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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A%B8%EB%9D%BC%EC%9D%B4%EC%95%84%EC%8A%A4%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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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아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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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아스기(Triassic Period)는 중생대의 세 기 중 첫번째 시기로, 고생대 페름기와 중생대 쥐라기의 사이의 시기이다. 약 2억 4500만 년 전부터 1억 8000만 년 전까지(또는, 2억 5100만 년 전부터 2억 100만 년 전까지) 지속되었다. 삼첩기(三疊紀)라고도 한다. 트라이아스기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 시대의 최고 지층인 독일의 지층이 3개로 뚜렷이 구분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실제 표준 지층은 스위스의 석회암 해성층을 이용한다. 이 시대의 지구는 페름기 말에 형성된 초대륙 판게아가 유지되었으며 해안선은 단조로웠다. 후기에 들어서 판게아는 서서히 분열되기 시작하였지만, 이 대륙의 분열이 트라이아스기의 지구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기후는 초기에는 건조하였으며, 후기는 습하고 더웠다. 전기에는 주로 단궁류와 원시 포유류, 대형 파충류가 번성했으며, 중기 ~ 후기에는 중생대의 공룡이 등장했다. 바다에는 원시 어룡과 수서 파충류, 그리고 원시적인 암모나이트가 등장했다. 하늘에는 소형 익룡이 나타났다. 익룡이 등장하기 전까지 하늘을 지배했던 곤충은 다양화하여, 노린재목, 대벌레목, 벌목이 크게 번성하였다. 시대 구분 주요 생물 이 시기의 주요 생물로는 육상 플라케리아스(Placerias), 칸네메리아(Kannemeyeria, Cannemeeria), 포스토수쿠스(Postosuchus)//파충류 플라테오사우루스(Plateosaurus), 코엘로피시스(Coelophisys), 헤레라사우루스(Hererasaurus)//공룡 침이 발달하지 않은 원시 벌목, 티타노프테라목(Titanoptera), 대벌레목, 노린재목//곤충 바다 킴보스폰딜루스(Cymbospondylus), 노토사우루스(Nothosaurus), 타니스트로페우스(Tanistropheus)//어룡, 수서 파충류 등을 들 수 있다. 각주 기 (지질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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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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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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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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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역사회획득 폐렴(Community-Acquired Pneumonia) 공동농업정책 시카고 지역 프로젝트 CAP 정리 캡(1992~): 대한민국의 가수. 2010년부터 2023년까지 아이돌 그룹 틴탑의 일원으로 활동. 본명 방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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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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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D%88%AC%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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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투 (동음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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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투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문신을 흔히 영어식 표기인 타투(tattoo)라고 한다. 러시아의 음악 그룹 t.A.T.u.. TATTOO (나카모리 아키나의 노래) 타투 (2015년 영화) 타투 (2002년 영화)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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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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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4%84%EB%A6%AC%EC%9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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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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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Julia)는 다음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인명 줄리아 피오나 로버츠(Julia Fiona Roberts, 1967~) - 미국의 영화 배우이다. 줄리아 아일린 길라드(Julia Eileen Gillard, 1960~) -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이다. 줄리아 멀록(Julia Mullock, 1928~) - 회은황태손 이구의 전처이다. 줄리아 (AV 배우): 일본의 여자 AV 배우. 줄리아 레논: 리버풀 출신 여성 줄리아 차일드: 미국의 요리연구가이자 셰프 줄리아 루이드라이퍼스: 미국의 배우 줄리아 스타일스: 미국의 배우 줄리아 오먼드: 잉글랜드의 배우 줄리아 가너: 미국의 배우, 모델 줄리아 스밋: 미국의 수영 선수 줄리아 세라노: 미국의 트랜스여성 생화학자이자 트랜스젠더 인권운동가, 트랜스여성주의 작가 줄리아 몬테스: 필리핀의 배우 줄리아 파르네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情婦) 가운데 한 사람 줄리아 퀸타발레: 이탈리아의 여자 유도 선수 줄리아 곤차가: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귀족 여성 줄리아 닉슨 솔: 미국의 배우 줄리아 존스: 미국의 배우 줄리아 세라 스톤: 캐나다의 배우 줄리아 골다니 텔레스: 미국의 배우, 발레 무용수 줄리아 그랜트: 미국의 전 대통령 줄리아 페이: 미국의 배우 줄리아 윈터: 잉글랜드의 배우 줄리아 스톤: 오스트레일리아의 싱어송라이터 줄리아 보저럽: 미국의 프로 테니스 선수 줄리아 마이클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줄리아 엘레트라 고리에티: 이탈리아의 배우 줄리아 미켈리니: 이탈리아의 배우 줄리아 사왈라: 잉글랜드의 배우 줄리아 라차리니: 이탈리아의 배우 줄리아 버터스: 미국의 배우 줄리아 켄트: 캐나다의 첼로 연주자, 작곡가 줄리아 재클린: 오스트레일리아의 싱어송라이터 줄리아 앤: 미국의 포르노 배우, 댄서, 모델 줄리아 바레토: 필리핀의 배우 줄리아 링: 미국의 배우 줄리아 마셀: 폴란드의 싱어송라이터 줄리아 보스: 캐나다의 배우, 모델 음악 Julia - 영국의 록 밴드 비틀즈의 곡이다. Julia - 일본의 아이돌 그룹 록 밴드인 TOKIO의 싱글이다. 영화 줄리아 (영화) 줄리아 줄리아: 영국에서 제작된 피터 델 몬트 감독의 1987년 드라마, 스릴러, 미스터리 영화 컴퓨터 과학 줄리아 (프로그래밍 언어) 같이 보기 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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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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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D%98%9C%EC%A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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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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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은 다음 사람을 가리킨다. 실존 인물 김혜진(1974년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김혜진(1975년 ~ )은 대한민국의 여자 배우이다. 김혜진(1977년 ~ )은 대한민국의 변호사이다. 법무법인 우리 청주저점 대표 변호사이며, 충북지역 최초 이혼전문분야, 충북지역 2호 및 여성변호사 최초 형사전문분야 등을 대한변호사협회에 인증받고 전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혜진(1983년 ~ )은 대한민국의 여자 성우이며 김나율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혜진(1983년 ~ )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김혜진(1989년 ~ )은 대한민국의 여자 배구선수이다. 김혜진(2002년 ~ )은 대한민국의 여자 배우이다. 김혜진은 대한민국 여자 가수 주니아의 본명이다. 김혜진(1993년 ~ )은 대한민국 가수이다. 김혜진(1991년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김혜진(1996년 ~)은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다. 가공 인물 김혜진: 굿 닥터 (2013년 드라마)의 등장인물 김혜진: 너희들은 포위됐다의 등장인물 김혜진: 그녀는 예뻤다 (대한민국의 드라마)의 등장인물 김혜진: 선물 (드라마)의 등장인물 김혜진: 위대한 쇼의 등장인물 김혜진: 아파트 (드라마)의 등장인물 김혜진: 듀얼 (드라마)의 등장인물 김혜진: 더 폰의 등장인물 김혜진: 그녀는 예뻤다 (일본의 드라마)의 등장인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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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A%B5%AD%EC%9D%B8%EC%9D%98%20%EC%84%B1%EB%AA%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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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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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성명(中國人의 姓名)은 중국인의 성과 이름을 말한다. 한족의 성씨 한족(漢族)의 성씨는 한자 한 자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두 자로 이루어진 성씨는 복성이라고 한다. 중국 성씨의 형성 중국 성씨의 형성 과정과 유래는 매우 다양하며 복잡하다. 대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유형이 있다. 출생지 지명, 봉국, 봉지 등에서 유래: 陳, 馮, 魯, 杜, 謝, 楊, 董, 蔡, 呂, 趙 선인(先人)의 이름 글자, 묘호, 시호에서 유래: 張, 牛 선인의 작위, 관직에서 유래: 史, 上官, 司空, 司馬, 司徒 직업, 기술등에서 유래: 陶 사물이름에서 유래: 松 차례에서 유래: 伯, 孟 군주로부터의 사성: 鄭, 朱, 李, 趙 등 소수민족이 채용한 한화 성씨: 元, 劉, 金 등 피휘, 천도로 인한 개성, 기존성에서 음이나 형태가 변한 것: 求, 邱(공자의 이름인 丘로부터), 諸葛 소수민족의 성씨 한족과 여러 소수민족들은 중국 역사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왔으며, 소수민족들이 중원에 편입될 때마다 한문화의 영향을 받아, 한자성을 차용했다. 이들 성씨중 많은 것은 본래 그들 언어로 된 성의 한자음역에서 온 것이며, 따라서 대부분 한자 3자 이상의 성씨가 된다. 대표적으로 북위의 황실 성인 탁발씨(拓跋)와 청 황실의 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등이 있다. 또한 많은 소수민족들이 정치적 이유나 생활상의 편이를 이유로 고유성에서 한식(漢式)의 단성으로 바꾸었다. 북위의 효문제는 스스로 한화정책을 펴서, 탁발씨를 원(元)씨 성으로 개성했으며, 청조가 멸망한 후에 많은 청황족들이 아이신기오로씨에서 진(金)씨로 바꾸었다. 오늘날에는 비교적 적은 수의 소수민족들이 전통적인 성씨를 유지하고 있다. 장손씨(長孫)나 울지씨(尉遲) 등이 그 예이다. 또한, 소수민족들은 한식 성을 채용하면서 그들 스스로 기존 한족의 단성에 없던 새로운 글자로 성을 만들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다이(傣)족은 도(刀)를 성으로 채용했다. 중국 성씨의 수 중국에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성씨의 종류는 약 4700여종에 이른다. 인구순으로 보면, 왕(王)씨가 약 9288.1만 명으로 1위이며, 중국전체인구중 약 7.25%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두 번째로 많은 성은 리(李)씨로 약 9207.4만 명, 인구대비 비율 7.19%이다. 이어서 장(張)씨가 8750.2만 명 6.83%로 3위이다. 인구가 가장 적은 성은 선비족에 유래를 두는 난(難)씨이다. 1위부터 2천만 명 이상의 성(10): , , , , , , , , , . 1천만~2천만 명 사이의 성(12): , , , , , , , , , , , . 이하 순위별로 많은 성씨:謝, 宋, 唐, 許, 韓, 馮, 鄧, 曹, 彭, 曾, 肖, 田, 董, 袁, 潘, 於, 蔣, 蔡, 余, 杜, 葉, 程, 蘇, 魏, 呂, 丁, 任, 沈, 姚, 盧, 姜, 崔, 鍾, 譚, 陸, 汪, 范, 金, 石, 廖, 賈, 夏, 韋, 付, 方, 白, 鄒, 孟, 熊, 秦, 邱, 江, 尹, 薛, 閆, 段, 雷, 侯, 龍, 史, 陶, 黎, 賀, 顧, 毛, 郝, 龔, 邵, 萬, 錢, 嚴, 覃, 武, 戴, 莫, 孔, 向, 湯. 중국 전 인구중 상위 100개 성이 전체 인구의 84.77%를 차지한다. 고대 중국의 저명한 서적인 《백가성》(百家姓)에는 한족이 자주쓰는 성씨가 실려 있는데, 현재 한족 성씨와 꼭 같지는 않다. 중국인의 이름 중국인의 이름은 보통 한자 1자 또는 2자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외자 이름이 대부분이였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진(晉)조 이래 현대까지 두 글자 이름이 주류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국 공안부의 성명 통계에 따르면, 가장 긴 성명은 성과 이름을 합쳐 15글자였다. 10자 이상의 성명을 가진 사람은 천 명 가까이 되었다. 이들 다음절 성명의 대부분은 약 97%가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 나타났다. 중국 이름 중에는 링링이나 추이추이 같이 글자를 두 번 겹쳐 쓴 이름도 찾아볼 수 있다. 같이 보기 중국의 성씨 각주 인명 중국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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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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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8B%9C%EB%A1%9C%20%EC%9C%A0%EC%A1%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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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로 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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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로 유조(, 1967년 12월 12일 ~ )는 일본의 게임 음악 작곡가, 게임 프로듀서이다. 주식회사 에인션트의 대표이사이다. 도쿄 도 출신. 약력 8세 무렵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의 친구인 히사이시 조에게서 피아노를 사사받음. 1986년 일본 팔콤에 아르바이트로 입사, '이스' 등의 음악을 맡아 유명해진다. 1990년 프리랜서로 전환, 주식회사 에인션트를 설립하여 90년대 후반에는 게임 프로듀서로 활동하지만 이후 다시 음악활동에 전념한다. 작품 YS 1,2 BARE KNUCKLE 1,2 SUPER SHINOBI ROMANCIA ETRIAN ODYSSEY (세계수의 미궁) 외부 링크 에인션트 사 일본의 작곡가 1967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도쿄도 출신 게임 음악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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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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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B%B0%94%EC%BD%94%EC%97%94%EC%97%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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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코엔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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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코엔역()은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에 있는 철도역이다. 역 구조 상대식 승강장 2면 2선의 지하역이고 승강장은 직선이다. 미타 방향과 오나리몬 방향의 승강장 끝에 개찰구가 있다. 배리어 프리 시설로서, 에스컬레이터나 다기능 화장실과 2011년 2월 11일부터 엘리베이터의 사용이 개시되었다. 승강장 당역과 미타 역 사이에 분기기가 있다. 2000년 9월 25일까지는 미타 선이 미타에서 멈췄기 때문에 분기기와 2층식의 미타 역 사이가 병렬 운전과 같은 형태로 미타행은 당역에서 미타 역의 3번 선과 4번 선에 들어가는 열차가 배정되고 있었다. 현재, 정기 운행표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역 주변 게이오기주쿠 대학 국도 제15호선 도영 지하철 오에도 선 아카바네바시 역 도쿄 프린스 호텔 도쿄 타워 도쿄 KAL 빌딩(대한항공 도쿄지점) 동조궁 메르파르크 도쿄 미나토구청 미나토시바산 우체국 시바 공원 시바파크 호텔 아타고 그린 힐스 조조지 버스 노선 근처의 정류소는 다음과 같다. 시바조노바시 도에이 버스 (도쿄 도 교통국) 미야코 06: 다이몬 역 경유 신바시역 행 / 시부야역 행 시바코엔역 미나토 구 마을 버스 "치 버스" (후지 익스프레스) 시바 루트 미나토 구청・도라노몬 2초메 경유 신바시 역 행 / 다마치 역 히가시구치 행 아자부 루트 히가시아자부 2초메・롯폰기 5초메・롯폰기 힐스 방면 역사 1973년 11월 27일: 영업 개시. 1978년 7월 1일: 6호선을 미타 선으로 노선명 변경. 사진 각주 인접역 미나토구 (도쿄도)의 철도역 도에이 지하철 미타선 1973년 개업한 철도역 1972년 개업한 철도역 도쿄도 교통국의 철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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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2%BD%EB%8F%8C%EA%B9%A8%EA%B8%B0%20%EB%B0%A9%EC%8B%9D%20%EA%B2%8C%EC%9E%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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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깨기 방식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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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깨기 방식 게임()은 '배트 앤 볼(Bat-and-ball)'이라는 비디오 게임 장르의 하위 분류에 속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 등장한 반사형 게임의 일종이다. 화면상을 반사하면서 이동하는 볼을 화면 아래쪽에 떨어지지 않게 바(막대기)를 조작해서 튕기며 한 토막의 벽돌들을 깨뜨리는 방식의 게임들을 말한다. '플레이 인원 1명'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보다 풍부하게 변형이 가능하다. 간단하면서도 뛰어난 게임성으로 가정용 게임기에서부터 휴대전화까지 많은 기기들에 게임이 제공되고 있다. 최초의 벽돌깨기 방식 게임은 1976년 발매된 아타리의 브레이크아웃(Breakout)이란 게임이며, 다양한 플랫폼으로 벽돌깨기 방식의 게임들이 제작·발매됐다. 대표적으로 알카노이드(Arkanoid) 시리즈가 있다. 게임 목록 주요 벽돌깨기 방식 게임 알카노이드 시리즈 알카노이드 (Arkanoid, 1986년, 타이토, 다양한 플랫폼 지원) 알카노이드 2 (Arkanoid: Revenge of Doh, 1987년, 타이토, 다양한 플랫폼 지원) 알카노이드: 두 잇 어게인 (Arkanoid: Doh it Again, 1997년, 타이토, 슈퍼 닌텐도 지원) 알카노이드 리턴 (Arkanoid Returns, 1997년, 타이토, 아케이드판과 플레이스테이션 지원) 알카노이드 DS (Arkanoid DS, 2007년, 타이토, 닌텐도 DS) 프리킥 프리킥은 알카노이드에 축구를 접목시킨 게임이다. 골을 넣으면 보너스를 얻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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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A5%B4%EB%B0%94%EC%9D%B4%ED%8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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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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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는 단기 혹은 임시 고용되어 일하는 것을 의미하는 대한민국과 일본의 고용 속칭이다. 파트 타임(part time, )이라고도 한다. 주로 학생, 주부가 수입을 얻기 위해 시간제로 일하거나 직업인이 부업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으며 단기 계약직을 뜻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알바라고 줄여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용어 아르바이트는 한국어식 낱말인데 원래 독일에서 'Arbeit'는 "일" 또는 "노동"을 뜻하며, 독일어에서 이에 해당하는 낱말은 영어로 job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를 짧게 줄여 ‘알바’라고도 한다. 이 용어는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것으로, 아르바이트()라는 용어에서 가져온 것이며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시간제 노동을 의미한다. 다만 한국과는 달리 줄여 말할 때는 “바이토”()라고 부른다. 영어권에서는 이런 시간제 근무를 파트타임잡(), 전일제 근무는 풀타임잡()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이러한 계약직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을 프리터()라고도 한다. 미국에서는 저임금 단순노동을 맥잡(McJob)이라고 한다. 대한민국의 아르바이트 임금 보장 이러한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경우 편의점 등의 영세사업장에서 일한다면, 근무조건이 열악하거나 급료의 안정적인 지급이 보장되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흔히 아르바이트라고 하는 단기/임시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도 노동자의 인간적 삶을 위해 최저임금 이상을 받는 최저임금제가 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2011년은 4,320원, 2012년은 4,580원, 2014년은 시급 5,210원 이었으며 2015년부터 최저임금은 시급 5,580원으로써 약 370원 올랐으며 대한민국 노동부에 의해 고시되었다. 2016년부터는 최저임금위원회에서의 진통을 겪은끝에 6,030원으로 고시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므로, 꾸준한 근로감독 및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의 노동운동이 필요하다. 만약 임금 체불 문제가 발생할 경우엔 대한민국에서는 노동부 종합상담센터(1350)으로 문의하거나 알바노조, 민주노총 등에서 노동인권을 상담하면 된다. 근로자의 권리 또는 노동인권 아르바이트도 노동자 한국에서는 아르바이트가 노동, 노동자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은데, 독일말로 아르바이트가 노동을 뜻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르바이트도 시급이나 일당을 경제적 보상으로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뜻하며,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는다. 당연히 대한민국 헌법33조에 근거하여 노동3권이 있으므로 비정규직 노조인 알바노조가 있다. 주휴수당 아르바이트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야간근로, 휴일근무, 초과근무시에는 추가로 임금을 받을 수 있다. 근로기준법에 근거하여 일주일에 15시간 이상 근무하면 하루의 유급 휴일을 인정받을 수 있으므로, 임금을 지급할 때에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주휴수당을 주어야 한다. 산재보상 또한 50명 이상의 사업장에서는 규정상 하루 7시간 1주일 40시간 이상은 일할 수 없다. (2008년 7월 1일부터는 20명 이상으로 확대 적용) 초과 근로는 1일 1시간, 1주일 6시간으로 제한되며 위험한 일이나 유흥주점, 노래방, 호프집 등 유해한 업종에서의 종사는 불법이다. 근무 도중 다쳤을 경우에는 산재보험법 또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치료와 보상이 가능하다. 4대보험 사용자는 사회보험 또는 사회안전망인 4대보험으로써 아르바이트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실직, 산재 등에 대비하도록 해야 한다. 단시간(아르바이트) 근로계약서 사용자는 1주간의 소정근로시간이 그 사업장의 통상근로자 1주간의 소정근로시간보다 짧게 근로한 근로자를 채용할 경우, 단시간(아르바이트)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여야 한다. 또한 사용자는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 24조에 따라 근로자에게 단시간(아르바이트) 근로계약서 1부를 반드시 교부하도록 되어있다. 단시간 근로자의 근로시간이 주 15시간 미만일 경우 주휴일 및 주휴수당, 연차휴가, 퇴직금이 적용되지 않음을 유념해야한다. 단시간(아르바이트) 근로계약서 양식 및 해설서 참고 청소년의 알바 대한민국에서는 연소근로자 특례규정이 있어 취업기간이 6개월을 경과하지 아니한 13세 이상 14세 미만의 취직인허증, 15세 이상 18세 미만의 근로자에 대하여는 시간급 최저 임금액의 90%에 해당되는 금액이 최저 금액이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면 전액을 지급해야 한다. 미성년자의 경우 부모님이나 보호자의 동의서와 나이를 증명하고 연소자 근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도덕상 또는 보건상 유해·위험한 일이 없고, 근로기준법과 청소년보호법에서 할 수 없는 일은 정하고 있다. 일할 수 없는 곳: 유흥주점, 공사현장, 단란주점, 비디오방, 노래방, 전화방, 담배소매업, 숙박업, 이용업, 안마실을 설치한 목욕장업, 만화대여업, 소주방·호프·카페, 무도장업, 사행행위영업, 소각·도살업무 등 일할 수 있는 곳 : 제조업체, 패스트푸드점, 술을 판매하지 않는 일반음식점, 편의점, 주유소 등 피해 사례 개인정보를 요구로 한 알바채용 사기도 있다. 같이 보기 직업 노동 최저임금 주휴수당 각주 외부 링크 대한민국 노동부 홈페이지 노동부의 연소근로자 홈페이지 비정규직 독일어계 외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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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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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A6%AC%EC%95%84%EA%B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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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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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아과(Anatinae)는 수면성오리류를 포함하는 오리과의 아과이다. 하위 속 브라질오리속 (Amazonetta) – 분류가 명확하지 않다. 오리속 (Anas) – 다계통군으로 추정. Lophonetta – 이전에는 오리속(Anas)에 포함 Speculanas – 이전에는 오리속(Anas)에 포함 목걸이오리 (Callonetta) 오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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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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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88%9C%EC%84%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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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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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선(金順仙, 1956년 6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성우이다. 문화방송 성우극회 소속. 1976년 MBC 공채 7기로 입사했다. 출연 작품 방송 검용전설 야이바(SBS) - 소라 할머니 모트의 시간여행(MBC) 미래용사 볼트론(MBC) - 피지(녹사자), 마녀 헤가 사랑의 큐피트(MBC) - 데메테르 알프스 소녀 안네트(MBC) - 쟌 야옹야옹 빌리(MBC) - 죠 우주보안관 장고(MBC) 유령대소동(MBC) 천방지축 덩크슛(SBS) - 철수 개구장이 조디(MBC) 개구쟁이 태즈(MBC) 벼리의 시간여행(MBC) 스모기(MBC) 마이티 마우스(MBC) 흙꼭두 장군(MBC) 도단이(MBC) 몽키특공대(VIDEO) - 몽키 무한지대큐(KBS) 메칸더V(MBC) - 민이 CSI 뉴욕(MBC) - 캐런 워커 (카렌 S. 그레건) 달려라 또뽀(MBC) 메다로트(챔프) - 메타비 수퍼 사이보그 네로(어린이TV) - 할머니 지옥소녀(애니맥스) - 시모노 메이코 영화 가위손 (MBC) - 마지 (캐롤라인 아론) 네버엔딩 스토리 2 (MBC) - 아트래유 (케니 모리슨) 노 브레인 레이스 (MBC) - 베라 베이커 (우피 골드버그) 디레일드 (MBC) - 나타샤 (루시 제너) 라비린스 (SBS) 러브 앤 샤도우 (MBC) 레드 히트 (SBS) 리썰 웨폰 3(MBC) - 도레스(델로어스 홀) 후크 (MBC) 레이디 킬러 (MBC) - 마운틴 걸(다이앤 델라노) 매그놀리아 (SBS) 빅 (SBS) 사랑의 블랙홀 (MBC) 사이렌스 (SBS) 상성: 상처받은 도시 (MBC) - 할머니(후환영) 블랙 라이온 (MBC) 쉬즈 더 맨 (MBC) - 선생님(패트리샤 이드레트) 스타트랙 7 - 제너레이션 (MBC) 슬립 허, 쉬즈 프렌치 (MBC) - 붓치 그래디 (줄리 화이트) 시카고 (MBC) - 모니 (마이아 해리슨) 시크리트 웨폰 (MBC) 써머스비 (MBC) - 에스더 (클라리스 테일러) 아이언 마스크 (MBC) 애나 앤드 킹 (SBS) 어느 멋진 날 (MBC) 에버 애프터 (MBC)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MBC) - 마크 (매튜 페이버) 책상 서랍 속의 동화 (MBC) 크루서블 (MBC) 탄생 (MBC) - 숀의 엄마(카라 세이무어) 트루 크라임 (SBS) 프랭키와 쟈니 (MBC) - 네다 (제인 모리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SBS) - 프레드 위즐리 (제임스 펠프스)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SBS) - 프레드 위즐리 (제임스 펠프스) 7일간의 사랑 (SBS) E.T. (MBC) - 스티브(숀 프리에) 같이 보기 문화방송 성우극회 외부 링크 문화방송 성우극회 김순선 블로그 대한민국의 여자 성우 1956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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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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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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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P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최우수 선수 (Most Valuable Player) 최소 분산 포트폴리오 (Minimum Variance Portfolio) 미국의 프로 레슬러: 몬텔 본테이비어스 포터 (Montel Vontavious Porter) 대한민국의 프로게임단: MVP (e스포츠) 최소 생존 개체수: (Minimum viable population) 최소 기능 제품: (Minimum Viable Product) 대한민국의 7인조 보이그룹이: MVP (음악 그룹) 모델-뷰-프리젠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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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9%84%EC%A7%80%20%EB%B3%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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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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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 본(Bizzy Bone, , 1976년 9월 12일 ~ )은 미국의 래퍼이다. 전 본 석스 앤 하모니의 리더였다. 생애 브라이언 앤서니 매케인 2세는 오하이오주의 콜럼버스에서 태어났으며, 4세였던 1980년 두 자매와 함께 양아버지에게 납치되어 2년 넘게 감금되었다. 납치된 시기에 그는 오클라호마주 북부에서 거주했으며, 지속적인 폭행과 고문, 성폭행을 당했다. 이후 1983년에 오클라호마주 코 시티에서 약 1년 반 동안 거주하던 도중,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그의 가족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뒤 비지 본이라는 이름으로 1994년 본 석스 앤 하모니로 데뷔했다. 그러나 그의 솔로 데뷔 앨범과 관련해 팀원과 불화가 생겼으며, 팀을 탈퇴하고, . 탈퇴 후 팀의 멤버인 레이지 본과 Bone Brother을 만들었다. 본 석스 앤 하모니는 대한민국의 힙합그룹 NOL이 비지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정도로 임팩트가 큰 그룹이다. 외부 링크 1976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아프리카계 미국인 래퍼 미국의 힙합 가수 미국의 기독교인 미국의 실종자 미국의 유괴된 사람 실종된 어린이 유괴된 어린이 발견된 실종자 이탈리아계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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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1%9C%ED%8A%B8%EB%A5%B4%203%EC%84%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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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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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3세(, 1728년 2월 21일 - 1762년 7월 17일)는 1762년부터 1762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황제다. 로마노프 왕조의 7번째 군주로, 홀슈타인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표트르 1세의 딸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이다. 정식 이름은 표트르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카를 페터 울리히()이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는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매우 친프로이센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못한 지도자가 되었다. 생애 스웨덴의 칼 12세의 생질 카를 프리드리히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와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로, 킬에서 태어났다. 1739년, 아버지가 죽자 작위를 물려받아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러시아 제국 황제와 스웨덴 국왕 양쪽 모두의 상속인으로 간주되었다. 1742년, 후사를 이을 아이가 없던 이모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표트르는 14살이 되던 해부터 러시아 궁정에 살면서 안할트제르프스트 공국의 공녀인 조피 프리데리케와 결혼했다. 같은 독일 태생이었던 두 사람은 금방 친해졌으나 조피가 이름을 러시아식인 예카테리나로 바꾸는 등 차츰 러시아인으로 변하며 국민적 지지를 얻을수록 독일에 아직 강한 애착을 가졌던 표트르는 그녀를 멀리하고 부재상 미하일 보론초프의 질녀 옐리자베타 보론초파라는 여인을 가까이 두었다. 1761년 12월 25일에 옐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함에 따라 새 황제로 등극한 그는 표트르 3세로 선포되었다. 표트르 3세는 옐리자베타의 장례기간 내내 사람들 앞에서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는가 하면, 프로이센에 국가 기밀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추도 기간이 끝난 후 표트르 3세는 즉시 프로이센 왕국과의 전쟁을 중지해, 멸망 직전에 몰리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을 구해주었다. 당시 러시아는 프로이센과의 7년 전쟁에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표트르 3세는 여전히 독일적 성향을 버리지 않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우상처럼 숭배했기 때문에 승자로서 마땅히 적에게 항복의 조건을 요구하는 대신 프로이센이 원래의 영토를 유지하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러시아군의 제복을 프로이센과 유사한 제복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는 자국인 러시아의 국익보다는 프로이센의 안위를 더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또한 루터교의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음에도 별로 신앙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황제가 된 후에는 모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 국유화해버렸고, 성직자들에게 수염을 깎고 루터교의 목사처럼 옷을 입으라고 강요했다. 표트르 3세는 이제 공식석상에서도 정부인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와 함께 지냈고 오직 황족에게만 허용되는 여러 가지 특권들을 그녀에게도 허용했다. 그에 반면 아내인 예카테리나에게는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거나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주는 데다가 심지어는 감옥에 가두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계속되는 실정과 방탕한 생활로 표트르 3세는 급속히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잃어갔다. 그러나 황후 예카테리나는 그녀의 오랜 친러시아 성향과 교양 있는 행동으로 점차 민중의 환심을 얻어 남편과 큰 대조를 이루었다. 드디어 1762년 여름 표트르 3세의 통치 반년 만에 예카테리나는 황실 근위대의 도움을 얻어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예카테리나 2세라고 선포하였다. 국민적 지지를 얻은 그녀는 페테르부르크 주위의 모든 성문과 다리를 봉쇄할 것을 지시했다. 그 무렵 아무것도 모른 채 정부와 함께 페트르호프 별궁으로 가던 표트르 3세는 잠시 후 예카테리나가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의 새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에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있던 표트르 3세에게 측근들은 크론슈타트 해군 기지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거기에 있는 함대의 지지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표트르 3세는 음식, 술, 의상 등을 배에 싣기 위해 시간을 낭비했고, 반면에 예카테리나는 민첩하게 크론슈타트 군 지휘관들에게 전갈을 보내 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크론슈타트 해군들이 반란에 동참했다는 것을 알고 표트르 3세는 경악해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측근들은 다시 그에게 충성할지도 모를 군대가 덴마크의 침공에 대비해 레벨항에 집결해 있으니 그 곳으로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표트르 3세는 이미 기진맥진하여 결단을 내릴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그는 그 곳으로 가는 대신 낮잠을 잤다. 6월 29일 표트르 3세는 예카테리나 2세가 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영원히 포기하라고 작성한 문서에 순순히 서명했다. 이후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3세를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여름 별장으로 보내 오를로프 백작 형제로 하여금 감시하게 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2세는 정통성을 가진 표트르 3세가 살아있는 한 자신의 제위가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카테리나 2세가 제위에 오른 지 1주일 후에 사형판결을 내리고 그녀의 오른팔인 알렉세이 오를로프에 의해 표트르 3세는 교살형을 당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표트르 3세는 심한 복통으로 인한 출혈로 사망했다고 공표되었다. 표트르 3세의 사형을 예카테리나 2세가 직접 명령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바라던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자녀 1745년 8월 21일 훗날 예카테리나 2세가 되는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와 결혼했다. 외부 링크 The ancestors and descendants Pyotr III Fyodorovitch, Emperor of Russia 1728년 출생 1762년 사망 전러시아의 황제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가 유군 사형된 사람 킬 출신 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 흑수리 훈장 수훈자 푸르 르 메리트 군사훈장 수훈자 18세기 러시아 사람 동방 정교 군주 러시아의 동방 정교도 18세기 유럽의 군주 독일계 러시아인 살해된 18세기 군주 루터교로부터 동방 정교회로 개종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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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B%9D%BC%EC%99%81%EC%A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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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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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왁주(Sarawak)는 말레이시아의 주이며,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큰 주이다. 보르네오섬의 서북해안 일대를 차지하며 인도네시아의 칼리만탄과 접한다. 주도는 쿠칭이며 면적은 124,450km2, 인구는 2,500,000명(2007년 기준)이다. 해안부는 습지가 많아 많은 토지가 미개간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1841년에 해적을 진압한 영국인인 제임스 브룩이 토후국이었던 이곳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 후 영역이 확대되고, 1888년에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63년 독립하였으며, 같은 해 말레이시아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이는 불법적인 합병이라는 논란이 있으며 인도네시아는 이를 승인하지 않고 말레이시아와 영유권 분쟁이 있었다. 주민은 주로 말레이인, 화교, 다야크족 등이 있다. 역사 1963년, 북보르네오(사바)와 싱가포르와 함께 말레이 연방으로 통합하여 말레이시아를 결성했다. 지리 사라왁주는 말레이시아 국토의 37.5%를 차지한다. 사라왁주는 보르네오섬의 동북쪽 해안선에서부터 750km에 걸쳐 있다. 사라왁주는 보르네오의 중앙 산맥을 기준으로 인도네시아령과 경계해 있다. 쿠칭시와 시부시는 해안에서 조금 들어간 강가의 구릉지대에 있다. 비자 문제 사라왁은 현재 특별행정구(SAR)와 같은 자치령이 아닌 엄연한 주이지만, 일부 자치권을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이민법도 본토와는 다르게 돌아간다. 이러한 문제는 본토인과 사라왁인 간의 심각한 갈등 등과 관련이 있는데, 사라왁 정부는 사라왁이 본토에 동화될 것을 우려하여 본토인의 입국을 제한하고 있다. 가령 사라왁인은 본토에 문제없이 갈 수 있지만, 본토인이 사라왁에 들어올 때는 90일 무비자를 받아야 한다. 또한 외국인이라도 본토나 사바에서 받은 무비자로 사라왁에서 체류하는 것은 불법이다. 말레이시아인이라도 현지에서 취직하거나 입학하려면 별도의 비자 신청이 필요하다. 최근 사라왁 정부는 본토인의 입국 제한을 더욱 더 강화했는데, 예전에는 90일 무비자가 만료되기 전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새로운 90일 무비자를 받았지만, 이제는 기존의 무비자 잔류일 동안만 체류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외부 링크 사라왁주 홈페이지 SarawakReport 말레이시아의 주 영어권 보르네오섬 해양 동남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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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A%B3%A0%EC%95%BC%20%EA%B3%B5%EC%97%85%EB%8C%80%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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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공업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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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공업대학(,)은 일본의 국립 대학이다. 대학 본부는 아이치현 나고야시 쇼와구(昭和區)에 있다. 연혁 나고야 공업대학은 1949년에 나고야 공업 전문학교(名古屋工業專門學校)와 아이치 현립 공업 전문학교(愛知縣立工業專門學校)를 통합해 설립되었다. 나고야 공업 전문학교 1905년 3월 관립(국립) 나고야 고등 공업학교(名古屋高等工業學校) 설립. 1905년 9월 현 고키소(御器所) 캠퍼스에서 개교 (학과: 토목과, 기계과, 건축과, 기직과, 색염과). 1929년 전기과를 설치. 1939년 항공공학과를 설치. 1941년 색염화학과(구 색염과)를 공업화학과로 개명. 1942년 제2부(야간부) 설치. 1944년 4월 나고야 공업 전문학교로 개칭. 1945년 3월 전쟁으로 인해 교사를 소실. 1945년 4월 요업과를 설치. 1945년 12월 항공기과를 제2류 기계과로 개편. 1949년 5월 나고야 공업대학으로 통합됨. 아이치 현립 공업 전문학교 1943년 2월 아이치 현립 고등 공업학교(愛知縣立高等工業學校) 설립. 가설 교사에서 개교. 학과: 기계과, 전기과. 1944년 4월 금속공업과를 설치. 1944년 6월 아이치 현립 공업 전문학교로 개칭. 1946년 3월 토목과를 설치. 1946년 4월 나고야 시 지쿠사 구(千種區)로 이전. 1949년 5월 나고야 공업대학으로 통합됨 (지쿠사 분교). 나고야 공업대학 1949년 나고야 공업대학 발족. 1958년 금속공학과가 지쿠사 분교에서 본부 캠퍼스로 이전. 1959년 공학부 제2부(야간부) 설치. 1964년 대학원 설치. 1968년 지쿠사 분교 폐교. 캠퍼스 고키소(御器所) 캠퍼스: 대학 본부 캠퍼스. - 아이치현 나고야시 쇼와 구(昭和區) 고키소 초(御器所町). 조직 학부 공학부 (제1부. 4년제) 생명/물질공학과 환경재료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전자공학과 정보공학과 건축/디자인 공학과 도시사회공학과 공학부 (제2부(야간부). 5년제) 물질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정보공학과 사회개발공학과 대학원 공학 연구과 (석사/박사 과정) 부속기관 도서관 품질혁신 테크노 센터 (, ) 공학교육 종합 센터 국제교류 센터 정보기반 센터 주요 동문 이훈우: 1911년 나고야 고등 공업학교 건축과 졸업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1949년 설립 아이치현의 대학교 나고야시의 교육 나고야시의 건축물 일본의 국립 대학 공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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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A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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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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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U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아시아 태평양 방송 연합 (Asia Pacific Broadcasting Union):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방송 컨텐츠와 기술 교류를 목적으로 세워진 국제 비영리 조직 ABU 가르시아 에어맨 배틀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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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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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A%B8%B0%EC%99%80%EB%9D%BC%EC%97%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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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와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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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와라역()은 일본의 철도역이다. 하기와라역 (아이치현) 하기와라역 (후쿠오카현) 히다하기와라역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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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95%EC%95%BC%EC%B9%B4%EB%A5%B4%ED%83%80%20%ED%8A%B9%EB%B3%84%EC%A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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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야카르타 특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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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야카르타 특별주()는 인도네시아 자와섬 중남부에 위치한 특별주이다. 주도는 욕야카르타이다. 욕야카르타 특별주는 제1급 지방 자치체이며 주와 동등한 지위를 갖는 특별 행정 지역이다. 형식적으로는 욕야카르타 술탄의 지배하에 있다. 면적 3,185.80 km², 인구 43,640,000명이다. 도시 지역의 인구는 약 60만명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유일하게 지사직이 세습되는 지역이다. 역사 욕야카르타는 인도네시아어로 "평화의 마을"을 뜻하며 명칭에 관해서는 "라마야나" 이야기에 등장하는 라마 왕자의 나라인 아유디야를 닮아서 붙였다고 한다. 태국의 아유타야도 유래가 비슷하다. 중부 자와섬에 위치해 있는 욕야카르타 지역은 마타람으로 불렸다. 8세기에는 힌두계 마타람 왕국이 발흥 했지만, 10 세기에 동부 자와섬으로 이동하였다. 16세기 후반, 이슬람계 마타람 왕국이 다시 발흥해 국력이 강력해졌지만,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 기지를 두고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견제에 의해서 점차 국력이 약화되어 갔다. 18세기에는 자와섬에서 3차례에 걸쳐 전쟁이 계속되어 국력이 약해진 마타람 왕국은 결국 1755년 네덜란드의 보호하에 들어갔다 동시에 이 왕국은 욕야카르타 왕국과 스라카르타 왕국으로 나뉘었다. 초대 욕야카르타 술탄은 하멩쿠부워노 1세이다.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에도 욕야카르타 왕국은 존속하였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시기에 욕야카르타 지역은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인도네시아의 임시 수도가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건국 후, 네덜란드에 협력적이었던 욕야카르타 왕국은 망했지만, 욕야카르타의 술탄 하멩쿠부워노 9세(1912년-1988년)는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에 협력한 공로로, 술탄의 직위를 인정받았던 것 뿐만 아니라, 명예직에 불과하지만 인도네시아의 부통령으로도 선출되고, 또 재무장관, 국방장관에도 취임하였다. 1988년에 술탄 하멩쿠부워노 9세가 사망하면서, 아들 하멩쿠부워노 10세가 술탄직을 계승하였다. 1998년 수하르토 정부가 붕괴하였고 당시 주지사였던 파쿠 알람 8세가 병사하면서 욕야카르타 주지사직이 선거제로 바뀌었으나, 하멩쿠부워노 10세는 직접 선거로 당당히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2012년 8월, 중앙정부와의 십여 년 동안의 대화 끝에 인도네시아 국회는 욕야카르타 술탄이 욕야카르타 주지사직을 자동 승계하는 것을 명문화했다. 관광 욕야카르타는 인도네시아의 고도(古都)로서, 독자적인 문화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지금도 술탄이 살고있는 왕궁은 일반적으로 공개가 되고 있다. 이 지역은 그림자 연극으로도 유명하다. 또 보로부두르 사원, 프란바난 사원 등 의 세계 문화 유산도 있다. 인구 2006년 지진 각주 외부 링크 욕야카르타 특별주 공식 홈페이지 인도네시아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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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DNA%20%EC%A4%91%ED%95%A9%ED%9A%A8%EC%86%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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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중합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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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중합효소(DNA Polymerase, DNA 폴리머레이스)는 DNA 복제를 돕는 효소이다. 이런 효소들은 주형(template)으로 읽히는 DNA 가닥을 따라서 디옥시리보뉴클레오타이드(DNA단량체)의 합성을 촉매한다. 새로 합성된 분자는 주형에 상보적이며 주형의 짝이 되는 가닥과 동일하다. 역할 DNA 중합효소는 DNA 구성요소(building block)인 네가지의 뉴클레오타이드를 조합하여 DNA를 합성하는 과정에 관여하는 효소이다. 이 효소는 DNA 복제에 필수적이다. 쌍을 이루어 하나의 DNA로부터 두 개의 동일한 DNA 가닥을 합성한다. 이 과정에서 DNA 중합효소는 기존의 DNA 가닥을 읽고 이와 상보적인 새로운 두 가닥의 DNA를 합성한다. 결과적으로 상보적인 DNA쌍 2개, 즉 기존의 주형 DNA와 같은 DNA를 만들 수 있다. DNA 복제(replication)는 단단히 꼬인 DNA 나선이 헬리케이스 효소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풀림으로써 시작된다. 가닥이 분리되면 염기가 노출되고 새로운 뉴클레오타이드들이 각 가닥에 상보적으로 도입된다. 이 합성 과정에서 DNA 중합효소는 기존 DNA 가닥의 3' 말단에만 새로운 뉴클레오타이드를 추가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5' → 3' 방향으로 DNA를 연장시켜 나간다. 세포가 나뉠 때마다 DNA 중합효소는 기존 DNA 복사에 참여하게 되고, 기존의 DNA 분자 복사본은 각각의 딸세포로 이동된다. 구조 잘 알려진 DNA 중합효소는 고도화된 보존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전체적인 촉매를 도와주는 개체들이 그들의 도메인 구조와는 무관하게 종끼리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존된 구조들은 보통 세포의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이 기능을 유지하는 것은 진화적인 이점을 가진다. 이 구조는 오른손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엄지 손가락(덤 도메인), 손바닥(팜 도메인), 손가락(핑거 도메인)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다. 팜 도메인(palm domain)은 인산 전달 반응에서 인산기(phosphoryl)의 전달을 촉매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효소가 활성화되면 DNA가 팜 도메인에 결합된다. 이 반응은 2-금속-이온 메커니즘(two-metal-ion )에 의해 촉매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핑거 도메인(finger domain)은 뉴클레오사이드 트리포스페이트를 주형 염기와 결합하는 기능을 한다. 덤 도메인(thump domain)은 DNA의 진행성, 전위 및 위치 지정에서 잠재적인 역할을 한다. 종류 보조 물질 DNA 중합효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마그네슘 이온과 같은 조효소(coenzyme)가 필요하다. 단백질 부분에 보조인자가 결합된 경우의 완전인자를 홀로엔자임(holoenzyme)으로 부르고, 마그네슘 이온이 없을 때에는 아포엔자임(apoenzyme)이라고 불린다. 복제가 일어나기 전에, 헬리케이스라는 효소는 단단히 꼬인 DNA 분자를 푼다. 복제를 위해서는 DNA의 염기가 노출되어 있어야 하므로 이 헬리케이스를 통해 DNA의 염기 간 수소결합을 푸는 것이다. 헬리케이스가 제대로 작동하면 DNA 이중나선을 벌리게 된다. DNA 중합효소의 작용이 비록 매우 정확할지라도아주 낮은 확률로 염기쌍을 복사할 때 실수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복사 후에 DNA 중합효소는 복사한 DNA를 교정하는 과정을 갖게 되며 잘못된 염기 부분을 교체한다. 이 과정을 DNA 수선이라고 한다. 이 결과로 기존 DNA 가닥을 온전하게 딸세포로 전달한다. 같이 보기 중심원리 RNA 중합효소 참고 DNA DNA 복제 EC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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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81%EB%8F%84%20%EC%88%98%EB%A0%B4%EB%8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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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수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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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수렴대(赤道收斂帶) 또는 열대 수렴대(熱帶收斂帶)는 적도 무풍대, 적도 우림대로 알려져 있는 적도 지역에 둘러져 위치하는 띠 형태의 저기압대이다. 적도의 남, 북에서 불어오는 따뜻하고 습한 상승 공기에 따라 형성된다. 지구의 열과 습도를 분배하는 계 가운데 하나인, 저위도 환류(Hadley cell)라는 대규모 대기 환류 작용에 따라 지속적으로 공기가 공급된다. 이 공기는 뇌우 작용의 대류에 따라 상승하게 되어 이 지역에서는 연간 200일 이상 강우가 나타난다. 적도 무풍대(赤道無風帶)는 적도 인근에서 바람이 매우 약하거나 없는 지역을 말한다. 적도무풍대의 중심은 적도의 약간 북쪽 대양에 있다. 북동쪽과 남동쪽에서 적도 무풍대로 부는 무역풍은 이 지역으로 공기를 몰고 온다. 공기는 열대에서 가열된 뒤 위로 올라가며 이 때문에 저기압 띠가 형성된다. 또 이 띠의 가장자리에서 열대폭풍이 발생하기도 한다. 저기압 띠는 아열대 무풍대처럼 태양을 따라 남북으로 움직인다. 위치 적도 수렴대의 위치는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 육지에서는 태양의 적위에 영향을 받으며, 좀 더 명확한 형태가 나타나는 해양에서는 해수에서 공급되는 열로써 발생하는 상승류로 말미암은 계절적 차이가 뚜렷하지 않게 나타난다. 때때로 이중 적도수렴대가 적도의 남, 북쪽에 생기는데,러한 경우에는 두 적도 수렴대 사이에 고기압대가 나타나며, 한쪽이 우세한 경우가 많다. 날씨 적도 수렴대의 위치 변화는 적도에 위치하는 여러 나라의 강우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고위도 지역의 여름/겨울 계절과 다르게 열대 지역에는 건기/우기가 나타난다. 적도 수렴대의 장기 변화는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를 야기할 수 있다. 적도 수렴대에는 좀 더 북쪽이나 남쪽에 위치하는 무역풍대와는 다르게 거의 바람이 불지 않는다. 때문에 예전의 선원들은 바람이 없는 며칠을 맞이한 후 이 지역을 적도 무풍대(the doldrums)라 불렀다. 바람이 유일한 동력원이었던 시절이었으므로 이 덥고 습한 지역에 들어선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열대 저기압 형성에의 역할 열대 저기압의 생성에는 여섯가지 요구 조건 가운데 약한 소용돌이도(low-level vorticity)가 필요하다. 적도 수렴대는 수평 바람 시어(wind shear)로도 알려진 바람의 속도와 방향이 바뀌는 곳이므로 이러한 조건이 충족된다. 또한 적도수렴대는 각 반구의 여름시기에 적도로부터 500km이상 북상하거나 남하함으로써 충분한 코리올리 힘을 받을 수 있으므로, 이 지역에서 열대 저기압이 형성되기 쉽다. 같이 보기 대기 대순환 몬순 기압골 외부 링크 고해상도 사진이 첨부된 NASA의 짧은 기사 바람 위선 기상학 기후 대기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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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90%EB%9D%BC%EC%9C%84%20%EC%B6%95%EA%B5%AC%20%EA%B5%AD%EA%B0%80%EB%8C%80%ED%91%9C%ED%8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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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위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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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위 축구 국가대표팀()은 말라위를 대표하는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말라위 축구 협회에서 관리한다. 1957년 짐바브웨를 상대로 국제 A매치 첫 경기를 치렀으며 현재 빙구 국립경기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제 대회 경력 FIFA 월드컵 현재까지 말라위의 월드컵 본선 진출 기록은 전무하며 그나마 2006년 FIFA 월드컵 아프리카 지역 예선에서 2라운드까지 올랐고 2010년 FIFA 월드컵 아프리카 지역 2차 예선에서도 4승 2패·12조 2위로 사상 첫 월드컵 지역 최종 예선에 오르며 말라위 축구 역사상 월드컵 지역 예선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에는 3번 출전하여 2번의 대회에서 조별리그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가 2021년 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 16강 토너먼트 진출의 성과를 거두었다. 기타 국제 대회 경력 세카파컵에는 34번 출전하여 이 중 1995년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2017년 대회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COSAFA컵에서는 19번의 대회에 모두 출전하여 3번의 대회에서 1번의 우승과 2번의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올아프리카 게임 축구에는 2번 출전하여 1987년 대회에서 동메달을 수확했다. FIFA 월드컵 (본선) FIFA 월드컵 (예선)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 주요 선수 치우케포 음소와야 아투사예 니욘도 로빈 응갈란데 존 반다 프랭크 반다 제럴드 피리 림비카니 음자바 스탠리 사누비 각주 말라위의 축구 축구 국가대표팀 아프리카의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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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D%8C%94%20%EA%B0%80%EC%8A%A4%20%EB%88%84%EC%B6%9C%20%EC%82%AC%EA%B3%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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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팔 가스 누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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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팔 가스 누출 사고(Bhopal gas tragedy) 또는 보팔 참사(Bhopal disaster)는 1984년 12월 2일에서 3일 사이에 인도 마디아프라데시주 보팔에서 화학약품 제조회사인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니언 카바이드(다우케미컬이 인수)의 현지 화학 공장에서 일어난 사고이다. 이 사고는 농약의 원료로 사용되는 42톤의 아이소사이안화메틸(MIC)이라는 유독가스가 누출되면서 시작되었다. 사고가 발생된 지 2시간 동안에 저장 탱크로부터 유독가스 8만 파운드(36톤 상당)가 노출되었다. 아직까지 공장을 관리하던 유니온카바이드사의 책임 문제나 소송은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개요 일시: 1984년 12월 2일에서 3일 사이 장소: 인도 중부 마디아프라데시 주 주도(主道)인 보팔 시의 Union Carbide India Ltd(UCIL) 발생 : 시내 중심가에서 약 15km 떨어진 외국지대의 살충제공장 지하가스 저장탱크에서 메틸 아이소사이나이드가 약 1시간 동안 새어나와 인근 지역으로 퍼짐. 피해 보팔 시 주민 약 50여만 명 중 20만명이 유독가스를 들이마신 것으로 추정됨. 많은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함. 정부 대응 주 정부는 가스누출사고의 책임자를 체포하도록 명령. 사망자에게 1인당 5천 루피 (당해년도 환산 약 5백달러), 입원 환자에게 1천루피를 지급하기로 결정. 사건 진행 과정 1934년 미국 소재의 다국적 화학기업인 유니온 카바이드 사가 인도에 UCIL(Union Carbide India, Ltd)라는 지사를 설립 1969년에 인도정부의 요청에 따라 보팔에 살충제 생산공장을 설립 1981년 보팔공장에서 포스젠 가스사고가 발생 1984년 12월 2일 약간의 아이소사이안화 메틸(MIC) 가스가 방출되어 상황이 바로 보고 보관탱크에 있던 MIC가스는 불과 2시간 동안에 85%가 방출(36톤) 원인 안전관리의 미비 보팔 가스 누출의 원인은 저장탱크에 가해진 과도한 압력이다. 압력이 높아지면서 저장탱크의 밸브가 파열되어 탱크 속에 있던 메틸이소시안이 누출되었다. 이 탱크는 항상 높은 압력과 저온 상태가 유지되어야 하는 시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탱크는 이 압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적정온도가 지켜지는 것이 중요했다. 온도가 올라갈 경우 내부 압력이 증가해 폭발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수칙에 따른 철저한 감독을 해야 하는 시설인데도,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공장은 인구 밀집지역에 설립되어 있었음에도 유해시설에 해당하는 공장의 안전시설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최대한 설계비용을 줄이기 위해 검증되지 않은 설계방식을 도입하여 탱크자체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안전관리 직원 숫자와 교육을 줄이는 등 안전관리에 소홀하였다. 사건 발생당시에도 가장 기본적인 조기 경보체계도 작동되지 않았다. 또한 잘못된 설계시스템도 사건 발생에 한 몫을 하였다. MIC탱크 압력지시계(PI), 온도 조절 기능 등이 미비되어있었다. 그리고 Scrubber 시스템 오류로 가성 소다 용액 펌프 미작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Flare Stack 설계또한 잘못되어있었다. 점검 보수상에도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누출시 보수 설치 자재가 확보되어있지 않았고 보수할 인력또한 부족하여 안전관리가 소홀했음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이전 1981년 포스겐 가스 누출로 위험성이 보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시정조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국적 기업들의 공해시설수출 이 참사는 다국적 기업의 공해수출에서 비롯되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의 선진국가들은 1970년대 이후 환경적으로 유해한 위험산업에 대한 법적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유해산업에 대해 엄격한 안전관리시설과 공해방지시설을 요구하게 되었다. 다국적 기업들은 이러한 규제망을 피해 비교적 규제가 약한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도 보팔시에 미국계 다국적 기업의 농약공장이 들어서게 되어 누출참사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피해 2,800여명의 인근 주민이 죽었고 20만명 이상의 피해자가 생겨났다. 인도의료연구협회는 사고 발생 10년이 지난 1994년까지 사망자 수가 2만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했다. 이 사고는 20세기 최대 인명 피해 사고로 12만 명이 실명과 호흡곤란과 위장장애 등 만성질환을 앓고 있으며 중추신경계와 면역체계 이상으로 인한 중병을 앓고 있는 이도 많고 유전자 돌연변이도 출현하고 있다. 피해 보상을 청구한 사람도 58만 3,000여명에 달한다.하지만 유니온카바이드사가 가스사고로 유출된 메틸이소시안염 가스의 화학적 구성성분이나 작용 및 영향에 대한 자체 의학연구 결과를 밝히지 않아, 환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환경피해 또한 이 사고로 자연생태계까지 크게 훼손되었다. 또한 공장부지에서 기준보다 2만배에서 6백만배 높은 수은이 검출되었고, 보팔 사람들이 마시는 물에는 12가지의 유독물질이 들어있으며, 이것은 미국 환경보호국이 정한 안전기준치보다 6백배나 높은 함량이다. 사고를 일으킨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공장 내 창고 등에는 아직도 425t이 넘는 유독성 폐기물들이 처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으며, 토양과 지하수 오염으로 주민들이 유독물질 오염 가능성에 여전히 노출돼 있다. 보상관련 인도 정부는 피해보상금으로 33억달러(약 3조5800억원)를 요구했지만, 유니온카바이드는 기나긴 협상 끝에 1989년 4억7000만달러(약 5100억원)를 지불했다. 2014년 인도 정부는 12억달러의 추가보상을, ‘보팔의 정의를 위한 국제 캠페인’이라는 피해자 지지단체는 81억달러 규모의 추가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사건 발생 이후 1985년 4월 인도 정부는 유니언카바이드사를 상대로 미국의 맨해튼 지방재판소에 제소 1986년 5월 인도의 재판소에 관할권이 있다는 판결이 남 1989년 2월 인도 최고재판소는 배상 청구액 33억 달러에 대해 4억 70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명령 1989년, 인도대법원은 유니언 카비아드사의 간부직원들을 처벌할 수 있는 형사 재판은 기각함 1989년 말에 성립된 V.P.싱 정권은 이 판결을 무효화하고 재차 보상금 교섭을 하여 잠정 조치로 피해자 50만 명에 대해 36억 루피의 구제금을 방출하라고 함 2001년 다우 케미컬이 유니언 카바이드사를 인수함. 그 결과 유니언 카바이드사의 자산과 채무는 모두 다우 케미컬에 귀속됨. 그러나 다우 케미컬 사는 현장을 정화하거나 안전한 식수와 의료봉사를 제공하지 않음. 2004년, 보상비 분배 과정의 최종 결과 보상신청 한 56만 6786건 중 약 95퍼센트가 최소금액인 500달러를 지급 받기로 함. 불과 1 퍼센트만 2 ~ 3천 달러를 받았음. 사망 보상신청 2만 2149건 가운데 1만 5100건만 보상됨 2013년 현재까지도 보팔 주민들은 다우 케미컬에 장기적인 건강관리 제공과 독성물질 제거, 경제적· 사회적 지원 제공을 요구하고 있지만 다우 케미컬은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임 2014년 미국과 인도 법원에서 4건의 보팔 참사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지만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전함 인도 정부가 다우 케미컬에 총 12억 달러의 추가 보상을 요구하는 반면, 다우 케미컬은 유니온 카바이드를 인수하기 전에 합의 보상이 이미 끝났으므로 남은 책임이 없다는 입장.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유니언 카바이드는 인도 노동자들의 사보타주로 가스가 누출되었다고 주장하나, 피해자들은 공장의 설계 결함과 유지 불량이 사고 원인이라고 지적함. 같이 보기 2020년 비샤카파트남 가스 누출 사고 각주 외부 링크 1984년 재난 인도의 환경재해 인도의 보건재해 화학 사고 마디아프라데시주의 역사 1984년 산업재해 1984년 인도 1984년 12월 1984년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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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8%EC%B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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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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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치()는 야드파운드법과 미국 단위계의 길이 단위이다.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표준 1 인치는 정확히 2.54 센티미터이고 1 피트의 1/12로 정의된다. 어원 인치는 one twelveth를 뜻하는 라틴어 unica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옛 영어의 unce와 ynche로 파생되었는데, unce는 온스로, ynche는 inch(인치)로 각각 파생되었다. 사람의 엄지손가락의 너비와 같은 길이로 정해지는 것에서 유래했다. 과거 1인치의 길이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기도 했다. 