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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세인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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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세인더스()는 동인 게임팀 나뚜르(Nature)가 비주얼 노벨 게임 엔진인 VNAP과 바실리어트로 개발하여 2006년 11월에 공개한 자체 성인 관람가로 판정한 비주얼 노벨 게임이다(2008년 1월 현재 다운로드 수치는 약 22000건을 기록했다.). 현재 공개된 게임은 크로세인더스의 서막에 해당하는 것으로, 메인 히로인 반시하의 과거를 보여줌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나올 게임의 주된 설정과 시나리오, 영상, 분위기 등을 소개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시나리오 선택지나 캐릭터 공략 등의 시스템은 없으며 플레이어가 게임의 시나리오를 한 편의 소설처럼 읽고 영상을 감상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총 4명의 팀원이 크로세인더스 본편을 개발중이었으며 3명의 팀원을 2008년 1월 중 추가하여 2009년말 창작 게임엔진을 활용해 코믹월드와 인터넷에서 발매할 예정이었으나 중단되었다. 갱신 정보. 저작권을 가진 핵심 개발자 일부가 스마트폰과 라이트노벨 등의 미디어로 상품화하는 것을 준비 중이다. 사운드트랙 하재현과 진(본명: 김여진)에 의해 작곡되었으며, 2007년 3월 8일에 발매되었다. 2009년 비디오 게임 동인 소프트웨어 노벨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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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88%ED%8D%BC%20%28%EC%86%8C%ED%94%84%ED%8A%B8%EC%9B%A8%EC%96%B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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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소프트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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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SUPER, Simplified Universal Player Encoder & Renderer의 준말)는 여러 가지 명령 줄 도구를 위한 프론트엔드이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 다른 많은 입출력 포맷을 지원하며 별도의 지식 없이 비디오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기 쉽게 되어 있다. 최소 요구 사항 운영 체제: 윈도 98 SE, 윈도우 미, 윈도우 2000, 윈도우 XP, 윈도우 2003, 윈도우 비스타 관리자 권한 (관리자 권한으로 설치했을 경우 동시에 제한된 계정으로 변경되며 이때 프로그램은 제한된 상태로 동작한다) 1.8 GHz 펜티엄 4 프로세서급 512 MB의 램 슈퍼는 이보다 낮은 사양에서도 동작할 수 있다. 실제 최소 요구 사항은 전적으로 사용자가 선택한 백엔드 프로그램과 설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각주 외부 링크 eRightSoft SUPER 공식 사이트 Videohelp.com 프로그램 훑어 보기 미디어 플레이어 윈도우 소프트웨어 윈도우용 미디어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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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958%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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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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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후주(後周) 현덕(顯德) 5년 요(遼) 응력(應曆) 8년 일본(日本) 덴토쿠() 2년 남한(南漢) 건화(乾和) 16년 / 대보(大寶) 원년 후촉(後蜀) 광정(廣政) 21년 남당(南唐) 중흥(中興) 원년 / 교태(交泰) 원년 북한(北漢) 천회(天會) 2년 기년 후주(後周) 세종(世宗) 5년 요(遼) 목종(穆宗) 8년 고려(高麗) 광종(光宗) 9년 사건 958년 (고려 광종 9년)에 후주에서 온 학자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실시 하였다. 탄생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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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5%EC%9B%94%207%EC%9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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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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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27번째(윤년일 경우 128번째)날에 해당한다. 사건 351년 - 콘스탄티우스 갈루스(Constantius Gallus)에 대항하는 유대인의 반란이 팔레스타인 지역 지포리(Zippori)에서 일어나다. 1342년 - 교황 클레멘스 6세, 198대 교황으로 선출. 1915년 - 루시타니아호가 침몰하여 1,957명 중 1,198명의 사망자를 내다 1918년 -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에 지친 루마니아가 동맹국에 항복 1952년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거제도포로수용소 폭동사건이 일어나다. 2000년 - 블라디미르 푸틴이 러시아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문화 1927년 -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개항. 1946년 - 현재 소니의 전신인 도쿄 통신공업이 창립되다. 1948년 - 대원고속이 설립되다. 2023년 - 한국프로농구 KBL 챔피언결정전 7차전에서 안양 KGC인삼공사가 서울 SK 나이츠를 100대 97로 꺾고 시리즈 전적 4승 3패로 2021년 이후 2년만에 통산 4번째 우승을 달성하였다. 탄생 기원전 428년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 (~기원전 347년) 1397년 -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대왕. (음력 4월 10일). (~1450년) 1833년 - 독일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 (~1897년) 1840년 - 러시아의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1893년) 1861년 -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1941년) 1901년 - 미국의 배우 게리 쿠퍼. (~1961년) 1938년 대한민국의 정치인 최수환. (~2023년) 대한민국의 기업, 언론인 출신 정치가 심상우. (~1983년) 1939년 - 대한민국의 언론인 이득렬. (~2001년) 1945년 - 대한민국의 외교학자 정세현. 1951년 - 영국의 기타리스트 버니 마즈든. (~2023년) 1955년 - 대한민국의 축구인 박성화. 1962년 - 대한민국의 서예가 이주형. 1964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연철. 1970년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탤런트 김수로. 1975년 - 대한민국의 방송인, 전 아나운서 정지영. 1977년 대한민국의 배우 김광필.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전 방송기자 이정민 (MBC) 1978년 - 미국의 농구 선수 숀 매리언. 1979년 - 대한민국의 만화가 조수진. (~2011년) 1982년 대한민국의 가수, 음악가, 음악프로듀서 정재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축구 선수 남성철. 베네수엘라의 야구 선수 루이스 히메네스. 1983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상혁(클릭비) 1986년 - 대한민국의 팝페라 가수 임형주. 1987년 - 일본의 아나운서 콘노 아사미. 1989년 대한민국의 가수 레이나(애프터 스쿨).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박현범. 1990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윤빛가람. 1991년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엘리사 바르톨리. 대한민국의 래퍼 저스디스. 1993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윤소희. 1996년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페이커. 1999년 대한민국의 가수 사야.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민규. 대한민국의 치어리더 김나연. 2002년 - 대한민국의 가수 방예담. 2004년 - 대한민국의 가수 민지(NewJeans) 사망 973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독일의 왕 오토 1세. (912년~) 1737년 - 오스트리아의 장군 구이도 슈타렘베르크. (1657년~) 1825년 - 이탈리아의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 (1750년~) 1873년 -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 (1806년~) 2007년 - 미국의 성격파 배우 니콜라스 워스. (1937년~) 2011년 - 미국의 초백세인 엘라 슐러. (1897년~) 2016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구태회. (1923년~) 2018년 - 에스토니아의 음악가 로만 토이. (1916년~) 2020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 주바오위. (1921년~) 2021년 - 미국의 영화배우 토니 키탠. (1961년~) 2022년 - 대한민국의 배우 강수연. (1966년~) 2023년 - 미국의 야구선수 바이다 블루. (1949년~) 기념일 부처님 오신 날 - 1995년, 2041년, 2060년, 2071년, 2090년 조국수호의 날: 카자흐스탄 라디오데이, 물리학자 알렉산더 포포프의 업적을 기리는 날: 불가리아 러시아 디엔비엔푸 승전 기념일: 베트남 같이 보기 전날: 5월 6일 다음날: 5월 8일 - 전달: 4월 7일 다음달: 6월 7일 음력: 5월 7일 모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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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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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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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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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리아의 ISO 3166-1 alpha-2 국가 코드 .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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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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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C%BD%94%ED%95%98%EB%A7%88%20%EC%8B%9C%EC%98%81%20%EC%A7%80%ED%95%98%EC%B2%A0%20%EB%B8%94%EB%A3%A8%20%EB%9D%BC%EC%9D%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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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시영 지하철 블루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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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라인()은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에 있는 쇼난다이 역과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시 아오바구에 있는 아자미노 역을 잇는 요코하마 시 교통국의 지하철 노선이다. 노선 색은 파란색이다. ■ 일반적으로는 요코하마 시영 지하철()이나 그저 지하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린 라인(2008년 개통)이 개통되면 요코하마 시 교통국이 운영하는 지하철 노선은 2개가 되므로 "블루 라인"이라는 노선 명칭을 정했다. 정식 명칭은 쇼난다이 역 ~ 간나이역이 1호선, 간나이 역 ~ 아자미노 역이 3호선이나 모든 열차가 1호선과 3호선을 직결 운행 하므로 구분의 의미는 없다. 역사 1972년 12월 16일: 가미오오카 - 이세자키초자마치 간 개통 1976년 9월 4일: 가미나가야 - 가미오오카, 이세자키초자마치 - 요코하마 간 개통 1985년 3월 14일: 마이오카 - 가미나가야, 요코하마 - 신요코하마 간 개통 1987년 5월 24일: 도쓰카 - 마이오카 구간 개통 1993년 3월 18일: 신요코하마 - 아자미노 간 개통 1999년 8월 29일: 쇼난다이 - 도쓰카 간 개통, 신요코하마키타 역을 기타신요코하마 역으로 역명 변경 2006년 6월 15일: 요코하마 시 교통국이 노선 명칭을 "블루 라인"으로 결정 2007년 12월 15일: 스크린도어 설치 완료, 1인 승무 개시. 차량 3000형 4000형 역 목록 외부 링크 히사큐 철도 소개: 요코하마 지하철 1호선·3호선 블루 라인 간토 지방의 철도 노선 가나가와현의 철도 교통 1972년 개통한 철도 노선 요코하마시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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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B%A8%B8%EC%8A%A4%20%ED%95%98%EB%9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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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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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하디(, 1840년 6월 2일 ~ 1928년 1월 11일)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조지 엘리엇의 전통을 잇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실주의 작가였던 하디는 자신의 소설과 시 모두에 있어 낭만주의, 특히 윌리엄 워즈워스의 영향을 받았다. 하디는 빅토리아 시대 사회 전반에 대해, 특히 자신의 고향인 사우스 웨스트 잉글랜드에서 볼 수 있었던 영국의 농촌 사람들이 몰락하는 상황을 비평했다. 하디는 1840년 6월 2일 도체스터 근방 스틴스퍼드()에서 석공인 아버지와 독서를 좋아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862년부터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한때 미술 평론가가 되려 했었던 하디는 시 창작에 뜻을 두어 몇 작품을 썼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대신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하디는 1920년과 1925년에 각각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로부터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애버딘 대학교, 브리스틀 대학교 등에서도 명예 학위를 받았다. 1925년에는 많은 유명 인사들을 접견하던 하디의 저택, 맥스게이트(Max Gate)에 왕세자가 방문하기도 했었다. 소설 1867년 집필을 마친 하디의 첫 소설 《빈자와 숙녀The Poor Man and the Lady》은 출판사를 찾는데에 실패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멘토이자 친구였던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이자 소설가 조지 메러디스에게 이 소설을 보여주는데, 메러디스는 《빈자와 숙녀》가 정치적으로 큰 논란을 낳게 될 것이고 훗날 하디가 책을 출판하는 데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로 하디는 그의 조언에 따라 이 책을 더이상 출판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이후 원고를 없애지만 훗날의 작품에서 이 책에서 선보였던 몇 가지 아이디어를 사용한다. 첫 소설을 단념한 후 하디는 상업적으로 더 호응을 얻길 바라며 《필사적 수단Desperate Remedies》 (1871)와 《녹림 나무the Greenwood Tree》 (1872)라는 두 권의 새 책을 썼는데 두 권 모두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그가 자신의 아내가 될 에마 기퍼드를 만난 것은 후자의 작업을 하고있을 때였다. 에마와의 교제를 바탕으로 쓴 《두 파란 눈A Pair of Blue Eyes》는 1873년 하디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이 책의 줄거리상의 기교는 찰스 디킨스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클리프행어cliffhanger”라는 단어는 틴슬리스 매거진에서 1872년 9월부터 1873년 7월까지 간행된 연재판 《두 파란 눈》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헨리 나이트가 절벽에서 말 그대로 목을 매어 죽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여겨진다. 그의 다음 소설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Far from the Madding Crowd》 (1874)에서 하디는 웨식스를 배경으로 서 잉글랜드 지방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착상을 처음으로 내놓는다. 웨식스는 초기 색슨 왕국의 이름이며, 잉글랜드에서 대략적으로 그 왕국의 영역이었던 부분을 뜻한다.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는 하디에게 건축 일을 그만두고 문학 활동을 추구하게 하는 데에 있어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그 후 25년간 하디는 10권이 넘는 소설을 집필한다. 뒤이어, 하디가는 런던에서 요빌로, 이후 스터미니스터 뉴턴으로 이사하고 하디는 그곳에서 The Return of the Native (1878)를 쓰게 된다. 하디는 1882년 천문학과 관련된 세상을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 《탑 위의 두 이Two on a Tower》을 출판한다. 그 후 1885년 하디가는 하디가 설계하고 하디의 남자 형제가 지은 도체스터 근교에 위치한 맥스 게이트로 마지막으로 이사를 간다. 그곳에서 그는 《캐스터브리지의 시장The Mayor of Casterbridge》 (1886), 《삼림인The Woodlanders》 (1887)와 《더버빌가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1891)를 썼는데, 그 중 더버빌가의 테스는 책 속 “타락한 여인”의 초상을 동정적으로 묘사한 것에 대하여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이 책의 부제, "순수한 여인: 충실히 표현된"은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들의 눈살을 찌푸리게끔 하고자 의도해서 쓰였다. 하디의 대표작으로는 웨섹스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광란의 무리를 떠나》, 《귀향》, 《숲의 사람들》, 《캐스터브리지의 시장》, 《더버빌가의 테스》, 《무명의 주드》 등이 있고, 장편 극시 《제왕들》 외에 많은 웨섹스 시편들이 있다. 하디의 작품들은 특정 지역, 즉 영국 남부 지역 농촌을 다루고 있어 지방색이 강하지만 결코 지역 소설에 머물지 않는다. 특히 그의 소설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인간적 가치들과 당대의 핵심적 문제들을 제시하는 데 특출한 작가적 역량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영국 남부의 웨섹스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그의 고향 도체스터를 모델로 한 것이다. 당시 도체스터는 농촌 지구의 상업 중심지 역할을 하긴 했으나 다소 외진 곳으로, 하디의 어린 시절에는 철도도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농촌 풍경, 농촌 사람들의 미신이나 풍습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경험은 훗날 그가 소설을 쓰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내용이 차차 어둡게 변하여 비난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지내온 불안한 시대를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만년 1928년 1월 11일, 하디는 아내 플로렌스 더그데일()에게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 시편을 읽어달라고 부탁하고 밤 9시경 사망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고향에 묻히고 싶어 했던 고인의 뜻에 따라 심장은 스틴스퍼드 교회에 있는 사별한 첫 아내 에마 기퍼드()의 묘 옆에 매장되었다. 하디는 1927년 12월 뇌졸증에 시달렸으며, 1928년 1월 11일 9시 직후 맥스 게이트에서 사망했다. 그는 임종하면서 아내에게 그의 마지막 시를 받아쓰게끔 했다. 사망증명서에는 그의 사인이 '심장성실신'와 '고령'으로 기재되어있다. 그의 장례식은 1월 16일에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치뤄졌다. 하디는 스틴스퍼드에 있는 첫번째 아내 에마와 같은 무덤에 묻히길 원했었는데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거기에 동의했으나, 그의 유언 집행자인 시드니 칼라일 코커렐 경은 하디가 웨스터민스터의 명성있는 시인 코너에 안장되어야 한다며 주장했다. 결국엔 그의 심장은 에마와 함께 스틴스퍼드에 안장되고, 유해는 시인 코너에 안장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죽을 당시 하디의 재산의 가치는 95,418 파운드 (2015년 가치로 5,647,015파운드)로 측정되었다. 하디의 작품은 D. H. 로렌스, 존 쿠퍼 포위스와 버지니아 울프같은 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존경받았다.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그의 자서전 Goodbye to All That (1929)에서 1920년대 초 도싯에서 있었던 하디와의 만남과 하디가 그레이브스와 그의 새 처를 얼마나 따뜻하게 환영하고 그의 작품에 대해 얼마나 격려했는지를 회상한다. 도체스터 보크햄턴에 있는 하디의 생가와 도체스터에 있는 그의 집 맥스 게이트는 내셔널 트러스트가 소유하고 있다. 서훈 1910년 오더 오브 메리트(Order of Merit, OM) 참고 문헌 참고 자료 각주 외부 링크 1840년 출생 1928년 사망 근현대의 아서왕 각색 작가 도싯주 출신 런던 대학교 동문 범신론자 잉글랜드의 소설가 잉글랜드의 시인 킹스 칼리지 런던 동문 19세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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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20%EA%B8%B0%EC%B4%88%EC%9E%90%EC%B9%98%EB%8B%A8%EC%B2%B4%20%EB%AA%A9%EB%A1%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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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기초자치단체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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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기초지방자치단체의 목록이다. 2019년 2월 현재 전국의 기초지방자치단체는 226곳이다. 아래의 표에서 인구는 모두 2019년 2월 28일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 기준이다. 각주 대한민국의 장소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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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84%EC%84%AD%20%28%ED%8C%8C%EB%8F%99%20%EC%A0%84%ED%8C%8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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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 (파동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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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干涉, ) 현상은 물리학에서 파동이 위상을 지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진폭의 공간적인 보강과 상쇄 현상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두 개 이상의 파가 동시에 한 점에 도달했을 때 그 점에서 이들의 파가 강하게 합쳐지거나 약하게 합쳐지는 현상을 파의 간섭이라 한다. 정의 간섭이란 물리적으로 두 가지 이상의 파장이 첨가되어, 새로운 파장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간섭의 관점은 서로 소멸되거나 서로 보강되는 파장들의 상호 작용에 관한 것이고, 그 이유는 그 파장들이 같은 광원에서 오는 것이거나 완벽에 가깝거나 그와 같은 주파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두 개의 파장이 정확히 같지 않은 파장 영역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만들어지는 파장에서 같은 수의 상 차이를 보인다면, 두 개의 비 단일파장들도 서로 완벽히 보강된다. 만약 파동들이 두 개 이상의 다른 원으로부터 발생된다면, 총 상의 차이는 두개의 파형의 차이와 초기 상차이의 합에 의해 야기된다. 이 같은 결론은 파장이 정확하게 파장의 시작점과 같은 점에서 끝이 나는가(in phase) 혹은 그렇지 않은가(out phase)에 따라 알 수 있다. 종류 간섭에는 '보강간섭'과 '상쇄간섭'이 있다. 보강간섭 보강간섭은 같은 위상의 두 파동이 중첩될 때 일어나는 간섭이다. 마루와 마루 또는 골과 골이 만나서 합성파의 진폭이 2배로 커진다. 같은 진폭과 진동수를 가진 두 파동이 어느 순간 같은 영역을 통과할 때 나타나는 순간의 결과로서, 두 파동의 위상이 같아 마루와 마루가 만나고, 골이 골을 만나도록 중첩되는 순간 생기는 파동은 원래의 파동과 진동수는 같고 진폭이 2배이다. 이럴 때 파동은 위상이 같은 보강간섭을 한다고 말한다. λ/2(2m) 상쇄간섭 상쇄간섭은 반대 위상의 두 파동이 중첩될 때의 간섭이다. 마루와 골이 만나서 합성파의 진폭이 0이 되는 간섭으로 소멸간섭이라고도 한다. 같은 진폭과 진동수를 가진 두 파동이 어느 순간 같은 영역을 통과할 때 나타나는 순간의 결과로서, 두 파동의 위상이 180° 어긋나 있을 때 마루와 골이 중첩되는 순간 생기는 파동은 완전히 상쇄된다. 이럴 때 파동은 위상이 같은 상쇄간섭을 한다고 말한다. 이론 서로 다른 파장이 서로 만났을 때 중첩의 원리에 따라서 서로 더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약 파장의 머리부분이 다른 파장의 머리 부분과 같은 점에서 만나게 되면 그 머리 부분이 보강,간섭하여 진폭이 커지게 된다. 만약 서로 일치 하지 않은 두 파장의 머리 부분이 만나게 되면 소멸간섭되어 진폭이 전체적으로 작아진다. 이 간섭의 형태는 다른 길이의 두개 또는 더 많은 경로를 가진 파장이 원천지에서 목적지까지 증식시킬 때마다 발생할 수 있다. 고정된 상(phase)이 두개 또는 더 많은 소스들과 관계를 한다면 간섭을 발생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간섭 발생은 한가지 소스와 관계할 때와 같다. 실험 토마스 영의 이중 슬릿 실험은 두 광선이 이동 경로에 따른 위상 차이에 의해 생성, 소멸하는 패턴이 나타남을 보임으로써 간섭 현상을 설명하였다. 두 빛은 같은 광원에서 나오므로, 같은 거리에서 같은 위상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간섭 무늬의 중심에서 두 빛은 같은 진행거리를 갖게된다. 각주 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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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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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AC%EC%9D%BC%ED%95%9C%EA%B5%AD%EC%96%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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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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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한국어() 또는 재일조선어()는 일본의 재일 한국인들 사이에서 쓰이는 한국어다. 주로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계열의 민족학교 출신 조선인들 사이에서 사용된다. 실제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재일조선인은 10% 정도이며, 대개는 재일조선어를 사용한다. 단, 출신지나 생활환경 등의 차이로 인해 화자에 따른 언어 차이도 크다. 대부분의 재일 한국인들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며 그들간의 대화에서까지 일본어를 사용한다. 표준적인 한국어는 오직 제한된 개수의 사회적 모임, 예컨대 이민 1세대나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지원을 받는 조선학교 등지에서만 사용된다. 대부분의 재일조선인들은 한국어를 제2모국어로 배우기 때문에 음운과 어휘에 일본어의 강한 영향을 받으며, 이것을 재일조선어라 부른다. 음운 음운은 일본어의 음운 체계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ㅜ와 ㅡ, ㅗ와 ㅓ가 구분되지 않고 각각 ㅜ, ㅗ로 소리난다(예로 들자면 사람을 사랑으로, 명수를 묭수로 발음하는 것 등), "ㅂ, ㄷ, ㄱ"과 "ㅁ, ㄴ, ㅇ"은 발음이 일본어와 거의 비슷하고 "ㅂ, ㄷ, ㄱ"은 촉음형태로 발음한다. "ㅁ, ㄴ, ㅇ"은 일본어의 ""발음으로 발음한다. 모음 한국어 표준어의 8모음 체계와는 달리 재일조선어는 5모음밖에 없다. ㅏ : /a/ ㅐ,ㅔ : /e/ ㅣ : /i/ ㅓ,ㅗ : /o/ ㅜ,ㅡ : /u/ 초성 어두의 자음에서 표준어는 명백하게 /k/, //, //와 같이 무기음과 유기음을 구분해서 발음하지만, 재일 일본어는 그것들을 구분하지 않는 대신 일본어처럼 무성음과 유성음(예를 들면 /k/ 와 //)을 명백히 구분한다. 비음 뒤에는 무성음이 없다. 그래서 표준어 "앉자"는 //나 //가 아닌 //가 된다. 문화어와 재일 한국어는 어두의 // 또는 /n/이 절대로 그것들의 음가가 바뀌지 않는다. 표준어의 "역사" // 또는 문화어의 "력사" //는 재일 한국어에서 //가 된다. 종성 표준어의 종성에는 7개의 자음, 즉 /p/, /t/, /k/, /m/, /n/, //, 그리고 //이 온다. 이는 재일조선어에서는 발음과 촉음에 의해 다르게 발음된다. 어휘 기초어휘를 제외한 복잡한 어휘는 대부분 일본어로부터 차용된다. 표준어가 문어에 사용되는 것과 달리, 재일 한국어는 작문에 문어가 대체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그러나"를 "구로나"로 발음하는 사람이 글로는 전자를 사용한다. 문법 재일한국어의 문법도 일본어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어떤 불변화사는 표준어와 다르게 쓰인다. 예를 들면, "차를 타다"라는 표준어의 표현이 재일조선어에서는 일본어의 ("車に乗る")처럼 "차에 타다" 로 표현된다. 표준 한국어에서는 완료상 ‘-어 있-’과 진행상 ‘-고 있-’을 구분한다. 예를 들면, 앉고 있는 행동의 중간을 나타내며 행동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은 "앉고 있다"이고, "앉아 있다"는 앉아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재일 한국어에서는 일본어에서처럼 ‘-고 있-’의 형태를 진행형과 완료형에 모두 쓰고,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않는다. 한국어에만 존재하는 종결어미가 잘 사용되지 않으며, 대신 일본어 특유의 종결어미가 자주 붙는다. 같이 보기 언어 접촉 외부 링크 재일조선어 한국어 재일 한국인 일본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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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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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9C%ED%98%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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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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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후(南湖)는 중국 저장성 자싱의 아름다운 호수이다. 면적인 0.54 km2, 수심은 2.5m이며, 원앙호(鴛鴦湖) 또는 원호(鴛湖)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장 성 3대 명호(名湖)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연우루 호수 가운데는 작은 섬이 있고, 이곳에 10세기에 세워진 연우루(烟雨楼)라는 유명한 정자가 있다. 1548년 명나라 때 지방 관료들이 수로를 정비하고 바닥을 파내 호수 중앙에 섬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연우탑을 이곳에 재건하였다. 1550년 대에는 이곳에 강남 양식의 정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 탄생지 호수의 주변에는 중국공산당 탄생처 유적지가 있는데, 1921년 8월 2일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이곳 남호의 놀잇배 위에서 마쳤다. 그때 이곳에서 중국공산당 탄생을 선언한다. 그래서 남호는 중국 혁명의 성지로 손꼽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피난처 또한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일본군에게 쫓겨서 이곳에서 회의를 개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변에 김구 선생 등 임정 요인의 피난처가 자싱의 시내에 있다. 문학 속의 남호 김용의 소설 사조영웅전은 저장성의 실제 배경이 나오는 데, 이곳 가흥이 가장 중요한 무대가 된다. 가흥(嘉興, 자싱시)의 남호 주변의 취선루에서 강남칠협과 전진파 도사 구처기의 만남이 이뤄지며, 호수 중앙의 연우루는 중반 이후의 주요 배경이 된다. 또한 우가촌이 등장하는 곽씨와 양씨의 고향인 소흥주의 고향 소흥(紹興, 사오싱시)이나 황약사와 황용의 거처인 주산(舟山, 저우산시)의 도화도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저장성의 호수 타이호 수계 자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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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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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0%88%EC%9D%B4%EC%BA%AC%EB%B9%84%ED%81%AC%20%EA%B3%A0%EB%93%B1%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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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캬비크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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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캬비크 고등학교 또는 레이캬비크 김나지움은 아이슬란드어로Menntaskólinn í Reykjavík 혹은 MR로 표기한다. 아이슬란드에서 제일 오래된 김나지움()형식의 교육기관이다. 학교의 연원은 스카울홀트에 처음 세워진 105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학교는 레이캬비크로 1786년에 옮겨졌으나, 열악한 건물 상황이 다시 1805년에 레이캬비크근교의 베사스타디르로 학교를 옮기도록 만들었다. 1846년에 학교는 레이캬비크에 있는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당시에 학교건물은 아이슬란드 전역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으며, 당시 화폐로 500 아이슬란드 크로나에 가까운 돈이 들어갔다. 아이슬란드 국회의 모임에 사용되기도 했다. 예전에 학교는 "학습당()", 혹은 "라틴어 학당(), 혹은 라틴어로 된 이름인 "스콜라이 레이키아비켄시스(, 레이캬비크 학교의 의미)등의 이름으로 불려왔으나 1937년 현재의 명칭을 얻었다. 학교는 4년제이며, 졸업학위인 스투덴트스프로우프()를 얻으면 마치게 된다. 이 학교는 저명한 아이슬란드 정치인과 유명인사들을 배출했으며, 현 대통령인 올라퓌르 라그나르 그림손도 이 학교 출신이다. 외부 링크 공식 웹 사이트 아이슬란드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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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94%ED%95%9C%EC%9D%98%20%EB%B3%B5%EC%9D%8C%EC%84%9C%203%EC%9E%A5%2016%EC%A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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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복음서 3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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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복음서 3장 16절은 성경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중의 하나이다. 이 구절은 또한 "껍질 속의 성경"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이 구절이 가장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중심적인 교리의 일부분의 정리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 하나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시고, 이 사랑은 이 절의 나머지 내용을 실행하는 데 동기가 되었다. ...외아들을... -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삼위일체의 두 번째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다. ...보내주시어... - 하나님은 뭔가 그의 아들을 희생으로 드리고 싶으셨다. ...그를... -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구주되신 예수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믿는... - 구원은 사람의 행실보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 구원이 모든 믿는 자에게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멸망하지 않고... -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심판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영원한 삶을 얻을 것을 말하는 구절이다. 영원한 삶, 생명은 요한의 복음서 저자의 주요관심사 중 하나이다. 번역 그리스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문자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영어로, KJV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해 두었다. 한국어 성경의 번역들은 다음과 같다. 각주 신약성경 요한의 복음서 요한의 복음서 3장 요한의 복음서의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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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20%EC%B6%95%EC%A0%9C%20%EB%AA%A9%EB%A1%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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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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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오래되거나 역사적인 기념일에 대해서는 한국의 전통 축제를 참조하세요. 한국의 관광 사업을 위해 많은 새로운 축제가 만들어졌습니다. 주 5일 근무제로의 점진적인 변화와 더 많은 여가가 이러한 축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전국에서 700개가 넘는 축제가 열렸으며, 이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대한민국의 축제입니다. 지역별 서울 서울빛초롱축제 서울국제불꽃축제 서울봄꽃축제 서울억새축제 경기도 고양국제꽃축제 경기국제도자비엔날레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충청남도 이순신대장군축제 부여서동연꽃축제 보령머드축제 충청북도 청풍호 벚꽃축제 소백산 진달래축제 강원도 화천 산천어 얼음축제 족배축제 경상남도 진주남강유등축제 진해 군항제 하동야생차문화축제 경상북도 청도 소싸움 축제 전라남도 광양국제매화축제 전라북도 전주 국제 영화제 전주 국제 소리 축제 무주반딧불축제 제주도 성산일출축제 지역별 축제 목록 2020년 10월 16일 기준 2020년도에 대한민국의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개최된 축제 목록이다. 총 968개의 축제가 있다. 서울특별시 : 81개 부산광역시 : 45개 대구광역시 : 38개 인천광역시 : 19개 광주광역시 : 8개 대전광역시 : 8개 울산광역시 : 23개 세종특별자치시 : 2개 경기도 : 110개 강원도 : 97개 강원특별자치도 : (예정) 충청북도 : 40개 충청남도 : 98개 전라북도 : 57개 전라남도 : 122개 경상북도 : 86개 경상남도 : 95개 제주특별자치도 : 39개 주제별 영화제 음악제 참고 사항 행사 참석하실 때, 항상 안전 사고에 유의하여, 운영하는 기관에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조치된다. 일부 범유행 및 국가애도기간 한정 행사가 취소된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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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9A%B4%EB%93%9C%20%EB%A7%88%EC%8A%A4%ED%82%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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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마스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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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마스킹(sound masking)은 어떤 소리, 특히 사람의 말소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다른 소리를 내는 기술을 말한다. 인간이 소리를 인식하는 과정을 이용한다. 사운드 마스킹은 미러 이미지 (Mirror Image, 역상)을 이용해 소리를 상쇄시키는 노이즈 캔슬레이션 (Noise Cancelation)과는 다른 기술이다. 우리의 뇌는 동시에 들리는 여러 소리 중 가장 큰 소리만을 인식한다. 또한 비슷한 크기의 소리가 있을 때에는 낮은 주파수의 소리를 더 잘 인식한다. 이는 MP3를 만드는 기본 방식 중 중요한 하나이다. 이와 달리 시차적인 마스킹 역시 존재한다. 큰 소리를 들은 직후에는 그 소리보다 작은 소리들을 순간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인간이 소리를 인식하는 특징 중 하나이다. 일상 생활에서의 사운드 마스킹 TV를 보면서 선풍기를 켜면 TV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선풍기의 모터 소리와 바람 소리가 방해하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은 조용하게 느껴진다. 빗소리가 다른 잡음을 잘 들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사운드 마스킹의 활용 의도적으로 대역 잡음을 발생시켜 다른 소리를 듣기 어렵게 만드는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도청 방지나 약한 수준의 소음 제어가 대표적이다. 강한 수준의 소음 제어는 노이즈 캔슬레이션으로 대표될 수 있으며, 이를 사용할 경우 일반적인 대화조차도 불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저렴하고 처리 속도가 빠른 DSP 프로세서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소리의 주파수와 크기를 측정해 그 역상을 만드는 방법이다. 사운드 마스킹에 이용되는 대역 잡음은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로 통칭되고 있지만, 엄밀하게는 화이트 노이즈, 핑크 노이즈 그 외에 우리의 음성 패턴에 부합하는 맞춤형 노이즈, 이 3가지로 볼 수 있다. 같이 보기 청각 마스킹 음향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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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BBS%EB%B6%88%EA%B5%90%EB%B0%A9%EC%86%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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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불교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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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불교방송(佛敎放送, )은 불교계 방송 중 하나로서, 대한민국 최초의 영상선교방송국이다. 