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
stringlengths 1
6
| url
stringlengths 31
332
| title
stringlengths 1
70
| text
stringlengths 9
170k
|
---|---|---|---|
182901
|
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C%B9%B4%EC%9D%B4%20%EC%95%A4%EB%93%9C%20%ED%85%94%EB%A0%88%EC%8A%A4%EC%BD%94%ED%94%84
|
스카이 앤드 텔레스코프
|
스카이 앤드 텔레스코프(Sky & Telescope, 약칭 S&T)는 아마추어 천문에 대한 모든 내용을 다루는 미국의 월간 잡지이다. 그 소재는 다음과 같다. 최근의 천문학과 우주 개발 소식 아마추어 천문 동아리 소식 천문 기기, 도서, 컴퓨터 소프트웨어 리뷰 아마추어 천체망원경 제작 천체사진 잡지의 내용은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며, 근래의 발견에 대한 (종종 연구에 참여한 과학자의) 상세한 검토를 포함한다. 전면 칼라이며, 아마추어와 직업적인 사진작가들의 천체 사진과 곧 있을 천문현상에 대한 표와 그림을 싣고 있다. 스카이 앤드 텔레스코프 잡지는 1941년에 처음 발행되었는데, 이는 '스카이(The Sky)'와 '텔레스코프(The Telescope)'의 두 잡지가 합쳐진 결과였다. 현재는 스카이 출판사(Sky Publishing)에 의해 출간되고 있다. 같이 보기 아마추어 천문학 외부 링크 SkyandTelescope.com - 스카이 앤드 텔레스코프 공식 홈페이지 스카이 앤드 텔레스코프의 역사 미국의 천문학 보스턴의 잡지 과학 기술 잡지 천문학 책 월간지 아마추어 천문학 1941년 창간
|
272305
|
https://ko.wikipedia.org/wiki/%EB%A5%98%EC%BD%94%EC%BF%A0%20%EB%8C%80%ED%95%99
|
류코쿠 대학
|
류코쿠 대학(, )은 일본의 불교계열의 대학이다. 연혁 류코쿠 대학의 기원은 1639년에 니시혼간지가 설립한 학료(學寮)이다. 1879년에 준공된 오미야(大宮) 캠퍼스 본관 등 건물들이 1964년에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639년 : 학료 설립. 1655년 : 학림(學林)으로 개칭. 1876년 : 대교교(大敎校)으로 개칭. 1879년 : 현 오미야 캠퍼스 본관 등 건물들 준공. 1888년 : 대학림(大學林)으로 개칭. 1900년 : 불교대학(佛敎大學)으로 개칭 1905년 : 전문학교령(專門學校令)에 의해 인가. 1922년 : 대학령에 의한 대학으로 승격. 류코쿠 대학으로 개칭. 1949년 : 신제 류코쿠 대학 발족 (학부: 문학부). 1960년 : 후카쿠사(深草) 캠퍼스 개설. 1961년 : 경제학부 설치. 1968년 : 법학부 설치. 1989년 : 세타() 캠퍼스 개설. 이공학부, 사회학부 설치. 1992년 : 동국대학교와 자매결연 체결. 1996년 : 국제문화학부 설치. 캠퍼스 후카쿠사(深草) 캠퍼스: 대학 본부 캠퍼스.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후카쿠사 쓰카모토초(深草塚本町) 67. 오미야(大宮) 캠퍼스: 문학부 캠퍼스. 교토 부 교토 시 시모교구 시치조도리(七條通) 오미야(大宮) 히가시이루(東入) 다이쿠초(大工町) 125-1. 세타() 캠퍼스: 이공학부, 사회학부, 국제문화학부 캠퍼스. 시가현 오쓰시 세타오에초() 요코타니(橫谷) 1-5. 조직 학부 문학부 진종(眞宗) 학과 불교 학과 철학과 사학과 일본어/일본문학과 영어/영미문학과 경제학부 현대 경제학과 국제 경제학과 경영학부 경영학과 법학부 법률학과 정책학부 정책학과 이공학부 수리(數理) 정보 학과 전자 정보 학과 기계 시스템 학과 물질화학과 정보 미디어 학과 환경 솔루션 학과 사회학부 사회학과 커뮤니티 매니지먼트(Community Management) 학과 지역복지학과 임상복지학과 국제문화학부 국제문화학과 농학부 식물생명학과 자원생물학과 식품영양학과 식료농업시스템학과 대학원 문화 연구과 경제학 연구과 경영학 연구과 법학 연구과 사회학 연구과 이공학 연구과 국제문화학 연구과 실천 진종학 연구과 법무 연구과 (법과대학원) 부속기관 도서관 인간/과학/종교 종합연구 센터 불교문화 연구소 사회과학 연구소 과학기술 공동연구 센터 국제사회문화 연구소 류코쿠 Extension Center(REC) - 창업보육 센터 류코쿠 대학 부속 류코쿠 고등학교 류코쿠 박물관 각주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1639년 개교 교토부의 대학교 교토시의 교육 교토시의 건축물 일본의 사립 대학 일본의 불교 대학 교토시의 중요문화재 일본의 국보 (서적·전적·고문서)
|
4063
|
https://ko.wikipedia.org/wiki/201%EB%85%84
|
201년
|
연호 후한(後漢) 건안(建安) 6년 기년 후한(後漢) 헌제(獻帝) 13년 신라(新羅) 내해 이사금(奈解泥師今) 6년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5년 백제(百濟) 초고왕(肖古王) 36년 사건 유비, 허도의 조조를 습격하다가 패해 형주 자사 유표에게로 도망침 음력 2월, 가야국(加耶國)이 신라에게 화친을 청하였다. 음력 3월 정묘(丁卯)일 그믐에 일식이 신라에서 관측되었다. 음력 3월, 신라가 크게 가물자, 중앙과 지방의 죄수를 조사하여, 가벼운 죄는 용서하여 주었다. 탄생 로마 제국의 황제 데키우스 일본의 천황 오진 사망 공도 (후한) 조기 (빈경) 조위 (삼국지 인물) 채양 (후한) 환전 (후한) 참고 문헌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내해 이사금 조(條)
|
109268
|
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8B%88%EC%BD%94%EB%93%9C%20%EB%93%B1%EA%B0%80%EC%84%B1
|
유니코드 등가성
|
유니코드 등가성(Unicode equivalence)은 특정한 일련의 코드포인트들이 반드시 동일 문자를 대표해야 하는 유니코드 문자 인코딩 표준의 사양이다. 이 기능은 비슷하거나 동일한 문자들을 포함하는 기존의 표준 문자 집합과의 호환성을 허용하기 위해 표준에 도입되었다. 유니코드는 2가지 개념을 제공하는데, 하나는 표준 형식의 등가성이고 나머지 하나는 호환성이다. 표준 형식의 등가성으로 정의되는 코드포인트 시퀀스는 인쇄와 출력을 할 때 동일한 모양과 의미를 가질 것으로 추정한다. 이를테면 코드포인트 U+006E(라틴어 소문자 "n")에 이어서 U+0303(결합 물결표 "◌̃")가 오면 하나의 코드포인트 U+00F1(스페인어 알파벳의 소문자 "ñ")과 동일하게 정의된다. 그러므로 이 시퀀스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표시되어야 하고 이름의 알파벳순 배열이나 검색 등을 할 때 애플리케이션에서 동일하나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이 표준은 동등한 문자 시퀀스를 대체함으로써 2개의 텍스트 중 어느 것이 와도 동일한 코드 포인트 시퀀스로 통합해주는 유니코드 정규화로 불리는 텍스트 정규화 절차를 정의한다. 정규화 유니코드 정규화(Unicode normalization)는 모양이 같은 여러 문자들이 있을 경우 이를 기준에 따라 하나로 통합해 주는 일을 가리킨다. 그 기준으로는 아래 표와 같이 NFD, NFC, NFKD, NFKC가 있다. 정규화의 예 NFD로의 정규화: 코드를 정준 분해한다. 발음 구별 기호가 붙은 글자가 하나로 처리되어 있을 경우, 이를 기호별로 나누어 처리하기 À (U+00C0) → A (U+0041) + ◌̀ (U+0300) ệ (U+1EC7) → e (U+0065) + ◌̂ (U+0302) + ◌̣ (U+0323) が (U+304C) → か (U+304B) + ◌゙ (U+3099) ポ (U+30DD) → ホ (U+30DB) + ◌゚ (U+309A) Й (U+0419) → И (U+0418) + ◌̆ (U+0306) 한글을 한글 소리마디 영역(U+AC00~U+D7A3)으로 썼을 경우, 이를 첫가끝 코드로 처리하기 위 (U+C704) → ᄋ (U+110B) + ᅱ (U+1171) 한 (U+D55C) → ᄒ (U+1112) + ᅡ (U+1161) + ᆫ (U+11AB) 표준과 다른 조합 순서를 제대로 맞추기 e (U+0071) + ◌̇ (U+0307) + ◌̣ (U+0323) → e (U+0071) + ◌̣ (U+0323) + ◌̇ (U+0307) NFC로의 정규화: 코드를 정준 분해한 뒤에 다시 정준 결합한다. 발음 구별 기호(조합 분음 기호: U+0300~U+036F)가 잇따라 붙었을 경우, 이를 코드 하나로 처리하기 A (U+0041) + ◌̀ (U+0300) → À (U+00C0) e (U+0065) + ◌̂ (U+0302) + ◌̣ (U+0323) → ệ (U+1EC7) か (U+304B) + ◌゙ (U+3099) → が (U+304C) ホ (U+30DB) + ◌゚ (U+309A) → ポ (U+30DD) И (U+0418) + ◌̆ (U+0306) → Й (U+0419) 한글을 첫가끝 코드로 썼을 경우, 이를 한글 소리마디 영역(U+AC00~U+D7A3)으로 처리하기 ᄋ (U+110B) + ᅱ (U+1171) → 위 (U+C704) ᄒ (U+1112) + ᅡ (U+1161) + ᆫ (U+11AB) → 한 (U+D55C) ᄃ (U+1103) + ᅲ (U+1172) + ᇰ (U+11F0) → 듀 (U+B4C0) + ᇰ (U+11F0) - 종성을 뺀 초성과 중성까지만 변환할 수 있는 경우, 알고리듬에 따라 거기까지만 변환한다 대한민국 산업 표준 KS X 1026-1은 '현대 한글 초성 + 현대 한글 중성 + 옛한글 종성'으로 이루어진 옛한글 완성자를 표현할 때 현대 한글 완성자를 사용하지 말고 첫가끝 한글 낱자들만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NFKD로의 정규화: 코드를 호환 분해한다. 합자 처리된 알파벳 코드를 각 알파벳으로 분해하기 fi (U+FB01) → f (U+0066) + i (U+0069) 옛 알파벳을 현대 알파벳으로 바꾸기 ſ (U+017F) → s (U+0073) ẛ (U+1E9B) → s (U+0073) + ◌̇ (U+0307) NFKC로의 정규화: 코드를 호환 분해한 뒤에 다시 정준 결합한다. 발음 구별 기호가 있는 옛 알파벳을 현대 알파벳으로 바꾸기 ẛ (U+1E9B) → ṡ (U+1E61) 모든 기준에서의 공통된 정규화 한중일 호환용 한자를 한중일 통합 한자로 처리하기 樂 (U+F914), 樂 (U+F95C), 樂 (U+F9BF) → 樂 (U+6A02) 전용 기호를 모양이 같은 보편적인 기호로 바꾸기 Ω (U+2126, 옴 기호) → Ω (U+03A9, 오메가) 각주 외부 링크 텍스트 정규화(Text Normalization) - 한국 썬 개발자 네트워크 UAX #15: 유니코드 정규화 방식(영어) 유니코드
|
189336
|
https://ko.wikipedia.org/wiki/Alive%201997
|
Alive 1997
|
Alive 1997은 다프트 펑크가 2001년 11월 6일에 발매한 라이브 싱글 앨범이다. 그들이 직접 선택한 45분 분량의 라이브 공연 실황이 수록된 이 앨범은 버밍엄의 Que Club에서 1997년 11월 8일 녹음되었다. Alive 1997에는 HomeWork 앨범에 들어있는 Daftendirekt, wdpk 83.7 FM, Da Funk, Rollin' & Scratchin 그리고 Alive와 같은 곡이 들어있다. 외부 링크 다프트 펑크의 음반 2001년 라이브 음반
|
90539
|
https://ko.wikipedia.org/wiki/%ED%8F%AC%EB%93%9C%20%ED%94%84%EB%A6%AC%ED%8E%99%ED%8A%B8%20%28%EC%9D%B8%EB%AC%BC%29
|
포드 프리펙트 (인물)
|
포드 프리펙트(Ford Prefect)는 영국 작가인 더글러스 애덤스가 지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가상의 등장인물이다. 그는 아서 덴트와 같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중심인물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안내서에 등장한다. 그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이동 조사원이다. 포드 프리펙트에 관하여 포드는 보통의 지구인인 아서 덴트의 친한 친구이다. 아서 덴트는 그를 몇 년 동안 서리에 있는 길포드에서 온 일자리가 없는 배우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베텔게우스 근방의 조그만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고, 안내서에 넣을 자료를 찾기 위해서 지구에 왔다. 포드는 지구의 사회를 유심하게 관찰한 끝에 그의 이름을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게 "포드 프리펙트"라고 지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좀 튀는 이름이 되었는데, 포드 자동차가 영국에서 생산한 소형 자동차 이름이 "포드 프리펙트"였던 것이다. 이것은 영화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포드는 가까이서 달리고 있는 자동차에게 인사하려고 하였는데, 여기서 달리고 있는 자동차가 포드 프리펙트였다. 거기서 아서 덴트가 그를 구해주게 되는데, 그게 그와 한 쌍이 된 동기였다. 애덤스는 나중에 미국의 관중들이 프리펙트가 "퍼펙트"의 타자 실수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프랑스어 판에서느 포드의 이름이 "포드 에스코트"로 바뀌게 된다. 이 조크는 또한 많은 젊은 독자들에게는 안 먹혔는데, 포드 프리펙트가 자주 쓰이는 것에 대하여 낙담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그의 마지막 이름이 스크린에 뜨지 않았는데, 그러나 여전히 프리펙트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이건 영화 크레딧에서 진실임을 증명하였다.). 포드는 원래 지구에 1주일간 머물 계획이었으나, 15년 동안 지구에 잡혀 있게 되었다가,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보곤 건설 함대가 나타날 때, 아서 덴트와 같이 탈출하게 된다. 독자/청자/시청자에게 포드는 아서 그 자신이 찾은 괴괴망측한 우주에 대한 설명의 근원이다. 예를 들어서 타올의 중요성에 대한 것과, 끈적끈적한 바벨 피쉬를 귀에다 집어넣는 것과, 왜 우주에서 최고의 요리사가 나쁜 음식이 있는 보곤 우주선에서 있느냐라는 점을 설명해 준다. 본질적으로,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임무는 끝내주는 술이 있는 좋은 파티를 찾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우리는 포드의 원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베텔게우스 방언"으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은하기 03758년에 일어난 대 흐룽 붕괴로 인해서, 베텔게우스 7행성에서 포드 프리펙트의 아버지만 간신히 살아남아서, 다른 행성에서 포드를 가져, 포드의 이름을 사라진 옛언어로 지었다. 포드는 그의 원래 이름을 영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자, 포드의 아버지는 수치심 때문에 죽어버렸다. 학교에서 그는 "익스"라는 별명을 가졌는데 이 별명의 뜻은 "흐룽이란 것에 대해 만족할 만하게 설명을 못하는, 왜 그게 베텔게우스 7행성에서 일어 났는지 설명을 못하는 아이"라는 뜻이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쪽 사촌인, 자포드 비블브록스는 그를 다시 만났을 때 포드라고 부른다. (영화판을 제외하고 모든 버전에서 자포드가 그를 소개할 때 "여긴 내 반쪽 사촌인 익스.... 실례 포드"라고 말한다. 더글러스 애덤스는 그것에 대하여 정확하게 지적했는데, 지구를 방문하기 이전에, 포드는 시간을 돌아가서 출생시에 포드 프리펙트라고 그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포드라고 불리는 것이다. 라디오 시리즈와 그 후속 LP판에서 제프리 맥 기번이 포드 역할을 하였고, 텔레비전 시리즈에서는 데이비드 딕슨이, 극장용 영화에서는 모스 데프가 그를 연기했다. 가공의 외계인 가공의 작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등장인물 1978년 창조된 가공인물 베텔게우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
|
89176
|
https://ko.wikipedia.org/wiki/%EC%83%81%ED%8C%8C%EC%9A%B8%EB%A3%A8%EC%A3%BC
|
상파울루주
|
상파울루주()는 브라질의 남동 대서양 연안에 있는 주이다. 마투그로수두술주, 미나스제라이스주, 리우데자네이루주, 파라나 주와 이웃하고 있다. 지리 상파울루 주는 면적이 248,800 km2, 인구는 40,442,795명이다. 대서양에 접해 있다. 대서양 연안을 따라 산맥이 펼쳐져 있고, 내륙에는 드넓은 고원이 펼쳐져 있으며, 주도이자 세계적인 대도시인 상파울루도 그 고원에 있다. 기후는 해안의 좁은 지역은 열대 기후이나 내륙부는 고도가 높아 기온이 낮아져서 온대 기후에 속하여 쾌적하다. 경제 인구가 4천만 명이 넘어 브라질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주로, 브라질 경제의 중심이 되어 있다. 농업으로는 커피 재배가 중요하며,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국인 브라질에서도 가장 커피가 많이 나는 주이다. 커피는 상파울루 주의 발전을 가져다 준 중요한 작물이다. 사탕수수, 면화, 옥수수, 콩 등도 많이 재배된다. 소의 사육도 많아지고 있다. 지금은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훨씬 높은 비중을 차지하며, 주도 상파울루는 브라질의 경제적 수도가 되어 있다. 상파울루와 주변 지역은 브라질 최대의 공업지역이기도 하다. 주요 도시 상파울루 구아룰류스 캄피나스 상베르나르두두캄푸 오자스쿠 산투안드레 상조제두스캄푸스 소로카바 히베이랑프레투 산투스 외부 링크 브라질의 주
|
71136
|
https://ko.wikipedia.org/wiki/VHDL
|
VHDL
|
VHDL()은 디지털 회로 및 혼합 신호(mixed-signal, 아날로그 신호 포함)를 표현하는 하드웨어 기술 언어이다. FPGA나 집적회로 등의 전자공학 회로를 처리하는 설계 자동화에 사용한다. 주로 디지털 회로 설계에 사용된다. 기존의 심볼에 의한 회로도 작성 대신 언어적 형태로 전자회로의 기능을 표현한다. 아날로그 신호(mixed-signal)는 VHDL-AMS(VHDL Analog and Mixed-Signal Extensions)로 표현하나, 실제 활용면에서 디지털회로에 많이 적용되어 사용한다. VHDL로 표현된 회로는, 실제 동작하는 기능적 소자로 변환하는 합성(synthesis) 과정을 거치면 동작할 수 있는 회로가 완성된다. 이때 FPGA나 ASIC 등을 위한 환경에 따라 합성된 실제회로의 소자가 달라지기 때문에 칩 설계 시 목적에 맞는 소자가 합성되도록 하는 개발도구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FPGA를 판매하는 회사는 보통, 회로 입력(심볼 및 VHDL코드)부터 시작해서 VHDL 코드의 합성, 모듈(소자)의 배치 등을 지원하는 도구를 지원한다. 역사 VHDL는 원래 미국 국방부에서 주문형 집적회로(ASIC)의 문서화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언어였다. 즉, 복잡한 매뉴얼로 회로의 동작 내용을 설명하는 대신, 회로의 동작 내용을 문서화하여 설명하기 위해 개발했다. 그러나 이런 문서를 회로 디자인 과정에서 시뮬레이션에 사용하게 되었고, VHDL 파일을 읽어들여서 논리 합성을 한 다음 실제 회로 형태를 출력하는 기능을 덧붙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디지털 회로의 설계, 검증, 구현등의 모든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VHDL은 에이다 프로그래밍 언어의 부분집합에 디지털 회로에 필수적인 시간 개념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나, IEEE 표준화 작업을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와 문법을 가지게 되었다.. 예제 VHDL을 이용한 간단한 논리연산 중 AND 게이트는 다음과 같다. -- (this is a VHDL comment) -- import std_logic from the IEEE library library IEEE; use IEEE.std_logic_1164.all; -- this is the entity entity ANDGATE is port ( I1 : in std_logic; I2 : in std_logic; O : out std_logic); end entity ANDGATE; -- this is the architecture architecture RTL of ANDGATE is begin O '0'); elsif rising_edge(CLK) then if LOAD = '1' then CNT <= unsigned(DATA); -- unsigned형으로 변환 else CNT <= CNT + 1; end if; end if; end process; Q <= std_logic_vector(CNT); -- type is converted back to std_logic_vector end architecture RTL; 시뮬레이션을 위한 구조 VHDL 코드 중에 회로의 표현이 주이지만 다음의 경우는 하드웨어로 합성하지 않고 시뮬레이션을 위한 방법으로 사용한 예이다. 따라서 이 VHDL 코드는 하드웨어로 합성되지 않고(non-synthesizable)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 코드는 50 MHz 클럭 신호를 표현하는 예이다. 이것은 실제 하드웨어 회로의 시뮬레이션 입력 신호로 사용하기 위해, 시뮬레이션에서만 클럭이 생성되는 코드이다. 실제로 클럭을 생성하지 않고 시뮬레이션 상에서만 신호가 생성되기 때문에 실제 하드웨어에서 동작하려면 클럭신호를 별도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process begin CLK <= '1'; wait for 10 NS; CLK <= '0'; wait for 10 NS; end process; 클럭 뿐만 아니라, 시뮬레이션을 위해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신호를 만들어 VHDL 코드 모듈에 입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 process begin wait until START = '1'; -- START=H가 될 때까지 기다린다. for i in 1 to 10 loop -- 몇 개의 클럭 주기동안 기다리고... wait until rising_edge(CLK); end loop; for i in 1 to 10 loop -- 1부터 10까지 DATA에 넣기, 1 매 주기마다 DATA <= to_unsigned(i, 8); wait until rising_edge(CLK); end loop; -- 출력이 변할 때까지 기다림. wait on RESULT; -- 한 클럭 주기 동안 ACK 펄스를 만든다. ACK <= '1'; wait until rising_edge(CLK); ACK <= '0'; -- 계속... end process; 각주 같이 보기 하드웨어 기술 언어 ABEL ("Advanced Boolean Expression Language") AHDL (알테라 HDL, Altera가 만든 상용 언어) PALASM Verilog (IEEE 1364) GHDL - VHDL 자유 소프트웨어 시뮬레이터 외부 링크 VHDL 예제들 VHDL 강좌 하드웨어 기술 언어 디지털 전자공학 전자공학
|
35441
|
https://ko.wikipedia.org/wiki/%ED%94%8C%EB%9D%BC%EC%9D%B4%EC%8A%A4%ED%86%A0%EC%84%B8
|
플라이스토세
|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는 약 258만 년 전부터 1만 2천년 전까지의 지질 시대를 말한다. 홍적세(洪積世), 갱신세(更新世) 또는 속칭 빙하기(Ice Age)라고도 한다. '플라이스토세'라는 명칭은 (가장)와 (새로운)에서 비롯되었다. 2009년 IUGS(International Union of Geological Science)는 플라이스토세의 시작 시기를 기존의 180만 년에서 258.8만 년으로 정정했다. 플라이스토세는 신생대 제4기에 속하며, 플리오세에서 이어진 시기이다. 지구 위에 널리 빙하가 발달하고 매머드, 곧은 상아 코끼리(straight-tusked elephant) 같은 코끼리류가 살았다. 플라이스토세가 끝나는 시기는 고고학에서 구석기 시대의 끝으로 본다. 기후 빙하에 관련된 부분 플라이스토세의 기후는, 어떤 지역에서 위도 40도 부근으로 빙하가 밀려내려가는, 반복되는 빙하의 사이클로 특징지어진다. 최대로 빙하기가 확장되었을 때, 지구 표면의 30% 정도가 빙하로 덮였다고 추정된다. 더하여 영구동토(永久凍土)의 구역이 빙하의 경계에서, 북아메리카에서는 그 남쪽으로 2, 3백 킬로미터까지,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그 남쪽으로 6, 7백 킬로미터까지, 늘어났다. 빙하에서의 연평균 기온은 -6 °C, 영구동토에서의 연평균 기온은 0 °C였다. 중요 사건들 귄츠빙기: ? ~ 86만6천 년 전까지 ("비스토니안기" = 북아메리카의 "네브라스카기") 귄츠-민델 간빙기: 88만6천 년 전 ~ 47만8천 년 전까지의 간빙기(40만8천 년 동안) ("크로메리안기"=북아메리카의 "아프토니안기") 민델 빙기: 47만8천 년 전 ~ 42만4천 년 전까지(5만4천년간) ("앵글리안기"=북유럽의 "엘슈터리안기"=알프스의 "민델기") 민델-리스 간빙기: 42만4천 년 전 ~ 37만4천 년 전까지(5만3천년간) ("혹시니안기"=북유럽의 "홀슈타인간빙기"=알프스의 "민델리스간빙기"=북아메리카의 "야마시안기") 리스 빙기: 35만2천 년 전 ~ 13만 년 전까지(21만8천년간) (=울스토니안기=북유럽의 "와데기"와 "살리안기"=알프스의 "리스기"=북아메리카의 "일리노이안기"와 "선일리노이언기의 가장 어린 부분") 리스-뷔름 간빙기: 13만 년 전 ~ 11만4천 년 전까지(1만6천년간) 뷔름빙기: 11만 년 전 ~ 1만2천 년 전까지의 빙기(9만8천년간)(최종빙기) 21.8만 년 전 - 최한랭기 1.4~1.2만 년 전 - 고드리아스기(소한랭기) 같이 보기 지질 시대 세 (지질학) 1830년대 신조어
|
19659
|
https://ko.wikipedia.org/wiki/%EA%B9%8C%EC%B9%98%EC%82%B0%EC%97%AD
|
까치산역
|
까치산역(Kkachisan station,까치山驛)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수도권 전철 5호선과 신정지선의 전철역이자 환승역이다. 신정지선의 경우 이 역부터 신도림역까지 모두 지하 구간이다. 역사 1996년 3월 20일: 서울 지하철 5호선 방화 ~ 까치산 구간 개통과 함께 종착역으로 영업 개시, 동시에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정지선도 신정네거리역 ~ 까치산역 연장 개통 1996년 8월 12일: 서울 지하철 5호선 까치산역 ~ 여의도역까지 연장 개통과 함께 중간역이 됨 역 구조 두 노선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2면 2선을 5호선이 이용하고 5호선 하행(하남검단산·마천 방향) 승강장과 붙어 있는 나머지 1면 1선을 신정지선이 이용한다. 언덕 위에 있는 대합실에 비하여 승강장은 매우 깊은 곳에 있으며, 대합실이 있는 지하 2층과 승강장이 있는 지하 5층이 에스컬레이터로 직접 연결되어 있다. 출입구는 4개이다. 승강장 2면 3선식 승강장을 갖춘 지하역이며, 완전밀폐형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환승 신정지선과 5호선 하행(하남검단산·마천)은 같은 승강장에서 평면환승을 할 수 있으나 5호선 상행(방화)은 지하 2층의 대합실과 화곡역 방면 맨 끝에 있는 통로를 경유하여야 한다. 역 주변 화곡8동 까치산시장 화곡2동 화곡8동주민센터 화곡1동 화곡1동주민센터 곰달래길 화곡터널 화원중학교 특이사항 승강장 행선안내 설비 2017년 5월 31일 서울교통공사가 출범하기 이전까지 까치산역은 역사 전체를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에서 운영하였다. 따라서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정지선 승강장의 경우, 서울메트로의 방식이 아닌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 방식의 행선안내게시기와 방송 설비를 갖추고 있었으며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와 동일한 방식으로 행선지 정보 표출 및 안내방송을 내보냈다. 다만 신정지선 승강장의 설치되어 있는 스크린도어는 서울교통공사의 소유였다. 이용객 변동 개집표기가 5호선측으로 통합되어 있어 이용객 수는 모두 5호선 이용객으로 집계된다. 갤러리 같이 보기 까치울역 인접한 역 외부 링크 까치산역 소개 (서울교통공사 사이버 스테이션 홈페이지) 각주 서울 강서구의 전철역 1996년 개업한 철도역
|
89015
|
https://ko.wikipedia.org/wiki/%ED%97%AC%EB%A1%9C%ED%82%A4%ED%8B%B0
|
헬로키티
|
헬로키티(Hello Kitty, )는 일본의 캐릭터 전문 기업인 산리오에서 캐릭터 상품용으로 만들어낸 캐릭터군(群), 혹은 주인공인 키티를 가리킨다. 개요 주인공인 키티 화이트(Kitty White, )는 의인화된 흰 아기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왼쪽 귀에 리본이나 그 외의 장신구를 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 산리오사(社)를 대표하는 장수 캐릭터이다. 키티 화이트는 정확히 말하면 고양이가 아니라 소녀이다. 2014년 7월 28일, 키화이트 제작사인 일본 산리오사(社)는 자사 웹사이트를 통해 "헬로 키티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쾌활하고 행복한 소녀"라고 설명했다. 헬로 키티의 양볼 옆에 각각 있는 털 세 가닥이 마치 고양이 수염으로 보이고, 전체적인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고양이로 오해해왔다. 산리오사는 이 털 세 가닥에 대하여 "소녀는 귀밑 털이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 "실제 이름은 키티 화이트이고 1974년 11월 1일 영국 잉글랜드 남부에서 태어났다. 혈액형은 A형"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캐릭터이며, 판매되는 상품은 문방구를 중심으로 식품, 컴퓨터에서 경자동차까지 일상생활의 거의 전영역에 걸쳐 있다. 그러나, 산리오는 술이나 담배 제품에는 라이선스를 제공하지 않는 방침을 정해 놓고 있기에 이 두 종류에 관한 상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소프트 리큐르나 담배용품(라이터나 파이프 본체)에 허가가 나는 경우가 있으며, 키티 와인, 지포 라이터(키티 탄생 30주년 기념으로 2004년에 한정품으로 발매되었다)는 실제로 있다. 캐릭터로서 개발된 것은 1974년이며, 공식적으로는 1974년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처음 상품이 발매된 것은 1975년 3월이다. 최초의 상품은 비닐제 동전지갑이었다. 당시 가격은 240엔이었으며, 산리오에는 남아있지 않았던 것을 사용하던 고객이 기증하여 전시되고 있다. 이 기증품을 토대로 재설계하여 단 1번 한정으로 복각, 판매되었다. 1975년까지는 이름이 없는 상태였으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흰 아기고양이의 이름을 따와 '키티'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성인 '화이트'는 나중에 설정이 변경되며 붙은 것으로, 초기 설정에는 없었거나 비공개로 추정된다. 초기 상품에는 앉은 자세 뿐이었으나 1977년에 처음으로 일어선 자세가 그려진 상품이 판매되었다. 성우 시라이시 후유미 코야마 마미 하야시바라 메구미 키티 화이트 1971년 11월 1일생 (초대 디자이너인 시미즈 유우코의 생일에서 유래) 출신지: 런던 근교 신장: 사과 5개분 체중: 사과 3개분 혈액형: A형 좋아하는 과목 : 영어 장래희망 : 피아니스트 좋아하는 음식 : 엄마가 만들어 준 애플파이 디자이너: :시미즈 유우코(1974년~1976년) :요네쿠보 세츠코(1976년~1980년) :야마구치 유우코(1980~2011년) 가족 미미: 키티의 쌍둥이 여동생으로, 리본은 오른쪽에 붙는다. (1976년에 설정 추가) :주로 미미의 리본은 노란색, 키티의 리본은 빨간색인 경우가 많다. 조지: 키티의 아버지 (1976년에 설정 추가) 메리: 키티의 어머니 (1976년에 설정 추가) 앤서니: 키티의 할아버지 (1979년에 설정 추가) 마가렛: 키티의 할머니 (1979년에 설정 추가) 남자친구 다니엘 스타: 키티의 남자친구. 상품명은 '디어 다니엘'.(1993년에 설정 추가) 그 외 원래 헬로키티는 당시 스누피의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던 산리오에서 일본판 스누피로서 자리잡을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고안한 것이며, 스누피가 개인 점에서 고양이 캐릭터를 골랐다. 키티에게 입이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과 감정을 공유하게끔 하기 위해 일부러 그리지 않는 것이나,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렇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입이 그려진다(단, 2006년 4월부터 '키티즈 파라다이스 PLUS'에서 방송된 애니메이션 '헬로 키티 사과나무 판타지'에서는 입이 없다). 일본 전국의 관광지에서는 지역한정 키티 상품이 팔리고 있다. 매년 신작을 발매한다. 2004년 6월에 쿡 제도의 법정 통화인 쿡 아일랜드 달러의 헬로키티 30주년 기념판 금화, 은화가 발매되었다. 중화민국의 항공 회사인 에바 항공에 도입된 A330-300 여객기와 보잉 777-300ER의 일부 기종에 헬로키티 도색을 운용하고 있다. 에브리타운에도 등장하였는데, 인형, 인형 공방, 스웨터, 스웨터 공방, 조경물로 나왔다. 대한민국 (주) 제이콥에프앤비에서는 '헬로키티카페'를 런칭하여, 현재 서울 홍대, 신촌, 명동, 제주 헬로키티아일랜드 점을 운영한다. 대한민국 (주) 제이콥씨앤이에서는 2014년 1월 1일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헬로키티아일랜드'를 개관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후저우 시에도 헬로키티 테마파크가 개원하였다. 산요 신칸센을 운영하는 서일본여객철도(이하 JR서일본)의 경우, 서일본 지역 활성화를 목표로 추진하는 '헬로 키티 테마 열차'를 기획 했으며, 2018년 6월 30일부터 산요 신칸센 고다마 호 등급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같이 보기 산리오 고양이 스누피 일본 외부 링크 헬로 키티의 프로필 메바에 유치원 (잡지) 가공의 쌍둥이 하야시바라 메구미 가공의 고양이 가공의 영국 사람 1974년 창조된 가공인물 산리오 캐릭터
|
179662
|
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C%83%81%ED%98%B8%20%28%ED%94%84%EB%A1%9C%EA%B2%8C%EC%9D%B4%EB%A8%B8%29
|
신상호 (프로게이머)
|
신상호(1990년 2월 9일~ )는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이다. Swagger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종족은 프로토스이다. Killer라는 아이디를 사용한 적이 있다. 은퇴 전까지 MVP 주장으로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코칭스태프 및 선수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은퇴를 선언했다 개요 스타크래프트 2006년 상반기 드래프트에서 이네이쳐 탑(이스트로)의 1차 지명으로 입단하였다. 그는 100명의 준프로 선수들 중에 가장 먼저 1순위로 프로구단에서 지명 한 선수여서 이슈가 주목됐다. 현피토스의 유래 현피토스란 별명은 2007년 12월 22일, 곰TV MSL 시즌 4 조지명식에서 유래됐다. 당시 염보성이 신상호를 지목하면서 "신상호 선수의 눈빛을 보면 우승을 한 번 하신 분 같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이고 발차기 하는 모습을 보고 태권도 선수 같았다" 라고 말하자 신상호는 "우승자 같은 눈빛이라고 해주셔서 기분은 괜찮은데 내가 좋아하는 발차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운동 선수 같다고 하면 곤란하다" 라며 "한 대 맞아보실래요?"라며 응수하자 염보성이 "악의는 없었고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 몰랐다" 라며 사과했다. 이에 네티즌들은 염보성을 조롱하면서 이 발언을 한 신상호를 비난했다. 동시에 네티즌들은 신상호에게 ' 현피토스 '라는 별명을 붙였다. 폭룡토스의 유래 폭룡토스란 프로리그 0910 시즌 때 6룡인 프로토스 선수들을 포함해 그 시즌 가장 승률이 좋은 선수였다. 그래서 네티즌 사이에서 6룡들 보다 더 높기 평가해서 폭룡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프로리그 승률 83% , 스타리그 , MSL 전부 진출해 0910 시즌 전체 승률 1위를 당당히 차지한 프로토스였다. 말그대로 경기스타일이 폭력적이고 거침없는 남자다움을 표현해 "폭룡토스"라는 별명을 붙였다. 스타크래프트 II 신상호는 2010년 스타크래프트 1 프로게이머를 은퇴하고 TSL팀에서 스타크래프트 II 게이머로 활동중이다. 2011년 11월 28일, TSL과 결별하고 무소속으로 활동중이었다. 2012년 2월 부로 미국의 게임단 컴플렉시티 게이밍에 입단하였다. 해외팀과 1년의 계약을 마치고 계약기간 MVP 국내게임단에 재입단하였다. 2014년 7월 31일 MVP와의 결별을 공식 발표했다. 마지막까지 MVP 주장으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코칭스태프 및 선수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은퇴를 선언했다. 수상 경력 스타크래프트 2004년 메가웹스테이션 우승 2006년 2월 제19회 커리지매치 입상 2007년 8월 2007 서울 국제 e스포츠 페스티벌 스타크래프트 256강전 4강 2007년 9월 곰TV MSL 시즌3 32강 2008년 1월 곰TV MSL 시즌4 32강 2008년 8월 인크루트 스타리그 2008 16강 2010년 9월 프로리그 다승,승률 부분 1위 ( MVP 수상 ) 스타크래프트 II 2010년 G-Star 2010 스타크래프트 II 올스타전 4강 2010년 소니 에릭슨 스타크래프트 II OPEN Season 2 4강 2011년 소니 에릭슨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Jan. Code A 4강 2011년 인텔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Mar. Code A 8강 2011년 LG 시네마 3D, 인텔코리아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May Code S 8강 2011년 LG 시네마 3D, 인텔코리아 슈퍼 토너먼트 64강 2011년 PEPSI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July Code S 8강 2011년 PEPSI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Aug. Code S 8강 2011년 소니 에릭슨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Oct. Code S 16강 2011년 소니 에릭슨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Nov. Code S 16강 2012년 핫식스 2012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시즌 1 Code A 24강 2012년 핫식스 2012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시즌 2 Code A 4강 2012년 무슈제이 2012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시즌 3 Code A 8강 2012년 핫식스 2012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시즌 4 Code A 16강 2013년 핫식스 2013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시즌 1 Code A 32강 2013년 2013 WCS Korea Season 1 챌린저리그 우승 2013년 2013 WCS 코리아 시즌 2 챌린저리그 4강 2013년 2013 WCS 코리아 시즌 3 조군샵 글로벌 스타크래프트 II 리그 8강 2013년 2013 WCS 코리아 시즌 3 챌린저리그 16강 2012년 11월 라스베가스 IPL 우승 2014년 3월 올란도 MLG 우승 2015년 5월 독일 NASL 우승 합기도 중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합기도를 배웠고, 2005년 제 15회 전국 합기도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까지 딴 실력파다. 각주 외부 링크 신상호 트위터 살아있는 사람 1990년 출생 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 프로토스 선수 순천시 (전라남도) 출신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 이스트로의 선수 Team SCV Life의 선수 MVP (e스포츠)의 선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
82852
|
https://ko.wikipedia.org/wiki/%ED%95%B5%EC%8B%A4%ED%97%98%20%EA%B8%88%EC%A7%80%20%EC%A1%B0%EC%95%BD
|
핵실험 금지 조약
|
핵실험 금지 조약은 다음 두 조약을 말한다.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1963년)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1996년)
|
195796
|
https://ko.wikipedia.org/wiki/Junicode
|
Junicode
|
Junicode(주니코드, 유니코드)는 중세 유럽 연구자를 위한 세리프 트루타입 글꼴이다. 라틴 문자, 룬문자, 국제음성기호, 그리스 문자 등의 영역을 취급하고 있으며, Medieval Unicode Font Initiative(MUFI)에서 중세 문헌용으로 지정한 유니코드 사용자 영역 표준인 MUFI 4.0 전체를 지원한다. GPL하에 자유롭게 무료로 배포되고 있다. 이탈릭체가 아닌 글자의 모양은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의 전신인 Clarendon Press에서 17세기 경 사용하던 활자체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스어 문자는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된 활자체를 따온 것이므로 현대 그리스 문자가 아닌 중세의 모습을 담고 있다. Junicode는 일반 서체, 이탈릭체, 굵은 서체, 굵은 이탈릭체로 제공되며 합자 처리, 언어별 문자모양 전환, 고전적인 숫자 모양 선택, 각종 발음구별기호 조합 등 트루타입과 오픈타입 기술을 지원한다. 외부 링크 Junicode 2 Junicode 1 Medieval Unicode Font Initiative 세리프 글꼴 유니코드 글꼴 오픈 소스 글꼴
|
180948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EB%84%88%EB%9F%B4%20%EC%9D%BC%EB%A0%89%ED%8A%B8%EB%A6%AD%20F404
|
제너럴 일렉트릭 F404
|
제너럴 일렉트릭 사의 F404는 후기연소기(afterburner)가 장착된 10,500 ~ 18,100 lbf (85 kN)급의 터보팬 엔진이다. 이후 F414 및 민수용의 GE36 엔진(프롭팬)으로 파생되었다. 러시아의 동급 출력의 엔진으로 RD-33 엔진이 있다. 비교 FA-50은 8톤 추력의 터보팬 단발엔진을 사용한다. 이런 엔진으로는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 F404, 프랑스 스넥마 M53, 스넥마 M88, 유럽 유로제트 EJ200, 러시아 클리모프 RD-33가 있다. 8~9톤 추력 단발엔진을 사용하는 군용기로는 미국 F-20 타이거샤크, 스웨덴 사브 JAS 39 그리펜, 인도 HAL 테자스, 이스라엘 IAI 크피르, 프랑스 미라주 2000, 중국 FC-1이 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삼각익기의 원조로 흔히 알려져 있는, 60년째 생산중이고, 가장 많은 나라에 수출된, 프랑스 미라주 2000 시리즈이다. 따라서, FA-50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한국판 미라주라고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8~9톤 추력 쌍발엔진을 사용하는 군용기로는 미국 F/A-18 호넷, 프랑스 다소 라팔, 유럽 유로파이터 타이푼, 러시아 미그-29 전투기와 미국 F-117 폭격기가 있다. 미국처럼 13톤 추력 단발엔진 F-16과 쌍발엔진 F-15와 같이, 단발기와 쌍발기를 주력 공군기로 독자개발해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 뿐이다. 9.7톤 단발엔진 미라주 2000과 8톤 쌍발엔진 다소 라팔을 독자개발해, 공군 주력기로 사용하고 있다. 엔진, 항법장비, 미사일, 폭탄 등을 모두 국산화했다. 러시아, 중국 등도 단발 쌍발 모두 독자개발은 했으나, 단발기를 공군 주력기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사용 기체 보잉 F/A-18 호넷 쌍발엔진 록히드 F-117 나이트호크 쌍발엔진 F-20 타이거샤크 단발엔진 보잉 X-45 단발엔진 다소 라팔 쌍발엔진 사브 JAS 39 그리펜 단발엔진 한국항공우주산업 T-50 골든이글 단발엔진 제원 (F404-GE-402) 형식: 후기연소기(afterburner)가 장착된 터보팬 길이: 154 in (3,912 mm) 직경: 35 in (889 mm) 무게: 2,282 lb (1,036 kg) 압축기: 팬 3단 및 압축기 7단으로 이루어진 축류 압축기 바이패스비: 0.34:1 터빈: 1단 저압 터빈 및 1단 고압 터빈 추력 11,000 lbf (4,950Kg, 48.9 kN) (후기 연소기를 사용하지 않을 때) 17,700 lbf (7,965Kg, 78.7 kN) (후기 연소기를 사용할 때) 압축비: 26:1 비연료소모율 0.81 lb/(lbf·h) (82.6 kg/(kN·h)) (후기 연소기를 사용하지 않을 때) 1.74 lb/(lbf·h) (177.5 kg/(kN·h)) (후기 연소기를 풀가동할 때) 추력 대 무게 비: 7.8:1 (76.0 N/kg) 외부 링크 GE Aviation 사의 F404 페이지 GlobalSecurity.org의 F404 페이지 항공기 엔진
|
182651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A7%80%EC%95%88
|
정지안
|
정지안(, 1990년 4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학력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 활동 드라마 영화 2001년 《선물》 ... 초등 애숙 역 2001년 《베사메무쵸》 ... 이자두 역 2005년 《제니 주노》 ... 미자 역 2007년 《열세살 수아》 ... 은지 역 2007년 《기담》 ... 최 간호원 역 2008년 《시선1318-진주는 공부중》 ... 진주 역 2012년 《청춘 그루브》 ... 편의점 알바 역 2015년 《미쓰 와이프》 ... 최 과장 부인 역 외부 링크 소속사 럭키몬스터 엔터테인먼트 의한 공식 프로필 199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여자 배우 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 대한민국의 여자 어린이 배우
|
142385
|
https://ko.wikipedia.org/wiki/%EB%B6%84%EB%B0%B0%20%ED%95%A8%EC%88%98%20%28%ED%86%B5%EA%B3%84%EC%97%AD%ED%95%99%29
|
분배 함수 (통계역학)
|
통계 역학에서 분배 함수(分配函數) Z는 열역학적 평형에 있는 계의 통계적 성질을 계산하는 데 쓰는 중요한 개념이다. 분배 함수는 온도나 부피와 같은 열역학적 변수의 함수다. 자유 에너지, 엔트로피, 압력과 같은 열역학적 계의 거시 변수는 대부분 분배 함수나 분배 함수의 미분으로 표시할 수 있다. 분배 함수는 앙상블의 종류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뉜다. 바른틀 앙상블(canonical ensemble)은 일정한 온도, 부피, 입자의 개수를 유지하면서 주위 환경과 열을 교환할 수 있는 계에 적용되며, 바른틀 분배 함수로 기술한다. 큰 바른틀 앙상블(grand canonical ensemble)은 일정한 온도와 부피, 화학 퍼텐셜을 유지하면서 주위 환경과 열과 입자를 교환할 수 있는 계에 적용되며, 큰 바른틀 분배 함수로 기술한다. 기타 다른 분배 함수는 각각 다른 환경에서 정의한다. 바른틀 분배 함수 정의 온도와 계의 부피, 계 내부에 있는 입자의 수가 고정된 닫힌 계로 이루어진 앙상블을 바른틀 앙상블이라 한다. 계의 모든 미시상태에 일련 번호 (=1,2,3, ...)를 붙이고, 계가 미시상태 에 있을 때 계의 총 에너지를 로 표기하자. 일반적으로 계의 불연속적인 양자상태를 미시상태로 간주한다. 바른틀 분배함수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β는 보통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T는 계의 온도를 뜻하며, kB은 볼츠만 상수다. 미시상태에 겹침(degeneracy) 상태가 존재할 경우, 분배함수는 다음과 같이 쓴다. 여기서 는 겹침 인자다.. 물리적 의미 분배 함수는 온도 T와 미시상태 i의 에너지 Ei의 함수다. 또한 미시상태의 에너지는 입자의 개수, 계의 부피와 같은 열역학적 변수의 함수다. 미시상태의 에너지를 계산해서 분배함수를 구성할 수 있으면, 그 분배함수에서 계의 다른 열역학적 특성을 계산해낼 수 있다. 또한 분배 함수에는 중요한 통계적 의미가 있다. 계가 미시상태 j에 있을 확률 Pj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여기서 는 볼츠만 인자다. 여기서 분배함수는 확률값의 합을 1로 만드는 틀맞춤(Normalization) 상수로 쓰였다. "분배 함수"라는 이름은 각각 다른 미시상태의 확률을 '분배'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Z란 문자는 독일어 단어 Zustandssumme에서 왔으며 "상태의 합(영어: "sum over states")"이란 뜻이다. 열역학적 변수와 관계 큰 바른틀 분배 함수 정의 열역학적 변수와 관계 참조 통계역학 물리학 개념
|
268266
|
https://ko.wikipedia.org/wiki/%EC%82%B0%ED%98%B8%ED%95%B4%20%ED%95%B4%EC%A0%84
|
산호해 해전
|
산호해 해전(), 1942년 5월 4일부터 5월 8일까지 치러진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로, 일본군 해군과 미국·호주 연합해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산호해 해전은 양측 항공모함이 서로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직후 서로를 향해 직접적인 공격을 가했다. 남태평양에서 일본의 방어를 강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일본군은 뉴기니의 수도 포트 모레스비, 그리고 남동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를 소유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한 작전명은 'MO작전'으로 불린다. 여기에 일본연합함대의 정규항공모함 2척, 경항공모함 1척이 침공대를 지원하기 위해 남하하였다. 이 함대의 총책임자는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이었다. 미국은 암호해독을 통해 일본군의 계획을 알아냈고 2척의 정규항모와 미국-호주 순양함대를 파견하였다. 이 함대의 총책임자는 프랑크 플레쳐 제독이었다. 5월 3-4일에, 일본군은 성공적으로 툴라기를 침공,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몇몇 전함이 미국 정규항모 요크타운의 항공공격을 받아 침몰하거나 손상되었다. 미국 항공모함이 근처에 있음을 알아차린 일본함대는 연합군의 함대를 수색, 격멸하기 위해 산호해로 진입하였다. 5월 7일, 양측 함대는 이틀간 계속해서 서로의 공격기를 주고받으며 격렬하게 싸웠다. 첫날, 미국은 일본의 경항공모함 쇼호를 침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고, 일본은 이에 반해 구축함 한척을 침몰시키고 급유함 한척을 대파하여, 첫날은 미국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다음날, 일본이 미국 정규항모 렉싱턴을 대파하여 스스로 침몰하게 했으며, 다른 정규항모 요크타운도 대파시킨데 반해, 미국은 일본의 정규항모 쇼카쿠를 대파, 정규항모 즈이카쿠를 소파하는데 그쳐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 과정에서 양측은 엄청난 항공기 피해를 입었으며, 양측 함대 모두 물러났다. 공중엄호력이 약해진 것을 우려한 이노우에 제독은 포트 모레스비 침공군을 물렸으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일본군은 경항공모함 1척 침몰, 정규항공모함 1척 대파, 정규항공모함 1척 소파의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미국-호주 연합군은 정규항공모함 1척 침몰, 정규항공모함 1척을 대파당했다. 가장 비싸고 진수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규항모가 침몰하였으므로 피해상황만 놓고 보면 일본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후의 전쟁전개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미국의 승리로 판단한다. 그 이유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항공모함 쇼카쿠와 즈이카쿠이다. 쇼카쿠는 대파당했고, 즈이카쿠는 항공기의 손실이 막심하였으나 일본의 산업력으로는 보충이 늦었다. 결국 이 두 항공모함은 이후 미드웨이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였으며, 그에 따라 미국은 미드웨이에서 일본을 이길 수 있었다. 미드웨이에서 일본은 완전히 허를 찔렸으나, 쇼카쿠와 즈이카쿠가 포함되어 있었다면 모든 전략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를 뒤집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판단이다. 물론, 미국 역시도 이 전투에서 정규항모 렉싱턴을 잃고 요크타운도 큰 손상을 입었지만, 엄청난 수리력을 발휘하여 요크타운을 끝내 미드웨이 전장에 참가시켰기 때문에, 산호해 해전은 일본이 전술적으로는 승리하였으나 전략적으로는 미국이 이겼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미드웨이에서 패한 일본은 다시 포트 모레스비를 공격하지 못했으며, 연합군은 이후 과달카날 전투, 뉴기니 전투에서 큰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남태평양에서의 일본의 방어는 부서졌고, 2차 세계대전 일본의 항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배경 일본의 확장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항공모함 6척을 동원해서 미국령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했다. 이 공격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의 대부분의 전함이 침몰하거나 크게 손상되었으며,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 수뇌부는 미국 함대를 무력화하고, 동남아시아의 풍부한 자원을 장악하며, 그들의 넓은 식민지를 방어하기 위한 거점을 소유하고자 했다. 진주만을 기습함과 동시에, 일본은 말레이반도 역시도 침공했으며, 이곳을 점거중이던 영연방,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도 이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을 결성하였다. 일본 연합함대는 1941년 11월 1일부로 1호작전을 발령하였는데, 이것의 최종 목표는 영연방과 미국을,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필리핀에서 쫓아내고, 그곳에서 쏟아지는 풍부한 자원을 손에 넣어,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942년 초 몇달 동안, 말레이를 포함하여 일본은 지속적인 동남아 침공을 가했고, 필리핀, 타이,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웨이크섬, 뉴브리튼, 길벗제도를 몽땅 손에 넣었다. 연합군의 중추인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반신불수가 되었으므로 일본은 큰 어려움 없이 이곳의 연합군을 축출하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일본은 그들이 점령한 땅에 강력한 요새와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연합군의 어떠한 반격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해군 지휘부는 일본 남태평양 세력의 위협이 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북쪽을 침공할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에만 막대한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으므로,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침공할 여유는 없다며 이 건의를 거절하였다. 게다가, 일본 남태평양은 대부분 일본해군 4함대 관할이었는데, 4함대를 통솔하는 이노우에 시게요시 중장은 오스트레일리아를 점령하는 것보단, 남동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와, 뉴기니의 수도 포트 모레스비 - 북부 오스트레일리아를 비행거리 내에 둘 수 있는 -를 점령하는 쪽을 지지하였다. 이노우에는 툴라기와 포트 모레스비를 장악하면 일본함대의 주력이 정박중인 뉴브리튼의 라바울 섬 방비를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일본 해군은 육군의 도움이 없으면 오스트레일리아 점령이 불가능했고, 일본 육군 또한 툴라기와 포트 모레스비 정도면 많은 육군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 보아, 양측 모두 이노우에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이제 이 지역은 뉴칼레도니아, 피지, 사모아를 점령하는 전초기지가 되고, 그렇게 되면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간의 보급선을 끊을 수 있을 것이었다. 1942년 4월, 일본 해군과 육군은 툴라기와 포트 모레스비 점령작전을 구체적으로 입안하고, ‘MO작전’으로 명명한다. 이 작전에서는 5월 10일까지 포트 모레스비를 침공,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전 5월 2-3일에 툴라기를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고, 해군은 이곳에 수상기 기지를 건설하여, 남태평양의 미군 활동을 감시하고 정찰하는데 이용하고자 하였다. MO작전이 끝날 경우, 해군은 RY작전을 발령하여 나우루, 오션제도를 5월 15일까지 점령하고, RY작전까지 성공적으로 끝나면, FS작전을 발령하여 피지, 사모아, 뉴칼레도니아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3월에 이미 연합군의 항공모함이 뉴기니의 라-사라무아 지역을 침공하는 일본함대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이노우에는 또다시 연합군이 항공모함을 보낼 것을 염려하여 일본 연합함대의 항공모함 3척을 보내어 MO작전의 항공엄호를 하도록 하였다. 특히, 이노우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타운스빌과 쿡타운의 연합군 폭격기들을 가장 우려하였다. 이들은 라바울과 라-사라무아를 사정거리 내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연합함대의 총책임자인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진주만 기습때 미국 항공모함을 놓쳤던 것을 매우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MO작전을 통해, 6월에는 미국 항공모함을 전장에 끌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MO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하와이를 공격하는 제스처를 취하면, 미국의 항공모함은 더이상 숨을곳이 없었다. 미국이 진주만에서 대부분의 전함을 잃었으므로, 아직은 일본이 해군력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는 하와이 근처 미드웨이를 낙점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국의 남은 항공모함들을 전부 격멸하기만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마모토는 MO작전의 성공을 지원하기 위해, 2척의 정규항모, 1척의 경항모, 1 순양함대, 2 구축함대등 상당한 규모의 함대를 파견하고,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MO작전의 지휘자로 임명했다. 연합군측의 대응 일본군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실 미국 해군은 해군통신부의 통신보안부서는 몇년 전부터 이미 일본군의 암호와 코드를 해독하는데 성공한 상태였다. 1942년 3월, 연합군측은 일본군 통신의 반절 가까이를 차지하는 JN-25B 암호의 15%를 해독할 수 있었다. 4월이 지날 때에는 85%를 해독할 수가 있게 되었다. 1942년 3월, 연합군은 일본측 통신을 가로채어, 처음으로 MO작전의 존재를 눈치챈다. 4월 5일, 연합군은 일본 항공모함과 전함들을 이노우에의 영역으로 보내는 메시지를 가로챌 수 있었다. 4월 13일, 연합군은 이노우에에게 보내는 메시지 도 해독한다. 제 5 항공전대에는 정규항모 즈이카쿠와 쇼카쿠가 편성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연합군은 MO작전의 타겟이 포트 모레스비라는 것을 알아낸다. 