李文炡, 1601 ~ ?) 외손자 : 이문황(李文煌, 1606 ~ ?) 외손자 : 이문욱(李文煜, 1609 ~ ?) 차녀 : 청주 한씨 사위 : 안대남(安大楠) 외손자 : 안정섭(安廷爕) 3녀 : 청주 한씨 사위 : 남두첨(南斗瞻) 외손자 : 남선(南翧) 외손녀 : 박수현(朴守玄)의 처 저서 《백졸재유고》 참고 문헌 국조문과방목 관련 작품 《징비록》 (KBS1, 2015년, 배우:이정성) 각주 1554년 출생 1614년 사망 조선의 문신 평난공신 광국공신 과거 급제자 임진왜란 관련자 청주 한씨 우의정 16세기 한국 사람 17세기 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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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C%83%81%EB%B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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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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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범(田相範, 1934년~ )은 대한민국의 언어학자이다. 생애 평안남도 중화 출신이다.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공군에 자진입대를 하였는데, 이때 호적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호적상 생년월일이 1932년 1월 22일로 굳어졌다. 195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과에 입학하여 1959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였고, 1959년부터 1963년까지 경기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으며, 석사과정을 수료한 후 미국으로 유학, 1966년 미국 컬럼비아대학 영어교육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그 해 귀국하여, 9월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1974년에는 'Phonological aspects of late middle Korean'라는 논문으로 미국 인디애나대학 언어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988년 8월부터 1990년 9월까지 한국언어학회 회장, 1991년 5월부터 1993년 5월까지는 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을 역임을 하였다. 1997년에 정년퇴임 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되었다. 2003년 3월 10일에 한양대학교에서 석좌교수로 임용이 되었다. 저서 《라틴어입문》(공저, 2008년) 《중세영어》(2007년) 《고대영어》(2006년) 《형태론개론》(2006년) 《음운론》(2004년) 《영어학개론》(1998년) 《최적성이론》(공저, 1997년) 《형태론》(1996년) 《영어음성학개론》(1995년) 《형태론》(공역, 1994년) 《영어의 음성체계》(역서, 1993년) 《생성형태론》(역서, 1987년) 등이 있다 《英語音聲學》(1985년) 《英語音聲學》(공저, 1984년) 《生成音韻論》(1977년) 1934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담양 전씨 중화군 출신 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 인디애나 대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언어학자 서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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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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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 코퍼레이션(, )은 반도체의 설계와 제조를 하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 제조사로 본사는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 있다. 1968년 7월 18일에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가 인텔을 설립하였다. 인텔은 Integrated Electronics의 혼성어이다. 그러나 'intelligence'라는 영어 단어에서 유래하였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레슬리 배다스의 감독 하에, 1971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인 인텔 4004를 만들었으며, 이후 만들어진 인텔 8088은 IBM PC에 장착되어 유명해졌다. 이때 만들어진 x86 명령어 아키텍처는 확장을 통해 지금까지 데스크탑 시장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으며, 일반적으로 PC는 x86 호환 프로세서를 사용하는 IBM PC 호환기종을 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뿐 아니라 메인보드 칩셋, 네트워크 카드, 집적 회로, 플래시 메모리, 그래픽 프로세서, 임베디드 프로세서 등의 통신과 컴퓨팅에 관련된 장치도 만든다. 역사 인텔은 1968년 7월 18일, 화학자 고든 무어와 물리학자이자 집적 회로의 공동 발명가인 로버트 노이스가 캘리포니아주 마운틴 뷰에 설립하였다. 아서 록(투자가이자 벤처 캐피털리스트)은 이들이 투자자를 찾는 일을 도와주었다. 무어와 노이스는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떠나 인텔을 설립했다. 이름 결정을 위해 무어와 노이스는 "무어 노이스"(Moore Noyce)라는 이름은 즉시 거절하였는데, 이 이름이 "더 많은 소음"(more noise)으로 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이들은 NM 일렉트로닉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뒤에 "인텔"이라는 이름(Integrated Electronics의 준말)으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인텔"이 호텔 체인점 인텔코(Intelco)의 상표로 이미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 이름의 권리를 구매해야 했다. 2020년 10월 인텔은 대한민국의 SK하이닉스에 플래시 메모리 관련 사업을 10조 3천억원에 매각하기로 합의하였다고 발표하여 세계 반도체 업계를 놀래켰다. 합의내용은 매우 복잡한데, 2021년 말경 SK하이닉스가 1차 인수대금 8조여원을 현금으로 지급하며 2025년에 나머지 금액을 역시 현금으로 지급하고 인텔은 이에 대응하여 단계적으로 사업을 양도한다. 양도가 완료되면 인텔은 플래시 메모리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는 것이며 SK하이닉스는 세계 2위 규모의 낸드 플레시 메모리 사업자로 올라서게 된다. 합의 내용이 발표된 시점에서 일단 옵테인 메모리는 양도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Logo Intel Inside 지배 구조 사내이사와 독립적 이사 12인(정관에는 9~15인으로 명시)(Bylaws Article III Section 1)으로 이사회가 구성되며 그 외에 명예이사 2인을 둔다. 명예이사는 의결권 없이 회의에만 참석한다. 이사들의 임기는 다음번 정기주주총회때까지로 한다.(Bylaws Article III Section 1) 인텔은 정기적으로 이사회의 적정 인원수를 검토하고, 독립적 이사가 실질적 다수가 되어야 하고 CEO 이외에 사내이사 선임을 유용하고 적절한 것으로 본다. 선임 사외이사는 다른 사외이사들의 활동을 조정하고 다양한 의무들을 수행하며 그 역할은 연속 5년을 초과할 수 없다. 선임 사외이사의 임기는 따로 없고 연령제한(72세)이 존재한다. 이사회는 대개 격월로 정기 개최되며, 필요시 수시 이사회가 소집된다. 사외이사는, 이사회 멤버들과 경영진들이 적절한 시점/과정에 참여토록 요청 받을 것을 기대하며 지명 위원회(Nominating Committee)에 후보선별 과정을 위임한다. CEO는 이사회와 함께 매년 CEO 승계 계획 및 경영진 계발을 검토하고, 집행임원에 관한 기업지배구조 경영 원칙(Corporate Business Principles)의 요구사항의 면제는 이사회에 보고 및 승인되어야 한다. CEO는 매년 기업의 종업원에 대한 360도 평가와 연계하여 사외이사들이 공식 평가한다. CEO와 이사회 의장은 서로 동일인이 아니다. 이사회 부의 사항은 이사회 요구사항, 변화하는 사업·법적 이슈, 전문위원회에 의해 수행된 작업들을 반영하여 이사회 상정안건 목록도 매년 변화한다. 재무, 영업, 마케팅, 주요 사업부문·운영조직의 정례적 프레젠테이션, 기업의 장기 전략계획, 장래에 회사가 맞이하게 될 주요 이슈들을 포함한다. 전문위원회로는 감사위원회(Audit Committee), 보상위원회(Compensation Committee), 지배구조위원회(Corporate Governance Committee), 집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 재정위원회(Finance Committee), 지명위원회(Nominating Committee)가 있다. 또한, 이사회 의장은 매년 개별 이사들에 대한 자기평가 프로세스를 관리하고, 매년 이사회 평가를 수행한다. 마케팅 1990년대에는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라는 슬로건으로 마케팅을 시작하였으며, 이 슬로건은 지금까지 프로세서 로고에 사용되고 있다. 특히 광고에서는 인텔 특유의 사운드 로고로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알려졌다. 2006년부터는 "Leap Ahead"라는 슬로건을 (한국 시장에서는 "지금 만나는 미래") 회사 로고 옆에 넣기도 하였다. 로고송 인텔의 로고송은 컴퓨터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있는 유명한 곡이다. 도~! 도파도솔! 이 중독성있는 곡이다. 현재 LG 그램16 광고에 사용되고있다. 인텔의 변화 대한민국 XNOTE-인텔센트리노 곰TV 스타 인비테이셔널 - 처음으로 인텔과LG전자와의 공동후원으로 진행했다. GOM 클래식 - TG삼보와 인텔 공동 후원 시즌 1~3까지 후원 TG삼보-인텔 스타크래프트 II OPEN Season 1 -세계최초의 스타2리그 출범과 동시에 인텔과 TG삼보와의 공동후원으로 제품까지 후원및 공급하였다. 2세대 인텔 코어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March 2013 WCS TG삼보-인텔 시즌 1 파이널 인텔 오버워치 에이펙스 시즌1 2009년 이후 인텔 SSD DC S3608 시리즈, 인텔 에디슨 시리즈는 인텔 공식 대리점인 한국의 이트론을 통해 5년간의 품질 보증이 제공하고 있다. 인텔 블레이드앤소울 토너먼트 2018 월드 챔피언쉽 인텔 펍지 코리아 컨텐더스 유럽 인텔 익스트림 마스터즈 미국 인텔의 역사는 ‘메모리 반도체 기업(1968~1985년),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업’ (1985~1998년), 그리고 ‘인터넷 기반 구축 기업’(1998년 이후) 등 3시기로 구분하여 첫 번째 시기는 고든 무어(1968~1987년), 두 번째 시기는 앤디 그로브(1987~1998년), 세 번째 시기는 크레이그 배럿(1998~ 2005년)과 폴 오텔리니(2005년~2013년) 재임 시기와 맞물린다. 이들 CEO는 인텔의 주력 제품을 메모리 반도체, 마이크로프로세서, 인터넷 관련 서버 프로세서 및 각종 부품으로 바꿔왔다.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CPU) 칩 분야에서 40년 이상의 회사로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은 PC 및 전자 기기의 핵심 부품이었다. 인텔은 2016년 7월 '클라우드'와 '사물인터넷' 진입으로 초연결 시대를 선언하였다. 초연결 시대에는 PC 시장과 서버 시장이 각각 다른 시장이 아니고 초소형 웨어러블 기기부터 스마트폰, 태블릿, PC는 물론 자동차, 디지털 사이니지, 그리고 통신 네트워크와 데이터센터, 슈퍼컴퓨터까지 서로 다른 수천가지 컴퓨팅 환경이 동시에 돌아간다. 이 모든 서비스는 네트워크를 통해 클라우드로 연결되고, 그 클라우드를 통한 서비스는 결국 다시 새로운 기기와 연결된다. 인텔이 말하는 초연결 시대의 선순환의 골자다. 인텔은 2015년 '모든 것을 위한 클라우드(Cloud for all)'라는 표어를 내세우며 사업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제품 데스크톱 프로세서 인텔 코어 시리즈 셀러론, 펜티엄, 아톰 i3, i5, i7, i9 워크스테이션, 하이엔드 코어 x모델 제온 서버 제온 E시리즈 제온 스케일러블 아이테니엄 (사업 종료) 모바일 프로세서 코어M, 코어 아톰 IoT 쿼크 컴퓨팅 가속기 제온 파이(단종) 그래픽 프로세서 Intel Xe Graphics(미출시, 비공식 기사) 메모리 인텔 옵테인 메모리 같이 보기 AMD 사이릭스 x86 트랜스메타 인텔 GMA 각주 외부 링크 해외 링크 Asia·Pacific 인텔 아시아·태평양 인텔 호주 인텔 인도 인텔 인도네시아 인텔 일본 인텔 대한민국 인텔 중국 인텔 대만 인텔 태국 인텔 베트남 Europe 인텔 프랑스 인텔 독일 인텔 아일랜드 인텔 이탈리아 인텔 폴란드 인텔 러시아 인텔 스페인 인텔 터키 인텔 영국 Latin America 인텔 라틴 아메리카 인텔 아르헨티나 인텔 브라질 인텔 칠레 인텔 콜롬비아 인텔 멕시코 인텔 페루 Middle East/Africa 인텔 이스라엘 North America 인텔 미국 인텔 캐나다(영어) 인텔 캐나다(프랑스어) 외부 링크 다국적 기업 미국의 전자 기업 반도체 기업 1968년 설립된 기업 미국의 브랜드 샌타클래라 (캘리포니아주)의 기업 미국의 다국적 기업 리눅스 기업 미국의 소프트웨어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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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387%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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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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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동진(東晉) 태원(太元) 12년 전진(前秦) 태초(太初) 2년 후연(後燕) 건흥(建興) 2년 서연(西燕) 중흥(中興) 2년 후진(後秦) 건초(建初) 2년 서진(西秦) 건의(建義) 3년 북위(北魏) 등국(登國) 2년 후량(後凉) 태안(太安) 2년 기년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15년 북위(北魏) 도무제(道武帝) 2년 신라(新羅) 내물 마립간(奈勿麻立干) 32년 고구려(高句麗) 고국양왕(故國壤王) 4년 백제(百濟) 진사왕(辰斯王) 3년 사건 문화 탄생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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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8%EC%B6%94%EB%A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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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추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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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추류(反芻類)는 우제목/경우제목에 속하는 동물로서, 반추 위를 가지고 있으며, 한번 삼킨 먹이를 다시 게워 내어 씹는 특성을 가진 동물이다. 다만 낙타아목의 동물은 반추동물이지만 반추류는 아니다. 기린, 사슴, 소, 양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하위 분류 작은사슴과 또는 꼬마사슴과 (Tragulidae) 진반추하목 (Pecora) † Gelocidae † Hoplitomerycidae † Leptomerycidae 기린상과 (Giraffoidea) 기린과 (Giraffidae) 영양붙이과 (Antilocapridae) † Climacoceratidae 사슴상과 (Cervoidea) 사슴과 (Cervidae) 사향노루과 (Moschidae) † Palaeomerycidae 소상과 (Bovoidea) 소과 (Bovidae) 계통 분류 각주 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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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야마 히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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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야마 히로노부(, 1961년 2월 18일~ )는 오사카부 출신의 남성 가수, 작사자, 작곡가로 솔리드 복스(SOLID VOX)소속이다. 본명은 쓰는 방식만 다르고 읽는 것은 동일하며() 레이지 시절에도 이 이름을 썼다. 작곡을 할 때에는 성과 이름을 거꾸로 적으며 『애니송의 프린스』란 별칭과 『나니와의 애니송 가수』란 이름으로 유명하다. 기본적으로 애칭은 가게짱()이지만 잼 프로젝트 내에서는 장로(長老)로 불린다. 현재는 가수, 작곡자 및 프로듀서 겸 솔리드 복스(SOLID VOX)의 대표 겸 소속 아티스트이다. 약력 집안은 이발소를 했다고 하며 16세 때 레이지를 결성, 당시 미쉘이란 애칭을 썼다. 아사히 방송의 「헬로 영」에 출연해 사회를 맡은 카마야츠 히로시로부터 인정을 받아 멤버 전원이 상경, 1977년에는 베이 시티 롤러스의 포고를 포함해 프로로 데뷔하고 히트곡 『붉은 두건씨를 조심해』(赤頭巾ちゃん御用心)가 나오는 등 순조로운 활동을 하다가 1981년 5월에 해체, 같은 해 10월에 현재의 예명으로 도쿠마음악공업(현 도쿠마 Japan Communications)을 통해 솔로로 나서게 된다. 1985년에 일본 콜롬비아(현 콜롬비아 뮤직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해「KAGE」라는 이름으로『전격전대 체인지맨』(電撃戦隊チェンジマン)의 주제가를 부르면서 오리지널 곡 이외에도 애니메이션, 특수촬영물의 주제가를 부르게 된다. 애니송 가수로서는 늦은 출발임에도 불구하고 1989년에 부른 애니메이션 『드래곤볼 Z』(ドラゴンボールZ)의 오프닝곡인 『CHA-LA HEAD-CHA-LA』가 130만장이 팔리는 것을 기록, 1991년의 『조인전대 제트맨』(鳥人戦隊ジェットマン)은 일본 골든디스크 대상의 [앨범상 학예 부분]을 수상하기도 해, 단박에 인기가 급상승, 같은 해 발매한 오리지널 싱글인 『스키스키스키』(好き好き好き)가 40만장 이상 팔리기는 기록을 세웠다. 이 일로 인해 이름이 알려져 애니송의 제왕 자리에 오를 수 있게도 되었다. 이후에는 레이지의 멤버인 이노우에 슌지가 설립한 레코드 회사인 『란티스』(ランティス)로 이적(전속은 아님)했으며 2000년에 결성된 Jam Project의 리더로도 활동하고 있다. 인물 정보 이지메의 구조의 저자인 모리구치 아키라와는 중학교 동창생이다. 본명이「가게야마(影山)」가 아닌「가게야마(景山)」인 것을 자신이 이상하게 여긴 적이 있어、부친에게 물어본 결과 「시마네 현 근처에 루트가 있지 않겠나?」라는 대답을 들었다(이 자체의 진상은 불명). 실제로 시마네를 방문할 때「가게야마」라는 문패가 많은 것을 보고 놀랐거나、현지 주변에서 열린 라이브 중 농담 섞인 질문을 할 때 몇몇 사람이「가게야마」란 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2010년 1월 2일의 자스코 이온 헤이즈 점 라이브에서 본인이 발언한 것이다.). 슈퍼전대 시리즈내에서의 활동이 상당히 두드러지는 편으로 오프닝 주제가는 『전격전대 체인지맨』, 『광전대 마스크맨』, 『조인전대 제트맨』의 주제가를 담당했으며 이는 MoJo의 역대 기록과 동일한 수준이다.(코러스는 코오로기'73이 여러 작품에 출연한 바 있다.) 엔딩 주제가는 위의 3 작품에 인풍전대 허리켄저까지 담당함으로써 유일하게 4작품을 맡아 역대 톱을 달리고 있다. 토에이의 다른 3대 히어로 시리즈 중 하나인 메탈 히어로 시리즈에서는 철완탐정 로보타크의 주제가를 맡았다. 어린 시절에는 오사카 부 히라카타시에 있는 히라카타 공원에서 자주 놀았다고 한다. 기타 활동 이 이하의 활동은 위에서 서술하지 않았지만 그가 해온 여러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아코기는 홀로 하는 여행이다」(アコギな一人旅だぜ)라고 알려진 전국 순회 아코기 활동(주 : 아코기=어쿠스틱기타) 엔도 마사아키와 함께 콤비 유니트인 「강철형제」(鋼鉄兄弟)를 결성, 「강철1호」(鋼鉄1号)로 나오기도 했다. 1998년에 재결성된 레이지로도 활동. 다만 멤버가 2명 죽고 이러저러한 일이 있어서 현재는 사실상 활동 중지. 텔레비전에서는 위성방송인 키즈 스테이션에서 진행하는 애니송 관련 프로그램인 『아니파라 음악관』(アニぱら音楽館)의 진행을 맡음. 그 안에서 JAM Project의 멤버인 엔도 마사아키, 키타다니 히로시와 함께 MANGATRIO로 활동 성우인 노가와 사쿠라의 음악활동을 프로듀스 하고 있음(노가와 사쿠라의 라이브 공연에 출연하는 일도 있음) 2002년에는 스도 켄이치, 코노 요고, 쿠리야마 요시치카와 함께 TRY FORCE를 결성,(주로 란티스가 연관돼 있는 애니메이션 작품의 주제가나 BGM을 담당)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로도 나섬(최근에는 란티스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바가 있다.) 『아랑』(牙狼)에 성우로서 출연(미즈키 이치로, 스즈키 마사미와 공동으로 진행을 하는 『라디오 슈퍼로봇 혼』(ラジオ・スーパーロボット魂)의 라디오 드라마에서 성우로도 활동한 경험이 있음.) 2003, 2004, 2005, 2007년에 브라질의 Anime Friends같은 애니메이션 이벤트에 참가 2006년에 스페인, 한국 등지에서 열리는 이벤트에 참가해 라이브 공연을 하면서 전 세계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 2007년 5월에 대만, 10월에 한국에 엔도 마사아키와 함께 입국해 라이브 공연을 함. 2008년 9월에 JAM Project로 한국에서 공연을 함. 2009년 매년 GW에 시모노세키시에서 열리는 「간류지마 피크닉 콘서트」가 인연이 되어서 「간류지마 페스티벌」실행위원회의 명예회장으로 취임. 주요 곡 여러 곡이 있지만 그가 솔로 활동을 하면서 참가한 곡 위주로 정리했으며 잘 알려진 곡 위주로 했다. 잼 프로젝트의 멤버로 활동한 곡은 JAM Project의 음반 목록 참조. 특수촬영물 전격전대 체인지맨(電撃戦隊チェンジマン, 전격전대 체인지맨 OP, KAGE 명의) NEVER STOP 체인지맨(NEVER STOP チェンジマン, 전격전대 체인지맨 ED, KAGE 명의) 싸워라! 체인지 로보(ファイト!チェンジロボ, 전격전대 체인지맨 삽입곡, KAGE 명의) 광전대 마스크맨(光戦隊マスクマン, 광전대 마스크맨 OP) 사랑의 전사(愛のソルジャー, 광전대 마스크맨 ED) 오라에 빛나라! 그레이트 파이브(オーラに輝け!グレートファイブ, 광전대 마스크맨 삽입곡) 5개의 마음으로 파이브 로보(5つの心でファイブロボ, 지구전대 파이브맨 삽입곡) 조인전대 제트맨(鳥人戦隊ジェットマン, 조인전대 제트맨 OP) 마음은 알(こころはタマゴ, 조인전대 제트맨 ED) 시간을 달리며(時を駆けて, 조인전대 제트맨 삽입곡) 제트 이카루스, 무적의 로봇!(ジェットイカロス無敵ロボ!, 조인전대 제트맨 삽입곡) 제트 가루다, 새의 로봇!(ジェットガルーダ鳥のロボ!, 조인전대 제트맨 삽입곡) 너가 있기에~JP&건 깁슨 우정의 테마(お前がいるから~JP&ガンギブソン友情のテーマ~, 특수로봇 잰퍼슨 삽입곡) 출격하라! 은대장군(出たぞ!隠大将軍, 닌자전대 카쿠레인저 삽입곡) 진홍빛 투혼! 레드 펀쳐!(真っ赤な闘魂!レッドパンチャー!!, 초력전대 오레인저 삽입곡) 이루면 과연 로보탁!(なせばなるほどロボタック, 철완탐정 로보타크 OP) 비온 뒤 맑음, 맑은 뒤 미소(アメノチエガオ エガオノチハレ, 보이스랏가 ED) Dynamic Soul!!(백수전대 가오레인저 삽입곡) 지금 바람의 가운데에(今風の中で, 인풍전대 허리켄저 ED) 다이노 거츠는 멈추치 않아(ダイノガッツがとまらない, 폭룡전대 아바레인저 삽입곡) 애니메이션 STAR DUST MEMORY(초시공기사단 서전크로스 삽입곡, 첫 애니메이션 송) 스타 더스트 보이즈(スターダストボーイズ, 우주함 사지타리우스 OP) 꿈의 광년(夢光年, 우주함 사지타리우스 ED) CHA-LA HEAD-CHA-LA(드래곤볼 Z 첫 OP) Heats(진 게타로보! 세계 최후의 날 2번째 OP) We Gotta Power(드래곤볼 Z 2번째 OP) 우리들은 천사였다(僕達は天使だった, 드래곤볼 Z 2번째 ED) 운명이라는 이름의 미로(運命という名の迷路, 남국소년 파프와군 삽입곡) Get The World(폭주형제 레츠&고!! WGP OP) Get Up! V MAGNUM(폭주형제 레츠&고!! 삽입곡) W-Infinity(기어전사 덴도 주제가, 「미에노 히토미 with 가게야마 히로노부」(三重野瞳 with 影山ヒロノブ)명의 성투사신화~솔져 드림~(聖闘士神話~ソルジャードリーム~, 성투사성시 2번째 OP) 꿈을 여행하는 사람(夢旅人, 성투사성시 2번째 ED) 귀신동자 젠키(鬼神童子ZENKI, 귀신동자 젠키 OP) 슈퍼 로봇 대전 OG~디바인 크루세이더 엠블렘 ~ 이름 없는 영웅들에게(エンブレム~名も無き英雄達へ~, 부활하는 하늘 -RESCUE WINGS- ED) SONIC DRIVE(소닉 X OP, 「가게야마 히로노부&타카토리 히데아키」(影山ヒロノブ&高取ヒデアキ) 명의) 각오완료!(覚悟完了!, 각오의 스스메 ED) Soul of Rebirth~시대의 고동이 되어라~(Soul of Rebirth~時代の鼓動になれ~,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SIN 최종화 OP) POWER of LOVE(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SIN 엔딩) 게임 열풍! 질풍! 사이버스타!(熱風!疾風!サイバスター, 슈퍼 로봇대전 시리즈) 날개(翼, PC판 마브러브 얼터너티브 삽입곡) 풍운무쌍전(風雲無双伝, PC판 진 삼국무쌍 BB 이미지송) 나는 철저하게 멈추지 않는다!(俺はとことん止まらない!!, PS판 드래곤볼 Z3 OP) Super Survivor(PS2&Wii판 드래곤볼 Z Sparking! Meteor OP) 오리지널 오늘을 살아나가(今日を生きよう, 솔로 데뷔곡) 스키 스키 스키(好き好き好き) 커버링 만화가 아니아 -꿈을 잃어버린 낡은 지구인이여-(アニメじゃない -夢を忘れた古い地球人よ-, 「기동전사 건담ZZ」 OP 어레인지) Flying In The Sky(「기동무투전 G 건담」 1번째 OP 어레인지) Trust You Forever(「기동무투전 G 건담」 2번째 OP 어레인지) Stand Up To The Victory~투 더 빅토리~(STAND UP TO THE VICTORY~トゥ・ザ・ヴィクトリー~, 「기동전사 V건담」OP 어레인지, 미즈키 이치로와 함께 함) 버닝 러브(「초수기신 단쿠가」ED 어레인지) 기타 오징어먹물, 문어먹물(イカスミダ、タコスミダ, 무시마루Q) Super Robot Dynamites(빠칭코 기기 제조사인 산세이 R&D의 『CR초절합체SRD』 오리지널 메인 테마곡) 오리지널 앨범 Broken Heart(1981년 12월 1일, 도쿠마 음악공업) It's LIVE Runnin(1982년 4월 1일, 도쿠마 음악공업) Born Again(1985년, 일본 콜롬비아) I'm in You(2000년 4월 26일, 란티스) Cold Rain(2005년 12월 7일, 란티스) 30years 3ounce(2007년 7월 25일, 란티스) 베스트 앨범 Eternity(1997년 8월 21일, 일본 콜롬비아) GOLDEN☆BEST(2004년 12월 22일, 도쿠마 Japan Communications) 출연작품 특수촬영 TV 드라마 『보이스랏가』(ボイスラッガー, 1999년, 테레비 도쿄) 제 4화 게스트 ※ 본인역 특수촬영 TV 드라마 『아랑』(牙狼, 2005년, 테레비 도쿄) 마수령 자르바의 목소리 특수촬영 TV 드라마 『아랑스페셜 백야의 마수』(牙狼スペシャル 白夜の魔獣, 2006년 패밀리 극장) 마수령 자르바의 목소리 참고 사항 외부 링크 Air Blanca(공식 사이트) Solid Vox(소속사무소) 가게야마 히로노부의 전체곡을 정리한 사이트 1961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남자 싱어송라이터 일본의 작사가 일본의 작곡가 일본의 록 가수 일본의 헤비 메탈 가수 오사카시 출신 20세기 일본 사람 21세기 일본 사람 일본어 가수 특수 촬영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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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D%9C%EB%A1%9C%EB%9D%BC%EB%8F%84%20%EB%A1%9C%ED%82%A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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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로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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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로키스()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 야구 팀이다.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서부 지구 소속이다. 이 팀은 1993년에 창단되었으며 뉴욕 양키스가 1983년 4월 12일 이전까지 홈구장 개수가 완료되지 않으면 해당 구단(콜로라도) 연고지인 덴버 등 전국 순회 경기를 펼칠 예정이었으나 2002년까지 양키스가 모든 홈경기를 양키 스타디움에서 치뤄야 한다는 계약 때문에 좌절됐다. 마이애미 말린스와 함께 메이저 리그의 확장정책으로 생긴 콜로라도 로키스는 말린스가 두 번의 우승을 경험하는 동안 단 한 번의 와일드카드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말린스가 유망주 모으기-그들이 전부 성장할 때쯤에 우승-대방출 패턴을 거치는 동안 로키스는 나름대로 꾸준히 전력을 모아왔고, 2007년 치열한 내셔널 리그 서부지구에서 시즌 마지막 날까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진흙탕싸움을 견뎌내었다. 결국 162게임을 다 마무리 한 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승률이 같아져 버린 로키스는 단판승제의 플레이오프게임에서 2007년 사이영 수상자 제이크 피비와 명예의 전당 입성이 유력한 마무리 트레버 호프먼을 물리치고 와일드카드 자격으로 플레이오프에 오르게 된다. (당시 지구우승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플레이오프에서 승승장구하며 월드시리즈까지 처음으로 올라갔으나, 결국 그해의 최종 우승 팀은 보스턴 레드삭스에게로 돌아갔고, 로키스는 다음 해를 기약해야 했다. 감독은 버드 블랙, 단장으로는 제프 브리디치가 있다. 휴미더 휴미더란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볼에 어떤 변화를 주는 장치가 아니고, 메이저 리그 규정에 맞도록 제작된 상태 그대로 유지 보관하는 기능을 갖춘 시설이다. 쿠어스 필드가 위치한 덴버는 해수면보다 정확히 1마일(약 1600m)가 높은데(덴버시의 별명은 Mile-High City), 이런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공기가 더 가볍고 건조하다고 하며, 이것은 타자들의 기록 향상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이 말은 반대로 말하자면, 투수들에게는 기록 저하를 유발하는데, 이것은 콜로라도 로키스 팀에게 항상 약점으로 지적되어 왔으며,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로키스 구단에서 설치한 것이 이 휴미더이다. 휴미더는, 로키스 구단에 따르면, 습도와 온도를 조절하여 공이 항상 제작된 당시와 동일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인데, 한때는 다른 구단들이 로키스 구단의 이런 볼 보관에 대해서 비난해 왔으나, 이제는 휴미더의 역할보다는 투수들의 역량 향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오히려 다른 구단에서도 휴미더를 설치하자는 의견이 불고 있는데, 이같은 의견의 배경에는 단순한 투수력 향상이라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공의 상태를 유지하는 측면에서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주요 선수 우발도 히메네즈 트로이 툴로위츠키 휴스턴 스트리트 크리스 이아네타 토드 헬턴 제이슨 지암비 카를로스 곤살레스 놀란 아레나도 래리 워커 유명 선수 에스밀 로저스 윌린 로사리오 영구 결번 #17 토드 헬턴 #42 재키 로빈슨(전 구단 공통) 역대 한국인 선수 (로키스 시절 등번호, 포지션, 로키스에서 소속이던 시즌) 김병현 - 49번, 투수, 2005년~2007년 김선우 - 51번, 투수, 2005년~2006년 오승환 - 18번, 투수, 2018년~2019년 각주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팀 콜로라도주의 야구팀 1993년 설립된 스포츠 클럽 1993년 설립된 야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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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B%A5%B4%EC%A7%80%ED%8C%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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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지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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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지팔(, WWV 111)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하고 대본을 작성한 막의 독일어 오페라이다.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파르치팔(Parzival)을 기초로 대본을 작성하였다. 1882년 7월 26일 바이로이트에서 헤르만 레비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작품 배경 악기 편성 플루트3, 오보에3 (3번은 잉글리쉬 호른 겸함), 클라리넷3(3번은 베이스 클라리넷 겸함), 바순3(3번은 콘트라바순 겸함), 호른4, 트럼펫3, 트롬본3, 튜바, 팀파니2, 작은북, 선더시트, 교회종6, 튜블러벨2(하나는 일반, 하나는 3m), 하프2, 현5부 무대 뒤, 별도: 트럼펫6, 트롬본6 이래의 4관 편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곡은 니벨룽의 반지 다음으로 팀파니 2대가 편성되어 있다. 연주시간 서곡 14분, 1막 1시간 45분(105분), 2막 1시간 10분(70분), 3막 1시간 20분(80분) 총연주시간 : 4시간 30분 등장인물 암포르타스(성배의 수호자) 바리톤 티투렐(그의 아버지) 베이스 구르네만츠(성배를 지키는 기사) 베이스 파르지팔(순진무구한 바보) 테너 클링조르(사악한 마술사) 베이스- 바리톤 쿤드리(여자 마법사) 소프라노 줄거리 시대: 중세 장소: 스페인 몬살바르트 성 사원, 마법사 클링조르의 성 배경설명 이 오페라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오페라 스토리의 배경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간략하게 언급한다. 성배(聖杯, Holy Grail)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 12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잔이다. 항목에 있듯이 예수는 이 만찬에서 술잔에 포도주를 담아 제자들에게 권하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또는 이것은 나의 피이다, 이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와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이 일화가 나중에 중세의 성배의 전설로 이어진다. 한편 성창(聖槍, Holy Lance)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사망한 후 로마 병사가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으로, 이 병사의 이름을 따서 흔히 롱기누스의 창이라고 한다. 이 창은 켈트족 전설에 나오는 항상 피가 묻어 있는 창의 이야기와 맞물려서 성배 못지 않게 중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신앙심이 깊고 위대한 기사 티투렐은 성창과 성배를 구한 후, 스페인 북부에 있는 몬살바트 성에 이 성배와 성창을 보관하고 이 보물들을 수호하기 위한 성배 기사단을 조직한다. 이후 티투렐은 나이가 들자 자신의 아들 암포르타스에서 성배 기사단장직을 물려준다. 한편 티투렐 시절 클링조르라는 인물이 몬살바트성에 찾아와 성배기사단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기사단에서는 그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며 성유물을 차지하려는 흑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서 받아주지 않았다. 클링조르는 이에 앙심을 품고 복수를 위해 흑마법사가 되었으며, 몬살바트 성 근처의 숲에 정원을 차려놓고 자신의 마법에 걸린 여인들을 이 곳으로 불러 모은다. 이 여인들은 지속적으로 성배수호 기사단의 기사들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면서 성배 수호 임무를 방해한다. 오페라에 나오는 쿤드리도 이 저주에 걸린 여인 중 한명인데, 평소에는 매우 순수하고 순박한 여성이지만 클링조르의 마법이 작동되면 남자를 유혹하는 꽃뱀이 되어 버린다. 부친에 이어 성배 기사단장이 된 암포르타스는 클링조르를 처단하기 위해 성창을 들고 클링조르의 본거지로 쳐들어간다. 하지만 경험과 전술력이 없이 혈기만 가득찼던 암포르타스는 저주에 걸린 여인들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클링조르에게 성창을 빼앗기고, 싸움 도중에 이 성창에 찔려서 큰 부상을 입는다. 부상을 입은 암포르타스는 몬살바트 성으로 돌아와 온갖 약과 치료법을 써보고 성배(聖杯)앞에 예배도 드리면서 상처가 치유되기를 바라지만 전혀 차도가 없이 오히려 고통만 가중된다. 성배는 직접 치료의 기적을 내리는 대신 '순수한 바보가 나타날 것이고 그가 당신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테니 참고 기다려라'라는 메시지를 준다. 이에 부상을 당한 암포르타스를 대신해서 성배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노장 기사 구르네만츠가 성배의 메시지를 찾아 나서는 상황에서 오페라가 시작된다. 1막 1장 스페인 북부 성배 수호 기사들이 있는 몬살바트 성 근처. 구르네만츠가 시종들을 깨워서 암포르타스 왕이 목욕을 하러 올테니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잠시 후 쿤드리라는 여인이 말을 타고 와서는 왕의 부상을 치료할 아라비아의 약 바르삼을 가져왔으며 이게 듣지 않는다면 더 이상 약으로는 그 부상을 치료할 수 없을 거라고 한다. 이윽고 암포르타스가 나타나서 쿤드리의 노력에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암포르타스는 이 약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순수한 바보가 너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성배의 메시지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부상을 고치려면 순수한 바보가 필요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왕이 목욕하러 떠나자 시종들은 쿤드리를 마법에 걸린 이교도라고 비난하고 쿤드리가 이를 음해라고 받아치면서 말싸움이 벌어진다. 구르네만츠가 이를 말리면서 매우 길고 장황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티투렐이 성배와 성창을 천사로부터 건네받은 이야기, 클링조르가 앙심을 품고 복수를 계획 한 이야기, 암포르타스가 낫지 않는 부상을 입게 된 이유 등등 전술한 이 오페라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때 호수 쪽에서 날아다니던 야생 백조 한 마리가 화살에 맞아서 떨어지고, 기사들과 시종들이 화살을 쏜 젊은이를 붙잡아온다. 이 젊은이는 파르지팔이라는 인물로, 사람들이 왜 백조를 죽이냐고 비난하자 파르지팔은 적반하장으로 자기는 뭐든지 다 맞출 수 있다고 자랑한다. 구르네만츠가 신성한 숲에서 살생을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게다가 왕이 목욕중인 상황에서 무기를 쓰는 것은 매우 불경한 행동이라고 꾸짖자 파르지팔은 활과 화살을 부러트리며 몰라서 그랬다고 태연하게 답한다. 구르네만즈는 파르지팔의 철없는 행동을 보고 그가 성배의 메시지에 나오는 순수한 바보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를 성찬식을 치르는 성전으로 데려간다. 여기서 무대가 바뀌면서 장면전환음악이 나온다. 2장 성전 안 성전에서는 장엄한 성찬식이 거행되고 있으며 파르지팔은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다. 이 예식의 목적은 암포르타스의 기력을 회복하고 부상을 치유하기 위한 것. 예식이 거행되는 중 티투렐이 나타나 아들 암포르타스에게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성배의 덮개를 열라고 하지만 암포르타스는 성배를 볼 경우 목숨이 연장되는데 이런 고통을 겪고 오래 사느니 그냥 빨리 죽고 싶다면서 거부한다. 하지만 티투렐이 재차 덮개를 열라고 명령을 하고 기사들이 이에 따라 덮개를 연다. 상처가 재발한 암포르타스가 고통스러워하자 기사들이 그를 가마에 태워 데리고 나간다. 의식이 끝난 후 구르네만츠가 파르지팔에게 무엇을 깨달았느냐고 묻는데, 파르지팔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느낀 것도 없다고 답한다. 이 답변에 실망한 구르네만즈는 그가 성배의 메시지에서 말한 순수한 바보가 아니라 말그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파르지팔을 성전에서 내쫓는다. 2막 클링조르의 마법의 성 클링조르는 마법에 의하여 깊은 잠에 빠져있는 쿤드리를 깨운 후 가서 성배의 기사들을 유혹하라고 요구한다. 쿤드리는 거부하려고 하지만 클링조르의 마법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때 파르지팔이 클링조르의 성으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클링조르의 부하들이 막아서지만 파르지팔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클링조르는 쿤드리에게 파르지팔을 유혹하라고 명령하면서, 혹시나 너의 유혹을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나의 마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해준다. 클링조르 성의 정원(庭園) 파르지팔이 정원에 도착하자 정원에 있던 클링조르의 처녀들이 몰려들어서 파르지팔이 클링조르의 부하이자 자신들의 애인들에게 부상을 입힌 것을 원망한다. 파르지팔은 자기를 막아섰기 때문에 물리친 것 뿐이라고 건조하게 이야기하고, 이에 처녀들은 자신들을 즐겁게 해줄 남자들이 없어졌으니 대신 파르지팔에게 자신들과 놀아달라고 요구하면서 유혹하기 시작한다. 처녀들이 서로 파르지팔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면서 싸움을 벌이는데, 부담을 느낀 파르지팔은 자리를 피해버린다. 이 때 갑자기 쿤드리가 나타나자 처녀들은 겁을 먹고 모두 달아난다. 마법에 걸린 쿤드리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해 있기 때문에 파르지팔은 그녀가 쿤드리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쿤드리는 파르지팔에게 당신의 이름이 파르지팔이라고 알려주고 이때 파르지팔은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다. 쿤드리는 이어서 파르지팔에게 부친과 모친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는데, 그가 떠난 후 모친이 슬픔에 빠진 채 죽었다고 상기시키면서 이제 모친 대신 자신이 파르지팔에게 사랑을 베풀겠다면서 그를 유혹하고, 이에 두 사람이 키스를 한다. 하지만 키스를 하던 파르지팔은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쓰러지는데, 이 때 몬살바트 성 성전에서 성배의식을 치를 때 암포르타스가 괴로워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유혹을 받는 순간 암포르타스가 느꼈던 고통을 파르지팔도 느끼게 된 것. 놀란 쿤드리가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지만 쿤드리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파르지팔은 쿤드리를 밀어낸다. 쿤드리는 왜 암포르타스의 고통은 느끼면서 자신이 저주를 받은 것은 느끼지 못하냐고, 자신의 저주를 풀어달라고 애원하지만 파르지팔은 이를 거부하면서 암포르타스왕에게 가겠다고 한다. 이에 쿤드리는 파르지팔을 비웃으면서 암포르타스를 유혹해서 클링조르에게 성창을 빼앗기고 부상을 입게 만든 것이 자신이라면서 당신도 자신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파르지팔이 쿤드리를 비난하자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클링조르가 성창을 들고 나타난다. 클링조르는 성창으로 파르지팔을 죽이려고 하지만 성창이 파르지팔 옆으로 빗나가버리고, 이에 파르지팔이 성창을 잡아챈 후 클링조르를 되찌른다. 성창에 찔린 클링조르는 그대로 사라지고 더불어 클링조르의 성도 무너져 내린다. 파르지팔은 쓰러져 있는 쿤드리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는 잘 알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며 암포르타스 왕을 만나러 가겠다고 한다. 3막 1장: 시간이 흐른 후, 몬살바트 성의 야영지. 배경상으로 2막 이후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나이가 들어 기사단에서 은퇴한 구르네만츠는 기척이 들려서 자신의 숙소에서 나오는데, 숙소 앞에 쿤드리가 서 있었다. 쿤드리는 이제 당신을 위해 일하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이것저것 허드렛일을 시작하는데, 구르네만츠가 자신은 이미 은퇴했기 때문에 하인이 필요 없다고 만류한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때 멀리서 완전무장을 한 흑기사(黑騎士)가 말을 타고 방패와 창을 들고 다가오다가 풀밭에 앉는다. 구르네만츠는 흑기사에게 누구냐고 물으면서 오늘은 성찬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에 무기를 손에 쥐는 것은 불경한 행동이라고 하자 흑기사는 방패와 칼을 땅에 내려놓은 후 창을 땅에 꼽고 투구를 벗는다. 이 흑기사는 바로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 구르네만츠는 그가 땅에 꼽은 창이 성창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크게 놀라는데, 파르지팔은 자기가 바보였을 때 암포르타스의 고통을 깨닫고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고행의 과정을 겪었으며 이제서야 창을 갖고 왔다고 이야기한다. 파르지팔은 지쳤는지 이 말을 마치고 땅에 주저앉는데, 쿤드리가 그를 간호한다. 구르네만츠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크게 기뻐하면서 그간 암포르타스는 계속 고통으로 고생을 했고 기사들은 신념을 잃어버렸다고 한탄을 한다. 이어 파르지팔에게 당신이 암포르타스를 치료하고 성배의 기사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파르지팔에게 세례를 주고, 이제부터 파르지팔을 왕으로 모시며 자신은 신하가 되겠다고 한다. 파르지팔은 성배의 기사가 된 후 첫 의식으로 쿤드리에게 세례를 주면서 2막에서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구르네만츠는 그 사건이 성 금요일(성 요한의 축일)의 마법이라고 이야기해준다. 2장: 성배예식을 치르는 전당 성배의식이 시작되자 한쪽에서는 성창을 보지 못하고 죽은 티투렐의 시신을 담은 관이 들어오고 다른 쪽에서는 부상당한 암포르타스를 태운 가마가 들어온다. 기사들이 선왕 티투렐을 위한 성찬식을 시작하려고 하자 암포르타스는 더 이상 성배를 보고 고통스러운 삶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면서 제발 죽여달라고 비명을 지른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서 당황하는 사이, 성창을 든 파르지팔이 암포르타스에게 다가간다. 파르지팔은 창끝을 암포르타스의 상처에 대면서 당신을 상처 입힌 이 창으로만 당신을 치료할 수 있으며 이제 치료가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제 성배 수호 임무는 파르지팔 자신이 하겠다고 선언한다. 암포르타스는 오랫동안 괴롭혔던 상처와 고통에서 드디어 해방이 되었다면서 감격해하고 파르지팔의 선언도 받아들인다. 파르지팔이 제단에 놓여진 성배 앞에서 기도를 하자 하늘에서 합창소리가 들리고 이어 파르지팔은 성창을 들어 기도하고 있는 기사들을 축복한다. 유명한 음악 서곡 매우 느리게, 근원적으로. (Sehr langsam. An der Quelle.) 내림가장조. 바그너 자신은 서곡은 극적이 아닌 근원적으로 연주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그가 루트비히 2세 때문에 쓴 주석에는 "사랑-신앙-:희망?"라고 기록되고 있다. 서곡에서는, 주로 "애찬의 동기"(잉글리쉬 호른, 클라리넷, 바순, 약음기가 있는 바이올린, 첼로), "성배의 동기"(금관의 차례상행). 독일의 찬송가 드레스덴 아멘을 차용하며 신앙의 동기(호른, 트럼펫)를 다룬다. 특히 "애찬의 동기"는, 다양한 종류의 악기를 거듭하는 것으로 악기의 독자적인 울림이 희미해지고 있어 이것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상연을 의식한 음색으로 보여진다. 로엔그린 전주곡이 가장조인데 반해, 파르지팔 서곡이 그보다 반음 낮은 내림가장조로 쓰여 있는 것도 보다 부드럽고 웅크린 듯한 분위기를 표출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된다.곡은 점점 무겁게 드러나다가, 이윽고 "성배의 동기"가 희망을 반영하듯 반복되면서 마지막엔 목관악기의 종결음으로 끝난다. 같이 보기 파르치팔 볼프람 폰 에셴바흐 성배 음악 듣기 외부 링크 독어|한글 대본Go! Classic 회원/대본 자료실 줄거리 네이버 음악사전 줄거리, 해설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줄거리 (영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줄거리 (영문)Opera~Opera, Alison Jones 작성 줄거리 (영문) "NAXOS.COM" 대본, 줄거리, 하일라이트 (영어, 독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대본, Libretto List 파르지팔에 관한 모든 것, "몬살바트" 롤프 메이의 에세이 (주의: 티투렐은 다시 산적이 없다. 작은 실수임) 영어와 독어 대본과 바그너가 직접 작성한 묘사 전체 성악 총보 "바그너 오페라", 상당량의 프로덕션 사진들, 음반 목록, 대본, 음악 화일.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Parzival 요약] 무대에 관한 파르지팔: PDF 화일, Katherine R. Syer 작성 "바그너 오페라" 역사적인 사진 엽서 갤러리 음반 평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악극 독일어 오페라 성배를 소재로 한 작품 영화화된 작품 파르치팔 1882년 오페라 인종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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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A%A8%EC%A7%88%EB%9D%BC%20%EC%95%A0%ED%94%8C%EB%A6%AC%EC%BC%80%EC%9D%B4%EC%85%98%20%EC%8A%A4%EC%9C%84%ED%8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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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질라 애플리케이션 스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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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질라 애플리케이션 스위트() 또는 모질라(, 코드명 Seamonkey)는 자유 소프트웨어 크로스 플랫폼 인터넷 스위트로, 웹 브라우저, 이메일 클라이언트, 뉴스 클라이언트, HTML 편집기, IRC 클라이언트가 포함되어있다. 처음에는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즈 코퍼레이션이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터의 소스를 기반으로 개발을 시작했으나, 이후 모질라 재단에서 개발을 주도하였다. 현재는 개발이 중단되었으며, 후속 버전으로 시몽키 커뮤니티에서 개발하는 시몽키(SeaMonkey)가 있다. 개관 모질라라는 이름은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 웹 브라우저의 개발을 시작할 때 내부적으로 쓰던 것이다. 모질라는 ‘모자이크 킬러()’를 의미하며, 당시 가장 인기있던 브라우저인 모자이크를 능가하려는 희망을 나타내려고 허구의 괴물인 고질라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외부적으로 이 이름은 HTTP 프로토콜의 User-Agent 문자열에만 쓰였고, 동시에 도마뱀 모양의 회사 마스코트의 이름이기도 했다. 1998년 3월, 넷스케이프는 자사의 인기 있던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터 스위트의 코드를 오픈 소스 라이선스 하에 대부분 공개했다. 이 애플리케이션의 이름은 "모질라"로 결정됐고, 이후 모질라 협회와 mozilla.org 웹사이트가 창립/개설되었다. 본래 커뮤니케이터 코드의 많은 부분(레이아웃 엔진, 프론트 엔드 관련 코드 등)이 폐기되었지만, 모질라 협회는 결국 기능과 안전성 면에서 기존 커뮤니케이터를 능가하는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2003년 7월까지 모질라 협회가 AOL의 간판을 걸고 브라우저 개발과 모질라 소스 관리를 계속하다가, 이후 모질라 재단으로 업무가 넘겨졌다. 이 재단은 mozilla.org의 개발자와 직원 상당수가 참여해 설립됐고, 모질라의 상표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소스 코드의 저작권은 GPL과 MPL에 따라 기여자들에게 돌아간다) 재단 창립 시 AOL, IBM, 선 마이크로시스템즈, 레드햇, Mitch Kapor 등에서 기부를 하였으나, 이후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의 개발 중단이 발표되고 AOL이 향후 자사의 모든 소프트웨어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 브라우저를 사용하기로 하면서 재단과 AOL과의 관계는 공식적으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AOL의 최근 브라우저에서는 모질라의 게코 레이아웃 엔진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다른 대규모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모질라는 그 자체가 다른 프로그램을 위한 플랫폼과 라이브러리의 역할을 한다. 기능 확장은 자바스크립트 기반의 단순한 북마클릿에서 모질라 확장기능(마우스 제스처와 같은), 완전히 독립된 프로그램까지 규모와 기능 면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모질라의 역사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터가 소스를 공개하던 시점인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경기 열풍이 한창 고조된 때였고, 인터넷 커뮤니티는 긍정과 부정의 시각이 엇갈린 가운데 이를 환영했다. 어떤 쪽에서는 넷스케이프의 소스 공개는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의 쾌거일 뿐 아니라 넷스케이프에게는 오픈 소스 개발의 힘을 이용할 기회가 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전망은 GNU/리눅스와 자유 소프트웨어 사용자들 사이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으며, 자유 소프트웨어와 관련되지 않은 다른 많은 이들은 이것을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독점적 성장에 직면한 넷스케이프의 항복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의 희망과는 다르게, 커뮤니케이터 코드를 기반으로 한 개발은 생각지 못한 난관들이 있었다: 커뮤니케이터의 코드는 거대하고 복잡했다. 되도록 많은 운영 체제에서 동작하도록 개발하기 위해, 서로 다른 라이브러리와 특성들을 고려해야 했다. 커뮤니케이터는 이른바 ‘인터넷 시간’에 따라 짧은 개발 주기를 유지하는 바람에 많은 문제를 품고 있었다. 짧은 개발 주기를 채택할 경우 프로그래머는 시간에 쫓겨 모듈성과 간결함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커뮤니케이터의 일부분은 협력사와의 라이선스 협의 문제로 공개되지 못했다. 그 결과 최소 배포된 커뮤니케이터의 소스는 깨끗하게 빌드조차 되지 않았고, 제대로 된 실행은 힘들었다. 이는 모질라 핵심 개발자들(대부분은 여전히 넷스케이프의 급여를 받고 있었다)에는 험난한 도전이 되었고, 독자적인 개발자들이 모질라에 공헌한다는 것은 더욱이 어려운 일이었다. 최종적으로 모질라 핵심 개발자들은 오래된 코드를 보수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했다. 대신 그들은 전체 코드 기반을 바닥부터 재작성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를 반대한 넷스케이프의 총괄 개발자인 제이미 자윈스키는 결국 프로젝트를 그만두었다. 최종 계획안에는 다른 내용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크로스 플랫폼 사용자 인터페이스 라이브러리와 새로운 HTML 렌더링 엔진의 제작이 포함되었다. 일부는 이 같은 결과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전의 커뮤니케이터 코드가 폐기된 지 두 달이 못 된 1998년 12월 7일에, 넷스케이프는 게코(Gecko) 레이아웃 엔진 기반의 시연판을 공개했다. 게코는 이미 넷스케이프에서 NGLayout(Next Generation Layout, 차세대 레이아웃)이란 이름으로 개발되던 것으로, 이전 엔진보다 훨씬 가볍고 빨랐다. 게코 시연판에서 가장 크게 홍보한 점은 용량이 하나의 1.44MB 플로피 디스크에 들어갈 정도로 작다는 점이었고, 이것은 당시 다른 브라우저의 1/10 정도 용량이었다. 게코의 빠른 배포로 인해 사람들은 완전한 브라우저의 공개가 멀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렌더링 엔진의 첫 번째 배포판은 버그가 많고 충돌이 잦았고, 완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완전한 기능을 갖춘 웹 브라우저의 제작은 미숙한 렌더링 엔진의 제작에 비해 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모질라 개발자들은 단순한 웹 브라우저보다 더 거창한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새로운 모질라(내부 코드명 Seamonkey)는 완전히 프로그램 가능한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모듈화된 아키텍처를 갖춘 ‘인터넷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으로 계획되었다. 모질라는 또한 이메일 클라이언트, 인스턴트 메신저 클라이언트, 유즈넷 뉴스 리더 등을 위한 기능을 갖추도록 계획됐다. 이 거대한 구상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프로젝트는 결국 예정된 시한을 맞추지 못했다. 일 년여가 지나자 모질라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늘어났고 어떤 이들은 모질라 브라우저의 개발이 완료될 수 있을지조차 의심했다. 그러나 프로젝트는 계속되었고, 넷스케이프가 AOL에 매각되고 닷컴 열풍이 종말을 고하는 중에도 개발을 꾸준히 지속했다. 2002년 6월, 모질라 프로젝트는 리눅스, 맥 OS,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솔라리스를 포함한 다수의 운영 체제에서 동작하는 표준 기반의 기능적인 웹 브라우저를 제작했다. 모질라 1.0이 2002년 6월 5일 공개되었고, 개인 설정이나 개선된 인터페이스 등을 포함해 인터넷 익스플로러에 없는 새로운 기능들을 소개하면서 호평을 받았다. 거기에 모질라 브라우저는 그 강력한 표준 지원으로 인해 W3C 표준에 대한 ‘사실상(de facto)’의 유일한 참고 구현이 되었다. 최신 버전의 모질라는 다양한 설정이 가능하고, 쿠키, 팝업, 패스워드, 이미지 관리, 탭 브라우징 등의 고급 기능을 갖추고 있다. 2003년 7월 15일, AOL은 넷스케이프 모질라의 핵심이었던 자사의 브라우저 개발부의 문을 닫기로 했다. 이는 곧 이전의 모질라 개발의 책임을 졌던 넷스케이프/모질라 개발자들이 주축이 된 모질라 재단이 설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다행히 AOL에서는 새로 설립되는 재단에 2백만 달러 규모의 지원을 약속했다. 사실 이것은 AOL이 경쟁자인 마이크로소프트와 앞으로 7년 동안 자사의 소프트웨어에서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사용하겠다는 계약을 한 뒤부터 예상된 결과였다. 넷스케이프는 이전부터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한 AOL의 교섭 카드였던 것이다. 다른 부서로 이동된 사람들 제외한 대부분의 넷스케이프 직원들은 해고되었다. 넷스케이프 간판은 건물에서 끌어내려졌고, 이것은 넷스케이프의 종말로 받아들여졌다. 넷스케이프 상표는 그 포털 사이트에서 계속 사용되겠지만, 모질라 개발에는 더 이상 투자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버전의 넷스케이프는 모질라에서 단순히 이름만 바꾼 것에 가까운데, 2004년 8월에 출시한 7.2 버전(모질라 1.7 기반)부터이며, 2005년에 출시한 넷스케이프 8.0은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모질라 파이어폭스 모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모질라 플랫폼 개발의 변화 앞으로 모질라의 변화에 대한 계획을 보여주는 새로운 개발 로드맵이 공개되었다. 이에 따르면 모질라는 현재의 통합 "클로스 플랫폼 프론트 엔드"(XPFE) 애플리케이션에서, XUL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레임워크와 게코 렌더링 엔진과 같은 공통 백 엔드 기술을 공유하는 작은 애플리케이션들의 패키지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이전처럼 끊임없이 작업이 계속되겠지만, 서드 파티 애플리케이션과의 통합은 더 나아질 것이다. 스위트의 기능을 분산시켜, 다음과 같은 방법을 통해 프로젝트를 발전시킬 계획이다. 애플리케이션의 불필요한 코드를 줄이기 프로젝트 관리의 단순화 프로그램 모듈화 향상과, 안전성과 보안 강화 이것은 장기적인 목표가 아니다. 이미 파이어폭스 1.0 브라우저(구 피닉스, 파이어버드)와 선더버드 1.0 메일/뉴스 클라이언트가 최근 배포되었다. 파이어폭스 같은 모질라 재단의 제품으로부터 스위트를 구별하기 위해, 모질라 재단은 모질라를 “모질라 스위트”로 홍보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많은 개발자들에게 Seamonkey로 잘 알려져 있다. 모질라 스위트의 개발 중단 2005년 3월 10일, 모질라 재단은 1.7.x를 끝으로 더 이상 새로운 모질라 스위트의 출시가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모질라 재단은 개발을 계속하기 원하는 커뮤니티 회원이 있다면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모질라 스위트는 계속 개발되겠지만, 모질라 재단 차원의 개발은 공식적으로 중단된 것이다. 1.7.x의 모질라 스위트를 계속 사용하기 원하는 단체를 위해서 "1.0"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이름의 비공식적인 제품이 나올 것이다. 개발자들은 이미 새로운 이름을 결정했으나, 파이어폭스 이름 변경 과정에서 겪었던 문제를 피하기 위해 상표권에 대한 법적 절차를 마치고 난 후에 이를 공개할 예정이다. 모질라 스위트의 마지막 정식 버전은 1.7.13이며, 1.8 버전으로는 6개의 알파와 1회의 베타가 발표되었지만 정식 버전은 출시되지 않았다. 시몽키 프로젝트 2005년 7월 2일 시몽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시몽키 프로젝트는 모질라 재단이 개발을 중단한 모질라 스위트의 개발을 계속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시몽키 커뮤니티에 의해 개발되고 있다. 기존 모질라 스위트와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이름과 로고를 이용하는 독립된 제품으로 존재한다. 모질라 스위트와 동일한 구성을 유지하며, 동시에 최신 모질라 기술을 반영하고 있다. 2006년 1월 30일 시몽키 1.0이 출시되었다. 모질라 기술 모질라의 주된 기술적 취지는 월드 와이드 웹과 이메일과 같은 주류 인터넷 통신 시스템의 기반이 되는 표준에 대한 구현과 확장이다. 자유롭고 이식이 용이한 접근 방식을 택하면서, 모질라 기술은 상업적 동기에서 최대한 자유로운 공공 인프라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이러한 기술의 진화에 있어 지도적인 위치가 되었다. 모질라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는 필요에 적절하게 모듈화되었다. 그 결과로 모질라 개발은 다른 상황에서 재사용이 가능하도록 몇 가지 구성이 분화되었다. 중요한 것들로는 모든 운영 체제에서 동일하게 동작하도록 하는 플랫폼 추상화 라이브러리인 NSPR, XPCOM, 마이크로소프트의 컴포넌트 오브젝트 모델(COM)과 유사한 소프트웨어 구성 프레임워크 등이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많은 프로젝트에서 재사용되고 있는 게코 레이아웃 엔진이다. 모질라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메뉴, 대화 상자를 포함한 전체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게코 운영 체제의 GUI 라이브러리가 아닌 레이아웃 엔진에 의해 렌더링 된다는 점이다. 이 같은 아키텍처는 XUL로 불리는 특별한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옹호자들은 그 유연함과 서로 다른 플랫폼에서도 표준적인 GUI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든다. 비판적인 이들은 이 아키텍처가 성능 저하의 원인이 되며, 애플리케이션 설계에서 운영 체제 인터페이스의 GUI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존재하는 많은 브라우저들이 렌더링 엔진을 단지 HTML 페이지를 출력하는 데만 사용한다. 