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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월봉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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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월봉고등학교(天安月峰高等學校)는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불당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2003년 3월 6일 : 제1회 입학식(486명) 2004년 1월 2일 : 천안시 불당동 소재 신축교사로 학교 이전 2004년 3월 26일 : 개교식 2006년 2월 10일 : 제1회 졸업식(482명) 2018년 2월 9일 : 제13회 졸업식(454명, 총졸업생 5,978명) 2020년 3월 1일 : 제7대 김진묵 교장 부임 2021년 2월 5일 : 제16회 졸업식(373명) 2021년 3월 2일 : 제19회 입학식(387명) 2022년 1월 5일 : 제17회 졸업식(376명) 2022년 3월 2일 : 제20회 입학식(432명) 2023년 9월 1일 : 제8대 박근수 교장 부임 학교 동문 참고 자료 각주 외부 링크 천안월봉고등학교 홈페이지 충청남도의 공립 고등학교 천안시의 고등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남녀공학 고등학교 2003년 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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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E%98%EC%96%B4%ED%95%84%EB%93%9C%20%EC%A0%84%ED%88%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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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필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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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필드 전투()는 미국 남북 전쟁 당시 게티즈버그 전역 중에 벌어진 전투다. 이 전투는 게티스버그 전투와 거의 동시에 펜실베이니아주 페어필드에서 7월 3일 벌어졌지만, 게티스버그 전투에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이 전투는 중대급 규모의 소규모 전투였지만 전략적인 관점에서는 이 전투의 승리로 남군은 중요한 하게스타운 도로를 확보했고, 7월 5일 로버트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이 도로를 이용하여 메릴랜드를 거쳐 버지니아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북버지니아군 기병대의 대다수는 젭 스튜어트를 따라 메릴랜드와 펜실베이니아 남부 및 중부를 거쳐 북군 포토맥군 주변에서 작전 중이었다. 리는 셰넌도어 계곡과 컴버랜드 계곡을 이용하여 진격하면서 산악 통로를 지키기 위해 몇 개 여단을 배치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북군의 위치를 찾게 했다. 후방에 배치된 여단 중에 터너 애쉬비 가 지휘했고 지금은 윌리엄 E. "그럼블" 존스가 지휘하는 로렐 여단이 있었다. 존스는 주벌 얼리의 보병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휘하 부대 중 최정예인 버지니아 기병대의 35대대를 파견했지만, 부대 규모는 큰 차이없었다. 본래 존스 여단은 리의 호출을 받기 전에 메릴랜드와 웨스트버지니아에서 볼티모어 & 오하이오 철도를 기습 공격하고 있었다. 도하지점의 여울을 지키기 위해 남겨진 12 버지니아 연대를 제외한 나머지 존스 여단은 7월 1일에 포토맥 강을 건너 펜실베이니아로 이동하여, 다음 날 밤, 펜실베이니아 챔버스버그에 도착하여 야영했다. 존스의 병력은 6, 7, 11 버지니아 기병대와 프레스턴 츄의 기마포병대로 축소되었다. 존스가 하게스타운 도로를 지키라는 리의 명령에 따라 페어필드에 도착한 것은 7월 3일이었다. 한편, 새로 취임한 웨슬리 메리트 준장은 부근에서 천천히 이동하는 남군 보급마차 대열에 관한 보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북군 6 기병대 사무엘 H. 스타 소령에게 페어필드와 보급마차 대열의 위치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페어필드에서 스타 소령은 보급마차대열이 막 마을을 벗어나 캐쉬타운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스타 소령은 휘하 400명의 병력을 3개로 나누어 보급마차를 찾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한 부대가 존스의 7기병대 소속 전초부대와 충돌했고, 남군의 증원부대가 달려오자 철수했다. 적 출현에 대한 정보에, 스타는 작은 산등성이로 달려가 부하들을 말에서 내리게 한 후 도로 양옆의 과수원과 들판에 배치했다. 남군 7 기병대가 이 북군 부대를 향해 돌격을 시작했다. 스타 소령의 부대가 남군의 첫 번째 돌격을 저지하는 동안, 츄의 기마 포병대가 포격 준비를 마쳤고, 남군 기병대가 일단 물러나자, 북군 기병들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6 버지니아 기병대의 지원을 받은 7 기병대가 다시 돌격하여 스타 소령의 부대를 능선에서 몰아내고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존스는 후퇴하는 북군을 쫓아 페어필드 갭으로 4.8km(3마일)을 추격했지만, 섬멸하는데는 실패했다. 북군은 전사자 6명, 부상자 28명을 냈고, 남군 7 버지니아 기병대의 손실은 8명 전사, 21명 부상, 실종 5명이었다. 존스는 페어필드 근처에 숙영지를 설치하고 리의 후퇴에 대비해 도로를 지켰으며, 7월 5일, 비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 페어필드 갭으로 후퇴하는 북버지니아군의 후방을 엄호했다. 북군 6 기병연대 H중대에서 복무하고 있던 아일랜드계 이민인 조지 C. 플래트(George C. Platt)은 1895년 7월 12일 이 전투에서 공으로 의회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받았다. 서훈장에는, "연대 기수가 전사하자 연대기를 낚아채어 적에게 군기가 뺏기지 않도록 했다"고 되어 있다. 참고 문헌 Wittenberg, Eric J., ""Gettysburg's Forgotten Cavalry Actions." Gettysburg, Pennsylvania: Thomas Publications, 1998. . Platt MOH webpage 각주 게티즈버그 전역 186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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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B%A9%B4%EC%A0%84%EC%B0%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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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면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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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면전차(路面電車), 시가전차(市街電車), 또는 트램()은 교통수단의 하나로, 주로 도로상에 부설된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전동차를 일컫는다. 개요 유럽의 전차 독일,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세계 약 50개국의 약 400도시에 존재한다. 도시 내 및 그 근교에서 여객의 이동 수단으로서 이용되고 있는 것이 많다. 현재의 일본에서는 약 20개소에서 노면 전차가 존재하고 있다. 노선은 일반적으로 노면을 주행하지만, 교외에서는 별개의 전용 궤도를 마련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시가지에 있어도 지하화 혹은 고가화로 도로와의 분리를 도모한 구간도 많지만 20세기말 이후는 반대로 노면으로부터 승강할 수 있는 것이 평가되어 유럽을 중심으로 보급되어 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한국에서는 경성전차가 1899년 5월 20일에 서울 서대문-청량리 구간에 처음 개통된 뒤 사대문 안을 중심으로 연결되었고, 부산에도 건설되었다. 경성전차는 1910년 이후 용산, 원효로, 왕십리, 영천, 노량진 등 외곽지대로 확장되었으며 1941년에는 창경원-돈암동 네거리까지 연장되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급속화한 산업화와 도시화, 현대시대의 정착으로 익숙하지 않게 된 근대화, 일본에 의해 폐지된 전국체전 부활 등 경제성장으로 인한 박정희가 만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자동차를 필두로 한 교통량의 증가로 1968년 버스가 등장해 모두 폐기되어, 노면전차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성남시, 위례신도시, 수원시, 대전광역시에서 노면전차가 부활할 예정이다. 북한에서는 일제강점기 초반 평양에평양 궤도전차( 건설되었다. 이후 폐지되었다가, 1991년에 부활되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주요 교통수단 중의 하나이다. 청진의 경우, 1999년도부터 노면 전차가 운행되고 있다. 대체교통수단 검토 최근에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는 지하철의 대체 교통수단으로 검토되고 있다. 노면전차는 경량전철(輕量電鐵·경전철)의 여러 종류 중 하나로 경전철은 중량전철인 지하철과 구분된다. 지하철보다 건설비가 적게 들고 공사 기간이 짧지만, 수송량은 지하철보다 소량이며, 버스보다는 많다. 한 칸에서 여섯 칸까지 만든다. 속도는 35∼40km/h이다. 역사 전차발명 전차는 마차철도의 동력인 마력을 대체할 에너지를 생각함으로써 개발되었다. 1879년에 독일의 전기 회사인 지멘스가 베를린 박람회에서의 시험주행을 시작으로, 1881년에는 베를린 교외에서의 운행이 개시되었다. 그 후 1887년에 미국에서 현재와 같은 방식의 노면 전차가 개발되어 사람들의 신뢰를 받으며 보급되었다. 유럽 전기 궤도(노면 전차)는 먼저 미국의 각 도시에서 보급되어 유럽 각국으로 뻗어나갔으나 1920년대 미국에서는 자가용이 보급되어 많은 도시에서 폐지되어 간다. 유럽의 일부에서 즉 런던, 파리 등의 도시에서 폐지되었다. 구 소련과 서독 한편, 구 소련과 서독 등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노면 전차를 활용했다. 서독에서 소규모 노면 전차는 폐지되었지만, 인구 20만 이상의 도시에서는 환승전철의 투입, 신용카드를 이용한 운임 납부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노선망의 폐지 및 신설도 빈번히 이루어졌고, 교외로의 노선 연장을 추진할 뿐 아니라 중심지의 노선의 지하화 등도 이루어졌다. 이 중 일부는 1960년대 후반 이후 전용 궤도화 등 노선의 고규격화를 추진해 속도의 향상이나 정시성 확보를 실시했다. 프랑크푸르트 U-반이나 쾰른, 슈투트가르트 등에 대표되는 이 방식은 슈타트반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변화는 미국에 영향을 주었다. 1970년대에 들어 미 연방대중교통국에 의해서 '라이트 레일'의 정의가 내려진다. 그 내용은 '대부분을 전용 궤도로 주행하고, 부분적으로 도로상(병용 궤도)을 1량 또는 수 량의 열차가 전기에 의해서 구동되는, 누구라도 용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 시스템'이다. 즉 본래 '라이트 레일(LRT)이란 시스템이며, 또 노면을 주행하는 전철인 필요성은 부족한 점에 주의를 필요로 한다. 이것에 수반해 미국 및 (캐나다)에서 라이트 레일이 정비되어 가게 되지만, 안에는 전용 궤도뿐인 노선도 있다. 전반적으로 고속 철도 지향이 강하다. 1980년대가 되면, 프랑스에서 도시내에서의 궤도 시스템 정비의 움직임이 강해져 온다. 프랑스에서는 슈타트반~라이트 레일이 아닌, 병용 궤도율의 비싼 노면 전차를 채용했다. 이것은 후에 다른 유럽에도 퍼져 가지만, 이 것들도 일부에서는 라이트 레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라이트 레일'이라는 용어는 미국과 유럽 사이의 뜻과 용례가 서로 다르다. 유럽과 미국에서 이러한 궤도계 교통이 주목받는 배경 중 하나는 시가 중심지에의 사람의 흐름을 확보해 진흥하는 수단으로서 또 환경 파괴를 막는 면에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정비는 토지 이용이나 인구 분포등의 점으로 도시 정책에 제대로 짜넣어지고 있는 것이 상이다. 또, 자가용차를 교외의 주차장에 두어 노면 전차나 버스 등에 갈아 타중심 시가지에 들어가는 파크 앤드 라이드 방식이나, 중심 시가에서 자동차의 노선연장을 금지해 공공 교통과 보행자만을 통행 가능하게 하는 아이디어가 태어나 실행되었다. 차량면에서는 고상 홈이 적은 유럽에서는 1980년대 후반보다 높이를 20~30cm정도로 낮춘 초저상 전철의 개발이 진행되어 바리어 프리화가 촉진되었다. 노면전차는 전기(電氣)로써 움직이는 전기 철도의 일종이기 때문에 대기오염이 없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버스에 비해 속력이 느려 교통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단점으로 있다. 또 전기를 배송하기 위한 전선을 설비해야 한다. 한편, 레일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타이어가 있는 바퀴를 쓰는 무궤도전차도 있다(보통의 전차는 궤도전차로 불린다.). 한국의 노면전차 서울과 평양, 그리고 부산에서 노면 전차가 운행된 적이 있다. 1882년 미국과 수교를 한 후 1898년에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었고, 1899년 석가탄신일에 서대문과 동대문 간의 전차를 개통하였다. 미국인 콜브란은 교토 전철의 설계자인 마키 헤이이치로에게 전차부설의 책임을 맡겼고 그는 오하타 코우노스케와 이시쿠마 노부노유 등을 동반하여 1898년 10월 서울에 들어와 설계와 공사를 시행하였다. 발전소는 동대문 문루 아래에 건설을 하였고, 서대문에서 홍릉까지 단선의 궤도가 부설되었다. 전차는 정원 40인의 일반차 8대와 귀빈용차 1대였다. 그러나, 개통식 후 전차가 어린아이를 치여 죽이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격분한 군중들이 전차를 불태워버렸다. 이 일때문에 전차는 몇달간 운행을 중지하게 되었다. 개통된 전차는 일본의 교토보다 4년이 늦었지만 도쿄보다 3년이 빨랐다. 당시 동경은 비교적 속도가 빠르고 유지비용이 적은 마차철도가 사용되고 있었다. 태국의 수도 방콕도 역시 1894년 철도마차를 대신하여 전기식 전차를 개통하였다. 심훈 작가가 쓴 《상록수》에서 박동혁과 채영신이 언론사 농촌활동가 대회에서 만나 학교 기숙사에 돌아가는 장면에 전차가 나오는 것을 보면, 서민들이 타고다니는 교통수단으로 널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예산이 들어가는 중량지하철을 대신하는 대중교통수단으로 도입이 건설/검토되고 있다. 위례신도시에서는 2017년부터 노면전차의 일종인 트램이 운행할 예정이며, 한국교통연구원은 경상남도의 의뢰로 용역을 수행한 결과 창원 도시철도의 최적 차량시스템으로 '노면전차'를 꼽았다. 법률 이하는 대한민국 법률에서의 노면전차에 대한 설명이다. 궤도운송법 궤도운송법에서는 노면전차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도시철도법 도시철도법에서는 노면전차를 도시철도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노면전차의 건설·운전 및 전용로의 설치 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같이 보기 서울 전차 부산 전차 라이트 레일(LRT) 무가선트램 신교통 시스템 바이모달트램 간선급행버스체계(BRT) 경전철 대한민국의 노면전차 적용 예정 노선 서울특별시 위례선 경기도 수원시 수원 1호선 경기도 성남시 판교 랜드마크 트램 경기도 화성시 동탄 1호선 경기도 화성시 동탄 2호선 부산광역시 오륙도선 부산광역시 강서선 부산광역시 정관선 부산광역시 씨베이-파크선 대전광역시 대전 2호선 각주 탈것 궤도 교통 독일의 발명품 러시아의 발명품 경전철 도로 위험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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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1%B4%EB%9F%AD%20%EB%93%9C%EB%A6%AC%ED%94%84%ED%8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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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럭 드리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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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럭 드리프트(clock drift)는 클럭이 정확한 속도로 동작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클럭을 발생시키는 오실레이터가 온도나 압력 등의 변화에 의해 미세하게 영향을 받음으로써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현상은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기대되는 동작 속도보다 빠르거나 느리게 된다. 만약, 기대되는 동작 속도보다 미세하게 빠르게 영향을 미치면, 기준 클럭보다 앞서게 된다. 반면, 기대되는 동작 속도보다 미세하게 느리게 영향을 미치면, 기준 클럭보다 뒤처지게 된다. 클럭 드리프트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원래의 기준 시각과의 편차는 커지는 현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마치 기준 클럭을 중심으로 떠다니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클럭 드리프트라고 하는 것이다. GPS 시계 암호 공격 난수 발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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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So%20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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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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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Hot(쏘 핫,소 핫)〉은 원더걸스의 두 번째 싱글 음반이다. 2008년 5월 22일 타이틀곡 〈So Hot〉의 음원과 뮤직비디오가 온라인으로 먼저 공개되었으며, 정식 앨범 발매는 6월 3일 이루어졌다. 활동하는 세 번째 음반이라는 뜻에서 ‘The 3rd Project’라는 부제가 붙었다. 새 곡 공개를 앞두고 하루에 한 장씩 멤버들의 콘셉트 사진을 공개하며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곡 공개 전날 미국의 음반 사이트에서 음원이 유출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세련된 모습을 전체적인 앨범의 콘셉트로 잡아 멤버 각자의 개성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정규 앨범에는 샘플링 허가가 지연되어 유빈의 랩 부분이 없었는데, 이번 음반에서는 선예의 제안으로 랩 버전이 포함되었다. 음반 재킷 사진은 조선희 작가가 맡았다. 배경 및 발매 2008년 5월 5일 원더걸스의 멤버 예은은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에 "Second ground"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앨범을 준비 중이라고 알렸다. 원더걸스의 한 측근은 "전혀 새로운 사운드와 더욱 중독성 있는 안무로 무장된 신곡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JYP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6월 초 첫 방송을 잡아놨다며 박진영이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녹음 마무리 작업, 뮤직비디오 작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고 알렸다. 2008년 5월 23일 박진영은 《섹션TV 연예통신》와의 인터뷰에서 "원더걸스의 이번 앨범 컨셉은 업그레이드다. 춤, 음악, 패션 모두 지난번보다 한 단계 완성도가 높게 했다"며 이어 〈So Hot〉의 안무를 10번 이상 바꿨다고 말했다. 2008년 5월 16일 JYP 엔터테인먼트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레오파드 원피스와 붉은색 스타킹을 입은 예은의 사진을 공개했다. JYP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현재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다. 원더걸스의 신곡과 새로운 컨셉트는 〈Tell Me〉의 파급력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5월 18일에는 선예의 티저 사진을 공개했는데, 데뷔 이후 처음으로 단발 머리를 시도했다. 이후 19일에는 유빈, 20일에는 선미, 21일에는 소희의 티저 사진을 순차적으로 공개했다. 공개된 티저 사진에는 예은은 세련, 선예는 보이시, 소희는 큐티, 선미는 걸리시, 유빈은 섹시와 같은 개별 컨셉이 있었다. 티저 사진과 함께 자켓 사진은 사진작가 조선희가 맡았다. 5월 21일에는 인터넷에 원더걸스의 새 노래 제목은 〈봉봉〉이라는 소문이 퍼졌으나, 소속사측은 사실이 아니며 22일 공개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같은 날, 미국 음반 사이트에서 음원과 함께 수록곡 〈This Time〉, 〈You're Out〉, 〈Tell Me (Rap Ver.)〉의 제목이 유출되었다. 5월 22일 커버 사진과 함께 뮤직비디오, 음원을 공개했다. 6월 3일에는 오프라인에서 CD 형태로 발매되었다. 구성 타이틀곡 〈So Hot〉은 80년대 복고풍 악기와 현대적인 악기가 어우러진 멜로디와, 자신의 예쁜 미모와 인기가 피곤하다는 ‘21세기형 공주병’을 표방한 내용의 가사가 어우러진 댄스곡이다. 의상 콘셉트는 호피무늬로, 앨범에 포함된 화보는 물론 모든 방송 무대에서 호피무늬 의상을 착용했다. 장재혁 감독이 제작한 뮤직비디오는 ‘코믹 섹시’를 콘셉트로, 가사 내용처럼 인기가 많지만, 공주병이 서투른 멤버들의 모습을 담아내었다. 안무는 도입부의 일명 ‘V 라인 춤’과 후렴구의 ‘기지개 춤’ 등이 특징적이다. MBC 《무한도전》 2008년 7월 5일자 방송에서 김신영이, MBC 《코끼리》 7월 19일자 방송에서는 이현지가, KBS 《개그콘서트》 8월 3일자 방송에서는 신봉선이 이를 따라하여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동영상 제공 웹사이트 유튜브에는 뮤직비디오가 대한민국 내 영상으로는 이례적으로 조회수 100만을 넘기기도 했다. 태국 MTV 인터내셔널 차트에서는 3주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 다이나믹 듀오의 4집 음반 《Last Days》의 〈해변의 Girl〉에는 〈So Hot〉의 일부분이 샘플링되었다. 동영상 제공 웹사이트 네이버 비디오에서는 이 곡을 두고 ‘내가 만든 So Hot 뮤직비디오’라는 이벤트를 개최하였는데, 300여개가 넘는 사용자들의 리믹스 혹은 랩 버전 참가 동영상이 등록되었다. 이 이벤트의 최종 수상자는 1위부터 5위까지 5명으로 박진영이 직접 선정하였다. 이와 겸하여 박진영의 〈So Hot〉의 제작 과정을 설명하는 동영상이 공개되었는데, 이 또한 화제가 되어 패러디 영상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So Hot》 음반에 포함된 〈So Hot〉과 〈This time〉의 뮤직비디오에 같은 JYP 엔터테인먼트의 소속 가수인 2PM의 데뷔가 예고되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So Hot〉뮤직비디오의 1분 25초경 시계가 ‘PM:02’였었다는 점과 2분 30초부터 유빈이 0점과 10점 푯말을 들고 있다는 것도 2PM의 데뷔곡인 〈10점 만점의 10점〉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또 〈This Time〉뮤직비디오 21초경에도 2PM의 데뷔일인 9월 4일에 달력이 펼쳐져 있었다. 〈This Time〉은 잔잔한 발라드곡으로, 실연의 아픔을 겪은 여성이 조심스레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는 내용의 가사를 담고 있다. 본격적인 홍보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각 방송사의 컴백 무대에서 타이틀곡과 함께 이 곡을 선보였고, 《뮤직뱅크》 6월과 7월 통합 K-chart 시청자 선호도 차트에서 각각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뮤직비디오는 2007년 ‘대낮에 한 이별 뮤직비디오 UCC 공모전’ 수상자와 김광은 감독이 제작하였다. 로토스코핑 기법을 이용한 실험적인 영상에, 마네킹과의 사랑을 다룬 내용이 담겨있는 이 뮤직비디오에는 신동욱과 김연아가 출연하였다. 〈You're Out〉은 경쾌하면서 펑키한 요소가 결합된 곡으로, 먼저 다가왔지만 금방 시큰둥해지는 남자 친구에게 경고하는 가사를 담은 곡이다. 〈This Time〉 뮤직비디오 초반부에 쓰였다. 공연 원더걸스는 2008년 5월 31일 《음악중심》에서 〈So Hot〉과 〈This Time〉을 선보이며 처음으로 컴백 무대를 선보였다. 이 날 무대에서 유빈이 성대결절로 인해 목을 사용하지 못해 유빈의 랩 파트만 립싱크로 대체했다. 수록곡 순위 및 수상 기록 2008년 6월 싸이월드 디지털 뮤직 어워드 - Song of the Month 2008년 Mnet 20’s Choice - Hot 클럽뮤직 2008년 멜론 뮤직 어워드 올해의 노래상 KBS 《뮤직뱅크》 ‘K-chart’ 2008년 6월 6일 디지털 음원 1위 2008년 6월 13일 디지털 음원 1위 2008년 6월 20일 디지털 음원 1위 2008년 6월 27일 통합 1위 2008년 7월 11일 디지털 음원 1위 SBS 《인기가요》 ‘뮤티즌 송’ 2008년 6월 15일 수상 2008년 6월 22일 수상 2008년 6월 29일 수상 Mnet 《M! Countdown》 2008년 7월 10일 1위 2008년 7월 17일 1위 2008년 7월 24일 1위 판매량 발매일 각주 외부 링크 〈So Hot〉 가사 (엠넷 미디어) 2008년 음반 2008년 싱글 원더걸스의 음반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음반 박진영이 작곡한 노래 박진영이 작사한 노래 2008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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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B%9D%BC%20%28%ED%95%AD%EC%84%B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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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항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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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Mira)는 고래자리에 있는 적색 거성으로, 지구에서 200~400광년 떨어져 있다. 바이어 명명법에 의하면 고래자리 오미크론(Omicron Ceti)으로 부른다. 미라는 쌍성으로 적색 거성 미라 A와 반성 미라 B로 이루어져 있다. 미라 A는 밝기가 크게 변하는 변광성으로, 초신성이 아닌 별들 중 최초로 발견된 변광성이기도 하다. 용골자리 에타같은 특수한 존재를 제외하면 미라는 맨눈으로 보이다가 보이지 않는 과정을 반복하는 변광성들 중에서는 가장 밝은 별이다. 미라까지의 거리는 정확하게 측정되지 않고 있다. 히파르코스 위성 이전까지는 220광년 정도로 관측되었고, 위성의 시차 측정에서는 오차범위 14% 이내에서 418광년의 값이 나왔다. 관측 역사 고대 중국, 바빌로니아, 그리스에서 미라를 관측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정확도는 낮다. 신빙성 있는 첫 번째 기록은 1596년 8월 3일 천문학자 데이비드 파브리시우스가 기록한 이 별의 밝기 변화이다. 그는 수성을 관측하면서 수성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3등급의 어두운 별을 기준으로 삼았다. 8월 21일 기준별의 밝기는 1등급이 올라갔다. 10월 이 별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파브리시우스는 이 별을 신성으로 생각했지만 1609년 2월 16일 이 별을 다시 발견했다. 요하네스 홀버다는 이 별이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주기를 11개월로 측정했다. 한편 요하네스 헤벨리우스도 동시에 이 별을 관측했으며 1662년 Historiola Mirae Stellae에서 이 별에 ‘미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서 미라는 ‘멋지다, 놀랍다’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로, 예전 어떤 별도 이런 존재는 없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스마일 부이요는 미라의 변광 주기를 333일로 측정했는데 이는 현대 측정값인 332일보다 단 1일이 많은 수치이다. 이 오차는 무시해도 좋을 수준인데, 그 이유로 미라의 변광 주기 자체가 조금씩 변하기 때문이다. 미라가 데이비드 파브리시우스보다 먼저 인지되었음을 알려주는 기록들이 있다. 식쌍성 알골의 경우 1667년 이 별이 변광성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 전에도 고대 기록 내에 이 별은 천 년에 걸쳐 관측되었음이 나타나 있다. 이는 미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히파르코스의 저작 '아라투스 주석'을 번역한 카알 마니티우스는 문서 내에 미라를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중세 중국(1596년)과 고려(1070년)의 천문 기록 및 히파르코스(기원전 134년)의 기록, 조선의 선조실록(1592년~1594년)에 미라가 언급된 것으로 추측한다. 이 중 중국의 경우 관측의 정교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미라의 존재를 기록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남긴다. 한편 선조실록의 기록의 경우 이것이 객성과는 다른 항성의 일종임을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미라 A 주성 A는 주계열 상태를 떠나 일생의 마지막 단계로 진행하는 중이다. 핵융합 장소가 중심핵에서 외곽부로 이동했기 때문에 항성의 부피는 크게 증가하지만, 대신 표면 온도는 떨어지며 적색 거성으로 진화한 상태이다. 외곽 부분에서 수소 연소가 일어나면서 중심핵 부분에 헬륨이 지속적으로 쌓이면, 내부의 헬륨 핵 질량은 꾸준히 상승한다. 중심핵 내 헬륨의 질량이 충분히 커져서 헬륨 연소가 시작되면 '헬륨 섬광'이라 불리는 과정이 일어난다. 헬륨 섬광은 중심핵에서의 헬륨 연소를 가속시키며 탄소와 산소를 생성한다. 중심핵은 크기가 커지면서 온도가 내려가고, 수소 연소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줄어든다. 여기서 별의 밝기는 어두워지며 바깥쪽 대기는 수축하고 표면온도는 올라간다. 항성진화 중 여기에 해당되는 단계를 수평가지로 부른다. 중심핵에 있는 헬륨이 소진되면, 탄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비활성 핵물질 위에 헬륨의 층이 생성된다. 미라 A는 다시 한번 부풀어 오르며 밝기가 증가하는 동시에 표면 온도는 내려간다. 이 단계를 점근거성가지로 부르며, 미라 A는 현재 이 단계에 있다. 미라의 헬륨 중심핵 외부 온도가 1천만 켈빈까지 상승하면, 수소는 별의 외곽층을 따라 점화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수소 연소 지역 내에서는 에너지가 전달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내부층 사이에 압력은 증가한다. 수소 연소층은 온도가 낮아져서 핵융합 작용이 멈출 때까지 팽창한다. 이후 미라는 수축하고, 수소층에서 다시 점화 현상이 발생한다. 이런 식으로 미라는 맥동치는 점근거성가지 단계에 머물면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맥동 주기는 10년 혹은 그 이상이며, 이 상태로 항성은 1만 년을 보낸다. 맥동 주기를 거치면서 미라는 밝기가 증가하며, 맥동의 폭도 상승한다. 미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주기가 짧고 불규칙해지면서, 밝기와 크기가 큰 폭으로 변화하게 된다. 미라 A는 불규칙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현상의 원인은 미라 표면의 밝은 흑점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허블 우주 망원경이 자외선 영역에서 관찰한 미라 A는 동반성을 향해 깃털 모양으로 뻗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변광 미라 A는 대표적인 변광성으로, 미라 변광성의 표준형이다. 미라 변광성에 속하는 항성들은 모두 적색 거성이며 미라처럼 80일에서 1천 일 주기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 미라는 평균 밝기가 +3.5등급이며 고래자리에서 밝은 축에 든다. 미라는 밝을 때는 2.0등급, 어두워질 때는 4.9등급까지 밝기가 변한다. 극대값과 극소값의 차이는 15배에 이른다. 역사적 기록으로 추측해 보면 이보다 세 배 이상의 폭으로 밝기가 변화했으며, 극소 광도는 8.6에서 10.1등급이었다. 이로 인해 도출된 가장 밝았을 때와 가장 어두웠을 때의 가시광 영역 광도차는 1700배에 이른다. 다만 미라는 복사 에너지의 대부분을 적외선 영역에서 방출하기 때문에, 같은 경우에 적외선 영역의 광도차는 2등급 정도에 불과하다. 미라의 광도 곡선은 100일에 걸쳐 상승하다가, 200일 정도에 걸쳐 다시 하강한다. 질량 손실 미국 우주항공국의 갈렉스 우주 망원경으로 미라를 자외선 영역에서 조사한 결과, 외곽 대기에서 우주 공간으로 물질이 수 만 년에 걸쳐 방출되어 13광년 길이의 꼬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꼬리의 원인은 압축된 플라즈마 및 가스로 이루어진 뱃머리 충격파로 보인다. 뱃머리 충격파 현상은 초당 130킬로미터 속도로 우주 공간을 달리는 미라 A에서 나온 항성풍과 성간 물질이 충돌하여 생긴 결과이다. 꼬리는 뱃머리 충격파의 머리 부분에서 벗겨져 나온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외선 영역에서 관측할 수 있다. 미라 B 1995년 허블 우주 망원경이 주성에서 70 천문단위 떨어진 곳에 있는 미라 B를 발견했다. 발견 사실은 1997년에 공표되었다. 허블 망원경의 자외선 사진 및 찬드라 우주 망원경의 엑스선 사진을 통해, 주성에서 나선 형태의 가스가 솟구쳐 올라서 반성 B로 흘러가는 현상이 관측되었다. 반성은 주성을 400년에 한 바퀴 공전한다. 2007년 반성 주위에 원시행성계 원반이 형성되어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 원시행성계 원반은 주성 미라 A에서 방출된 물질들이 B 주변에 강착 원반 형태로 모인 것이다. 이 물질들은 미라 B 주위를 도는 행성계로 자라날 것으로 보인다. 상기 관측 자료들을 통해 반성은 종전에 예측했던 백색 왜성이 아니라, 분광형 K에 질량은 태양의 0.7배 정도인 주계열성임이 밝혀졌다. 읽어보기 중요한 변광성 목록 미라 변광성 적색 거성 고래자리 미라형 변광성 쌍성 M형 거성 바이어 천체 플램스티드 천체 014386 0681 0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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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A%A9%ED%9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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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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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김용환(金龍煥, 1887 ~ 1946)은 일제 시대의 독립 운동가이다. 김용환(金容煥, 1900 ~ 1969)은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김용환(金龍渙, 1909 ~ 1949)은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한국의 가수이다. 김용환(金龍渙, 1912 ~ 1998)은 한국의 만화가이다. 김용환(金龍煥, 1922 ~ ?)은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다. 김용환(金龍渙, 1932 ~ 2017년)은 대한민국의 제13·14·15·16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김용환(金溶煥, 1958년 ~ )은 대한민국의 제3대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공무원이다. 김용환(金容煥, 1958년 ~ )은 대한민국의 제4대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을 역임한 공무원이다. 김용환(金容奐, 1993년 ~ )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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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C%A2%85%ED%9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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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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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환(1980년 6월 26일 ~ )은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이자 전(前) 기자이다. 경희대학교 언론정보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2005년에 MBC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특히 MBC에선 대학 재학 중에 입사한 최초의 인물이다. 초창기에는 《불만제로》, 《우리말 나들이》같은 류의 TV방송에만 출연하였으나, 2009년 4월 13일부터 《뮤직스트리트》의 진행자로 발탁되는 등, 라디오 방송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2011년 5월 9일까지 진행을 맡고 하차했다. 2011년부터 2018년까지는 MBC 기자로 활동했다가, 현재 아나운서로 복귀했다. 출연 텔레비전 《불만제로》 (제로맨) 《우리말 나들이》 《일요일 일요일 밤에 - 노다지》 (진행 MC) 《MBC 뉴스투데이》(주말앵커 : 2010년 6월 12일 ~ 2011년 10월 1일) 《스포츠 매거진》 《리얼매치! 국가대표 하이킥》 《퀴즈쇼 레인보우》 《평창, 우리의 밤》 《뉴스콘서트》(2018년 3월 12일 ~ 2018년 7월 6일) 《MBC 뉴스데스크》(주말 임시 보조 진행 : 2018년 4월 28일) 《MBC 뉴스투데이》(평일앵커 : 2018년 7월 16일 ~ 2020년 6월 26일) 《생방송 오늘아침》(2020년 8월 31일 ~ 2023년 2월 28일) 《PD수첩》 (2021년 1월 12일 ~ 2023년 2월 21일) 라디오 《뮤직스트리트》 《그건 이렇습니다 전종환입니다》 외부 링크 스포츠 매거진 198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문화방송의 아나운서 문화방송의 기자 대한민국의 방송인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기자 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 경희대학교 동문 서울특별시 출신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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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A7%88%EC%B6%94%EC%96%B4%20%EC%B2%9C%EB%AC%B8%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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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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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천문학(Amateur astronomy)은 참여자가 천체를 연구하고 관측하는 것을 즐기는 취미활동이다. 개요 아마추어 천문가는 천문학을 직업으로 하거나 천문학 분야의 학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취미로 천문을 연구, 관측한다. 아마추어들은 대개 초심자들이고, 일부는 높은 수준의 천문 지식이 있어 종종 전문적인 천문가를 돕기도 한다. 아마추어 천문가는 보통 대부분의 천체가 보이는 밤하늘을 관측한다. 하지만, 때로는 대낮에 흑점이나 일식을 관측하기도 한다. 그들은 주로 맨눈으로 하늘을 관측하지만, 흔한 장비로 휴대용 망원경이나 쌍안경을 휴대하기도 한다. 역사를 통해 사람들은 아마추어로서, 어떤 형식적인 방법이나 재정적 지원 없이 하늘을 연구해 왔다. 아마추어 천문학이 직업적인 천문학과 명확하게 구분된 것은 불과 수 세기 전의 일이다. 관측 대상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다양한 천체들과 현상들을 관측한다. 대체적으로는 달, 행성, 항성, 혜성, 유성우, 그리고 다양한 성운·성단·은하들을 관측한다. 다수의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흥미있는 특정 천체, 특별한 종류의 천체, 특별한 천문 현상 등에 전문화되고 싶어한다. 그 한 분야인 아마추어 천문사진은 밤하늘의 사진을 찍는 것으로, 최근에는 높은 품질의 CCD 카메라의 보급으로 아마추어 천문가들에 인기가 있다. 대부분의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가시광선의 영역에서 활동하지만, 실험적으로 가시외 영역을 다루기도 한다. 아마추어 전파 천문학의 개척자로서 칼 잔스키(Karl Jansky)는 1930년대에 전파 영역에서 하늘을 관측하였고, 이후 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해 왔다. 가시광선 바깥의 영역에는 기존의 망원경에 적외선 필터, 전파 망원경을 사용한 관측이 포함된다. 일부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직접 제작한 전파 망원경을 사용하기도 하며, 천문학 연구에 사용되었던 것을 개조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1마일(MRAO) 망원경은 그 한 예이다. 관측 도구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각자의 기호와 여건에 따라 하늘을 연구하기 위한 다양한 도구를 사용한다. 관측 방법은 단순히 맨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에서, 쌍안경을 이용하거나, 다양한 성능과 품질의 천체망원경을 이용하는 방법, 카메라와 같은 복잡한 장비를 추가하는 방법으로 별빛을 관측한다. 천체망원경을 구입하여 사용하기도 하며, 아마추어 천문가들이 직접 자신의 천체망원경을 자작 또는 의뢰하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마추어 천문가로서의 천체망원경의 제작을 가장 흥미있는 일로 주목하기도 한다. 특화되고 숙련된 아마추어 천문가들이 더욱 특화되고 성능이 좋은 장비를 갖추어 왔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적으로 간단한 장비가 선호된다. 예를 들면, 쌍안경은 대부분의 천체망원경보다는 배율이 낮지만, 넓은 시야를 제공하며, 이는 일부 천체를 관측하기에는 좋은 조건이 된다.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또한 경험과 노력에 따라 성도(星圖, 별자리판)을 사용하기도 한다. 성도는 간단한 평면천체도에서 밤하늘의 특정 영역이 매우 상세하게 그려진 것도 있다. 다양한 천문 프로그램을 구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그 중에는 성도를 만들어 내는 것, 천문 사진에 도움이 되는 것, 천문현상과 관련된 다양한 계산을 수행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관측 내용을 관측일지의 형식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관측일지는 전형적으로 관측 대상과 시각, 관측된 세부 내용들이 기록된다. 때로는 스케치나 사진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인터넷은 아마추어 천문가들에게는 필수적인 도구이다. 거의 대부분의 천문 동아리는 웹사이트를 갖고 있다. 아마추어 천문가들에 CCD 가 널리 보급되어 많은 웹사이트가 그들의 영상과 장비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기도 한다. 메일링 리스트나 토론 그룹에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한다. 야후나 구글의 그룹에서는 다양한 천문학 리스트를 제공한다. 아마추어 천문학의 홍보나 장비의 거래 등이 인터넷 상에서 이루어진다. 많은 아마추어 천문가들은 인터넷 상의 도구를 사용하여 관측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단체와 활동 전 세계에는 많은 수의 아마추어 천문학 단체들이 있으며, 아마추어 천문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의 만남의 장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참여자들이 갖는 관심의 정도는 서로 다르다. 단체의 성향은 지형, 지역 환경, 규모, 회원들에 따라 달라진다. 규칙적인 모임은 관측회나 발표회 같은 활동을 포함하기도 한다. 천문 단체는 또한 천체망원경 제작 같은 특별한 관심사를 갖는 사람들의 모임의 장소가 된다. 한국 기록상으로 한국에는 태양과 천체를 관측하는 직책이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즉, 아마추어 천문학의 시초는 삼국시대라 할 수 있다. 「혜성가」를 지은 융천사는 그 한 예이다. 조선 시대의 홍대용 또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거나 직업으로 천문학을 하지 않은 아마추어 천문가라 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은 또한 농사나 정세에 관한 점을 치기 위해 천문을 관측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많은 수의 필사본은 조선 시대의 일반인들도 천문에 관심이 많았음을 시사해 준다. 근대 이후로는 대한민국에서 1972년 쟈코비니 유성우 관측을 계기로 한국 아마추어 천문학회가 결성되어 관측회와 자작 망원경 전시 등을 활동을 벌였다. 이후로 각 대학별로 천문 동아리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일본 일본에서는 취미와 야외활동의 일환으로서 천체 관측이 행하여진다. 관측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천체를 관측하여 '천체관망', '천체감상'으로도 부른다. 천문대와 박물관이 개최하는 '별의 관찰회()'와 캠프에서 별을 관측하는 등, 연구라기보다는 사회교육이나 레크리에이션 같은 측면으로도 행한다. 여름에는 페르세우스자리 유성우나 칠석, 스타위크 등이 지나고 별축제(, 호시 마쓰리)로 불리는, 많은 이들이 모여 별을 보는 관측회가 각지에서 열린다. 또한, 뉴스와 기상정보 등에서 보도되는 천체 현상이 있을 경우에는 각지의 천문연구회 등에서 주최하는 천체관측회가 열리기도 하는 등 여러 사람들이 관측을 한다. 일본 환경성에서는 광공해와 대기 오염에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전국밤하늘계속관찰()사업을 매년 여름과 겨울에 2차례 개최하고 있다. 이 밖에도, 천문대를 시작으로 박물관, 플라네타리움에서의 해설, 텔레비전 방송의 출연, 천문잡지와 일반 서적의 저술·감수에 의해 천체 관측이 일반에 보급된다. 특히, 천체 사진 분야에서 활약하는 이들도 많으며, 서적도 다수 출간되어 있다. 같이 보기 별자리 천문학 아마추어 천체망원경 제작 천체 관측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한국 아마추어 천문학회 공식 홈페이지 취미 시민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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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82%98%EC%9D%B4%EC%A0%9C%EB%82%98%EC%9A%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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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이제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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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이제나우(Gneisenau) 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1760 - 1831) : 나폴레옹 전쟁때의 프로이센 육군원수. 같은 이름을 가진 독일 해군함은 다음과 같다. SMS 그나이제나우(1879년) : 3개의 돛대를 가진 철갑 프리깃함. 1879년 진수하여 1900년 난파됨. SMS 그나이제나우 : 제1차 세계 대전 장갑순양함. 1906년 진수하여 1914년 침몰함. 독일 순양전함 그나이제나우 : 제2차 세계 대전 순양전함. 1936년 진수하여 1945년 침몰함. 훈련함 그나이제나우 : 독일 해군의 훈련용 배. 독일 여객선 그나이제나우(1935년) : 독일 정기여객선으로 자매선으로 샤른호르스트와 포츠담이 있다. 그나이제나우 집중력 캠프 그나이제나우성 : 오스트리아에 있는 성(城)이름. 그나이제나우역 : 베를린 지하철의 역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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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A%B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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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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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尹瓘, 1040년 7월 12일 (음력 6월 1일) ~ 1111년 6월 15일 (음력 5월 8일))은 고려 중기의 문신·군인이다. 숙종, 예종 때 여진족 토벌에 출정하였다. 본관은 파평,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처음 시호는 문경(文敬)이었으나 뒤에 문숙(文肅)으로 개시되었다. 파평 윤씨의 시조 삼한공신(三韓功臣) '윤신달'(尹莘達)의 4대손으로, 아버지 윤집형(尹執衡)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을 지냈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진 정책을 완수한 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숙종 때 2차 여진족 토벌 당시는 원수로 출정하였으나 실패, 강화회담을 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특수 부대 별무반을 창설하여 오연총과 함께 병력을 훈련, 1107년(예종 2년) 3차 토벌 때 대원수에 임명되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군의 원수(元帥)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척준경, 왕자지, 오연총 등과 함께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족을 토벌한 뒤, 북방에 9성을 쌓고, 여진족이 재침략하자 이를 진압하고 1108년(예종 3년) 개선하였다.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동북 9성을 공략하였으며 북방을 방비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의 동북9성 반환 요청이 있자 그는 반대하였으나 고려 조정은 화의론을 주장하여 9성을 되돌려주었고, 1109년 길주성에서의 패전을 이유로 한때 공신호를 박탈당하고 해임당하였으나 예종의 특별 배려로 복직하였다. 파평 윤씨의 중시조이다. 아들은 윤언이이고, 충혜왕의 장인 윤계종은 윤관의 7대손이었다. 남원 윤씨와 함안 윤씨 역시 그의 후손이었다. 폐비 윤씨는 윤관의 11대손이 된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수태보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군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다. 경기도 파주 출신.후손 지금 살아있는 후손은 윤상운 윤지혁과 함께 여럿이 있다 생애 출생과 가계 윤관은 1040년 음력 6월 1일 경기도 파주군 파평현(坡平縣)에서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 윤집형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윤관의 아버지 윤집형은 삼한공신(三韓功臣) 윤신달의 증손자로 벼슬은 검교소부소감을 지냈다. 그의 가계는 고려 삼한공신 윤신달의 후손으로 윤신달 이전의 가계는 미상이다. 그가 공신이 되고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기에 그를 중심으로 고조부까지만 기록된 것으로 전한다. 부인 경원 이씨는 이성간(李成幹)의 딸로, 슬하에 윤언이(尹彦頤)·윤언순(尹彦純)·윤언식(尹彦植)·윤언이(尹彦頤)·윤언민(尹彦旼)을 두었으며, 이 중 두 사람은 승려가 되었다. 윤언이는 『고려사(高麗史)』에 열전이 수록되었고, 윤언순은 예종(睿宗) 때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이르렀으며, 윤언식은 타고난 자질이 고상하고 우아하여 빈객을 좋아하였는데, 벼슬은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에 이르렀다. 윤언민은 다른 사람보다 총명하고 서화(書晝)를 잘하였으며, 인종(仁宗) 때에 상식봉어(尙食奉御)가 되었다. 이와 같이 그의 가문은 상당히 번성하여, 이후 왕실과 혼인을 하는 등 당대의 명문으로 거듭났다. 초기 관직 생활 과거 급제와 관료생활 초반 윤관은 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습유(拾遺)· 보궐(補闕) 등을 지냈고, 1087년(선종 4)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그해 합문지후로서 출추사(出推使)가 되어 광주(廣州), 충주, 청주를 시찰하고 되돌아왔다. 1095년(숙종 즉위) 좌사낭중(佐司郞中)이 되었으며, 그해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바로 형부시랑 임의(任懿)와 함께 국신사(國信使)로 요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숙종 3)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가 되었으며, 동궁시학사로 재직 중 조규(趙珪)와 함께 송나라에 다시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리고 귀국하였다. 1099년 우간의대부·한림시강학사(右諫議大夫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임의와 인척이어서 간원(諫院)인 어사대(御史臺)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中書省)의 건의로 따라 스스로 물러났다. 1101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었고, 9월에 남경개창도감을 설치되자,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등과 양주에 파견퇴어 궁궐터를 물색하는 등 남경건설사업을 활발히 추진했다. 그리하여 1104년 5월 지금의 서울지역에 남경궁(南京宮)을 건설되었다. 1102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굉(李宏) 등과 함께 진사시험(進士試驗)을 주관했고, 이어 어사대부, 추밀원부사 등을 지냈다. 1103년 이부상서(吏部尙書) 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에 올랐다. 개혁 정책 숙종 때에 여러 벼슬을 지내고 동궁시강·어사대부·이부상서·한림학사 승지 등을 지냈다. 숙종 재위기간 중 그는 대각국사 의천과 함께 숙종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동시에 의천과 함께 시정개혁을 담당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남경 건설, 금속화폐 유통책 실시와 신법(新法)을 제정, 실시했다. 또 기존의 호족들을 억압하고 과거 시험과 추천제로 신진 관료들을 선발하였다. 고려의 동북면과 연결된 갈라전(曷懶甸) 일대에 거주하던 여진 부족들은 고려의 국경지대를 왕래하며 그들의 토산물을 부족한 생필품과 무역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 부락의 추장들 중 일부는 고려를 종주국으로 삼고 입조하였는데, 고려는 그들 추장들에게 무산계(武散階)나 향직(鄕職)을 주어 회유하기도 하고, 투항해오는 여진족에게는 투화전(投化田)을 주어 정착시키기도 했다. 숙종 즉위 초, 그는 여진족 추장들을 만나 왕의 대리인으로서 여진족 추장들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추장들을 면담하였다. 그러나 여진족 추장들은 1106년을 전후해 우야소(烏雅束)를 중심으로 통일부락을 건설하면서 고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1103년(숙종 8)에 우야소의 세력은 함흥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하게 되었다.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충돌 직전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定州關) 밖에 쳐들어오게 되었다. 1103년경부터 여진족 정벌 여론이 나오면서 여진족을 토벌해야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숙종대 후반에 제기되는 여진정벌론에는 여진족의 흥기와 고려 동북면 침입이라는 객관적 정세 변화 외에 국내의 정치상황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진족 정벌 별무반 조직과 3차 여진족 토벌전쟁 1107년(예종 2년)에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하지 않다는 한 변장(邊將)의 긴급보고를 접하자 여진족 토벌을 주청하였다. 이에 왕명으로 여진 정벌군의 원수(元帥)가 되어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이끌고 부원수에 임명된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족 정벌에 출정하였다. 당시 여진족은 우리 나라 동북부에서 만주에 걸쳐 살면서 북부 국경지대인 함흥 지방을 위협하자 고려의 북진 정책에 역행이 되었던 여진족을 소탕하려고 출정하였으나 누차 실패하고 심려 끝에 그 원인이 여진족의 기병임을 깨닫고 왕명을 받아 윤관은 오연총과 특수부대 17만을 거느리고 여진촌락 129개를 쳐서 포로 1030명, 사살 4940명 등 큰 공을 세웠다. 1107년 12월 원수가 되어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명의 군사를 중·좌·우의 3군으로 편성했으며 수군(水軍)까지 동원해 여진정벌에 나섰다. 고려군은 일거에 쳐들어가 여진족을 쫓아내고 9성을 쌓았다. 처음 여진족을 공격하는 척 하다가 후퇴한 뒤, 여진추장에게 사자를 보내 고려가 앞서 잡아둔 여진족 허정(許貞)·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내겠다고 거짓통보를 하자, 여진족 추장은 400여명의 호송 병력을 보내왔는데, 이때 윤관과 오연총은 이들을 유인하여 거의 섬멸시키고 사로잡았다. 이들을 미끼로 여진족을 유인하게 하고, 이후 윤관은 따로 5만3,000명을 편성하여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중군(中軍)은 김한충(金漢忠), 좌군(左軍)은 문관(文冠), 우군(右軍)은 김덕진(金德珍)으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으며, 수군(水軍)은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 등이 2,600명으로 도린포(都鱗浦)의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윤관군의 기습공격에 눌린 여진이 퇴각하여 동음성(冬音城)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편성하여 추격, 여진족이 재기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격파하였으며, 다른 여진군이 숨은 석성(石城)은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공격, 패주하게 하여 섬멸하였다. 승전과 동북9성 수축 여진족의 전략적인 거점을 무찌른 곳은 135개처, 적의 전사자 4,940명, 포로 130명을 생포하였다. 이후 조정에 전승의 보고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오연총과 함께 9성의 축조를 감독하였다. 현재 9성의 확실한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흔히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鎭)·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으로 비정되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진양진·숭녕진 대신 의주(宜州)·평융진(平戎鎭)을 꼽기도 한다. 윤관은 남쪽지방의 민호(民戶)를 이곳으로 옮겨 살게 했다. 〈고려사〉 윤관전에 기록되어 있는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의하면 당시 이주한 가구의 수는 함주·영주·웅주·길주·복주·공험진에 병민(兵民) 6,466정호(丁戶)였다. 9성을 쌓은 뒤 예종에게 건의하여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남도지방의 이주민들이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 되었다. 남도의 이주민으로 6성을 쌓은 뒤 별도의 군대를 편성하여 지키게 하였고, 이 6성 외에 1108년 초 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3성의 수축을 명하여 감독, 9성을 설치하였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어 이곳이 가장 요충이 되었다. 9성을 완공한 뒤 재침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1108년(예종 3년) 출발, 회군하였다. 오연총과 함께 9개의 성벽을 쌓아 국경을 튼튼하게 하고 개선하자 예종은 그와 오연총에게 공신호를 내렸다.여진족을 몰아내고 북진 정책을 완수한 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9성을 개척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는 반발하여 1108년초에 군사를 이끌고 함경북도 지역을 재침략하여 정면대결을 하게 된다. 4차 여진족 토벌 전쟁 그러나 여진족은 다시 변경을 쳐들어왔고, 1108년 (고려 예종 3년) 1월 오연총, 척준경, 왕자지 등과 함께 별무반을 이끌고 다시 출정하였다. 그러나 가한촌(加漢村) 전투 중 험곡에서 윤관은 오연총과 함께 여진족에게 포위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척준경(拓後京)이 후발대를 이끌고 급습하여 구출되었다. 영주성 공략에서는 왕자지가 이끄는 군대가 패퇴하였으나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기지로써 왕자지를 구출하고 여진군을 겨우 물리치게 되었다. 그는 숙종대 왕권강화시책의 한 주역이었고, 예종 즉위 초기의 정책 수행과 여진정벌 추진에서도 중심세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우야소는 다시 여진군 수만명을 이끌고 쳐들어와 웅주성을 포위하였다. 역시 척준경의 지략과 용기로써 적을 패주시켰다. 1108년 3월 30일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00두를 노획하여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개경으로 개선하여 추충좌리평융 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 拓地鎭國功臣)에 책록되고, 문하시중(門下侍中) 겸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判尙書吏部事 知軍國重事)에 임명되었다. 이어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식읍(食邑) 2,000호, 식실봉(食實封) 300호에 봉해졌다. 생애 후반 여진족과의 화전과 동북9성 반환 한편, 윤관이 예종에게 신임을 받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던 관리들이 윤관을 비방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고려의 정벌과 9성 설치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여진족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모여 무력항쟁을 계속하였고, 사자를 보내 9성을 돌려주고 생업을 편안히 해주면 자손 대대로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면서 9성을 되돌려달라고 애걸하였다. 이에 일부 주화파들은 9성을 되돌려주자고 주장하였고, 윤관과 오연총은 9성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당시 고려는 여진족의 공세 앞에 9성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또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지키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서 조정에서도 화평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서쪽에 강력한 요나라와 접경하고 있던 여진은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게 되었으나, 윤관의 9성 축조와 농업이주민으로 말미암아 농경지를 빼앗긴 토착 여진족으로서는 강력히 반발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여진은 적극적인 강화교섭을 개시하였으며 7월 3일 예종은 육부를 소집, 회의를 열고 9성을 동여진 우야소에 되돌여주는 것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평장사 최홍사(崔弘嗣) 등 28명은 찬성하고, 윤관과 오연총, 예부낭중(禮部郎中) 한상(韓相)은 반대하였으나 당시 조정은 화평으로 기울어 있었고, 결국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7월 18일부터 9성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뒤에 금나라 태조 아골타(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워 강대한 국가가 된 기반에는 그들이 9성을 다시 되찾은 데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공신호 삭탈과 생애 말년 1109년 10월 여진족이 갑자기 쳐들어와 길주성을 함락시키자 동계병마부원수(東界兵馬副元帥) 오연총과 함께 출정하였다. 그러나 길주성을 포위한 여진족을 다시 치려다가 공험진에서 기습공격을 당하고 공략에 실패,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11월 여진족의 계속된 침범을 막지 못한 책임으로 재상 최홍사(崔弘嗣) 등의 탄핵을 받아 한때 관직과 공신의 자격이 박탈되고 파면되었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했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회군해서는 왕을 만나지도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숙종대를 이어 예종대에도 왕권강화를 위한 정책을 충실히 수행한 정치세력이었으므로, 흔히 패군한 장수가 영구히 관직을 삭탈당하는 것과는 달리 예종의 특별 배려로 다시 복직하였다. 예종 5년(1110년) 복관되었고, 오히려 예종은 윤관에게 문하시랑 평장사를 주고 가까이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윤관은 나이가 많고,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곧 사직했고, 그 뒤 독서에 몰입하던 중 그 해 수태보 문하시중(守太保門下侍中) 겸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임명되자 윤관은 표문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예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윤관이 다시 사퇴하려 하였으나 예종은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1111년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시호는 당초에 문경(文敬)이었으나 인종때 문경왕태후(文敬王太后)로 추존 된 예종비의 휘호를 피하기 위해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1130년(인종 8년)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사후 무속에서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묘는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윤관의 묘는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었다. 윤관 장군 묘를 둘러싼 산송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에 위치한 윤관 장군 묘역(사적 제323호)은 조선시대부터 400여 년 동안 계속된 산송으로도 유명하다. 1614년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이 윤관 장군 묘를 파헤치고 부친 등 일가의 묘를 잇따라 조성하자, 이에 반발한 파평 윤씨가 1763년에 심지원의 묘 일부를 파헤치고 청송 심씨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다툼이 발생한 고양 지역의 군수는 명문가의 다툼에 개입하기를 꺼려 이 문제를 조정에 넘겼다. 결국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는 윤관의 묘와 심지원의 묘를 그대로 두고 양 가문이 합의하도록 종용했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가 조선시대에 왕비를 각각 4명, 3명씩 배출한 외척 가문이었기 때문에 영조도 섣불리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평 윤씨 가문에서 이에 불복하여 심지원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오히려 곤장을 맞고 귀양가다 병사(病死)하는 등, 두 가문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노력이 있어 왔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2006년 음력 4월 10일, 파평 윤씨 대종회와 청송 심씨 대종회는 파평 윤씨 측이 이장에 필요한 부지를 제공하고 청송 심씨 측이 윤관 장군 묘역에 조성된 청송 심씨 조상 묘 19기를 이장하기로 합의하면서 조선시대부터 392년 동안 이어진 묘지 다툼을 끝내기로 하였다. 기타 숙종대에 고위직으로 진급하고 출세한 데에는 며느리(윤언영尹彦榮 = 윤언식으로 추정됨)가 숙종비인 명의태후(明懿太后)의 동생이었던 사실이 작용했던 듯하다는 시각도 있다. 전승 전승에 따르면,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거란군에게 쫓길 때 잉어가 도와서 강을 건넜다는 전승이 있어서, 지금도 파평 윤씨 가문에서는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김부식과 윤언이 글씨를 잘 써서 여러 글과 묘비명, 작품 등을 남겼으나 상당수 실전되었다. 그가 쓴 대각국사 의천의 묘갈명을 김부식이 임의로 수정하고 내용을 바꾸어버리자 이를 불쾌하게 여긴 그의 아들 윤언이는 김부식과 앙숙이 되었다. 평가와 비판 여진족을 토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아 북방의 방어력을 높인 점을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만년에 공신호를 삭탈당하고 불우한 최후를 맞이한 것에 대한 동정 여론도 있다. 가족 관계 다섯 아들 중, 첫째 아들 윤언인의 후손에서 남원윤씨와 함안윤씨가 갈라졌고, 넷째 아들 윤언이의 가계에서 희비 윤씨, 정희왕후, 정현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숙빈 윤씨 등을 배출했다. 할아버지: 윤금강(尹金剛) - 상서 좌복야 아버지: 윤집형(尹執衡) 어머니: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처 : 인천이씨(仁川李氏), 상장군 이성간의 딸, 이자연의 당질녀 - 5남 2녀(이 중 두 사람은 승려가 되었다.) 아들: 윤언인(尹彦仁)-합문지후 손자: 윤덕첨(尹德瞻)-전중시 내급사 아들: 윤언순(尹彦純) - 시어사 손자 : 윤중첨(尹仲瞻) 아들: 윤언식(尹彦植, ? - 1149년 5월)-상서좌복야 며느리: 하원군군 류씨(河源郡君 柳氏 : 명의태후의 동생) 아들: 윤언이(尹彦頤, ? - 1149)-정당문학, 시호 문강 손자: 윤인첨(尹鱗瞻)-수태사 , 시호 문정文定 손자: 윤자고(尹子固)-국자감 박사 손자: 윤돈신(尹敦信)-이부시랑 손자: 윤자양(尹子讓) 손자: 윤돈의(尹敦義) 손자: 윤돈효 손녀: 4명 아들: 윤언민(尹彦旼, 1095년~1154년 4월 23일(음력 3월 9일), 자는 일장(日章))-상식봉어 딸 : 윤씨, 황원도에게 출가 딸 : 윤씨, 임원후에게 출가 (임충빈 묘지명 참조) 왕후들과의 관계 그의 첫째 아들 윤언인의 11대손이 폐비 윤씨이고, 넷째 아들 윤언이의 혈통에서 희비 윤씨, 정희왕후, 정현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숙빈 윤씨 등을 배출했다. 윤언이(尹彦頤)의 셋째 아들 윤돈신(尹惇信)-윤상계(尹商季)-윤복원(尹復元)-윤순(尹純)-영평군(鈴平君) 윤보(尹珤, ?∼1329년(충숙왕 16년), 시호는 문현공(文顯公))로 이어지며 영평군 윤보의 첫째 아들이 윤계종(尹繼宗)으로 윤계종의 딸이 고려 충혜왕의 후궁 희비 윤씨이며, 충정왕의 외조부가 된다. 다시 윤보의 넷째 아들이자 윤계종의 동생이 양간공 윤안숙(尹安淑)이고, 윤안숙의 아들 윤척(尹陟)에게서 판전의시사 윤승휴, 윤승도, 문하평리 윤승순(尹承順), 윤승경, 판도판서 윤승례(尹承禮) 형제가 태어나는데, 윤승순의 아들이 윤곤(尹坤)이고, 윤곤의 아들 윤삼산(尹三山)-손자 윤호(尹壕)가 배출된다. 윤호는 정현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윤곤의 아들이자 삼산의 형이 둘째아들 윤희제이고, 윤희제-윤은(尹垠)-윤사로는 다시 세종의 딸 정현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된다. 윤사로는 다시 6촌누이인 정현왕후와 시대고모부-시종손부 관계가 된다. 윤필상 또한 윤곤의 증손이다(곤-희제-경-필상). 판도판서(版圖判書) 윤승례 아들 정정공(貞靖公) 윤번(尹璠)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윤번의 아들이자 정희왕후의 오라비인 윤사윤, 윤사흔, 윤사분 형제 중 차남 윤사윤(尹士昀)-윤보(尹甫)- 윤여필, 윤여해 형제가 나고, 윤여필이 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친정아버지이자 윤임의 아버지이다. 윤번의 셋째 아들 윤사흔(尹士昕)의 증손녀가 문정왕후이고, 고손녀가 인종의 후궁 숙빈윤씨이다. 윤사흔-윤계겸(尹繼謙)-윤욱(尹頊)으로 이어지며 윤욱의 아들이 윤지임(尹之任)이고, 윤지임은 다시 윤원개(尹元凱), 윤원량(尹元亮), 윤원필(尹元弼),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 5형제와 딸 문정왕후(중종의 3비)가 태어난다.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는 둘째 아들 윤원량의 딸이다. 고려 충숙왕비 희비는 윤관의 8대손, 성종비 폐비윤씨는 12대손, 세조비 정희왕후는 11대손, 성종의 3비 정현왕후는 13대손,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는 윤관의 14대손, 중종의 3비 문정왕후는 15대손,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는 16대손이 된다. 사돈의 유래 고려 예종 때 여진을 함께 정벌한 도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은 아들과 딸의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했다. 어느 봄날 술이 잘 빚어진 것을 본 윤관은 하인에게 술동이를 지게하고 오연총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일 밤에 내린 소낙비로 물이 불어나 개울을 건널 수가 없었다.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고 있는데 개울 건너편을 바라보니 오연총도 술통을 옆에 두고 발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등걸나무 조각을 구해 걸터앉았다. 먼저 윤관이 술잔을 비운 뒤 개울 건너 오연총에게 잔 권하는 시늉을 했다. 오연총도 머리를 숙여 술잔을 받는 예를 표시한 뒤 스스로 채운 술잔을 비웠다. 이렇게 둘은 등걸나무(査)에 걸터앉아 서로 머리를 숙이며 술잔을 주고받는 흉내를 내며 거나하게 마셨다. 이때부터 자식 사이의 혼인을 제안할 때는 '사돈 하자'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한다. 사돈의 뜻은 등걸나무(査)에 머리를 숙이다는 뜻의 돈수(頓首)의 합성으로 등걸나무에 앉아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다. 더 보기 파평 윤씨 고려 문종 별무반 척준경 왕자지 김종서 동북면 동북 9성 오연총 윤언이 여진족 윤신달 태조 왕건 서희 강감찬 고려 예종 윤돈신 윤인첨 윤상계 김부식 강조 거란족 강동 6주 요나라 이자겸 척준신 각주 외부 링크 윤관:네이버 캐스트 윤관장군묘 - 파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윤관 윤관:네이트 한국학 윤관: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1040년 출생 1111년 사망 고려 중기의 문신 고려의 무신 고려의 문하시중 고려의 군인 고려의 백작 육군 군인 사상가 고려의 작가 서예가 고려의 공신 한국의 장군 과거 급제자 병사한 사람 영웅 파평 윤씨 파주시 출신 한국의 인물신 문벌귀족 숭의전 16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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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B9%84%20%EC%98%AC%EB%A1%9C%EA%B1%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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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비 올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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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비 올로건(영어:Bobby Ologun, 일본어:ボビー・オロゴン, 1973년 4월 8일 ~)은 나이지리아 출신의 일본 국적 개그맨이자 종합격투기 선수이다. 일본에서는 그를 통칭 '일반인(종합격투기 선수가 아닌 사람) 중 최강자'라 부른다. 게임개발업체 (주)아틀라스사가 개발했지만 이 회사가 부도나서 (주)SNK사에서 판권을 이어받아 만든 호혈사시리즈 중 호혈사 번뇌해방에 최종보스로 등장하기도 한다. 호혈사 일족의 캐릭터 보비 올로건은 이름만 빌리고 실제로는 외형이 완전히 다른 김갑환과는 달리 정말 보비 올로건 본인이 등장한다. 생애 출생 나이지리아에 태어났다. 2007년 7월에는 공식적으로 일본으로 귀화를 하였다. 그의 동생인 앤디 올로건도 일본으로 귀화하여 종합격투기 선수로 생활하고 있다. 종합 격투 전적 4전 2승 2패(0 KO) 입식 격투 전적 1전 0승 1패(0 KO) 정보 주 베이스는 MMA 타격이다. 그는 K-1의 이벤트무대인 다이너마이트에서만 4번 등장하였다. 그중에 2번은 이기고, 2번은 졌다. 2승은 MMA가 전무한 시릴 아비디를 맞아 판정승을 거두었고, 지나친 체중으로 연속 패배 중인 아케보노를 역시 판정으로 꺾었다. 2패는 어마어마하게 큰 신장을 이용해 긴 리치로 공격하는 데다가 씨름을 바탕으로 하여 타격까지 갖춰 위협적인 MMA실력을 보여준 최홍만에게 16초만에 TKO로 끝나고, MMA에 나름 능한 흥행 보증수표 밥 샵에게는 파운딩 연타로 패하게 된다. 외부 링크 소속사무소에서의 프로필 바비 올로건 공식블로그 K-1 선수 데이터 SHERDOG 선수 데이터 바비 올로건 돗토콤(팬사이트、K-1도전까지의 기록) 1966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나이지리아의 남자 킥복싱 선수 나이지리아의 남자 종합격투기 선수 일본의 남자 킥복싱 선수 일본의 남자 종합격투기 선수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 나이지리아계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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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342%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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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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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원(元) 지정(至正) 2년 일본(日本) 남조(南朝) 고코쿠() 3년 일본(日本) 북조(北朝) 랴쿠오() 5년 / 고에이() 원년 쩐 왕조(陳朝) 티에우퐁(紹豊) 2년 기년 원(元) 혜종(惠宗) 10년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복위 3년 쩐 왕조(陳朝) 유종(裕宗) 2년 사건 5월 7일 - 교황 클레멘스 6세 198대 교황으로 선출 이제현이 《역옹패설》을 지음 러요시 1세가 헝가리 왕국의 왕이 됨 탄생 삼봉 정도전 탄생 - 양력 10월 6일 음력 8월 26일 사망 4월 25일 - 교황 베네딕토 12세 조선 태조의 할아버지 이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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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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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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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는 1982년 개봉한 미국의 SF 모험 영화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하였고 멀리사 매시슨이 각본을 썼으며, 디 월리스, 헨리 토머스, 피터 코요테, 로버트 맥노턴, 드루 배리모어가 출연하였다. 