한편, 태평양 기동함대의 새 제독으로 임명된 체스터 니미츠 대장과 그의 참모들은 해독된 일본측 메시지에 대해 논의하였고, 일본의 남서태평양 첫 목표지가 포트 모레스비일 것 같다는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연합군측은 포트 모레스비를 반격의 중요거점으로 여기고 있었다. 니미츠의 참모부는 일본의 MO작전이 또한, 항공모함들을 동원하여 미군의 기지인 사모아와 수바 또한 공습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니미츠 제독은 어네스트 킹 - 미 해군 총사령관 - 에 건의하여, 태평양에서 미군의 가용한 항공모함 모두를 (당시 4척) 산호해에 투입하여 일본의 야욕을 저지하겠다고 허락을 받았다. 4월 27일까지, 미군의 암호해독반은 MO작전과 RY작전의 더 구체적인 사항과 목표를 알아내었다. 4월 29일에, 드디어 니미츠는 그의 항공모함 4척 모두에게 명령을 내려 산호해로 향하는 전함들을 보호토록 하였다. 플레쳐 미 해군소장이 이끄는, 정규항모 요크타운이 포함된 미 17기동함대는, 순양함 3척과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았고, 보급대로는 급유함 2척과 구축함 2척이 뒤따랐다. 17기동함대는 4월 27일 통아타부 본진을 떠나, 산호해로 향하였다. 어브레이 피치 미 해군소장이 이끄는, 정규항모 렉싱턴이 포함된 미 11기동함대는, 순양함 2척과 구축함 5척의 호위를 받았고, 피지와 뉴칼레도니아 사이를 항해하고 있었다. 윌리엄 허지 미 해군중장이 이끄는, 정규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이 포함된 미 16기동함대는, 둘리틀 특공대를 도쿄에 발진시키고 이제 막 진주만에 돌아온 상태였으므로, 산호해의 전투에는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니미츠 제독은 그동안 플레처를 남태평양 함대 관할로 맡겼다. 사실, 산호해 영역은 미 육군을 이끄는 맥아더의 관할이었지만, 이 전투에서 플레처와 헐지는 상부보고시, 맥아더가 아닌 니미츠에게 직접적으로 보고를 올렸다. 한편, 일본측도 미 16기동함대가 진주만에 도착했다는 통신을 가로채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한척을 제외한 미국의 항공모함이 전부 진주만에 있다고 생각하였고, 나머지 한 척의 항공모함의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없었으므로, 미국의 항공모함이 일본의 MO작전에 적절히 반응할거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전투 전초전 4월 하순 동안, 일본의 잠수함 RO-33과 RO-34는 상륙침공하기로 계획된 장소들을 정찰중이었다. 이 잠수함들은 로젤제도와 조마드 해협, 포트 모레스비로 가는 길 등을 탐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연합군 배를 발견하지 못하고, 4월 23일과 24일 각기 라바울에 귀항하였다. 일본의 포트 모레스비 침공대는, 코소 아베 일 해군소장의 지휘를 받았으며, 일본육군의 남태평양군 소속 5천명의 병력과 일본해군 육전대 5백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호송하는 함대는 사다미치 카치오카 일 해군소장이 이끄는 경항모 1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6척의 함대였다. 아베의 상륙함대는 5월 4일 라바울을 출발하여 다음날 카치오카의 호위함대와 합류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8노트의 속도로 조마드 해협을 지나 뉴기니 남쪽을 돌아 5월 10일 포트 모레스비로 도착할 예정이었다. 포트 모레스비의 연합군 수비대는 5,333명으로, 숫자만 놓고보면 방어에 충분하였으나, 그중 반절은 제대로 훈련받은적이 없고 무장도 빈약했다. 일본의 툴라기 침공대는, 키요히데 시마 일 해군소장의 지휘를 받았으며, 일본해군 육전대 4백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륙함대는 기뢰부설함 2척, 구축함 2척, 기뢰제거함 6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툴라기 상륙을 지원하는 함대는 아리토모 고토 일 해군소장이 이끄는 경항모 1척(쇼호), 중순양함 4척, 구축함 1척의 함대였다. 나중에 여기에 쿠니노리 마루모 일 해군소장이 이끄는 경순양함 2척, 수상기모함 1척(카와카마 마루), 기관총보트 3척도 합류한다. 툴라기가 5월 3일 혹은 4일 함락되면, 이 호위함대들은 전부 포트 모레스비 공략을 지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노우에 일 해군중장은 중순양함 가시마에 탑승하여, MO작전을 총지휘하였다. 고토의 함대는 4월 28일 트럭 섬을 떠나, 부겐빌과 초이설 사이의 솔로몬 해역을 가로질러 뉴조지아 부근에 잠시 정박하였다. 마루모의 지원함대는 4월 29일 뉴아일랜드를 떠나 산타 이사벨 제도의 천선만으로 향했다. 툴라기 침공을 지원할 수상기 기지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시마의 육전대는 4월 30일 라바울에서 출발하였다. 정규항모 즈이카쿠와 쇼카쿠가 포함된 제 5항공전대는, 중순양함 2척, 구축함 6척의 호위를 받으며 5월 1일 트럭을 떠났다. 제 5항공전대는 일 해군중장 타케오 다카기의 지휘를 받았다. 다카기는 중순양함 묘고를 기함으로 하였으며, 하라 주이치 일 해군소장이 즈이카쿠를 타고 항공대를 지휘하였다. 제 5항공전대는 솔로몬제도의 동쪽을 타고 내려와 과달카날 남쪽의 산호해 해역으로 진입하였다. 산호해 해역에 진입하면, 제 5항공전대는 일본의 상륙침공대에 공중엄호를 제공하고, 포트 모레스비의 연합군 항공력을 괴멸시키며, 동시에 산호해 해역으로 진입하는 연합군 세력은 즉시 격퇴하는 임무를 맡았다. 산호해로 향하는 도중, 다카기는 9대의 제로기를 라바울로 보냈다. 하지만 기상조건이 좋지 않아 제로기들이 귀환해야만 했고, 그중 1기는 바다에 추락하였다. 다카기는 한번 더 제로기를 보냈으나 또다시 실패하였고, MO작전의 시간기한을 맞추기 위해 제로기를 라바울에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솔로몬 제도에서 함대 급유를 받도록 지시했다. 혹시나 접근할지 모를 연합군 함대의 조기경보를 제공하기 위해, 일본은 잠수함 4척을 보내어 과달카날 남서쪽 520마일 해상에서 감시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작 연합군측 플레쳐의 함대는 잠수함들이 감시위치에 도달하기 전에 과달카날을 이미 빠져나갔으므로, 일본은 플레쳐의 함대가 오는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정찰을 위해 추가파견했던 잠수함 I-21은, 미 정규항모 요크타운이 보낸 항공기에 의해 공격을 받기까지 하였으나, 일단 잠수함은 피해를 받지 않았고, 그 항공기가 육지기지에서 보낸 것으로 착각하여, 이 상황에서도 일본은 미국함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일본 잠수함들은 몽땅 정찰업무에 투입되었으나 아무도 미 함대를 발견하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는 전투에 어떠한 잠수함도 참가하지 못했다. 5월 1일 아침, 미 17 기동함대와 11기동함대는 뉴칼레도니아 남서쪽 350마일 해역에서 합류하였다. 플레쳐는 11기동함대는 급유함 티피카노에서, 17기동함대는 급유함 네오쇼에서 급유를 받도록 하였다. 17기동함대는 다음날까지 급유가 완료되었으나, 11기동함대는 5월 4일에야 급유를 마칠 수 있었다. 툴라기 5월 3일 아침, 시마의 함대가 툴라기에 도착했고 곧 섬을 점령하기 위해 육전대를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툴라기는 무방비 상태였다. 오스트레일리아 특전사로 구성된 소수의 수비대와 오스트레일리아 정찰기 몇대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상륙한 일본군은 즉시 이 섬에 수상기 기지와 통신센터를 건설하였다. 경항모 쇼호에서 날아온 전투기들이 오전동안 이곳을 엄호해 주었다. 그동안 고토의 함대는 급유를 받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급유가 끝나면 포트 모레스비의 상륙작전을 엄호하도록 되어 있었다. 5월 3일 17:00, 플레쳐는 일본군의 함대가 툴라기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11기동함대는 급유를 계속 받고 있어야 했고, 17기동함대는 무선침묵 때문에 통신을 할 수가 없었다. 17기동함대는 다음날 아침 툴라기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과달카날로 출발하였다. 5월 4일, 17기동함대는 과달카날 남쪽 120마일 해상에서 총 60대의 항공기를 3번에 걸쳐 순차적으로 발진시켰다. 공격목표는 툴라기의 시마 함대였다. 요크타운에서 날아오른 항공기들은 시마의 함대를 기습하는데 성공했고, 구축함 기쿠주키와 3척의 기뢰제거함을 침몰시켰고 4척의 다른 함정에도 크고작은 피해를 입혔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 1대의 급강하폭격기와 2대의 전투기를 잃었지만, 조종사들은 모두 무사히 구조되었다. 공격을 나간 항공기들이 무사히 귀환하자, 17기동함대는 신속히 남쪽을 통해 전장을 이탈하였다. 항공기들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그러나 일본군은 수상기 기지 건설을 계속하였고, 5월 6일부터는 이 기지에서 수상기들이 정찰임무를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항공전대를 지휘하는 다카기가 연합군의 습격소식을 전해들은 당시에는 그의 함대가 툴라기 북쪽 350마일에서 급유를 받는 중이었다. 다카기는 즉시 급유를 중단하고 남동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연합군 함대가 솔로몬제도 동쪽에 있다고 예상하고, 정찰기들을 그곳으로 파견했다. 물론 연합군 함대는 이곳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정찰기들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공중정찰과 결단 5월 5일 8:16분, 17기동함대와 11기동함대, 그리고 44기동함대는 과달카날 남쪽 370마일 지점에서 합류하였다. 이때, 요크타운 소속 와일드캣 전투기 4대가 일본정찰기를 발견하고 격추시켰다. 이 정찰기는 격추되기 전 본진에 적기 출현보고를 하지 못하였으나, 이 정찰기가 돌아오지 않자 다카기는 연합군 항공모함이 그 부근에 있을 것임을 짐작하게 되었다. 한편 진주만으로부터 플레쳐에게 일본군의 포트 모레스비 상륙이 5월 10일에 있을 것이며, 일본 항공모함이 이들의 상륙을 엄호할 것이라는 정보가 제공되었다. 이 정보를 들은 플레쳐는 17기동함대에 재급유를 받을 것을 지시하고 재급유가 끝나는 5월 6일에 루이지애드로 출발하여 5월 7일에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이 와중에, 다카기의 항공전대는 솔로몬 제도 동쪽을 남하하고 있었다. 그러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 크리스토발의 남쪽을 지나 5월 6일에는 산호해 해역으로 진입하였다. 다카기는 툴라기 서쪽 210마일 지점에 이르자, 함대에 재급유를 받을 것을 지시하고 다음날 있을지도 모를 전투를 준비하였다. 5월 6일, 플레쳐는 11 기동함대와 44 기동함대를 17기동함대로 통합시켰다. 그리고 일본군 항공모함이 아직 부겐빌 북쪽 부근에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재급유를 계속하였다. 일본군의 함대가 정찰범위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의 정찰기는 하루종일 정찰을 했지만 일본군의 배 한척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반면 10:00시에, 툴라기의 수상기 기지에서 발진한 일본군 정찰기가 17기동함대를 발견하였고, 이를 긴급히 수뇌부에 알렸다. 다카기는 10:50분에 이 보고를 받았다. 이때 그의 함대의 위치는 플레쳐보다 350마일 북쪽에 있었다. 일본군 항공기들의 최대항속거리에 거의 딱 맞는 거리였다. 보고에 의하면 17기동함대는 남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카기는 두 함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게다가 플레쳐의 함대는 구름이 잔뜩 낀 곳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항공기들을 발진시켜도 연합군 함대를 발견하지 못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카기는 하라 소장으로 하여금 2대의 항공모함에 2척의 구축함을 딸려보내서, 내일 여명에 미국함대를 공격할 만큼 거리를 좁히게 하고 나머지 함대는 계속 급유를 받게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기지를 두고있던 미국의 B-17 폭격기들은 포트 모레스비를 향해 다가오는 고토의 전함들을 공격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맥아더의 사령부는 플레쳐에게 무전을 보내 일본군 상륙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맥아더의 정찰기는 17기동함대의 북서쪽 489마일 지점에서 일본해군의 경항모 쇼호를 발견했고, 이에따라 플레쳐는 여기에 일본군 항공모함들이 몽땅 다 있을거라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18:00시에, 17기동함대는 마침내 급유를 마쳤고, 급유함 네오쇼는 구축함 심즈의 호위를 딸려보내 떼어졌다. 연료를 모두 채운 17기동함대는 북서쪽의 로젤제도로 향했다. 그러나 20:00에, 적의 항공모함 2대가 70마일 부근에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본측도 마찬가지) 20:00시에, 일본의 하라 함대는 다카기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방향을 반대쪽으로 틀었다. 5월 6일에서 7일로 넘어가는 밤에, 상륙함 카와카미 마루는 데보인 섬에 수상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함대항공전 첫째날 아침 공격 5월 7일 아침 6:25분. 17기동함대는 로젤제도 남쪽 132마일 해상에 있었다. 플레쳐는 순양함과 구축함을 일부 보내어 조마드 해협을 봉쇄토록 하였다. 플레쳐는 이 순양함과 구축함들에게 공중엄호를 제공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였다. 플레쳐의 항공모함은 일본 항공모함과 직접 싸워야 했기 때문에 엄호를 제공할 여유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나중에 그의 항공모함이 일본 항공기의 공격을 방어하기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된다. 플레쳐는 자신의 항공모함이 위험해지게 될 것도 예상을 했으나, 일본군 상륙함이 포트 모레스비로 도달하지 못하게 저지하기 위해서는 조마드 해협을 반드시 봉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플레쳐는 다카기의 항공모함이 어딘지 정확히 모르지만 자신의 북쪽에 있을거란 정도는 예상하였다. 그래서 요크타운에서 차출한 10기의 급강하 폭격기(돈틀레스)를 보내어 6:19분부터 정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카기는 북쪽이 아니라 동쪽 350마일 해상에 있었다. 다카기는 12기의 함상폭격기(97식)를 6:00시에 출발시켜 17기동함대를 찾도록 했다. 하지만 일본측도 미국함대가 자신들의 남쪽에 있을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서쪽이 아닌 남쪽으로 정찰기들을 보냈다. 결국 양측의 정찰은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한편, 고토도 순양함 2척에서 각기 수상기 2기씩을 차출하여 남동쪽을 정찰하게 하였다. 데보인 섬에서 완성시킨 수상기 기지에서도 몇기의 수상기가 날아올랐다. 7:22분에 쇼카쿠에서 출발한 다카기의 정찰기가 미국의 함대를 보고해왔다. 또다른 정찰기도 이 함대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7:45분, 정찰기는 "항공모함 1척, 순양함 1척, 구축함 3척"이라고 보고해왔다. 다른 정찰기도 다시 이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항공모함이 아니라 급유를 마치고 내려가던 급유함 네오쇼였다. (플레쳐가 딸려보낸 심즈도 같이 있었다). 일본 수뇌부는 드디어 미국 항공모함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환희에 젖었다. 하라와 다카기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쇼카쿠와 즈이카쿠로부터 즉시 78대의 항공기를 출격시켰다. 18대의 제로 전투기, 36대의 99식 급강하폭격기, 24대의 뇌격기였다. 그러나 8:20분, 후루카타에서 보낸 수상정찰기 중 1기가 플레쳐의 진짜 항공모함을 발견했고, 이를 긴급히 라바울의 본부로 송신했다. 그러나 이미 항공모함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항공기를 보낸 다카기는 이를 지나쳐 버렸다. 8:30분에는 기누가사의 수상정찰기가 앞선 보고를 확인시켜 주었다. 그제서야 다카기와 하라는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이미 보낸건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고 최초의 보고가 진짜 항공모함이기를 바라며, 항공기들을 귀환시키지 않았다. 믿고싶은대로 믿어야 할 상황이었다. 혹은 재수가 좋으면, 연합군 항공모함이 두 그룹을 나뉘어 작전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었다. 한편 8:15분, 연합군의 항공모함 요크타운에서 발진한 돈틀레스 폭격기의 파일럿이, 고토의 함대를 발견하였다. 그는 이 함대가 원하던 목표물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나 실수로 "항공모함 2척, 중순양함 2척"으로 잘못 보고하였다. 플레쳐는 이 보고를 받고 그 역시도 기뻐하며 즉시 93대의 항공기를 출격시켰다. 요크타운과 렉싱턴으로부터 18대의 와일드캣 전투기, 53대의 돈틀레스 급강하 폭격기, 22대의 데버스테이터 뇌격기였다. 10:19분, 연합군 정찰기의 파일럿은 귀환했는데, 그제서야 자신의 보고가 잘못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사실 그는 순양함 2척과 구축함 4척으로 보고한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식별이긴 했다. 실제로는 경항모 쇼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보다 약간 전, 10:12분에 이미 다른 정찰기로부터는 이상한 보고가 들어왔다. 좀전 항공모함 2척이라고 보고되었던 것과 비슷한 위치에서 "항공모함 1척, 상륙함 10척, 함종식별 어려운 전투함 16척"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던 것이다. 이것이 고토의 함대의 정확한 보고였다. 그러나 어쨌든 플레쳐는 이 보고를 받고 자신이 일본 주력함대의 정확한 몸통을 찾아 전투기들을 파견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이미 보낸 전투기들을 나중에 보고가 들어온 쪽으로 목적지를 변경시켰다. 9:15분, 다카기가 파견한 공격기들이 목표지점에 다다랐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연합군의 항공모함이 아닌 구축함 심즈와 급유함 네오쇼였다. 공격기들은 그것들을 내버려두고 근처에 어딘가 있을 항공모함을 정신없이 찾아다녔다. 하지만 한시간이 지나서도 연합군의 항공모함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공격기들은 정찰기가 급유함을 항공모함으로 착각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카기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크게 실망한 다카기는 심즈와 네오쇼를 격침시키고 빨리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4대의 함상폭격기가 심즈와 네오쇼를 공격하였고, 나머지 항공기들은 급히 항공모함으로 돌아갔다. 4대의 폭격기의 공격을 받은 네오쇼와 심즈는 힘없이 가라앉는다. 4방의 폭탄을 맞은 심즈는 두동강이 나서 가라앉았다. 7방의 폭탄을 맞은 네오쇼는 이곳저곳이 만신창이가 되어 동력을 잃고 표류하다 가라앉았다. 동력을 잃기 전 네오쇼는 플레쳐에게 무전으로 대규모 일본 항공기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보고하였다. 하지만 긴박한 틈에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리는데는 실패하였다. 한편 10:40분, 고토의 함대에 다다른 미국 항공기들도 맹공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경항모 쇼호는 6대의 제로 전투기, 2대의 96식 전투기가 공중엄호 중이었다. 쇼호의 나머지 전투기는 갑판 아래 출격대기중이었다. 그리고 고토의 순양함들이 항공모함 주변을 다이아몬드 진형으로 호위하고 있었다. 렉싱턴에서 출발한 공격기들이 먼저 달려들었다. 이들은 대공방어망을 뚫고 쇼호를 집중공격, 2방의 450KG 폭탄과 5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쇼호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1:00분, 요크타운에서 출발한 공격기들이 쇼호의 숨통을 끊기 위해 공격을 가했다. 무려 11방의 450KG 폭탄과 2발의 어뢰를 추가로 얻어맞은 쇼호는 끝내 침몰하였다. 고토는 북쪽으로 함대를 퇴각시켰고, 이후 구축함 사자나미를 보내어 생존자들을 구조하였다. 834명의 항공모함 승무원 중 203명만이 구조되었다. 일본군은 쇼호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3대의 돈틀레스 폭격기를 격추시켰으나, 쇼호 안에 대기중이던 18대의 전투기를 잃었다. 그러나 공중엄호 중이던 전투기 3대만은 살아서 데보인 기지로 귀환하였다. 미국은 원했던 2대의 정규항모를 침몰시키지는 못했으나, 꿩대신 닭처럼 경항모 쇼호를 침몰시키면서 출격한 보람은 있었다. 오후 작전 쇼호를 침몰시킨 미국 항공기들은 득의양양하게 귀환하여 13:38분 착함을 완료하였다. 14:20분에, 미국 항공기들은 포트 모레스비의 고토 침공함대를 재공격하기 위해, 재무장을 받았다. 하지만, 플레쳐는 아직 일본의 2척의 항공모함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으므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본부로부터 제공받은 정보에는, 어쩌면 일본의 항공모함이 2척이 아니라 4척일 수도 있다는 내용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더 불안했다. 플레쳐는 항공기들을 출격시켰을 때 일본의 항공모함들을 방어할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오늘은 더이상 공격기들은 출격시키지 말고, 마침 짙은 구름이 위에 있었으므로 초계기들을 올려보내어 함대방어에 신경을 썼다. 한편, 이노우에는 쇼호의 격침을 보고받고 크게 분노하였다. 이노우에는 일시적으로 포트 모레스비 상륙작전을 중단시키고, 다카기에게 미국 항공모함이 근처에 있으니 어떻게든 박살내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미국의 B-17기 8대가 상륙함대를 발견하고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명중시키지 못하였다. 고토는 상륙함대를 로젤 제도로 이동시켜 밤사이에 있을지 모를 야간전투에 대비하였다. 12:40분, 일본이 건설한 데보인 기지의 수상기들이 데보인에서 9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크레이스의 함대를 발견하고 보고해왔다. 13:15분에는 라바울의 정찰기도 크레이스의 함대를 발견하고 보고해 왔으나, 2척의 항공모함이 있다고 잘못 보고를 올렸다. 실제로 크레이스에게는 항공모함이 없었다. 이 보고를 받았을 때 네오쇼를 공격했던 공격기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다카기는 일단 과감하게 빈 항공모함들을 이끌고 연합군 함대가 발견되었다는 지점으로 이동했다. 그동안 플레쳐가 이끄는 진짜 미국의 항공모함들은 일본의 공격반경을 벗어나 버렸다. 이노우에는 라바울의 육상기지에도 명령을 내려 크레이스의 함대를 격멸시키도록 하였다. 육상기지에서는 12대의 뇌격기, 19대의 96식 육상폭격기가 출동하였다. 14:30분에, 이들은 크레이스의 함대를 찾아내 공격하였다. 공격이 끝나고 귀환하면서, 일본 공격기들은 전함 캘리포니아를 침몰시키고 또다른 전함 1척과 순양함 1척을 대파하였다고 보고하였으나, 실제로는 크레이스의 함대는 손상이 없었고 오히려 크레이스 함대의 대공포화에 일본 공격기 4대가 격추되었다. 이와중에 미국의 B-17 폭격기가 크레이스 함대를 일본함대로 오인하고 폭격을 가했으나 다행히 빗나갔다. 위기를 넘긴 크레이스는 15:26분에 플레쳐에게 공중엄호 없이는 더 이상 임무를 완수할 수 없을 거라고 무전을 보냈다. 크레이스는 휘하 함대를 지정된 자리보다 남쪽으로 410km가량 물러났다. 방금 자신을 공격한 전투기들이 일본의 항공모함에서 날아온 것인지, 육상에서 날아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적기가 날아온 곳과 거리를 벌리기 위함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크레이스 함대는 연료가 부족하였는데, 무선침묵을 유지하는 플레쳐의 함대로부터는 아무런 답신이 없었다. 크레이스는 플레쳐의 위치, 상태, 의중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15:00분이 조금 지난 후에, 일본의 항공모함 즈이카쿠에서는 데보인 수상기지에서 발진한 정찰기의 보고가 입수되었다. 크레이스의 함대가 남동쪽 120도 방향으로 변침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크레이스의 함대가 미국의 항공모함 본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다카기의 참모진은, 플레쳐의 함대(실제로는 크레이스의 함대)가 아슬아슬하게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와 있을 거라고 여겼다. 계산대로라면 지금 폭격기들을 보내면 해질녘이 되기 전 가까스로 플레쳐의 항공모함들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카기와 하라는 즉시 제로기의 호위를 붙여 공격기 편대들을 출격시켰다. 물론 그들이 성공하더라도 돌아올 때는 야간착함을 각오해야 했다. 미국 항공모함의 위치를 철저히 확인하기 위해 15:15분, 하라는 함상공격기 8대를 서쪽으로 보내어 370km반경을 샅샅히 훑었다. 이때 미국의 네오쇼와 심즈를 격침시킨 함상폭격기들이 항공모함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이제 막 도착하여 피곤한 이들은 착함하자마자 다시 공격을 나가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하라는 최정예의 조종사들을 가려뽑아, 16:15분에 12대의 함상폭격기와 15대의 함상공격기를 출격시켰다. 하지만 이미 보냈던 함상공격기 8대는 370km반경을 정찰하고도 플레쳐의 함대를 찾을 수 없었다. 17:47분, 다카기의 서쪽 370km 해상에 있던 미 17 기동함대는 일본 공격기 편대를 발견하고 11대의 와일드캣을 보내어 6대의 함상공격기와 1대의 함상폭격기를 격추시켰다. 대신 와일드캣 3기가 격추당했다. 공격기를 상당수 잃은 일본 공격기들은 목표를 수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어뢰와 폭탄등을 버리고 모함으로 달아났다. 18:30분, 일몰이 시작되었다. 달아나던 몇 기의 일본 폭격기들은 어둠 속에서 미군 항공모함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일본군으로 착각하여 근처를 빙빙 선회하며 착륙을 시도하였다. 놀란 17 기동함대는 대공포를 퍼부어 이들을 쫓아냈다. 20:00분에, 다카기의 함대와 플레쳐의 함대는 단 190km 떨어져 있었다. 다카기가 보냈던 공격대 중 18대만이 살아 돌아왔고, 전함들이 탐조등을 켜서 이들은 무사히 착함하였다. 그러는 동안, 15:18분에서 17:18분 사이, 구축함 네오쇼는 17기동함대에 무전을 보내 현재 위치와 침몰중임을 알렸다. 하지만 네오쇼는 자신들의 위치를 잘못 보냈고, 시간은 지체되어 급유함 심즈는 결국 구출되지 못했다. 이 소식은 플레쳐에게는 더 이상 급유지원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밤이 되자 플레쳐는 함대를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이노우에는 다카기에게 미국 항공모함을 내일 격침하라 이르고 포트 모레스비 상륙작전을 5월 12일로 연기하였다. 다카기는 함대를 북쪽으로 물렸다. 그리고 내일은 서쪽과 남쪽의 수색에 집중하고 포트 모레스비 침공을 도울 준비를 하였다. 고토의 수상함대는 손상을 입어 미군과 야간수상전투를 벌이긴 무리였다. 일본군과 미군 양측은 다음날에서는 서로를 반드시 일찍 찾아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낮 작전 동안 지친 조종사들을 쉬게 하고 내일의 전투를 준비했다. 1972년 미 부제독 덕워스는 이날 전투를 이렇게 평했다. "1942년 5월 7일 산호해의 전투는 전쟁사상 가장 어리버리한 전투였다." 그럴 만 했다. 이날 일본과 미국 모두 부정확한 정찰과 보고의 오류, 그에따른 오판을 계속 저지르는 바람에 하루종일 비행기를 출격시키고도 서로 별 타격도, 성과도 없었다. 그나마 미국은 일본의 경항모 쇼호를 침몰시키면서 소정의 성과는 달성하였다. 함대항공전 둘째날 일본 항공모함에 가해진 공격 다음날인 5월 8일, 06:15분. 로젤섬 동쪽 190km 해상에 있었던 하라는 7대의 함상공격기를 보내어 140-230도 방향 460km를 정찰했다. 이 정찰에는 툴라기에서 발진한 97식 카와니시 비행기 3대와, 라바울에서 발진한 1식 폭격기 4대가 도움을 주었다. 07:00분에, 일본의 항공모함 본대는 남서쪽으로 변침하여 고토의 순양함 2대(기누가사, 후루타카)와 합류했다. 고토와 카지오카의 상륙부대는 우드락 섬 동쪽 74km 해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밤사이에, 어제는 미군 항공모함을 숨겨주었던 구름들은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이제는 일본의 항공모함들을 숨겨주었다. 06:35분에, 17기동함대는 루이지애드 남서쪽 330km 해상에 자리잡고 있었다. 플레쳐는 정찰을 위해 18대의 돈틀레스 폭격기를 출격시켰다. 구름이 사라진 미군 항공모함은 먼 곳에서도 잘 보였다. 08:20분, 렉싱턴에서 출발한 돈틀레스 파일럿은 구름 사이의 구멍 틈으로 보이는 일본 항공모함을 발견하고 이를 17기동함대에 알렸다. 그리고 켄조 칸노가 조종하는 일본 정찰기가 17기동함대를 발견하고 이를 급히 항공모함 쇼카쿠에 보고하였다. 이는 미군이 일본 항공모함을 발견한 시간과 2분 차이였다. 일본과 미군 항공모함은 서로 390km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양측은 공격기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09:15분, 카쿠이치 중좌와 다카하시 중좌가 지휘하는 18대의 제로 전투기, 33대의 함상폭격기, 18대의 케이트 뇌격기들이 날아올랐다. 미국측은 요크타운과 렉싱턴에서 따로 전투기들을 출격시켰다. 요크타운에서는 6대의 와일드캣 전투기, 24대의 돈틀레스 폭격기, 9대의 데버스테이터 뇌격기가 날아올랐고 렉싱턴에서는 9대의 와일드캣 전투기, 15대의 돈틀레스 폭격기, 12대의 데버스테이터 뇌격기가 날아올랐다. 이와 동시에 양측 항공모함들은 상대위치를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이는 상대를 공격한 후 최대한 빨리 전투기들을 받아들이고 재출격 시키기 위함이었다. 윌리엄 버치가 지휘하는 요크타운의 폭격기 편대는 10:32분에 일본 항공모함 상공에 도달했다. 미국의 뇌격기들은 폭격기보다 느렸으므로 버치는 뇌격기들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이때, 일본의 항공모함 쇼카쿠와 즈이카쿠는 서로 9km가량 떨어져 있었다. 즈이카쿠는 스콜을 동반한 소나기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쇼카쿠와 즈이카쿠 상공에는 16대의 제로 전투기가 전투초계비행 중이었다. 10:57분이 되자 뇌격기들이 도착했고 버치는 공격명령을 내려 쇼카쿠로 돌진하였다. 공격 중 450kg폭탄이 쇼카쿠에 명중하였고 갑판과 격납고가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뇌격기들이 가한 어뢰공격은 전부 빗나가고 말았다. 공격중 2대의 돈틀레스와 2대의 제로 전투기가 격추되었다. 렉싱턴의 전투기들이 뒤늦게 11:30분에 도착하였다. 2대의 돈틀레스가 쇼카쿠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450kg 폭탄 한 발을 더 명중시켰다. 하지만 즈이카쿠로 향한 2대의 돈틀레스는 폭탄을 맞추지 못했다. 나머지 렉싱턴의 공격기들은 스콜을 동반한 구름 때문에 즈이카쿠를 공격할 수 없었다. 렉싱턴의 데버스테이터 뇌격기들은 쇼카쿠를 향해 무려 11발의 어뢰를 쐈으나 쇼카쿠는 교묘한 조함을 통해 이들을 모두 피하였다. 공격중 3대의 와일드캣이 격추당했다. 쇼카쿠는 미국 항공기들의 공격으로 갑판이 크게 손상되었고, 223명의 사상자를 냈다. 쇼카쿠는 더 이상 작전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쇼카쿠의 조지마 함장은 전열을 이탈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고, 12:10분에 2대의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며 북동쪽으로 물러갔다. 미국 항공모함에 가해진 공격 10:55분, 렉싱턴의 레이다가 126km 근방에서 일본 공격기들 떼가 몰려오는 것을 탐지했다. 렉싱턴에서는 9대의 와일드캣이 요크타운 엄호를 위해 날아올랐다. 그러나 와일드캣들은 일본 뇌격기들이 낮은 고도로 접근해올 거라 예상하고 낮은 고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공격기들은 와일드캣들을 상공으로 그대로 지나쳤다. 어젯밤 요격했다가 입은 피해 때문에, 일본군은 한쪽 항공모함을 포기하고 나머지 한쪽에 공격을 집중하기로 전략을 바꿨던 것이다. 시마자키가 이끄는 일본 뇌격기 편대는 14대가 렉싱턴 공격에 집중했고, 나머지 4대만이 요크타운을 노렸다. 와일드캣들은 하나의 뇌격기를 격추시키는 데 그쳤고, 요크타운에서 날아오른 데버스테이터 8기가 일본군 케이트 뇌격기 3대를 격추시켰다. 하지만 케이트 뇌격기를 호위하는 제로 전투기들이 4대의 와일드캣을 격추시켰다. 11:13분부터 일본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요크타운을 공격한 4대의 뇌격기의 어뢰는 전부 빗나갔다. 그리고 나머지 뇌격기들은 전부 렉싱턴으로 몰려들었다. 11:20분, 일본군의 어뢰가 렉싱턴에 명중했다. 첫번째 어뢰는 운좋게도 휘발유 탱크를 직격했다. 렉싱턴 함내 전체로 유증기가 퍼지기 시작했으나, 미군은 이걸 알지 못했다. 두번째 어뢰가 렉싱턴에 명중했다. 이 어뢰는 수도관을 파열시켰다. 이 때문에 보일러실이 가동을 멈추었다. 하지만 남은 보일러실을 통해 렉싱턴은 44km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미군의 대공포가 4대의 일본 뇌격기를 격추시켰다. 미군 상공에 떠 있던 33대의 일본 폭격기들은 맞바람 때문에 뇌격기들보다 3~4분 동안 공격을 늦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카하시가 이끄는 쇼카쿠 소속 19대의 폭격기는 렉싱턴을 향해 정렬했고, 나머지 즈이카쿠 소속의 14대는 요크타운을 향해 정렬했다. 제로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례차례 급강하 공격을 시작했다. 다카하시의 폭격기들은 2발의 250kg 폭탄을 렉싱턴에 명중시켜 화재를 냈다. 요크타운은 비행갑판에 250kg 폭탄을 한방, 반철갑탄을 한방 맞았다. 반철갑탄은 4층을 뚫고들어가 폭발하여 비행기 저장고를 폭파시키고 66명의 승무원이 몰살당했다. 공격중 2대의 일본 폭격기가 와일드캣에 의해 격추당했다. 공격을 마친 일본 공격기들은 철수를 시작했다. 그들은 2대의 미국 항공모함 모두 치명상을 입었다고 판단했다. 성난 와일드캣과 데버스테이터들이 일본기들을 추격했고, 한바탕 공중전이 치러졌다. 여기에서 3대의 데버스테이터와 3대의 와일드캣이 격추되었고, 일본측에서는 3대의 뇌격기, 1대의 폭격기, 1대의 제로 전투기가 격추되었다. 퇴각 12:50분에서 14:30분 사이에, 공격을 나갔던 미군 전투기들이 항공모함으로 귀환했다. 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렉싱턴과 요크타운 모두 전투기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착함 중 5대의 데버스테이터와 2대의 돈틀레스, 1대의 와일드캣을 잃었다. 일본측도 전투기들이 귀환했고, 착함 과정에서 2대의 제로기, 5대의 폭격기, 1대의 뇌격기를 잃었다. 69대의 공격대 중 46대가 살아서 돌아왔고, 이들은 모두 즈이카쿠에 착함하였다. 착함 후 살펴보니 3대의 제로기, 5대의 폭격기, 5대의 케이트가 더 이상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고, 때문에 바다로 버려졌다. 17기동함대가 착함을 마치고 나자, 플레쳐는 상황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플레쳐는 2대 항공모함 모두 손상을 입었고, 전투기 손실이 막심하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네오쇼와 심즈가 침몰하여 연료공급을 받을 수도 없어, 더 이상의 작전이 어려웠다. 14:22분, 플레쳐는 2대의 일본 항공모함이 모두 살아있음을 알게 되고 자괴감에 빠졌다. 일본의 강력한 항공모함에 압도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는 17기동함대를 후퇴시키기로 결정했다. 14:30분, 하라는 다카기에게 24대의 제로기와 8대의 폭격기, 4대의 뇌격기만이 작전 가능하다고 보고하였다. 다카기 역시도 플레쳐처럼 연료부족을 걱정하고 있었다. 순양함들은 50%이하, 구축함들은 20%이하의 연료만이 남아 있었다. 15:00분에, 다카기는 이노우에에게 2대의 미국 항공모함을 침몰시켰다고 보고하였다. 하지만 항공기 손실이 막심하여 상륙작전에서 항공엄호를 지원하기는 어려웠다. 아직 크레이스의 함대가 건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노우에는 라바울 침공대를 물렸고, MO작전을 7월 3일로 연기하였다. 쇼카쿠는 수리를 위해 일본으로 향했고, 즈이카쿠는 라바울 침공대를 호위하여 물러났다. 한편, 미군 항공모함 렉싱턴의 보수반은 불길을 진화하고 렉싱턴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12:47분, 전기모터에서 발생한 스파크가 내부의 유증기에 불을 붙였고, 렉싱턴의 함교가 불탔다. 이후 폭발이 발생, 25명의 승무원이 사망하였고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14:42분, 또 한번의 거대한 폭발이 발생했고, 심각한 두번째 화재를 발생시켰다. 3번째 폭발은 15:25분에 일어났고, 15:38분에 이미 화재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17:07분 퇴함명령이 내려졌고 바다에 뛰어든 승무원들은 구조되었다. 19:15분, 구축함 펠프스가 불타는 렉싱턴을 향해 5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자침시켰다. 256명의 승무원과 36기의 항공기가 렉싱턴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았다. 펠프스와 다른 전함들은 이후 쓰러져가는 요크타운을 인양해 끌고갔고, 17기동함대는 남서쪽으로 이탈하였다. 이것으로 산호해 해전은 끝이 났다. 산호해 전투의 영향 산호해 해전이 종료하고 5월 9일, 17기동함대는 동쪽으로 변침하여 뉴칼레도니아섬 남쪽길로 빠져나갔다. 니미츠 제독은 플레쳐에게 통가타부에서 급유를 받은 후 최대한 빨리 진주만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급유를 받는 동안, 미군의 폭격기는 데보인 수상기지와 수송선 카와카미마루를 공격했으나 일본군의 피해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동안, 플레쳐와 연락이 두절되었던 크레이스는 17기동함대가 전장을 이탈한 모양이라고 추측하였다. 5월 10일 1:00, 일본함대가 포트 모레스비에서 물러난 것을 알고, 크레이스는 호주로 도주, 5월 11일에 휘스선데이 섬의 시드 항에 도착했다. 5월 8일 22:00분에, 일본군 해군 총사령관인 야마모토는 이노우에에게 남은 미군 함대를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포트 모레스비 점령을 끝까지 완수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이 명령을 듣지 않고 포트 모레스비 침공군을 후퇴시킨다. 대신 명령 수행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다카기와 고토에게는 남은 미군 함대를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연료부족으로 다카기는 5월 9일 대부분의 시간을 연료급유를 받으면서 보내버렸다. 5월 9일 밤, 급유를 끝낸 다카기와 고토는 남동쪽 해상으로 향했고, 산호해의 남서쪽 부근까지 도달했다. 데보인 수상기지의 수상기들이 17기동함대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이미 플레쳐와 크레이스의 함대는 아무데도 없었다. 5월 10일 13:00분, 다카기는 플레쳐와 크레이스가 안전하게 도주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라바울 기지로 귀환했다. 야마모토는 이 보고를 받고 항공기 보충을 위해 즈이카쿠를 귀환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때 수송선 카와카미마루가 물품을 가득 싣고 데보인 수상기지를 떠났다. 그리고 5월 11일 미 해군의 카탈레나 비행정이 표류하는 네오쇼를 찾고 구축함 헨리가 출동하여 네오쇼 승무원 109명과 심즈의 생존자 14명을 구출했다. 헨리는 쓰러져가는 네오쇼와 심즈에 어뢰를 발사하여 자침시켰다. 5월 10일, 일본군의 RY작전이 개시되었다. 작전이 끝나고, 수상기뢰함 오키노시마는 미 잠수함 S-42의 공격에 의해 5월 12일 가라앉았다. 이 때문에 상륙은 또다시 5월 17일로 미뤄지고 종전되었다. 태평양 전쟁의 해전 1942년 5월 1942년 분쟁 1942년 일본 1942년 오스트레일리아 산호해 일본이 참가한 제2차 세계 대전의 해전 미국이 참가한 제2차 세계 대전의 해전 오스트레일리아가 참가한 제2차 세계 대전의 해전 남서태평양 전구 (제2차 세계 대전)
|
35335
|
https://ko.wikipedia.org/wiki/%EC%B9%B4%EB%A5%BC%EC%8A%A4%EB%A3%A8%EC%97%90
|
카를스루에
|
카를스루에()는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에 있는 도시이다. 프랑스의 국경에 가깝고, 인구는 약 30만명으로, 같은 주에서는 슈투트가르트, 만하임에 필적하는 제3의 도시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와 독일 연방재판소(Bundesgerichtshof)의 소재지이다. 원형 고리 모양을 한 32개의 거리들이 성을 중심으로 하여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성으로부터 북부에는 숲과 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이런 부채꼴로 펼쳐진 도시의 모양때문에 "부채꼴도시(Fächerstadt)"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프리드리히 바인브레너의 오래된 건축양식이 19세기부터 시작된 도시의 확장을 보여준다. 1950년 독일연방법원 및 1951년 연방헌법재판소가 자리잡았으며 프라운호퍼연구소(Fraunhofer-Institut)와 국립핵물리연구소(Forschungszentrum Karlsruhe, 현재는 카를스루에 공과대학에 통합) 비롯해 전산정보학연구소(FZI) 농업기술연구소(Landwirtschaftliches Technologiezentrum Augustenberg) 등 여러 주요 연구기관이 설립되었다. 카를스루에 공과대학은 헬름홀츠 연구공동체의 일원으로 카를스루에에 위치한 9개의 대학 중 가장 크고 역사가 깊다. 그 외에 예술미디어센터(ZKM, Zentrum für Kunst und Medientechnologie), 바덴주립박물관(Badisches Landesmuseum)과 주립예술전당(Staatliche Kunsthalle)이 위치하고 있다. 지세와 특징 라인강의 근처에 있는 공업도시, 첨단과학과 대학도시로, 라인 강과는 운하로 연결되고 있다. 남쪽에는 슈바르트발츠 숲이 펼쳐져 있다. 약 50km 북쪽으로 하이델베르크, 55km 북쪽으로 만하임, 60km 남동쪽으로 슈투트가르트가 위치한다. 약 30km 남쪽의 바덴바덴은 국제적인 온천 휴양지로서 알려져 있다. 첨단 기술과 대학 도시이기도 하다. 카를스루에 공과대학교, 음대 (Musikhochschule), 미대 (Kunstakademie), 조형예술대(Hochschule für Gestaltung), 전문대 (Technische Fachhochschule), 교대 (Pädagogische Hochschule) 등이 있다. 연구 기관으로는 프라운호퍼 협회와 카를 수원자력연구소 등이 있다. 기후 인구 역사 1715년 바로크 양식의 계획도시로 오늘날의 두어라흐(Durlach) 지역에서 시작된 카를스루에는 과거 바덴 공국의 수도이자 거주도시였다. 이름의 일부인 "칼(Karl)"은 18세기의 칼 빌헬름 백작(Karl III. Wilhelm von Baden-Durlach)에서 유래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심대한 피해를 받았지만, 전후에는 복구되었다. 유명인 카를 벤츠 (자동차의 창시자. 다임러 벤츠의 창립자) 하인리히 헤르츠 (물리학자. 카를스루에 대학 교수. Hertz 발견자) 올리버 칸 (축구 선수) 올리버 비어호프 (축구 선수) 자매 도시 프랑스 낭시 (1955년) 영국 노팅엄 (1969년) 독일 할레안데어잘레 (1987년) 루마니아 티미쇼아라 (1992년) 러시아 크라스노다르 (1998년) 각주 외부 링크 공식 사이트 독일의 도시 바덴뷔르템베르크주
|
142970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A%B0%91%EC%98%81
|
정갑영
|
정갑영(鄭甲泳, 1951년 8월 22일 ~ )은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대한민국 경제학자이자 교육자이며 연세대학교의 제17대 총장이다. 약력 전주고등학교를 거쳐 1975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1985년 미국 코넬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산업조직론과 국제경제학이며, 1986년부터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장, 정보대학원장, 교무처장, 원주부총장을 역임하면서 동아시아국제학부(EIC) 설립에 기여했고, 정부의 행정개혁위원회, 정부투자기관 운영위원회, 산업자원부 전기위원회, 통신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동북아경제학회 회장, 산업조직학회장, 비교경제학회장, 삼성경제연구소 석좌연구위원을 지낸 바 있으며, 현재는 영국 라우틀리지에서 출판하고 있는 국제적인 SSCI 등재저널인 《Global Economic Review》의 에디터를 맡고 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연세대학교 제17대 총장으로 재직하였다. 학력 전주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경제학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대학원 코넬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명예 학위 고려대학교 명예 교육학 박사 게이오기주쿠대학교 명예 경제학 박사 주요 저서 《나무 뒤에 숨은 사람》(2003년) 《정갑영 교수의 재미있는 두루누리 경제》(2004년) 《열보다 더 큰 아홉》(2005년) 《카론의 동전 한 닢》(2005년) 《정갑영 교수의 재미있는 경제》(2006년) 《정갑영의 경제학교》(전5권, 2006년 ~ 2007년) 《명화 경제 토크》(2007년) 《정갑영 교수의 만화로 읽는 알콩달콩 경제학》(2009년) 《데메테르의 지혜로운 선택》(2010년) 이 중 경제 에세이 《열보다 더 큰 아홉》은 KBS 《TV, 책을 말하다》의 테마 도서로 선정되었고 일부 내용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또한 《카론의 동전 한 닢》은 ‘국내 CEO 100인 가장 많이 읽은 책 10권’에 포함된 바 있으며 《정갑영의 경제학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시장경제대상을 수상하였다. 기타 활동 문화방송의 《손에 잡히는 경제》, KBS의 《경제포커스》, SBS의 《TV칼럼》 등에 고정패널로 출연하였고 조선일보와 매일경제신문 등 많은 언론에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으며 ‘매경 이코노미스트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는 자유기업원 이사장과 동아일보 객원 논설위원을 맡고 있으며, 2007년부터는 조선일보에 ‘정갑영 교수의 만화로 읽는 알콩달콩 경제학’을 5년 째 연재하고 있다. 각주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 정갑영 교수 1951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대한민국의 저술가 대한민국의 경제 평론가 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 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전주고등학교 동문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동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문 코넬 대학교 동문 김제시 출신 연세대학교 총장 대한민국의 개신교도 CJ 사람 대한민국의 사외이사
|
46234
|
https://ko.wikipedia.org/wiki/%ED%82%B9%EB%A8%BC%20%EC%95%94%EC%B4%88
|
킹먼 암초
|
킹먼 암초(Kingman Reef)는 북태평양에 있는 산호초로, 미국령의 해외 영토이다. 크게 잠긴 무인 삼각형 모양의 암초로 지질학적으로 환초이며 동서 9.0nmi(20km), 남북 4.5nmi(8km), 북태평양에 위치한다. 하와이 제도와 미국령 사모아 사이에 있다. 면적은 3헥타르(0.03km2; 7.4에이커)이며 오세아니아에 있는 미국의 편입되지 않은 영토 중 하나이다. 암초는 "Kingman Reef National Wildlife Refuge"라는 지명으로 미국 어류 및 야생동물관리국에서 관리한다. 역사 킹먼 암초는 1798년 6월 14일 벳시(Betsey)호의 미국인 선장 에드먼트 패닝(Edmund Fanning)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암초는 1853년 11월 29일 슈팅스타호의 W. E. 킹먼 선장에 의해 처음 기술되었다. 이 영토는 1859년 미국 구아노컴퍼니(Guano Company)에 의해 데인저스 록(Dangers Rock)이라는 이름으로 번호와 함께 소유권이 주장되었다. 이 주장은 1856년 미국 구아노 제도법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구아노가 킹먼 암초에서 존재했거나 채굴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영국 증기선 타르타(Tarta)호는 1874년 6월 암초를 강타했고, 나중에 1897년 HMS 펭귄(1876)호가 조사하여 킹먼 암초가 이전에 캘드루 암초(Caldew Reef) 및 마리아 모래톱(Maria Shoal)과 같은 이름으로 차트에 표시된 것과 동일한 위험 요소임을 확인했다. 1922년 5월 10일, 로린 A. 서스턴은 환초에 성조기를 게양하고 합병 선언문을 낭독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미국의 무인도 미국령 군소 제도 라인 제도 미국의 암초 태평양의 암초
|
67840
|
https://ko.wikipedia.org/wiki/%EA%B3%B5%EC%84%B1%EC%A7%84
|
공성진
|
공성진(孔星鎭, 1953년 4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예비역 대한민국 해병 중위이며 한나라당의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학력 서울남산초등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교 대학원 - ( 이론과 실제의 합일: 정치적 책무에 관한 현상학적 고찰 ) Ph.D 경력 1986년 한양대학교 교수 - 서양정치철학,문명충돌론,인간과 미래 등 강의 1989년 미래구상연구소에 이은 한백연구재단 설립 - 『포럼21』, 『델파이 라인』 등에 기고 1992년~1997년 『아시아 포럼 2005』한․중․일 국제회의체 결성 2001년~2002년 『북악포럼』결성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 교환교수 의정활동 2004년 제17대 총선 당선 (한나라당, 서울 강남 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방위원회, 정보위원회, 남북평화통일 특별위원회에서 상임위 활동 2007년 이명박 대통령선거 한나라당 예비후보의 서울시 선거대책위원장 역임, 서울시당 위원장, 서울시 총괄선거대책본부장 2008년 18대 총선 재선 (한나라당, 서울 강남 을)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 당선 (경선결과; 대표 박희태, 최고위원 공성진, 정몽준, 허태열, 박순자) 2008년 8월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 2010년 6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 2011년 6월 18대 의원직 상실 저서 『한국의 미래 세계의 미래』(전 5권) 『눈을 뜨고 꿈을 꾼다』 『한국의 정치』 『대한민국 안보전략 2008~2013』등 병역 해병대 간부후보 59기, 해병대 중위 전역 논란 비리 혐의 2008년 경기도 안성 스테이트월셔 골프장의 대표 공모씨로부터 4천100만원을, C사와 바이오 기술업체 L사에서 각각 1억1천800만원과 4천100만원을 받는 등 2억원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이후 2011년 6월 집유형이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했다. 한편 삼화저축은행 관련 비리에도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입국거부 사태 2012년 2월 23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엔젤레스 국제공항에서 입국심사도중 전자여행허가 시스템에 범죄관련 유무를 허위로 기재했다가 발각되어 입국이 거부, 한국으로 돌아왔다. 공성진 새누리당 전 의원은 삼화저축으로부터 억대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징역6월, 집행유예1년, 추징금 1억 7000만원을 선고받았다. 역대 선거 결과 각주 참고 자료 공성진 홈페이지 외부 링크 195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서울특별시 출신 경기고등학교 동문 경기중학교 동문 서울남산초등학교 동문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 클레어먼트 대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 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 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 대한민국의 저술가 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 대한민국 해병 중위 자유한국당 당원 곡부 공씨 한양대학교 교수 친이 서울특별시의 국회의원
|
96781
|
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9D%BC%EB%B9%84%ED%8B%B0%20%28%EA%B8%B0%EC%97%85%29
|
그라비티 (기업)
|
그라비티( )는 2000년 4월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게임 개발사이자 배급사이다. 또한, 2005년 2월 이후 국내 게임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나스닥에 상장 되어 있다. 그라비티는 폭넓은 유저 층을 확보하고 있는 MMORPG ‘라그나로크 온라인’을 개발, 전세계 91개 국가에 서비스 하고 있으며, 라그나로크 온라인의 성공으로 구축된 강력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의 퍼블리싱 사업도 펼쳐 나가고 있다. 연혁 2001년 라그나로크 온라인 오픈베타 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온라인 비공개테스트 실시 2002년 라그나로크 온라인 일본 상용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온라인 대만 상용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온라인 국내 상용서비스 실시 2003년 라그나로크 온라인 인도네시아 상용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온라인 필리핀 상용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온라인 미국 상용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온라인 중국 상용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온라인 태국 상용서비스 실시 2004년 라그나로크 온라인 러시아 진출, 호주, 뉴질랜드 상용화 로즈온라인 한국, 일본 오픈베타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온라인 말레이시아-싱가포르 상용화, 유럽 5개국 상용화 라그나로크 월드 챔피언십 2004 (RWC) 개최 2005년 에밀크로니클 온라인 전세계 퍼블리싱 계약 체결 ㈜엔도어즈와 ‘타임앤테일즈’ 퍼블리싱 계약 체결, G-star 2005 참가 라그나로크 온라인 스페인 및 중남미 25개국 진출 라그나로크 온라인 프랑스, 벨기에 진출 라그나로크 온라인 중동, 아프리카 14개국 진출 나스닥 상장 2006년 라그나로크 온라인 베트남 오픈베타 서비스 실시 에밀크로니클 온라인 동남아 및 오세아니아 8개국 진출 타임앤테일즈 국내 오픈베타 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온라인 인도 상용서비스 실시 2007년 레퀴엠 온라인 러시아 진출 레퀴엠 온라인 국내 상용화 뿌까 레이싱 국내 오픈베타 서비스 실시 W베이스볼 국내 오픈베타 서비스 실시 바디첵 온라인 국내 오픈베타 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온라인2 일본 오픈베타 서비스 실시 에밀크로니클 온라인 국내 상용화 실시 에밀크로니클 온라인 태국 오픈베타 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월드 챔피언십 2007 (RWC) 개최 2008년 라그나로크 온라인 DS 일본 발매 에밀크로니클 온라인 홍콩 진출 뿌까 레이싱 태국 진출 레퀴엠 온라인 미국 진출 라그나로크 월드 챔피언십 2008 (RWC) 개최 2009년 라그나로크 온라인 중동, 북아프리카 19개국 상용 서비스 실시 IPTV 게임 ‘뽀로로 놀이’ 정식 상용서비스 실시 에밀크로니클 온라인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진출 라그나로크 월드 챔피언십 2009 (RWC) 개최 2010년 카나안 온라인 국내 상용 서비스 실시 신병전기 퍼블리싱 계약 체결 카나안 온라인 퍼블리싱 계약 체결 해브 온라인 퍼블리싱 계약 체결 레퀴엠 온라인 대만 상용서비스 실시 레퀴엠 온라인 글로벌 서비스 오픈 라그나로크 월드 챔피언십 2010 (RWC) 개최 뿌까레이싱 서비스 종료 2011년 프린세스 펀트 앱스토어 출시 판타지 아쿠아 앱스토어 출시 군웅온라인 공개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바이올렛 한국, 미국 앱스토어 출시 해브 온라인 공개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노스텔지어 모바일 게임 일본 출시 라그나로크 월드 챔피언십 2011 (RWC) 개최 2012년 게임포털 지앤조이 리뉴얼 안도라사가 공개 서비스 실시 스틸파이터 비공개 테스트 실시 레퀴엠 온라인 페이스북 런칭 라그나로크2 공개서비스 실시 파인딩 네버랜드 온라인 공개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월드 챔피언십 2012 (RWC) 개최 2013년 알파제로 앱스토어 출시 스틸파이터 공개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온라인 중국 정식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2 북미 시장 진출 스틸파이터 대만 정식 서비스 실시 승천의 탑 국내 앱스토어 출시 라그나로크 애쉬바쿰 국내 앱스토어 출시 라그나로크 월드 챔피언십 2013 (RWC) 개최 2014년 라그나로크 애쉬바쿰 안드로이드 버전 출시 2015년 2015년청소년 직업 체험의 날(천안 중앙고등학교) 진행 상하이 더 드림 네트워크 테크놀로지 社와 RO IP를 활용한 게임 개발 및 글로벌 서비스 준비 2016년 2016년대만지점 설립, 라그나로크 온라인 직접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온라인 태국, 중국, 인도네시아 재계약 및 재론칭 라그나로크 WEB RPG, 라그나로크 R 중국, 대만 정식 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대만 챔피언십 (RTC) 개최 2017년 라그나로크 R 한국 정식서비스 실시 미라클뽀로로 한국 정식 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모바일 MMORPG 대만 정식 서비스 실시 (대만 출시명: 선경전설 RO: 영원한 사랑의 수호) 요지경 한국 정식 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제로 한국 정식 서비스 실시 라그나로크 태국 챔피언십 (RTC) 개최 라그나로크 대만 챔피언십 (RTC) 개최 라그나로크 한국 챔피언십 (RKC) 개최 2018년 라그나로크 모바일 MMORPG 한국 정식 서비스 실시 (한국 출시명: 라그나로크M: 영원한 사랑) 라그나로크: 포링의 역습 한국 정식 서비스 실시 수상내역 2001년 2001대한민국게임대상 2개 부문 수상 2003년 문화관광부 선정 2003 대한민국 문화콘텐츠 수출대상 ‘대상-문광부장관상’ 수상 문화 콘텐츠 진흥원 선정 캐릭터 우수상 수상 서울경제 선정 온라인 콘텐츠 부문 골든상 수상 스포츠조선 등 일간지, 잡지 상반기 히트 상품선정 및 상반기 수출대상 수상 ‘라그나로크 온라인’ 일본 AMD 어워드 작품상 수상 2004년 문화관광부 선정 2004 대한민국 문화콘텐츠 수출대상 ‘대상-국무총리상’ (03, 04년 2년 연속 수상) 한국경제신문, KTB NETWORK 주관 제29회 벤처기업상 ‘한국경제신문자장상’ 수상 한국무역협회 주최 ㈜그라비티 ‘2천 만불 수출의 탑’ 수상 벤처 기업 협회 주관 벤처 기업 대상 – 대통령 표창 수상 2003년 중국 10대 최고 인기 온라인 게임상 수상 2005년 문화관광부 선정 2005년 대한민국 문화 콘텐츠 수출 대상 기념패 (3년 연속 대상 수상 실적) ‘디지털 콘텐츠 표시 우수 서비스 업체’ 수상 2007년 2007년 대한민국 문화콘텐츠 수출유공자포상 ‘문화관광부장관표창’ 라그나로크 온라인, 美 MMOsite ‘2006년 게임상’ 수상 2009년 라그나로크 DS, 2009 대한민국 게임대상 인기게임상 수상 2012년 뽀로로 놀이, 대한민국 TV앱 이노베이션 대상 교육 부문 최우수상 수상 라그나로크 온라인2, ‘TG어워드 2012’ 사운드상 수상 2016년 태국 TGS '베스트 MMORPG' 수상 2017년 태국 TGS '베스트 MMORPG' 2년 연속 수상 게임 목록 개발한 게임 라그나로크 온라인 라그나로크 온라인2 라그나로크 DS 라그나로크 온라인 길드 마스터즈 라그나로크 온라인 제로 레퀴엠 온라인 드래곤사가 뽀로로놀이 라그나로크M: 영원한 사랑 배급한 게임 파인딩 네버랜드 온라인 안도라사가 라그나로크R 미라클뽀로로 요지경 라그나로크: 포링의 역습 자회사 그라비티 게임즈 그라비티 인터랙티브 그라비티 EU 그라비티 CIS 네오싸이언 각주 외부 링크 2000년 설립된 기업 대한민국의 기업 비디오 게임 개발사 비디오 게임 배급사 대한민국의 비디오 게임 기업 2000년 설립된 비디오 게임 기업