모질라에서 XUL은 그것의 AOM(Application Object Model, 애플리케이션 객체 모델)과 단단히 통합되어 있다. 이 객체의 집합은 문서-명시된 GUI를 GUI 소프트웨어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소프트웨어('명령하기'나 '열기' 같은)와 통합한다. 이 기술은 HTML에 수반한 W3C DOM 표준과 비슷한 면이 있다. 같이 보기 모질라 모질라 재단 모질라 코퍼레이션 모질라 공용 허가서 모질라 애플리케이션 프레임워크 모질라서 넷스케이프 공중 사용 허가서(MPL) mozdev.org Stylish 각주 외부 링크 모질라 스위트의 공식 제품 소개 모질라 재단 홈페이지 모질라 자유 소프트웨어 OS/2 웹 브라우저 인터넷 스위트 1998년 소프트웨어 C++로 작성된 자유 소프트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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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2007%EB%85%84%20%EC%84%B8%EA%B3%84%20%EC%9C%A1%EC%83%81%20%EC%84%A0%EC%88%98%EA%B6%8C%20%EB%8C%80%ED%9A%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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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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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는 국제 육상 경기 연맹(IAAF) 주관으로 2007년 8월 25일부터 9월 2일까지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나가이 육상 경기장에서 열린 국제 육상 대회이다. 1991년 제3회 도쿄 대회 이후 일본에서 16년 만에 열린 이 대회에는 IAAF 회원국 212개국 중 197개국에서 선수 1800명이 참가해 당시로서는 역대 최대 규모였다. 개최지 선정 2001년 IOC 총회에서 2008년 하계 올림픽 개최에 실패한 오사카 시는 2007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개최에 도전했다. 당시 개최를 희망한 도시는 오사카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독일의 베를린 등 세 도시였다. 그러나 베를린과 부다페스트는 신청 마감일인 2002년 1월 1일에 앞서 개최 의사를 철회했고, 그에 따라 오사카가 개최 도시로 확정되었다. 2002년 11월 15일, IAAF는 오사카가 2007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개최지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 결과 남자 트랙 경기 필드 경기 여자 트랙 경기 필드 경기 메달 집계 각주 외부 링크 제11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공식홈페이지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일본에서 개최된 육상 대회 오사카시의 스포츠 2007년 8월 2007년 9월 2007년 세계 선수권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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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1%AC%EB%A6%AC%EC%8A%A4%20%EC%86%8C%EC%97%AC%EC%9D%98%20%EB%A1%9C%EC%BD%94%EB%AA%A8%EC%8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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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소여의 로코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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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소여의 로코모션》(, 통칭 '로코모션')은 크리스 소여가 제작하고 아타리사에서 판매한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게임 전체의 흐름은 크리스 소여가 주장한 대로 마이크로프로즈 사에서 발매한 《트랜스포트 타이쿤》을 잇고 있으며, 시스템 자체는 아타리가 발매한 《롤러코스터 타이쿤 2》의 엔진을 기반으로 한다. 2004년 9월 7일 미국에서 발매되었으며, 같은해 9월 10일 한국어판이 발매되었다. 특징 1900년부터 2100년까지 기차, 노면전차, 버스, 트럭, 선박, 비행기 등의 운송 수단을 이용해 승객과 화물을 운송한다는 내용이다. 각 운송수단은 실제 차량에 기반하여 구현된 가상차량이며, 사용자가 직접 제작한 차량이나 건물 등을 추가할 수 있다. 총 40개의 시나리오가 있으며 시나리오 에디터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지역을 작성해서 추가할 수 있다. 성과 지수는 낮은 순서부터 선로공 (0~9), 엔지니어 (10~19), (20~29), (30~39), 노선 관리인 (40~49), 이사 (50~59), (60~69), 회장 (70~79), 사장 (80~89), 거물 (90~100)으로 나뉜다. 단점 역 크기가 80타일로 제한되어있다. 맵이 비슷한 장르의 게임에 비해서 좁다. 마을 수가 80개로 제한되어 있다. 동시에 선택가능한 오브젝트 수가 제한되어있다. 외부 링크 아타리의 로코모션 페이지 제작자 크리스 소여의 웹사이트 2004년 비디오 게임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 영국의 비디오 게임 윈도우 게임 어셈블리어 소프트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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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C%9D%B4%EC%9B%90%ED%94%84%EB%A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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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원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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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원프로(AONEPRO)는 전자사전, 블루투스, DMB수신기 제작을 주력목표로 만든 회사이다. 최고 경영자는 김남중이다. 제품 정보 전자 사전 전자사전에는 총17가지 모델이있다. SD 카드를 사용해서 용량을 확장할 수 있다.(일부모델제외) 일부 단종된 모델도 있고, 더 많은 모델도 있으나 홈페이지에 게재된 모델만 서술했다. C,J로 구분된 모델은 중국어, 일본어가 각각 선택사양으로 있으며 서로 다른 언어를 원할 때는 확장카드를 구매해야한다. AP-760 AP-750(C,J) AP-703(C,J) AP-701(C,J) AP-450 AP-400 AP-350 AP-310(J) AP-300(C) AP-255 AP-250 AP-155 AP-120(C,J) AP-115(C,J) AP-111(C,J) AP-101(C,J) APM-700(의학전문사전) DMB수신기 DMB수신기는 총1개의 모델이 있다. MDR-100(지상파DMB수신) 블루투스 블루투스헤드셋은 총1개의 모델이 있다. BS-6010 대한민국의 전자 기업 전자 기업 대한민국의 기업 1991년 설립된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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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E%98%EC%96%B4%EC%B0%A8%EC%9D%BC%EB%93%9C%20%EC%B1%84%EB%84%90%2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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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차일드 채널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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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차일드 채널 F(Fairchild Channel F)는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Fairchild Semiconductor)에서 1976년 8월 발매한 가정용 게임기로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에 이어 두 번째 카트리지 방식의 게임기이다. 오디세이의 카트리지가 단순한 점퍼 조합이었던 것에 비해 채널 F는 롬 카트리지로서 2세대 가정용 게임기의 시초라 볼 수 있다. 발매 당시 가격은 169.95$였다. 채널 F 채널 F는 나중에 인텔을 창립한 로버트(Robert Noyce)가 개발한 Fairchild F8 CPU를 탑재하였고 아주 기초적인 그래픽 성능을 보여 주었으나 퐁에 비하면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운드는 본체에 내장된 스피커로 출력되었다. 채널 F의 게임은 총 26종의 카트리지가 발매되었는데 그 중에 몇 가지는 하나의 카트리지에 하나 이상의 게임이 있는 경우도 있었으며 보통 19.95 달러에 판매되었다. 채널 F 시스템 II 페어차일드는 아타리와 경쟁하기 위해 채널 F 시스템 II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채널 F와의 차이점은 현대적인 단순한 케이스와 고정되었던 컨트롤러가 분리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전에는 본체의 내장 스피커에서 나오던 소리가 시스템 II에서는 텔레비전으로 출력되었다. 하지만 첫 번째 비디오 게임 충돌의 영향으로 페어차일드는 비디오 게임 시장에서 철수하게 된다. 1979년에 Zircon International은 채널 F 사업을 인수해 채널 F 시스템 II를 출시하지만 고작 6개의 게임만을 출시하고는 단종되었다. 또 유럽 업체의 라이선스 게임기로 스웨덴의 Luxor Video Entertainment System, 영국의 Adman Grandstand, 독일의 Saba Videoplay와 Nordmende Teleplay, ITT Tele-Match Processor가 있다. 사양 CPU : 페어차일드 F8 1.79MHz (PAL: 2.22MHz) RAM: 64 바이트, 2킬로바이트 VRAM (2×128×64 비트) 해상도: 128*64, 102*58, 8색(라인당 최고 4색) 사운드: 500Hz, 1kHz, 1.5kHz 3가지 톤(tone) 2개의 컨트롤러 컴포지트 비디오 출력(RF모듈) 외부 링크 페어차일드 채널 F (OLD-COMPUTERS.COM) 채널 F FAQ (rec.games.video.classic) 카탈로그와 팸플릿 (FNDCollectables.com) The MESS Project (채널 F 에뮬레이터) 채널 F와 게임의 역사 (The Dot Eaters) 채널 F 프로그래밍 정보 (VESWiki) (Fairchild Gallery) 가정용 게임기 2세대 게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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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3%A8%EB%BC%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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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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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뼈 또는 두정골(頭頂骨, )은 머리뼈를 구성하는 뼈의 하나이다. 두 개의 뼈가 한 쌍을 이루어 머리뼈의 천장을 형성하며, 각각의 뼈는 사각형의 판 모양(quadrilateral)이다. 두 개의 면과 네 개의 가장자리, 네 개의 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절 하나의 마루뼈는 반대편 마루뼈, 1개의 뒤통수뼈, 1개의 이마뼈, 1개의 관자뼈, 1개의 나비뼈와 관절한다. 이마뼈와의 관절부를 관상봉합(), 관자뼈와의 관절부를 비늘봉합()이라고 한다. 골화(骨化) 두정골의 골화()는 두정융기()에서 일어난다. 머리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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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A%A9%EC%A4%80%20%28%EC%84%B1%EC%9A%B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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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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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은 대한민국의 남자 성우, 배우이다. 1994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학과(학사, 87학번)를 나왔다. 1987년 영화 《연산일기》의 단역을 통하여 영화배우로 데뷔를 하였고, 1년 후 1988년 연극 《아버지와 아들》의 조연을 통하여 연극배우로 데뷔하였다. 1988년 영화 《보릿고개》에 단역으로 마지막 출연하였다. 5년 후 1993년 4월, KBS 한국방송공사 공채 15기 탤런트로 커리어를 쌓고, 1997년 9월, MBC 문화방송 공채 14기 성우로 전향하였다. 출연 작품 TV 방송 CSI 과학수사대 (MBC) - 앨 로빈스 (로버트 데이비드 홀) CSI 뉴욕 (MBC) - 비니 마리노 (크리스티안 스벤손) 섀도우파이터 (MBC) - 치앙카 24 (MBC) 닥터 슬럼프 (MBC) - 가라 말괄량이 삐삐 (MBC) - 클랭 부메랑 파이터 (MBC) 토미와 오스카 (MBC) 돌고래 플리퍼 (MBC) 톰과 제리 (MBC) 와 이 멋진세상 (MBC) - 나레이션 아이 삼국유사 (SBS) 홍길동 어드벤처 (SBS) - 먹쇠 내 꿈은 온에어 (KBS) - 이무열 선생님 치카치카 폼폼이 (KBS) - 부르부르 해머보이 망치 - 할아버지 에그보이 코루 (MBC) 마법천자문 (MBC) - 돈킹 헌터X헌터 (애니원) - 다르초르네 골프천재 탄도 (챔프) - 탄도 아버지 닌자의 왕 (애니맥스) - 쿠모히라 토바리 듀랜달 유리함대 (애니맥스) - 바닷트 카미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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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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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Sauer P226(시그 자우어 P226, )는 시그 자우어(SIG-Sauer)가 SIG-Sauer P220을 기반으로 개발한 9 mm 패러벨럼 탄환을 사용하는 대형 권총이다. 특징 SIG P226은 P220과의 차이를 외관상으로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가장 개선된 점으로는 복열 탄창의 도입이 있다. 그 결과 장탄수가 9 mm 파라벨럼 기준으로 P220의 9+1발에서 15+1발로 늘어났다. .357 SIG 탄환이나 .40 S&W 탄환 기준으로는 12+1발이다. 장시간 물이나 흙탕물 안에 담근 후에도 확실히 작동할 정도로 견고하고, 뛰어난 내구성을 과시하지만 가격은 P220보다 비싸다. 미군의 제식 권총 사업에서는 높은 가격과 더불어 수동 안전 장치가 없다는 점으로 인해 베레타 92에 밀려 채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각국의 군대, 경찰 등의 기관 중에서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기관을 중심으로 많이 채택하고 있다. 특히 베레타 92의 (슬라이드 파손을 비롯한) 내구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네이비 실과 영국의 SAS 등 여러 특수부대의 제식 권총으로 채택되었다. 기능상의 특징으로는 높은 신뢰성 외에도 '디코킹' 기능이 특징적이다. 이는 탄환을 장전하여 뒤로 젖혀진 헤머를 디코킹레버를 작동시킴으로써 원위치시키는 기능으로서 디코킹을 하면 헤머는 콕킹의 바로 전 단계인 하프 콕킹으로 돌아가지만 방아쇠를 누르면 디코킹을 하지 않았을때와 마찬가지로 탄환이 발사된다. 디코킹 기능은 장전을 한 상태로 홀스터 등에 총기를 수납할 경우 헤머가 걸려 총기를 신속히 뽑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방지하고 적에게 자신의 총기가 장전되어 있는지를 알리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담으로 높은 가격에 인한 탈락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자면 권총 한정으론 베레타92보다 좀 저렴하지만 예비 탄창과 정비 도구 비롯한 세트 비용이 베레타92 세트 비용보다 좀 높았기에 미군의 제식권총 사업에 놓치게 된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진실을 떠나서 결론은 가격 경쟁에서 패배했으니, 굳이 제대로 된 진실을 따질 이유가 없다. 변형 P227 P226의 .45 ACP 사양 P228 SIG P228은 P226의 컴팩트 모델로 1989년에 출시되었다. P226을 축소, 경량화한 탓에 가격도 역시 저렴해졌으며, 동시에 13+1발의 많은 장탄수로 인해 미군에서도 M11 권총으로 일부가 제식 채용되었다. 또한 미국 국토안보부(DHS)와 미국 연방 수사국(FBI), 마약단속국(DEA) 등 미국의 여러 사법 기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영국군에서 장기간 사용된 FN 브라우닝 하이파워 권총을 일부 대체하였으며, 그 외에 프랑스의 GIGN, 독일의 GSG-9, 이스라엘 육군(일부), 일본 경찰의 SAT, 일본 해상보안청 특수경비대(SST), 지바(千葉) 현경 등의 항공 보안관(Sky Marshal)에서 정식으로 채택된 바 있다. 일반적으로 P228은 P226의 슬라이드를 짧게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장탄수가 감소하는 반면 프레임이 얇아져 손이 작은 사람도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P226과 그립이 약간 다르고 엄지손가락이 닿는 부분이 다소 움푹 파여 있어서 P226보다 비교적 쉽게 쥘 수 있다(실제로 P226과 P228은 쥘 때의 감각이 크게 차이난다). P226에 사용되는 15발 탄창과 20발 탄창 역시 사용 가능하다. P228은 9 mm 파라벨럼 탄환을 사용하는 버전만이 존재하며, .357 SIG와 .40 S&W 탄환을 쓸 수 있도록 개량된 P229가 나오면서 판매량이 감소함에 따라 2005년을 끝으로 단종되었다. 영화 2015년 개봉된 영화 007 스펙터에서, 007은 본드걸에게 SIG P226 권총을 호신용으로 가지고 있으라면서, 사용법을 설명한다. 사용 국가 P226 - 3군(육,해,공) 및 뉴질랜드 SAS - 대한민국 육군 대한민국 해군 - 베를린 Spezialeinsatzkommando(SEK) - 제 10 낙하산 여단(10 Paratrooper Brigade), Grup Gerak Khas, General Operations Force - 멕시코 육군(P226 Tactical), 해병대 - 베네수엘라군(Fuerza Armada Nacional) - 스웨덴 경찰 - Grupo Especial de Operaciones - 슬로베니아군 및 경찰 특수부대(Specialna Enota Policije) - 싱가포르군의 제식 권총 - Emergency Response Unit (Garda), 아일랜드 육군 레인저(Irish Army Rangers) - 영국군에서 제식명 L105A1(기본형)과 L105A2(P226R)로 사용, British Armed police, SAS - Counter Terrorism Battalion (CTB-71st), Royal Special Guard - 쿠르드 민병대 페시메르가(Peshmerga), 이라크 다국적군(Multi-National Force - Iraq) - Defense Industries Organization에서 ZOAF 권총으로 라이선스 생산(현재는 PC9으로 개명), 이란군의 제식 권총 - 세이렛 듀브드반(Sayeret Duvdevan / 217 부대) - 인도 육군, 낙하산 연대, 해군 특수부대 MARCOS, National Security Guards - 일본 경찰 특수급습부대(SAT), 해상자위대 특별경비대(Special Boarding Unit) - 터키군 Maroon Berets - 포르투갈군 및 경찰 - 폴란드 해군 특수부대 GSP FORMOZA - 핀란드 육군 평화유지군 및 군악대(9.00 PIST SIG-Sauer) - 필리핀 경찰, 국가정보국(National Intelligence Coordinating Agency) P228 P229 외부 링크 현대 화기 P226 현대 화기 P228 & P229 독일의 자동 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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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9%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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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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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李滉, 1502년 1월 3일(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1년 1월 3일(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율곡이이에게 신사임당이 있다면, 퇴계이황에게는 춘천 박씨 어머니가 있다. 아버지 이식이 의성김씨와 사별한 후, 춘천박씨(박치의 장녀)정경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언적의 사상을 이어받아 영남학파의 중추적 학자가 되었으며 나아가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되었다. 학맥은 동서 분당 뒤에 동인의 핵심을 이루고, 다시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이황 제자들은 남인, 조식 제자들은 북인을 이룬다. 한편 그의 저술 중 일부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약탈해갔는데, 일본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정 환경 퇴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경북 안동부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 온계리(溫溪里)에서 진사(進士)이식(李埴)과 부인 문소 김씨(2남 1녀) 춘천 박씨(5남)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 물러나 시내 위에 머무르다는 뜻),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과 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다. 안동부사를 지낸 송재 이우의 조카이자 문하생이다. 이황이 태어날 때 이황의 부모는 태몽을 꾸었는데 이식이 40세 때 진사시에 합격한 해에 어머니의 꿈에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황을 낳았다하여 대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춘천박씨 밑에서 자라야 했다. 형은 온계(溫溪) 이해(李瀣)로 마찬가지로 학자였으나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연루되어 유배가는 도중 병사하였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일찍이 김해 허씨와 결혼하였으나 27세에 상처하고, 재혼한 안동 권씨 역시 46세에 사망하였으며 둘째 아들과 증손의 요절을 보았다. 상처한 후 우연히 그의 사람됨을 본 권질이 병약한 자신의 딸을 부탁한다고 청하자, 그는 거절하지 못하고 권질의 딸을 받아들였다. 권질의 딸은 정신질환이 있었는데, 후일 20세기의 학자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권씨 부인을 사이코라고 표현하였다. 그 외에도 퇴계에게는 첩이 1명 있었으나 첩도 서자 1명을 낳고 일찍 요절하였다. 퇴계는 본부인 허씨 소생 자녀들에게 생모와 계모를 차별하지 말도록 가르쳤고, 이에 권씨 부인이 사망한 뒤에도 자녀들은 권씨 부인의 3년상을 시묘살이하였다. 수학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대대로 물려오는 재산이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생활했다. 1508년(중종 3) 8세 때 중형(仲兄) 이징(李澄)이 칼에 손을 베였는데 다른 형제들 중 그만 이를 보고 통곡하였다. 이에 어머니가 손을 베인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어째서 우느냐고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어찌 저렇게 피가 나는데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이황은 1512년(중종 7) 12세에 숙부 송재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송재는 당시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친히 조카 퇴계를 비롯한 동리 청년들을 가르쳤다. 1514년(중종 9)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여, 도연명과 주자를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 숙부 이우에게 수학한 뒤 향리의 용수사에서 공부하였고, 1520년(중종 15) 20세 무렵부터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독서를 하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병을 얻었는데, 이후부터 그는 잔병치레에 시달렸다. 결혼과 가정 생활 1528년(중종 23) 퇴계가 28세 때, 부인허씨는 둘째 아들을 낳고 1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비록 아내는 죽었으나 사위로서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홀로 된 장모를 도와 그가 죽을 때까지 처가집의 대소사를 끝까지 챙겼다. 당면한 학문에 전념하면서 어린 두 자녀를 돌보는 것은 무리가 따랐지만, 사정이 어렵다고 본처가 사망한 후 바로 후처를 들일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관습대로 첩을 한 사람 들였는데, 그 첩은 집안 살림을 잘 돌 보면서 퇴계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을 뿐만 아니라 어린 두 아들도 친모처럼 잘 챙겨주었다고 한다. 또 나중에 온전치 못한 둘째 부인 권씨를 맞이한 후에도 장애가 있는 권씨를 대신해 실질적인 안살림을 충실하게 챙겼다. 퇴계는 이러한 첩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두 자녀들에게도 친어머니와 동일하게 대하라고 하였다. 그 뒤 권질의 딸 권씨부인과 재혼하였다. 권씨 부인의 할아버지 권주(權柱, 1457-1505)는 1503년 경상감사로 재직 중에 갑자사회(1504년) 때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갔다는 죄목으로 평해 땅에 유배된 후 교살당하였다. 그리고 할머니는 관노가 되었으며, 친정아버지 권질은 연산군을 비방하는 언문 투서사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어린 나이에 사화의 참혹함을 경험한 권씨 부인은 정신적 후유증으로 이상 정세를 보였다. 아버지 권질은 1506년 중종반정 이후 해배(解配)되었으나, 기묘사화 후 다시 무고(誣告)로 인한 옥사인 무옥으로 예안 땅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평소 퇴계의 사람됨을 눈여겨 본 후 퇴계를 불러 집안의 참극으로 인하지 않은 충격으로 정신이 혼미한 자신의 딸을 의탁하였다. 딸을 부탁할 때 자신의 딸이 어려서 겪은 집안의 모진 일을 당한 후 정신이 혼미하여 아무도 색시로 데려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알리면서 「부디 죄인의 소원을 들어 주시게나」하며 딸을 부탁하였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퇴계는 「예 고맙습니다.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께 승낙을 받고 예를 갖추어 혼례를 올리도록 하겠으니 마음 놓으시고 기력을 잘 보존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는 심사숙고 후 예를 표하고 어머니의 윤허를 받고 혼례를 갖출 테니 심려 마시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권질이 예안으로 유배된 지 9년이 되는 1530년에 권씨 부인을 맞이하였다. 둘째 부인인 권씨 부인은 아버지 권질이 사전에 말한 것처럼 부족한 부분이 많아 퇴계는 마음고생도 많이 하였다. 그러한 부인을 이해하고 아끼며 임지가 어디든지 동행하며 정성을 다하여 자상하게 대한 덕으로 둘 사이는 별 탈 없이 잘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일가친척들이 종가(宗家)에 모였을 때, 권씨 부인이 느닷없이 차려진 제사상의 음식을 집어먹으며 상위에서 떨어지는 배를 치마 속에 숨겼다. 이 광경을 목격한 일가친척들이 못 마땅한 눈치를 주어, 결국 퇴계의 형수가 질책하자 퇴계는 태연하게 ‘제사도 지내기 전에 며느리가 음복하는 것은 예절에 벗어난 일이지만, 조상께서는 철부지를 귀엽게 여기실망정 손자며느리의 행동에 노여워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형수님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저가 잘 가르치겠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며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부인을 따뜻하게 감쌌다. 퇴계의 이 말에 동서를 꾸짖던 큰 형수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동서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야. 서방님 같이 좋은 분을 만났으니」라고 하였다고 한다. 제사를 끝낸 후 아내를 불러 왜 그러한 행동을 하였느냐고 묻자 배가 몹시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여 퇴계는 권씨 부인을 위해 배를 손수 깎아 주었다고 한다. 또 퇴계가 어느 상가(喪家)에 조문(弔問)을 하러 가려던 때에 흰색 도포 자락이 해어져 있어 부인에게 꿰매 달라고 하자 해어진 흰 도포에 큼지막하게 빨간 헝겊으로 기웠다. 도착한 상가에서 예학(禮學)에 밝은 사람이 ‘흰 도포를 어찌 빨간 헝겊으로 기워 문상(問喪)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하고 왔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퇴계는 별다른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권씨 부인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끝까지 그녀를 아끼고 존중하였다. 1546년(명종 원년) 47세 때, 권씨 부인과 혼인한지 16년이 되는 해였는데, 부인이 출산 중 난산으로 사망하였고 태어난 아이도 며칠 후 죽고 말았다. 권씨 부인이 사망한 후에도 전처 소생의 두 아들은 평소 친어머니처럼 깍듯이 예우할 것을 당부한 아버지 퇴계의 말대로 계모 권씨 무덤이 있던 산기슭에 노막(廬幕)을 지어 시묘살이를 하였고, 퇴계는 그 건너편에 암자를 짓고 1년여를 기거하였다. 평소 퇴계는 자녀들에게 사람들이 친모와 계모를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니 그러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던 대로 자녀들은 권씨 부인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퇴계 또한 아내의 제삿날이 되면 아무리 귀한 손님이 찾아와도 손님 접대 후,자신은 고기와 술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또 첩이 죽은 후에도 그녀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이적을 자신의 호적에 올렸고, 차후에 이적의 후손들이 적서 차별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족보에 적서의 구별을 두지 못하게 하였다. 퇴계는 모든 사람에게 정중한 예와 고매한 인격, 차별 없는 인애로서 대하였다. 정치 활동과 학문 연구 1527년(중종 22) 향시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 해인 1528년(중종 23)에 소과인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서 하서 김인후와 더불어 서로 교유하며 뜻이 맞아 끊임없이 토론하고 연구하며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았다. 이때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또한 노수신과도 만나 친분을 쌓았는데, 이황은 조광조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으나 노수신은 조광조의 제자인 이연경(李延慶)의 문인이었으므로 그를 통해 조광조의 영향을 받게 된다. 1533년 귀향 도중 김안국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9년(중종 34)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며, 동년 곧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1540년(중종 35)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는 등 승진을 거듭하였다. 중종 말년인 1543년(중종 38)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8월에 부모 봉양의 걸양을 청하여 먼저 고향으로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10월에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성묘를 핑계삼아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이후 조정에서 다시 불러 1545년(인종 원년) 6월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이 되었다. 바로 일본과 강화를 하고 변경을 방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해 1545년(명종 즉위년) 10월 이기로부터 을사사화의 역신인 김저와 같은 무리라 탄핵 당하여 삭탈관직 되었으나, 곧바로 10월 말 이기가 죄가 없다고 하여 다시 복관되었다. 그 뒤 사복시 정 겸 승문원 참교가 되었다. 1546년(명종 원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그해 3월 지제교(知製敎)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을 잘못 지어 사은사 남세건의 탄핵을 당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의 변호로 처벌을 모면하고, 그해 8월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를 거쳐 1547년(명종 2) 7월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부임했다가, 1개월 만에 홍문관 부응교로 임명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그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어떤 조건이나 권위, 편견을 두지 않았다. 이언적, 이현보 등에게도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생각과 견해를 주고받는가 하면 기대승과도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논쟁을 하기도 했다. 이때 이황은 자신의 나이나 경력은 말하지 않고, 순수하게 학문적인 내용만으로 논쟁을 이어나갔다.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과 편지논쟁은 후대의 사류들에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안동의 대장장이로 자신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몰래 수업 내용을 듣던 대장장이 배순(裵純)이 자신의 수업을 듣는 것을 확인하였다. 배순은 대장장이이자 쇠,유기 등을 다루는 장인으로 제작한 그릇이 비뚤어지거나 흠이 있으면 시장에 내놓지 않았고, 그의 명성이 알려져서 배순의 집을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누군가 만약 흠이 있는 그릇을 사려 하면 염가로 판매하기도 했다. 몰래 자신의 수업을 들은 것을 확인한 이황은 그에게 강연한 내용들을 물어보았고, 배순은 하나도 틀림없이 대답하였다. 배순의 학문적 열정에 감복한 이황은 신분을 뛰어넘어 배순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배순은 이황의 제자로 인정되어 정식으로 그에게서 학문을 배울수 있었고, 이에 감동한 배순은 더욱 열심히 학문을 수업하였다. 나중에 풍기로 이사한 뒤에도 이황을 찾았던 배순은 이황의 부음 소식을 접하고 3년상을 치루었으며, 금속으로 이황의 철상(鐵像)을 손수 만들어 제사를 지내 화제가 되었다 한다. 주자대전 입수와 탐독 그는 송나라의 주자의 문서인 주자대전을 입수하려고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였다. 각처를 수소문한 끝에 1543년(중종 38) 그는 드디어 주자대전을 입수하였다. 그는 이언적이 쓴 저서들, 조광조가 쓴 저서들을 모두 탐독, 독파하였는데 이언적의 저서가 많고, 사서육경과 주자에 대한 원문과 그에 대한 해석, 주해와 이언적 자신의 생각, 견해를 적은 것을 읽고 크게 칭송하였다. 그러나 조광조의 저서나 시문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에 많이 당황해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자의 책을 직접 읽어보기로 다짐하고 주자대전을 입수하기 위해 오랫동안 수소문하였다. 이언적과 조광조의 저서 외에도 그는 이미 심경부주, 태극도설, 주역, 논어집주까지 이미 다 완독한 상태였다. 이황이 1543년(중종 38)에 입수한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제 때에 재간행한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으로, 가정간본의 원본은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정, 보충본이었다 한다. 1549년 풍기군수를 사퇴한 직후부터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해서 완독하였다. 지방관 생활과 낙향 1545년(명종 즉위년)을사사화때 탄핵을 당하여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1547년(명종 2)에는 안동대도호부사, 홍문관 부응교, 의빈부 경력 등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토계(兎溪) 인근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 몰두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 '이부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1548년(명종 3) 1월 충청도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기녀 두향을 만났다. 얼마 되지 않아 형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받자,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수 시절에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소수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지방관으로 활동하면서 향약과 주자가례의 장려와 보급에 치중하였고, 퇴청 후에는 문하생을 교육하여 성리학자들을 양성했다. 서원 건립과 후학 양성 풍기군수 재직 시절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는 서원을 근거지 삼아 세력을 확대해 나가게 된다. 그의 소수서원 사액 실현은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552년(명종 7년) 다시 내직으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시독관(侍讀官)이 되었다. 이어 불교를 배척할 것을 건의하였다. 하고, 이어 소매 속에서 소지(小紙)를 꺼내어 어상(御床)에 놓으며 아뢰기를, 그해 5월 사헌부집의, 6월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 7월 성균 대사성 지제교(成均大司成知製敎)를 거쳐 그해 11월 사직하였다. 1553년 행성균관사예를 거쳐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후 성균관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을 짓고 1557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이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한편 그의 문하에서는 저명한 학자들과, 당대의 정승 10여명과, 판서 30여 명이 배출되었다. 조정 출사와 사퇴 1553년(명종 8) 행상호군으로 빈전에서 서얼 방금법 허용 논의에 참석하였다. 이때 그는 서얼 허통을 지지하였는데 그는 일부 서자들이 적장자를 무시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으나 서자라고 해도 실력이 있는 자는 채용해야 된다며 인재 채용시 귀천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1554년(명종 9) 5월 형조참의에 임명되어 상경하였고, 6월 병조참의를 거쳐 그해 12월 첨지중추부사로 전임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55년(명종 10) 2월 다시 상호군에 임명되어 한성에 왔는데, 상경할 적에 가난하여 의복과 관대(冠帶)가 없으므로 판서 조사수(趙士秀)가 겉옷 1벌을 주었지만 사양하고 옷을 받지 않았다. 5월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2월 참찬관 박민헌이 말하기를 「경연관으로서 신 같은 무리는 「서경」에 나오는 글들을 잘 모르는 처지이니, 모름지기 유학자 이황과 김인후를 구하여 아침 저녁으로 더불어 강론한다면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556년(명종 11) 5월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그해 8월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58년(명종 13)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고사하였고, 한직인 충무위상호군직에 임명되었다. 1559년(명종 14) 다시 공조참판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올라오지 않았고, 여러번 그에게 올라올 것을 권고하여 그해 7월 상경하여 정사를 올려 사직하였다. 바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낙향하였다. 학문 연구와 사상적 완성 그는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사색, 후진 양성에 주로 치중하였다. 명종은 그를 존경하여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그는 조광조의 죽음을 봤고 왕의 출사 요청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출사 요청을 계속 거절하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그 풍경을 그리게 하고,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하였다. 명종의 총애를 안 경상도관찰사 이감(李戡)은 수시로 그를 찾아 예를 표하고 우대하였다. 그의 사상은 50~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저술·편저 등 중요한 것은 모두 이 기간에 되었으며,《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계몽전의》, 《심경석의》 및 기대승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서》와 같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명저이다. 생애 후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1560년(명종 15) 고향 토계동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으로 고쳤으며, 이후 7년간 주로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문하생들이 찾아와 이를 지도하였다. 1565년(명종 20) 4월 다시 동지중추부사직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반려하였다. 1566년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자 왕이 반려하였다. 이후 명종 말에 예조 판서가 되고 대제학·판중추 겸 지경연사 등이 되어 유명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지어 임금께 올리니 이는 국은에 보답하고 학문을 개발하기 위한 만년의 대표작이다. 명종이 갑자기 죽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선왕의 행장을 짓는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질병으로 부득이 귀향하게 되었다. 선조가 즉위한 후 선조가 여러번 부를 때마다 시정의 폐단을 간하는 사퇴 상소를 올리고 낙향했다가 거듭된 부탁으로 출사, 대제학, 지경연이 되어 성리학을 그림과 함께 쉽게 서술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왕에게 올려 성리학이 국가 이념임을 밝히게 한다. 또한 그는 아녀자들도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언문으로 번역한 것을 인쇄, 간행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생애 후반에 그는 친구로서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하였다. 당대 최고의 이론가였던 퇴계는 제자들과 토론하기를 즐겼으며, 성리학에 관한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1568년(선조 원년) 1월 행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하였고, 그해 7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어 상경하였다. 죽음 1569년(선조 2) 이조판서가 되어 상경하였으나 여러번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사직소가 수리되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평생 겸손함을 강조하며 청렴하게 살았으며, 생각이나 헤아림을 멈춘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사색과 '경'(敬)을 중시했다. 만년에 병을 핑계로 낙향, 1570년(선조 3) 음력 12월 8일 고향인 안동 토계동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향년 70세였다. 그가 죽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파하고 조회를 하지 않았다. 사후 상례와 석물을 화려하게 하지 말고 작은 비석이나 하나 세우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산소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쓴 작은 비석이 하나 세워졌다. 사후 그 뒤 문순공의 시호를 내리고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춘추관사를 추증하였으며, 1610년(광해군 2) 성균관 문묘(文廟)에 종사되었다. 안동의 도산서원을 비롯한 전국 40여 개 서원에서 제사하고 있다. 학문상으로는 영남 지역이 기반인 동인과 남인의 종통이었다. 동서 분당의 원인이라 일컬어지는 성암 김효원, 그리고 한강 정구 등은 이황과 조식 둘에게서 배웠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는 유성룡과 김성일이며 많은 다른 제자들이 있었다. 한강 정구는·미수 허목에게 이어지며, 허목은·성호 이익 등 남인 실학자로 이어진다. 또한 여헌 장현광 등은 이황과 이이 학설의 절충을 한다. 이황은 영남학파의 핵심을 이루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당색으로는 동인과 남인이었다. 이황 자신은 동서 분당 전에 죽었기 때문에 당파에 소속되지 않았다. 숙종 때까지 그를 기리는 뜻에서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가 주관되었다가, 노론 집권 후 영조 때 폐지되었으나 정조 때 가서야 정조가 행차하면서 부활하였다. 1968년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1천원 권의 첫 주인공으로 도안이 완성되었다. 이후 30년간 천원권 지폐의 도안 인물로 계속 유지되었다. 사상과 신념 그는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와 양명학은 이단이자 화(禍)로 간주하고, 임금에서부터 동료,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불교 배척, 양명학 배척을 한결같이 말하였다. 이기 이원론 이이와 더불어 한국의 성리학(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적 사상 및 영남학파의 창시자인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 시대에는 기몬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식과의 논쟁 이황은 조식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조식은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고 맞대응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황의 조식 비판은 후일 정인홍이 조식을 옹호하는 글을 올림으로서 다시한번 재현된다. 후일 조식의 제자와 이황의 제자들은 율곡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하며 동인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황의 제자와 조식의 제자 간 사상의 차이는 다시 동인을 양분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거유의 상이한 출세관과 학문관은 결국 남인과 북인의 분화로 이어졌고,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기대승과의 논쟁 ; 47 논쟁 추만 정지운이 [천명도설]을 지었고, 이를 우연히 본 이황이 몇 구절을 고쳤다. 정지운이 "4단 = 發於理, 7정 = 發於氣" (4단은 리에서 드러나고, 7정은 기에서 드러난다"고 한 것을 이황이 "4단 = 理之發, 7정 = 氣之發" (4단은 리의 드러남이고, 7정은 기의 드러남)이라고 고쳤다. 우연히 이것을 본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하는 편지를 이황에게 보내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황은 당시에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이황에게 편지로 문의했다. 기대승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황과 논쟁을 했다. 기대승은 리와 기가 '함께 있음, 붙음'(不相離; 서로 떨어지지 않음)을 주장했다. 이황의 명제는 리와 기를 서로 갈라놓는다. 이에 이황은 기대승의 비판을 받아들여서 "4단 = 理發而氣隨之, 7정 = 氣發而理乘之" (4단은 리가 드러나면 기가 그것을 따르고, 7정은 기가 드러나면 리가 그것을 올라탄다)고 명제를 바꾸었다. 이 명제는 '而' 이하의 뒷부분을 빼면 "4단-리발, 7정-기발"이고, 이황의 원래 명제와 다를 것이 없다. 이황은 리와 기의 '떨어짐, 분리됨, 구별됨'(不相雜; 서로 섞이지 않음)을 주장했다. 붙음과 떨어짐, 이것은 기대승과 이황의 기본적 차이이다. 기대승은 붙음을 주장해서 리와 기를 하나로 만든다. 그 결과 리가 드러남을 부정하고 기만 드러남을 주장한다. 이황의 두 명제 가운데 氣發만 인정한다. 반면 이황은 리와 기를 분리시킨다. 따라서 리발과 기발을 다 인정한다. 2원론이다. 이렇게 되면 논쟁은 리발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나간다. 이황은 주희의 강의록 모음인 [주자어류]를 읽다가, 주희가 "4단 = 理之發, 7정 = 氣之發" 이라 한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가 틀리지 않았으며, 주희의 말을 따르자고 기대승에게 제안한다. 기대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대승의 입장은 뒤에 율곡 이이가 그대로 이어받는다. 이이는 성혼과 논쟁하면서 기대승의 입장을 반복한다. 성혼은 약간 양자 절충을 한 이황의 입장에 선다. 이후 이이가 창시한 서인들은 기발 하나만 인정하는, 리와 기의 붙음을 당로로 정한다. 나아가 한원진은 {주자 언론 동이고}를 써서, 주희가 "4단 = 理之發, 7정 = 氣之發" 이라 한 것은 제자들이 잘못 기록한 말이라 부정한다. 호승심에 사로잡혀 이기려고 집착하다 보니 원문까지 부정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이는 너무 어려서 이황과 논쟁한 적이 없다. 이황이 죽기 전에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방문해서 며칠 머물며 가르침을 받았다. 돌아가서 편지를 몇통 주고 받는다. 60대 대학자에게 20대 학생이 묻는 것 이상이 아니다. 일본 유학에 영향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 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592년(선조 25년)부터 발생한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의 서적과 도공 등이 상당수 약탈당했는데, 이때 이황의 저서가 상당수 약탈당하였다. 경상북도의 해안가를 통해 유출된 이황의 서적, 서한들은 후일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미국에 의해 서구 문물이 강제로 유입되기 전까지 일본에는 조선에서 전래된 이황 계열의 성리학이 막부 세력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유행하였다. 양명학에 대한 이단시 이황은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후에 최명길은 퇴계에 의하여 이단으로 지목되었던 양명학을 남몰래 공부하여 양명학적인 사상을 저술에서 암암리 드러낸다. 이황은 (傳習錄辨)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했다. 그가 양명학을 '사문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에는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으니 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판한 셈이 된다. 문하생 그 문하생으로는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소고 박승임, 성암 김효원, 황재 심의겸 등이 있다. 월천 조목(趙穆), 송암 권호문(權好文), 두곡 고응척이 그의 문인이었으며, 특히 권호문에게 글 쓰는 법을 설명한 필법을 선물하였다. 권호문은 이를 퇴도선생필법-퇴도선생유첩(退陶先生筆法─退陶先生遺帖)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만들어 소장하고 후대에 전하였다. 김효원은 동인의 영수가 되었고, 심의겸은 서인의 영수가 되었다. 심의겸은 이황의 문인임에도 이이, 성혼과 어울린 탓에 자연스럽게 서인이 되었다. 박승임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그 제자 가운데 일부는 북인, 일부는 남인으로 출사한다. 류성룡과 그의 주변 인물, 제자는 모두 남인으로 이어진다. 368인 문인 가운데 정유일(鄭惟一), 매암 이숙량, 약포 정탁(鄭琢), 김취려(金就礪)도 그의 문인이었고, 한강 정구는 조식의 문하에서도 수학했지만 그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퇴계 문하생은 류성룡의 문하생인 서애학파와 학봉 김성일의 문하생인 학봉학파로 나뉜다. 히후 류성룡과 김성일 모두에게서 수학한 경당 장흥효는 퇴계학파나 주변으로부터 종통으로 인정받았다. 장흥효 외손은 숙종 때 저명한 영남남인 학자이자 정치인인 갈암 이현일이다. 양반가 자제 외에 상민의 자제도 그의 문하에 출입하여 배울 수 있었다. 그가 소수서원에서 성리학 강학 할 때 대장장이 배점이 뜰에 꿇어 엎드려 배우기를 간청하자 그는 이를 허락한다. 그가 죽자 배점은 3년간 상복 입고 소식(素食)하며 심상(心喪)했다. 퇴계 직계 문하생은 아니지만 기호학파 계통의 이이도 그를 스승의 예에 준해서 대접했다고 한다. 불행한 가정사 생후 1년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성장했다. 그러나 45세 되던 해 을사사화로 친형 이해가 연루되어 처형당한다. 첫 부인 허씨를 27세에 잃고, 재혼한 둘째 부인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46세에 사별한다. 그러나 그는 이 둘째 부인을 무척 가여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는 재혼하지 않고 48세 때 만난 기녀 출신 소실 두향 외에는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평생을 보냈다. 1548년(명종 3) 2월 이황의 둘째 아들이 일찍 요절하였다. 그는 둘째 며느리가 정혼한지 1년도 안되어 남편이 죽고 청상과부가 되자, 며느리의 개가를 허용하고 남의 눈을 피해 친정으로 몰래 돌려보낸다. 그가 선조 즉위 초 한성부로 가던 길에 한 주막에 들렀을 때, 그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해온 이가 있었는데 그때 그가 개가를 허용한 둘째 며느리였다 한다. 한성부에 분가한 그의 손자 내외가 아이에게 고열이 있어서 위중하자, 그에게 도움 요청을 하였으나 그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의 증손자는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그보다 앞서 사망하고 만다. 평가 그의 제자 중 학봉 김성일은 선생께서 산과 계곡을 거닐 때면 마치 '신선 같다'고 평하였다. 유홍준은 '퇴계는 평생에 처사가 되기를 원하여 죽을 때 영정에 벼슬이름을 적지 말고 '처사'라고 써주기를 희망했다지만 그는 처사 지망생이었지 처사는 아니었다.'라고 평하였다. 당대에 이미 그의 제자들은 경상좌도와 영남학파를 형성하였으므로 영향력이 있었다.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친구 하서 김인후는 퇴계에 대하여 '선비 사회에서도 드물게 도리를 다하였고, 말과 행동이 일치되었다'고 평하였다. 기타 대한민국의 1000원 지폐 앞면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의 도산서원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배출되었고, 동인과 남인, 북인 학자와 정치인들을 양성한 요람으로서 1910년 이전까지는 성역화되었다. 그러나 유교 성리학을 비판하던 1920년대의 경상북도의 공산주의자들은 도산서원을 도산서원(盜産鼠院)이라 하여 도둑들을 생산하는 쥐새끼들의 소굴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여 물의를 빚게 되었다. 그는 이언적과 조광조의 저서와 문집을 정리하여 간행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그는 회재 이언적이 사서 육경에 대한 해석과, 사서 육경에 대한 견해를 남긴 것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김종직에게는 박한 평가를 내렸다. 이황은 김종직을 가리켜 학문에 몸담은 사람이 아니라 화려한 사장을 즐기는 문장 잘하는 선비였을 뿐이라는 인색한 평을 남겼다. 임진왜란 이후 이황의 저서와 글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이황의 사상과 저술에 감동받은 일본의 사무라이 지식인 중에는 양명학이나 기타 학문에서 성리학으로 사상적인 전향을 하기도 했다. 사림 확산에 기여 풍기군수 재직 중 서원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으며, 백운동 서원의 현판을 왕의 사액 하사운동을 추진하여 성공시킨다. (심통원 참조) 이후 서원의 보급과 사액서원의 수가 늘어나면서 사림파(士林派)의 세력 확장에 기여하였다. 또한 조식의 문하생인 북인이 소북과 대북으로 나뉜 뒤, 소북이 대북에게 숙청되고 대북은 서인에게 숙청되면서 그의 문하는 쇠퇴했고, 이언적은 많은 제자를 내지 못하여 이황의 제자들이 영남학파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성호학파에 영향 후대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자신의 학문적 뿌리를 이황에게서 찾으려 했다. 성호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을 비롯한 선대 인사들은 대부분 윤휴와 가깝게 지냈다. 이익의 6촌 형님뻘 되는 반계 유형원도 윤휴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또한 성호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송곡 이서우는 윤휴와 허목 모두에게서 수학하였다. 이에 따라 성호 이익의 문도들 중에는 윤휴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며 그의 학문을 계승했음을 강조하였다. 윤휴와의 관계를 다소 부담스럽게 여겼던 성호 이익은 자신의 학통을 퇴계 이황이 근원임을 여러번 강조하였다. 이익 가문의 학문은 17세기까지 북인 계열의 윤휴와 상당히 유사하였다. 이하진이나 이잠 형제, 조하주 등은 윤휴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이익의 6촌 형인 유형원은 윤휴와 자주 만나며 연락하던 사이였다. 반면 뒷날 이익이 계승한 인물로 평가받는 허목과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이때까지 이익 집안의 학문은 성리학적 흐름과는 무관하였으며, 오히려 주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1699년(숙종 25) 이잠은 정시한을 예방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는 퇴계학 수용의 증거로 지목된다. 정시한은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이서우는 주희의 경전 해석을 따르면서 이황의 학문을 수용하였다. 이익 단계인 1710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저술을 하면서 학파를 개창하기에 이르렀다. 퇴계학을 수용하고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성과를 낸 성호 이익은 이제 이황과 자신을 연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윤휴의 학문이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이라는 비판적인 견해가 계속 제기되자 이를 부담스럽게 느꼈던 성호 이익은 학문적 전통을 윤휴에게서 찾던 형 섬계 이잠이나 유형원 등과 달리 허목을 거쳐서 퇴계 이황으로 연결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이서우가 허목과 윤휴 모두에게서 수학한 것에서 근거로 삼았다. 1715년(숙종 41)에서 1720년(숙종 46) 사이 성호 이익은 전대에 거리가 있었던 허목과 이하진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허목을 자신이 사숙한 스승으로 규정하였다. 서인 노론이 율곡 이이를 자신들의 학문적 뿌리로 삼은 것에 대항해서, 이익은 서울 지역(近畿) 남인들의 학문적 근원을 이황에서 찾으려 시도했다. 이익은 47 논쟁에 관한 책을 쓰고, 또 이황의 글을 발췌한 {이자 수어}도 편찬한다. 이러한 시도는 서울지역 남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다. 한편 이익은 허목의 후학으로 자정한 이후에도 경전해석이나 경세론 분야에서는 여전히 윤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전통적인 윤휴와의 계통을 강조하였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학문 경향을 보였다. 윤휴를 강조하던 인사들이 신유 박해로 몰락하면서 성호 학파의 학통은 오로지 퇴계학과 관련된 내용으로 전승되게 된다. 이익은 이황의 사상을 직접 계승하지는 않았으나 이익의 스승 중 한명인 이서우가 허목의 문인이고, 허목의 스승인 정구는 이황의 문하에서도 배웠고, 조식의 문하에서도 공부하였다. 이익은 이 점을 들어 퇴계 이황과의 관련성을 계속 강조하였다. 북인계 학문의 전통을 가진 윤휴에게 영향을 받은 성호 학파는 지속적으로 퇴계학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자 하였으며, 이는 18세기 후반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완성되었다. 일본 유학에 영향 임진왜란 당시 이황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 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e다. 기생 두향 그에게는 소실로 두향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1548년(명종 3)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한 후 만난 기생 두향은 이후 그가 떠나간 뒤에도 그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1571년(선조 4) 그의 부음을 들은 기생 두향은 충주 강선대에서 충주호로 몸을 던져 투신했다. 그 뒤 매년 10월이면 이황의 후손들은 이황에 대한 절개를 지켜 순사한 두향의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시제를 드린다 한다. 자산 규모가 꽤나 컸던 지방 유지 가장 많은 노비를 소유한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은 758명의 노비를 재산으로 물려줬다. 퇴계 이황은 367명의 노비 문서를 남겼다. 이황의 경우는 본인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부를 쌓은 사례이다. 이황은 생전에 자신이 늘 넉넉치 않다고 여겼으며, 가뭄이나 흉년이 들 때면 경제적 곤궁함을 토로한 적도 많았다. 