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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94%EC%B2%9C%EA%B5%B0
화천군
화천군(華川郡)은 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서북부에 위치한 군이다. 대부분 지역이 산악 지형이고, 북한강이 군의 중남부로 흘러 파로호로 흐른다. 군청 소재지는 화천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4면이다. 해방 직후 5년 동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실효지배하였으나 6.25 전쟁 중 대한민국이 장악하여 대한민국이 실효지배하는 지역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통치 시절 인민군 사령부 막사가 문화유산으로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지금은 국방부 소유로 되어 있다. 접경 지역이지만 철원군(김화군)에 가로막혀 군사분계선을 바로 접하지는 않는다. 역사 고구려 시기 : 생천군(牲川郡) 또는 야시매(也尸買)로 불렸다. 685년(신라 신문왕 6년) : 낭천(狼川)이라 불리었다. 995년(고려 성종 16년) : 삭방도(朔方道)의 관할이 되었다. 1178년(고려 명종 8년) : 삭방도를 폐하고 춘주도(春州道)가 설치되어 춘주도의 관할이 되었다. 1413년(태종 13년) : 현감을 두었다. 1645년(인조 23년) : 현을 폐지하고 지금의 금화군에 있던 도호부 관할로 되었다가, 뒤에 다시 현이 복구되었다. 1869년(고종 6년) : 화천(華川)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 : 낭천군으로 개칭하였다. 1902년 : 화천군으로 개칭하였다. 1914년 4월 1일 : 하서면과 남면을 하남면으로, 상면과 서면을 상서면, 간척면과 원동면을 간동면으로 각각 통합하였다. 4면 - 하남면, 간동면, 군내면, 상서면 1917년 : 군내면을 화천면으로 개칭하였다. 1941년 : 화천댐이 건설되면서 간동면의 사무소를 구만리에서 유촌리로 옮기고, 화천호 북쪽의 동촌리와 태산리를 화천면으로 이관하였다. 1945년 9월 2일 :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화천군 전 지역이 소련군정 관할 아래 들아갔다. 가평군의 북면은 사내면에, 춘천군 사북면은 하남면에, 춘천군 북산면은 간동면에 편입되었다. 1953년 7월 27일 : 한국 전쟁의 결과, 화천군 전 지역이 수복되었다. 1954년 10월 21일 : 춘천군 사내면이 편입되었다. (5면) 1954년 11월 17일 : 화천군의 행정권이 군정(軍政)으로부터 강원도로 이양되었다. (5면) 1979년 5월 1일 : 화천면이 화천읍으로 승격하였다. (1읍 4면) 지리 화천군은 서울 동북방 132 km, 휴전선남방 22 km 지점의 강원특별자치도 서북부에 위치한 산악지대로서 동쪽은 양구군, 서북쪽은 철원군, 남쪽은 춘천시, 서쪽은 경기도 포천군 및 가평군과 접하고 있어 5개 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서간 66 km, 남북간 45 km로 면적의 86.2%가 산지로 형성된 산악지대로서 서부에는 광주산맥이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있고 동부는 태백산맥의 지맥들이 험준한 고산지대를 이루면서 불규칙하게 분포되어 있다. 강원도의 영서지방 중북부, 북쪽에서 태백산맥의 서사면을 차지하며 서북경의 광주산맥에는 백암산·대성산 등이 솟아 있고, 남경 사명산맥에는 간곡산·죽엽산 등이 솟아 있다. 북한강이 감입곡류하며 그 사이를 흐르고 구만리 부근에는 화천발전소의 파로호가 구축되었다. 지류 서옥천·동림천·원천 등이 모이는 간동면에 분지가 발달하였다. 기후 겨울철에 강설은 주로 중부지방을 통과하는 저기압 때문이나 강원도 영동지방의 강설량 보다는 훨씬 적게 내리게 하고 있다. 바람은 겨울철에는 한냉 건조한 북서 계절풍이 주를 이루고 여름에는 고온다습한 남서계절풍이 많이 불고 봄가을은 편서풍이 강하게 부는 때가 있다. 내륙 산간에 위치한 까닭에 기온의 교차가 심하다. 연평균 기온 9.4°C, 1월 평균 -7.2°C, 8월 평균 26.4°C, 최고 기온 39.5°C, 최저 기온 -25.1°C, 연평균 강수량 1,300 mm이다. 행정 구역 화천군의 행정 구역은 1읍 4면이며, 면적은 2016년 기준으로 908.93 km2이다. 인구는 2019년 12월 말 주민등록 기준으로 2만4917 명, 1만2603 가구이고, 남녀 성비는 1.18:1이다. * 인구·세대는 2019년 12월 31일 주민등록 기준 직속기관 및 사업소 직속기관 사업소 교통 국도 시외버스 산업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콩·감자·누에고치·꿀 등이다. 축산업으로는 한우·젖소·돼지·닭·사슴·산양 사육이 활발하며 농가에서 부업으로 양봉·양잠이 행해지기도 한다. 광업은 규석광산 1개 소가 있으나 생산량이 많지 않다. 특산물 느타리버섯·동촌달래·두류산방울토마토·무공해유정란·뽕잎미숫가루·사과·생칡즙·아카시아꿀·재래메주·천마·취나물·파로호산양유·평화가시오이·현미숭늉차·화악산찰토마토 등이 유명하다. 관광 파로호와 화천댐 파로호는 1944년 5월에 화천댐이 건설되면서 만들어진 인공 호수이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일제는 대륙침략을 지원하는 군수산업을 위해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와 용호리의 북한강 협곡을 막아 화천댐을 축조하였다. 파로호는 이 때 생긴 인공호수로, 면적은 38.9km2이다. 평화의 댐 평화의 댐은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에 따라 2005년 10월 19일 완공한 대응댐이다. 총저수량, 26.3억톤, 총길이 601m, 높이 125m의 대규모 댐이다. 입구 좌측에는 비목공원과 물문회관이 있으며, 물문회관에서는 물의 중요성을 홍보 자료와 함께 식당 등을 운영하고 있다. 화악산 화악산은 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화천군의 경계에 있는 높이 1,468m의 산이다. 38선 정상을 가르고 있어서, 한국전쟁 때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삼일계곡을 비롯해, 법장사, 화음동정사지 등 역사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 삼일리에서 출발하여, 법장사와 화음동정사지를 둘러보고, 촛대바위를 거쳐 내려오면 낙수대와 모골계곡, 반수암지 법장사, 화음동 계곡, 농수정사지, 곡운구곡 등의 명승고적을 즐길 수 있다. 비수구미 아쿠아틱리조트 붕어섬 용화산 딴산 파로호 낭천산림욕장 비목공원 미륵바위 축제 산천어축제 1월 중에 약 25일간 화천천 축제장에서 개최되며, 파로호, 평화의 댐 등지에서 축제가 열린다. 산천어 얼음낚시, 루어 낚시, 산천어맨손잡기, 창작썰매콘테스트, 얼음썰매장, 눈썰매장, 봅슬레이, 빙상장, 얼음축구장 등의 즐길거리가 마련되어 있다. 토마토축제 쪽배축제 교육 고등학교 인물 역대 군수 자매도시 각주 외부 링크 화천군청 (공식) 강원특별자치도의 군 1902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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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B%9E%80%ED%88%B4%EB%9D%BC%20%EC%84%B1%EC%9A%B4
타란툴라 성운
타란툴라 성운()또는 황새치자리 30(30 Doradus), NGC 2070은 대마젤란 은하(LMC)에 있는 전리수소영역이다. 처음에는 항성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1751년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가 이것이 성운임을 밝혀냈다. 타란툴라성운의 실시등급은 8등급이다. 성운까지의 거리가 49 킬로파섹(160,000 광년)임을 생각해 볼 때, 이 천체는 극도로 밝은 비항성 천체이다. 타란툴라성운의 광도는 너무 크기 때문에, 만약 타란툴라성운이 오리온 성운마냥 지구에 가까이 있었다면 그 빛은 그림자를 지울 수 있을 정도로 밤하늘에서 밝게 빛났을 것이다. 타란툴라성운은 국부은하군에서 가장 활동적인 폭발적 항성생성 영역이다. 또한 타란툴라성운은 직경 약 200 파섹으로 국부은하군에서 가장 큰 폭발적 항성생성 영역이기도 하다. 성운은 LMC의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곳의 램 압력으로 인해 성간매질이 압축되어 이런 구조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성운의 중심에는 거대한 산개성단인 R136(직경 약 35광년)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성단이 성운이 보일 수 있게 하는 에너지 대부분을 생산한다. 성단의 추정 질량은 450,000 태양질량으로, 미래 언젠가 구상성단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R136에 더하여 타란툴라성운 안에는 좀더 늙은 산개성단이 하나 더 있는데, 호지 301이라 한다. 이 성단의 나이는 2천만 ~ 2천 5백만 년이며, 이 성단의 무거운 별들은 이미 초신성 폭발을 일으켰다. 망원경 발명 이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폭발한 초신성인 SN1987A가 타란툴라성운의 가장자리에서 발견되었다. 각주 대마젤란 은하 황새치자리 2070 전리수소영역 1751년 발견한 천체 콜드웰 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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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C%9D%B4%EB%B2%A0%EC%9D%B4%20%EB%8C%80%EA%B3%B5%EC%8A%B5
타이베이 대공습
타이베이 대공습(, , 대북 대공습)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5년 5월 31일, 연합군이 일본제국의 타이완식민지 타이베이를 전략 폭격한 사건이었다. 이 공습으로 약 3,000명이 사망, 중경상자 및 집을 잃은 사람은 수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같이 보기 일본 본토 공습 도쿄 대공습 포르모사 공중전 타이베이 형무소 벽 유적 1945년 분쟁 1945년 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와 작전 대만일치시기 전략폭격 1945년 5월 미국-중화민국 관계 타이베이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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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5%8C%ED%81%AC%EB%8B%88%EC%BB%AC%20%ED%8E%A0%EB%A1%9C
테크니컬 펠로
테크니컬 펠로(, 기술 특별 연구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개인에게 주는 명예이다. 이 명칭은 기술적 비전, 전문적 지식 그리고 세계적인 리더쉽 부문에서 널리 인정 받는 개인에게 수여된다. 이들은 고객, 회사 그리고 산업을 위한 기술 전략을 개발하고 추진하는 데에 능력을 발휘한다. 현재 18명의 테크니컬 펠로가 있다. 테크니컬 펠로 수여자 Rakesh Agrawal Moshen Agsen Wael Bahaa-El-Din 데이비드 캠벨(David Campbell) Terry Crowley 데이비드 커틀러 도널드 F. 퍼거슨(Donald F. Ferguson) 게리 플레이크(Gary Flake) 짐 그레이(Jim Gray) 아네르스 하일스베르 버틀러 램프슨(Butler Lampson) 브래드 러버링(Brad Lovering) 수리 라만(Suri Raman) Darryl Rubin 마크 러시노비치 Burton J. Smith Peter Spiro Chuck Thacker 같이 보기 IBM에는 이와 비슷한 인정 프로그램으로 IBM 펠로가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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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A%BD%EB%B9%9B%EB%B3%B4%EB%8B%A4%20%ED%91%B8%EB%A5%B4%EA%B2%8C
쪽빛보다 푸르게
《쪽빛보다 푸르게》()는 후미즈키 코우 원작의 하렘계 애니메이션이다. 2002년 작품으로 악독한 남자 주인공 주위에 미소녀들이 둘러싸 여러 가지 일이 생기다는 전형적인 하렘물 이야기로 흘러가지만, 쪽빛보다 푸르게는 카오루와 아오이, 이 둘을 확실한 커플로 묶어놓고 주인공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애니메이션 인기에 힘입어 2003년에는 2기 〈쪽빛보다 푸르게 ~인연~〉 이 만들어졌다. 대한민국 안에서는 대원에서 《천생연분》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애니메이션은 《쪽빛보다 푸르게》로 애니원을 통해 방영되었다. 등장인물 사쿠라바 아오이 하나비시 카오루 카구라자키 미야비 티나 포스터 성우 : 유키노 사츠키 / 지미애 미나즈키 타에코 성우 : 미즈하시 카오리 / 김지혜 미유키 마유 성우 : 정소영 미나즈키 치카 성우 : 배정민 일본의 만화 사이타마현을 배경으로 한 작품 2002년 애니메이션 일본의 애니메이션 후지 TV 계열 심야 애니메이션 J.C.STAFF NBC유니버설 재팬 애니메이션 하렘물 연애 만화 플레이스테이션 2 게임 윈도우 게임 대원방송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도시마구를 배경으로 한 작품 사이타마현을 배경으로 한 만화 사이타마현을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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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B%A6%AC%EC%82%AC%20FC
라리사 FC
AEL FC(은 그리스의 축구 클럽으로 그리스 테살리아의 주도인 라리사를 연고로 하고 있다. AEL은 아틀리티키 에노시 라리사스()의 약자이며, 이는 라리사 체육 조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역사 1964년에 AEL(Athlitiki Enosi Larissas)로 탄생하였는데, 이는 네 개의 지역 클럽인 이라클리스 라리사(Iraklis Larissas), 아리스 라리사(Aris Larissas), 톡소티스 라리사(Toxotis Larissas), 라리사이코스(Larissaikos)의 합병으로 만들어졌다. 라리사는 곧 1부리그에 올라갔고 1988년엔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하강세를 그리며 2000년에는 3부리그로 강등되었고, 파산에 이르게 되었다. 클럽은 2003년에 파산으로 인해 명칭 변경을 하게 되어 AEL 1964로 변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4-05시즌에 2부리그 우승을 하였고, 그리스 컵 8강전에 올라가는 좋은 시즌을 보냈다. 라리사는 지방을 연고로 한 팀(아테네와 테살로니키 팀을 제외한 팀) 가운데 최초로 1988년에 리그 우승을 하였다. 또한 두번의 그리스 컵 우승 기록도 가지고 있는데, 1985년과 2007년에 우승을 하였다. 역대 성적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그리스의 축구단 1964년 설립된 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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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85%EC%8B%A0%EC%84%B8
독신세
독신세(獨身稅)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 특별히 걷는 세금이다. 싱글세나 1인가구세라고도 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결혼 적령기를 넘긴 노총각에게 특별 세금을 부과했다. 만약 30세가 넘도록 미혼으로 남아있으면 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저출산 대비책으로 제안되기도 한다. 대한민국 2014년 9월 4일에 손숙미 인구보건복지협회 회장이 여성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싱글세는 개인 삶의 방식에 대한 침해나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문제에 대한 책임의식과 결혼과 출산에 대한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정책으로 인식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14년 11월 12일자 매일경제신문 기사에 따르면, 보건복지부 관계자가 매일경제신문 기자와의 대화에서 "앞으로 몇 년 후에는 '싱글세(1인가구 과세)'를 매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라며 "장기적으로는 (싱글세와 같은) 페널티 정책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에서는 11월 12일에 "'싱글세' 등과 같이 페널티를 부과하는 방안은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으며, 싱글세는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표현한 말이 잘못 전달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라고 밝혔다. 소수공제자 추가 공제 제도 폐지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에 "소수공제자 추가 공제" 제도를 폐지했다. 이는 연말정산을 할 때, 부양가족이 적은 1인 가구, 2인 가구(자녀가 없는 부부)에게 추가로 소득공제를 하는 제도였다. 그런데 가족 수가 적을수록 인적공제액이 많게 되는 문제점이 있고, 선진국의 경우에도 유사한 제도가 없기에 폐지한 것이다. 대신에 정부는 "다자녀가구 추가 공제" 제도를 도입했다. (즉, 직접적으로 세금을 걷지 않고, 연말정산 소득공제를 폐지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세금을 걷은 것이다.) 그러나 2009년 5월 17일에 조세연구원 및 국세청의 자료에 따르면, 여전히 독신가구에 비해 다자녀가구의 세부담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신에 세금을 내는 근로자는 크게 늘었다. 월 300만원을 받는 미혼인 회사원 A씨는 매달 근로소득세 원천 징수액이 8만 8510원이다. 반면 전업주부 배우자와 20세 이하 자녀가 두명 있는 B씨는월 300만원을 받는데도 1만 8810원을 낸다. 두 사람이 받는 월급은 같은데 근로소득세만 놓고 볼때 A씨는 B씨보다 1년에 약 84만원을 더낸다. 이는 소득세법상 인적 공제가 있기 때문에 자녀나 배우자가 있으면 공제를 더 받을 수 있는 법 때문이다. 찬성론 나라를 위해서 충분히 가능하다. 혼자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은 편할지 모르지만 미래를 위해 최소한의 인구 감소는 막아야 할 의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론 독신세가 국민을 국가의 부품화하고 성소수자를 차별한다는 반대론이 있다. 각주 같이 보기 무자녀세 인세 출생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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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TVT%20%28%ED%85%94%EB%A0%88%EB%B9%84%EC%A0%84%20%EC%B1%84%EB%84%90%29
TVT (텔레비전 채널)
TVT()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존재한 CJ미디어(현 CJ E&M 방송사업부문)의 종합 영화 오락 채널이다. 개요 2008년 7월 15일에 스카이라이프를 통해 송출을 시작하면서 개국하였다. 당초 2008년 1월 1일에 TvN이 스카이라이프를 통한 송출을 중단하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 CJ미디어가 이를 대체하고자 준비하였으나, 한국디지털위성방송(현재의 KT스카이라이프)이 이를 거부하고 대체 프로그램을 방송하면서 시청자들에게 공급을 하지 못했다. 이후 2008년 6월 7일에 TVN이 스카이라이프를 통한 송출을 재개하자, CJ미디어는 TVT를 유료 방송에서 24시간 HD 영상으로 방송하는 종합 영화 오락 채널로 육성하기로 하였다. 한 달 뒤에는 CJ헬로비전의 헬로TV를 통하여, 일주일 뒤에는 스카이라이프를 통하여 송출하기 시작하였다. TVN의 HD 제작 프로그램과 CJ미디어가 방영권을 보유한 일부 HD 제작 영화로만 방송을 편성하였다. 하지만, 2010년 4월 1일에 스카이라이프에서의 송출이 중단됨에 따라 폐국하였다. CJ ENM의 텔레비전 네트워크 오락 텔레비전 네트워크 영화 텔레비전 네트워크 2008년 설립된 텔레비전 방송국과 채널 2010년 폐지된 텔레비전 방송국과 채널 폐국된 텔레비전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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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D%86%A0%EB%8B%88%EC%98%A4%20%ED%91%B8%EC%97%90%EB%A5%B4%ED%83%80
안토니오 푸에르타
안토니오 호세 푸에르타 페레스(, 1984년 11월 26일 ~ 2007년 8월 28일, 스페인 세비야)는 스페인의 축구 선수였으며 프리메라리가의 세비야 FC에서 활약을 하였다. 2007년 8월 25일, 헤타페 CF와의 리그 경기 도중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3일 뒤인 8월 28일에 결국 사망하였다. 향년 23세. 선수 경력 타고난 왼발잡이인 푸에르타는 비록 때때로 레프트 백을 채웠음에도 좌측 미드필더로 활약하였다. 그의 강한 인상을 주는 플레이는 그의 국제적 인지도를 가져오게 하였고 아스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푸에르타는 한번 스페인 대표팀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또한 스페인 U-21 대표팀에도 뽑혔다. 사망 푸에르타는 세비야 FC의 홈 경기장에서 2007-08 프리메라리가 개막전 경기인 헤타페 CF 전 도중 심장의 고통을 느껴 경기 도중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의식을 잃었는데 잠시 경기가 멈추고 그의 팀동료 이비차 드라구티노비치와 의료진들이 곧바로 달려가 혀가 말려 들어가 기도를 막지 않도록 막았으나 이후 다시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되찾은 푸에르타는 교체 후에 락커룸에 들어가서 다시 한 번 쓰러졌다. 구급차로 병원으로 이송될 때 심폐소생술을 하였으나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때는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중태에 빠졌고, 결국에는 2007년 8월 28일 세비야의 한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24세. 담당의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의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로 인한 장기 및 뇌 손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푸에르타와 같이 심장마비로 죽은 선수들로는 마르크비비앵 푀, 페헤르 미클로시가 있으며, 파브리스 무암바도 이 때문에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푸에르타는 아내가 있고 안타깝게도 곧 첫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사망하였다. 한편, 푸에르타는 이전에도 비슷한 건강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푸에르타가 죽은 직후, 세비야는 UEFA 챔피언스리그 예선 AEK 아테네전을 연기하였다. 또한 세비야는 푸에르타를 기리기 위해 9월 초에 잡힌 모든 프리메라리가 주말경기마다 1분간 묵념할 것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세비야 회장은 AC 밀란측의 UEFA 슈퍼컵 경기를 연기하는 제안에 대해 AC 밀란과의 경기를 2007년 8월 13일(현지 시간)에 치르기로 한 것은 변함이 없으며, 푸에르타를 위해서 슈퍼컵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포부도 내비추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비야는 선제골을 넣었음에도 불구 3-1로 역전패를 당하며 슈퍼컵 우승을 AC 밀란에게 내주고 말았다. 각주 1984년 출생 2007년 사망 스페인의 남자 축구 선수 세비야 FC의 축구 선수 스페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남자 축구 미드필더 경기 중 사망한 축구 선수 심부전으로 죽은 사람 세비야 출신 스페인 남자 U-21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라리가의 축구 선수 세군다 디비시온 B의 축구 선수 세비야 아틀레티코의 축구 선수 스페인 남자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2005년 지중해 게임 참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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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B%8F%84%EC%95%94
수도암
수도암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수도암 -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산47에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 수도암 -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설옥리 613에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 수도암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충도리 78에 있는 태고종 소속 사찰 수도암 -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 513에 있는 조계종 소속 청암사 암자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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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7%B9%EB%9D%BD%EC%A1%B0%EC%9E%90%EB%A6%AC%20%EC%84%B8%ED%83%80
극락조자리 세타
극락조자리 세타(θ Aps)는 남반구 하늘 극락조자리 방향에 있는 항성이다. 세타의 겉보기 등급은 5.7로 이 정도 밝기는 맨눈으로 밤하늘에서 겨우 보일 수준이다. 세타는 히파르코스 위성이 수집한 시차 자료에 따르면 지구로부터 약 370광년 떨어져 있다. 세타별은 헤르츠스프룽-러셀 도표상 점근거성가지 상태에 있는, 항성진화의 후반 단계에 접어든 적색 거성이며 분광형은 M7 III이다. 세타는 준규칙변광성으로, 119일 주기로 밝기가 0.56 간격으로 요동친다. 세타는 매년 태양질량의 1.1 × 10−7배만큼의 물질을 항성풍 형태로 우주공간에 날리고 있다. 세타별은 우주공간을 이동하면서 뱃머리 충격파를 만들고 있는데 이는 별에서 나온 먼지 물질들이 항성주위 성간매질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뱃머리 충격파 최전방과 별과의 거리는 대략 0.134광년이다. 극락조자리 세타는 측성쌍성으로 관측되어 왔는데 이는 세타의 주성(主星)을 중력적으로 흔드는 짝별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참고 문헌 외부 링크 극락조자리 세타의 사진 극락조자리 M형 거성 준규칙 변광성 점근거성열성 바이어 천체 측성쌍성 122250 5261 068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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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4%94%EC%A7%80%ED%84%B8%20%ED%8F%AC%EB%A0%8C%EC%8B%9D
디지털 포렌식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 Science), 또는 디지털 법과학, 전자법의학은 컴퓨터 범죄와 관련하여 디지털 장치에서 발견되는 자료를 복구하고 조사하는 법과학의 한 분야이다. 디지털 포렌식이라는 용어는 원래 컴퓨터 포렌식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지만 디지털 데이터를 기억 할 수 있는 모든 장치에 대한 조사를 포함하여 확장되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의 가정용 컴퓨팅 혁명에 뿌리를 둔 이 분야는 1990년대에 우연히 진화했으며 21세기 초가 되어 국가 정책으로 관장되었으므로, 근래 들어 디지털 성폭력이 사회적으로 가장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성착취물 추적 시스템 등 다양한 수사 기법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참조 디지털 법의학 도구 목록 사이버 스페이스 디지털 법의학 용어집 법의학 개요 법 의학적 검색 디지털 증거에 관한 과학 실무 그룹 같이 보기 컴퓨터 포렌식 관련 저널 Journal of Digital Forensics, Security and Law International Journal of Digital Crime and Forensics Journal of Digital Investigation International Journal of Digital Evidence International Journal of Forensic Computer Science Journal of Digital Forensic Practice Small Scale Digital Device Forensic Journal 각주 법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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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B%A4%ED%94%8C%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커플 (동음이의)
커플(couple)은 다음을 가리킨다: 짝이되는 남녀 한 쌍 부부 애인 공개적으로 두 사람이 사회적으로 결합한 것 혼인 동성 결혼 이성애 레즈비언 동성애 커플 (전기) 환상의 커플 같이 보기 커플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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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3%80%ED%98%B8%EC%82%AC%20%EC%8B%9C%ED%97%98
변호사 시험
변호사 시험이란 변호사 자격을 얻기 위한 시험을 말하며 주로 국가에서 법조인 선발을 위해 실시하며 법학이론과 실무지식 그리고 법조윤리 과목등을 평가한다. 대한민국 사법시험의 후신으로서, 조선변호사시험-고등고시 사법과-사법시험-변호사시험으로 이어지고 있다. 법학전문대학원의 설립 이후에도 사법시험이 몇년간 유예기간을 두고 존속하였으나, 2017년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폐지된 후, 변호사 자격의 배출 통로가 변호사시험으로 일원화되었다. 난이도 변호사시험에서는 기존 사법시험에서와 같이 많은 수의 수험생을 탈락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암기 위주의 문제를 가급적 배제하고, 최소한의 실무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실용적인 문제를 위주로 출제하는 것이 주 목표가 되었다. 기존 사법시험에는 없던 '기록형 시험'도 추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회 변호사시험을 1년 앞두고 실시된 변호사시험 모의시험은 난이도가 어려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1회 변호사시험 2012년 1월 3일부터 7일까지 중간휴일로 5일을 건너뛰고 7일까지 4일간 치러졌다. 3일은 공법, 4일에는 형사법, 6일에는 민사법, 7일에는 민사법과 전문분야에 관한 선택법 시험을 실시하였다. 통계 로스쿨 졸업 예정자 2000여명 가운데 응시원서를 낸 인원은 1698명이고 30여명은 원서를 내고서도 시험을 보지 않았다.1665명 중 1451명이 합격 87%의 합격률을 보였다. 제2회 변호사시험 2013년 1월 4일부터 8일까지 중간휴일로 6일을 건너뛰고 4일간 치러졌다. 총 2046명이 응시하여 그 중 1538명이 합격하여 당초 법무부가 예정한 수준에 근접하는 합격률(75.17%)을 보였다. 출제문제 공법: 사례형 제1문은 폐기물처리사업 계획변경승인거부처분 취소소송과 관련한 사례에서 취소소송의 적법성, 권리구제 수단, 재거부처분의 적법성 등을 묻는 문제였다. 사례형 제2문은 공무원연급법이 갑작스레 개정된 상황에서 납부율 인상, 퇴직연금 인하 등 실질적인 불이익을 입는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한 사실관계다. 또 공무원 재직 중 임용당시 공무원 결격사유가 있었던 것이 밝혀진 사례가 주어졌다. 이에 대한 행정소송의 적법성, 헌법소원 적법성 및 기본권 침해성, 공무원 임용행위의 당연무효성 등을 묻는 문제였다. 기록형은 미용사 면허를 가졌지만 공중위생법령에 의해 점빼기와 귓볼뚫기가 금지에 된 것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와 법령위반으로 인한 영업정치처분에 대한 취소소송을 의뢰하는 내용에 대한 변호사의 소장작성을 묻는 문제였다. 형사법: 사례형 제1문은 甲, 乙, 丙이 절도를 공모했고 절도한 수표를 분배한 사실관계와 이중 한명과 친척관계인 사법경찰관 丁의 불구속 건의한 사실관계를 중심으로 범인도피, 직무유기, 공소장변경, 증언거부권 등 절차적 법리를 묻는 문제였다. 이에 대한 각각의 죄책 증인신문 가부, 증언거부 가부, 공소장 변경 불비의 적법성 등을 물었다. 사례형 제2문은 3인이 공모한 취객상대의 절취행위와 이를 검거한 사법경찰관의 함정수사(?), 더 나아가 수사과정에서 인지된 피고인들의 부당한 부동산 매수 개입사건 등 복잡한 사실관계가 제시되었고 이에 대한 각각의 형사책임, 증거능력, 특정경제가중(횡령)법, 공소장변경, 함정수사성 등에 대한 적법 여부를 물었다. 기록형은 토지매매 의뢰를 받은 甲이 부동산중개인 乙과 공모한 후 실거래 3억짜리를 5억으로 부풀려 매수해 차액을 챙긴 사실관계와 이들의 별건의 차량사고 뺑소니, 음식 값 지금 면피 도주와 이 과정에서의 폭행 등이 발생한 사건에 대해 이들의 변호인으로서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특가법(도주차량), 도로교통법위반, 특정경제가중법, 공갈죄 등에 대한 변론요지서 작성 문제였다. 필수과목 민사법 선택형과 사례형, 기록형으로 나누어 시험이 실시된다. 선택형: 최소한의 기초지식을 숙지하고 있는지 여부만을 측정할 방침이며, 사례형: 사법시험과 마찬가지로 논점추출형과 쟁점제시형, 주장제기형 등이 출제된다. 기록형: (1) 자료를 기초로 소장을 작성하는 방식과 (2) 소제기 후 소장과 답변서의 왕래로 진행된 기록을 검토하여 최종 준비서면을 작성하는 방식의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과목별 출제비율 공법 선택형: 간단한 사례를 제시한 후 사례에 법리를 적용해 해결하거나 사례와 관련된 법률지식을 묻는 문제를 60% 이상 출제할 전망이다. 기록형: 헌법소송관련 문제와 행정소송관련 문제를 통합하여 번갈아가며 출제할 방침이며, 수험생들이 예측할 수 없게 2년 연속 같은 과목의 문제도 나올 수 있도록 했다. 사례형: 논술시험은 2~3문제를 헌법과 행정법에서 균등하게 출제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과목별 출제비율 형사법 단순한 판례의 결론만을 묻는 문제는 지양하기로 했다. 선택형: 변호사에게 필요한 법률지식을 골고루 물어 실무능력을 검정하고, 난이도는 적정한 난이도를 유지하기로 했다. 시험시간은 70분에 40문항을 출제하고 정답은 1개만을 고르는 문제를 출제하도록 한다. 사례형: 설명의 방식으로 사례를 제시하고 수험생들이 논술식으로 문제에 대하여 답을 하도록 하는 형태가 출제된다. 기록형: 복잡한 사실관계에서 필요한 사실관계를 추출하여 요약하고, 법률적 쟁점을 찾아내어 정리하고 주장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할 수 있도록 출제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출제부속법령 도로교통법,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부정수표 단속법,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소년법, 여신전문금융업법,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부동산등기 특별조치법, 변호사법,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통신비밀보호법,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법원조직법, 검찰청법, 경찰관직무집행법, 즉결심판에 관한 절차법,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 법조윤리 법조윤리는 변호사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직업윤리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평가하게 된다. 문제유형은 지식측정형과 사례판단형 문제를 적정한 비율로 출제하며, Pass/Fail 형식으로 운영된다. 문항 수는 총 40문항으로 하고 시험시간은 80분으로 정했다. 특히 문제의 명확성 강화 및 난이도 조절을 위해 4지선다로 통일하며, 조합형·묶음형 문제 출제는 지양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선택과목 국제법·국제거래법·노동법·조세법·지적재산권법·경제법·환경법 중 하나를 논술형으로 치르게 된다. 국제법 국제경제법을 포함하며 2009년 10월 17일 설립된 대한국제법학회의 ‘국제법과목 출제범위 검토위원회’ (이하 “검토위원회" )은 2010년 2월 20일 상임이 사회에서의 토의를 거쳐 변호사시험법 국제법 과목의 출제범위를 다음과 같이 정하기로 의결하였다. 변호사시험법 국제법 과목 출제범위 국제법의 연원 (lCJ 제38조 제1항) 국제법과 국내법의 관계 국가의 기본적 권리와 의무 (UN헌장 제1조, 제2조 및 제51조) 국가관할권 (결정원칙, 범죄인인도, 내수 및 영해) 국가책임 및 외교적 보호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 (제1조~제53조) (국제경제법) WTO 설립협정 제2부속서 (DSU) (국제경제법) GATT 주요원칙과 예외 (제1조~제3조, 제11조 및 제20조) ‘국가책임’은 ‘2001년 ILC 국가책임 초안’의 내용에 한정하며 국제경제법의 출제비율은 매년 25% 이내로 한다. 국제거래법 「국제사법」과 「국제물품매매계약에 관한 유엔협약」 노동법 사회보장법 중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포함한다. 조세법 「국세기본법」, 「소득세법」, 「법인세법」 및 「부가가치세법」으로 한다. 지적재산권법 「특허법」, 「실용신안법」, 「디자인보호법」, 「상표법」 및 「저작권법」으로 한다. 경제법 「소비자기본법」,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 「할부거래에 관한 법률」 및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로 한다. 환경법 「환경정책기본법」, 「환경영향평가법」, 「대기환경보전법」, 「수질 및 수생태계 보전에 관한 법률」, 「폐기물 관리법」, 「토양환경보전법」, 「자연환경보전법」, 「소음ㆍ진동규제법」 및 「환경분쟁조정법」으로 한다. 문제유형 대문제 배점 50점(답안지 100~120행 분량) 해당과목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복합적 사례에 대한 해결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종합적인 문제 사례형과 논술형이 있음 소문제 배점 20~30점(답안지 50~60행 분량) 주요 제도․논점에 대한 체계적이고 정확한 이해를 검증하기위한 문제 사례형과 약술형이 있음 근거제시형 배점 10~15점(답안지 10~20행 분량) 사례 또는 특정 논점에 대하여 결론과 함께 그 근거를 10~20행 정도로 간략히 기재하는 문제유형 특정 주제에 관하여 다수의 핵심쟁점에 대한 이해를 검증하기 위한 일련의 문제도 출제 가능 변호사시험 합격률 응시자대비 합격자률은 제1회 시험은 87.15%(1665명 응시, 1451명 합격)였고, 제2회 시험은 75.17% (2046명 응시, 1538명 합격)였다. 참고로, 미국의 사법시험 합격률은 주마다 다르지만 50~80% 정도로 알려져있다. 출제주제 공법 회사법 일본 최근 로스쿨 도입으로 신사법시험이 실시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신사법시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나라처럼 법률대학원(일본로스쿨의 명칭)을 졸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비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다. 영국 2021년부터 사무변호사자격시험(Solicitors Qualifying Examination)이 실시될 예정이다. 미국 각 주별로 법조인자격여부를 관장하며 변호사시험도 개별 주별로 실시한다. 대부분의 주는 미국변호사협회에서 승인한 법과대학원에서의 통상 3년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J.D.를 취득한 자에게 응시자격을 준다. 하지만 해외에서 법학을 수료하였거나 판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경우, 예외적으로 응시기회를 주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주가 캘리포니아와 뉴욕이다. 합격률 면에서는 미국 전체를 보았을 때 평균적으로 변호사자격시험에 응시한 총 인원 중 약 60-65% 정도가 최종 합격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캘바 시험은 모든 주의 바시험 중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 중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한국 회계사 시험처럼 부분 합격이 인정되는 주(D.C.)도 있고, 합격 점수가 꽤 낮은 주도 있으며, 시험을 하루만 보는 주도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시험은 별도 법학석사 과정 등 거치지 않고 응시 가능… 학비 부담 없어서 한국 변호사들 사이에서 인기이다. 시험 형태 미국은 연방국가로 각 주마다 고유의 사법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변호사자격 역시 각 주정부의 소관이다. 일반적으로 민간단체인 미국변호사협회의 인가를 받은 법학전문대학원 졸업자를 대상으로 3-4일에 걸쳐 주관식과 객관식이 혼합된 형태의 변호사시험을 연간 수차례 실시한다. 다수의 주는 전미공통의 객관식시험인 Multistate Bar Exam과 주관식인 Multistate Essay Exam, 그리고 실무능력을 평가하는 Multistate Performance Test등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주 고유의 법률을 묻는 시험과 혼합하여 출제한다. 캘리포니아 주의 예 18세 이상일 것. 법조인에게 요구되는 윤리성을 갖추고 있을 것. (i) 법과대학원 이전에 학사학위를 취득하였거나 또는 (ii) 4년제 학부에서의 학사학위 취득에 필요한 학점 중 반 이상을 2년 이상의 기간 동안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에서 취득하였어야 하며, 또는 (iii) 별도의 시험 등을 통하여 이에 준하는 학력을 소지하였음을 증명할 것. 법과대학생으로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후 90일 이내에 캘리포니아주 변호사협회 내에 설치되어 있는 상설기구인 변호사자격시험관리위원회에 등록을 하여야 한다. (i) 시험관리위원회 또는 미국변호사협회의 승인을 받은 3년제 법과대학원을 수료하였거나(part-time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법과대학원인 경우 4년제인 경우도 있음), (ii) 법학 학위를 수여하고 학점 취득을 위해 학생이 1년에 최소 270시간 이상 수업에 실제 출석해야 하는 대학에서 최소 4년 이상 법을 공부하였거나(학부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영미법계가 아닌 외국에서 법학사학위를 취득한 자는 그러한 법학교육과 관련경험 이외 제반 자격이 캘리포니아주 변호사자격시험에 응시하기에 충분함을 시험관리위원회에 증명하여야 한다), (iii) 캘리포니아주 소재 변호사사무실에서 캘리포니아주 변호사자격을 소지한 자의 감독 하에 최소 5년 이상 법조실무경험을 쌓으며 최소 4년 이상 법학을 공부하였거나, (iv) 캘리포니아주 법원에서 판사의 감독 하에 최소 4년 이상 법학을 공부하였거나, (v) 법학 학위를 수여할 수 있도록 캘리포니아주의 인가를 받은 매년 864시간 이상의 학업량을 요구하는 통신제 법학원의 학업지도에 따라 4년간 법학을 공부하였거나, (vi) 위 (ii)-(v)의 방식 중 복수의 방식을 혼합하여 법학을 공부한 자. 시험관리위원회 또는 미국변호사협회의 승인을 취득하지 못한 법과대학원에서 법을 수학하는 자는 재학기간 1년이 지난 후 소정의 법학학력평가시험(예비시험)에 응시하여 3회 이내에 이에 합격하여야 한다. 이러한 1년차 법학학력평가시험은 1년에 2회(6월과 10월) 각 1일간 행해진다. 시험관리위원회에서 요구하는 바의 법조윤리 과목 시험에서 요구되는 최소점수 이상을 취득하였을 것. 시험관리위원회에서 주관․실시하는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을 것. 예비시험(법학학력평가시험) 캘리포니아 주는 드물게 비인가 로스쿨 재학생을 대상으로 예비시험을 실시하고 있다. 법과대학생1학년시험(First Year Law Student Exam 혹은 속칭 Baby Bar)으로 불리며 100문제의 4지선다형 객관식문제와 4문제의 논술형 문제가 주어진다. 계약법, 불법행위법, 형법 과목만 테스트하며 객관식은 200문항에 3시간, 논술형은 1문제당 1시간씩 4시간이 주어진다. 논술시험 계약법(60분) 형법 회사법 (2002년2월 제3문) 전미사법시험 Multistate Bar Exam (MBE) 계약법, 형사법, 불법행위법, 증거법, 헌법, 재산법 등 6개 과목에 대한 지식을 200개의 4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로 시험한다. 객관식 연방법 시험(MBE)에서도 개별법 영역에서 가장 기본적인 법구조를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가장 기초적인 실정법 내용을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하는 의도가 문제의 내용에 반영되어 그 출제범위가 명확히 사전에 공개되며 핵심적 내용을 확인하는 선에서 문제가 출제된다. 따라서, 법과대학원(law school)학생으로서는 물론 재학 중 기본적인 법 과목들을 수강하는 것이 보통이고 대체로 이러한 과목들은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기본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더하여 학교수업 이외에 시험에 대비한 공부를 재학 중 수업과 병행하여 하여야 할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이는 법과대학원 재학 중 학교수업의 내실화, 수강과목의 다양화에 크게 기여한다고 하겠다. Multistate Essay Exam (MEE) Multistate Performance Test (MPT) 선판례와 법조문, 기타 법률문서를 가상의 사실관계 관련사항과 함께 소책자 형식으로 부여한 후 가상의 법률문제를 위의 자료를 사용하여 해결하되 결론을 문제에서 요구하는 방식의 법률문서 형태로 작성하게 하는 논술형 시험이다. 법조윤리시험 미국 내절대다수의 주에서 법조윤리 과목 필기시험 각 주에서 요구하는 일정 점수 이상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공통의 법조윤리시험은 50문항으로 구성된 객관식 시험(시험시간 2시간 5분 배당)으로서 매년 3월, 8월, 11월에 실시된다. 법조윤리 분야의 전문가 6인으로 구성된 출제위원회가 출제하는데, 그 내용은 미국변호사협회(ABA)의 법조윤리규정과 법관윤리규정이 주축이 되고, 필요한도 내에서 연방민사소송법․규칙과 연방증거법의 관련 내용이 포함된다. 시험준비 바브리, PMBR, Barpassers와 같은 사설 학원에 등록하여 준비한다. 한국과 미국 변호사시험 비교 미국에서 가장 긴 캘리포니아주 변호사시험과 비교를 하면 한국 변호사시험은 4일에 걸쳐서 보는 반면 미국은 3일에 걸쳐서 본다. 미국은 과목의 구분없이 무작위 순서로 되어 있으며 과목별 최소기준이 없다. 선택형 민사법 동일과목: 계약법, 불법행위법, 재산법 한국고유과목: 가족법, 유산상속법, 회사법, 보험법 형사법 동일과목: 형법, 형사소송법, 증거법 공법 동일과목: 헌법 한국고유과목: 행정법 논술사례형 논술 기록형 선판례와 법조문, 기타 법률문서를 가상의 사실관계 관련사항과 함께 소책자 형식으로 부여한 후 가상의 법률문제를 위의 자료를 사용하여 해결하되 결론을 문제에서 요구하는 방식의 법률문서(예: 법률의견서, 배심원 설시사항 또는 최후변론문 등)형태로 작성하게 하는 기록형 시험이다. 100% 사례문제이고 객관식도 전부 사례형식이다. 판례OX문제는 없다. 쟁점을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례형식 문제가 적고 대부분 판례의 태도로 옳은 것을 묻는다. 이론이 중요하고 판례문구의 정확한 암기가 상대적으로 중요하다. 응시자격이 로스쿨 졸업자로 한정되지 않는다. (주마다 다름) 사례문제의 예시답안을 공개한다. 객관식 문제는 공개하지 않고 답도 없다. 예시답안이 없다. 시험을 노트북컴퓨터로 작성한다. 시험을 수기로 작성한다. 과목의 구분이 없고 전과목이 셖어서 나온다. 민사법, 공법, 형사법, 선택과목, 법조윤리로 구분되어 나온다. 사례문제가 여러 과목 복합문제가 종종 출제된다. 법전이 없다. 법전을 활용하다. 캘리포니아 주와 뉴욕주 변호사시험 비교 논술기록형(MPT)의 경우에도 뉴욕에서는 한 문제가 출제되며 1시간 30분 동안 작성해야 하는 적은 분량이며 총점에서 10% 비중을 차지하는 반면, 캘리포니아에서는 두 문제를 각각 3시간 분량의 답안으로 작성해야 하며 합격 성적에서도 26% 가량을 차지하므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합격결정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필기시험 과목은 연방법 객관식, 캘리포니아주 서술형 주관식, 기록형 등 3개 분야(법조윤리시험은 별도)이다. 총점 2,000점 중 1,440점 이상 취득자를 합격자로 결정한다.(절대점수 기준)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법학전문대학원 미국사법시험 변호사시험법 사법시험 법학적성시험 졸업시험 참고 문헌 李瑀渶, 미국의 변호사자격시험 서울대학교 法學 제45권 제4호: 248∼277 각주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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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B9%98%20%EB%93%9C%EB%9D%BC%EB%A7%88