|
156037
|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A%B0%80%EC%82%AC%ED%82%A4%20%EB%B0%A9%EC%86%A1
|
나가사키 방송
|
나가사키 방송은 일본 나가사키현에 처음 세워진 민영방송국으로 라디오 방송국은 1953년 3월 1일, 텔레비전 방송국은 1959년 1월 1일 개국했다. 약칭은 NBC, 라디오 콜사인은 JOUR, 텔레비전 콜사인은 JOUR-DTV이다. 개요 나가사키현의 유일한 텔레비전·라디오 겸영 민영방송국으로 나가사키에서 최초로 개국한 민영방송국이다. 텔레비전은JNN계열 방송국, 라디오는 JRN/NRN의 크로스넷 방송국이다. 나가사키 국제 TV개국 전까지는, TV 나가사키가 후지TV계열과 니혼TV계열 크로스 네트워크 방송국(후에 후지TV 완전가맹국이 된다)이었지만 스폰서등의 관계로 NBC도 일부 후지TV 프로그램과 니혼TV 프로그램을 방송했으며 아사히 신문자본의 관계로 나가사키 문화방송개국까지 TV 아사히계 프로그램도 상당수 방송하고 있었다. 중파 민영 라디오 방송국이 없는 사가현전용으로 일부 독자적인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다.(→NBC 라디오 사가 참조) 라디오 사가는 동명의 현지 법인이 업무 전반을 맡고 있어 현재 이곳에 재적하는 본사 사원은 국장등 일부 관리직·기술 책임자(일본 전파법에 근거)밖에 없다. 나가사키 지방의 전통과 원폭, 반핵에 관한 보도에 대해서 민감하며 예전부터 원폭에 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많이 제작했다. 연혁 1952년 9월 12일 - 나가사키 평화방송 설립(후에 라디오 나가사키로 변경) 1953년 3월 1일 - 일본 19번째 중파 라디오 방송국으로서 라디오 나가사키(JOUR) 개국 1954년 4월 1일 - 라디오 사세보(JOMF) 개국. 1954년 10월 18일 - 라디오 사세보와 합병하면서 회사명을 나가사키방송(NBC)으로 개명 1958년 8월 1일 - 사가 라디오 방송국(JOUO, NBC 라디오 사가) 개국 1959년 1월 1일 - 텔레비전 방송 개시 1966년 12월 21일 - 컬러 텔레비전 방송 개시 1981년 3월 21일 - 텔레비전 음성다중방송 개시 1985년 4월 17일 - 라디오 사가와 나가사키 방송국에서 개별적으로 CM을 방송하기 시작 1996년 10월 28일 - NBC 라디오 이사하야 중계국의 주파수가 나가사키 방송국과 동일하게 바뀌었다.(1449kHz → 1233kHz). 2001년 10월 29일 - NBC 라디오 시마바라 중계국의 주파수가 나가사키 방송국과 동일하게 바뀌었다.(1098kHz → 1233kHz). 2006년 12월 1일 - 지상파 디지털 텔레비전 방송 개시 2011년 7월 24일 - 지상파 아날로그 텔레비전 방송 종료 2015년 10월 1일 - 나가사키 FM 보완중계국 개국. 라디오 주파수 사가현 텔레비전 네트워크 변천사 1959년 1월 1일 - 나가사키현에서 텔레비전 방송 개시.니혼TV·라디오도쿄 TV와 네트워크 관계를 맺는다. 1959년 3월 1일 - 일본 교육 TV·이 날 개국한 후지 TV와도 네트워크를 맺는다. 1959년 8월 1일 - 뉴스 네트워크 JNN에 가맹.뉴스 프로그램은 라디오도쿄 TV의 프로그램만 방송, 나머지 프로그램은 프리 네트워크로 결정한다. 1967년 6월 - 민간방송 교육협회에 가맹. 1969년 4월 1일 - TV 나가사키가 개국하면서 일부 프로그램을 제외한 대부분의 니혼TV·후지 TV 프로그램이 이행된다. 1975년 3월 31일 - 준 중심방송국 네트워크 교환에 의해, 간사이 지역 JNN가맹국이 아사히 방송에서 마이니치 방송으로 변경되었으나 당시 나가사키에 있던 다른 민영 텔레비전 방송국 TV 나가사키가 ANN에 가맹하지 않아 아사히 방송 프로그램이 계속해서 나가사키 방송에서 방송된다. 1984년 4월 1일 - 도쿄 방송의 프로그램만 황금시간대에 방송하기 시작하고 이때 방송되고 있던 니혼 TV 프로그램은 TV 나가사키에서 방송하게 된다. 1990년 4월 1일 - 나가사키 문화방송 개국에 의해 민간방송 교육협회 프로그램을 제외한 TV 아사히 프로그램이 중단된다. 1991년 4월 1일 - 나가사키 국제 TV가 예정보다 반년 늦게 개국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니혼TV 프로그램이 중단되고 이 날을 기점으로 신에츠 방송과 동시에 도쿄방송 완전가맹국화가 완료되었다. 보충서술 2021년 3월까지 로고를 바꾸지 않았다. 나가사키현 첫 번째 민영 방송국이지며, 현지 신문인 나가사키 신문과 관계가 있지만, 나가사키 문화방송만큼 강하지 않다.그리고 전국지인 마이니치 신문·아사히 신문과도 관계가 있지만,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라디오 사세보(JOMF) 개국에 따라 나가사키 현은 동일 현내에 민영라디오국이 2개 존재하는 당시 일본에서는 꽤 드문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현 1방송국」을 원칙으로 하는 우정성의 방침에 의해 1954년 10월 양사가 합병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라디오 사세보는 이후 「NBC 사세보 방송국」이 되었지만 콜사인(JOMF)은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텔레비전 방송국 개국시에도 사용되었으나 아날로그 텔레비전 방송이 종료된 뒤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2000년대 후반 들어 경영합리화와 방송 설비 노후화에 따라 방송국 사옥을 폐쇄하면서 「사세보 지사」로 기능이 축소되었다. 사가에 중계국이 있는 이유는 1950년대 사가현에 민간 중파라디오 방송국이 없어서였으며 지금도 그렇지만 사가 현 청취자들은 후쿠오카나 구마모토의 민영 중파방송국을 청취할 수 있어서 현내에 민영 라디오 방송국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강했다.이에 NBC는 나가사키현과 사가현이 같은 지역권인것에 주목해 중계국의 설치를 신청하고 그 요청이 수리되어 NBC 라디오 사가가 개국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대한민국에서는 나가사키 방송을 라디오, TV 모두 수신이 가능하다. 다만 TV는 한국에서 시청이 가능한 지역은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 김해시, 양산시, 진해시의 일부 지역에서도 시청할 수 있다. 이유는 이즈하라 중계국과 쓰시마 오메가국 등의 전파가 서쪽으로 쏘아지는 과정상 수신 가능 지역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며, 부울경에서의 TV 시청이 가장 많은 일본 방송 채널이기도 한다. 나가사키현에 있는 다른 텔레비전·라디오 방송국 NHK 나가사키 방송국 TV 나가사키(KTN)(후지 TV계열) 나가사키 국제 TV(NIB)(니혼 TV계열) 나가사키 문화방송(NCC)(TV 아사히계열) FM나가사키(JFN 계열) 각주 외부 링크 공식 사이트 1952년 설립 재팬 뉴스 네트워크 재팬 라디오 네트워크 NRN 일본의 AM 라디오 방송국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사
|
199998
|
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C%97%B0%EA%B6%8C
|
자연권
|
자연권(自然權)은 자연법상의 인간의 천부인권(天賦人權)을 말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히 주어지는, 법률이나 믿음보다 앞선 보편적 선험적 권리이다. 기본권은 생래적인 권리뿐만 아니라 국가의 내적인 사회권적 기본권이나 청구권적 기본권, 참정권 등을 포함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생래적 권리를 의미하는 인권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권은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불변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자연법 사상에 근거한다. 역사적으로 자연권에 대한 주장은 절대왕권과 같은 구체제와 실정법에 대항하기 위한 이론으로서 발전하여 왔다. 현재 대한민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자연권적 기본권을 인정하고 있다. 대표적 자연권으로 자유, 평등권이 있다.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의 혁명을 비롯해 근대민주국가의 건설은 기본적 인권의 확립이 주요한 목적이었으므로 근대국가의 헌법에는 이것이 주목적이 되었고, 근대국가의 헌법에는 모두 기본적 인권의 불가침이 선언되어 있다. 역사 인간에게 특정 권리가 천부적이고 어떤 경우에도 박탈될 수 없다는 개념은 최소한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 시대부터 발전되어 왔다. 이후 중세 시대를 거쳐 가톨릭 교회의 교회법, 그리고 종교 개혁, 그리고 근현대의 계몽주의를 거치며 현재의 개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자연권에 대한 대표적인 주장은〈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문〉이 있다. 이 선언문은 천부인권의 개념을 도입하여 모든 인민이 양도불가능한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태어나면서부터 획득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자연권에 대한 주장은 민주주의와 함께 발달하여 유엔은 1948년 세계 인권 선언을 채택함으로써 천부적 인권을 세계에 천명했다. 인권 17세기와 18세기에 서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성장한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자연권이라는 관념에서 나왔다. 미국 미국 연방 대법원은 "자연권으로서 보호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 대신, "적법절차 조항에 의해 보호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그렇게 적법절차 이론을 발전시켰다. 적법절차는 절차적 적법절차와 실체적 적법절차로 구분되어, 근본적인 권리를 자연권이라는 추상적인 이름이 아닌 실체적 적법절차 법리를 근거로 보장하고 있다. 즉, 자연법이라는 추상적인 규정이 아닌 수정헌법 제5조와 제14조에 근거를 두고 실체적 적법절차법리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기본권 신장에 도움을 주고 있다. 미국 수정헌법 제5조 (형사사건에서의 제권리) 누구라도, 대배심에 의한 고발 또는 기소가 있지 아니하는 한, 사형에 해당하는 죄 또는 파렴치죄에 관하여 심리를 받지 아니한다. 다만, 육군이나 해군에서 또는 전시나 사변시에 복무중에 있는 민병대에서 발생한 사건에 관하여서는 예외로 한다. 누구라도 동일한 범행으로 생명이나 신체에 대한 위협을 재차 받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사 사건에 있어서도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당하지 아니하며, 누구라도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또 정당한 보상 없이, 사유재산의 공공용으로 수용당하지 아니한다. 미국 수정헌법 제14조(공민권) 제1항 합중국에서 출생하고 또는 귀화하고, 합중국의 관할권에 속하는 모든 사람은 합중국 및 그 거주하는 주의 시민이다. 어떠한 주도 합중국 시민의 특권과 면책권을 박탈하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시행할 수 없다. 어떠한 주도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사람으로부터도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할 수 없으며, 그 관할권내에 있는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도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 각주 권리 인권 개념 윤리학 개념
|
273604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B%8F%99%20%ED%95%98%ED%9A%8C%20%EC%B6%A9%ED%9A%A8%EB%8B%B9
|
안동 하회 충효당
|
안동 하회 충효당(安東 河回 忠孝堂)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생가이다. 1964년 11월 14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41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에 지은 단층 기와지붕으로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다. 규모는 총 52칸이다. 행랑채에 달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대청 앞에 마주서게 되며 이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대청 정면과 측면에는 난간이 있는 툇마루가 있다. 개요 조선 중기 이름난 문신이었던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집이다. 류성룡 선생은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 때에는 영의정으로 전쟁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데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선생이 쓴『징비록』과『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도 평가 받고 있다. 충효당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손자인 졸재 류원지(1598∼1674)가 짓고, 증손자인 눌재 류의하(1616∼1698)가 확장 수리한 것이다. 행랑채는 8대손 일우 류상조(1763∼1838)가 지은 건물로 대문과 방,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을 앞면으로 긴 행랑채를 두고 안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연이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왼쪽에서부터 사랑방, 대청마루, 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돌보던 공간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다. 또한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이라고 쓴 현판은 명필가였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갤러리 같이 보기 하회마을 징비록 참고 자료 경상북도의 보물 하회 충효당 조선의 건축물 하회마을
|
60419
|
https://ko.wikipedia.org/wiki/%EC%86%90%EC%A3%BC%ED%95%AD
|
손주항
|
손주항(孫周恒, 1934년 2월 25일 ~ 2017년 7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밀양. 호는 우지(愚地)이다. 출생지는 전라북도 임실군이다. 학력 전주북중학교 졸업 전주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정치과 4년 졸업 경력 전라북도 도의회 의원(3대) 제9대 국회의원(임실ㆍ남원ㆍ순창) 무소속 제10대 국회의원(임실ㆍ남원ㆍ순창) 무소속 제13대 국회의원(전주을) 평화민주당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초대 이사장 (사)한국국악협회 고문(현재) 삼성그룹 문화담당 상임고문(제일기획, 제일제당) (사)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회장(현재) 판소리인간문화재 5호 조상현 명창 후원회장(현재) 평화민주당 부총재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명예 재단 이사(현재) (사)전주대사습기능후원회 및 장학회 이사장(현재) K.C.C.A(종합유선방송위원회) 심의위원 밀알회 공동대표(현재) 역대 선거 결과 가족 관계 외숙 : 진직현 아들 : 손성, 손권 딸 : 손난, 손정 참고 자료 외부 링크 1934년 출생 2017년 사망 임실군 출신 밀양 손씨 전주고등학교 동문 중앙대학교 동문 전라북도의 국회의원
|
200610
|
https://ko.wikipedia.org/wiki/%EA%B5%AC%ED%95%99%EC%84%9C
|
구학서
|
구학서는 다음 사람을 가리킨다. 구학서(具鶴書, 1881년 ~ ?)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다. 구학서(具學書, 1946년 ~ )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같이 보기
|
288655
|
https://ko.wikipedia.org/wiki/C%2B%2B11
|
C++11
|
C++11(C++0x라고도 알려짐)은 ISO가 2011년 8월 12일에 승인한 C++ 프로그래밍 언어의 최신판이다. 2000년대의 한 시점, 즉 늦어도 2009년 12월 31일에는 공개될 것으로 예상해 C++0x으로 불려 왔으나, 2010년이 되면서 아무리 늦어도 2010년대의 한 시점에 공개될 것으로 예상해 C++1x로 변경되었고 2011년 8월 12일에 들어서야 국제표준으로 확정되면서 C++1x는 최종적으로 C++11이 되었다. C++11은 핵심 언어에 여러가지를 추가하고 C++ 표준 라이브러리를 확장하고, 선택적인 확장안이었던 C++ 기술 보고서 1(C++TR1) 라이브러리의 수학적 특수 함수의 라이브러리 예외들이 대부분 흡수, 통합되었다. C++11은 ISO/IEC 14882:2011라고 출판되었다. 이전 표준에서의 변화 C++ 의 수정은 핵심 언어와 표준 라이브러리 모두를 포함한다. 2011 표준안의 모든 활용에 대한 개발에서, 표준 위원회에서는 몇 가지 지침을 적용했다. 안정성 및 C++98(가능하면 C언어와도)과의 호환성 유지 핵심 언어의 확장보다는 표준 라이브러리를 이용하여 새로운 기능 추가 프로그래밍 기술을 발전시킬 변화 선호 특정 애플리케이션에서만 유용한 새로운 기술보다는 시스템이나 라이브러리 디자인에 유용하게 C++을 개선 이전의 안전하지 않은 기술에 대해 좀 더 안전한 대안을 제공하여 type 안전성 증가 성능 향상과 하드웨어 직접 조작 능력 강화 실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 제시 "부담 최소화"의 원칙 (어떤 유틸리티가 필요로 하는 추가적인 지원은 그 유틸리티를 사용할 때만 필요해야 함) 전문 프로그래머가 필요로 하는 어떤 유틸리티도 제거하지 않고도, 쉽게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어야 함 프로그래머 중 초심자가 대다수이며, 많은 초심자들은 C++에 대한 지식을 늘리기 보다는 그들에게 특화된 언어 측면에만 매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C++ 언어의 문법 확장 C++ 위원회의 주된 관심은 언어 문법을 개발하는 것이다. C++0x의 프리젠테이션 일정은 표준안에서 이 부분의 진행에 영향을 받는다. 언어의 문법적 범위는 멀티태스킹 지원, 제네릭 프로그래밍 지원, 초기화 방법 통합, 성능 향상 등으로 매우 증가하였다. 이 문서의 목적에 맞게, 문법적 기능과 변화는 "런타임 성능 향상", "컴파일 성능 향상", "편의성 향상", "새로운 기능"등의 4부분으로 그룹화하였다. 일부 기능은 여러 부분에서 언급될 수 있지만, 주된 기능에 대해서 한번씩만 설명할 것이다. 핵심 언어 - 런타임 성능 향상 아래 나열된 기능은 주로 메모리나 계산 속도에 대한 성능 향상을 제공한다. rvalue 레퍼런스와 이동 생성자 일반화된 상수식 POD에 대한 재정의 문법 기능의 컴파일 성능 향상 extern 템플릿 문법 기능의 편의성 향상 초기화 리스트 초기화 방법의 통합 자료형 추론 범위기반 for 반복문 람다 함수와 람다 식 함수선언의 다른 방법 객체 생성의 향상 명시된 가상함수 오버라이딩 널 포인터 상수 자료형에 안전한 enum 템플릿의 괄호처리 형변환 연산자로써의 explicit 템플릿 별명 union에 대한 제한 해제 문법의 새로운 기능 템플릿에서의 가변 인자 새로운 문자열 리터럴 사용자 정의 리터럴 멀티태스킹 메모리 모델 TLS 특수 멤버함수에 대해 기본값 사용및 삭제에 대한 명시적 표시 long long int 자료형 정적 assertion 멤버에 대한 sizeof 허용 C++ 표준 라이브러리의 변화 새로운 기능의 상당수는 C++0x 표준 라이브러리에서 소개된다. 이들중 상당수는 현재의 표준안에서도 구현될 수 있다. 하지만 일부는 C++0x의 새로운 문법에 의존한다. 새로운 라이브러리의 대부분은 C++ 표준 위원회의 TR1이라고 불리는 기술 보고서에서 정의되고 있으며 이는 2005년에 발표되었다. TR1의 대부분은 std::tr1 네임스페이스에서 현재 이용가능하다. C++0x에 맞게 그 네임스페이스를 std로 이동할 것이다. 하지만 C++0x 표준 라이브러리에서 TR1 기능이 제공됨에 따라, 초기 TR1에서 제공되지 않았던 기능들과 함께 적당한 위치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또한 C++03에서 구현 가능했던 기능들을 C++0x에 맞게 향상되겠지만 오리지널 TR1 규정의 부분은 아니다. 위원회는 C++0x 표준안이 완료된 이후에 TR2를 계획하고 있다. C++0x를 만들면서 준비되지 못한 라이브러리 제안사항은 TR2나 그 뒤의 기술 보고서에서 다룰 것이다. 다음 제안 사항들은 C++0x에서 진행되고 있다. 표준 라이브러리의 업그레이드 스레드 튜플 자료형 해시 테이블 정규 표현식 범용 스마트 포인터 확장가능한 난수 생성기 wrapper 레퍼런스 함수객체에 대한 다형성이 있는 wrapper 메타 프로그래밍을 위한 type traits 함수객체의 리턴형에 대한 방법 적용 C++11은 GCC 4.3부터 C++0x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4.7부터는 C++11로서 시험적용되고 있고, Visual Studio 10부터 Visual Studio 12까지 부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GCC(>=4.3)으로 커맨드 라인에 -std=c++0x 을 추가함으로써 해당 컴파일러에서 지원하는 C++0x 표준으로 컴파일 할 수 있다. GCC 4.7 이상의 버전에서는 -std=c++11과 -std=gnu++11 역시 지원한다. 인용 외부 링크 류광의 번역 이야기 - C++0x 글 모음 C++ 프로그래밍 언어 표준
|
189704
|
https://ko.wikipedia.org/wiki/EUR%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
EUR (동음이의)
|
EUR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로의 ISO 4217 코드 로마만국박람회 (Esposizione Universale Roma) 에라스무스 대학교(Erasmus University Rotterdam)
|
96770
|
https://ko.wikipedia.org/wiki/%EB%B0%9C%EB%A0%88%EC%95%84%EB%A0%88%EC%8A%A4%ED%95%B4
|
발레아레스해
|
발레아레스 해는 스페인의 동쪽 해안과 발레아레스 제도 사이의 지중해 해역이다. 지중해의 해역 스페인의 해역
|
67172
|
https://ko.wikipedia.org/wiki/%EB%A0%88%EC%A0%9C%ED%94%84%20%ED%83%80%EC%9D%B4%EC%9D%B4%ED%94%84%20%EC%97%90%EB%A5%B4%EB%8F%84%EC%95%88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 1954년 2월 26일~)은 튀르키예의 정치인으로, 제25대 총리이자, 제12대 대통령이다. 2003년 3월 14일에 총리가 되었으며, 2014년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로 치러진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선출된 첫 대통령이기도하다. 2014년 8월 28일 취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생애 1954년 2월 26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터키 흑해 연안 해안경비대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 시절 용돈을 벌기 위해 레몬탄산음료와 참깨빵을 이스탄불 거리에서 팔았다. 원래는 축구선수 출신으로 카슴파샤 SK에서 13번으로 활약했다. 터키 수립 이후 59, 60번째 정부 총리이며 정의개발당(AKP)의 당수이다. 전에는 이스탄불시의 시장을 역임했다. 1977년 에미네 에르도안(Emine Erdoğan)과 만나 1979년 7월 4일 결혼했다. 아흐메트 부라크(Ahmet Burak), 네지메딘 빌랄(Necmeddin Bilal)이란 이름의 두 아들과 에스라(Esra) 그리고 쉬메이예(Sümeyye)란 이름의 두 어린 딸이 있다. 아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공부 중이다. 201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다. 선거운동 중 대통령제 개헌을 내세웠는데, 이는 총리의 4선을 금하는 현 AKP의 당헌에 따라 대통령으로 그 자리를 옮기려는 모양새로 보인다. 이후 대선에서 야권 단일후보 에크멜레딘 이흐산오을루를 누르고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2014년 8월 28일 정식으로 업무 수행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재임 중이다. 경제 정책 2014년 8월 취임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3년부터 2014년까지 터키의 총리직을 맡으면서 터키의 경제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며 '경제 총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2007년에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시작되어 2009년까지 이어진 세계금융위기와 2012년 터키의 최대 경제 교류 지역인 EU에 경제위기가 찾아오면서 주춤하지만 이외의 시기에는 높은 경제 성장률을 이루어낸다. 에르도안 총리가 추진했던 경제 정책은 크게 인프라 건설, 일자리 창출 및 실업률 낮추기, 외국인 투자 유치, 주력 육성 산업 지원책 등이 있다. 인프라 건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23년에 터키공화국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2011년에 Vision 2023이란 이름으로 계획을 발표하였다. 계획의 일환으로 도로, 철도, 항만, 메트로, 공항, 운하 등의 인프라 및 의료시설을 BOT(Build-Operate-Transfer) 및 민관 협력(PPP) 모델 방식으로 5000억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이를 위해 투르크메니스탄, 러시아 등과 105억 달러 규모, 60여개의 프로젝트를 계약하는 등 중동, 아프리카 및 투르크계 주변국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건설 산업을 부흥시켰다. 건설 산업의 부흥으로 건설과 관련된 건설자재 생산, 건설장비 인부, 설계 등 많은 분야들이 확대되었으며 고용기회를 증진시켜 일자리 창출로 이어졌다. 에너지 인프라 에르도안은 터키의 에너지 자원 및 전력의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폭증하고 있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신재생 에너지 인프라와 터키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하고 있다. 그가 집권 후 정부에서 사업단지조성을 위해 국가를 경제발전 수준에 따라 여섯 개 단계로 분류하였는데, 여섯 번째 단계에 속한 튀르키예에서 가장 낙후된 동남부 지역에 균형발전 국책사업(GAP)의 일환으로 댐 건설을 진행하여 저렴한 수력전기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전기가 부족했던 동남부 지역의 상황을 많이 개선되었다. 또한 아큐유 지역에 4,800 MW급과 시놉 지역의 4,480 MW급의 원자력 발전소의 건설과 트랜스-아나톨리안 가스파이프라인(TANAP)이 공사를 개시하는 등 석탄, 가스, 재생가능 에너지 기반 시설 개발하여, 에너지 부족이 경제의 중대한 제한 요소가 되는 것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에너지 인프라 확장으로 인해 터키는 전력 생산용량을 2005년에 38,843 MW에서 2015년 73,147 MW까지 증가시켜켰다. 교통 인프라 에르도안은 교통 인프라를 발전시켜 지리적, 물리적, 기업적 특성을 바탕으로 산업 부분을 발전 시켰다. 주요 프로젝트로는 앙카라-시바스 간 고속철도 프로젝트, 시바스-에르진잔-에프주룸-카르스 간 고속철도 프로젝트, 앙카라-폴라틀르-아피온-우사크-이즈미르 고속철도 프카젝트, 코냐-카라만 간 급행열차 프로젝트, 카라만-니데-메르신 간 급행열차 프로젝트 등이 있다. 이와 같은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교통 인프라를 통해 터키는 중앙아시아와 범유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터키의 국도와 철도망이 유라시아 인프라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그리고 빠른 고속철도망의 확장에 의해 현재 고속철도 노선 길이 부분에서 유럽 내 6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전세계에서는 8위를 기록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2023년까지 급행열차와 고속철도의 라인을 12,000km까지 통합 및 확장하려고 하며, 터키의 올림픽 유치를 위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을 이을 보스포루스 대교 건설과 이스탄불에 계획 중인 새로운 국제공항을 건설하였다. 보스포루스 대교 중 ‘야우즈 술탄 셀림 대교’라고 불리는 제 3대교는 이스탄불 내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연결하고 있으며, 이는 제 1대교와 제 2대교의 역할을 분배, 화물 운송 시의 교통 부담을 완화시켜준다. 이 대교를 만드는 과정에서 현재 6천여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으며, 연간 한화 약6조 6천원 규모의 경제적 이익이 발생되었다. 이스탄불 신공항 프로젝트는 터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프로젝트로서 1억 5천만 명을 수용가능하며, 북부 마르마라 고속도로를 통해 보스포루스 제 3대교와 연결된다. 에르도안은 이 신공항 건설을 통해 이스탄불을 해외여행지의 허브로 만들고자 한다. 일자리 창출 및 실업률 낮추기 현재 레제프 타이이안 에르도안 대통령은 총리로 임해있던 시절부터 터키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힘을 써왔다. 실업률을 20%대에서 10%대로 낮추는 등 큰 경제 성장률을 이뤄왔다. 2016년 5월 8일에 이스탄불에서 개최된 터기 상공회의소(TOBB)에서는 터키의 기업주들을 불러서 극적으로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 직원을 최소 한명을 더 고용하라고 주장했다. 기업이나 단체마다 한명씩 고용하면 실업자들을 위해 약 15억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사람을 더 고용한다고 기업이 파산하는 것은 아니라고, 오히려 기업의 규모를 늘리고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득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는 가지고 있는 자산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구할 기회를 줘야 한다". 여기에 더해서 자금과 융자 확보에만 끓임없이 몰두하고 있는 은행 업체를 비판하였다. 빠른 시간 내에 은행에 의존하는 기업들을 구해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7] [8] 과거 에르도안이 총리로 임해 있을 때 집권 정의개발당(AKP) 의원총회 연설에서 기업 유치를 위해 교통 인프라 및 교육 체계 구축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기업들에 세금우대를 제공할 것이라고 언급했었다. 당시에 정부의 주요 계획은 산업 단지 조성 이었다. 동남부의 최빈곤 지역에 위치해 있는 기업들에는 세금 우대 조치와 보조금이 제공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터키 동남부 지역 균형발전 국책사업(GAP)의 일환으로 댐 건설을 진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동남부 지역에 저렴한 수력전기를 공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도 기업을 유치하게 하여 실업률을 12.4%로 감소시킬 목적이었다. [16] 에르도안의 경제 노선에는 이슬람 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책이었다. 주류세를 인상하고, 터키 국민의 95%를 차지하는 무슬림에 대한 각종 경제혜택을 제공했다. 식품료 등 생필품의 가격을 최대한 낮추는 대신 자동차 및 사치품에 대한 과세를 강화했다. 저소득자와 저학력의 이슬람 유권자들로부터 절대적 지지가 뒤따라왔다.[15] 외국인 투자 유치 에르도안이 총리 시절 추진했던 중요한 경제 정책 중 하나는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이다. 터키는 2003년 약 17억 달러, 2004년 27억 달러를 외국인 투자로 벌어들이지만 2005년 100억 달러를 벌어들이게 되고 2007년에 190억 달러로 정점을 찍는다. 하지만 2009년, 2010년 금융위기를 맞아 외국인 투자가 급감하게 되고 2011년 다시 회복하지만 2012년 주요 투자 국가인 EU지역에 경제위기가 찾아오면서 다시 감소하는 모습이다. 외국인 투자를 17억 달러에서 190억 달러까지 10배 이상 끌어올린 이러한 성과는 에르도안 총리 시절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에 기인하고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자료 : 터키 중앙은행 1. 대외 신뢰도 표명 지속적인 터키의 정치 불안은 인플레이션과 주기적인 경제 불안을 야기 했고 이는 외국인 투자자들로 하여금 터키에 대한 투자 신뢰도 및 의욕을 감소 시켜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터키는 국제사회에 터키에 대한 신뢰도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국제기구인 EU 가입을 위해 노력한다. 결국 2005년 터키의 EU 가입 협상 개시가 확정되고 이는 외국인 투자가 2004년 27억 달러로 증가세를 띄기 시작해서 2005년 100억 달러를 초과하는 급증세를 띄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2007년 EU 가입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으로 터키는 EU 가입협상 과제별 터키 정부의 계획인 EU 가입 로드맵을 발표함으로써 2007년 190억 달러를 외국인 투자를 통해 벌어들이게 된다. EU 가입 로드맵 2. 외국인직접투자법 2003년 터키 정부는 ‘외국인직접투자법’을 발표한다. 이 법안은 외국인과 내국인의 동등 대우를 기본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 법안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수출 의무, 국산 원자재 사용 의무, 최소 투자 자본 요건 등의 제한이 존재하지 않으며 과실 송금과 자본금의 외화 구좌 납입을 보장한다. 그리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 의욕 증진을 위해 기업 설립 절차를 간소화하였다. 그리고 이 법안은 산업에 따른 차별책을 적용하고 있다. 특정 산업에 대해서는 장려책 적용하여 외국인 투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며 또 국가 독점 산업으로 지정된 특정 산업에 대해서는 제한책을 두고 있다. 투자 제한 분야 라디오 TV 방송(방송법 Law No : 3984), 국내 민간 항공(항공법 Law No : 2920), 국내 해운(해운법 Law No : 815), 선박 소유(무역법 Law No : 6732), 전화 및 전보 서비스(통신법 Law No : 406), 정부 조달(정부조달법 Law No :4734), 수산업(수산물법 Law No : 1380), 요트 선착장(관광 촉진법 Law No : 2634), 인력알선회사(고용법 Law No : 4904), 민간 경호서비스 회사(사설 경호 서비스법 Law No : 5188) 위 산업에 대해서는 금지 혹은 제한하는 제한책을 두고 있다. 투자 장려 분야 : 광업 / 테스트센터, 풍동 및 유사한 시설 투자 / 승객 및 화물 운송을 위한 철도 및 해운시설 투자 / 관광진흥지역에 대한 관광업 투자 / 초, 중, 고 학교에 대한 민간 투자 / 특정 의료분야 및 방위산업에 대한 총액 2000만불 이상의 투자 위 산업에 대해서는 기타 산업들에 비해 높은 인센티브를 적용하는 장려책을 두고 있다. 3. 상법 개정 터키의 기존의 상법은 195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 법안은 현재 사회에 적용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있어왔다. 이에 따라 터키 정부는 2012년 7월, 55년 만에 상법을 새로 개정한다. 이 법안의 외국인 투자와 관련된 주요 내용은 기존 터키만의 회계기준을 개정하여 EU 법령과 일치하는 국제 회계기준으로 바꾸고 1인 주주회사의 인정에 관한 것이다. 이를 통해 터키 정부는 외국인의 투자를 이끌어내고 외국 기업의 단독 투자 기업 설립을 용이하게 만들어 외국인투자기업 및 중소기업의 설립을 증가시키고자 한다. 터키 회계기준(TMS)와 국제회계기준(IFRS)의 일치 터키에 존재하는 모든 기업의 재무제표는 TMS에 따라 작성되어야 한다. 이번 상법 개정을 통해 TMS를 IFRS의 터키어 번역판으로 정의했는데 이는 TMS와 IFRS의 일치를 의미한다. 또한 이 법안 내용에 관한 효율적인 집행을 위해 터키회계기준위원회(TMSK)에 터키회계기준을 제정하고 규제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1인 주주 주식회사에 관한 법률 기존에는 주식회사 및 유한회사를 설립하려면 주주의 수에 하한선이 존재했다. 이는 외국인투자기업 및 중소기업의 설립을 가로막는 요소 중 하나였는데 이번 개정안을 통해서 이 하한선을 제거했다. 이에 따라 1인의 주주만으로 주식회사의 설립이 가능해졌고 설립 가능 여부 뿐만이 아니라 주주총회가 갖는 모든 권한 역시 보장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복수 주주를 가진 회사가 1인 주주회사로 축소될 시에도 똑같이 보장된다. 4. 인센티브 제도 기존 대터키 투자의 문제점 중 하나는 투자가 지역별로 차이가 심해서 큰 불균형을 야기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2004년부터 터키 정부는 이러한 지역별 불균형 하고 균형적인 발전을 위하여 투자지역에 따라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터키의 정책은 2009년 인센티브 제도 개정에서 터키를 4개의 구역으로 나누면서 구체화되었다. 후에 좀 더 효율적인 인센티브 제도를 위해 2012년 인센티브법 개정을 하여 6개로 확대 구분하여 지역에 따른 차등적인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있다. 2009년 터키의 지역 구분 2012년 터키의 지역 구분 그림 : Investment Support and Promotion Agency of Turkey 자료 : 터키 경제부, 투자청 인센티브 내역 인센티브 내역으로는 대표적으로 세금 감면, 이자 지원 등이 있다. 당국의 지침에 따라 이 인센티브 내역은 지역별로 차이를 두고 있고 이는 다음과 같다. 자료 : 터키 경제부, 투자청 자료 : 터키 경제부, 투자청 자료 : 터키 경제부, 투자청 (4) 주력 육성 산업 1. 자동차 산업 2008년 기준 터키는 연 150만 대 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하여 세계 자동차 생산 16위를 점하고 있으며, 유럽 최대의 버스 생산국이자, 유럽 3위 상용차 생산국이며, 터키 전체 수출의 20.1%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2007년에 이스탄불상공회의소에서 발표한 '터키 500대 기업'에 자동차 관련 업체들이 상위권에 속해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터키는 자동차 생산대수 200만대 이상으로 유럽 3위, 세계 10위 자동차 생산국 도약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2. 파이프라인 사업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에너지 산업에서 큰 이점을 보고 있다. 이 지리적 요인덕분에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및 카스피 해에서 생산되는 원유와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연결해주며 많은 이익을 취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파이프라인 사업이다. 2005년 바쿠-트빌리시-제이한(BTC) 석유 파이프라인을 완공함으로써 터키는 에너지 수송의 위상을 굳건히 하였다. 한편 2009년부터 야심차게 준비해온 나부코(Nabuco) 파이프라인 사업이 무산되면서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3. 에너지 산업 지난 10년간 터키 정부는 개인의 참여를 지향하여 에너지 공급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먼저 민영화된 투자에 대한 길을 마련하는 전략을 마련하고, 에너지 생성 자산을 민영화하여 전기 발전 부문에 있어 민간 부문의 몫을 2002년의 32퍼센트에서 2015년 75퍼센트로 증가시켰다. 또 에너지 증권 거래소를 설립하여 시장의 자유화를 고양하고 투명성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공급과 수요 사이의 건전한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4. 전자 산업 자료 : 터키전자정보산업협회( (2008년 9월 기준 자료) 터키의 전자산업은 터키의 대표적인 수출산업이다. 그 중에서 백색가전제품류는 전자산업 중에서도 가장 효자산업이라 할 수 있다. 터키의 전자산업은 2004년 에르도안 총리의 지지 아래 생산액, 수입액, 수출액 모두 1.5배~2배가량 비약적으로 뛰어 올랐다. 언론 통제 2006년 미스 터키로 뽑힌 메르베 뷰육사라츠가 인스타그램에 '주인님의 시'란 풍자시를 공유했다가 에르도안(당시 총리)를 모욕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한, 2월 17일에도 터키 법원이 17세 고등학생이 에르도안 대통령을 모욕했다는 혐의로 징역 7개월 23일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는 등 대통령 모욕죄 처벌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반대파에 대한 광범위한 숙청작업 2016년, 에르도안은 쿠데타를 진압한 후 정부 비상사태를 선언해 비상 대권을 확보한 뒤 반대파에 대한 광범위한 숙청작업을 벌여왔다. 숙청은 특히 군부와 헌법재판소에 집중됐다. 에르도안은 이슬람주의자로서 이슬람을 앞세워 정치를 벌여왔다. 하지만 군부와 헌법재판소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정신을 앞세워 정치활동을 벌이는 것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와 세속주의 정치를 규정한 헌법 제2조에 위배된다고 판단해 해산을 명령하기로 결정했다. 에르도안이 군부와 법조계에 가혹한 이유다. 역대 선거 결과 각주 2. ↑ 집권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터키 건설시장에 주목하자 - 건설경제 3. ↑ 대통령 선거•대형 인프라 개발'양대 이슈'부각 - 중소기업뉴스 4. ↑ [글로벌 파워 피플(111) 레제프 탕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터키의 EU 강비 기회 잡은 강골 정치인] - 이코노미스트 5. ↑ 터키인들은 왜 에르도안에 열광하나 - NEWSIS 6. ↑ 터키정치와 건설시장의 관계 - EMERiCs{{터키의 대통령 7. 8. 9. EU 가입을 위한 향후 7년간 로드맵 - 주터키대사관 10. 터키 상법, 외국인 투자확대를 위해 반세기 만에 개정 - KOTRA 11. 7.1일, 개정 터키 상법 발효 - OIS 12. 터키 진출기업을 위한 세무안내 2013 (p63-73). 국세청 13. 신흥교역국의 통관환경 연구 (p17-19). 한국조세연구원 세법 연구센터 14. KOTRA 국가정보 - 터키 (p8-12, 42-44). KOTRA 15. 16. 17. 18. 외부 링크 1954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조지아계 튀르키예인 튀르키예의 총리 튀르키예의 대통령 20세기 튀르키예 사람 21세기 튀르키예 사람 이스탄불 출신 튀르키예의 무슬림 현재 국가 지도자 정의개발당 (튀르키예)의 정치인 아르메니아 집단학살 부정론자 튀르키예의 이슬람주의자 이그 노벨상 수상자
|
32399
|
https://ko.wikipedia.org/wiki/%EB%97%80%EC%84%9D%EA%B8%B0
|
뗀석기
|
뗀석기란 돌을 깨서 만든 석기로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구석기 시대(약 200만년 ~ 1만년 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만들었으며, 보통 나무를 자르거나 동물을 사냥할 때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제작 방법 및 종류 종류는 다양하며, 대형석기와 소형석기로 나뉘며, 돌망치나 뿔망치로 돌에 직접 타격을 가하여 만들거나, 뿔·뼈·나무·긴 자갈 등을 쐐기처럼 써서, 간접적으로 타격을 가하여 만든다. 또한 뿔·뼈로 만든 날카로운 가압기를 써서 돌날에 대고 눌러 격지를 떼어내는 방법 등이 있는데 만드는 기술이 전기·중기·후기에 따라 변화한다. 대형석기에는 주먹도끼·찍개·안팎날찍개·주먹괭이·자르개·다각면원구(多角面圓球) 등이 있는데, 주로 전기 구석기 시대에 많이 만들어 썼다. 중기·후기에는 그 비율이 줄어들었으며 한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소형석기는 격지석기와 돌날석기로 나뉘는데, 격지석기로는 긁개·첨기(尖器)·홈날·톱니석기·유경석기·르발루아석기 등이 있다. 돌날석기는 끝긁개·밀개·송곳·조각칼·복합석기·첨두형돌날·기하문형석기(幾何紋形石器)와 다듬은 돌날 등이다. 격지석기들은 석기·후기 구석기시대에도 만들어졌지만 주로 중기에 주된 뗀석기로 썼으며, 돌날석기는 주로 후기에 만들어졌다. 같이 보기 르발루아 기법 간석기 참고 자료 각주 석기 구석기 시대 일본의 구석기 시대 조몬 시대
|
120724
|
https://ko.wikipedia.org/wiki/%ED%81%B4%EB%A6%B0%ED%84%B4
|
클린턴
|
클린턴(Clinton)은 영어 이름이다. 사람 이름 빌 클린턴(Bill Clinton, 1946년 8월 19일 ~ )은 미국의 42대 대통령이다.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1947년 10월 26일 ~ )은 빌 클린턴의 부인이며, 미국의 제67대 국무부 장관이다. 첼시 클린턴은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의 외동딸이다. 클린턴 조지프 데이비슨: 미국의 물리학자 조지 클린턴: 미국의 군인, 정치인 헨리 클린턴: 영국의 군인, 정치인 조지 클린턴 (음악가): 미국의 음악가 제임스 클린턴: 미국 독립 전쟁 때 활약한 군인 헨리 클린턴 (1771년):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육군 장교이자 장성급 장교 지명 클린턴 (뉴욕주) 클린턴 (아이오와주) 클린턴 성: 뉴욕 맨해튼 배터리 파크에 위치하고 있는 사암 요새 같이 보기
|
134319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8%EB%82%A8%20%EB%B6%84%EA%B8%B0%EC%A0%90
|
하남 분기점
|
하남 분기점(河南分岐點, Hanam Junction, 하남JC)은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과 덕풍1동, 그리고 천현동에 걸쳐 설치된 중부고속도로와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가 만나는 분기점이며 중부고속도로의 종점이다. 연혁 1987년 12월 31일 : 분기점 신설을 위해 신장 도시계획시설 교통광장에 광주군 서부면 춘궁리 일원을 신장 분기점으로 고시 1991년 10월 31일 :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판교 ~ 하남 구간 개통과 함께 통행 개시건설부공고 제134호, 1991년 10월 31일. 1998년 3월 7일 : 분기점 개량을 위해 하남시 도시계획시설 교통광장 변경 구조물 정보 위치: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덕풍1동, 천현동 접속하는 노선 대전 방면 중부고속도로 (43번) 성남・구리 방면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5번) 각주 경기도의 고속도로 분기점 대한민국의 도로 구조물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분기점 하남시의 교통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
73912
|
https://ko.wikipedia.org/wiki/%EB%8F%84%EB%8F%84
|
도도
|
도도(dodo)는 마다가스카르 동쪽의 모리셔스 섬에 생식했던 현재는 멸종한 조류이다. 도도과에 속하는 새는 로드리게스 도도 등 1종류가 더 있는데(현재는 모두 멸종되었으며, 박제도 남아있지 않다), 대체로 도도(새)라고 하면 모리셔스 섬의 도도를 지칭한다. 흰색 도도는 레위니옹섬 근처에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진 적이 있었다. 도도의 반화석은 도도의 몸길이가 약 1미터(3.3feet), 몸무게는 약 10.6~21.1킬로그램 정도였을 것이라고 나타내준다. 도도의 생활 모습은 오직 17세기 그림,회화,서적 등에서만 볼 수 있다. 묘사된 모습들이 매우 다양하고, 몇 개의 그림들만 살아있는 도도의 모습을 정확히 그렸기 때문에 도도의 생활 모습은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도도의 서식지와 행동에 대해서도 정확히 아는 부분은 적다. 회색과 갈색을 섞은 깃털, 노란색의 발, 회색 머리, 검은색,노란색과 초록색의 부리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된다. 위결석을 이용해 과일과 같은 음식을 쉽게 소화할 수 있었고, 주 서식지는 모리셔스의 해안가로 추정된다. 도도는 모리셔스 섬에 천적이 없어서 날개가 퇴화하여 몸체에 비해 매우 작아 날 수 없었다. 날개가 퇴화한 이유는 도도새가 살던 땅에는 도도새를 위협할 만한 맹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도새는 포식자가 살지 않는 서식지의 특성에 맞게 새들에게 가장 튼튼한 생존 수단인 날개를 포기한 것이다. 도도새는 날개를 포기한 대신 튼튼한 다리와 구부러진 부리로 철저히 땅 위의 생활에 적응하였다. 초식성으로 과실 등을 주식으로 했다. 9월이 번식기로, 땅 위에 둥지를 지었다. 이 새는 대항해 시대인 1507년 포르투갈인들이 마스카린 제도에서 발견했다. 1598년 네덜란드의 항해사에 의해 첫 번째로 묘사되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도도가 나왔을 때 부터이다. 그 당시 도도는 인간, 가축들에 의해 무자비로 포획당했었다. 마스카린 제도가 기항지로 이용된 이후부터 도도는 하늘을 날거나 재빨리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고 17세기 초반 네덜란드인 이주자들에 의해 볼거리로 포획되어, 1681년 영국인 벤자민 해리가 목격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인간의 남획 등으로 발견된 지 180년 만에 완전히 멸종된 사실에서, 동물의 멸종으로 몰아넣은 인간의 잔인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 언급된다. 생물 분류 도도는 초기에 로버트 실버버그에 의하면, 짧은 다리로 타조, 콘도르, 펭귄, 도요새, 따오기의 친척이라고 생각되었다. 1842년, 테오도어 레인하르트는 도도의 두개골을 연구한 끝에 도도가 비둘기목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주장은 처음에 터무니 없다고 믿어졌으나, 에드윅 스트릭런드와 고든 멜빌 등 여러 학자가 1848년 그들의 논문에서 그 사실을 뒷받침해 주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 보존되어 있던 도도를 해부하고 분석해본 결과, 비둘기목과 비교해 봤을 때 매우 가깝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스트릭런드에 따르면 이 새들은 모두 같지는 않지만 비둘기목에서만 볼 수 있는 다리 뼈의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도도는 해부학적으로 비둘기목과 굉장히 유사했다. 스트릭런드는 도도의 케라틴의 부리와 길고 가느다란 비골에 주목했다. 또한, 도도는 피부와 눈 부분도 비둘기목과도 비슷했다. 도도의 다리도 골격과 크기로 보았을 때 비둘기목과 비슷했다. 도도와 비둘기목의 차이는 더 작은 날개, 더 큰 부리, 두개골의 비율 뿐이었다. 도도는 영국인 박물학자 존 트라데스칸트가 사망한 뒤, 1683년 옥스퍼드의 애쉬모리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유일한 박제가 나쁜 관리 상태로 1755년 소각 처분이 되어버린 이후, 스케치 이외에는 머리 부분, 다리 등 극히 일부의 단편 표본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어원 도도가 처음으로 불린 이름은 네덜란드어로 'Walghvoge'였다. 1598년 9월 20일, 모리셔스를 방문했던 비르반드 바르바크 제독이 처음으로 사용했다. Walghe는 '병약해 보이는'이란 뜻이고 vogle은 '새'를 의미한다. 그 이름은 독일로 Walchstök 또는 Walchvögel로 다시 번역되었다. 네덜란드어의 Waarachtige Beschryving 논문은 존재하지 않지만 영어로 번역된 본은 존재한다. 바르바크 제독과 같이 한 항해에서 포르투갈인들은 도도를 펭귄의 한 종이라고 묘사했다. 영어에서 펭귄이 여기서 유래된 것은 아니지만 새 날개의 끝 부분을 뜻하는 pinion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1602년 그와 함께 항해한 선원인 헬데를란트는 도도를 '부풀다'라는 뜻의 Dronte라 불렀고, 현재 실제로 몇 언어에서는 도도를 Dronte라고 한다. 또한 그는 도도를 항해 다음 날 열리는 수호 성인 축제에 사용되는 가금류와 관련해서 'griff-eendt'또는 'kermisgans'라고 부르기도 했다. "도도"라는 단어는 어디서 온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추측하기를 독일어에서 작은 논병아리를 가리키는 "Dodaars"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추측은 논병아리와 도도새의 엉덩이 부분에 비슷한 모양의 털이 나 있고 또 두 새 모두 꽤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를 하고 다녀서 그러한 것으로 추정된다. "Dodaars"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602년 빌럼 반 웨스트 자넨 선장의 일지에서 사용되었다. 1634년 토마스 허버트가 그의 기행문에서 "Dodo"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고, 어원이 포르투갈이라고 주장했다. 엠마누엘 알트헴이라는 한 사람은 1628년 그의 편지에서 "Dodo"를 사용했고, 역시 포르투갈이 어원이라고 썼었다. "Dodar"이란 단어는 "Dodo"와 같이 같은 시기에 써졌으나 18세기 이후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포르투갈 사람이 도도를 언급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자료들은 도도가 "바보"나 "멍청이"를 뜻하는 포르투갈어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도도가 도도의 울음소리에서 온 의성어라는 주장도 있다. 같이 보기 도도나무 각주 도도과 절멸한 날지 못하는 새 모리셔스의 상징 인간에게 절멸된 종 1758년 기재된 새 모리셔스의 새 칼 폰 린네가 명명한 분류군 비둘기목 1500년 이후 절멸한 새
|
27016
|
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B%B0%94%EC%8B%9C
|
지바시
|
지바시()는 지바현 중앙부에 있는 현청 소재지이고, 정령지정도시로 지정되었다. 도쿄 만의 도쿄도 도심에서 동쪽으로 약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도시는 1992년에 정령지정도시가 되었다. 2019년 6월 기준으로 이 지역의 인구 수는 총 979,768명, 넓이는 271.77제곱km이고, 인구 밀도는 3,605명의 인구밀집도를 가지고 있다. 지바 시는 관동 지방의 주요 항구들 중 하나이며 일본에서 가장 많은 화물을 취급하는 지바 항의 본거지이다. 도시의 대부분은 주택지이지만 해안가를 따라 많은 공장과 창고가 있다. 마쿠하리 멧세가 위치한 수변 상업지구인 마쿠하리, 현청, 시청이 위치한 치바 중부를 포함한 여러 주요 도시 중심지가 있다. 지바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 모노레일인 지바 도시 모노레일로 유명하다. 관광지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패총인 가스리 셸 미덴, 일본에서 가장 긴 인공 해변의 일부를 이루는 이나게 해변, 그리고 붉은 판다 후타로 유명한 지바 시 동물원이 있다. 인구는 90만 여명으로 정령지정도시 중에서 세 번째로 적다. 지리 도쿄 중심에서 약 40km 거리에 있어서 1960년대 이후에 주택 단지 개발이 촉진되었다. 또한 도쿄 만 해변은 옛날에는 해수욕장으로서 번성했으나 1960년대 이후에 매립되고 공업 지역이나 주택 단지가 개발되었다. 시는 해안가를 따라 위치한 많은 공장들과 창고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거지이다. 더욱 도쿄에 가장 가까운 마쿠하리(幕張) 지구의 매립지에는 도쿄의 부도심 기능을 갖추도록 마쿠하리 신도심(幕張新都心)이 개발되었으며 이곳에는 지바 현청과 시청이 위치한다. 한편 교외 지역에는 자연이 많이 남아 있다. 지바 시는 간토 지방의 주요 해항 중 하나인 지바 항이 있고 일본에서 가장 많은 화물을 처리하는 하구 중 하나이다. 역사 지바 시와 관련된 첫 번째 기록은 헤이안 시대에 다이라 쓰네시게(平常重)가 지바로 이주했다는 기록이다. 그는 자신을 지바노수케(千葉介)로 선언하였고 오늘날 지바 시라고 알려진 지역 주변을 통치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성씨를 "지바 씨"로 칭하고 이 지방을 무로마치 시대까지 계속 지배했다. 가마쿠라 시대에 지바 쓰네하네(千葉常胤)는 미나모토 요리토모를 도와 가마쿠라 막부를 세웠다. 이로 인해 지바 씨는 가마쿠라 막부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본거지를 이노하라 산의 이노하라 성에 세웠다. 그들의 힘과 영향력은 난보쿠초 시대와 무로마치 시대에 간토 지방 주변에서 벌어진 전쟁 때문에 쇠퇴하였다. 16세기에 지바 씨를 대신해 지바 씨의 가신 중 하나였던 하라 씨가 이 지역에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센고쿠 시대에 하라 씨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明)에 의해 강제로 제거되었다. 아시아카 요시아키는 또한 사토미 씨의 가신 중 하나인 사카이 씨에 의해 제거되었다. 마지막에 지바 씨와 사카이 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멸망하였다. 에도 시대에는 시역의 대부분이 사쿠라번에 속했고 일부는 오유미 번과 소가노 번에 속했다. 폐번치현 후 기사라즈 현과 인바 현이 폐지되었고 두 현의 경계인 지바 정에 현청이 설치되었고 현내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시제의 시행으로 1921년 1월에 지바 시가 탄생하였다. 이후 주변의 정과 촌을 합병하였고 바다를 매립하여 현재의 광대한 시역이 성립되었다. 전쟁 전에 현재의 가와사키 정의 매립지에 히타치 항공 제작소와 히타치 제작소 등의 군시설이 집중되어있는 군사 도시로 발전했지만 1945년 6월 10일과 7월 7일에 연합군에 의한 대규모 공습으로 시역의 70%가 괴멸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전후 대규모의 매렵과 시정촌의 합병으로 게이요 공업지역의 중심 도시로 재건되었다. 1992년에 정령 지정 도시로 지정되었다. 2003년부터는 인접하는 요쓰카이도시(四街道市)와 통합을 향해 협의를 했으나, 요쓰카이도 시가 실시한 주민 투표에서 반대 표가 많아서 통합을 단념했다. 행정구 교육 지바 대학 도쿄 정보대학 지바 상과대학 도쿄 치과대학 게이아이 대학 교통 항공 나리타 국제공항과 도쿄 국제공항이 가장 가까운 주요 공항이다. 도로 고속도로 히가시-간토 고속도로 다테야마 고속도로 게이요 도로 지바 도가네 도로 국도 국도 14호선 국도 16호선 국도 51호선 국도 126호선 국도 357호선 철도 동일본 여객철도 주오·소부 완행선 소부 쾌속선 소부 본선 게이요 선 소토보 선 우치보 선 게이세이 전철 지바 선 지하라 선 지바 도시 모노레일 지바 도시 모노레일 1호선 지바 도시 모노레일 2호선 문화 지바의 특산품 중 하나는 땅콩이다. 주요 볼거리로 녹지식물실험소가 있다. 시설 지바 동물원 마쿠하라 신도심 기후 인구 스포츠 지바에는 몇 개의 프로 스포츠 팀이 연고지를 두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들로 다음이 있다. 자매 도시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노스밴쿠버 (1970년) 아순시온 (1970년) 텍사스주 휴스턴 (1972년) 케손시티 (1972년) 톈진시 (1986년) 우장 시 (1996년) 몽트뢰 (1996년) 각주 외부 링크 지바 시 공식 홈페이지 지바현의 도시 정령지정도시 일본의 도도부현청 소재지 일본의 항구 도시