개요 법인명은 (재)BBS불교방송, 영문명은 Buddhist Broadcasting System, 약칭은 BBS, 대한민국에서는 "BTN불교TV"와 구분하기 위해 "BBS불교방송"로 통칭 연혁 1987년 1월 15일: 조계종에 BBS불교방송 설립 추진 1989년 2월 16일: 재단법인 BBS불교방송 설립 발기 임원회의 개최 1989년 3월 2일: 문화공보부, BBS불교방송 재단법인 설립인가 및 무선국 추천 허가서 발급 1989년 5월 22일: BBS불교방송 설립모금본부 설치 1990년 3월 2일: 시험 방송 개국. 1990년 3월 30일: BBS불교방송 라디오 개국 안내(지상파 TV광고 개시) 1990년 5월 1일: 라디오 방송 개국(초단파 101.9㎒, 5㎾) 1990년 5월 1일: 입체낭독 오디오 드라마 고승열전 첫 방송 (10분간 방영) 1995년 2월 1일: 부산불교방송 개국(초단파 89.9㎒, 3㎾) 1995년 2월 23일: 가릉빈가 합창단 창단 1995년 3월 1일: 광주불교방송 개국(초단파 89.7㎒, 3㎾) 1996년 11월 1일: 대구불교방송 개국(초단파 94.5㎒, 3㎾) 1997년 4월 25일: 청주불교방송 개국(초단파 96.7㎒, 3㎾) 1998년 11월 1일: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 ( 2001년 11월 1일: 인터넷 방송서비스 실시 2001년 12월 26일: 남산 송신소에서 관악산 송신소로 이전 2002년 11월 1일: 춘천불교방송 개국(초단파 100.1㎒, 3㎾) 2002년 12월 26일: 춘천불교방송 홍천중계소 허가 (초단파 100.1㎒) 2003년 12월 23일 : 대구불교방송 포항중계소 개소 (초단파 105.5㎒, 500W) 2003년 12월 24일 : 대구불교방송 안동중계소 개소 (초단파 97.7㎒, 1㎾) 2004년 4월 1일: 서울 본사 디지털 방송 제작 및 송출 시스템 구축 완료 2004년 10월 20일: 가릉빈가 합창단 창단 10주년 기념 음악회 개최 2005년 6월 9일: 문화원형 디지털 콘텐츠 제작 사업 수행 2005년 9월 9일: 지방 사찰 디지털 송출 시스템 구축 2005년 10월 1일: 사내 업무 행정 전산화 2005년 12월 6일: 가릉빈가 합창단이 불교종단협의회 주최 '대한민국 불교음악 페스티벌'에서 불교합창 콩쿨 부문 1위를 수상 2006년 3월 7일: 홈페이지 개편 및 동영상 서비스 개시, 백일법회 개최 2006년 3월 23일: 제1회 한국불교박람회 개최 2006년 4월 18일: 울산불교방송 허가 추천 (방송위원회) 2006년 8월 1일: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과 업무제휴 계약 체결 2006년 11월 6일: 동국대학교와 교류협정 체결 2007년 4월 30일: 국민대화합 기원법회 2007년 8월 20일: 신임 재단이사장 영담스님 취임 2007년 9월 12일: 시사주간지 《BBS 저널》 창간 2007년 10월 11일: 정보통신부로부터 울산불교방송 허가를 받음 2007년 12월 4일: 동국대학교 통합인문학특성사업단과 인턴십 교육 협약을 체결 2008년 2월 28일: 부산불교방송 마산중계소 허가 (초단파 89.5㎒, 500W 허가 기관: 부산체신청) 2008년 5월 29일: 신규 방송 채널 사용 사업 신청(방송통신위원회) 2008년 6월 30일: 울산불교방송 개국(초단파 105.3㎒, 1㎾) 2008년 8월 1일: 시사주간지 《BBS저널》을 《판판뉴스》로 변경 2008년 8월 11일: 방송 채널 사용 사업 등록증 발급(방송통신위원회) 2008년 10월 8일: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 콘텐츠 사업 신고증 발급 (방송통신위원회) 2008년 12월 2일: IPTV 채널 개국과 함께 KT 올레 TV를 통해 방송을 시작 (채널 550번) 2009년 1월 1일: U+ TV를 통한 방송을 시작 (채널 108번) 2009년 4월 1일: B TV를 통한 방송을 시작 (채널: 521번) 2009년 4월 9일: 방송 영상 독립 제작사 신고증 발급 (문화체육관광부) 2009년 7월 1일: 춘천불교방송 대룡산송신소 이전, 방송구역 확대, 방송구역 확대에 따라 홍천중계소 폐국 2010년 2월 1일: 부산불교방송 창원중계소 개소 (초단파 89.5㎒, 500W) 2012년 10월 1일: 춘천불교방송 속초중계소 개소 (초단파 93.5㎒, 100W) 2013년 12월 2일: 라디오 방송시간 1시간 확대 (1일 22시간 방송) 2013년 12월 24일: BBS불교방송 인천중계소 개소 (초단파 88.1㎒, 20W) 2014년 7월 2일: 부산불교방송 진주중계소 허가 (초단파 88.1㎒, 250W) 2014년 7월 8일: 춘천불교방송 강릉중계소 허가 (초단파 104.3㎒, 1㎾) 2014년 8월 12일: 춘천불교방송 양양중계소 개소 (초단파 97.1㎒, 10W) 2014년 9월 18일: 광주불교방송 사옥이전 (북구 상무중앙로 1270 → 서구 상무중앙로 9 동양빌딩 20층 2014년 11월 5일: 울산불교방송 주파수 이전허가 취득(함월산 송신소 초단파 105,3㎒, 1㎾ → 무룡산 송신소 초단파 88.3㎒, 1㎾) 2015년 5월 7일: 울산불교방송 송신소 이전 및 가청권 확대(함월산 송신소 초단파 105.3㎒, 1㎾ → 무룡산 송신소 초단파 88.3㎒, 1㎾) 2015년 6월 4일: 광주불교방송 광양중계소 허가 (초단파 105.7㎒, 200W) 2015년 12월 16일: 불교방송에 후원하는 공덕주 모임 만공회 출범 (매년 TV와 라디오에서 특별생방송 진행) 2016년 4월 1일: 부산불교방송 진주중계소 개소 (초단파 88.1㎒, 500W) 2016년 5월 10일: 광주불교방송 광양중계소 개소 (초단파 105.7㎒, 200W) 2016년 7월 28일: 티베트자치구 뗌빠체림 대사 와 남카 스님 BBS불교방송 사옥 방문 2016년 9월 11일: 춘천불교방송 강릉중계소 개국 (초단파 104.3㎒, 1㎾) 2017년 7월 3일: 딜라이라마 존자 여동생 제쭌 빼마 여사 BBS불교방송 사옥 방문 2017년 9월 5일: 광주불교방송 여수중계소 허가 (초단파 105.1㎒, 50W) 2017년 10월 20일: BBS불교방송 상암동 상암글로벌미디어센터 건립 추진 2017년 11월 10일: 제주불교방송 설립 발기인대회 개최 2017년 12월 11일: 만공회 2주년 행복콘서트 Jump BBS 개최 2018년 1월 15일: BBS불교방송-조계종 포교원 업무협약 체결 2018년 4월 11일: 제주불교방송 TV송출 개시 (KCTV 제주방송 채널 376번) 2018년 4월 20일: BBS불교방송-대한불교조계종 군종특별교구 군 포교 업무협약 체결 2018년 5월 1일: 라디오 개국 28주년 기념 특별생방송 2018년 5월 4일: 애니메이션으로 만나는 입체낭독 고승열전 (유튜브,네이버TV에 공개) 2018년 6월 6일: 마니샤 구나세이카라 주한 스리랑카 대사 BBS불교방송 사옥 방문 2018년 9월 9일: 제주불교방송 개국(제주시 초단파 94.9㎒, 1㎾) 2018년 9월 17일: 마하매우나워선원 스리랑카 불교성지순례 사진,영상 기증 2018년 10월 11일: 광주불교방송 여수중계소 개소 (초단파 105.1㎒, 50W) 2018년 12월 11일: 애니메이션 드라마 고승열전 경허대선사 불교언론문화상 우수상 선정 2019년 3월 3일: 청주불교방송 가청범위 확대예정(충북 충주,음성,괴산지역) 2019년 4월 8일: 청주불교방송 충주중계소 개소(초단파 106.7㎒, 300W) 2019년 5월 1일: BBS불교방송 개국 29주년 2020년 5월 1일: BBS불교방송 개국 30주년 2020년 8월 1일: 제주불교방송 서귀포 중계소 개소(서귀포시 초단파 100.5㎒, 1㎾) 2020년 12월 16일: 만공회 출범 5주년 2021년 5월 1일: BBS불교방송 개국 31주년 2021년 12월 7일: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평가에서 종교 라디오 1위 기록 2022년 5월 1일: BBS불교방송 개국 32주년 2022년 10월 3일: 춘천불교방송 창사 20주년 2022년 12월 16일: BBS불교방송 개국 32주년, 만공회 출범 7주년 기념 ""행복한 나를 찾는 길"" (TV, 라디오, 유튜브 생중개) 방송지표 참된 말씀을 바로 펴는 방송 온 겨레를 하나로 묶어주는 방송 치우침 없는 생각을 이끌어가는 방송 우리 것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방송 나누는 기쁨을 함께 하는 방송 지역 방송국 BBS FM 위치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20 다보빌딩 개국일 : 1990년 5월 1일 부산불교방송 위치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로 102 개국일 : 1995년 2월 1일 광주불교방송 위치 :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중앙로 9 동양빌딩 20층 개국일 : 1995년 3월 1일 대구불교방송 위치 : 대구광역시 중구 명덕로 261 개국일 : 1996년 11월 11일 청주불교방송 위치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월평로184번길 101 개국일 : 1997년 4월 25일 춘천불교방송 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중앙로 10 개국일 : 2002년 11월 1일 울산불교방송 위치 : 울산광역시 남구 삼산로 201 개국일 : 2008년 6월 30일 제주불교방송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임항로 14 탑동 덕산빌딩 개국일 : 2018년 9월 9일 방송 주파수 방송 시간 라디오 : 오전4시 ~ 익일 오전2시 (총 22시간) TV : 오전4시 ~ 익일 오전4시 (총 24시간) 역대 라디오 제공 시보 삼성전자 (개국 첫날 제공시보) 롯데칠성음료 매일유업 롯데하이마트 SK이노베이션 현대자동차 삼성 갤럭시 BBS FM BBS 만공캠페인 나레이션 : 김명석 아나운서 역대 이사장 의현스님 (1989~1993) 종하스님 (1993~1997/2006~2007/2013~2021) 영담스님 (1997(대행)/2007~2013) 도후스님 (1997~2006) 정문스님 (2021~2022) 덕문스님 (2022~ ) 역대 BBS불교방송 사장 장상문(1989~1992) 정인섭 사장대행 (1993) 김태호 (1993~1995) 강한필 사장대행 (1995~1996) 종하 사장대행 (1995) 조해형 (1996~1997) 서돈각 사장대행 (1997~1998) 성낙승 (1998~2000) 도후 사장대행 (2000/2004) 김규칠 (2000~2004) 이성언 (2004~2006) 홍승기 (2006~2007) 영담 사장대행 (2007~2008) 최명준 (2008~2009) 김영일 (2009~2011) 이채원 (2011~2015) 선상신 (2015~2019) 종하 사장대행 (2019) 이선재 (2019-2023) 김태영 (2023-) 아나운서 김명석 장수연 정준영 최은경 이선희 이효주 오승진 사건사고 불교방송국 괴한난입 사건 1990년 5월 2일, 새벽 3시 10분경 다보빌딩에 있는 BBS불교방송에 20대로 보이는 회색작업복 입은 2명 남성이 방송국에 들어가 침입을 해 20여분간 난동을 부리고 도주했다. 같이 보기 가톨릭평화방송 원음방송 각주 외부 링크 BBS불교방송 공식 홈페이지 부산불교방송 공식 홈페이지 광주불교방송 공식 홈페이지 대구불교방송 공식 홈페이지 청주불교방송 공식 홈페이지 춘천불교방송 공식 홈페이지 울산불교방송 공식 홈페이지 제주불교방송 공식 홈페이지 불교방송 FM 라디오 방송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케이블 방송국 대한민국의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국 1990년 설립된 라디오 방송국 2008년 설립된 텔레비전 방송국과 채널 대한민국의 라디오 방송국 대한민국의 불교 종교 방송 대한민국의 민영 방송 서울 마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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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2000%EB%85%84%2011%EC%9B%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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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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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1월 11일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의 스키 휴양지 키츠슈타인호른 빙하 근처 터널 을 통과하던 산악열차에서 발생한 화재로 172명이 사망하였다. 2000년 11월 7일 미국 대선이 치러져 조지 W. 부시 후보가 엘 고어 후보를 누르고 승리하다. 최종 결과는 1개월 뒤 플로리다의 법원에 의해 결정되다. 2000년 11월 5일 일본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가 유물을 날조하여 일본의 선사시대 연대를 70만년 전으로 조작했음이 밝혀졌다. 2000년 11월 1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유엔에 가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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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94%EC%94%A8%EC%86%8C%ED%94%84%ED%8A%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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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소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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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엔씨소프트(NCSOFT)는 대한민국에 기반을 둔 온라인 · 모바일 게임 개발사 및 퍼블리셔이다. MMORPG 《리니지》, 《리니지2》, 《아이온》,《블레이드 & 소울》로 유명하다. 본사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왕판교로644번길 12 (삼평동)에, 본점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09 (삼성동)에 있다. 역사 창업 엔씨소프트는 1997년 3월 한글 워드프로세서 한/글의 개발자인 업무용 소프트웨어 개발자 김택진에 의해 설립되었다. 엔씨소프트가 개발한 첫 번째 소프트웨어 중 하나는 NC HTML 편집기(NC HTML Editor)였다. 1998년 11월, 엔씨소프트는 리니지를 발표하였는데, 이 게임은 엔씨소프트의 데뷔작으로, 엔씨소프트의 게임들 중 가장 유명한 게임이다. 리니지의 성공으로 엔씨소프트는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본, 미국으로 진출했다. 2000년 7월 7일 코스닥에 상장하였으며, 2003년 5월 22일 거래소 이전 상장했다. 엔씨소프트는 2001년 4월 리처드 개리엇의 데스티네이션 게임즈와 제휴하기 위해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엔씨 인터랙티브(NC Interactive)라는 자회사를 설립했다. 리니지의 개발자인 송재경 또한 오스틴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송재경은 엔씨소프트를 퇴사하여 자신의 회사 XL게임즈를 설립함) 엔씨 인터랙티브는 MMORPG의 개발과 엔씨소프트의 북미 지역의 지원을 담당했다. 엔씨소프트는 대한민국에서 2003년 10월 1일, 미국에서 2004년 4월 28일, 각각 리니지 II를 발표하였다. 또한 엔씨소프트는 길드워를 퍼블리싱 하였으며(길드워는 엔씨소프트의 자회사 아레나넷에서 개발한 게임이다), MMORPG 시티 오브 히어로와 시티 오브 빌런을 퍼블리싱 하였다. (이 두 게임은 크립틱 스튜디오에서 개발했다.) 2004년 7월, 엔씨소프트 유럽이 영국 브라이튼에서 설립되었다. 엔씨소프트 유럽은 2005년 2월 4일 시티 오브 히어로를 유럽 각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하였으며, 같은날 유럽용 리니지 II의 서버를 개설하였다. 2006년 2월, 타이페이 게임쇼에서 엔씨소프트는 엔씨 오스틴에서 개발하고 있던 던전러너의 클로즈드베타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 게임은 이후 무료 게임으로 현재 엔씨소프트의 북미 게임 포탈 플레이엔씨에서 서비스되고 있다. 중흥기 2006년, 엔씨소프트는 오픈 소스 진영의 JMonkeyEngine의 개발자를 고용하였다. 또한, 2006년 E3에서 엔씨소프트는 새로운 MMORPG 아이온의 개발을 발표, 2008년 11월에 한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한데 이어 2009년에는 중국, 일본, 대만, 북미, 유럽에서도 서비스를 시작했다. 아이온의 음악은 양방언이 담당했다. 2011년 3월, 경상남도 창원시를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 제 9구단 NC 다이노스를 창단하였다. 2012년에 KBO 퓨처스리그에 참가했고, 2013년부터 KBO 리그에 참가하고 있다. 2012년 2월, 엔트리브소프트의 지분 76%를 인수했다. 2012년 6월, 동양적 세계관의 대작 MMORPG 블레이드 & 소울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중국에는 2013년 11월, 북미/유럽에는 2016년 1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했다. 2012년 8월, 길드워2를 북미 시장에 론칭했고, 그 해 타임지의 ‘2012 올해의 게임’으로 선정되었다. 2016년 3월, 모바일 TCG 게임 ‘블레이드 & 소울 모바일’(战斗吧剑灵)을 중국에 론칭했다. 2018년 1월, 아이온 1월 17일 리플라이 패치를 통해 추억팔이를 하며 유저를 우롱 기만하는 행동에 대해 이에 화가난 유저들이 리니지M, 아이온등 NC소프트의 모든 게임의 사행성과 게임내 재화인 "키나"를 마음대로 회수삭제한것에대해 재산에 대한 피해를 언급하며 집단행동을 나서 청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2019년 11월 리니지2M을 국내에 출시했다. 연혁 1997년 3월 - (주)엔씨소프트 창립 1998년 9월 - 온라인게임 리니지 한국 상용서비스 개시 12월 - 리니지, 대한민국 게임대상 대상 수상 2000년 1월 - 영국 현지 법인 엔씨 인터랙티브 (NC Interactive) 설립 5월 - 미국 현지 법인 엔씨 인터랙티브(NC Interactive) 설립 7월 - 코스닥 등록 7월 - 리니지 대만 상용 서비스 개시 12월 - 리니지, 국내 최초 동시 접속자 수 10만 돌파 2001년 5월 - 미국 지사 엔씨 오스틴(NC Austin) 설립 5월 - 리차드 게리엇(Richard Garriott) 등 세계 정상급 미국 게임 개발자 영입 7월 - 리니지, 북미 상용 서비스 개시 8월 - 소프트뱅크 그룹과 일본 합작 법인 엔씨 재팬(NC Japan) 설립 12월 - 리니지, 세계 최초 동시 접속자 수 30만 돌파 2002년 3월 - 미국 크립틱 스튜디오(Cryptic Studios)와 시티 오브 히어로(City of Heroes) 퍼블리싱 계약 9월 - 리니지, 일본 상용 서비스 개시 12월 -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의 핵심 개발자로 구성된 미국 아레나넷(ArenaNet) 인수 2003년 1월 - 시나(SINA)와 중국 합작 법인 엔씨 시나(NC-Sina) 설립 4월 - 리니지 중국 상용 서비스 개시 5월 - 한국증권거래소로 이전 상장 8월 - 엔씨 타이완(NC Taiwan) 설립 10월 - 리니지 II 한국 상용 서비스 개시 11월 - 엔씨소프트, 개인정보보호 우수업체로 선정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 12월 - 리니지 II 대한민국 게임대상 대상(대통령상) 수상 2004년 4월 - 시티 오브 히어로 미국 상용 서비스 개시 5월 - 리니지 II, 북미/대만 상용 서비스 개시 6월 - 리니지 II 일본 상용 서비스 개시 7월 - 트루(True Corporation Public Company Ltd.)와 태국 합작 법인 엔씨 트루(NC True) 설립 7월 - 유럽 현지 법인 엔씨소프트 유럽(NCsoft Europe) 설립 10월 - 중국 북경에 NCsoft China R&D Center 설립 11월 - 리니지 II 중국 상용 서비스 개시 11월 - 리니지 II 유럽 게이머를 위한 서버 오픈 2005년 3월 - 시티 오브 히어로 한국 상용 서비스 개시 4월 - 길드워 북미/유럽 상용 서비스 개시 5월 - 길드워 한국 상용 서비스 개시 6월 - 리니지 II 태국 상용 서비스 개시 9월 - 길드워 전 세계 1백만 계정 돌파 10월 - 시티 오브 빌런 북미/유럽 상용 서비스 개시 2006년 1월 - 길드워 일본 상용 서비스 개시 1월 - 엑스틸 한국 상용 서비스 개시 2월 - 길드워 대만 상용 서비스 개시 2월 - 일본 오사카에 엔씨소프트 재팬(NCsoft Japan) 설립 2월 - 시티 오브 히어로 유럽 상용 서비스 개시 4월 - 길드워 팩션(Guild Wars Factions) 상용 서비스 개시 4월 - 오토어썰트 북미/유럽 상용 서비스 개시 5월 - 엔씨소프트 차이나(NCsoft China) 설립 6월 - 길드워 2백만 계정 돌파 10월 - 길드워 나이트폴(Guild Wars Nightfall) 상용 서비스 개시 11월 - 리니지 II, 북미/유럽 10만 액티브 유저 돌파 12월 - 길드워 3백만 계정 돌파 2007년 5월 - 던전러너 북미 정식 서비스 개시 5월 - 소니(SCEI)와 전략적 제휴 체결 5월 - 길드워 400만 계정 돌파 5월 - 길드워 아이 오브 더 노스(Eye of the North) 상용 서비스 개시 5월 - 샨다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와 전략적 제휴 체결 5월 - 리차드게리엇의 타뷸라라사 북미, 유럽 정식 서비스 개시 2008년 2월 - 길드워 500만 계정 돌파 4월 - 엔씨소프트 R&D센터 완공 11월 - 아이온: 영원의 탑 상용화 서비스 개시 12월 - 기능성게임 '푸드포스' 한글판 배포 2009년 1월 - 포인트블랭크 태국 상용 서비스 개시 4월 - 이노바시스템즈(Innova Systems Ltd)와 아이온 퍼블리싱 계약 체결 4월 - 아이온 중국 상용 서비스 개시 4월 - 길드워 600만장 판매 7월 - 아이온 일본, 대만 상용 서비스 개시 9월 - 아이온 북미/유럽 상용 서비스 개시 10월 - LG전자-인텔과 전략적 제휴 체결 10월 - 인텔과 글로벌 협력 체계 구축 12월 - 아이온 러시아 서비스 개시 12월 - 웹게임 ‘무림제국’ 서비스 개시 12월 - 캐주얼게임 개발사 ‘제페토’ 지분 인수 2010년 1월 - 개인정보관리보호 국제인증 획득 3월 - 캐주얼게임 개발사 ‘넥스트플레이’ 지분 인수 5월 - 서울대학교 ‘온라인 지식 나눔 서비스(SNUi)’ 후원 9월 - ‘펀치몬스터’ 정식 서비스 개시 10월 - ‘드래고니카’ 정식 서비스 개시 12월 - ‘N 서비스’ 개시 2011년 3월 31일- NC 다이노스 프로야구단 창단 (구단 명칭 확정은 2012년 8월 12일) 6월 - 웹게임 '무림제국' 업데이트 중단 8월 - 웹게임 '마이트앤매직 히어로즈킹덤즈' 업데이트 중단 2012년 6월 - 넥슨, 엔씨소프트의 지분 14.7%를 인수하여 엔씨소프트 최대주주가 됨 (경영권 미 인수. 넥슨은 2015년 10월 엔씨소프트 지분 전량 매각함.) 6월 - 블레이드 앤 소울, 정식서비스 시작(상용화) 8월 - 길드워2, 북미/유럽에서 정식서비스 시작 11월 - 블레이드 앤 소울, 게임대상 2012에서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엔씨소프트 게임대상에서 대통령상을 4번 받은 유일한 게임업체) 12월 - 길드워2, 타임지 ‘2012 올해의 게임’ 선정 2013년 8월, 판교 R&D센터 완공 11월 – 블레이드 앤 소울, 중국 서비스 시작 12월 11일 - 모바일 매거진 '버프(BUFF)' 출시 2014년 6월 - 와일드스타 북미/유럽 상용서비스 개시 2015년 5월 - 북미법인 엔씨웨스트(NC West)의 모바일 스튜디오 설립 (“Iron Tiger Studios”) 10월 - 길드워2: 가시의 심장(Heart of Thorns™) 상용서비스 개시 2016년 1월 - 블레이드 앤 소울, 한국, 중국, 일본, 대만에 이어 북미/유럽 정식 서비스를 시작. 2018년 1월 - NC소프트의 아이온의 리플라이 패치로 키나를 몰수, 거래불가능한 대체품 지급에 대해 재산피해를 야기, 사기에 가까운 이벤트로 과금유도를 하는등의 행위로인해 유저들이 NC소프트 모든 게임에 대해 사행성조장에 대해 법의 개편과 사행성 조장 게임 과금 컨텐츠를 규제 해달라는 목소리를 내며 단체행동에 나서고 있다. 2019년 11월 - 리니지2M을 출시했다. 2021년 4월 - 프로야구 H3가 서비스를 시작했다. 게임 제작한 게임 개발 중인 게임 서비스 종료한 게임 기업의 사회적 책임 엔씨소프트의 창립 15주년(2012년)을 맞아 엔씨소프트의 사회공헌 활동을 총괄하는 비영리 공익 재단 엔씨소프트문화재단 설립. 엔씨소프트문화재단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우리사회의 질적 도약을 위한 가치 창출’을 지향하며 사회공헌 활동을 더욱 체계적, 지속적으로 수행 하고 있음. 엔씨소프트문화재단 주요 활동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가치 제고 및 문화적 삶의 질 향상, 건강한 게임문화 확립,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회적 환경 조성 등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재단은 출연자 엔씨소프트의 뛰어난 분야인 게임 및 소프트웨어 개발을 통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는 활동을 주요 사업으로 하며, 게임사전 제작, 야구를 통한 사회공헌, 특수학교 및 부산 소년의 집 후원 등 비영리 공익목적의 사회공헌 활동을 수행 중 엔씨 소프트에 일어난 각종 사건들 리니지 II 개인정보 노출사건 2005년 5월 대한민국 리니지II의 사용자 개인정보가 노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엔씨 소프트가 게임을 업데이트 하면서 엔지니어의 실수로 사용자들의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암호화되지 않은 채 저장된게 발단이었다. 이로 인해 동월 11일부터 16일까지 엿새 동안 게임에 접속을 시도한 모든 컴퓨터에 개인의 비밀번호 등이 그대로 노출됐으며, 피해자는 약 50만명으로 추산된다. 리니지 명의 도용 사건 2006년 2월 13일 엔씨 소프트는 누군가가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 게임계정을 생성했다는 내용의 신고가 약 500건 접수됐다고 발표했다. 발표직후 경찰의 수사가 이루어졌으며, 경찰의 수사결과에 의하면 국내 작업장 운영자들이 다량의 계정을 이용해 매크로 등을 사용하여 리니지의 사이버머니와 아이템을 대량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약 28만건의 개인정보를 도용해 리니지에 가입시킨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관여되었던 모든 작업장 사장들은 입건되었으며, 사건을 방조한 엔씨소프트에도 책임이 있다하여 엔씨소프트 또한 입건되었다. 이 사건은 한때 대한민국의 사회적 이슈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최대 주민등록번호 도용사건 중 하나로 기록됐다. 이 사건은 엔씨소프트에서 개인정보가 유출된것이 아니라, 작업장 사장들이 대량의 개인정보를 도용해 리니지 계정을 생성한 사건이다. 리니지 III 소스 유출 시도 사건 2007년 4월 27일 서울지방경찰청은 엔씨소프트 전(前) 직원 7명이 리니지 III의 소스 코드를 일본 유명 게임 개발사에 팔려고 시도한 혐의가 있다고 밝혀졌다. 엔씨소프트에 의하면 잠재적인 손실은 1억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3D 기술 침해 논란 2009년 3월 12일 월즈닷컴의 CEO 톰 키드린은 2008년 12월 엔씨소프트의 시티오브히어로, 시티오브빌런, 던전러너, 엑스틸, 길드워, 리니지, 리니지2, 타뷸라라사 게임들이 자사의 가상현실과 관련된 특허권을 침해했다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리니지M 불성실한 보상 논란 2021년 1월, '문양 저장 및 복구 기능'인 아이템 업데이트 롤백(저장해두었던 상태로 돌릴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고과금 이용자들이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문제를 제기하였고, 엔씨소프트는 업데이트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미 과금한 이용자들에게 환불을 해주는 과정에서 마찰이 심해졌고, 불매 운동으로까지 번졌다. 각주 외부 링크 엔씨소프트 홈페이지 엔씨소프트 홈페이지(영문) 엔씨소프트 웨스트 홈페이지(영문) plaync 홈페이지 NC PLAY(공식 브랜드 미디어) 리니지 홈페이지 리니지2 홈페이지 아이온 홈페이지 아이온 홈페이지(영문) 블레이드 앤 소울 홈페이지 MXM 홈페이지 NC 다이노스 홈페이지 1997년 설립된 기업 경기도의 게임 회사 비디오 게임 개발사 비디오 게임 배급사 1997년 설립된 비디오 게임 기업 대한민국의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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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B1%84%ED%9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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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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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화(金彩華, 1988년 11월 7일 ~ )는 대한민국의 전 피겨 스케이팅 선수다. 일본 오사카 출신의 재일한국인 3세로, 2007년 한국선수권 챔피언이다. 기본정보 일본이름: 나가세 아야카() 신장: 158cm 코치: 하마다 미에, 야마모토 타무라 안무가: 탐 딕슨 ISU 공인 기록 쇼트프로그램: 46.96 (2007 4대륙 선수권 대회) 프리스케이팅: 82.57 (2010 4대륙 선수권 대회) 개인종합점수: 123.91 (2010 4대륙 선수권 대회) 경력 김채화는 어린 시절 일본의 국내 대회에 참가했지만, 2004-2005시즌부터는 대한민국 선수로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이는 김채화가 귀화하지 않은 재일 한국인이기에 가능했다. 2005-2006 시즌에는 김연아와 함께 2006 세계 주니어 선수권에 참가하여 7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김연아의 성적과 김채화의 성적이 합산되어 2006년에 이어 2007년에도 대한민국의 주니어월드 출전권은 3장으로 유지되었다.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을 마치고 뒤이어 있었던 4대륙 선수권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간사이 대학을 졸업한 후 코치로 전업했다. 프로그램 주요대회 기록 같이 보기 신예지 최지은 김연아 신나희 안도 미키 아사다 마오 외부 링크 ISU 프로필 각주 1988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재일 한국인 스포츠 선수 오사카부 출신 대한민국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간사이 대학 동문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 피겨스케이팅 참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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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4%C2%B719%20%ED%98%81%EB%AA%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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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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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四一九革命) 또는 4월 혁명(四月革命)은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의 학생과 시민들이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에 대항하여 일으킨 민주 항쟁을 말한다.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해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대규모의 시민들이 참여하며 전국적으로 확대된 반독재 투쟁이자 혁명이었다. 부정 선거 당시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4할 사전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3·15 마산 의거에 참여한 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만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의 허종 기자를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지며 격화되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 후 귀교 중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4월 19일 경찰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다.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고, 이 혁명의 결과로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회는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윤보선에 의해 지명된 장면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부정 선거 책임자와 그 과정에서 부정 축재를 한 사람들을 처벌하는데 실패하였으며 민주당 내의 구파와 신파 분열이 일어났고, 구정치인의 활동 금지와 부패한 공직자 처벌을 명분으로 곧 군사 정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명칭 4·19 민주혁명 혹은 4·19 학생운동, 4·19 의거, 4월 의거, 4월 혁명, 미완의 혁명 등으로도 일컫는다.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에서는 '의거'(義擧)로 불리다가 문민정부부터 혁명으로 승격되었다. 개요 배경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갑자기 사망하여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은 건재하였고, 이에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활동에 열을 올렸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독찰하도록 하는 등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 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며 대구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2·28 대구 학생의거) 3월 15일 자유당의 대대적인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함으로써,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3월 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고, 내무부장관이 홍진기로 교체·임명되는 등 정국을 수습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4월 18일의 서울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세종로-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의 만류로 하오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평화행진을 하면서 귀교하는 도중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등 폭력배들로부터 취재한 기자들 일부와 함께 학생들이 피습된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이 일어났다. (학생시위의 주역을 지방의 고교생으로부터 서울의 대학생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시위 목적도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 타도로 전환시켰다는 데 그 의의가 큰 사건) 4월 19일 데모의 구호는 등 독재정권 퇴진과 민주수호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서울 시내가 완전히 무정부상태에 빠지자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데 이어 유혈 사태가 벌어진 부산·대구·광주·대전에도 계엄령을 선포했다. 밤늦게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던 시위는 송요찬 계엄사령관을 필두로 계엄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일단 가라앉았으나, 하루 동안의 시위로 서울에서만 1백여 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자라는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그리고 4월 25일과 4월 26일의 데모로 이어졌다. 3·15 의거결과 3·15 의거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시민과 학생들이 항거한 사건으로, 이후 전 국민적 분노와 함께 4.19혁명의 도화선이 돼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3.15의거는 지난 2001년 제정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을 통해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됐으나, 4.19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독자적인 위상을 갖지 못했다가, 2010년 3월 9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사실상 '국가기념일'로 확정됐다. 또한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투표소에서 부정표를 발견한 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가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이 발단이 돼 시민 1천여 명이 낮 12시 45분부터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 제2차 마산 시위 전라북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여 경상남도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1960년 3·15 마산 의거 때 행방불명되었던 열사 김주열의 시체가 약 한 달 뒤 즈음인 4월 11일 바다에서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김주열 시체 인양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어,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날 시위대는 마산경찰서 무기고 문을 파괴하고 수류탄 1~3개를 탈취했으며 경찰서장실 앞뜰에 투척 폭발시켰다.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 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한 후 귀교하다가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아 한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사건. 신입생 환영회 날이었던 이날 오후 12시 50분 전교생은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총궐기하자」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교문 밖으로 진출, 국회의사당에까지 이르렀다. 의사당 앞에서 △경찰의 학원출입 금지 △마산사건 책임자 처단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마친 후 귀교길에 올라 질서정연하게 행진하던 중, 선두가 종로 4가 천일극장 부근에 이르렀을 무렵 쇠갈고리·쇠사슬·쇠망치 등으로 무장한 50~60명의 괴한들이 튀어나와 학생들을 무차별 난타했다.(가해자 :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동네깡패 임화수) 자유당이 사육한 이들 폭력배와의 약 30분에 걸친 난투극 끝에 한상철이라는 학생이 죽고 50여 명의 학생이 부상당했으며, 현장을 취재하던 사진기자 3명이 카메라를 빼앗기고 구타당했다. 이 4·18고대생시위대 피습사건은 이튿날인 4월 19일 학생들이 일제히 궐기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학생시위의 주역을 지방의 고교생으로부터 서울의 대학생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시위목적도 부정선거규탄에서 독재타도로 전환시켰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 증언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 시신이 발견된 게 도화선이 됐죠. 서울 지역 총학생회 간에 물밑 논의를 통해 19일 오전 9시 일제히 경무대와 중앙청 앞에 집결하는 것으로 행동 지침을 정했습니다. 경무대 앞엔 대학생만 2만여 명을 헤아릴 만큼 엄청난 군중이 몰렸습니다. 여기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많은 희생자가 났습니다(사망 21명, 부상 172명). 과잉 진압은 국민을 격노시켰고, 결국 엿새 후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과 대통령 하야로 이어졌습니다." 민주당의 대응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민주당 측에서는 윤보선 등이 부상당한 학생을 위문하였다. 4월 학생 시위의 진상조사단이 각 정당별로 꾸려질 때 그는 민주당측 부정선거 규탄사태 진상조사단장이 되어 마산과 부산, 창원 등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이어 정부의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관련자 색출 처벌을 요청하였다. 1960년 4월 11일 윤보선은 민주당의 마산시위 진상조사단장에 임명되어 경상남도 마산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최고위원회를 긴급 소집하여 대책을 숙의했다. 우선 현지에 내려가 사태의 진상을 조사, 파악하고 자유당 정권에 강력한 대응책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회의에서 그가 조사단장으로 결정되었다. 그는 급히 조사단을 구성, 야당의원 세 사람을 동반하고 마산 현지로 내려갔다. 마산에 도착해 보니 온 시가지가 극히 혼란한 상태였다. 그것은 데모가 아니라 완전히 혁명이었다. 법에 의한 질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마산은 지배되어 있었다. 도착한 즉시 김주열이 안치된 병원에 가 보니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그대로 있었다. 그를 단장으로 한 민주당 진상조사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산 시민들은 데모를 중지하고 몰려와 사태를 빨리 해결해 시민들을 희생시킨 경찰을 처벌해줄 것을 요구하며 즉석 연설을 청하기도 했다. 윤보선은 마산시장과 경남도지사, 마산경찰국장, 그리고 법원 사람들을 만나 회의를 열고 군중에 대한 발포금지와 감금된 시민들을 석방할 것 등을 골자로하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회의장을 에워싸고 기다리던 시민들이 회의 결과가 빨리 발표되지 않자 무차별 투석을 가하고 전기를 끊는가 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직접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이튿날 그를 비롯한 민주당 조사단은 다시 경찰서장과 지방법원 관계자들을 만나 해결책을 협의했으나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당시 내무부차관은 마산 시민의 1차 봉기 배후에 공산당 조직과 민주당이 개입돼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2차 봉기 역시 공산당 조직의 조정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윤보선은 그런 사실이 없다며 즉각 반박성명을 냈다. 마산 현지에서 조사를 마치고 국회발언을 통해 윤보선은 마산 시민 봉기는 공산당의 폭동이 아니라 애국시민의 의거라고 규정지었다. 그러자 자유당은 윤보선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4월 19일 1960년 4월 19일, 전날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발표한 총궐기 선언문과 같은 선언을 발표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들과 이에 고무되어 자극을 받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경무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한편 제1공화국 시절, 소위 '부부통령' 이라 불리던 권력의 제3인자로 기세충천하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 경무관(현 대통령 경호실장급)은 곡사포를 동원하여 학생들을 진압하여 막았으나, 곡사포는 곧 무너졌다. 경무대 정문을 부순 순간에 갑자기 군인들이 덮쳐서, 여기서도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다. 재선거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당황한 제1공화국 정부는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기붕은 이미 자택을 빠져나와, 경기도 양주의 모 육군부대로 피신하였다. 경찰로부터 무기를 탈취하여 기동화된 무장시위대원들은 저녁무렵 종로와 을지로 일대를 휩쓸었다. 오후 6시40분경 소방차와 트럭등에 분승한 시위대원들이 종로3가를 지나다가 동대문 경찰서 앞을 통과할 무렵 경찰은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이곳에서 쌍방간 최초의 사격전이 벌어졌다. 40여대의 차량에 분승, 밤거리를 질주하며 시위하던 수백명의 시위대는 숭인동 근처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고 잠시 주춤했으나 밤 8시경부터는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태우면서 27자루의 카빈총마저 탈취, 창동쪽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이에 앞서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 앞에서 경찰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무장시위대의 일부는 20여대의 차량에 분승, 의정부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다. 이들은 창동지서 경찰들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무렵 급거 출동한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다시 시내로 되돌아와 고려대 뒷산쪽으로 몰렸다. 안암동 근처 산에서는 20일 새벽까지 무장시위대원과 무장경찰 사이에서 사격전이 끝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은 계엄군에 선제발포를 금하고 유연하게 대처하여 사태를 수습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의 시위 참여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데모가 있던 날 저녁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자유당 국회의원인 최규남으로부터 "서울대학생들도 데모에 나올 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4월 19일 아침 8시에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각 단과대학 학장회의를 소집했다.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데모를 벌일 기세를 보여 학장들이 황급히 달려나가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후 4.19 혁명이 발생하자 그는 학생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윤일선은 경찰청과 법원에 전화를 걸어 학생들의 데모 참여를 만류할테니 최대한 관대한 처리를 요청하였다. 4월 19일 낮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신태환 서울법대 학장 등 7,8명의 학장들과 함께 국회의사당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까지 간 서울대 데모대를 찾아가 학교로 되돌아가라고 설득했다. 학생들은 공부가 학생들의 본분이며,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학생들의 귀교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이었다. 이어 학생들의 귀교 조건으로 내세운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동대문경찰서장을 만나고 왔는데 서울대생들은 건대, 중앙대 등의 데모대 대열과 함께 중앙청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위가 격화되면서 그는 학생들 옆을 따라갔다. 동아일보사 사옥 앞에서 서울대생도 아닌 불량차림의 청년이 데모대열에 끼어들어 선동하는 것을 본 윤일선은 "너 학생이냐"라고 물었다. 학생들 사이에 끼어들어 유언비어를 선동하는 자들을 막기도 하면서 그는 시위 학생들과 동행하였다. 국민대학교 앞에 이르러 경찰들이 발포 사격을 가하자 그는 학생들의 앞에서 이를 가로막고 중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대학 앞에서의 경찰의 총격에 학생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사태를 돌이킬수 없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어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학생들의 학교 복귀를 촉구하는 한편 경찰에 찾아가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 사면을 호소하여 학생들의 석방, 사면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데모대에 가담했던 학생들도 자연 해산했고 그도 학교로 되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이정재의 부하 깡패인 신정식은 4·19 혁명에 참가하는 경성전기공고 3학년 최기태 학생을 각목으로 구타하여 사망케 했다. 연세대학교에서 주도적으로 시도를 했던 인물로 김달중, 안병준, 김병철은 격변의 상황을 기록 자료로 남기고 2020년 연세대학교박물관에서 책으로 출판하였다. 당시 김병철은 연세대학교 3학년 재학중 18일에 가회동 계광순의 아들 계원명의 집에서 어머니께서 주신 광목에 인쇄소에서 프랑카드를 직접 만들었다. 19일에 채플시간에 총장인 백낙준 박사의 설교가 끝난 다음에 무대에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고 오늘 하자고 말하면서 연세대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제일 선두에서 신촌로타리로 진출하여 경찰과 충돌하였다. 다시 서대문 로터리에서 충돌하여 많이 맞아서 치아도 부러지고 다리도 상처를 입었다. 계속 전진하여 서울역을 거쳐 청와대로 갔는데 친구인 김흥수는 총까지 맞았다. 연세대학교 학생들을 대표하여 선언문을 5페이지를 직접 써서 만들었던 것을 어머님이 아들을 걱정하여 찢어버렸다. 그는 김달중과 안병준과 함께 연세대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주도적으로 4.19 혁명에 참여하였다. 1960년 8월 13일 김병철은 정치외교학과 3학년으로서 연세대학교의 학생운동의 모든 과정에 대하여 기자회견을 하였고 역사적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이 내용은 2020년 7월 중순경에 발굴되었다. 연세대학교에서는 4.19 혁명 6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전시전을 가졌으며 모든 기록물들은 문화재로 등재될 예정이다. 4.19혁명이 끝나후에 1960년 11월 서울대학교의 경제학과 한극과 함께 1960년 11월에 제 1회 전국대학생모의UN 총회를 창립하여 최초로 모임을 가졌다. 주로 한극은 자본주의에 대한 강연을 했고 김병철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연을 전국적으로 순회하면서 4.19의 정신을 확장하였다. 4월 19일 이후 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갔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다. 4월 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 계층으로 확산되어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W. P.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서 하야할 것을 권유, 설득하였다. 법무부장관 권승렬, 외무부장관 허정 등도 이승만의 하야를 요청했다. 이에 이승만은 자유당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 하였다.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의 방문을 받은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가 장면과 교회세력의 지시라고 설명했지만 메카나기 대사는 3.15부정 선거와 이를 저지르고도 숨긴 각료들 특히 경찰의 탓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즉각적인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 대학 교수단 데모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 데모가 4·19로 절정에 이른 뒤, 1960년 4월 25일, 전국 대학교수 대표들이 모여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선 사건. 이날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7개 대학교수 258명은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대법관 등은 3·15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요지의 14개항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어 4백여 교수들은 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하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감행, 서울시가를 행진했다. 이 4·25교수단 데모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켜 그날밤부터 다시 시민·학생들이 궐기했으며, 26일 또다시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시킴으로써 마침내 이승만의 하야를 촉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의 하야 이에 장시간 동안 여러 사람의 설득 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결정했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 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고 병원을 찾아 부상 학생들을 위문한 뒤, 방송에 애도의 뜻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4월 24일 유혈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 사임선언을 했다. 4월 26일 오후 1시에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연설내용은 다음과 같다. 4월 26일 오후 2시,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4월 27일 오후 3시에는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수리되었다. 대한민국 부통령 장면도 그보다 먼저 사퇴하였으므로 외무부장관 허정이 수석국무위원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이승만 부부는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갔다. 이기붕 일가 변사 4월 26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취임한 허정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관련자 처벌을 약속했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이기붕 처벌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기붕의 처벌을 거부했다. 4월 27일 경무대의 비서관 박찬일이 대통령 권한대행 허정의 집을 방문했다. 박찬일은 이기붕의 딱한 처지를 말하며 망명의 길을 열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허정은 이기붕의 망명을 결정하였다. 허정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박 비서관에게 확실한 언질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만송('이기붕'의 호)을 해외로 내보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는 '만송('이기붕'의 호)이 부패와 부정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산 국가에서처럼 실권(失權)=곧 죽음이라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민주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체면에도 관계되는 일이었다.' 고 했다. 그는 사태가 가라앉아 만송에 대한 공정한 재판이 가능할 때까지만 그를 해외로 안전하게 피신시킬 생각이었다. 한편, 양주로 피신했던 이기붕은 4월 27일에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다. 당시 그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자로써 당대 이승만의 권력을 반증하는 가짜 이강석 사건으로 잘 알려진) 이강석 소위는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4월 28일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부인과 함께 떠났고 그곳에서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91세 때 사망했다.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작가 최인호는 그의 연재소설 《가족》에서 이승만의 죽음에 대해 '독재자다운 비참한 말로'라고 비평하였다.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 1960년 4월, 부통령 장면은 잔여임기를 4개월 남겨놓고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 궐위시 부통령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도록 돼있었음으로, 장면은 이승만이 사퇴하기를 기다렸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데 그걸 포기한 것이다. 장면은 부통령직 사임 이유로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대통령 직을 계승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하여 이승만의 하야를 유도하려는 것이었다는 주장과, 두 번째로 부통령으로서의 도의적인 책임, 세 번째로 이승만의 불행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는다는 인식을 심는 것이 싫어서였다고 하였다. 장면의 부통령직 사임에 대해 이영석은 이승만이 하야하면 잔여 임기가 4개월도 안 되지만 그동안은 장면이 대통령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어있는데 이것을 거부한 것은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비판하였다. 민주당 구파는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에 대해 정략적 사임설을 주장, 그가 새 정부의 실권을 잡는데 보다 유리하리라는 정치적 타산에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고 비판했다. 