정치 드라마
정치 드라마(Political drama)는 그 당시에 정치 상황을 사실에 맞게 재현한 다큐드라마이다. 또한 사실주의에서 벗어나 당시상황을 픽션으로 재연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미국등 선진국들은 이미 정치관련 내용이 드라마 소재인 픽션으로 쓰일정도로 일상화가 진행되었으나, 동아시아권은 민감한 현대사와 그리고 현재 집권층의 영향 때문으로 사실을 다루는 정치드라마를 자주 쓰기 어렵다. 정치드라마는 당시 그 국가의 시청자들이 열망하는 "정치적 이상" 과 "신념"에 대해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평가받고 있다. 예 미국에서는 "24시간", "웨스트 윙" 일본에서는 체인지(CHANGE) 대한민국에서는 1981년 드라마 제1공화국을 시작으로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제4공화국, 코리아게이트, 3김시대 등이 나왔으며, 최근에는 드라마 제5공화국이 방영되기도 했다. 한편 2010년에는 가상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대물이 방영되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정치를 소재로 한 작품 텔레비전 프로그램 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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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0%BD%EC%9B%90%EB%8C%80%EB%A1%9C
창원대로
창원대로(Changwon-daero, 昌原大路)는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소계동 소계광장 교차로와 성산구 불모산동 창원터널을 잇는 창원시의 간선도로이다. 동양 최장의 직선도로로, 13.8 km 중 대부분 구간이 굴곡이 전혀 없이 1자 형태로 뻗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1970년대 창원시 계획도시 개발정책의 일환으로 건설되었으며, 1977년에 왕복 2차로로 임시 개통되었고 현재의 왕복 8차로 이상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1987년에 이르러서였다. 또한 전 구간에 걸쳐 창원시 최초로 지하차도와 자전거전용도로를 설치했다 2000년대 말부터 시행된 새주소 정비사업으로 인하여 지방도 제1020호선 일부구간이 창원대로에 편입되었다. 그래서 주소상으로는 일반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 구간을 같이 가지게 되었다. 본 도로는 남해고속도로 순천방향 정체시 우회도로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도로를 끼고 신창원역과 창원종합버스터미널이 위치해 있다. 이 도로 중 삼정자동 ~ 창원터널 구간은 자동차전용도로이므로 긴급자동차를 제외한 이륜자동차, 자전거, 보행자는 통행할 수 없다. 연혁 2009년 7월 2일 : 2개 이상 시·군에 걸쳐 있는 도로로 창원대로를 고시 노선 갤러리 각주 외부 링크 (창원시 성산구) (창원시 의창구) 창원시의 도로 경상남도의 도로 지방도 제1020호선 대한민국의 자동차 전용도로
180239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D%82%A4%ED%83%80%20%EB%AA%A8%EB%A6%AC%EC%8A%A4%EC%97%90
아키타 모리스에
아키타 모리스에(, 1620년 ~ 1676년 2월 26일)는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미하루번의 2대 번주이다. 선대 번주 아키타 도시스에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마쓰다이라 노부요시의 딸이다. 1649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번주 자리에 올랐다. 물려받은 영지 중 5천 석 땅을 동생인 스에히사에게 분할해주었다. 1676년에 사망하였고, 차남 데루스에가 그 뒤를 이었다. 1620년 출생 1676년 사망 아키타씨 미하루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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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금역
미금역(Migeum station, 美金驛)은 대한민국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과 금곡동에 걸쳐 있는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과 신분당선의 환승역이다.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은 동막천 하저터널로 오리역과 연결된다. 신분당선은 동막천 하저터널로 동천역과 연결된다. 역사 1994년 9월 1일 : 분당선 수서역~오리역 구간 개통과 함께 영업 개시 2009년 12월 1일 : 철도승차권 단말기 철거 2011년 5월 경 : 스크린도어 설치 2012년 9월 18일 : 왕십리역~선릉역 구간 개통으로 왕십리 기점 30.7km로 변경 2015년 1월 16일 : 부기역명 분당서울대병원 부기 2015년 9월 4일 : 신분당선 미금역 사용개시 고시 2018년 4월 28일 :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과 신분당선 미금역 개통과 함께 환승역이 됨 2018년 12월 31일 : 청량리역~왕십리역 구간 개통으로 왕십리 기점 33.1km로 변경 개요 부기역명은 분당서울대병원으로 인근에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이 있으며, 2018년 4월 28일에 신분당선이 개통되면서 환승역이 되었다. 이 역 북쪽으로 신분당선 연결선이 있다. 역명 유래 역이 구미동과 금곡동에 걸쳐 있어 구미동의 미(美)와 금곡동의 금(金)을 본따서 만들었다. 당초 "구미역"이나 "금곡역"으로 영업할 예정이었으나, 각각 경부선의 구미역, 경춘선의 금곡역과의 중복 우려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역명으로 영업하게 되었다. 이 역 개업 이듬해인 1995년 1월 1일에 폐지된 행정 구역인 미금시(渼金市, 現 남양주시)와는 한자가 다르다. 역 구조 두 노선 모두 2면 2선의 상대식 승강장을 갖춘 지하역이며,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출구는 8개다. 1·2·7·8번 출구는 금곡동에 있고, 3번~6번 출구는 구미동에 있다. 수인분당선 승강장 신분당선 승강장 역 주변 성남시구미도서관 금곡동 행정복지센터 늘푸른초등학교 늘푸른중학교 미금시장 구미1동 행정복지센터 성남미금초등학교 분당경영고등학교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불곡중학교 불곡고등학교 오리초등학교 2001아울렛 분당점 청솔초등학교 청솔중학교 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이용객 변동 사진 인접한 역 각주 외부 링크 한국철도공사 미금(분당서울대병원)역 신분당선 (주) 미금(분당서울대병원)역) 성남시의 전철역 1994년 개업한 철도역 2018년 개업한 철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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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B%93%9C%EC%9B%8C%EB%93%9C%20%ED%99%94%EC%9D%B4%ED%8A%B8%20%EB%B2%A4%EC%8A%A8
에드워드 화이트 벤슨
에드워드 화이트 벤슨(Edward White Benson, 1829년-1896년)은 캔터베리 대주교이다. 잉글랜드 중부 버밍엄 출신으로 1877년 트루로 주교가 되었고, 1883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1888년의 제3차 램버스 회의에서는 성공회의 기본 교리에 관한 4대 방침을 확립하였다. 람베스-시카고 4개 조항(the Lambeth-Chicago Quadrilateral, 1888년)이라 불리는 이 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약성서과 신약성서 66권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은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선언이다. 세례성사와 성찬례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두 가지 성사(Sacrament,성례전)이다. 역사적 주교직(the historical episcopate)은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적절한 치리 방법이며,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외부 링크 1829년 출생 1896년 사망 벤슨가 (잉글랜드) 캔터베리 대주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동문 버밍엄 출신 케임브리지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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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FIFA%20%EC%9B%94%EB%93%9C%EC%BB%B5%EC%9D%98%20%EC%97%AD%EC%82%AC
FIFA 월드컵의 역사
FIFA 월드컵의 역사는 1928년,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쥘 리메가 국제적인 축구 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데에서 시작된다. 1930년, 우루과이에서 첫 번째 FIFA 월드컵이 개최되었을 때 초청받았던 팀은 단 13개국뿐이었다. 이후 계속된 확장과 형식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FIFA 월드컵은 현재 전 세계 200여 개가 넘는 국가들이 2년 동안 열리는 월드컵 예선을 통해 본선에 출전하는 32개국을 결정한다. 첫 번째 월드컵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1932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개최국 미국은 미식축구의 인기 탓에 축구의 인기가 낮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계획이 없었다. 또한, FIFA와 IOC의 아마추어 선수의 지위에 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축구는 올림픽에서 제외되었다. 이어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쥘 리메는 첫 번째 월드컵 대회를 1930년 우루과이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각 국가의 축구 협회들은 대회 참가 초청을 받았지만, 유럽 지역의 팀들에게는 우루과이가 대서양을 횡단해야 하는 먼 나라였기 때문에, 큰 지출과 오랜 여정이 불가피했다. 그런 이유에 따라 대회 2달 전까지도 팀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한 유럽 국가는 없었다. 결국, 쥘 리메는 벨기에, 프랑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를 설득하여 대회에 참가시켰다. 이리하여 유럽에서 4팀, 북중미에서 2팀, 남미에서 7팀, 총 13개 팀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1라운드는 조별리그로 진행하되 각조 1위만 2라운드인 준결승에 진출했으며 준결승부터는 토너먼트로 진행이 되었다. 월드컵 개막식은 두 경기가 동시에 열렸으며, 프랑스와 미국이 각각 멕시코를 4-1로, 벨기에를 3-0으로 꺾고 승리했다. 월드컵 사상 첫 번째 득점은 프랑스의 루시앙 로랑이 기록했으며, 미국의 버트 페이트노드는 4일 뒤에 열린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월드컵 사상 첫 번째 해트트릭을 기록, 미국의 3-0 승리를 이끌었다. 한편 개최국 우루과이는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93,000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르헨티나를 4-2로 꺾으며 첫 번째 FIFA 월드컵 우승 팀이 되었다. 우승국 1930: 1934년~1938년 1934년 FIFA 월드컵과 1938년 FIFA 월드컵이 두개의 대회에서는 나치 독일과 월드컵과의 관련성 때문에 본선 경기는 무조건적인 단판 토너먼트로 개최되었다. 즉, 패하면 무조건 탈락이 되었다. 그러나 준결승까지 올라가서 패할 경우가 참작이 되어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3,4위전이라는 패배팀들끼리의 경기가 만들어졌다. 우승국 1934: 1938: 1950년~1982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월드컵은 다시 재개되었으며 이 때부터 월드컵은 흥행수입을 위해서 한 경기라도 더 치르게 하려고 했다. 그래서 결승전을 포함한 모든 경기에서 싱글 엘리미네이션 토너먼트를 없애고 전부 라운드 로빈으로 바꿨다. 그러나 1958년에 다시 1차 예선만 리그로 남기고 본선을 토너먼트로 바꿨지만 1978년과 1982년까지 결승전을 제외한 모든 경기를 다시 리그로 바꿨다. 이 과정에서 본선 진출국은 16개국에서 24개국으로 늘어났다. FIFA 월드컵의 트로피가 이 기간 동안 변경되었는데 1970년 FIFA 월드컵에서 쥘 리메컵이 마지막으로 사용되었으며 1974년 FIFA 월드컵부터는 FIFA 컵이 사용되었다. 우승국 1950: 1954: 1958: 1962: 1966: 1970: 1974: 1978: 1982: 1986년~1994년 본선 진출팀은 그대로 24개국으로 동일했다. 하지만 반복되는 경기 수를 줄임과 더 많은 팀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 리그경기는 1차 예선에만 적용하는 것으로 변경되었으며 여기서 조 꼴찌만 탈락이며 조 1위와 2위는 본선 직행, 조 3위는 승점과 골 득실차를 따져서 16강에 진출하는 여부를 결정했다. 총 6팀이 조 3위를 차지하는데 여기서 4팀이 16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16강 이후부터는 다시 토너먼트 제도를 적용했다. 그러나 톱시드가 정착되지 않아 강팀끼리 같은 조에 몰리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1986년 FIFA 월드컵의 조별리그 A조를 보면 1978년 FIFA 월드컵의 우승 팀인 아르헨티나와 1982년 FIFA 월드컵의 우승 팀인 이탈리아가 같은 조로 편성되어 디펜딩 챔피언끼리 같은 조에 묶이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우승국 1986: 1990: 1994: 1998년~2022년 본선 진출국이 24개국에서 32개국으로 늘어났으며 완전무작위 선정방식의 기존의 조편성과는 달리 대륙 및 실력순으로 나눠 조편성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시드라 한다. 각 조마다 할당된 시드 중 톱시드는 바로 전 회에 개최된 월드컵 우승국과 해당월드컵 개최국 외에 실력순으로 6개국이 톱시드로 선정되었다. 다음은 1998년 이후 단 한 번도 톱시드 자리를 잃지 않았던 팀들이다. 남미 : 브라질, 아르헨티나 유럽 : 독일 역대 월드컵 톱시드 보기 우승 준우승 3위 4위 8강 16강 조별 리그 2026년~ 2026년 FIFA 월드컵부터는 진출국이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16개국이 더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치르게 될 경기 수도 64경기에서 104경기로 늘어나게 되어 40경기를 더 치러야 하고, 대회 기간도 4주에서 5~6주로 늘어나게 된다. FIFA 월드컵 본선 대회방식 변천사 본선에 참가하는 팀 수와 본선의 형식은 각 대회마다 꽤 달랐으나, 거의 대부분의 대회는 리그전 방식에 토너먼트전 방식을 혼합한 방식을 취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1930년: 조별 리그전으로 참가팀이 4개 조로 나뉘었으며, 각 조 1위팀이 토너먼트전을 치렀다. (단, 3,4위 결정전이 별도로 치러지지 않았다.)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단순 토너먼트 형식이었다. 이 대회들은 별도의 조별 리그전이 없었다. 1950년: 1차 조별 리그전에 16개 팀이 진출하며 이들은 6개 주 4개 팀씩 나뉜다. 그리고 각 조 1위팀들이 다시 2차 조별 리그전을 치른다. 2차 조별 리그전에서 1위를 한 팀이 대회 우승 팀이 되는데, 이 대회는 별도의 결승전이 없는 유일한 대회이다. 1954년부터 1970년까지: 조별 리그전에 16개 팀이 진출하며 이들은 4개 조 4개 팀씩 나뉜다. 그리고 각 조 1,2위를 한 8개 팀이 토너먼트전을 치른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1차 조별 리그전에 16개 팀이 진출하며 이들은 4개 조 4개 팀씩 나뉜다. 그리고 각 조 1,2위를 한 8개 팀이 2차 조별 리그전에 진출한다. 이들은 다시 2개 조 4개 팀씩 나뉜다. 2차 조별 리그전에서 각 조 1위는 결승전에 진출하며 각 조 2위는 3,4위 결정전에 진출한다.) 1982년: 1차 조별 리그전에 24개 팀이 진출하며 이들은 6개 조 4개 팀씩 나뉜다. 그리고 각 조 1,2위를 한 12개 팀이 2차 조별 리그전에 진출하며 이들은 다시 4개 조 3개 팀씩 나뉜다. 다시 2차 조별 리그전에서 1위를 한 팀들끼리 토너먼트전을 치른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 : 조별 리그전 24개 팀이 진출하여 이들은 6개 조 4개 팀씩 나뉜다. 그리고 각 조 1,2위를 한 팀과 3위팀 중 상위 4개팀이 16개 팀이 토너먼트전을 치른다. 1998년부터 2022년까지: 조별 리그전 32개 팀이 진출하여 이들은 8개 조 4개 팀씩 나뉜다. 그리고 각 조 1,2위를 한 16개 팀이 토너먼트전을 치른다. 2026년부터: 조별 리그전 48개 팀이 진출한다. 1 3, 4위 결정전 없이 치러졌다. 2 오스트리아가 예선을 통과한 뒤 독일에 합병되면서 15개 팀만이 대회에 참가했다. 3 스코틀랜드, 인도, 터키가 예선을 통과한 후에 기권하면서 13개 팀만이 대회에 참가했다. 결과적으로 우루과이는 단 4경기만으로 우승했다. 4 3, 4위 결정전은 2차 조별 리그전에서 각 조 2위를 한 팀들이 치렀다. FIFA 월드컵 출전국 팀 기록 각주 본선의 변천사 축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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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A8%EB%B6%80%EB%A5%B4%ED%81%AC%20SV
함부르크 SV
함부르거 슈포르트-페어라인 e. V. (Hamburger Sport-Verein e. V.)는 독일 함부르크에 위치한 스포츠 클럽이며, 가장 큰 부서는 축구이다. 이 팀은 독일 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가장 좋은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1부리그에만 속해 있었으며, 1963년 분데스리가가 출범한 이래 2018년 구단 사상 최초로 2. 분데스리가로 강등될 때까지 1. 분데스리가에만 머물러 있었던 유일한 클럽이기도 하였다. 1970년 이래, HSV는 여러 차례의 우승 경력을 쌓아 올렸다. 1976년, 그들은 DFB-포칼 우승 뒤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쟁취하였다. 1979년 첫 분데스리가 타이틀 획득 뒤, 1980년에 FC 바이에른 뮌헨에 승점 2점차로 준우승한 뒤 팀의 슈퍼스타 펠릭스 마가트에 힘입어 1982년과 1983년에 2연패를 하였다. 1983년에는 리그 타이틀 외에도 유벤투스 FC를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1-0으로 물리치며 첫 빅이어를 들어올렸고, 1987년에는 또다른 DFB-포칼을 들어올렸다. 역사 초창기 함부르크 SV (HSV)는 데어 호헨펠더 스포트클럽 (Der Hohenfelder Sportclub)과 반츠벡 마린탈러 스포트 클럽 (Wandsbek-Marienthaler Sportclub)이 통합되어 1887년 9월 29일 스포트클럽 게르마니아 추 함부르크 (Sportclub Germania zu Hamburg)가 탄생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의 클럽명인 함부르크 스포트 버라인 (Hamburger Sport-Verein)은 1919년으로, 시내의 3팀의 통합으로 이루어졌으며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약화되었다. 스포트클럽 게르마니아 추 함부르크, 함부르크 FC (1888년 창단), 그리고 FC 팔케 에펜도프 (1906년 창단)으로 구성되었다. 클럽의 유니폼 색은 한자동맹의 적색 (Hanseatic red)이며 흰색은 함부르크 시의 명예를 상징하며, 파랑과 검은색은 가장 오래된 클럽, 게르마니아를 상징함과 동시에 팀의 로고에도 쓰인다. HSV는 게르마니아로 있었던 시대를 포함하여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클럽이다. 하지만, 게르마니아가 육상 클럽으로 창단되었으며, 축구팀은 5~6명의 잉글랜드인이 클럽에 합류하여 1891년에 창단된 것에 관하여 타 클럽과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이 어느팀인가에 관하여 논란을 가지고 있다. 새롭게 함부르크 SV로 이름을 바꾼 이 클럽은, 1922년에 당시 3연패를 노리는 1. FC 뉘른베르크를 국가 결승전에서 상대하였다. 경기는 10분만에 암전 사태로 3시간 10분이 지연되었고, 연장전 끝에 2-2로 비겼다. 재경기에서도 연장전까지 경기를 하였고, 교체 없이 경기를 뛰었던 이 경기에서, 1-1인 상황에 뉘른베르크는 7명이서 뛰었고 (2명이 부상당하고, 2명이 퇴장당하였다) 그리고 주심은 뉘른베르크의 몰수패를 선언하였다. 이 결정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독일 축구 협회는 함부르크 SV에게 우승 타이틀을 주었지만, 거절하였다. 최종적으로 빅토리아 트로피를 수여받은 클럽은 그해 공석으로 기록되었다. 클럽의 결점없는 성공은 1923년에 처음 달성되었고 우니온 오베르쇤네바이데를 상대로 국가 타이틀을 따내었다. 1924년, 뉘른베르크에 패하여 2연패를 실패하였지만, 1928년에 빅토리아 트로피를 다시 들어올렸다. 제 3제국 시기동안, HSV는 지역에서 성공적인 클럽으로, 가울리가 노르트마크에서 1942년까지, 그 후로 가울리가 함부르크에서, 리그 타이틀을 1937년, 1938년, 1939년, 1941년, 그리고 1945년에 획득하였으나 국가 타이틀을 획득하는데에는 실패하였다. 그들의 당시 가울리가 주 라이벌은 아임스뷔텔러 TV였다. 전쟁 후, 슈타트리가 함부르크에서 팀은 1946년에 우승을 하였고, 클럽은 영국 점령기인 1947년과 1948년에 타이틀을 획득하였는데, 이 두 시즌만이 점령기였다. 오베르리가 노르트에서 1947년에 점령국이 철수한 후, 함부르크는 지역에서 독주하는 클럽이 되었다.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인 1962-63까지 16시즌 중, 그들은 15번의 오베르리가 타이틀을 가져갔고, 1953-54시즌의 11위 불명예만이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 시기였다. 이 시기동안, 그들은 100골이 넘는 골을 1951년, 1955년, 1961년, 그리고 1962년 시즌에 기록하였다. 하지만, 국가 타이틀은 그보다 더 안좋은 모습을 보였다. 1928년 국가 타이틀 이후, 1957년, 1958년의 결승전 진출 실패하였고, 1960년까지 국가 타이틀 가뭄이었다. 1961년의 유러피언컵에서, 함부르크는 준결승에서 FC 바르셀로나에 패하였다. 준결승에 올라오기 전까지 스위스의 BSC 영 보이즈와 잉글랜드의 번리 FC를 꺾었다. 분데스리가 출범기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국가적 프로축구인 푸스볼-분데스리가가 출범하였고, HSV는 첫 시즌에 참여한 16개의 클럽중에 하나였다. 함부르크 SV는 현재까지 1부리그에만 머무른 분데스리가 원년 멤버로 기록되었으며, 1963년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로 한번도 강등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1996년,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함께 이 상태를 지속해왔고, 1. FC 쾰른과 1998년까지 이 상태를 지속해왔다. 현재까지 49개의 다른 클럽이 분데스리가 승격과 강등을 연속하였다. 분데스리가는 2004년 8월 24일에 40주년을 맞이하였고 가장 오래된 클럽이라는 데에서 유래한 "공룡", 함부르크 SV와 분데스리가의 가장 성공적인 클럽, FC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가 있었다. 2004년 8월, HSV는 지역의 SC 파더보른 07에 패하며 DFB-포칼 1라운드에서 탈락하였다. 이 경기는 축구 역사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경기로, 로베르트 호이처 주심이 크로아티아의 도박 업체로부터 돈을 받아 승부조작을 한 것으로 적발되었다. 그는 파더본에게 두번의 페널티와 함부르크의 에밀 음펜자를 퇴장시켰다. 이 스캔들은 독일 축구계에서 30년만의 큰 스캔들로, 2006년 FIFA 월드컵의 개최에 앞서 독일의 국가 위상에 먹칠을 하였다. 2006-07 UEFA 챔피언스리그 함부르크는 UEFA 챔피언스리그 2006-07에 2000-01 이래 처음으로 참여하였고, 그 전 시즌의 분데스리가를 3위로 마감하였다. 그들은 CA 오사수나와의 3차 예선에서 원정 다득점으로 꺾었고, 아스널 FC, FC 포르투, PFC CSKA 모스크바와 G조에 속하였지만, 실망스러운 경기 후 조 최하위로 탈락하였다. 2006-07 분데스리가 시즌 이 시즌에 함부르크는 매우 좋지 않은 시작을 보였다. 2005-06 시즌의 성공으로, 리그 3위로 마감한 함부르크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였고, 함부르크는 시즌 전반기를 강등권 바로 위를 기어다니며 지냈고, 단 한번의 승리만 하였다 (바이어 04 레버쿠젠전의 2-1 승리). 주전 수비수인 할리드 불라루즈와 다니엘 판 바위턴의 이적과 선수들의 부상은, 함부르크의 리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팬들은 그들의 1부리그 잔류 기록이 마감될까 두려워하였다. 시즌 전반기 이후 함부르크는 리그 최하위를 하였다. 2007년 2월 1일, 토마스 돌 감독은 경질당하였고 네덜란드인 후프 슈테벤스가 새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슈테벤스의 스타일은 HSV의 사태를 진정시켰고, 2007년 2월 10일과 2007년 4월 7일 사이에 7경기 연속 무패를 달렸고 1실점만 하였다. 이 무패행진 기간 이후, HSV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홈경기에서 첫 패배를 하였고, 이후에 노르트 더비 숙적 SV 베르더 브레멘과 FC 샬케 04에 패하였다 (경기 당시 브레멘과 샬케는 각각 리그 2위와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좋은 페이스에도 불구하고 (4월 VfB 슈투트가르트와의 홈 경기에서 대패), HSV는 여전히 하위팀들이 승점을 추가함에따라 강등권에서 안전하지 못하였다. 3월에는 12팀이 강등권에 위치하였고, 7위 하노버 96과 18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사이는 겨우 10점에 불과하였다. HSV는 홈보다 원정에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고,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원정 (시즌 종료 후 최하위로 강등), FC 바이에른 뮌헨 원정, 그리고 1. FC 뉘른베르크 원정에서 HSV는 귀중한 승점을 획득하였지만 홈에서 VfL 보훔과 VfB 슈투트가르트와 함께 강등권을 같이 맴도는 1. FSV 마인츠 05에 패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5월 5일에 보훔에 3-0으로 패한 것은 HSV가 알레마니아 아헨 (최종 16위)와 1. FSV 마인츠 05 (최종 17위)가 동시에 패함에 따라 승점 6점차를 유지하며, 1 분데스리가의 확정을 짓는데 성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골득실 또한 아헨과 마인츠가 만회하기에는 매우 컸다. 잔류 확정 상황에서, HSV는 약체 상대만이 남았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하노버 96, 아르미니아 빌레펠트, VfL 보훔과 더불어 다음시즌의 UEFA 인터토토컵 진출권을 경쟁하였다. 한 경기만 남은 상황에서, VfL 보훔에 0-3으로 패하고, HSV는 1. FC 뉘른베르크를 2-0으로 꺾었다. 1주일 후, 알레마니아 아헨에 홈 경기에서 4-0으로 4월 1일 이래 첫 홈승을 거두었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바이어 04 레버쿠젠에 2-1로 패하고 하노버 96이 1. FC 뉘른베르크에 0-3으로 패함에 따라, HSV는 7위를 확보하였다. 최근 행보 역대 성적 함부르크는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3번의 리그 우승을 거두어 로고 위에 "진정한 챔피언 클럽" (Verdiente Meistervereine)을 상징하는 금별을 달았다. 현재의 수상 시스템에 따라, 그들의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타이틀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5번째 분데스리가 우승 이전까지는 두 번째 별을 달 수 없다. 1922년, 국가 대회 결승전에서 상대팀에 몰수패를 당한 것에 대해, 독일 축구 협회에서는 HSV가 다시 이 타이틀을 가져갈 것을 당부하였다. 국가 타이틀 독일 챔피언쉽 / 1 분데스리가 우승 6회 우승: 1923, 1928, 1959–60, 1978–79, 1981–82, 1982–83 준우승: 1924, 1956–57, 1957–58, 1975–76, 1979–80, 1980–81, 1983–84, 1986–87 DFB-포칼 우승 3회 우승: 1962–63, 1975–76, 1986–87 준우승: 1955–56, 1966–67, 1973–74 DFL-슈퍼컵 준우승: 1977, 1982, 1987 DFB-리가포칼 우승 2회 우승: 1972-73, 2003 국제 타이틀 유러피언컵 /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우승: 1982-83 준우승: 1979-80 UEFA 컵위너스컵 우승 1회 우승: 1976-77 준우승: 1967-68 UEFA컵 / UEFA 유로파리그 준우승: 1981-82 UEFA 슈퍼컵 준우승: 1977, 1983 인터콘티넨털컵 준우승: 1983 UEFA 인터토토컵 우승 2회 우승: 2005, 2007 지역 타이틀 북독일 챔피언쉽 우승 10회: 1921, 1922, 1923, 1924, 1925, 1928, 1929, 1931, 1932, 1933 준우승 2회: 1926, 1927 가울리가 노르트마크 우승 4회: 1937, 1938, 1939, 1941 준우승 4회: 1934, 1935, 1940, 1942 가울리가 함부르크 우승 1회: 1945 준우승 2회: 1943, 1944 슈타트리가 함부르크 우승 1회: 1946 준우승 1회: 1947 영국점령지 챔피언쉽 우승 2회: 1947, 1948 오베르리가 노르트 우승 15회: 1948, 1949, 1950, 1951, 1952, 1953, 1955, 1956, 1957,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기타 타이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트로피 우승 1회: 1982 두바이 챌린지컵 우승 2회: 2007, 2008 에미레이츠컵 우승 1회: 2008 T-홈컵 우승 1회: 2009 피스컵 우승 1회: 2012 텔레콤컵 우승 2회: 2009, 2015 준우승 1회 : 2011 경기장 함부르크는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을 현재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이 구장은 임테흐 사가 스폰서쉽을 가지고 있어 임테흐 아레나 (Imtech Arena)라고도 불렸었고 현재 15-16 시즌부터는 다시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있다. 1953년의 구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 터에 새로 지어졌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개장한 것은 2000년이다. 현재 최대 수용 관중은 57,000명으로 47,000명이 좌석에 10,000명이 입석으로 관람할 수 있다. 이전에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은 1974년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 1988을 개최하였다.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은 UEFA로부터 5성급 경기장으로 인정되어, UEFA 유로파리그와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개최할 수 있다. 2006년 FIFA 월드컵에서는 4번의 조별리그 경기와 8강전 경기의 총 5경기를 개최하였다. 당시 경기장 명칭은 함부르크 FIFA 월드컵 경기장이었다. 2010년에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풀럼 FC간의 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을 개최하였다. HSV 팬들은 홈 구장 근처의 공동묘지에 묻히며, 원래 함부르크 구장의 피치로 사용한 잔디로 덮인다. 스타디움에 걸려 있는 시계는 HSV가 1부리그에 머무른 시간을 나타내며, 지금은 강등이 되어 시간이 멈추어 있다. 선수 현재 선수 명단 역대 선수 타 부서 타 부서로 축구팀 2군을 운영하는 함부르크 SV II, 여자 축구팀, 야구, 배구, 크리켓, 럭비부를 가지고 있다. 라이벌과 친선 관계 함부르크는 같은 함부르크를 연고지로 둔 FC 장크트 파울리와 라이벌 관계이며, 북부 독일의 또다른 맹주 SV 베르더 브레멘과의 경기를 노르트 더비라고 한다. 2009년 봄, 함부르크는 베르더 브레멘을 상대로 4번의 헤딩골을 넣었고, 3주 뒤, 브레멘은 함부르크를 UEFA 컵과 DFB-포칼 준결승에서 떨구었다. 함부르크는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속한 레인저스 FC와 친선 관계에 있다. 함부르크는 레인저스 클럽 로고와 합성하여 유럽대항전 원정 경기에 사용한다. 이 두 클럽관의 관계는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함부르크 레인저스 서포터스' 클럽이 레인저스 원정에 간 함부르크 팬들에 의해 형성되었고,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의 형태에 감탄하였다. 이 두 클럽관의 관계는 레인저스가 함부르크의 외르크 알베르츠를 UEFA 컵에서 레인저스의 라이벌 셀틱 FC를 꺾은 후에 성사됨에 따라 더욱 가까워졌다. 한편, 셀틱 FC는 함부르크의 라이벌 FC 장크트 파울리와 아무런 관계는 없다. 함부르크는 하노버 96과 똑같은 이니셜(HSV)로 밀접한 관계를 짓고 있다. 두 클럽의 경기때에는 원정팀 응원가를 경기 전에 부른다. 각주 외부 링크 함부르크 공식 웹사이트 독일의 축구단 1887년 설립된 축구단 함부르크의 축구단 독일의 종합 스포츠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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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9D%BC%20%28%EC%84%B1%EC%9A%B0%29
김일 (성우)
김일(1966년 12월 3일 ~ 2018년 11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성우이다. 1990년 KBS 22기 공채 성우로 데뷔하였다. 학력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 사망 2018년 11월 18일에 향년 51세에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하였다. 후임 김일 사후 비어있는 자리를 채울 성우들은 다음과 같다. 김영선: 로이 (포켓몬스터), 상디 (원피스) 안효민: 사카즈키 (원피스) 출연 작품 애니메이션 ※전체 출연작은 외부 링크를 참조 강철의 연금술사 (애니원) - 매스 휴즈 / 베르시오 / 의사(10화) / 허스키슨(극장판) 검비의 모험 (투니버스) 골판지 전사 (어린이 TV) - 건일 골판지 전사 더블 (투니버스) - 이건혁 / 우해준 / 최준기 박사 광속사이버 (VIDEO) - 민호 구슬대전 배틀 비드맨 (KBS) - 그레이 / 멍키동 / 클라우드 비밀일기 (KBS) - 지수빈 (아사바 히데야키) 기동전사 건담 SEED (애니원) - 아스란 자라 꼬꼬리코 돌격대 (SBS) 꼬마양 삼총사 (KBS) - 메그 꾸러기 수비대 (KBS) - 요롱이 / 앨버트 꿈을 찍는 이안 (EBS) - 카일 녹색의 전설 (투니버스) - 란 녹색전차 해모수 (KBS) - 준 다카하시 루미코 극장 - 인어의 숲 (애니원) - 유타 달의 요정 세일러문 (KBS) - 레온(턱시도 가면) / 대니 / 어둠의 왕국의 엔디미온 / 킹 엔디미온 / 페르손 박사 더그의 일기 (투니버스) - 로저 디그레이맨 (애니맥스) - 코무이 리 / 저스데로 러브 콤플렉스 (애니맥스) - 나카오 레스톨 특수구조대 (KBS) - 테오 / 진 레츠고 MBA (SBS) - 밀리 선생님 마이크로맨 (KBS) - 네오 마법기사 레이어스 (SBS) - 신관 자가토 / 란티스 / 페리오 마법기사 레이어스 OVA (애니박스) - 페리오 마법소녀 리나 TRY (SBS) - 케일 마법소녀 위치 1기 (애니원, 챔프 TV, SBS) 마법사 헌터 (MBC) - 캐롯 말썽꾸러기 띠떼프 (EBS) - 띠떼프 매기와 환상의 나라로 (K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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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룸(에이드리언 브로디) 역 빌리 베스게이트(KBS) 뽀네뜨(KBS) - 아빠(그자비에 보부아) 역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KBS) - 토멕(올라프 루바젠코) 역 사랑의 블랙홀(KBS) - 래리(크리스 엘리엇) 역 사랑하는 딸에게(KBS) 사이코4(KBS) 섀도우(KBS) - 리자르(보르세 나세프) 역 세상의 모든 계절(KBS) - 조(올리버 맬트먼) 역 설원의 윌(KBS) - 윌 스톤맨(맥켄지 애스틴) 역 소비버 탈출(SBS) 소울 메이트(KBS) - 딘(재커리 트론) 역 슈퍼맨 4: 최강의 적 (KBS) - 죄수(론 트래비스) / 간수(브래들리 라벨) 스몰 솔저(KBS) 스쿠비 두 (SBS) - 섀기(매튜 릴라드) 스트레인저(KBS) - 변호사 / 세라 친구 역 스티븐 시걸의 글리머맨(KBS) - 짐 캠벨(키넨 아이보리 웨이안즈) 역 스페이스 잼(SBS) - 찰스 바클리(본인) / 보라색 외계인(도리안 헤어우드) / 야구 선수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 - 덤블도어(주드 로) 스피어(SBS) - 테드 필딩 박사(리브 슈라이버) 역 신투첩영(SBS) - 자칼 역 아가사 크리스티의 창백한 말(KBS) - 마크 역 아메리칸 스플렌더(KBS) - 배우 하비(폴 지어마티) 역 아비정전(KBS) - 아비의 친구(장학우) 역 아빠 만들기(KBS) - 제리 역 애니멀(KBS) - 마빈 맨지(롭 슈나이더) 역 애들이 줄었어요(KBS, MBC) - 라스 톰슨 주니어(토머스 브라운) 역 야구천재 에드(KBS) - 에드 역 야마카시(KBS) - 웅크린 소(샤를 페리에르) 야마카시 2(KBS) - 로간(샤를 페리에르) 야연(SBS) - 우 루안(오언조) 역 언더시즈(KBS) 언더시즈 2(KBS) - 동료 요리사(로이스 D. 애플게이트) 얼라이브(SBS) - 칼리토스(브루스 람세이) 역 에볼루션(SBS) - 웨인(숀 윌리엄 스콧) 역 엘 시드(KBS) - 베르뮤데즈(카를로 주스티니) / 아리아스(허드 하트필드) 연애사진(SBS) - 미코토(마츠다 류헤이) 역 열혈남아(KBS) - 우잉(장학우) 역 우리도 사랑일까(KBS) - 대니얼(루크 커비) 역 원티드(KBS) - 웨슬리(제임스 맥어보이) 역 웨이 백(KBS) - 야누시(짐 스터게스) 역 오션스 일레븐(SBS) - 라이너스(맷 데이먼) 역 / 러스티의 친구(조슈아 잭슨) 오만과 편견(KBS) - 빙리(사이먼 우즈) 역 온 더 라인(SBS) - 케빈(랜스 배스) 역 용서받지 못한 자(KBS) - 스코필드 키드(제임즈 울벳) / 패티(제퍼슨 머핀) 욕망의 덫(SBS) 위대한 유산(KBS) - 핀(이선 호크) 역 유브 갓 메일(KBS) - 프랭크(그레그 키니어) 역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KBS) - 아서 덴트(마틴 프리먼) 역 음식남녀(KBS) - 국륜(진소영) / 사장의 아들(임사칙) / 학교 반장(홍계덕) 이브닝(KBS) - 버디(휴 댄시) 역 이유없는 반항(KBS) - 버즈의 친구(프랭크 마졸라) 이퀄리브리엄(SBS) - 존 프레스턴(크리스천 베일) 역 이유 없는 반항(KBS) - 버즈의 친구(프랭크 마졸라) 역 인 더 베드룸(SBS) - 프랭크 파울러(닉 스탈) 역 인조인간(KBS) - 악당1 역 자이언트(KBS) - 데이빗(로드 테일러) 역 제17 포로수용소(KBS) - 쿠키(질 스트래튼) 역 좋은 친구들(KBS) - 어린 헨리 힐(크리스토퍼 세론) 역 지옥의 특공대(SBS) - 브라이언트 요원 역 진주만(SBS) - 대니 워커(조시 하트넷) 역 초연(KBS) - 이일평(갈민휘) 역 칠 팩터(SBS) - 팀 메이슨(스킷 울리히) 역 컨페션(KBS) - 척(샘 록웰) 역 캘리포니아 여자(KBS) - 데이비드(코리 파커) 역 컬러 퍼플(KBS) - 하퍼 존슨(윌러드 E. 퍼프) 케인호의 반란(KBS) - 윌리 장교 역 쿵푸 프리즌(KBS) - 스탠(롭 슈나이더) 역 클로저(KBS) - 댄(주드 로) 역 터미네이터(SBS) 터미네이터 3(SBS) - 존 코너(닉 스탈) 역 토크 투 미(KBS) - 피티 그린(돈 치들) 역 투게더(KBS) - 바람둥이 남자 역 파더스 데이(SBS) - 스캇(찰리 호프하이머) 펄프 픽션(KBS) - 브레트(프랭크 월리) 풍운(KBS) - 보경운(곽부성) 역 프라이트너(KBS) - 프랭크 배니스터(마이클 J. 폭스) 역 피라미드의 공포(KBS) 하몬드 가의 비밀(KBS) - 트리거(숀 애스틴) 역 한 여름밤의 미소(KBS) - 헨리크 에게르만(비요른 브엘프벤스탐) 역 할로우 맨(SBS) - 세바스찬(케빈 베이컨) 역 홀랜드 오퍼스(KBS) - 러스(테런스 하워드) / 콜(안소니 나테일) / 라디오 방송 홀리 맨 (KBS) - 스캇(에릭 맥코맥) 외화 강호풍운록(KBS) - 가육 닥터 후(KBS) - 11대 닥터(맷 스미스) 대지진 10.5(KBS) - 잭 놀런(이반 세르게이) 로빈 후드(KBS) - 로빈 후드(조너스 암스트롱) 로마 시즌 2(SBS) - 옥타비아누스(맥스 퍼키스/사이먼 우즈) 리썰 웨폰(KBS) - 마틴(크레인 크로포드) 말괄량이 마법학교: 캠퍼스 대소동(SBS) - 홉스(바비 베리) 삼국지(KBS) - 제갈량 (육의) 스필버그의 어메이징 스토리(KBS) - 조나단 스타는 괴로워(KBS) - 제트(리 톰프슨 영) 아빠, 뭐하세요?(KBS) - 브래드 의천도룡기(KBS) - 장무기(양조위) 정무문(KBS) - 이시다(후시다) 피시는 사춘기(KBS) - 피시(키에란 컬킨) 특수촬영드라마 가면라이더 이그제이드 - 현종수 / 가면라이더 크로노스 슈퍼파워 김치맨 - 울프 다큐 2010.05.27 KBS 특선 (KBS) 2012.03.09 EBS 다큐 10+ (EBS) 2014.07.21 SBS 지식나눔콘서트 아이러브 人 (SBS) 2015.01.31 MBC 다큐프라임 (MBC) 2016.01.30 KBS 특선다큐 (KBS) 2016.06.08 KBS 해외걸작다큐 (KBS) 2016.06.15 KBS 해외걸작다큐 (KBS) 2016.07.27 KBS 세상의 모든 다큐 (KBS) 방송 2022년 상반기 에디터톤 공모전의 언어 에디터톤이 6월 5일까지 열립니다. 주주클럽(KBS) TV 동물농장(SBS) 좋은 친구들(SBS) TV쇼 진품명품(KBS) TV는 사랑을 싣고(KBS) TV로 보는 세계(MBC) 골든글러브 시상식(SBS) 김용만 신동엽의 즐겨찾기(SBS) 꽃미남 포차(KBS Joy) 도전 1000곡 한소절 노래방(SBS) 댄싱 위드 더 스타(MBC) 뷰티풀 라이프(SBS) 모닝와이드(SBS) 솔로몬의 선택(SBS) 생방송 세븐데이즈(SBS) 생활의 달인(SBS) 신나는 운전석(TBN인천교통방송) 열린 TV 시청자 세상(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SBS) 줌인! 게임천국(MBC) 추석특집 Mr. 살림왕(MBC) 찾아라! 맛있는 TV(MBC) 퀴즈! 육감대결(SBS) 특명 아빠의 도전(SBS) 해결 돈이 보인다(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일이(SBS) SBS 연기대상 (SBS) 라디오 KBS 라디오 극장 (KBS 한민족 방송) 2007.10.01 ~ 2007.10.31 이창례 作 영원한 이방인 2011.01.01 ~ 2011.01.31 권현순 作 에어홀릭 (박승주) 2016.06.01 ~ 2016.06.30 홍부용 作 아빠를 빌려 드립니다 (채태만) KBS 무대 (KBS 한민족 방송) 1999.06.27 초승달과 밤배 2부 2000.04.02 두번째 첫사랑 2000.04.16 남자의 향기 2001.05.27 그 여자가 사는 법 2001.07.29 멍에 2002.01.06 우리들의 천사가 온다 (병) 2002.10.06 한심한 청춘 (방형기) 2002.12.29 스물 아홉 (박승렬) 2003.01.12 모델하우스 (홍용표) 2003.02.23 호수 (정현우) 2003.03.23 그가 부른다 (민세준) 2003.06.22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오영달) 2004.10.03 무녀리 (한유빈) 2005.02.06 뻐꾸기 둥지에서 사랑을 품다 (강철수) 2005.05.21 당신 없는 하루 (용택) 2006.02.25 이 메마른 날들 (새점남) 2007.09.29 캔버스에 관한 보고서 2007.12.22 아버지의 약속 2008.11.15 움켜쥔 손 2009.01.31 당신이 잠든 사이에 2009.04.18 장모님의 아파트 2009.06.06 낙타의 눈물 2009.10.17 일몽주막 2010.03.06 전기수, 최필의 희망가 2010.09.11 네 번째 방 2010.12.04 아빠를 찾아 드립니다 2011.02.19 아버지의 선택 (이영훈) 2011.11.19 그 남자의 귀향(歸鄕) 2011.12.17 무다잡 전당포 2012.03.17 섬에 취하다 2013.04.20 치킨과 소주 (정만) 2014.05.24 요조숙녀 왕순진의 날개짓 (고귀한) 2014.10.11 연애를 읽다 (강기태) 2015.02.28 봄, 재규어, 키스 (오민석) 2015.08.29 죽거나 죽이거나 (추대남) 라디오 독서실 (KBS 한민족 방송) 2000.07.16 조경란 作 나의 자줏빛 소파 2001.09.23 박자경 作 너라는 검은 덩어리 2002.04.07 김주영 作 멸치 (달구) 2004.06.20 김연수 作 리기다 소나무 숲에 갔다가 (나) 2005.10.09 김인숙 作 감옥의 뜰 (규상) 2009.03.22 김경욱 作 위험한 독서 (나) 2015.08.09 정민철 作 귀로 (나) 엄길청의 성공시대 (KBS 사회교육) 2004.07.19 ~ 2004.07.31 제 20화 이영석의 총각네 야채가게 2005.07.04 ~ 2005.07.16 제 45화 권동칠 토종 등산화에 날개를 달다 환타지 특급 (KBS 라디오) 2001.04.09 ~ 2001.06.30 판타지 특급 - 싸이의 드래곤 라자 (닐시언) KBS 교통 캠페인 드라마 '노란 안전선 위에 행복' (KBS 라디오) 1999.12.26 이제 내게 남은 것들 교통방송 TBS 창립 20주년 특별기획 다큐 드라마 서울 600년을 걷다 (교통방송) 2010.05.03 ~ 2010.05.28 황희편 (황숙신 / 신숙주) 2010.05.31 ~ 2010.06.25 성삼문편 (신숙주) 2010.06.28 ~ 2010.07.30 한명회편 (신숙주) 2010.08.30 ~ 2010.10.01 유성룡편 (신숙주) 2010.12.06 ~ 2010.12.31 최석정편 (숙종) 입체낭독 라디오 문학관 (교통방송) 2008.12.08 ~ 2008.12.12 김연수 作 달로 간 코미디언 불교방송 고승열전 (불교방송) 2003 일연선사편 (일연선사) 인터넷 유령주식회사 (세이캐스트) - 류은호 게임 루니아 전기 - 라이언 헌트 미소녀닌자 모험기 2 - 에드 삼국지 천명 2 - 육손, 격투가 아머드 코어 넥서스 - 웬즈데이 기관 오퍼레이터 용기전승 2 - 세실 그라나드 이리너 - 레이어 진 삼국무쌍 - 여포 창세기전 3 Part2 - 아슈레이 파랜드 택틱스 5(파랜드 심포니) - 필스 광고 CJ 제일제당 젠립소 쏘팔메토up 오렌지라이프 라이프 정기보험 반다이 건담 시드 각주 외부 링크 다음영화 김일 - 네이버 인물검색 - 다음 인물백과 1966년 출생 2018년 사망 대한민국의 남자 성우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부산광역시 출신 성우 한국방송공사의 성우 김해 김씨 심장 마비로 죽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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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940%EB%85%84%EB%8C%80
940년대
940년대는 940년부터 949년까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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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G-Unit
G-Unit
G-Unit은 50센트를 주축으로 하는 미국의 힙합그룹이다. 이 그룹은 'Gangsta Unit'의 줄임말이다. 현재가지 약 700만장의 앨범을 팔았으며, 50센트, 로이드 뱅크스, 토니 야요, 영 벅이 현재 멤버이다. 2003년 그들은 Beg for Mercy를 발매한다. 비록 토니 야요는 거의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앨범은 꽤나 큰 성과를 냈다. 2008년에 발매된 T.O.S: Terminate on Sight는 스위즈 비츠, 플로우 다 돈 등이 참여했다. 그룹역사 초창기 50 Cent가 토니 야요, 로이드 뱅크스와 함께 만들었다. 이 그룹은 단순히 친목단체 같은거 였는데, 50 Cent가 인터스코프와 계약하고, 히트 앨범인 'Get Rich Or Die Tryin'을 발매하면서 그들은 그들만의 회사인 G-Unit Record를 설립한다. 그들은 여러 개의 믹스테잎(50 Cent Is the Future, God's Plan, No Mercy, No Fear and Automatic Gunfire 등)을 발매한다.그러던 중 멤버인 토니 야요가 불법 총 소지로 재판을 받아 감옥에 간다. 2003년 토니 야요를 제외한 앨범인 'Beg For Mercy'가 발매되었는데, 첫 주에만 30 만 장이 팔리는 성과를 얻었다. 게스트들로는 에미넴, 조, 닥터 드레,'Olivia'등이 참여했다. 이 앨범에서 토니 야요는 두 곡에 참여했다. 전멤버 G-Unit은 인터스코프의 시스템과 여러 문제 때문에 멤버들이 자주 바뀌고 퇴출당한다. 2006년까지 멤버였던, 더 게임은 닥터 드레, 50 Cent덕분에 그룹에 합류하고, 첫 데뷔앨범인 'The Documentary'도 성공적이었지만,그는 당시 50 Cent와 디스관계였던 뮤지션들과 작업하고 싶어했다. 그걸 못마땅하게 여긴 50 Cent은 더 게임과 디스전을 하고 탈퇴시켰다. 또한 2008년 오랜 멤버였던 영 벅도 음악적 차이로 디스를 하게 되었고,현재는 레이블은 'G-Unit'이지만,그룹내에서는 탈퇴했다. 후에 영 벅은 50센트와 화해를 하게 되고, 2014년 G-Uint에 재합류한다. 음반 목록 정규 음반 Beg for Mercy (2003) T.O.S: Terminate on Sight (2008) 멤버 현재 멤버 토니 야요 (Marvin Bernard, 1978년 3월 31일, 자메이카) 데뷔: 2003년, G-Unit 1집 앨범 - Beg for Mercy 로이드 뱅크스 (Lloyd Banks, 1982년 4월 30일, 미국) 데뷔: 2003년 G-Unit 1집 앨범 - Beg for Mercy 전 멤버 영 벅 (David Brown, 1981년 3월 15일) 데뷔:2003년 G-Unit 1집 앨범 - Beg For Mercy 경력:2003년 ~ 2008년 G-Unit 멤버 더 게임 (Jayceon Taylor) 데뷔:2004년, Untold Story 경력:2003년~2006년 G-Unit 멤버 외부 링크 G-Unit 공식 웹사이트 G-Unity Foundation 미국의 힙합 그룹 50센트 1999년 결성된 음악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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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A7%80%20W.%20%EB%B6%80%EC%8B%9C