|
21261
|
https://ko.wikipedia.org/wiki/II
|
II
|
II, Ii, ii는 다음 뜻을 가지고 있다. II는 로마 숫자로 2를 뜻한다. 생물학 및 의학 화상 증배관(Image intensifier): 형광 증배관 시신경(Optic nerve) 경제 경제적 불평등(Income inequality) 음악 위으뜸음(Supertonic) ii: 밴드 처치스의 2018년 노래 음반 II (보이즈 투 멘의 음반): 1994년 음반 Crystal Castles II: 2010년 음반 Led Zeppelin II: 1969년 음반 기타 불법체류(Illegal immigrant) 쓰촨 이어의 ISO 639-1 코드 ii 눠쑤어의 ISO 639 알파-2 코드 ii
|
184000
|
https://ko.wikipedia.org/wiki/%EB%8F%84%ED%8C%BD%20%28%EC%B9%AD%ED%98%B8%29
|
도팽 (칭호)
|
도팽 드 프랑스()는 1350년에서부터 1791년, 그리고 1824년부터 1830년까지 프랑스 왕국의 왕위 계승자에게 붙이던 칭호로 보통 왕세자로 번역된다. 정식으로는 도팽 드 비엔누아 (Dauphin de Viennois)이다.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비엔누아를 다스리던 백작 기 8세는 돌고래를 자신의 문장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때문에 프랑스어로 돌고래라는 뜻의 ‘르 도팽(le Dauphin)’이라고 불렸다. 이후 비에누아의 도팽이라는 칭호는 어느새 비에누아의 통치자만이 쓰는 독특한 칭호로 굳어져 그의 후계자들이 이 칭호를 계승하여 계속해서 사용해 왔다. 또한 도팽의 봉토는 도팽령이라는 뜻의 도피네(Dauphiné)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1349년 비엔누아 백작 도팽 움베르 2세가 도피네를 프랑스의 필리프 6세에게 매각하면서, 프랑스 왕실에서 이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최초로 도팽의 칭호를 받은 프랑스 왕세자는 샤를(훗날 샤를 5세)였다. 1349년에 필리프 6세는 도피네의 매입을 추진하며 당시 왕세자였던 장(훗날 장 2세)에게 줄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협상이 타결되자마자 서거하고 왕세자 장이 장 2세가 되어 즉위하면서 도피네를 자신의 아들이자 새로운 왕세자 샤를에게 물려주었다. 1364년에 장 2세가 죽고 샤를 5세가 즉위하였다. 샤를 5세는 1368년에 자신의 아들 샤를 왕세자 (훗날 샤를 6세) 에게 도팽의 칭호를 물려주었다. 이때부터 이 칭호는 프랑스 왕국의 왕위계승자(추정 상속인)를 뜻하는 말로 굳어지게 되었다. 같이 보기 웨일스 공 왕태자 프린스 각주 프랑스의 왕가 왕위 계승자 이제르주의 역사
|
236532
|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A%B5%AD%EC%9D%98%20%EC%8B%A0%EC%84%9D%EA%B8%B0%20%EB%AC%B8%ED%99%94%20%EB%AA%A9%EB%A1%9D
|
중국의 신석기 문화 목록
|
본 문서는 고고학자들이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내에서 발굴한 신석기 문화의 목록을 정리한 것이다. 이 문서는 가장 먼저 발생한 문화부터 가장 늦게 발생한 문화 순서로 정렬되었다. 중국의 신석기 문화 목록 표 아래에는 기원 전 7000년부터 기원 전 1500년까지의 각 문화를 지역별로 나타내고 있다. 신석기 시대 문화는 무인으로, 청동기 문화(기원 전 2000년경부터 출현)는 별표(*)가 붙어 있다. 연대에는, 연구마다 더욱 많은 차이점이 있다. 위 도표에서는 중국을 아홉 개의 지역으로 나누고 있다. 몽골과 만주: 내몽고 자치구, 흑룡강성, 지린성, 랴오닝성 황하 상류 지역(중국 서북부): 감숙성, 청해성, 섬서성 서부 황하 중류 지역(중원): 산서성, 하북성, 하남성 서부, 섬서성 동부 (화북 평야. 이전에는 중국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되어 있었다.) 황하 하류 지역(중국 동북부): 산둥성, 안휘성, 강소성 북부, 하남성 동부 장강 하류 지역: 강소성의 거의 대부분 및 절강성 장강 중류 지역: 후베이성과 후난성 북부 쓰촨성과 장강 상류 지역 중국 동남부: 푸젠성, 강서성,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 후난성 남부(베트남 북부의 홍 강 하류나, 타이완도 포함) 중국 서남: 윈난성, 귀주성 각주 참고 문헌 Chang Kwang-chih, The Archaeology of Ancient China,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1986 (4판 - 개정증보판), Loewe, Michael en Edward L. Shaughnessy, The Cambridge History of Ancient China. From the Origins of Civilization to 221 B.C.,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99, . Higham, Charles, The Bronze Age of Southeast As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96, Li Liu,The Chinese Neolithic. Trajectories to Early Stat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04, Maisels, Charles Keith, Early Civilizations of the Old World. The Formative Histories of Egypt, The Levant, Mesopotamia, India and China, Routledge: Londen, 1999, . Scarre, Chris, The Human Past. World Prehistory & the Development of Human Societies, Thames & Hudson: Londen, 2005, Higham, Charles, 'East Asian Agriculture and Its Impact', 7장, p.234 ~ 264. Higham, Charles, 'Complex Societies of East and Southeast Asia', 7장, p.552 ~ 594 같이 보기 중국의 역사 베이푸디 삼황오제 하나라 목록 아시아의 신석기 문화
|
91407
|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8B%B9%EC%A3%BC
|
마당주
|
마당주(Madang)는 파푸아뉴기니의 주로 주도는 마당이며 면적은 29,000km2, 인구는 365,106명(2000년 기준)이다. 가장 높은 고지대와 많은 활화산이 분포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 사용하는 언어만 175개에 달할 정도로 언어학적으로 다양성이 가장 큰 주이다. 이 지역은 코코아와 코프라 생산량은 파푸아뉴기니에서 세 번째로 많으며 양 축산량으로는 두 번째로 많다. 많은 지역은 도로로 연결되지 않고 미개발 상태로 남아 있다. 역사 마당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은 12000년에서 15000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1914년 오스트레일리아 군대가 라바울을 점령하고 독일령 뉴기니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군정은 7년간 계속되었으며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비준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거의 개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년 5월 1일 일본 제국에 의해 마당이 점령되기도 했다. 마당은 이 과정에서 양군의 교전으로 인해 심하게 파괴되었고 1944년 4월 24일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전후 복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교육 마당 시에는 1996년 세워진 디바인워드 대학이 위치해 있다. 외부 링크 마당 주 관광 웹사이트 파푸아뉴기니의 주 모마세 지방
|
34401
|
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B%84%AC%20%EB%8C%80%ED%95%99%EA%B5%90
|
코넬 대학교
|
코넬 대학교(Cornell University)는 미국 뉴욕주 이타카에 위치한 아이비 리그 사립 대학(부분 공립)이다. 현재까지 54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코넬 대학교를 교수 또는 학생으로 거쳐가며 세계 대학 중 9번째로 많은 수상자를 배출했다. 학부생은 약 13,000명이고, 대학원생은 6000여 명이다. 코넬 대학교는 1865년에 에즈라 코넬(Ezra Cornell)과 앤드루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에 의해 인종이나 종교에 상관 없이 입학을 받는 무교파 대학으로 설립되었다. 다른 아이비리그 대학과 달리 1872년부터 여학생을 받아들여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남녀공학으로 기록된 대학이다.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인재를 배출한다'는 것을 모토로 삼는다. 7개 학부 단과대학과 7개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농경대학, 인류생태학부, 노사관계학부과 수의대학원은 뉴욕주립대학교(SUNY) 시스템의 일부인 공립단과대학이다. 재학생중 동양계 학생은 약 16%이며, 유학생 신분 학생이 9%를 차지한다. 역사 1862년 통과된 모릴 토지 허여 법안(Morrill Land Grant)은 1860년 실시한 인구 조사에 따라 인구에 비례해서 선발된 각주의 상원의원과 하원의원 숫자 일인당 30,000 에이커의 연방소유 땅을 각 주에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것으로, 같은해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이 최종 사인함으로 각주는 무상으로 불하받은 땅을 매각하여 그 수익금으로 농업교육과 기술교육을 실시하는 대학설립을 지원하게 할 수 있었다. 1863년 에즈라 코넬(Ezra Cornell)과 앤드루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가 뉴욕주 상원에 선출되었다. 둘다 랜드 그랜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65년 1월 에즈라 코넬 의원은 이웃 도시인 시라큐스 출신의 앤드루 딕슨 화이트 의원과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마음속에 그가 평소에 꿈꾸던 대학설립의 원대한 꿈이 구체화되었다. 한달이 지나서 앤드루 딕슨 화이트 의원이 국회에 연방정부로부터 지원받은 뉴욕주 내에 있는 토지를 매각해 코넬대학교 설립에 유용하자는 주법안을 상정하였고, 이 법안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 당시의 뉴욕주 지사의 최종서명을 받게 되었다. 코넬 대학교는 뉴욕주 법안에 의해 1865년 4월 27일 설립되었다. 앤드루 딕슨 화이트 의원은 첫 번째 코넬대 총장이 되었다. 한편 자신이 창시한 웨스턴 유니언을 통하여 막대한 재산을 벌어들인 에즈라 코넬(Ezra Cornell)은 그의 평생의 꿈을 실현하는 대학 설립을 위하여 당시에 자신의 재산 500,000 달러를 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소유하던 광대한 농장 또한 대학에 기부함으로써 그의 농장위에 오늘의 코넬대학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바쳐 교사 건축, 택지조성, 장비, 서적등을 구입하는 조달업무를 총괄하는 일을 수행하기도 했다. 설립 초기부터 재능있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 있는 모든 학문을 연구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모토 하에 기본 학문 이외에 공학, 건축학, 호텔경영학, 수의학, 노사관계학, 농학 등 다른 전통 학교들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실용 학문들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결과,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손꼽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아이비리그 대학들 가운데 최초로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한 학교이기도 하다. 캠퍼스 코넬 대학교의 메인 캠퍼스는 뉴욕주 이타카 시의 이스트 힐(East Hill)에 위치해 있으며, 이타카 시와 카유가 호를 내려다 보고 있다. 260 여개의 교내 건물들은 중앙 캠퍼스(Central Campus), 동쪽 캠퍼스(East Campus), 북쪽 캠퍼스(North Campus)에 흩어져 있으며 신입생을 제외한 2, 3, 4학년들의 기숙사가 서쪽 캠퍼스(West Campus)에 위치해 있다. 대학가로는 컬리지 타운(Collegetown)이 있고 중앙 캠퍼스의 남쪽에 있다. 교내 대부분의 주요 건물들이 위치한 중앙 캠퍼스(Central Campus)에는 실험실, 행정 건물, 단과 대학 건물, 도서관, 운동 시설, 대강당 등이 위치해 있다. 서쪽에는 루브르 피라미드를 디자인한 I. M. 페이가 직접 설계한 허버트 F. 존슨 미술 박물관(Herbert F. Johnson Museum of Art)이 있다. 북쪽에는 천체물리학과 천문학의 대가이자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이 평생 동안 석좌교수 겸 소장으로 근무하던 코넬 행성연구소와 퓨어테스 천문대(Fuertes Observatory)가 있다. 여담으로 칼 세이건의 묘는 코넬 대학교 캠퍼스 옆 레이크뷰 공동묘지(Lake View Cemetery)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 캠퍼스(East Campus)에는 각종 식물원과 수목원, 식품영양학과 건물인 Stocking Hall, 교내에서 직접 생산한 유제품과 아이스크림 등을 판매하는 Cornell Dairy Bar, 수의학대학원(College of Veterinary Medicine) 등이 있다. 코넬 소유의 2,800 에이커 부지 내에 위치한 식물원에는 멋진 조경으로 꾸며진 다양한 종류의 꽃, 나무, 그리고 연못을 볼 수 있다. 북쪽 캠퍼스(North Campus)에는 신입생과 대학원생들을 위한 기숙사, 프로그램 하우스, 그리고 29개의 남녀 동아리 기숙사가 있다. 서쪽 캠퍼스(West Campus)에는 상급생들과 25개의 남녀 동아리 기숙사가 있다. 컬리지 타운(Collegetown)에는 슈워츠 퍼포밍 아츠(Schwartz Performing Arts)센터가 있고, 상급생들이 사는 2개의 기숙사 건물과 교외 캠퍼스 아파트, 상가, 레스토랑, 바 등이 위치해 있다. 코넬 대학교의 일부분은 뉴욕 맨하탄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곳에 의학대학원과 의과학대학원이 있다. 웨일 의학대학원(Weill Cornell Medicine)은 1927년부터 뉴욕 장로회 병원(New York-Presbyterian Hospital)과 협력 관계에 있다. 뉴욕 시에는 의학대학원생 뿐 아니라 코넬 대학의 건축예술대학, 농업생명과학대학, 공과대학, 인간생태대학, 노사관계대학 학생들이 와서 공공 기관, 예술 기관, 기업, 또는 연구소에서 일을 하거나 수업을 듣고, 경험을 쌓기도 한다. 또한 뉴욕의 루즈벨트 아일랜드에는 2017년 문을 연 코넬 대학교의 최첨단 캠퍼스인 코넬 테크(Cornell Tech)가 위치하고 있다. 뉴욕에 위치한 의학대학원 외에 또 다른 의과대학은 중동 지역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 위치해 있다. 2004년에 개교했으며 미국 최초로 미국 영토 밖에 위치한 의과대학이 되었다.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한 코넬 대학의 프로그램으로 카타르의 정부와 협력 관계에 있다. 구성 코넬 대학교는 7개 학부 단과대학과 7개 대학원로 구성되어 있다. 7개의 학부로는 문리대학 (College of Arts and Sciences) 건축예술대학 (College of Architecture, Art, and Planning) 농업생명과학대학 (College of Agriculture and Life Sciences) 경영대학 (S.C. Johnson College of Business) 공과대학 (College of Engineering) 인간생태대학 (College of Human Ecology) 노사관계대학 (School of Industrial and Labor Relations)이 있으며, 6개의 대학원으로는 법학대학원 (Cornell Law School) 의학대학원 (Weill Cornell Medical College) 의과학대학원 (Weill Cornell Graduate School of Medical Sciences) 수의학대학원 (NYS College of Veterinary Medicine) 일반대학원 (Graduate School) 경영대학원 (S.C. Johnson Graduate School of Management) 이 있다. 이 중 문리대학 (College of Arts and Sciences) 와 공과대학 (College of Engineering)은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같이 제공한다. 학부 입학 현황과 각종 랭킹 2022년 졸업예정으로 2018년 가을에 입학하는 학부 신입생의 경우 51,324명의 지원자 중 코넬 대학교 역사상 가장 낮은 10.3%인 5,448명이 합격하였다. 각 대학별 합격률은 2011년의 경우 농생명과학대학 19%, 건축예술대학 16%, 문리과 대학 15%, 공과대학 20%, 호텔경영대학 27%, 인간생태연구대학 32%, 노사관계대학 24%였다. 가장 극악의 합격률을 가진 분야대학은 경영대학내의 Dyson School of Applied Economics & Management이다. 이 소수정예 프로그램은 약 4천 명의 지원자 가운데 100명 정도의 인원만 선출하기 때문에 2020년 기준 2.9%라는 극악의, 코넬 내 최고의 입학 경쟁률을 보유하고 있다. 이 학과는 전미 기준 3위 수준의 학부 Business School이다. 코넬 대학교는 2014년 《U.S. 뉴스 & 월드 리포트》가 매년 발행하는 종합대학 학부 순위에서 전미 15위, 공학부 순위에서 전미 7위, 경영학부 순위에서 전미 3위, 농생명과학 순위에서 2위. 2014년 중화인민공화국 세계 대학 학술 순위에서 세계 13위, 2017년 영국 타임즈 고등교육 세계 대학 랭킹에서 세계 19위, 타임즈 고등교육 세계 대학 학계 평판도 순위에서 세계 17위, 2018년 영국 QS 세계 대학 순위에서 세계 14위, 2014년 사우디아라비아 세계대학랭킹센터(Center for World University Rankings)가 발표한 세계 대학 순위에서 세계 11위를 차지했다. 전문대학원의 경우 2014년 《U.S. 뉴스 & 월드 리포트》가 경영대학원을 전미 16위, 법학대학원을 전미 13위, 의학대학원을 전미 15위, 수의학대학원 1위, 공학대학원을 전미 13위에 랭크했다. 또한 경영대학원은 《Forbes》의 2015년 세계 경영대학원 순위에서 세계 9위, 《Bloomberg》의 2015년 세계 경영대학원 순위에서 세계 13위를 기록했다. 1년제 MBA 순위에서는 전미 2위를 기록했다. 건축대학의 학부과정은 매년 발간하는 《디자인인텔리전스》의 미국 건축대학 순위에서 지속적으로 전미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2000–2002, 2005–2007, 2009–2013, 2015-2016), 건축대학원은 2016년 건축대학 순위에서 2위에 등재되었다. 도서관 코넬 대학교는 미국에서 권수로 순위를 매겼을 때 11번째로 큰 대학 도서관 시설을 갖추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학부생들에게 도서관의 도서를 대여한 대학으로 알려진다. 프린스턴 리뷰지에서는 2006년도의 11번째로 가장 좋은 대학 도서관을 갖춘 대학으로 코넬 대학을 뽑았고, 2009년에는 6위를 기록했다. 과학 혹은 역사 기록을 온라인으로 보관하는 데 도서관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조직 코넬 대학교는 비영리 단체이다. 대부분의 자금을 등록금, 연구 교부금, 자산 운용, 졸업자 기부금에서 충당한다. 법정 대학(statutory college) 세 곳의 학부(농업생명과학대학, 인간생태대학, 노사관계대학)와 뉴욕 주립 코넬 수의학대학원은 "법정 대학"(statutory college) 혹은 "계약 대학"(contract college)라고 불리는데, 이들은 교육, 연구, 서비스를 위해 뉴욕 주의 자금 지원을 상당 부분 계속 받고 있다. 2007-08학년도에는 이들 단과 대학들은 뉴욕주립대학교(SUNY) 자산 운용 명목으로 1억 677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받을 예정이다. 뉴욕주 주민이라면 이들 법정 대학에 등록할 때 등록금의 할인을 받는다. 저명한 동문 18명의 노벨상 수상자, 29명의 로즈 장학생, 34명의 마셜 장학생, 14명의 억만장자들을 포함하는 코넬 동문들은 사회 많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정계에는 중화민국의 첫 여성 총통인 차이잉원과 전 총통 리덩후이, 쿠바의 전 대통령 마리오 가르시아 메노칼, 이란의 전 총리 잠시드 아무제가르, 중화민국의 개혁가이자 전 UN 대사 후스가 코넬을 졸업했다. 법조계에는 미국 연방 대법원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정치학) 대법관, 미국 최초의 여성 법무장관 자넷 르노 (화학) 등이 있으며, 재계에는 전 세계은행 총재 바버 코너블 (법학) 과 폴 월포위츠 (수학), 크래프트푸즈 회장 아이린 로젠펠드 (심리학), 버거킹 설립자 제임스 맥라모어, 전 시티그룹 CEO 샌포드 웨일 (정치학), 전 골드만삭스 회장 스티븐 프리드먼, 전 인도 타타 그룹 회장 라탄 타타 (공대) 등이 있다. 농대 식물학과 출신으로 여성 최초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한 바버라 매클린톡, 스탠포드 대학 초대 총장 데이비드 스타 조던(식물학), 프레온을 발명한 화학자 토머스 미즐리(공대), 식물유전학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고 시카고 대학 총장을 지낸 조지 W. 비들, 유명 과학 교육자 빌 나이(공대)도 코넬 출신이다. 예술계에는 크리스토퍼 리브가 슈퍼맨으로, 프랭크 모간(예술학)이 《오즈의 마법사》, 지미 스미츠가 《스타 워즈》 시리즈에서 활동했다. 그 외에도 배우 빌 마(영문학), 방송인 키스 올버먼(커뮤니케이션학) 등이 있다. 작가 중에는 노벨 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영문학), 《대지》를 쓴 노벨 문학작가 펄 S. 벅, 《샬롯의 거미줄》을 쓴 동화작가 엘윈 브룩스 화이트, 《중력의 무지개》를 쓴 토머스 핀천 등이 있다. 스포츠계에는 2002년 피파 월드컵 미국 축구 대표팀 감독 브루스 어리나가 코넬 출신이다. 건축계에선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설계한 피터 아이젠만과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리처드 마이어와 렘 콜하스가 있다. 코넬과 관련해 유명한 단어인 ‘코넬 마피아’는 코넬 대학교 호텔경영대학 동문들이 미국 호텔 업계를 주름잡고 있다는 데서 생겨난 말로, 현재 전 세계 관광 업계 요직에 8천여 명의 코넬 출신이 포진해 있다. 한국의 동문 중에는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 전 소장, 정갑영 연세대학교 전 총장, 백성기 포항공과대학교 전 총장,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대표이사, 이주호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양윤세 전 동력자원부 장관, 김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김재훈 법무법인 광장 대표변호사, 박병대 대법관, 성제환 원광디지털대학교 전 총장, 이종훈 새누리당 의원, 유경준 미래통합당 의원, 전우영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등이 있다. 코넬 테크(Cornell Tech) 조성계획 탄생 배경 2010년 12월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 뉴욕 시장은 뉴욕시의 금융이나 법률 등 서비스 산업에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낙후된 최첨단 기술산업과 앙트러프러너십(entrepreneurship) 발전을 위해 대학 시내 캠퍼스 유치대회를 열었다. 전 세계 27개의 대학이 참가한 이 유치대회에 코넬 대학교는 스탠퍼드 대학교와 함께 최후까지 경합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2011년 12월 19일 뉴욕시 캠퍼스의 유치대학으로 최종 선정되었다. 이 유치의 성공으로 인해 코넬 대학교는 최첨단 캠퍼스인 코넬 테크(Cornell Tech)를 뉴욕시내 루즈벨트 아일랜드에 개발하고, 2017년에 1차 완공, 2037년에 최종 완공을 목표로 4000명 이상의 학생과 교직원을 보유한 테크 캠퍼스를 조성하게 된다. 코넬 위주의 조성 계획이지만 이스라엘의 테크니온 공과대학 역시 콘소시엄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코넬 호텔경영대학 동문인 척 피니(Chuck Feeney)가 3억 5000만 달러에 달하는 기금을 출연하였고, 뉴욕시 역시 10에이커(12만 2000평)의 토지와 1억 달러의 지원금을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최종적인 캠퍼스 조성 비용은 2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거대 기업들의 참여도 이어져 구글의 경우 캠퍼스 완공까지 22,000 평방 피트에 달하는 뉴욕 맨하탄 본사 시설을 강의실 등으로 무료 임대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 시장, 퀄컴 회장 어윈 M. 제이컵스, 그리고 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가 캠퍼스 운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언론에서는 이들을 코넬의 "매우 중요한 백만장자 백인 남성" 어벤저스(the super-important ultra-rich white guy Avengers of Cornell)라고 칭하는데, 이는 IT 업계가 코넬 테크에 거는 기대와 해당 캠퍼스의 위상을 보여주는 예이다. 향후 전망 코넬 테크에는 코넬의 기존 교수들만이 아니라 구글, 퀄컴, 애플 등 IT 기업 뉴욕사무소와 벤처캐피탈 소속 현업종사자들이 멘토로 참여하는 산학협력 방식의 교육이 채택될 예정이다. 이는 향후 코넬 테크 졸업생들의 성장을 담보할 수 있는 최고의 방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해당 캠퍼스에는 컴퓨터공학, 헬스케어과학 이외에 노사관계학, 경영학, 법률학 등을 망라한 학제적 연구시스템이 도입될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여러 단과대학과 대학원이 융합한 형태로 운영될 것으로 예상된다. 코넬 테크가 지향하는 3대 산업은 미디어, 헬스케어 및 환경 산업으로 모두 차세대 성장동력산업에 해당한다. 현재는 공학석사(Master of Engineering) 과정만 개설되어 있지만, 테크 캠퍼스의 설립 자체가 다양한 분야의 학제적 연구를 목표로 한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공학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과의 연계방안이 유력하다. 또한 코넬 경영대학원(SC Johnson College of Business)과 함께 테크 관련 MBA 과정을 개설하게 되며, 이외에 노사관계대학이나 법학대학원과의 공동학위 등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코넬 테크는 공학만이 아니라 코넬 대학교 전분야에 걸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위와 같은 코넬 대학교의 뉴욕 시내 테크 캠퍼스는 매우 야심찬 계획으로 대학 역량의 1/3 이상을 이타카에서 뉴욕 시로 이전하는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코넬 대학교가 아이비리그의 명성과 함께 세계의 경제수도라는 뉴욕시에 위치한 코넬 테크의 입지로 인한 유리함까지 누리게 될 경우 상당한 도약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대중문화 속 코넬 대학교 《오피스》 (미국 시트콤, 2005-2013) 《앨리 맥빌》 (미국 드라마, 1997-2002) 《섹스 앤 더 시티》 (미국 드라마, 1998-2004) 《넘버스》 (미국 드라마, 2005-2010) 《아메리칸 파이》 (미국 영화, 1999, 2001, 2003, 2012) 《30 ROCK》 (미국 시트콤, 2006-2013) 《모던 패밀리》 (미국 시트콤, 2009-) 《어글리 베티》 (미국 드라마, 2006-2010) 《더티 댄싱》 (미국 영화, 1987) 《인 디 에어》 (미국 영화, 2009) 《뉴문》 (미국 소설, 2006) 《잃어버린 주말》 (미국 영화, 1945) 《시민 케인》 (미국 영화, 1941) 갤러리 같이 보기 코넬 대학교 법학대학원 코넬 노트 아레시보 우주 만원경 각주 외부 링크 코넬 대학교 입학정보 (공식 웹사이트) 코넬대 경영대학원 (공식 웹사이트) tech.cornell.edu 캠퍼스 조감도 코넬 캠퍼스 탐방 동영상(코넬 공식유튜브) 미국의 사립 대학 뉴욕주의 대학교 이사카 (뉴욕주)의 건축물 랜드그랜트 대학교 미국 대학 협회 아이비 리그 1865년 개교
|
220653
|
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B%B9%88%20%EB%B0%95%EC%94%A8
|
수빈 박씨
|
유빈 박씨(綏嬪 朴氏, 1770년 6월 1일 (음력 5월 8일) ~ 1823년 2월 3일 (1822년 음력 12월 26일)) 또는 수빈 박씨(綏嬪 朴氏)는 조선 정조(正祖)의 후궁이며, 순조(純祖)의 어머니이다. 궁호인 가순궁(嘉順宮)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경칭은 유빈 저하(綏嬪邸下)이다. 개요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정조의 마지막 간택 후궁으로, 정조와의 사이에서 순조와 숙선옹주(淑善翁主)를 낳았다. 조선 역사상 후궁의 신분으로 생존시에 아들이 국왕이 되는 영예를 직접 누린 사람은 수빈 박씨가 유일하다. 대한제국 고종 때 비(妃)로 추증되었다. 생애 탄생과 가계 1770년(영조 46년) 5월 8일, 박준원(朴準源)과 원주 원씨(原州 元氏)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영조의 부마인 박명원과 정조 시대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수빈의 아버지 박준원과 동항렬의 친척이다. 어머니 원주 원씨는 효종의 여섯째 딸인 숙경공주의 손자 원경유의 딸이며, 윤두수의 7세손인 윤형동의 외손녀이다. 후궁 간택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가 요절하고, 문효세자를 낳은 의빈 성씨마저 죽자, 후사를 근심하던 예순왕대비(정순왕후)의 명으로 간택령을 내려 후궁을 선발하였다. 당시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와 후궁인 화빈 윤씨에게 소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1787년(정조 11년) 2월 8일, 삼간택을 통해 정조의 후궁으로 간택되었다. 2월 11일, 수빈(綏嬪)의 빈호를 받고, 다음날인 2월 12일 정조와 가례를 올렸다. 삼간택을 거쳐 간택된 수빈의 가례는 왕비의 가례에 준할만큼 그 의장과 예식이 성대하였다. 이 무렵 가순궁(嘉順宮)의 궁호를 받았으며, 이후 빈호인 수빈보다 궁호인 가순궁으로 더 많이 칭해졌다. 후궁 시절 1790년(정조 14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순조를 낳았다. 후사가 없음을 근심하던 정조는 아들이 태어나자 크게 기뻐하였다. 수빈이 순조를 낳은 6월 18일은 순조의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생일이기도 하였다. 1793년(정조 17년) 3월 1일에는 숙선옹주를 낳았다. 정조는 수빈의 백부이자 박준원의 형인 박윤원과 서찰을 주고 받으며 교류하였고, 박준원의 장남이자 수빈의 큰오빠인 박종보(朴宗輔)를 신임하고 총애하였다. 정조와 박종보는 돈독한 사이였으며, 정조는 박종보를 격식 없이 대하기도 하였고, 많은 선물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정조가 박종보에게 보낸 편지는 어찰첩에 수록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00년(정조 24년) 1월 1일, 아들 순조가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순조의 즉위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고 1주일 후인 7월 4일 아들 순조가 즉위하였다. 순조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즉위와 함께 왕의 법적 증조모이자,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김씨(정순왕후)가 3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대왕대비는 수빈의 아버지 박준원을 어영대장으로, 수빈의 오빠인 박종보와 박종경(朴宗慶)을 경모궁령과 종척의 집사로 삼았다. 이후 박준원의 벼슬은 점점 높아져 공조판서와 판돈녕부사에 임명되었으며 박종보는 승지에 임명되었다. 박준원은 아들 박종경에게 내리는 과분한 특전을 거두어 달라고 상소하기도 하였다. 박준원이 죽은 뒤, 수빈의 가문인 반남 박씨는 박종경을 중심으로 세를 형성하여, 순조의 처가인 안동 김씨와 더불어 세도정치 시기의 세도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순조는 김조순과 안동 김씨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자, 자신의 외숙부인 박종경의 벼슬을 높이고 외가인 반남 박씨를 기용하였다. 순조 중기에는 안동 김씨 주도하에 반남 박씨가 공존하는 양상을 띠었으나, 박종경과 수빈이 죽은 후에는 세력이 약화되었다. 사망 1822년(순조 22년) 12월 26일,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졸하였다. 시호는 현목유빈(顯穆綏嬪)이며, '행실이 중외에 드러남'을 '현(顯)'이라 하고 '덕을 베풀고 의로움을 간직함'을 '목(穆)'이라 한다. 묘소는 휘경원(徽慶園)이며, 양주 배봉산 기슭에 위치하였다가, 철종 대에 현재의 위치인 남양주시 진접읍으로 이장하였다. 첫 매장지였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徽慶洞)의 지명은 수빈의 묘인 휘경원에서 유래되었다. 1823년(순조 23년), 창경궁 내의 전각에 신위를 봉안하고 현사궁(顯思宮)으로 불렀다가, 3년상이 끝나고 사당을 지어 경우궁(景祐宮)으로 명명하고 신위를 옮겨 봉안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고종과 명성황후가 경우궁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경우궁은 국왕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인 칠궁(七宮)을 구성하는 사당 중 하나이다. 1901년(고종 38년 · 광무 5년), 고종이 정조를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함에 따라 유빈 박씨도 유비(綏妃)로 추존되었다. 최종 시호는 현목유비(顯穆綏妃)이다. 1902년(고종 39년 · 광무 6년), 특진관 이주영 등이 유빈을 황후로 추존할 것을 청하였으나 고종은 이를 거절하였다. 진향문 순조는 어머니 수빈의 죽음을 슬퍼하며 직접 진향문을 지었다. 가족 관계 '綏'의 발음에 관하여 한자 '綏'의 발음과 관련하여 수빈이 아니라 유빈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현대의 대부분의 서적은 수빈(綏嬪)으로 발음하여 적고 있다. 하지만 綏에는 '수' 뿐만이 아니라 '유'라는 발음이 존재해 왔으며, 수빈 박씨 사망 당시에 한글로 쓰여진 진향문과 애책문, 상시문에는 모두 수빈이 아니라 '유빈'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타 조선 역사상 아들이 국왕으로 등극하는 것을 지켜본 유일한 후궁이다. 영조 · 정조 시대의 학자 황윤석의 저서인 《이재난고》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수빈의 임신을 늦게 반포하였다고 한다. 수빈은 후궁으로서 몸을 삼가고 근신하였으며,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 효의왕후를 정성으로 받들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중 3부는 손자인 순조에게 사도세자 사건의 전말과, 친정 가문의 억울함 등을 알리고 신원하기 위해 작성되었는데, 《한중록》의 내용에 따르면 순조 연간에 작성된 3부는 며느리인 수빈의 권유로 작성하였다. 혜경궁 홍씨는 수빈에게 《한중록》을 맡기기도 하였다. 시증조모인 숙빈 최씨와 100년의 시간 간격을 두고 태어나 유사한 삶을 살았다. 두 사람 모두 노론이었으며, 아들이 왕이 되었다. 또한 숙빈이 영조를 낳은 보경당에서 수빈이 서거하였다. 수빈 박씨가 등장하는 작품 1989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 파문》 (배우 : 홍진희) 1990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 (배우 : 정애란) 1994년 MBC 《야망》 (배우 : 박소현) 2012년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 (배우 : 김하영) 같이 보기 정조 순조 헌경왕후 효의왕후 휘경동 경우궁 반남 박씨 세도정치 가순궁동가의절 : 가순궁이 행차할 때의 식차(式次)를 적은 책 정조 사 박종보 어찰첩 : 정조가 수빈의 큰오빠인 박종보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놓은 어찰첩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주 주해 1770년 출생 1822년 사망 조선의 후궁 반남 박씨 조선 정조 조선 순조 18세기 한국 사람 19세기 한국 사람
|
178155
|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C%9D%B4%EC%A0%80%20%EA%B3%84%ED%9A%8D
|
보이저 계획
|
보이저 계획()은 미국이 외태양계 연구를 위해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와 2호를 만들어 쏘아올린 과학 프로젝트로,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을 탐사하였다. 두 탐사선은 1977년에 네 행성이 운 좋게 일렬로 섰을 때 발사되었으며, 원래는 목성과 토성만 탐사할 계획이었지만 보이저 2호는 천왕성과 해왕성도 탐사하였다. 현재 두 탐사선은 태양권 밖에서 성간매질을 연구 중이며, 기존 계획보다 3배가 넘는 기간 동안 유용한 과학 정보들을 보내오고 있다. 또한, 현재까지 보이저 2호를 제외하고는 천왕성과 해왕성을 방문한 탐사선은 없다. 2012년 8월 25일, 보이저 1호에서 전송된 자료를 검토한 결과, 1호가 인류가 만든 물체로는 최초로 성간 공간으로 진입해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멀리" 위치하게 되었다. 2013년 기준으로, 보이저 1호는 17 km/s의 속도로 태양에서 멀어지고 있다. 보이저 탐사선에 실려 있던 카메라나 자력계 등 장비들을 통해 목성형 행성들과 위성들의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목성에서는 복잡한 구름의 모습, 풍속, 폭풍을 측정했고, 위성 이오에서는 화산을 발견했다. 토성에서는 고리에 불가사의한 덩어리, 간극, 뾰족한 모습 등이 있음을 알아내었고, 고리가 무수히 많은 "소천체"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밝혔다. 천왕성에서는 불안정한 자기장이 방출됨을 감지했고, 위성을 10개 더 발견했다. 해왕성에서는 고리 3개, 위성 6개를 발견했고 자기장을 감지했으며, 복잡하게 분산되어 있는 오로라도 발견했다. 현재까지 거대 얼음 행성을 방문한 탐사선은 보이저 2호밖에 없다. 보이저 탐사선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지원을 통해 캘리포니아 남부에 위치한 제트 추진 연구소에서 건조되었으며, 플로리다의 케이프커내버럴 공군 기지에서 발사되었다. 경과 두 탐사선은 원래 매리너 계획의 일부였고, 각각 임시로 매리너 11호, 매리너 12호라고 불렸었다. 이후 두 탐사선은 "매리너 목성-토성"이라는 별도의 계획으로 나눠졌고, 나중에는 기존의 매리너 탐사선들에 비해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같은 프로젝트로 묶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여 최종적으로 "보이저 계획"이라고 이름붙여졌다. 보이저 계획은 60년대 말에 계획되었던 행성 대탐사 계획과 비슷하다. 행성 대탐사 계획은 제트 추진 연구소에서 행성들이 딱 맞게 정렬되어 탐사선 2개로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당시에는 행성)을 근접통과 방식으로 탐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후 세워진 것으로, 두 탐사선을 각각 "목성-토성-명왕성" 및 "목성-천왕성-해왕성"으로 보낼 계획이었다. 행성 대탐사 계획은 결국 자금 중단으로 취소되었지만, 세부 사항들은 보이저 계획으로 넘어가 명왕성을 제외한 나머지 행성들을 탐사하였다. 두 탐사선 중 먼저 발사된 탐사선은 2호로,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을 모두 근접통과하는 궤도로 발사되었다. 1호가 더 늦게 발사되었으며, 토성의 위성 타이탄을 거쳐가는 궤도로 발사되었다. 보이저 1호는 타이탄을 거침으로 인해 궤도가 황도면 바깥으로 나갔고, 그대로 행성 탐사가 끝나게 된다. 만약 1호가 타이탄을 거치지 못했다면 2호가 타이탄으로 향할 예정이었고, 천왕성과 해왕성을 탐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1호는 타이탄을 거치지 않고 토성에서 바로 명왕성으로 갈 수도 있었다. 1990년대에 보이저 1호는 먼저 발사되었지만 더 느렸던 파이어니어 10호와 11호를 추월했고,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인공 물체가 되었다. 이 기록은 거의 깨지지 않으리라 여겨지고 있는데, 발사 속도가 더 빨랐던 뉴 허라이즌스 탐사선조차 보이저 1호보다 느리기 때문이다. 보이저 1호는 파이어니어 10호와 서로 태양계 반대편에 위치한다. 2004년 12월, 보이저 1호는 태양의 말단충격을 통과했으며, 태양풍이 성간매질과 접촉하여 속력이 느려지는 태양권덮개에 진입했다. 2007년 12월 10일, 보이저 2호도 말단충격을 통과했으며, 이 지점이 보이저 1호가 통과한 지점보다 약 16억 킬로미터 가까운 지점이었기 때문에 태양권은 비대칭으로 추정되고 있다. 2010년, 보이저 1호에서 측정한 태양풍의 속력이 0이 되었고, 과학자들은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 성간 공간에 들어섰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2011년, 보이저 탐사선들의 자료를 통해서 태양권덮개는 "매끄럽지 않고" 많은 자기장 거품들이 존재함이 밝혀졌다. 2012년 6월 15일, NASA는 보이저 1호에서 측정한 우주선량이 갑자기 증가했음을 발견했고, 성간 공간에 들어서기 직전이라고 추정했다. 2013년 9월, NASA는 보이저 1호가 2012년 8월 25일에 태양권덮개를 통과했으며, 공식적으로 태양계를 벗어났다고 발표했다. 2018년 기준으로, 보이저 1호와 2호는 현재까지도 태양계 바깥쪽의 자료를 수집해서 보내오고 있다. 2020년까지는 실린 과학 장비들을 가동할 수 있으며 그 후에는 전력이 부족해 장비를 하나하나 꺼야 한다. 2025년 즈음에는 전력이 부족해 과학 장비를 하나도 가동시키지 못하리라고 추정되고 있다. 탐사선 설계 보이저 탐사선의 총 중량은 773 kg였으며, 이 중 105 kg은 과학 장비였다. 두 보이저 탐사선은 구조적으로 완벽히 동일했으며, 과학 실험이나 사진 촬영, 지구 방향으로의 안테나 유지, 고도 조정 등에 가속도계를 사용하는 3축 안정화 조정 시스템을 사용했다. 보이저 탐사선의 고이득 안테나(High-gain antenna)는 지름 3.7 m에, 십각형 전지에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가운데에는 구형 하이드라진 단일추진제 저장 탱크가 위치했다. 보이저 금제 음반은 운송부에 장착되었다. 오른쪽의 사각형 판은 광학 교정 시의 대상임과 동시에 방열판 역할을 했다. 방사성동위원소 열전기 발전기(RTG) 3개는 아래 막대기 끝에 차례대로 장착되었다. 탐색대(scan platform)에는 적외선 간섭 분광기, 자외선 분광기, 화상 과학 시스템, 망원 사진 편광계가 설치되었다. 비행 자료 하부체계(Flight Data Subsystem, FDS) 및 자기 테이프로 데이터를 처리했는데, FDS는 각 장비를 조정하고 과학 및 공학 자료를 모아 전송할 수 있게끔 변환했으며, 자기 테이프는 플라스마 파동 시스템의 자료를 기록했다. 데이터는 6개월마다 재생되었다. 협각 및 광각 카메라로 이루어진 화상 과학 시스템은 마리너 탐사선에 사용되었던 저속 비디오 카메라 관을 개량한 것으로, 카메라 각각은 관 앞에 필터 8개가 돌아갈 수 있게끔 설계되었다. 광각 카메라는 초점거리 200 mm에 조리개 f/3, 협각 카메라는 1500 mm에 f/8.5였다. 과학 장비 컴퓨터 및 자료 처리 보이저 탐사선에는 역할이 각기 다른 컴퓨터 3종류가 있었고, 여분으로서 1종류에 포함된 컴퓨터는 2대였다. 따라서 총 컴퓨터는 6대였다. 컴퓨터는 CMOS 및 TTL 중간 직접 회로가 맞춤 제작된 맞춤형 컴퓨터였다. 보이저 1호와 2호의 컴퓨터 시스템은 동일했다. 컴퓨터 명령 체계(Computer Command System, CCS)는 중앙 통제기 역할을 하며, 4096단어 비휘발성 와이어 메모리를 사용한 18비트 인터럽트형 프로세서 사용 워드 머신이었다. 보이저 탐사 대부분 기간 동안 CCS 컴퓨터는 탐사선의 명령 및 처리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과도한 사용을 제한했다. 보이저 탐사선의 CCS는 바이킹 탐사선과 매우 유사했다. 비행 자료 체계(Flight Data System ,FDS)는 각각 8198 단어 모듈 메모리 16비트 워드 머신이었다. 고도 및 산출 조정 체계(Attitude and Articulation Control System ,AACS)는 각각 4096단어 워드 머신이었다. 다른 탑재 장비와는 다르게, 가시광선 카메라는 비행 자료 체계 컴퓨터에 탑재된 사진 변수 표를 통해 통제되었다. 컴퓨터 명령 체계는 카메라를 조정했다. 또한 고정된 프로그램이 탑재되어 있어 명령 해석, 오류 감지, 수정 절차, 안테나 조준 절차 등을 자동으로 수행했다. 이 컴퓨터는 바이킹 탐사선에 탑재된 컴퓨터를 개량한 것이다. 두 탐사선에 탑재된 하드웨어는 완벽히 동일하며, 소프트웨어적으로만 과학 하위체계 보완을 위한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다. 고도 및 출력 조정 하위체계(Attitude and Articulation Control Subsystem ,AACS)는 우주선의 기동 조절, 즉 고이득 안테나를 지구로 향하게 하고, 탐색대를 특정 지점으로 향하게 조정했다. 통신 보이저 탐사선과의 통신은 탐사선에 탑재된 3.7미터 고이득 안테나를 이용했다. 상향 링크 통신은 S 대역 마이크로파를 이용했으며, 하향 링크 통신은 탐사선에 탑재된 X 대역 마이크로파 통신기를 이용했고 S 대역 통신기를 보조로 사용했다. 전파 폭은 X 대역이 0.5°, S 대역이 2.3°이다. 저이득 안테나의 증폭 정도는 7dB였으며, 전파 폭은 60°이다. 전파 통신에도 역제곱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하향 링크 통신에 사용되는 디지털 데이터 속도는 지구에서 멀어질수록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목성 근방에서 사용한 데이터 속도는 초당 115,000 비트였으나, 토성에서는 절반으로 감소했고,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역제곱 법칙의 효과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는데, 1982 ~ 1985년에 심우주 통신망의 파라볼라 안테나 지름을 64미터에서 70미터로 증가시켰고, 이를 통해 약한 마이크로파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이 매우 향상되었다. 탐사선이 토성과 천왕성 사이에 있을 때, 탑재된 소프트웨어가 이미지 압축 및 효율적인 리드 솔로몬 부호를 사용할 수 있게끔 업데이트되었다. 1986~1989년에는 지상 안테나의 신호를 합쳐 강한 신호를 낼 수 있게끔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었다. 캘리포니아 골드스톤, 캔버라, 마드리드에 있는 접시안테나 여분을 사용했으며, 1989년 해왕성 통과 즈음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파크스 전파망원경도 동원되었다. 미국에서는 골드스톤의 장비와 함께 사용하기 위해 뉴멕시코주의 장기선 간섭계도 잠시 사용된 적이 있다. 이 기술을 종합해 해왕성부터 지구까지 긴 거리의 통신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전력 전력은 MHW-RTG 방사성동위원소 열전기 발전기(RTG) 3개를 통해 충당되었으며, 각 RTG는 플루토늄-238을 플루토늄-239로 변환시켜 에너지를 얻어, 발사 당시 기준으로 직류 470 W, 30 V를 생산해냈다. 플루토늄 238의 반감기는 약 87.74년이기 때문에, 보이저 탐사선의 RTG는 이론상 1년에 1−0.5(1/87.74) = 0.79%만큼 전력 생산량이 줄어든다. 발사 34년 후인 2011년, 이론적으로 RTG는 470 W × 2−(34/87.74) ≈ 359 W를 생산해내고 있어야 했지만, 열을 전기로 변환시키는 열전대 또한 효율이 감소하여 실제 전력 생산량은 이보다 더 낮았다. 2011년 10월 7일, 보이저 1호와 2호의 전력 생산량은 각각 267.9 W, 269.2 W였으며, 이는 발사 전에 예상했던 수치보다 더 나은 값이였다. 전력 생산량이 점점 줄어듬에 따라 가동할 수 있는 장비가 점점 줄어들며, 탐사선의 활약 가능성을 좁힌다. 2032년 경에는 통신에 사용할 전력도 없으리라 예상되고 있다. 보이저 성간 탐사 보이저 탐사선의 첫 임무는 1989년에 보이저 2호가 해왕성을 통과함으로써 끝났다. 그 후, 일종의 계획 연장으로서 보이저 성간 탐사(Voyager Interstellar Mission ,VIM)가 시작되었으며, 이 시점에 탐사선들은 이미 우주에서 12년 이상을 보낸 상태였다. NASA 과학 임무 기획부의 태양 부서는 2008년 보고서를 냈으며, 내용은 "보이저 성간 탐사는 반드시 연장되어야 하며, 심우주 통신망 개선을 통해 이를 도와야 한다"였다. 보이저 성간 탐사의 주요 목적은 태양계 외행성 너머 먼 곳까지 과학 탐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태양 자기장의 끝인 태양권계면을 통과하면 탐사선이 태양풍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간매질을 탐지할 수 있다. 보이저 2호의 탐색단 및 탐색단에 탑재된 모든 장비는 1998년 전원이 나갔으며, 보이저 1호도 자외선 분광기를 제외하고는 2000년 후반 전원이 나갔다. 위쪽 방향에서 오는 자외선은 측정할 수 있지만, 주변 탐색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2016년 및 2017년에 보이저 2호와 1호의 자이로 작동이 끝났고, 이로 인해 자력계를 통한 360도 방향 자기장 자료 수집이 불가능해진다. 두 탐사선은 하부체계 몇몇의 작동을 줄이면서 계속 동작할 것이며, 보이저 성간 탐사에 사용되는 장비를 통해 과학 자료를 계속해서 보내올 수 있다. 두 탐사선 모두 2025년까지는 고도 조정에 필요한 연료와 전력 생산량이 충분할 것이며, 그 후에는 전력 문제로 과학 장비 몇몇을 꺼야 한다. 그 때쯤 되면 과학 탐사가 중단될 가능성이 크다. 임무 상세 보이저 성간 탐사 시작 당시 보이저 1호와 2호는 지구로부터 각각 40 AU, 31 AU 떨어져 있었다. 성간 탐사는 말단충격 단계, 태양권덮개 단계, 성간 탐사 단계로 세분되었다. 처음 단계인 말단충격 단계는 태양의 자기장이 주변 공간에 강한 영향을 미치며, 플라스마 입자가 가득한 공간이다. 태양에서 더 멀어지면 성간풍으로 인해 태양풍의 확장이 멈추며, 태양풍 속도가 초음속에서 음속 이하로 감소하며 플라스마 흐름 방향과 자기장 형태가 크게 변화한다. 보이저 1호는 2004년 12월 94 AU 지점에서, 2호는 2007년 8월 84 AU 지점에서 말단충격 단계를 완료했다. 그 후 탐사선은 태양풍 입자가 가득한 태양권덮개로 진입했으며, 2012년 8월 25일 보이저 1호는 태양권덮개를 지나 성간 공간으로 진입했다. 현재 보이저 1호는 1년에 3.6 AU, 2호는 1년에 3.3 AU의 속도로 태양계를 탈출 중이다. 4만 년 이후에 보이저 1호는 기린자리의 항성 AC+79 3888에서 1.6 광년까지 접근할 것이며, 비슷한 시기에 2호는 로스 248에 1.7 광년까지 접근할 것이다. 29만 6천 년 이후에 2호는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인 시리우스에 4.6 광년까지 접근한다. 통신 통신은 통신변조장치(TMU)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저속" 및 "고속" 대역이 분리되어 있었다. 저속 대역의 속도는 초당 40 비트였으며 평문으로 전송되어 오류 감지가 불가능했다. 고속 대역의 속도는 초당 10 비트에서 115.2 킬로비트 사이였으며, 암호화되어 보내졌다. TMU는 고속 대역 데이터를 비트의 2배(k=7, r=1/2)와 같도록 7글자로 돌림형 부호화하였다. 보이저 통신 장비는 다음과 같이 작동했다. 7200, 1400 bit/s 테이프 녹음기 600 bit/s 실시간 입자, 장, 파동; UVS 전체; 공학 데이터 160 bit/s 실시간 입자, 장, 파동; UVS 일부; 공학 데이터 40 bit/s 실시간 공학 데이터, 과학 데이터 없음 참고: 160 및 600 bit/s 에서는 다른 데이터 종류가 끼워져 있다. 보이저 탐사선에는 통신 장비가 3종류 있었다. 고속 CR-5T (ISA 35395) 과학 데이터, 일부 공학 데이터가 포함되기도 함 FD-12 고정확도 공학 데이터, 일부 과학 데이터가 포함되기도 함 저속 EL-40 공학 데이터, 일부 과학 데이터가 포함될 수도 있으며, 시스템 전체가 대표되는 것은 아님 이는 일부 하부체계가 포함되지 않는 축약형이다. EL-40과 CR-5T (ISA 35395) 사이에는 중첩이 있으며, 간단한 EL-40 데이터는 CR-5T 장비처럼 해상도가 좋지는 못하다. 하부체계의 전기를 표현할 때 EL-40은 정수로만 표현하므로, 다른 곳에서도 비슷하게 동작하리라 여겨진다. 둘 모두 공학 데이터에서 코어 덤프가 가능했다. 이 일상적인 절차를 통해 간헐적인 메모리 비트 넘김 문제를 감지 및 해결하고, 2010년대 중반에 2주치 데이터를 날렸던 영구적인 비트 넘김 문제를 감지할 수 있다. 보이저 금제 음반 두 탐사선에는 각각 30 cm 크기의 금제 음반이 실렸으며, 지구의 소리와 사진들이 기록되어 있다. 음반의 표지에는 음반을 트는 방법과 지구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 음반은 외계 문명이 보이저 탐사선을 찾았을 때 인류가 보내는 "메시지"이며, 미래에 인류가 만약 탐사선을 다시 회수한다면 타임캡슐이 된다. 음반에 실린 내용들은 칼 세이건이 의장을 맡은 위원회에서 선별했다. 창백한 푸른 점 보이저 탐사선이 촬영한 새로운 사진들은 인쇄물이나 전자 미디어를 통해 주기적으로 발표되었으며, 그 중 가장 유명하다 할 수 있는 사진이 1990년 1호가 촬영한 창백한 푸른 점이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이 사진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대중문화 속에서의 보이저 우주대모험 1999의 에피소드 "Voyager's Return"에서는 "보이저 1호"와 "보이저 2호"라는 우주선이 등장하며, 이 에피소드는 실제 보이저 탐사선이 발사되기 2년 전에 방영되었다. 스타 트렉에서는 가상의 우주선 "보이저 6호"가 나오며, 다만 탐사선의 명판에는 "Voyager 6"에서 o, y, a, 6이 가려져 "V ger"로 표시되어 있다. 영화 스타맨은 외계 문명이 보이저 2호를 발견해 금제 음반을 재생하는 데 성공하여, 정찰병을 지구로 보내는 내용이다. PBS 다큐멘터리: "The Farthest - Voyager in Space" 같이 보기 가족 사진 파이어니어 계획 행성 대탐사 계획 각주 외부 링크 NASA NASA 보이저 웹사이트 – 주요 출처 보이저 임무 현황 (약 3달 정도 지연) 보이저 우주선의 일생 우주 탐험 – Robotic Missions NASA 팩트 - 보이저의 외행성 탐사 (PDF) 보이저 1호, 2호와 토성의 위성 6개 (PDF) 1984 JPL Voyager Telecom Manual NASA 장비 정보 사이트: NASA 외 사이트 Spacecraft Escaping the Solar System – current positions and diagrams NPR: Science Friday 8/24/07 Interviews for 30th anniversary of Voyager spacecraft 프로젝트 엔지니어 Raymond Heacock의 Illustrated technical paper PBS featured documentary "The Farthest-Voyager in Space" 목성 탐사선 토성 탐사선 천왕성 탐사선 해왕성 탐사선 미국 항공 우주국의 계획 미국의 우주 개발
|
120849
|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B%A3%8C
|
장료
|