현재의 길이인 2.54 센티미터로 확정된 것은 1959년의 일이다. 표기 in 또는 ''로 나타내기도 한다. 각주 길이의 단위 영미 단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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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C%90%ED%83%80%EC%A6%88%EB%A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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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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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즈마》(Phantasma)는 buddies에서 제작한 비주얼 노벨 동인 게임이다. 2007년 3월 웹사이트를 통해 무료로 공개되었다. VNAP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2009년 라이온로직스에 의해 모바일 게임화되었다. 줄거리 주인공(20세 여성, 이름은 플레이어가 설정)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재수생이다. 그 무렵 마을에서는 '이변'이라고 불리는 기이한 현상이 생기고 있었는데, 은행에 갔다가 은행강도를 만난 주인공의 앞에 이상한 복장을 한 두 남자가 나타나 강도를 물리치고 홀연히 사라진다. 하지만 폐쇄 회로 텔레비전만 보고 경찰은 그 둘을 강도와 한 패로 오인하고, 두 사람과 다시 만난 주인공은 자기 집에 숨도록 한다. 이를 계기로 주인공은 두 남자와 함께 살게 되는데…… 등장인물 류빈 21세.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그쪽 세계에서는 왕자라고 한다. 풍아 24세. 류빈을 호위하는 신하 입장. 그의 말은 보통 사람이 듣지 못하지만, 주인공은 조금씩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친해진다. 한성우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후배. 김진하 재수 학원에서 친해진 선배. 민지혁 얼떨결에 나간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 신경일 재수 학원에서 성적 1등을 달리고 있다. 주인공에게 아는 척을 하지만 주인공은 기억하지 못한다. 만든 사람들 그래픽, 시나리오, 스크립트 - 란(김민영) 그래픽, 시나리오 - 시드(박신애) 배경일러스트 - 다구 외부 링크 공식 사이트 2007년 비디오 게임 윈도우 게임 동인 소프트웨어 노벨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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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C%A0%84%20%EC%86%90%ED%83%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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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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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1933년 1월 16일~2004년 12월 28일)은 미국의 소설가·문예 평론가·사회 운동가다. 수필 《캠프에 관한 단상》과 《해석에 반대한다》로 여러 지식인들의 관심을 받았는데, 《캠프에 관한 단상》에서는 기괴한 것을 좋아하는 태도를 '캠프'라고 정의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했으며, 《해석에 반대한다》에서는 예술에 대한 해석을 '지식인들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라 규정하면서 예술을 심미적으로 체험하자고 주장하였다. 문예 평론 외에도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 여러 문학 작품들을 창작했으며, 사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반대에 목소리를 높였다. 생애 초기 생애 수전 손택은 1933년 1월 16일 미국 뉴욕주 뉴욕에서 태어났다. 손택의 부모는 유대인이었는데, 아버지 잭 로젠블랫이 폐결핵으로 일찍 사망하자 어머니는 육군 대위였던 네이선 손택과 재혼하였다. 이에 따라 손택은 계부의 성씨를 쓰게 되었다. 유년기를 투산과 로스엔젤레스 등지에서 보낸 후 15살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입학해 1년간 수학하였다. 이후 시카고 대학교으로 옮겨 문학, 역사, 철학을 전공하였다. 17살에 시카고 대학교 강사였던 필립 리프와 결혼해 아들 1명을 낳았다. 시카고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 들어가 1954년에 영문학, 1955년에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부터 파리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소르본 대학교 등에서 수학을 한 후 1959년부터 뉴욕 시립 대학교, 세라 로렌스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등에서 철학 강의를 하였다. 1959년 필립 리프와 이혼하였다. 직업 활동 1963년 첫 소설인 《은인》을 발표하면서 문학계에 데뷔하였다. 이후 1964년 시사지 '파르티잔 리뷰'에 수필 《캠프에 관한 단상》을 발표하였는데, 이 수필이 '타임'에서 다뤄지면서 여러 지식인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 수필에서 손택은 기괴한 것을 좋아하는 태도를 '캠프'라고 정의한 후 현대 팝아트 문화를 캠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966년 발표한 수필 《해석에 반대한다》에서는 예술을 해석하는 행위를 '지식들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라고 규정하면서 예술을 심미적으로 체험해야 한다는 반해석론을 주장하였다. 이 수필은 전세계 지식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켜 손택을 유명 인사로 만들어 주었다. 한편 1978년에 유방암 판정을 받고 2년 뒤에 쓴 《은유로서의 질병》은 질병이 단순히 개인이 가진 증상이나 통증이 아니라 사회학적 기호라는 주장하였다. 여러 수필과 문예 평론 외에도 손택은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 여러 문학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국제펜클럽 회장을 맡았으며 1977년 전미비평가협회상, 1999년 전미도서상, 2003년 독일 출판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1983년에는 우디 앨런이 감독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젤리그》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사회 운동 손택은 1966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기고문을 발표하면서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방한해 구속된 한국 문인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으며 살만 루시디가 를 써서 이란 당국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자 즉각 항의하였다. 사라예보 내전 중에는 사라예보 한가운데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해 전쟁 속에서도 예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2001년 9·11 테러와 뒤이어 일어난 이라크 전쟁에서는 조지 W. 부시 정부를 크게 비판하는 글을 뉴욕 타임즈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죽음 수전 손택은 2004년 12월 28일 미국 뉴욕주 뉴욕에서 백혈병으로 죽었다. 죽은 후 뉴욕 타임즈는 그녀에 대한 부고 기사에 '여왕이 영면하다'라고 제목을 붙였다. 활동 에세이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 1966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Styles of Radical Will》1969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1977 《은유로서의 질병Illness as Metaphor》1978 《우울한 열정Under the Sign of Saturn》1980 《강조해야 할 것Where the Stress Falls》2001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s》2003 문학 《은인The Benefactor》1963 《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I, Etcetera》1977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Alice in Bed》1993 같이 읽을 거리 프레드릭 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Marxism and Form》1972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쾌락Le Plasir du texte》1973 외부 링크 수전 손택 공식 홈페이지 "Notes on 'Camp'" 전문 1933년 출생 2004년 사망 백혈병으로 죽은 사람 미국의 시사 평론가 미국의 소설가 유대계 미국인 하버드 대학교 동문 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문 시카고 대학교 동문 파리 대학교 동문 미국의 활동가 미국의 베트남 전쟁 반전 운동가 세라 로런스 칼리지 교수 프랑스에 거주한 미국인 미국의 수필가 미국의 영화 평론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폴란드계 미국인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앤스 칼리지 동문 뉴욕 출신 작가 애리조나주의 성소수자 인물 뉴욕주의 성소수자 인물 양성애자 대학 교수 미국의 성소수자 작가 20세기 역사가 21세기 역사가 미국의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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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20%ED%97%8C%EB%B2%95%20%EB%B6%80%EC%B9%99%20%EC%A0%9C3%EC%A1%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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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부칙 제3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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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부칙 제3조는 대한민국 헌법 부칙의 조항이다. 본문 대한민국 제 48-1 조 추방 조항 B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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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4%AC%20%28%EB%B0%B4%EB%93%9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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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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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은 대한민국의 모던 록 밴드이다. 결성 1998년 수능 이후에 김종완이 그의 선배들과 함께 밴드 '아일럿(ilot)'을 결성했으나, 서로 잘 맞지 않아 멤버가 이재경과 정재원으로 교체되었고 이정훈이 마지막으로 합류하면서 1999년 3월, 지금의 멤버가 모이게 되었다. 아일럿(ilot)을 밴드명으로 활동하던 중, 1999년 7월 31일 인천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을 보러 갔다가 비를 피하기 위해 찾은 한 PC방에서 밴드명을 이들이 이전에 본 조디 포스터 주연의 영화 《넬》로 교체했다. 밴드명을 교체한 이유에 대해 넬은 "영화 《넬》의 주인공은 오랜 시간 세상과 단절된 채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이는 '음악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다'라는 우리의 뜻과 맞아떨어져서 밴드명으로 따왔다."라고 언급했다. 활동 1집 Let It Rain (2003년) 2003년 정규 1집 《Let It Rain》이 발매됐다. 언더그라운드 시절에 이미 작곡된 100여곡 가운데 11곡을 엄선해 600시간의 녹음과 믹싱 작업을 거쳤다. 앨범 명에 대해선 “‘거침없이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나타낸다. ‘(비가 오는 걸) 막지 말라, 내버려두라’라는 뜻이다”라고 언급했다. 한편, 앨범 수록곡 '시작의 끝'과 '기생충'은 난해한 가사와 제목을 이유로 KBS로부터 방송불가 판정이 내려졌다. 메이저 데뷔를 하면서 생긴 큰 변화로 넬 멤버들이 꼽은 점은 다른 스테프가 넬의 공연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무대 올라가서 갑자기 셋리스트 바꾸고 잼(Jam) 하다가 내려오고 그랬는데 스탭들이 많으니 지켜야 할 것들이 생겼다며, 그런 것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불편하기도 하고, 사람들 대하는 일이 힘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음악 외에 조명이라든지, 영상, 공연의 흐름 등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언급했다. 2집 Walk Through Me (2004년) 2004년 11월 18일, 정규 2집 《Walk Through Me》가 발매됐다. 1집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흘러가는 사운드를 추구했고, 이를 위해 일본에서 유명 엔지니어(히로노리 사토)와 함께 녹음과 마스터링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한 곡당 20번 이상의 재녹음을 하는 등 1년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였다. 멤버들은 "표현의 한계가 확장됐다"라며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음악에 첫 발을 내딛은 느낌"이라고 언급했다. 앨범 명과 관해선 "넬을 솔직히 표현한 음악"으로 "나를 뚫고 지나가면 확실히 알 수 있지 않겠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한편 넬은 발매 몇 시간 만에 초도 물량 15,000장이 다 팔려나가고 공연 예매 시작 15분 만에 전석이 매진되는 등의 두터운 팬층을 쌓으며 '모던 록의 한국화에 기여한 밴드'로 인정받게 된다. 3집 Healing Process (2006년) 2006년 7월, 서태지컴퍼니와 결별 후 절친한 사이인 힙합 그룹 에픽하이의 당시 소속사인 울림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2006년 9월 21일, 정규 3집 《Healing Process》가 발매됐다.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의 전형적 편성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현악기를 사용하는 등 스케일을 넓히는 데 주력했는데 이에 멤버들은 "소속사를 옮긴 것과 음악은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언급했다. 만들어 둔 50곡 중 17곡을 CD 2장에 실었고, 앨범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힘들고 아팠던 일들을 그대로 담아내어 'Healing Process'라는 앨범명을 붙이게 되었다. 히든 트랙이 한 곡 있는데, 제목이 '1분만 닥쳐줄래요'로, 마지막 수록곡이 끝나고 정확히 1분간의 정적 후에 노래가 시작된다. 그리고 후에 이 앨범은 음악 관계자가 뽑은 2006년 최고의 앨범에 선정되었다. EP Let's Take A Walk (2007년) 기존 곡들을 어쿠스틱 버전으로 새롭게 편곡 앨범이다. 이 외에도 'It's okay', 'Down', 그리고 데모 버전으로만 공개되어있던 '연어가 되지 못한 채'를 포함한 신곡 3곡이 함께 수록되었다. 4집 Separation Anxiety, DVD The Trace (2008년) 2008년 12월 11일 골든디스크 수상을 끝으로, 멤버들의 군입대로 인해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군입대와 공백기 (2009년~2011년) 2011년 10월 22일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다시 활동을 재개하였다. 5집 Slip Away (2012년) 2012년 《Slip Away》로 성공적인 컴백을 하며 〈그리고, 남겨진 것들〉, 〈Cliff Parade〉 등이 대중에게 사랑받았다. 중력 3부작 (2012년~2014년) 싱글 앨범 2장인 《Holding onto Gravity》(2012년), 《Escaping Gravity》(2013년)과 정규 앨범 1장 《Newton's Apple》(2014년)로 구성된 'Gravity 3부작'을 발표했다. 한편, 《Newton's Apple》은 빌보드가 뽑은 2014년 최고의 K-pop 앨범에서 2위에 선정되었다. 7집 C (2016년) 넬이 2년 5개월이라는 긴 공백을 깨고 발매한 정규 앨범이다. 울림엔터테인먼트로부터 독립한 이후 처음으로 내놓는 작품이며, 원래 8월 11일 발매 예정이었지만, "더 오래 간직할 수 있는 CD를 만들기 위해 잠깐의 시간을 더 빌리겠다"라는 입장을 밝히며, 8월 19일로 발매를 연기하였다. 오프라인으로는 8월 24일 발매되었다. 이후, 네이버 뮤직 이주의 발견에 선정되고, 이즘에서 별점 4개를 받는 등의 호평을 받기도 하였으며, 여담으로 메이저 데뷔 이후 가장 적은 방송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구성원 김종완 (, 보컬, 리듬 기타, 키보드) 이재경 (, 기타, 키보드) 이정훈 (, 베이스 기타, 키보드, 코러스, 샘플러 등) 이전 구성원 정재원 (, 드럼) 평가 특유의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음악으로 '넬'스럽다고 일컫는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여 두터운 매니아 팬층을 지닌 밴드, 한국 모던록의 독보적인 밴드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의 라디오헤드', '감성밴드'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며, 일본의 록 전문 잡지 Crossbeat에선 이들을 '한국의 콜드플레이'라 묘사했다. 대중 매체에 노출이 적다는 이유로 '신비주의 밴드', '미스터리 밴드'라는 대중들의 시선에 김종완은 "감춘다기 보단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일뿐이다. 멤버들 모두 개인적인 공간과 시간을 중시하는 편이기도 하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음악 방송만 하는 것일뿐"이라고 언급했다. 넬은 음반을 발매할 때마다 대중들이 상반된 반응을 보여왔다. 데뷔 초, 인디 1집 《Reflection of》에서 '라디오헤드의 아류'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으나 2006년 중고 음반 최고가인 30만원을 기록하며 놀라운 반응을 끌어냈고 정규 3집 《Healing Process》 발매 땐 현악기와 전자음 등 스케일이 커진 앨범을 선보이자 대중들은 넬이 '색을 잃었다, 대중적이다' 등의 반응을 보였으나 전문가들은 2006년 최고의 앨범으로 선정했고 팬들은 '넬'스러운 앨범이라고 평했다. 또한, 정규 5집 《Slip Away》때도 '넬스럽다'와 '색을 잃었다'라는 의견이 교차했고 중력 2부 《Escaping Gravity》에선 '밝아졌다'와 '어두워졌다'라는 상반된 평가가 많았다. 이에 정재원은 "신기한 건 '이번엔 달라졌다' 이런 반응이 있다가도 다음 앨범이 나오면 그땐 또 '그게 넬스러웠던 것'이라는 목소리다. 이런 반응들이 재밌더라"라고 말했다. 음반 인디 앨범 2001년 1월 19일 《Reflection of》 2001년 9월 26일 《Speechless》 정규 앨범 2003년 6월 12일 《Let It Rain》 2004년 11월 18일 《Walk through Me》 2006년 9월 21일 《Healing Process》 2008년 3월 21일 《Separation Anxiety》 2012년 4월 10일 《Slip Away》 2014년 2월 27일 《Newton's Apple》 2016년 8월 19일 《C》 2019년 10월 10일 《COLORS IN BLACK》 2021년 9월 2일 《Moment in between》 EP 2007년 6월 25일 《Let's Take A Walk》 2012년 12월 3일 《Holding onto Gravity》 2013년 6월 10일 《Escaping Gravity》 싱글 2008년 6월 3일 〈멀어지다〉 (디지털 싱글) 2013년 1월 8일 (디지털 싱글) 2014년 12월 15일 〈청춘연가〉 (디지털 싱글) 2015년 9월 18일 (디지털 싱글) 2015년 12월 2일 (디지털 싱글) 2016년 12월 6일 〈그리워하려고 해〉 (디지털 싱글) 2016년 12월 16일 (디지털 싱글) 2017년 12월 15일 〈부서진〉 (디지털 싱글) 2017년 9월 18일 (디지털 싱글) 2019년 12월 2일 (디지털 싱글) 2020년 6월 26일 〈듀엣〉 (디지털 싱글) 2020년 7월 31일 (디지털 싱글) 2020년 10월 23일 〈기억해〉 (디지털 싱글) 2020년 12월 18일 (디지털 싱글) 2021년 3월 12일 〈Don't hurry up〉 (디지털 싱글) 2021년 7월 5일 (디지털 싱글) 2022년 8월 5일 (디지털 싱글) 2023년 1월 1일 〈인정의 미학〉 (디지털 싱글) 2023년 8월 11일 (디지털 싱글) DVD 2008년 11월 27일 《The Trace》 사운드트랙 2013년 8월 7일 《투윅스 OST Part 1》 2016년 6월 25일 《미녀 공심이 OST Part 7》 2016년 7월 23일 《굿 와이프 OST Part 1》 미공개곡 앨범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공연장에서 종종 불리는 곡들을 말한다. 팬들에 의해 녹음본이 다수 존재하며, 녹음본이 없는 곡들도 있다. 다음은 미공개곡의 목록. Hate Hold On Intima (음원 없음) Shower Whatever Why 가난한 진실 내 안에 딩디리딩 멋지다 대한민국 (음원 없음) 본능 부서진 (10년동안 공개되지 않았다가 이후 2017년에 디지털 싱글로 발매) 비밀의 화원 비와 달 삐에로와 눈사람 어젯밤 내게 생긴 일 연어가 되지 못한 채 (후에 재편곡되어 Let's Take A Walk 수록) 자물쇠 파란 토마토의 비밀 커버곡 다른 가수의 곡을 넬이 편곡해서 공연장에서 부른 것을 말한다. 다음은 커버곡의 목록. 널 지우려 해 - 서태지 (With. 서태지) Take One - 서태지 내가 바라는 나 - 이승환 (With. 유희열) 천일동안 - 이승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 장필순 Eternal Flame - Bangles Across the Universe - Beatles Song 2 - Blur Knocking On Heaven's Door - Bob Dylan If - Bread Yellow - Coldplay Like A Star - Corinne Bailey Rae (With. 지선) Zombie - Cranberries Can't Take My Eyes Off You - Frankie Valli (With. 피아) Brainstew - Greenday This Love - Maroon 5 Plug in Baby - Muse Unintended - Muse Muscle Museum - Muse Uno - Muse Helena - My Chemical Romance Lithium - Nirvana Smells Like Teen Spirit - Nirvana Every Breath You Take - The Police Roads - Portishead I'll Be Missing You - Puff Daddy (With. 에픽하이) Creep - Radiohead Bulletproof……I wish I was - Radiohead I Love You - Sarah McLachlan Nothing Compares 2 U - Sinead O'connor She's gone - Steelheart Shape of My Heart - Sting Last Christmas - Wham 수상 및 경력 2006년 최고의 앨범 선정 《Healing Process》 공연 및 콘서트 ※ 넬 Daum 팬 카페에 업로드된 스케줄을 바탕으로 작성. 2007년 2008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각주 외부 링크 스페이스보헤미안 대한민국의 록 밴드 모던 록 소프트 록 1990년대 음악 그룹 2000년대 음악 그룹 2010년대 음악 그룹 2020년대 음악 그룹 한국어 음악 그룹 영어 음악 그룹 남성 음악 그룹 3인조 음악 그룹 1999년 결성된 음악 그룹 괴수 인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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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C%8A%A4%ED%83%80%EC%83%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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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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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타샤 - 크로아티아 혁명운동()은 크로아티아의 반(反)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 운동 조직이자 파시스트 조직으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70여만명의 세르비아인과 정교도인들을 학살했다. 파시즘, 민족주의, 가톨릭의 결합 우스타샤의 이념에는 파시즘, 나치즘, 크로아티아의 극단적인 민족주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권주의적 근본주의 가 섞여있다. 우스타샤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테러 집단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4월 이들은 추축국이 점령한 유고슬라비아 일부 지역에 나치 독일 이 세운 괴뢰 국가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지배를 맡았으며, 바티칸 교황청,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의 비호를 받으며 세르비아인 학살을 저질렀다. 1929년에 창설된 우스타샤는 안테 파벨리치가 지도자였으며, 크로아티아에 독립국을 건설하려는 민족주의 단체였다. 우스타샤가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지배하면서 이 나라 군대는 우스타샤 군대(Ustaška Vojnica)가 되었다. 명칭의 근원 이들의 명칭은 "서다", "오르다"라는 뜻의 동사 'ustati'에서 나왔으며, 우스타샤(ustaša)는 반란을 뜻한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당시 조직이 세워진 초기에 'ustat'이라는 말은 헤르체고비나에서 1875년의 헤르체고비나 반란의 반란군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기 때문에 이 명칭에 파시즘의 함의가 없었다. 'Pučki-Ustaša'는 제국 크로아티아 조국 수비대(1868년~1918년)의 군사 계급이었다. 이 조직의 원래 정식 명칭은 1931년 4월에 우스타샤 - 크로아티아 혁명 조직(Ustaša - Hrvatska revolucionarna organizacija, UHRO)로 등장하였으나, 1933년 '우스타샤 - 크로아티아 혁명 운동'으로 바꾸어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유지하였다. 전후 몰락 1945년 전황이 불리해진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에서 물러나자 우스타샤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쫓겨나 인근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나 이탈리아의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 수녀원 등으로 숨어들었다. 가톨릭 연구가인 아브로 맨하탄(Avro Manhattan)의 《바티칸 대학살》은 당시 우스타샤의 세르비아인 학살의 모든 상황과 사건의 배경 그리고 은폐 의혹 등을 다뤘는데 이 책에 따르면 크로아티아에서 학살의 배후가 바티칸 교황청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각주 같이 보기 안테 파벨리치 철위대 파시즘 크로아티아 독립국 크로아티아의 해산된 정당 크로아티아의 파시즘 일당제 정당 홀로코스트와 유고슬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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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8%8C%EB%9D%BC%EC%9A%B4%20%EC%95%84%EC%9D%B4%EB%93%9C%20%EA%B1%B8%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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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아이드 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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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대한민국의 걸 그룹이다. 제아, 미료, 나르샤, 가인 4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에이팝엔터테인먼트 소속이다. 역사 2003–07: Your Story, 떠나라 미스김 작곡가이자 가수 윤일상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내가네트워크라는 연예 기획사를 설립했고 당시 제아가 초창기 연습생으로 합류했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초기 팀명인 크레센도라는 이름을 내걸고 제아를 비롯한 나머지 3명의 멤버는 데뷔를 준비했다. 하지만 브라운 아이드 걸스로 이름을 바꾸기 직전 여러 가지 이유로 제아를 제외한 멤버들이 팀에서 나갔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라는 팀명은 브라운 아이즈, 브라운 아이드 소울까지 성공시킨 박종갑과 식사자리에서 윤일상이 우연히 "브라운 아이드소울이 있으니 브라운아이드 걸스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며 이름 사용 허락을 구하면서 지어졌다. 이후 윤일상은 방송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음악성 위주의 화음이 아름답고 거기에 랩까지 겸비된 당시 한국에 없었던 그룹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또한 윤일상은 일본 그룹 소울헤드와 같은 랩이 있는 알앤비, 소울 풍의 그룹을 만들고 싶어했다. 허니패밀리의 객원래퍼였던 미료는 허니패밀리 2집 이후 미스터 타이푼과 함께 힙합 듀오(가칭 "프로펠라")를 결성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가수 린과 영지의 소개로 내가네트워크의 오디션을 통해 브라운 아이드 걸스 프로젝트에 먼저 합류하였다. 이후 오디션을 통해 나르샤와 가인이 합류하게 된다. 고음부를 맡아줄 멤버가 필요했던 차에, 고등학생때부터 제아와 안면이 있는 친구 사이였으며 같은 실용음악학원을 다니며 가수의 꿈을 키웠던 나르샤는 여러 기획사에서 연습생으로만 수 년 동안 지내다 제대로 데뷔를 못하고 있던 차에, 가수의 꿈을 거의 포기한 채 지냈다. 그러다가 제아의 연락을 받고 내가네트워크 오디션에 응시하여 합격 통보를 받으면서 합류하게 되었다. 가인은 Mnet 오디션 프로그램 《배틀신화》에 참가했다가 떨어졌다. 그때 내가네트워크의 작곡가 안정훈이 가인을 회사에 소개시켜 제아, 나르샤, 미료 앞에서 오디션을 보게 되었고, 세 멤버들의 승인 아래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데뷔 이전에 약 3년여의 하드 트레이닝을 거쳐 2006년 3월 9일 첫 정규 앨범 《Your Story》를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윤일상, 오승은, 바비킴, 김건우, 함경문, 김영아, 이태건 등 유명한 프로듀서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MC몽과 바비킴이 랩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데뷔 초에는 여자 브라운아이즈를 표방하며 방송 활동 없이 활동하겠다고 했으나, 처음의 계획과 달리 타이틀곡 〈다가와서〉로 방송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 5월 30일에는 첫 싱글 〈Hold The Line〉을 발매했는데, 조PD가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이 노래는 온라인 음원 차트 상위권에 머물렀었다. 또한 이 노래로 제1회 싸이월드 디지털 뮤직 어워드 송 오브 더 몬스상을 받았다. 2006년 7월 1일과 2일 양일에 걸쳐서는 서울 대학로 질러홀에서 첫 콘서트 First Concert Your Story를 열었다. 이들은 당시 콘서트장에서 "한국의 데스티니 차일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8월 25일에는 《Your Story》의 리패키지 앨범을 발매하고 9월 9일 쇼케이스를 시작으로 리패키지 앨범의 타이틀곡이자 후속곡 〈Second〉로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룹 활동 외에도 9월 8일 제아는 씨야의 김연지와 함께 싱글 〈To My Lover〉를, 11월 16일 가인은 SG 워너비의 김용준과 〈Must Have Love〉를 발표했다. 같은 달 나르샤는 가리온과 함께 영화 《잔혹한 출근》의 엔딩곡 〈피할 수 없다면〉을 발표했다. 같은 해 12월 1일 열린 서울가요대상에서 슈퍼주니어, 씨야와 함께 공동으로 신인상을 수상했다. 나중에 브라운 아이드 걸스 본인들은 "얼굴없는 가수"라는 컨셉이 정해졌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으며, 가인은 "사기당한 기분이었다"라고 회상했다. 2007년 6월 21일에는 싱글 〈내가 여름이다〉를 발표했고, 쿨의 이재훈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타이틀곡 〈오아시스〉로 활동했다. 싱글 활동으로 조금이나마 대중적인 활동으로 이름을 알린 뒤, 2007년 9월 6일 두 번째 정규 앨범 《떠나라 미스김》을 발매한다. 이 앨범은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본래의 음악적 색깔을 다시한번 확인 시켜준 앨범이였다. 타이틀 곡인 〈너에게 속았다〉는 같은 날 발표된 원더걸스의 "Tell Me"에 묻히는 바람에 훌륭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급격한 기호 변화를 읽지 못했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또한 이 앨범은 1년 6개월만에 나온 새 정규 앨범인데도 불구하고, 〈오아시스〉의 화제로 대중들은 후속앨범인것처럼 받아들였다. 타이틀곡의 상업적인 실패 후, 2007년 말 짧은 기간 동안 〈하필이면〉이라는 후속곡으로 잠시 활동을 한 후 야심차게 준비했던 정규 앨범 2집의 프로모션 활동을 끝냈다. 2007년 12월 27일에는 내가 겨울이다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콘서트를 열었는데, 첫 번째 콘서트보다 2배 이상 커진 규모로 열었다. 이 외에 〈남자는 없다〉, 〈떠나라 미스김〉 등 많은 후속곡 활동을 펼칠 예정이였으나, 타이틀 곡의 상업적 실패로 모두 무산되고 말았다. 브아걸은 여러 방송에서 이 시기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으며, 두 번째 정규 앨범 《떠나라 미스김》은 가장 마음 아픈 앨범이었다고 이야기했다. 2008–09: Sound G. 2008년부터 일렉트로니카 유행이 시작되자 브라운 아이드 걸스도 이에 맞춰 변신을 시도했다. 장르의 전환이 될 첫 앨범은 "With L.O.V.E"라는 싱글 앨범이였고, 2008년 1월 17일 발매되었다. 타이틀 곡 "L.O.V.E"는 일렉트로팝 장르의 노래였는데, 일렉트로니카 씬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세인트바이너리가 참여했다. 원래 "With L.O.V.E"의 타이틀 곡으로는 재즈 풍 그루브 장르의 "Love Action"이 선정 돼 뮤직비디오까지 촬영을 끝낸 상태였지만, 앨범 발매 1주를 앞두고 뒤늦게 완성된 "L.O.V.E"의 퀄리티가 뛰어나 타이틀 곡을 바꿨다. "L.O.V.E"는 공개가 되자마자 무서운 상승세를 이어갔고, 각종 차트의 정상을 휩쓸었다. 뿐만 아니라 《인기가요》의 뮤티즌 송, 《뮤직뱅크》의 K-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지상파 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했다. 9월 12일에는 새 앨범 발매에 앞서 "You"를 선공개했고, 9월 16일 첫 미니 앨범 My Style을 발매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타이틀곡은 용감한 형제가 작곡한 일렉트로닉 장르의 〈어쩌다〉로, 복고풍 컨셉으로 활동했다. "You"와 〈어쩌다〉는 큰 인기를 얻었지만, 비슷한 시기 활동하던 원더걸스의 "Nobody"로 인해 〈어쩌다〉는 가요프로그램 순위에서 8주 동안 2위만 했다. 10월 30일에는 "My Style (Hidden Track)"이라는 싱글을 발매했고, 원래 팬 서비스용 곡이였던 히든 트랙 "My Style"이 이외에 인기를 얻으면서 후속곡 활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My Style"도 차트 상위권에 진입하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걸 그룹으로 올라섰다. 12월 10일에는 2008 골든디스크상에서 "L.O.V.E"로 디지털 음원 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2009년 7월 21일 여름을 맞아 브아걸은 세 번째 정규 앨범 Sound G.를 발매한다. 이번 앨범에는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테크노 뮤지션들과의 공동작업을 했다. Sound G.는 총 2장의 2CD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정규 수록곡이 수록된 첫 번째 CD외에 기존의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히트곡들을 새롭게 리믹스한 두 번째 CD에는 여러 나라 정상급의 테크노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앨범 발매에 앞서 7월 11일 수록곡 "Candy Man"을 선공개해 컴백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고, 음원 차트 상위권에 진입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 멤버 나르샤가 뮤직비디오 촬영 중 큰 부상을 입을 뻔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황수아 감독이 만든 "Abracadabra"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고, 동성애와 선정적인 장면 등 큰 화제를 모았다. 파격적인 장면들 때문에 지상파 심의에 걸리기도 했지만, 시건방춤이 인기를 모으며 8월 뮤직비디오 차트 1위를 차지했다. 타이틀 곡 "Abracadabra"는 공개되자마자 수직상승해 모든 음원 사이트뿐만 아니라 케이블 차트까지 점령했다. 특히 투애니원, 소녀시대, 지드래곤 등과 같은 가수들을 이기고 8월 종합 차트에서 1위를 거두었고, 싸이월드 디지털 뮤직 어워드에서 송 오브 더 먼스 상을 받았다. 타이틀 곡 활동이 막바지 활동에 이를 때, CD2에 실린 프랙탈이 리믹스한 "Abracadabra"로도 잠시 활동을 하고 마쳤다. 이어 2009년 10월 29일 후속 EP 앨범 Sound-G Sign을 발매했다. 타이틀 곡은 "Sign"으로 10월 30일 "Sign"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는데, 꼬챙이로 사람을 찔러 피가 흘르는 등 파격적인 장면으로 또 다시 뮤직비디오로 화제를 모았다. "Sign"의 안무 중 부채를 이용한 일명 '마사지 춤'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상위권을 유지하는 등 연속적으로 히트를 쳤다. 이번 활동을 통해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고, 음원 수익만 100억원에 달했다. 또한 기존의 이미지에서 장르의 전환을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지만, 일부에서는 기존의 정체성을 잃어간다는 의견도 있었다. 공식 앨범 활동을 마치고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이번 활동부터 개인 활동을 활발히 시작했다. 기존에 가장 인기가 있었던 멤버 가인은 《우리 결혼 했어요》에 출연하게 되었고, 조권과 함께 "아담부부"로써 많은 인기를 누리지만, 새로운 앨범 활동을 위해 2011년 하차를 하게 된다. 가인은 또한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도 비중은 작지만 영화 데뷔를 했다. 나르샤는 《청춘불패》에 출연을 하며 새로운 예능 기대주로 발돋음했다. 미료는 많은 가수들에게 랩 피처링 제의가 일었다. 이러한 개인 활동은 2010년까지 이어가게 된다. 한편, 나르샤, 제아, 미료는 초기활동 시기 풋풋한 컨셉을 위해 나이를 2살 어리게 낮췄지만, 브아걸이 예능에 나와 실제로는 나이가 더 많다고 밝혔다. 2010–14: Sixth Sense, BLACK BOX 2010년 4월이 되자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EP 앨범 Festa on Ice 2010을 발매했는데, 이는 2010년 4월 16-18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개최된 페스타 온 아이스 2010을 장식하기 위한 테마음반이다. 이 시기에 브아걸 멤버들은 개별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나르샤는 《청춘불패》, 《영웅호걸》 등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에 이어 《나르샤의 볼륨을 높여요》를 통해 DJ로써도 활동을 시작했다. 2010년 7월에는 첫 솔로 앨범인 Narsha를 발매해 〈삐리빠빠〉와 〈맘마미아〉로 활동했다. 이러한 바쁜 활동을 이어가자 나르샤는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2010년 10월에는 가인이 나르샤에 이어 솔로 앨범 step 2/4를 발매했고, 《우리 결혼 했어요》 활동도 계속 이어갔다. 특히 솔로 앨범의 타이틀 곡이였던 〈돌이킬 수 없는〉은 일렉트로 탱고라는 장르를 내웠는데, 각종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지상파에서도 솔로 첫 1위에 올라 성공적인 활동을 했다. 12월 28일에는 제아와 엠블랙의 지오가 듀엣 곡 〈니가 따끔 거려서〉를 발표했다. 한편 3집 활동 이후 해외에서 브라운 아이드 걸스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는데, 싱가폴, 베트남, 미국, 몽골 등에서 공연을 펼쳤다. 특히나 유튜브와 구글에서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안무와 노래를 패러디하는 해외 동영상들이 많이 늘어났다. 브아걸은 일본에 대한 정식적인 진출을 선언했고, 소니 뮤직 재팬 인터내셔널과 계약을 맺어 일본어판 "Abracadabra" 및 DVD가 수록된 초회 한정판 발매를 기념하는 쇼케이스 및 미니 라이브가 동경의 하라주쿠 아스트로홀에서 성공적으로 마쳤다. 2011년 9월 16일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네 번째 정규 앨범 발매에 앞서 "Hot Shot"을 선공개 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후 9월 23일, 동명의 "Sixth Sense"를 타이틀곡으로 한 네 번째 정규 앨범 Sixth Sense를 발매해 활동하였다. 11월에는 5년 만에 "Cleansing cream"을 발매해 팬들에게 발라드를 선보였다. 2012년 12월에는 대한민국 걸그룹 최초로 19세 이상의 성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Tonight 37.2 °C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2013년 7월 9일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새 앨범 발매에 앞서 싱글 〈레시피〉를 발매했다. 7월 28일에는 다섯 번째 정규 앨범 BLACK BOX를 발매하여 활동했다. 2015–현재: BASIC, RE_vive, 2019년 겨울 첫눈으로 만든 그댈 2020년 눈으로 다시 만들 순 없겠지만 다섯 번째 정규 음반 《BLACK BOX》 이후 브라운 아이드 걸스 멤버들은 개인 활동에 집중했고, 해체설이 나오기도 했지만 소속사측에서 사실 무근이라고 발표했다. 비슷한 시기 내가네크워크와 계약이 끝나 멤버들 모두가 가인이 소속된 에이팝엔터테인먼트로 옮겼다. 2015년 11월 5일 여섯 번째 정규 음반 《BASIC》이 발매되었다. 2019년 10월 28일 리메이크 음반 《RE_vive》으로 4년 만에 컴백하였다. 전곡이 리메이크한 곡이다. 2020년 1월 2일 디지털 싱글 음반 《2019년 겨울 첫눈으로 만든 그댈 2020년 눈으로 다시 만들 순 없겠지만》으로 컴백하였다. 음악 스타일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제작자 윤일상은 일본 그룹 소울헤드와 같은 랩이 있는 알앤비, 소울 풍의 그룹을 만들고 싶어했다. 데뷔 당시 R&B 발라드 장르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알앤비에 힙합이 접목된 새로운 장르인 하이브리드 소울(Hybrid Soul)을 자신들의 장르로 내세웠다. 원래부터 작곡가들의 공동체로 시작한 브아걸의 소속사 내가네트워크인 만큼, 대중적으로 쉽게 히트할 만한 멜로디 라인의 곡보다는 상대적으로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하는 편이며, 특히 2009년 Sound G. 앨범에서 다소 실험적이었던 아브라카다브라가 대박을 터뜨린 이후에는 노골적으로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를, 멤버들의 솔로 활동을 통하여 선보이고 있다. 이는 나르샤의 솔로 앨범 타이틀 곡이었던 삐리빠빠(East4A 작곡)와 맘마미아(이민수 작곡)에서도 이어졌으며, 2010년 10월 발표된 가인의 솔로 앨범도 윤상과 이민수의 공동작업물인 타이틀 곡 "돌이킬 수 없는"은 아스토르 피아졸라풍의 반도네온 연주가 인상적인 탱고 리듬에 일렉트로닉 비트를 얹힌, 다소 실험적인 곡이었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대한민국에서 실력파로 인정받고 있는 걸 그룹으로써 1집과 2집 동안에는 알앤비를 주 장르로 삼았지만, 3집으로 넘어가면서 댄스 그룹으로 전환하였다. 3집의 타이틀곡 "Abracadabra"는 기존에 유행하던 '후크송' 류에 조금 더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특색을 실어내어 무게감있는 리듬과 자극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도입부의 사운드, 시원하게 터지는 느낌의 후렴구, voodoo를 연상시키는 인상적인 가사가 잘 어우러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음악전문가들은 보컬에 무게를 둔 그룹으로써는 어려운 도전이라 할 수 있는 일렉트로니카 장르의 곡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는 평가를 하였다. 2008년부터는 장르를 전환했는데, 일부에선 데뷔 당시 소울 음악을 상징하다시피 한 'Brown Eyed'라는 이름과, 현재 브라운 아이드 걸스를 대중에게 크게 알려지게 한 일렉트로니카 음악과는 서로 음악색이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몇몇 평론가들 또한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변화를 시장 트렌드에 의해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제기하였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 자신들 역시 정체성의 혼란이 있었다고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또 다른 라디오 인터뷰에서는 자신들은 발라드를 선호하지만 대중들이 댄스 음악을 더 원하는 것 같고 가수는 대중들을 사랑을 얻어야 하며 자신들 또한 대중들이 즐거워하는 노래를 부르면 기분이 좋기 때문에 댄스 음악도 나쁘지 않다고 하였다. 이러한 논란들을 뒤로 하고 이들의 3집 앨범인 Sound G.에 이르러서는 충실한 음악성과 트렌드를 선도하는 대중성이 잘 만나 기존의 걸그룹들과 차별화된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도 나오게 되었다. 특히 최근 인터뷰에서는 이들은 매 앨범마다 트렌드는 바뀌었을지라도 1집부터 이들이 하고 싶었던 음악들을 꾸준히 추구하려고 했으며 걸그룹들에 대해 단순히 트랜드만을 쫓는 상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의식을 가진 진정한 가수로 인식해 주기를 바라는 바램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발라드를 부르던 시절의 인터뷰에서도 이들의 평소에 즐겨듣는 음악으로는 가인의 경우 애시드 재즈 그룹인 D' sound나, 나르샤의 경우, 하우스룰즈 같은 리듬감이 살아 있는 그루브한 음악도 좋아한다고 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시류에 영합하여 댄스 음악으로 갈아탔다고 보기 보다는, 정말 본인들이 하고 싶었던 음악 중의 하나로서 댄스 풍의 빠른 음악을 선보이면서, 그동안 대중들한테 상대적으로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던 국내 언더그라운드의 테크노 뮤지션들(세인트바이너리 등)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서 주류 가요계에 새롭고 신선한 시도를 끊임없이 선보이고 있다고도 보인다. 한편, 댄서블한 음악을 선보이게 되면서 "L.O.V.E", 활동에서는 간간히 곁들이던 정도였던 댄스와 퍼포먼스는 "Abracadabra"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강렬한 노래의 주제에 걸맞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산된 안무와 퍼포먼스(미료의 LED안경, 시건방춤, 나르샤의 불꽃 퍼포먼스 등)를 선보이면서, 이는 다소 실험적이었던 진보적인 테크노 비트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강렬한 음악의 효과를 배가시켜서 받아들이게 되면서, 큰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멤버들 스스로도 평가하였다.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멤버 구성은 보컬 세 명에 랩만 전문적으로 맡는 멤버 한 명이라는 당시로서는 독특한 멤버 구성이었다. 리더 제아는 팀 내 메인보컬과 서브보컬과 같은 포지션이 따로 없다고 밝히며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멤버 모두 메인보컬이다. 그게 우리 그룹 콘셉트다"라고 이야기했다. 구성원 음반 목록 《Your Story》 (2006년) 《떠나라 미스김》 (2007년) 《Sound G.》 (2009년) 《Sixth Sense》 (2011년) 《BLACK BOX》 (2013년) 《BASIC》 (2015년) 《RE_vive》 (2019년) 콘서트 First Concert Your Story (2006년) 내가 겨울이다 (2007년) Hot Winter Party (2010년) Tonight 37.2 °C (2012년) 수상 목록 기타 브아걸의 백댄서로 댄스 트레이너, 배윤정이 있었다. 각주 외부 링크 브라운 아이드 걸스 소니 뮤직 재팬 공식 웹사이트 춘천시 출신 한국어 음악 그룹 대한민국의 댄스 음악 그룹 대한민국의 걸 그룹 대한민국의 전자 음악 그룹 내가네트워크 미스틱스토리 음악가 에이팝엔터테인먼트 음악가 4인조 음악 그룹 2000년대 음악 그룹 2010년대 음악 그룹 2020년대 음악 그룹 2006년 결성된 음악 그룹 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 하이원 서울가요대상 본상 수상 음악가 하이원 서울가요대상 신인상 수상 음악가 Mnet 아시안 뮤직 어워드 수상 음악가 한국대중음악상 수상 음악가 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수상자 KBS 뮤직뱅크 1위 수상자 엠넷 엠카운트다운 1위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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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C%96%B4%EB%8F%84%EC%96%B4%20%EB%B8%8C%EB%9E%98%EB%A9%9C%EB%93%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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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브래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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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브라멜드(Theodore Brameld, 1904년 ~ 1987년)는 미국의 재건주의 교육사상가이다. 그는 현대의 세계는 실업과 공황에 의한 불안과 전쟁의 위협에 의해 특징지워져 있다고 하였다. 이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지배체제를 확립시키고 교육이 다수자의 이익에 봉사할 수 있게 하며 생산수단이 다수자의 것이 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진보주의를 발전적 방향으로 극복하는 문화적·교육적 이상향을 구상하였다. 이것은 문화혁명의 전망을 지니며 현대문화의 개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이런 입장을 개조주의라고 하였다. 개조주의란 자연과 인간에 관한 과학적 지식의 확고한 기초 위에 서서 미래에 대한 문화적 형태를 구상하고 그것을 확립하기에 유효한 수단을 발전시키려는 것이다. 즉 개조주의는 진보주의와 마찬가지로 인문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하였다. 같이 보기 교육사상 재건주의 1904년 출생 1987년 사망 미국의 교육학자 교육학자 시카고 대학교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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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B%B9%EA%B3%A0%EA%B0%9C%EC%97%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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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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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역(Danggogae station, 堂고개驛, 堂岭驛)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에 있는 수도권 전철 4호선의 전철역이다. 이 역부터 창동역까지 지상 구간이다. 심야에 2편성이 주박한다. 역사 1993년 4월 21일(수요일) : 서울 지하철 4호선 상계역~당고개역 구간 연장 개통과 함께 종착역으로 영업 개시 2014년 12월 10일(수요일) : 수도권 전철 4호선 당고개역~진접역 구간 착공 2022년 3월 19일(토요일) : 수도권 전철 4호선 당고개역~진접역 구간(풍양역 제외) 연장 개통과 함께 역명 유래 역명은 예부터 산짐승들이 많아 나그네들이 돌을 들고 넘었다는 의미인 당고개에서 유래되었다. 개요 심야에 이 역 회차 터널에서 서울교통공사 4000호대 VVVF 전동차 직류 1편성, 서울교통공사 4000호대 VVVF 전동차 직교류 1편성씩 총 2편성이 주박한다. 서울교통공사와 한국철도공사와의 협약으로 오이도·안산·사당발 진접행 모든 서울교통공사 4000호대 VVVF 전동차, 한국철도공사 341000호대 전동차는 이 역까지만 운행하고, 별내별가람역부터는 사당발 서울교통공사 4000호대 VVVF 전동차만 운행된다. 역 구조 개찰구, 역무실은 지상 2층에 있고, 승강장은 지상 3층에 있다. 당고개역~진접역 구간(풍양역 제외) 연장 개통 전까지는 이 역 진입 전에 건넘선이 존재하였다. 과거에는 반대편 승강장 횡단이 가능하였으나 현재는 양쪽 승강장의 운임구역이 분리되어 있어 개찰을 거치지 않고는 왕래할 수 없다. 출입구는 6개다. 승강장 2면 2선의 곡선 상대식 승강장을 갖춘 고가역이며, 반밀폐형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역 주변 수락산 삼락시장 상계3동우체국 상계종합사회복지관 수락산당고개지구공원 서울신상계초등학교 상계4동치안센터 상계3·4동행정복지센터 예비군훈련장 이용객 변동 인접한 역 각주 외부 링크 당고개역 소개(서울교통공사 사이버 스테이션 홈페이지 홈페이지) 서울 노원구의 전철역 1993년 개업한 철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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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C%8A%A4%EB%AA%A8%EC%8A%A4%20%281980%EB%85%84%20%ED%85%94%EB%A0%88%EB%B9%84%EC%A0%84%20%ED%94%84%EB%A1%9C%EA%B7%B8%EB%9E%A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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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1980년 텔레비전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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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Cosmos: A Personal Voyage)는 우주와 생명을 주제로 한 13부작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시리즈로, 미국의 PBS에서 방송되었다. 칼 세이건, 앤 드리앤, 스티븐 소터가 저술하였고, 천문학을 중심으로 하여 우주와 천문학의 역사, 인류의 원시 문명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지식과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매회 칼 세이건이 상상의 우주선(SOTI, Ship of the imagination)을 타고 우주 법칙과 생명 진화 등과 관련된 내용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며, 그리스 음악가인 반젤리스의 여러 앨범의 음악이 사용되었다. 에미상과 피버디 상을 수상하였다. 2014년 미국 NGC에서 원조 코스모스의 속편 격으로 그간의 새로운 과학적 성과를 추가해 동명의 새로운 다큐(코스모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빅 히스토리, Cosmos: A Spacetime Odyssey)를 선보였다. 같이 보기 코스모스 (책) 코스모스 (2014년 텔레비전 프로그램) 각주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천문을 소재로 한 작품 미국의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프로그램 1980년대 미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PBS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칼 세이건의 작품 천문학 교육 텔레비전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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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B%B9%EC%82%AC%EC%9D%B4%ED%8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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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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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는 인터넷 프로토콜 기반의 네트워크에서 도메인 이름이나 IP 주소, 루트 경로만으로 이루어진 일반 URL을 통하여 보이는 웹 페이지들의 의미 있는 묶음이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말하는 홈페이지는 엄밀히 말해 웹사이트를 지칭한다. 최초의 웹사이트는 팀 버너스리가 1990년에 CERN에서 만든 info.cern.ch이다. (지금도 CERN사이트 안에 존재함.) 웹사이트는 인터넷이나 랜과 같은 네트워크를 통해 접속할 수 있는, 적어도 하나의 웹 서버 상에서 호스팅된다. 웹 페이지는 HTML/XHTML의 형식으로 표현되지만 일반적으로 순수 문자열로 쓰여진 문서이다. 웹 페이지는 HTTP를 통하여 접속되며 가끔씩은 HTTPS를 통한 암호화를 사용하여 웹 페이지 콘텐츠를 이용한 사람들에게 보안과 개인 정보 보호를 제공한다. 사용자가 이용하는 웹 브라우저는 HTML 마크업 명령을 모니터에 표시하는 그대로 페이지 내용을 표현한다. 공식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모든 웹사이트는 총체적으로 월드 와이드 웹을 이루고 있다. 역사 월드 와이드 웹(WWW)는 1989년 CERN의 팀 버너스리가 만들었다. 1993년 4월 30일에 CERN은 월드 와이드 웹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HTML과 HTTP가 도입되기 전에 파일 전송 프로토콜과 고퍼 프로토콜과 같은 다른 프로토콜들이 서버로부터 개별 파일을 내려받는 데 쓰였다. 이러한 프로토콜들은 사용자가 탐색하고 파일을 내려받는 단순한 디렉터리 구조를 제공한다. 문서는 워드 프로세서 형식 등으로 형식화되지 않은 순수 문자로만 된 글자로 표현되었다. info.cern.ch 1989년 CERN의 팀 버너스리가 만든 세계 최초의 웹 사이트로 CERN 홈페이지 안에 Welcome to info.cern.ch!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 웹사이트에서는 개발자인 팀 버너스리의 소개와 생애, 연구자료, 스크린샷 등 여러 CERN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 후로, 약 24년 동안 전 세계 수억 개의 사이트가 새로 생겼으며,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기능별 분류 기능으로 분류하면 웹사이트는 다음과 같이 나뉜다. 개인 웹사이트 상용 웹사이트 정부 웹사이트 비영리 단체 웹사이트 종류 포털 사이트 - 현관문이란 뜻으로 정보검색, 커뮤니티를 통합한 형태의 웹사이트이다. 검색 사이트 - 웹 크롤러가 수집한 많은 인터넷상의 웹문서중 사용자가 검색한 정보만 추출해서 보여준다. 전자상거래 사이트 - 인터넷을 통해 상품을 사고판다. 다운로드 사이트 - 소프트웨어나 바탕화면 등의 자료를 받는다. 정보 사이트 - 어떤 주제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알려준다. 미러 사이트 블로그 인터넷 포럼 기관별(도메인) 분류 ac(Academy) : 대학, 대학원. co(Company), com(Commercial) : 기업, 상업기관. go(Government) : 정부기관. net(Network) : 네트워크 관련 단체 도메인. or(Organization) : 비영리기관. pe(Personel) : 개인 홈페이지. re(Research) : 연구기관. es(Elementary School) : 초등학교. ms(middle school) : 중학교. hs(high school, secondary schoo) : 고등학교. sc(School) : 기타학교(특수학교 등). 인트로 페이지 각각의 모든 웹사이트 또는 홈페이지는 특수한 단하나의 예약된 'index.html'이라는 페이지를 갖고있다. 이는 최초 인트로 웹페이지이며 웹브라우저는 디폴트로 브라우저가 방문한 사이트(디렉토리)의 'index.html'의 이름을 갖는 HTML파일을 우선적으로 읽어들이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index.html 파일은 일반적으로 태그와 하위의 태그로 영역 구획 및 여기에 콘텐츠를 넘겨주는 기능을 하는 간단한 구조의 그릇 역할처럼 설정되곤 한다. 같이 보기 웹사이트 목록 각주 외부 링크 월드 와이드 웹 협회 영어계 외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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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A8%EC%96%91%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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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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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咸陽郡)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서부에 있는 군이다. 군의 남쪽으로 지리산이 위치한다. 지리 경상남도의 서쪽, 지리산 북쪽에 위치한다. 화강편마암과 화강암으로 된 이 지역의 서쪽에는 소백산맥의 고산 준령이 많고 덕유산·기백산·지리산 등 높은 산이 솟아 있다. 서쪽에는 팔량치(520m)·육십령(640m)의 고개가 있어 전라도와 연결된다. 남강의 상류 위천·임천 등이 흐르며, 북부의 안의분지와 남부의 함양분지는 비교적 넓은 침식분지이다. 기후 기온은 온화한 편이나 내륙부 산지에 있어서는 한서(寒暑)의 차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 12.6℃, 1월 평균 기온 1.2℃, 8월 평균 기온 25.6℃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약 1,300mm이다. 역사 신라 때 속함군(速含郡) 또는 함군(含郡)/함성(含城)이라 하였다. 경덕왕 때 천령군(天嶺郡)으로 고치고 운봉현과 이안현의 두 영현을 두었다. 그 후 고려 성종때 허주군(許州郡)이라하고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鍊使)를 두었다. 고려 현종 3년(1012년)에 강등하여 함양군으로 개칭되었다가, 후에 함(含)을 함(咸)으로 고쳤다. 한때 현이 되었다가 1395년 조선 태조 4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1629년(인조 7년) 함양현으로 강등하였다. 1729년(영조 5년) 함양부로 승격하였다. 1788년(정조 12년) 함양군으로 환원되었다. 1895년 6월 23일(음력 윤5월 1일) 진주부 함양군으로 개편하였다. 1896년 8월 4일 경상남도 함양군으로 개편하였다. 1914년 4월 1일 안의군의 7개 면을 합하였다. 13면 - 위성면, 석복면, 지곡면, 휴천면, 유림면, 수동면, 병곡면, 마천면, 백전면, 안의면, 대지면, 서하면, 서상면 1933년 1월 1일 대지면을 안의면으로 합면하고, 위성면을 함양면으로 개칭하였다. (12면) 1957년 10월 21일 함양면과 석복면을 함양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10면) 1976년 휴천면 엄천(嚴川)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88년 함양읍 상동을 운림리로, 하동을 용평리로 개칭하였다. 1998년 엄천출장소를 폐지하였다. 행정 구역 함양군의 행정구역은 1읍 10면 103동 255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면적은 724.88km2이며, 인구는 2011년 6월30일을 기준으로 18,850세대, 41,122명이고 그 중 46.3%가 함양읍에 거주한다. 인구 최고점은 124,178명이었다. 함양군의 남녀 성비는 여자 100명에 남자 94명 정도로, 여초 지역의 하나이다. 군청 현재 함양군청은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에 위치하고 있다. 산업 주업은 농업이며 꿀의 명산지이다. 지리적 조건을 살려 양잠과 한우를 육성하여 대성과를 올려 경남서부 종합개발 한우육성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임산자원은 도내 1위로 입목 축적량은 81만m3이다. 농림업 경지 면적은 총면적의 약 15%이며 논이 많고, 농민은 약 64%이다. 주요 농산물은 산양삼·여주·사과·작약·도라지·구기자 등이다.지형적인 조건으로 임야 면적이 넓고, 임야에서는 인삼·잎담배·참깨 등 특용작물의 재배가 성하며, 한우·산양·닭 등 가축사육도 성하다. 또한 대규모 뽕밭과 잠실이 조성되어 양잠산업이 활발하다. 광공업 지하자원으로는 고령토가 많이 생산된다. 공업은 가내 수공업으로 한지·목기·석재 가공업도 유명하고 함양읍을 중심으로 생사·메리야스·도자기 공업이 성하다. 특산물 지리산 솔송주·한우고기·흑돼지 등이 유명하다. 관광 함양군에서는 함양 8경을 선정하여 알리고 있다. 상림 사계: 상림의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 금대 지리: 금대에서 보는 장엄한 지리산 조망 용추 비경: 용추폭포과 기백산의 빼어난 경치 화림 풍류: 거연정, 동호정을 잇는 화림계곡의 절경 칠선 시류: 지리산 칠선계곡의 경치와 화살과 같이 빠르게 굽이쳐 흐르는 물 서암 석불: 벽송사와 서암정사의 고즈넉한 풍경과 경이로운 석불 덕유 운해: 남덕유산 아래로 평쳐진 구름바다의 신비로움 대봉 철쭉: 백운산, 대봉산으로 이어지는 고산 철쭉의 아름다움 그 외에 다음과 같은 관광자원도 있다. 승안사지 삼층석탑 함양 마천면 마애여래입상 함양 허삼둘 가옥 사근산성 함양 석조여래좌상 남계서원 상림공원 하림공원 지리산조망공원 교통 산지가 많아 교통이 불편했으나 1984년 광주대구고속도로 (구 88올림픽고속도로), 2005년 통영대전고속도로가 함양군을 경유하여 개통했으며, 거창·산청·합천·장수·남원 등지에 국도와 지방도가 연결되어 경상남도 서부의 교통 중심지를 이루게 되었다. 서울에서 함양까지는 3시간 소요된다. 함양군은 대구광역시 및 울산광역시에서 전주시로 가는 필수 경유지다. 대구/울산에서 전주로 가는 시외 및 고속버스는 함양 분기점을 통해 통영대전고속도로로 올라가며, 울산에서는 추후 함양울산고속도로 경유가 추가될 예정이다. 철도 교통 일제 강점기 때 함양군을 통과하는 대삼선이 계획되었으나 완공되지 못하였고, 지금은 대구-광주 간 달빛내륙철도가 계획되고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남원역이 가장 가깝지만 함양군청에서 35.1 km 정도 떨어져 있고, 경상남도 진주시에 진주역과는 50.3 km 정도 떨어져 있으나, 모두 자가용으로 약 1시간 걸리는 거리이다. 버스 교통 농어촌버스 : 함양군에서는 농어촌버스가 대표 교통편으로 운행하고 있으며, 운영업체는 함양지리산고속이다. 버스는 경상남도 도색과 함양지리산고속 자체도색으로 이루어진다. 함양읍 내 출발지는 함양시외버스터미널 근처 시내버스 정류장이다. 시외버스 : 함양시외버스터미널 교육기관 유치원 13개교, 초등학교 13개교, 중학교 6개교, 고등학교 4개교 중 사립학교는 유치원과 중학교에만 존재한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도서관 야영수련원 폐지학교 출신 인물 같이 보기 산청·함양 양민 학살 사건 자매 도시 대전광역시 서구 부산광역시 사상구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울특별시 은평구 전라남도 영광군 경상남도 창원시 뉴욕주 뉴욕 장쑤성 양저우 시 지린성 통화 시 후이난 현 각주 외부 링크 함양군청 (공식) 읍지속의 지도모음, 규장작 지리지 종합정보 경상남도의 군 1395년 설치 1629년 폐지 1788년 설치 1914년 폐지 1914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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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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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3%BC%EC%A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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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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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준(朱儁, ? ~ 195년)은 후한 말기의 관료로, 자는 공위(公偉)이며 양주 회계군 상우현(上虞縣) 사람이다. 생애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어머니를 도와 비단 장사를 하여 생계를 이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의협심이 있었다. 현장에게 천거를 받아 군의 관리를 역임했고, 회계태수 윤단(尹端)에게서 주부(注簿)로 임명되었다. 희평 2년(173년), 윤단이 반란을 일으킨 허소(許昭)를 공격했다가 패하여 처형당하게 되었다. 주준은 남몰래 낙양(洛陽)으로 가서 조정 관리에게 뇌물을 주어 윤단이 죽음만은 면하게 했는데,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178년 1월, 교지(交趾)에서 소수민족들이 들고일어났으며 또 교지의 양룡(梁龍)이 남해태수 공지(孔芝)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주준을 교지자사로 삼아 반란을 진압하게 했으며, 진압 후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우중랑장(右中郞將)에 임명되어 진압에 나섰다. 처음에는 파재에게 패하였으나 이후 황보숭·조조와 함께 장사(長社)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조정의 명령에 의해 황보숭과 갈라져 완성(宛城)에 있는 황건적을 토벌하게 되었다. 원래 이들은 장만성이 이끌고 있었으나 남양태수 진힐이 장만성을 죽이자 조홍을 새 우두머리로 받들고 저항을 계속했다. 주준은 6월부터 8월까지 공격을 계속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주준을 해임시키려 했다. 그러나 사공 장온이 주준을 두둔한 덕분에 토벌을 계속하여 조홍의 목을 벨 수 있었다. 이후 한충과 손하(孫夏)가 계속 완성을 점거하고 저항했으나, 모두 주준에게 토벌당했다. 이 공으로 광록대부에 임명되고 식읍 5천 호를 받았다. 185년 흑산적(黑山賊)의 수장인 장연이 조정에 귀순하고 평난중랑장(平難中郞將)으로 삼았다. 그러나 다시 무리들을 이끌고 낙양으로 향하자, 조정은 주준을 하내태수로 임명하고 흑산적을 격퇴하게 했다. 이 일이 성공한 후 성문교위(城門校尉) 겸 하남윤에 임명되었다. 동탁이 정권을 잡고 횡포를 부리자, 이에 반발한 제후들이 반동탁 연합군을 이끌고 일제히 공격해 왔다. 당황한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려 하자 주준은 계속 반대했다. 그러나 동탁은 주준의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함부로 해치지 못하고 천도할 때 부상국(副相國)으로 삼아 데려가려 했다. 주준이 사양하자 낙양을 남겨 지키게 하고 장안으로 가 버렸다. 주준은 몰래 반동탁 연합군과 내통하다가 형주로 달아났는데, 동탁이 양의(楊懿)를 하남윤으로 삼자 낙양을 공격하여 양의를 물리쳤다. 낙양은 황폐해졌기 때문에 중모(中牟)로 옮겨가 주변에 동탁을 토벌하자고 청하여 도겸 등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뒤이어 동탁이 보낸 이각에게 패하였다. 192년 동탁이 살해당하고 이각이 정권을 잡자, 도겸은 주변 지역의 군사들을 모아 이각을 공격하고 헌제를 모셔오려 했다. 그러나 때마침 가후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각이 벼슬을 내리고 주준을 조정으로 불러들이자, 도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변란이 일어난 틈을 타 뜻을 이룰 생각으로 장안에 갔다. 195년 이각과 곽사의 사이가 나빠져 장안성 안에서 계속 싸웠기 때문에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헌제는 대사농 주준·태위 양표·사공 장희를 비롯한 대신들을 곽사에게 보내 이각과 정전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곽사는 이들을 인질로 삼았으며, 이후 주준은 병이 생겨 죽었다. 가계 각주 생년 미상 195년 사망 후한의 태위 후한의 장군 동탁과 주변 인물 저장성 출신 하남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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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C%9E%90%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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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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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기(打字機, )는 글자를 찍어 글을 쓰기 위해 사용하는 기계이다. 일반적으로 타자기에는 글자들이 적인 누름쇠가 나열되어 있고, 이를 누르면 글쇠가 잉크 띠를 통해 종이에 글씨를 찍어내도록 되어 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타자기는 1874년 크리스토퍼 숄스(Christopher Latham Sholes), 카를로스 글리든(Carlos Glidden) 등이 개발하고 쿼티 자판을 채용한 레밍턴 사(E. Remington and Sons)의 타자기였으나, 그 이전부터 타자기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만들어졌다. 한때 세계 여러 곳에서 사용된 대표적인 사무기기 중 하나였던 타자기는 대부분 워드 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설치된 개인용 컴퓨터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타자기는 전력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않는 지역에서 여전히 사무기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메이커 문화와 스팀펑크와 같은 하위문화적인 요소로도 쓰이고 있다. 개요 타자를 치는 방식 기계식, 전자기계식 혹은 전자식으로 글쇠를 주로 종이 위에 잉크로 찍어 출력을 한다. 이중 전자식은 수정액이나 테이프를 사용해야 하는 기계식에 비해서, 수정이 편리하고 작업내용을 저장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무용이나 작가에 의해 쓰여지며 손으로 쓴 글씨보다 인지하기가 편리하고 빠르게 글을 쓸 수 있어 이용되었다. 전성기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글쓰는 일을 하는 학자와 작가들이 많이 이용해서 곤충학자 석주명 선생도 영문타자기로 논문을 작성했다. 당시 타자기는 매우 비쌌지만 교육열이 높은 석주명 선생의 어머니가 황소를 팔아 기꺼이 사주었다고 전해진다. 1980년대에는 워드프로세서(여기서 말하는 워드 프로세서는 워드, 아래아한글같은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프린터가 내장된 휴대용 워드프로세서를 말한다. 실제로 1980년대는 1983년 국산제품 개발을 시작으로 대우전자 르모, 현대 워드피아 등의 휴대용 워드프로세서가 전동식 타자기를 밀어내고 전성기를 누리던 시대이다.)가 대신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와 프린터에 의해 거의 대체되어가는 추세이다. 전성기에는 상업고등학교(현재 정보고등학교)나 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은 타자수(Typist)가 있었으며, 문화방송 시사교양프로그램인 시사매거진 2580에 나온 노인 한 분에 의하면 타자기는 한창 유행할 때에는 사무실의 필수품중 하나였다. 상공회의소에서 주관하는 사무원자격증에도 타자 자격증이 있었다. 현재도 일부 작가나 마니아들에 의해 선호되고 있지만, 대다수의 문서작성자들은 사용하기 편리하고 기능도 다양한 워드프로세서를 선호한다. 2014년 현재 타자기를 생산하는 업체는 지구상에 거의 없지만 일부 생산하는 업체도 있다. 역사 1714년 영국에서 최초의 특허가 있었으나 내용은 남아있지 않으며, 이후 19세기 중반까지는 주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기계로 발전되었다. 최초의 타자기는 미국의 발명가 윌리엄 오스틴 버트(William Austin Burt)가 1829년 출시한 타이포그래퍼(typographer)였다. 최초의 실용화된 타자기는 1868년 크리스토퍼 숄스, 카를로스 그리덴과 사무엘 소울에 의해 발명되었다. 이후 레밍턴사에서 만든 제품이 일반화되었다. 웅진 싱크빅에서 펴낸 헬렌 켈러 위인전기(고정욱 지음)에 의하면 헬렌 켈러는 하버드 대학교에 부속된 레드 클리프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에 점자타자기로 숙제를 해서 제출했다. 물론 헬렌 자신도 인정했듯이 부모가 부유하여 헬렌이 설리번 선생님을 모시고 특수교육을 받았으며, 대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이지, 헬렌이 노력으로써 장애를 '극복'한 것은 아니다. 타자기의 종류 타자기는 기계식, 전자기계식, 전자식으로 구분된다. 기계식 타자기는 수동 타자기로서 글자판을 누르면 활자판이 탄소리본을 때려서 글자를 찍는 타자기이다. 전자식 타자기는 글자 휠에 망치가 충격을 주어 글자가 찍히는 타자기이다. 