독재 방지를 위해 내각책임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장면이 대통령이 되면 내각제 개헌을 실현해야 되는데, 현직 대통령에 있으면서 차기 정부 국무총리직 경쟁에 나서는 것은 여론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고 그것을 내다본 것이라는 것이었다. 민주당 구파 인사였던 김도연은 1968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에서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가 이승만 하야를 촉진했을 가능성은 인정하였으나, 당시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대통령직을 유지한다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장면이 국회에 사표를 전달한 이후 약간의 논란이 일기도 했는데, 대통령이나 부통령의 임기 도중 사퇴에 대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시영 초대 부통령과 김성수 제2대 부통령이 사임했을 때는 부통령 선임권이 국회에 있었음으로 사표 역시 국회에서 수리하였으나, 장면은 국민 직선으로 당선된 바 국민이 뽑은 부통령을 국회에서 물러나게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같은 전례를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부통령의 당선 공포는 국회의장이 하도록 돼있었음으로 국회는 사퇴 역시 국회의장의 선포로 효력이 생기는 것으로 하는 것이 합의되었다. 이재학 국회부의장이 장면의 사표가 접수되었음과 장면이 사임하였음을 발표함으로써 문제는 일단락되었고, 이는 얼마 후 이승만 대통령의 사표를 수리할 때도 똑같이 적용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은 곽상훈 국회의장의 선포로 공식화되었다. 사태 수습과 제2공화국 출범 부통령 장면은 4월 25일에 미리 사퇴하였으므로 궐위 중인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대신하여 외무부장관인 허정(許政)이 수석 국무위원 자격으로 내각수반 겸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하였다. 이후 6월 허정은 권한대행직을 일시 사퇴하였으나 곽상훈이 일주일만에 사퇴하므로 다시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하였다. 허정의 이승만 망명 주선 5월 29일 새벽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수반 허정은 이수영 외무부 차관에게 이화장으로 가서 직접 이승만 내외를 모시고 나오도록 지시하고, 그는 직접 김포공항으로 나갔다. 허정의 이승만 출국 정보를 입수한 경향신문은 5월초 이화장에 사람을 보내 이승만의 동태를 감시했다. 김포공항에 미리 도착하여 이승만 내외를 면담했다. 이승만은 그의 손을 잡고 '바쁜데 왜 여기까지...'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뒤따라온 신문기자가 이 박사에게 소감을 묻자 옆에서 프란체스카 도너가 대신 대답했다. 허정은 '더 지체하는 것이 좋지 않을 듯 해서' 이 박사 내외를 비행기 내로 안내했다. 당시 이승만을 배웅한 허정에 의하면 '나는 이승만의 아픈 심정을 직접 느끼는 듯해서 목이 메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 직접 프란체스카 도너의 편의도 봐 주었고, 여권도 발급해 주었다. 그는 심지어 '각료들까지도 모르게' 비밀리에 이승만의 출국을 추진 했다. 이는 허정이 단독으로 비밀리에 주한미국대사관 대사와 상의하여 이승만을 출국시켰던 것이다. 이승만 부처를 태운 비행기가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건너갈 때쯤 허정은 바로 공보실을 통해 이승만의 출국을 발표했고, 국회와 언론과 국민은 이승만의 출국 문제로 논란을 벌였다. 이승만이 망명하자 국회에서는 항의가 빗발쳤다. 장면은 그를 이승만의 심복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허정은 즉시 각의(閣議)를 열고 평소 이승만과의 사적 관계라든가 기타 여러 가지 사리로 보아 할 수 없이 그와 같이 단행하였다는 말을 하면서, 이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을 지겠노라고 하였다. 5월 30일 국회에서는 이승만 망명에 대한 책임추궁이 있었다. 허정은 국회에 불려가서 이승만 출국의 경위를 설명했다. 국회의원들 중에는 이승만의 출국 조치에 대한 그의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도 있었다. 양일동 국회의원은 그에게 이승만 망명의 책임을 추궁하였다. 양일동 의원의 추궁에 허정은 어쩔 수 없었다고 답변했다. 한편 장면 민주당 대표는 과도정부에 이승만의 탈출 경위와 진상을 밝히도록 요구하고 부패와 독재와 학정에 인책·사과하지 않고 망명함은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정부를 비난했다. 그가 설명을 마치고 하단하자 곽상훈 의장과 그 밖의 많은 간부들은 '영감 잘 내보냈소.'라며 오히려 허정을 격려해 주었다. 그는 국회에 나가서도 그러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함으로써, 그 일을 무사히 매듭지었다. 그러나 윤치영 등 이승만의 최측근들은 개인적으로 이승만을 비밀리에 출국 조치시킨 허정을 비판하였다. 한편 이승만의 측근 윤치영, 장택상 등 이승만의 최측근들은 그가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 및 이수영 외무부 차관 등과 음모를 꾸며 이승만을 해외로 몰아냈다고 성토하였다. 제2공화국 출범 1960년 5월 민,참의원 총선거 후보 등록이 있었고, 이때 자유당원들에 대한 집단적인 낙선운동과 선거방해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제1공화국의 고관이자 부산정치파동의 주역으로 규탄받던 장택상, 이범석 등은 학생들의 후보자 사퇴 요구를 묵살하고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7월 29일로 예정된 제5대 총선거에 관심을 보인 미국은 친미성향이 강한 장면을 선택했다. 7월 11일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서울의 주한 미국대사에게 장문의 훈령을 보냈다. 훈령에서 장면을 지도자로 선발하는 것이 이상적인 선택임을 주지시키고, 이 점을 허정에게 말한 뒤, 장면에게 지도자 자리를 수락하도록 은밀히 요청하라고 주문하였다. 6월 12일 내각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국무총리로 내각수반이었던 허정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8월 12일 국회 선거를 통해 대통령 윤보선을 선출했다. 그러나 민주당 구파이자 한민당 출신이었던 윤보선은 같은 구파 출신의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하려 했고, 이 때문에 민주당 신파가 집단 반발, 자유당은 자유당대로 민주당을 흔들기 위해 반대하여 낙마했다. 8월 18일 2차로 지명한 민주당 신파의 장면이 총리로 당선됨으로써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하지만 제2공화국은 얼마 못 가 이듬해인 1961년에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에 의하여 막을 내리게 되고 1979년까지 지속될 박정희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4.19 발포명령사건, 장면 부통령 저격 배후사건 등 6대 사건을 심리한 서울지방법원(재판장 장준택, 최석봉, 김동정)은 피고인 48명에 대한 언도 공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반응 1960년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는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 4월 21일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 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 한편 김일성은 국제부장 박용국을 시켜 주한미군만 철수되면 남한의 평화적 접수도 가능할 것이라며 국제사회에 대한 설득을 주문하기도 했다. 1995년 국립묘지로 승격된 이후 2007년 5월 19일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서 4.19 국립묘지에 방문했다. 홍성옥 위원장은 방명록에 "4.19 용사들의 불굴의 투쟁 정신과 의지를 안고 일본의 과거 청산을 위한 활동에서 조선 민족의 대중적 화합으로 투쟁할 때 승리를 달성할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북측 일행을 안내한 소장은 "이들이 4.19에 대한 깊은 배경 지식을 갖고 찾아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4.19라는 ‘혁명’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접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평가 혁명의 의의 김성식은 당시 《사상계》기고를 통해 4월혁명의 의의를 7가지로 제시했다. 민주주의는 가열한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이것만이 가치있다는 것을 경험한 점. 혁명의 성공으로 외국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을 높이 평가하게 하였다는 점. 혁명은 부정선거가 원인이나 근본정신은 20년간 누적된 부패정치와 사회악에 대한 항거였다는 점. 혁명으로 구체제가 무너지고 새 민주체제가 성립했다는 점. 혁명으로 반공 이데올로기가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 혁명으로 세계 민주운동사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점. 혁명으로 시민의 전체적인 개혁이 시작되는 동시에 한국 학생들의 정치, 도덕적 갱신과 성숙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전 청와대 수석 김정남은 4월혁명의 정신은 "반독재민주, 반외세자주, 반분열통일, 반기득권민중주의"라고 단언하고 이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는 것으로 정권타도뿐만 아니라 향후 미래의 공동체적 이상을 제시했다면서, 4월혁명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시작해야 할 시원, 고향이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이상, 목표로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4.19혁명은 민족정기이자 혼이요 생명이고 영원히 타오르는 민족의 숨결이고 정신이라는 것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4월혁명을〈낡은 것, 썩은 것을 퇴치하고 4월의 봄같이 새 생명이 돋아나는 새 세상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고 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간부의 대다수를 차지한 친일파가 썩은 것으로 이를 몰아내고, 관존민비, 남존여비 등 온갖 인간차별적 낡은 봉건인습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4월혁명은 모든 퇴영적인 것, 침울하고 억압된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혁명으로 한국인은 일종의 '사회적 민주주의'라는 '정신혁명'을 경험했다고 평가했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를 목표로 출발한 이 혁명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퇴진과 이기붕에 대한 심판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는 평가가 있다. 부정적 평가 역사학자 겸 언론인 한홍구에 의하면 '학생들과 시민들이 흘린 피의 수혜자가 된 민주당 정권은 '혁명의 계승자'이기보다는 이승만 정권 수립 당시 권력의 배분에서 배제된, 어떤 의미에서 자유당 정권보다 더 보수적인 집단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 때문에 제2공화국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분출을 수용하지 못하였고, 4.19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 불리게 되었다. 구 자유당 지지세력과 일부 우익세력 등 일각에서는 4.19를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태'로 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이승만의 측근 윤치영, 허정 등은 '4.19 사태'라고 평가하였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허정은 4.19 사태라고 평가하였다. 그에 의하면 4.19 사태는 혁명으로 보고 싶지 않다 고 하였다. 허정은 또 '4월의 사자들의 민주회복을 위한 투쟁은 의거였고 결코 혁명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허정에 의하면 '4.19 사태는 꺼져가는 민주주의의 횃불을 지키려는 의로운 궐기였을 뿐 정권에는 조금도 뜻이 없던 한없이 투명한 젊은 애국심의 발로였다. 이러한 의거는 혁명과는 분명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4.19 의거는 혁명이 아니다'라고 평가하였다. 이승만의 다른 측근이었던 윤치영은 4.19를 두고 김창룡의 요절을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윤치영은 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윤치영은 4.19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그는 4.19를 '4.19 사태'라고 보았다. 기타 한편 국회의장을 지낸 이만섭에 의하면 4.19의 직접적인 원인이 이기붕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기붕을 무리하게 부통령으로 만들려던 것이 4.19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석했다. 야당 대통령 후보가 죽었으니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이미 당선된 거나 마찬가지이기에 부통령은 야당은 장면이고 여당은 이기붕인데, 그 전에도 장면 박사가 부통령을 했고 굳이 이기붕이 부통령이 될 필요는 없었지만 끝내 부통령에 당선시키려고 자유당에서 애를 썼는데 무리수를 두다가 사단이 났다는 주장이다. 논란 1960년 3월15일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해 오후 3시30분 경남 마산에서 1천여 명의 시민, 학생이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며 거리에 나섰다. 역사에 기록된 3.15 의거는 이처럼 마산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호남 4·19 혁명단체총연합회는 광주가 마산보다 3시간 앞서 유혈봉기가 일어났다며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섰다. 호남 4·19 혁명단체총연합회는 이날 광주 동구 충장로에서 이승만 부정선거를 규탄했던 '곡(哭) 민주주의 장송' 데모를 재현했다. 투표소에서 부정 표를 발견한 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가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이 발단이 돼 시민 1천여 명이 낮 12시45분부터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 '민주주의 사망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상복을 입고 행진을 계속하던 시위대는 경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만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첫 유혈 시위로 기록된 민주주의 장송 데모로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했다. 전라남도 광주에 이어 오후 1시에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민주당 당원들이 시위를 벌였고, 오후 3시30분 경상남도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김 열사의 시신이 4월 11일 발견되고 결국 4.19 혁명으로 이어졌지만,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장송 데모가 사실상 도화선이 됐다는 것이 4·19단체의 주장이다. 김영용 호남 4·19혁명단체총연합회 회장은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장송 데모가 마산보다 3시간 앞섰는데도 역사는 마산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오류를 바로잡고자 행사를 열었다"며 "사실상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은 광주 3·15의거"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이어 "4·19혁명의 정신은 민주와 통일인데, 통일정신은 5·16 군사 쿠데타로 용공으로 몰려 역사에 묻혔다"며 "역사를 바로잡고 그날의 첫 의지를 살려 통일로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참고 문헌 연세가 기록한 1960년 4월 혁명 청년의 힘!: 정의의 깃발! 자유의 함성! 민주의 길!, 연세대학교 박물관 (서울: 연세대학교 박물관, 2020년) 같이 보기 부정선거 국립4·19민주묘지 4·19혁명기념도서관 4·19혁명 기념일 제1공화국 자유당 민주당 김주열 진영숙 이기붕 장덕수 임화수 신도환 권승렬 전성천 이승만 장택상 허정 윤치영 이강석 박마리아 장면 윤보선 과도 내각 제2공화국 3·15 부정 선거 대한민국의 부통령 3·19 마산 시위 광주 5.18 민주화 운동 곽영주 임영신 최인규 조병옥 부산일보 허종 2.28 민주 운동 각주 외부 링크 4·19 혁명 홈페이지 국립 4·19 묘지의 안장자 검색 4.19 혁명 당일의 모습을 담은 영상. 4월혁명 구술 아카이브 1960년 대한민국 1960년 시위 1960년 분쟁 대한민국 제1공화국 대한민국 제2공화국 20세기 혁명 대한민국의 헌정사 대한민국의 정치사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 이승만 대한민국의 학생 운동 대한민국의 사회 운동 1960년 4월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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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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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2%80%EB%A6%AC%20%28%EA%B0%9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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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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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puli)는 헝가리 원산으로 마자르족이 헝가리로 이주했을 때 데리고 온 것으로 여겨진다. 헝가리 경찰견으로 이용되며 미국·영국 등지에서도 사랑받고 있다. 모포 같은 북슬북슬한 털이 풀리의 최대 특징으로 악천후에도 강한 이중털이다. 털빛은 검은색과 회색이다. 성격은 유순하고 집중력이 강하여 경찰견이나 집 지키는 개로 알맞다. 참고 자료 외부 링크 사역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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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B%8B%AC%20%EC%A7%80%EC%97%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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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 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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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공학 및 디지털 회로에서 전달 지연이나 회로 지연(gate delay)은 논리 회로에 안정되고 유효한 신호가 입력되는 순간부터 논리 회로가 안정되고 유효한 신호를 출력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경우에 따라서 전달 지연은 입력 신호가 변경되었을 경우에 출력 신호가 최종 출력 수준의 50%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나타내기도 한다. 디지털 회로에서 회로 지연을 감소시키면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고 전반적인 시스템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논리 성분의 전달 지연에서 다른점은 경합 상태의 결과처럼 비동기 회로에서 글리치를 발생시키는 주요 원인이다. 논리적 노력은 동일한 논리 기술을 구현하는 설계들을 비교하는 데 전달 지연을 도구처럼 사용한다. 물리학 물리학에서, 특히 전자기학 분야에서, 전달 지연은 신호가 전송돼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예시로, 전기 신호의 경우에, 전선을 통하여 신호가 전송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또한 확산 속도도 참조하세요. 같이 보기 지연 계산 오염 지연 전자기학 전자공학 디지털 전자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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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B%A0%89%EC%82%B0%EB%93%9C%EB%A5%B4%20%EC%BC%80%EB%A0%8C%EC%8A%A4%ED%82%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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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케렌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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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1881년 5월 4일, 심비르스크(현재 울리야놉스크 주 울리야놉스크 ~ 1970년 6월 11일)는 제정 러시아의 정치가로 러시아 혁명 때 트루도비키의 영수이자 총리를 지냈다. 볼세비키에 의한 10월 혁명 후 핀란드와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했고,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나치 독일을 피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정착했다. 향년 89세로 뉴욕에서 사망했다. 생애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출신의 변호사였던 그는 정치범 변론으로 이름을 얻은 1905년 사회주의혁명당에 가입해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12년 제4차 두마(제정 러시아의 의회)에 러시아노동당 소속으로 진출해 제도권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2월 혁명 아직 전선에서는 독일군과 치열한 혈투를 벌이던 1917년 3월 15일, 이른바 2월 혁명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다. 혁명 직후 사회주의혁명당으로 복귀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부의장을 맡으며 새 러시아의 권력 중심부로 들어갔다. 혁명의 결과로 러시아에 공화정 형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을 거쳐 7월에는 총리가 되었다. 정치 활동 초기부터 온건 사회주의자로 일관한 그는 법무부 장관이 되자마자 사형제를 폐지하고 언론 자유를 확대하고 보통선거제 도입을 꾀하는 등 민주주의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러시아의 전 역사를 통해 사형제가 없었던 시절은 그가 정부에 머물러 있던 7개월 남짓뿐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는 계속 사형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지친 군인들과 일반 민중의 뜻을 거스르며 독일과의 강화에 반대했다. 러시아력으로 4월 18일에 임시정부 외무장관 밀류코프가 혁명으로 러시아가 전선에서 이탈할 것을 우려하는 서방연합국에게 전쟁 지속을 밝힌 바 있는데, 케렌스키도 이 입장을 지지했다. 실제로 7월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점차 케렌스키가 주도하는 공화정에 대해 좌우 양측으로부터 위기가 닥쳐왔다. 먼저 9월에는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우익독재 수립을 위한 쿠테타를 일으켰다. 전선의 군부대를 동원, 모스크바로 진격했지만, 정쟁을 중단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이 무렵 레온 트로츠키가 볼세비키에 가담했다. 이미 독일의 지원으로 망명지 스위스에서 핀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돌아온 블라디미르 레닌이 지도하는 볼세비키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었고, 트로츠키의 가담으로 군사 부문도 강화되었다. 트로츠키의 지도로 탄생한 적위대가 훗날 붉은 군대의 전신이 되는 적위대이다. 전쟁을 지속하려던 케렌스키가 제정 러시아처럼 배고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볼세비키는 "평화와 빵을"이라는 구호로 점점 세력을 넓혀나갔다(독일이 레닌을 이때 러시아로 보낸 것은 케렌스키의 정책이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 하에 러시아를 전선에서 이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덕분에 1920년대 독일과 소련은 상당히 사이가 좋았다). 10월 혁명 결국 10월, 대중의 지지를 잃은 케렌스키는 볼세비키가 주도한 10월 혁명으로 여자로 변장한 채 모스크바에서 탈출한다. 탈출 후 자신을 겨냥하며 쿠테타를 일으켰던 코르닐로프 장군은 1918년 4월에 적군한테 전사당했다. 결국 케렌스키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1940년에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지지를 표했으나, 스탈린은 이에 대해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전쟁기간동안 BBC에서 소련의 전쟁노력을 지지하는 방송에 종사하였다. 스탈린의 반대 세력이었다가 멕시코시티에서 암살당한 트로츠키와 달리, 케렌스키는 89세까지 살아남았고, 《러시아혁명 회상록》과 《사료집》을 집필하였다. 외부 링크 1881년 출생 1970년 사망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트루도비키 러시아 혁명 관련자 러시아계 미국인 러시아의 사회주의자 미국의 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스탠퍼드 대학교 교수 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 러시아의 망명자 러시아의 제1차 세계 대전 관련자 울리야놉스크 출신 러시아의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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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B%9E%98%ED%9D%AC%EB%A7%9D%EC%97%B0%EB%8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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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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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희망연대(未來希望連帶)는 2007년 9월 28일 창당한 친박계열의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으로, 2011년 2월 2일에 한나라당과 합당했다. 초기에는 후술되어있듯 빅텐트 성향의 정당이었으나, 2008년 이후 한나라당 계파 갈등으로 탈당한 친박 국회의원들이 다수 입당하면서 당명과 정체성도 친박 보수정당으로 급격히 바뀌게 된다. 덕분에 창당 당시에는 참주인연합(-主人聯合)이었으나 이후 미래한국당(未來韓國黨), 친박연대(親朴連帶) 등 수차례 개명하였다. 역사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참주인연합은 2007년 9월 28일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대선 출마를 위해 창당하였다. 정 후보의 지지를 위해 대통합민주신당에서 탈당한 김선미 의원이 당 대표를 맡았고, 의석수 1석으로 의석 수가 없는 다른 정당에 앞섰고, 창조한국당과 추첨하여 기호 7번을 부여받았다. 2007년 12월 18일 정근모 후보가 무소속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으나, 대선을 하루 앞둔 상태였으므로 후보 사퇴는 하지 않고 대선을 치러 15,380표(0.1%)를 득표하여 9위를 기록하였다. 2008년 대한민국 제18대 총선 이후 참주인연합은 2008년 3월 12일 미래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고, 18대 총선 한나라당 후보 공천 과정에서 탈락한 친(親) 박근혜 인사들이 공천에 불복, 한나라당을 집단으로 탈당하여 신당을 만들어 총선에 출마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신당을 창당하기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대선 이후 방치되어 있던 미래한국당에 서청원, 홍사덕 등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정치인들이 대거 입당하였고, 이후 총선에서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당명을 친박연대로 변경하였다. 한나라당 측에서 과연 특정 정치인을 지칭하는 표현이 당명으로 쓰일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선거관리위원회 측에서는 '친박연대'라는 명칭이 정당 명칭으로 문제가 없다고 결론내렸다. 의석수 3석으로 기호 6번을 부여받았는데, 이것이 공통기호가 아니어서 친박연대의 후보자가 없는 경우, 다른 정당의 후보가 6번이 되었다. 총선 결과, 13%의 정당지지를 얻어 자유선진당을 제치고 지지율 3위를 기록했으며, 지역구에서 당선된 6석을 비롯해 총 14석의 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2008년 비례대표 1번 당선자 양정례의 학력·경력 위조 및 특별당비 논란, 비례대표 3번 김노식의 공천 헌금 논란, 경북 경주 지역구 당선자 김일윤의 금품살포 혐의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어 친박연대는 구속영장이 발부된 김일윤 당선자를 4월 21일자로 공식 제명하였다. 뒤이어 비례대표 1,2,3번 양정례, 서청원, 김노식의 당선무효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친박연대라는 당명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의미하지만, 정작 박근혜는 친박연대에 합류하지 않고 한나라당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는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복당 및 합당 문제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는 친박연대를 비롯한 탈당 친박 인사들에 대해 복당을 불허한다는 뜻을 밝혔지만 이명박 대통령 · 박근혜 전 대표와 함께 차례로 회동을 가진 후 복당 불허 방침을 철회했다. 복당 대상은 검찰 수사로 물의를 일으킨 서청원, 양정례, 김노식을 제외한 모든 인사들이 될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그리고, 비례대표가 8명이나 있다는 특성 때문에 정당 해체와 함께 당대당 통합하는 형식을 취해야 손해가 없지만 옛 참주인연합 당원이나 대의원들이 극구 반대할 것으로 보여 쉽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나라당 측에서 다시 복당 문제를 논의한 끝에 복당을 허용하기로 하였다. 야당은 이에 대해 부패 전력이 있는 자들에 대한 무차별 복당 허용에 대해 비판하고 또한 거대 여당의 탄생이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이에 대해 친박연대 서청원 대표는 친박연대 소속 13명 의원 가운데 5명의 지역구 의원이 7월 15일부터 복당 신청을 하고 비례대표 8명은 7월 말께 정치자금 문제 등으로 기소된 서 대표와 김노식·양정례 의원 등의 재판 결과에 따라 당 해산을 하고 복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8년 기준으로 서청원, 김노식, 양정례 3인은 서울고등법원에서 당선무효형을 받은 상태이다. 이후 서청원, 김노식, 양정례 3인의 당선무효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었으며, 5석으로 줄어들었다가, 이후 비례대표 차순위 3인이 헌법재판소에 비례대표 승계 금지 조항에 헌법소원을 내어, 위헌 결정을 받아 서 3석이 늘어나서 2008년 기준으로 의석이 8석이 되었다. 3인의 당선무효형 이후에는 한나라당 합당 움직임을 중지하고 당명 개정, 독자 활동 등을 추진하여, 2010년 2월 12일에 당명을 미래희망연대로 변경하였다. 2010년 3월 24일 서청원 공동대표는 옥중 서신을 통해 한나라당과 조건 없는 합당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지방선거를 준비해온 후보자와 당원들을 중심으로 반발하였다. 한나라당과 합당에 대해 이규택 공동대표는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이며 구시대적인 밀실야합" 이란 말을 하면서 한나라당과 합당을 반대 하며, 심대평이 창당한 국민중심연합과 합당선언을 하였다. 이규택 대표의 합당 선언으로 미래희망연대는 분당위기까지 갔지만 이규택은 대변인을 통해 "우리 당이 한나라당과의 합당 의제를 4월2일 전당대회에서 결정하기로 한 만큼 심대평 국민중심연합과의 통합에 관한 논의는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를 중단하겠다." 말하면서 국민중심연합과의 합당을 철회하여 미래희망연대의 분당 위기가 하루 만에 극적으로 봉합됐다. 2010년 4월 2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전당대회를 열어 미래희망연대 대의원 128명중에 91명이 참석하여, 대회를 개최한 지 30여분만에 만장일치로 합당 안건을 추인하여 한나라당과 합당을 의결했다. 4월 18일 한나라당과의 무조건적인 합당에 반발한 미래희망연대의 일부당원 및 지지자들이 만든 미래연합이 창당해 출범했고, 7월 14일 한나라당이 전당 대회를 통해 미래희망연대와의 합당을 의결하였다. 하지만, 미래희망연대의 세금 납부 문제로 완전한 합당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가,2011년 2월 2일에 한나라당과 합당 절차를 마무리했다. 공천 헌금 비리 사건 국회의원 14명을 당선시켜 돌풍을 몰고 온 친박연대는 이후 후보 공천 과정에서 헌금을 받았다는 혐의가 포착되어 수사를 받았다. 이미 김일윤이 금품 살포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한 데 이어, 김노식, 양정례 두 명 역시 서청원 대표에게 15억씩의 공천 헌금을 준 정황이 포착되었다. 당시 양정례의 어머니는 비례대표 후보의석을 돈을 주고 구매하려 했다. 처음에는 한나라당의 비례대표 16위를 구매하려고 했으나 한나라당에서 거절하여 친박연대의 비례대표 1위를 구매 시도하였고, 친박연대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친박연대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양정례는 당선되었지만 이후 수사 과정에서 비례대표의 의석을 구매한 혐의가 드러나 결국 양정례는 당선무효형인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으며, 양정례의 어머니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또한 김노식은 징역 1년, 헌금을 받은 서청원은 징역 1년 6개월이 각각 확정되었다. 역대 정당 당원 및 당내 관련 사안 주요 선거 결과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같이 보기 박근혜 친박 서청원 자유한국당 (옛 한나라당) 미래연합 양정례 김을동 노철래 18대 국회 비례대표 공천헌금 사건 각주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2007년 설립된 정당 2011년 폐지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 원내정당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 원내정당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당 2008년 설립된 정당 2012년 해산된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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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C%EB%B3%B8%EC%9D%B8%EA%B3%BC%20%EB%9F%AC%EC%8B%9C%EC%95%84%EC%9D%B8%20%EC%9A%B0%ED%98%B8%EC%9D%98%20%EC%A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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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과 러시아인 우호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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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과 러시아인 우호의 집(, , “우호의 집”이라고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은 일본의 정치인 스즈키 무네오가 중의원 재직 시절에 러시아 쿠나시르 섬 유즈노쿠릴스크에 완성시켰던 시설이었다. 건설 경위와 현황 건설 당시 스즈키 무네오가 건설업자와 뒷거래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본 공화당의 중의원 사사키 켄쇼가 이 의혹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추궁할 때 '무네오 하우스'라는 속칭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였고 매스컴에서 이것을 보도해 버려 '우호의 집'은 이런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인터넷 상에서의 영향 이 의혹이 떠오른 2002년 2월 무렵, 인터넷 게시판 사이트 2채널의 테크노판에 '애시드 하우스(음악의 장르) = 무네오 하우스'라는 이름의 게시글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말장난으로 올렸던 글이었으나 덧글 중에 DJ SHIKARABA 등이 스즈키 무네오 등, 당시 국회의원들의 답변 외 여러 가지 목소리를 샘플링해 하우스 뮤직을 발표해버리자 화제가 되었다. 테크노는 물론 트랜스까지 어우러진 장르였지만 모두 '무네오 하우스'라고 불렸다. 2002년 봄에서 여름에 걸쳐 신주쿠, 교토 등에서 클럽 이벤트가 개최되어 일시적으로 서버 트래픽이 문제가 될 정도로 열기가 높았다. 2003년 이후 붐이 시들해진 뒤에도 공식 사이트 게시판에서 계속 곡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앨범으로는 20장 이상 분량의 곡이 완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당연하게도 본인 허가 없이 언더그라운드적인 활동이었지만, 2004년 5월에는 삿포로에서, 2006년 2월에는 도쿄에서 개최된 무네오하우스의 클럽 이벤트에는 'MC 무네오'라는 이름으로 스즈키 무네오 본인도 참가하는 등, 현재는 사실상 본인이 공인한 셈이 되었다. 외부 링크 공식 사이트 남쿠릴 열도 쿠릴 열도 사할린주 네무로 관내 러시아-일본 관계 쿠나시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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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A0%ED%8F%B4%EB%A6%AC%20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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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폴리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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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폴리 풋볼 클래브()는 토스카나주 엠폴리에 위치한 스타디오 카를로 카스텔라니 경기장을 근거로 하는 이탈리아의 축구 클럽이고 1920년에 창단되었며, 1921년에 첫 경기를 치렀다. 팀은 최근 10년간을 세리에 A와 세리에 B 사이를 왔다갔다를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가장 최근에는 엠폴리가 2004년에 강등되었지만, 다음 시즌에 세리에 A로의 승격권을 확보하였으며, 세리에 B에서 1위를 하고 승격후에 리그에서 7위를 기록하여 클럽 역사상 첫 유럽대항전 출전권을 획득하였다. 엠폴리는 2013-14 시즌에 리보르노에게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패배한 이후, 팔레르모에 뒤를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며 2014-15 시즌 세리에 A 승격권을 확보하였다. 역사 엠폴리의 역사는 그들이 1980년대에 세리에 B로 올라오기전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다. 1986년에, 이 소도시의 클럽은 세리에 A 승격이라는 놀라운 성과물을 내었다. 피렌체에서 첫 홈경기를 치르는 엠폴리는 인테르나치오날레와의 세리에 A 데뷔전을 1-0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우디네세가 승점 9점을 감점당한 덕분에, 그들은 30경기에서 승점 23점과 13득점에 불가했지만 강등을 피했다. 엠폴리는 다음 시즌에 승점 5점이 삭감된 상태로 시작하였고 좋은 모습을 보였음에도 강등되고 말았다. 그들은 1989년에 세리에 C1으로 다시 한번 강등되었다. 그들은 1996년에 세리에 B로 복귀하기 이전에 세리에 C1에서 일부 시즌을 보냈고 1997년에 두 번째 연이은 승격을 해냈다. 루차노 스팔레티 감독하에서, 엠폴리는 12위로 마감하며 강등을 피했다. 다음 해에 세리에 B로 강등되어 3년간을 있었고, 이 기간에 젊은 뛰어난 재능의 선수들을 육성을 해내는 걸로 유명하였다. 2002년에 세리에 A로 승격하였고 2005년에 강등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들은 세리에 A 2005-06 시즌을 뛰어난 1부 리그 10위로 마감하였다. 시즌 종료후에 2006년 이탈리아 축구 스캔들의 결과로, 그들은 다음 시즌 UEFA 컵 출전권을 획득하였지만, 예상치 못하게 클럽 경영진들이 UEFA가 요구한 조건들을 충족하지 못하면서 출전하지 못하였다. 세리에 A 2006-07 시즌에 그들은 다시 한번 UEFA 출전권을 얻었다. 유럽 클럽 대항전 데뷔와 강등 유럽 클럽 대항전 출전이 현실로 다가오자, 경영진들은 인테르나치오날레의 힝콩, 밀란의 이냐치오 아바테와 리노 마르초라티, 유벤투스의 세바스티안 조빈코,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 레이 볼파토 같은 세리에 A의 빅클럽들의 유망주 몇 명을 공동 소유 계약으로 데려와 선수단을 강화시켰다. 엠폴리는 그들의 UEFA 데뷔인 FC 취리히와의 1,2차 전에서 합계 4-2로 패하며 탈락했다. 그리고 해당 시즌 초기에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파브리치오 코르시 회장은 UEFA 출전권을 가져다준 루이지 카니를 경질시키고, 알베르토 말레사니로 대체시켰다. 하지만, 클럽의 불운은 끝나지 않았고 말레사니도 삼프도리아에 0-2로 패하여 리그 최하위권으로 떨어지고 경질당했다. 2008년 3월 31일에 카니가 다시 선임됐지만 결국 팀은 강등의 아픔을 겪고 말았다. 카니는 사임을 하였고 2008-09 시즌을 대비해 실비오 발디니로 대체되었다. 발디니의 재임 기간도 리그를 5위로 마치고, 승격 플레이오프에서도 브레시아에 탈락하면서 썩 성공적이지는 못하였다. 세리에 B 현재 선수 명단 우승 세리에 B 우승 (3): 2004–05, 2017–18, 2020–21 코파 이탈리아 세리에 C 우승: 1995–96 세리에 C1 우승: 1982–83 각주 외부 링크 엠폴리 FC 공식 홈페이지 토스카나주의 축구단 1920년 설립된 축구단 세리에 A 구단 세리에 B 구단 세리에 C 구단 세리에 D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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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A%BD%EA%B3%A8%EC%9D%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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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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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 , )은 몽골에 거주하는 몽골계 민족이다. 러시아, 중국(주로 내몽골 자치구)에 거주하는 재외 몽골인도 존재한다. 몽골인들의 모국인 몽골에서는 300만명 이상이 살며, 러시아의 재외 몽골인은 200만명 정도이다. 중국 내몽골 지역에 사는 몽골인들은 멍구족()으로 불리며 한국계 소수 민족인 조선족과 유사하게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 분류된다. 기원 탁발선비가 원거주지인 알선동을 떠난 뒤 ‘실위’가 출현할 때까지 어떠한 북방 종족도 대규모로 이동해오거나 갔다는 기록이 문헌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위인은 서쪽으로 옮겨가지 않고 남아 있던 탁발선비의 잔여세력으로 탁발선비와 기본적으로 같은 원류라고 할 수 있다. 실위 중에서 몽골족의 선조인 몽올실위는 《구당서》와 《신당서》 등에 기술된 20부 실위의 하나였다. 《구당서》와 《신당서》는 몽올실위가 망건하(望建河, 《신당서》는 室建河로 기록함)의 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망건하는 지금의 아르군 강 및 헤이룽강에 해당된다. 이들은 본래 다싱안링의 서쪽인 아르군 강으로부터 헤이룽강 상류의 산림과 초원이 교차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9세기 중엽 위구르 제국의 붕괴를 계기로 실위인들이 대이동을 단행하자, 몽올실위도 수렵과 유목이 교차하는 곳인 헨티산맥의 오논강 유역으로 이동해왔다. 몽골의 기원에 관해 라시드 앗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라시드 앗딘의 설명은 몽골족이 에르구네를 기반으로 성장해왔음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몽올실위가 에르구네 일대에 거주했다는 한문 기록과도 일치한다. 몽골이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보이는 한문 사료는 《구당서》「북적전(北狄傳)」으로 ‘몽올(蒙兀)’이라 했고, 《신당서》「북적전」에서는 ‘몽와(蒙瓦)’라고 했는데, 당시 음운 통례상 올(兀)과 와(瓦)는 같은 음이다. 요·금시대의 한문 문헌에서 ‘맹고(萌古)’, ‘맹골(萌骨)’, '몽골(朦骨)' 등으로 표기되다가 12세기 말경에 ‘몽고(蒙古)’로 표기되기 시작한다.. 또한 《몽골비사》에서는 “칭기스칸의 뿌리가 되는 부르테 치노와 고아 마랄이 ‘텡기스(Tengis)’를 건너와 오논 강의 발원지인 부르칸 칼둔에 터를 잡았다”고 했다. 여기서 ‘텡기스’는 튀르크어로 바다를 의미하지만, 내륙 한가운데 바다는 호수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 몽골인들은 큰 호수를 바다를 의미하는 ‘달라이(Dalai)’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텡기스’가 ‘쿨룬호’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싱안링 서쪽지역의 에르구네(아르군 강)와 훌룬 부이르 초원에 거주하던 몽올실위가 몽골의 직접 조상이 된다는 것이 많은 사료를 통해서 입증되고 있다. 840년, 위구르 제국의 멸망은 몽올실위를 비롯한 실위인들의 몽골리아 진출을 용이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이주한 실위인들은 당시 대제국을 건설했던 튀르크와 위구르의 선진문화와 유목경제를 흡수함으로써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것은 실위인들이 흥안령 서쪽의 에르구네하 일대에서 수렵과 약간의 목축, 농경을 하던 경제에서 기마 양 유목경제로 본질적인 전환을 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유목경제로의 전환은 싱안링 일대의 수렵과 원시농경에 비해 보다 안정적인 생산을 보장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초원으로 이주한 수렵민은 유목민이 되었고, 이들의 기마 양 유목민화는 몽골 초원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몽골 초원이라는 생태환경에서 초원 기마 양 유목민으로 전환한 몽올실위는 향상된 기동력을 발판으로 크고 작은 부족 전쟁을 통해 강력한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이후 몽올실위를 주체로 실위인들이 점차 몽골족 으로 응집되었고, 싱안링을 포함해 실위인들이 거주하고 활동했던 모든 지역은 몽골제국의 통치권 아래 흡수되었다. 역사 오늘날 몽골인의 전신은 동호족 계통에 속하는 몽올실위로 몽골을 지배했던 흉노족, 돌궐족의 혼혈 민족이다. 중앙아시아 북부를 장악한 흉노족은 크게 코카서스계 유럽인종과 몽골로이드 아시아 유목 민족이 있었다. 이들을 튀르크족이라고 부른다. 흉노 무덤에서는 코카서스계 유럽인종과 몽골로이드 유골이 함께 출토되었다. 튀르크족이 몽골과 동아시아를 휩쓸고, 튀르크족의 지배층이 동호에 남게 되면서 이 시점에 동호족의 일파는 현재 몽골 지역인 바이칼, 울란바타르로 이동하였다. 이 동호족의 일파들이 오늘날 몽골인의 전신인 몽올실위로 추정된다. 근대 역사 전란에 휘말렸으나 1921년 담딘 수흐바타르가 전란을 수습하고 1924년 국호를 몽골 인민 공화국이라 함에 따라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 이후 소련의 영향력이 막강해졌으며 중국과 소련의 분쟁이 발생할 때 옛 소련을 지원하였다. 그에 힘입어 코메콘 가맹 국가도 몽골에 경제적 지원을 해 주었다. 1992년에 복수정당제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 공산주의 체제를 버리고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몽골 부족 중세 몽올실위 : 대부분의 몽골 부족들의 전신이 된 동호계 민족으로, 현재는 사멸하였다. 몽골부 : 몽골 제국의 전신인 부족이다. 보르지긴 : 몽골 제국의 창건자인 칭기즈 칸의 씨족이다. 나이만부 케레이트부 메르키트부 타타르부 근현대 오이라트 준가르 할하인 : 오늘날 몽골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부족이다. 몽골 밖의 몽골족 중국의 자치구인 내몽골 자치구는 중국 몽골족 자치구이지만, 이 지역의 다수 민족은 한족이다. 러시아에도 몽골족 자치 지역이 있는데 칼미크 공화국과 우스티오르딘스키부랴트 자치구, 아긴스크부랴트 자치구, 부랴트 공화국이 바로 그것이다. 언어 키릴 문자가 주로 사용된다. 현재는 몽골 민주 공화국에서 몽골 문자를 학교에서 배우기도 한다. 현대 몽골어는 러시아어 차용어가 소수 있다. 전통 문화 백식은 유제품을 말하고 홍식은 육류(주로 소, 양, 염소고기 등)를 말한다. 백식은 몽골어로 순결하고 고상한 음식이라는 뜻으로 귀한 손님이 오면 통상적으로 반드시 접대하며 가족이나 친지 중의 한 사람이 먼 길을 떠날 때도 백식을 먹게 하여 안전한 여행을 기원한다. 홍식은 몽골어로 붉은 음식이라는 뜻으로 시집을 갈 때는 반드시 삶은 양의 가슴고기를 먹음으로 가족들과의 이별을 나타낸다. 몽골인의 거의 대부분은 원나라가 중국 한족을 지배할 때 중국 지역에서만 믿고 있었던 라마 불교를 믿는다. 같이 보기 몽골 외몽골 내몽골 자치구 재일몽골인 각주 러시아의 민족 몽골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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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3%B0%EC%98%A4%EC%B9%B4%20%EC%9A%94%EC%8A%A4%EC%B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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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오카 요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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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오카 요스케(, 1880년 3월 3일 ~ 1946년 6월 26일)는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의 일본 제국 외무대신이었다. 초기 이력 1880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나 사촌 겐스케와 함께 1893년 미국에 건너가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정착했다. 이후 미국인 던바 부인의 가정에서 하숙하였다. 던바 부인은 마쓰오카의 미국적응을 도와 주었다. 이후 포틀랜드의 애킨슨 그래머 스쿨(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프랭크(Frank)라는 미국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던바 가족의 영향으로 기독교도로 자라났다. 이후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로 가서 오클랜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법학자의 꿈을 갖고, 버스안내원, 커피 외판원, 일본어 통역자로 고학하면서 1900년 오리건 대학교의 로스쿨을 졸업하였다. 