장료(張遼, 169년 ~ 222년)는 중국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군이다. 자는 문원(文遠)이며 병주 안문군 마읍현(馬邑縣) 사람이다. 초반에 여러 세력을 전전하다가 조조에게 귀순한 후 맹활약하였다. 특히 합비 전투에서 7,000명으로 손권의 호왈 10만이라 위세부린 수만 군사를 물리치는 등 주로 동오 전선을 담당하며 맹위를 떨쳤다. 정사에서는 조조 막하에서 가장 맹장이었으며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실수가 없었고 전선에 나가 장수급을 수없이 베고 승리를 이끌어서 오나라에서는 어린 아이들도 장문원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였다고 한다. 정사에서 서주군 전투때는 관운장과 전투중에 수십합을 겨뤄도 밀리지가 않았고 관우가 힘겨워하자 도와주러온 부장 장익, 마상, 주원 등을 죽였다. 이때 관우는 후퇴하였고 조조군에 포위된 관우는 잠시 항복하여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유비 부인과 식솔이 있기에 더는 전투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생애 주군을 찾아서 선조는 전한 무제 때의 섭일(聶壹)이다. 섭일이 흉노를 유인하여 섬멸하려 했던 일 때문에 원한을 피하여 성씨를 고쳤다. 젊어서 군의 관리가 되었으며 병주자사 정원이 종사(從事)로 삼아 군을 이끌고 수도로 가게 했다. 대장군 하진은 장료를 하북으로 보내 병사 1,000여 명을 모았다. 그 사이 하진은 십상시에게 암살당하고 동탁이 조정과 중앙군을 장악했으므로 장료도 동탁의 지휘를 받았다. 192년(초평 3년) 여포가 동탁을 죽이고 집권하면서 장료는 기도위로 승진하였다. 다시 1달 만에 정권은 이각에게 돌아갔고 패망한 여포를 쫓아 서주까지 가서 28살의 나이에 노국상(魯國相)과 북지태수(北地―)를 겸하였다. 198년(건안 3년) 음력 9월 고순과 함께 하후돈을 깨트리고 유비의 패성(沛城)을 점령하였다. 여포가 토벌당하자 조조에게 부하들을 이끌고 항복하여 중랑장과 관내후(關內侯)를 받았다. 조조에게 귀순 200년 원소가 남진하면서 안량으로 하여금 백마(白馬, 지금의 허난성 화현)를 공격하였다. 조조는 연진(延津)에서 도하하는 척해서 원소군의 본대를 분리하고 백마를 기습하였다. 장료와 관우가 선봉이 되어 안량을 베었다. 이외에도 여러 전공을 세워 비장군(裨将軍)에 올랐다. 관도 대전에서 승리한 후 노국의 여러 현을 접수하였다. 201년 하후연과 함께 동해군에서 창희를 몇 달간 포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량이 다 떨어졌다. 회군하기 전에 장료가 창희와 단둘이 만나 설득하니 그가 투항하였다. 하북 쟁탈전 202년 조조가 원상, 원담과 여양(黎陽, 지금의 허난성 쉰 현)에서 공방전을 벌일 때 종군하였다. 203년 3월(음력) 여양이 함락되고 중견장군(中堅将軍)이 되었다. 4월 조조를 따라 업으로 진격했지만 원상의 수비에 막혔고 대신 악진과 같이 음안(陰安)을 쳐서 그 주민을 황하 이남으로 이주시켰다. 204년 조조가 다시 업을 공격할 때 참전하였다. 8월 업이 무너진 후 조국(趙國), 상산군 방면으로 나아가 흑산적 손경 등 여러 산적들을 규합하였다. 205년 조조의 지휘 하에 원담을 격멸한 후 요동의 도적 유의(柳毅)를 무찌르는 등 바닷가 일대까지 정리하고 돌아오니 조조가 친히 맞으며 탕구장군(盪寇将軍)에 임명했다. 형주 강하군의 여러 현들도 평정하여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백랑산 전투 207년 조조가 원상과 오환을 마저 정벌하려 하기에 장료는 다른 장수들과 함께 ‘유표가 유비를 시켜 허도를 기습할 수도 있다’며 말렸다. 그럼에도 조조는 ‘유표는 유비를 신임하지 않는다’는 곽가의 진언에 따라 출병하였고 장료는 이를 수행하였다. 원상과 오환 연합군은 유성(柳城, 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시)에 주둔했는데 조조는 그 앞에서 퇴각하는 척하면서 전주가 알려준 200년 간 끊어졌어도 이용할 수 있었던 샛길을 몰래 돌파하였다. 원상군은 200리가 남았을 때에야 알아차리고 황급히 진형을 짰다. 8월 백랑산(白狼山)에서 양군이 우연히 만났고 장료와 장합이 선발대의 적은 병사로도 바로 몰아쳐서 대승을 거두었다. 답돈은 조순의 호표기에게 붙잡혀 참수당했고 원상과 원희는 공손강에게 달아났다가 죽었다. 반란 진압 208년 조조가 형주로 남하하기 직전 장료는 영천군 장사현(長社縣, 지금의 허난성 창거 시)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밤중에 누군가가 난을 일으키고 불을 지르니 모두 동요했다. 장료는 주동자가 소수임을 간파하고 난에 가담하지 않은 자는 침착하게 앉아 있으라 명하였다. 이후 측근 수십 명을 데리고 주동자만을 처단하였다. 209년 진란과 매성(梅成)이 육안(六安)에서 반기를 들었다. 장료가 장합과 우개(牛蓋)를 거느려 진란을 맡고, 우금과 장패가 매성을 맡았다. 매성은 우금에게 거짓 항복하여 전력을 보전했다가 진란에게 합류하였다. 진란은 첨산(灊山)으로 들어가 버텼다. 그중에서도 천주산(天柱山)은 험하고 깊어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우금은 장료에게 계속 군량을 보급하고, 장패는 환현(皖縣, 지금의 안후이성 첸산 현), 서현(舒縣, 지금의 안후이성 루장 현) 일대에서 한당과 손권을 격파하여 오나라의 지원을 차단함으로써 장료가 마음 놓고 작전할 수 있도록 도왔다. 결국 장료가 험난한 산세를 무릅쓰고 깊이 돌입하여 진란과 매성을 베고 그 무리를 모두 포획하였다. 이 공으로 식읍이 늘고 가절(假節) 권한까지 생겼다. 합비 전투의 서막 214년 5월 손권이 여몽, 감녕 등을 이끌고 환성으로 쳐들어왔다. 장료가 원군으로 달려갔지만 협석(夾石)에 다다랐을 때 성이 함락당해 돌아왔다. 장료는 악진, 이전과 함께 7,000명으로 합비를 지켰다. 215년 조조가 장로를 토벌하러 떠나면서 호군(護軍) 설제에게 ‘적이 침입하면 뜯어보라’고 겉에 쓰인 교서를 보냈다. 8월 손권이 정말로 합비를 포위했는데 병력이 무려 10만 명이었다. 열어본 교서에는 장료, 이전은 나가 싸우고 악진은 수비하고 설제는 참전하지 말라고 씌어 있었지만 전력 차이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많은 장수들이 회의적이었다. 장료만이 주장하기를 가만히 농성해봤자 무너질 것이 뻔하고 손권군이 태세를 미처 갖추기 전에 급습하여 예봉을 꺾어놔야 병사들의 사기를 다스리고 성을 지켜낼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 이전이 평소 장료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같이 행동하기로 결정하였다. 밤중에 정예병 800명을 모아 소를 잡아 배불리 먹이고 동트기를 기다렸다. 장료가 온다 날이 밝자마자 장료와 이전이 돌격하였다. 장료는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병사 수십 명과 장수 2명을 베고 손권의 지휘 막사까지 유린하였다. 손권과 좌우가 깜짝 놀라 근처 언덕으로 도주하였다. 손권은 장료의 군세가 적은 것을 보고는 겹겹이 예워싸도록 했으나 장료는 이를 뚫어냈다.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남은 병사들이 “장군님은 우리를 버리십니까?”라고 부르짖으니 다시 포위망에 뛰어들어 모두를 구출하였다. 손권군은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갈대처럼 짓밟혔고 사기는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합비로 복귀해서 방비를 굳건히 하자 성에 있는 자들이 안정되고 장수들은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손권은 10여 일 정도만 찔러보고는 역병까지 겹쳐 회군하였다. 손권은 군을 무르면서 최후미인 소요진(逍遙津) 북쪽에 가장 늦게까지 남았다. 여몽, 장흠, 능통, 감녕, 그리고 1,000명의 근위병만이 손권을 호위하였다. 장료가 이를 놓치지 않고 즉시 출격하였다. 피 튀는 난전 속에 손권은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 전투 종료 후 장료가 항복한 오나라 사람에게 물었다. “말을 능숙하게 타고 활을 잘 쏘는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은 자줏빛 수염의 장군이 있던데 그게 누구요?” 손권이라고 대답하자 잡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조조가 매우 장하게 여기고 정동장군(征東将軍)을 주었다. 217년 유수구 전투에서 장패와 선봉이었고 전후 하후돈 등과 함께 거소(居巢, 지금의 안후이성 차오후시)를 지켰다. 219년(건안 24년) 관우가 번성(樊城)의 조인을 포위하고 손권은 스스로 칭번하기에 조조는 장료로 하여금 조인을 구하게 했다. 장료가 도착하기 전에 서황이 먼저 관우를 물리치고 포위를 풀었다. 조조의 지휘소가 있던 마피(摩陂)에서 조조를 배알하고 진군에 주둔했다. 조비의 즉위와 죽음 220년 조비(훗날 위 문제)가 위왕을 이으면서 전장군으로 오히려 강등되고 형 장범(張汎)과 아들은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이내 손권과 반목해서 조비는 장료를 도향후(都鄉侯)에 봉하고 다시 합비에 주둔케 했다. 조비는 장료의 어머니에게는 수레를 하사하고 병마(兵馬)를 보내 그 가족을 전송하였으며 합비의 모든 장수와 관리들은 길가에 정렬하여 절하며 맞이하도록 했다. 보는 이들이 이를 명예로운 일로 여겼다. 조비가 황제에 오르면서 장료도 진양후(晉陽侯)로 올랐다. 식읍도 1,000호를 더하여 모두 2,600호가 되었다. 221년(황초 2년) 문제는 장료에게는 저택을, 장료의 어머니에게는 특별히 전각을 지어 주고, 장료의 모집에 응해서 오나라를 쳐부쉈던 병사들은 호분(虎賁)으로 삼았다. 8월 손권이 이릉 대전으로 인해 칭번했으므로 옹구(雍丘, 지금의 허난성 치현)로 돌아왔는데 병이 나고 말았다. 문제는 시중(侍中) 유엽에 태의(太醫)를 딸려 보내 살폈으며 장료의 상태를 묻는 호분이 끊이지 않았다. 병이 낫지 않자 장료를 행재소(行在所)로 들이고 친히 문병을 가 그 손을 잡으며 위로하였다. 또 임금의 옷을 하사하고 태관(太官)으로 하여금 매일 임금의 음식을 보냈다. 어느 정도 차도가 있어 옹구로 돌아갔다. 222년 문제가 오나라에 대한 남정을 시작하여 장료와 조휴는 해릉(海陵, 지금의 장쑤성 타이저우시)으로 갔다. 손권이 이를 심히 꺼려서 장수들에게 장료가 아무리 병들었어도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여범을 상대로 선전했으나 결국 강도(江都)에서 병사했다. 문제가 눈물을 흘리며 시호를 강후(剛侯)라 했다. 아들 장호가 후사를 이었다. 성품 담력이 남달랐다. 몇 달 동안 서로 전투를 벌였던 창희가 장료의 설득에 응해 투항하자 그 답례로 혼자 창희의 본거지인 삼공산(三公山)에 올라 그 가족에게 예를 갖추었다. 창희가 감격하여 장료를 따라 허창까지 와서 조조를 배알하였다. 창희가 돌아간 후 장료는 조조에게서 ‘적의 소굴에 단독으로 들어가는 것은 대장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는 주의를 받았다. 백랑산 전투에서는 적은 병사로 갑자기 원상과 오환 연합군을 만났음에도 바로 칠 것을 조조에게 권하기도 하였다. 합비 전투에서는 직접적으로 지명되어 나가 싸우라는 교서까지 받을 정도였으며 그대로 손권군을 상대로 무쌍난무를 선보였다. 216년 조조는 격전지를 둘러보며 매우 오랫동안 감탄하였다. 오나라 사람들에게는 극한의 공황감으로 남아서 ‘울던 아이 장료 온다는 말에 울음 그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공과 사도 구별하였다. 관우가 잠시 조조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 장료가 조조의 명을 받아 관우의 의중을 물었다. 관우는 유비와 함께 죽기로 맹세했다며 조조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는대로 떠날 것이라고 하였다. 장료는 이대로 전하면 형제 같은 관우를 조조가 죽일까 두려웠고, 전하지 않자니 주군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었다. 고민 끝에 사실대로 고했고 조조는 관우를 의롭게 여겨 그렇게 해주었다. 이 일은 이후 신하의 바른 자세로써 회자되었다. 의로웠고 잘못이 있으면 고쳤다. 장료가 장사현에 주둔할 무렵 우금은 영음(潁陰)에, 악진은 양책(陽翟, 지금의 허난성 위저우 시)에 주둔했는데 셋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공연속주부(司空掾屬主簿) 조엄이 세 군영의 일에 매사 간여하며 타이르니 모두 깨우쳐 화목해졌다. 합비에서는 호군 무주(武周)와 틈이 벌어져 양주 자사 온회에게 호질로 변경해줄 것을 청한 적이 있다. 호질이 병을 핑계로 사양하자 장료가 직접 그 이유를 물었다. 호질은 관포지교의 우정을 먼저 얘기한 후 “무주는 한때 장군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고아한 선비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사이가 벌어졌으니 하물며 저 같이 모자른 자가 어찌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고 이에 깨달은 장료는 무주와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평가 조조는 206년 헌제에게 올리는 표(表)에서 우금, 악진, 장료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들은 무력이 걸출할 뿐더러 계략까지 능합니다. 충성심도 한결같아 절의를 지킵니다. 싸울 때마다 병사를 지휘하여 어떠한 강한 적이라도 분격하여 물리치고 스스로 북을 쳐 지치지도 않습니다. 원정을 가면 군대를 어루만져 화합하게 하고 법을 받듭니다. 적을 만나면 과감하게 결단하면서도 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금은 호위장군(虎威―), 악진은 절충장군(折衝―), 장료는 탕구장군에 임명됐다. 조비는 장료에게서 합비의 무용을 듣고는 소호(召虎, 주 선왕 때의 명장)라 하였고 225년 장료와 이전을 추념하며 “800명으로 10만 명을 깨뜨리는 미증유의 용병술은 지금까지도 오나라 사람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고 있으니 실로 우리나라의 발톱과 어금니이다.”라 말하고 각각의 아들 1명에게 관내후를 수여하였다. 부현(傅玄)은 조인 다음으로 가장 용맹하다고 평하였고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조조 휘하의 훌륭한 장수로는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5명이 으뜸으로 가히 명장이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동아시아의 문인 및 사가들이 무략을 논할 때 자주 언급하였다. 삼국지연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장막이 여포를 끌어들여 연주에서 거병할 때부터 팔건장의 일원으로서 여포의 부하로 등장한다. 각종 전투를 수행하다가 여포가 죽은 후 조조에게 귀순한다. 서주에서 독립한 유비가 조조에게 깨져서 하비성에 고립된 관우를 세 가지 죄를 들어 설득하여 항복하게 한다. 관우가 유비를 찾아 오관참육장을 벌이고 하후돈과 싸우려 할 때 조조의 관우를 보내준다는 명을 알리며 둘의 싸움을 말린다. 하북, 적벽에서 활약하고 합비 전투(작중 209년)에서 손권군 태사자의 계략을 간파하여 역습하고 중상을 입혀 결국 죽인다. 소요진에서 악진, 이전과 함께 손권을 쫓아낸 후 제2차 합비 전투 내지 유수구 전투(작중 215년)로 이어진다. 조비가 오나라에 대한 친정에 실패하고(작중 224년) 퇴각하는 것을 호위하다가 정봉(丁奉)의 화살에 맞아 허창에서 죽는다. 가계 아들 : 장호 관련 작품 만화 《삼국전투기》, 최훈 : 장료가 주인공 각주 내용주 참고 문헌 《삼국지》17권 위서 제17 장료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169년 출생 222년 사망 후한의 관내후 조조 휘하의 장군 조위의 장군 전장군 동탁과 주변 인물 여포와 주변 인물 병사한 사람 산시성 (산서성) 출신 숴저우시 출신
|
4932
|
https://ko.wikipedia.org/wiki/579%EB%85%84
|
579년
|
연호 남진(南陳) 태건(太建) 11년 후량(後梁) 천보(天保) 18년 북주(北周) 대성(大成) 원년 / 대상(大象) 원년 신라(新羅) 홍제(鴻濟) 8년 기년 남진(南陳) 선제(宣帝) 11년 북주(北周) 선제(宣帝) 원년 / 정제(靜帝) 원년 신라(新羅) 진지왕(眞智王) 4년 / 진평왕(眞平王) 원년 고구려(高句麗) 평원왕(平原王) 21년 백제(百濟) 위덕왕(威德王) 26년 사건 로마 원로원 해체 신라, 진지왕이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8월 24일 진지왕이 사망하고, 진흥왕의 장남 동륜의 아들 백정이 진평왕으로 왕의 자리에 오르다. 문화 탄생 사망 7월 30일 - 교황 베네딕토 1세, 62대 로마 교황. 8월 24일(음력 7월 17일) - 신라(新羅) 25대 왕 진지왕(眞智王) 가락국의 문신 김무력(金武力)
|
56073
|
https://ko.wikipedia.org/wiki/%EB%8B%A4%ED%81%AC%20%ED%8A%B8%EB%9E%AD%ED%80%BC%EB%A6%AC%ED%8B%B0
|
다크 트랭퀼리티
|
다크 트랭퀼리티(Dark Tranquillity)는 스웨덴 예테보리 출신의 멜로딕 데스 메탈 밴드이다. 1989년 '셉틱 브로일러(Septic Broiler)'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으며, 다른 밴드들과는 달리 안정된 구성원을 유지하였다. 1994년에 다크 트랭퀼리티의 보컬 안데르스 프라이덴(Anders Fridén)이 탈퇴하고 인 플레임즈에 합류하자 리듬 기타를 연주하던 미카엘 스탄네는 보컬리스트로 전향-미카엘 스탄네는 인 플레임스에서 보컬로 활동하기도 했었다.-하고 새로운 기타리스트 프레드리크 요한손을 영입한다. 1998년에 Projector를 발표하고 요한손이 밴드를 떠나자 키보디스트 마르틴 브렌스트룀과 베이시스트 미카엘 니클라손을 새로 영입하고, 마르틴 헨릭손은 기타로 전향하게 된다. 이 앨범은 스웨덴 그래미 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다크 트랭퀼리티는 센추리 미디어 레코드에 소속되어 있다. 구성원 현재 구성원 미카엘 스탄네(Mikael Stanne) - 보컬 (1994–현재), 리듬 기타 (1989–1994) 니클라스 순딘(Niklas Sundin) - 리드기타 (1989-현재) 마르틴 브렌스트룀(Martin Brändström) - 키보드, 프로그래밍 (1999-현재) 안데르스 이바르프(Anders Jivarp) - 드럼 (1989-현재) 안데르스 이워스(Anders Iwers) - 베이스 기타 (2015-현재) 전 구성원 안데르스 프라이덴(Anders Fridén) - 보컬 (1989-1994) 프레드리크 요한손(Fredrik Johansson) - 기타 (1994-1999) 마르틴 헨릭손(Martin Henriksson) - 베이스 기타 (1989–1999, 2013–2015), 기타 (1999–2016) 미카엘 니클라손(Mikael Niklasson) - 베이스 기타 (1999-2008) 다니엘 안톤손(Daniel Antonsson) - 베이스 기타 (2008-2013) 게스트 보컬 안나카이사 아베할(Anna-Kajsa Avehall) (Skydancer) 에바마리 라르손(Eva-Marie Larsson) (The Gallery) 사라 스벤손(Sara Svensson) (The Mind's I) 요한나 안데르손(Johanna Andersson) (Projector) 음반 목록 정규 음반 Skydancer (1993) The Gallery (1995) The Mind's I (1997) Projector (1999) Haven (2000) Damage Done (2002) Character (2005) Fiction (2007) We Are the Void (2010) Construct (2013) Atoma (2016) 컴필레이션 음반 Exposures - In Retrospect and Denial (2004) Yesterworlds (2009) The Dying Fragments (2009) 1989년 결성된 음악 그룹 스웨덴의 헤비 메탈 밴드 멜로딕 데스 메탈 밴드
|
101008
|
https://ko.wikipedia.org/wiki/%ED%8E%9C%ED%83%81%EC%8A%A4%20K10D
|
펜탁스 K10D
|
펜탁스 K10D()는 2006년 후반기에 출시된 1020만 유효 화소 디지털 SLR이다. 펜탁스 K10D과 삼성 GX-10은 디자인 외에는 거의 동일하며, 일본 펜탁스와 대한민국 삼성테크윈이 공동으로 개발했다. 펜탁스 KAF2 마운트를 가진다. K10D의 이미지 센서는 소니의 ICX493AQA CCD 센서로 추정된다. K10D는 22 bit ADC(analog-to-digital converter)와 손떨림 보정 기구를 가지고 있다. 손떨림 보정 기구는 카메라의 CCD 센서를 움직임으로써 손떨림을 보정한다. dpreview.com의 실험결과에 따르면 50mm 렌즈 사용시 약 1 stop의 손떨림 보정 효과가 있다. 센서가 직접 움직여 작동하는 방식이므로, 마운트 가능한 모든 렌즈에 대하여 손떨림 보정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K10D는 22 bit ADC를 가지고 있어 일반적으로 12 bit ADC를 사용하는 기존 디지털 SLR보다 다이나믹 레인지가 넓다고 펜탁스 측에서 주장하였다. 하지만, dpreview.com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K10D JPEG 이미지의 다이나믹 레인지는 경쟁 제품들(니콘 D80, 소니 DSLR-A100, 캐논 EOS 30D, 캐논 EOS 400D)보다 좁으며, 노이즈도 비슷한 수준이다. RAW 이미지 포맷의 다이나믹 레인지는 경쟁 제품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랑프리 수상 기념 모델 2007년, K10D는 TIPA 2007에서 수상을 하게 되었다. 그 기념으로 펜탁스는 K10D 그랑프리 수상 기념 모델을 내놓게 된다. 이 모델이 일반적인 K10D와 다른 점은 제품의 헤드에 있는 PENTAX 로고와 모드다이얼에 새겨진 글씨가 금색인 점, 한정판 K10D그랑프리 전용스트랩 포함, 한정판 세로그립 포함, 바디와 세로그립에 있는 고무그립의 색깔이 다크브라운인 점, 출하 당시의 펌웨어가 1.3 버전인 점 정도가 있다. 외관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K10D와 기계적 성능은 완전히 동일하다. 외부 링크 dpreview.com의 리뷰 펜탁스 DSLR 카메라
|
245300
|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A1%B0%20%EB%82%98%EC%B9%B4%EB%AC%B4%EB%9D%BC
|
고조 나카무라
|
고조 나카무라()는 코나미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게임뮤직 작곡가. 일본 효고현 고베 출신이다. 기타프릭스 & 드럼매니아를 중심으로 악곡을 제공하고 있으며, 주로 Kozo Nakamura라는 영문 이름을 사용한다. 또한 "麻雀格闘倶楽部4(마작 격투 클럽 4)", "5" 의 음악도 담당하고 있다. 주요악곡 Kozo Nakamura 명의 WILD RIDE(中村康三 명의) Aithon (ee'mall 2nd avenue) Durandal (GUITARFREAKS 11th & drummania 10th) Dragon Blade (GUITARFREAKS 11th & drummania 10th) Desert Rose (GuitarFreaks V & DrumMania V) Atalante (GuitarFreaks V2 & DrumMania V2) Ring (GuitarFreaks V3 & DrumMania V3) Slang (GuitarFreaks V4 & DrumMania V4) Jumping Boogie (유비트(jubeat)) JailBreak Red (GuitarFreaks V6 & DrumMania V6) Deep Forest (GuitarFreaks XG & DrumMania XG) 타 아티스트 명의 BLIND (有待雅彦) HIGH (Nitza Melas) ROCKIN' PARADISE (Thomas Howard Lichtenstein) BRING BACK (Kevin Vecchione) SWEET FERINE (Anna Vieste) SUZY AND THE TIME MACHINE (Thomas Howars Lichtenstein) Utopia (寺島純子) Country day (Anna Vieste) Libra (Thomas Howard Lichtenstein) Electric Sun (Anna Vieste) HOLIDAY (らく楽器隊2003) - らくがきっず(들 구가 키즈) BGM 어레인지 Real~Lサイズの夢~ (MAKI) Say (TOMOKO MIWA) 無常の星 (P-Bombers) - 고에즈카 요시히코, Jimmy Weckl과 합작 The Legend (Ritter) - Naya~n과 합작 Spellbound (Anna Vieste) On Cloud Nine (Brian Smith) 관련 링크 기타프릭스 드럼매니아 유비트 비마니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음악가 고베시 출신 비마니 시리즈 관련 인물
|
290328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A7%88%EC%9D%B4%EC%BC%80%EC%97%AD
|
이마이케역
|
이마이케역()은 일본의 철도역이다. 이마이케 역 (아이치현) 이마이케 역 (오사카부) 이마이케 역 (후쿠오카현) 같이 보기
|
109473
|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C%A0%84%EC%8B%9C%EB%A6%BD%EA%B5%90%ED%96%A5%EC%95%85%EB%8B%A8
|
대전시립교향악단
|
대전시립교향악단(大田市立交響樂團, Daejeon Philharmonic Orchestra)은 대전광역시에 있는 교향악단이다. 1984년 1월에 창단되었으며, 초대 예술감독 겸 상임 지휘자는 정두영이었다. 정두영 이후로 안주용(1997), 금난새(1998-1999), 함신익(2001-2006), 에드몬 콜로메르(2007-2009), 장윤성(2009~2010) 금노상(2011~2016)에 이어 2016년부터 영국 출신의 제임스 저드가 8대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재직하고 있다. 악장은 김필균이 맡고 있으며, 주요 공연장은 대전문화예술의전당 아트홀이다. 2004년에는 창단 이후 최초로 미국에서 순회 공연을 가졌으며, 이듬해인 2005년 10월에는 아시아 오케스트라 위크에 한국 대표 악단으로 참가해 도쿄와 오사카에서 공연했다. 2011년부터 2016년까지 금노상 대전시립교향악단 제7대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재직하면서 관객들로부터 절대적인 호응을 이끌어내며 마스터즈 시리즈 시즌 전회 매진의 기록을 세우고 있고, 한국 오케스트라 최초 무지크페어라인 골드홀을 비롯한 체코 프라하 스메타나홀, 헝가리 부다페스트, 독일 뮌헨으로이어지는 유럽투어에서 유럽인들의 뜨거운 기립박수를 이끌어 냈다.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대한민국의 교향악단 대전광역시 1984년 설립
|
68459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2%AC%EC%A7%88
|
이사질
|
이사질(李思質, 1705년~1776년)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호는 흡재(翕齋), 함제이다. 《훈음종편》을 저술했고, 유고로는 《翕齋遺稿》가 있다. 18세기 조선의 명문거족이었던 한산 이씨의 일원으로 당대의 명류들과 교유했다. 그와 교유했던 인물로는 김상숙, 김종수, 황경원, 이인상, 이윤영 등으로 대개 노론 명문가의 자제들이었다. 1753년, 영조 29년에 고양(高陽) 군수를 지냈다. 《일몽고(一夢稿)》를 남긴 이규상(李奎象, 1727년~1799년)이 그의 아들이다. 각주 조선의 학자 1705년 출생 1776년 사망
|
33471
|
https://ko.wikipedia.org/wiki/%EC%95%94%ED%8E%98%EC%96%B4
|
암페어
|
암페어()는 전류를 측정하는 데 사용하는 SI 기본 단위이다. 기호로는 A, 약자로는 amp를 쓴다. 현재의 정의는 1948년 제9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앙페르 회로 법칙을 만든 앙드레마리 앙페르()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전류와 저항에 대한 소위 “국제” 전기단위는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국제전기협의회에서 도입되었고, “국제 암페어”와 “국제 옴”의 정의는 1908년 런던국제회의에서 추인되었다. 제8차 CGPM(1933)에서 “국제단위”를 소위 “절대단위”로 대치시키자는 만장일치의 열망이 이미 있었지만 이들을 폐기하기로 한 결정은 제9차 CGPM(1948)에서야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회의에서는 CIPM(1946, 결의사항 2; PV, 20, 129-137)에 의해 제안된 다음과 같은 정의에 따라 전류의 단위로 암페어를 채택하였다. 정의 암페어는 무한히 길고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원형 단면적을 가진 두 개의 평행한 직선 도체가 진공에서 1 미터의 간격으로 유지될 때, 두 도체 사이에 1 미터 당 2 × 10−7 뉴턴(N)의 힘을 생기게 하는 일정한 전류이다. 1암페어는 두 도선에 전류가 흐를 때 생기는 자기력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지름을 무시할 수 있고 길이가 무한한 두 직선 도선이 서로 1m 떨어져 있고, 같은 크기의 전류가 흐를 때 1m 당 의 힘이 작용한다면, 두 도선에 흐르는 전류는 1A이다. 이에 따라 자유공간의 투자율로도 알려진 자기상수는 정확히 4×10−7 헨리 매 미터, 즉, =4×10−7 H/m이다. 이 정의에서는 1946년의 원문에서 사용한 “힘의 MKS 단위”라는 표현을 제9차 CGPM(1948, 결의사항 7; CR, 70)에서 이 단위의 명칭으로 채택된 “뉴턴”으로 대치시켰다. 각주 같이 보기 SI 단위계 옴의 법칙 와트 SI 기본 단위 전류의 단위 사람 이름을 딴 낱말
|
43175
|
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C%98%88
|
동예
|
동예(東濊, 기원전 82년 ~ 6세기경)는 한반도 동해안 일대에 동옥저와 자리잡았던 초기 부족 국가의 하나이다. 예(濊)라고 불렸으나, 넓은 의미의 예와 구별하기 위해 통상 ‘동예’라고 부른다.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함경남도 원산으로부터 남쪽으로는 강원도 강릉(명주)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이르렀고 영서지역 산간까지 세력범위로 하였는데, 서쪽의 마한·백제와 군사적으로 대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고, 직조기술도 발달하였다. 산과 하천을 경계로 읍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을 삼로(三老)가 통치했다. 6세기에 신라의 진흥왕에게 완전히 복속되어 신라의 하슬라주(何瑟羅州)로 편입되었다. 진흥왕은 옛 동예 영토의 위쪽 지방에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를 세움으로써 신라의 영토임을 확실시하였다. 역사 지금의 원산에서부터 강릉까지 사이의 중부 동해안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부여족 계열의 부족 국가로서, 옥저와 마찬가지로 한군현에 속해 있다가 6세기 이후 멸망했다. 멸망 6세기 이후, 동예의 옛 땅은 확실히 신라의 영토가 되었음이 문헌과 금석문, 발굴을 통해 입증되었다. 현재 멸망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몇가지 가설이 제시되어 있다. 신라의 정복 신라가 전성기일 때 함경도 일대 동해안까지 진출함으로써 신라에 정복되었다는 설이다.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의 북진으로 신라에 완전 병합되어 하슬라주가 된 사실과, 강원도 위쪽 지방인 함경남도에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와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가 발견된 사실로 볼 때, 가장 유력한 설로 평가된다. 자연적 멸망 동예의 정치형태는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은 군장국가의 형태였기 때문에, 왕권이 한곳으로 모이지 못했다. 따라서 내부적인 분열, 반란 등에 의해 스스로 멸망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다. 기타 고구려가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피폐해지자 동예는 낙랑군의 영향권에 들어갔다가, 미천왕이 313년 낙랑군을 병합하자 동예도 고구려에 병합되었다는 가설이다. 다만 동예가 고구려의 정식 영토로 편입된 것이 아니라, 속국의 형태로 예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동예의 직접적인 멸망에 대해 학계에서 인정받는 가설은 아니다. 또한 해외 유목민의 이주로 인해 멸망했을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위치 예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에서 처음 등장하는데,‘예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옥저를 접하고, 남쪽으로 진한과 접하며,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낙랑에 이르니 본시 조선의 땅’이라고 기술하였다. 《삼국지》 부여전에서는 “위나라 때 부여의 곳집에 인문(印文)이 있었는데 예왕(濊王)의 도장이라 했고, 나라 안에 옛 성이 있었는데 이름을 예성(濊城)이라 했으니, 대개 본시 예·맥의 땅”이라고 기술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리지에서는 ‘명주는 본디 고구려의 아슬라주인데 뒤에 신라에 속하였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지금 신라 북쪽 지경 명주가 대개 예국(濊國)이다. 이전 역사책(삼국지 부여전 등)에서 부여로 예 땅을 삼은 것은 대개 잘못이다’라고 기술하여, 동예의 위치를 지금의 강릉시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동사강목》에서는 ‘고구려 태조왕이 동옥저를 취하였는데, 그 땅이 동쪽으로는 창해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동옥저의 땅은 지금의 함경남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 예 땅은 여기까지이고 한나라의 무제가 설치한 창해군이 통솔한 땅 또한 여기까지였는가’라고 기술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명주는 본시 예국이다’라고 하였고, 《여지승람》에는 ‘강릉이 본디 명주인데, 강릉부 동쪽에 예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그 수도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지》「동이전」에 2만 호의 인구가 기록되어 있고, 《한서》「동이열전」에서는 28만 명이 한의 요동군에 투항한 기록이 나온다. 대한민국 역사학회는 대부분 일반적으로 두 사서의 예를 별개의 세력으로 보고 있다. 윤내현 교수는 예(濊)는 원래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요서지방의 난하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낙랑군을 피하여 동으로 이동하여 강원도 일대에 정착했다는 설을 주장한다. 정치·문화 공열(孔列)토기로 대표되는 무문토기문화이다. 주민은 옥저·고구려와 같은 예맥족이며 언어·풍속도 거의 같았다. 중기 이후로는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삼국지》〈위지〉(魏志)에 따르면, 호수(戶數)는 2만 정도이나 군주가 없었으며, 옥저의 삼로(三老)와 같이 중국 민족이 온 이래 후(侯)·읍장(邑長)·삼로(三老)의 관명을 사용하며 서민을 다스렸다. 한편 책화(責禍)라는 씨족 사회의 유습(遺習)이 남아 있었다. 책화란 다른 마을을 침범할 경우에는 재물과 가축으로서 그를 보상한다는 제도이다. 또, 아래 족외혼에도 역시 씨족사회의 유습이 드러난다. 동예의 법속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원시 형법이 사용되었으며, 도적이 적었다. 특산물 단궁(檀弓), 문표(文豹), 과하마(果下馬), 반어피(班魚皮, 海豹皮), 명주(비단)와 삼베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과하마 : 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는 키 3척의 말 반어피 : '반어피'는 수·당대 이후로 해표(바다표범)의 가죽이라고 하였다. 명주(비단)와 삼베 : 방직 기술이 발달 풍습 혼상법(婚喪法)은 고구려와 비슷하여 동성(同姓)간에는 혼인을 하지 않고(족외혼), 질병자나 사망자가 있으면 곧 집을 버리는 등 금기(禁忌)가 많았다. 주민은 검소·근면하고 싸움에 능하였다. 매년 10월에 무천(舞天)이라 일컬어진 제천행사가 있었다.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는 책화라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새벽에 별자리를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점쳤다(별점). 같이 보기 신라 옥저 고조선 고구려 독산성 전투(獨山城 戰鬪) 각주 참고 문헌 한국사 4권 -초기국가:고조선 부여 삼한, 국사편찬위원회 외부 링크 중국에 수출되던 토종말 과하마(果下馬), 지금은 천연기념물이래요 조선멤버즈 2013년 12월 31일 한국의 옛 나라 한국의 부족국가 한국의 고대 민족 예맥
|
281024
|
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D%83%81%EC%97%B0
|
윤탁연
|
윤탁연(尹卓然, 1538년 5월 15일 ~ 1594년 5월 2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 시호는 헌민(憲敏), 본관은 칠원(漆原)이다. 윤석보(尹碩輔)의 증손이다. 1559년(명종 14)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의 요직을 역임학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후 동래부사, 상주목사, 경기감사 등 지방관으로도 활동했고, 승지, 예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580년(선조 13년)에도 경회루에서 열린 중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90년 종계변무에 성공하자 광국공신 3등훈에 책록되고 칠계군에 봉작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과 싸우던 중 객사하였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경기 광주 출신. 생애 생애 초반 1538년 5월 15일에 경기도 광주군(현 성남시)에서태어났으며,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낸 윤척(尹摭)의 후손이자 우봉현령과 사온서령 윤이(尹伊)와 김윤선(金胤先)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아들이다. 증조부는 청백리 윤석보(尹碩輔)이고, 할아버지는 내섬시판관을 지내고 증 이조참판과 증 자헌대부이조판서에 추증된 윤문형이다. 감사를 지낸 윤풍형(尹豊亨)의 종손이 된다. 부인은 여산 송씨로 동지중추부사 송맹경의 딸이다. 아버지 윤이는 현령에 그쳤지만 뒤에 증 의정부좌찬성과 증 순충보조공신 대광보국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귀원부원군으로 추봉되는데 모두 그가 출세해서 내려진 증직이다. 조부 윤문형 역시 이조참판과 이조판서로 거듭 추증되는데 역시 그의 출세로 인한 증직이다. 어려서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8년(명종 13) 사미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59년(명종 14)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소속되었다. 이후 사관(史官)으로 활동하다가 1565년(명종 20) 다시 알성 문과에 합격하였다. 관료 생활 이후 승정원주서로 임명되고 명종이 병이 들자 입시하여 명종의 유언을 받아적고 덕흥군 초의 셋째 아들이라고 받아 적다가, 만약 누군가의 위변조를 염려하여 삼(三) 대신 삼(參)자로 써서 임기응변을 칭찬받았다. 선조 즉위 후1568년(선조 1) 전적, 사간원의 정언을 지내고, 천추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홍문관부수찬ㅇ 임명되었다가 이어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검토관과 춘추관기사관을 겸임하고 명종의 임종 시에는 직접 이준경 등과 함께 입시하여 명종의 유언을 받아 기록하였다. 11568년 이후 《명종 실록》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573년(선조 6)에 명나라에 종계 변무 주청사 이후백(李後白)·윤근수(尹根壽)가 파견되자 그는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후 1574년 사헌부지평과 장령, 교리, 의정부검상과 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75년(선조 8) 11월 13일 동래 부사로 발탁되었으나 1576년 7월 24일 부친상으로 사직한 뒤, 3년간의 여묘살이를 마치고 복귀하였다. 1579년(선조 13) 승선이 되어 춘당대에서 실시한 기묘 문신정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어 승정원좌승지가 되었다. 1579년 상주목사로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상주목사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고, 선조 임금은 그에게 표리 1벌을 상으로 주었다. 1580년(선조 13) 춘당대(春塘臺)에서 실시한 문신 정시/9庭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 바로 승정원좌승지가 되었다가 도승지로 승진하고 예조참판이 되었다. 그 해에 경회루에서 실시한 중시문과에 다시 장원으로 급제,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그 해 예조참판을 지내고 1582년 영남 지방에 대흉년이 들자 경상도관찰사로 특채되었고 경상감사 재직 중 가의대부로 승진했다. 경상도의 흉년을 궂하고 돌아와 1583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1583년 형조에서 죄인을 다스릴 때 임신한 여자를 장형에 처하여 낙태치사하게 한 책임으로 형조판서 강섬(姜暹)과 함께 좌천되었다. 영남 지방을 소생시킨 공로로 예조로 임명되었다가 또 지신사(知申事)로 옮겨서 동지춘추관사와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 겸직했다. 얼마 뒤에 한성판윤으로 제수되었다. 1585년(선조 18)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이어 세 차례의 형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냈다. 1590년 명나라 대명회통의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된 것이 수정되어 종계변무가 성공하자,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에 참여한 관료들을 포상할 때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정헌대부로 승진하여, 칠계군(漆溪君)에 봉작되었다. 바로 비변사유사당상(有司堂上)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과 최후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 직후 조정이 파천하자 선조를 따라 갔다가, 피난지에서 함경도관찰사에 제수되어 왕세자 광해군을 호종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초기에 그는 의병장 정문부(鄭文孚)와 갈등하여 그를 조정에 여러번 상소하였다 한다. 1594년 4월 2일 사헌부로부터 뇌물 관련, 술과 고기, 기생을 많이 거느리는 점과 형문 중 매질이 심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송익필, 이산해 등과 함께 팔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저서에 《중호문집》,《계사일록》, 의주 파천으로 호종하는 기간에 쓴 《중호관북일기 (重湖關北日記)》 등이 있다. 1594년 5월 함경도에 피난하였던 임해군과 순화군이 적의 포로가 되자 왕명으로 함경도도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을 방어할 계획을 세우던 중 오랜 야영 생활에 피로가 쌓여 5월 28일 막사에서 과로로 객사하였다. 사후 시신은 임시로 광주군 중부면 하대원리 세동(細洞) 부락 선영 임좌(任坐)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뒤에 같은 광주군 중부면 하대원리(후에 하대원리가 성남시로 편입되어,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세동(細洞) 부락 선영 자좌(子坐)에 정식으로 매장하였다. 뒤에 양평군으로 묘를 이장하였으며, 후에 2000년대 이후 다시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 산45-1 도장골로 이장되었다. 행장은 이숙이 쓰고, 묘비문과 신도비문은 호곡 남용익(壺谷 南龍翼)이 지었다. 그의 아들 윤경원(尹慶元)은 한성부 서윤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순직하여 증 좌승지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칠평군에 추봉되었다. 1711년(숙종 37) 6월 16일 헌민(憲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87년(정조 11년) 함안 홍포사에 배향되었다. 1797년(정조 21년) 7월 8일 함흥 창의사(咸興彰義祠)에 제향되었다. 저작 저서 《계사일록 (癸巳日錄)》 《중호문집 (重湖文集)》 《중호관북일기 (重湖關北日記)》 작품 진천군 이옥정묘갈(晉川君李玉貞墓碣) 가족 관계 증조 - 윤석보(尹碩輔, ? ~ 1505년) :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 조부 - 윤문형(尹文亨) : 내섬시판관(內贍寺判官), 증 이조참판 아버지 - 윤이(尹伊, 1502년 ~ 1576년) : 우봉현령(牛峰縣令), 증 영의정(贈 領議政) 어머니 - 안동김씨(安東金氏), 생원(生員) 김윤선(金胤先)의 장녀 동생 - 윤수연(尹粹然) : 장단부사(長湍府使) 동생 - 윤호연(尹浩然, 1553년 ~ ?) : 영평현령(永平縣令) 첫째 부인 여산송씨 -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송맹경(宋孟璟)의 딸 장남 - 윤경원(尹慶元, 1560년 ~ 1592년 10월 18일) : 형조좌랑(刑曹佐郞), 증 이조판서(吏曹判書), 충장공(忠壯公), 임진왜란 때 전사 차남 - 윤길원(尹吉元, 1560년 ~ ?) : 검열(檢閱) 둘째 부인 전의이씨 - 현감(縣監) 이념(李念)의 딸 3남 - 윤희원(尹喜元, 1576년 ~ 1619년) 4남 - 윤상원(尹祥元) 5남 - 윤영원(尹榮元) 첫째 사위 - 이유심(李幼深) 둘째 사위 - 남석(南錫) 기타 임진왜란 전쟁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순국하였다. 선조는 생전 초상화 그리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런데 그는 전란의 혼란 와중에 누군가 선조의 초상화를 그린 것을 발견, 이를 입수하여 비밀리에 보관해왔다. 각주 1538년 출생 1594년 사망 병사한 사람 과거 급제자 조선의 군인 조선의 외교관 임진왜란 관련자 조선의 서예가 칠원 윤씨 광국공신 과로사한 사람 경기도 출신
|
91369
|
https://ko.wikipedia.org/wiki/%EC%84%A0%EC%9A%B0%EC%88%9C
|
선우순
|
선우 순(鮮于(金+筍), 1891년 3월 ~ 1933년 8월 8일)은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으로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동생인 선우갑 또한 거물 친일파 밀정으로 유명하다. 본관은 태원이다. 생애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은식과 이동휘의 서북학회 기관지에 1909년 기고한 기록으로 보아 초년 시절에 민족주의적 계몽 운동에 참가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무렵 대한매일신보 기자였다는 설도 있으나 역시 분명치 않다. 그는 1910년 일본어 신문인 평양신문 주필을 지냈고, 그해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4년에는 일본의 도시샤 대학을 나왔다. 도시샤 대학에서는 신학을 전공하여 전도사 수업을 받았다. 이 과정 또한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명화는 일본 조합교회에서 설립한 평양기성교회 신자로서 일본인들의 눈에 들어 유학하게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시샤 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한 선우순은 1915년 12월 기성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조선총독부의 보호 아래 포교 활동을 하면서, 정미소를 운영하는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일본 조합교회의 대시국 특별 운동(對時局 特別 運動)이 전국에서 이어졌는데, 이때 선우순은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열린 강연회에 적극 참가하여 3·1 운동 후속 시위들을 진정시키고 독립은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주지시키는 일에 뛰어들었다. 조선총독부에 민심의 현황을 보고하고 향후 총독부의 수습책을 건의하는 밀정 활동도 병행했다. 1920년 좀 더 조직적인 선전 작업을 위해 평안도 지방의 친일 인물들을 규합한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선우순은 대동동지회 소속으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영국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처럼 일본과 융화하여 공존공영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대동동지회는 기관지 《대동신보》와 월간지 《공영(共榮)》을 발행하여 이러한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데 이용했다. 그는 3·1 운동 이후의 맹렬한 활약으로 민원식, 유일선과 함께 이 시기를 대표하는 친일 인물로 급부상했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조선인 면회 횟수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선우순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면담 횟수 1위(46회, 2위는 송병준의 33회), 1922년부터 1923년까지 2위(34회, 1위는 민흥식의 36회),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또다시 1위(39회, 2위는 이진호의 37회)로, 이 기간 중 사이토가 가장 가까이 한 인물이었다. 선우순은 1919년부터 1926년말까지 사이토와 119회나 밀담을 나누어 22일에 1회꼴이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921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되었다. 독립단 안주 지단장 홍이도(洪彞度) 등 몇 사람의 가출옥을 미끼로 금품을 사휘하고 피소된다. 총독부는 담당검사를 일본인으로 교체하면서까지 불기소 처분했다. 그 뒤로도 일선융화·공존공영 및 독립반대 운동을 하다가 1933년 사망했다.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우갑과 함께 선정되었다.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선우순, 선우갑 형제가 들어 있다. 조선총독 사이토를 가장 많이 면회한 인물은 밀정으로 악명 높은 선우순이다. 그는 1919년부터 1926년말까지 사이토와 119회나 밀담을 나누었다. 이름 기록에 따르면 선우순의 한자는 鮮于金筍으로 전한다. 그대로 읽으면 선우금순이 되지만 그냥 선우순이라고 부른다. 사실 금(金)자에 순(筍)자를 더한 '순' 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같은 한자 문화권인 한국이나 일본, 중국 등에서도 쓰이지 않는 글자이다. 따라서 금(金)자가 누락되었는데 이것이 성을 바뀌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같은 평양 출신 가수인 선우일선은 본명이 최창선(崔昌善)이라고 알려져 있다. 유독 평안남도 평양 출신에는 선우순 외에도 선우갑, 선우일, 선우영빈 등 친일 전력자가 많아,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선우혁, 선우훈 등과 대조를 보였다. 참고 자료 각주 1891년 출생 1933년 사망 일제강점기의 관료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일제강점기의 공작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평양시 출신 태원 선우씨
|
172784
|
https://ko.wikipedia.org/wiki/%EB%A7%8C%EA%B8%B0%EC%9A%94%EB%9E%8C
|
만기요람
|
《만기요람》(萬機要覽)은 1808년(순조 8년)에 서영보(徐榮輔), 심상규(沈象奎) 등이 왕명을 받아 왕이 나라의 군정(軍政)과 재정(財政)을 파악하도록 만든 책이다. 《재용편》(財用篇)이 6권 6편 62절목, 《군정편》(軍政篇)이 5권 5편 23절목이다. 필사본으로 전해지다가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1938년에 활자본을 간행하였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71년에 번역본을 냈다. 재용편은 재정, 군정편은 군정에 관한 내용을 매우 자세하게 담고 있다. 외부 링크 국방일보_만기요람 1808년 책 조선의 책 정치학 책
|
111219
|
https://ko.wikipedia.org/wiki/%ED%81%B0%EB%B0%94%EB%8B%A4%EC%82%AC%EC%9E%90
|
큰바다사자
|
큰바다사자(Eumetopias jubatus)는 물개과 바다사자아과에 속하는 동물이다. 물개과 중에서는 가장 덩치가 크며, 기각류에 속하는 동물 중에서는 코끼리물범류 및 바다코끼리 다음으로 덩치가 크다. 영어 명칭인 Steller sea lion은, 1741년에 큰바다사자를 처음으로 기술한 박물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슈텔러(Georg Wilhelm Steller)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최근 알래스카의 서식지에서 밝혀지지 않은 원인으로 인해 개체수가 크게 줄고 있다. 한국의 경우 2012년부터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몸길이는 수컷이 3.3m, 암컷이 2.3m 정도이고, 몸무게는 수컷이 평균 500kg(최대 1000kg), 암컷이 평균 270kg 정도이다. 새끼는 흑갈색을 띠나 성장함에 따라 코르크색이 되며 가슴배부는 색이 짙어진다. 머리 앞부분은 편평하나 중앙부는 높아져 있다. 송곳니는 크고 앞니도 바깥 것은 송곳니와 비슷하다. 북극 지방의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곳을 좋아하고 바위 위·모래 위·풀 위 같은 곳에서 산다. 물고기를 즐겨 먹지만 오징어도 잡아먹는다. 6월에 10~15마리의 암컷이 무리를 이루어 새끼를 낳는데, 새끼는 한배에 한 마리를 낳는다. 번식기에 수컷은 10~15마리의 암컷을 거느리고 살다가 교미시기가 지나면 분산한다. 암컷은 어린 새끼의 목을 물어서 운반하며, 위험을 느낄 때에는 곧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태평양의 북부에서 번식하고 겨울에는 캘리포니아 연안에 도달한다. 아시아에서는 시베리아 연안으로부터 캄차카·베링 해·사할린·쿠릴 열도에서 번식하고, 겨울에는 홋카이도·한반도 동해안 등지에 나타난다. 천적은 범고래, 상어(백상아리) 다. 계통 분류 각주 외부 링크 • 큰바다사자 - 멸종위기 야생생물 포털 바다사자아과 1776년 기재된 포유류 일본의 포유류 러시아의 포유류 미국의 포유류 캐나다의 포유류 해양생태계의 보전 및 관리에 관한 법률상 보호대상 해양생물 요한 크리스티안 다니엘 폰 슈레버가 명명한 분류군
|
98088
|
https://ko.wikipedia.org/wiki/605
|
605
|
605(육백오)는 604보다 크고 606보다 작은 자연수이다. 수학 합성수로, 그 약수는 1, 5, 11, 55, 121, 605이다. 과학 기타 날짜: 6월 5일 연도: 605년 기원전 605년 6e02 605
|
85987
|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83%81%EC%98%A5%20%281890%EB%85%84%29
|
김상옥 (1890년)
|
김상옥(金相玉, 1890년 1월 5일 ~ 1923년 1월 22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다른 이름은 김영진(金永鎭), 아호는 한지(韓志)· 의엄(義嚴)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그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생애 한성부 어의동에서 구한 말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과 김점순(金占順)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김해김씨 안경공파(金海金氏 安敬公派) 15대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시에 어의동보통학교를 다녔다. 10대 중반부터 개신교에 입문하고 서울 동대문 감리교회를 다녔다. 야학에 다니면서 물산장려운동을 벌이고 경상북도 풍기군에서 결성된 대한광복단에 참가하는 등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김상옥은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자영하고 한 때 종업원만 50명에 가까울 정도로 컸었다. 김상옥은 이를 모두 독립운동에 쏟았다. 그는 말발굽을 만들어 히트를 쳤다. 일제강점기 시절대 머리카락이 잘린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수있는 말총모자를 선보였다 독립운동에 투신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3·1 운동 당시 만세를 외치던 여고생을 살상하려고 한 일본군경을 저지 및 폭행하고 군경의 검을 탈취하여 자신이 보관하였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 동지인 한훈,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 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일제에 폭력투쟁으로써 저항하며,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거나 억압을 하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것을 주장 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기독교인이었던 김상옥은 1922년 5월 5일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신사상에 접했으며, 한살임 정강 및 선언을 통해 종교를 배경으로 한 민족 혁명에서 유물론적 계급 혁명으로 사상이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 임정 군무부 행정관 직책으로 발탁된 그는 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곧 일제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알려져 있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김상옥은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유도사범이자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고봉근의 집에서 경부 20여명에게 포위당한 후, 반격해 중상을 입혔다. 서거 김상옥은 1923년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천여 명의 일본 군경에게 포위당해 민가의 지붕을 뛰어다니며 권총 두 자루로 일본 군경 4백여 명과 3시간동안 총격전을 벌이며 일본 군경 15명을 사살하고 총알이 다 떨어지자 남은 한발로 자결하였다. 의문과 논란 의열단원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의 장본인인지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김상옥의 시신에는 11발의 총알이 몸에 박혀 있었다. 총알을 맞아가면서도 그 정도로 싸웠으니 매우 전투능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생포가 목적이었는데 김상옥이 일본 군경들과의 교전 중 자결했기 때문에 일본 군경들은 과연 김상옥이 폭탄을 투척하였는지에 대해 심문해 볼 수 없었다. 효제동 총격전 직후 3월 14일 총독부 경무국의 야마구치 고등과장은 사건 전모를 발표하면서 김상옥이 폭탄투척 사건의 범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공식 발표했다. 또한 후에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고 진술한 자가 없었다. 의열단원들도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가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윤익중 - 재판정에서 "그날 그 시각 김상옥과 함께 종로대로를 걸었다, 그때 종로서를 지나온 학생들에게서 폭탄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김상옥은 그런 식의 폭탄투척은 그리 좋다고 (효과적이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라고 진술했다. -다른 동지들의 증언도 같은 의견이었다.- 조선일보는 3월 16일 신문에서 이 진술을 기사에 실었고, 이와 함께 "김상옥은 정녕 폭탄 범인이 아니다."라고 분석하여 전했다. 또, 그 때 김상옥은 사이토 암살 계획 실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경찰 추적과 경계, 감시를 강화시킬 일을 자초했을 가능성은 적다. 전에도 이런 식의 치밀하고 영향력 있는 사건이 일어난 후 일본군은 비상경계 상태를 취했었으며, 종로경찰서 폭탄사건 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당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이견이 많이 제기됐었으며, 미와 경부보도 이에 대한 확답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은신처는 혁신단 시절의 동지인 이혜수의 집이었는데, 효제동은 그의 생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종로경찰서 사건에 대해서는 김상옥이 결행했다는 설이 정설이나, 오래 준비해 온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며,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서 다른 조직의 소행이라는 이설도 있다. 사후 1924년에 임시정부 외교부장이며 김상옥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조소앙이 그의 전기를 집필해 간행했다. 김상옥이 수많은 일본 경찰의 포위 속에서도 단신으로 여러 시간 동안 버티며 총격전을 벌인 이 사건을 당시 중학생이던 서양화가 구본웅이 직접 목격하여, 해방 후 1930년 시화집 《허둔기》에 스케치와 추모시를 함께 실었다. 이는 일제감정기에 독립투사 최후의 순국 장면을 생생히 그린 유일한 작품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념 사업을 위해 벌이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일제강점기 초기의 무장 독립 운동과 의열단의 용감한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김상옥이 최초로 선정되었다. 1988년에 서울특별시 종로에 김상옥 의거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1998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동상이 설치되었다. 가족 관계 부친 : 김귀현(金貴鉉) 모친 : 김점순(金点順) 누나 : 김기숙(金基淑)&김아기(金兒基) 매형 : 고봉근(高奉根) 형 : 김춘옥(金春玉, 요절) 형수 : 박도순 동생 : 김춘원(金春元) 제수 : 이애기 부인 : 정진주(鄭眞珠) 아들 : 김태용(金泰龍, 1914~1939)- 25세로 후사 없이 요절) 아들 : 김태운(金泰雲, 1927~2014.5.3) -조카를 입양하여 대를 이음 며느리 : 한정수(1929) 손자 : 김주동(金柱東, 최경순),김민홍(金敏洪, 여현미) 손녀 : 김영심(金英心, 김영돈),김영실(金英實, 이두표),김영욱(金英旭, 최신호) 증손 : 김종찬,김종근,김용민,김주아,이선호,이진호,최예진,최예은,김종한,김지원 장녀 : 김의정(金義政, 1917 ~1958) 사위 : 김진익 외손 : 김효기(요절) 외손 : 김세원 외손부 : 지영희 외증손 : 김남석, 김남연 대중문화 속 김상옥 경성을 쏘다 경성을 쏘다는 이성아가 글을 썼으며, 북멘토에서 출판되었다.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김상옥은 몰래 발간하던 신문이 발각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지들을 지키고 이후 의열단에 들어가서 식민 치하 경성 한복판에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신출귀몰 경찰들을 따돌리다가 열흘 뒤 일제 군경 천여 명과 세 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인 끝에 마지막 한 발의 총탄으로 자결하였으며, 이 시가전으로 일본 형사 16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내용의 일제 시대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은 세계일보 김동진 기자가 글을 썼고, 서해문집에서 2010년 출판되었다. 영화 의 원작으로 김상옥과 황옥, 김시현, 김원봉 등 의열단의 항일 투쟁 이야기를 박진감 넘치게 서술했다. 영화 밀정 같이 보기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 영화 밀정 독립유공자로 대통령장을 수여받은 사람 참고자료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이 달의 독립운동가 - 김상옥, 1992년 1월 국가보훈처 : 이달의 독립운동가 세계일보 김동진 기자, 서해문집,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2010년 8월 5일 주해 각주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1890년 출생 1923년 사망 서울특별시 출신 의열단 한국독립당의 당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 김해 김씨 일제강점기의 개신교도 한국의 자살한 정치인 1923년 자살