220V의 전기를 사용하는 전자제품이며, 글자 지우기(수정테이프 사용), 문장 기억(메모리 사용), 글자 수정기능 등을 제공한다. 츨판사 이레에서 펴낸 '내 영혼의 닭고기 스프'에 실린 이야기에 따르면, 사고로 손이나 발을 다친 지체장애인들을 위한 타자기를 IBM에서 개발했다고 한다. 글을 쓴 사람은 지체장애인인데, 어릴 적에 트랙터 사고로 손을 다쳤다. 다행히 부모님이 강인한 분들이어서 좌절하거나 한숨을 쉬지 않고 따님을 학교에 보내셨고, 작가는 장애유형에 맞지 않는 체육수업을 받지 않는 대신 타자반 교사에게서 타자를 배웠다. 아이비엠에서 지체장애인들이 타자기를 쓸 수 있도록 손이나 발을 쓸 수 없는 지체장애에 맞춘 타자기를 개발하여 무료로 보내준 덕분이었다. 이후 작가는 고등학교 3년 동안 타자기로 숙제를 작성해서 교사에게 제출했다. 한글 타자기 한글 타자기의 시초로는 1914년 재미 교포 이원익이 미국에서 쓰이던 스미스 프리미어(Smith Premier) 7행식 타자기의 글쇠를 한글로 바꾼 한글 타자기가 꼽힌다. 1929년 경에는 송기주가 언더우드 포터블(Underwood Portable) 타자기를 개조하여 네벌식 세로쓰기 타자기를 개발했다. 1948년 2월 안과 의사였던 공병우는 송기주 등의 세로쓰기 타자기 대신 세벌식의 가로쓰기 타자기를 만들어 특허를 출원했다. 1953년, 장봉선이 기존의 Olympia typewriter를 토대로 세벌식 자판에 다섯벌식 메카니즘을 적용한 타자기를 개발했다. 한글 타자기는 한국전쟁에서 문서를 빠르게 만들고 교환할 필요가 있는 군, 특히 손원일의 주목을 받아 군대와 행정 영역에서 널리 쓰였다. 각주 외부 링크 Antique Typewriter Collecting, History & Resources for the Collector Early Typewriter Collectors' Association The Classic Typewriter Page Many photos and closeups of machines, histories of early machines, historical photos of typewriters being used. Martin Howard's Antique Typewriters Mr. Martin's Typewriter Museum The Portable Typewriter Reference Site Nick Beland's Typewriter Pages Typewriter: Free Minimal Text Editing Software the Behaves like a Typewriter 한글문화원 공병우 박사 자료실 이탈리아의 발명품 1873년 도입 19세기 발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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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C%82%B0%EC%A0%90%EC%9C%A0%ED%9A%8C%EB%B3%B5%EC%86%8C%EC%86%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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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점유회복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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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점유회복소송(動産占有回復訴訟, ), 프랑스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 영미법 법률용어이며 물권회복소송이라고도 한다. (고대 프랑스어인 replevir에서 왔으며 맹세한다는 뜻의 plevir에서 파생되었다). 불법적으로 빼앗긴 물건 보상을 위해 제기하는 특수한 소송의 형태를 뜻하며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깊은 소송제도이다. 현재는 부당 압류된 동산의 반환이나 부당 압류로 입은 손해의 보상을 위한 소송으로 널리쓰인다. 동산점유회복소송은 시간이 지나서 더이상 Privilege to Recapture Chattel을 행사할 수 없을 때, 소송을 이용해서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이다.예를 들어 소비자는 야채에 대한 가격을 지불하고 나서 원판매자에게 아채를 잠시 점유를 맞겨 놓았으나 야채장수가 제3자에게 과실로 판매하여 소비자는 점유회복을 위하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각주 외부 링크 브리태니카 사전 정의 영미법 법률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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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85%EC%9D%BC%2011%EC%9B%94%20%ED%98%81%EB%AA%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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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11월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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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11월 혁명 또는 11월 혁명()은 독일에서 1918년 11월 7일에 발생한 혁명이다. 이 혁명으로 독일 제국 제정이 붕괴하고 의회민주주의적인 공화국이 탄생했다. 1918년-1919년 독일 혁명()이라고도 한다. 혁명의 원인은 4년 넘게 길어지는 전쟁(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극도의 부담이었는데, 이전의 독일 제국의 패배에 대한 만연된 충격, 그리고 사회적인 긴장상태와 권력 엘리트들에 의한 전민주주의적 구조가 이러한 부담을 촉발시켰다. 직접적인 기폭제는 1918년 여름무렵이었다. 이 무렵, 독일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졌고, 10월초에는 막스 폰 바덴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성립되어 휴전교섭을 진행했다. 이런상황에서 10월 말에 해군지도부가 실패할 것이 분명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수병들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구하기로 결정하고 11월 3일 킬 항구에서 처음 봉기를 일으켰다. 수병들에 이어 노동자들도 호응해 봉기에 가담하면서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구성되었고, 이 기구가 11월 4일 킬의 실권을 장악했다.(킬 군항의 반란) 혁명은 독일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어 곳곳에서 병사와 수병, 노동자들이 만든 급진적인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기존의 지방 정부를 대체했다. 11월 7일 바이에른 지역에서는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이 선포됐다. 베를린에서도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는데, 이때 사회민주당(SPD)은 무장봉기에 반대했다. 결국 11월 9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제정이 무너졌고, 이와 함께 막스 폰 바덴 총리가 사임하면서 사회민주당의 지도자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임시정부 수립을 위촉했다. 에베르트는 사민당 뿐만 아닌 독립사민당에도 내각구성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독립사민당이 에베르트의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11월 9일 당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공화국 선포 직후 '제국 총리'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11월 11일 휴전협정에 조인,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독일은 그동안 점령한 영토를 모두 포기하고, 군대를 라인강 서안으로 철수하며, 라인 지방의 요새를 철거하는 데 동의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11월 13일 독일과 맺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무효화를 선언했다.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되고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정부의 수립은 난관에 부딪혔다. 의회주의자였던 에베르트는 제헌의회의 조속한 소집을 추진했는데, 여기서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스파르타쿠스단이 에베르트의 의회주의노선에 반대하면서 반정부투쟁을 전개하였다. 스파르타쿠스단은 독립사민당에서 떨어져 나와 1919년 1월 1일, 독일 공산당(KPD)를 창설하였다. 이어 스파르타쿠스단은 베를린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사민당(SPD)지도부는 내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기존의 제정시절 관료들의 권력을 박탈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새로운 민주주의적인 관계 안에서 이용하려 했었다. 그래서 사민당(SPD)지도부는 독일 국방사령부와 연합하여 혁명의 과격화를 저지하고자 했다. 이때 사민당의 구스타프 노스케가 이끄는 의용군(자유군단)에 의해 스파르타쿠스단의 대중시위,봉기는 가혹하게 탄압되고 스파르타쿠스단의 2명의 지도자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이로써 과격 혁명노선은 약화되어 1919년 8월 11일에 혁명은 새로운 바이마르 헌법의 채택과 함께 형식적인 종결을 맞게 되었다. 사건 일지 1917년 3월 8일 - 러시아에서 러시아 혁명이 발발 4월 6일~4월 8일 - 독일에서 독립사민당이 결성 11월 7일 - 러시아에서 볼셰비키당이 이끈 러시아혁명이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전복 12월 22일 - 독일과 '혁명 러시아'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평화협상을 시작 1918년 1월 14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대중파업 발생 1월 28일 - 핀란드에서 혁명이 일어나 노동자정부 수립. 독일에서도 수도 베를린에서 1백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으며, 다른 50개 도시에서도 파업 발생 9월 29일 - 군 수뇌부, 즉각적 휴전 요구 10월 3일~10월 4일 - 막스 폰 바덴 수상에 임명, 사민당 지도자들이 정부에 참여 10월 16일 - 독립사민당이 주도한 시위에 참여한 5천여 명이 '정부타도'를 요구 10월 28일 - 1871년의 제국헌법, 의회 제도화 10월 30일 - 대규모 시위 뒤에 오스트리아에서 사민당 정부가 구성 10월 31일 - 헝가리혁명이 발발 11월 3일~11월 4일 - 킬 군항에서 수병들이 상관의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봉기 일으켰다.(킬 군항의 반란) 4일에 수병들이 킬을 점령하고, '노동자 병사평의회' 구성 11월 7일~11월 8일 - 노동자, 수병, 농민들의 봉기가 독일 전역을 휩쓸다. 여기서 바이에른 왕정이 타도되다. 뮌헨의 사민당-독립사민당-농민동맹이 공화국을 선포 11월 9일 - 빌헬름 2세 퇴위, 사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수상이 되어 베를린에서 공화국 선포. 당일 로자 룩셈부르크가 석방 11월 10일 - 사회민주당과 독립사회민주당 '인민위원회' 구성 11월 11일 - 휴전 협정 조인 12월 16일~12월 20일 - 베를린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참의원 회의 12월 28일~12월 29일 -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의회주의에 반발. '인민위원회'에서 독립사회민주당의 탈퇴 12월 31일 - 독일 공산당(KPD) 창설 1919년 1월 5일~1월 11일 - 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단의 난' 발생 1월 15일 -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반(反)혁명세력 의용군에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1월 19일 -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의회 선거 실시 2월 6일 - 바이마르에서 국민의회 회합 2월 11일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 2월 13일 - '바이마르 연립 정부'(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민주당, 가톨릭 중앙당) 구성 2월 21일 - 뮌헨에서 아이스터 암살당하다. 2월~5월 - 여러 각지역에서 소요 사태·파업·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4월 7일 ~ 5월 2일 - 뮌헨의 평의회 공화국 5월 7일 - 독일 협상단에 '평화의 전제 조건' 전달 6월 20일 - 사이데만 사퇴와 바우어 내각 구성 6월 28일 - 베르사유에서 평화조약 체결 8월 11일 - 바이마르 헌법 가결 같이 보기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제1차 세계 대전 베르사유 조약 러시아 혁명 킬 군항의 반란 카프 폭동 에른스트 톨러 빌헬름 그뢰너 우드로 윌슨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 빌헬름 2세 막스 폰 바덴 필리프 샤이데만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쿠르트 아이스너 카를 라데크 독일 사회민주당(SPD) 다수파사회민주당(MSDP) 독립사회민주당(USPD) 독일 공산당(KPD) 스파르타쿠스단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구스타프 노스케 자유군단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An overview of the German Revolution by Gerhard Rempel of Western New England College Library of materials on the German Revolution at marxists.org archive of texts on the German Revolution at libcom.org Homepage from Kiel Interview with one of the leaders of the mutiny in Kiel: Lothar Popp; CV of Lothar Popp; interviews with other contemporary witnesses; evaluations; time-line Die Deutschen-Wilhelm und die Welt 1/5(ZDF제작 다큐멘터리) Die Deutschen-Wilhelm und die Welt 2/5(ZDF제작 다큐멘터리) Die Deutschen-Wilhelm und die Welt 3/5(ZDF제작 다큐멘터리) Die Deutschen-Wilhelm und die Welt 4/5(ZDF제작 다큐멘터리) Die Deutschen-Wilhelm und die Welt 5/5(ZDF제작 다큐멘터리) Die Deutschen II - Rosa Luxemburg und die Freiheit(ZDF제작 다큐멘터리) ZDF 제작 다큐멘터리 'Die Deutschen' 제1차 세계 대전 1918년 독일 1919년 독일 1918년 분쟁 1919년 분쟁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 제국 독일의 역사 독일이 참전한 전쟁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 백색 테러 20세기 혁명 봉기 1918년 11월 독일의 항의행동 독일이 참가한 군사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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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88%ED%8D%BC%EB%A7%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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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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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은 미국 DC 코믹스에 나오는 영웅으로, 흔히 미국 문화의 상징으로 꼽힌다. 1932년 미국의 작가 제리 시걸과 캐나다 출신 만화가 조 슈스터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창조해내고, 1938년 디텍티브 코믹스(현 DC 코믹스)에 팔았으며, 그해 6월 《액션 코믹스 #1》에 처음 등장했다. 크리스토퍼 리브 등의 배우가 등장하여 만들어진 영화나 드라마들이 있다. 평소에는 데일리 플래닛 신문사의 기자 클라크 켄트로 생활을 한다. 역사 영화 및 실사 드라마 1978년: 슈퍼맨 - 크리스토퍼 리브 1981년: 슈퍼맨 2 - 크리스토퍼 리브 1983년: 슈퍼맨 3 - 크리스토퍼 리브 1987년: 슈퍼맨 4 (최악의 속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종말) - 크리스토퍼 리브 1988년~1992년: 슈퍼 보이 (클라크 켄트의 20대 시절 슈퍼맨 이야기를 그림) 1993년~1997년: 로이스와 클라크 데일리 플래닛 신문사 기자로 영웅 슈퍼맨으로 활약하는 클라크의 일과 사랑, 우정, 동료 신문사 기자 로이스 레인과의 알콩달콩 연애담과 결혼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 딘 케인 2001년~2011년: 스몰빌 (10시즌 종영). 클라크 켄트의 고등학생 청소년~20대의 청년 시절의 방황기를 그렸다. 2006년: 슈퍼맨 리턴즈 (슈퍼맨2 편의 새로운 속편의 의미로 제작) - 브랜던 라우스 2013년: 맨 오브 스틸 (슈퍼맨 시리즈의 리부트 작품, 6월 13일 개봉) - 헨리 카빌 2016년: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 헨리 카빌 2017년: 저스티스 리그 - 헨리 카빌 2021년: 슈퍼맨과 로이스 - 타일러 헤클린 2021년: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 헨리 카빌 2025년: 슈퍼맨: 레거시 - 데이비드 코런스웻 애니메이션 (TV 및 극장판) 슈퍼맨 TAS: Superman the Animated Series. 워너 브러더스 제작 방송 슈퍼맨-둠즈데이 (2007) 슈퍼맨-배트맨 퍼블릭 에너미즈 슈퍼맨-배트맨 아포칼립스(2010) 슈퍼맨-올스타 슈퍼맨 (2011) 슈퍼맨-더 엘리트 (2012) 저스티스 리그 (2017) 연관 인물 클라크 켄트 (Clark Kent): 슈퍼맨이 지구인으로 행세할 때 쓰는 이름이자 그를 입양한 켄트 가족이 지어준 이름. 데일리 플래닛의 기자이며 실력 있는 칼럼니스트의 이름이다. 기본적으로 밝고 성실한 기자의 면모를 보인다. 칼 엘(Kal-El): 슈퍼맨의 크립톤식 이름. 외계인으로서의 슈퍼맨의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조 엘: 슈퍼맨 칼 엘의 아버지. 크립톤의 멸망을 예측한 과학자로, 하나뿐인 아들을 지구로 보내어 슈퍼 영웅으로서 살게 한다. 조너선 켄트: 지구로 추락한 슈퍼맨을 구해 입양했다. "그 어느 악당이라도 켄트 부부 아래에서 자랐다면 영웅이 되었을 거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아무 힘도 없는 보통 사람이지만 그의 성실함과 상식적이며 올바른 판단력은 배트맨조차 감복시키곤 한다. DC 코믹스의 New 52 이벤트 이후에는 클라크 켄트가 슈퍼맨으로 활동하기전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마사 켄트: 조너선 켄트의 부인이자 클라크의 어머니. 슈퍼맨과 슈퍼걸의 옷을 크립톤에서 가져온 천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력을 갖고 있다. 슈퍼맨의 망토는 대기권 돌파를 할 때 아무 힘도 없는 자타나를 털끝하나 다치게 하지 않았다. DC 코믹스의 New 52 이벤트 이후에는 클라크 켄트가 슈퍼맨으로 활동하기전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슈퍼맨과 슈퍼걸의 코스튬은 크립톤 행성의 것으로 설정이 변경되었다. 다이애나 프린스(원더우먼): DC 코믹스의 New 52 이벤트 이후 슈퍼맨의 공식적인 연인. DC 코믹스의 New 52 이벤트 이후에는 로이스 레인이 이미 애인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외로워하던 슈퍼맨에게 저스티스 리그 활동중 같은 외로움을 느끼던 원더우먼과 키스를 하게 되고, 이후 공식적인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현재는 "슈퍼맨/원더우먼"이라는 공식 작품을 통해 DC 공식 커플임을 보여주고 있다. 로이스 레인: 모던 에이지까지는 슈퍼맨의 운명의 여인이였으나, DC 코믹스의 New 52 이벤트 이후에는 더 이상 연인도, 부부도 아니다. 메트로폴리스의 데일리 플래닛의 사회부 기자이며 퓰리처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항상 슈퍼맨이 구해주다보니 왠지 용감해져서 사건에 무작정 뛰어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녀는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관찰력과 추리력을 겸비하고 있다. 다만 켄트의 정체에 대해서만 꽤 헤맨 것처럼 보인다. 라나 랭: 스몰빌 시절부터의 클라크 켄트의 친구이자 첫사랑. 어린 시절부터 클라크 켄트의 정체를 알고 있다. DC 코믹스의 New 52 이벤트 이전에는 한때 렉스 루터를 대신하여 렉스 코퍼레이션을 운영했다. 그 와중에 슈퍼맨과 대립하게 되어 관계가 일단 끊어졌지만, 슈퍼맨의 첫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여러 모로 로이스 레인과 비교된다. 지미 올슨: 데일리 플래닛의 사진기자. 클라크 켄트와 죽이 잘 맞는 절친으로 메트로폴리스에 사는 이상 그의 인생도 평탄하지만은 않다. 카라 조 엘(슈퍼걸): 칼엘, 슈퍼맨의 사촌이다. 실제로는 슈퍼맨보다 10살정도 나이가 많았지만, 우주 여행의 타임 슬립 덕에 10대 소녀인 채로 지구에 도착했다. 지구를 몇 번이나 구한 영웅이지만 그녀의 희생에 대해 아는 사람보다 그녀의 옷차림에 관심있는 자들이 더 많은 편이다. 코너 켄트(슈퍼보이): 슈퍼맨과 렉스 루터의 DNA를 받아 태어난 클론 소년. 팀 드레이크 웨인(로빈)과 절친이다. 크립토: 클립톤 행성에서부터 슈퍼맨을 따라온 개. TV 시리즈 Krypto의 주인공. (번역기를 통해 말이 통하고 하늘을 날며 눈에서 히트비전도 쏘는 등, 슈퍼맨이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뱃하운드와 어울리는 것까지.) 렉스 루터: 렉스 코퍼레이션의 회장이자 전지구적 악당. (거대기업총수라는 점에서 그는 대단히 노력파인 악당이다.) 슈퍼맨이 인류의 적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슈퍼맨이 해결해주는 국제 분쟁이나 자연 재해가 인류를 나약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하고, 슈퍼맨이 결국은 외계에서 온 불청객에 지나지 않으며, 그가 언제든 인류를 배반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약육강식과 자연의 선택적 진화를 믿으며 동시에 인류에게 있어 구원자 따위는 필요 없고 인류 스스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자신이 그 대표가 되고자 한다. 슈퍼맨만 없으면 무척 제정신에다 능력도 출중한 남자다. 대머리라는 점을 제외하곤 그다지 흠도 없다. (물론 애니메이션에서 그는 크립토나이트 정키였고 암환자였던 적도 있고 촉수 괴물로 변신한 적도 있다.) 보통 인간의 몸으로 슈퍼맨이라는 일종의 신과 대결한다는 점에서 얼마나 개그 캐릭터가 되든 얼마나 진지해지든, 그의 노력에는 모두가 감탄하고야 만다. 공식적으로 DC 유니버스에서 배트맨(브루스 웨인)보다 재산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그는 브루스 웨인도 해내지 못한 고담시 재건 사업을 해낸다(노 맨스 랜드). 워싱턴 정계에 뿌리는 듬직한 뇌물과 로비에 있어서도 브루스 웨인보다 한 수 위이다. 액션 코믹스 annual 10에서- 자신의 만족할 줄 모르는 자아에 의해 타락한 천재, 렉스 루터는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단 한사람, 슈퍼맨을 변질시키고 파괴하는 데 집착한다. 다크사이드: 행성 아포칼립스의 신이자 독재자. 슈퍼맨의 숙적 중 하나. 반생명 방정식을 찾아 전 우주를 손에 넣고자 한다. 다크사이드와 슈퍼맨의 가장 멋진 대결이었던 JLU의 마지막편에서 그는 온 힘을 다한 슈퍼맨조차 쓰러뜨린다. (그리고 렉스 루터가 지구를 구한 셈이 된다.) 브레이니악: 행성 크립톤을 멸망시킨 인공지능 컴퓨터(이자 기계 생명체다). 행성의 정보와 신기술을 습득한 뒤 파괴해 버린다. 이후 브레이니악의 후손인 브레이니악 5는 유기생명체의 몸을 얻게 되고 리전 오브 수퍼히어로즈에서 활동한다. 액션 코믹스 annual 10에서-브레이니악은 행성 콜루 출신이다. 그의 12등급 지성은 그를 우주에서 가장 명석한 존재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가장 냉혹하다. 도시를 축소하는 일에서 모든 외계 종족을 말살시키는 일까지, 브레이니악은 과학이란 이름으로 어떤 짓이든 자행할 것이다. 조드 장군: 크립톤 군부의 수장이었던 자로 크립톤의 범죄자. 슈퍼맨의 아버지 조-엘이 그를 팬텀존에 가두는 형벌을 내렸기에 그 아들인 슈퍼맨 칼-엘에게 복수하고자 한다. 배트맨: 저스티스 리그의 동료. 슈퍼맨과 가장 오래 같이 활동한 히어로이다보니 자주 엮인다. 보통 인간에 불과하지만 슈퍼맨을 쓰러뜨릴 수 있는 히어로는 배트맨밖에 없다고들 자연스럽게 떠올리는데, 그 이유는 슈퍼맨과 연관된 시리즈에서의 배트맨의 출중함 때문이다. 심지어 JLU 마지막 편에서는 슈퍼맨조차 피하지 못한 다크사이드의 오메가 빔을 간단히 피하는 배트맨을 보여준다. 배트맨, 슈퍼맨, 원더우먼 셋을 일컬어 "트리니티"(삼위일체)라고도 한다. 로보: 슈퍼맨의 라이벌로 은하계에서 가장 잔혹한 현상금 사냥꾼이자 용병이다. 매인 맨이라고도 칭하며 적이 아닌 라이벌 관계이다보니 슈퍼맨이나 저스티스 리그와 함께 싸우기도한다 같이 보기 원더우먼 배트맨 로이스 레인 기타 슈퍼맨의 저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슈퍼맨 역을 맡은 사람들의 현실에는 암울한 결과가 나왔다는 풍문이 유포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톰 웰링도 이 저주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억측이 유포되고 있다고 한다. 슈퍼맨 역을 맡은 사람들은 모두 183cm이상의 장신이다.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미국의 SF 드라마 SF 애니메이션 미국의 영화 작품 DC 코믹스의 슈퍼히어로 1938년 창조된 가공인물 1938년 도입 슈퍼히어로 영화 등장인물 만화 등장인물 애니메이션 등장인물 드라마 등장인물 비디오 게임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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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4%8C%EB%A1%9C%EB%A0%8C%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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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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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스(Florence)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지명 플로렌스(Florence)는 이탈리아의 도시 "피렌체"의 영어식 이름이다. 플로렌스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도시이다. 플로렌스는 미국 앨라배마주에 있는 도시이다. 플로렌스는 미국 오리건주에 있는 도시이다. 플로렌스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있는 도시이다. 플로렌스는 미국 콜로라도주에 있는 도시이다. 플로렌스는 미국 켄터키주에 있는 도시이다. 영화 플로렌스는 영국에서 개봉한 영화이다. 인명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영국의 간호사, 작가, 통계학자 플로렌스 그리피스조이너: 미국의 육상 선수 플로렌스 퓨: 잉글랜드의 배우 플로렌스 오언스 톰프슨 플로렌스 포스터 젱킨스: 미국의 소프라노 가수 플로렌스 웰츠: 잉글랜드의 싱어송라이터 플로렌스 카숨바: 우간다 태생의 독일 배우 플로렌스 그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인물로서는 최후까지 생존한 인물 기타 허리케인 플로렌스: 2018년 9월 미국을 강타한 대형 허리케인 3122 플로렌스: 지구 근접 소행성이다 셸테 존 바비 버스가 1981년 3월 2일에 발견한 소행성 플로렌스 (비디오 게임): 2018년 비디오 게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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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C%95%84%EB%A5%B4%EB%A9%94%EB%8B%88%EC%95%84%20%EC%99%95%EA%B5%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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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아르메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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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아르메니아 왕국()은 기원전 331년부터 서기 428년까지 아르메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한 왕국이다. 역사 건국 이전에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사트라피 중 하나인 아르메니아 사트라피였으며 기원전 331년 예르반드 왕조 출신의 미흐란에 의해 건국되었다.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이 쇠퇴하고 있던 기원전 190년 아르타셰사 1세에 의해 아르타셰산 왕조로 교체되었다. 이후 대아르메니아는 시리아, 레바논에서 캅카스의 일부와 터키 동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한동안 대아르메니아는 동방의 가장 강력한 나라 중의 하나였으며, 특히 티그란 1세 시대가 전성기로, 티그란 2세는 한때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전 66년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아르메니아 - 폰토스 동맹의 최종 패배 이후 고대 로마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이후 로마 제국이 세워지자 대아르메니아는 속국이 되었고, 로마 장군 티베리우스는 티그란 5세를 왕위에 복위시키기도 했다. 이후 기독교가 들어왔으며 428년에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 제국에 합병됨으로써 멸망하였다. 아르메니아의 역사 셀레우코스 제국 로마 제국 킬리키아 아시아의 옛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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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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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2%9C%EC%88%9C%EC%A0%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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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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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순제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천순제(天順帝)는 원나라의 제7대 황제이다. 천순제(天順帝)는 명나라의 제6대 황제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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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E%AC%EC%A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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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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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주(李在珠, 1973년 12월 25일 ~ )는 KBO 리그 전 KIA 타이거즈 선수이다. 이국적인 외모에 콧수염까지 기른 이재주는 뛰어난 타격기술 또한 가지고 있어 팬들이 이재주와 메이저 리그 야구선수인 로드리게스를 합성하여 만든 재주리게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선수 활동 중 처음으로 얻은 별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로드리게스와 이재주가 실제로 닮은 것은 아니다. 선수 활동 태평양 돌핀스 강릉고등학교 졸업 후 1992년 태평양 돌핀스에 포수로 입단하고 나서 팀에서는 대타요원으로 활약하다가 이후 당시 팀내에서 김동기, 장광호와 함께 믿음직한 포수로 자리잡았다. 현대 유니콘스 1995년에 방위입대를 한 사이 태평양 돌핀스는 1995년 정규시즌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태평양 돌핀스의 명맥을 이어가는 현대 유니콘스는 태평양 돌핀스 시절에 방위입대한 58명 선수와 함께 이재주는 1996년 11월 25일에 현대 유니콘스의 보류선수 발표 이틀 후 11월 28일에 연 2천2백만원에 재계약을 하게 되면서, 현대 유니콘스에 제대후에도 계속 잔류하게 된다. 1997년 제대와 함께 팀으로 복귀 후 방위복무로 인해 공백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재주는 현대 골수팬들에게도 낯선 존재였으나 복귀 이후 시범경기에 출전하면서 홈런 3개등으로 높은 장타율을 보이며 공격형 포수의 대명사로 떠오르며 당시 시범경기 스타가 되며 그의 이름이 점차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범경기에서의 스타가 된 이후 현대 유니콘스는 박경완을 주축으로 장광호와 함께 현대의 백업주축포수로 활동하면서 1999년도에 타율 0.067대로 부진하긴 했으나 이후 2001년 시즌에는 0.228까지 타율을 올렸다. KIA 타이거즈 2002년 KIA 타이거즈는 현금 3억원을 주고 이재주를 현대 유니콘스에서 영입해 온다. 이적 후 이재주는 KIA 타이거즈에서 김상훈의 백업포수로 활동하다 2006년부터 지명타자로 주로 출전과 함께 대타 또는 대수비로 자주 출전하였는데 이때 대타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결정적인 한방을 터뜨려 언론에서는 이재주를 최고의 찬스맨이라고 기사는 낸적이 있다. 이에 대해 이재주는 "나가서 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포수든 1루수든 대타든 주전이든 가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후 이재주는 최고의 대타와 가끔은 든든한 4번타자로 거듭나면서 2008년 그는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을 얻었으나, 러브콜을 원하는 팀이 나오지 않아 결국엔 야구계에서 미아신세가 될뻔했다. 결국 KIA 타이거즈에서 이전연봉보다 20% 삭감된 연봉 8,000만원으로 팀에 잔류하게 된다. 팀에 잔류하면서 이전과 같이 지명타자와 대타로 출전하며 대타 전성시대를 계속 이어나가며, 재계약 다음 해인 2009년에는 KBO 리그 사상 대타 홈런이 통산 20개로 가장 많은 선수로 활동 이후 KIA 타이거즈의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맴버로 활동하였고, 2009년 시즌이 끝나자 이재주는 조범현감독에 의해 팀내에서 이제 필요성이 없다 느껴져 최경환과 함께 2009년 시즌타율 0.194를 기록하고 방출되었다. 방출된 현재 함께 방출된 최경환은 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반면에 이재주는 아직까지 자리를 잡을 팀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그는 불러주는 팀 없으면 "아마 지도자 길 걷고싶어"라고 발언하였다. 이후 넥센 히어로즈와 접촉하여 계약하려 했지만 결국 결렬되었다. 이후 야구계를 완전히 떠나 광주 운암동에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통산기록 통산 최다 대타홈런(20개) 출신 학교 1980 ~ 1986 : 노암초등학교 1986 ~ 1990 : 경포중학교 1989 ~ 1992 : 강릉고등학교 각주 외부 링크 이재주 - KBO 이재주 미니홈피 - 싸이월드 197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강릉시 출신 KBO 리그 포수 KBO 리그 내야수 KBO 리그 지명 타자 노암초등학교 동문 경포중학교 동문 강릉고등학교 동문 태평양 돌핀스 선수 현대 유니콘스 선수 KIA 타이거즈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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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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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A%B5%AD%20%EC%9D%98%ED%9A%8C%EB%8F%84%EC%84%9C%EA%B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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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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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도서관(美國議會圖書館, )는 미국의 사실상의 국립 도서관이다. 워싱턴 D.C.에 있으며, 서재 공간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며 중요도에서도 으뜸이다. 3천만권의 대장에 정리된 도서가 있으며 470개 언어로 되어 있는 인쇄물들이 있다. 5천 8백만개의 문서들이 있으며, 구텐베르크 성서(현재 완전한 벨룸 형태의 책은 세계에 3권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를 포함해서 고서를 가지고 있기로도 북아메리카에서 최고이다. 백만권의 미 정부 출판물과 백만편의 세계 신문은 3세기에 걸쳐 있고, 철된 신문도 3만 3천권, 50만개의 마이크로필름, 6천권의 만화책과 세계 최대의 법학책, 4백 80만점의 지도, 악보, 2백 7십만의 음반, 베츠 스트라디바리우스, 카사베티 스트라디바리우스도 소장하고 있다. 총 관리자(Acting Librarian of Congress)는 국회 사서인 David S. Mao이다. (마오는 前관리자, 제임스 빌링턴(James H. Billington)의 퇴임이후인 2015년 10월 1일부터 직무를 시작했다.) 미국 의회조사국(CRS), 의회예산처, 미국 연방회계감사원(GAO), 기술평가원과 함께 미국 의회의 4대 입법보조기관 중 하나이다. 미국 의회도서관(LC)은 미국 의회에 공식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연구 도서관이다.그것은 그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연방 문화 기관이다. 이 도서관은 워싱턴 D.C.의 캐피톨 힐에 있는 세 개의 건물에 있다; 또한 버지니아주 컬퍼에 보존 센터를 유지하고 있다. 도서관의 기능은 의회 사서가 감독하고, 건물은 국회의사당 건축가가 관리한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 중 하나이다.이 책은 "주제, 형식, 국가 경계에 의해 제한되지 않고 보편적이며, 세계 각지와 470개 이상의 언어로 된 연구 자료를 포함한다." 의회는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임시 수도에서 11년 동안 회의를 개최한 후 1800년에 워싱턴 D.C.로 옮겼다. 두 도시 모두에서, 미국 의회 의원들은 뉴욕 소사이어티 도서관과 필라델피아 도서관 회사의 상당한 규모의 소장품을 접할 수 있었다. 작은 의회도서관은 1890년대 초까지 19세기 대부분을 미국 국회의사당에 소장되어 있었다. 원래 소장품의 대부분은 1812년 전쟁 중에 영국에 의해 불태워졌고, 도서관은 1815년에 소장품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이 도서관은 토머스 제퍼슨의 개인 소장품 6487권을 구입했고, 1851년 의사당에서 또 다른 화재를 겪었지만, 그 후 몇 년 동안 소장량은 서서히 늘어났다. 이로 인해 제퍼슨의 저서들을 포함한 많은 양의 소장품이 파괴되었다. 남북전쟁 이후, 의회도서관의 중요성은 그 성장과 함께 증가했고, 불태워진 책의 대체본을 구입하려는 캠페인이 있었다. 도서관은 미국에서 인쇄된 책, 지도, 삽화, 도표 2부를 보관하는 모든 저작물의 양도권을 받았다. 그것은 또한 수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1888년과 1894년 사이에 개발은 캐피톨 길 건너편에 자체적인 큰 도서관 건물이 건설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수집품을 보관하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1930년대와 1970년대에 두 개의 건물이 추가로 건설되었다. 도서관의 주요 임무는 의회 조사 서비스를 통해 수행되는 의회 의원들의 질의에 대한 연구이다. 또한 미국 저작권 사무소를 운영하고 감독하고 있다. 도서관은 연구를 위해 일반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고위 공무원들과 도서관 직원들만이 도서와 자료를 대출할 수 있다. 역사 1800-1851: 오리진과 제퍼슨의 기여 버지니아의 제임스 매디슨은 1783년에 처음으로 그러한 제안을 한 의회 도서관을 만든 아이디어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1800년 4월 24일 존 애덤스 대통령이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으로 정부 소재지를 이전하는 법안에 서명하면서 미국 의회도서관이 설립되었다. 법률의 일부는 "의회를 위해 필요한 책들을 구입하고 그것들을 보관하기 위한 적절한 아파트를 설치하는 데" 5,000달러를 지출했다. 책은 런던에서 주문되었고, 그 수집품은 740권의 책과 3장의 지도들로 구성되었고, 이 지도들은 새로운 미국 국회의사당에 소장되었다.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은 의회 도서관의 구조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802년 1월 26일, 그는 대통령이 의회의 사서를 임명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에 서명하고, 도서관 공동 위원회를 설립하여 이를 규제하고 감독하였다. 새 법은 대통령과 부통령에게도 대출 특권을 확대했다. 1814년 8월, 블래든스버그에서 미군을 수송한 후, 영국은 무혈로 워싱턴 D.C.를 점령했다. 미국의 포트 도버 파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은 도시의 수많은 공공 건물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영국군은 의회 도서관을 불태웠다. 3천 권의 소장품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 책들은 국회의사당의 상원 부속 건물에 보관되어 있었다.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의회 책들 중 하나는 1810년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정부 회계 장부였다. 1940년 영국 해군 장교 조지 콕번 경(Sir George Cockburn)이 기념품으로 가져갔다. 한 달 안에, 토마스 제퍼슨은 그의 큰 개인 도서관을 대체하기 위해 팔겠다고 제안했다. 의회는 1815년 1월 그의 6,487권의 책을 구입하기 위해 23,950달러를 지불하겠다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뉴햄프셔주 하원의원 대니얼 웹스터를 포함한 일부 하원의원들은 전면적인 매입에 반대했다. 그는 "무신론적이고, 비종교적이며, 부도덕한 성향의 모든 책"을 돌려주기를 원했다. 제퍼슨은 철학, 역사, 법, 종교, 건축, 여행, 자연과학, 수학, 고전 그리스와 로마의 연구, 현대 발명품, 열기구, 음악, 잠수함, 화석, 농업, 기상학 등의 다양한 책들을 50년 동안 축적했다. 그는 또한 요리책과 같이 입법 도서관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는 주제에 관한 책들을 수집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과목이 의회 도서관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것이 의회가 그들의 수집품에서 제외하기를 원하는 어떤 과학분야를 포함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실, 국회의원이 언급할 기회가 없을 수 있는 주제는 없다. 제퍼슨의 컬렉션은 전시를 위한 신사 컬렉션이 아니라 학자의 작업 컬렉션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원래 도서관의 크기를 두 배로 늘린 그의 수집품이 추가되면서, 의회 도서관은 전문가의 도서관에서 더 일반적인 도서관으로 바뀌었다. 그의 원본 컬렉션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지식 조직을 기반으로 한 계획으로 구성되었다.특히 제퍼슨은 그의 책들을 기억, 이성, 상상으로 분류하고 44개의 더 많은 세분화들로 나누었다. 그 도서관 때 사서 허버트 Putnam의회 분류 구조의 좀 더 유연한 도서관에 작업을 시작했다는 19세기 후반까지 제퍼슨의 조직 계획을 따라갔다.이것은 현재 1억 3천 8백만 개 이상의 품목에 적용된다. 1851년–1865년: 약세 1851년 12월 24일 도서관 역사상 가장 큰 화재로 35,000권의 책이 소실되었다. 도서관 소장품의 약 3분의 2와 제퍼슨의 원래 전학품의 약 3분의 2가 말이다. 의회는 1852년에 분실된 책들을 대체하기 위해 168,700 달러를 지출했지만 새로운 자료를 얻기 위해 지출하지는 않았다. (2008년까지 의회의 사서들은 제퍼슨의 원본 컬렉션에 있는 것으로 기록된 300점을 제외한 모든 작품들을 대체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도서관 행정의 보수적인 시기의 시작을 알렸다. 도서관 사서 존 실바 미한과 공동 위원회 위원장인 제임스 A. 도서관 활동을 제한한 피어스에 의해서 말이다. 의회 도서관의 제한된 범위에 대한 미한과 피어스의 견해는 의회 의원들에 의해 공유된 견해를 반영하였다.미한은 도서관 사서가 되는 동안 "의회 도서관은 국가 현장에서 제한적인 역할을 해야 하며, 그 소장품들은 대체로 미국 의회에 명백한 사용 자료를 강조해야 한다"는 개념을 지지하고 영구화했다. 1859년 의회는 도서관의 공공 문서 배포 활동을 내무부로, 국제 도서 교환 프로그램을 국무부로 이관했다. 1850년대에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도서관 사서 찰스 코인 주엣은 적극적으로 스미스소니언 도서관을 미국 국립 도서관으로 개발하려고 했다. 그의 노력은 과학 연구와 출판에 초점을 맞추자는 스미스소니언의 비서 조셉 헨리에 의해 저지되었다. 스미스소니언에 대한 그의 의도를 강화하기 위해, 헨리는 실험실을 설립하고, 튼튼한 물리 과학 도서관을 개발했으며, 연구 결과를 전파하기 위한 많은 출판물들 중 첫 번째인 스미스소니언 지식에 대한 공헌을 시작했다.헨리에게 의회도서관은 국립도서관으로서 명백한 선택이었다. 분쟁을 해결할 수 없었던 헨리는 1854년 7월 주엣을 해임했다. 1865년 스미스소니언 건물은 노르만 건축양식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은 헨리에게 스미스소니언의 비과학 도서관과 관련된 기회를 주었다. 이 무렵, 미국 의회 도서관은 내화성을 위해 설계된 새로운 토머스 제퍼슨 빌딩을 짓고 이전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866년 헨리는 스미스소니언의 비과학 도서관을 미국 의회도서관으로 옮겼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존 G를 임명했다. 스티븐슨은 1861년 의회의 사서로서 임명되었다.스티븐슨은 내과의사였고 북군의 사서 및 내과의사로서 동등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조수로서 애인스워스 랜드 스포포드를 고용하였기 때문에 이 관심의 분할을 관리할 수 있었다. 그의 새로운 직업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슨은 전쟁에 집중했다. 미국 의회 도서관원 임기 3주 후, 그는 미국 남북 전쟁 동안 챈슬러즈빌과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자원 보좌관으로 복무하기 위해 워싱턴 D.C.를 떠났다.스티븐슨이 그의 부재 중에 도서관을 감독한 스포포드를 고용한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을 것이다. 1865년-1897년: 스포포드의 확장 1865년부터 1897년까지 미국 의회도서관을 이끌었던 도서관 사서 애인스워스 랜드 스포포드는 국립도서관과 입법자원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광범위한 초당적 지지를 얻었다. 그는 전후 연방 정부의 확장과 우호적인 정치 풍토에 도움을 받았다. 그는 미국 문학과 미국 문학을 종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고, 도서관을 수용하기 위한 새로운 건물의 건설을 주도했으며, 의회의 사서직을 힘과 독립의 지위로 변화시켰다. 1865년과 1870년 사이에 의회는 토머스 제퍼슨 빌딩의 건설을 위해 자금을 충당했고, 모든 저작권 등록과 예금 활동을 도서관의 통제하에 두었다. 이 도서관은 또한 스미스소니언 도서관과 역사학자 피터 포스의 방대한 도서관을 인수하여 과학 및 아메리카나 소장품을 크게 강화하였다. 1876년까지 미국 의회도서관은 30만권의 책을 소장했다. 이 도서관은 보스턴 공공 도서관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큰 도서관으로 지정되었다. 1897년 840,000권 이상의 책을 가지고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새 본부로 이전했으며, 그 중 40%는 저작권 보증금을 통해 구입했다. 도서관 이전 1년 전 공동도서관위원회는 도서관의 실태를 평가하고 향후 성장과 개편 가능성을 계획하기 위해 청문회를 열었다. 스포포드와 미국도서관협회가 파견한 전문가 6명은 도서관이 진정한 국립도서관으로 거듭나려면 계속 확장해야 한다고 증언했다. 청문회를 바탕으로 의회는 도서관의 직원을 42명에서 108명으로 두 배 이상 늘릴 수 있는 예산을 승인했다. 버몬트의 저스틴 모릴 상원의원과 인디애나 주의 대니얼 W. 부히스 상원의원은 이 지지를 얻는 데 특히 도움이 되었다. 도서관은 또한 소장품의 모든 측면을 위한 새로운 행정 단위를 설립했다. 그 법안에 있어서, 의회는 의회 사서의 역할을 강화했다.: 그것은 도서관을 관리하고 직원 약속을 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대통령 내각 임명과 마찬가지로, 상원은 대통령 임명자들을 그 자리에 승인하도록 요구되었다. 1897–1939: 재편성 후 이러한 지원과 1897년 조직 개편으로 미국 의회도서관은 더욱 빠르게 성장하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스포포드의 후임자인 존 러셀 영은 도서관의 관료 제도를 정비하고, 전 외교관으로서 자신의 연줄을 사용하여 전 세계로부터 더 많은 자료를 얻었으며, 시각장애인과 신체장애인을 위한 도서관 최초의 지원 프로그램을 설립했다. 영의 후임자 허버트 퍼트넘은 1899년부터 1939년까지 40년 동안 그 직책을 맡았다. 그가 취임한 지 2년 후, 그 도서관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백만 권의 책을 소장했다. 퍼트넘은 도서관을 대중과 다른 도서관들에게 더 접근하기 쉽고 유용하게 만들기 위해 그의 노력을 집중했다. 그는 도서관 상호 대출 서비스를 도입하여 의회 도서관을 그가 "최후의 수단 도서관"이라고 지칭한 것으로 바꾸었다. 퍼트넘은 또한 도서관을 "과학적 연구자들과 적법한 자격을 갖춘 개인들"로 넓혔고, 학자들의 이익을 위해 주요 자료들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푸트남의 재임 기간 동안 도서관은 인수의 다양성을 넓혔다. 1903년 푸트남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하여 국무부에서 의회도서관으로 건국의 아버지들의 문서들을 이관하는 데 행정명령을 사용하였다. 푸트남은 1904년 4천 권의 인디카 도서관을 매입하고, 1906년 G. V. 유딘의 8만 권의 러시아 도서관을 매입하였으며, 1908년 초 샤츠 소장 오페라 리브레토와 1930년대 초 러시아 제국 도서관을 매입하여 2,600권의 책을 구입하였다. 다양한 주제에 관한 로마노프 가의 도서관이 있다. 헤브리카, 중국, 일본 작품들도 수집되었다.한 번은 의회가 인수를 시작했다: 1929년 하원의원 로스 콜린스는 도서관이 오토 볼베어의 인큐뷸라 소장품을 150만 달러에 구입하도록 승인받았다. 이 수집품에는 구텐베르크 성경의 완벽한 사본 세 개 중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푸트남은 1914년 도서관의 행정 단위로서 입법 참고 서비스(LRS)를 설립하였다. 진보주의 시대의 과학 철학에 기초하여, 주 입법부의 성공적인 연구 부서를 본떠서, LRS는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한 의회의 연구 조사에 정통한 답변을 제공할 것이다. 의회는 1925년 의회도서관이 기부금과 기부금을 받을 수 있는 신탁기금 위원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도서관은 존 D와 같은 저명한 부유층으로부터 기부금과 기부금을 받았다. 록펠러(ockefeller,) 제임스 B. 윌버(James B. Wilbur)와 아처 M. 헌팅턴(rcher M. Huntington.),G절트루드 클라크 화이텔(ertrude Clarke Whitall은) 5개의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도서관에 기증했다. 엘리자베스 스프래그 쿨리지의 기부금은 의회 도서관 건물 내에 건설될 콘서트 홀과 라이브 공연자들에게 콘서트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음악 부서를 위해 설립된 사례금을 위해 지불되었다. 기부금으로 다수의 의장과 자문단이 설립되었는데,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시인 수상자 컨설턴트이다. 1910년과 1927년에 선반 확장을 사용했지만, 도서관의 확장은 결국 도서관 본관을 채웠다. 도서관은 새로운 구조로 확장될 필요가 있었다. 의회는 1928년에 인근 토지를 취득하고 1930년에 애너슨 빌딩(이후 존 애덤스 빌딩으로 알려짐)의 건설을 승인했다. 대공황 시기에는 지연되었지만, 1938년에 완공되었고 1939년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1939–1987: 국가 대 입법 역할 1939년 푸트남이 은퇴한 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시인이자 작가인 아치볼드 맥리쉬를 그의 후계자로 임명했다.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던 맥리쉬는 도서관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의회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맥리쉬는 민주주의를 대표하여 전체주의에 반대하도록 사서들을 격려했다.;애덤스 빌딩의 남쪽 열람실을 토마스 제퍼슨에게 헌정하고 예술가 에즈라 윈터에게 방을 위한 네 가지 주제의 벽화를 그리도록 의뢰했다.그는 제퍼슨 빌딩의 메인 독서실에 독립 선언서, 헌법, 연방주의자 문서와 같은 중요한 문서들을 위한 "민주주의 오두막"을 설립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전쟁 기간 동안 미국 독립선언서와 미국 헌법을 포트 녹스에 보관하는 것부터 공군 조종사를 위한 히말라야에 대한 기상 자료를 조사하는 것까지 지원했다. 1944년 국무부 차관보로 임명되면서 사임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루터 H. 에반스를 의회 도서관장으로 임명했다. 1953년까지 재직했던 에번스는 도서관의 인수와 목록 작성, 서지 서비스를 확장했다. 하지만 그는 전 세계에 미국 의회 선교 도서관을 만든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선교는 유엔을 설립하는 회의의 참가자들을 돕고, 유럽에서의 선교는 의회 도서관과 다른 미국 도서관을 위한 유럽 출판물을 얻었으며, 일본에서의 선교는 국립 국회 도서관의 설립에 도움을 주었다. 에번스의 후임자 로렌스 퀸시 멈포드가 1953년에 취임했다. 1974년까지 존속하는 동안 멈포드는 국회의사당에 있는 세 번째 의회 도서관 건물인 제임스 매디슨 메모리얼 빌딩의 건설 시작을 지휘했다. 멈포드는 정부에 의한 교육비 지출 증가 기간 동안 도서관을 감독했다. 도서관은 카이로와 뉴델리를 포함한 해외에 새로운 인수 센터를 설립할 수 있었다. 1967년, 도서관은 보존 사무소를 통해 도서 보존 기술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미국에서 가장 큰 도서관 연구와 보존 노력으로 발전해왔다. 멈포드 행정부 동안 의회 도서관이 입법 도서관 겸 국립 도서관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마지막 주요 공개 토론이 일어났다.미국 하버드대 도서관의 더글러스 브라이언트(Douglas Bryant)는 도서관 공동위원장인 클라이본 펠(D-RI)의 운영 평가와 권고안을 묻는 질문에 여러 제도 개혁을 제안했다. 여기에는 국가 활동과 서비스의 확대와 다양한 조직 변화가 포함되었는데, 이 모든 것들은 도서관의 입법적 역할보다는 국가적인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브라이언트는 의회 도서관의 이름을 바꾸는 것을 제안했는데, 이는 "전통에 말할 수 없는 폭력"으로서 멈퍼드에 의하여 질책된 권고였다. 그 토론은 도서관 커뮤니티 내에서 얼마간 계속되었다. 1970년 입법재편법은 도서관의 입법적 역할에 대한 강조를 다시금 강조하여 의회와 의회 위원회를 위한 연구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추도록 요구하였다. 1974년 뭄포드가 은퇴한 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역사학자 대니얼 J. 부스틴을 사서로 임명했다. 1980년과 1982년 사이에 일어난 매디슨 빌딩으로 일부 구간의 이전을 관리하는 것이 부스틴의 첫 도전이었다.이것을 성취하면서, Boorstin은 획득과 수집과 같은 도서관 관리의 다른 영역들에 초점을 맞췄다. 1975년 1억 1,600만 달러에서 1987년까지 2억 5천만 달러 이상으로 꾸준한 예산 성장의 이점을 이용하여, 부스틴은 학자, 작가, 출판사, 문화 지도자 및 비즈니스 커뮤니티와 제도 및 직원 관계를 강화하였다. 그의 활동은 의회의 사서직을 바꾸어 그가 1987년 은퇴할 때까지 뉴욕 타임즈는 이 사무실을 "아마도 국가의 지도적인 지적 공공 지위"라고 불렀다. 1987–현재: 디지털화 및 프로그램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7년 역사학자 제임스 H. 빌링턴을 13대 의회도서관으로 지명했고, 미 상원은 만장일치로 임명을 승인했다. 빌링턴의 지도 아래, 그 도서관은 1987년 8,550만 개의 아이템에서 2014년 1억 6천만 개 이상의 아이템으로 아날로그 컬렉션의 크기를 두 배로 늘렸다. 동시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수립하고 "샴페인을 병에서 꺼내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사용했다. 이것들은 포함되었다: 아메리칸 메모리(American Memory)는 1990년에 만들어졌으며 1994년에 국립 디지털 도서관이 되었다. 주요 소스를 포함하여 디지털화된 미국 역사와 문화 자원에 온라인으로 무료로 액세스하고, K-12 교육에 대한 사용을 지원하기 위한 큐레이터 설명을 제공한다. 지속적인 업데이트와 함께 미국 연방 입법 정보에 대한 무료 액세스를 제공하기 위해 1994년에 시작된 Thomas.gov 웹 사이트; Congress.gov 웹사이트는 2012년 의회와 대중을 위한 최첨단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 2001년 영부인 로라 부시 여사와 함께 창설된 내셔널 북 페스티벌은 독서를 축하하기 위해 내셔널 몰과 워싱턴 컨벤션 센터에 1,000명 이상의 작가와 100만 명의 손님을 끌어 모았다. 2013년 데이비드 루벤스타인의 주요 선물과 함께, 그 도서관은 미국 및 해외에서의 문맹퇴치 향상 성과를 인정하고 지원하기 위해 의회 도서관 문맹퇴치상을 설립했다. 2000년 존 W. 클루지로부터 6천만 달러를 지원받아 시작한 클루지 센터는 국제적인 학자들과 연구자들을 도서관 자원을 사용하고 정책 입안자들과 대중들과 교류하기 위해 데려온다. 이 상은 공개 강연과 학술 행사를 개최하고, 클루게에게 기부된 장학금을 제공하고, 인류학 연구로 클루게상(현재는 150만 달러 상당)을 수여한다. 오픈 월드 리더십 센터(Open World Leadership Center)는 2000년에 설립되었으며, 2015년까지 러시아, 우크라이나 및 구 소련의 다른 후계국가의 포스트 소련 지도자들을 위한 23,000개의 전문 교류를 관리하였다. 오픈 월드는 의회 도서관 프로젝트로 시작되었고, 후에 입법부에서 독립 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오늘날까지 미국 참전 용사들의 개인 계정을 수집, 보존, 열람할 수 있도록 2000년에 의회에 위임된 재향군인 역사 프로젝트가 있다. 미국 국립 시청각 보존 센터는 2007년 버지니아주 컬퍼퍼의 45에이커 부지에 문을 열었으며, 패커드 인문학 연구소가 1억 5천만 달러 이상을 기부하고, 의회의 추가 지원으로 8,210만 달러를 받았다. 1988년부터 국립영화보존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의회의 명령에 따라 설립되었으며, 매년 25편의 미국 영화를 선정하여 미국 영화 모음집인 내셔널 레지스트리에 포함시킨다. 도서관은 이 중 일부를 인터넷에서 무료로 스트리밍할 수 있도록 했으며, 추가로 등록부에 추가된 영화에 대한 간단한 에세이를 제공했다. 2015년까지 사서는 650편의 영화를 등록부에 올렸다. 이 컬렉션의 영화들은 가장 이른 시기부터 10년 이상 전에 제작된 것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이사회에 제출된 후보자들 중에서 선발된다. 이는 추가 프로그램을 포함한다: 거슈윈 대중가요상은 작곡에 평생의 업적을 반영하는 예술가의 작품을 기리기 위해 2007년에 시작되었다.2015년 현재 수상자는 폴 사이먼, 스티비 원더, 폴 매카트니, 버트 바차라크, 할 데이비드, 캐롤 킹, 빌리 조엘, 윌리 넬슨이다. 이 도서관은 또한 미국의 다양한 문화, 과학, 사회유산에 기여한 예술가, 활동가, 영화 제작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2000년에 살아있는 전설상을 시작했다.; 픽션 상()은 미국 의회 도서관상(현재의 미국 픽션 부문)으로, 소설 창작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기 위해 2008년에 시작되었다. 2009년 유네스코와 81개국의 181개 파트너와 함께 설립된 세계 디지털 도서관은 전문적으로 큐레이션된 세계 다양한 문화의 주요 자료들을 여러 언어로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011년에 출시된 내셔널 주크박스는 10,000개 이상의 인쇄되지 않은 음악과 음성 녹음에 대한 스트리밍 무료 온라인 액세스를 제공한다. BARD는 2013년에 시작되었으며, 시각장애인과 신체장애인을 위한 국립도서관 서비스와 제휴하여 점자 및 오디오 읽기 다운로드를 위한 디지털 토킹북 모바일 앱이다. 애플 앱 스토어를 통해 오디오와 점자 책을 모바일 기기로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빌링턴의 재임 기간 동안, 이 도서관은 1996년 프랑스 라 그랑주에 있는 한 성에서 라파예트 장군의 문서를 입수했다. 또한 2003년 토마스 제퍼슨 빌딩에 영구 전시된 1507년 세계지도(미국 출생증명서)를 입수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개인적으로 모금한 기금을 사용하여 토마스 제퍼슨의 원래 도서관을 재건했다. 이것은 2008년부터 제퍼슨 빌딩에 영구 전시되어 왔다. 빌링턴 아래에서 제퍼슨 빌딩의 공공 공간은 국가적인 전시장으로 기능하기 위해 확장되고 기술적으로 향상되었다. 이는 100개 이상의 전시회를 주최했다. 여기에는 바티칸 도서관과 프랑스 국립도서관, 남북전쟁과 링컨,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 종교, 초기 아메리카 대륙의 건국(키슬락 컬렉션은 영구 전시)에 관한 전시물들이 포함되었다. 마그나 카리타, 그리고 루벤슈타인 베이 시편집을 특집으로 한 초기 미국 인쇄물 등이 있다. 미국 의회 도서관에 대한 현장 접근성이 증가했다. 빌링턴은 의회 사용과 도서관 토머스 제퍼슨 빌딩의 공공 투어를 늘리기 위해 2008년에 새로운 미국 의사당 방문자 센터와 도서관 사이의 지하 연결을 얻었다. 2001년에 도서관은 거의 400만 권의 책과 1200만 장의 원고지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대량 탈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2002년 이후로 포트 미드의 새로운 컬렉션 스토리지 모듈은 도서관 아날로그 컬렉션에서 4백만 개 이상의 아이템을 보존하고 접근 가능하게 만들었다. 빌링턴은 1992년 도서관의 소장품 보호를 강화하기 위해 도서관 소장품 보안 감독 위원회를 설립했고, 2008년에는 의회 도서관 의회 위원회도 설립해 도서관의 큐레이터와 소장품들에 관심을 끌었다. 그는 2009년 제퍼슨 빌딩에 최초의 젊은 독자 센터를 설립했고, 1991년 대학생들을 위한 최초의 대규모 여름 인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빌링턴이 이끄는 이 도서관은 2010년부터 2011년까지 특별히 설계된 18륜 트럭으로 미시시피 동쪽의 모든 주를 아우르는 90개의 장소를 대상으로 한 모바일 전시회를 후원했다. 이것은 특히 시골 사람들을 위해 도서관 소장품에 대한 일반인들의 접근을 증가시켰고, 온라인으로도 이용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빌링턴은 도서관 소장품, 프로그램 및 디지털 아웃리치에 대한 의회의 지출을 보충하기 위해 5억 달러 이상의 민간 지원을 모금했다. 이러한 민간 자금은 주로 입법 예산 삭감에 의해 야기된 30%의 인력 감소에 직면하여 도서관의 성장과 홍보 활동을 지속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1987년에 민간 기금 모금을 위한 도서관 최초의 개발 사무소를 설립했다. 1990년에 그는 제임스 매디슨 평의회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도서관 최초의 국가 민간 부문 기증자 지원 단체이다. 1987년 빌링턴은 또한 GAO에 최초의 도서관 전반의 감사를 실시하도록 요청하였다.그는 도서관 운영에 대한 정기적이고 독립적인 리뷰를 제공하기 위해 도서관에 최초의 감사관실을 만들었다. 이 판례는 도서관의 정기 회계 감사를 초래했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수정되지 않은(깨끗한) 의견을 받았다. 2010년 4월, 이 도서관은 2006년 3월 트위터의 론칭 이후 모든 통신을 포함한 모든 대중 통신을 트위터에 보관할 계획을 발표했다., 트위터 아카이브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2015년 은퇴하기 전, 28년간의 복무 후, 빌링턴은 의회의 사서로서 "압박"을 받았다. 이는 "중앙 감독 기능이 결여된 업무 환경"을 기술하고 "법에서 요구하는 대로 최고 정보 책임자를 고용하라는 반복적인 요구를 무시한" 빌링턴을 비난한 정부 회계 책임국(GAO)의 보고서에 이은 것이다. 빌링턴이 2015년에 은퇴할 계획을 발표했을 때, 평론가 조지 와이겔은 의회 도서관을 "진지한 초당적 협력과 담담한 대화의 마지막 피난처 중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2016년 9월 14일, 칼라 헤이든은 미국 의회의 14번째 사서로서 선서하였다. 2017년, 도서관은 미래 세대의 사서들에게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다른 분야의 사서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서-인-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 프로그램은 수집/수집 개발, 카탈로그 작성/메타데이터 및 수집 보존에 그 목적이 있다. 2021년 1월 6일 오후 1시 11분, 미국 동부 표준시 기준 도서관 매디슨 빌딩과 캐논 하우스 오피스 빌딩은 국회의사당 건물을 습격하기 전 폭도들이 경계선을 돌파하면서 대피 명령을 받은 첫 번째 건물이었다. 헤이든은 이틀 후 폭도들이 도서관의 건물이나 소장품을 침범하지 않았으며 모든 직원들은 안전하게 대피했다고 밝혔다. 재산 미국 의회도서관의 소장품에는 470개 언어로 된 3,200만 권 이상의 목록화된 책과 다른 인쇄물들을 포함해 6,100만 부 이상의 원고가 있다. 구텐베르크 성서인 독립선언서 초안을 포함한 북미 최대의 희귀 도서 모음집이 그 예이다. (블랙 포레스트의 세인트블레이즈 수도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 3개의 완벽한 벨룸 사본 중 하나)(1백만개 이상의 미국 정부 간행물, (지난 3세기에 걸친 세계 신문의 1백만개 발행); (제본된 신문 3만 3천 권) (50만 마이크로필름 릴) (미국과 외국 만화책—총 12,000권 이상, 총 140,000권 이상) 190만 개의 동영상 (2020년), 530만 개의 지도, 6백만 장의 악보, 300만 개의 녹음음반, 훌륭하고 인기 있는 예술 작품과 건축 도면을 포함한 1,470만 장 이상의 인화 및 사진 이미지, 벳츠 스트라디바리우스 가문, 카사베티 스트라디바리우스 등이 있다. 그 도서관은 대부분의 미국 연구 및 대학 도서관에서 사용하는 LCC(Library of Congress Classification)라고 불리는 도서 분류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도서관은 저작권 보호와 저작권 등록을 위한 법적 저장소이자 미국 저작권 사무소의 기지 역할을 한다. 저작권 등록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출판사는 출판된 작품의 완전한 사본 2부를 도서관에 제출해야 한다. 미국에서 출판된 거의 15,000개의 새로운 물품들이 매일 도서관에 도착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이 도서관은 매일 평균 12,000개의 항목을 추가하지만 이 모든 작품들을 영구 소장하고 있지는 않다. 거부된 물품은 전 세계 다른 도서관과의 거래에 사용되거나, 연방 기관에 배포되거나, 미국 내 학교, 지역사회 및 기타 기관에 기증된다. 많은 유사한 도서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회도서관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출판물의 사본을 영어로 보관하고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약 1349km의 책꽂이를 채우고 3,900만 권 이상의 책과 다른 인쇄물들과 함께 1억 6,700만 점 이상의 물건들을 소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2000년 정보과학자 피터 라이먼과 할 바리언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2,600만 권의 책으로 대표되는 압축되지 않은 텍스트 데이터의 양은 10테라바이트라고 한다. 이 도서관은 또한 766,000명 이상의 미국인들에게 제공되는 오디오북과 점자 도서관 프로그램인 시각장애인과 신체장애인을 위한 국립도서관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디지털화 이 도서관의 첫 번째 디지털화 프로젝트는 "아메리칸 메모리"라고 불렸다. 1990년에 출시된 이 회사는 처음에 학교와 도서관에 배포될 레이저 디스크와 CD에서 디지털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컬렉션에서 1억 6천만 개의 개체를 선택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이 너무 비싸고 비효율적일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도서관은 대신에 디지털화된 자료를 인터넷을 통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기로 결정했다.이 프로젝트는 1994년 10월에 만들어진 국립 디지털 도서관 프로그램(NDLP)에서 공식화되었다. 1999년까지 NDLP는 5백만 개 이상의 물체를 디지털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1,200만 달러의 예산을 책정했다. 이 도서관은 퍼블릭 도메인 웹사이트의 "아메리칸 메모리"라는 이름을 유지해왔으며, 현재 7페타바이트 이상의 데이터로 구성된 1,500만 개의 디지털 오브젝트를 포함하고 있다. 아메리칸 메모리는 오디오, 비디오 및 아카이브된 웹 콘텐츠뿐만 아니라 공용 도메인 이미지 리소스의 소스이다. 도서관의 카탈로그인 소장목록은 거의 모두 홈페이지에서 직접 조회할 수 있다. 전 세계의 사서들은 미국에서 출판된 책을 목록화할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의 필요에 더 적합한 웹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 이러한 카탈로그를 참조한다. 그들은 책의 정확한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의회 도서관 통제 번호를 사용한다. 디지털 이미지는 아카이브 인쇄를 제공하는 과거의 스냅샷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이 도서관은 매년 디지털화를 위한 600만~800만 달러의 예산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모든 작품이 디지털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의회에 특히 중요하거나 대중들에게 잠재적으로 흥미로운 것에 기초하여 어떤 대상을 우선시해야 할지에 대한 결정을 한다. 1500만 개의 디지털화된 문물은 도서관 전체 1억 6000만 개의 문물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도서관은 인터넷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지원했지만 구글 북스나 미국 디지털 공공 도서관 같은 다른 디지털 도서관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THOMAS 및 정부 회의 프로젝트 1995년 미국 의회도서관은 미국 의회 의사록인 토마스의 온라인 아카이브를 설립했다. 토머스 웹사이트는 법안 요약과 현황, 의회 기록 문서, 의회 기록 색인뿐만 아니라 제안된 법률의 전문을 포함했다. 토머스 시스템은 2005년과 2010년에 주요 업데이트를 받았다. 더 현대화된 웹 시스템인 Congress.gov으로의 이주는 2012년에 시작되었고, 토마스 시스템은 2016년에 은퇴하였다. Congress.gov은 미국 의회 도서관, 하원, 상원, 정부 출판부의 공동 프로젝트이다. 미국 의회 도서관 건물 미국 의회도서관은 캐피톨 힐에 있는 세 개의 건물과 버지니아 시골에 있는 보존 센터에 물리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이 도서관의 캐피톨 힐 건물들은 모두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어서, 도서관 이용자는 한 번 방문하면 보안을 통과할 수 있다.도서관은 또한 덜 자주 요청되는 자료들을 위한 오프사이트 보관 시설도 갖추고 있다. 토머스 제퍼슨 빌딩 토머스 제퍼슨 빌딩은 SE 1번가의 인디펜던스 애비뉴와 이스트 캐피톨 스트리트 사이에 위치해 있다.1897년 도서관의 본관으로 처음 문을 열었으며, 세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1980년 6월 13일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존 애덤스 빌딩 존 애덤스 빌딩은 제퍼슨 빌딩과 인접한 블록인 2번가 SE의 인디펜던스 애비뉴와 이스트 캐피톨 스트리트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 건물은 원래 공간이 부족했던 본관 부속 건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것은 1939년 1월 3일에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처음에는 1970년대에 매디슨 빌딩으로 이전한 미국 저작권 사무소를 수용하기도 했다. 제임스 매디슨 기념관 제임스 매디슨 메모리얼 빌딩은 인디펜던스 애비뉴 SE의 1번가와 2번가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은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지어졌으며,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의 공식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매디슨 빌딩은 또한 미국 저작권 사무소와 의회 도서관의 "영화 및 텔레비전 열람실"인 메리 픽포드 극장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이 극장은 고전 영화와 현대 영화, 텔레비전 쇼의 정기적인 무료 상영을 주최한다. 시청각 보존을 위한 패커드 캠퍼스 시청각 보존을 위한 패커드 캠퍼스는 미국 버지니아주 컬퍼에 위치한 미국 의회도서관의 새 건물이다. 옛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창고와 냉전 벙커로 건설되었다.캠퍼스는 도서관의 모든 영화, 텔레비전, 사운드 컬렉션을 저장할 수 있는 단일 사이트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다. 데이비드 우들리 패커드(David Woodley Packard)를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단지의 중심축은 반주 단위로 무료 영화 상영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복제 아트데코 영화관이다.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 의회도서관은 의회도서관과 저작권 등록부를 통해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의 일부로서 미국법전 제17권 제1201조의 예외를 승인할 책임이 있다. 이 과정은 3년마다 이뤄지는데, 등록부가 일반인으로부터 제안서를 받아 도서관의 자문역할을 하고, 도서관은 무엇이 면제되는지에 대한 판결을 내린다. 3년이 지난 지금, 그 판결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면제에 대한 새로운 판결을 내려야 한다. 접근 독자 신분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학술 연구를 할 수 있다. 열람실 또는 도서관 건물에서 도서관 물품을 철거할 수 없다. 도서관의 서적과 저널의 대부분은 제퍼슨 빌딩과 애덤스 빌딩의 폐쇄된 서고에 있으며, 전문 서적과 기타 자료들은 세 개의 주요 도서관 건물 모두 폐쇄된 서고에 있거나 오프사이트에 보관되어 있다. 폐쇄된 서고에 대한 접근은 허가된 도서관 직원과 때때로 고위 관리들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되지 않는다. 열람실 참조 컬렉션만 열려 있는 선반에 있다. 1902년부터 미국 도서관은 미국 의회도서관의 도서관 간 대출을 통해 도서와 다른 물품들을 다른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없을 경우 이러한 물품들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다. 허버트 퍼트넘 전 의회도서관에 따르면, 이 시스템을 통해 의회도서관은 "최후의 수단 도서관" 역할을 해왔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빌린 도서관 안에서만 사용하도록 규정하여 다른 도서관에 책을 빌려준다. 기준 의회도서관은 도서관 서비스 외에도 도서 목록 및 검색 표준과 관련된 분야에서 다양한 표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작업 영역에는 MARC 표준, METS(메타데이터 인코딩 및 전송 표준), MODS(메타데이터 객체 설명 스키마), Z39.5 및 SRW(검색/검색 웹 서비스), URL을 통한 검색/검색(SRU) 등이 있다. 미국 의회 법학도서관은 학자와 실무자들이 중요한 법률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법률 장학금을 더 많이 받으려고 한다. 미국 의회, 다른 정부 기관 및 대중을 위해 봉사하는 법학 도서관의 다면적인 사명을 증진시키는 프로젝트에 참가하기 위해 개인을 초대한다. 연중 행사 미국 의회도서관의 미국 서신 펠로우 거쉰상 대중가요 부문 미국 의회 도서관상 창립 기념일 전국 도서 축제 대부분 유실된 필름 식별 작업장 주목할 만한 사람들 헨리에트 아브람: 서지 및 도서관에 정보를 보유하기 위한 국제 데이터 표준인 MARC 형식(Machine Readable Cataloging)을 개발했다. 존 Y. 콜: 책 센터의 설립자이자 미국 의회 도서관의 첫 역사학자이다. 세실 홉스: 미국의 동남아시아 역사학자, 미국 의회도서관 오리엔탈리아(현재의 아시아)부의 남아시아 부장이며, 아시아에 대한 학문과 미국 도서관 소장품의 동남아시아 커버리지 개발에 주요한 공헌자이다. 줄리어스 C. 제퍼슨 주니어,미국도서관협회장, 의회조사처장 (2020–2021), 자유독서재단 이사장 (2013–2016). 