조지 W. 부시
조지 워커 부시( , , 1946년 7월 6일~)는 미국의 정치인 가문이자, 정치인이다. 2000년 11월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어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제43번째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1989년~1993년 제41번째 대통령으로 재직한 조지 H. W. 부시의 장남으로, 역대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 재선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대통령 집권 기간 중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해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의 전쟁이 일어났고, 2008년 세 금융 위기의 책임으로 수없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초기 생애 조지 워커(W.) 부시는 코네티컷주 뉴헤이번에서 아버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와 어머니 바버라 부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미국에서 여러 대 째 이어오는 부유한 명문 집안이며, 조부 프레스컷 부시는 유명한 기업가 출신으로 후에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다. 그의 출생 당시 부친 조지 H. W. 부시는 뉴헤이번에 있는 예일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학업을 마치자마자 부친은 곧바로 석유 사업을 위해 텍사스주 미들랜드로 가족을 데리고 이주하여, 조지는 미들랜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휴스턴의 명문 사립 학교를 다녔으며, 그 후 집안 대대로 다니던 매사추세츠주의 유서 깊은 사립 고등학교인 필립스 앤도버 학교를 거쳐 예일 대학교에 입학했고, 역사학을 전공했다. 1968년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후 텍사스 주방위군에 장교의 신분으로 입대하여 중위로 퇴역했다. 군복무와 함께 텍사스 대학교 로스쿨에 지원했으나, 낙방했으며, 1973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입학하여 2년뒤 경영학 석사학위(MBA)를 취득했다. 이 기간 중 그는 이전부터 즐기던 술에 더욱 빠져들어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기도 했으며, 1976년에는 음주운전으로 벌금 150달러를 물고 운전면허를 일시 정지당하기도 했다. 술은 결혼 후 줄이기 시작했으며, 1986년 40세 생일 이후로는 완전히 끊었다. 1977년 미들랜드 출신의 도서관 사서인 로라 웰치를 만나 결혼했다. 조지는 결혼과 함께 집안에서 믿던 성공회에서 부인을 따라 감리교로 개종했다. 부부는 1981년 쌍둥이 딸 제나와 바버라를 낳았다. 정치 및 사회 활동 초기 경력 결혼 후 미들랜드에 정착하여 석유 사업에 관계하는 동시에 조부와 부친의 뒤를 이어 정계 진출을 시도하였다. 1978년, 텍사스주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구의 연방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민주당 후보에게 패했다. 하원 진출에 실패한 후, 석유 회사를 설립하고 다른 석유회사를 합병하는 등 적극적인 사업 활동을 했으나, 석유값 하락으로 그다지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러나 1986년 합병 후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스펙트럼 7 석유 회사를 상당한 이익을 남기고 매각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 후 워싱턴으로 옮겨, 198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부친의 선거운동 본부에서 일하며 정치를 익혔다. 부친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그는 텍사스 주로 돌아가 동업자들과 함께 프로야구 메이저 리그(MLB) 구단인 텍사스 레인저스를 매입했다. 대통령의 아들로 그는 팬들과 함께 자주 경기를 관전하며 텍사스 주민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인기를 얻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부친의 선거 운동을 다시 도왔으나, 부친은 재선에 실패했다. 텍사스 주지사 젊어서 그는 마약을 복용하여 아버지 조지 H. W. 부시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주지사 재직 중 그는 대통령 출마를 결심한다. 그러나 주지사 재직 중이자 예비후보로 거론되던 2000년 마약복용 경력 등이 터져나왔으나 그는 무난히 대통령 후보자로 추천되었다. 대통령 선거 2000년 대통령 선거 2000년 11월 7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당 후보이자 현직 부통령이던 앨 고어와 맞대결을 펼쳤다. 투표 결과 선거인단 수에서는 271 대 266으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총 득표율은 오히려 엘 고어에게 패했으나 미국의 선거방식 덕분에 엘 고어보다 적은 표를 받고도 당선되었다. 지역구마다 선거인단을 두는 제도로 각 선거구마다 이기면 자신이 이긴 선거구의 선거인단을 모두 확보하는 방식이다. 그런 즉 부시는 고어를 이긴 선거구는 선거인단이 더 많은 선거구였으나 이길땐 간발의 차이로 이기고 패할 땐 일방적으로 패했다. 2004년 대통령 선거 2004년 11월 2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재선에 도전했다. 부시는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존 케리를 선거인단 수에서 286 대 251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대통령직 활동 집권 테러리스트의 공격과 군사 실행 취임한 지 8개월 후인 9월 11일, 부시와 미국은 9.11 테러에 마주쳤다.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여객기들이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와 워싱턴 D.C.의 펜타곤에 부딪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은 무너지고 펜타곤의 한 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약 3,000명의 희생자외 6,0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내었다. 미국은 곧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재벌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테러리스트 기구 알카에다가 9.11 테러 뒤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빈 라덴의 본부들과 테러리스트 훈련소들은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의 통치 단체 탈리반에 빈 라덴을 넘겨주고 훈련소들을 문닫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탈리반이 거부하자, 부시는 테러에 전쟁을 선언하여 군사를 조직한다. 전쟁 선언은 연방 의회에 그 권한이 있다. 엄연히 말해자면, 이라크 전쟁은 국제정세 안정을 위한 미국의 치안 행위였을 뿐, 공식적인 전쟁은 아니었다. 더하여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국은 이와 같은 입장을 보였었다. 2001년 10월에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아프가니스탄에 군사 선전을 하였다. 경제 문제 2001년 3월부터 미국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9.11 테러 후에 실업률이 늘고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많은 항공사들을 포함한 회사들이 경기 침체 속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몇몇의 미국 항공사들은 파산되었고, 테러 후에 그들의 보안 시스템에 값비싼 정밀 검사를 해야 했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 타고 여행을 하는 데 두려움을 느껴 항공사들의 소득이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의회는 현금 15억 달러의 일괄 예산을 통과시켜 국채가 피해를 입은 항공사들을 지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국가의 경제적 어려움은 2002년과 2003년에 계속되었다. 경기 부양책으로 부시는 감세와 실업자 보조를 실시했다. 그는 또한 다른 나라들과 무역 협정들을 협상하는 데 더 넓은 권위를 의회에 물었다. 의회는 부시의 계획을 옮기는 데 법률 제정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부시가 요구한 것들보다 더 작은 감세를 통과시켰다. 2007년과 2008년에는 미국의 초대형 모기지론 대부업체들이 파산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세계금융위기가 일어났다. 이 사태는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금융 시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각에서는 이 사태의 원인으로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을 지목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간의 많은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외교 정책 테러 국가와의 관계 조지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 이후 이슬람 무장 항쟁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거나 추인하는 일부 서남아시아 국가들과의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2002년 국정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표현해 화제가 됐다. 2003년에는 '무법 정권'(Outlaw Regim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2004년에는 '가장 위험한 정권'(the most dangerous regime)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2001년에는 탈레반이 오사마 빈 라덴 등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적용해서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을 투입하여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를 붕괴시켰다. 2003년에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소지했다는 점을 들어 4년간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수없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뒤 2006년 12월에는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을 처형하고 이라크에 과도정부를 수립했으나 정치적 이견으로 이라크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도중에 끊임없이 인질 사태가 발생하고 미국 내에서는 평화주의자들의 전쟁 반대 시위가 계속되었다. 9.11 테러 이후 체포된 테러 용의자들을 수감하기 위해 쿠바 관타나모 만에 관타나모 만 수용소를 세우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인권 침해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종교관 2005년 1월 11일 워싱턴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신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고 말했다. 기타 1985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매일 아침 성경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2000년 미국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나는 교회를 사랑하고 찬송하는 것을 좋아하며 매일 기도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퇴임 후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단순한 여행 목적으로 2009년 7월 31일 '전국경제인연합회 2009 제주 하계포럼' 참석을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8월 3일에는 대한민국의 안동을 방문하였다. 방한 기간 동안 이명박 대통령과 회동을 갖고 재계인사 등을 만나는 등 미국과 한국 사이의 우호관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퇴임 이후 행보는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 구현에 맞추고자 한다"며 "이를 위해 '부시 기념 도서관'과 '정책연구소'를 설립 중에 있다"면서 "전 세계 독재국가와 민주주의가 핍박받고 있는 나라에서 민주화운동을 벌이고 있는 인사들의 글과 자료도 전시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청계재단 설립 소식을 접하고는 "이명박 대통령이 전 재산을 기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단한 일"이라고 평했다. 가족 할아버지: 프레스콧 셸던 부시 아버지: 조지 H. W. 부시 어머니: 바버라 부시 아내: 로라 부시 장녀: 바버라 피어스 부시 사위: 크레이그 코인 외손녀: 코라 코인(2021년생) 차녀: 제나 부시 헤이거 사위: 헨리 체이스 헤이거 외손녀: 밀라 헤이거(2013년생) 외손녀: 포피 헤이거(2015년생) 외손자: 핼 헤이거(2019년생) 역대 선거 결과 같이 보기 9.11 테러 테러와의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침공 이라크 전쟁 대침체 각주 외부 링크 조지 W. 부시 美차기대통령 라이프 스토리, 《신동아》, 2001.1. 1946년 출생 2000년 미국 대통령 후보 2004년 미국 대통령 후보 미국의 대통령 텍사스주지사 코네티컷주의 정치인 조지 W. 예일 대학교 동문 하버드 대학교 동문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동문 미국 공군의 장교 20세기 미국 사람 21세기 미국 사람 유럽계 미국인 미국의 이라크 전쟁 관련자 뉴헤이번 출신 살아있는 사람 미국의 감리교도 공화당 (미국)의 정치인 미국의 회고록 작가 타임 올해의 인물 아일랜드계 미국인 미국의 보수주의 공화당 (미국) 대통령 후보 미국의 투자가 21세기 화가 미국의 전기 작가 미들랜드 (텍사스주) 출신 미국 대통령의 자녀 대량 살인자 A급 전범 세습 정치인 텍사스주의 공화당 당원 텍사스주 출신 작가 미국 부통령의 자녀 9·11 테러 관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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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의
건의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건의는 개인이나 단체가 어떤 문제에 대해 의견이나 희망사항을 내놓는 것이다. 건의 (서진)(建義)는 서진(西秦) 선열왕(宣烈王)의 연호이다. 건의 (북위)(建義)는 북위(北魏) 효장제(孝莊帝)의 연호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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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C%BC%80%EB%AF%B8%EC%95%BC%20%EC%BC%80%EC%9D%B4%EC%BD%94
타케미야 케이코
타케미야 케이코(, 1950년 2월 13일 ~ )는 일본의 만화가이다. 도쿠시마현 도쿠시마 시 출신. 1980년경, 竹宮恵子에서 개명하였다. 현재의 일본 소녀만화계(한국에 있어서의 순정만화)의 방향성을 확립하였다고 일컬어지는 24년조(24年組)의 견인차 역할로, 소녀만화계의 개척자이다. SF, 역사, 연애물, 코미디 등 손댄 장르도 다양하여 소년지, 청년지에서도 활약하였으며, 다케미야 케이코를 동경하는 유명 만화가도 남녀를 불문하고 셀 수도 없이 많다. 역시 24년조인 하기오 모토와 함께 손꼽히는 거장이다. 타케미야 케이코의 혁신적이었던 점은, 먼저 주인공이 소년이었던 것과 본격적인 SF 판타지 작품을 그렸던 것을 꼽는다. 전자에서는 소년의 동성애를 그린 《바람과 나무의 시》, 후자에서는 《지구를 향해》를 대표작으로 꼽으며, 두 작품으로 제25회 소학관 만화상을 수상하였다. 특히 《바람과 나무의 시》로 일으켰던 센세이션은 이후 소년끼리의 연애를 그린 작품(보이즈 러브, 야오이)이 소녀만화의 하나의 큰 장르가 되기까지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타케미야 케이코의 매력은 그 화려한 그림 스타일이다. 그녀가 그리는 소년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소녀만화의 미소년상의 형태를 만들어냈으며, 지금도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보편적인 매력을 지닌다. 연보 1950년 2월 13일 도쿠시마 현 도쿠시마 시에서 태어났다. 1968년 1월, '사과의 죄'가 주간 마가렛(현재 격주간)의 신인상 가작으로 입선하여 데뷔하였다. 1970년, 대학을 중퇴하고 상경. 이후, 마찬가지로 상경한 하기오 모토와 1972년까지 함께 살게 된다. 1978년, 《지구를 향해》로 제9회 성운상 코믹부문 수상. 1980년, 《바람과 나무의 시》와 《지구를 향해》로 제25회 소학관 만화상을 수상. 1988년, 가도카와 쇼텐에서 전집(전 44권) 간행. 2000년, 교토 세이카 대학 만화학부 교수에 취임. 만화가로서는 일본 최초의 대학 전임교원이 되었다. 대표 저작 만화 1976년 바람과 나무의 시 (~1984년) 1977년 지구를 향해 (~1980년) : 한국에서는 애니메이션이 이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1981년 날 달까지 데려다줘! (~1986년) 1991년 천마의 혈족 2000년 브라이트의 우울 ('날 달까지 데려다줘!' 의 후속에 해당) 2005년 시간을 가는 말 소설 문고본 삽화 1978년~1984년에 걸쳐 어슐러 르 귄의 소설 일러스트. 80년대 초, SF작가인 아라이 모토코의 코발트 문고 시대의 소설 일러스트. 그 외 화집, 수필집, 단행본으로 묶이지 않은 잡지 연재 다수 애니메이션화 극장판 《지구를 향해》(1980년) 《여름으로 가는 문》(1981년) OVA 《바람과 나무의 시》(1979년) 스승 이시노모리 쇼타로 외부 링크 Keiko Takemiyas HP 사토 시오 데이터베이스 오오이즈미 살롱에 대해 (24년조가 주로 기거하던 아파트) 일본의 만화가 195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타케미야 케이코 도쿠시마현 출신 도쿠시마 대학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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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 메디나
리나 마르셀라 메디나 드 호라도(, 1933년 9월 23일~ )는 의학 역사상 최연소에 아이를 출산한 여성으로, 만 5살 7개월 21일의 나이에 아이를 출산했다. 생애 리나 메디나는 페루 파우랑게()에서 태어났다. 5살의 나이에 배가 불룩해져서 부모는 큰 종양이 생긴 줄 알고 병원에 데려갔는데 아이를 임신한 것으로 밝혀져 한 달 뒤인 1939년 5월 14일에 제왕절개로 사내아이를 분만했다. 당시 수술은 헤라르도 로사다(), 알레한드로 부사예우(), 로날두 콜레타() 등 세 명이 집도했다. 수술을 하기 전, 로사다 박사는 리나를 페루의 수도 리마로 데려가서 다른 전문가들에게 리나를 진찰하게 했고, 이들은 리나가 실제로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것은 에드문도 에스코멜()이 《》에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수술했던 의사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은 헤라르도()라고 지었다. 출생당시 몸무게는 5.9파운드(2.7 kg)였다. 태아는 건강한 상태였으며 산모와 아기는 며칠 후 퇴원했다고 한다. 당시 이 사실은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기 때문에 로사다 박사는 이후에도 리나를 정밀 진단했다. 리나는 8개월 때 첫 월경을 했으며 4세때 이미 유방과 음모가 발달했다고 한다. 출산후에는 다른 산모들처럼 뼈가 단단해지는 현상도 관찰되었다고 한다.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며, 리나가 어떻게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헤라르도는 10살이 될 때까지 리나가 누나인 줄 알고 있었으나, 자신을 놀리는 학교 친구에 의해 리나가 사실은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헤라르도는 40세였던 1979년 골수에 병이 생겨 사망했다. 헤라르도가 병에 걸린 것이 산모의 나이가 매우 어렸다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리나는 1972년에 라울 후라도()와 결혼하여 헤라르도를 낳은 지 33년 만에 둘째 아이를 낳았다. 둘째 아이는 멕시코에 살고 있다고 한다. 메디나의 남편은 현재 리마의 치카고 치코(, ‘작은 시카고’)에 살고 있으며, 2002년 로이터 통신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각주 193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페루 사람 임신 인간의 발달 과정 아동 성학대
87150
https://ko.wikipedia.org/wiki/.me
.me
.me는 몬테네그로의 국가 도메인이다. 2006년 6월 5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분리되며 할당되었다. 이 도메인이 할당되기 전까지는 .yu를 사용했다. me의 의미('나') 때문에 .name처럼 개인적 용도의 웹사이트를 주요 마케팅 대상으로 한다. 역사 몬테네그로는 국민 투표에서 독립이 결정된 이후 2006년 6월 3일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의 일부로서 몬테네그로는 비공식적으로 .cg.yu 2차 도메인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몬테네그로는 .mn.yu 도메인을 사용했으며 .cs 최상위 도메인은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이후 2003년 몬테네그로에 할당되었지만 사용되지 않았다. 이후 몬테네그로는 국제 표준화기구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에서 할당한 ISO 3166-1 두 글자 코드에서 "ME"를 할당받았다. 2007년 9월 ICANN은 .me 도메인의 운영 권한을 몬테네그로 정부에 위임했다. 이전 .yu 도메인은 .rs 도메인 레지스트리 (Serbian National Register of Internet Domain Names)에 의해 일시적으로 운영되었지만, 2009년 9월 30일 사용이 중단되었다. 루트 네임서버의 위임은 IANA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후 2008년 7월 16일에 모든 .me 도메인에 대해 다양한 등록 기관의 모든 사람이 등록할 수 있게 되었다. .me의 도메인 구조 몬테네그로 정부는 도메인에 대한 영단어의 뜻을 고려하여 .me를 일반 최상위 도메인과 동일하게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3단계 도메인은 아래에 따라 등록할 수 있다. .co.me – 제한 없으나 기업에 적합 .net.me – 제한 없으나 인터넷 서비스 제공 업체에 적합 .org.me – 제한 없으나 시민 단체 및 협회에 적합 .edu.me – 초등학교 및 고등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 .ac.me – 대학과 같은 학술 및 고등 교육 기관 (몬테네그로 대학교의 기본 도메인은 ucg.ac.me) .gov.me – 주 및 정부 당국 .its.me 또는 .priv.me – 제한 없으나 개인적인 사용에 적합 같이 보기 .rs 각주 Me Me 몬테네그로의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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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81%EA%B0%95
영강
영강은 다음 뜻으로 쓰인다. 영강 (후한)(永康)은 후한(後漢) 환제(桓帝)의 일곱 번째 연호이다. 영강 (서진)(永康)은 서진(西晉) 혜제(惠帝)의 네 번째 연호이다. 영강 (동진)(寧康)은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의 첫 번째 연호이다. 영강 (후연)(永康)은 후연(後燕) 혜민제(惠愍帝)의 연호이다. 영강 (오호십육국 서진)(永康)은 서진(西秦) 문소왕(文昭王)의 첫 번째 연호이다. 영강 (고구려)(永康)은 고구려의 연호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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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C%EB%B3%B8%20%ED%92%8B%EB%B3%BC%20%EB%A6%AC%EA%B7%B8
일본 풋볼 리그
일본 풋볼 리그()는 1999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축구 리그의 하나로서, 일본 프로 축구 리그와 지역 리그의 사이에 위치하며, 일본 축구 리그 시스템에서 4부에 해당한다. 약칭은 일본 축구 리그의 발족 전에 동일한 카테고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재팬 풋볼 리그의 약칭인 JFL을 그대로 계승하여 JFL을 사용하고 있다. 이 둘은 같은 약칭은 사용하고 있는 탓에, 편의상 이전의 재팬 풋볼 리그를 구 JFL, 현 일본 풋볼 리그를 신 JFL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재팬 풋볼 리그가 J리그를 목표로 하는 클럽들이 모인 세미 프로 리그라고 하는 성격이 짙었던 데 반하여, 일본 풋볼 리그는 순수하게 아마추어 팀의 최고봉 리그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재팬 풋볼 리그에서는 발족에서 종료하기까지의 7시즌 동안에 16팀(1999년에 J2리그 소속이 된 팀을 포함)이 J리그에 가입한 것에 반해, 개막으로부터 같은 7시즌을 비교한 경우, 일본 풋볼 리그에서는 5개팀 밖에 가입하지 않았다. 또, J리그와 같이 일본 축구 협회에서 독립된 개별의 운영주체, 즉 '사단법인 일본프로축구리그'와 같은 기관을 가지지 않고, JFA가 직접 리그의 운영을 행하고 있는 것도 JFL의 특징이다. JFL에 참가하는 팀의 수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으나, 몇번에 이르는 팀 수의 증가에 의하여 2006년부터는 18개 팀에 의하여 리그가 운영되고 있다. 그 중에서 J리그로의 참가 의지가 있으며, 더불어 팀내외의 요소들에 있어서 그 기준(J리그 준가맹 기준)을 충족하고 있으면 원칙적으로는 연간 성적 4위 이내의 팀은 J리그 이사회의 승인을 얻은 후에 다음해부터 J리그에 참가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대로 하위 3개팀은 지역리그로의 강등 가능성이 있다. 강등에 대해서는 JFL로부터 다음해에 J리그로 참가하거나 다음해 JFL 참가를 포기하는 클럽의 유무에 의하여 좌우되는 면이 있으며, 그 비정규성은 해마다 일정하지 않은 것이 현재 상황이다. JFL에 참가하는 팀은 크게 2개로 나눌 수 있다. 장래에 J리그로의 참가(팀의 프로화)를 희망하는 팀과, 그 밖의 사회인 아마추어 팀이다. 따라서 JFL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에게도 차이가 있으며, 팀과 프로계약을 맺은 선수와 아마추어로서 뛰고 있는 선수가 혼재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J리그를 지향하는 클럽에는 프로선수가 많아 반쯤은 프로적인 성격의 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 탄생 J리그가 실력별로 1, 2부제로 이행하기 위하여 1998년을 끝으로 구 JFL은 종료, 이듬해 1999년, 전년도에 참가하고 있던 팀들 중 J2에 참가하지 않았던 7개 팀과 전국지역리그 결승대회에서 우승한 요코가와덴키 축구부를 합한 8개 팀으로 일본 풋볼 리그가 발족하였다. 그 후, 신생팀 요코하마 FC가 특례로써 JFL로부터 준회원 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이 인정되어, 제 1회 리그에는 합계 9개팀에 의하여 행해지게 되었다. 클럽 수의 변천 원년 당시 9개 팀으로 시작한 JFL은, 그 후로도 참가 희망 팀을 받아들여 리그 참가 클럽 수를 꾸준히 늘여왔다. 먼저 제 2회인 2000년에는, 미토 홀리호크가 J2참가에 의하여 1팀 줄어든 것에 반해, 지역 리그로부터 4팀이 승격하여 12개팀 체제가 되었다. 제 3회인 2001년에는 요코하마 FC의 J2 승격으로 인하여 1팀이 줄어든 반면, 지역 리그로부터 5팀이 승격하여 16클럽에 의한 리그 체제를 갖추었다. 이후 제 7회의 2005년까지 기본적으로 이 16클럽의 리그 구성이 유지되었다. 다만 예외로써 2002년도의 제 4회 JFL에서는, 2002년 FIFA 월드컵의 영향에 의하여 18개팀에 의한 홈 앤 어웨이 방식이 아닌 1회전 단일 리그 경기라고 하는 변칙적인 운영을 하게 된 바 있다. 이 예외적인 조치는 2002년 시즌에만 해당하여, 이듬해 2003년부터 2005년까지의 3시즌간은 다시 16클럽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2006년부터는 J리그 참가를 희망하는 클럽의 증가를 받아들여, 지금까지의 16팀에서 18팀으로 확대되었다. 우승 팀 당초 2년간은 요코하마 FC가 구 JFL시대를 포함하여 최초의 연패를 달성하였으나, 그 후로 혼다 FC를 시작으로, 사가와큐빈토쿄축구부(佐川急便東京サッカー部), 사가와큐빈오사카축구부(佐川急便大阪サッカー部), YKK축구부(YKKサッカー部 현・YKK AP 축구부(YKK APサッカー部)), 오츠카FC(大塚FC 현・도쿠시마 보르티스(徳島ヴォルティス)) 등의 아마추어 팀에 의하여 우승 쟁탈전이 펼쳐졌다. 이들 중 제3회, 제4회는 혼다FC가 2년 연속으로 우승하였다. 당시가 JFL에 있어서의 아마추어 팀의 절정기였다. 이 움직임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 2003년도의 제5회 JFL을 우승한 오츠카FC이다. 오츠카는 아마추어 팀으로서의 체제를 취하고 있었으나, 2003년에 J리그 승격을 목표로 하는 것이 명확해지자, 이듬해 2004년에는 2년 연속 우승을 이루어 J리그 입성에 큰 계기를 이루었다. 이 무렵부터 J리그를 지향하는 팀이 서서히 실력을 키우기 시작하여, 아마추어 팀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다. J리그로의 승격 원칙적으로는 해당 년도의 JFL에 있어서의 상위 2개팀은 J리그 참가 의사가 있을 경우, J리그에 참가하는 자격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J리그로의 참가 의사가 없는 팀이나 준회원 자격의 클럽이 상위를 점한 경우에는 3위이더라도 자격을 얻는 경우가 있다(미토 홀리호크(水戸ホーリーホック), 자스파구사츠(ザスパ草津) 등). JFL에서 J리그로 참가하였던 팀은 1999년 미토 홀리호크(水戸ホーリーホック), 이듬해 2000년의 요코하마 FC(横浜FC)로 연속하여 있었으나, 그 후 2004년에 오츠카FC(大塚FC)와 자스파 쿠사츠(ザスパ草津)가 J리그로 참가하게 될 때까지 3년간의 공백이 있었다. 그 동안, JFL의 상위 클럽들 중에도 J리그 참가를 희망하는 팀은 나타나지 않아 J리그 클럽수가 고정되는 상태가 이어졌으나, 2004년에 도쿠시마 보르티스(徳島ヴォルティス)・자스파 구사츠(ザスパ草津)가 J리그로의 승격을 달성하자, JFL에 소속하고 있는 여타 클럽에서도 J리그 참가를 목표로 하는 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에 의해, J리그 참가를 목표로 하는 팀들이 종래 JFL에서 상위를 점하고 있던 혼다FC(ホンダFC) 등의 아마추어 팀들의 성적을 웃돌게 되었다. 이것은 종래 JFL이 지향하는 아마추어 국내 최고봉의 리그라고 하는 성격이 변하는 사건이었다. 2006년부터는 J리그 준가맹 제도가 설치되었다(구JFL 시대에도 이것과 비슷한 'J리그 준회원'제도가 있었다). 2007년부터는 J리그 준가맹으로 JFL 연간순위가 4위 이내라면 J리그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진다(단, J2소속 클럽 수가 22팀이 될때까지의 잠정조치). 2012년 J리그 디비전 2와의 승강제 실시로 V-바렌 나가사키가 J2로 승격되고 마치다 젤비아가 일본 풋볼 리그로 강등되기도 했다. 2014년 J3리그의 창설로 일본 풋볼 리그에 참여하고 있던 J리그 준가맹 클럽들이 J3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자동적으로 리그시스템에서 4부에 해당하는 리그가 되었다. 클럽 2023 시즌 참가 클럽 레인미어 아오모리 소니 센다이 FC 크리아상 신주쿠 도쿄 무사시노 유나이티드 FC 브리오베카 우라야수 혼다 FC 마르아수 오카자키 스즈카 포인트 게터즈 페르틴 미에 MIO 비와코 시가 FC 티아모 히라카타 FC 카구라 시마네 고치 유나이티드 SC 베르스파 오이타 혼다 록 SC 오키나와 SV 전적 1999년~2013년 참고 2004년에 소속 선수 15명이 성추문에 연루되면서 강제퇴출되었다. 사가와 익스프레스 SC으로 통합되었다. 카탈레 도야마로 통합되었다. 2014년~ 일본의 축구 대회 4부 아시아의 축구 4부 리그 1999년 설립된 스포츠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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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조선
성서조선(聖書朝鮮)은 기독교 사상가인 김교신이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1927년부터 1942년까지 발행한 무교회주의 기독교계 월간 잡지이다. 1942년 3월호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弔蝸)’ 조와사건으로 잡지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일제는 김교신, 수제자 류달영, 함석헌, 송두용등 기독교 지도자들과 장기려박사를 포함 전국의 독자 300여 명을 검거했다. 역사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 우치무라 간조에게서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앙을 배운 일본 유학생 6인조의 동인지로서 동경에서 시작한 성서조선은, 유학시절 스기나미 마을()에서 처음으로 모임을 가진 ‘조선성서연구회’활동 중 연구한 기독교 지식인으로서의 깨달음들을 담았다고 창간사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곧 성서조선 잡지는 김교신 혼자서 원고 수집, 편집, 총독부 검열, 교정, 출판, 배포 등의 모든 일을 감당해 내는 일인(一人)출판물의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성서연구, 성서해설,인생론,신앙론 등 다양한 제목을 담아 조선을 위한 기독교를 주장한 김교신과 그 동지들의 신앙과 신학 연구를 전파하였다. 1942년 3월호(제158호)에 실린 권두언 "조와(弔蛙)"(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는 뜻)에서 일본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조선을 개구리에 빗대었다고 본 조선 총독부는 성서조선을 강제폐간하였다. 이때 그동안 발간된 성서조선의 전편을 압수 폐기하는 조치의 성서조선사건을 일으켜 김교신은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일본 경찰은 “너희 놈들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중 가장 악질들이다.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 100년, 아니 500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터전을 마련해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라며 맹비난했다. 김교신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가장 더럽다 천대받던 흥남질소 비료공장에서 5천여명의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다 본인도 발진티브스에 전염돼 해방 백일전 유명을 달리했다. 독립을 보지 못한 김교신은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기에도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에서 동양의 고난이 이 땅에 집중된 것은 한반도가 동양의 중심임을 증명하며, 따라서 동양의 가장 고귀한 사상 또한 한국에서 나올 것이라고 민족에 희망을 전했다. 교회사학자 민경배(연세대)는 “민족교회사를 공부할수록 그 주류와 명맥은 김교신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깊어가고, 그의 인품과 신앙이야말로 한국 기독교의 모습, 나라 사랑의 길이라는 생각이 더해 간다.”고 밝히는등 김교신이 성서조선에서 보여준 기독교적애국심은 한국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장기려박사는 평생 의료 봉사로 류달령은 새마을 운동의 전신인 국가재건운동 본부장으로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을 선진국으로 재건했다. 조와(弔蛙) / 김교신 (1900-1945)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다. 층층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연못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가 연못 속에서 솟아나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하늘이 마련해 준 성전이다. 이 반석 위에서 때로는 가늘게 때로는 크게 기도하고 간구하고 찬송하다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연못 속에서 바위의 색깔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 속에 큰일이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새로 온 손님에게 접근하는 친구 개구리들. 때로는 5,6 마리, 때로는 7,8마리. 늦가을도 지나서 연못 위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하더니 개구리들의 움직임이 날로 날로 느려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연못의 투명함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고막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소식이 막힌 지 무릇 수개월 남짓!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얼음 덩어리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개구리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연못 속을 구부려 찾아보았더니 오호라, 개구리 시체 두세 마리가 연못 꼬리에 둥둥 떠다니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연못의 적은 물이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얼어 죽은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연못 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가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현대어 번역 신학적 저술 이외에도 성서조선에 실린 김교신의 일기 등은 해방 직후 부족했던 한국어 교육의 교본으로 사용될 정도로 뛰어났으며, 그 속에 담긴 김교신의 투철한 교육 철학과 교육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들은 교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광복 이후 노평구 등의 노력으로 전편을 다시 수집하여 영인본과 전집의 형태로 재발간하였으며, 부키에서 전집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외부 링크 김교신의 글과 자료들을 모은 사이트 일제강점기의 잡지 일제강점기의 기독교 함석헌 무교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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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AF%EB%8B%A4%EB%A5%B4%ED%83%80%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싯다르타 (동음이의)
싯다르타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싯다르타는 불교의 창시자이다. 싯다르타는 1922년에 발표된 헤르만 헤세의 소설의 제목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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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
수학여행(修學旅行, )은 학교에서 학습 활동의 일환으로 관광지를 여행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개요 학교에서는 학습 활동의 일환으로 학생들에게 어떤 지역을 직접 답사하게 함으로써 그 지역의 문화 등을 직접 익히며 견문을 넓힐 수 있다. 또, 사제와 학우 간의 단결심을 기를 수 있으며 좋은 추억거리로도 남게 된다. 학교의 졸업 사진첩에서도 수학여행 기념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학여행은 2박 3일의 일정으로 진행되며(무박3일로 가는 학교도 있다), 4월에서 6월 사이에 간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규정은 아니어서 어떤 학교는 3박 4일 또는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진행되거나, 가을이나 겨울에 수학여행을 가기도 한다. 그리고 수학여행 대상이 되는 학년 또한 학교마다 다르다. 일반적으로 한 학년이 1년에 한 번 가게 되어 있으나 소규모 학교에서는 3년에 한 번 모든 학년이 한꺼번에 가기도 한다. 수학여행지는 학교별로 매우 다양하나, 대한민국에서 수학여행지로 인기가 높은 지역은 대체로 경주 나 제주도 등이다. 지방에 있는 학교는 서울과 경기도 지역이 인기가 높다. 농사체험을 하는 수학여행도 있다. 강원도 정선군 남면 낙동2리 "개미들" 마을은 밭에 조와 수수를 심는 등의 농사체험을 하는 수학여행으로 일 년에 7천명의 학생들이 다녀간다. 비판 대한민국에서는 최근에는 생활수준 향상으로 일부 학교에서 많은 경비를 들여 대한민국 이외의 국가로 수학여행을 보내는 경우가 있어 수학여행의 본래 취지가 퇴색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 수학여행에 참여할 형편이 되지 못하는 학생을 위한 배려로 대한민국 내의 관광지를 대신 답사할 수 있게 한다고는 하나 이마저도 학생들의 위화감을 조장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취소된 사례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에는 수학여행 취소 소동을 일으켰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전면 취소되었다. 2015년 메르스와 2020년부터 2022년 4월까지 코로나19 범유행 여파로 전면 취소되었다. 각주 여행 학교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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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 국왕의 목록
카르타고는 기원전 308년까지 공식적으로 왕정이었다. 다음은 기원전 814년부터 기원전 308년까지 카르타고 국왕의 목록이다. 디도 왕조 기원전 814년 - c. 기원전 760년, 디도 미상 c. 기원전 580년 - c. 기원전 556년, 한노 1세 c. 기원전 556년 - c. 기원전 550년, 말쿠스 1세 마고 왕조 c. 기원전 550년 - c. 기원전 530년, 마고 1세 c. 기원전 530년 - c. 기원전 510년, 하스드루발 1세 c. 기원전 510년 - 기원전 480년, 하밀카르 1세 기원전 480년 - 기원전 440년, 한노 2세 기원전 460년 - 기원전 410년, 히밀코 1세 (시칠리아왕) 기원전 440년 - 기원전 406년, 한니발 1세 기원전 406년 - 기원전 396년, 히밀코 2세 기원전 396년 - 기원전 375년, 마고 2세 기원전 375년 - 기원전 344년, 마고 3세 기원전 344년 - 기원전 340년, 한노 3세 한노 왕조 기원전 340년 - 기원전 337년, 한노 대왕 기원전 337년 - 기원전 330년, 기스코 기원전 330년 - 기원전 309년, 하밀카르 2세 기원전 309년 - 기원전 308년, 보밀카르 기원전 480년 하밀카르 1세의 죽음과 함께 실권은 왕으로부터 장로회로 넘어갔다. 기원전 308년 보밀카르는 왕권의 회복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이후 카르타고는 공화국이 되었다. 국왕 아프리카의 군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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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프로필안티피린
이소프로필안티피린(isopropylantipyrine) 또는 프로피페나존(propyphenazone)은 안티피린의 유도체 가운데 하나이다. 진통 · 해열 작용이 있다. 질소 화합물 유기 화합물 진통제 해열제 아이소프로필 화합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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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자
《소공자》(小公子, )는 프랜시스 버넷의 소설이다. 1886년 발표되었다. 뉴욕 시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고 있던 영국 귀족의 손자 세드릭 에롤이 할아버지 집에서 살게 된 후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이야기이다. 완고하고 인색한 지주로 악명높던 할아버지는 맑고 순수한 손자의 영향으로 어진 성품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동심에 대한 찬양은 《소공녀》, 《비밀의 화원》 등 다른 작품에서도 일관되고 있다. 19세기 패션계에 레이스 칼라를 유행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수없이 제작되었으며, 영화는 교육방송(EBS)에서 방영된 바 있다. 줄거리 1880년대 중반, 미국 뉴욕에서 엄마와 단둘이 살던 소년 세드릭 에롤은 어느 날 집을 찾아온 영국인 변호사 해비셤에게서 자신이 영국 백작가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세드릭의 아버지는 드린코트 백작의 아들이었지만 미국인 여자와 결혼하면서 집안과 의절한 상태였고, 그를 포함해 백작의 아들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손자인 세드릭만이 백작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백작은 세드릭과 같이 살면서 그에게 귀족으로서 소양을 가르치고 싶어하고 세드릭은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영국으로 건너가 그의 대저택에서 함께 살게 된다. 하지만 미국인을 몹시 경멸하는 백작은 세드릭의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저택 근처의 작은 집에서 세드릭과 떨어져 살게 된다. 완고하고 인색한 지주인 백작과는 달리 세드릭은 어려운 형편의 소작인들을 토지사용료를 늦게 내도록 배려하는 어진 성품을 갖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를 찬양한다. 그리고 백작도 손자의 순수한 동심에 영향을 받아, 점차 어진 노인으로 변한다. 이후 세드릭과 백작 앞에 자신이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소년 톰과 그의 어머니 미나가 나타난다. 미나는 자신이 백작의 장남 비비스의 아내이며 톰은 그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백작은 그녀를 통해 세드릭의 어머니가 상대적으로 얼마나 훌륭한 여성인지 깨닫게 된다. 한편 세드릭의 고향 친구인 구두닦이 딕은 그녀가 자신의 형수임을 알아보고, 세드릭을 돕기 위해 세드릭의 또다른 친구 홉스와 함께 영국으로 달려온다. 세드릭은 무사히 자신의 지위를 찾게 되고, 백작도 세드릭의 어머니를 찾아가 그녀를 며느리로 인정한다. 세드릭은 할아버지, 어머니, 친구들과 함께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파생 작품 영화 소공자(Little Lord Fauntleroy, 1921) : 메리 픽포드 주연 소공자(Little Lord Fauntleroy, 1936) : 프레디 바솔로뮤 주연 소공자(Little Lord Fauntleroy, 1980) : 릭 슈뢰더 주연 애니메이션 소공자 세디(小公子セディ, 1988) 외부 링크 소공자 1886년 책 미국의 아동문학 1886년 소설 1880년대 소설 1880년대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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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88%EB%A2%B0%EB%94%A9%EA%B1%B0%EC%9D%98%20%EA%B3%A0%EC%96%91%EC%9D%B4