이 당시 그는 독실한 기독교도였으며, 고등학교 시절엔 열성적으로 성경공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외교관 마쓰오카는 1902년 고국으로 돌아와 외교관이 되었으며 2년 뒤 상하이의 부영사가 되었다. 이후 18년간 그는 승진을 거듭하다 1921년 퇴직하고, 남만주 철도(이하 만철)의 간부가 되어 만주로 건너갔다. 1930년 만철에서 퇴직하여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33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워 국제적 여론이 악화되고, 국제연맹이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자, 마쓰오카의 주도하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후 의원직을 사퇴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 만철 총재가 되었고, 이 당시 관동군에서 특무장교로 근무중이던 도조 히데키와 급속히 가까워졌다. 외무 대신 (1940 ~ 1941)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마쓰오카는 외무대신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내무대신 히라누마 기이치로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마쓰오카는 일본-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간의 삼국 동맹 조약을 강하게 옹호했다. 마쓰오카는 이것이 중국을 침략하는 일본을 점점 압박하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최적의 균형추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1940년 맺어진 삼국 동맹 조약의 주역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한편 1940년 12월 31일, 마쓰오카는 유대인 사업가들에게, "일본은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있지만, 일본은 그들의 반유대정책과는 무관하다" 고 말하기도 했다. 마쓰오카는 1941년 4월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1년 6월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일본에게 소련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하였고, 마쓰오카는 이를 강력히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고노에 총리과 육해군 고위장교들에게 이를 실행할 것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소련 공격대신 미국을 공격하고 남방으로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마쓰오카는 계속 소련 공격을 주장하는 동시에 미국을 상대로한 협상에서 강경해졌다. 마쓰오카는 미국이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가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쓰오카의 미국에 대한 적의는 고노에를 놀라게 하였다. 고노에는 미국을 상대로한 전쟁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고노에는 내각을 개편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사임하여 마쓰오카를 물러나게 했고, 이후 다시 수상에 올라 도요다 데이지로를 새로운 외무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마쓰오카는 이후 전쟁기간 동안 별다른 역할 없이 지내다가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되었다. 그러나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옥사하였다. 각주 외부 링크 1880년 출생 1946년 사망 결핵으로 죽은 사람 일본 제국의 외교관 일본의 외무대신 일본의 척무대신 제2차 세계 대전의 정치인 태평양 전쟁 관련자 남만주철도 사람 A급 전범 피고 야마구치현 출신 훈3등 욱일중수장 수훈자 일본의 개신교도 히카리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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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8%AC%EA%B3%BC%EA%B3%84%EC%8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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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과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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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투과계수(透過係數, Transmission coefficient)는 전자기파 등을 비롯한 어떤 파동이 다른 물체와의 경계면에 입사했을 때, 그 물체를 투과하는 정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광학이나 양자역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이다. 광학에서의 투과계수 광학에서 투과계수는 전자기파가 어떤 매질의 표면이나 광학소자를 통과하는 정도를 가리킨다. 입사파(入射坡)와 투과파(透過波)간의 진폭이나 세기(광도)의 비를 이용해 계산한다. 투과계수의 계산 전자기파의 단위면적당 세기, 즉 광도(intensity)는 다음과 같다. 는 전자기파에서 전기장의 진폭. 유전율이 인 매질에서 인 매질로 전자기파가 진행할 때, 입사광과 투과광의 광도와 속도를 각각 과 , 과 라고 하면, 투과계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여기에서 과 는 두 매질의 굴절률을 가리킨다. 투과계수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반사계수(反射係數)가 있다. 반사계수는 매질이나 광학소자의 표면에서 반사되는 정도이다. 반사계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라 이다. 양자역학에서의 투과계수 비상대론적() 양자역학에서, 투과계수()와 반사계수()는 경계면에 파가 입사되었을 때 거동을 묘사할 때 쓰인다. 투과계수는 종종 경계를 터널링하는 확률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투과계수는 입사와 투과 확률 흐름 밀도() j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여기서 는 경계층을 입사하는 확률이고 는 경계층을 투과하는 확률이다. 반사계수 R은 다음과 같이 투과계수와 비슷하게 정의된다. 두 계수의 합은 확률 보존에 의해 이다. WKB 근사법에 의한 투과계수 계산 WKB 근사법을 이용하여, 터널링 계수를 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은 전위 장벽의 두 개의 고전적인 회귀점이다. 만약 의 근사를 취하여 플랑크 상수보다 매우 큰 매개변수에 고전적 한계를 취하면, 투과계수는 정확하게 0으로 수렴한다. 이런 고전 극한은 현실적이지가 않고, 좀 더 단순히 풀기 위해, 네모 전위()이라 가정한다. 만약 투과 계수가 1보다 매우 작으면, 식을 다음과 같이 근사할 수 있다. 여기서, 은 전위장벽의 두께이다. 같이 보기 프레넬 방정식 반사계수 물리광학 기하광학 파동 양자역학 광섬유 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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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A9%EC%82%B0%EA%B3%A0%EB%93%B1%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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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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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고등학교(芳山高等學校)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97년 5월 8일 : 일반계 고교로 설립 확정 2002년 9월 1일 : 방산고등학교 교명 확정 2003년 2월 15일 : 신입생 428명 배정(남학생 7개 학급, 여학생 5개 학급) 2003년 3월 1일 : 제1대 백정길 교장 취임 2003년 3월 3일 : 입학식(신입생 428명) 2003년 9월 30일 : 개교식 2006년 2월 9일 : 제1회 졸업식(졸업생 438명) 2021년 1월 8일 : 제16회 졸업식(졸업생 275명, 누계 6,769명) 2021년 3월 2일 : 입학생 (신입생 265명) 2022년 9월 1일 : 제8대 홍애란 교장 취임 학교 동문 참고 자료 각주 외부 링크 서울 송파구의 고등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남녀공학 고등학교 2003년 개교 과학중점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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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91%EC%B2%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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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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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천(甲川)은 금강의 제1지류이며, 대둔산에서 발원하여 대전을 향하여 북쪽으로 흘러 금강에 유입되는 국가하천이다. 개요 갑천은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검천천과 어곡천을 합치며 서구 용촌동에서 두계천과 합류하면서 국가하천으로 바뀐다. 이어 금곡천과 매로천이 합류하고 이어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에서 진잠천과 합류하고 이어 유성천과 합류한다. 대덕대교 앞에서 탄동천과 합류하고, 유성구 도룡동에서 유등천과 합류한다. 이어 법동천 및 관평천과 합류한 뒤, 대전광역시 대덕구 문평동에서 금강과 합류한다. 지류 국가하천 등급의 지류로는 대전천과 유등천이 있고 나머지 지류들은(검천천, 어곡천, 두계천, 매로천, 진잠천, 유성천, 탄동천, 법동천, 관평천) 모두 지방하천이다. 주변 원정동 부근 갑천이 흐르는 원정동은 영화 클래식에서 다리위에서 반딧불이를 잡는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월평공원 월평공원은 대전에 있는 갑천과 유등천 사이의 산 도솔산과 그 인근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399만 4734m2( 120여만평)에 이른다. 갑천의 대전시 구간 중 가수원동과 월평동은 잘 보존된 생태계를 가지고 있는데, 멸종위기 어류인 미호종개와 땅귀개 등 34종의 어류와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 원앙 등 59종의 조류가 발견되었다. 이 월평공원 구간은 국토해양부가 주최한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선정되었다. 도솔산에는 육상생태계가 갑천에는 수상생태계가 잘 보존이 되어 습지 생태계가 이루어져있다. 월평공원에는 소나무가 가장 많고, 아카시나무,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등 참나무 군락지가 있고, 자귀나무, 물오리나무, 노간주나무, 산초나무같은 활엽수와 찔레, 청미래덩굴, 댕댕이 덩굴 같은 덩굴식물이 자라고 있다. 습지에는 뱀모양의 모양으로 흐르는 갑천이 여울과 소를 만들어내어 개구리, 두꺼비, 까치 살모사, 자라 등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천연기념물인 미호종개와 한국특산인 10여 종의 민물고기들의 산란장과 서식처이다. 환경부에서는 늦반딧불이 서식처를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또한 도솔산의 계곡에는 도룡뇽, 맹꽁이가 살고 있다. 도룡동 권역 갑천은 도룡동의 남쪽을 흐르는데, 갑천 위로 대전의 랜드마크 중의 하나인 엑스포 다리가 놓였다. 엑스포 다리는 도룡동과 한밭수목원을 잇는다. 활용 대전광역시 서구청은 둔산동에서 기성동에 이르는 ‘갑천 생태문화탐방 녹색길’ 사업을 추진하여 하천변길을 따라 걷기 운동, 자전거타기, 생태탐방이 가능하다. 교통 대전광역시내에서는 대전 1호선 갑천역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각주 금강 권역 금강의 지류 충청남도의 하천 대전광역시의 하천 대한민국의 국가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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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7%80%ED%8C%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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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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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GPANG)은 GAME의 'G'와 의성어 '팡(Pang:팡팡터진다)'이 결합된 것으로 KTF(현 KT)의 차세대 모바일 게임 서비스이다. 원래 지팡 전용폰 게임만 서비스되었지만 전용 휴대전화와 전용 게임의 판매 부진 때문에 2007년 11월 23일부터 공식 사이트가 KTF 모바일 게임 포털 사이트로 바뀌면서 일반 모바일 게임도 같이 서비스되고 있다. 지팡 전용폰 게임 서비스는 2009년 6월 1일에 종료되었다. 지팡 전용폰 게임 지팡 전용폰 게임은 일반 모바일 게임과는 달리 3D 가속칩이 탑재된 지팡 전용 휴대전화가 따로 있고, 보다 높은 그래픽을 지원한다. 그리고 유선 사이트에서도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지팡 전용폰 게임을 지원하는 휴대전화는 SPH-G1000, LG-KV3600, SPH-B3200 (출시순)이 있다. 이 휴대전화들은 게임폰으로 불리기도 한다. 게임 목록 개발 중단된 게임 목록 외부 링크 지팡 공식 웹사이트 모바일 소프트웨어 온라인 게임 서비스 모바일 소프트웨어 배포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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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A%A9%EA%B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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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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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木簡)은 문자를 기록하기 위해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 또는 대나무 조각이다. 주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또는 널리 쓰이기 이전에 사용되었다. '목독'(木牘) 또는 '목첩'(木牒)으로도 불리었고, 대나무로 만든 죽간(竹簡)과 함께 사용되었다. 특히 목간과 죽간을 총칭하여 '간독'(簡牘)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20세기 초에 처음 발견된 이래, 서쪽 감숙성 지방에서 군사적 내용을 적은 것이, 다른 지역에서는 주로 무덤에서 목간이 발견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1920년대 최초로 발견되어 현재까지 약 20만 점이 출토되었으며, 8세기 나라시대의 왕궁이었던 평성궁(平成宮)같은 궁궐터에서 많은 양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1975년 경주 안압지 발굴 조사에서 처음 출토된 이후 현재까지 약 5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신라권(경주, 함안, 창녕, 김해)에서 출토되었고, 백제권의 부여, 익산 지역 등에서도 출토되었다. 목간 발굴지 경주 안압지 경주 월성 해자 경주 황남동 376번지 유적 국립경주박물관 부지 내 유적 하남 이성산성 부여 궁남지 부여 쌍북리 유적 부여 능산리사지 부여 관북리 유적 함안 성산산성 김해 봉황동 유적 익산 미륵사지 인천 계양산성 태안 마도 해역의 마도3호선 같이 보기 금석문 죽간 각주 외부 링크 가야문화재연구소 개정판 한국의 고대목간 유형별 책 기록 매체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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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A6%AC%EB%93%9C%EB%A6%AC%ED%9E%88%20%ED%8F%B0%20%ED%9B%84%EC%97%90%EB%84%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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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폰 후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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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폰 후에네(, 1875년 3월 22일 ~ 1969년 4월 4일)는 20세기 초에 유럽의 그 누구보다 공룡의 학명을 많이 붙인 독일의 고생물학자이다. 후에네는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튀빙겐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류에 묻혀 죽은 35마리 이상의 플라테오사우루스 골격, 1910년 발견한 초기의 원시공룡 살토푸스, 1926년 발견한 프로토케라톱스, 1929년 발견한 아타록토사우루스, 그리고 셀 수없이 많은 다른 공룡들과 익룡 같은 동물들의 화석들을 발견했다. 또한 그는 원시용각류나 용각아목 같은 수많은 분류군들을 최초로 기술했다. 1875년 출생 1969년 사망 독일의 고생물학자 튀빙겐 대학교 동문 튀빙겐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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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B1%EC%88%98%20%28%EB%B3%84%EC%9E%90%EB%A6%A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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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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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星宿)는 동아시아의 별자리인 이십팔수의 하나이다. 남방주작 7수(宿) 중 네 번째에 해당된다. 서양 별자리의 바다뱀자리의 일부에 해당된다. 성수에 속한 별자리 성수에 속한 별자리들은 다음과 같다. 참고 문헌 권근 외, 『천상열차분야지도』, 서운관(書雲觀), 1395년 이문규, 《고대 중국인이 바라본 하늘의 세계》, 문학과 지성사, 2000년 이순지 저, 김수길.윤상철 역,《천문류초》, 대유학당, 1998년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김영사, 2002년 이십팔수 바다뱀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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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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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3%B0%EC%8B%9C%ED%8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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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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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를 포함하는 낱말은 다음과 같다. 기업 파나소닉은 2008년 9월 30일까지 마쓰시타 전기산업 주식회사(, )이었다. 일본 사람 이름 마쓰시타 고노스케 파나소닉의 창시자 마쓰시타 히로유키 - 일본의 전직 레이싱 사업가 마쓰시타 나오 - 일본의 배우, 가수, 피아니스트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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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TQ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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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Q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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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QFP (thin quad flat pack)는 PC 카드처럼 공간이 제약된 응용제품을 설계하는 데 사용되는 집적회로 패키지의 한 종류이다. TQFP 패키지 칩은 PQFP 패키지 칩보다 더 얇다. 보통 TQFP 패키지의 두께는 1.0밀리미터에서 1.4밀리미터이다. 같이 보기 집적회로 LQFP PQFP 외부 링크 래티스 세미컨덕터의 재납땜 가이드 위키하우투: 칩 패키지 가이드 칩 패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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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3%81%EA%B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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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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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각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이상각(李尙珏, 1899 ~ ?)은 일제 강점기의 법조인이다. 이상각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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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B%8F%99%EC%88%98%20%28%EC%95%BC%EA%B5%AC%EC%9D%B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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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수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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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수(崔東秀, 1971년 9월 11일 ~ )는 전 KBO 리그 LG 트윈스의 내야수, 지명타자이자, 현 KBO 리그 LG 트윈스의 육성군 타격코치이다. 선수 시절 LG 트윈스 시절 1994년 2차 4순위 지명을 받아 포수로 입단했으나, 이후 내야수로 전향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주전 자리를 잡지 못했고, 데뷔 첫 해에는 1군에서 1경기에 그쳤다. 방위 복무를 마친 후에도 오랜 시간 동안 서용빈, 유지현 등의 걸출한 내야수들에 밀려서 주목받지 못하였다. 2001년 김성근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부임한 이후 그는 뒤늦게 중용되기 시작하였고, 2군에서 훈련하였을 때 김성근의 트레이드 마크인 지옥 훈련을 많이 소화한 결과였다. 당시 그가 훈련이 끝나고 손이 펴지지 않아 김성근이 그의 손을 펴 주었다고 할 정도였고, 김성근이 훈련을 멈추도록 했던 유일한 선수였다. 2002년 시즌 중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한 서용빈의 자리를 이어받아 주전 1루수로 활동했다. 2002년에는 준 플레이오프 MVP를 수상하기도 하였다. 2007년에는 최초로 풀 타임 출장에 3할대 타율을 기록하여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그러나 2010년에는 주전 경쟁에서 밀려 그리 많은 출장 기회를 얻지 못했고, 29경기에 출전해 1할대 타율에 그쳤다. SK 와이번스 시절 2010년 시즌 좀처럼 주전 기회를 잡지 못하던 그는 그 해 7월 28일 4:3 대형 트레이드로 SK 와이번스로 이적하였다. 주전 내야수 박정권, 나주환이 부상으로 이탈하여 내야수가 필요하였던 SK 와이번스와 투수가 필요하였던 LG 트윈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그는 권용관, 안치용, 이재영과 함께 SK 와이번스로 이적하였고, LG 트윈스는 SK 와이번스로부터 투수 박현준, 김선규, 포수 윤요섭을 받았다. 그 때 SK와 LG는 잠실 3연전 중이어서, 트레이드된 선수들은 잠실에서 유니폼을 바꿔 입었다. 트레이드가 성사된 7월 28일 당일, 트레이드 당사자인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가 맞대결하게 되었는데 그는 같이 이적한 안치용과 함께 선발 출장하였고 권용관은 도중에 대주자로 교체되어 출전하였다. 그리고 이적한 선수 중 윤요섭이 대타로 나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SK 와이번스 이적 첫 경기에서 그는 3점 홈런을 쳐 내는 등 4타점을 쓸어담아 맹활약하였다. 그 날 SK 와이번스는 연장전에서 권용관이 정성훈의 타구를 놓치는 실책을 범해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여 패했다. 특히 그에겐 프로에서 눈을 뜨게 해 준 김성근과의 재회여서 더 의미가 컸으며, 2차 드래프트가 있기 전 김성근이 감독직에서 경질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2010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 해 시즌 후 32번을 쓰고 있었던 외야수 박윤이 보류 선수에서 빠져 신고선수로 전환되자, 자신의 번호였던 '32'번을 되찾았다. 2011년에는 박경완의 재활이 장기화되어서 10년 만에 그의 본업인 포수로 출전하기도 하였으며, 2002년 이후 9년 만에 포스트 시즌에 복귀하여 한국시리즈에도 출전했다. LG 트윈스 복귀 2011년 한국시리즈에 출전한 후 2011년 11월 22일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친정 팀 LG 트윈스로 1년여 만에 복귀했다. 1차 드래프트인 신인 지명회의와 2차 드래프트를 통틀어 최연장자로 지명된 선수였다. 2013년 개막전 명단에 올라 시즌 개막전을 통해 2경기에 출장하였으나 무안타에 그친 후, SK 와이번스와의 2연전이 끝나고 2군으로 내려갔다. 이후에는 지도자 수업을 받았고, 사실상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2013년 10월 5일 두산 베어스전이 끝난 후 공식 은퇴식을 가졌으며, 이 경기에서 LG 트윈스가 두산 베어스를 이기고 정규 시즌 2위를 확정해, 플레이오프에 직행한 의미있는 경기가 되었다. 야구선수 은퇴 후 은퇴 후 베이스볼아카데미 마스터 코스 시험에 합격하여 지도자 자격을 얻었고, LG 트윈스의 잔류군 담당 타격 겸 배터리코치로 배정받았다. 에피소드 2009년 5월 12일 SK전에서 그는 프로 데뷔 15년 만에 투수로 첫 등판하였다. 이와 더불어 팀 동료이자 포수인 김정민은 좌익수로 출전하게 되었는데, 이 상황은 역할 분담이 철저하고 지명타자제를 채택하고 있는 KBO 리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는 데뷔한 후 포수에서 내야수로 전향했고, 이 날 경기에 지명타자로 출장했으나 연장 12회 초에 마무리 투수 우규민이 대량 실점으로 인한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모창민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빈볼성 투구를 던지고 퇴장당했다. 남아 있는 투수가 선발로 등판해야 할 심수창 외에는 없자 당시 감독이었던 김재박은 궁여지책으로 지명타자로 나선 그를 투수로 내보냈다.마운드에 오른 그는 상대 타자 박경완을 공 2개(1구 128 km, 2구 131km로 스피드 건에 찍힘)로 플라이 아웃 처리했는데, 당시 박경완은 경기 후 "차마 제대로 칠 수가 없었다. 그냥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대충 휘둘러서 아웃됐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 와중에 외야에서 그의 등판을 지켜본 이진영은 "본래는 내가 등판하려 했다. 내가 아무래도 동수 형보다는 구속이 빠르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지만, 그의 공에 대해 "오승환인 줄 알았다. 돌직구를 던지더라" 라며 감탄하기도 했다. 출신 학교 서울봉천초등학교 강남중학교 광영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1990학번) 통산 기록 각주 외부 링크 1971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서울특별시 출신 KBO 리그 투수 KBO 리그 포수 KBO 리그 내야수 KBO 리그 1루수 KBO 리그 지명 타자 LG 트윈스 선수 SK 와이번스 선수 서울봉천초등학교 동문 강남중학교 (서울) 동문 광영고등학교 (서울) 동문 중앙대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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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A6%AC%EB%AF%B8%EC%96%B4%EB%A6%AC%EA%B7%B8%20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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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리그 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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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 프리미어리그 2002-03시즌은 프리미어리그의 11번째 시즌이다. 리그 우승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잉글랜드 리그 15번째이자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한 뒤로는 8번째의 우승을 차지하였다. 아스널, 뉴캐슬 유나이티드, 첼시가 다음 시즌의 챔피언스리그에 나가게 되었다. 전 시즌에 승격한 맨체스터 시티와 버밍엄 시티는 각각 9위와 13위를 기록하며 잔류에 성공했지만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은 19위를 기록하며 강등되었다. 또다른 강등팀은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와 선덜랜드이다. 이 중 선덜랜드는 사상 최저 승점인 19점을 기록하며 강등되었다. 승격 및 강등 승격팀 우승 팀 : 맨체스터 시티 FC 준우승 :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 플레이오프 우승 팀 : 버밍엄 시티 FC 강등팀 선덜랜드 AFC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 FC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리그 순위 1: 리버풀은 풋볼 리그 컵 우승 팀 자격으로 UEFA컵에 참가하였다. 2: 리버풀이 가지고 있던 리그 5위의 UEFA컵 출전권은 다음 순위인 블랙번 로버스에게 주어졌다. 3: FA컵 우승 팀인 아스널이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하게 되어서 준우승 팀인 사우샘프턴이 UEFA컵에 참가하였다. 4: 맨체스터 시티는 UEFA 페어 플레이 랭킹 1위팀으로 선정되어 UEFA컵에 참가하였다. 득점 순위 출처 : 2002-03 2002-03 축구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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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C%99%B8%EB%B2%84%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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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외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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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외버스(市外 - , )는 둘 이상의 지역을 연결하는 버스를 통칭하는 말이다. 고속형 시외버스는 고속버스(高速 -, )라고도 부른다. 규정 대한민국의 관계 법령에서는 세부적으로 시외버스를 고속형, 직행형, 일반형 등으로 나누고 있다. 각 운행 형태에 따른 규정은 다음과 같다. 시외고속형 : 법규에 맞는 시외고속버스(고속버스)와 시외우등고속버스(우등고속버스)로 운행하며, 운행거리가 100km 이상이고 운행구간의 60퍼센트 이상을 고속도로로 운행하며, 노선 중간에 정차하지 않는다. 고속도로변의 정류장에 정차하거나 기점·종점이 있는 자치단체의 행정구역 내에 각 1개소씩 중간정차장을 지정받아 정차할 수 있다. 이때 중간정차장부터 중간정차장까지 가는 승객은 태울 수 없으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환승 가능하다. (보기를 들어, 인천 -> 정안휴게소 -> 나주와 같이 고속버스가 없는 노선을 갈아 탈 수 있는 조건 마련) 시외직행형 : 시외직행버스로 운행하며, 기점·종점이 있는 자치단체의 행정구역이 아니라 다른 행정구역에 1개소 이상 중간정차장을 지정받아 정차할 수 있다. 운행거리가 100km 미만이거나 고속도로 운행구간이 60퍼센트 미만이면 중간 정류소에 정차하지 않고 운행할 수 있다. 중간 정류소의 개수는 관할 자치단체에서 조정할 수 있다. 흔히 ‘무정차’로 불리는 것이 이 형태다. 시외일반형 : 시외일반버스를 사용하여 모든 정류소에 정차하면서 운행한다. ‘시외일반형버스 ’으로 불리는 것이 이 형태에 해당되나 이 지역을 오가는 해당 시외일반버스들 중 대다수가 중·단거리 노선 중심의 시내버스와 농어촌버스로 전환되었다. 고속버스 원칙적으로 고속버스는 전국고속버스운송사업조합에 소속된 8개 회사(금호고속, 동부고속, 동양고속, 삼화고속, 속리산고속, 중앙고속, 천일고속, 한일고속)의 노선과 차량만을 이른다. 실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경우로 인해 고속버스와 시외버스 경계 영역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간혹 있다: 고속버스 면허 노선에 공동 운행 형식으로 시외버스 회사의 차량도 운행하는 경우(경남여객의 용인 - 부산간 노선 등) 지역 토착업체의 시외버스 면허 노선과 경쟁하는 등의 경우(서울 - 진주 등) 시외버스 회사의 명칭에 "고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등의 경우(강원고속, 진흥고속, 용남고속 등) 전국고속버스운송사업조합 소속 회사 면허의 시외버스(삼화고속의 부천 - 강진 등) 고속버스의 전산망을 차용하여 발매하는 시외버스(금호고속 직행부 중 일부, 광신고속의 광주광역시 - 인천국제공항 등) 시외버스 회사가 고속면허로 인가를 받아 운행하는 전환고속 (금호고속 직행부의 광주광역시 - 부산사상 등) 고속버스 노선이 시외버스로 전환된 전환시외 (동양고속의 서울 - 천안 등)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동부익스프레스의 단거리 노선도 전환시외버스로 운행되고 있다. (동부익스프레스의 서울 - 용인 서울 - 이천 서울 - 여주가 있다.) 그러나 고속버스도 시외버스의 일종이라는 사실은 법적으로도 명확하다. 다만 고속버스 면허 노선만의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국토교통부 직접 관할(시외버스는 각 도청 관할), 노선 인가를 차량 수로 관리(시외버스는 운행 횟수로 관리), 우등고속 운임에 부가가치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광역시 및 특별시로 면허지를 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인근 도 지역의 면허 및 차적으로 번호판이 붙는다. 다른 나라의 시외버스 미국 미국의 경우, 장거리 간선형 고속도로망이 잘 정비되어 있기 때문에 대도시끼리 연결해주는 시외버스가 있으며, 주로 침대 형태로 운영되는 경우가 있고, 주내 각 도시끼리 연결해주는 시외버스가 있어 지역마다 제각각 다를 수도 있다. 중국 중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침대형 시외버스가 많이 있으나, 한국계 업체인 금호고속이 중국에도 현지 유한공사 형태의 시외버스가 광저우시, 우한시 등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운행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일본 일본은 도로 교통이 철도, 항공과 마찬가지로 운송 체계 역시 잘 정비된 교통망을 유지하고 있어 각 고속도로와 간선도로를 통해 중단거리 장거리 노선 할 것 없이 시외버스를 운영하고 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대다수의 업체들이 시트 형태의 구조로 이루어지는 시외버스를 채택한 것과 달리 혼슈에서 규슈, 시코쿠까지 광범위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과 같이 침대형 시외버스와 고속버스를 운행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자세한 사항은 일본의 버스 교통 문서를 참조하라. 독일 같이 보기 관련 항목 대한민국의 버스 회사 목록 - 영국 스코틀랜드 퍼스에 있는 장거리 버스 그룹 고속버스 운행 회사 목록 연관 교통수단 광역버스 관광버스 시내버스 각주 종류별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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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3%BC%EC%9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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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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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앙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주앙(周昂, ? ~ ?)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이다. 주앙()은 포르투갈 이름이다. 주앙 1세: 포르투갈 왕국 제10대 왕(재위: 1385년 ~ 1433년) 주앙 2세: 포르투갈의 제13대 국왕 주앙 3세: 포르투갈의 15대 국왕 주앙 4세: 포르투갈 왕국을 다스린 브라간사 왕가 최초의 국왕(재위: 1640년 ~ 1656년) 주앙 5세: 포르투갈의 국왕(재위: 1706년 ~ 1750년) 주앙 6세: 현명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포르투갈의 국왕(재위: 1816년 3월 20일 ~ 1826년 3월 10일) 주앙 미란다: 흔히 미란다 (Miranda)로 알려진 브라질의 축구 선수 주앙 소아리스 다 모타 네투: 모따로 불리는 브라질 포르탈레자 출신의 축구 선수 주앙 시우베이라 두스 산투스: 주앙(포르투갈어: Juan)이라고도 불리는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주앙 지우베르투: 브라질의 보사노바 연주가 주앙 마리우: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미드필더로 활약하고 있는 포르투갈의 축구 선수 주앙 길례르미 누니스 제주스: 흔히 주앙 제주스(Juan Jesu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브라질의 축구 선수 주앙 칸셀루: 잉글랜드의 축구 클럽 맨체스터 시티와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는 포르투갈의 프로 축구 선수 주앙 핀투: 포르투갈의 전직 축구 선수이며 포지션은 공격수 주앙 페드루 다 실바 페헤이라: 포르투갈의 프로 축구 선수 주앙 피게이레두: 브라질의 제30대 대통령 주앙 굴라르: 브라질의 14대 부통령이자, 24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 주앙 아벨란제 주앙 펠리스: 포르투갈의 축구 선수 주앙 카를루스 두스 산투스: 브라질의 축구 선수 베아트리스 자네라투 주앙: 베아트리스(Beatriz) 또는 비아(Bia)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브라질의 여자 축구 선수 주앙 파울루 다 시우바 아라우주: 주앙 파울루로 불리는 브라질의 축구 선수 주앙 베르나르두 비에이라 주앙 마리아 리마 두 나시멘투 주앙 카브라우 지 멜루 네투: 브라질의 시인 주앙 카를루스 테이셰이라: 포르투갈의 축구 선수 주앙 바프치스타 마스카레냐스 지 모라이스: 브라질의 육군 장성 주앙 드 베자 공작: 포르투갈의 인판테 주앙 우바우두 히베이루: 브라질의 작가 주앙 카를루스 핀투 샤베스: 브라질의 축구 선수 주앙 소자: 포르투갈의 남자 테니스 선수 주앙 세자르 몬테이루: 포르투갈의 영화 감독, 배우, 작가, 영화 평론가 마리아 주앙 바스투스: 포르투갈의 배우 주앙 호드리게스: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 활동한 로마 가톨릭교회 선교사 중에서 최고의 일본어 학자였던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신부 주앙 코엘료 더 소우자: 비공식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산 남성 중 한명으로 알려진 브라질 출신의 남성 주앙 페드루 호드리게스: 포르투갈의 영화 감독, 각본가 주앙 니콜라우: 포르투갈의 영화 감독 주앙 보텔류: 포르투갈의 영화 감독, 각본가 주앙 파울루 (1964년): 브라질의 축구 선수 같이 보기 이름 (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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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A%B3%A0%EC%9D%B8%EB%AF%BC%ED%9A%8C%EC%9D%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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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인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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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인민회의(最高人民會議, )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입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조선로동당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 정부를 구성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 주권기관으로, 1948년(주체37년) 8월에 진행된 조선인민총선거에 의해 발족하였다. 지역이나 군으로 이루어진 선거구마다 선출된 대의원에 의해 구성된다. 대의원의 임기는 5년 1992년(주체81년) 4월 헌법 개정 전까지는 4년)이고, 정원은 1990년(주체79년)부터 687명이다. 또한 일반 법령과 결정은 재석 과반수로 결정되고, 헌법의 수정 및 보충은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된다. 그리고 기구에는 상임위원회와 부문별위원회(법제위원회, 예산위원회 등)가 있다. 기구별 소개 최고인민회의 최고인민회의는 헌법상 국가최고주권기관으로서 입법권을 갖는다는 점에서 각 나라의 의회에 해당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따라 명목상으로는 다른 나라의 의회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가진다. 예산·결산 심의 의결, 내각 등 주요 기관 선출, 법안 및 당면 의제 심의 확정 등이 주요 기능이다. 각 지방에는 행정단위별로 지방인민회의가 있다.그러나, 이 기관은 통상 1년에 1회 개최되기 때문에 그 실상이 조선로동당에서 결정한 국정 전반사항을 추인하는 거수기 역할만 할 뿐 유명무실하고, 휴회 중에는 20 명 정도로 구성되는 상임위원회가 기능을 대신한다. 지방인민위원회의 임기는 4년이다. 한편 최고인민회의는 구성원의 선출 과정이 형식적이고 집행부에 대한 견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점, 구성원의 수가 과도하게 많고 평소에는 소수의 상임위원들만으로 운영된다는 점, 그 실체와 실질적 기능이 극히 드물게 소집되는 전체 회의에서 모양새를 갖추고 최고권력자를 찬양하는 정치 이벤트의 장식용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제4공화국의 통일주체국민회의과 유사하다. 권한 헌법의 수정 보충 부문법의 제정 또는 수정·보충 휴회중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채택한 법률 승인 국가의 대내외 정책의 기본원칙 수립 국무위원회 위원장의 선거 및 소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의 선거 및 소환 국무위원회 위원장의 제의에 의하여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위원들의 선거 및 소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명예부위원장, 서기장, 위원들의 선거 및 소환 내각 총리의 선거 및 소환 내각 총리의 제의에 의하여 내각 부총리, 위원장, 상 그밖의 내각 성원들의 임명 중앙검찰소 소장의 임명·해임 중앙재판소 소장의 선거 및 소환 최고인민회의 부문위원회 위원장, 부위원장, 위원들의 선거 및 소환 인민경제발전계획과 그 실행정형에 관한 보고의 심의 및 승인 국가예산과 그 집행정형에 관한 보고의 심의 및 승인 필요에 따라 내각과 중앙기관들의 사업정형을 보고받고 대책수립 최고인민회의에 제기되는 조약의 비준 및 폐기 결정 의장 및 부의장 의장 : 박태성 부의장 : 박철민, 박금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개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의 휴회시 국가최고주권기관이며, 위원장은 헌법에 따른 명목상의 국가수반이다. 원래 명칭은 최고인민회의상설회의였고 의장은 명목상 국가수반이었다가, 1972년에 국가주석제가 시행된 이후 국가주석이 국가수반까지 겸하였다. 1994년에 국가주석 김일성이 사망한 후 1998년 9월 5일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개정 헌법에 따라 폐지된 국가주석이 가지고 있던 국가수반의 지위와 상훈권, 대사권, 특사권, 행정구역 개폐권 등의 권한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인 전제적 1당 독재 국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지위와 권한은 제도적 장식에 불과하고, 실질적인 국가 의사결정권은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정일에 이어 국무위원회 위원장인 김정은에게 있다. 권한 최고인민회의 소집 최고인민회의 휴회중 법안과 수정안, 현행 부문법과 규정의 수정 보충안의 심의 채택, 채택 실시하는 중요 부문법을 다음번 최고인민회의 승인을 받음 불가피한 사정으로 최고인민회의 휴회기간에 제기된 인민경제발전계획, 국가예산과 그 조절안 심의 및 승인 헌법과 현행부문법 규정 해석 국가기관들의 법준수 집행에 대한 감독과 대책 마련 헌법, 최고인민회의 법령·결정, 국방위원회 결정·명령,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결정·지시에 어긋나는 국가기관의 결정·지시를 폐지하며 지방인민회의의 그릇된 결정·집행의 정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사업 및 지방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사업의 조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과의 사업 최고인민회의 부문위원회와의 사업 내각 위원회·성의 조직 및 폐지 최고인민회의 휴회중에 내각총리의 제의에 의하여 부총리, 위원장, 상, 그밖의 내각성원들의 임명 및 해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문위원회 성원들의 임명 및 해임 중앙재판소 판사, 인민참심원 선거·소환 조약의 비준 및 폐기 외교대표 임명 및 소환 훈장과 메달, 명예칭호, 외교직급의 제정 및 훈장과 메달, 명예칭호의 수여 대사권과 특사권 행사 행정단위와 행정구역을 내오거나 고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상임위원회 사업을 조직 지도하고, 국가를 대표하며 다른 나라 사신의 신임장 · 소환장을 접수한다. 현 위원 현 위원은 2019년 8월 2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2차회의에서 선출했다. 위원장: 최룡해 부위원장: 태형철, 박용일(북한) 서기장: 정영국 위원 : 김영철, 김능오, 강지영, 주영길, 김창엽, 장춘실, 박명철, 리명철, 강수린, 강명철, 리철 역대 지도부 최고인민회의 역대 의장 최고인민회의 역대 부의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역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역대 부위원장 현칠종(玄七鍾) 1957년 ~ 1959년 홍기문(洪起文) 1972년 ~ ,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겸직 홍기문(洪起文) 1977년 ~ ,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겸직 양형섭(楊亨燮) 1998년 7월 26일 ~ 2003년 8월 3일 양형섭(楊亨燮) 2009년 4월 9일 ~ 2016년 5월 태형철(太炯哲) 2016년 5월 ~ 2021년 9월 박용일(朴勇一) 2019년 8월 29일 ~ 2023년 1월 18일 강윤석 (姜潤石) 2021년 9월 ~ 현재 김호철 2023년 1월 18일 ~ 현재 선거구 목록 강원도 개성시 라선특별시 양강도 자강도 평안북도 평안남도 평양직할시 만경대선거구 광복선거구 팔골선거 함경남도 함경북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대의원 선거 최고인민회의는 임기 5년의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대체로 당, 사회단체, 내각, 군 등에서 직책을 겸임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의원의 직책보다는 자신들의 원래 직책을 수행하는 것이 주 임무로 되어 있다. 1948년 1기 최고인민회의 선거를 시작으로 2019년까지 총 14번의 대의원 선거가 진행되었다.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제1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같이 보기 대한민국 국회 북조선인민위원회 의회 각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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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OB%20%EB%B2%A0%EC%96%B4%EC%8A%A4%20%EC%84%A0%EC%88%98%EB%8B%A8%20%EC%A7%91%EB%8B%A8%20%EC%9D%B4%ED%83%88%20%EC%82%AC%EA%B1%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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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선수단 집단 이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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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OB 베어스 선수단 집단 이탈 사건은 1994년 9월 4일, KBO 리그의 OB 베어스 선수단이 17명이 집단 이탈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OB 베어스 항명 파동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사건 1994년 9월 4일, OB 베어스가 쌍방울 레이더스 군산 원정 경기에서 패한 후 숙소에서 미팅을 가지던 중 당시 윤동균 감독이 “오늘(9월 4일)은 매를 들어야겠다” 라고 크게 꾸짖어 말하자 이에 주장 김상호 등이 "최선을 다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라며 반발했다. 그러자 윤동균 감독이 화를 내며 “말을 듣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서울로 올라가 버리라” 고 말하자 박철순, 김상호, 장호연, 김상진, 이광우, 권명철 등 17명이 이탈한다. 전주역에서 흩어진 선수들은 대전역으로 속속 모여들어, 다음 열차를 타고 자정께 서울에 도착하여 잠실운동장에 주차해놓은 승용차를 빼내 다시 9월 5일 경기도 양평 플라자콘도에 집결한 베어스 선수진은, 다음날 기자들을 불러모아 윤동균 퇴진을 요구하는 회견을 연다. 박철순은 이날 “윤 감독이 옷을 벗으면, 나도 같이 벗겠다”고 선언한다. OB 베어스와 야구인생을 함께한 그의 뼈굵은 한마디였다. 구단에서는 5일 홍보부 직원 두 명을 급파하는데, 선수들이 모여있는 플라자콘도를 찾았던 그들이 내놓은 해법은 황당했다. 