같이 볼것 Bisbort, Alan, and Linda Barrett Osborne. The Nation's Library: The Library of Congress, Washington, D. C. (Library of Congress, 2000) Cole, John Young. Jefferson's legacy: a brief history of the Library of Congress (Library of Congress, 1993) Cole, John Young. "The library of congress becomes a world library, 1815–2005." Libraries & culture (2005) 40#3: 385–398. in Project MUSE Cope, R. L. "Management Review of the Library of Congress: The 1996 Booz Allen & Hamilton Report," Australian Academic & Research Libraries (1997) 28#1 online Ostrowski, Carl. Books, Maps, and Politics: A Cultural History of the Library of Congress, 1783–1861 (2004) online Rosenberg, Jane Aiken. The Nation's Great Library: Herbert Putnam and the Library of Congress, 1899–1939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3) Cole, John Y. and Henry Hope Reed. The Library of Congress: The Art and Architecture of the Thomas Jefferson Building (1998) excerpt and text search Small, Herbert, and Henry Hope Reed. The Library of Congress: Its Architecture and Decoration (1983) 각주 추가 자료 Bisbort, Alan, and Linda Barrett Osborne. The Nation's Library: The Library of Congress, Washington, D. C. (Library of Congress, 2000) Cole, John Young. Jefferson's legacy: a brief history of the Library of Congress (Library of Congress, 1993) Cole, John Young. "The library of congress becomes a world library, 1815–2005." Libraries & culture (2005) 40#3: 385–398. in Project MUSE Cope, R. L. "Management Review of the Library of Congress: The 1996 Booz Allen & Hamilton Report," Australian Academic & Research Libraries (1997) 28#1 online Ostrowski, Carl. Books, Maps, and Politics: A Cultural History of the Library of Congress, 1783–1861 (2004) online Rosenberg, Jane Aiken. The Nation's Great Library: Herbert Putnam and the Library of Congress, 1899–1939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3) Cole, John Y. and Henry Hope Reed. The Library of Congress: The Art and Architecture of the Thomas Jefferson Building (1998) excerpt and text search Small, Herbert, and Henry Hope Reed. The Library of Congress: Its Architecture and Decoration (1983) 더 보기 미국 의회조사국(CRS) 의회예산처 미국 연방회계감사원(GAO) 기술평가원 외부 링크 미국 의회 도서관 웹사이트 미국 의회도서관 유튜브 채널 의회 도서관 카탈로그 검색 Congress.gov, 입법 정보 연방 관보에서의 미국 의회도서관 회의 공지사항 및 규칙 변경사항 RSS 피드 있는 미국 의회 도서관 야외 조각 국회도서관 미국 의회 도서관 (족보학자를 위한 패밀리 서치 리서치 위키에서) C-SPAN 미국 의회도서관 다큐멘터리 및 자료 미국 의회도서관 국립도서관 서비스 (NLS) 비디오: "1968년 미국 의회 도서관 – 컴퓨터 자동화" 도서관 웹 아카이브 – URL 검색 미국 의회도서관 홈페이지 미국 의회도서관 국립 도서관 미국 의회 기관 미국의 아카이브 워싱턴 D.C.의 도서관 워싱턴 D.C.의 역사 박물관 계보학 1800년대 설립 워싱턴 D.C.의 역사 박물관 사진 아카이브 납본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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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C%84%B1%20%EA%B2%BD%EC%98%81%EA%B6%8C%20%EB%B6%88%EB%B2%95%20%EC%8A%B9%EA%B3%84%20%EB%93%B1%EC%97%90%20%EB%8C%80%ED%95%9C%20%EC%9E%AC%ED%8C%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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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경영권 불법 승계 등에 대한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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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경영권 불법 승계 등에 대한 재판은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삼성에버랜드 (현 제일모직)의 전환사채(CB) 및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의 3자 발행으로 인한 경영진의 배임 혐의에 대한 재판이다. 에버랜드 사건에서는 전, 현직 에버랜드 사장인 허태학, 박노빈씨가 기소되어 하급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었으나 대법원에서 무죄취지로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환송하였고, 삼성SDS 사건에서는 이건희 회장 등이 기소되어 하급심에서 일부 유죄 일부 무죄로 판단하였으나 대법원에서 무죄부분 중 일부에 대한 유죄 취지로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하였다.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배정 사건 1996년 12월 삼성 에버랜드가 전환사채를 헐값에 발행해 이재용을 제외한 97%의 주주가 전환사채를 인수 직후 실권함으로써 이재용이 집중적으로 전환사채를 가질 수 있었던 사건이다. 2000년 6월 법학교수 43명이 이건희 회장 등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하였으나, 검찰은 2003년 12월 공소시효를 하루 앞두고 여론에 떠밀려 이건희 회장을 제외한 허태학, 박노빈 전 현직 에버랜드 사장만을 불구속 기소했다. 1심과 2심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은 전환사채 발행 과정에서 형식적으로 주주 배정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회사에 끼친 손해가 없다며 무죄취지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항소심법원에 환송하였다.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저가 배정 사건 1999년 2월 당시 비상장회사였던 삼성SDS의 이사회는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이재용씨 등에게 발행하면서 시장 가격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에 삼성SDS 주식을 인수할 수 있게 했고, 이에 대해 1999년 참여연대는 삼성SDS 이사들을 배임혐의로 고발했다. 이 사건은 검찰에 의해 6번 불기소되었고 결국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 후 제정된 삼성 비자금 의혹 관련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특별검사 조준웅이 임명된 뒤, 특검의 기소로 심리가 시작되었다. 제1심은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3형사부(재판장 민병훈)가 담당하여 일부 유죄·일부 무죄·일부 면소 판결을 선고하였고, 피고인들 및 특별검사가 모두 항소함에 따라 제2심(항소심)은 서울고등법원 제1형사부(재판장 서기석)가 담당하여 면소 부분만 무죄로 변경하는 취지의 판결을 하였으며, 이에 특별검사가 상고하였는바 대법원 제2부(대법관 양승태, 김지형(주심), 전수안, 양창수)는 삼성SDS(주)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부분에 대하여 유죄 취지로 판단하여 원심판결 중 관련 부분을 파기하고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하였다. 판결 내용 요약 1심 공판 관여자 재판부: 재판장 판사 민병훈, 우배석 판사 박종열, 좌배석 판사 오현석(주심) 특별검사: 조준웅 특별검사보: 윤정석, 조대환, 제갈복성 변호인: 변호사 조준형, 변호사 이완수, 변호사 김승섭, 변호사 조해섭 재판 경과 2008년 6월 15일 공판준비기일 - 양측의 쟁점을 정리하고 증거수집 계획 수립 2008년 6월 26일 삼성화재 횡령 공판 2008년 7월 10일 조준웅 삼성 특별검사는 결심공판에서, 경영권 불법 승계로 계열사에 수천억원의 손해를 입히고 우량 계열사 주식을 차명으로 거래하며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이건희 전 회장에게 징역 7년에 벌금 3500억원을 구형했다. 2008년 7월 16일 선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 일부 무죄, 일부 면소 항소심 공판 관여자 재판부: 재판장 판사 서기석, 우배석 판사 정재훈(주심), 좌배석 판사 이광영 특별검사: 조준웅 특별검사보: 윤정석, 조대환, 제갈복성 변호인: 변호사 조해섭, 이완수, 조준형, 김승섭 재판 경과 2008년 10월 10일 서울고등법원 제1형사부(재판장 서기석 부장판사)는 피고인 이건희에 대한 부분에 관하여는,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저가발행 부분에 대한 제1심의 면소 판단 부분을 무죄로 변경한 것을 제외하고는 제1심의 판단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판결문) 상고심 2009. 5. 29. 주주배정방식에 의한 전환사채 발행과 제3자 배정방식에 의한 신주인수권부사채 발행 모두 배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본 원심에 대하여 제3자 배정방식에 의한 신주인수권부사채 발행은 배임죄가 성립된다는 이유로 원심을 파기하였다. 사면 이명박 대통령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준비를 이유로 이건희를 사면하였다. 같이 보기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배정 사건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 저가 배정 사건 업무상배임죄 각주 외부 링크 이건희 전 삼성회장 등 관련 판결문(요약) 항소심 판결문: 서울고등법원 2008. 10. 10. 선고 2008노1841 판결 대한민국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 경영권 불법 승계 등에 대한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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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B9%B8%EC%86%8C%EC%A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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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칸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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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칸소주()는 미국 남부의 주이며, 미국에서 유일하게 다이아몬드가 채광되는 주이다. 북쪽으로는 미주리주에, 동쪽으로는 테네시주와 미시시피주에, 남쪽으로는 루이지애나주에, 서쪽으로는 텍사스주와 오클라호마주에 접한다. 아칸소주의 북서부는 구릉 형태의 오자크 대지이나, 그 밖의 곳은 미시시피강 하류 저지의 대평야이며 저습지가 많다. 주의 동쪽 경계에 미시시피강이 흐르고, 또 주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미시시피강의 지류인 아칸소강이 흐른다. 미국의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의 고향이다. 역사 초기 역사 약 12,000년 전에 아칸소 지방에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살았다. 초기의 유럽인 탐험가들은 3개의 주요 종족 - 캐도족, 오세이지족과 쿼포족을 지방에서 찾았다. 아칸소라는 명칭은 캔자스주와 동일한 어원에서 파생된다. 원주민인 칸사족(Kaw people)은 대평원의 수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칸소라는 단어는 '강의 하류 사람들의 땅(land of downriver people)' 또는 '남쪽 바람의 사람들(people of the south wind)'을 의미한다. 탐험과 정착 1541년 스페인의 탐험가 에르난도 데 소토가 아칸소를 도달한 원정을 이끌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탐색하던 금을 찾는 데 실패하였으나 역사가들은 원정이 인구의 거의를 죽인 병들을 소개하였다고 믿는다. 1673년 프랑스의 자크 마르케트 신부와 루이 졸리에는 자신들이 쿼포 인디언들을 만난 아칸소강의 입구로 들어가는 데 미시시피강을 여행하였다. 1682년 르네-로베르 카블리에 드 라 살이 미시시피강 유역을 프랑스를 위하여 주장하였다. 1686년 라 살은 아칸소강 입구 근처에 아칸소 교역장이라 불리는 교역소를 지은 앙리 드 통티에게 대지의 양도를 만들었다. 1717년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의 은행원 존 로에게 루이지애나에서의 독점적인 교역의 권리들을 주었다. 자신의 회사에 돈을 융자하는 데 로는 "미시시피 계획"을 개발하였다. 로의 회사는 결국 "미시시피 사기"라 불리는 재정적 재앙에서 무너졌다. 그러나 계획은 루이지애나에 많은 정착자들을 데려왔다. 대략 100명의 유럽인과 몇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교역지 근처에 정착하였다. 정착자들의 대부분은 떠났으나 어떤 농부들은 남아있었다. 1762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서부의 대지를 할양하였다. 이 대지는 루이지애나 준주를 포함하였다. 1800년 스페인은 루이지애나 준주를 프랑스에 돌려주었다. 1803년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준주를 매입하였다. 준주 시대 1812년 루이지애나 준주의 남부는 루이지애나주로 만들어졌다. 아칸소주를 포함한 북부는 미주리 준주가 되었다. 1817년 미국 정부는 지방에서 인디언 종족들 사이에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현재 아칸소주 북서부에 포트 스미스를 설립하였다. 1819년 정부는 아칸소 준주를 창조하였다. 그 준주는 오늘날의 아칸소주와 현재의 오클라호마주의 일부를 포함하였다. 포트 스미스의 타운은 근처에 개발된 밴뷰런 요새 주위에 자라났다. 워싱턴 타운은 텍사스주로 향하는 길에 중요한 정지의 점이 되었다. 1800년대 초반에 아칸소의 북서부는 체로키족의 큰 수에 일시적 집이 되었다. 그러나 체로키족과 다른 동부의 종족들은 1830년대 동안에 인디언 영토(오늘날의 오클라호마주)로 이주하는 데 강요되었다. 주 지위와 남북 전쟁 1836년 6월 15일 아칸소는 25번째 주로 합중국에 편입되었다. 미국은 당시 노예제의 의문에 거대한 토론에 교전 중이었다. 1860년으로 봐서 아칸소주는 435,450명의 백인 인구와 대략 110,000명의 노예들이 있었다. 많은 노예들은 아칸소 저지대들에서 면화 재배에 일하였다. 노예제를 반대한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몇몇의 남부의 노예주들이 합중국으로부터 탈퇴하여 아메리카 맹방을 형성하였다. 주의 투표인들은 처음에 탈퇴에 반대하였으나 1861년 4월 12일 남북 전쟁이 일어난 후에 주는 곧 맹방에 가입하였다. 아칸소주는 1861년 8월 미시시피주에서 윌슨즈 크리크 전투에 싸우는 데 군인들을 보냈다. 남군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1862년 3월 북군이 아칸소주로 들어와 남군을 물리쳤다. 12월에는 북군이 프레리 그로브 전투에서 남군을 물리쳤다. 1863년 9월 10일 북군은 리틀록을 차지하였다. 그러고나서 남군은 자신들의 수도를 아칸소주 남서부에 있는 워싱턴으로 옮겼다. 1864년 북부에 충성을 하는 아칸소주민들이 리틀록에 합중국 정부를 설립하고 노예제를 폐지하는 새로운 주 헌법을 썼다. 그러나 주의 거의는 북군 혹은 남군에 의한 아무런 통치를 받지 않았다. 무법의 게릴라들이 도둑질하고 많은 주민들을 살해하였다. 남부 제주의 통합기 전쟁에 이어 남부 제주의 통합기 동안에 전직 남군들이 합중국에 재가입하는 데 거부한 아칸소주의 입법부를 지배하였다. 미국 의회는 아칸소주를 군사 통제의 아래에 놓았다. 연방군은 1867년부터 1874년까지 주를 영유하였다. 아칸소주는 1868년에 합중국으로 재편입되었다. 그해에 주는 흑인 남성들에게 투표하는 권리를 주는 새 헌법을 채택하였으나 전직 남군들에게는 부인하였다. 공화당 정부는 경제 개발, 학교들의 설립과 전 노예들의 인권들을 보호하는 데 서두르는 시도를 하였다. 공화당원과 민주당원 사이와 백인과 흑인들 사이에 폭력이 일어났다. 쿠 클럭스 클랜 같은 반흑인 단체들이 공포를 퍼뜨렸다. 1872년 2명의 공화당원들이 주지사를 위한 경쟁에 충돌하였다. 엘리샤 백스터는 조지프 브룩스를 꺾었으나, 브룩스는 사기를 고발하고 자신이 우승한 주장을 하였다. 1874년 4월 15일 브룩스는 총으로 위협하면서 백스터에게 상원을 떠나라고 강요하였다. 2명의 경쟁 후원자들이 브룩스 - 백스터 전쟁이라 불리는 사건에 충돌하였다. 5월 15일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은 백스터를 주지사로 선언하였다. 그해 후반에 주는 거의 수정되었어도 아직도 쓰이는 새 헌법을 채택하였다. 1800년대 후반 새로운 철도들이 1800년대 후반에 아칸소주를 가로질렀다. 재목 회사들은 풍부한 숲의 자원들을 거두어 들이는 데 주로 이동하였다. 강들을 따라 놓인 새로운 제방들과 배수구들이 삼각주에서 대지의 붐을 일으켰다. 1887년 보크사이트가 리틀록 근처에서 발견되고 광산들이 개장되었다. 1900년대 초반 1900년대 초반은 지속적인 개발을 가져왔다. 향상된 학교들, 보건과 다른 정부 서비스들이 적어도 타운들에서 유효하였다. 쌀의 자람이 아칸소주의 동부에 소개되었고, 면화를 대신하였다. 1921년 엘도라도 근처에서 석유가 찾아졌다. 주의 첫 큰 수력 발전 댐이 1924년에 지어졌다. 하지만 농업의 가격들이 1920년 후에 떨어지고 많은 아칸소 주민들이 자신들의 농장들을 잃었다. 주는 또한 1927년에 파괴적인 미시시피강 홍수, 1930년의 가뭄과 1930년대의 대공황에 의하여 충격을 받았다. 1934년 면화의 가격이 생산 가격의 아래로 하락하자, 어떤 반란적 아칸소주 농부들은 타이론자에서 가장 짧게 간 남부 소작인 조합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상태들은 소작인과 물납 소작인들을 위하여 부족하게 남았다. 1932년 아칸소주의 여성 해티 캐러웨이는 미국 상원에 선출된 첫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 새디어스 캐러웨이 상원이 사망한 후 곧 치러진 특별 선거를 이겼다. 1900년대 중반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에 아칸소주의 농업과 광업이 확장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 곧 주는 농업적에서 산업적 경제로 옮겨지기 시작하였다. 많은 농부들은 농기구 사용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제조업이 자라났으나 이 모든 미숙련 노동자들을 위한 직업을 마련하는 데 빠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주들에서 직업을 찾으러 아칸소주를 떠났다. 이 문제들에 불구하고 1940년대와 1950년대 동안에 아칸소주의 공장들의 수가 2배로 자라났다. 공장들의 수가 1955년에 설립된 아칸소 산업 개발 위원회에 의하여 주로 몰려들었다. 1957년 아칸소주는 학교의 인종 통합에 놓인 논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1954년 미국 대법원은 공공 학교에서 의무적인 인종 분리가 비헌법적이라고 통치하였다. 1957년 연방 법원은 리틀록에 있는 센트럴 고등학교에 인종 차별을 없애는 데 명령을 내렸다. 주지사 오벌 E. 포버스는 인종 차별 폐지를 막기 위하여 아칸소 주방위군을 보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주방의군을 연방 정부 지휘권 아래에 두고 법원의 명령을 집행하는 데 연방군을 보냈다. 1970년으로 봐서 아칸소주 학교와 다른 공공 시설들의 대부분이 매우 인종적으로 합쳐졌다. 1960년대 초반에 아칸소주의 제조업 소득은 처음으로 그 농장 소득을 통과하였다. 포버스 주지사는 1964년 6번째 임기로 재선되었다. 아칸소 주지사들 중에 아무도 3개 이상의 임기를 지내지 않았다. 1967년 윈스롭 록펠러가 남부 제주 통합기 이래 처음으로 아칸소주의 공화당 지사가 되었다. 1900년대 후반 아칸소강 개발 프로그램이 1970년에 완료되었다. 맥클렐런-커 아칸소강 항해 시스템으로 개명된 개발은 주를 가로질러 미시시피강으로부터 오클라호마주로 들어가는 항해를 하는 데 강을 열었다. 아칸소 주지사에 5번이나 선출된 민주당원 빌 클린턴이 1992년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996년에도 재선되었다. 1996년 5월 짐 가이 터커 주지사는 재정적 연구소들을 속여서 빼앗고 불법적 대부금을 이기는 음모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지사 직을 떠난 그는 검정과 공동체 서비스로 선고를 받았다. 21세기 오늘날 아칸소주는 공해와 수질 오염을 줄이고, 주를 위한 충분한 동력을 공급하고, 그 공동 교육을 향상하고, 불안정한 농장 경제를 강하게 하는 직무들을 향하였다. 주의 공무원들은 다른 나라들과 무역을 촉진하고 새로운 산업을 끌어들이는 데 어떤 시도에서 성공하였다. 주의 북서부는 번영하고 퇴직자들은 이 지방을 즐거움으로 찾았다. 하지만 많은 삼각주의 군들은 인구를 잃었다. 아칸소주는 그 학교들을 국가적 평균으로 가져오는 시도를 되풀이하였으나, 기금의 문제들이 남아있다. 사립 학교들과 자택 학습이 인기에 증가하였다. 새로운 주니어 칼리지들과 존재하는 칼리지들의 새로운 지점들이 교육적 기회들에서 확장되었다. 경제 서비스업 서비스업은 아칸소주의 고용과 국내 총생산에서 둘다 70 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서비스업의 대부분은 리틀록과 다른 메트로폴리탄 지역들에 집중되어 있다. 주도인 리틀록은 주 정부 활동의 중심지이다. 많은 금융 회사와 보험 회사들도 또한 리틀록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많은 호텔, 식당과 소매상들은 리틀록 지역과 주의 북서부에서 운영된다. 큰 병원들은 파예트빌, 포트 스미스, 존스보로와 리틀록에서 의료 간호를 마련한다. 리틀록 공군 기지는 아칸소주에서 가장 큰 군사 기지이다. 백화점들의 체인 딜러즈는 리틀록에 기지를 두고, 미국에서 가장 큰 할인 스토어 체인 월마트는 벤턴빌에 기지를 두었다. 2개의 지도적인 트럭 교통 회사들이 주에 본부를 두었는 데, 로얼에 있는 J. B. 헌트와 포트 스미스에 있는 ABF 화물 시스템이다. 제조업 식품은 주의 지도적인 제조품들이다. 가금육 가공업이 지도적인 식품 가공업이며, 스프링데일에 기지를 둔 타이슨 식품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가금육 생산과 가공자들 중의 하나이다. 다른 식품 가공업 공장 지대들은 포트 스미스, 존스보로, 리틀록과 다른 도시들에 있다. 합성 금속 제품, 초기 금속 제품과 교통 수단들도 또한 중요한 제조품들이다. 건축과 구조의 금속들은 주에서 만들어지는 합성 금속 제품들의 가장 가치적인 타입이며, 알루미늄, 철과 제철은 초기 금속 제품들의 지고적인 타입이다. 항공기 부품, 자동차 부품과 열차가 아칸소주에서 만들어진다. 농업 농장 지대가 아칸소주 내륙 지역의 대략 5분의 2를 덮고 있다. 닭은 지도적인 농산물이며, 아칸소주는 닭의 사육에서 지도적인 주들 중의 하나이다. 닭의 대부분은 주의 서부에서 기른다. 육우, 낙농제품, 달걀, 돼지와 칠면조도 또한 중요한 축산물이다. 육우는 주의 대부분에서 사육되고, 낙농업은 오자크 고원, 리틀록 근처와 포트 스미스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아칸소주는 달걀 생산과 칠면조 사육에서 지도적인 주이다. 돼지는 주로 주의 서부에서 기른다. 수확물은 농장 소득의 거의를 차지한다. 면화, 쌀과 콩은 주의 가장 가치적인 수확물이다. 아칸소주는 면화와 콩의 생산의 둘다에서 지도적인 주들 안에 들어있다. 아칸소주는 미국에서 지도적인 쌀의 생산지이다. 쌀은 주로 미시시피 앨러비얼 평야 지방에서 자란다. 어떤 농부들은 자신들의 논에 홍수를 일으켜 거기에다가 물고기를 기른다. 다른 지도적인 수확물은 옥수수, 건초와 밀을 포함한다. 옥수수와 밀은 동부에서 자라고, 건초는 주의 북서부에서 중요하다. 광업 천연가스는 아칸소주의 지도적인 광물이며, 석유는 그 다음이다. 주의 천연가스는 거의 아코마 분지에서 찾아진다. 그 분지는 아칸소주의 서부로부터 오클라호마주로 들어가 뻗어있다. 아칸소주의 가장 큰 유전들은 남부 경계의 근처에 놓여있다. 브롬과 깨진 돌도 또한 중요한 광물이며, 아칸소주는 지도적인 브롬 체굴의 주이다. 주의 몇몇의 지역들은 채석장들이 있다. 주민 2000년 미국 인구 조사국은 아칸소주의 인구가 2,673,400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주의 인구는 1990년으로 본 2,350,725명에서 대략 14 퍼센트로 증가하였다. 2000년 조사국에 의하면 아칸소주는 50개의 주들 중에 33위에 들어와있다. 아칸소 주민의 절반 이상은 메트로폴리탄 지역들에 살고 있다. 아칸소주에서 전적으로 놓여 있는 4개의 메트로폴리탄 지역들은 핫스프링스, 존스보로, 리틀록-노스리틀록과 파인 블러프이다. 파예트빌-스프링데일-로저스 메트로폴리탄 지역은 주로 아칸소주에 놓여 있고 미주리주로 뻗어 나간다. 포트스미스 메트로폴리탄 지역은 오클라호마주로 뻗어 나간다. 멤피스(테네시주)와 텍사캐나(텍사스주)와 텍사캐나 지역들은 주로 테네시주와 텍사스주에 놓여있다. 주도인 리틀록은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대략 183,000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아칸소주는 30,000명 이상의 인구와 함께 한 9개의 다른 도시들이 있다. 인구의 순서로 봐서 이 도시들은 포트 스미스, 노스리틀록, 파예트빌, 존스보로, 파인 블러프, 스프링데일, 콘웨이, 로저스와 핫스프링스이다. 아칸소 주민의 대략 16 퍼센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다른 큰 인구 단체들은 아일랜드, 독일, 영국과 아메리카 인디언 계통이다. 교육 대학과 대학교 아칸소 대학교 아칸소 주립 대학교 센트럴 아칸소 대학교 헨더슨 주립 대학교 하딩 대학교 존 브라운 대학교 에클레시아 칼리지 각주 외부 링크 [주정부 홈페이지] 아칸소주 관광 미국 남부 미국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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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3%BD%EC%A7%95%EC%8B%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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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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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징시(, )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도시이다. 면적은 2591km2, 인구는 26만여 명이고, 전체 인구 중 한민족 비율이 67%에 이른다. 가곡 로 알려진 정자 일송정이 있으며, 시인 윤동주의 고향으로 그의 무덤이 있다. 지리 동남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접해 있다. 동북쪽으로는 연길, 도문, 서남쪽으로는 화룡, 서북쪽으로는 안도에 접해 있다. 백두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도시 가운데로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이 흐른다. 행정 구역 룽징은 2개의 가도, 5개의 진, 2개의 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도(街道) 안민 가도(, ) 룽먼 가도(, ) 진(鎭) 카이산툰 진(, ) 라오토우고우 진(, ) 싼허 진(, ) 둥성융 진(, ) 즈신 진(, ) 향(郷) 더신 향(, ) 바이진 향(, ) 기후 교육 기관 룡정중학교 (용정중학, 龍井中學) 인물 윤동주 문익환 기타 2008년 여름 - 한국방송공사의 1박 2일에서 중국 용정시를 방문하여 촬영한 편이 방영되었다. 각주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지린성의 현급시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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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8%EC%9B%94%204%EC%9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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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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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16번째(윤년일 경우 217번째) 날에 해당한다. 사건 70년 - 예루살렘 제2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다. 1896년 - 조선의 지방제도를 23부에서 13도로 개편하는 칙령(제98호) 반포되다. 1903년 - 교황 비오 10세, 257대 로마 교황 취임. 1905년 - 이승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 지원 요청 1914년 - 미국, 제1차 세계 대전에 중립선언. 1914년 - 영국, 독일에 선전포고. (제1차 세계 대전) 1915년 -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 중 독일군이 바르샤바 점령. (제 1차 세계 대전) 1944년 - 《안네의 일기》 저자 안네 프랑크 가족, 독일군에 체포. 1948년 - 제헌국회, 의장과 부의장에 각각 신익희(申翼熙)와 김약수(金若水) 선출. 1988년 - MBC 뉴스데스크 생방송 중 뉴스 스튜디오에서 도청장치 방송사고 발생. 1991년 - 탤런트 조형기 강원도 정선군에서 음주 운전중 30대 여성을 차에 치어 숨지게 함. 1996년 - 대한민국, 남산 국가안전기획부 청사 철거. 1999년 - 치사율 80% 에볼라 바이러스 독일에서 첫 발견. 2001년 - 모스크바에서 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정상회담 2002년 - 남북실무접촉 대표, 남북장관급회담(제7차) 재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수단의 아시안게임 참가 논의. 2003년 -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투신 자살하다. 2014년 - 방글라데시 여객선 피낙 6호 침몰. 2020년 - 레바논 베이루트항에서 거대한 폭발 사고 발생. 문화 2007년 - 화성 탐사선 피닉스가 발사되다. 2014년 - 문화방송이 여의도 시대를 마감하고, 마포구 상암동에서 신사옥 시대를 시작. 탄생 1521년 - 제228대 교황 교황 우르바노 7세. (~1590년) 1792년 - 영국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 (~1822년) 1805년 - 아일랜드의 수학자 윌리엄 로언 해밀턴 (~1865년) 1821년 - 프랑스의 사업가이자 루이비통의 설립자 루이 비통 (~1892년) 1834년 - 영국의 논리학자, 도덕 철학자, 벤 다이어그램 발명가 존 벤. (~1923년) 1859년 - 노르웨이의 소설가 크누트 함순. (~1952년) 1892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조동호. (~1954년) 1900년 영국의 왕족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2002년) 일본의 슈퍼센티네리언 다지마 나비. (~2018년) 1901년 - 미국의 재즈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 (~1971년) 1912년 - 스웨덴의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 (~1945년) 1927년 - 대한민국의 아동음악가 권길상. (~2015년) 1928년 - 헝가리의 배우 카다르 플로라. (~2003년) 1929년 - 팔레스타인 정치인 야세르 아라파트. (~2004년) 1937년 -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 최시중. 1938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신철주. (~2005년) 1944년 - 미국의 배우 리차드 벨저. (~2023년) 1951년 - 미국의 정치인 레인 에번스. (~2014년) 1953년 - 일본의 야구인 나시다 마사타카. 1956년 - 미국 해군 예비역 대장 및 제 24대 주한 미국 대사 해리 해리스. 1960년 대한민국의 야구인 이광길. 스페인의 정치인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1961년 - 미국의 제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 1962년 - 체코의 작가 야힘 토폴. 1963년 미국의 변호사, 정치인 키스 엘리슨. 대한민국의 정치인 조해진. 1968년 대한민국의 야구인 강남규. 한국계 미국인 배우 대니얼 대 킴. 1971년 - 일본의 배우 단 레이. 1973년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임선동. 대한민국의 배우 이윤성. 1974년 -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코린 디아크르. 1976년 일본의 성우 나바타메 히토미. 일본의 전 야구 선수 후쿠모리 가즈오. 1978년 - 대한민국의 기상캐스터 이설아. 1979년 - 대한민국의 전 방송 기자 김지언. 1980년 대한민국의 배우 이규한. 대한민국의 가수 정재원 (넬). 1981년 - 미국의 배우 서식스 공작부인 메건. 1982년 대한민국의 방송인, 전 아나운서 이지윤. 대한민국의 배우 전미도. 1983년 대한민국의 배우 손여은. 대한민국의 축구인 강동구. 미국의 배우 겸 영화 감독 그레타 거윅. 1984년 - 러시아의 전 리듬 체조 선수, 코치 나탈리야 라브로바. (~2010년) 198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도 선수 박현숙. 일본의 야구 선수 사카키바라 료. 1986년 - 대한민국의 역도 선수 윤진희. 1988년 미국 태생 대한민국의 영어 교사, 유튜버 올리버쌤. 대한민국의 배우 장선. 1990년 - 크로아티아의 축구 선수 마야 요슈차크. 1992년 대한민국의 스타그래프트, 프로게이머 고병재.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우찬. 대한민국의 요리 유튜버 수빙수tv. 1994년 - 일본의 배우 후쿠다 마유코. 1995년 - 대한민국의 가수 동헌. 1996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우석. 1997년 - 대한민국의 아역배우 심혜원. 미상 대한민국의 가수 백노루양. 사망 221년 - 위나라의 초대 황제 조비의 정비 문소황후. (183년~) 966년 - 프랑크 왕국 출신 이탈리아의 귀족이자 이탈리아의 왕 베렌가리오 2세. (900년~) 1265년 - 영국의 정치가 시몽 드 몽포르. (1208년~) 1857년 - 조선 순조의 정비 순원왕후. (1789년~) 1875년 - 덴마크 동화작가 안데르센. (1805년~) 1926년 - 일제강점기의 연극인 김우진. (1897년~) 일제강점기의 가수 윤심덕. 1952년 - 한국의 소설가 정인택. (1897년~) 1970년 - 대한민국의 서양 화가 이봉상. (1916년~) 1992년 - 일본의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 (1909년~) 1997년 - 세계 최장수 인물인 프랑스의 잔 칼망. (1875년~) 2003년 - 대한민국 기업가 정몽헌. (1948년~) 2004년 - 대한민국 아나운서 정은임. (1968년~) 2009년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조오련. (1952년~) 2011년 - 일본의 축구 선수 마쓰다 나오키. (1977년~) 2015년 - 대한민국의 전 국회의원 박상천. (1938년~) 2018년 - 일본의 배우 츠가와 마사히코. (1940년~) 2019년 - 캄보디아의 정치인 누온 찌어. (1926년~) 2023년 - 페루의 예술가 루이스 알라르콘. (1929년~) 기념일 해안경비대의 날: 미국 제헌절: 쿡 제도 마티차 슬로벤스카 역사문화 박물관의 날: 슬로바키아 혁명의 날: 부르키나파소 같이 보기 전날: 8월 3일 다음날: 8월 5일 - 전달: 7월 4일 다음달: 9월 4일 음력: 8월 4일 모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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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EA%B7%BC%ED%98%84%EB%8C%80%EC%8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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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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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한국근현대사는 한국사의 근현대 부분을 지칭하는 말이다. 한국근현대사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선택 과목에 7차 교육과정으로 시행된 한국사 교과목이다. 같이 보기 한국 현대사 한국 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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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98%EC%83%81%EA%B2%8C%EC%9E%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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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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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게임 , 幻想 Game》()은 와타세 유우의 소녀 만화작품이자, 동명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환상게임》 및 《판타스틱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바 있으며, 투니버스에서도 여러차례 재방송을 해 주었을 만큼 애니메이션도 팬들의 호응을 많이 받았다. 주작편의 전편으로, 현무의 무녀인 오쿠다 타키코 (奧田多喜子)를 주인공으로 한 현무개전 (玄武開傳)이 2003년부터 2013년까지 10여년 동안 연재되었고 현재는 2015년부터 현무개전과 주작편의 중간 편으로, 오스기 스즈노(大杉鈴乃)를 주인공으로 한 백호이문(白虎仙記)이 연재중이다. 작품 소개 사신천지서라는 고대 소설책을 통해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가게 된다는 설정은 이세계(異世界) 소환 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지만 여기에 주작, 청룡, 현무, 백호와 같은 동양의 도가사상에 기반한 4개 세력과 함께, 각각의 세력이 7명의 전사를 모아 각자를 상징하는 성물을 소환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가 가미됨으로써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게다가 현실세계에서 절친한 친구가 각 세력의 무녀가 되어 대치하는 구도로 진행되고, 각 전사들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가 들어가면서 이 작품은 한층 더 탄탄한 긴장·갈등관계를 이루며 치밀하게 진행된다. 관련 팬시 상품들로도 유명한 작품이며, 특히 일본 순정만화 중 영문권 국가들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환상게임 애니메이션으로는 TV 시리즈를 비롯해 1기~3기까지 13편의 OVA가 있으며, TV 시리즈의 경우, 총 52화로 1995년 4월 6일부터 1996년 3월 28일까지 테레비 도쿄를 통해 방영되었다. 투니버스에서는 52화 전편 방송되었다. 1997년 6월 투니버스에서 방영되었었는데 당시엔 케이블도 지상파와 마찬가지로 왜색이 짙은 부분을 편집하는 성향이 있었으므로 왜색이 있는 일부분을 편집해야 했다. (홍콩 ATV는 등급을 전체 관람가로 맞추기 위해 선정성이 전체 관람가에 맞추기 부적절한 장면들을 편집) 그리고 2021년 7월 8일에 애니맥스 코리아에서 재방영되었다. 줄거리 중학교 3학년인 미주(미아카)는 수험을 앞두고 친구 진아(유이)와 국립 도서관에 가게된다. 그러던 중 미주는 붉은 색을 띈 새를 보고 뒤따라 가게된다. 중요 문서 자료실에 들어가게 된 미주는 뒤따라온 진아와 함께 우연히〈사신천지서〉라는 오래된 중국 서적을 발견하게 된다. 책을 펼치고 읽는 순간 둘은 붉은 빛과 함께 서적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고대 중국을 닮은 이세계에서 각각 주작·청룡의 무녀가 된다. 미주는 책안의 세계를 지켜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 그녀를 돕는 주작 칠성사와 함께 힘을 모으고, 또한 칠성사 중 한 명인 유귀와 강한 연을 맺게 된다. 한편, 세계 파멸의 야망을 안고 있던 청룡 칠성사 유심은, 진아를 속여 미주와 적대시킨다. 이에 미주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칠성사를 모아 성수를 불러낼 수 있도록, 여행을 계속한다. 그러나 주작, 청룡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그 조건이란 바로 칠성사 전원과 그에 합당한 무녀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한 유심의 책략에 의해 주작 및 청룡 칠성사는 차례차례로 목숨을 잃어 간다. 그러던 중, 유심의 명을 받아 움직이던 또 다른 청룡 칠성사인 유항에 의해 주작 및 청룡, 양측의 첫 성수소환은 좌절되었으나, 과거에 나타난 현무, 백호의 무녀들이 남긴 신좌보를 모으는 것으로, 무녀만 있으면 성수를 불러내는 것이 가능한 것을 알게 된다. 최종적으로 신좌보를 통해 성수소환에 성공한 쪽은 청룡 측으로, 청룡의 무녀인 진아는 성수가 소환되었을 시에 들어주는 세 가지 소원 중 첫 번째 소원으로서 주작을 봉인한다. 그 뒤, 두 번째 소원으로 미주를 책의 세계로부터 추방, 진아와 미주는 현실 세계에 귀환한다. 현실 세계에 돌아오게 된 미주의 뒤를 쫓아, 유귀도 책의 세계로부터 현실 세계로 나타난다. 거기서 유귀는 자신이 〈책안의 인물〉이라고 하는 허구의 존재이며, 지금까지의 사건은 스스로에게 있어서는 현실이지만 미주와 진아에게 있어서는 모두 현실이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가공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주의 오빠와 그의 친구는, 사신이 소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녀를 산재물로서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다만 무녀가 강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소환된 성수에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미주에게 고한다. 그러나 진아의 몸은 이미 청룡에 침식당하고 있었고 이를 안 미주는 빈사상태의 진아를 유심의 손으로부터 구출하려 한다. 간신히 유심의 본심을 알아차린 진아는 미주와 화해, 마지막 소원으로서 주작을 소환할 힘을 미주에게 주지만 곧 청룡에게 먹히고 만다. 그로 인해 성수소환의 힘을 얻게 된 미주는 주작을 소환, 그 첫 번째 소원으로 청룡으로부터 진아를 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이어서 두 번째 소원으로는 청룡을 봉인하고, 이에 따라 청룡의 가호를 잃은 유심은 유귀에 의해 쓰러지고 만다. 세계를 파멸로부터 구한 미주는 마지막 소원을 사용, 유귀와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을 바란다. 주작은 여러 가지 경험을 거쳐 마음의 성장을 이룬 미주의 소원을 받아들여 유귀는 진유귀로서 미주의 세계에 환생한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애니메이션에서의 미주의 마지막 소원은 “투쟁에 의해 파괴된 거리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일”로 원작과는 달라, 유귀의 환생은 그들이 서로 진실되게 사랑하는 마음에 반응하여 나타난 기적으로 여겨진다. 등장인물 미디어 믹스전개 때문에, 성우 캐스팅이 복수 존재한다. 주작·청룡·현무주변에 대해서는(애니메이션판 / CD북판)의 순서. 주작·청룡의 PS2용 게임 담당 성우에 대해서는 게임의 항을 참조. 백호는 애니메이션판의 성우. 현무는 「현무개전」으로서 기용된 각 미디어별의 성우에 대해서는 현무개전의 항참조 강미주(유우키 미아카) 소진아(혼고 유이) 강용주(유우키 케이스케)() 성우:미키 신이치로/토비타 노부오(일본), 손원일(한국), 미주의 오빠, 8화부터 등장했으며 초기에는 여동생 미주에게 그 책인 "사심 천지서"에 가지말라고 설득 했으나 끝내 미주가 사심 천지서 속으로 들어가자 얼떨결에 "사심 천지서 관리인"이 된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나와 미주와 주작칠전사의 상황을 살펴봐 준다. 그러다 28화에 자신의 친구 철만이의 도움을 받게 되며 45화에는 책 속 인간인 유귀를 만나고 47화에는 청룡 칠전사 유각을 만나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49화에서 청룡 칠전사 두목인 유심이 나와 미주, 진아를 위협하지만 사심천지서 속에 있던 남은 주작 칠전사 유익, 유정을 불러내는 통 큰 도움을 미주에게 준다. 철만(카지와라 테츠야)() 성우:나리타 켄/모리카와 토시유키 미주 오빠 용주의 친구, 28화가 첫 등장이며, 용주가 빌려간 10,000원을 돌려 받으려고 용주를 찾았는데, 얼떨결에 용주에게서 사심 천지서 소개를 받아 용주와 같이 사심 천지서 조사를 돕는다. 얼마 뒤 책 속인간 유귀를 목격하고, 47화에는 청룡 칠전사 유각을 만나 죽을 위험에 처하지만, 50화에서 미주가 꺼낸 미주 친구 진아를 구해주고, 그 이후 철만은 진아와 커플이 된다. 주작 홍남국 유귀 유성 (환상게임) 유유 유정 유익 유진(미츠카케)()/묘 수안(묘 주안)() 성우:이시이 코지/코스기 쥬로타(일본), 정승욱(한국), 유소문(홍콩) 의사인데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소화를 구할 수 없었던 것에 절망해, 마을에서 벗어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 왼쪽 손바닥에 〈軫(진)〉의 문자가 있다. 주작 칠성사 중 유일하게 치유 능력의 소유자. 고양이인 〈타마〉를 데리고 있다. 상당히 큰 체격에 과묵한 성격이기 때문에 실제 나이 이상으로 생각되기 일쑤다. 치유 능력은 그 자신의 체력이나 정신력을 혹사시키기 때문에, 하루에 여러번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일군으로부터는 성수를 내려 받음. 전투 중 상처를 입었는데에도 자신의 마지막 남은 힘으로 어린 아이를 치유 한 끝에 사망. 5월 7일생. 199cm. O형. 22세. 유장(치리코)()/왕 도휘(오 도우쿤)() 성우:카와카미 토모코/오리카사 아이(일본), 김선희(한국), (증패의)(홍콩) 아직 어린 소년인데도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합격. 그러나 그것은 칠성사로서의 능력으로, 문자가 나와 있지 않을 때에는 지력(知力)을 발휘할 수 없다. 왼발에 〈張(장)〉의 문자가 있다. 무녀가 칠성사를 모으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문자가 나오지 않는 기간이 길게 지속되어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문자가 나왔을 때의 자신과 그렇지 않을 때의 자신의 갭을 컴플렉스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몸집이 작고 가녀린 얼굴 생김새로 인해 남자다움을 동경한다. 평상시는 대범하고 의젓한 소년. 주작 칠성사 중 최연소. 태일군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내려 받았으며, 후에 그 두루마리는 청룡 봉인 시에 사용된다. 유기에게 몸을 빼앗겨 주작 칠성사를 위험에 빠트릴 뻔했으나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3월 19일생. 148cm. A형. 13세. 태일군() 성우:쿄우다 히사코/미즈하라 린(일본), 성선녀(한국) 냥냥() 성우:히카미 쿄코 타마(たま) 소화() 성우:사카키바라 요시코 봉기() 성우:사카모토 치카/타카야마 미나미 예청제 홍남국의 제5대 황제. 유성의 아들. 청룡 구동국 유심(나카고)()/아유르(アユル) 성우:후루사와 토오루/오키아유 료타로(일본), 김수중(한국) 구동국의 장군으로, 국내 병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금발 벽안의 이민족인 것으로 인해 박해를 받은 과거를 가지고 있다. 어릴 적, 습격한 군사를 앞에 두고 처음으로 칠성사로서의 힘에 눈을 떴으나, 너무 강대한 그 힘으로 어머니도 다치게 해 버린다. '칠성사로서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끌려간 궁전에서 구동국 황제의 위로자(창부)가 된다. 세계의 모두를 증오하여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청룡의 힘을 이용하려고 한다. 소설판에서의 본명은 아율. 아버지는 당시 구동국의 장군이었으며, 유심에 의해 살해당했다. 유귀와 같이 '기(氣)'를 조종하지만, 무인으로서 검을 이용한 전투에도 꽤 강하다. 이마에 〈心(심)〉의 문자를 가진다. 유귀와의 전투의 끝에 사망. 귀에 걸고 있던 피어스만을 남겨둔 채 소멸하였으나, 피어스는 유이에 계승되었다. 신장 193cm. 25세. 유각(스보시)()/부 슈운가쿠() 성우:우에다 유지(일본), 최재호(한국) 유항의 쌍둥이 남동생. 형을 지나칠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 형과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쉽게 흥분하는 형. 형을 죽인(후에 죽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유귀를 미워해 그의 가족을 참살하는 등, 형에 비해 격한 천성을 가지고 있다. 형 이외에는 처음으로 상냥하게 대해 준 유이를 마음에 담지만, 억지로 강요했기 때문인가 그녀에게 거부된다. 그러나, 그 후에도 단념하지 못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그녀를 생각한다. 자신의 연적인 유귀와의 싸움 끝에 사망. 유성추라고 하는 암기(暗器)를 사용해 공격한다. 다만, 유각의 능력은 유성추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낼 수 없다. 본명은 무준각. 왼쪽 어깨에 〈角(각)〉의 문자를 가진다. 유항(아미보시)()/부 코투쿠() 성우 : 우에다 유지/이와나가 테츠야, 최준영 (한국) 유각의 쌍둥이 형, 피리를 불어 사람의 마음등을 조정할 수 있다. 중반엔 유심의 명령으로 주작쪽에서 주작 칠성사인것처럼 행동하여 주작 소환을 방해하였다. 그리고 최후에는, 강에서 떨어질뻔했으나 미주가 잡아주었지만, 결국 자신이 손을놓아 목숨을 끊는다. 하지만 그는 한 마을에서 그저 평범한 가족이되어 있었고, 미주에게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미주와 유귀를 이어주고, 유저에게서 유귀와 미주를 구한뒤, 죽게된다 유방(소이)()/하쿠 카엔() 성우 : 타나카 아츠코/오리카사 아이, 이지영 (한국) 양쪽 칠성사중 유일한 여자. 주술을 사용할 수 있는듯하다. 중반부에는 유저와 힘을합해 (유저는 유귀에게 유방이 미주로보이는 주술을건다) 하지만 잘 먹히는 중, 유귀의 강한 정신력으로 깼다. 그러나, 후반부의 홍남국과의 싸움에서 전사한다. 그녀는 죽기 직전, 어렸을때의 자신을 구해준 유심을 사랑했다고 말한다. 유저 유미(아시타레)() 성우:오오토모 류자부로/후루타 노부유키 유기(미보시)() 성우:나카자와 미도리, 성선녀(한국) 백호 서랑국 오오스기 스즈노(성영미)(최영선)() 성우 - 나카자와 미도리, 이지영(한국) 백호의 무녀. 사신천지서속 세계에서 최초의 무녀인 타키코의 강림 110년 후 백호의 나라 서랑국에 강림한 2번째 무녀이다. 온화하고 얌전하며 조용한 성격의 소녀이다.겉보기에는 연약하고 얌전한 이미지이나 강한 의지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신수한테 먹히는 무녀의 운명을 이겨내고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 백호 칠성사인 유루와 사랑에 빠졌고 유루와 영원히 함께하게 위해 자신을 책 속에 있게 해달라고 빌었으나 백호는 무녀는 백호를 불러내기 위해 잠시 이곳에 오는 존재로 다른 세계 사람끼리는 이루어줄수 없다고 했기에 백호를 불러낸 후에는 결국 홀로 현실세계로 돌아가 평온히 천수를 다했다. 그러나 죽는날까지 유루를 잊지못하고 그리워하며 유루와 한날 한시에 죽는다. 유루(타타라) (카사루 초니에)() / カサル=ツォニェ 성우 - 야마노이 진, 이주창(한국) 백호 칠성사의 루성으로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칠성사이다. 식물을 조종하는 능력으로 이 능력은 공격과 방어가 다채로우며 이 능력으로 신좌보를 지켜왔다. 침착하고 상냥한 성격을 가진 칠성사로 백호의 무녀인 스조노가 남긴 신좌보를 지키기 위해 같은 백호 칠성사인 유묘가 가진 육체를 늙지 않게 하는 술법을 이용해 스스로 육체의 나이를 멈추어 90년동안 스즈노가 남긴 신좌보를 지킨다. 하지만 이 술법은 육체를 젊은 상태로 유지시켜 주는 대신 반대로 몸 안의 노화를 촉진시켜 오히려 수명을 단축시킨다. 백호의 무녀인 스즈노와 사랑하는 사이었으나 다른 칠성사들은 너희들은 이루어질 수 없다며 반대했다. 결국 스즈노가 백호를 불러낸 후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스즈노는 원래 세계로 돌아갔으며 유루는 자진해서 그 술법에 걸려 신좌보를 백호의 성좌에서 90년동안 지키나 90년후 미아카한테 주려던 신좌보를 유이에 의해 빼앗겨 되찾으려 싸우나 결국 술법에 의해 이미 죽어가는 몸으로 무리하다가 전사한다. 유루는 타마호메와 미아카에게 비록 헤어질걸 알고 있었다고 해도 나와 스즈노가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고, 그녀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난 행복하다. 비록 떨어져 있어도 우리 마음은 언제나 하나로 이어져있어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서로 사랑했던걸 후회하지 않으며 우린 언제나 함께한다고 말하고 스즈노와 한날 한시에 죽는다. 유묘(스바루) (두란 하무)() / ドゥリン=ハム 성우 - 도이 미카, 이현진(한국) 생일 : 5월 1일, 나이 : (90년후-107세), 신장 : 163 cm, 혈액형 : O형, 취미 : 요리/쇼핑 백호 칠성사의 묘성으로 왼쪽 가슴에 묘자가 나타난다. 뛰어난 미모와 몸매를 자랑하는 칠성사로 유규와는 부부 사이이며 동료 칠성사가 남긴 아이를 양녀로 맡아서 유규와 키우고 있다. 서랑국 소수민족인 납족 출신으로 칠성사로서의 능력은 육체의 시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힘으로 이 힘으로 유루의육체의 나이를 멈추게해 신좌보를 지켰으며 청룡 칠성사와의 전투에서 미야카 일행을 이 술법으로 유규와 90년전 육체로 돌아가 도운다. 왕언니 타입으로 남을 잘 챙겨준다. 유규(토카키) (란바 하무)() / ランヴァ=ハム 성우 - 이시이 코우지 / 젊은 시절 시가 카츠야, 홍시호(한국) 생일 11월 11일, 나이 : (90년후-109세), 신장 : 183 cm, 출신지 : 이다, 취미 : 여자 꼬시기 백호 칠성사의 규성으로 왼쪽 뺨에 규자가 나타난다. 유귀의 격투기 스승이며 성격은 자유분방하고 유귀나 유익처럼 다혈질기가 있다. 서랑국 수도인 이다 출신으로 유귀에게는 격투기 스승이며 거의 백호 칠성사의 리더격이나 바람기많고 여자 밝히는 문제가 옥의 티이다. 칠성사로서의 능력은 다채롭다. 순간이동 능력이나 점혈을 이용한 치유 능력도 겸비하고 있어 유귀를 치료한다. 귀에 한 귀고리를 이용한 격투 능력이 주공격이다. 유루와 스즈노의 결말을 옆에서 지켜봤기에 무녀와 칠성사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알고 유귀와 미야카 사이를 반대했으나 유루의 스즈노를 향한 마음이 여전했고 미주와 유귀의 사랑이 깨어질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미야카 일행을 유묘와 유루와 도우며 유루의 시신을 구한 뒤에 유묘와 원래 나이로 돌아간다. 현무 북갑국 오쿠다 타키코(선우다희)(백다희)() 성우 - 타나카 아츠코(OVA만)/ 유키노 사츠키(환상게임 현무개전드라마CD&게임판) 생일 : 9월 22일생, 나이 : 17세, 신장 : 154 cm, 혈액형 : O형, 취미 : 소품 만들기, 최초로 사신천지서 속에 들어가 북갑국에서 현무를 강림시킨 최초의 무녀로 이 책을 중국에서 가져온 오쿠다 에이노스케(선우영진)(백영규)의 외동딸이다. 평소 가정을 내팽기치는 아버지를 원망했으며, 아버지와 싸움 끝에 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실한 노력가에 굳세고 당찬 성격으로, 어떤 무녀보다 의지가 강했다. 미아카와는 달리 당시엔 무녀가 처음 온 데다 북갑국에선 무녀와 칠성사는 불운의 상징이라고 생각되어 고생을 많이했다. 미인에 공부, 운동 못하는 것이없는 팔방미인으로, 성적은 학년 톱에 월도가 특기로 그 실력은 구동국 용병대장을 무찌를 정도로 강하다. 후에 무녀가 신수에게 몸을 바치는 산제물 이란 것을 알게 되면서도 유녀와 칠성사와 북갑국을 위해 사신천지서에 다시 들어간다. 현무 칠성사의 리더인 유녀와 사랑에 빠져 영원한 사랑을 멩세했으며 결혼에 성공해 북갑국의 황후가 된다. 하지만 어머니한테 폐병이 감염되고 북갑국을 지키기 위해, 현무를 불러냈으나 타키코의 강한 의지와 마음으로도 병들어 죽어가던 타키코의 몸은 이미 신수를 감당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고 2번째 소원까지 빌고 아버지 에이노스케가 자신의 심장을 찌르자 피로 연결된 타키코 역시 심장에 이상이와 유녀가 좋아했던 곤돌라의 노래를 부르며 유녀의 품안에서 죽어간다. 유녀(리무드 로운) 생일 : 1월 28일생, 나이 : 16세, 신장 :175 cm(여 :165 cm), 혈액형 : O형, 취미 : 딱히 없음. 북갑국의 숨겨진 황자이자 최초의 칠성사인 현무 칠성사의 녀성으로 가슴 중앙에 자가 나타난다. 칠성사의 힘을 쓰면 여자로 변하며, 그 제약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적을 방심시키는데 도움이되기 때문에, 유용하게 쓰인다. 칠성사의 힘은 단번에 수천의 적을격퇴하는 만능 바람으로 적의 무리를 날려버리고 주위를 순식간에 베어버려 쑥대밭으로 만드는 등 바람의 공격은 강하고 다채롭다. 화살을 튕겨내거나 멀리 이동도 할 수 있으며, 입김안 약하게 불어도 배를 움직일수 있다. 이 질풍의 힘으로 천명의 목을 베어 풍참귀 리무드란 별명을 갖고 범죄자로 쫓기게 된다. 타키코가 사신천지서 속으로 들어와 처음에 만난 칠성사이다. 미남에 의지가 굳으며 강하고 당찬 성격으로 적장 앞에서도 당당한 태도를 보이며 쿨한 성격이다. 아들이 태어나면 자신을 죽일거란 예언에 의해 아버지인 황제의 형 테무단 로운으로부터 태어날때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어 도주 생활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최강의 전사가 되었으며 자신을 지켜준 소르엔을 제외하고는 믿지 않았고, 칠성사가 되는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동료 칠성사들과 같이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서서히 동료들과 신뢰를 쌓게되어 현무 칠성사의 리더로 모두를 중심에서 움직이는 존재가 된다. 현무의 무녀인 타키코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무녀가 현무에게 먹히는 산 제물이라는 것을 알고 타키코를 원래 세계로돌려보낼 정도로 타키코를 아낀다. 타키코가 돌아오고 결혼에 성공했으며 아버지와의 오해를 풀고 북갑국 차기 황제가 됐으나 타키코가 곤돌라의 노래를 부르며 죽고, 주검이된 그녀를 안으며 타키코만을 사랑하며 죽는날까지 두번다시 재혼하지 않는다. 116세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북갑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황제로 남는다. 후에 북갑국 백성들의 간절한 소원으로 죽어서 타키코와 다시만나 영원히 헤어지지 않게된다. 미남에 쿨하고 멋진 이미지로 인기가 대단했으며 환상게임 인기투표에서도 전작에서 최고 인기였던 유유를 제치고 당당히 인기투표 1위에 올랐다. 유허(토미테)(차무카 탄)() / チャムカ=ターン 성우 - 이와나가 테츠야 / 호리카와 료, 홍시호 (한국) 생일 : 2월 14일생, 나이 : 16세, 신장 :173 cm, 혈액형 : B형, 취미 : 사냥 타키코와 처음부터 여행을 같이한 칠성사다. 현무 칠성사의 허성으로 왼쪽 어깨에 자가 나타난다. 북갑국 소수민족인 가(可)족 출신으로 가난 때문에, 현상금 사냥꾼을 하며 유녀를 쫓다가 유녀가 자신과 같은 칠성사라는 것을 알게된다. 칠성사의 힘은 공격과 방어 모두 능한 얼음이며 절대로 빚나가지 않는 얼음 화살을 사방으로 쏜다. 그 위력은 요마의몸을 꿰뚫을 정도이며 상대를 얼음속에 얼리거나 얼음 화상의 모양을 바꿔 상대를 공격하기도 한다. 또 다른 능력은 백발백중의 활 솜씨로 부족 최고의 궁사이며 그 솜씨는 독약을 마셔 정신이 몽룡한 상태에서도 표적을 정확히 맞춘다. 솔직하고 올곧으며 뜨겁고 순수한 혼을 가진 열혈남으로 어머니를 위해 현상금 사냥꾼 일을 할 만큼 효자이다. 다혈질적이고 불같은 성격이라 무모하고 앞뒤 안가리는 면이 있지만, 뜨겁고 순수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소년같은 긍정적인 자세로 유두를 동료로 맞아들이고 전투에서 먼저 활을 쏘고 현무 칠성사 일행의 선두를 담당하며 무거운 분위기의 현무 일행을 전진케 하고 밝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유두와는 의형제 사이로 굉장히 친하다. 타키코를 사랑했으나 타키코가 사랑하는 사람이 유녀였기에 포기하고 칠성사로서의 의무를 다한다. 구동국과의 전쟁 때, 유두와 같이 전사하고 타키코의 성명석 목걸이인 신좌보를 유두와 함께 잔류사념으로 남아 새로운 무녀를 기다리며 지킨다. 유두(히키츠)(에무타르 첸)() / エムタト=チェン 성우 - 히야마 노부유키 / 츠지타니 코우지, 최준영 (한국) 생일 : 12월 6일생, 나이 : 21세, 신장 :184 cm 혈액형 : A형, 취미 : 말 타고 멀리 나가기 미남에 침착하고 어른스러운 현무 칠성사의 두성으로 오른쪽 눈동자에 자가 나타난다. 유허의 가족과 동맹을 맺고있는 북갑국 소수민족인 한(汗)족 출신으로 칠성사의 글자가 눈동자에 있어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을 마주치면 나타나기 때문에, 평소땐 능력을 쓰지 않기위해 안대나 붕대로 오른쪽 눈을 가리고 있다. 능력은 두가지로 첫번째 능력은 사경감으로 눈을 마주치면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파헤친다. 두번째 능력은 물을 다양한 형태로 변화시켜 공격한다. 주요 공격은 물의 용으로 상대를 산산조각내는 것이다. 침착하고 어른스러우며 내면을 쉽게 들어내지 않는 사려깊은 성격으로 냉철한 판단력과 현명함으로 브레이크 없이 날뛰는 유녀와 유허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도 냉철한 용모 속엔, 여동생을 굉장히 아끼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의형제이자 단짝인 유허와 죽는날까지 함께였으며 죽은 후에 유허와 같이 신좌보를 유허와 잔류사념으로 남아 신좌보를받을 새로운 무녀를 기다리며 지킨다. 뛰어난 외모와 침착한 성격으로 유녀 다음으로 인기가 많았다. 오쿠다 에이노스케() 성우 - 나카노 유타카 / 오오카와 토오루(환상게임 현무개전드라마CD&게임판) 천정과 지살 사천왕 원작 제2부(OVA2)의 스토리. 천정() 성우 - 코스기 쥬로타 / 시오자와 카네토 시교 렌(박성현)() / 렌호우(성현)() 성우 - 이시다 아키라 카미시로 미이루(박신희)() / 미이스우(신희)() 성우 - 아마노 유리 한귀 비고(히코우)() 성우 - 타카기 와타루 용수(요우스이)() 성우 - 토치카 코이치・미도리카와 히카루 그 외 사카키 마요() 성우 - 노다 쥰코 환상게임 외전7~8 -영광전-밑OVA3의 주인공으로, 주작의 2대째 무녀. 오오토리 마도카() 게임환상게임 주작이문의 주인공. 주작의 무녀 히무로 미사키() 성우 - 오노 료코 게임환상게임 주작이문에 있어서 주인공의 소꿉친구. 청룡의 무녀. 용어 사정국 사신의 전설 칠성사 신좌보 매체 사신천지서와 사신천지서 소설 일러스트·원작:와타세유우. 저자:니시자키 메구미. 환상게임 외전 -겐로전- 환상게임 외전 -승룡전- 환상게임 외전 -설야차전- 환상게임 외전 -유성전- 환상게임 외전 -주작비전- 환상게임 외전 -청람전- 환상게임 외전 -영광전(상편)- 환상게임 외전 -영광전(하편)- 환상게임 외전 -주옥전- 환상게임 외전 -봉명전- 환상게임 외전 -우애전- 환상게임 외전 -삼보전(상편)- 환상게임 외전 -삼보전(하편)- TV애니메이션 원작과의 애니메이션의 차이점 강미주가 입시에서 고민하는 것에 대한 묘사나, 강미주의 엄마와의 언쟁 장면이나 커트등, 초반에서의 전개가 다르다. 유장(치리코)의 「글자가 나오고 있을 때와 사라지고 있을 때의 성격이 틀리다」 설정이나, 여진실국(女誠国)편의 에피소드가 없다. 별보기 축제의 내용이 다르다. 각각의 칠성들이 사망할 때의 연출이 있다. 유심(나카고)이 죽을 때까지의 유귀(타마호메)와의 회화. 강미주의 최후의 소원이 「전쟁으로 부서진 거리를 다시 올바르게 되돌려줘」-(애니메이션), 「유귀(타마호메)와 함께 있고싶어」-(원작) 원작에서는 직접 진유귀(타카)에 환생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유귀(타마호메)인 채로 환생 하여, 그 후에 진유귀(타카)로 환생 한다. 원작에 여기저기 있던 속옷 노출장면이 많이 줄었다, 또 잔혹묘사도 삼가되고 있다. 스탭 원작 - 와타세 유우 (쇼가쿠칸 출판사에서 간행한다) 감독 - 카메가키 하지메 각본 - 우라사와 요시오 캐릭터 디자인· 각 이야기 에필로그 총 작화 감독 - 모토하시 히데유키 미술 감독 - 나가사키 히토시 메카 디자인 - 나가시마 마유미 색채 설계 - 이와미 미카 촬영감독 - 이시즈카 토모 음악 - 혼마 유스케 음향 감독 - 시미즈 카츠노리 애니메이션 제작 - 아오키 시게오 감독 - 이와타 케이스케(도쿄TV), 기무라 교타로, 하기노 켄 제작 - 도쿄TV、 XEBEC l Production I.G l YOMIKO ADVERTISING、피에로 주제가 일본판 오프닝테마 「사랑스러운 사람을 위해서」 작사 - 아오키 쿠미코 / 작곡 - 키요오카 치호 / 편곡 - 야노 타츠미 / 노래 - 사토 아케미 엔딩테마 「두근거림의 도화선」 작사 - 리노즈카 레오 / 작곡 - 이에하라 마사츠구 / 편곡 - 야마나카 노리마사 / 노래 - 콘노 유카리 한국판 오프닝테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개사 - 신동식, 이창희, 윤희선 외 / 작곡·편곡 - 이창희 / 노래 - 김현아 엔딩테마 「두근거림의 도화선」 작곡·편곡 - 이창희 / 노래 - 김현아 삽입곡 「알고 있었을텐데..」 개사 - 신동식 / 노래 - 김현아 방영 리스트 방송국 관련CD OVA 오리지널 비디오 시리즈 환상게임(OVA1) 스탭(OVA1) 주제가(OVA1) 오프닝 테마 「아침이 오기 전에(夜が明ける前に)」 노래 - 사토 아케미 삽입곡 「Voice」 작사 - 아오키 쿠미코 / 작곡 - 이에하라 마사츠구 / 편곡 - 야마나카 노리마사 / 노래 - 미도리카와 히카루 엔딩 테마 「내일의 나를 믿고 싶어(明日の私を信じたい)」 작사 - 아오키 쿠미코 / 작곡 - 이에하라 마사츠구 / 편곡 - 야마나카 노리마사 / 노래 - 이시즈카 사오리 방영 리스트(OVA1) 환상게임 제2부(OVA2) 스탭(OVA2) 주제가(OVA2) 오프닝 테마 「Star」 작사 - 아오키 쿠미코 / 작곡 - 키요오카 치호 / 편곡 - 야노 타츠미 / 노래 - 사토 아케미 엔딩 테마 「꿈일지도 몰라(夢かもしれない)」 작사 - 아오키 쿠미코 / 작곡 - 이에하라 마사츠구/ 편곡 - 야마나카 노리마사 / 노래 - The S・h・e 방영 리스트(OVA2) 환상게임 -영광전-(OVA3) 스탭(OVA3) 주제가(OVA3) 오프닝 테마 「지상의 성좌(地上の星座)」 작사 - 모리 유리코 / 작곡·편곡 - 사카이 요시 / 노래 - 우에노 요코 엔딩테마 「YES-여기에 영원이 있어-(YES-ここに永遠がある-)」 작사 - 모리 유리코 / 작곡·편곡 - 사카이 요시 / 노래 - 코야스 타케히토 방영 리스트(OVA3) 게임 오토메이트에서 2008년 5월 29일에 발매된 플레이 스테이션 2 게임. 2009년 6월 25일에는 《환상게임 현무개전 외전 거울의 무녀 》와 《환상게임 주작이문》이 커플링 된 닌텐도 DS 소프트 〈환상게임DS〉가 발매되었다. 한정판에는 드라마 CD의 주작편 《주작7전사, 유유쟁탈전!?》과 현무편 《한밤중의 격투! 전설의 버섯을 찾아서》가 동봉되었다. 주작의 무녀인 주인공 및 청룡의 무녀인 친구는, 만화와는 달리 미주와 진아가 아닌 오리지날 캐릭터이다. 성우 또한 과거의 드라마 CD·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새로 캐스팅 되었다. 성우 리스트 주작 오토리 마도카 (음성 없음) 본 작품의 주인공. 주작의 무녀. 타마호메 (성우: 미야노 마모루) 유성 (성우:코니시 카츠유키) 유유 (성우:미나가와 쥰코) 유익 (성우:토리우미 코스케) 유진 (성우:미야케 켄타) 유정 (성우:미야타 코우키) 유장 (성우:키무라 아키코) 청룡 히무로 미사기(성우:오노 료코) 작품의 소꼽친구. 청룡의 무녀. 유심 (성우:나리타 켄) 유항 (성우:카키하라 테츠야) 유방 (성우:혼나 요코) 유저 (성우:나카무라 유이치) 유미 (성우:노무라 켄지) 유기 (성우:야마우치 토시오) 현무 유허 (성우:이와나가 테츠야) 유두 (성우:히야마 노부유키) 백호 유루 (성우:쿠스다 토시유키) 그 외 태일군 (성우:카사이 사키) 오빠 (성우:노미야 카즈노리) 소화 (성우:카타가이 마코) 土黙勒 (성우:니시마츠 카즈히코) 유귀의 아버지 (성우:스기사키 료) 유이렌 (성우:와다 카요) 타다히데 (성우:키쿠치 코코로) 주제가 오프닝 테마 〈DISCOVERY〉 작사:타나카 히데노리 작곡:野間康介 편곡:Jin Nakamura 노래:미야노 마모루 외부 링크 환상게임 - 미만부 와타세 유우 소녀 코믹 1995년 애니메이션 1996년 애니메이션 1997년 애니메이션 1998년 애니메이션 2001년 애니메이션 2002년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비디오 애니메이션 하이 판타지 만화 TV 도쿄 계열 애니메이션 피에로 (기업) 반다이 비주얼의 애니메이션 하이 판타지 애니메이션 연애 만화 와타세 유우 사신을 소재로 한 작품 이세계물 투니버스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애니맥스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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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T%E3%83%BBR%E3%83%BBY%20-RETURN%20TO%20YOUR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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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Y -RETURN TO YOUR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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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Y -RETURN TO YOURSELF-〉(; )는 TWO-MIX의 3번째 싱글이다. 개요 일본 TBS계 《슈퍼 축구》엔딩 테마이다. 2번째 앨범《BPM143》으로부터 싱글 커트된 작품으로, 커트에 해당해서 편곡이 크게 변경되었다. 표기에는 없지만, 마카이노 코우지 (馬飼野康二)가 작곡한 얼마 없는 작품 중 하나이다. C/W(커플링곡)은 《신 기동전기 건담W》의 테마송 후보곡이였다. 이 싱글은 오리콘 최고 순위 17위를 기록하였다. 또한 리믹스 미니앨범《TWO→(RE)MIX》과 동시 발매하였다. 수록곡 작사,작곡,편곡:TWO-MIX T·R·Y -RETURN TO YOURSELF- (Super Single Edition) BELIEVE T·R·Y -RETURN TO YOURSELF- (Super Single Edition) (Original Karaoke) BELIEVE (Original Karaoke) 수록 작품 T·R·Y (오리지널 버전) BPM143 20010101 T·R·Y -RETURN TO YOURSELF- (싱글 버전) BPM "BEST FILES" SUPER BEST FILES 1995~1998 Categorhythm T·R·Y~RETURN TO YOURSELF~(High Fly Vocal Mix) BPM"DANCE∞" BELIEVE BPM "BEST FILES" Categorhythm 같이 보기 TWO-MIX TWO-MIX의 노래 킹레코드 (일본)의 노래 1996년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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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90%EC%9E%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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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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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정체자: 甘藷, )는 쌍떡잎식물 통화나물목 가지과의 여러해살이 식물로, 벼, 밀, 옥수수와 함께 세계 4대작물에 해당한다. 또한 고구마, 옥수수와 함께 대표적인 구황작물(救荒作物)로 인류를 기아의 공포에서 구제한 고마운 작물이기도 하다. 원산지는 남미 안데스 지역인 페루와 북부 볼리비아로 알려져 있으며, 예로부터 든든한 한 끼로도 손색이 없는 주식(主食)이며, 부식으로도 다양하게 이용되어 왔다. 콜럼버스의 남미 탐험이후 16세기 중후반에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유럽에 전래되었으나 초기에는 강한 거부감으로 인해 관상용, 가축사료, 소수의 가난한 하층민들의 식품으로 이용되었을 뿐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유럽에서 감자를 식품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 후반 부터이며 구황식품이자 주식으로 자리잡으면서 인구폭발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감자는 아일랜드와 독일 등 전세계 많은 지역에서 주식으로 사용되어 지고 있으며 다양한 요리에서 식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포테이토칩과 프렌치프라이 등으로 인해 현대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식재료에 속한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도 감자를 우주인들의 식량 자원으로 사용하기 위한 연구와 무중력 공간에서의 재배실험을 진행하기도 했다. 감자는 추운 지역이나 4,000m 고산지대에서도 재배가 가능하고, 3개월이라는 단기간내에 수확이 가능하며 양분을 땅속에 저장하므로 전란에도 피해가 적다. 척박한 환경과 가뭄에 강하며, 다 자라지 않은 상태에도 수확하여 식용할 수 있고, 수확 후 별도 가공없이 즉시 요리가 가능하므로 가난한 농부에게는 경제적이다. 식용하는 부위는 뿌리가 아니고 줄기이며 이를 덩이줄기라 한다. 한국에서는 하지감자, 지슬, 북감저(北甘藷), 마령서(馬鈴薯)라고도 한다. 한반도에는 1824년에 처음 전래되었으며 본격적으로 재배를 한 시기는 한국전쟁이후 부터이다. 한국인에게 감자란 가난의 상징이고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을 연상하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제주도에서는 시설재배를 통해 2월에 출하하고 내륙지방에서는 6월말, 강원특별자치도 고랭지 감자는 10월에 수확하므로 1년내내 신선한 감자를 맛볼 수 있다. 전세계 총생산량은 2020년 기준 약 3억6천만톤이며 금액으로 볼 때 40조원 정도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최대 생산국은 중국으로 7천8백만톤, 이는 전세계 총생산량의 22%를 차지한다. 한국의 경우 매년 약 25,000헥타르(7천6백만평) 땅에서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연간 생산량은 약 70여만톤으로 총생산량 중 강원특별자치도에서 33%, 제주도에서 22%를 재배하고 있으며 전체 생산량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품종은 '수미감자'이다. 기원 감자의 원산지는 페루, 칠레, 볼리비아의 안데스 고지대와 티티카카 호수 주변부로 알려져 있다. 처음으로 재배된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약 7,000여년 이전 시기부터 재배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000년경 전성기를 이루었던 모체문화의 토기에서 감자와 같은 모습의 식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아주 일찍부터 지역 원주민들의 주식이었다고 보여진다. 감자는 해발 4,000m 고지대에서 재배가 가능하여 잉카제국의 주식 중 하나였다. 안데스 고산지대에 거주하던 남미 원주민들은 감자를 장기 저장하기 위해서 냉동 건조 과정을 거쳐 추뇨(스페인어 Chuño)라는 저장식품을 만들었다. 제조 과정은 단순한데, 감자를 밤새 외부에 두어 서리를 맞혀 수분을 제거하고, 다음날 언 감자를 밟아서 물기를 한번 더 제거한 후, 낮 동안 햇볕에 말리는 과정을 최소 세 번에서 열 번 이상 반복하여 추뇨를 만들었다. 완성까지는 최대 4주가 걸리기도 한다. 안데스 지역의 큰 일교차를 이용하여 동결 건조 감자를 만드는 것이다. 완성된 추뇨는 냉장 보관하지 않아도 10년 동안 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기저장이 가능하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추뇨는 흉년에 대비한 좋은 식량자원이었으며, 수분이 거의 없어 가볍기 때문에 운반이 용이하여 군대식량으로 사용하였고 세금으로 납부도 하였다. 고대 잉카제국을 건설할 때 일꾼들에게 제공하였고 스페인의 은광개발시 원주민 노동자들에게 식품으로 추뇨를 제공했다고 한다. 감자 껍질의 유무에 따라 ‘추뇨 블랑코(blanco; 하얀 추뇨)’와 ‘추뇨 네그로(negro; 검은 추뇨)’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전자는 감자 껍질을 까서 흰색의 감자 속살 상태에서 흐르는 물에 담가둔 감자를 냉동 건조한 것이며, 후자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로 바싹 말려 짙은 색을 띄고 있다. 영양학적으로 탄수화물, 단백질, 무기질, 비타민 등이 함유되어 있으며, 건조 과정으로 인해 비타민D와 단백질 함량이 일반 감자에 비해 높다. 현지 케추아어 속담에 "추뇨 없는 수프는 사랑 없는 인생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추뇨는 오늘날에도 페루, 볼리비아, 안데스 고지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식재료에 속한다. 추뇨는 특별히 강한 풍미가 없어 다른 향미가 잘 배어든다. 그러나 제대로 씻어서 껍질을 벗기지 않으면 쓴맛이 나는 수가 있다. 요리를 할 때는 물에 담가서 녹인 다음 사용하기도 한다. 수프나 스튜에 넣으면 다시 말랑말랑해지며, 쪄서 치즈를 뿌리고 돌절구에 찧어 가루로 만들어 고기 요리를 할 때 넣는 등 쓰임새는 매우 다양하다. 추뇨 블랑코는 당밀과 과일을 넣어 마자모라(mazamorra)라는 후식으로 만들 수도 있다. 고추를 넣은 매콤한 수프나 튀김류 이외에도, 토끼고기를 넣은 코네호 에스티라도(conejo estirado)는 볼리비아의 대표 특선 요리로 꼽힌다. 어원 스페인어 감자와 고구마는 공히 남미가 원산지이며 땅속에 양분을 저장하고 여러개의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다는 점 등에서 유사한 점이 많음에도 식물학적으로는 밀접한 관련이 없다. 하지만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유럽인들은 감자보다도 먼저 고구마를 접하게 되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1492년 콜럼버스 탐험대원들이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고구마를 맛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고구마를 발견했을 당시에 해당지역의 원주민인 타이노족들은 이를 바타타(batata)라고 불렀다. 스페인 왕립 학술원 측의 설명에 의하면 감자나 고구마를 지칭하는 스페인어 파타타(patata)의 어원은 서인도 제도의 원주민 타이노족의 말인 바타타(batata, 고구마)와 잉카족의 언어인 케추아어 파파(papa, 감자)를 결합한 합성어라고 한다. 파타타(patata)라는 새로운 합성어를 만든 이유는 감자를 뜻하는 papa(파파)라는 단어가 로마 교황을 의미하는 단어 Papa(파파)와 같기 때문에 이를 피하고자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영어 감자보다 먼저 영국에 전래된 고구마를 영국에서는 potato(포테이토)라 하였으며, 이는 스페인어 patata(파타타)에서 유래되었다. 고구마와 감자가 영국에 전래된 이후의 농업과 식물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두 종류를 모두 potato(포테이토)라 부르면서 때에 따라서 감자를 white potatoes(화이트 포테이토)라 했을뿐, 감자와 고구마에 대해 크게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6세기 영국의 약초학자 존 제라드(John Gerard)에 의하면, 당시에 영국에서는 먼저 전래된 고구마를 potato(포테이토)라고 했으며, 오늘날 감자로 알려진 종에 대해서는 bastard potatoes(서자 감자), Virginia potatoes(버지니아 감자)라는 정도의 용어를 사용했다 한다. 그러던 것이 영국에 대기근이 닥쳤을 때 감자가 구황작물의 역할을 하면서 점차 주식(主食)으로 삼게 되자 감자를 potato라고 부르고, 별식으로 먹는 고구마를 감자와 구분하기 위해서 '달콤한 감자'라는 뜻의 Sweet potato(스위트 포테이토)로 부르게 되었다. potato라는 말이 고구마에서 감자로 변경된 것이다. 고구마는 썩기 쉬운 성질 때문에 저장성이 떨어지면서 군것질 거리나 별미로 인식된 반면에, 장기보관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구황작물로써 우수성이 입증된 감자는 양식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감자를 아일랜드 감자(Irish potatoes) 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아일랜드 대기근 이후 감자를 주식으로 했던 아일랜드인이 대거 미국으로 집단이주해온 영향 때문이다. 