초능력을 가진 외계인이 지구에 홀로 남아 지구 소년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며 동료들에 의해 구출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음악은 존 윌리엄스가 담당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1984년 6월 23일에 연소자 관람가로 개봉하였고, 재개봉하여 상영되었다. 이후 2002년에 UIP 코리아㈜에서 다시 수입하여 영화 제작 20주년을 기념하여 보너스 장면과 디지털 영상 등을 업그레이드 하여 2002년 4월 5일에 재개봉하였다. 2011년에는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UPI 코리아)에서 재수입하여 CGV 무비꼴라쥬 내 인생의 가족영화 시리즈로 CGV 계열 10개 극장에서 2011년 8월 11일~31일까지 상영하였다. 이 때에는 디지털 판본이 없어 필름으로만 공급되었다. 줄거리 캘리포니아의 어느 숲속에 일군의 외계인들이 도착한다. 그들은 식물학자로서 지구의 식물들을 조사하려는 목적으로 왔으나, 지구의 정부 요원들이 등장하자 우주선을 타고 황급히 달아난다. 그런데 한 명이 우주선에 타지 못하고 지구에 남겨지고 만다. 샌퍼넌도밸리에 사는 10살짜리 소년 엘리엇은 여러 가지로 외로운 삶을 보내고 있다. 엘리엇의 아버지는 바람을 피워 가족을 버렸고 어머니인 메리가 삼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엘리엇의 형 마이클과 그 친구들은 엘리엇을 무시하기 일쑤다. 그날 밤, 엘리엇은 피자 심부름을 다녀오다 마당 창고에서 우주선을 타지 못한 그 외계인을 목격하고 깜짝 놀란다. 외계인을 봤다고 가족들에게 알렸지지만 외계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고, 아무도 엘리엇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자기 전 엘리엇은 사탕을 조금씩 흘려서 외계인을 꾀어내고, 방 창소 안에 외계인을 숨긴다. 다음날 아침 엘리엇은 꾀병을 부려 학교를 쉬고 외계인과 놀며 이것저것을 가르친다. 그날 오후 엘리엇은 형 마이클과 여동생 거티에게 외계인을 소개한다. 남매는 어머니에게 외계인의 존재를 숨기기로 한다. 남매가 외계인의 출신을 묻자 외계인은 창 밖을 가리키고, 초능력으로 공을 공중에 띄워 자신이 태양계 밖에서 왔음을 알려준다. 엘리엇이 손끝에 상처가 났을 때, 외계인은 빛나는 손가락을 맞대어 엘리엇의 상처를 치유해준다. 다음날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 외계인은 집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텔레비전을 보며 언어를 배운다. 엘리엇은 학교에서 개구리 해부 실습을 하게 되는데, 외계인의 행동과 감정을 학교에서 엘리엇이 똑같이 느끼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외계인이 술을 마시자 엘리엇이 취기를 느끼고, 실습용 개구리에게 동정심을 느껴 전부 풀어준다. 외계인이 보는 영화 속 장면을 엘리엇이 똑같이 따라하여 혼란 와중 같은 반 여자아이에게 키스도 한다. 외계인은 그 사이 거티와 놀면서 분장을 하고 스스로 '이티'라고 이름짓는다. 만화 속 주인공이 우주에서 연락을 하는 장면을 본 이티는 엘리엇에게 '집에 전화를 해야 한다'고 부탁한다. 마이클은 이티의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있으며, 엘리엇이 이티와 점점 이티와 일심동체가 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남매는 할로윈 파티를 틈타 이티를 분장시켜서 밖으로 내보내기로 한다. 엘리엇이 직접 자전거로 이티와 함께 이티를 발견한 숲속으로 향한다. 도중에 길이 끊기자 이티가 자전거를 공중에 띄워 숲을 가로지르고, 이티가 처음 도착했었던 장소에 오게 된다. 잡동사니들로 만든 통신기가 성공적으로 동작하지만 엘리엇은 어느새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이티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엘리엇이 간신히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은 엘리엇이 실종된 줄 알고 있었다. 엘리엇은 마이클에게 숲에서 이티를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마이클은 자전거를 몰아 숲속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이티를 찾아 데려온다. 이티가 쓰러지자 엘리엇도 앓게 되고, 곧 어머니 메리가 모든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때 정부 요원들이 집에 들이닥친다. 요원들은 엘리엇네 집에 의료 캠프를 설치하고 엘리엇과 이티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이티와 엘리엇의 정신연결이 끊어지고, 엘리엇은 건강해지지만 이티의 숨이 끊어지고 만다. 슬픔에 빠진 엘리엇이 이티를 바라보다 돌아서는데, 곧 이티의 가슴이 빛나면서 되살아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티의 동료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엘리엇은 이티를 잠시 죽은체하게 한 뒤, 마이클의 도움을 구해 이티를 실은 요원들의 차를 뺏어 타고 출발한다. 마이클의 친구들까지 가세해서 자전거로 요원들과 경찰들의 추적을 피하고, 궁지에 몰리자 이티가 자전거를 띄워 모두 날아가 버린다. 숲속에 돌아와 보니 이티의 동료들이 우주선을 타고 와 있었다. 마이클의 친구들과 메리, 정부 요원 키스가 보는 앞에서, 이티는 남매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이티는 마이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거티는 이티에게 화분을 선물로 준다. 그리고 이티는 엘리엇을 안아준 뒤 손끝을 맞대며 '나는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러고는 이티는 화분을 들고 우주선에 올라탄 뒤 떠난다. 배역 디 월리스 - 메리 헨리 토머스 - 엘리엇 피터 코요테 - 키스 로버트 맥노턴 - 마이클 드루 배리모어 - 거티 K. C. 마텔 - 그레그 C. 토머스 하월 - 타일러 숀 프라이 - 스티브 에리카 일레니액 - 예쁜 소녀 팻 웰시 - 이티 목소리 성우 한국판 성우진 MBC (1991년 11월 30일) 박영남 - 엘리엇(헨리 토머스) 배한성 - 이티 목소리(팻 웰시) 정희선 - 메리(디 월리스) 이영주 - 거티(드루 배리모어) 박기량 - 마이클(로버트 맥노튼) 황일청 - 키스(피터 코요테) 김순선 - 스티브(숀 프리에) 안정현 - 그레그(K. C. 마르텔) 김기현 - 의사(로버트 D. 머피) 홍승옥 - 의사(바바라 하트넷) 이윤연 - 의사(알렉산더 람포네) KBS (2004년 12월 24일) 박영남 - 엘리엇 (헨리 토머스) 나수란 - E.T (데브라 윙거) 윤소라 - 엄마 (디 월리스) 김우정 - 마이클 (로버트 맥노튼) 차명화 - 거티 (드루 배리모어) 임은정 정옥주 김태웅 박규웅 양정애 류다무현 정현경 사성웅 김래환 같이 보기 외계 생명 외부 링크 20주년 기념판 - 공식 웹사이트 1982년 영화 영어 영화 작품 미국의 SF 모험 영화 미국의 성장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영화 존 윌리엄스 영화 음악 외계생명을 소재로 한 영화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로스앤젤레스에서 촬영한 영화 유니버설 픽처스 영화 앰블린 엔터테인먼트 영화 1985년 소설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작 아카데미 음향편집상 수상작 아카데미 음향효과상 수상작 아카데미 시각효과상 수상작 골든 글로브상 드라마 작품상(영화) 수상작 미국 국립영화등기부 등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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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C%97%90%ED%95%98%EB%9D%BC%20%EB%A7%88%EC%BD%94%ED%86%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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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하라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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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하라 마코토(, 1984년 11월 14일~)는 일본의 킥복싱 선수이다. 일본 도쿄도 출신이며 키는 182cm, 체중은 92kg이다. 생애 K-1 격투 전적 33전 23승 1무 9패 정보 주 베이스는 가라테와 킥복싱이며, 가라테 도장 겸 킥복싱 체육관인 무라카미 학원 소속이다. 2008년 7월 아시아 GP에서 원래는 상대인 송빙난과의 리저브 매치에 출전하려 했지만 장칭준이 비자 문제로 결장하면서 토너먼트 8강전에서 박용수와 붙게 되었다. 3R까지 팽팽하게 맞써 그의 위협적인 펀치가 연장 라운드 1분 25초만에 박용수를 KO시켰다. 타이틀 사도관(士道館) 관동 대회 무차별급 글러브 가라테 2007 우승 사도관 전일본 스트롱 오픈 토너먼트 2007~08, 2010~11 우승 제2대 RISE 헤비급 챔피언 초대 RISE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외부 링크 우에하라 마코토 공식 사이트 1984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남자 킥복싱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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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B0%9C%ED%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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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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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발탄》(誤發彈)은 작가 이범선의 단편 소설로서, 1959년에 써졌다. 월남한 사람들의 당시 1950~1960년대 생활상을 소재로 하고 있다. 당시의 비참한 시대 상황을 '인간에 대한 사회의 학대와 배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잔혹한 것인가를 강력히 추궁'하는 고발문학으로서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줄거리 주인공 송철호는 한국 전쟁 이전에 월남해 와서 해방촌의 판잣집에 살면서 계리사 사무실의 서기로 일하고 있다. 실성해서 누워 있는 어머니는 월남한 이후 7년 동안 이어온 남쪽에서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고, 옛날 이북에서의 고향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듯 끊임없이 가자를 되뇌고, 음대 출신으로 한때 상당한 미인이었던 아내는 자신이 미인이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말을 잃어 가고, 누이동생 명숙은 양공주가 되었고, 어린 딸아이는 영양실조로 여위어 간다. 제대군인인 동생 영호는 양심과 윤리와 관습과 법을 훌훌 벗어던지며 인간답게 살것을 말한다. 하지만 결국 동생 영호의 한번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결심에도 불구하고 영호는 결국 경찰서에 들어가고 만다. 또한 철호의 아내가 출산 도중 죽게 된다. 낙심하고 절망하는 철호는...결국 이를 4개나 뽑은후 빈혈이 찾아온 상태로 택시를 타는데 목적지를 확실히 정하지 못하는게 오발탄처럼 되었다. 각주 1959년 소설 대한민국의 단편소설 서울특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 영화화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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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9E%91%EB%93%9C%EC%BD%94%EB%AA%A8%EB%A5%B4%EC%84%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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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드코모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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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드코모르섬() 또는 응가지자섬(코모로어: Ngazidja)은 코모로 제도 최북단에 위치한 섬으로 면적은 1,025km2, 인구는 316,600명(2006년 기준), 인구 밀도는 300.52명/km2이다. 코모로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다. 중심 도시인 모로니는 코모로의 수도이기도 하다. 코모로의 섬 코모로 제도 코모로의 자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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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D%9C%EB%A1%A0%EB%82%98%EA%B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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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론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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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론나 가문() 또는 콜론나가(Colonna家)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로마에서 세력 있는 귀족 가문으로, 교황과 그 외 많은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이들 일족은 1511년 교황 교서에 의해 진정될 때까지 오르시니 가와 로마의 패권을 놓고 싸워왔다; 1571년 두 집안의 우두머리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딸들과 결혼하였다. 오도네 콜론나는 교황 마르티노 5세로 선출되어 서구 대이교를 끝마쳤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콜론나 가문의 명칭은 튀스쿨룸 백작의 분가 -튀스쿨룸 백작 그레고리우스 3세의 아들 페트루스(1099-1151)에 의해- 로 그가 살던 콜론나에 있는 콜룸나 성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192년 콜론나 가문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된 조반니 콜론나는 산타 프리카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이 되었다. 1297년 야코포 추기경은 그의 형제 오토네와 마테오, 란돌포의 영지 기득권을 빼앗았다. 세 사람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청원하여 야코포에게 땅을 돌려줄 것을 명령하게 하고자 가문의 본거지인 콜론나와 팔레스트리나, 그 외 다른 마을들을 교황에게 이양하였다. 야코포가 거절하자 보니파시오 교황은 5월에 추기경단에서 그를 파직함과 동시에 그와 그의 추종자 네 명을 파문하였다. 콜론나 가문은 (교황과 동맹을 맺은 세 형제를 제외하고) 교황 첼레스티노 5세의 사직 후 선출된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해 불법적으로 선출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분쟁이 일어나자, 9월에 교황 보니파시오는 란돌포에게 교황군의 지휘를 맡기며 그의 일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란돌포는 교황의 명령에 따라 1298년 콜론나와 팔레스트리나, 다른 마을에 들어가 점령한 다음 남김없이 파괴하였다. 가문의 영지는 교황에게 충성스러운 란돌포와 그의 형제들에게 골고루 배분되었으며, 간신히 살아남은 나머지 일족들은 이탈리아 밖으로 달아났다. 1300년대 콜론나 가문은 뛰어난 바닥 모자이크를 비롯한 산 조반니 성당의 장식을 후원하였다. 1728년 줄리오 체사레 콜론나 디 스치아라가 바르베리니 가문의 마지막 남자인 타데오 바르베리니의 딸 코르넬리아 바르베리니와 결혼했을 때 콜론나 가문은 바르베리니라는 이름을 성씨에 추가하였다. 1710년 이래 교황의 제후였던 콜론나 가문은 1854년부터 그들만이 유일하게 교황의 제후 칭호를 얻었다. 로마에 있는 가문의 주거지는 콜론나 궁전으로, 오늘날에는 대중에게 공개하고 있다. 유명한 인물 비토리아 콜론나, 미켈란젤로의 친구. 스치아라 콜론나,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반대한 아나니의 폭행에 참여했다. 스테파노 콜론나, 14세기 초 황제 대리로 중세 로마의 영향력 있는 귀족. 교황 마르티노 5세 파브리지오 콜론나, 비토리아 콜론나의 아버지이자 신성 동맹의 장군. 프로스페로 콜론나, 사촌 파브리지오와 함께 참전했다.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 마르캉토니오 콜론나, 16세기 후반의 콘도티에리. 피에로 콜론나, 16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휘하 선장 프란체스코 콜론나, 본문의 아크로스틱에 의해 히프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의 원작자로 믿어지고 있음. 외부 링크 콜론나 궁전 공식 사이트 교황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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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A0%81%EB%B6%84%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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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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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분학(微積分學, )은 수학의 한 분야로 극한, 함수, 미분, 적분, 무한급수를 다루는 학문이다. 미분은 도함수라는 정의역에서 미소한 차이에 대한 함수값의 차이 값의 비를 구한다. 그 값은 곡선의 기울기로 해석한다. 또 넓이, 부피, 길이 등은 곡선으로 제한된다. 여기서 "곡선"은 직선을 의미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또 극한을 구하는 과정을 유도하는 무한 과정 또는 궁극점(일반적으로 구하는 값)에 접근해 가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2가지 방법은 수학적 해석학의 토대가 되고 있다. 기하학이 모양에 중심을 둔 학문이고 대수학이 연산에 대한 수학이라면, 미적분학은 변화에 중점을 둔 수학이다. 미적분학은 크게 2개의 분야로 분류되는데, 미분과 적분이 바로 그것이다. 미분은 미소적인 변화를 다루는 분야이고, 적분은 미소적인 양의 집적을 다루는 분야이다. 미분의 기하학적 의미를 보면, 특정 함수 그래프의 어떤 점에서 접선, 혹은 접평면을 구하는데 필요한 연산이다. 더 일반적으로, 미분은 원래는 어렵게 정의된 함수를 선형근사해서 다루기 쉬운 형태로 바꾸어 파악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미분은 선형사상이 된다. 그래서 선형 대수학에서 미분가능한 함수들의 선형공간을 다룰 때 중요한 선형사상으로 여겨진다. (단, 다변수 함수의 미분을 선형사상으로 취급하는 방식은 20세기에 들어서부터 확립됐다.) 미분방정식은 이런 사고의 자연스러운 연장 선상에 있다. 적분은 기하학적으로 보면, 곡선 또는 곡면과 좌표축으로 둘러싸인 영역의 면적을 구하는 것에 해당된다.(단, 이때는 절댓값 기호를 씌워서 곡선 또는 곡면을 x축위로 꺾어올렸을때의 상태이다.)(실제 적분의 기하학적인 의미는 y좌표, 즉 길이들의 합이다.) 그러나 적분의 의미는 오랫동안 확실하게 파악되지 못하고 있었다. 적분의 확실한 정의를 내린 사람은 베른하르트 리만이 최초이다. 리만이 생각한 적분을 정식화한 것을 리만 적분이라고 한다. 적분 또한 선형사상이다. 미분과 적분은 완전히 별개의 개념이지만,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변수가 하나인 경우, 하나가 나머지의 역연산이 된다. 이를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라고 부른다. 역사 고대 시기 적분을 이끌어내기 위한 몇 가지 아이디어들은 고대에서부터 시작됐지만 이 시대의 방법들은 수학적으로 엄밀하지도 않고 체계적이지 않았다. 모스크바 수학 파피루스(Moscow mathematical papyrus)에서 적분의 목표 중 하나인 부피계산법들이 나와있으나 이것들은 방법으로서 설명이 부족하고 몇 가지는 틀렸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Eudoxus)가 극한의 개념과 유사한 문제의 철저 검토법을 사용했고 아르키메데스는 이 방법을 발전시킨 발견적 교수법이라는 적분과 비슷한 방법을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유휘가 3세기에 원의 넓이를 구하기 위해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와 같은 방법을 발명하였다. 중세 시기 중세 시대에는 인도에서 미적분학의 기초가 다져졌다. 14세기 인도 수학자 마다바(Mādhava of Sañgamāgrama)와 케랄라 학파(Kerala school of astronomy and mathematics)가 테일러 급수, 무한급수의 근사법, 수렴에 대한 적분판정법, 미분의 초기형태, 비선형 방정식 풀이를 위한 방법, 곡선 아래부분이 차지하는 넓이가 적분값과 같다는 이론 등 미적분을 위한 많은 요소들을 기술하였다. 근대 시기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는 무한소 오차항이 있어도 등호가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adequality 개념을 소개했으며, 미분해서 0이 되는 곳을 구하여서 극대 극소를 찾는 법을 만들었다. 아일랜드 수학자 제임스 그레고리(James Gregory)이 미적분학의 핵심 정리인 미적분학 기본정리의 증명을 출판하였으며, 영국 수학자 아이작 배로(Issac Barrow)가 좀 더 일반적인 경우를 증명하였다. 무한소 미적분과 유한차 미적분의 결합은 두 번째 미적분학 기본정리가 증명되고 2년이 지나서 존 월리스(John Wallis), 아이작 배로(Issac Barrow)와 제임스 그레고리(James Gregory)에 의해 1670년경에 완성됐다. 이후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아이작 뉴턴이 당시 알려져 있던 미적분학을 좀 더 체계화하고 발전시켰다. 아이작 뉴턴은 그가 수리물리학 문제를 풀 때 사용했던 이상한 형태의 곱의 미분법, 연쇄법칙, 고계도 미분계수의 개념, 테일러 급수와 해석함수를 공개했다. 하지만 그가 출판물로 낼 때는 그 시대의 수학적 표현방법에 맞게 그의 아이디어와 동등한 의미를 지니는 기하적 표현으로 그의 아이디어를 적어냈다. 뉴턴은 그의 책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거론한 행성의 운동, 회전하는 유체 표면의 모양, 지구의 편평도, 사이클로이드에서 미끄러지는 물체의 운동 같은 문제들을 푸는 데 미적분을 사용했다. 뉴턴은 미적분과 함께 함수의 급수를 실수의 범위로 확장했고 테일러 급수의 원칙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이뤄낸 모든 발견을 출판하지는 않았고 이 시대에 무한소를 이용한 방법은 여전히 평이 좋지 않았다. 그의 아이디어들은 뉴턴이 자신을 표절했다고 고소한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에 의해서 참된 무한소 미적분으로 체계화됐다. 뉴턴은 그를 표절자로 여겼지만, 현재는 그도 독립적으로 얻은 것임이 밝혀졌다. 그는 무한소를 다루는 규칙들을 명확하게 정리했고 2계도 이상의 미분을 가능하도록 해줬으며 곱의 미분법과 연계법칙을 미분 적분 형태로 모두 만들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모두 미적분학에 기여한 자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둘의 미적분의 성격은 다르다. 뉴턴은 미적분을 물리학에서 활용한 첫 번째 사람으로, 라이프니츠는 오늘날 사용하는 미적분 표기법의 대부분을 만든 사람으로 여겨진다. 또 라이프니츠는 뉴턴과는 달리 형식을 중시해서 알맞은 표현법을 만들어내는데 며칠을 쓰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미적분에서 규정한 기본적인 사항들로는 미분과 적분의 법칙들, 2계도 이상에서의 미분, 다항 함수 급수의 근사에 대한 개념들이 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 이전에 미분과 적분이 역관계라는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들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라이프니츠가 그의 결과를 발표하고 뉴턴이 그의 아이디어에 대해서 권리를 주장하자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사람을 우선권자로 인정을 해야 하느냐는 주제로 큰 논란이 일었다. 뉴턴이 최초로 결과를 이끌어 낸 사람이지만 출판을 한 것은 라이프니츠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자신이 출판하지 않고 왕립학회에서 공유한 노트들에서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주장했다. 이 논란 때문에 영국 수학자들과 유럽 대륙의 수학자들이 오랫동안 갈라지게 되고 이는 영국 수학에 큰 손실을 초래했다. 현재는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논문에 대한 면밀한 조사 덕분에 그들이 독립적으로 결론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 밝혀졌다. 라이프니츠는 적분에서부터 뉴턴은 미분에서부터 시작해서 결과를 도출해냈다. 이 시대 이후에 수많은 수학자들이 미적분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첫 번째로 가장 성공적이었던 업적 중 하나로 마리아 아녜시가 1748년에 쓴 무한과 유한 분석이 있다. 기초 미적분학에서 기초(foundations)는 정확하고 엄밀한 공리와 정의들의 발전을 말한다. 초기 미적분학에서 사용한 무한소는 엄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많은 수학자들에게 특히 미셸 롤과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에게 맹렬하게 비난 받았다. 버클리는 그가 1734년에 출판한 《해석학자》()라는 책에서 무한소를 ‘사라진 값들의 유령’()이라고 묘사했다. 미적분학의 엄밀한 기초를 도출해내는 일은 여러 수학자들이 제공했고 오늘날까지도 연구활동이 있는 분야다. 콜린 매클로린(Colin Maclaurin)을 포함한 다수의 수학자들이 무한소의 사용이 정당하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했지만 그것은 150년이 지나서야 오귀스탱 루이 코시와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에 의해서 증명됐고 무한소의 의미가 극히 작은 값이라는 관념을 막을 방법을 찾았다. 이것이 미분과 적분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코시의 필기에서 무한소의 형태로 적혀진 연속의 정의와 극한의 (ε-δ) 정의의 원형 등의 기초에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코시의 업적에서 바이어슈트라스는 극한의 정의를 공식화 시키고 무한소의 개념을 없애버린다. 바이어슈트라스의 작업에 따라서 미적분학은 무한소가 아닌 극한에 기초하는 것이 일반적이게 됐다. 베른하르트 리만은 바이어슈트라스의 개념을 사용해서 적분의 정확한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발견의 기간 동안 미적분학의 아이디어들은 유클리드 공간과 복소평면에서 일반화됐다. 현대 수학에서 미적분학의 기초는 미적분학의 정리에 대한 완전한 정의와 증명들을 포함하는 실해석 분야에 포함되어 있고 미적분학의 범위는 엄청나게 확대됐다. 앙리 르베그는 측도론을 만들어서 거의 모든 함수에서 적분을 가능하게 했다. 로랑 슈바르츠는 어떤 함수도 미분시킬 수 있는 분포 이론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극한의 개념을 미적분학의 기초로 두지만 극한이 미적분학의 기초에 대한 유일한 접근법은 아니다. 에이브러햄 로빈슨(Abraham Robinson)의 비표준해석학이 대안책이다. 1960년대에 만들어진 로빈슨의 접근법은 미적분학 초창기에 사용했던 개념인 무한소와 무한수로 실수체계를 늘린 체계를 사용한다. 그 결과로 나온 수를 초실수라고 부른다. 초실수는 미적분학의 일반적인 법칙들을 라이프니츠의 방식처럼 이끌어 낼 수 있다. 함수 함수의 정의 함수 란 집합 안에 있는 원소 가 집합 에 있는 정확히 한 원소, 에 대응되는 규칙을 말한다. 여기서 집합 는 정의역이라하고 는 공역이라고 한다. 또한 정의역에 있는 임의의 수를 나타내는 기호를 독립변수, 공역에 있는 원소를 나타내는 기호를 종속변수라고 한다. 함수의 표현방법 함수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말로 설명하는 방법, 표를 이용하는 방법, 그래프를 이용하는 방법, 대수학적 식으로 표현하는 방법 등이 있다. 극한 극한의 정의 는 가 로 다가갈 때 가 로 다가간다는 것이다. 극한에는 좌극한과 우극한이 존재하는데 좌극한이란 가 보다 작은 곳에서 로 다가갈 때 가 다가가는 값을 의미하고 우극한은 반대로 가 보다 큰 곳에서 다가간다. 좌극한과 우극한은 기호로 각각 , 라고 표시한다. 극한값이 라는 것과 좌극한과 우극한 모두 라는 것은 필요충분조건이다.는 가 로 다가갈 때 는 무한히 커진다는 것이고 는 무한히 작아진다는 것이다. 엡실론-델타 논법 극한의 더 정확한 수학적 정의는 엡실론-델타 논법이다. 는 모든 양수 에 대해 만약 면 인 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기호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이 방법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극한들을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 : : : : : : 극한의 성질 가 상수이고 와 가 존재할 때 다음 성질들을 만족한다. 극한에 관한 정리 만약 근처 에서 이고 둘다 에서 극한값이 존재한다면 이다. 샌드위치 정리(조임 정리): 만약 근처 에서 이고 세 함수 모두 에서 극한값이 존재하고 이라면 이다. 연속 함수 가 에서 연속 에서 정의된 함수 가 다음의 조건을 만족할 때 는 인 점에서 연속이라고 한다. () 에서 함숫값 가 존재한다. 에서 극한값 가 존재한다. 에서 함숫값과 극한값이 일치한다. 함수 가 연속 함수 가 정의역에 존재하는 모든 에서 연속일 때, 는 연속함수라고 한다. 정의역 이외의 에 대해서 불연속이더라도, 함수의 연속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은 이외의 모든 점에서 연속이다. 에서는 함숫값이 정의되지 않아 불연속이지만, 은 정의역에 있지 않는 수이므로 함수 는 연속함수이다. 균등연속(Uniform Continuity) 함수 f(x)가 모든 정의역에서 연속이면, 정의역의 모든점 에 대해서 ε-δ 논법에 의해 모든 ε>0에 대해 00이 존재한다. 만약 모든 에 대해서 δ가 같다면, 즉, δ가 에 변화에 따르지 않고 오직 ε의 변화에만 따른다면, 이 함수 f(x)가 균등연속(Uniformly continuous)이라고 한다. 제거 가능한 불연속성 함수 f(x)가 에서 불연속이지만 를 적절히 정했을 때 연속이 될 수 있다면, 는 에서 제거 가능한 불연속성을 지닌다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라면, 인 점에서 함숫값이 정의되지 않아 불연속이다. 그러나 로 극한값이 존재하므로 만약 로 함숫값을 정하면 불연속성이 제거될 수 있다. 따라서 함수 는 x=0인 점에서 제거 가능한 불연속성을 지닌다. 미분 도함수 그래프 에서 점을 통과하는 접선은 기울기 를 가진다. 여기서 라고 하면 가 된다. 함수 의 도함수 란 를 의미한다. 도함수 표현법에는 등이 있다. 도함수를 한번 더 미분한 것을 이계도함수라고 한다. 이계도함수의 표현법에는 등이 있다.이계도함수를 또 한번 더 미분한 것을 삼차도함수라고 하고 이것은 등으로 표현한다. 를 번 미분한 것은 등으로 표현한다. 미분 가능성 함수 가 에서 미분 가능하다는 말은 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구간에서 미분가능하다는 말은 구간 내의 모든점에서 미분가능하다는 것이다. 함수 가 점 에서 미분 가능하다는 말은 에서 연속하다는 것이다. 미분 불가능한 경우에는 좌미분계수와 우미분계수값이 다르거나 불연속하거나 수직 접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직접선이란 일 때 에서 수직 접선을 가진다. 미분의 성질 는 상수이고 는 미분 가능할 때 다음을 만족한다. 삼각함수의 미분 이다. 이것을 이용하여 삼각함수의 미분을 할 수 있다. 삼각함수들의 미분은 다음과 같다. 연쇄법칙 가 에서 미분가능하고 가 에서 미분가능하면 는 에서 미분가능하고 로 표현된다. 이것을 다른방식으로 표현하면 와 가 미분가능한 함수면 이다. 음함수 미분법 일반적으로 함수는 로 표현된다. 하지만 나 와 같이 표현되는 음함수도 존재한다. 이런 함수를 미분할 때는 이 함수를 형태로 바꿀 필요 없이 음함수 미분법을 사용하면 된다. 이 방법은 양변을 모두 에 대하여 미분을 한 뒤, 에 대한 방정식을 풀면 된다. 예를 들어 는 양변을 로 미분하면 가 돼서 가 된다. 지수, 로그 함수의 미분 지수함수 를 정의를 이용해 미분하면 이다. 이때 이므로 이다. 이때 이 되는 를 라고 한다. 즉, 이고 이다.일 때, 라고 정의한다. 이때 를 밑이라고 하는데 밑이 인 로그를 자연로그라고하고 라고 표현한다. 즉, 이다. 를 임을 이용하여 미분하면 임을 알 수 있다. 이 자연로그의 미분을 이용하여 일반적인 밑을 가지는 지수, 로그 함수의 미분을 구하면 다음과 같다. 적분 역도함수(부정적분) 모든 에 대하여 일 때 함수 를 구간 에서의 의 역도함수(부정적분)라고 한다. 여기서 F가 f의 부정적분이면 일반적으로 F+C도 f의 부정적분이다. 여기서 C는 임의의 상수이다. 정적분 함수 f가 구간 [a,b]에서 정의된 연속함수 일 때, 구간 [a,b]를 동일한 n개의 폭 으로 분할하여, 이 n개의 부분구간들의 끝점들을 이라하자. 에 속하도록 표본점 을 잡자. 이 때 가 존재하면, 그 값을 a로부터 b까지의 f의 정적분이라고 하고, 함수 f는 구간 [a,b]에서 적분 가능하다고 한다. 이 때 표본점은 각구간의 끝점 또는 중점으로 잡는다. 일반적으로 함수f가 구간 [a,b]에서 유한개의 불연속점을 가지면 f가 구간[a,b]에서 적분 가능하다. 정적분의 성질 1. 2. (단, 는 임의의 실수)3. 4. 5. 인 에 대해서 이면 이다. 6. 인 에 대해서 이면 이다. 7. 인 에 대해서 이면 이다. 8. 이면 미적분학의 기본정리 함수 가 구간 에서 연속이면, , 로 정의된 함수 는 에서 연속이고 에서 미분가능하며, 이다. {| class="toccolours collapsible collapsed" width="90%" style="text-align:left" !증명: |- |와 가 안에 있다고 하면 따라서 인 에 대해 이다. 이제 임을 가정하자. 극값정리(에 의해) 이고 인 가 안에 존재한다. (은 각각 함수 의 에서의 최솟값과 최댓값) 따라서이다. 에 의해 이고, , 인 경우도 비슷한 방법으로 이 부등식을 얻을 수 있다.가 에 가까워질때, 가 안에 있으므로 는 에 근접하게 된다. 따라서이다. 그러므로 압축정리에 의해서()이다. |} 함수 가 닫힌 구간 에서 연속이면, 이다. 여기에서 는 의 임의의 역도함수, 즉 이다. {| class="toccolours collapsible collapsed" width="90%" style="text-align:left" !증명: |- |로 놓으면 위의 기본정리에 의해 이다.의 임의의 도함수 는 와 상수만큼 차이가 있다. 여기서 C는 상수라고 하자. 따라서 이다. |} 치환 법칙 함수 가 미분 가능하고, 그 치역이 구간 I이며 함수 f가 구간 I에서 연속이면, 이다. 정적분에 대해 변형시키면, 함수 g'이 [a,b]에서 연속이고, 함수 f가 의 치역에서 연속이면, 이다. 부분적분법 두 미분가능한 연속 함수 와 에 대해서, 적분 구간이 일 때, 부분적분법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이때 우변의 첫째 항은 다음을 나타낸다. 이 법칙은 다음과 같이 미분의 곱셈 법칙과 미적분학의 기본정리로 증명할 수 있다. {| |- | | |- | | |} 부정적분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다. 또는, 짧게 줄여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서, 이고, 이다. 넓이 [a,b]안의 모든 x에 대하여 f,g가 연속이고, ≥일 때, 곡선,와 직선 ,로 둘러싸인 영역의 넓이 A는 로 정의된다. 부피 S를 와 에 놓인 입체도형이라 하자. x를 지나고 x축에 수직인 평면 Px에 있는 S의 절단면의 넓이가 A(x)이고, A가 연속이라면 S의 부피(V)는 이다. 회전체의 경우, 위의 방법으로는 부피를 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회전체의 부피의 경우, 아래와 같은 방법을 이용한다. 곡선 와 및 로 둘러싸인 영역을 축을 둘레로 회전시킬 때 생기는 회전체의 부피는 다음과 같다. 속도와 거리 수직선 위를 움직이는 점 P의 시각 에서의 속도가 이고, 시각 에서의 위치가 일 때, 다음이 성립한다. 시각 에서 점 P의 위치 는 시각 에서 까지 점 P의 위치의 변화량은 시각 에서 까지 점 P가 움직인 거리 s는 좌표평면 위를 움직이는 점 P의 시각 에서의 위치 가 , 일 때, 시각 에서 까지 점 P가 움직인 거리 s는 다음과 같다. 곡선 , 의 겹치는 부분이 없을 때 길이 은 다음과 같다. 곡선 의 길이 은 다음과 같다. 급수 급수(級數)란 수학에서 수열들의 각 항의 합을 의미한다. 즉, 급수란 여러 수들의 합연산으로 표현된다. 급수의 예로는 아래와 같은 등차수열의 합이 있다. 1 + 2 + 3 + 4 + 5 + ... + 99 + 100 급수에 더해지는 각 항들이 어떤 공식이나 알고리즘에 의해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난수들로 이루어진 급수도 생각할 수 있다. 급수는 유한 급수와 무한급수로 나눌 수 있다. 유한 급수의 경우 기초적인 대수학의 법칙들만 사용하여도 그 값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무한급수는 그 정확한 합을 구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의 여러 정리들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등차수열들의 합으로 이루어진 급수의 경우,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등비수열의 합으로 이루어진 급수의 경우,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무한급수 무한급수는 위의 , 즉 급수의 부분합으로 이루어지는 수열의 극한값으로 생각한다. 이 무한대로 갈 때, 그 극한이 유한한 값을 갖는다면 이 급수가 수렴한다고 한다. 만약 이 값이 무한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급수는 발산한다고 한다. 무한급수의 수렴을 판정하는데는 비교판정법, 적분판정법, 일반항판정법, 멱근판정법, 비율판정법 등이 있다. 멱급수 주어진 수열 와 변수 에 대해서 를 수열 a로부터 얻은 멱급수라고 부른다. 가 존재한다고 하자. 이때, 이 수열의 멱급수는 일 때 수렴한다. 테일러 급수 원점 을 포함하는 구간I에 대해서 정의된 n번 미분가능한 함수 f:I→R 에 대하여 의 차 근사 다항식이라하고, 를 차 테일러 나머지 항이라고 하자.그리고 원점 근방에서 정의된 무한번 미분 가능한 함수 에 대하여 멱급수 를 의 테일러 급수라고 한다. 테일러 급수가 원래 함수에 수렴할 필요충분조건은 이다. 교육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미적분학을 가르치고 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에서는 고등학교의 "수학 II" 과목과 "미적분" 과목에서 미적분학을 배운다. 같이 보기 푸리에 급수 각주 적분학 독일의 발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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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D%99%94%20%28%ED%99%94%ED%8F%9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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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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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銅貨)는 구리를 재료로 해서 만들어진 화폐를 말한다. 구리는 부식에 비교적 강한 금속이지만, 순동으로 동화가 제조되는 것은 드물고, 대부분 청동화로 주조된다. 일반적으로 동화는 청동화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노란 황동화나 하얀 백동화도 동화의 범주에 들어간다. 현재 금화나 은화는 주로 소장용, 수집용, 축재용으로 이용되지만, 동화는 유통용 화폐로써 널리 이용되고 있다. 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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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2006%EB%85%84%20%EC%9B%94%EB%93%9C%20%EB%B2%A0%EC%9D%B4%EC%8A%A4%EB%B3%BC%20%ED%81%B4%EB%9E%98%EC%8B%9D%20%EA%B2%B0%EC%8A%B9%20%ED%86%A0%EB%84%88%EB%A8%BC%ED%8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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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 토너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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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 토너먼트는 미국 샌디에이고에 위치한 펫코 파크에서 열렸다. 대진 경기 준결승 쿠바 vs 도미니카 공화국 2006년 3월 18일 - 12:00 펫코 파크 일본 vs 대한민국 2006년 3월 18일 - 19:00 펫코 파크 결승 2006년 3월 20일 - 18:00 펫코 파크 외부 링크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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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84%ED%98%B8%EC%BF%A0%20%EB%B0%A9%EC%86%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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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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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 방송은 미야기현에 처음 세워진 민영 방송국으로 라디오 방송국은 1952년 5월 1일, 텔레비전 방송국은 1959년 4월 1일 개국했다. 약칭은 TBC, 라디오 콜사인은 JOIR, 텔레비전 콜사인은 JOIR-DTV이다. 텔레비전 네트워크는 JNN·TBS, 라디오는 JRN과 NRN의 크로스 네트워크 방송국이다. 라디오 주파수 연혁 1950년 6월 1일 - 민간방송 개설을 신청한 가호쿠 방송·도호쿠 방송·센다이시영 방송의 삼자가 면허 신청 일원화를 결정 1951년 1월 15일 - 회사명을 라디오 센다이로 결정 1951년 1월 17일 - 라디오 센다이, 방송국 개설을 신청 1951년 4월 21일 - 라디오 센다이에 예비 면허 교부(호출 부호 JOIR) 1951년 11월 30일 - 창립 총회 개최, 회사명을 센다이방송 주식회사로 결정 1951년 12월 10일 - 센다이방송 주식회사 설립(현재의 센다이 방송과는 관계없음), 통칭은 라디오 센다이 1952년 3월 26일 - 시험 전파 발사 1952년 4월 5일 - 면허교부와 동시에 서비스 방송 개시 1952년 5월 1일 - 일본 11번째, 도호쿠 지방 첫 번째 민영 라디오 방송국으로서 라디오 본방송 개시(출력 3kW). 1953년 1월 26일 - 회사명을 도호쿠 방송 주식회사로 변경 1955년 10월 1일 - 약칭을 TBC로 결정 1959년 4월 1일 - 미야기현 첫 텔레비전방송 개시 8월 1일 - 뉴스 네트워크 JNN발족과 동시에 가맹 1962년 10월 1일 - 센다이방송 개국에 의해 니혼 TV·후지 TV 프로그램 전부, NET-TV 프로그램 대부분이 중단된다. 1964년 9월 23일 - 컬러 방송 개시 1965년 5월 2일 - TBS 라디오를 중심국으로 한 라디오 네트워크 JRN 발족과 동시에 가맹. 1965년 5월 3일 - 닛폰 방송과 분카 방송을 중심국으로 한 라디오 네트워크 NRN 발족과 동시에 가맹. 1970년 10월 - 올나이트 니폰방송 개시 1972년 3월 1일 - 출력을 20kW로 증력 1975년 10월 1일 - 히가시닛폰 방송개국에 의해 남아 있던 NET-TV(일본교육 TV) 프로그램이 중단되어 도쿄 방송 완전가맹국이 된다. 1980년 3월 20일 - 텔레비전 음성다중방송 시작 1991년 4월 23일 - SNG 고정형 지구국 완성 2005년 12월 1일 -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본방송을 개시(NHK 센다이 방송국, 센다이 방송, 미야기 TV 방송도 동일 개시) 2006년4월 21일 - 원세그개시 2012년 3월 31일 - 지상파 아날로그 텔레비전 방송 종료. 2017년 5월 1일 - 센다이 FM 보완중계국 개국 2020년 1월 6일 - CI 변경(대문자 TBC에서 소문자 tbc로) 텔레비전 네트워크 변천사 1959년 4월 1일 도호쿠 지방에서 첫 번째로 텔레비전 방송 개시.니혼TV·라디오도쿄 TV·후지 텔레비전·일본교육테레비와 네트워크 관계를 맺는다. 1959년 8월 1일 뉴스 네트워크 JNN에 가맹.뉴스는 라디오도쿄테레비, 그 이외의 프로그램은 TBS계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한 프리 네트워크 방송이 된다. 1962년 10월 1일 센다이 방송개국에 의해 후지 TV·니혼TV 프로그램이 중단된다.그리고 NET-TV의 프로그램도 대부분 센다이 방송으로 이행되었다. 1967년 6월 민간방송 교육협회에 가맹. 1975년 3월 31일 준 중심방송국 네트워크 교체에 의해 간사이 준 중심방송국을 마이니치 방송으로 변경하지만 일부 아사히 방송 제작 프로그램은 프로그램 판매 형식으로 계속 방송했다. 1975년 10월 1일 히가시닛폰 방송 개국에 의해 민간방송 교육협회 제작 프로그램을 제외한 나머지 NET-TV 프로그램이 중단되면서 도쿄방송 완전가맹국이 되었다. 보충서술 1950년대 전반 아오모리현에 라디오 방송국을 설치하려고 했으나 아모모리현의 지역신문인 도오일보가 라디오 아오모리(현재의 아오모리 방송)을 개국시키면서 무산되었다. 텔레비전 방송국 개국전후로 니혼TV 자본이 많이 투자되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도호쿠방송 사사에는 그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같은 현에 있는 ANN계열 방송국 히가시닛폰 방송과 대조적으로 도호쿠 지역의 다른 JNN계열국과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극히 적다. 도호쿠방송에 소속된 차량의 차량번호는 대부분 라디오 주파수와 1260번이며 라디오 주파수인 1260KHz는 1978년 전 세계적으로 실시한 중파방송국 주파수 간격 이동때도 변경된 적 없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 미야기현에 있는 다른 텔레비전·라디오 방송국 NHK 센다이 방송국 센다이 방송(OX)(후지 TV 계열) 미야기 TV 방송(MMT)(니혼 TV 계열) 히가시닛폰 방송(KHB)(TV 아사히 계열) FM센다이(JFN 계열) 각주 외부 링크 TBC 도호쿠 방송 공식 사이트 재팬 뉴스 네트워크 재팬 라디오 네트워크 NRN 일본의 AM 라디오 방송국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사 1951년 설립된 기업 1959년 설립된 텔레비전 방송국과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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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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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0%B0%EC%8A%A4%20%EC%9C%8C%EB%A6%AC%EC%97%84%20%EC%95%A8%EC%BD%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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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윌리엄 앨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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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윌리엄 앨콕(, 1842년 12월 2일 ~ 1907년 2월 26일)은 잉글랜드의 운동가이자 행정가이다. 그는 국제 축구와 크리켓 창시에 많은 역할을 한 인물로서, FA컵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다. 생애 및 경력 그는 선덜랜드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어릴적에 남쪽으로 이사하였다. 해로 스쿨에서 교육받을 당시에 그는 학교 축구선수로 활동을 하였고, 1859년에 포레스트 FC(Forest Football Club)이라는 축구팀을 친형 존과 만들었다. 그는 후에 1863년에 포레스트 FC의 후신으로 만들어지는 원더러스 FC에 몸담게 되면서, 해로 스쿨의 졸업생 가운데 두각을 나타냈다. 선수로서의 앨콕은 정확한 슛과 함께 열심히 뛰는 중앙공격수로 유명하였다. 1875년 3월 6일, 그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2-2 경기에서 득점을 하였다. 이 경기는 그의 유일한 국제 경기로 남아 있다. 축구 1871년 7월 20일,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비서관으로서 앨콕은 "축구 협회의 모든 팀이 참가하여 경쟁하고, 축구 협회와 관계된 챌린지 컵을 신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는 제안을 하였다. 이렇게 세계 최초의 축구 대회인 FA컵이 해로우 스쿨에서의 서든 데스 방식의 대회의 앨콕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탄생하였다. 1872년의 첫 번째 대회에는 15개 팀이 참가하였다. 앨콕은 첫 번째 대회를 우승한 원더러스 FC의 주장으로 출전하였다. 하지만 그는 3월 16일에 열린 결승전 단 한경기에만 출전하였는데, 바로 전달에 그는 서리 주 크리켓 클럽(Surrey County Cricket Club)의 사무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앨콕의 생각이 구체화되어 "스코틀랜드에서의 협회의 인기를 더 얻기 위해, 현 시즌 동안 글래스고에 팀을 보내어 스코틀랜드와의 경기를 펼치기로 결정하였다"라고 1872년 10월 3일에 언급하였다. 세계 최초의 국제경기가 1872년 11월 30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간에 펼쳐졌고 0-0으로 끝났다. 1866년에 축구 협회 위원회에 들어간 후로, 앨콕은 1870년부터 1895년에 명예재무상 및 부의장이 될 때까지 축구 협회 사무관으로 일하였다. 앨콕은 1875년과 1879년의 FA컵 결승전의 심판을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기자로서 1868년에 첫 번째 축구 연감(Football Annual)을 편집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앨콕은 1874년에 현대에 통용되는 축구 경기의 전신을 설명하기 위해 "컴비네이션 게임"(combination game)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내가 '컴비네이션 게임'이라고 칭하는 것보다 성공한 것은 없다."(Nothing succeeds better than what I may call a 'combination game''') 크리켓 크리켓에서 그는 에섹스주 크리켓 클럽(Essex County Cricket Club)에서 뛰기 전까지, 미들섹스주 크리켓 클럽(Middlesex County Cricket Club)의 주장을 맡아 1867년에 첫 번째 주(州) 경기를 하였다. 그는 단 한번의 1부 경기에 출전하였다. 1872년부터 1907년까지 서리주 크리켓 클럽의 사무관을 지냈다. 그의 스포츠 국제 경기에 대한 관심은, 첫 번째 크리켓 테스트 경기가 잉글랜드에서 벌어졌는데, 잉글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경기로 1880년에 더 오발에서 열렸다. 그는 또한 사반세기 동안 존재했던 신문인 크리켓''에서 "레드 릴리화이트"라는 연보를 1872년부터 1900년까지 편집하였다. 찰스 윌리엄 앨콕은 런던 남부의 웨스트놀우드 묘지에 안장되었다. 각주 외부 링크 영국 축구의 전설 프로필 잉글랜드의 첫 번째 테스트 경기의 100주년 기념 찰스 윌리엄 앨콕의 잉글랜드 프로필 1842년 출생 잉글랜드의 남자 축구 선수 1907년 사망 잉글랜드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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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B%A6%AC%EC%99%95%EC%82%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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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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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加里王山)은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과 평창군에 걸쳐 있는 산이다.오대산의 남쪽에 있으면서 높이도 비슷하여 오대산과 더불어 태백산맥의 지붕노릇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육산이며 능선에는 고산식물인 주목, 잣나무, 단풍나무등 각종 수목이 울창하다. 갈왕(葛王)이 난을 피하여 숨어든 곳이라 하여 갈왕산(葛王山)이라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가리왕산(加里王山)으로 불리고 있다. 정선아리랑의 고장이다. 지금은 가리왕산 안에 국립 자연 휴양림이 있으며 예약은 국립휴양림( 이용 가능하다 등산로 코스 가리왕산에는 등산로 코스가 3곳이 있다. 가리왕산 1코스는 총거리가 4.9Km 이고, 심마니교에서 시작하여 장구목이까지 이어지는 등산로 코스이다. 소요시간은 약 2시간 55분이 걸린다. 가리왕산 2코스는 총거리가 5.93Km 이고, 매표소에서 시작하여 정상까지 이어지는 등산로 코스이다. 소요시간은 약 3시간이 걸린다. 가리왕산 3코스는 총거리가 3.82Km 이고, 장구목이에서 시작하여 정상까지 이어지는 등산로 코스이다. 소요시간은 약 3시간이 걸린다. 자연휴양림 1993년에 개장하여 수용인원은 하루에 500~1000명 정도이다. 숙박시설로 객실 24개 야영장 45개를 가지고 있다. 주변 시장현황으로는 정선군은 주변에 대학이 없고 대규모 기업체로는 사북읍에 위치한 강원랜드가 유일한 실정이나 축제 및 행사는 풍부한 편으로 9월말경 에 열리는 정선 아리랑제, 매월(2,7,12,17,22,27일)마다 열리는 정선오일장, 매년 6월 열리는 두위봉 철쭉축제, 10월 중순에 열리는 민둥산 억새꽃 축제, 1월중 북면 구절리 역에서 열리는 정선 아이스 페스티벌, 8월 초에 열리는 아우라지 뗏목축제 등이 열린다. 보유 서비스는 현재로는 숲해설 및 숲체험 프로그램(무료)과, 숲체험관에서 목공예체험(유료) 및 학습프로그램을 운영함. 주변 먹거리로는 오삼불고기, 곤드레밥, 황기백숙 등이 있고 여가 시설로는 하이원스키장, 강원랜드가 있다. 볼거리로는 아라리촌, 화암동굴 등이 있다. 가리왕산의 위기 현재 가리왕산이 개발로 인한 위기를 겪고 있다. 2018 평창올림픽 경기장을 지어야 해서 가리왕산을 개발해려 하고 있기 때문에 개발과 보전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가리왕산 도서 '아름다워서 슬픈 가리왕산' [저자-조명환] 가리왕산이 평창올림픽으로 인해 개발되어 파괴되는 모습이 안타까운 저자의 느낌을 사진까지 담아 더욱 와닿게 전달하고 싶어하는 메시지가 담긴 책이다. '가리왕산 고자배기' [저자-배덕춘] 외에도 우리나라 여러 산들을 소개해주는 책에서 가리왕산을 소개해주는 내용이 담긴 책들이 많이 있다. 같이 보기 한국의 산 각주 강원특별자치도의 산 정선군의 지리 평창군의 지리 휴양림 1000미터 봉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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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8D%EB%8F%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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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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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紅島)는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섬으로,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1965년 4월 7일 지정). 면적은 6.47km2, 해안선 길이는 8km, 남북 길이는 6.7km, 동서 길이는 2.4km, 인구는 2001년 현재 71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목포시에서 남서쪽으로 1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섬하고 13개의 부속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섬을 형성하는 기반암의 성분이 붉은색의 규암하고 규암질사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층리와 절리(암석에 수평 또는 수직으로 있는 틈)가 잘 발달되어 있어 절경을 이룬다. 1981년에는 섬의 일부가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으로 편입되었다. 홍도 등대 홍도 등대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 2월, 대륙 진출을 꿈꾸던 일본이 침략 전쟁에 참여하는 함대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만들었다. 홍도 등대의 불빛은 20초에 3번 반짝이며 50km의 먼 곳에 있는 선박에까지 불빛을 전달한다. 목포에서 약 116km, 흑산도에서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목포항과 서해안의 남북항로를 이용하는 선박의 뱃길을 안내하며, 등탑의 높이는 10m로 그리 높지 않다. 원형으로 만들어진 다른 등대와 달리 사각형 콘크리트 구조로 내부에는 상부로 올라가는 주물 계단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참고 자료 외부 링크 홍도 천연보호구역 - 남북의 천연기념물 홍도 천연보호구역 - 문화재청 전라남도의 천연기념물 전라남도의 섬 신안군의 지리 황해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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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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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A%B0%80%EB%A5%B4%EC%A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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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가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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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가르주(, 다리어: ولایت لوگر)는 아프가니스탄의 34개의 주의 하나에 속한다. 아프가니스탄의 동부에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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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B%B3%B4%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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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동음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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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정보(情報)는 관찰이나 측정을 통하여 수집한 자료를 실제 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정리한 지식 또는 자료이다. 정보(鄭保)는 조선의 문신이다. 정보(程普)는 삼국 시대의 무장이다. 정보(町步)는 넓이,길이 등의 단위이다. 정보(情報)는 대한민국 육군 병과의 하나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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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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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B0%EB%82%98%EB%AC%B4%EC%86%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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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나무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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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나무속(Pyrus)은 장미과의 한 속이다. 배나무속 과일을 "배"라고 부른다. 역사 배나무의 기원지는 중국 서부, 혹은 남서부로 추정된다. 한국으로 배가 들어온 경로는 요동반도와 백두대간이다. 지금도 백두대간의 산악지역에는 아름드리 배나무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한국의 남해안에서 일본으로 배가 전파되기도 하였다. 현재 과일을 위하여 재배하는 배나무는 동양계로 남방형인 한국배와 북방형인 중국배 그리고 유럽계인 서양배로 크게 3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한국에 자생하는 배나무는 재래종인 콩배와 함께 가장 널리 재배되는 돌배, 그리고 중국배의 근간인 산돌배가 있다. 또한 야생종으로 전남 광양의 백운산에 자생하는 백운배, 전북 위봉산의 '위봉배', 해남 두륜산의 '들배', 남해 용문산의 '용문배'가 있다. 배나무의 재배에 관하여는 삼국시대와 신라시대의 문헌에 기록이 남아있다. 한국에서는 품종육성의 노력으로 '단배'를 처음으로 '황금배', '추황배', '원황', '만풍배' 등의 품종이 육성되었다. 종류 콩배나무 (Pyrus calleryana var. fauriei) (C.K.Schneid.) Rehder 서양배 (Pyrus communis) L. 청위봉배나무 Pyrus pseudocalleryana Uyeki 개위봉배나무 Pyrus pseudouipongensis Uyeki 돌배나무 Pyrus pyrifolia (Burm.f.) Nakai 배나무 Pyrus pyrifolia var. culta (Makino) Nakai 산돌배나무 Pyrus ussuriensis Maxim. var. ussuriensis 취앙내 Pyrus ussuriensis var. acidula (Nakai) T.B.Lee 금강산돌배 Pyrus ussuriensis var. diamantica Uyeki 백운배나무 Pyrus ussuriensis var. hakunensis (Nakai) T.B.Lee 참배 Pyrus ussuriensis var. macrostipes (Nakai) T.B.Lee 남해배나무 Pyrus ussuriensis var. nankaiensis (Nakai) T.B.Lee 청실리 Pyrus ussuriensis var. ovoidea Rehder 털산돌배 Pyrus ussuriensis var. pubescens Nakai ex Kawamoto ex Nakai 문배 Pyrus ussuriensis var. seoulensis (Nakai) T.B.Lee 합실리 Pyrus ussuriensis var. viridis T.B.Lee 들배나무 (Pyrus uyematsuana) Makino 배즙 배즙은 배를 갈아서 나온 즙을 가리킨다. 소화가 잘 되고 마시면 목이 좋아져 음용하거나 요리에 첨가하는 등 널리 사용된다. 배는 동의보감, 본초강목 등 한의학 서적에서는 폐를 보호해주고, 기침을 억제해 감기와 기관지 질환, 가래에 효과가 있다고 적혀있다. 배즙은 기호에 따라 도라지, 생강, 인삼 등을 같이 갈아서 마시기도 한다. 참고 문헌 우리 배 이야기, 2003년,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 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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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2%BD%EB%B6%81%EB%8C%80%ED%95%99%EA%B5%90%20%EB%8F%84%EC%84%9C%EA%B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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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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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도서관은 1953년 5월 농과대학, 사범대학, 의과대학에서 보유하고 있던 자료 8,895권을 인수하여 현재 출판부자리의 목조 가건물에서 개관하였다. 1956년 12월 현재 박물관인 구.도서관으로 이전되었다가 1982년 3월 현재의 위치에 중앙도서관을 신축하여 자리하고 있다. 현재 연면적 41,434.41m2, 5,095석의 열람석을 갖추고 상주캠퍼스, 의학, 치의학, 법학 4개의 분관을 갖추고 있다. 1996년부터 시작한 도서관 전산화사업의 지속적인 추진으로 도서관 소장 자료와 학과, 연구소 및 병원에 소장된 자료 전체를 데이터베이스 구축하여 ‘경북대학교도서관 학술정보시스템(KUDOS,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Library Document Retrieval and Online System)’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하였다. 특히 2004년 2월 전국 대학 중 단일캠퍼스로는 최초로 장서 200만권을 돌파하였고, 현재는 장서 320여만권과 고서 및 고문서 6만2천여권을 확보하고 있다. 그 동안 오래된 책과 손실된 책은 176,817권이 폐기되었다. 2019년 기준 전국 대학 중 세번째로 많은 장서를 보유중이다. 2019년 2월 열람관인 신관 1층과 자료관인 구관 1층을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 ICT 기반의 학습 및 연구 공간은 물론 북갤러리, 카페테리아, 세미나·전시 공간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단장했다. 시설 지정 문화재 각주 외부 링크 경북대학교 도서관 1953년 설립 도서관 대구 북구의 건축물 대한민국의 대학 도서관 대구광역시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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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EC%9E%90%EC%9C%A0%EC%B4%9D%EC%97%B0%EB%A7%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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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자유총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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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자유총연맹(韓國自由總聯盟, )은 대한민국의 법정단체, 국민운동단체로, 본부는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단로 72 자유회관이다. 2003년부터 한전산업개발의 지분 51%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2010년 12월 상장공모 당시 20%를 매각해 2017년 3월 현재는 31%의 지분을 갖고 있다. 자유총연맹의 설립 근거는 '한국자유총연맹 육성에 관한 법률'이다. 설립 근거 한국자유총연맹 육성에 관한 법률 제1조 역사 한국자유총연맹 홈페이지의 연혁란에 의하면, 1949년 8월 8일 이승만 대통령과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의 진해 정상회담에서 반공산주의 태평양 동맹 결성을 필리핀의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에게 제의했다. 1954년 6월 15일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이 창립했고, 1956년 5월 30일 한국아시아민족반공연맹이 성립했다. 이것이 자유총연맹의 모체다. 1962년 6월 15일에는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자유회관을 기공했으며, 이듬해 12월 5일 '한국반공연맹법' 제정으로 법정단체가 됐다. 자유회관은 1964년 12월 3일 개관했는데, 2017년까지 자유총연맹의 본부건물로 쓰이고 있다. 이후 반공연맹은 1967년 6월 세계반공연맹 사무국 개설, 1969년 세계반공연맹 세미나 개최, 1972년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총회 개최 등의 활동을 벌인다. 1989년에는 반공연맹법이 폐지되고 자유총연맹법이 제정된다. 이에 따라 단체 이름도 한국자유총연맹으로 바뀌었다. 2002년에는 UN 경제사회이사회(UNECOSOC) 산하 NGO로 가입했으며, 2003년 2월 4일에는 한전산업개발의 지분 51%를 인수해 경영권을 갖게 됐다. 2011년 8월에는 본부 건물 앞에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전국 광역단체마다 지부, 기초단체마다 지회가 설치되어 있으며, 읍면동에는 분회가 있다. 회원 수는 약 350만 명이나, 실제로 전산상에 등록한 회원 수는 80만 명, 연맹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회원은 30만 명 선으로 알려져 있다. 2016년 기준으로 16대 중앙회장은 김경재다. 한전산업개발 외에 코리아에너지산업, 한산기전 등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조직 총회 총재 중앙운영위원회 자문위원회 특별위원회 이사회·감사 고문 부회장 사무총장 본부 전국시도청년협의회 전국시도여성협의회 역대 중앙회장 1대 정일권(1989.2~1991.4) 2,3대 노재현(1991.7~1993.3) 4,5대 최호중(1993.3~1996.6) 6대 안응모(1996.6~1998.7) 7대 양순직(1998.7~2000.12) 8~10대 권정달(2000.12~2009.2) 11~13대 박창달(2009.3~2013.7) 14대 김명환(2013.8~2014.8) 15대 허준영(2015.3~2016.3) 16대 김경재(2016.3~2018.4) 17, 18대 박종환(2018.4~2021.7) 19, 20대 송영무(2021.7~2022.12) 21대 강석호(2022.12~) 활동 자유총연맹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옹호 발전을 목적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으며, 월간지 《자유마당》과 《KFF뉴스》등을 발간하고 있다. 청소년 민주시민교육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사업 어머니포순이봉사단 운영 지구촌 재난구조단 운영 대학생해외봉사단파견사업 나라사랑 대학생 DMZ 국토 대장정 전국고교생토론대회 전국자유수호 웅변대회 민간인자유수호희생자위령제 등 같이 보기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 새마을운동중앙회 각주 외부 링크 1954년 설립 대한민국의 정치 단체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서울 중구 특수법인 (행정안전부 소관) 대한민국의 반공주의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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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B%84%A4%EC%BD%94%20%EB%A7%88%EC%BD%94%ED%86%A0%20%28%EC%95%BC%EA%B5%AC%EC%9D%B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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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마코토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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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마코토(, 1975년 11월 8일~)는 일본의 야구 선수, 지도자이다. 현재 퍼시픽 리그인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의 1군 내야 야수종합코치 겸 타격코치를 맡고 있다. 애칭은‘맥’(), ‘마코’()이다. 생애 프로 입단 전 조소가쿠인 고등학교 시절 고시엔 대회에는 춘계와 하계 대회를 합해 3차례나 출전했고 고교 시절에 유격수를 맡았다. 3학년 때 하계(1993년, 제75회 선수권 대회) 대회의 준결승전에서는 도이 요시히로가 소속된 가스카베 공영고등학교에게 패했지만 이 대회에서는 전 경기 모두 안타를 기록했다. 같은 해 가을에 있은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닛폰햄 파이터스로부터 3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프로 입단 후 1994년 ~ 2002년 이듬해 1994년에는 2군에서만 뛰었고, 그 다음해인 1995년 4월 2일에는 긴테쓰 버펄로스전(2차전, 후지이데라 구장)에서 이가라시 신이치의 대주자로서 출전했다. 3년차인 1996년에는 주전 2루수가 되어 타율 2할 6푼 1리와 퍼시픽 리그 최다 기록인 38개의 희생타를 기록하는 등 그 해의 퍼시픽 리그 신인왕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해 센트럴 리그의 신인왕은 같은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니시 도시히사였다. 1997년에는 처음으로 두 자릿수 홈런(12개), 타율 2할 7푼 7리를 기록했고 그 해에는 1표 차이로 골든 글러브상 수상을 놓쳤지만 이듬해 1998년과 1999년에는 2년 연속으로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2002년이 되면서 지금까지 주전 유격수였던 다나카 유키오가 3루수로 변경한 것에 의해 유격수로 자리를 옮겼다. 또, 형으로서 그리워하고 있던 가타오카 아쓰시가 한신 타이거스에 이적하면서 가타오카가 착용하고 있던 등번호 8번을 물려받았다. 2003년 ~ 2005년 2003년부터 2005년까지는 극심한 타격 부진으로 인해 뚜렷한 활약은 없었지만 2004년에는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팀의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2005년에는 트레이 힐만 감독(당시)으로부터 출루율이 낮았다는 지적을 받아 새로 입단한 외국인 선수였던 에릭 알몬테에게 주전 유격수 자리를 빼앗겨 시즌 개막은 2군에서 시작했다. 알몬테의 부진에 의해서 5월에는 1군에 승격, 주전으로 복귀했다. 시즌 종료 후 삿포로 그랜드 호텔에서 구단 측이 주최한 디너쇼에 출연하여 팬층 확보에 노력했다. 2006년 그 해에 닛폰햄 선수회장으로 취임했고 정규 시즌에서는 126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 5푼 4리와 시즌 100안타를 기록하면서 4년 만에 세 자릿수 안타 기록을 세웠으며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 기여했다. 2007년 팀의 주장으로 발탁되면서 시즌 초반에는 팀 타선 전체가 저조할 정도의 침체를 겪고있는 와중에 가네코의 타격이 호조를 이루면서 클린업을 맡아 주로 9번 타자로서 활약했다. 타율 2할 4푼 3리(리그 최하위)이면서도 득점권 타율은 2할 8푼 5리를 남겨 팀내 3위인 53타점을 기록했다. 2008년 개막 이후부터 타격 부진과 부상이 있을 정도의 극심한 침체를 겪었지만 9월 이후에 회복되면서 타율과 홈런 개수는 전년도보다 크게 떨어졌다. 시즌 종료 후 유격수였던 니오카 도모히로가 트레이드로 닛폰햄에 입단한 것에 대해서 큰 기대를 나타냈는데 가네코의 남동생은 긴키 대학 출신이며, 니오카의 1년 후배에 해당된다. 2009년 선수회장의 자리를 팀의 후배인 다나카 겐스케에게, 주장의 자리도 이나바 아쓰노리에게 각각 넘겨주었고 정규 시즌에서는 4월 7일의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15일의 오릭스 버펄로스전에 걸쳐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이 되는 7경기 연속 2루타를 때려낸 것과 월간 타율 4할 2푼 3리를 기록한 공로로 퍼시픽 리그 월간 MVP(야수 부문)에 선정되었다. 최종적으로 1997년 이후의 두 자릿수 홈런과 처음으로 3할 대의 타율을 기록했다. 본인으로서는 세 번째가 되는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는데 과거의 두 차례는 2루수 부문이었고 유격수 부문에서는 처음이었다. 이러한 활약을 평가받아 12월 10일에는 구단과의 재계약 협상 결과, 자신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1억 엔이 넘은 1억 3,500만 엔(추정)의 연봉으로 다음 시즌의 계약을 맺었다. 연봉 1억 엔이 넘은 것은 17년째의 일이며 닛폰햄 구단 역사상 가장 늦은 기록이었다. 2010년 개막을 앞둔 시점에서 아킬레스건 통증과 고관절 통증으로 인해 2군에서 시즌 개막을 맞이했다. 그 후 1군에 복귀하면서 77경기에 출전했지만 거듭된 부상과 극심한 타격 부진으로 인해 암울한 시즌을 보냈다. 2011년 부상의 배려로 이이야마 유지, 이마나미 다카히로 등과 병용되면서 한 번도 2군에 내려가는 일도 없이 시즌을 극복했지만 타격 성적과 수비 성적 모두 침체되었다. 상세 정보 출신 학교 조소가쿠인 고등학교 선수 경력 프로팀 경력 닛폰햄 파이터스·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1994년 ~ 2014년) 국가 대표 경력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 지도자경력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팀 통할 본부 특명 코치(2015년 ~ 2017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군 내야 수비 코치(2018년 ~ 2018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군 타격 코치 겸 작전 코치(2019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군 야수 종합 코치(2020년 ~ 2021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군 야수 종합 코치 겸 타격 코치(2022년 ~ ) 기타 경력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선수회장(2006년 ~ 2008년) 수상·타이틀 경력 수상 신인왕(1996년) 도쿄 돔 MVP: 1회(1997년) 베스트 나인: 1회(1999년) ※2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상: 3회(1998년, 1999년, 2009년) 월간 MVP: 1회(2009년 4월) 지바 현 지사상(2004년) 국제 대회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2004년) 개인 기록 첫 기록 첫 출장: 1995년 4월 2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2차전(후지이데라 구장), 9회초에 이가라시 신이치의 대주자로서 출장 첫 선발 출장: 1995년 10월 3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3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8번·2루수로서 선발 출장 첫 안타: 상동, 7회초에 오노 가즈요시로부터 첫 타점: 1996년 4월 12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차전(도쿄 돔), 7회말에 에릭 힐만으로부터 첫 도루: 1996년 4월 17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4차전(후쿠오카 돔), 8회초에 2루 안착(투수: 우치야마 도모유키, 포수: 요시나가 고이치로) 첫 희생타: 1996년 5월 2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5차전(도쿄 돔), 6회말에 가토리 요시타카로부터 첫 홈런: 1996년 5월 5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6차전(후지이데라 구장), 8회초에 이케우에 고이치로부터 솔로 홈런 기록 달성 경력 통산 1000경기 출장: 2004년 4월 16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4차전(도쿄 돔), 9번·유격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391번째 통산 1000안타: 2005년 8월 23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5차전(인보이스 세이부 돔), 7회초에 오누마 고지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236번째 통산 200희생타: 2007년 8월 14일,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5차전(후쿠오카 Yahoo! JAPAN 돔), 8회초에 와다 쓰요시로부터 ※역대 27번째 통산 1500경기 출장: 2008년 8월 18일,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9차전(후쿠오카 Yahoo! JAPAN 돔), 9번·유격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162번째 통산 250희생타: 2010년 6월 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4차전(도쿄 돔), 6회초에 위르핀 오비스포로부터 투수 앞 희생타·야수 선택 ※역대 12번째 통산 1500안타: 2011년 4월 20일, 대 오릭스 버펄로스 2차전(홋토못토 필드 고베), 7회초에 고바야시 마사히데로부터 좌익선상 적시 2루타 ※역대 107번째 기타 올스타전 출장: 3회(2002년, 2004년, 2009년) 5년 연속 수비율 1위: 1997년 ~ 2001년(2루수의 퍼시픽 리그 타이 기록) 1경기 5삼진: 1997년 6월 14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3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역대 8번째(퍼시픽 리그 4번째) 1경기 유격수 최다 11개 보살: 2004년 7월 6일, 대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14차전(삿포로 돔), 8회초에서의 수비 기록 7경기 연속 2루타 달성. 