|
234719
|
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C%A7%80%EC%9B%A8%EC%96%B4%EC%97%AD
|
에지웨어역
|
에지웨어역()은 런던 바넷 자치구 에지웨어에 있는 런던 지하철의 역이다. 노던 선의 북부지선중 하나인 에지웨어 지선의 종착역이며 런던 지하철 5구역에 있다. 역은 A5100의 일부인 스테이션 로드(station road)상에 있다. 역사 1924년 8월 18일에 차링 크로스, 유스턴과 헴스테드 철도에 의해 당시 종착역이던 골더스 그린 연장으로 개통되었다. 앞으로 5km의 거리를 더 연장시켜 브로클리 힐(Brockley Hill), 엘스트리 사우스(Elstree South), 부시 히스(Bushey Heath)의 역들을 개통시킬 예정이다. 원래 이 계획은 19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으나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중단되었다. 외부 링크 런던 지하철역 1924년 개업한 철도역
|
14099
|
https://ko.wikipedia.org/wiki/%ED%91%B8%EC%9D%B4
|
푸이
|
아이신 교로 푸이(, , 1906년 2월 7일 ~ 1967년 10월 17일)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 재위 : 1908년 ~ 1912년, 황제의 칭호는 1924년까지 유지)이자 만주국의 집정 및 황제(재위 : 1932년 ~ 1934년, 1934년 ~ 1945년)이다. 만주국 집정으로는 대동왕(大同王), 황제로는 강덕제(康德帝)이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전국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로 널리 알려져 있고 도광제의 증손자이다. 민제(愍帝), 양제(襄帝), 손제(遜帝), 폐제(廢帝), 말제(末帝)로 불리기도 한다. 만주어로는 거훙거 요소 한(), 몽골어로는 휴브트 요스 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생애 출생 1906년 청나라 제10대 황제인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 재풍(載灃)과 서태후의 측근인 대학사 겸 군기대신 영록(榮祿)의 딸 유란의 아들로 순친왕부에서 태어났다. 즉위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붕어하자 당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서태후가 푸이를 동치제와 광서제의 후계자로 지명하여 태어난지 2년 10개월 만에 청나라 11대 황제 선통제로 즉위하였다. 청 왕조의 가법(家法)에 따르면 동치제가 죽었을 때, 항렬이 부(溥)자인 후손들이 황위를 계승해야만 했지만 서태후가 권력을 놓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동치제와 같은 항렬인 광서제로 황위를 승계하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푸이는 동치제와 광서제를 겸조하여 대를 잇게 되었다. 서태후는 푸이의 생부인 순친왕을 감국섭정왕(監國攝政王)으로 임명하여 정치의 실권을 위임하였고 광서제가 붕어한 다음날인 11월 15일에 훙서하였다. 즉위식은 1908년 12월 2일 베이징의 자금성 태화전에서 봉행되었다. 즉위식에서 푸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섭정왕인 순친왕은 "울지 마세요, 곧 끝납니다, 곧 끝나요!"라고 말하였고, 대신들은 대청제국의 불길한 징조라고들 하였다. 유모 왕초씨(王焦氏)는 자금성에 푸이와 동행하였다. 푸이는 생모를 7년 동안 볼 수 없었고 유모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성장하였다. 유모는 푸이가 8살이 되자 자금성에서 출궁하지만, 푸이는 결혼한 후에도 때때로 자금성에 유모를 불렀고, 만주국이 성립한 후에도 유모는 푸이를 만났다. 만주국에서 들인 두 후궁 (명현귀비 탄위링, 복귀인 리위친)은 유모가 소개시켜 준 것이었다. 1959년 특별 사면되자 푸이는 유모의 양자를 방문하기도 했다. 청 멸망과 퇴위 1909년 순친왕은 형인 광서제를 배반하고 무술변법을 실패하게 만든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 위안스카이를 실각시키고, 위안스카이는 하남성(河南省) 창덕(彰德)에 칩거한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의 시발점이 된 우창 봉기가 발생하자 위안스카이는 이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청 조정은 위안스카이의 요구대로 위안스카이를 총리대신에 임명하였고, 순친왕은 섭정에서 물러나야 했다. 위안스카이는 쑨원으로부터 난징 임시정부(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의 지위를 양보하겠다는 밀약을 받고 적극적으로 청 왕조 타도에 나섰다. 1912년 1월 16일 위안스카이는 융유 황태후(隆裕皇太后, 1868년 ~ 1913년)에게 공화정을 수용하라는 협박을 하였고 황족회의에서는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선기와 푸웨이(溥偉)는 푸이의 퇴위에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황태후는 황제의 퇴위에 찬성하였다. 1월 30일 내각에 공화정 선포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2월 3일 청 황실은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난징 임시정부 측과 퇴위 조건에 관한 구체적인 협상을 하게 했다. 2월 9일 황제에 대한 퇴위 후 우대 조항 8개조가 확정된다. 청 황족에 대한 우대 조항 4개조와 만주족·몽고족·회족·장족에 대한 우대 조항 7개조도 아울러 확정된다. 2월 11일 황태후가 황실 우대 조건을 받아들였고, 2월 12일 자금성 양심전(養心殿)에서 마지막 조회(朝會)가 열렸다. 황태후는 공화국체제의 도입을 위하여 황실의 통치권을 포기하며 만한몽회장(滿漢蒙回藏)의 5족으로 중화민국을 구성한다는 뜻을 담은 퇴위조서를 공표하게 했다. 이로써 푸이는 황제에서 퇴위하였고 286년간 중국을 통치한 청나라 황조는 공식적으로 멸망한다. 숙친왕은 일본 조차지인 뤼순(旅順)에서, 공친왕은 독일 조차지인 칭다오에서 복벽운동을 전개한다. 청 조정과 중화민국 정부의 협의에 따라 자금성은 건청문 광장을 경계로 하여 외조(外朝)의 삼대전과 문화, 무영 등의 전각은 중화민국 정부의 소유가 되었고, 내정(內廷)의 후삼궁과 동쪽과 서쪽에 있는 육궁 등은 청 조정이 소유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정사복벽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했던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2일 제정 부활을 선언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1916년 국호를 '중화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정했다. 하지만 북양 군벌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반발로 인해서 즉위 직후인 동년 3월에 퇴위했고 6월에 사망했다.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에 선전 포고하는 문제로 대총통 리위안훙(黎元洪)은 총리 돤치루이(段祺瑞)와 권력투쟁을 벌여 돤치루이를 해임했다. 돤치루이는 자신을 따르는 각 성의 군벌들을 부추겨 중앙 정부에 대해 독립을 선포시켰다. 리위안훙은 급히 장쉰(張勳)에게 병력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와서 화해를 주선하도록 요구했지만 장쉰은 이를 기회로 푸이의 복벽(復辟)을 꾀했다. 장쉰은 3천명의 변자군을 이끌고 베이징에 입성하였고, 6월 30일 자금성에 들어가 첸바오첸(陳寶琛) 등과 복벽 계획을 상의하고 사전에 청 황실에 이를 알렸다. 심야에 장쉰의 병력은 기차역과 전신국 등을 점령하였고 리위안훙에게도 협력할 것을 권유했다. 7월 1일 새벽, 장쉰은 청나라 조복을 입고 캉유웨이(康有爲) 등과 함께 자금성에 들어가 푸이를 복위시켰다. 이후 각종 공화 제도를 다시 전제 왕정으로 되돌리려는 복고 정책을 반포하였다. 장쉰은 스스로 의정대신과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에 올라 군권과 정권을 장악하였다. 복벽의 소식이 알려지자 쑨원은 상하이(上海)에서 이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각 성의 혁명당원에게 토벌할 것을 명령하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각지에서 복벽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졌고 장쉰을 토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리위안홍은 복벽에 협력할 것을 거절하였고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돤치루이는 일본의 재정지원을 받아 7월 3일 톈진(天津)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돤치루이는 장쉰의 군대를 단숨에 격파했고 장쉰은 급히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도피하였다. 7월 12일 푸이는 다시 퇴위를 발표했고, 14일 돤치루이는 베이징에 입성하여 정부를 장악하였다. 존스턴과의 만남 1919년 푸이는 영어 교육을 목적으로 리홍장(李鴻章)의 아들이자 오스트리아 공사를 역임한 리징마이(李經邁)의 권유에 의해서 영국 식민성의 관료로 북경어에 능통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태생의 레지널드 존스턴(Sir Reginald Fleming Johnston, 중국명: 莊士敦, 1874년 ~ 1938년)을 황제의 사부인 제사(帝師)로 초빙했다. 푸이와 존스턴은 1919년 3월 3일 자금성에서 처음으로 대면한다. 존스턴은 9품계 중 둘째 품계와 초피괘를 받았고, 1922년 대혼은전(大婚恩典)이 베풀어졌을 때, 첫째 품계로 올라 중국 최고위 관리가 되었다. 그는 자금성의 후문 부근에 거주했고 자동차로 통근했다. 이후 푸이는 존스턴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양복, 자전거, 안경, 전화나 영어 잡지 등의 유럽의 최신 수입품을 접하게 된다. 푸이는 자금성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 변발을 자르는 등, 존스턴이 가져온 서양의 생활 양식과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 존스턴은 푸이에게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을 주었지만, 푸이는 공식적으로는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존스턴은 1924년 푸이가 자금성에서 출궁하였을 때 제사에서 사임하고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하기 전에 텐진에 거주하던 푸이를 방문하였다. 1927년 존스턴은 영국의 중국 조차령인 포트 에드워드(중국명:威海衛)의 행정장관으로 중국으로 돌아와 1930년 10월 1일 중국에 반환될 때까지 주재하였다. 영국에 귀국한 존스턴은 런던 대학교의 동양학 및 중국어 교수로 취임하였고 1931년 태평양 회의에 참석을 위해서 다시 중국을 방문했을 때 푸이와 재회한다. 1934년 푸이의 제사 시절부터 푸이의 만주국 집정까지의 동향을 서술한 《자금성의 황혼》(Twilight in the Forbidden City)을 저술하였다. 1935년 만주국을 방문해 집정이 된 푸이와 재회하는 등, 푸이와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자금성 생활 1922년 12월 1일 만주 기인으로 다우르족(达斡尔族)의 완룽(郭布羅婉容, 1906년 11월 13일 ~ 1946년 6월 20일)을 황후로, 몽고 기인의 원슈(鄂爾徳特文繍, 1909년 12월 20일 ~ 1953년 9월 17일)를 숙비(淑妃)로 삼아 자금성에서 대혼전례(大婚典禮)를 거행하였다. 푸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관습이라며 황후 외에 숙비를 맞이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측근들의 권유로 1명만 맞이하는 것으로 동의했다. 황후 완룽은 저수궁(儲秀宮)에, 숙비 원슈는 장춘궁(長春宮)에 거주하게 되었다. 혼례를 치른 뒤에 청 왕조 사상 처음으로 푸이는 외국인을 위한 비공식 합동 환영회를 개최했다. 결혼 후에 완룽의 영어 교사로서 미국인 선교사의 딸이자 베이징 태생의 이사벨 잉그램(Isabel Ingram, 1902년 ~ 1988년)을 초빙한다. 인그램은 웰즐리 대학교(Wellesley College)를 졸업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완룽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인그램은 완룽이 자금성에 황후로 들어오기 전부터 완룽의 영어 교사였으며, 완룽에게 '엘리자베스(Elizabeth)'라는 영어 이름을 주었다. 푸이는 영국이나 미국으로의 유학을 준비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푸이는 중화민국이 혼란한 상황에 있었지만, 완룽과 존스턴 등의 측근들과 함께 자금성에서 평온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1923년 푸이는 내무부에 자금성의 재산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요구하였고, 일련의 횡령 행위를 일소하려 한다. 6월 27일 새벽, 건복궁에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부정 행위가 발각될 것을 두려워한 환관들이 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에 푸이는 7월 15일 중화민국 정부의 힘을 빌려 천여 명의 환관 대부분을 일제히 해고한다. 푸이는 내무부 총관 정샤오쉬(鄭孝胥)와 함께 자금성의 경비 삭감과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푸이는 자선을 베푸는 것을 좋아했는데 베이징의 빈민 구호 기금이나 중국 각지의 자연재해 피해를 입은 이재민을 위한 의연금으로 많은 액수를 익명으로 기부하였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20만 달러 이상의 지진 구호 기금을 요시자와 겐키치(芳沢謙吉) 일본 공사에게 전달했는데, 존스턴은 푸이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정치적 동기도 없었다고 단언하였다. 자금성 출궁 1924년 11월 5일 오전 9시경, 펑위샹의 참모인 루종린(鹿鐘麟)과 그 부하들은 자금성 신무문에서 경비 부대의 무장을 해제시킨 뒤 해산을 명령하였다. 루종린은 내무부를 찾아가 푸이와의 회견을 요구하면서, 세 시간 안에 자금성에서 나가라는 명령을 전하러 왔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들은 대청황실우대조건의 수정본을 즉시 승인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오후 3시, 푸이와 청 황실은 결국 자금성을 떠나 순친왕부로 거처를 옮긴다. 존스턴은 수정안에 중화민국 정부가 새로운 협약을 충실하게 준수하겠다는 보장이 어떤 형태로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치명적인 모순을 발견했다. 더욱이 기존의 우대 조항에 명시되어 있는 연금 지급 규정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존스턴은 중화민국 정부가 오로지 중국인과 외국인의 눈을 속여 황제가 공정하고 관대한 처우를 받고 있다고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라 보았다. 톈진 체류 시절 푸이는 자금성에서 출궁한 후 순친왕부에서 기거하며 상하이 조계나 칭다오 조계의 영국 공사관과 네덜란드 공사관에 비호를 요청하지만 중국에 대한 내정 간섭이 되는 것을 우려하여 거부된다. 일본 정부는 푸이의 비호를 수락하고 푸이는 1924년 11월 29일 베이징의 일본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1925년 2월 27일 정샤오쉬와 일본 정부의 권유로 텐진의 일본 조계의 장원(張園)으로 이주한다. 장원은 호북제독이며 우창 주재 제8진 통제(統制)인 장표(張彪)가 사재로 건축한 유락 시설이었는데, 푸이가 텐진에 온 것을 알고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2년 뒤에 같은 일본 조계지에 위치한 정원(静園)으로 이주하였다. 푸이의 텐진 이주는 만주에 본격적 진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 관동군과 푸이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중화민국 정부는 만주에 강한 영향력을 가진 푸이의 행보에 곤혹스러워 했다. 1927년 국공내전으로 정치적 혼란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1928년 국민당의 군벌 쑨디앤잉(孫殿英)의 군대가 청동릉(淸東陵)을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한다(동릉 사건). 건륭제의 유릉(裕陵)과 서태후의 정동릉(定東陵)의 묘실이 철저하게 약탈된다. 푸이는 국민당 정부에 항의하였지만 쑨디앤잉이 국민당의 고관에게 뇌물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처벌이 없었다. 동릉 사건은 자금성 출궁과 함께 푸이에 있어 청조 복벽에 대한 생각을 한층 강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푸이는 텐진에 거주하면서 첸바오첸, 정샤오쉬, 뤄젠위(羅振玉)와 함께 청조 복벽에 대한 방법을 의논하였다. 뤄젠위와 정샤오쉬는 외부 세력의 원조를 통한 복벽에 긍정적이었고 첸바오첸은 이를 반대하였다. 1931년 8월 푸이는 일본 육군 대신 미나미 지로에게 편지를 보내 복벽에 대한 그의 열망을 전했다. 푸이는 만주국 원수의 취임을 제안하는 관동군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土肥原 賢二)와 만났다. 1931년 숙비 원슈는 푸이에게 이혼을 요구하였고, 이혼 후에 칭호가 박탈되어 평민이 되었다. 만주국 건국과 집정 취임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해 이를 중국의 장쉐량 군대의 소행으로 몰아 군사 행동을 개시하였다(만주사변). 만주 침략 작전을 시작하여 5일 만에 랴오둥, 지린 성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 압력을 가해 두 성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게 하였다. 9월 21일 일본의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에 의한 독단 월경으로 전쟁은 남쪽 만주 지방 전체에 확대되었다. 일본 정부는 군사 행동의 정당성과 이후 전쟁을 확대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사건을 공인하였다. 1931년 10월 진저우를 폭격하고 만주 남부를 점령한 후 11월에는 치치하얼 점령하였으며, 소련·만주간 경계를 이루는 동북3성 전역을 장악하고 1932년 1월 장쉐량의 반만항일 거점인 진저우를 점령하였으며 2월에는 하얼빈을 점령하여 만주 북쪽 주요 도시를 거의 점령하였다. 당초 만주 몽골 지방을 영유하려고 계획했던 일본 관동군은 만주 지배방식을 괴뢰국가 수립으로 변경하여, 1931년 10월 을 세워 통치방침·정부조직을 결정하고 각지의 군벌과 군인에게 지역적인 독립정권을 세우도록 하였으며 11월에는 톈진에 망명 중이던 푸이를 탈출시켜 만주국의 황제로 삼을 준비를 추진하였다. 도이하라 겐지의 만주국의 원수 취임 제안을 받은 푸이는 청조 복벽을 조건으로 만주국의 집정 취임에 동의하였다. 푸이는 텐진을 떠나 11월 13일 잉커우(营口)에 도착하여 뤼순의 남만주철도가 경영하는 야마토 호텔에 머물렀다. 관동군과 협력하고 있던 숙친왕 선기의 제14왕녀 가와시마 요시코(川島芳子)는 완룽을 텐진에서 뤼순까지 호송하였다. 1932년 1월 말, 항일운동이 거센 상하이에서 일본 해군육전대와 중국군의 충돌이 일어나자 3월 1일, 장징후이 등에 의한 둥베이행정위원회가 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하였고, 만주는 일본의 중국 침략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화되었다. 3월 9일 푸이가 만주국의 집정에 취임하여, 오족협화의 왕도낙토(五族協和的王道樂土)를 기치로 내걸어, 연호를 대동(大同), 창춘을 신징으로 개명하여 수도로 삼고 만주국을 건국하였다. 국제연맹은 중국 측의 제소에 따라 리턴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였으나 러허 성마저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으며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조사를 위해 만주국을 방문했던 리턴 조사단은 조사의 일환으로 푸이를 만났었다. 만주국 황제 즉위 푸이는 1934년 3월 1일에 만주국 황제에 즉위하여 강덕제가 되었다. 푸이의 황제 즉위에 아울러 국명도 만주 제국으로 불리는 것이 많아졌다. 연호도 '강덕(康德)'으로 변경되었다. 만주국 측에야는 당초는 '계운(啓運)'으로 예정하고 있었지만, 관동군의 간섭에 의해서 변경하였다. 동시에 자금성 시절부터의 내무부 대신이었으며 푸이와 일본 관동군과의 사이를 주선한 정샤오쉬가 국무원 총리로 취임했다. 같은 날 신징 시내에서 행해진 황제 즉위식에서 푸이는 만주국의 슬로건의 하나인 '오족협화'를 내거는데 있어서 만주족의 민족색을 내는 것을 싫어한 관동군으로부터의 강한 권유로 만주국군의 군복을 착용하였지만, 푸이의 강한 의지로 신징 시내의 순천(順天) 광장에 놓여진 특설 회장에서 즉위식에 앞서 즉위를 청조의 선조에게 보고하는 의식인 (告天禮)를 행할 때에 푸이는 만주족의 용포를 착용했다. 그러나 동시에 만주국 정부에서는 이것은 청조의 복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성명이 나와 있었다. 푸이의 황궁은 집정 당시와 같이 만주국의 수도의 신징 중심부에 있었다. 당초 푸이 부부는 집정부의 집희루(緝煕樓)에서 살고 있었지만, 황궁으로의 위엄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만주국 정부에 의해서 1938년 새롭게 동덕전(同德殿)이 황궁으로서 지어졌다. 그러나 관동군에 의한 도청을 경계해 푸이 자신은 한번도 황궁으로서 이용하지 않았다. 관동군의 주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만주국의 헌법상에서는 황제는 국무원 총리를 시작으로 대신들을 임명할 수 있었지만, 차관 이하의 관료에 대해서는 1932년 조인한 (日滿議定書)에 의해서 관동군이 일본인을 만주국의 관리에게 임명 혹은 파면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관동군의 동의가 없으면 임면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관동군 장교인 요시오카 야스나오(吉岡安直)나 쿠도 타다시(工藤忠)가 항상 푸이와 함께 행동해서 푸이의 행동이나 발언에 대해 조언하여 황제의 칭호는 허울 뿐이었고 일본의 괴뢰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국체에 관련되는 중요 사항의 결정에는 푸이 뿐만이 아니라 관동군의 인증이 필요하였고 만주국 관직의 약 절반을 일본인이 차지하였으며 건국 당초 만주국 독자적인 군대나 국적법이 존재하지 않는 등, 관동군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1937년 2월 푸이와 관동군 사령관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의 사이에 만주국 황제에게 남자 자손이 없는 경우에는 일본 천황이 후사를 정한다는 각서를 교환하였는데 사실상 푸이의 후계자를 일본이 정하게 되었다. 이후 푸이는 이전에 비해 관동군에 의한 암살과 친일적인 성향을 가지는 황제로의 교체를 경계했다고 한다. 푸이는 1937년 만주 기인 타타라씨(他他拉氏)인 탄위링(譚玉齡)을 측실로서 맞아 상귀인(祥貴人)으로 삼았지만, 1942년 사망하였다. 푸이는 관동군에 의한 독살이라고 의심하였으며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그와 같이 증언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단순한 병사였다고 증명되었다. 한편 푸이는 1943년 한족 리위친(李玉琴)을 측실로서 맞아 복귀인(福貴人)으로 삼았다. 만주국의 초대 국무원 총리로서 푸이를 지지한 정샤오쉬는 만주국의 실권을 잡은 관동군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고 푸이의 황제 즉위 불과 1년 후인 1935년 5월 사임하였다. 관동군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형태로의 만주국의 운영과 실권을 수반하지 않은 형태의 푸이의 황제 취임에 대해서는 일본 내로부터의 반발도 있었다. 당시 정계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아시아주의자의 거두로 겐요샤의 총수인 도야마 미쓰루는 만주국의 건국 당시부터 일본 정부와 관동군의 과잉 개입에 우려를 나타내었으며 1935년 푸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 초대를 받았지만 거절하였다. 일만 우호를 촉진하는 목적과 만주국 및 푸이의 위신을 국내외에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1935년 4월 푸이는 일본 천황의 초대에 의해 일본을 국빈으로서 공식 방문한다. 푸이는 일본 제국 해군의 연습 전함 히에이(比叡)를 타고 일본에 도착하였고 히로히토가 도쿄역까지 푸이를 맞이하러 나왔다. 1940년 6월 황기(皇紀) 2600년 기념 행사가 도쿄에서 행해졌을 때에 다시 일본을 방문하여 히로히토와 회견하였다. 푸이의 제2차 일본 방문에서 이세 신궁을 다녀간 후에 만주국에 건국신묘가 만들어져 신체로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모셔졌고 만주국 국민은 궁성요배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숭배를 강제 당하였다. 푸이는 두차례의 일본 방문에서 완룽을 동반하지 않고 단독으로 방일을 하였다. 193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지바현에 살고 있던 푸이의 동생 푸계와 일본 사가 후작의 딸이자 천황가의 친척에 해당되는 사가 히로(嵯峨浩)의 혼담이 관동군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1938년 2월 6일 주일 만주국 대사관에서 결혼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4월 3일 도쿄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당초 푸이는 사가 히로를 관동군의 스파이로 의심했지만, 이후 2명의 아이가 태어나고 푸계와 사가 히로의 관계가 양호하자 사가 히로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만주국 붕괴와 퇴위 푸이가 황제로 즉위한 4년 후인 1937년 7월 7일 베이징의 루거우차오에서 일어난 발포 사건을 계기로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내전 상태에 있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한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인 제2차 국공합작을 구축했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의 개전에 의해서 일본이 연합국과 교전 상태에 들어가면서 만주국도 일본과 아울러 연합국 각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여 사실상 추축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 지역으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만주국의 종주국인 일본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의 사이에 이 존재하여 만주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에 의한 게릴라 공격이 자주 행해지고 있었지만 평정이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1944년 가을에 들어가면서 각 전선에서 점차 패퇴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동시에 만주국 국경선을 돌파하였다. 소련군은 동·북·서쪽 세 방향에서 만주국의 수도 신징을 노리고 침공을 시작하였다. 관동군은 에 의지해 1942년 이후 증강을 중지하고 주력 부대가 남방 전선에 있었다. 관동군은 1945년 5월 독일의 패배 이후 대일 참전에 대비해 전진 배치된 소련군에게 결정적 반격도 하지 못하고 일본인 만주 거류민을 버려둔 채 패주한다. 일본은 8월 15일 연합국에 대해 항복을 선언한다. 8월 17일 총리대신 장징후이의 주재로 열린 국무원 회의에서 만주국의 해체를 결정하고, 8월 18일 푸이는 퇴위의 조칙을 읽어내려 만주국은 탄생한지 13년 만에 멸망한다. 8월 20일 푸이의 퇴위조서를 공포할 예정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포로와 수감 푸이는 1945년 8월 19일 선양에서 비행기로 일본에 망명하려 했지만 소련군 공수 부대에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푸이와 동생 푸계는 즉시 소련 영내로 이송되었고 하바롭스크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완룽은 푸이와 동행하지 못하고 따로 이동하던 중 중국 공산당군에 사로잡혔으며, 지린성 옌지의 감옥에서 아편 중독의 금단 증상과 영양 실조로 사망하였다. 1946년 8월 도쿄에서 개정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일본의 전쟁 책임을 증언할 검사 측(대표 조셉 베리 키넌) 증인으로서 도쿄로 호송된다. 검사는 푸이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희생자였음을 증명하려고 했고, 일본인 피고 변호인들은 푸이가 침략에 가담할 뜻이 있었으며, 만주국 황제로서 맡았던 역할에 대한 그의 증언이 거짓임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존스턴의 저서인 《자금성의 황혼》은 변호인 측의 증거 자료로 제출되었지만 푸이의 증언과 존스턴의 사망을 이유로 재판부는 증거 자료로 채택하지 않았다. 1950년 푸이의 신병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인도되어 푸순 전범 관리소(撫順戦犯管理所)에 수감되었다. 동생 푸계와 만주국 상층부 61명 등과 함께 수감되어 중국 공산당에 의한 재교육을 받게 된다. 같은 해 10월 하얼빈 정치범 수용소로 이동하였다가 1954년 다시 푸순 전범 관리소로 돌아왔다. 수감 중의 푸이는 모범수였지만 처음에는 생활력이 없던 푸이로 인해서 주위의 불만이 많았다. 말년 1959년 12월 4일 국가 주석 류샤오치의 전범에 대한 특사령을 받아서 12월 9일 푸이는 모범수로 사면되었다. 푸이와 함께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동생 푸계도 1960년 11월 20일 석방되었다. 1960년 1월 26일 중난하이에서 푸이는 총리 저우언라이와 회담하여, 석방 이후의 장래에 관하여 대화하였다. 일반 시민의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저우언라이의 추천을 받아서 중국과학원이 운영하는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로 근무하게 된다. 이후 정협 제4기 전국정치협상회의 문사연구위원회(文史硏究委員會)의 전문위원이 되어서 문사 자료를 연구한다. 1962년 푸이는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한족 출신의 간호사 리수셴와 재혼한다. 리수셴은 푸이의 말년을 함께 하지만 자녀를 갖지는 못했다. 1964년 다민족국가가 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조화를 목적으로 저우언라이에 의해서 만주족을 대표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저우언라이는 푸이에 대해서 항상 동정적이었다. 사망 1966년 문화대혁명 시절에 푸이는 암에 걸리지만, 청조 황제라는 반혁명적 출신 때문에 홍위병의 공격을 염려한 다수의 병원이 그의 입원을 거부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베이징 내의 북경 반제 병원(현, 베이징 협화의원에 입원하지만, 푸이는 이미 입원할 때부터 암이 말기로 진행된 상태였다. 1967년 10월 17일 새벽 2시 30분, 베이징에서 신장암과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사후 푸이의 유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법에 따라 화장되어 베이징 교외의 바바오산 혁명공동묘지에 매장된다. 1995년 허베이 성 이셴의 청조 역대 황제의 능묘인 청서릉 근처의 민간 묘지 '화룡황원(華龍皇園)'의 경영자가 리수셴에게 푸이의 묘를 조성하는 것을 제안하였고, 이에 동의한 리수셴은 푸이의 유골을 동 묘지로 이장하였다. 이후 푸이의 묘 곁에 완룽과 탄위링의 묘도 조성되었지만, 완룽의 유골이 발견되지 않아서 유품을 묻었다. 중국 정부는 손제(遜帝)라는 칭호만 인정한다. 일화 황후와 일본 군관 사이의 사생아 푸이는 정신장애를 갖고 있던 황후 완룽과 사이가 좋지 않아 부부 관계가 사실상 절연 상태였다. 완룽은 푸이와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할 수는 없었지만 황후라는 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푸이는 밝히고 있다. 그녀가 아편에 빠진 것은 친정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고 일본 군관과 간통한 것은 친정 오빠가 주선한 것이다. 오빠는 완룽이 1932년 푸이를 따라 톈진에서 다롄으로 옮기던 도중 어떤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에서 여동생을 일본 군관에게 넘겼다고 푸이는 지적하고 있다.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는 이어졌고, 1935년 완룽이 일본 군관 사이에서 사생아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푸이는 황후가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화로에 던져 죽여버렸는데, 황후는 자신의 아이를 자신의 오빠가 키우는 줄 알고 양육비를 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일본이 패망한 이듬해인 1946년 지린성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아이가 궁 밖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았다. 푸이가 완룽이 낳은 아이를 아궁이에 던진 사실을 1964년 푸이의 자서전 초판에서 삭제한 것은 외국인들이 가질 수 있는 혐오감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만주족 여자 후궁 간택 푸이는 완룽과 이혼하려고 했으나 일본인과 관동군 측이 모두 불허하면서 다른 귀인을 물색해서 보복을 하기로 했다. 친척의 소개로 1937년 탄위링이라는 17세의 만주족 중학생과 결혼했다. 이후 중학교를 졸업한 탄위링과 부부관계를 가졌으나, 탄위링은 1942년 원인 모를 이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리위친과의 이혼 복귀인 리위친은 푸이가 1959년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5번이나 전범관리소를 찾았다. 하지만 나이 차와 여러 가지 배경을 고려하여 1958년 이혼한다. 푸이의 자서전 초판에서 이 대목이 삭제된 배경은 당시 당의 배려로 1962년 결혼한 리수셴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가족 관계 증조부 : 선종 도광성황제 민녕(宣宗 道光成皇帝 旻寧), 1782년 9월 16일 ~ 1850년 2월 25일) 조부 : 순현친왕 혁현(醇賢親王 愛新覺羅奕譞, 1840년 10월 16일 ~ 1891년 1월 1일) 양부 : 덕종 광서경황제 (德宗 光緖景皇帝) 재첨(載湉, 1871년 8월14일 ~ 1908년 11월 14일) 생부 : 순친왕 재풍(醇親王 愛新覺羅載灃, 1883년 2월 12일 ~ 1951년 2월 3일) 생모 : 순친왕대복진 유란(醇親王大福晋 瓜爾佳幼蘭, 1884년 ~ 1921년) 남동생 푸계(溥傑, 1907년 4월 16일 ~ 1994년 2월 28일), 동복형제. 푸궁(溥倛, 1915년 ~ 1918년) 푸런(溥任, 개명:金友之, 1918년 9월 21일 ~ 2015년 4월 10일), 이복형제. 여동생 온영(韞媖, 1909년 ~ 1925년), 동복남매. 온화(韞和, 개명:金欣如, 1911년 ~ 2001년), 동복남매. 온영(韞穎, 개명:金蕊秀, 1913년 ~ 1992년), 동복남매. 온한(韞嫻, 개명:金韞嫻, 1914년 ~ 2003년) 온형(韞馨, 개명:金蕊潔, 1917년 ~ 1998년) 온오(韞娛, 개명:溥韞娛, 1919년 ~ 1982년) 온환(韞歡, 개명:金志堅, 1921년 ~ 2004년) 부인 효각민황후 완용(孝恪愍皇后 郭布羅婉容, 1906년 11월 13일 ~ 1946년 6월 20일), 1922년 결혼. 숙비 악이덕특씨 문수(淑妃 鄂爾徳特文繡, 1909년 ~ 1953년), 1922년 결혼, 1931년 이혼. 상귀인 담옥령(祥貴人 谭玉龄, 1920년 ~ 1942년), 1937년 결혼. 광서제의 진비의 조카 복귀인 이옥금(福貴人 李玉琴, 1928년 ~ 2001년), 1943년 결혼, 1957년 이혼. 효예민황후 이숙현(孝睿愍皇后 李淑賢, 1925년 ~ 1997년), 1962년 결혼. 청조 구황실에서 추존 양자 유얀(1918년 5월 17일 ~ 1999년 1월 18일) 자서전 《나의 전반생》(, )은 유일한 자서전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정치범으로 재교육을 받던 1957년 후반부터 1년여 동안 20만 자의 초고를 집필하였고, 최종적으로 1964년 3월에 정식 출판되었다. 2007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1964년판 당시에 삭제된 16만 자가 새롭게 포함된 완전판이 출판되었다. 푸이의 이혼 및 사생활과 극동국제군사법정의 재판 등의 내용이 새롭게 추가됐다. 관련 도서 《자금성의 황혼》(Twilight in the Forbidden City), 레지널드 존스턴 저, 빅터 골란츠 사, 1934년 3월. 영화 1986년, 《훠롱》(火龍), 리한샹(李翰祥) 감독. 1987년,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감독. 각주 내용주 출전 외부 링크 1906년 출생 1967년 사망 청나라의 황제 만주국 관련자 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 폐위된 중국의 황제 만주사변의 인물 제2차 세계 대전의 군주 전쟁 중 포로가 된 군주 전범혐의 피기소자 중화민국 대륙 시기 사람 중국공산당원 중국의 일제 부역자 일본에 거주한 중국인 잉글랜드에 거주한 중국인 스코틀랜드에 거주한 중국인 소련에 거주한 중국인 대훈위 국화장경식 수훈자 암으로 죽은 사람 20세기 중국 사람 유군 20세기 중국의 군주 시베리아 억류자 중국의 파시스트
|
7081
|
https://ko.wikipedia.org/wiki/%EA%B5%AC
|
구
|
구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수학 9(九)는 8과 10 사이의 자연수이다. 구(溝)는 1032를 의미하는 큰 수이다. 양(穰)의 만 배이다. 구(球)는 3차원 도형이다. 단위 구(句)는 하나 이상의 낱말이 모여 절이나 문장의 일부를 이루는 단위이다. 구(區)는 행정 구역 중의 하나이다. 구(具)는 시체를 세는 단위이다. 인명 구(丘/具/邱)는 한국의 성씨 중 하나이다. 구(丘, ? ~ ?)는 전한 중기의 관료이다. 구(璆, ? ~ ?)는 중국 동오의 관료이다. 구 (정위) 기타 구는 비둘기를 뜻하는 한자어다. 구는 구(具)구(咎)구(垢) 등의 여러 불교 용어이다. 구(灸)는 뜸을 이르는 말이다. 龜는 龜부의 한자로, '땅이름 구'라고 읽으며 '거북 귀', '터질 균'으로도 읽는다. 같이 보기
|
103765
|
https://ko.wikipedia.org/wiki/%EC%83%81%ED%95%98%EC%9D%B4%EC%96%B4
|
상하이어
|
상하이어() 또는 상해어 또는 상하이 셴화() 또는 후어()는 중국어의 대표적인 방언의 하나인 우어의 한 갈래이다. 상하이에서 주로 사용되지만, 최근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상하이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많은 학습서가 출판되었다. 2개의 성조만 존재한다(높음, 낮음)고 하나, 전통적으로는 5가지로 나뉜다. 상하이어는 1,400만명의 사용자가 사용하는 언어로 우어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언이다. 성모 각주 같이 보기 우어 중국어의 방언 상하이시의 문화 성조어 SVO형 언어
|
125438
|
https://ko.wikipedia.org/wiki/%EB%B9%84%EC%98%A4%ED%86%B1
|
비오톱
|
비오토프()는 도심에 존재하는 인공적인 생물 서식 공간을 말한다. 생명을 나타내는 접두사 bio와 그리스어로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 topes의 합성어로 약 100년 전에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에 의해서 제창되었다. 자연 생태계와 동일한 의미로도 쓰이나, 그것보다 구체적인 지역과 생물군으로 성립된 생태계라고 할 수 있다.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이동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숲, 가로수, 습지, 하천, 화단 등 지역생태계 향상에 기여하는 작은 비오토프들은 단절된 생태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기법으로는 다른 나라에서 실시되었던 Biotop Network 계획과, 근자연형 하천공법, 다자연형 하천공법이 있다. 1992년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루의 유엔 환경개발회의에서 체결된 생물의 '다양성보전 조약' 이후 일본과 유럽 지역에서 비오토프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고, 한국도 비오토프 기법을 이용해 한강 생태계보전과 청주의 생태도시 조성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환경
|
46528
|
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AA%A8%EB%85%B8%EC%86%8C%ED%94%84%20%28%EB%A0%88%EB%8B%8C%EA%B7%B8%EB%9D%BC%EB%93%9C%EC%A3%BC%29
|
로모노소프 (레닌그라드주)
|
로모노소프(, )는 레닌그라드주의 도시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서쪽으로 39km지점에 위치하고 핀란드만의 남해안에 위치한 도시이고, 코틀린섬의 크론슈타트시에서 가깝다. 인구는 4만2,000명(1992년)이다. 이전에는 오라니옌바움(Ораниенбаум, 독일어로 "오렌지 나무"라는 뜻)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것은 원래 황실 궁전의 식물원을 부른 이름이었다. 1948년에 과학자 미하일 로모노소프를 기념하기 위해 로모노소프로 개칭했다. 1707년 표트르 대제는 충신 알렉산드르 멘시코프에게 부근의 토지를 주었다. 멘시코프는 1710년부터 1727년에 걸쳐 여기에서 큰 궁전을 건설했다. 1762년에는 에카테리나 2세가 별장을 건설했다. 오라니옌바움은 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출생지이다. 자매 도시 핀란드 올란드 제도 마리에함 미국 매사추세츠주 프레이밍햄 미국 워싱턴주 애나코티스 독일 헤센주 오버우어젤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러시아의 도시 레닌그라드주
|
94685
|
https://ko.wikipedia.org/wiki/%EC%82%BF%ED%8F%AC%EB%A1%9C%20TV%ED%83%80%EC%9B%8C
|
삿포로 TV타워
|
삿포로 TV타워()은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 주오구에 있는 지상 147.2m의 텔레비전 전파탑이다. 1957년에 지어졌으며, 지하에는 식당, 1층에는 오락실이, 2층에는 다목적 홀, 3층에는 기념품 판매점이 있다. 지상 90.38미터 부근에 전망대가 있으며, 이곳에도 매점 같은 관광객의 편의를 위한 시설이 존재한다. 전망대 밑에는 전광 시계가 있는데 1961년 마쓰시타 전기산업의 기증으로 전망대 지상 65미터 부근에 설치되었다. 당시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시계를 설치하면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생각 때문에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차원에서 설치되었다고 한다. 전광 시계는 1998년과 2006년에 개보수 공사를 해 현재는 발광 다이오드제이다. 시계 밑 광고에는 초창기 'National'이란 로고가 있었으나 마쓰시타 전기산업이 내셔널 브랜드를 폐지함에 따라 2006년 'Panasonic'으로 변경되었다. 삿포로 TV탑은 초창기 시내에 고층 건물이 적고, 삿포로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시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시민이나 관광객이 방문하고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서 몇 시간 동안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삿포로 TV탑은 삿포로 시내에 더 높은 고층 건물이 들어서면서 한 때 얼마 안 되는 고층 건물들 중의 하나로서의 위상도 사라졌다. 현재는 눈축제 개최 시기를 제외하면 관광객 수는 초창기보다 적은 편이지만, 여전히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는 시설이다. 외부 링크 삿포로 TV탑 공식 홈페이지 일본의 방송탑 주오구 (삿포로시)의 건축물 삿포로시의 관광지 1957년 작품 1957년 완공된 건축물
|
217717
|
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A6%B0%EB%9E%80%EB%93%9C%ED%95%B4
|
그린란드해
|
그린란드해()는 북극해에 접한 북대서양의 바다이다. 그린란드, 스발바르 제도, 얀마옌섬, 아이슬란드, 덴마크 해협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면적은 1,205,000km2, 평균 수심은 1,450m이다. 가장 깊은 곳은 그린란드와 스발바르 제도 사이의 프람 해협에 있는 몰리 해연으로 그 깊이는 5600m이다. 대서양의 해역 북극해의 해역 유럽의 해역 북아메리카의 해역 그린란드의 해역 노르웨이의 해역 아이슬란드의 수역
|
145498
|
https://ko.wikipedia.org/wiki/%EC%83%89%2C%20%EA%B3%84
|
색, 계
|
《색, 계》(, )는 리안이 감독한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중화민국의 합작 영화이다. 리안은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이 영화로 두 번째 황금 사자상을 수상하였다. 1979년 중국 작가 장아이링이 발표한 동명의 중편소설이 원작이다. 1939년부터 1940년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대략적인 근거로 하고 있다. 20분에 달하는 적나라한 정사 장면으로 상당수 국가에서 삭제되어 개봉되었다. 여주인공의 음모와 남자 주인공 양조위의 음낭이 노출되어 논란에 휩싸였다. 대한민국에서는 18세 이상 관람가로 개봉되었으며 삭제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NC-17 등급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30분가량 삭제되었다. 출연진 양조위 - 이모청(易默成) / 이 선생 역 탕웨이 - 왕자즈(王佳芝) / 막 부인 역 진충 - 이 부인 역 왕리훙 - 쾅위민(鄺裕民) 역 퉈쭝화 - 우 노인(老吳) 역 주즈잉 - 라이슈진(賴秀金) 역 가오잉쉬안 - 황레이(黃磊) 역 커위룬 - 량룬성(梁潤生) 역 롼더창 - 어우양링원(歐陽靈文) / 막 선생 역 첸자러 - 차오더시(曹德禧) 선배 역 쑤옌 - 마 부인 역 허싸이페이 - 샤오 부인 역 쑹루후이 - 자즈의 이모 역 판광야오 - 창 비서 역 류제 - 량 부인 역 다케시타 아키코 - 일본인 종업원 역 아누팜 케르 - 보석상 직원 역 제작진 의상 : 판 라이 같이 보기 정핑루 외부 링크 2007년 영화 관화 영화 작품 광둥어 영화 작품 일본어 영화 작품 힌디어 영화 작품 리안 감독 영화 미국의 에로 영화 미국의 첩보 영화 미국의 스릴러 영화 대만의 스릴러 영화 중국의 스릴러 영화 첩보 영화 중일 전쟁 영화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중국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1938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1942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 홍콩을 배경으로 한 영화 상하이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 상하이시에서 촬영한 영화 말레이시아에서 촬영한 영화 황금사자상 수상작 저장성에서 촬영한 영화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영화 음악
|
117919
|
https://ko.wikipedia.org/wiki/%EB%94%94%EC%98%A4%EB%84%A4
|
디오네
|
디오네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디오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다. 디오네는 토성의 위성이다. 같이 보기
|
200523
|
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C%8A%A4%ED%81%AC%EB%A3%A8%EC%8B%9C%EC%8A%A4
|
라스크루시스
|
라스크루시스(Las Cruces, )는 미국 서부 뉴멕시코주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 97,618(2010). 뉴멕시코주 남부, 도냐아나 군의 군청소재지이다. 지명은 스페인어로 십자가라는 뜻이다. 해발고도 1,219m의 건조한 고원지대에 있으며, 주변에서는 관개농업과 목축을 하고 있다. 뉴멕시코 주립 대학교(New Mexico State University:NMSU)가 있는 대학도시로, 뉴멕시코주 남부의 교육, 문화의 중심지이다. 라스크루시스는 앨버커키 다음가는 뉴멕시코주 제2의 도시인데,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텍사스주의 엘패소이다. 엘패소에서 서북쪽으로 약 42마일(약 65km) 떨어져 있고, 앨버커키에서는 남쪽으로 약 225마일(약 340km) 떨어져 있어, 경제, 문화적으로는 주는 다르지만 엘패소와 더 밀접한 관계에 있다. 또한 멕시코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히스패닉계 인구 비율이 51.7%로 높은 편이다. 고용면에서 볼때 주요기관은 인근지역에 있는 연방정부 소속인 화이트 샌드 미사일 시험장(White Sands Missile Range)과 화이트 샌드 시험소(White Sands Test Facility)가 된다. 동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 있는 웅장한 오르간 마운틴(Organ Mountains) 산이 도시 풍경에 한 몫을 차지한다. 인구 기후 출신 인물 클라이드 톰보 각주 외부 링크 라스크루시스 시 공식 홈페이지 뉴멕시코주의 도시 뉴멕시코주의 군청 소재지
|
44821
|
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A1%9C%EB%B0%A9%EC%8A%A4
|
프로방스
|
프로방스(, , )는 과거 로마 제국의 속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에 기원을 둔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서부 일부를 가리킨다. 프로방스에는 유사 이전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나르보넨시스의 일부인 동안 내륙에는 켈트족이, 해안지역에는 기원전 600년경부터 그리스인들과 페니키아인들이 정착했으며, 이 시기의 가장 큰 도시는 마실리아(현대 마르세유)였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로마인들의 진출이 시작되어 결국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1032년부터 1246년까지 이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으며, 1246년 프랑스 내의 영주 국가가 되었다. 1481년 루이 11세에게 양도된 프로방스는 1486년에 이르러 완전히 프랑스 왕가의 영토로 흡수된다. 프로방스 내에서도 오랑주는 1672년까지 오라녜나사우가에 속해 있었으며, 아비뇽의 콩타 브내생은 1791년까지 교황령으로 남아 있었다. 1860년까지 니스와 망통은 프루 벤 소의 일부로 간주되지 않았다. 현재 프로방스는 오시타니아의 동부 지역으로, 이 지역의 방언인 프로방스어는 프레데릭 미스트랄에 의해 구어 위주로만 사용되던 파투아에서 문어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프로방스어는 중세로부터의 요소를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렝고두시오어와 함께 가장 중요한 오크어 방언이다. 프로방스는 이전부터 현재의 프로방스알프스코트다쥐르 레지옹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은 지역 전부 또는 일부로 구성된다. 프로방스 백국 프로방스 후작령 (드롬주와 보클뤼즈주) 니스 백국 도피네 (오트잘프주) 브네생 백작령 오랑주 공국 탕드와 라브리그의 코뮌 프로방스의 언어로는 (행정・종교 언어로써) 라틴어와 고대 프로방스어가 있었으며, 이 두 언어는 이전에 현대 오크어나 프로방스어로도 불리던, 알팽, 마리팀, 니스, 론, 가팡세 등의 지방에서 쓰이던 프로방스어와 비바로알팽어 방언들로 구성된 오크어(또는 옥시탕-랑그도)로 대체되었다. 21세기부터는 프랑스어가 주로 사용되나 아직까지 남아있는 오크어 화자들과 단체에 의하여 오크어는 여전히 쓰이고 있다. 외부 링크 Official Provence Alpes Côte d'Azur (PACA) Tourist Board Official Bouches-du-Rhône Tourist Board Official Vaucluse Tourist Board Aix-en-Provence Tourist Office 프랑스의 프로뱅스
|
162085
|
https://ko.wikipedia.org/wiki/%EC%88%9C%EC%96%91%EC%A0%84%ED%95%A8
|
순양전함
|
순양전함(巡洋戰艦) 또는 전투순양함'(Battlecruiser)은 영국 해군에 의해 처음 소개된 20세기 전반의 군함이다. 이들은 장갑순양함으로부터 발전되었고, 순양함과 전함 사이의 영역에 해당된다. 일반적으로, 순양전함은 배수량 및 배치나 무장에 있어서 전함과 유사하나, 장갑의 상당부분과 화력의 일부를 줄이는 대신 속도를 향상시켰고, 이는 더 강력한 엔진과 날씬한 선체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은 여전히 주요 군함으로 분류될 충분한 화력을 갖추었으나, 방호면에서는 전함의 화력을 이겨낼 수 없으므로 속도를 이용한 일격이탈 전법을 쓰지 않는다면 전함과의 전투를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순양함 이하의 함선들에게는 압도적인 화력과 속도, 충분한 방호력으로 확실한 우위를 가진다. 본래 영국에서만 사용하던 용어였으나, 현재는 순양함과 전함사이에 있는 함선, 예를 들면 대형 순양함이나 포켓전함 같은 경우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같이 보기 고속전함
|
46487
|
https://ko.wikipedia.org/wiki/%EB%A5%98%EC%A7%84%20%28%EA%B8%B0%EC%97%85%EC%9D%B8%29
|
류진 (기업인)
|
류진(柳津, 1958년 3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주)풍산의 현직 회장이다. 본관은 풍산 류씨이다. 1982년 풍산에 입사하여 1997년 대표이사를 역임했고, 2000년 4월 회장에 취임했다. 전국의 몇 학교의 이사장을 겸직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풍산고등학교의 이사장을 들 수 있다. 2011년 2월 25일 한국비철금속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IWCC(International Wrought Copper Council)의 회장도 겸직하고 있다. 참조 외부 링크 풍산 최고경영자 소개 네이트닷컴 인물검색 1958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기업인 풍산그룹 풍산 류씨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전국경제인연합회
|
2281
|
https://ko.wikipedia.org/wiki/%ED%86%B5%ED%95%A9%20%EC%9E%90%EC%9B%90%20%EC%8B%9D%EB%B3%84%EC%9E%90
|
통합 자원 식별자
|
통합 자원 식별자(, URI)는 인터넷에 있는 자원을 나타내는 유일한 주소이다. URI의 존재는 인터넷에서 요구되는 기본조건으로서 인터넷 프로토콜에 항상 붙어 다닌다. URI의 하위개념으로 URL, URN 이 있다. 표현방법 일반 URI와 절대 URI 참조 문법은 RFC 2396에 처음 정의되었으며, 1998년 8월 출판되었으며, RFC 3986로 완성되어, 2005년 1월 출판되었다. 일반 URI는 다음과 같은 형태를 나타낸다: scheme:[//[user[:password]@]host[:port]][/path][?query][#fragment] 예 다음은 2개의 예시 URI와 구성 부분을 나타내고 있다. hierarchical part ┌───────────────────┴────────────────────┐ authority path ┌───────────────┴──────────────┐┌───┴────┐ abc://username:password@example.com:123/path/data?key=value#fragid1 └┬┘ └───────┬───────┘└────┬─────┘└─┬┘ └───┬────┘└───┬──┘ scheme user information host port query fragment urn:example:mammal:monotreme:echidna └┬┘ └──────────────┬───────────────┘ scheme path 역사 URI와 URL은 역사를 함께 공유한다. 1994년 팀 버너스 리가 하이퍼텍스트를 제안하면서 하이퍼링크의 대상이 되는 자원을 대표하는 짧은 문자열로 URL의 개념을 암묵적으로 도입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하이퍼텍스트 이름" 또는 "문서 이름"으로 불렀다. 같이 보기 웹사이트 URL IRI 각주 외부 링크 URI Schemes – IANA-maintained registry of URI Schemes 응용 계층 프로토콜 인터넷 프로토콜 인터넷 표준 시맨틱 웹 URL
|
73820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D%8C%8C%ED%8B%B0%ED%95%98
|
알파티하
|
수라 "개경장(알 파티하)"은 이슬람의 성서 꾸란의 첫 번째 장이다. 이 장은 무슬림의 일일기도 때, 평균적으로 무슬림들이 매일매일 하루에 5번씩 기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랍어로 암송되는 것이다. 아랍어 원문 بِسْمِ ٱللَّهِ ٱلرَّحْمَـٰنِ ٱلرَّحِيمِ ٱلْحَمْدُ لِلَّهِ رَبِّ ٱلْعَـٰلَمِينَ ٱلرَّحْمَـٰنِ ٱلرَّحِيمِ مَـٰلِكِ يَوْمِ ٱلدِّينِ إِيَّاكَ نَعْبُدُ وَإِيَّاكَ نَسْتَعِينُ ٱهْدِنَا ٱلصِّرَ ٰط ٱلْمُسْتَقِيمَ صِرَ ٰطَ ٱلَّذِينَ أَنْعَمْتَ عَلَيْهِمْ غَيْرِ ٱلْمَغْضُوبِ عَلَيْهِمْ وَلاَ ٱلضَّاۤلِّينَ 전문[개경장(開經章)] 1:1 가장 자비로우시고 가장 자애로우신 분, 하나님의 이름으로. 1:2 온누리의 주 하나님께 모든 찬미가 있습니다(모든 찬미를 드립니다). 1:3 당신께서는 가장 자비로우시고 가장 자애로우신 분. 1:4 심판의 날의 주님. 1:5 저희는 당신만을 흠숭(欽崇, 최고의 숭배와 경배)하고, 당신께만 도움을 간구합니다. 1:6 부디 저희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1:7 그 길은 당신의 노여움(진노)을 산 이들의 길이 아니고, 방황하는 이들의 길도 아닙니다. 바로 당신께서 은총을 내리셨던 이들의 길이니 [그 길로 이끌어 주소서]. 참고 사항 이 수라는 많은 하디스에서 꾸르안의 어머니로 칭해지기도 하였다. Arabic Holy Quran (14mb).pdf 수라
|
260644
|
https://ko.wikipedia.org/wiki/%EA%B8%80%EB%A6%AC%EC%BD%94%EC%A0%A0
|
글리코젠
|