이 항명사태를 주도한 주동자 고참 다섯 명을 은퇴시키고, 감독도 경질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며칠간의 줄다리기 끝에 구단과 선수들은 ‘윤동균 감독 교체 및 박철순 김형석 등 5명 은퇴’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이번엔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팬들의 반발이 봇물처럼 터져나온다. 구단은 결국 강영수를 제외한 16명 이탈자 모두를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김형석이 기록하던 연속경기출장 기록은 622경기에서 멈췄고, 시즌 내내 2군에 머무르다 사건 직전 1군으로 승격했던 강영수 선수는 선배라는 책임감 때문에 이탈에 합류했다가 홀로 방출되는 비운을 겪는다. 강영수는 이듬해 태평양 돌핀스에서 21홈런을 작렬하며 부활한다. 이 사건으로 OB 베어스의 잔여 경기 몰수패가 논의되었다. 결국 윤동균 감독이 자진 사퇴하고 선수단의 대대적인 징계로 막을 내렸다. 두산 베어스 10번의 저주 여담으로 이 사건의 당사자 윤동균이 현역 시절 달던 번호가 10번이었고, 한때 영구 결번까지 갔지만 이 사건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면서 슬그머니 해제, 그 후 두산 베어스로 가면서 10번을 단 선수들이 이상하게 부진을 겪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선수는 문희성으로 1997년 입단 이후 1년 동안 10번을 달고 뛰었다. 그러나 문희성은 이후 2군을 전전하여 2005년 시즌을 제외하면 만년 2군, 백업을 전전하다가 잠시 버스 기사를 하기도 하고 현재는 사회인 야구에서 뛰고 있다. 이후 10번을 단 선수는 강혁으로 한양대와 OB 구단 사이 이중 등록으로 영구 제명까지 갔다가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 이후 복권되어 당시 지명권을 소유한 두산으로 5억 7,000만 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하면서 10번을 달게 된다. 그러나 당시 두산은 1루수로 우즈가 있었고, 거기다 해태 타이거즈에서 최훈재를 영입한 상황으로 자리가 없어진 강혁은 대타를 전전하다 2001년 SK 와이번스로 이적, 이후 2004년 병역 비리 사건 때 방콕 아시안 게임 직전 병역 면탈을 시도했던 사실이 드러나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받은 병역 특례가 박탈되고 사회 복무 요원으로 입대하면서 선수 인생이 완전히 망가지게 된다. 강혁이 이적한 후 이번에는 심재학이 2001년 2월 두산으로 오면서 10번을 달게 되었다. 심재학은 2001년 한국 시리즈의 우승 주역이 되었고 더불어 성적도 타격 2위인 0.344에 홈런 24개, 88타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찍었는데 2002년과 2003년에 거짓말 같이 패망, 결국 2004년 KIA로 이적하면서 10번의 주인은 사라졌다. 더군다나, OB 베어스 선수단 집단 이탈 사건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김종석은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큰 기여를 했지만 1996년 허리부상으로 인해 어렵게 잡은 주전 자리를 빼앗겼고 설상가상으로 1998년 입단한 우즈 때문에 주전 입성에 실패했으며 급기야 이중계약으로 인해 영구제명을 먹었던 강혁이 제명에서 풀려 1루수 자리에서 밀려났고 지명타자 자리도 기존의 이도형 최훈재 (99년 해태에서 이적)가 있어 자리를 못 잡았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9년 말 선수협 파동까지 겹쳐 동계훈련에 빠진데 이어 2군생활을 전전했고 결국 2000년 6월 한화 유니폼을 입었으며 신인 시절 스승이었던 이광환 감독이 부임한 2001년 처음이자 마지막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하지만, 김종석은 2002년부터 갑작스런 부진에 빠졌고 급기야 2003년 부임한 유승안 감독에 의해 본격적으로 등용된 김태균에게 밀려 설 자리를 잃었으며 유승안 감독이 성적 부진 뿐 아니라 2년 계약 종료로 팀을 떠난 2004년 시즌 뒤 자유계약선수로 풀려 은퇴했는데 공교롭게도 김종석은 2004년 시즌 후 한화 감독으로 취임한 김인식 감독이 OB 감독을 맡은 첫 해인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를 했으나 1996년 허리부상으로 인해 어렵게 잡은 주전 자리를 빼앗긴 데 이어 이에 앞서 OB 베어스 선수단 집단 이탈 사건의 주동자로 낙인찍혔던 데다 1998년 입단한 우즈 때문에 주전 입성에 실패했으며 급기야 이중계약으로 인해 영구제명을 먹었던 강혁이 제명에서 풀려 1루수 자리에서 밀려났고 지명타자 자리도 기존의 이도형 최훈재(99년 해태에서 이적)가 있어 자리를 못 잡았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9년 말 선수협 파동까지 겹쳐 동계훈련에 빠져 김인식 감독으로부터 미움을 사 2군생활을 전전하여 2000년 6월 두산(전신 OB 포함)을 떠난 바 있었다. 이후 트레이드된 황윤성이 10번을 달았지만, 그 또한 2005년 5월 현대 유니콘스 전에서 그라운드 홈런을 친 경기를 제외하면 큰 존재감은 없었고, 최준석이 2006년 이적 이후 이듬해부터 10번을 달게 되는데, 최준석은 2007년 16홈런, 2009년부터 2011년까지 5번 타자로 맹활약하며 저주가 드디어 깨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질병인 무릎 부상이 발목을 잡기 시작, 2012년과 2013년을 연속으로 부진했다. 하지만 2013년 한국 프로 야구 포스트 시즌에서의 맹활약 이후 FA 때 친정 팀 롯데 자이언츠로 컴백, 부활에 성공했다. 다만 최준석은 롯데에서는 25번을 달았다. 최준석이 떠난 후 10번은 2011년 말 한화 이글스에서 2차 드래프트로 영입한 김강이 달고 있었는데, 김재환, 오재일 등에 밀려나면서 2군을 전전했고 끝내 두산 유니폼을 입고는 1군에 올라오지 못한 채 2016년 9월에 선수단에서 제외되었다. 그래도 2군 코치로 금새 재취업했고, 이후 kt 위즈의 타격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 2017년 박세혁이 47번에서 10번으로 번호를 교체했다. 일단 7월 말까지는 큰 문제도 없고 양의지가 손가락 골절로 빠진 공백을 잘 메워주고 있다가 파울 타구에 급소를 자주 강타당했다. 각주 OB 베어스 선수단 집단 이탈 사건 OB 베어스 선수단 집단 이탈 사건 OB 베어스 KBO 리그의 역사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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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C%A0%95%EC%8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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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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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사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수정사는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에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수정사는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에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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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E%B8%EC%84%9C%ED%92%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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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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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서풍(偏西風, )은 편동풍에 대칭되는 바람으로 북반구와 남반구의 중위도지역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분다. 북반구 대륙에서는 산맥 때문에 편서풍의 진로가 자주 바뀐다. 위도 30도와 60도 사이의 중위도 지역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탁월풍을 말한다. 편서풍 또는 탁월풍은 30도에서 60도 사이의 중위도에서 지배적이며 마위도(Horse latitudes, 30~35)의 고압 영역에서 극으로 분다. 바람은 주로 북반구에서는 남서쪽에서, 남반구에서는 북서쪽에서 불어온다. 무역풍과 함께 편서풍은 초기의 유럽 항해선박을 위한 왕복항로로 이용되었다. 편서풍은 지역에 따라 부분적으로 강하거나 약하게 부는데, 특히 남반구는 북반구보다 중위도 지역에 육지가 적기 때문에 마찰이 줄어들어 바람이 더 강하게 분다. 편서풍은 위도 40도에서 50도 사이(Roaring Forties)에서 가장 강하게 분다. 편서풍파 중위도 편서풍대에서 관측되며 단파나 중간 규모의 요란은 파장이 1,000-3,000km 정도로, 주로 대기의 하층에서 뚜렷이 나타나며 지상의 비교적 작은 고기압과 저기압에 대응되므로 단기예보에 중요하다. 같이 보기 무역풍 극동풍 편동풍 기후 패턴 바람 지구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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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B%A6%B0%ED%86%A0%EC%8A%A4%20%EC%9A%B4%ED%9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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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스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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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스 운하()는 코린토스 만과 에게해의 사로니코스 만을 연결하는 운하이다. 코린토스 지협을 따라 1881년부터 1893년까지 6.3 km의 길이로 건설되었다. 운하를 이용할 경우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가는 것 보다 700km 정도 운항거리가 줄어들지만, 운하의 폭이 24m, 깊이가 8m로 규모가 작기 때문에 운하를 이용하는 선박은 대부분 관광용 여객선이다. 그리스의 운하 펠로폰네소스주의 건축물 코린티아현 코린토스만 사로니코스만 1893년 완공된 건축물 선박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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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7%B8%EB%A6%AC%EC%8A%A4%EC%9D%98%20%EC%A3%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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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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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절에서는 그리스의 지방행정구획의 세부사항을 설명한다. 아울러 그리스의 지방행정제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리스에서는 2010년부터 '칼리클라티스 개혁'이라 불리는 대규모 지방제도개혁이 이루어졌고, 행정구획은 2011년 1월 1일자로 크게 재편되었다. 전 영토는 13개의 페리페리아(지방), 74개의 페리페리아키 에노티타(현), 325개의 디모스(시)로 구획되어 있다. 지방공공단체체]]는 2층제로, 디모스가 기초자치단체, 페리페리아가 광역자치단체이다. 그리스 공화국의 주권 아래에 속하는 특수한 지역으로는 중앙마케도니아 남쪽의 아토스 수도사 공화국이 있다. 이 지역은 그리스 정교 수도사에 의한 특별한 자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일반 지방 행정 제도 밖에 놓여 있다. 지방행정계층 페리페리아 페리페리아( / , 복수형: '페리페리에스 / ; )는 그리스의 광역지자체이다. 일본 국가기관의 자료를 참고하자면 "지방"으로 번역되는 것 외에, "주"가 사용될 수 있다. 페리페리아 주지사(/)와 페리페리아 의회()는 보통 5년마다 선거를 한다. 페리페리아는 13개(본토에 9개, 도서에 4개) 있으며, 이는 '칼리클라티스 개혁' 전과 다르지 않다. 아래 표의 번호는 오른쪽 지도의 번호(영어 표기 알파벳순)와 일치하고 있다. 또한 "철자"란의 그리스 문자 표기는 그리스어판 위키피디아의 해당 항목에 링크되어 있다. 인구는 2001년 인구조사에 의한다. 페리페리아키 에노티타 페리페리아키 에노티타( / {{lang|el-Latn|periferiaki enotita : ; )는 "페리페리아의 구성단위(유닛)"를 의미 그리고 페리페리아의 하위 구분이다. 구제도의 노모스(현)에 상당하고, '현'이라고도 번역되는. 과거의 노모스는 광역자치단체였지만, '칼리클라티스 개혁'에 의해 폐지되어 페리페리아를 구분한 행정구라는 위치를 둔 페리페리아키 에노티타가 되었다. 각 지구는 주지사와 같은 정치적 구획에서 선택된 부지사()가 장이 디ㅗㄴ다. 많은 경우, 페리페리아키 에노티타는 노모스의 범위를 계승하고 있지만, 시마야부 등에서는 구 노모스의 분할이 행해지고 있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 개혁 전에 노모스는 전국에 51개였으나 개혁 후 페리페리아키 에노티타는 전국에 74개 있다. 디모스 디모스( / , 복수형: / ; , 시)는 그리스의 기초지자체이다. 디모스는 시장()과 시의회()에 의해 운영된다. "칼리크라티스 개혁" 후에, 디모스는 전국에 325개가 있다. 통상 5년마다 선거를 한다. 디모스의 하위 구분 디모스의 하위는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디모스() 디모티키 에노티타( 복수형: ) 디모티키 키노티타() 토피키 키노티타 () 디모티키 에노티타( 복수형: {{lang|el|δημοτικές ενότητες (단위)을 의미하며, 칼리클라티스 개혁 이전의 구자치체(디모스와 키노티타)의 구획이 되고 있다. 디모티키 에노티타는 키노티타({{lang | el | [[: el : Κοινότητα (τοπική αυτοδιοίκηση) | )로 구분된다. "키노티타"() 또는 퀴노티스()는 "공동체(커뮤니티)"를 의미하는 말로, 도시공동체를 나타내는 디모티키·키노티타와 촌락 공동체를 나타내는 토피키·키노티타의 2종이 있다. 양자의 경계는 대체로 인구 2000명이다. 이 키노티타는 원래는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를 근대에 들어가 지방행정구획으로 이용하도록 한 것으로, 이탈리아의 「코무네」나 스페인의 「무니시피오」에 상당한다. 카포디스트리아스 개혁(1999년 1월 시행)에 의해 지자체의 통폐합이 진행되었고, 이 단위는 지자체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현행 제도인 키노티타는 '의회'를 가질 수 있지만, 키노티타 의회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시당국에 대한 조언에 그친다. 「칼리크라티스 개혁」까지는, 복수의 토피키·키노티타를 포함한, 지자체로서의 「키노티타」(마을)가 있어, 디모스와 함께 노모스에 속하고 있었다. 연혁 독립에서 20세기 말까지 근대 그리스의 최초의 행정구획은, 그리스 독립전쟁 중 그리스 제1공화정1828년에, 초대 대통령이오아니스·카포디스트리아스아래 제정되었다. 임시정부가 지배하고 있던 페로포네소스 반도와 에게 해의 섬들은 13개로 구분되었고, 에팔히아(군)에 의해 구분되었다. 그리스 독립이 승인되어 그리스 왕국이 건국되면, 1833년에 국왕오토 1세 아래 지방행정제도가 정돈되었다. 전 국토(당시 그리스 왕국 영토는 페로포네소스 반도, 그리스 본토, 키클라데스 제도만으로 이루어짐)는 10개의 "노모스"(현), 43개의 에팔히아(군)에 의해 구분되고, 말단의 행정 구분으로서 디모스(도시)가 말다에 놓여졌다. 디모스의 장은 국왕이 임명하여, 그때까지의 디모스(도시공동체)나 키노티스(촌락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자치권은 부정되었다. 1836년에 노모스가 폐지된 구분이 도입되지만 {{enlink|Διοικητική διαίρεση της Ελλάδας 1831|4년 쿠데타가 발생하여 입헌군주제로 이행하자 1845년에 노모스와 에팔히아에 의한 구분이 부활했다. 오토 1세의 퇴위 후에 맞이한 게오르기오스 1세 아래 그리스 왕국은 확장을 계속한다. 1864년에는 이오니아 제도, 1881년에는 테살리아가 그리스령으로 편입되어, 1899년의 행정구획재편에 의해 노모스의 수는 26개가 되었다. 1909년의 변경을 거쳐 , 1912년에 지방제도가 개조되었다 그리스는 그 후 크레타, 이피로스,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1947년, 이탈리아령이었던 도데카네스 제도가 그리스의 영토가 되어, 현재의 그리스의 영역이 정해졌다. 1971년 시점에서 그리스 전역에는 키노티타가 5805개, 디모스가 256개이며, 수도권과 아토스산을 제외하고 52개의 노모스가 놓여 있었다.. 1971년, 군사 정권(1967년 - 1974년) 하에서 행해진 지방제도의 변경에 의해, 페리페리아라는 구분이 도입되었다. 전국은 7개의 페리페리아에 의해 구획되고 각각에 사령관이 놓여졌지만, 1973년에 폐지되었다. 1987년의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지리적인 「지방」은 행정구획으로서는 폐지되어 전국은 13개의 페리페리아에 의해 구획되게 되었다. 같이 보기 그리스의 현 ISO 3166-2: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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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99%EC%82%B0%20%28%EC%9E%AC%EC%82%B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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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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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動産)이란 움직일 수 있는 재산상의 가치를 지닌 물건을 말한다. 반대되는 개념으로 부동산이 있다. 단 선박, 항공기 등은 움직일 수 있으나 부동산으로 여겨지며 이 기준은 등기를 하는지 여부로 가늠한다. 민법 부동산 이외의 물건이 동산이다(99조 2항). 토지에 부착하는 물건도 정착물이 아닌 물건은 동산이다(예;假植 중의 樹木이나 庭園石 등). 또 동산의 개수는 사회 통념에 의하여 결정된다. 예컨대 쌀·된장·간장 등은 용기(容器)에 의하여 개수가 결정된다. 또한 선박·자동차·항공기·건설기계 등은동산이지만 그 경제적 의의가 부동산과 비슷하므로 법률상 부동산에 준한 취급을 하고 있다. 그런데 부동산과 동산은 법률상의 취급이 각각 다르다. 양자의 주요한 상위점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부동산 물권의 공시방법은 등기(登記)이다. 그리고 이 등기의 효력은 그 권리의 득실변경이다(186조). 예컨대 매매계약에서 부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하여도 등기를 하지 않으면 법률상 소유권 취득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등기를 믿고 부동산을 매수하여 소유권 이전의 등기를 끝마쳤어도 만약 그 등기가 허위(虛僞)의 등기인 경우에는 매수인(買受人)은 소유권을 취득할 수가 없다. 즉 등기에는 이른바 '공신력(公信力)'이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동산 물권의 공시 방법은 인도(引渡)이다. 그 효력은 동산 물권의 양도이다. 동산 매수인이 그 소유권을 공시하려면 인도, 즉 점유(占有)의 이전을 받지 않으면 아니 된다. 또한 매도인에게 처분권이 없어도 매수인이 선의(善意)로 동산을 매수하여 점유 이전을 받으면 그 동산의 소유권을 취득할 수가 있다(249조). 즉 점유에는 '공신력'이 있다. 같이 보기 부동산 각주 물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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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F%AD%ED%8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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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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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瀑布, )는 강이나 호수에서 단차(段差)로 인하여 수직 또는 몹시 가파른 경사면으로 낙하하는 물줄기다. 물이 떨어지는 곳을 의미하기도 한다. 폭포는 평평한 빙산이나 빙붕의 가장자리 용융물이 떨어지는 곳에서도 발생한다. 유형 돌출형(Ledge waterfall) 블럭형 (Block/Sheet) 고전형 (Classical) 커튼형 (Curtain) 하방형(Plunge) 펀치볼형 (Punchbowl) 말꼬리형(Horsetail) 슬라이드형 (Slide) 리본형 (Ribbon) 낙하산형 (Chute) 부채형 (Fan) 캐스캐이드형(Cascade) 단층식(Tiered) / 다층식(Multi-step) / 계단식(Staircase) 홍수형(Cataract) 분할형(Segmented) 동결형(frozen) 풍차형(Moulin) 일부 폭포는 연속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구별된다. 단명(ephemeral) 폭포는 비나 눈이 많이 녹은 후에만 흐른다. 주요 폭포 나이아가라 폭포 - 북아메리카 최대의 폭포. 나이아가라 강, 미국과 캐나다 국경. 보요마 폭포 - 가장 수량이 풍부한 폭포(17,000 m³/s). 루알라바 강, 콩고 민주 공화국. 빅토리아 폭포 - 가장 폭이 넓은 폭포. 잠베지 강, 잠비아와 짐바브웨 국경. 앙헬 폭포 - 가장 낙폭이 큰 폭포 (979m). 베네수엘라. 이과수 폭포 - 남아메리카 최대의 폭포. 이과수 강,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국경. 엉또폭포 - 많은 비가 내려야 생기는 폭포. 제주도 서귀포시. 폭포의 형성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폭포 목록 나마 (지형) 지류 각주 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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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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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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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오백십오)는 514보다 크고 516보다 작은 자연수이다. 수학 합성수로, 그 약수는 1, 5, 103, 515이다. 과학 기타 날짜: 5월 15일 연도: 515년 기원전 515년 5e02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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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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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8%AC%EB%93%9C%ED%95%A0%EB%A6%AC%EC%95%BC%203%EC%84%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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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드할리야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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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드할리야 3세(Tudhaliya III, 제위 기원전 1358년)는 히타이트 제국의 단명한 왕이다. 그는 하투실리 2세의 아들로 계승자일 수 있지만 정상적으로 투드할리야 2세의 아들로 다음 계승자로 보지만 그는 왕도 아니었던 것 같다. 히타이트 문헌들은 그를 작은 투드할리야로 언급한다. 그는 그의 후계자 아마도 형제인 수필룰리우마 1세를 포함한 장군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투드할리야는 보통 히타이트 왕목록에 포함되지 않고 그의 아버지가 투드 할리야 3세로 목록화되기도 하였다. 암살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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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I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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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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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J, Ij, ij는 다음 뜻을 가지고 있다. 지명 에이 (암스테르담) 기타 IJ는 네덜란드어에서 쓰이는 문자이다. iJustine: 미국의 유튜브 인물 IJ는 이인제의 애칭이다. 만리장성항공의 이전의 IATA 코드 IJ 일본춘추항공의 현재의 IATA 코드 I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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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9C%EC%99%80%20%EB%8A%91%EB%8C%80%EC%9D%98%20%EC%8B%9C%EA%B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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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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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의 시간》은 사과나무픽처스에서 제작하고 2007년 7월 18일부터 2007년 9월 6일까지 MBC에서 방송한 드라마이다. 프로그램 기획서에 당초 20부작 미니시리즈로 가닥을 잡았다가, 제작사와 방송사의 조율로 최종 16부작 미니시리즈로 최종 확정되었다. 약칭으로 '개늑시'라고 한다. 한편, 매 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탄탄하고 치밀한 스토리와 화려한 액션, 그리고 절제되고 감각적인 영상으로 많은 화제를 낳았으며 한국형 느와르를 개척한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에서 제작을 일부 후원하였다. 또한 2019년 개국한 MBC ON에서 방송하였다. 줄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수현을 중심으로 하여 국가정보원과 태국의 범죄조직 청방 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등장 인물 주요 인물 이준기 : 이수현, KAY 역 (아역 박건태) 前 국가정보원 해외1팀요원 국가안전기획부 요원 이동조와 태국검찰청 검사 유경화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없이 자랐어도 어머니와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태국에서 만나게 된 아리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마오에 의해 어머니가 눈앞에서 피살당하자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복수를 맹새했고, 이후에 국정원요원 강중호에 의해 키워졌다. 수현은 타고난 상황판단능력과 동물적인 감각을 인정받아 국정원 해외1팀에 입사하였다. 유능한 요원으로 인정받게 되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원수이자 청방의 보스였던 마오를 암살하려다가 임무를 실패하게 되고, 그 책임을 물어 보직에서 해임된다. 하지만 정학수 부장의 언더커버(잡입수사요원) 제의를 받아들여 태국으로 떠나게 되고, 케이라는 이름으로 거리의 깡패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수현은 태국의 무에타이 경기장에서 일을 하다가 마오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그 대가로 마오의 그림자가 되어 부모님의 원수였던 마오를 처단하기 위해 그의 목을 조금씩 조여간다. 정경호 : 강민기 역 (아역 정세인) 국가정보원 정보분석과 요원 국정원요원 강중호의 아들이자 수현의 절친한 친구다. 어릴 때 아버지가 태국에서 데려온 수현을 보고 그와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결국 친해지게 된다. 이후 장성함에 따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정원 요원으로 입사해 능력을 인정받지만, 중요한 작전 때에도 여자에게 한눈팔고 작업거는 게 주특기다. 하지만 공항에서 작전 테스트 도중에 지우를 만난 민기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어릴 적 인연으로 인해 수현과 더 가까워지는 지우가 야속하기만 하다. 수현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지켜보던 민기는 수현이 사망처리된 이후 수현을 그리워하는 지우의 곁을 지켜주지만 수현과 꼭닮은 케이가 나타나고 케이에 의해 아버지 강중호가 죽으면서 그를 잡기 위해 달려들기 시작한다. 남상미 : 서지우 (리랏 아리) 역 (아역 정민아) 아트디렉터 서영길의 딸이지만 실제로는 마오의 친딸이다. 마오의 부인과 불륜 관계인 영길은 부인과 지우(아리)를 데리고 한국으로 도망친다. 지우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고 그래서인지 직업도 아트디렉터로 가졌다. 꿈을이루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민기와의 인연으로 첫사랑 수현을 만나게 되고 풋풋한 사랑을 키워가지만, 수현의 사망 처리 이후 가슴아파한다 하지만, 수현과 꼭 닮은 케이가 나타나면서 수현과 케이 사이에서 번민한다. NIS 관련 인물 이기영 : 강중호 역 국가정보원 요원이자 수현의 아버지였던 이동조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그의 아내였던 경화와도 잘아는 사이다. 태국에 정보수집차 왔다가 청방의 마약거래를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 경화의 수사를 도와 청방의 대규모 마약거래를 좌절시켰고, 경화의 죽음을 전해듣고 수현을 입양하여 한국으로 데려와 친아들처럼 키웠다. 언더커버(잡입수사요원)으로 투입된 수현이 기억을 잃고 방황하자 그의 기억을 일깨우려다가 배상식에게 살해된다. 김정난 : 유경화 역 태국검찰청 소속의 검사. 국가안전기획부요원이었던 이동조의 아내이며 수현의 어머니이다. 자신의 남편을 죽인 청방조직에 복수하려는 이유로 청방의 대규모 마약거래를 일망타진하는 큰공을 세웠지만, 그에 대한 보복으로 마오가 쏜 총에 암살당한다. 성지루 : 변씨(변동석) 역 공군정보과를 거쳐 국가안전기획부의 요원까지 했었지만 정보를 해외에 팔다가 걸려 국가안전기획부를 그만두고 택시운전이나 카페를 경영하면서 정보수집을 하고 있다. 중호와도 친한 사이고, 그 때문에 민기와 수현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김갑수 : 정학수 역 국가와 조직의 이익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 국가정보원 소속의 부장이다. 수현의 상처를 끄집어내 복수의 도구로 삼고 수현을 언더커버으로 추천한다. 이미영 : 명애 역 민기의 어머니이자 중호의 아내. 처음에는 수현의 갑작스런 입양에 반대하지만 나중에는 친아들인 민기 못지않게 수현을 아끼고 기른다. 서동원 : 최일도 역 국가정보원 해외분석 과장. 냉철한 판단력으로 무장한 엘리트 요원이다. 민기에게 무심한 척 하지만 누구보다 관심이 많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민기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청방 관련 인물 최재성 : 리랏 마오 역 태국 최대 마약조직 청방의 보스. 타고난 사업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고 냉혹한 성격도 지니고 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케이를 더욱 신임하여 곁에 두고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려고 하였으나, 케이의 정체가 자신이 죽인 친구의 아들이란사실이 드러나면서 참회하며 수현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 정성모 : 서영길 역 과거 마오의 동료였지만 손을 씻고 한국으로 돌아와 건실한 사업가로 변모하여 살고있다. 지우와 가족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최지호 : 지라프 역 마오의 경호원이자 뛰어난 무술실력을 가졌다. 차수연 : 샤오밍 역 마오의 정부이자 뛰어난 외모를 지녔다. 박효준 : 아화 역 케이의 동료. 유쾌하고 쾌활하며 약간 어벙한 면도 있다. 수현을 항상 믿고 따른다. 이태성 : 배상식 역 독거미파 부두목. 단순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에 냉혹하다. 자신을 음모에 빠뜨리려고 했던 천 회장을 몰락시키고 그것을 계기로 청방에 투항하지만, 후에 민기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 그 외 인물 정경순 : 오승주 역 국가정보원 해외1팀장. 카리스마 있고 강단 있는 여장부 스타일이다. 수현을 믿고 지지하며 그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정호빈 : 천 회장 역 독거미파 보스. 청방에 대응하며 조직을 이끌었으나 마오가 놓은 덫에 걸려 수현에게 죽음을 당한다. 참고 사항 이준기는 부산대표 출신 태권도 공인 3단 유단자이다. 국정원 정문에서 차를 세울 수 있는 건 대통령과 국정원장 뿐이다. 그러므로 국정원 정문에서 내렸던 정학수 부장은 국정원장으로 승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드라마의 작가였던 한지훈 작가와 류용재 작가는 이 이야기를 드라마 촬영 3년전부터 기획했다고 한다. 원래는 국가정보원이 아니라 AP(ASIAN POLICE)라는 인터폴보다 더 강력한 경찰 조직이었고, 등장인물도 남자 2명에 여자 4명으로 총 6명이등장하는 드라마로 기획되었다. 맨 마지막의 결말은 이수현이 마오를 사살하고 죽음을 맞는 엔딩 크레딧이였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AP는 국가정보원으로, 등장인물도 주연 5명이 등장하는 드라마로 탈바꿈되었다 히스토리 2004년 《개와 늑대의 시간》기획을 시작하다. 2005년 3월 《개와 늑대의 시간》전신인 프라미스 시놉시스를 완성하다. 2005년 8월 한지훈 작가가 참여하다. 2006년 4월 이준기, 주연으로 물망 오름 2006년 여름 이준기, 정경호, 남상미 등 주연배우 캐스팅 완료하다. 2006년 11월 KBS2 편성 논의 2006년 12월 국가정보원 내부촬영과 해외 실사헌팅을 진행하다. 2007년 2월 방송사가 MBC로 결정, 김진민 감독이 연출로 참여하다. 2007년 5월 1일 《개와 늑대의 시간》첫 촬영을 진행하다. 2007년 6월 태국 현지 촬영을 진행하다. 2007년 7월 18일 3년의 기획 기간과 2년간의 대본 집필 과정을 거쳐 첫방송이 전파를 타다. 2007년 7월 19일 DC 개늑시 갤러리 생성 2007년 9월 6일 마지막회 방송과 드라마 최초로 용산 CGV 극장 단체관람 2007년 12월 13일 개와 늑대의 시간 일반판 DVD 발매 2007년 12월 30일 MBC 연기대상 이준기, 남상미가 우수상을 수상한다. 2008년 2월 DC 개늑시 갤러리 추진 리뷰북 발행 2008년 7월 19일 1주년 기념 영상회가 연세대학교에서 열렸다. (기획 : DC 개늑시 갤러리) 2008년 10월 11일 서울 드라마 어워즈 네티즌이 뽑은 베스트 드라마에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 남자배우와 여자배우는 이준기와 남상미가 각각 수상하였다. 2010년 7월 22일 품절되었던 개와 늑대의 시간 일반판 DVD 재발매 2012년 4월 18일 이준기와 함께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 드라마 메이킹북이 발행되었다. 2014년 6월 개늑시 커플이었던, 이준기, 남상미는 KBS2드라마 조선총잡이에서 연인으로 다시한번 재회하고, 최재성은 이준기의 아버지로 특별출연 한다. 이준기와 남상미는 그해 12월 KBS 연기대상에서 조선총잡이로 커플상을 받는다. 그리고 2015년 1월 남상미는 일반인 사업가와 결혼식을 올렸다. 2015년 11월 DC 드라마갤과 이준기 팬덤이 중심이 되어 개와 늑대의 시간 Blu-ray를 출시 요청하다. 2016년 1월 25일 개와 늑대의 시간 Blu-ray 스페셜 에디션이 출시가 확정되었다. 2016년 4월 12일 개와 늑대의 시간 Blu-ray 스페셜 에디션 발매. 편성 변경 2007년 8월 22일 방송분은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베이징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경기가 저녁 8시부터 시작한 관계로 지연 방송되었다. 시청률 아래의 파란색 숫자는 '최저 시청률'이고, 빨간색 숫자는 '최고 시청률'입니다. 시청률조사회사와 지역별로 시청률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각주 수상 경력 2007년 MBC 연기대상 남자 우수상 이준기 2007년 MBC 연기대상 여자 우수상 남상미 2008년 제3회 서울 드라마 어워즈 네티즌이 뽑은 남자 인기배우상 이준기 2008년 제3회 서울 드라마 어워즈 네티즌이 뽑은 여자 인기배우상 남상미 2008년 제3회 서울 드라마 어워즈 네티즌이 뽑은 베스트 드라마상 관련기사 한국적 느와르 / 《매일경제》2007-07-05 ‘개와 늑대의 시간’ 못다한 그 뒷얘기 / 《뉴스엔》2007-09-10 외부 링크 MBC 개와 늑대의 시간 홈페이지 2007년 드라마 문화방송 수목 미니시리즈 복수를 소재로 한 드라마 200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2007년에 시작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2007년에 종료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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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B9%B4%EC%95%BC%EB%A7%88%ED%9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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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야마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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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야마현()은 일본 주고쿠 지방의 세토 내해 연안에 있는 현이다. 현청 소재지는 오카야마시이다. 1988년에는 시코쿠와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었고 돗토리현, 시마네현과 연결하는 간선 철도도 있으므로 주고쿠, 시코쿠 지방의 거점 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 지리 오카야마현은 효고현, 돗토리현, 히로시마현에 접한다. 또한 세토 내해를 사이에 두고 시코쿠섬의 가가와현과 마주보며 내해의 90개의 섬을 포함한다. 오카야마현은 역사적인 도시인 구라시키시를 포함한다. 인구의 대부분은 구라시키 시와 오카야마시 주변에 집중되어있다. 북부 산지 지방의 작은 마을들은 인구가 고령화되고 감소하고 있다 - 공식적으로 현 자치체의 절반이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지역 시부(市部) 정령지정도시 일반시 구라시키시() 쓰야마시() 다마노시() 가사오카시() 이바라시() 소자시() 다카하시시() 니미시() 비젠시() 세토우치시() 아카이와시() 마니와시() 미마사카시() 아사쿠치시() 군부(郡部) 와케군() 와케정() 쓰쿠보군() 하야시마정() 아사쿠치군() 사토쇼정() 오다군() 야카게정() 마니와군() 신조촌() 도마타군() 가가미노정() 가쓰타군() 쇼오정() - 나기정() 아이다군() 니시아와쿠라촌() 구메군() 구메난정() - 미사키정() 가가군() 기비추오정() 인구 교통 철도 서일본 여객철도 산요 신칸센 산요 본선 하쿠비 선 기비 선 아코 선 쓰야마 선 우노 선 혼시비산 선 게이비 선 기신 선 인비 선 시코쿠 여객철도 혼시비산 선 지즈 급행 지즈 선 이바라 철도 이바라 선 미즈시마 임해철도 미즈시마 본선 오카야마 전기궤도 히가시야마 본선 세이키바시 선 도로 고속도로 산요 자동차도 주고쿠 자동차도 국도 국도 제2호선 국도 제30호선 국도 제53호선 국도 제179호선 국도 제180호선 국도 제181호선 국도 제182호선 문화 예로부터 모모타로의 전설로 유명함 스포츠 축구 : 파지아노 오카야마 F.C.(오카야마 시) 관광 고라쿠엔() - 오카야마 시 오카야마성() - 오카야마 시 시즈타니 학교() - 비젠시 구라시키 미관 지구() - 구라시키시 빗추 마쓰야마 성() 가쿠잔 공원 비세이 천문대() - 이바라 정 외부 링크 오카야마 현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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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C%97%90%EC%8A%A4%ED%8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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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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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스타(Siesta)는 낮잠을 자는 스페인의 전통적인 습관이다. 스페인 문화의 영향으로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도 시에스타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은 브라질에서는 시에스타가 나타나지 않는다. 대개 시에스타의 원인을 높은 기온에서 찾곤 한다. 날씨가 더울 때 많은 양의 음식을 먹게 되는 것도 한 이유이다. 두 가지가 조합되어 식후 졸림증을 유발한다. 스페인어권 국가를 빼고서도 비슷한 습관은 필리핀, 중국, 베트남, 인도, 이탈리아, 그리스, 크로아티아, 몰타, 슬로베니아 등에서도 나타난다. 위 국가들은 낮 기온이 상당히 높은 것이 공통점이어서 점심 식사 후에 잠깐의 휴식이 꼭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중동 지역 국가에서도 잔디에 눕거나 그늘에서 쉬는 모습이 오후에 나타나는데 이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북부 스페인이나 아르헨티나 북부, 칠레는 시에스타가 존재하지만 기후는 캐나다와 비슷하기도 하다. 원 의미의 시에스타는 점심 후에 사람들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시에스타는 그 시간이 상당히 긴 편이다. 그 이유는 분분하지만 대개는 스페인 내전 동안 실직자가 폭증해 구직자들이나 일을 마친 자들이 식사를 늦게 미루고 잠을 잤다가 다시 저녁쯤에 돌아다니게 됐으므로 나타난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시에스타가 문화적 습관으로 자리잡은데다 라틴 국가에서도 오랜 관습이었으므로 이에 반하는 의견도 많다. 생물학적 필요성 낮잠은 항상성을 증진하여 생체 리듬을 최적화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즉 24시간 주기로 돌아가는 인간의 생체 리듬을 잠으로 잠시 쉴 수 있도록 돕는 한편 몸이 잠에 대해 유연히 반응하도록 돕는다. 낮잠을 통해 지나친 잠을 막고 피로의 누적을 막아주는 셈이다. 초저녁이 되면 졸리는 경향이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 낮잠은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초저녁에 기력이 소진된다는 것은 낮에 지나치게 활동을 많이 함을 의미하므로 낮에 잠시 잠을 자면 그 피곤함을 덜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열대 기후 국가에서도 낮잠에 대한 관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낮의 기온이 노동생산성을 지나치게 떨어뜨리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워싱턴포스트는 2007년 2월 13일 그리스의 연구 결과를 연달아 발표했다. 그리스 연구자들은 낮잠을 조금이라도 자는 사람들이 심장 발작을 일으킬 확률이 낮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관공서나 사무소 등에서는 인근 관련 업계와 시에스타 시간을 맞추거나 하여 영업시간을 정하기도 한다. 남아시아에서는 점심 후 낮잠이 흔하다. 하지만 이것은 산업화 이전의 일이다. 당시에는 겨자씨 기름으로 간단한 마사지를 하여 낮잠을 잤다. 방글라데시와 벵골만 서쪽 지역에서는 이러한 관습을 bhat-ghum으로 별칭하기도 하는데 한국어로 옮기면 밥잠이다. 점심 식사를 한 후에 잠깐 자는 잠이라는 뜻이다. 중국과 타이완에서도 흔한 것인데 대개 학교에서도 점심 후 30분 정도 낮잠을 잘 시간을 따로 주기도 한다. 이 때에는 모든 전등을 끄고 쉬거나 자는 것 이외에는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근무 중에 낮잠을 자는 경우를 볼 수 없으나 군부대의 경우 혹서기(6월 하순부터 8월 중순까지)에는 열사병으로 인한 사고 방지를 위해 점심 시간 이후 2시까지 오침을 실시하므로 오후 일과가 2시부터 시작된다.(대개의 경우는 오후 1시부터이다) 이슬람 문화에서는 기도할 시간을 마련하거나 밤 늦게 코란을 암송할 것(tahajjud)을 대비하여 15분~30분 동안 잠을 자는 것을 장려한다. 각주 외부 링크 왜 시에스타로 우리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까?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 연구결과 잠 스페인의 문화 스페인어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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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9%A7%EC%83%88%EC%86%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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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새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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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새속(Emberiza)는 참새목에 속하는 조류 속이다. 멧새과(Emberizidae)의 유일속으로 45종을 포함하고 있다. 곤충과 식물의 씨앗을 먹는 새로 뭉툭한 원추형 부리를 갖고 있다. 하위 속 E. affinis 검은머리촉새 (E. aureola) 붉은머리멧새 (E. bruniceps) E. buchanani E. cabanisi E. caesia E. calandra E. capensis 노랑눈썹멧새 (E. chrysophrys) E. cia E. cineracea 멧새 (E. cioides) E. cirlus 노랑멧새 (E. citrinella) 노랑턱멧새 (E. elegans) E. flaviventris 붉은뺨멧새 (E. fucata) 바위멧새 (E. godlewskii) 회색머리멧새 (E. hortulana) E. impetuani 점박이멧새 (E. jankowskii) E. koslowi E. lathami 흰머리멧새 (E. leucocephalos) 검은머리멧새 (E. melanocephala) 북방검은머리쑥새 (E. pallasi) 섬촉새 (E. personata) E. poliopleura 쇠붉은뺨멧새 (E. pusilla) 쑥새 (E. rustica) E. sahari 검은머리쑥새 (E. schoeniclus) E. siemsseni E. socotrana 촉새 (E. spodocephala) E. stewarti E. striolata 무당새 (E. sulphurata) E. tahapisi E. townsendi 흰배멧새 (E. tristrami) 검은멧새 (E. variabilis) E. vincenti 쇠검은머리쑥새 (E. yessoensis) 꼬까참새 (E. rutila) 계통 분류 각주 칼 폰 린네가 명명한 분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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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C%84%B1%EA%B7%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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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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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균은 다음 사람을 가리킨다. 김성균(金聲均, 1908~1983)은 일제 강점기에 검열관을 지낸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다. 김성균(金成均, 1976~)은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이다. 김성균(1980~)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김성균(2001~)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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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90%EC%8A%A4%EB%8D%B8%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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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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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델(-記, , , )은 구약성경의 일부로, 개신교에서는 에스더, 가톨릭에서는 에스테르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특히 이 문헌의 정경성이 오랜 기간 의심받아 왔다. 2세기에 처음 기독교의 구약성경 목록을 제시한 멜리토는 에스더를 성경 목록에 넣지 않고 대신 2정경 문헌인 지혜서를 넣었다. 성경 목록이 처음 공식 제안된 라오디케아 공의회에서 에스더를 포함할 것을 결정하였으나, 비슷한 시기의 아타나시우스는 정경 목록을 제안한 부활절 서신에서 에스더를 제외하고 바룩서를 정경으로 제시하였다. 제롬의 불가타 성경과,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정경으로 확정함으로써 기독교에서 보편적인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70인역의 그리스어 추가 부분은 개신교에서 외경으로 제외한다. 내용 페르시아 제국의 아하수에로스 황제는 인디아와 페르시아 지역을 다스리는 황제이었다. 아하수에루스 황제는 축제에서 술을 마시다가 왕비 와스디의 미모를 자랑하고자 황후를 부른다. 그녀가 나타나기를 거부하자, 황제는 새로운 황후를 찾는다. 에스텔의 사촌이었던 모르드개는 페르시아 제국에 잡혀 온 유대인들 중에 하나였다. 에스텔은 고아로, 모르드개의 보호하에 있었다. 황후를 찾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에스텔은 왕궁으로 불려갔다. 에스텔은 높은 직책에 올라갔지만, 그녀는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황제은 사랑에 빠져 그녀를 황후로 삼는다. 모르드개는 아말렉 출신이며 고관 대신이었던 하만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에 분을 느낀 하만은 황제에게 고하여 전 제국의 유대인을 학살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모르드개는 이것을 먼저 알아채고, 에스텔에게 이야기 하여, 황제에게 간청해서 이 명을 거둬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에스텔은 모르드개의 말을 듣고 주저하다. 그 이유는 황제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황제에게 임의로 나아가는 경우, 황제가 만나기를 거부하면 죽음을 당하는 당시 규칙 때문이었다. 에스텔은 전 유대인들에게 삼일간 금식을 선포하고 본인도 같이 금식한 후, 황제에게 나아간다. 황제는 에스텔의 미모에 에스텔을 부르게 되고, 모든 명을 다 들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황제에게 하만을 초청하도록 간청하고, 하만 앞에서 하만이 왕비를 포함한 모든 유대 민족을 말살하려는 것을 황제에게 고하였다. 놀란 하만은 에스텔 앞에 엎드렸으나, 황제는 그녀를 공격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더욱 진노하게 된다. 이에 하만은 처형되고, 하만의 모든 소유는 에스텔에게 주게 된다. 그리고, 유대인 학살의 명을 거두도록 청하고, 모르드개에게 관련 내용의 전권을 위임한다. 그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유대인들이 모여서 스스로를 방어하고, 위해하려는 자를 죽일 수 있도록 하는 조서를 각지에 내리게 된다. 하만이 유대인을 죽이려던 아달월 13일에 유대인들이 유대인 혐오세력을 몰아내게 되었다. 아달월 13일 부림절은 하만이 유대인을 죽이려던 순간에 오히려 유대인이 대적자들을 물리치게 된 날이다. 유대인에게는 목숨을 건지고, 대적을 이긴 기쁜 날로써, 유대인들은 그 날을 기념하여 연간 절기인 부림절로 정하였다. 