중상층 이상의 재산을 소유했던 그의 이런 '결핍' 의식은 재산 증식의 당위성과 원동력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생계 걱정 없이 학문에만 전념했던 지방 지주들의 재산이 평균 전답 300~500두락, 노비 100여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답 3000두락에 노비 250여명 가까이 거느린 이황은 꽤 잘 사는 축에 속했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일화 그가 도산서원에 있을 때 어느 행인이 말을 타고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시중을 들던 제자들과 하인들이 지나가는 이의 무례함을 지적했다. '선생님, 저 사람 행동이 지나칩니다. 선생님 앞을 지나면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내버려 두어라, 말 탄 사람이 그림속의 사람처럼 좋은 경치를 더해 주는데 무슨 허물이냐?'라며 하인과 제자들에게 자신을 못알아보는 행인을 내버려 두라고 지시한다. 이문형, 윤두수, 윤근수 등을 탄핵했던 훈구파 권신 이감은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그를 찾아 문안인사를 드렸다 한다. 저서 및 작품 저서 《단양산수기》 《유소백산록》 《계몽전의》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심경석의》 《사단칠정분리기서》 작품 《무진육조소》 《성학십도》 《자성록》 《퇴계집》 《도산십이곡》 가족 관계 첫 부인 허씨는 27세때 사망하고, 재혼한 권씨는 46세 때에 사망한다. 그 뒤 이황은 재혼하지 않았고, 기녀 두향을 소실로 맞이하였다. 둘째 아들이 일찍 죽자, 둘째 며느리가 재혼할 수 있도록 친정에 돌려 보냈다. 한편 서자와 적자를 차별하던 시대에 퇴계는 서자 이적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차별하지 않게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당시 본처와 후처, 생모와 계모를 은근히 차별하였지만, 이황,선생은 자손들에게 생모와 계모를 차별대우하지 말도록 가르쳤다. 조부 : 이계양(李繼陽, 1424년 ~ 1488년) 조모 : 영양 김씨(英陽金氏), 김유용(金有庸)의 딸 아버지 : 이식(李埴, 1463년 ~ 1502년) 전모: 의성 김씨(義城金氏, 1460년 ~ 1488년), 김한철(金漢哲)의 딸 이복형 : 이잠(李潛, 1479년 ~ 1536년) 이복형 : 이하(李河, 1482년 ~ 1544년) 이복누나 : 신담(辛聃)에게 출가 생모: 춘천 박씨(春川朴氏, 1470년 ~ 1537년), 박치(朴緇)의 딸 형 : 이서린(李瑞麟) 요절 형 : 이의(李漪, 1494년 ~ 1532년) 형 : 이해(李瀣, 1496년 ~ 1550년) 형 : 이징(李澄, 1498년 ~ 1582년) 부인 : 김해 허씨(金海許氏, 1501년 ~ 1528년), 허찬(許瓚)의 딸 장남 : 이준(李寯, 1523년 ~ 1583년) 며느리 : 봉화 금씨(奉化琴氏), 금재(琴梓)의 딸 손자 : 이안도(李安道, 1541년 ~ 1584년) 손자 : 이순도 (李純道, 1554년 ~ 1584년) 손자 : 이영도(李詠道, 1559년 ~ 1637년) 차남 : 이채(李寀, 1527년 ~ 1548년) 부인 : 안동 권씨(安東權氏, 1502년 ~ 1546년), 권질(權礩)의 딸 첩 서자 : 이적(李寂, 1531년 ~ 1608년) 관련 작품 《불멸의 이순신》 (KBS1, 2004년~2005년, 배우:이순재) 같이 보기 이원론 퇴계전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성학십도(聖學十圖) 박승임 김효원 심의겸 조식 주세붕 소수서원 도산서원 사단칠정론 도산십이곡 문묘·종묘 종사 6현 이언적 이이 김집 송시열 박세채 외부 링크 퇴계학의 ‘독창성’에 대한 외국 학자들의 관점, 오늘의 동양사상 제16호 2007년4월 각주 관련 서적 노대환,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5)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부남철, 조선시대 7인의 정치사상 (사계절, 1996) 이상은 ,퇴계의 생애와 학문(서문당, 1973) 유정동, 퇴계의 생애와 사상(박영사, 1974) 외부 링크 1501년 출생 1570년 사망 과거 급제자 종묘배향공신 조선의 성리학자 조선의 정치인 조선의 문신 조선의 교육인 조선의 화가 조선의 작가 조식 (1501년) 조선의 철학자 조선의 시인 사상가 을사사화 관련자 지폐의 인물 진보 이씨 안동시 출신 유교인 병사한 사람 동인 남인 16세기 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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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B%93%9C%EC%9B%8C%EB%93%9C%20%EC%BD%94%ED%81%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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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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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코크(Edward Coke, "Cook"으로 발음함) (1552년 2월 1일-1634년 9월 3일)는 17세기 영국의 식민지 사업가, 판사, 정치인이다. 법의 지배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의회의 특권이 판례로부터 나오고 그것에 구속된다고 지적했으며, 1609년 Calvin's Case에서 "자연법은 영국법의 한 부분이며 신으로부터 비롯되어 영원하며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적인 법에 우선한다"고 선언하였다. 1610년의 보넘 판결(Bonham`s case)에서는 "의회제정법이 일반권리 또는 이성에 반하거나, 모순되거나, 실행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보통법(common law)이 그것을 통제하며 그러한 법을 무효라고 결정할 것이다"라고 했다. 후에 하원의원이 된 에드워드 코크는 1628년의 권리청원을 주도하였다. 정치 엘리자베스 1세 법무차관 1592년 6월 16일, 코크는 잉글랜드 웨일스 법무차관(Solicitor General)에 임명되었다. 법무장관 1594년 4월 10일, 코크는 잉글랜드 웨일스 법무장관(Attorney General)에 임명되었다. 영국은 스코틀랜드 법무장관, 아일랜드 법무장관이 따로 있다. 마그나 카르타 에드워드 코크 경은 마그나 카르타를 깊게 논평한 최고의 법학자 중의 한 명이다. 그는 1225년 판본을 해석했는데, 마그나 카르타가 귀족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코크는 마그나 카르타가 수백년 간 잘못 해석되어 왔다고 비판했다. 그는 마그나 카르타의 자유들(liberties)이 개인의 자유(individual liberty)과 같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코크는 마그나 카르타의 자유들을 보완하기 위하여 1628년 권리청원을 기초했다. 권리청원을 제정하는 토론 중에, 코크는 국왕의 주권을 부정하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 그는 국왕이 아니라 성문법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다. 각주 더 보기 법의 지배 누구도 자신의 사건에서 재판관이 될 수 없다 헌법재판소 사법심사 Marbury v. Madison 영미법학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동문 잉글랜드의 검사 잉글랜드의 법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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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OLIVIA%20%28%EC%9D%BC%EB%B3%B8%EC%9D%98%20%EA%B0%80%EC%88%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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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IVIA (일본의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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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IVIA(올리비아, 1979년 12월 9일 ~ )는 일본 오키나와현 나하시 출신의 가수이다. 현재 비전 팩토리 소속이며, 커팅 에지를 통해 음반을 발매하고 있다.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 남동생인 제프 러프킨은 뮤지션. 여동생인 캐럴라인 러프킨은 미국에서 인디 활동하는 가수. 언어는 주로 영어를 사용하고 공식 웹사이트의 일기도 영어로 쓰고 있다. 일본어는 이해할 수 있지만 회화가 자신있지는 않다. 프로필 출생부터 데뷔까지 1979년 12월 9일 일본의 오키나와현 나하시에서 미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키나와 현에서 태어난 후 1년동안 생활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군인이었던 탓에 이사를 빈번히 다녔다. 어렸을 때 그녀는 부모님이 아침마다 틀어준 클래식 음악을 들었고 그것만큼 TV에서 뮤지컬도 많이 보았다. 원래 그녀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미적인 것들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었다. 심지어 그녀가 학교를 다닐때 그녀의 작품으로 상을 받기도 했다. The Sound of Music이라는 뮤지컬에 출연하기 위해 시험을 보았지만 그녀가 원하던 배역은 얻지 못했다. 이후에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을 다니게 된다. 이때부터 일본어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1996년 에이벡스 Trex에 스카우트되고 D&D라는 새로운 유로비트 그룹에 대한 제의를 받게 된다. 그녀는 그것을 수락했고 1996년 D&D의 메인보컬로 데뷔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어에는 아직 익숙하지 못했다. 또한 당시에는 머라이어 캐리를 목표로 했다. 데뷔 이후부터 첫 앨범까지 1998년 FIFA 월드컵때 Jean Michel Jarre(프랑스의 작곡가)와 고무로 데쓰야가 프로듀스한 앨범「TOGETHER NOW」에 객원보컬로 참가한다. 또한 같은 해 고무로 데쓰야와 한번 더 작업하게 되어 「TK 1998 LATEST WORKS」에 객원보컬로 참가한다. 1999년 싱글 「I.L.Y.~欲望~」(I.L.Y.~욕망~)로 솔로데뷔를 한다. 데뷔싱글은 D&D와는 다른 장르인 파워풀한 ROCK스타일로 팬들은 놀라게 된다. 같은 해 2번째 싱글인 「re-ACT」가 발매되고 이때부터 싱글의 타이틀곡이 가네보화장품인 KATE의 CM송으로 사용되고 그녀가 출연한다. 그녀의 처음 2번째 싱글까지는 T2ya가 작업했지만 3번째 싱글인 「Dear Angel」부터는 작사,작곡을 그녀 자신이 한다. 작사를 할 때에는 영어로 작사를 하지만 일본어가 익숙하지 않으므로 지인의 도움을 얻어서 일본어로 바꾸게 된다. 또한 4번째 싱글인 「Dress me Up」의 뮤직 비디오에서는 기타를 연주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만 20세인 2000년에 5번째 싱글인 「데키나이」(할 수 없어)가 발매된다. 이 싱글엔 できない 20才過ぎているから(20살이 넘어서 할 수 없어요)라는 가사도 있다. 또한 이 싱글만 KATE CM송으로 쓰이지 않았다. 또한 같은 해 6번째 싱글인 「Color of your Spoon」를 발표했다. 이 싱글은 어렸을 때의 꿈같은 것들을 노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때 Inter FM의 DJ가 되었다. 그리고 6번째 싱글까지만 KATE CM송으로 쓰였고 그 출연 역시 이때가 마지막이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첫 번째 앨범인 「Synchronicity」가 발매된다. 총 13트랙으로 이전에 발매된 6개 싱글의 타이틀곡이 모두 들어있다. 누적매수 41280매로 오리콘 최고 20위를 기록한다. 첫 번째 앨범 이후 그녀는 1년간의 휴식기를 갖는다. 첫 앨범에서 두 번째 앨범까지 2001년에 7번째 싱글인 「Sea me」가 발매된다. 이때 팬사이트인 OliviaLufkinOnline.com이 생겼다. 2002년에는 8번째 싱글인 「Into The Stars」가 나왔다. 발매시기가 2달이나 연기되었다. 「Sea me」와 「Into The Stars」는 판매실적이 좋지 않았다. 2003년 그녀는 남동생인 Jeffrey Lufkin와 공동제작을 하기로 결심하고 스타일을 바꿔서 노래를 영어가사로 발매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타워 레코드에서 독점판매한 미니앨범 4개를 만들게 된다. 4개의 미니앨범을 같은 해에 모두 발매함으로써 화제가 된다. 또한 같은해 그녀의 친구인 Friedia Niimura(Rin Kozue)와 함께 Black Daisy Ville라는 패션 브랜드를 론칭한다. 2004년 여름까지만 상품이 나오고 이후엔 나오지 않았다. 2004년 초 그녀의 두 번째 앨범인「The Lost Lolli」가 발매된다. 총 13트랙으로 싱글 2개의 타이틀곡과 미니앨범에 실려있던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두 번째 앨범부터 현재까지 그녀는 2004년 「The Lost Lolli」를 끝으로 2년간의 휴식기를 가진다. 2006년 그녀의 동생인 Caroline Lufkin의 첫 앨범인 「Murmurs」에 그녀의 그림들을 넣었다. 같은 해 일본의 애니메이션인 NANA의 가창캐스트로 캐스팅되었다. 그녀는 나나에 나오는 두 록 밴드중 하나인 TRAPNEST의 보컬인 REIRA를 맡았다. 나나에 관한 활동을 할 때엔 OLIVIA inspi' REIRA(TRAPNEST)라는 명칭으로 활동한다. OLIVIA inspi' REIRA(TRAPNEST)로 2개의 싱글과 1개의 앨범을 내게된다. 이 활동들로 인해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또한 그녀는 처음으로 미국공연을 하게 되었다. 장소는 로스앤젤레스의 Pacific Media Expo이었다. 2007년 초 그녀는 미니앨범 「The Cloudy Dreamer」를 발매한다. 총 8트랙으로 OLIVIA inspi' REIRA(TRAPNEST)의 2곡도 들어있다. 3번트랙인 Dream Catcher는 일본 드라마 지옥소녀의 엔딩곡으로 쓰였다. 이때 한국의 팬사이트인 the OLIVIA dreamer가 생겼다. 그리고 6월 6일 프랑스 파리의 La Locomotive 에서 단독라이브를 하였다. 2008년 그녀의 개인적인 블로그 Share Your Treats가 생겼다. 그리고 6번째 미니앨범인 Trinka Trinka를 발매하였다. 음반 싱글 I.L.Y.~欲望~[I.L.Y.~욕망~] re-ACT Dear Angel Dress me Up 데키나이(할 수 없어) Color of your Spoon Sea me Into The Stars a little pain Wish / Starless Night Sailing free 미니앨범 Internal Bleeding Strawberry MERRY & HELL GO ROUND Comatose Bunny Butcher The Return Of Chlorophyll Bunny The Cloudy Dreamer Trinka Trinka 앨범 Synchronicity The Lost Lolli OLIVIA inspi' REIRA(TRAPNEST) 베스트 앨범 GREATEST HITS 디지털 싱글 If you only knew(World's End Girlfriend remix) 컴필레이션 Tuesday Song (5번트랙 'Dear Angel') OPTION presents STREAM Z J-LOUD EDITION (2번트랙 'SpidERSpins(Lost Lolli Mix)') FLOWER FESTIVAL (8번트랙 'Bleeding Heart') 콜라보레이션 Together Now (Jean Michel Jarre & 고무로 데쓰야) Music Of The World Cup: Allez! Ola! Ole! (15번트랙 'Together Now') TK 1998 LATEST WORKS (고무로 데쓰야) NANA BEST (OLIVIA inspi' REIRA(TRAPNEST)+ANNA TSUCHIYA inspi' NANA(BLACK STONES)) 이외의 상품 DVD VIDEO CLIPS 외부 링크 올리비아 공식 웹사이트 올리비아 공식 블로그 비전 팩토리 공식 웹사이트 올리비아 팬 페이지 (영어/일본어) 올리비아 MySpace 올리비아 MySpace Music the 올리비아 dreamer(팬사이트) Space Halo(커뮤니티) 1979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여자 싱어송라이터 일본의 록 가수 나하시 출신 미국계 일본인 에이벡스 그룹 음악가 일본계 미국인 일본어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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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B%82%98%EB%82%9C%20%EA%B8%B0%EB%A6%AC%EC%BD%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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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난 기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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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난 기리코(, 1972년 12월 14일 ~ )는 일본의 만화가이다. 작품 블루 1997 호박과 마요네즈 (南瓜とマヨネーズ ) 1997 strawberry shortcakes 2003 영화로 제작 블루 2001 외부 링크 197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만화가 니가타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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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A%90%EA%B8%8B%ED%95%9C%20%EA%B3%84%EC%82%B0%EB%B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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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계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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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느긋한 계산법(Lazy evaluation)은 계산의 결과값이 필요할 때까지 계산을 늦추는 기법이다. 두 가지 관련된 항목들이 있는데 지연 계산법과 최소 계산법이다. 느긋하게 계산하면 필요없는 계산을 하지 않으므로 실행을 더 빠르게 할 수 있고, 복합 수식을 계산할 때 오류 상태를 피할 수 있고, 무한 자료 구조를 쓸 수 있고, 미리 정의된 것을 이용하지 않고 보통 함수로 제어 구조를 정의할 수 있다. 느긋한 계산법을 사용하는 언어들은 "이름으로 호출"하거나 "필요할 때 호출"하는 계산 전략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하스켈과 같은 대부분의 실제 느긋한 언어들은 성능상의 이유로 "필요할 때 호출" 전략을 사용한다. 그러나 느긋한 계산법을 이론적으로 표현한 것들은 간편하게 "이름으로 호출"하기도 한다. 느긋한 계산법의 반대되는 계산법은 조급한 계산법이 있는데 엄격한 계산법이라고도 한다. 조급한 계산법은 대부분의 프로그래밍 언어가 동작하는 방식이다. 복합 수식 (a and b)와 같은 논리식을 계산한다고 하면 a항이 거짓인 경우에, b항을 계산하지 않아도 전체 식의 답을 알 수 있다. (a or b)에서 a항이 참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항이 복잡한 식이면 이점이 많고, 식에서 결과가 참이나 거짓일 가능성과 계산의 비용에 따라 어떤 항이 먼저 계산되어야 좋은지 알 수 있다. 따라서 (a or b or c)와 같은 식에서 a항이 참값을 가질 가능성이 많다면, 전체 식을 쉽게 계산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해, 컴파일러는 더 계산해야 할 것인지, 다른 항을 지름길 계산 해야 할 것인지를 검사하기도 한다. 이런 검사는 계산을 줄이는 것을 실패할 경우나 꼭 필요한 경우 무조건 전체 식을 계산해야 할 때 시간이 더 많이 걸리게 된다. 산술식을 계산할 때에도 유사한 접근 방식을 취할 수 있다. 어떤 수에 0을 더하는 것은 의미 없고, 0이나 1을 곱하는 경우에는 특별한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값들을 검사하는 것은 논리값은 2개의 값을 가지는 데 비하여 수는 여러 가지 값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큰 이득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0이 소수점 값으로 변환하는 데 쓰이지 않는 이상 하드웨어가 특수한 경우는 잘 계산하고 있다. 오류 회피 특정한 상황에서는 계산되면 오류 상황이 되어 오류를 발생시키는 수식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수식은 (계산해도 안전한 식 and 수식)과 같은 형태로 보호되어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N <> 0 and (x mod N = 0)과 같은 형태이다. 분명히, 이것은 if N <> 0 then if x mod N = 0 then ...과 같은 형태로 쓸 수 있지만 깔끔하지 못하다. 반대로, (a or b)로 검사할 때, a가 참인 경우에 b는 계산될 필요가 없을뿐더러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a와 b 둘 중 하나가 참인 경우에 어떤 행동을 하고 싶다면(이 식에서 의미하는 것이다!) 친절하게 if a then action else if b then action이라고 쓸 수 있지만, action을 반복해서 쓰기 때문에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여기 공백이 뒤쪽에 있는 텍스트 문자열이 있고, 공백이 아닌 맨 마지막 문자의 위치를 알고 싶다고 할 때, l:=Length(t); while l > 0 and t(l) = " " do decrement l; 라고 하거나, 좀 더 유연한 언어에서는 for l:=Length(t):1:-1 while t(l) = " " do; 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문자열 전체가 공백으로 차 있다면 l은 0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자열에서 0번째 문자열을 읽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해야 쓸데 없는 노력이고, 못하면 오류를 일으킬 수도 있다. 지연 계산법 지연 계산법은 함수형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주로 사용한다. 지연 계산법을 사용하면 수식이 변수에 접근하는 순간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계산값을 출력하라고 할 때까지 계산을 늦춘다. 말하자면, x:=수식;과 같은 구문이 있다고 하면, 분명히 수식을 계산하여 결과값을 x에 넣어야 한다. 하지만 x에 들어있는 값은 나중에 참조되어 그 값을 요구한다든지 할 때까지는 상관이 없다. 비록 다른 심볼보다 바깥 세상을 보고자 하는 몇 가지 심볼을 생성하기 위해 빠르게 자라는 의존성 나무의 가지를 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식의 계산을 뒤로 미룰 수 있다. 수식의 계산을 기본으로 늦추는 프로그래밍 언어도 있고 함수나 특별한 구문으로 계산을 늦추는 언어도 있다. 미란다와 하스켈은 기본으로 계산을 늦춘다. 다른 언어들은 특수한 구문을 써서 계산을 늦추라고 명시하거나 성크에 수식을 감싸서 계산을 늦춘다. 예를 들어 스킴에서는 "delay"와 "force"를 써서 이런 것을 명시할 수 있다. 지연 계산법은 계산할 때 무한 반복 문제나 크기 문제 없이 계산 가능한 끝없는 목록을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피보나치 수로 (보통 스트림이라고 부르는) 끝없는 목록을 만드는 함수를 작성할 수 있다. n번째 피보나치 수는 끝없는 목록의 원소를 추출하는 것만으로도 간단하게 계산할 수 있는데, 목록의 처음 n개의 수들만 계산하도록 하면서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스켈에서는 모든 피보나치 수의 목록을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fibs = 1 : 1 : zipWith (+) fibs (tail fibs) 하스켈의 구문 ":"는 목록에 원소를 첨가하는 것이고 tail은 첫 번째 원소를 빼고 리스트를 돌려주며, zipWith는 특정한 (여기서는 (+)) 함수를 사용하여 두 목록의 각 원소를 결합하여 세 번째 항목을 생성하도록 한다. 프로그래머가 주의한다면, 특정한 결과값을 생성할 때 필요한 값만 계산할 것이다. 그러나 특정 계산이 목록의 길이를 구하는 것이라든지, 목록의 원소들의 전체합을 구하는 것과 같이 프로그램에서 무한히 많은 원소를 계산하는 것이라면 계산을 끝내지 못하거나 메모리를 다 쓰게 될 것이다. 읽을거리 최소 계산법 비엄격 프로그래밍 언어 함수형 프로그래밍 자료 흐름 람다 대수 결합 논리 커리화 그래프 감축 콘 프로그래밍 언어 비교: 느긋한 초기화 예측 계산 참고문서 Steve Summit's C FAQs 외부 링크 Functional programming in Python becomes lazy 평가 전략 프로그래밍 패러다임 프로그래밍 계산법 컴파일러 최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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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D%89%EB%B6%80%EC%99%B8%EA%B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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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부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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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부외과(胸部外科, cardiothoracic surgery, thoracic surger)는 가슴 안의 기관, 특히 심장과 허파에 관한 질병을 다루는 외과 분야이다. 심장흉부수술은 주로 심장수술(심장, 대혈관 등)과 흉부수술(식도, 폐, 가슴샘 등)으로 세분화된다. 심장외과 초창기 심낭(심장을 둘러싼 주머니) 수술은 19세기에 프란시스코 로메로, 도미니크장 라레 같은 의사들이 처음으로 했다고 한다. 심장 자체에 대한 첫 수술은 1895년 9월 4일 노르웨이 외과의사 악셀 카펠렌이 오슬로에서 했다. 흉부외과계의 응급질환 기흉 혈흉 늑골골절 심장압전 기타 질환 근막동통 증후군 식도 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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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C%9D%B4%EB%82%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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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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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타이난시(臺南市)는 중화민국의 직할시이다. 타이난현(臺南縣)은 중화민국 타이완 성(臺灣省)의 현(縣)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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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80%EB%9D%BC%EB%85%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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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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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 , )는 이탈리아의 북부에 있는 도시로, 롬바르디아주의 주도이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북부의 최대 도시로, 롬바르디아 평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 강이 이 도시를 흐르고 있다. 인구는 2009년 현재 130만 명이며, 광역 도시권 내에 337만 명이 거주한다. 밀라노 대도시의 인구가 320만 정도이며 면적이 1500km2로 대략 300만정도의 도시로 봐야 한다. 시내 인구는 수도 로마 다음으로 많으며, 광역 도시권 인구는 로마를 훨씬 초과하여 이탈리아 최대의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밀라노는 국제, 다국적 도시로도 불리는데, 인구의 13.9%가 외국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유럽의 주요 도시이기도 한데 주요 교통수단이 밀라노를 통과하며 많은 유적지들이 남아 있고, 밀라노는 금융과 많은 비지니스 사업들이 본사를 두고 있어 유럽에서 손꼽히는 도시이다. 밀라노 광역권 GDP는 2008년을 기준으로 유럽에서 높은 편이다. 역사 켈트와 로마 시대 기원전 400년에 켈트족과 인스부레스족들은 밀라노와 주변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기원전 222년에 로마는 밀라노를 점령하여 메디올라눔이라고 불렀다. 로마가 점령한 지 몇 세기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기원후 293년 서로마 제국의 수도로 선포하였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로마 제국으로 떠났으며 대신 막시미아누스가 황제로 임명되어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막시미아누스는 여러 대형 건축물들을 지었는데, 그 중에 대형 서커스로 크기는 470 × 85 m(1,540 × 279 ft)에 달했으며 그 외에 여러 개의 거대한 기념비, 공중 목욕탕, 임페리얼 궁전과 같이 여러 가지 크고 복잡한 건물을 건축하였다. 이로써 밀라노는 서로마 제국의 군사, 행정, 교통, 상업의 중심지로 발달했다. 313년 2월에는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기독교에 대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그리해 이곳은 종교의 중심지 역할로도 한 몫 하였다. 402년 서로마 제국의 수도는 라벤나로 이전하게 된다. 50년 후(452년)에는 훈 족이 도시를 장악했다. 539년, 비잔티움 제국과 동고트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밀라노는 함락을 당했고 그 와중에 도시의 시설들은 철저히 파괴된다. 569년 여름, 랑고바르드족이 이 지방을 점령해 랑고바르드 왕국을 세운다. 774년 밀라노는 샤를마뉴에 의하여 프랑크 왕국의 일부로 편입된다. 샤를마뉴는 밀라노의 중요성을 인정해 다른 식민지보다 자유도를 높이 부여했다. 이후 이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편입된다. 중세 시대 중세 시대 밀라노는 풍부한 평원을 기초로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를 공격해 1162년 밀라노는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며 또다시 재앙을 겪었다. 이를 계기로 롬바르디아 지방의 도시들은 동맹의 필요를 느껴 1167년 롬바르디아 동맹이 창립되고, 밀라노는 동맹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 롬바르디아 동맹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1183년 프리드리히 1세는 롬바르디아 동맹을 인정해줬다. 하지만 이 동맹은 공동의 적에 의해 만들어진 동맹으로 불과해 군대가 물러나자 도시들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으며 당시 전쟁으로 인해 도시는 혼란 속으로 빠진다. 또한 그 전쟁 때문에 밀라노의 인구와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고 이후 10년동안이나 전쟁이 지속됐다. 이후 1277년 비스콘티 가문이 밀라노의 영주로 추대받으며 영주에 의한 도시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세력을 더욱 넓혀 인근의 많은 영역들을 통치하게 되었으며 1395년 비스콘티는 밀라노 공작위를 얻는다. 이후 비스콘티 가문은 14세기 초부터 15세기 중반까지 밀라노의 권력을 유지하였다. 1447년이 밀라노의 마지막 공작이었던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비스콘티 가문의 영주정은 끝이나고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권력이 넘어간다.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에 의한 지배 1492년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2세는 밀라노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 그 당시 밀라노는 스위스의 지배하에 있었다. 지리 밀라노는 포 계곡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포강, 북쪽으로는 큰 호수(코모 호수, 마조레 호수, 루가노 호수)가 있고, 서쪽으로 티치노강, 동쪽으로 아다강이 있는 알프스 기슭의 중간 지점에 있다. 도시의 땅은 평평하며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122m이다. 행정 구역 코무네의 면적은 약 181k㎡이고,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1,324,169명, 인구 밀도는 k㎡당 7,315명이다. 밀라노 광역권의 면적은 1,575k㎡이며, 2015년 인구는 3,196,825명으로 추산되었으며, 그 결과 밀도는 k㎡당 2,029명이었다. 밀라노, 몬차와 브리안차, 코모, 레코 및 바레세의 일부로 구성된 광역권 지역은 너비가 1,891k㎡이고, 인구는 5,270,000명이며 밀도는 k㎡당 2,783명이다. 도심의 동심원 배치는 항해가 가능하고, 상호 연결된 고대 운하 시스템인 나비글리를 반영한다. 도시의 교외는 주로 북쪽으로 확장되어 바레세, 코모, 레코 및 베르가모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많은 공동체를 삼켰다. 기후 쾨펜 기후 구분에 따르면 밀라노는 중위도의 4계절 온난 습윤 기후(Cfa)를 특징으로 한다. 밀라노의 기후는 덥고 습한 여름과 춥고 안개가 자욱한 겨울이 있는 북부 이탈리아 내륙 평야의 대부분과 유사하다. 알프스와 아펜니노 산맥은 북유럽과 바다에서 오는 주요 순환로부터 도시를 보호하는 자연적인 장벽을 형성한다. 겨울에는 일일 평균 기온이 영하(0°C) 아래로 떨어질 수 있고, 눈이 쌓일 수 있다. 밀라노 지역의 역사적 평균은 1961년에서 1990년 사이의 기간 동안 25cm이다. 1985년 1월에 90cm를 기록했다. 교외 지역에서는 평균이 36cm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도시는 연간 평균 7일의 눈을 내린다. 도시는 종종 겨울 동안 짙은 구름이나 안개에 가려지지만, 남부 지역에서 논이 제거되고, 도시 열섬 효과가 최근 수십 년 동안 이러한 발생을 줄였다. 때때로 푄 바람으로 인해 온도가 예기치 않게 상승한다. 2012년 1월 22일에는 일일 최고 기온이 16°C에 도달했고, 2012년 2월 22일에는 21°C에 도달했다. 대기오염 수준은 추운 공기가 토양에 달라붙는 겨울철에 크게 증가하여 밀라노를 유럽에서 가장 오염된 도시 중 하나로 만든다. 밀라노의 여름은 덥고, 습도 수준이 높으며, 최고 온도는 35°C 이상이다. 높은 습도, 도시 열섬 효과와 바람 부족으로 인해 여름철에는 야간에 종종 후덥지근하다. 일반적으로 여름은 평균 일광이 13시간 이상인 맑은 하늘을 즐긴다. 그러나 비가 내리면, 뇌우와 우박이 동반될 가능성이 더 크다. 봄과 가을은 일반적으로 쾌적하며 온도 범위는 10~20°C이다. 이 계절은 특히 4월과 5월에 더 높은 강우량이 특징이다. 상대 습도는 일반적으로 일년 내내 45%(편안함)에서 95%(매우 습함) 사이이며, 드물게 27%(건조) 아래로 떨어지고, 100%까지 도달한다. 바람은 일반적으로 고요한 편에 속하다. 연중 일반적인 풍속은 0에서 14km/h(고요한 바람에서 부드러운 산들바람)로 다양하며, 바람이 강하게 불 수 있는 여름 뇌우 동안을 제외하고, 29km/h(신선한 바람)를 거의 초과하지 않는다. 봄에는 알프스에서 부는 트라몬테인이나 북쪽에서 보라와 같은 바람이 부는 강풍과 같은 폭풍이 발생할 수 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위치로 인해 밀라노는 유럽에서 바람이 가장 덜 부는 도시 중 하나이다. 행정 구역 밀라노는 롬바르디아주의 주도로 현재 총 9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1999년 이전에는 20개의 구역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99년 정부는 9개의 구역으로 수를 줄이기로 결정했다. 정치 시장의 이름: Giuseppe Sala (주세페 살라) 취임 날짜: 2016년 6월 20일 인구통계 공식 이탈리아 통계 기관인 ISTAT에 따르면 2018년 12월 31일 현재 밀라노시의 공식 추정 인구는 1,378,689명으로, 2011년 인구조사에서 136,556명 또는 약 11% 증가했다. 같은 날짜에 3,250,315명이 밀라노 지방급 지자체에 살았다. 오늘날 밀라노의 인구는 역사적 정점보다 적다. 전후의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밀라노의 인구는 1973년에 1,743,427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인구의 약 3분의 1이 교외의 외곽 지대와 도시 주변으로 새로운 위성 정착지로 이주했다. 밀라노는 파리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극동 아시아인 공동체의 본거지이며 필리핀과 중국인이 외국인의 약 4분의 1을 차지한다. (2015년 기준 250,000명 중 약 70,000명) 오늘날 밀라노의 교외는 도시 본연의 경계와 특별 지위를 가진 지방 당국의 경계를 훨씬 넘어 확장된다. 인접 도시 지역은 2015년에 5,270,000명의 거주지였으며, 광역권 지역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그리고 EU에서 네 번째로 큰 이 도시는 82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외국인 주민 2019년 기준으로 약 277,773명의 외국인 거주자가 밀라노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전체 거주 인구의 19.9%를 차지한다. 이 수치는 이민자 인구가 지난 15년 동안 두 배 이상 증가했음을 시사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밀라노는 두 차례의 큰 이민 물결을 겪었다. 두 번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외국 태생 이민자들이 우세한 것이 특징이다. 초기 시기는 소위 이탈리아의 전후 경제 기적과 일치하며, 급속한 산업 확장과 대규모 공공사업을 기반으로 한 비정상적 성장의 시대로, 주로 농촌과 저개발 남부 이탈리아에서 400,000명 이상의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인구에서 외국 태생의 비율이 급증했다. 이민자들은 주로 아프리카(특히 에리트리아, 이집트, 모로코, 세네갈, 나이지리아)와 동유럽의 이전 사회주의 국가(특히 알바니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마케도니아, 몰도바, 러시아)에서 유입되었으며,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인(특히 중국인, 스리랑카인, 필리핀인)과 라틴 아메리카인(주로 남미인)이 대세를 이룬다. 1990년대 초 밀라노에는 이미 약 58,000명(당시 인구의 4%)의 외국 태생 거주자가 있었고, 2010년 말에는 117,000명 이상(전체의 약 9%)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수십 년 동안 계속된 많은 이민자들로 인해 이 도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국제적이고, 다문화적인 도시가 되었다. 밀라노는 특히 2011년에 거의 21,000명의 인구를 가진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중국인 공동체를 유지한다. 9구에 위치한 중요한 상업 거리인 파올로 사르피 거리를 중심으로 하는 밀라노 차이나타운은 원래 1920년대에 저장성 원청현 출신의 이민자로 소규모 직물과 가죽 작업장을 운영했다. 밀라노에는 또한 상당한 영어 사용자 공동체(3,000명 이상의 미국, 영국과 호주 국외 거주자)가 있고, 여러 곳의 영어 학교와 헬로 밀라노(Hello Milano), 웨어 밀라노(Where Milano), 이지 밀라노(Easy Milano)와 같은 언어 출판물을 출간했다. 종교 밀라노의 인구는 이탈리아 전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이다. 밀라노 대교구가 자리한 곳이다. 밀라노 광역권은 또한 개신교, 동방정교회,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교 및 불교 공동체의 고향이다. 밀라노는 로마 제국 말기부터 기독교인이 많은 도시였다. 그 종교사는 성 암브로시우스의 특징으로 구분되었는데, 그의 유산에는 밀라노 대교구의 대부분에서 약 5백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사용하는 암브로시오 전례(Rito ambrosiano)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이 예식은 미사, 전례 연도(사순절은 로마 예식보다 4일 늦게 시작), 세례, 장례 예식, 사제 복장, 신성음악(그레고리우스 말고 암브로시오 성가를 예식에 사용) 등의 다양한 절차를 가진다. 또한 이 도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정교회 공동체가 있는 곳이다. 롬바르디아에는 적어도 78개의 정교회 본당과 수도원이 있으며, 대부분이 밀라노 지역에 있다. 밀라노의 주요 루마니아 정교회는 가톨릭 승리의 성모 마리아 교회(Chiesa di Santa Maria della Vittoria)로, 현재 루마니아 지역 사회에 사용하도록 허가되었다. 유사하게, 러시아 정교회 추종자들의 기준점은 파스퀴롤로에 있는 산 비토 가톨릭 교회이다. 밀라노의 유대인 공동체는 이탈리아에서 로마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크며, 주로 세파르디를 비롯한 약 10,000명의 회원이 있다. 주요 도시 회당인 헤찰 다비드 u-모르데차이 사원은 건축가 루카 벨트라미가 1892년에 지었다. 밀라노는 또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무슬림 공동체 중 하나를 가지고 있으며, 도시는 1300년에 루세라의 고대 모스크가 파괴된 이후로 돔과 첨탑이 있는 이탈리아 최초의 새로운 모스크를 건설했다. 2014년 북부동맹 등 우익 정당들이 강력히 반대하는 가운데 시의회는 정치적 논쟁이 첨예한 새 모스크 건립에 합의했다. 현재 밀라노 대도시 지역의 힌두교와 시크교도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제공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다양한 출처에 따르면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전체 인도 인구의 약 40% 또는 약 50,000명이 롬바르디아에 거주하며, 많은 힌두교 사원과 시크교 사원이 존재하고 영국에 이어 유럽에서 가장 큰 공동체를 형성하는 곳이다. 명소 두오모 (밀라노 대성당) 스포르체스코 성 나빌료 (다 빈치가 설계한 인공 운하)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 라스칼라 극장 교통 밀라노는 이탈리아와 남부 유럽의 주요 교통수단 중 하나이다. 밀라노 중앙역은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 유럽에서 여덟 번째로 붐비는 기차역이다. 말펜사, 리나테와 오리오 알 세리오 공항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대도시인 밀라노 광역권에 서비스를 제공한다. ATM(Azienda Trasporti Milanesi)은 밀라노 시립 운송 회사이다. 4개의 지하철 노선, 18개의 트램 노선, 131개의 버스 노선, 4개의 무궤도 전차 노선, 1개의 인력 이동 노선을 운영하며, 2018년에는 약 7억 7,600만 명의 승객을 수송했다. 전체적으로 네트워크는 거의 1,500km에 걸쳐 46개 지자체에 도달한다. ATM은 대중교통 외에 자전거 공유와 카셰어링 시스템을 포함한 교환 주차장과 기타 운송 서비스를 관리한다. 철도 지하철 밀라노 지하철은 도시와 주변 지자체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빠른 대중교통 시스템이다. 네트워크는 총 101km의 네트워크 길이와 113개 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지하에 있다. 일일 이용 승객 수는 115만 명으로, 이탈리아에서 가장 크고, 유럽에서 가장 큰 것 중 하나이다. 교외 트레노르드가 운영하는 밀라노 교외 철도 서비스는 대도시 지역과 도심을 연결하는 12개의 S 노선으로 구성되며 모든 지하철 노선으로 환승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S 노선은 일반적으로 일 빠산테(il Passante)라고 불리는 밀라노 통행 철도를 통과하며 중앙 지하 구역에서 4~8분 간격으로 2층 열차가 운행된다. 국내 및 국제열차 연간 1억 2천만 명의 승객이 이용하는 밀라노 중앙역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8번째로 붐비는 기차역이며, 이탈리아에서는 로마에 이어 두 번째로 붐비는 기차역이다. 밀라노 카도르나역과 밀라노 포르타 가리발디역은 각각 이탈리아에서 7번째와 11번째로 붐비는 역이다. 2009년 말부터 두 개의 고속열차 노선이 밀라노와 로마, 나폴리, 토리노를 연결한다. 이탈리아의 다른 주요 도시와의 이동 시간이 상당히 단축된다. 제노바와 베로나를 향하는 추가 고속 노선이 건설 중이다. 밀라노는 니스, 마르세유, 리옹, 파리, 루가노, 제네바, 베른, 바젤, 취리히 및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국제 직행열차와 파리와 디종(Thello), 뮌헨 및 비엔나(ÖBB)로 가는 야간 침대 서비스가 제공된다. 밀라노는 롬바르디아 지역 기차 네트워크의 핵심이기도 하다. 지역 열차는 레노르드(밀라노 카도르나에서 출발)와 트레니탈리아(밀라노 첸트랄레 및 밀라노 포르타 가리발디에서 출발)에 의해 두 가지 다른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2011년부터 새로운 회사인 트레노르드는 롬바르디아에서 트레니탈리아와 레노르드 지역 열차를 모두 운영하여 매일 50개 이상의 노선에서 750,000명 이상의 승객을 태우고 있다. 버스와 트램 도시 트램 네트워크는 약 160km의 트랙과 18개 노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럽에서 가장 진보된 경전철 시스템이다. 버스 노선은 1,070km 이상을 운행한다. 밀라노에는 민간 회사가 운영하고, 밀라노 시의회에서 허가한 택시 서비스도 있다. 이 도시는 또한 북부 이탈리아의 모든 주요 고속도로가 연결되는 국도 네트워크의 핵심 노드이다. 수많은 장거리 버스 노선이 밀라노와 롬바르디아 및 이탈리아 전역의 다른 많은 도시와 마을을 연결한다. 항공 밀라노 대도시 지역에는 3개의 국제 공항이 있으며, 2018년에는 총 약 4,700만 명의 승객이 이용했다. 말펜사 공항은 2018년에 2,470만 명의 승객이 이용했던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분주한 공항이며, 화물과 화물운송 부문에서 이탈리아에서 가장 분주한 공항으로, 2018년에 약 600,000톤의 국제 화물을 처리했다. 말펜사는 밀라노 시내에서 45km 떨어져 있으며, 말펜사 익스프레스 철도 서비스로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 리나테 공항은 밀라노의 도시 공항으로, 현재 국내선과 단거리 국제선에 주로 사용되며 2018년에는 920만 명의 승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했다. 리나테 공항은 이탈리아 국적 항공사인 알리탈리아의 두 번째로 큰 거점이다. 오리오 알 세리오 공항(Orio al Serio Airport)은 베르가모 타운 근처에서 약 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주로 밀라노의 저가 교통을 제공하며 라이언에어(2018년 1,290만 승객)의 주요 기지이다. 마지막으로 브레소 비행장은 에어로 클럽 밀라노에서 운영하는 일반 항공 공항이다. 자전거 자전거는 밀라노에서 점점 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2008년부터 교통체증과 대기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도시 전역에 자전거 도로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2019년 COVID 전염병 동안 지하철 점거에 대한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35km의 자전거 도로가 단기간에 실현되었다. 자전거 공유 시스템 BikeMi는 거의 모든 도시에 배포되었으며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스테이션이 없는 상업용 자전거와 스쿠터 공유 시스템은 널리 사용 가능하다. 스포츠 밀라노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축구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팀인 AC 밀란과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연고지이다. 이 두 팀 간의 경기는 특별히 데르비 델라 마돈니아라고 불리며, 축구팬들의 큰 관심의 대상이다. 코르티나담페초와 함께 2026년 동계 올림픽을 공동으로 개최할 예정이다. 같이 보기 주 밀라노 총영사관 밀라노 대도시권 (Milan metropolitan area) 밀라노 광역시 (Metropolitan City of Milan) 밀라노도 (Province of Milan) 밀라노 대학교 밀라노의 행정 구역 (Municipalities of Milan) 각주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네이버 캐스트 : 여행 - 밀라노 밀라노의 비디오 투어 이탈리아의 도시 밀라노 광역시의 코무네 이탈리아의 도청 소재지 이탈리아의 주도 동계 올림픽 개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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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D%8C%90%EB%9D%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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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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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판락(河判洛, 일본식 이름: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 1912년 2월 15일 ~ 2003년 9월 11일)은 일제강점기의 고등계 친일파 경찰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원적지는 경상남도 진주군 명석면 관지리이다. 하판락은 1912년 명석면협의회원과 명석면학교비 평의원을 지낸 지역유지인 하한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판락의 형 하영락은 명석면 부면장을 지낸 면서기였고, 그의 동생 하충락은 일본유학생이었다. 생애 일제 시대 1912년 경상남도 진주의 지역 유지 가문에서 태어났다. 1930년 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만세 운동에 참석했다가 구금되었다. 졸업한 후 순사 시험에 합격하면서 1934년부터 일제 경찰로 일했다. 사천과 부산의 경찰서에서 근무했는데, 경남 지역의 독립 운동가를 색출하는 일을 맡았다. 1939년 경부보 시험에 합격하였다. 오늘날 '고문 경찰'의 대명사가 된 자가 '이근안'이라면 일제강점기 최고의 고문 경찰은 바로 '하판락'이었다. '고문하는 귀신'이라는 '고문귀'가 그의 별명이다. 하판락이 이같은 악명을 얻게 된 계기는 1930년대 말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명을 집단 고문하면서부터 였는데, 당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진주 배돈병원장 김준기의 증언에 의하면 하판락은 자신 역시 조선인 출신이면서도 '조센징' 운운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이에 김준기 씨는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나는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 고 회고했다. 또한, 1943년 이른바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으로 검거된 여경수와 이광우 등 7~8명에 대해 하판락은 자백을 강요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하고 혈관을 통해 주사기 하나 가득 피를 뽑아낸 하판락은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를 향해 뿌린 후, 다시 물었고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착혈 고문' 외에도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 젓가락으로 지지고, 전기 고문, 물 고문, 다리 고문 끝에 여경수, 이미경 등 3인이 순국하였고, 살아남은 이광우 등 은 고문으로 전원 신체 불구자가 되었다. 독립운동가 이광우(2007년 작고)는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또 하나는 다른 이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다. 광복 이후 해방후에도 하판락은 미 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여전히 미군정 경남도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있으면서, 그는 일본인들이 남기고간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1946년 6월에는 경상남도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되었다. 1949년 1월 하판락이 부산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게 체포되었다. 하판락의 고문으로 사망한 독립투사 여경수의 어머니가 그를 반민특위에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1949년 당시 고원섭이 쓴 에 따르면 하판락을 체포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 하자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하겠으니 맡겨 달라"며 부산시민들이 애원할 정도로 하판락에 대한 분노가 충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로 압송되어 반민특위에 의해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으나 하판락은 끝내 자신이 한 독립투사 살해 및 착혈 고문 사실 등을 끝끝내 부인했다. 그러다가 1949년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내무부 장관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 발생 후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서울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었던 하판락은 서울에서 3회, 부산에서 1회 등 모두 4차 공판을 거쳐 최종 무혐의로 풀려났다. 당시 사건 담당 김철호 조사관은 전란 와중에 통영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사업가 변신 석방 후 그는 고향인 명석면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부산에 거주하며 사업가로 변신했는데 재력을 바탕으로 제도정치권에 진입하고자 여러 차례 애를 썼다. 1956년 제2대 경남도의원 선거에 하판락은 고향인 명석면으로 돌아와 진양군 제1선거구에 입후보하여 출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막강한 하씨 문중의 영향력과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친일파 하판락을 기억하고 있던 면민들과 유권자들은 그를 낙선시켰다. 하지만 그 후에도 꿈을 버리지 않고 있던 하판락은 부산시의원 선거에도 뜻을 두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그는 방향을 완전히 바꿔 신용금고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 금융업자로 변신하는 한편,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자리잡는데 성공했다. 이 돈으로 그는 고향에 돌아와 진주 명석면 청사를 신축하는데 기금을 희사하거나 크고 작은 고향 일에 기부금을 내는 등 고향을 빛낸 출향 인사로 변신했고, 부산에서는 어버이날에 부산시장의 표창을 받는 등 노인복지 공로자로 화려하게 신분 세탁을 한다. 하판락의 친일 행적이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독립투사 이광우의 증언이었다. 이광우가 하판락으로부터 고문당하고 투옥되었으며, 이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불구자로 고통받고 있는 사실이 정부로부터 인정되어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상을 받으면서 하판락의 죄상이 다시 드러난 것이다. 하판락의 친일죄상과 고문 사실이 하나 둘 재조명되면서 국민적인 공분과 비판여론이 비등하자 노령의 하판락은 2000년 1월 17일 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 경찰 간부를 지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며 마지못해 잘못을 시인하기도 했다. 2000년 12월 하판락의 고향인 현 진주시 명석면에서 발간된 에서는 그의 집안인 진주 하씨 문중의 반발로 하판락의 친일 죄상이 모조리 삭제되는 ‘분서갱유’를 당했다. 명석면사를 쓴 김경현은 하씨문중이 하씨 집성촌인 명석면 관지리 마을회관으로 김씨를 불러 ‘무슨 근거로 그렇게 썼냐. 근거를 대라. 하판락은 단지 경찰이었다. 고등계 형사가 아니다.′‘광주놈이라 경상도를 저렇게 쓴다’, ‘외지인 주제에 지역사정을 뭘 안다고 그렇게 막 쓰냐’고 비판했고 결국 하판락 부분은 삭제되었으나, 김경현은 자신의 마지막 양심을 편찬후기 형식으로 끼워넣었다.“명성면 출신자 중에 반민특위 관련자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위의 결의로 삭제했다.” 진주 하씨 문중은 뒤늦게 ‘죽일 놈 살릴 놈’했지만 책은 인쇄가 끝난 뒤였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을 발표했을 때 명단에 든 인물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경찰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03년 9월 11일 하판락은 향년 91세로 천수를 다 누리고 그 악명높았던 일생을 마감하였다. 각주 참고자료 문화방송,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2002년 3월 10일 방송) 1912년 출생 2003년 사망 일제강점기의 경찰 대한민국의 경찰 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 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대만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대한민국의 기업인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주시 출신 진주 하씨 진주고등학교 동문 진주중학교 동문 진주초등학교 (경남)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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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C%93%B0%EB%85%B8%EB%AF%B8%EC%95%BC%EC%8B%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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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쓰노미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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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쓰노미야시()는 도치기현 중부에 위치하는 시이자 현청 소재지이며 중핵시로 지정되어있다. 기타칸토의 최대 도시이며 수도권 도시에선 인구가 10위를 자랑한다. 지리 도치기 현의 거의 중부, 간토평야의 북단에 위치하고 수도 도쿄로부터 북쪽으로 약 105km 떨어진 곳에 있고 고도는 시 중심부가 약 100m이다. 남부에는 평탄한 토지가 펼쳐져있고, 동부에는 기누 강, 중앙부를 기누 강 지류의 하나인 다가와 강, 서부를 오모이가와 강의 지류의 스가타가와 강이 흐른다. 또 중심 시가지에는 가마가와 강, 신카와 강이 흐른다. 토지는 기누 강이 흐르는 시 동남부 지역이 가장 낮고 북서부를 향해서 서서히 높아지고 있으며 그 전에는 고가지 산·다키 산·구라카케 산 등 작은 산들이 늘어서 있다. 우쓰노미야 시가지는 이 북서부 산계로부터 이어지는 도마쓰리 산, 하치만 산, 후타라 산이 정확히 종단한다. 뒤쪽으로 북부의 산계가 있고 평지의 앞으로 다가와 강 등의 수계가 있는 전형적인 "천연 요새"이고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세워진 우쓰노미야 성의 조카마치로부터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인구 기후 인접한 지자체 도치기현 가누마시 가와치군 가미노카와정 닛코시 모카시 시모쓰가군 미부정 시모쓰케시 시오야군 다카네자와정 시오야군 시오야정 쓰쿠보군 하야시마정 하가군 하가정 역사 고고학자들은 우쓰노미야 지역이 일본 구석기 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정착했다는 증거를 발견했고, 고분 시대의 수많은 무덤들이 그 경계에서 발견된다. 우쓰노미야 후타라산 신사는 353년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는 시모쓰케 국의 이치노미야이다. 우쓰노미야 정은 헤이안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까지 후지와라 씨의 분파인 우쓰노미야 씨의 지배하에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파괴되었다. 에도 시대에 우쓰노미야 지역은 닛코 가도와 오슈 가도가 만나는 곳에서 번성했다. 보신 전쟁 기간 동안 간토 북부의 우쓰노미야 성 전투는 간토 지방의 주요 분쟁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우쓰노미야는 잠시 우쓰노미야 현에 속했다가 1884년에 도치기 현에 합병되어 현의 현도가 되었다. 우쓰노미야는 일본 제국 육군의 중요한 주둔지가 되었다. 1889년 4월 1일 정제가 시행되면서 공식적으로 우쓰노미야 정이 성립되었다. 1889년 말, 우쓰노미야의 인구는 30,698명으로 도쿄와 요코하마에 이어 간토 지역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자치체였다. 1896년 4월 1일에 우쓰노미야 시가 되었다. 1945년 7월 12일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군의 우쓰노미야 폭격으로 우쓰노미야와 주변 지역이 파괴되었다. 시 경계는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이웃한 스즈메노미야 정과 히라이시, 요코카와 정, 미즈호노 정, 쿠니모토 촌, 시로야마 촌, 토미야 촌, 도요사토 촌, 스가타가와 촌, 하가 군으로부터 시노이 촌의 일부를 합병하면서 확장되었다. 1996년에 우쓰노미야는 자치권이 확대된 핵심 도시로 지정되었다. 2007년 3월 31일에 가와치군 가미카와치 정, 가와치 정이 합병해 인구 50만 명이 되었다. 1868년 5월 10일 ~ 5월 14일 : 우쓰노미야 성 전투 1896년: 우쓰노미야 시 설립. 인구 약 3만5천 2백명, 호수 약 7천호. 시역은 현재의 본청 관내 1899년 6월: 우쓰노미야 전등 회사가, 정내에 전력 공급을 개시하였다. 1902년 8월: 와세다 대학 야구부가 우쓰노미야에서 제1회 하계 연습이 진행되었다. 1906년 12월: 시내에 전화가 개통. 1908년 11월: 육군 제14사단이 이주, 사단본부가 가와치군 구니모토무라토제에 놓인다(현·국립도치기병원). 1909년 10월: 일본 철도가 국유화되어 우에노 역 - 아오모리 역 간의 노선 명칭을 도호쿠 선, 마찬가지로 우쓰노미야 역 - 닛코 역 간을 닛코 선으로 구성되었다. 1911년 2월 14일: 시장(휘장)이 제정되었다. 1911년 3월 4일: 내무성 고시 제14호에서 도쿄시에서 제14사단까지의 구간이 국도 60호로 제정되었다. 1912년 4월: 시청이 아사히 정에 낙성되었다. 1916년 3월: 상수도 급수가 개시된다. 1920년 4월 1일: 내무성 고시 제28호에서 시내를 지나는 국도 6호는 국도 4호, 국도 60호는 국도 29호로 개칭된다. 1922년 10월: 우쓰노미야 고등농림학교(현 우쓰노미야 대학 농학부) 창설. 1931년 8월: 도부 철도 우쓰노미야 선 개통. 1934년 1월 1일: 가와치군 무라카와촌 쓰루타의 일부를 편입되었다. 1936년 3월: 현 청사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1939년 4월 1일: 가와치군 시로야마무라 다이자 고마오의 일부 편입. 1944년 1월: 나카지마 비행기 우쓰노미야 제작소가 조업을 개시하였다. 1945년 7월 12일: 우쓰노미야시가 공습을 당해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1947년 4월 1일: 도치기 사범학교 남자부 부속 중학교가 다카라키에, 여자부가 호제에 설치됨. 1947년 9월: 인구 10만명이 돌파하였다. 1948년: 도치기현 종합운동공원 정비사업이 시작되다. 1950년 3월: 우쓰노미야 경마장이 완성되었다. 1953년 : 도치기현 종합운동공원이 개장되었다. 1961년 11월: 우쓰노미야 공업단지가 분양을 개시하였다. 1963년 4월 1일: 도치기 방송인 라디오 도치기가 개국하였다. 1965년: 도치기현 체육관이 오픈되었다. 1965년 8월: 다가와 하수 처리장에서 하수도 종말 처리가 개시하였다. 1970년 9월 10일: 후쿠다야 백화점에서 화재.리모델링 공사를 하던 철근 8층짜리 점포가 전소.고층 건축물이기 때문에 소방수가 닿지 않아 일본 백화점 화재로는 사상 최대 규모(당시)가 되었다[14]. 1972년 : 도치기현 체육관 수영장 개장. 1972년 4월: 시기 제정[15]. 1972년 8월: 인구 30만 명에 도달. 1972년 11월: 도호쿠 자동차도 우쓰노미야 IC 개통.도치기현립미술관이 오픈. 1974년 4월: 키요하라 공업단지 분양 개시. 1975년 6월: 우쓰노미야 중앙도매시장 개설. 1977년 : 도치기현 체육관 무도관과 궁도장이 오픈. 1980년 4월: 시민헌장 제정.