슈뢰딩거의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ödingers Katze)는 1935년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보이기 위해서 고안한 사고 실험이다. 기원과 의의 자신이 만든 파동방정식의 해(파동함수)가 확률을 뜻한다고 막스 보른(Max Born)이 주장하자 물리학에 불확정성이 도입된 것에 대해 반발해 고안된 사고실험이다. 즉, 코펜하겐 해석의 비상식적인 면을 드러내어 비판하고자 하는 목적의 실험이다. 양자역학의 특징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예시로 흔히 사용된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미시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그 사건이 관측되기 전까지는 확률적으로밖에 계산할 수가 없으며 가능한 서로 다른 상태가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슈뢰딩거가 제안한 이 사고 실험은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미시적인 사건이 거시적 세계에 영향을 미칠 때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하나의 패러독스로서 거론된다. 사고실험 사고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양이 한 마리와 청산가리가 든 유리병, 방사성물질 라듐, 방사능을 검출하는 가이거 계수기, 망치가 상자에 들어 있다. 상자는 외부 세계에 차단되어 있고,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다. 라듐 핵이 붕괴하면 가이거계수기가 그걸 탐지한다. 그러면 망치가 유리병을 내려쳐 깨게 돼 청산가리가 유출된다. 청산가리를 마신 고양이는 죽게 된다. 라듐이 붕괴할 확률은 1시간 뒤 50퍼센트다. 1시간 뒤 고양이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요약하면 "1시간 후에 절반의 확률로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는다. 당신은 그 상황을 전혀 볼 수 없다."라는 것이다. 이는 역설을 제기하기 위한 사고실험이다. 이해와 검증 양자역학에 따르면 관측하지 않은 핵은 '붕괴한 핵'과 '붕괴하지 않은 핵'의 중첩으로 설명되지만, 한 시간 후 상자를 열었을 때 관측자가 볼 수 있는 것은 "붕괴한 핵과 죽은 고양이" 또는 "붕괴하지 않은 핵과 죽지 않은 고양이"뿐이다. 그럼 언제 이 계의 중첩 상태가 끝나고 하나의 상태로 고정되는가.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슈뢰딩거는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 고양이"가 진짜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며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는 반드시 살아있거나 죽은 상태여야 하기 때문에, 그 둘 사이의 어디쯤이 아닌, 원자 역시 붕괴했거나 붕괴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중 슬릿 실험 텅 빈 실험실 안에 손전등이 벽면을 비추고 있다. 손전등과 벽면 사이에 가림판을 설치하고 그 가림판에 가늘고 기다란 구멍을 뚫는다(A슬릿이라고 부른다). 그럼 가림판의 A슬릿을 빠져나온 빛은 벽면에 길다란 한줄의 빛줄기를 남길 것이다. 만약 그 구멍옆에 똑같은 구멍(B슬릿이라고 부른다)을 하나 더 뚫는다면, 벽면에는 여러 줄의 불빛이 생긴다. 이는 파동이 서로 간섭하는 현상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A슬릿과 B슬릿을 동시에 통과한 불빛들이 서로 간섭을 하여, 그 결과로 벽면에 간섭 불빛이 남은 것이다. 즉, 벽면에 비치는 여러 줄의 간섭 불빛을 통해 빛이 파동임을 확실하게 증명한다. 만약 위의 실험에서 손전등으로 불빛을 비추는 대신 이중 슬릿을 향해 전자빔 발사기로 전자빔을 쏜다면 위와 똑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일단 먼저 전자는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전자가 도달한 위치 파악을 위해, 전자를 받으면 색이 변하는 도료를 벽면에 바른다. 편의상 감광판이라고 부르도록 한다. 위의 불빛과 마찬가지로 전자빔 발사기에서 발사된 전자빔은 이중 슬릿을 통과하여 선명한 간섭무늬를 감광판에 남기게 된다. 즉, 전자빔도 빛과 마찬가지로 파동이다. A슬릿과 B슬릿을 동시에 통과한 연속적인 전자의 흐름들은 파동이기 때문에 당연히 서로 간섭을 하여 감광판에 간섭 무늬를 남긴다. 위의 전자빔발사기에서 전자다발들이 아니라 전자를 한 번에 하나씩 불연속적으로 발사한다면, 어김없이 감광판엔 간섭 무늬가 남는다. 여기서 이를 통해 전자다발들 혹은 연속적인 전자들의 흐름만이 파동이 아니라, 애초에 각각의 전자 하나 하나가 그 자체로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원래대로라면 감광판에 간섭 무늬가 남기 위해선 A슬릿을 통과한 파동과 B슬릿을 통과한 파동(전자)이 서로 간섭을 일으켜야 하고, 서로 간섭을 일으키기 위해선 각각의 슬릿을 최소한 하나씩의 전자가 동시에 통과해야 한다. 하나씩의 전자를 차례대로 발사해서는 결코 이 전자는 감광판에 간섭 무늬를 남겨서는 안 된다. 위의 의문을 정리해본다면, 감광판에 간섭 무늬가 남기 위해선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전자가 A와 B 각각의 슬릿을 따로 그리고 동시에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전자는 분명 한번에 하나씩만 발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광판엔 선명하게 간섭 무늬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모두 통과했다. 하나의 전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했다는 것은 물론 하나의 전자가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한다는 뜻을 포함하며, 결론적으로 하나의 전자는 확률적으로 위치할 수 있는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파동함수를 따르는 한)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태로 동시에 존재하며,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더 나아가서 양자역학은 확률론과 인식론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 즉, 일반적인 확률의 개념과 양자역학에서의 확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상상 속의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은 실제로 재현할 수 없다. 현실 속의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 확정된 상태에 있으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선 직접 뚜껑을 열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슈뢰딩거의 사고실험에 논리상 허점은 없다. 하지만 이중 슬릿 실험을 통해 하나의 전자가 두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 역시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거시세계에서도 한마리의 고양이가 두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겠으나, 우리는 그런 장면을 목격할 수 없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경계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풀러렌을 이용한 이중 슬릿 실험 결과를 살펴보면, 플러렌의 크기는 앞에서 실험한 전자에 비해 매우 크다. 원자핵과 전자의 크기 비가 100,000 : 1이고 탄소 원자들이 60개가 모여 입체적인 구 형태를 만든 풀러렌(C60)은 수소 원자보다 5만배는 더 크다.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의 경계쯤 되는 풀러렌 분자로 이중 슬릿 실험을 할 경우 간섭 무늬가 아닌 단지 2개의 띠를 만든다. 하지만 실험 환경을 진공에 가깝게 조성할수록 간섭무늬가 생긴다. 공기는 기체이기에 분자 자체가 많지도 않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자의 크기가 분자의 크기에 비해 너무 작기 때문에 전자를 이용한 이중 슬릿 실험에서는 진공이 아니더라도 간섭 무늬를 만든다. 이번엔 풀러렌이 아닌 전자 실험으로 다시 넘어가 이번에는 A슬릿과 B슬릿에 관측 장비를 달아서 전자가 어떤 슬릿을 통과하는지 확인해보도록 하면, 해당 실험에서는 전자는 A슬릿과 B슬릿 중 하나만 통과하며 간섭 무늬가 아닌 이중 띠를 만든다. 공기 중에서의 풀러렌 실험과 관측 장비를 단 전자 실험의 공통점은, 공기 중에서의 풀러렌 실험에서는 공기와 풀러렌이 서로 상호작용을 했고 관측 장비를 단 전자 실험에서는 관측 장비의 광자와 전자가 서로 상호작용을 했다는 것이다. 즉 풀러렌 분자와 전자와 같은 입자들은 다른 입자들과 상호작용을 하기 전까지는 여러 개의 중첩된 상태를 가지고 있다가, 다른 입자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순간 결어긋남 상태가 되어 더 이상 간섭을 일으킬 수 없으며, 파동성을 잃는 것(파동함수의 붕괴)과 같은 결과에 이른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위의 풀러렌의 처지와 똑같다. 상자 안의 물체들이 각각 닫힌 계라면 외부 계는 그들의 상태를 관측할 수 없고 그들은 파동성을 잃지 않고 동시에 여러 상태를 갖게 될 것이다. 상자 안은 진공도 아니며 적외선과 같은 광자를 방출하고 있을 것이다. 즉, 이중 슬릿 실험에서의 전자와 진공에서의 풀러렌과는 다르게 상자 안의 고양이, 청산가리가 든 병, 가이거 계수기는 서로 의미있는 상호작용을 하는데다가 상자 안과 밖을 상자 자체가 연결해주기에 상자 자체부터가 완전한 고립계가 아니다. 다시 말해, 상자 밖과 안은 언제나 의미있는 상호작용을 하며 이는 언제나 상자 안이 관측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상자 속의 고양이는 상자를 열든 열지 않든 죽거나 살아있는 둘 중 하나의 분명한 상태를 가진다. 그러므로 현대에서 다루는 슈뢰딩거 사고실험의 해석의의는 어디까지나 양자역학의 근본적인 개념을 다루기 위한 사고실험이다. 실험의 해석 코펜하겐 해석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설명이다.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었으나 관측하는 순간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라는 해석이다. 이것을 간단히 "파동함수가 붕괴된다"고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이 실험에서는 관측자가 상자를 여는 동시에 상태가 고정된다. 즉 대상에 대한 관측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단, 코펜하겐 학파라고 해서 "파동함수가 붕괴하는 것"을 납득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중력에 의해 땅으로 떨어지는 사과가 지면에 도달하는 즉시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멈추는 것은 중력의 인력보다 훨씬 더 큰 전자기력의 척력에 막혔기 때문이지, 사과가 지면에 도달하는 즉시 중력이 붕괴했기 때문이 아니다. 관측이 되면 그 즉시 파동함수가 붕괴한다는 것도 납득될 수 없는 문제다. 현재로는 도저히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으니 일단 그런 것으로 해두자는 게 코펜하겐 해석의 입장으로, 사실 코펜하겐 해석은 어떤 해석을 내놓는 것이라기 보단 해석을 유보하는 것으로 보는게 더 적절하다.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발언에 대한 보어의 "신에게 참견하지 말라"는 답변이 코펜하겐 해석의 입장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다중세계 해석 휴 에버렛 3세가 만든 해석으로,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살아있는 세계와 죽어있는 세계가 모두 존재하며 관측하는 순간 어떤 한 쪽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라는 해석. 핵이 붕괴하는 순간이 분기점이 되어 고양이가 살아 있는 세계와 고양이가 죽은 세계가 분리되어 평행 우주가 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이 이론에서 파동함수는 각각의 세계로 진입할 확률을 뜻하게 된다. 이 해석이 물리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는 파동함수의 붕괴라는 납득하기 힘든 답을 피할 수 있음과(이 관점에 따르면 파동함수는 관측 전이든 관측 후든 잘 작동한다. 다만, 파동이 붕괴하는 대신 결어긋남 상태에 놓이게 된다.) 동시에 외관상 파동함수가 붕괴되어 보이는 이유를 매끄럽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코펜하겐 해석과 함께 파동함수의 붕괴를 설명하기 위해 경쟁하는 가장 중요한 이론으로, 전통적인 코펜하겐 해석 쪽이 정설이지만 다중세계 해석쪽도 지지하는 과학자도 있다. 앙상블 해석 앙상블 해석에서는 양자 물리학의 확률의 문제를 통계적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상자 속의 고양이가 살아있을 확률이 50%이고 죽어 있을 확률이 50%라는 것은, 한 마리의 고양이가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가 중첩된 상태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고양이가 같은 상태에 있을 때 그 중의 반은 죽어 있고 반은 살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사성 원소와 고양이가 든 상자가 1억 개 있을 때, 한 시간 후에 그 중의 5,000만 상자의 고양이는 살아 있고 나머지 5,000만 상자 속의 고양이는 죽어 있다고 통계적으로 해석한다. 앙상블 해석을 전자와 같은 작은 입자들에도 적용하면 이해하기 어려웠던 많은 문제가 쉽게 이해되는 듯 보인다. 앙상블 해석을 적용하면 확률함수는 전자가 다른 에너지를 가지는 여러 가지 상태로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전자가 여러 가지 다른 상태에 있을 확률을 나타낸다고 설명할 수 있다. 비슷한 예로, 광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광자 중의 절반이 한 슬릿을 통과하고 다른 반이 또 다른 슬릿을 통과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앙상블 이론을 발전시켜 숨은 변수이론을 제안했다. 양자 물리학에서 입자 하나하나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은 입자의 상태를 결정하는 변수를 우리가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이 확률을 포함하게 된 것은 입자 하나하나의 상태를 결정하는 숨은 변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숨은 변수를 알게 된다면 양자물리학도 확률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정론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앙상블 해석을 받아들이면 양자물리학이 입자 하나의 물리적 상태를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인 과학자들은 양자물리학에는 파동함수 이외에 다른 변수가 존재하지 않으며, 물리적 실재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같이 보기 양자역학 결정론 참고 문헌 외부 링크 양자역학 역설 사고 실험 가공의 고양이 물리학 개념 에르빈 슈뢰딩거 양자역학에 관한 사고 실험 양자 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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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A5%B4%ED%8E%98%EC%98%A4%EC%99%80%20%EC%97%90%EC%9A%B0%EB%A6%AC%EB%94%94%EC%B2%B4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는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가 작곡한 3막의 오페라이다. 대본은 라니에리 데 칼자비지가 작성하였다. 이 작품은 오페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초연은 1762년 10월 5일, 프란시스 1세의 탄생 축연일에, 오스트리아 빈의 브르크 극장에서 막이 올려졌다. 이 작품은 빈 판본과 파리 판본, 베를리오즈 판본 등 3개의 판본이 있다. 본 문서의 제목은 이탈리아의 오페라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발음에 따라 에우리디케가 아닌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라고 표기하나, 등장인물들의 원래 이름인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로 불리기도 한다. 역사 등장인물 주요 인물 오르페오(오르페우스) - (카스트라토) 에우리디케 - (소프라노) 아모레(큐피드), 사랑의 신 - (소프라노) 행복한 그림자 - (소프라노) 양치기들, 복수의 세 여인, 악령들, 망령들 줄거리 아내를 막 잃은 오르페오가 비탄에 빠져 노래하자, 이를 본 사랑의 신 아모르(에로스)는 노래의 마력으로 지하세계의 지배자(플루토)를 감동시켜 에우리디체를 다시 살려 데려올 수 있다고 일러준다. 단,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상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면 안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에 오르페오는 하계로 내려가기 위하여 지옥의 문을 지키는 복수의 여신 퓨리스(세자매)를 만난다. 그러나 이들은 오르페오가 부르는 감미로운 노래에 깊은 잠이 들고, 지옥의 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지하세계의 왕 플루토에게 아내를 데리고 나가는 허락을 받고 에우리디케를 인도하여 지상으로 나아가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에우리디케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오르페오의 변심을 의심하여 계속 여러 가지 질문을 하자, 오르페오는 이를 참지 못하고 뒤돌아 본다. 이에 에우리디체는 다시 죽게 된다. 이에 비통한 오르페오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를 가엾게 여기는 사랑의 신이 그를 위로하며, 에우리디체를 다시 살린다. 이에 부부가 환희에 넘쳐, 사랑의 신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며 마친다. 외부 링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줄거리 네이버 음악사전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줄거리 (영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줄거리 (영문)Opera~Opera, Alison Jones 작성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대본과 줄거리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독어), OPERA-GUIDE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오페라 이탈리아어 오페라 프랑스어 오페라 오페라 세리아 1762년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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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B2%84%ED%8A%B8%20%ED%8C%B0%EC%BB%A8%20%EC%8A%A4%EC%BD%A7
로버트 팰컨 스콧
로버트 팰컨 스콧(, 1868년 6월 6일~1912년 3월 29일)은 영국의 군인, 탐험가이다. 잉글랜드의 플리머스에서 태어나 1882년 해군에 입대하였으며, 1901년부터 1904년까지 디스커버리 호를 타고 남극 탐험을 지휘하였다. 이때 '킹 에드워드 7세 랜드'를 발견하여 남위 82도 17분까지 도달, 당시 가장 남쪽에 당도한 기록을 세웠다. 1910년 테라노바 호를 이끌고 제2차 남극 탐험에 나서서 1912년 1월 18일 남극점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남극점은 1911년 12월 14일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 먼저 도달하였기 때문에 첫 정복의 목표는 깨어졌다. 그와 4명의 동행자는 귀로에 악전후로 조난, 식량부족과 동상으로 전원 비명 횡사하였다. 1912년 11월 12일 탐색팀의 에드워드 앳킨슨()에 의해 유해와 일기(마지막 일자는 3월 29일)가 최후를 맞았던 텐트에서 발견되었는데, 불과 11 miles (18 km)에 스콧의 메인 베이스 캠프 ('One Ton Depot')가 위치해 있었고, 24 miles (38 km)에 예정지였던 베이스 캠프가 있었다. 마지막까지 용기를 잃지 않고 영국 신사다운 최후를 마친 것이 알려져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저서로는 《탐험항해기》(2권, 1905년), 《스콧 C.M.Scott 최후의 원정》(1913년)이 있다. 다만 스콧이 로알 아문센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문센이 탐험에 성공한 것에 비해 스콧이 탐험에 실패한 탓으로 스콧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귀환 실패의 원인 연료의 부족 남극의 혹한의 날씨로 인해 납 리벳으로 제작한 연료 저장고에서 연료가 서서히 새는 현상이 있었고 이는 이전의 탐험대에서 보고된 바 있었다. 그러나 스콧은 이를 간과하였다. 그의 일기 곳곳에는 저장소마다 연료 저장고의 연료의 양이 줄어들어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굶주림 스콧 탐험대는 하루 평균 섭취 칼로리를 약 4,000칼로리로 잡고 식량을 분배했으나 남극에서의 강행군은 그 이상의 체력과 열량을 필요로 하였다. 결국 그들은 마지막 3월의 귀환길에서 체력이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문센의 경우도 식량이 부족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문센은 자기 대원 중에 포경선 사수를 고용하여 바다표범이 보이는 대로 사냥해서 식량을 보충했지만 스콧은 탐험기간 내내 단 한 번도 사냥을 시도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하 대원 중 한 사람인 로런스 오츠가 스콧에게 조랑말이 죽으면 바로 고기를 뜯어서 그걸 먹어가면서 버티자고 했으나 스콧은 동물애호가 기질을 보여 그런 오츠의 조언을 묵살하고 조랑말이 죽으면 그 자리에 그냥 방치했다. 보조 동물 선택의 실패 로알 아문센은 작은 크기에 비해서 추위에 강한 개를 택한 반면에 스콧은 큰 크기에 비해서 추위에 약한 말을 선택했다. 결국 말은 남극 수준의 추위에 약할 뿐 아니라 크기도 커서 크레바스에 개가 빠지면 손으로 개를 들어서 건지면 되지만 말이 빠지면 그냥 포기해야 했다. 더군다나 말은 개에 비해 식량 소모도 엄청났기 때문에 스콧은 말이 먹이인 건초를 따로 구비해서 탐험을 해야 했다. 결국 스콧이 선택한 말은 아사하거나 동사하거나 크레바스에 빠져 죽었고 이로 인하여 스콧의 썰매는 탐험 중반을 넘기면서 사람이 직접 끌어야 했기 때문에 체력 소모가 시종일관 개가 썰매를 끌고 탐험한 아문센의 탐험대에 비해 심했다. 복장 불량 아문센의 경우는 이미 이누이트들과 조우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옷, 즉 순록 가죽으로 만든 옷을 그대로 착용하여 그 옷을 입고 탐험을 했다. 그래서 추위를 완벽하게 견뎌냈다. 하지만 스콧은 겉치례에만 몰두한 나머지 이누이트들의 저질스러운 옷은 입을 수 없다며 영국에서 직조한 모직 옷을 입고 탐험을 했다. 그런데 모직 옷은 젖으면 오히려 벌거벗은 것보다도 체감 온도가 떨어지는 데다가 자체 방한 능력도 순록 가죽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게다가 아문센의 가죽 옷은 앞이 트여있는 데다가 끈으로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었지만 스콧의 모직 옷은 푸대자루처럼 입어야했던 데다가 추위에 약해서 낮은 온도에서는 부서지는 성질을 지는 금속인 주석을 단추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찬 바람을 막기 어려웠다. 이미 탐험에 실패한 다른 사람의 경험 무시 / 이미 실패한 방법을 다시 동원한 점. 스콧이 남극을 텀험하기 이전에 이미 어니스트 섀클턴이 조랑말과 설상차를 이용하여 남극탐험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런데 그 전례에 대해 스콧은 섀클턴이 왜 실패했는지 분석하지 않은 채 섀클턴과 동일한 방법으로 다시 남극을 탐험했다. 스콧은 다른 사람이 실패했다는 것을 입증한 방법을 다시 들고 나왔다는 점은 분명히 탐험에 실패할만 했다. 대원 선발의 문제 스콧 탐험대이나 아문센 탐험대나 둘 다 팀원 중에 해군장교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스콧과 아문센의 팀원들은 전혀 다른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문센의 탐험대원들은 해군장교 이외에 포경선 사수, 세계 스키 선수권 대회 우승자, 세계 개썰매 선수권 대회 우승자 등 한랭지역 전문가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에 스콧의 탐험대원들은 스콧 자신이 해군 장교인 것 이외에 지질학자, 기후학자, 자연생태학자, 설상차 정비공 등이었다. 거기에 악재까지 겹쳐 같이 동반했던 지질학자 겸 기후학자 에드가 에번스는 탐험을 할 때 이미 뇌진탕으로 정신장애를 얻은 상태였는데 이로 인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대며 스콧 탐험대의 진로를 계속 방해했고 결국 스콧의 탐험대원 중 가장 먼저 사망했다. 대원의 조언 묵살 아문센은 올라프 바야란드가 스키를 더 빨리 달리게 한다면서 개조하겠다고 하자 이를 수락해서 80kg에 달했던 스키의 무게를 22kg까지 줄이고도 성능의 변화가 전혀 없도록 개조했다. 이 스키 중량을 줄인 개조로 인하여 아문센의 탐험대는 체력소모가 덜했고 결국 남극탐험 성공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스콧은 로런스 오츠라는 매우 유능한 장교가 있었음에도 그런 오츠의 조언을 모두 묵살했고 결국 탐험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 대원이 전원 사망했다. 목표의식 아문센은 오직 남극 탐험 하나에만 몰두한 반면에 스콧은 남극 탐험과 남극의 토양 생태계 조사에 심지어는 황제펭귄의 생태에 대해 조사하는 일까지 병행했다. 즉, 스콧은 너무 많은 일을 무리하게 많이 벌인 것이다. 실제로 스콧이 사망할 당시에 갖고 있던 물건들 중에서는 남극에서 채취한 각종 광물들도 있었는데 무게가 무려 16kg에 달했을 정도였다. 자존심 스콧은 아문센이 남극점에 먼저 도달하고 나서 남극점을 비롯한 여러 곳에 스콧을 위해 남기고 간 식량과 의복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스콧은 경쟁자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살았다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 나머지 아문센이 남기고 간 중요한 물자들을 일절 손대지 않았다. 이정표 미설치 아문센은 각종 물자를 저장하는 보관창고와 자신들이 여행한 길에 깃발을 높게 세워서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스콧은 이런 조치 없이 그저 과거에 섀클턴이 지나갔던 길을 따라가기만 했다. 이것이 스콧이 탐험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는데 그 증거로 스콧은 탐험을 마치고, 메인 베이스 캠프에서 불과 11 miles (18 km) 밖에 안 남겨둔 지점에서 사망했다는 점이다. 과학적 기여 스콧은 야심에 찬 과학 탐사를 기획하였는데, 당시까지 최대 규모인 극지 과학 탐사 팀으로 생물학자 2명, 지질학자 3명, 기상학자 1명 등 12명의 과학자들이 참여하였다. 팀은 각기 다른 2,109 종류의 동물들 (이 가운데 401개가 새로운 종), 바위 샘플들, 펭귄 알들, 식물 화석들을 채집하였다. 가장 중요한 발견은 인도, 아프리카, 뉴질랜드, 호주에서 자라는 고사리 유사 종의 식물 화석(fossilised fern-like plant)으로서, 2억 5천만년 전의 기후가 충분히 온난했음을 추정하게 한다. 스콧 팀에 의해 수집된 다른 증거들과 함께 인도, 아프리카, 뉴질랜드, 호주, 남극 대륙(앤탁틱 혹은 앤타르틱)들이 모두 초대륙()의 일부였다는 힌트를 준다. 과학자들은 이 대륙을 곤드와나랜드()라고 명칭한다. 서훈 1901년 로열 빅토리아 훈장 4등급(Member of the Fourth Class, 현행 LVO) 1904년 로열 빅토리아 훈장 3등급(CVO) 참고 문헌 각주 참고 자료 1868년 출생 1912년 사망 자연재해로 죽은 사람 저체온증으로 죽은 사람 굶어 죽은 사람 영국의 탐험가 남극 탐험가 영국 해군 군인 데번주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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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드
머드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머드()는 '진흙'을 일컫는 말이다. MUD는 컴퓨터 게임의 장르 중 하나이다. 《머드》()는 2012년 영화이다. 머드 더 스튜던트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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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C%8B%9C%EB%AF%B8%EC%A6%88%20%EA%B0%80%EA%B0%80%EB%AF%B8
요시미즈 가가미
요시미즈 카가미(, 1977년 ~ )는 일본 사이타마현 삿테시 출신으로 가스카베 교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성 만화 작가 및 일러스트레이터, 원화가이다. ‘’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콤프틱》, 《월간 콤프 에이스》에서 《러키☆스타》, 《콤프 H's》에서 《미야카와 가의 공복》을 연재 중. 주요 작품 원화 《웃지 않는 에리카》 (펭귄 웍스, 명의) 《케이크X3 ~모에 이치에~》 (frau) 만화 《나와 우리들의 여름》 (콤프틱) 같은 이름의 게임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현재 단행본화되지 않았음. 《러키☆스타》(콤프틱, 월간 콤프 에이스(카도카와 쇼텐) 등) 《아키라의 야망》(월간 콤프 에이스) 《미야카와 가의 공복》 (콤프 H's) 그 외 《REVENGE!!~산 · 벨 넷 학원기담~》( · 저, 소설 삽화, 명의) 콤프쨩 (월간 콤프틱의 마스코트 캐릭터) 《Canvas2 ~무지개색 스케치~》 (제6화, 제15화 아이캐치 작화) TV애니메이션 《러키☆스타》 구성 협력, 24화 '미정'(최종회)의 각본 그 외 콘프틱 지상 칼럼 〈VoiceStation〉에서 4컷 만화 《아즈망가 대왕》의 팬임을 밝힌 바 있다. 2007년 11월 4일에 아오야마학원 대학 학원제인 아오야마제에서 만화 연구회 주최에 의한 첫 토크 쇼를 가졌다. 제자 MIKOTO 《러키☆스타》 단행본의 권말에 채색 어시스턴트로 기명되었다. 그 자신도 스승과 같이 《콤프틱》과 《월간 콤프 에이스》에 4컷 만화 《스텝 UP!()》을 병행 게재하고 있다. 같이 보기 러키☆스타 콤프틱 콤프 에이스 카도카와 쇼텐 외부 링크 요시미즈 카가미의 무명시절 코믹 마켓 출전 관련 이야기와 그 시절 작품의 일러스트가 있다. 각주 1977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만화가 일본의 삽화가 사이타마현 출신 러키☆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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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게이라
스타게이라 (그리스어; Στάγειρα, 영어 Stagera)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 현재의 중앙마케도니아주 할키디키반도(할키디키현) 동쪽 해안 근처에 위치해 있으며,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가 태어난 곳이다. 시는 오늘 날 올림피아다 타운 근교에 있는 스타게이라 마을에서 북북동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스타게이라는 기원전 655년 안드로스에 온 이오니아 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곳을 점령했다. 이후 이곳은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에 가맹했지만, 아테네의 데마고기 클레온이 기원전 422년에 이곳을 포위를 한 결과로 기원전 424년 동맹을 탈퇴했다. 그러나 클레온은 형편없는 전략가로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의 희곡 《기사들》에서 풍자할 정도로 그의 포위는 비효율적이었다. 클레온은 그 해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타게이라는 스파르타 편을 들어 아테네에 적대를 하게 된다. 기원전 348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이곳을 정복하고 도시를 초토화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아들 알렉산더를 훈육시켜 준 답례로, 필리포스는 이후 이 도시를 재건하고, 노예로 전락한 옛 주민들을 해방시켜 다시 거주하게 해주었다. 이 시기 송수로와 2개의 데메테르 신전 등 많은 새로운 구조물들이 들어섰다. 각주 고대 그리스의 도시 안드로스인의 식민지 기원전 6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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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A%B1%B4%EA%B3%A0%EB%93%B1%ED%95%99%EA%B5%90%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대건고등학교 (동음이의)
대건고등학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대건고등학교는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달서구에 있는 고등학교이다. 논산대건고등학교는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고등학교이다. 인천대건고등학교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연수구에 있는 고등학교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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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84%EC%9A%94
필요
필요(必要, )는 영미법에서 형사적 혹은 민사적 손해배상 책임을 면하게 해주는 항변의 하나이다. 필요 항변은 의도적인 불법행위를 상대로 할 수 있으며 필요가 성립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강풍으로 인해 스카이다이버가 김성식 씨의 논밭으로 착륙한 경우. 소방관이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무단으로 집으로 침입한 경우. 주요판례 Vincent v. Lake Erie Transportation Co. Surocco v. Geary Wegner v. Milwaukee Mutual Ins. Co. 같이 보기 긴급피난 참고 문헌 이상윤, 『영미법 - 개정판』, 박영사, 2000. (). Black's Law Dictionary, 1486 (8th ed. 2004). 영미법 법률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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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9D%B4%EC%98%A4%EB%8B%88%ED%81%B4
바이오니클
바이오니클(BIONICLE)는 레고 그룹에서 만든 장난감 시리즈이다. 바이오니클은 생물학(biology) + 연대기(chronicle)의 합성어이다실제로 "생체공학"(bionics) 파생되었다. 역사 2001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며, 처음엔 전 시리즈인 슬라이져와 로보라이더와 매우 유사하였으나 지금은 이들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원래 레고사에서는 슬라이져와 로보라이더를 연속으로 출시하였으나 큰 수익을 얻지 못했다. 그 이후로 방대하고 체계적인 스토리가 갖춰진 바이오니클을 출시하였고, 바이오니클은 큰 수익을 얻었다. 2010년에 바이오니클 스타즈를 마지막으로 끝마쳤다가 2015년에 리부트되어 출시했으나 1년만에 다시 중단했다. 스토리 2001 - 토아의 도래(Coming of the Toa) 아쿠아 마그나에 자리잡은 마타 누이 섬에는 마토란이라는 종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섬에 정착하고 1년 후부터 마쿠타라 불리는 악의 존재에 의해 끊임없이 시달려 왔다. 마쿠타는 크라타라 불리는 애벌래를 이용해 섬에 서식하는 라히들을 오염시켜 본인의 통제 하에 둔 것이다. 마토란들은 1천년간 이 라히들과 전쟁을 치뤄야 했다. 그리고 마토란들이 정착하고 1000년 만에 토아라 불리는 영웅들이 마침네 마타 누이 섬에 도착한다. 그들은 각자 위대한 카노히 가면들토과 마코키 스톤 조각들을 모아 마쿠타의 본거지인 망가이아에 집입하는데 성공한다. 그들은 마나스와 쉐도우 토아를 물리친 다음 마쿠타를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킨다. 2002 - 보록 군단(The Bohrok Swarms) 마쿠타는 마타 누이 섬 지하에 잠들어 있던 보록 군단을 깨운다. 그들의 목표는 마타 누이 섬의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들은 마타 누이 전 지역을 휩쓸고 다니며 마을과 건축물들을 파괴했다. 마침네 토아들은 각각 6 종류의 크라나들을 모아 보록 여왕 바라그의 둥지에 침투한다. 토아 마타들은 여섯 원소의 힘을 합성해 바라그를 프로토더미스에 봉인한다. 그들이 승리한 직후, 토아들은 에너자이지드 프로토더미스에 빠져 변이를 일으키게 되고 결과적으로 더 강한 능력과 힘을 가진 토아 누바로 변하게 된다. 2003 - 보록-칼의 공습/빛의 가면(The Bohrok-Kal Strike / Mask of Light) 봉인된 바라그는 텔레파시로 여섯 엘리트 보록인 보록-칼을 깨운다. 그들의 목표는 봉인된 바라그를 깨우는 것. 그들은 토아 누바들의 힘의 원천인 누바 심볼을 훔쳐 그 여섯 힘을 합성해 바라그를 깨우려 한다. 그러나 투라가 바카마에게서 시간의 가면을 받은 타후 누바에 의해 에너지가 과부하돼서 계획이 무산되고 만다. 한편 마토란인 잘라와 타쿠아는 타 코로 마을에 숨겨진 빛의 가면 아보키를 발견한다. 투라가들은 빛의 가면의 주인은 일곱번째 토아이며, 누군가가 그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결국 잘라와 타쿠아는 일곱번째 토아를 찾으러 떠나고 그림자의 힘에 기반한 마쿠타는 위협을 느껴 락시들을 보내기에 이른다. 우여곡절 끝나 타쿠아가 일곱번째 토아가 될 운명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타쿠아는 빛의 가면을 쓰고 빛의 토아 타카누바로 거듭난다. 일곱명의 토아들은 키니 누이에서 힘을 합쳐 락시들을 쓰러뜨리고, 타카누바는 마쿠타의 본거지에 처들어가 마침네 그를 쓰러뜨린다. 타카누바와 토아들은 마쿠타가 지키고 있던 비밀의 문을 열어보았고, 그 너머에는 광대한 지하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지하에는 거대한 돔이 있었고, 위에 뚫린 구명으로 햇빛이 들어와 낮처럼 밝았으며 은빛 바다로 둘러쌓인 도시 섬이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2004 - 메트루 누이의 전설(Legends of Metru Nui) 마타 누이 섬의 장로들이었던 투라가는 이 지하세계의 비밀을 밝힌다. 마토란들은 원래 이 지하세계의 주민들이었으며, 돔 한 가운데 있는 섬은 메트루 누이였다. 2004년 스토리는 투라가 바카마가 1천여년 전 메트루 누이에 살던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1천년 전, 메트루 누이는 토아 망가이라는 팀에게 보호받고 있었다. 그러나 니디키나 투옛과 같은 토아 망가이의 멤버들은 팀을 배신했고, 오로지 토아 리칸만이 메트루 누이를 수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마토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모부작이라 불리는 살아있는 식물이 섬 곳곳에 피해를 입혔다. 이에 토아 리칸은 새로운 토아가 될 여섯 마토란들을 선택해 "토아 스톤"을 나누어준다. 그는 가장 마지막으로 마토란이었던 바카마에게 토아 스톤을 건내주었고, 이를 끝으로 마쿠타에게 고용된 어둠의 사냥꾼들에게 잡혀간다. 이 때 리칸을 잡아간 어둠의 사냥꾼은 오래전 리칸을 배신한 니디키. 여섯 마토란들은 위대한 사원에 모여 토아 스톤으로 토아 수바를 작동시켰고, 토아 수바는 여섯 마토란들을 토아로 변이시켰다. 토아가 된 직후, 바카마는 환영을 본다. 환영을 통해 바카마는 도시를 위협하는 모부작을 물리치기 위해선 여섯개의 위대한 카노카 디스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로운 여섯 "토아 메트루"들은 도시 곧곧에 숨겨진 원반들을 찾아내 모부작을 쓰러뜨린다. 그리고 콜로세움으로 가 도시의 통치자인 투라가 두마에게 본인들을 새로운 수호자로 임명해 달라고 주장하지만, 투라가 두마는 오히려 누주, 오네와, 웨누아 세 토아를 잡아 수감하고, 나머지 바카마, 노카마, 마타우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도망 중, 바카마는 여섯개의 위대한 원반들을 주조해 시간의 가면을 만들고, 누주를 비롯한 수감된 토아들은 감옥에서 어둠의 사냥꾼들에게 잡혀간 리칸을 만난다. 바카마를 비롯한 세 토아들은 감옥에 침투해 리칸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만 리칸은 이미 토아로서의 힘을 잃고 투라가가 되어버린 후였다. 리칸은 본인의 힘을 여섯 마토란들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을 토아로 만든 것이었다. 그곳에서 마토란 스피어라는 은색 구체에 같힌 채 투라가 두마가 수감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토아들은 사실 마쿠타가 투라가 두마의 가면을 쓰고 두마 행세를 하며 도시를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마쿠타는 마토란들을 이와 같은 마토란 스피어에 가둬버렸다. 마토란 스피어 안에서 기억을 모두 잃은 마토란들에게 새로운 지도자로 군림하는 것이 마쿠타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토아 메트루는 일부 몇몇 마토란들이 갖힌 스피어들만 우선 수송선에 싣고 메트루 누이를 탈출하려 한다. 이 때 바카마는 다시 한 번 환영은 본다. 환영 속에서 메트루 누이의 돔, 즉 위대한 장벽 너머의 빛을 따라가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토아 메트루는 바키 수송선을 타고 메르루 누이 돔에 있는 빛이 새어나오는 구멍을 향해 나아간다. 마쿠타는 본인이 고용한 어둠의 사냥꾼 니디키와 크레카를 흡수해 몸을 강화한다. 그들을 막고 바카마가 만든 시간의 가면을 빼앗기 위해 따라온다. 토아들은 각자의 능력을 사용했고, 바카마는시간의 가면을 사용해 마쿠타의 공격을 막으려 하지만 그 강력한 힘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결국 바카마는 마쿠타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나 투라가 리칸이 마쿠타와 바카마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대신 희생해 죽고 만다. 리칸은 죽기 직전 유품으로 자신의 가면을 남긴다. 바카마는 카노카 디스크를 날려 시간의 가면을 은빛 바다에 빠뜨린 후, 다른 토아들과 여섯 원소를 합성해 마쿠타를 프로토더미스에 가두고 위대한 장벽 너머에서 마타 누이 섬을 발견한다. 2005 - 보이지 않는 함정(Web of Shadows) 배경세계: 메트루 누이 제품: 토아 호디카, 비소락, 라하가, 시도락, 루다카, 키통구, 토아 하가(이루이니, 노릭) 토아 메트루들은 여섯 마토란만 마타누이섬에 두고온 후 다른마토란들을 구출하기 위해 다시 메트루누이로 돌아간다. 그런데 메트루누이는 비소락이라는 거미라히들에게 점령당했다. 그들의 왕 시도락과 루다카는 토아메트루에게 호디카베놈으로 토아메트루들을 토아호디카로 바꾸어버리고 높은곳에서 떨어트려죽게하려고했지만 라하가라는 자들이 토아호디카를 구출해내었다. 바카마는 마타우와의 말다툼으로 인해팀원들을 버리고 루다카의 말에 넘어가버려 악한편이되어 라하가 노릭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라하가를 전부 납치하였다. 한편 노릭은 호디카베놈을 없엘수있는 유일한 희망인 키통구를 찾으러 토아호디카와 함께 키통구를 찾는데 성공하고 같이 바카마를 구하러간다. 호디카들은 서로 협동을 해서 바카마를 돌려놓고 키통구는 시도락을 쓰러트린다. 그리고 바카마는 비소락들을 자유롭게해준뒤 루다카를 기절시키지만 그녀는 테리닥스가 봉인당한 프로미더스조각을 가지고 있었다. 바카마는 루다카를 쓰러트리고 테리닥스의 봉인을 풀어버린것이였다. 그리고 키통구는 토아호디카를 다시 돌려놓고 토아 메트루는 마타누이로 가서 마토란들을깨우고 투라가로 변한다. 2006 - 파멸의 섬(Island of Doom) 배경세계: 보야 누이 제품: 보야 누이 마토란, 토아 이니카, 피라카, 액손, 브루타카, 베존과 펜락, 움브라(국내 미발매) 2007 - 암흑의 바다(Sea of Darkness) 배경세계: 마리 누이 제품: 마리 누이 마토란, 토아 마리, 바라키, 녹턴, 가둔카, 하이드락손, 막실로스와 스피낙스, 레소빅 2008 - 최후의 전투(The Final Battle) 배경세계: 카르다 누이, 비밀의 늪 제품: 카르다 누이 마토란, 토아 누바, 토아 이그니카, 타카누바, 마쿠타 협회, 뮤트란과 비칸, 마쿠타 이카락스, 마제카 2009~2010 - 전설의 부활(The Legend Reborn),여정의 끝(Journey's End) 배경세계: 바라마그나 제품: 아고리, 글라토리안, 스타즈 2015~바이오니클2016~하나가되기위한여정 리부트 (Reboot) 배경세계: 오코토 섬 제품: 타후, 코파카, 갈리, 포하투, 오누아, 레와, 불의 수호자, 얼음의 수호자, 물의 수호자, 돌의 수호자, 흙의 수호자, 정글의 수호자, 에키무, 스컬 워리어, 스컬 슬라이서, 스컬 배셔, 스컬 스콜피온, 스컬 그라인더(컬타) 제품없음 :마쿠타 통제의 가면,궁극의힘의 마쿠타 특징 바이오니클은 2001년 첫 출시에는 레고 테크닉의 한 종류였으나, 인기를 많이 끌게 되면서 레고 테크닉에서 분리되었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바이오니클의 부재로 인해 새로운 스토리를 지닌 히어로 팩토리를 출시하였다. 같이 보기 바이오니클 제품 목록 바이오니클 히어로즈 레고 장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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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후소 트럭・버스