또한 모르드개는 황제보다 다음가는 사람이 되었으며, 그는 유대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같이 보기 에스테르 (인물) 구조 1장 - 와스디 왕후 폐위 2장 1-18 - 에스더가 왕후가 되다 3장 - 하만이 유다 사람을 멸하고자 하다 4장 - 에스더가 백성을 구원하겠다고 하다 5장 1-8 - 에스더가 왕과 하만을 잔치에 청하다 9-14 - 하만의 음모 6장 - 왕이 모르드개를 존귀하게 하다 7장 - 하만의 몰락 8장 - 유다 사람들에게 살길이 열리다 9장 1-19 - 유다 사람이 대적들을 진멸하다 20-32 - 부림일 10장 - 왕과 모르드개가 높임을 받다 기원전 4세기 책 원경전 제2경전 케투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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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80%ED%95%98%EC%88%98%EB%A5%BC%20%EC%97%AC%ED%96%89%ED%95%98%EB%8A%94%20%ED%9E%88%EC%B9%98%ED%95%98%EC%9D%B4%EC%BB%A4%EB%A5%BC%20%EC%9C%84%ED%95%9C%20%EC%95%88%EB%82%B4%EC%84%9C%20%28%EC%98%81%ED%99%9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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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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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더글러스 애덤스가 지은 코믹 SF 동명의 책을 기반으로 한 코미디 영화이다. 이 영화는 2004년에 촬영을 마치고, 2005년 4월 28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첫 개봉을 하였고, 미국에도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5월부터 9월 동안 전 세계에 상영되었다. 대한민국에선 처음에 단관개봉하다, 메가박스에서 연장개봉한 전력이 있다. 영화 대본은 애덤스가 직접 썼으나, 2001년 애덤스가 사망하고 난 뒤, 거스 제닝스와 캐리 커크패트릭이 영화 대본을 완성하였다. 줄거리 영화를 시작할 때 해설자는 돌고래가 지구가 철거될 것을 알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돌고래는 사람들에게 뒤공중제비로 지구가 파괴될 것을 알렸지만, 사람들은 이를 잘못 이해하였고 결국 돌고래들은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지구를 떠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불도저가 집으로 다가오는 소리를 들은 아서 덴트는 자기 집이 우회로를 건설하기 위해서 철거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서는 집의 철거를 막기 위해, 그의 집을 철거 하려는 불도저 앞에 드러눕게 된다. 아서의 시도는 그의 친구인 포드 프리펙트 때문에 방해를 받았고, 포드는 아서를 데리고 술집으로 가게 된다. 술집에서 포드는 자기가 길포드에서 온 것이 아니라, 외계인이란 걸 아서에게 말하였다. 포드는 아서가 그에게 보여준 친절(포드가 자동차를 지구를 지배하는 생물이라고 생각하고, 자동차와 악수하려고 할 때, 아서가 그를 길 밖으로 밀어내었다)로 보곤인이 초공간 고속도로를 놓기 위해 지구를 파괴하려는 순간 아서를 구하게 된다. 둘은 겨우 보곤 우주선에 히치하이킹을 하게 되고, 거기서 그들은 함장의 시(보곤의 시는 전우주에서 3번째로 최악이다)를 듣고 난 뒤, 우주로 던져지게 된다. 그들은 순수한 마음호에 의해서 구조되었는데, 순수한 마음호에는 이 우주선을 훔친 은하계 대통령 자포드 비블브락스와, 지금은 트릴리언이라 불리는 트리시아 맥밀런과, 우울증을 앓고 있는 안드로이드 마빈이 타고 있었다. 자포드는 순수한 마음호로 마그라테아에 가서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한다. 그들은 마그라테아로 진로를 돌렸으나, 순수한 마음호에 실린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기는 그들을 비트보들 6행성의 궤도에 올려놓는다. 비트보틀 6행성은 자트라바티드인들과 자포드와 대통령자리를 다투던 후마 카블라의 고향별이다. 후마 카블라는 마그라테아로 가는 좌표가 담겨있는 붉은 육면체를 가지고, 자포드에게 깊은 생각근처에 있는 모든 관점 총을 가져다 준다고 하면 좌표를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후마 카블라는 자포드가 총을 갖고 오도록 하기 위해 인질로 자포드의 다른 머리를 인질로 잡아둔다. 그들이 비트보틀 6행성에서 탈출할 때, 트릴리언은 그들의 본 행성인 보그스피어로 끌려가게 된다. 아서와 포드, 그리고 자포드는 트랄행성의 버그블래터 비스트에게 먹힐뻔한 트릴리언을 우여곡절 끝에 구하게 되고, 그들은 마그라테아로 향하게 된다. 마그라테아에서 자포드와 트릴리언 그리고 포드 프리펙트는 깊은 생각에게서 지구가 최호의 질문을 계산하는 컴퓨터였으며, 거기에 살고 있던 생명체들은 계산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깊은 생각의 바로 밑에서 은하계의 화난 주부들의 회의에서 만들었고, 이 총을 맞은 사람은 이 총을 쏜 사람의 관점을 경험하게 되는 모든-관점 총을 찾게 된다. 아서는 슬라티바트패스트를 만나게 되고, 슬라티바트패스트는 아서에게 자신들이 지구를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또한 자신이 지구에 만든 피요르드 때문에 상을 탔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 뒤에 그는 아서와 함께 마그라테아의 행성 제작 공장으로 데리고 가게 된다. 마그라테아 행성 제작 공장에서, 아서는 지구의 백업본인 지구 마크 2를 보게 되었고 결국 그는 재창조된 영국의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서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쥐들과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가 자리에 앉고 난 뒤에, 쥐들은 질문의 한 부분을 구상하는 그의 뇌를 떼어내려고 하였다. 우여곡절끝에 아서는 쥐들의 속박에서 풀려나게 되고, 쥐들을 찻주전자로 짓눌러 버린다. 쥐포가 되머린 쥐들은, 깊은 생각의 제작자로 변하였다. 아서 일행이 집 밖에 나오니, 보곤인 부대가 아서의 집을 둘러싸고 있었고, 보곤 대대장은 그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자포드는 아서의 우주선(사실 아서의 트레일러)을 조종해서 이 상황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아서와 트릴리언은 모든-관점 총을 회수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보곤 대대의 공격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총을 주우러 간 마빈은 보곤인의 공격을 맞고 쓰러졌고, 그들은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 그 때, 마빈이 그 총을 들어 보곤인들에게 모든-관점 총을 쏘았다. 그가 쏜 총으로 인해서 모든 보곤인들은 그의 관점을 느끼게 되었고, 그들은 모두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보곤인의 공격이 분쇄되고, 지구의 모든 생명주기가 보곤인이 파괴하기 전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아서와 그의 친구들은 순수한 마음호를 타고 우주저편의 레스토랑으로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흥행 수익 미국에서 개봉 당시 주말동안 21,103,203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리고 개봉 후 첫 4주 동안, 미 박스 오피스 순위 10위권을 기록하였다. 이 영화는 2006년 12월 기준으로 104,478,416 달러를 전 세계에서 벌어들였다. 사소한 내용 BBC 작품들과의 고리 버니 랜던이 작곡하고, 이글즈가 녹음한 BBC 라디오와 TV 시리즈의 테마곡이던 "Journey of the Sorcerer"은 조지 탈벗에 의해 개작되어 영화에 삽입되었다. 라디오와 TV 시리즈에서 아서 덴트역을 맡은 시몬 존스는 "순수한 마음"호가 마그라테아의 궤도에 도착하였을때, 마그라테아 행성에서 보낸 경고 메시지의 3D 영상에 까메오로 출현하였다. 보그스피어에서 트릴리언을 구하기 위해 보고인의 사무실에서 줄을 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BBC 드라마 버전의 마빈이 나온다. 초반의 파티 장면에서 자포드 비블브락스가 쓰고 나온 선글라스는 BBC의 드라마에 나오는 자포드 비블브락스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만들었던 사람이 만든 것이다. 기타 더글러스 애덤스는 이 영화에서 4번 등장한다 - 마그라테아 행성 제작 공장 장면에서, 그의 머리와 닮은 행성의 모양이 잠깐 보이며, 비틀보틀 6행성의 위대한 초록 아클시저의 신전에서 그의 코가 보인다; 또한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기의 발견과정의 벽에 그려졌으며, 맨 마지막에 "순수한 마음호"가 불가능 확률 추진을 할 때 그의 얼굴이 보인다. 깊은 생각은 그의 전자 눈위의 오른쪽 위에 애플 로고를 달고 있다. (이건 포드, 트릴리언, 그리고 자포드가 깊은 생각과 대화하는 장면을 클로즈업할 때 보인다). 이것은 더글러스 애덤스가 영국에 들어온 2번째 매킨토시 사용자인 것과 안내서의 목소리를 맡은 스티븐 프라이가 세 번째 매킨토시 사용자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한다. 포드의 회상 장면에서, 아서는 포드가 차에 부딪히는 것을 구해 주는데, 이 차는 실제 포드 프리팩트이다. 처음 혼란 장면의 몇몇 부분에 애덤스의 가족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조용히 신문을 보고 있는 늙은 부인은 사실 더글러스 애덤스의 어머니이다. 아서 덴트와 트릴리언이 처음 만나는 파티에서는 더글러스 애덤스가 진화론을 좋아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아서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있었고, 트릴리언은 찰스 다윈으로 분장하였다. 아마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Noël Adams)의 대문자를 따면 DNA가 된다는 점과, 그의 절친한 친구가 리처드 도킨스인것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순수한 마음호가 마그라테아의 궤도에 진입하였을 때, 행성에서 경고 메시지로 보낸 3D 영상은 실제로 3D영상용 안경으로 보면 입체로 보인다고 한다. 배역 마틴 프리먼 - 아서 덴트 샘 록웰 - 자포드 비블브록스 모스 데프 - 포드 프리펙트 조이 데이셔넬 - 트리샤 토머스 레넌 - 에디(목소리) 헬렌 미렌 - 깊은 생각(목소리) 스티븐 프라이 - 해설 존 말코비치 - 험마 카불라 빌 나이 - 슬라티바트패스트 워릭 데이비스 / 앨런 릭먼(목소리) - 마빈 빌 베일리 - 고래(목소리) 한국판 성우진(KBS) 김일 - 아서 덴트(마틴 프리먼) 홍시호 - 자포드 비블브록스(샘 록웰) 유동균 - 포드 프리펙트(모스 데프) 소연 - 트리샤(주이 데샤넬) 박상일 - 에디(토머스 레넌) / 보고인 임은정 - 깊은 생각(헬렌 미렌) 원호섭 - 해설(스티븐 프라이) 서윤석 - 험마 카불라(존 말코비치) 홍진욱 - 슬라티바트패스트(빌 나이) / 보고인(마크 월슨) / 고속도로 건설원 장민혁 - 마빈(워윅 데이비스 / 앨런 릭맨(목소리)) 백승철 - 고래 (빌 베일리) 이제인 - 은하 뉴스 앵커(켈리 맥도널드) 배진홍 - 론톡(안나 챈셀러) 같이 보기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소설) 참조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Official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Movie Site (영국) Official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Movie Site (미국) 공식 예고편 인터뷰 Interview with executive producer Robbie Stamp (Slashdot) Online chat with executive producer Robbie Stamp Online chat with director Garth Jennings 기타 영화 2005년 영화 영국의 영화 작품 영국의 코미디 영화 영국의 SF 영화 영국의 SF 코미디 영화 영어 영화 작품 우주 모험 영화 SF 소설의 영화화 작품 감독 데뷔 영화 외계생명을 소재로 한 영화 세계 종말 이후를 배경으로 한 영화 인공지능을 소재로 한 영화 카나리아 제도에서 촬영한 영화 가공의 행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 실사 애니메이션 영화 터치스톤 픽처스 영화 스파이글라스 엔터테인먼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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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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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袁熙, ? ~ 207년)는 후한 말의 군웅 원소(袁紹)의 차남으로, 자는 현혁(顯奕)이며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여양현(汝陽縣) 사람이다. 생애 원소가 원상(袁尙)을 후계자로 삼을 뜻을 품고 원담(袁譚)을 청주자사로 내보내자 이를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은 저수(沮授)가 간언했으나 원소는 오히려 원희도 유주자사로 임명하여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다. 원희는 원소의 급사 이후 원상의 계승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던 원담이나 표면상으론 원상을 따르면서도 은밀히 야심을 품고 있던 고간과 달리 원상의 승계를 불복하거나 특별히 문제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원상에게 협조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04년 원상이 조조(曹操)와 원담에게 패하여 도망쳐 온 것을 받아들였으나 205년 1월. 원희의 부하 장수 초촉(焦触)과 장남(張南)이 원희를 배반하여 공격했기 때문에 원소에게 우호적이었던 오환족의 답돈(蹋頓)에게 피신해야 했다. 207년 조조가 오환을 공격해 오자 원상 형제는 오환족과 함께 조조군에 맞섰으나 결국 대패하여 요동으로 달아났다. 요동을 지배하고 있던 공손강(公孫康)과는 일단은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원상 형제가 요동에 있는 시점에서는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었으므로 결국 살해되었다. 그가 죽은 후 아내였던 견씨는 조조의 아들 조비의 황후가 되어 문소황후로 봉해졌다. 원상과 원희의 머리는 오환 지도자들의 머리와 함께 조조에게 보내졌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원희 창정(倉亭) 전투에서 유주 군사 6만을 이끌고 아버지를 도왔으나, 조조군에게 패하여 원소를 호위하며 후퇴하다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원담과 원상만 여양(黎陽)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연의에서는 원희와 고간까지 같이 싸운 것으로 나온다. 원희를 섬긴 사람들 장남 초촉 한형 자패(子佩) 원희의 친족관계 관련 인물 원기 원담 원매 원봉 원상 원성 원소 원술 원안 원외 원요 원유 원윤 원평 각주 생년 미상 207년 사망 원소와 주변 인물 살해된 사람 여남 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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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C%EC%84%B1%20%EB%A6%BC%ED%94%84%EA%B5%AC%EC%84%B1%20%EB%B0%B1%ED%98%88%EB%B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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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 림프구성 백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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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 림프모구 백혈병(, CLL)은 림프구의 악성화로 인해 생기는 원발성 만성 백혈병이다. 서양에서는 백혈병 중에서 가장 높은 유병률을 나타내고 있으나,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는 흔하지 않다. 과거의 분류와 달리 WHO 분류법에서는 B 세포 유래 질환만 만성 림프모구 백혈병으로 분류된다.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골수가 너무 많은 림프구(백혈구의 일종)를 만드는 암의 한 유형이다. 초기에는 일반적으로 증상이 없다. 나중에 통증이 없는 림프절 부기, 피곤함, 열, 야간 발한 또는 뚜렷한 이유 없이 체중 감소가 발생할 수 있다. 비장 비대와 낮은 적혈구(빈혈)도 발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수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악화된다. 위험 요인에는 질병의 가족력이 포함되며,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 환자의 10%는 질병의 가족력이 있다. 고엽제, 특정 살충제에 대한 노출, 태양 노출, C형 간염 바이러스에 대한 노출 및 일반적인 감염도 위험 요인으로 간주된다. 만성 림프모구 백혈병은 골수, 림프절 및 혈액에서 B 세포 림프구의 축적을 초래한다. 이 세포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건강한 혈액 세포를 밀어낸다. 이 질환은 두 가지 주요 유형으로 나뉜다. 변이된 IGHV 유전자를 가진 자 해당 유전자가 없는 자 진단은 일반적으로 많은 수의 성숙한 림프구 및 스머지 세포를 찾는 혈액 검사를 기반으로 한다. 무증상 사례의 초기 단계의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은 조기 개입 치료가 질병의 경과를 바꿀 수 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신중한 관찰을 진행한다. 면역 결함은 이 백혈병의 과정 초기에 발생하며 이는 항생제로 적절하게 치료해야 하는 심각한 감염이 발생할 위험을 증가시킨다. 심각한 증상이 있는 경우 화학 요법, 면역 요법 또는 화학 면역 요법을 사용할 수 있다. 개인의 나이, 신체 상태, del(17p) 또는 TP53 돌연변이 여부에 따라 다른 1차 치료가 제공될 수 있다. 2021년부터 이브루티닙 및 아칼라브루티닙과 같은 BTK 억제제가 만성 림프구성 백혈병의 1차 치료에 종종 권장된다. 플루다라빈, 시클로포스파미드, 리툭시맙 약물은 이전에 건강한 사람들에게 쓰였던 초기 치료 수단이었다. 이 질환은 2015년 전 세계적으로 약 904,000명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60,700명이 사망했다. 2021년 미국에서 추정되는 발병률은 21,250건의 신규 사례와 4,320건의 사망이다. 이 질병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생하는 유전적 돌연변이의 축적으로 인해 65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가장 일반적으로 발생한다. 남성은 여성보다 약 2배 더 자주 진단된다(6.8 대 3.5 비율). 아시아 사람들에게는 훨씬 덜 일반적이다. 진단 후 5년 생존율은 미국에서 약 83%이다. 이는 암으로 인한 사망의 1% 미만을 나타낸다. 외부 링크 암 백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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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2%8B%EB%B3%BC%20%EC%96%BC%EB%9D%BC%EC%9D%B4%EC%96%B8%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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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 얼라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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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 얼라이언스(Football Alliance)는 잉글랜드의 축구 리그로, 1889년부터 1892년까지 존재했던 리그이다. 풋볼 얼라이언스는 12팀으로 구성된 풋볼 리그에 대한 라이벌로서, 1888-89시즌에 처음 시작되었으며 역시 12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풋볼 얼라이언스는 풋볼 리그와 비슷한 지리적 범위인 중부 내륙부부터 북서쪽까지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셰필드, 그림스비, 선덜랜드 지역을 포함하여 동쪽으로 더 넓었다. 더 웬즈데이가 첫 번째 우승 팀이었다. 얼라이언스의 첫 시즌이 끝나고, 스토크가 풋볼 리그에서 떨어져 나왔고, 얼라이언스는 새로이 참가팀으로 받아들였다. 다음해에 풋볼 리그가 팀을 14팀으로 늘리게 되면서 스토크와 또 다른 얼라이언스 클럽인 다웬이 풋볼리그에 참가하게 되어 얼라이언스를 떠났다. 1892년에 두 리그는 공식적으로 통합하기로 하고, 대부분 풋볼 얼라이언스 팀을 포함하여 풋볼 리그 2부 디비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현재의 리그 팀들에 얼라이언스 팀 가운데 상위권 세 팀을 합하여 풋볼 리그 1부 디비전을 형성하였다. 참가 클럽 1: 풋볼 리그 1부 디비전에 참가함. 2: 풋볼 리그 2부 디비전에 참가함. 풋볼 얼라이언스 우승 팀 잉글랜드의 축구 대회 1889년 설립된 스포츠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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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9D%B4%EB%A7%89%EC%8A%A4%ED%82%A4%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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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막스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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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막스키군(, )은 바시키르 공화국의 남동부에 위치한 군이다. 동쪽은 첼랴빈스크 주에 접해 있고, 1930년에 설치되었다. 면적은 5432 km2이고 주요한 도시는 바이마크, 시바이이다. 중심지는 바이마크로 우파에서 275km 떨어져 있다. 군의 인구는 1995년에 4만3,500명이었다. 1인당 인구 밀도는 8명당 1 km2이다. 주민은 러시아인, 바시키르인이다. 러시아어 신문인 "Баймакский вестник"와 바시키르어 신문인 "hakмар"이 발간된다. 바시키르 공화국의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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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B4%ED%98%84%EA%B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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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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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雲峴宮)은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서, 고종이 탄생하여 즉위하기 전 12살까지 살았던 잠저이기도 하다. 운현궁의 이름은 서운관(書雲觀, 관상감의 별칭)이 있는 앞의 고개라 하여 운현(雲峴)이라 불렸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때 여기서 청나라 톈진으로 납치되었다. 한때는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한다. 이로당 뒷편에 있던 고종이 소년 시절에 자주 오른 노송(老松)은 현재는 사라지고, 그를 추양하는 경송비만이 남아있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교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 제257호로 지정하였다. 역사 조선시대 일반 상류주택이었던 이 건물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영역이 크게 넓혀지고 건물들도 새로 더 들어서며 흥선대원군이 10여 년간 집정하며 정치를 하는 곳으로 변모하였다. 실제로 고종이 살았던 집은 운현궁 동북쪽 뒤에 있었는데, 1966년에 헐리고 그 자리에 중앙문화센터가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대원군이 섭정을 행하던 1863년 ~ 1873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인데, 노락당과 노안당은 1864년 9월, 이로당은 1870년 준공되었다. 운현궁은 원래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양관(洋館), 일본 문화원, 중앙문화센터, 운현초등학교 일대까지 포함된 넓은 지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다. 1940년대 후반에는 대한민청의 본부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1996년 새로 중수하여 개방한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로당(二老堂)의 세 건물과 부속 행랑채를 운현궁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운현궁 터는 복원하면서 대지를 동서로 크게 양분하여, 동편에는 세 건물들이 들어섰고, 서편은 빈 마당으로 남겨 도로와 접하고 있다. 동편에 있는 세 건물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대원군의 사랑채였던 노안당, 안채인 노락당, 그리고 별당인 이로당(二老堂) 순서로 자리 잡고 있다. 노안당 남쪽에 원래 아재당(我在堂)이 있었으나 없어졌고, 이로당 북쪽에 있던 영로당(永老堂)도 원래 운현궁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개인 소유의 건물(김승현 가옥,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9호)로 되어 운형궁 경역과는 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건물 현존하는 운현궁의 건물들은 격식이나 규모로 보아 궁실의 내전 건물에 가깝다. 평면에 보이는 특징으로 각 채들의 동측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월랑(月廊)으로 연결시킨 점을 들 수 있다. 창덕궁에서 고종이 손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경근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또 대원군 전용문인 공근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노안당 노안당의 '노안(老安)'은 《논어》공야장(公冶長)편에 나오는 "노인들을 편안하게 하여준다(老者安之)"에서 유래하였다. 노안당은 전체적으로 정(丁)자형의 건물로 대원군이 국정을 의논하던 곳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몸채 동쪽 끝에 7칸이 덧붙었다. 몸채부는 동쪽 2칸 사랑방을 제외하고 모두 우물마루로 되었으며, 동쪽 끝에서 남으로 돌출한 2칸은 누마루로 구성되었는데, 영화루(迎和樓)라고 한다. 누마루의 하부에는 판장벽을 막고 홍예문을 만드는 등, 실용적이며 장식적인 의장을 선보인다. 지붕 박공 부분 중 뒷면 두 군데에 회벽을 쌓고 중앙에 복(福)을 상징하는 박쥐를 그려 넣었다. 영화루는 대원군이 손님을 맞아 접대하던 곳이다. 노안당의 몸채는 장대석의 세벌대이고, 영화루는 장대석 두벌대로 되어있다. 기둥은 평주, 고주 모두 사각기둥이고 약간의 민흘림이 있으며, 쌍사모를 한 기둥을 세워 기둥머리에는 초익공을 결구하였다. 가구(架構)는 2고주 5량이고, 뒤쪽으로 내민 부분은 1고주 5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마에는 송판으로 만든 차양(遮陽)을 달았는데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단 차양은 고전적 수법이다.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노락당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자 모양을 취하고 있으며, 정면 3칸은 앞퇴를 개방했고, 좌협간 2칸 중에서 한 칸 부분이 개방되어 좌측 날개 부분의 통로 역할을 한다. 좌우 각 2칸은 온돌, 중앙 3칸은 대청이다. 좌우측의 날개 부분 즉 안채의 몸채에서 직각으로 꺾여 있는 부분은 돌출부가 각 2칸이며 부엌과 창고로 쓰였다. 노락당은 초익공 7량 건물로 사대부가의 건축미를 느낄 수 있는 기법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 문양이 남아있다. 노락당 남쪽의 남행각은 자 모양의 평면을 하여 자 모양의 평면을 한 노락당과 함께 자 모양의 안마당을 형성하였다. 이곳은 명성황후 민씨가 삼간택을 마친 후 왕비수업을 받았던 곳이고, 고종 3년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가례가 있었던 곳이다. 이로당 별당인 이로당은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은 지극히 폐쇄적인 '口'자형 건물이다. 노락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오로지 안채에서만 드나들 수 있었던 비밀스럽고 은밀한 건물이었다. 이로당은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가 거처하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7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정방형주초(正方形柱礎)이고 기둥은 평주, 고주 모두 사각기둥으로 약간의 민흘림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나 툇마루는 장마루이고 가구는 입구자형 평면에서 남쪽은 1고주 5량, 서쪽과 북쪽은 1고주 3량, 동쪽은 평4량(平四樑)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인 서북쪽 모서리를 제외하고 모두 팔작지붕이다. 정면 앞마당 서쪽으로는 석함, 동쪽으로는 요거석이 있고, 동쪽 마당에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사진 운현궁의 역대 종주 제1대 :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년~1898년) 제2대 :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완흥군(完興君), 1845년~1912년) 제3대 :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년~1917년) 제4대 : 이우(李鍝, 1912년~1945년) 제5대 : 이청(李淸, 1936년~) 같이 보기 운현궁의 봄 계동궁 흥선대원군 흥친왕 영선군 이문용 이우 이재선 운니동 김승현 가옥 은신군 고종 이종 이청 박찬주 윤원선 흥선대원군묘 :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소재 참고 자료 외부 링크 운현궁 홈페이지 서울 종로구의 건축물 서울특별시의 사적 조선의 건축물 조선의 궁전 흥선대원군 해제된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서울 종로구의 한옥 영선군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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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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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7%B0%ED%9D%A5%20%28%EC%84%9C%EC%97%B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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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흥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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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흥(燕興)은 중국 서연(西燕) 제북왕(齊北王) 모용홍(慕容泓)의 연호이다. 384년 4월에서 12월까지 9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384년 4월, 전진(前秦)으로부터 자립한 모용홍은 도독섬서제군사·대장군·옹주목·제북왕(都督陝西諸軍事大将軍雍州牧濟北王)을 자칭하면서 개원하였다. 6월에 모용홍이 살해되고 모용충(慕容沖)이 즉위하여 남은 6개월 동안 이어서 사용하였다. 같은 시기에 사용된 다른 연호로는 동진(東晉)에서 사용한 태원(太元 : 376년 ~ 396년), 전진(前秦)에서 사용한 건원(建元 : 365년 ~ 385년), 후연(後燕)에서 사용한 연원(燕元 : 384년 ~ 386년), 후진(後秦)에서 사용한 백작(白雀 : 384년 ~ 386년)이 있다. 연대대조표 관련항목 중국의 연호 서연의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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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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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D%98%81%EB%A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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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혁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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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혁로(柳赫魯 / 柳赫老, 1851년 3월 9일 ~ 1945년 5월 15일)는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무신이자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다. 구한말 개화파의 일원으로 갑신정변과 을미사변에 참여했고, 일제강점기에는 고위 관료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갑신정변 당시 오위장으로 가담, 참여하여 행동대의 1개 부대를 이끌었으며, 통신연락과 정찰 임무를 담당하였다. 1873년(고종 10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1882년(고종 19년)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 어윤중 등의 수행원으로 도쿄에 다녀왔다. 1883년(고종 20년) 5월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 토야마 하사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1884년 5월 귀국하였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정변 당시 행동대장의 한 사람으로 군사들을 이끌었으나 3일만에 실패하고 배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4년 귀국, 군무아문참의(軍務衙門參議) 등을 거쳐 1895년 7월에는 박영효 등과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해의 을미사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4년(광무 7년) 귀국하여 군무아문참의, 육군부령(陸軍副領), 육군 포공국장(砲工局長) 등을 지냈다. 1907년(융희 1년) 12월 평안북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1910년 10월 한일합병 조약 후 경기도참여관으로 강등되었다. 1916년 충청북도지사, 1917년 중추원 찬의, 1919년 전라북도지사를 거쳐 1921년 중추원 참의로 전임되었다. 1940년 매일신보에는 사망 기사가 나왔으나 1945년 광복 직전까지도 생존했다는 설이 있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호는 설악(說嶽), 설강(雪岡), 설강산인(雪岡山人)이다. 일본식 이름은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로,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길에 치토세마루 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 오경석(吳慶錫)·박규수(朴珪壽)의 문인이다. 충청남도 출신. 생애 생애 초반 초기 활동 1851년 3월 9일 충청남도 아산군 읍내면 송하리(현재의 아산시 온양동)에서 식송만호(植松萬戶) 등을 지낸 유상오(柳相五)와 목천상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무인이 되었다. 출신지는 아산군 읍내면 송하리였고, 본적지는 아산군 영인면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한성의 양반이었다가 고조할아버지 유흡(柳潝)이 동지중추부사를 끝으로 이후 그의 증조부 태화와 할아버지 덕원은 관직에 오르지 못해 집안은 몰락했다가 아버지 유상오가 무관이 되어 다시 집안을 일으켰다. 아버지 유상오는 하급 무관으로, 초기 개화당 형성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일설에는 그가 개화당에 가담함으로써 아버지 유상오가 은퇴했다고도 한다. 그에 의하면 '명문 출신인 서광범이 김옥균과 긴밀한 접촉을 갖고 개화당 형성을 위해 행동하였으나 유상오는 그 아들 유혁로가 참여 함으로써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의 출생년도도 1851년생 설과 1852년생 설, 1853년생 설, 1855년생 설, 1862년생 설, 1863년생 설 등 정확하지 않다. 어려서 한성으로 올라온 뒤 오경석의 문인이 되었다가 나중에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며 어윤중,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윤웅렬을 만났고 나중에는 박규수의 문하에 새로 출입한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과도 만나 교류하였다. 아버지 유상오 역시 박규수, 오경석 등과 교분을 쌓으면서 개화당에 가담하였고 그는 자연스럽게 개화파 인사가 되었다. 어려서 글을 배워 문과에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낙방하다, 1873년(고종 10년) 3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1879년(고종 16년) 8월 개성 후릉의 능위를 개보수할 때 감관(監官)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6품으로 승진하였다. 이때까지도 관직을 얻지 못하여 출신으로만 불렸다. 그해 11월 장위영 영관이 되었다. 이후 훈련원부봉사를 거쳐 1882년(고종 19년) 7월부터 8월 수신사(修身使) 박영효, 어윤중 등의 수행원으로 윤웅렬 등과 함께 일본에 출발, 그해 9월 도쿄 방문을 동행하였다. 관료 생활 초반 1880년(고종 17년) 12월 19일 오위장에 임명되었으나 같은해 12월 29일 병으로 병비의 건의로 체직, 첨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880년 무렵 개화당이 조직되었을 때의 중심인물은 유대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상오 등이었다. 초기에 그는 개화 인사들과 어느정도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갑신정변 무렵 유혁로는 오위장(五衛將)이었고, 아버지 유상오(柳相五)의 뒤를 이어 개화당에 본격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개화당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의 핵심 인사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금릉위(錦陵尉) 박영효, 서광범과 유혁로의 부친인 유상오 그리고 유대치였다. 가세가 미미했지만 그는 김옥균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김옥균, 박영효 등과 거리를 두었다. 1882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그해 8월 동행했다. 박영효는 김옥균과 함께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유혁로는 행동대의 한 사람으로 정변에 참여 하여 정찰과 통신을 담당했다. 그는 정변 당시 정란교, 이주회, 이규완 등과 함께 박영효와 서광범 계열 인물로 분류되었다. 1882년 8월 9일 수신사의 수행원 겸 호위무사로 수신사의 일행이 되어 한성을 출발하여 9월 2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후, 일본의 신문물을 접한 뒤 수신사 일행을 따라 1883년 초 귀국했다. 일본 유학 생활 1883년(고종 20년) 4월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유학하게 된다. 그는 고령자라는 점과 벌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될 위기에 놓였다가, 신식 군대 양성의 포부를 밝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을 설득하였다. 김옥균에게서 학비를 받은 그는 1883년 4월 서재필, 서재창 등 61명의 관비유학생과 함께 배편으로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883년 5월 그는 서재창, 신응희, 정행징, 임은명, 신중모, 윤영관, 하응선 등과 함께 일본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뒤에 1884년 1월 게이오 의숙을 수료한 서재필과 이규완 등도 합류하였다. 그러나 1884년 5월 귀국하게 된다. 이 무렵 박영효는 광주유수로 있으면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사관생도 신복모,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등을 귀국시켜 신식 군대의 양성에 착수했다. 인원은 600명으로, 유혁로는 병조 조련국 교관의 한 사람으로 병력 양성에 참여했다. 1884년 7월부터 김옥균,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에 가담하였으며, 그해 여름 정변 계획이 수립되었을 때는 일행이 고용한 일본인 자객 쇼시마(小心和) 등과 함께 통신연락과 정찰 임무를 부여받았다. 김옥균은 고영석과 유혁로를 정보담당으로 명했다. 청나라군과 민씨 당의 동정 뿐 아니라, 일본 공사관과 일본 영사관군의 동정도 세밀히 살펴야 할 필요를 느낀 때문이었다. 12월 정변이 시작되자 군사들의 통신 연락을 맡아보았고, 쇼시마가 이끄는 무사들과 민영익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가 도야마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김옥균이 개화파의 영향 아래 있는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개화파 청년들의 한 부류를 일본 육군 도야마 학교에 입학시켜 군사지식과 기술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청년들은 전공 학교에서 정치, 경찰, 우편, 관세, 재정제도와 관련된 실무지식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하였다. 군 계통의 유학은 1883년 이들이 도야마 학교에 입학한 데서 시작되었지만, 이들 유학생들은 학자금이 점차 바닥이 나 1년 후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이미 정3품 당상관의 신분이었지만 서구의 문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여 유학에 참여하게 해줄 것을 김옥균에게 간청하였고 이를 수락하여 일본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갑신정변 갑신정변 전야 1884년(고종 20년)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을 방문하였다. 일행은 박영효의 집에 모여 갑신정변 직전 사전 준비를 하였다. 4일 거사할 각 부문의 담당자의 임무도 이때 최종 결정되었다. 이인종, 이희정은 거사 당일 현장에서 지휘, 호령의 책임을 지기로 하고 불이 붙어 사람들이 모여 오면 여러 장사들을 지휘하여 차질이 없도록 했다. 그리고 종래의 정찰이며 통신은 유혁로와 고영석 두 사람이 맡도록 했다. 12월 4일 오후 6시 우정국 낙성식 직후 갑신정변이 터지자 그는 대기하고 있다가 별궁 일대에 모인 장사들로 1개의 부대를 이끌고 궐내에 들어왔다. 유혁로의 부대는 수가 적었으므로 일본인 쇼시마가 이끄는 무사들과 합세하여 1개 부대를 이루었다. 궐내에서 서재필 부대, 서재창 부대, 이규완 부대와 각각 궐로 들어가 길을 나눠서 관군을 제거하였다. 우정국에 민영익이 등장하자 유혁로와 서재필, 서재창, 윤경순과 윤경완, 이규완은 각자 자신이 이끄는 부대에서 소규모 분견대를 따로 뽑아 우정국 입구 주변과 나무 위 등에 매복하였다. 별궁 방화 활동 오후 8시경 별궁 밖에서 방화하기로 한 이규완, 윤경순 등이 방화에 실패하였다. 방화대에서는 통신을 맡은 유혁로를 우정국 연회장으로 보내어 실패의 결과를 급보케 했다. 이 보고를 받은 김옥균은 초조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으나 기지와 응변에 능했던 김옥균은 다시 지시하기를 "별궁이 안되면 이웃집에 불을 지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김옥균은 임시로 화재, 혼란의 장면을 만들어 그 혼란한 때를 타서 사대당의 요인을 살해하도록 장사들에게 명령했다. 이때 유혁로는 "이웃집에 불을 지르는 것도 좋으나, 우리들이 연회석상에 들어가 간당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어떻습니까?"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김옥균은 "그것은 그렇지 않아. 이 연석에는 조선 사람만이 아니요, 외국 사람들이 섞여 있으므로 만약 혼잡한 가운데 잘못하여 외국사신을 다치게 한다면 우리 일은 그만 실패하고 말 것이다. 내 말대로 빨리 딴 곳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유혁로는 돌아가고 김옥균은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유혁로의 회보를 들은 장사의 일파는 곳 이웃집에 화재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일부는 우정국 앞 개천 가운데에 몸을 숨기고, 만일 어떤 요인이 나오기만 하면 한칼에 요절을 내기로 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규완, 윤경순 등은 윤치호의 집 이웃집과 별궁 건너편 서광범의 집 이웃집에 방화하였다. 윤치호의 집 근처에 아버지 민태호의 집이 있던 민영익은 바로 우정국을 나섰다가 서재창의 분견대와 이규완, 윤경순의 습격을 당한채로 우정국에 되돌아가 묄렌도르프 일행의 부축을 받고 우정국을 나섰다. 유혁로는 쇼시마가 이끄는 무사들과 민영익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이규완, 윤경수, 최은종, 고영석, 황용택, 이인종 등과 함께 박영효의 집에 모인 다음 지휘명령을 기다리기로 했다. 정변의 실패 국왕 내외가 파천한 이후 그는 고영석(高永錫)이 이끄는 부대와 일본인 자객 쇼시마 등과 함께 덕수궁, 창덕궁 등의 정찰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민씨 일족은 청나라 측과 교신하였고, 청나라 군을 끌어들여 정변군을 진압한다. 12월 7일 청나라군이 한성부에 당도하여 국왕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홍영식은 박영교와 함께 사태가 어지러움을 알고 자신들이 국왕 내외를 인솔할테니 다른 동지들에게 피신을 권고하였다. 국왕을 보낸 후 무라카미 중대장은 퇴거의 대형을 편성했다. 일개 소대를 전위로 하여 다케조에 신이치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이규완, 유혁로, 정란교, 신응희, 변수 등을 중앙에 세우고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유혁로는 일행과 함께 창덕궁 북관왕묘를 거쳐 북문에서 변장하고 빠져나와 일본 공사관으로 간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당 5주역 가운데 4명과 변수, 유혁로, 이규완, 신응희, 정란교 등 5명은 다케조에 공사를 따라 이날 오후 9시경 일본 공사관에 들어갔다. 피신해 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신응희,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변수 등과 몇몇 개화파는 몸에 맞지도 않는 양복을 걸쳤다. 1884년 12월 12일 일본공사 다케조에의 주선으로 유혁로는 일행과 함께 인천주재 주조선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12월 12일 인천으로 피신했다.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로, 변수 등 생존자는 천신만고 끝에 인천에서 일본 상선 치도세마루(千歲丸)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들의 망명 사건은 1942년 7월 조용만의 단편 소설 배 안에서의 소재가 되었다. 일본 망명 생활 피신과 일본 망명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도움을 받아 일본 공사관에 피신했다가 쓰기무라의 집에 은신해 있던 유혁로는 정란교, 이규완, 서재필, 신응희 등과 함께 인천에서 스치 가츠자부노우(十勝三郞)의 배 천세환(千歲丸) 호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12월 13일 일행은 묄렌도르프의 추격을 받던 중, 묄렌도르프는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와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을 대동, 국적(國敵, 갑신정변 주동자들을 가리킴)을 내놓으라 하였다.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승선한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이규완 외 일행에게 내리라고 하자 자결을 결심했지만, 천세환 선장 스치 가츠자부노우(十勝三郞)가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무책임함을 질타하고, 일행을 선박 지하 석탄실에 은신시킨 뒤,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함으로써 무사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 유혁로는 이규완, 서재필 등과 함께 자객들의 표적이 된 박영효와 김옥균을 경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일본으로 망명한 갑신정변 주도 세력은 그곳에서 모두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 김옥균은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 박영효는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岐永春), 이규완은 아사다(淺田良), 정난교는 나카하라 헤이키치(中原雄三),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이치(山田唯一) 등으로 개명한 것이다.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는 자서전에서 배의 선원 쓰지 후치주로(十藤十郞)가 나가사키에서 김옥균 일행과 헤어질 때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회상했다. 스치 후치주로는 이들이 조선 이름으로 생활하다가 자객에게 발각될 것이라 하여 이들에게 기념으로 일본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는 김옥균은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 박영효는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岐永春), 이규완은 아사다(淺田良), 유혁로는 야마다 유이이치(山田唯一), 정난교는 나카하라 헤이키치(中原雄三)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때의 사정이 이노우에 가오루의 자서전에 기록돼 있다. 일본 망명 생활 초기 일본 망명 생활 중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생이며 게이오 의숙 출신인 스나가(1868~1942)의 후원을 받았다. 게이오 의숙을 졸업한 스나가는 낭인 조직 현양사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김옥균, 박영효, 신응희, 정난교, 유혁로, 우범선, 이두황 등 조선인 망명객들과 두터운 교류를 가졌고,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사노에 있는 그의 대저택에는 조선에서 온 망명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정변 참여자의 가족과 측근들에게 연좌제가 적용돼 대대적인 체포와 고문, 처단이 자행되었다. 일본 체류 중 가족과 친구들이 연좌제로 단죄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유혁로는 조선 정부 타도를 다짐한다. 일본에 망명한 이들 중 김옥균의 시중은 유혁로가, 박영효는 이규완이, 서광범의 시중은 그의 13촌조카 서재필이 각각 들었다. 유혁로는 김옥균의 수발을 들었으나, 이규완의 심한 반발로 각자 자기 방에서 따로 생활하게 되었다. 그 뒤 조선 정부에서는 이들의 소환 문제를 일본측에 수차례 제기했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장갑복과 지운영 등 자객을 파견해 김옥균과 박영효를 살해하고자 했다. 1차 김옥균 암살 미수범 격퇴 1885년 6월 고종과 명성황후의 밀명을 받은 장은규(일명 장갑복)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장은규는 의친왕의 생모 귀인 장씨의 친정오빠였다. 장은규가 장귀인의 오라비라는 것을 안 유혁로는 그를 경계할 것을 김옥균에게 제안했고, 김옥균은 장은규를 피함으로써 1차 암살 기도는 미수로 돌아갔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는 역관 출신의 온건 개화인사인 지운영을 자객으로 파견하였다. 통리기무아문 주사로 근무 중 밀지를 받은 지운영은 1886년 2월 23일 인천을 출발하여 나가사키를 거쳐 고베에 도착한다. 그러나 김옥균은 지운영도 자객임을 간파하였다. 김옥균은 당시 고베를 떠나 도쿄에 은거 중이었다. 