시립 체육관, 시 문화 회관, 시 축구장이 개설된다. 1980년 10월: '도치노바 국체' 개최, UHF 전파 중계탑(우쓰노미야 타워) 완성. 1981년 7월: 시립 도서관 개관. 1981년 10월: 도치기현립미술관 상설전시관이 오픈. 1982년 2월 : 마누카우시(뉴질랜드)와 자매도시 제휴. 1982년 6월 23일: 도호쿠 신칸센 우쓰노미야 역 개업. 1982년 10월 10일: 도치기 현립 박물관이 오픈. 1984년 5월: 테크노폴리스(기술집적도시)로 지정됨. 1984년 8월: 기요하라 공업단지 내에서 84와 하타히로 개최. 1984년 9월: 지치하르시(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와 우호도시 제휴. 1984년 10월: 인구 40만명이 돌파하였다. 1986년 4월: 시제 90주년.이치키를 제정 1986년 10월: 현재의 시청이 개청. 1988년 7월: 기요하라 중앙공원 내에 우쓰노미야 키요하라 구장과 키요하라 체육관이 건립됨. 1989년 1월 1일: 가와치군 가미미카와 정과 경계 변경. 1989년 4월: 테이쿄 대학 이공학부, 사쿠신가쿠인 대학, 우쓰노미야 분세이 단기 대학의 3개교가 개설됨. 1989년 5월 프랑스 오를레앙과 자매도시 제휴. 1990년 도호쿠 본선의 우에노 역 - 구로이소 역 사이에 우쓰노미야 선의 애칭이 붙음. 1990년 6월 1일: 가와치 군 가와치 정과 경계 변경. 1990년 8월: 세계 선수권 자전거 경기 대회 로드 레이스 경기 개최(닛코우쓰노미야 도로 및 시 삼림 공원 주변). 1992년 6월: 타르사시(미국)와 자매도시 제휴. 1993년 : 전용 구기장 도치기현 그린 스타디움 완공. 1993년 1월 1일: 가누마 시 및 이마이치 시와 경계 변경. 1993년 8월: 전국 고등학교 종합 체육 대회(인터하이) 개최. 1995년 8월: 피에트라 산타시(이탈리아)와 문화우호도시 제휴. 1995년 10월: '제10회 국민문화제와 뜯는 95' 개최. 1995년 12월 1일: 가와치군 가미미쓰카와 정과 경계 변경. 1996년 4월 1일: 시제 100주년, 핵심시로 지정됨. 1996년 7월: 헤이세이 기념 어린이 모리 공원·모험 활동 센터가 오픈. 1996년 9월: 시 농림공원 「로만치쿠 마을」이 오픈. UCI 월드컵 최종전 개최(아시아에서 유일한 개최). 1996년 : 시외 연부를 일주하는 우쓰노미야 순환도로가 전선 개통. 1997년 3월: 우쓰노미야 미술관이 오픈. 1999년 4월: 문성예술대학 개학. 1999년 9월: 시청 본청 창구 업무의 일부를 19시까지 연장. 2000년 7월: 기타칸토 자동차도 토치기 도가 JCT - 우쓰노미야카미 미카와 IC간 개통.시 종합운동공원 예정지(현, 미즈호의 자연의 숲 공원)에서 전국 도시 녹화 페어 「마로니에와 절록화제 2000」개최. 2001년)3월: 클린파크 시게하라가 개설된다. 2001년 8월 1일: 가와치군 가미미쓰카와 정과 경계 변경. 2001년 8월: 우쓰노미야시 모하라 건강교류센터 '초수코데란네'가 오픈. 2001년 12월: 쇼난 신주쿠 라인 개업과 동시에 시내 각 역에 열차 운행 개시. 2003년 3월 24일: 우쓰노미야키타 도로의 공용을 개시. 2003년 4월: 우쓰노미야시 교육센터 개설. 2003년 7월 1일: 가누마 시와 경계 변경. 같은 날 가와치 군 가미미카와 정과도 경계 변경. 2003년 7월: 우쓰노미야카미미 미카와 IC 주변에 상업 유통 단지 「인터파크 우쓰노미야미나미」가 개장. 2005년 2월 1일:하가군 하가정과 경계 변경. 2005년 11월 8일: 우쓰노미야 키타 도로의 제한 속도를 80km/hr로 인상.일반도로 제한속도로 70km/hr를 넘어선 첫 사례. 2006년 4월: 우쓰노미야 공화대학(구 나스대학) 우쓰노미야 시티 캠퍼스 개설. 2006년 : 오리온 스퀘어(오리온 시민광장) 개장. 2007년 3월 25일: 우쓰노미야 성의 일부를 복원, 우쓰노미야 성지공원 개장. 2007년 3월 31일 : 가와치군 가와치정, 가미카와치정을 편입 합병해 50만명이 돌파하였다. 2007년 7월 31일: 우쓰노미야 니아라 산신사 앞의 우에노 백화점 본관 터에 우쓰노미야 오모테산도 스퀘어가 오픈. 2008년 1월: 도치기현청 신청사 완공. 2008년 3월: 제5차 우쓰노미야시 종합계획이 책정된다. 2011년 3월 11일: 도호쿠지방 태평양 앞바다 지진이 발생해 진도 6강을 관측했다.이 지진으로 재해구조법이 적용되었다.부상자 8명, 건물 피해 8426동. 2011년 3월 26일: 우쓰노미야 선·쇼난 신주쿠 라인 자쿠미야 역의 교상 신역사가 완성.같은 날 사용 개시. 2011년 4월 4일: 우쓰노미야역 서쪽 출구에서 대형 LCD식 버스 종합 안내 시스템 사용 개시[16]. 2012년 8월 1일: 가누마시와 경계 변경. 2016년 4월 1일 : 우쓰노미야시 소방본부가 우쓰노미야시 소방국으로 명칭 변경 2017년 3월 8일: 커뮤니티 FM 미야라지 개국. 2018년 5월 28일: 우쓰노미야 라이트레일 우선 정비 구간 기공식을 우쓰노미야역 동쪽 출구 광장에서 거행. 2019년 7월30일: 스마트시티 실현을 위해 시와 민간의 협동조직 U스마트추진협의회 설립 2021년 1월7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만연을 방지하기 위해 외출 자제와 음식점 휴업을 요구하는 '우쓰노미야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긴급사태 선포'를 발령. 2021년 3월21일: 우쓰노미야시내 간토자동차, JR버스 간토의 버스노선에서 교통계 IC카드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전국 최초의 지역 제휴 IC 카드 「totra」서비스 개시. 2021년 7월13일: 재생가능에너지 전력을 시유시설이나 라이트레일에 공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와 민간이 출자하는 제3섹터 기업 우쓰노미야 라이트파워 설립. 2022년 2월1일: 클린파크 모하라 화재 발생.시 쓰레기 소각 능력의 약 70%를 상실. 2022년 2월15일: 시장 사토 에이이치(佐藤英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2월 24일까지 자택 요양. 2022년 11월1일: 환경부에 의해 '탈탄소 선행지역'으로 선정. 2022년 11월30일: 우쓰노미야역 히가시구치지구에 교류거점시설, 라이트큐브 우쓰노미야가 개업. 2023년 1월11일: 이주·정주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텔레비전 CM의 방영을 개시.지방 자치 단체가 텔레비전 광고를 내고하는 것은 전국적으로도 드문 사례 2023년 8월26일: 전국최초의 전 노선 신설형 라이트레일(LRT) 노선, 우쓰노미야 하가라이트레일선의 우쓰노미야역 동쪽 구간 개업. 금후의 예정 2025년 : 고마뉴초의 토호쿠 자동차도에 오타니 스마트 나들목이 용지 매수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경우 완성될 예정 2026년 : 신사토초에 대형 스포츠 시설인 '북서부 지역 체육 시설'이 완공 예정. 2030년경: 시 동부 LRT 연선지역에서 탄소중립(탈탄소)화를 도모하고 민생부문의 전력소비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실질제로 한다(후술). 동년까지 시내의 모든 대중교통(LRT, 노선버스, 택시 등)에서 탄소 중립(탈탄소)화를 도모하고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실질 제로로 한다(후술). 2030년대 전반: 우쓰노미야 하가 라이트 레일선이 우쓰노미야 역 동쪽 출구에서 도치기 현 교육회관 부근까지 연장될 예정. 교육 우쓰노미야 대학 데이쿄 대학 우쓰노미야 캠퍼스 교통 도로 도호쿠 자동차도 철도·도시철도 동일본 여객철도 도호쿠 신칸센: 우쓰노미야역 우쓰노미야 선: 스즈메노미야역 - 우쓰노미야 역 - 오카모토 역 쇼난 신주쿠 라인: 스즈메노미야 역- 우쓰노미야 역 가라스야마 선: 우쓰노미야 역- 오카모토 역 닛코 선: 우쓰노미야 역 - 쓰루타 역 도부 철도 우쓰노미야 선: 니시카와다 역 - 에소지마 역 - 미나미우쓰노미야 역 - 도부 우쓰노미야 역?? 우쓰노미야 라이트레일 우쓰노미야 하가 라이트레일 선: 우쓰노미야역 히가시구치 - 히가시슈쿠고 - 에키히가시코엔마에 - 미네 - 요토3초메 - 우쓰노미야 대학교 요토 캠퍼스 - 히라이시 - 히라이시추오쇼갓코마에 - 도비야마조아토 - 세이료 고교마에 - 기요하라지구 시민센터마에 - 그린스타디움마에 - 유이노모리니시 - 유이노모리추오 - 유이노모리히가시 그 중 고속철도인 도호쿠 신칸센과 기차선인 가라스야마선 이외는 도시철도이다. 시내버스 간토 버스() 도야 버스() JR버스 간토() 자매 도시 오클랜드시(구 마누카우 시티) 1982년2월24일 구 마누카우시와 자매도시 제휴,2010년3월의 광역합병에 의해 오클랜드시로 합병됨. 오를레앙 오클라호마주 털사 헤이룽장성 치치하얼 시 각주 외부 링크 공식홈페이지 우쓰노미야 시 도치기현의 도시 중핵시 일본의 도도부현청 소재지 가와치군 조카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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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B%B4%89%EC%A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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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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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全琫準, 1855년 1월 10일 ~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은 조선의 농민 운동가이자 동학의 고부접주였다. 본관은 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다른 이름은 영준(永準)이며 호는 해몽(海夢)이다. 1890년대 초 한때 흥선대원군 문하의 식객으로 있었다. 1894년 2월 15일 고부에서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1차 봉기를 주도하였으나 조정의 회유책으로 해산했다가, 3월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가 동학 농민군을 도적으로 규정하여 동비(東匪)라 칭한 뒤, 동학군과 협력자를 처벌, 처형하고 관련없는 농민들까지 동비로 몰아 처단하자 다시 봉기를 일으킨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을 지휘하였으며, 거사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하여 연결을 시도했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전봉준은 1855년 전라북도 고창군 죽림리 당촌 몰락 양반 출신인 전창혁(全彰赫, 일명 전승록, 다른 이름은 전형호(全亨鎬))와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안 전씨 족보에 의하면 족보상 이름은 영준(永準)이요, 봉준(琫準)은 어릴적 이름이며 녹두(綠豆)는 그 체구가 작아서 불린 별호라 한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료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어머니 김씨는 언양 김씨 설과 광산 김씨 설이 있다. 몰락한 양반이었으나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적이 있는 지역의 명사이자 성리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평소 가난한 생활을 하였으며, 약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갔다. 소년기의 전봉준은 기억력이 총명한 소년이었는데 5세 때에 한문을 수학 했고 13세 때에는 '백구시'(白鷗詩)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다. 청소년기 서당에서 훈장으로도 활동했으며, 동시에 접주(接主) 일도 하고, 지관으로 묘자리도 점지해 주었다고 한다. 또한 시장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며 장사에 종사하기도 했다. 1893년 그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 일명 전승록)은 탐관오리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욕에 저항을 하다가 조병갑의 모친상 때 부조금 2천 냥을 안 거둬 줬다는 이유로 모진 곤장을 맞게 되어 몸이 허약해지더니 이내 사망에 이르게 되는데, 이 일이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과 사회개혁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스스로를 선비라고 칭하며, 농민이기도 하였다. 청년기 동학 입교 전봉준은 30대 전후에 동학에 몸을 담고, 이후 고부 지방의 동학접주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러나 당시 최시형이 그를 만나 직접 임명하지 않았고, 또한 최시형이 초기에 전봉준의 봉기에 반감을 나타냈기 때문에 반론이 있다. 20, 30대에 조선사회는 극히 어수선했는데, 개항을 계기로 하여 외세는 물밀듯이 밀려들어왔고, 종말론 등 유언비어등이 나돌고 탐관오리들의 착취가 극에 달하면서 위기적 상황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봉준 역시 나라의 장래에 대해 고민했으며, 그러한 고민의 과정에서 1888년(고종 25) 무렵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했다. 1890년 무렵 전봉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다. 뒷날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로 관군에 체포된 뒤 1895년 일본 영사관에서 있었던 제2차 재판에서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하여 스스로 동학에 입교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대원군가 식객 생활과 동학 입도 초기 1890년 전봉준은 운현궁을 찾아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1892년 초 전봉준은 운현궁 문객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인 전라북도 고부군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동리 서당의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편 그가 동학교도가 아니라는 의혹이 동학 농민 운동 당시부터 동학군 내부 사이에 돌고 있었다. 당시 은밀히 세를 불렸으며, 동학 농민운동 당시 은거 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기도 했다. 이는 그가 한때 1890년 초 잠시 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던 인연 때문이었다. 동학 입교 초기인 1890년에 운현궁에 찾아가 대원군의 식객 노릇을 한 적이 있었으므로 동학 내부에서는 그의 정체나 목적을 의심하는 교도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1892년 무렵에 교주 최시형(崔時亨)에 의하여 고부지방의 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그의 정체에 대한 의혹과 의심은 일단 불문율에 부쳐졌다. 1892년 4월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내게 하고 양민의 재산을 수탈하는 행위를 다시 일삼았다. 조병갑은 다시 자신의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었고, 불응하거나 세금을 낼 여력이 없는 백성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거나 솥단지까지 빼앗아갔다. 1893년 초에는 고부군에서 물세를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만석보 밑에 다시 보(洑)를 축조하여 불법으로 세를 징수하자 농민 대표와 함께 연명 상소를 고부군수에게 보내 그 시정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했다. 전봉준은 상소의 소두의 한사람이었는데, 군수 조병갑은 전봉준 등 서명한 군민대표들을 잡아다가 공초를 하고 곤장을 쳐서 내쫓았다. 1893년 2월 전봉준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흥선대원군과의 면담을 마친 뒤 전봉준은 다시 길을 떠나 전라북도 고부로 내려간다. 한성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전봉준은 동지를 규합했다. 전봉준은 강연을 다니며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과, 탐관오리를 처벌하고 새로운 세상이 일어설 것이라는 것과, 흥선대원군이 자신들을 일부 도와줄 것을 약속했다고 했다. 전봉준은 사람을 모았고, 그가 흥선대원군과도 연결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수많은 청년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1893년 3월 무렵 전라북도 옥구군 금구현 수류면 원평리에 장소에는 한 무리의 동학 농민세력을 형성·영도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자발적인 지원과 기부를 통해 이들의 숙식을 해결하였다. 동도문변(東徒問辨)에 기록된 것에 의하면 그 세력은 1만여 명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1893년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던 동학의 보은취회에 참가하여 그 집회를 반봉건·반부패·반침략의 정치적 운동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1893년 3월 말경에 충청북도 보은으로 향했으나, 보은 집회가 4월 3일 해산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보은군은 당시 동학의 교조인 최시형이 종종 머무르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학도들의 일부는 그보다 앞선 2월 경 한성부로 올라가 경복궁 앞에서 복합 상소를 올렸다.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계속된 상소의 내용은 폐정 개혁과 부패 관리 처벌 등이었다. 전봉준은 이들의 상소가 성공하면 호응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들과 호응하기로 한 보은집회가 취소되면서 한성부에 올라간 시위대도 해산되었다. 1만 여 명 이상의 많은 인파의 대규모 시위는 한성부의 백성과 조정의 관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전봉준이 떠난 직후 일어난 이 시위를 접한 흥선대원군은 1893년 2월의 동학도들과 농민들의 집회를 주목하게 된다. 흥선대원군과 연대 전봉준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시위를 주목했다. 1893년 초 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동학의 교주 최시형은 전봉준 등이 흥선대원군 등과 모의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대원군에 의해 이용당하리라는 것이 최시형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이 뒤로도 동학농민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는 흥선대원군의 말을 신뢰하고 그와 연결을 계속 하였다. 1893년 겨울 농민들은 정부에 부패관리 처벌을 상소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때에 동학교도들 역시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상소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1893년 12월부터 94년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되긴 했으나 이후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은 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해 죽게 한다. 동학 농민 혁명 고부 농민 봉기 1894년 3월 21일(음력 2월 15일) 그는 거병을 선언하고 전봉준은 선두로 나서 수백 명의 동학교도를 이끌고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를 공격하게 되며, 이를 고부 봉기, 제1차 봉기라 한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줄행랑을 놓았고, 전봉준은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고 세금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부패한 관리들을 붙잡았다.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감정이 격해 죄없는 관리들도 관리라는 이유로 처벌하려는 동학농민군을 만류하여 진정시키기도 했다. 이 보고를 받은 조선 정부에서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후임 군수로 박원명을 내려보냈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해산하였다. 1894년 봄 동학농민운동 발생 당시 전봉준과 일부 동학군 지도자들은 흥선대원군과 결탁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그에 의하면 동학군 중 온건파 지도자들이 그를 섭정으로 복위시킬 것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제1차 농민 봉기 이에 ‘전봉준은 창과 칼을 맞지 않고, 총구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재주가 있다.’라는 소문도 퍼져나갔다. 조선 조정은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선처를 확약하자 전봉준은 일단 농민군을 해산하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으나, 이용태 역시 탐학이 심했으며 농민군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무자비한 탄압·처벌을 감행했다. 이에 재봉기를 결의하고, 이 기회에 국가 정치와 사회제도의 전면 개혁을 단행하고 보국안민의 동학사상을 펼 뜻을 굳혔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차치구(車致九)를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초 동지 정익서(鄭益瑞)·김도삼(金道三) 등과 협의하여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동학교도를 주도 세력으로 하고 농민대중의 호응을 얻어 진용(陳容)을 정비하고 고부의 백산(白山)을 근거로 8천여의 병력으로 대오를 편성하였다.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강령과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고, 백성의 궐기를 호소했다. 이에, 정읍시 태인·김제시금구(金溝)·부안 등지에서도 농민들이 합세하여 그 수가 수천에 도달했다. 동학군의 봉기는 이로부터 본격화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음력 4월 초 금구 원평에 진을 쳤다. 실제로는 농민군의 구성원은 대부분 일반 농민이었고, 동학교도는 비교적 적었다. 농민군은 탐관오리의 제거와 조세 수탈 시정을 주장하였으며, 균전사(均田使)의 폐지를 촉구하였다. 그와 함께 전봉준은 동학군 남접의 지도자 중 한사람이자 동도대장이 되어 척왜(斥倭)·척양(斥洋)과 부패한 지배 계급의 타파 등 사대 강령을 내세우고 부근의 고을로 진격하여 관군(官軍)을 무찔렀다. 중앙에서 관군을 이끌고 온 양호 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을 황토현(黃土峴)에서 대파하고 이어 부안·정읍·고창·무장(茂長) 등을 장악하고, 이어 음력 4월 28일에는 전주(全州)를 점령했다. 전주를 점령한 직후 전봉준은 홍계훈에게 탄원서를 보낸다. 전주화약을 맺기 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이 탄원서에는 대원군을 다시 권좌에 복귀 시키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홍계훈은 이를 반박하는 답장을 보냈다. 전주 화약 직전인 5월 4일에 다시 홍계훈에게 보낸 밀서에서는 '태공을 받들어 나라를 감독토록 함은 그 이치가 심히 마땅하거늘 왜 이를 불궤라고 합니까?'라 하였다. 전봉준과 홍계훈 간의 공방전이 오가는 가운데 외부 세력의 개입이 명확해지자 그는 일단 농민군의 개혁 조항을 관군에서 일부 수용하는 조건에서 화약을 체결하기로 한다. 화약과 휴전 그러나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오고 동시에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입국하여 압박함으로써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자, 12개의 항목을 들어 개혁할 것을 요구하는 대가로 휴전 제의를 받아들이는데, 주요 내용은 이러하다. 불량한 양반의 죄를 조사하여 벌줄 것 노비 문서를 소각할 것 천민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패랭이를 없앨 것 불법적으로 거두어들이는 세금을 없앨 것 일본인과 내통한 자를 엄중하게 처벌할 것 이 화약은 전주에서 체결되어 전주화약이라 부른다.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에는 전봉준에 의지에 의해 개혁 조항 외에도 흥선대원군의 감국을 요구하는 항목을 집어넣었다. 제2차 농민 봉기 그 후 20여 명의 간부를 인솔하여 각지로 다니며 교도를 격려하고 집강소를 전국에 설치하는 등 조직 강화에 힘썼다. 한편 정부의 관헌들과 대등한 처지에서 시정을 감시하고 신임 관찰사 김학진(金鶴鎭)과 도정(道政)을 상의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차지했다. 그러나 부패한 지배 계급의 근절과 근본적인 시정 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청일전쟁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진전됨에 따라 점차 조선에서의 침략 행위를 더해가는 일본의 흉계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했다. 제1차 봉기의 휴전은 동학군에 불리하여 정부는 강화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군은 물론 일본군도 음력 5월 6일(양력 6월 9일)부터 1만의 군대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일본은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를 일으켜 친일 정권을 세우고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공사로 임명했다. 7월 25일(음력 6월 23일) 드디어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험악한 정세를 조정하였다.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은 고부접주였던 전봉준의 기병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다. 당시에 동학의 주요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진술에 따르면, 최시형은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나라의 역적이고 사문난적이다 라 규정하고, 동시에 호남의 농민군을 칠 예정이었다. 당시 남접의 지도자인 김개남 등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 최시형은 전봉준 역시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을 압박하자, 최시형 등은 처음에는 협상론인 화전론(和戰論)을 펼치다가, 마침내 현실상황의 급박함을 인식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동학군을 전봉준의 무장투쟁 노선에 동참시켰다. 인심이 즉 천심이고 이는 천운이 이르는 바이다. 고로 너희들은 도중(道衆)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 이로써 교주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도의 큰 뜻을 실현시키라! 이로써 손병희 등이 이끄는 동학군이 전봉준과 힘을 합쳐 봉기 에 가담했다. 조선 조정은 농민군이 밀고 들어오자 일본과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최경선, 김덕명, 최시형,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손천민, 김봉득, 김봉년, 유한필, 차치구 등이 다시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분격한 농민군은 이 해 음력 9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하였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을 상대로 항쟁하고자 하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9월 충청남도 공주에서 관군과 싸웠다. 그런데 충청관찰사 박제순은 9월 봉기후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논산(論山)으로 진격하여 공주감영이 위급해지자 교주 최시형이 거느리는 다른 동학의 10만 대군을 막는 일보다도 전봉준의 군사를 방어하는 일이 더 화급하다며 천안에 머물고 있는 토벌대장 이규태에게 급전을 보냈다. 이규태가 이끄는 군사가 박제순군과 가세하면서 공주싸움에서 패퇴, 은신하게 된다. 체포후 어떻게 되었는가? 옛 부하의 밀고와 체포 전봉준은 음력 9월 삼례(三禮)에서 남접 접주가 되어 12만 명의 병력을 동원·지휘하여 북도 접주 손병희의 10만 명의 병력과 동원하였으며, 최고 교주 최시형의 총지휘를 받으며 항일 구국의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한때 중부·남부의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의 규모가 확대되었고, 특히 이천(利川)·목천·공주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수한 무기와 조직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패배하였고, 음력 11월의 금구(金溝) 전투를 최후로 분쇄되고 말았다. 11월 27일 태인싸움에서 패배한 뒤 전봉준은 수행 몇몇과 11월 29일 입암산성(笠巖山城)으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이때 남하(南下)하는 일본군 모리오 부대와 이규태의 관군이 정읍군 입암면 천원(川原)에서 전봉준 일행을 추격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11월 30일 다시 입암산성에서 동쪽 약8km에 떨어진 내장산의 백양사(白羊寺)로 이동했다. 백양사에 은신할 때 사람을 통해 김개남(金開南)이 태인군 산내면 종성리(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은신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행원들과 함께 태인으로 가던 중 12월 1일 저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부하 김경천을 찾았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해 놓고 순창의 한 민가에 은신하도록 권고했다. 그 뒤 전주부(全州府) 감영 퇴교(退校)이자 동지이며 이웃에 사는 한신현을 사주하여 전주부 관가에 고변했다. 김경천의 부탁을 받은 한신현은 김영철, 정창욱 등 외에 9명의 피노리 마을 장정들을 동원하여 매복하고 있었다. 민가에서 전봉준은 동지 몇 명과 순창으로 피해 다시 거사를 일으킬 준비를 했으나, 현상금을 노린 옛 부하 한신현과 김경천 등의 배신으로 피로리(避老理)에서 관군에 체포되었다. 한신현과 김경천의 밀고 외에도 김영철, 정창욱 등의 제보와 마을사람 9명의 제보가 있었다. 1894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새벽 한신현과 김경천의 밀고 사실을 알고 위기에 처하자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 피노리 주민이 던진 몽둥이에 다리를 얻어맞고 붙잡혔다. 순창군 관아에 갇혔다가 담양군 관아에서 조선 관군에게 인계되어 나주부와 전주부로 옮겨졌다가 1895년 1월 13일(1894년 음력 12월 18일) 한성부에 도착하여 의금부 감옥에 수감되었다. 1895년 음력 3월, 그의 동지들인 손화중 · 최경선 · 김덕명 · 성두환과 함께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되었다. 최후 의금부의 옥에 갇힌 전봉준 등에게는 무수한 고문이 가해졌다. 그러나 의금부의 공초 중에는 그가 흥선대원군과 내통한 사실 여부의 추궁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과 만났느냐는 추궁에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고문은 계속되었으나 자백이 없자 일본 영사관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후 음력 2월 9일, 음력 2월 11일, 음력 2월 19일, 음력 3월 7일, 음력 3월 10일 5차에 걸쳐 일본 영사관에 설치된 헌병의 심문을 받았으나 역시 목적이나 동지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다가 4월 24일(음력 3월 30일) 의금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나는 바른 길을 걷다가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반역죄를 적용한다면 천고에 유감이다.'라고 개탄하였다. 당시 상처가 아물지 않아 한발자국도 옮겨 놓을 수가 없어 아리(衙吏)가 그를 안고 사형장으로 갔다. 이때 그의 형제들도 연좌되어 사형당했고, 그의 후처 여산송씨는 끌려가 노비가 되었다. 당시 전봉준의 나이는 향년 41세였다. 그는 죽음에 다달아 다음 유시(遺詩)를 남겼다. 전봉준을 관아에 밀고했던 한신현은 금천군수에 제수되었으며, 상금은 한신현 1천냥, 김영철 300냥, 정창욱 200냥, 마을사람 9명 200냥 그리고 200냥은 피노리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공초 과정에서의 대원군 변호 일본 영사관으로 옮겨진 뒤에도 이노우에 공사와 우치다 영사, 그리고 법부대신 서광범 등 심문관들로부터 5차례 이상 취조가 계속되었다. 심문관들은 흥선대원군이나 이준용이 그를 사주했는가 여부를 집중 추궁하였다. 대원군에게 보내려던 편지가 발견됐고, 그가 대원군의 식객으로 운현궁에 있었다는 진술까지 나오면서 형문은 혹독해졌다. 그러나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대원군이 개입했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심문의 초점은 그가 농민군을 일으킨 것이 대원군의 지시 내지 사주에 의한 것인지 여부를 캐내는 데 맞춰졌다. 일본 측은 겉으로는 협조하는 체하면서 뒤로 반일 공작을 펼친 대원군을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원군과의 관련성을 완강히 부인했다. 고문 과정에서 심문관들이 흥선대원군을 비판하자 그는 흥선대원군을 변호하였다. 그는 사형당하는 순간까지도 흥선대원군 관련설을 부인했다. 심문관이나 일본인 영사관원들이 흥선대원군을 비난하면 그를 변호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후일 경희대학교 교수 허동현은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에도,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도 대원군을 다시 권좌에 복귀시키려는 열망이 넘쳐흐른다. 고 평하기도 했다. 사후 두 딸 전옥례(全玉禮)는 사찰에 숨어 있었고, 다른 딸도 근처에 은신해 있다가 성인이 된 뒤에 출가했다. 딸 전옥례는 15세의 나이로 화를 피하여 전라북도 진안 마이산으로 들어가 김옥련으로 이름을 고치고, 사찰인 금당사의 공양주로 있다가 23세에 이영찬과 결혼했다. 동학 농민 운동이 민란에서 농민운동으로 승격된 뒤, 1970년 갑오 동학 혁명 기념문화제를 개최하자 나타나 비로소 그 동안의 사실을 밝힘으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전옥례는 1970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본처 최씨에게 얻은 두 아들은 요절했고, 후처 여산 송씨에게 얻은 아들도 셋째 아들 전용규(全龍圭)는 일찍 사망했다. 넷째 아들 전용현은 결혼하였으나 후사가 없어서 조카뻘 되는 친척 전만길(全萬吉)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아 후사를 이어오고 있다. 1954년 천안전씨 문중에서 이평면 조소리에 전봉준을 추모하는 사적비를 건립하였고, 1960년부터 복권 노력이 추진되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동학 농민 운동을 동학난으로 서술하던 것을 농민 운동으로 고쳐서 싣도록 하면서 동학난은 농민운동으로 격상되었고, 전봉준에게 씌여졌던 역적 누명 역시 벗겨졌다. 1981년 한국청년회의소가 전주 덕진공원에 전봉준의 추모비를 세웠다. 1983년 대통령 전두환의 특별 유시로 '전봉준장군 유적정화사업'이 시작되었다. 이어 전봉준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건립된 기념관의 중심 시설물은 전봉준 장군 동상이다. 시행청이 '전라북도'이고, 조각한 사람이 김경승(金景承)이며, 시공된지 4년만인 1987년 10월 1일 완공되었다. 2005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전봉준이 체포되어 끌려가는 사진을 실은 최초의 전봉준 기념 엽서가 발행되었다. 가족 관계 증조부 : 전도신(全道臣, 1750년 ~ ?) 증조모 : 김해 김씨(金海 金氏) 용양위 부호군 김진호(金鎭浩)의 딸 조부 : 전석풍(全碩豊, 1790년 ~ 1857년) 조모 : 인동 장씨(仁同 張氏, 1797년 ~ 1876년) 장익휴(張益休)의 딸 아버지 : 전창혁(全彰赫, 1827년 ~ 1893년) 어머니 : 언양 김씨(彦陽 金氏, 1821년 ~ 1866년) 김환(金煥)의 딸 여동생 : 전고개(全古介, 1861년 ~ 1951년) 매제 : 손여옥(孫如玉, 1860년 ~ 1894년) 본처 : 여산 송씨(礪山 宋氏, 1851년 ∼ 1877년) 송두옥(宋斗玉)의 딸 장녀 : 전옥례(全玉禮, 1876년 ~ 1970년, 15세에 사찰에 은신해 있다가 이영찬과 혼인했다.) 사위 : 이영찬(李永贊, 1868년 ~ 1933년) 차녀 : 전성녀(全姓女, 1877년 ~ 1938년) 사위 : 강장언(姜長彦, ? ~ 1914년) 후처 : 이순영(李順瑛, 1860년 ∼ 1903년) 이문기(李文琦)의 딸 장남 : 전용규(全龍圭, 1879년 ~ 1896년) 차남 : 전용현(全龍鉉, 1882년 ~ 1941년) 자부 : 이양림(李楊林, 1887년 ~ 1926년) 이춘경의 딸 손녀 : 전오복(全五福, 1907년 ~ ?) 손자 : 전익선(全益善, 1909년 ∼ 1998년) 손부 : 서정월(徐正月, 1917년 ~ ?) 1939년 이혼 증손자 : 전기철(1935년 ~ 1939년) 손부 : 김연임(金連任, 1928년 ~ ) 종손녀 : 전영자(全英子, 1956년 ~) 증손자 : 전장수(全長壽, 1958년 ~) 목회자로 활동 증손녀 : 전영숙(全英淑, 1961년) 1964년 실종 증손자 : 전용석(全容奭, 1963년 ~ 1992년) 손녀 : 전오녀(全五女, 1913년 ~ ?) 손녀 : 전오순(全五順, 1916년 ~ ?) 손자 : 전태보(全泰普, 1918년 ~ 1923년) 처남 : 경허(鏡虛) 선사 평가 긍정적 평가 전제정권과 탐관오리의 부패를 여러 번 상소하여 개정하려 노력하는 등 민권을 제창한 혁명가요, 사상가였다는 시각이 있다. 부정적 평가 전봉준은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선 세력이었으나 낡은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출발을 꾀하기보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충군(忠君)을 내세우며 근왕주의(勤王主義)적 태도를 보였다. 또한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 꾸준히 접촉하며 연결을 시도하였다는 점은 부정적인 평가로 작용되고 있다. 농민군은 조선 관군을 넘어선 외세의 개입에 대하여 맞서 싸울 만한 효과적인 무기와 병력이 부족하였다. 둘째, 농민들 중심의 동학군에 대항하여 기득권을 가진 향촌사회의 지주·부호·양반들의 민보단(民堡團)등을 통한 저항을 과소 평가하였다. 셋째, 사회 개혁을 위한 혁명을 수행 하면서도 대원군에 의지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기타 조병갑과의 악연 탐관오리로 악명높은 조병갑은 모친상을 당하자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에게 2,000냥을 조의금으로 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전창혁이 가난한 탓에 이를 이행하지 못하자 조병갑은 전창혁을 장살형에 처했다. 전봉준과 동학 최근에 전봉준이 동학교도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전봉준이 동학교도라는 주장을 “전봉준 동학 교도론”(줄여서 “교도론”)이라 하며, 아니었다는 주장을 “전봉준 동학 비교도론”(줄여서 “비교도론”)이라 한다. 교도론 전봉준이 문초를 받을 때 “동학을 좋아한다.”라는 답변하였다. → 반론 : “동학을 좋아한다.”라는 말과 “동학을 믿는다.”라는 서로 같지 않으며, 전봉준이 동학교도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고 비교도론자들은 주장한다. 공초(供招)의 제목이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이다. → 반론 : 비교도론자들은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서 전봉준은 “교도는 적었고 원한에 찬 농민이 많았다”라고 답하였기 때문에 전봉준이 꼭 동학교도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고 반박하며, 당시에는 동학 농민 운동을 동학난이라 불렀고, 그 참여자가 동학교도이든 아니든 구별하지 않고 동학교도라고 불렀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법정 진술에서 “네가 접주가 된 것도 역시 최시형이 차출한 것인가?”라고 묻자 전봉준이 “그렇다.”라고 대답하였으므로 전봉준은 동학교도라고 주장한다. → 반론 : 전봉준은 동학 교주 최시형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또한 동학은 국적과 사문난적에게도 명첩과 접주 임명장을 주는가? 비교도론 전봉준이 문초를 받으면서 “나는 서당의 선생으로서 아동을 가르쳤을 뿐 동학의 교리를 따르거나 가르친 바가 없다.”라고 답하였다. 전봉준이 문초를 받으면서, 직업을 물었을 때, 동학의 “접주”라 하지 않고 “선비”라고 대답하였다. 비교도론자들은 그가 동학 접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주장한다. 동학 농민 운동 제1차 봉기 당시 동학교주 최시형이 “이들은 국적이요 사문난적이며,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면 효도로써 할 일이지 서두르지 말라.”라고 밝혔다. 비교도론자들은 이것이 교도론과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전봉준이 작성한 격문에는 동학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흥선대원군과 내통 논란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전봉준은 대원군을 찾아갔고, 직접 찾아갈 수 없을 때는 사람을 보내 연락하였다. 전봉준이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와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흥선대원군은 전봉준 등의 도움 요청이 있자 즉각 수용하였다. 전봉준이 도움 요청을 하기 전에 흥선대원군은 1893년 2월의 동학도들과 전라북도의 농민들의 폐정 개혁 상소를 할 때 이들의 거병 움직임을 예상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할 계획을 짜기도 했다. 동학농민군의 주장 중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 다.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사전모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음을 주목한 대원군측이 농민군을 이용하여 일본군과 친일개화파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음을 시사해준다.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계획은 "농민군이 재기하면 그 토벌을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서 개화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으려던 것으로 재기병을 촉구하는 밀사를 보냈던 것"이었으며, 또 만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가게 되면 즉각 해산하였다가 그 해 11월,12월 경에 강이 결빙하기를 기다려 청국병이 오게 될 형편이 되면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정부를 갱신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대원군과 이준용 등이 자신들을 이용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한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이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이들과 협력, 연대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천우협 논란 한편 전봉준은 동학 농민 운동 중 흥선대원군, 이준용 세력 외에 일본의 폭력 조직인 천우협(天佑俠) 등과도 연결을 시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기요후지 고시치로(清藤幸七郎)의 책 《천우협》에서는 1894년 6월 27일에 부산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의 정치 폭력 조직 천우협 회원 일부가 전봉준을 만나 동학 동민 운동을 지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천우협》에 나타난 만난 곳과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 나타난 장소가 다르며,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서는 당시 전봉준을 따른 군세는 고작 20여 명이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5백여 명으로 기술하여 그 수치가 매우 차이가 크다. 결정적으로 《천우협》에 나타난 시기인 6월부터 8월 말까지는 전혀 전투가 없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천우협 회원들과 전봉준 일동이 협조하여 관군을 격파했다고 하였다. 한편 동학측 자료에서도 전봉준과 천우협(天佑俠)의 접촉을 확인해주고 있는데 『천도교 창건사』에 의하면 "일본인 다케다(武田範之) 등 15명이 금시계 1개와 마노(瑪瑙, 보석의 일종) 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면회를 청한 즉 전봉준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면담하고 시국을 서로 논하였다'하여 전봉준과 천우협 측의 면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체격 전봉준은 키가 152cm이며 이는 현재도 물론이거니와 당대 기준으로도 작은 체격이였다. 그래서 붙은 전봉준의 별명이 녹두장군(綠豆將軍)이였다. 기타 1959년 4월 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전봉준을 소재로 한 액면가 2전 우표를 발행하였다. 전봉준이 교수형에 처한 이후 백성들은 〈새야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이 노래는 전봉준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2010년 초에 대한민국에서 언론에 공개됐는데 널리 알려진 전봉준이 압송되는 길에 찍었다는 사진은 사실 재판을 가는 도중 찍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전봉준이 등장한 작품 김인태 - 1982년, 《풍운》, KBS1 드라마 양지운 - 1984년, 《독립문》, KBS1 드라마 이영범 - 1990년, 《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 MBC 드라마 유인촌 - 1994년, 《새야 새야 파랑새야》, MBC 드라마 임혁주 - 1994년, 《동학 100주년 특집》, KBS 1TV 다큐멘터리 김경응 - 1995년, 《찬란한 여명》, KBS1 드라마 전병옥 - 2001년, 《명성황후》, KBS2 드라마 김동식 - 《오페라 동녘》, 1997년 오페라 조창배 - 《녹두 꽃이 피리라》, 2008년 연극 최무성 - 2019년, 《녹두꽃》, SBS 드라마 같이 보기 새야새야 동학 농민 운동 임오군란 김개남 최시형 최제우 손천민 손병희 이필제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천도교 갑오경장 을미개혁 이필제의 난 단발령 흥선대원군 이준용 김구 박성빈 조병갑 김봉득 김봉년 차치구 명성황후 유한필 참고 문헌 고종실록 순종실록 전봉준 공초록 고종시대사 관련 서적 이이화, 《녹두장군 전봉준》 (중심, 2006) 한길사, 《이이화와 함께 한국사를 횡단하라》(한길사 편집부 지음| 한길사 펴냄 | 2006) 오영섭, 《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한국사연구총서 28)》( 오영섭 지음| 국학자료원 펴냄 | 2006)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7:조선의 문을 두드리는 세계 열강》 (이이화 지음 | 한길사 | 2006)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8:민중의 함성 동학농민전쟁》 (이이화 지음, 한길사, 2006)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2003)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연갑수, 《고종대 정치변동 연구》 (일지사, 2008) 유영익, 《갑요경장 연구》(일조각, 1990) 혜문, 《조선을 죽이다》 (동국대학교출판부, 2009) 각주 외부 링크 (사단법인)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전봉준-대원군 밀약 있었다" 경남도민일보 2006.12.15 서울로 끌려간 녹두장군 전봉준 끝까지 대원군 감싸다 처형돼 중앙일보 2009.05.06 동아일보 2001년 6월 1일자 1854년 출생 1895년 사망 정읍시 출신 조선 사람 사상가 조선의 학자 조선의 종교인 조선의 교육인 조선의 상인 조선의 시인 저격수 혁명가 한국의 혁명가 사형된 사람 효수된 사람 천도교 동학농민운동 관련자 천안 전씨 19세기 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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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B%AF%BC%ED%85%8C%EB%A5%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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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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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인터내셔널(, ), 약칭 코민테른(, ) 또는 제3인터내셔널(, )은 1919년 3월 소련 공산당의 혁명가들이 설립하여, 이 조직의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1943년 5월에 코민포름으로 대체되었다. 코민테른의 목표는 "무장 군대를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으로, 완전한 국가 소멸이라는 과도적 단계로 이행함으로써, 전세계 자산계급의 전복 및 세계적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립을 위하여"투쟁하는 것이다. 코민테른에 가입하기 위해 공산당은 21개 조항을 준수해야 했다. 이는 다음의 것들을 포함했다: (1) 공산주의 선전과 동요 활동을 하고 대중 앞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상을 떠받친다. (2)중책을 맡은 개량주의자들과 중도주의적 의견의 지지자들을 당에서 제거하는 것 (3)체제전복 임무를 위한 혁명(합법적인 것을 포함하여) 조직을 창립한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는 코민테른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그가 레프 트로츠키를 지지하여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를 해임할 때까지 7년간 의장직을 수행했다. 그레고리 지노비예프의 해임 이후 니콜라이 부하린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으나 그 역시도 기회주의적 모습을 보이면서 해임되었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1928년에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General Secretary)으로서 코민테른의 지도자가 되었다. 역사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 혁명이 승리한 이후 여러 나라들에서 창건된 공산당들이 아직 장성하는 공산주의 혁명을 독자적으로 지도할 만큼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못했던 조건하에, 각국 공산당과 공산주의 혁명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국제적인 조직체가 요구되었다. 코민테른은 이러한 요구를 반영하여 창건되었다. 1914년 11월 사회배외주의로 굴러떨어진 제2인터내셔널과의 결렬을 선포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간부들의 대표회의(1918년 1월 페트로그라드), 각국 공산당 내의 좌익 조직들의 대표회의(1919년 1월 모스크바)를 소집하고 코민테른 창건문제를 토의하였으며 창건될 코민테른의 목적, 전략전술, 조직원칙들을 정하였다. 1919년 3월 2일부터 3월 6일 사이 블라디미르 레닌과 소련 공산당의 지도하에 모스크바에서 30개 나라의 35개 공산당 및 공산주의 단체에서 온 52명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코민테른 창건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1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코민테른의 창건을 선포하고 코민테른의 혁명론을 심의, 채택하였다. 창립 목적과 조직 코민테른의 목적은 각국 공산당간 사이의 연계를 강화하고 공산당들의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함으로써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달성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의 규약은 레닌주의의 당생활원칙에 근거하여 코민테른의 기구와 지도기관들의 기능을 규정하였다. 코민테른의 최고기관은 코민테른 대회이고 대회와 대회사이의 지도기관은 집행위원회이며, 당의 일상사업은 집행위원회가 선거한 상무위원회가 지도하였다. 매개 나라에는 일국일당의 원칙에 따라 코민테른 지부를 두었다. 이러한 코민테른의 원칙에 따라 조선의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 중 만주에서 활동한 이들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코민테른은 창건되어 해산될 때까지 7차례의 대회를 가졌으며, 제7차대회에서는 계급투쟁 노선에 반파시즘-반제국주의 투쟁을 추가하였다. 이러한 노선변화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 성격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할 수 있는 이념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회원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 공산당 몽골 인민공화국 몽골 인민혁명당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국 공산당 투바 인민공화국 같이 보기 코민포름 마르크스-레닌주의 볼셰비키 소련 공산당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인민전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인터내셔널가 중화소비에트공화국 각주 공산주의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공산주의 단체 극좌 정치 1943년 폐지 국제주의 국제 사회주의 단체 1919년 설립된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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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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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B%82%98%EC%9D%80%ED%96%89%20%281959%EB%85%84~2015%EB%85%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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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은행 (1959년~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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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은행()은 대한민국에 존재하였던 시중은행으로 하나금융그룹의 자회사였다가 2015년 9월 1일 한국외환은행과 합병하여 KEB하나은행이 되었다. (참고:KEB하나은행에서 2020년 2월 다시 하나은행으로 브랜드 명칭을 변경하였다.) 역사 1959년 12월: 서울 지역을 영업구역으로 하는 지방은행 "서울은행"으로 시작 1962년 4월: 부산 중구 남포동에 부산지점의 신설 승인을 받아 시중은행으로 전환 1976년 8월: 8월 신탁은행과 흡수 합병하여 "서울신탁은행"으로 행명을 변경 1995년 6월: "서울은행"으로 행명 환원 2002년 12월: 서울은행을 존속 법인으로 지정하여 하나은행과 대등 합병 2015년 9월 1일: 구 외환은행과 합병하여 KEB하나은행으로 변경. 존속 법인을 구 외환은행으로 지정함과 동시에 서울은행 법인 소멸. 대한민국의 은행 1959년 설립된 기업 하나금융그룹의 이전 자회사 서울특별시의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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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AD%EA%B0%80%EC%96%91%EC%B2%AD%EC%9B%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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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양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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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양청원(國家兩廳院)은 중화민국 타이베이시에 있는 종합 예술 문화 시설이다. 1986년 정식 개관하였다. 오페라, 발레, 뮤지컬, 연극, 관현악, 실내악, 전통 음악, 경극등 각종 공연이 개최되고 있다. 중정기념당의 부지안에 위치해 있다. 기념당왼쪽 건물이 국가희극원(國家戲劇院), 오른쪽 건물이 국가음악청(國家音樂廳)이다. 주요 시설 주소 台灣臺北市中正區中山南路21-1號 같이 보기 중정기념당 외부 링크 국립중정문화중심 공식 홈페이지 대만의 음악 공연장 타이베이시의 건축물 타이베이시의 관광지 중화민국 교육부 1987년 완공된 건축물 중정구 (타이베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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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7%A8%EB%A6%AC%20%EB%AA%A8%ED%84%B4%20%EC%8A%A4%ED%83%A0%EB%A6%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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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모턴 스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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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모턴 스탠리 기사(, 1841년 1월 28일 ~ 1904년 5월 10일)는 영국의 탐험가이자 언론인으로 아프리카 탐험과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구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후에 미국 남북 전쟁에 참가하여 포로가 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뉴욕 헤럴드 신문사의 특파원이 되어 활약하였다. 1871년 신문사 사장의 부탁으로 행방불명된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찾아 아프리카로 건너갔고, 탕가니카호 부근의 우지지 마을에서 리빙스턴을 만날 수 있었다. 생애 영국 북웨일스의 덴비()에서 출생한 헨리 모턴 스탠리의 본명은 존 롤런즈()이다. 어릴 때 고아가 되어 소년 시절을 구빈원에서 보내대가 17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뉴올리언스 상인인 스탠리라는 사람의 양자가 되어 그 이름을 계승하고 미국 시민권도 얻었다. 후에 미국 남북 전쟁에 참가하여 포로가 되는 등 고생이 많았으나, 의지가 강한 그는 열심히 공부하며 1865년 신문 통신원이 되어 에티오피아 등지에 취재하였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뉴욕 헤럴드지의 특파원이 되어 활약하였다. 1869년 뉴욕 헤럴드의 사장 J. G. 베넷()으로부터 당시 아프리카에서 소식이 끊긴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행방을 찾으라는 밀령을 받았다. 이 당시 가장 유명했던 아프리카 탐험가였던 리빙스턴의 행방불명과 연락 두절은 큰 이슈거리였다. 1871년 3월에 아프리카로 건너가 온갖 고생을 이겨내고, 11월 탕가니카호 부근의 우지지 마을에서 병에 걸린 리빙스턴과 극적으로 만났다. 그 때 그가 감동 어린 목소리로 "리빙스턴 박사님이 아니십니까?()"라고 물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874년 다시 뉴욕 헤럴드와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래프 두 신문사의 공동 출자로 리빙스턴 구조를 목적으로 아프리카 탐험을 시작하여, 리빙스턴의 죽음을 확인한 뒤, 나일강의 원천인 빅토리아호를 발견하고 콩고강 유역을 답사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였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878년 《암흑 대륙 횡단기》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1877년부터 1884년까지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후원을 얻어 콩고 지방을 탐험, 콩고 자유국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 1887년부터 1889년에까지는 중앙 아프리카를 탐험하여 루웬조리 산맥을 답사하였으며, 답사 도중에 현지 반란에 휘말려 있던 독일 탐험가 에민 파샤(Emin Pasha)를 구출하기도 하였다. 만년에 영국 국적으로 복귀하였고, 1895년 하원의원이 되었다. 1874~1877년 리빙스턴의 뒤를 이은 스탠리가 아프리카 횡단 성공으로 해안에서 내륙으로 가는 유럽의 침략 통로가 열렸다. 사실 스탠리는 훌륭한 탐험가로 알려졌지만, 그들은 제국주의가 아프리카를 침략하는 선봉장 구실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저서 《암흑대륙 횡단기》(2권, 1878년) 《암흑의 아프리카》(1890년) 등 서훈 1899년 바스 훈장 1등급(GCB, 작위급 훈장) 참고 문헌 각주 참고 자료 외부 링크 1841년 출생 1904년 사망 아프리카 탐험가 웨일스의 탐험가 웨일스의 작가 영국의 기자 미국의 탐험가 미국의 작가 양자 미국의 기자 영국의 기사 웨일스계 미국인 웨일스의 정치인 웨일스계 잉글랜드인 잉글랜드계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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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C%90%EB%A1%80%20%EC%9D%B8%EC%9A%A9%EB%B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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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례 인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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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나라마다 사용하는 판례 인용 표기법이다. 법원에서 판결이 나면 판결문을 공식 판례집에 싣는데 후에 과거 판례를 인용할 때 이 판례집 번호를 표기한다. 영미법체계에서는 판례가 구속력을 가지므로 판결문마다 수많은 인용을 할 필요가 생기며 이를 위해 짧게 요약하여 표기하는 방법이 발달하였다. 보통 판례 인용 방식은 다음 정보를 표기한다. 판례집 이름 판례집 판 페이지 번호 판결 연도 대한민국 일반 판례 인용 대법원 2007.7.26. 선고 2007다29119 판결. 대한민국의 판례인용은 다음과 같은 순서에 의한다. 경우에 따라 판례공보집과 그 페이지를 덧붙이는 때도 있다. 재판법원(위의 예에서 '대법원') 선고날짜(위의 예에서 '2007. 7. 26.') 소 제기 된 해(위의 예에서 '2007년') 사건부호(위의 예에서 '다'). 주요 사건 부호는 아래와 같다. 민사 민사 제1심 단독사건 - 가단 민사 제1심 합의사건 - 가합 민사항소사건 - 나 민사상고사건 - 다 형사 형사 제1심 단독공판사건 - 고단 형사 제1심 합의공판사건 - 고합 형사항소공판사건 - 노 형사상고공판사건 - 도 형사항고사건 - 로 치료감호1심사건 - 감고 치료감호항소사건 - 감노 치료감호상고사건 - 감도 형사재항고사건 - 모 형사준항고사건 - 보 비상상고사건 - 오 즉결심판사건 - 조 형사신청사건 - 초 행정 행정 본안 1심 - 구합 행정 본안 1심 재정단독사건 - 구단 행정 본안 항소 - 누 행정 본안 상고 - 두 헌법재판소 결정 위헌법률심판사건 - 헌가 탄핵사건 - 헌나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 헌법소원사건 - 헌마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2항 헌법소원사건 - 헌바 사건의 일련번호(위의 예에서 '29119'. 그 해에 대법원에 접수된 29119번째 사건이라는 뜻이다.) 재판의 종류: 종류에 따라 '선고' 혹은 '결정'이라 표현한다. 학자에 따라, 대판(大判)이나 대결(大決)의 축약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판례공보 인용 대법원의 판례공보 인용은, 미국, 독일과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즉 선고연원일과 사건번호가 아예 없다. 