등번호 30(1994년 ~ 2002년) 8(2003년 ~ 2014년) 88(2015년 ~ ) 연도별 타격 성적 2013년 기준,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연도별 수비 성적 2013년 기준,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각주 외부 링크 1975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20세기 일본 사람 21세기 일본 사람 일본의 야구 선수 일본 프로 야구 유격수 일본 프로 야구 2루수 닛폰햄 파이터스 선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선수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 일본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올림픽 야구 메달리스트 2004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일본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2004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일본 프로 야구 신인왕 수상자 지바현 출신 지바현의 야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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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C%9C%A1%EA%B3%B5%ED%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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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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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학(敎育工學, )은 교육학의 한 분야로서, 교육 현장을 개선하고 교육 효과를 높이는 방법을 설계, 개발, 평가하는 학문이다. 정의 및 개념 정의 교육공학은 교육의 과정(過程)을 향상하기 위해서 기술공학과 자동화체제까지를 포함하는 여러 가지 수단을 개별적으로나 또는 체제적(體制的)으로 활용하는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교육공학은 발전하는 과정에서 학자들마다 주안점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공통적인 한 가지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체적으로는 1994년 미국의 Association for Educational Communications and Technology(AECT)의 정의를 따르는 추세이다. 또한, 과거에는 교육공학(educational technology)과 교수공학(instructional technology)을 구별하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구별 없이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 1963년, Association for Educational Communications and Technology(AECT) 교수공학의 실용적 정의를 제공하고, 시청각 매체에 관하여 최초로 공식적으로 정의하였으며, 결과 지향적인 관점에서 과정 지향적인 관점으로 전환하는 태도를 보였다. 1968년, 엘리 1968년, Silverman 1970년, 교수공학위원회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며 연구에 기초한 효과적인 교수를 추구하였다. 1970년, 실버(Silber) 교육공학은 체계적인 방법으로 교수 체제 요소를 개발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1971년, Collier et al. 1971년, 매켄지(MacKenzie)와 에라우트(Eraut) 1972년, Association for Educational Communications and Technology(AECT) 1976년, Cleary et al. 1977년, Association for Educational Communications and Technology(AECT) 실천가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으며, 교수공학과 교육공학의 구분이 사라졌다. 1989년, 하인니히(Heinich) 1990년, 가네(Gagne) 구성주의자적 학습환경 관점에서 한계점이 있다. 포괄적이며 체제지향적인 정의를 하였다. 1991년, 젠트리(Gentry) 1993년, 하인니히(Heinich), 몰렌다(Molenda), 러셀(Russell) 1994년, Association for Educational Communications and Technology(AECT), Seels & Richey 연구적인 학문이자 실제적인 학문임을 강조하였다. 이 정의는 전문적 학자가 학회의 후원을 받고 광범위한 연구와 조언을 받으면서 도출되는 과정을 거쳤는데, 주목할 만한 것은 교육공학 대신 교수공학을 전면에 내세운 점이다. 2004년, Association for Educational Communications and Technology(AECT), Definition and Terminology Committee 2008년, Association for Educational Communications and Technology(AECT), Definition and Terminology Committee 교육공학은 적절한 과학기술적 과정과 자원을 창출하고 활용하며 관리하여 학습을 촉진하고 수행을 향상시키려는 연구와 윤리적 실천이다. (Educational technology is the study and ethical practice of facilitating learning and improving performance by creating, using, and managing appropriate technological process and resources) 개념 교육공학의 개념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교육에 필요한 도구나 기술을 만들어내는 것, 과학기술 수단을 교육 활동에 응용하는 것 등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1980년대까지는 아직 새로운 영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인터넷의 보급에 힘입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연구 분야이다. 본래 교육공학은, 생산업 등에서 볼 수 있는 문서화를 교육 현장이라도 적용하려고 하는 '교육 기술의 체계적 집합체'로 다루어졌다. 현대에 와서는 교육공학을, 보다 창조적이고 효율적인 교육을 행하기 위한 기술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으며, 교육으로 활용되는 정보에 대해 연구하는 교육 정보학, 정보의 교육에 대해 연구하는 정보 교육론 등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현대의 교육공학에 있어서는 정보학 또는 교육 방법학 등과 함께, 슬라이드, 프로젝터, 영상, 오버헤드 프로젝터, 컴퓨터와 같은 매체를 교육에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연구하며, 이러한 기기의 기초적 측면이 연구되기도 한다. 기초론과 응용론의 구분이 엄격한 것은 아니며, 기초적 영역으로부터 응용적 영역까지를 총체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교육공학이란 '과학기술을 교육에 응용하는 것'이며, 교육에 관해서 과학기술 요소를 가지는 연구의 총칭이라고 할 수 있다. 관점 교육공학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기계나 과학기술 기재(機材)로서 교원을 대신할 수 있다고 하는 입장이고, 둘째는 교육공학적인 수단이 고안품이든지 체제이든지 어디까지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의 수단에 지나지 않고 사람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전자의 경우는 과학기술 수단들을 가르치는 기능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종래에 교사가 설명하고 시범하던 것을 시청각기재나 프로그램 교재나 교수기계로 대신함으로써 교원을 대신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교원의 부담을 경감하고 교육비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사의 노동 위주의 교육에서 자본과 기재를 겸용한다는 것이다. 후자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되 특히 배우는 사람을 위주로 생각하는 것이다. 교사는 지식 내용이나 기술을 전수하는 것과 동시에 학생을 인격적으로 지도하기도 하는데, 교사가 지식 내용이나 기술에 관하여 설명하고 시범하는 것은 학생측에서 보면 여러 가지 제한이 있다. 즉 교사가 하게 되면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같은 속도로 해야 하고 여러 번 반복하거나 개별 학생의 속도에 맞게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려면 교사의 수가 크게 증가해야 되는데, 그것을 위한 교육비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의 학습은 보다 더 효과적이고 학생들의 자율적이고 개별적인 학습에 적합하게 고안되고, 과학기술 수단들을 활용하고, 그 대신 교사는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지도하거나 자율적·개별적으로 각자에게 알맞게 학습하도록 학습계획을 세우고 평가하는 것을 조력하는 데 주력하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사는 교사대로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인간적·인격적인 면의 일을 하고, 학생은 학생대로 그들에게 알맞고 자율적으로 학습하는 데 과학기술 수단이나 자동화체제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공학"과의 관계 교육공학(educational technology)과 관련하여, 영어의 'technology'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일반적으로는 "기술"이라고 한다. "educational technology"를 "교육공학"이라고 한 이유로는 "기술"에 비해 "공학"으로 이름 짓는 것이 좀 더 ‘학문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한편으로는 '공학'에는 '기술자 양성'이라는 분야가 포함되어 있지만, 'Educational Technology'에는 '교육기술자 양성'이라는 분야가 포함되지 않게 되는 것 같아서라는 설도 있다. 어찌 되었든 "educational engineering"이라는 용어가 공존하고 있어서 'technology'와 'engineering'을 구분해야 함에도 educational technology를 "공학"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며 편의성 등을 앞세워버린 작명이다. 학부에서 교육공학 과정은 대체로 공학부가 아닌 교육학부에 속해 있다. 덧붙여 정보 공학을 기반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개별적인 연구는 공학부 등 다양한 학부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학자들이 오랫동안 다음과 같이 'Educational Technology'의 'technology' 의미를 정립하기 위해 노력해왔는데, 이러한 '의미'들이 '공학(engineering)'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론적 기반 교육공학은 교육심리학 분야를 그 이론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 교육심리학에서의 행동주의, 인지주의, 구성주의를 기초로 하여 교수학습이론들이 도출되었다. 또한 이러한 이론들은 교수설계를 하는 바탕이 된다. 행동주의 이 이론적 기반은 20세기 초에 이반 파블로프, 에드워드 썬다이크, 에드워드 C. 톨먼, 클라크 L. 헐, B.F. 스키너 등의 동물 학습 실험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이러한 이론들을 바탕으로 인간의 학습 활동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행동주의 학자들은 인간이 학습을 통하여 행동이 변화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인지주의 인지 과학은 교육자들이 학습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켰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인지 혁명이 시작된 이래로, 학습 이론은 거대한 변화를 겪었다. 인지주의 이론은 행동을 넘어 뇌에 기초한 학습을 설명하려 하였다. 인지주의자들은 학습을 촉진하기 위해 인간의 기억이 어떻게 동작하는지에 주목했다. 애킨슨-쉬프린 기억 모형, 배델레이의 작동 기억 모형과 같은 기억 이론들이 인지주의 심리학의 이론적 기반으로 제기되었다. 학습에 대한 새로운 인지주의적 기반은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동안 큰 성과를 보였다. 컴퓨터 과학과 정보 기술이 인지주의 과학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작동 기억(주로 단기 기억이라고 알려져 있다)과 장기 기억의 인지주의적 개념은 컴퓨터 과학 분야의 연구 및 기술에 의해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이밖에 노엄 촘스키도 인지주의 과학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인지부하(cognitive load)와 정보 처리(information processing) 이론과 같은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 구성주의 구성주의는 1990년대에 많은 교육자들이 관심을 가진 학습 이론(또는 교육 철학)이다. 구성주의에 따르면, 실세계에서 인간이 여러 가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것처럼, 학습자 스스로가 새로운 정보로부터 의미를 구성해낸다고 한다. 구성주의자들은 학습에서 새롭고, 관련 있고, 적응할 수 있는 개념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배경 지식과 경험을 사용할 수 있는 학습 환경이 필요하다고 한다. 구성주의자 교육자들은, 선행 학습 경험이 적절하도록 해야 하며 가르치는 것의 개념과도 관련이 있도록 해야 한다. 1997년 조나센은, '잘-구조화된' 학습 환경은 초보 학습자에게 유용하며, '잘못-구조화된' 환경은 좀 더 진보한 학습자에게만 유용하다고 주장하였다. 가르칠 때 구성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기술을 활용하는 교육자들은 문제 해결 환경에서 아마도 선행 학습을 강화하는 기술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역사 교육공학은 과학기술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교육의 수단이 발달한 데서 비롯하였다. 종래에도 교육을 하는 데 도구와 자료를 썼다. 예를 들면 칠판, 분필, 교과서를 도구 및 자료로 활용하면서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썼다. 이러한 도구, 자료,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교육공학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교육에 과학기술 수단이 도입, 활용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1964년 아타나시시우스 키르처(Athanasius Kircher)는 슬라이드 영사기의 전신인 환등기(magic lantern)를 로마(Rome)에서 전시한 일이 있다. 물론 당시에 그것이 교과서, 괘도 같은 것보다 훨씬 값비싼 것이어서 교육에 폭넓게 활용되지는 못했지만, 이것은 과학기술을 교육에 도입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19세기에서 20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에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축음기, 환등기, 무성 및 유성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이 발전했다. 이러한 시청각 매체들은 대체로 교육과는 별도로 발전한 것인데 이러한 것을 교육에 도입하여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교육에 충분히 적합하지는 않았으나 과학기술 매체로서 시청각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에 널리 활용된 것이다. 20세기 중엽에서부터 교수 기계(敎授機械, teaching machine), 프로그램 교수(programmed instruction), 언어 실습실(language laboratory), 컴퓨터 보조 학습(computer assisted instruction, CAI) 같은 것이 발전하고 있다. 이런 것은 종래의 경우와 달리 과학기술을 교육과 직결시켜서 고안하였거나, 또는 교수·학습(의 전 과정과 관련시켜서 활용하여 교수-학습과정 자체를 과학기술적으로 새롭게 체계화하려고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새로 고안되면서 "Educational Technology"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에는 1950년대에 교수기계(敎授機械)나 프로그램 교수가 가지고 있는 특정한 심리학설의 이론적 근거나 고안품의 한계를 넘어서 교수-학습의 전 과정을 프로그램화하고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것은 교수-학습의 목적설정에서부터 학습내용의 선정과 프로그램화 또는 계열화(系列化), 시간표의 작성과 학습 집단 편성, 교원조직과 보조원의 활용 및 교실시설의 다양화와 재조직, 교수-학습의 전개, 그리고 평가향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새로운 교육매체와 과학기술 수단을 씀으로써 교육의 효과를 올리도록 재체계화하는 접근방법이 발전했다. 대한민국에는 시청각 매체의 활용이 해방 전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해방 후에 널리 소개되었다. 오늘날도 교육비 문제로 충분히 활용되지는 못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지고는 있다. 1960년대 말에 교육공학이 대한민국에 소개되고, 현재는 그 용어가 널리 알려지고 있다. 기술 수단 교육에 활용되는 기술 수단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메시지의 전달을 효과적으로 하는 것, 둘째는 그 전달과 반응을 효과적으로 하는 것, 셋째로 학생이 학습 내용 선택과 진도를 자유스럽게 하고, 자료를 처리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하는 것 등이다. 축음기·녹음기 같은 것은 청각을 통해서 교육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데, 후자는 테이프에 녹음하고 녹음한 것을 다시 들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전자에 비해서 활용의 범위가 넓다. 최근에는 테이프를 카세트에 넣어서 쓸 수 있게 하여 조작을 더 편리하게 하고 있다. 특히 언어를 학습하는 데 카세트를 루프로 해서 자동적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하도록 하고 있으므로, 카세트를 다시 넣지 않고도 같은 것을 다시 들을 수 있다. 환등·오버헤드 프로젝터·무성 영화 같은 것은 시각을 통해서 문장이나 실물 또는 사건 현장을 사진 또는 그림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앞의 두 가지는 장면이 움직이지 않는 대신 오래 볼 수 있고, 후자는 장면이 동적인 대신에 같은 장면을 오래 보려면 필름이 많이 소비된다. 유성영화는 시청각을 겸하는 것이다. 녹음장치와 환등 등의 무성영화를 겸용하여 시청각을 합하기도 하고, 또 영사기의 특수 장치를 가해서 화면을 정지시키기도 한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방송국을 통해서 널리 수신 또는 시청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교육에 활용된다. 이것은 방송되는 시간표에 학습시간을 맞추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오는 제한은 비디오 테이프 레코더(videotape recorder:VTR)를 이용함으로써 극복된다. 또 텔레비전은 시청 범위에 한도가 있는데, 이 제한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공위성을 이용하기도 하고, 비행기에 중계장치를 싣고 고공을 선순(旋巡)하는 방법도 있고, 중계장치를 실은 풍선을 고공에 정착시키기도 한다. 텔레비전이 가지고 있는 다른 제한점은 채널이 한정된 것인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CATV가 고안되어 개발되었다. 다음으로 전달과 반응을 효과적으로 하는 방안이 있다. 이것은 비교적 단순한 것에서부터 자동화된 것까지 있다. 학생반응장치(student responder system)는 학생에게 A·B·C·D 등의 기호가 있는 일련의 단추가 달린 반응기를 주고, 응답하고자 하는 내용을 사전에 기호화해 두고, 그것에 따라서 단추를 누름으로써 교원에게 반응하게 한다. 단추를 누르면 교사 앞에 반응 집계판이 있어서 정답의 백분율이나 또는 학생별로 나타나는 이해수준이 집계되어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단순한 장치에 대해서 교수기계나 CAI 등과 같이 상당히 복잡하고 자동화된 것도 있다. 이것은 지면·화면·스크린 또는 타자로 배워야 할 내용을 전하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을 지면·화면·스크린 및 타자로 물어보고, 그것에 앞의 학생반응장치와 같은 원칙으로 된 것을 통해서 응답하게 한다. 그 응답에 대해서 즉시 정답이나 오답 또는 그 다음에 학습해야 할 것을 알려 준다. 그것에 따라서 학습하고 또 반응하고, 그것에 대해서 응답 또는 지시를 받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학습의 스텝은 작고, 동시에 프로그램화 또는 구조화되어 있다. 끝으로 학습내용을 학생이 선정하기 위한 장치로 다이얼식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다이얼 액세스 시스템(dial access system)이라고 하는데, 학생이 자기가 학습해야 할 것을 전화 다이얼을 돌리듯이 돌리면 배워야 할 내용과 연결되는데, 이것에는 유선 텔레비전(CCTV)형과 녹음형이 있다. 즉 다이얼을 돌리면 앞의 두 가지 과학기술 수단 중에 유선 텔레비전이나 녹음으로 학습내용을 전해 주고, 교수기계처럼 된 프로그램으로 학습하거나 자기가 선택한 학습을 끝내고 다른 것을 자기가 선택해서 학습하게 된다. 오늘날 전자계산기의 발전으로 교육에 관한 자료처리를 정확·신속하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문제점 교육에 기술 수단을 도입한 당초의 동기는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두었으나, 수단의 제한으로 인해 주로 시청각 매체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학습의 통로를 시청각적인 것에 국한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비용이 많이 들어서 교육비 부족으로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공학을 주장하는 입장 가운데는 과학기술 수단을 활용함으로써 교원의 부담을 경감하고, 나아가서는 교원봉급에 지불되는 비용을 절약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입장은 첫째, 기계가 교사를 대행(代行)하여 교육해서는 안 된다는 이론과, 둘째, 교사들의 반대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주로 공업화된 나라에서 경험하고 있는 일이다. 전망 공업화된 사회에서 하는 일은 세 가지로 분화되어 있다. 즉 첫째, 직접적으로 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지도하고 가르치는 일, 둘째,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촉진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과 조건을 생산하고 정비하여 활용하는 것을 관리하는 일, 셋째, 교육을 창조적으로 향상하기 위해서 연구하고 개발하는 일이 있다. 교육에 과학기술 수단을 도입하는 것은 창조적 향상이므로 연구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교육에 적합한 것을 고안하고 실험하여 교육의 질적 향상에 기여할 것을 창안·발명하고, 개발과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 창안·발명된 것을 질 좋고 값싸고 간편하게, 그리고 손쉽게 전달되게 하고, 이것을 선용하고 절약하여 교육현장에서 활용하는 일 들 사이에 원활한 협력관계를 가지게 하는 일이 요청된다. 교육에 과학기술 수단을 쓸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이들 여러 기능이 교육에서 알맞게 활용되도록 새로운 체제를 발전시키느냐 하는 문제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같이 보기 교수 설계 참고 자료 각주 외부 링크 한국교육공학회 교육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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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6%B5%EC%9D%BC%EC%8B%A0%EB%9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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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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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統一新羅)는 676년부터 935년까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를 통합한 이후의 신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조선의 문신이자 실학자인 유득공은 북국 발해와 대비하여 남국(南國)이라 부르기도 했다. 대체 용어로는 대신라와 후기신라가 있다. 명칭 논란 한국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일반적으로 제29대 태종무열왕 이전을 삼국 시대, 그 이후를 통일신라 시대로 구분짓는다. 나당전쟁 이후 통일신라라는 개념은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가 쓴 《조선사朝鮮史》(1892)에서 처음 나타난다. 1902년에 대한제국에서 김택영, 현채 등이 발간한 역사교과서 《동사집략》이나 《동국사략》 역시 하야시 다이스케의 《조선사》를 거의 그대로 번역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통일신라라는 개념이 한국인들의 한국사 인식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발해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일부 민족주의 사학자를 중심으로 '통일신라'라는 표현에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는 분명한 한국의 역사이지만, 발해가 세워진 698년부터를 남북국 시대라고 하여 발해의 역사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의견이 분분하다. 발해를 한국의 역사로 연구하고, 신라의 삼국통일 또한 온전한 통일로 보기 어렵다는 관점이 생기기 시작하여, 이름을 '대신라' 등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역사 삼국의 전쟁과 신라의 승리 신라는 진흥대왕(재위 540년 ~ 576년) 때에 이르러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나제 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때부터 신라는 삼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한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함경도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접 소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이때의 신라 뛰어난 국세는 이른바 진흥왕 4비(眞興王四碑)인 창녕비(昌寧碑:昌寧)·북한산비(北漢山碑:서울 北漢山碑峰)·황초령비(黃草嶺碑:함남 함흥)·마운령비(摩雲嶺碑:함남 이원) 등이 증명하고 있어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훗날 신라가 삼국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고 승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신라의 대외적인 팽창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백제 양국은 반격을 시작하였다. 진흥왕 이후에는 진흥왕 대에 복속했던 영토들을 조금씩 잃어버리기 시작했으며, 선덕여왕 대에 와서는 백제(의자왕)가 신라의 턱밑인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까지 함락(642)하여 위기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연개소문의 독재 정치로 합의에 실패하였고, 결국 신라는 당나라와 나·당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백제에 반격을 준비하였다. 나·당 동맹 이후, 신라는 반격하여 백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660년 사비성을 함락하는데 성공하면서 의자왕과 지배층의 향락 등으로 정치 질서가 문란해져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던 백제를 정복하였다. 또한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연개소문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지역간 갈등이 악화되어 국론이 분열되고 내전이 빈번했었다. 이에 신라는 당과 연합군을 구성해 668년에 고구려를 정복하고 고구려 귀족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나라의 최종 목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의 문무대왕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크게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676년). 하지만 옛 고구려의 북부 영토인 대동강 이북과 만주 일대에는 말갈족이 여전히 버티고 있어서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는 약 30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 말갈족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세우면서 남북국 시대가 형성되었다. 신라의 최전성기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데 무열왕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신문왕 때에는 김흠돌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의 재편을 수행하였다. 이후,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와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회의를 주도하여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으며,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을 인정한 관료전(官僚田)이 지급하는 등 신문왕은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5묘제를 설치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하였다. 이 후 685년에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에 지방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하였고, 군사제도로 9서당 10정을 마련하였다. 호족의 성장과 정치의 변동 8세기 후반 통일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진골 귀족들은 녹읍제를 다시 부활시키는 등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권력 투쟁을 벌였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또한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르면서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지게 되었다. 9세기 중엽의 문성대왕(文聖大王) 이후 중앙 귀족은 지방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 쟁탈을 위요(圍繞)한 정쟁(政爭)을 식히고 점차 타협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한편 골품제로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없었던 지방 세력은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海上貿易)에서 찾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적인 조공(朝貢)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대외무역은 점차 민간무역에서 주도하였다. 이들은 당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그러나 당과의 무역이 가장 성하여서,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山東半島)나 장쑤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신라방(新羅坊)이 생기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 기관이 설치되었다. 또 거기에는 신라원(新羅院)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文登縣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은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지방 세력가들의 민간 무역이 성행하고, 당의 지방통제권이 약화되면서 해적(海賊)의 출몰이 잦았다. 이는 성행하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는데, 이러한 배경 속에 해상의 군진(軍鎭)이 설치되었다. 신라는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에 설치하던 군진(軍鎭)을 해적들의 활동이 심한 해안의 요지에 설치하여 이를 방비하였다. 청해진(淸海鎭 : 완도)·당성진(唐城鎭 : 남양)·혈구진(穴口鎭 : 강화) 등이 그것이며, 그 중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청해진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고, 다시 중앙의 정치에도 관여하였다. 장보고의 경우와 유사하게 지방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며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이 시기에는 수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보통 성을 쌓고 스스로 성주(城主)라고 자처하였다. 9세기 이후에 나타난 통일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大商人)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되었다. 중앙 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또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村主)도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갔다.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다. 한편 국가의 비호 밑에 발달한 사원도 면세(免稅)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兼倂), 농장을 확대해 갔다. 한편,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쇠퇴와 멸망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축소되면서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후고구려의 궁예를 실각시킨 고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아내어 신라를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이후 고려 태조는 신라 계승을 표방하였다. 경제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모든 지역의 크기와 인구, 가축의 수, 특산물 따위를 모두 조사하는 양전을 실시하여 민정문서를 작성했다. 이 민정문서의 일부가 일본에서 발견되어 현재까지 전한다. 문화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중국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많은 신라 승려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교를 배워 왔고, 혜초는 인도까지 가서 그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왕오천축국전). 선종, 정토종 등의 불교 종파가 수입된 것도 이 때이다. 682년에는 유교를 가르치는 국학을 설치했고 750년 태학감으로 개칭되기도 했다. 국학의 교육 혜택은 귀족 엘리트들만 받을 수 있었다. 불교의 수트라 및 유교 경전을 찍어내기 위한 목판 인쇄도 발달했다. 석가탑 안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기원후 751년경의 물건이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목판인쇄물 중 세계 최고(古)의 것이다. 각주 참고 자료 신라 한국의 옛 나라 668년 설립 경상도의 역사 신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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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B%A8%B8%EC%8A%A4%20%EC%97%90%EB%94%94%EC%8A%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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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에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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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앨바 에디슨(, 1847년 2월 11일 ~ 1931년 10월 18일)은 미국의 발명가 및 사업가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남긴 사람으로 1,093개의 미국 특허가 에디슨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참고로, 비공식적으로는 2,332개를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토머스 에디슨은 후에 제너럴 일렉트릭을 건립하였다. 생애 1847년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태어나 미시간주 포트 휴런에서 자랐다. 에디슨은 어린 시절부터 만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당시의 주입식 교육에 적응하는데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은 3개월 뿐이었으나, 결혼하기 전에는 교사로 일했던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 덕에 점차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중앙교육연구원에서 펴낸 에디슨 전기(영국 엑스터 출판사 원전)에 따르면, 에디슨의 어머니는 아들의 재능을 생각해서 직접 실험을 할 수 있는 과학책을 사 주었다. 전신기 특허로 큰 돈을 번 그는 1876년 세계 최초의 민간 연구소로 알려진 멘로파크 연구소를 세워 발명을 계속하였다. 그의 발명은 굉장히 많아서 특허의 수효만도 1,300여 개나 된다. 에디슨은 1874년 자동 발신기, 1877년 축음기, 1879년 전화 송신기, 1880년 신식 발전기와 전등 부속품을 개발했고, 1881년 전차의 실험을 했다. 1882년 발전소를 건설했고, 1888년 영화의 제작방법을 알아냈다. 1895년 광물을 가려내는 방법, 1900년 시멘트 공업의 개량, 1909년 엔진형과 축전지를 개발했다. 흔히 노력형 천재라고 알고 있으나 의외로 상당히 틀린 부분이 많다. 이 중 가장 높게 평가되는 부문은 역시 도시의 밤을 환하게 했다는 것이다. 전구의 발명은 발전, 송배전 부문의 발전을 가져오게 했고 각 가정마다 전기가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전구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경복궁 전체에 전기가 들어왔다(경복궁 향원정에서 시작). 1929년 82세 때 백열 전구 발명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고 난 뒤 병을 앓게 되었다. 에디슨은 그 이후 미국 뉴저지주 웨스트오렌지 자택에서 병상에 누워서 지내다가, 1931년 10월 18일에 향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제너럴 일렉트릭 제너럴 일렉트릭은 에디슨이 세운 전기조명회사를 모태로 한다. 에디슨 효과 3극 진공관 발명의 기초가 되어 라디오 발명의 길을 열어 준 과학상의 중요한 발견을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에디슨 효과를 에디슨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가족 관계 에디슨은 한평생 발명/사업에 힘써왔지만 가족에게는 정말로 소홀했다. 첫째 부인은 쓸 만한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구박했고 대학교육에 대한 컴플렉스 탓에 자식들을 공과대학을 제외한 그 어떤 대학에도 보내지 않았다. 첫 번째 부인 메리 스틸웰이 죽었을 때 그는 일이 바쁘다며 장례식도 가지 않았다고 하며, 그 후 한동안 적적하게 지내다 두 번째 부인이 된 미나 밀러에게 모스 부호로 프로포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족에 소홀했던 탓인지 자식들의 삶도 좋지 못했다. 첫째 아들 토머스 주니어는 '전기 활력 회복기’라고 이름 붙인 가짜 건강기계를 만들어 팔다 고발당하는 등 아버지 이름을 빌려 사기나 치는 사기꾼이었고, 둘째 윌리엄은 하는 사업마다 망해서 매주 40달러씩 생활비를 대주는 처지가 되었다. 문제는 윌리엄의 부인이 허영심이 많았는지 주 40달러 가지고 어찌 사냐고 시도 때도 없이 편지를 보내 에디슨을 닦달했다는 것이다. 다만 셋째 아들 찰스 에디슨은 정계로 진출해 훗날 뉴저지주의 주지사가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가장 친밀하다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그마저도 아버지 얼굴을 평생 봤던 시간이 채 1주일도 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공헌 당시의 미국의 과학기술은 유럽에 비해 내세울 게 없었다. 특히 유럽의 물리학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퀴리 부부,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등 천재적인 학자들이 서로 경쟁하며 비약적인 발전하고 있었으나 미국은 변방이었다. 비록 에디슨은 학자적인 이론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실험과 호기심을 통한 발명으로 미국을 응용기술 면에서 유럽을 압도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 같이 보기 조르주 멜리에스 니콜라 테슬라 각주 참고 자료 외부 링크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토머스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 사람 미국의 기업인 미국의 발명가 캐나다계 미국인 영국계 미국인 네덜란드계 미국인 오하이오주 출신 1847년 출생 1931년 사망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회원 영화 선구자 이신론자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잉글랜드계 미국인 청각 장애인 미국의 전기공학자 19세기 미국 사람 20세기 미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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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D%81%AC%EC%88%98%20%EC%A7%80%EA%B5%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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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수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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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수 지구(, )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서쪽에 위치한 지구이다. 면적은 128,099km2이고 인구는 220만 명(2007년)이 거주한다. 지리 톈산 산맥 남쪽 기슭,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에 위치하여, 동쪽은 바잉궈렁 몽골 자치주와 접해, 남쪽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멀리해 호탄 지구를 바라본다. 서남쪽은 카슈가르 지구, 서북쪽은 키르키스스탄 및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접한다. 주민 21만9,000명의 인구 중, 71.93%가 위구르족, 26.62%가 한족이다. 행정구역 1개의 현급시, 8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급시 아커쑤 시(아크수 시)(, ) 현 원쑤 현(온수 현)(, ) 쿠처 현(쿠차르 현)(, ) 사야 현(사야르 현)(, ) 신허 현(토크수 현)(, ) 바이청 현(바이 현)(, ) 우스 현(우츠투르판 현)(, ) 아와티 현(아와트 현)(, ) 커핑 현(칼핀 현)(, ) 관광 쿠처 현의 키질 천불동이나 쿠차 고성이 유명하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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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9D%EC%8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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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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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碩士, )는 대학교의 대학원 과정으로 학사 학위를 지닌 사람이 대학원의 석사과정의 일정 강의에 참석하고 소논문과 논문자격 시험을 통과하여 지도교수의 논문과정 이후 논문을 작성하고, 학위 심사에 제출하여 논문을 인정 받으면 얻는 학위이다. 단, 논문을 작성하지 않고 시험만으로 석사학위를 받는 과정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학술 논문을 작성하는 학술 석사 학위과정과 학술 논문을 요구하지 않는 전문석사 학위 과정 등의 비학술 석사 학위 과정의 구별이 있으며, 일반 대학원 과정에서는 '학술 석사' 학위 과정을 제공하고 전문 대학원과 특수 대학원, 산업대학원 과정에서 전문 석사 학위를 포함한 '비학술 석사' 학위 과정을 운용한다. 일반 대학원의 학술 석사 과정은 각 학문별로 인문과 사회, 자연, 공학 등에 걸쳐 다양한 과정이 있는 반면, 전문대학원은 제한적이고 대부분 대학교에서 의학, 법학, 신학, 경영학, 국제학 등의 특별한 과정만 제공한다. 대한민국에서 석사 과정을 제공하는 대학원은 학술 학위 과정을 제공하는 일반 대학원과 비학술 학위 과정을 운용하는 특수대학원, 산업대학원, 전문대학원, 원격 대학원으로 구분한다. 대한민국에서 석사 학위명칭에서 학술 학위와 비학술 학위에 큰 차이는 없으나, 전문대학원은 전문 석사학위 명칭을 별도로 사용한다. 석사학위 종류 대한민국에서 석사학위는 학술 계열과 비학술 계열로 나뉜다. 학술 계열 석사학위는 대부분 일반 대학원이나 그에 준하는 연구기관에서 제공한다. 비학술 계열은 특수 대학원과 전문대학원, 산업대학원에서 제공한다. 학술 석사 학위 대한민국에서 학술 석사학위는 2년, 4학기 과정이며, 학위 명칭은 해당 학문명에 석사 학위명을 붙여서 사용한다. 석사 학위 취득을 하려면 3학기 세미나 과정과 1학기 논문과정, 논문자격시험을 통과하고, 학술 논문과 그에 준하는 연구성과를 제출하고 해당 교수 3명으로 이뤄진 논문심사위원이 인정해야 한다. 석사 과정부터는 해당 학문의 전공 분야가 있으므로, 전공분야를 별도로 표기하며, 논문에는 해당 분야의 전공을 별도로 기재한다. 비학술 석사 학위 대한민국의 비학술 석사학위는 특수대학원에서 시작하였고, 현재는 전문가를 육성하는 전문대학원으로 발전하였다. 현재 산업대학원은 사라지는 추세이다. 대한민국의 산업이 급발전하던 1960년대부터 행정과 경영, 법률 분야 등에서 재교육이나 추가교육에 대한 요구가 있었고 이로 특수대학원인 경영대학원이나 행정대학원, 법무대학원, 교육대학원 등을 대학에서 운영하였다. 현재까지도 전문적 분야의 재교육 형태의 특수대학원이 대학마다 여전히 있으나, 전문대학원의 등장으로 일부 특수대학원은 전문대학원으로 변화하는 추세이다. 전문대학원은 미국의 전문대학원을 모형으로 하며, 1980년대 개신교 목사 육성을 위한 3년제 신학대학원이 등장하며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전문대학원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기독교 성직자를 위한 과정이므로 특수대학원의 변형 형태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21세기에 들와서 전문적 인력을 육성하고자 전문대학원 과정을 위한 법률을 개정하였고, 의학전문대학원과 법학전문대학원으로 의사와 변호사를 육성하는 전문대학원이 개설되었다. 현재는 이 이외에도 경영전문대학원과 신학전문대학원, 국제전문대학원, 한의학전문대학원, 치의학전문대학원 등의 다양한 전문인력을 육성하는 전문대학원이 있다. 이중 의학전문대학원은 4년으로 '의무석사' 학위를 제공하며, 법학전문대학원 3년으로 '법무석사' 학위를, 신학전문대학원은 3년으로 '목회학석사', 경영전문대학원은 2년으로 '경영학석사'를 제공한다. 그 외의 다양한 전문대학원에서 다양한 전문 석사 학위를 제공한다. 산업대학원은 말 그대로 기술관련 재교육을 위한 대학원이었으나 공학 분야의 발전과 다양한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공학 석사 학위를 일반 대학원에서 제공하며 분야가 확장되어서 현재는 유명무실한 대학원과정으로 변화하였다. 현재 운영하는 대학원 2개 대학뿐이다. 석사 학위 취득 자격 학술 석사학위 취득 대한민국의 학술 석사 학위 과정은 정규 학사 학위가 있는 사람이 대학원에서 관련 학문의 심도 있는 연구를 위하여 입학하며 시작한다. 입학을 하기 위해서는 각 대학교의 대학원 입학 규정에 따라 서류심사와 입학시험 등이 있다. 정규 학사 학위는 대한민국 대학교의 4년제와 5년제, 6년제 학사학위를 의미한다. 학사 학위는 학과 별로 다르며, 대부분의 인문과 사회, 공학, 자연 학과들은 4년제 학사 학위과정을 운용한다. 응용 학문 분야인 건축학과 5년과 의학과 6년 등이 있다. 석사학위 지원자가 일반 대학원에 입학하면, 우선적으로 대학원에서 기초 과목을 이수하였는지 확인한다. 해당 석사 학위와 유사한 학과 학사 학위나 동일한 학과인 경우에는 문제가 없으나, 학사와 석사 학과가 다른 경우인 역사학과 출신이 경영학 석사에 지원하는 경우에는 지원자가 학부과정에서 경영학 기초과목인 경영수학이나 기초통계학 등을 이수하지 못하였으므로 대학원 과정을 진행하며 경영학 학부 과정의 기초과목을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 석사 강의 과정 강좌나 세미나 형태로 4학기 중 3학기이다. 강좌 형태로 교수가 처음부터 끝까지 강의하는 형태도 있으나 이와 달리 세미나 형태로 강의를 진행기도 한다. 교수가 자신이 연구한 분야나 최신 이론을 소개하는 대학원 수준의 전문적 강의를 하는 과목도 있으며, 학과마다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 1명에서 3명 정도가 각 강의 시간마다 할당된 논문과 교재부분을 정리하여 발표하고, 참석자가 질의 응답하고, 교수가 추가적인 설명이나 방향을 제시하는 세미나로 진행하기도 한다. 특히 세미나에서 교수는 발표자에게만 질문하지 않고, 발표중에도 참석자들에게 질문을 하거나 의견을 묻는다. 따라서 참석자가 강의 시간에 할당된 논문과 교재를 미리 숙지하지 않고 출석해 교수의 질문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거나 대답을 못할 경우에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렵다. 과목별 시험은 강좌 형태의 강의는 대부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있다. 세미나 형태의 강의는 중간고사가 있거나 없으며, 기말고사를 대신해 소논문을 제출해야 한다. 논문자격시험은 대체로 3학기에 응시하며, 학과 전공마다 중요한 과목으로 3과목 전후로 시험을 치른다. 석사과정의 논문자격시험은 박사과정과 달리 미리 지정해준 수준만 공부하면 대부분 논문 자격 시험을 통과한다. 1회차에 과락한 경우, 과락한 과목의 2회차 시험에 추가 비용을 지급하고 지원할 수 있다. 학위명 박사 학위의 약자는 Ph.D.인 데 반해 학사 학위는 B.S.와 B.A., B.E., 석사 학위의 약자는 M.S.와 M.A., M.E.가 혼재되어 있다. M.S.는 Master of Science이고 M.A.는 Master of Arts, M.E.는 Master of Engineering이라는 뜻이다. M.S. 학위는 Science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수학, 자연 과학을 포함하는 순수 과학과 공학을 포함하는 응용 과학의 관련 학과에서 수여된다. M.A.에서의 Arts는 인문학이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그래서 인문학 쪽에 많이 수여된다. 공학에서는 석사학위를 Master of 학과명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Master of Civil Engineeering 또는 Master of Electronic Engineering이다. Degree of Master라고도 사용하기도 한다. 공학에서 박사학위는 Doctor of 학과명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Doctor of Civil Engineeering, Doctor of Electronic Engineering이다. Degree of Doctor라고도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한국에는 흔하지 않지만 외국에서 사용하는 석사 학위로 M.Phil.이 있다. M.Phil.이란 Master of Philosophy이다. Master of Science는 대개 M.Sc.로 축약하여 쓴다. 두 과정 모두 논문을 통해 졸업하는 것은 동일하지만,국가별 그리고 학교별로 표현이 상이하다. 영국의 잉글랜드 소재 옥스퍼드 대학교나 캠브리지 대학교에서는 M.Phil.을 논문을 통과한 석사 학위로 표기하고, 논문을 통과 못할 경우 PD(Postgraduate Degree)를 통해 수료를 표기한다. Master of Science는 영국 잉글랜드 지역의 경우, 이학 석사이지만,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및 웨일스 지역에서는 논문을 통과할 경우, 일반적으로 M.Sc.를 수여한다(전문대학원 계열은 대신 M.Litt.을 수여하는 경우도 있다). 졸업을 못할 경우 마찬가지로Postgraduate Degree를 통해 수료에 준하는 표기를 한다. 영연방 국가들내에서는 M.Phil.이나 M.Sc. 모두 전공을 불문하고 일반대학원의 정규과정일 경우, 'M.Phil in 전공'이나 'M.Sc in 전공'으로 명확히 표기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석사의 표기 방식이 다를뿐, 철학 석사나 이학 석사로 번역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궁극적으로 석사과정은 수강과 연구를 통한 논문작성이 복합되는 것이 대부분이고, 실제로는 학교와 전공특성에 따른 차이로 학위명이 구분된다. M.F.A는 Master of Fine Arts의 약자로, 예술분야에서 실기와 연동된 석사학위를 의미한다. 같이 보기 학사 박사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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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9E%80%EC%BD%94%20%EB%B0%94%EB%A0%88%EC%8B%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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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코 바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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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키노 "프란코" 바레시 OMRI 장교장(, , 1960년 5월 8일~)는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지도자이다. 그는 세리에 A의 밀란에서 현역 20년을 전부 보내며 중앙 수비수나 최후방 수비수로 활약했고, 이 중 15년을 선수단의 주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로 손꼽힌다. 그는 월드 사커지의 20세기를 빛낸 100명의 축구인 명단 19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밀란 소속으로 3번의 챔피언스리그, 6번의 세리에 A, 4번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2번의 유러피언 슈퍼컵, 그리고 2번의 인터콘티넨털컵 우승을 거두었다. 그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1982년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다. 그는 1990년 월드컵에도 참가해 3위의 성적을 거두고 대회의 선수단에 이름을 올렸다. 1994년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 선수단 주장을 맡아 결승 진출의 성과를 올렸지만,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첫 주자로 나서서 실축하였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바레시는 이탈리아를 대표로 1980년과 1988년에 유럽 선수권 대회에도 2번 출전했고, 1984년 하계 올림픽에도 참가했는데, 3번 모두 준결승전까지 올라갔다. 그는 주세페 바레시의 동생인데, 밀란 1군에 전도유망한 유망주로 승격한 후, 프란코 바레시는 "꼬마"(밀라노 방언으로 Piscinin이라고 쓴다)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솜씨를 보이고 성과를 내면서, 바레시는 이후 전설적인 최후방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워에 빗대어 "프란츠 황제"(Kaiser Franz)로 별명이 바뀌었다. 1999년, 그는 밀란 세기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7년에 밀라노에서 마지막 시즌을 보낸 후, 구단은 바레시의 등번호 6번을 영구 결번으로 처리했다. 2004년, 펠레는 국제 축구 연맹 100주년 행사에서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125명의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바레시는 2013년에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유년 시절 바레시는 북부 이탈리아의 소규모 군인 트라빌랴토의 외곽의 농장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10세가 되기 전까지 축구를 텔레비전으로 보지 않았었다. 클럽 경력 밀란의 유소년부를 졸업한 바레시는 현역 시절 20년 전부를 밀란에서 보냈는데, 1978년 4월 23일, 1977-78 시즌에 17세의 나이로 세리에 A 신고식을 치렀다. 그는 앞서 형 주세페가 입단한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입단을 거절당했고, 그에 따라 프란코 바레시는 밀란에 입단하게 되었다. 두 형제는 세리에 A 무대에 등장한 후 각자의 구단에서 주장을 역임했고, 두 형제가 배너를 교환하는 일은 1980년대 마돈니나 더비(derby della Madonnina)의 상징적인 연례행사로 자리매김했다. 바레시는 2년차부터 주전 선수로 도약해 최후방 수비수나 중앙 수비수를 맡아 파비오 카펠로와 잔니 리베라와 한배를 타고 1978-79 시즌 구단 통산 10번째 세리에 A 우승에 일조했다. 이 시즌에 성과를 내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구단의 암흑기가 찾아왔는데, 밀란은 1980년대 초에 세리에 B로 2차례 강등당했다. 밀란은 1980년 승부조작 스캔들에 연루되어 1980년에 강등되었고, 1981-82 시즌에는 뒤에서 3등으로 시즌을 마무리에 직전 시즌인 1980-81 시즌에 세리에 B를 우승하고 세리에 A에 돌아온 뒤 1년 만에 강등되었다. 4위의 성적을 거둔 유로 1980와 1982년 월드컵 우승을 거둔 이탈리아 선수단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바레시는 밀란과의 의리를 지키며 1982-83 시즌에 2번째 세리에 B 우승을 이끌고 소속 구단을 다시 세리에 A로 올려놓았다. 알도 말데라와 풀비오 콜로바티가 1982년에 구단을 떠난 뒤, 바레시는 불과 22세의 나이로 밀란의 주장 완장 주인이 되었고, 이후 은퇴할 때까지 선수단의 주장을 맡아, 밀란의 상징이자 구심점으로 우뚝 섰다. 바레시는 밀란의 암흑기에 세리에 A에서 악전고투를 벌였지만, 1982년에 미트로파컵 우승을 거두었고, 1984-85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 올랐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바레시는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마우로 타소티, 그리고 이후에 합류한 크리스티안 파누치와 함께 아리고 사키와 파비오 카펠로 감독 휘하에 이탈리아인으로만 구성된 수비진의 핵심으로, 역대 최고로 회자되는 수비진을 구축했다. 네덜란드인 공격진 3인방 마르코 판 바스턴, 뤼트 휠릿,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1980년대 말에 합류하면서, 밀란은 1987년부터 1996년까지 국내 및 국제 무대에서 승승장구하며 황금기를 일구었고, 밀란은 로베르토 도나도니, 카를로 안첼로티, 판 바스턴, 휠릿, 레이카르트, 이후에는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데얀 사비체비치, 즈보니미르 보반, 마르셀 드사이, 조지 웨아, 장-피에르 파팽, 브리안 라우드루프, 그리고 로베르토 바조가 합류해 동시대에 이탈리아 국내외의 거성 선수들로 채워졌다. 사키 감독의 임기에, 밀란은 1987-88 시즌 세리에 A를 우승했는데, 바레시는 밀란이 단 14실점만 허용하도록 철저히 골문을 틀어막았다. 바로 다음 시즌에는 1988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우승했고, 1988-89 시즌과 1989-90 시즌에 연달아 유러피언컵을 제패하며 정점을 찍었다. 1990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바레시는 막강한 활약을 펼친 선수단의 주장을 맡아 밀란이 벤피카를 상대로 무실점으로 틀어막아 1-0 승리를 거두어 유럽 정상을 방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바레시는 1989년에 동료 판 바스턴에 이어 발롱도르 투표에서 2위에 올랐고, 또다른 동료 프랑크 레이카르트보다 높은 순위에 올랐으며, 1989-90 시즌 세리에 A 올해의 선수로도 선정되었다. 밀란은 1989-90 시즌에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도 올랐다. 바레시는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지도 하에 밀란이 세리에 A를 4번 더 우승하도록 공을 세웠는데, 1991-92 시즌, 1992-93 시즌, 그리고 1993-94 시즌은 3년 연속으로 리그를 평정했다. 바레시의 밀란은 1991-92 시즌을 무패 우승으로 끝냈고, 밀란이 이탈리아 최다 경기 무패 기록인 58경기 무패 행진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밀란은 그 해 74골을 넣어 득점 부문에서도 신기록을 세웠다. 1993-94 시즌, 바레시는 세리에 A에서 15실점으로 틀어막아 리그 최소 실점 기록으로 시즌을 마쳤다. 바레시는 카펠로 감독의 임기에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도 1992년, 1993년, 그리고 1994년에 3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밀란은 1992-93 시즌, 1993-94 시즌, 그리고 1994-95 시즌에도 3년 연속으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랐다. 이 중 1992-93 시즌에는 마르세유에, 1994-95 시즌은 아약스에 패해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쳤다. 바레시는 1993-94 시즌에 요한 크라위프가 이끄는 바르셀로나의 "꿈의 선수단"을 결승전에서 4-0으로 완파하고 개인 통산 3번째 유러피언컵/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품었다. 비록 밀란은 1994년 인터콘티넨털컵, 1993년 유러피언 슈퍼컵, 1993년 인터콘티넨털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1994년 유러피언 슈퍼컵을 우승했다. 카펠로 감독 지휘 하에 바레시의 밀란은 1995-96 시즌에 1번 더 세리에 A 정상에 올랐고, 이는 바레시의 개인 통산 6번째 리그 우승이었다. 바레시는 1996-97 시즌을 끝으로 37세의 나이에 축구화를 벗었다. 그는 밀란에서 20년을 몸담으며 세리에 A를 6번, 유러피언컵/챔피언스리그를 3번(결승 진출은 5번), 인터콘티넨털컵을 2번(대회에 총 4번 참가), 유러피언 슈퍼컵을 4번(대회에 총 5번 참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4번(대회에 총 5번 참가), 세리에 B를 2번, 그리고 미트로파컵을 1번 우승했다. 그는 밀란 소속으로 31골을 넣었는데, 이 중 21골은 페널티킥으로 성공시켰고, 비록 수비수였지만, 1989-90 시즌에는 코파 이탈리아 최다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고, 아이러니하게도 코파 이탈리아는 그가 현역 시절에 들어올리지 못한 우승컵으로, 준우승만 2번 하는데 그쳤다. 그의 마지막 밀란 골은 1995년 8월 27일, 2-1로 이긴 파도바전에서 기록했다. 그의 업적을 기린 밀란은 바레시가 현역 시절에 착용했던 등번호 6번을 영구결번 처리했다. 바레시는 주장 완장을 15년 동안 찼는데, 완장은 파올로 말디니에게 물려주었다. 밀란은 1997년 10월 28일, 산 시로에서 다수의 축구 거성들이 참가한 가운데 그를 기리기 위한 행사를 진행했다. 국가대표팀 경력 20세의 나이로 U-21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는 와중에, 엔초 베아르초트 감독은 그와 형 주세페 둘다 유로 1980에 참가할 이탈리아의 22인 선수단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안방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는 대회를 4위로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형과 달리 프란코 바레시는 이 대회에서 1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유로 1980은 두 형제가 이탈리아 선수단에 동시 차출된 유일한 주요 대회이기도 했다. 22세의 바레시는 1982년 월드컵에도 이탈리아 선수단에 차출되었다. 푸른 군단(Azzurri)은 결승전에서 서독을 꺾고 통산 3번째 월드컵 우승을 거두었지만, 바레시는 이번 대회에서도 대회 내내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다. 바레시는 198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한 이탈리아 선수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에, 동메달 결정전에서 유고슬라비아에 패하며 대회를 4위로 끝냈다. 바레시는 미국과의 조별 리그 경기에서 득점에 성공했다. 바레시는 1982년 12월 14일, 피렌체에서 0-0으로 비긴 루마니아와의 유로 1984 예선전 경기에서 첫 성인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 대회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엔초 베아르초트 감독은 바레시를 수비수라기보다는 미드필더로 간주하면서 1986년 월드컵에 참가할 이탈리아 선수단에 배제시켰다.(단 그의 형 주세페와 동료 로베르토 트리첼라는 월드컵에 참가할 수비수로 승선했다). 그는 유로 1988에서 국가대표팀에 복귀해 아첼리오 비치니호의 이탈리아 선수단이 준결승전에 올라가는데 일조했고, 부동의 주전으로서 모든 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안방에서 열린 1990년에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경기에 출전했고, 모든 경기에서 이탈리아의 중앙 수비를 맡아 3위의 성적에 일조했다. 이탈리아는 전 대회 우승을 거둔 아르헨티나와의 준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무릎을 꿇었다. 바레시는 이탈리아가 이 대회에서 5경기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는데 일조했고, 단 2골만을 내주었고, 아르헨티나와의 준결승전에서 동점골을 헌납할 때까지 518분 동안 실점을 내주지 않아 월드컵 신기록을 세웠다. 그는 이 대회에서의 맹활약으로 1990년 월드컵 대회의 선수단에 이름을 올렸다. 주세페 베르고미를 대신해 1994년 월드컵에서 주장을 맡은 바레시는 밀란의 전 감독 아리고 사키의 지도 하해 출전했지만, 1-0으로 이긴 노르웨이와의 2차 조별 리그 경기에 출전해 반월판 부상을 당해 그리 많은 경기를 출전하지 못했다. 그는 25일 만에 선수단에 복귀해 결승전에 돌아왔고, 훌륭한 수비를 선보이며, 이탈리아는 비록 밀란 동료인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와 마우로 타소티가 빠진 상황이었지만 브라질을 무실점으로 막는데 일조했다. 연장전 끝에 0-0으로 양측 모두 무득점으로 침묵한 가운데, 경기는 승부차기로 이어졌고, 피로와 경련에도 투혼을 벌이던 바레시는 1번 주자로 나서서 실축했다. 이후 다니엘레 마사로와 로베르토 바조가 실축하면서 브라질은 이탈리아를 승부차기 끝에 이기고 4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석패한 후, 바레시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경기에 1번 더 출전했는데, 1994년 9월 7일, 1-1로 비긴 슬로베니아와의 유로 1996 예선전에 출전했다. 바레시는 이후 34세의 나이로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고, 주장 완장을 밀란 동료인 파올로 말디니에게 넘겼다. 바레시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경기에 81번 출전해 소련과의 친선경기에서 1골 넣었고, 그는 7명밖에 되지 않는 월드컵에서 우승, 준우승, 그리고 3위를 모두 경험한 선수 목록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경기 방식 바레시는 역대 최고의 수비수로 손꼽힌다. 그는 현역 시절 20년을 전부 밀란에 헌신하여 구단의 전설로 남았다. 그는 밀란에서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마우로 타소티, 필리포 갈리,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크리스티안 파누치와 함께 역대 최고의 수비진을 구축했다. 그는 꾸준한 완전체형 수비수로 힘과 우아함을 겸비하였으며, 주력, 강인함, 끈질김, 집중력, 그리고 체력의 경이로운 체격 및 정신적 역량을 지녀, 수비수 치고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공중 경합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비록 바레시는 어느 수비 역할이든 수행 가능했지만, 수비적 역량과 경기를 읽는 역량, 넓은 시야, 기술력, 공 배급 및 공다루기 등의 능력을 모두 선보일 수 있는 중앙 수비수나 최후방 수비수를 주로 맡았다. 이러한 역량을 통해, 그는 지역 방어 체계에서 두각을 나타내 높은 수비진을 이용해 오프사이드 함정을 구사했는데, 특히 사키 감독 시절의 밀란에서 그 능력을 여과없이 선보였다. 또한 바레시는 오프사이드 함정을 구사할 때 부심이 잘 볼 수 있도록 팔을 높이 올리곤 했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바레시는 다양한 공넘김 방식, 기술적 역량, 공 제어력을 통해 중원으로 전진해 공격을 후방에서 전개토록 해, 보조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며, 유사시 수비형이나 중앙 미드필더로도 뛰었다.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페널티킥을 정확히 처리한 것으로도 회자된다. 바레시는 강하고 정확히 견제를 해 공을 회수하고, 전술적 지능, 사고의 속도, 견제 능력, 그리고 위치 선정을 앞세워 앞의 일을 내다보며 공을 잘 가로챘다. 유망주 시절부터 조숙하게 재능을 뽑냈던 바레시는 현역 시절 내내, 프로 정신, 선수로서의 열정, 오랜 활동, 그리고 훈련에서의 자제력은 물론 특출한 지도자적 역량, 경기장에서의 강력한 존재감, 그리고 조직력으로써 독보적으로 우뚝 섰다. 그 외에도, 그는 밀란과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주장을 모두 맡았었다. 바레시는 리카르도 페리와 함께 세리에 A 역사상 공동 최다 자책골 기록 선수이기도 한데, 8번 아군의 골망을 흔들었다. 감독 경력 2002년 6월 1일, 바레시는 풀럼의 단장으로 공식 취임했지만, 바레시와 장 티가나 풀럼 감독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8월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는 이후 밀란의 유소년부(Primavera) U-20 부서를 맡았다. 2006년, 그는 U-19 부서인 청년부로 옮겼고, 유소년부 후임 감독은 전 동료였던 필리포 갈리가 차지했다. 그는 감독일을 그만두고 로베르토 베르투초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사생활 프란코 바레시는 인테르나치오날레의 전설적인 수비수 주세페 바레시의 동생이다. 그래서 프란코 바레시는 유망주 시절에 형과 함께 인테르나치오날레 입단 시험을 보았지만 낙방했고, 결국 같은 연고지의 경쟁 구단인 밀란이 그를 영입했다. 그는 프란코보다 연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바레시 2호(Baresi II)로 불렸다. 그러나, 프란코가 현역 시절을 거쳐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유명세를 타면서, 형 주세페의 명성을 추월했고, 이후 주세페 바레시가 나름대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또다른 바레시(L'Altro Baresi)로 수식되었다. 매체 바레시는 EA 스포츠의 축구 전자 오락 FIFA 14의 다국적 거성들로 구성된 고전 선수단 일원으로 같은 국적의 브루노 콘티, 잔니 리베라, 그리고 자친토 파케티와 함께 등장한다. 그는 FIFA 15에서도 궁국의 전설 선수단으로 등장한다. 경력 통계 클럽 국가대표팀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아래의 점수에서 왼쪽의 점수가 이탈리아의 득점이며, 득점 열은 바레시의 득점 상황의 점수를 나타낸다. 수상 밀란 세리에 A: 1978–79, 1987–88, 1991–92, 1992–93, 1993–94, 1995–96 세리에 B: 1980–81, 1982–83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988, 1992, 1993, 1994 유러피언컵 / 챔피언스리그: 1988–89, 1989–90, 1993–94 유러피언 슈퍼컵: 1990, 1994 인터콘티넨털컵: 1989,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1982 준우승: 1994 3위: 1990 개인 발롱도르 2위: 1989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1989–90 구에린 금상: 1989–90 월드컵 대회의 선수단: 1990 가에타노 시레아 경력모범상: 1994 월드 사커 20세기를 빛낸 100명의 선수 19위: 1999 밀란 세기의 선수: 1999 이탈리아 선수협회 세리에 A 세기의 선수: 2000 FIFA 100: 2004 유럽 축구 연맹 50주년 여론 조사 17위: 2004 밀란 명예의 전당 스포츠 영화 텔레비전 국제 연맹(FICTS) 명예의 전당 명예 화륜 골든 풋: 2012 ("축구 전설상" 부문)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3 발롱도르 꿈의 선수단 은상: 2020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역대 남자부 꿈의 선수단: 2021 상훈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4등급 / 장교장: 1991 같이 보기 원클럽맨 명단 참고 각주 외부 링크 fourfourtwo.com 2009년 회견 프란코 바레시] - 국제 축구 연맹 프란코 바레시 - 유럽 축구 연맹 프란코 바레시 - FootballDatabase.eu 프란코 바레시- TuttoCalciatori 프란코 바레시 - Olympics.com 프란코 바레시 - Olympedia 196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20세기 이탈리아 사람 21세기 이탈리아 사람 남자 축구 스위퍼 이탈리아의 남자 축구 선수 이탈리아의 축구 감독 AC 밀란의 축구 선수 이탈리아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세리에 A의 축구 선수 세리에 B의 축구 선수 풀럼 FC의 비선수진 AC 밀란의 비선수진 1982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199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1994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이탈리아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1984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UEFA 유로 1980 참가 선수 UEFA 유로 1988 참가 선수 FIFA 월드컵 우승팀 선수 FIFA 100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수훈자 브레시아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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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84%ED%98%B8%EC%9D%B4%EC%A0%80%20%28%EC%98%A4%ED%8E%98%EB%9D%B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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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호이저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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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호이저》() WWV.70은 바르트부르크의 노래 경연대회와 탄호이저에 관한 독일 전설을 기초하여, 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하고, 대본을 작성한 3막의 독일어 오페라이다. 작곡과 초연 1843년부터 1845년 사이에 작곡된 1845년 10월 19일에 드레스덴의 궁정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그 때 지휘자는 바그너 본인이다. '파리 판 "의 초연은 1861년 3월 13일에 파리 국립 오페라에서 이루어졌다. 한국 초연은 1979년 11월 12일, 홍연택의 지휘로 국립오페라단에 연출가 한스 하르트레트와 안무가 프레드 마르티니가 참여해 국립극장 대극장에 올려졌다. 버전 정보 드레스덴 판 (1845년) 1845년의 드레스덴 초연에서는, 제3막의 종막 부분에서 베누스는 나타나지 않고, 엘리자베트의 죽음도 암시에 머무르고 있어서, 결말이 청중한테 이해하기 어렵다고 악평을 샀다. 바그너도 그 점을 자각하고 있어, 상연 후 조속히 개정에 착수했다. 1847년에 엘리자베트의 시신과 베누스를 등장시켜, 탄호이저의 구제를 강조하는 형태로 고쳐 썼다. 이 제2 원고가 오늘날 「드레스덴 판」으로서 상연된다. 연주회 등에서 다루어지는 「탄호이저」서곡」은, 일반적으로는 이 드레스덴 판의 서곡을 가리킨다. 파리 판 (1861년) 1859년에 파리를 다시 방문했을 때, 바그너에게 나폴레옹 3세로부터 「탄호이저」상연의 칙명이 내렸다. 바그너는, 대본을 프랑스어로 번역할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개정을 실시했다. 주된 개정 내용은, 제1 막 서두의 베누스베르크 부분을 개정해 「바카날레」라고 일컫는 발레 음악을 첨가하고, 제2막의 노래 자랑 장면에서 발터의 아리아를 삭제한 것이다. 