도쿄에 도착한 지운영은 이세강(伊勢勘) 여관에 투숙하며 인근에 살고 있는 김옥균에게 편지를 보내 면담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과거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기에 도쿄까지 찾아와 한번 만나자고 하는 지운영의 제의에 김옥균이 응할만도 했지만 김옥균은 서신을 보내 지운영의 면담 제의를 거절했다. 장은규 일파를 상대한 유혁로는 지운영도 자객으로 의심하고 이를 김옥균과 박영효에게 전했다. 지운영의 정체에 의혹을 느낀 김옥균은 거절하는 답신을 보낸다. 김옥균은 유혁로 등에게 지운영이 가져온 거사금 5만 엔을 갈취할 것을 제안한다. 김옥균은 함께 있는 동지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등에게 지운영에게 접근하여 그가 공작비로 가져온 5만 엔의 돈을 빼앗자고 제안한다. 세 사람은 지운영을 만나 불평을 늘어놓았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동지들로 일본에 같이 망명해 있던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등을 지운영에게 접근시켜 지운영이 자객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잡도록 했다. 유혁로 등은 지운영을 만나 이국에서 떠돌고 있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김옥균을 비난하는 등 김옥균에게 큰 불만이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지운영은 유혁로 일행과 2,3개월 이상 만나면서 신뢰하게 되었다. 2차 김옥균 암살 미수범 격퇴 그러던 어느날 지운영은 그들에게 김옥균을 처치하면 망명자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자신은 국왕의 밀지를 받들어 김옥균을 죽이기 위해 왔으므로 제군은 자신을 도우라고 본색을 드러냈다. 지운영은 그 증거로 고종의 칙서를 보여주었다. 발행 일자는 1885년 5월로 되어 있고 국왕의 옥쇄(대군주모)까지 찍힌 이 칙서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바다 건너의 역적을 체포하는 특명을 부여한다"고 되어 있다. 게다가 김옥균 살해에 성공한 자에게는 5천 엔을 지불한다는 지불보증서도 가지고 있었다. 지운영은 한성에서 품고 온 비수도 보여주었다. 유혁로 등 3인은 지운영을 포박한 뒤 구타, 위협해 가지고 있던 칙서와 비수 등을 빼앗았다. 그는 지운영의 단도와 소지한 신임장을 증거품으로 일본 경시청에 고발, 체포하게 했다. 망명 생활 일본 망명 중 그는 다시 거사를 일으킬 마음을 품었다. 그러나 김옥균의 만류로 중단되었다. 일본에 함께 망명한 박영효, 신응희, 유혁로 등에 의해 제기된 재(再)거사 계획, 실력 행사 등의 반문은 일본 망명 후 급속하게 "삼십 년이 걸리더라도 실력을 기르자"고 하는 실력 우선주의로 경도된 김옥균의 단호한 말로 차단되었다. 유혁로는 일본에 체류하면서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등의 권고와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조언으로 유학생 기숙사인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하며 박영효, 김옥균 및 일본내 조선인 유학생의 신변을 보호하였다. 그는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의 게이오 의숙에서 이름을 따 친린의숙이라 이름하고, 후쿠자와 유키치, 나카무라 마사나오 등의 조언을 구했다. 그러나 그가 유학생들과 공모하여 박영효, 김옥균을 집권시키려 한다는 소문과 이준용을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이 유포되면서 조선 정부에서는 자객을 보내 유학생들의 뒤를 밟게 된다. 그는 일본 망명생활 중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노동으로 마련한 생활비를 쪼개 자금을 모아 쿠데타를 계획한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밀정의 보고로 쿠데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1891년(고종 28년) 장위영 영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조선 정부 자객 격퇴 1892년 4월, 민씨 일파 민영소의 밀명을 받은 이일직은 무역상으로 가장해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는 김옥균, 박영효, 정난교, 이규완, 유혁로 등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인사들에게 접근했다. 이일직의 최종 목표는 개화 망명객의 우두머리인 김옥균과 박영효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이일직은 금전적으로 궁핍한 이들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하면서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들의 은신처가 발각되면서 자객이 침투했고 그는 이규완, 정란교 등과 함께 조선인 자객들을 상대하였다. 이일직은 김옥균과 그의 일행이 고베를 떠나는 것을 본 후, 오사카로 돌아가서 소네자키 무라에 있는 그의 애인의 집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외국인 옷을 입었다. 1894년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암살대원 중 한 사람인 홍종우가 김옥균의 암살에 성공한 뒤, 홍종우의 일행이었던 이일직은 무사 권동수, 권재수 형제와 일본인 가와쿠보 주네기치(川久保常吉)를 매수하여 박영효의 은신처를 알아낸 뒤 암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첩자의 파견을 예상한 이규완에 의해 적발되어, 권동수(權東壽)를 잡아 친린의숙에 감금하고 그를 감시하였다. 1894년 3월 25일 이일직은 다시 도쿄에 와서, 사쿠라다, 홍고 지역에 있는 호텔 무라이 칸에서 가와구보를 만났고, 이때 양인은 당분간 하숙하였다. 이일직과 가와쿠보는 이때 박영효, 정란교 그리고 이규완을 이 호텔로 유인해서 그들을 없애는 절차를 수행하자는 것은 이일직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그 곳으로 데려오기 위해 거듭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조선 정부에서 자객을 보낼지 모른다는 의심을 한 이규완은 박영효 등에게 신변에 각별히 신경쓸 것을 주문했다. 이일직 등은 박영효가 서예를 잘 하고, 서화와 서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점을 이용, 박영효의 별실에서 휘호를 쓴 뒤 박영효가 품평을 하게 하는 사이에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일직 등은 가와쿠보를 매수하여 박영효가 투숙하고 있는 친린의숙(親隣義塾)을 알아내고, 김태원(金泰元) 등을 보내어 박영효를 유인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일본인이 가와쿠보 주네키치가 이일직 등과 접촉하는 것을 알리면서 계획이 누설되었다. 권동수 형제는 권총과 일본도를 휴대하고 운래관(雲來館)에 대기하고 이일직이 직접 박영효를 방문, 암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을 경계하던 이규완과 정란교에 의해 적발됨으로써 암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규완과 정란교는 자객들을 붙잡아 친린의숙으로 보내 그에게 감시하게 했다. 자객들은 곧 도쿄지방법원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고 조선으로 추방되었다. 당시 유혁로 역시 제거 대상이었다. 지지신보 1894년 6월 20일자가 보도한 자객 이일직의 심문기에 의하면 "머리를 깎고 4월 24일 도쿄에 온 것은 박영효, 정란교, 유혁로, 이규완, 이선호 등 5인의 목과 손을 잘라 그것을 가방에 넣어 권동수, 권재수에게 들려서 귀국시키고, 나는 상하이 쪽으로 갈 목적으로 그랬다."는 것이다. 귀국과 재 망명 귀국과 2차 망명 그후 갑오경장으로 개화파가 복권되면서 1894년 8월 장위영 영관(壯衛營 領官)으로 임명되었다. 1894년(고종 31년) 말 그는 조선에 비밀리에 잠입하였다. 1894년 12월 20일 군무아문참의(軍務衙門參議)에 임명되고, 1895년 4월 1일 탁지부 부령(副令)이 되었다. 제1차 갑오 개혁 당시 그는 박영효, 서광범 계열의 개혁 관료로서 활약하였다. 1895년 4월 육군 부령이 되고, 육군 포공국장에 임명되었다. 1895년 5월 박영효 등과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해 10월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했을 때 조선인 안내자들과 일본인 낭인들을 이끌고 경복궁을 침범하는 등 앞장서서 활약했다. 그는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척살하기 위해 행동한 조선인 행동대의 한 사람이었다. 권동진에 의하면 자신과 자신의 형 권형진 외에도 정난교, 조희문, 이주회, 유혁로 등도 왕비 암살에 가담한 직접 행동파라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이끌던 다른 일본 낭인들이 먼저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사살한다. 을미사변 후에 친일 내각이 무너지면서 또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이후 비용을 마련하고 유학생을 포섭, 박영효, 유길준 등과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1895년 5월의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과 8월의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로 그는 규탄의 대상이 되었고, 탄핵 상소가 빗발쳤다. 그는 본래 박영효의 명성황후 암살 계획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자 을미사변에 가담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박영효의 암살 미수 계획과 대원군, 유길준 등의 을미사변이 같은 세력이 일으킨 것으로 해석하였다. 1895년 11월 휴직을 청원하여 포공국장직에서 휴직,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그는 박영효 등과 일본 외무성에 망명 신청과 신변보호를 요청, 받아들여졌다. 이후 군사, 산업 등을 시찰했다. 1896년 6월 17일 4품 이승구(李承九)가 상소를 올려 유길준(兪吉濬), 조희연(趙羲淵), 박영효, 정란교 등을 죄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대한제국기 활동 1898년에는 한때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1899년 만민공동회 등이 강제 해산되면서 일본으로 출국했다. 후일 권동진은 삼천리 誌자에 당시 망명중이던 자신의 옛 동지를 소개할 때 한 사람으로 그를 소개하였다. 고종은 일본 조정에 계속 사람을 보내 유혁로와 이준용, 이규완, 정난교, 유길준의 국내 송환을 요구했으나 일본 조정은 송환 요구를 거절했다. 1905년 4월 1일 일본 체류 중 특별히 육군부령(副令)에 임명되고 군무부 포공국장(軍務部砲工局長)에 재보직되었다. 1907년 3월 대동학회에 가입, 평의원에 임명되었다. 1907년(광무 10년) 5월 11일 서북영림창 사무관(西北營林廠事務官)에 임명되었다. 1907년(융희 1년) 7월 대한제국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당한 뒤 순종이 즉위하자, 바로 사면되었다. 이준용, 박영효, 정란교, 이규완 등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이 내리면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옛 개화파 인물들이 대거 관료로 기용되었다. 이때 유혁로도 복권되었다. 9월 19일 육군부령에서 면직되고 12월 20일 서북영림창 사무관을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11월 7일 대한제국 중추원 부찬의를 거쳐 12월 21일 가선대부로 승진, 평안북도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와 칙임관3등(勅任官三等)에 임명되었다. 곧 평안북도재판소 판사를 겸임했다. 순종 연간에는 이전에 독립협회 간부를 지낸 후 일진회를 이끌었던 윤갑병(전 만민공동회장), 최정덕 등과 함께 일진회를 지도하였다. 생애 후반 한일 합방 전후 1910년 10월 1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고등관에 임용되고, 경기도청 참여관에 임명되었다. 10월 2일 한일합방 은사금 5000원을 받았으나, 수령해가지 않았다. 충청북도 장관(1916년) 등 고위직을 역임했고, 중추원 칙임참의로도 23년간 7회에 걸쳐 중임·재직했다. 한일 병합 조약 당시 남작 작위를 거절했고 합병식에도 불참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측의 지시로 경기도참여관으로 임명되자 부임하였다. 1912년 8월 15일 장헌식, 정란교 등과 함께 임시문관보통시험 출제위원의 한 사람에 임명되었다. 1912년 각 도의 농산물품평회에 심사관으로 참여하였다. 1914년 경기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에 위촉되어 1916녀ㄴ 3월까지 재직했다. 1916년 3월 9일 전라북도 장관, 3월 28일 충청북도 장관이 되었으며, 충청북도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토지 조사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해 4월부터는 충청북도 소작인 품평회를 개최하였다. 1916년 4월 일본적십자사 청주지부장이 되고, 일본적십자사 충주지부 고문도 겸하였으며, 애국부인회 조선본부 청주지부 고문에도 선임되었다. 1917년 6월 13일 도장관을 사퇴하고, 바로 중추원 참의로 전임되었다. 1919년 전라북도지사로 부임하였으나 곧 사퇴했다. 일제강점기 내내 그는 대 지주로도 풍족한 만년을 보냈다. 1925년 9월에는 전국적으로 수해가 나자 동아일보에 수해 기탁금 20원을 기부하였다. 그러나 공무상 출장으로 각 도장관, 도지사에게 숙소가 배정되었을 때는 숙소의 물품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수건과 치약, 칫솔, 비누를 따로 준비, 지참하여 세면, 세족하였다. 1920년 비누생산 공장인 조일석감주식회사(후에 조일비누주식회사로 명칭 변경)의 설립에 참여, 주주의 한 사람이 되고 곧 조일석감 이사가 되었다가 같은해 조일비누주식회사의 감사가 되어 사망시까지 재직하였다. 일제강점기 활동 1920년 6월 중추원 참의로 전직되어 1940년까지 중임되었다. 1920년 11월 13일 중추원 시찰단의 한 사람이 되어 일본을 방문, 이듬해 1월에 귀국하였다. 1921년 4월 중추원 칙임대우 참의로 위촉되었다. 1922년 4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 창립 발기식에 참여하고, 동 8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 주주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이사로 선임되어 사망시까지 재직했다. 또 1922년부터 1927년까지 한성투자신탁주식회사 감사를 역임했다. 1926년에는 동민회 평의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1927년 3월 10일부터는 해동은행의 주주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30년 6월 5일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인 칙임참의에 임명되었다. 1932년 7월 중추원 시정조사연구회를 조직하자 시정조사연구회 위원이 되고, 곧 시정조사연구위 사회부 위원을 겸임하였다. 1933년 중추원 참의에 재임명되고, 1936년 6월 3일 다시 중추원 참의에 선임되었다. 1936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 총독이 조선 내에 거주중인 일본인 고령자 24명과 고령자 200여명 등 80세 이상 고령자들을 초청, 특별 양로연을 베풀 때 유혁로도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초대되었다. 1939년 6월 4일 다시 중추원 참의에 재선임되었다. 그는 불필요한 만남을 줄이고 독서와 바둑, 작문, 시 짓기, 서예 등을 즐겼으며 홀로 술을 마셨다. 매일신보의 보도에 의하면 1940년 5월 15일 오전 9시경 종로 가회정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생존했다는 설도 있다. 사망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며,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할 때에는 이미 사망 하였다. 1945년 사망설 외에도 1940년 5월에 종 4위 훈 3등으로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경성부 종로방 가회정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사망 원인은 노환에 뇌일혈이었다. 사후 충청남도 아산군 형산(瑩山)에 안장되었다. 사망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던 그는 1949년 1월의 반민특위에 제소되었으나 호적 조사 결과 이미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어, 기소처분이 취소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가족 관계 고조할아버지 : 유흡(柳潝) 증조할아버지 : 유태화(柳台華) 할아버지 : 유덕원(柳德源) 아버지 : 유 상오(柳相五, ? - 1884년(?)) 어머니 : 목천상씨(木川尙氏), 상안곡(尙安谷)의 딸 형 : 유태로(柳泰魯) 부인 : 밀양박씨(密陽朴氏), 박수일(朴修一)의 딸 아들 : 유기영(柳冀暎), 형 유태로의 양자로 출계 아들 : 유기성(柳冀星) 아들 : 유기진(柳冀辰) 외할아버지 : 상안곡(尙安谷) 화랑 평가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인물평론에 나온 그의 인물평에 의하면 그는 가식적이지 않으면서도 겸손했다 한다. 인물평론에 나온 그의 인물평은 "한국의 국운이 다난(多難)한 때부터 몇 번인가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면서 온갖 풍상을 고루 겪어 몸과 마음이 자연히 갈고 닦인 인물", "인품이 온후하고 순박하며 조선인 중에서 보기 드문 인격자", "일을 행함에 있어서 지성(至誠)으로 관철하는 신조(信條)를 가지고 있으므로 완수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 "공무(公務)를 행할 때 자신의 이해득실을 전혀 따지지 않았고, 오로지 근무에 열중"한다고 되어 있다. 같이 보기 갑신정변 을미사변 조선총독부 중추원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 서재창 서광범 박규수 박영교 박원양 박정양 박중양 윤치호 이규완 유길준 윤경순 윤경완 정란교 하응선 참고 자료 박은숙,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 (너머북스, 2011) 김옥균이 '희대의 사기꾼'? 아니 '애국적 혁명가'! 프레시안 2011.07.01 각주 1851년 출생 1945년 사망 과거 급제자 육군 군인 급진개화파 혁명가 저격수 한국의 혁명가 한국의 장군 조선의 무신 조선의 군인 조선의 시인 갑신정변 을미사변 관련자 대한제국의 관료 대한제국의 활동가 일제강점기의 관료 일제강점기의 정치인 일제강점기의 시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 서재필 윤치호 박중양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아산시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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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A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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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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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離陸, ) 또는 영어로 테이크오프()는 항공기가 양력을 얻어 공중으로 떠오르는 현상을 말한다. 대부분의 항공기는 이륙하기 위해 활주로가 필요하지만 VTOL, Vertical Take-Off and Landing 항공기, 즉 열기구, 헬리콥터와 특수한 전투기(예: AV-8B Harrier, F-35B, YAK-141, V-22)는 활주로가 없어도 이륙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활주로 등의 표면에서 동력을 사용하여 필요한 양력을 얻을 수 있는 속도에 이를 때까지 활주하면서 떠올라 이륙한다. 기체가 무겁거나 날개가 작다면 그만큼 이륙에 필요한 활주 거리가 길어진다. 같이 보기 착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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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C%EB%B3%B8%20%ED%94%84%EB%A1%9C%20%EC%95%BC%EA%B5%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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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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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 야구(, ; NPB)는 일본 야구 기구(NPB) 산하의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의 양대 리그 12개 구단, 독립 리그로 이뤄지는 일본 내의 프로 야구 리그를 가리킨다. 프로 야구단 2010년 현재 구단이다. 과거에 존재한 구단에 대해서는 센트럴 리그, 퍼시픽 리그 참조. 일본 프로 야구 (NPB) 「수용 인원수」:일본의 소방법 상의 정원, 또는 프로 야구 개최시의 정원. 「평균 관객수」:본거지 홈 경기의 1경기 평균 관객수(2010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일본 시리즈의 관객 수는 포함하지 않고 집계 방법은 구단마다 다르다. 「평균 점유율」:본거지 홈 경기의 1경기 평균 수용 관객수 대비 수용 인원수의 비율. 보호 지역은 원칙 1구단에 1도도부현()에 한정하고 있다. 다만 오릭스와 긴테쓰와의 합병 때문에 잠정 조치로 2005년부터 2007년도까지의 3년간에 한해서는 한신과 오릭스에게 각 2부현(오사카부·효고현)의 보호 지역이 인정되고 있었다. 센트럴 리그 퍼시픽 리그 홈 게임 개최지 2010년도 홈 게임 수는 72경기. 구단과 본거지 구장의 생략 명칭은 NPB공식·통칭 및 약칭. 구단명의 1문자 / 2문자 생략 표기는 NHK 및 스포츠 신문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기. 「■」 : 준본거지(비공식), 야구 협약상 전용 구장과 같은 도도부현내를 제외한 지방은 권리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지방명」: 본거지가 있는 도시의 지역 밀착 외에 주변 지방에도 밀착(지방 밀착)의 경향이 있는 경우에 기재(비공식) 주니치는 주니치 신문의 주요 판매지(도쿄 신문의 판매 지역은 제외)에서 개최. 히로시마의 호쿠리쿠 지방 개최는 격년에 실시. 요코하마는 1군 본거지 구장이 있는 요코하마시와 2군 본거지 구장이 있는 요코스카시·히라쓰카시를 중심으로, 가나가와현 전역에 지역 밀착을 진행하고 있다. 또, 요코하마 구단의 최초 본거지인 시모노세키에서 1경기 개최하는 것을 관례로 하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의 1년 자율 훈련(1월) 춘계 캠프(2월) 오픈전(시범 경기, 2월 하순 ~ 3월) 춘계 교육 리그(2군, 3월) 개막전(퍼시픽 리그 : 3월 하순, 센트럴 리그 : 3월 하순 ~ 4월 초순) ※센트럴・퍼시픽리그 동시 개막하는 해도 있다. 일본 생명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약칭 인터리그전, 5월 하순 ~ 6월 하순) 후레시 올스타 게임(2군, 舊 주니어 올스타, 7월 하순) 올스타 게임(7월 하순, 2008년부터 주관 스폰서는 마쓰다, 1988년 ~ 2006년에는 SANYO, 2007년은 걸리버) 매직 넘버 점등(6월 하순 ~ 9월) 행가레(정규리그 우승 결정, 9월 중순 ~ 10월 초순) 소화 경기(정규리그 우승 결정 ~ 클라이맥스 시리즈 개막) 전력외 통고(10월 1일 ~ 리그 종료 다음날과 클라이맥스 시리즈 종료 ~ 일본 시리즈 종료 직후 2번) 피닉스 리그(2군, 10월) 클라이맥스 시리즈(플레이오프 제도, 센트럴·퍼시픽 양대 리그의 플레이오프, 10월 초순 ~ 중순) 드래프트 회의(10월 하순) 일본 시리즈(아시아 시리즈 일본대표 선발전, 10월 하순 ~ 11월 초순) 추계 캠프(10월 하순) 아시아 시리즈(11월 초순 ~ 중순) 스토브 리그(일본 시리즈 종료 ~ 내년 1월) 자유계약선수(FA)(일본 시리즈 종료 후) 계약 개정(일본 시리즈 종료 ~ 내년 2월) 트레이드(일본 시리즈 종료 ~ 내년 6월 30일) 다음 시즌 일정 발표(11월 중순 ~ 12월 초순) ※어디까지나 대체적으로 이렇게 되고 있으며, 반드시 이렇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경기 개시 시각 경기 개시 시각은 평일은 18:00(일부 구장은 18:15). 토·일요일, 공휴일은 주최 구장에 따라 다르지만 13:00 또는 14:00(여름철에는 햇빛으로 인해 야간경기는 같지만 주간경기는 14시나 15시 이후 시간대의 개시가 많다)에 개시한다. 2009년에는 18:30에 6경기가 개시, 17:00에 4경기가 개시했다. 2010년에는 35년 만에 오키나와현 나하시의 오키나와 셀룰러 스타디움 나하에서 요코하마 대 야쿠르트의 2연전이 19:00에 개시했다. 그리고 “황혼의 주간경기” 또는 “준 야간경기”로 17:00에 개시하는 6경기가 추가되었다. 가을의 포스트시즌의 경기 개시시각은 센트럴 리그의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평일과 토·일요일 모두 18:00, 퍼시픽 리그의 클라이맥스 시리즈는 평일에 18:00, 토·일요일에 13:00에 개시한다. 일본 시리즈는 센트럴 리그 주최 경기는 18:00, 퍼시픽 리그 주최 경기는 18:15 또는 18:30에 개시한다. 개인 타이틀 야수 6개 타이틀 수위 타자(타율 1위) 최다 홈런(홈런왕) 최다 타점(타점왕) 최다 도루(도루왕) 최다 안타 최고 출루율(출루왕) 투수 6개 타이틀 최우수 평균 자책점 최다 승리(다승왕) 최다 탈삼진(탈삼진왕) 최우수 투수 최다 세이브 투수(세이브왕) 최우수 중간 계투(중간 계투왕) 그 외의 타이틀 사와무라상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최우수 선수(MVP) 최우수 신인(신인왕) 컴백상 최우수 배터리상 IBM 플레이어 오브 더 이어 상 JA전농(전국 농업협동조합 연합회) GO·GO상 스피드업상(센트럴 리그만 해당됨) 스카이 퍼펙트 커뮤니케이션! 드라마틱·사요나라상 "조지아 혼"상 폐지된 타이틀 최다 출루 수 최다 승리 타점 최고 승률 구원투수상 슈터 슬러거상(최고 장타율) 주간 베스트 플레이어상(주간 BIS 포인트 1위 선수에게 수여, 1989년~2000년) JCB·MEP상(센트럴 리그만 해당됨) 2군 리그 이스턴 리그 (홋카이도 닛폰햄, 도호쿠 라쿠텐, 사이타마 세이부, 지바 롯데, 요미우리, 도쿄 야쿠르트, 요코하마) 웨스턴 리그 (주니치, 한신, 오릭스, 히로시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프레시 올스타게임 팜 일본 선수권 신 일본 리그 교육 리그 NPB 파트너(후원 업체) ENEOS(일본 국가 대표팀 공식 후원) 일본 생명 보험(인터 리그, 월간 MVP 후원) 마쓰다(2008년부터 올스타전 후원) 일본 코카콜라(2010부터 캔커피 "조지아"브랜드로 후원) 이전 코나미(2007년까지 아시아 시리즈 후원) 산요 전기(1988~2006년 올스타전 후원) 걸리버 인터내셔널 (2007년 올스타전 후원) 독립 리그 2004년에 발생한 "프로 야구 재편 문제"와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현재의 시코쿠 규슈 아일랜드 리그)의 탄생 영향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독립 리그 구상' 열풍이 불어왔다. 그 후에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처럼 실현된 리그가 있는 반면에 자금문제 같은 문제들로 실현되지 못한 리그 들도 있다. 리그 소속 선수는 지금까지 사회인, 아마추어 등의 대우를 받아 왔었다. 그러나, 2009년에 일본 야구 연맹의 선수 등록 규약 개정으로 NPB와 같이 프로선수로서 대우받게되었지만. NPB의 드래프트 지명대상 대우는 이전과 같다. 독립리그 선수들도 NPB와 같이 프로계약으로 구단으로부터 연봉을 받고있지만, 액수는 NPB와 비교시 적다. 그래서 오프 시즌에 부업을 인정하는 리그도 있다.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는 5개 구단에 의해 구성된다. 2004년의 창설 최초의 명칭은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였다. 시코쿠 지방 4개 현에서 각 1개 구단이 가입해 2005년 시즌을 개최했다. 2007년 12월 후쿠오카 나가사키의 규슈지방의 2개 구단이 신규가입 함에 따라 "시코쿠 규슈 아일랜드 리그"라는 명칭으로 개칭했다.따라서 2008년부터 2009년까지 6개 구단으로 공식경기를 치렀다. 후쿠오카 레드 워블러스는 경영난으로 2009년부터 리그 참가를 중지해서 2010년에 5개 구단으로 개최했고 후쿠오카의 사무소는 남아있어서 "준가입 구단"으로 2011년 시즌의 복귀를 목표한다고 했으나 2010년 10월 익년 시즌 복귀를 보류한다고 발표한 바있다. 그리고 나가사키 세인트는 2010년 시즌으로 해산이 정해졌다. 2011년 시즌부터 중지된 재팬 퓨처 베이스볼 리그에서 혼슈의 미에 스리 애로스가 가입했다. 이에 따라 리그 명칭 변경이 다시 협의되어,2011년 1월 27일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로 이름을 변경했다. 에히메 만다린 파이렛츠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스 고치 파이팅 독스 도쿠시마 인디고 삭스 미에 스리 에로우스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약칭 BC 리그)는 이하 6개 구단에 의해 구성된다. 2006년 창설 당시 명칭은 "호쿠신에쓰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에서 니가타・시나노・토야마・이시카와의 4개 구단이 가입해서 2007년부터 시즌을 개최했다. 2007년 11월 군마・후쿠이의 2개 구단이 가입함에 따라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했다. 2008년 시즌부터 6개 구단(2지구제)로 공식경기를 치르고 있다. 니가타 알비렉스 베이스볼 클럽() 시나노 그랜드세로우스()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 도야마 선더버즈() 이시카와 밀리온 스타스() 후쿠이 미라클 엘리펀츠() 간사이 독립 리그 간사이 독립 리그()는 이하 4개 구단으로 구성된다. 2009년 시즌부터 개최했다. 오사카 엑스포 세븐티스()와 미에 스리 에로우스가 가입할 예정이었지만, 모두 독자 리그를 결성할 방침으로 변경했다. 원년에 참가한 오사카 골드 빌리케인즈()는 2009년 시즌 종료 후 탈퇴해서 2010년 시즌부터 한국 선수들이 만든 간코쿠 해치(, 구 코리아 해치)가 가입했다. 2011년부터는 오사카 호크스 드림()이 가입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고베 나인 크루즈() 아카시 레드 솔저스() 기슈 레인저스() 간코쿠 해치() 재팬 퓨처 베이스볼 리그 재팬 퓨처 베이스볼 리그는 이하 2개 구단으로 구성된다. 2010년 시즌부터 개최했다. "미에 스리 에로우스"는 당초에 간사이 독립 리그에 가입할 예정이었지만, 간사이 독립 리그의 기존구단과의 선수급여 수준이나 리그운영 방침과 관련해서 의견과 이념이 다르다고 여겨서 2009년 10월 간사이 독립 리그에서 탈퇴하고 독자 리그를 결성하게 되었다. 10월 13일에 새 리그의 명칭을 "재팬 퓨처 리그"로 발표했고 동년 12월 1일에 "재팬 퓨처 베이스볼 리그"로 개칭했다. 그리고 "오사카 골든 빌리케인즈"도 2009년 10월에 간사이 독립 리그에서 탈퇴해서 재팬 퓨처 베이스볼 리그에 참가하겠다고 발표했다. 2010년 시코쿠 규슈 아일랜드 리그와 교류전을 추가해서 리그를 펼쳤다. 하지만 오사카 골든 빌리케인즈 선수의 불상사로 인해 스폰서가 철회하는 등 경영문제가 생겨서 2010년 9월에 2011년 리그를 쉬기로 결정했다. 미에 스리 에로우스() 오사카 골든 빌리케인즈() NPB 은퇴 선수들의 프로 야구 리그 NPB에서 현역을 은퇴한 선수들로 구성된 리그로,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는 이하 5개 구단으로 구성된다. 2001년(2001-2002년 시즌)부터 NPB에서 은퇴한 선수들로 개최되었다. 주로 프로 야구 정규 시즌이 열리지 않는 동절기에 리그 전을 개최하고 있었지만, 2008-2009년 시즌의 리그전은 열리지 않았고(이후 올스타전만 개최). 2010-2011년 시즌부터의 리그전 재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삿포로 앰비셔스() 도쿄 드림스() 나고야 80D'sers() 오사카 로만스() 후쿠오카 돈타크스() 역사 1871년 9월 30일 - 요코하마의 거주 중인 외국인과 미군함 “콜로라도 호”의 승무원 간 야구 경기를 개최, 이 경기가 일본 최초의 야구 경기임. 1872년 무렵 - 제1번 중학(, 현재의 도쿄 대학)의 외국인 교사인 호레이스 윌슨에 의해 학생들 사이에 야구가 퍼진다. 1907년 - 첫 유료 경기. 1908년 - 미국의 프로 야구 팀(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의 일본 방문. 1909년 - 하네다 구장()을 건설, ‘일본 운동 클럽’()을 설립. 1920년 - ‘합자회사 일본 운동 협회’()를 설립, 프로 야구의 시작. 1920년 - 일본에서 2번째 프로 야구 팀인 ‘덴슈 야구단’()을 설립. 1920년 - 일본 운동 협회가 (일제 강점기 시대의)조선의 만주로 원정을 떠나서 인기를 받음. 1923년 - 간토 대지진의 지진 피해에 의해 ‘일본 운동 협회’, ‘덴슈 야구단’등 두 팀이 해체됨, 일본 운동 협회는 한큐 전철에 의해 ‘다카라즈카 운동 협회’()로 재결성. 1929년 - ‘다카라즈카 운동 협회’ 해체. 1934년 - ‘대일본도쿄야구클럽’(, 도쿄 교진군(), 현재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설립. 1935년 - ‘오사카 야구 클럽’(, 오사카 타이거스(), 현재의 한신 타이거스)의 설립. 1936년 - ‘일본 직업 야구 연맹’ 설립, ‘대일본야구연맹 나고야협회’(, 나고야군(), 현재의 주니치 드래건스), ‘도쿄 야구 협회’(, 도쿄 세네터스()), ‘나고야 야구 클럽’(, 나고야 긴코군()), ‘오사카 한큐 야구 협회’(, 한큐군(), 현재의 오릭스 버펄로스), ‘대일본야구연맹 도쿄 협회’(, 다이도쿄군())가 발족, 현재와 같은 페넌트 레이스가 시작됨. ※일본 최초의 전국 규모 사회인 스포츠 리그임. 1937년 - ‘고라쿠엔 야구 클럽’(, 고라쿠엔 이글스()) 발족. 1938년 - ‘난카이군’() 발족. 1939년 - 일본 직업 야구 연맹이 ‘일본 야구 연맹’()으로 개칭. 1944년 - 일본 야구 연맹이 ‘일본 야구 보국회’()로 개칭함, 11월 13일부로 활동 중지. 사와무라 에이지 등 많은 야구 선수들이 제2차 세계 대전에 동원됐고 전사자도 나왔음. 1945년 1월 1일 - 정월 대회가 간사이 지방에서 개최(1월 5일까지). 1945년 11월 6일 - 일본 야구 연맹의 부활을 선언. 1945년 11월 23일 - ‘동서대항전’이 개최됨. 1946년 3월 27일 - 페넌트 레이스를 재개. 1950년 - 일본 야구 연맹이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로 분열됨. 1951년 - 제1회 올스타전을 개최. 1952년 - 1948년부터 1949년까지 프랜차이즈 제도를 시범 도입한 뒤 이 해부터 프랜차이즈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됨. 1955년 - 이스턴 리그와 웨스턴 리그가 결성. 1961년 - 야나가와 사건()이 발생, 사회인 야구 협회에서 프로 야구 은퇴 선수의 사회인 야구팀 입단을 거부. 1965년 - 제1회 드래프트 회의 개최. 1969년 - 검은 안개 사건()이 발생, 가짜 승부(미리 짜놓은대로 승부를 하는 것, 담합이 아님)에 관여했던 선수들이 ‘영구 출장 정지 처분’, ‘장기간 출장 금지’ 나 연봉 감액을 받거나 사실상의 은퇴에 내몰린 사건. 1973년 - 닛타쿠홈 플라이어스와 롯데 오리온스의 합병 계획이 일어남(이후에 파담). 1974년 - 세이브 기록 항목을 채용. 1975년 - 퍼시픽 리그가 지명 타자 제도를 도입. 1978년 - 에가와 사건() 발생(이른바 "공백의 1일"()), 1978년 드래프트 회의 전날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입단 계약을 맺은 투수 에가와 스구루의 거취를 둘러싼 사건. 1980년 -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가 노동 조합으로 인정됨. 1993년 - 역지명제도()와 프리에이전트 제도(자유계약선수 제도)를 도입. 1997년 - 프로 야구 탈세 사건이 발생, 선수 10명이 탈세 혐의로 기소됨. 2004년 - 프로 야구 재편 문제가 일어남(이 사건에 의해 9월 18일·19일에 선수회에 의해서 사상 최초로 파업을 하였음). 2004년 - 퍼시픽 리그에서 플레이오프 제도를 도입. 2005년 -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이 실시됨. 2005년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창단. 2006년 -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프로 야구 선수(일본인 메이저 리거 2명을 제외하고 전원 NPB소속 선수)들로 구성된 일본 대표 팀이 우승을 제패함. 2007년 - 뇌물 사건이 발생, 세이부 라이온스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가 규칙으로 정해진 금액보다 상당히 큰 금액을 뇌물로 아마추어 선수나 지도자에게 건네주고 있었던 것이 발각된 사건. 센트럴 리그에서도 플레이오프 제도를 도입하여 제1회 클라이맥스 시리즈라는 명칭으로 실시됨. 2009년 - 독립 리그인 간사이 독립 리그 발족. 일본 최초로 프로와 대학 선발팀 간의 교류전이 도쿄 돔에서 개최되었다. 2010년 - 프로 야구 공식 경기에서 홈런에 대해 비디오 판독이 도입되었다. 2011년 - 프로 야구 구단과 대학 야구팀의 연습 경기가 3월과 8월에만 허용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프로 야구 12개 구단의 공식 시합구가 통일되었다. 프로 야구 심판원이 통일되었다. 일본 야구 대표팀의 상설화가 결정되었다.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을 받아 당초 3월 25일로 예정되었던 개막일을 양 리그 모두 4월 12일로 연기했다. 또한 4월 2일과 3일의 시범 경기에서 자선 관을 붙여 이틀 간의 여섯 시합에서 합계 6만 명의 관중을 모았다. 2012년 - 센트럴 리그도 예고 선발을 도입. 2013년 - 2011년부터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전력 부족 대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던 3시간 30분 경기 종료 규칙을 폐지하고 시간 제한을 연장 12회로 규정했다. 現 시대 프로 야구와 관련된 사건들 프로 야구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긴 시간 동안 나가시마 시게오와 오 사다하루 등 국민적 인기를 얻은 선수들의 등장도 있었으며, 일본의 스포츠 중에서도 가장 큰 인기를 받으면서 경기당 관객 동원수를 늘려 왔다. 1990년대에 들어와 자유 계약 선수제도의 도입이나 드래프트 제도의 변경으로 인해 기존 선수들의 연봉과 신인 선수들의 연봉이 해마다 증가하며 억 단위까지 상승해서 연봉 지급금이 구단 경영을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연봉의 증가에 관해서는 예전에 일본 프로 야구에 치명타를 준 검은 안개 사건과 같은 가짜 승부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들을 굳이 문제화 할 수는 없다. 메이저 리그로 선수 이적이 자유롭게 되면서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인기와 관심을 많이 받게 되었다. 반면에 메이저 리그로 선수 유출이 잇따르고 있는 것에 대해 ‘프로 야구계의 공동화(空洞化 : 속이 텅 비게 되는 현상)’, ‘일본 프로 야구의 메이저 리그 2군화’를 걱정하는 소리도 많다. 퍼시픽 리그 구단은 전국 TV 중계 방송 수가 센트럴 리그 구단의 중계방송 수에 비해 크게 적기 때문에 사업상 많이 어렵다. 그래서 센트럴 리그 구단에게 현행 양대 리그제에서 단일 리그제로 바꾸는 것과 교류전 개최를 주장해 왔었지만 지금까지 센트럴 리그의 협력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2004년에 퍼시픽 리그의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는 팀 명명권의 매각을 원했지만 타 구단의 반대로 좌절해서 마침내 같은 퍼시픽 리그의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합병을 교섭하기까지 도달했었다. 이 사건은 일찍이 긴테쓰가 소비자 금융대기업인 "아콤(ACOM)"의 회사 로고를 유니폼에 넣었을 때와, 국제 미디어 기업에서 미국 메이저 리그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매수 할 만큼의 능력이 있는 호주의 뉴스 코퍼레이션이 긴테쓰를 매수한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외국 자본 기업이나 소비자 금융업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던 요미우리신문 그룹 본사의 와타나베 쓰네오 회장이 강경하게 반대한 것도 있었으며 긴키 닛폰 철도의 경영난도 일어나는 등 자력 재건을 단념했기 때문에 라고 말해진다. 또, 팬의 지리적 범위가 겹쳐지는 센트럴 리그의 한신 타이거스에게 편향 하는 오사카의 대중 매체의 보도도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합병 교섭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의 프로 야구 재편 문제를 참조). 2004년에 이시게 히로미치가 입안해서 2005년에 발족한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현·시코쿠 규슈 아일랜드 리그)는 기존의 일본의 프로 야구 리그와는 달리 지역 밀착해서 야구의 보급·활성화를 목적으로 조직 되었다. 시코쿠는 일본에서도 뛰어날 만큼 야구 경기가 번성한 지역이며, 또 일본의 유명한 '하이쿠 짓는 사람'으로서 야구 경기의 소개·보급에 노력한 마사오카 시키()는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출신이다(덧붙여 말하면 마사오카 시키가 "Baseball"을 야구라고 번역했다는 설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말은 잘못된 것으로서, 본명인 「升(노보루)」에 야구라고 하는 문자를 「노 보루()」라고 멋부려 부른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야구’라고 번역한 것은 주만 가나에이다. 이전부터 각 구단과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등이 해왔던 소년 야구 교실에 참여해서 고교 야구선수에게 프로 야구 선수가 심포지엄 형식으로 기술 지도를 하는 기획이 시작됐다. 해외 원정 공식경기 옛날에는 일본 운동 협회와 덴슈 야구단이 1923년에 경성 (현 서울)에서 프로 구단끼리의 해외 경기를 벌이고 있었다. 프로 야구 리그 개시 후, 첫 공식경기로서 해외 원정 개최는 1940년에 벌인 만주 리그전이다. 만주(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부지방)에서 9팀이 참여해서 원정길을 떠났다, 7~8월에 걸친 하계 리그 경기(사전의 연습 경기와 오픈전을 포함해서)를 개최했다. 다음 1941년도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중일 전쟁의 판국이 악화되어서 취소됐다. (태평양)전쟁 후로는 1961년 5월 20일에 당시 미국 점령하의 오키나와현의 오노야마 야구장에서 니시테쓰 라이온스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와의 경기로서 전쟁 후 첫 해외 원정이 개최되었다(1962년 6월 13일과 6월 14일에 한큐 브레이브스 대 다이마이 오리온스와의 경기도 함께 오키나와 원정에 나섰다). 2002년 5월 14일과 5월 15일에는 대만(중화민국)의 타이베이시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경기가 개최되었다. 2005년에도 대한민국 서울의 잠실 구장과 부산의 사직 구장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가 6월 28일과 6월 29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서울의 잠실 구장이 한국 프로 야구 소속의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의 2개 구단이 본거지로서 사용하고 있어서 비어있는 날짜가 없기 때문에 경기를 열 수 없게 되었다. 대신에 인천의 문학 구장에서 경기하기로 결정했지만 이것도 한국 프로 야구의 인기 침체에 수반되어서 채산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었다. 동년 3월 9일에 개최 취소를 발표했다(그래서 롯데의 본거지 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개최). 같이 보기 일본 시리즈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명예의 전당 쇼리키 마쓰타로상 사와무라 에이지상 일본여자야구협회 각주 외부 링크 일본 야구 기구 공식 홈페이지 재단법인 야구체육박물관 일본 프로 야구 선수회 공식 홈페이지 1950년 설립된 스포츠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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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A0%95%EC%97%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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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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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연(吳靜姸, 1983년 1월 18일 ~ )은 방송인, 배우이다. 신장은 168cm이고 2003년 광고 모델 첫 데뷔하였다. 2006년 KBS 32기 아나운서로 입사, 2015년에 프리랜서 선언하였다. 이후 방송인이자 배우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학력 관문초등학교 (졸업) 과천중학교 (졸업) 과천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 발레교육 전공 (2001학번) (졸업)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연극영화학과 (졸업) 경력 드라마, 연극 2016년 MBC 일일드라마 《워킹 맘 육아 대디》 ... 주예은 역 2016년 SBS 수목드라마 《질투의 화신》 ... 아나운서 지원자 역 2019년 MBN/UMAX 수목드라마 《로스타임 라이프 : 더 라스트 찬스》 ... 캐스터 역 2019년 연극 《옥상 위 달빛이 머무는 자리》 2019년 KBS2 주말드라마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 - 배현지 역 (특별출연) 2021년 tvN 주말드라마 《마인:MINE》 - 최미주 역 2021년 JTBC 월화드라마 《아이돌: 더 쿠데타》 - 기자 역 (특별출연) 2021년 연극 《리어왕》 - 리건 역 2023년 JTBC 주말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 - 정나영 역 영화 2021년 《죽이러 간다》 ... 고수 역 교양 2023년 3월 25일 MBC 《생방송 행복드림 로또 6/45》- 게스트 1060회 예능 2019년 1월 30일 MBC 《황금어장 라디오스타》 - "꼭 그렇게 해야만 속이 후련했냐!" 특집 2019년 5월 16일 KBS2 《해피투게더4》 - "아나운서국의 문제아들" 편 2019년 12월 29일 MBC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 참가자 (목소리에 버터를 발랐나~?! 슈퍼보이스 아보카도!) 2020년 1월 2일 KBS2 《해피투게더4》 - '인생은 뷰티풀, 위기는 개뿔' 특집 2020년 tvN 《신박한 정리》 - 게스트 2020년 10월 KBS2 《퀴즈 위의 아이돌》 2020년 11월 tvN 《나는 살아있다》 2020년 11월 채널A 《황금나침반》 2021년 9월 카카오tv 《골프전야》 2021년 11월 SBS 《골 때리는 그녀들》 2022년 1월 KBS2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2022년 5월 디스커버리 채널 코리아 《저 세상 중고차-기어갓》진행 2023년 10월 ~ tvN•tvN STORY 《골프스타K》 진행 TV 중계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캐스터 라디오 2008년~2011년: KBS 제2FM 《오정연의 3시와 5시 사이》 2015년: EBS FM 《책으로 행복한 12시》(임시 진행) 2016년: EBS FM 《EBS 책 읽는 라디오 낭독 시리즈》 2019년: EBS FM 《아이돌이 만난 문학》 광고 2003년 유니레버 - 도브 크림샴푸 발레연습실편 2011년 농림수산식품부 - 한우양돈자조금 구제역 모금 캠페인(성세정 아나운서와 함께) 2013년 고용노동부 - 노후 걱정이 없는 사회 2015년 SG골프 - 킬빌 편, 원초적본능 편 수상 및 후보 외부 링크 뉴에라프로젝트 오정연 유튜브 198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프리랜서 아나운서 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 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 대한민국의 여자 모델 대한민국의 방송인 서강대학교 동문 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 인천광역시 출신 해주 오씨 관문초등학교 동문 과천중학교 동문 과천고등학교 동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동문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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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9D%B4%ED%94%84%EB%9F%AC%EC%8A%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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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프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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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프러스(Cypress, Cyprus)는 다음의 뜻을 가지고 있다. 생물 사이프러스()는 영어권에서 측백나무과 쿠프레수스속 식물을 부르는 말이다. 지리 사이프러스(Cyprus)는 키프로스의 영어 표기이다. 사이프러스 주립공원(Cypress Provincial Park)은 캐나다 서부의 공원이다. 사이프러스산 사이프러스 마운틴 스키장 사이프러스(Cypress)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사이프러스(Cypress)는 미국 일리노이주의 도시이다. 기업 사이프레스 세미컨덕터는 반도체를 설계 및 생산하는 기업이다. 음악 사이프러스 힐(Cypress Hill)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사우스게이트에서 결성된 힙합 그룹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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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A0%9C%EA%B7%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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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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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박제균(朴濟均, 1887 ~ ?)은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박제균(1963 ~ )은 대한민국의 생체공학자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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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B9%B8%ED%98%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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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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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칸 호()는 홋카이도 동부의 구시로시에 있는 호수이다. 호수 전체가 아칸 국립공원에 속해 홋카이도 동부의 대표적 관광지이다. 2005년 11월 람사르 협약에 등록된 습지 중 한 곳이다. 지리 홋카이도 동부의 구시로 시 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호수 동쪽에는 오아칸 산이 입지해 있다. 호수는 오아칸 산의 분화로 생성된 폐색호이다. 호수의 둘레는 30km, 면적은 13.28km2, 최대수심은 45m에 이른다. 섬으로는 오시마 섬, 고시마 섬, 주루이 섬, 야이타이 섬이 떠있다. 그중 주루이 섬에는 천연기념물인 마리모 전시관람 센터가 입지해 있다. 유입하천 : 이베시베쓰 강, 기네탄베쓰 강, 주루이 강, 본추루이 강, 시리코마베쓰 강 등 유출하천 : 아칸 강 생태 특별천연기념물인 마리모와 홍연어가 살고 있다. 주위는 가문비나무, 분비나무 등의 아고산대 침엽수림 및 활엽수림이 산재해 있다. 홋카이도의 호수 홋카이도의 화산 일본의 칼데라 화산 폐색호 일본의 람사르 등록 습지 구시로시의 지리 홋카이도의 자연경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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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A%B8%EB%9D%BC%EC%9D%B4%EB%8D%98%ED%8A%B8%20%28%EB%AF%B8%EC%82%AC%EC%9D%BC%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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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던트 (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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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던트 미사일(Trident missile)은 미국 록히드 사가 개발한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이다. 