인용하기가 매우 쉽다. 공2012하, 1590 "공"은 판례공보를 말한다. 대법원에서 매달 2회 발행한다.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대략 매달 60개 판례 정도를 공보한다. 페이지 수를 연속으로 누적하여, 1년에 상권 하권의 2권을 발간한다. "2012"는 2012년 판례공보라는 의미이다. 2012년 선고된 판례라는 의미이다. "하"는 2012년 판례공보가 상권 하권 2권으로 발행되었는데, 그 하권이라는 의미이다. 상하권이라고 페이지 번호가 새로 사작되는 것은 아니다. "1590"은 페이지 번호이다. 2012년 1590쪽 판례라는 의미이다. 사건 번호 법원 헌법재판소 캐나다 캐나다의 판례 인용법은 크게 중립 인용(neutral citation), 판례집 인용, 전자 인용으로 나뉜다. 인용법에 따라 표기 사항과 그 순서가 다르다. '맥길 가이드(McGill Guide)'로 알려진 '캐나다 동일표준 법 인용 가이드(Canadian Guide to Uniform Legal Citation)'의 인용법이 일반적인 인용법으로 쓰이지만 법원이나 기관, 출판사 또는 학교마다 표기법의 관행이 다를 수 있다. 표기 사항 사건의 이름(case name) 사건의 이름은 ‘v’(versus/대)를 사이에 두고 소를 제기하는 측(원고, 신청인, 청원인, 상소인 등)의 성(姓)을 앞에, 소송을 당한 측(피고, 응답인, 피상소인 등)의 성을 뒤에 쓴다. '캐나다 동일표준 법 인용 가이드(The Canadian Guide to Uniform Legal Citation)'는 'versus' 약자에 마침표를 쓰지 않는데, 법원 관행에 따라 마침표를 써 'v.'로 표기해야 할 때도 있다. 피고가 상소 하는 경우 피고가 상소인이 되어 그의 성이 앞으로 올 수 있는데 사건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는 법원도 있다. 사건의 이름은 기울기를 주거나 밑줄을 긋는다. 형사사건의 경우 검사(crown attorney, crown counsel 또는 crown prosecutor)가 원고이기 때문에 ‘v’ 앞에 정부 또는 국가를 뜻하는 ‘R’[라틴어로 군주(Regina 또는 Rex)를 의미]을 쓰고 피고인의 성을 ‘v’ 뒤에 쓴다. 사건의 공식이름에선 ‘R’이 아니라 ‘Her Majesty The Queen’ 또는 ‘His Majesty The King’이다. 법이나 정책 등의 합헌성과 관련한 권고적 의견(advisory opinion)을 묻는 참고적 질의(reference question)의 경우에는 'Reference re'를 쓰고 그 뒤에 주제를 쓴다. 예: Reference re Secession of Quebec, [1998] 2 SCR 217 판결 연도 중립 인용 시 필수 표기 사항이며 사건의 이름 뒤에 숫자만 표기하는데 앞에 쉼표를 쓴다. 판례집 인용 시 사건의 이름 뒤에 소괄호 안에 쓰는데 이때는 쉼표를 쓰지 않는다. 판례집 인용 시 판례집의 출판 연도와 같을 경우 표기될 필요가 없으나, 다를 경우 표기해야 한다. 법원 식별자(court identifier) 중립 인용 시 필수 표기 사항이며 판결 연도 뒤에 위치한다. 판례집 인용 시 페이지 번호 뒤에 위치하며 소괄호 안에 쓴다. 판례집 인용 시 경우에 따라 표기해야 하거나 표기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캐나다 대법원 판례집 S.C.R.을 인용한다면 법원을 특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 판결 번호(ordinal number of decision) 중립 인용에 쓰이며 법원 식별자 뒤에 쓴다. 출판 연도 판례집 인용에 쓰이며 사건 이름 뒤에 대괄호 안에 쓴다.(판결 연도가 있거나 있어야 할 때는 판결 연도 뒤에 그 다음으로 쓴다.) 고유한 권 번호(volume number)가 부여되는 판례집이 있고, 권 번호가 매해 1부터 다시 시작되는 판례집이 있다. 고유한 권 번호가 부여되는 판례집은 권 번호로 판례집을 특정할 수 있기 때문에 출판 연도 표기가 필수적이지 않다. 반대로 새로운 연도마다 권 번호가 다시 시작되는 판례집은 연도 표기가 필수적이며 이 경우 대괄호 안에 연도를 표기한다. 예를 들어 도미니온 판례집(Dominion Law Reports)은 새로운 판례집마다 고유한 권 번호가 부여돼 권 번호만 알면 판례집을 특정할 수 있지만, 캐나다 대법원 판례집(Supreme Court Reports)은 매해 판례집이 1권부터 시작돼 권 번호만으로는 무슨 연도의 판례집인지 알 수가 없다. 권 번호(volume number) 판례집 인용에 쓰이며 출판 연도 뒤에 숫자만 쓴다. 판례집 약자 판례집 인용에 쓰이며 판례집 이름의 약자를 쓴다. '캐나다 동일표준 법 인용 가이드(Canadian Guide to Uniform Legal Citation)'는 약자에 마침표를 쓰지 않는데, 법원 관행에 따라 마침표를 써야 할 때도 있다. 판(edition) 판례집 인용에 쓰이며 판례집 약자 뒤, 소괄호 안에 숫자와 서수 접미사를 쓴다. 문단 번호 'at para'라고 쓴 뒤 판결문 안에서 인용한 문단 번호를 쓴다. 두 개 이상의 문단일 경우 'at paras'라고 쓰고 첫 문단과 끝 문단 사이에 엔대시나 하이픈을 넣는다. 'para'나 'paras' 뒤에 마침표를 찍는 것도 법원의 관행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페이지 번호 판례집 인용에 쓰이며 판결문이 시작되는 쪽의 숫자만 쓴다. 직접인용을 하는 경우 페이지 번호 뒤에 'at'을 쓰고 인용문이 쓰인 쪽의 숫자를 쓰기도 한다. 중립 인용(neutral citation) 중립 인용은 1990년대 후반부터 법원 및 행정부의 심위·심사·조사 위원회 등에서 채택되어 쓰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판례 인용 중 가장 우선시되어 한 판례 인용에 두 개 이상의 출처를 표기할 때 가장 앞에 위치한다. 인용법이 비교적 간단하다. R v Baldini, 2012 BCCA 206 at paras 56-65. "R v Baldini"는 검사가 Baldini를 기소한 사건의 이름이다. "2012 BCCA 206 at paras 56-65"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상소 법원(B.C. Court of Appeal)에서 2012년에 판결했고 판결 번호는 206이며 인용된 문단은 56에서 65문단까지임을 뜻한다. 판례집 인용 Peter v Beblow, [1993] 1 SCR 980. "Peter v Beblow"은 Peter와 Beblow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의 이름이다. "[1993] 1 SCR"은 1993년도 캐나다 대법원 판례집(Supreme Court Reports) 1권(volume)을 뜻한다. "980"은 판결문이 시작하는 페이지 번호이다. Leung v Hanna (1999), [2000] 1 WWR 600 (BCSC). "Leung v. Hanna (1999)”는 1999년 판결된 Leung과 Hanna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의 이름이다. “[2000] 1 WWR”은 2000년도 웨스턴 위클리 판례집(Western Weekly Report) 1권(volume)을 뜻한다. “600”은 판결문이 시작하는 페이지 번호이다. “(BCSC)”는 판결한 법원인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대법원(B.C. Supreme Court)을 뜻한다. Egan v Egan (2002), 214 DLR (4th) 687 (BCCA). "Egan v Egan (2002)"은 2002년에 판결된 Egan과 Egan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의 이름이다. "214 DLR (4th)"은 도미니온 판례집(Dominion Law Reports) 214권 4번째 판(edition)을 뜻한다. "687"은 판결문이 시작하는 페이지 번호이다. "(BCCA)"는 판결한 법원인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상소 법원(B.C. Court of Appeal)을 뜻한다. R v Wholesale Travel Group Inc. (1991), 8 CR (4th) 145. "R v Wholesale Travel Group Inc. (1991)"은 검사가 Wholesale Travel Group Inc.을 기소해서 1991년 판결된 사건의 이름이다. "8 CR (4th)"은 형사판례집(Criminal Reports) 8권 4번째 판을 뜻한다. "145"는 판결문이 시작하는 페이지 번호이다. 두 개 이상의 출처(parallel citation) 한 판례를 인용하는데 두 개 이상의 출처가 요구될 때 쓰인다. 사건의 이름은 가장 앞에 한 번만 쓰고, 중립 인용이 가장 앞으로 오며, 서로 다른 출처의 표기를 쉼표로 구분해준다. Kerr v Baranow, 2011 SCC 10, [2011] 1 SCR 269. "Kerr v Baranow"는 Kerr와 Baranow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의 이름이다. "2011 SCC 10"은 중립 인용으로 캐나다 대법원(Supreme Court of Canada)에서 2011년 판결했고 판결 번호는 10임을 뜻한다. "[2011] 1 SCR 269"는 판례집 인용으로 2011년도 캐나다 대법원 판례집 1권 269 페이지를 뜻한다. 미국 보통 미국에서 판례 인용은 다음 형식을 따른다. Roe v. Wade 410 U.S. 113 (1973). Roe v. Wade (로 대 웨이드 사건)은 사건을 축약한 이름이다.(원고이자 상소인 제인 로과 피고인 헨리 웨이드간 소송을 뜻한다) 410 은 판례집 번호를 말한다. U.S.(United States Reports) 판례집 이름을 축약한 것이다. 113은 판례집의 페이지 번호이다. 판결문이 시작하는 첫장을 기준으로 한다. 1973은 판결이 난 연도를 말한다. 영국 Regina v. Wiki Regina는 여왕이란 라틴어로 이는 국가가 피고 또는 원고인 소송일 때 쓰인다. 독일 BVerfGE 82, 322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s) 판례집 제82권 322 페이지 판례라는 의미이다. 같이 보기 블루북 각주 외부 링크 LAW Legal Citation (McGill Guide) Quick Reference Canadian Legal Citation: Parallel Citation 판례 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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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Wu%20%28%EA%B0%80%EB%82%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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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u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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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일본어의 음절의 하나이며, 가나의 하나이다. 메이지 초기에 사용되었다. 원래부터 행 단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였는데, 메이지 초기의 학자들이 그 자리에 이 두 글자를 인위적으로 배정했던 것이다(단 히라가나 ''는 행 단의 문자로도 사용). 이 글자는 행 단에 배정되었기 때문에 그 음은 wu(IPA: [])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어에서는 예부터 wu와 u의 구분이 없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들어가는 글자가 비어 있는 상태였다(또는 행 단을 빌려와서 채움). 이 점은 (Yi (가나))와 비슷하다. 는 에서 윗부분(宀)을 생략한 것으로, 와 근원이 같다. 본래 이 둘은 원래의 한자에서 생략한 부분만 다르고 실제 쓰임은 완전히 같은 글자(이체자)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메이지 초기의 학자들이 를 와 달리 행에 속하는 문자로 규정을 지었다. 는 汙의 초서체이다. 이 글자는 엄밀히 말하면 의 헨타이가나로 봐야 할 것이나 메이지 시대에는 두 글자의 행을 달리하였다. 로마자와 한글 표기 로마자 표기의 경우, 근·현대 일본어의 실제 발음에 의거할 때(헵번식, 훈령식 등)는 u, 오십음도 내에서의 형식적인 위치(행·단)을 명시할 때(일본식)는 wu 정도로 적을 수 있을 것이다. 한글 표기의 경우 '우'로 적을 수밖에 없다. 요음 이 글자는 요음으로 사용할 일은 없으나, 굳이 쓰려면 다른 글자의 요음 표기 규칙에 의거해서 표기하면 될 것이다. 컴퓨터 코딩 유니코드에서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히라가나 (U+3046)는 당연히 포함되어 있으나, 히라가나 와 가타카나 는 2021년의 유니코드 14.0에 들어서야 각각 U+1B11F, U+1B122에 추가되었다. 금석문자경() 코드에서 해당 가타카나는 존재하지 않으나, 실제 모양이 같은 한자 (U+4E8E)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가나(, )의 경우, 히라가나 는 유니코드(U+3045)와 금석문자경 모두 포함돼 있으나 가타카나 는 둘 다 그렇지 않다. 같이 보기 Yi (가나) (, ) (𛀁, ) 각주 외부 링크 이즈〔〕에서의 수확 이로하()와 아이우에오() わ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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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B3%91%EC%84%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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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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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석은 다음 사람을 가리킨다. 이병석(李炳奭, 1910년 ~ ?)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이병석(李炳淅, 1935년 ~ )은 농림수산부 차관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이병석(1937년 ~ )은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다. 이병석(李秉錫, 1952년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이병석(1956년 ~ )은 대한민국의 의사이다. 이병석(李炳奭, 1971년 ~ )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다. 이병석(1977년 ~ )은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이다. 이병석(李炳錫, 1978년 ~ )은 대한민국의 사진가이다. 이병석(李炳碩, 1981년 ~ )은 대한민국의 소방공무원이며 화재조사관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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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C%9D%B4%ED%95%AD%EC%82%B0%EB%A7%A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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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항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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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항 산맥(太行山, Taihang Mountains)은 중국 산시성과 허베이성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이다. 길이는 남북으로 400 km이며, 베이징, 허베이, 샨시, 허난 4개의 성에 걸쳐 있다. 개요 타이항 산맥은 동쪽의 화북평야와 서쪽의 산서고원(황토고원의 최동단)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400 km에 걸쳐 뻗어 있고 평균 해발은 1,500m에서 2,000m 정도이다. 최고봉은 허베이성 장자커우 시의 소오대산(小五台山)으로 해발 2,882m이다. 산맥의 동쪽에 있는 해발 1,000m 정도의 창암산(蒼巖山)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봉이나 역사가 오래된 누각 등이 많은 풍경구이다. 산시성(山西省), 산둥성(山東省)이라는 지명은 이 타이항 산맥의 서쪽, 동쪽에 있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타이항 산맥의 북단은 베이징으로 흐르는 〈거마하〉(拒馬河)에 의해서 베이징 북부를 둘러싼 〈군도산〉(軍都山)(군도산맥은 좀 더 동쪽인 요서로 뻗은 옌산 산맥의 일부를 이룬다)과 멀어지며, 남단은 허난성의 심하평원에서 끝난다. 산맥의 동쪽은 화북평야로부터 우뚝 솟아 낙차가 크며, 단차 1,000m 이상의 절벽을 형성하고 있는 곳도 있다. 산맥의 서쪽은 산서성의 고원지대로 완만하게 연결되어 있다. 많은 강이 산맥으로부터 시작되며, 서쪽의 황하(黄河)나 동쪽의 화이허(海河)에 합류한다. 북부와 남부는 석회암, 중부의 지형은 편마암으로 구성되어, 많은 강에 의해 심하게 침식되어 험한 계곡이나 우뚝 솟은 봉우리들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계곡이 산맥을 동서로 가로질러 화북평야와 산서성을 연결하는 길이 되고 있어 옛날부터 《낭자관》(娘子關)이나 《자형관》(紫荊關) 등의 관문이나 요새가 설치되어 왔다. 또 이러한 강이 평야에 나오는 곡구에 해당하는 부분도 전략상, 교통상의 요지이다. 산업 산맥에는 석회암 외에도 석탄 자원이나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흙이 풍부하여, 탄광, 도자기 제조, 시멘트 제조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재해 여름에는 산맥의 동쪽으로 수분을 많이 포함한 바람이 바다에서 직접 넘어가기 때문에 폭우를 동반하며 하류에서 홍수가 발생된다. 1963년의 허베이성의 대홍수는 전형적인 예이다. 또 산맥이 화북평야에서 융기하고 있는 것은 단층의 기능이기도 하기 때문에 내륙성 지진의 진원대가 되는 경우도 있다. 산록의 허베이성 싱타이 시에서는 1966년에 20 세기 중국의 지진 사상에서도 최대급의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산시성 (산서성)의 산맥 허난성의 산맥 허베이성의 산맥 베이징시의 지리 화베이 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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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237%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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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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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위(魏) 청룡(靑龍) 5년 / 경초(景初) 원년 촉(蜀) 건흥(建興) 15년 오(吳) 가화(嘉禾) 6년 기년 위(魏) 명제(明帝) 11년 촉(蜀) 후주(後主) 15년 오(吳) 대제(大帝) 16년 신라(新羅) 조분 이사금(助賁泥師今) 8년 고구려(高句麗) 동천왕(東川王) 11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4년 사건 음력 8월, 신라, 메뚜기가 곡식을 해쳤다. 문화 탄생 사망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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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9%A8%EB%AC%B5%EC%9D%98%20%EB%B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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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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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Silent Spring)은 1962년 레이첼 카슨이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살포된 살충제나 제초제로 사용된 유독물질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여 쓴 책으로, 환경운동이 서양에서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된 책이다. 이 책으로 인하여 1963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환경문제를 다룬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이에 1969년 미국의회는 DDT가 암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증거를 발표하였으며, 1972년 미국 EPA(미 환경부)는 DDT의 사용을 금지하게 되었다. 개요 이 책은 레이철 카슨이 《뉴요커》라는 잡지에 투고한 내용을 묶어서 책으로 편찬한 것이다. 이 책은 DDT나, BHC같은 유기염소계 농약에 대한 생물학적 피해를 설명해놓은 책으로서, 이런 "유독물질의 사용을 줄여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예시들을 통해서 이런 농약들이 우리 인체에 어떤 해를 주느냐, 그리고 자연에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농약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자연적인 방법과, 자연에 폐를 끼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같이 보기 (아르디 제임스 저) (콜본 등 3인 공저) 각주 1962년 책 환경 농약 1962년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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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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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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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Q, Nq, nq는 다음 뜻을 가지고 있다. 에어재팬(Air Japan)의 IATA 약자. 작은여우자리 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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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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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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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이백칠십팔)은 277보다 크고 279보다 작은 자연수이다. 수학 합성수로, 그 약수는 1, 2, 139, 278이다. 과학 기타 연도: 278년 기원전 278년 2e02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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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FC%20%EB%94%94%EB%82%98%EB%AA%A8%20%EB%AF%BC%EC%8A%A4%ED%81%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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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디나모 민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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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디나모 민스크()는 벨라루스의 축구 클럽으로, 수도인 민스크를 연고로 하여 창단되었다. 디나모 민스크는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소비에트 탑 리그에 참가한 유일한 팀으로 54시즌 가운데 39시즌 동안 참가하였다. 1982년에는 소비에트 리그 우승을 하였다. 경기장 FC 디나모 민스크의 홈 경기장은 벨라루스 민스크에 있는 트락토르 스타디움이다. 1968년에 개장했으며, 16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1980년 하계 올림픽 직전에 리모델링 되었다. 두번째 리모델링은 1997년에 이뤄졌는데, UEFA의 새로운 규정에 맞춰 펜스를 설치하고 플라스틱 좌석을 설치하였다. 2005년에 한 번 더 리모델링이 이뤄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역사 1927년 : 디나모 민스크 (Dynamo Minsk)로 창단 1954년 : 해산됨 1954년 : 스파르타크 민스크 (Spartak Minsk)로 재창단 1959년 : 벨라루스 민스크 (Belarus Minsk)로 변경 1962년 : 디나모 민스크 (Dynamo Minsk)로 변경 1983년 : 유러피언컵에 최초로 출전함 유명 선수 드미트리 시초프 라자르 베셀리노비치 역대 우승기록 유럽 대회성적 외부 링크 벨라루스의 축구단 1927년 설립된 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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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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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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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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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백칠십삼)은 172보다 크고 174보다 작은 자연수이다. 수학 40번째 소수이다. 앞의 소수는 167이고, 다음은 179이다. 173은 제곱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22+132 = 4+169) 과학 기타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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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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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1%B8%EC%9A%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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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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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요()는 에콰도르 중부에 위치한 도시로 파스타사 주의 주도이며 면적은 87.67km2, 높이는 950m, 인구는 36,659명(2010년 기준)이다. 기후 각주 외부 링크 푸요 공식 홈페이지 에콰도르의 도시 에콰도르의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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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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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80%EC%A7%91%20%EC%9E%A5%EC%B0%BD%20%EB%B3%B4%EB%B3%91%EB%8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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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집 장창 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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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집 장창보병대 혹은 팔랑크스()는 고대 그리스 시민군의 전형적인 부대 형태 또는 그러한 부대를 운용하는 전술을 말한다. 이후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원정 때에도 이 전술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시민들은 직접 무장을 준비하여 유사시 호플리테스(ὁπλίτης)로 참전했다. 즉, 그리스의 보병은 훈련받은 우수한 병사라기보다는 무장을 갖춘 시민들의 집단이다. 따라서 개개인의 무용이나 현재와 같은 전술적 움직임 대신, 시민단 전체의 유기적인 연결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스식 투구, 흉갑, 정강이받이를 장비하고 왼팔에 묶은 대형의 원형 방패(호플론)로 내 몸 일부와 왼쪽 병사의 몸 일부를 가려주는 형태로 바짝 다가서붙은 밀집진을 형성하며, 드러난 양쪽 날개부분은 소수의 귀족 기병들이 보호해주게 된다. 진과 진이 서로 부딪혀서 먼저 대열이 깨지는 쪽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그리스 폴리스간의 전투였다. 그리스 밀집진의 위력은 비슷한 훈련도를 가지고 제대로 된 대열을 갖추지 못한 보병대와 싸울 때 발휘되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제국 간의 전쟁에서 지상군의 수효가 충분했을 때 그리스 보병 밀집진을 페르시아군이 돌파한 경우는 없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를 발전시켜, 종래 그리 길이가 길지 않았던 창의 길이를 몇배로 늘여 기병돌격에서도 버틸 수 있는 사리사를 개발하였다. 한편 과거 양쪽 날개의 보호에만 주력하던 기병대를 증강하여 보병 밀집진이 전열을 유지하는 동안 기병을 이용한 우회공격을 하는 망치와 모루 전술로 동방원정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밀집진형은 기동성이 떨어지며 탁 트인 평지에서만 운용가능하다는 전술적인 경직성을 가지고 있어, 이후 로마의 보다 유연한 군단병이나 우수한 기동성을 가진 궁기병대와의 싸움에서는 한계를 보였다. 역사 희랍 군단은 마케도니아가 오기 전에는 폴리스의 시민들이 직접 장비들을 제공하였는데, 그래서 적어도 아테네에서는 최상위 계급의 시민들은 지휘자로 활약하며 그 밑의 상위 시민들은 기병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대다수인 자유농민들이 중장보병이 되었다. 이 옛 방진은 장창보병대라고 보기에는 그냥 밀집 보병대라고 보아야하는데, 이유는 그때 당시의 무기는 약 2.5미터 정도의 도리()여서 마케도니아의 방진처럼 뒤에 있는 보병들이 공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전술적으로 알렉산드로 대왕의 원정 전에는 이런 옛 방진이 경직성이 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트라키아에서 전수 받은 펠타스트()가 이피크라테스 장군에 의해 유행하게 되면서 (특히 이가 아테네의 군대를 지휘할 때 투척병으로 스파르테의 중장갑 보병대를 말살할 때부터) 옛 방진은 점점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피크라테스 장군은 좀 더 근대화된 방진을 썼는데, 금속 장갑을 세마포 장갑으로 대신하여 개인의 방어력보다는 기동성을 중요시해 경보병을 맞서 싸울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엑크드로모이도 알렉산드로스 대왕후 생성되어 경보병을 상대하도록 경무장을 하게 하였으며 이런 밀집대에만 의존하지도 않았지만 필요시 밀집대에 서서 싸울 수 있게 하였다. 마케도니아식 장창보병대 전술은 다른 국가들도 본받게 되었다. 스파르테의 용병 장수 크산티포스는 카르케돈에게 이 전술을 유입하게 되었는데, 이는 한니발 장군에게 유용하게 되었다. 또한 게르마니아는 본받지는 않았지만 장창 보병이 있었고, 켈트족도 특히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들과 싸운후 밀집 보병대를 쓰곤 하였다. 마케도니아식 방진은 역시나 강했는데, 그러나 외적이 많지 않아 후계자 국가들은 방진에 더 의존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경보병과 기병의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같은 경우엔 자신들끼리 싸웠기 때문에 이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필리포스 5세 같은 경우엔 로마의 군단병의 유연성이 기병에게 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트라이키아인들 같은 기존의 "야만인"들을 장창보병대에 입대시켜도 역부족이었다. 같이 보기 원앙진 고대 그리스의 군사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사 군사 전술 20세기 이전의 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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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C%9D%B4%ED%8D%BC%ED%8A%B8%EC%9D%98%206%EC%A4%91%20%EC%9D%80%ED%9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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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퍼트의 6중 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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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퍼트의 6중 은하 또는 세이퍼트의 6중주 (Seyfert's Sextet)은 뱀자리 머리 부분에 있는 네 개의 은하군을 말한다. 육중 은하로 알려져있지만, 이중 네개 (NGC 6027, 6027a, 6027b, 6027c)만 상호작용 은하이고 막대나선은하 NGC 6027d (사진 가운데 왼쪽)는 배경 천체이며, NGC 6027e (사진 왼쪽 위)는 NGC 6027 은하에서 나온 별꼬리이다. 따라서 이 은하군은 6중 은하가 아닌, 4중 은하인 셈이다. 이 은하군은 1951년, 발견자인 칼 세이퍼트의 이름을 따 붙쳐졌다. 은하 각주 뱀자리 10116 6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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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7%A4%EC%88%98%EC%8A%A4%20%EB%82%98%EB%B0%9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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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수스 나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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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수스 나바스 곤살레스(, 1985년 11월 21일 ~ )는 스페인의 축구 선수로, 현새 스페인 라리가 세비야 소속이다. 포지션은 윙어, 풀백이다. 그는 빠른 스피드와 준수한 키핑능력, 강력한 중거리 슛 등이 장점이다. 세비야에서 650경기를 뛰었고, UEFA컵과 코파 델 레이를 포함한 8개의 주요 타이틀로 그의 경력은 대부분 세비야에 있다. 클럽 경력 세비야 FC 자타공인 세비야의 레전드로, 구단 역대 최다 출전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2번의 국왕컵, 4번의 UEFA 유로파리그, 1번의 수페르코파, 1번의 UEFA 슈퍼컵 우승을 함께하였다. 맨시티에서 돌아온 이후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하였고, UEFA 유로파리그 MVP에 선정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맨체스터 시티 2013년 6월 12일, 그는 오랫동안 몸을 담구었던 세비야를 떠나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하였다. 이적료는 영국 매체 스카이스포츠와 BBC는 1490만 파운드(약 263억 원)라고 추측했고, 더 선은 2100만 파운드(약 370억 원)라고 전했다. 또한 맨시티와 나바스의 계약기간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BBC는 4년 계약을 맺었다고 하였다.나바스는 "맨시티는 흥미진진한 계획을 세우는 팀이다. 나는 이 곳에서 뛸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어 매우 행복하다"며 "맨시티는 내게 많은 믿음을 보여주었고, 그 믿음에 대해 그라운드에서 보답하고 싶다"고 이적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 또한 "프리미어리그는 매우 빠르고 경쟁력 있는 축구를 구사하지만, 나는 내 플레이를 프리미어리그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매우 기다려지는 일이다"라며 프리미어리그 무대에 대한 기대감도 나타냈다. 이적후 나바스는 2013년 8월 19일에 맨체스터 시티에서 데뷔전 뉴캐슬 유나이티드전에서 경기 종료 직전 90분에 자신의 데뷔골을 뽑아내면서 팀은 4-0 승리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11월 24일에는 토트넘전에서 전반전 1분만에 선제골을 넣었고 후반전 막판에 결승골을 넣어 2골을 기록하였다. 2014년 3월 2일에는 풋볼 리그 컵 2013-14 결승전, 선덜랜드와의 경기에서 2-1로 이기고 있다가 그의 팀의 세번째 골로 3-1 승리를 하여 우승을 확정지었다. 국가대표 경력 2009년, 델보스케 감독의 선발로 대표팀에 데뷔하였다. 이후 2010년 월드컵, 2012년 유로 최종 명단에 승선하며 우승을 경험하였다. 2023년 6월, UEFA 네이션스리그 파이널에 출전하며 스페인 대표팀 역대 최고령 출전 기록자가 되었다. 수상 세비야 국왕컵 : 2006–07, 2009–10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 2007 UEFA 유로파리그 : 2005–06, 2006–07, 2019–20, 2022-23 UEFA 슈퍼컵 : 2006 맨체스터 시티 프리미어리그 : 2013-14 EFL컵 : 2013–14, 2015–16 스페인 FIFA 월드컵 : 2010 UEFA 유로 : 2012 UEFA 네이션스리그 : 2022-23 개인 라리가 최우수 공격형 미드필더 : 2009-10 UEFA 유로파리그 대회 MVP : 2022-23 UEFA 유로파리그 대회 베스트 : 2019-20, 2022-23 스페인 왕립 스포츠 협회 금십자상 : 2011 스페인 국가대표팀 최고령 출전 기록자 1985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스페인의 남자 축구 선수 안달루시아주 출신 축구 선수 스페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세비야 FC의 축구 선수 맨체스터 시티 FC의 축구 선수 201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FIFA 월드컵 우승팀 선수 UEFA 유로 2012 참가 선수 2013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참가 선수 남자 축구 미드필더 남자 축구 윙어 잉글랜드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스페인의 해외 진출 남자 축구 선수 스페인 남자 U-21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라리가의 축구 선수 세군다 디비시온 B의 축구 선수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선수 잉글랜드에 거주한 스페인인 세비야 아틀레티코의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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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A4%EC%8B%9C%EA%B0%84%20%EC%BB%B4%ED%93%A8%ED%8C%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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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컴퓨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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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컴퓨팅(real-time computing, RTC)이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작업 수행이 요청되었을 때, 이를 제한된 시간안에 처리해 결과를 내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컴퓨팅을 활용한 시스템은 실시간 시스템(real-time system)이라고 하는데, 작업의 요청에서 수행결과를 얻기까지의 시간적인 제약이 존재하는 시스템으로 그 제약의 엄격함에 따라서 경성 실시간 시스템과 연성 실시간 시스템으로 나뉜다. 실시간 시스템의 분류 경성 실시간 시스템 경성 실시간 시스템(hard real-time system)은 작업의 실행 시작이나 완료에 대한 시간 제약조건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 시스템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를 가리킨다. 예로 무기제어, 발전소제어, 철도자동제어, 미사일 자동조준 등을 들수 있다. 보장되는 컴퓨팅과 시간의 정확성과 컴퓨팅에 대한 예측성을 가지게 해주어야 한다. 연성 실시간 시스템 연성 실시간 시스템(soft real-time system)은 작업실행에 대한 시간 제약이 있지만, 이를 지키지 못하더라도 전체 시스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시스템을 말한다. 그 예로 동영상을 들 수 있다. 초당 일정한 프레임(Frame)이상의 영상을 재생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으나, 통신부하나 시스템의 다른 작업으로 인하여 프레임(Frame)이 건너뛰어져도 동영상을 재생하고 있던 시스템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여기서 프레임(Frame)은 DATA 통신, 컴퓨터 그래픽스(Computer Grapics:CG), TV(Tele Vision) 방송 등에서 전송되는 정보의 일정한 단위(초당 그림이 보이는 수라고도 볼 수 있음)이다. 같이 보기 실시간 운영 체제 일괄 처리 시분할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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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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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C%9D%BC%EB%A6%AC%EC%96%B8%20%EC%95%A4%ED%8A%B8%20%ED%8C%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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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 앤트 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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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리언 앤트 팜()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결성된 록 밴드이다. 구성원 드라이든 미첼(Dryden Mitchell) - 보컬(1995년 ~ 현재) 테리 코소(Terry Corso) - 기타(1995년 ~ 2003년, 2008년 ~ 현재) 타이 자모라(Tye Zamora) - 베이스 기타(1996년 ~ 2006년, 2008년 ~ 현재) 마이크 코스그로브(Mike Cosgrove) - 드럼(1995년 ~ 현재) 이전 멤버 조 힐(Joe Hill) - 기타(2005년 ~ 2008년) 알렉스 바레토(Alex Barreto) - 베이스 기타(2006년 ~ 2008년) 음반 목록 《Greatest Hits》(1999년) 《ANThology》(2001년) 《truANT》(2003년) 《Up in the Attic》(2006년)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마이스페이스 페이지 미국의 록 밴드 얼터너티브 록 얼터너티브 메탈 포스트 그런지 1996년 결성된 음악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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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8C%EC%9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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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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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은 동양의 철학적 사고의 틀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모든 환경을 음양을 가지고 해석했다. 각각 음()과 양()으로 표기하며 세상의 만물이 음 혹은 양으로 나뉘며, 양분된 개념이지만 음양의 공존과 조화를 통해 세상이 유지된다고 생각했다. 유래 그 시초가 어느 때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유가의 시조인 공자의 말에 "학(學)하고 사(思)하지 않으면 곧 망(罔)하고 사(思)하고 학(學)하지 않으면 곧 태(殆)한다" (남에게서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사색하지 않는다면 정당한 인식을 얻을 수는 없다. 혼자 사색만 하고 남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나, 또 도가의 시조라고 하는 노자(老子)의 도는 "독립하여 개(改)치 않고 주행하여 태(殆)치 않는다" "도는 독립적 존재이며 동시에 보편적 존재이다"라고 한 것과 같이 대구적(對句的)인 설명 방법으로 사물의 본질과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설명법은 고대부터 이미 보인다. 대구적 설명 방법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이 사물을 상대적으로 파악하려는 방법이 습성화되어, 음양사상으로 귀결되었듯이 상대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은, 중국 고대인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음양은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 중 음양가를 이루며 하나의 사상으로 성숙하였고, 송대의 주자가 성리학을 통해서 유학과 음양을 결합시켰다고 여겨진다. 보통 음양을 도가의 개념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본래 노자의 저서(《도덕경》 또는 덕도경)에서는 음양이 언급되지 않았으며, 단지 천(), 도(), 유(), 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아마 후세에 음양과 접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노자 도덕경의 덕편 42장엔 음양이 언급되어 있다.(萬物負陰而抱陽) 다만 도덕경에서의 음양이 후대 음양가의 음양만큼 추상화된 개념인가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많다. 음양사상 우주나 인간 사회의 현상은 하늘에 대해서는 땅이 있고, 해에 대해서는 달, 남에 대해서는 여, 기수에 대해서는 우수, 강에 대해서는 유(柔)가 있는 것과 같이 서로 상대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그것을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환원시켜 플러스와 마이너스 교체 또는 소장(消長)의 변화에 의하여 우주 현상 및 인간 사회의 현상을 해석하려는 것이 음양사상이다. 이 음양사상은 상대적으로 사물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과학사상으로서도 우수하고 또한, 철학적이다. 음양사상을 근간으로 인간 사회의 현상을 예측하고 판단하려고 한 것이 바로 '역(易)'의 생각하는 방법이다. 한의학과 음양 한의학의 음양은 한의학의 기본적인 틀이다. 도가와 달리 초기부터 음양이 핵심 개념이었다. 가장 오래되었다는 한의학 문헌 《황제내경》에서도 이미 음양이 사고의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이를 알 수 있다. 같이 보기 기 오행 태극 참고 문헌 이원론 역경 철학 철학 개념 동양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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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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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8C%EC%A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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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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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飮酒)는 영미법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운 상태를 말하며 이는 무죄를 주장하는 변론이 되지 못한다. 단 음주 상태가 피고가 범행의도를 가지지 않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가능하다. 같이 보기 공공장소 음주(:en:Drinking in public) 음주 운전 음주 연령 음료 마시기 먹기 삼키기 영미법 법률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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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1%B4%EA%B5%AD%20%28%EB%8C%8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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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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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建國)은 중국 대(代) 소성제(昭成帝)의 연호이자 대나라의 유일한 연호이다. 338년 10월에서 376년까지 38년 3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대나라는 실질적인 건국 시조인 탁발의로(拓跋猗盧)가 서진(西晉) 민제(愍帝)에 의해 대왕(代王)으로 봉해짐으로써 건국되었는데, 338년에 즉위한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 때에 이르러 체제를 정비하고 연호를 사용하였다. 376년에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에 의해 대나라가 멸망하면서 폐지되었다. 연대대조표 관련항목 중국의 연호 오호 십육국 시대의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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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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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UTC%2B07%3A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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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C+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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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C+07:20 시간대는 협정 세계시보다 7시간 20분 빠른 시간대이다. 시간대 1933년부터 1940년까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일광절약시간의 표준시로 사용되었다. 1933년 1월 1일 자정, 싱가포르 국민들은 UTC+07:00에서 UTC+07:20로 시계를 20분 늦추었다. 현재 사용중인 시간대 UTC+07:30로 변경하기 전인 1941년 9월 1일 자정까지 사용했다. 각주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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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C%8B%B1%20%EC%82%B0%ED%83%84%EB%8D%B0%EB%A5%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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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싱 산탄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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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라싱 클루브 데 산탄데르(Real Racing Club de Santander)는 칸타브리아 지방 산탄데르에 위치한 엘 사르디네로 경기장을 근거로 하는 스페인의 축구 클럽이다. 현재 감독은 파코 페르난데스이다. 이 축구단은 1913년 창단되었다. 1941년 '레알 산탄데르'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77년 다시 현재의 이름으로 복구되었다. 최고 성적은 1930-31 시즌의 준우승이다. 현재 세군다 디비시온에 속해 있다. 10-11시즌, 하반기에 임대로 영입한 지오반니 도스 산토스의 활약에 힘입어 36라운드에 1부리그 잔류를 확정지었다. 그 시즌은 12위로 마무리 하였다. 선수 현재 선수 명단 2011년 7월 15일 기준 임대 선수 명단 2011년 7월 15일 기준 저명한 선수들 외부 링크 라싱 산탄데르 공식 홈피 / 칸타브리아주의 축구단 1913년 설립된 축구단 칸타브리아주의 축구단 왕실 후원을 받는 스페인의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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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D%B8%EB%AC%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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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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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문(金仁問, 629년~694년 4월 29일)은 신라의 왕족이자 문무왕 때의 장군 및 정치가이고,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친동생이다. 자(字)는 인수(仁壽)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 의하면 그의 작위는 임해공(臨海公)이라 한다. 생애 태종 무열왕과 그의 부인 문희의 둘째 아들로, 문무왕 법민의 친동생이며, 문왕의 형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였고, 사어(射御 : 활쏘기와 말 타기)·음률(音律)·예서(隸書)에 능하였으며, 식견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진덕여왕 5년(651년), 당나라에서 숙위(宿衛)하고, 태종무열왕이 즉위하자 압독주 총관(押督州摠官)이 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쌓고 공신이 되어 식읍(食邑) 300호(戶)를 하사받았다. 백제가 자주 침공해 오자 당나라에 파견되어 원군을 청하니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摠官)으로, 김인문을 부총관으로 임명하여 백제를 정복하는데 출전하였다. 그 후 당나라에서 예전과 같이 숙위하며 고구려 정복에 양곡을 보급했고, 문무왕 8년(668년) 당과 합세,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정복하는데 출정하였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에 의하면 그의 작위는 임해공(臨海公)이라 하며 언제 책봉되었는지는 불확실하며, 식읍으로 웅천주(熊川州)를 하사받았다 한다. 676년에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축출하려 하자 당 고종은 김인문을 신라의 왕으로 대치하려 하기도 했다. 그후 김인문은 당나라로부터 보국 대장군 상주국(輔國大將軍上柱國)에 임명된 후 694년 4월 29일 당나라 장안에서 죽었다. 사후 사후 시신은 신라로 이송되어 금성 남부 서원에 장사되었다. 그 뒤 효소왕은 그를 증 태대각간에 추증하였다. 그의 묘비는 후대에 잃어버렸다가 1931년 경상북도 경주군 경주읍 서악리(현, 경주시 서악동 서악 2길 23번지)에 있던 서악서원(西岳書院)의 영귀루(詠歸樓) 서편 누문(樓門) 아래에서 상부가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었다. 1990년대 이후 그의 묘비명이 일부 판독, 그의 묘비명과 문무왕 묘비명에서 신라 태조를 성한왕이라 기록한 구절이 발견되어 김성한과 김알지에 대한 논란이 생겼다. 또한 김주원의 증손자 김흔은 임해공 휘 인문이 자신의 조상이라 하여, 후대에 김문왕의 후손으로 전해지는 신라김씨 족보와는 다소 이견을 보인다. 평가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기고 다재다능했던 김인문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웠고, 신라와 당 사이의 외교를 휼륭히 수행하였다. 김인문은 숙위로서 당에 머물며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는 데 외교력을 발휘했다. 삼국통일 후에는 신라와 당의 분쟁 조정 과정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백제를 정복할 때는 당의 장군으로, 고구려를 정복할 때는 신라군 사령관으로 신라를 이끌었다. 나당 전쟁이 발발했을 때 당은 문무왕을 폐위하고 김인문을 신라의 새로운 왕으로 삼는다고 할 정도로 김인문을 소중하게 여겼다. 결국 나당 전쟁에서 승리한 문무왕이 당에 사죄하는 것으로 전쟁이 끝났는데, 이때 김인문이 중재자로서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김인문이 등장한 작품 《삼국기》(KBS, 1992년~1993년, 배우 : 최석구) 《연개소문》(SBS, 2006년~2007년, 배우 : 김혁) 《대왕의 꿈》(KBS, 2012년~2013년, 배우 : 전광진) 영화 류승수 - 《황산벌》 (2003년), 《평양성》 (2011년) 같이 보기 문무왕 성한왕 태종무열왕 각주 외부 링크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김인문 신라의 군인 신라의 왕족 신라의 정치인 한국의 섭정 629년 출생 694년 사망 각간 신라의 불교 신자 7세기 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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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221%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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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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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남송(南宋) 가정(嘉定) 14년 금(金) 흥정(興定) 5년 일본(日本) 조큐() 3년 서하(西夏) 광정(光定) 11년 리 왕조(李朝) 끼엔자(建嘉) 11년 기년 남송(南宋) 영종(寧宗) 27년 금(金) 선종(宣宗) 9년 고려(高麗) 고종(高宗) 8년 몽골 칭기즈 칸 16년 서하(西夏) 신종(神宗) 11년 리 왕조(李朝) 혜종(惠宗) 11년 사건 탄생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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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가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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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가우 전투(1760년 11월 3일)는 프로이센군이 더 많은 수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한 전투로, 7년 전쟁의 전투 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이다. 프리드리히 대왕(Frederick II) 휘하의 프로이센군 49,000명은 오스트리아의 야전 사령관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Leopold Josef Graf Daun) 원수가 지휘하는 53,000명의 오스트리아군과 격돌하였다. 전투는 처음 쉬프티처 회엔(Süptitzer Höhen)의 고지대에 방어선을 구축한 오스트리아군과 한스 요아힘 폰 치텐(Hans Joachim von Zieten)이 지휘하는 프로이센 분견대 사이의 포격전으로 시작되었다. 포병대끼리의 전투소식을 들은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는 10개의 보병대대를 이끌고 신속하게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의 야포 400문에서 사격이 시작되었고, 프로이센군은 1시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5,000명의 척탄병을 잃었다. 공격은 지리멸렬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언덕을 공격하는 계획을 취소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상황에서 아군이 패했다고 믿었다. 오스트리아군의 다운 원수는 다리에 부상을 입고 토르가우로 이송되었는데, 카를 플린(Charles Flynn)을 빈에 있는 여황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에게 보내, 미리 승리에 대한 보고를 하도록 하였다. 황혼이 질 무렵 전투의 향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프란츠 모리츠 폰 라시(Franz Moritz von Lacy) 장군과 무의미한 전투를 벌이던 치텐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가 오스트리아군의 본대가 있는 고지대에 공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이 공격을 성공시켜 오스트리아군으로부터 포를 포획하는 데 성공하였다. 치텐은 탈취한 포를 이용하여 빼앗긴 포를 탈취하려고 두 번이나 공격에 나선 오스트리아군에 포격을 가하여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오후 9시 경까지 전황은 여전히 고지를 장악하고 있던 프로이센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퇴각하였다. 프로이센군은 결국 전투에 승리하였으나 피해는 더 컸다. 프로이센군은 약 20,000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오스트리아군은 16,000명의 병력과 43문의 포를 잃었다. 참고 문헌 Frederick the Great: A Military Life By Christopher Duffy 외부 링크 1760년 분쟁 7년 전쟁의 전투 오스트리아가 참가한 전투 프로이센이 참가한 전투 1760년 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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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AC%EB%A1%9C%20%28%EC%8B%9D%EB%AC%B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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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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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藜蘆)는 여로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분포 한국·만주·일본 등지에 분포하는 여러해살이풀로서 산지에서 자란다. 특징 높이는 40-60cm 정도이다. 