글리코젠() 또는 글리코겐()은 사람, 동물, 균류, 세균에서 에너지 저장의 한 형태로 작용한다. 포도당(glucose)을 기본으로 하며 복잡한 가지 구조를 가지고 있는 다당류, 중합체이다. 글리코젠의 구조는 체내 포도당의 주요 저장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글리코젠은 두 가지 장기 에너지 저장 형태 중 하나로 기능하며, 다른 한 가지 형태는 지방 조직(즉, 체지방)의 트라이글리세라이드이다. 사람에서 글리코젠은 주로 간과 골격근의 세포에서 만들어지고 저장된다. 간에서 글리코젠은 장기 무게의 5~6%를 차지할 수 있고, 70 kg의 체중을 가진 성인의 간은 약 100~120 g의 글리코젠을 저장할 수 있다. 골격근에서 글리코젠의 낮은 농도(근육 질량의 1~2%)로 발견되며, 70 kg의 체중을 가진 성인의 골격근은 약 400 g의 글리코젠을 저장한다. 체내에 특히 골격근과 간에 저장되는 글리코젠의 양은 주로 신체 활동, 정액,장애대사율, 식습관에 따라 차이가 난다. 소량의 글리코젠은 콩팥, 적혈구, 백혈구 및 뇌의 신경교세포를 비롯한 다른 조직과 세포에서도 발견된다. 임신 중에 자궁은 배아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글리코젠을 저장한다. 사람의 혈액 속에는 대략 4 g의 포도당이 항상 존재한다. 단식 중인 경우 간과 골격근에 저장된 글리코젠을 소비하기 때문에 혈당량은 일정 수준으로 유지된다. 골격근에 글리코젠을 저장하는 것은 근육에는 없다. 근육에서 글리코젠의 분해는 근육의 포도당 흡수를 방해하여 다른 조직에서 사용할 수 있는 혈당량을 증가시킨다. 간에 글리코젠을 저장하는 것은 신체 전반에 걸쳐, 특히 중추신경계에 사용하기 위한 포도당의 저장소로 역할을 한다. 사람의 뇌는 단식하거나 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에서 혈당량의 약 60%를 소비한다. 글리코젠은 식물에서 에너지 저장 기능을 하는 포도당의 중합체인 녹말과 화학적으로 유사하다. 글리코젠은 아밀로펙틴(녹말의 구성 성분)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녹말보다 광범위하게 가지가 나있고, 보다 조밀하다. 글리코젠과 녹말은 둘 다 건조 상태에서는 흰색 분말이다. 글리코젠은 많은 세포 유형에서 세포기질/세포질에서 과립의 형태로 발견되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글리코젠은 포도당에 대한 갑작스런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신속하게 동원될 수 있는 에너지 비축물을 형성하지만, 트라이글리세라이드(지질의 한 종류) 보다 덜 조밀하다. 글리코젠은 많은 기생성 원생동물에서도 에너지 저장 물질로 발견된다. 구조 글리코젠은 약 8~12개의 포도당 잔기마다 가지를 가지고 있는 분지형의 생체고분자이다. 포도당 단위체들은 α(1→4) 글리코사이드 결합에 의해 선형으로 연결된다. 가지는 새로운 가지의 첫번째 포도당과 줄기 사슬의 포도당 사이에 α(1→6) 글리코사이드 결합으로 연결된다. 글리코젠이 합성되는 방식 때문에 모든 글리코젠 과립은 그 핵심에 글리코제닌 단백질을 가지고 있다. 글리코제닌은 글루코실 전이효소(glucosyltransferase) 활성을 가지고 있는 단백질로, 글리코젠의 중심부에 이합체로 존재한다. 글리코제닌은 글리코젠의 한쪽 환원 말단에 공유결합된 상태로 과립 안에 묻혀 있다. 글리코젠이 가지고 있는 많은 수의 비환원 말단들은 글리코젠의 빠른 합성과 분해를 가능하게 한다. 근육, 간 및 지방세포의 글리코젠은 글리코젠 1 g 당 0.45 밀리몰(18 mg)의 칼륨과 연관된 글리코젠의 부분 당 3 또는 4 부분의 물로 구성된 수화된 형태로 저장된다. 기능 간 탄수화물 또는 단백질을 함유한 식사가 섭취되고 소화되면 혈당량이 증가하고 이자에서 인슐린이 분비된다. 간문맥을 거쳐 나온 혈당은 간세포로 들어간다. 인슐린은 간세포에 작용하여 글리코젠 생성효소를 포함한 여러 효소들의 작용을 자극한다. 포도당 분자는 인슐린과 포도당이 충분하게 남아있는 한 글리코젠 사슬에 첨가된다. 식사 후에 간은 간에서 방출되는 것보다 많은 포도당을 혈액으로부터 흡수한다. 음식물이 소화되고 포도당 수치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인슐린 분비가 감소하고, 글리코젠 합성이 중단된다. 에너지가 필요할 때 글리코젠은 분해되어 다시 포도당으로 전환된다. 글리코젠 포스포릴레이스는 글리코젠 분해의 주요 효소이다. 다음 8~12 시간 동안 간의 글리코젠으로부터 분해된 포도당은 신체의 나머지 부분에서 연료로 사용되는 혈당의 주요 공급원이다. 이자에서 생성되는 또 다른 호르몬인 글루카곤은 인슐린과 길항작용을 한다. 인슐린의 수치가 정상보다 낮아지면(혈당량이 정상 범위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글루카곤의 분비량이 증가하고 글리코젠의 분해와 포도당신생합성(다른 공급원으로부터 포도당의 생성)을 자극한다. 근육 골격근의 글리코젠은 근육 세포에 사용가능한 포도당의 즉각적인 예비 공급원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글리코젠을 소량 포함하는 다른 세포들도 글리코젠을 국지적으로 사용한다. 근육 세포는 포도당을 혈액으로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포도당 6-포스파테이스(포도당 6-인산가수분해효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근육 세포에 저장된 글리코젠은 근육 세포 내에서만 사용될 수 있으며 다른 세포에 공유되지 않는다. 이는 간세포와 대조되는데 간세포는 필요에 따라 저장된 글리코젠을 포도당으로 분해하여 혈류를 통해 다른 장기에 연료로 보낸다. 역사 글리코젠은 클로드 베르나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베르나르의 실험은 간이 환원당을 생성시킬 수 있는 물질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857년까지 베르나르는 "la matière glycogène" 또는 "당 형성 물질(sugar-forming substance)" 이라고 불리는 물질의 분리에 대해 설명했다. 간에서 글리코젠이 발견된 직후 A. 산손(A. Sanson)은 근육 조직에도 글리코젠이 있음을 발견했다. 글리코젠의 실험식 (C6H10O5)n 은 1858년 아우구스트 케쿨레에 의해 확립되었다. 물질대사 합성 글리코젠의 합성은 글리코젠의 분해와 달리 흡열 반응(에너지의 투입이 필요함)이다. 글리코젠 합성을 위한 에너지는 UDP-포도당 피로포스포릴레이스에 의해 UTP와 포도당 1-인산이 반응해서 형성되는 UDP-포도당에서 비롯된다. 글리코제닌은 호모다이머(homodimer)이기 때문에 글리코젠의 환원 말단을 위한 2개의 티로신 앵커(anchor)를 갖는 단백질인 글리코제닌에 의해 글리코젠의 초기 합성 반응은 UDP-포도당으로부터 포도당이 글리코제닌으로 전이됨으로써 일어난다. 티로신 잔기에 약 8개의 포도당 분자가 첨가된 후, 글리코젠 생성효소는 UDP-포도당을 사용하여 글리코젠 사슬의 환원 말단에 α(1→4) 글리코사이드 결합으로 포도당을 첨가함으로써 글리코젠 사슬을 첨차적으로 늘린다. 글리코젠 분지효소(glycogen branching enzyme)는 글리코젠 가지 사슬의 비환원 말단으로부터 6~7개의 포도당 말단 부분을 글리코젠 분자의 보다 안쪽에 있는 포도당 잔기의 6번 탄소(C-6)의 하이드록시기로 옮기는 것을 촉매한다. 글리코젠 분지효소는 적어도 11개의 잔기를 갖는 사슬에만 작용할 수 있고, 동일한 사슬 또는 인접한 사슬로 새로운 가지를 전달할 수 있다. 분해 글리코젠은 글리코젠 가인산분해효소(글리코젠 포스포릴레이스)에 의해 사슬의 비환원 말단으로부터 분해되어 포도당 1-인산을 생성한다. 생체 내에서 인산과 포도당 1-인산의 비율이 대개 100을 초과하기 때문에 가인산분해는 글리코젠 분해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런 다음, 포도당 1-인산은 포스포글루코뮤테이스에 의해 포도당 6-인산으로 전환된다. 글리코젠의 α(1→6) 가지를 제거하고 사슬을 선형 중합체로 재형성시키기 위해서 글리코겐 탈분지효소(glycogen debranching enzyme)가 필요하다. 생성된 포도당 6-인산(G6P)은 다음의 세 가지 가능한 운명을 갖는다. 포도당 6-인산은 해당과정에서 계속 대사될 수 있으며 연료로 사용될 수 있다. 포도당 6-인산은 포도당 6-인산 탈수소효소를 통해 오탄당 인산 경로로 들어가서 NADPH와 오탄당을 생성할 수 있다. 간과 콩팥에서 포도당 6-인산은 포도당 6-인산가수분해효소(포도당 6-포스파테이스)에 의해 포도당으로 탈인산화될 수 있는데, 이는 포도당신생합성 경로의 마지막 단계이다. 임상 관련성 글리코젠 대사 장애 글리코젠 대사가 비정상적으로 일어나는 가장 흔한 질환은 비정상적인 인슐린 양 때문에 간의 글리코젠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되거나 고갈될 수 있는 당뇨병이다. 정상적인 포도당 대사의 회복은 보통 글리코젠 대사를 정상화시킨다. 과도한 인슐린에 의해 야기되는 저혈당에서는 간의 글리코젠 수치가 높은데, 높은 인슐린 수치는 정상적인 혈당량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글리코젠 분해를 방해한다. 글루카곤의 사용은 이러한 유형의 저혈당에 대한 일반적인 치료법이다. 다양한 선천성 대사 이상은 글리코젠 합성이나 글리코젠 분해에 필요한 효소의 결핍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들을 총칭하여 당원병(glycogen storage disease)이라고 한다. 글리코젠 고갈과 지구력 운동 마라톤 선수, 크로스컨트리 스키 선수, 사이클 선수와 같은 장거리 운동 선수들은 종종 글리코젠 고갈을 경험한다. 글리코젠 고갈은 충분한 탄수화물의 섭취 없이 장시간 운동을 한 후에 운동선수의 글리코젠 저장량이 거의 바닥 났을 때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을 "히팅 더 월(hitting the wall)"이라고 한다. 마라톤의 경우 선수와 코스에 따라 다르지만, 마라톤 선수들은 보통 약 32 km 지점에서 이 현상을 경험한다. 글리코젠의 고갈은 가능한 세 가지 방법으로 예방할 수 있다. 첫째, 운동 중에 혈당으로의 전환률이 가장 높은 탄수화물(고혈당지수)을 지속적으로 섭취한다. 이 전략의 최선의 결과는 최대 80% 이상의 심장 박동에서 소비되는 포도당의 약 35%를 대체하는 것이다. 둘째, 지구력 적응 훈련과 특수 식이 요법(예: 단식 저강도 지구력 훈련)을 통해 신체는 I 형 근육 섬유를 조절하여 연료의 사용 효율과 작업 부하 용량을 모두 향상시켜 탄수화물의 사용을 분리시키고 연료로 사용되는 지방산의 비율을 증가시킬 수 있다. 셋째, 운동이나 식이의 결과로 글리코젠의 저장량을 고갈시킨 후에 많은 양의 탄수화물을 섭취함으로써 근육 내의 글리코젠 저장 용량을 증가시킬 수 있다. 이 과정을 탄수화물 로딩(carbohydrate loading)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탄수화물 공급원의 혈당지수는 일시적인 글리코젠 고갈의 결과로 인한 근육의 인슐린 감수성이 증가하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 글리코젠 부채를 경험할 때, 운동선수들은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피로를 경험하기도 한다. 참고로 세계 최고의 프로 사이클 선수들은 위의 세 가지 전략을 사용하여 글리코젠 고갈의 한계에 도달해 4~5시간 동안 경기를 한다. 고강도 운동 후에 운동 선수가 탄수화물과 카페인을 함께 섭취하면, 글리코젠의 저장량이 보다 빠르게 보충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글리코젠 축적에 임상적으로 유의미한 효과가 있는 카페인의 최소 투여량은 정해지지 않았다. 같이 보기 녹말 키틴 펩티도글리칸 글리코겐 저장질환 각주 외부 링크 Glycogen storage disease – McArdle's Disease Website 탄수화물 다당류 운동생리학 간장학 영양 당생물학
|
1516
|
https://ko.wikipedia.org/wiki/1%EC%9B%94%2027%EC%9D%BC
|
1월 27일
|
1월 2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7번째(윤년일 경우도 27번째) 날에 해당한다. 사건 98년 - 트라야누스가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다. 1945년 -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가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되다. 1989년 - 전두환 정부 시절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이 비리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 2010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 서해 백령도 NLL부근에 해안포를 발사하였다. 2011년 - 이광재 강원도지사가 대법원에서 직역형을 선고받고 도지사직을 잃게 되었다. 2019년 - 보이그룹 워너원이 마지막 콘서트 2019 Wana One Concert [ Therefore ]을 끝으로 활동을 마무리했다. 문화 1988년 - 서울 여의도에 대한민국 국회도서관이 완공되었다. 2010년 - 애플이 아이패드를 공개되었다. 2012년 - ia/이아가 발표되었다. 탄생 1756년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791년) 1775년 -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1854년) 1832년 - 영국의 수학자 루이스 캐럴. (~1898년) 1836년 - 오스트리아의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1895년) 1859년 -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 (~1941년) 1899년 - 캐나다의 여성 장수자이며 前 트뤼도 행정부 예하 별정행정관 섬 잉 펑. (~2011년) 1908년 - 대한민국의 극작가 이석훈. (~?) 1919년 - 미국의 배우 로스 배그더세리언. (~1972년) 1920년 - 일본의 파일럿 니시자와 히로요시. (~1944년) 1921년 - 미국의 배우 도나 리드. (~1986년) 1928년 - 동독의 정치인 한스 모드로. (~2023년) 1929년 - 이집트의 기업인 모하메드 알파예드. (~2023년) 1935년 - 대한민국의 법조 출신 정치인 이택돈. (~2012년) 1936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영덕. (~2023년) 1942년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최병국. 1943년 - 대한민국의 방송 작가 김수현. 1950년 - 대한민국의 배우이며 前 정치가 최종원. 1956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유지인. 1958년 - 대한민국의 배우 장미희. 1961년 - 미국의 배우 로이 피건 1962년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 김현희. 1964년 대한민국의 배우 이병준. 대한민국의 권투인 백현만. 1965년 대한민국의 배우 견미리. 대한민국의 배우 임대호. 1967년 - 대한민국의 기자 김대오. 1968년 - 대한민국의 배우 박상면. 1969년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박정태. 1970년 - 대한민국의 배우 임호. 1973년 - 대한민국의 배우 · 방송인 · 전 아나운서 최은경. 1976년 - 대한민국의 래퍼 조PD. 1979년 일본의 성우 고야마 기미코. 영국의 배우 로저먼드 파이크. 1984년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태완. 대한민국의 성우 최낙윤. 대한민국의 희극인 김지석. 1986년 - 대한민국의 성우 문유정. 1987년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선신. 미국의 가수 애슐리 그레이스. 1988년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조세희. 1989년 -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비비. 1991년 - 대한민국의 가수 예아라. 1993년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야야 사노고. 1996년 - 대한민국의 가수 제이유나. 1997년 - 일본의 축구 선수 이타쿠라 고. 1998년 - 대한민국의 가수 키노 (펜타곤). 1999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혜성. 2011년 -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임서원. 사망 98년 - 로마 제국의 황제 네르바. (30년~) 672년 - 76대 교황 교황 비탈리아노. (580년~) 1142년 - 송나라 남송 초기의 군인 악비. (1103년~) 1596년 -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 프랜시스 드레이크. (1540년~) 1731년 - 이탈리아의 악기제조자이자 피아노의 발명가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 (1655년~) 1814년 -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1762년~) 1901년 - 이탈리아의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1813년~) 1924년 - 일본의 정치인 하세가와 요시미치. (1850년~) 1987년 - 대한민국의 목사 김재준. (1901년~) 2008년 - 인도네시아의 전(前) 대통령 수하르토. (1921년~) 2009년 - 미국의 작가 존 업다이크. (1932년~) 2010년 - 미국의 소설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1919년~) 2017년 영국의 배우 존 허트. (1940년~) 프랑스의 배우 에마뉘엘 리바. (1927년~) 2018년 - 스웨덴의 기업인 잉바르 캄프라드. (1926년~) 2020년 - 대한민국의 소설가 최창학. (1941년~) 2021년 미국의 영화배우 클로리스 리치먼. (1926년~) 이란의 축구선수 메흐르다드 미나반드. (1975년~) 2022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리용무. (1925년~) 2023년 - 영국의 영화배우 실비아 사임스. (1934년~) 기념일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 같이 보기 전날: 1월 26일 다음날: 1월 28일 - 전달: 12월 27일 다음달: 2월 27일 음력: 1월 27일 모두 보기
|
218742
|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88%9C%EB%B4%89
|
김순봉
|
김순봉은 다음 사람을 가리킨다. 김순봉(金舜鳳, 1888년 ~ ?)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김순봉(1950년 ~ )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같이 보기
|
164461
|
https://ko.wikipedia.org/wiki/%EA%B4%91%EC%82%B0%EC%97%85
|
광산업
|
광산업(光産業)이란 광기술(光技術)을 중심으로 한 광통신, 광계측, 광정보 등의 산업 분야이며, 빛을 이용한 모든 산업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빛의 도시 광주광역시에서는 도시의 이미지에 맞는 첨단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광산업에는 "광섬유를 이용한 산업", "조명기기" 등이 포함된다. 같이 보기 광전자공학 산업
|
199980
|
https://ko.wikipedia.org/wiki/%EC%99%80%EC%9D%B4%EB%A7%A5%EC%8A%A4
|
와이맥스
|
와이맥스()는 점대점 연결에서 완전한 휴대형 접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먼 거리를 걸쳐 무선으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통신 프로토콜이다. WirelessMAN이라고도 불리는 IEEE 802.16 표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와이맥스"라는 이름은 표준의 상호 운용성과 순응을 제고시키기 위해 와이맥스 포럼이 2001년 6월에 만든 것이다. 이 포럼은 와이맥스를 "케이블, DSL의 대안으로서 라스트 마일(last mile)의 무선 광역 접근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표준 기반의 기술"로 설명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보통 와이브로로 알려져 있다. 용어의 정의 WiMAX는 IEEE 802.11 무선 랜 표준(Wi-Fi 얼라이언스에서 승인된)의 상호운용성 적용을 참조한 Wi-Fi와 비슷한 의미로 IEEE 802.16 무선 네트워크 표준(WiMAX 포럼이 승인한)의 상호운용성 적용을 참조한다. WiMAX 포럼 인증을 통하여 제조사는 WiMAX certified(고정형 또는 이동형)로써의 제품 판매를 허가해주며 따라서 같은 규격에 맞는 기타 인증 제품과의 상호운용성에 대해 검증을 확인한다. 고정 와이맥스(fixed WiMAX), 모바일 와이맥스(mobile WiMAX), 802.16d, 802.16e라는 용어는 자주 잘못 쓰인다. 올바른 정의는 다음과 같다: 802.16-2004 802.16-2004는 여러 모임이 표준을 개발하였으므로 802.16d라고도 한다. 휴대성을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주 "고정 와이맥스"라고도 불린다. 802.16e-2005 802.16e-2005는 802.16-2004의 수정판이며 802.16e로 줄여 말하기도 한다. 휴대성을 지원하므로 "모바일 와이맥스"라고도 부른다. 이용 와이맥스의 대역폭과 접근성을 이용해 다음과 같은 일들이 가능하다. 와이파이 핫스팟을 다른 곳이나 다른 인터넷 부분과 연결한다. 라스트 마일 광역 접근을 위해 DSL, 케이블의 대안으로 무선을 제공한다. 고속 데이터, 전자 통신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업의 지속적인 계획의 일부로서 다양한 원천의 인터넷 연결을 제공한다. 여러 곳으로 이동해 다니며 연결할 수 있게 도와 준다. 같이 보기 와이브로 참조 IEEE 802 무선 네트워크 도시권 통신망
|
160300
|
https://ko.wikipedia.org/wiki/%EC%84%B1%EB%85%95%EB%8C%80%EA%B5%B0
|
성녕대군
|
성녕대군 이종(誠寧大君 李褈, 1405년 8월 12일(음력 7월 9일) 출생 ~ 1418년 3월 20일(음력 2월 4일) 서거)은 조선의 왕자이며 태종의 6남이자 적4남으로 어머니는 원경왕후이다. 이름은 이종(李褈)이다. 성녕대군은 부모의 막내 자식으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성품이 공손하고 온순하였기 때문에 태종과 원경왕후가 다른 자녀들보다 각별히 사랑하였다. 생애 탄생 1405년(태종 5년) 7월 9일,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혼인 1411년(태종 11년) 성녕군(誠寧君)에 책봉되었고, 1414년(태종 14년) 1월,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진봉되었다. 이해 12월, 성억(成抑)의 딸인 경녕옹주 성씨와 혼인하였다. 1417년(태종 17년), 대광보국의 품계를 받았다. 사망 1418년(태종 18년) 1월 26일, 홍역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태종은 흥덕사의 승려들과 무당을 모아 기도하게 하고, 승정원에 명하여 점성사들을 불러 성녕대군의 길흉화복을 점치게 하였다. 형인 충녕대군은 직접 약재를 짓고 병구완을 하였으나 발병 10여일만인 2월 4일 사망하였다. 태종은 성녕대군을 잃은 슬픔에 식사를 물렸으며, 형조의 청에 따라 성녕대군의 병세를 점친 맹인과 무녀 중 일부를 벌주라고 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녕대군의 치료를 담당했던 의원 양홍달을 파직하고 원학 등의 직책을 강등하였다. 또한 대군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변계량과 효령대군, 충녕대군을 불러 귀신의 이치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 1418년(태종 18년) 3월 13일, 예조의 특별 건의로 변한국 소경공(卞韓國昭頃公)에 추봉되었다. 사후 성녕대군은 고양현 북쪽 산리동 진방(震方) 산기슭에 안장하였다. 성녕대군의 묘비문은 변계량이 지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성녕대군에게 입적되어 봉사손이 되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귀양가고, 그 해 10월 19일 그 일가가 멸문당하면서 안평대군은 성녕대군의 봉사손에서 제외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인 성녕대군의 아내 성씨 또한 연좌되어 경주로 유배되었다. 이후 1456년(세조 2년) 7월 7일, 세조의 특명으로 석방되었다. 1459년(세조 4년), 종부시(宗簿寺)에서 대군가가 대(代)가 끊기어 제사봉행을 못하고 있으므로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原川君) 의(宜)를 양자로 들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종손이 일곱 번이나 끊겼다. 훗날 이러한 사태를 딱하게 여긴 고종이 입직강관이었던 이승보에게 명하여 대군의 후손을 찾게 하고 전지(傳旨)를 내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입직강관 이승보의 농간으로 인하여 고종의 은전을 받지 못하고 가세가 계속 기울어 고양시 대자동에서 충청도 음성으로 하향까지 하였다. 이후 성녕대군의 사후 양가 후손들이 주경야독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대군의 16대손에 이르러 종손가에 여유로운 훈풍이 불면서 종사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 성녕대군 가문에 출계되었기 때문에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종회에서는 성녕대군의 양가 종손을 같은 종손(從孫)으로 예우하고 있다. 가족 관계 아버지 : 태종(太宗, 1367~1422) 어머니 :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 누나 : 정순공주(貞順公主, 1385~1460) 누나 : 경정공주(慶貞公主, 1387~1455) 누나 : 경안공주(慶安公主, 1393~1415) 형 :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 형 :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 형 : 세종(世宗, 1397~1450) 누나 : 정선공주(貞善公主, 1404~1424) 부인 :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창녕 성씨(昌寧 成氏) - 성억(成抑)의 딸 장남(양자) : 안평대군 용(安平大君 瑢) - 세종의 3남 차남(양자) : 원천군 의(原川君 宜) - 효령대군의 6남 성녕대군이 등장하는 작품 드라마 《용의 눈물》(KBS, 1996년~1998년, 배우:허정민) 《대왕 세종》(KBS, 2008년, 배우:백승도, 주영민) 《조선구마사》 (SBS, 2021년, 배우:문우진) 같이 보기 태종 원경왕후 세종 양녕대군 효령대군 각주 1405년 출생 1418년 사망 조선의 왕자 조선 태종의 자녀 조선 세종 효령대군파 홍역으로 죽은 사람
|
260779
|
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D%9D%AC%EC%95%88
|
강희안
|
강희안(姜希顔, 1419년 ~ 1464년)은 조선의 명신이며 서예가, 화가, 시인이다. 자는 경우,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이다. 심온의 외손자이자 소헌왕후의 조카로 세종은 그의 이모부이며 문종, 세조 등은 사촌이다. 친동생으로 강희맹이 있으며 또다른 사촌으로 노사신, 박중선 등이 있다. 1441년(세종 23년) 문과 식년시에 정과 13등위로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그림에 능했을 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다. 세종이 옥새의 글씨를 맡길 정도로 당시에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만년에는 시·서·화로 소일하였으나 천기(賤技)라 하여 타인의 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집현전에서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에 대한 해석을 붙이는 일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용비어천가》에 대한 주석을 붙이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시·글씨·그림의 3절로서 이름이 높았다. 대표작으로 《고사관수도》가 있으며, 저서로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양화소록》이 있다. 가족 관계 증조부 : 강시(姜著) 할아버지 : 강회백(姜淮伯) 아버지 : 강석덕(姜碩德) 어머니 : 심온(沈溫)의 딸 남동생 : 강희맹(姜希孟) 여동생 : 영빈강씨 - 세종의 후궁 전처 : 이곡(李谷)의 딸 후처 : 김중행(金仲行) 장녀 : 조중휘(趙仲輝)에게 출가 외손자 : 조광유(趙光裕) 외손자 : 조광작(趙光綽) 외손자 : 조광진(趙光震) 외손녀 : 나이동(羅異同)에게 출가 차녀 : 송윤종(宋胤宗)에게 출가 삼녀 : 김맹강(金孟鋼)에게 출가 외손자 : 김곤(金琨) 외손자 : 김위(金瑋) 외손자 : 김필(金珌) 사녀 : 어맹렴(魚孟濂)에게 출가 외손자 : 어숙정(魚叔貞) 외손녀 : 조복견(趙福堅)에게 출가 외손녀 : 김원복(金元福)에게 출가 외손녀 : 이언박(李彦博)에게 출가 외조부 : 청천부원군 심온(沈溫) 외조모 : 안천보(安天保)의 딸 이모 : 소헌왕후 심씨 이숙 : 제4대 세종 사촌 : 제5대 문종 사촌 : 제7대 세조 이숙 : 노물재(盧物栽) 사촌 : 노사신(盧思愼) 이숙 : 유자해(柳子偕) 사촌 : 유양(柳壤) 이숙 : 박거소(朴去疎) 사촌 : 박중손(朴重善) 1419년 출생 1464년 사망 조선의 문신 조선의 화가 조선의 시인 조선의 서예가 진주 강씨 시흥시 출신 15세기 한국 사람 15세기 시인 15세기 화가
|
194579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7%91%ED%8A%B8%20%EC%B4%88%EA%B8%B0%EC%99%95%EC%A1%B0
|
이집트 초기왕조
|
이집트 초기왕조는 대략 기원전 3150년에서 기원전 2686년에 해당되는 시기로, 전갈왕과 나르메르 등의 초기 상이집트 군주들과 이집트 제1왕조, 이집트 제2왕조를 포함한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고대 이집트에 통일국가가 출현했으며, 이후의 고왕국 시대의 밑거름이 된다. 이집트의 역사
|
16878
|
https://ko.wikipedia.org/wiki/1818%EB%85%84
|
1818년
|
1818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연호 청(淸) 가경(嘉慶) 23년 일본(日本) 분카() 15년 / 분세이() 원년 응우옌 왕조(阮朝) 자롱(嘉隆) 17년 기년 류큐(琉球) 쇼코왕() 15년 청(淸) 인종 가경제(仁宗 嘉慶帝) 23년 조선(朝鮮) 순조(純祖) 18년 응우옌 왕조(阮朝) 가륭제(嘉隆帝) 17년 사건 2월 5일 - 칼 14세,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 12월 3일 - 일리노이주가 21번째 미국의 주가 됨. 12월 24일 - 프란츠 그루버와 조셉 모르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작곡. 정약용, 목민심서 펴냄. 샤카 줄루, 줄루 왕국 건설. 콜레라, 인도 서 발생 탄생 4월 17일 - 알렉산드르 2세, 러시아 제국 황제. 5월 5일 - 독일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 (1883년 사망) 5월 28일 -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동맹의 장군 피에르 보우리가드 7월 30일 - 영국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 8월 22일 - 루돌프 폰 예링, 독일의 법학자. 12월 24일 -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줄 사망 6월 6일 - 나폴레옹 시대 폴란드 장군 얀 헨리크 동브로프스키 7월 28일 - 프랑스 수학자 가스파르 몽주 달력 음양력 대조 일람
|
208114
|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A5%B4%EB%94%94%EC%95%88%20%EA%B0%80%EC%8B%9C
|
아르디안 가시
|
아르디안 가시(Ardian Gashi, 1981년 7월 20일 자코비차 ~ )는 코소보의 전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였다. 그는 코소보출신이지만, 부모님은 8살때 노르웨이로 망명했다. 현재 그는 노르웨이 시민권을 획득했고, 2014년까지 노르웨이 축구대표팀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코소보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뛰었다. 1981년 출생 노르웨이의 남자 축구 선수 코소보의 남자 축구 선수 몰데 FK의 축구 선수 볼레렝아 포트발의 축구 선수 SK 브란의 축구 선수 프레드릭스타드 FK의 축구 선수 알바니아계 노르웨이인 살아있는 사람 남자 축구 미드필더 노르웨이의 해외 진출 남자 축구 선수 노르웨이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코소보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두 개 이상의 대표팀에서 뛴 축구 선수 스웨덴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알스벤스칸의 축구 선수 엘리테세리엔의 축구 선수 20세기 노르웨이 사람 21세기 노르웨이 사람
|
138496
|
https://ko.wikipedia.org/wiki/%EB%89%98%EC%98%AC%EB%A0%88%EC%88%9C
|
뉘올레순
|
뉘올레순(, "새로운 올레순"이라는 뜻)은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의 네 영구 거주지 중 하나이다. 현재 상주 인구는 약 30~35명으로 모두 이곳의 연구 기지나 이 기지에 물품을 보급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여름에는 연구자나 기술자 등이 더 찾아와 120명까지 늘기도 한다. 현재 노르웨이, 네덜란드,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대한민국(다산과학기지), 중화인민공화국 등이 뉘올레순에 연구 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기후 스피츠베르겐섬 1916년 설립
|
201479
|
https://ko.wikipedia.org/wiki/%EC%9B%94%EA%B0%84%20%EC%BD%94%EB%AF%B9%20REX
|
월간 코믹 REX
|
《월간 코믹 REX》(, )는 이치진샤(구 스튜디오 DNA)에서 발행하는 월간 발행의 만화 잡지이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네이트 등에서 온라인 서비스 중이며, 현재 잡지 내 17개 작품이 서비스되고 있다. 개요 이치진샤로부터 2005년 12월에 창간되었다. 매월 9일 발행. 타사·타잡지 연재작품의 속편 연재가 제법 있다.(예:신시아 더 미션, 소울 가제트 레디언트, 팅클 세이버 NOVA, 버스 게이머, 사립 채릉고교 초능력부, 가우가우 와~타 등) 연재작의 단행본은 REX코믹스란 레이블로 매월 9일에 발매된다. 《망가 4칸 KINGS 파레트》는 본지의 증간 형식으로 창간되었다. 그 뒤에 독립 창간. 연재 작품 목록 연재중(잡지 오리지널) 《칸나기(かんなぎ)》(타케나시 에리)(창간호-2008년 12월호, 2011년 9월호-) : 국내 정발 《宇宙スレイヴ後藤田リサコ》(유우키 신이치)(2008년 9월호-) 《에스페리더스 오드(エスペリダス・オード)》(츠츠미 쇼코)(2006년 12월호-) 《에루·에루 시스터(える・えるシスター)》※단편으로 개제되었으나 호평을 받아 연재화(요코시마 타케마루)(2008년 3월-) 《나와 메이드와 때때의 한기(オレとメイドと時々オカン)》(우치무라 카나메)(2008년 2월호-) 《俺野鳥観察記》(츠쿠리모노지)(2008년 2월호-) 《怪異いかさま博覧亭》(시노다 타카히로)(2007년 1월호-) 《가우가우 와~타 2(ガウガウわー太2)》(우메카와 카즈미)(창간호-)※본편은 2006년 2월호부터 《학원천국 파라독시아(学園天国パラドキシア)》(미카와 베루노)(창간호-) 《카미아리(かみあり)》(染屋カイコ) - 부정기 연재(2007년 3월호, 2007년 10월호, 2008년 2월호, 2008년 6월호) 《역습!빠빠라대 (逆襲!パッパラ隊)》(마츠자와 나츠키)(2006년 7월호-) 《신시아 더 미션(CYNTHIA_THE_MISSION)》(타카도 루이)(창간호-2008년 10월호) 《사립 채릉고교 초능력부(私立彩陵高校超能力部)》(이시다 아키라)(2006년 6월호-2008년 10월호) 《白砂村》(이마이 가미) 《精怪異聞》(時任奏) - 부정기 연재 《창해결전(蒼海訣戰)》(난토 하나마루)(창간호-) 《소울 가제트 레디언트(SOUL GADGET RADIANT)》(오오모이 오오이)(2006년 3월호-) 《正しい国家の創り方。》(橘あゆん) 《ツキとおたから》(渡真仁) 《팅클 세이버 NOVA(ティンクルセイバーNOVA)》(후지에다 미야비) 《헌드레드(ハンドレッド)》(원작:쿠라타 히데유키 작화:호시 이츠키) 《버스 게이머(BUS GAMER)》(미네쿠라 가즈야) 《히메나 카메나(ひめなカメナ)》(유우키 신이치) 연재중(미디어 믹스) 《世界樹の迷宮II~六花の少女~》(원작:아틀라스 작화:FLIPFLOPs)(2008년 3월호-) 《테일즈 오브 레젠디아(テイルズ オブ レジェンディア)》(원작:주식회사 반다이 남코 게임즈 작화:후지무라 아유미)(창간호-) 연재종료(잡지 오리지널) 《술래잡기(鬼ごっこ)》(쿠로마사 시세이)(2006년 3월호-2009년 5월호) 《귀신공주(鬼姫)》(토가시 히데아키)(2006년 11월호-2007년 11월호) 《黒地旅記-カオスアイル-》(ゆづか正成) 《彼と彼女の境界線》(요리시로 토모유키) (연재도중 원작자 사망) 《기업전대 샐러리맨(企業戦隊サラリーマン)》(三田直槻) 《겐Cha!(げんCha!)》(사다 고) 《주소미정(가)(住所未定(仮))》(마리오 카네다) 《쥿TEN!(じゅっTEN!)》(젯쿄우) 《少年ブランキーJET》(사노 타카시) 《たなかは》(田中淳一) 《나*나*키!!(ナ*ナ*キ!!)》(미즈타니 유즈) 《みてぐら》(키마 아즈사) 《몽환영역(夢幻領域)》(ちはやいくら) 《迷宮街輪舞曲―晴れた日には剣を持って。》(원작:林亮介 작화:結城さくや) 《メメルさんのしつじ》(望月和臣) 《롤리포 언리미티드(ろりぽ∞)》(이무산조)(창간호-2009년 6월호) : 국내 정발 연재종료(미디어 믹스) 《아이돌 마스터 relations(アイドルマスター relations)》(원작:반다이 남코 게임즈 작화:上田夢人) 《SoltyRei -赤の淑女-》(각본:キムラノボル 작화:瀧宮一隆) 《동방맹월초 ~ Silent Sinner in Blue.(東方儚月抄 ~ Silent Sinner in Blue.)》(원작:ZUN 작화:아키에다)(2007년 7월호-2009년 5월호) : 국내 정발 휴재중 《Dear Emily...》(코스미 유우치) 《REVEREND D》(후지사와 토오루) 외부 링크 코믹 렉스 공식 사이트 이치진샤 공식 사이트 일본의 만화 잡지 2005년 창간
|
277242
|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8B%A0%EC%82%AC
|
정신사
|
정신사(精神史)는 관념사관(觀念史觀)의 하나로서, 관습·법률·언어·신화·종교·예술·철학을 민족정신·시대정신의 표현으로서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관습·법률 등의 변천을 통하여 정신이라고 하는 실체(實體)의 변천, 즉 역사를 서술한다. 이 경우, 소위 토대로서의 경제적인 모든 관계는 무시되고 이데올로기의 자립적 발전만이 문제가 되며 '역사과학'적 인식방법으로서 추체험(追體驗), 이해가 사용된다. 문화사 역사적 분야 철학사 인문학
|
174274
|
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B%AA%A8%EC%9A%94%20%EC%95%A0%ED%94%84%ED%84%B0%20~It%27s%20a%20Wonderful%20Life~
|
토모요 애프터 ~It's a Wonderful Life~
|
《토모요 애프터 ~It's a Wonderful Life~》()는 Key사에서 제작한 연애 어드벤처 게임이다. 개요 《토모요 애프터》는 2005년 11월 25일에 DVD-ROM 전용으로 발매되었으며, 주인공 음성을 제외한 풀 보이스 게임이다. 전 작품인 《클라나드》의 외전 스토리이며, 클라나드의 히로인중 한명인 '사카가미 토모요'의 후일담 형식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현재는 삭제되어 있으나, '본 작품은 클라나드와는 다른 작품으로, 등장 인물이나 세계관 등 모든 유사점이 서로 관련되어 있지 않은 별개의 작품입니다'라는 문구가 공식 홈페이지에 존재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캐릭터 설명에서 성을 제외한 이름만을 표기하고 있다. 2007년 1월 25일. PS2용으로 출시되었다. PS2용에선 시나리오 비주얼이 1.5배로 늘어나 윈도판의 비판이 컸던 부분들도 개선되었다. 등장인물 본편 등장인물 토모야 () 성우 : 나카무라 유이치 (PSP판) 사회인 1년차로, 졸업 후에 폐품상에 취직. 아파트에서 독신생활. 토모요와 사귀고 있다. 토모요 () 성우 : 잇시키 히카루 본작의 히로인이며, 토모야의 연인으로 타카후미의 누나. 불량학생들의 전설이 될 만큼 강하지만, 토모야와 사귀기 시작한 후부터 성격은 누그러졌다. 어린아이를 좋아하고, 토모야를 매우 사랑하고 있다. 타카후미 () 성우 : 스즈모리 치사토 (원작 PC 게임) / 스즈키 케이코 (PS2 CS Edition) 토모요의 남동생. 컴퓨터를 잘 다룸. 토모야의 아파트에 자주 드나들다가, 토모야의 집에 PC를 설치하고 나서 아파트에 눌러 앉는다. 카나코 () 성우 : 스즈모리 치사토 (원작 PC 게임) / 스즈키 케이코 (PS2 CS Edition) 타카후미의 옛 여자친구. 입이 험하다. 학교에서는 자신의 농담이 대 호평이라고 하지만, 본편에서는 농담으로 등장인물을 웃긴 적이 없다. 아이스크림이 좋아하는데, 아이스주나 빠삐코를 특히 좋아하는 것 같다. 토모 () 성우 : 사사키 아카리 토모요, 타카후미의 아버지의 사생아로 유치원생. 어머니에게 버려져 토모야의 아파트에서 살게 된다. 순진무구, 뭐든지 믿어 버리는 귀여운 일면을 가지고 있어 특히 토모요에 몹시 귀여움을 받는다. 미시마 유코 () 성우 : 아사키 소요 토모의 어머니. 정신박약. 토모를 버리고 떠난다. 나오유키 () 성우 : 타니 슌스케 토모야의 부친. 토모야와의 관계가 어색하다. 스노하라 요헤이 () 성우 : 사카구치 다이스케 토모야의 악우. CG한장 없고, 목소리도 PS2판에만 한마디 등장할 뿐이지만, 그 한마디는 토모야와의 우정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미디어 믹스(PS2판) 캐스트로부터 인계된 캐스팅. 던전 앤 타카후미 '토모요 애프터'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 《DUNGEONS & TAKAFUMIS》라는 롤플레잉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본게임보다 플레이 시간이 더 오래걸려 덤으로서는 최대의 규모라 불리고 있다. 이 게임은 PS2판에도 포함되어 있지만 윈도용보다는 조작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같이 보기 Key 클라나드 각주 외부 링크 PC판 공식사이트 PS2판 공식사이트 클라나드 플레이스테이션 2 게임 미소녀 게임 연애 어드벤처 게임 Key (기업) 2005년 성인 비디오 게임 스핀 오픈 작품 2005년 비디오 게임 안드로이드 게임 플레이스테이션 3 게임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 게임 윈도우 게임 엑스박스 360 게임
|
236797
|
https://ko.wikipedia.org/wiki/%EC%B6%A9%EB%B6%81%EC%82%B0%EC%97%85%EA%B3%BC%ED%95%99%EA%B3%A0%EB%93%B1%ED%95%99%EA%B5%90
|
충북산업과학고등학교
|
충북산업과학고등학교(忠北産業科學高等學校)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54년 6월 7일 : 옥천여자고등학교 개교 1977년 3월 10일 : 현 위치로 이전(여중. 고 분리) 1979년 4월 3일 : 생활관 개관(건평 290.4m2) 1987년 3월 1일 : 옥천상업고등학교로 운영 체제 변경 1998년 12월 17일 : 후관 9개 교실 증축 2004년 4월 30일 : 학과변경 경영정보과 2학급, 인터넷상거래과 2학급, 정보처리과 2학급(계 18학급 - 남여공학) 2004년 7월 31일 : 다목적실 지용관(智勇館) 신축 2017년 3월 1일 : 충북산업과학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2019년 10월 21일 : 기숙사(지용학사) 증축 2022년 1월 4일 : 제66회 졸업식(충북산과고 5회) 81명, 졸업생 총수 14,122명 (여고 5,746명, 상고 7,804명, 충북산과고 572명) 2022년 3월 2일 : 신입생 87명 입학(금융회계과 44명, 의료전자과 43명) 2022년 9월 1일 : 제32대 장영 교장 취임 설치 학과 의료전자과 금융회계과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충북산업과학고등학교 홈페이지 옥천군의 고등학교 전문계 고등학교 남녀공학 고등학교 충청북도의 공립 고등학교 1954년 개교
|
1650
|
https://ko.wikipedia.org/wiki/4%EC%9B%94%2011%EC%9D%BC
|
4월 11일
|
4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01번째(윤년일 경우 102번째) 날에 해당한다. 사건 491년 - 플라비우스가 아나스타시우스 1세란 이름으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다. 672년 - 교황 아데오다토 2세, 77대 로마 교황 취임. 1241년 - 킵차크 칸국의 바투 칸이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의 벨러 4세를 무찌르다. 1512년 - 라벤나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교황군을 격파하다. 1623년 - 인조반정 발발. 1919년 -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53년 - 영국의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가 태어남. 1960년 - 이승만 정부의 3·15 부정선거에 저항하다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다. 1968년 - 서독에서 요제프 바흐만에 의해 독일사회주의학생대표 루디 두치케가 저격당하다. 1970년 - 미국의 NASA가 아폴로 13호를 발사하다. 아폴로 13호는 사고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달의 궤도를 거쳐서 지구로 귀환했다. 1975년 - 김상진 할복 사건이 일어났다. 1979년 -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이 물러나다. 1992년 -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해 대한민국 대중음악을 바꾸며 청소년들의 우상이 된다. 1996년 - 대한민국 15대 총선이 실시되다. 2008년 유럽 최후의 봉건 제도 국가로 남아있던 채널 제도의 사크섬이 봉건 제도를 폐지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하이난섬 보아오에서 아시아 각국의 정치, 경제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보아오 포럼이 개막되었다. 2012년 대한민국에서 제19대 총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로 추대. 문화 1959년 - 장훈, 일본 프로 야구에서 자신의 첫 안타 기록. 2008년 - 광주 도시철도 1호선이 완전 개통되었다. (상무 ~ 평동 구간) 2012년 - 프로야구에서 강윤구가 역대 3번째 3타자 9구삼진을 하였다. 2017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우 비스타와 인터넷 익스플로러 9의 모든 지원을 종료했다. 라이젠 5가 출시되었다. 2023년 -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2013의 연장 지원이 종료되었다. 탄생 146년 - 로마 제국 20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211년) 999년 - 판관 포청천. (~1062년) 1893년 - 미국의 정치가 딘 애치슨. (~1971년) 1931년 - 에스토니아의 배우 이타 에베르. (~2023년) 1934년 - 독일의 추기경 카를요제프 라우버. (~2023년) 1940년 - 미국의 작가 토머스 해리스. 1942년 - 대한민국의 방송인 송재익. 1949년 - 독일의 영화 제작자 베른트 아이힝거. (~2011년) 1950년 - 헝가리의 축구 선수 메사로시 페렌츠. (~2023년) 1953년 영국의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 대한민국의 승려 법륜. 1960년 대한민국의 가수 김종찬. 대한민국의 정치인, 기초지방자치단체장 함명준. 1961년 - 미국의 배우, 영화감독 빈센트 갤로. 1966년 - 대한민국의 가수 신승훈. 1969년 - 일본의 가수, 작사가, 작곡가 모리타카 치사토. 1970년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 선수 길영아. 1972년 - 대한민국의 배우 이도엽. 1974년 캐나다의 모델, 배우 트리샤 헬퍼.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현인아. 1975년 - 대한민국의 희극인 고혜성. 1980년 - 일본의 축구 선수 다마다 게이지. 1981년 - 브라질의 모델 알레산드라 암브로지우. 1982년 대한민국의 배우, 전 아나운서 최송현. 대한민국의 롯데자이언츠 야구 선수 박종윤. 대한민국의 배우 줄리엔 강. 1983년 - 대한민국의 성우 김현지 1984년 대한민국의 배우 임소영. 대한민국의 배우 한수인. 대한민국의 배우 유연석. 1985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근호. 1986년 - 대한민국의 가수 서연. 1987년 대한민국의 KBS 아나운서 이재성.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정.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박준혁 (성남 FC) 1988년 - 대한민국의 배우 최서연. 1989년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진야곱 (두산 베어스).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강지영. 1990년 - 대한민국의 모델 고소현. 1991년 일본의 가수 마노 에리나. 대한민국의 배우 방초록. 스페인의 축구 선수 티아고 알칸타라. 1992년 대한민국의 배우, MC 김민지. 대한민국의 연극배우 손별이. 1995년 대한민국의 배우 이도현. 대한민국의 래퍼 장문복. 벨기에의 모델 유미 랑베르. 1996년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델레 알리. 2000년 미국의 배우 모건 랠리. 걸그룹 에스파의 멤버 카리나. 2001년 - 대한민국의 작가 김아영. 2005년 - 오스트레일리아, 대한민국의 가수 다니엘 (NewJeans) 사망 678년 - 제78대 로마 교황 도노. (610년~) 1512년 - 16세기 이탈리아 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의 장군 가스통 드 푸아. (1489년~) 1936년 - 라트비아의 정치인 알베르츠 크비에시스. (1881년~) 1943년 -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운동가 김명식. (1890년~) 1965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이난영. (1916년~) 1985년 - 알바니아의 정치인 엔베르 호자. (1908년~) 2006년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신상옥. (1926년~) 2007년 - 미국의 작가 커트 보네거트. (1922년~) 2012년 - 알제리 공화국의 초대 총리이자 초대 대통령 아흐메드 벤 벨라. (1916년~) 2020년 - 잉글랜드의 수학자 존 호턴 콘웨이. (1937년~) 2020년 - 미국의 기업인 스탠리 체라. (1942년~) 2021년 - 일본의 마술사 안성우. (1959년~) 2021년 - 일본의 영화배우 류 다이스케. (1957년~) 2022년 - 대한민국의 의사 장윤석. (1931년~) 2023년 - 대한민국의 무용가 김백봉. (1927년~) 2023년 - 대한민국의 배우 정채율. (1996년~) 기념일 후안 산타마리아 데이: 코스타리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대한민국 도시 농업의 날: 대한민국 세계 파킨슨병의 날 같이 보기 전날: 4월 10일 다음날: 4월 12일 - 전달: 3월 11일 다음달: 5월 11일 음력: 4월 11일 모두 보기
|
48934
|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98%81%EA%B7%BC
|
박영근
|
박영근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박영근(朴永根, 1885 ~ 1910)은 호남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사형당했다. 박영근(朴寧根, 1887 ~ ?)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 출신 관료이다. 박영근(朴榮根, 1893 ~ ?)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박영근(朴英根, 1947 ~ 2016)은 대한민국의 작곡가이다. 박영근(朴永根, 1958 ~ 2006)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같이 보기
|
233727
|
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B%AF%B8%EC%98%88%20%EC%A0%84%ED%88%AC
|
라미예 전투
|