미쓰비시 후소 트럭・버스 주식회사(, , )는 일본의 자동차 제조 기업의 하나다. 약칭으로 미쓰비시 후소(三菱ふそう)라 불린다. 본사는 일본 가와사키시에 있다. 일본 최초로 대형 자동차(트럭과 버스), 산업용・디젤 엔진을 생산하여 전 세계에 생산망과 판매망을 갖추고 있다. 2003년에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의 대형 상용차 부문이 분사해 설립했다. 현대자동차가 출시한 구형 5t트럭(1990~1997), 현대 마이티, 현대 91A트럭, 현대 에어로버스, 현대 에어로시티, 현대 에어로타운 버스 등 다수의 현대자동차 제품은 미쓰비시 후소의 제품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다임러 AG와의 자본제휴를 맺은 후 결별한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과 달리 미쓰비시 후소는 다임러 AG가 대주주다. 그러나 미쓰비시 그룹 각사와 자본 관계를 포함한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쓰비시 그룹 광보위원회(三菱広報委員会)・미쓰비시 금요회(三菱金曜会) 소속 기업. 2011년 기준 일본 국내 상용차 판매율 3위이다. 회사 명칭의 유래 사명인 후소(ふそう, 扶桑)는 「일본」을 뜻하는 고대 일본어. 1932년 미쓰비시조선(三菱造船, 지금의 미쓰비시 중공업)이 대형차 사업을 개시했을 때 사내 공모에 의해 결정됐다. 연혁 미쓰비시 조선(三菱造船) 시기 1917년 - 미쓰비시 조선(三菱造船) 설립. 1918년 - 미쓰비시 조선. 미쓰비시 브랜드의 자동차 생산 시초인 「미쓰비시A형 승용차」 개발・완성. 1932년 - 미쓰비시 조선. 고베조선소에서 B46형 가솔린 버스 개발・완성. 후소(ふそう)로 명명. 미쓰비시 중공업(三菱重工業) 시기 1934년 - 미쓰비시 조선. 미쓰비시 중공업(三菱重工業)으로 회사명 변경. 1937년 - 생산 거점을 도쿄제작소(현재 미쓰비시 후소 가와사키제작소)로 이전. 1946년 - 태평양전쟁 패전 후 초대 후소버스B1형 대형 본넷트 버스 발매. 1950년 - B25형 대형 본네트 버스 발매. 1959년 - 일본 최초 국내양산 대형 캡오버 8t트럭 T380형 발매. 중형 트럭(3t) 쥬피터 발매. 1960년 - T330형 본네트형 8t차 발매. 1961년 - T385형 캡오버형 8t차 발매. 1962년 - AR820형 고속버스 발매. 1963년 - 미쓰비시 후소 소형 트럭의 기초를 세운 초대 캔터・T720형 발매. 1967년 - 대형 트럭 T950형 발매. 1970년 - 중형 트럭 T650형 발매. 미쓰비시 자동차공업(三菱自動車工業) 시기 1970년 6월 1일 - 미쓰비시 중공업의 자동차 부문이 분사되어 미쓰비시 자동차공업(三菱自動車工業) 설립. 미쓰비시 자동차 사내에서 대형차 부문의 약칭은 「후소」 혹은 「트・버」였다. 1973년 - 대형 트럭 F시리즈 발매 개시. 1976년 - 중형 트럭 FK시리즈 발매 개시. 1985년 - 미쓰비시 상사(三菱商事)와 공동 출자로 미국에 트럭 판매 회사 설립. 1993년 - 크라이슬러社와의 자본제휴 해제. 1999년 - 볼보社와 트럭・버스 사업에 관한 자본・업무 제휴 계약 체결. 2001년 - 트럭・버스 사업에 관한 전략적 제휴 파트너를 볼보社에서 다임러社로 변경. 미쓰비시 후소 트럭・버스(三菱ふそうトラック・バス) 시기 2003년 1월 6일 - 미쓰비시자동차공업으로부터 트럭・버스 등의 상용차 부문과 산업 엔진 부문이 분사되어 미쓰비시후소트럭・버스(三菱ふそうトラック・バス)주식회사 설립. 2004년 - 닛산자동차(日産自動車)에 소형차(캔터 로자)용 디젤 엔진의 OEM 공급을 개시. 2006년 - 캔터 에코 하이브리드 판매 개시. 상용차 메이커 최초로 하이브리드카 시장에 잠입. 2006년 4월 - (주)후소엔지니어링을 미쓰비시후소트럭・버스주식회사에 통합. 2007년 - 미쓰비시 후소 75주년. 2009년 2월 - 2008년 연간 세계판매대수가 19만 7천대를 돌파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 2009년 7월 - 러시아 시장 개척을 위해 러시아의 최대 상용차 제조회사 카마즈(KAMAZ)社와 트럭의 생산・판매 합병사업 설립 합의서에 조인. (주)후소테크니컬서비스를 미쓰비시후소트럭・버스주식회사에 통합. 2011년 - 메르세데스 벤츠 상용차부분 자회사 다임러AG로부터 300억엔 증자. 2012년 - 닛산자동차와 일본 국내시장용 소형 트럭의 상호 OEM 공급 기본 합의. 개발・생산 거점 가와사키 제작소・기술센터(가나가와현) - 소・중・대형 트럭 생산・개발. 기츠렌가와 연구소(토치기현) - 선행개발・차량 평가・테스트 코스. 나카츠시 공장(가나가와현) - 트랜스미션 개발. 아츠기 부품센터(가나가와현) - 부품 개발・공급. 미쓰비시후소버스제조주식회사(토미야마현) - 대형 버스 제조. 후소 테크니컬 서비스주식회사(가나가와현) - 미쓰비시후소 생산기술・라인 멘테넌스 관련 업무. 미쓰비시자동차・미쓰비시후소 사내의 인하우스 여행 대리업. 부동산 중개업. 후소텍 주식회사(가나가와현) - 트럭・버스 특장, 옵션, 시작(試作) 사업. 바브코 주식회사(가나가와현) - 미쓰비시후소 트럭 부품 공급. 미쓰비시후소트럭 유럽 - 포르투갈에 본사 설치. 유럽 시장용 소형 트럭(캔터)의 제조를 담당하는 유럽 시장 중핵 거점. 미쓰비시후소트럭 타이 - 타이 방콕에 본사 설치. 아시아 시장용 소형 트럭(캔터)의 제조를 담당하는 아시아 시장 중핵 거점. 슈트트가르트 오피스 - 다임러 슈트트가르트 본사내에 위치. 대형 트럭용 엔진 개발. 생산 차종 현재 생산차종 트럭 캔터 파이터 슈퍼 그레이트 74식 특대형 트럭 버스 버스에 대해서는 2012년까지 닛산 디젤 (현, UD트럭)에 OEM 공급했으며 양 회사에 동일 제품이 공급되는 통합 차종의 이행이 진행되었다. 에어로퀸 에어로에이스 로자 에어로 미디 에어로 스타 기타 차종 74식 특대형트럭 (일본 육상자위대 소속) 산업용 엔진 M 시리즈 (배기량 2.8~7.5L, 4・6기통) D3 시리즈 (배기량 3.6~5.9L, 4・6기통) D1 시리즈 (배기량 7.5L, 6기통) D2 시리즈 (배기량 11.9L, 6기통) DC 시리즈 (배기량 16L, 8기통) 과거 생산차종 트럭 T계 F계 FK계 더 그레이트 쥬피터 버스 고속버스, 전세버스 MAR820 B806/905/906/907 MS512/513 B800시리즈 MP107/117/118/517/518 에어로 버스 1세대 에어로퀸 1세대 에어로 버스 2세대 에어로퀸 2세대 2층 버스 에어로킹 에어로킹 하이웨이 라이너 9m급 대형버스 MM104/504/115/515/116/516 에어로 스타 1세대 에어로 스타 S 에어로 버스 MM 에어로 미디 MM 뉴 에어로 스타 MM 에어로 에이스 숏타입 MM 중형 버스 MR620 B6 MK103H MK115/116/515/516 에어로 미디 에어로 미디 MJ 에어로 미디 ME 에어로 미디 S 기타 차량 트럭 차체 크레인 차량 전용 차체(K시리즈) 같이 보기 미쓰비시 미쓰비시 자동차 공업 다임러 AG 미쓰비시후소 차종 미쓰비시후소 엔진 외부 링크 일본 미쓰비시후소 미국 미쓰비시후소 유럽 미쓰비시후소 호주 미쓰비시후소 뉴질랜드 미쓰비시후소 남아프리카 미쓰비시후소 모로코 미쓰비시후소 2003년 설립된 기업 일본의 자동차 제조 기업 일본의 엔진 제조업체 일본의 군수산업체 일본의 브랜드 가와사키시의 기업 일본의 버스 제조사 일본의 화물자동차 제조사 디젤 엔진 제조업체 메르세데스-벤츠 그룹 미쓰비시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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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위원회
하카위원회(客家委員會)는 중화민국 행정원에 속해 있는 위원회이다. 2001년 6월 14일에 정식 성립하였다. 점점 사라져 가는 하카(객가) 문화를 되찾고 객가의 전통 문화의 명맥을 계속 유지하여 중화민국이 다원 민족 문화를 존중하는 국가로 만드는 것에 관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하카위원회에는 주임위원 1명, 부주임위원 2명, 위원이 21~27명을 두고 소관 조직으로 기획소, 종합소, 문교소와 인사실, 회계실이 설치되어 있다. 주소 中華民國臺北市信義區松仁路3號(中油大樓)8樓 같이 보기 객가어 하카 텔레비전 외부 링크 중화민국 행정원 중화민국의 중앙정부 위원회 하카 신좡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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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협주곡 3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라단조 작품번호 30은 러시아의 작곡가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탐보프의 가족 별장인 이바노프카(Ivanovka)에서 1909년 9월 23일에 완성한 피아노 협주곡이다. 연주자에게 요구되는 기교와 음악성으로 유명하며,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함으로써 그 작품성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역사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작곡가로서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가로서의 재능을 보여주기 위해 이 곡을 작곡했다. 비슷한 시기의 작품으로는 피아노 소나타 1번과 교향시 《죽음의 섬》 등이 있다. 이 곡의 헌정 대상이었던 요제프 호프만은 “나를 위한 곡이 아니다”라며 이 곡의 연주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이후 호로비츠가 완벽하게 연주하였으며, 라흐마니노프는 그를 높게 인정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미국 여행을 위하여 작곡해서 3번의 작업이 완료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미국에 건너가게 되었다. 시간 제약 때문에 고국인 러시아에서는 연습할 기회가 거의 없었고 따라서 미국으로 건너가는 도중에 원양 정기선에서 그가 가지고 갔던 약음 키보드로 대신 연습하였다. 1909년 11월 28일, 미국 뉴욕에서 발터 담로쉬(Walter Damrosch)가 지휘하는 뉴욕 심포니 소사이어티와의 협연으로 처음 연주되었고, 몇 주 후에는 구스타프 말러에 의해 두 번째로 연주되었다. 악보는 1910년에 출판되었다. 영국에서는 1911년 10월 리버풀에서 사이먼 스필먼(Simon Speilman)의 지휘 아래에서 초연되었고 11월에는 영국에서 빌렘 멩겔베르크(Willem Mengelberg)에 의해서 연주되었다. 악기 구성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플루트 2개, 오보에 2개, 클라리넷 2개, 바순 2개, 호른 4개, 트럼펫 2개, 트럼본 3개, 튜바, 팀파니, 큰북, 작은북, 심벌즈와 피아노, 현악기가 사용된다. 악곡 구성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다음과 같은 세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알레그로 마 논 탄토 (Allegro ma non tanto) 라단조 인테르메조(간주곡): 아다지오 (Intermezzo: Adagio) 올림바단조 → 내림라장조 피날레: 알라 브레베 (Finale: Alla breve) 라단조 → 라장조 세 번째 악장은 두 번째 악장에 이어서 멈춤 없이 연주된다. 1악장부터 3악장까지 일반적인 총 연주 시간은 40분 정도이다. 유명한 연주 유명한 연주에는 프리츠 라이너가 지휘한 RCA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협연 가운데 특히 1951년의 녹음과,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피아노 연주와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지휘하는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있다. 그 외 얼 와일드, 스티픈 허프, 마르타 아르헤리치, 반 클라이번, 예브게니 키신, 블라디미르 펠츠만, 그리고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연주가 있다. 2022년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의 우승자 임윤찬이 파이널라운드에서 연주한 것이 있다. 외부 링크 ISMLP의 퍼블릭 도메인 악보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작품 라흐마니노프 라단조 작품 헌정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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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3%B0%EB%8B%A4%EC%9D%B4%EB%9D%BC%20%EB%8B%A4%EC%BC%80%EC%B9%98%EC%B9%B4
마쓰다이라 다케치카
마쓰다이라 다케치카(, 1714년 2월 2일 ~ 1779년 9월 5일)는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이자 지샤부교, 로주이다. 다테바야시번의 3대 번주이자, 다나구라번주였다. 관위는 종4위하, 시종, 우근위장감이다. 히타치 후추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아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728년에 다테바야시 번주 마쓰다이라 다케마사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계승하자마자 다나구라 번으로 전봉되었다. 1739년에는 소자반이 되었고, 1744년에는 지샤부교를 겸직하였다. 1746년에 니시노마루 로주에 취임한 후 다테바야시로 다시 옮겨갔다. 1747년에 시종을 겸임하고 혼마루 로주가 되었으며, 1761년에는 로주 수좌 자리에 올랐다. 도쿠가와 요시무네, 도쿠가와 이에시게, 도쿠가와 이에하루 3대를 모셔서 이에하루로부터 '니시노마루 할아버지'(西丸下の爺)라고 불리며 신뢰를 받았다. 로주로 재임한 후반기에는 다누마 오키쓰구와 협력 관계에 있었고, 1779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로주 수좌직에 머물렀다. 넷째 아들 다케히로가 그 뒤를 이었다. 1714년 출생 1779년 사망 미토련지 마쓰다이라가 오치 마쓰다이라가 신판 다이묘 다나구라번주 다테바야시번주 에도 막부 지사부교 에도 막부 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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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84%EA%B0%84%20%EB%A6%AC%EC%96%BC%ED%8C%90%ED%83%80
계간 리얼판타
계간 리얼판타는 웹사이트 리얼판타에서 발행한 소설 문예지이다. 2002년 창간되어 계간지로 발행되었다.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구분을 없애고 모든 장르의 문학을 아우르겠다는 이념과 함께 창간되었으나 소규모의 웹사이트에서 발행한다는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었고 리얼판타 사이트와 연계성이 없으면서도 웹사이트의 오프라인판(회지와 같은 개념)이 아니냐는 인식에서 오는 괴리감(웹사이트 자체는 이전부터 유행하던 독자 참여식 판타지 연재 사이트와 흡사하면서도 잡지는 문단 데뷔작가와 별도의 경로를 통해 선별한 신인작가의 글이 실리는 주류문단의 문예지와 대동소이한 형식을 갖고 있었다)으로 인해 큰 반향은 얻지 못하고 자본 및 제반사정으로 6호까지 발행된 후 휴간(사실상 폐간)되었다. 외부 링크 리얼판타 대한민국의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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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4%91%EC%A3%BC%EA%B3%B5%EC%97%85%EA%B3%A0%EB%93%B1%ED%95%99%EA%B5%90
광주공업고등학교
광주공업고등학교(光州工業高等學校)는 광주광역시 북구 매곡동에 위치한 공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46년 10월 21일 : 광주공업중학교 개교 1951년 9월 1일 : 광주공업고등학교로 개편 1975년 3월 1일 : 전남기계공업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1979년 3월 1일 : 신축공사 준공 및 학교 이전 1986년 3월 1일 : 광주광역시 기계과 공동실습소 설치 1989년 9월 1일 : 광주기계공업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1994년 3월 1일 : 토목과, 건축과 증설. 산업체 특별학급 설치 2000년 3월 1일 : 남녀 공학 모집 2003년 3월 1일 : 광주공업고등학교로 개편 2007년 2월 28일 : 산업체 특별학급 폐지 2007년 4월 11일 : 기자재 박물관 개관 2009년 12월 30일 : 계열별 핵심 산업분야 특성화 고교 지정 2019년 9월 1일 : 제27대 박봉규 교장 취임 2022년 1월 10일 : 제71회 졸업식(330명) 총 45,817명 졸업생 배출 2022년 3월 2일 : 신입생 245명 입학 설치 학과 정밀기계과 전기과 전자과 기계설비과 토목과 건축과 기계시스템과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광주 북구의 고등학교 전문계 고등학교 광주광역시의 공립 고등학교 남녀공학 고등학교 1946년 개교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골프부 특성화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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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피
프란츠 우어반 파피(Franz Urban Pappi, 1939년 3월 10일 ~ )는 독일의 정치학자, 사회학자이다. 파피는 독일 만하임 대학 정치학과 교수와 만하임 유럽 사회 연구센터(MZES, Mannheimer Zentrums für Europäische Sozialforschung)의 이사로 재직 중이다. 그의 연구관심 분야는 선거 이론과 유권자의 전략적 투표, 선거제도의 영향 등이다. 그 외에도 행태모델을 이용한 국제 행태 시스템과 연정이론을 다루고 있다. 그는 현재 만하임 유럽사회연구센터(MZES)에서 „기대학습과 투표결정“에 대한 연구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학자 이력 그의 학자 이력은 1964년 뮌헨 대학 사회학 연구소의 조교 서비스 사무소의 관리인으로 시작했다. 거기서 1967년 박사학위를 하고 1974년까지 쾰른대학의 경험사회조사 중앙아키브의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1974년에서 1978년까지 만하임 설문-방법론-분석 센터(ZUMA)의 연구책임자로 활동했다. 1977년 쾰른 대학에서 교수자격논문이 통과되었다.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쾰른대학에서 교수자격을 갖춘 강사로 강의를 했고 1978년에서 1990년까지 킬 대학 사회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1년에서 1983년까지 학장을 역임하고, 1987년에서 1990년까지 부총장을 역임했다. 1986년에는 미국 시카고 대학 사회학과에서 교환교수로 1년동안 재직했다. 1989년 그는 쾰른대학 사회학과 교수와 만하임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동시에 초빙되었으며, 그는 만하임에서 연구를 계속하기로 하고 1990년부터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93부터 1996년까지 만하임 유럽사회연구센터의 소장을 역임했다. 그외도 1996년에서 1998년까지 사회대 학장으로 재직했었다. 연구 프란츠 우어반 파피는 경험적 사회연구분야의 연구를 통해 사회학 교수로서 독일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고 있다. 정치학계에서도 경험적 선거연구와 양적 정치네트워크 분석, 경험적 정책연구 같은 정치사회학 분야에서의 학제적 연구를 통해 명성을 얻고 있다. 그의 방법론적, 이론적, 내용적 논문들이 사회과학분야에서 중요한 문제제기로 인정받고 있다. 이 논문들은 사회과학의 각분야에서의 다양한 이론적 시각을 바탕으로 한다는 데 의미를 지닌다. 그는 다양한 분석 방법을 사용하며 각분과 학문사의 경계의 주제를 다룬다. 그외 그는 양적 네트워크분석을 통해 사회시스템의 구조적 분석뿐만아니라 정치 구조와 정책결정 과정까지도 포함시켜 연구하였다. 그외에 그는 요즘 정치학의 경험적 정책연구의 표준적 방법이된 양적 정책 네트워크 분석의 발전에 핵심적 공헌을 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학제적 연구외에 이론의 경험적 적용과 이론의 현실 적용성 테스트와 같이 이론과 실제의 연결의 그의 학문의 특징중에 하나다. 팝피는 이론을 사회적 실재를 경험할 수 있는 도구로 이해한다. 그외 중요한 학문적 공헌은 데이터의 정확한 측정과 분석분야이다. 그외에 그가 킬에서 재직중일 때 스포츠 사회학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거기서 쉴레스비히-홀스타인의 탁구 클럽에 관해 네트워크 분석을 통해 협회장선출의 전략적 투표에 대한 주요 연구를 발표했다 외부 링크 1939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독일의 정치학자 독일의 사회학자 20세기 사회학자 21세기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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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14
114
114(백십사)는 113보다 크고 115보다 작은 자연수이다. 수학 합성수로, 그 약수는 1, 2, 3, 6, 19, 38, 57, 114이다. 과학 플레로븀(Fl)의 원소번호 기타 대한민국에 있는 이동통신들의 전화번호이다. 코란의 총 장 수이다. 날짜: 1월 14일, 11월 4일 연도: 114년, 기원전 114년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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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B0%EC%95%85%ED%8C%8C
산악파
산악파 또는 몽타뉴파()는 프랑스 혁명 시기 국민공회에서 활동하던 가장 급진적인 정치 파벌로, 지롱드파와 대립하였다. 프랑스 혁명 기간에 벌어진 공포정치의 주도 세력이었으며, 혁명에 대해 온건적 입장이었던 지롱드파와 대립하였다. 파벌 일원은 각자 사상이 조금씩 달랐으나, 장자크 루소의 공화주의 이상 실현, 경제에 대한 광범위한 통제, 급진적인 토지 개혁, 폭력을 통한 공화정 질서 확립, 합리주의에 기초한 보편주의적 국가 운영 등을 주장하였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주요 지도자들이 단두대로 가면서 사실상 몰락하였지만, 몇몇 일원은 프랑스 전역에 급진적 공화주의 조직을 결성하였으며, 19세기 공상적 사회주의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들의 혁명성이 어디까지나 부르주아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적했지만 동시에 유럽 사회 진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여겼다. 기원 프랑스 혁명 동안 1791년 입법의회의 좌파 의원들은 산악파(la Montagne)라고 불린 반면, 중도파 의원들은 평원파(la Plaine) 또는 늪지파(le Marais)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지롱드파(Girondins)"라는 이름이 브리소를 따르던 이들이 보르도 출신이란 점을 설명하는 것에 반하여, "산악파"라는 이름의 기원을 두고 사학계에서는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여러 설명들이 제시되었다. 가장 주류 의견 중 하나로는, 산악파 의원들이 의회 왼쪽의 가장 높은 의석에 앉았기 때문에 이 같은 의석 위치에 근거하여 "평원(Plaine)"에 대비되는 "산(Montange)"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루이 메트리에에 따르면, 이 같은 고저대비는 단지 의회 위치만이 아니라 더 보편적으로 파리의 지정학적 구조와 대응하는 것으로, 좌파 의원들이 생트 주느비에브 산 주변 구역에서 온 성직계 출신으로 코르들리에 수도원에서 모인 것이라면, 우파 의원들은 센강 우안의 평지 주변(뱅돔 광장과 팔레루아얄 사이) 구역들에서 온 금융계 출신으로 푀양 수도원에서 모였다는 점에서 근거한다. 주요 인물 각주 같이 보기 관련 문서 장 미셸 뒤루아 지롱드파 로베스피에르 관용파 크레타파 자코뱅파 코르들리에 산악파 (1849년) 프랑스 혁명의 정파 1792년 설립된 정당 1793년 설립된 정당 급진주의 정당 1795년 해산된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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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치
페치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페치 (헝가리)(): 헝가리의 도시 페치의 초기 기독교 묘지: 페치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페야() 또는 페치(): 코소보의 도시 슈퍼페치 (SuperFetch): 윈도우 비스타의 입출력 기술 가운데 하나. 같이 보기 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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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스탠턴
프랭크 니콜라스 스탠턴(, 1908년 3월 20일 ~ 2006년 12월 24일)은 미국 출신의 기업인이다. 1946년부터 1971년까지 CBS의 사장을 역임하였고 1973년까지 부회장 자리에 있었다. 프랭크 스탠턴은 1961년부터 1967년까지 랜드 코포레이션(Rand Corporation)의 회장직도 겸임했다. 윔리엄 S. 페일리()와 함께, 프랭크 스탠턴은 CBS를 굴지의 방송국으로 크게 성장시킨 인물로 꼽히고 있다. 프랭크 스탠턴은 예리한 경영 감각으로 유명했다. 방송사 경영인으로서 소신 있게 방송사 경영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그의 경영자로서의 손길은 각종 디자인 분야에까지 닿았다. 그는 뉴욕 시의 CBS의 본부 건물(블랙 락(Black Rock))에서부터 사소한 회사 업무용 문방구 디자인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생애 프랭크 스탠턴은 1908년 3월 20일 미시간주 머스커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헬렌 조세핀 슈미트()였고 아버지는 프랭크 쿠퍼 스탠턴()이었다. 프랭크 스탠턴은 오하이오주 데이턴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 다음 그는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 있는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30년 학사 학위를 받으면서 졸업하였다. 그는 1년간 데이턴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수공예를 가르쳤다. 그 다음 그는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 진학해 1935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딴 후, 그는 CBS에 입사해 연구 부서에서 일했다. 청취율 조사를 위한 연구 부서를 이끌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그는 CBS의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미국 군사정보국(), 국방부, 해군성 등의 자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또한 1958년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조직한 비밀 조직인 (비상통신국 정도의 의미)의 국장으로 지명되기도 하였다. 이른바 아이젠하워 텐이라고 불리던 10인 중 1명으로 뽑힌 것이었다. 그는 국가 비상사태 시,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지명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CBS에 재직하면서, 《The Honeymooners》《I Love Lucy》 같은 성공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데 일조를 하기도 하였다. 미국 대선 텔레비전 토론회 프랭크 스탠턴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미국 대선 텔레비전 토론회를 열었다. 그는, 8년간의 노력 끝에, 텔레비전 토론회를 시험하기 위해, 연방 통신 위원회(FCC)로 하여금 통신법 제 315 조를 일시 중지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통신법 제 315 조가 일시 중지되어야 했던 이유는, 그것이 모든 후보에게 똑같은 방송시간이 주어져야 한다는 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상 최초의 텔레비전 토론회는 시카고에 있는 CBS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당시 대선 후보는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이었다. 하지만, 텔레비전 토론회는 1960년 대선 이후 바로 계속되지는 못했다. 린든 존슨은 1964년 대선에서 텔레비전 토론회를 회피하였다. 또한 1968년과 1972년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은 대선 토론회를 거부하였다. 리처드 닉슨이 텔레비전 시청자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준다는 말이 많았기 때문었다. 1976년 텔레비전 토론회는 재개되었다. 당시 대통령 제럴드 포드가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뒤지자 민주당 후보 지미 카터와의 토론회를 승낙했었던 것이었다. 방송 산업계에서의 활약 프랭크 스탠턴은 미국 의회로부터 방송 산업계를 대변하는 거물로 인정받았다. 또한, 프랭크 스탠턴은 방송 저널리즘과 저널리스트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CBS 보도국 국장을 역임한 리처드 S. 샐런트(, 사람들은 샐런트를 가장 훌륭했던 보도국 국장 중 한 명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프랭크 스탠턴을 회사의 멘터이자 지도자로 꼽으며 칭송하기도 하였다. 1950년대 말, 사람들은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R. 머로(Edward R. Murrow)가 1958년도에 라디오 텔레비전 뉴스 제작자협회(Radio and Television News Directors Association, RTNDA)에서 한 방송사들이 공공 서비스(public service)에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연설을 많이들 칭찬하고는 하였다. 하지만 프랭크 스탠턴도 이에 못지않게, 1959년 5월 연설에서(오하이오 주립대에서의 연설임.) 방송의 공공 서비스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프랭크 스탠턴은, 다음 해에는 CBS가 프라임 타임 시간 대에 공익 시리즈물을 방영할 것임을 약속하였다. 나중에 이 시리즈는 《CBS 리포츠》(CBS Reports)가 되었다. 수 개월 후, 1958년에 머로가 연설했던 협회인 RTNDA에서 한 1959년도 연설에서, 프랭크 스탠턴은 퀴즈 쇼 스캔달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며, 사기 프로그램이 다시는 제작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다큐멘터리 논란 1971년, CBS의 사장으로 재직하던 프랭크 스탠턴은 정부와 큰 갈등을 겪었다. 《CBS 리포츠》(CBS Reports) 시리즈의 다큐멘터리 중 하나였던 〈The Selling of the Pentagon〉 때문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큰 규모의 공적 자금이, 군국주의(militarism) 의식 제고를 의해 (부분적으로 불법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고발하였다. 텔레비전 뉴스가 미국 수정 헌법 제 1 조에 의해 보호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그는 촬영 후 상영 필름에서 커트한 장면(outtakes) 및 대본(script)의 사본을 제공하라는 미국 상무 위원회의 명령이 적힌 소환장(subpoena)을, 감옥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거부하였다. 그는 그것들이 수정 헌법 제1조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호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러한 소환장(subpoena) 요구를 응한다면 방송 저널리즘에 전반적인 의욕 상실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염려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공로로 그는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계의 상인 피바디 상 개인상 부문을 수상하였다. 컬러 텔레비전 스탠턴은 CBS 컬러 텔레비전 시스템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1951년 6월 25일, 프랭크 스탠턴은 1시간짜리 특별 프로그램 〈Premiere〉에 출연하였다. 여기서 그는 로버트 앨다, 페이 에머슨, 에드 설리번, 아서 갓프리, 윌리엄 팰리 등과 함께 나와 CBS 컬러 텔레비전 시스템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CBS 시스템은 기존에 나와 있던 흑백 TV 수상기와 호환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결국 FCC가 RCA 시스템을 컬러 텔레비전 시스템으로 선정하였다.. 경영과 관련된 논란 1951년, 프랭크 스탠턴은 CBS 사원들의 정치적인 경향을 사찰하는 부서를 창설하였다. 매카시 열풍을 다룬 2005년도 영화인 《굿 나잇, 앤 굿 럭》은 이 시대 상황을 그리고 있다. 감독인 조지 클루니는 의도적으로 프랭크 스탠턴 캐릭터를 제외하였다. 영화 제작 당시 스탠턴이 살아있었고, 그에 대한 묘사가 논란을 일으킬까 염려한 까닭에서였다. 프랭크 스탠턴은 아서 갓프리에 관한 악명 높은 논란에 있어서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아서 갓프리는 1950년대 초 CBS의 라디오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였는데, CBS에게 가장 많은 수익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갓프리는 CBS 쇼 세 개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 중 쇼 두 개에 "리틀 갓프리즈"()라고 불리던 가수 그룹을 출연시키고 있었다. 갓프리는 평소, "리틀 갓프리즈"()로 하여금 매니저를 갖지 말라고 명령해두고 있었다. 리틀 갓프리즈에는 당시 떠오르던 스타인 줄리우스 라로사라는 가수가 있었다. 1951년 프랭크 스탠턴이 아서 갓프리에게 라로사를 추천한 바 있었다. 한데 라로사는 매니저를 고용했고, 그 매니저가 갓프리와 사소한 불화를 일으켰다. 프랭크 스탠턴은 사서 갓프리에게 그를 해고(release)하라고 조언하였다. 1953년 갓프리는 라로사를 방송 상에서 전격적으로 해고하였다(fired). 라로사는 그 사실을 사전에 통고받지 못했었다. 이 사건은 갓프리에 대한 막대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나중에, 프랭크 스탠턴은 갓프리의 일대기 - 〈Arthur Godfrey: The Adventures of an American Broadcaster〉를 쓴 아서 싱어(Arthur Singer)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아마도 (그 추천 건은) 실수였을 거에요." 적십자사 총재 프랭크 스탠턴은 적십자 봉사자로서 수 년간 봉사하였다. 그는 공공 정보와 기금 모금 분야에 집중하였다. CBS 사를 나온 후, 1973년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에 의해 그는 미국 적십자사 총재로 임명되었다. 그 자리에 1979년까지 있었다. 사망과 유산 프랭크 스탠턴은 2006년 12월 24일 매사추세츠주 보스톤 자택에서 취침 도중에 사망하였다. 향년 98세였다. 로스 앤젤레스에 있는 프랭크 스탠턴 스튜디오에서 미네소타 퍼블릭 라디오의 마켓플레이스()라는 제목의 인기 비즈니스 라디오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있다.. 하버드 공중위생학 학부()는 제이 윈스턴 박사를 센터장으로 하여 프랭크 스탠턴 의료 보도 센터()를 세웠다. 그의 사망 후 자선단체인 스탠턴 재단이 설립되었다. 각주 외부 링크 "The Memoirs Of Frank Stanton" (APM/MPR) Museum of Broadcast Communications - 일대기 TV Week.com 사망 기사 Notable New Yorkers - Frank Stanton 일대기, 사진, 인터뷰. 콜럼비아 대학교의 오럴 히스토리 리서치 오피스의 노터블 뉴 요커즈 콜렉션. 1908년 출생 2006년 사망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동문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동문 피버디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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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4%BC%EB%A7%88%EC%9E%90
피마자
피마자() 또는 아주까리는 대극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이다. 피마자속에 피마자 1종만 있다. 인도·소아시아·북아프리카 원산으로 원산지에서는 여러해살이풀이다. 키가 2 미터 정도로 크게 자라고, 잎은 어긋나며 손바닥 모양이다. 줄기는 속이 비어 있다. 꽃은 8~9월에 노란색으로 피고, 열매는 겉에 가시가 있고 안에 씨 세 개가 들어 있다. 씨에는 얼룩무늬가 있는데, 이 씨로 기름을 짠다. 기원 전 2000년 무렵부터 인도에서는 피마자 씨 기름을 등불의 기름으로 썼으며, 약으로도 썼다. 지금도 피마자 기름을 포마드, 인주, 공업용 윤활유로 이용한다. 2006년 기준으로 인도, 중국, 브라질 순으로 많이 생산된다. 씨에는 리친이라는 독성 물질이 포함되어 있다. 사진 외부 링크 국가표준식물목록 산림청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USDA GRIN Taxonomy for Plants 대극과 광엽초본 게놈 해독이 완료된 식물 1753년 기재된 식물 네팔의 식물상 인도의 식물상 칼 폰 린네가 명명한 분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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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A9%EC%82%B0%EB%B2%8C%20%28%EC%98%81%ED%99%94%29
황산벌 (영화)
"황산벌"은 2003년 개봉된, 황산벌 전투를 다룬 대한민국의 역사 코미디 영화이다. 황산벌은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각 지역 방언으로 이야기를 진행해나가는 영화이다. 내용 영화 황산벌은 여러 가지 영화적 요소가 첨부되어 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사투리를 사용하며 백제인은 전라도 사투리를, 신라인은 경상도 사투리를 각각 사용한다. 김춘추는 딸의 원수인 백제에 복수하기 위해 당 고종과 손을 잡는다. 의자왕은 충신인 계백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계백은 반대파 신하들을 위협하고 5000결사대를 결성하여 황산벌에 진을 친다. 신라군도 황산벌에 다다르고 전투에 임한다.(5000(백제군 수)/50000(신라군 수)) 신라군은 상대의 사기를 낮추기 위해 욕설을 퍼붓거나 일기토를 신청한다.그러나 모두 백제군이 승리한다 김유신(정진영)이 계백(박중훈)의 전술을 알아내기 위해 고뇌하고 결국 계백의 '죽을 때까지 갑옷을 벗지 않는다'라는 간단한 전술을 힘들게 알아낸다. 김유신은 계백이 스스로 자신의 가족을 죽이고 전투에 임해 백제군의 사기가 높은 것을 알게 된다. 김유신은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계백처럼 화랑들을 백제군 진영에 보내 고의적으로 전사하게 한다. 김유신은 신라군의 사기가 오르자 비오는날 투석기로 진흙(찰흙)을 백제군 영채에 날리고 돌격한다. 신라군이 쳐들어오자 백제군은 싸우려 하지만 진흙(찰흙)이 갑옷을 굳게 해서 쉽게 싸울 수 없다. 결국 백제군이 갑옷을 벗고 용맹하게 싸우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 할 수는 없었다. 계백은 옆에서 자신을 지키던 겁 많은 병사인 거시기(이문식)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하지만 뭐라도 하나 남겨야 하지 않겠나?난 널 남기고 싶다'하며 몰래 탈출 시킨다. 계백과 그를 모시는 장수는 화살 받이가 된채 김유신에게 베인다. 거시기는 운좋게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어머니(전원주)를 만난다. 캐스팅 박중훈: 계백 역 정진영: 김유신 역 이문식: 거시기 역 김윤태: 천존 역 이호성: 태종무열왕 역 안내상: 김법민 역 류승수: 김인문 역 신정근: 김흠순 역 전기광: 김품일 역 정성화: 문디 역 전대병: 강냉이 역 김광식: 백제 병사 1 역 김형일: 백제 병사 2 역 김탄현: 백제 병사 3 역 김동하: 백제 병사 4 역 조경훈: 흑치상지 역 오상훈: 짝눈이 역 안혁모: 부여효 역 임형준: 부여태 역 박수현: 부여융 역 이환: 부여연 역 왕도경: 부여풍 역 이용준: 부여용 역 고규필: 부여충승 역 우현: 임자 역 이달형: 부여교기 역 혜령: 계백 큰 딸 역 이상훈: 신라 병사 2 역 김상원 - 신라 병사 6 역 양진우: 관창 역 김병철: 신라 첩자 역 정해균: 암호해독관 역 서진원: 계루 역 나수원: 애꾸 역 김상원 - 뻐꾸기 1 역 조달환: 뻐꾸기 2 역 정대용: 노인 병사 1 역 이준익: 북 치는 백제군 병사 역 오지명: 의자왕 역 (특별출연) 이원종: 연개소문 역 (특별출연) 김선아: 계백 처 역 (특별출연) 김승우: 백제 첩자 1 역 (특별출연) 신현준: 백제 첩자 2 역 (특별출연) 전원주: 거시기 엄마 역 (특별출연) 김육룡: 당 고종 역 (특별출연) 고목춘: 소정방 역 (특별출연) 김만수: 유백영 역 (특별출연) 이지흥: 풍사귀 역 (특별출연) 같이 보기 황산벌 전투 평양성 (영화) 외부 링크 2003년 영화 이준익 감독 영화 대한민국의 코미디 영화 대한민국의 전쟁 영화 한국의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 김유신을 소재로 한 작품 계백을 소재로 한 작품 7세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영화 백제를 배경으로 한 영화 신라를 배경으로 한 영화
47686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5%9C%EA%B5%AC
이한구
이한구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이한구(李漢九, 1878 ~ ?)는 일제 강점기의 경찰이다. 이한구(李漢求, 1935 ~ )는 대한민국의 공무원이다. 이한구(李漢久, 1945 ~ )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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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AC%EB%B4%89%EC%82%B0
구봉산
구봉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구봉산(九峰山)은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에 있는 산이다. 구봉산(九峰山)은 대전광역시 서구에 있는 산이다. 구봉산(九峰山)은 전라북도 진안군에 있는 산이다. 구봉산(九鳳山)은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산이다. 구봉산(龜峰山)은 부산광역시 서구에 있는 산이다. 같이 보기
287973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B%AA%85%EC%9B%90%20%28%EC%95%84%EB%82%98%EC%9A%B4%EC%84%9C%29
박명원 (아나운서)
박명원(1979년 5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KBS 아나운서이다. 학력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경력 2007년 : KBS 33기 공채 KBS 아나운서 (KBS전주방송총국, KBS 대전방송총국 근무) 출연 프로그램 TV THE 비빔밥 KBS전주 음식기행 삼道삼米 現TV이웃 다정다감 現뉴턴의 사과나무 라디오 생방송 대전입니다 5시N대.세.남 뉴스 現KBS 제1라디오 아침종합뉴스 現KBS 뉴스광장 1979년 출생 서강대학교 동문 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 살아있는 사람
270527
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C%9D%B4%ED%86%A0
라이토
라이토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야가미 라이토: 만화 《데스노트》의 주인공이자 반영웅 키나미 라이토: 다카라즈카 가극단 하나구미 소속 남역 같이 보기 라이트
86093
https://ko.wikipedia.org/wiki/%EB%AF%BC%EC%A1%B1%EB%8C%80%ED%91%9C%2033%EC%9D%B8
민족대표 33인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개신교 인사 16명, 천도교 인사 15명, 불교 인사 2명이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기독교계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 모였다. 그들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다.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한 김병조와 2년간의 구금 이후 무죄 판결을 받은 길선주, 그리고 체포 직후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들 중 손병희 등은 복역 후 병사하였다. 명단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민족대표 33인 중 최린, 박희도, 정춘수는 변절하여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평가 3.1만세운동을 이끌어내고 표현하게 된 대한독립선언서(독립선언문)는 3.1운동 정신의 근간이 되었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기록한 주요 문헌이 되었다. 3.1 독립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의 근거로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을 잇는 대한민국 정부에 그 정신이 계승된다. 일제의 침탈로 정치, 사회, 경제 분야가 친일로 변질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족 지도자로서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전개하였다. 사회 전반이 친일 변질 상황에서 독립선언서 작성 및 배포 등 3.1운동 전반에 종교계가 앞장선 결과, 민족대표 33인 모두 종교계 인사들이라는 한계가 있다. 이들 33인중 3명은 후에 친일반민족 행위로 변절하였다. 같이 보기 3.1 운동 민족대표 49인 3.1 운동 3.1절 자제단 무오독립선언 연서자 (39인) 2.8 독립선언 각주 1919년 일제강점기 한국 사람 목록 3·1 운동 한국의 독립운동가 명수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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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A6%AC%EC%98%A8%20%28%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20%EA%B8%B0%EC%97%85%29
오리온 (대한민국의 기업)
주식회사 오리온()은 대한민국의 제과 회사다. 또한 오리온은 오리온홀딩스의 계열사 및 주력 회사며, 오리온 초코파이로 유명하다. 오리온은 1934년 4월 13일에 설립되었으며, 오리온의 본사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백범로 90다길 13(문배동)에 위치에 있다. 연혁 1981년 3월 13일 : 日本 유명 식품업체인 모리나가제과社 기술제휴로 생산된 밀크카라멜 출시 1994년 11월 3일 : 동양제과 청주공장 완공 (위치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 2003년 4월 30일 : 동양제과 서울공장 패쇄 및 주택건설사업계획 승인 (서울 용산구 생산공장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일부 생산설비은 전북 익산공장으로 이전을 하였다.) 2017년 6월 1일 : 제조사업부문을 (주)오리온으로 분할하고 (주)오리온홀딩스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최근에는 코레일유통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많이 판매하고 있다. 2018년 7월 18일 : 오리온과 농협 합작회사 오리온농협 밀양공장 준공 (위치 : 경상남도 밀양시 점필재로) 판매 상품 스낵 꼬북칩, 포카칩, 스윙칩, 섬섬옥수수, 오징어 땅콩, 오! 감자 태양의맛! 썬, 도도한 나쵸, 대단한 나쵸, 치킨팝, 땅콩강정, 눈을감자, 감자엔 소스닷, 고로케땅콩, 감자산맥 초콜릿 초코파이 情, 초코송이 핫브레이크, 새알, 생크림파이, 투유 미니 케이크 후레쉬 베리, 오뜨 비스킷 고래밥, 왕고래밥, 촉촉한 초코칩, 초코칩 쿠키, 예감, 미쯔 통크, 까메오, 고소미, 쿠쉬쿠쉬, 다이제, 다이제 초코 껌 와우 껌, 생 후라보노 더 자일리톨 껌 캔디 및 젤리 오리온 카라멜, 바이오 캔디, 송이젤리, 젤리데이 비타민C 젤리 아이셔 비틀즈 마이구미, 왕꿈틀이 젤리밥 음료 제주용암수 사건사고 오리온 이천공장 설비 시설 화재 2016년 1월 30일 오후 6시 20분경에 오리온 이천공장에서 과자 굽는 기계설비가 과열로 추정이 된 화재가 발생되었지만, 이천공장 직원 20명이 대피를 하였고, 공장건물 4개동 만 제곱미터에 모두 소실이 되었다. 31일 새벽 0시 20분에 6시간만에 화재 불이 잡혔있었다. 같이 보기 오리온홀딩스 각주 2017년 설립된 기업 대한민국의 식품회사 제과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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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93%9C%EB%A6%AC%EB%93%9C%20%EC%99%95%EA%B6%81
마드리드 왕궁
마드리드 왕궁()은 스페인의 왕실 공식 관저이다. 사실 마드리드 외곽의 작은 궁전인 사르수엘라 궁에 머물고 있다. 국가적 상황에만 사용이 되는 것이 원칙이다. 뿐만 아니라 서부 유럽을 통틀어서는 2,800여 개 이상의 방과 135,000 m²의 크기로 단연 최대의 크기를 자랑한다. 궁전은 마드리드 서부 중심가의 서쪽 바일렌 거리에 있으며 만사나레스 강변에 있다. 스페인 지하철의 오페라 역에서 금방 갈 수 있다. 부분적으로만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 역사 궁전의 역사는 9세기 성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이리트라고 불리던 이 지방은 모하마드 1세의 성벽의 일환으로 지어졌다. 이후 1036년 경에는 무어인이 건설한 톨레도 왕국의 소유로 넘어갔다. 마드리드가 카스티야의 손으로 넘어가자 마드리드 왕궁은 카스티야 군주가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된다. 1329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는 최초로 스페인 국회를 마드리드 왕궁에 소집한다. 이후 펠리페 2세는 그의 궁정을 마드리드 왕궁으로 옮겼다. 구 성곽()은 16세기에 지어졌지만 1734년 12월 24일 불타버렸다. 펠리페 5세는 새로운 궁전을 다시 짓도록 명하였다. 건축에만 15년 이상이 소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764년 카를로스 3세가 최초로 새 궁전에 머물게 되었다. 벨라스케스를 비롯해 티에폴로, 고야 등의 최고 화가들이 궁전의 보수 작업에 착수 하였다. 스페인 왕가가 수집해온 역사적인 작품들이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13세기 이전의 무기를 비롯하여 포르셀린, 가구 등도 소장품에 속한다. 궁전 아래의 서쪽 편에는 정원이 있다. 스페인어로는 "캄포 델 모로"라고 하는데 이 이름은 당시 이슬람 군주가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다시 마드리드를 탈환하고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남쪽에는 성당이 있고 북쪽으로는 사바티니 정원이 위치한다. 이 정원은 정원 건축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펠리페 왕자와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왕세자비 결혼식이 2004년 5월 22일 궁전의 중앙 광장에서 치러졌다. 외부 링크 공식사이트 (영어) 마드리드 궁전-스페인 웹사이트 궁전의 사진 왕궁에 대한 설명과 그림 마드리드의 궁전 1755년 완공된 건축물