뿌리줄기는 원줄기의 밑부분과 더불어 잎집이 썩으면서 남은 섬유로 덮여 있고, 원줄기에 돌기 같은 털이 있다. 잎은 어긋나며 길이 20-35cm, 너비 3-5cm의 좁은 피침형인데 위로 올라가면서 선형으로 되고 밑부분의 앞집이 원줄기를 완전히 둘러싼다. 꽃은 7-8월에 자줏빛이 도는 갈색으로 피고 지름 1cm 정도로서 반쯤 퍼지고 원추꽃차례로 달리는데 윗부분에 양성화가, 아랫부분에 수꽃이 달린다. 꽃덮이조각은 6개로서 장타원형이고 수술은 6개이며 씨방은 난형으로서 3개로 얕게 갈라지고 암술머리는 3개인데 뒤로 젖혀진다. 열매는 삭과로서 타원형이고 3개의 줄이 있으며 끝부분에 암술대가 달려 있는데 10월에 익는다. 쓰임새 유독성 식물로서 뿌리줄기를 살충제로 사용하며, 한방에서는 뿌리줄기를 강심제·임질·고혈압·중풍 등의 약재로 쓴다. 사진 같이 보기 흰여로 (Veratrum versicolor Nakai) 외부 링크 국가 표준식물 목록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환경부 자연생태 라이브러리 자연교실 The International Plant Names Index 여로과 유독식물 약용식물 초본식물 1960년 기재된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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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A2%85%EC%9D%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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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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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익(高宗益, 일본식 이름: 高島宗益, 高山宗益, 1915년 1월 17일 ~ 1995년 8월 5일)은 한국의 바리톤 성악가이다. 생애 1935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전국남녀현상콩쿠르대회에서 이인범과 함께 성악 부문 2위로 입상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 음악보국 음악회에 출연했고, 1943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조직한 국민가창지도대라는 친일 음악 단체에 가입하여 지방을 순회하며 군국가요를 보급했다. 이 단체에는 현제명을 중심으로 마금희, 김성태, 이흥렬 등이 참여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대한민국 초창기 오페라계에서 활동했다. 1948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가 공연되었을 때 출연했고, 1950년 초에 공연된 《카르멘》에도 출연했다. 한국 전쟁 개전 초기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대한민국 출신 음악가들로 조직한 경비대협주단의 합창부에 속해 있다가 인민군이 후퇴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평양시 인민대의원을 역임했으며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참고자료 송방송, 〈판소리 전통의 창조적 계승문제〉 (1990년 국악원 학술회의) 각주 1915년 출생 1995년 사망 일제강점기의 성악가 대한민국의 성악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성악가 바리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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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4%B1%EC%97%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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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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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열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이성열(李聖烈, 1888 ~ ?)은 독립운동가이다. 이성열(李星烈, 1951 ~ )은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이성열(李性烈, 1984 ~ )은 전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외야수, 내야수, 지명타자이자, 현 KBO 리그 kt 위즈의 육성군 타격코치이다. 이성열(1991 ~ )은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인피니트의 멤버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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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이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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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프랑수아 앙투안 마리 이베르(, 1890년 8월 15일~1962년 2월 5일)는 프랑스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생애 파리 음악원에서 폴 비달에게 음악을 배웠고, 1919년에 칸타타 《Le poète et la fée》로 로마대상을 받았다. 1937년 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French Academy)의 예술 감독을 했었고, 1955년부터 1957년까지는 파리에 있는 Opéra-Comique의 예술 감독을 했다. 파리에서 죽었다. 음악의 특징 이베르의 음악은 가볍고 재치가 있으며 매력 있는 선율과 다채로운 관현악법이 특징으로 여겨진다. 그는 프랑스 6인조의 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작풍은 그들과 비슷하다. 이베르의 작품에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 관현악 모음곡 《기항지》(1924), 오스카 와일드의 시를 토대로 한 교향시 《레딩 감옥의 발라드》(1920), 플루트 협주곡(1934), 알토 색소폰 소협주곡(1935~36), 피아노 모음곡 《이야기》(1922), 가곡집 《돈키호테의 노래》(1932), 오페라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1921), 《안젤리카》(1927) 등이 있다. 이 밖에 오슨 웰스 감독의 《맥베스》(1948) 등의 영화 음악도 작곡했다. 주요 작품 관현악곡 레딩 감옥의 발라드(1920) 기항지(1922) 디베르티스망(1929) 교향 모음곡 '파리'(1930) 카프리치오(1936) 축전 서곡(1940) 루이빌 협주곡(1953) 바카날(1956) 상상 속의 사랑 신들(1957) 보스토티아나(1961) 협주곡 첼로와 목관을 위한 협주곡(1925) 플루트 협주곡 바단조(1934) 알토 색소폰과 11대의 악기를 위한 실내 소협주곡(1935~36) 협주 교향곡(오보에와 관현악)(1949) 실내악곡 여섯 개의 소품(하프)(1916~7) 두 대의 플루트[또는 플루트와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을 위한 두 개의 악장(1921) 유희(소나티나, 플루트와 피아노)(1923) 사모스의 정원사(플루트, 클라리넷, 트럼펫, 바이올린, 첼로, 타악기)(1924) 세 개의 짧은 소품(목관 5중주)(1930) 플루트 독주곡 '소품'(1936) 현악 사중주(1937~42) 바이올린·첼로·하프를 위한 3중주(1944) 첼로 독주곡 '기를라자나'(1950) 피아노곡 폐허에 부는 바람(1915) 낭만 소품(1916) 이야기(10개의 소품)(1922) 알베르 루셀의 이름에 따른 토카타(1929) 작은 모음곡(1944) 가곡 돈키호테의 노래(1932) 세 개의 노래(1947) 플로린의 슬픈 노래(1951) 합창 미친 이의 노래(1924) 공포의 오중창(1943) 발레 주피터의 사랑(1945) 방황하는 기사들(1951) 오페라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1921) 안젤리카(1927) 참고 문헌 "Jacques Ibert" — 자크 프랑소아 앙투안 이베르 in Sax, Mule & Co, Jean-Pierre Thiollet, H & D, 2004, 135. 프랑스의 영화 음악 작곡가 프랑스의 작곡가 20세기 클래식 작곡가 1890년 출생 1962년 사망 발레 작곡가 오페라 작곡가 파리 음악원 동문 프랑스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스위스에 거주한 프랑스인 프랑스의 클래식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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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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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는 미국 육군의 탄도탄 요격유도탄 체계로, 정식 명칭은 종말단계고고도지역방어(終末段階高高度地域防禦, )이다. 단거리(SRBM), 준중거리(MRBM), 중거리(IRBM) 탄도유도탄을 종말 단계에서 직격파괴로 요격하도록 설계되었다. 'terminal'은 종말 단계를 의미하며, 개칭 전에는 전구, 전역이란 뜻의 'theater'라 했다. 전역탄도미사일(TBM: theater ballistic missile)이란 사거리 350 km 이상 1500 km 이하인 탄도 미사일(SRBM, MRBM, IRBM)을 말한다. THAAD의 미사일은 탄두를 싣고 있지 않으며, 충돌의 운동 에너지로 다가오는 미사일을 파괴한다. 운동 에너지를 사용하므로 통상의 탄두를 장착한 탄도유도탄이 폭발할 위험을 최소화하며, 앞부분에 핵을 장착한 탄도유도탄은 운동 에너지의 타격으로 폭발하지 않겠지만 화학 또는 생물학 탄두의 경우 분해되거나 폭발하여 주변을 오염시킬 위험이 있다. THAAD 시스템은 록히드 마틴이 주계약업자의 역할을 담당하여 설계, 제작, 조립했다. 주요 계약자로는 레이시온, 보잉, 아에로젯, 로켓다인, 허니웰, BAE 시스템스, 오시코시 디펜스, 밀톤CAT, 올리버 캐피털 컨소시움 등이 있다. THAAD는 원래 미 육군의 프로그램이었지만, 현재는 미사일 방어국의 사업이 되었다. THAAD와 비슷한 프로그램으로는 미해군의 해상발사형인 이지스 탄도미사일 방어시스템이 있으며, 현재 지상에서 발사되는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가 있다. THAAD는 2012년에 도입될 예정이었으나, 2008년 5월에 최초로 도입되었다. 대한민국 국방백서에 의하면 "사드(THAAD)는 현존하는 미사일방어체계(MD) 중 가장 요격 성공률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개요 종말비행단계에 돌입한 적의 단거리 및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패트리어트 보다 고고도에서 요격하기 위해서 개발됐다. "전구"(theater)는 미군이 전개되어 있는 일정 전투 구역을 의미하며 사드는 미국 본토 방어와 관계 없이 아태지역, 유럽지역과 같은 전구에 존재하는 지역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단거리와 중거리 미사일을 대응하는 요격체계이다. 이전에는 PAC-3형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이런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PAC-3형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비교적 소규모로 전개하기 쉬운 대신, 사거리가 짧기 때문에 고속으로 대기권에 돌입하는 중거리 탄도미사일 등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았다. 요격에 성공하더라도 지상에 미치는 피해가 크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이 때문에 PAC-3형 패트리어트 미사일보다 더 위쪽 고도에서 적의 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THAAD이다. THAAD 시스템은 다가오는 미사일을 조준하여 요격미사일을 발사, 파괴 충돌 기술(hit-to-kill-technology)을 이용하여 공중 충돌로 접근하는 탄도미사일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THAAD 시스템은 스커드 미사일과 같은 단거리와 중거리 전술(theater) 탄도 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THAAD 시스템은 주계약자인 록히드 마틴 우주 시스템즈 컴퍼니(LMSSC)가 설계하고 제작한다. 그 밖의 주요 참가업체로는 레이시온, 보잉, 로켓다인, 허니웰, BAE 시스템즈가 있다. 개발 예산은 2004년에만 700만 달러가 넘고 총 개발비는 수백억 달러가 넘게 들 것으로 예상된다. 개발 연혁 THAAD 미사일 방어 개념은 1987년에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방산업체에 대한 공식적인 제안 요구는 1990년에 있었다. 1992년, 미육군은 록히드 마틴을 THAAD 개발의 주계약자로 선정했다. 실제의 원형 개발에 앞서 AOE(Aero-Optical Effect) 소프트웨어 코드를 개발, 록히드사가 제안한 설계가 의도한 운용상의 기능을 대략적으로 입증하였다. 최초의 THAAD 발사는 1995년 4월에 있었다. 모든 시험발사는 DEM-VAL (Demonstration-Validation)이라는 프로그램 단계에서 있었고, 화이트샌드 미사일 시험장에서 발사되었다. 4회에서 9회까지의 시험발사였던 최초의 6회 요격시험은 실패했다. 첫 번째 목표물 요격 성공은 1999년 6월 10일에 있었다. 시험용 목표물은 헤라 미사일이었다. THAAD 프로그램은 2000년 6월 록히드 마틴의 평가에 의해 Engineering and Manufacturing Development (EMD) 단계로 접어들었다. 2005년 11월 22일, THAAD는 FLT-01 이라고 알려진 첫 번째 EMD 시험비행을 완료했다. 시험비행에 요격대상 목표물은 없었다. 이것은 LMSSC와 고객에게 성공으로 평가 받았다. 2006년 5월 11일, FLT-02 시험비행이 성공했다. 이것은 요격미사일, 발사대, 레이다, 화력관제시스템(FCS: fire control system)을 포함한 전체 THAAD 시스템을 갖춘 첫 번째 시험발사였다. 2006년 7월 12일, FLT-03 시험발사가 성공했다. 살아있는(live) 미사일의 요격에 성공했다. 미군은 2013년 북한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괌에 알파포대를 처음으로 배치했다. 2015년 3월초 현재 2개 대대를 배치했다. 미국 미사일 방어국은 2014년말 제작사인 록히드 마틴으로부터 4개 대대 분량을 넘겨받았다. 텍사스주 포트 블리스(Fort Bliss)의 1번 대대와 2번 대대는 발사대 3개조로 운영되다가 2014년 6개조로 확충됐다. 미군 당국과 록히드 마틴은 개량형인 THAAD-ER 개발에 착수했다. 배치와 각국 상황 개발과 배치 THAAD 개발비는 2004년 예산에서 7억 달러 이상이 예상됐다. 총 개발비는 100억 달러 이상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2008년 5월 THAAD를 갖춘 부대가 텍사스주 포트 블리스(Fort Bliss)에 편성됐고, 2009년부터 본격적인 운용이 예정됐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THAAD와 유사한 L-SAM을 개발 중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은 2014년 6월 3일 대한민국에 THAAD를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와 이에 대해 협의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THAAD 배치에 대해 중국, 러시아 등이 반대 의사를 표시한 바 있다. THAAD 배치는 핵을 탑재할 가능성이 있는 북한 미사일 대응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측면과 미·중 사이에 외교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딜레마를 안겨주는 사안이다. 사드 배치 문제를 둘러싼 한·중간 마찰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가운데, 중국 외교부는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에 대항해서 되겠냐, 너희 정부가 사드 배치를 하면 단교 수준으로 엄청난 고통을 주겠다"고 중국의 입장을 표명했다. 2017년 10월 30일,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THAAD 배치로 인해 붕괴된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했다. 일본 일본은 200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사일 공격에 대비한 기본적인 청사진을 완성했다. 그에 근거하여 지금까지 체계적으로 필요한 무기체계를 획득하였으며, 2017년까지 1차적인 방어능력을 구비한다는 목표이다. 그 결과 일본은 현재 PAC-3 17개 포대, SM-3 미사일을 장착한 구축함 4척, 자체 개발한 FPS-3와 FPS-5 레이다와 미국의 X-Band 레이다도 2식(式, 시스템의 단위)을 보유하고 있다. 앞으로 SM-3 미사일을 장착한 이지스함 4척을 추가하며, 미국과 공동으로 개발하여 온 요격 고도 500km의 SM-3 Block IIA도 2017년까지 완성하여 2018년경에는 군부대가 인계받도록 되어 있다.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사일 발사 이후 THAAD 도입을 검토한다는 마이니치신문의 보도가 나왔지만, 방위성은 구체적으로 도입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발표했다. 전세계의 사드 2018년 기준으로, 미국 사드, SM-3와 러시아판 사드인 S-400을 배치하거나, 배치할 나라들은 다음과 같다. 2014년 9월, S-400 2개 포대 30억 달러 구매계약, 6개 포대 계획중 L-SAM, 2016년 7월 13일 사드 1개 포대 배치 결정, 사드는 총 3개 포대 2012년 번개 6호 최초 공개, S-400 국산화 2017년 S-400 구매계약 2015년 S-400 구매하기로 결정 2017년 10월 S-400 구매계약 2011년 9월 2개 포대 구매계약 2010년 7월 3일, SM-3 배치 협정 체결 2016년 5월 12일, 이지스 어쇼어 개소식 2015년 S-400 배치, 러시아는 처음엔 부인 S-300은 이미 구매했는데, S-400은 여러 가지 보도가 혼재 구성 유도탄 THAAD 유도탄 본체는 1단식의 고체 로켓 부스터로 이뤄져 있다. 추력편향 노즐로 날아가는 방향을 조정해가며 초속 2,500m까지 가속한다. 미사일의 사거리는 대략 125 마일(200 km)에 이르며, 최대 93마일(150 km)의 고도까지 도달할 수 있다. THAAD 유도탄은 패트리어트 PAC-3와는 다르게 폭발성 탄두를 장착하지 않는다. 히트투킬 기술을 이용한 충돌(colliding)에 의해 적의 미사일을 파괴한다. 탄두로 탑재된 요격체(KKV)는 적외선으로 유도되는 운동에너지탄이다. 대기권 밖에서 로켓 부스터에서 떨어져나간 뒤 적 미사일을 적외선 화상 '시커'(seeker, 목표탐색장치)로 포착한다. 그후 탄두에 부착된 10개의 추진기로 궤도와 자세를 바꿔가며, 표적의 최적부위를 명중시킨다. THAAD 유도탄은 앨라배마주 트로이 근처의 록히드 마틴 파이크 카운티 조립 공장에서 조립된다. 그 곳에서는 THAAD 유도탄에 대한 최종적인 시스템통합, 조립, 시험이 이루어진다. 초기에 공개된 사드 외형을 살펴보면, 사드 미사일을 45도로 발사했을 경우, 최대 사거리는 900 km로 추정된다. 포대(battery) THAAD의 지상 시스템은 스스로 움직이거나 트레일러에 실려 움직이는 이동식이다. 1개 포대는 X밴드 레이다인 AN/TPY-2(종말형)와 6개 발사대, 발사대당 8개의 요격미사일로 구성된다. 미사일을 발사한 후 다음 발사를 준비하는 데까지도 30분 이상이 걸린다. THAAD 레이다 AN/TPY-2는 지상 배치형 레이다로, 1,000 km거리를 탐지할 수 있는 고성능 레이다다. 미사일 방어 체계인 사드의 일부 장비이며, 원거리에 위치한 탄도체를 탐지하는 장비다. 한반도에 배치 되는 사드는 요격용으로 600 km 거리를 탐지한다. 2006년 1월 31일, 대한민국 정부는 지상 통제 장치로 탐지 거리가 500km에 달하는 ‘그린파인’ 레이다 3대와 요격용 애로 2 미사일 36기를 한 세트로 구입하려고 한다고 매일경제가 단독 보도했었다. 2009년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슈퍼 그린파인 레이다, 미국의 FBX-T 사드 레이다, 프랑스의 M3R 레이다 중 하나를 도입할 것이라고 한다. 2005년 경기도 용인시에 대한민국 최대의 레이다 연구소가 세워졌다. 삼성 탈레스 종합연구소이다. 삼성 탈레스는 프랑스 탈레스와 삼성이 50대 50의 지분으로 설립한 회사이다. 슈퍼 그린파인 레이다: 이스라엘, 탐지거리 900 km, 실전배치중. 애로우 미사일. 이스라엘은 애로우를 포기하고 미국의 THAAD를 선택하려고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AN/TPY-2 레이다: 미국, 탐지거리 1000 km, (THAAD 요격모드 600 km) M3R 레이다: 프랑스, 탐지거리 300 km THAAD 레이다 스펙 레이다: AN/TPY-2 주파수: X 밴드 전진배치용 탐지거리: 1,000Km 종말요격용 탐지거리: 600Km 제조국가: 탐지거리 전진배치용: 1,000Km 종말요격용: 600Km 시어도어 포스톨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와 조지 루이스 코넬대 선임연구원은 사드의 TPY-2 레이다 전진배치 모드의 탐지거리가 3,000 km를 넘는다고 분석했다. 2008년 6월 1일, 미국 미사일방어국(MDA) 부국장인 패트릭 오라일리(Patrick O'Reilly) 육군 소장은 미국 알래스카주 주노(Juneau)에 임시 배치된 사드 레이다(AN/TPY-2)에 관해 지역 언론(JuneauEmpire)과의 인터뷰에서 "1억 달러(약 1,137억 원)가 넘는 이 레이다는 1,800마일(약 2,897km)이 넘는 탐지거리를 가졌으며, 단거리 미사일 추적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패트릭 오라일리는 이후에 미사일방어국 국장인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사드를 전진배치 모드에서 종말요격 모드로 변경하는데는, 소프트웨어 등 여러 가지가 바뀌기 때문에, 8시간이 걸린다. 2006년 THAAD의 AN/TPY-2 레이다가 일본 아오모리현(青森県)의 주일미군 샤리키(車力) 기지에 배치되었다. 탐지거리 3,000 km를 구글지도에서 확인하면, 이미 2006년부터 미군은 중국 거의 전역을 감시중임을 알 수 있다. 샤리키 기지에서 베이징은 2,000 km 떨어져 있다. 2006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넘게 중국은 일본이나 미국에 항의하지 않았다. 2014년 12월, 일본 교토의 주일미군 교가미사키 기지에 AN/TPY-2 레이다가 배치되었다. 교가미사키 기지에서 베이징은 1,700 km 떨어져 있다. 중국에 더 가까워졌다. 역시 구글지도로 확인하면, 탐지거리 3,000 km인 경우, 중국 거의 전역이 탐지된다. 역시 중국은 일본과 미국에 항의한 적이 없다. 이미 미국은 2006년부터 중국 거의 전역의 항공기와 미사일을 실시간 감시중이었기 때문에, 한국 주한미군에 사드가 배치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게 없다. 그런데 일본과 미국에는 항의도 보복도 없는데, 한국에는 레이다 전파가 베이징 상공을 커버한다면서, 대규모 경제보복중이다. 설치는 주한미군이 했는데, 미국에는 아무런 경제보복도 없다. 사드 개량형 데이터링크 2019년 말, 주한미군은 사드 개량형 배치를 한국에 통보했다. 새로운 장비가 들어오는 것은 아니고,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사드는 미군과 한국군의 패트리어트와 연동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탄도 미사일을 동시에 10발 발사했을 경우, 각 지역에 배치된 패트리어트와 사드가 연동되지 않아서, 북한 탄도 미사일 하나에 여러발의 요격 미사일이 중복 발사되어, 다른 탄도 미사일을 놓칠 수 있는데, 이제 새로운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로 각 지역의 패트리어트와 사드가 연동된다. 문제는, 한국군의 천궁과도 연동이 되어야만 중복 발사를 피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보도가 없는 것을 보면, 아직 연동이 안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발사대 성주에 배치된 사드는 발사대 차량이 유선으로 연결되었는데, 이를 무선으로 교체한다. 그동안 사드 레이더는 서울을 보호하지만, 사드 미사일은 성주에서 발사되면 서울 방어가 힘든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무선 연결로 발사대 차량 하나를 평택미군기지에 배치하면, 서울을 제대로 보호할 수 있게 된다. 미국 정부는 이번 사드 성능 개선에 10억달러(약 1조1800억원)를 배정했다. 이 비용은 한국 뿐만 아니라 미 본토와 괌에 배치된 것 등 미군이 보유한 7개 사드 포대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IRBM 요격 2017년 5월 14일, 북한은 IRBM 화성 12호를 최초로 시험발사했다. ICBM이라는 분석도 있었지만, 북한 정부는 화성 14호가 최초의 ICBM이라며, 평양에서 발사 성공 축제도 열었기 때문에, 화성 12호는 IRBM이다. 마하 17의 속도가 관측되었다. 사드 요격이 가능한 최대 속도 마하 15를 넘어서기 때문에 우려가 제기되었지만, 사드가 가장 요격하기 좋은 고도인 100km 구간에선 마하 13∼14 수준이라는 게 한국 국방부 설명이다. 2017년 7월 11일, 미국 미사일방어국은 최초로 IRBM을 사드로 요격하는데 성공했다. 동영상을 유투브에 공개했다. 2005년부터 시작된 사드 시험발사는 13회까지 모두 SRBM만을 요격했으며, 이번 14회 시험발사에서 최초로 IRBM을 요격했다. 14회 모두 100% 요격에 성공했다. IRBM은 사거리 3000-5500 km 인 탄도 미사일을 말하며, 속도는 중국 DF-26의 경우 마하 18 정도이다. 이번 시험발사로 사드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IRBM을 요격하는 무기체계라는 점을 입증했다. 패트리어트는 SRBM만 요격할 수 있으며, IRBM 요격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ICBM을 요격하는 GBI 미사일은 미국이 수출한 적이 없으며, 시험발사 성공률도 55%에 불과해 미완성인 요격체계로 알려져 있다. S-300으로 유명한 러시아도, IRBM을 요격하는 동영상을 전세계에 공개한 적은 없다. ICBM은 최대 사거리가 5500 km 이상인 탄도 미사일을 말하지만, 최소 사거리는 2000 km 정도 된다. 북한에서 남한은 사거리 2000 km로서, ICBM으로 공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이론상, 고각 발사라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IRBM은 최대사거리가 3000-5500 km인 탄도 미사일로서, 최초사거리는 수백 km로서, 북한이 부산 등 남한 후방의 한미 군사기지를 공격하는데 사용할 수도 있다. 패트리어트, 천궁 등으로는 IRBM의 요격이 불가능하거나 불충분하다고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도, 패트리어트, 천궁으로 IRBM을 요격하여 동영상을 공개한 적이 없다. 북한의 IRBM은 무수단 미사일이 유명하며, 30-50발 정도 보유한 것으로 한미 정보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사드 1개 포대는 1개의 레이다, 6개-9개의 미사일 발사 트럭으로 구성되며, 미사일 발사대는 8개의 미사일을 탑재한다. 성주에 6개 발사대를 배치하면, 48발의 무수단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최근 북극성 2호, 화성 12호 등 새로운 IRBM을 시험발사했기 때문에, 향후에는 사드 1개 포대로는 수량이 부족할 것으로 추정된다. 스커드 미사일로 유명한 SRBM은 기존의 패트리어트, 천궁 포대가 요격한다. 사드용 IRBM인지 패트리어트용 SRBM인지는, 고도와 속도로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최대사거리 1000-3000 km인 탄도미사일을 MRBM이라고 하는데, 사드 미사일 수량으로 보면, 한미 군당국은 MRBM은 패트리어트로 요격이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7년 기준으로 북한은 SRBM 스커드 미사일 800발, MRBM 노동 미사일 300발, IRBM 무수단 미사일 50발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한미 군당국은 추정하고 있다. 북한의 SRBM을 요격하기 위해, 한국은 독일 중고 패트리어트 PAC-2 8개 포대(발사대 6대 x 미사일 4발), 신형 패트리어트 PAC-3 1개 포대(발사대 8개 x 미사일 16발), 천궁 PIP 8개 포대(발사대 4대 x 미사일 8발) 등 대략 580발의 요격 미사일을 배치해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을 구축 중이다. 스커드 노동 1100발에 비해 절반 정도인데, 현무-2 미사일 수백발로 선제타격하는 킬 체인으로 나머지 스커드 노동을 제거할 계획이다. 같이 보기 THAAD J/FPS-5 J/FPS-3 SSPARS 해상 기반 X-밴드 레이다 대한민국의 사드 배치 논란 중국의 사드 보복 애로우 미사일 GBI 미사일 록히드 PLV 패트리어트 미사일 HQ-19 - 중국판 THAAD 한한령(限韓令, 금한령) - 중국의 보복조치 각주 외부 링크 프로젝트 상세 미 육군 프로젝트 페이지 MDA 프로젝트 페이지 프로그램 역사 DEM-VAL 테스트 프로그램 THAAD 첫 번째 요격 성공, 1999년 6월 10일 THAAD 두 번째 요격 성공, 1999년 8월 2일 EMD 테스트 프로그램 요격 발사 실험, 2005년 11월 22일 통합시스템 비행 테스트, 2006년 5월 11일 THAAD 요격 비행, 2006년 7월 12일 탄도탄 요격 미사일 지상 레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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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5%AC%EB%B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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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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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범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이구범(1964~ )은 미래에셋증권 IB부문 대표를 지낸 대한민국의 금융인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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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C%A6%88%EB%B2%A0%EB%A6%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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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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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베리(, , )는 산딸기속 식물의 먹을 수 있는 과일을 부르는 말이다. 대부분 산딸기아속에 속한다. 원래는 라즈베리 (종라즈베리(Rubus idaeus) 한 종만을 부르는 말이다. 종류 한반도 특산종인 복분자딸기(Rubus coreanus)도 상표명 등에서 ‘라즈베리’로 불린다. 라즈베리는 거의 모든 환경에서 자랄 수 있어 전 세계적으로 재배되고 있는 농산물이기도 하다. 현대에 널리 재배되고 있는 라즈베리 가운데 하나는 R. idaeus와 R. strigosus의 교배종이다. 산딸기아속 식물 가운데 "라즈베리"로 불리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곰딸기 R. phoenicolasius Maxim. 라즈베리 R. idaeus L. R. idaeus subsp. strigosus (Michx.) Focke 멍석딸기 R. parvifolius L. 복분자딸기 R. coreanus Miq. 산딸기 R. crataegifolius Bunge 서양복분자 R. occidentalis L. R. ellipticus Sm. R. gunnianus Hook. R. leucodermis Douglas ex Torr. & A. Gray R. rosifolius Sm. 그 외에도 다음 식물이 "라즈베리"로 불린다. 바위딸기 R. deliciosus Torr. (아노플로바투스아속) 오도라투스산딸기 R. odoratus L. (아노플로바투스아속) 함경딸기 R. arcticus L. (킬락티스아속) R. nivalis Douglas (카마이바투스아속) R. sieboldii Blume (말라코바투스아속) 생산 사진 각주 외부 링크 과일 장미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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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90%EC%95%84%ED%86%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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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아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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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아톤》은 자폐성 장애를 가진 청년이 마라톤을 통해 사회와 소통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2005년에 개봉하였다. 개요 이 영화는 KBS 《인간극장》에서 다큐멘터리로도 소개된 자폐성 장애 당사자 배형진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색되었다. 주인공 배형진(극중 윤초원)은 2001년 춘천 마라톤 대회에서 서브쓰리(3시간 이내 완주)를 기록하였다. 배형진과 달리 영화 중 개인코치는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다. 배형진은 2002년 철인3종경기(올림픽 코스)에 출전하여 약 15시간의 기록으로 완주하였는데 이 내용은 영화의 끝부분에서 자막으로만 표시된다. 한편 이 영화의 주연 배우 조승우는 〈말아톤〉 촬영현장 공개 때 취재온 기자 한명에게 몹시 화를 내서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자폐아처럼 한번 포즈를 취해보라”는 주문을 받고 나서였다. 그는 자폐아에 대한 기본적 상식도, 예의도 없는 요구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말아톤〉 시사회가 끝나고 조승우가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자폐아 연기는 어떻게 하셨나요? 힘들지 않았나요?”였는데, 그는 “운동복 입고 뛰느라 겨울에 땀 빼는 게 힘들었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듣는 이로서는 조금 당황스런 대답이다. 조승우는 이렇게 말한 이유에 대해 “배형진군(영화의 실제 모델)이나 다른 자폐아 친구들을 만나면서 자폐아는 ‘자개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꾸밈없는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과 만난다는 점에서 그래요. 달리 어떤 패턴이나 정의로 자폐아로 묶는 건 엄청난 오해라는 걸 깨달았죠.”라고 말했다. 줄거리 다섯 살의 지능을 가진 스무 살 윤초원(조승우 분)은 달리기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재능을 가졌다. 이전부터 윤초원의 달리기 가능성에 희망을 가져온 엄마(김미숙 분)는 마라톤을 가르쳐 주기로 결심하고 음주운전으로 인해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전직 메달리스트이자 체육교사인 정욱(이기영 분)에게 마라톤을 가르쳐 달라고 호소한다. 우여곡절 끝에 정욱은 이를 승락하고 교육이 시작된다. 정욱은 윤초원에게 매일 운동장에서 훈련을 시키지만 윤초원을 놔두고 혼자서 사우나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등 성실하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들은 곧 있을 마라톤 대회에서 세 시간의 벽을 넘는 일명 '서브쓰리'를 목표로 삼는다. 처음 윤초원이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정욱은 윤초원이의 순수한 마음과 가능성에 점점 마음을 열고 열심히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어느 날 윤초원이를 가르치던 체육교사의 실수로 인해 말다툼을 벌이던 엄마는 자신이 마라톤을 빌미로 아들 윤초원이를 혹사시키는 건 아닌지 고민에 빠지고 결국 마라톤 출전을 포기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마라톤 경주 당일 윤초원이는 이미 경기장에 가 있었고, 엄마는 출전을 말리려고 경기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윤초원이는 뛰고 싶어하며 엄마가 항상 되짚던 말을 꺼낸다.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아들 윤초원이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엄마는 아들 윤초원이의 손을 놓아 주고 마라톤 경주가 시작된다. 캐스팅 조승우 : 윤초원 역 조영관 : 어린 초원 역 김미숙 : 엄마 경숙 역 백성현 : 윤중원 역 김민기 : 어린 중원 역 이기영 : 손정욱 역 안내상 : 윤희근 역 김선재 : 초원 담임 역 탁용신 : 교장 역 전수지 : 세연 역 박소은 : 어린 세연 역 박미숙 : 얼룩무늬 핸드백 역 우기홍 : 잡지 기자 역 이상홍 : 지하철 청년 역 윤갑수 : 양재천 클럽 회장 역 맹봉학 : 양재천 클럽 총무 역 김도영 : 정신과 여의사 역 김재록 : 파출소 경찰 역 이정성 : 내과 의사 역 장남열 : 페이스 메이커 역 이성민 : 정욱 친구 역 박민경 : 얼룩무늬 스커트를 입은 여자 역 김영아 : 초코파이 여 역 김홍택 : 마라톤 의사 역 김빈 : 마트 여 역 이진영 : 택시기사 역 권영헌 : 옆집 아저씨 역 석명홍 : 택시기사 역 홍효인 : 친구 역 장민석 : 특수학교 친구 역 신동훈 : 특수학교 친구 역 장지웅 : 특수학교 친구 역 정옥권 : 특수학교 친구 역 조용선 : 특수학교 친구 역 이창헌 : 특수학교 친구 역 조인기 : 특수학교 친구 역 장수영 : 마라톤 사진사 역 김장욱 : 마라톤 사진기자 역 박봉욱 : 마라톤 아나운서 역 정철우 : 인라인 역 김준원 : 교통 순경 역 이두영 : 춘천 치어리더 역 정미영 : 춘천 치어리더 역 정미선 : 야구장 치어리더 역 이성진 : 야구장 치어리더 역 이민숙 : 야구장 치어리더 역 박정미 : 야구장 치어리더 역 이용헌 : 수영장 안전요원 역 김종배 : 중국집 배달원 역 박현수 : 세연 남자친구 역 허자경 : 미장원 누나 역 이완호 : 동물의 왕국 나레이션 역 흥행 성적 대한민국 국내 개봉에서 500만 관객 동원 2005년 상반기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성적 같이 보기 레인 맨 - 장애인을 배경으로 하는 내용이 비슷한 동일 소재의 미국 영화 말아톤 (드라마) - 일본에서 2007년 당시 TBS를 통해 소개된 동명의 원작을 리메이크한 드라마 수상 및 후보 각주 외부 링크 말아톤 공식웹사이트 2005년 영화 대한민국의 스포츠 드라마 영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포츠 영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영화 육상 영화 자폐증을 소재로 한 영화 쇼박스 영화 장애인 스포츠 영화 정윤철 감독 영화 감독 데뷔 영화 대한민국의 액션 영화 모자관계를 소재로 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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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84%B8%EC%9B%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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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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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원(徐世源, 1956년 3월 18일~2023년 4월 20일)은 대한민국의 코미디언, 방송인 등으로 활동했던 목회자였다. 생애 서세원은 1956년 3월 18일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실제로는 1955년생이다.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고, 1979년 TBC 라디오 개그 콘테스트를 거쳐 《노래하는 곳에》로 데뷔해 코미디언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1990년대부터는 TV 토크쇼나 오락 프로그램의 MC 활동에 치중해왔으며, 영화 방면으로는 1980년대부터 꾸준한 경력을 쌓아 2001년 서세원 프로덕션을 통해 《조폭 마누라》를 제작하여 상업적으로 성공하였다. 2010년부터 청담동에서 목회 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교회는 2014년에 문을 닫았다. 2014년 5월 서세원이 서정희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러한 어머니의 고통을 견디다 못한 아들 서동천과 딸 서동주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혼시키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결국 서세원은 2015년에 아내가 아닌 아들과 딸에 의해 결혼 생활 32년 만에 이혼했다. 사실 이 이혼 소송은 부인이 아니고 아들과 딸이 제기한 이혼 소송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대중에게 화제가 되었다. 2016년에는 23살 연하의 해금 연주자와 재혼하였다. 가족과 결별한 후인 2020년, 캄보디아로 이주하여 목회 활동과 각종 부동산 사업을 하다가 2023년 4월 20일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인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놈펜 현지에서 화장을 마친 후, 고인의 유해는 2023년 4월 30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조문을 받기 위해 임시로 안치되었다가 5월 2일 발인을 거쳐 충북 음성군 '무지개 추모공원'에 안장되었다. 가족 관계 CF 모델로 유명한 서정희와 본인 사이에 1남(서동천) 2녀(서동주), (서지혜)를 두었다. 2015년 말에 내연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득녀했다. 관련 소송 1991년 말 SBS TV 개국과 함께 1년 전속계약을 맺었으나 건강악화로 1992년 10월 7일 이후 방송활동을 중단했다가 같은 해 10월 26일부터 1년 전속계약을 체결했지만 약속을 어기고 MBC 전격 팡팡쇼 진행을 맡아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SBS는 1993년 6월 11일 서세원을 상대로 6천만의 위약금 청구소송을 서울민사지방법원에 제기했고 결국 서세원은 같은 해 9월 서울민사지방법원으로부터 SBS와의 계약 만료일인 1993년 10월 26일까지 SBS가 허용하지 않는 타방송사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못한다는 판결을 받아 전격 팡팡쇼에서 하차했다. 한편, MBC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91년 말 SBS TV 개국과 함께 1년 전속계약을 맺었으나 건강악화로 1992년 10월 7일 이후 방송활동을 중단했다가 같은 해 10월 26일부터 1년 전속계약을 체결했지만 약속을 어기고 전격 팡팡쇼 진행(9월 13일부터 정원관이 후임으로 들어옴)을 맡은 서세원 으로 인해 해당 TV 프로그램 진행이 차질을 빚음은 물론, 1989년 제 3회 이후 TV 개그맨 콘테스트를 개최하지 않은 데다 정재환 박미선 등 핵심 개그맨들의 공백 뿐 아니라 소위 '감자골' 사건까지 터져 말 그대로 "설상가상"이었으며 '감자골' 사건 2달 뒤인 93년 4월 열린 제 4회부터 TV 개그맨 콘테스트를 재개했는데 '감자골 4인방'의 멤버였던 김국진 김용만은 93년 6월 25일 미국으로 떠났고 또다른 '감자골 4인방' 멤버 박수홍은 군 입대 때문에 한동안 공백기를 가지기도 했다. 결국 서세원은 2000년 4월 23일부터 일요일 일요일 밤에 메인 MC를 맡아 MBC 예능 프로그램에 복귀했지만 불과 2개월 만에 중도하차하는 수모를 겪었다. 서세원프로덕션을 운영하면서 영화 《조폭 마누라》와 소속 연예인을 홍보하기 위해 방송사 PD들에게 홍보비 800만원을 건네고 허위 세금계산서를 작성해 법인세 3억7천만원을 포탈한 혐의(조세포탈 및 배임증재)로 수사가 진행되자 홍콩으로 출국했고 이후 미국으로 도피하였다. 여권이 무효화되고 인터폴 수배자 명단에 오르게 되자 2003년 4월 30일 귀국했다. 2003년 10월 구속됐으며, 이후 재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 2심 결과에 불복하고 2006년 4월 9일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2006년 11월 23일 원심을 확정하였다. 닛시엔터테인먼트 대표로 재직하던 2005년 11월 박효신 등의 가수와 음반 전속 계약을 맺고 모 회사와 16억원을 공동 부담해 일정 수의 음반을 제작, 유통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가, 음반 작업을 하기로 한 가수와의 계약이 파기되는 바람에 계약 위반으로 모 회사에게 민사소송을 당해, 2007년 3월 계약 보증금이었던 8억 7천여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2014년 5월에는 옛 배우자인 서정희를 폭행하여 전치 3주의 상해를 입히고 목을 조르고 다리를 잡고 끌고 다니는 등의 폭력을 행사했고, 소송 끝에 2015년 8월 21일 공식 이혼하였으며 2009년 주가 조작 및 회사 자금 횡령 혐의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아 2010년 6월 KBS의 출연 금지 명단에 올랐다. 종교 활동 서세원은 전부인 서정희와 함께 교회에 출석하며 다양한 프로에 출연해 교인임을 주장했다. 이후 그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나 구체적인 신학교명과 안수를 준 교단명은 밝혀지지 않았다. 목사가 된 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솔라 그라티아 교회를 세웠으나 재정적인 이유로 문을 닫았다. 하지만 목사로써의 활동은 전광훈 목사와 함께 의 홍보와 함께 반공주의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는 또한 캄보디아에서 목회활동을 펼치던 중 캄보디아의 한 병원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출연 경력 방송 경력 TBC 《노래하는 곳에》 KBS 《가족오락관》 KBS 《뛰어라 날아라》 KBS 《국군장병과 함께》 MBC 《일요일밤의 대행진》 MBC 《유쾌한 스튜디오》 MBC 《청춘행진곡》- 서세원의 스타데이트 MBC 《청춘만만세》- 지세왕 MBC 《금주의 FM인기가요》 MBC 《FM은 내친구》 SBS 《스타와 만나요》 SBS 《SBS 인기가요》 SBS 《코미디전망대》 SBS 《토요일7시 웃으면 좋아요》 MBC 《서세원 최유라의 100분쇼》 KBS 《FM대행진》 SBS 《주부만세》 KBS 《전원집합 토요대행진》 MBC 《전격 팡팡쇼》 KBS 《유머채널》 KBS 《웃음은 행복을 싣고》 KBS 《퍼즐 특급열차》 KBS 《MC 온 퍼레이드》 KBS 《지구촌 영상음악》 KBS 《밤과 음악사이》 MBC 《TV시간여행》 KBS 《폭소 대작전》 KBS 《서세원 양미경의 행복이 가득한 집》 KBS 《출발 토요대행진》 KBS 《TV는 사랑을 싣고》 SBS 《주부를 위하여》 KBS 《코미디 세상만사》 KBS 《체험 삶의 현장》 KBS 《도전 지구탐험대》 KBS 《전격 퍼즐쇼》 KBS 《이문세쇼》 KBS 《노영심이 여는 세상》 EBS 《야호 퀴즈마을》 KBS 《가요산책》 KBS 《KBS 빅쇼》 KBS 《서세원의 화요스페셜》 KBS 《연예가중계》 KBS 《슈퍼선데이》 KBS 《특종 비디오저널》 KBS 《서세원 김지호의 시사터치 코미디 파일》 KBS 《서세원쇼》- 2002년 MC 중도 하차 SBS 《좋은 세상 만들기》 KBS 《스타출동 크리스마스 축제》 KBS 제2라디오 《서세원의 네시엔》 임시 진행 YTN 스타 《서세원의 生쇼》 2013년 채널A 《서세원·남희석의 여러가지연구소》 드라마 경력 MBC 《나리집》 KBS 《오늘은 왠지》 영화 경력 《이런 여자 없나요》(1981년) - 서승철 역 《연분홍 치마》(1981년) 《바보들의 청춘 '82》(1982년) 《납자루떼》(1986년 각본, 연출) 《영구와 우주 괴물 불괴리》(1994년) - 영구 어머니 역 《조폭마누라》(2001년 공동제작) 《긴급조치 19호》(2002년, 제작) 《네발가락》(2002년 투자) 《도마 안중근》(2004년, 각본, 연출, 각색, 제작) 《젓가락》(2010년, 각본, 연출) CF 경력 1970년대: 해태제과식품 바밤바, 아바초콜릿 1981년: 해태아이스크림 부라보콘 1983년: CJ제일제당 아이미 1984년: 삼양식품 에스키모바 1985년: 롯데제과 가위바위보 1985년: 종근당 옥산콤(강석하고 콤비로 출연) 1987년: 코실크무역 코끼리본드 1987년: 동아제약 가그린 1988년: 오리온 고소미 1988년: LG전자 88싱싱냉장고 1989년: 샤니 꿀떡꿀떡 1990년: 롯데제과 ABC초콜렛, 해바라기초코볼 1990년: 동산C&G 바이오썬 1987~94년: 동화약품 까스활명수, 까스활명수큐 1993년: 화인하우스 화인산업 1994년: 웅진씽크빅 웅진미디어 1995년: 부라더상사 부라더홈미싱 1996년: 공익광고협의회 신소비문화 공익광고 1997년: 삼성물산 에버랜드 1997년: 대우통신 아망떼900 여보세요 1997년: 해태htb 축배사이다 1998년: KT 무료전화 080 1998년: 웅진씽크빅 웅진출판사 1999년: 라이온코리아 닥터세닥 1999년: 삼일제약 콜디 1999년: SK브로드밴드 수상 경력 모범상록수 표창(1999년) 대한민국연예예술상 남녀 희극인 연기상(1999년) SBS 연기대상 MC상(1998년) 한국방송프로듀서상 출연자상(1988년) 문화체육부 선행연예인 장관 표창(1997년) 한국방송대상 남자 코미디언상(1997년) KBS 코미디대상 대상(1995년) MBC 연기대상 코미디부문 최우수상(1988년) 백상예술대상 남자TV 예능상(1988년) MBC 연기대상 코미디부문 우수상(1987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특별상(1983년) TBC 라디오 개그콘테스트 5위(1979년) 기타 경력 에스에스원 시네마 대표이사 서세원프로덕션 대표이사 닛시엔터테인먼트그룹 대표이사 국제어린이후원단체 플랜코리아 친선대사(2001) 2011 솔라그라티아 교회 담임목사 같이 보기 양원경 유재석 신동엽 이경규 신은경 최성훈 각주 외부 링크 1956년 출생 2023년 사망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대한민국의 남자 희극인 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 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대한민국의 남자 배우 대한민국의 팝 가수 대한민국의 남자 가수 대한민국의 작사가 대한민국의 작곡가 대한민국의 영화 각본가 대한민국의 기업인 대한민국의 방송인 대한민국의 조세 범죄 기결수 대한민국의 범죄인 청주시 출신 달성 서씨 대전삼성초등학교 동문 부산대신중학교 동문 대륜고등학교 동문 경기대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개신교도 심장 마비로 죽은 사람 의료 사고로 죽은 사람 의문사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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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C%EC%82%AC%EC%86%8C%EC%86%A1%EB%B2%95%EC%9D%98%20%EC%9B%90%EC%B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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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소송법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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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소송법의 원칙은 미국 민사소송제도를 이루는 법리를 말한다. 미국법은 보통법 체계로 판례중심으로 법체계가 형성 발전되어 왔다. 연방국가 체제를 취함으로써 연방법, 주법의 이원화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사법제도 역시 이원화되어 있다. 민사소송법 역시 이원화 구조에서 연방법원과 주법원과의 관할 배분 문제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미국 연방민사소송규칙은 제1장 규칙의 범위; 소송의 형태; 소송의 형태에서 다음과 같이 원칙을 설시하고 있다. 민사소송법 영미법 법률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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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A%B0%95%EC%9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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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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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왕(定康王, ?~887년 음력 7월 5일, 재위 : 886년~887년)은 신라의 제50대 국왕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황(晃)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딸인 문의왕후(文懿王后)이다. 생애 김황의 형 헌강왕이 재위 12년째인 886년 7월 5일에 사망한 후 헌강왕의 태자 김요(金嶢)가 아직 두 돌이 안된 어린 나이였으므로, 김황이 신라 제50대 왕에 즉위하였다. 887년 1월에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마련해 왕 스스로도 행차하고 강의를 들었다. 같은 달, 한주(漢州)의 이찬 김요(金蕘)가 반란을 일으키자 파병하여 김요를 죽였다. 김요의 난을 평정한 후, 5월에 병을 얻어 쓰러졌다. 그 때에 「내 병이 위급하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불행이 사자(嗣子)가 없으나 나의 누이 만(曼)은 천자가 명예하고 골상이 장부와 같으니 경들은 옛날 선덕, 진덕의 고사를 의방하여 세우는 것이 좋을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긴 후 7월 5일에 사망했다. 가계 부왕 : 경문왕 (景文王) 모후 : 문의왕후 참고 발해 대현석 (871년 ~ 895년) 신라 국왕 생년 미상 887년 사망 신라 사람 신라의 왕족 9세기 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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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9D%B8%EA%B3%A8%EB%A6%B0%20%EB%AA%BD%EA%B3%A8%20%EC%9E%90%EC%B9%98%EC%A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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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인골린 몽골 자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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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인골린 몽골 자치주(, , , )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가장 큰 자치 지역으로 면적은 462.700 km2이다. 중심지는 쿠얼러이다. 주민 2000년의 조사에 따르면 바인골린의 인구는 105만6,970명 (인구 밀도: 2.28km2)이다. 2000년 바인골린 몽골 자치주의 민족 조사 행정 구역 1개의 현급시, 7개 현, 1개 자치현을 관할한다. 현급시 쿠얼러 시(코르라 시)(, ) 현 룬타이 현(부구르 현)(, ) 위리 현(로프누르 현)(, ) 뤄창 현(차키리크 현)(, ) 체모 현(체르첸 현)(, ) 허징 현(세징 현)(, ) 허숴 현(호수트 현)(, ) 보후 현(바그라슈 현)(, ) 자치현 옌치 후이족 자치현()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자치주 중화인민공화국의 몽골족 자치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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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C%9D%B4%ED%83%80%EB%8B%89%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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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 (동음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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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RMS 타이타닉은 1912년 침몰한 영국의 여객선이다.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는 1912년 4월 15일에 여객선 RMS 타이타닉이 침몰 사건이다. 타이타닉 (미니시리즈)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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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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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545%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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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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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남량(南梁) 대동(大同) 11년 동위(東魏) 무정(武定) 3년 서위(西魏) 대통(大統) 11년 신라(新羅) 건원(建元) 10년 베트남 전 리 왕조(前李朝) 천덕(天德) 2년 기년 남량(南梁) 무제(武帝) 44년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 12년 서위(西魏) 경문제(景文帝) 11년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6년 고구려(高句麗) 안원왕(安原王) 15년 / 양원왕(陽原王) 원년 백제(百濟) 성왕(聖王) 23년 사건 토틸라의 동고트족 군대가 로마를 점령, 약탈하다. 고구려, 안원왕이 사망하고 아들 평성이 양원왕으로 왕의 자리에 오름. 문화 신라 거칠부가 《국사》(國史)를 편찬하고 파진찬으로 임명되다. 탄생 사망 고구려(高句麗) 23대 국왕 안원왕(安原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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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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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9C%EB%A1%9C%EB%8B%88%EB%AA%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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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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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니모(Geronimo, 1829년 6월 ~ 1909년 2월 17일)는 치리카후아(Chiricahua) 아파치 족의 주술사이며, 아파치 전쟁 중 아파치족 영토를 계속 잠식해들어오던 멕시코와 미국을 상대로 투쟁했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걸출한 지도자였다. 그의 이름은 키리후아 어로 Goyaałé라고 쓰며, 하품하는 사람(one who yawns)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Goyathlay 또는 Goyahkla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여러차례 체포와 탈출을 반복하며 투쟁하던 제로니모였지만, 미국 기병대가 1886년 8월에 그를 체포한 후 그의 투쟁도 막을 내렸다. 배경 유럽인들이 오기 전 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던 인디언들은 나중에는 소수민족으로 흩어진다. 그들은 북아메리카의 95%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급격히 인구 수가 줄어들었다. 그 원인 중 하나로 백인들의 식민지 전쟁, 학살, 약탈이 있다. 1492년 가을 콜럼버스가 앤틸리스 제도에 닻을 내렸을 때 백인들에게는 대륙의 발견이었으나 원주민들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백인들은 처음에는 종교적인 이류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륙으로 건너왔지만 금광을 발견하자 그들은 더많은 황금과 땅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었다. 금을 얻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었으며 백인들의 대량학살로 인한 질병이 원주민들의 인구 수를 줄게 했다.1883년에는 평원의 들소 떼의 도살도 끝이 났고 그와 함께 인디언의 숫자도 3분의 1로 줄었다. 당시 아파치족은 미국의 남서부에 살고 있었고 여러 지파로 갈라져 있었으며 6000명도 안되는 소수 부족이었다. 그러나 250년이 넘게 스페인 사람들에게 대항해 게릴라전을 펼쳤고 부족과 땅을 지키기 위해서 뭉치는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제로니모였다. 생애 및 가족 제로니모는 당시 멕시코의 일부였던 뉴멕시코주의 길라 강의 지류였던 터키 크리크 근교의 아파치 베돈코헤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Bedonkohe Apache의 추장이었고 3명의 형제와 4명의 자매들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어머니는 Tchihende로 데려가고 그들과 함께 키웠다. 제로니모는 17살에 Nedni-Chiricahua의 Alope와 결혼했고 3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기원 스페인어 제로니모라는 가톨릭 성인의 이름에는 영어로는 제롬, 라틴어로는 히에로니무스라 불리는 카톨릭 성인이라는 뜻이 있다. 제로니모의 본명은 고야틀레이 '하품하는 자'를 뜻한다. 멕시코의 '카스키예'라는 마을에서 아파치족은 카스키예의 수호성인인 성 제로니모의 축일에 카스키예를 습격하였다. 성당에서는 성 제로니모의 생을 재현하는 연극이 상연될 예정이었는데, 고야틀레이가 나타나자 멕시코군의 펠리페 대장은 장난으로 만세를 외쳤다. “성 제로니모 만세! 성 제로니모 만세!” 대장이 외치니 사람들도 따라 외쳤다. “성 제로니모 만세! 성 제로니모 만세!” 그 후 그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제로니모가 되었다. 카스키예 전투 1858년 3월 5일, 호세 마리아 카라 스코 대령이 이끄는 소 노라 출신 멕시코 군인 400 명 일 개 중대 가 야노스 (아파치의 카이-예이) 외부의 제로니모 진영을 공격했다. 베돈코에족 4분의 1에 달하는 여자와 아이들이 죽었다. 이 전투에서 제로니모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3명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따라서 제로니모는 멕시코인들을 평생 증오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만나는 멕시코인들마다 살해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National Geographic)에 따르면 "소 노라 총재는 1886년 제로니모의 야생 경력 마지막 5 개월 동안 16 명의 전사가 500 명에서 600 명의 멕시코 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나는 많은 멕시코 인들을 죽였습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계산할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 만 여전히 멕시코 인에 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나와 함께 그들은 항상 위험하고 악했습니다. — Geronimo, My Life: The Autobiography of Geronimo, 1905.추장이었던 Mangas Coloradas는 제로니모의 멕시코인들에 대한 복수를 돕기 위해 Cochise로 그를 보냈다. 추장 코치스는 Mangas Coloradas의 사위였고 그는 초코넨족의 지원을 약속했다. 또한 제로니모는 동쪽의 네드니 아파치 부족으로 가서 추장 후의 네드니족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카스키예 학살이 벌어진 약 1년 후 세 부족이 멕시코 국경에 모여들었다. 제로니모는 이 전투의 지휘자였는데, 두시간 가량의 격렬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멕시코인들에 대한 복수를 한다. 아파치들은 제로니모를 아파치 부족 전체의 전시 추장으로 삼았다. 전시추장이 된 제로니모는 이후 30년 동안 백인들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인디언 지도자가 되었다. 아파치 인디언들에게 제로니모는 ‘전쟁주술사’와 같았다. 평시에 추장이나 주술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전쟁주술사는 위기에 처한 부족을 구해주는 메시아와 같은 존재였다. 카스키예에서 대대적인 복수를 감행했지만 제로니모의 분노는 사그라 들지 않았다. 가족을 잃은 슬픔은 어떤 복수로도 보상받을 수 없었다. 제로니모는 계속해서 결사대를 조직해 멕시코 마을을 습격하고 약탈전을 벌였다. 그에 따라 멕시코군은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고, 미군은 애리조나에서 인디언 소탕작전을 벌였다. 