바카날레 추가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했던 그랜드 오페라 관행을 따라서, 발레 삽입을 극장 측이 상영 조건으로 부과해 왔기 때문이다. 바그너도 염원하던 파리에서 성공을 위해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타협하지 못하고, 보통 제2 막이 아닌 제1 막 발레를 삽입했다. 이것은 무희 목적의 제2 막에서 오는 귀족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당시의 정치 대립도 얽혀 방해 공작으로까지 발전하고, 공연 3일만에 중단되는 사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처참히 실패한 사건이 반대로 바그너의 주목을 끌어, 이를 계기로 프랑스 음악계와 문단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때 사용된 버전이 좁은 의미의 '파리 판 "이지만, 오늘날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서곡은 아직 오페라 본체에서 분리된 형태였다. 개정에 따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후의 더 색채적이고 박진감적인 것으로 변모를 이룬 음악이 담겼지만, 이것은 "탄호이저" 작곡 당시의 음악과 양식상의 일관성이 없게 돼버렸다. 바그너는 이후에도 작품에 계속 손을 가하여, 1867년 뮌헨에서 대본을 독일어로 다시 번역하여 상연했다. 빈 판 (1875년) 또한 1875년 빈 공연은 서곡에서 피날레 부분을 삭제하고 단절, 구분없이 제1 막 바카날레로 전환하는 형태 (서곡 289마디에서 바카날레로 들어간다)를 취하도록 했다. 이것이 오늘날 이른바 '파리 판 "으로 정착한다. 엄밀하게는 이것은 "빈 판"이라고 부르고 실제로 새로운 전집 판에서는 "빈 판"으로 앞의 "파리 판"과 구별한다. 바그너 자신은 최종 버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 뒤에도 여러 번 개정에 임하려고 했다. 아내 코지마의 일기에 따르면, 1883년 죽기 전달에도 "아직 세상에 탄호이저라는 빚이 있다"고 털어 놓았었다고 한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코지마의 의향에 따라 오랫동안 "파리 (빈 판)"을 사용했지만 ,볼프강 이후 "드레스덴 판" 이 다시 다루어졌다. 이밖에 제1 막은 "파리 (빈 판)", 제2 막부터는 "드레스덴 판"을 사용하는 절충판이 사용되는 경우도 빈번하여, 지휘자에 따라 미세 교체를 할 수 있다. 악기편성 플루트3(3번은 피콜로 겸함), 오보에2, 잉글리시 호른, 클라리넷3, 바순3, 호른6, 트럼펫3, 트롬본3, 튜바, 팀파니, 큰북, 탬버린, 심벌즈, 트라이앵글, 캐스터네츠, 하프, 현5부 무대 뒤, 별도: 호른8, 트럼펫3 연주시간 드레스덴 판 : 서곡 15분, 1막 51분, 2막 1시간 10분, 3막 54분 빈 판 : 서곡 10분, 1막 1시간 총 연주시간 : 3시간 10분 등장인물 줄거리, 구성 13세기 독일 튀링겐 1막 베누스베르크의 산속 베누스의 궁전 2막 바르트부르크의 음유시인들이 모여있는 성안 3막 바르트부르크의 계곡 서곡 서곡은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에 관능적인 베누스베르크의 세계가 배치되고 그 앞뒤로 경건한 순례자들의 합창 음악이 배치되어 있다 - 3부 형식은 이 오페라 전체의 기본 형식으로 각각의 막과 장은 모두 3부 형식을 취한다. 곡의 제 1부는 안단테 마에스토소, E장조, 3/4박자로 장엄한 '순례의 합창'이 먼저 관악기 합주로 시작된다. 이어서 현악기가 들어와 이 주제가 반복되면서 차차 음량이 커지고 트롬본으로 다시 장엄하게 연주된다. 이 모티브가 여러번 연주되고 난뒤 멀리 사라져가듯이 목관군으로 조용히 연주된다. 제 2부는 갑자기 알레그로, 2/2박자로 바뀌어 베누스베르크의 요염한 세계가 뚜렷해지며 '환락의 동기'가 먼저 비올라에 나타난다. 이어서 '시레네의 부르는 소리'가 목관으로 연주된 다음, 처음 템포로 돌아와 현악기로 힘차게 '베누스 찬가'가 연주된다. 그 뒤 첼로, 바이올린, 클라리넷 등으로 '베누스의 동기'가 나타난다. 이어서 '유혹의 동기'가 바이올린에 나타나고 음악이 계속 고조되다가 베누스베르크의 세계는 멀리 사라져간다. 이제 제 3부로 넘어오면서 관악기로 '순례의 합창'이 들려온다. 이 합창이 한층 힘차고 장엄하게 연주되면서 곡이 끝난다. 주요 아리아 노래의 전당 Dich, teure Halle (소프라노) 볼프람의 아리아 Blick'ich umher(바리톤) 엘리자베트의 기도 Elisabeths Gebet(소프라노) 저녁별의 노래 O! du mein holder Abendstern(바리톤) 각주 참고 문헌 The Opera Goer's Complete Guide by Leo Melitz, 1921 version. The New Kobbes Opera Book (11th edition), 1997. Murakami, Haruki. "The Second Bakery Attack." The Elephany Vanishes and Other Stories. New York: Vintage Books, 1993. 외부 링크 독어|한글 대본Go! Classic 회원/대본 자료실 줄거리, 해설Go! Classic 줄거리, 해설Go! Classic 베이직 클래식. 줄거리 네이버 음악사전 줄거리, 해설 곽근수의 음악이야기 줄거리 (영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줄거리 (영문)Opera~Opera, Alison Jones 작성 줄거리 (영문) "NAXOS.COM" 대본, 줄거리, 하일라이트 (영어, 독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대본, Libretto List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낭만 오페라 독일어 오페라 1845년 오페라 독일의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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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B2%A4%ED%88%AC%EC%8A%A4%20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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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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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 풋볼 클래브()는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토리노가 연고지인 축구 클럽이다. 유벤투스는 라틴어로 젊음이라는 의미이며, 줄여서 유베(Juve)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 3번째로 오래된 축구 클럽이며, 2006–07 시즌을 제외하고 줄곧 1부 리그인 세리에 A에 있었다. 연고지인 토리노에서는 토리노 FC와 경쟁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 두 클럽 간의 경기를 토리노 더비라고 부른다. 1990년대 후반 3연속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1995-96 우승, 1996-97, 1997-98 준우승)을 비롯하여 꾸준하게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활약하여, IFFHS(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 Statistics, FIFA 산하 통계 전문 기관)에서 선정한 20세기 축구 클럽 순위에서 1위인 레알 마드리드에 뒤이어 2위에 위치하면서 다시 한 번 세계 최정상의 클럽들 중 하나임을 공인받았다. 이탈리아 클럽랭킹 1위, 세리에 A 최다 우승(36회) 등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역사 초기 유벤투스는 토리노에 있는 마시모 다젤리오 라이시엄 학교의 학생들이 1897년 말에 SC 유벤투스(Sport Club Juventus)라는 이름으로 창단하였지만, 2년 뒤에 유벤투스 FC(Juventus Football Club)로 개명하였다. 축구단은 1900년에 이탈리아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였다. 이기간 동안에 팀은 분홍색과 검은색 유니폼을 입었다. 유벤투스는 벨로드로모 움베르토 1세 경기장에서도 뛰던 1905년에 처음으로 축구 선수권 대회를 우승하였다. 이때부터 팀의 상징색은 잉글랜드에 있는 노츠카운티에 영감을 받아서, 검은색과 하얀색 줄무늬로 바꿨다. 일부 운영진들이 토리노 밖으로 구장을 옮길 것을 고려하자, 1906년에 클럽이 분열되었다. 알프레도 딕 회장은 이 사태에 안타까워하였고 일부 핵심 선수들과 함께 클럽을 떠나 데르비 델라 몰레를 낳게한 FBC 토리노를 세웠다. 유벤투스는 팀 분열 이후에 이 기간 많은 시간들을 팀을 서서히 회복하는데 보내며, 1차 세계 대전에도 살아남았다. 리그 지배 피아트의 소유주 에도아르도 아녤리가 1923년에 클럽의 소유권을 획득하였고, 새 경기장을 지었다. 이 인수는 1925–26 시즌에 안토니오 보야크의 놀라운 골들과 알바 로마를 합계 12-1로 이기면서, 팀의 두 번째 스쿠데토를 차지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유벤투스는 1930년대 이후부터 이탈리아 축구계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확립하였으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프로 축구단이 되었고 서포터들을 기반으로 분권화시켰으며, 이를 통하여 카를로 카르카노 감독과 1934년 FIFA 월드컵 시절 팀을 이끌던 비토리오 포초 시대의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와 5연속 스쿠데토를 이뤄냈다. 당시에 팀에는 라이문도 오르시, 루이지 베르톨리니, 조반니 페라리, 루이스 몬티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유벤투스는 스타디오 코무날레로 이전하였지만, 1930년대의 리그 휴식과 1940년대에 리그 지배권을 되찾지는 못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잔니 아녤리가 명예회장으로 임명되었다. 클럽은 1949–50, 1951-52 시즌 두 차례 우승을 하였으며, 그중 후자는 잉글랜드 출신의 감독 제시 카버의 지휘하에 이룬 것이였다. 웨일즈 출신 존 찰스,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 오마르 시보리등 두 공격수가 1957-58 시즌에 영입이 되어, 오랫동안 잠피에로 보니페르티와 함께 뛰었다. 그 시즌에 유벤투스는 리그 우승 10회를 달성하여 그들의 유니폼에 황금 별을 달았다. 같은 시즌에 오마르 시보리는 클럽 역사상 첫 발롱도르 수상자가 되었다. 다음 시즌에 유벤투스는 피오렌티나의 리그 첫 우승을 좌절시킴과 동시에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하며 더블을 이룩하였다. 보니베르티가 1961년에 은퇴하였으며, 그가 이룩한 유벤투스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인 182골은 이후 델 피에로가 경신하기 전까지 45년간 깨지지 않았다. 10년의 남은 기간 동안, 유벤투스는 1966-67 시즌 단 한번 우승을 하는데 그쳤다. 그럼에도, 1970년대에 이탈리아 축구내에서 강자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다. 전 유벤투스의 선수 체스트미르 비츠팔레크 지휘하에 로베르토 베테가, 프란코 카우시오, 호세 알타피니 등의 선수들과 함께 1966-67, 1972-73 시즌에 스쿠데토를 차지했다. 10년의 남은 기간 동안, 수비수 가에타노 시레아 눈부신 활약덕에 두 차례 리그 우승을 더 하였다. 이후의 우승은 1980년대 초의 클럽의 리그 지배를 하게 기여하고 1978년 FIFA 월드컵과 1982년 FIFA 월드컵 기간이 포함된 엔초 베아르초트의 시대의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뼈대를 이룬 조반니 트라파토니 지휘하에 이뤘다. 유럽 대항전 트라파토니 시대는 1980년대에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1984년을 시작으로 80년대에 세 차례 리그 우승 타이틀을 거머줬다. 이로 인해 유벤투스는 통산 리그 우승 20회를 거뒀고 유니폼에 두 번째 별을 달었으며, 이는 이탈리아 축구 클럽 중 최초였다. 이 시기에 유벤투스 선수들은 상당한 주목을 많이 받았는데, 이중에는 이탈리아의 1982년 FIFA 월드컵 우승을 이끌고 득점왕과 골든볼은 물론 그해 발롱도르까지 수상한 파올로 로시가 특히 그랬다. 프랑스인 미셸 플라티니 역시도 1983년과 1984년, 1985년 연달아 3년 연속 올해의 유럽 선수상을 수상하며 기록을 세웠다 유벤투스는 팀 선수단중 4년 연속 올해의 유럽 선수상을 수상한 선수를 보유한 유일한 축구팀이다. 플라티니가 1985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었는데, 이 골로 유럽 축구를 바꿔놓은 비극적인 사건인 헤이젤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 해 유벤투스는 UEFA 주관의 3개의 대회를 모두 우승한 첫 클럽이 되었고, 그후 인터콘티넨털컵을 우승해내며, 현재까지도 참가 가능한 모든 대륙별 대회와 세계 타이틀을 모두 우승해낸 전세계에 유일한 축구팀이 되었다. 이탈리아 챔피언에 오른 1985-86을 제외하고는 그 이후 80년대에 들어서 유벤투스는 성공적이지 못한 세월을 보냈다. 그 시기에는 디에고 마라도나의 나폴리와 밀란 그리고 인테르나치오날레, 두 밀라노 클럽과 경쟁을 했어야 했다. 1990년, 유벤투스는 1990년 FIFA 월드컵을 위해 지어졌던 스타디오 델레 알피로 홈 경기장을 옮겼다. 리피 시대의 성공 1994-95 시즌 시작을 하면서, 마르첼로 리피가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의 첫 시즌에 1980년대 중반 이후로 우승이 없던 세리에 A 우승 타이틀을 가져왔다. 이 당시의 선수들로는 치로 페라라, 로베르토 바조, 잔루카 비알리, 어린 시절의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있었다. 리피는 다음 시즌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파브리치오 라바넬리의 골로 1-1 무승부 끝에 승부차기 끝에 아약스를 꺾고 우승컵을 들었다. 유벤투스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네딘 지단, 필리포 인차기, 엣하르 다비츠 같은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들을 영입하였다. 유벤투스는 1996-97 시즌과 1997-98 시즌 연속 우승과 더불어 1996년 UEFA 슈퍼컵, 1996년 인터콘티넨털컵을 우승하였다. 유벤투스는 이시기에 1997년, 1998년에 결승전에 올랐지만, 각각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배했다. 리피 없이 한 시즌을 보내고 그가 복귀한 뒤, 잔루이지 부폰과 다비드 트레제게, 파벨 네드베드, 릴리앙 튀랑 같은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였고, 2001-02, 2002-03 시즌에 리그 우승을 이뤘다. 유벤투스는 또한 이탈리아 팀이 모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오른 2003년에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0-0 무승부를 거치고 승부차기 끝에 밀란에게 패배했다. 그 다음해 유벤투스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컵을 가져다준 감독 중 한 명인 리피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칼치오폴리 스캔들 및 세리에 B 강등 (2006) 파비오 카펠로가 2004년에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2번의 세리에 A 우승을 안겨줬다. 하지만 2006년 4월에 유벤투스는 칼초폴리에 연루된 5개의 클럽중 하나가 되었고, 그 결과로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세리에 B로 강등되었다. 카펠로 감독 시절에 이룬 2번의 세리에 A 우승(2004-05, 2005-06)도 무효 처리되었다. 세리에 B로 강등되자, 릴리앙 튀랑,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파비오 칸나바로가 포함된 많은 핵심 선수들이 팀을 떠났다. 하지만 부폰과 델 피에로, 네드베드 같은 거물 선수들은 팀에 잔류하여, 세바스티안 조빈코와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 같은 프리마베라 출신의 1군으로 올라온 젊은 선수들과 함께 세리에 A 승격을 도왔다.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21골을 넣어 득점왕에 오르며, 한 시즌 만에 다시 세리에 A로 복귀하였다. 세리에 A 복귀 (2007-08) 2007-08 시즌 세리에 A로 복귀한 후, 유벤투스는 클라우디오 라니에리를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그들은 복귀 후 첫 시즌만에 상위권인 리그 3위로 시즌을 마쳤고, 챔피언스리그 3차 예선전 출전권이 주어졌다. 유벤투스는 조별예선전에 진출하여, 같은 조에 있던 레알 마드리드를 홈, 원정에서 모두 이기고, 16강에 진출했지만 첼시에게 탈락하였다. 라니에리는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고 남은 2008-09 시즌 종료를 두 경기를 앞두고 치로 페라라가 임시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후 그는 2009-10 시즌 정식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페라라의 유벤투스 감독 부임 기간에 챔피언스리그와 코파 이탈리아에서 탈락하며 실패했음이 증명되었고, 2010년 1월 말에 리그에서 6위에 그치자, 페라라를 경질시키고 임시 감독으로 알베르토 차케로니를 부임시켰다. 차케리니는 7위로 마감하며 상황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 했다. 세리에 A 2010-11 시즌에는 안드레아 아녤리가 장클로드 블랑을 대신하여 유벤투스의 회장으로 부임하였다. 아녤리의 첫 행동은 차케로니와 스포츠 단장이였던 알레시오 세코를 삼프도리아의 감독 루이지 델네리와 단장 주세페 마로타로 교체한 것이였다. 하지만 델네리 역시도 상황을 역전시키는데는 실패했고 경질됐다. 시에나의 승격으로 이루고 유벤투스 출신 선수이자 팬들이 선호했던 신임 감독인 안토니오 콘테가 델네리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2011년 9월, 유베는 유벤투스 스타디움(현 알리안츠 스타디움으로 홈 경기장을 옮겼다. 무패 우승 (2011-12) 콘테가 감독으로 부임한 유벤투스는 세리에 A 2011-12 시즌 전체를 무패 성적을 거뒀다. 시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유벤투스는 북부의 라이벌인 밀란과 1위를 두고 살떨린 우승 경쟁을 펼쳤었다. 유벤투스는 37번째 경기에서 칼리아리를 2-0으로 꺾고, 밀란이 인테르나치오날레에게 0-2 패배를 하면서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다른 주목할만한 업적으로는 해당 시즌 세리에 A 최다 점수차 원정 승리(피오렌티나 5:0)와 그 해에 유럽 6대 리그에서 두 번째로 적은 최소 실점 기록등이 있다. 리그 3연패 (2013-14) 세리에 A 2013-14 시즌에 유벤투스는 세리에 A 역대 최다 승점 기록인 102점을 쌓으며, 3연속 스쿠데토를 가져갔다. 이 우승으로 인해 유벤투스는 이탈리아 최초로 세리에 A 30회 우승을 달성하였다. 그들은 또한 UEFA 유로파리그 2013-14에 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10명으로 이뤄진 벤피카의 카테나치오에 탈락하면서, 그들의 홈 경기장인 유벤투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결승전 진출권을 놓치고 말았다. 리그 4연패와 더블 (2014-15) 2014-15 시즌에는 안토니오 콘테 감독이 나가고,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를 감독으로 선출했다. 그렇지만,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감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다. 그러나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는 이러한 예상을 깨고, 마르키시오, 아르투로 비달, 폴 포그바, 피를로를 잘 조화롭게 움직여서 세리에 A 4연패를 달성했으며, 코파 이탈리아까지 우승하며 더블을 달성한다. 그러나 UEFA 챔피언스리그 2014-15에서도 결승까지는 진출했지만, 결승전에서 FC 바르셀로나에게 3-1로 패하여 준우승에 그침으로써 트레블 달성은 실패했다. 리그 5연패와 2년 연속 더블 (2015-16) 그러나 유벤투스는 2014-15 시즌을 마치고, 카를로스 테베스, 안드레아 피를로, 아르투로 비달 등의 핵심 멤버들이 팀을 떠났다. 그로 인해, 유벤투스는 사미 케디라, 마리오 만주키치, 후안 콰드라도(당시 임대), 파울로 디발라 등을 영입해 그들의 공백을 메우려고 애를 썼지만, 대부분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다. 거기다 새로 영입한 사미 케디라와 지난 시즌 유벤투스의 중원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마르키시오가 부상으로 쓰러지고, 선수들의 노쇠화와 지난 시즌 에이스 역할을 했던 폴 포그바마저 극심한 부진에 빠지니, 유벤투스는 한때 14위까지 떨어지는 부진을 겪었다. 그러나 유벤투스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당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선두권으로 달리던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더블을 달성하는 등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였고, 마르키시오등 부상으로 이탈했던 선수들이 돌아오면서 리그에서 연승을 내달렸다. 이윽고 SSC 나폴리와 치른 25라운드 경기에서 시모네 차차의 결승골로 승리하면서, 1위 탈환과 함께 리그 15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35라운드에서 SSC 나폴리가 AS 로마에 패함에 따라 세리에 A 5연패와 통산 32번째 스쿠데토 획득을 확정지었다. 코파 이탈리아 AC 밀란과의 결승전에서 연장 전반 알바로 모라타의 결승골로 우승함으로써 2년 연속 더블을 달성했다. 이는 이탈리아 클럽 중에서는 최초의 기록이다. 유니폼 유벤투스는 1903년 이래로 검은색과 하얀색스 스트라이프 줄무늬가 있는 상의와 하얀색 하의, 가끔식은 검은색 하의를 입고 경기를 뛰었다. 본래 유벤투스는 검은색 타이가 있는 분홍색 상의를 입었는데, 이는 오직 잘못 배달된 유니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선수 아버지 중 한 명이 초창기의 유니폼을 제작했으나, 계속된 세탁으로 유니폼 색깔이 빠지게 되어, 1903년에 기존의 유니폼을 대체할 새로운 것을 찾게 되었다. 유벤투스는 팀 선수 중 한 명인 잉글랜드 출신인 존 새비지에게 잉글랜드에서 더 나은 색깔의 새로운 유니폼을 공급해줄 연락책이 있는지 물어봤었다. 그는 노팅엄에 노츠 카운티의 서포터 친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가 토리노로 노츠 카운티의 유니폼 색깔과 같은 검은색 하얀색 스트라이프 줄무늬가 있는 유니폼을 보냈다. 유베는 유니폼 디자인이 공격적이고 강하다고 생각해 그 후로 계속 입었다. 선수단 최근 명단 2023년 1월 31일 기준'' 임대 선수 명단 코칭 스태프 2021년 1월 14일 기준 우승 기록 국내 대회 세리에 A : 36회 세리에 B : 1회 코파 이탈리아 : 14회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 9회 유럽 대회 UEFA 챔피언스리그 : 2회 UEFA 유로파리그 : 3회 UEFA 슈퍼컵 : 2회 UEFA 컵위너스컵 : 1회 UEFA 인터토토컵 : 1회 국제 대회 인터콘티넨털컵 : 2회 클럽 통산 기록 출장 득점 (#)은 현역 선수. 비판 2019년 7월 26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된 팀 K리그와의 친선경기에서 계약서에 명시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45분 이상 의무 출전 조항 파기 등 무성의한 태도로 한국 축구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사건 이후, 호날두는 날강두, 느그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문양, 별 의미 스쿠데토(Scudetto : 작은 방패) : 세리에 A에서 우승한 팀이 다음 시즌 유니폼에 부착할 수 있는 문양이다. 코카르다 트리콜로레(Coccarda Tricolore : 삼색모장) : 코파 이탈리아에서 우승한 팀이 다음 시즌 유니폼에 부착할 수 있는 문양이다. 금별 : 세리에 A 10회 우승 시 금별 1개를 유니폼에 부착할 수 있다. 은별 : 코파 이탈리아 10회 우승 시 은별 1개를 유니폼에 부착할 수 있다. 각주 외부 링크 유벤투스 공식 웹사이트 토리노의 축구단 1897년 설립된 축구단 세리에 A 구단 세리에 B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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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A0%88%EC%9D%B4%EC%A0%80%EA%B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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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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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강(-江; )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강이다. 로키산맥부터 태평양 쪽의 조지아 해협으로 흐른다. 총 길이는 1400 km, 면적은 220,000 km2이다. 로키산맥에서 발원한다. 캐나다의 강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지리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강 캐나다의 람사르 등록 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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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A%B5%AC%ED%98%95%20%ED%96%89%EC%84%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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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형 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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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형 행성(地球型行星, terrestrial planet)은 태양계에서 규산염 따위로 된 암석이나 금속 등 고체 상태의 물질을 주성분으로 하는 행성을 말한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이 이에 해당한다. 목성형 행성보다 안쪽 궤도에 있으며, 크기 또한 상대적으로 작다. 구조 지구형 행성은 철을 주성분으로 하는 핵을 규산염 성분의 맨틀이 감싸고 있다. 달 역시 비슷한 구조이나 철로 된 핵은 없다. 이오와 유로파 또한 지구형 행성과 유사한 외부 구조를 가진 항성이다. 지구형 행성들은 표면에 계곡, 충돌구, 산, 화산의 지형을 지닌다.(단 행성의 물과 지각 활동에 영향을 받는다) 지구형 행성의 대기는 초기 생성과정에서 미행성과의 충돌 및 내부 화산활동으로 인하여 생겨났는데, 이를 부대기(secondary atmosphere)로 일컫는다. 이는 원시태양계에 충만하던 가스구름으로부터 대기성분을 확보한 목성형 행성과는 구별된다. 후자를 원대기(primary atmosphere)로 일컫는다. 이론적으로 지구형 행성(또는 암석 행성)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규산염질 행성이며, 다른 하나는 탄소질 행성이다. 탄소질 행성(또는 다이아몬드 행성)의 경우 그 조성은 C형 콘드라이트와 유사하리라 추측된다. 태양계의 지구형 행성 태양계에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4개의 지구형 행성이 있다. 태양계가 처음 생겨날 때 존재했던 수많은 미행성들은 서로 뭉쳤고 현재의 4개의 행성의 재료가 되었다. 생성 과정에서 살아남은 네 행성 중, 지구만이 물로 이뤄진 수권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암석질 왜행성인 세레스가 존재한다. 명왕성과 같은 왜행성들은 고체의 표면을 지닌다는 점에서 지구형 행성들과 유사하지만, 구성 성분이 얼음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이 점에서 암석질 왜행성과 달리 얼음 왜행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계 지구형 행성 현재 발견된 외계행성들 중 대다수는 가스행성이다. 지구형 행성은 작은 질량으로 말미암아 관측을 통하여 그 존재를 유추하기가 가스행성보다 쉽지 않다. 그렇지만 현재 발견된 외계행성들 중 여럿은 지구형 행성으로 추측된다. 알렉산더 볼시찬은 펄사 PSR B1257+12를 도는 지구 질량의 0.02, 4.3, 3.9배의 천체를 발견했다. 펄사의 맥동 관측에서 약간의 변화를 감지했는데 여기서 행성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 행성들이 펄사의 주위를 돌지 않았다면 그 존재는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핵융합성(fusing star)의 주위를 도는 행성 중 가장 먼저 발견된 페가수스자리 51b의 경우, 많은 천문학자들은 항성의 가까운 곳(0.052AU)을 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행성이 거대한 지구형 행성일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러나 유사한 사례인 HD 209458 b의 지름을 측정한 결과 가스행성임이 밝혀졌고 이는 페가수스자리 51b도 마찬가지였다. 2005년 6월 13일, 지구에서 15광년 떨어진 적색왜성 글리제 876의 주위에서, 지구형 행성으로 추측되는 작은 질량의 행성(글리제 876d)이 발견되었다. 이 행성의 공전주기는 2일에 불과하며, 질량은 지구의 5~7배였다. 2005년 8월 10일, PLANET/RoboNet과 OGLE은 OGLE-2005-BLG-390Lb로 명명된 행성을 발견했다. 이 행성의 질량은 지구의 5.5배로, 약 21,000광년 떨어진 전갈자리의 한 항성 주위를 공전하고 있었다. 이 행성과 모항성의 거리는 대략 태양~소행성대 정도였다. 이 행성은 중력렌즈 관측법을 이용하여 발견되었으며, 이 방법을 통하여 모항성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지구 정도의 질량을 지닌 행성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2007년 4월 4일, 11명의 유럽 과학자들로 구성된 관측팀은 태양계 밖에서 지구 정도의 온도를 지닐 것으로 추측되는 행성을 발견했다. 이 행성은 칠레의 라 실라(La Silla) 소재의 유럽 남방 천문대의 망원경을 통해 발견되었다. 이 행성은 적색왜성 글리제 581의 주위를 돌고 있었으며, 글리제 581c로 명명되었다. 질량은 지구의 약 5배로, 만약 규산염질 행성일 경우 지름은 지구의 1.5배로 추측되고, 얼음으로 이루어진 행성일 경우 지름은 좀 더 클 것이다. 2007년 4월 24일 스위스 제네바 연구소의 천문학자 스테판 우드리 팀은 생물권 내에 자리잡고 있어 액체 물이 표면에 존재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보이는 행성을 발견했다. 이 행성은 칠레의 라 실라(La Silla) 소재의 유럽 남방 천문대의 망원경을 통해 발견되었다. 이 행성은 적색왜성 글리제 581의 주위를 돌고 있었으며, 글리제 581d로 명명되었다. 종전 이론으로는 글리제 581d가 생물권 바깥을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9년 4월 21일 발표된 새로운 연구 결과에 따르면 d는 생물권 내를 공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구와 가장 비슷한 외계행성들 각주 같이 보기 뜨거운 목성 목성형 행성 명왕성형 천체 슈퍼지구 글리제 581c 글리제 876d 행성 거주가능성(planet habitablity)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 행성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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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5%8C%EB%A5%B4%EB%8B%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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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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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니()는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테르니도에 위치한 코무네다. 테르니도의 도청 소재지이고, 네라강 평야에 위치해 있다. 로마로부터 북동쪽 104km 거리에 있다. 선사 시대 때부터 사람이 거주하던 곳이며, 로마 제국 시절에는 도시가 건설되었다. 15세기에는 교황령에 속했다. 그 후 부근에서 생산되는 철을 이용하여 제철업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최초의 근대적인 철강공장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의 제철공업 중심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크게 파괴되었으나, 이후 복구되어 다시 중부 이탈리아의 중요한 공업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강철의 도시", "이탈리아의 맨체스터"라는 별명이 붙었다. 선사 시대의 유물이 남아 있으며,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 인공폭포인 마르모레 폭포 등의 로마 제국 시절의 유적도 있다. 마르모레 폭포는 현재 높이 165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폭포로 개조되었고, 수력발전에도 이용되고 있다. 테르니는 이곳의 수호성인인 발렌티누스 때문에 "연인들의 도시"로 알려져있다. 발렌티누스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주교가 되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지어진 바실리카 제단이 보존되어 있다. 경제 이 도시는 중요한 산업 허브 세 개를 지녔는데, 하나는 AST(티센크루프 그룹 계열사의 일부)라고 불리는 스테인리스강이며 테르니 동부 지역에 있는 넓은 부분에 위치해있다. 두 번째는 서부 지역에는 위치한 "아레아 폴리머(area Polymer)"라고 알려진 네 개의 다른 다국적 화학 기업들이다. 세 번째 산업 허브는 그린 에너지 기술들을 개발하고 이탈리아에서 그린 파워 발전소들을 건설하는 "테르니 리서치(TERNI Research)"이다. 출신 유명 인물 마르쿠스 클라디우스 타키투스, 로마제국의 황제 발렌티누스, 주교이자 성인 프란체스코 아고스티니, 역사가이자 작가 바코닌 보르차키니, 그랑프리 모터 레이싱 드라이버 줄리오 브리찰디, 작곡가이자 플루트 연주자 알레산드로 카사그란데,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 아우렐리오 데 펠리체, 조각가 에토레 파트리치, L'Italia의 출판자 리베로 리베라티, 500 cc 레이서 다닐로 페트루치, 모토GP 레이서 파올로 탈리아벤토, 세계적인 축구 심판 스테파노 미켈리, 음악가 ("My Mine") 자매 도시 테르니의 자매 도시 목록: 각주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AboutTerni.com Terni city portal Terni Oggi Terni at UmbriaTravel.Com 움브리아주의 코무네 테르니도의 코무네 이탈리아의 도청 소재지 움브리아주의 로마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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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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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8%98%EB%A7%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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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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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만(李秀滿, 1952년 6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진행자, 프로듀서 출신의 연예기획사 SM 엔터테인먼트를 창립한 기업인이다. 오늘날 서태지와 함께 케이팝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90년대부터 케이팝의 주류격인 아이돌 시장을 개척하고 중국과 일본 등 해외시장 진출을 본격 시도해서 성공했다. 2010년대 이후부턴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프로듀서 일만 부분적으로 하고 있었으나, SM의 미래에 대해 다른 방향성을 가진 경영진들과 갈등 끝에 2023년 SM 주식을 대거 내놓는 등 사실상 SM과 결별하고 독자 행보를 걷고 있다. 학력 1965년 서울청운초등학교 졸업 1968년 경복중학교 졸업 1971년 경복고등학교 졸업 1978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공학 학사 1985년 캘리포니아주립 대학원 노스리지 컴퓨터공학 석사 생애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다만 본적은 서울로, 성장 역시 서울에서 했다. 1972년, 4월과 5월의 멤버로 데뷔하였지만 건강상 문제로 탈퇴하였다. 그런 이유로 목소리만 녹음이 되었고 음반 표지에는 백순진, 김태풍만이 찍혔다. 그러다가 1975년 대마초 파동 당시 ‘바른 생활’ 이미지로 살아 남아 진가를 드러냈다. 1977년 샌드페블즈 2기 보컬로 잠시 활동했었다. 그리고 1977년 《Lee Soo Man》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을 낸 후, 1989년까지 《뉴 에이지》, 《끝이 없는 순간》 등의 앨범을 발매했다. 주로 어덜트 컨템포러리 스타일의 음악으로 활동하였으며, 머리의 두상이 말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이문세, 유열과 함께 ‘마삼트리오(馬三Trio)’로 불리기도 했다. 음악 활동 앨범 1972년: 4월과 5월 1집 1976년: 이영식 이수만 1977년: Lee Soo Man 1978년: 이수만 1980년: 이수만과 365일 1980년: Greatest 1983년: 이수만 1985년: 이수만 1986년: 끝이 없는 순간 1989년: New Age 2 1989년: 뉴 에이지 연예 활동 진행 텔레비전 1977년 MBC 《토요일 토요일밤에》 1977년 《MBC 대학가요제》 (77년 ~ 80년, 91년 ~ 93년 통산 7회 진행) 1985년 《MBC 강변가요제》 1986년 MBC 《화요일에 만나요》 1986년 KBS2 《연예가중계》 1987년 MBC 《젊음은 가득히》 1988년 《MBC 창작동요제》 (88년 6회 ~ 90년 8회, 통산 3회 진행) 1991년 MBC 《이수만과 함께》 1990년 KBS 《신혼은 아름다워》 1993년 MBC 《이야기쇼 만남》 1994년 SBS 《순간포착 당신이 특종》 1994년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1994년 MBC 《아름다운 것이 좋다》 1995년 SBS 《TV전파왕국》 1995년 MBC 《경찰청사람들 특별기획 학교폭력》 1995년 HBS 《이수만쇼》 1996년 SBS 《우리는 여고동창》 1996년 MBC 《생방송 아침》 라디오 1974년 TBC 《비바 팝스》 1976년 MBC 《별이 빛나는 밤에》 1980년 TBC 《밤 하늘의 멜로디》 1987년 MBC 《젊음의 음악캠프》 1988년 MBC 《팝스 투나잇》 1989년 MBC 《젊음의 음악캠프 이수만과 함께》 광고 1976년 롯데제과 롯데 이브껌 1991년 롯데칠성 델몬트 따봉주스 - 최진희와 동반 출연 1994년 현대자동차 엑센트 - 이문세, 유열과 동반 출연 1998년 리유니트 와인 2011년~2012년 KB투자증권 홍보대사 2005년 서울시 홍보대사 2011년 2012 경남고성공룡엑스포 홍보대사 프로듀서 이수만 1989년 2월 14일 자신의 이름 이니셜을 딴 S.M.기획을 설립하며 연예기획사 사업을 시작했다. 1995년 2월 14일 SM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2002년 4월 18일 - 4월 20일 세계 경제 포럼 참가했다. 2003년 11월 5일 - 11월 7일 세계 경제 포럼 참가했다. 2004년 9월 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 25부에서 특경가법상 횡령 혐의 등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선고 받았다. 2006년 3월 12일 SBS 스페셜 《아시아 쇼비즈 삼국지 이수만의 CT(Culture Technology)론과 한류의 미래》편을 통해 집중조명 받았다. 5월 30일 하버드 MBA 학생 대상 한류 특강을 했다. 10월 중국 대표 시사경제 잡지 환치우 (Globe) 특별 기획기사 "전 세계 스타 제작 회사의 노하우" 집중보도 했다. 2007년 1월 1일 LA 타임스, 이수만과 한류 집중조명했다. 6월 5일 미국 하버드대학교 MBA 학생 50명을 대상으로 2년 연속 방문해, 한류강의 앙코르 요청을 받았다. 2008년 3월 24일 MIT 경영대학원 (MIT Sloan School of Management) MBA 학생 22명을 대상으로, 한류의 글로벌 전략을 배우기 위한 강의 요청을 받았다. 4월 22일 중국 대표 포털 소후닷컴 특별 인터뷰, 스페셜 웹진 ‘大人物 Big Pot’ 게재,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인터뷰 게재된 것은 최초이다. 5월 23일 코넬대학교 존슨 경영대학원 MBA 학생 35명을 대상으로, 한류의 글로벌 전략을 배우기 위해 SM 엔터테인먼트 본사를 방문했다. 6월 2일 하버드 경영대학원 MBA 학생 45명을 대상으로, 이수만 회장으로부터 한류 비즈니스 전략을 배우기 위해 3년 연속 SM 엔터테인먼트 본사를 방문했다. 9월 10일 "Best of Asia, Bring on America!" BoA 미국 진출 기자회견을 통해 BoA의 한국 가수 최초 미국 메인스트림 진출 발표했다. 11월 6일 2008 글로벌 인재포럼 '글로벌 음악인재 양성' 주제로 강연했다. 2009년 3월 17일 BoA의 미국 정규 1집 "BoA"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4월 20일 CNN, USA TODAY, CBS, Pacific daily News, Minnesota Public Radio등 7개 매체의 기자단 특별 만났다. (아시아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 대중 음악의 우수성과 성공 전략 등 대담) 6월 23일 샤또 무똥 로칠드에서 기사작위를 받았다. (60년 만에 처음 주최한 샤또 무똥 로칠드 기사 작위 수여식에서 유일한 문화계 인사로 수상) 2010년 3월 27일 미국 보스턴에 위치한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열린 "아시아 비즈니스 컨퍼런스"에 아시아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하는 인물로 초청받아 특별 강연했다. 5월 14일 제임스 카메론 감독, 삼성전자와 3D 콘텐츠 제작 협력 발표했다. 10월 14일 SM 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프로듀서로써 제 11회 세계지식포럼 3D 세션 참석했으며, 삼성전자 윤부근 사장, 드림웍스 제프리 카젠버그와 3D 콘텐츠 산업 진화 방향 발표했다. 2011년 3월 17일 SM엔터테인먼트, 日 지진 피해 돕기 위해 대한적십자사 통해 일본 적십자사에 피해복구성금 10억원 기부 3월 27일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MBA 학생 대상으로 ‘한류 비즈니스 전략’ 강연 4월 1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포드 대학교 Knight Management Center에서 MBA 학생 대상으로 "한류 비즈니스 전략"에 대해 강연했다. 6월 10일, 6월 11일 SMTOWN LIVE WORLD TOUR in PARIS 개최했다. 6월 11일 프랑스 파리 Marriott Rive Gauche 호텔에서 Writers & Publishers Conference 을 개최하였고, 유럽 작곡가들과 퍼블리셔 50여명이 참석, CT론 강연을 했다. 7월 KB 투자증권의 기업 홍보 광고 모델로 선정, 광고 출연료 주 프랑스 한국 문화원에 기부 2012년 4월 9일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힐러리 클린턴 장관 주최 영화 특별시사회에 공식 초청받아 참석 2013년 3월 4일 모교인 서울대학교 입학식 축사자로 참석 9월 10일 S.M. 엔터테인먼트-삼성, 사회공헌 사업 공동 추진 업무협약식 참석 2014년 4월 28일 이수만 프로듀서,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세월호 침몰 사고 실종자와 희생자, 유가족을 돕기 위해 대한적십자사에 10억원 기부 4월 30일 S.M. 엔터테인먼트-에이벡스뱅가드, 유니버설뮤직재팬과 디지털 음악 비즈니스 강화를 위한 3자 합작회사 'everysing Japan' 설립 5월 8일 S.M. 엔터테인먼트그룹-중국 바이두 그룹 전략적 업무제휴 MOU 체결 9월 3일 S.M. 엔터테인먼트 그룹, 미디어 아시아 그룹과 전략적 한중 합작 및 제휴 발표 및 협약식 참석 2015년 3월 24일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과 SMTOWN@coexartium 방문 5월 21일 중국 청두에서 열린 '한중고위기업가포럼' 기조연설 10월 22일 KAIST 문화기술대학원 10주년 기념 행사에 특별 초청 및 축사 2016년 1월 27일 S.M. 엔터테인먼트 그룹의 2016년 신규 프로젝트 및 신인 그룹을 런칭하는 프리젠테이션 쇼'SMTOWN: New Culture Technology, 2016'를 진행함 11월 30일 제7회 성공경제포럼 ‘AI와 한류의 미래’이어령 교수와 대담 12월 4일 ~ 12월 5일 '제11회 한중일 30인회' 한국대표 참석 "삼국 프로듀싱 시장기술 뭉쳐 세계 1등 시장 만들다" 연설 2017년 3월 14일 '한-인도네시아 비즈니스 서밋' 문화계 대표 참석 및 "한-중-일-인도네시아 협력, 동양의 할리우드 만들 수 있어" 기조연설 7월 20일 서울국제포럼 'K팝을 통한 문화 콘텐트 외교와 SM이 바라보는 미래론' 수상 기념강연 영산외교인상 수상 9월 4일 '한-인도네시아 문화콘텐츠포럼' 기조연설 "문화 콘텐츠 산업의 전망과 미래를 대비한 아시아 국가 간 협력" 강연 11월 미국 유명문화 매거진‘Variety’발표 'Variety 500’ 선정 12월 5일 '매경 베트남 포럼'전야제 기조연설 "AI연예인 아바타와 집에서 문화 즐기는 세상 곧 올 것" 12월 6일 2017 코틀러 어워즈 '최고경영자상' 수상 2018년 3월 22일 스포츠동아 창간 10주년 기념 선정 한국 연예계를 움직이는 파워 피플 1위 선정 6월 미국 Variety 선정 "인터내셔널 뮤직 리더 2018" 등극 6월 28일 2018 한중경영대상 '최고경영자상' 수상 9월 11일 '한-베트남 비즈니스 협력 세미나' 기조 연설 "한국과 베트남의 협력을 통한 문화산업의 미래 전략" 10월 2018 리더십 잘 발휘하는 경영인 4위 선정 10월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경영인 6위 선정 10월 대학생이 생각하는 최고의 CEO 10위 선정 11월 미국 Variety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리더 500" 등극 2019년 2월 21일 '한-인도네시아 콘텐츠 및 IT 협력 세미나' 기조연설 "국가 간 협력을 통한 문화 산업의 미래 전략" 5월 14일 이수만 프로듀서, 방한한 중국 칭다오 멍판리 시장과 미래의 칭다오 논의 5월 미국 Variety 선정 "인터내셔널 뮤직 리더 2019" 선정 7월 5일 '2019 한국문화산업포럼' 기념사 연설 "한류 문화와 지역 발전" 7월 16일 영국 BBC, 한류 · 케이팝의 선구자 이수만 프로듀서 집중 취재 8월 세계적인 뮤직 레이블 CMG요청으로 캐피톨 뮤직그룹과 SM엔터테인먼트의 글로벌 프로젝트 'SuperM' 프로듀싱 9월 25일 '제 20회 세계지식포럼'에서 '미래 엔터테인먼트 세상'에 대해 연설 9월 26일 이수만 총괄프로듀서 SM과 '글로벌 시티즌' 아시아 공연을 유치 및 2020년 9월 개최될 아시아 공연 총감독 10월 28일 英 BBC, 이수만 프로듀서에 대해 “K-Pop 성장에 공헌”, “엄청난 영향 끼친 상징적 인물” 등 다큐멘터리 통해 집중 조명 11월 5일이수만 프로듀서 SM ENTERTAINMENT와 美 에이전시 CAA와 협업 이끌어내다 11월 14일이수만 프로듀서, 인텔 스튜디오와 협업해 360도로 즐기는 K-POP 첨단 콘텐츠 프로듀싱 11월 20일이수만, 5개 대륙 동시 개최 역사상 최대 규모 자선 음악 축제 서울 공연 총감독 2020년 1월 中 국영방송 청두TV, 이수만 프로듀서 “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선구자”로 집중 조명 1월 성공경제포럼 '컬처 유니버스와 K팝의 미래' 기조연설 1월 17일 미국 유명문화 매거진‘Variety’발표 'Variety 500’3년 연속 선정 1월 23일 미국 빌보드 ‘2020 빌보드 임팩트 리스트’ 한국인 유일 선정 7월 2일 대한민국 동행세일 K팝 공연 총괄 연출 2021년 1월 26일 매일경제·성공경제연구소 개최 신년 세미나 참석 5월 7일 이수만 프로듀서-SM엔터테인먼트, 미국 마크 버넷 프로듀서-대형 제작사 MGM Worldwide Television과 함께 NCT-Hollywood 런칭 위한 미국 오디션 프로그램 발표 2022년 2월 23일 SM, 이수만 프로듀서 최초 제시한 ‘Play2Create’로 블록체인 기반 참여형 창작문화 선도 및 수익모델 제시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 KAIST 전산학부 초빙석학교수로 임용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방문…사우디 정부 관계자 “이수만 프로듀서의 혜안과 비전, 성공모델 벤치마킹 원해, 모든 일에 전폭적인 지원할 것”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 중동 대표 뉴스 전문 채널과 특별 인터뷰 진행...알 아라비아 “이수만, K팝 창시자(founder)” 집중 조명 3월 28일 UAE 문화청소년부 장관과 문화교류 및 미래 문화 산업의 비전과 발전 방향에 대해 환담 3월 29일 두바이 ‘The World Government Summit 2022’ 내 ‘Global Crypto Forum’ 오프닝 세션 초청 및 토론 참여 4월 28일 미국 LA 'SM 엔터테인먼트 스퀘어' 표지판 설치, "한류와 글로벌 K팝 현상의 개척자"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 공로 새겨져 6월 8일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 사우디아라비아 문화부 장관 만나 환담 7월 7일 제3회 세계문화산업포럼 기조연설...“새로운 문화 생태계 P2C, 크리에이터의 창작활동이 곧 경제활동이 되는 새로운 크리에이터 이코노미 활성화될 것” 8월 20일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SM엔터테인먼트, 사우디아라비아 투자부와 MOU 체결 8월 25일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의 CT 시스템, 사우디 이어 몽골도 미래 엔터테인먼트 시티로 프로듀싱 9월 24일 영국 최대 국립 박물관 V&A 요청으로 ‘한류’ 에세이북에 특별 기고 11월 28일 아마존 스튜디오에서 이수만 프로듀서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이수만: K팝의 왕’(Lee Soo Man: The King of K-Pop) 제작 중 11월 29일 이수만 프로듀서•SM, 사우디아라비아 관광청과 MOU 체결 - 이수만 프로듀서, 하이파 공주 만나 “전 세계 팬들과 함께 시작하는 나무 심는 K팝 페스티벌 등 지구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위한 탄소 배출 제로(Net Zero) 로드맵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할 때“ 강조...사우디 하이파 공주, 이수만 프로듀서의 ‘나무를 심는 K팝 페스티벌’ 적극 동참 의사 밝혀 11월 29일 이수만 프로듀서·SM, 사우디 문화부와 문화 협력 증진을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 11월 30일 CNBC ASIA와 인터뷰, “K팝의 세계화 이끈 음악의 마에스트로” 조명 2023년 1월 1일 SM, 韓 엔터사 최초 서스테이너빌리티 포럼 개최 (이수만 프로듀서, 2023년 ‘서스테이너빌리티 무브먼트’ 원년...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글로벌 무브먼트 앞장) 1월 5~8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3’ 방문 수상 경력 1976년 MBC 10대 가수 남자 신인상 1977년 MBC 10대 가수상 1987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우수상 1997년 서울 가요 대상 "최고 기획자상" SBS 서울 가요 대전 "최고 기획자상" 1998년 SBS 가요 대상 "최고 기획자상" 2000년 12월 - 선행예술인 국무총리 표창상 2002년 "대한민국 문화콘텐츠 수출대상 - 음악부문" (보아의 일본 활동) 2003년 "대한민국 문화콘텐츠 수출대상 - 음악부문" (보아의 일본 활동) 2004년 SBS 가요대전 "올해의 프로듀서 상" 2005년 6월 13일 "LA 홍보대사 공로패" 7월 18일 시사 주간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 선정 10월 30일 중국 동남 경폭음악방 "최고 해외 제작인 상" 11월 1일 제12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연예예술발전상" 2007년 9월 1일 머니투데이 스타뉴스 창간 3주년 설문조사 "2007 연예계 파워 넘버원" 전체 1위, 가요계 1위 선정 10월 19일 국제 경영학회 주최 ‘글로벌 CEO상 수상 기업 사례발표 및 시상식’, ‘글로벌 프론티어 상’ 2008년 12월 10일 제 23회 골든디스크 시상식 "제작자 상" 2009년 6월 23일 샤또 무똥 로칠드 기사작위 수여 받음 2011년 2월 28일 제2회 대한민국 서울문화예술대상 대중가요프로듀서 대상 4월 - 대중음악 전문지 '대중음악 사운드'가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파워 100' 1위 8월 17일 2011 제 13회 경영관련학회 통합학술대회 제 1회 "강소기업가상" 수상 11월 21일 제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 문화훈장" 11월 22일 제6회 한-EU 산업협력의 날 "한-EU 협력상" 12월 4일 제1회 한국음악저작권대상 음반제작자상 12월 8일 제11회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국위선양부문 12월 26일 헤럴드경제 선정 '대중문화 파워리더' 1위 2012년 2월 22일 제 1회 가온차트 K-POP 어워드 K-POP 공헌상 6월 4일 미국 뉴욕 '코리아 소사이어티' 55주년 기념 만찬 '문화상' 2014년 5월 27일 SM 이수만 프로듀서, 日 ‘오리콘 연간 히트 랭킹’ 프로듀서 TOP 100에서 3년 연속 TOP 10 진입! 한국인은 물론 해외 프로듀서 중 최고 순위 기록 2015년 12월 28일 2015 헤럴드경제 대중문화 파워리더 1위 이수만 총괄프로듀서 2016년 4월 9일 제16회 음악 풍운방 연도성전 아시아 최고 프로듀서상 수상 9월 13일 한국인 최초 Asia Society 주관 'Asia Game Changer'상 수상 10월 7일 2016 이데일리 문화파워 ‘올해의 문화리더’ 1위 이수만 총괄프로듀서 2017년 7월 20일 문화인사 최초 2016 영산외교인상 수상 11월 미국 Variety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리더 500" 등극 12월 6일 2017 코틀러 어워드 '최고경영자상' 수상 2018년 3월 22일 스포츠동아 창간 10주년 기념 선정 한국 연예계를 움직이는 파워 피플 1위 선정 6월 미국 Variety 선정 "인터내셔널 뮤직 리더 2018" 등극 6월 28일 2018 한중경영대상 '최고경영자상' 수상 10월 2018 리더십 잘 발휘하는 경영인 4위 선정 10월 국가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경영인 6위 선정 10월 대학생이 생각하는 최고의 CEO 10위 선정 2019년 5월 미국 Variety 선정 "인터내셔널 뮤직 리더 2019" 선정 2020년 1월 17일 미국 유명문화 매거진 ‘Variety’발표 'Variety 500’3년 연속 선정 1월 23일 미국 빌보드 ‘2020 빌보드 임팩트 리스트’ 한국인 유일 선정 12월 제29회 '다산경영상' 창업경영인 부문 수상 12월 미국 유명문화 매거진 'Variety' 발표 'Variety 500' 4년 연속 선정 2021년 1월 13일 제10회 가온차트 뮤직 어워즈 K-POP 공헌상 12월 22일 미국 유명문화 매거진 'Variety' 발표 'Variety 500' 한국인 유일 5년 연속 선정 강연 2013년 3월 "목표를 높여라, 서울대도 너무 낮다” 3월 이수만 서울대 입학식 축사, “성공하기 위해서는 관심, 집중, 열정이 중요" 2015년 5월 이수만 회장의 작심발언…"중국, 법과 약속 잘 지켜야" 10월 이수만 "미래는 셀러브리티와 로봇의 세상, 기술융합 중요" 2016년 11월 30일 제7회 성공경제포럼 ‘AI와 아시아의 시대, 대한민국의 미래를 말하다’ 대담 참석 12월 4일~5일 '제11회 한중일 30인회' 한국대표 참석 "삼국 프로듀싱 시장기술 뭉쳐 세계 1등 시장 만들다" 연설 2017년 3월 14일 '한-인도네시아 비즈니스 서밋' 문화계 대표 참석 및 "한-중-일-인도네시아 협력, 동양의 할리우드 만들 수 있어" 기조연설 7월 20일 서울국제포럼 'K팝을 통한 문화 콘텐트 외교와 SM이 바라보는 미래론' 수상 기념강연 9월 4일 '한-인도네시아 문화콘텐츠포럼' 기조연설 "문화 콘텐츠 산업의 전망과 미래를 대비한 아시아 국가 간 협력" 강연 12월 5일 '매경 베트남 포럼'전야제 기조연설 "AI연예인 아바타와 집에서 문화 즐기는 세상 곧 올 것" 2018년 9월 11일 '한-베트남 비즈니스 협력 세미나' 기조 연설 "한국과 베트남의 협력을 통한 문화산업의 미래 전략" 2019년 2월 21일 '한-인도네시아 콘텐츠 및 IT 협력 세미나' 기조연설 7월 '2019 한국문화산업포럼' 기념사 연설 9월 25일 '제 20회 세계지식포럼'에서 '미래 엔터테인먼트 세상'에 대해 연설 2020년 1월 성공경제포럼 '컬처 유니버스와 K팝의 미래' 기조연설 10월 28일 '제1회 세계문화산업포럼'에서 韓 문화계 대표 인사로 기조연설 2021년 6월 23일 ‘KAIST와 SM이 함께 할 미래 엔터테인먼트 세상’ 주제로 특별 강연 7월 1일 '제2회 세계문화산업포럼'에서 韓 문화계 대표 인사로 기조연설 9월 15일 ‘Google for Korea’ 행사에 초대 연사로 참석, ‘K팝과 유튜브가 만나 이룬 성과, 그리고 미래’를 주제로 발표 11월 9일 퍼블릭 블록체인 플랫폼 솔라나 재단 개최 ‘Breakpoint 2021’ 컨퍼런스 기조연설 2022년 3월 28일 두바이 BBW 포럼 ‘한국인 최초 키노트 스피커’로 기조연설 5월 20일 美 스탠퍼드대 한국학 컨퍼런스 'K팝의 미래 비전' 연설 7월 7일 제3회 세계문화산업포럼 기조연설...“새로운 문화 생태계 P2C, 크리에이터의 창작활동이 곧 경제활동이 되는 새로운 크리에이터 이코노미 활성화될 것” 8월 30일 국토부 개최 글로벌 인프라협력 컨퍼런스(Global Infra Cooperation Conference, GICC) 찬조연설 11월 30일 사우디에서 열린 제22회 세계관광협의회(World Travel&Tourism Council, WTTC) 글로벌 서밋(Global Summit)에 기조연설 2023년 1월 1일 SM 서스테이너빌리티 포럼 기조연설…“음악 한 곡이 인생을 바꾸듯 나무 한 그루가 세상을 바꾼다” 인간 관계 이문세, 유열과 셋이서 당대 발라드를 주름잡은 이른바 '마삼 트리오'로 유명했는데 셋 다 인상이 말(馬)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셋은 친분이 생겼고 그 때로부터 현재까지 주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가수 시절에는 이문세, 유열과 라이벌 겸 절친이었고 음반기획사를 차린 이후에는 이호연과 아이돌 1세대(젝스키스, 핑클, 클릭비 vs H.O.T, S.E.S, 신화) ~ 2세대(SS501, 카라, 레인보우 vs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의 라이벌이었다. 이후 아이돌 3세대에 접어들면서 이호연의 DSP 미디어가 망하기 시작하자 새로 급부상하는 박진영(트와이스 vs 레드벨벳), 양현석(블랙핑크 vs 레드벨벳), 방시혁(방탄소년단 vs EXO)에 심지어는 소성진(여자친구 vs 레드벨벳)까지 라이벌들이 많아졌다. 사건 회사자금 횡령 2002년 대한민국의 검찰은 이수만이 1999년 8월 SM 엔터테인먼트가 유상증자를 통하여 코스닥에 등록 할 때 SM 엔터테인먼트의 자금 11억 원으로 주식을 취득해 부당한 수백억 원의 시세차익을 얻은 점을 포착하였다. 또 검찰은 이수만이 개인 사무실과 금고에 거액의 현금을 보관하고, 방송사 프로듀서 등에게 금품 로비를 벌인 정황을 확보하여 조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수만은 2002년 6월부터 해외에 머물며 도피를 하였고, 검찰 조사가 시작된 이후인 8월 2일에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골프장에 나타나기도 했다. 검찰은 해외에서 도피하며 검찰에 소환에 불응한 이수만의 여권을 무효화하고 인터폴에 수배하였다. 2003년 5월 22일 이수만은 귀국하여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10월 7일 이수만에 대해 검찰은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하였고, 10월 8일 구속수감되었다. 10월 14일 이수만은 보증금 3천만원을 내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10월 19일 검찰은 이수만에 대해 불구속기소를 하였고, 2004년 9월 4일 법원은 이수만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였다가, 2007년 2월 참여정부 4주년 특별사면에 의해 석방되었다. 각주와 인용 외부 링크 S.M.Entertainment Homepage S.M.Entertainment Youtube Channel Daum 인물검색 Naver 인물검색 Nate 인물검색 195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남자 가수 대한민국의 팝 가수 대한민국의 포크 록 가수 대한민국의 기타 연주자 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 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 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 대한민국의 기업인 SM 엔터테인먼트 사람 은관문화훈장 수훈자 부산광역시 출신 음악가 전주 이씨 서울청운초등학교 동문 경복중학교 동문 경복고등학교 동문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동문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개신교도 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1970년대 가수 1980년대 가수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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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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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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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吏讀, )는 한자에 의한 한국어 표기법의 한 가지이다. '이투(吏套, )', '이서(吏書)', ‘이도(吏道·吏刀)’, ‘이토(吏吐)’라고도 불린다. 신라시대부터 시작하여 19세기 말까지 사용되었다. 고대 한국어를 분석하기 위한 자료의 하나이다. 개요 광의의 이두는 구결, 향찰 등을 포함하여 한자를 빌려 이뤄진 한국어 표기법 전체를 가리킨다. 협의의 이두는 이두문에 나타나는 한국어의 한자 표기를 이른다. 이두문이란 이서(吏胥)들이 행정 문서를 작성할 때 사용한 한자 표기의 산문을 이르는데 같은 문체로 쓰인 민간의 글도 이두문이라 부른다. 여기서는 협의의 이두에 관해 언급한다. 이두의 성립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신라시대에 시작하여 남북국 시대에 확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자료에는 신라의 설총이 이두를 만들었다는 기술이 나오지만 진평왕 때의 서동요나 진흥왕의 순수비문에 쓰인 것이 있어 설총이 창작한 것은 아니고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5세기부터 고구려에서는 한문을 한국어 어순으로 재배치하거나, ‘之’자를 문장의 종결어미로 사용했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6세기 말 이후 차자 표기법 (이두)이 정체 또는 퇴조하였고, 신라에서는 반대로 6세기 말부터 7세기로 접어들면서 표기법상의 큰 발전을 이루었다. 한편 유독 신라에서만 이두가 발전한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시각이 있다. 국어학계 일각에서는 무열왕이 즉위한 7세기 중반까지 당나라의 서신에 쓰인 한문을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인이 드물었다는 의 서술을 두고,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한자를 100여 년 늦게 도입한 신라는 상대적으로 한문 이해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국어 표기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반면 역사학계는 다른 시각이 제기되고 있는데, 2016년 윤선태 교수는 "오랫동안 구두 전달 위주로 행정 명령을 내린 신라의 특수성이 한자 도입 이후 문서에도 반영돼, 구어체를 살릴 수 있는 이두 개발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며, 월성 해자 목간 등에서 발견되는 이두의 내용과 어휘를 보면 일상적인 구두 전달 체계를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표기법 이두문에서는 명사, 동사 어간 등 단어의 실질적 부분에서 주로 한자어가 사용되고, 조사(助詞)나 어미(語尾) 등 문법적 부분에서 주로 이두가 사용되었다.(명사, 동사 부분에서 이두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음) 한반도에서는 한자를 도입한 뒤에 한동안은 정규 한문만 사용되었다고 추측되는데, 그 후 한국어 어순에 맞춰 글을 쓴 서기체(誓記體)와 같은 의사한문(擬似漢文)이 나타난다. 이두는 이와 같이 한국어 어순으로 쓰인 의사한문에 문법적 요소가 더 보완되어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두는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이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하는데, 한자 독법은 옛날부터 있는 관습적인 독법이 내려와 있다. 그 중에는 중세 한국어와도 다른 독특한 것도 있다. 예) 처격 ‘良中(-아)’에 대해 중세국어 ‘-애/-에’ 아래는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 1415년)에 나타나는 이두의 예이다.(밑줄이 이두 부분) 낱말의 예 件記(발기) : 발긔. 궁중에서 자주 쓰이던 말로 물건의 목록, 일람표 刀子(칼자) : 숙수(熟手), 관청에서 일하는 요리사 召史(조이) : 일반 상민의 아내, 결혼한 양인 여자 (양반의 아내를 지칭하는데는 사용하지 않음) 斗洛只(마지기) : 씨 한 말을 뿌릴 만한 땅 ( 升洛只:되지기, 洽洛只:홉지기 ) 侤音(다짐) : 죄인의 공술서. 범죄 사실을 추궁당한 뒤 자기의 진술이 사실임을 못박고, 만일 허위로 드러나면 벌을 받겠다는 진술서 內人(나인) : 궁궐에서 일하는 여인 같이 보기 구결 향찰 군두목 이문대사 참고 문헌 남풍현(2000) “吏讀研究”, 태학사 李基文(1998) “新訂版國語史概説”, 태학사 (1929; 1974) ‘’, “”, 안길정, 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생활사 하권 53쪽, 2000년, 사계절 각주 한국어의 표기법 한국어의 역사 음절 문자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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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4%94%EB%B0%94%EC%9D%B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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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바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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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바이스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팀 디바이스(Team Device)는 대한민국의 동인 그룹이다. 디바이스(device): 장치(裝置)를 의미하는 영단어. 장치#컴퓨팅 및 기술을 참고. 디바이스(device): 폭발물 또는 폭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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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B4%EC%9D%BC%EB%A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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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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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로(Rail路)는 2007년 여름부터 한국철도공사에서 판매하는 패스형 철도 여행 상품이다. 청년을 대상으로 한 대표적인 여행 상품으로, 2010년부터 여름, 겨울마다 매년 2회에 걸쳐 상품이 출시되고 있다. 처음 실시되었던 2007년 여름에는 8,000여장 판매에 그쳤으나, 2008년 여름에는 13,000여장, 2009년 여름에는 24,000여장이 판매되었고, 2010년 여름에는 무려 58,000여장이 판매되었다. 역사 2007년 7월 11일에 판매를 시작할 때에는 여름에만 한정되었고 기간 또한 7월 11일부터 8월 31일까지의 2개월이 채 안 되었으나, 2008년부터는 기간이 6월부터로 확대되었다. 2009년부터 겨울에도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이용객의 증가로 운영 도중에 기간을 연장하기도 하였다. 단, 겨울 내일로 티켓의 경우 설 대수송 기간에는 운영하지 않으며, 이 기간이 포함될 때에는 해당 기간을 제외하고 일정을 이용할 수 있다. 세부 사항 이용 자격 : 티켓 사용 시작일 기준으로 만 27세 이하 대한민국 국민 구입 기간 : 티켓 사용 시작일 7일 전부터 당일까지. 구입 장소 : 레츠코레일 홈페이지, 내일로 티켓 예매 홈페이지, 철도 승차권을 발매할 수 있는 철도역 창구 이용 기간 : 티켓 사용 시작일 0시부터 7일간으로 티켓이 끝나는 날의 23시 59분 이전에 도착하는 것이 원칙이나, 해당 시간에 출발하는 열차는 익일 도착하더라도 이용할 수 있다. 티켓 사용 시작일 이전까지는 환불이 가능하지만, 티켓 사용 시작일 당일부터는 환불이 불가능하다. 티켓을 분실했을 때에는 1회에 한하여, 소량의 수수료를 지급하고 티켓을 재발급 받을 수 있다. 단 2011년 여름시즌부터는 스마트폰, SMS 등 온라인 티켓에 한정한다. 타인의 명의 혹은 티켓을 부정하게 사용하거나 일반 내일로 티켓으로 아래에 있는 이용 불가능한 열차를 부정승차하다 적발될 경우, 철도사업법에 의해 최대 10배의 부가금을 지불해야 한다. 일부 역에서는 해당 역에서만 제공하는 혜택을 내일로 티켓과 연계해 팔기도 한다. 그러나 발급한 역에 상관 없이 내일로 이용자라면 무조건 주어지는 혜택도 있다. 특징 이용 가능 열차 다음에 해당하는 열차는 입석 또는 자유석으로 이용할 수 있다. ITX-청춘 ITX-새마을 새마을호 무궁화호 누리로 통근열차 이용 불가능 열차 다음에 해당하는 열차는 내일로 티켓으로 이용할 수 없다. 이용하고자 한다면 내일로 티켓과 상관없는 별도의 승차권을 구입해야 한다. KTX : 프리미엄 내일로 티켓 이용시 2회 좌석 지정 후 이용이 가능하다. 인천국제공항철도 : 직통열차 정상가 14,800원 대신 6,900원 할인 이용은 가능하다. 각 열차의 특실 수도권 전철 등 각 지역 도시, 광역 철도 각종 관광, 전세, 군용 열차 및 차량 레일크루즈 해랑, 바다열차, 와인시네마트레인, 통통통 뮤직카페트레인, 군전세객차 등 이용 기간 2007년 : 7월 11일 ~ 8월 31일 2008년 : 6월 14일 ~ 8월 31일 2009년 : 6월 19일 ~ 8월 31일 / 12월 10일 ~ 2010년 2월 10일 + 2010년 2월 17일 ~ 2010년 3월 1일 2010년 : 6월 18일 ~ 8월 31일 / 12월 1일 ~ 2011년 1월 31일 + 2011년 2월 7일 ~ 2011년 2월 28일 2011년 : 6월 1일 ~ 9월 6일 / 12월 1일 ~ 2012년 1월 19일 + 2012년 1월 26일 ~ 2012년 3월 6일 2012년 : 6월 1일 ~ 9월 6일 / 12월 1일 ~ 2013년 2월 7일 + 2013년 2월 13일 ~ 2013년 3월 6일 2013년 : 6월 1일 ~ 9월 6일 / 12월 1일 ~ 2014년 1월 28일 + 2014년 2월 3일 ~ 2014년 3월 31일 2014년 : 6월 1일 ~ 9월 6일 / 12월 1일 ~ 2015년 2월 16일 + 2015년 2월 23일 ~ 2015년 3월 6일 2015년 : 6월 1일 ~ 9월 6일 / 12월 1일 ~ 2016년 2월 4일 + 2016년 2월 11일 ~ 2016년 3월 6일 2016년 : 추가 바람 2017년 : 6월 1일 ~ 8월 31일 / 12월 1일 ~ 2018년 2월 28일 기간별 변동 사항 2007년 여름 : 내일로 티켓을 발급받으면 선착순으로 가이드북과 목걸이를 제공하였다. 2008년 여름 : 이용 가격이 기존 49,800원에서 54,700원으로 상향 조정되었고, 승차권이 기존의 파란색 정기승차권형 용지에서 노란색 할인카드형 용지로 변경되었다. 2009년 겨울 :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수험생에 한해 12월 8일과 9일 선착순으로 승차권을 정상 가격의 50% 할인된 금액으로 임의 기간 지정 판매하였다. 또 이 해에 코레일 구간 전철역에서의 승차권 발매 업무가 일반열차 정차역이나 일부 승차권 발매역을 제외하고 중지되었으므로, 해당 역에서는 내일로 티켓을 발급받을 수 없게 되었다. 2010년 여름 : 이용 기간 중 1회에 한하여 KTX를 정상 운임의 50%를 할인받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주말 제외), 내일로 티켓과 본인 확인 신분증을 지참하고 이용 기간이 지나면 본 할인을 사용할 수 없다. 또 기존의 대상 연령을 만 18세 이상 ~ 만 24세 이하에서 만 19세 이상 ~ 만 25세 이하로 상향 조정할 예정이었으나, 6월 15일에 나온 추가 공지에 의해 나이 제한 하한선이 없어지면서 대상 연령이 만 25세 이하로 조정되었다. 7월 15일부터 내일로 티켓 구입 가능 기간이 사용 시작일 5일 전에서 7일 전으로 확대되었다. 2010년 겨울 : 기존의 내일로 티켓 혜택에 추가하여 KTX 자유석 및 입석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KTX 내일로 티켓이 출시되었다. 가격은 178,200원이고 역당 1일 선착순 500명 한정이었다. 2011년 여름 : KTX 내일로 티켓이 판매실적 저조로 폐지된 대신에, 이용 기간 중 정상 운임의 50% 할인가격으로 KTX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2회로 늘렸다. 내일로 티켓을 SMS/스마트폰 전송으로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노란색 할인카드형 용지의 경우 분실 시 재발급을 받을 수 없다. 더 많은 고객에게 내일로 혜택을 보기 위해 운영 기간을 늘렸다. 2011년 겨울 : 시즌 시작 전인 11월 1일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상품인 자유 이용 패스가 출시되어서, 반드시 내일로 티켓과 자유 이용 패스를 구별하여 구입 사용해야 한다. 2012년 여름 : 이용 가격이 기존 54,700원에서 5일권 56,500원, 7일권 62,700원으로 이원화되고, 내일로 티켓 시작일 기준 1일 발급수량이 기존 1,500매에서 2,000매로 각각 상향 조정되었다. 2012년 겨울 : 내일로 티켓 발급 시 제주 / 일본 선박연계 할인과 부산아쿠아리움 입장권 할인 혜택이 있었다. 2014년 여름 : 8월 1일부터 그 동안 내일로 티켓으로 이용이 불가능했던 ITX-청춘의 이용이 가능해졌다. 2015년 여름 : 7월 13일부터 만 25세 이하였던 내일로 이용연령이 한시적으로 만 28세 이하로 확대되었다. 또한, 출발일 기준으로 8월 8일부터 8월 31일까지의 내일로 티켓에 대해 50% 할인 혜택이 적용된다. 2015년 겨울 : 기존의 내일로 티켓 외에 내일로 이용 대상자를 포함하여 한 가족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패밀리 티켓이 출시되었으며 이용 금액은 1인당 4만원이다. 3인권과 4인권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이용 기간은 3일이다. 2017년 여름 : 내일로 티켓 판매 연령을 기존의 만 25세 이하에서 만 29세 이하로 대폭 상향하였다. 또한 기존의 내일로 티켓 외에 프리미엄 내일로 티켓이 출시되었으며 이용 금액은 5일권 110,000원, 7일권 120,000원이다. 여정 기간 중 평일에 출발하는 KTX 열차의 좌석 지정을 2회 무료로 할 수 있다. 논란 일부 추가 혜택의 비리 내일로 티켓 발급이 한국철도공사 직원의 발권 실적에 반영됨에 따라, 일부 역에서는 더 많은 고객을 모으기 위해 숙박과 이벤트 등의 추가 혜택을 주게 되었다. 한국철도공사에서 이 혜택 제공에 한 철도 동호회가 연루되었다고 하는데, 해당 동호회에서 한국철도공사 측에 헌금 등의 무리한 요구를 했다고 한다. 해당 동호회에서는 부인하고 있으나 동호인 사이에서 알려져 있다. 이용자의 에티켓 문제 내일로 티켓의 이용 인원이 증가하면서 좌석 무단점유, 카페객차 점거, 열차내 충전 시설 점유등 몇몇 일부 이용자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다른 일반 철도이용객에게 피해가 발생되다 보니 일부 철도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개목걸이'란 표현으로 내일로 이용자를 폄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열차 내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내일로 티켓이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는지라 시설 개선이 같이 이루어져야 하는 문제이다. 각주 외부 링크 내일로 공식 홈페이지 (한국철도공사) 철도 여행 대한민국의 철도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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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B%A3%A8%EC%8A%A4%20%EB%B0%B1%EA%B3%BC%EC%82%AC%EC%A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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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루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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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루스 백과사전(Grand Larousse Encyclopedique)은 피에르 라루스가 지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백과사전이다. 1982년부터 1985년 사이 Éditions Larousse에 의해 출판되었다. 문서는 사진, 지도, 연표, 다이어그램으로 묘사된다. 프랑스어 백과사전 1982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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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2003%EB%85%84%205%EC%9B%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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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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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31일 프랑스 서북부지방에서 현지시간으로 오전 5시경 개기 일식이 관측되다. 2003년 5월 25일 스페인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여당인 국민당이 마드리드를 위시한 주요 도시를 장악한 한편, 사회노동당이 10여 년 만에 캐스팅 보트를 확보하다. 2003년 5월 17일 프랑스 도빌(fr)에서 G8 재무장관 회의가 개최되다. 2003년 5월 16일 슬로바키아에서 유럽 연합 가입을 묻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52.15%의 투표율에 92.46%의 찬성으로 가결되다.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5회 자살 폭탄 테러가 연달아 일어났다. 범인 14명 중 2명이 살아남아 체포되다. 2003년 5월 14일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카를로스 메넴이 2차 투표에서 사퇴하여 자동적으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당선되다. 취임은 25일이다. 2003년 5월 12일 2002년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프랑스의 연쇄 살인자 파트리스 알레그르(fr)에게 툴루즈 지역의 주요 인물이 연루된 추가 혐의가 발견되다. 2003년 5월 9일 이 우주선은 2003년 5월 9일에 발사되다. 2003년 5월 8일 콩고 민주 공화국 킨샤사에서 루붐바시로 가던 일류신 Il-76(ru) 형의 비행기가 추락하여 200여 명이 사상하다. 2003년 5월 4일 4월 26일 발사된 소유스 우주선이 국제 우주 정거장에서 2명의 미국인 우주비행사와 1명의 러시아인 우주비행사를 태우고 귀환하다. 2003년 5월 1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 호(en) 선상에서 이라크 전쟁에서의 주요 작전이 종료되었음을 선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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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A%B1%B0%EC%9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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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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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거아(胡車兒, ? ~ ?)는 중국 후한 말 장수의 부장이다. 《부자》에만 있는 짤막한 언급을 바탕으로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비중이 늘었다. 생애 장수군 제일의 무용을 자랑했다. 197년(건안 2년) 장수가 남진해온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조조는 호거아에게 그 무력을 칭찬하며 황금을 주었다. 