180899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B%AC%B4%EC%97%91%ED%84%B0%EC%8A%A4
나무엑터스
나무엑터스()는 대한민국의 연예기획사로서 2004년 1월 15일 설립되었고, 출범 당시 소속 배우로는 김주혁, 문근영, 김지수 등이 있었다. 소속 연예인 남성 강기영 고우림 고찬빈 구교환 김정환 김혜성 박중훈 송강 오현중 유준상 유진우 이신성 이준기 이정식 이정하 여성 이열음 김하나 김환희 노정의 김효진 도지원 박은빈 서예화 김예지 이윤지 홍은희 김재경 박지현 서현 채빈 주해은 조우리 이나은 전 소속 연예인 천우희 김지수 김태희 김아중 (故) 김주혁 유선 (故) 이은주 남규리 오승훈 조동혁 한혜진 김강우 박민영 유지태 전혜빈 백윤식 조한철 김소연 박건형 윤제문 박상욱 백서빈 한정수 신세경 오태경 전유림 김수정 문채원 이규정 문근영 이유진 김향기 외부 링크 나무엑터스 공식 웹사이트 2004년 설립된 기업 대한민국의 연예 기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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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D%95%EC%82%B0%EA%B5%B0
덕산군
덕산군(德山郡)은 덕산면을 중심으로 지금의 예산군 서부지역에 있었던 옛 행정구역이다. 덕산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에 덕풍현(德豊縣)과 이산현(伊山縣)이 합쳐서 생긴 지명인데, 여기서는 합치기 전까지의 이산현만 다룬다. 이산현은 지금의 예산군 덕산면을 중심으로 삽교읍 일부까지의 지역이다. 역사 백제시대에 마시산군(馬尸山郡)이 설치되었다. 신라시대에 이산군(伊山郡)으로 개명하고 목우현(目牛縣)과 금무현(今武縣)의 두 현을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 현으로 강등되어 이산현(伊山縣)이 되었다. 1405년 조선 태종 5년에 옛날의 영현이었던 덕풍현과 합병되어 덕산현(德山縣)이 되었다. 1413년 태종 13년에 현감이 배치되었다. 1847년 조선 헌종 13년에 덕산이 군으로 승격되었다. 덕산군의 산하에 장촌(場村) 대조지(大鳥旨), 대덕산(大德山), 나박소(羅朴所), 현내(懸內), 내야(內也), 외야(外也), 도용(道用), 고현내(古縣內), 고산(高山), 거등(居等), 비방곶(菲方串)의 12개면이 있었다. 1895년 23부府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홍주부관할 덕산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13도제로 환원되면서 충청남도에 속했다.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하여 비입지(飛入地)인 비방곶면이 면천군으로, 설현우현이 해미군으로 이관되었다. 1914년 이후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95%;" | colspan=3 |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 ! width="50%"| 구 행정구역 !! colspan=2 width="50%"| 신 행정구역 |- | 덕산군 현내면(縣內面) 중치리/삼승리/약동/신치리/소시촌 일부, 구정리/궁리/노곡리 일부/조양리 일부, 동문리 일부/(내야면)평리 일부, 교동/어은리, 상가리/중가리 일부/사점리 일부, 원리/신리/조양리 일부/평리 일부/서문리 일부, 서문리 일부/중가리 일부, 성내리/동문리 일부/서문리 일부/평리 일부/신리 일부, 궁평리/신동/노곡리 일부/조양리 일부/소시촌 일부 || rowspan=2 | 덕산면 || 대치리, 둔리, 북문리, 사동리, 상가리, 신평리, 옥계리, 읍내리, 시량리 |- | 덕산군 나박소면(羅朴所面) 조교촌/광돌리/사천리 일부, 상탄리/낙천리 일부/(홍주군 고남하도면)갈오리 일부/원성리 일부, 신동/송애촌/복당리 일부, 거천리/낙천리 일부, 복당리 일부/평리 일부/(홍주군 고남하도면)구성동/원성리 일부, 사천리 일부, 점촌/사천리 일부 || 광천리, 낙상리, 내라리, 대동리, 복당리, 사천리, 외라리 |- | 덕산군 내야면(內也面) 식암리/구산리/(고현내면)군대리 일부, 시동 일부/화은리 일부, 서림리/봉동/제동/성지동, 돌리/사점리/목리 일부/후종리 일부, 시동 일부/시점리, 상안리/중안리/화은리 일부, 평리 일부/목리 일부/후종리 일부, 두암리/시동 일부/평리 일부/(고현내면)대야동 일부/(도용면)풍경리 일부 || rowspan=3 | 봉산면 || 구암리, 당곡리, 봉림리, 사석리, 시동리, 옥전리, 하평리, 효교리 |- | 덕산군 외야면(外也面) 고도리/(고현내면)군대리 일부, 궁리/세영동/평리/신동 일부, 월조리/중안리/탄리/신동 일부, 석하리/석교리/항리/마산리/(면천군 마산면)대곡리 일부, 옹안리/대덕리, 고상리/(고현내면)군대리 일부 || 고도리, 궁평리, 금치리, 마교리, 옹안리, 화전리 |- | rowspan=2 | 덕산군 고현내면(古縣內面) 포두리/송정리/화리/군대리 일부/(내야면)사점리 일부, 상별리/내성리/외성리/옥동/고곡리/해상리/하리, 방축리/신동 || 대지리 |- | rowspan=4 | 고덕면 || 대천리, 석곡리 |- | 덕산군 고산면(高山面) 양금리/하몽리/원기리/두곡리/주교리/상몽리 일부/천변리 일부, 어은동/상시동/후곡동/동리/천변리 일부/호음리 일부/상몽리 일부, 도동/상장리 일부/(고현내면)하리 일부, 오촌/추동/지곡리 일부, 지곡리 일부/상장리 일부 신상리/공수동/매동/황매동/호음리 일부/천변리 일부 || 몽곡리, 상몽리, 상장리, 오추리, 지곡리, 호음리 |- | 덕산군 거등면(居等面) 방리/상리/궁리/(고현내면)하리 일부 || 상궁리 |- | 덕산군 도용면(道用面) 포리/황금리/천변리, 일리/이리/삼리 일부/조산리/(대조지면)하룡리 일부, 중리/(대조지면)상룡리 일부/하룡리 일부 || 구만리, 사리, 용리 |- | 덕산군 대덕산면(大德山面) 사리/(홍주군 치사면)치사동, 수촌리 일부/(대조지면)평리 일부, 이리 일부/삼리 일부/목리 일부/(현내면)원리 일부/(대조지면)안치리 일부, 이리 일부/삼리 일부/수촌리 일부/(대조지면)안치리 일부/역상리 일부/평촌 일부 || rowspan=3 | 삽교면 || 목리, 수촌리, 신리, 이리 |- | 덕산군 대조지면(大鳥旨面) 상룡리 일부/역하리 일부, 신흥리/삽교리 일부/평촌 일부/상성리 일부/하성리 일부/(장촌면)도리 일부, 상동 일부/하성리 일부/상성리 일부, 상갈리/하갈리/창정리/역동/역중리 일부/송산리 일부/(현내면)동문리 일부, 안치리 일부/송산리 일부/(대덕산면)신리 일부/(현내면)역리 일부, 안치리 일부/역상리 일부, 역중리 일부/역하리 일부, 하동/상룡리 일부/하룡리 일부/상동 일부/하성리 일부, 창정리/(도용면)삼리 일부/풍경리 일부, 삽교리 일부/(대덕산면)이리 일부 || 가리, 삽교리, 상성리, 상하리, 송산리, 안치리, 역리, 용동리, 창정리, 평촌리 |- | 덕산군 장촌면(場村面) 현화리/사촌/방리 일부, 현교리/(예산군 거구화면)목소리, 신흥리/가곡리, 하리/포리/신리 || 두리, 성리, 신가리, 하포리 |} 기타 덕산 송씨 ·황씨 ·고씨 ·오씨 ·문씨 ·장씨(蔣氏)의 관향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옛 지명 예산군의 역사 예산군의 지리 한국의 폐지된 군 충청남도의 폐지된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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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8%ED%84%B0%EB%84%B7%20%EC%A0%9C%EC%96%B4%20%EB%A9%94%EC%8B%9C%EC%A7%80%20%ED%94%84%EB%A1%9C%ED%86%A0%EC%BD%9C
인터넷 제어 메시지 프로토콜
ICMP(Internet Control Message Protocol, 인터넷 제어 메시지 프로토콜)는 인터넷 프로토콜 스위트에 기록된 주요 프로토콜 가운데 하나이다. 네트워크 컴퓨터 위에서 돌아가는 운영체제에서 오류 메시지(Requested service is not available 등)를 전송받는 데 주로 쓰이며 인터넷 프로토콜의 주요 구성원 중 하나로 인터넷 프로토콜에 의존하여 작업을 수행한다. 프로토콜 번호 1로 할당되고 시스템 사이에 데이터를 교환하지 않거나 최종 사용자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TCP와 UDP와는 다르다.(ping 이나 traceroute 같은 몇몇 진단 프로그램 제외) 인터넷 프로토콜 버전 4(IPv4) 용 ICMP는 ICMPv4로 알려져 있고, 유사하게 IPv6은 ICMPv6이다. 상세 기술 정보 인터넷 제어 메시지 프로토콜은 RFC 792에서 정의한 인터넷 프로토콜 모음 중의 하나이다. ICMP 메시지들은 일반적으로 IP 동작(RFC 1122에 규정)에서 진단이나 제어로 사용되거나 오류에 대한 응답으로 만들어진다. ICMP 오류들은 원래 패킷의 소스 IP 주소로 보내지게 된다. 예를 들어, IP 데이터그램을 전달하는 모든 기기(중간 라우터 같은)는 맨 처음 IP 헤더에서 타임 투 리브(Time to Live, TTL)을 '1'만큼 감소시킨다. 만약 TTL이 '0'이면 패킷은 버려지고, ICMP TTL 초과 메시지가 데이터그램의 원래 IP 주소로 보내진다. 비록 ICMP 메시지는 표준 IP 패킷에 포함되지만, 일반적인 IP 처리와는 구분되어 특별한 경우로 처리된다. 많은 경우, ICMP 메시지의 내용을 검사하고 ICMP 메시지 전송을 유발하는 IP 패킷을 만들어내는 응용 프로그램으로 적당한 오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네트워크 유틸리티에서 사용되는 많은 것들이 ICMP 메시지에 기반을 두고있다. 트레이스라우트(traceroute) 명령어는 특별하게 만들어진 IP TTL 헤더 필드들을 가진 IP 데이터그램을 전송하고, 응답에서 ICMP TTL 초과 메시지와 "목적지에 닿을 수 없음(Destination unreachable)" 메시지가 생성되었는지 찾는다. 이와 유사한 핑(ping) 유틸리티는 ICMP "에코 요청(Echo request)"과 "에코 응답(Echo reply)" 메시지를 사용해 구현할 수 있다. ICMP는 네트워크 계층 프로토콜이다. 포트 번호는 전송 계층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ICMP 패킷과 연계되는 TCP 또는 UDP 포트 번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ICMP 부분 구조 ICMP 헤더는 IPv4 헤더 뒤에서 시작되고 IP 프로토콜 번호 '1'로 분류된다. 모든 ICMP 패킷은 8 바이트 헤더와 가변 데이터 구역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4 바이트는 ICMP 패킷의 타입과 코드에 의존하지만, 처음 4 바이트는 고정된 형식을 가진다. 타입 ICMP 타입, 제어 메시지 참조. 코드 ICMP 서브 타입, 제어 메시지 참조. 검사 합계 ICMP 헤더와 데이터로부터 계산되는 오류 검사 데이터, 이 필드는 0으로 대치됨. 인터넷 검사 합계는 RFC 1071에 규정된 방식으로 사용된다. 나머지 헤더 ICMP 타입과 코드에 따라 내용이 변경되는 네 바이트 필드 RFC RFC 792, Internet Control Message Protocol RFC 950, Internet Standard Subnetting Procedure RFC 1016, Something a Host Could Do with Source Quench: The Source Quench Introduced Delay (SQuID) RFC 1122, Requirements for Internet Hosts – Communication Layers RFC 1716, Towards Requirements for IP Routers RFC 1812, Requirements for IP Version 4 Routers 각주 외부 링크 IANA ICMP parameters IANA protocol numbers Explanation of ICMP Redirect Behavior 인터넷 프로토콜 인터넷 표준 네트워크 계층 프로토콜 인터넷 계층 프로토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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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요시오키
오우치 요시오키(, 분메이 9년 음력 2월 15일(1477년 3월 29일) ~ 교로쿠 원년 음력 12월 20일(1529년 1월 29일))는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센고쿠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스오 센고쿠 다이묘이다. 오우치가 제15대 당주(종손)이다. 백제 온조왕의 원손(遠孫)이며 임성태자의 28대손이다. 약력 아명은 기도마루(亀童丸). 무로마치 막부의 간레다이로 쇼군의 후견인이 되었고, 스오, 나가토, 이와미, 아키, 지쿠젠, 부젠, 야마시로 국의 7곳의 슈고를 겸임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등장하기 전인 센고쿠 시대 전기의 패권을 장악한 영웅이다. 생애 가독 상속 분메이 9년 (1477년) 오우치 가문 제14대 당주 오우치 마사히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메이오 원년 (1492년) 롯카쿠 가문 토벌전에 참전하였고, 다다음해인 메이오 3년 (1494년) 아버지 마사히로가 병으로 당주의 자리를 물러나고 가독을 승계해 제15대 당주로 되었다. 메이오 4년 (1495년) 아버지가 죽자, 나가토 슈고다이 나이토 히로노리가 동생 오우치 다카히로를 옹립하려 하자 스에 다케모리?(陶武護 스에 오키후사(陶興房)의 형)가 참언하여 이것을 믿고 나이토 히로노리 부자를 주살하였다. 후에 나이토 부자의 무고를 알고 참언한 스에 다케모리?를 주살하였다. 그리고, 나이토 히로노리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나이토 가문을 재건하였다. 세력 확대 규슈 북부에서 오토모 가문(大友氏)과 쇼니 가문(少弐氏)간의 전투를 계속하면서, 아버지 대에 영유하였던 스오, 나가토, 부젠, 지쿠젠에 더하여 아키, 이와미 슈고를 겸했으며, 그 밖에도 히젠의 일부까지도 세력하에 두었다. 메이오 5년 (1496년)에 일어난 오토모 가문의 내분에 개입하여, 오토모 마사치가(大友政親)를 처형하고, 다이쇼인에 있던 오토모 슈신(大友宗心)을 후계자로 내세우려 하였지만, 슈신의 사촌인 오토모 지카하루(大友親治)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한다. 메이오 6년 (1497년) 1월에는 쇼니 마사스케(少弐政資) 부자를 공격하였고, 4월에는 마시스케 부자의 자결로 규슈 북부에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쇼니 마사스케의 셋째 아들 쇼니 스케모토(少弐資元)가 분키 원년 (1501년) 거병하였고, 에이쇼 3년 (1506년)에 오토모 지카하루와 연대하여 오우치 령의 공격을 계획한다. 그러나, 메이오 8년 (1500년)에 메이오 정변으로 교토에서 쫓겨난 전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가 야마구치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우치 요시오키는 에이쇼 4년 (1507년) 아시카가 요시타네의 중개로 쇼니 스케모토와 화친해, 규슈 북부를 세력하에 두었다. 기나이 출병 에이쇼 4년 (1507년) 6월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澄)를 제11대 쇼군으로 옹립해 전권을 장악한 간레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가 암살되었다. 그 후, 호소카와 가문의 내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기나이 진출로 눈을 돌린다. 오우치 요시오키는 규슈, 주고쿠의 여러 다이묘에게 동원령을 발포하였고, 11월에 야마구치를 출발 12월에는 빈고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양자였던 호소카와 다카쿠니(細川高国)가 오우치 요시오키와 내통하여 호소카와 즈미모토(細川澄元)와 대립 항쟁을 하였고, 에이쇼 5년 (1508년) 3월 호소카와 즈미모토는 다카쿠니, 요시오키에 압도당해, 아시카가 요시즈미와 함께 오미로 도주하였다. 6월 상락을 달성한 요시오키는 7월에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쇼군직에 복귀시켰고, 자신은 사쿄노다이부 및 간레다이로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함께 막정에 관여한다. 그러나, 아시카가 요시즈미와 호소카와 즈미모토가 교토 탈환을 목표로 반격을 하였고, 에이쇼 7년 (1510년) 1월에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함께 오미로 공격해 가지만, 역으로 패하고 만다. 그보다도 아시카가 요시즈미측은 일대 결전을 결이하며 에이쇼 8년 (1511년) 7월에는 셋쓰로 공격해 오자 오우치 요시오키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함께 출진하지만, 셋쓰에서도 이즈미에서도 패배하고 단바로 도주한다. 그러나 8월 14일 아시카가 요시즈미의 갑작스런 죽음과 롯카쿠 다카요리(六角高頼)의 이반등으로 전황이 유리해졌고, 8월 23일 야마시로 후나오카야마 전투(船岡山の戦い)에서 호소카와 즈미모토군을 격파하고 교토를 탈환한다. 이때 오우치 요시오키의 활약이 상당했다고 한다. 에이쇼 9년 (1512년) 3월 그 무공으로 종3위와 구교의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점점 쇼군 요시타네와 간레 다카쿠니의 사이가 나빠졌으며, 더욱이 오우치 가문 영내의 이와미와 아키에 대해 이즈모의 아마고 쓰네히사(尼子経久)가 침공을 개시했기 때문에, 에이쇼 15년 (1518년) 8월 2일 간레다이를 사임하고 야마구치로 귀환한다. 아마고 가문과의 싸움 요시오키가 자리를 비운사이 세력을 키운 아마고 쓰네히사는 다이에 3년 (1523년)에는 이와미가 공격 받았으며, 아키에서는 오우치 가문에 종속되었던 모리 가문이 아마고 가문으로 자리를 옮긴다. 아마고 쓰네히사는 모리 가문의 당주 모리 고마쓰마루(毛利幸松丸)의 후견인이었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를 이용해 오우치 가문의 아키 경영의 거점이었던 가가미야마 산성을 공략하는 등 잠시나마 오우치 가문을 압도했다. 이렇게 되자, 요시오키는 다이에 원년 (1521년)부터 아키, 이와미로 진격해 해마다 아마고 가문과 싸우지만, 생각하는 만큼의 전과는 없었다. 그러나, 다이에 4년 (1524년) 아키 이쓰쿠시마섬으로 진격해 사토카나 산성 공방전에서 아마고 군을 격파하였고, 다이에 5년 (1525년)에는 모리 모토나리가 다시 오우치 가문으로 종속되었기 때문에 아키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또, 아마고 가문도 산인방면에서 야마나 가문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미에서도 세력을 잃었다. 게다가 규슈 북부에서도 쇼니 스케모토(少弐資元)와의 전투의 전황도 유리했다. 교로쿠 원년 (1528년) 아키 가나야마 산성 공격중 병으로 쓰러져, 야마구치로 돌아온 직후 병사하였다. 향년 52세. 묘소는 야마구치 시 료운지터(凌雲寺跡)에 있다. 가독은 적자 오우치 요시타카가 계승하였다. 인물·일화 요시오키는 구게와 같은 인물로 전해지지만, 연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생애 전반을 전장에서 보낸 무장이었다. 오히려 구게와 같은 일면이 있기 때문에 교토에서 도망쳐온 구게를 야마구치로 맞아들여 조정과의 연락체계를 구축했으며, 더욱이 교토 문화를 야마구치에 꽃피운 인물로 오우치 문화를 창출해 야마구치를 서쪽의 작은 교토라고 불리었다. 오우치 가문의 전성기를 구가한 인물이다. 상락을 달성했지만, 막정에 오래 관여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영지가 너무 서쪽에 치우쳐 있고, 호족들의 연합맹주로써의 한계도 있다. 이 때문에 요시오키가 천하 패자로 군림한 기간을 길지 않다. 무역 조선과 명나라과의 무역은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1506년 (연산군 12년) 조선에서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일본과의 무역은 배타적으로 변했다. 물품의 양과 가격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무역으로 인한 이익이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무역에대한 실익이 별로 없자 요시오키는 선대에서 해왔던 방법으로 자신은 백제왕의 후손이며 종례에 따라 특혜를 받고자 하였다. 하지만, 성과는 얻지 못했고, 더욱이 1510년 (중종 5년) 에 일어난 삼포왜란으로 조선과의 무역은 더욱더 어려워졌고 실익도 없었다. 그리고, 1508년 쇼군을 옹립 막정을 장악한 요시오키는 호소카와 가문이 해왔던 명과의 무역도 독점한다. 하지만, 1523년 호소카와 가문이 이에 대항하여 명나라에서 오우치 가문과 대립끝에 오우치 가문의 사신이 죽고 민가가 불탔으며 게다가 이 일로 인해 명나라 관료까지 죽게 된다. 이를 닝보의 난(寧波의 亂)이라고 한다. 닝보의 난으로 오우치 가문과 명국 사이의 무역은 잠정 중단되게 되었다. 계보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가 오우치 가문의 시조라고 전해진다. 족보를 잃어버려 백제왕의 후손이 맞느냐는 의심을 받자 그는 조선 왕 정종 (조선)에게 우리 집안이 백제에서 건너온 것을 입증하는 자료를 부탁한다는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어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 정종실록 1년 7월 10일 중에서 일본에 정착한 임성태자의 후손이 스오국 다타라하마에 기착해 오우치무라에 살았기 때문에 성(姓)은 다타라 (多多良), 씨(氏)는 오우치(大內)로 했다고 전해진다. 가족 친척 오우치 마사히로(大內政弘, 오우치 씨의 제29대 당주, 부친) 오우치 요시오키(大內義興, 오우치 씨의 제30대 당주) 오우치 요시타카(大內義隆, 아들)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의 부인(딸) 오우치 요시나가(大內義長, 외손)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鎭, 외손):어머니가 아소 고레노리(阿蘇惟憲)의 딸이라는 이설이 있다. 오우치 다카히로(大內隆弘, 동생) 인척 나이토 히로노리(內藤弘矩, 장인) 나이토 히로노리의 딸 (부인) 요시오키의 이름을 받은 인물들 오우치 요시오키(大內義興) 깃카와 오키츠네(吉川興経) 고바야카와 오키카게(小早川興景) 스에 오키후사(陶興房) 나이토 오키모리(內藤興盛) 모리 오키모토(毛利興元) 같이 보기 백제 성왕 백제 위덕왕 임성태자 오우치씨 오우치 노스케 오우치 요시타카() 깃카와 오키츠네() 고바야카와 오키카게() 스에 오키후사() 나이토 오키모리() 모리 오키모토() 나이토 히로노리 오토모 요시아키 닝보의 난 도요타 각주 1477년 출생 1529년 사망 오우치씨 센고쿠 다이묘 슈고 다이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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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코 단돌로
엔리코 단돌로(, , , 1107년? – 1205년)는 1193년부터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였고 제4차 십자군의 비잔티움 제국의 침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생애 배경과 도제 선출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유력한 법률가 가문의 비탈레 단돌로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려져있지 않다. 엔리코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외교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었고 1172년에 비잔티움과 베네치아 사이에 불화가 생겼을 때 공화국의 사절단으로 비잔티움 제국으로 가서 황제 마누엘 콤네누스와의 실패한 강화협상에 참가하기도 했다. 일설에 의하면 엔리코 단돌로는 이때 실명을 당했다고도 하며 이 때부터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깊은 적개심을 가졌다고 한다. 단돌로는 두번이나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2세의 베네치아 대사로 파견되었고 언제나 베네치아의 이익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1193년 1월 1일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39대 도제로 선출되었다. 이때 이미 시력을 잃고 노인이었으나 단돌로는 놀라운 정신력과 체력으로 야심만만하고 정렬적으로 일했다. 제4차 십자군 1202년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를 비롯한 일단의 십자군 기사들이 베네치아를 방문하여 십자군원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단돌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베네차아의 이익을 취하기로하고 십자군에게 베네치아의 선단을 빌려줌과 동시에 베네치아군도 출진하기로 하였다. 원래 십자군의 의도는 성지의 이슬람 세력의 배후인 이집트를 공격하는 것이었는데 베네치아는 이집트와의 무역을 더 중시하고 있었다. 단돌로는 원래 인원의 3분의 1밖에 오지 않아 베네치아 배의 수송비를 대지 못하고 있는 십자군에게 베네치아의 무역 기지였다가 얼마전에 헝가리 왕국에 반란을 일으킨 자라를 되찾아줄 것을 제의했고 십자군은 자라를 공격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은 이미 기독교 왕국이었기 때문에 십자군이 같은 기독교를 공격한 것에 대하여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십자군 전체를 파문해 버렸다. 십자군은 사절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여 파문을 풀었지만,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는 베네치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돌로는 자라를 정복한데 만족하지 않고 다시한번 십자군을 베네치아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조정했다. 다음 목표는 바로 비잔티움 제국의 부유한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 비잔티움의 망명 황태자 알렉시우스 앙겔루스 또는 알렉시오스 앙겔로스는 자신의 삼촌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눈이 먼 아버지 이사키우스 앙겔루스 또는 이사키오스 앙겔로스의 복위를 십자군에 제의했고 단돌로는 십자군을 설득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게 했다. 1203년 6월 십자군과 베네치아 연합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공성전을 시작했는데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좀처럼 정복할 수 없었다. 이때 장님에다 노인인 단돌로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병사들의 상륙을 지휘하고 자신이 직접 산마르코 깃발(베네치아 공화국의 상징)을 땅에 꽂았다. 라틴제국과 죽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십자군은 알렉시우스 4세에게 배상금을 요구했고 결국 알렉시우스는 반란으로 쫓겨났다. 1205년 초, 십자군은 엔리코 단돌로의 선동으로 다시한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고 이번에는 엄청난(약탈 정도는 당시의 평균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나, 절대적 수치로는 엄청난 양이었다) 학살과 파괴, 약탈을 자행하고 라틴 제국을 세웠다. 이 때도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했고 결국 베네치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의 8분의 3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베네치아는 십자군과 정복한 땅을 거래하여 크레타 등의 무역 기지를 얻는다. 또한 단돌로는 라틴 제국의 초대황제의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자신이 황제가 되면 공화국에게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 후보가 되지 않았으며, 동료 베네치아인들을 설득해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를 제치고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황제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일들을 마치고, 단돌로는 병에 의해 자신의 고국 베네치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에 묻혔다. 평가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인물 중 하나로 중세의 베네치아를 빛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엔리코 단돌로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십자군 원정 당시 이미 팔순의 노인에다 장님이 된 상태에서 십자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나 당시 가장 부유하고 큰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로마 제국의 8분의 3을 소유한 영주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았다. 그럼에도 베네치아에서는 이 위대한 도제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지 않았는데, 이는 공화제의 정신에 해가 가는 일은 어떤 일이든 하지 않는 베네치아의 전통에 의거한 일이었다. 그의 무덤조차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있다. 그러나 그의 애국심과 개인적인 야심으로 인해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십자군 약탈자들의 의해 파괴되고 엄청난 문명적 재앙을 겪게 되었다. 엔리코 단돌로는 이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각주 1107년 출생 1205년 사망 베네치아의 역사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동로마 제국 이탈리아의 역사 제4차 십자군 기독교인 베네치아 출신 단돌로가 12세기 이탈리아 사람 13세기 이탈리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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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몬 세이버즈의 등장인물 목록
디지몬 세이버즈의 등장인물은 디지몬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인 디지몬 세이버즈의 등장인물의 이름 및 성우진에 대한 소개글이다. 중요인물 다이몬 마사루(최건우) 성우: 호시 소이치로 / 최원형 / 마커스 데이먼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중학교 2학년 14살 소년. 생일은 작중에서도 밝혀진대로 4월 2일생인데 재밌는 점은 이 날이 디지몬 세이버즈의 제1화 방영일이라는 점이다. 오렌지색 디지바이스 iC에 닷트 제복컬러는 빨강. 싸움이라면 세끼 밥보다 좋아한다. "Rapter-1"이라 불리던 아구몬과의 만남을 통해 디지몬 사건에 관여하게 된다. 최고로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서 강한 녀석들과 싸울 수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닷트에 입대한다. 그가 얼마나 싸움을 좋아하는지는 학교가 뭐냐고 물어보는 아구몬의 질문에 싸움상대가 잔뜩 있는 곳이라고 답하는 부분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때문에 아무 생각도 없이 싸움만 생각한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면으로 가족을 매우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여동생 민지를 가장 신경써주고 있으며, 10년 전에 소식이 끊긴 그의 아버지이자 디지털 월드 탐험대의 박사인 최영재를 지금도 그리워 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준 펜던트를 갖고 있으며 그가 관련된 문제는 내버려두지를 못한다. 또, 갈곳이 없어진 한지호를 집에 데려와 돌보는 모습에서도 그런 일면을 볼 수 있다. 다른 단원들과는 달리 그는 디지소울을 자기의지로 발생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적 디지몬(구체적으로 디지털 데이터로 구성된 물질)을 주먹으로 내리침을 통해 팔에 디지소울을 발생시켜 그 힘으로 아구몬을 진화시킨다. 디지몬 크로스워즈 68화에서 실루엣이 잠깐 나왔고, 76화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아구몬 성우: 마츠노 타이키 / 이미나 건우의 파트너 디지몬. Rapter-1이라는 코드네임을 부여받고 닷트의 추격을 받고 있었다. 그렇게 닷트의 추적을 뿌리치며 도망치던 중에 우연히 만나게 된 최건우와의 싸움을 통해 최건우를 형으로 모시게 된다. 그 때문에 최건우와 아구몬의 관계는 파트너 디지몬이라기보다는 형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어드벤처에서 나왔던 아구몬처럼 식욕이 왕성하며, 특히나 오유리(최건우의 엄마)가 만들어준 달걀말이를 가장 좋아한다. 최건우 집의 아이돌을 자칭하고 있을 정도로 최건우의 가족에게 사랑받고 있다. 아구몬은 최건우 외에는 전부 경칭을 생략해서 부르는데, 특히나 최건우의 엄마인 오유리에게까지 경칭을 생략할 정도로 매우 락천적이다. 토마 H 노르슈타인 성우: 노지마 히로후미 / 양석정 / 크리스핀 모리먼 닷트의 멤버로 최건우의 라이벌이다. 14살로 최건우와 동갑. 블루 디지바이스 iC를 갖고 있다. 닷트의 제복컬러는 청색(언제나 제복 지퍼를 맨위까지 확실하게 채워두고 있다). 1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스톡홀름 왕립과학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소년. 어렸을 적에 어머니와 한국에서 살고 있었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여의고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하며 무슨 일이든 데이터를 토대로 행동하는 쿨한 면모를 보인다. 그 때문에 언제나 앞뒤 생각없이 돌진하는 최건우와 대립하고 의견출동을 일으키지만 최건우의 실력만큼은 인정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귀족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혼혈로 귀족의 피를 받은 탓인지 프라이드가 높다. 그 프라이드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랭정함을 잃는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를 여의고, 아픈 여동생에 냉전중인 아버지, 이런 가족을 갖고 있어서인지 언제나 가족들과 함께 따스한 삶을 보내는 최건우에게 질투심을 갖고 있다. 가오몬 성우: 나카이 카즈야 / 전태열 토마의 파트너 디지몬. 사이좋은 친구같은 최건우와 아구몬과는 달리 토마와는 주종관계의 모습을 보인다. 그때문에 언제나 토마를「마스터」라고 부른다. 별로 감정을 드러낸 적 없으며, 언제나 마스터인 토마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손에 끼고 있는 장갑은 그의 진화형인 가오가몬의 혈액으로 물들인 '이누미미 글러브'(양손에는 블랙 워그레이몬에게 입은 상처가 있어서 장갑으로 그것을 숨기고 있다)로, 싸울 때 꼭 필요한 장갑이다. 하지만 완전히 감정이 없는 건 아니며, 민지나 리나 앞에서는 부끄러워 한다든지 감정적인 면도 갖고 있다. 특히나 마스터인 토마를 바보취급하면 크게 화를 낸다. 마찬가지로 토마도 가오몬을 단순한 도구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 파트너로서 큰 신뢰를 갖고 있다. 무신경하게 개라고 부르면「난 강아지가 아냐!」하고 거짓말을 하는데 아무래도 콤플렉스로 보인다. 후지에다 요시노(유진) 성우: 아라가키 유이 / 배정미 / 콜린 오쇼너시 이 작품의 히로인. 닷트멤버의 홍일점을 노리고 있다. 분홍색 디지바이스 iC를 갖고 있다. 닷트 제복컬러는 자줏빛. 주요 멤버들 중에서는 가장 연장자인 18살로 최건우와 토마의 누나뻘이다. 쉽게 폭주해버리는 두사람에게 언제나 휘둘리며, 연장자이기 때문인지 고동혁 대장한테서 어려운 일들을 부탁받고 있어서 언제나 골머리를 앓고있다. 그때마다「또 골치 아프게 생겼군……」이라고 말하는 입버릇이 있다(때때로 라라몬이 흉내내기도 한다). 그리고 연장자이기 때문인지 멤버들 중에서 유일하게 운전면허가 있다. 어렸을 적에 2명의 언니들과 함께 피아노를 배웠지만 자신은 언니들과는 달리 무리라 여기며 자신을 갖지못하고 중요한 순간에 실패해버린 과거를 갖고 있다. 현재는 가족과는 떨어져 혼자서 살고 있는데, 정작 그런 그녀의 생활력은 라라몬이 말하길 매우 칠칠치 못한 듯. 라라몬 성우: 유카나 / 이재현 라일라몬의 데이터로 만든 꽃잎 마스크를 쓴, 유진의 파트너 디지몬. 매우 작은 체구이지만, 성격은 어른스러우며 유진와 함께 오페레이터일을 할 때도 있다. 유진이 어렸을 적에 유진이 친 피아노의 음색에 이끌려 인간계에 디지몬알 상태로 나타났다. 그 때문에 진화하기를 포함해 가장 오래 지낸 사이다. 아구몬・가오몬의 파트너십을 반반씩 가진 듯한 관계이며, 엄밀하게 얘기하면 인간과 디지몬의 관계를 넘어선 친구같은 사이다. 극장판에서는 평소보다도 큰 활약을 펼쳤다. 노구치 이쿠토(한지호) 성우: 쿠기미야 리에 / 조진숙 / 브리엔 시달 나이는 10살. 블랙&퍼플의 디지바이스 iC를 갖고 있다. 자신 스스로를 디지몬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은 디지털 월드 탐험대의 멤버였던 노구치 박사 부부의 아들이다. 10년 전의 어느날 어린아기였던 이쿠토는 갑자기 열린 디지털 게이트에 빨려들어가, 디지몬들과 함께 자라나게 되어 야생소년이 되어버렸다. 오래전에 자신을 키워준 부모였던 유키다루몬이 장태수가 개발한 기즈몬 AT에게 말살당하면서 인간을 깊게 증오하고 있다. 그래서 디지털 월드에 온 닷트멤버들을 적대시했지만, 차츰 마음이 바뀌기 시작해 인간계로 돌아가 마사루(최건우)와 교류하며 친부모를 만나면서 이쿠토는 자신이 디지몬인가 인간인가 큰 갈등을 갖게 된다. 그 후에 몸을 숨기고있던 다이몬 가(家)에서 오유리에게 설득되어 디지몬과 인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디지털 월드로 가서, 모든 사건의 원흉인 장태수를 쓰러뜨리기 위해 마사루의 동료가 된다. ※참고로 그의 디지바이스 iC는 닷트가 만든 것이 아닌, 다이몬 스구루(최영재)가 메르큐리몬에게 맡긴 물건이다. 팔코몬 성우: 코시로 치에 / 김성연 한지호의 파트너 디지몬. 오래전부터 한지호와 함께 유키다루몬의 손에서 자라나서, 인간인 한지호와 친근하다. 인간도 디지몬도 되지 못해 고뇌하는 한지호의 곁에서 그를 지탱해주고 있다. 조금은 겁쟁이이지만 친구인 피요몬의 디지몬알을 지키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세상에 온 적도 있다. 또, 의리심도 깊어서 적이었던 최건우와의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닷트측 세력 Digital Accident Tactics Squad의 약자로, 닷트라고 읽는다. 직역하자면 디지털위협전술부대. 인간계에 나타나는 디지몬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기밀기관에서 설립한 과학특수팀. 그들의 존재는 나라에는 비밀로 취급되고 있으며 그 존재를 알게 된 인간이 있다면 기억소거장치를 써서 기억을 삭제한다. 그때문에 닷트에 대해서도 디지몬에 대해서도 잊어버리게 되어 디지몬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10년 전에 발생한 연속실종사건의 원인을 찾기 위해「디지털 월드 탐험대」가 결성되어, 이것이 닷트의 전신이 된다. 당시의 멤버는 연구원이었던 최건우의 아버지 최영재, 후에 닷트의 대장이 된 고동혁, 마찬가지로 닷트의 소장인 유진욱, 초공간연구원인 한지호의 부모 한지섭 박사 부부, 디지몬 사건의 발단인 장태수 이렇게 여섯 명. 사츠마 렌타로(고동혁) 성우: 쿠스노기 타이텐 / 박기량 / 제이미슨 프라이스 닷트의 대장. 레드&블랙의 디지바이스 iC를 갖고 있다. 디지털 월드와 인간계를 지키는 열혈남아로 거친면모와 상냥함을 모두 갖고 있으며 미숙한 멤버들을 잘 이끌어준다. 화난 그의 외침은「귀신의 일갈」이라 불리며 닷트멤버들이 두려워하는 것중 하나. 오래전 유진욱와 함께 형사로 일했으며, 연속실종사건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디지털 월드 탐험대의 일원이 되었다. 쿠다몬 성우: 카즈라기 나나호 / 서혜정 고동혁의 파트너 디지몬. 성장기. 최영재가 디지몬과 인간의 무익한 전쟁을 막고자 전력으로서 인간계에 보낸 존재. 언제나 고동혁의 어깨에 올라타 있으며 하얀 족제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성격은 쿨하며 어른스러우며, 디지몬에 관해 정확한 어드바이스를 해준다. 혈기왕성한 최건우에게는 언제나 골머리를 앓고있다. 쿠다몬의 정체는 로열 나이츠의 하나인 슬레이프몬이며, 인간들을 감시할 목적으로 이그드라실이 보냈다. 하지만 그녀가 인간을 전멸시키기로 결정하자 이그드라실을 배신하고 인간측의 세력에 합류한다. 유시마(유진욱) 성우: 쵸 / 유강진 닷트의 소장. 록색의 디지바이스 iC를 갖고 있다. 코카트리몬과의 싸움에서 최건우에게 디지바이스 iC를 건네준다. 오래전 서울특별시 현경 특수부대소속 경부보로 10년 전에 디지털 월드 탐험대에 참가했다. 언제나 인간과 디지몬의 무익한 전쟁을 막고자 노력하고 있다. 카메몬 성우: 타카하시 나오즈미 / 박소라 / 제프 니모이 유진욱의 성장기 파트너 디지몬. 최영재가 디지몬과 인간들의 무익한 전쟁을 막기 위한 전령으로서 인간계에 보낸 디지몬 중 하나. 거북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매우 부끄럼을 타는 성격이라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난 뒤에 껍질 안에 숨어버릴 정도. 쿠로사키 미키(미키) 성우: 나가노 아이 / 이명희 / 케이트 히긴스 닷트의 오페레이터이자 폰체스몬(흑의 모습)의 파트너. 블랙&실버의 디지바이스 iC를 갖고 있다. 어른스러운 성격에 나이스한 스타일의 소유자. 이름그대로 기본적인 복장 컬러는 검정. 시라카와 메구미(메리) 성우: 하니오카 유키코 / 서유리 / 스테파니 셰이 닷트의 오페레이터이자 폰체스몬(백의 모습)의 파트너. 화이트&실버의 디지바이스 iC를 갖고 있다. 금발에 가까운 머리색을 갖고 있으며, 동안으로 꽤나 어린아이같은 행동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최건우와 비교하면 어른이다. 폰체스몬 퍼펫형 성장기 디지몬. 닷트의 오페레이터들의 파트너 디지몬이다. 흑과 백의 2마리가 있다. 언제나 오페레이팅에 전념하고 있으며, 전혀 얘기를 하지 않으며, 좀처럼 개성을 찾아볼 수 없지만, 감추어진 투구 속에는 귀여운 눈이 있다. 닷트멤버의 가족 및 협력자 다이몬 스구루(최영재) 성우: 고다 호즈미 / 최낙윤 최건우의 아버지. 직업은 박사로 디지바이스를 만든 장본인. 인간과 디지몬은 함께 살 수 있고 친하게 지낼수있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다. 초반에는 디지털 월드에서 행방불명 되었다고 되어있으나 디지털 월드에서 반쵸레오몬과 같이 행동하면서 어려운 디지몬들을 도와주고 돌봐주는 일을 해왔다. 디지몬들은 최영재박사를 보고 디지털의 수호신이다 라고 불리고 있다. 모험을 하다 로얄나이츠를 만나고 이그드라실을 만나 자신의 뜻을 말하지만 그의 조수였던 장태수박사가 그의 뜻을 부셔버리는등 이그드라실의 노여움을 샀다. 그로인해 처형을 당하는 순간 반쵸레오몬의 공격을받고 반쵸레오몬과 합체를 하게된다. 합체를 한후 그의 모습은 이그드라실이 하게되고 반쵸레오몬과 합체를 한 그는 아들 최건우를 디지털 월드에서 재회. 어려운일 있을때마다 도와준다. 다이몬 사유리(오유리) 성우: 코우다 마리코 / 리지현 최건우의 어머니. 한쪽 머리만을 길게 기른 머리모양(10년 전에는 롱헤어)이 매력포인트로 아들이 절찬할 정도로 요리(특히 달걀말이)에 능하다. 남편이 실종된 이후로 여성의 몸으로 홀로 자식 둘을 키워왔다. 남편이 돌아올때까지 강하게 살겠다고 말하는 강인한 엄마이지만, 선천적일 정도로 둔한 면모가 있어서 어떤 사건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구몬, 피요몬, 한지호, 팰코몬 등등 새로운 가족이 늘어남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따스하게 대해주며 그런 그녀의 모습에 토마도 한지호도 닫힌 마음을 허락하기도 한다. 특히나 남편 최영재가 디지몬의 연구원이었던 탓에 디지몬을 잘 알고있었지만, 아들인 최건우마저 디지털월드로 보내고 싶지 않았기에 최건우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싸움이라는 위험한 일을 하는 아들을 걱정하지만, 부모로서 그런 최건우를 말리지 않고 오히려 따스한 눈으로 지켜봐준다. 다이몬 치카(최민지) 성우: 키쿠치 코코로 / 김민정 / 크리스티 데이먼 나이는 10살. 최건우의 여동생으로 트윈테일의 귀여운 소녀. 괄괄한 성격으로 10년이 지나도 어린아이같은 오빠에, 둔한 엄마의 모습에 골머리를 앓고있는 어떻게 보면 최씨 집안의 가장 제대로 된 지식인. 하지만 아직 어려서 그런지 울고 때를 쓰는 모습도 보여준다. 10년전에는 아직 갓난아기였기에 아빠인 최영재를 사진으로 밖에 알지 못한다. 뒤늦게 피요몬을 만난다. 일반인같지만 디지바이스도 없이 피요몬을 급속하게 진화시킨 부분을 통해 최건우와 마찬가지로 강한 디지소울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노구치 켄지(한지섭) 성우: 나카 히로시 / 서원석 한지호의 아빠. 직업은 역시 박사다. 10여년전 디지털게이트를 열다가 아들 지호가 디지털게이트의 빨려들어갔다. 그로인해 아들 지호는 디지털 월드에서 쭉 자라게 되었고 결국 자신이 디지몬이라고 굳게 믿고있다. 최영재 박사와는 같은 친한 선후배 사이이다. 노구치 미스즈(백지희) 성우: 쿠마가야 니이나 / 김민정 한지호의 엄마. 머리색깔은 아들 지호랑 똑같다. 아들 지호를 과거에 잃어버린 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두 번째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난 후에는 충격에서 벗어났다. 아들 지호를 최건우의 도움으로 재회하고 다시 지호가 디지털 월드에 가겠다고 하자 결사 반대한다. 하지만 아들 지호의 굳은 다짐과 남편 한지섭박사의 말의 뜻에따라 어쩔수없이 보낸다. 하지만 아들 지호가 무사히 돌아올날만 기달리고있다. 쿠라타(장태수) 측 세력 디지몬 연구원이자 이전의 디지털 월드 탐험대의 일원이었던 장태수를 주축으로한 모든 디지몬의 말살을 꿈꾸는 집단이다. 디지몬을 죽이는 것이 아닌 소멸시켜버리는 능력을 가진 인공 디지몬과 인간과 디지몬의 융합체인 바이오 디지몬과 수많은 병사를 보유하고 있다. 쿠라타 아키히로(장태수) 성우: 키쿠치 마사미 / 이호산 디지몬 연구원이자 10년 전 디지털 월드 탐험대의 일원이었다. 10년 전 디지몬의 폭력성을 보고 악의를 품고할려는 계획을 세우고 최건우 일행에게 접근했다. 머큐리몬과 최건우가 만났을 때 본색을 드러내고 기즈몬 AT를 이용해서 머큐리몬을 해치우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벨페몬을 발견하면서부터 디지몬월드와 인간세상을 지배하려는 지배자가 되려는 야망을 갖게 된다. 하지만 최건우 일행의 저지로 마지막에 벨페몬과 융합하고 최건우 일행이 벨페몬을 쓰러뜨리자마자 분리되지만, 마지막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츠바사 코우키(카일) 성우: KENN / 서원석 장태수의 부하. 자신의 의지로 직접 참여한 디지몬과 인간의 DNA를 합치는 실험에 참가하여, 디지바이스를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디지몬으로 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실험에 참가한 이유는 불명. 최건우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으며, 최건우에게 패배하자 더욱 더 강한 실험을 통해 궁극체로 진화해 최건우에게 복수하려 하지만 결국 최건우에게 패배한다. 바이오선더버몬으로 진화한다. 나나미 성우 : 오노 료코 / 은정 장태수의 부하. 자신의 의지로 직접 참여한 디지몬과 인간의 DNA를 합치는 실험에 참가하여, 디지바이스를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디지몬으로 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단순히 디지몬을 죽이는 것을 재미로 생각하고 있으며 토마와 비슷할 정도의 두뇌를 가진 천재다. 같은 천재이기 때문에 고독한 토마를 동정하며 같은 편으로 회유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바이오코아틀몬으로 진화한다. 이안 성우: 호시노 타카노리 / 심정민 장태수의 부하. 자신의 의지로 직접 참여한 디지몬과 인간의 DNA를 합치는 실험에 참가하여, 디지바이스를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디지몬으로 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자신의 동생들을 먹여살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실험에 참가한다. 흰색의 짧은 머리를 한 덩치 큰 사내로, 과묵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종종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말해버리는 바보같은 면이 있다. 유진을 좋아하고 있어 사랑을 방해하는 로제몬을 없애려 하지만 패배한다. 바이오스테고몬으로 진화한다. 디지털 몬스터 일본의 애니메이션 등장인물 목록 디지몬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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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969%EB%85%84%20%EC%9D%BC%EB%B3%B8%20%EC%8B%9C%EB%A6%AC%EC%A6%88