이 전투 이후 제로니모는 그의 악명만큼 높은 현상금이 걸렸다. 아파치 전사 한 명당 100페소, 아파치 여자는 50페소, 아파치 아이나 여자는 25페소였지만 제로니모의 현상금은 2000페소와 말 20마리, 소 50마리였다. 미 육군과 맞닥뜨리기 전에, 이미 멕시코 전역에는 그의 악명이 퍼져있었다. 투항과 죽음 제로니모는 1884년 멕시코군과 마지막 큰 전투를 벌인다. 위에서 미군들이 인디언들을 소탕하고 있을 때 제로니모는 멕시코로 남하한다. 그는 야영지를 자주 바꾸어 위치를 들키지 않게 했고 잠자기 전에는 정찰병을 세워 대비했다. 제로니모는 항상 부족민들을 설득하여 스스로 나서서 싸우기를 독려하여 수많은 아파치 전사들이 목숨을 걸고 그를 따랐다. 그를 뒤쫓는 미군들을 그의 지략으로 항상 따돌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전사는 죽어갔고 수는 줄어들었다. 결국 그에게 한계가 왔고 5000명의 토벌대에 맞서는 그는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해 36명에 불과했다. 1886년 9월 3일 제로니모에게 토벌대의 사령관 넬슨 마일스는 플로리다에서 잠시 생활한 뒤 반드시 애리조나로 되돌아가게 해준다고 약속하면서 항복을 권유했다. 이튿날 항복한 제로니모는 이후 다시는 전사의 길을 걸을 수 없었다. 1909년 2월 17일 제로니모는 여전히 포로인 몸으로 죽었다. 죽기 직전, 그는 자신의 애마에 안장을 얹어서 한 나무에 묶어 놓으라고 유언했다. 3일 후 그말을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따르지 않았다. 1906년 자서전을 낸 후 3년 뒤인 1909년 2월, 말을 타고 집으로 오던 중 말등에서 떨어졌고 친구가 발견할 때까지 밤새 추위 속에 방치되었다. 오클라호마주 실 요새(Fort Sill)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조카에게 항복하기로 한 결정을 후회했다고 고백했다. 그가 조카에게 한 말이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항복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마지막 사람이 될 때까지 싸워야 했었다." 그는 아파치 인디언 포로 묘지의 오클라호마 포트 실에 묻혔다. 그가 죽을 때는 네드니 아파치족 추장 후의 아들인 아사 다크루지가 곁에 있었다. 아파치족의 전사 제로니모는 이름만 들어도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던 전사였지만 초라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항복 이후 1894년 제로니모는 실 요새로 옮겨갔고 미국에게 애리조나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수락하지 않는다. 요새 밖에서 아파치와 제로니모의 이름은 유명해져갔고 결국 1898년 제로니모는 트랜스미시시피와 오마하의 국제박람회에 구경거리로 전시되었다. 이 전시회에 이어 그는 박람회, 전시회 및 기타 공공 행사를 자주 방문했다. 그는 자신의 사진, 활과 화살, 셔츠 단추, 모자까지 팔아서 돈을 벌었다. 그는 자신의 단추를 떼서 사람들에게 팔았을 정도로 그의 물건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여할 만큼 유명인사가 되었다. “제로니모!”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낙하병들은 적지 상공의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이렇게 외쳤다. 제로니모는 곧 용기와 희생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수영장의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들까지도 “제로니모~!”라고 외치면서 뛰어내렸다. 헬리콥터 이름에는 ‘아파치’가 붙었으며, 컴퓨터 소프트웨어 게임에도 ‘아파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제로니모와 아파치족을 소재로 여러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부영화에 제로니모와 아파치는 끊임없이 등장했다. 더 보기 오퍼레이션 넵튠 스피어 - 오사마 빈라덴 사살 작전 참고 문헌 아파치 최후의 추장 제로니모(이성아 2009) 각주 외부 링크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제로니모 1829년 출생 1909년 사망 뉴멕시코주 출신 폐렴으로 죽은 사람 멕시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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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A9%EC%B6%A9%EC%8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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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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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충상(黃忠尙, 1945년 2월 19일~ )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전남 강진에서 출생하였고, 1969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8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경기대학 한국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2001~2012 까지)를 엮임했으며 문학나무 편집주간으로 현재 일하고 있다. 2013년부터 박인성기념사업회와 더불어 ‘박인성 스마트소설상’을 제정 수여함으로써 스마트소설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꽃을 드니 미소 짓다》,《붉은 파도》,《화생(化生)》,《물과 구름의 순례》 등이 있다. 현실적 삶을 초월하려는 관념적 무속 세계를 통하여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작가이다. 주요저서 출생년도: (1945년 2월 19일~) 출생지: 전남강진 학력: 서라벌예대(현재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창작집 《뼈 있는 여자(1989)》, 《무명초(1997)》, 《나는 없다(1998)》,《사람본전(2021)》 장편소설 《옴마니 반메홈(1992)》, 《부처는 마른 똥 막대기다(1994)》, 《뼈 없는 여자(1995)》 명상스마트소설 《푸른 돌의 말(2014)》 수상 제8회 서라벌문학상(1998년) 제3회 월간문학동리상(2005년) 문학비단길작가상 특별상(2020년) 제11회 황순원작가상(2022년) 작품세계 1989년에 발간한 《뼈있는 여자》는 첫 창작집으로 15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이 실려 있다. 김선학문학평론가에 의하면 “인간존재의 진면목에 대한 탐구, 불교적인 세계 인식의 천착, 구도 체험을 통해 일상적 삶에 던지는 화두를 현실적 정황과 결부시키고 있는 곳에 황충상의 이 작품집 세계는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첫 소설집을 시작으로 황충상은 불교소재와 주제로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단편집《무명초》는 스스로 불교소설이라 밝히고 불교를 소재로 한 단편 7편을 싣고 있다. 고은 시인은 《무명초》에 “소설 《무명초》는 아마도 그의 회심의 소산인 것 같다. 저 중국 오지의 돈황 막고굴의 그 극채색의 아름다움과 함께 시작하는 이 소설은 작자의 대승적인 미의식이 출세간과 세간을 넘나드는 구도의 역정을 펼치고 있는데 그 파란만장의 곡절이 구성진 바 있다.” 고 평했으며 윤후명 소설가는 “그의 열정은 신앙의 그것과 같다. 맹목적이고 순수하다. 무릇 우리들이 나이를 먹고 세파에 시달려 변색해 간다는 법칙이 그에게는 통용이 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로지 일과(一果)의 사리(舍利)만을 키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 극찬했다. 《나는 없다》는 ‘없다는 것의 영원한 아름다움’이란 부제를 달았다. 중편 1편과 4편의 단편집이다. 임영봉 평론가는 이 작품집에 대해 “황충상의 작품들은 작가라는 존재와 글을 쓰는 행위가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하여 새삼스레 돌이켜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이 말하고 있는 바는 결국 작가란 그 무엇도 아닌 자신과의 대결에 생명을 건 존재라는 사실”일 것이다고 말했다. 《옴 마니 반메 훔》은 ‘대한불교’ 신문에 1년간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비구니와 수녀를 보게 되면 막연한 상념에 시달린다고 말한다. 그 상념은 “뱀이 허물을 벗듯 그들이 수도복을 벗어버렸으면” 하는 것이며 “모든 여자가 어머니로 남는 세상, 그것이 극락이고 천당”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비구니와 수녀가 존재하는 한 이 세상은 지옥이다. 세상이 인류에게 꽃이 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의 꽃이 되듯이. ‘옴 마니 반메 훔(당신의 거룩한 꽃 속에 나 온전히 안기나이다)’ 이 바램에 대한 명상이 이 소설을 낳았다고 작가는 밝힌다. 《부처는 마른 똥막대기다》는 불교 문예지 월간 《불교사상》에 1년 동안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마른 똥막대기는 부처고, 우슬초 잎사귀는 사람이다’ 이것은 소설 속 절집 추녀에 매단 풍경이 그곳에 오는 모든 이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동쪽 하늘이 바다와 맞닿은 지점에서 해가 떠오르면 그 절간의 아침은 남쪽 바다에서 몰려오는 안개로 뒤덮인다. 이 전경은 인간이 우주에 머물다 가는 축소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절은 우주이고 안개는 인간이다. 《뼈없는 여자》는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 이야기, 바꾸어 한 여자가 두 남자를 사랑한 이야기다. 오른쪽 팔을 잡은 남자, 왼쪽 팔을 잡은 남자가 동시에 당기다 빠져나온 팔을 하나씩 안은 두 남자는 외로울 때마다 그녀의 손이 가슴을 만진다고 느낀다. 뼈없는 여자만이 이런 유의 이야기를 창작하게 한다. “어둠 속에 분명한 것이 있다. 밤이 아침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옛 아내, 지숙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 ‘뼈없는 여자는 물과 같다. 그 물의 유연성은 모든 강함을 이긴다. 내게 있으면서도 없는, 없으면서도 있는 지숙.’ 그녀는 수인 스님으로 새 생을 산다. 이생에서 뼈없는 여자로 살기를 서원하면서. 그렇다면 내게 있어. 그녀는 뼈있는 것으로 없고, 뼈없는 것으로 영원한 여자인 것이다.” (본문에서) 《푸른 돌의 말》은 황충상 명상 스마트소설집이다. 명상이란 이름을 단 스마트소설인 만큼 새롭고 실험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푸른 돌의 말》은 유년시절 불가(佛家)와 인연이 있어 에 쓴 무산 오현 스님의 글을 빚은 것이다. 오현 스님은 “ 에 쓴 내 ‘사족’을 오로지 사족으로 읽고 이 을 빚었지 싶어 반갑다. 여기에 성속을 넘나드는 작용이 있어 이 글들은 언제 읽어도 그만한 이야기로 읽히는 맛”이 있다고 작품을 소개한다. 작가 역시 서문에서 밝힌다. “《문학나무》 문예지에 연재한 ‘사족소설’ 33편을 모아 명상 스마트소설 《푸른 돌의 말》이라 제목을 붙였다. 무산 오현 스님의 ‘역해’와 ‘사족’을 읽고 내 나름의 사념을 줄잡아 쓴 글이라는 뜻이다. 있는 내가 없는 나에게 이야기하고, 없는 내가 있는 나에게 이야기한 이 글을 허공에 뿌린다. 이야기의 씨앗이 누군가 마음밭에 떨어지면 무슨 색깔의 꽃을 피울까. 아득한 생각이 기대와 그리움을 낳는다.” 윤후명 소설가는 “이 독특한 문법은 오래 전에 그가 등단할 때부터 보여준 놀라운 세계를 잇고 있다” 면서 이것이 “선(禪)인가 하다가도, 판단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말한다. “ 정신이 어느 접점으로 가는 듯하지만 실은 그것 자체를 망막 밖으로 옮겨다 놓는” 소설 세계가 황충상의 세계이며 “어디엔가 지평선과 수평선이 맞닿은 곳”으로 작가가 홀로가고자 한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의 소설가 1945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강진군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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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A%B5%90%EC%97%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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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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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교역(Segyo station, 細橋驛)은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장재리에 위치하던 장항선의 철도역으로, 일제 강점기 조선 1930년대에 정류장 등급으로 존재하였으며, 대한민국 수립 이후인 1967년 임시승강장으로 개업하여 1974년에 폐지되었다. 이설 전의 장항선 선로에 위치한 역으로, 현재는 신도시 건설로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 그 터조차 찾아볼 수 없다. 역 소재지 때문에 장재역이라고도 불리었다. 2007년 3월에 고속철도 천안아산역과 환승 가능한 장항선 역을 신설하면서, 이 역과 인접한 곳에 개통된다는 점에서 장재역이라는 이름을 계승하려고 하였으나, 아산시의 요구로 아산역이라는 역명으로 개업하였다. 현재 장재울공원 위치였다. 역사 1930년대, 연도 미상: 정류장 등급으로 영업함. 1967년 6월 1일: 임시승강장으로 영업 개시 1974년 6월 1일: 폐지 각주 충청남도의 폐지된 철도역 1967년 개업한 철도역 1974년 폐지된 철도역 아산시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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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9C%EC%9D%B8%EC%A0%95%EB%B3%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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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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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個人情報)는 개인에 관한 정보 가운데 직ㆍ간접적으로 각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식별 가능성이 없는 정보는 개인 정보로 보지 않는다.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기록된 정보 중 주로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이용되는 정보"를 말한다는 견해도 있다. 정보보호법상 개인이라 함은 특정될 수 있는 자연인을 의미한다. 따라서 법인이나 단체에 대한 정보는 개인정보가 될 수 없으며, 해당정보의 주체가 특정이 가능하여야 한다. 즉, 어떤 정보가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 관한 정보이기는 하나 특정한 개인에 대한 정보라고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개인정보가 아니다. 다만 단체에 속한 정보라고 하더라도 소규모 집단이고 특정기간에 개인이 처한 특수한 상황이 적시됨으로써 해당 개인이 추정가능한 경우에는 개인정보라고 할 것이다. 국제기구가 채택한 정의 OECD 이사회가 채택한 1980년「프라이버시보호 및 개인정보의 국가간 유통에 관한 가이드라인에 관한 이사회권고」(Guidelines on the protection of privacy and transborder flow of personal data, annex to the recommendation of the council of 22rdSeptember 1980 OECD.Pt.2.cl.(1)(b))에서는 "식별된 또는 식별될 수 있는 개인에 관한 모든 정보"( any information relating to identified or identifiable individual)"라고 정의하고 있다. EU의 1995년 「개인정보처리에 있어서 개인정보의 보호 및 정보의 자유로운 이동에 관한 유럽의회 및 이사회의 지침」에서는 개인정보를 ‘식별된 또는 식별 가능한 자연인에 관한 정보, 즉 신체적ㆍ정신적ㆍ심리적ㆍ경제적ㆍ문화적ㆍ사회적 특성의 요소에 의해서 직ㆍ간접적으로 식별되는 자연인에 관한 정보’라고 정의하고 있다. 각국별 개인정보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경우, 규정하고 있는 법률에 따라 그 정의가 약간 다르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정통망법상 개인정보라 함은 생존하는 개인에 관한 정보로서 성명·주민등록번호 등에 의하여 당해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부호·문자·음성·음향 및 영상 등의 정보(당해 정보만으로는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는 경우에도 다른 정보와 용이하게 결합하여 알아볼 수 있는 것을 포함한다)를 말한다. 이메일 주소는 당해 정보만으로는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을지라도 다른 정보와 용이하게 결합할 경우 당해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라 할 것이므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항 제6호에서 정한 ‘개인정보’에 해당한다. 예컨대 취미나 출신학교 등의 정보는 그 자체만으로는 개인을 식별할 수 없으나 성명과 결합하여서는 당해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개인정보에 해당한다. 개인정보 보호법 개인정보란 살아 있는 개인에 관한 정보로서 성명, 주민등록번호 및 영상 등을 통하여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정보(해당 정보만으로는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더라도 다른 정보와 쉽게 결합하여 알아볼 수 있는 것을 포함한다)를 말한다. 「개인정보 보호법」은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모두에 적용되는 일반법이므로 기존에 공공분야에서 개인정보보호 일반법으로 역할을 해온 「공공기관의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법률」은 그 역할을 다하여 폐지하였다. 전자서명법 개인정보라 함은 생존하고 있는 개인에 관한 정보로서 성명·주민등록번호 등에 의하여 당해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부호·문자·음성·음향·영상 및 생체특성 등에 관한 정보(당해 정보만으로는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는 경우에도 다른 정보와 용이하게 결합하여 알아볼 수 있는 것을 포함한다)를 말한다. (전자서명법 제2조 제13호) 일본 일본은 「개인정보의 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항에서 개인정보를 ‘생존하는 개인에 관한 정보로서 당해 정보에 포함된 성명, 생년월일 기타 기술 등에 의하여 특정한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것(다른 정보와 용이하게 조합할 수 있고, 그에 의하여 특정 개인을 식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 프랑스 정보처리 축적 및 자유에 관한 법률 제2조: 개인정보는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식별확인번호나 그를 확인하게 해주는 하나 이상의 요소를 참고함으로써 식별되거나 식별가능한 개인에 관한 정보로 구성된다. 개인이 식별가능한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신원확인을 이용가능하거나 정보처리의 책임자가 접근가능하거나 혹은 어떤 다른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고려할 것이 권고된다. 독일 독일 연방 개인정보보호법 제3조 제1항: "개인정보"란 신원이 확인되었거나 확인가능한 자연인(정보주체)의 인적, 물적 환경에 관한 일체의 정보를 의미한다. 영국 영국의 개인정보보호법 제1조제1항: 개인정보는 다음 (a),(b)로부터 식별할 수 있는 생존하는 개인에 관한 데이터를 의미한다; (a) 당해 정보 (b) 정보관리자가 보유하고 있거나 앞으로 보유할 가능성이 많은 기타 데이터나 정보 또는 해당 개인에 대한 의견의 표현이나 해당 개인에 대한 다른 사람들 또는 정보관리자의 의도를 드러내는 모든 표시를 포함한다. 미국 미국의 경우 1995년 클린턴 행정부가 창설한 정보인프라기획단(Information Infrastructure Task Force, IITF)이 제시한 “개인정보의 제공과 이용에 관한 원칙”에서 개인정보를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information identifiable to the indivisual)’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연방법에서는 개인정보의 내용이 각기 법률제정목적에 따라 세부적으로 정하여져 있어 개인정보에 관한 총괄적 규정을 찾기 어렵다. 다만 1998년의 「아동 온라인 프라이버시보호법(Children’s Online Privacy Protection Act)」에서는 개인정보를 ‘개별적으로 식별가능한 개인에 관한 정보’로 정의하면서, 여기에서 성명, 주소, 이메일주소, 전화번호, 사회보장번호 등을 포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법 제3조에서는 개인정보를 ‘개인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신체외형기록, 주소, 전화번호, 교육정도, 의료기록 및 고용기록 등을 포함하나 이에 한정되지 아니하며 개인을 식별하거나 묘사하는 것으로서 기관에 의하여 보관되는 정보’라고 정의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프라이버시법 제6조 제1항: “개인정보”란 진실하거나 아니거나, 물리적인 형태에 기록되어 있거나 아니건 간에 그의 신원이 명백하거나 합리적으로 판명될 수 있는 개인에 관한 정보 또는 의견을(데이터베이스의 부분을 형성하는 정보 또는 의견을 포함) 의미한다. 개인정보의 침해 개인정보는 정보주체의 프라이버시 보호 요구와 사업자의 마케팅 등의 수집 및 활용 사이에 이해상충 및 갈등관계에 있으며 이에 따라 개인정보 침해의 위험성이 증가되고 있다. 또한 대량의 개인정보가 중앙집중 방식으로 수집·관리되어 데이터베이스화 되면 사업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해 언제라도 개인정보가 침해·누설될 수밖에 없는 위험성에 놓이게 된다. 개인정보의 침해는 이러한 상황에서‘정보주체의 동의없이 개인정보가 수집·이용·제3자에게 제공되는 일체의 피해’를 포괄하여 일컫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구별되는 개념 통신사실확인자료: 가입자의 전기통신일시나 인터넷의 로그기록자료 등(통신비밀보호법 제2조 제11호) 개인신용정보 같이 보기 프라이버시 지문 / 홍채 / 혈액형 / 음성 / 필체(서명) 주민등록번호 각주 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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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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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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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C 또는 Zc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염화 아연(Zinc chloride) 제타쿨롬(Zettacoulomb) 젭토클롬(Zeptocoulo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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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2027%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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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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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예정 1월 - 2027년 AFC 아시안컵이 개최될 예정이다. 3월 3일 -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5월 9일 -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의 임기 종료. 5월 10일 - 제21대 대한민국 차기 대통령의 임기 시작. 8월 7일 - 소행성 (137108) 1999 AN10이 388,866 km(0.0026AU) 거리에서 지구를 근접통과할 예정이다. 8월 20일 - 미국의 우주 탐사선 보이저 2호 발사 50주년 9월 5일 - 미국의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 발사 50주년 11월 - 2027년 WBSC 프리미어 12 개최. 미정 상반기 - 부산 도시철도 사상하단선이 개통될 예정이다. 호주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건설 중인 전파 망원경 SKA(Square Kilometer Array)가 완성된다. 대전, 세종, 충남, 충북 지역에서 2027 하계 세계대학경기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부산 도시철도 C-BAY-Park선이 개통될 예정이다. 마틴 루터 킹의 간음 비밀 포함 존 F. 케네디 대통령 시기의 비밀 문서가 대부분 공개된다. 템파베이 레이스의 홈구장인 트로피카나 필드의 계약이 끝난다. 주오 신칸센의 도쿄 ~ 나고야 구간이 개통할 예정이다. 한국철도공사의 일반여객열차인 무궁화호가 완전히 퇴역할 예정이다. 김포국제공항의 국내선 2터미널과 교통센터가 완공될 예정이다. 시부야 스크램블 스퀘어의 서관 및 중앙동이 오픈할 예정이다. 두바이 원 타워가 완공될 예정이다. 국제열핵융합실험로가 수소 - 트리튬 운전을 개시할 예정이다. 문화 3월 28일 - 부활절. 사망 노벨상 경제학상: 문화상: 물리학상: 생리학 및 의학상: 평화상: 화학상: 달력 음양력 대조 일람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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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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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9D%91%ED%9D%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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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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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희(申應熙, 1858년/1859년 11월 2일 ~ 1928년 2월 12일)는 조선 후기·대한제국의 무신,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갑신정변 당시 행동대원으로 참여하였다. 본관은 평산이다. 다른 이름은 응희(應凞)이다. 무관으로 재직하며 박영효의 심복이 되었으며,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야마 하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8월 귀국하였다. 이후 남행부장 겸 사과, 후영군사마 등을 역임하여 갑신정변 거사에 참여하였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셨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왔으며, 1886년 5월에는 박영효, 김옥균을 암살하려고 조선 조정이 파견한 지운영(池運永)을 김옥균의 유인책으로 유혁로, 정난교, 이규완 등과 함께 유인하였다. 김옥균, 박영효에게 불만이 있는 척 가장하여 한참 안심시킨 뒤 지운영을 유인하여 암살 계획을 폭로하였다. 1894년(고종 30년) 7월 사면을 받고 귀국, 박영효의 심복으로 활동했으며 1895년 박영효, 유혁로 등과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다가 유길준의 밀고로 폭로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사면받고 귀국, 중추원부찬의, 1908년(융희 2년) 전라남도관찰사, 겸임 전라남도재판소 판사를 지냈으며,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함경남도도장관, 1919년 황해도지사를 역임했다. 광주농림고등학교(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의 전신)의 초대 교장이었다. 생애 초기 활동 생애 초반 1858년(철종 9년) 11월 2일에 신식(申式)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설에는 11월 5일에 태어났다는 설, 9월생 설도 있다. 출생년대에 대해서도 다른 설이 있어 1859년생 설이 있다. 대한제국의 관원 이력서와 조선총독부 관원 이력서에는 1858년생 설과 1859년생 설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한성부 서서(西署) 동영동(東嶺洞) 42통 7호 출신으로, 이후 경성부 북부(北部) 송현방(松峴防)에서 거주하였다. 어려서 집안의 서당인 가숙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소년 시절에 첫 결혼을 하였지만, 첫 부인과 이별한 사연은 알려져있지 않다. 1875년(고종 12년) 부사과가 되었다. 무관으로 있으면서 일찍이 박영효(朴泳孝)의 심복이 되었다. 그는 키와 체격이 컸다 한다. 조선총독부에서 남긴 인사자료 중 그의 체형과 성격에 대한 자료에 의하면, 거구의 비대한이며 풍채는 당당했지만, 도량이 아주 좁아서 타인을 포용할줄 모른다는 평을 남겼다. 일본 유학과 귀국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주선으로 서재필, 정란교, 이규완 등 13명과 함께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게이오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1883년 10월 3일 일본 육군의 부사관 양성기관인 육군 도야마 하사관학교에 입학, 1884년 5월에 졸업하였다. 1883년 5월 그는 일본에 건너가자 마자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신중모 등과 게이오의숙에 입학했으며, 그는 10월 3일에 게이오의숙을 수료하고 도야마 하사관학교로 진학하였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행동대원으로 활동했다. 1884년 7월 여비가 떨어져 수료후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操鍊局)에서 교관의 한 사람으로 근무하며 사관생도들의 훈련을 맡았고, 김옥균, 박영효 및 미리 귀국해 있던 서재필, 이규완 등과 갑신정변 준비에 가담하였으며 1884년 8월 남행부장 겸 사과(南行部將兼司果), 8월 28일 부장(部將), 9월 후영군사마(後營軍司馬)를 거쳐 10월 남행군직(南行軍職)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계획에서 그는 서재필, 이규완, 서재창 등과 함께 군사 지휘관으로 내정되었다. 갑신정변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행동대의 1개 부대를 이끌고 서재필, 정난교, 서재창, 윤경순, 유혁로, 이규완 등과 함께 생도들, 장사패들을 이끌고 궐내에 잠입하였다. 그는 서재필의 부대, 이규완이 인솔하는 부대와 함께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국왕과 비빈들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겼다. 그러나 12월 7일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이규완 등 10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886년(고종 23) 박영효, 서광범, 이규완,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그는 박영효 등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896년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중 그는 도쿄사범학교(東京師範學校)를 다녔다. 그는 일본에 체류하며 유혁로, 정난교 등과 함께 박영효, 김옥균의 경호를 담당하였으나 어느정도 거리를 두었다. 1886년 5월 이규완이 지운영(池運永)이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임을 간파하자, 김옥균의 지시로 유혁로, 정난교 등과 함께 김옥균, 박영효에게 불만이 있는 척 가장하여 김옥균 암살밀지를 받고 일본으로 온 지운영을 유인, 그를 안심시킨 뒤 고종의 밀서와 비수, 칼 등을 압수하였다. 1888년(고종 23) 다시 배편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94년 초 귀국하였다. 1894년 일본으로 잠입한 홍종우가 김옥균을 만나려 할 때, 주선하여 홍종우를 김옥균과 만나게 했다. 그러나 이규완, 유혁로 등의 극력 만류에도 김옥균은 그해 3월 홍종우를 신뢰하여 함께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 김옥균이 떠난 뒤에는 도쿄사범학교의 공부와 박영효의 경호에 전념하였다.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여인 신매자(申梅子)와 결혼, 1남 7녀를 두었다. 관료 생활 귀국과 관료 생활, 재망명 1894년(고종 30년) 7월 비밀리에 환국, 그해 11월 통위영 정령관(統衛營副領官)에 임명되었다. 1895년 1월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가 되어 훈련대(訓練隊)에 배치되었고, 2월 훈련대 제1대대장이 되고 육군참령(陸軍參領)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그는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등과 함께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으나, 유길준의 밀고로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갔다. 1895년 12월 박영효, 오세창, 이규완, 권동진, 우범선, 이두황, 정난교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신응희의 모친이 죽어 집안 사람들이 부음을 전하니, 그는 "일이 있어 갈 수 없다." 고 회답하고, 사람을 보내 치상하였다. 매천 황현은 이때 그의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오인하였다. 신응희의 아버지 신식(申式)은 1900년대 초까지도 생존해 있었는데, 황성신문 1901년 1월 5일자 기사에 그의 아버지가 피체된 기사가 나타난다. 1895년 12월 말 다시 입국했으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8년(광무 1년) 9월 대한제국 중추원 의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1904년 4월 중순 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조선인 출신 정치적 난민 신청자 중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두황, 이진호, 권동진, 구연수, 정란교, 이규완, 이범래, 신응희 등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한일본공사는 4월 14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들의 송환을 거절하였다. 을사 보호조약 체결 이후 1905년(광무 8) 11월 을사 보호 조약 이후 환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07년 4월 27일 아버지 신식의 부음을 전보로 보냈으나, 분망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며 다른 사람을 보내 치상을 대신하게 했다. 1907년(광무 10년) 6월 대한제국으로 환국, 바로 중추원 부찬의(中樞院副贊議)에 임명되었다가, 순종 즉위 후 육군부령에 임명되었다. 9월 19일 육군부령에서 면직되고, 육군정령에 임명되었다가 1907년(융희 1년) 10월 정령으로 예편하고 중추원 부찬의(中樞院副贊議)에 임명되었다. 11월 10일 다시 중추원부찬의에 임명되고 주임관2등(奏任官二等)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20일 의원면직하였다. 1908년(융희 2) 1월에는 그의 친구인 특진관 장박(張博)이 평리원판사(平理院判事) 박만서(朴晩緖)에게 신응희를 위해서 사퇴하라고 압력을 넣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정미 7조약 이후 그는 내무부대신 송병준(宋秉畯) 등의 추천과 통감부의 비호를 받아 1908년 2월 19일 전라남도관찰사 칙임관 3등(勅任官三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남관찰사직을 여러번 사양했다. 총리대신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여러번 권하였으나 그는 마다하였다. 결국 그해 6월 11일 전라남도 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 칙임관3등에 재임명되자 취임하였다. 1908년 6월 25일 겸임전라남도재판소판사(兼任全羅南道裁判所判事)를 겸임하였다. 전라남도관찰사로 재직 중, 1909년(융희 3) 8월 의병운동 탄압 작전인 한국통감부의 남조선대토벌작전을 지원하고, 의병들을 회유하는 공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국통감부는 당시의 한국 관원들 중 신응희를 지목하여 "그는 폭도의 절멸에 열중하여 군대 간부와 함께 전후 2회 폭도가 창궐하는 지방을 순시하면서 군수 이하를 경고, 장려하고 민중을 훈유하는 등 백방으로 수단을 강구"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한일 합방 직전 1908년(융희 2년) 3월 대동학회의 평의원의 한 사람에 위촉되었고, 그해 5월에는 대한학회 찬성회 창립발기인이 되었으며 대한학회의 평의원이 되었다. 그해 6월에는 대한협회의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1909년 공립 광주농림학교가 설립되자 전라남도관찰사이던 신응희가 초대 교장을 겸했다. 공립광주농림학교는 설립 당시 농림업 및 측량목과의 경우 수업연한이 3년, 속성과는 1년이었으며, 학생 수는 5개 학급에 52명이었다. 교장은 관찰사 신응희가 겸하고 교사는 30평 2동, 실습지로는 학교에서 1.1km 정도의 양림리에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 전남 관찰사로 교장직을 겸임한다. 한일 합방 이후 조선총독부 고등관 재직 1910년 10월 1일 한일합방조약 체결과 동시에 조선총독부고등관에 임용되었다. 한일합병 조약 직후 함경남도 장관 고등관3등(咸鏡南道長官高等官三等), 종5위(從五位)가 되었고, 1919년 황해도지사가 되었다. 3·1운동 때에는 경고문을 내었다. 1912년 11월 함경남도에 학교 건물 신축비를 기부하였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도장관으로서 함경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에 협력하였다. 함경남도 장관 재직 시 일본과 미국의 어업 도구와 그물 등을 들이고 양식업을 독려하여, 함경남도 일대의 어업 생산량을 늘렸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평에 의하면 "함경남도 서호진(西湖津) 이북의 어업이 舊來의 면모를 일신하여 융성해지고 관내의 저금 액수가 장관의 독려로 이상 증대를 초래한 치적이 있다고 평가됨"이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측의 인사자료에 의하면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털끝만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는 것만을 염려하며, 부하가 직무를 행할 때 큰 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한편 그의 일본인 부인 신매자(申梅子)가 3.1 운동 전후하여 한때 대한애국부인회에 관여하여 부인회 함흥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생애 후반 1918년 9월 황해도 도장관으로 전임되었으며. 그해 11월 훈4등과 금배 한 잔을 선물로 받았다. 1919년 4월 3.1 운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도장관 명의로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경고문에서 그는 미국의 민족자결은 조선의 독립과 하등 관계가 없는 망발이며, 앞으로 시위에 참가하는 자는 가차없이 탄압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이후 자제단에 가입, 황해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각 군에 자제단을 조직했다. 1920년 함흥 육군 군용지 비용을 기부하고 목배 1조를 선물로 받았다. 1921년 2월 황해도지사에서 물러났으며 동시에 휴직을 신청했으며, 1923년 2월 도지사직에서 사퇴했다. 1922년 2월 흥린건축주식회사 취체역에 선임되었다. 1924년 4월 중추원 칙임관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24년 4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만든 내선융화단체인 동민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동민회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동민회 본부 이사, 1927년 동민회 상담역의 직책을 맡았다. 1926년 11월 경성부부협의회 의원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며, 11월 20일의 투표에서 113표를 받아 6위로 낙선하였다. 1928년 2월 12일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 경성부 종로구 도렴동 자택에서 급성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가족 관계 아버지 : 신식(申式, ? - 1907년 4월 27일) 어머니 : 이름 미상 부인 : 이름 미상, 갑신정변으로 이혼 부인 : 신매자(申梅子), 일본인 아들 : 1남 딸 : 7녀 평가 조선총독부의 관원 이력서에는 그의 인물됨을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털끝만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는 것만을 염려하며, 부하가 직무를 행할 때 큰 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인사 기록에 의하면 그의 인물됨을 원래 준민 교혜(寯敏巧慧)하며 부하를 대하는데 아주 엄하지만 윗사람을 맞이할 때는 아첨을 하고 허리를 굽실거리기에 정신이 없다. 천성이 교묘하고 영리하기 때문에 중후함이 결여되었고, 움직이기만 하면 이익을 쫓는 버릇이 있다며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그밖에도 조선총독부는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기를, 경박한 미국의 공기에 접한 그는 협소한 인물에 더하여 일종의 뻔뻔스러움이 숨어 있으며 툭하면 건방진 태도를 보인다. 지식이 저급하고 천하의 형세에 어둡다고 하였다. 다만 됨됨이는 도량이 아주 협소하지만 축재(蓄財) 문제에는 깨끗하여, 억지로 재산을 모으는 일에 급급한 것 같지는 않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같이 보기 갑신정변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 을미사변 아관파천 박영효 이규완 서재필 박정양 박중양 박영교 신복모 임은명 유길준 유혁로 정행징 윤계완 윤경순 광주농림학교 자제단 김옥균 김윤식 변수 서광범 서재창 신중모 안경수 안국선 윤웅렬 윤치호 정병하 정란교 홍영식 참고자료 관련 서적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 이태룡, 《한국근대사와 의병투쟁 3》 (중명, 2007) 각주 1858년 출생 1928년 사망 병사한 사람 호흡기 질환으로 죽은 사람 육군 군인 급진개화파 혁명가 한국의 혁명가 한국의 장군 조선의 무신 조선의 군인 갑신정변 대한제국의 관료 일제강점기의 관료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서재필 윤치호 박중양 평산 신씨 서울특별시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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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3%BC%EB%95%8C%EA%B8%B0%20%EC%82%AC%EB%9E%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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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때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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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rfect Ballad》는 엠씨 더 맥스의 디지털 싱글이다. 엠씨 더 맥스가 소속사 이전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을 때 전 소속사였던 파라마운트 엔터테인먼트에서 데모곡으로 녹음하였다가 정규 앨범 삽입에 탈락된 곡으로 추정되는 〈볼때기 사랑〉을 수록하여 만든 앨범으로 많은 논란을 빚었다. 처음에 2번 트랙에 〈Finally〉가 수록되었는데, 이 곡은 이전에 엠씨 더 맥스가 발매한 디지털 싱글 《Duplex Man》의 삽입곡이며 앨범명과 동명인 곡으로, 이름만 바꿔 수록한 것으로 밝혀져 중도에 〈볼때기 사랑〉의 반주곡으로 교체 수록되었다. 수록곡 볼때기 사랑 볼때기 사랑 (Inst.) (Finally) 2007년 싱글 엠씨 더 맥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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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550%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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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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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남량(南梁) 대보(大寶) 원년 동위(東魏) 무정(武定) 8년 북제(北齊) 천보(天保) 원년 서위(西魏) 대통(大統) 16년 신라(新羅) 건원(建元) 15년 기년 남량(南梁) 간문제(簡文帝) 원년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 17년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 원년 서위(西魏) 경문제(景文帝) 16년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 11년 고구려(高句麗) 양원왕(陽原王) 6년 백제(百濟) 성왕(聖王) 28년 사건 남인도에 카루카아 왕조 일어남 신라 진흥왕이 이사부 장군을 보내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두고 그들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두 성을 빼앗음. 문화 탄생 교황 보니파시오 4세, 67대 로마 교황.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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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82%AC%EA%B5%B0%20%EC%82%AC%EA%B1%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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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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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군 사건(新四軍事件) 또는 원난 사건(皖南事变)은 중일 전쟁중인 1941년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이 공동 항일 전선을 펼 당시 일어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은 사실상 결렬되었고 이론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사건을 두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가들의 평가가 나뉘는데 중화민국 쪽에서는 이를 공산군의 불복종에 대한 징벌이라고 보는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쪽에서는 국민당의 배신행위라고 보고 있다. 개요 제2차 국공 합작이후 양쯔 강 남쪽에서는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신사군이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산군과 공산당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는 것에 불안을 느낀 장제스는 점차 공산군과의 협력을 꺼리게 되었고 1940년 12월 신사군을 안후이성 및 저장성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은 이에 동의하고 병력을 양쯔 강 이북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신사군 공산당 장교들은 이 명령에 반발했으나 결국 이동에 합의했다. 예팅이 이끄는 신사군의 정예 병력 9,000명은 3개 방면으로 나눠 양쯔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고 1월 5일 도하를 마치고 집결하였다. 이때 갑자기 8만명의 국민혁명군이 나타나 이들을 포위하고 다음날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숫적 열세에 밀려 신사군은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고 부대장 예팅은 부하를 살리기 위해 1월 13일 국민당군측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예팅이 협상하러 오자 갑자기 국민당측은 그를 체포해 버렸고 결국 신사군의 부부대장도 전사하고 2,000명의 병사만 살아서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1월 17일 장제스는 신사군의 해체를 명령했고 예팅은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그러나 1월 20일 옌안의 공산당 군사위원회는 부대를 재건하기로 결정하고 천이가 새로운 부대장이 되었고 류샤오치는 정치위원이 되었다. 신사군은 7개 사단 및 1개 여단으로 구성된 9만병력의 규모로 재편되었다. 결과 이 사건으로 사실상 제2차 국공 합작은 결렬되었고 국민당은 항일전선을 깨뜨렸다는 비난에 당면한 반면 공산당은 항일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비록 공산당은 이 사건으로 인해 양쯔강 남쪽의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인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중국 공산당 내에선 왕밍의 통일전선론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어, 즉각적으로 중앙위원회에서 그 설득력을 잃었으며, 약 1년 후에 있을 정풍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각주 1941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1941년 1월 1941년 분쟁 1941년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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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2%9C%EC%95%88%EC%98%A4%EC%84%B1%EA%B3%A0%EB%93%B1%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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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오성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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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오성고등학교(天安五城高等學校)는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성동에 있는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2005년 8월 10일 : 천안오성고등학교 설립 인가 2007년 3월 1일 : 천안오성고등학교 개교(1학년 12학급) 2007년 3월 1일 : 초대 유장준 교장 부임 2007년 3월 5일 : 제1회 입학식(12학급 466명) 2010년 2월 14일 : 제1회 졸업식(12학급 448명) 2017년 9월 1일 : 제7대 조영종 교장 부임 2020년 2월 6일 : 제11회 졸업식(12학급 422명, 총 졸업생 5,104명) 2021년 2월 5일 : 제12회 졸업식(12학급 373명) 2021년 3월 2일 : 제15회 입학식(12학급 384명) 2021년 9월 1일 : 제8대 장호중 교장 부임 2022년 2월 11일 : 제13회 졸업식(12학급 362명) 2022년 3월 2일 : 제16회 입학식(12학급 393명)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천안오성고등학교 홈페이지 충청남도의 공립 고등학교 천안시의 고등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남녀공학 고등학교 2007년 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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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NGC%204631%20%EC%9D%80%ED%95%98%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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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C 4631 은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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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C 4631 은하군(NGC 4631 Group)은 사냥개자리와 머리털자리의 경계 지점에 있는 은하단이다. 최소 5개에서 최대 27개의 은하가 있다. 은하단 구성원 나선 은하 NGC 4631 (고래 은하), 은하단 중 제일 밝다. 상호작용 은하 NGC 4656 (하키 막대) 왜소 타원 은하 NGC 4627, NGC 4631의 짝 이 은하단은 처녀자리 은하단의 일부와 같이 상대적으로 '복잡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각 은하마다 극단적으로 다른 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은하단에는 적어도 5개의 은하가 하나의 은하단을 이룰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다른 영역까지 고려한다면 27개까지 그 개수가 증가한다. 덧붙여, 이 은하단에서 제일 유명한 은하는 NGC 4631, 즉 고래 은하와 NGC 4656/NGC 4657, 즉 하키 막대로 불리는 은하 둘이다. 각주 은하 머리털자리 사냥개자리 은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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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A4%EC%B2%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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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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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첨(舌尖) 또는 혀끝이란 혀의 가장 앞쪽 끝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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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EC%84%9C%EB%B6%80%EB%B0%9C%EC%A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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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부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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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부발전주식회사(韓國西部發電株式會社, )는 2001년 한전으로부터 분리되어 설립된 발전전문회사 6곳중 한곳이다. 2000년 정기국회에서 통과된 전력산업구조개편 촉진법에 의거하여 2001년 한국전력공사의 발전부분이 6개의 자회사로 분리되었는데, 서부발전이 소유하고 있는 발전소의 대부분이 서쪽에 있어 서부발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혁신도시 사업에 따라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중앙로 285로 본사를 이전하였다. 연혁 2001년 4월: 한국서부발전 설립 역대 사장 홍문신 (2001~2002) 이영철 (2002~2004) 김종신 (2004~2007) 손동희 (2007~2010) 김문덕 (2010~2013) 조인국 (2013~2016) 정하황 (2016~2017) 정영철 사장대행 (2017~2018) 김병숙 (2018~2021) 박형덕 (2021~ ) 조직 사장 국정과제추진실 일자리창출부 윤리준법부 사회공헌부 홍보부 중소기업지원부 안전품질처 산업안전부 예방안전부 공정안전부 재난안전부 품질경영부 상임감사위원 감사실 감사전략부 총괄감사부 청렴감찰부 기획관리본부 기획처 미래전략실 예산자금부 출자관리부 내부회계통제부 성과관리부 관리처 총무부 인사운영부 노사협력실 호계세무부 계약자재부 본사시설부 보안처 정보보안부 ICT지원부 비상계획부 사업본부 사업금융부 해외사업처 해외총괄부 해외화력실 해외신재생부 해외수력실 신재생사업처 신재생총괄부 태양광사업부 풍력사업부 신에너지사업부 기술안전본부 발전운영처 발전계획부 발전운영실 전력거래부 연료조달실 LNG부 기후환경실 온실가스감축부 발전기술처 발전기술실 성능개선부 4차산업부 국산화부 연구개발부 사내벤처부 건설처 전원기획부 신규사업부 기전실 토건부 발전소 태안화력발전소 -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발전로 457 평택화력발전소 -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남양만로 175-2 서인천복합화력발전소 - 인천광역시 서구 장도로 57 군산복합화력발전소 -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 3.1로 91-5 설비 현황 발전기 대수: 57대(태양광 포함) 총 설비용량: 8,909.3MW 국내 총 발전 설비용량의 10.5% 점유 각주 외부 링크 대한민국의 전력 회사 대한민국의 시장형 공기업 대한민국의 발전소 2001년 설립된 기업 공공기관 (산업통상자원부 소관) 충청남도의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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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3%B0%EB%8B%A4%EC%9D%B4%EB%9D%BC%20%EB%8B%A4%EB%8B%A4%EC%95%84%ED%82%A4%EB%9D%BC%20%281691%EB%85%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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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 (16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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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 1691년 ~ 1736년 3월 25일)는 고오리번의 2대 번주이다. 관위는 종5위하, 겐바노카미()이다. 고오리번 초대 번주 마쓰다이라 다다나오의 동생 가라쓰번주 마쓰다이라 노리하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712년, 다다나오의 양자가 되었고, 1719년, 다다나오가 은거하면서 번주직을 계승했다. 1724년, 소샤반()이 되었고, 1732년에는 사사봉행()이 되는 등, 교호 개혁 시기의 막부 정치에 참여하였다. 1736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맏아들 다다유키가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둘째 아들 다다쓰네가 뒤를 이었다. 1691년 출생 1736년 사망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가 오규 마쓰다이라씨 고오리번주 에도 막부 지사부교 가라쓰번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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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A%B8%EB%8C%80%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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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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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국립 대학이다. 1946년에 경성제국대학을 포함한 여러 관·공·사립 전문학교가 통합되면서 국립종합대학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었다. 1948년에 ‘서울대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2011년에는 국립대학법인으로 변경되었다. 법인의 명칭은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이다. 현재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의 거점국립대학교 가운데 하나이다. 2020년 기준으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4조 제1항 제4호에 따라 주된 사무소를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소재한 관악캠퍼스에 설치하고, 그밖에 서울 종로구,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경기 시흥시에 멀티캠퍼스를 두고 있다. 15개 단과대학 82개 학과(부), 1개 자유전공학부, 1개 일반대학원 석사과정 5계열 72학과(부) 31개 협동과정, 박사과정 5계열 73학과(부) 32개 협동과정, 12개의 전문대학원 15개 학과(부)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 서울대학교의 기원 19세기 말 대한제국의 고종 광무 태황제는 자력 근대화를 위한 교육 사업을 추진하면서 처음으로 여러 근대식 고등 교육 기관을 설치했다. 1895년 4월 19일, 칙령을 통해 최초의 근대 법학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가 설립됐고, 그해 5월 6일 입학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고 다음해 이준을 포함한 47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국립 고등 교육 기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법관양성소는 이후 법학교(1909년) - 경성전수학교(1911년) - 경성법학전문학교(1922년) - 국립서울대학교 법과대학(1946년)을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이 2018년 2월까지 존속하고 문을 닫는다. 2018년 3월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사과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법과대학 석사과정과 박사과정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1895년 5월 10일 소학교 설립 준비의 일환으로 소학교 교사 양성기관인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됐다. 일곱 차례에 걸쳐 졸업생 195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한성사범학교는 이후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1911년) - 국립서울대학교 사범대학(1946년)을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이어졌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더욱 적극적으로 고등 교육 기관 설립을 추진했다. 1899년 고종은 “우리나라에 각종 학교를 대략 설치했으나 의학교는 아직 만들지 않았다”며 의학교관제를 반포하고 전문 의료인을 양성했다. 