장수는 조조가 자신의 측근들을 회유하여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외의 기록은 없다. 삼국지연의 사서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500근의 무게를 짊어지고 하루에 700리도 간다는 설정이 붙었다. 장수는 숙모 추씨(鄒氏)를 들여 놀아나는 조조에 분노한다. 이에 기습할 계획을 짜는데 호거아가 ‘주공께서 전위를 초대해 술에 취하게 하면 그 틈에 흘러들어가 주무기인 쌍철극을 훔치겠다’고 제안하고 그대로 실행한다. 다른 묘사는 없다. 참고 문헌 부현, 《부자》(傅子) ; 배송지 주석, 《삼국지》8권 위서 제8 장수에서 인용 생몰년 미상 삼국지와 관련된 한나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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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B%94%94%EC%96%B4%20%EB%AF%B9%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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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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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믹스(, )는 하나의 상품 또는 미디어 소스를 여러 미디어 형태로 확장하여 판매 및 판촉하는 것을 일컫는 일본식 영어 조어이다. 유사한 표현으로는 대한민국의 원 소스 멀티 유즈와 영어권의 미디어 프랜차이즈가 있다. 개요 미디어 믹스는 원래 광고업계의 용어로, 상품을 광고하기 위해 여러 매체(미디어)를 조합함으로써, 각 매체의 약점을 보완하는 수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하나의 매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음악CD, TV드라마, 영화, 탤런트, 캐릭터 상품 판매 등의 다양한 방면으로 전개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대개 일본의 오타쿠 문화에서 더욱 활성화된 편으로 어떤 매체로서의 작품이 인기를 끌면 다른 매체의 작품으로 파생되는 경우가 많다. 또 최근에는 작품을 다양한 관점에서 묘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처음 기획단계에서부터 다양한 미디어로 동시에 발표할 것을 염두에 두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예로는 《BLOOD》, 《.hack》, 《갤럭시 앤젤》 등을 들 수 있다. 마케팅 1960년대 신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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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B%B9%84%EB%89%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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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비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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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브송 지 소자( 혹은 , 1984년 1월 25일, 상비센치 ~)는 흔히 호비뉴()로 알려진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로, 현재 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공을 다루는 능력, 스파이더맨 센스, 그리고 드리블 능력으로 알려져 있다. 1999년, 호비뉴는 불과 14세의 나이에 브라질 전설 펠레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되었고, 펠레 시대 이후로는 산투스의 첫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 후로, 그는 산투스에서의 두 번째 우승을 거두고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라리가 우승을 2차례 거두었다. 그는 밀란에서의 첫 시즌에 이탈리아 세리에 A 우승도 차지했다. 클럽 경력 산투스 호비뉴는 상파울루주 상비센치 출신이다. 2002년, 그는 18세의 나이에 산투스와 첫 프로 계약을 맺었다. 그는 첫 시즌에 24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고, 산투스는 2002년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우승을 달성했다. 그는 산투스 일원으로 2003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행 주역이 되었지만, 결승전에서 보카 주니어스에 패했다. 2004년, 호비뉴는 37경기 출전 21골로 1년을 마쳤고, 산투스는 또다시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정상에 올랐다. 그의 기량은 2004년 여름에 다수 유럽 구단들의 관심을 끌어모았지만, 호비뉴는 브라질 구단이 모든 제의를 거절하면서 산투스에 잔류했다. 그의 기량은 2005년에 들어 모친 마리나 다 시우바 소자가 11월 6일에 프라이아 그란지의 자택에서 총 든 괴한들에게 납치당하며 주춤했지만, 그의 모친은 6주 후 몸값을 받고 온전히 풀려났다. 호비뉴는 12번의 리그 경기에서 9골을 득점했고, 그의 몸값은 재능이 만개하면서 더욱 올랐고, 유럽 축구계는 그의 존재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산투스는 이후 구단의 거물급 선수를 지키기 어려울 것임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2005년 7월, 스페인 거함 레알 마드리드가 인수 조항 60%에 해당하는 €24M의 이적료를 산투스에 지불하면서 호비뉴를 영입했다. 레알 마드리드 호비뉴는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면서 공석이 된 루이스 피구의 등번호 10번을 받았다. 호비뉴는 마드리드에서의 1년차를 37경기 출전 14골로 마쳤다. 2006-07 시즌, 호비뉴는 바르셀로나와의 시즌 첫 고전 더비 경기에서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는 활약을 펼치고도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그를 후보 선수로만 기용했다. 호비뉴는 겨울 휴식기 이후에야 주전 11인에 다시 입지를 확보했고, 이후 레알 마드리드가 그 시즌에 30번째 라 리가 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힘을 보탰다. 이 리그 우승은 호비뉴의 통산 세 번째 리그 우승이기도 했다. 그러나, 카펠로는 이후에 해임되고 베른트 슈스터가 레알 마드리드 신임 감독으로 취임했다. 호비뉴는 2007-08 시즌을 리그에서 11골 8도움을 올리는 것으로 마쳤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4골을 추가했다. 같은 시즌, 호비뉴는 시즌 후반기 시작과 함께 부상을 당했다. 그는 로마와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치르는 시점에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채로 마드리드 선수단에 합류했다. 그러나, 몇 주 전, 호비뉴는 2008년 3월 3일에 레크레아티보와의 원정 경기에서 2골을 추가해 라 리가 우승 경쟁에 불을 치폈다. 이 경기 시점에 바르셀로나가 주춤했고, 결국 레알 마드리드는 통산 31번째이자 호비뉴의 개인 통산 4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호비뉴는 자신이 마드리드에 머무른 3년동안 라울과 뤼트 판 니스텔로이에 이어 레알 마드리드 선수단 내 득점 3위를 기록했다. 그는 도움 순위에도 구티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와 더불어 2007-08 시즌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 최종 후보 10인 명단에 이름을 올린 유이한 마드리드 선수였다. 라몬 칼데론 레알 마드리드 회장은 호비뉴와 2007-08 시즌 중반에 새로 계약 협상할 것을 약속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칼데론은 여름에 협상할 것이라 말을 바꾸었지만, 칼데론은 그에게 뒤통수를 쳤다. 호비뉴는 마드리드가 자신을 이용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2008년 여름에 맞바꿔 영입하려 시도했기 때문에 협상을 개시하지 않았다는 이유을 알아냈다. 호날두의 영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드리드는 호비뉴와 재협상을 시도했지만, 호비뉴는 거절하고 첼시로의 이적을 요청했다. 맨체스터 시티 2009년 9월 1일, 프리미어리그 여름 이적 시장 말일, 호비뉴는 €41M과 €42M 사이의 이적료 (£32.5M) 에 맨체스터 시티와 4년 계약을 맺었다. 그의 이적은 아랍계 투자사 아부다비 유나이티드 그룹의 구단 인수일과 같은 날에 성사되었다. 호비뉴는 앞서 첼시와 연락망이 닿았었고, 자신도 이적 시장 종료가 임박한 시점에 런던 연고 구단에서 활약할 의사를 밝혔다. 8월 27일, 피터 케년 첼시 수석 단장은 마드리드가 호비뉴의 이적에 합의를 보았다는 점을 확인해 구단이 이적 성사 여부에 "자신한다"고 밝혔다. 호비뉴의 첼시행은 맨체스터 시티로의 이적을 놓고 뜬끔 없이 발언하기 전까지 확실시 되었는데, 당시 호비뉴는 기자회견에서 "전날, 첼시가 좋은 제의를 했고 저는 승락했습니다."라고 말하고 "맨체스터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맞지요?" "네, 맨체스터, 죄송합니다!"라고 이어 말했다. 가디언지와의 기자회견에서 호비뉴는 브라질인 동료 조와 일라누의 입단이 대형 구단으로 보이게 만들어 맨체스터 시티 입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2008년 9월 13일, 그는 프리미어리그 데뷔전을 치러 첫 골을 득점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이적설에 연루되었던 첼시와의 이 안방 경기는 1-3 패배로 끝났다. 10월 26일, 그는 스토크 시티와의 경기에서 첫 프리미어리그 해트트릭을 달성했고, 11월 6일, 트벤터와의 UEFA컵 경기에서는 맨체스터 시티 소속으로 첫 유럽대항전 골을 기록해 3-2 승리에 일조했다. 그는 리처드 던이 징계로 결장한 헐 시티와의 경기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임했고, 결과는 2-2 무승부였다. 4월 19일, 호비뉴는 리그 13호골을 기록했고, 4월 25일, 2-1로 이긴 에버턴과의 원정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했는데, 시티는 2008년 8월 31일 이래 처음으로 원정 경기 승리를 거두었다. 그 다음 주, 그는 블랙번 로버스와의 경기에서 3경기 연속골을 기록했고, 맨체스터 시티는 3-1 승리를 거두었다. 호비뉴는 14골로 맨체스터 시티 선수단 득점 1위이자 리그 전체 득점 4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는 맨체스터 시티 2년차에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부상으로 시즌 초반 3달을 결장했고, 총 12경기 (프리미어리그 10경기) 에 출전하고 1골 (하위권 스컨소프 유나이티드와의 FA컵 경기에서 기록) 에 그쳤다. 이로 인해, 그는 구단 모임에서 밀려나 1월 이적 시장에서 구단을 떠날 의사를 밝혔다. 산투스 임대 2010년 1월 28일, 고립된 호비뉴는 맨체스터 시티에서 친정 구단 산투스로 6달간 임대로 이적했다. 그는 FIFA 월드컵이 임박한 상황에 맨체스터 시티에서 매 경기 뛰고 싶었지만, 그리하지 못해 상파울루행을 거절한 후 산투스로 이적해 브라질로 복귀했다고 밝혔다. 산투스 복귀 후, 호비뉴는 발뒤꿈치로 그의 영입을 갈망했던 상파울루를 상대로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득점했고, 물고기 군단은 2-1 승리를 쟁취했다. 임대 기간의 최종전은 8월 4일자 경기로 호비뉴는 산투스의 코파 두 브라지우 우승을 도왔다. 비록 산투스는 비토리아에게 1-2로 패했지만, 합계 3-2로 우위를 점해 사상 첫 대회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호비뉴는 잉글랜드로 복귀하기보다 산투스에 잔류할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맨체스터 시티는 임대 계약 연장 제안을 거절했고, 산투스는 이적 제의를 내지 못했다. 호비뉴는 2010년 8월에 맨체스터 시티로 복귀했지만 8월 31일 여름 이적 시장이 마감되기 전까지 이적을 원한다는 의사를 표했다. 터키의 페네르바흐체와 베식타시가 이적 협상을 위해 맨체스터 시티와 접촉했지만, 호비뉴는 터키행을 거절했고, 자신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구단으로 이적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밀란 2010–11 시즌 2010년 8월 31일, 호비뉴는 €18M (£15M) 에 맨체스터 시티에서 밀란으로 이적했고, 4년 계약을 맺었다. 그는 0-2로 패한 승격 새내기 체세나와의 경기에서 교체로 들어가 신고식을 치렀다. 그는 1-0으로 이긴 제노아와의 경기에 처음으로 선발 출전했다. 2010년 10월 16일, 그는 키에보베로나와의 경기에서 추가 시작에 첫 골을 기록해 3-1 승리에 공헌했다. 2010년 10월 25일, 그는 나폴리와의 세리에 A 경기에서 득점 행진을 이어나갔다. 그는 이후, 삼프도리아와의 경기에서 밀란의 선제골을 넣었지만, 60분에 잠파올로 파치니에게 동점골을 얻어맞아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다. 2010년 12월 4일, 호비뉴는 3-0으로 이긴 산 시로에서 열린 브레시아와의 경기에서 밀란의 추가골을 기록해 3-0 완승에 일조했다. 8일 후인 12월 12일, 그는 3-0으로 이긴 볼로냐전에서도 소속 구단의 추가골을 기록했다. 그는 또다시 3-0으로 밀란이 이긴 바리전에서 2011년 개인 1호골을 기록했다. 1월 29일, 그는 카타니아전에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찬 프리킥이 굴절된 것을 선제골로 스스로 집어넣었고, 이후 이브라히모비치의 골을 도와 밀란의 2-0 승리를 도왔다. 2011년 2월 12일, 그는 파르마와의 경기에서 밀란 이적 후로는 처음으로 2골을 기록해 밀란의 4-0 승리를 견인했다. 2011년 5월 14일, 호비뉴는 칼리아리와의 리그 37차전에서도 2골을 뽑아냈고, 경기 후 구단이 작은 방패 탈환 축하 행사를 치를 수 있게 했다. 2011–12 시즌 그는 2011-12 시즌을 준수하게 시작했는데, 밀란이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인테르나치오날레를 이길 수 있게 도왔다. 모든 대회를 통틀어 11골을 기록한 호비뉴는 밀란의 세리에 A 준우승에 일조했다. 2012–13 시즌 구단의 전설 필리포 인차기가 밀란을 떠나면서 알레샨드리 파투가 9번을 가져가자, 호비뉴가 파투의 7번을 가져갔다. 호비뉴는 삼프도리아와의 2012-13 시즌 세리에 A 1라운드 경기에 출전했지만, 부상으로 위르비 에마뉘엘손과 교체되어 나갔다. 호비뉴는 2-0으로 이긴 칼리아리전에서 교체로 복귀전을 치렀다. 나흘 후, 밀란은 파르마와의 원정 경기에서 비겼고, 호비뉴는 이 경기에 교체로 들어갔다. 호비뉴는 인테르나치오날레전에 교체로 출전했지만, 밀란은 경기를 0-1로 졌다. 호비뉴는 이후 훈련 도중 부상을 당해 5경기에 결장했다. 그는 유벤투스와의 2012년 11월 25일 경기에 시즌 1호골을 넣었고, 이 골은 1-0 결승골이 되었다. 호비뉴는 2013년 1월과 2013년 7월에 친정 구단 산투스 복귀를 거의 성사시킬 뻔했으나, 호비뉴의 주급 문제로 두 차례 모두 무산되었다. 2013년 7월 18일, 호비뉴는 주급을 삭감하고 밀란과 재계약을 맺어 2016년까지 검정-빨강 군단 소속으로 남게 되었다. 그의 기존 계약 만료일은 2014년 6월 30일이었다. 2013–14 시즌 호비뉴는 2013년 7월 27일, 발렌시아와의 시즌 전 친선전에서 사타구니 부상을 당해 시즌을 앞두고 준비하는 과정에 차질을 빚었다. 경기에서 부상으로 빠지기 전, 그는 페널티킥을 실축했지만, 1분 후, 정상적인 경기 진행 상황에서 골을 넣었다. 10월 22일, 호비뉴는 H조 머리 구단 바르셀로나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13-14 경기에서 같은 국적의 카카로부터 패스를 받아 선제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리오넬 메시에게 동점골을 허용한 후, 그는 후반전에 추가골을 넣을 기회를 날려버렸고,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11월, 셀틱과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 도중에 이번에는 어깨가 빠지는 부상을 당했다. 2014년 1월 15일, 그는 산 시로에서 벌어진 스페치아와의 코파 이탈리아 8강전에서 밀란의 유일한 한 골을 득점했다. 그는 세리에 B 구단을 상대로 가까운 거리에서 머리로 골을 넣어 3-1 승리에 일조했다. 2월, 왼쪽 허벅지에 부상을 당하면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출전이 좌절되었다. 그는 스페인에서 열린 2차전에 교체로 출전했지만 빨강-하양 군단을 상대로 합계 1-5로 패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산투스 재임대 2014년 8월 6일, 호비뉴는 상파울루 구아룰류스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해 산투스로 1년 임대 계약을 맺고 복귀했다. 필리포 인차기 신임 감독의 계획에서 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구단 측이 호비뉴의 주급을 지불하고 물고기 군단측이 월급으로 R$400,000을 부담하고, 밀란이 R$400,000을 책임질 것으로 발표되었다. 호비뉴는 이튿날 입단식을 치렀고, 숙적 코린치앙스와의 경기 후 경기를 치를 의사를 밝혔다. 8월 10일, 그는 0-1로 패한 안방 경기에 선발로 출전해 물고기 군단 복귀전을 치렀다. 호비뉴는 나흘 후 복귀 신고 골을 기록하고, 히우두의 골을 도와 론드리나와의 코파 두 브라지우 안방 경기 2-0 승리를 견인했다. 그의 2호골은 2-0으로 이긴 그레미우와의 같은 대회 원정 경기에서 터졌다. 9월 13일, 호비뉴는 브라질레이랑 1호골을 기록해 소속 구단이 코리치바와의 안방 경기에서 2-1로 이기는데 일조했다. 9월 21일, 그는 3-1로 이긴 피게이렌시와의 경기에서 왼발로 골을 추가해 3-1 승리를 도왔다. 2015년 6월 30일, 앞서 밀란과의 계약을 5월에 해지했던 호비뉴는 계약 만료로 물고기 군단을 떠났다. 광저우 에버그란데 2015년 7월 16일, 호비뉴는 같은 국적 루이스 펠리피 스콜라리가 이끄는 중국 슈퍼리그의 광저우 에버그란데와 6개월 계약을 맺었고, 전 국가대표팀 동료 파울리뉴와 동행하게 되었다. 2015년 7월 23일, 그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친선경기에서 광저우 비공식 데뷔전을 치렀다. 2015년, 그는 중국 슈퍼리그를 우승했다. 2016년 2월 1일, 광저우와의 계약이 만료되면서 호비뉴는 자유 계약 상태로 풀려났다.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2016년 2월 11일, 호비뉴는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와 2년 계약을 체결했다. 국가대표팀 경력 호비뉴는 2003년 CONCACAF 골드컵의 브라질 선수단 일원으로 참가해 0-1로 패한 멕시코와의 7월 13일 경기에 브라질 국가대표팀 신고식을 치렀다. 비록 브라질은 CONCACAF 골드컵 대회에 U-23 국가대표팀 선수단을 파견했지만, FIFA에서는 이 대회 경기를 모두 성인 대표팀 경기로 간주했다. 그는 2005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의 브라질 선수단 일원으로 참가해 우승을 거두었다. 대회에서, 호비뉴는 아드리아누와 공격을 맡아 그리스와 일본과의 조별 리그전에서 득점을 기록했다. 호비뉴는 독일에서 열린 2006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할 브라질 선수단에 이름을 올렸다. 본선에서, 주축 공격 자원으로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아드리아누, 그리고 카카가 존재함에 따라 호비뉴는 주로 후보 선수로 기용되었다. 그러나, 호비뉴는 4-1로 이긴 일본과의 조별 리그 최종전에 브라질 선발로 출전했다. 그는 0-1로 패한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 3번째 교체 출전을 했다. 브라질의 FIFA 월드컵 주축 공격진이 빠지면서, 호비뉴는 1년 뒤에 열린 200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주전 공격수로 참가했다. 호비뉴는 대회에서 그의 유년 시절 우상 호마리우가 썼던 11번 유니폼을 입었다. 호비뉴는 조별 리그에서 브라질이 기록한 4골을 홀로 기록했는데, 칠레와의 조별 리그전에서는 해트트릭으로 브라질의 완승을 견인했고, 1-0으로 이긴 에콰도르전에서도 페널티킥으로 골을 넣었다. 이후, 그는 6-1로 이긴 칠레와의 8강전에서 2골을 추가했다. 이후, 브라질은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를 3-0으로 완파하고 대회 정상에 올랐다. 호비뉴는 개인상을 석권했는데, 골든 슈를 타는 것 외에도 대회 최우의 선수로도 선정되었다. 2009년,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린 200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 브라질 대표로 참가해 우승 주역이 되었다. 그는 대회 전 경기에 출전했는데, 브라질은 결승전에서 미국을 꺾고 대회 정상을 차지했다. 호비뉴는 2010년 FIFA 월드컵의 브라질 선수단에 이름을 올렸고, 그는 루이스 파비아누와 공격을 맡았다. 그는 칠레와의 16강전에서 골을 신고해 브라질이 3-0으로 이기고 8강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이어지는 네덜란드와의 8강전에서 선제골을 기록했지만, 브라질은 1-2로 역전패를 당해 탈락했다. 2011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형편 없는 활약을 펼친 호비뉴는 브라질 주전 공격수 지위를 자드송에게 빼앗겼다. 2013년 10월 31일, 2년동안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지 않았던 호비뉴는 루이스 펠리피 스콜라리 감독에 의해 다시 선택받은 자들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각각 11월 16일과 19일에 치른 온두라스전과 칠레전에 모두 참가했다. 호비뉴는 이 중 칠레와의 경기에서 2011년 이래 처음으로 국가대표팀 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2014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할 스콜라리의 선수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FIFA 월드컵 종료 후, 후임 감독으로 복귀한 둥가는 호비뉴를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다시 차출했다. 2014년 9월 6일, 호비뉴는 1-0으로 이긴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 13분 교체로 출전했고, 마이애미에서 벌어진 이 경기는 1-0 승리로 끝났다. 2015년 5월, 호비뉴는 칠레에서 열리는 2015년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할 브라질의 23인 선수단에 포함되었다. 그는 베네수엘라와의 조별 리그 최종전 경기에서 네이마르가 대회의 남은 경기에 참가할 수 없게 되면서 선발로 출전했다. 시작 9분만에 호비뉴는 코너킥을 치아구 시우바에게 띄워주었고, 시우바는 브라질이 앞서나가는 골을 넣어 브라질이 2-1로 이겼고, 조 1위로 8강에 올랐다. 6월 27일, 호비뉴는 파라과이와의 8강전에서 선제골을 넣었지만, 브라질은 승부차기 끝에 3-4로 져 탈락했다. 플레이스타일 발빠르고, 창조적이며, 민첩하며, 천부적인 기술력을 지닌 호비뉴는 우아함, 공 제어 능력, 공격 본능, 그리고 드리블 능력은 물론 빠른 발로 가위나 퍼덕이 같은 기교와 농락하는 능력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조숙한 기량 성장과 공 다루는 능력으로 유년 시절부터 펠레와 견주어졌다. 대게 배치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그는 다양한 공격 역할을 맡을 수 있는데, 주로 측면 공격을 맡지만, 후방 공격수 혹은 주 공격수로도 기용되기도 하며, 공격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치고, 직접 득점하거나 골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어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기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호비뉴는 근면성 부족, 전술적 이해 부족, 그리고 나약한 신체 능력으로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그로 인해 넘어진 척 속이려는 경향이 있다. 유망주 시절에 엄청난 재능을 선보였지만, 그는 현역 생활 도중 기복이 잦았고, 체육계 인사들로부터 기대를 못미치는 활약을 펼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사생활 2004년 11월, 호비뉴의 모친은 총을 든 괴한에게 납치당했었다. 그의 어머니는 다음 달 온전히 풀려났다. 2009년, 호비뉴는 비비안 굴리엘미네티를 배우자로 맞이했다. 두 부부는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는데, 장남 호브송 주니오르는 2007년 12월 17일 산투스에서 났고, 차남 잔루카는 2011년 4월 20일 상파울루에서 출생했다. 경력 통계 클럽 2017년 12월 7일 기준 국가대표팀 2017년 1월 25일 기준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아래의 점수에서 왼쪽의 점수가 브라질의 점수이다. 수상 클럽 산투스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 2002, 2004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2010, 2015 코파 두 브라지우: 2010 레알 마드리드 라 리가: 2006–07, 2007–08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8 밀란 세리에 A: 2010–11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2011 광저우 에버그란데 중국 슈퍼리그: 2015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2017 국가대표팀 브라질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2005, 2009 코파 아메리카: 2007 CONCACAF 골드컵 준우승: 2003 수페르클라시코 데 라스 아메리카스: 2014 개인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 2002, 2003, 2004 볼라 지 프라타: 2002, 2004, 2016 볼라 지 오우루: 2004 월드 사커 올해의 신인 선수: 2005 코파 아메리카 대회 최우수 선수: 2007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2007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올해의 팀: 2015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 올해의 팀: 2016 각주 외부 링크 RSSSF 국가대표팀 통계 Football Database 프로파일 및 통계 개인 공식 웹사이트 Futpédia 통계 Sambafoot 프로파일 1984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상비센치 (상파울루주) 출신 아프리카계 브라질인 브라질의 남자 축구 선수 잉글랜드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스페인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이탈리아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중국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튀르키예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브라질의 해외 진출 남자 축구 선수 중국에 거주한 브라질인 남자 축구 공격수 브라질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산투스 FC의 축구 선수 레알 마드리드 CF의 축구 선수 맨체스터 시티 FC의 축구 선수 AC 밀란의 축구 선수 광저우 FC의 축구 선수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의 축구 선수 시바스스포르의 축구 선수 이스탄불 바샥셰히르 FK의 축구 선수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이 A의 축구 선수 라리가의 축구 선수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선수 세리에 A의 축구 선수 중국 슈퍼리그의 축구 선수 쉬페르리그의 축구 선수 2003년 CONCACAF 골드컵 참가 선수 2005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참가 선수 2006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2007년 코파 아메리카 참가 선수 2009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참가 선수 2010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2011년 코파 아메리카 참가 선수 2015년 코파 아메리카 참가 선수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팀 선수 코파 아메리카 우승팀 선수 잉글랜드에 거주한 브라질인 이탈리아에 거주한 브라질인 스페인에 거주한 브라질인 중국에 거주한 브라질인 FIFA 센추리 클럽 남자 선수 튀르키예에 거주한 브라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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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B%93%9C%EB%A6%AC%EC%95%84%EB%85%B8%ED%8F%B4%EB%A6%AC%EC%8A%A4%20%EC%A0%84%ED%88%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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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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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378년 8월 9일 동로마의 황제 발렌스와 고트족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황제 발렌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고트족은 로마군을 이겼다. 역사상 이 전투의 패배로 5세기 후반 서로마 제국의 붕괴가 시작됐다. 배경 376년 훈족의 침입으로 위협받은 고트족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스에게 로마 제국의 영토로의 이주를 허가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발렌스는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트라키아로 이주를 허가하고 지방 정부에 그들의 정착을 도우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로마의 동맹 부족이 되어 정착해 안정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었으나 트라키아의 총독 루키피누스는 황제가 명령했는데도 도나우강을 건너온 고트족의 재산을 빼앗고 거처를 마련해 주지 않아 이들은 거의 기아 상태에 빠졌다. 377년 여름, 살아남고자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하기 시작한 고트족 난민들은 마리아노폴리스로 몰려가서 루키피누스와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총독 루키피누스는 거절하고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해산하려고 시도했으나 루키피누스는 오히려 고트족에게 패주했고 발렌스는 서로마 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증원군을 요청했다. 동서 로마 제국의 대규모 증원군에도 고트족과 로마군 어느 쪽도 분명히 승리하지 못한 채 2년이 경과하였다. 378년 봄, 그라티아누스에게 약속받고 군대를 직접 이끌고 발칸반도로 마침내 향한 발렌스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출발해 5월 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그라티아누스도 증원군을 더 보냈으나 알레마니족이 라인강을 넘어 쳐들어오자 병력을 다시 불러들였고 갈리아에서 알레마니족 격퇴에 성공한 일변, 발렌스는 아드리아노폴리스까지 진군하여 상당한 규모의 고트족을 격퇴하고 서방의 증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의 경과 그라티아누스가 보낸 증원군의 사령관 리코메레스는 발렌스에게 자신의 증원군이 도찰할 때까지 대규모 전투를 자제하라고 요청했으나 발렌스는 독자 정보망으로 적군이 고작 1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서 휘하 장군 세바스티아누스가 즉각 공격을 주장하자 그 의견에 동의하여 공격에 나섰다. 8월 8일 발렌스는 고트족의 족장 프리티게른이 로마군의 정황을 파악하고서 제안한 협상을, 아군의 수를 기준으로 하는 우세를 믿고서 거절하는 생애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다음날 전투가 개시되었다. 하드리아노폴리스의 성문을 나선 로마군은 적을 발견하자마자 급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열이 갖추어지기도 전에 공격을 시작한 탓에 로마군은 처음부터 밀릴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은 전투 단위와 명령 체계가 분명한데 부족 단위라서 개별로 전투한 고트족군은 짐수레를 둥글게 둘러싸고 방어진을 취하는 와중에 함께 온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려고 로마군을 죽을 힘을 다해 공격하였다. 로마군은 전투 단위마다 기능에 따라 유효하게 응대하는 전략을 취하지 못하고 고트족군에게 격퇴당했으며 상대를 야만족이라고 얕보던 발렌스는 전투 경험이 없었다. 고트족 기병에 밀린 로마군은 대대장 35명과 군단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했다. 로마군 총사령관 세바스티나누스와 부사령관 트라야누스는 전사했다. 발렌스도 그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그 정확한 사정은 모른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도 하고 호위대에서 떨어져 들판의 농가의 오두막에 숨어들었다가 고트족군에게 불에 태워져 죽었다고도 전한다. 결과 고트족은 로마 병사들이 값나가는 물건을 놓고 왔으리라 추정되는 하드리아노폴리스를 공략하러 갔지만,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패잔병이 아드리아노폴리스로 도망해 방위에 앞장서고 있었다. 결국 공략을 단념한 고트족은 그대로 로마 가도를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해 남동으로 향했지만, 이곳은 로마 제국 동방의 수도인 데다가 방위 면에서는 만점인 지리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고트족은 이 대도시 공략도 일찌감치 단념했다. 영향 이 전투의 패배는 로마인에게 아주 심각하게 수용됐다. 로마군은 더는 천하무적인 불패의 군대가 아니며 야만족은 로마군을 압도하게 되었다. 황제 전사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로마군이 게르만족에게 참패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예전의 패배는 곧 로마군은 일어나서 복수했지만 이 전투의 패배는 절대로 설욕되지 않았다. 로마의 게르만화는 마침내 더는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발렌스를 계승해 동로마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계속해서 밀려오는 고트족을 로마 영토 내로 마침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각주 로마 제국이 참가한 전투 동로마 제국이 참가한 전투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고트인 알란인 에디르네의 역사 4세기 로마 제국 4세기 분쟁 3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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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4%84%EB%A6%AC%EC%96%B8%20%EB%B0%98%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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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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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패트릭 반스(Julian Patrick Barnes, 1946년 1월 19일 ~ )는 영국 레스터 출신의 현대 영국의 작가이다. 대표작 그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들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전범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년), 《잉글랜드, 잉글랜드》(1988년), 《아서와 조지》(2005년)로 맨 부커상 후보에 세 번 올랐다. 그는 댄 캐버나라는 필명으로 범죄 소설을 썼다. 그는 또한 프랑스 문학의 번역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번역한 작가로는 도데와 플로베르가 있다. 그가 1980년에 발표한 처녀작 《메트로랜드》는 1960년대의 반항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젊은 세대의 운명을 묘사한 것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서머싯 몸상을 받았다.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1989년)는 전투적인 무신론과 신비적인 신앙을 교묘하게 조화시키면서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대담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바다와 관련된 모티프는 계속 변주되며 나타난다. 반스가 제기하는 철학적 질문들은 독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잉글랜드, 잉글랜드》는 현대의 허구적인 삶에 대한 반스의 성찰이 보이는 작품으로, 가혹한 현실을 사생활에서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상쇄하려는 경향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반스는 사랑 이야기를 쓰는 데 능숙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지나치게 냉소적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반스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의 문제를 깊이 있게 응시하고 있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창작 과정에서 작가의 역할에 대한 극히 유쾌한 연구라 할 수 있다. 반스는 무엇보다 그의 아이러니한 스타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내 말 좀 들어 봐》와 《사랑, 그리고》에서 그는 남녀 관계를 묘사하면서 모든 등장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하게끔 했다. (이것은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와 이노우에의 《엽총》에서 시도되었던 수법이다.) 그의 소설들은 그에게 각국의 중요한 문학상들을 안겨 주었다. 프랑스에서는 《플로베르의 앵무새》로 메디치상을, 《내 말 좀 들어 봐》로 페미나상을 받았고, 독일에서는 1993년 함부르크의 퇴퍼 재단에서 주는 셰익스피어상을 받았다. 《고슴도치》(1992)는 동유럽의 어느 국가(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에서 벌어진 공산 독재자에 대한 재판을 다룬 것으로, 불가리아의 지프코프의 재판을 모델로 했다. 이 소설은 불가리아어판이 영어판보다 먼저 출간되었다. 또한 2011년에는 단편집 『펄스』로 부커상, 휘트브래드 대상과 함께 언급되는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을 수상했다. 사생활 그는 옥스퍼드 대학 모들린 칼리지를 졸업한 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찬자로 일했다. 그 뒤 문학 편집자, 영화 평론가로 활동했고 현재는 전업 작가이다. 그의 형 조너선 반스는 고대 철학 전공의 철학자이다. 현재 그는 아내이자 문학 에이전트인 퍼트리샤 캐버나와 함께 런던에서 살다가 아내와 사별한다. 그의 소설의 대부분은 아내에게 바쳐진 것이다. 작품 (특별한 표시가 없으면 장편소설임) 메트로랜드Metroland (1980). 국역 열린책들(2007)|신재실 옮김|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Before She Met Me (1982). 국역 문학동네(1998), 열린책들(2006)|신재실 옮김| 플로베르의 앵무새Flaubert's Parrot (1984). 국역 동연(1995), 열린책들(2005)|신재실 옮김| 태양을 바라보며Staring at the Sun (1986). 국역 열린책들(2005)|신재실 옮김|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A History of the World in 10½ Chapters (1989). 국역 동연(1993), 열린책들(2006)|신재실 옮김| 내 말 좀 들어봐Talking it Over (1991). 국역 동연(1997), 열린책들(2005)|신재실 옮김| 고슴도치The Porcupine (1992). 국역 열린책들(2005)|신재실 옮김| Letters from London (1995) — (뉴요커에 연재한 글 모음) Cross Channel (1996) — (단편집) England, England (1998) 사랑, 그리고 Love, Etc. (2000). 국역 열린책들(2009)|신재실 옮김| Something to Declare (2002) — (에세이) The Pedant in the Kitchen (2003) — (요리에 관한 저널리즘) 레몬 테이블 The Lemon Table (2004) — (단편집). 국역 열린책들(2008)|신재실 옮김| 용감한 친구들 Arthur & George (2005) 국역 다산책방(2015) | 한유주 옮김 Pulse(2011) — (단편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Ending(2011) 국역 다산책방 | 최세희 옮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Levels of Life(2013) - (에세이) 국역 다산책방 | 최세희 옮김 시대의 소음 The Noise of Time (2016) 국역 다산책방 | 송은주 옮김 댄 캐버나의 작품 Duffy (1980) Fiddle City (1981) Putting the Boot In (1985) Going to the Dogs (1987) 수상 경력 《메트로랜드》로 서머셋 몸상(1981) 《플로베르의 앵무새》로 제프리 페이버 기념상(1985) 《플로베르의 앵무새》로 프랑스 메디치상 에세이 부문(1986) 미국 문예 아카데미의 E. M. 포스터상(1986) 독일 구텐베르크상(1987) 이탈리아 그리차네 카부르상(1988) 슈발리에 문예 훈장(1988) 《내 말 좀 들어 봐》로 프랑스 페미나상 외국 소설 부문(1992) 함부르크 퇴퍼 재단의 셰익스피어상(1993) 오피시에 문예 훈장(1995) 오스트리아 국가상(2004) 코망되르 문예 훈장(2004) 새 단편집 《Pulse》로 영국 데이비드 코헨 문학상(2011)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 수상(2011) 반스는 메디치상과 페미나상을 다 받은 유일한 외국 작가이다. 기타 《내 말 좀 들어봐Talking it over》(1991)는 프랑스에서 《사랑, 그리고Love etc.》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1992). 반스는 이 프랑스판 제목을 2000년에 쓴 속편에 그대로 사용했다(사랑, 그리고). 속편은 프랑스에서 《10년 후Dix ans après》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2002). 줄리언 반스는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세련된 지식인인 본인 역으로 등장한다. 영화 Love etc. (1996) - 《내 말 좀 들어 봐》를 프랑스에서 영화화한 것. Metroland (1997) 《브리짓 존스의 일기》 (2001) - 헬렌 필딩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것. 자기 자신으로 출연. 외부 링크 줄리언 반스 공식 홈페이지 필명 댄 캐버나의 공식 홈페이지 영국 문화원 사이트 Publisher's Website - 반스와 Arthur & George에 관한 내용 포함 Guardian Books "Author Page" 1991년 인터뷰 녹음 2011년 데이비드 코헨 문학상 수상 소식 1946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잉글랜드의 소설가 한국어 전집이 출간된 저자 런던 출신 맨부커상 수상자 잉글랜드의 무신론자 잉글랜드의 회고록 작가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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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A6%8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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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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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스(Worms)는 독일 남서부 라인란트팔츠주에 있는 도시이다. 화학, 금속 등의 산업의 중심지이며, 특히 포도주로 유명하다. 인구는 2004년 기준으로 85,829명이다. 자매 도시 세인트올번스 (1957) 오세르 (1968) 파르마 (1984) 티베리아스 (1986) Bautzen (1990) 모빌 (1998) 닝더 시 (2014)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독일의 도시 라인란트팔츠주 라인란트팔츠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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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2008%EB%85%84%202%EC%9B%94%20%EA%B0%9C%EA%B8%B0%20%EC%9B%94%EC%8B%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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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개기 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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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기 월식 현상이 2008년 2월 21일 아침(유럽과 아프리카 기준, 미주 지역은 2월 20일)에 일어났다. 북·남아메리카 지역에서는 2월 20일 저녁 동쪽 하늘에서 볼 수 있었으며, 아프리카와 유럽 지역에서는 2월 21일 동트기 전 서쪽 하늘에서 볼 수 있었다. 이 월식 현상은 2008년에 있을 두 번의 현상 가운데 첫 번째로, 2008년 8월 16일에는 부분 월식 현상을 볼 수 있다. 다음 개기 월식은 2010년 2월 1일 있을 예정이다. 상황 달의 반그림자 영역 안으로 들어간 때는 00:35 UTC이며 본그림자 영역 안으로 들어간 때는 1:43 UTC이다. 개기 월식은 51분 동안 지속되었다. 5:09 UTC에 본그림자 영역 밖으로 나왔으며 6:17 UTC에는 반그림자 영역 밖으로 나왔다. 각주 외부 링크 NASA: Total Lunar Eclipse: February 20, 2008 2008-02 월식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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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3%B5%EA%B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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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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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강(腹腔, )은 복막(장막)에 감싸인 공동이다. 그 아래쪽에는 골반이 있다. 안쪽에는 내장이 포함되어 있어 복벽에 둘러싸여 있다.인간을 포함한 포유류는 이것을 가지고 있다. 흉곽의 횡격막보다 아래에서 위치한다. 같이 보기 복부 체강 해부학 배 (해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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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0%88%EC%9D%B4%EC%95%84%EC%9B%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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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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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아웃(layout, 배치라는 뜻)은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페이지 레이아웃은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이나 소프트웨어 디자인에서 각 구성요소를 제한된 공간 안에 효과적으로 배열하는 일을 의미한다. 키보드 레이아웃은 키보드 자판의 키 배열을 가리키는 말이다. IC 레이아웃은 반도체 집적 회로(IC)를 설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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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5%AD%EB%B3%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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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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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李恒福, 1556년 11월 16일 ~ 1618년 7월 4일(음력 5월 13일))은 조선 승정원(대통령비서실) 동부승지(국토교통부) 겸 당상관(국장급 공무원) 등을 거쳐 조선 의정부 영의정(국무총리) 직책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정치가·시인·작가이다. 주로 잘 알려져있는 오성과 한음 대감 중 '오성'이다. 주요 전력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진인(靑華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도원수 권율의 사위이다. 경주 이씨(慶州 李氏) 백사공파(百沙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선조를 수행하여 의주까지 몽양을 다녀왔으며, 호성공신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참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 및 영창대군, 임해군 처단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중풍으로 병사하였다. 공신 책록 경력으로는 1604년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 1608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죽마고우 이덕형과의 우정 이야기 《오성과 한음》대감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생애 형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어나서 사흘 동안은 울지도 않고 젖을 먹지도 않아 모두들 걱정을 하였는데, 점성술사가 보고 장차 큰 인물이 될 아기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자라면서는 해학에도 뛰어나 만인의 귀염을 받았음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9세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으나 16세에는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어린 시절에는 놀기를 좋아하여 동네 불량배의 우두머리로 세월을 헛되게 보냈었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정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을 치른 뒤 학궁(學宮)에 들어가 학문이 더욱 이루어졌다. 영의정을 지낸 권철은 이항복의 이웃에 살고 있었다. 이항복의 인물됨됨이를 알아본 권철은 아들 권율에게 이항복을 사위를 삼도록 권하여 이항복은 19세에 권율의 딸과 혼인하였다. 1580년(선조 13년) 문과에 급제하여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다. 이 해에 이덕형도 20세에 문과에 을과 1인으로 급제하여 함께 벼슬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582년(선조 15년)에는 장인어른인 권율도 46세에 문과에 병과 1인으로 급제하여 뒤늦게 벼슬을 시작한다. 관직 생활 과거 급제 이듬해에는 한림학사가 되고, 1583년에는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친구인 이덕형과 함께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했다. 또 홍문관인 옥당의 벼슬아치로 천거받았다. 호조참의가 되어 전곡(錢穀)의 출납에 밝았으므로 판서 윤두수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이후 1589년 예조정랑으로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이 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어지러운 붕당 정치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려고 슬기와 인내로써 항상 조심하였으며, 본디 재치와 익살이 뛰어난 인물인지라, 그의 우스갯소리에는 모두들 웃으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건저 사건이 일어나 정철이 수괴(首魁)로 몰리게 되었는데 친구들이 찾아가는 자가 없었으나 이항복이 꺼림 없이 방문했으며, 승지(承旨) 때 정철의 죄안을 처리하는 데 태만하였다고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35세인 1590년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에 올라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다.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로서 선조를 모시고 개성으로 피난을 갔고, 의주로 피난가는 도중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다시 두 왕자들을 모시고 먼저 평양으로 가서 형조판서에 특진하고 병조판서로 옮겨 왜군 격퇴의 지휘권을 얻게 되었다. 이때 조선 정부에서는 선조를 함흥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명나라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는 영변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영변과 정주를 거쳐 의주에 이르렀다. 의주에서 명나라에서 들어온 황응양(黃應暘)에게 조선과 일본이 협력하여 중국을 치려 한다는 유언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고 구원의 대병이 이르게 하였다. 그동안 형조판서를 거쳐 전란 중, 이덕형(李德馨)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맡으며 명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동시에 왕실 근위대 정비에 전력을 다하고 올바른 정치로 선조를 보필하였다. 그리고 이조판서, 우참찬 등도 했다. 그 공으로 우의정이 되었으며, 왜란이 끝난후 호성공신(扈聖功臣)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올랐다. 정인홍 등이 성혼을 무고하자 성혼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의 당이라는 혐의를 받고 자진하여 영의정 벼슬을 내놓았는데 예우(禮遇)는 그대로 받아 큰일에는 왕이 자문을 받았다. 임진왜란 중에는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 사건으로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다. 정응태는 명나라 구원병 책임자로 조선에 와 있던 양호(楊鎬) 장군과 갈등하던 중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침공할 것이다.”라고 명나라 조정에 허위로 보고를 했다. 만약 명나라가 지원군을 회군한다면 전력에 손실이 나타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나 이항복은 당시 공조참판인 월사 이정구를 부사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을 서장관으로 대동하고 명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명나라로 하여금 정응태를 파면케 하여 사건을 무마하였다. 1604년(선조 34) 임진왜란 관련 신하들을 포상할 때 그는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1605년 청난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광해군 정권의 혼란과 유배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영중추부사로 재직 중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후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며 물러났다가 다시 우의정을 거쳐서 좌의정이 되었다. 계축옥사 당시 좌의정을 겸하면서 훈련도감 도제조와 체찰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항복은 임해군의 사사 때 정인홍 등의 탄핵을 받았고, 영창대군의 사사와 인목대비 폐서인 사건이 논의될 때 이들에게 온갖 정성과 지혜를 경주했으며 목숨까지 바쳐가며 적극적으로 구제하고자 하였다. 국모를 폐위하는 논의가 결정되어 인목대비가 폐모되어 서궁에 갇히는 반인륜적인 사건이 발발하자 이항복은 비로소 글을 올려 극력 부당함을 간하였다. 평생토록 당쟁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대북파에 의해서 폐모론이 거론되자 이에 반대하며 서인(西人)에 가담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의 폐위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다가 1617년 12월 21일(음력 11월 24일) 관직을 삭탈당하고 북청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중풍이 재발하여 반신불수의 몸이 되고, 조정은 이항복의 신병 처리에 당황해했다. 1617년 음력 12월 16일(양력 1618년 1월 12일) 이항복의 유배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위리 안치의 명이 떨어진 이후 계속 유배지를 옮겨다니며 17일 용강, 18일, 흥해, 21일 창성, 24일 경원, 28일 삼수로 다니다가 1618년 1월 31일(음력 1월 6일)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사후 광해군은 7월 9일(음력 5월 18일) 이덕형 사후의 예에 따라 관작을 회복시켜 주고 예장을 함은 물론 경유지마다 관에서 운구에 협조할 것을 명했다. 사후 정충신이 이항복의 시신을 수행했는데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는 경기도 포천으로 8월 7일(음력 6월 17일) 출발하여 8월 31일(음력 7월 12일) 도착했다. 묘(경기도 기념물 제24호)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번지에 있다. 《상신록》(相臣錄)에 실렸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북청과 포천의 선비들이 각각 사당을 세워 모셨으며, 효종 때부터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노덕서원 등지에 제향되었다. 한음 이덕형 가문과의 우의는 지금도 이어지며 정인보 가계와도 친분이 있다고 한다. 후손에 이광좌(李光佐), 이태좌(李台佐), 이종성(李宗城), 이경일(李敬一), 이유원(李裕元)은 정승에 올랐으며 소론의 명문가로서 독립운동가인 이회영, 이시영 형제도 이항복의 후손이다. 생애는 연보 및 계곡 장유가 쓴 행장과 상촌 신흠이 쓴 신도비명에 남겨졌다. 평가 천성이 효우돈목(孝友敦睦)하며, 젊어서 기생을 좋아했으나 끊은 후 다시는 성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조정에 나가 있는 40년 동안 항상 붕당 정치에서 초연하려고 노력하였다. 권율과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초월하여 매우 친하게 지냈다. 둘 다 개구쟁이라서 관련 일화가 매우 많다. 가족 할아버지 : 이예신(李禮臣) 아버지 : 이몽량(李夢亮) 어머니 : 전주 최씨 부인 : 안동 권씨 - 권율(권철의 아들)의 딸 장남 : 부사 이성남(李星男) 자부 : 권씨 손자 : 이시현(李時顯) 손녀 : 최욱에게 출가 자부 : 김씨 차남 : 예빈시정 이정남(李井男) 자부 : 윤씨 손자 : 이조참판 이시술(李時術) 장녀 : 윤인옥에게 출가 측실 : 금성 오씨 삼남 : 이규남(李奎男) 자부 : 권씨 손자 : 이시행(李時行) 사남 : 지중추부사 이기남(李箕男) 자부 : 박씨 차녀 : 경주이씨 - 안동인 군수 권칙의 처 관련 작품 드라마 《임진왜란》(MBC, 1985년~1986년, 배우:김용건) 《서궁》(KBS 2TV, 1995년~1995년, 배우:박영목) 《천둥소리》(KBS 2TV, 2000년~2001년, 배우:백준기) 《왕의 여자》(SBS, 2003년~2004년, 배우:한인수) 《불멸의 이순신》(KBS 1TV, 2004년~2005년, 배우:박병선) 《징비록》(KBS 1TV, 2015년, 배우:최철호) 《화정》 (MBC, 2015년, 배우:김승욱) 문화재 《백사 이항복 집터》 -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9호 《이항복선생묘》 - 경기도 기념물 제24호 주요 저서 이항복의 저술은 사후 1629년 강릉에서 문하생들이 주도로 간행됐다가 경남 진주에서 1635년 정충신이 주도로 재간행되었고, 1726년에는 5대손 이종성의 주도로 각각 간행되었다. 현재 문집 15책이 남아 있다. 《백사집》(白沙集)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같이 보기 임진왜란 종계변무 이덕형 권율 권철 이종성 이광좌 이태좌 홍순언 이제현 포천 화산서원 각주 참고 자료 외부 링크 말년 불우했던 백사 이항복 유배생활(경향신문) 2006년 1월 3일자 경주이씨 장인 권율을 왕 앞에서 놀린 이항복의 재치 오마이뉴스 2006.12.09일자 1556년 출생 1618년 사망 조선의 문신 조선의 학자 조선의 정치인 조선의 시인 조선의 작가 과거 급제자 조선의 임진왜란 관련자 성혼 권율 평난공신 호성공신 위성공신 조선의 저술가 경주 이씨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서울특별시 출신 병사한 사람 서인 16세기 한국 사람 17세기 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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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0%88%EC%9D%B8%EB%B3%B4%EC%9A%B0%20%EB%B8%8C%EB%A6%AC%EC%A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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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 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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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 브리지()는 다리의 명칭 가운데 하나이다. 레인보우 브리지 (캔자스주) (영문) 레인보우 브리지 (나이아가라 폭포) (영문) 레인보우 브리지 (텍사스주) (영문) 레인보우 브리지 (옥스퍼드) (영문) 레인보우 브리지 (도쿄) 음악 Rainbow Bridge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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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545%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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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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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명(明) 가정(嘉靖) 24년 일본(日本) 덴분() 14년 후 레 왕조(後黎朝) 응우옌호아(元和) 13년 막 왕조(莫朝) 꽝호아(廣和) 5년 기년 류큐(琉球) 쇼세이왕() 19년 명(明) 세종 가정제(世宗 嘉靖帝) 24년 조선(朝鮮) 인종(仁宗) 원년 후 레 왕조(後黎朝) 장종(莊宗) 13년 막 왕조(莫朝) 헌종(憲宗) 5년 사건 을사사화가 발생함.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은광산 발견됨으로 스페인이 본격적인 은 채굴이 시작되었다. 7월 21일 - 이탈리아 전쟁 프랑스군이 잉글랜드의 와이트 섬에 침공하였다. 10월 31일 - 가와고에 성 전투 발생(일본) 12월 13일 - 트리엔트 공의회가 개최되다. 탄생 음력 2월 9일 - 조선의 류격(柳格) 음력 2월 27일 - 조선의 유희경(劉希慶) 음력 3월 8일 -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4월 2일 - 펠리페 2세의 3번째 부인 엘리자베트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장녀) 음력 6월 29일 - 조선의 정사성(鄭士誠) 음력 10월 21일 - 조선의 조호익(曺好益) 무장 롯카쿠 요시하루(일본) 사망 8월 7일 - 조선 12대 국왕 인종. 대윤파 영수 윤임 - 장경왕후의 오빠, 인종의 외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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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B%94%94%EC%9E%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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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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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잔(, )은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제4의 도시이고 안디잔 주의 주도이다. 추정 인구는 35만명이다. 고대에는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카슈가르와 코칸트의 중간에 있었다. 인도에서 무굴 제국의 시초를 세운 바부르가 1483년 이 땅에서 태어났다. 코칸트 한국이 존재했다. 1876년에코칸트 한국은 러시아 제국 투르케스탄 지방 페르가나 군에 속했다. 1898년에는 반(反)러시아 봉기가 일어났지만 군에 진압되었고 1902년에는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다. 2005년 5월에는 이슬람 카리모프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군대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하는 시민들이 다치기도 하였다. 인구 기후 참조 안디잔 대학살 각주 우즈베키스탄의 도시 안디잔주 비단길 세계유산 잠정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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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BD%EC%A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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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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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진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곽진(郭瑨, 1568 ~ 1633)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곽진(郭瑨)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곽진(郭鎭, ? ~ 129년)은 후한 중기의 관료이다. 곽진(1979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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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9%B4%EB%AA%A8%EB%85%B8%EC%9A%B8%ED%8A%B8%EB%9D%BC%EB%A7%88%EC%9D%B4%ED%81%AC%EB%A1%9C%EC%8A%A4%EC%BD%94%ED%94%BD%EC%8B%A4%EB%A6%AC%EC%BD%94%EB%B3%BC%EC%BC%80%EC%9D%B4%EB%85%B8%EC%BD%94%EB%8B%88%EC%98%A4%EC%8B%9C%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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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모노울트라마이크로스코픽실리코볼케이노코니오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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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모노울트라마이크로스코픽실리코볼케이노코니오시스( )는 ‘주로 화산에서 발견되는 아주 미세한 규소 먼지를 흡입하여 허파에 쌓여 생기는 만성 폐질환’을 뜻하는 영어 낱말이다. 한국어에서 대응하는 말로는 ‘진폐(증)·폐진증’ 또는 ‘규성 진폐증’이 긴 영어단어로 알려지고 있다. 어원 : 허파―고대 그리스어가 어원이 된 라틴어에서 : 초(超: 극심한)―라틴어에서 : 아주 작은―그리스어의 mikron(작다)와 skopos(시야)에서 : 규소―라틴어에서 : 화산―라틴어에서 : 티끌―그리스어의 konis에서 : 병·증상―그리스어에서 역사 이 낱말은 사전에 올라온 모든 영어 낱말 중 가장 길다. 로골로지(logology)에서는 이 45글자의 단어를 줄여서 "P45"로 지칭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1936년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처음 올라 왔으며, 그 후에 웹스터 영어 사전, 랜덤 하우스 영어 사전 등에도 올라 왔다. 그러나 이 낱말은 기술적인 낱말(정확히는 의학 용어)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쓰이는 가장 긴 영어 낱말로 보지는 않는다. 본래 장난으로 만들어진 낱말이다. 실용어가 아니다. National Puzzlers' League(NPL)의 회장이었던 에버릿 M. 스미스(Everett M. Smith)가 1935년에 NPL의 정기 모임에서 만든 것으로, 모임에 대한 신문 기사에서 처음으로 쓰였다. 그 후로 NPL의 회원들은 이 낱말을 주요 사전에 올리기 위한 캠페인을 펼쳤고 결과적으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 등에 올라가게 되었다. 1935년 이후에도 거의 쓰이지 않기는 했지만, 그 이전의 의학 관련 글에서 이 낱말이 사용된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더 보기 제일 긴 영어 단어 긴 한국어 낱말 Supercalifragilisticexpialidocious 각주 외부 링크 "AskOxford: What is the longest English word?" 영어 낱말 긴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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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82%98%EC%A7%80%EC%9B%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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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지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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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지움()은 일부 유럽 국가의 중등교육 기관으로 나라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한국의 중학교에 해당하며 일부 국가에서는 한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과정에 해당하는 경우도 있다. 역사 유래 ‘김나지움(Gymnasium)’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사용된 ‘김나시온(Gymnasion)’에서 유래되었다. 김나시온은 체육장이자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지성을 길러주는 장소였다. 이 말은 독일에서는 교육기관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고 영어권 지역에서는 체육관을 의미하게 되었다. 독일의 경우에는 16세기에 고전적 교양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로 김나지움을 세웠다. 19세기 초에 대학입학을 위한 준비교육기관이 되었다. 그 후 사회의 발전과 근대과학의 발달에 따라 외국어나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각종 김나지움이 생겼다가, 나치스시대에 김나지움 1종으로 통합되었다. 성립배경 김나지움은 대학 입학 자격의 수여권을 1901년까지 거의 독점적으로 차지하고 있던 중등학교이다. 그 성립 배경을 근대 독일의 교육체제를 주도한 프로이센에 입각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김나지움은 18세기 말 프로이센에서의 대학 진학 억제책으로서 등장했다. 당시의 대학은 절대주의 국가를 위한 관리 · 성직자 · 의사 등의 소수 엘리트를 양성하는 장이었는데, 일정한 입학 자격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입학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청년들이 병역을 피하기 위해서도 대학에 입학하고, 결국에는 졸업해도 취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발생하여 사회불안의 온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한 정부 당국은 대학 진학을 억제하기 위해 김나지움이라는 9년제 중등학교를 설치하고, 이곳의 졸업시험 합격을 대학 입학의 자격요건(아비투어(Abitur)라고 부른다.)으로 삼았다. 하지만 당초에는 대학의 독자적인 입시도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나지움에서 아비투어를 취득한 경우에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특혜 조건을 설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학 진학 억제책으로서는 충분치 못했다. 대학에 의한 독자적인 입시가 폐지되고 김나지움이 대학 입학 자격의 수여권을 명실상부하게 독점하게 되는 것은 1834년의 일이었다. 교육내용과 시대에 따른 그 변화 프로이센 정부는 김나지움을 설립함에 있어 당시 존재했던 라틴어학교 중에서 설비와 교원이 충실한 곳을 김나지움으로 격상시켰다. 라틴어학교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던 곳들의 총칭인데, 주로 교회 등이 성직자 양성의 예비교육 시설로 하고 있었던 곳으로서 라틴어로 성서의 강독 등을 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설립 배경은 김나지움의 교육 내용에 라틴어 우위라는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그에 더하여 김나지움의 교육 내용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19세기 초엽에 교육개혁이 단행되어 김나지움에 관한 법률적 정비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신인문주의의 깃발 아래 그리스 · 로마문화가 이상으로 간주되고, 그것을 배움으로써 인간성의 전면적인 개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정신운동의 일환으로서 교육개혁이 착수되었다. 이것은 김나지움의 교과 과정에 반영되어 고대 그리스 · 로마의 고전을 고전어(그리스어 · 라틴어)로 학습하는 교육이 중시된다고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와 같은 김나지움에서의 고전어 중시는 더 나아가 지적 세계 일반에서 고전어가 차지하고 있던 중요성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고전어, 특히 라틴어는 일찍이 중세에서는 지식인과 성직자의, 즉 학문과 교회의 언어로서 군림하고 있었다는 전통이 있고, 이미 19세기에는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사어(死語)'이긴 했지만 여전히 '교양인의 언어'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김나지움의 커리큘럼에서는 고전어, 특히 라틴어의 학습(수업시간 수 전체의 약 30%)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 · 로마의 고전문화의 흡수가 중시되고, 역으로 영어는 없고 프랑스어나 자연과학은 몇 %와 같은 실학적 교과의 경시라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또한 고전문화는 독일 근대문화를 대표하는 괴테의 문학이나 칸트 철학의 원류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교육이 지향한 것이 바로 독일 교양주의라 일컬어지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회적으로는 공업화의 진전에 따른 실학의 효용이 증대하는 가운데 분명 고전어의 비중은 약간 줄어들고 있었지만, 고전어 중시라는 커리큘럼의 기본적 성격은 그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문화적, 사회적 기능 김나지움이 대학 입학 자격의 수여권을 독점하게 되자 그 문화적 · 사회적 영향은 엄청났다. 근대 독일의 대학은 관리 · 성직자 · 의사, 대학이나 김나지움의 교사라는 정치 · 사회 · 문화의 엘리트적 담당자 양성의 장으로서, 각각 법학부 · 신학부 · 의학부 · 철학부에서 전문적 지식이 교육되고 있었다. 근대 독일에서는 이러한 대학 수료자를 교양시민층이라 부르고, 기업가나 상인 등의 경제시민층과 구별된 보다 높은 사회적 위신을 지닌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다. 김나지움은 이와 같은 대학의 이를테면 교양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김나지움은 교양시민층의 생산 메커니즘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며, 그 교육은 교양시민층의 교양 목록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김나지움의 진학률에 관해 언급하기로 하자.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까지 동일 세대의 3~4%이고, 바이마르 시기에서도 본질적 차이는 없었다. 게다가 9년 동안 재학하고 졸업시험에 합격하여 아비투어를 취득한 자는 동일 세대의 2%를 넘지 않았다. 이를테면 김나지움 진학자는 소수 엘리트이고, 아비투어 취득자는 한층 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이상과 같은 체제는 기본적으로 1901년까지 존속했다. 이 해에 김나지움 이외의 실업계 중학교에도 전 학부의 아비투어 수여권이 인정되어 김나지움의 아비투어 독점은 붕괴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법률상의 대등화일 뿐이어서 교육사회의 현실에서도 대등화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바이마르 말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사 교육기관 리세(lycée)-프랑스 퍼블릭스쿨(public school) & 그래머스쿨(grammar school) -영국 미들스쿨(middle school)-미국 독일의 동급 중등교육기관 하우프트슐레(Hauptschule:직업학교) 레알슐레(Realschule:실과학교) 게잠트슐레(Gesamtschule:종합학교) 교육과정 학생들은 초등교육을 마치고 9세 혹은 10세에 이 학교에 입학한다. 수업연한은 대개 9년이지만 현재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8년제로 시행되고 있다. 마지막 학년에는 졸업을 앞두고 ‘아비투어(Abitur)’라는 시험을 본다. 이 시험은 졸업시험인 동시에 대학입학자격시험이다. 초등교육은 1~4학년까지이고 중등교육을 5학년으로 이어서 진행한다. 