1969년 일본 시리즈
1969년 일본 시리즈()는 1969년 10월 26일부터 11월 2일까지 열린 일본 프로 야구의 일본 시리즈 경기이다. 센트럴 리그 우승 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총 6차례의 접전을 펼친 끝에 퍼시픽 리그 우승 팀 한큐 브레이브스를 누르고 4승 2패의 성적을 기록, 5년 연속 11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감독 경기 일정 1차전 : 10월 26일 2차전 : 10월 27일 3차전 : 10월 29일 4차전 : 10월 30일 5차전 : 10월 31일 6차전 : 11월 2일 경기 기록 일본 시리즈 경기 결과 1차전 10월 26일 -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2차전 10월 27일 -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연장 10회) 3차전 10월 29일 - 고라쿠엔 구장 4차전 10월 30일 - 고라쿠엔 구장 5차전 10월 31일 - 고라쿠엔 구장 6차전 11월 2일 -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수상 선수 MVP·타격상 : 나가시마 시게오(요미우리) 감투상 : 나가이케 도쿠지(한큐) 최우수 투수상 : 다카하시 가즈미(요미우리) 기능상 : 다카다 시게루(요미우리) 우수 선수상 : 아다치 미쓰히로(한큐) 외부 링크 1969년 일본 시리즈 경기 결과(일본야구기구 공식 기록) 1969년 야구 프로 야구 일본 시리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큐 브레이브스 1969년 10월 1969년 11월
199507
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A6%B0%EB%B2%A0%EC%9D%B4
그린베이
그린베이(Green Bay)는 미국 중서부 위스콘신주의 북동부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 100,353(2006)인 이 도시에는 유통업과 도매업이 발달하였고, 위스콘신 주의 공업 제품과 낙농 제품을 선적하는 오대호 연안의 중요한 항구 도시이다. 역사 원래 위네바고족 인디언이 살았다고 한다. 1634년에 프랑스 사람에 의해 물물 교역소를 세워진 이후 프랑스와 캐나다 간 모피거래가 이루어졌는데, 당시 영국인 거래상이 그린베이라고 부른 것이 현재의 도시 이름이 되었다. 1812년에 미국과 영국간 일어난 전쟁 이후, 미군이 1816년에 하워드 요새를 건설하며 미국 영토가 되었다. 1820년대에 납 광산 채굴이 호황을 이루며 점차 발전해 1829년에 도시 계획이 이루어졌고, 1854년에 시로 승격된다. 스포츠 그린베이는 미국의 중소 도시 중 유일하게 4대 프로 스포츠의 메이저 팀을 보유한 도시로, 프로미식축구(NFL) 그린베이 패커스의 연고지이다. 그린베이 패커스는 1921년 NFL에 속한 이후 계속해서 그린베이에 연고지를 둔 강팀으로 이 도시에서 인기가 매우 높다. 관광 미국 국립 철도박물관 헤리티지힐 주립공원 위스콘신 주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임을 기념하는 공원 인구 기후 각주 내용주 외부 링크 그린베이 시 공식 홈페이지 위스콘신주의 도시 미국의 항구 도시 위스콘신주의 군청 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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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B%9D%BC%EB%A7%8C%EB%8B%A4
사라만다
《사라만다》(, )는 일본 코나미사의 슈팅 게임으로, 1986년에 제작되었다. 전작인 그라디우스에서 파생된 사라만다 시리즈의 최초판으로, 다른 갈래의 후속작인 그라디우스 2나 그라디우스 II보다 앞서 제작되고 시판되었다. 분신 공격과 엔딩 후 난이도 상승 등 많은 면에서 그라디우스를 답습하고 있으나 다른 점도 많다. 이후 사라만다를 변형한 게임 《라이프포스》(Lifeforce)가 1987년에 제작되었다. 그 전에 사라만다와 같은 해인 1986년에 제작된 유럽 및 북아메리카판의 라이프 포스는 단순히 사라만다에서 이름만 바꾼 것이다. 반면, 1987년에 제작된 일본판 라이프포스는 그라디우스의 파워업 방식을 도입하였고, 스테이지의 모든 배경요소(화산, 기지 제외)도 생명체로 바꾸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1P인 빅 바이퍼와 2P인 로드 브리티쉬의 파워업 게이지의 순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간략한 게임 설명 최초의 사라만다를 기준으로 설명한다. 전작 그라디우스와 다른 점 죽으면 특정 지점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바로 살아난다. 이때 분신이 떨어져 나가는데, 살아날 때 떨어진 분신을 잡아 바로 장착할 수 있다. 스테이지에 따라 종·횡이 바뀐다. 파워업 파워업 개념은 그라디우스와 전혀 다르다. 붉은 색의 작은 적군(편대 포함)을 잡으면 아이템이 나오는 것은 같으나, 게이지에 의한 파워업을 하지 않는다. 파워업의 종류가 미리 정해져서 각기 다른 모습을 한다. 아래와 같은 6가지 파워업 중 하나가 제공된다. Speed Up : 전작과 같이 속도가 1단계씩 올라간다. 하지만 전작보다 속도 증가폭이 크다. Missile : 미사일을 발사한다. 전작과는 달리 위아래 또는 양 옆으로 두 개가 동시에 기어간다. 스테이지 4와 스테이지 6에서는 땅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Ripple : 고리형의 레이저를 발사한다. Cyclone Laser : 전작의 레이저와 같다. Option : 전작과 마찬가지로 분신공격을 한다. Shield (Force Field) : 전작과 마찬가지로 전방을 방어한다. 스테이지 아래와 같이 6개가 존재한다. (괄호 안은 스크롤 방향임.) 스테이지 1 : 생명체 내부 (횡) 스테이지 2 : 우주 공간 (종) 스테이지 3 : 화염 (횡) 스테이지 4 : 화산+소형기지 (종) 스테이지 5 : 우주 공간 (횡) 스테이지 6 : 본기지 (종) 배경 음악 패밀리 컴퓨터판 배경 음악 평가 각주 아케이드 게임 그라디우스 횡스크롤 슈팅 게임 일본의 비디오 게임 1986년 비디오 게임 암스트래드 CPC 게임 코모도어 64 게임 모바일 게임 MSX 게임 패밀리 컴퓨터 게임 플레이스테이션 4 게임 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 게임 샤프 X68000 게임 PC 엔진 게임 ZX 스펙트럼 게임 협동 비디오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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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C%EB%A6%AC%EC%95%BC%20%ED%8E%98%ED%8A%B8%EC%BD%94%EB%B9%84%EC%B9%98
일리야 페트코비치
일리야 페트코비치(, 1945년 9월 22일 ~ 2020년 6월 27일)는 세르비아 출신의 축구인이다. 전 경남 FC 감독이다. 지도자 경력 일리야 페트코비치는 1990년 자신이 선수로써 뛴 세르비아의 OFK 베오그라드에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하였다. 1993년 스위스의 세르베트 FC를 거친 이후, 1998년 일본의 아비스파 후쿠오카를 시작으로, 2001년 중국의 상하이 선화 및 2002년 쓰촨 다허, 2009년 인천 유나이티드 FC 등 극동아시아 프로축구팀에서 고루 지휘봉을 잡았다. 특히 상하이 선화의 경우 하위권 팀을 단숨에 리그 2위로 끌어 올리면서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 받았다. 이후 2002년 한·일 월드컵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를 거쳐, 2006년 독일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짠물 수비를 내세워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축구 국가대표팀을 예선 1위로 본선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본선에서는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를 만나는 바람에, 3패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페트코비치는 2009년 성적 부진의 위기에 빠진 인천 유나이티드 FC의 제 3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인천에 가기 전에는 강원 FC의 감독으로 간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국가대표팀 감독을 뽑겠다는 강원 FC의 방침 하에 결국 인천 유나이티드 FC로 오게 되었다. 페트코비치가 인천 유나이티드 FC에서 3개월 간 기술고문으로 활동한 후 감독 선정을 최종적으로 선택한다고 했으나 영입 직후부터 감독의 모든 권한은 사실상 페트코비치 감독에게 있었고, 얼마 후 인천 유나이티드 FC의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감독 부임 첫 시즌인 2009 K-리그에서 정규 리그를 5위로 마감하며 팀을 K-리그 챔피언십에 올려놓았지만 K-리그 챔피언십에선 첫 경기인 4위 성남 일화 천마에 승부차기 끝에 패하여 탈락하였다. 부임 이후 총 1년 6개월 간 인천 유나이티드 FC의 지휘봉을 잡았다가, 2010년 6월 8일, 아내의 지병 악화를 이유로 인천의 감독직에서 사임하였다. 페트코비치는 약 1개월 뒤 7월 1일, 카타르의 알아흘리 도하의 감독에 취임하였다. 2013년 5월 29일 성적 부진으로 사퇴한 최진한 감독과 송광환 감독 대행의 뒤를 이어 경남 FC의 4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부진을 면치 못하며 경남 FC는 K리그 챌린지로 강등될 위기에 처하였고 시즌을 11위로 마감하며 가까스로 자력 잔류를 확정하였으나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됐다. 그 자리는 이차만 전 부산 대우 로얄즈 감독으로 대체되었다. 이후 세르비아 U-20 국가대표팀을 마지막으로 지도자에서 은퇴하고 베오그라드 축구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코로나19 합병증으로 2020년 6월 27일에 타계했다. 각주 외부 링크 Petković's profile on the official FIFA world cup website 1945년 출생 2020년 사망 남자 축구 미드필더 유고슬라비아의 남자 축구 선수 크로아티아의 남자 축구 선수 세르비아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유고슬라비아의 축구 감독 세르비아의 외국인 축구 감독 OFK 베오그라드의 축구 선수 트루아 AC의 축구 선수 OFK 베오그라드의 축구 감독 세르베트 FC의 축구 감독 아비스파 후쿠오카의 축구 감독 아리스 FC의 축구 감독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상하이 선화의 축구 감독 쓰촨 관청의 축구 감독 인천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감독 알아흘리 (도하)의 축구 감독 경남 FC의 축구 감독 1974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2006년 FIFA 월드컵 참가 감독 프랑스의 외국인 남자 축구 선수 UEFA 유로 1968 참가 선수 유고슬라비아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대한민국의 외국인 축구 감독 중국의 외국인 축구 감독 그리스의 외국인 축구 감독 스위스의 외국인 축구 감독 크닌 출신 크로아티아의 해외 진출 남자 축구 선수 경남 FC의 코칭스태프 카타르의 외국인 축구 감독 세르비아의 축구 감독 리그 1의 축구 선수 K리그1의 축구 감독 인천 유나이티드 FC의 코칭스태프 대한민국에 거주한 세르비아인 중국에 거주한 세르비아인 그리스에 거주한 세르비아인 스위스에 거주한 세르비아인 카타르에 거주한 세르비아인 세르비아에서 코로나19로 죽은 사람 20세기 세르비아 사람 21세기 세르비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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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3%88%EB%AA%AC%20%EB%A7%A4%ED%95%91
새몬 매핑
새몬 매핑()은 고차원 자료를 저차원으로 사상하는 알고리즘이다. 새몬 사상 또는 새몬 사영()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보통 영어를 그대로 쓴다. 이 알고리즘은 그래프 그리기에도 응용된다. 새몬 매핑은 새몬 압력이라고 하는 아래 오차 함수의 값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는 원래 공간에서 i번째와 j번째 개체 사이의 거리이고, 는 사영된 뒤의 거리이다. 실제 계산을 할 때는 새몬이 원래 논문에서 제안한 대로 기울기 하강()법을 주로 쓰지만,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다. 소프트웨어 새몬 사영은 통계 컴퓨팅용 언어인 R의 MASS 패키지와, MATLAB의 패키지인 SOM toolbox에서 지원한다. 참고 문헌 참고 다차원 스케일링 그래프 그리기 함수와 사상 차원 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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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B9%EA%BD%81%EC%9D%B4
맹꽁이
맹꽁이는 맹꽁이과에 속하며 몸길이는 4~4.5cm 정도로 몸통은 뚜렷하게 팽대되어 있어 몸의 거의 대부분을 이룬다. 주둥이는 짧고 작으며, 맨끝이 약간 둔하면서 뾰족하고, 아랫입술보다 약간 앞쪽으로 돌출돼 있다. 특징 울음주머니는 아래턱 앞쪽 끝에 하나 있으며, 혀의 아래쪽 가장자리에 비교적 큰 숨구멍이 세로로 줄지어 있다. 몸의 등면은 황색 바탕에 연한 청색을 띠고 있고, 배면은 황색 바탕에 옆쪽에 연한 흑색의 얼룩무늬가 있다. 장마철이 되면 땅 위로 나와 짝짓기를 한 후 알을 낳는다. 맹꽁이 역시 다른 개구리와 마찬가지로 울음소리로 암컷을 유인한다. 맹꽁이의 울음소리는 매앵~꽁 과 같은 소리이다. 알은 산란 직후에는 1mm 정도의 공 모양으로 4개 정도가 서로 붙어 한덩어리를 이룬다. 한 마리가 1회에 15-20개의 알을 15-20회 걸쳐서 낳는다. 산란된 알은 28-30시간 만에 부화되고 30일 정도 되면 변태가 끝난다. 생태 천적에게 위협받으면 맹꽁이는 복어처럼 몸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등에서 끈끈한 점액을 내뿜는다. 한국양서류보존네트워크에서 전국적인 맹꽁이 산란 조사와 모니터링, 장마철 산란 자료수집을 하고 있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에 처해져 법적 보호를 받고 있다. 맹꽁이는 장마철에 만들어진 웅덩이나 고인 물에 산란하므로 다른 개구리류에 비해 변태과정을 빨리 거친다. 연중 땅 속에서 생활하다가 밤중에 지표로 나와 먹이를 잡아먹는다. 맹꽁이와 같은 속에 속하는 열대산 아시아맹꽁이는 애완동물로 키워진다. 사진 갤러리 참고 자료 외부 링크 맹꽁이 - 멸종위기 야생생물 포털 맹꽁이과 한국의 양서류 1908년 기재된 양서류 중국의 양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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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성 (1913년)
김학성(金學成, 일본식 이름: 金井成一 가네이 세이이치, 1913년 8월 10일 ~ 1982년 11월 20일)은 1968년 영화 촬영감독 분야에서 은퇴한 대한민국 영화 촬영기사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사이다. 그는 여배우 최은희의 1번째 前 남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생애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였다. 지난날 한때 평안남도 평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그 후 경상북도 경주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가세가 몰락하여 누나 손에서 자랐다. 김학성의 누나는 한국 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간 영화 배우 김연실이며, 형 김학근은 우미관 변사였다. 형과 누나의 영향으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5년경부터 경성촬영소에서 근무하면서 도제 경험을 쌓다가 일본에 유학하여 영화 촬영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3편의 일본 영화를 촬영하고 귀국한 뒤, 1939년 방한준이 연출한 《성황당》 촬영을 맡으며 조선 영화계에 데뷔했다. 데뷔작부터 깨끗한 화면으로 장래가 촉망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 말기로 친일 영화가 대거 제작되었는데, 그도 국책 영화인 《집없는 천사》(1941), 《풍년가 》(1942), 《거경전》(1944)을 촬영하여 잇따라 세 편의 친일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 《새로운 맹서》(1947)로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이 영화는 연극 배우로 활동하던 최은희가 영화계에 데뷔한 작품이다. 김학성은 《새로운 맹서》를 찍으며 최은희와 만나 그해 결혼했다. 김학성에게는 재혼이었다. 그러나 나이 차이가 13년인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최은희에 따르면 결혼 자체가 어린 나이에 얼떨결에 이루어진 것으로, 전처 소생의 아이까지 키워야하는 힘든 여건 속에서 김학성이 술 먹고 나서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삐그덕거리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최은희가 북조선으로 납치되었다가 탈출해 돌아오는 파란만장한 사건을 계기로 사실상 종료되었다. 전쟁 중 김학성의 종군하여 미군 공보원의 촬영기사로 근무하면서 기록 영화를 찍다가 《정의의 진격》 촬영 도중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한국 전쟁이 종전된 뒤 최은희가 신상옥과 결혼하자 간통죄로 두 사람을 고소하기도 했으나, 신상옥과 최은희가 법적으로 혼인신고가 되어있지 않아 간통죄는 성립하지 않았다. 다만 후배에게 부인을 빼앗긴 김학성은 영화계 선후배들의 동정을 받았고 신상옥과 최은희는 한동안 따돌림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1958)을 비롯하여 유현목 연출의 《오발탄》(1961), 마지막 작품이 된 《아리랑》(1968) 등 10여 편의 영화를 남겼다. 한국영화기술자협회의 제4대 회장을 역임했다. 같이 보기 김연실 최은희 참고 자료 각주 외부 링크 1913년 출생 1982년 사망 수원시 출신 일제강점기의 영화 촬영기사 대한민국의 영화 촬영기사 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 대한민국의 촬영 감독 대한민국의 투자가 대한민국 육군 군인 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 대한민국의 불교도 신민당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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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20E9%20s
1 E9 s
109 s 미만 1 기가초 = 32년 79.4년 - 대한민국 사람의 평균 수명(2008년 기준). 84년 -- 천왕성의 공전주기. 100년 -- 한 세기 = 3.16 × 109 초 120년 -- 인간의 예측 최대 수명(만 120세). 158년 --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의 나이. 165년 -- 해왕성의 공전주기. 187년 -- 가장 오래 산 사람의 수명. 247.7년 -- 명왕성의 공전주기. 10 기가초 = 320년 1010 s 이상 크기 정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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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8F%99%20%ED%96%89%EB%8F%99%20%ED%8F%89%EA%B0%80%EC%B2%99%EB%8F%84
아동 행동 평가척도
아동 행동 평가척도(Child Behavior Checklist, 약칭 CBCL)는 아동 및 청소년의 사회 적응 및 정서행동 문제를 평가하는 데 세계 여러 나라가 사용하는 유용한 임상도구이다. 아동 및 청소년의 정서·행동 장애의 문제를 진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는 대상 아동 및 청소년의 정서·행동적 문제가 학교에서 자신의 학업 성취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에게도 문제가 되어 학교 생활이 더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해 학습지도 전에 미리 그 아동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중재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동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에 사용하는 평가도구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아동과 청소년을 평가하기 위해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이 바로 아동·청소년 행동평가척도이다. CBCL 도구의 특징 다수의 임상집단의 자료를 요인 분석하여 경험적 방법으로 구성된 임상척도를 사용하여 행동평가 자료를 요약하도록 되어 있다. 광범위한 정상집단의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분석하여 이를 기초로 규준을 작성함으로써, 이를 실제로 적용하여 아동을 평가하는 데에 중요한 지침을 마련해 주고 있다. 정서·행동문제의 평가와 동시에 사회능력척도를 제작하여 정서·행동문제뿐만 아니라 아동의 사회적응능력에 대한 평가도 병행하고 있다. 다축적 평가를 전제로 하고 있다. K-CBCL K-CBCL(Korea-Child Behavior Checklist)은 미국의 심리학자인 아헨바흐(Achenbach)와 에델브록(Edelbrock)이 1983년에 개발한 CBCL(Child Behavior Checklist)을 대한민국에서 오경자,홍강의,이혜련등이 1990판으로 번역하여 표준화한 평가도구이다. 원래의 CBCL은 4~18세 학생을 대상으로 부모가 평가하는 CBCL/4-18, 유아용인 CBCL/2-3, 교사 보고형, 11~18세 청소년을 위한 청소년 자기보고형, 그리고 학령기 아동의 교실에서의 행동을 10분간 관찰한 후 관찰자가 완성하는 직접관찰형이 포함된다. 그러나 K-CBCL은 19세의 연령이 대한민국에서 특수상황인 고3의 연령이므로 표준화에 어려움이 있어 이를 제외하고 4세부터 18세까지의 아동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성별(남, 여)과 연령(4-11세, 12-18세)에 따라 총 네 그룹으로 표준화하였다. 구성 K-CBCL은 가장 최근 판인 1991년의 CBCL(Achenbach)을 기초로 하여 크게 사회능력 척도와 문제행동증후군 척도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능력 척도는 친구나 또래와 어울리는 정도, 부모와의 관계 등의 사회성을 평가하는 사회성(Social) 영역, 교과목 수행정도, 학업수행상의 문제 여부 등을 평가하는 학업수행(School) 영역이 있고, 두 영역을 합하여 산출한 총 사회능력 평가점수가 높을수록 정상범위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은 점수가 높아 부적편포로 나타난다고 한다.) 반면, 문제행동증후군 척도는 119개 항목이 3점 척도로 평가되어 점수가 낮을수록 문제의 정도가 약함을 나타낸다. (정적편포를 나타낸다.) 문제행동 증후군은 다시 내재화와 외현화로 나뉘며, 두 합계점수와 문제행동증후군의 여덟 영역을 합하여 전체 점수를 합산한후 CBCL 메뉴얼에 따른 프로파일을 연결해볼 수 있다. 문제행동증후군의 8개 영역은 공격적인 행동(Aggressive Behavior),불안/우울(Anxious/Depressed) 주의집중(Attention Problems),규칙을 위반하는 행동(Rule-Breaking Behavior),신체적 불만(Somatic Complaints),사회적 문제(Social Problems),사고 문제(Thought Problems),정서불안정(Withdrawn/Depressed)척도로 구성되어있다. 방법 K-CBCL은 대상아동의 부모가 평가하는 것으로 부모가 부재하는 경우 아동을 잘 아는 사람이 평가하며, 개인검사의 소요시간은 평균 15~20분이다. 집단으로 실시할 경우에는 배부하고 난 다음 날 회수하는 방식으로 실시할 수 있다. 이때 주의할 점은, 검사 시작 전에 검사 목적과 결과의 용도 및 검사결과의 사용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신뢰도 높은 결과를 위해 각 문항에 빠짐없이 체크하도록 해야 한다. 채점 및 프로파일 작성 사회능력 척도의 채점은 각 문항의 채점기준에 근거하여(요강의 부록에 제시되어 있음) 채점하고, 영역별로 평균을 구한다. 문제행동 증후군 척도는 하위 척도별로 평정된 점수를 합하여 원점수를 낸다. 부록에 있는 규준표(이것은 성별, 연령별로 제시되어 있음)에서 사회능력 및 문제행동증후군의 원점수로 표준점수(백분위, T점수)를 구한다. 표준점수로 프로파일을 작성한다. 사회능력 척도는 사회성척도와 학업수행척도의 표준점수인 T점수가 30 이하이면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며 총 사회능력척도의 T점수가 33점 이하이면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반면, 문제행동 증후군 척도는 총 문제척도의 T점수 63 이상(90% 이상), 각 문제증후군의 T점수 70 이상 (97% 이상)이 주의 대상이다. 정리 이 도구는 그래프 형식의 프로파일이 준비되어 있어 문제행동 증후군의 어느 영역이 가장 문제가 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용하기 편리하고 시간이 적게 들며, 비교적 포괄적이고 안정된 척도로 구성되어 있다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아동에게 중재를 함에 있어서 검사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동과 밀접한 부모 및 교사의 지속적인 관심과 판단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같이 보기 웩슬러 성인 지능 검사(WAIS) MMPI 신경심리검사 로샤검사 K-PRC 사회성숙도검사(SMS) 주제통각검사(TAT) 집-나무-사람 검사(HTP) 밴더도형검사(BGT) 진로탐색검사 참고 특수교육평가, 이승희, 학지사 아동 및 청소년 정신병리의 진단평가, David Shaffer 외, 학지사 특수아동 진단 및 평가, 이나미, 집문당 임상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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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B%90%ED%98%B8
원호
원호에는 다음 뜻이 있다. 원호(圓弧)는 원둘레의 일부분을 말한다. 실존 인물 원호(元豪, ? ~ ?)는 조선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원주. 원두표의 할아버지이다. 원호(元昊, 1397년 ∼ 1463년)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원주. 원호(元號)는 연호의 별명이다. 원호는 힙합그룹 몬스타엑스의 전 멤버이다. 가공 인물 게이트의 등장인물 막걸스의 등장인물 리미트의 등장인물 메소드의 등장인물 새앙쥐 상륙작전의 등장인물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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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88%EB%93%9C%EB%9D%BC%EC%B9%B4
슈드라카
슈드라카(Śudraka)는 고대 인도의 극작가이다. 산스크리트극(劇)인 《흙으로 된 작은 수레》의 작자로서 100세의 장수를 누린 학식·덕망을 겸비한 왕이었다고 전하나 전기는 분명한 것이 없다. 《흙으로 된 작은 수레》는 바사(Bhāsa)의 미완성 희곡 《차르다타》를 부연(敷衍)하여 10막(幕)의 극으로 꾸민 것이다. 그 내용은 영락한 상인과 유녀(遊女)와의 사랑을 중심으로 엮어진 시민극(市民劇)으로 산스크리트 희곡 중 이색적인 걸작이다. 생몰년 미상 인도의 극작가 인도의 시인 고대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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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1870년)
김명준(金明濬, 일본식 이름: 金田明가네다 아키라, 1870년 양력 10월 26일 ~ ?)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대한제국의 관료이며, 일제강점기의 사회 운동가, 교육자, 언론인,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다. 일제 강점기 초반 교육 계몽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구한 말 관료생활 재직 중에도 대한자강회, 서우학회, 서북학회, 대한협회 등 교육, 계몽단체에도 참여해 활동했고, 안중근 사건과 105인 사건 등으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921년 민원식, 한영원 등과 함께 국민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민원식의 사후 국민협회를 이끌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886년(고종 23년) 12월 향시 과거에 병과로 급제한 후 승정원, 성균관에서 근무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홍문관시강과 중추원 부참의, 강동군수를 역임했다. 한때 일진회에도 가담하였다. 1910년(융희 4) 10월 한일 합방 조약 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서우학회, 서북학회, 대한협회, 신민회 등 계몽단체에서도 활동했으며, 한일합방 직후에는 교육계에 투신하여 오산학교, 중앙학회, 진명여고보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국민협회의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었고 곧 협회 총무에 선출되었으며, 1921년에는 부회장이었다. 민원식의 사후 한영원 등과 국민협회를 이끌었고, 다른 회원들이 탈퇴한 뒤에도 계속 국민협회를 유지하였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가담하여 활동했고, 1945년 4월 일본 상원 귀족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8월 10일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이 해방되었다. 1947년 중앙신문사 사장이 되었다. 6.25 전쟁 직전 무렵까지도 생존해 있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활동, 행적은 미상이다. 생애 초기 활동 생애 초기 1870년(고종 7년) 10월 26일 경기도 한성부 서서(西署) 적선방([후대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적선동)에서 김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평안남도 평양부가 출생지라는 설이 있다. 출생년대도 불확실하여 일설에는 1872년(고종 9)생 설이 있다. 아버지 김석인은 성리학자로 성균관유생이었으며 감역과 첨지를 역임했다. 한학자 집안에서 자라 유교 성리학을 신봉했던 그는 한때 불교로 개종했다가, 1920년대 중반 다시 유교 성리학으로 종교를 바꾸었다. 그의 유년시절에 대한 행적은 미상이며 1876년(고종 13년) 3월 3일 향학당(鄕學堂)에 입학하여 성리학을 수학했다. 소년시절에 신식 학교의 진학을 원하였지만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고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다. 구한 말 관료 생활 1886년(고종 23년) 12월 13일에 과거 향시 평안도 도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87년 3월 17일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를 지냈다. 3월 25일 의원면직했다. 5월 30일 승정원주서 조병건(趙秉健)이 병으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자 다시 승정원가주서에 임명되었지만 당일 사퇴하였다. 1887년 9월 27일 권지성균관학유가 되었다. 1887년 11월 성균관학유(成均館 學諭)가 되고 1888년 3월 27일 봉상사부봉사(奉常司副奉事)가 되고 3월 30일 겸 향관을 겸임하였다. 4월 4일에는 승정원 임시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에 임명되어 6월 13일까지 매일 출근, 승정원일기 작성에 참여하였다. 6월 15일 병을 이유로 승정원 임시 사변가주서직을 물러났다. 6월 23일 사직으로 입시했다가 다시 가주서에 임명되었다. 1888년 9월 승정원 가주서, 11월 4일 다시 승정원가주서가 되어 입직하고 11월 7일부터는 매일 승정원과 향실에 번갈아가며 입직했다. 1889년 1월 11일 병으로 사직했다. 1889년 1월 30일 다시 승정원 가주서로 임명되어 입직, 매일 승정원에 입직하다가 1889년 8월 24일 병으로 사직했다. 1889년 9월 7일 성균관학록2단, 11월 4일 성균관 학록에 임명되었다가 11월 5일 승정원가주서로 다시 매일 입직하였다. 11월 14일 병으로 가주서직을 사직했다. 1890년 1월 29일 창락도찰방(昌樂道察訪), 1891년 10월 15일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가 1892년 5월 26일 부사과(副司果), 1893년 6월 30일 6품으로 승진하였으나 곧 의원면직하였다. 1895년 1월 13일 중추원참의상원외랑(中樞院參上員外郞), 원외랑 등을 거쳐 관직에서 물러나 1904년 12월 공진회 부회장을 맡았다. 1905년(광무 7년) 10월 경연원시강관(經筵院侍講官), 11월 13일에 홍문관 시강관(侍講官) 판임관 4등(判任官四等)으로 승진하였지만 11월 17일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의원면직하고 물러났다. 곧 경연원시강관에 다시 제수되었으며, 1906년(광무 9) 1월 19일 정6품으로 승진, 여주비각의 비석을 영건할 때 별단(別單)으로 참여하였다. 1906년 3월 23일 승정원 가주서에 임명되억 3월 5일까지 입직하였다. 그해 4월 16일 비서감승 주임관 3등 을호 6급(奏任官三等乙號六級)에 임명되었으나 4월 19일 의원면직하였다. 11월 4일 정3품(正三品)으로 대한제국 중추원 부참의에 임명되었으며, 12월 2일 사퇴하였다. 한일 병합 조약 이전에 일진회에서 활동하였다. 계몽단체 활동과 투옥 1906년(광무 9) 1월 6일에는 윤치호, 남궁억, 최병헌, 여병현 등과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지방을의 치안은 교화가 법률보다 효과적인가(治安之方은 敎化가 勝於法律)라는 주제를 두고 토론하였다. 관료생활 중 그는 교육계몽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06년 대한자강회에 가입, 참여하였고 대한협회에도 참여, 활동하였다. 대한협회회보 1908년 4월호에는 "식산론 (殖産論)"이라는 주제의 글을 발표하였다. 1906년 3월 윤효정, 장지연, 윤치호 등과 실력 양성 운동 시민단체인 대한자강회의 창립발기인과 조직에 참여하였다. 8월에는 대한자강회 평의원이 되었다. 1906년 10월에는 박은식(朴殷植), 안병찬, 이갑(李甲), 유동열, 노백린 등과 함께 관서, 기호지방 출신 전현직 관료, 저명인사들이 조직한 교육계몽, 장학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의 창립발기인과 회원으로 참여하여 1908년 1월까지 활동하였다. 1906년 12월 1일 박은식과 함께 서우학회 기관지 서우지의 발행인, 편집인으로 참여하였다. 서우지는 1908년 8월 1일 한국통감부의 폐간령에 의해 폐간되었다. 1906년 8월 식산장려회사의 설립을 건의하고, 동시에 대한식산장려회 설립에 참여하여 회장에 선출되었다. 9월에는 대한자강회 총무에 선출되었다. 1907년 8월 21일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당하였다. 그러자 김명준은 1907년 11월 남궁억 등이 결성한 대한협회에 가입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07년(광무 10) 4월 25일 강동군(江東郡) 군수 주임관 4등 8급(奏任官四等八級)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그는 지방관으로 부임한 뒤에도 대한자강회나 서북학회, 대한협회 등에 꾸준히 활동했다. 1908년(융희 2) 1월에 한성부에서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의 인사들이 기존의 서우학회 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서북학회를 조직하자, 그는 서북학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학회 평회원이 되었다. 그 밖에 태극학회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서북학회 평의원, 4월 대한협회 특별평의회 위원과 대한협회 대외교섭위원, 1908년 5월 대한학회 찬성회 창립발기인이자 회원이 되었다. 1908년 4월 26일 사직서를 제출, 강동군수직을 의원면직으로 물러났다. 이후 삼등군(三登郡) 군수 등으로 재직하였다. 1908년 7월 서북학회 실업부 연구위원, 9월 대한학회 법률부 법칙 제정위원이 되었다. 1908년(융희 2년) 9월 군수직에서 물러났다. 1908년 9월 명도학교(明道學校) 교사가 되었다. 1908년 10월 서북학회의 단체 내 모임인 학회와 구락부 조직위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말 중앙기독교청년회 본부위원으로 중앙기독교청년회 의사부원이 되었으며, 활민노동회에 가입하여 평의원이 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여 국채보상금조사회 평의원을 역임했다. 1909년(융희 3년) 1월 서북학회 총무부원, 그해 3월 서북학회 규칙개정위원이 되었다. 1909년 중추원 부참의를 사직하고 강동군 등에서 군수로 발령되으나 곧 사퇴했다. 1909년 (융희 3년) 2월 27일에는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강연회에 김광제(金光濟), 조완구 등과 함께 연사로 참여, 그는 "선과 악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천부적인 성질 (善善 惡惡은 人의 天賦)"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09년 12월 대한협회 의사부원으로 선출됐다. 그 해 안중근 등이 만주 하얼빈 등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만주 다른 기차역에 숨어있던 우덕순 등도 체포된 안중근 사건이 발생하자, 12월 그는 안창호 등과 함께 안중근 의거 가담, 관련 혐의자로 지목되어 체포, 투옥되었다. 그러나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1910년 2월 19일 안중근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던, 안창호, 이갑 등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관직은 정2품까지 올라갔지만, 1910년(융희 4년) 10월 2일 한일 합방 조약 체결 뒤에는 관직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한일 합방 이후 활동 교육계 활동 및 3.1운동 전후 1911년 1월 오성학교(五星學校) 재단 전임이사(專任理事)가 되었고, 1911년 9월 중앙학회 부회장, 1912년 3월 사임하였다. 1911년 11월에는 사립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가 되고 동시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장려위원(奬勵委員)이 되었다. 명도학교와 오성학교, 진명여자고보 등은 신민회 사건으로 투옥되면서 중단되었다가 풀려난 뒤, 복직하여 1920년 사퇴하였다. 그는 신민회에 가입하였다가 105인 사건으로 경성부에서 이승훈, 양기탁 등과 함께 피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한일 합방 직후에는 교육계에서 활동했지만 105인 사건 이후 이규완, 민원식 등의 조선인 참정권 운동, 자치권 운동에 호응하여 참여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생했을 때는 만세 반대운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해 4월 3.1 운동이 지속되자 윤효정, 고희준 등과 함께 자제를 촉구할 것을 성명서 발표하였다. 1919년 7월 민원식 등과 함께 협성구락부를 조직하고, 창립발기인이 되고 곧 평의원이 되었다. 1919년 9월 교풍회 경성지회(矯風會京城支會)에 가입하고 평의원(評議員)에 선출되었다. 10월 협성구락부가 주최한 시국강연회의 연사로 활동했다. 11월 4일부터 11월 11일까지 매일신보에 '협성구락부의 시국강연회'라는 주제로 칼럼을 기고, 3.1 운도을 반대하고, 합병은 어쩔 수 없었으며, 국방력이 약한 조선은 타국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논설을 8회에 걸쳐 기고하였다. 1920년에는 민원식, 김환, 한영원 등과 함께 조선인의 참정권과 자치권을 요구하는 단체인 국민협회를 설립하여 총무를 맡았다. 1921년 국민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민원식이 암살된 뒤에도 국민협회를 이끌어갔다.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 운동 1920년 1월 18일 국민협회(國民協會)의 총무에 피선되고, 1920년 3월 16일에는 민원식 등과 시사신문(時事新聞)의 창간에 참여, 시사신문사 부사장이 되었다. 그해 8월 10일 시사신문사 부사장직을 사퇴했다. 1921년 1월 국민협회의 부회장으로 국민협회 창립 1주년 기념 시국대연설회에서 강연하였다. 1921년 1월 국민협회 부회장에 임명되었지만 그해 2월 17일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 허용을 목적으로 2차로 일본을 방문한 민원식이 도쿄 제국 호텔에서 양근환에게 피살되었다. 그는 국민협회를 맡아서 운영했으며, 계속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을 주장하였다. 1930년대에 가서 일부 회원들이 이탈하고 운동은 다소 쇠퇴하였다. 1921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사립학교 교원 공개채용시험을 시행할 때 합격하였다. 1921년 4월 12일 그가 국민협회 임시 회장이 되었다가 4월 21일 국민협회 총회에서 김명준이 국민협회 회장을 맡고, 정병조(鄭丙朝)를 부회장으로 선출했다. 1921년 4월 29일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고, 바로 주임관(奏任官)을 대우 참의가 되었다. 7월 31일 정7위(正七位)에 서위되었다. 1923년 5월 31일 국민협회 평안남도지부 총회 개최에 참석, 축사를 발표했는데 축사에는 참정권과 자치권, 의무교육 실시 중 보통교육 우선 보급과 점차적 의무교육 확대, 노자 협조 등의 의견이 개진되어 있었다. 1924년 4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각 사회단체 연합회인 각파유지연맹을 조직하자, 국민협회 대표로 각파유지연맹 이사가 되었다. 그해 5월 각파유지연맹이 주최하는 강연회에 참석, 관민일치·시정개선, 대동단결·사상선도, 노자협조·생활안정 등의 3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1925년 1월 동민회 평의원에 선임되고, 1926년 1월 조선불교협회 평의원에 위촉되었다. 1927년 11월 조선인 참정권 관련 시국간담회를 열어, 갑자구락부, 국민협회, 대동동지회 등의 단체의 간부들을 초청하고 조선인 참정권 획득, 사상 선도, 금융조합 개혁, 내선공학(조선인과 일본인이 같은 학교, 공간에서 수학하는 것) 등을 결의했다. 1928년 10월 조선박람회 경성지부협찬회 상담역에 위촉되었다.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이 되었고, 1930년 1월 국민협회 회장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국민협회 고문이 되었다. 1929년 12월 14일 종6위(從六位)로 승서되었으며, 1930년 이후 국민협회의 회원들이 이탈하고 활동이 지지부진했지만 국민협회를 지켰다. 1932년 1월 이봉창의 동경 천황 폭탄투척 불발 사건이 발생하자 한상룡, 신석린 등과 함께 '경성 조선인 유지 일동'이라는 이름의 연명부를 작성, 일본정부 내각총리대신, 조선총독부, 조선군사령부 등에 사과문을 발송하고 3일간 전조선인이 근신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하였다. 1933년 6월 2일 중추원 주임관대우 참의 임기 만료로 물러났다. 6월 3일 다시 중추원 주임관대우 참의로 재임명되었다. 1934년 4월 18일자로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칙임관(勅任官) 대우 참의가 되었다. 이후 1945년 9월 12일까지 중추원 참의직에 있었다. 1923년부터 1926년에는 잡지 월간 개벽의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1936년부터 1941년 11월까지는 잡지 삼천리의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 운동을 추진하였고, 1940년 조선총독부에서는 일본 본국에 조선인 몫의 귀족원, 중의원 의원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요청하였다. 1932년 7월 만몽박람회 상담역, 1932년 12월 대일본소화연맹 경성지부 회원으로 가입했다. 1933년 7월 중추원 시정연구회의 회원이 되고 곧 시정연구회 학예부 주사위원에 선출됐다. 1934년 2월 조선대아세아협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상담역에 위촉되었다. 1935년 2월 국민협회 이사장으로서 서명운동을 벌여, 조선에 참정권, 자치권을 허용해 줄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일본 중의원에 제출했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기 전후 서양에서 유입된 유색 옷이 유행하면서 1935년 11월 조선총독부에서는 의복 관련 의례준칙 준수를 제정했고, 그는 총독부가 정한 의례준칙에 따라 유색옷을 입자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1935년 유교단체인 조선유교회에 가입하고, 기관지인 일월시보의 필진으로 참여했다. 1936년 11월 경성부 부민관에서 조선인 징병제도 실시 요망운동 단체를 조직할 때,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는 일본군의 전쟁 수행 시 조선인이 군인과 징용 등으로 참여, 참전한다면, 일본 정부 내에서도 조선인 참정권, 조선인의 일본 국회 입후보를 반대할 명분이 없다고 보고 조선인의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했다. 1937년 7월 중일 전쟁 전후로 혼란을 방지하고자 중추원 주최하에 조직된 중추원 시국강연반에 참여, 대구, 부산 등지를 돌며 순회강연하였다. 1937년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제2차 전조선시국강연반에 참석하여 평안북도에 가서 시국인식을 강조하는 강연활동을 하였다. 1938년 2월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를 창립 발기하고, 7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이사에 피선되었다. 1939년 2월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고문이 되었다. 1939년 4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조선지부 상무이사로 선출되었고, 7월 영국과 미국이 동맹하자 일본 내에서 반영 여론이 나타나 배영동지회가 조직되었다. 그는 바로 배영동지회 상담역으로 위촉되었다. 1939년 8월부터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관한, 국민정신 선양을 위한 각 도 지역 순회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였다. 11월 유교계에서도 유림의 전쟁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조선의 유림 단체를 통합해서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이사로 위촉되었다. 1939년 민중신문사 대표 겸 편집인, 발행인을 맡았다. 1940년 창씨개명령 시행 후에는 가네다 아키(金田明)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하였다. 1941년 8월 24일 조선호텔에서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 조직될 때 창립발기인이자 회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해 8월 흥아보국단 상임위원회 위원이자 흥아보국단 경기도지회 위원을 겸했다. 1941년 9월 임전대책협의회가 전시 채권 판매를 목적으로 조직한 채권가두우격대의 경성부 명치정지부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10월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의회가 통합, 조선임전보국단이 조직될 때 참여, 임전보국단 감사에 선출되었다. 생애 후반 1943년 8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조선인 징용 징집, 자발적 자원병 입대 등 다양한 경로로 조선인의 참전 전사, 부상 등이 확대되자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참정권 허용, 입후보 허용 주장을 반대할 수 없었고 1940년부터 일본 정부에 조선인 참정권 허용과 중의원 입후보 허용을 상주하였다. 일본 정부에서는 허용하지 않았지만 1942년부터 귀족원 의원에 조선인을 선임하고, 1945년에는 중의원 선거에 조선인 출마, 입후보를 허용하게 된다. 1945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한 조선인 참정권 실시 감사대회에 참석, 개회선언을 하고, 일본에 파견되는 감사 사절단에 선정되었다. 그는 윤치호를 수행하여 박중양 등과 함께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 허용 및 일본 의회 출마 허용을 감사하는 사절단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4월 귀국했다. 1945년 4월 윤치호, 박중양 등과 함께 조선인 몫의 일본 의회 상원 귀족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패전 후에도 1947년 천황의 일반인 선언 전까지 귀족원 의원직은 형식적으로 유지되었다. 7월 대일본흥아회 조선지회 간부가 되었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중 김붕준의 이름을 신문에서 오기로 보도하여 그의 행적과 김붕준의 행적이 일부 혼동되기도 한다. 1947년 중앙신문사 사장이 되었다. 당시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이나 민족정기의 심판 등에 친일파로 분류되어 수록되었다.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제소되었지만 생전 그는 치부, 축재 등 재산형성을 하지 않아서 몰수된 재산은 없다. 반민특위의 해산과 함께 풀려났다. 그는 1950년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무렵까지도 생존해 있었으나, 이후의 행적과 사망년월일은 미상이다.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가족 관계 아버지 : 김석인(金錫仁) 같이 보기 조선총독부 중추원 국민협회 신민회 서북학회 일진회 민원식 과거 제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대한협회 안중근 의거 105인 사건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이갑 대한자강회 참정권 자치권 이규완 한영원 박중양 참고 자료 대한협회 회보 1~10호 대한자강회월보 제1~13호 대한협회회보 제1~10호 태극학회 회보 제1~19호 서북학회월보 제1~16호 대한학회월보 제4호 각주 1870년 출생 몰년 미상 경성부 출신 조선의 문신 과거 급제자 대한제국의 관료 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 신민회 일진회 회원 일제강점기의 교육인 일제강점기의 사회운동가 일제강점기의 관료 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 일본 제국의회 의원 고문 피해자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전주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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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부