감자의 비격식적인 표현인 스푸드(spud)라는 이름의 기원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감자를 심기 전에 흙에 구멍을 파는 것에서 유래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타 스페인 탐험가들이 감자를 발견한 초기에 붙였던 이름 중에 하나가 '백색 송로버섯'이라는 의미에 Tartuffoli(타르투폴리)였다. 그 당시에 감자는 현대에 개량된 감자보다는 훨씬 알이 작았고 송로버섯 처럼 땅속에서 성장하는 특성 때문에 잉카인들이 송로버섯과 비슷한 작물을 먹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Tartuffoli(타르투폴리)에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에서는 tartuffo(타르투포) 라 하였고 독일에서도 kartoffel(카르토펠)이라 부르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감자를 '땅속의 사과'라는 뜻을 가진 pomme de terre(폼 드 테르)라 한다. 과거에 유럽에서는 낯선 열매에는 모두 사과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남미에서 온 낯선 열매인 감자를 보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전파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기인 1536년에 남미지역에서 황금을 찾아나섰던 스페인 탐험가 곤잘로 히메네스 데 케사다가 안데스 고산지역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이 주식으로 삼던 감자를 유럽인으로서는 처음 발견했다. 같은 해에 항해용 비상식량으로 감자를 선적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스페인 식민지 지배자들은 포토시 은광산에서 일하는 인디오들에게 말린 감자(추뇨)를 공급했다고 한다. 또한, 1573년 스페인 세비야의 상그레 병원 물품 구입 목록에 감자가 들어있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늦어도 16세기 중후반 경에 감자는 스페인 탐험가들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여진다. 새로운 식품은 호기심과 동시에 두려움 속에 강한 거부감을 야기하기도 한다. 거부감이 강한 식품의 경우 기존 음식과 농업 간의 균형이 심각하게 깨어지는 기근 등이 발생해야만 음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 준 식재료 중에 하나가 감자다. 남미에서 이미 수 천년 간에 걸쳐 주식으로 검증이 이루어졌지만, 16세기에 처음 전래 되었을 때 유럽인들의 거부감은 커서 전혀 환영 받지 못했으며 거부를 너머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식품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다. 감자는 고질적인 기근을 극복하게 만들어 준 고마운 구황작물로 위상이 올라갔고 이런 감자의 도입은 식량 혁명이란 평가도 받게 되었다. 처음 감자가 유럽에 전래 되었을 때, 유럽에는 이미 무(radish) 나 당근 등이 있어 뿌리채소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으나, 감자는 이들과 달리 땅속에서만 성장하고 뿌리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양새 등으로 인해 유럽인들은 그다지 감자를 좋게 보지 않았다. 종교적인 해석에 의하면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과실만이 식물(食物)로 허락된 것인데 감자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는 하나 땅속에 양분을 저장하는 방식이고, 씨 뿌려 파종, 번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잘라 파묻듯이 하는 방법이 기괴하여 상스럽지 못하다고 여기며 '악마의 야채' 라고 부르기도 했다. 기독교화 되어있던 유럽인들에게 감자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부정한 식품이며 신이 허락하지 않은 음식물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감자에 대한 무지 때문에 싹이 난 감자를 잘못 먹고 심한 복통과 부작용을 경험하며 더욱 기피하게 되었다. 감자를 자르면 표면 색깔이 거무스름하게 변하게 되는데 이것을 불길하게 여겼으며, 최음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음란을 조장한다 생각했다. 일찍이 아일랜드가 감자를 주식으로 삼은 후 주민들의 영양상태가 좋아진 덕분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나 이를 감자의 최음 효과 때문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지금에 개량된 감자와는 달리 당시의 감자는 울퉁불퉁, 거무튀튀하고 알도 작아 볼품이 없었고 표면은 쭈굴쭈굴한게 괴사된 피부와 비슷하여 마치 한센병 환자의 피부를 연상하게 했으며 한센병을 옮긴다는 소문까지 돌자 혐오식품으로 간주하며 식용과 재배를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200 여년동안 감자는 식물학적 호기심에 의한 관상용 재배, 돼지나 먹는 가축사료, 하층민들이 먹는 '빈민의 빵' 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와 프랑스의 농경학자 파르망티에의 노력으로 감자에 대한 편견은 조금씩 깨어지기 시작했으며 19세기들어 감자는 점차 좋은 구황작물이자 식품으로 이미지가 개선되며 유럽인들의 식탁에 자주 올라가게 되었다. 이는 18세기에 빈번했던 흉년, 잦은 전쟁에 의한 기근, 인구 증가로 인해 식량자원의 부족에서 비롯되었다. 20세기 들어 전반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 기간 중에 감자는 구황식품의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재배와 섭취가 적극 장려되었고 건강식품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까지 지니게 되었다. 유럽인의 주식 빵의 재료인 밀은 전란과 가뭄 등 이상기후에 민감한데 반해 감자는 척박한 환경에 적응력이 뛰어났다. 재배에도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으며 수확 후 밀처럼 가루로 만들거나 하는 별도의 가공이 필요치 않았다. 빵을 구우려면 오븐을 이용해야 하고 연료가 많이 소비되지만 감자는 냄비 하나만 있으면 되었고 연료도 적게 들어가는 장점이 있어 가난한 농민이나 하층민들에게 좋은 식재료가 되었다. 영양가 면에서도 훌륭한 식품이라 인구 증가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3개월만에 수확이 가능했고 고구마와 달리 장기 저장도 가능했다. 한편, 유럽에서 감자가 식품으로 받아들여진 후 빠른 속도로 재배지역이 확장된 이유 중에 하나는 감자에 대해서는 십일조가 면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인들이 빵을 포기하고 성서적인 근거가 없는 '악마의 작물' 을 식탁에 올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빵이란 그냥 평범한 음식의 한 종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마시대부터 먹었었던 일용할 양식의 대표주자인 빵은 출애굽기 등 성경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된 이후에 빵은 구세주의 육체로서 종교적으로 볼 때 성령의 음식이었다. 육신의 건강과 생명을 연장시켜주며 영혼까지 치유해주는 역할을 빵이 한다고 암암리에 생각하고 있었다. 부귀의 상징이었던 흰 빵은 가난한 이들에게는 갈망의 대상이었고 안식일 미사 중 성체성사때나 맛 볼 수 있었다. 신령한 빵을 만들기 위해 경작하던 밀밭에 감자를 심는 작물전환은 영혼의 구원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연이은 기근이 고정관념을 깨고 감자를 식품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감자는 좋은 가축 사료였기 때문에 돼지 사육량이 증가하여 유럽인들의 고기 섭취량을 늘려주었다. 종전에는 겨울이 다가오면 가장 부담이 되는 가축이 돼지였다. 개는 사냥에 쓸모가 있었고 말은 운송과 군사용, 소는 농경에 필요한데다 우유까지 제공했다. 하지만 돼지는 먹기만 했고, 특히 잡식성이라 사람과 먹이 경쟁을 벌이는 가축으로 겨울만 되면 돼지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소나 말은 건초를 준비하면 되지만 돼지는 달랐다. 그래서 추워지기 전에 번식용을 제외하고는 전략적 차원에서 도축하여 베이컨, 소세지 등을 만들어 훈제나 염장을 해서 저장해 두었다가 겨울양식으로 사용했다. 겨울철 사료가 부족한 관계로 상당수를 도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육 두수를 늘리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저장성이 뛰어난 감자 덕분에 계절에 상관없이 돼지 사육이 보편화되어 사육두수를 증가시킬 수 있게 되었고 유럽인들의 동물성 단백질 섭취량이 늘어나게 되었다. 아울러 사료로써 유용성 때문에 식용치 않는 지역에서도 재배 명맥을 이어갔고 훗날 식용전환시 신속하게 재배농가에 감자가 보급될 수 있었다. 보급 아일랜드 영국을 통하여 감자가 전래된 후 17세기 초반에 유럽에서는 가장 먼저 감자를 식품으로 받아들여 주식으로 삼았다. 이는 16세기 중반 영국의 헨리 8세 시기부터 아일랜드에 대한 식민지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는데, 이때 영국이 아일랜드인들을 영세 소작농으로 전락시킨 후 곡물 수탈정책을 실시하자 식량이 부족해짐에 따라 취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영양상태가 좋아지자 아일랜드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또한 점차 감자 재배면적은 늘어났는데 이는 감자가 타 작물에 비해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월등히 높았으며, 아일랜드 같은 척박한 환경하에서 매우 적합한 작물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감자는 이미 아일랜드인들의 주식으로 자리잡았는데, 불행하게도 감자라는 단일작물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았던 탓에 19세기 중반들어 감자 흉작으로 인해 아일랜드 대기근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아일랜드는 여전히 감자를 많이 먹고 있으며, 감자를 주식으로 하고 감자반찬을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감자요리가 존재한다. 독일 스페인의 남미개척에 참여했던 이탈리아 출신 선원들에 의해 이탈리아로 감자가 전해진 후 독일로 전래되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나폴리 그리고 독일을 통치하던 왕가는 합스부르크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독일에서의 감자에 대한 거부감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하인들 중에 감자를 먹느니 차라리 주인을 바꾸겠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30년전쟁(1618~48)에 독일지역으로 참전했던 스페인 용병들이 말 사료로 쓰던 감자를 군량미가 떨어지자 먹곤 했다. 배를 곯던 독일 농민들이 이를 얻어먹으며 점차 식품으로 받아들인 후 조금씩 재배가 시작됐다. 그러던 것이 여러 전쟁을 거치면서 감자가 구황작물로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86)는 적극적으로 감자 재배와 섭취를 장려하였다. 농경조건이 척박했던 독일지역은 자주 기근에 시달렸는데 감자 덕분에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 독일인들은 프리드리히 2세가 고질적인 기근문제를 해결해준 것을 그가 이룬 군사적 업적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2세를 '감자대왕' 이라 부르고 그의 묘지를 방문할 때는 감자를 올려놓고 오기도 한다. 2차대전으로 혹독한 시련을 경험한 프랑스는 독일인들의 체력의 원천은 주식인 감자에 있다고 결론짓고 프랑스인의 감자 섭취를 권장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독일의 감자 소비량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보다 월등히 앞서고 있다. 또한, 독일하면 맥주, 소시지와 함께 감자가 떠오를 정도로 감자는 빵과 더불어 독일인의 주식에 속한다. 프랑스 17세기 초반에 농학자 올리비에 드 세르(1539-1619)가 감자를 소개한바가 있으나 프랑스 사회에서의 감자에 대한 거부감은 매우 컸다. 감자가 나병을 퍼뜨린다며 재배 자체를 1748년부터 법으로 금지할 정도였다. 이런 감자를 식품으로 널리 보급하는데 기여한 이는 농경 학자였던 앙투안 파르망티에 였다. 그는 7년 전쟁(1756~63)에 참전했다가 독일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중에 감자를 주식으로 먹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걱정과 달리 양호한 건강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면서 감자의 우수성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763년, 귀국후에 감자에 대한 연구와 보급에 앞장섰다.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감자의 우수성을 알리는 연구결과도 발표하고, 궁중연회에 감자요리를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시식회도 여러차례 개최하는 등의 노력 끝에 1772년에는 파리 약학청으로부터 식용작물로 인정받았고, 재배금지법도 폐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왕궁에서의 관상용 재배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자장식으로 감자 꽃 사용을 이끌어내며 감자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여러 결실을 거두며 프랑스 사회가 감자를 식품으로 받아들이게 된 시점은 1785년에 흉작으로 기근이 발생했을 때부터 였으며, 프랑스 대혁명 후에 식량부족 문제에 봉착하자 감자 식용문화는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1794년에는 메리고(Mérigot)라는 여성이 오로지 감자만을 주재료로 삼은 31가지 요리를 소개하는 요리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혹독한 시련을 겪은 프랑스는 감자를 주식으로 한 독일 국민이 체력적으로 더 우세하게 됐다는 결론을 내리고 정부차원에서 감자섭취를 장려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현대 프랑스인들은 감자를 많이 먹는다. 연간 1인당 감자소비량은 125㎏이나 된다. 이는 감자대국인 미국인들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의 2배를 넘는 양이다. 영국 영국은 스페인을 거치지 않고 16세기 후반에 중남미 지역으로부터 월터 롤리 경이 직접 감자를 들여왔다는 설이 있다. 또한 영국은 다른 유럽 지역과는 달리 가장 늦은 19세기 중반이후가 되서야 감자를 식품으로 받아들였다. 영국인들은 그간 아일랜드가 감자를 주식으로 삼자 '돼지 사료를 먹는 미개하고 지저분한 민족' 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었다. 이는 16세기에 단행된 종교개혁(1534년)으로 아일랜드인들의 종교인 카톨릭에 대한 탄압과 멸시 그리고 반교황주의와 식민지 지배 민족으로서의 우월감에 입각한 발언이었다. 1765년에 벌어진 선거에서는 "감자는 가라. 교황주의자도 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카톨릭 교도였던 경쟁자를 비방하며 감자를 정치도구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후 도시로 인구가 몰려들고 인구증가와 더불어 19세기 들어 발생한 기근으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점차 감자를 식품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1860년경에 조셉 말린(Joseph Malin)이 런던에서 흰살 생선과 감자칩을 함께 튀겨서 저렴한 가격에 팔았는데, 이 튀김 요리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영국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피시앤칩스라 불리우게 된 이 패스트 푸드는 칼로리가 높아 그 당시 힘든 육체노동을 하던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아주 적합한 음식이었던 것이다. 한편, 1차대전이 발생하여 노동력이 감소하고 공습으로 작물피해가 증가하자 영국왕실은 버킹검 궁전 앞에 잔듸를 걷어낸후 감자와 채소들을 심어 모범을 보이며 전 영국인들에게 개인 채원 만들기와 감자재배를 권장했다. 영국 교회(성공회)도 특별조례를 통해 안식일인 일요일에도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일은 1930년대 경제대공황이나 2차세계대전시에도 반복되었고 감자는 구황작물로써의 역할을 감당해냈다. 2차대전 당시에 처칠이 피시앤칩스를 '좋은 반려자'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영국인들의 지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컴포트 푸드(comfort food)였으며, 오늘날 피시앤칩스는 영국의 대표음식에 속한다. 미국 맥도날드, 버거킹으로 대변되는 패스트 푸드의 나라인 미국에 감자가 전래된 시기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건너가 서부를 개척한 17세기 전반기로 추정된다. 백달러 지폐의 주인공인 벤저민 프랭클린(1706~90)이 파리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할 때 감자요리를 접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파르망티에가 개최한 연회에 자주 참석했던 것 같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미국 초대 주프랑스 대사를 지낸 토머스 제퍼슨은 파리에서 먹었던 감자튀김을 미국 대통령이 된 후 1802년 백악관에서 소개했는데, 프랑스식 감자튀김이라고 표현한 것이 프렌치 프라이(French Fries)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으며, 방문객들에게 대접하면서 점차 미국인들이 감자를 식품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일랜드 대기근(1845~52) 발생하여 북미대륙으로 수차례 집단이주한 아일랜드인들은 새로운 터전에 감자를 심기 시작했다. 그들로 인해 감자는 미국 땅에 식품으로 온전히 정착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감자를 아이리시 감자(irish potato)라고도 부르는데 바로 이러한 역사에 기인한다. 20세기 들어 세계대전을 치루며 곡물생산량이 급감하자 정부차원에서 감자를 홍보하고 재배를 장려한 결과, 미국인들의 감자 소비량은 크게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전후에도 미국인의 식탁에서 햄버거, 스테이크, 치킨과 함께 빠지지 않고 오르는 음식의 반열에 감자튀김(French Fries)도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미국은 다인종 다민족 국가이자 이민자로 이루어진 나라인 만큼 전세계 각국의 다양한 감자요리를 맛볼 수 있다. 1인당 연간 62㎏정도를 소비하며 25% 정도가 생감자이고, 포테이토칩용 11%, 튀김용의 냉동감자가 35%를 차지한다. 생산량은 연간 약 2천만톤으로 세계 5위이며 아이다호(Idaho)주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어 ‘감자의 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감자는 러셋감자(russet potato : 흰감자의 한 종류)로 미국에서 생산되는 감자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이 있을 정도다. 벨기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벨기에와 네덜란드에는 16세기경에 감자가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벨기에에 있는 감자튀김 박물관(Frietmuseum) 측의 주장에 의하면, 스페인 테레사 수녀(1515~1582)가 개발한 감자튀김 요리가 벨기에 지역에 전래되어 보편화 되었다고 한다. 또한 벨기에의 역사학자 조 제라르(Jo Gerard) 역시 1680년대 벨기에의 뫼즈강 유역에서 작은 생선을 튀겨 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강물이 얼어 붙어 물고기를 잡을 수 없게 되면 물고기 대신에 감자를 길게 썰어 튀겨 먹었다고 한다. 점진적으로 감자를 식품으로 받아들인 벨기에는 현재 1인당 감자튀김 섭취량이 가장 많은 유럽 국가로 알려져 있다. 감자튀김에 대한 벨기에인들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지역마다 감자튀김 전문점이 있으며, 집집마다 비법 레시피가 존재할 정도다. 특히 감자튀김은 자국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며 프랑스와는 원조논쟁을 벌리고 있다. 또한 세계 최대 감자 가공품 수출국 중 하나로 한해 감자 가공식품 생산량이 510만톤이며 이중 90%를 수출하고 있다. 세계 유일에 감자튀김 박물관(네덜란드어 Frietmuseum)도 가지고 있다. 중국 중국은 전세계에서 감자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다. 그러나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서 감자가 전래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중국학자들이 명나라 만력제 시대에 유입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감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청나라 강희제 때 쓰여진 《송계현 현지 식화, 松溪县县志·食货》라는 책이다. 대만에는 17세기에 네덜란드인에 의해 전래되었으며, 1914년 경부터 본격적으로 재배가 시작되었다. 일본 감자의 일본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1598년경 네덜란드인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자바섬의 자가타라(자카르타의 옛 이름)를 경유하여 나가사키로 전래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자가타라이모(ジャガタライモ)'로 불리었으나 이것이 단축되어 '자가이모'(ジャガイモ, 감자)로 불리고 있다. 에도 시대 이후, 쌀 재배에 불리한 산간, 한랭지에 보급되어 널리 재배되었기 때문에, 각 지방마다 다양한 이름이 존재하며 품종도 다양하다. 에도 막부 후기인 18세기 말에는 러시아의 영향으로 홋카이도 동북 지방에서 기근을 대비한 작물로 재배되기도 했다. 난학자 다카노 나가히데(高野長英)는 감자 재배를 장려하였다. 또 에도 후기에는 가이국(甲斐国)의 대관이었던 나카이 세이타오가 감자 재배를 장려하여 향화 원년(1801년)에는 야마나시 고후(山梨県甲府市)에서 감자를 재배했다고 『甲駿豆相採薬記』에 기록되어 있다. 또 에도 시대 후기에는 홋카이도의 아이누도 감자를 재배하고 있었다. 간세이 연간, 탐험가 모가미 토쿠나이(最上徳内)가 현재의 도야코쵸 아부다에 씨감자를 반입해, 아이누에게 재배시킨 것이, 홋카이도에서의 감자 전래라고 한다. 본격적으로 재배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홋카이도 개척에 이용되면서 부터이다. '감자판관'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초대 네무로(根室) 현령에 의해 보급되었으며, 가와타 류키치(川田龍) 남작이 영국에서 남작품종(Irish Cobbler)을 도입한 후로 감자 재배가 정착되었다. 처음에는 서양 요리의 식재료로써 수요였지만, 서서히 일본의 가정 요리에도 사용되었다. 기타 국가들 7년전쟁(1756~63)때 감자가 군대식량으로 사용되는 것을 지켜본 스웨덴 출신 룸포드 백작이 독일의 포메른 지역에서 감자를 가져가 스웨덴에 보급하였다. 그는 여러 요리법도 고안했으며 지금도 뮌헨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으며 '룸포드 퐁 수프' 라는 요리에도 그의 이름이 남아있다. 한국 전래 감자는 1824년(순조 24)경에 조선에서 산삼(山蔘)을 찾기 위해 숨어 들어온 청나라 사람들이 식량으로 쓰려고 몰래 산간지역에 경작하면서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나라 심마니들이 식량을 메고 다닐 수 없으니 길목마다 감자를 심어놓고 양식이 떨어지면 사용할 비상식량이었다는 것이다.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함경도에서 떠도는 말로 "감자가 강을 건넜다"는 말이 있는데 청나라 심마니들이 국경을 넘어 감자를 심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한 순조 28년과 29년 두 해 동안 흉년이 들었는데, 감자종자를 많이 뿌려둔 덕분에 굶어 죽는 것을 면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1862년에 쓴 김창한의 〈원저보(圓藷譜)〉에 의하면 순조 32년에 전라도 해안에 영국 상선이 표류했다고 한다. 이 상선에 타고 있던 네덜란드 선교사에 의해 감자의 종자와 재배법이 김창한의 아버지에게 전해져 기르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예로 부터 칡뿌리, 토란, 도라지, 인삼 등이 식품과 의약재로 이용되어 왔기에 뿌리식물인 감자에 대한 큰 거부감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1900년 이후에 품질이 개선된 외래종이 도입되면서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재배 역사 한반도에서는 특히 강원특별자치도 지역이 감자로 유명한데, 이는 1920년대 초에 강원특별자치도 회양군 난곡면에서 농업연구를 하던 독일인 매그린이 개발한 품종(난곡 1호 ~ 난곡 5호)이 1930년대 강원특별자치도 지역에서 대규모로 재배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강원특별자치도에는 화전민이 약 35만명으로 도내 인구(약 150만명)의 23%에 달하였는데, 강원특별자치도의 기후조건이 감자를 재배하기에 원활하고 다른 작물에 비해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많았기 때문에 쌀을 경작하기 어려웠던 이 지역에서는 화전민을 중심으로 감자가 주식으로 재배되었다. 이후 량강도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북측에서는 강원도의 감자보다 량강도의 감자가 유명해졌다. 1930년경에는 '남작(男爵 Irish Cobbler)'으로 불리는 신품종이 일본을 통해 들어와 보급되며 많이 재배되었다. 한국에서 감자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시기는 광복후 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국토가 황폐졌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했다. 이때 많은 농경학자들이 감자를 추천했는데,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의 특성 때문이었다. 1975년에 미국에서 육성된 품종인 ‘수미(秀美)’가 도입되었고 현재까지 전체 감자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품종으로 자리잡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시설을 활용한 내륙의 겨울 시설재배와 제주도의 가을 재배 수확기가 연장되면서 연중 신선한 감자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감자는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고 여름더위와 장마에 약한 탓에 외국처럼 다양한 품종이 재배되지는 못하고 있으나 최근에 품종개발이 이루어져 한국 기후에도 잘 자라는 자주감자, 붉은감자가 농가에 많이 보급될 것으로 보인다. 어원 감자는 마령서(馬鈴薯), 북감저(北甘藷)라고도 한다. 마령서(馬鈴薯)라 한 것은 감자를 들어 올렸을 때 말에 달린 방울들이 모여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감저’(甘藷)란 말은 본래 사탕수수와 고구마를 가리키던 말이었으므로, 고구마가 들어오고 60년 뒤에 한반도에 감자가 들어오자 혼동을 피하고자 '북방에서 온 감저' 라는 뜻으로 북감저(北甘藷)라고 불렀다. 또한 명확히 구분하고자 할 때는 전래된 경로를 기준으로 하여 북쪽에서 전래된 감자는 북저(北藷), 일본을 통해서 남쪽에서 전래된 고구마를 남저(南藷)라 하기도 했다. 영어에서 고구마와 감자가 용어의 혼동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어에서도 감자와 고구마의 명칭에 대한 혼동은 한동안 있었다. 예를 들어 1925년에 발표된 김동인의 소설 《감자》에 등장하는 ‘감자’는 오늘날의 고구마를 말한다. 이러던 것이 어느 시기부터 감저나 감자로 불리던 고구마가 고구마로 불리는 것으로 호칭이 굳어지면서 감자는 ‘감자’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고구마가 쉽게 썩는 성질 때문에 저장성이 떨어지는 데다가 군것질 거리나 별미 정도로 인식된 반면에 감자는 점차 구황작물로 자리잡으면서 양식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글로 감자라고 표기한 최초의 문헌은 1918년에 발행된 《조선농업대전》이다. 재배 종자 준비 되심기를 하는 영양번식작물이므로 해마다 수확량의 일정부분을 저장해 놓았다가 씨감자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병충해 등의 위험성이 크고 보관 관리가 어럽기 때문에 전문업체에서 구입하여 파종하는 것이 좋다. 씨감자로는 고랭지에서 가꾼 것을 쓰는 것이 좋다. 씨감자는 따뜻한 기후에서 생산한 감자를 쓰면 생육이 불량하고 병에 약해 소출이 감소하는 ‘씨감자 퇴화 현상’이 있지만, 서늘한 산간지방이나 바닷바람이 부는 해안지방에서 재배한 감자는 이러한 현상이 적어 씨감자로서 좋다. 그리고 가을감자도 봄감자와 달리 기후가 서늘할 때 재배하기 때문에 봄에 씨감자로 쓰면 좋다. 씨감자는 정부 보급종, 씨감자 주산지의 농협 또는 민간채종회사로부터 구입할 수 있다. 씨감자는 구입한 후 싹틔우기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 늦어도 파종하기 한 달 전에는 구입하는 것이 좋다. 정부 보급종의 경우 봄에 심을 씨감자는 1~2월에 이장이나 동장을 통하여 신청하면 2~4월에 공급받을 수 있다. 감자 주산지의 농협이나 작목반 또는 민간채종회사로부터 씨감자를 구입할 수도 있는데 구입가격은 보급종보다 다소 비싼편이다. 싹 틔우기 감자를 심기 20∼30일 전에 그늘에서 싹 틔운 뒤 심으면 땅 위로 싹이 빨리 올라와 그냥 심었을 때보다 수량을 늘릴 수 있다. 생육 기간을 10∼20일 더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사광선에 노출되지 않도록 비닐하우스에 30~50% 정도 햇빛 가림망을 치고 바닥에 두꺼운 부직포를 깐 뒤 씨감자를 얇게 펴준다. 2~3일에 한 번씩 위치를 바꿔주어 햇빛을 골고루 받을 수 있게 한다. 적정 온도는 15∼20도로 낮에는 바람이 잘 통하게 하고, 밤에는 얼지 않도록 감자 위에 덮개를 덮어 보온한다. 하루에 한두 번 바닥에 물을 뿌려 80∼90% 정도의 습도를 유지해주면 좋다. 싹 길이는 1cm 내외가 알맞다. 재배 방법 감자는 수확할 때 늦서리 염려가 없도록 가능한 일찍 파종하는 것이 좋다. 예전에는 음력 2월에 파종하였으나, 지금은 모내기 전에 수확하는 논감자는 양력 2월 하순, 남쪽지방의 봄감자는 3월 중순, 경기, 충청 등 중부내륙 지역은 3월 하순, 강원특별자치도 등 고랭지 여름감자는 4월 하순, 남쪽지방의 가을감자는 7월 하순이 파종적기이다. 감자는 비교적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데, 자라는 데 가장 알맞은 온도는 20°C쯤이다. 이정도 온도가 90~150일 정도 유지되어야 최상의 감자를 얻을 수 있다. 소독한 칼을 이용하여 씨감자를 싹이 날 눈이 붙어 있는 쪽으로 2~4조각으로 잘라 준비한다. 한쪽당 적당한 무게는 30∼50g 정도이며 두 개 이상의 눈이 들어가도록 한다. 자른 감자를 재에 버무려 심으면 데뎅이병과 검은점박이병을 예방 효과가 있다. 재 대신 농약으로 살균하기도 한다. 물 빠짐이 좋고 햇볕이 잘 드는 밭에 밑거름으로 준 후 60~75센티미터의 이랑을 만들고 파종은 20~30센티미터 간격으로 한다. 파종간격은 품종과 토양의 비옥도 그리고 기후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산간지방에서는 조밀하게 심고 평지에서는 듬성듬성 심는다. 심을 때는 호미로 심을 곳을 파거나 곡갱이로 골을 타고 씨감자를 넣은 다음 흙을 덮는다. 감자에 기본 양분과 수분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파종후 비닐멀칭 정도만 잘 해주었다면 추가로 물을 줄 필요는 없다. 파종하고 싹이 올라오기까지는 보통 한 달 정도 걸리며, 싹이 올라와 잎이 벌어지면 두세 줄기만 남기고 솎아준다. 북주기는 꽃필 무렵에 한다. 수확과 저장 봄에 재배하는 하지감자는 여름 장마를 견디지 못하므로 하지(夏至 6월21일경) 전 후에 반드시 수확을 해야 한다. 잎과 줄기가 누렇게 변할 때 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지방에 따라 이른 곳은 6월 하순부터 늦은 곳은 8월 상순까지도 하고, 가을감자는 서리가 올 때까지 두었다가 한다. 호미나 괭이로 캐거나 농사가 많은 농가에서는 쟁기를 쓰기도 한다. 보통 통풍이 잘되는 그늘에 펴 널어 한두 달 말린 다음 가마니에 담아 서늘한 곳에 보관하였다가 지하에 움을 만들거나 지하저장고 또는 저온저장고에 저장하면 좋다. 주요 병해충 역사적으로 중요한 감자역병균은 유럽과 미국에서 진행 중인 문제로 남아 있다. 그 밖의 다른 질병으로는 다음과 같다. 감자걀쭉병 감자암종병 감자시스트선충 감자희시스트선충 콜로라도잎벌레 담배노균병 재배 지역 감자는 현재 재배 식물 가운데 가장 환경 적응력이 뛰어난 식물로 알려져 있다. 해안가에서부터 히말라야나 안데스 등 해발 4,000m 이상이 되는 고산지대에서도 재배가 가능하며, 기후지대별로는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에서부터 연중 대부분 눈이 덮여 있는 그린란드에서도 재배하고 있다. 위도상으로 보면 북위 72도, 남위 46도 부근까지 퍼져 있다. 감자는 연작장해가 없는 작물로 봄 감자의 경우에 한국 전역 어디에서나 재배와 수확이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여름장마가 오기전인 하지에 수확하는 봄에 심는 봄감자와 늦가을에 수확하는 가을 감자가 있고, 제주 감자는 1, 2월에 수확하기 때문에 겨울에 신선한 감자를 맛볼 수 있다. 봄감자는 경기 여주, 전북 김제, 전남 보성, 경남 밀양 등에서 많이 재배하고 가을 감자는 강원특별자치도와 제주지역에서 많이 재배하고 있다. 강원특별자치도는 해발 600m 이상의 고랭지이고 일교차도 커서 감자가 크는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곳 감자는 9월 중순에서 말쯤 출하된다. 제주도는 강원특별자치도 다음으로 감자 재배가 많은 곳이다. 제주도의 따뜻한 기후를 이용해 가을에 심은 감자를 땅속에 묻어두고 수확을 지연시킨다. 생산 현황 20세기 후반들어 전세계의 감자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1960년대 초 3천만톤이던 생산량이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1억톤으로 늘어났다. 2001년도 FAO(유엔식량농업기구) 자료에 의하면 전세계 감자 생산량은 3억톤 정도였으며, 2020년에는 약 3억6천만톤으로 집계되어 금액으로 볼 때 40조원 정도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최대 생산국은 중국으로 7천8백만톤, 이는 전세계 총생산량의 22%를 차지한다. 2위는 인도, 3위는 러시아, 4위는 우크라이나, 5위는 미국이 차지하고 있다. 유럽에서의 생산은 줄어드는 추세인데 반해 아시아 지역에서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매년 약 25,000헥타르(7천6백만평) 땅에서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연간 생산량은 약 70여만톤으로 총생산량 중 강원특별자치도에서 33%, 제주도에서 22%를 재배하고 있으며 전체 생산량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품종은 '수미감자'이다. 외관 높이는 60~100cm이고 독특한 냄새가 난다. 땅 속에 있는 줄기 마디로부터 가는 줄기가 나와 그 끝이 비대해져서 원형 또는 알 모양의 덩이줄기를 형성한다. 덩이줄기에는 오목하게 팬 눈 자국이 나 있고, 그 자국에서는 작고 어린 싹이 돋아난다. 땅위줄기의 단면은 둥글게 모가 져 있다. 잎은 줄기의 각 마디에서 나오는데 대개 3∼4쌍의 작은잎으로 된 겹잎이고 작은 잎 사이에는 다시 작은 조각잎이 붙는다. 6월 경에 잎겨드랑이에서 긴 꽃대가 나와 취산꽃차례를 이루고 지름 2~3cm 되는 별 모양의 5갈래로 얕게 갈라진 엷은 자색 또는 백색 등의 꽃이 핀다. 꽃이 진 뒤에 토마토 유사한 작은 열매가 달린다. 종자 구분 씨감자 감자는 되심어야 재배,생산할 수 있는 영양번식작물이다. 따라서 해마다 수확량의 일정부분을 저장해야 한다. 씨감자로 사용될 감자는 가능한 한 각종 병(바이러스, 곰팡이 및 세균병)에 걸리지 않은 깨끗하고 순도가 높은 감자여야 한다. 씨감자는 주로 한지나 고랭지산(産)의 씨감자가 사용하는 것이 좋다. 과거에는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품종들을 정부 장려품종으로 지정하여 보급하였지만, 2000년대에 종자산업법이 개정된 이래로는 국립종자원에 품종등록을 하고있다. 감자는 벼, 보리, 콩, 옥수수와 함께 국가품종목록등재 5대 작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약 40여 품종이 등록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매년 약 7천6백만평 면적에 감자가 재배되며 이때 대략 5만여톤의 씨감자(종자)가 사용되고 있다. 씨감자는 정부 보급종, 씨감자 주산지의 농협 또는 민간채종회사로부터 구입할 수 있으며 전년도 수확분 중에 별도 저장해 놓았다가 사용하기도 한다. 휴면성 감자를 수확 직후에 다시 심으면 싹이 나지 않는다. 이는 감자라는 식물이 가지고 있는 휴면성 때문이다. 수확 후 일정 기간이 지나 숙성이 이루어져야 싹을 만드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품종과 보관 온도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50~120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싹을 틔울 수 있다. 이런 감자의 휴면성을 인해 감자 저장이 비교적 수월 해진다. 하지 감자의 경우에 보통은 겨울이나 봄이 되어야 싹이 돋아난다. 또한 발아를 위한 최소 온도는 8℃ 이상이 되어야 한다. 재배시기에 따른 구분 재배시기에 따라 1기작용과 2기작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1기작용은 휴면기간이 길어 1년에 한 번, 즉 봄재배 또는 여름재배에 이용되는 품종이다. 2기작용은 휴면기간이 짧아 1년에 두 번 재배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대략 50~70일 가량의 휴면기간을 가지는 품종들이 2기작용으로 육성되고 있다. 1기작용 품종으로는 수미, 남작, 조풍, 세풍, 대서, 남서, 자심, 가원, 자서, 신남작, 조원, 가황, 하령, 서홍, 자영, 홍영이 있다. 2기작용으로는 대지, 추백, 추동, 추영, 추강, 고운, 제서, 새봉, 방울 등이 있다. 용도에 따른 구분 용도에 따라 식용, 침가공용, 프렌치프라이 가공용 및 전분용으로 나눌 수 있다. 칩 가공용 품종은 감자 덩이 줄기 모양이 둥글고 속색이 흰색이며 건물함량이 높고 환원당 함량이 낮아 감자칩으로 가공하였을 때 칩의 색이 밝은 것이 좋다. 프렌치프라이 용은 건물함량이 높아 튀겼을 때 모양이 구부러지지 않고 색이 밝은 것을 쓴다. 또한 모양이 장원형으로 긴 것을 많이 이용한다. 일반적으로 가공용 감자 품종들은 건물함량이 높고 맛이 좋은 품종들이 많아 식용으로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전분용 감자는 한국에서는 경제성이 없기 때문에 개발된 것이 없다. 식용 : 남작, 수미, 대지, 초풍, 남서, 자심, 자서, 신남작, 조원, 추백, 추동, 추강, 추영, 하령, 서흥, 제서, 자영, 홍영, 방울 칩용 : 대서, 가원, 가황, 고운, 새봉, 수미 프렌치프라이용 : 세풍 숙기에 따른 구분 감자품종은 익는 시기에 따라 조생종, 중생종, 만생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조생종은 보통 생육기간이 80~95일, 중생종은 95~110일, 만생종은 110일 이상으로 구분한다. 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특성상 고랭지 여름재배와 겨울시설재배를 제외하고는 중생종과 만생종이 적합하지 않다. 조생종 : 남작, 수미, 조풍, 추백, 가원, 추동, 조원, 가황, 고운, 새봉, 방울 중생종 : 대서, 세풍, 남서, 자서, 신남작, 추영, 하령, 서홍, 홍영, 제서 만생종 : 자심, 대서, 추강, 자영 인공 씨감자 1991년, 한국 유전공학 연구소 정혁 박사팀이 조직 배양을 통하여 인공 씨감자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다. 기존의 파종은 감자를 쪼개 심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씨감자 생산에서 파종까지 6~8개월이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또한 질병 감염 때문에 재배가 그리 쉽지 않고 씨감자는 수분이 많고 무거워 운송도 어렵고 물류비도 많이 드는데다 저장도 어렵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인공 씨감자이다. 자연 씨감자의 대체물로 사용될 인공 씨감자는 조직 배양 기술로 무균 배양 용기 내에서 대량 생산된 감자 줄기를 통해 콩알만한 크기로 생산된 씨감자이다. 크기는 약 0.5~1㎝, 무게는 약 0.5g 정도이며 한번만 증식해도 400g 정도의 감자를 서너 개씩 만들어 낸다. 이론적으로는 1ha 에서 약 25톤 정도의 감자를 생산할 수 있어 단위면적당 50% 정도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고 한다. 주요 품종 수미 (Superior) 한국내 감자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수미(秀美)’는 찐득한 느낌이 드는 점질 감자로 알이 단단하여 저장성이 높으며, 고소하고 단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1961년 미국에서 육성된 품종으로 한국에는 1975년 도입되었고 1978년 장려품종으로 선정되어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녹말 함량과 섬유질이 많아 식용 또는 칩 가공용으로 봄과 여름에 재배한다. 중만생종으로 생육기간이 90∼100일이고 휴면기간은 80∼90일이다. 한국 전역 어디에서나 재배할 수 있다. 감자잎말림바이러스병과 감자역병에는 약하지만 더뎅이병에도 비교적 강하고 감자모자이크바이러스병에는 특히 강하다. 남작 (Irish Cobbler) 미국에서 수미(秀美 superior)가 들어오기 전에 한국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던 품종이었으나 현재에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다. 1876년 미국에서 자주색 조생종인 얼리로즈(Early Rose)의 아조변이(芽條變異)에서 선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영국으로 전파된 후 일본의 가와다(川田) 남작이 영국에서 가져왔다고 하여 '남작(男爵)'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에는 1928년에 홋카이도(北海道)에서 도입되었다. 일제가 쌀을 수탈하기 위해 그 대체작물로 보급하였다는 설이 있다. 잎은 보통 크기이고 꽃은 연한 붉은빛을 띤 자주색이다. 감자(덩이줄기)는 편원형으로 겉껍질이 연한 노란색이고 눈이 깊게 박혀 있다. 육질이 분질성이라서 맛이 좋아 식용에 알맞다. 바이러스병과 감자역병에 약해서 미리 방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극조생종으로 생육기간은 80∼90일이며, 휴면기간은 90∼100일로 길어 가을 재배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저장력이 좋으며 겨울 동안 장기저장할 때에는 통풍을 잘 해주어야 한다. 감자 중 재배역사가 가장 오래된 품종이다. 전국 어디에서나 재배할 수 있다. 대서 (Dejima) 1971년 일본의 나가사키 시험장에서 북해31호와 운젠을 교배해 육성하였고 한국에는 1976년 도입되어 1978년 재배가 장려된 품종이다. 뿌리가 잘 발달해서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란다. 감자(덩이줄기)는 편원형이고 겉껍질과 속살은 연한 노란색이며 눈이 얕게 박혀 있다. 식용 전용 품종으로 칩 가공용에 많이 이용된다. 덩이줄기는 바이러스병에는 강하지만 감자역병과 더뎅이병에는 약하다. 중만생종으로 생육기간은 110∼120일이며 휴면기간은 50∼60일로 짧아 봄재배에서 얻은 씨감자를 가을재배에 이용할 수 있다. 겨울재배할 경우에는 고랭지 여름재배에서 얻은 씨감자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춘·추작 이기작용으로 재배된다. 남부 지역 평야지대와 해안지대가 재배하기에 알맞다. 영양 영양성분 감자는 밀가루보다 더 많은 필수 아미노산을 함유하고 있으며 지방과 단백질에 비해 탄수화물 함량이 높고 철분, 마그네슘과 같은 중요한 무기성분 및 비타민 C, B1, B2, 나이아신과 같은 인체에 꼭 필요한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으며, 당분이 낮아 좋은 영양 식품이다. 특히 감자에 포함되어 있는 비타민C는 다른 채소들과 달리 불로 조리를 해도 파괴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효능 감자에는 같은 양의 쌀밥보다 더 많은 철분이 들어있어 철분 섭취가 중요한 빈혈 환자에게 좋다. 수박이나 사과보다 4배 이상 많이 들어있는 칼륨은 나트륨의 배출을 도와 고혈압 환자와 당뇨환자들에게 좋다. 특히 염분이 많은 음식을 많이 먹는 한국인들은 많이 섭취할 수록 좋다. 또한 칼슘을 포함하고 있어 산성이 강한 육식의 섭취량이 증가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알카리성으로 몸을 유지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식물성 섬유질인 펙틴은 변비에 특효가 있다. 감자는 염증 완화, 화상, 고열, 편도선이나 기관지염에 효과가 있다고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다. 섭취와 활용 감자는 삶아서 주식 또는 간식으로 하고 굽거나 기름에 튀겨 먹기도 한다. 소주의 원료와 알코올의 원료로 사용되고, 감자 녹말은 당면, 공업용 원료로 이용하는 이외에 좋은 사료도 된다. 감자는 설탕으로 간을 하는 경우, 토마토와 마찬가지로 감자의 비타민 B1이 설탕을 대사하는 과정에서 소비되어 영양학적으로 좋지 않다. 감자는 소금이나 된장으로 간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이 경우 감자의 칼륨이 소금이나 된장의 나트륨을 배출하므로 합리적이다. 특히, 된장으로 간을 하면 된장이 발효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여러 펩타이드가 항산화작용을 하므로 건강에 유익하다. 독성 감자에는 글리코알칼로이드라는 독성 화합물이 들어있는데, 이 가운데 솔라닌과 차코닌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화합물들은 포식자들로부터 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생성되는데 일반적으로 잎, 뿌리, 싹, 과실에 함축되어 있다. 볕 드는 곳에 두거나, 물리적으로 위해를 받거나, 시간이 오래되면 괴경 안에 글리코알칼로이드 성분이 증가한다. 껍질 바로 아래 부분 쪽이 가장 많이 함축되어 있으며, 170 °C (340 °F)의 고온에서 요리하면 부분적으로 이들을 제할 수 있다. 야생 감자의 글리코알칼로이드 독성분은 사람에게도 독성의 영향을 미치기 충분하다. 독의 증상으로는 심한 두통, 설사, 구토 등이 있고 심지어는 사망에 이를 수 있으나 감자로 인한 중독은 극히 드물게 일어난다. 선별과 보관 감자 고르기 감자를 고를 때는 표면에 흠집이 적고 매끄러우며 무겁고 단단한 것이 좋다. 감자에 싹이 나거나 녹색 빛이 도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감자 보관 감자 보관은 직사광선을 피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보관한다. 이때 사과와 같이 보관하면 싹이 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사과에서 배출되는 에틸렌 가스가 감자의 발아를 막기 때문이다. 양파는 함께 보관하면 둘 다 금방 상한다. 양파는 사과와 정반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8℃ 이상에서는 싹이 나고, 영하 1℃ 이하가 되면 얼게 되기 때문에 온도를 1~4℃ 사이로 적정히 유지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껍질을 깐 감자는 찬물에 담가 물기를 뺀 후 물기를 제거하고 랩에 싸 놓아 갈변을 방지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오해 감자에서 식용하는 부위를 흔히 고구마처럼 "뿌리"부분인 것으로 여기는 오해가 있지만, 사실 줄기가 변하여 만들어지는 것으로 고구마의 뿌리와는 근본적으로 생성 원인이 다르다. 역사속 사건 감자 전쟁 1778년 7월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에 벌어진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을 일명 '감자전쟁(Potato war)'이라고도 한다. 양측은 후계자 없이 사망한 바이에른 공작의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렸으나, 서로 비등한 전력으로 인해 전면전을 피하고 대치하게 되었다. 전쟁이란 것이 싱겁게도 제대로 된 교전 한번없이 소강상태가 계속 이어졌으며 서로 상대측의 연락과 보급선을 차단하는 전략에 몰두했다. 특히 7년 전쟁이후 프리드리히 2세의 독려 속에 재배가 증가한 감자를 확보하는데 경쟁을 벌렸다. 양측의 병사들은 상대측과 마주쳐도 총을 쏘기 보다는 서로 먼저 감자밭으로 달려가 더 많은 감자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바닥난 군량미를 확보하는 동시에 상대측이 감자를 식량으로 사용하는 것을 차단하려 하였다. 소강상태로 이어지던 전쟁이 10개월만에 전투다운 전투없이 종결되자 감자전쟁(Potato war)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아일랜드 대기근 1845년에서 1852년까지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백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다수가 해외로 집단이주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840년대의 아일랜드 인구는 대략 850만명이었는데, 대기근 기간 중에 발생한 사망 또는 이주로 인해 전체인구 중 약 20%~25% 정도가 줄어들어 기근 후 약 600만명 정도가 되었다. 감자 역병 때문에 기근이 발생하였으나 사태가 심각해지도록 만든 것은 아일랜드를 식민통치하고 있던 영국의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차별정책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아일랜드인들의 영국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졌으며 독립의 열망이 증가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독립투쟁을 거쳐 1921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문화 감자튀김 박물관 - 벨기에 브뤼헤에 있으며 감자튀김의 역사와 관련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다. 감자축제 - ‘강원 감자 큰잔치’, '팔봉산 감자축제', 미국 메인주의 ‘감자꽃 축제' 등 전세계에 많은 감자축제가 있다. 감자튀김 분쟁 - EU산 감자튀김 가공품에 대해 콜롬비아가 높은 관세를 부과하자 벌이진 무역분쟁이다. 감자튀김 원조논쟁 - 벨기에와 프랑스가 각기 자국이 감자튀김의 원조국임을 주장하며 벌어진 논쟁이다. 감자 대왕 - 감자보급에 앞장서 독일지역의 기근을 종식시킨 프리드리히 2세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소설 감자 - 김동인이 1925년 1월에 《조선문단》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감자가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고구마이다. 영화 감자 - 1987년 변창호 감독이 소설 '감자'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1968년 김승옥 감독도 영화화 한적이 있다. 영화 마션 - 화성에 홀로 낙오된 우주인이 생존기를 그린 영화인데, 감자를 키워 양식으로 삼는 장면이 나온다. 감자 심포니 - 전용택이 감독과 주연을 맡고 유오성 등이 출연한 영화로 2009년에 개봉했다. 강원특별자치도를 배경으로 했다. 감자먹는 사람들 - 빈센트 반 고흐가 1885년에 그린 그림이다. 그를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최초의 걸작이라는 평가가 있다. 뜨거운 감자 -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미묘한 문제를 일컫는 말이다.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 게이름뱅이를 뜻하는 영어 단어이다. 감자칩을 먹으며 소파에 누워 지내는 모습에서 유래하였다. 포테이토 헤드(potatohead) - 바보, 멍청이, 얼간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 감자 요리 감자 튀김 감자전 감자떡 감자칩 감자 샐러드 감자빵 감자탕 감자 볶음 감자 와플 감자밥 감자옹심이 게와 다치 고로케 군감자 그라탱 니쿠자가 레프세 마살라 도사 맛감자 매시트 포테이토 무파라카 바레니키 버블 앤드 스퀴크 분모자 브린조베 할루슈키 비시수아즈 아얌 퐁테 아이리시 스튜 아코디언 감자 아히아코 아히아코 (페루 음식) 아히아코 산타페레뇨 알루 고비 얀손스 프레스텔세 월리버흐 웨지감자 중국당면 체펠리나이 카덜 카리팝 칼 캬넌 칼두 베르드 쿠겔리스 쿰피르 클로스 (음식) 크로켓 토르티야 (스페인 음식) 파파스 아루가다스 파파타스 브라바스 패스티 폼 뒤셰스 피테팔트 피시앤칩스 해시 브라운 같이 보기 고구마 뚱딴지 씨감자 감자 누르개 감자 짜개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원예연구소의 감자에 대한 소개 산림청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인류 역사를 뒤흔든 음식, 감자의 신분상승 스토리 감자의 효능과 섭취방법 가지속 식용작물 주식 게놈 해독이 완료된 식물 칼 폰 린네가 명명한 분류군 1753년 기재된 식물 북아일랜드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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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2%BD%EC%98%81%20%281960%EB%85%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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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영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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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영(李璟榮, 1960년 12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학력 충주고등학교 (졸업) 충남대학교 상경대학 (중퇴)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1985년 편입 후 1992년 학사) 생애 1960년 12월 12일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충주고등학교를 거쳐, 충남대학교 상경 대에 입학했으나 얼마 안 되어 중퇴한 뒤 군 입대를 했고, 1985년 제대 이후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편입하여 학사 학위하였다. 1984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다. 그는 1987년 3년만에 영화 《아다다》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이후 《깜동》, 《구로 아리랑》, 《하얀 전쟁》, 《게임의 법칙》, 《런어웨이》, 《할렐루야》, 《종려나무 숲》등 수많은 작품을 참여했다. 1993년 드라마 《머나먼 쏭바강》을 시작으로, 《로맨스》, 《크리스탈》, 《당신은 누구시길래》등 TV 드라마에 출연하였다. 1996년에는 《귀천도》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 밖에 《몽중인》에서 감독을 맡았다. 1990년 제1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남우상 '비 오는 날 수채화', 1991년 제2회 춘사대상영화제 남우조연상 '사의 찬미', 제12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1992년 제30회 대종상 남우조연상, 제3회 춘사대상영화제 남자 우수연기상, 1993년 제31회 대종상 남우조연상, 제14회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제2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1996년 제3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런어웨이', 1998년 SBS 연기대상 우수연기상 등의 상을 수상했다. 연기 활동 및 출연작 영화 1987년 《아다다》 ... 수룡 역 1988년 《연산일기》 ... 중종 역 1988년 《깜동》 ... 최중기 역 1989년 《구로 아리랑》 ... 현식 역 1990년 《비 오는 날 수채화》 ... 천호 역 1990년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 오 선생 역 1990년 《영심이》 ... 교생 역 1990년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 상대편 변호사 역 1990년 《난 깜짝 놀랄 짓을 할거야》 ... 김인 역 1991년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2》 ... 오 선생 역 1991년 《부활의 노래》 ... 태일 역 1991년 《잃어버린 너》 ... 이종환 역 1991년 《하얀 비요일》 ... 고묵 역 1991년 《사의 찬미》 ... 홍난파 역 1992년 《가을 여행》 ... 천호 역 1992년 《백치 애인》 ... 명준 역 1992년 《섬강에서 하늘까지》 ... 장재인 역 1992년 《공룡 선생》 ... 영웅 역 1992년 《하얀 전쟁》 ... 변진수 역 1993년 《사랑의 종합병원》 ... 박민우 역 1993년 《아침이 오면 그대 이름으로》 ... 준영 역 1993년 《그 여자, 그 남자》 ... 창 역 1993년 《비 오는 날 수채화 2》 ... 천호 역 1993년 《그 섬에 가고 싶다》 ... 군인 역(특별출연) 1994년 《장미의 나날》 ... 명호 역 1994년 《세상 밖으로》 ... 이춘길 역 1994년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 (특별출연) 1994년 《게임의 법칙》 ... 인수 역 1994년 《어린 연인》 ... 이은우 역 1995년 《손톱》 ... 정민 역 1995년 《남자는 괴로워》 ... (특별출연) 1995년 《테러리스트》 ... 사현 역 1995년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 진우 역 1995년 《개같은 날의 오후》 ... 덕배/도둑1 역 1995년 《런어웨이》 ... 장 형사 역 1996년 《진짜 사나이》 ... 라이방 역(우정출연) 1996년 《코르셋》 ... 한상우 역 1996년 《귀천도》 ... 좌운검 역 1997년 《3인조》 ... 안 역 1997년 《체인지》 ... 학생주임 미친개 역 1997년 《마리아와 여인숙》 ... (특별출연) 1997년 《미스터 콘돔》 ... 경호 역 1997년 《홀리데이 인 서울》 ... 전화상 역 (특별출연) 1997년 《쁘아종》 ... 영수 역 1997년 《베이비 세일》 ... 상준 역 1997년 《할렐루야》 ... 오동팔 역 1998년 《죽이는 이야기》 ... 하비 역 1998년 《기막힌 사내들》 ... 베테랑 역 1998년 《키스할까요?》 ... 성주 역 2001년 《이것이 법이다》 ... (특별출연) 2002년 《몽중인》 ... 이윤호 역 2002년 《미워도 다시 한 번 2002》 ... 안지환 역 2002년 《패밀리》 ... 최무영 역 2005년 《종려나무 숲》 ... 최 선장 역 2007년 《눈부신 날에》 ... 상준 역 2007년 《두 사람이다》 ... 가인 부 역(특별출연) 2007년 《상사부일체 - 두사부일체 3》 ... 주지 스님 역(특별출연) 2008년 《신기전》 ... 금오 역(특별출연) 2009년 《파주》 ... 보스 역(특별출연) 2010년 《무적자》 ... 박 경위 역 2011년 《죽이러 갑니다》 ... 노동자 역 2011년 《써니》 ... 성인 준호 역(특별출연) 2011년 《모비딕》 ... 장 선생 역 2011년 《최종병기 활》 ... 김무선 역 2011년 《푸른소금》 ... 최고문 역 2011년 《카운트다운》 ... 조명석 역 2012년 《부러진 화살》 ... 이태우 판사 역 2012년 《봄, 눈》 ... 아버지 역 2012년 《후궁: 제왕의 첩》 ... 김계주 역 2012년 《5백만불의 사나이》 ... 박 의원 역(특별출연) 2012년 《회사원》 ... 반지훈 부장 역 2012년 《외사경찰》 ... 최길순 역 2012년 《남영동1985》 ... 이두한 역 2012년 《26년》 ... 김갑세 역 2012년 《차이나 블루》 ... 은혁 아버지 역(특별출연) 2013년 《베를린》 ... 리학수 역 2013년 《신세계》 ... 석 회장 역(특별출연) 2013년 《마스터 클래스의 산책》 2013년 《더 테러 라이브》 ... 차대은 역 2013년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 임형택 역 2014년 《또 하나의 약속》 ... 교익 역 2014년 《관능의 법칙》 ... 최성재 역 2014년 《백프로》 ... 교장 역 2014년 《무명인》 ... 유강진 역 2014년 《해적: 바다로 간 산적》 ... 소마 역 2014년 《군도: 민란의 시대》 ... 땡추 역 2014년 《타짜: 신의 손》 ... 꼬장 역 2014년 《제보자》 ... 이장환 역 2014년 《패션왕》 ... 원호 부 역(특별출연) 2015년 《허삼관》 ... 옥란 부 역 2015년 《은밀한 유혹》 ... 김석구 역 2015년 《소수의견》 ... 박재호 역 2015년 《암살》 ... 강인국 역 (작중 메인 악남) 2015년 《협녀, 칼의 기억》 ... 스승 역 2015년 《뷰티 인사이드》 ... 우진 부 역 2015년 《치외법권》 ... 왕 팀장 역 2015년 《서부전선》 ... 유 중령 역 2015년 《내부자들》 ... 장필우 역 (작중 메인 악남) 2015년 《조선마술사》 ... 안동휘 역 2016년 《대배우》 ... 깐느 박 역 2016년 《판도라》 ... 총리 역 2017년 《여교사》 ... 이사장 역 2017년 《재심》 ... 구필호 대표 역 2017년 《프리즌》 ... 배 국장 역 2017년 《중2라도 괜찮아》 ... 백운도사 역 2017년 《특별시민》 ... 정치인 역 2017년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 고병철 역 2017년 《리얼》 ... 노염 역(특별출연) 2017년 《군함도》 ... 윤학철 역 2017년 《대장 김창수》 ... 이재정 역 2017년 《강철비》 ... 김경영 역 2017년 《신과함께: 죄와 벌》 ... 오관대왕 역(특별출연) 2018년 《게이트》 ... 장춘 역 2018년 《머니백》 ... 킬러 박 역 2018년 《신과함께: 인과 연》 ... 오관대왕 역(특별출연) 2018년 《물괴》 ... 심운 역 2019년 《자전차왕 엄복동》 ... 엄선양 역 2019년 《블랙머니》 ... 이광주 역 2019년 《백두산》 ... 최 장군 역 2019년 《오즈 온 더 문》 2021년 《새콤달콤》 ... 경비원 역 2022년 《방관자들》 ... 강윤태 의장 역 2022년 《탄생》 ... 이웅식 역 《컴백홈》 드라마 SBS 1993년 SBS 《머나먼 쏭바강》 ... 김기수 병장 역 1996년 SBS 《달팽이》 ... 병도 역 1998년 SBS 《은실이》 ... 장낙도 역 1998년 SBS 《로맨스》 ... 유춘봉 역 1998년 SBS 《시트콤 LA아리랑》 1999년 SBS 《러브스토리》 ... 동재 역 1999년 SBS 《크리스탈》 ... 은석 역 1999년 SBS 《당신은 누구시길래》 ... 동호태 역 1999년 SBS 《아들아 너는 아느냐》 ... 장수 아빠 역 2000년 SBS 《도둑의 딸》 ... 덕구 역 2000년 SBS 《불꽃》 ... 이강욱 역 2019년 SBS 《해치》 ... 민진헌 역 2019년 SBS 《배가본드》 ... 에드워드 박 역 2020년 SBS 《하이에나》 ... 송필준 역 2022년 SBS 《어게인 마이 라이프》... 조태섭 역 2022년 SBS 《왜 오수재인가?》... 한성범 역 2023년 SBS 《낭만닥터 김사부 3》... 차진만 역 MBC 1998년 MBC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 ... 사단장 최병학 육군 소장의 전속부관 이경영 육군 소령 역으로 카메오 단역 2021년 MBC 《검은 태양》 ... 이인환 역 2022년 MBC 《닥터 로이어》 ... 구진기 역 KBS 2001년 KBS2 《푸른 안개》 ... 윤성재 역 2023년 KBS2 《순정복서》 ... 김오복의 아버지이자, 백반집 식당 주인 역 (특별출연) 타방송사 2009년 OBS 《거위의 꿈》 ... 윤희 부 역 2012년 OCN 《뱀파이어 검사 2》 ... 조정현 역 2014년 tvN 《미생》 ... 최영후 전무 역 2015년 tvN 《신분을 숨겨라》 ... 최대현 국장 역 2015년 넷플릭스 《센세이트》 ... 박강대 역 2015년 OCN 《귀신 보는 형사 처용 2》 ... 경찰서장 역 2015년 JTBC 《디 데이》 ... 박건 역 2017년 tvN 《비밀의 숲》 ... 이윤범 역 2017년 tvN 《하백의 신부 2017》 ... 대사제 역 2017년 tvN 《아르곤》 ... 이근화 역 (특별출연) 2018년 JTBC 《미스티》 ... 장규석 역 2018년 tvN 《나인룸》 ... 기산 역 2019년 OCN 《달리는 조사관》 2020년 JTBC 《부부의 세계》 ... 여병규 역 2021년 tvN 《빈센조》 ... 박승준 역 2022년 TVING 《돼지의 왕》 ... 최석기 역 2022년 tvN 《아다마스》 ... 권재규 역 2023년 ENA 《낮에 뜨는 달》 뮤직비디오 2022년 이무진 - 참고사항 연출 활동 영화 감독 1996년 《귀천도》 2002년 《몽중인》 방송 2022년 JTBC 《히든싱어 7》 - 게스트 CF 더 워킹 데드 : 서바이버즈 엔픽셀 그랑사가 유주게임즈코리아 그랑삼국 러시앤캐시 OK!저축은행 한국네슬레 네스카페 (with 신혜수) 아가방 월다크 브랑누아 태광산업 쾨헬 덴폴 신용협동조합중앙회 SK에너지 엔크린 (with 박중훈) 캠브리지맴버스 세진컴퓨터랜드 하림 (with 이미영) 유한양행 지르텍 OK캐쉬백 (with 김민종) 오리온 미스 후라보노 (with 이주희) 수상 및 후보 사건·사고 외부 링크 196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남자 모델 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 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수상자 경주 이씨 충주시 출신 충주고등학교 동문 한양대학교 예술체육대학 동문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개신교를 이탈한 사람 로마 가톨릭교회를 이탈한 사람 학력 위조자 SBS 연기대상 남자 최우수연기상 수상자 SBS 연기대상 남자 우수연기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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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A4%80%EC%98%81%20%281946%EB%85%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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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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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朴晙瑩, 1946년 10월 21일 ~ , 영암)은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 정치인이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민선 3·4·5기 제34·35·36대 전라남도지사를 지냈고, 2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공직선거법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학력 1959년 목포북교국민학교 졸업 1962년 목포중학교 졸업 1965년 인창고등학교 졸업 1973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 1983년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 석사 1987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 명예 박사 학위 2005년 여수대학교 명예경제학 박사 2006년 전남대학교 명예농학 박사 2009년 목포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 경력 1972 ~ 1980.06: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 (5.18 광주 민주화운동 시 제작 거부로 강제 해직) 1987: 중앙일보 외신부 기자, 차장(복직) 1989: 중앙일보 뉴욕 특파원 1995: 중앙일보 편집국 정치2부장·부국장 1999: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겸 대변인 2001: 제2대 국정홍보처 처장 2001: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선정 2003: 동국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2004.06 ~ 2014.06: 제34~36대 민선 3~5기 전라남도지사 2011.08 ~ 2012.10: 제5대 전국시도지사협의회 회장 2016.05 ~ 2018.02: 제20대 국회의원 (전남 영암군/무안군/신안군, 국민의당 → 무소속 → 민주평화당) 2016.06 ~ 2018.02: 제20대 국회 전반기 기획재정위원회 위원 범죄 기록 업무추진비 부당 사용 2010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형사4부(박강회 부장판사)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박준영에게 벌금 90만원을 선고했다. 박준영은 3천 800여만원 상당을 유관기관 관계자에게 격려금으로 하사하는 등 업무추진비를 부적절하게 집행한 혐의를 받았다. 재판에서 박준영은 관행적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업무추진비를 이용해 선거법이 금지하도록 한 기부행위를 계속해 선거의 공정성을 해친 점 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후 검찰과 피고인 양측이 항소하지 않아 판결이 확정되었다. 후보자 추천 관련 금품 수수 등 범죄 2016년 3월 30일 서울특별시선거관리위원회는 신당 창당 및 20대 총선 과정에서 재력가로부터 비례대표 후보자 공천을 빌미로 금품을 수수하였다는 내용으로 박준영에 대해 검찰에 수사 의뢰하였다. 2016년 4월 15일 검찰은 금품 제공자 F○○(전 신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총장, 전 서울특별시의원)를 체포하였으며, 박준영의 선거 사무실을 압수색하였다. 4월 17일에는 체포한 금품 제공자 F○○를 구속하였고(5월 4일 구속기소,공직선거법위반 및 정치자금법위반), 4월 23일에는 회계책임자 G○○를 구속(5월 10일 구속기소, 공직선거법위반 및 정치자금법위반)하였다. 이어 2016년 5월 5일 박준영의 비서실장 H○○ 및 조직책 I○○를 구속(5월 20일 구속기소, 공직선거법위반 및 정치자금법위반)하였고, 5월 18일 박준영의 구속영장을 청구하였으나 기각되었다. 검찰은 2016년 8월 1일 구속영장을 재청구하였으나 기각되었고, 후보자 추천과 관련하여 3억 5,200여 만원을 수수한 사실 등 혐의(공직선거법위반 및 정치자금법위반)로 2016년 8월 8일 박준영을 불구속 기소하였다. 2015년 7월 박준영은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 후 2015년 9월 신민당 창당을 선언하였으나, 제20대 총선 예비후보 등록이 임박한 2015년 12월 초까지도 창당 자금 부족으로 1개의 시도당도 창당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박준영은 경기지역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재력가인 F○○가 총선 출마를 희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F○○에게 접근하여, “사무총장이 되면 바쁠 거니까 비례대표 출마 쪽으로 생각해보라”며 비례대표 후보자로 추천을 언급하며 사무총장직을 맡긴 다음 창당 비용 등의 조달을 지시하였다(2015년 12월 초순). 이에 F○○는 광주시당, 전남도당 창당자금 1억원을 비롯하여, 식대, 사무실 운영비, 활동비 등 명목으로 합계 1억 5,200여 만원을 제공하였으며, 2016년 1월 중순 경 박준영은 창당준비위원회 관계자로부터 F○○이 포함된 ‘제20대 총선 출마예상자 명단’을 보고 받았다. 2016년 1월 30일 박준영은 신민당을 원외 민주당과 통합시켜 공동대표로 취임하였고, F○○도 박준영을 따라 원외 민주당에 합류하여 선거대책본부 부본부장을 맡았다. 이후 2016년 2월 하순 박준영은 제20대 총선에 출마하기로 결심하고 F○○에게 “현금으로 선거자금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여전히 비례대표 공천을 희망하던 F○○는 2016년 3월 4일, 현금 1억원을 빌려 종이쇼핑백에 담아 그날 밤 전남 무안군에 있는 박준영의 아파트를 방문했다가 나오면서 아파트 1층 현관까지 배웅나온 박준영의 처에게 해당 쇼핑백을 건네주어 박준영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또한 2016년 3월 9일 현금 1억원을 추가로 빌려 종이쇼핑백에 넣은 다음, 3월 12일 저녁 무렵 선거사무소로 찾아가 박준영에게 직접 1억원을 건네주었다. 2016년 3월 14일 박준영이 원외 민주당을 탈당한 후 국민의당에 입당하자, 3월 15일 금품 제공자 F○○도 국민의당에 입당하면서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하였다. F○○는 입당 시 입회인(추천인)을 박준영으로 기재하고, 비례대표 공천신청서 접수증을 박준영의 비서실장 등을 통해 박준영에게 전달하였다.(이하 공직선거법위반 및 정치자금법위반) 검찰은 2016년 4월 15일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박준영과 박준영 처의 휴대폰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박준영이 2016년 4월 13일 선거 당일 처와 함께 군의원, 도의원, 조합장, 기자, 이장, 목사, 교장 등 선거구내 영향력이 있는 사람 574명에게 선거운동 목적으로 문자메시지를 발송한 사실도 추가로 확인하였다(공직선거법위반). 또한 박준영은 선거홍보물 대금 8,000여 만원 중 4,600여 만원을 미지급하고 있다가 대금 지급을 요구받자, 2016년 6월 28일 보좌관(상황실장)인 B○○에게 지시하여 신고된 정치자금 계좌를 통하지 아니한 채 현금 2,000만원을 지급하였다(정치자금법 위반). 수사 과정에서 박준영은 금품을 수수한 적이 없다거나 선거운동원들의 범행일 뿐 자신은 상관없다며 관련성을 부인하였고, 배우자와 선거운동원 등과 모두 말을 맞추어 진술하는 등 사건의 실체에 대한 조작 왜곡을 시도하였다. 2016년 12월 29일 서울남부지방법원 형사11부(반정우 부장판사)는 검찰의 공소 사실을 전부 유죄로 인정하며 공직선거법위반 및 정치자금법위반으로 기소된 박영준에게 징역 2년 6월에 추징금 3억 1천700만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임시국회 회기 중으로 불체포특권에 따라 법정 구속하지는 않았다. 2017년 10월 27일 서울고등법원 형사6부(재판장 정선재 부장판사)는 박영준에게 1심과 같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국회 회기 중인 점을 감안해 법정구속 하지는 않았다. 2018년 2월 8일 대법원 형사1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박준영에게 징역 2년 6개월과 추징금 3억1700여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으며, 의원직이 상실되었다. 상훈 2016 의정활동 대상(농수산식품산업발전부문) 2016 대한민국 의정대상(지방자치 발전, 의정활동부문) 2016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지역발전 공로부문) 제48회 전국여성대회 우수지방자치단체상 대한민국 경제리더 대상 미래경영부문 황조근정훈장 국민훈장모란장 이탈리아정부 수교훈장 프랑스정부 수교훈장 공약 이행 2013년 6월 15일: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개관 저서 전라도사랑 (2006.03.17, 한얼미디어) 평화의 길 (2003.11.10, 에쎈에스 ) 역대 선거 결과 각주 외부 링크 박준영 홈페이지 박준영 블로그 박준영 트위터 박준영 페이스북 1946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밀양 박씨 영암군 출신 목포북교초등학교 동문 목포중학교 동문 인창고등학교 (서울) 동문 성균관대학교 동문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동문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문 대한민국의 기자 동국대학교 교수 대한민국의 국정홍보처 장관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당원 민주당 (대한민국, 2007년) 당원 대통합민주신당 당원 조선대학교 교수 전남대학교 교수 광주대학교 교수 목포대학교 교수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인 새정치연합 신민당 (2015년) 동교동계 친안 국민의당의 정치인 대한민국의 불교도 대한민국의 범죄인 민주평화당의 정치인 전라남도의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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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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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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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또는 영아(嬰兒)는 인간 발달 단계 중 가장 어린 시절로, 출생 직후부터 만 1세까지 일컫는다. 생후 1개월까지는 신생아라고 부른다. 용어 영아(嬰兒)는 돌 전의 젖먹이를 뜻하며, 유아(幼兒)는 생후 1년부터 만 7세가 되기 전까지의 어린이를 의미한다. 대한민국 영유아보육법에서 영유아란 6세 미만의 취학 전 아동을 말한다. 갓난아기 외모 갓난아기(갓 태어난 아기, 신생아)는 어깨와 골반이 좁으며, 배가 튀어나왔고, 팔과 다리가 상대적으로 짧다. 열 달을 다 마치고 태어난 갓난아기의 몸무게는 대략 3.2kg 정도이고 2.7-4.6kg의 분포를 갖는다. (출생 당시의 체중이 2.5kg 미만인 아기는 저체중아 (低體重兒), 1.5kg 미만인 아기는 극소 저체중 출생아 (劇小 低體重 出生兒), 4kg 이상인 아기는 과체중아 (跨體重兒)라고 부른다.) 평균 키는 35.6-50.8cm이다. 미숙아는 이보다 작다. 압가 점수는 갓난아기가 태어났을 때 발달 정도를 나타낸다. 갓난아기의 머리는 몸에 비해서 상당히 작고, 얼굴에 비해 두개골이 엄청나게 크다. 어른의 두개골은 보통 몸의 1/8 정도이지만, 갓난아기는 1/4 정도이다. 많은 지역의 갓난아기는 완전히 뼈가 되지 않은 두개골을 가지고 있고, 곳곳에 숫구멍 또는 정문들이 있다. 가장 큰 것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전정문으로 머리 정면의 꼭대기에 있고, 그다음 큰 것은 삼각형 모양의 후정문으로 머리 뒷쪽에 있다. 나중에 이들은 정밀하게 맞물려 머리뼈가 된다. 노긴(noggin)이라는 단백질이 두개골이 붙는 것을 지연시킨다. 분만과 출산 시, 아기의 두개골의 모양이 질을 따라 나올 수 있도록 변행되며, 가끔은 머리 모양이 길어지거나, 기형이 되기도 한다. 의사들이 이 과정에서 특별한 출산 연습을 부탁할 수 있다. 가끔 어떤 갓난아기들은 몸에 솜털을 지니고 나온다. 특히 배와 어깨, 앞머리와 귀, 그리고 얼굴에도 나는 경우가 있다. 솜털은 두세 주가 지나서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모든 아기들이 머리털을 가지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완전히 머리털이 없이 나올 수도 있고,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는 머리카락을 지닐 수도 있으며, 어떤 아기들은 짙은 머리를 가지고 나오기도 한다. 부모가 금발이 아닌 경우에도 아기의 머리카락이 금발로 보일 수도 있고. 머리카락이 없는 아기들 중에 가끔, 머리에 일시적인 상처가 있을 수도 있으며, 눈 주위가 들어갔을 수도 있다. 출생 직후, 갓난아기의 피부는 주로 갈색이나 짙은 푸른색이다. 그 후 아기가 숨을 쉬기 시작하면 1~2분 후에 피부색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갓난아기는 젖어있고, 핏덩이로 덮여 있으며, 버닉스 카세오사(vernix caseosa)라는 비늘로 덮여 있다. 이는 박테리아를 막는 보호막 역할을 한다고 추정된다. 갓난아기는 몽고 반점이 있을 수 있고, 살갗에 붉은 반점들이 있을 수 있다. 신생아 여드름이라고 부르는 흰색 반점도 생길 수 있다. 갓난아기의 탯줄은 푸른빛을 띠는 흰색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자르게 되며, 2-5cm 정도의 토막을 남겨놓게 된다. 이는 나중에, 보통 3주쯤 이전에, 마르게 되어 떨어진다. 가끔 어떤 병원은 감염을 막기 위해 탯줄에 염색을 하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설명한 갓난아기의 거의 대부분 특징들은 빨리 사라져버린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아는 아기의 모습과 신생아의 모습은 매우 다르다. 아기들은 귀엽지만 갓난아기는 별로 귀엽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되며, 처음 부모가 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생식기 남자아기는 음낭이 달려있으며, 사춘기부터 일생동안 정자를 만들어낸다. 음경은 태어날 때부터 발기 현상이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풀린다. 유방이 크고 젖이 나올 때도 있는데, 이것은 남성호르몬 부족으로 남성호르몬이 생성되면서 없어져간다. 