이곳에서는 대학에 진학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생들을 지도한다. 2009~2010년 독일에는 3,094개의 김나지움이 있었으며, 247만 5,000명의 학생들이 김나지움에 다녔다. 이 수치는 당시 대학 진학을 앞둔 학생들의 약 28%에 해당했다.(일반적으로 김나지움을 통해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은 25%가량이다.) 일반적으로 김나지움은 공립학교로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지만 사립학교와 기독교계 학교도 많이 있다. 교육 과정은 학교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독일어 , 수학 , 정보학 / 컴퓨터 과학 , 물리학 , 화학 , 생물학 , 지리학 , 예술 (뿐만 아니라 공예, 디자인 등), 음악 , 역사 , 철학 , 공민/시민권, 사회 과학 , 그리고 여러 외국어를 포함한다. 어린 학생들을 위한 김나지움의 거의 전체 교과 과정은 필수이며, 상위 몇 년 동안 더 많은 선택 과목을 사용할 수 있지만 선택은 미국 고등학교에서만큼 넓지는 않다. 김나지움은 일반적으로 능력 범위의 상한 25~35%를 충족시켜로서 일반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다. 김나지움 최고학년에 이르게 되면 아비투어 자격 시험을 치뤄 합격해서 아비투어를 획득해야 졸업이 되며 아비투어를 획득하지 못할 경우 '졸업'이 아닌 '수료'가 된다. 또한 아비투어는 대학교 입학 자격 시험을 겸하기 때문에 대학교에 진학하려면 반드시 취득해야 한다. 김나지움의 유형 일반적인 유형 Humanistisches (인문학 중심) 인문학 중심 김나지움은 일반적으로 오랜 전통이 있다. 그들은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를 (때로는 옛 히브리어) 중점적으로 가르치고 또한 영어 나 불어 또는 둘 모두 가르친다. Neusprachliches (현대 언어 중심) 비교적 덜 전통적이다. 적어도 2개 이상의 현대언어를 가르치고, 대부분의 경우 학생들은 라틴어 또한 배울기회를 가질 수 있다. Mathematisch-Naturwissenschaftliches (수학 및 과학 중심) 수학과 과학에 중점을 두는 교육과정을 택하고, 두 번째 언어로 라틴어 또는 프랑스어를 제공한다. 특별 유형 Sportgymnasium 및 Skigymnasium Sportgymnasium는 스포츠에 주요 초점이 있고 일반적으로 체육관 형, 기숙 학교의 학교이다. Skigymnasium는 스키에 초점이 있다. Musikgymnasium Musikgymnasium 음악에 초점이 있다. 전공 과목의 하나로서 악기 (주로 피아노 나 바이올린) 연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Europäisches Europäisches 김나지움은 언어에 특성화되어 있다. 바이에른과 바덴뷔르템베르크에 있는데, 주로 학생들에게 3가지 언어를 요구한다. 바이에른의 김나지움은 5학년에 첫 번째 언어를 선택하고, 6학년에 두 번째 언어를 선택하며, 10 또는 11학년에 3번째 언어를 선택한다. 바덴 뷔 르템 베르크의 Europäisches 김나지움은 5학년에 라틴어와 영어를 학습하게 하고 7, 8학년에 세 번째 언어를 선택하게 하며, 10학년에 네 번째 언어를 선택할 수 있다. 10학년에 학생들은 5학년 때 선택한 언어 중 하나를 포기할 수 있다. 그 후에 다른 언어를 포기할 수 있다. 졸업 요건은 적어도 두가지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준으로 이수해야 한다. 참조 외부 링크 중등학교 독일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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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5%98%20%EB%A5%B4%EB%82%98%EB%A5%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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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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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르나르(, 1864년 2월 22일 ~ 1910년 5월 22일, 프랑스 출생)는 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이다. 살롱 출생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집안에서는 그를 파리의 사범학교에 보내려 하였으나, 문학에 이끌린 그는 창작에 열중하여 1894년 를 써냄으로써 문단에서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다. 나이가 들자 고향으로 돌아가 촌장 일을 보면서 농촌을 개혁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주요 작품으로 등이 있다. 생애 1864년 2월 22일 중부 프랑스 지방 라바울에서 토건청부업자 프랑수아 르나르를 아버지로, 로자 안을 어머니로 하여 차남으로 태어났다. 1887년에 첫 작품 ≪쥐며느리(Les Cloportes)≫를 발표하고 그해 6월 ≪장미꽃≫, ≪혈조(血潮)≫를 자비로 출판했다. 1894년 30세에 문인협회에 가입하고 대표작 ≪홍당무≫를 출판했다. 1904년 고향인 시트리에 정착해 촌장에 피선되었다. 농사와 창작을 병행하던 중 1910년 46세에 파리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사후에 출간된 ≪일기≫(1928)가 뛰어난 일기문학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1864년 출생 1910년 사망 프랑스의 소설가 마옌주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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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리드 린드그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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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리드 안나 에밀리아 린드그렌(, 에릭손·, 1907년 11월 14일 ~ 2002년 1월 28일)은 스웨덴의 동화 작가이다. 저널리스트, 비서, 타이피스트 등으로 일하다가 1944년 문학상에 당선하며 작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딸에게 즉석에서 해준 이야기에 기초한 동화 말괄량이 삐삐(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1945)를 간행하여 매우 유명해졌다.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은 뒤죽박죽 별장에서 혼자 사는 괴력을 가진 소녀 삐삐, 그리고 삐삐의 친구인 토미와 아니카를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를 그린 것이다. 그 후에도 《미오, 나의 미오》, 《떠들썩한 마을의 아이들》, 《소년탐정 칼레》, 《라스무스와 방랑자》, 《나, 이사 갈 거야》, 《마디타》 등의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그 외에도 《개구쟁이 미셸》, 《꼬마 백만장자 삐삐》 등 여러 가지 동화를 지었다. 각주 참고 자료 1907년 출생 2002년 사망 스웨덴의 아동문학 작가 시각 장애인 안데르센상 수상작가 스웨덴의 판타지 작가 스웨덴의 평화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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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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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Flavius Iulius Constantius, (317년 8월 7일 - 361년 11월 3일)는 337년부터 361년까지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로마 황제였다. 처음에는 형인 콘스탄티누스 2세(340년 죽음) 및 동생 콘스탄스(350년 죽음)와 공동 황제로 제국을 삼분(三分)해 통치했으나 353~361년에는 단독으로 통치했다. 생애 콘스탄티누스 1세와 황후인 파우스타 사이의 둘째 아들로 317년 일리리쿰의 시르미움에서 태어났다. 323년~337년 아버지 밑에서 부제(caesar)로 있었다. 337년 5월 22일 아버지가 죽은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 콘스탄티우스의 할아버지 즉,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테오도라 사이에서는 4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우스, 갈루스, 율리아누스) 그중 콘스탄티누스 1세로부터 부제의 칭호를 받은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콘스탄티누스 왕가의 후손들이 학살을 당한 것이다. 이 대학살은 콘스탄티우스 2세 자신이 사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살해되지 않은 것은 당시 12살인 갈루스와 6살 이었던 율리아누스뿐이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세명의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제국을 3분할했는데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를,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그리고 나머지 제국동부의 속주들(트라키아 · 마케도니아 지방 · 그리스 · 아시아 · 이집트)은 콘스탄티우스가 차지했다. 340년, 콘스탄티누스 2세가 콘스탄스의 이탈리아를 침범해 싸우다가 전사하자 제국은 서방의 콘스탄스와 동방의 콘스탄티우스 2세로 양분된다. 338~350년에는 사산조 페르시아 왕인 샤푸르 2세와 혈전을 벌였으나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했다. 350년에 이르러 두 명의 제위찬탈자가 나타났다. 하나는 도나우강 지역 주둔군 사령관인 베트라니오로 일리리쿰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게르만족 출신의 장군으로 350년 콘스탄스를 처형하고 서부 로마의 통치자임을 주장한 마그넨티우스였다. 나이수스(지금의 유고슬라비아 니슈)에서 지내고 있던 콘스탄티우스는 베트라니오를 설득해 제위를 포기하게 하고, 사촌동생인 갈루스 부제를 부제로 삼아 제국동부를 다스리게 하고 자신은 마그넨티우스와 격전을 벌였다. 351년 무르사(지금의 크로아티아 오시예크)에서 마그넨티우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마그넨티우스는 갈리아로 도망가 결국 353년 자결했다. 이어 콘스탄티우스는 부제인 갈루스 부제를 반역죄의 명목으로 처형하고 나중에 다시 율리아누스를 부제에 앉혔다. 357~358년 도나우강에서 사르마티아족·수에비족·콰디족과 전투를 벌인 뒤 다시 동부 변경에 대한 공격을 재개한 샤푸르 왕과 싸우기 위해 동부로 돌아왔다. 그러나 361년 갈리아에서 복무하던 부제 율리아누스가 병사들로부터 황제로 추대를 받자 다시 서부 지역으로 가던 중 타르수스에서 병에 걸려 죽었다. 종교적 문제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했던 콘스탄티우스는 이교도 박해법을 제정하고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다른 그리스-로마 신전의 파괴를 부추겼다. 또한 동시에 수많은 아리우스 반대파 주교들을 추방하고 박해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 주교로 영향력있는 반(反)아리우스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아타나시우스의 처리 문제를 놓고 형제인 콘스탄스와 대립했고 나중에 아타나시우스를 끝까지 추적해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317년 출생 361년 사망 4세기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왕조 로마 제국의 집정관 아리우스파 기독교인 4세기 동로마 황제 율리우스 씨족 플라비우스 씨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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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9C1%EC%B0%A8%20%EA%B3%A0%EC%9D%B4%EC%A6%88%EB%AF%B8%20%EB%82%B4%EA%B0%81%20%28%EC%A0%9C2%EC%B0%A8%20%EA%B0%9C%EC%A1%B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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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2차 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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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당과 공명당, 보수신당의 연립 내각이다. 이 내각을 두고 요미우리 신문, 산케이 신문, 마이니치 신문, 주니치 신문 등은 ‘고이즈미 재개조내각’()이라고 지칭했고, 아사히 신문, 니혼케이자이 신문 등은 ‘고이즈미 제2차 개조내각’이라고 지칭했다. NHK는 ‘제2차 개조’라고 불렀다. 내각에 대한 반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한 납치사건에서 강경한 발언으로 일본 국민의 주목을 받았던 아베 신조를 자민당의 간사장으로 임명하는 등, 선거를 의식한 내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젊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반면에, 대부분이 세습이거나 강경파 의원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2세 내각’이라거나 ‘고이즈미 호크스(매파)’ 등의 지적도 받았다. ‘관료의 말대로’라거나 ‘개혁을 방해하고 있다’는 등의 비난을 받고 있던 오기 지카게를 대신하여 행정개혁 담당 대신이었던 이시하라 노부테루를 국토교통대신에 임명하는 등 ‘개혁 중시’를 강조한 내각이 되었다. 내각 개조 전에 쟁점이 된 다케나카 헤이조와 가와구치 요리코의 두 민간인 각료는 유임된 것을 두고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후의 변화 인기를 중심으로 구성된 내각에서 아베 신조 간사장은 매스미디어 등에서 ‘행렬이 생기는 간사장’ 등으로 불릴 정도로 국민의 인기도 높다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을 제압하지는 못하고,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약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제158특별국회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제88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지만, 내각이 발족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점이나 각료 중에 낙선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각료는 전원이 유임하게 되었다. 각료 명단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에 대해서는 그 담당을 괄호 내에 기술하였다. 내각부 이외의 다른 성청(내각관방 포함)의 특명사항을 담당하는 국무대신의 직무는 꺾은 괄호(〈〉) 내에 기술하였다. ※가네코 가즈요시 국무대신의 담당 사항의 하나인 〈지역재생〉은 2003년 10월 24일 이후. 같이 보기 일본의 역대 내각 외부 링크 수상관저 -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2차 개조내각 고이즈미 2003년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 헤이세이 시대의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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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B%8D%B0%EB%A5%B4%EC%8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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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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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손(Anderson, ‘앤드루의 아들’이라는 뜻)은 영어권에서 흔히 쓰이는 이름이다. 포르투갈어권에서는 안데르송이라고도 한다. 케네트 안데르손(Kennet Andersson, 1967년~ )은 스웨덴의 축구 선수이다. 안데르송 클레베르 베랄두(Anderson Cléber Beraldo, 1980~)는 브라질의 축구 선수이다. 안데르송 히카르두 두스 산투스(Anderson Ricardo Dos Santos, 1983~)는 브라질의 축구 선수이다. 안데르송 루이스 지 아브레우 올리베이라(Anderson Luís de Abreu Oliveira, 1988~)는 브라질의 축구 선수이다. 안드라지 안투니스 안데르송(Andrade Antunes Anderson, 1981~)는 브라질의 축구 선수이다. 안데르송 조제 로페스 지 소자(Anderson José Lopes de Souza, 1993~)는 브라질의 축구 선수이다. 로이 안데르손(Roy Andersson, 1943 -)은 스웨덴의 영화 감독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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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8%81%EC%A3%BC%20%28%EC%84%B1%EC%9A%B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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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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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1953년 3월 26일 ~ )는 대한민국의 성우이다. 1971년 TBC에 입사했으며, 언론통폐합으로 현재는 KBS 13기로 분류된다. 한국방송 성우극회 소속. 주요 출연작품 애니메이션 ※전체 출연작은 외부 링크를 참조 구피와 친구들 (KBS) - 맥스 구프 데블 파이터 (KBS) - 이혜성 방가방가 햄토리 (SBS) - 얌얌이 / 호호 할머니 뾰로롱 꼬마마녀 (KBS) - 폴 엄마는 4학년 (투니버스) - 민우 / 수정 엄마 올림포스 가디언 (SBS) - 할머니 / 아기 포켓몬스터 (SBS) - 관철이 / 토게피 쥐라기 월드컵 (KBS) - 트리케 / 아라신 피너츠 (VIDEO) - 루시 반 펠트 짱구는 못말려 (VIDEO) - 짱구 천사소녀 네티 (KBS) - 셜록스 큐비즈 (재능TV) - 딩크 가면라이더 디케이드 (챔프) - 할머니 매일엄마 (SBS, 챔프) - 할머니 부탁해 마이 멜로디 (SBS) - 플랫 뚝딱박사 핌 (KBS) - 당근 부인 터보유격대 - 핑크 터보 헬로 스팽크 (투니버스) - 얼룩이 오! 패밀리 (투니버스) 비틀쥬스 (MBC) 안녕! 노디 (MBC) 노인과 바다 (KBS) 몬스터 (투니버스) - 스쿠 어머니 아가사 크리스티의 명탐정 포와로와 마플 (투니버스) - 바바라 레이시 몬타나 존스 (MBC) - 아메드 달의 요정 세일러문 (챔프) - 퀸 메탈리아 소년탐정 김전일 Original (챔프) - 키미사와 쾌걸 조로 (SBS) - 카테리나 뮬란 - 뮬란 어머니 뮬란 2 - 뮬란 어머니 미녀와 야수 - 바베트 영화 더 캣 (SBS) - 콴 부인 (에이미 힐) 룩 앳 미 (SBS) - 에디트(미셸 모레티) 페이싱 (SBS) 브래스드 오프 (SBS) 모스맨 (SBS) - 고든 부인 남과 여 : 20년 후 (SBS) - 줄리 매드맥스 2 (SBS) - 레베카(모이라 클라우스) / 야생소년(에밀 민티) 깝스 (SBS) - 아그네타 (시셀라 카일) 더 야드 (SBS) 웨딩플래너 (SBS) E.T. (MBC) - 거티 (드루 베리모어) 우리들만의 집 (KBS) 흐르는 강물처럼 (KBS) - 어릴적 폴 맥클레인 (밴 그라버지) / 마벨(니콜 버데트) 아이 리멤버 에이프릴 (KBS) - 타일러 (리처드 테일러 올슨) 폭로 (SBS) - 스테파니 카플란 (로즈메리 포사이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들 (SBS) - 잔느 (샤를로트 드 투르크하임) 콜리야 (SBS) - 루카 엄마 삼형제와 상속자 (SBS) - 제네비에브 7일간의 사랑 (SBS) 티파니에서 아침을 (KBS) - 홀리의 초대 손님(미리암 넬슨) / 도서관 직원(엘비아 올먼) 졸업(KBS) - 벤저민의 어머니(엘리자베스 윌슨) / 전화 음성 줄리엣을 위하여 (KBS) 아버지의 그늘 (KBS) 어둠속의 8일 (KBS)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KBS) - 캐럴의 아들(제시 제임스) / 출판사 직원(린다 게링거) / 의사 선생 조수(안토니아 존스) / 식당 손님 사이더 하우스 (KBS) - 버스터 (키에란 컬킨) 슈퍼에이트 (VIDEO) - 어린 타로 아주 특별한 약속 (SBS) 줄리아 로버츠의 사랑 게임 (SBS) 하우스 어레스트 (SBS) - 매트 제5원소 (KBS) - 남자 아이 / 코벤의 엄마(전화 목소리) / 스튜디어스 내 마음의 수호천사 (KBS) - 스티븐 (나단 워트) 빠삐용 (KBS) 그렘린 2 (SBS) - 마지 (캐슬린 프리먼) 007 살인번호 (KBS) - 실비아 트렌치(유니스 게이슨) / 릴리(이본느 시마) 소공녀 (KBS) - 라비니아(모리카 존스) 꾸러기 전쟁 (KBS) - 선생님(매들린 빌뇌브 부샤르) 외화 천사들의 합창 (KBS, SBS) 스필버그의 어메이징 스토리 (KBS) 가면라이더 블레이드 (챔프) 닥터 퀸 (KBS) 노래 애로쏭 같이 보기 한국방송 성우극회 외부 링크 한국성우협회 이영주 프로필 KBS 성우극회 이영주 프로필 20세기 대한민국의 여자 성우 21세기 대한민국의 여자 성우 195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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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2%84%EC%A6%88%20%28%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20%EB%B0%B4%EB%93%9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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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 (대한민국의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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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5인조 남성 밴드그룹이다. 버즈는 2000년 1월에 결성되어 인디에서 활동했던 록 밴드이다. 2002년 민경훈으로 보컬이 교체되고 2003년 Morning of Buzz를 발매하며 메이저 시장 데뷔를 이뤘고, 발라드 형식과 대중적 멜로디 라인을 앞세운 이들의 음악은 록이라는 신선한 테두리를 바탕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멤버는 김예준(드럼), 윤우현(기타), 신준기(베이스), 손성희(기타),민경훈(보컬)으로 구성되어 있다. 멤버들의 군입대 문제로 2007년 잠정 해체를 한 이후 2010년 11월 기존 멤버 윤우현(기타)과 새로운 보컬 나율로 구성된 2인조로 버즈 2기가 구성되기도 했다. 2014년 기존 멤버들이 재결합하며 선공개 싱글 '8년만의 여름', 'Train'을 발표했으며 이후 정규 4집 앨범 Memorize로 컴백해 재결합을 알렸다. 버즈는 록 발라드 계열의 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한 앨범에서 1위곡이 3개가 연달아 나오는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는 등 신드롬과 같은 인기를 누렸다. 최전성기였던 2005년과 2006년에는 히트곡들이 전국 노래방에서 순위권을 차지했으며 현재까지도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결성과정 및 데뷔 전 활동 결성과정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버즈의 기타리스트인 손성희는 중학교때부터 기타를 쳐왔고 밴드를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음악계는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1998년 당시까지 댄스음악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위엔 온통 춤을 추는 사람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손성희가 다니던 반포고에 기타를 치는 사람이 손성희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손성희는 근처 학교였던 상문고에 드럼을 엄청 잘친다는 소문이 떠돌았던, 후에 버즈의 드러머가 되는 김예준의 이야기를 듣고 김예준을 찾아가서 같이 음악을 하자고 제안했고 둘은 친해진다. 하지만 기타와 드럼만 가지고 밴드를 만들 순 없었기에 그렇게 1년을 보내다 둘은 우연히, 당시 소속가수라곤 없는 작은 무명 기획사였던 에이원엔터테인먼트 (현 에이원피플, 네끼엔터테인먼트. 당시 대표는 박봉성)에서 밴드를 시켜준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다. 에이원은 손성희와 김예준의 밴드의 나머지 멤버들을 채워줄테니 같이 일하길 제안했다. 결국 얼마 후 손성희와 김예준은 에이원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기로 했고, 두 사람보다 먼저 에이원과 계약한 윤우현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오랫동안 언더그러운드에서 활동해온 신준기와 박정훈이라는 멤버를 영입하게 된다. 이렇게 2000년 팝/록 밴드인 버즈가 결성되었다. 즉 이들은 소속사에 의해서 탄생된 밴드가 아니라 밴드를 너무 하고 싶어 했던, 언더그라운드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청년들이 모여 스스로 결성시킨 밴드이다. 민경훈 영입과 언더그라운드 활동 그 후 이대 앞 라이브 퀸과 그외 여러 클럽, 행사, 공연을 다니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롯데월드 락 페스티벌에서 2위를 했으며 심지어는 그들의 팬카페까지 생기게 됐다. 하지만 2001년 말 혹은 2002년 초에 보컬이었던 박정훈이 개인사정으로 팀을 나가고 버즈는 새 보컬을 필요로 하게 됐다. 결국 당시 버즈 관계자 중, SM엔터테인먼트와 친분이 있었던 사람이 있었고 그 관계자는 당시 SM엔터테인먼트 소속가수였던 신비의 한 멤버에게 보컬을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한다. 당시 그 멤버는 대원여고를 다녔고 그 멤버는 옆학교였던 대원고에서 노래 좀 하기로 소문이 나있었던, 하지만 연예계엔 전혀 관심없고 오직 게임만 좋아하던 소년이었던 민경훈을 에이원 엔터테인먼트에 소개시켜줬다. 그렇게 2002년 6월, 연예계엔 관심없는 게임소년이었던 민경훈은 버즈의 멤버가 되었고 버즈는 당시 민경훈의 부족한 무대경험을 채우기위해 2002년 8월부터 엄청난 양의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결성된지 2년 밖에 안된 밴드였음에도 불구하고 300여회를 공연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공연으로 버즈는 윤도현밴드 콘서트 오프닝 게스트에 참여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이렇게 인지도는 급상승했고 공식 팬카페 는 회원수가 2003년 5월에 1700명을 돌파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얼마 후 버즈는 1집 《Morning Of Buzz》로 데뷔하게 된다. 데뷔 후 활동 1집 《Morning Of Buzz》 및 후속활동 버즈는 2003년 10월 11일 정규 1집 《Morning Of Buzz》의 으로 MBC 《음악캠프》를 통해 데뷔하는데, '무서운 신인밴드'라는 소리를 들으며 등장하였다. 당시엔 밴드음악의 암흑기였고 버즈는 대중적인 음악을 지향하는 밴드였기에 자작곡 체제로 가자는 원래 계획과는 달리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작곡가의 곡을 썼다. 이 온라인차트 상위권에 진입하였고, 후속곡 도 상위권 진입에 성공하였다. 1집의 앨범 판매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연말에는 SBS가요대전 록 음악상을 수상하면서 록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함을 인정받았다. 2004년에는 버즈의 첫 번째 디지털 싱글 《가난한 사랑》을 발표하였다. 2집 《Buzz Effect》 및 후속활동 2005년에는 정규 2집 Buzz Effect를 발매하여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2집 《Buzz Effect》의 타이틀곡 는 발매 1주일만에 각종 온라인차트 1위를 하면서 차트를 휩쓸었고, 멜론, 맥스MP3, 쥬크온 등에서 2~5주 정도 1위를 차지하였다. 이후 후속곡 또한 정상에 올라섰다. 특히 가시는 대한민국 국민 애창곡 5위로 노래방에서 약 1128만여 회 불렸다고 한다. 그들의 질주는 멈추지 않고 다른 후속곡 으로도 1위를 달성하였다. 타이틀곡 는 가요 프로그램에서 MBC 생방송 음악캠프 5주 연속 1위, SBS 인기가요 3주 뮤티즌 송 트리플 크라운, Mnet 엠카운트다운 3주 연속 1위 트리플 크라운, KMTV 쇼 뮤직탱크 5주 연속 1위 최강자, KBS 뮤직뱅크 상반기 결산 1위 총 17관왕을 달성하며 가요 프로그램 1위를 모두 휩쓸었다. Mnet의 엠카운트다운에서는 , , 총 3곡이 1위를 달성하면서 엠카운트다운 방송 최초로 한 앨범에서 3곡이 1위를 달성하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다. 이후 디지털 싱글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를 발표하였고, 단 한 차례의 방송활동도 없이 CF송 KTF 전용 음원사이트 도시락 차트에서 9주 연속 1위 기록을 세웠다. 음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둔 시기이지만, 버즈 멤버들은 많은 일정들을 소화해내야 하는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 후에 민경훈과 손성희는 밝히길 2집 때가 버즈의 큰 위기였다고 했다. 민경훈은 "내 길이 아니구나"라고 생각까지 했고, 손성희는 전국투어 후 만들어진 2집을 보고 "남의 옷을 껴입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이를 보아 소속사의 무리하고 일방적인 활동 계획, 음반 기획 등으로 멤버들이 혹사당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민경훈은 무리한 음악방송(특히 민경훈은 립싱크로 부르는 무대보다 라이브로 부르는 무대가 훨씬 많았다)과 콘서트 스케줄로 인해 성대에 무리가 갔고 2005년 당시에 불렀던 무대를 모아 보면 노래하는 목소리의 변화가 느껴진다. 3집 《Perfect》 및 후속활동 2006년 3집 《Perfect》를 발표하였다. 이후 높아지는 인기에 소속사인 에이원 엔터테인먼트는 버즈의 음악에 대중성을 더욱 더 입히기 시작하였고 3집부턴 록발라드라고조차 보기 힘든 완전 대중적인 발라드음악을 하게 했고, 대부분의 녹음을 세션맨을 쓰기 시작했다. 회사에 복종할 수 밖에 없었던 멤버들은 방송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일부에선 언더그라운드 생활만 7년이 넘을 정도로 베테랑의 연주실력과 현재까지 노래방 애창곡 5위에 꼽힐 정도의 히트곡을 쓰는 작곡능력을 가진 버즈멤버들이 세션맨을 고용하고 자작곡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비난 혹은 비판을 하기도 했다. 한편 원래 타이틀곡은 이었으나 앨범이 출시된 후 상당수의 팬들에게 은 2집 타이틀곡 겁쟁이와 곡 구성이 비슷하다는 지적을 들었고, 후속곡으로 내정되었던 My Love (And)보다도 못하다는 혹평을 들었으며 7번 트랙인 가 지지를 받았다. 그러자 기획사는 3집 출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레 타이틀곡을 로 바꾸었다. 는 하위권에 있다가 버즈가 방송활동을 하면서 인기가 급상승하여 타이틀곡 교체 1~2주만에 정상에 올랐다. 2~4주간 정상에 올라 인기를 누리고, 후속곡 로 활동하여 역시 상위권에 진입하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 는 버즈에 명성에 걸맞은 인기를 얻는 데 성공했으나, 3집 앨범 전반적으로는 이전만큼 큰 인기를 모으지 못했다. 수록곡들의 수준의 영향도 있지만, 2006년 3월 민경훈과의 열애설이 났던 남호정 사건이 한 몫 하기도 했다. 민경훈이 팬들에게 약속하기를 여자친구가 생기면 팬들에게 꼭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남호정과 연애하는 사실을 숨기다가 알려져버렸다. 뿐만아니라 민경훈이 남호정이 하는 쇼핑몰을 도와주는데 팬들은 그것이 민경훈의 쇼핑몰인 줄 알고 돈을 쓰다가 그것이 남호정의 쇼핑몰임을 알고는 배신감에 많은 팬들이 이탈했다. 이 시기에 소속사의 혹사와 갑자기 생긴 천식으로 인해 점점 보컬 민경훈이 지쳐가고 있었다. 무리하게 스케줄을 소화하던 민경훈은 3집 후반으로 갈수록 무대에서 떨어진 기량의 공연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디지털 싱글 《'떠나' 그리고 '울지마'》를 발표하였다. 이 앨범에는 , 두 곡이 수록 되어있다. 는 버즈의 기타리스트 손성희가 불렀다. 버즈 노래중에 처음으로 랩이 들어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라는 곡 또한 방송활동 없이 차트 상위권에 진입했지만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였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붉은악마 공식응원가 를 부르면서 국민밴드로서의 인기를 자랑했다. 와 는 일본 애니메이션 《나루토》의 한국어 오프닝곡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는 2006 투니 초이스 어워드에서 최고의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잠정 해체 2007년 5월 17일 소속사와의 계약기간이 남아있던 민경훈을 제외한 멤버들의 군입대 등을 이유로 잠정 해체를 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리고 2007년 6월, 버즈의 마지막 디지털 싱글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Part 2》를 발표하였다. 는 활동 한 번 없이 온라인차트 최대 3위까지 드는 인기를 누렸다. 라는 게임 의 OST를 공개했다. 2007년 12월부터 보컬 민경훈이 《Impressive》로 솔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해체 이유 당시에는 군입대 문제로 잠정 해체한다고 했지만, 군입대 문제뿐만 아니라 소속사와의 갈등이라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군입대 문제 : 멤버들은 각자 계약기간이 달랐고, 군입대 시기 또한 달랐다. 민경훈은 계약기간이 더 남아있어서 솔로활동을 한 후 군대를 가게 되었다. 윤우현은 2007년 5월 21일 ~ 2009년 4월 25일, 손성희는 2007년 7월 10일 ~ 2009년 6월 12일, 신준기는 2007년 12월 10일 ~ 2010년 1월 3일, 김예준은 2008년 2월 25일 ~ 2010년 4월 (추정), 민경훈은 2012년 3월 6일 ~ 2013년 12월 5일 군생활을 하였다. 소속사와의 갈등 : 소속사였던 에이원 엔터테인먼트에 대해 멤버들은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소속사는 버즈가 큰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자 무리한 일정들을 잡았고, 멤버들은 각종 방송 녹화와 공연 무대, 콘서트를 수행했다. 민경훈은 3집 때 천식에 걸리고도 많은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또한 소속사는 음악적으로도 인기가 있고 돈벌이가 될만한 장르와 컨셉의 노래로 활동하도록 했다. 4집 발매 기념 쇼케이스와 이후 방송 등에서 멤버 신준기와 윤우현, 민경훈은 해체이유로 군입대에 대한 압박과 수용해야만 했던 제도적인 환경을 이야기했다. 민경훈의 경우 라디오스타에서 "멤버들간의 갈등이 있긴 했지만 해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본인이 가졌던 불만들이 없지는 않았음을 언급했다. 그 예로 다른 멤버들에 비해 자신은 주목을 받아 사생활에 제약이 많았는데 다른 멤버들은 편하게 지냈고, 활동은 자신이 가장 많이 했지만 돈은 똑같이 나누었다고 털어놓았다. 또 자신은 메인코디가 챙겨주고 다른 사람은 보조코디가 챙겨주는 것도 서로 마음이 불편했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멤버들 간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소속사의 지나친 욕심과 버즈 멤버들 (특히 민경훈)을 돈벌이 대상으로 삼았던 태도로 인해 생긴 갈등으로 보인다. 해체 후 각 멤버들의 활동 신준기는 다른 밴드의 베이스로 활동했고, 손성희는 전역 후 4th floor의 멤버로 활동했다. 윤우현은 전역 후 버즈 2기 (윤우현, 나율)를 만들어 2010년 《Fuzz·Buzz》라는 앨범을 발표하였다. 이 앨범에는 객원보컬로 민경훈이 부른 곡(이별수집가, 사랑이 멈춘 시간)들도 수록되어 있다. 음원순위는 높지 못하였고 활동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보컬인 나율이 집먼지 알레르기에 걸려서 활동을 중단했다.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윤우현은 그때 버즈 2기를 만들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버즈로 활동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버즈 2기로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를 두고 민경훈은 버즈라는 자리가 언제든 채워질 수 있는 자리구나 싶어서 기분이 묘했다고 언급했다. 여기에 손성희는 "그게(버즈 2기가) 만약 대박이 났으면... (지금의 버즈는 없었을 것)"이라는 농담을 던져서 라디오 녹음실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민경훈은 버즈 2기를 보며 씁쓸함을 느꼈을 수 있겠지만, 민경훈이 없는 버즈 2기를 완전한 버즈로 인정한 팬은 없었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2012년 버즈의 보컬이 나율에서 민대홍으로 교체되어 디지털 싱글 《Buzz Return》을 냈고, 타이틀곡 를 공개해 온라인차트 5위에 올랐다. 재결합과 4집 《Memorize》, 4집 이후 버즈가 해체할 때 멤버들은 서른 넘어서 다시 뭉치자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으며, 멤버들간 서로의 행사에 종종 참여하는 등 재결합에 관해서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를 보여왔다. 더욱이 민경훈은 솔로활동 시절 힘든 시간을 거치며 재결합에 더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민경훈의 전역 후 원년멤버(김예준, 윤우현, 신준기, 손성희, 민경훈)들은 2014년 4월 새 소속사인 산타뮤직과 계약을 맺고, 8년만에 재결합하였다. 신준기는 컴백 쇼케이스에서 "기계처럼 일하는 게 싫어서 따로 활동을 했는데 나와 보니 버즈와 함께 할 때가 즐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멤버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어서 다시 뭉치게 됐다"고 재결합 계기를 밝혔다. 한편 '버즈'라는 이름의 권한을 전 소속사에서 갖고 있었기 때문에 멤버들은 다른 밴드의 이름으로 활동해야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버즈의 새 소속사인 산타뮤직은 전 소속사와 버즈 첫 번째 공연부터 마지막 공연까지 함께 만들며 오랜 기간 인연이 있던 회사였다. 자연스럽게 ‘버즈’ 이름에 대한 멤버들과 팬들의 요청을 전달했고 전 소속사에서 다행히 이 요청을 받아들여 '버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2014년 8월 8일, 디지털 싱글 《8년만의 여름》을 발표하였다. 2014년 9월 22일, 디지털 싱글 《Train》을 발표하였다. 2014년 11월 26일, 정규 4집 《Memorize》를 발표하였다. 2015년 4월 29일, 디지털 싱글 《남자라면》을 발표하였다. 2015년 10월 20일, 디지털 싱글 《Forever Love》를 발표하였다. 2015년 11월 22일, 디지털 싱글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Part.3》를 발표하였다. 2016년 10월 30일, 디지털 싱글 《넌 살아있다》를 발표하였다. 2017년 7월 28일, 미니 앨범 《Be One》를 발표하였다. 2018년 12월 14일, 미니 앨범 《15》를 발표하였다. 2021년 3월 10일, 미니 앨범 《잃어버린 시간》을 발표하였다. 2021년 4월 13일, 디지털 싱글 《소년에게》를 발표하였다. 팬 버즈 멤버 모두 팬과 팬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싫다는 이유로 팬클럽 창단에 반대하였으나 팬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버즈樂人이라고 칭하기 시작하였고 지금까지 그 명칭은 버즈 팬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이며 명칭에 불과하다. 공식 팬클럽은 없다. 팬카페는 2001년 3월 11일 '이 시대 최고의 밴드'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었다.( 버즈樂人은 풍선을 쓰지 않고, 파란색 야광봉을 사용하였다(풍선색은 파랑). 민경훈 팬들 사이에서도 쓰이고 있다. 공식 팬카페 회원수는 40만명이 넘었고, 비공식으로 50만명이 넘었다. 특히 여자 팬과 남자 팬을 동시에 보유한 드문 케이스에 속해있는 밴드였다. 디시인사이드에서는 팬들이 버즈 갤러리 신설을 위해 모여 케세라세라 갤러리(종영한 MBC 드라마갤러리)를 임시 버즈 갤러리로 삼아 활동하였으며, 2015년 12월 14일에는 디시인사이드 버즈 갤러리가 개설 되었다. 2016년 8월 15일 버즈 팬페이지가 개설 되었다. ( 영향 록 음악을 대중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멤버들이 직접 연주하고 작사, 작곡하는 실력파 밴드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 씨엔블루와 FT아일랜드 등 많은 밴드에 영향을 미쳤다. 평가 2003년 데뷔와 동시에 독보적인 창법으로 주목받은 원조 꽃미남 밴드이다. 김종국, SG워너비 등과 함께 2000년대 초중반 인기몰이를 한 밴드그룹이며, 2000년대 중반 버즈의 전성기를 경험한 세대들은 버즈에 대해 특별한 향수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겁쟁이》, 《가시》,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3곡이 연달아 히트하면서 2005년 8월 18일 Mnet 엠카운트다운이 생긴 이래 최초로 한 앨범에서 3개의 수록곡이 1위를 달성하는 역대 7번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가수가 되었다. KTF의 음원 서비스 '도시락(現 지니뮤직)'과 광고모델 계약을 맺은 버즈는 도시락의 TV 광고 음악으로 2005년 11월 11일 디지털 싱글 를 발매하였다. 이 곡은 도시락에서 방송 활동 없이 11주 연속 1위를 달성하였다. 는 하루 온라인과 모바일 매출 집계가 평균 1억원에 달했으며 2위곡과는 다운로드 수가 두 배가량 차이가 났다.[20] 이에, 당시 음반 시장에서 음원 시장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디지털 싱글의 가능성과 더불어 노래가 좋으면 활동하지 않고도 히트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성공 사례를 제시하였다. 당대 최고의 애니메이션 나루토의 OST 《활주》가 큰 사랑을 받으면서 유독 남성 팬들의 충성심이 강하다. 2012년 8월 24일 위문열차 육군 학생군사학교 편에서 무대에 선 적이 있다. 버즈가 활동하던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10대들이 군입대를 한 뒤에 민경훈이 위문공연을 오자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2005년 《겁쟁이》와 2006년 《남자를 몰라》를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2년 연속 노래방 차트 연간 순위 1위를 차지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금영노래방와 TJ미디어에서 발표한 노래방 최고의 애창곡 TOP 10에 2곡을 올린 유일한 가수되었다. 2016년에는 KBS 방송문화연구소 설문조사 한국인이 사랑하는 노래방 애창곡에서 《겁쟁이》가 15위, 《가시》가 35위를 차지하였다. 2018년에는 국방일보 설문조사 병영노래방 애창곡에서 《가시》가 8위를 차지하였다. 2019년에는 한국갤럽조사 한국인의 애창곡에서 겁쟁이가 20대 남자들의 애창곡 3위, 《가시》가 30대 남자들의 애창곡 1위를 차지하였다. 2021년에는 이십세기 힛-트쏭 91회 시청자 PICK 노래방에서 꼭 부르고 싶은 애창곡 힛-트쏭에서 《가시》가 금영노래방와 TJ미디어에서 각각 누적순위 5위와 6위를 차지하였다. 버즈는 현재까지 금영노래방 주간차트에 총 23곡을 랭크시켰다. 사람들이 버즈를 떠올리며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다. 전성기가 길고 굵었을 거란 착각이다. 버즈 이름으로 남아있는 명곡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버즈는 한 앨범에서 3곡이나 1위에 오른 곡을 배출했을 정도로 앨범 하나 당 임팩트가 컸다. 게다가 정규 앨범말고도 앨범과 앨범 사이에 디지털 싱글 형태로 내놓은 곡도 많았다. 하지만 버즈의 전성기는 굵었을지언정 길지는 않았다. 멤버들의 군 입대, 소속사와 멤버들 간의 마찰로 인해 결국 2007년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Part.2》라는 곡을 마지막으로 버즈는 잠정 해체하였다. 이후 민경훈은 솔로 활동에 나서지만 버즈 때만큼의 생동감 있는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다. 다른 멤버들이 제대하고 민경훈이 아닌 다른 보컬을 내세워 버즈라는 이름으로 기존 멤버들이 활동하기도 했으나 사람들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다. 그러다 2013년 말, 민경훈이 제대를 하고 이듬해 버즈는 원년 멤버가 모여 재결합 음원을 내게 된다. 당시 10~20대에겐 버즈의 인기가 폭발적이었지만 기성세대들에게는 다소 낯선 밴드였다. 그럼에도 히트곡의 연령대와 성비를 나타낸 지표를 보면 다양한 연령대에서 버즈의 노래를 즐겨들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버즈의 노래가 꾸준히 회자되고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으면서 전세대를 아우르는 밴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버즈였다'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이다. JTBC 히든싱어4에 출연하면서 과거 히트곡이 재조명되었다. 방송 이후 멜론 실시간 검색어와 실시간 인기차트 줄세우기에 성공하면서 2015 버즈 전국 투어 콘서트는 엄청난 예매율를 자랑함과 동시에 앵콜 콘서트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JTBC 아는형님의 CP 여운혁에 따르면 JTBC 히든싱어4 출연이 민경훈의 캐스팅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2017년 7월 28일 버즈는 처음으로 미니앨범을 선보였다. 타이틀곡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은 버즈 멤버들이 직접 작사, 작곡한 곡으로 공개하자마자 각종 음원사이트 1위에 오르며 오랜만에 버즈가 돌아왔다는 평을 받았다. 읽을거리 데뷔 초 인디 시절과 1집땐 J-ROCK 스타일의 록 음악을 했으며 소재도 꿈, 우정, 동화, 환경 등 다양했다. 윤도현도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버즈를 팝 밴드가 아닌 신인 록 밴드라 칭하였었다. 1집때까진 대중적인 성향이 많이 들어가 있는 인디음악이라는 느낌이 강한 편이었다. 인디 시절엔 자작곡을 많이 불렀지만 데뷔후엔 그런 모습이 줄었고 당시 버즈가 인디였을때부터 팬이었던 사람들은 발라드로 도배된 2집과 3집을 보고 '버즈의 색깔을 잃었다'며 버즈를 떠났다. 인디 시절엔 록음악을 했지만 메이저 데뷔 이후엔 팝에 가까운 음악을 많이 했다. 하지만 단 한번도 자신들을 록밴드라 칭한 적이 없었고 한 인터뷰에서 자신들은 팝밴드라고 말하기도 했다. 버즈는 실력으로 승부한다며 CF를 거절하고 얼굴 말고 실력으로 봐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은 상업성에 찌들었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는데 실제로 이들이 음악 외적으로 활동을 했던 건 2집때 잠시 동안 활발히 했던 예능활동과 CF 3편이 전부이고 이름이 알려졌던것도 신인 때 출연했던 윤도현의 러브레터(2003.11.21)에서 불렀던 최선원의 의 커버곡이 좋은 반응을 얻어서였다. 1집 《Morning Of Buzz》 을 민경훈이 부를 때 처음 몇번은 원음으로 라이브를 했는데, 최고음이 매번 라이브를 하기엔 너무 높아서 반음 내리고 라이브를 한다. 이후로도 계속 반음 내리고 부른다. 의 뮤직 비디오와 1집 음원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다른데, 이유는 음원의 목소리가 맘에 들지 않아서 민경훈이 재녹음을 제안해서 그렇다고 한다. 민경훈은 1집때,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당시 20세였던 2003년) 일부러 목소리를 굵게 해서 녹음했으며 후엔 얇은 목소리로 다시 불러 재녹음했다. 버즈 1집에 담긴 〈To.Fan〉의 일부 (1절의 "아무 약속 없는~ 비틀대는 나에게로"와 2절의 "너를 지킬거란 ~ 꿈을 꾸잖아")를 드러머인 김예준이 불렀다. 2집 《Buzz Effect》 수록곡 은 육각수 를 리메이크한 곡이다. 수록곡 는 1집과 2집에 두 음반에 수록된 곡이다. 1집, 2집 모두 3번 트랙에 속해 있는데 2집에 다시 수록된 이유는 멤버들이 애착을 가진 곡이고 민경훈의 그동안 바뀐 창법을 보여주기 위해 다시 넣었다고 한다. 현재는 1집의 연주 방식으로 곡을 연주하며 노래방 반주기에 등록된 곡은 1집의 수록곡이다. 수록곡 은 후속곡으로 논의되었지만 윤우현의 자작곡인 에게 밀려 활동하지 않았다. 수록곡 은 GLAY의 의 표절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버즈의 언더그라운드 활동 시절 GLAY곡을 카피하여 활동했다는 점이 있지만 멜로디의 진행과 유사한 부분의 코드가 달라 의혹에 그쳤다. 수록곡 는 작사가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쓰여진 곡이다. 3집 《Perfect》 버즈 3집 Mnet 컴백무대에서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41단 바이브레이션을 보여줘 기교적으로 놀라운 실력을 보여줬다. 이후 지나치게 힘든 스케줄과 공연으로 천식에 걸렸지만 3집 후속곡 MR제거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면서 녹슬지 않는 가창력을 대중에게 알렸다. 11번 트랙은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KTF사에서 내세웠던 응원가인 이다. 곡이 처음 발표됐을 때 대중의 반응은 냉담하여 좋은 반응을 얻는 데는 실패하는 듯했다. 그런데 이후 많은 사랑을 받으며 네티즌이 가장 사랑하는 축구 응원가 1위로도 꼽히기도 했다. 대중문화평론가 임진모는 이 곡이 버즈의 기본 인지도와 월드컵 분위기가 맞아떨어져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고 평했다. 를 쓴 고석영 작곡가는 월드컵 기간 동안 1억여 원의 저작권 수익을 얻었고, 한국 축구 대표팀이 16강에 진출했다면 그것의 10~20배는 가능했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곡은 육군 훈련소에서 정훈교육 중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동영상에 사용되기도 했고, 육군 모 사단에서는 월드컵 기간동안 기상나팔을 이 곡으로 대체하였다고 한다. 4집 《Memorize》 4집의 수록곡 의 마지막 영어 파트를 김예준이 불렀다. 기타 버즈의 라이벌로는 유명한 3인조 발라드 그룹 SG워너비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각각 과 로 데뷔하였으며, 2005년엔 같은 시기에 각각 와 로 맞붙었다. 2006년에도 역시 비슷한 시기에 각각 & 와 & 로 맞붙었다. 민경훈은 버즈 데뷔전에 많은 도움을 준 PD가 맡고있는 '연애편지'라는 프로그램에 보답 차원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2회 출현했을 때, 시청률이 43.1%가 나오기까지 했다. (2005) 민경훈을 영입하기 이전에 여러 보컬 후보가 있었는데, 그 후보 중에는 훗날 배우로서 대성하게 되는 현빈도 있었다고 한다. 히든싱어4에 출연했을 때 게스트였던 현미는 윤우현을 '멕시칸 아저씨'라고 불러 새로운 별명을 얻게 했다. (2015) 구성원 2기 구성원(2010) 윤우현 (기타) 나율 (보컬) - 2011년 탈퇴 3기 구성원(2012) 윤우현 (기타) 민대홍 (보컬) - 2014년 탈퇴 음반 목록 정규 앨범 Morning of Buzz (2003) (후속곡) Monologue (타이틀곡) 어쩌면... 1st B612 The... 사랑 뒤의 사랑 약속 어느 소녀의 희망 잘 살아요 가버려! It's U To. Fan Morning Of Buzz Buzz Effect (2005) (타이틀곡) 겁쟁이 벌 1st 거짓말 (삼속곡)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Funny Rock 내가 아니죠... (후속곡) 가시 비망록 (스물의 노래) Tomorrow 일기 Perfect (2006) Intro (前 타이틀곡) My Darling (End) (후속곡) My Love (And) 은인 약자의 눈물 행복하세요 (타이틀곡) 남자를 몰라 Go Away! 일 년쯤이면... 미완예찬 (未完禮讚) Reds Go Together 우리 이별 앞에 지지말아요 (세상에 한 사람) Memorize (2014) Memorize Train (타이틀곡) 안녕 (타이틀곡) 나무 Good Day 그대여 그림자 8년만의 여름 너는 나의 꽃이야 나무 (Original Ver.) Star 미니 앨범 Be One (2017) 15 (2018) 잃어버린 시간 (2021) 디지털 싱글 가난한 사랑 (2004)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2005) '떠나' 그리고 '울지마' (2006)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Part 2 (2007) 8년만의 여름 (2014) Train (2014) 스파이 OST Code No.3 (2015) 남자라면 (2015) Forever Love (2015)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Part 3 (2015) 넌 살아있다 (2016) 소년에게 (2021) 라이브 앨범 Live & Acoustic (2006) 버즈 2, 3기 앨범 Fuzz-Buzz (2010) Buzz Return (2012) 참여음반 OST 나루토 2기 OST (2005) - 《활주》 나루토 3기 OST (2006) - 《투지》 브리스톨 탐험대 OST (2008) - 《꿈을 찾아서》 스파이 OST (2015) - 《Hero》 타 아티스트 앨범 참여 2004 Christmas Story (2004) - 《Jingle Bell Rock》 KTF & 붉은악마 월드컵 응원 앨범 (2006) - 《Reds, Go Together》 SG워너비 (2006) - 《Ordinary People》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신년특집) (2015) - 《그대에게》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이장희 2편) (2015) - 《그건 너》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사랑과 이별의 찬가, 작곡가 故 길옥윤 편) (2015) -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김지애 & 문희옥편) (2015) - 《몰래한 사랑》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남성 보컬리스트 특집) (2015) - 《사랑한 후에 + 행진》 수상 경력 시상식 음악 방송 1위 누적 날짜별 콘서트 활동 방송일 기준 방송 고정출연 게스트 음악 방송 《어쩌면...》 《Monologue》 《겁쟁이》 《가시》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My Darling (End)》 《약자의 눈물》 《남자를 몰라》 《My Love (And)》 《Reds Go Together》 《나무》 《Forever Love》 라디오 출연 방송일 기준 해체 이전 KBS (CoolFM)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 (2004.01.14 / 2004.01.28 / 2004.02.04 / 2004.04.14 / 2004.04.21) (2FM) 자두의 라디오가 좋아요 (2004.01.31) (2FM) 밤을 잊은 그대에게 (2004.05.08) (2FM) 데니의 키스더라디오 (2004.07.10 / 2005.03.15 / 2005.05.07 / 2005.06.14) (2FM) 김구라의 가요광장 (2005.03.17 / 2006.05.10) (2FM) 박준형의 FM인기가요 (2005.03.19 / 2005.07.05 / 2005.11.25 / 2006.05.10 / 2006.07.11 / 2006.08.07 / 2006.08.08) (2FM) 이금희의 가요산책 (2005.04.09 / 2006.05.24) (3Radio) 윤선아의 노래선물 (2005.05.21) (2FM) 봄여름가을겨울의 Bravo My Life (2005.07.08 / 2006.05.11 / 2006.05.20) (CoolFM) 최강희의 볼륨을 높여요 (2005.08.11 / 2006.05.02) (FM) 강수정의 뮤직쇼 (2006.05.15) MBC (표준FM) 모두가 사랑이에요 (2005.03.19) (FM4U) 조정린, 김상혁의 친한친구 (2005.03.26) (표준FM) 최정원의 감성시대 (2005.04.14) (표준FM) 옥주현의 별이 빛나는 밤에 (2005.05.07 / 2005.08.11 / 2006.05.17) (춘천MBC) 별이 빛나는 밤에 (2005.06.07) (표준FM) 박경림의 심심타파 (2005.06.17 / 2005.07.24 / 2005.08.13 / 2005.08.20 / 2005.08.27 / 2005.09.03 / 2005.09.10 / 2005.09.24 / 2005.10.01 / 2005.10.15 / 2005.10.22 / 2006.05.17 / 2006.06.15) (FM4U) 여름음악페스테벌 (2005.08.06 / 2006.08.03) (FM4U) 박명수의 펀펀라디오 (2006.05.07) (FM4U) 정선희 정오의 희망곡 (2006.05.19) (FM4U) 김원희의 오후의 발견 (2006.06.01) (FM4U) 김성주의 굿모닝FM (2006.06.13) SBS (FM) 플라이투더스카이(FTTS)의 텐텐클럽 (2003.11.28 / 2004.01.30 / 2004.02.06 / 2004.04.16 / 2004.04.23 / 2004.04.30) (파워FM) 하하 몽의 영스트리트 (2004.01.06 공개방송/ 2004.02.01 녹음방송/ 2004.03.11) (FM) 박용하의 텐텐클럽 (2005.03.26 / 2005.04.16 / 2005.04.22 / 2005.05.14 / 2005.05.21 / 2005.05.28 / 2005.06.01 / 2005.06.04) (파워FM) 장근석의 영스트리트 (2005.04.17 / 2005.05.18 / 2005.06.21 / 2005.07.04 / 2005.07.11 / 2005.07.12 / 2005.07.13 / 2005.07.14 / 2005.07.15 / 2005.07.25 / 2005.08.02 / 2005.10.13) (러브FM) 서민정의 기쁜우리젊은날 (2005.06.02 / 2005.06.13 / 2005.07.16 / 2005.07.22 / 2005.07.24 / 2005.07.29 / 2005.08.05 / 2005.08.12 / 2005.08.19 / 2005.08.26 / 2005.09.02 / 2005.09.09 / 2005.09.16 / 2005.09.23 / 2005.09.30 / 2005.10.07 / 2005.10.14 / 2005.10.21 / 2005.10.28 / 2005.11.04 / 2005.11.11 / 2005.11.18 / 2005.11.25) (파워FM) 최화정의 파워타임 (2005.06.07 / 2005.06.18 / 2005.09.06 / 2005.11.06 / 2005.11.13 / 2005.11.20 / 2005.11.27 / 2005.12.04 / 2006.05.09) (FM) 박소현의 러브게임 (2005.08.19 / 2006.06.12) (파워FM) 하하의 텐텐클럽 (2005.11.08 / 2006.05.24) (파워FM) 김희철 박희본의 영스트리트 (2005.11.03) (파워FM) SS501의 영스트리트 (2006.05.06) (러브FM) 노홍철의 기쁜 우리 젊은 날 (2006.05.10 / 2006.06.02) (러브FM) 남궁연의 고릴라디오 (2006.05.24 / 2006.05.31 / 2006.06.07 / 2006.06.28 / 2006.07.05 / 2006.07.12) TJB 대전민방라디오 (2003.12.13) iFM 빈우의 러브 플러스 (2004.01.14 / 2004.01.28) BBS 백팔가요 (2004.04.04) WBS 원음방송 FM 아하데이페스티벌 (2005.04.28) PBC 평화방송 한낮의 가요선물 (2005.07.13) CBS FM 설수현의 12시에 만납시다 (2005.08.17) 재결합 이후 SBS (파워FM) 김창렬의 올드스쿨 (2014.12.01) (파워FM) 최화정의 파워타임 (2014.12.02) (파워FM) 두시탈출 컬투쇼 (2014.12.04 / 2015.10.22) (파워FM) 이국주의 영스트리트 (2015.02.14~2016.03.26) 손성희, 민경훈 출연 / (2015.05.13) 멤버 전원 출연 (2015.10.04) 라디오 공개방송 / (2016.04.02 / 2016.04.09) 김예준, 손성희 출연 / (2016.04.16 / 2016.04.23 / 2016.04.30) 손성희 출연 KBS (CoolFM) 이금희의 사랑하기 좋은날 (2014.12.07 / 2014.12.14 / 2014.12.21 / 2014.12.28) (CoolFM) 레이디제인의 2시 (2015.05.05) (CoolFM) 김성주 가요광장 (2015.11.06) MBC (FM4U) 김신영 정오의 희망곡 (2014.12.11 / 2015.11.03) (FM4U) 써니의 FM데이트 (2014.12.11) (FM4U) 테이의 꿈꾸는 라디오 (2015.11.16) (표준FM) 박준형, 정경미의 두시만세 (2015.05.08 / 2015.10.30) (표준FM) 허경환 별이 빛나는밤에 - 공개방송 (2015.05.25) (표준FM) 정준영의 심심타파 (2015.09.22) 아리랑라디오 Super K-POP 버즈 (2014.12.10) Sound K (2015.11.05) CBS 김필원의 12시에 만납시다 - 공개방송 (2015.02.28) 기타 공연 및 행사 행사일 기준 해체 이전 윤도현밴드 콘서트 게스트 출연 (2003.10.18~19) Mnet 스마트스타페스티벌 (2004.02.28) 프라임콘서트 (2004.03.24) TJB 교사가족초청음악회 (2004.05.28) 울산 Summer Festival (2004.07.27)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 음악회 (2005.05.10) KTF 도시락라이브파티 (2005.06.17) SBS i콘서트 (2005.07.10) 남해 라이브 N joy 썸머 페스티벌 (2005.07.28) Live WOW Special 더위사냥 氷 콘서트 (2005.08.05) MBC 대한민국 음악축제 (2005.08.07) Tooniverse 2005 투니버스데이 - (2005.08.19) 2005 대한민국 음악축제 "록페스티벌 영원" (2005.08.25) 전국 국민생활체육 대축전 (2006.04.14) 트루 뮤직 라이브 (2006.06.28) 2006 아시아송 페스티벌 (2006.10.03) 경남도민 한마당 (2006.11.18) 재결합 이후 팬미팅 '밀회' (2014.07.06) 한양대학교 축제 (2014.09.22) SBS 어워즈 페스티벌(SAF) (2014.12.21) 건국대학교 축제 (2015.05.13) 그린플러그드 락페스티벌 (2015.05.23) 팬미팅 '버즈와 떠나는 여름 휴가' (2015.08.08) 렛츠락 페스티벌 Vol.9 (2015.09.19) 막계페스티벌 (2015.09.12) 대한민국 나눔대축제 나눔음악회 (2015.10.23) 경희대학교 하늘연달가요제 축하무대 (2015.10.28) 2015 JTN Live Concert (2015.11.13)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신년콘서트 '버즈(BUZZ)밴드 겨울이야기' (2016.01.15) 서강대학교 축제 (2016.05.20) 중앙대학교 축제 (2016.05.27) 렛츠락 페스티벌 Vol.10 (2016.09.24) 빅필드 락 페스티벌 in 간월도 (2016.10.01)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 축제 (2016.10.05) Hi, Rock Concert 시즌2 (2016.10.08) 뉴이어월드락페스티벌 (2016.12.13) 현대백화점 판교점 신년콘서트 (2017.01.18) 아프리카TV 체육대회 (2017.04.20) 메종글래드 제주 창사 40주년 기념 콘서트 (2017.06.25) 제 10회 정남진 장흥 물축제 (2017.07.28) 미니앨범 발매 팬사인회 (2017.07.30) Bugs Special Live Vol.31 '버즈' (2017.08.01) 한여름 밤의 신정호 별빛축제 (2017.08.11) 라임 트리 페스티벌 2017 (2017.09.02) 그린 플러그드 경주 2017 (2017.09.09) 2017 춘천 가족음악 축제 with KBS 올댓뮤직 (2017.09.16) 멜로디 포레스트 캠프 (2017.09.23) 광고 2005년 도시락 2005년 스쿨룩스 2006년 Mnet 2014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공익광고 2016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공익광고 각주 외부 링크 2000년 결성된 음악 그룹 2007년 해체된 음악 그룹 2014년 재결성된 음악 그룹 남성 음악 그룹 5인조 음악 그룹 대한민국의 팝 록 밴드 대한민국의 팝 음악 그룹 대한민국의 아이돌 그룹 아이돌 그룹 2000년대 음악 그룹 2010년대 음악 그룹 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 엠넷 엠카운트다운 1위 수상자 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수상자 한국어 음악 그룹 2008년 해체된 음악 그룹 2003년 결성된 음악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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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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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A5%B4%EC%83%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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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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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샤(, , ) 또는 보르샤()는 벨라루스 비쳅스크주에 있는 인구 12만4,300명(1999년 1월 1일)의 도시이다. 아르시차 강이나 드니프로 강과, 민스크와 모스크바의 사이를 연결하는 철도가 도시를 통과하고 있다. 역사 러시아 제국 시대에는 모길료프 현에 속했다. 1880년 당시에는 837채가 있었는데 그 중에 431채는 유대인 소유였고 1개의 유대교회당이 있었다. 1897년 당시의 인구는 13,161명이었는데 그 중 약 7,000명이 유대인이었다. 유명인 레프 비고츠키 - 심리학자 아브라함 돕 바에르 벤 솔로몬(Abraham Dob Baer ben Solomon) - 18세기의 랍비 벨라루스의 도시 비쳅스크주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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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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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2%98%EC%A7%90%EA%B0%81%EB%B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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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짐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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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짐각법(-角法, Slope deflection method) 또는 요각법(撓角法)은 1915년에 미네소타 대학교의 조지 A. 매니 교수가 발표한 연속보와 뼈대 구조에 적용할 수 있는 구조해석법의 하나이다. 모멘트 분배법이 발표되기 전까지 정확한 구조해석 방법의 한 가지로 널리 사용되었다. 기본적으로 절점과 부재의 회전각을 미지수로 하기 때문에, 변위법 또는 강성도법에 속한다. 처짐각법에서는 모멘트로 인해 발생하는 부재의 휨과 처짐각을 고려하지만, 그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은 전단 변형과 축방향 변형은 무시한다. 처짐각법은 소규모의 특정 구조물에 대한 효율적인 구조해석 방법이며, 모멘트 분배법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이 되는 구조해석 방법이다. 또한 매트릭스 구조 해석과도 관련이 깊다. 개요 절점의 회전각(처짐각)과 부재의 현회전각을 미지수로 하여 변위의 적합조건에 맞도록 하중을 나타낸 뒤, 힘의 평형조건을 만족시키는 해를 구한다. 해석 결과 직접적으로 얻는 해는 변위이다. 처짐각 방정식 처짐각 방정식은 자유도에 해당하는 변위의 발생으로 부재단에 생기는 모멘트를 부재의 강성도와 부재 양단의 변위 즉 처침과 처짐각의 항으로 나타낸 식을 말한다. 부재ab의 a단과 b단에에 발생하는 모멘트는 각각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여기서 , 는 각각 a단과 b단의 처짐각이며 는 a와 b 지점의 상대변위이다. 처짐각 방정식은 종종 강도계수(stiffness factor) 와 현회전각 을 도입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내어지기도 한다. 처짐각 방정식의 유도 경간 길이 , 휨강성 인 단순보 AB의 양단에 각각 시계방향의 모멘트 하중 , 가 작용하여, 하중의 작용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 의 처짐각이 발생하였고, 지점 AB의 상대 변위로 인한 시계방향의 현회전각이 라면, 단위하중법이나 모멘트면적법 등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관계식을 유도할 수 있다. 위의 두 식을 연립하면 양단의 모멘트 , 를 처짐각, 와 현회전각 로 표현한 처짐각 방정식을 얻는다. 평형 조건 절점 평형 절점 평형 방정식은 각 부재의 재단 모멘트(member end moment)로 인한 각 절점에서의 모멘트의 평형을 나타내는 식이다. 즉, 절점의 고정단 모멘트와 그 절점에 연결된 각 부재의 재단 모멘트의 총 합에 대한 평형 조건식이다. 자유도를 갖는 각 절점에 대해 다음의 평형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여기서 는 부재의 재단 모멘트, 는 고정단 모멘트, 는 절점에 재하된 모멘트이며, 동일한 부호체계로 나타내어진다. 전단 평형 횡방향 변위나 지점의 침하 등으로 인한 현회전각이 발생하는 구조물을 처짐각법으로 해석하는 경우 절점 평형 방정식에 더하여 전단력의 평형 조건이 필요하다. 예제 오른쪽 그림과 같은 연속보 구조물을 해석해 보자. 부재 AB, BC, CD의 길이는 모두 로 같고, 휨 강성은 각각 EI, 2EI, EI이다. 부재 AB는 지점 A로부터 의 위치에 크기 인 집중 하중이, 부재 BC는 부재 전체에 걸쳐 의 등분포 하중이, 부재 CD는 중앙에 크기 인 집중 하중이 재하되어 있다. 계산 과정에서, 시계 방향의 회전각과 모멘트를 양(+)으로 한다. 자유도 절점 A, B, C의 회전각 , , 을 미지수로 한다. 지점 침하등으로 인한 현회전각은 없다. 고정단 모멘트 고정단 모멘트는 다음과 같다. 처짐각 방정식 절점 평형 방정식 절점 A, B, C에서 각각 모멘트 평형을 만족해야 하므로, 절점 변위 위의 평형 방정식을 연립하면, 다음과 같은 절점 변위를 얻는다. 재단 모멘트의 계산 절점 변위를 이용해 재단 모멘트를 구한다. 참고 문헌 McCormac, Jack C.; James K. Nelson, Jr. (1997). Structural Analysis: A Classical and Matrix Approach, 2nd, Addison-Wesley, 430-451. . 양창현 (2001-01-10). 《구조역학》, 4판, 청문각, 357-389. . 같이 보기 모멘트 분배법 고정단 모멘트 구조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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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3%A8%ED%82%A4%EC%9A%B0%EC%8A%A4%20%EC%84%B8%EB%A5%B4%EA%B8%B0%EC%9A%B0%EC%8A%A4%20%EC%B9%B4%ED%8B%B8%EB%A6%AC%EB%8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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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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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Lucius Sergius Catilina, 기원전 108년–기원전 62년)는 로마 공화정말기의 정치가이다. 원로원에 맞서서 로마 공화정을 전복하려 시도한 카틸리나의 모반으로 유명하다. 생애 카틸리나는 기원전 108년 유서깊은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선대에 집정관을 지낸 집안이었으나 그의 시대에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쇠퇴해가는 가문이었다. 카틸리나는 군사적 재능을 보여 동맹시 전쟁당시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밑에서 키케로, 폼페이우스와 함께 참전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시절에 별다른 역할을 하진 않았지만 정치적으로 실각하진 않았고 술라 내전 시기에는 술라의 편에 섰다. 기원전 73년 로마 신전의 여사제와 간통혐의를 받았으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도움으로 무죄가 되었다. 기원전 68년 법무관이 되었고 그 다음 2년간은 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으로 있었다. 로마로 돌아와서 기원전 65년 겨울 집정관직에 출마하려 했으나 속주민 대표단이 그를 권력남용으로 원로원에 기소하여 재판에 회부되는 바람에 입후보 자격을 상실했다. 그 불만으로 음모를 꾀했으나 실패하였다(제1차 카틸리나 음모 사건). 수많은 로마의 유력자들의 지원으로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집정관직은 놓쳤다. 다음해에도 집정관직을 노리고 출마했으나 원로원의 지원을 받은 키케로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가 당선되는 바람에 좌절했다. 당시 그는 부채의 전액 탕감을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그런 급진적인 공약을 두려워한 원로원은 그를 방해했다. 카틸리나 모반 카틸리나는 포기하지 않고 기원전 63년에도 또 집정관 선거에 도전했는데 이번에도 부채의 전액 탕감을 공약으로 걸고 나섰으나 3등에 그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선출된 집정관중 한사람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당했다. 무레나의 유죄가 확정되면 카틸리나가 집정관이 되는 상황에서 원로원은 키케로를 앞세워 변호하게 하고 결국 무죄가 되었고 카틸리나는 또 다시 실패했다. 모반의 과정 카틸리나에게는 부채의 탕감을 원하는 지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카틸리나는 이들을 규합하고 기원전 63년 10월 28일을 기해 무장 봉기를 일으켜 공화정을 전복할 계획을 세웠다. 카틸리나에 모여든 사람들가운데는 기원전 71년의 집정관을 지냈으나 방탕한 생활로 원로원에서 쫓겨났다 돌아온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전직법무관 카시우스 롱기누스등 원로원에 불만이 많았던 귀족들과 빚이 많은 자들이었다. 당시 집정관인 키케로는 정보망을 통해 이 음모를 알고 있었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카틸리나는 거사를 앞둔 사람답지 않게 너무도 태연하였기 때문에 원로원 의원들은 반신반의 하는 분위기였다. 원로원에서는 연일 음모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고 크라수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음모의 공모자라는 혐의를 받았다. 카이사르가 당시 카토에게 혐의를 벗어나는 일화는 유명하다. 10월 21일 카틸리나의 음모를 확신하는 키케로는 결국 원로원에서 원로원 최종 권고를 얻어냈지만 카틸리나는 계속해서 증거를 대라고 주장했다. 카틸리나 탄핵 11월 8일 원로원 회의에서 키케로는 유명한 카틸리나 탄핵을 발표했고 카틸리나는 로마를 떠났으나 아직도 결정적인 물적 증거는 없었다. 키케로는 증거확보를 위해 반란에 가담한 갈리아인들을 부추겨 음모가담자의 서명을 받아오게 하여 증거를 확보했고 카툴루스를 비롯한 로마에 남아있던 음모자 5명을 체포했다. 12월 5일 원로원 회의에서 체포된 음모자 5명의 처형문제가 논의되다. 쟁점은 "원로원 최종 권고"가 있더라도 과연 재판권과 항소권도 없이 로마 시민을 처형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카이사르는 음모자의 재판권없는 처형을 반대했으나 카토와 키케로의 열변으로 결국 처형이 결정되었다. 죽음 기원전 62년 1월 대규모 카틸리나 토벌군단이 조직되었고 3만명의 병력이 동원되어 카틸리나 토벌에 나섰다. 카틸리나는 동지 3,000명과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달아나려다 정규군에 포위되었고 카틸리나 본인을 비롯해 3,000명 전원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나중에 키케로는 네 차례에 걸친 카틸리나 탄핵을 책으로 펴냈고 이 책은 아직까지도 라틴어의 교본으로 쓰일 정도로 명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각주 기원전 108년 출생 기원전 62년 사망 고대 로마의 정치인 암살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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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390%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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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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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명(明) 홍무(洪武) 23년 일본(日本) 남조(南朝) 겐추() 7년 일본(日本) 북조(北朝) 고오() 2년 / 메이토쿠() 원년 쩐 왕조(陳朝) 꽝타이(光泰) 3년 기년 명(明) 태조 홍무제(太祖 洪武帝) 23년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 2년 쩐 왕조(陳朝) 순종(順宗) 3년 사건 조선 태조 이성계의 차남, 이방과가 양광도(경기·충청) 영주 도고산에서 왜구토벌하다. 밀성군(密城郡)이 고려 공양왕의 증조모 박씨의 친정 고향이라는 이유로 밀양부(密陽府)로 승격되었다. 탄생 6월 19일 - 조선의 문신 최치운(崔致雲) - 조선의 과학자 장영실 사망 12월 22일 - 고려의 무신 조민수(曺敏修) 참고 문헌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慶州府) > 밀양 도호부(密陽都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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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914%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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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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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연호 중화민국(中華民國) 민국(民國) 3년 일본(日本) 다이쇼(大正) 3년 응우옌 왕조(阮朝) 주이떤(維新) 8년 기년 응우옌 왕조(阮朝) 유신제(維新帝) 8년 사건 1월 11일 - 호남선 철도가 완공되었다. 1월 17일 - 단성사가 건립되었다. 2월 15일 - 의병장 임병찬이 피검되었다. 4월 1일 - 조선의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12부 220군이 되었다. 4월 5일 - 관부연락선 신라마루 호 (新羅丸)가 취항하였다. 4월 13일 - 주시경의 《말의 소리》가 간행되었다. 4월 25일 - 일제강점기: 토지대장규칙, 하천취체규칙, 항만기타공공사용수면 및 그 부지 취체에 관한 건이 공포되었다. 5월 22일 - 일제강점기: 농공은행령, 지방금융조합령이 공포되었다. 6월 10일 -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하였다. 6월 28일 - 사라예보 사건. -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 저격. 7월 13일 - 선린상업학교의 한국인 학생이 일본인 학생과 충돌하여 전원 동맹휴교 및 자퇴원서를 제출하였다. 7월 28일 -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 8월 1일 -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에 선전 포고. 8월 3일 - 독일 제국, 프랑스에 선전 포고. 미국, 제1차 세계 대전에 중립 선언. 8월 4일 - 제1차 세계대전 : 영국, 독일 제국에 선전 포고. 8월 11일 - 제1차 세계 대전 : 프랑스, 오헝제국에 선전 포고. 8월 16일 - 경원선 철도가 완공되었다. 8월 23일 - 제1차 세계 대전 : 일본 제국, 독일 제국에 선전 포고. 8월 25일 - 일제의 대독일 선전 포고로 인해 서울의 독일 영사관이 폐쇄되었다. 8월 26일 - 제1차 세계 대전 :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타넨베르크 전투 개시. 8월 30일 - 제1차 세계 대전 : 독일 제국 공군기, 파리에 폭탄 투하 (세계 최초의 공습). 9월 - 러시아가 일본의 요구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을 추방하고 권업회 등의 독립단체도 해산시켰다. 9월 1일 - 조선은행이 100원권 지폐를 발행하였다. 9월 3일 - 교황 베네딕토 15세, 258대 로마 교황 취임. 10월 10일 - 조선호텔이 개업하였다. 11월 2일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다. 11월 5일 - 영국이 키프로스를 합병하면서 프랑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다. 12월 1일 - 청진-블라디보스토크 간 직통 통신선이 개통되었다. 