외무부(外務部, Ministry of Foreign Affairs) 또는 외교부(外交部)는 외교를 담당하는 행정기관으로, 일반적으로 쓰이는 행정부 부처 이름이다. 외무부가 있는 나라 대한민국 외교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미국 국무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일본 외무성 영국 외무부 독일 외교부 중화민국 외교부 태국 외무부 핀란드 외무부 베트남 외교부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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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C%B2%AD%EB%A5%A0
시청률
시청률(視聽率, )은 텔레비전의 특정 프로그램 또는 특정 시간대를 시청한 개인 또는 세대가 그 당시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던 개인 또는 세대의 총수에 대한 비율을 나타난 숫자이다. 라디오는 청취율이라고 한다. 조사 방법 과거에는 시청률 조사를 하기 위해 편성표 책자에 시청여부를 기록하여 제출하거나 면접조사를 진행하였으나 최근에는 TV에 부착하여 전자적으로 조사하는 '피플 미터'를 이용하고 있다. 외부 링크 TNMS AGB 닐슨 미디어 리서치 방송 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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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이동녕(李東寧, 1869년 10월 6일 (음력 9월 2일) ~ 1940년 3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언론인이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였다. 본관은 연안, 자(字)는 봉소(鳳所), 호(號)는 석오(石吾)·암산(巖山). 1926년부터 192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고, 1933년부터 1940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총리·대통령 직무대리·주석·국무위원, 임시 의정원 의장 등으로 활동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생애 초기 의성군수 등을 지낸 이병옥의 장남으로 충청도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서 태어났다. 충청도 청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이동녕이 17세이던 1885년 일가가 서울 종로 봉익동으로 이주하였다. 1892년 24세에 응제진사(應製進士) 시험에 합격하였다. 1893년 원산에서 아버지 이병옥의 육영사업을 도왔다. 개화 운동 이동녕은 28살 되던 해에(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 간사원에 선출되었다. 독립협회 활동 당시 그는 이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다음해 경성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상동교회의 청년지사들과 함께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임금께 상소하는 등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이승만(李承晩) · 이준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승만과는 이때 이후 친숙한 동지가 되었다. 1898년 30세에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 그는 옥파 이종일이 경영하는 제국신문에 입사,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하였다. 계몽 활동 1902년에 이상재와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에는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서울 상동 교회에서 전덕기 · 양기탁 · 신채호 · 조성환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한 뒤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구 · 이회영을 알게 되었다. 다음 해 을사늑약(일제의 특사로 대한 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가 궁궐을 포위한 상태에서 외교권을 빼앗는 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여 2개월간 다시 투옥 생활을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이동녕은 1906년 만주 북간도로 망명, 이상설과 함께 한국 최초의 해외 사립학교인 서전의숙을 설립, 한국동포의 2세의 민족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뒷날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이때 이상설이 2명의 특사와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다녀오는 길을 수행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 · 전덕기 · 양기탁 · 이동휘 · 이갑 · 유동열 등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1907년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총무로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안창호 · 이회영과 협력하고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 공립협회와 대한매일신보의 조직과 발행을 지원하였다. 한편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함에 있어서도 크게 조력하였고, 상동학교의 교사로 재직한 일도 있었다. 삼원보에 망명하여 이석영 · 이철영 · 이회영 · 이시영 형제 및 이상룡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설립하고 교포들의 신분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독립 운동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 서간도 요녕상으로 망명하였다. 동지들과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립, 교포들의 신분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교장에 취임했다.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고, 《대동신문》(大東新聞),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행하는데 참여하였다. 이상설의 알선으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총독 보스타빈이 약속한 한국군관 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 3개월간 투옥 생활로 고초를 겪었다. 1915년 그의 나이 47세때 이상설 · 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의 사업기관으로 권업회를 조직, 대동신문과 해조신문을 발행 보급하였다 그가 49세되던 1917년에는 노령 니콜라에프스크에서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 포교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독립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 성에서 대종교 김교헌 외에 조소앙 · 조완구·김좌진·여준 등과 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하였다.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하이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마침내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4월 10일 임시 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었다. 임시정부 활동 임정 수립 초기 1919년 4월 11일 동지들과 임시 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이승만이 부임치 않자 국무총리로 취임, 임정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그해 9월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자 그는 내무부 총장에 선임되었다. 11월 '남녀학생(男女學生)에게'라는 격문, 그리고 '상업(商業)에 종사(從事) 하는 동포(同胞)에게'라는 격문을 배포, 황종화(黃鍾和)·최익무(崔益武(崔翼武)) 등의 정보원들을 통해 국내에 잠입, 살포케 하였다. 1921년 이동휘가 사임하자 그는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임정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등 임정 불신이 표면에 나타나자 그는 안창호 · 여운형 · 조소앙 · 이시영 · 차이석 · 홍진 · 노백린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1924년 그는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하였고 9월 군무총장도 겸임하였으며, 이승만의 장기 궐석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대통령 직권을 대행하였다. 이때 조선총독이 한국인을 시켜 그에게 귀화를 권유하였으나 즉석에서 일축, 이로 인해 그 부친이 투옥된 일도 있었다. 1925년에 두 번째로 의정원의장이 되었고, 1924년 8월 17일의 임시의정원의 대통령유고안 재의심의위원회는 6월 16일의 임시의정원의 대통령 유고결의가 타당하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로써 국무총리 이동녕이 대통령 권한을 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동녕도 1924년 12월 11일 '민정식 사건'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 대리직에서 사퇴하였다. 1925년 8월 이동녕은 이건규(李健珪) 외 10명에게 의뢰하여 국내에 밀파하였다. 이건규 외 10명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모두 대구경찰서(大邱署)에 수감되고 독립군자금 모금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임시정부 법통 수호 활동 1926년에는 국무령에 지목된 양기탁, 안창호가 거절하면서 의정원 의장으로 국무령이 되었다. 이때 58세인 그는 법무총장도 겸임 2차 개헌에 따른 국무령 지도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1927년 3월 임정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그해 그는 임정의 주석이 되어 약화된 임정을 튼튼한 반석위에 올려 놓았다. 1927년 8월 19일 임시정부에서 임시약헌을 발표할 때 의정원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주석과 국무위원 겸 법무장을 겸임하였다. 1929년 10월 세 번째로 의정원의장이 되어 임정의 존폐위기를 겨우 극복하고, 두 번째의 임정 주석이 됨으로써 중책을 짊어졌다. 1930년 1월 김구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 그 이사장에 추대되었으며, 당 기관지 한보·한성을 발행하였다. 1930년 11월 6일 임시정부 주석과 국무위원 겸 재무장에 재선출되었고, 임시의정원 의장을 겸임하였다. 생애 후반 1932년에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김구·이유필 등과 지도, 쾌거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민필호 등의 주선에 따라 임정 요인과 같이 절강성 가흥 수륜사창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 10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었다.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여 1939년 9월까지 재임했다. 11월 한국국민당의 초대 당수로 선출되었다. 1937년에는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을 구축하고 그 진로를 모색하였다. 1939년 10월 25일의 임정 국무회의에서 그는 임정의 네 번째 주석이 됨으로써 김구와 합심하여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에 대한국사단을 파견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중 1940년 3월 13일 사천성 기강에서 급성폐렴 후 과로로 72세에 영면하였다. 사후 장례는 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93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에 이동녕 집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2019년 3월 13일 순국79주기를 맞아 독립기념관 겨레의집에서 석오 이동녕 선양회 주관 추모식 및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고, 석오이동녕선생 서훈등급상향(1등급)을 청와대 청원 을 2019년 4월 10일까지 진행하였다. 가족 아들 : 이의식 - 의사 손자 : 이석희 - 대우그룹 부회장 같이 보기 독립협회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김구 김규식 송병조 이상재 이승만 양기탁 박찬익 전덕기 조성환 홍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장을 수여받은 사람 석오이동녕선양회 각주 참고 문헌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연구》 (혜안, 2001)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유영익,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이현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석오 이동녕과 백범 김구》 (동방도서, 2002) 이현희, 《임정과 이동녕연구》 (일조각, 1989) 이현희, 《한민족광복투쟁사》 (정음문화사, 1989) 이현희, 《석오 이동녕 평전》 (동방도서, 1992) 이현희, 《석오 이동녕과 백범 김구》 (일조각, 1999) 이현희,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성》 (동방도서, 1987) 이현희, 《대한민국임시정부사》 (집문당, 1982) 김석영, 《이동녕일대기》 (을유문화사, 1979) 채근식, 《무장독립운동사》(대한민국공보처, 194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5》 (국사편찬위원회, 1965∼1970) 재상해일본총영사관 경찰부 제2과 편, 《조선민족운동연감》 (東文社書店, 1946) 외부 링크 네이버 백과사전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 1869년 출생 1940년 사망 폐렴으로 죽은 사람 천안시 출신 조선의 사회 운동가 과거 급제자 조선의 관료 조선의 정치인 급진개화파 신민회 대한제국의 언론인 독립협회 무오독립선언 연서자 한성정부 경학사 대한광복군정부 신흥무관학교 반공주의자 한국독립당 (1930년) 한국독립당의 당원 연안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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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온나무
펠리온나무는 한반도 중부 이남의 산골짜기 습지에 나는 낙엽관목이다. 밑부분은 목질이고, 윗부분은 연질로 높이는 20~40cm이다. 전체가 검은 청록색이며 줄기에 회색의 짧은 털이 밀생한다. 잎은 줄기 윗부분에서 어긋나며 일그러진 피침형, 긴 타원형이며 길이 6~10cm이다. 상반부의 가장자리에 몇 개의 톱니가 있고 끝이 뾰족하며, 표면이 우글쭈글하고, 뒷면 맥위에 짧은 털이 나며, 잎자루는 없다. 꽃은 황록색으로 암수딴그루로 암꽃이삭은 잎겨드랑이에 모여 달리고, 수꽃이삭은 줄기 윗부분의 잎겨드랑이에 달린다. 외부 링크 국가 표준식물 목록 국가생물종 지식정보시스템 쐐기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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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연극문화협회
조선연극문화협회(朝鮮演劇文化協會)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직된 연극인 단체이다. 태평양 전쟁 시기의 신체제에 협조하기 위하여 기존의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를 통합하여 창설된 대규모 단체였다. 개요 1942년 7월에 16개 연극 단체가 가입된 조선연극협회와 11개 연예 단체가 가입된 조선연예협회를 통합하여 발족했다. 조선연예협회는 악극단과 창극단, 곡마단 등이 구성한 단체였다. 주요 활동은 이동극단을 동원하여 순회공연을 펼치고, 세 차례 연극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친일성이 강한 연극을 공연한 것이다. 일반 연극, 악극, 창극, 곡마단 공연 등 연극과 관련된 모든 문화 활동을 일원화하여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창립된 단체였다. 발족과 함께 조직을 재정비하여 조선연예협회 소속 창극단과 곡마단은 통폐합되고, 악극단은 제1악극대로 통합되었다. 조선연극협회 소속 극단도 통폐합하여 정리했다.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 소속이었던 이동극단과 이동연예대도 각각 이동극단 제1대와 제2대로 개편되었다. 이 단체의 목적은 "황국신민으로서의 수련을 기초하고 일본 국민문화의 진전에 필요한 연극연예의 기능을 연마하며, 다함께 국민의식의 앙양과 일반 문화수준의 향상"을 꾀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1945년 8월에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면서 해체되었다. 주요 활동 1942년 : 이동극단 전국 순회공연 시작 1942년 8월 13일 : '독자위안 명창명무 대연예대회' 공연 (경성부 부민관) 1942년 9월 ~ 11월 : 제1회 연극공연대회 개최 1942년 12월 : 이동극단 제2대 평안북도 순회공연 1943년 2월 : 창극단체 합동 공연 1943년 3월 20일 : 이동극단 제1대 조선예술상 수상 1943년 4월 17일 : 조선문인보국회발회식 축하공연 1943년 5월 : 연극인 성지참배 1943년 6월 23일 : '미영격멸 전의앙양대회' 개최 1943년 9월 ~ 12월 : 제2회 연극공연대회 개최 1943년 12월 12일 : '문화단체 결의선양대회' 참가 (조선신궁) 1944년 10월 12일 ~ 10월 13일 : '연극인총궐기 예능제' 개최 - 《분노의 아세아》 공연 1945년 1월 ~ 3월 : 제3회 연극공연대회 개최 같이 보기 조선연극협회 조선연예협회 참고 자료 일제강점기의 연극 일제강점기의 단체 1942년 설립 1945년 폐지 친일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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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진 오스트레일리아
버진 오스트레일리아 ()는 2000년 8월 31일 버진 블루란 이름으로 2대의 항공기와 200명의 종업원으로 영업을 시작하여 오스트레일리아 국내선 및 오세아니아 지역 주요 도시의 국제선을 운항하는 버진 그룹의 브랜드 중 최대의 항공기를 소유한 회사인 동시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저비용 항공사이다. 브리즈번 공항을 허브 공항으로 하며, 오스트레일리아의 28개 도시에 취항하고 있다. 리처드 브랜슨 경이 소유한 버진 그룹이 창립하였으며, 본사는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주의 브리즈번에 위치하고 있다. 일부 국제선 항공기의 경우 '퍼시픽 블루', '버진 사모아'라는 이름도 사용하고 있다. 2011년 5월 4일에는 버진 오스트레일리아로 사명을 바꾸었다. 역사 2000년 8월 31일 버진 블루란 이름으로 2대의 항공기와 200명의 종업원으로 설립해 시드니 공항에서 브리즈번 공항 국내선 노선을 운항하기 시작했다.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의 모든 주요 도시와 많은 관광지 취항 노선을 확대했다. 버진 그룹은 버진 블루가 실적 부진에 불구하고 꾸준히 운항했으나 2005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운송 복합 기업인 패트릭 코퍼레이션()이 절반의 지분을 인수했다. 2002년 당시 오스트레일리아의 두 번째로 큰 항공사인 안셋 오스트레일리아가 파산되면서 고객을 많이 확보하는데 기여했다. 2003년 지주 회사인 버진 오스트레일리아 홀딩스()가 오스트레일리아 증권 거래소에 상장해 사실상 자회사가 되었다. 2003년 9월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본토를 운항하고 있는 퍼시픽 블루 항공을 인수했다. 당시 퍼시픽 블루 항공은 콴타스 항공의 운임이 고액이라고 비판해 양자에 경쟁을 하게 되었다. 2005년 11월부터 사모아에 취항을 했으며 폴리네시안 항공을 지주 회사로 합병하여 폴리네시안 블루(현 버진 사모아)를 설립했다. 2009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저비용 항공사인 V 오스트레일리아를 설립해 미국, 피지, 태국, 아랍에미리트에 취항했다. 2011년 5월 현재의 사명으로 변경했고 같은 해 12월에 V 오스트레일리아와 퍼시픽 블루 항공과 합병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운항 노선 2014년 2월 현재 오스트레일리아 국내선과 뉴질랜드 및 오세아니아 국제선을 운항하고 있다. 코드쉐어 협정 버진 오스트레일리아는 다음과 같은 항공사와 코드쉐어 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보유 기종 2023년 5월 기준으로 버진 오스트레일리아는 다음과 같이 보유하고 있으며 평균 기령은 4.9년이다. 현재 사용하는 기종 퇴역 기종 특징 버진 오스트레일리아는 사우스웨스트 항공이나 라이언에어에 의해 개발된 것으로 마찬가지로 철저한 합리성을 추구하는 운영 방식을 채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내 서비스는 유료 항공권을 프린터로 인쇄하거나 전화 및 인터넷 예약 시스템을 사용하여 저렴한 비용으로 운영을 도모하고 있다. 한편 오스트레일리아의 최대 항공사인 콴타스 항공은 버진 오스트레일리아와 경쟁하기 위해 새로운 저비용 항공사인 제트스타 항공을 2004년에 설립했다. 붉은 도장 장비를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빨간 머리의 남자 'Blue'or 'Bluey'는 전통적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영어 속어로 사용하고 있다. 자회사 퍼시픽 블루 2003년 9월에 버진 블루가 호주에서 뉴질랜드까지 운항할 수 있는 저비용 항공사 퍼시픽 블루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퍼시픽 블루는 또한 사모아 정부와 합작 투자한 폴리네시안 블루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현재 폴리네시안 블루는 버진 사모아로 변경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2011년 12월에 버진 오스트레일리아로 합병했다. V 오스트레일리아 2006년에 버진 블루 모회사가 새로운 항공사를 만들어 일주일에 7번,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중 한 공항에 취항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2007년에 V 오스트레일리아가 새로운 항공사의 이름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존재한 항공사로 이 회사는 2009년에 최초로 취항하여 2011년에 버진 오스트레일리아에 합병했다. 버진 사모아 2005년 10월에 버진 오스트레일리아 홀딩스가 사모아 정부와 함께 합작 회사로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규모를 줄이고 제트기 운항을 정지한 폴리네시아 항공을 대신하여 피지, 사모아, 미국령 사모아, 통가 등의 섬들을 연결하였다. 당시 뉴질랜드 남섬의 도시인 크라이스트처치에 기반하여 운항하는 퍼시픽 블루와 여러 업무 면에서 깊이 연관되어 있다. 2017년에 버진 오스트레일리아에 합병했다. 서비스 객실 버진 오스트레일리아의 기내 서비스는 3 클래스 기반이며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다. 콴타스 항공의 자회사이자 저비용 항공사인 제트스타 항공과 다른 점은 저비용 항공사 (LCC) 대신 전체 경력이 있는 이코노미 클래스를 포함하는 기내식 시트 TV (기내 엔터테인먼트) 담요와 베개는 별도로 요금이 부과했다. 단 국제 이코노미 클래스의 경우 1 번째 기내식은 주류는 요금에 포함되어 있지만 추가할 경우 신용 카드 결제로 구입해야 한다. 프리미엄 이코노미와 비즈니스 클래스 음료수는 요금 없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또한 기내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은 파나소닉의 eX2을 채용하고 있다. 그리고 음료수를 포함한 모든 기내 서비스는 유료로 제공되고 있지만 무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는 없다. 국제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 배열은 2-2-2에서 시트 피치는 77인치 (195cm)의 완전 평면 좌석을 채용. 인터내셔널 프리미엄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 배열은 2-4-2에서 시트 피치는 38인치 (95cm) 국제 일반석 좌석 배열은 3-3-3에서 시트 피치는 32인치 (81cm) 마일리지 프로그램 마일리지 프로그램으로 "Verocity Rewords"를 운영하고 있다. 버진 사모아, 버진 애틀랜틱 항공, 버진 아메리카, 에티하드 항공, 말레이시아 항공, 델타 항공, 하와이안 항공, 버진 오스트레일리아 리저널 항공, PNG 항공과 제휴하고 있다. 사진 수상 내역 2007년 스카이트랙스에서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 지역 저비용 항공사 2위를 했다. 같이 보기 버진 그룹 버진 사모아 버진 오스트레일리아 홀딩스 버진 애틀랜틱 항공 버진 아메리카 각주 외부 링크 버진 오스트레일리아 - 공식 웹사이트 버진 오스트레일리아 -모바일 공식 웹사이트 항공|블루 저비용 항공사 오스트레일리아의 항공사 2000년 설립된 기업 IATA 회원 에티하드 항공 파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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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B%B6%81%EB%8C%80%ED%95%99%EA%B5%90%20%EC%82%AC%EB%B2%94%EB%8C%80%ED%95%99%20%EB%B6%80%EC%84%A4%EA%B3%A0%EB%93%B1%ED%95%99%EA%B5%90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全北大學校 師範大學 附設高等學校)는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에 위치한 국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76년 7월 10일 : ‘전북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설립 인가 1977년 3월 5일 : 개교식 및 77학년도 입학식, 초대 민병호 교장 취임 1978년 2월 27일 : 본관 교사 준공(전라중학교 임시 교사에서 현 교사로 이전) 1980년 6월 19일 : 강당 겸 체육관(1,162㎡) 준공 1981년 4월 30일 : 숭의관(생활관 130평) 준공 1987년 4월 24일 : 본관 4층 증축 완공 1991년 11월 5일 : 성지관(생활관) 준공(98평) 2001년 3월 2일 : ‘전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로 개명 2004년 11월 1일 : 성덕관(924평) 준공 및 숭의관 증축 2004년 12월 17일 : 학생종합학습관(성덕관) 준공(3,054㎡), 숭의관 개축(524㎡) 2007년 3월 2일 : 함께반 (특수학급) 신설 2014년 1월 9일 : 식생활관(한울원) 준공(994.6㎡) 2016년 8월 23일 : 기숙사 찬솔관 준공식 2017년 12월 30일 : 숭의관 학습실 1, 2층 200석 확충 2020년 9월 1일 : 제11대 채선영 교장 취임 2021년 1월 29일 : 제42회 졸업식(졸업생 227명, 총 14,287명) 2021년 3월 2일 : 입학식 및 개학식(입학생 225명)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1977년 개교 일반계 고등학교 남녀공학 고등학교 전주시의 고등학교 부설고등학교 대한민국의 국립 고등학교
19253
https://ko.wikipedia.org/wiki/%EC%9D%8C%EB%A0%A5%207%EC%9B%94%2030%EC%9D%BC
음력 7월 30일
음력 7월 30일은 음력 7월의 30번째 날이다. 사건 문화 1997년 - 울산방송 TV 개국. 탄생 1457년 - 조선 9대 국왕 성종. 1996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이찬혁 (악동뮤지션). 1997년 - 대한민국의 가수 정국 (방탄소년단). 사망 같이 보기 음력 360일: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전날:7월 29일 다음날:8월 1일 - 전달:6월 30일 다음달:8월 30일 양력:7월 30일 음력, 윤달 3*30일
188142
https://ko.wikipedia.org/wiki/%EC%97%98%EB%9D%BC%EB%9D%BC
엘라라
엘라라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엘라라 (신화)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연인. 엘라라 (위성) - 목성의 위성. 엘라라 (왕) - 고대 스리랑카의 왕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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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85%EC%9D%BC%EC%9D%98%20%EA%B5%AD%EB%AA%85
독일의 국명
독일을 가리키는 명칭은 유럽의 중앙부에 위치한 독일의 지리적 위치와 수많은 종족과 소국가로 나뉜 오랜 역사 때문에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대한 명칭들보다 상대적으로 다양하다. 예를 들어 독일어로는 도이칠란트()라고 하지만, 프랑스어로는 알마뉴()라고 하며, 폴란드어로는 니엠치()라고 한다. 국적, 모어나 민족을 지칭하는 말에서 파생되어 독일인을 천대시하는 의미로 쓰이는 말도 다양하다. 예로는 , , , , , , , , , 등이 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의 기간 동안에 특히 많이 사용되었다. 어원에 따른 명칭 고대고지독일어의 "diutisc" 또는 독일어 조어의 "Þeudiskaz"에서 유래 고대고지독일어의 "diutisc"은 "종족에 속하는"이라는 의미를 지내는 말로서 일차적으로 역사상에서의 독일의 제민족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자체명칭이었다. 이에서 "deutsch"라는 단어와 이웃하는 게르만의 여러 언어들에서 이에 상응하는 명칭들이 파생되었다. 북게르만의 제어에서는 경음화된 자음이 있는 "tysk"가, 서게르만의 여러 언어에서는 /d/-, /s/-나 /ʃ/-와 같은 부드러운 소리들이 발음의 특징이다. 나우아틀어: Teutōtitlan 네덜란드어: Duitsland 노르웨이어: Tyskland 덴마크어: Tyskland 독일어: Deutschland 베트남어: 북소토어: Tôitšhi 스웨덴어: Tyskland 아이슬란드어: Þýskaland 아프리칸스어: Duitsland 이디시어: (Daytshland) 일본어: ( < 구자체: ; 도이쓰, Doitsu) < 네덜란드어 (현재 철자는 ) 중국어: / (더궈, 한어 병음: Déguó) 또는 (더이즈, 한어 병음: Déyìzhì) 페로어: Týskland 한국어 표준어: 독일(獨逸)< 일본어 (신자체: , 가나: ドイツ); 또는 덕국(德國), 도이칠란트 문화어: 도이칠란드 라틴어의 "게르마니아"에서 유래 라틴어의 "게르마니아(Germania)"의 어원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이 단어는 기원전 약 200년경부터 로마의 문서상에 로마제국의 북쪽 국경 지역에 접하여 거주했던 민족들에 대한 포괄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결정적으로 이 명칭은 기원전 51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저서 갈리아 전기를 통해 확립되는데, 여기서 그는 라인강을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의 경계로 규정했다. 그루지야어: გერმანია (Germania) 그리스어: (Germanía) 러시아어: (Gyermaniya) 중세 라틴어: Germania 루마니아어: Germania 마오리어: Tiamana 말레이어 / 인도네시아어: Jerman 몰타어: Ġermanja 불가리아어: Германия (Germaniya) 스와힐리어: Ujerumani 아르메니아어: Գերմանիա (Germania) 아일랜드어: An Ghearmáin 알바니아어: Gjermania 에스페란토(인공어): Germanio (also Germanujo) 영어: Germany 이탈리아어: Germania 인터링구아(인공어): Germania 태국어: (yerramani) 타히티어: Heremani 하와이어: Kelemania 히브리어: (Germaniyah) 힌디어: (Jarmanī) 게르만 부족의 명칭인 "알레마니(Alemanni)"에서 유래 갈리시아어: Alemaña 바스크어: Alemania 브르통어: Alamagn 아랍어: ('Almāniyā) 스페인어: Alemania 오크어: Alemanha 웨일스어: Yr Almaen 카자흐어: (Almanïya) 카탈루냐어: Alemanya 콘월어: Almayn 튀르키예어: Almanya 페르시아어: ('Ālmān) 포르투갈어: Alemanha 프랑스어: Allemagne 게르만계 부족명 "색슨"에서 유래 리보니아어: Saksāmō 에스토니아어: Saksamaa 핀란드어: Saksa 벙어리에 해당하는 옛 슬라브어 또는 부족명 "네메트"에서 유래 벨라루스어: (Njameččyna) 세르비아어: 고지 소르브어: Němska 저지 소르브어: Nimska 슬로바키아어: Nemecko 슬로베니아어: Nemčija 우크라이나어: (Nimeččyna) 체코어: Německo 카슈브어: Miemieckô 크로아티아어: Njemačka 폴란드어: Niemcy 헝가리어: Németország 독일어의 "Volk"(민족)에서 유래(추정) 라트비아어: Vācija 리투아니아어: Vokietija 쿠로니아어: Vāce Zėm 기타 고대 노르드어: (복수) 남방, 남녘 저지 소르브어: bawory 또는 bawery (고어 및 방언) – 게르만계 부족명,지역명인 바바리아에서 유래 타히티어: Purutia 또는 Heremani: 독일의 옛 국가인 프로이센의 프랑스어 명칭인 Prusse의 변형 같이 보기 도이치 (어원) 독일의 역사 독일의 지리 독일의 문화 국명 국명 어원학
165037
https://ko.wikipedia.org/wiki/%EB%B9%84%20%28%EC%88%98%ED%95%99%29
비 (수학)
비(견줄 비 比, )는 서로 다른 두 수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다. 어떤 수가 다른 한 수의 몇 배인지를 나타내는 관계이다. 백분율로도 비교할 수 있으며, 이 배수를 비율(比率, , )이라고 한다. 정의 두 수 와 의 비는 와 같은 꼴의 표현이다. 여기서 a와b를 각각 비의 항이라 부르고, ' : ' 기호의 앞에 있는 항 를 전항, 뒤에 있는 항 를 후항이라고한다. a:b와 b:a를 구별하기 위해서 a:b를 'a대 b', 'b에 대한 a의 비', 'a의 b에 대한 비', 'a와 b의 비'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두 수 a와 b의 비가 다음과 같을 때, 비의 비율은 다음과 같다. 이때 를 비율의 분수라 하고 이를 소수로 나타낸 것을 비율의 소수라 한다. 예 원주율 는 원의 지름 에 대한 원의 둘레 의 비율로 정의 된다. 속도는 시간의 변화량 에 대한 위치 변화량 의 비율로 정의 된다. 그러나 이 경우 분자와 분모의 단위가 다르기 때문에 영어에서는 ratio가 아니라 rate (non-dimensionless ratio)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통계비율 통계비율(統計比率)은 논리적으로 관계가 있는 두 가지의 통계 숫자에 관해서 한 편을 다른 편으로 나눈 몫이다. 따라서 통계비율의 논리적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분자 및 분모의 통계 숫자가 표상(表象)하는 통계집단의 상호관계이다. 이에 대응하여 통계비율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구조비율·분석비율(構造比率·分析比率): 이는 분모집단(分母集團)의 크기에 대한 부분집단의 크기의 비(比)로서 주어지는데, 통상 백분비(百分比) 또는 천분비(千分比)로 표시된다. 이는 집단의 질적 구조를 분석하는 경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지수(指數): 이는 동종 집단의 크기 사이의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나, 주로 시간적 또는 장소적 변화의 대소를 살피는 것이 목적이다. 지수 중 단독지수(單獨指數)라 불리는 것은 단일의 시계열(時係列)에 관해 그 변화를 상대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산출된 지수이며, 종합지수라 불리는 것은 몇 개인가의 시계열의 변화를 종합적으로 표시하기 위해 산출된 지수이다. 물가지수나 생산지수 등은 종합지수의 대표적인 것이다. 관계비율(關係比率): 이는 이종(異種) 집단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집단이며 분모집단에 대한 분자집단의 관계의 조밀(稠密)의 정도를 나타낸다. 이는 다시 분자집단이 분모집단에 대해 종속적인 관계를 갖는 경우의 발생 비율과, 대등한 대립관계를 갖는 경우의 대립비율(密度)로 나뉜다. 발생비율로서는 출생률이나, 사망률 등이 있고, 대립비율로서는 토지면적에 대한 인구의 비(比) 등이 있다. 비율을 비교하는 경우, 특히 주의를 요하는 것은 관계비율(關係比率)이다. 관계비율에 있어서는 분모집단의 각 부분집단이 분자집단에 대해 같은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없고, 조밀의 정도를 달리할 수 있다. 분모집단의 구조가 일률적으로 동질적이 아닌 경우에는 그것을 되도록 동질적인 부분집단으로 나누어 그 부분 집단마다에 대응하는 비율을 계산하여 비교할 필요가 있다. 만일 개개의 것에 관해서 비교하는 것이 곤란한 경우는 표준화의 방법이 유력한 구실을 할 것이다. 예컨대, 사망률에 있어서 지역간의 비교를 곤란하게 하는 요인은 분모집단인 인구의 연령구조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표준적인 연령구조(가령 전국에 걸친 것)를 갖는 인구집단을 산정하고, 비교할 실제의 인구집단이 표준적인 연령구조를 가질 경우, 사망 수가 얼마나 되는가를 계산(표준인구의 x 세 인구에 실제 인구의 x 세 사망률을 곱하여 합계)하고 그것을 표준인구로 나누어 표준화사망률을 도출한다. 같이 보기 프로포션 참고 문헌 초등 수학 대수학
188566
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B%A0%88%EB%82%98
알레나
알레나 또는 쌍둥이자리 감마(γ Gem)는 쌍둥이자리 방향에 있는 항성으로 쌍둥이자리 내에서 세 번째로 밝게 보인다. 겉보기 등급은 1.9로 도심지에서도 맨눈으로 쉽게 볼 수 있다. 히파르코스 위성의 시차 자료에 따르면 알레나는 대략 지구로부터 109 광년 떨어져 있다. 특징 알레나는 중심핵에 있는 수소가 상당히 고갈되어 준거성 단계로 진화한 상태이다. 분광형상으로는 A0 IV로 분류된다. 태양과 비교하면 질량은 2.8배, 반지름은 3.3배 크다. 광도는 태양의 123배 정도이며 바깥쪽 대기층에서의 유효 온도는 약 9,260 켈빈이다. 이 온도 때문에 알레나는 전형적 A형 항성의 특징인 흰 빛의 색조를 띤다. 알레나는 분광쌍성으로 두 별은 높은 이심률의 케플러 궤도를 그리면서 12.6년(4614.51일)에 서로의 질량중심을 1회 공전한다. 어원 쌍둥이자리 감마는 항성을 바이어 명명법으로 부른 이름이다. 전통적인 애칭 알레나는 아랍어 الهنعة (‘알하나’, 낙타 목에 있는 낙인)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다른 애칭인 알메이산은 아랍어 المیسان (‘알마이산’, 빛나는 것)에서 온 것이다. ‘알하나’는 알레나, 쌍둥이자리 뮤(테자트 포스테리어), 누, 에타(테자트 프라이어), 크시(알지르) 별들을 하나로 묶어 부르는 이름이었다. 이 별들은 ‘알누하트’의 ‘곱절’ 의미를 지닌 ‘알 누하타이’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 뜻은 ‘낙타의 혹’이다. 2016년 국제천문연맹 내 항성명칭심의위원회(WGSN)는 항성의 고유명칭을 목록화, 공식 명칭으로 고시하였으며 알레나 역시 해당 목록에 포함되었다. ‘알 악사시 알 무아케트 책력’에 수록된 성표에는 ‘니르 알헤나트’로 수록되었으며 이는 라틴어로 번역하면 Prima του al Henat로 ‘알헤나트 중에서 가장 밝은 별’이라는 뜻이다. 동아시아 별자리에서 알레나는 정수(, , ‘우물’)에 속해 있다. 정수를 구성하는 별들은 알레나, 쌍둥이자리 뮤, 누, 크시, 엡실론, 제타, 람다, 쌍둥이자리 36이 있다. 알레나의 단독 명칭은 ‘정수삼’(, )으로 ‘정수에서 세 번째 별’이라는 뜻이다. 문화 ‘알레나’는 과거 네덜란드의 선박 이름으로 1927년 10월 브라질 연안에서 침몰하는 유람선 ‘프린시페사 말파다 호’에 접근하여 많은 사람을 구조했다. 미국 해군의 공격화물수송함 명칭 ‘알레나 AKA-9’는 이 항성명을 따라 붙인 것이다. 각주 쌍둥이자리 A형 준거성 바이어 천체 플램스티드 천체 분광쌍성 047105 2421 031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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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9D%B4%EB%B9%84%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아이비 (동음이의)
아이비(Ivy)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식물 아이비(ivy)는 두릅나뭇과의 식물이다. 포이즌아이비(poison ivy)는 옻나뭇과의 식물이다. 담쟁이덩굴을 아이비와 혼동하여 부르기도 한다. 음악 오퍼레이션 아이비는 펑크 그룹이다. 아이비는 대한민국의 뮤지컬배우이자 가수이다. 재지 아이비는 대한민국의 래퍼이다. 기타 국제 바칼로레아 아이비리그 아이비 계획은 1952년에 이루어진 핵폭탄 계획이다. 아이비는 해태의 과자이다. 아이비는 빠샤메카드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다. 아이비는 큐브의 한 종류이다. 같이 보기 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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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C%9D%8C%EA%B8%B0
소음기
소음기(消音器, )는 총기의 총열부분에 끼우는 장비로, 총기의 총성과 광원을 감쇄시키는 작용을 한다. 소음 효과 소음기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청각이 견딜 수 있는 140db이하로 감소시켜 주는 정도의 감쇄 효과를 가진다. 화기 발사 소음의 감쇄 정도(데시벨 기준)는 아래와 같다. (Silencerco.에서 제공한 인포그래픽 참조) 도서관에서 속삭이는 소리 - 30 데시벨 구급차 사이렌 - 115 데시벨 소음기 장착 22구경 라이플 - 116 데시벨 천둥소리 - 120 데시벨 소음기 장착 9×19mm 패러벨럼권총 - 125 데시벨 접시 깨지는 소리 - 129 데시벨 굴착기 - 130 데시벨 소음기 장착 22구경 자동 소총 - 134 데시벨 소음기 장착 12구경 산탄총 - 137 데시벨 제트기 이륙 소음 - 150 데시벨 12구경 산탄총(비장착) - 160 데시벨 22구경 자동소총(비장착) - 165 데시벨 특징 소음기는 길이가 길거나 짧은 것등 다양하다. 탄속을 소리 속도 이하로 낮추지 않는 이상 소음 효과는 현저히 떨어지며, 여러발을 발사할 경우 총기의 노리쇠가 작동을 하지 않아 직접 탄피를 빼줘야 하는 등의 일이 빈번하다. 다중 매체에서의 소음기 영화나 게임에서는 대부분 권총이나 저격총에 착용해서 암살이나 잠입용으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보통 실제 소음기의 효과보다 매우 과장되어 나온다. 소음기가 기본 장착된 총기들 K7 소음기관단총, MP5 SD5, 웰로드, VSS 빈토레즈, KBP VSK94 같이 보기 소염기 각주 화기 부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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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A5%B4%EB%A9%94%EB%8B%88%EC%95%84%20%ED%94%84%EB%A6%AC%EB%AF%B8%EC%96%B4%EB%A6%AC%EA%B7%B8
아르메니아 프리미어리그
아르메니아 프리미어리그()는 아르메니아의 최상위 축구 리그이다. 현재 후원사의 명칭을 붙여 공식적으로 VBET 아르메니아 프리미어리그로 부르고 있다. 이 리그는 1992년에 아르메니아 축구 협회에 의해 만들어졌다. 1936년부터 1991년까지의 아르메니아 리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지역리그로서 존재해왔었다. 처음 3년간은 봄부터 가을까지 리그를 진행하였고, 1995년에는 리그를 2년제로 바꾸느라 1994시즌 다음에 1995-06시즌으로 진행하였다. 다음 시즌인 1996-97시즌까지 2년제로 실시하다가 1997년부터 다시 1년제의 리그 진행방식으로 바꾸었다. 진행 방식 리그는 여덟 개 팀이 각 팀당 네 번씩의 경기를 치러 총 28라운드의 경기를 하게 된다. 시즌 종료후 최하위팀과 1부리그 우승 팀은 각각 강등 및 승격을 하게 된다. 2008시즌에 새롭게 프리미어리그에 참가하게 될 레르네인 아트사크가 프리미어리그 참가를 포기하였고, 1부리그 팀 가운데 유일하게 승격 가능한 FC 디나모 예레반은 해체되어서 2008시즌은 2007시즌과 변함없는 구성으로 진행하게 된다. 현재 아르메니아 리그는 단 8팀으로 프리미어리그와 1부리그가 구성되어 있다. 1부리그는 프리미어리그팀들의 2군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가팀 역대 우승 팀 클럽별 우승 횟수 1992년 설립된 스포츠 리그 아르메니아의 축구 리그 유럽의 축구 1부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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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A%B0%80%EB%A0%9B%20%28%EC%9E%A1%EC%A7%80%29
마가렛 (잡지)
《마가렛》()은 슈에이샤가 발행하는 일본의 소녀 만화 잡지이다. 격주로 발행된다. 1963년에 주간지로 창간되었다. 성인 여성이 읽는 작품도 있지만 11세에서 15세 여성이 주로 구독한다. 단행본의 레이블은 "마가렛 코믹스"이다. 연재 작품 베르사이유의 장미 올훼스의 창 꽃보다 남자 절애 관련 잡지 별책 마가렛 디럭스 마가렛 더 마가렛 외부 링크 일본의 만화 잡지 슈에이샤의 만화 잡지 1963년 창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