여자아기는 음순이 크며, 사춘기부터 폐경기때까지 사용하게 될 난자를 갖고 큰소리로 응애응애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난다. 감각 감각의 종류로는 시각, 미각, 후각, 촉각의 온도감각, 통증 감각 등이 있다. 갓난아기는 여러 종류의 감각을 느낄 수 있으나, 발달단계에 있다는 점에서 가볍게 두드려주거나 껴안거나 달래는 데 주로 반응한다. 부드럽게 흔들어주는 것도 우는 아기를 달래는 데 도움이 되며, 마사지나 따듯한 목욕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엄지손가락이나 인공 젖꼭지를 빨면서 안정을 느낄 수도 있다. 빠는 것은 본능적이며, 젖을 먹을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갓난아기는 아주 약한 시력을 가지고 있고, 45 cm 이내에 정면에 있는 물체만 볼 수 있다. 이것이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젖을 먹을 때 엄마의 눈이나 유륜을 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일반적으로 갓난아기는 젖을 먹고 싶을 때 운다. 젖먹이가 잠을 자거나 젖을 먹거나 울지 않을 때는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본다. 빛나는 것이나 뚜렷하게 드러나는 색, 복잡한 패턴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갓난아기는 사람의 얼굴 보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6개월 뿐 아니라 7개월~12개월을 전후해서 시력이 성인 수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는 엄마 몸속에서 나는 소리들, 가령 심장박동을 들을 수 있고, 외부의 소리들, 가령 사람의 목소리나 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갓난아기는 보통 여자의 목소리에 남자의 목소리보다 더 반응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아기와 이야기할 때 목소리를 높이려고 한다. 사람의 목소리, 특히 엄마의 목소리는 아기를 안정시키는 데 큰 효과가 있다. 반대로 크거나 급작스러운 소리는 아기를 놀라게 하고 무서워하게 한다. 한편. 갓난아기는 다른 맛, 즉 달고 시고 쓰고 짠 것을 구별할 줄 알며, 단 것을 좋아한다. 갓난아기는 태어나면서 냄새를 맡을 줄 알며, 산모가 아기에게 초유 수급시 1주일이 지나기 전 자기 엄마의 젖과 다른 엄마의 젖 냄새를 구별할 줄 안다. 발달 운동 발달 신생아는 통일이 없는 전신운동밖에 하지 않는다. 삼키기·재채기·기침·구역질이나 파악(把握)의 반사, 바빈스키(Babinski) 반사, 모로(Moro) 반사 등도 최초는 전신운동을 수반한다. 이 미분화한 전체 운동이 차차로 특수한 부분만이 활동하도록 분화하여, 끝내는 부분 운동 사이에 조금씩 통일된 연관이 생기게 된다. 이 경향은 국부운동의 각 부분 운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전체 운동에서 특수 부분 운동으로의 분화는 상부에서 하부로 진행된다. 즉 머리·목의 운동에서 팔·상반신·하반신·다리로 발달한다. 발달은 중심에서 외부로 진행한다. 예를 들면, 손의 운동은 팔의 운동보다 늦게, 손가락 끝의 운동은 그보다 더 늦게 발달한다. 한편 영아기에는 생후 7개월을 전후해서 앉기를 할 수 있으며, 생후 10개월을 전후해서 길 수 있으며 13~16개월을 전후해서 일어서기와 걷기를 시도한다. 사회성 발달 사회적 행동은, 유아(乳兒)가 인물과 사물의 구별을 하기 시작한 다음에 시작된다. 사람의 소리가 나면 그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성인의 미소에 미소로 응답하고, 주위에 사람이 있으면 쾌활해지며, 손발을 움직이고 기쁨을 표시한다. 이러한 생후 2~3개월의 반응이 최초의 사회적 행동으로 간주된다. 이와 같이 먼저 성인과의 사회적 반응이 시작된다. 5~6개월에서 어머니와 타인과의 구별이 가능하게 된다. ‘낯가리기’도 이 무렵에 나타난다. 표정의 이해도 하게 된다. 10개월경이 되면 서투른 말이 시작되고, 근 1년쯤 되면 어른의 요구나 의사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며 모방도 나타난다. 다른 어린이와의 관계는, 4~5개월 정도가 되어서 다른 어린이에게 웃음을 보이고, 특히 응애응애라는 울음소리에 주의를 하는 등의 행동부터 시작된다. 6개월 이후가 되면 상대편에 손을 내민다든지, 완구의 쟁탈 정도의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언어 발달 1개월 이내의 신생아는 호읍(號泣)·몸짓·폭발음 등으로 환경과의 교섭을 갖는다. 그리고 2개월경에 내는 일종의 남어가 되는 폭발음은 발성기관의 무의식 운동에 의해서 생기며, 돌발적이긴 하나 다분히 감정 표현으로서 일어난다. 초기의 발음은 모음인지 자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미분화한 복합음이지만, 먼저 모음, 이어서 파·바·마·다…라·사 행(行)의 순으로 자음이 분화한다. 처음에는 대단히 부정확하고, 생략·난음(亂淫)·이행(移行)·전치(轉置)·첨가·융합 등의 현상이 오청(誤聽)·오발음(誤發音)의 결과로서 많이 나타난다. 또 남어는 폭발음과 구별하기 어려우나 감정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소리를 낸다든지 듣는다든지 하여 기뻐하는 일종의 유아의 유희로서 3~8개월경에 왕성하다. 그러나, 아직 특정한 사상(事象)과의 관련은 없다. 10~12개월경에 음성이 특정한 사상과 결부되어 의미가 가해져서 비로소 언어가 시작된다. 최초에는 형식상의 단어에 불과하지만, 의미나 내용상으로 보면 하나의 문장이 되는 1어문(一語文)이 요구나 호소로서 발해진다. 한편 영아기에는 언어습득과 관련해서 옹알이를 한다. 지각 습관화 성 문제 간혹 남자아이로 태어났는데 음경과 음낭이 몸 안으로 들어가 음순으로 보일 수 있는데. 성장했을 때 생식기를 꺼내야 한다. 반대로 여자아이로 태어났는데 요도와 난소가 몸 밖으로 나와 음경과 음낭으로 보일 수 있는데. 성장했을 때 생식기를 넣어야 한다. 영아 사망 영아 사망은 만 1세 미만의 사망을 말한다. 영아 사망은 다시 태어난 지 27일 이내의 사망인 신생아 사망과 4주 이후의 사망인 후신생아 사망으로 나눈다. 영아 사망의 가장 큰 이유는 질식, 감염, 선천성 기형 그리고 SIDS이다. 영아 살해도 영아 사망의 한 부분이다. 전염병 지수는 한 나라의 건강에 중요한 척도가 되는데, 이는 영아, 아동, 임산부의 건강 상태와 연관이 있으며, 의료 조치, 사회경제학적 상태와 공공 보건의 실천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영아 사망 순위 1위는 앙골라, 2위는 아프가니스탄, 3위는 시에라리온이다. (영아사망률에 따른 나라 목록 참조) 세계 평균 영아 사망률은 50.11명이다. 대한민국의 영아 사망 순위는 187위이고, 제일 낮은 나라는 싱가포르, 226개 국가 중 최하위다. 돌보는 방법 아기가 우는 것은 본능적인 의사소통 방법이다. 우는 아기는 자기의 다양한 감정, 즉 배고픔, 불편함, 자극 과잉, 지루함, 외로움, 추움과 더움 등을 표현하려고 애쓴다. 아기를 돌보는 사람들은 아기를 관찰하거나 베이비캠을 이용하여 다른 방에서 아기를 관찰할 수 있다. 보통 모유 수유를 통해 아기에게 먹을 것을 공급한다. 유네스코나 미국 소아과 협회 같은 대부분의 영아 건강 기구들은 모유를 권장한다. 그러나 모유수유가 불가능하거나 이를 원치 않으면 분유를 먹일 수 있다. 아기들은 빨려는 본능이 있어 엄마 젖꼭지나 분유병의 인공 젖꼭지에서 젖이나 분유를 빨 수 있다. 또 아기는 젖꼭지를 찾으려는 본능도 있다. 극히 드문 경우로는, 특히 개발 도상국에서, 아기를 돌보는 사람이 고용되어 아기에게 수유를 하기도 한다. 갓난아기가 자라게 되면 식성도 발달하게 되어, 많은 부모들은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이용하여 직접 만들거나 시중에서 살 수 있는 이유식을 분유에 보충해 주기도 한다. 아기들은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 산업화된 국가에서는 기저귀를 채우지만, elimination communication과 같은 방법도 제삼세계 국가들에서 쓰인다. 연구에 의하면 6개월정도가 되면 아기는 몸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오줌을 싸는 것도 인식하게 된다. 아기들은 똥오줌을 싸고 싶을 때 싸게 해주도록 부모에게 몸을 비틀거나 소리를 내어 신호를 보내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 때 보호자가 이유식을 먹여주지 않고 아기가 스스로 먹도록 하는 자기주도이유식을 실시하기도 하며, 이 경우 음식은 퓨레나 미음 같은 종류보다는 아기가 손으로 잡기 편한 형태의 것으로 준비한다. 아기들은 정상적인 활동을 위해 성인에 비해 엄청난 잠을 자게 된다. 보통 새로 태어난 아기는 최대 18시간까지 자고, 자라면서 시간이 달라진다. 영아기에는 걸을 수는 없고, 성장이 빠른 아기들은 뒤집고 긴다. 유모차를 타거나 포대기에 업혀 (그리고 앞으로 메는 아기 주머니에 실려) 이동할 수도 있고, 그냥 팔을 통해 안을 수도 있다. 산업화된 거의 대부분의 나라는 자동차에 태울 때 아동용 의자에 태울 것을 법으로 의무화 하고 있다. 아기가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부모에게 달려 있고, 보통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버스 운임이나 박물관, 놀이공원의 입장료는 무료이다. 아기가 자라나면서 이러한 특별한 관심은 점점 사라진다. 반대로 비행기의 경우 아기에게는 좌석이 제공되지 않으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는 기압 적응력이 약하기 때문에 비행기 탑승이 거부된다. 아기를 관리하는 데 있어 주의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트림 시키기, 배탈 더 큰 아동으로부터 위생: 목욕 또는 샤워. 탯줄과 배꼽 관리 낮 동안 보호 기저귀 갈기 젖 주기: 모유 수유나 젖병에 모유 또는 분유 수유 병균으로부터 보호 부모와의 유대 인공 젖꼭지 아기바구니 또는 아기 침대에서 자기 양치질 화상사고 육아카페 같은 곳에서는 아기를 '등센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최초 1,000 일의 삶 - 임신과 두 번째 생일 사이의 시간 -은 이상적인 건강, 성장 및 신경 발달의 토대가 평생 동안 드러나는 독특한 기회이다. 기독교 교단에서는 아기에게 유아 세례를 주는 교단이 많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도 아기는 마스크 착용 의무에서 제외된다. 같이 보기 유아 어린이 성인 육아 보육 교육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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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A1%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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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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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은 다음을 의미한다. 사농공상 규벌 사족 (일본)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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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6%A5%EB%82%98%EB%AC%B4%EC%86%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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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나무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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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나무속은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분류 향나무속에 속하는 종의 수는 여러 설에 따라 다르다. 최근의 두 연구 결과에서도 차이가 크게 난다. Farjon (2001)은 52 종을, Adams (2004)는 67 종을 향나무속으로 분류했다. 향나무속은 여러 절로 나뉘는데, 각 종이 어느 절로 분류되는지에 대해서도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이다. Juniperus sect. Juniperus: 바늘잎류 Juniperus sect. Juniperus subsect. Juniperus: Cones with 3 separate seeds; needles with one stomatal band. 두송 Juniperus communis - Common Juniper Juniperus communis subsp. alpina - Alpine Juniper 해변노간주 Juniperus conferta - Shore Juniper (syn. J. rigida var. conferta) 노간주나무 Juniperus rigida - Temple Juniper or Needle Juniper Juniperus sect. Juniperus subsect. Oxycedrus: Cones with 3 separate seeds; needles with two stomatal bands. Juniperus brevifolia - Azores Juniper Juniperus cedrus - Canary Islands Juniper Juniperus deltoides - Eastern Prickly Juniper Juniperus formosana - Chinese Prickly Juniper Juniperus lutchuensis - Ryukyu Juniper Juniperus navicularis - Portuguese Prickly Juniper Juniperus oxycedrus - Western Prickly Juniper or Cade Juniper Juniperus macrocarpa (J. oxycedrus subsp. macrocarpa) - Large-berry Juniper Juniperus sect. Juniperus subsect. Caryocedrus: Cones with 3 seeds fused together; needles with two stomatal bands. Juniperus drupacea - Syrian Juniper Juniperus sect. Sabina: 비늘잎류 아메리카를 제외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종 향나무 Juniperus chinensis 눈향나무 Juniperus chinensis var. sargentii Juniperus convallium - Mekong Juniper Juniperus excelsa - Greek Juniper Juniperus excelsa subsp. polycarpos - Persian Juniper Juniperus foetidissima - Stinking Juniper Juniperus indica - Black Juniper Juniperus komarovii - Komarov's Juniper Juniperus phoenicea - Phoenicean Juniper Juniperus procera - East African Juniper Juniperus procumbens - Ibuki Juniper Juniperus pseudosabina - Xinjiang Juniper Juniperus recurva - Himalayan Juniper Juniperus recurva var. coxii - Cox's Juniper Juniperus sabina - Savin Juniper 단천향나무 Juniperus sabina var. davurica - Daurian Juniper Juniperus saltuaria - Sichuan Juniper Juniperus semiglobosa - Russian Juniper 곱향나무Juniperus sibirica Juniperus squamata - Flaky Juniper Juniperus thurifera - Spanish Juniper Juniperus tibetica - Tibetan Juniper Juniperus wallichiana - Himalayan Black Juniper 아메리카 서식 종 Juniperus angosturana - Mexican One-seed Juniper Juniperus ashei - Ashe Juniper Juniperus barbadensis - West Indies Juniper Juniperus bermudiana - Bermuda Juniper Juniperus blancoi - Blanco's Juniper Juniperus californica - California Juniper Juniperus coahuilensis - Coahuila Juniper Juniperus comitana - Comitan Juniper Juniperus deppeana - Alligator Juniper Juniperus durangensis - Durango Juniper Juniperus flaccida - Mexican Weeping Juniper Juniperus gamboana - Gamboa Juniper Juniperus horizontalis - Creeping Juniper Juniperus jaliscana - Jalisco Juniper Juniperus monosperma - One-seed Juniper Juniperus monticola - Mountain Juniper Juniperus occidentalis - Western Juniper Juniperus occidentalis subsp. australis - Sierra Juniper Juniperus osteosperma - Utah Juniper Juniperus pinchotii - Pinchot Juniper Juniperus saltillensis - Saltillo Juniper Juniperus scopulorum - Rocky Mountain Juniper Juniperus standleyi - Standley's Juniper 연필향나무 Juniperus virginiana - Eastern Juniper (Eastern Redcedar) Juniperus virginiana subsp. silicicola - Southern Ju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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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MIPS%20%EC%95%84%ED%82%A4%ED%85%8D%EC%B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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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PS 아키텍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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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PS(Microprocessor without Interlocked Pipeline Stages)는 밉스 테크놀로지에서 개발한 RISC ISA이다. MIPS 디자인은 실리콘 그래픽스 사의 컴퓨터 시스템, 많은 임베디드 시스템과 윈도우 CE 장치, 시스코 시스템즈 라우터에 사용되었다. 그 외에도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닌텐도 64, 플레이스테이션 2,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 같은 게임 콘솔에도 사용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아이스테이션 사의 아이스테이션 T43제품에 쓰인바 있다. 초기 MIPS 아키텍처는 32비트를 사용하였다. 이들은 32비트 레지스터와 데이터 경로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후의 MIPS 프로세서들은 64비트 구현을 사용하였다. 5종류의 하위 호환성 MIPS 동작 세트가 존재하며, 이들은 각각 MIPS I, MIPS II, MIPS III, MIPS IV, MIPS 32/64라고 불린다. MIPS 32/64 릴리즈 2에서는 동작 세트와 함께 컨트롤 레지스터 셋도 정의하고 있다. MIPS-3D 같은 3차원 그래픽을 위한 SIMD 확장 기능도 존재한다. MDMX(MaDMaX) 확장은 64비트 유동 소수점 레지스터를 활용하는 정수 연산 집합이다. 최근에는 MIPS MT라고 하는 인텔 펜티엄 4 프로세서의 하이퍼스레딩 같은 멀티스레딩 기능이 추가되었다. MIPS 디자이너들이 명령어 세트를 깔끔하게 설계했기 때문에 많은 대학의 컴퓨터 아키텍처 강좌에서 MIPS 아키텍처를 가르친다. MIPS 프로세서의 디자인은 후기 RISC 아키텍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 모델 알림: 이 규격들은 일반 프로세서 모델에 해당한다. 특히 2차 캐시 쪽에서 변종들이 존재할 수 있다. 외부 링크 MIPS Technologies 마이크로프로세서 명령어 집합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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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2007%EB%85%84%20%ED%95%9C%EA%B5%AD%EC%8B%9C%EB%A6%AC%EC%A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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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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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삼성 PAVV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10월 22일부터 29일까지 모두 6차전을 벌여 SK 와이번스가 두산 베어스를 4승 2패로 꺾고 창단이후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시리즈 MVP는 SK 와이번스의 김재현 선수가 차지했다. 정규 시즌 정규 시즌에서 각각 1, 2, 3, 4위를 차지한 SK, 두산, 한화, 삼성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 결과 준 플레이오프 먼저 준 플레이오프에서, 정규시즌을 각각 3·4위로 마친 한화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맞붙었다. 이 시합에서 한화가 1차전 선발 등판해 승리한 류현진과 이번 준 플레이오프에서 3홈런을 기록한 이범호의 활약으로 삼성을 2승 1패로 누르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준 플레이오프 MVP는 류현진이 차지했다. 이로써 한화는 정규시즌을 2위로 마감한 두산 베어스와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놓고 다투게 되었다. 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결과는 두산이 고영민, 김현수, 이대수, 이종욱 등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들이 활약하면서 한화를 상대로 3전 전승을 기록하며 정규시즌 1위인 SK 와이번스와 한국시리즈를 치르게 되었다. 플레이오프 MVP는 이종욱 선수가 차지했다. 출장자 명단 SK 와이번스 감 독 - 김성근 코 치 - 이만수, 가 토, 오오타, 김경기, 이광길, 후쿠하라 투 수 - 김원형, 채병용, 윤길현, 송은범, 레이번, 로마노, 가득염, 김광현, 조웅천, 정대현, 이영욱 포 수 - 박경완, 정상호 내야수 - 정경배, 이호준, 나주환, 박정권, 김동건, 정근우, 최 정 외야수 - 박재홍, 김재현, 이진영, 조동화, 박재상, 김강민 두산 베어스 감 독 - 김경문 코 치 - 김광수, 김태형, 김광림, 윤석환, 한영준, 김민호 투 수 - 리오스, 랜 들, 이경필, 이혜천, 이승학, 정재훈, 김상현, 김명제, 금민철, 임태훈 포 수 - 홍성흔, 채상병, 김진수 내야수 - 안경현, 김동주, 정원석, 이대수, 최준석, 고영민, 오재원 외야수 - 장원진, 전상열, 유재웅, 이종욱, 민병헌, 김현수 경기 기록 한국시리즈 경기결과 1차전 10월 22일 - 인천SSG랜더스필드 시구 : 박태환 (수영 국가대표) 두산 리오스, 한국시리즈 통산 8번째 완봉승, 20번째 완투승 - 4피안타 1피사사구 2탈삼진 두산 리오스, 역대 최소 투구 완봉승 - 99개 양팀 선발로 SK는 레이번, 두산은 리오스를 올리며 외국인 에이스끼리의 대결로 한국시리즈의 막을 열었다. 두산은 1회초 1사 2루 상황에서 고영민의 적시 2루타로 선취점을 따냈다. 이후 두산은 5회초에 1사 만루 상황에서 김동주가 친 플라이에 이종욱이 과감한 베이스 러닝으로 한점을 더 따내며 2-0을 만들어냈다. 이후 시합은 투수전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SK는 레이번에 이어 가득염, 윤길현, 이영욱, 김광현, 조웅천 등이 이어 던진 반면, 두산은 선발 리오스를 끝까지 밀고 나가서 결국 한국시리즈 첫 승을 리오스의 완봉승으로 장식하였다. 이로써 두산은 한국시리즈 우승에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 한편, 5회초 무사 1루 상황에서 두산 이종욱의 2루 도루때 SK 유격수 정근우가 포수가 송구한 공을 받지 못했었고, 이 틈을 타 이종욱은 3루까지 진출하려 했으나 정근우에게 걸려 넘어져 3루에 가지 못한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주루방해 시비가 일기도 했다. 2차전 10월 23일 - 인천SSG랜더스필드 시구 : 이현지 (방송인) SK는 1회말 2사 1루 상황에서 이호준이 선제 투런 홈런을 만들어내며 두 점을 먼저 앞서나갔다. 이에 두산은 3회초 2사 1루 상황에서 고영민이 동점 투런 홈런을 쳐내어 다시 2-2 균형을 이루었다. 여세를 몰아 5회초에 두산 채상병이 역전 솔로 홈런을 쳐냈고, SK는 바로 5회말에 조동화가 동점 솔로 홈런을 만들어내며 다시 동점을 이루었다. 그러나 두산은 6회초 2사 2,3루때 이대수가 2타점 중전 적시타를 쳐내며 결승점을 만들어냈다. 이후 이어진 기회에서 채상병이 좌익수 키를 넘기는 적시 2루타를 터뜨리며 한 점을 추가했다. 결국 두산은 이 경기에서 6-3으로 이기면서 적지인 인천에서 SK를 상대로 2연승을 거두어 한국시리즈 우승에 단 2승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한편, 6회초 무사 1루 두산의 공격 상황에서, SK 투수 채병용이 던진 공이 두산 김동주의 몸에 맞았고, 이 때문에 빈볼 시비가 일어났다. 이 상황에서 양팀 선수가 그라운드에 몰려나와 서로 대치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3차전 10월 25일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애국가 : 가수 양파 시구 : 원더걸스 두산 이대수, 한국시리즈 1이닝 최다 실책 - 6회 3실책 두산, 한국시리즈 한 경기 최다 실책 타이기록 - 3실책 SK, 선발 전원 안타 두산 이혜천, 한국시리즈 3호 퇴장 SK는 1회초 1사 3루 상황에서 김재현의 적시 2루타와 계속된 2사 3루 기회에서 박재홍이 내야안타를 만들어내며 선취점으로 2점을 얻어냈다. 마운드에서 로마노가 호투하는 가운데, SK는 6회초에 대거 7점을 만들어냈다. 6회초 무사 1,3루 상황에서 3루주자 이호준이 주루사당하며 기회가 무산되는 듯했으나, 계속된 1사 2루 상황에서 두산 유격수 이대수가 김강민의 땅볼을 더듬는 실책을 범했다. 정경배가 내야안타를 만들어내 이어진 1사 만루 상황에서 이대수는 김강민의 실책 유도로 인하여 최정의 내야땅볼을 또 더듬는 실책을 범해 1점을 헌납했다. 이후 박경완이 2타점 2루타를 쳐냈고, 정근우의 몸에 맞는 볼로 인해 다시 만들어진 1사 만루 상황에서 조동화의 내야 플라이 때 이대수가 뜬공을 놓치고 아무도 없는 3루에 악송구를 하며 2점을 더 내주었다. 이로써 이대수는 6회에만 3실책을 하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겼다. 계속된 1사 2,3루 상황에서 정근우가 이혜천이 김재현에게 초구를 던지는 순간 3루 주자 정근우가 홈스틸을 시도했다. 뜻밖의 홈스틸에 당황한 포수 채상병이 공을 뒤로 빠뜨렸고 2루 주자 조동화까지 홈플레이트를 밟아 점수는 9-0으로 벌어졌다. 주자 두 명이 모두 득점으로 만들어졌고, 이로써 승부는 사실상 SK쪽으로 기울었다. 두산은 바로 이어진 6회말에 고영민의 적시타로 1점을 만회하여 영패를 모면했다. 선발 로마노는 6이닝 4안타 1실점으로 호투했고 구원진은 각각 1이닝 무실점으로 승리했다. 반면 선발 김명제는 5이닝9안타 3실점 패전투수가 됐다. SK는 2연패 뒤 1승을 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의 희망을 이어갔다. 한편 이날 경기에선, 두산 투수 이혜천이 9-0이던 6회초 1사 김재현 타석때 타자의 등 뒤로 공을 던지는 빈볼이 나오자, 지난 경기에 이어 양팀 선수들이 모두 그라운드로 뛰쳐나왔고, 주심은 투수가 고의적으로 빈볼을 던졌다고 판단하여 이혜천에게 퇴장 명령을 내렸다. 4차전 10월 26일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시구 : 탤런트 박진희 SK 김광현, 한국시리즈 신인 최다 탈삼진 - 9개 SK 조동화-김재현, 한국시리즈 통산 6호 백투백 홈런 - 5회 SK, 한국시리즈 최초 2경기 연속 선발 전원 안타 앞선 세차례의 경기에서 양팀은 분위기가 매우 과열되어 있었고, 세 경기 모두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하여 험악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이에 KBO에서는 양 팀에 엄중 경고조치하였고 경기 시작전 양팀 주장 선수인 두산의 홍성흔과 SK의 김원형 선수에게 경기전 팬에게 공개 사과하도록 하였고 두 선수가 선전을 다짐하며 포옹을 하도록 주선하였다. 양팀 선발투수로 두산은 지난 1차전때 완봉승을 거둔 에이스 리오스를 예정대로 올렸으나, SK는 에이스끼리의 승부를 피해 고졸신인 김광현을 선발로 올렸다. 선발로테이션 변경을 통해 나머지 경기에서 선발투수의 우위를 점하겠다는 작전이었다. SK는 1회초에 이호준의 적시타로 1점을 선취하는 데 이어, 5회초에는 조동화와 김재현이 한국시리즈 6번째 백투백 홈런을 터뜨리며 지난 1차전때 리오스를 상대로 무득점 한 것을 설욕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SK는 6회초 1사 1,3루때 두산 투수 김상현의 와일드 피칭 때 한점 더 추가하면서 4-0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 경기에서 SK 선발 김광현이 8회1아웃까지 1피안타 2피사사구 9탈삼진 무실점의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쳐, 팀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이로써 SK는 두산과 2승 2패의 전적으로 한국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반면 두산 선발 리오스는 전날 있었던 3차전 때 벤치 클리어링 상황에서 심하게 흥분하며 과격한 행동을 보였던 여파로 정상적인 투구를 하지 못하고 패전의 명예를 썼다. 5차전 10월 27일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애국가 : 가수 강진 시구 : 강수정 (방송인) 두산 홍성흔, 한국시리즈 사상 한 경기 최다 병살타(3개) 양팀 선발인 SK 레이번과 두산 랜들의 호투 속에 경기는 7회까지 투수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0-0이던 8회초, SK는 두산 임태훈을 상대로 무사 2루 상황에서 김재현이 우측 펜스 맞고 나오는 3루타로 1점을 선취했고, 이어진 기회에서 이호준이 우중간 2루타를 만들어 2-0으로 앞서나갔다. 두산은 이혜천을 구원투수로 등판시켰으나 김강민의 2루타와 2사 3루 상황에서의 폭투 등으로 2점을 더 내주어, 4-0 패배를 당했다. SK는 홈 2연패 뒤 원정 3연승이자 잠실 3연전 싹슬이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에 단 1승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6차전 10월 29일 - 인천SSG랜더스필드 애국가 : 뮤지컬 배우 류정한 시구 : 가수 손담비 두산, 한국시리즈 21이닝 연속 무득점 두산은 1회초에 김동주의 적시 2루타로 1점을 먼저 선취해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SK는 3회말 1사 1루 상황에서 정근우의 역전 투런 홈런과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터진 김재현의 솔로 홈런으로 3-1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SK는 8회말에 최정의 적시타와 조동화의 적시 2루타로 2점을 더 추가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었다. 두산은 9회초에 유재웅의 적시타로 1점을 더 추가했으나, 더 이상 점수를 내지 못했다. 이로써 SK는 두산을 상대로 2연패 뒤 4연승으로 팀 창단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방송 중계 이 방송부터 HD 디지털 화질 영상입니다. 각주 한국시리즈 SK 와이번스 두산 베어스 한국시리즈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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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8B%A4%20%EC%99%95%EA%B5%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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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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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국(, , )은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931년 무렵에 분열되어 12개 지파 가운데 2개의 지파인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지지로 세워진 왕국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창건 왕조인 다윗 왕조가 군림하였다. 북이스라엘 왕국과 대조하여 남유다 왕국으로 부르기도 한다. 왕국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유다 지파의 이름을 따서 유다 왕국이라 불렀고, 약 344년 동안 20명의 임금이 재위하였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히스기야, 여호사밧, 아사, 요시야, 요담 등 몇몇 외에는 유대교 신앙 외에 다른 신앙에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다 왕국의 중심지는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이었다.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6년 무렵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당했다. 고고학적 기록 성경 기록에 따르면 유다 왕국은 기원전 10세기경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통치되었던 통일 이스라엘 왕국에 그 근간을 둔다. 단 석비는 기원전 9세기경 북이스라엘 왕국 남쪽에 있었던 다윗 왕조의 후손이 다스리는 국가가 있었음을 실증하며, 이후 다른 자료들도 기원전 8세기에 유다 왕국을 통치했다고 전해지는 몇몇 왕들의 실존을 증명한다. 그러나 유다 왕국이 정확히 어떻게 창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추론할 근거가 없다. "유다"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은 님루드에서 발굴된 기원전 733년에 쓰여진 석판이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에 대해 현대 고고학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던 이론은 이스라엘 핀켈슈타인이 제시한 '저연대Low Chronology' 이론이다. 이 이론에서 제시하는 층서학적 모델에 따르면, 그동안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것으로 인식되던 유물이나 유적들(게셀, 므깃도, 하솔의 마병장)은 기원전 10세기가 아닌 기원전 9세기로 비정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다윗 왕은 기원전 10세기~9세기로 비정하는데, 강한 왕권을 가졌다기 보단 유다의 소규모 부족의 족장 수준의 인물로 북이스라엘 왕국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학계에서는 현재 기원전 10세기경 예루살렘의 위상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 구역의 중심부는 '다윗의 성읍'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데, 실제로 이 구역을 조사해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의 흔적은 기원전 9세기가 되어서야 나타난다. 그러나 이 구역에서 발견된 계단 형태의 석조 구조물이나 대형 석조 구조물들은 기원전 10세기까지 소급된다. 네게브 사막의 텔아라드에서 발굴된 군사 요새의 무기류 유물들은 유다의 말단 장교들도 글을 배웠음을 시사한다. 역대 국왕 같이 보기 이스라엘 왕국 유다 왕국의 군주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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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9E%98%ED%94%BD%20%EC%82%AC%EC%9A%A9%EC%9E%90%20%EC%9D%B8%ED%84%B0%ED%8E%98%EC%9D%B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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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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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사용자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입출력 등의 기능을 알기 쉬운 아이콘 따위의 그래픽으로 나타낸 것이다.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화면 위의 물체나 틀, 색상과 같은 그래픽 요소들을 어떠한 기능과 용도를 나타내기 위해 고안된 사용자를 위한 컴퓨터 인터페이스이다.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에서 어떤 요소를 제어하려면 그 요소에 해당하는 그래픽을 직접 조작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2차원의 공간에서 그 기능을 은유적 혹은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그래픽으로 요소를 꾸미고 이를 선택, 이동, 복사하여 작동한다. 이를테면, X자와 같은 형태의 그래픽 요소는 이를 선택하면 삭제하거나 취소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며 어떤 파일을 나타내는 아이콘을 어느 위치에서 다른 하드 디스크의 장소를 나타내는 공간으로 이동하면 복사가 된다. 컴퓨터 자판의 명령어 입력이 요구되는 명령 줄 인터페이스(CLI)의 가파른 학습 곡선에 대응하여 GUI가 도입되었다. GUI의 동작은 일반적으로 그래픽 요소의 직접 조작을 통해 수행된다. 컴퓨터를 넘어 GUI는 MP3 플레이어 등,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 게이밍 장치, 스마트폰, 소형 가전, 사무 및 산업 제어 등 수많은 휴대용 모바일 장치에 사용된다. 윈도우와 리눅스, OS X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 운영 체제들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지원한다. 리눅스 및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에서는 X 윈도 시스템을 주로 사용하며, 모티프, Qt, GTK+ 등의 툴킷으로 확장할 수 있다. 예시 역사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아이디어는 1960년대에 제안되었다. 이반 서덜랜드가 1963년에 개발한 스케치패드는 컴퓨터 지원 설계(CAD) 소프트웨어의 조상이자 최초로 완전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구현한 것이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더글라스 엥겔바트를 비롯한 SRI 인터내셔널의 연구자들은 하이퍼링크를 기반으로 마우스를 사용하는 NLS(On-line System)를 개발하였다. NLS의 하이퍼링크 개념은 제록스 파크에서 그래픽으로 확장되었으며, 1973년에 개발된 제록스 알토 컴퓨터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들은 기본적으로 이 인터페이스로부터 유래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파크 사용자 인터페이스(PUI)’라 부르기도 한다. 파크 사용자 인터페이스는 윈도, 메뉴, 아이콘, 라디오 단추, 체크 상자 등의 그래픽 요소들을 사용하며, 마우스와 같은 포인팅 장치를 키보드와 함께 사용한다. 이후 애플 컴퓨터는 제록스 파크에서 만든 이러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보고 당시 비상장이었던 애플의 주식 액면가 100만 달러 어치를 지불하고 기본적인 기술을 전수받았다. 1981년에 개인용 컴퓨터인 1983년에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기반한 컴퓨터 리사(LISA)를 출시했지만 값이 너무 비싼 탓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후 1984년에 나온 애플의 매킨토시는 상업적인 성공을 이뤘다. 한편 매킨토시가 이러한 성공을 거두자 마이크로소프트사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개발하였다. 이는 매킨토시의 아이디어를 다시 모방한 것이었으며 이후 법정소송을 거치기도 하였다.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윈도우 95를 출시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본격적인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대중화를 이루었다. 한편 CUI(character user interface, 명령 줄 인터페이스) OS인 유닉스(UNIX)와 그 계열의 리눅스에서는, X 윈도 시스템을 통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구현하고 있다. 같이 보기 사용자 인터페이스 스킨 GUI 위젯 각주 미국의 발명품 소프트웨어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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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B9%EB%83%A5%EC%9D%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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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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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냥이 또는 아시아들개, 돌()은 개과의 포유동물로 승냥이속에 속하는 유일한 종이다. 개요 몸길이 120cm, 꼬리길이 45cm, 몸무게 36kg으로 큰 개와 비슷하나 개보다 이마가 넓고 주둥이가 더 뾰족하다. 꼬리털은 길어 발 뒤축까지 내려온다. 귀는 짧고 꼬리를 늘어뜨린다. 몸빛은 붉은색을 띤 회갈색에서 황갈색·홍갈색 등으로 변하고, 몸의 아랫면은 회백색이다. 행동이 대단히 민첩하며 5-10 마리로 무리를 지어 저녁과 새벽에 활동하며 인가 근처에 나타난다. 추운 지역에서는 멧돼지, 꽃사슴, 고라니, 노루, 산양, 멧토끼, 새 등을 잡아먹고 더운 지역에서는 멧돼지, 액시스사슴, 삼바사슴, 물소, 인도영양, 말레이맥, 원숭이, 오랑우탄, 빈투롱, 새 등을 잡아먹는다. 임신 기간은 2개월이고, 한배에 3-4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추운 지역에서는 한반도, 중국, 러시아에 분포하고 더운 지역에서는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분포한다. 천적은 호랑이, 표범, 눈표범, 늑대다. 사진 계통 분류 각주 외부 링크 승냥이에 관한 홈페이지 승냥이에 관한 사실과 사진들 동남아시아의 승냥이 답사 ARKive - 승냥이의 사진과 동영상들 반디푸르의 승냥이 사진들 개과 1811년 기재된 포유류 중국의 포유류 대한민국의 포획·채취 등의 금지 야생생물 플라이스토세 아시아의 포유류 최상위 포식자 서식지 파편화로 인한 절멸위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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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9D%B4%EC%BC%80%20%EC%9C%A0%EB%A6%AC%EC%BD%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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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케 유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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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케 유리코(, 1952년 7월 15일~)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7선 중의원 의원이었다. 현재 도쿄 도지사를 역임하고 있다. 개요 참의원 의원과 제5·6·7대 환경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오키나와 및 북방 대책 담당)을 역임했으며, 내각총리대신 보좌관(국가안전보장문제 담당), 제2대 방위대신을 역임했다. 생애 고이케는 효고현 아시야시 출신이다. 1971년 9월에 간세이 가쿠인 대학 사회학부를 중퇴했다. 의류 관련 무역상을 하던 부친이 이시하라 신타로의 신당 결성 움직임에 발맞춰 중의원 선거에서 효고 2구에 입후보했지만 낙선하자, 일가가 모두 이집트로 건너간다.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교(American University of Cairo)에서 아랍어를 배우면서 카이로 대학교에 진학했다. 1976년 10월에 카이로 대학교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등과의 단독 인터뷰를 성공시키는 등의 활동으로 이름을 높였다. 1992년 7월에 일본신당 비례구에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1993년 7월의 총선거에서 다시 효고 2구에서 출마해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여러 정당의 분열·통합이 이루어지자 신진당으로 이동해 “신진당의 결성은 매튜 C. 페리, 더글러스 맥아더에 이은 제3의 흑선(黑船, 구로후네)이다”라고 평했지만, 이후에 자유당과 보수당을 거쳐 2002년 12월 27일에는 자유민주당으로 이동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오자와 이치로, 니카이 도시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의 권력자나 실력자가 있는 정당으로 이동해 왔다. 이 때문에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환경대신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2차 개조내각에서 환경대신으로 입각했다. 2003년 총선거에서는 긴키 블록에 비례대표로만 명부에 3번으로 등록되어서 당선되었다. 2003년 2월에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라크 문제에 대해서 미국의 입장과 행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연명으로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제2차 고이즈미 내각 출범과 함께 환경상으로 유임되었고, 2005년 여름에는 가벼운 복장을 입자는 쿨 비즈 캠페인의 선도자가 되었다.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우정 민영화 법안에 반대한 고바야시 고키의 대항마로 도쿄 10구에서 입후보했다. 이 지역은 이전까지는 자민당의 고바야시 고키와 민주당의 사메지마 무네아키(鮫島宗明)의 대결장이었으며, 두 사람의 나이가 같고 도쿄 대학을 졸업한 전 관료 사이의 싸움이었던 점에 착안한 고이케 유리코는, 고바야시의 낙선을 노린 이른바 자객 후보로 나서면서 도쿄 10구(도시마 구)는 미디어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자민당 비례대표에서 비례 명부에 오를 수 있었지만, 당선에 대해 확신한 고이케는 선거구에서의 불리함을 피하기 위해 상위 우대를 거부하고 낮은 순위로 명부에 올랐다. 우정 민영화를 바탕으로 한 우정(郵政) 선거라는 순풍과 함께 사메지마보다 낮은 지지율을 기록한 고바야시의 자멸로 고이케는 쉽게 당선되었다. 선거 이후에는 온난화 대책이라는 명목으로 환경세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제를 도입한다는 구상을 발표했지만, 반대가 많아 보류되었다. 제2차 고이즈미 내각 개조내각에서는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오키나와 및 북방대책 담당)도 겸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으로 2005년에 피로로 입원하게 되면서, 2006년 4월 6일의 『슈칸신초』(週刊新潮)에서는 “나가타초(永田町)에서는 위독설이나 자살미수설이 흐르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지만, 4월 14일에 퇴원하고 업무에 복귀했다. 고이케는 복귀 회견에서 “여성의 경우 남성의 10배 정도의 결과를 내지 않으면 인정받기 힘들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치게 열심히 했다”고 발언했다. 방위대신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의 발족과 함께 국가안전보장문제를 담당하는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으로 취임했지만, 2007년 7월 3일에 규마 후미오 방위상이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발언으로 방위대신 직을 사직하면서, 다음날인 4일에 그 후임으로 방위대신에 취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 군사 역사상 여성이 방위담당각료가 된 것은 처음이다. 도쿄 도지사 2016년 7월 31일, 도쿄도지사 재보궐선거에서 여성 최초로 도쿄도지사에 당선되어 공식 취임하였다. 도민퍼스트회, 희망의 당 창당 2017년 6월 1일 고이케 유리코는 도쿄 도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 정당인 도민퍼스트회를 창당하면서 자유민주당을 탈당하였다. 2017년 9월 25일에는 희망의 당을 창당하였다. 역대 선거 결과 외부 링크 195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방위대신 일본의 환경대신 일본의 여자 각료 도쿄도지사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 관계자 중의원 의원 희망의 당의 정치인 효고현 출신 간세이 가쿠인 대학 동문 카이로 대학교 동문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교 동문 호소카와 모리히로 여자 국방장관 올림픽 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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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DNS%20%28%EC%9D%8C%EC%95%85%20%EA%B7%B8%EB%A3%B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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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S (음악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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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S는 Digital Masta와 실력이 결성한 듀오이다. 2002년 Future Flow를 통해서 데뷔하였으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고, Future Flow의 와해와 함께 해체하였다. DNS란 이름은 둘의 이름의 첫 알파벳과 and를 따서 만든 것이다. 역사 Digital Masta는 1집을 조PD의 프로듀싱과 피쳐링으로 작업한 것을 계기로 Stardom의 멤버가 되었다. 한편, Jah-U와 함께 팀을 이뤄 활동하고 있던 Carsen은 역시 조PD에게 픽업되면서 이름을 실력으로 바꾸고 Future Flow의 멤버가 되었다. 둘은 처음부터 팀은 아니었으나, 2002 대한민국 앨범에서 "쿵짝"이라는 곡으로 함께 콜라보를 한 것을 시작으로, 그 해 6월 DNS란 이름의 팀으로 데뷔하였다. Digital Masta 1집과 달리 조PD의 참여가 얼마 없었던 이 앨범은, 해피투게더 시즌 1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했던 실력의 인지도와 매니아들 사이에서의 Digital Masta의 인기로 어느 정도 기대를 모았으나, 방송 쪽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이는 Digital Masta가 조PD에게 자신을 충분히 홍보시키지 않는다는 불만과 조PD가 Digital Masta에게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야기, 결국 둘의 사이가 벌어져 Digital Masta는 Future Flow를 탈퇴하면서 DNS는 해체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곧 Future Flow의 와해로 이어졌다. 대표곡: 이번달에 디스코그래피 2002년 6월 28일 Take Two 근황 Digital Masta는 현재 YG 엔터테인먼트의 Masta Wu와 함께 YMGA라는 팀을 결성하여 2008년 10월 데뷔하였다. 실력은 이후 솔로 앨범을 준비한다는 소문과 함께 LowDown과 하하의 앨범에 참여하는 등 간간히 모습을 드러냈으나, 2008 대한민국 앨범 참여 이후로는 아무런 공식 활동도 없었다. 2012년 엠넷 《쇼미더머니》에 출연하여 힙합 팬들을 놀라게 하였다. 대한민국의 힙합 그룹 한국어 음악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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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4%91%EC%9D%8C%EC%9E%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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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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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음자(二重音字)란 두 개의 글자 조합으로 이루어져 하나의 음소를 나타내는 문자의 짝이다. 이철일음자(ニ綴一音字)라고도 한다. 보통 로마자에서 자주 사용되나, 한글의 ㅏ+ㅣ로 이루어진 ㅐ나, ㅗ+ㅏ로 이루어진 ㅘ, ㄱ+ㅅ으로 이루어닌 ㄳ 등도 관점에 따라 이중음자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보통 기본 자모만으로 특정 언어의 음소를 모두 표기할 수 없을 때 사용한다. 이중음자는 경우에 따라 하나의 독립된 자모로 간주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중음자 ch를 독립 자모로 간주하는 경우, 사전에서는 c 다음에 ch를 독립 항목으로 설정하여 표제어가 ... ca – cb – cc … cg – ci ... cz – cha – chb … chz – d …의 순서가 된다. 반면, 이를 독립 자모로 간주하지 않는 경우는 cg와 ci 사이에 ch가 나타난다. 이중음자는 각 언어마다 음소와의 대응 규칙이 다르다. 이중음자의 예 이중음자의 예로는 qu, ch, sh, th, wh, tz, rr, ll, rz, zs, sx, dh, rh, bb, dd, rs, yy, sz, zx, ds, gu, gh, zh, xx, sy, zy, pp, tt, nn 등이 있다. 유니코드 같이 보기 다중음자 로마자 이중음자 목록 각주 음성학 다중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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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1%85%84%EA%B3%BC%20%E1%85%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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ᅄ과 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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ᅄ과 ᅋ은 각각 ㅇ과 ㅂ, ㅇ과 ㅍ을 겹쳐 적은 합자이다. 20세기 초반에 [v]와 [f] 소리를 적기 위해 만들었다. 역사 18세기 《청어노걸대》는 만주어의 [f]발음을 ㅍ으로 적었다. 20세기 초에도 [v]와 [f]를 ㅂ, ㅍ으로 적는 기록도 있었지만, 지석영의 《아학편》(1908)이나 이종극의 《모던조선외래어사전》(1937) 등에는 [v]와 [b], [f]와 [p]를 구분하기 위해 ㅇ을 붙여서 ᅄ과 ᅋ으로 표기했다. 1948년 제정된 외래어 표기법인 들온말 적는 법에서는 ᅄ과 ᅋ이 각각 와 의 발음을 표기하는 데에 쓰였다. 한편 주시경은 《대한국어문법》(1906)에서 이 표기가 ㅇ의 원래 발음과 관련이 없으니 불합리하다고 여겼으며, ㅇ 자리에 대신 ∨를 병서한 표기를 제안했다. 코드 값 {| | 각주 참고 문헌 외래어 표기 양상의 변천, 새국어생활 제14권 제2호 ᅋ의 사용 예: 1931년 포드 자동차 광고 ㅇㅂ과 ㅇ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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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D%94%BC%EB%85%B8%EC%82%AC%EC%9A%B0%EB%A3%A8%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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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사우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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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사우루스(Spinosaurus, spine lizard를 의미)는 백악기 전기와 후기에 살았던 대형 육식 공룡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모든 육식 공룡 중에서 제일 길며, 최대 몸길이는 11~18m, 몸무게는 7.4t이다. 현재까지 정확한 복원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생태 주로 온코프리스티스 누미두스(톱가오리류) 같은 대형 어류들과 해양 파충류를 잡아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족 보행에 관한 논란이 있었는데 현재는 이족 보행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최근에 꼬리가 완벽히 보존된 스피노사우루스 화석에서 수생동물의 흔적이 발견됨으로서 악어와 비슷하게 수영을 했을 것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물에서 보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개요 "척추 도마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등에는 피가 흘렀을 것으로 생각되는 2m에 달하는 신경배돌기가 뻗어나 있는데, 이 신경배돌기의 기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 중에서 체온조절에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의견과 위협 혹은 성 선택에 쓰이는 장식용이라는 주장 등이 있다. 최대 몸길이가 약 14m 정도에 무게가 7.4t이다. 가장 몸길이가 긴 수각류 육식 공룡이며, 두개골은 길쭉하고 이빨은 작고 날카로웠으며 원추형이었다. 치열의 구조를 본다면 어류를 주식으로 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치악력은 약했을 것으로 보인다. 스토머가 이집트에서 최초로 발굴한 표본인 IPHG1912viii19가 2차 세계 대전으로 소실되었기 때문에 척추 배열에서도 논란이 있다. 보통의 모습은 바리오닉스의 등 위 '돛'만 얹으면 되는 모습이지만, Andrea Cau의 그림상으로는 이리타토르의 신경배돌기가 심하게 솟아오른 모습으로, 마치 수코미무스를 연상케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돛은 배의 돛처럼 쓰인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몇몇 과학자들은 그냥 짝짓기를 할 때 쓰는 것 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중 매체 영화 쥬라기 공원 3에서 주역 육식공룡으로 나온 바 있다. 2001년에 방영된 시대적 한계 때문에 지금의 상상도와 다른 과거의 복원 모델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고대왕자 공룡킹에서 2006년판에 등장하나 이후 애니메이션 판인 공룡킹 어드벤처에서 스피노라는 별개의 개체가 등장한다. 외부 링크 스피노사우루스과 1912년 기재된 화석 분류군 1915년 기재된 화석 분류군 백악기 후기 아프리카의 공룡 백악기 전기 아프리카의 공룡 1910년대 신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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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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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8%A1%EC%B2%9C%EB%AC%B8%EC%9E%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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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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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문자(則天文字)는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제정한 문자이다. 문자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나, 기존의 한자와 완전히 다른 문자가 아닌 한자의 제자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특수한 한자라 할 수 있다. 한자의 제자원리인 육서 가운데 주로 상형과 회의를 주원리로 하여 만들었다. 또한 없는 개념을 나타내는 새로운 글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에 있는 한자와 뜻이 겹치는 문자이나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만들어진 점이 특징이다. 측천무후는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한 시황제를 전례로 삼아 측천문자를 제작했다. 현재 문헌에 남아 전하는 문자는 17자가량이며, 國과 의미가 같은 圀이라는 문자가 일본에서 인명 한자로 쓰인다. 한국식 자전에도 이 문자는 國의 고자로 소개되어 있다. 측천문자 목록 한자 당나라 무측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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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456%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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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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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유송(劉宋) 효건(孝建) 3년 북위(北魏) 태안(太安) 2년 기년 유송(劉宋) 효무제(孝武帝) 3년 북위(北魏) 문성제(文成帝) 5년 신라(新羅) 눌지 마립간(訥祗麻立干) 40년 고구려(高句麗) 장수왕(長壽王) 44년 백제(百濟) 개로왕(盖鹵王) 2년 사건 신라가 당과함께 고구려를 쳐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문화 탄생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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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3%BC%EC%98%A4%EA%B5%AC%20%28%EB%8F%84%EC%BF%84%EB%8F%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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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오구 (도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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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오구()는 일본 도쿄도의 심장부에 있는 특별구의 하나이다. 에도 시대에는 각 지방에 가는 길의 기점인 된 다리 "니혼바시"()가 만들어지고 그 주변의 니혼바시 지역은 상업 지역으로서 발전되었다. 현재도 니혼바시 지역 일본은행 본점, 도쿄 증권거래소 등 일본 경제의 중추와 미쓰코시 본점, 다카시마야 도쿄점 등 일본을 대표하는 백화점이 집중하고 있다. 또 일본을 대표하는 고급 상가인 "긴자"(), 전국에서 생선류가 모이는 "쓰키지 시장"도 주오 구에 있다. 지리 주오 구는 도쿄의 중심 지역으로 5개의 특별구(지요다구, 미나토구, 다이토구, 스미다구, 고토구)에 둘러싸여있다. 행정적으로 주오 구는 3개의 구역(니혼바시, 교바시, 쓰키시마)으로 나뉜다. 니혼바시와 교바시는 도쿄역 동쪽의 두드러진 상업 지역으로 긴자, 쓰키지와 같은 유명한 지구들이 있다. 쓰키시마는 도쿄 만에 의해 분리되어있으며 콘도 건물이 주를 이룬다. 2차 대전까지 이 지역은 강과 운하가 교차하던 지역으로 작은 배가 주요 교통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전쟁 후 이 수로들이 새로운 도로와 건물,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매립되었다. 그러나 이전의 수로들은 특별구 내의 많은 지구들의 경계선의 기준이 되었다. 스미다 강은 구의 동쪽 경계를 이룬다. 주오 구는 도쿄에서 다이토구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구이다. 역사 1612년 :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를 일본의 사실 상의 수도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도쿄와 간사이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인 도카이도의 동쪽 끝 주변으로 새로운 상업 지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에도 시대에 이 지역은 에도마치로 불렸고 에도의 중심이었다. 이 지역의 대부분은 쇼군에 의해 매립되기 전에는 스미다 강의 모래 삼각주였다. 1657년 : 도시가 불타버린 후에 이 지역에는 더 많은 해상 무역을 위해 더 많은 수로가 다시 계획되었다. 1869년 : 외국인 정착지가 쓰키지에 세워졌다. 이것은 1899년까지 계속되었다. 1872년 : 긴자 지역에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 후에 도쿄 시장은 북쪽의 니혼바시와 남쪽의 신바시 사이의 긴자에 현대적인 유럽 스타일의 상업 지구를 다시 계획하였다. 1878년 : 새 지방단체법에 따라 현재의 주오 구 지역에 도쿄 시 정부 하의 니혼바시 구와 교바시 구가 설치되었다. 1945년 : 일본의 2차 대전 패배 이후, 몇 개의 건물이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인수되어 점령군의 공급 기지 역할을 했다. 이들로는 하토리 와치사, 마쓰야 백화점, 도시바 건물이 포함된다. 이 건물들은 1951년에 일본에 반환된다. 1947년 : 5월 3일, 지방자치법의 시행으로 주오 구는 도쿄의 특별구가 되었다. 지역 니혼바시 지구() 니혼바시 - 전통적인 상업 중심지로 다카시야마() 백화점이 있다. 니혼바시오덴마초() 니혼바시카키가라초() 니혼바시카부토초() - 도쿄 증권거래소가 있다. 니혼바시카야바초() 니혼바시코덴마초() 니혼바시코부나초() 니혼바시토미자와초() 니혼바시나카스() 니혼바시닌교초() 니혼바시하코자키초() - 도쿄 시티에어터미널이 있다. 니혼바시하마초() 니혼바시바쿠로초() 니혼바시히사마쓰초() 니혼바시호리도메초() 니혼바시혼고쿠초() - 일본은행이 있다. 니혼바시혼초() 니혼바시무로마치() - 미쓰코시 백화점이 있다. 니혼바시요코야마초() 히가시니혼바시() 교바시 지구() 아카시초() 이리후네() 교바시() 긴자() - 도쿄 최고의 상류층 쇼핑 지구로 마쓰야(), 마쓰자카(), 미쓰코시(), 와코()와 프린템프스 백화점, 가부키자 극장이 있다. 밤에 긴자는 네온 사인이 화려하게 빛난다. 술집이 많이 있다. 신카와() - 스미다 강에 있는 유명한 다리 에이타이교()가 있다. 신토미() 쓰키지() - 주오 구청이 있다. 거대한 수산 도매시장이 있어 스시를 먹으러 많이 온다. 츠키지혼간지의 조도신수가 있는 곳이다. 하초보리() - 에도 막부 때 경찰서가 있었다. 하마리큐 정원() - 하마리큐 은사정원()이 있다. 예전에는 고후의 다이묘의 영지로 이후 궁내청의 관할이 되었다. 미나토() 야에스() - 도쿄역의 동쪽에 있는 지구이다. 도쿄역의 야에스 쪽은 신칸센의 종점이다. 쓰키시마 지구() 하루미() - 하루미 승객터미널이 있다. 가치도키() - 스미다 강의 가치도키 교가 이곳에 있다. 쓰키시마() 쓰쿠다() - 스미요시 신사()가 있다. 도요미초() 경제 리코의 본사 건물이 이곳에 있다. 본사 건물은 25층으로 긴자 지역에 있다. 스미모토 그룹의 본사가 주오 구의 하루미 아일랜드 트리톤 스퀘어 타워에 있다. 미쓰이 부동산의 본사 또한 이곳에 있다. 도쿄팝의 일본 지사가 이곳에 있다. 1990년대 후반 이래 지오시티의 일본 지사가 니혼바시의 니혼바시하코자키 빌딩에 있다. 교통 철도 도쿄 도 교통국 도쿄 도 교통국 지하철 1호선(아사쿠사 선) : (미나토구) - 히가시긴자 - 다카라초 - 니혼바시 - 닌교초 - 히가시니혼바시 - (다이토구) 도쿄 지하철 도쿄 지하철 2호선(히비야 선) : (지요다구) - 긴자 - 히가시긴자 - 쓰키지 - 핫초보리 - 가야바초 - 닌교초 - 고덴마초 - (지요다구) 도쿄 지하철 3호선(긴자 선) : (미나토구) - 긴자 - 교바시 - 니혼바시 - 미쓰코시마에 - (지요다구) 도쿄 지하철 4호선(마루노우치 선) : (지요다구) - 긴자 - (지요다구) 도쿄 지하철 5호선(도자이 선) : (지요다구) - 니혼바시 - 가야바초 - (고토구) 도쿄 지하철 11호선(한조몬 선) : (지요다구) - 미쓰코시마에 - 스이텐구마에 - (고토구)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도쿄도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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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C%8B%9C%EB%A7%88%20%EC%9E%84%ED%95%B4%20%EC%B2%A0%EB%8F%84%20%EC%98%A4%EC%95%84%EB%9D%BC%EC%9D%B4%EC%B9%B4%EC%8B%9C%EB%A7%88%EC%84%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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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마 임해 철도 오아라이카시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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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라이카시마 선()은 가시마 임해 철도의 철도 노선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 이바라키현 미토시에 위치한 미토 역과 가시마시에 위치한 가시마 축구 스타디움 역을 잇는다. 일본 철도 건설 공단 건설선(북 가시마 선)을 계승해 개통한 노선이다. 수도권 공통 IC 교통 카드(PASMO·Suica)의 사용은 하지 못하고, 도입 예정도 없다. 노선 정보 노선 거리: 53.0 km 궤간: 1,067mm(협궤) 역 수: 15 복선 구간: 없음, 전 구간 단선임. 전철화 구간: 없음 차단 장치: 특수 자동 차단식 보안 장치: ATS 노선 개요 미토-오아라이간 미토의 근교 에리어로서 통근·통학의 이용이 많아 수족관(아쿠아 월드·오아라이)등의 마린 스포트가 다수 점재하는 오아라이의 액세스 이용이 많다. 이 구간의 편수는 1시간에 2 - 3편 정도가 설정되어 있어 제 3 섹터의 지방 로컬선으로서는 열차 밀도가 높다. 미토 - 오아라이간의 구간 열차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여객 수송에 대해 오아라이는 매우 중요한 거점역이다. 오아라이-신호코타간 오아라이보다 앞은 가시마나다에 따라서 진행되지만 5km 정도 거리를 두어 주행하기 때문에 차창으로 태평양이 비치는 구간은 없다. 농지가 계속되는 평지 직선상에 노선이 깔려 역간 거리도 5km 정도로 길기 때문에 로컬선의 기동차면서 주행 속도는 높다. 오아라이보다 앞은 열차 편수는 1시간에 1차량 정도로 적게 된다. 신호코타는 도중 역으로서는 이용자수가 좀 많고, 오아라이가시마 선에 있어서의 거점역의 하나이다. 오아라이가시마 선의 개통에 의해서 호코타시(개통 당시는 호코타정)로부터 미토까지의 통근·통학의 소요 시간은 큰폭으로 단축되었다. 호코타 시에는 가시마 철도(2007년 폐지)의 호코타 역이 있어 호코타 시에 있어서는 오아라이가시마 선은 첫 철도 노선은 아니었지만, 개통시는 오아라이마치와 마찬가지로 현지로부터 많이 환영되어 그 후의 호코타 시의 발전에 기여했다. 오아라이가시마 선의 신호코타 역과 가시마 철도의 호코타 역은 서로 2km 정도 떨어져 있어 양선을 넘는 이용자는 전무했다. 신호코타-가시마 축구 스타디움-가시마 신궁간 기타우라와 가시마나다의 사이를 주행하며, 다이요 - 가시마 축구 스타디움간은 가시마나다의 연안으로부터 2km 정도의 거리를 두어 주행한다. 연선 인구는 적고, 통학의 이용이 눈에 띌 뿐이다. 오아라이가시마 선의 종점은 가시마 축구 스타디움이지만, 축구 개최일 이외는 통과하는 임시역이다. 가시마 임해 철도는 가시마 축구 스타디움에의 액세스 수요에 분기하고 있지만, 오아라이가시마 선을 이용하는 스타디움 관전객은 적다. 가시마 축구 스타디움 - 가시마 신궁간은 JR가시마 선의 노선이며, 동선에 노선 연장하는 형식이 된다. 다만, 야간 회송을 제외하고 JR의 여객 열차가 주행할 것은 없고, 이 구간은 사실상 「오아라이가시마 선」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그 때문에 일부의 지도에서는 이 구간을 지도 기호는 JR선으로 해두면서 「오아라이가시마 선」이라고 표기되고 있는 예가 있다. 역사 국철 재건법 시행시에는 철도 건설 공단에 의해 건설중으로, 개통 후의 수송 밀도가 4000명 이상 전망할 수 있다고 하여 공사가 속행되었지만, 당시의 일본국유철도는 제 3 섹터로의 운영을 희망했다. 이것을 이바라키현에서는 1984년, 가시마 임해 철도에 의한 인수를 결정해 다음 1985년에 개통했다. 당초는 특급 열차를 운행할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단선이면서 고규격인 설계가 되어 있다. 건널목은 미토 역 부근의 조반 선과 병행하는 부분에 JR이 설치한 2곳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덧붙여 전철화를 전제로 시설은 건설되었지만 제 3 섹터 철도로의 운영이 결정된 단계에서 유지 관리·운용 경비를 산정한 결과, 비전철화 디젤 운전으로 변경되었다. 만일 전철화한다고 했을 경우 오아라이가시마 선에 한해서도 미토 - 다이요간은 이바라키현 이시오카시 가키오카에 있는 기상청 지자기 관측소로부터 가깝기 때문에 염가의 직류 전철화를 실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교류 전철화로 했을 경우에도 가시마 신궁 - 북 가시마간의 국철 가시마 선은 이미 직류 전철화되고 있기 때문에, 제조 가격이 비싼 교류 직류 양용 차량을 사용하든가, 혹은 지상 교류/직류 변환 설비를 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통상의 전철화보다 비용이 커지기 때문에, 전철화는 행해지지 않았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선로가 속속 붕괴했지만, 4개월 후인 2011년 7월 12일에 전 노선을 복구했다. 1985년 3월 14일 미토 - 북 가시마(현재의 가시마 축구 스타디움)간(53.0km)개통. 1989년 11월 1일 전선으로 화물 영업 개시. 1990년 11월 18일 조자가하마 시오사이하마나스 공원 앞역 신설. 1994년 3월 12일 북 가시마 역을 가시마 사커 스타디움 역으로 개칭. 축구 시합 개최일의 일부 열차만 여객 영업 개시. 1996년 3월 16일 화물 열차 설정 폐지. 2004년 12월 1일 오아라이가시마 선 COMBAT(바리스식 열차 검지형 폐색 장치) 도입 프로젝트 시작 2005년 10월 12일 쓰네즈미 - 오아라이간에서 COMBAT의 표시 기능 운용 개시. 운행 형태 노선상의 종점인 가시마 축구 스타디움 역은 가시마 축구 스타디움으로의 시합 개최일의 일부 열차만의 영업이며, 또 동역을 지나는 미토 방면과의 열차는 모두 가시마 임해 철도 소유의 기동차로 운행되어 JR가시마 선 가시마 신궁 역까지 1구간 노선 연장한다. 가시마 축구 스타디움 역은 1994년에 화물역인 북 가시마역을 여객화·개칭한 것으로, 오아라이가시마 선 개통시부터 모든 열차가 통과 취급(일부 열차 교환을 위한 운전 정차 있음)이다. 열차로서는 매시 1편의 미토 - 가시마 신궁간을 주행하는 열차 외, 미토 - 오아라이간·미토 - 신호코타간의 구간 열차도 설정되어 있다. 또, 2001년 4월 1일부터 일부의 열차로 1인 승무 운전을 실시하고 있다. 2002년의 월드컵 개최시에 도쿄 방면에서 동일본 여객철도(JR동일본)의 전철을 가시마 축구 스타디움 역까지 운전하는 수송 계획을 세울 수 있었지만(가시마 축구 스타디움 역까지의 가시마 선은 직류 1500V 전철화가 되어 있어 EF65형 정기 열차로 입선 한다), 전년에 일어난 효고현 아카시시의 보도교 압사 사고를 교훈으로 경비상의 문제로부터 보류되게 되었다. 그 후, 2006년 7월 15일의 2006 JOMO 올스타 축구에 즈음하여 처음으로 JR동일본의 여객 차량이 가시마 축구 스타디움 역까지 영업 운행(임시 열차)되었다. 이용 상황 수송 실적 오아라이가시마 선의 근년의 수송 실적을 아래 표에 적는다. 표중, 수송 인원의 단위는 만명. 수송 인원은 연도로의 값. 표중, 최고치를 적색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연도 이후의 최저치를 청색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연도 이전의 최저치를 녹색으로 표기했다. 수입 실적 오아라이가시마 선의 근년의 수입 실적을 아래 표에 적는다. 표중, 수입의 단위는 천엔. 수치는 연도로의 값. 차량 7000계 동차는 이바라키현이 가지는 차량이고 임시 운행으로만 사용된다. 역 목록 전역 이바라키현에 소재 *표시는 사원 배치역. JR동일본과 동형의 POS 단말기가 설치되어 있다. 가시마 축구 스타디움 역은 화물역으로서는 상설. 가시마 축구 스타디움 역을 지나는 실제의 여객 열차는 JR 가시마 선 가시마 신궁 역까지 운행되어 가시마 신궁 역이 사와라 방면과의 환승역이 된다. 외부 링크 가시마 임해철도 공식 웹사이트 오아라이카시마 선 간토 지방의 철도 노선 이바라키현의 철도 교통 1985년 개통한 철도 노선 일본의 퀘이프 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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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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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484%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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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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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명(明) 성화(成化) 20년 일본(日本) 분메이() 16년 후 레 왕조(後黎朝) 홍득(洪德) 15년 기년 류큐(琉球) 쇼신왕() 8년 명(明) 헌종 성화제(憲宗 成化帝) 20년 조선(朝鮮) 성종(成宗) 15년 후 레 왕조(後黎朝) 성종(聖宗) 25년 사건 조선 경국대전 완성 탄생 1월 1일 - 스위스의 신학자 울리히 츠빙글리. 