문화 8월 15일 - 파나마 운하 개통. 8월 16일 - 경원선 전 구간(용산-원산) 개통. 10월 17일 - 전라선 개통. 10월 18일 - 독일 프랑크 푸르트 대학교 설립. 탄생 2월 21일 - 한국의 화가 박수근. (~1965년) 3월 1일 - 미국의 작가 랠프 엘리슨. (~1994년) 3월 25일 -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 노먼 볼로그. (~2009년) 3월 28일 - 체코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 . (~1997년) 4월 4일 - 프랑스의 작가, 영화 감독 마르그리트 뒤라스. (~1996년) 4월 22일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 군인 미하엘 비트만. (~1944년) 6월 15일 - 구소련의 정치인 유리 안드로포프. (~1984년) 6월 24일 - 영국의 작가 로버트 에이크먼. (~1981년) 7월 23일 - 노르웨이의 작가 알프 프뢰위센. (~1970년) 7월 31일 -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마리오 바바. (~1980년) 8월 10일 -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변호사 이태영. (~1998년) 9월 25일 - 미국의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 (~1999년) 10월 10일 - 한국의 승려 서경보. (~1996년) 10월 21일 - 미국의 놀이 수학자 마틴 가드너. (~2010년) 12월 2일 - 미국의 경제학자 마틴 브론펜브레너. (~1997년) 사망 7월 27일 -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 주시경. (1876년~) 7월 31일 -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정치인 장 조레스. (1859년~) 8월 20일 - 교황 비오 10세. (1835년~) 9월 30일 - 대한제국의 외교관 유길준. (1856년~) 11월 7일 - 대한제국의 의병장 김도현. (1852년~) 노벨상 물리학상 - 막스 폰 라우에 화학상 - 생리학·의학상 - 평화상 - 문학상 - 달력 음양력 대조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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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 교통국 5500형 전동차 (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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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 교통국 5500형 전차()는 1953년에 등장한 도쿄도 교통국의 노면전차(통칭: 도덴/)차량이다. 영업 개시 초기에는 '방진방음전차(防振防音電車)' 또는 '일본제 PPC카'로 불렸다. 개요 미국에서 개발된 PPC CAR의 라이선스를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사에서 구입하고 그 기술을 도입해서 제작한 차량이다. 처음으로 만들어진 차량은 5502호차였다. 도덴 차량 최초의 카르단 구동 방식이며, 집전장치로 팬터그래프를 채택했다. 제동장치도 전기지령식을 채택하였다. 지붕에는 환기장치로 환데리아를 탑재하고 있다. 5502호차의 주요기기 류는 원래 6500형용으로 준비한 것이지만 5501호차의 공기 지연으로 시민의 신차 도입에 대힌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5501호차와 동등한 차체를 만들고 5502호차에 유용한 것이다. 5501호차와 달리 전장품은 미쓰비시 전기, 바퀴는 스미토모금속공업 제이다. 차체는 나니와공기에서 제작했다. 이 제작사 3개 회사의 머리 문자를 합쳐서 'MSN차'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6500형 전차의 전장품은 후일 다시 동일한 사양으로 재발주되었다. 그리고 1954년에는 5501호차가 제작되었다. 준공 초기에는 수동 제어기로 조작하는 방법이 아니라 일본의 철도차량으로서는 드문 미국 PPC카의 표준 장비인 자동차와 같은 페달식을 채택했다. 또 바퀴 부분에 커버가 있는 점도 특징이다. 미국제 부품도 일부 채택되어 있는 점이 특필된다. 바퀴는 내측 테두리이며 레일 압착 브레이크, 직각 카르단 구동 방식, 주전동기는 각각의 바퀴에 양축 모터 1기를 장착하고 있다. 차체 외관도 5502, 5503-5507호차와 크게 다르다. 1954년부터 1955년 사이에 5502, 5501호차 이외에 5503-5507호차가 만들어졌다. 이 5량이 5500형의 양산차로 할 수 있다. 다만, 운전방법은 5502호차와 같은 수동 제동기방식이고 페달방식은 채택하지 않았다. 차체는 세부를 제외하고 5502호차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운용과 폐차 구조가 특수하고 차체가 커서 1계통 이외의 노선에는 운행할 수가 없고 또 다른 도덴 차량과 비교해서 특수한 전장품의 구조가 보수면에서 수고가 많았기 때문(시바우라에 있던 차량공장에 가까운 미타차고에 배치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에 1967년 1월 제1차 도덴 본격 철거 개시와 동시에 폐차되었다. 그 후 5502-5507호차는 폐차 및 해체되었으나 5501호차는 우에노 공원에 보존되었다. 그러나 옥외 전시로 인해 노후화가 진행하고 1991년에 아라카와 차고로 이동하였으며, 복원공사가 실시되었다. 다시 옥외에서 보존되어 최근에는 차체가 상당히 부식하고 있었다. 2007년 3월에는 5월 26일부터 개장된 도덴 오모이데 광장에 전시를 위해 재정비되어 보존하였다. 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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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덕여자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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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덕여자고등학교(同德女子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08년 4월 28일 : 동원여자의숙을 설립, 설립자 조동식 선생 1909년 4월 1일 : 동원여자의숙과 동덕여자의숙을 병합하여 교명을 동덕여자의숙으로 함 1910년 3월 10일 : 동덕여자의숙 내에 부설로 중등속성과를 설립 1911년 4월 1일 : 속성과를 개편, 수업연한 3개년의 동덕여학교로 하고 설립자는 천도교주 손병희 선생, 학교장은 조동식 선생 1919년 12월 26일 : 독립운동에 손병희 선생 참가후 피검, 학교는 교장 조동식 선생이 인수하고 설립자가 됨 1926년 4월 27일 :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인가를 받음 1926년 5월 27일 : 이석구 선생 교주로 취임 1926년 6월 6일 : 재단법인 동덕여학원의 설립인가를 받고 설립자를 재단으로 변경 1933년 10월 14일 : 동대문 창신동에 본관 준공하고 교사를 이전 1938년 4월 10일 : 대강당 특별교실(기념관)등 건물을 준공하고 학제변경으로 교명을 동덕고등여학교로 함 1946년 10월 29일 : 교육령에 의하여 교명을 동덕여자중학교(6학제)로 함 1951년 5월 8일 : 학제개정으로 동덕여자중학교(3년제)와 고등학교(3년제)로 개편 1959년 4월 1일 : 중, 고등학교 교사(신관) 4층 20교실 준공 1962년 11월 20일 : 중·고등학교 생활지도관을 상월곡동에 증축 개관 1969년 3월 1일 : 중·고등학교 분리 1971년 8월 20일 : 체육관을 겸한 강당 준공 1982년 3월 1일 : 2부 상업과 8학급 인가 설치 1985년 2월 11일 : 상과 (제1회) 졸업식 거행 1986년 2월 15일 : 강남구 방배동 신축 교사로 이전 1986년 4월 27일 : 신축 교사 준공식 거행 1990년 9월 21일 : 학생 생활관 준공 1993년 5월 31일 : 상과 교실 증축 2015년 8월 10일 : 학교법인 이사장에 조원영 박사 취임 2019년 9월 2일 : 제13대 학교장 조승현 선생 취임 2020년 2월 1일 : 동덕여학단을 동덕학원으로 변경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동덕여자고등학교 서울 서초구의 고등학교 대한민국의 여자 고등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서울특별시의 사립 고등학교 1908년 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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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AC%EB%9F%AC%20%EC%96%B8%EC%96%B4%EC%97%90%EC%84%9C%EC%9D%98%20%ED%8C%8C%EB%9E%91%EA%B3%BC%20%EB%85%B9%EC%83%89%EC%9D%98%20%EA%B5%AC%EB%B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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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언어에서의 파랑과 녹색의 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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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언어 가운데에는 파랑과 녹색을 구별하는 언어도 있고, 구별하지 않는 언어도 있다. 또, 짙은 파랑과 옅은 파랑을 농도나 채도만 차이나는 같은 파란색이 아닌, 별개의 색으로 여기는 언어도 있다. 브렌트 벌린과 폴 케이의 1969년 연구 〈Basic Color Terms: Their Universality and Evolution〉에 따르면, 한 언어에서 파란색과 초록색을 구별하기 전까지는 갈색, 자주색, 분홍색, 주황색과 회색을 구별하는 낱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색을 나타내는 낱말이 발전되는 과정은 그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하얀색/검은색(또는 밝음/어두움), 빨간색과 초록색/노란색의 구별로부터 시작된다. 많은 언어에는 파란색과 초록색을 구별하는 낱말이 없고, 둘을 하나로 일컫는 낱말만 존재한다. 예를 들어, 베트남어에서는 나뭇잎의 색깔과 하늘 빛을 구별하지 않고 'xanh'('xanh lá cây'는 나뭇잎의 초록색, 'xanh dương'은 바다의 파란색)라는 낱말로 표현한다. 태국어의 ''는 하늘과 바다를 설명할 때만 파란색, 그 밖의 경우는 초록색을 지칭하며, '', '', 그리고 ''는 모두 짙은 파란색 또는 밝은 초록색을 일컫는데, 파란색과 초록색을 구별하게 되면서 점차 후자의 사용이 확대되고 있다. 한국어의 '파랗다'나 중국어의 '칭()', 일본어의 '아오()'와 같이, 초록색과 파란색을 구별해 일컫는 낱말이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을 함께 일컫는 낱말 역시 사용되는 언어도 있다. 남아프리카의 츠와나어 등 응구니어어에 속하는 언어에는 파란색과 초록색을 같은 낱말로 표현한다. 전통적인 웨일스어에서 'glas'라는 낱말은 파란색을 나타낼 수 있지만, 초록색이나 회색 빛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 웨일스어에서는 이를 구별하여 'glas'는 파란색만을 표현하며, 'gwyrdd'는 초록색을 'llwyd'는 회색을 각각 나타낸다. 이와 비슷하게 게일어로 'glas'는 여러 명암의 초록과 회색을 나타낼 수 있으며 'loath'는 회색만을, 'gorm'은 파란색만을 나타낸다. 고대 노르드어에서 'blá'는 검은색(따라서 흑인은 blámenn (파란/검은 사람)이라고 불린다)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스웨덴어에서 파란색을 나타내는 'blå'도 20세기 초까지 검은색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국어 순한국어 낱말인 '푸르다'는 파란색, 초록색이나 그 둘이 섞인 빛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푸른 하늘'은 하늘의 파란 빛을 표현하며, '푸른 숲'은 나무의 초록 빛을 표현한다. 파란색과 초록색을 각각 따로 나타내는 '파랑'('파란색'), '초록'('초록색' 또는 '녹색')과 같은 낱말도 있다. 그러나 초록은 한국 고유어가 아니기 때문에 활용하지 못한다. 교통 신호를 과거에 '파란불'이라 일컫기도 했다. 일부 언어 순수주의자들은 초록을 '초랑'으로, 보라를 '보랑'으로 바꾸어 '초랗다', '보랗다' 등의 활용을 쓸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영어 파란색을 나타내는 ''(블루)와 초록색을 나타내는 ''(그린) 등이 따로 존재하며, 둘이 섞인 빛은 ''(블루이시 그린)등으로 나타낸다. 언어학 용어로 제안된 'grue'(그루)는 다른 언어에서 파란색과 초록색을 구별하지 않는 낱말을 영어로 번역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러시아어 러시아어에는 파란색 계열을 통칭하는 낱말이 없다. 대신, 전통적으로 밝은 파란색은 ''(골루보이)로, 보통 또는 짙은 파란색은 ''(시니)로 나타내는 등 명암에 따라서 다른 낱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기본 색 일곱 가지를 빨간색 - 주황색 - 노란색 - 초록색 - 밝은 파란색(, 청록색과 다름) - 짙은 파란색() - 보라색으로 나타낸다. 한편, 하늘색과 옥색()을 다른 빛으로 구별하지 않고, 명암이 차이나는 한가지 빛으로 인식한다. 이는, 영어에서 빨간색을 로, 분홍색을 로 나타내 구별하는 것과 달리, 한자문화권에서 빨간색(홍색(紅色))과 분홍색(粉紅色)을 공히 빨갛다는 의미를 지닌 '紅'(홍)을 써서 표현하는 것, 즉 명암, 농도가 차이나는 같은 빨간 빛으로 인식하는 것과 비슷하다. 러시아 극동 및 기타 아이누어는 노랑·파랑(초록 포함) 이 세 빛깔이 같은 어휘로, '시우닝'이라 발음한다. 이들은 우리말이 그렇듯 푸르다는 한 가지 어휘가 존재한다. 몽골어는 청색·록색이 각각 쳉ㅎ(ㅔ)ㄹ(), 넉언()인데 한자어에서 유래했다고 추정된다. 알타이어족은 모두 두음법칙을 적용하여 ㄹ로 처음내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 알타이어족을 언급했지만 튀르크어파는 두 색을 구분하기 때문에 관하지 않는다. 에벤어를 쓰는 에벤족은 역시 시베리아에서 청색·록색을 함께 쓰는 깃발을 가진 이들 가운데 하나인데, 역시 한 가지 어휘(촐바나)를 사용한다. 어웡키어(에벤키어)역시 그렇다. 같이 보기 의미장 파란색, 초록색, 암청색 색 목록 색 이름 참고 문헌 Brent Berlin, Paul Kay: Basic color terms : their universality and evolution. CLSI Publ., Stanford (Calif.) 1999, Green... midori? ao? – 요미우리 신문의 "Pera Pera Penguin" 컬럼 (32호) 녹색 파랑 언어 문화 언어 비교 어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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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E%AC%EC%9D%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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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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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익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김재익(金在翊)은 대한제국 말기에 자위단원호회 회원이었다. 김재익(金在益, 1938 ~ 1983)은 제5공화국의 경제 관료이다. 김재익(1940 ~ )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이다. 김재익(1957 ~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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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4U%200142%2B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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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U 014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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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U 0142+61는 카시오페이아자리 방향으로 지구에서 약 13,000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마그네타이다. 2006년 4월 6일 네이처 지에 이 항성 주위에 별주위 원반이 존재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를 통해 중성자별 주위에 펄사 행성은 흔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원반 물질들은 무거운 금속 물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별은 약 10만 년 전 초신성 폭발로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질들 대부분을 날려 보냈다. 원반은 별에서 약 160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형성되어 있으며 물질의 총 질량은 지구의 약 10배로 추정된다. 참고 문헌 과학자들이 행성 생성의 비밀을 풀다 (2006-04-05) CNN 스피처 우주망원경이 죽은 별 주위에 있는 원반을 관측하다 (2006-04-07) SpaceDaily '불사조' 행성의 탄생인가? 4U0142+61 1RXS J014621.5+614509 펄사 별주위원반 카시오페이아자리 펄사 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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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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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NBA%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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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동음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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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 농구 협회(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세계 복싱 협회(National Boxing Association) NBA TV 미국 도서상 퍼시픽 디비전 (NBA) 내셔널 북 어워드(National Book Award) 뉴캐슬 브라운 에일(Newcastle Brown Ale) 영보이 네버 브로크 어게인(YoungBoy Never Broke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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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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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FCI%20%EB%A0%88%EB%B0%94%EB%94%94%EC%95%84%20%ED%83%88%EB%A6%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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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I 레바디아 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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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I 레바디아 탈린(Football Club Infonet Levadia Tallinn)은 에스토니아의 축구 클럽으로 수도인 탈린을 연고지로 삼고 있다. 레바디아 탈린은 1998년에 FC 레바디아 마르두(FC Levadia Maardu)로 창단하였다. 창단 첫해인 1998년에 2부리그인 에스토니아 에실리가 우승을 하며 승격한 이래로 에스토니아 리그의 상위권을 유지해 왔다. 레바디아는 에스토니아 리그 5회 우승기록을 가지고 있다. 레바디아의 홈구장은 A. 레 코크 아레나로 15,000여석의 관중석을 가지고 있다. 레바디아 탈린은 유럽 대회에 자주 나갔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하였다. UEFA 챔피언스리그는 2007-08시즌을 포함하여 네 번 진출하였는데, 최고성적은 2000-01시즌과 2007-08시즌의 예선2라운드이고, UEFA컵 역시 네번의 진출경험을 가지고 있고 최고성적은 2006-07시즌의 1회전 진출이다. 그리고 UEFA 인터토토컵에는 2002시즌에 단 한번 출전하여 2라운드까지 올라간 경험을 가지고 있다. 역대 성적 에스토니아 메이스트릴리가 (1부리그) 우승 (10) : 1999, 2000, 2004, 2006, 2007, 2008, 2009, 2013, 2017, 2021 준우승 (2) : 2002, 2005 에스토니아 에실리가 (2부리그) 우승 (1) : 1998 에스토니아 컵 우승 (5) : 1998-99, 1999-00, 2001-02, 2003-04, 2004-05, 2006-07 에스토니아 슈퍼컵 우승 (3) : 1999, 2000, 2001 준우승 (5) : 2002, 2004, 2005, 2007, 2008 외부 링크 FC 레바디아 공식 웹사이트 uefa.com의 FC 레바디아 페이지 1998년 설립된 축구단 에스토니아의 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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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B%9D%BC%EC%B9%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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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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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칸(; , ), 또는 U Kʼux Kaj, " 하늘의 심장은 마야 신화에서 바람, 폭풍, 불을 관장하는 키체 신이며 세 가지 인류 창조 시도에 모두 참여한 창조신 중 하나이다. 그는 또한 2세대 인간이 신들을 화나게 한 후 대홍수를 일으켰다. 그는 아마도 홍수 위의 바람이 부는 안개 속에서 살았고 육지가 바다에서 올라올 때까지 반복적으로 "땅"을 불렀다. '한-다리'로 이해되는 그의 이름은 선고전기와 고전기 마야 도상학의 신 K, 인간의 다리와 뱀 모양의 다리를 가진 번개의 신을 암시한다. 신 K는 일반적으로 카윌로 여겨진다. 그 이름은 궁극적으로 카리브어 단어인 우라칸과 오르칸( 유럽 폭풍우 )이라는 단어의 출처에서 파생될 수 있다. 관련 신으로는 키체 신화의 토힐, 유카텍 신화의 볼론 트사카브, 사포텍 신화의 코키즈, 아즈텍 신화의 테스카틀리포카가 있다. 각주 참고 문헌 땅의 신 바람의 신 마야 신 천공의 남신 불의 남신 창조의 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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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C%8A%A4%EC%9D%98%20%EC%A0%95%EB%A6%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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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의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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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의 정리(Coase theorem, 코스의 법칙)는 로널드 코스(Ronald H. Coase)가 만든 경제학 이론으로서, 민간경제의 주체들이 자원의 배분 과정에서 아무런 비용을 치르지 않고 협상을 할 수 있다면, 외부효과로 인해 초래되는 비효율성을 시장에서 그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정리이다. 이 정리는 경제적 효율성 및 정부의 자산 분배와 관련이 있으며, 거래 비용의 존재에 대한 이론적 바탕이 된다. 1937년에 발표된 코스의 《기업의 본질(The Nature of the Firm)》에서는 기업 조직에 대한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거래 비용에 대한 부분에 중점을 두어 설명하였다. 이 논문으로 코스는 199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코스의 정리는 현대의 정부 규제를 경제적 분석으로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이 정리에 따르면 기업은 추가 거래를 기업 내부에서 처리할 때에 드는 비용과 외부의 시장에서 처리하는 비용과 비교하여 같아질 때까지 조직이 확대되는 경향을 가진다. 현대적인 해석은 거래 비용 감소에 따라 기업 내의 조직의 복잡성, 기업의 수는 감소한다는 정리이다. 내부적으로 처리하는 비용이 더 낮으면 조직은 유지될 수 있다. (혹은 확대 되거나)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개인이 1:1로 거래할 때 드는 비용보다 기업을 조직하고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더 저렴하기 때문에 기업이 본질적 가치를 가진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 인터넷의 등장으로 이 정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세계 경제를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으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인터넷을 이용하게 됨에 따라 거래 비용이 획기적으로 낮아졌고, 그런 시장에서는 해당 거래 비용을 내부적으로 처리하던 조직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정리 코스는 무선통신의 발달로 코스의 정리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두 통신사가 있다면, 서로 간섭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의 분배를 위해 협상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코스의 정리는 두 재산권의 경계가 분명하다면, 분배방식은 시장에서 최종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거래비용이 전혀 없다는 상황에서만 성립하는 내용이며, 거래비용이 있는 경우에는 시장에서의 분배 협상에 장애가 된다. (담판비용, 소송비용 등) 분배자(정부)는 당연히 거래비용이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을 최대한 줄여서 시장참여자들이 거래를 하는 데에 충분한 상태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하며,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는 시장은 최종적으로 효율적인 상태에 충분히 도달하게 된다. 예 갑과 을은 이웃이다. 그런데 갑이 기르는 강아지로 인해서 을이 고통을 받고 있다. 갑은 강아지를 기르며 즐거움을 누리지만, 을은 개 짖는 소리에 잠을 못이루기 때문이다. 이 상태를 돈의 가치로 표현 해보자. 갑은 개를 기르면서 얻는 가치는 500이고, 을의 고통은 800이다. 이 경우 양자는 어떻게 해결을 볼 수 있겠는가? 이럴 경우 두 가지 해결 가능성이 있다. 갑에게 사육권이 있는 경우와, 을에게 조용히 수면을 취할 권리가 있는 경우이다. 사육권이 인정되는 경우 을은 갑에게 강아지를 처분하면 보상하겠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갑은 보상액이 강아지로부터 얻는 혜택보다 크다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을은 갑에게 강아지를 처분하는 대가로 최대지불용이 800을 지불할 의사가 있고, 갑의 경우 최소한 500이상을 받으면 되기 때문에, 500~ 800 사이에서 갑은 이를 기꺼이 수락할 것이고, 이 결과 두 사람 모두 전보다 높은 경제적 후생수준을 누릴 수 있는 효율적인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수면권이 보장되는 경우 을에게 법적으로 갑의 강아지를 처분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경우로, 갑은 강아지를 기를 수 있게 해달라는 대신 을에게 그만큼의 보상을 해 주겠다고 제안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을이 받는 고통인 800이상의 가치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갑은 300 이상의 손해를 보게 되고, 갑은 강아지를 처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런 결과는 결과적으로 혜택과 고통을 감안한다면 이 결과도 효율적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갑의 가치가 800, 을의 피해는 500일 때도 코스의 정리는 성립한다. 비록 두 사람은 법적권리가 누구에게 존재하든지 효율적인 결과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에 따라 경제적 후생이 어떻게 배분되는지가 결정된다. 이러한 예로 코스의 정리는 이해될 수 있으며, 이는 공공경제학이나 법경제학, 자원경제학에서 적용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한계 행태경제학자들은 보유 효과에 따라서 수취 의사액과 지불 의사액의 괴리가 발생하는데, 코스의 정리는 이 두 액수가 일치한다는 암묵적인 전제를 바탕에 두고 있으므로 코스의 정리가 더이상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경제학 경제학 정리 시장 실패 공공선택론 신제도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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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A%B3%A0%EC%95%BC%EC%84%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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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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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성()은 오와리국 아이치 군 나고야에 있었던 성이다. 오와리 도쿠가와가 17대의 거성으로 긴코조(金鯱城), 오사카성과 함께 긴죠(金城,금성)로도 불린다. 성이 있는 곳은 현재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구·기타구의 메이조 공원에 있다. 이세 민요에도《이세는 나루를 품고, 나루는 이세를 품고, 오와리 나고야는 성을 품네》라는 대목이 나온다. 오사카성, 구마모토성과 더불어 일본 3명성이다. 천수에 놓인 긴샤치는 성뿐만 아니라 나고야의 상징이다. 이마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의 나고야 성(那古野城)은 지금의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구의 나고야 성 니노마루에 위치한다. 옛 나고야 성은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역사 센고쿠 시대 16세기 초기에 이마가와 우지치카가 오와리 진출을 위해 축성한 야나기노마루가 나고야 성의 기원이다. 이 성은 지금의 나고야 성 니노마루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1532년 오다 노부히데가 이마가와 우지토요로부터 탈취해 나고야 성(那古野城)이라고 개명한다. 노부히데는 잠시 동안 성에 거주하며 이 곳에서 아들 오다 노부나가를 낳았다고 한다. 후에 노부히데는 후루와타리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나고야 성은 노부나가의 거성이 되었지만, 1555년 노부나가가 기요스성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에 폐성되었다. 에도 시대 기요스 성은 오랫동안 오와리의 중심이었지만, 1600년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정치정세의 대응과 수해에 취약한 기요스의 지형의 문제등의 이유로 도쿠가와 요시나오(오와리번 초대 번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홉 번째 아들)의 거성으로써, 1609년 나고야 성 축성을 결정한다. 1610년 서국의 여러 다이묘에 데쓰다이부신으로 성을 짓기 시작한다. 축성 담당은 다키가와 다다유키, 사쿠마 마사자네외 5명, 작업 담당은 오쿠보 나가야스, 고보리 마사카즈외 9명에게 맞겼다. 건물의 입지와 배치는 도도 다카토라라고 전해지며, 석벽은 여러 다이묘가 분담해서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천수의 석벽은 가토 기요마사가 했다고 한다. 천수는 작업 담당인 고보리 마사카즈, 목수들의 수장인 나카이 마사키요가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단, 목수들 수장에 관해서는 오카베 마타베에란 설도 있다. 1612년 대천수가 완성되었다. 기요스로부터 이주는 나고야 성하 마을을 조성한 1612년부터 도쿠가와 요시나오가 나고야 성으로 거처를 옮긴 1616년동안 행해졌다고 사료된다. 이 이주를 기요스 고에시라고 한다. 가신, 마을 주민은 물론, 사찰 10사, 신사 3사, 기요스 성 소천수도 옮겨 철저하게 준비되었다고 한다. 1634년에는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천황이 있는 교토로 갈 때 들르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 후, 오와리 번 제14대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는 신 정부에 대해 나고야 성을 해체 매각하고 긴샤치의 헌상하겠다고 주청한다. 그러나, 주일 독일공사 맥스 폰 프란트와 육군 제4국장대리인 나카무라 시게토 대령의 상소에 따라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성곽 보존을 결정했다. 이때 천수는 혼마루 어전과 함께 보존되었다. 1872년(메이지 5년) 도쿄 진다이를 성 안에 두었다. 1873년(메이지 6년) 나고야 성의 도쿄 진다이가 나고야 진다이로 되었다가, 1888년(메이지 21년) 제 3사단으로 되어 종전까지 계속 주둔했었다. 보존된 혼마루는 1891년(메이지 24년) 노비 지진에 의해 혼마루의 세이난 망루(西南隅櫓)와 다몬 망루(多聞櫓)의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천수와 혼마루 어전은 큰 피해가 없었다. 1893년(메이지 26년) 혼마루는 육군성 관할에서 궁내성으로 이관되어 나고야 이궁(名古屋離宮)이라고 불렸다. 그 후, 나고야 이궁은 1930년(쇼와 5년) 폐지되어 궁내성으로부터 나고야시로 이관되었다. 나고야 시는 나고야 성을 시민에 일반공개하였고, 이 즈음 건축물과 장벽화는 국보(舊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45년(쇼와 20년) 5월 14일 나고야 공습때 혼마루 어전, 대천수, 소천수, 도호쿠 망루(東北隅櫓), 정문, 긴샤치등이 소실되었다. 전후, 산노마루를 뺀 성터는 성의 북동쪽에 있었던 저습지 터와 함께 메이조 공원으로 되었다. 공원안에는 전쟁의 화마를 피한 3개의 망루와 3개의 문, 니노마루, 정원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또, 일부 해자를 메워 많이 변했지만, 흙으로 쌓은 보루, 해자, 문등이 산노마루를 포함해서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다. 천수는 1959년(쇼와 34년)에 재건되어, 복원된 긴샤치와 함께 나고야 시의 상징이 되었다. 혼마루 어전의 복원은 1994년(헤이세이 6년) 5월 14일에 시민봉사단체인 혼마루 어전 포럼이 설립을 시작으로 2002년(헤이세이 14년)부터 재건기금을 모았다. 2009년(헤이세이 21년) 복원공사를 착공하여 2013년(헤이세이 25년)에 제1기로 현관과 표서원의 공개를 개시하였으며, 2016년(헤이세이 28년) 6월 제2기로 대면소와 하어선소가 공개를 개시하였으며 장벽화도 복원되어 2018년 6월 8일 혼마루 어전 복원이 종료되어 완전히 공개되었다. 한편, 나고야 성 천수각은 2018년 5월부터 목조복원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천수각의 입장을 금지하고 있다. 구조 입지 나고야 성은 쇼나이 강이 만들어낸 노비 평야 서북단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 장소는 북쪽에서 노비평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축성전, 나고야 성이 위치하고 있는 대지(臺地)는 서쪽면과 북쪽면이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그 절벽 밑에는 저습지가 있어, 천연의 방어라인을 형성했다. 또, 대지의 서쪽 끝에 접해있는 호리가와 강 주위를 파, 이세 만에 인접한 항구(아쓰타 신궁 앞마을)로부터 축성물자 수송과 나고야 성하 마을의 서쪽을 지키는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나고야 성의 입지로 볼 때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가문등의 서국 다이묘가 도카이도를 지나 에도로 진격하는 것을 고려해 지어진 성이라고 생각된다. 기본 배치 나고야 성의 방어라인은 각각의 성곽이 곧게 뻗은 직사각형태인 성벽을 많이 가지고 있다. 각 모퉁이는 직각으로 단순하 되어 있다. 따라서, 히메지성과 같이 복잡한 굴곡을 많이 가진 구조를 좋아하는 에도 시대 군사학자에게는 썩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군사학자는 "방어라인이 좋지 않다."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현대의 성곽 연구자들로부터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나타냈다. 즉, 나고야 성이 축성된 에도 시대초기는 공성전술, 기술이 성숙된 시기로 있고, 이 시점에서 볼 때, 성으로의 공격에 대비해 도카이도 방위의 최대 거점으로 나고야 성이 선정했던 것을 감안하고 나서 방어라인을 평가해야 된다. 당시 성에서 농성전을 할 때, 방어, 전략, 전술을 어떻게 기획, 분석, 판단했는지를 생각한다면, 단순히 방어라인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구조는 전형적인 제곽식 평성으로 혼마루를 중심에 놓고, 남동쪽을 니노마루, 남서쪽을 니시노마루, 북서쪽을 오후케마루가 둘러싸고 있다. 더욱이 남에서 동으로 걸쳐 산노마루가 덮어 싸고 있다. 혼마루의 3개의 출입구 안에는 남쪽의 오테 문과 니노마루의 2개소의 가라메테 문이 있다. 그리고, 해자 안쪽에는 2중 성문으로 된 마스가타(桝形)딸린 문이 있고, 해자 바깥쪽에는 우마다시(馬出し)가 있어 성의 입구를 2중으로 두텁게 했다. 마스가타내 통로를 굴곡시켰고 주위를 다몬 망루로 둘려싸 적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또, 외성곽으로부터 토교(土橋)를 통해 우마다시로 들어오는 통로에는 장해가 되도록 직선형태의 작은 석벽이 있으며, 혼마루 뒤쪽으로 향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우마다시의 배치도 정교해서, 일부 성곽을 점령하더라도 혼마루에는 쉽게 진입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또, 어느 출입구가 공격을 받으면, 또 다른 출입구에서 출격해 격퇴하도록 설계되었다. 서쪽과 북쪽에는 해자 및 저습지로 막혀 있으며 남쪽과 동쪽에는 산노마루가 니노마루와 니시노마루를 둘러싸 막고 있다. 그리고 그 바깥쪽에는 폭이 넓은 빈 해자와 해자가 있는 외성곽으로 구성돼 있다. 더욱이 그 바깥에는 소가마에 또는 소쿠루와라고 불리는 외성과 성하 마을이 자리잡을 계획이었다. 그 크기는 서쪽으로는 히와지마하시(枇杷島橋), 남쪽은 옛 후루와타리 성부근(古渡旧城下), 동쪽으로는 야다가와하시(矢田川橋)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지만, 오사카 전투가 끝난후에 건설은 중지되었다. 이로 볼 때, 나고야 성의 축성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천수 천수는 혼마루 북서쪽 구석에 위치해 있다. 에도 시대초기 성곽을 대표하는 것중 하나이다. 대천수와 소천수를 연결하는 형태이고, 대천수 지붕위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영화를 나타내는 긴샤치로 장식되어 있다. 대천수는 5층5계, 지하 1층으로 된 건물로, 높이 55.6m(석축 19.5m, 본체 36.1m)로 18층 고층건물에 상응한다. 높이야 말로 에도 성과 도쿠가와 가문이 다시 축성한 오사카 성의 천수에는 미치지 않치만, 면적으로 치자면, 두 천수를 능가하는 4,424.5m2을 자랑한다. 그 내부에는 1,759장의 다다미가 깔려있다. 천수의 구조는 승탑형이라 불리며, 천수 받치는 아래층에 지붕은 팔짝 지붕이 아니다. 따라서, 천수 자체의 균형을 잡기 위해, 천수 한층의 평면이 대체적으로 정사각형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소천수는 2층2계, 지하 1층으로 대천수의 현관 역할을 한다. 평면은 직사각형으로 외견상으로는 대천수에 가려 소박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성의 3층 천수보다도 훨씬 크다. 천수는 1612년에 완성되었고, 이후 333년간 나고야에 그 위용을 뽐냈다. 도중, 몇 번의 지진과 화재로부터의 소실을 모면했고, 메이지 유신후 폐성의 위기도 벗어났다. 그리고, 진도 8.0의 노비 지진도 잘 견뎌냈지만, 1945년 공습에 의해 천수대만 남긴 채 소실되었다. 천수의 재건을 시작한 것은 1957년 나고야 시 제정 7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재건이 시작되었다. 이 때, 대천수를 목조건물로 지을지를 결정하는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석벽내에 케이슨기초를 설치하고, 그 위에 철골철근콘크리트(SRC) 구조로 대천수를 짓게되었다. 석벽자체만으로 건물의 중량을 이겨낼지 우려도 있었기 때문에, 기공식은 1958년 6월 13일, 준공식은 1959년 10월 1일에 했다. 그에 앞서 6일전에는 태풍 베라의 영향으로 나고야 시를 비롯 도카이도 지방 전역이 큰 피해를 입었다. 재건된 대천수 내부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외관은 충실히 재현했지만, 최상층에는 전망대로서의 역할 때문에 소실전보다 창이 더 커졌다. 그래서 아랫층과 비교하면 약간의 위화감이 존재한다. 현재는 목조 구조로의 복원을 위해 2018년 5월 7일부터 천수각의 입장이 금지되고 있다. 혼마루의 망루, 문 혼마루는 대부분 정사각형의 형태이며, 북서쪽 구석에 천수, 그 밖에 3 곳의 구석진 부분에는 스미 망루가 지어져있다. 문은 남쪽에 정문인 미나미 문(南御門), 동쪽에는 히가시 문(東御門), 북쪽에는 아카즈 문(不明御門)이 있다. 그리고, 다몬 망루가 혼마루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스미 망루는 모두 2층3계의 구조로 지어졌으며, 그 규모는 타 지역의 천수와 비교될만 하다. 또, 외관도 각각 달라, 외관 디자인에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현존해 있는 망루는 남동쪽의 도난 망루(東南隅櫓), 남서쪽의 세이난 망루(西南隅櫓)이며, 북동쪽의 도호쿠 망루(東北隅櫓)는 전화로 소실되어 망루대만 남아 있다. 미나미 문과 히가시 문은 마스가타를 가진 2중 성문 구조를 채용했다. 그리고, 아카즈 문은 암문(闇門) 형식의 비상구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전화로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성문은 미나미 니노 문(南二之門: 미나미 문의 두 번째 문)이다. 다몬 망루는 간단한 성벽이 아니라, 하나의 연결된 망루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점에서 기존의 스미 망루와 다른 점이다. 스미 망루는 점의 형태로 방어를 하지만, 다몬 망루는 선의 형태로 방어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몬 망루는 내부에 병장기를 보관하거나 비상식량을 수납했다. 안타깝게도 노비 지진 때 모두 파손되거나, 철거되었다. 혼마루 어전 평상시 성주가 거처하는 어전이다. 실제 나고야 성이 축성된 직후에는 그랬지만, 1620년 쇼군 상경시에 황족이나 쇼군, 고위관료 전용 거처로 삼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이후 번주는 니노마루에서 기거하였다. 실제 혼마루 어전을 사용했던 쇼군은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도쿠가와 이에미쓰뿐이었다. 그 후 전혀 사용되지 않고, 경비와 관리만 할 뿐이었다. 황족, 고위관료, 쇼군 전용인 탓에 혼마루 어전은 니조 성에 필적할 만큼 호화로운 건물로 알려져있다. 미나미 문으로부터 들어서면 입구인 시키다이(式台)가 있으면 그 안쪽에는 현관이 지어져있다. 그 밖에도 히로마(広間), 번주의 침실이 있는 쇼인(書院), 부엌인 가미다이도코로(上台所), 시모다이도코로(下台所) 등의 역사가 나란히 지어져 있으며, 각종 창고와 반쇼(番所)도 지어져있다. 이들 건물들은 모두 태평양 전쟁에서 소실되었지만, 내부에 있던 장벽화 일부는 스미 망루등에 보관해 두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장벽화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오랜 복원 공사를 마치고 2018년 6월 완전히 개방하였다. 니노마루 니노마루는 혼마루 남동쪽에 위치해 있고, 미나미 문과 히가시 문의 우마다시에 접해있다. 그 면적은 혼마루, 니시노마루, 오후케마루, 이 3곳의 면적에 상응한다. 성이 건축될 당시 번주는 혼마루에 거주했었다. 그리고, 니노마루에는 쇼군의 거처로 고자쇼(御座所)를 건립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쇼군 초기 히데타다는 상경과 오사카 전투가 있을 때 니노마루에 머물렀다. 그러나, 혼마루 어전이 쇼군 전용으로 되면서, 니노마루에 있던 히라이와 지카요시의 저택을 개수하여 1618년 니노마루 어전으로 삼았다. 이후 이 니노마루 어전은 오시로(御城)로 불렀으며, 번주의 거처 및 오와리 번의 번청으로써 기능을 담당했다. 니노마루의 방어시설로는 북동, 남서, 남동쪽에 L자 형의 스미 망루를 세웠고, 남쪽 변 중앙에 다이코 망루(太鼓櫓)가 있었지만, 북쪽 변과 북서쪽에는 방어 시설로 볼 수 없는 누각을 배치했기 때문에, 아마 니노마루 정원에서의 보이는 경관을 고려했다고 생각된다. 서쪽과 동쪽의 구로가네 문(鉄御門)을 배치하였다. 이 구로가네 문도 2중 문으로 되어있고, 다몬 망루가 감싸고 있다. 니노마루 주위는 토담으로 막고 있다. 니노마루 어전의 정문으로써 남쪽에 있는 구로 문(黒御門)이 있고, 가까이 아카즈 문, 서쪽에는 구자쿠 문(孔雀御門), 히가시쿠로가네 문 가까이에는 조추 문(女中門)과 메시아와세 문(召合門), 나이쇼 문(内証門), 후조 문(不浄門), 혼마루 히가시 문 우마다시 부근에는 암문이 설치되어 있다. 어전의 남쪽 면에서부터 히가시쿠로가네 문까지 다몬이 서있고, 서쪽 면과 동쪽 면에는 토담이 둘러쳐져 있다. 구로 어문으로 들어서면, 정면과 서쪽에 걸쳐 오모테 어전, 그 안쪽에는 나카오쿠 어전과 오쿠 어전, 구로 어문 동쪽에는 오오쿠 어전, 그 안쪽에는 더넓은 니노마루 정원이 있다. 이 니노마루 정원은 번주 전용 정원으로 성곽내부에 있는 정원으로는 규모 면에서 손꼽히는 정원이다. 초기에는 중국풍 전원이었지만, 그 후, 순 일본식 회유식 정원으로 바뀌었다. 니노마루 어전은 니노마루 북쪽에 위치해있고, 남쪽에는 승마장이 있었다. 현재 승마장터에는 아이치 현 체육관이 들어서 있다. 현존해있는 것은 동, 서에 각각 구로가네 문의 두 번째 문인 구로가네 니노 문(鉄御門二之門)이 2동 있지만, 동쪽에 있는 히가시쿠로가네 니노 문(동쪽 구로가네 문의 두 번째 문)은 혼마루의 히가시 니노 문터(동문의 두 번째 문)터에 이축되었다. 그 밖에도 니노마루 내에 건물은 모두 철거되었지만, 현재 정원의 일부로 복원 정비되고 있다. 또, 니노마루에는 현재 나고야 성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나고야 성(那古野城)이 있었고, 이를 알리는 석비가 있다. 덧붙여 옛 나고야 성은 오다 노부나가의 첫 번째 거성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니시노마루 니시노마루는 나고야 성의 정문부근에 위치해 있다. 남쪽에는 에노키다 문(榎多御門)이 있고, 마스가타와 2중성문구조로 되어있다. 이 문은 산노마루와 연계되어 있다. 남쪽 면은 다몬 망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그 밖에 주변은 토담으로 둘러쳐 있다. 남서쪽 구석부에는 고간조 다몬 망루, 서쪽 면 중앙에는 쓰키미 망루가 세워져있다. 성곽내 많은 미곡 창고가 이곳에 건설되어 보급기지로써의 성격이 짙다. 니시노마루에 있던 구조물은 메이지 시대에 모두 철거되었고, 1910년 (메이지 43년)에 에도 성의 하스이케 문(蓮池門)을 이축하여 세이몬(正門: 정문)이라고 개칭하였다. 불행히도 태평양 전쟁때 소실되었다. 현재 세이몬은 복원된 것이다. 현재 니시노마루에는 나고야 성 관리사무소와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오후케마루 오후케마루는 혼마루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혼마루에는 아카즈 문으로 연계되어 있으며, 혼마루 북쪽에 있는 오시오구라가마에(御塩蔵構:소금 창고) 터와 니시노마루가 좁은 통로로 연계되어있다. 망루는 북서쪽과 북동쪽 부근에 2동이 있었고, 그 중에 북서쪽에 있는 세이호쿠 망루가 현존해 있다. 세이호쿠 망루는 3층3계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규모면에서 히로사키성 천수와 마루가메성의 천수보다도 크다. 또, 기요스 망루라고도 불리는데 1611년 기요스성의 소천수를 이축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해체 수리시 이축한 흔적이 발견되었고, 기요스 성의 소천수일 가능성이 크다. 혼마루의 후방을 담당하는 성곽이며, 당초에는 성곽의 외측을 모두 다몬 망루로 지을 예정이었지만, 도중 계획이 변경되어 망루 이외에는 토담만 쌓았다. 이 이유는 겐나엔부(元和偃武)에 따라 공사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이 성곽 안에는 각종 창고가 지어졌다고 사료된다. 또, 오후케마루에는 메이지 시대 초기에 노기 창고(乃木倉庫)라고 불리는 옛 일본 육군의 탄약고가 지어졌다. 이 탄약고는 오후케마루에 현존해있다. 또, 이 건물의 벽돌은 나고야 시내에 존재하는 어떤 건물보다도 오래된 벽돌 건물로, 태평양 전쟁중에는 혼마루 어전의 장벽화등이 이곳에 보관되었었다.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나고야 진다이에 근무할 때 지어져 노기 창고란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1997년 국가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그 밖에 오후케마루 동쪽에는 천수 재건공사때 철거된 천수각의 초석들이 놓여 있으며, 나고야 대공습때 불에 그을린 자국도 볼 수 있다. 산노마루 산노마루는 현재 나고야 시 나카 구 산노마루 1정목(一丁目) ~ 4정목(四丁目)까지의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성곽내에는 중신들의 저택과 각종 신사가 건립되었다. 문은 5개였으며, 서쪽에는 암문(闇門)인 하바시다 문(巾下御門), 남쪽 면의 서쪽에는 미조노 문(御園御門), 남쪽 면 중앙에는 혼초 문(本町御門), 동쪽에는 히가시 문, 북쪽 면 니노마루에 시미즈 문(清水御門)이 있다. 각각 마스가타를 가지고 있다. 단, 문이 있는 주변은 석벽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외에는 흙으로 되어있다. 산노마루에 있던 구조물은 모두 철거되었지만, 이치노미야시 묘코지의 정문인 소몬(総門)은 시미즈 문을 이축한 것이다. 나고야 도쇼궁은 산노마루 남쪽(나고야 시 나카 구 마루노우치)으로 이축되었고, 덴노 신사는 나고야 신사(那古野神社)로 명칭이 바뀌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관청가로 변모하였으며, 나고야 성의 바깥 해자 일부는 메이지 후기 ~ 쇼와 후기에 결처 메이데쓰 세토선의 선로가 놓였다. 현재 산노마루에는 아이치 현청, 나고야 시청, 아이치 현 경찰본부, 각종 청사가 건립되어 아이치 현의 행정 중심지역이 되었다. 나고야 성의 긴샤치 긴샤치에 관한 에피소드 처음 만들어진 긴샤치는 한개당 게이초 오반(1분당 금이 약 671/1000) 1940분의 금을 사용했다. 두 긴샤치의 금의 중량은 약 320kg이다. 하지만, 그 후, 재정이 악화되어 3회에 걸쳐 금박을 개수해 금의 순도를 낮추었다. 그 때문에 마지막에 가서는 광택이 툰탁해져 버렸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긴샤치 주위에 금망을 둘러 위장했다. 이는 표면상으로 새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한다. 전화(戰禍)로 소실되기 전까지 긴챠치에 금망이 쳐져 있었다. 긴샤치는 바다를 건넌적도 있다. 1871년 정부에 헌상되어, 도쿄 궁내성에 납입되었다. 그 후, 수컷 샤치호코는 국내 박람회를 돌았고, 암컷 샤치호코는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었다. 긴샤치가 대천수로 돌아온 것은 1879년 2월이 되어서였다. 긴샤치의 비늘 도난사건은 몇 번 일어났다. 에도 시대 큰 연을 이용해 긴샤치에 접근한 가키노기 긴스케의 전설이 유명하지만, 긴스케는 실재 도둑이다. 메이지 시후에는 3번 도난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은 훔친 비늘을 녹여 매각하려다 체포되었다. 단, 3번째 사건이 있을 때는 하양기념사업 중이었기 때문에 당시 나고야 시장은 책임을 지고 사임하는 결과가 되었다. 소이탄으로 소실된 긴샤치의 잔해는 전후, 연합군 사령부에 접수되었고, 후에 대장성(재무부)으로 이관되었지만, 1967년 나고야 시로 반환되었다. 나고야 시는 잔핵을 녹여, 나고야 시의 깃봉의 환두로 가공해 보존하고 있다. 현재 긴샤치는 오사카의 조폐국에서 복원한 것으로 두 긴샤치의 금의 사용량은 약 88kg이다. 수컷 샤치호코(북측)에 44.7kg, 암컷 샤치호코(남측) 43.4kg 을 사용했다. 긴샤치의 외부시설 전시 2005년 3월 24일 열린 일본 국제박람회의 개회식전에서 긴샤치가 전시되었다. 그 일이 있기 전에도 나고야 성의 박람회 개최로 천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온적이 있었고, 메이조 공원내 박물관에 전시했었다. 하지만, 외부로 전시된 것은 1959년 재건되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 국제박람회가 있기 전날 3월 23일에는 나고야 시내 16구를 암수 둘로 나누어 퍼레이드를 했다. 오호리 전차 나고야 성 산노마루를 둘러싼 바깥 해자의 밑에는 1911년부터 1976년까지 전철을 운행했고, 오랫동안「오호리 전차」라고 불리었다. 오조네에서 세토 간을 연결하는 세토전기철도가 나고야 성 서쪽의 호리가와 강의 수운을 이용해 세토모노(도자기) 운송과 나고야 관청로까지 열차가 올 수 있도록 계획했다. 1911년 5월 23일 도이시타 ~ 오조네 구간, 10월 1일에는 호리가와 ~ 도이시타 구간을 개업했다. 도이시타 역은 산노마루 북동부의 바깥 해자에 위치해 있다. 그 곳으로부터 바깥 해자의 중간을 통과해 남하하고, 남동쪽 외진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서진한다. 그리고, 남서쪽 외진부분의 호리가와 역까지 복선으로 되어있다. 성의 해자 가운데로 선로가 놓인 곳은 주오 본선의 요쓰야역부근 등에서 볼 수 있지만, 해자의 원형을 그대로 둔 채 선로가 놓인 예는 드물다. 그 대신에 해자의 각진 부분에 반경 60m의 급 커브가 있거나, 복선부분의 폭이 충분치 않아 단복선(협궤)이라는 구조도 있다. 선로설치에 애로사항을 볼 수 있다. 세토전기철도는 1939년 나고야 철도로 병합되어 메이테쓰 세토 선으로 되었지만, 전후, 세토 선의 사카에마치 지역으로 노선이 결정되어 공사를 착공했다. 1976년 2월 15일에 호리가와 ~ 도이시타 구간의 폐선되었다. 현재, 대부분 철도시설이 철거되어 확인할 수 없지만, 단복선의 흔적 위에 있는 혼마치 다리의 벽돌아치, 그리고, 옛 오쓰마치 역사터로 내려가는 계단(출입금지)등을 볼 수 있다. 남아있는 건조물 태평양 전쟁전에는 舊국보 31건을 비롯 다수의 건물이 성내에 존재했지만, 1945년 5월 14일 8시 20분경 미육군 소속 B-29의 폭격으로 천수를 포함 대부분의 건물과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6동으로 모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6동은 다음과 같다. 혼마루의 도난 망루, 혼마루의 사이난 망루, 혼마루의 미나미니노 문, 니노마루의 히가시쿠로가네 니노 문(현재 혼마루의 히가시 니노 문 자리로 이축되었다.) 니노마루의 니시쿠로가네 니노 문, 오후케마루의 기요스 망루이다. 그 밖에도 니노마루 북쪽의 석벽위에는 〈난반 다타키〉 공법으로 지어진 토담을 볼 수 있다. 1952년 3월 29일 현재 성이 있는 지역 전체는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각주 같이 보기 일본 3대 명성 구마모토성 나고야 성 오사카성 나고야 성 (16세기) 외부 링크 나고야 성 나고야 성과 혼마루 어전 나고야시의 성 일본의 특별사적 아이치현의 국가 지정 사적 에도 시대의 건축 재건축한 건축물 오와리번 오와리 도쿠가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1959년 완공된 건축물 일본 100 명성 기타구 (나고야시)의 건축물 나카구 (나고야시)의 건축물 기타구 (나고야시)의 역사 나카구 (나고야시)의 역사 나고야시의 중요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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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2009%EB%85%84%206%EC%9B%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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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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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30일 인도양 코모로에 예멘 국영 예메니아 항공 소속 여객기가 추락했다고 프랑스국제방송, CNN, BBC, AP 통신사가 보도했다. 여객기는 에어버스 A310 기종이고 승무원과 승객이 150명 탑승했다. 이라크에 주둔해 있는 미군이 미-이라크 안보협정에 따라 바그다드, 모술 등 이라크 주요 도시지역에 교육 및 자문 인력 소수만 남기고 전체 병력을 지방으로 옮기는 작업을 마무리했다고 프랑스 통신사, AP 통신사가 보도했다. 2009년 6월 29일 미국 맨해튼 연방 법원이 약 650억달러 규모의 대규모 다단계 금융사기(폰지사기)를 벌인 혐의를 받고 있는 버나드 메이도프(71) 전 나스닥증권거래소 위원장에게 29일(현지시간)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0년을 선고했다. 대한민국 이명박 대통령이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포기하고 4대강 정비 사업을 추진한다고 라디오를 통해 연설했다. 2009년 6월 28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인근에서 임금 삭감에 항의하는 의류공장 노동자 5만여명이 26일 시작된 대규모 시위로 경찰과 충돌해 2명 사망, 수십여명 부상했다. 중국 광둥성 사오관(韶關)시에 있는 홍콩기업의 장난감 공장에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온 위구르족과 한족 종업원 간 유혈 충돌이 26일 발생해 최소 2명이 사망, 118명 부상했다고 홍콩 명보(明報) 온라인판이 보도했다. 온두라스의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이 군부 쿠데타로 코스타리카로 추방되었다. 2009년 6월 27일 유네스코가 조선의 왕릉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로 확정했다. 유엔이 금융회의에서 금융개혁안을 채택했다. 2009년 6월 26일 이란내의 자금이 피난처를 찾아 해외로 대거 유출되고 있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보도했다. 2009년 6월 25일 미국의 가수 마이클 잭슨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2009년 6월 23일 미국 국방부가 사이버사령부를 창설하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한국은행이 36년만에 신사임당을 도안으로 새 고액권 50000원권을 발행했다. 세브란스병원이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존엄사를 집행했다. 2009년 6월 22일 미국의 워싱턴 D.C.에서 오후 5시경(현지시간) 지하철간 충돌 사고로 80여명이 사상했다. 소말리아의 샤리프 셰이크 아흐메드 대통령은 반군의 수도 모가디슈 진출에 대응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2009년 6월 21일 중국 허난성 저우커우(周口)시의 실험유치원에서 19일부터 유치원생 214명이 집단 식중독 증세로 치료 받고 있다고 신화통신사가 보도했다. 그린란드가 주민 투표로 결의한 자치권 확대를 덴마크 의회가 승인했고 법안을 정식으로 발효시켰다. 2009년 6월 20일 소말리아 정부군과 반군간 내전이 악화되어 내각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인접국에 파병을 호소했다. SBS 8 뉴스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진 물건을 맞아서라고 대답 하였다. 2009년 6월 19일 이란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테헤란대에서 가진 연설에서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최대 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시위에 대해서 강경 진압을 하겠다고 시위대에 최후 통첩을 하였다. 2009년 6월 18일 미국의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장거리 미사일이 하와이 제도로 발사될 가능성에 대비해 미사일 방어 체제를 고고도방어체계(THADD)로 재배치 했다. 몽골에서 민주당 차히아긴 엘베그도르지가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한민국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1만6,000명이 서명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미국에 있는 졸리-피트 재단이 UNHCR에 100만 달러(한화 약 12억6500만원)를 기부했다. 돈은 파키스탄 난민에 사용될 예정이다. 장기 20세기The Long Twentieth Century를 쓴, 1937년 밀란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출신 사회학자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가 오랜 암투병 끝에 만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009년 6월 17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2010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 1966년 FIFA 월드컵 이후 44년 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본선진출에 성공하여, 사상 첫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2010년 FIFA 월드컵 공동진출이 확정되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텍사스주의 부호 로버트 알렌 스탠포드 및 그의 3개 회사가 80억달러 상당의 주식거래 사기에 관련돼 고발했다고 발표했다. 2009년 6월 16일 예멘에서 12일날 실종 되었던 외국인 9명이 납치된 것으로 밝혀졌고 이들 중 3명이 피살되었다. 납치범의 정체는 불명확하다. 2009년 6월 15일 영국 바클레이즈 그룹의 자산운용사 '바클레이즈 글로벌 인베스터스(BGI)'가 미국 글로벌 자산운용사 블랙록에 3억8천만 파운드(한화 약 7천873억원)에 매각 되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넷판이 전했다. 대한민국에 있는 STX조선은 유럽선주로부터 탱커 4척을 모두 2천128억원에 수주했다고 공시했다. 콜롬비아에서 토마토 축제에 1천여 명이 참가해 열렸다. 올해로 5회째를 맞았고 15톤 이상 토마토가 동원됐다. 2009년 6월 14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동성애자 축제에 350만명이 참가해 열렸다. 올해로 13회째를 맞았다. 사우디 왕자 알왈리드 빈 탈랄이 이끄는 킹덤 그룹은 경제 수도 지다에 건설할 1천 미터 높이의 마천루 개발과 건설감독 용역을 두바이 소재 에마르사에 의뢰했다. 일본 나고야 인근의 고마키 파크 아레나에서 열린 제1회 동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대한민국 대표팀(허재 감독)이 일본(홈팀)과의 경기에서 68대 58로 우승했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가 올랜도 매직과의 미국 농구 협회 경기 결승에서 4승 1패로 우승했다. 팀 통산 15번째 우승이다. 2009년 6월 12일 대한민국 국방부가 황해 북방한계선에서 북한군의 무력도발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대한민국 해병대 1사단과 2사단에서 차출한 병력을 백령도와 연평도에 배치했다. 세계보건기구는 신종플루가 74개국에서 2만9천669명이 감염 되었고 8개국에서 145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보고되었다 대한민국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박연차 게이트 수사와 관련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을 포함해 전체 21명을 기소하고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뇌물수수 의혹 부분은 내사 종결했다는 내용의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대한민국 광주지방경찰청은 40대 남자가 음주운전으로 초등학생을 치고 공기총으로 살해해 야산에 버렸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여성에 대한 남성 보호제도 및 미성년자 사형 등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고 국제 인권감시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가 밝혔다. 앤티가 바부다의 화물선 한 척이 오만 영해에서 해적들에게 납치됐다. 이란의 대통령 선거에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후보가 당선돼 재선에 성공하였다. 세계없는 세계화The Global Gamble의 저자 피터 고완(피터 고언)이 중피종으로 만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009년 6월 11일 세계보건기구가 H1N1 인플루엔자의 전염병 경보 수준을 대유행으로 격상했다. 대유행 선언은 1968년 이후 처음이다. 대한민국 교육과학기술부가 전남 고흥군 봉래면 외나로도 소재에 나로우주센터를 준공했다. 대한민국은 13번째 우주센터 보유 국가가 되었다. 2009년 6월 10일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군사적, 경제적 제재 결의안 초안 마련에 최종 합의했다. 대한민국 서울광장에서 6.10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2009년 대한민국 시국선언,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문화제 등을 내용으로 했다. 중국 진시황의 병마용에 대한 발굴이 20년 만에 재개된다고 중국 동방조보가 보도했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교육청의 공정택이 교육감 선거에서 비리 혐의로 1,2심에서 교육감직 상실형(15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공 교육감 측은 즉각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2009년 6월 9일 브라질 정부가 대서양 상공에서 실종된 에어프랑스 에어버스 A330 447편의 탑승자 시신을 41구 인양했다고 발표했다. 콜롬비아 보건 당국은 "콜롬비아에서 신종 플루에 감염돼 사망한 첫 사례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현재 전 세계 73개 국에서 2만6500명이 감염, 140명이 사망했다. 대한민국 강원도 평창군의 한 어린이집 원생 14명이 수족구병에 감염돼 치료를 받은 것으로 보건소에서 밝혔다. 대한민국 해군이 북한 경비정의 황해 북방한계선 침범에 대비해 함정을 증강배치했다. 미국 연방법원은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 중인 탄자니아 출신 를 뉴욕으로 호송, 첫 재판을 진행했다. 2009년 6월 8일 가봉의 오마르 봉고 대통령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향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009년 6월 7일 중국의 "까오카오(高考)"(대학 입학 시험)에 1020만 명이 참가해 8일까지 시행되었다. 스위스의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가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에서 우승했다. 대한민국의 경찰청 사이버테러대응센터는 해킹 프로그램을 배포해 200만 명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방문자 접속정보를 빼내 미니홈피 이용자들에게 제공하고 2억 원을 챙긴 일당 6명을 (정보통신망법 위반 등) 불구속 입건했다. 2009년 6월 6일 일본 도쿄 동쪽에 있는 지바현 동부 앞바다에서 규모 5.9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일본 기상청이 밝혔다. 2009년 6월 5일 대한민국의 검찰총장이었던 임채진이 임기 6개월을 남겨두고 사퇴하여 퇴임식을 치렀다. 대한민국의 민주당은 이명박 대통령과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발했다. 멕시코 에르모시요에 있는 탁아소에서 화재가 발생해 유아 29명이 사망하고 50명 이상이 부상했다 대한민국의 삼성탈레스 구미사업장에서 첨단 검독수리급 유도탄고속함에 탑재되는 `전투체계'가 양산되기 시작했다. 2009년 6월 4일 중국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운동(1989년 톈안먼 사건) 20주년 기념으로 홍콩 빅토리아공원에서 홍콩시민 15만명(주최측 추산)이 참석해 촛불 집회가 열렸다. 영국에서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국적의 음식제조업체들이 단백질 가루가 주입된 닭고기를 판매한 사실이 적발되었다. 일본의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에서 전기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2009년 6월 3일 인도 의회에서 메이라 쿠마르(64세, 여성)의원이 국회 하원의장으로 당선됐다. 대한민국에서 서울대와 중앙대 교수들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과 관련해 검찰과 이명박 정부를 규탄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2009년 6월 2일 중국인이 마시는 에너지 음료 '홍뉴(紅牛, Red Bull)'에서 코카인이 검출됐다. 2009년 6월 1일 에어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 에어프랑스 소속 AF447편 여객기가 승객과 승무원 등 228명을 태우고 대서양 브라질 연안 상공을 비행하던 중 레이다에서 사라졌다고 샤를 드골 공항 관계자가 밝혔다. AIG 한국 보험이 정식으로 AIA생명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대한민국의 통신회사 KT와 KTF가 합병하여 통합 KT가 정식 출범하였다. 인천 도시철도 1호선 송도신도시 구간(동막~국제업무지구)구간이 개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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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81%EB%8F%84%20%EB%B0%98%EB%A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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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반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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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반류는 태평양과 인도양의 주요한 해류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북위 5도 정도에서 흐른다. 반류는 각 대양내의 해수의 서쪽 방향 흐름을 북적도 해류와 남적도 해류로 균형을 잡는다. 엘니뇨가 발생하는 해에는 이 해류는 태평양에서 강화된다. 태평양의 해류 인도양의 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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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8%94%EB%A3%A8%EC%82%AC%EC%9D%B4%EB%93%9C%20%EC%97%94%EC%A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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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사이드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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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사이드 엔진()은 블루사이드 스튜디오가 개발한 게임 엔진이다. 2012년 9월 6일에 바꾸기 전의 명칭은 페임테크였으며, 페임(FAME)은 ""의 각 단어의 머리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블루사이드 스튜디오의 《킹덤 언더 파이어: 히어로즈》와 《나인티 나인 나이츠》를 개발하는 데 사용된 페임테크 1과 대규모 온라인 게임에 특화된 페임테크 2로 나뉘어 있다. 2008년 12월, 블루사이드 스튜디오가 페임테크 1,2를 상용 엔진으로 판매함을 발표했다. 2012년 9월 6일, 블루사이드 스튜디오는 페임테크와 자사를 별개로 보는 사회적인 인식에 따라 엔진과 회사 간의 연관성을 높이기 위해 페임테크 2를 회사 명칭과 똑같은 "블루사이드 엔진"으로 개명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밝혔다. 엔진을 사용한 게임 페임테크 1 킹덤 언더 파이어: 히어로즈 (2005년, 엑스박스, 블루사이드 스튜디오) 나인티 나인 나이츠 (2006년, 엑스박스 360, 블루사이드 스튜디오) 킹덤 언더 파이어: 써클 오브 둠 (2007년, 엑스박스 360, 블루사이드 스튜디오) 카르마 2 (2009년, 온라인, 드래곤플라이) 페임테크 2(= 블루사이드 엔진) 킹덤 언더 파이어 2 (개발중, 온라인/플레이스테이션 3, 블루사이드 스튜디오) 참조 외부 링크 페임테크 1 소개 페임테크 2 소개 게임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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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염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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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염 또는 항염증성이 염증이 일어나는 과정 또는 이를 억제하는 성질이라고 정의할 때 항염증제(抗炎症劑) 또는 소염제(消炎劑)는 염증(inflammation)을 없애는 성질을 가지고 있거나 염증 과정에 관여하여 이를 억제하는 물질이나 치료를 의미하지만 또다른 방식인 진통제도 포함하기도 한다. 아편 등 마약과 같은 신경성 진통제를 제외한 비마약성 진통제들은 염증 기제에 작용하여 염증을 억제하거나 줄여나감으로써 통증을 없애는 소염 역할을 하는 것이다. 스테로이드계 글루코코르티코이드를 포함한 많은 스테로이드들이 글루코코르티코이드 수용체에 결합하여 붓기와 염증을 줄여준다. 이러한 약물들을 주로 코르티코스테로이드라 부른다. 비스테로이드성 약물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Non-Steroidal anti-inflammatory drugs/NSAIDs)는 시클로옥시지나제(COX; cyclooxygenase) 효소를 저해하여 통증을 완화한다. COX효소는 프로스타글란딘을 합성하는데, 프로스타글란딘이 바로 염증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모든 NSAIDs가 프로스타글란딘의 합성을 저해하기 때문에 통증 완화가 가능한 것이다. NSAIDs 약물의 대표적인 예로 아스피린, 이부프로펜 그리고 나프록센등이 있다. 후에 등장한 COX 특이적인 약물들은 NSAIDs와 그 작용이 비슷하지만 고전적인 NSAIDs와 구분한다. 고전적인 NSAIDs는 상시 발현되는 COX1과 염증이 있을 때만 나타나는 COX2를 가리지 않고 억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염증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부작용 중 하나로 아스피린의 위장장애를 들 수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셀레콕시브와 로페콕시브 등의 COX2 특이적 저해제가 등장했다. 타이레놀로 알려진 아세트아미노펜과 같이 소염효과가 없고, 진통효과만 있는 약물도 있다. 아직 확실한 기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시상하부에만 작용하는 COX3에 특이적으로 작용하여 열과 고통만 없앤다고 생각된다. 또 최근 endocannabinoids의 재흡수를 막는 것으로 보인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이는 염증을 없애지 않고 진통효과만 나타내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장기간 동안 NSAIDs를 사용할 경우, 위장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이는 위궤양을 초래할 수 있다. 또한 천식을 악화시킬 수 있으며 신장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아세트아미노펜 또한 과량 복용 시 간에 위험을 초래한다. 면역 특이 소염 제재 면역 특이 소염 제재(imSAIDs; Immune Selective Anti-Inflammatory Derivatives)는 이뮬란 바이오세라퓨틱스(IMULAN BioTherapeutics, LLC)에서 개발된 펩타이드이다. 이는 다양한 생물학적 특징을 가지는데, 그 중에 염증을 줄이는 특징이 포함되어있다. 면역 특이 소염 제재는 면역 반응을 증폭하는 면역 세포들의 활성과 이동을 변조시킨다. 현재 면역 특이 소염 제재는 스테로이드 계열 제재나 비스테로이드 계열 소염제와는 달리 분류되는 새로운 유형의 소염제로서 구분되고 있다. 면역 특이 소염 제재는 악하선과 침의 생물학적 특징에 대해 연구하던 과학자에 의해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초기의 연구로 악하선에서 체내 염증 반응과 면역 반응을 조절하는 한 무리의 요소들이 나온다는 것이 밝혀졌다. 세포의 재생과 염증 반응을 조절 하는 데에 면역계와 신경계 그리고 내분비계 모두가 서로 상호작용한다는 것은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이러한 신경내분비 전달 경로 중 하나로서, 악하선 경부교감신경간(CST-SMG; cervical sympathetic trunk-submandibular gland)이 있다. 악하선 경부교감신경간의 전반적인 작용 방식은 교감신경에 의해 자극을 받아 악하선에서 면역 반응을 조절하는 물질이 방출되는 것이다. 악하선 경부교감신경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자를 찾기 위한 초기의 연구를 통해, 일곱 가지의 아미노산들이 발견되었다. 이 아미노산들은 악하선 펩티드-t (submandibular gland peptide-t; SGP-T)로 명명된다. 악하선 펩티드-t는 엔도톡신(endotoxin)의 방출과 관련된 생물학적 활성과 체온조절 역할을 한다. 악하선에서 분리된 악하선 펩티드-t는 면역 조절 능력과 염증 반응의 조절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악하선 펩티드-t 유도체 중 하나는 세가지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물질인데, 소염작용에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펩티드는 페닐알라닌-글루타민-글리신(FEG)과 이것의 거울상 이성질체인(feG)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면역 특이 소염 제재 계열을 구성하는 기본이 된다. FeG와 관련된 펩티드들은 백혈구 세포 표면 수용체에 작용해서 과다한 활성을 억제하고 조직 침투를 억제하여 백혈구의 면역 활동을 조절한다. FEG와 그 거울상 이성질체인 feG는 백혈구 표면 부착에 관여하는 αMβ2 인테그린을 조작하며 CD16b 항체가 인간 호중구에 결합하는 것을 억제한다. 또한 호산구의 집적을 막기도 한다. 이 외에도 호산구의 집적을 막아서, 세포내 산화를 낮추며 항원 노출후의 CD49d의 발현을 낮춘다. 허브 소염제로 개발된 약 이외에도, 자연에 존재하는 허브 중에도 소염 작용을 하는 것 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Harpagophytum, hyssop, 생강, 강황, Arnica montana등 헬레날린(helenalin)을 포함하는 것과, sesquiterpene lactone, 그리고 아스피린의 원료가 된 살리실산을 포함하는 버드나무 껍질 등이 있다. 대마초에 들어있는 다양한 카나비노이드 중의 하나인 카나비크로멘(cannabichromene) 역시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염제의 또 다른 기능 몇 가지 임상 연구 결과에 따르면, 비스테로이드 계열의 특정 소염제를 장기 복용했을 때 알츠하이머병에 좋은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존의 알츠하이머 환자에게 소염제를 투여 했을 경우에는 병의 진행을 막거나 돌이키는 데에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연구가 아직 진행 중이다. 얼음 찜질 상처 부위에 얼음이나 차가운 물을 이용해 찜질 하는 것 역시 염증을 줄이는데 효과적이다. 이 방법은 운동선수들이 상처 부위를 치료하거나 통증을 멈추는 데 자주 사용한다. 체온을 떨어뜨리면 주변 혈액의 흐름이 저해되고, 상처 조직의 부기가 완화된다. 음식을 통한 치료 소염 기능을 가진 음식 섭취를 통해서 염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전형적인 소염 식단은 균형 잡힌 채식 위주이다. 채소의 비중이 높은 반면 정제된 탄수화물과 지방의 함량은 낮다. 