라미예 전투는 1706년 5월 23일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주요한 전투이다. 이 교전은 블레넘 전투로 인하여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친 동맹군이 모젤(Moselle)강가를 따라 벌인 급작스런 전역에 의해 일어났는데,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연합군의 승리로 여겨진다. 결국 이 전투로 말버러 공작(Duke of Marlborough)은 프랑스 국내로 진입한다는 자신의 계획을 포기해야 하였다. 비록 동맹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루이 14세(Louis XIV)는 평화를 갈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정한 조건을 얻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프랑스군은 방어자세를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앞서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1706년은 빌라르(Villars)장군이 바덴의 변경백 (Margrave of Baden)을 압박해 라인을 넘어 퇴각하게 만드는 등 알자스(Alsace)와 이탈리아에서 초기에 얻은 성공적인 승리는 루이 14세 휘하의 프랑스 장군들에게 유리하게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이제 빌레루아(Villeroi)원수에게 말버러 공작을 끌어내어 동맹군이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싸울 것을 강요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 원수는 루뱅(Louvain)에서 60,000명의 병력과 함께 리우(Léau)를 향해 도발적인 행군을 시작했다. 결전을 결심한 말버러 또한 메하임(Mehaigne)강과 라미예 평원으로 진군하기 전에 약 62,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마스트리히트(Maastricht)에 조직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동맹군, 그리고 말버러 공작의 진군 경로를 예상하고 이미 그 지역을 점거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버러 공작은 한번 공격해 보기로 결심했다. 4시간도 되기 전에 빌레루아의 군대는 완전히 패배했다. 말버러 공작의 미묘한 움직임과 전투 중 공격로의 변경은 -프랑스와 바이에른의 사령관들은 너무 늦을 때까지 그 변화를 파악하지 못했다. - 그의 적들을 전술적으로 교란시켰다. 프랑스 바이에른 연합군은 패퇴하여 한 덩어리로 궤주하였고, 20,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부 이탈리아의 투린(Turin)에서 사보이 외젠 공작(Prince Eugène)의 승리와 함께 동맹군은 루이 14세에게 전쟁 기간 동안 심각하게 고통 받을 정도의 많은 영토와 자원의 손실을 강요하였다. 브뤼셀(Brussels), 브뤼헤(Bruges), 앤트워프(Antwerp)와 같은 도시들이 전역의 종결때까지 말버러 공작의 군세에 의해 점령당했고,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퇴각했다. 1706년은 동맹군에게 최고의 해(annus mirabilis)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배경 1704년에서 재난에 가까운 패배 이후의 해는 프랑스에게 어느 정도 휴식의 해였다. 말버러 공작은 1705년 블레넘(Blenheim)에서의 성과를 완료하고 루이 14세로 하여금 평화 조약을 맺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모젤 계곡을 통한 프랑스 침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적군의 저항과 아군의 실수로 인해 곤경에 빠진 상황이었다. 독일에서 다른 도박으로 인해 군대가 거의 배치되지 않은 자신들의 국경을 의식하는 말버러공작의 동맹자인 네덜란드 정부의 못마땅해 하는 태도는 말버러 공작이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더 중요한 요소는 바덴의 변경백이 다음 공격에 말버러 공작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한 선언이었다. 이 전쟁은 이탈리아의 외젠 공을 지원하기 위해 라인으로부터의 갑작스런 기습이었기 때문이고, 또 전해의 셸렌베르크의 강습(storming of the Schellenberg)으로부터 입은 다리 부상이 재발함으로 인해 바덴의 루이공의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말버러 공작은 대동맹이 피할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문제인, 5월 황제 레오폴드 1세(Emperor Leopold I)의 죽음에 이은 요제프 1세(Joseph I)의 계승 역시 처리해야 했다. 프랑스왕의 회복과 그의 장군들의 노력은 말버러 공작의 고민들을 가증시켰다. 빌레루아 원수는 뮤즈(Meuse)강을 따라 네덜란드의 장군인 오버크리크(Overkirk)를 상당히 압박하였고, 리에주(Liège)를 압박하기 위해 7월 10일에는 뫼즈강의 위이(Huy)를 점령하였다. 모젤에서 빌라르 원수의 우세에 의해 결정적인 보급 문제를 겪게 된 동맹군 장군은 7월 16일 전역을 취소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나 말버러 공의 망신일 것인가?" 빌레루아는 환성을 지르며 말했다. "아무 성과도 없이 무익한 원정을 치렀으니." 말버러 공작이 북쪽으로 출발함과 동시에 빌라르 원수는 라인강으로 진군을 시작했고, 프랑스군은 이제 모젤 계곡에서 플랑드르(Flanders)에 있는 빌레루이의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출발했다. 동맹군은 엘릭스하임의 성공으로 모젤 전역의 실패를 조금은 보상했다. 그리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브라반트 선(Lines of Brabant)을 건넜다.(위이 역시 7월 11일 탈환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게으름과 우유부단함 때문에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와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찬스를 잃어버렸다. 1705년은 군사적인 실패를 뒤셀도르프(Düsseldorf), 프랑크푸르트(Frankfurt), 비엔나(Vienna), 베를린(Berlin), 하노버(Hanover)에서의 외교적 성과로 조금 보상한 말버러 공작에게 허무한 해로 증명되었고, 이에 그는 대동맹의 지원을 증강하고 다음해에 벌어지는 전역에 대해여 즉각적인 지원을 받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서막 1706년 1월 11일, 말버러 공작은 그의 외교적 여정의 끝으로 런던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번 계획의 전술을 이미 짜둔 상황이었다. 처음의 선택(비록 말버러 공작이 이런 활동을 함으로써 무엇을 증진시켰는지는 의문이 많지만)은 그의 병력을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북 이탈리아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말버러공작은 적에게 위협받고 있는 사보이아(Savoy)를 구하고 프랑스군을 격파하기 위해 외젠 공작과 합류하기를 시도하였다. 사보이아는 산을 넘는 길을 통해 프랑스로 들어가는 진입로 역할을 하였거나, 아니면 대신에 지중해 해안을 통해 니스(Nice)나 툴롱(Toulon)에 대한 해안지원을 통해 공격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버러공작이 선호하는 안은 프랑스의 마르생(Marsin)이 최근에 탈취한 모젤 강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프랑스의 심장부로 진격하는 작전인 듯 보였다. 그러나 결정은 곧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버러 공작은 네덜란드 공화국에 4월 14일 상륙했다. 확대된 전쟁을 방해했던, 주된 동맹자에게 도착한 것이다. 대동맹에게 프랑스는 아직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결심한 루이 14세는 알자스와 북 이탈리아에서 두 배의 작전을 벌였다. 4월 19일 최전방에서 방돔(Vendôme) 원수가 칼치나토(Calcinato)에서 황제군을 격파하고, 혼란에 빠진 황제군을 몰아넣었다. 프랑스군은 이제 투린(Turin)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의 공성전을 준비할 위치에 있었다. 알자스에서는 빌라르 원수가 바덴의 변경백을 헤게나우(Haguenau)에서 급습해 함락함으로써 격파했고, 그를 혼란속에 라인강 너머로 패주시켰고, 란다우(Landau)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네덜란드는 자신의 국경과 병사들을 비워두고 이탈리아로 가려는 말버러 공작의 야심찬 계획을 거절했다. 그러므로 동맹의 협동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상황에서 말버러 공작은 저지대(현재의 베네룩스 3국)에서의 전역을 준비하였다. 움직이는 동안 공작은 5월 9일 헤이그를 떠났다. "신은 내가 무거운 마음으로 가는 것을 알 것일세." 말버러 공작은 6일 후 영국에서 그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맹자인 고돌핀(Godolphin)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와 같이 썼다. "나는 무엇인가 중요한 어떤 것을 할 희망이 없네. 만약 프랑스가 내가 그들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확신하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는 한 말일세." 다시 말해 궁정암투였다. 5월 17일 말버러 공작은 그의 네덜란드-영국 동맹군을 마스트리히트 근처의 통게렌(Tongeren)에 집결시켰다. 하노버인, 헤센인, 덴마크인은 일찍 지원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을 늦추는 다양한 이유를 찾거나 만들거나, 말했다. 말버러 공작은 덴마크 군대의 사령관인 뷔르템베르크 공작(Duke of Württemberg)에게 애원하는 편지를 썼다. "저는 전하께서 기병들을 이끌고 저희와 일찍 합류하기 위해 빠르게 행군하실것을 바라는 이런 전언을 드립니다." 더하여 프로이센의 왕은 비엔나에서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인하여 그의 군대를 라인강의 뒤편에 주둔하고 있었고, 헤이그에 있는 네덜란드 국회의 문제는 여전히 안 풀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버러 공작은 비록 빌레루아가 마르생의 명령으로부터 지원요청을 강요받더라도 프랑스군이 그들의 좋은 위치를 벗어나 그의 병력을 공격하기 위해 움직일 여건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잘못 계산하고 있었다. 비록 루이 14세가 평화를 원하고 있더라고 그는 일정 조건을 원했고, 이는 그로 하여금 회전에서의 승리를 요구했다. 이탈리아와 라인 강변에서의 승리로, 루이 14세는 플랑드르에서도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희망에 가득 찼다. 강력한 방어에 둘러싸여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말버러 공작이 인식하지 못했던 루이 14세는 그의 원수들로 하여금 행동을 하라고 완고하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빌레루아는 상상하기 시작했다. 생-시몽 공작 루이 드 루브루아(Louis de Rouvroy duc de Saint-Simon)이 저술하길 "왕이 자신의 용기를 의심하고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를 필요가 있다고." 이에 따라 5월 18일, 빌레루아는 루바인(Louvain)을 떠나 70개의 보병 대대와 132개의 기병 대대, 62문의 포로 구성된 총 60,000명이 넘는 군세로 이루어진 대군을 이끌고 딜레(Dyle)강을 건너 전투를 벌일 적을 찾기 시작했다. 적장에 대한 자신의 장군으로서의 능력을 과신하고, 또 블레넘의 복수를 결심한 베르사유궁의 독촉에 의해 진영을 박차고 나온 빌레루아와 그의 장군들은 성공을 예상하고 있었다. 양측 모두 어느 순간 전투가 벌어지고 어디서 전투가 일어날 지 예상치 못했다. 프랑스군은 처음 남쪽으로 방향을 돌아 저도이겐(Judoigne)을 향하기 전에는 틸레몽(Tirlemont)으로 움직였다.(프랑스가 1705년 8월 프랑스가 퇴각한 류를 위협하는 것처럼) - 이러한 행군은 빌레루아의 군대로 하여금 라미예와 타비에르(Taviers)의 작은 마을 근처에 있는 메하인(Mehaigne)과 페티테 키테(Petite Gheete)강 사이의 마른 땅의 좁은 균열지대로 향하게 하였다. 그러나 어떤 장군도 그의 적들이 얼마나 행군하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빌레루아는 5월 22일에도 여전히 동맹군이 실제로는 코르스와렌(Corswaren) 근처에서 그들을 따라잡으려는 덴마크 기병대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하루 동안 쭉 행군을 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이에 말버러 공작은 빌레루아가 실제로는 라미예 근처의 진영을 설치할 준비를 하면서 생 안드레(St. André)산의 고원으로 접근하고 있는 동안에 그들이 아직도 저도이겐에 있다고 예측하고 있었다(오른쪽 맵을 보라). 다음날 1시, 말버러 공작은 그의 병참사령관 케도건(Cadogan)을 급파하여 빌레루아가 진군하고 있는 같은 마른 땅으로 정찰을 하도록 하였는데, 이 지역은 전년의 전역으로 공작이 잘 알던 곳이었다. 2시간 후에 말버러 공작은 74개의 보병대대 123개의 기병대대, 90문의 포와 20대의 박격포로 구성된 총 62,000명의 대군세를 이끌고 케도건을 따랐다. 8시경, 케도건이 메르도르프(Merdorp)를 막 지난 후에, 그의 군대는 잔드레노윌레(Jandrenouille)의 고원 외각지대에서 마초를 모으던 프랑스 경기병(후사르)대의 일부와 마주치게 되었다. 얼마간의 총격전 교환 이후, 프랑스군은 퇴각했고, 동맹군 용기병(드라군)대는 정면으로 진군했다. 안개 속에서의 짧은 탐색을 통해 케도건은 빌레루아의 잘 정렬한 정찰부대가 4마일(6 km) 밖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령장교가 말버러공작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 급파되었다. 2시간 후에 네덜란드 야전 사령관 오버크리크(Overkirk), 다니엘 도프(Daniel Dopff) 그리고 다른 동맹군 장교들과 함께 있던 말버러 공작은 케도건이 있는 곳까지 말을 달려서, 서쪽 지평선과 함께 프랑스의 대군세가 4마일(6.4 km)밖에서 전쟁을 위해 전열을 준비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투 전장 라미예의 전장은 블레넘의 전장과 비슷한데, 이곳에는 나무와 잡목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광대한 경작지가 펼쳐져 있었다. 빌레루아의 우익은 메하인 강이 그들의 외각을 보호해주는 타비에르와 프랑퀴니(Franquenée) 마을에서 쉬고 있었다. 약 1마일(~2 km)정도 되는 광대한 넓은 평원이 타비에르와 라미예 사이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블레넘과는 다르게 이곳에는 기병대를 방해할 하천들이 없었다. 중앙에는 라미예 그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북쪽과 남쪽이 멀리서 보이는 고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프랑스군의 우익은 부서진 마을과 경사를 깊게 달리는 페티테 키테의 강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강물의 프랑스 측은 아우트 에글리스(Autre-Église)의 북쪽 너머에 있고 빌레루아의 우익에 자리 잡은 오프스(Offus)의 마을로 뻗었다. 페티테 키테의 서쪽은 생 안드레의 고원으로 향했다. 잔들레누일레의 고원에 있는 두 번째 평원은 동맹군이 집결해 있었는데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초기의 배치 11시경 말버러공작은 전투대형을 명했다. 최우익에서 풀츠(Foulz)를 향해 영국 보병대대와 기병대대가 제우체(Jeuche)강의 근처에 2열로 그들의 수비 위치를 공고히 했다. 중앙은 네덜란드, 독일, 프로테스탄트 스위스, 스코틀랜드 보병대(약 30,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가 오푸스와 라미예를 정면에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또 라미예를 앞에 두고 말버러공작은 24파운드짜리의 30개의 강력한 포병대를 배치했고 오센(oxen)의 부대를 끌어와 이 위치에 배치했다. 나머지 포병대는 페티테 기테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배치되었다. 그들의 좌익에는 말보로가 생각하기에 반드시 결정적인 교전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한 타비레즈와 라미예 사이의 넓은 평원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오버크리크가 69개의 네덜란드, 덴마크 기병대로 구성된 기병대대가 네덜란드의 19개 보병대대와 두개의 포병부대에 의해 지원을 받은 상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빌레루아 역시 그의 부대를 배치했다. 그의 우익은 타비에르에 있었는데, 그는 여기에 프란퀴니(Franquenée)에 있는 소규모의 군세와 함께 그레데르 수이세 연대(Greder Suisse Régiment)의 두개의 보병대대를 배치했다. 이곳은 전 지역인 메하인 강의 늪지대에 의해 동맹군의 우회공격으로부터 보호되고 있었다. 타비에르와 라미예 사이의 개방된 지역에 빌레루아는 스위스와 바이에른 보병으로 구성된 프랑스 보병대의 지원을 받는 드 구이스카르(de Guiscard) 휘하의 82개 기병대대를 배치했다. 라미예와 오푸스, 오트레 에글리스(Autre-Eglise)의 산등성이를 따라 빌레루아는 왈룬(Walloon)과 바이에른 보병대를 바이에른의 선제후 휘하의 바이에른과 왈룬의 50개 기병대대를 생 안드레의 산 위의 고원 뒤에 배치하여 지원하게 하였다. 라미예와 오푸스, 오트레 에클리스의 길은 바리케이트가 쳐졌고, 벽은 머스킷으로 가득 메워진 방어선으로 보호되었다. 빌레루아는 또 라미예 근교에 막강한 포병대를 배치하였다. 이 멋진 포격의 호를 그리는 포들은(전년의 엘릭스하임에서 봤던 세 개의 같은 종류의 것)은 동맹군 보병대가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잔드레노윌레의 고원에의 접근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군의 배치에 몇 가지 중대한 약점을 발견하였다. 전술적으로 빌레루아가 그의 우익에 있는 타비에르와 그의 좌익에 있는 오트레-에글리스의 지역을 차지하는 것은 필수적이었으나, 빌레루아는 그의 부대를 지나치게 확장하여 배치하였다. 게다가 이 배치는, 동맹군에 대하여 오목한 모양이었는데, 말버러 공작에게 프랑스의 초승달 진영 뿔들 사이를 좀 더 끌어들일 수 있는 촘촘한 전열을 구성할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게다가 동맹군이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면, 좀 더 집중적이고 강하게 공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덧붙여, 말버러 공작의 배치는 그의 적보다 더 쉽게 전위를 넘어 이동할 수 있었고, 이러한 전술적 이점은 점심쯤에 전개되는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비록 빌레루아는 그가 잔드레뉠레의 고원을 점령했을 때(동맹군의 외원을 위협하며) 동맹군의 우익을 점령하는 선택도 있었으나, 말버러 공작은 프랑스 사령관의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산등성이를 따라 방어적인 전투를 벌일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타비에르 13시경 포병대는 행동을 개시했다. 잠시 후 동맹군의 중대가 그들의 전선의 끝부분을 벗어나 프랑스-바이에른군의 옆구리에 공격을 개시했다. 베르트뮐러(Wertmüller) 대령의 지휘 하에 있는 네덜란드 부대의 남쪽에서 프랑퀴니(Franquenée)의 작은 마을을 점령하기 위해 2문의 야포를 끌고 나섰다. 마을에 있던 소규모의 스위스부대로 구성된 주둔군은 그들의 후방에 있던 보병대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당해, 순식간에 패퇴하여 타비에르의 마을에서 물러났다. 타비에르는 프랑스 바이에른 연합군에게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 지방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평원에 배치된 드 구이스카르(de Guiscard)의 기병대의 옆구리를 지켜주는 동시에, 프랑스 보병대로 하여금 그들이 돌격할 때, 네덜란드와 덴마크 기병대대의 옆구리를 위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부대가 공격을 개시했을 때, 스위스군대는 마을에 있는 그들의 동료들에게로 힘겹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오솔길과 시골의 작은 마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전투는 흉포한 총검전으로 악화되었으며, 이는 멜리(mêlée)에서 난투극을 벌이게 하였다. 그러나 화력에서의 네덜란드군의 우세는 곧 나타났다. 전투에 참여했던 프랑스군의 장교 드 라 콜로니(de la Colonie) 근처의 평원에서 회고했다. "마을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교전은 이 전투에서 벌어졌던 다른 교전만큼이나 유혈이 난무했다." 약 15시경 스위스군은 습지대 너머로 마을에서 퇴각하였다. 빌레루아(Villeroi)의 우익은 혼란에 빠졌고, 개방된 상태에 공격받기까지 쉽게 되었다. 드 구이스카르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최근에 후방에 배치된 프랑스 용기병으로 구성된 14개 기병대대에게 공격을 명했다. 그레데르 수이세 연대의 두개의 다른 보병대대 역시 보내졌으나, 공격은 협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분산되었다. 동맹군 사령관은 수비부대와 야전포와 함께 하마한 용기병을 타비에르로 보냈고, 이들은 머스켓 일점 쏴(집중사격)를 퍼부었다. -그리고 산탄사격을 전진하는 프랑스 부대에게 퍼부었고, 이 부대를 지휘하는 다우비기니(d’Aubigni)대령은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프랑스 군대의 횡대가 휘청거리지 시작했을 때, 이제 적들에게 통제받지 않은 채로 다른 마을에도 포격을 가하기 시작한 뷔템베르크(Württemberg)의 덴마크 기병대가 공격을 위해 적진에 보내졌고, 노출된 프랑스의 스위스 보병과 용기병 부대의 옆구리를 쳐부쉈다. 그레데르 수이세 연대와 사령관 드 라 콜로니는 그의 척탄병 부대와 함께 연대를 이루었던 콜론네 부대와 함께 마을에서의 반격이 주춤거리자 이를 돕기 위해 라미예의 남쪽의 방어구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은 혼란상황에 빠져 있었다. "우리 군사들은 우리보다 먼저 갔던 용기병대와 스위스 부대가 전투로 인해 거의 무력화되었을 때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나의 전우들은 방향을 돌려 물러나기 시작했다." 데 라 콜로니는 프랑스의 용기병과 그레데르 수이세 바탈리온과 함께 집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지나치게 단순한 명령이었고, 이로 인해 빌레루아의 우익이 약화되는 것을 도왔을 뿐이었다. 오푸스와 오트레-에글리스 타비에르를 공격하는 동안에 오크니 백작(Earl of Orkney)은 동맹군의 우익에 위치한 바리케이트가 쳐진 마을인 오푸스와 오트레-에글리스에 대하여 공격을 결심하고 페티테 기테(Petite Gheete)를 넘으라는 명령을 그의 영국군 제 1열에게 알렸다. 빌레루아는 오푸스의 근처에 있었는데, 우려스러운 눈으로 붉은 코트를 입은 부대가 진군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루이 14세로부터 5월 6일 받았던 경고를 되새기고 있었다. "그대의 군대가 영국군의 최초의 공격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특히 유의하시오." 이 조언에 유의하며 프랑스 사령관은 그의 좌익을 강화하기 위해 중앙에서 부대를 급파하고, 그들을 대체하기 위해 이미 약화된 우익에서 더 보병부대를 끌고 왔다. 영국 보병대대가 늪지대가 있는 하천을 넘기 위해 애쓰면서 페티테 기테의 계곡의 완만한 능선을 내려올 때, 드 라 귀이체(de la Guiche)소장이 오프스 근처에서 보낸 왈룬 보병부대를 만나는 고난을 겪게 되었다. 일제사격 이후에, 영국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유발한 후에, 왈룬 부대는 잘 정렬한 상태로 산등성이를 내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하천을 넘어 마른땅에 그들의 횡대를 구성할 수 있었고, 산등성이에 있는 바리케이드와 작은 마을을 향해 강한 압박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군의 돌격으로 인한 무위는 마을에 설치된 방어선을 돌파하여 그들로 하여금 적을 위협할 수 있었고, 생 안드레 너머의 고원으로의 진입로를 열 수 있었다. 이는 잠재적으로 동맹군 보병대에게 위험했는데 바이에른의 선제후와 벨기에 기병대대가 움직이기 위해 고원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헨리 룸리(Henry Lumley)의 영국 기병대는 페티테 기테 주변의 습지대를 건너고자 노력했지만, 이것은 충분한 기병대의 지원은 효율적이지 않고, 전투는 동맹군 우익에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말버러 공작에게 입증하는 증거가 되었다. 그러므로 공작은 오푸스와 오트레-에글리스에 보낸 공격명령을 철회하였다. 오크니 경에게 자신 퇴각명령을 확신시키기 위해, 말버러 공작은 명령을 내리는 사람으로 그의 보급사령관인 케도건을 보냈다. 오크니 경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케도건은 순종을 요구했고,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오크니는 그의 병력을 원래 위치인 잔드레노윌레(Jandrenouille)로 물리겠다는 말을 전하게 했다. 라미예 라미예에 대한 동맹군의 돌격이 어느 정도 속도를 얻는 동안에 말버러 공작의 손아래 동생이자 보병대 사령관인 찰스 처칠(Charles Churchill)은 4개의 보병 종대에게 마을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이 돌격은 슐츠(Schultz)와 스페어(Spaar)가 지휘하는 네덜란드 보병대대 12개와 슐렌부르크 백작(Count Schulenburg)가 지휘하는 2개의 작센 보병 여단, 아가일 공작 2세(2nd Duke of Argyle)이 지휘하는 네덜란드 소속된 스코틀랜드 여단,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스위스의 소규모 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라미예에는 20개 프랑스-바이에른 보병대대가 있었고, 이들은 아일랜드 용기병과 마페이 후작(de Maffei)의 휘하에 있는 쾰른과 바이에른인들로 구성된 소규모 여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방어의지로 충만해 있었으며, 어느 정도의 피해와 함께 적들을 격퇴하였다. 슐츠와 스페어가 고전하는 것을 보고 말버러 공작은 오크니의 영국, 덴마크 보병대대로 구성된 제 2열(이들은 오프스와 오트레-에글리스에의 강습에는 사용되지 않았다.)에게 라미예를 향해 남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지대에 있는 얼마 안 되는 가축우리에 의해 프랑스군의 관찰로부터 움직임을 감출 수 있었던 이들은, 사령관 반 팔란트(van Pallandt) 준장은 명령으로 자신들의 군기를 고원의 끝에 있는 이 지역 왼쪽에 꽂아 두어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으로 하여금 아직도 동맹군이 초기 위치에 있다고 믿도록 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은 동맹군의 주력과 그들의 목표가 페티테 기테의 반대쪽에 있다고 확신하였고, 말버러 공작은 연합군에게 들키지 않고, 자신의 주력부대를 라미예를 향해 이동하게 하여 평원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러는 동안에 빌레루아도 역시 그의 좌익에 있는 반대방향에 보병대의 잔여부대를 움직이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 시간에 프랑스 사령관들은 동맹군 위치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약 15시 30분경 오버크리크(Overkirk)는 그의 기병대대에게 평원을 넘어 라미예를 공격하는 보병부대를 지원하게 하였다. 21개의 덴마크 부대에 의해 그들의 좌익이 지원받는 48개의 네덜란드 부대로 이루어진 잘 훈련받은 동맹군 기병대는 그들의 돌격을 위한 힘을 얻기 위해 움직이기 전에 적을 향하여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했다.(그들의 말이 너무 일찍 지친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퓨퀴에레 후작(Marquis de Feuquières)는 이 전투의 장면을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돌격은 4열로 이루어졌다. 그들이 접근할 때 그들은 2열과 4열이 그들의 1열과 3열에 끼인 채로 움직였는데, 이는 그들이 우리에게 접근할 때 아무런 중간부분이 없이 정면에 하나의 진형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의 전투는 네덜란드와 덴마크 기병대에게 유리했다. 빌레루아 원수가 그들의 보병대를 프랑스군의 좌익을 지원하기 위해 빼낸 것으로 발생한 숫자의 불균형은 동맹군으로 하여금 프랑스 기병대를 혼란 상태에서 그들의 2열로 도망치도록 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제2진 역시 계속적인 공격에 의해 결국에는 기병의 제 3열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이제 소수의 보병대대만이 평원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최정예부대 중 하나인 메종 두 루아(Maison du Roi)의 기병대는 바이에른의 중기병대로 구성된 4개의 정예 기병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드 구이스카르에 의해 교묘히 지휘되는 프랑스 기병대는 재집결하여 국지적인 반격을 벌여 동맹군 기병대를 요격하는 데 성공했다. 오버크리크의 우익은 라미예에 근접했는데 10개의 기병대대는 갑작스럽게 횡렬을 이탈해 흩어져, 재 정열을 위해 후방으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이로써 라미예에 돌격을 감행한 동맹군의 좌익은 위험에 노출되었다. 보병대의 지원이 결여됐음에도 불구하고 드 구이스카르는 그의 기병대를 훌륭히 지휘하여 동맹군 부대를 두 번이나 격퇴하였다. 중앙에 위기가 다가오기 시작했으나 그의 유리함을 통해 말버러 공작은 상황을 확실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동맹군 사령관은 이제 중앙을 지원하기 위해 우익의 기병대를 불러들였고, 오크니 경을 지원하기 위해 오직 영국 기병대대만을 남겨놓았다. 전투의 포연과 유리한 지형에 의해 말버러 공작이 명령한 부대 이동은 아직 움직이지 않은 50개 기병대대를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한 빌레루아 원수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그가 새로운 지원 병력이 도착하길 기다리는 동안 말버러 공작은 스스로 멜리(mêlée)를 공격하게 하여 혼란에 빠진 네덜란드 기병대를 재집결시켰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일로 인해 그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프랑스 기병대는 말버러 공작이 예상하기에 그의 부대로 몰려들어오고 있었다. 말버러 공작의 말은 넘어졌고, 공작은 내던져졌다. "말버러공작이 말에서 떨어졌다." 오크니경은 얼마 후에 그렇게 저술하였다. 이것은 전투에서 중대한 순간이었다. "무라이 소장(Murray)은" 어떤 목격자가 회상하길 "말버러 공작의 낙마를 보았고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적들을 격파하며 그를 구하기 위해 두개의 스위스 보병대대와 함께 재빨리 진격하기 시작했다." 말버러 공작의 부관중 하나는 말버러 공작이 무라이의 훈련된 부대가 추격하는 프랑스 군대를 격멸하기 전에 공작이 안전한 위치에 도달할 수 있도록 그를 자신의 말에 태웠다. 잠시 후, 말버러 공작의 말 관리관인 브링필드(Bringfield)대령은 말버러 공작을 위해 여분의 말 한 필을 끌고 왔다. 그러나 그는 말버러 공작을 말에 태우는 것을 돕는 동안에 불행하게 유탄에 의해 총을 맞았다. 말버러 공작의 다리 뒤에 있었던 불행한 대령이 총탄에 맞기 전에, 그 총탄은 최고 사령관의 다리 사이를 지나갔다. - 그 다음 순간이 으스스한 카드 게임의 그림에 그려져 있다.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위험은 지나갔고, 공작은 그의 우익으로부터 파병된 기병 지원군들을 제자리에 잡게 하였다. 더 없이 행복해하던 빌레루아가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돌파 시간이 약 16시 30분쯤 되자, 양군은 남쪽의 소택지대에서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며 약 4마일(6 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근접해 있었다. 거대한 기병대가 평원으로 진입하여 중부의 라미예의 교전상황을 돌파하여, 오프스와 오트레-에글리스의 작은 마을들이 있는 북부로 향하려 하였다. 오크니와 드 라 구이체는 서로 페티테 기테를 두고 새롭게 전투할 준비를 하면서 대치하였다. 지원 기병대대의 도착은 동맹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끌었다. 지치고, 계속적인 사상자 증가에, 수적인 불리함까지 겹친 구이스카르의 기병대대는 평원에서 전투하던 중 결국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전의 자리를 유지하거나 프랑퀴니와 타비에르를 재점령한 후에는 귀스카르드의 우익은 그들의 우익과 지나치게 멀리 떨어지게 되어 위협에 노출하게 되었다. 이런 유리한 상황을 살리기 위해 뷔템베르크의 덴마크 기병대는 전력을 모아 네덜란드군을 막는 데 쓰고 있던 메종 두 로이의 측면을 찌르며, 총 공격을 감행했다. 아무런 저항 없이 돌격해 들어가면서 21개 덴마크 기병대대는 오토몽드의 무덤 지역 근처의 프랑스 군 후방에서 재집결하고 생 안드레의 고원을 건너 빌레루아의 군대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기병대를 위해 동맹군의 최종적인 지원군이 남쪽으로부터 도착하자, 말버러 공작의 좌익에서의 우위는 더 이상 뒤집을 수 없게 되었고, 빌레루아는 전장을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최초의 계획을 지키려 했다. 그는 아직 출진하지 않은 50개 기병대대를 배치하였으나 최초의 배치 후에 부주의하게 남아있는 프랑스 본영의 텐트와 군수물자들을 지키는 수비병들은 라미예의 후방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동맹군 사령관은 이제 프랑스-바이에른의 기병대를 수적으로 압도하고 있는 그의 기병대에게 명령했다. 드 구이스카르의 우익은 적절한 보병지원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맹공을 견딜 수 없었고, 그들의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려 혼란상태에서 격파 당한 채 궤주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기병대대는 이제 라미예의 후방에서 맹공을 견딜 수 없게 된 빌레루아와 함께 한 덩이로 뒤섞기기 시작했다. "비명이 곳곳에 울려 퍼졌다. 프랑스에서 아일랜드 용병으로 종군한 페터 드래이크(Peter Drake)는 회고한다. "스스로 살길을 찾아라!" 라미예에서 동맹군 보병대는 이제 영국군에게 지원을 받고, 북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돌파에 성공했다. 드 피카르디 연대(Régiment de Picardie)는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으나 볼드위크(Borthwick) 대령의 스코틀랜드-네덜란드 연대와 영국의 지원군에 의해 패퇴하였다. 볼드위크는 그의 부대에서 선두에 서서 싸우다가 프랑스군에서 종군 중이던 아일랜드인 찰스 오브리온(Charles O’Brien)에 의해 살해당했다. 드 마페이 후작은 바이에른과 쾰른부대를 이끌고 방어에 나섰으나 이는 곧 무의미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빠르게 남쪽으로부터 접근하는 기병부대의 돌격을 발견한 것이다. 후에 그는 회고하길 " 나는 그들의 장교들을 지원하려는 기병대대가 주둔한 곳의 최북단으로 향했으나, 그러나 이에 대해 듣기 전에 나는 급작스럽게 포위되었고, 자비를 구걸하게 되었다." 추격 북쪽과 서쪽으로 향하는 길은 탈주자들로 가득 찼다. 오크니는 이제 영국 부대를 보내 페티테 기테의 하천을 다시 한번 건너 드 라 귀체의 보병대가 혼란상태에서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한 오프스에 대한 강습을 다시 한번 시도했다. 보병대의 오른쪽에서 하이(Hay)와 로스(Ross)의 용기병 부대는 또 강을 건너 자신들의 목표를 향했고, 오트레-에글리스에 있는 두 로이 연대에게 돌격을 감행했다. "우리 용기병은" 존 딘(John Deane)은 서술하길 "마을에 돌입했고, 적들을 도살하기 시작했다." 바이에른의 기병 부대와 선제후의 호위병은 퇴각하여 빌레루아와 선제후를 보호하기 시작했으나, 룸리의 기병에 의해 흩어지게 되었다. 전장을 도망 다니는 패잔병의 무리가 공격당하는 가운데 프랑스와 바이에른 사령관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고, 단지 프랑스와 바이에른의 중장들을 습격한 데 만족한 코르넬리우스 우드(Cornelius Wood) 덕분에 가까스로 사로잡히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남쪽 멀리에서는 드 라 콜로니 부대의 잔여병력이 나무르(Namur)의 프랑스 부대가 장악한 요새와는 반대방향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퇴각은 곧 궤주가 되었다. 개별적인 동맹군 사령관들은 그들의 병력을 이끌고 추격에 나섰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공격하는 것을 허가했다. 곧 동맹군 보병대는 추격을 계속 유지할 수 없었으나, 그들의 기병대는 딜레(Dyle)강을 건너 밤동안 집결하면서 추격을 계속해 적부대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드디어 말버러 공작은 전장으로부터 12마일(19 km)떨어진 멜더트(Meldert) 근처에서 자정이 얼마 지난 후에 추격하는 것을 멈추었다. 영향 이제 완파당한 빌레루아의 부대는 무엇이 남았는가? 사상자의 불균형은 루이 14세의 군대에게 충분한 재난으로 인식되었다(더 보기). 더하여 프랑스 군대의 수백명이 탈영했고, 그들의 대부분이 군기아래 다시는 집결하지 않았다. 빌레루아는 또한 52개의 대포 대부분을 잃었고, 그의 보급용 공구 마차를 거의 다 잃어버렸다. 빌라르(Villars) 원수의 말에 따르면 라미예에서의 프랑스의 패배는 "가장 부끄럽고 굴욕적인 궤주"였다. 여러 도시들이 동맹군에게 함락되었다. 루뱅(Louvain)이 1706년 5월 25일 함락되었다. 3일 후에 동맹군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수도 브뤼셀에 들어갔다. 말버러공작은 라미예에서의 승리를 통해 무수한 기회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이제부터 전에는 가지지 못했던 모든 여름을 갖게 되었소." 브뤼셀에서 말버러 공작은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이는 신의 축복이므로 나는 이 기회를 최대한 사용할 것이오." 말린(Malines), 리에르(Lierre), 겐트(Ghent), 알로스트(Alost), 담(Damme), 오우데나르데(Oudenaarde), 브뤼헤(Bruges) 그리고 6월 6일에는 앤트워프(Antwerp)가 말버러 공작의 승리한 군대에 의해 결과적으로 함락되었다. 빌레루아는 패배의 과정에서 도움도 없이 체포되었다. 루이 14세가 이 재난을 알았을 때 그는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방돔(Vendôme) 원수를 플랑드르를 함락시키게 하기 위해 소환했다. 그러나 방돔이 지휘하게 된 병력은 전에 비해 너무 약해졌다. 동맹군의 승리 소식은 프로이센, 헤센, 하노버의 파견단들에게 알려지고, 이는 많이 망설이던 그들의 군주로 하여금 궤주하는 프랑스와 바이에른 군대를 추격하는 데 열정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이는" 말버러공작은 따분하게 서술하길 "나는 우리의 지난 승리로 이것을 얻게 되었다. 오버크리크가 7월 4일 오스텐더(Ostende)의 수비대를 격파하고, 보급과 연락을 위해 영국 해협과의 직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동맹군은 강력하게 저항하는 덴데몬드(Dendermonde)의 지배자 발리 후작(Marquis de Valée)를 몰아내기에는 준비가 부족했다. 케도건과 찰스 처칠이 공격을 감행한 후에야 도시가 함락되었다. 방돔은 8월 4일 플랑드르의 지휘권을 공식적으로 인수했다. 방돔의 패배한 전임자 빌레루아는 다시는 최고 지휘권을 얻지 못한 채 한탄하길 "나는 내 행복한 날들이 오직 나의 죽음을 예비한 것이었다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그를 용서하고는 친절한 말로 그의 옛친구를 맞았다. "원수, 우리의 시대에 우리는 좋은 행운이 없었을 뿐이오." 이때 말버러 공작은 상당한 피해를 입을 끝에 8월 22일 메닌(Menin)의 강력한 요새를 점령했다. 덴데몬드는 1706년 마지막에 함락되었는데, 결국 9월 6일 8월 2일 함락된 아스(Ath)의 뒤를 이어 함락되었다. 이때 말버러 공작은 라미예 전역을 끝내고 뫼즈(Meuse)강의 서쪽, 삼브르(Sambre)의 북쪽으로, 즉 스페인령 네덜란드 너머 프랑스로 진입하는 것을 거절했다. 이것은 영국의 공작이 얻은 작전상의 승리 중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 이러는 동안, 라인 강의 북부에서 빌라르는 그가 보병대대를 지원 보낸 플랑드르에서 프랑스 군대가 붕괴한 이후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가 란다우(Landau)를 재탈환할 가능성은 없었다. 동맹군에게 북 이탈리아에서 7월 4일 외젠 공작이 피에몬테(Piedmontese)의 수도인 투린(Turin)이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게 함락되기 전에 그들을 격파했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오직 스페인에서 골웨이 경(Galway)이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퇴각하고, 펠리페 4세(Philip V)로 하여금 8월 4일 마드리드로 돌아갈 수 있게 한 것만이 루이 14세에게 좋은 소식이었을 뿐이었다.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상황은 심각하게 바뀌었고, 루이 14세는 프랑스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기에 이르렀다. 앤 여왕은 또한 라미예의 전역은 하나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평화의 전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신에게 감사할 것이오." 그러나 대동맹은 승리로 인해 대담해져, 지혜와 평화에 대한 의지도 결여하게 되었다. 프랑스가 누구의 눈에도 알 수 있을 법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도, 전쟁은 다음해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공세를 대신하는 대신에 동맹은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이는 루이 14세로 하여금 라미예와 투린의 패배로부터 회복할 기회를 주었다. 사상자 프랑스군의 전 사상자는 정확히 계산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이때의 프랑스 바이에른군의 붕괴는 완벽하게 알 수 없다. 데이비드 G. 첸들러(David G. Chandler)의 저서 사령관으로서의 말보로(Marlborough as Military Commander)와 유럽의 전장 안내(A Guide to the Battlefields of Europe)에서는 프랑스의 사상자의 규모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12,000명이 전사하고 부상자를 포함하여 7,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제임스 팔크너(James Falkner)는 저서 라미예 1706년, 기적의 해(Ramillies 1706: Year of Miracles)에서 역시 전사자가 12,000명이며, 부상당하거나 포로가 된 사람이 10,000명에 이른다고 하고 있다. 군사 역사의 콜린스 백과사전(The Collins Encyclopaedia of Military History)에서 두퓌(Dupuy)는 빌레루아 부대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8,000명이고, 7,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보았다. 개략 언론(Compendious Journal (1733))에서 기록된 존 밀러(John Millner)의 기록은 좀 더 정확한데, 빌레루아의 부대에서 사망하고 부상한 사람이 12,087명이고, 9729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말버러(Marlborough)라는 책에서 코렐리 바넷(Correlli Barnett)은 총 사상자 규모를 30,000명으로 보고 있는데, 15,0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고, 여기에 덧붙여 15,000명이 잡혔다는 것이다. 라 콜로니는 그의 옛 장군들의 연대기(Chronicles of an old Campaigner)에서 사상자 규모를 빠트리고 있었다. 그러나 생 시몽 공작(duc de Saint-Simon)은 그의 저서 기억(Memoirs)에서 4,000명이 전사하고, 여기에 덧붙여 많은 이들이 부상당하고, 많은 중요인물들이 포로로 잡혔다고 기록하였다. 볼테르(Voltaire)는 그의 저서 루이 14세의 역사에서(Histoire du siècle du Louis XIV)에서 프랑스는 2만에 가까운 사람들을 잃었다고 기록했다. 더 보기 이 전투의 이름을 사용한 영국 함선이 몇 개 있다 ; HMS 라미예 각주 참조문헌 첫 번째 La Colonie, Jean Martin de. The Chronicles of an Old Campaigner, (trans. W. C. Horsley), (1904) (1857) Mémoires relatifs à la Guerre de succession de 1706-1709 et 1711, de Sicco van Goslinga, publiés par mm. U. A. Evertsz et G. H. M. Delprat, au nom de la Société d’histoire, d’archéologie et de linquistique de Frise, (Published by G.T.N. Suringar, 1857) Saint-Simon. Memoirs, vol i. Prion Books Ltd., (1999). 두 번째 Barnett, Correlli. Marlborough. Wordsworth Editions Limited, (1999). Chandler, David G. A Guide to the Battlefields of Europe. Wordsworth Editions Limited, (1998). Chandler, David G. Marlborough as Military Commander. Spellmount Ltd, (2003). Dupuy, R. E & Dupuy, T. N. The Collins Encyclopaedia of Military History 4th ed. HarperCollins Publishers, (1995). Falkner, James. Ramillies 1706: Year of Miracles. Pen & Sword Books Ltd, (2006). Gregg, Edward. Queen Anne. Yale University Press, (2001). Lynn, John A. The Wars of Louis XIV, 1667–1714. Longman, (1999). 1706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전투 독일이 참가한 전투 프랑스가 참가한 전투 영국이 참가한 전투 1706년 분쟁 1706년 프랑스 잉글랜드가 참가한 전투
|
173795
|
https://ko.wikipedia.org/wiki/%ED%9E%88%EC%97%90%EB%A1%9C%EB%8B%88%EB%AC%B4%EC%8A%A4%20%ED%8F%B0%20%EC%BD%9C%EB%A1%9C%EB%A0%88%EB%8F%84%20%EB%B0%B1%EC%9E%91
|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레도 백작
|
히에로니무스 그라프 폰 콜로레도(Hieronymus Graf von Colloredo, 1732년-1812년)는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이다. 모차르트와의 관계 그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첫 번째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모차르트의 잦은 연주회 불참으로 애를 먹었고, 결국 수많은 다툼 끝에 결별하였다. 1732년 출생 1812년 사망 오스트리아의 성직자 빈 출신 일루미나티 회원 18세기 오스트리아 사람 18세기 로마 가톨릭 대주교 19세기 로마 가톨릭 대주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69552
|
https://ko.wikipedia.org/wiki/2026%EB%85%84
|
2026년
|
2026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예정 상반기 - 울릉공항이 개항할 예정이다. 상반기 - 양산 도시철도 전 구간이 개통할 예정이다. 2월 3일 - 미국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창립 40주년을 맞이한다. 2월 6일 ~ 2월 22일 - 밀라노 및 코르티나담페초에서 2026년 동계 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이다. 3월 6일 ~ 3월 15일 - 밀라노 및 코르티나담페초에서 2026년 동계 패럴림픽이 개최될 예정이다. 3월 - 202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개최. 4월 25일 - 뮤직카우 설립 10주년. 6월 3일 -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치러질 예정이다. 6월 10일 - 6·10 만세 운동이 100주년. 6월 11일 ~ 7월 19일 - , , 에서 2026 북중미 월드컵이 개최될 예정이다. 7월 - 서울 경전철 동북선이 개통될 예정이다. 8월 12일 - 일식 9월 19일 ~ 10월 4일 - 아이치·나고야에서 2026년 아시안 게임이 개최될 예정이다. 10월 14일 ~ 10월 22일 - 아이치·나고야에서 2026년 장애인 아시안 게임이 개최될 예정이다. 12월 이후 - 부산 도시철도 사상하단선 1단계(사상 ~ 하단) 구간이 개통 예정이다. 미정 광주 도시철도 2호선 1단계 구간이 개통될 예정이다. 수도권 전철 동탄인덕원선 구간이 개통될 예정이다. 함양울산고속도로의 창녕JC - 북함양JC 구간 개통될 예정이다. 바르셀로나에 지어지고 있는 로마 가톨릭 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완공될 예정이다. 김해국제공항이 확장 개항할 예정이다. 부산 도시철도 강서선의 1단계 구간이 계통 예정이다. 수도권 전철 4호선 풍양역이 개통될 예정이다. 화성탐사로버에 탑재되어 열과 전기를 공급하는 플루토늄 발전기(plutonium generators)의 연료가 소진될 예정이다. 유럽 우주국이 우주공간 임무 로드맵(Cosmic Vision: Space Science for Europe 2015–2025)의 일환으로 M-class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플라토 우주망원경을 발사할 예정이다. 플라토는 외계 행성 발견을 목적으로 발사하는 우주망원경이다. 현대차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가 완공될 예정이다. OKEANOS가 발사될 예정이다. 대한민국의 차세대 다목적 전투기 KAI KF-21 보라매가 실전 배치될 예정이다. 두바이 타워스 도하가 완공될 예정이다. NEO 서베이어가 발사될 예정이다. 부산 도시철도 2호선 양산종합운동장역 개통예정이다. 문화 4월 5일 - 부활절. 탄생 사망 노벨상 경제학상: 문학상: 물리학상: 생리학 및 의학상: 평화상: 화학상: 달력 음양력 대조 일람
|
101422
|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B9%B4%EC%9D%BC
|
미카일
|
미카일(, )은 히브리어에서 비롯한 남자 이름이다. 미카일 나이마는 레바논의 평론가·시인·소설가이다. 같이 보기 마이클 미카엘 인명
|
111594
|
https://ko.wikipedia.org/wiki/KTX-%EC%82%B0%EC%B2%9C
|
KTX-산천
|
KTX-산천(KTX-山川, KTX-Sancheon) 또는 SRT는 한국철도공사와 에스알에서 각각 운용하는 고속철도 차량이다. 기존 KTX의 후계 차량이라는 점에서 초기에는 “KTX-II”로 불리었으나 한국철도공사의 공모전 결과 2010년 2월 28일 “KTX-산천”으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차량은 한국철도공사가 직접 보유, 운영하는 110000호대, 140000호대, 한국철도공사가 보유하고 에스알이 이를 임대해서 운용하는 120000호대, 에스알이 직접 보유, 운용하는 130000호대 등으로 구분된다. 시험차량 HSR-350x의 시험 결과를 반영하여 설계되었으며, 모든 차량이 현대로템에서 제작되었다. 현재 총 10량 71개 편성(710량)이 도입되었다. 성능 KTX-산천은 KTX, HSR-350x를 바탕에 두고 제작되었다. 따라서 해당 차량들로부터 바뀐 성능을 아래에 나열한다. KTX와의 차이점 주전동기를 동기전동기에서 현대로템에서 제작한 1,100 kW급 유도전동기 8개로 바꾸어 유지·보수의 간략화를 도모했다. KTX 차량이 마일드 스틸제 싱글 스킨 구조인데 비해, KTX-산천은 알루미늄제 더블스킨 구조를 채용하여 이에 따른 기밀성 강화와 소음 저감을 도모했다. 현대로템의 발표에 의하면 300 km/h 주행시 64 dB의 소음치를 달성했는데 이것은 KTX에 비해 2 dB 정도 낮은 수치다. 객차의 차폭이 2,904 mm에서 2,970 mm으로 확대되었다. 대차의 구조는 1차 현가 장치에 코일 스프링이 적용되었으며, 2차 현가 장치에는 코일 스프링, 공기 용수철, 안티 롤 바가 적용되어 있다.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몸체는 산천어를 모티브로 유선형으로 제작되었다. HSR-350x과의 차이점 전력제어소자로 절연 게이트 양극성 트랜지스터(IGBT)를 사용한다. 고속철도 차량의 개념설계가 행해지고 있었던 1996년 당시 IGBT 출력이 1,100 kW에 달하는 주전동기 제어가 불가능해서, 전력제어소자로 대전력 제어가 가능한 게이트 턴 오프 사이리스터(GTO) 소자 중 효율이 높은 통합 게이트 정류 사이리스터(IGCT)를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HSR-350x의 시험운행 결과 IGCT의 비효율성이 드러났으며, 전력 전자공학 발달로 IGBT를 이용한 대전력의 제어가 용이해지면서 양산형 차량인 KTX-산천은 히트 파이프를 이용한 강제 냉각 방식의 IGBT 인버터 제어 방식을 채용하였다. 와전류제동이 제거되었다. 특이 사항 두 개의 편성을 한대로 붙여 운행하는 방식의 중련 운행이 가능하다. 특히 양쪽 선두부에 전공일체 자동연결장치를 적용해 수요에 따른 탄력적 운용이 가능하며, 경부선, 동해선, 경전선, 호남선, 전라선 등에서는 이를 이용한 중련 열차를 운행하고 있다. 중련 운행시 9, 10호차 없이 남측 편성의 차량번호가 11~18호차로 편성된다. 급전은 각 편성이 별도로 편성 후미가 되는 동력차의 집전장치를 사용한다. 2011년 5월 16일부터 2012년 10월 31일까지는 중련 운행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KTX-산천 110000호대 2006년 6월 7일 현대로템과 납품 계약을 체결하여 24편성이 도입되었다. 완성된 첫 편성은 2008년 11월 25일 공개되었으며, 2009년 1월 19일 부산철도차량정비단으로 회송되었으나 동월 21일 공장으로 돌아갔고, 2월 17일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으로 회송되었다. 2009년 2월 17일부터 7월 16일까지 6편성, 2010년 2월 18일부터 11월 2일까지 13편성, 2012년 1월 30일부터 5월 24일까지 5편성이 도입되었으며, 한국철도공사는 시운전을 거쳐 2009년 10월 13일 서울역에서 열린 '타자! 기차를!' 발대식에서 정식으로 공개하였다. 현재 한국철도공사가 소유한 24편성 240량이 모두 영업 운행에 투입되었다. 차량 가격은 1편성 10량 기준 330억원이다. 실내 사양 일반실의 좌석간 거리가 980 mm로 50 mm가량 늘어나 쾌적성이 향상되었다. 모든 좌석이 회전 가능한 형태로 변경되었으며, 형태와 재질도 개량되었다. 간접조명을 채용해 개방감이 향상되었다. 특실용 좌석의 경우 자동 리클라이닝 기능이 추가되었으며, 최대 리클라이닝 각도는 기존 39도에서 43도로 향상되었다. 창유리가 기존 29 mm의 3겹에서 38 mm의 4겹로 두꺼워져 소음 차단효과와 안전성이 향상되었다. 특실 전 좌석과 일반실 8개소에 220 V 전원 콘센트가 설치되었다. 스낵바가 4호차에 설치되었다. 종전 식당차나 새마을호, 무궁화호 카페객차와 달리 노래방, 안마, PC방, 게임기 시설이 없으며 식탁도 1인용이 아닌 마주보기식으로 되어 있어 공간이 좁다. 현재는 좌석으로 개조되었다. 특이 사항 가속 성능이 향상되어, KTX의 6분 5초에 비해 49초 줄어든 5분 16초만에 정지상태에서 최고속도인 300 km/h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철도공사 전산망에서는 짧은줄표(-)를 넣어 KTX-산천으로 표기한다. 109호기가 특별 동차로 지정되어 있으며, 해당 차량은 영업 운전 시 1~2호차를 개방하지 않고 운행한다. 2016년 3월 11일 140000호대 도입과 함께 편성 번호가 1호기 내지 24호기에서 백의 자리 1이 추가된 101호기 내지 124호기로 개번되었다. 편성 SRT 120000호대 2015년 4월 2일 호남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도입된 한국철도공사 소유의 고속철도 차량이며, 현재 에스알로 임대되어 운행중이다.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2012년 2월 20일 현대로템과 납품 계약을 체결해 22편성(220량)이 제작되었고, 완성된 첫 편성이 2013년 8월 21일 공개되었다. 한국철도공사에서는 2015년 4월 2일부터 호남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2016년 12월 8일까지 KTX_산천으로 영업 운행에 투입하였다. 이후 수서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2016년 12월 9일부터 에스알에 임대되면서 KTX_산천 명칭을 KTX_산천 140000호대에 내주고, SRT로 변경되었다. 정비는 호남철도차량정비단에 배속되어 시행한다. 차량 가격은 1편성 당 335억원이다. 성능 가속 성능이 향상되어, 정지 상태로부터 최고 속도인 300 km/h까지의 도달 소요 시간이 KTX 6분 5초, KTX-산천 110000호대 5분 16초보다 줄어든 4분 57초(거리 15.6km)다. 감속 성능도 향상되어, KTX와 KTX-산천 110000호대가 300 km/h 주행에서 정지하기까지 3300 m 이내의 제동거리가 요구되는 데에 비해, 3000 m(69초)만에 정지할 수 있게 되었다. 전기공급이 차단되더라도 공압에 의해 작동할 수 있는 스페어 와이퍼를 추가 설치하였다. 동력차와 객차를 연결하는 사이드버퍼의 헤드 연결부를 일체형으로 제작하여 강도와 안전성을 높였다. 만일의 장애에 대비하여 기존 차량보다 진단제어장치를 업그레이드 하였다. 먼지유입 방지를 위해 팬터그래프 제어기를 박스구조로 개선하였다. 공차중량이 10량 1편성 당 406톤으로 KTX-산천의 공차중량 403톤보다 증가하였다. 승차감이 향상되었다. 특이 사항 단독창 방식을 채택하여 실내조망 크기를 유지하고 외부 노출면적은 줄여서 창문 파손을 최소화하였다. 2D곡면 유리를 채택하여 상의 일그러짐을 개선하고 시야를 확보하였다. 좌석 공간은 110000호대보다 20 mm 적은 960 mm이나 테이블을 위로 올려 여유 공간이 110000호대보다 57 mm 늘어나 무릎, 의자 사이의 거리는 200 mm가 되었다. 모든 좌석에 모바일용 전원 콘센트를 설치하였고, 객실 LED 조명 및 조도 조절 기능도 추가하였다. 방음재 추가적용으로 객실 소음 저감 등 편의성을 개선하였다. 승무원실과 방송실을 통합하여 공간을 재배치해 스낵바는 없으며 차내 도시락 서비스는 제공되지 않는 대신 자동 판매기가 설치되었다. 비즈니스실이 없으며 좌석 수는 110000호대보다 많은 410석이다. 이는 이후 차량에도 적용된다. 전두부쪽 기적커버가 기존 산천과는 다른 모양으로 되어있다. 기존 산천의 기적커버는 구명이 몇개 뚫려있는 형태지만 120000호대부터는 일직선 모양으로 되어있다. 편성 SRT 130000호대 2016년 12월 9일 SRT 개통과 함께 도입된 에스알 소속 차량이다. 2014년 3월 19일 에스알과 현대로템이 납품 계약을 체결하였고, 2015년 10월 20일 완성된 첫 편성이 현대로템 창원공장에서 공개되었다. 2016년 12월 9일 SRT 개통과 함께 총 10개 편성(100량)이 영업 운행에 투입되었다. 정비는 한국철도공사 호남철도차량정비단에 배속되어 시행한다. 특이 사항 국내 최초로 특실에 항공기형 선반이 적용되었다. 차량번호의 경우에는 반입 당시에는 31~40호기로 구분하였으나, 현재는 301~310호기로 구분한다. 편성 KTX_산천 140000호대 2017년 12월 22일 강릉선 개통 및 2018년 동계 올림픽을 대비하여 도입된 고속철도 차량이다. 한국철도공사 전산에서는 기존 110000호대(KTX-산천)와 구분하기 위해 KTX-원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2014년 3월 19일 한국철도공사와 현대로템이 납품계약을 체결하여 총 15편성 150량이 도입되었으며, 완성된 첫 편성이 2016년 3월 10일 현대로템 창원공장에서 공개되었다. 401호기는 2016년 3월 11일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으로 갑종회송되었고, 2016년 5월 27일부터 402호기를 시작으로 자력회송하였다. 현재 15개 편성이 도입되었다. 이중 412호기는 11월 4일 강릉선 KTX 시승식에 쓰였다. 차량 가격은 1편성 329억원이다. 기존 KTX-산천의 HID 램프에서 LED 램프로 교체되었고, 통유리에서 120000호대의 개별형으로 변경된 것이 특징이다. 또한 기존 산천에 쓰이던 디스크타입 IGBT가 단종되어 모듈형 스텍을 사용하였다. 기존 110000호대 산천과는 다르게 객실 측면에 출입문 표시등이 추가되었다. 2021년 8월 1일 KTX-이음 열차가 운행함에 따라 강릉선 운행에서 철수하였다. 편성 현황 현재 운행 중인 차량은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굵은 글씨로 표시하였다.지금 현재 총 71개 편성 710량이 제작이며 차량 현황은 다음과 같다. 110000호대 총 24개 편성이 도입되었으며, 모든 편성이 운행 중에 있다. 120000호대 총 22개 편성이 도입되었으며, 2023년 기준 모든 편성이 운행 중에 있다. 130000호대 총 10개 편성이 도입되었으며, 모든 편성이 운행 중에 있다. 140000호대 총 15개 편성이 도입되었다. 이 중 사고로 인하여 휴차중인 408호기를 제외한 전 편성이 운행 중에 있다. 논란•사건 및 사고 KTX-산천은 2010년 3월 투입 이후부터 1년 사이에 40여건에 이르는 크고 작은 고장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특히 용산발 목포행 401열차의 잔고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운영사인 한국철도공사와 제작사인 현대로템 관계자는 영업개시 직후 평균 10일에 한번 꼴로 발생하는 KTX-산천의 잇따른 사고에 대해 도입 초기 상태여서 발생한 일이며, 기계 특성상 2년에서 3년 정도의 안정화 기간이 필요하다 보니 추가적인 사고가 불가피할 것이라 전망하고 있으나 현장에서는 KTX-산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시험운행중 120000호대 차량의 변압기가 3차례나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호남고속철도 개통 당일날 용산발 목포행 #515 열차(120000호대 열차)가 주행중 워셔액 주입구가 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일직터널 KTX 열차 탈선 사고 2011년 2월 11일에는 부산역을 출발하여 광명역으로 가던 KTX-산천 제224열차 10량 중, 후미 6량이 광명역 약 500여m를 앞두고 탈선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해당 열차의 이용고객 149명은 10여 분을 걸어 터널을 빠져나왔으며, 인명 피해는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해당 편성은 특별 동차 편성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한국철도공사의 리콜 요청 2011년 5월 7일, 고양차량사업소에서 KTX-산천 102호기의 운행을 앞두고 사전 검수를 하던 도중 모터감속기에서 균열이 발견되었다. 모터감속기는 모터블록의 동력을 제어하는 주요 구성 장치이다. 이 외에도 신호 장치와 고압회로, 모터블록 등의 장치가 빈번하게 고장이 발생하자, 한국철도공사에서는 제작사인 현대로템에 사실상의 리콜을 요청하였다. 같은 해 8월 9일에는 한국철도공사가 제작사인 현대로템을 상대로 잔고장을 일으킨 KTX-산천에 대해 피해구상 소송을 내기로 했다. 한국철도공사 KTX-산천 운행 개시 이후 차량 자체의 결함으로 말미암은 한국철도공사의 안전 신뢰도 하락 및 이미지 실추에 대해, 모두 11억 2000여만원의 피해구상 청구 소송을 냈다. 사진 같이 보기 KTX SRT HSR-350X HEMU-430X 각주 대한민국의 고속철도 차량 현대로템의 철도 차량 2010년 도입
|
289514
|
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A%B2%A9%EB%8B%A4%EC%A7%90
|
우격다짐
|
《우격다짐》은 한유랑의 순정 만화로, 2003년 2월 24일부터 2003년 5월 9일까지 10권에 걸쳐 연재되었다. 줄거리 조폭 No.1 가문의 독자인 나동명이 조폭의 적인 판사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잔머리를 잘 굴리는 여자 깡패 금비단이 나동명을 굴복시키기 위해 맞닥뜨리게 된다. 등장 인물 나동명 금비단 한유랑의 만화
|
66111
|
https://ko.wikipedia.org/wiki/%ED%8F%AC%EB%B3%91
|
포병
|
포병(砲兵)은 병과(兵科)의 한 가지로, 대포 종류로 장비된 군대 또는 군인이다. 대공포, 대포, 로켓, 미사일 등을 쏘아 적을 공격하거나 아군을 엄호한다. 단, 박격포와 무반동총은 명칭이나 구경에 관계 없이 보병으로 분류한다. 포병 숫자 포병은 야포를 조작할 때에 여러 가지 수치를 계산하고 포에 장입하게 되는데 이 때에 시끄러운 야전에서 숫자를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통화표(通話表, 일명 '포병 숫자')를 사용한다. 숫자의 한글 통화표는 아래 표와 같다. 예를 들어 10은 하나공, 271은 둘칠하나와 같은 식으로 센다. 포병의 경우 병영 생활 할 때에 포병 숫자를 사용하여 수를 세거나 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경우에 따라서 하나, 둘, 셋, 넷, ... 과 같은 기수를 그냥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 때에도 절대로 셋이라고 하지 않고 삼이라고 한다. 즉, 하나, 둘, 삼, 넷, ... 과 같이 기수를 센다. 단위 부대 포병은 포대() 단위로 운용된다. 이는 보병의 중대에 해당하는 제대로서 통상 대위급 장교가 지휘한다. 한 개 포대가 통상 6문의 야포를 운용하며, 야포를 직접 운용하는 하위제대를 전포대(戰砲隊, Firing Battery)라고 부르는데 이는 보병 중대 예하의 소대에 대응된다. 전포대는 통상 중위급 장교가 전포대장으로 지휘하며 전포사격통제관은 상사 또는 중사가 담당한다. 완편(완전편제)이 아닐 경우에는 최고선임 부사관이 행정보급관과 전포사격통제관을 겸하기도 한다. 포의 운용을 지원하는 병력을 통틀어서 비전포라고 부른다. 비전포는 포대본부, 관측반, 통신반 등으로 나뉘며 관측반에는 소위급 관측장교가 3명 편제되어 있다. 사단 포병의 경우 총 4개의 포병대대가 있는데 3개 포병대대는 사단에 있는 3개의 보병연대를 직접 지원하며, 나머지 1개 포병대대는 사단을 화력지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병연대를 지원하는 포병대대는 1개 포대에 1개 관측반이 편성되어있지만 사단을 지원하는 포병대대는 대대에 1개 관측반이 있다. 포병대대의 경우 참모부에 보병대대에 편제되어있는 참모 외에도 사격지휘장교, 화력지원장교등이 추가로 편제되어 있다. 대한민국 포병의 분류 2012년부터 병과에 따른 주특기번호가 개편되었다. 육군 일반장교 3자리(끝자리가 0), 군의장교 4자리 준위 및 부사관 3자리(일반장교 3자리에서 끝자리로 세분화). 준위와 부사관 모두 공통의 주특기번호를 가지나, 각각 고유로 갖는 것도 있음. 부사관 중 특전통신, 화기, 의무, 정작 특기의 경우 병의 경우와 마찬가리로 기본 3자리 끝에 추가 3자리를 덧붙인다. 병 6자리 준위 및 부사관의 특기 기본 3자리 끝에 추가 3자리를 덧붙인다. 병 특수자격 중 외국어 자격(16개), 특수자격(39개), 전환복무자 및 카투사 전역자 특기도 개편되었다. 2012년도 예비군 실무편람 '군사특기 및 유사특기 범위' 560쪽 참조 131 105mm 견인포병 : 1311 155mm 견인포병 : 1312 155mm/175mm 자주포병 :1313 8인치 자주/견인포병 :1314 자주포병/조종수 : 1315 견인포화포정비 : 1316 자주포화포/장갑정비 : 1317 132 다연장운용/정비 : 1321 어네스트존운용/정비 : 1322 현무발사대운용/정비 : 1323 현무사통장비운용/정비 : 1324 133 야포작전정보 : 1331 (폐지) 105mm 사격지휘 : 1332 155mm 사격지휘 : 1333 8인치/175mm사격지휘 : 1334 로켓포 사격지휘 : 1335 음향 : 1336 포병측지 : 1337 표적레이더 : 1338 자동측지운용/정비 : 1339 같이 보기 병과 대포 전략포병 전술포병 각주
|
Subsets and Splits
No community queries yet
The top public SQL queries from the community will appear here once avail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