사망 8월 12일 - 제 212대 로마 교황 식스토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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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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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A%8C%EC%83%81%EB%A1%9D%20%28%EB%B9%84%EB%94%94%EC%98%A4%20%EA%B2%8C%EC%9E%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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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록 (비디오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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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록》(Reminiscence)은 대한민국의 동인 게임 제작 서클인 팀 디바이스가 발매한 창작 비주얼 노벨이다. 작품 소개 팀 디바이스의 두 번째 작품으로 제작된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이다. 2002년 10월에 코믹월드에서 판매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상업화 동인 창작 비주얼 노벨이다. 스토리 열기를 품은 공기로 가득 차 있던, 그 해의 여름. 대학으로의 힘겨운 재수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나. 그나마 그런 나에게 있어 위안이 되었던 나만의 장소, Cafe Reminiscence. 그런 여름의 어느 날인가에 있었던 만남. 미래는 현재가 되고 현재는 과거가 되어 추억으로써 우리를 감싼다. 그리고 그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우리들의, 일상적인 이야기... 등장인물 오세희 박정아 오세영 제작진 총감독 Adol 시나리오 Hajime Lemmy Adol 그래픽 Hiziri Amuro 林 Kokoro 사운드 Xenopsyx 프로그램 Mjmj Adol 외부 링크 회상록 홈페이지 팀 디바이스 홈페이지 2002년 비디오 게임 윈도우 게임 동인 소프트웨어 노벨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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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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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A0%ED%94%8C%EB%A6%AC%EC%BC%80%EC%9D%B4%EC%85%98%20%EC%84%B1%EB%8A%A5%20%EA%B4%80%EB%A6%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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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리케이션 성능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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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리케이션 성능 관리(APM, Application Performance Management) 또는 응용 프로그램 성능 관리는 응용 소프트웨어의 성능과 서비스 이용성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데 초점을 둔 시스템 관리 원칙을 일컫는다. 또, 운영 중인 시스템에 대한 응답시간과 같은 성능이나 처리량, 가용성, 및 기능적 무결성, 신뢰성을 확보하고 다운타임의 최소화 등을 통해 안정적인 시스템 운영을 위한 도구로써 부하량, 접속자 파악, 장애진단, 통계, 분석 등을 목적으로 하는 성능 모니터링 제품으로 정의할 수도 있다. 응용 프로그램의 성능은 중도에 얼마나 처리를 빨리 마치는지, 또 특정 네트워크, 응용 프로그램 및 웹 서비스 인프라를 거친 응용 프로그램을 통해 정보가 최종 사용자에게 전달되는지와 관련이 있다. 응용 프로그램의 성능을 측정하는 방법에는 주로 2가지가 있다. 첫째는 컴퓨터가 비즈니스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한 이후로 응용 프로그램이 사용하는 리소스를 측정하는 방식이 쓰였다. 두 번째는 응용 프로그램의 응답 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사용되었다. 응용 프로그램 성능 관리는 최종 사용자 체험 관리(End User Experience Management)와 실제 사용자 관리(Real User Management)와 관련되어 있다.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실제 사용자의 체험을 측정하는 것은 응용 프로그램의 성능을 측정하는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여겨지고 있다. 응용 프로그램 성능을 관리하는 데 쓰이는 웹 애플리케이션은 이를테면 J2EE와 마이크로소프트 닷 넷 플랫폼을 들 수 있다. 시스템 관리를 주도하는 업체들(Dynatrace, New Relic, Cisco(AppDynamics)) 모두 J2EE, 닷넷 APM 제품을 자사의 포트폴리오에 포함시키고 있다. J2EE용 APM과 닷넷 기반 응용 프로그램들은 웹 서버의 측면에서 응답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과 J2EE나 닷넷 환경에서 실행하는 응용 프로그램 코드 안에서 성능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루트 원인 분석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세계적으로 Dynatrace, New Relic, Cisco(AppDynamics)의 3사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제니퍼 등이 로컬 플레이어로서 활약하고 있다. APM은 크게 3세대로 나누어 분류할 수 있다. 1세대 - 통신 프로토콜을 확인하여 애플리케인션의 성능을 모니터링하는 dynatrace(DCRUM), Riverbed, ExtraHop등이 여기에 속한다. 2세대 - 현재 시장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APM제품으로 agent를 사용하여 데이터를 수집하는 dynatrace(Appmon), New Relic, Cisco(AppDynamics), 제니퍼소프트(제니퍼), TRACER(웰컨) 등이 이에 속한다. 3세대 - 클라우드, 빅데이터, 마이크로 서비스환경에서는 기존 2세대의 사상으로는 모니터링이 힘들기 때문에 오토스케일링 지원, 에이전트 자동삽입, AI등의 기술이 요구된다. 이러한 제품으로는 Dynatrace가 있다. 문제 APM이 IT 산업에 직면한 문제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수많은 기업에서 비즈니스 중심의 응용 프로그램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웹 기반이며 J2EE/닷넷을 필두로 다양한 기술들로 작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수많은 응용 프로그램 시스템이 가상화되고 있어 응용 프로그램이 실행 중인 게스트 운영 체제의 시간 기반의 유효성을 무너뜨리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APM은 가상화 시스템에 맞는 새로운 접근이 요구된다. 업계에서 사용되는 기술은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APM도 그에따라 가야 한다. 국내에서는 JAVA/.NET 모니터링에 WAS단일 노드 모니터링이 주로 사용되었으나(제니퍼) 시장의 추세는 APM에 EndToEnd 모니터링을 요구하며 글로벌 업체들의 제품은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고 있다. 국내업체의 경우 니치마켓의 플레이어로서 글로벌업체의 개념등을 빠르게 습득하여 제품화하고 있다. 같이 보기 Zenius-APM 브레인즈컴퍼니(주) 와탭 OneAPM회사 시스템 관리자, 시스템 관리 네트워크 관리 다이나트레이스 모코엠시스 2018년 가트너의 APM분야의 Magic Quadrant TRACER 시스템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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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2%9C%EA%B5%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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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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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구(天球)는 천문학 및 항해에서 천체 관측에 이용되는, 관측자를 중심으로 한 반지름이 무한대인 가상의 구체(球體)로, 하늘에 있는 모든 천체들은 이 천구의 안쪽 벽에 붙어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천구의 두 점 사이의 거리는 두 점을 각각 천구의 중심(관측자)을 연결하여 생기는 두 직선 사이의 각으로 측정한다. 지구와 자전축 및 중심점을 공유하는 천구는 지구의 표면으로부터 연장되어 나온 가상의 존재이기도 하여, 지구상 좌표와 유사한 명칭이 붙는다. 천구 북극, 천구 남극, 천구 적도 등이 그러하다. 천구 투사(透寫)는 구면 천문학 분야에 있어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천구의 별들은 천구의 안쪽에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표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태양이나 달, 태양계 행성은 천구상에 있기는 하지만 별과 달리 같은 위치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구를 따라 조금씩 움직인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등은 천구를 가상의 존재가 아닌 물리적인 실체로 생각했다. 천구의 기준 일반적으로 공의 중심을 지나는 곳을 기준으로 둘로 쪼갰을 때 그 쪼개진 면이 가장 큰 원이 되는데, 천구의 선이라고 하면 반드시 이 큰 원을 의미한다. 그래서 천체의 위치나 운동을 조사하려면 천구상에 몇 개의 특별한 점이나 선을 생각해야 한다. 지구상의 적도를 하늘에 투사한 가상의 선을 천구 적도라고 하는데, 천구는 이 선을 기준으로 남반구와 북반구로 나눈다. 마찬가지로 천구 북회귀선, 천구 남회귀선, 천구 북극, 천구 남극 등을 투사할 수 있다. 하늘에 보이는 수많은 천체들은 천구 좌표계를 사용하여 위치를 계량화할 수 있다. 천정과 지평선 수평한 평면을 확대하여 천구에 대입하면 커다란 원이 생기는데, 이것을 지평선이라고 한다. 또한 원의 중심에서 수평면에 직각인 직선을 위로 연장하여 천구와 교차하는 점을 천정이라 한다. 북극과 자오선·적도 천구상의 ‘하늘의 북극(北極)’은 모든 별의 운동 중심이 되는 점이다. 그래서 북극과 천정을 잇는 선을 만들면 ‘자오선(子午線)’이 생긴다. 자오선과 지평선의 두 교점을 ‘북점’·‘남점’이라 하고, 또 이 북점과 남점에서 지평선을 따라 90°거리에 있는 점을 ‘동점’·‘서점’이라 한다. 그리고, 북극에서 90°거리에 있는 선을 ‘적도(赤道)’라고 한다. 적도는 지평선과 동점·서점에서 교차한다. 고도와 방위 천체에서 지평선에 수선을 내리그으면 한 점에서 교차한다. 남점에서 지평선을 따라 이 교점까지 잰 거리를 ‘방위’라고 하며, 교점에서 수선을 따라 천체까지 잰 거리를 ‘고도’라고 한다. 이 방위와 고도 두 가지로 천구상의 천체의 위치를 확정한다. 방위는 남점에서 서쪽으로 360°까지 재는 것이 보통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북점에서 동·남·서로 돌아 재는 경우도 있다. 또한 고도 대신에 천정과 천체 사이의 거리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천정 거리’라고 한다. 천정 거리와 고도와의 합은 항상 90°이다. 이와 같이 지평선을 기준으로 하여 별의 위치를 나타내는 것을 ‘지평 좌표계’라고 한다. 관측자의 위치와 천구의 이동 다른 장소에서 본 천구 천구는 지구 중심 또는 관측자 중심으로 이용할 수 있다. 전자는 가상의 관측자가 지구 중심부에서 천구를 관측한다고 설정한 것으로, 지구상의 위치에 따라 시차(視差)가 발생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후자는 관측자가 지구 표면 임의의 장소에서 천구를 관측한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이 경우 수평 시차가 발생하는 것을 고려해야 하는데 특히 달의 경우가 그러하다. 어떤 지점에서 별을 고정시키고 태양의 움직임을 그린 천구는 단 하나밖에 나타낼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천구를 지구상의 다른 장소에서 보면 그 기준이 달라진다. 천구상에 그은 지평선이나 자오선, 천정 등의 점은 천구를 보고 있는 사람의 지구상에서의 위치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므로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이 보는 천구상의 천정, 자오선, 지평선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같은 순간에 어떤 장소에서 본 자오선을 지나는 별과 다른 장소에서의 자오선을 지나는 별은 다를 수 없다 천구의 회전 천구에 있는 천체들은 같은 시간 동안 천구의 북극을 기준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일주 운(日週運)이라고 한다. 따라서 별들은 동쪽에서 떠서 자오선을 지나,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보인다. 천구 북극에 가까운 별들은 천구 북극을 중심으로 하늘에서 빙빙 도는 것처럼 보인다. 태양시와 항성시 천구가 한번 회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4시간이다. 또한, 천구의 일주운동은 항상 같은 속도가 아니라 극히 미미하기는 하지만 속도가 달라진다. 평균 태양시 또는 평균 항성시는 이러한 차이를 평균하여 나타낸다. 지구가 자전축을 따라 서에서 동으로 23시간 56분에 한 바퀴 자전하기 때문에, 다음날 밤의 별들은 전날과 거의 비슷하게 다시 출현하지만 시간상으로 전날에 비하여 4분 빨리 뜨는 것으로 관측된다. 둘째 날 별들은 8분 빨리 뜨며, 셋째 날은 12분...이런 식으로 계속 어긋나게 된다. 이처럼 시계와 실제 자전 시간이 맞지 않는 이유는, 태양이 다른 별들처럼 천구상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황도로 불리는 대원을 따라 매일 동쪽으로 1도씩 움직이기 때문이다.(1년에 360도 이동하며, 이를 태양의 연주 운동이라고 한다.) 1도 각도는 360도를 24시간이라고 가정했을 경우 4분에 해당되는 범위이기 때문에, 태양이 (예를 들어) 자오선 위에 되돌아 오게 하려면 매일 4분을 더해야 한다. 따라서 1 자전주기는 24시간으로 되는 것이다.(이는 평균값이고, 계절적인 편차를 무시한 값이다. 균시차를 참조) 따라서 보통 시계는 항성시를 표시한다. 항성 움직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은 대신 항성시가 표시되는 시계를 사용한다. 1 항성시는 태양시로 표현할 경우 23시간 56분이다. 천구 모형 천구는 가상의 존재뿐 아니라 천구의 모형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며, 이를 ‘천구의(天球儀)’라고도 한다. 천구 모형은 공 표면에 별이 박혀 있는 모양으로, 특정 시간 및 장소에서 어떤 별자리가 보이는지를 알려주는 기구이다. 별자리는 천구의 내부에서 관찰되는 모양이기 때문에, 천구 외부에서 보이는 별자리는 실제 별자리를 거울에 비친 모양이 되기도 한다. 같이 보기 혼천의 분점 천동설 북극성 남극성 극성 지점 황도대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천구좌표계 구면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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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9%98%EC%95%88%EC%9C%A0%EC%A7%80%EB%B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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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유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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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유지법》()은 일본 제국 말기에 천황 통치 체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단속하는 법률이다. 1925년 5월 12일에 시행되고, GHQ 점령 1945년 10월 15일 폐지되었으나 이후에 이를 기반으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다. 요약 일본 역사상 가장 폭력을 휘둘러온 언론 탄압법으로 악명 높은 법률이다. 1910년대에 잇달아 일어난 군주제 국가의 붕괴(신해 혁명, 러시아 혁명, 독일 혁명,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의 영향을 받아 활발하게 전개된 민주주의 운동(다이쇼 데모크라시), 공화제 운동, 공산주의 운동을 분쇄하는 목적도 있었다. 해당 법안의 조문 제1장 제1조에는 "국체 (천황 통치 체제)의 변혁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라고 기재되어있다. 처음에는 일본 공산당이 적용 대상이었지만 대상은 멈추지 않고 확대되어 사회주의와 노동 운동과 종교가도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나중에는 정부를 비판하는 모든 언론도 포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결성된 치안유지법 피해자 연맹은 치안유지법에 의해 고문 또는 처형당한 피해자 수는 내지에서만 약 75,000명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이 치안 유지법 모델은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공포된 긴급 칙령이었다. 이 법은 내지(일본 제국의 일본 본토) 뿐만 아니라 외지(일본 제국의 속령)에 대해서도 적용되었으며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지속된 국가총동원법 체제는 조선의 민족 독립 운동에 대한 탄압에도 적용되었다. 내용 1925년 4월 22일에 법률 제46호로 제정되었을 때는 최고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의 처벌이던 조항이, 1928년 개정되면서 최고 사형까지 가능하도록 크게 강화되었다. 태평양 전쟁 직전인 1941년 3월 10일에 그때까지 7조에 불과했던 법률 조항이 전면적으로 개정되면서 전 65조의 새로운 치안유지법(법률 제54호)이 공포되어 동년 5월 15일부터 시행되었다. 이에 의해 처벌은 더욱 강해졌으며 더불어 "예방구금제도"도 도입되었다. 폐지 연합군 총사령부가 일본의 항복 이후에 일본을 점령했고 1945년 10월 4일 연합군 총사령부가 일본 측에 인권지령인 "정치적, 공민적, 종교적 자유에 대한 제한의 제거에 대한 사령부 각서"에 의해 폐지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치안유지법은 1945년 10월 15일을 기하여 폐지되었다. 같이 보기 정보국 (일본제국)(내각정보국, 情報局) 국가 총동원법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 Tokutomi Sohō) 국민정신총동원(国民精神総動員) 민간검열지대(民間檢閱支隊, 民間検閲支隊, Civil Censorship Detachment, CCD) 내각정보조사실(CIRO) 군국주의 파괴활동방지법 국가보안법 미국 애국자법 요제프 괴벨스 국민계몽 선전부(Ministry of Public Enlightenment and Propaganda) 각주 1894년 법 1900년 법 1925년 법 쇼와 시대 일본 제국의 정치 일본의 법 일제강점기의 법 일본의 정치적 억압 가토 다카아키 반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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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A7%80%206%EC%84%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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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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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6세(, 1895년 12월 14일 ~ 1952년 2월 6일)는 1936년 12월 11일에서 1952년 2월 6일까지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의 왕 겸 인도 제국의 황제()였다. 본명은 앨버트 프레데릭 아서 조지 윈저()이다. 생애 즉위 이전 빅토리아 여왕 때인 1895년 12월 14일 요크 공작(훗날의 조지 5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증조부인 작센코부르그고타의 앨버트 기일에 태어나 증조부의 이름-알버트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여러 지병을 앓았는데, 특히 어렸을 적 유모의 방치로 위염 때문에 자주 고생했으며, 말을 더듬었다. 아버지 조지 5세는 엄격한 해군식 교육을 자녀들에게 적용하였다. 알버트 남동생 헨리 왕자는 그의 아버지가 쳐다보기만 해도 기절할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알버트는 병약했고, "쉽게 겁을 먹으며 잘 울었다"라고 표현했다. 알버트는 안짱다리를 고정하기 위해 부목을 착용하였으며 선천적으로 왼손잡이었던 그는 강제로 오른손잡이로 교정받았다. 1909년부터 그는 오스본에 있는 왕립해군사관학교에 사관 생도로 재학했다. 재학 시절 알버트는 다른 생도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재학 중 1911년 치른 최종시험에서 성적은 하위권이었지만, 다트머스 왕립해군사관학교로 진학하였다. 1910년 5월 6일 에드워드 7세가 서거하자 알버트의 아버지 웨일스 공 조지는 조지 5세로 왕위를 계승하였고, 그는 형을 이어 왕위 계승 서열 2순위에 올랐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알버트는, 1916년 윌란 해전(1916년 5월 31일 – 6월 1일)에서 포탑 장교로서 공을 인정 받았다. 1919년 10월, 알버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진학하여 1년간 역사, 경제학, 그리고 시정학을 공부하였다. 1920년 6월 4일, 알버트는 요크 공작(Duke of York), 인버네스 백작(Earl of Iverness), 킬라니 남작(Baron of Killarney) 칭호를 부여 받았다. 요크 공작 지위에 오른 그는 공적인 일을 맡게 되었다. 알버트는 아버지를 대표하여 탄광, 철도, 공장을 방문했다. 알버트 역할은 두터워지는 노동자층과 유대를 형성하는 일이었다. 그 주된 활동은 비공식적인 기구인 산업복지회 회장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공장의 여러 후생조건에 관해 자신이 제일 먼저 알기를 바란다는 명령을 내려 노동자 복지 개선에 큰 이바지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 '산업 공작'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공장을 돌아보았는데, 번거로움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왕실에서 방문할 때마다 깔리던 자주빛 카펫은 생략했었다. 형 에드워드 8세의 유부녀와 스캔들 등 미덥지 못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앨버트 부담은 더 가중되었다. 앨버트는 내성적인 성격과 함께 말더듬증 등으로 형 에드워드 8세에 비해 인상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냥, 낚시, 테니스를 즐기는 등 신체적으로 활동적이었다. 춤을 매우 잘 추었고, 옷 또한 잘 입었다. 영국 왕실의 결혼은 국내외적으로 항상 화제가 되었는데, 앨버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지나치게 경직되고 도덕적인 분위기로 잘 알려진 조지 5세의 왕실이 자유분방한 생활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왕족 출신이 아닌 자신의 지위로 앨버트의 청혼을 두 번 거절하였으나, 앨버트는 "엘리자베스 이외의 여성과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하였다. 앨버트의 어머니 테크의 메리 왕비 또한 글래미스 성으로 엘리자베스를 방문한 후 "버티(요크 공)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처녀"라며 엘리자베스를 설득하였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세실리아 보우스 라이언과 테크의 메리 왕비의 설득으로, 엘리자베스는 알버트의 세 번째 청혼을 받아들였다. 결국 앨버트는 영국 왕립 해군 소령 예편 직후 스코틀랜드 귀족가문의 레이디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1923년 4월 26일 결혼하였다. 엘리자베스의 신선함과 우아함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결혼전부터 애민(愛民)정치가로 존경받던 알버트도 국민들에게 더 많은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런 소식은 부왕인 조지 5세도 흐뭇하게 해주어 공작 부부 동반으로 해외 여행을 자주 시키곤 하였으며, 그의 말 더듬는 언어장애를 고치도록 그 분야의 최고인 오스트레일리아인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Lionel Logue)를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어장애의 치료에 큰 효과가 없자, 조지 5세는 윈저 성 내의 왕실 별장을 알버트에게 내어주고는 자주 요양하면서 병을 치료하도록 배려했다. 이 이야기는 영화 킹스 스피치에서 묘사되어 있다. 1926년 두 사람은 첫째 딸인 엘리자베스 공주를 낳았고, 그로부터 4년 후에는 둘째 딸인 마거릿 로즈 공주를 낳았다. 아버지 조지 5세와 달리 매우 가정적이었던 알버트는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로즈 공주를 일컬으며 "엘리자베스는 나의 자랑이며 마거릿은 나의 기쁨이다."라고 기자에게 말하기도 하였다. 재위 기간 1936년 에드워드 8세가 하야하자 그의 동생인 알버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평소 형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명했던 그는, 에드워드 8세의 퇴위 직전까지 만찬회 등에서 왕을 옹호하곤 했다. 1936년 12월 3일, 에드워드 8세는 그의 어머니인 테크의 메리의 거처 말보로 하우스에서 테크의 메리와 조지 6세(당시 요크 공)에게 양위 결정을 알렸다. 에드워드 8세의 하야 소식은 그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어, 그는 평소 냉정하기로 유명했던 어머니 테크의 메리의 품에 안겨 1시간 넘게 울었다고 전해진다. 알버트는 에드워드 8세가 일으킨 심프슨 부인과의 스캔들로부터 영국 왕실을 회복 시키고, 화목한 가정과 안정성의 아버지 조지 5세의 시대를 연상시키는 '조지 6세'를 왕명으로 결정하며 지속성을 표방하였다. 에드워드 8세의 퇴위는 전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왕위 계승자로서의 수업을 전혀 받지 못했던 조지 6세는 3주간의 간단한 준비 후에 공식적인 행사에 들어가야만 했다. 건강하고 젊은 나이에 왕이 된 형이 있었기에, 자신이 왕이 된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는 갑작스런 형의 퇴위와 함께 자신이 왕이 되자 모든 것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정치를 함에 있어서 한 가지씩 시험 대상에 올려놓고 얼마간 지켜본 후 결정을 내리는 신중함을 보이곤 하였다. 당시 유럽에는 전체주의 세력 파시즘과 나치즘이 팽배해 있었다.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있었다. 자칫 전쟁의 조짐마저 보이자 그는 평화를 대내외 정치의 우선 원칙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유화 정책과 평화를 내세우는 네빌 체임벌린이 수상이 되자 조지 6세는 그를 일단 지지하였다. 체임벌린의 노력으로 외교적으로 평화적인 결과가 나타나기를 바랐지만 독일의 움직임은 그렇지 않은 쪽으로 진행되어 갔다. 여기서 조지 6세는 평화보다는 다른 방법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의 고통 속으로 국민들을 다시 몰아넣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하려 하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끝없는 탐욕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의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1939년 6월에 미국을 방문하여 영국과 미국 간 공조 방안을 마련하고 돌아온 조지 6세는 곧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날 밤 방송을 통해 조지 6세는 영국 및 영국 연방 전역에 전쟁 선포를 알리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은 독일군의 공습 때문에 어느 전쟁 때보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버킹엄 궁전을 떠나지 않고 국민들과 함께 한 조지 6세는 1940년 9월 공습 때 포격으로 죽을 뻔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위험한 상황인데도 조지 6세는 인근 이스트엔드 지역의 상처와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민중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하곤 하였다. 조지 6세가 민중들과 함께 한 시간은 동생인 켄트 공작이 비행기 사고로 죽은 1942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는 지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부왕이 행했던 것처럼 1943년부터 군사단과 병기 제조 공장 등을 수시로 시찰하였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10일 전에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지휘 하에 출정을 기다리는 영국군과 함께 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5월 8일 마침내 독일이 항복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피폐해진 국내 경제를 풀어야 될 총선거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사회보장제도를 들고 나온 영국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가 전쟁 승리로 이끈 영국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을 물리치고 수상이 되었다. 조지 6세는 애틀리에게도 역시 처음부터 관심을 주지 않고 그의 정책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애틀리와의 사이가 좋아지지는 않았다. 특히 사회주의자인 애틀리의 국유화를 향한 급진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조지 6세는 재위 기간 동안 대영제국의 분해를 지켜보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애틀리의 내각에서 특히 제국으로부터 자발적인 연합체인 영국 연방으로의 탈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47년 영국령 인도 제국이 각각 독립된 점령지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되자, 조지 6세는 인도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였고, 대신 각각 인도의 왕과 파키스탄의 왕이 되었다. 인도가 영국 연방 내에서 공화국 체제로 전환하자 조지 6세는 인도의 왕의 호칭을 잃었고, 그의 죽음까지 파키스탄의 왕의 칭호를 유지하였다. 1947년 8월 15일 조지 6세는 인도의 왕에서 영국 연방의 수장이 되었다. 말년 조지 6세는 선천적으로 건강한 인물이 아니었다. 지병이 있었던 그는 대전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47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로디지아 등 인종 차별 문제가 대두되고 있던 지역을 방문하는 열성을 보였다. 194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로부터 백인들과의 악수만 허용한다는 사실에 경악했으며, 흑인들의 접근을 막던 경호원들을 게슈타포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48년의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방문을 앞두고 약간의 동맥경화증을 보이면서 방문 일정이 취소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처칠이 다시 내각을 맡게 된 1951년 다시 병이 악화되어 1952년 2월 6일 잠자는 도중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작위 1895년 12월 14일 ~ 1898년 5월 28일 : 요크 공자 앨버트 "전하" 1898년 5월 28일 ~ 1901년 1월 22일 : 요크 공자 앨버트 "전하" 1901년 1월 22일 ~ 1901년 11월 9일 : 콘월 요크 공자 앨버트 "전하" 1901년 11월 9일 ~ 1910년 5월 6일 : 웨일즈 공자 앨버트 "전하" 1910년 5월 6일 ~ 1920년 6월 4일 : 앨버트 왕자 "전하" 1920년 6월 4일 ~ 1936년 12월 11일 : 요크 공작 앨버트 "전하" 1936년 12월 11일 ~ 1952년 2월 6일 : 국왕 "폐하" 1936년 12월 11일 ~ 1947년 8월 14일 : 황제 "폐하" (영국령 인도 제국과 관련하여) 조지 6세는 그의 삶 내내 증손자, 손자, 그리고 왕의 아들로서 많은 직함을 가졌었다. 군주로서 그는 간단하게 '왕' 또는 '폐하'로 매우 자주 언급되곤 하였으며, 군주인 그의 입장에서 자동적으로 영국과 캐나다의 총사령관이란 직함을 가졌다. 가족 관계 배우자 자녀 조지 6세를 소재로 한 작품 영화 킹스 스피치 드라마 더 크라운 각주 외부 링크 이야기 영국사/김현수 지음/청아출판사 1895년 출생 1952년 사망 영국의 군주 인도 황제 영연방 수장 영국의 성공회교도 윈스턴 처칠 해군 제독 말더듬이 영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영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 6성장군 윈저가 요크 공작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동문 에드워드 시대 사람 대훈위 국화장경식 수훈자 대훈위 국화대수장 수훈자 개신교 군주 피지 국왕 제2차 세계 대전 중 대영 제국 독일계 영국인 헝가리계 영국인 잉글랜드계 영국인 스코틀랜드계 영국인 네덜란드계 영국인 19세기 개신교도 20세기 개신교도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죽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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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A%A8%EA%B5%B4%EB%A6%AC%EC%8A%A4%ED%83%84%20%EC%B9%B8%EA%B5%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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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굴리스탄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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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굴리스탄은 1346년에 차가타이 칸국이 분열된 이후 차가타이 칸국의 동부에 성립된 몽골 제국계 국가룰 이르는 말이다. 지배계층은 몽골인이었으며, 주민은 몽골인, 현지화된 모굴인, 투르크인, 위구르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1706년에 마지막 칸이 호자 가문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존속했다. 차가타이 칸국의 동부 지대에 성립했다고 하여 동차가타이 칸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모굴인들이 주축이 된 국가임으로 모굴 칸국이라 이르기도 한다. 모굴리스탄 칸국은 초원 지대와 오아시스 지대의 상이한 두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천산 산맥 북방(= 모굴리스탄)이 초원의 유목 지대였고, 천산 산맥 남부(= 타림 분지)에 오아시스 도시들이 있는 정주 지대였다. 오이라트의 서남쪽이었고, 몽골의 서북쪽, 티베트의 북부와 북동쪽과 경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16세기 초두에 모굴리스탄 칸국은 모굴리스탄을 상실하고 타림 분지의 정주지대로 이동했다. 이후 모굴리스탄 칸국은 이슬람교에 더 기우는 동시에 정주화되었다. 역사 투글루크 티무르 칸 1346년에 차가타이 칸국은 카잔 칸이 카자간에 의해 피살되면서 사실상의 종말을 고했다. 천산북방에서 유목적인 생활을 고집하던 부족들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옹립된 이름뿐인 새로운 군주에 대한 신종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차가타이의 후예인 투글루크 티무르를 군주로 추대한다.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차가타이 칸국의 분열인 동시에 모굴리스탄 칸국의 탄생으로 본다. 1358년 카자간은 수렵 도중 암살당했다. 이후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무정부 상태로 몰아넣었다. 반면 동부의 모굴리스탄에서는 투글루크 티무르가 이슬람을 수용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칸의 권력을 확고히하여 안정되었다. 이후 투글루크 티무르는 두 번에 걸쳐 트란스옥시아나로 진군하여 차가타이 울루스를 재통일했다. 하지만 이 통일은 오래가지 못 했다. 투글루크 티무르가 사망할 때(1363년)즈음 티무르와 아미르 후세인에 의해 모굴리스탄 칸국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티무르 제국 투글루크 티무르에 이어 차가타이 한국을 장악한 것은 바를라스부의 아미르, 티무르였다. 투글루크 티무르에 의해 바를라스부의 아미르가 된 티무르는 다른 여러 부족들을 제압한 뒤 1370년에 서차가타이 한국을 장악하고 티무르 왕조를 세웠다. 티무르 왕조가 설립된 이후에도 차가타이 한국의 칸은 1402년까지 명목상으로 존재하지만 사실상 차가타이 한국은 1370년에 멸망을 고했다. 투글루크 티무르 사후, 그의 아들 일리아스 호자는 트란속시아나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서차가타이 한국에서 티무르 왕조가 성립, 모굴리스탄 한국은 티무르 왕조의 지배권 아래로 들어가게 됐다. 15세기 중반, 티무르 한국의 분열로 다시 자립한 모굴리스탄 한국은 에센 부카 2세와 유누스 칸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카슈가르 한국 하지만 모굴리스탄 한국은 도스트 무함마드가 유누스 칸에 대항하여 동쪽 투르판을 중심으로 위구르스탄 한국을 세우며 양분되었다. 16세기 초 위구르스탄의 만수르 칸이 모굴리스탄을 재통일하고 오이라트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며 위세를 떨쳤지만 그의 형제인 사이드 칸이 카슈가르를 중심으로 카슈가르 한국을 세우면서 모굴리스탄 한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카슈가르 한국에서는 16세기 말부터 칸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대신 호자라는 이슬람 귀족 가문이 권력을 잡게 됐다. 호자 가문은 카슈가르의 백산당과 야르칸드의 흑산당으로 분열하여 권력 투쟁을 벌였다. 17세기 초, 모굴리스탄 칸국은 결국 두 개의 칸국으로 분열된다. 하나는 야르칸드를 수도로 하였고, 또 하나는 투르판을 수도로 하였다. 1638년/1639년, 투르판의 칸 압둘라가 야르칸드를 정복하여 연합된 칸국을 재건했다. 그러나 연합된 칸국은 1680년 경, 갈단보쇽투 쿤타이지가 야르칸드와 카쉬가르를 정복하고, 차가타이 가문 최후의 군주, 이스마일 칸을 생포해 중가르로 돌아간 뒤에 사실상 붕괴했다. 갈단보쇽투는 방계혈통에 속하는 압둘 라시드를 허수아비 칸으로 세웠다가 곧 일리로 연행했다. 압둘 라시드 이후에는 그의 형제들이 연이어 칸이 되지만 모두 백산당의 호자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리하여 모굴리스탄에 있는 칸 가문은 소멸하고 어머니쪽에서 칸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아팍 호자의 손자 아흐마드가 칸을 칭했다. 외교 부하라 칸국과의 관계 16세기 초반에는 부하라 칸국과 모굴 칸국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1530년 이후 부하라와 모굴 칸국 사이는 우호적으로 변한다. 양자의 지배 가문들은 통혼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카자흐족에 대한 공동적 대응의 필요성과 양국 사이의 교역 규모가 축소되고 있어, 이를 살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서 18세기 양국 관계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 원인으로는 부하라 칸국 내부에서 아불 하이르 왕조에서 잔 왕조로의 왕조 교체가 일어나고 있던 와중 이란에 의해 정복당했던 시기와 모굴 칸국 내부에서는 흑산당과 백산당의 내분이 심화되어 준가르의 속국이 되었던 시기가 겹쳤던 점이 지적된다. 교역 부하라 칸국과의 교역 16세기의 사료에 따르면, 아불바카 이븐 호자 바하 알딘은 중앙아시아 최고의 거부였는데, 정기적으로 카쉬가르와 인도로 카라반을 보냈다고 한다. 또, 오스만 제국의 여행자 사이피 첼레비는 부하라 상인들이 모굴 칸국의 주요 도시인 투르판과 하미에서 활동했다고 기록했다. 모굴 칸국의 상인들은 면, 도자기, 카쉬미르산 숄, 향료, 농산물, 중국 의복, 대리석 등을 부하라에 판매했다. 모굴 칸국에서는 부하라산의 말린 과일이나 직물을 부하라를 통해 얻었다. 모굴리스탄 칸국의 군주들 모굴리스탄 상실 이전 투글루크 티무르 칸 (재위기간: 1347년 ~ 1363년) 일리야스 호자 칸 (재위기간: 1363년 ~ 1368년) 카마르 웃딘 칸 (재위기간: 1368년 ~ 1392년)) 히드르 호자 칸 (재위기간: 1392년 ~ 1399년) 샤미 자한 칸 (재위기간: 1399년 ~ 1407년) 무함마드 칸 (재위기간: 1407년 ~ 1415년) 우와이스 칸 (1차 재위; 재위기간: 1417년 ~ 1421년) 시르 무함마드 칸 (재위기간: 1421년 ~ 1425년) 이센 부카 칸 (재위기간: 1433년 ~ 1462년) 두스트 무함마드 칸 (재위기간: 1462년 ~ 1468년/1469년) 유누스 칸 (재위기간: 1468년/1469년 ~ 1487년) 마흐무드 칸 (1487년 ~ 1508년) 아흐마드 칸 (1476년 ~ 1503년) 만수르 칸 (재위기간: 1503년 ~ 1543년) 사이드 칸 (재위기간:1514년 ~ 1533년) 카슈가르 한국 (서부 칸국) 사이드 칸 (재위기간:1514년 ~ 1533년) 압둘 라시드 1세 (재위기간: 1533년 ~ 1559년/1560년) 압둘 카림 칸 (재위기간: 1559년/1560년 ~ 1590년/1591년) 무함마드 칸 가지 (재위기간: 1590년 ~ 1606년) 샤 슈자 앗딘 칸 (재위기간:1606년 ~ 1618년/1619년) 압둘 라티프 칸(재위기간: 1618년/1619년 ~ 1626년/1627년) 술탄 아흐마드 칸 (1차 재위; 재위기간: 1626년/1627년 ~ 1632년/1633년) 술탄 마흐무드 칸 (재위기간: 1632년/1633년 ~ 1635년/1636년) 술탄 아흐마드 칸 (2차 재위; 재위기간: 1635년/1636년 ~ 1638년/1639년) 압둘라 칸 (재위기간: 1638년/1639년 ~ 1667년/1668년) 욜바르스 칸 (재위기간: 1667년/1668년 ~ 1670년) 이스마일 칸 (재위기간: 1670년 ~ 1680년 경) 압둘 라시드 2세(재위기간: 1680년 경) 무함마드 에민 칸 (재위기간: 1680년 경 ~ 1692년) 악바슈 칸 (재위기간: ?) 같이 보기 차가타이 한국 카슈가르 아팍 호자 투르판 각주 몽골의 역사 몽골 제국 차가타이 칸국 티무르 왕조 칸국 중앙아시아의 옛 나라 몽골계 왕조 몽골계 잔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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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A%B8%B8%EB%B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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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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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길병(尹吉炳, 1853년 ~ ?)은 조선 말기의 개화파 인물로 일진회 부회장을 지냈다. 일진회 초대 회장인 윤시병과 형제 사이이다. 생애 1894년 동학에 동생인 윤시병과 함께 입문했다. 윤시병이 1898년 만민공동회의 회장으로 선출될 때 함께 참여하였고, 1899년 독립협회에도 함께 가담하는 등 형제가 모두 개화파로 활동했다. 1904년 윤시병이 송병준과 공동으로 일진회를 조직했을 때는 평의원으로 참가했다가 후에 부회장이 되었다. 윤길병은 일진회를 처음 조직할 때 취지문을 쓰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07년 송병준이 입각하면서 일진회 회원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부에 의해 중용되었고, 윤길병은 충청북도 관찰사와 대한제국 중추원 찬의직을 맡았다. 이때 관직 배분에서 소외된 윤시병은 송병준과는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사후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참고자료 각주 개화파 생몰년 미상 일진회 회원 대한제국의 관료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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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D%83%80%EC%9D%B4%20%EA%B3%B5%ED%99%94%EA%B5%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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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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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 공화국(; , ; 알타이어: , Altay Respublika, )은 러시아의 공화국이다. 역사 알타이 공화국은 1922년 1월 1일에 자치공화국이 되기 전에는 알타이 지방이 포함된, 오이로트 자치주(Ойро́тская автоно́мная о́бласть)로 있었다. 1948년 7월 7일에 개정이 되어서 고르노알타이 자치주(Го́рно-Алта́йская автоно́мная о́бласть)가 되었다. 1991년에 다시 개정되어 고르노알타이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ASSR)으로 잠깐 개정되었다. 1992년부터 알타이 공화국이 되었다. 지리 서시베리아 남쪽에 위치해 있다. 알타이 공화국은 유라시아중부에 위치해 있으며, 중국, 몽골, 카자흐스탄에 접해 있다. 러시아의 다른 지역인 투바 공화국과 하카스 공화국, 알타이 지방과 케메로보주에도 접해 있다. 시간대 알타이 공화국은 옴스크 시간대(OMST)에 놓여있다. 협정 세계시와의 차이는 +0700(OMST)이다. 호수 텔레츠코예 호수는 알타이 공화국의 가장 큰 호수이다. 천연 자원 천연 자원으로 금, 은, 철광석 등이 생산된다. 기온 기후는 대륙성 기후를 보이는 곳으로, 여름은 짧고 더우나, 겨울은 길고 몹시 춥다. 1월 기온: -9.2 °C에서 -31 °C. 7월 기온: +11 °C에서 +19 °C. 강수량: 100-1000 mm. 행정구역 마이민스키 군(Майминский район, 알타이어: Майма аймак) 최스키 군(Чойский район, 알타이어: Чоя аймак) 투로착스키 군(Турочакский район, 알타이어: Турачак аймак) 체말스키 군(Чемальский район, 알타이어: Чамал аймак) 셰발린스키 군(Шебалинский район, 알타이어: Шебалин аймак) 옹구다이스키 군(Онгудайский район, 알타이어: Оҥдой аймак) 우스티칸스키 군(Усть-Канский район, 알타이어: Кан-Оозы аймак) 우스티콕신스키 군(Усть-Коксинский район, 알타이어: Кӧк-Суу Оозы аймак) 울라간스키 군(Улаганский район, 알타이어: Улаган аймак) 코시아가치스키 군(Кош-Агачский район, 알타이어: Кош-Агаш аймак) 고르노알타이스크 (수도) 주민 2002년 인구는 20만2,947명이다. 2002년의 조사에서 러시아인들이 11만6,510명(57%) 있으며 알타이인들은 6만2,192명(30.6%)를 차지한다. 다른 민족들로는 카자흐족{1만2,108명(5.97%)}, 텔렝기트족{2,386명(1.18%)}, 투발라르족{1,533명(0.76%)}, 우크라이나인{1,437명(0.71%)}과 독일인, 쿠마딘족 (0,46%), 라트비아인, 에스토니아인 등 소수 민족이 있다. 교육 고르노알타이스크 대학교를 포함해서 12개의 대학교가 있다. 그리고, 205개교의 학교가 알타이 공화국에 있다. 각주 외부 링크 알타이 공화국 공식홈페이지 알타이 공화국 공식홈페이지 고르노알타이스크 대학교 홈페이지 알타이 공화국 관광 알타이 공화국의 인구 중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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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D%8C%80%ED%8E%91%ED%81%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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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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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펑크()는 SF중에서도 대체 역사물의 하위 장르 중 하나를 지칭한다. 20세기 산업 발전의 바탕이 되는 기술(예: 내연기관, 전기 동력) 대신, 증기기관과 같은 과거 기술이 크게 발달한 가상의 과거, 또는 그런 과거에서 발전한 가상의 현재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가상현실, 사이보그와 같은 전자·정보 기술의 영향으로 변모되는 미래를 묘사한 사이버펑크(cyberpunk)에서 사이버(cyber) 대신 증기기관의 증기(steam)를 합쳐서 만들어졌다. 198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과 유럽을 배경으로 하거나 증기기관에 의한 산업혁명시기를 다룬 것이 많다. SF 평론가이자 번역가인 김상훈에 의하면 기존 과학소설의 건설적인 해체를 지향하던 사이버펑크 소설의 방향성을 시간축에 적용한 일종의 대체역사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스팀펑크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미국의 과학소설 작가인 K. W. 지터이다. 지터는 당시의 과학소설계를 휩쓴 사이버펑크 운동에 빗대어 "컴퓨터 대신 증기기관이 등장하는 우리 소설은 스팀펑크라고 불러야 한다"라는 농담을 했다. 현재 이 장르를 대표하는 소설가로는 지터의 동료 작가인 팀 파워즈와 제임스 P. 블레이록이 있다. 현재 스팀펑크는 SF의 하위 장르를 넘어서서 하나의 문화 ‘밈(meme)’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 의복, 건축 그리고 순수 예술 분야에서 산업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의 영향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역사 기원 스팀펑크는 19세기의 과학소설 작가 쥘 베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H.G.웰즈의 소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산업 시대 초기, 증기를 기반으로 한 기술의 발전에 대한 고찰과 상상을 표현한 이들의 소설은 스팀펑크의 장르적 토대가 되었다. 순수 예술 분야에서는 레메디오스 바로의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초현실주의적 작업이 스팀펑크의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르의 분화와 확립 스팀펑크 장르의 확립은 1950년대 뉴웨이브(New Wave) 운동, 1980년대 초반 일어났던 사이버펑크(Cyberpunk)의 등장으로 인한 SF장르의 분화와 관계가 깊다. 1950년대 후반의 뉴웨이브 운동은 과학적인 논리의 정합성을 중시하던 이전의 경향에서 탈피하여 인간 내부의 우주를 탐색하고 초현실주의적인 내용과 전위적인 실험을 추구함으로써 SF의 외연을 넓혀놓았다. 1980년대 이후 활발히 생산된 사이버펑크는 인간과 과학에 대한 부정적인 비전으로 디스토피아를 그려내고, 기억과 정신의 전자정보화라는 테마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을 묻는 이야기를 통해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스팀펑크는 뉴웨이브 운동의 초현실주의적 내용과 사이버펑크의 문제의식을 계승하여 '증기기관 시대의 대체역사 SF'라는 장르적 특성을 확립하게 된다. 과학소설에서 스팀펑크 장르의 확립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미국의 과학소설 작가 K.W.지터와 팀파워즈, 제임스 P.블레이록이다.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체 역사적 배경, 증기 기관을 소재로 한 오버 테크놀로지 등을 공유하는 그들의 소설은 80년대 스팀펑크 장르의 기반을 다졌다. '스팀펑크'라는 단어는 K.W.지터가 농담조로 보낸 편지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스팀펑크의 확산 아날로그적 감성에 기술적 고찰이 담겨 있는 스팀펑크의 개념은 다른 분야에서도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988년에는 스팀펑크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게임 Space:1889가 출시되었다. 1990년대에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와 같은 스팀펑크를 기반으로 한 영상물이 등장하였으며,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스팀펑크 기반 영상물이 증가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스팀펑크 기반 팬덤들이 활성화되었고, 스팀펑크를 테마로 한 저자본 공예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2012년에는 프라다를 필두로 수많은 하이패션 업체들이 스팀펑크를 제품에 반영시켰다. 2014년 현재 소셜에서 스팀펑크의 언급 빈도는 2009년에 비해 12배 증가했으며, 그 중 88%는 미국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소셜에서 스팀펑크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63%는 30세 이하의 젊은 소비자들이다. Etsy 등의 핸드크래프트 사이트에서 스팀펑크 테마 물품이 거래되며, 명품시장에서도 그 영향력이 증가하는 중이다. 장르적 특징 대체역사 스팀펑크는 대부분 전형적인 SF장르의 시간성을 이탈하여 18~19세기의 연대기적 과거를 스토리상의 현재로 설정한다. 스팀펑크는 현재의 과학 기술이 극도로 진보한 가상의 상황을 상상하는 대신에 증기기관 시대의 과학기술이 현재를 추월하여 미래적으로 여겨질 만큼 고도화된 상황을 가정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연속성이 파기되고 서로 다른 시간대가 하나로 뒤엉킨다. 전통적으로는 K.W.지터 등 1세대 스팀펑크 과학소설 작가들의 배경인 빅토리아 시대부터 1차 세계대전 사이의 유럽을 테마로 삼는다. 때로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와 같은 서부 개척 시대 혹은 미국 남북 전쟁 시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삼을 때도 있으며 《나인》,《신비의 바다 나디아》,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와 같은 포스트아포칼립스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삼기도 한다. 증기 기관 스팀펑크는 《해저 2만리》, 《지구 속 여행》, 《달세계 여행》, 《타임머신》 등 초기 과학소설에 등장하는 기술들에 영감을 받아 증기 기관을 장르의 주요 문법으로 사용한다. 여기에는 산업혁명 초기의 낭만이 들어있는 동시에 기계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 역시 담고 있다. 벨 에포크 스팀펑크의 배경이 되는 빅토리아 시대는 유럽 역사상 유래없던 평화기이자 황금기였던 벨 에포크라 불리는 시기였고, 이는 작품 분위기 전반에 반영된다. 때문에 스팀펑크를 소재로 하는 작품은 여타 펑크 장르(정보 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사이버펑크, 생명공학의 발달을 기반으로 하는 바이오펑크, 디젤엔진과 핵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디젤펑크 등)에 비해 비교적 밝은 분위기를 띄고 있다. 또한 벨 에포크시기를 다룬 작품이 많기 때문에 다소 유럽, 혹은 서구 중심주의적인 면이 존재하며, '펑크'적 느낌이 사라지고 과거에 대한 향수와 무조건적인 긍정이 나타나는 작품도 다수 존재한다는 점에서 비판 받기도 한다. 미디어 소설 K. W. 지터의 Morlock Night(1979). 윌리엄 깁슨과 브루스 스털링의 The Difference Engine(1990). 제임스 P. 블레이록의 Lord Kelvin's Machine(1992). 팀 파워즈의 아누비스의 문, 라미아가 보고 있어. 필립 풀먼의 황금 나침반 필립 리브(Philip Reeve)의 견인도시연대기 (2001). 켄 리우의 '즐거운 사냥을 하길' (단편집 '종이 동물원'에 수록됨) 영화 스팀펑크는 아날로그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과학소설의 기계적 미학을 느낄 수 있는 시각적 효과를 활용할 수 있어서 할리우드 영화의 소재로 종종 받아들여졌다. 《젠틀맨 리그》: 그래픽 노블 원작으로, 빅토리안 스팀펑크의 예를 보여준다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 서부개척시기를 배경으로 한 스팀펑크 《황금나침반》 《나인》: 포스트아포칼립스 스팀펑크로, 기계문명에 대한 반성을 다룬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셜록홈즈》 《삼총사 3D》: 역사극에 스팀펑크의 장르적 특징을 일부 차용했다 《휴고》 《헬보이》: 골든 아미에서 스팀펑크요소가 많이 드러난다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은 스팀펑크를 소재로 활용하거나 분위기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감독의 재패니메이션이 두드러진다. 《기신병단》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스팀보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 《자이언트로보》 《붉은 돼지》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 《쿠크하트:시계심장을 가진 소년》 게임 《RF온라인》 《네오스팀》 《바이오쇼크》 3편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한정 《팝픈뮤직》 24편 "토끼와 고양이와 소년의 꿈" 한정 《영웅서기》 3편, 4편, 5편 한정 《디스아너드》 《문명5》 시나리오 〈산업시대의 제국들〉 미니어처 게임 《워머신》 보드게임 《고려KORYO》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디오더 1866 만화 앨런 무어의 《젠틀맨 리그》 《한성 1905》 《강철의 연금술사》 《바니타스의 카르테》 각주 참조주 같이 보기 레트로 퓨쳐리즘 대체 역사 증기 기관 벨 에포크 더 읽기 Donovan, Arthur. "The Art of Steampunk". The Museum of the History of Science, Oxford University, UK. Fox Chapel Publishers, 2011, SF의 하위 장르 SF 소재 하위문화 1980년대 신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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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20%EB%8B%88%EC%BD%9C%EB%9D%BC%EC%98%A4%204%EC%84%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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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니콜라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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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니콜라오 4세(라틴어: Papa Nicholaus IV, 이탈리아어: Papa Niccolò IV)는 제191대 교황(재위: 1288년 2월 22일 - 1292년 4월 4일)이다. 본명은 지롤라모 마쉬()이다. 프란치스코회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생애 초기 지롤라모 마쉬는 1227년 9월 30일 아스콜리피체노 인근의 리시아노에서 태어났다. 경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그는 프란치스코회 수사로서 교회를 보호하고 십자군 원정을 촉구하고, 이단을 근절하는데 노력하였다. 레브도르프의 하인리히에 따르면, 그는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1272년 피사에서 열린 프란치스코회 총회에서 달마티아 관구장으로 선출되었다. 1272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제2차 리옹 공의회에 동방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참여하도록 그를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에게 사절로 보냈다. 교황에게는 동서방 교회의 재일치를 이루고자 하는 원대한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총장 보나벤투라는 교황의 사절단과 동행할 네 명의 프란치스코회원을 선발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보나벤투라는 그 중의 한 명으로 지롤라모 마쉬를 선택했다. 보나벤투라가 1274년 7월 15일 리옹에서 가진 수도회 총회 제5회기 중에 갑자기 선종하자 당시 부재 중이었음에도 지롤라모 마쉬가 프란치스코회의 후임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지롤라모 마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동로마 대표들과 함께 돌아왔다. 1277년 10월 15일 교황 니콜라오 3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와 아라곤 왕 알폰소 3세 사이의 평화 협상을 주선하고자 지롤라모와 도미니코회 총장 베르첼리의 요한을 보냈다. 지롤라모와 요한은 1278년 4월 4일에도 똑같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동시에 지롤라모는 프란치스코회 총장을 당분간 계속 맡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1278년 지롤라모는 교황 니콜라오 3세에 의해 산타 푸덴치아나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추기경이 된 이후에도 그는 한동안 프란치스코회 총장을 계속 역임하였다. 1281년 4월 12일 그는 교황 마르티노 4세에 의해 팔레스트리나의 주교급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교황 선출 1287년 4월 3일 교황 호노리오 4세가 선종하자 그가 선종한 장소인 아벤티노 언덕의 산타 사비나 성당 옆 교황궁에서 13명의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콘클라베가 소집되었다. 당시 추기경단은 후임 교황 선출 문제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는 양상이었다. 콘클라베 중에 추기경이 6명이나 선종하자 지롤라모 마쉬 추기경을 제외한 나머지 추기경들은 모두 콘클라베를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콘클라베가 다시 소집된 것은 다음해가 되어서였다. 당시 콘클라베에 참석한 추기경은 지롤라모 마쉬를 포함해 총 7명이었다. 1288년 2월 15일 1차 투표에서 추기경들은 만장일치로 지롤라모 마쉬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꿋꿋하게 교황궁에 남아있으려는 그의 모습에 다른 추기경들이 깊은 김명을 받았다고 전해지긴 하지만, 구체적인 동기에 관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마쉬는 선거에 앞서 말했듯이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도 일주일 내내 교황직 수락을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2월 22일에 이르자 마침내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고 교황직을 수락하였다. 최초의 프란치스코회 출신 교황이 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니콜라오 4세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자신을 추기경으로 서임한 니콜라오 3세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교황 교황은 교황령의 일관된 통치를 위하여 강력한 콜론나 가문을 이용하여 반대 요인을 무마시키려고 하였다.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자치 공동체(comune)를 업고 통치자(Signore)가 등장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정부들은 자주 소요를 일으켜 무장 충돌도 빈번히 일어났다. 교황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칙서 《Celestis altitudo potentiae》를 발표하였으나 이 교서가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선종하고 말았다. 그 내용은 교황청 수입의 반을 추기경단에 할당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증가하는 추기경들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교황령에 대해 그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는 데 있었다. 1288년 10월 28일, 아라곤의 하이메 2세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확정한 샹프랑크 조약을 무효화했다. 이 조약은 교황의 이익과는 부합하지 않았다. 1289년 5월 그는 분명하게 교황령이 종주국임을 인정한 조약을 체결한 후 카를로 2세를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시켰으며, 1291년 2월에는 아라곤의 알폰소 3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시칠리아에서 하이메를 축출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1288년 니콜라오 4세는 중국에서 온 네스토리우스파 라반 바사우마를 접견했다.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니콜라오 4세는 십자군 원정에 대한 열의로 불타올랐다. 그는 불가리아와 에티오피아, 몽골, 타타르족, 중국 등에 프란치스코회원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 등의 선교사들을 파견하기도 했다. 죽음 니콜라오 4세는 1292년 4월 4일 로마의 리베리오 대성전(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옆에 세운 궁전에서 선종했다. 사후 그의 유해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문은 ‘여기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 니콜라오 4세가 잠들다.’(Hic requiescit / Nicolaus PP Quartus / Filius Beati Francisci)이다. 각주 1227년 출생 1292년 사망 이탈리아 출신 교황 프란치스코회 출신 교황 팔레스트리나 주교 추기경 작은형제회 총봉사자 아스콜리피체노 출신 페루자 대학교 동문 13세기 교황 13세기 이탈리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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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97%90%20FM%20%EB%B0%A9%EC%86%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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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 FM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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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 FM방송은 일본의 FM라디오 방송국으로 1985년 6월 1일 개국했으며 미에현에서 방송을 실시하고 있다. JFN에 가맹했으며 약칭은 FM미에(FM三重), 애칭은 radio3(radio CUBE FM미에) 콜사인은 JONU-FM이다. 개요 방송구역에 아이치현이 있기 때문에 일부 FM도쿄 제작 프로그램이 방송되지 않고 있다. 나가노 FM방송이 개국하기 전에는 나가노현에서도 듣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원래 욧카이치시에 본사를 설치하려 했다. 연혁 1984년 4월 3일 - 회사 설립 1985년 6월 1일 - 개국 2005년 4월 - 새로운 애칭으로 "라디오 큐브" 제정. 주파수 쓰 방송국:78.9 MHz(출력:3kW) 오와세 중계국:80.4MHz 호쿠세이 중계국:76.8MHz 린나이 중계국:76.8MHz 나바리 중계국:85.5MHz 도바 중계국:83.2MHz 오미야 중계국:83.2MHz 미야가와 중계국:84.9MHz 구마노 중계국:85.7 MHz 이소베 중계국:78.1MHz 미에현에 있는 다른 텔레비전·라디오 방송국 NHK 쓰 방송국 미에 TV 방송(MTV)(독립 텔레비전 방송국) 외부 링크 공식 사이트 JFN 일본의 FM 라디오 방송국 1984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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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2%8C%EC%98%A4%EB%A5%B4%ED%81%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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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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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는 독일어 이름이다. 작센의 게오르크(1471~1539)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1595~1640): 독일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1525~1598):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이자 프로이센의 공작 작센의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1585~1656) 요한 게오르크 4세(1668~1694) 게오르크 옴(1787~1854)은 독일의 물리학자이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남성 철학자 요하네스 게오르크 베드노르츠: 독일의 물리학자 한스 게오르크 데멜트: 볼프강 파울과 공동으로 이온 트랩 기법을 개발한 공로로 198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독일 출신의 미국의 물리학자 게오르크 폰 베케시: 헝가리 태생의 미국의 생물리학자 게오르크 비티히: 독일의 화학자 게오르크 카를 폰 헤베시 게오르크 옴: 독일 물리학자 게오르크 폰 퀴흘러: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육군 원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게오르크 뷔히너: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칸토어 요한 게오르크 하만: 독일의 철학자이자 시인 요한 게오르크 1세 폰 작센 선제후: 1611년부터 1656년까지 작센 선제후였던 인물 게오르크 엘저: 나치즘에 반대하였던 독일인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독일의 보수 정치인 게오르크 5세 오토 게오르크 티라크: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독일 출신의 외교관 겸 언어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독일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이자 프로이센의 공작(1619 - 1640) 게오르크 데르팅거: 동독의 정치인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 아돌프 히틀러의 할아버지로 알려진 인물 게오르크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쿨름바흐 변경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페르디난트 게오르크 프로베니우스: 독일의 수학자 게오르크 에른스트 슈탈: 독일의 화학자이자 의사 게오르크 지멜: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 독일의 바로크 음악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 호엔촐레른가(家)의 수장 게오르크 케플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장친위대 고위 장교 게오르크 옐리네크: 19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공법학자·헌법학자·행정법학자 게오르크 힐마르: 독일의 체조 선수 게오르크 폰 프룬츠베르크: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와 카를 5세의 휘하에서 복무한 인물 게오르크 트라클: 오스트리아의 시인 게오르크 도나투스 폰 헤센다름슈타트 게오르크 데 랄란데: 독일의 건축가 게오르크 고트프리트 게르비누스: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정치가 게오르크 카이저: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게오르크 포르스터: 독일의 박물학자, 민족학자, 여행작가, 언론인, 혁명가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라프: 구(舊) 오스트리아-헝가리(現 오스트리아 공화국) 제국 해군에 복무한 군인 게오르크 빌헬름 슈텔러: 독일의 식물학자, 동물학자, 의사, 탐험가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 독일의 물리학자, 풍자작가 게오르크 스테르진스키: 독일 가톨릭교회의 추기경이자 베를린 대교구장 게오르크 그로처: 헝가리 출신 독일의 배구 선수 게오르크 가프키: 독일의 세균학자 하인리히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에발트: 독일의 동양학자이자 복음주의 신학자 게오르크 몰러: 남부 독일, 현재의 헤센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활동했던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 설계자 게오르크 시투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 군인 게오르크 라파엘 도너: 오스트리아의 조각가 요한 게오르크 파우스트: 독일의 방랑하는 만능치료사, 연금술사, 마술사, 점성술사 겸 예언자 게오르크 겐스바인: 2012년에 명의 대주교로 서임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고위성직자이자, 교황 궁내원장이고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개인 비서 게오르크 에레트: 식물학자, 곤충학자이며 식물 삽화가 게오르크 니더마이어: 독일의 축구 선수 게오르크 라칭거: 독일의 기독교 성직자이자 음악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형 게오르크 브라운: 독일의 쾰른에서 태어난 지리학자 요한 게오르크 폰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중세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 군주로 크르노프(예겐스부르크)의 공작 요한 게오르크 폰 브란덴부르크 게오르크 H. 슈넬: 20세기 독일의 배우 게오르크 폰 코프: 독일 가톨릭교회의 추기경 요한 게오르크 폰 졸트너: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 게오르크 틴트너: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지휘자이자 작곡가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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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1%90%EC%9C%84%EB%B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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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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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위봉(斗圍峰, 일명: 두리봉)은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신동읍 방제리, 사북읍 사북리, 남면 무릉리와 영월군 산솔면 직동리에 걸쳐 있는 해발 1,466m의 산이다. 백두대간의 함백산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이다. 1400m급의 고산인 만큼 그 덩치도 만만치 않고 주능선만도 정상을 열 십자로 그으며, 각각 사방으로 뻗어나간 능선이 장장 10Km가 넘는다. 정상에 올라 바라보는 전망도 좋아서 북으로는 민둥산이 펼쳐지고, 동쪽으로 백운산과 그 오른족에 태백산이며 남으로 매봉산이 두루 조망된다. 정상에 이르는 주능선에는 철쭉 군락이 대단하여 정선군에서 해마다 철쭉제를 열기도 한다. 고생대 오르도비스기의 퇴적암 지층 조선 누층군 두위봉층의 이름이 이 산에서 유래되었다. 각주 강원특별자치도의 산 정선군의 지리 영월군의 지리 1000미터 봉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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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D%9E%88%EC%8A%A4%ED%88%B0%20%EB%B9%84%EB%AC%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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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히스툰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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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히스툰 비문(비시툰 또는 비수툰, 현대 페르시아어: بیستون ; 고대 페르시아어: 바가스타나 "신의 땅")은 이란의 케르만샤 주의 베히스툰 산에 위치한 다리우스 1세 시대의 다국어 비문이다. 비문은 같은 글의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의 세가지 설형 문자로 기록된 세가지 버전을 포함한다. 영국의 군장교 헨리 롤린슨은 1835년과 1843년 두 부분으로 전사시켰다. 롤린슨은 1838년 고대 페르시아 설형문자를 번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엘람어와 바빌로니아어 글은 롤린슨과 다른 이들에 의해 1843년 이후에 번역되었다. 바빌로니아어는 아카드어의 후기 형태로, 둘 다 셈어이다. 그 후 이 비문은 실질적으로 로제타석과 같은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베히스툰 비문은 고대의 글 해독에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가 되었다. 비문은 거의 높이가 150미터에 폭이 100m의 석회암 절벽에 있다. 해당 절벽은 바빌로니아와 메디아의 수도 바빌론과 엑바타나를 잇는 고대 도로에 있다. 