또 다양한 색깔의 과일과 채소가 많으며, 오메가3가 풍부한 생선 그리고 견과류도 비중이 높다.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기름은 올레오칸탈(oleocanthal)이라는 화학 물질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물질이 이부프로펜과 비슷하게 작용하여 소염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오메가3 지방산은 GPR120 수용체에 결합하여 염증을 일으키는 세포 신호체계를 교란시켜 소염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염증을 완화하는 식물 염증을 완화하는 식물의 피토케미컬은 강황, 생강, 마늘, 양파, 상추 등에 함유된 성분들에서 보여지며 신체내에서 염증을 일으키는 매개인자를 차단하거나 염증을 일으키는 체내 유발인자를 억제하는 등의 기제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이 보기 항산화제 류머티즘 항류머티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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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A8%EA%B0%95%EB%A6%89%20%EB%82%98%EB%93%A4%EB%AA%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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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릉 나들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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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릉 나들목(S.Gangneung IC)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에 설치된 동해고속도로의 34번 교차로이다. 구정면, 강릉시내로 진출할 수 있다. 개요 본래 동해고속도로 왕복 4차로 확장 계획 당시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나들목이다. 구정면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구정 나들목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으며 2004년 11월 24일 강릉 ~ 동해 구간 왕복 4차로 확장 개통 당시 향후 추가 개설을 대비하기 위한 일부 토목 공사만 이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동해고속도로 강릉 ~ 동해 구간 확장 개통 당시 강릉시에 개설된 나들목은 기존 평면 교차로 수보다 적은 강릉 나들목, 옥계 나들목만 개통되었기 때문에 이 두 나들목으로 교통량이 집중되어 교통혼잡이 우려되자 강릉시에서 조기 개설을 건의하고 나섰다. 2005년 1월 1일 정동진 새해 해맞이 행사가 진행되고 나서 이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는데, 정동진과 안인 통일안보공원 등지에 몰렸던 관광객 차량들이 이 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평소 15분 정도 소요되던 정동진 ~ 강릉시내 이동 시간이 무려 2시간 이상 걸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강릉시에서는 건설교통부가 연결도로만 개설되면 남강릉 나들목을 개설하겠다는 방침을 보이자 조기 개설에 빨리 나설 수 있도록 군도 3호선을 거쳐 국도 7호선에 이르는 나들목 접속도로 4.9km에 대한 토공 및 포장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예산 문제로 전 구간 공사 진행이 어렵게 되자 우선 34억원을 들여 접속도로 1.7 km 구간만 개설해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로 통하는 7번 국도와 임시 연결하고 2006년 말까지 남강릉 IC에서 구 고속도로와 연결되는 도로를 완공하기로 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2005년 5월 강릉시는 건설교통부를 방문해 남강릉 나들목 연결 도로 개설 공사 마무리에 필요한 국비 지원을 약속받았으며, 2006년 5월 24일 나들목 개설 공사가 착공되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착공된 남강릉 나들목은 접속도로 개설 공사에 필요한 일부 예산이 추경예산에서 삭감되고 공사 일수도 촉박해 2007년 말까지 준공이 어렵게 되자 강릉시에서는 2007년 예산에 이 도로 공사에 최대한 반영하고 안될 경우 지방채까지 발행해서라도 충당하겠다고 밝혔으며, 2007년 2월 강릉시와 건설교통부, 한국도로공사가 긴급 회의를 열어 2007년 말까지 개통하기로 합의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준공검사를 진행했으며, 12월 20일에 개통했다. 연혁 2006년 5월 24일 : 나들목 개설 착공 2007년 12월 20일 : 나들목 개통 구조물 정보 위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영업소: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구정면 동해고속도로 340 접속하는 도로 칠성로 간접 연결 : 국도 제7호선 (동해대로, 유산교 이용) 교통량 정보 각주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나들목 강원특별자치도의 고속도로 나들목 강릉시의 교통 동해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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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B2%84%ED%8A%B8%20%EB%B2%A0%EC%96%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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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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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베어(Robert Baer, 1952년 7월 1일 -)는 CIA의 전직 작전관이자 작가이다. 콜로라도주 아스펜에서 자란, 로버트 베어는 원래 프로 스키 선수를 지망했었다. 고등학교 초의 성적이 좋지 않자 어머니는 그를 군사학교로 보냈다. 1976년, 베어는 조지타운 대학교 외교학부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들어간 후, CIA의 작전 본부(Directorate of Operations; DO)의 작전관을 지원한다. CIA에 들어가서는 4개월의 준군사작전 훈련을 포함한 1년간의 훈련을 받았다. 1976년부터 1997년까지 21년간 CIA 작전본부 소속으로 인도, 레바논, 수단, 프랑스, 이라크, 타지키스탄, 보스니아 등에서 근무하며 중동지역 전문 요원으로 경력을 쌓았다. 1995년 CIA의 비밀 공작을 통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 전복을 지원할 것을 클린턴 행정부에게 촉구하다 실패한 후, 베어는 CIA를 사직하였다. 그는 See No Evil을 써서 CIA서 일하는 동안의 경험을 글로 남겼다. 이 책은 2005년 워너 브러더즈의 영화 Syriana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베어는 CIA 요원으로 지냈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본 중동 분석을 제시한다. 그의 정치적 신조는 다소 불분명하며, 그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양쪽 관점을 모두 보이고 있다. CIA 경력 1976년 CIA 입사, 비밀 활동 부문 작전관(Clandestine Service, Operations Officer) 채용 1977? ~ 78년 작전본부 근동국(Near East Division) 소속으로 최초 해외 근무.인도 파견. 처음에는 마드라스 기지.후 뉴델리 지국 마드라스 근무 중 인도 군에 파견(군사 고문?)된 모 아랍국가(시리아?) 장교 Sami 관계 구축 .포섭 시도 무위 1981년 본부 귀국. 아랍어 연수 코스 과정 시작 (2년짜리. 현지 실습 과정 포함. 튀니지) 1983~1985년 아랍어 코스 수료. 83. 4 베이루트 미 대사관 폭파 사건. 83.8 중동 모 전초기지 부임. 해당 지역 근거 레바논 정보 수집 베이루트 해병기지 폭파 사건(83.10) 베이루트 CIA 지국장 빌 버클리 납치사건 (84.3) 등 해당 사안 관계 정보 수집, 현장 조사 1985년 85.1 수단 하르툼 지국 부임(지국장 밀튼 비어든 Mealton Bearden) 85.5 본부 전보 (리비아 반체제 인사-무슬림 형제단 계열 인사 접촉 관계 보안 문제) 아프리카 국 근무 1986년 86.1 미중앙정보부 테러대책센터 (Counter-Terrorism Center; CTC) 배치 86.2 아사드 암살 계획 관련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과 독일에서 접촉 86.8 레바논 베이루트 지국 부임. 헤즈볼라 억류 인질 구출 및 시리아, 이란, 시아파, 팔레스타인계 테러 조직 관계 정보 담당 1988년~1990년 88. 프랑스 파리 지국 부임(지국장 찰스 코건 Charles Cogan) 1990/91년? ~ 1992년 모로코 라바트 지국 부지국장 1992년~1994년 타지키스탄 두샨베 지국장 92.10~93.1 정정불안에 따른 두샨베 지국 폐쇄에 따라 일시 키르기스스탄 거주. 93.1 두산베 지국 복귀 1994년 본부 복귀. 근동국 이라크 작전단 부단장(Deputy Chief of Iraq Operations Group). 1995년 95.1 북부 이라크 파견. 후세인 전복 비밀 공작 지휘 95.3 쿠르드족 봉기 계획 무산. 본부 귀국 (암살 기도 혐의 관계 FBI로부터 조사) 그 후 중앙유라시아국 남부(작전)단 부단장(Deputy Chief of South Group)으로 중앙 아시아 및 카프카스 8개국 담당. 해당 부서 재직 중 카스피 해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 석유업자 로저 탐라즈(Roger Tamraz)와 접촉. 탐라즈와 당시 NSC 러시아 우크라이나 유라시아 담당관 쉴라 헤슬린(Sheila Heslin) 사이의 대립에 연루. 1996년 남부(작전)단장(Chief of South Group) 1997년 97.12 CIA 사직 책 See No Evil: The True Story of a Ground Soldier in the CIA's War on Terrorism , Crown, 2002, Sleeping With the Devil: How Washington Sold Our Soul for Saudi Crude, Crown, 2003, 곽인찬 역, 악마와의 동침: 워싱턴과 사우디 왕가의 추악한 거래, 도서출판 중심, 2004년, 영화 Syriana - See No Evil을 원작으로 헐리우드 스타 조지 클루니가 로버트 베어를 재구성한 인물로 등장하는 영화 다크 아일랜드 - 터프 역 외부 링크 Guardian지의 See No Evil 발췌(영문) PBS Frontline과의 인터뷰(2002년 3월 22일, 영문)): 이란 문제 관련 BuzzFlash.com과의 인터뷰(2003년 9월 12일, 영문): 사우디/이라크를 중심으로 한 중동문제 관련 Syriana 시사회장에서 chud.com과의 인터뷰(2005년 11월 20일, 영문): 중동문제 전반 관련 BBC3와의 인터뷰(영문): CIA의 고문/취조 관련 The Cult of the Suicide Bomber 195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미국의 정치 작가 미국의 소설가 미국의 역사가 CIA 요원 유격전 이론가 심리전 이론가 대분란전 이론가 냉전기의 간첩 탈냉전 시대의 간첩 로스앤젤레스 출신 조지타운 대학교 동문 20세기 작가 21세기 작가 테러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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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타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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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타 제국은 서기 4세기 초부터 서기 6세기 후반까지 존재했던 고대 인도 제국이다. 서기 약 319년부터 467년까지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하며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기는 역사가들에 의해 인도의 황금기로 간주된다. 제국의 왕조는 스리굽타 왕에 의해 설립되었다. 왕조의 가장 주목할만한 통치자는 찬드라굽타 1세, 사무드라굽타, 찬드라굽타 2세 및 스칸다굽타였다. 서기 5세기 산스크리트어 시인 칼리다사는 파라시카 왕국, 후나 왕국, 캄보자 왕국, 서부와 동부 옥서스 계곡에 위치한 부족, 킨나라 왕국, 키라타 및 기타 왕국을 포함하여 인도 안팎에서 약 21개 왕국을 정복한 굽타를 인정한다. 이 시기의 최고점은 주로 사무드라굽타, 찬드라굽타 2세, 쿠마라굽타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일어난 위대한 문화적 발전이다.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와 같은 많은 힌두 서사시와 문학 자료가 이 시기에 시성되었다. 굽타 시대는 칼리다사, 아리아바타, 바라하미히라, 바트샤야나와 같은 많은 학문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룬 학자들을 배출했다. 과학과 정치 행정은 굽타 시대에 새로운 정점에 도달했다. 이 기간은 "인도뿐만 아니라 국경 너머까지 예술의 전체 후속 과정을 결정하는 형식과 취향의 기준을 설정"한 건축, 조각 및 회화 분야의 성과를 낳았다. 강력한 무역 관계는 또한 지역을 중요한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고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인근 왕국과 지역에 영향을 미칠 기지로 이 지역을 설립했다. 다양한 주제에 대한 초기의 긴 시인 푸라나도 이 시기에 기록된 텍스트에 투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통치자들은 힌두교를 숭상했고 브라만은 굽타 제국에서 번성했지만 굽타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용인했다. 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후나족(키다라족과 알촌 훈족)의 침략은 물론 이전의 봉건제국으로 인한 영토와 제국의 권위를 크게 상실하는 등의 요인으로 인해 결국 멸망했다. 6세기 굽타 제국이 무너진 후 인도는 다시 수많은 지역 왕국의 통치를 받았다. 기원 굽타의 고향은 불확실하다. 한 이론에 따르면, 그들은 초기 굽타 왕의 비문과 동전 저장고의 대부분이 발견된 오늘날의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낮은 도압 지역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이론은 초기 굽타 왕의 영토를 갠지스 분지의 프라야가, 사케타, 마가다 지역으로 언급하는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푸라나에서도 뒷받침된다. 또 다른 저명한 이론은 7세기 당나라 불교 승려 의정의 설명에 근거하여 갠지스 분지의 현재 벵골 지역에 있는 굽타 고향을 찾는다. 의정에 따르면 실리급다 왕(스리굽타와 동일시됨)은 미리기아시기아포노(미리가-시캬-바나) 근처에 중국인 순례자들을 위한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의정은 이 사원이 날란다에서 동쪽으로 40요자나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고 말한다. 이는 현대 벵골 지역 어딘가에 위치했음을 의미한다. 또 다른 주장은 초기 굽타 왕국이 서쪽의 프라야가에서 동쪽의 북부 벵골까지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굽타 기록에는 왕조의 바르나(사회 계급)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AS 알테카르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특정 고대 인도 텍스트가 바이샤 바르나 구성원에 대해 "굽타"라는 이름을 규정하기 때문에 바이샤 기원이라고 이론화했다. 역사가 RS 샤르마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무역과 관련이 있었던 바이샤는 이전 통치자의 압제적인 세금에 저항한 후 통치자가 되었을 수 있다. 바이샤-기원 이론의 비평가들은 접미사 굽타(Gupta)가 이전과 굽타 기간 동안 여러 비바이샤의 이름에서 특징지어지며 왕조 이름 "굽타"는 단순히 가족의 첫 번째 왕 굽타에서 파생되었을 수 있다. SR 고얄과 같은 일부 학자들은 굽타가 브라만과 결혼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브라만이었다고 이론화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 증거가 결정적이지 않다고 거부한다. 굽타의 공주 프라바바티굽타의 푸네와 리다푸르 비문에 근거하여, 일부 학자들은 그녀의 친고트라(종족)의 이름이 "다라나"라고 믿지만, 이 비문들의 다른 해석은 다라나가 그녀의 어머니 쿠베라나가의 고트라였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네팔과 데칸에서의 최근 발굴은 굽타 접미사가 아비라 왕들 사이에서 일반적이었고, 역사가 DR 레그미는 굽타 황실과 네팔의 아비라 굽타를 연결한다는 것을 밝혔다. 바가바탐에서는 굽타 왕조를 아비르라고 불렀다. 역사 초기 통치자 굽타(굽타 문자: 19x19픽셀, fl. 서기 3세기 후반)는 왕조의 가장 초기에 알려진 왕이다. 다양한 역사가들은 그의 통치 시작을 서기 3세기 중후반에서 시작했다고 다양하게 기록한다. 굽타 왕조의 개창자인 스리굽타는 서기 240년부터 280년까지, 그의 아들인 가톳트카차는 서기 280년부터 319년까지, 가톳트카차의 아들 찬드라굽타는 서기 319년부터 335년까지 왕조를 다스렸다. "실리급다(室利笈多)"는 7세기 중국 불교 승려 의정이 언급한 왕의 이름으로 "스리굽타"( IAST : Śrigupta)의 번역어로 여겨지며 "스리"는 경칭 접두사이다. 의정에 따르면 이 왕은 미리기아시기아포노(미리가-시캬-바나) 근처에 중국 불교 순례자들을 위한 절을 세웠다. 알리하바드 기둥 비문에서 굽타와 그의 후계자 가톳카차굽타는 마하라자("대왕")로 묘사되고 다음 왕 찬드라굽타 1세는 마하라자디라자("대왕중왕")라고 묘사된다. 후기에는 마하라자라는 칭호가 봉건 통치자들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이는 굽타와 가톳카차가 아마도 쿠샨 제국의 가신이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굽타 이전과 굽타 이후 시대에 마하라자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최고 주권자의 여러 사례가 있으므로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다만, 굽타와 카톳카차가 낮은 지위를 가졌고 찬드라굽타 1세보다 덜 강력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찬드라굽타 1세는 리차비 공주 쿠마라데비와 결혼했는데, 이는 그가 그의 정치적 권력과 지배권을 확장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수 있으며, 그가 마하라자디라자라는 황실 칭호를 채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왕조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들인 사무드라굽타가 제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카차라는 굽타 통치자가 발행한 동전의 발견은 이 주제에 대한 약간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 이론에 따르면 카차는 사무드라굽타의 별명이다. 또 다른 이론은 카차가 왕좌에 대한 경쟁 주장자였다는 것이다. 사무드라굽타 사무드라굽타는 서기 335년 또는 350년경에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여 서기 375년까지 제국을 통치했다. 그의 신하가 작성한 알리하바드 칙령 비문은 그를 광범위한 정복자로 인정한다. 비문은 사무드라굽타가 나가족을 포함하여 북부 지역인 아리아바르타의 8왕을 뿌리뽑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가 인도 중부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삼림 지역의 모든 왕을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남부 지역인 닥쉬나파타(Dakshinapatha)의 12명의 통치자를 패배시킨 공로를 인정한다. 이들 왕 중 몇 명에 대한 정확한 신원은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이 왕들이 동부 해안에 위치한 지역을 통치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비문은 사무드라굽타가 남쪽의 팔라바까지 진출하여 칸치푸람의 팔라바 섭정인 비슈누고파를 물리쳤다고 암시한다. 이 남부 전역에서 사무드라굽타는 아마도 중앙 인도의 숲 지역을 통과하여 현재 오디샤주의 동부 해안에 도달한 다음 벵골만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행군했다.알라하바드 기둥 비문에는 여러 국경 왕국과 부족 과두정의 통치자들이 사무드라굽타에게 공물을 바치고 그의 명령에 복종했으며 그 앞에서 경의를 표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국경 왕국에는 카마루파, 네팔라 및 카트리푸라가 포함된다. 부족 과두 정치에는 말라바, 아르주나야나, 야우데야, 마드라카, 아비라 등이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비문에는 여러 외국 왕이 개인 자격으로 사무드라굽타를 기쁘게하려고 노력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에게 그들의 딸을 결혼시키겠다고 제안했다(또는 다른 해석에 따르면 그에게 처녀를 선물했다). 자신의 영토를 관리하기 위해 굽타 인장을 묘사하는 가루다의 사용을 모색했다. 이것은 과장이다. 예를 들어 비문에는 이 왕들 중 싱할라 왕이 나열되어 있다. 싱할라 왕 메가바르나가 굽타 황제에게 부다가야에 불교 사찰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하는 풍부한 선물을 보냈다는 중국 소식통이 알려져 있다. 사무드라굽타는 그의 에란 비문 에 의해 증명된 바와 같이 비슈누교도인 것으로 보이며 여러 브라만교 의식을 수행했다. 기록은 그가 소와 금을 아낌없이 기부한 공로를 인정한다. 그는 고대 인도 왕들이 제국의 주권을 증명하기 위해 거행했던 아슈바메다 의식(말 희생)을 거행하고 이 의식을 기념하기 위해 금화(아래 주화 참조)를 발행했다. 알리하바드 기둥 비문은 사무드라굽타를 현명한 왕이자 엄격한 행정관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을 도울 만큼 동정심이 많았다. 또한 음악가이자 시인으로서 왕의 재능을 암시하며 그를 "시인왕"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비나를 연주하는 모습을 묘사한 금화에 의해 확증된다. 사무드라굽타는 오늘날 인도에 있는 인도-갠지스 평원의 상당 부분과 인도 중부의 상당 부분을 직접 통제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제국은 인도 북부와 인도 남동부 해안 지역의 여러 군주제 및 부족 지류 국가로 구성되었다. 라마굽타(375년 ~ 380년) 6세기 산스크리트어 연극인 데비-찬드라굽탐에 따르면 사무드라굽타와 찬드라굽타 2세의 공백기인 375년부터 380년까지는 라마굽타라는 군주가 굽타 제국을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 연극에 따르면 찬드라굽타 2세 사후 제위에 오른 라마굽타는 사카족과 전쟁을 벌이다 패배할 위기에 놓였고 이때 라마굽타가 자신의 아내인 드루바데비를 사카족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평화 조건을 맺으려 하자 이에 화가 난 찬드라굽타 2세가 드루바데비로 변장해 사카족 왕을 살해하였으며, 이 사실을 안 백성들은 라마굽타를 비열하다고 비난하는 동시에 찬드라굽타 2세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신망을 잃게 된 라마굽타는 백성들의 신망을 받던 찬드라굽타 2세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찬드라굽타 2세에 의해 역으로 살해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의 역사성은 불분명하지만 라마굽타의 존재는 두르잔푸르에서 발견된 3개의 자이나교 조각상과 그를 마하라자디라자로 부르는 비문으로 확인된다. 그의 많은 구리 동전도 에란 - 비디샤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며 가루다, 가루다디바자, 사자 및 국경 전설 유형을 포함하는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이 동전에 대한 브라흐미 전설은 초기 굽타 양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찬드라굽타 2세 비크라마디트야(380년 ~ 415년) 굽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들들 중에서 사무드라굽타는 닷타데비 황후에게서 태어난 찬드라굽타 황자를 그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찬드라굽타 2세, 또는 비크라마디티야(태양의 승리)는 375년부터 415년까지 제국을 통치했다. 그는 쿤탈라의 카담바 공주이자 나가 혈통의 쿠베라나가와 결혼했다. 이 나가 황후의 딸 프라바바티굽타는 데칸의 바카타카 통치자 루드라세나 2세와 결혼했다. 그의 아들 쿠마라굽타 1세는 카르나타카 지역의 카담바 공주와 결혼했다. 찬드라굽타 2세는 409년까지 지속된 군사 원정에서 말와, 구자라트 및 사우라슈트라를 장악하고 있던 서사트라프를 물리치고 제국의 영토를 서쪽으로 확장했다. 395년에 그의 주요 적대자인 루드라심하 3세에게 승리하고 벵골 토후를 물리쳤다. 이것은 그의 통제권을 해안에서 해안으로 확장했고 우자인에 두 번째 수도를 세웠으며 제국의 전성기였다. 인도 카르나타카주의 쿤탈라 지역에 있는 쿤탈라 비문은 찬드라굽타의 통치를 나타낸다. 훈자 비문은 또한 찬드라굽타가 인도 북서부 아대륙을 통치할 수 있었고 발흐를 정복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지만 일부 학자들은 굽타 왕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전쟁을 통한 제국의 창조에도 불구하고 찬드라굽타의 치세는 힌두교 예술, 문학, 문화 및 과학의 매우 영향력 있는 스타일로 기억된다. 데오가르의 다샤바타라 사원에 있는 패널과 같은 일부 훌륭한 힌두교 예술 작품은 굽타 예술의 장엄함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굽타 예술에 독특한 풍미를 부여한 것은 요소들의 합성이었다. 이 기간 동안 굽타는 번성하는 불교와 자이나교 문화도 지원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비힌두 굽타 미술의 오랜 역사가 존재했다. 특히 굽타 시대의 불교 미술은 대부분의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 학자이자 여행 법현은 그의 일기에 많은 진보를 기록하고 나중에 출판했다. 찬드라굽타의 궁정은 문학 예술에 뛰어난 9명의 집단인 나바라트나(아홉 보석)의 은총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유명해졌다. 이들 중에는 칼리다사가 있는데, 그의 작품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다른 많은 문학적 천재들의 작품을 왜소하게 만들었다. 칼리다사는 주로 그의 구절에서 슈링가라(로맨틱) 요소를 미묘하게 사용한 것으로 유명했다. 찬드라굽타 2세의 외국 부족에 대한 원정 4세기 산스크리트 시인 칼리다사는 찬드라굽타 비크라마디티야가 인도 안팎에서 약 21개 왕국을 정복한 공로를 인정한다. 그는 동인도와 서인도에서의 캠페인을 마친 후 북쪽으로 진행하여 파라시카를 정복한 다음 서쪽과 동쪽 아무다리야강 계곡에 각각 위치한 후나족과 캄보자족을 정복했다. 그 후 왕은 킨나라, 키라타 및 인도 고유의 산악 부족을 줄이기 위해 히말라야 산맥으로 진격했다. 칼리다사는 그의 작품에서 '사랑스러운 우자인의 도시에서 사카족을 몰아낸 사람이 비크라마디티야가 아니었는가?'라고 쓰며 그가 사카족을 몰아낸 공로를 인정한다. 카슈미르 작가 크셰멘드라가 저술한 브리하트카타만자리에서는 비크라마디티야 왕이 "이 죄 많은 믈레차를 완전히 전멸시킴으로써 사카족, 믈레차족, 캄보자족, 야바나족, 투샤라족, 파라시카족, 후나족과 같은 야만인들을 신성한 땅에서 털어냈다"고 주장한다. 법현의 인도 순례 법현은 중국 동진의 불교도로서 굽타 황제 찬드라굽타 2세 재위 기간 중 인도를 방문한 순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399년에 동진에서 출발하여 405년에 인도에 도착했으며, 411년까지 인도에 머물면서 마투라, 카나우지, 카필라바스투, 쿠시나가르, 바이샬리, 파탈리푸트라, 카시, 라자그리하를 순례하며 제국의 상황을 면밀히 관찰했다. 법현은 관리의 온화함에 만족했다. 형법은 온화했고 범죄는 벌금형으로만 처벌되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굽타 제국은 번영한 시기였다. 그의 글은 이 시대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를 형성한다. "눈과 더위가 곱게 누그러지고 서리도 눈도 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많고 행복하다. 그들은 가구를 신고할 필요가 없다. 왕토를 경작하는 자만이 그로부터 얻은 이익을 (일부) 지불하면 된다. 만약 그들이 가고 싶다면, 그들은 간다. 그들이 계속 머무르고 싶다면, 그들은 계속 머무른다. 왕은 참수나 (기타) 체벌 없이 통치한다. 범죄자들은 단순히 상황에 따라 벌금을 지불한다. 악랄한 반란을 반복적으로 시도하는 경우에도 오른손만 잘릴 뿐이다. 왕의 경호원들과 수행원들은 모두 급여를 받는다. 전국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생물도 죽이지 않고, 어떤 술도 마시지 않으며, 양파나 마늘도 먹지 않는다." 쿠마라굽타 1세(415년 ~ 455년) 찬드라굽타 2세는 마하데비 드루바스바미니가 낳은 그의 둘째 아들인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계승되었다. 쿠마라굽타 1세는 마헨드라디티야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455년까지 통치했다. 그의 통치가 끝날 무렵 나르마다 계곡의 한 부족인 푸쉬야미트라가 권력을 장악하여 제국을 위협했다. 키다라족은 아마도 쿠마라굽타 1세의 통치가 끝날 무렵 굽타 제국과 대결했을 것이다. 그의 아들 스칸다굽타는 비타리 기둥 비문에서 푸쉬야미트라 및 후나족에 대한 군사적 승리와 재조직을 통해 혼란에 빠진 국가를 재편하려는 그의 노력을 언급했다. 그는 2016년 7월 15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날란다 대학의 설립자였다. 쿠마라굽타 1세는 또한 카르티케야의 추종자였다. 스칸다굽타(455년 ~ 467년) 쿠마라굽타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스칸다굽타는 일반적으로 마지막 굽타 명군으로 간주된다. 그는 비크라마디티야와 크라마디티야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는 푸샤미트라족의 위협을 물리쳤지만, 그 후 북서쪽에서 침입하는 키다라족(때때로 에프탈 또는 "알촌 훈"으로 묘사되며 인도에서는 스웨타후나로 알려짐)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서기 455년경에 후나족의 공격을 격퇴했지만, 전쟁 비용으로 인해 제국의 자원이 고갈되어 제국의 쇠퇴에 기여했다. 스칸다굽타의 비타리 기둥 비문은 키다라족의 공격으로 굽타 제국이 전멸에 가까워진 것을 회상한다. 키다라족은 굽타 제국의 서쪽 부분을 차지한 것 같다. 스칸다굽타는 467년에 죽었고 그의 형제인 푸루굽타가 제위를 계승했다. 제국의 쇠퇴 스칸다굽타 사후 제국은 분명히 쇠퇴하고 있었으며, 이후 발행된 굽타 주화는 467-469년 이후 서인도 대부분에 대한 굽타의 통제력 상실을 보여준다. 스칸다굽타에 이어 푸루굽타(467–473), 쿠마라굽타 2세(473–476), 부다굽타(476–495), 나라심하굽타(495–530), 쿠마라굽타 3세(530–540), 비슈누굽타(540–550)가 차례대로 제위를 계승했으며, 그 외에도 바이냐굽타와 바누굽타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두 명의 황제가 존재했다. 480년대에 토라마나와 미히라쿨라 휘하의 알춘 훈족은 북서쪽의 굽타 방어선을 돌파했고, 북서부 제국의 대부분은 500년까지 훈족에게 점령당했다. 일부 학자에 따르면 제국은 토라마나와 그의 후계자 미히라쿨라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비문을 보면 굽타는 힘이 많이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훈족에 저항한 것으로 보인다. 훈족 침략자 토라마나는 510년에 바누굽타에게 패배했다. 훈족은 말와의 야소다르만 왕과 아마도 굽타 황제 나라심하굽타에 의해 528년에 패배하여 인도에서 쫓겨났다. 이러한 침략은 불과 수십년에 불과했지만 인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고전 인도 문명을 종식시켰다. 이민족의 침략 직후, 외부의 침략과 더붙어 야소다르만과 같은 지역 통치자의 부상으로 이미 쇠퇴하던 굽타 제국은 종지부를 찍었다. 침략 이후 인도 북부는 혼란에 빠졌고 굽타가 무너진 후 수많은 군소 인도 세력이 등장했다. 후나족의 침략은 유럽 및 중앙아시아와의 인도 무역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굽타 제국이 큰 혜택을 받았던 인도-로마 무역 관계가 큰 타격을 받았다. 굽타는 나시크, 파이탄, 파탈리푸트라 및 바라나시와 같은 중심지에서 실크, 가죽 제품, 모피, 철 제품, 상아, 진주 및 후추와 같은 수많은 고급 제품을 수출하고 있었다. 후나족의 침공은 아마도 이러한 무역 관계와 그에 따른 세수를 방해했을 것이다. 게다가 인도의 도시 문화는 쇠퇴했고, 불교는 맹렬한 반불교 시바교도 미히라쿨라의 손에 의한 수도원 파괴와 승려 살해로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탁실라와 같은 훌륭한 교육 센터가 파괴되어 문화적 퇴보를 가져왔다. 60년 동안 알촌은 지배 가족의 계층 구조와 인도 카스트 제도를 변경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후나는 종종 라지푸트의 선구자로 여겨졌다. 6세기 굽타 왕조의 승계는 완전히 명확하지 않지만, 왕조의 본선에서 가장 마지막에 인정된 통치자는 540년에서 550년까지 통치한 비슈누굽타 황제였다. 제국의 쇠퇴한 요인에는 훈족의 침략뿐만 아니라 바카타카와의 경쟁과 말와의 야소다르만의 세력 부상이 포함된다. 굽타 황제에 의해 마지막으로 알려진 비문은 비슈누굽타의 치세때 나온 다모다푸르 동판 비문으로, 그는 서기 542/543년에 코티바르샤(서벵골의 반가르) 지역에서 토지를 하사했다. 이것은 532년경 아울리카라 통치자 야소다르만이 인도 북부와 중부 대부분을 점령한 이후이다. 고고학자 샨케르 샤르마의 2019년 연구는 굽타 제국의 몰락 원인이 6세기 중반 우타르프라데시와 비하르에서 발생한 파괴적인 홍수라고 결론지었다. 굽타 이후의 후계 왕조 이전 굽타 제국의 중심부인 갠지스 지역에서 굽타 왕조는 마우카리 왕조와 푸슈야부티 왕조로 이어졌다. 마우카리와 푸샤부티의 주화는 굽타의 은화 유형을 따랐으며, 측면에는 통치자의 초상화가 있고(적대감의 상징인 굽타에 비해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음) 뒷면에는 공작이 있다. 브라흐미 전설은 통치자의 이름을 제외하고 유지된다. 서부 지역에서는 구르자라, 프라티하라 및 찰루키아-파라마라 왕조가 알촌 훈족에 의해 인도에 도입된 사산 제국의 주화를 모델로 소위 인도-사산 주화를 발행했다. 행정 중앙 일반적으로 마우리아 제국에서 실시하던 전통적인 관료제도를 대부분 답습하여 세분화시켰는데, 중앙 정부는 각각 재상 직책의 마하 만트리, 오늘날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마하 발라디크리타, 사법부 수반에 해당하는 마하 단다나야카, 일반 행정의 책임자 마하 프라티하라들이 최고 통치자인 황제와 함께 국정을 다스렸다. 지방 굽타 제국의 비문 기록에 대한 연구는 행정 구역이 위에서 아래로 계층적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제국은 라지야, 라슈트라, 데샤, 만다라, 프리스비, 아바니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제국은 26개 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 주는 부크티, 프라데샤, 보가로 구분되었으며, 각 주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총독직인 우파리카가 통치하였다. 주들도 비샤야라는 하위 행정구역들로 나뉘었고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인 비샤야파티의 지배하에 놓였다. 비샤야파티는 아디카르마라고 불리는 직업별 대표자들로 구성된 집회의 조언을 얻어 비샤야를 통치하였는데, 이 아디카르마는 나가라 슈레스틴(도시의 부자 또는 길드의 대표), 스타라브라하(상인 대표), 프라타마 쿨리카(수공업자 대표), 프라타마 케야스타(지방행정 대표)로 구성되었다. 비샤야는 다시 비티(현)로 세분화되었고 비티는 다시 그라마(마을)로 세분화되었으며, 그라마카(촌장)가 마을 원로들의 도움을 받으며 그라마를 통치하였다. 변경 지방에는 황족 출신의 총독을 파견하고 해당 지역의 토착세력들을 지휘 및 감독토록 했는데, 총독은 관할 지역의 행정권, 군사권, 사법권 등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한편 지역 관리를 직접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독립적인 상태에 있었다. 이와 같이 굽타 제국 시기 각 지역은 대부분의 일을 중앙 정부의 지시 없이 직접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독립된 권위를 지닌 지방자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회 굽타 시대에 브라만교가 힌두교라는 형태로 부활함과 함께 이민족의 유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무역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전체적인 경제 수준이 크게 향상되며 상인 계급의 지위가 신장되는 등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나고 특히 힌두교로 부활한 브라만교는 바르나 체제를 정착시키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굽타 시대에 4중 바르나 체계가 관찰되었지만 카스트 체계는 유동적이었으며, 굽타 사회는 대체로 그들 사이에서 공존을 이루었다. 굽타의 힌두화가 진행되며 브라만들의 지위가 높아졌지만, 브라만들은 비브라만적인 직업을 따랐고, 왕족이자 무사 계급인 크샤트리야는 한편으로 무역과 상업에 관여했으며, 사제층인 브라만 계급과의 상호 협력을 거듭하며 브라만의 권한인 제사 의식을 독자적으로 거행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 지역의 경제를 담당하던 바이샤 계급 또한 굽타 경제가 성장을 이루자 지역의 경제권을 바탕으로 권한을 확대하여 지역의 행정회의에도 참석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발언권을 행사하게 되고 수드라 계급 또한 제한적이나마 어느 정도의 자유를 누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직업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으며, 육체노동자에 가까운 수드라 계급과 노예에 가까운 찬달라 간의 구별이 이루어졌다. 법률 굽타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바르나와 자티 기반의 카스트 제도가 인도 사회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굽타 제국은 이 카스트 제도를 기반으로 각종 의무나 법률들을 제시한 마누 법전을 기반으로 하는 법 체계를 실시하였으며, 기존의 마누 법전을 보완하기 위하여 나라다 법전, 브라하스파티 법전, 카티야야나 법전 등의 법전들을 새로 반포하여 재판 시의 준칙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군사 마우리아 제국과 대조적으로 굽타는 인도 전쟁사에 몇 가지 군사적 혁신을 도입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공성 엔진, 중기병 궁수 및 중검 기병의 사용이었다. 중기병은 굽타 군대의 핵심을 이루었고 전통적인 인도 군대 요소인 전투 코끼리와 경보병의 지원을 받았다. 굽타 시대에 기마 궁수의 활용은 황제를 기마 궁수로 묘사한 찬드라굽타 2세, 쿠마라굽타 1세 및 프라카사디티야(푸루굽타로 추정)의 주화에서 입증된다. 불행히도 굽타군의 전술적 작전을 자세히 설명하는 현대 자료가 부족하다. 현존하는 최고의 정보는 고전 산스크리트 작가이자 극작가인 칼리다사가 쓴 산스크리트어 서사시 라구밤사에서 나온다. 많은 현대 학자들은 칼리다사가 찬드라굽타 2세의 치세에서 스칸다굽타의 치세까지 살았고 라구밤사의 주인공인 라구의 원정이 찬드라굽타 2세의 군사 원정을 반영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라구밤사의 칸토 IV에서 칼리다사는 왕의 군대가 강력하고 기병 중심의 페르시아인과 나중에 북서부의 야바나(아마도 훈족)의 군대와 어떻게 충돌하는지 설명한다. 여기에서 그는 왕의 군대에서 기마 궁수를 사용하는 것과 치열한 전투 후에 말들이 많은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특별히 언급한다. 굽타군의 다섯 군대에는 보병, 기병, 전차, 코끼리 및 선박이 포함되었다. 바이냐굽타의 구나이가르 동판 비문에는 선박이 언급되어 있지만 전차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배는 서기 6세기에 인도 군대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경제 굽타 제국에서는 찬드라굽타 2세(은화)와 쿠마라굽타(동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황제들이 금화를 자주 유통하여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었다. 또한 이전부터 존재하던 무역과 상업 길드 조직이 굽타 시대에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는데 정부의 간섭을 받던 마우리아 시대의 길드와는 달리 독립적이고 자치적으로 길드가 운영되었으며, 길드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지방 행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그 중에는 사병들을 두어 지배자들에게 자신들의 권익을 반영한 법을 제정하라고 위협을 가하거나 상거래의 편의를 위해 독자적으로 화폐를 만드는 길드도 있었다. 굽타 제국은 사우라슈트라 지역 같이 아라비아해와 맞닿은 서인도 지역의 항구들을 차지함으로서 동서양의 교통 요충지를 확보해 유럽과의 무역을 직접 관장하였으며, 마투라와 바라나시가 각각 면화와 비단의 주산지로 알려져 서북부 인도의 무역과 대외 무역의 주요 품목을 차지했다. 대외 무역으로는 인도양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무역을 통하여 동남아시아, 아랍, 동로마 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중국 등의 국가들과 주로 교역하였는데, 서인도 지역의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아라비아해를 거쳐 서아시아 및 로마 제국과 교역하였으며, 동인도 지역의 벵골만을 통해 중국 및 동남아시아 지역과 교역하였다. 특히 이 시기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통해 인도 문화가 동남아시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동남아시아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굽타 제국에서는 주로 진주·보석·향료·향신료·코코넛·상아·인디고 등을 수출하고 금·은·주석·비단·말 등을 수입하였으며, 또한 굽타 제국에서 서기 350년경 세계 최초로 설탕을 결정화하는 방법을 확립하자 다양한 무역로를 통해 인도의 결정화된 설탕이 타 지역에 전파하기도 하였다. 자연과학 굽타 제국 시대에 인도의 대표적인 과학자로는 바라하미히라, 아리아바타, 브라마굽타가 있다. 그는 0을 별도의 숫자로 간주한 최초의 인물로 여겨지며 23세에 아리아바티야라는 저서를 편찬하여 원주율, 삼각법, 방정식, 제곱근과 세제곱근 등 기하학과 대수학에 대한 내용을 남겼으며, 특히 원주율의 값을 3.146으로 정확히 계산하거나, 삼각비의 "사인" 개념을 최초로 발견하는 등 인도 수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아리아바타와 더붙어 브라마굽타도 인도 수학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는 해가 여럿인 2차부정방정식의 정수해를 구하는 방법을 최초로 발견하였고, 브라마굽타의 방정식은 1000년이 지난 17세기에 영국의 수학자 존 펠이 연구한 2차 방정식 형태의 "펠 방정식"으로 이어졌다. 또한 브라마굽타는 원에 내접한 사각형의 넒이와 대각선의 길이를 구하는 "브라마굽타 공식"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무한대나 0의 사용 또한 인도 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도 수학과 함께 인도 천문학도 발전하였는데, 아리아바타는 원주율의 값을 계산한 결과를 바탕으로 지구의 둘레를 측정한 후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이론을 가정하였으며, 달과 행성이 반사된 햇빛에 의해 빛난다는 것을 발견한 그는 일식이 의사 행성 노드 라후와 케투에 의해 발생한다는 일반적인 우주론 대신에 지구에 드리워지고 떨어지는 그림자의 관점에서 일식을 설명했다. 바스카라 차리아라는 천문학자는 지구가 각 물체를 그 무게에 따라 끌어당긴다고 하는 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세계 최초의 위치 기반 10진법인 인도 숫자는 굽타 인도에서 유래되었으며, 일주일의 이름은 로마식 이름에 해당하는 힌두 신과 행성을 기반으로 굽타 시대가 시작될 때 나타났다. 의학 굽타 시대에는 유명한 약햑서인 《나바니타캄》과 동물의 병을 치료하는 수의학 서적인 《하스트야아유르베다》와 《아슈바샤스트라》가 간행되었지만 대부분 이전에 저술된 의학서를 기초로 하고 있으며, 수술에 관한 혁신적인 장을 포함하여 아유르베다 의학의 모든 주요 개념에 대한 산스크리트어 편집 문헌인 수슈루타 삼히타는 굽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의사들은 또한 여러 가지 의료 기구를 발명했고 수술까지 했다. 체스 체스는 이 시기에 발전했다. 6세기 체스의 초기 형태는 차투랑가로 알려졌는데, 이는 보병, 기병, 코끼리, 전차 등의 "4개 사단"으로 번역되며 각각 현대 폰, 나이트, 비숍, 룩으로 진화하였다. 종교 굽타 왕조는 전통적으로 힌두 왕조였다. 그들은 정통 힌두교도였으며 불교도와 자이나교도들이 그들의 종교를 수행하도록 허용했다. 산치는 불교의 중요한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쿠마라굽타 1세(455 CE)는 날란다를 설립했다고 전해진다. 현대 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굽타 시대부터 인도 카스트 집단이 다른 카스트와의 결혼을 중단하고 족내혼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후기 통치자들은 특히 불교를 장려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대 작가 파라마르타에 따르면 나라심하굽타(c. 495– ?)는 대승불교 철학자인 바수반두의 영향을 받아 자랐다. 그는 날란다에 상가라마를 지었고, 또한 그 안에 부처상이 있는 300피트(91m) 높이의 비하라를 지었는데, 현장에 따르면 "보디 나무 아래에 세워진 위대한 비하라"와 닮았다고 한다. 만주슈리물라칼파(c. 800 CE)에 따르면 나라심하굽타는 불교 승려가 되었고 명상을 통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중국 승려 현장은 또한 상가라마를 위임한 나라심하굽타 발라디티야의 아들 바즈라가 "믿음에 확고한 마음을 가졌다"고 언급했다. 문학 이 시기 굽타 황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고전 산스크리트어 문학이 발전을 거듭하였다. 굽타 제국 시대의 산스크리트어 문학은 힌두교적 색채가 매우 강하게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황실 소속의 학자와 문학가들이 구전설화를 정리하며 오늘날의 인도 2대 서사시로 거듭난 와 는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닌 힌두교의 주요 경전 중 하나로서 기능하였다. 당대 저명한 산스크리트어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칼리다사를 궁정시인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 와 같은 훌륭한 작품들이 편찬되었다. 굽타 제국에서는 산스크리트 문학 외에도 팔리어 문학이나 타밀어 문학 등의 작품들도 등장하였으며, 자이나교 시인들에 의해 프라크리트어 문학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인도 학자 밧샤야나의 고대 굽타 문헌 카마수트라는 산스크리트 문학에서 인간의 성행위에 대한 표준 작업으로 널리 간주된다. 예술과 건축 굽타 시대는 일반적으로 모든 주요 종교 단체에서 북인도 예술의 고전적인 정점으로 간주된다. 그림이 분명히 널리 퍼져 있었지만 살아남은 작품은 거의 모두 종교조각이다. 이 시기에 힌두교 예술에서 상징적인 조각된 신상이 등장했고, 불상과 자이나교의 티르탄카라상도 등장했으며, 후자는 종종 매우 큰 규모였다. 두 개의 위대한 조각 중심지는 마투라와 간다라로 후자는 그리스 불교 미술의 중심지였다. 둘 다 인도 북부의 다른 지역으로 조각품을 수출했다. 광범위하게 굽타 양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유명한 기념물인 아잔타, 엘레판타, 엘로라(각각 불교도, 힌두교도, 자이나교를 포함한 혼합)의 석굴은 사실 후기 왕조에서 제작되었지만 주로 굽타 양식의 기념비성과 균형을 반영한다. 아잔타는 주로 그림 궁전에서 오랫동안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는 성숙한 형태를 보여주면서 이 시기와 그 주변 시기의 가장 중요한 그림의 잔존물을 포함하고 있다. 힌두 우다야기리 석굴은 실제로 왕조 및 그 대신들과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으며, 데오가르의 다샤바타라 사원은 중요한 조각품과 함께 가장 먼저 살아남은 주요 사원 중 하나로 남아있다. 역대 군주 각주 인용주 참조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굽타 왕조 마가다 비하르주의 옛 왕국 인도의 왕조 힌두 왕조 파키스탄의 고대사 방글라데시의 역사 네팔의 역사 아프가니스탄의 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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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1%84%EC%97%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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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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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염(蔡琰, 177년 ~ 239년)은 중국 후한말의 시인이다. 채문희라는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문희(文姬)는 자이다. 진류(현재의 허난성 치 현) 출신으로 후한의 중신 채옹의 딸이다. 시재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왕이, 장춘화, 보연사와 함께 이름이 정확히 역사서에 기재된 몇 안되는 삼국시대 여성이다. 생애 흉노에 납치되다. 하동의 위중도(衛仲道)의 아내가 되지만 사별하였다. 195년(흥평 2년), 동탁의 잔당에 의해서 난이 일어나면서, 친가에 돌아간 채염은 흉노의 기마병에게 납치되어 마침내 남 흉노의 좌현왕 유표에게 측실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좌현왕 유표와 사이에 쌍둥이를 낳았다. 귀국 후 12년 후의 207년, 채옹의 후계자가 없는 것을 아까워한 조조가, 재보를 몸값으로 흉노 측에 지불하는 것에 의해서 귀국했다(그 때, 아이를 흉노에게 남겼다). 그 후, 동향 출신의 동사(董祀)에 시집간다. 아버지 채옹의 잃어버린 저서를 암기하여 채옹의 저서들을 복원했다. 작품 현존하는 시로서 〈호가십팔박〉과 〈비분시〉 2수가 전해지고 있어, 스스로의 파란의 인생을 엮은 작품이다. 〈호가십팔박〉에 대해서는, 후세의 산물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또한 채염의 인생을 소재로 한 작품에, 북경의 이화원의 장랑에 그려진 〈문희귀한도〉, 곽말약의 희곡 등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채염 채옹의 딸로 좌현왕 유표에게 붙잡혀가 측실로 가게 되었다. 이에 조조가 좌현왕 유표를 공격해 채염을 구출하고 동향 출신의 동사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 219년, 조조가 한중으로 가는 도중 채염의 집에 들리게 되는데, 이때 채옹이 썼던 유언장의 수수께끼를 풀기도 하였다. 채염의 친족관계 생몰년 미상 177년 출생 239년 사망 한나라의 음악가 한나라의 시인 조위의 음악가 조위의 시인 중국의 작곡가 중국의 작가 동탁과 주변 인물 조조와 주변 인물 허난성 출신 2세기 중국 사람 3세기 중국 사람 2세기 시인 3세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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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A%B7%B8%EB%9D%BC%EB%8B%A4%20%ED%8C%8C%EB%B0%80%EB%A6%AC%EC%9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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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그라다 파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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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짓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성당이다. 또한 '사그라다'는 스페인어로 성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파밀리아는 가족을 뜻하기 때문에 성가족성당이라고도 불린다. 카탈루냐 출신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하고 직접 건축을 책임졌다. 이 건물을 포함한 가우디의 작품들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었으며, 2010년 11월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성당에서 준 대성당으로 승격을 선포했다. 1882년 성당의 건축은 Francisco de Paula del Villar에 의해 시작되었다. 1883년 비야르가 사임하자 가우디가 수석 건축가로 취임하여 고딕 건축 양식과 아르누보 양식을 결합한 건축 및 엔지니어링 스타일로 프로젝트를 변형시켰다. 가우디는 그의 남은 생애를 프로젝트에 투입했으며, 1926년 73세의 나이로 고인이 되었을 때 프로젝트의 1/4, 즉 25%가 완료되었다. 가우디는 이 성당의 일부인 동부 성만 완성하고 별세하였다. 성당 건축은 개인적인 기부금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천천히 진행되었다가 1950년대에 스페인 남북 전쟁에 의해 중단되었다. 건설이 시작된 이래로 컴퓨터 지원 설계 및 CNC(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와 같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2010년 중반에 건설이 가속화되며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10개의 첨탑을 추가로 건설하는 등 프로젝트의 가장 큰 과제 중 일부들이 현재 남아 있다. 각각은 신약 성경에서 중요한 성경적 인물을 상징하며, 가우디 서거 100주년인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또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까탈루냐 모더니즘으로 지어진 최고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가우디는 이 성당을 지으면서 건축과 장식의 구성요소, 조형미와 아름다움, 기능과 형태, 외부와 내부 사이의 완벽한 조화를 추구했다. 지하 예배당과 성당의 내부 뒤에 부분은 네오고딕 양식으로 만들었고 그 이후, 성당의 나머지 부분은 자연의 형태를 모방하여 만들었다. 성당의 내부는 나무처럼 기울어지고 나선형의 기둥으로 인해 숲을 닮아서 간단하고 튼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우디는 이런 특이한 형태의 건축기법을 그가 지은 구엘공원이나 구엘 성지에서 검증한 후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하여 조형미와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구조적으로 완벽한 건축물을 만들었다. 2023년 1월 현재 141년째 공사가 진행 중이며, 비용은 관광객하고 신자들 헌금, 기부금 따위로 충당하고 있다. 역사 배경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서점가인 조셉 마리아 보카 벨라(Josep Maria Bocabella)의 영감을 받아 설립되었다. 1872년 바티칸을 방문한 후 보카 벨라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로레토(Loreto) 성당에서 영감을 얻어 교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교회의 교정이 필요한 부분은 기부금으로 충당되었으며, 1882년 3월 19일 세인트 요셉 축제에서 고딕 양식의 부흥을 통해 교회를 계획한 건축가 Francisco de Paula del Villar이 디자인에 착수했다. 가우디는 1883년에 교회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1884년까지 건축가 이사로 임명되지 않았다. 구성 극도로 긴 건설 기간에 대해 가우디는 "내 의뢰인은 서두르지 않고있다"고 말했다. 가우디가 1926년에 죽을 때, 공회당은 약 15%와 25% 사이에서 완료되었다. 가우디가 사망한 후 1936년 스페인 내전 중단될 때까지 Domènec Sugrañes i Gras의 지시하에 계속 작업이 진행되었다. 미완성 공회당의 일부와 가우디의 모델과 워크샵은 카탈로니아의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전쟁 중 파괴되었다. 현재의 디자인은 현대적인 적응 뿐만 아니라 화재로 불태워진 계획의 재구성된 버전을 기반으로 한다. 1940년 이래로 건축가인 Francesc Quintana, Isidre Puig Boada, Lluís Bonet i Gari 및 Francesc Cardoner가 이 작업을 수행했으며, 조명은 Carles Buïgas에 의해 설계되었다. Lluís Bonet의 현 감독이자 아들인 Jordi Bonet i Armengol은 1980년대 이후 컴퓨터를 설계 및 시공 과정에 도입해 왔다.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Jordi Fauli가 2012년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설의 수석 건축가로 취임했다. 중앙 본당 둥근 천장 작업은 2000년에 완료되었으며 이후 주요 작업은 천장 높이 및 선미의 건설이었다. 2018년, 중앙 본당의 남쪽 인클로저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메인 타워에 대한 교차 및지지 구조에 집중하고 있다. 교회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박물관 건물 (원래 건축가의 아이들을 위해 1909년에 가우디가 디자인 한 학교)과 사이트를 공유한다. 2002년 동부 구석에서 남쪽 구석으로 이주한 이 건물에는 현재 전시가 있다. 건설현황 수석 건축가인 조르디 파울리는 2015년 10월에 공사가 70% 완료되었으며 6개의 거대한 건물을 세우는 마지막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발표했다. 타워와 대부분의 교회 건축물은 가우디의 사망 100주년인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장식 요소는 2030년 또는 2032년까지 완료될 예정이라고 한다. 15-20 유로의 방문자 입장료는 연간 건설 예산 2,500만 유로를 충당한다. 컴퓨터 보조 설계 기술은 건물 건설을 가속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현재의 기술은 돌을 CNC 밀링 머신에 의해 빠르게 조각할 수 있는 반면, 20세기에는 돌을 손으로 조각했다. 2008년 일부 카탈로니아 건축가들은 가우디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존중하기 위해 건설 중단을 옹호했다. 원래 디자인은 철저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지만 최근 몇 년간 재건되었다. AVE 고속철도 터널 2013년 이래 AVE 고속 열차는 바르셀로나 중심부에서 지하 터널을 통과하여 성당 근처를 통과했다. 2010년 3월 26일에 시작된 터널 공사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스페인 공공 사업부는 이 프로젝트가 교회에 아무런 위험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건축 엔지니어와 건축가는 터널이 건물의 안정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고 말하면서 의견을 달리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이사회와 AVE pelle Litoral은 AVE를 위한 이 갈등 때문에 AVE에 대한 캠페인을 성공으로 이끌지 못했다. 2010년 10월, 터널 보링 머신은 건물의 주요 외관 위치 아래 지하 교회에 도착했다. 터널을 통한 서비스는 2013년 1월 8일에 개통되었다. 터널의 트랙은 Edilon Sedra의 시스템을 사용하여 레일을 탄성 소재에 매립하여 진동을 줄인다. 다행히도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대한 손상은 현재까지 보고된 바 없다. 미사 집전 메인 본당은 덮여 있었고 기관은 2010년 중반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건물이 종교적 서비스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는 6,500명의 회중 앞에서 2010년 11월 7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봉헌되었다. 추가로 50,000명의 사람들이 바실리카 외곽에서 봉헌 미사를 쫓았다. 그곳에서 100명 이상의 주교와 300명의 성직자가 손을 잡고 성만찬을 제안했다. 2017년 7월 9일부터 매주 일요일과 성례 날 오전 9시에 대성당에서 기념하는 국제 미사가 대중에게 공개된다 (교회가 가득 찰 때까지). 때때로 미사는 다른 시간에 경축되며, 출석에는 초대가 필요하다. 미사가 예정되어있을 때, 초대장을 얻기 위한 지시 사항은 바실리카의 웹 사이트에 게시된다. 또한 방문객들은 거룩한 성체와 참회의 예배당에서 기도 할 수 있다. 가치 건물의 디자인 자체가 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가우디의 동료 건축가들의 평가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이었다. 루이 설리반(Louis Sullivan)은 사그라 다 파밀리아를 "지난 25년 동안 가장 위대한 창조적 건축물"로 묘사했다. 그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돌로 상징화 된 영적인 건물 입니다!"라고 말했다. Walter Gropius는 성당을 칭찬하면서 건물의 벽을 "경이로운 기술이 만든 완성형 물체"라고 불렀다. 타임지(Time Magazine)는 성당을 "관능적이고 영적이며 변덕스럽고 풍성한 건물"이라고 불렀다. 또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세계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건물 중 하나"라고 불렀고, James A. Michener는 "가장 이상하며 심각한 세계의 건축물"이라고 불렀으며, 영국의 역사학자 제럴드 브레난(Gerald Brenan)은 "유럽의 건축물조차도 이 성당 앞에서는 저속하거나 허식이 아닌 것을 찾을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건물의 독특한 실루엣은 바르셀로나의 상징이 되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매년 약 200~300여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문화재 지정 사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현재 바르셀로나에 소재한 여섯 개의 다른 가우디 건물들과 함께 1969년 7월 24일 스페인의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선정되었으며, 그 까닭은 "건축 및 건축 기술 개발에 대한 가우디의 독창적 인 공헌", "카탈로니아의 엘 모더니즘을 대표 " 및 "예상된 20세기 현대 건설의 발전과 관련된 형태와 기술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침." 등이 있다. 방문 방문자들은 Nave, Crypt, Museum, Shop 및 Passion and Nativity 타워에 접근할 수 있다. 탑승구 중 하나에 입장하려면 예약과 사전 티켓 구매가 필요하다. 승강기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며 나머지 타워는 탑 사이의 다리까지 걸어간다. 하강은 300단계 이상의 매우 좁은 나선형 계단을 통과한다. 올라가기 매우 힘들기 때문에 계단에는 건강 상태에 대한 주의 사항이 있다. 2017년 6월부터 온라인 티켓 구매가 가능하게 되었다. 성수기인 5월에서 10월 사이에는 방문자들로 인한 며칠 간의 입국 예약 지연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자금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설은 정부 또는 공식 교회에서 지원하지 않는다. 개인 후원자들은 초기 단계에 자금을 지원했다. 관광객들이 구매한 티켓의 돈은 작품 비용을 지불하는 데 사용되며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대해서는 후원자들을 통해 사적인 기부가 허용된다. 2009년 건설 예산은 1,800만 유로(242억 640만 원)가 들었으며, 공사비용은 모두 관광객하고 신자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갤러리 각주 스페인의 대성전 스페인의 세계유산 바르셀로나의 교회당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물 공사 중인 건축물 아웃사이더 아트 낙헌제 수학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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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HSV%20%EC%83%89%20%EA%B3%B5%EA%B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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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V 색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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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V 색 공간 또는 HSV 모델은 색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자, 그 방법에 따라 색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색상(Hue), 채도(Saturation), 명도(Value)의 좌표를 써서 특정한 색을 지정한다. 비슷한 것으로 HSL(Lightness), HSI(Intensity) 등이 있다. 구성 요소 색상 색상값 H는 가시광선 스펙트럼을 고리모양으로 배치한 색상환에서 가장 파장이 긴 빨강을 0°로 하였을 때 상대적인 배치 각도를 의미한다. 때문에 H 값은 0°~360°의 범위를 갖고 360°와 0°는 같은 색상 빨강을 가리킨다. 채도 채도값 S는 특정한 색상의 가장 진한 상태를 100%로 하였을 때 진함의 정도를 나타낸다. 채도값 0%는 같은 명도의 무채색을 나타낸다. 명도 명도값 V는 흰색, 빨간색 등을 100%, 검은색을 0%로 하였을 때 밝은 정도를 나타낸다. HSV 색 공간 모형 HSV 색 공간 모형은 원기둥 또는 거꾸로 선 원뿔 모양의 입체 도형이다. 원기둥 모형 구성요소의 정의에 따라 HSV 색 공간은 그림과 같은 원기둥으로 표현할 수 있다. 원기둥의 표면과 내부의 한 점은 하나의 색을 나타낸다. 색상값은 각도로 표현되며 지정한 색이 원기둥의 수평 단면의 어느 방향에 위치하는지를 지정한다. 채도는 반지름에 해당하며 정 중앙에 무채색이 위치하며 원기둥의 겉면은 가장 진한 채도를 갖는다. 명도는 높이에 해당하며 위로 갈수록 색이 밝다. HSV 색 공간 지정의 예 (남색) 남색을 예로 원기둥 모형을 설명하면 남색은 파랑과 같은 색상을 지닌 어두운 색이다. H: 파랑은 빨강을 기준으로 240°회전한 위치에 있다. S: 남색은 가장 진한 채도를 지니므로 최댓값인 100%로 표기된다. V: 남색은 회색과 같은 명도를 지닌다. 검정과 흰색의 중간인 50%로 표기된다. 좌표: 위와 같이 남색은 HSV 색 공간에 따라 좌표 (240,100,50)로 표현할 수 있다. 원뿔 모형 원뿔모형은 원기둥 모형을 보다 현실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명도 0%는 오직 검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점으로 표현되며 원뿔의 꼭짓점에 해당한다. 또한 실제 색상은 진하지 않을수록 채도값의 변화에 따른 색상 변화가 크지 않기 때문에 높은 명도에 비해 채도값이 나타내는 폭은 줄어든다. 이와 같은 사실을 원기둥 모형에 반영한 것이 원뿔모형이다. 오른쪽 그림을 보면 높은 명도에서는 넓은 폭의 채도 변화를 보이고 낮은 명도에서는 채도 변화가 크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색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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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3%9C%EB%A0%8C%ED%84%B0%EC%A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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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렌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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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렌터주()는 네덜란드 북동부에 위치한 주로 주도는 아선이며 면적은 2,683km2, 수역 면적은 44km2, 인구는 488,957명(2015년 기준), 인구 밀도는 180명/km2이다. 남쪽으로는 오버레이설주, 서쪽으로는 프리슬란트주, 북쪽으로는 흐로닝언주, 동쪽으로는 독일 니더작센주와 접한다. 주도인 아선 이외의 도시로는 에먼, 메펄, 호헤베인이 있다. 12개 지방 자치체를 관할한다. 인구 기후 각주 외부 링크 드렌터 주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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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C%9B%90%EC%A0%84%206%EC%84%B8%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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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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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는 기원전 600년부터 기원전 501년까지를 말한다. 주요 사건 기원전 6세기 -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성립되었다. 기원전 594년 - 솔론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 개혁을 시작하다. 기원전 587년 - 고대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이와 동시에 바빌론 유수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563년 -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가 룸비니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560년 - 고대 그리스의 정치인 히파이스가 태어나다. 기원전 543년 - 마가다 왕국의 왕조가 브리하드라타 왕조에서 하리얀카 왕조로 교체되었다. 기원전 525년 -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집트 제26왕조 (이집트 제27왕조)를 멸망시키고 서아시아 지역 재 통일. 기원전 509년 - 고대 로마가 호민관 뽑기를 실행했다. 기원전 508년 - 클레이스테네스가 고대 아테네의 정치를 개혁했다. 주요 인물 키루스 2세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크세노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석가모니 (기원전 563년 - 기원전 483년) 빔비사라 노자 공자 솔론 페이시스트라토스 클레이스테네스 발명, 발견, 과학사 기원전 585년 - 탈레스가 일식을 예측하였다. 년대와 년도 기원전 제1천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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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1%B0%EB%A3%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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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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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룡(, , , 1958년 8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액션 무술영화배우 겸 연기자이다. 생애 그는 충청남도 서산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강원도 춘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태권도(跆拳道)와 합기도(合氣道)를 배우며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이후 청년 시절이던 한때는 대한민국에서 데뷔 초기에 문거룡(文巨龍)이라는 예명을 사용하였다. 1978년부터는 홍콩(香港)에서 활동하였는데, 그는 이 당시에 드래건 리(Dragon Lee)라는 예명을 사용하였고, 브루스 레이(Bruce Lei)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1976년 영화 《위대한 주먹》의 단역으로 영화배우 데뷔하였고 이듬해 1977년 영화 《최후의 정무문》에 첫 주연하였다. 이후 1978년부터 홍콩에서 무술영화배우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1996년 영화 《Two Men》으로 영화제작자 데뷔하였으며 그 후 사업가가 되어 아태필름영화주식회사 사장을 거쳐 영화마당주식회사 사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이다. 소속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 前 용인대학교 체육교육학과 겸임교수 前 한양대학교 체육교육학과 특임강사 학력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경제학 석사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사회과학 석사 출연작 영화 《위대한 주먹》 (1976년) 《장엄한 듀오》 (1976년) 《최후의 정무문》 (1977년) 《오대제자》 (1977년) 《무림 18여걸》 (1978년) 《쾌권괴초》 (1978년) 《사권괴초》 (1978년) 《잡기고수》 (1979년) 《타출두》 (1979년) 《정무지보》 (1979년) 《흑표비객》 (1980년) 《사형삼걸》 (1980년) 《지옥 12관문》 (1980년) 《일소일권》 (1980년) 《용권사수》 (1980년) 《응권》 (1980년) 《18 동문방》 (1981년) 《사형삼걸》 (1981년) 《정무문` 81》 (1981년) 《용무파계 제자》 (1981년) 《월굉쌍수》 (1981년) 《소림사 용팔이》 (1982년) 《인자문살수》 (1982년) 《뇌권》 (1983년) 《밤을 벋기는 독장미》 (1985년) 《종로부르스》 (1990년) 《전국구》 (1991년) 《전국구 2》 (1993년) 《암흑가의 황제》 (1994년) 《투맨》 (1996년) - 제작가 텔레비전 드라마 1989년 KBS 《무풍지대》 1990년 MBC 《대원군》 ... 광흥령 이희하 역 라디오 프로그램 2015년 EBS FM 《EBS 책 읽는 라디오 낭독 시리즈》 같이 보기 김태정 브루스 라이 황정리 왕호 황춘수 외부 링크 홍콩 시네매직의 드래건 리 1958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서산시 출신 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홍콩의 남자 영화 배우 대한민국의 무술가 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 대한민국의 남자 라디오 배우 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대한민국의 기업인 대한민국의 남자 태권도 선수 이소룡 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러시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베트남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대만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홍콩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용인대학교 교수 한양대학교 교수 중앙대학교 동문 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동문 대한민국의 불교도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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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84%EC%BF%84%20%EB%A9%94%ED%8A%B8%EB%A1%9C%20%ED%9B%84%EC%BF%A0%ED%86%A0%EC%8B%A0%EC%84%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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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메트로 후쿠토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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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지하철 후쿠토신선()은 사이타마현 와코시의 와코시 역에서 도쿄도 시부야구의 시부야역까지를 잇는 도쿄 지하철(도쿄 메트로)의 철도 노선이다. 한국어 한자음으로 부도심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노선도나 직결 안내에 사용되는 노선 색은 ○갈색이다. 도쿄 메트로에서 가장 최근에 개통한 노선으로, 2008년 6월 14일에 개통하였다. 개요 당초에 도쿄 지하철 13호선은 도쿄권의 철도망 정비계획에 도쿄 13호선으로서 구상되었던 것으로, 1972년의 도시교통심의회 답신 제15호에 의해 사이타마 현의 시키에서 와코 시, 나리마스, 무카이하라, 이케부쿠로, 히가시이케부쿠로, 메지로히가시, 스와초, 히가시오쿠보를 경유해 신주쿠에 이르는 노선으로서 처음 제안되었다. 그 후 1985년의 운수정책심의회 답신 제7호에서는 이케부쿠로 이남의 남하에 대해 종점을 시부야로 하는 것이 나타났다. 그동안 시키 역에서 와코 시 역 간은 도부 도조 선의 복복선화를 실시하였으며, 또한 와코 시역 ~ 고타케무카이하라 역간은 유라쿠초 선으로서, 고타케무카이하라 역 ~ 이케부쿠로 역(신선 이케부쿠로 역)간은 유라쿠초 신선으로서 각각 개통하였다(단 센카와 역과 가나메초 역 2역은 미개통). 이후 2008년 6월 14일에 이케부쿠로~시부야 간이 개통되었다. 코타케무카이하라 ~ 이케부쿠로 간은 사실상 유라쿠초 선의 일부가 되어 있다(‘유라쿠초 신선’ 혹은 그저 ‘신선’이라고 안내된다). 2013년 3월 16일 이후로 고타케무카이하라 역에서 도부 도조 선(유라쿠초 신선 경유)·세이부 이케부쿠로 선 (세이부 유라쿠초 선 경유), 시부야 역으로부터 도쿄 급행 전철 도요코 선·요코하마 고속 철도 미나토미라이 선으로의 직결 운행이 시행되고 있다. 역사 일부 역사는 도쿄 지하철 유라쿠초 선과 중복된다. 1983년 6월 24일: 유라쿠초 선으로서 영단 나리마스 역 (현재: 지하철 나리마스 역) ~ 고타케무카이하라 역 구간이 개통. 1987년 8월 25일: 유라쿠초 선으로서 와코 시 역 ~ 영단 나리마스 역 구간이 개통. 1994년 12월 7일: 도쿄 지하철 유라쿠초 신선으로서 고타케무카이하라 역 ~ 이케부쿠로 역(개통 당시에는 신선 이케부쿠로 역) 개통. 2008년 6월 14일: 이케부쿠로 역 ~ 시부야 역 구간이 개통, 센카와 역, 가나메초 역이 영업 개시. 2013년 3월 16일: 도쿄 급행 전철 도요코 선과 직결 운행 개시. 유라쿠초 신선 1994년 12월 7일에 도쿄 지하철 유라쿠초선 신선()이 개통되었다. 개통 당시 운행 구간은 고타케무카이하라 역에서 이케부쿠로역(신선 이케부쿠로 역)까지였으며, 노선 명칭을 부를 때는 유라쿠초 신선, 또는 신선이라고 줄여서 불렀다. 열차 운행 방식은 신선 이케부쿠로 역에서 출발하여, 유라쿠초 선의 와코 시까지 운행하거나, 도조 선과 직결 운행하여 시키까지 운행하기도 하였고, 세이부 유라쿠초 선 및 세이부 이케부쿠로 선과 직결 운행하여 기요세 역 및 고테사시 역까지 운행하기도 하였다. 이케부쿠로역의 경우 유라쿠초 선과 구분을 위해 “신선 이케부쿠로 역”, 또는 “이케부쿠로 역(신선)”이라고 칭했다. 고타케무카이하라 역과 이케부쿠로 역 구간에 중간 정차역은 없었다. 역 번호 및 기호는 유라쿠초 선과 동일하게 'Y-번호'로 표기했다. 예를 들어 유라쿠초 선 이케부쿠로역의 기호가 Y-09일 때, 신선 이케부쿠로 역의 기호도 Y-09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운행하다가 2008년 6월 14일에 이케부쿠로 역에서 시부야 역까지 개통하고, 센카와 역, 가나메초 역이 영업을 개시함으로써 지금의 형태로 운행을 시작하였다. 차량 7000계 10000계 17000계 도부 철도 9000계 도부 철도 50070계 세이부 6000계 세이부 40000계 도쿄 급행 전철 5050계 미나토미라이 선 Y500계 역 목록 통 : 통근급행 정차역, 급 : 급행 정차역, F : F라이너 정차역, S : S-train 정차역 ●:정차역, |:무정차 통과역 노선색으로 표시된 구간(와코시-고타케무카이하라)은 도쿄 메트로 유라쿠초선과 선로를 공유하여 운행하며, 센카와역, 가나메초역, 이케부쿠로역은 도쿄 메트로 유라쿠초선과 다른 선로를 사용한다. 급행 열차는 토, 휴일에 메이지진구마에 역에 정차한다. 각주 외부 링크 도쿄 지하철의 철도 노선 간토 지방의 철도 노선 도쿄도의 철도 교통 사이타마현의 철도 교통 1983년 개통한 철도 노선 1994년 개통한 철도 노선 일본의 퀘이프 궤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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