의학교는 이후 대한의원 교육부-경성의학전문학교-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및 의학전문대학원으로 계승됐다. 대한의원은 1901년 최초로 교육부 산하에 산파 및 간호부양성과를 신설하는데 이는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의 시작이었다. 1904년에는 농업과 상업을 가르치는 농상공학교가 개교했고, 이후 분화와 재편을 거듭하면서 국립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으로 이어졌다. 개교와 그 이후의 변천 1946년 7월 13일 미 군정청 문화교육부는 '국립서울종합대학안'을 공식 발표했다. 서울대학교에 따르면, 조선교육심의회에서 현대적 국립대학을 건립할 때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관 · 공립 및 사립의 전문학교를 통합하자는 구상이 있었다고 한다. 1946년 8월 22일에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됨으로써 서울대학교는 공식적으로 설립됐다. 이 법령의 내용은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여러 관 · 공 · 사립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종합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는데, 9개 단과대학(문리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예술대학, 치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구성된 ‘국립서울대학교’가 1946년 10월에 개교하였다. 초대 총장으로 해리 엔스테드 미국 해군 대위가 취임하였다. 그러나 설립 과정에서 기존 대학에 있던 교수, 직원, 학생들은 반대 운동을 강렬히 전개했으며, 이를 국대안 파동이라 부른다. 한국 전쟁의 발발로 1951년부터는 부산으로 옮겨가 전시연합대학의 형태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이듬해 5월에 전시 연합대학은 해체됐으며, 그 다음 해인 1953년 9월 18일이 돼서야 본부와 문리과 대학이 서울로 돌아오게 됐다. 1960년에는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 혁명으로 서울대학교 재학생 7명이 사망했으며, 그 해 11월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됐다. 4·19 혁명이 끝나고 대학에는 학생회 조직과 같은 자율적인 분위기가 잠시 조성됐으나 이듬해 5·16 군사 정변으로 탄압이 다시 이어졌다. 1960년대는 이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계속 이어지는 시기였다. 한편 1961년에는 정부의 ‘국립대학 정비절차’에 따라 많은 사범대 학과가 폐지되고 문리대로 합쳐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범대 교수와 학생들은 이에 거세게 항의했으며, 이듬해 정부는 없어진 학과들을 다시 부활시켰다.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대학교 단과대학들은 서울특별시 동숭동(문리과대학), 연건동(의과대학), 을지로(사범대학, 음악대학), 공릉동(공과대학), 종암동(상과대학), 경기도 수원시(농과대학) 등 곳곳에 나뉘어 있었다. 이에 서울대학교는 종합화 계획을 세우고 1975년에 공과대학, 농과대학(현재 농업생명과학대학, 수의과대학)과 의과대학 본과만을 제외하고 단과대학들을 모두 새로 세운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고, 1980년에는 노원구 공릉동의 공과대학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현재 공릉동 캠퍼스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사용하고 있다. 수원에 남아 있던 단과대학도 2003년에 관악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현재와 같이 관악과 연건캠퍼스만 남게 됐다. 한편 10월 유신 이후 계속 억눌려 있던 대학에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1991년에 총장 선출 방식도 직선제로 변경됐다. 첫 직선제 총장인 김종운을 시작으로 이수성, 선우중호, 이기준, 정운찬, 이장무, 오연천 등이 총장으로 선출됐다. 2011년 12월 28일에는 새로 시행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1946년 이래 65년 동안 유지해왔던 국립대학교 체제로부터 독립법인 체제로 전환하였다. 2014년 6월에는 평창캠퍼스가 준공됐으며 같은 해 7월 법인화로 전환된 이후에 치러진 첫 간선제 총장 선거에서 성낙인이 제26대 총장으로 선출되면서 2018년 7월까지 맡았다. 총장 서울대학교 총장은 대한민국 내에서의 서울대학교의 위상으로 인해 대한민국 고등교육 및 학문 분야의 수장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지위는 장관급이다. 1946년 개교 이후 총 26명의 총장이 배출되었으며 이들 중 3명이 국무총리, 6명이 장관을 지냈다. 개교 초기부터는 정부에서 임명하는 관선제였으나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제19대 총장부터 직선제로 바뀌었으며, 2011년에 법인화로 전환된 이후 간선제로 다시 바뀌었다. 캠퍼스 역사적 캠퍼스 동숭캠퍼스 해방 후 서울대학교 문이과대학, 법과대학이 설치된 곳은 과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京城帝國大學法文學部)가 자리하고 있던 곳이었다. 한국 전쟁 중에는 한 때에 공산군의 병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였던 우에노(上野)가 대학의 경관조성을 위해 지중해 지역에서 선박편으로 마로니에 나무 3그루를 실어와 심었는데 마로니에 이외에도 10여 그루의 은행나무, 느티나무, 그 외에 차츰 자작나무, 개나리, 라일락 등도 심어져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을 이루게 됐다. 당시 교정은 아름답기가 서울의 10대 정원(庭園)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었다. 도서관 도서관 건물은 1927년 8월에 경성제대 법문학부 연구실을 겸해 세워진 건물로, 4층짜리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었다. 당시 총건평 1,491평 중에 도서관은 사무실 및 열람실 519평, 서고 392평이었는데 해방 후 1층을 더 올려 5층이 됐다. 1975년 당시 열람실은 154평에 불과해 4백여 명을 수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해방 직전의 장서 수는 55만권에 달하였으나 해방 후 30년 동안 늘어난 장서의 양은 10만 권 미만이었다고 한다. 강의실 문리대 운동장 쪽에 있었던 빨간 벽돌조 3층 건물로,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강의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의실의 수는 16개로, 원래 경기도립상업전문학교 건물이었던 것을 1926년 경성제대가 인수를 해 사용하였다. 경성제대는 그 후 2년에 걸쳐 이 건물 주변에 도서관, 본관 등을 지어 대학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1964년 과학관 건물이 지어지자 그 뒤에 가려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게 됐고 상대적으로 초라한 모습이 됐다. 본부 1931년 9월 완공된 건물로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전까진 서울대학교 본부로 쓰였다. 본부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거됐으며 현재 그 자리에는 마로니에 공원이 들어서게 됐다. 구 사대·상대 캠퍼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은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었다. 1920년대 경성여자사범학교로 지어진 것을 서울 수복 후 옮겨온 것으로, 캠퍼스 뒤에는 선농단이 있었다. 한편 상과대학은 성북구 종암동 19번지(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며, 원래 경성고등상업학교 건물이었다. 벽돌 건물 안에 연구실 35곳, 강의실 16곳이 있었다. 송림에 감싸여 황성(荒城)의 숲으로 통했으며, 인근에 고려대학교가 있었다.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이들 건물은 현재 모두 철거됐다. 이공캠퍼스 노원구 공릉2동에 있던 구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건물을 이어받아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자리잡았으며, 다른 단과대보다 조금 늦은 1980년에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당시의 건물은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사용하고 있으며 계속 관리되고 있다. 기타 과거 서울대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가 사용하던 서울 중구 을지로의 땅은 현재 국방부와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해당 토지의 크기는 약 4만m2 정도로 현재 미군 극동사령부 공병단이 점유하고 있다. 현재 캠퍼스 관악캠퍼스 대학 본부가 있는 관악캠퍼스는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에 따라 조성됐다. 원래는 관악골프장이 있던 자리였다. 1970년대 1만 4천여 명이었던 학생 수가 1980년대에는 2만 4천여 명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학교 식당 등의 생활 지원 시설 및 연구 시설이 부족해지기 시작했고, 1987년 ‘서울대학교 발전장기계획-캠퍼스부문계획’이 수립돼 시설 면적이 기존에 비해 2배가량 늘어났다. 현재 관악캠퍼스에 있는 약 200개의 건물 중 절반은 1990년 이후에 지어졌으며, 캠퍼스를 감싸고 있는 순환도로의 길이는 약 5킬로미터이다. 서울대학교의 로고는 ‘서울’, ‘국립’, ‘대학교’의 머리글자인 'ㅅ', 'ㄱ', 'ㄷ'을 따서 만들어졌으며, 개교 60주년을 맞아 은회색을 입혔다. 정문 디자인을 새롭게 구상한 디자인학부의 백명진 교수에 따르면, 중립적인 색상인 은회색을 통해 공적인 교육 공간의 느낌을 표현하였고 조명을 설치해 24시간 열려 있는 서울대의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 서울대 정문은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는 서울 지하철에서 대학 이름을 역명으로 사용하는 역 중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한 것이다. 정문 근처에는 대운동장을 끼고 제일 가까이 체육관과 미술관, 경영대학 등이 있다. 서울대학교 체육관은 세계 최초의 올림픽 탁구 경기장으로서 1988년 서울 올림픽 탁구 경기가 이 곳에서 열렸다. 그 뒤로 산 쪽으로 사회과학대학, 법과대학, 음악대학, 미술대학, 인문대학, 사범대학 등의 순서로 인문 계통의 단과대학이 있으며 중앙도서관의 터널을 경계로 반대편에는 약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등 이과 계통의 단과대학이 있다. 정문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오르면 후문으로 가는 갈림길(속칭 ‘기숙사삼거리’)이 나오는데, 왼쪽 길로 내려가면 낙성대역에 이르게 되며 오른쪽 길로 내려갈 경우 버들골, 노천강당, 교수회관, 학군단, 신공학관 등으로 갈 수 있다. 낙성대역을 향하는 길에는 서울대학교 기숙사인 ‘관악사’와 교수 회관인 ‘호암교수회관’이 있다. 한편 경영대-법대백주년기념관-문화관-중앙도서관-공대 폭포로 캠퍼스를 관통하는 길은 ‘걷고 싶은 거리’로 조성돼 있다. 걷고 싶은 거리는 주위 조경과 보도를 정비하였으며 밤에는 은은한 조명 시설이 걷고 싶은 거리를 비춘다. 학교가 관악산을 끼고 있기 때문에 학내 각종 도로들은 등산객들에게 관악산 정상 등반을 위한 등산로로도 애용된다. 신공학관 부근에서 ‘자운암’이라고 쓰인 표지판 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관악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봄에는 캠퍼스 내 벚꽃, 진달래, 개나리의 만개로 상춘객의 발길이 빈번하다. 2008년 4월 25일, 서울대학교는 캠퍼스 안에 있는 규장각, 미술관, 박물관, 문화관, 중앙도서관 등 5개 거점 문화시설을 활용해 ‘문화 캠퍼스’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그 첫 프로그램으로 다음날인 26일에 학부모 3천여 명을 초청해 문화 행사를 개최했다. 연건캠퍼스 옛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자리에 터를 잡은 연건캠퍼스에는 의과대학, 치의학대학원, 간호대학이 있으며, 서울대학교병원도 이곳에 있다. 대학로와 창경궁로 사이에 있으며, 수도권 전철 4호선 혜화역에서 가깝다. 캠퍼스의 중심에 서울대학교병원 본관이 있으며, 의대본관, 함춘회관 등이 대학로 쪽에, 치과대학이 창경궁로 쪽에 자리 잡고 있다. 2025년까지 간호대학은 관악으로 이전하기로 하였다. 평창캠퍼스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대화면 신리에 위치하며, 2014년 6월 12일 정식으로 준공식이 열렸다. 국제농업기술대학원이 평창캠퍼스 내의 유일한 교육기관이며 현재 약 100명 이상의 석사 박사과정생들이 수업 및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캠퍼스 전체가 농업 및 바이오 집중 기관이다 보니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면이 있다. 방문하기 위해선 KTX 평창역에서 하루 5회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하거나 택시를 타야한다. 택시비는 가장 가까운 문으로 진입 시 5500원이다. 기타 과거에 농업생명과학대학, 수의과대학이 있던 수원캠퍼스는 이들 단과대학이 2003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함에 따라 매각이 추진 중이지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서울대 법인화 이후 동쪽 부지는 서울대학교 소유로 남았지만 서쪽 부지는 기획재정부 소유가 되었다. 서울대학교는 서울대 소유인 구 농학도서관을 리모델링해서 중앙도서관의 오래된 책들을 보존하기 위한 보존도서관을 만들었다. 기획재정부와 경기도가 구 수원캠퍼스의 정부 소유 부지를 경기도 소유 경인교육대학교 경기캠퍼스 부지와 교환함에 따라 정부 소유 부지는 모두 경기도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경기상상캠퍼스가 되었다. 수원캠퍼스의 서울대 소유부지 기숙사(상록사)는 경기도 수원 소재 대학생들을 위해 경기도에 임대를 주었다. 2008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광교신도시에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을 세웠으며,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은 본부는 관악에 있지만 수업과 연구는 광교의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건물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시스템면역의학연구소는 강원특별자치도 홍천군 화촌면에 조성됐다. 인천경제자유구역 청라지구에 한국과학기술원과 함께 국제 과학 복합 연구 단지를조성할 계획이 있었으나 무산됐다.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에 그린바이오 첨단 연구 단지인 평창캠퍼스를 조성했다. 평창캠퍼스는 평창역 인근에 있다. 서울대학교는 또한 전라남도 구례군과 광양시 등지에 200km2에 가까운 연습림을 소유하고 있다. 대학 및 개설 학과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의 교육조직은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ㆍ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서울대법') 제4조 제1항 제6호,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정관(이하 '서울대정관') 제30조에 따라 서울대학교 이사회에 제·개정 권한이 있는 학칙으로 위임되어 있다. 이에 따라 서울대학교 학칙(이하 '학칙') 제2장 제2절 제14조 내지 제22조가 '교육조직'이라는 제목으로 대학, 대학원의 편제를 규정하고 있다. 학부 과정 서울대학교 학칙 제14조 제1항, 제3항 별표 1에 따라 2022년 기준 15개 단과대학에 83개 학과(부)가 설치되어 있다. 각 학과별 정원은 학칙 제16조 제1항 별표2가 규정하고 있다. 단과대학별 개설 학과의 연혁을 개요하면 다음과 같다. 치의예과 및 치의학과는 2002년 학번 50명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학부 신입생을 받지 않다가 ‘치의학전문대학원’ 제도로서 대학원에 통합된 후에 2014년 입시에서부터 다시 치의학과 학석사 통합과정 모집단위를 운영하며 이 단위로 신입생을 선발하고 있다. 또한 2009학년도부터는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의 개원으로 법학부의 신입생을 받지 않는다. 2008학년도 신입생부터는 주전공 외에 설계전공, 복수전공, 부전공, 연합전공, 연계전공 등 다른 학과의 학점을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제2전공제(규범화 되지는 않음)가 사실상 의무적으로 실시됐다. 2017학년도 신입생부터 광역으로 모집하던 사회과학대학을 학부 별로 모집한다. 서울대학교 학부 과정 학과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농업생명과학대학 미술대학 음악대학 사범대학 생활과학대학 약학대학 연합전공 수의과대학: 수의예과, 수의학 간호대학: 간호학과 경영대학: 경영학과 의과대학: 의학과, 의예과 자유전공학부: 자유전공학부. 대학원 서울대학교 학칙 제14조 제2항에 따라 서울대학교는 고등교육법 제29조의2 제1항 제1호에 해당하는 1개의 일반대학원과 제2호에 해당하는 12개의 전문대학원을 두고 있다. 서울대학교 일반대학원은 고등교육법 제35조 제2항, 제6항 및 같은 법 시행령 제43조 제2항에 따른 학술학위로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단일기관이다. 일반대학원이 하나만 설치되어 있으나, 하나의 일반대학원에서 모든 학위과정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학칙 제10조 제2항에 따라 일반대학원장이 각 대학장(대학 학장) 및 전문대학원장(대학원 원장)에게 위임하여 운영하는 구조이다. 다만 학칙 제10조 제2항에 의하여 일반대학원 학생들의 소속까지 개별 대학 및 전문대학원에 위임되는 것은 아니므로, 일반대학원 학생들은 학칙 제15조에 따라 교육과정이 위임된 각 대학·전문대학원 소속이 아닌 일반대학원 산하의 학과·전공·협동과정 중 1곳의 소속이 된다. 일반대학원에 석사과정은 5계열, 72학과(부), 31협동과정이, 박사과정은 5계열, 73학과(부), 32협동과정이 설치되어 있으며 각 과정별 정원은 학칙 제17조 제1항 별표3에 따라 규정되어 있다. 서울대학교에 속한 전문대학원은 총 12곳으로, 이들은 학칙 제90조 제2항에 따라 원칙적으로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43조 제2항의 전문학위가 수여되나 예외적으로 학술학위를 수여받을 수 있다. 다만 법학전문대학원의 경우 다른 전문대학원과 달리 고등교육법 제29조의2 제3항에 따라 법학전문대학원 설치ㆍ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추가적인 규율을 받게 된다. 이에 따라 서울대학교는 또한 2008년에 법과대학 신입생을 더 이상 뽑지 못하게 되었고 전문대학원인 법학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되어 매년 정원의 1/3 이상을 타대학 출신으로 선발해야만 하게 되었다. 한편 2016년에는 공학전문대학원이, 2020년에는 데이터사이언스전문대학원이 개원하였다. 보건대학원: 보건학과, 환경보건학과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환경조경학과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정책학과, 공기업정책학과 국제대학원: 국제학과 공학전문대학원: 응용공학과 의학대학원: 의학과 수의학대학원: 수의학과 치의학대학원: 치의학과 경영전문대학원: Global MBA, SNU MBA, Executive MBA 법학전문대학원: 법학과 융합과학기술대학원: 나노융합학과, 디지털정보융합학과, 지능형융합시스템학과, 분자의학 및 바이오제약학과 국제농업기술대학원: 국제농업기술학과 데이터사이언스전문대학원: 데이터사이언스학과 대학 시설 도서관 중앙도서관: 1946년 개교하면서 경성대학의 건물과 서적을 이어받아 개관하였다. 1949년 도서관 명칭을 ‘국립서울대학교중앙도서관’에서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변경하였으며 1975년 1월 본관을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도서관 명칭을 ‘서울대학교도서관’으로 변경하였고, 1992년 다시 ‘서울대학교중앙도서관’으로 변경하였다. 수원캠퍼스에 있던 농업생명과학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이전함에 따라 2005년 농학도서관도 수원캠퍼스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2006년 기준으로 분관으로는 사회과학도서관, 경영학도서관, 농학도서관, 법학도서관, 의학도서관, 치의학도서관, 국제학도서관 등 총 7개가 있다. 중앙도서관은 관악캠퍼스 62동으로 대학본부 뒤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2009년 기준으로 분관을 포함한 총 장서량은 약 4백만 권이다. 도서관 내 열람실은 재학생 전용 열람실과 일반인도 사용 가능한 열람실로 나뉜다. 그동안 국립 대학교라는 성격에 비추어 지역 주민도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도록 전 열람실이 일반인에게도 개방되면서 운영돼 왔는데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열람실 부족으로 인해 학내에서 개방 여부에 따라 토론이 계속 있어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람실 부족 현상이 심화되자, 현재는 일부 열람실의 일반인 출입은 제한하게 됐다. 관정관: 기존 중앙도서관에 이어 별설된 제2의 중앙도서관이다. 기존 중앙도서관의 시설 노후와 학업 공간의 수요를 충당하지 못함에 따라 2012년부터 별관 신설이 계획되어 공모전을 통한 디자인이 입안되었으며 12년 3월부터 신축 기금 1000억 원 모금행사를 펼친 결과, 불과 2개월 만에 이종환 장학재단의 이종환 이사장이 단일 최대 기부 액수인 600억을 지원키로 하였고, 이어 수많은 교원과 각계각층의 동문 및 본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뜻 있는 일반인까지 약 700여 명이 모금에 동참하면서 약 100억 원을 마련했다. 2013년 5월 29일에 기공식이 있었고 당초 예정보다 완공이 지연되다가 2015년 2월 5일, 마침내 준공식을 가진 후 2월 23일 개관했다. 제2도서관의 이름은 관정관이라 하였는데 크게 기부한 이종환 명예이사장을 기려 그의 아호 관정(冠庭)을 딴 것이다. 지하 1층, 지상 7층으로 구성되어 총넓이 약 2만 7천320m2이며 열람실 4천석, 공동학습실, 멀티미디어실, 스터디가든, 콘퍼런스룸, 실내정원 등이 시설되어 있고 건설에 기부한 유지자들을 기려 도서관 내부 서가와 의자, 기타 시설 등에는 100만 원 이상 기부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또 통로로 연결된 기존 중앙도서관 (3만 500m2)과 합하여 국내 대학교 중 명실상부 최대 규모의 도서관을 갖추었다. 그 완공과 함께 각종 상업 시설이 더불어 들어서는 것과, 교외 일반인 및 본교 졸업자의 출입을 제한하는 문제로 하여 논란을 빚기도 하였다. 규장각 1962년 5월에 서울대학교 부속중앙도서관 안에 ‘규장각 도서위원회’가 설치됐다. 1990년 6월에 규장각 전용 건물이 준공돼 교내 G1 게이트 우측편,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게 됐다. 한국학연구에 기초자료가 되어온 규장각 도서 이외에 17만 5천여 책의 고도서, 5만 여점의 고문서, 1만 8천여 점의 책판 등 총 30만 여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2006년 2월 1일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가 통합되면서 현재의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1986년부터 고문서 간행사업을 시작한 ‘규장각 자료조사 사업’이 진행돼 오고 있으며 2001년부터 ‘한국학장기기초연구사업’을 진행하면서 한국학 관련 연구 과제를 지원하고 있다. 한국학에 대한 워크숍/심포지엄, 콜로퀴엄, 학술세미나 등의 학술행사 열고 있으며 시민강좌, 초서강좌 등 일반인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한국문화’, ‘규장각’,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 학술지를 발행하고 있으며 무료로 자료를 열람하고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현재 원장은 국사학과 교수 김인걸이다. 연구 기관 서울대학교의 연구 기관으로는 주관대학연구소, 본부직할연구소, 국가지원연구센터, BK21플러스 사업단, 그리고 HK 사업단이 있다. 본부직할연구소로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소들이 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 기구인 국제 백신 연구소도 위치해 있다. 미술관 1995년 미술대학 동양화과 이종상 교수가 미술관의 건립 건의안을 냈으며 삼성문화재단의 기증으로 만들어졌다. 설계는 네덜란드의 건축가 렘 콜하스가 맡았으며, 지상 3층, 지하 3층, 연면적 1357평의 규모로 삼성물산에서 시공을 맡았다. 2003년 관악 캠퍼스 정문 옆에 착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2005년에 완공, 2006년 6월 8일에 개관하였다. 건물의 절반이 지면에서 떨어져 떠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 내에 기둥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나선형 계단으로 각 층이 연결돼 있는 독특한 구조로 국내 미술계와 건축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현재 미술대학 디자인학부 권영걸 교수가 미술관장을 맡고 있다. 2007년 10월 9일에는 마르그레테 2세 덴마크 여왕이 방문하기도 했다. 외부인은 유료 관람비를 지불해야 한다. 박물관 서울대학교 박물관은 관악캠퍼스에 있는 부속박물관이며, 1946년 대학의 설립과 함께 ‘서울대학교부속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개관하였다. 이는 1941년 세워진 경성제국대학 진열관의 동숭동 건물과 유물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1975년 중앙도서관 6층으로 옮겨졌으며 이름도 ‘서울대학교 박물관’으로 변경됐다. 1993년 동원관 옆에 있는 현재의 신축 건물로 이전됐다. 1층에는 고고역사와 현대미술 및 기획물을, 2층에는 인류민속과 전통미술을 전시하고 있다. 주요 상설 전시물로는 발해 소조불상, 근역화휘, 김홍도와 장승업의 작품을 비롯하여 각종 고고유적 출토물과 자연사 표본 등이 있다. 현재 박물관장은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이선복이다. 언어교육원 언어교육원은 1963년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에서 어학연구소로 발족하여 2001년 언어교육원으로 승격하였다. 언어교육원은 서울대학교 구성원에게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며, 외국인에게 한국어 및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이 밖에도 국가공인 영어능력 인증시험인 ‘TEPS’, ‘TEPS- Speaking & Writing’, ‘u-TEPS’ 등과 중국어, 일본어를 포함한 6개의 외국어 능력을 측정하는 ‘SNULT’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언어학 학술지 《어학연구》를 발행한다. 현 원장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전영철이다. 산하에 외국어교육센터, 한국어교육센터, TEPS 측정 센터, SNULT 센터가 있다. 언어교육원은 관악 캠퍼스 수의대와 행정대학원 옆에 있으며, 연건 캠퍼스에서도 분원을 두어 교육을 하고 있다. 학생생활관(구 기숙사) 서울대학교 관악사는 학부생활관, 대학원생활관, 그리고 가족생활관으로 구성돼 있다. 1975년 8월 서울대학교 설치령 제 14조에 의거, 관악사 5개동과 후생동 1개동을 개사하였으며, 당시 수용인원은 남학생 970명이었다. 여학생 거주동은 1983년 3월에 개사됐고, 수용인원은 288명이었다. 1996년 8월에는 기혼 대학원생들을 위한 가족생활관을 개사하였고, 수용세대는 200세대이었다. 1999년 9월에는 918동 1인실 대학원생활관을 개사하였고, 수용인원은 304명이었다. 2004년 3월에는 919동 아파트형 기숙사를 개사하였고, 수용인원은 990명이었다. 2010년 9월에 BTL생활관을 개사하였고, 7개동으로 수용인원은 2,500명이었다. 2014년 6월을 기준으로 학부생활관 8개동, 대학원생활관 7개동, 가족생활관 5개동으로 총 5,010명의 수용규모를 갖추고 있고, 여기에는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유학을 온 1,000여 명의 외국인 학생들도 포함돼 있다. 현재 사감은 수의과대학 수의학과 김대용 교수이다. 다른 학교들과 달리 특별히 제한된 출입 시간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더 상세한 사항들은 ‘관악사 가이드 북’(안내책자) 에 기술돼 있다. 관악사에서는 해마다 관악사 가이드 북을 발간하여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외국인 학생들을 위해서 영문판 도 제공하고 있다. 관악사는 숙박 외에도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을 운영하여 학생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있다. 2012년 12월부터 서울대학생을 대상으로 소통·봉사·팀웍의 민주시민의 역량을 갖춘 사회적 리더 양성하기 위한 반복 트레이닝 토론 프로그램인 아크로폴리스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2014년 6월부터 관악사 거주 사생이 자신이 준비한 학업 관련 컨텐츠를 영상매체를 통해 다른 관악사 구성원과 자발적으로 공유하는 지식나눔프로그램, 서울대학교 관악사 지식실천공유프로그램(GKNet)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연건사는 의과대학 등이 있는 연건캠퍼스에 있는 기숙사로 일반 사생동은 553명, 가족 생활동은 17세대의 수용 규모를 갖추고 있다. 함춘사는 130명, 국제회관은 51명이 그 수용 규모이다. 기타 시설 기록관 은 1997년 7월 서울대학교 기록 및 역사 보존을 위해 설치된 대학 사료실에서 출발하였으며, 2001년 9월에 현재의 명칭인 기록관으로 개칭됐다. 서울대학교와 관련된 역사 기록 및 행정 문서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있다. 기록관에 소장된 기록물은 서울대학교의 역사적 발전과 변천을 보여주는 학교사 자료를 포함해 학생 운동 관련 자료, 교수 및 동문 등이 기증한 개인 컬렉션 등이다. 일반인도 열람 및 복사가 가능하며(단, 개인 정보가 포함된 자료는 부분열람만 가능) 현재 약 5만여 건의 서울대 관련 기록을 보존하고 있다. 기록관 홈페이지를 통해 기록물을 기증할 수도 있다. 기초교육원 은 2002년 대학생들의 기본 소양과 각 전공의 기초 지식을 함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치됐다. 서울대학교 합격자를 대상으로 하는 영어(TEPS 평가), 수학, 물리 성취도 평가를 담당하고 있으며 성적에 따라 수준에 맞는 기초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핵심교양의 지정과 관리를 담당하고 있으며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주제와 수업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제공하고 있다. 현 원장은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허남진이다. 대학생활문화원 은 학생들의 심리검사 및 상담을 비롯한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962년 2월 ‘학생지도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는데 1964년 의과대학 함춘회관에 있다가 1975년 관악캠퍼스 학생회관으로 장소를 옮겼으며, 2001년에 현재의 명칭을 대학생활문화원으로 변경하였다. 현 원장은 사회과학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혜란이다. 평생교육원 은 온/오프라인 평생교육을 통해 동반자 사회의 지식나눔을 실천하는 기관으로 2010년 5월 개원하였다. 다양한 시민교양교육 프로그램과 원격교육을 활용한 전문자격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이 중 서울대학교 온라인 한국어교원 양성과정은 2013년 1월 기준으로 33개국 80여개 지역의 학습자에게 서비스되고 있다. 현 원장은 국어국문학과 교수 장소원이다. 산하 부설학교 서울대학교 산하에는 총 4개의 부설학교가 존재한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여자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가 그것으로, 서울대학교 법인화 이후에도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법인 소속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다가 최근 완전히 편입되었으며, 국립대학법인이 부설한 학교는 국립학교로 간주한다는 관련 법조항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국립이지만, 운영은 사립학교에 가까운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서울대학교 부설학교의 교직원들 중에는 아직 국공립학교 교사들이 남아있으나, 그들이 수 년 후 정기 인사이동을 하고 법인에서 빈 자리를 채울 교직원을 새로 뽑으면, 신임 교직원들은 국공립학교 교사가 아니라 법인 소속 직원이 되므로 사립학교 교직원의 신분에 가까우며 그 외 운영 전반이 사립학교와 유사하게 이루어진다. 위상 대한민국 정부가 시행한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수석들이 주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생들이 대한민국 학계·정계·재계에 대거 포진돼 있다. 많은 인재를 배출해내고 있는 동시에 국내에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혹은 '대한민국의 최고 지성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인식이 절대적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학벌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서울대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이 초기에 수능·서울대학교 폐지를 추진한 적이 있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인 타임스가 발표한 세계 대학 평가와 전문 대학평가 기관인 QS가 발표한 QS 세계 대학 평가 등의 세계 대학 평가에서 서울대학교의 순위는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2005년 93위로 처음 100위권에 진입한데 이어 2006년 63위, 2007년 51위, 2008년 50위, 2009년 47위, 2010년 50위, 2011년 42위, 2012년 37위, 2013년 35위, 2014년 31위 로 아시아 최고의 명문이자 일본 최고의 명문이라고 하는 도쿄대와 동위에 자리하는 등 매년 순위가 올랐으며, 이렇듯 국외 종합 평가에서도 국내 대학 가운데 최고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대학교는 2015년까지 세계 30대 대학에 진입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바 있으며 2025년 이내에는 세계 순위에서 무려 10위권 대학 가운데 들겠다는 포부를 시사한 바 있다. 하지만, QS 평가는 학술적, 혹은 연구성과 보다는 평판도가 대학 순위에 큰 비중을 차지해서 신뢰성의 문제가 많이 제기된다. 2015년에 타임스 등 여러 대학 평가기관에서 평가대학을 확대하고, 채점기준을 바꾸면서 QS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 대학 평가기관 순위가 하락했다. 2015년 타임스 기준 순위는 85위, ARWU 기준 순위 100위권 이하, 2018 US News&World Report 기준 순위 129위이다. 한편, 2009년 서울대학교는 프랑스 파리 국립광업학교가 실시한 《최고경영자배출능력에 따른 대학평가》에서 세계 500대 기업 CEO 중 9명을 배출해 세계 5위에 올랐다. 학생 활동 총학생회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군부독재 정권 시대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끈 주요 대학 학생회 가운데 하나이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주화의 달성과정에서 서울대학교 학생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2007년을 기점으로 50대를 맞았으며, 3.8 여성의 날 행사, 4.19혁명 기념 대행진, 4.30 메이데이 행사, 봄 대동제(5월), 가을 대동제(10월), 총학생회 선거(11월) 등을 기획한다. 2006년 황라열 총학생회장의 탄핵과, 송동길 부총학생회장의 사퇴로 한동안 단대 회장단 회의 체제로 운영됐다. 선거는 매년 11월에 열리지만 2006년 선거 당시 투표율이 낮아 2007년 4월에 재선거가 있었으며, 학생행진(운동권 좌파) 계열인 한성실 후보가 회장으로 당선됐다. 2007년 선거에서는 비 운동권 계열인 실천 가능 선거운동본부의 전창열 후보가 당선됐고 이듬해 선거에서도 같은 선본의 박진혁 후보가 당선됐다. 이후 이른바 ‘식권파동’,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 도청 사건’ 등을 겪으며 2009년 11월, 2010년 4월 두 차례의 총학생회 선거가 무산되며 2010년은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로 운영됐다. 2010년 11월, 학생행진 계열로 사회대 학생회장 출신인 지윤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됐으며 이후 2012년 3월에 선출된 사노위 계열로 법대 학생회장 출신의 오준규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현재 2013년 4월에 당선된 산림환경학과 소속 김형래가 총학생회장을 맡고 있다. 동아리 학생 동아리는 본부에 소속된 중앙 동아리와 단과대학에 소속된 단과대학 동아리로 나뉘어 있으며 본부 동아리의 수는 2006년 기준으로 103개이다. 본부 동아리에 가입한 학생들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그들의 취미와 특기를 연마한다. 서울대학교에는 체육 특기생이 없지만 야구를 비롯한 축구, 농구부 등이 존재한다. 1977년 창단한 야구부는 199패 1무 뒤에 2004년 첫 승을 거뒀으며, 축구부도 역시 같은 해인 2004년에야 18년 만에 승리를 맛보았다. 농구부도 기록은 좋지 않아, 2001년 이후로 무승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서울대학교 복싱부는 2001년부터 대학 복싱 동아리연합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네 번이나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교내 언론 대학신문: 주간지 《대학신문》(大學新聞)은 1952년 2월 4일 한국 전쟁 피난 중에 창간돼 1953년 서울 동숭동으로 이전하였으며, 1958년부터 고교판을 발행한 적도 있다. 1960년 재정난으로 한때 발간이 중지되기도 하였지만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여 오늘날까지 발행해오고 있다. 창간 당시에는 유료(500원)였고 한때 주 2회 찍어내던 적도 있으나 현재는 매주 월요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방학이나 시험기간에는 발행하지 않는다. 서울대저널: 월간지 《서울대저널》은 1995년 총학생회에서 《우리세대》란 이름으로 창간했다. 1997년 총학생회에서 벗어났으며, 2001년 《서울대저널》로 이름을 바꾸었다. 교육저널: 2007년 사범대 학생회에서 준비호를 발행하였으며 이후 연 4회 혹은 3회 발간되고 있다. 준비호 발행 이후에는 사범대 학생회 소속이 아닌 독립적인 자치언론으로 운영되고 있다. 교지 관악: 1990년에 창간, 2014년까지 매학기 말(연 2회)에 발행되었다. 본래 총학생회 산하에 있었으나 2006년 총학생회회칙에서 해당 조항이 삭제됐다. 2014년에는 신입 기자 부족으로 폐간을 발표하였다. 쥬이쌍스: 여성주의 자치언론 《쥬이쌍스》는 2002년 시작하여 꾸준히 발행되고 있다. 스누나우: 2001년 문을 연 인터넷 뉴스 ‘스누나우’는 2007년 종간하였다. 스누라이프(SNULife): 1999년에 개설됐으며 학내 뉴스, 선거 소식과 역사, 교수들과의 대화 등의 내용을 제공하는 등 언론으로서의 기능도 일부 담당하고 있다. 스누라이프는 비공식적인 사이트이고, 일부 학생들의 의사소통을 담당하는 사이트로써 기능하고 있다. 동문회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서울대학교는 설립과 개교 이래로 학계, 법조계, 정계, 재계, 교육계, 언론계, 문화예술계, 의료계 등 사회 다방면에 걸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33만 동문을 보유하였다. 서울대학교 총동창회는 시기별로 단독활동기(1946년 ~ 1968년 12월)와 연립활동기(1968년 12월 ~ 1976년 2월)와 종합활동기(1976년 2월 ~ 1979년 12월) 그리고 발전구축기(1980년 1월 ~ 현재)로 나눌 수 있다. 정문 광장 '샤' 모양을 한 정문은 1978년 완공된 것으로 서울대학교의 랜드마크이다. 국립 서울대학교의 초성(ㄱㅅㄷ)을 표현한 조형물로 서울대학교의 교훈인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의 '진리'를 찾는 열쇠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울대입구역 2번 출구로부터 이어지는 관악로 14길은 여기서 이름을 본따 '샤로수길'이라 불린다. 샤로수길은 카페와 식당이 즐비한 곳으로 기실 관악구에 위치한 커다란 상권 가운데 하나이다. 2006년에는 개교 60주년을 맞아 기존 노란색에서 밝은 은회색으로 새로이 도색하고 정문 주변에 밤새 점등되는 조명을 설치했다. 이는 공적인 교육 공간의 이미지를 강화함과 동시에 24시간 깨어 있는 학문의 전당으로서의 서울대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2022년에는 정문 환경 개선 사업이 실시되어 정문 광장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조형물 바로 아래를 지났던 기존의 4차선 도로는 관악산 계곡 방향으로 옮겨졌고 정문 광장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서현 교수의 설계 아래 4월 25일 착공하여 동년 8월 24일에 완공되었다. 광장 바닥에는 서울대학교의 정장이 새겨졌고, 그 위에는 '지식의 계단'이라는 이름의 삼각형 모양의 수경 시설이 설치되었다. '샤' 조형물 앞에는 '지식인의 의자'가 설치되어 재학생 및 졸업생, 방문객 등이 기념 사진을 남기기에 용이하게 되었다. 같이 보기 경성대학 경성제국대학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축구단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축구단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축구단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축구단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서울대학교 구 공과대학 본관과 교사 (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다산관과 창학관):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12호 서울대학교 구 공과대학 광산학과 교사 (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대륙관):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369호 각주 참고 문헌 서울대학교 40년사 편찬위원회 편, 《서울대학교 40년사》, 서울대학교출판사, 1986 서울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편, 《서울대학교 50년사》, 서울대학교출판사, 199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2014년 3월 18일에 확인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50년사 편집위원회 저,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50년 (1961-2011)》,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인류학과, 2011, 서울대교수민주화운동50년사발간 저, 《서울대학교 교수민주화운동 50년사》, 서울대학교출판사, 1997 차배근,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사 1》,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최종고, 《서울법대시대. 내가 본 서울대 반세기》,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한기언, 《서울대학교의 정신》, 한국학술정보, 2006, 외부 링크 서울대학교 박물관 서울대학교 미술관 서울대학교 관악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서울특별시의 대학교 서울 관악구의 학교 서울 종로구의 학교 강원특별자치도의 대학교 평창군의 학교 아시아연구네트워크 국제경영대학발전협의회 1946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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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C%B9%98%EB%82%98%EC%A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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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치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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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치나주()는 나이지리아의 북부에 있는 주로, 주도는 카치나이다. 면적은 24,192km2이며, 인구는 3,878,344명(1991년)이다. 1987년 9월 23일 카두나주에서 분리되어 신설되었다. 북쪽으로는 니제르와 국경을 접하며 남쪽으로는 카두나주, 서쪽으로는 잠파라주, 북동쪽으로는 지가와주, 남동쪽으로는 카노주와 접한다.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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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A%B9%EC%8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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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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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수(趙承洙, 1963년 1월 22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17·18대 국회의원(울산 북구)을 지냈으며, 정의당 상임고문 및 울산광역시당위원장이다. 동국대학교 생명자원경제학과 학사, 그리고 울산대학교 지역개발대학원 행정학 석사 과정, 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북한학과 정치학 박사 과정 수료)을 나왔다. 1991년 2월부터 1992년 3월까지 민중당 당무위원 등을 지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사전선거운동 혐의로 2005년 국정감사 기간 중 9월 29일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하여, 진보신당 연대회의를 창당하는 주역이 되었다. 2009년 4.29 재보궐선거에서 진보신당 소속으로 울산 북구에 다시 출마해 당선되었다. 2011년 10월 6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 실패에 책임을 지고 통합진보정당 건설에 매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진보신당에서 탈당하였다. 이후 통합진보당 합류를 위해 새진보통합연대를 창당했고 진보정당 통합 안건이 가결되어 통합진보당에 합류하였다. 2010년 진보신당 당원들이 참여한 당대표단 선거에서 96.1%의 찬성률로 제3기 진보신당 연대회의 당대표(2010~2011)를 맡았다.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대한 국회의 규탄 결의안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행사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군사적 대응 방식만 들어가고 평화적 통일 방안에 대해 논의하지 않은 결의문은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2012년 통합진보당을 탈당해 진보정의당 창당에 합류하였다. 생애 학생운동에서 국회의원 첫 당선까지 1996년, 동국대학교 생명자원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원래 1981년에 입학했으나 1982년, 살인마 전두환 군사독재 세력을 쳐서 거꾸러뜨리는 내용의 교내 시위를 주도하다가 제적당했었다. 조승수는 이 사건으로 구속돼 수감당했다가 이듬해인 1983년 8월에 출소했다. 그 후 울산 등지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다가 1986년 10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당한 후 다음해인 1987년 9월에 출소했다. 조승수는 출소해 울산에 사회과학을 취급하는 서점 '신새벽서점'을 개설했다. 1989년, 지금은 현대중공업으로 통합된 '현대엔진'의 노동자들을 테러한 사건인 '1.8 식칼테러사건'이 발생한다. 조승수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당해 2년 넘게 도피하면서 생활했다. 신새벽서점에서는 당시 필명으로 활동하던 황광우의 책도 판매했는데 수사하는 과정에서 노동조합원들이 신새벽서점에서 황광우의 책을 산 것으로 드러나는 바람에 엉뚱하게 신새벽서점으로 불똥이 튄 것이다. 1991년부터는 민중당에 참여해 활동해다. 이 경험은 그 후 1993년부터 시작한 '진보정당추진위원회' 활동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1994년부터는 환경 운동에 관심하기 시작해 1995년에 울산 북구에서 최연소 시의원으로 당선 된 후 울산환경운동연합의 정책실장을 지내기도 했고 참여연대 울산지부의 공동대표를 맡기도 하였다. 1998년에는 무소속으로 나와 울산시 북구청장으로 선출돼 '전국 최연소 기초단체장'이란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2004년에 실시된 제17대 총선에서는 울산 북구에 출마해 친박 바람을 등에 업은 후보 윤두환을 7,000여 표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지역구의 현안인 음식물처리시설과 관련해 서명운동에 참여한 것이 2005년 국정감사 기간 중 사전선거운동으로 선관위에 고발돼 2005년 9월 29일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조승수 측은 이에 대해 '선거운동이 아니라 지역 민심 동향을 파악한 것으로, 뇌물 수수 등의 불법행위가 일체 없었으며 이는 진보당 탄압의 일환'이라 주장하였다. 민주노동당과 동료의원들도 조승수를 구제하려고 탄원하는 운동을 벌였지만 국회의원직은 회복되지 않았다. 분당 사태와 진보신당의 창당 조승수의 국회의원직 상실로 울산 북구에서도 재보궐선거가 실시됐다. 보궐선거 후보에는 정갑득이 선출됐다. 당초 민주노동당은 울산 북구민 중 노동자가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또다시 재선에 기대했으나 선거를 얼마 앞두지 않고 터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수석 부의장 강승규가 비리를 저지른 사건과 이 사건의 여파로 벌어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내 정파 분쟁 그리고 이것보다 앞서 터진 민주노동당원이던 동국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교수 강정구의 필화 사건 등 연한 악재 탓에 민주노동당은 울산 북구 재획득에 실패한다. 10월 31일에는 이에 대한 책임을 두고, 결국 대표단 전원이 사퇴하기에 이른다. 이에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궐위한 직위를 채우고자 새 지도부 선거가 실시됐다. 새 지도부 선거에는 평등파에게 지지받고 출마한 조승수와 자주파에게 지지받는 문성현 그리고 무당파를 자임한 주대환이 출마해 3파전 양상을 띠었으나 사실상 당내 양대 정파에 지지받은 조승수와 문성현의 양자 구도로 압축되고 있었다. 2006년 1월 20일부터 1월 24일까지 나흘 간 실시된 지도부 선출 투표 결과 조승수는 44.8%를 얻어, 1위인 문성현 (47.6%)와 결선 투표를 치르게 되었다. 2월 6일부터 2월 10일까지 나흘 간 실시된 결선 투표에서도 조승수는 46.38%를 획득해 53.62%를 얻은 문성현에게 패배한다. 이 과정에서 조승수와 문성현을 지지하는 당원들 사이에 당원게시판을 이용해 육두문자가 오가거나 조승수를 음해하는 성질을 띤 글이 난립하는 등 혼탁한 양상을 보였고 이것은 평등파와 자주파 간의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됐다. 이후 조승수는 민주노동당의 정책연구소인 진보정치연구소의 소장을 맡게 된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실시된 당내 경선도, 정파 선거의 형태로 벌어져 결국 당내 양대 정파의 갈등을 심화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권영길을 지지했던 자주파와 노회찬을 지지했던 평등파 사이에 노회찬의 과거 경력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더욱이 경선에서 승리한 권영길이 경선 과정에서 구호로 내건 '코리아연방공화국'안과 '백만민중대회' 등을 두고서도 권영길과 자주파가 당내 정책연구소인 진보정치연구소(소장: 조승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내세웠다 하여 젊은 연구원들의 집단으로 하는 반발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승수는 레디앙에 기고한 글을 이용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군사왕조집단'이라 지칭해 자주파 최고위원들에게 징계를 요구받기도 하였다. 한편, 대선 직후 패배의 원인을 두고 정파 간 책임 공방이 심화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평등파 성향 당원들의 탈당 행렬이 이어졌다. 2008년 1월 8일, 경기도 구리의 지역위원회 전원의 탈당을 시작으로 11일에는 부산 지역 당원 52명이, 21일에는 조현연을 위시한 11명이 추가로 탈당했고 이어 광주·여수 등서도 당원들의 집단 탈당이 이어졌다. 2008년 1월 27일에는 조승수를 중심으로 민주노동당의 전 대변인이었던 김형탁과 함께 선도 탈당한 홍세화, 김혜경, 김석준, 조현연 등이 참가한 '새 진보정당 운동'이 닻을 올리게 된다. 2월 1일에는 결국 조승수와 김형탁도 탈당했다. 이후 종북 주의의 청산을 못박은 심상정의 비상대책위원회 혁신안이 당내 다수파인 자주파에 의해 부결되자 심상정과 노회찬도 조승수의 '새 진보정당 운동'에 참가한다. 이 '새 진보정당 운동'은 창당 과정을 거쳐 진보신당 연대회의로 이어진다. 국회의원 재당선 창당 이후, 녹색정치위원회 등에서 활동하던 조승수는 2009년 3월 12일자로 윤두환(울산 북구)의 의원직 상실이 확정되자, 바로 다음날인 13일, 4.29 재보선에 출마할 뜻을 밝힌다. 이에 대항해 민주노동당 측에서는 김창현을 내세워 실지(失地) 회복의 염원을 드러냈다. 진보진영의 후보가 양립할 경우 패배할 수도 있었기에 3월 24일부터 양 당 간 후보단일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양 당 간의 일진일퇴의 협상 끝에 4월 9일, 후보단일화가 합의되었으나 민주노총 조합원 총투표를 둘러싼 양 당 간의 입장차이와 총투표가 선거법을 위반할 수도 있다는 울산 선거관리위원회의 유권해석으로 난관에 부딪힌다. 그러나 4월 11일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울산 선관위의 유권해석을 번복하는 새로운 유권해석을 내놓아 후보 단일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지속적인 입장차로 난항을 겪던 후보단일화는 결국 선거를 며칠 앞둔 4월 23일에서야 최종 합의되었고, 4월 25일부터 26일까지 주말동안 진행된 여론조사를 통해 26일 저녁 조승수 후보가 단일 후보로 선출되었다. 재보선 당일, 조승수는 49.2%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지역구인 울산 북구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한편, 이 선거로 진보신당 연대회의는 원내정당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보대통합 실패와 통합진보당 창당 진보신당 대표를 역임한 조승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대통합을 추진했으나 2011년 9월 4일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진보통합안이 부결됨으로써 좌절되었다. 이에 조승수는 노회찬, 심상정과 함께 탈당 '새진보통합연대'를 결성하고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과 함께 '통합진보당 건설'에 참가하였다. 2011년 12월 통합진보당 창당 후 2012년 3월 통합진보당으로 울산 남구갑 총선 후보로 출마하였다. 울산 남구갑에서 심규명 민주당 후보와 야권단일화를 시도했으나 경선에서 패배하고 사퇴하였다. 울산시장 출마 조승수는 2012년 11월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에서 탈당, 정의당 건설에 참여. 2014년 2월 정의당 울산시당 창당 후 울산시당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이후 2014년 6.4 지방 선거에서 정의당 울산시장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2위로 첫 낙선을 경험했다. 애초 울산시장 선거는 새누리당 김기현 후보와 5명의 야당 후보가 경합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이영순 후보가 중도 사퇴했고, 새정치민주연합의 이상범 후보는 조승수 후보와의 단일화 여론조사에 패해 사퇴했다. 반면 노동당의 이갑용 후보는 끝까지 완주했다. 또한 조승수는 선거운동 기간동안 시사주간지 시사인을 인용해 상대 후보인 새누리당 김기현 의원이 소유한 건물에 성매매 업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기현은 "선거용 흑색선전"이라며 법적 조치를 예고했다. 조승수는 이후 TV토론에서도 성매매 업소 입주 의혹을 계속 제기했다. 김기현은 조승수의 무면허 운전, 음주운전 전력을 꼬집었다. 선거 전인 4월 7일, 박유기 전 금속노조 위원장은 조승수를 비롯해 새정치민주연합 이상범, 통합진보당 이영순, 노동당 이갑용 후보 모두 노동운동가 출신이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선거 결과 26.43퍼센트를 획득하며 65퍼센트를 득표한 김기현 후보에게 밀려 2위로 낙선했다. 학력 2009~2011 동국대학교 대학원 북한학과 박사 수료 1998~2001 울산대학교 정책대학원 행정학 석사 졸업 1981~1996 동국대학교 생명자원경제학 학사 졸업 1978~1981 학성고등학교 졸업 1975~1978 울산 제일중학교 졸업 1969~1975 울산 중앙초등학교 졸업 경력 [진보정당추진위원회] 활동(1993년~1995년) [울산참여연대] 공동대표(1995년~1998년) 제1대 울산광역시 북구청장(민선,1998년 7월~2002년, 무소속) 제17대 국회의원(울산 북구, 2004년 6월~2005년 9월, 민주노동당) 에너지정치센터 대표(2008년~2009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이사장(2009년~) 제18대 국회의원(울산 북구, 2009년 4월~2012년 5월) 진보신당 대표(2010년 10월~2011년 10월) 동국대학교 사회과학대학원 겸임교수(2013 3월~12월) 정의당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본부 공동본부장(2014년 2월~ ) 정의당 울산광역시당 위원장(2014년 2월~ ) 전과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징역 1년 - 1983년 4월 26일 선고, 1984년 8월 14일 특별복권 국가보안법위반(기타):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 1987년 7월 30일 선고, 1988년 2월 27일 특별사면복권 도로교통법위반(음주운전): 벌금 100만원 - 2003년 6월 4일 선고 도로교통법위반(무면허운전): 벌금 100만원 - 2003년 12월 12일 선고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위반: 벌금 150만원 - 2004년 12월 30일 선고, 2008년 8월 15일 특별복권 수상 1996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시민상 1999 한국청년의 전화 `올해의 청년상' 정치부문 2010 ‘제9회 대한민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상’ 정치공로부문 역대 선거 결과 각주 외부 링크 조승수 의원 지지 카페(다음) 조승수 의원 지지 블로그(네이버) 조승수 의원 트위터 《울산매일 여론조사》 조승수, 유력후보들 제치고 1위, 《울산매일》 2009년 4월 2일. 진보정치 1번지, 울산북구는 지금..., 《민중의 소리》, 2008년 2월 12일. 196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함안 조씨 울산광역시 출신 울산중앙초등학교 동문 울산제일중학교 동문 학성고등학교 동문 동국대학교 동문 울산대학교 동문 동국대학교 대학원 동문 동아대학교 교수 대한민국의 불교도 민중민주파 민중당의 정치인 참여연대 민주노동당 (대한민국) 당원 진보신당 당원 통합진보당의 정치인 정의당 (대한민국) 당원 새진보통합연대 당원 울산시의원 울산 북구청장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울산광역시의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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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2%85%EB%A1%9C5%EA%B0%80%EC%97%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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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5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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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5가역(Jongno 5(o)-ga station, 鍾路5街驛)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에 위치한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전철역이다. 부역명은 삼양그룹이다. 역사 1974년 8월 15일 :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과 함께 영업 개시 2021년 4월: 리모델링 완료 역 구조 2면 2선의 상대식 승강장이며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출구는 8개다. 승강장 역 주변 광장시장 종로5가동 행정복지센터 종로6가동 행정복지센터 종로5가동 우체국 종묘 서울특별시중부교육지원청 청계4가 청계5가(마전교) 청계천 평화시장 서울혜화경찰서 서울효제초등학교 훈련원공원 신한은행 종로중앙금융센터 신한은행 종로6가지점 신한은행 종로광장시장지점 두산아트센터 이화사거리방면 한국기독교연합회 이용객 변동 인접한 역 사진 각주 외부 링크 종로5가역 소개 (서울교통공사 사이버 스테이션 홈페이지) 서울 종로구의 전철역 1974년 개업한 철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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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D%9D%A5%EA%B3%A0%EB%93%B1%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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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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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고등학교(信興高等學校)는 경기도 동두천시 안흥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57년 7월 : 신흥농축기술학교 개교 1960년 4월 14일 : 학교법인 신흥학원 설립 인가 1960년 5월 3일 : 신흥농업고등학교 개교 (농업과, 축산과) 1960년 5월 3일 : 초대 이사장 강신경 목사 취임 1960년 5월 3일 : 제1대 강순경 교장 취임 1962년 12월 6일 : 신흥실업고등학교로 개편 인가(농업과 3학급, 상업과 3학급) 1984년 3월 20일 : 청심헌(기숙사) 개관 1987년 11월 23일 : 신흥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1993년 3월 1일 : 신흥고등학교 개편 인가 (보통과 12학급) 2003년 3월 1일 : 제4대 강성종 이사장 취임 2020년 1월 8일 : 제58회 졸업 (102명, 졸업생 총수 7,301명) 2020년 3월 1일 : 제5대 김계민 교장 취임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신흥고등학교 홈페이지 동두천시의 고등학교 경기도의 사립 고등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대한민국의 남자 고등학교 1960년 개교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야구부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골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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