여기는 접근하기 어렵게 아래의 산측이 제거되었는데 완성 후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대 페르시아어 글은 5칼럼에 414줄로 되어있다. 엘람어 글은 8칼럼에 593줄 분량이며, 바빌로니아어 글은 112줄이다. 이란의 유적 이란의 조각품 이란의 세계유산 케르만샤주의 건축물 아케메네스 제국의 건축 고대 조각 비문 암면미술 부조 다언어 매체 번역 아카드어 엘람어 아카드 문학 다리우스 1세 군주 목록 기원전 6세기 조각 작품 기원전 5세기 조각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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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BC%ED%95%99%EC%9D%84%20%EB%A7%90%ED%95%9C%EB%8B%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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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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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말한다》(Closer To Truth: Science, Meaning and the Future)는 미국 PBS에서 제작한 과학 대담, 토론 텔레비전 시리즈물이다. 대한민국 OUN이 번역하여 붙인 제목이며, 진행자는 로버트 로런스 쿤 박사이며, 쿤 재단의 후원으로 제작되고 있다. 프로그램은 새롭게 발견되었거나, 발전되고 있는 과학과 그러한 첨단 과학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분야의 과학자와 석학들이 나와서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프로그램이 다루는 주제는 "뇌와 마음", "생물학과 의학", "우주와 세계", "과학, 철학, 종교", "과학과 실세계" 다섯 개의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다. 프로그램은 미국 전역을 비롯해, 대한민국, 중국, 캐나다, 이스라엘에서도 방영되고 있다. 80여 개로 예정되어 있는 새로운 시즌이 2007년 현재 제작 중이다. 주제는 천문 물리학, 우주론, 인식의 근원, 종교철학, 신학, 과학과 종교의 관계 등을 아우르며, 과학자와 철학자가 토론 패널로 참여한다. 주제 시즌 1 101: "What are the Grand Questions of Science?" 102: "Will the Internet Change Humanity?" 103: "What’s Creativity and Who’s Creative?" 104: "New Communities for the New Millennium" 105: "How Did This Universe Begin?" 106: "Can We See the Near Future — Year 2025?" 107: "What is Consciousness?" 108: "Can You Really Extend Your Life?" 109: "Can ESP Affect Your Life?" 110: "Whatever Happened to Ethics and Civility?" 111: "How Does Technology Transform Thinking?" 112: "Strange Physics of the Mind?" 113: "Can Science Seek the Soul?" 114: "Does Sex Have a Future?" 시즌 2 201: "Can We Imagine the Far Future—Year 3000?" 202: "How Do Breakthroughs Change Science?" 203: "How Does Creativity Work at Work?" 204: "Do Brains Make Minds?" 205: "Will Gene Therapy Change the Human Race?" 206: "Why are Music and Art So Exhilarating?" 207: "Why is Quantum Physics So Beautiful?" 208: "How Did We Think in the Last Millennium?" 209: "Who Needs Sex Therapy?" 210: "Can Technology Transform Society?" 211: "Can You Learn to Be Creative?" 212: "What is Parapsychology?" 213: "When Will This Universe End?" 214: "Will Intelligence Fill This Universe?" 시즌 3 301: 과학소설은 과학인가? ("Is Science Fiction Science?") 302: 과학과 종교 ("Can We Believe in Both Science and Religion?") 303: 자폐증과 뇌 ("How Does the Autistic Brain Work?") 304: 우주의 신비 ("How Weird is the Cosmos?") 305: 미생물의 두가지 얼굴 ("Microbes — Friend or Foe?") 306: 우주의 숨겨진 질서 ("How Does Order Arise in the Universe?") 307: 과학과 음악 ("Why is Music So Significant?") 308: 양자 컴퓨터의 꿈 ("Will Computers Take a Quantum Leap?") 309: 첨단을 걷는 정신의학 ("Does Psychiatry Have a Split Personality?") 310: 기초과학과 국가안보 ("How Does Basic Science Defend America?") 311: 대체의학의 가치 ("Who Gets to Validate Alternative Medicine?") 312: 의식은 정의될 수 있는 주제인가 ("Is Consciousness Definable?") 313: 외계생명체는 존재하는가("Is the Universe Full of Life?") 314: 첨단 과학에 위협받는 종교 ("Can Religion Withstand Technology?") 315: 신약개발의 윤리적 과제 ("Testing New Drugs: Are People Guinea Pigs?") 미국의 교육 텔레비전 프로그램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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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95%94%20%EA%B4%91%EB%AC%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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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암 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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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암 광물은 암석을 이루고 있는 주된 광물을 말한다. 조암광물에는 석영, 장석, 흑운모, 각섬석, 휘석, 감람석 등이 있다. 종류와 성질 조암광물의 주성분 광물로는 석영 · 장석류 · 운모류 · 휘석류 · 각섬석류 · 감람석류가 있고, 부성분 광물로는 인회석 · 자철석 등이 있으며, 또한 화성암에서 주성분 광물을 무색광물과 유색광물로 나누는데, 무색광물로서는 석영 · 장석 등, 유색광물로서는 운모 · 각섬석 · 휘석 · 감람석 등이 있다. 모든 조암광물은 산소와 규소를 포함해서 규산염 광물이며, 철과 마그네슘이 포함되어있는 흑운모, 각섬석, 휘석, 감람석은 어두운 색을 띈다. 석영과 장석은 철과 마그네슘이 없으므로 밝은색을 띈다. 참고로 말하자면 장석이 조암광물 중 가장 많은 부피비를 차지한다. 그 다음으로 석영이다. 광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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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8%B0%EB%8F%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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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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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동은 다음을 의미한다. 인물 이기동(李基東)은 대한제국의 관료이며 황국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기동(李起東, 1885 - 1952)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활동한 직업적 친일 인물이다. 이기동(1935 - 1987)은 대한민국의 희극인이다. 이기동(李基東, 1943 - )은 대한민국의 사학자이다. 이기동(李基東, 1951 - )은 대한민국의 유학자로 성균관대학교의 교수이다. 이기동(1965 - )은 대한민국의 정치학자이다. 이기동(1984 - )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다. 이기동(1956년 8월 30일 ~ )은 춘천지방검찰청 강릉지청장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검사, 변호사이다. 지명 이기동(耳基洞)은 강원도 동해시의 법정동이다. 행정동은 삼화동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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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AD%ED%9A%8C%EB%8F%84%EC%84%9C%EA%B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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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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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도서관(國會圖書館) 또는 의회도서관(議會圖書館)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대한민국 국회도서관은 대한민국 국회에 속하는 도서관이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미국 의회에 속하는 도서관이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은 일본 국회에 속하는 도서관이다. 같이 보기 유형별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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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B2%94%EC%A4%80%20%281933%EB%85%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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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준 (19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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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준(李範俊, 1933년 6월 29일 ~ 2011년 7월 14일)은 정치학자 출신으로 제9대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남편은 정치인 박정수이다. 학력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수학 미국 켄터키 주립 대학교 졸업 (정치학 학사) 미국 어메리칸 대학교 대학원 졸업 (국제정치학 석사 및 박사) 약력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학장, 대학원장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 대한민국 외무부 외교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 통일부 통일교육홍보위원장 및 통일정책평가위원 유엔 및 유네스코 총회 대한민국 대표단 고문 국제의회연맹 총회 대한민국 대표 서울가정법원 가사조정위원 대한민국 중앙인사위원회 위원 1973년 ~ 1979년 : 제9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참고자료 1933년 출생 2011년 사망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대한민국의 여자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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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C%9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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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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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 )은 중국의 고도(古都)로 현재 산시성(陝西省)의 성도(省都) 시안시(西安市)에 해당한다. 한 왕조의 시기에 장안으로 명명되었는데, 이후 전한, 북주, 수 왕조의 수도였다. 당(唐) 왕조의 시대에 장안은 대제국의 수도로서,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로 발전했다. 또한 서도(西都), 대흥(大興), 중경(中京), 경조(京兆)으로 불린 적도 있었다. 송(宋) 왕조 이후 정치 · 경제의 중심이 동쪽의 개봉으로 옮겨가면서 장안은 더 이상 수도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당대의 장안은 주변 여러 민족의 도성 건설의 모범으로서 한국의 신라 왕경이나 발해 상경용천부는 물론, 일본의 헤이조쿄와 헤이안쿄가 장안을 모방해 세워졌다. 수도를 가리키는 말인 '장안'은 오래된 도읍인 장안에서 따왔다. 역사 서주 장안의 도시로서의 역사는 주(周) 왕조의 도읍이었다는 풍읍(豐邑)에서 시작되는데, 풍경(豊京)이라고도 불린 풍읍은 문왕 때까지 종실인 주공의 도읍이었다. 무왕이 은 왕조의 주왕을 멸망시킨 후, 풍수(灃水)를 사이에 두고 풍읍 맞은편에 있던 호(鎬) 땅으로 천도했다. 주의 수도는 호경(鎬京)이라 했는데, 호경은 지금의 시안 시 서남쪽 근교에 해당하는 곳이다. 호경은 정치를 맡고 풍읍은 제사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호경은 12대 유왕 때 전란으로 파괴되고 평왕은 기원전 770년에 낙읍으로 천도했다. 이후 이 지역은 춘추전국시대 진의 영토가 되었으며, 전한 무제 때의 토목공사로 당시의 유적은 파괴되었다고 생각된다. 진 진나라 때 서쪽 근교에 진의 수도인 함양(咸陽)이 건설되었다. 전한부터 북주까지 진 멸망 후의 전란을 거쳐 한 왕조를 세운 유방은 파괴된 함양의 교외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하고 장안으로 명명했으며, 혜제 때 성벽이 건축되었다. 장안성의 남쪽은 남두육성, 북쪽은 북두칠성의 형태를 하고 있었기에 당시의 장안성의 별칭인 두성(斗城)이 탄생했다. 장안성에는 9시, 12문이 설치되었고 성내에는 미앙궁(未央宮), 장락궁(長樂宮), 명광궁(明光宮), 북궁(北宮), 계궁(桂宮)이라는 궁전이 있었으며(《삼보황도》) 전체적인 도시의 형태는 방형이 아닌 다소 찌그러진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후 전한, 신, 후한(멸망 전의 몇 년간), 전조, 전진, 후진, 서위, 북주가 수도를 두고 있었다. 후한의 실권자 동탁은 태위 황완·사도 양표의 반대를 내치면서 장안 천도를 강행했다.(190년) 수 · 당 시대 북주를 멸하고 수 왕조를 세운 양견은 생활 환경의 악화나 정치적인 문제 등을 이유로 이때까지의 장안을 버리고, 그 교외에 있던 용수원(龍首原)에 새로운 도성(都城)을 세운다. 새로운 도성을 만드는 공사를 맡은 것은 우문개(宇文愷, 555년 ~ 602년)였다. 처음에는 대흥성(大興城)이라 불린 도성은 수 · 당 시기의 수도이자 국제도시로서의 장안의 모태가 되었으며, 중앙에 주작대로로 불리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인 주작문가(朱雀門街)를 끼고 왼편에 54방(坊)과 동시(東市)를, 오른편에 또 54방과 서시(西市)를 만들어 총 110개의 방시(坊市)로 이루어진 조방도시(條坊都市)였다. 장안을 모방해 지은 헤이안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장안 성내에는 방마다 사면에 또 높은 장벽을 둘러쌌다는 점이었고, 장벽의 문은 밤에는 닫혀서 통행이 금지되었다. 또한 용수원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6단의 계단처럼 이루어진 대지 모양의 구릉 지대였다. 설계자인 우문태는 이것을 주역의 육효(六爻)로 삼아 도시계획을 세웠다고 여겨진다. 천자의 자리에 해당하는 구이(九二)에 궁성(宮城)을 두고, 군자의 자리에 해당하는 구삼(九三)에는 황성(皇城)을 배치하였다. 나아가 《주역》에서 말하는 구이(九二)보다도 가장 높은 곳에 해당하는 구오(九五)의 언덕은 일반 서민이 살기 어렵고 재앙의 근원이라 여겨 국립 사찰인 대흥선사(大興善寺)와 국립 도관(道觀)인 현도관(玄都観)을 두어 국태민안을 기도하였다. 최전성기 장안의 인구는 백만 명에 이르는 대도시로 발전했지만, 동시에 식량문제라는 치명적인 문제도 내포하고 있었다. 관중(関中) 지역은 장안의 불어난 인구를 지탱할 식량 생산이 불가능했고 강남(江南)으로부터 대운하를 따라 대량 운송이 이루어졌으며, 조정은 이러한 문제를 식량 반입이 편이한 장소로 일시적으로 옮겨두는(낙양을 부수도로 삼은 것도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등의 대응책을 내놓았지만, 안사의 난 이후 정치적 불안정으로 대운하 관리가 차츰 곤란해지고 대운하가 통항 불가능한 지경이 되어 장안의 식량 가격은 몹시 치솟는 결과를 가져왔고, 빈곤층 가운데 굶어 죽는 자들이 잇따랐다. 당 왕조가 멸망하기 직전 왕조를 찬탈한 주전충에 의해 수도가 낙양으로 옮겨진 뒤, 장안이 다시 수도가 되는 일은 없었다. 오대 이후 당말의 전란으로 황폐해진 장안 대신 새로운 왕조의 수도는 동쪽의 낙양으로 옮겨졌다. 당을 멸하고 후량을 세운 주전충은 수도를 더 동쪽에 있던 개봉으로 옮겼다. 이로 인해 수도 기능을 잃은 장안의 성벽은 축소되어 하나의 지방도시가 되었다. 명대에 장안으로의 천도론이 주창된 적이 있었지만, 이미 당대에 식량 문제를 안고 있던 장안으로의 천도는 실현되지 않았고, 명칭을 서안(西安)으로 개칭해 지방도시로서 발전해갔다(현재의 시안에 대해서는 시안시의 항목을 참조). 같이 보기 시안시 전한 수나라 당나라 태극궁 대명궁 각주 중국의 역사 한나라 시안시의 역사 중국의 옛 수도 고대 중국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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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D%B8%EB%A7%88%EC%99%80%20%EB%A3%A8%EC%9D%B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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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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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는 리들리 스콧 감독이 제작하고 수전 서랜던과 지나 데이비스가 주연한 1991년작 미국 영화이다. 로드 무비의 전형으로, 평범한 두 여성이 겪는 사건들을 통하여 여성주의적인 요소를 표현하여 이후 여성주의 영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1991년 칸 영화제의 폐막 초대작으로 상영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델마와 루이스》를 여성주의 로드무비라고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영화를 특정 장르로 구분짓게 되면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관객층을 제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인 남편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는 가정주부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루이스(수전 서랜던)가 여행을 떠났다가 강간미수범을 살해하게 되면서 현행범으로 몰리게 된다. 그들이 쫓아오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신세가 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성별과 인종, 계층의 구분을 넘어 다양한 범주의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델마와 루이스》는 이전까지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장르를 여성의 지속적인 반향을 보여줌으로써 여성화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한 영화를 본 수많은 관객들이 델마와 루이스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그들의 여정에서 표현되는 감정을 공감하며 느낄 수 있었다. 두 주인공 델마와 루이스를 통해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수한 장애물을 부딪히는 평범한 미국 여성들을 보여주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 영화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상징적인 요소들을 통해 사회에 전달하고자 하였다. 줄거리 가정주부인 델마는 덜렁대는 성격에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지만, 남편이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여 외출도 매번 허락을 받아야 하는 답답한 현실에 불만이다. 루이즈는 웨이트레스로 꼼꼼하고 이성적이지만, 식탁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기만 하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주말에 별장을 빌려 함께 지내기로 하고 각자 간단한 메모만을 남긴 채 신나게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고속도로변 휴게실에 차를 세웠을 때 평범한 두 여인들의 여행길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의 긴 여로에 오른다. 남편으로부터의 해방감에 들뜬 델마는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을 마시고 휴게실에서 만난 할런 퍼케트와 춤을 추나, 퍼케트가 주차장에서 폭력을 휘두르며 강간하려 하자 루이스가 권총을 가져와 그를 제지하고 델마를 구해준다. 그때 남자가 성적인 모욕을 가하자 루이스는 그를 쏴 살해한다. 즐거움으로 가득찬 여행길은 이제 공포의 도주로 바뀌고 델마와 루이스는 극한 상황에 빠져든다. 더구나 루이스의 돈을 제이디라는 건달 청년이 훔쳐가는 바람에 델마는 솜씨 좋은 강도로 변신한다. 두 사람은 강력범으로 수배되나 형사 할 슬로컴브만이 두 여자의 어쩔 수 없는 여정을 알고 그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들이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유조차 트레일러가 그녀들의 차를 쫓아온다. 그 운전사는 끊임없이 성적 희롱으로 추근댄다. 고속도로변에서 몇번 그와 마주친 루이스는 그 운전사와 차를 나란히 달리게 됐을 때 뭘 원하느냐고 묻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그러자 운전사는 신이 나 차에서 내려 그녀들의 차가 있는 곳으로 온다. 그때 루이스가 묻는다. "만약에 당신의 아내나 딸에게 누가 당신처럼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소?" 운전사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험한 욕을 해대기 시작한다. 그때 델마가 총을 꺼내 트레일러의 차 바퀴를 쏴 버린다. 그리고 유조차의 탱크를 쏴 폭파시켜 버린다. 경찰의 추격 끝에 그랜드 캐년의 벼랑 끝에 몰리게 된 두 여인. 델마가 루이스에게 그냥 앞으로만 달리자고 소리친다. 서로의 눈빛을 확인한 두사람은 그랜드 캐년의 벼랑 끝을 질주한다. 등장 인물 지나 데이비스 - 델마 디킨슨 역 수전 서랜던 - 루이스 소여 역 하비 카이텔 - 핼 슬로컴 역 마이클 매드슨 - 지미 역 크리스토퍼 맥도널드 - 대릴 역 브래드 피트 - 제이디 역 티모시 카하트 - 할란 퍼케트 역 시대적 배경 및 맥락 사회적 배경 직업과 관련한 시대적 배경 영화 초반에 집에서 주부로만 지내는 델마와 달리 루이스는 식당에서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시대에는 직업과 관련한 여성의 지위가 변화하고 있는 시기였다. 윌리엄 대리티와 패트릭 메이슨에 따르면, 1990년 미국에서 성별에 기반하여 대규모 수평적 직업 분할이 있었다. 그 당시 직업에 관련한 상이지수는 53%였으며, 이는 여성의 53% 혹은 남성의 47%가 모든 직업에서 평등적인 성별 구성을 위해 다른 직업 필드로 옮겼음을 의미한다. 여성은 이전 전통적인 남성 중심의 직업 군에 진입하기 시작하였지만, 남성이 여성 중심의 직업에 진입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이러한 수평적 직업 분리는 성별에 관한 임금 차이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소였다. 미국 내 성별간 임금 격차는 동일임금법(Equal Pay Act)이 지정된 이래로 좁혀지고 있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와 임금 격차의 수렴은 주춤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1980년대 이래로 중상층 임금의 직업이 커짐에 따라 고임금 직업과 저임금 직업의 비중이 줄었다. 이로 인해 심각한 양극화 상황이 발생하였으며, 전반적인 임금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80년대 후반에 남성이 한 가정의 유일한 수입원이어야 한다는 인식은 32%에서 21%로 감소하였다. 당시 15%의 가정만이 남성의 수입에만 의존한다는 결과를 보면 그 당시 많은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성의 사회적 노동참여는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남성의 실질임금은 하락하였으며, 실업률은 높아졌다. 불투명한 미래에 불편함을 느낀 남성들은 보수주의로 회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아이를 돌봐야 하는 여성의 취업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어머니의 취업이 어머니와 자녀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아이의 발달을 저하시킨다고 믿었다. 아내와 어머니로서 여성의 전통적 가치가 강조되었으며, 직장 일을 하더라도 가정에 충실하기를 원하는 문화적, 도덕적 보수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결과적으로 그 당시 여성과 남성, 또 전업주부와 취업여성 간의 대립적 구도가 강화되었다. 가부장적 사회 영화의 주인공 델마와 그녀의 남편인 데럴을 통해 그 시대의 가부장적인 사회 모습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녀차별은 여전히 존재하였다. 전문직과 고위직에 여성의 비중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위직의 95%는 남성이 차지하고 있었다. 남성들은 여전히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여성이 취업을 하기보다는 집에서 전업주부로 지내기를 원했다. 아내와 어머니로서 여성의 전통적 가치가 중요시되었으며,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문화적인 보수주의가 성행하였다. 1950년대부터 사회적으로 여성들의 '이름없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가정주부들은 원인을 알 수 없어 정의내리지 못하는 심리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교외에서 남편과 자녀와 함께 집을 가지고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녀들은 심리적으로 불만족과 공허함을 느꼈다. 그들의 교육수준에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문제였다. 델마와 데럴의 관계를 이러한 시대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델마는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도 그의 폭력에 반항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참고 버틴다. 여성을 평등한 관계라고 인식하기 보다는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문화적 배경 강간 문화 성폭력에 기여하는 사회적 관습이나 사고방식 등을 일컫는 '강간 문화(rape culture)'는 1970년대 제2물결 여성주의자들에 의해서 식별된 사회현상으로서 1975년 동일한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려진 개념이다. 강간 문화와 흔히 연결되는 품행에는 피해자책임주의, 성적 대상화, 성폭력의 경시, 성폭력의 만연함 또는 피해에 대한 부정 등등이 있다. 강간 문화에는 성폭력을 평범한 삶의 일부로 여기거나 더 나아가서는 남성의 특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폭력을 부추기고 여성에게 성적 행동에 관한 사전정의된 성역할을 강요하는 사회적 메시지인 강간통념(rape myth)들을 영속시키기도 한다. 강간통념의 종류에는 성폭력을 그저 거친 섹스 정도로 취급한다든가 피해자에게 성폭행을 불러들인 책임을 지운다든가 등등이 있는데, 이러한 강간통념들에서 왜 델마와 루이스가 합법적으로 할란 퍼케트를 처벌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증거라곤 델마 얼굴의 피와 친구의 증언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소가 가능하다 해도 경찰서와 재판소에서 가부장제적 사고방식에 희생되었을게 뻔한 것이다. 비록 델마가 폭행을 당했지만 퍼케트와 춤을 추었고, 주차장으로 같이 나갔다는 사실이 델마를 궁지에 빠뜨릴 것이고, 그 사실에 대해서 '네가 먼저 꼬리를 쳤다,' '성관계를 바라던게 아니었다면 왜 모르는 남자와 춤을 춰서 흥분시켰냐,' '주차장까지 따라갔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만 하지 않았냐'등의 비난만 쏟아졌을 거란 뜻이다. 의법 처단은 물론, 재판소까지 가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델마와 루이스에게 퍼케트를 처벌할 수 있는 수단은 직접적인 자경주의밖에 안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진 시청자는 자연스럽게 퍼케트의 죽음을 '살인'보다는 '처형'이라 해석하게 되고, 델마와 루이스의 도주에도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성적 해방주의 (Sexual Liberation) 성적 해방주의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서양, 특히 미국에서 성생활과 대인관계에 관한 사회적 규범들에 도전장을 내민 사회운동을 일컫는다. 결혼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이성애적 관계 이외의 다양한 성관계의 종류에 대한 수용이 증가하면서 피임과 경구 피임약, 알몸의 공개적 노출, 자유로운 혼전 성관계의 정상화, 동성애와 대안적 성생활, 낙태의 합법화 등의 주제들에 대한 수용도 따라서 증가했다. 여성주의 제2의 물결과 동시에 발생한 성적 해방주의는 여성적 및 퀴어 성생활을 옭아매는 고정관념들에 대한 공통적인 의문을 제기했으며, 여성주의자들에게도 주요 관심이었던 성적 해방주의의 주된 목표 중 남성에 대한 우호적 편견과 여성의 성적 대상화로부터의 배제, 그리고 여성이 외부의 간섭이나 비판 없이 성적 파트너를 고를 수 있는 권리의 취득에 협조를 받았다. 많은 여성주의 사상가들은 성적 수위(首位)의 주장이 궁극적 목적인 여성의 해방을 향한 중요한 움직임이라 믿었기 때문에 다른 여성들에게 자진해서 먼저 성적 구애를 하고, 성교를 즐기며, 새로운 유형의 성행위를 시도해 보길 권고했다. 억압적인 남편을 떠난 델마의 혼외정사도 자유롭고 달달한 하룻밤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성적 해방주의적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응 전반적 이해 델마와 루이스는 미국의 영화 평론 사이트 메타크리틱에서 100점 만점 중 88점을 기록하고, IMDB에서 10점 만점 중 7.4점을 기록한 성공적인 영화이다. 또한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대표적인 영화이다. 이 영화는 여성 친구들의 가벼운 모습을 담은 영화라고 광고하기도 한 버디 영화이다. 또한 평범한 여성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로드 무비로 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석양이 지는 가운데 외로이 달리는 자동차나 시골적인 풍경, 컨트리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로드무비의 클리셰를 따른다. 뉴욕 타임스의 기자 자넷 매슬린은 그녀의 평론에서 ‘이 영화는 원작자 칼리 코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적인 장면과 다른 요소들이 매우 놀랍다. 스콧 감독은 이전의 장엄하고 우울한 영화들과는 다르게 활기찬 코미디와 미국적인 요소를 사용해 시도하지 않았던 영화를 만들어냈다. 신선하고 활기찬 버디 영화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수잔 서랜던과 지나 데이비스의 기대하지 않았던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는 평을 남겼다. 로저 이버트는 이 영화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타이틀 시작 전의 장면을 지적했다. ‘하얗게 변하는 멈춰있는 장면은 좋지만 한편으로는 부적절한 망설임처럼 보인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이들의 범죄 행각을 직접적으로 합리화하기 보다는 이어지는 장면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름답고 흥미로운 반영웅들이라는 긍정적인 평이 있다. 반면, 강도와 살인, 음주운전을 미화하고, 남성을 지나치게 악인으로 규정한다는 측면, 또 성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다루면서도 에이즈나 콘돔에 관해 다루지 않는 점 등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영화는 1991년 칸느 영화제에서 상영 되었다. 이후, 싱어송라이터 토리 에이모스는 6년 전 자신이 강간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Me and a Gun이라는 곡을 만들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가수 피토 파에즈는 이 영화를 본 뒤 Dos dias en la vida(일생의 이틀)이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의 가사는 델마 역에 파비아나 칸틸로, 루이스 역에 셀레스테 카발로가 맡아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한다. 이 노래는 1992년 그가 발매한 El amor despues del amor 앨범에서 가장 성공적인 싱글 중 하나였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의 성격의 변화와 자유, 흥분 등을 의상이나 헤어를 통해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었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델마와 루이스가 서로 끌어안고 절벽으로 차를 모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으로, 많은 극찬과 만화, 비디오 게임, 뮤직 비디오 등의 패러디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 패러디들은 비극적인 결말 대신 다른 엔딩을 제시하기도 한다. 여성주의(여성주의) 델마와 루이스는 여성주의 영화의 대표적 작품인만큼 이와 관련된 반응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영화가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남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여성들의 복수라는 줄거리로 인해 주로 여성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한편, 이러한 내용을 담고있는 영화가 인기를 얻는 것에 반발하는 남성 관객들도 있었다. 특히, 개봉년도인 1991년에는 영화 속 여성들이 너무 폭력적이며, 남성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는 반응이 대다수 존재했다. 그러나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더불어, 델마와 루이스에 대한 평가 역시 단순히 여성 관객들의 만족과 선호에서 나아가 여성주의적 가치에 관련하여 다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B. 루비 리치는 ‘델마와 루이즈’는 “여성들의 경험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인정”이라 평했으며, 케네스 터랜은 이 영화를 신여성주의 로드무비라 칭했다. 또한 제시카 엔블드는 ‘델마와 루이스의 딸들’이라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 영화를 “남성 우월주의적인 기존 패턴을 향한 공격”이라 주장했고, 로드무비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기존의 남성과 여성의 정형화된 관계를 폭로해냈다고 하였다. 델마와 루이스에 대한 평론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레이나 립시츠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영화 가운데‘델마와 루이스’를 포함시키면서,“여성을 그린 위대한 영화 중 마지막 작품”이라 평했다. 하지만 그녀는 ‘델마와 루이스’ 이후로 여성을 주제로 한 영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한편 영화 평론가인 쉴라 벤슨은 2011년 LA 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델마와 루이스’는 여성주의적 가치보다는 폭력과 복수를 그려내고 있다며 이 영화를 여성주의 영화로 구분짓는 것에 반대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역시 델마와 루이스가 가진 여성주의적 영향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진 바 있다. 국내 개봉 당시 쓰여진 기사에서는, 비슷한 시기 개봉한 조이 럭 클럽이나 올란도 등의 여성주의 영화와 비견하여, "비록 흥행에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자아를 획득한 여성의 가치와 사회적 위치를 극적이면서도 설득력있게 제시, 여성들의 관심을 끌었다"며 "여성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전파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는 셈"이라 평하였다. 또한 김호기 교수는 "델마와 루이스는, 비록 20여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라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들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이 영화가 성평등적 관점에서 가진 의의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남성주의 입장 ‘델마와 루이스’에 대한 해석 중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남성주의적 입장도 존재한다. 남성주의적 입장은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남자 배우들이 무시당하는 것에 주목한다. 뉴욕 데일리 뉴스의 정기 기고가인 리처드 존슨은 “‘델마와 루이스’가 남성의 가치를 격하시키고 살인과 강도 그리고 의식 고취를 위한 만성적인 음주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델마와 루이스는 남성에게 속하는 물건이나 행위를 자연스럽게 잘 소화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남자 배우들은 여성적인 환경에 적응을 잘 못 하는 모습을 보인다. 델마와 루이스는 번갈아가면서 리더의 입장에 서는데, 그녀들을 제외한 남자 배우들은 누가 리더일 것인지 정하는데 오랜 시간을 투자한다. 또한, 남성주의적 입장은 통찰력이 강한 델마와 루이스에게 당하는 남성 배우들에 대한 영화적 묘사가, 시청자들이 자발적으로 남자 배우들을 무시하고 조롱하게 하는 틀로 이 영화가 제작되어 었다고 주장한다. 첫 장면에, 루이스는 자신에 남편 데릴에게 뭐 먹고 싶냐고 묻자 그는 바쁘다며 안 먹겠다고 답한다. 루이스는 데릴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며 남편에게 풍자적으로 답변한다. 이후에 데릴은 의자에서 떨어진다. 남성주의적 입장은 데릴의 초라한 모습을 보는 시청자들이 루이스에 편을 들수 밖에 없으며 함께 데릴을 비웃게 된다고 주장한다. ‘델마와 루이스'에서는 남자들이 무례하고 버릇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델마와 루이스가 클럽에 가는 장면에서 그녀들은 할런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는 델마와 루이스에게 무례하고 시시덕거리는 표현을 한다. 그러한 장면들은, 또한 시청자들이 남성들에 대한 안 좋은 평을 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델마와 루이스’는 “여자들은 옆에 남자가 있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의견에 반대한다. 끝 장면에 델마와 루이스는 남성으로 대표되는 경찰에게 체포되기 보단 죽음을 택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결정에 대해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또한 남성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이 영화가 남성을 필요없는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결말에 대한 해석 영화의 엔딩은 그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얼마 전 발표된 '할리우드 최고의 엔딩 20편'은 마지막 장면이 뛰어난 영화가 작품성 또한 높다는 사실을 입증해줬다. 이 중 가장 널리 회자되는 작품이 ‘델마와 루이스’다. 반복되는 일상의 삶을 털어버리고 훌쩍 차에 올라탄 후, 그들은 살인, 강도의 경험을 겪으며 결국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속 ‘델마와 루이스’는 그랜드 캐년의 절벽 끝에 차를 세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향해 미소를 뿌리는 두 사람. 허공에 뜬 차 안에서 손을 꼭 맞잡은 둘의 여행은 그렇게 끝난다. 맨 처음으로 자신들의 의지대로 선택한 자유다. 또한 영화의 엔딩은 정치권에서도 흔히 인용된다. 2년 전 갓 취임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의료보험개혁을 밀어붙이며 '델마와 루이스' 얘기를 꺼냈다. "지금 두 여성이 벼랑 끝으로 차를 몰고 가고 있다. 당장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영화는 자동차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을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멈춰선 그대로, 정지 상태로 끝난다. 가장 비극적일 수 있는 장면에 ‘멈춤’ 버튼을 눌러 비극을 아름다운 해피엔딩처럼 마무리 지은 것이다. 그 자동차는 포드의 1966년형 썬더버드다. 미국차답게 엄청나게 길고 커다란 오픈카로, 당시 미국의 아이콘이나 마찬가지였던 쉐보레 콜벳의 인기와 함께 만들어진 차량이었다. 리들리 스콧이 얘기하는 것처럼 ‘델마와 루이스’의 이야기는 사실 돌아갈 곳이 없는 이들이 결국 자신들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은 세상을 등지고 떠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당시 관객들도 그렇고 지금까지 이 영화를 기억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를 결코 비극으로 기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희망을 그린 작품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야말고 비극으로서 희망을 이야기한 진정한 로드 무비이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도 강한 인상을 남긴 마지막 장면은 마치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 콤비의 버디무비의 명작, ’내일을 향해 쏴라’의 부치와 선댄스의 마지막 장면과도 같은 깊은 여운을 남기면서, 이 비극을 비극아닌 희망으로 받아 들이도록 하는 영화적 경험을 가능케 했다. 수상내역 칼리 코우리는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리들리 스콧, 지나 데이비스, 수잔 서랜던, 영화 촬영 감독인 아드리안 비들, 편집자 톰 노블은 오스카시상식에서 후보로 올랐다. 보스톤영화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 지나 데이비스 전미 비평가 위원회 여우주연상 수잔 서랜던, 지나 데이비스 10대 영화상 델마와 루이스 골든 스파이크상 리들리 스콧 아카데미시상식 각본상 칼리 코우리 덴마크비평가상 비유럽권영화상 리들리 스콧 이탈리아영화아카데미상 외국여우주연상 지나 데이비스, 수잔 서랜던 골든글로브상 각본상 칼리 코우리 실버리본상 여성더빙상 로젤라 이조 (루이스 목소리) 런던비평가협회상 올해의 여자배우상 수잔 서랜던 올해의 감독상 리들리 스콧 올해의 영화상 델마와 루이스 전미비평가협회상 남우조연상 하비 케이틀 PEN Center USA 문학상 각본상 칼리 코우리 미국작가조합상 각본상 칼리 코우리 American Film Institute 리스트 AFI's 100주년...100대 영화 – 노미네이트 AFI's 100주년...100대 스릴영화 – #76 AFI's 100주년...100대 영웅과 악당: 델마 디킨슨 & 루이스 소여 – #24 영웅 AFI's 100주년...100대 환호 – #78 AFI's 100주년...100대 영화 (10주년 기념 에디션) – 노미네이트 참고할 만한 작품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 1967)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1969) 단 한번뿐인 삶 (You Only Live Once, 1937) 밀드레드 피어스 (Miㅣdred Pierce, 1945) 황무지 (Badlands, 1973) 컬러 퍼플 (The Color Purple, 1985) 바그다드 카페 (Bagdad Cafe, 1987)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 (Fried Green Tomatoes, 1991) 소년은 울지 않는다 (Boys Don't Cry, 1999) 각주 외부 링크 영어 영화 작품 1991년 영화 여성주의 영화 로드 무비 버디 영화 미국의 모험 영화 미국의 드라마 영화 리들리 스콧 감독 영화 한스 치머 영화 음악 아칸소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 애리조나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 오클라호마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 유타주에서 촬영한 영화 캘리포니아주에서 촬영한 영화 미국 국립영화등기부 등재 영화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 메트로-골드윈-메이어 영화 중년기 위기를 소재로 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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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C%ED%9A%8C%EB%B9%88%20%EA%B0%95%EC%94%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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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회빈 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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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1611년 4월 18일(음력 3월 6일) ~ 1646년 4월 30일(음력 3월 15일)) 또는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는 조선의 세자빈으로,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의 부인이다. 개요 소현세자의 부인으로,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청나라에서 8년간 인질 생활을 하였다. 귀국 후 인조의 냉대를 받았으며 소현세자가 급사하는 등의 아픔을 겪다가, 다음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아 폐서인 된 후 사사되었다. 세자빈의 어머니와 오빠, 남동생 모두가 옥사에 연루되어 처형되는 멸문의 화를 당하였다. 실록에서는 소현세자가 사망한 이후부터 세자빈 강씨를 '강빈(姜嬪)'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대에 이미 소현세자빈의 억울한 죽음을 많은 이들이 인식하였으나, 뒤를 이은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소현세자빈의 복권을 청하지 못하였다. 이후 신원될 때까지 '역적 강씨'라는 뜻인 '역강(逆姜)'으로 칭해졌다. 사후 72년만인 1718년(숙종 44년), 숙종이 소현세자빈과 그 일가의 죄를 신원하고 소현세자빈의 위호를 회복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추증하였다. 생애 탄생과 가계 1611년(광해군 3년) 4월 18일(음력 3월 6일), 아버지 강석기(姜碩期)와 어머니 신예옥(申禮玉)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금천이며, 귀주 대첩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장수 강감찬의 18대손이다. 모계로는 강빈의 어머니인 신예옥의 외할머니가 신수근의 손녀이며, 신수근은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외손자이므로 세종의 외8대손이기도 하다. 세자빈 책봉 1627년(인조 5년) 12월 4일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12월 27일 소현세자와 가례를 올렸다. 소현세자와의 사이에서 4남 5녀를 두었다. 병자호란과 볼모 생활 1636년(인조 14년) 12월 14일,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다음해인 1637년(인조 15년) 1월 26일, 강화도가 함락면서 청군에 붙잡혔고,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자 이후 강화조약에 따라 남편인 소현세자, 시동생인 봉림대군(효종)과 그의 부인인 풍안부부인 장씨(인선왕후)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 명나라가 멸망한 다음해인 1645년(인조 23년) 정월,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8년간의 인질 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볼모 생활이 길어지면서 인조와 소현세자 부부 사이에 오해와 불신이 생겼고, 인조의 냉대 속에 반목하게 된다. 여기에 인조의 후궁인 조소용(귀인 조씨)이 세자 부부와 인조의 사이를 이간질 하면서 더욱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1645년(인조 23년) 4월 26일,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인조는 장례를 앞당겨 입관을 서두르고, 세자에게 시침한 어의 이형익을 처벌하지 않았다. 또한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을 제치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강빈 옥사사건 1646년(인조 24년) 1월 3일, 인조의 식사 중 전복구이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인조는 강빈을 의심하여 강빈의 궁인들을 잡아 심문하였다. 이후 옥사는 확대되어 시녀와 궁인들이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불복하였다. 인조는 강빈을 미워하여 대신들의 주청을 물리치고 강하게 처벌할 뜻을 내비친다. 대신들과 세자인 봉림대군 또한 사건의 진상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성급히 처벌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주청했으나 인조는 단호하였고, 강빈을 옹호하는 대신들의 발언에는 노골적으로 화를 내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었다. 인조는 강빈을 '개새끼같은 것' 이라고 칭하였고 이후 마음을 바꿔 강빈을 폐출하여 사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대사헌 홍무적, 지평 조한영, 부제학 유백증 등이 강빈의 사사를 반대하였으며, 간원들 또한 강빈을 죽이는 것은 부당하며 폐출만 시킬 것을 건의하였으나 인조는 모든 의견을 묵살하고 강빈을 사사할 것을 전교하였다. 최후 1646년(인조 24년) 4월 30일(음력 3월 15일), 강빈은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인조는 강빈의 죽음 이후 자신의 손자이자 강빈의 세 아들 또한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1648년(인조 26년) 첫째 석철(경선군)은 장독으로 죽고, 둘째 석린(경완군)은 병으로 죽게 되며, 셋째 석견(경안군)만이 살아남아 효종 때에 귀양에서 벗어났다. 사후 강빈과 그녀의 아들들의 옥사는 김자점과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 일파의 정치공세성 성격이 짙었으므로 김집 등은 효종 때 경안군(강빈의 셋째 아들)의 석방을 탄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서인 산림 계열은 강빈이 억울하게 죽었다 여겼으며 김집, 송시열, 송준길은 소현세자와 강빈의 명예회복과 복권을 여러번 건의하였다. 이 때문에 남인으로부터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 한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효종은 심양에 볼모로 잡혀있을 당시 강씨의 행적을 언급하였고 강씨가 소현세자 사후에 낳은 아들을 죽였다고 말하며 강씨를 비난하였다. 효종은 추후 강씨의 죄를 신원해달라고 주청할 경우, 역당으로 논하여 강력하게 처벌할 것이라 경고하였다. 1654년(효종 5년) 황해감사 김홍욱은 강빈 옥사의 조작을 탄원하며 억울하게 죽은 강빈의 신원 회복과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석견(경안군)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김홍욱을 국문 끝에 장살로 죽였다. 복권 숙종 때 송시열이 다시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여 신원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김수항의 신원 상소로 복관되었다. 1718년(숙종 44년), 숙종이 소현세자빈과 그 일가의 죄를 신원하고 소현세자빈의 위호를 회복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추증하였다. 사후 72년만의 일이었다. 가족 관계 민회빈 강씨를 다룬 작품 드라마 《대명》 (KBS, 1981년, 배우:이문희) 《역사극장》 (EBS, 2005년, 배우:김예령) 《한국사 전》(KBS, 2007년, 배우:이선영) 《최강칠우》 (KBS, 2008년, 배우:양소민) 《추노》 (KBS, 2010년, 배우:김하윤) 《마의》 (MBC, 2012년, 배우:경수진)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 (JTBC, 2013년, 배우:송선미) 《삼총사》 (tvN, 2014년, 배우:서현진) 《화정》(MBC, 2015년, 배우:김희정) 《연인》(MBC, 2023년, 배우:전혜원) 영화 《올빼미》 (2022년, 배우:조윤서) 소설 《소현세자》 박안식, 창작과 비평사, 1996, 《강빈》 박정애, 예담, 2006, 《별궁의 노래》 김용상, 순, 2009, 《소현세자빈 강빈》 김혜경, 문학스케치, 2010, 《민회빈 강씨》 김용상, 멜론, 2011, 《소현세자 독살 사건》 이수광, 산호와진주, 2011, 《소현세자》 이정근, 책으로보는세상, 2009, 같이 보기 소현세자 인조 효종 경안군 병자호란 귀인 조씨 심양일기 관련 서적 박정애, 예담, 2006. 12. 07, 이덕일, 다산초당, 2005. 07. 08, 이수광, 다산초당, 2006.09.15 신동준, 살림, 2007.11.09 KBS한국사제작팀, 한겨레출판, 2008. 05. 26 ISBN 97888984312814 외부 링크 역대인물종합정보 시스템 - 민회빈 강씨 각주 주해 1611년 출생 1646년 사망 금천 강씨 조선 인조 조선의 왕세자빈 인질 병자호란 관련자 정묘호란 관련자 사사된 사람 사형 집행 후 무죄가 밝혀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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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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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81%EB%8D%95%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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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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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군(盈德郡)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동해안에 있는 군이다. 어업이 발달하여 특산물로 대게가 유명하다. 기타 복숭아, 송이, 물가자미, 황금은어 등의 특산물이 있고, 해수욕장으로 고래불, 장사, 대진해수욕장이 있으며, 유원지로는 달산 옥계계곡, 지품 오천솔밭 등이 있다. 주요관광지로 강구항, 삼사해상공원, 영덕어촌민속전시관, 영덕풍력발전단지, 영덕신재생에너지전시관, 신돌석장군유적지, 영해 괴시전통마을, 영덕향교 등이 있다. 군청 소재지는 영덕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8면이다. 역사 고구려 시대에는 우시군 (于尸郡)이었다. 고구려 장수왕 때에는 군 전체가 고구려에 속해 있었으나, 진흥왕 때 신라에 편입되었다. 신라 시대에는 야시홀, 야성 (野城), 유린군 (有隣郡)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시대에는 예주 (禮州)였다. 1310년 영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남부 남정면, 강구면, 영덕읍, 지품면, 달산면은 영덕현으로, 북부 축산면, 영해면, 병곡면, 창수면은 영해도호부로 현재의 군역이 둘로 갈라져 있었다. 1895년 6월 23일(음력 윤5월 1일) 안동부 영덕군·영해군 1896년 8월 4일 경상북도 영덕군·영해군 1914년 4월 1일 양군 병합 영덕군 (9면) 이 과정에서 산하의 면들이 대거 합병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영덕의 독음은 일본어로 에이토쿠(盈徳; えいとく)였다.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 95%;" | colspan=4 | 경상북도령 제2호 |- ! colspan=2 width="50%"| 구 행정구역 !! colspan=2 width="50%"| 신 행정구역 |- | rowspan=8 | 영덕군 || 동면(東面) 대탄동, 노물동/노내동, 기곡동/성황동/신리동/매령동/양정동, 삼계동, 예진동/돌면동, 오보동, 창포동, 태부동, 금진동/소하동, 하저동/임리동 || 오보면 || 대탄동, 노물동, 매정동, 삼계동, 석동, 오보동, 창포동, 태부동, 금진동, 하저동 |- | 서면(西面) 상대동/하대동/재궁동 일부/중평동 일부/(북면)식율동 일부, 상덕동/하덕동, 상입동/하입동/상오동 일부, 용천동/중평동 일부, 산하동/일이동/서점동, 주산동/봉동, 상마동/하마동/수구동/궁기동 일부/(청하군 죽북면)하옥리 일부, 중오동/하오동/상오동 일부, 주방동/상응동/중응동, 광산동/오봉동/궁기동 일부 || 달산면 || 대지동, 덕산동, 용전동, 용평동, 매일동, 봉산동, 옥산동, 인곡동, 주응동, 흥기동 |- | rowspan=2 | 북면(北面) 기사동/평지동, 눌곡동/양원동 일부/구룡동 일부, 신리동 일부/(진보군 동면)낙평동 일부, 상소동/하소동, 속곡동, 대덕동/구룡동 일부, 상묵동/외묵동, 수곡동/수내동/신리동 일부/(진보군 동면)낙평동 일부, 상주동/중주동/하주동/신성동, 신기동/식율동 일부/양원동 일부/(서면)재궁동 일부, 원전동/재곡동, 지품동/대동동, 황장동/토곡동, 용수동/관동/전여동, 상금동/중금동/하금동/오일동, 내류동/외류동 일부 || 지품면 || 기사동, 눌곡동, 낙평동, 도계동, 속곡동, 용덕동, 송천동, 수암동, 신안동, 신양동, 원전동, 지품동, 황장동 |- | rowspan=4 | 영덕면 || 삼화동, 오천동, 옥류동 |- | 읍내면(邑內面) 구미동, 비석동 일부/우곡동 일부/(중남면)둔리동 일부/지곡동, 상장동/하장동/남부동/상남동/중남동/하남동/서상동 일부/비석동 일부, 내곡동/외곡동/덕천동 일부/우곡동 일부, 우곡동 일부/비석동 일부, 천전동, 동상동/삼근동/서상동 일부, 덕천동 일부/(동면)미동/주등동 || 구미동, 남산동, 남석동, 덕곡동, 우곡동(右谷洞), 천전동, 화개동, 화수동 |- | 중남면(中南面) 구강동, 상금동/하금동/둔전리 일부/소월동 일부, 삼사동/피전동/호연동, 신기동/중직동/이동/상직동, 소월동 일부, 오포동/신강동, 장현동/외직동/하직동, 연화동/눌미동/장전동 || 강구동, 금호동, 삼사동, 상직동, 소월동, 오포동, 하직동, 화전동 |- | rowspan=2 | 외남면(外南面) 남정동, 남호동, 우곡동/원구동, 상화동/하화동/원동, 구계동, 도천동/덕성동, 봉전동/동동, 고부동/지경동, 비물동/사부동/신흥동 일부, 적암동/다사동, 양성동, 원척동, 장사동/두천동/오산동/신흥동 일부, 쟁암동, 상회동/하회동 || 남정동, 남호동, 우곡동(羽谷洞), 중화동 |- | 남정면 || 구계동, 도천동, 봉전동, 부경동, 부흥동, 사암동, 양성동, 원척동, 장사동, 쟁암동, 회동 |- | rowspan=9 | 영해군 || 남면(南面) 경정동/오매동/군유동 일부, 보기암/아삼동/(묘곡면)칠성동 일부, 동로동/대곡동/(묘곡면)조항산동 일부, 도천/하판동 일부, 부곡동/원포동 일부, 상판동/하판동 일부/원포동 일부, 양장동/축산동 일부/군유동 일부, 금천동/화계동, 고곡동/하판동 일부 || rowspan=2 | 축산면 || 경정동, 기암동, 대곡동, 도곡동, 부곡동, 상원동, 축산동, 화천동, 고곡동 |- | rowspan=2 | 묘곡면(畝谷面) 조항산동 일부, 칠성동 일부/화전동 일부, 대동/묘곡동 일부, 백일동/원상동 일부/묘곡동 일부, 옥금동/원중동/원하동/원상동 일부 || 조항동, 칠성동 |- | rowspan=3 | 영해면 || 대동, 묘곡동, 원구동 |- | 읍내면(邑內面) 반리진/사진/마흘진/건달동 일부/(남면)축산동 일부, 어대동/괴시동 일부/교동 일부, 공수진/대진/건달동 일부, 벌영동/갈물동/송계동 일부/(묘곡면)임두정, 성내동/노상동/노하동/노동동/지동/송계동 일부/교동 일부 || 사진동, 괴시동, 대진동, 벌영동, 성내동 |- | rowspan=2 | 북초면(北初面) 연평동/신기동/(읍내면)괴시동 일부, 월의동/각리 일부, 사천리/항리, 송상동/송하동 일부, 신평동/각리 일부, 이천동/(북이면)원황동 일부, 휘리/송하동 일부 || 연평동 |- | rowspan=2 | 병곡면 || 각리동, 사천동, 송천동, 신평동, 이천동, 휘리동 |- | 북이면(北二面) 거무역동 일부, 금곡동/지경동/백륙동 일부, 병륙동 일부/백륙동 일부/백진동 일부, 병진동/병륙동 일부, 삼읍동, 아곡동/보곡동 일부, 영상동/영하동/보곡동 일부/백륙동 일부/백진동 일부, 원황동 일부/거무역동 일부/(북초면)송하동 일부 || 거무역동, 금곡동, 백석동, 병곡동, 삼읍동, 아곡동, 영동, 원황동 |- | 오서면(烏西面) 미하동/미상동 일부/(서면)우상동 일부, 백청동, 보상동/보중동, 삼계동/운계동 일부, 수동/희암동, 봉정동/오촌/미상동 일부/운계동 일부, 인천동/보하동/(서면)일모소 일부 || rowspan=2 | 창수면 || 미곡동, 백청동, 보림동, 삼계동, 수동, 오촌동, 인천동 |- | 서면(西面) 가산동/우앙현/우상동 일부, 갈천동/일모소 일부, 신기동/우정동, 갈상동/신리, 인상동/인하동, 방가동/장구동/창수동 || 가산동, 갈천동, 신기동, 신리동, 인량동, 창수동 |} 1934년 4월 1일 영덕면과 오보면 간의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오보면 일부 동이 영덕면으로 이관되었고, 영덕면 일부 동과 (영덕면에 편입되지 않은)오보면 일부 동을 강구면으로 합면하였다.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 95%;" | colspan=2 | 도령 제83호 |- ! width="50%"| 구 행정구역 !! 신 행정구역 |- | 영덕면 우곡동(右谷洞), 덕곡동, 남석동, 화개동, 천전동, 구미동, 화수동, 남산동 || rowspan=2 | 영덕면 일원 |- | 오보면 석동, 오보동, 대탄동, 노물동, 매정동, 삼계동, 창포동, 대부동 |- | 영덕면 금호동, 소월동, 오포동, 하직동, 상직동, 화전동, 강구동, 삼사동 || rowspan=2 | 강구면 일원 |- | 오보면 하저동, 금진동 |- | 영덕면 삼화동, 오천동, 옥류동 || 달산면 일부 |- | 영덕면 남정동, 남호동, 우곡동(羽谷洞), 중화동 || 남정면 일부 |} 1950년 영덕-강구 전투, 영덕-포항 전투 등 여러 차례의 전투가 일어났고, 일시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점령당했다가 9월에 장사 상륙 작전이 실시되기도 했다. 인천 상륙 작전 성공 이후 인민군이 패주하면서 대한민국이 수복하였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영덕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8면) 1983년 2월 15일 영일군 죽장면 하옥리 일부를 달산면에 편입하였다. 1988년 12월 31일 지품면 오천리 일부를 분할, 신애리를 신설하였다. 1990년 1월 3일 행정구역 명칭개정에 따라 강구면 하직리를 원직리로, 병곡면 휘리를 덕천리로 개정 1990년 6월 29일 축산면 화천리가 영덕읍으로 편입되었다. 지리 경상북도 동북부에 위치하여 영남지방에 속하고 포항시와 울진군, 영양군, 청송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태백산맥이 동남쪽으로 뻗어내리고, 칠보산과 팔각산이 형성되어 있으며, 병곡 영해평야를 이루고 향토의 젖줄인 오십천이 흐르고 있다. 기후 대체적으로 온후한 편이며, 여름 최고온도는 섭씨 38도이며, 겨울 최저온도는 영하 13.8도이다. 봄철은 동남풍, 겨울철은 서북풍이 심하게 불며 가을이 길고 봄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행정 구역 영덕군의 행정 구역은 1읍 8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덕군의 면적은 741.06km2이다. 인구는 2020년 12월 기준 20,153세대 36,313명이고, 그 중 30.4%가 영덕읍에 거주한다. 남성 17,197명, 여성 19,116명이다. 1960년대까지는 119,498명이었으나 이후 인구가 감소하였다. 인구 영덕군(에 해당하는 지역)의 연도별 인구 추이 문화·관광 고래불해수욕장 대진해수욕장 장사해수욕장 남호해수욕장 하저리해수욕장 오보해수욕장 경정해수욕장 삼사해상공원 해맞이공원 풍력발전단지 괴시리전통마을 장육사 유금사 강구항 축산항 특산품 영덕대게 교통 도로 교통 서산영덕고속도로가 있으며 2009년 12월 18일에 연장선인 (낙동 분기점 ~ 영덕 나들목)이 착공하여 2016년 12월에 개통되었다. 추후 동해고속도로와 직결 될 예정이다. 남북으로 국도 제7호선과 동서로 국도 제34호선이 관통한다. 예전에는 국도 제7호선이 확장되지 않아 피서철에는 상습 지정체 구간이었으나, 확장 공사가 이루어져 교통 상황이 나아졌다. 시외버스편을 이용할 때에는 인근의 안동시나 포항시를 찾는 것이 편리하다. 서산영덕고속도로로 서해까지 갈수있다. 철도 교통 2018년 1월 26일에 동해선이 영덕까지 개통되어 장사역, 강구역, 영덕역에서 기차를 탈 수 있게 되어 부산이나 대구, 서울로의 접근이 더욱 편해진다. 2020년경 동해선이 삼척역까지 연장되면 영해역과 병곡역쪽윽 영덕군 북부 지역에서도 철도 이용이 용이해질 전망이다. 현재 영덕군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영덕역이다. 김천역에서 영덕역을 잇는 경북내륙선이 검토 중에 있다. 도로명 ㄱㄴㄷㄹㅁㅂㅅ 강산로 - 강영로 - 경동로 - 고래불로 - 군지경로 - 대동로 - 동해대로 - 산정로 - 석보로 ㅇㅈㅊㅋㅌㅍㅎ 영덕대게로 - 영덕로 - 영양창수로 - 영축로 - 오서로 - 온정로 - 주왕산로 - 죽장로 - 지영로 - 창수영해로 - 축산로 - 팔각산로 - 흰돌로 교육 기관 의료 영덕군에는 병원이 있으나 종합병원은 영해면에 한 곳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분만실이 없어 출산은 안동시나 포항시에서 하는 실정이다. 정치 적은 인구로 인해 국회의원 선거구는 봉화군, 영양군, 울진군과 공유하는 상황이고, 과거에는 청송군과 선거구를 공유한 적이 있었다. 출신인물 성씨 다음의 성씨들이 현재의 영덕군 지역을 관향으로 하고 있다. 영덕 김씨 (盈德金氏) 영해 김씨 영해 박씨 영해 이씨 영덕 정씨 자매 도시 서울특별시 송파구 전라남도 해남군 전라남도 여수시 대구광역시 동구 후쿠이현 에치젠정 북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각주 외부 링크 영덕군청 (공식) 경상북도의 군 1895년 설치 1914년 폐지 1914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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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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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B%B6%80%EB%A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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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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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로는 일본의 이름이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에 나오는 호죠 무츠미의 다른 이름이 사부로이다. 오무라 사부로는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이며, 현재 지바 롯데 마린스 소속 외야수이다. 야쓰데 사부로는 도에이 애니메이션이 제작하는 슈퍼전대 시리즈 등 특수촬영 드라마 작품의 원작자로써 사용되는 텔레비전 프로듀서진의 공동 필명이다. 기타지마 사부로는 일본의 가수이자 배우, 탤런트이다. 구루스 사부로는 일본의 외교관이다. 모로이 사부로는 일본의 작곡가이다. 야마다 사부로는 일본의 국제사법학자이다. 사카이 사부로는 일본 해군 소속 전투기 파일럿이었다. 오키타 사부로는 일본의 경제학자이자 정부 관료이다. 이에나가 사부로는 일본의 역사학자로 역사교과서 논란으로 유명하다. 햐쿠타케 사부로는 일본의 해군 대장이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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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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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8%EC%9B%94%2025%EC%9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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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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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37번째(윤년일 경우 238번째) 날에 해당한다. 사건 127년 - 일식 발생. 608년 - 교황 보니파시오 4세, 67대 로마 교황으로 취임. 1919년 - 이승만, 미국 워싱턴 D.C.에 임시정부 구미위원회 설립. 1936년 - 일장기 말소 사건: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채 보도하다. 1948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총선거 실시. 1958년 - 안도 모모후쿠가 처음으로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되었다. 1965년 - 대한민국 정부, 한일협정 반대 시위 확산되는 고려대학교에 무장군인 투입. 1979년 - 태풍 주디호, 대한민국의 남부 지방을 강타해 130여 명 사망·실종. 1991년 - 리누스 토르발스가 유즈넷 뉴스그룹에 새로운 자유 운영 체제를 만들고 있다고 공개되었다. 1992년 - 대한민국, 노태우 대통령, 민주자유당 총재직 사퇴. 2003년 - 대한민국 정부, 신용불량자 81만 명 구제 대책 발표. 문화 1923년 - 경성전기, 안국동 선 전차 운전 개시되었다. 1960년 - 제17회 로마 올림픽이 개막되었다. 1972년 - 대한민국, 경복궁 내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1977년 - 대한민국, 금산 제 2위성통신 지구국 완공되었다. 1986년 대한민국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시로 이전 개관. 대한민국, 영광 원자력 1호기 준공. 1989년 - 보이저 2호가 해왕성을 접근 통과함. 최초로 해왕성의 근접 촬영에 성공. 1999년 - 대한민국 정보통신부, 국내 이동전화 가입자 2천만 명(국민 2.3명당 1대꼴) 돌파발표. 2009년 - 대한민국 고흥군 나로우주센터에서 우주발사체 나로호가 발사되었다. 탄생 1530년 - 러시아의 이반 4세. (~1584년) 1841년 - 스위스의 의사, 노벨 의학상 수상자 에밀 테오도어 코허. (~1917년) 1912년 - 독일 민주 공화국의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 (~1944년) 1918년 - 미국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1990년) 1924년 - 일본의 영화감독 마스무라 야스조. (~1986년) 1928년 - 대한민국의 희극인 서영춘. (~1986년) 1930년 - 스코틀랜드의 영화배우 숀 코너리. (~2020년) 1933년 - 미국의 연주가, 작곡가 웨인 쇼터. (~2023년) 1938년 - 영국의 소설가 프레더릭 포사이스. 1940년 - 대한민국의 변호사 이재후. 1943년 - 대한민국의 만화가 윤승운. 1949년 - 영국의 작가 마틴 에이미스. (~2023년) 1951년 - 영국의 헤비 메탈 가수 롭 할포드. 1958년 - 미국의 영화감독 팀 버튼. 1962년 - 대한민국의 배우 손병호. 1963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이상우. 1966년 - 잉글랜드의 배우 트레이시앤 오버먼. 1967년 - 일본의 성우 히야마 노부유키. 1968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신동진. 1970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전 축구 선수 하오하이둥. 독일의 모델 겸 배우 클라우디아 시퍼. 1972년 - 영국의 영화감독 조 라이트. 1973년 - 독일의 영화감독 파티흐 아킨. 1974년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강혁. 대한민국의 기타리스트 이상순. 1976년 - 스웨덴의 배우 알렉산데르 스카르스고르드. 1977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윤정. 1981년 미국의 배우 레이철 빌슨. 일본의 성우 아베 아츠시.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구은경. 1982년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 선수 정재성. (~2018년) 1983년 대한민국의 방송인, 전 아나운서 김석류. 일본의 가수 오호리 메구미. 잉글랜드의 스쿼시 선수 제임스 윌스트롭. 1984년 대한민국의 가수 아유미. 대한민국의 성우 여윤미. 1985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창민 (NC 다이노스). 1986년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출신 방송인 이겨레. 1987년 미국의 배우 블레이크 라이블리. 중국의 배우 유역비. 대한민국의 방송인 윤지오. 1988년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정민. 대한민국의 가수 황광희 (제국의 아이들). 1992년 일본의 가수 나츠야키 미야비 (Berryz코보). 스페인의 축구 선수 보르하 바스톤. 스위스의 축구 선수 리카르도 로드리게스. 독일의 루지 선수 아일린 프리슈. 1994년 - 대한민국의 가수 연경 (더 씨야). 1995년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배우 옹성우 (워너원). 대한민국의 가수 윤도운 (데이식스). 1996년 대한민국의 가수 배유진 (걸카인드). 대한민국의 가수 최석원 (싸이퍼). 대한민국의 배우 백서후.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장윤호 (K리그, 전북 현대 모터스).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홍예지 (WK리그, 현대제철 레드엔젤스). 대한민국의 정치인 박성민. 일본의 아이돌 시부야 나기사. 1997년 대한민국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허만흥. 대한민국의 유튜버 변승주. 대한민국의 배우 최지수. 1998년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연지은 2001년 - 대한민국의 가수 JEROME (TO1). 2002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환희. 사망 1227년 - 몽골의 정복자 칭기즈 칸. (1162년~) 1776년 -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 (1711년~) 1819년 - 영국의 발명가 제임스 와트. (1736년~) 1822년 - 독일 출신의 영국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 (1738년~) 1867년 - 영국의 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 (1791년~) 1900년 -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1844년~) 1908년 -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투안 앙리 베크렐. (1852년~) 1925년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장군 콘라트 폰 횟첸도르프. (1852년~) 1985년 - 미국의 평화 운동가 서맨사 스미스. (1972년~) 2011년 - 대한민국의 배우 한채원. (1985년~) 2012년 - 미국의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 (1930년~) 2013년 대한민국의 정치인 고희선. (1949년~) 대한민국의 희극인 오성우. (1966년~) 2015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상순. (1937년~) 2017년 - 대한민국의 군인 오자복. (1930년~) 2018년 - 미국의 정치인 존 매케인. (1936년~) 2018년 - 잉글랜드의 무용가 린제이 켐프. (1938년~) 2018년 - 일본의 성우 아소 미요코. (1926년~) 기념일 광복절: 프랑스 파리 군인의 날(Soldier's Day): 브라질 선군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같이 보기 전날: 8월 24일 다음날: 8월 26일 - 전달: 7월 25일 다음달: 9월 25일 음력: 8월 25일 모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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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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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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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E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계산과학공학(Computational Science and Engineering) 컴퓨터 과학&컴퓨터 공학(Computer Science & Engineering) 특수교육 위원회 Customized Search Engine(맞춤 검색 엔진)의 약자로 구글이 하고 있는 주요 서비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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