미국 해군에서는 함대 탄도 미사일 (FBM : Fleet Ballistic Missile)이라고도 불린다. 사양이 다른 트라이던트 I과 II가 있다. 트라이던트 I 트라이던트 I(Trident I, Trident C4)은 포세이돈 C3의 후속으로 개발된 미사일로, 제식명칭은 UGM-96A이다. 기존 포세이돈 C3 미사일에서 사거리 연장을 최우선 항목으로 하여 개발이 시작되었다. 성능과 특징 Trident C4는 크기를 대형화해 사거리를 증대시킬 수가 없었다. 라파예트급 원자력 잠수함 등 포세이돈 C3를 사용하는 전략 미사일 핵 잠수함에 탑재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탄두 수를 포세이돈 C3의 14발에서 8발로 줄였으나 탄두를 포세이돈 C3의 W68 핵탄두에서 W76 핵탄두로 바꾸어 기존 포세이돈 C3 미사일의 위력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로켓을 포세이돈 C3 미사일에서 1단을 늘린 3단으로 늘렸으며 (제어부를 포함하면 4단), 발사 직후 끝에서 에어로 스파이크로 불리는 돌기가 돌출해 가속 단계에서 공기 저항을 감소시켜 사거리 연장에 기여하고 있다. 사양 길이: 10.36 m 직경: 1.88 m 발사 무게: 33,113 kg 탄두: W76 탑재 Mk4 (100 kt) 탄두 수: 최대 8 출발 사거리: 4,000 해리 이상 (약 7,400 km) 유도 방식: 관성유도 추진 방식: 3 단 고체 로켓 CEP: 450 m 내외 탑재 잠수함: 라파예트급 잠수함, 오하이오급 잠수함 (1 ~ 8 번 함) 트라이던트 II Trident II (Trident D5)은 Trident C4를 대형화한 미사일로, 사거리와 CEP가 개선되었다. 정식 명칭은 UGM-133A이다. 오하이오급 잠수함과 영국에서 뱅가드급 원자력 잠수함에 탑재되는 것을 고려했기 때문에 여전히 크기 제한이 있으나, 크기 제한을 풀면 ICBM으로 사용이 가능할 만큼 높은 정확도를 (CEP 90M) 가지고 있다. 성능과 특징 기본적인 모양은 거의 Trident C4과 같지만, 무게는 2배 정도 된다. 탄두 수도 Trident C4는 최대 8발 이었는데 Trident D5는 포세이돈 C3과 같은 14발이다. 무게가 무거워진 이유는 탄도와 사거리 때문인데, 탄도의 경우 Trident C4에서는 W88 탄두를 8발 탑재했으나, Trident D5는 W88 탄두 포세이돈 C3와 같은 14발을 탑재할 수 있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START I 조약으로 인해 8발 전후로만 탑재되어 있다) 사거리 또한 미국의 ICBM 중 가장 사거리가 긴 Minuteman III보다 10% 정도 짧은 거리인 약 6,000 해리로 알려져 있어 Trident C5의 약 1.5배 수준이다. 정확도가 높기 때문에, 간단하게 보복 공격으로 도시를 공격할 뿐만 아니라 적 ICBM의 사일로에 대한 공격에도 사용이 가능하다. GPS를 사용하여 CEP를 향상시킬 계획이 있었고 실제 실험까지 행했으나, 실용화되어 있지는 않다. 사양 길이: 13.41 m 직경: 2.11 m 발사 무게: 58,968 kg 탄두: W76 탑재 Mk4 (핵 출력 100 kt) 또는 W88 탑재 Mk5 (핵 출력 475 kt) 탄두 수: 최대 14발 사거리 (공표 값): 4,000 해리 이상 (약 7,400 km) 사거리 (추정치): 6,480 해리 이상 (약 12,000 km) 유도 방식: 관성 + 천측 추진 방식: 3 단 고체 로켓 CEP: 90 m 안팎 탑재 잠수함: 오하이오 급 (9 ~ 18 번 함) : Vanguard 급 (영국) 각주 같이 보기 미사일 목록 외부 링크 트라이던트 미사일 발사 동영상 미국의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 미국의 핵무기 영국의 핵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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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D%99%8D%EC%9A%B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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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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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욱(金弘郁, 1602년 6월 25일(음력 5월 6일)~ 1654년 8월 27일(음력 7월 16일))은 조선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자는 문숙(文叔)이고 호는 학주(鶴洲)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635년(인조 13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과 예문관, 삼사의 요직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했으며, 1637년 암행어사로 강원도에 다녀온 뒤 홍문록에 뽑혔다. 이후 1645년 훈신 김자점과의 갈등으로 사퇴했다가 홍문관에 복직, 효종 즉위 후 사헌부집의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649년(효종 즉위) 김자점의 사치와 사리사욕을 탄핵하고 사직했으나, 주변의 변호로 복직하였다. 1649년 인조의 만장을 쓰다가 신하들의 잘못 보도를 지적한 구절이 문제시되어 파면됐으나, 이경석 등의 변호로 복직, 암행어사로 다녀왔다. 1650년 홍문관 부응교, 의정부 사인, 응교, 실록청 도청낭청이 되다. 1651년 장악원정, 부묘도감 도청낭청을 거쳐 사헌부집의가 되고, 승정원동부승지로 승진하여 지제교를 겸했다. 1654년 홍청도(현재의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충청도 관찰사 당시 대동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감염철소(請減鹽鐵疏)를 올려 염전업자에 대한 세금 감면을 청원하였으며, 잠곡 김육의 대동법을 적극 지지하였다.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과 사면, 복권을 주장했다가 효종에 의해 장살되었다. 그가 죽자 송시열, 송준길과 남인의 당원 허적, 홍우원 등도 그의 사면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여러번 올려 복권되었다. 숙종 때 민진후의 상소로 증 이조판서 겸 홍문관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에 추증됐다. 당색으로는 서인이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5대조이자, 영조 때의 영의정 김흥경의 고조부이며, 추사 김정희의 7대조이다. 생애 생애 초반 학주 김홍욱은 한성부 남부 훈도방 저포동(南部 薰陶坊 苧廛洞)에서 행안기도찰방찰방(行安奇道察訪)을 지내고 증 이조참판에 추증된 단구자(丹丘子) 김적(金積)와 동지중추부사, 좌윤을 지낸 최원(崔遠)의 딸 화순최씨(和順崔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태사 김인관(仁琯)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증 승정원좌승지 김호윤(金好允), 증조부는 서흥부사,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이다. 형은 연산현감 김홍익(金弘翼), 김홍양, 김홍필 선대의 고향은 충청남도 서산으로 이곳에 선영이 있었다. 김홍욱의 본가는 원래 한성부 저동(苧洞)이었으나 무과 출신으로, 서흥부사로 재직 중 임꺽정(林巨正(을 토벌하고 안주목사를 역임한 증조 김연(金堧)이 1500년 중반 충청남도 서산군 가야산 서쪽 취영봉 아래 한다리, 현 서산시 음암면 유계2리 한다리 마을로 이주, 터를 잡아서 살았다. 이후 그의 집안의 세거지가 되었고, 그의 집안은 증조부 김연이 처음 정착한 한다리 마을의 이름을 따서 한다리 김씨로 불렸다. 따라서 그를 서산 출신으로 보는 설도 있다. 김홍욱은 아버지 김적의 한성 남부 저포동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월사 이정귀(李廷龜)가 그를 특별히 알아보고 총애하였다. 8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 바로 구절을 짓고 암송하니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15세에는 각종 경전을 암송하였다. 1518년 4월 26일 동복오씨 병조참의로 있던 오정(吳靖)의 딸 동복오씨와 혼인했다. 그해 처조부 문숙공 만취당 오억령의 문하에 들어가 정식으로 글을 배웠다. 그러나 오억령은 그해 10월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1623년(광해군 15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어떤 이유로 갑자기 파방(罷榜)되어 합격 취소되었다. 다시 그해 초시에 합격하고, 1624년(인조 2년) 그 해의 증광과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3등으로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었다. 이후 음서로 관직에 올라 참봉(參奉)을 지냈다. 관료 생활 초반 1630년(인조 8년) 중별시문과(中別試文科)의 초시(初試)에 합격했다. 이듬해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35년(인조 13년) 참봉으로 재직 중 그해의 중초시(中初試)에 제2등, 중회시(中會試)에 1등하였다. 그해 10월 27일 증광문과 전시(殿試)에 을과 7위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承文院) 등을 거쳐 예문관검열(檢閱)로 재직 중 시강원설서를 겸임하였다. 당색으로는 서인(西人)이었으나, 그 중에서도 산림 계열에 속했다. 1636년(인조 14년) 부모의 노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인조는 유마(由馬)를 지급하여 그를 위로하였다. 그해 춘추관기사관으로 경연에 입시했고, 시강원설서가 됐다. 1636년 12월 무사(武士) 임항수(林恒壽) 등을 추천, 변방에 보내 국경을 지키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1636년 12월 8일 청나라의 침공으로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병자호란 때 인조의 남한산성 피난길을 호종하여 다녀왔다. 이때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하였으며, 1637년 초 예문관대교가 되고, 다시 대교에 재임명됐다. 인조의 항복 이후, 정축하성 때 어가를 호위, 환도했다. 곧 성균관전적이 되었다가 바로 강원도암행어사로 나갔다. 다시 내직으로 복귀해 예조 좌랑, 병조 좌랑이 되고 그 해의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 그해 부수찬,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친병으로 상소하고 귀향했다. 1638년(인조 16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가, 그해 당진현감으로 나갔으나 충청도관찰사와 의견 충돌로, 뜻이 맞지 않아 사헌부의 탄핵을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그 뒤 복직하여 대교(待敎),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냈다. 공신 세력과의 갈등 그 뒤 1641년(인조 19년) 홍문관수찬이 된 뒤 교리, 사간원헌납을 거쳐 1645년 이조좌랑이 되었을 때, 서인 공신인 김자점(金自點)의 뜻에 거슬려 사직하였다. 그 뒤 김자점 일파가 숙청당하고 공신세력이 몰락하면서 1648년 복직하였다. 그 해 홍문관 응교가 되어 관기숙청(官紀肅淸)과 해안가의 기근, 공물의 폐단과 민생고의 해결책을 상소하였다. 이어 관기(官紀), 전제(田制) 개혁, 공물방납(貢物防納) 등 시정의 폐단 15개 조를 상소하였다. 인조가 승하하자 그는 바로 김자점을 공격했다. 또한 효종 즉위 직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행 사헌부집의 지제교 겸 춘추관 편수관 세자 시강원 보덕(行司憲府執義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世子侍講院輔德)이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649년(효종 즉위) 장령 이석(李晳)과 함께 훈신 김자점의 사치와 사리사욕을 이유로 탄핵했다가 체직당했다. 승정원과 사간원에서 그의 체직을 반대하며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그해 7월 24일 홍문관응교로 복직, 인조의 만장을 쓸 때 "어찌 오랑캐를 섬기겠는가.(何必事戎氈)", "입을 다문 신하의 죄가 크다.(口緘臣罪大)"는 구절이 대신을 조롱, 풍자했다는 이유로 8월 25일 파면되었다. 이어 약방 도제조 이경석(李景奭), 제조 조경(趙絅), 부제조 김남중(金南重) 등이 그를 변호하였고, 장령 이재(李梓), 지평 홍처윤(洪處尹)과 사간원에서 연이어 그를 변호하므로 하루만에 복직하였다. 그해 12월 6일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한달 뒤 귀환했다. 1650년(효종 1) 김자점이 청나라의 사신을 불러들인 일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 뻔했으나, 인평대군 요의 변호로 화를 모면하였다. 이후 1650년 홍문관 부응교가 되었다가, 의정부 사인, 응교, 실록청 도청낭청이 되다. 1651년 장악원정ㅈ, 부묘도감 도청낭청(祔廟都監 都廳郞廳)을 거쳐 사헌부집의가 되었다가 승정원동부승지로 승진하여 지제교를 겸했다. 9월 부묘도감 관련자를 시상할 때 1자급 승진했다. 그해 말 김육의 추천으로 홍청도관찰사(洪淸道 觀察使)로 부임하였다. 지방관 생활과 대동법 시행 잠곡 김육이 대동법을 주장하자 이를 적극 찬성하였다. 효종 즉위 초 승지(承旨)를 거쳐 1651년 공충도 관찰사로 제수되었으며,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그 뒤 내직에 돌아와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다시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 이때 청감염철소(請減鹽鐵疏)를 올려 서산·태안 지방의 철물·소금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바쳐야 하는 세금 부담이 너무 과중해 염전업자들이 염전을 중단하거나 도망가는 일이 많고 생산이 감축된 실정에 있으니 이를 탕감해 줄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효종이 들어주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1654년(효종 5년) 6월 17일 그는 소현세자의 장남 경선군 석철의 석방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효종은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말을 그대가 능히 말하니 진실로 가상하다. 유념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여 그 상소를 문제삼는 의견을 물리치고 특별하게 해를 입히지 않았다. 김홍욱은 홍우원의 주장에 적극 동의하다가 이듬해 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사가 무고임을 주장한다. 구언과 최후 1655년 효종 즉위 후 5년 되던 해에 김홍욱은 구언에 의해 황해감사로 재직 중, 민회빈 강씨 옥사의 조작을 탄원하여 인한재응지소(因旱災應旨疏)를 올려 강빈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강빈의 신원회복과 소현세자의 살아있는 셋째 아들 경안군 이회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효종은 즉위 초부터 소현세자 문제에 대한 발언을 엄금하였는데 그 이야기를 꺼낸다며 국문장을 열고 그를 직접 국문하였으며, 중신들의 만류와 산림의 반대, 김집과 그 문하생들의 사면 탄원서와 구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문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 일가의 무죄가 입증되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진다고 판단한 효종에 의해 김홍욱을 국문 끝에 장살로 살해하였다. 죽음에 이르러 "말하는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잠곡 김육 등도 차자를 올려 구언을 한 김홍욱을 국문하면 구언한 일로 죽게 된다며 효종에게 만류를 청했다. 의정부좌의정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垕)는 원임대신 자격으로 국문장에 들어가 눈물흘리며 김홍욱의 사면을 청했으나 효종은 듣지 않았다. 송시열, 송준길 등도 상소를 올려 김홍욱의 사면, 석방을 청하였으나 효종은 거절했다. 김홍욱은 의금부에서 국문받던 도중 장살로 죽었다. 사후 그는 구언 상소를 올리기 전, 완남군 이후원(李厚源)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부모님 곁에 묻어줄 것을 부탁, 이후원이 그의 장례식을 주관했다. 분노한 효종은 김홍욱의 후손들을 금고형에 처했으나 그해 호조판서 허적이 차자를 올려 김홍욱의 자손들의 금고형을 취소해줄 것을 청했다. 1654년(효종 5년) 김홍욱이 장살되자 우의정 구인후는 “전하께서 국사를 말하는 신하를 죽이고자 하시니, 후세에 전하를 비방하는 말은 어떻게 하시렵니까.(殿下欲殺言事之臣, 其於後世譏議何)”라고 하여, 김홍욱을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한편 김홍욱을 잡아온 금부도사는 바로 잡아오지 않고, 기간을 지연시켰다는 이유로 투옥, 1668년(현종 9년) 10월까지 투옥당했다. 그해 9월 20일 그의 본가가 있던 충청남도 서산군 대교리(大橋里)에 임시로 장사했다가, 11월 충청남도 서산군 흑수촌 선영하에 장사지냈다. 그의 묘비는 1746년(영조 22) 박필주(朴弼周)가 썼는데, 후일 대한민국에 와서 1995년 후손들, 성암서원 등에 의해 다시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김홍욱이 고문으로 죽은 뒤 이상일(李尙逸) 등도 이에 연루되어 관직을 사직, 낙향했고, 지방관으로 있던 그의 외사촌도 파직당했다. 김홍욱의 구명을 청한 김집 등도 관직을 사퇴했다. 그가 죽자 송시열, 송준길은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 복권 외에 김홍욱 복권 운동을 당론으로 삼고, 여러 번 상소를 올려 효종에게 김홍욱의 신원 복권을 계속 상주하였다. 1674년(현종 15) 김홍욱의 맏아들 김세진(金世珍)이 당시 유배 중이던 송시열을 찾아가 신도비문을 청해 받아왔으며, 신도비문은 사헌부대사헌 겸 동지경연사 윤득화(尹得和)가 글씨를 썼다. 송시열은 그의 묘갈명도 지어주었다. 현재의 신도비는 1772년에 다시 세워졌다. 그의 아들 김세진의 손자 김흥경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김흥경의 아들이 김한신으로 영조의 서녀 화순옹주의 부마가 된다. 다른 아들 김계진의 증손자는 김한구이며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는 뒤에 영조의 계비가 된다. 강빈 복권 여론 1654년말 남인 홍우원은 홍문관 수찬이 되었는데, 그는 당색을 초월하여 김홍욱의 사면, 복권여론을 주청하였다. 홍우원은 강빈 옥사의 허위를 직언하다 장살당한 김홍욱의 신원(伸寃)과 복권을 주장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656년(효종 7년) 송시열, 김익희 등이 상소를 올려 김홍욱의 복권을 청하였다. 1656년(효종 7년) 7월 부교리 이정기(李廷夔)가 김홍욱의 사면을 상소하고 사직을 청했으나 효종이 듣지 않았고, 부수찬 이단상(李端相)이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김홍욱의 사면을 청하였다. 8월에는 전 승지 김응조(金應祖)가 김홍욱의 억울함을 상소하며 신원을 청하였다. 1657년(효종 8년) 송시열의 건의로 효종은 김홍욱의 자손들에 대한 금고형을 철회했다. 이때 김홍욱의 사면을 청하지 않은 신천익(愼天翊) 등이 지탄을 받고 실록에 실리기도 했다. 1657년 송시열은 다시 그의 사면을 여러번 상소했고, 효종은 자손들의 관직 금고를 취소했다. 뒤에도 송시열은 계속 김홍욱의 사면을 요청했고, 1659년 효종은 그를 신원(伸寃)하였다. 문집 학주문집은 1715년에 가서 간행되었다. 1718년(숙종 44) 민진후의 상소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에 추증되고 1721년(경종 1년) 서산(瑞山)의 성암서원(聖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이후 영조 즉위 초 서원철폐령에 의해 성암서원은 철폐되었으나 정순왕후에 대한 배려로 1760년(영조 36년) 특별히 복설되기도 했다. 충청북도 음성 지천 서원(陰城 知川書院)에 제향되었다. 민진후는 시장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문정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그의 묘소와 신도비 등은 2010년 12월 30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0호로 지정되었다. 저서 학주집(鶴洲集) 가족 관계 할아버지 : 김호윤(金好尹) 아버지 : 김적(金積) 어머니 : 최원(崔遠, 화순최씨)의 딸 형님 : 김홍익(金弘翼, 1581 ~ 1636) 부인 : 오정(吳靖)의 딸 동복오씨 장남 : 김세진(金世珍) 손자 : 김두성(金斗星) 손자 : 김두정(金斗井) 손자 : 김두규(金斗奎) 손자 : 김두벽(金斗壁) 손녀 : 박전(朴錪)에게 출가 손녀 : 윤명원(尹明遠)에게 출가 차남 : 김계진(金季珍) 손자 : 김두광(金斗光) 장녀 : 이기직(李基稷)에게 출가 차녀 : 한성열(韓聖悅)에게 출가 삼녀 : 조지한(趙持韓)에게 출가 사녀 : 이기서(李基敍)에게 출가 오녀 : 박상주(朴尙胄)에게 출가 기타 그가 죽기 전에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고 한 말은 후세인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일찍이 조지운이 감사 김홍욱(金弘郁) 상에서 조문을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이 들어오는지라 뒷걸음치며 물러나 길을 양보하였다. 그러자 정두경이 눈을 흘겨보며 말하였다.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조지운이 아버지의 이름을 들어 대답하자, 정두경이 말하였다.“성상께서 김문숙을 죽였으니, 이는 성세(聖世)의 누로다. 아깝도다. 아까워.”그때에 상께서 몰래 대궐 안의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는 사람들을 보게 하였던 까닭으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감히 조문을 못하였다. 정두경은 짐짓 일부러 이런 말을 발설하여 그 사람들로 하여금 아뢰도록 하게 한 것이었다. 같이 보기 성암서원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5호 참고 학주 김홍욱과 강빈옥사(姜嬪獄事) 김홍욱:네이트 한국학 김홍욱: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각주 1602년 출생 1654년 사망 사상가 과거 급제자 조선의 문신 조선의 정치인 조선의 작가 김육 병자호란 관련자 정묘호란 관련자 경주 김씨 고문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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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D%8E%80%EC%A7%80%20%EC%BC%80%EC%9D%B4%ED%81%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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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펀지 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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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펀지 케이크()는 스펀지 모양으로 구운 비스킷의 한 종류이다. 기본적으로 거품을 낸 달걀에 밀가루와 설탕을 적절히 배합하고 기타 여러 재료들을 섞어 구워 만든다. 만드는 방법에 따라 수백 가지의 다양한 종류의 스펀지 케이크가 있다. 스펀지 케이크는 계란 흰자, 밀가루, 설탕으로 만든 가벼운 케이크로, 때때로 베이킹 파우더로 누룩을 넣기도 한다. 일부 스펀지 케이크에는 엔젤 푸드 케이크와 같이 달걀 노른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대부분은 포함되어 있다. 달걀을 풀어 부풀린 스펀지 케이크는 르네상스 시대, 스페인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스펀지 케이크는 효모를 넣지 않은 최초의 케이크 중 하나로 생각된다. 당시의 케이크는 크래커와 비슷했고 얇고 바삭했다. 스펀지 케이크는 18세기 중반 빵 굽는 사람들이 반죽한 계란을 떠오르는 재료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인정받는 케이크가 되었다. 1843년 영국 식품 제조업체인 앨프리드 버드가 빅토리아 시대에 베이킹 파우더를 만들면서 전통적인 스펀지 레시피에 버터를 추가하여 빅토리아 스펀지가 탄생했다. 케이크는 다양한 맛으로 제공되며 많은 요리법도 있다. 스폰지 케이크는 트윙키(Twinkie)를 통해 스낵 케이크가 됐다. 몇몇은 스펀지 케이크를 빵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사실은 비스킷이다. 같이 보기 롤 케이크 빅토리아 스펀지 카스텔라 영국의 케이크 이탈리아의 후식 스페인의 후식 잉글랜드 요리 유대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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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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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아일랜드(FTISLAND)는 FNC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3인조 팝 락 밴드이다. 밴드명은 Five Treasure Island의 약칭으로, 다섯개의 보물섬이다. 2007년 6월 7일 1집 《Cheerful Sensibility》의 타이틀곡 〈사랑앓이〉로 데뷔하였다. 사랑앓이는 음악프로그램에서 7주 연속 1위를 하였고 음반판매는 12만장을 돌파하였다. 2007년 신인상, 2010년 골든디스크 록상 등을 수상하였다. 구성원 이전 구성원 음반 출연 작품 드라마 2007년 KBS2 못말리는 결혼 (이재진) 2009년 KBS1 집으로 가는길 (최민환) 2009년 SBS 미남이시네요 (이홍기) 2011년 MBS·TBS 머슬 걸 (이홍기) 2011년 KBS 노리코, 서울에 가다 (이홍기) 2014년 TV조선 백년의 신부 (이홍기) 2014년 SBS 모던파머 (이홍기) 2015년 네이버 웹 드라마 프린스의 왕자 (최종훈) 2015년 네이버 웹 드라마 아부쟁이 얍! (이재진) 2015년 QTV 영웅들 (최종훈) 2016년 네이버 웹 드라마 수사관 앨리스2 (송승현) 2016년 네이버 웹 드라마 88번지 (최종훈) 2016년 네이버 웹 드라마 매콤달콤 (최민환) 2017년 SBS 언니는 살아있다 (이재진) 2018년 tvN 화유기 (이홍기) 영화 2011년 너는 펫 (최종훈) 2013년 뜨거운 안녕 (이홍기) 2014년 레디 액션 청춘 중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송승현) 2014년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이홍기) 2016년 걷기왕 (이재진) 뮤지컬 2009년 소나기 (이재진) 2009년 한 여름밤의 꿈 (이홍기) 2012년 잭 더 리퍼 (송승현) 2012년 ~ 2013년 광화문연가 (최민환) 2013년 썸머스노우 (송승현) 2013년 궁 (최민환) 2013년 하이스쿨 뮤지컬 (이재진) 2014년 삼총사 (송승현) 2014년 요셉 어메이징 (최민환) 2014년 뱀파이어 (이홍기) 2016년 그날들 (이홍기) 2019년 사랑했어요 (9월,이재진-10월) 2021년 1976 할란카운티 (다니엘 역 이홍기) 2021년 ~ 2022년 뱀파이어 아더 (아더 역 이재진.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2021년 ~ 2022년 마타하리 (다니엘 역 이홍기. 한전아트센터 대극장) 연극 2017년 ~ 2018년 여도 (송승현) 음반 외 활동 텔레비전 2007년 Mnet 두근두근 여친 만들기 2008년 MBC every1 아이돌 군단의 떴다 그녀 2008년 SBS 좋아서 (이홍기) 2009년 SBS 인기가요 (이홍기) 2009년 E! 아이돌 막내 반란시대 (송승현) 2009년 온스타일 스타일 웨이브 (최종훈, 송승현) 2009년 MBC every1 지금은 꽃미남 시대 (최종훈, 최민환, 송승현) 2010년 KBS2 위기탈출 넘버원 (이홍기) 2010년 ~ 2011년 KBS2 백점만점 (이홍기) 2011년 KBS2 불후의 명곡2 (이홍기) 2012년 Mnet 와이드 연예 뉴스 (최민환 송승현) 2012년 KBS2 세대공감 토요일 (이홍기 송승현) 2013년 MBC every1 세계판 우리결혼했어요 (이홍기) 2013년 ~ 2014년 tvN 청담동 111 2015년 SBS MTV Coming Out! FT아일랜드 2015년 KBS2 나를 돌아봐 (이홍기) 2017년 tvN 우리들의 인생학교 (이홍기) 2017년 ~ 2018년 JTBC 밤도깨비 (이홍기) 2018년 TV조선 전설의 볼링 (이홍기) 2022년 채널A 오은영의 금쪽상담소 (최민환) 2022년 TV조선 미스터트롯2 (이홍기) 2022년 JTBC 아는형님 (이홍기, 이재진) CF 및 홍보대사 2007년 스마트 (교복) 2008년 ~ 2013년 리트머스 (의류) 2009년 ~ 2012년 바비펫 (화장품) 2009년 한톨나눔축제 홍보대사 2009년 서울동행봉사단 홍보대사 2012년 ~ 2014년 또래오래 (식품) 2017년 ~ 부산롯데호텔 홍보대사 뮤직 비디오 FT아일랜드 이홍기 참여 수상 내역 가요 프로그램 1위 Live Stage 각주 외부 링크 FTIsland 공식 사이트 / 한국 FTIsland 공식 사이트 / 일본 FNC 엔터테인먼트 홈페이지 FTIsland 프로필 FTIsland 공식 유튜브 채널 / 한국 FTIsland 공식 유튜브 채널 / 일본 3인조 음악 그룹 FNC 엔터테인먼트 소속 2007년 결성된 음악 그룹 2000년대 음악 그룹 2010년대 음악 그룹 2020년대 음악 그룹 한국어 음악 그룹 대한민국의 팝 록 밴드 SBS M 더 쇼 초이스 수상자 엠넷 엠카운트다운 1위 수상자 KBS 뮤직뱅크 1위 수상자 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수상자 골든디스크 신인상 수상 음악가 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 골든디스크 인기상 수상 음악가 하이원 서울가요대상 신인상 수상 음악가 하이원 서울가요대상 본상 수상 음악가 아이돌 그룹 대한민국의 아이돌 그룹 일본어 가수 한국어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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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D%94%84%EA%B0%80%EB%8B%88%EC%8A%A4%ED%83%84%EC%9D%98%20%EA%B5%AD%EA%B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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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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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는 아프가니스탄의 국가이다. 1973년 제정된 이래 현재의 것은 2006년 제정되었다. 파슈토어 가사 2021년 이후 가사 2006 ~ 2021년 파슈토어 가사 دا وطن افغانستان دی دا عزت د هر افغان دی کور د سولی کور د توری هر بچی یی قهرمان دی دا وطن د تولو کور دی د بلوچو د ازبکو د پشتون او هزاره وو د ترکمنو د تاجکو ورسره عرب، گوجر دی پامیریان، نورستانیان براهوی دی، قزلباش دی هم ایماق، هم پشه ییان دا هیواد به تل زلیژی لکه لمر پرشنه آسمان په سینه کی د آسیا به لکه زره وی جاویدان نوم د حق مودی رهبر وایو الله اکبر وایو الله اکبر 로마자 독음 Dā watan Afγānistān dai, dā izat də har Afγān dai Kor də sole, kor də ture, har bačai ye qahramān dai Dā watan də ttolo kor dai, də Baločo, də Uzbəko də Pax̌tun aw Hazārawo, də Turkməno, də Tāǰəko Wər sara Arəb, Guǰər di, Pāmiryān, Nuristānyān Brāhuwi di, Qizilbāsh di, ham Aymāq, ham Pašāyān Dā hiwād ba təl dzaleγ̌i, ləka lmar pər šnə āsmān Pə sine ke də Āsyā ba, ləka zrrə wi ǰāwidān Num də haq mo dai rahbar, Wāyu Allāhu Akbar, Wāyu Allāhu Akbar, Wāyu Allāhu Akbar 한국어 해석 이 땅은 아프가니스탄! 이 영예는 모든 아프간인의 것이다. 우리의 조국, 평화의 땅. 모든 자손들이 영웅이다. 이 나라는 우리 모두의 고향이다. 발루치족과 우즈베크족, 파슈툰족과 하자라족, 투르크멘족, 그리고 타지크족. 그들과 함께 아랍인과 구르자르족, 파미르족과 누리스탄족, 브라후이족과 키질바시족, 아이마크족, 그리고 파샤이족. 이 땅은 항상 빛날 것이다. 하늘에 떠있는 태양처럼, 아시아의 심장에 빛나는 수천개의 보석처럼. 올바른 신의 이름을 받들어라. 말하라! 알라는 위대하시다! 말하라! 알라는 위대하시다! 말하라! 알라는 위대하시다! 1992 ~ 2006년 가사 1절 قلعه اسلام قلب اسیا جاویدان ازاد خاک اریا زادگاه قهرمانان دلیر سنگررزمنده مردان خدا 후렴 الله اکبر الله اکبر الله اکبر الله اکبر 2절 بنداستبدادراازهم گسست تیغ ایمانش به میدان جهاد ملت ازاده افغانستان در جهان زنجیرمحکومان شکست 3절 پرچم ایمان به بام مابود سرخط قران نظام ما بود وحدت ملی مرام مابود همصداوهمنواباهم روان 4절 ای وطن درنورقانون خدا شادزی ازادزی ابادزی مردم سرگشته راشورهنما مشعل ازادگی رابرفراز 로마자 풀이 1절 Qal’a-ye Islam, qalb-e Asiya, Jawidan azad khak-e Ariya, Zadgah-e qahramanan-e bozorg, Sangar-e razmande-ye mardan-e khoda 후렴 Allahu akbar, Allahu akbar, Allahu akbar.2절Tigh-e imanash be meydan-e jihad, Band-e estebdad-ra az ham gozast Mellat-e azade Afghanistan Dar jehan zanjir-e mahkuman shekest.3절Sar-e khatt-e qur’an nizam-e ma bowad, Parcham-e iman be bam-e ma bowad, Ham seda o-ham nawa ba ham rawan, Wahdat-emelli muram-e ma bowad.4절Shad zey, azad zey, abad zey, Ey watan dar nur-e qanun-e khoda. Mash’al-e azadegi-ra bar firaz, Mardom-e sar-goshte-ra shou rahnama. 1978 ~ 1992년 가사 후렴 گرم شاه لا گرم شاه تا ا ی مقدس لامارا ای دا آزادی لامارا ای دا نکمارغی لامارا 1절 موژ پاتوفانونوکای پری کرا دا بار لارا هم دا تورو شپو لارا هم ده رانای لارا سرا ده سرباز لارا پاکا ده رور لارا 2절 دا انقـلابی وطن اوس د کارگرانو دی دغه د زمرو میراث اوس د بزگرانو دی تیـر شو د ستم دور وار د مزدورانو دی 3절 موږ په نړیوالو کی سوله او وروری غواړو موږه زیارایستونکو ته پراخه آزادی غواړو موږ ورته ډوډی غواړو کور غواړو، کالی غواړو 로마자 풀이 후렴Garam shah lā garam shah Ta e muquadas lamara E da-āzādī lamara E da-nekmarghī lamara.1절Muzh patūfānunokē Prī kra da-barī lāra Ham da-toro shpo lāra Ham da-ranāī lāra Sra da-sarbāzī lāra Paka da-rorī lāra.2절Dā inqilābī vatan Os da-kārgarāno de Dagha da-zmaro mīrās Os da-bāzgarāno de Ter-so da-sitam daur Vār da-mazdūrāno de.3절Muzh pa-nārīvālo-ke Sola au urūrī ğvārū Muzhan ziyār istunko-ta Parākha āzādī ğvārū Muzh varta dode ğvārū Kor ğvārū kālī ğvārū. 해석 후렴뜨겁게, 더 뜨겁게 떠올라라. 그대, 신성한 태양이여 자유의 태양이여, 행운의 태양이여.1절우리는 폭풍을 넘어 길의 끝까지 왔다. 우리는 또한 좁은 길과 어둠을 뚫고 나왔다 또한 빛나는 길을 승리의 붉은 길을, 순수한 형제애의 길을.2절우리의 혁명적인 조국은 이제 노동자들과 손을 맞잡는다 사자의 유산은 이제는 농민의 것이다 압제의 시대가 지나갔다 노동자들의 시대가 왔다.3절''' 우리는 평화와 형제애를 원한다 온 세계의 인민들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자유를 외친다 평생 고생한 인민들을 위하여 우리는 그들을 위한 빵을 원하니, 우리는 집과 옷을 원한다. 1973 ~ 1978년 가사 څو چي ده ځمکه او اسمان وي څو چي دا جهان ودان وي څو چي ژوندي په دي جهان وي څو چي پاتي يو افغان وي تل به دا افغانستان وي تل دي وي افغانستان ملت تل دي وي جمهوريت تل دي وي ملي وهدت تل دي وي افغان ملي جمهوريت تل دي وي افغان ملت جمهوريت ملي وهدت ملي وهدت 로마자 풀이 So Che Da Mezaka Asman Wee So Che Da Jahan Wadan Wee So Che Jowand Pa De Jahan Wee So Che Pati Yaw Afghan Wee Tel Ba Da Afghanistan Wee Tel De Wee Afghanistan Melat Tel De Wee Jumhouriat Tel De Wee Meli Wahdat Tel De Wee Afghan Meli Jumhouriat Tel De Wee Afghan Mellat Jumhouriat Meli Wahdat – Meli Wahdat 해석 그곳의 지구와 천국은 영원하리 오래도록 세계를 지켰다네. 세계의 삶이여 영원하리 아프가니스탄은 오래도록 숨을 쉰다네. 아프가니스탄이여, 그대여, 아프가니스탄이여 영원하리. 공화국이여 영원하리. 오래도록 우리가 연합할 때면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연합하리, 연합하리라. 외부 링크 1973-1978 버전에 대한 설명 1978-1992 버전에 대한 설명 1992-2006 버전에 대한 설명 국가 MIDI 파일 1973-1978 국가 MIDI 파일 1978-1992 국가 MIDI 파일 1992-1999/2002-2006 국가 MIDI 파일 2006-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노래 옛 국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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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9%80%ED%83%80%EB%82%98%EB%B2%A0%20%EB%A7%88%EC%9C%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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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마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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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마유(, 1994년 3월 26일 ~ )는 일본의 여성 아이돌 그룹 전 AKB48 팀B의 멤버이자 솔로가수이다. 2008년 6월부터 프로덕션 오기에 소속되어 있다. 2012년 3월에 트라이식 고등학교(통신제)를 졸업했다. 2007년 4월 8일부터 AKB48 극장에서 팀B의 일원으로서 공연했다. 2020년 5월 31일 건강상의 문제로 소속사를 퇴소하고, 연예계를 은퇴했다. 내력 데뷔 전 초등학교 6학년 (2005년도) 때는 히키코모리에 가까웠다고 고백했다. 식사 중에 가족과 대화하지 않고, 학교에서는 "반의 유령", 하교하면 컴퓨터로 직행해 인터넷으로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일러스트를 그리거나 했다. 본인 왈, "2차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런 생활이 2년간 이어졌다. AKB48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인터넷이 계기였다. 어머니는 처음엔 연예계 진출에 난색을 표했으나 이를 계기로 딸이 밖에 나가서 활발한 아이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결국엔 찬성했다. 2006년 2월 19일 제2기 오디션에 응모해 낙선. 12월 3일 『 제3기 AKB48 추가 멤버 오디션』에 합격. AKB48 출범 때부터 팬이었으며 오디션 응모 이유도 "너무 좋아해서 들어가고 싶었다". 가창 심사에서 "벚꽃의 꽃잎들"을 불렀다. 2007년 4월 8일 AKB48 극장에서 팀B 1st Stage "청춘 걸즈" 첫날 구 팀B의 일원으로 공연했다. 7월 18일 4th 싱글 "BINGO!"에서 구 팀B 멤버로서는 처음으로 (카시와기 유키, 히라지마 나츠미와 동시) 선발 멤버에 입성했다. 2008년 히라지마 나츠미와 나카가와 하루카 (전 JKT48), 오오타 아이카(전 HKT48)와 함께 유닛 "渡り廊下走り隊"를 결성 (후에 渡り廊下走り隊7으로 이행). 2009년 6월 23일부터 7월 7일까지 실시된 『AKB48 13th 싱글 선발 총선거 "하느님께 맹세코 진심입니다"』에서는 4위로, 미디어 선발에 입성했다. 10대 초반의 멤버로 톱5에 진입한 것은 2013년 현재 와타나베뿐이며, 톱10 진입을 포함해도 마츠이 쥬리나(SKE48, 2010년도, 2012년도)와 2명뿐. 2010년 5월 25일부터 6월 8일까지 실시된 『AKB48 17th 싱글 선발 총선거 "어머니께 맹세코 진심입니다"』에서는 5위, 2년 연속으로 미디어 선발에 입성했다. 6월 9일에 개최된 개표 이벤트에서의 연설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지금 이 현상에 만족하지 않습니다"라고 코멘트했다. 2011년 5월 13일 1st사진집 『 마유유 』(슈에이샤)가 발매되었다. 5월 23일자 오리콘 랭킹의 Book(종합) 부문에서 여성 솔로 사진집 중 최고로 3위를 획득. 5월 24일부터 6월 8일까지 실시된 『AKB48 22nd 싱글 선발 총선거 "올해도 진심입니다"』에서는 2년 연속 5위, 3년 연속으로 미디어 선발에 진입했다. 6월 9일에 개최된 개표 이벤트에서의 연설에서는 전년과 달리 웃으면서 "순위는 그냥 숫자이므로 저는 좌우되지 않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자신을 믿고 여러분을 믿고 자신이 정한 길을 걷겠습니다"라고 코멘트했다. 5월 24일부터 6월 8일까지 실시된 "AKB48 홍콩 선발 총선거"에서는 2위가 되었다. 6월 12일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완화 구 서문 거리에 개점한 AKB48 오피셜 매장 이벤트에 참가했다. 12월 13일에 개최된 TV 애니메이션 『AKB0048』 성우 공개 오디션에 합격해 성우 선발에 입성했다. 2012년 1월 13일부터 방송된 심야 드라마 『사바돌』(TV도쿄)로 드라마 첫 주연. 2월 29일 『사바돌』의 주제가 "싱크로 도키메키"로 소니 뮤직 레코드에서 솔로 데뷔했다. AKB48에서는 4번째 솔로 데뷔이다. 기획싱글이었던 오오호리 메구미, 아키모토 야스시가 프로듀스에 관여하지 않은 마스다 유카, 오쿠 마나미를 포함하면 7번째이다. 4월 26일 『AKB0048』 성우 선발 멤버 9명의 신유닛 "NO NAME"의 결성이 발표된다. 작품의 주제가 "희망에 대해"와 "꿈은 몇번이나 다시 태어난다"를 부른다. 5월 22일부터 6월 5일까지 실시된 『AKB48 27th 싱글 선발 총선거』에서는 2위로 선발에 진입했다. 6월 6일에 개최된 개표 이벤트에서의 연설에서는 "만약 내년에도 총선이 있다면 저는 1위를 차지하고 싶어요. 아직 미숙할지도 모르지만, 내년까지는 반드시 센터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코멘트했다. 8월 24일 『AKB48 in TOKYO DOME~1830m의 꿈~』 첫날 공연에서 팀A로 이동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11월 1일 팀A에 이동 11월 2일 팀A 웨이팅 공연 센터로 새 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1월 21일 솔로 3rd 싱글 "빛나는 것들"을 발매. 오리콘 주간 싱글 랭킹에서 첫 등장 1위를 기록. 2013년 2월 20일 발매된 30th 싱글 "So long!"에서 첫 센터 포지션을 맡게 되었다. 5월부터 6월에 걸쳐 실시된 『AKB48 32nd 싱글 선발 총선거』에서는 3위로 선발 멤버로 선출되었다. 2014년 2월 24일 Zepp DiverCity에서 개최된 《AKB48 그룹 대조각 축제》에서, 팀B로 이동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5월부터 6월에 걸쳐 실시된 『AKB48 37th 싱글 선발 총선거』에서는 1위로 센터를 차지했다. 2015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실시된『AKB48 41st 싱글 선발 총선거』에서는 3위로 선발 멤버로 선출되었다 드라마 싸워라서점걸 주연. 2016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실시된『AKB48 45th 싱글 선발 총선거』에서는 2위로 선발 멤버로 선출되었다. 2017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실시된『AKB48 49th 싱글 선발 총선거』에서는 2위로 선발 멤버로 선출되었다. 총선거 스피치에서 AKB48로부터의 졸업을 발표했다. 10월 31일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개최된 AKB48로부터의 본인 졸업 콘서트를 개최했다. 12월 20일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11월 22일 발매된 50th 싱글 "11월의 앵클릿"에서 센터를 맡았다. 12월 26일 AKB48 극장에서 개최된 졸업 공연을 했다. 12월 31일 AKB48 팀B 졸업. 2020년 6월 1일 소속 사무소인 프로덕션 오기에서 건강상으로 연예계를 은퇴한다고 발표, 5월 31일자로 계약 종료 및 소속사 퇴사. 동시에 연예계 은퇴. 인물 3자매의 막내. 이름인 "마유"는 할머니가 붙여주신 이름으로 "삼 (麻)나무처럼 쑥쑥 자라친구 (友)들을 많이 만드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에서 유래했다. 어머니를 "뭇티"라고 표현한다. 어린 시절에는 울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샀다는 붉은 테 안경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방은 애니메이션 상품으로 가득 차서 거실에서 잔다고 한다. 좋아하는 음료수는 유산균 음료 "피루쿠루". 좋아하는 음식은 버섯. 예전에는 싫어하는 음식이 야채 전반과 매운 음식이었으며 수영도 전혀 못했고 체육에 전반적으로 취약하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2012년 이후에는 "1년에 100개의 골칫거리 극복"을 목표로 수영은 수영장에서 5미터 헤엄칠 수 있게 되었고 달리기나 농구에도 첫 도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잘하는 건 아니다. 야채도, 찐 양배추나 인삼이라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시력이 나빠 콘택트 렌즈를 사용하고 있다. 콘택트 렌즈를 끼지 않을 때는 안경을 착용. AKB48에 가입하고 얼마 안 지났을 무렵 시부야에서 카시와기 유키와 함께 헤어모델 캐스팅 제의를 받은 경험이 있다. 일러스트를 잘 그려서 어릴 때부터 만화가를 지망했다. 『AKB 0시 59분!』의 퀴즈에서 즉흥으로 특징을 파악해 애니메이션 『사자에상』의 아나고 상 등 각종 애니메이션, 만화 캐릭터를 10초 이내에 그린다는 특기가 있다. 『주간 영 점프』 2010년 9월 9일 발매 41호에 "2차원밖에 사랑할 수 없어"를 게재하고, 만화가로 데뷔한다. 또 『아리요시 AKB공화국』의 마스코트 캐릭터의 창작자이기도 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키바계 오타쿠로, 애니메이션이나 특수 촬영 프로그램을 선호한다. 애니메이션은 주로 심야 애니메이션을 녹화해 보고 있으며 특히 『듀라라라!!』를 좋아한다. 그 외에는 『흑집사』도 즐겨보며, 애니메이션 매장에서 세바스찬 미카엘리스의 피규어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본인 왈, "5시간 정도 (피규어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미즈키 나나의 팬으로 『GIRLS' FACTORY』 2012년 4월 14일 방송분에서 미즈키가 게스트 출연했을 때 『하트 캐치 프리큐어』의 대사를 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특수 촬영물 중에는 슈퍼 전대 시리즈 『염신 전대 고온쟈』에서 아이자와 리나가 연기하는 고온 옐로우를 좋아해 코스프레도 했다. 그러나 2012년 이후에는 활동이 바빠져 애니메이션을 볼 시간도 적어졌기 때문에 스스로 애니메이션 화제를 거론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현실 세계의 남성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고 해서, "2차원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3차원의 남자를 좋아한 적이 없어."라고 키쿠치 아야카에게 말할 정도. 다만, 남장 카페에 다니거나 『AKBINGO!』의 "DANSO 코시엔"에서 의대생 남장을 했을 때는 "백의나 안경을 좋아해서 신났다"고 한 만큼, 남장에는 관심이 있다. 이 때는 미야자와 사에 (현 SNH48)에 1표 차로 우승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케부쿠로 선샤인 시티에서 개최된 『제멋대로☆페어리 미루모퐁!』의 이벤트에서 카에데 역의 나카하라 마이와 악수한 경험이 있다. 호리에 유이를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 본 애니메이션 『시스터 프린세스』와 그 오프닝 테마 곡인 "Love Destiny"에서 호리에의 존재를 처음 알고 이후 출연 작품이나 CD, 라이브 DVD를 체크하게 되었다. 와타나베의 14세 생탄제가 열린 극장 공연을 호리에가 관람했으며, 공연 종료 후에 와타나베가 인사하러 가려고 했으나 스틸 촬영 등으로 현장이 분주했기 때문에, 제대로 인사는 못했다. 그 4년 후인 2012년에 TV 애니메이션 『AKB0048』에 공동출연하게 되면서 잡지 대담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thee michelle gun elephant, BUMP OF CHICKEN, Sound Horizon을 좋아하는 아티스트로 꼽고 있다. B'z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GIRLS' FACTORY#5~PART 1~』(2012년 3월 11일 후지 TVONE)에 출연했을 때, B'z에 관해서는 루머이며,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부정했다. Sound Horizon은 가족 모두가 열중하고 있어 콘서트에 간 적도 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팬이다. 작은 언니와 효고현 다카라즈카시의 다카라즈카 대극장까지 함께 보러 갈 때가 많고, 역시 다카라즈카 가극단을 좋아하는 코바야시 마리나, 하타 사와코 (전 SKE48)와 함께 3명을 "즈카부"라고 부른다. 주조의 남자 역 스타 아사카 마나토를 "마아사마"라고 부를 만큼 팬이지만, 조에 대해서는 "화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월간 AKB48그룹 신문』 2013년 8월호 표지에서 사시하라 리노와 함께 통칭 "화조 포즈"로 불리는, 한 손을 후두부에 댄 자세로 등장했다. AKB48 관련 애칭은 "마유유". 작명자는 전 멤버인 요네자와 루미. 후배에게는 "마유상", "마유유상"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캐치 프레이즈는 "모~두의 시선을 받아먹겠습니다 마유유". 『AKBINGO!』가 시작된 초기에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앉아만 있었으며 잘 갖추어진 얼굴 생김새에서 "와타나베 마유는 CG이다", "2.5차원"이라고 한 적이 있다. 본인도 이 일을 몇번 언급했고, 제2회 선발 총선거 포스터에는 "일으켜 보이겠습니다! CG 레볼루션!!"이라는 광고 카피가 사용됐다. 머리는 한번도 염색한 적이 없다. 본인 왈, "주위에서 갈색머리를 하는 걸 봐도, 염색하고 싶었던 적이 없어요, 한번도. 머리를 칭찬받을 때도 많고, 이 검은 머리가 자신의 매력 포인트인 걸까 싶어요." 대부분의 경우, 앞머리는 왁스로 굳히고 있어 절대로 올라가는 일이 없다.(앞머리만드는데2시간걸림) AKB48에 가입해서 이마를 보인 것은 2번뿐. 라이브 사이의 MC에서도 앞머리에 신경 쓰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2017년에 갈색으로 염색했고 2016년부터는 앞머리를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내력에 기재한 대로 AKB48을 좋아해서 오디션을 받은 만큼 인생에서 처음 구입한 CD도 후에 자신의 오디션에서 부른 "벚꽃의 꽃잎들". AKB48 멤버 중 카시와기 유키(동기)와 사시하라 리노(HKT48에 이적) 등과 사이가 좋고, 오오타 아이카나 타나베 미쿠, 나카야 사야카와 "오타쿠 4"를 결성했다. 또, 남장 카페를 좋아해서, 히라지마 나츠미와 함께 가는 사이. 또 전 SKE48 멤버인 마츠시타 유이와 ℃-ute 멤버 스즈키 아이리 와도 사이가 좋다. 오오시마 유코와는 서로의 엉덩이가 마음에 들어 의기 투합해서 이후 "오시리(엉덩이) 시스터즈"를 자칭하고 있다. 와타나베는 오오시마를 "오시리코", 오오시마는 와타나베를 "시리리"라고 부른다. 평가 AKB48의 종합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는, 와타나베를 "정통파 아이돌 미소녀", "타고난 일본 아이돌입니다. 아이돌이 되기 위해 태어난 듯한 아이입니다."라고 평가했다. 『 MUSIC FAIR』에서 "사랑에 대해"를 공연한 스가시카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연기력에 대한 평가가 높아서, 제3회 선발 총선거 개표 행사 사회자에게 "드라마 『마지스카 학원』에서 어려운 역할을 호연"이라고 소개됐다. 또 『주간 플레이 보이』(슈에이샤)에서 열린 "제3회 AKB 선발 총선거 예상"에서는 『BUBKA』(코어 매거진)의 AKB48 담당자(편집장) 모리타가 ""마지스카" 네즈미 역할에 너무 빠져 버려서, 팬 이탈(순위의 저하)이 걱정"으로 예상되었지만 실제로 등수는 내려가지 않고, 획득 득표수는 전년도를 웃돌았다. AKB48에서의 참가곡 싱글 CD 선발곡 BINGO! 僕の太陽/나의 태양 夕陽を見ているか?/석양을 보고 있는가? ロマンス、イラネ/로맨스, 필요없어 桜の花びらたち2008/벚꽃의 꽃잎들2008 Baby! Baby! Baby! 大声ダイヤモンド/큰소리 다이아몬드 10年桜/10년 벚꽃 涙サプライズ!/눈물 서프라이즈! 言い訳Maybe/변명Maybe RIVER 桜の栞/벚꽃의 서표 マジスカロックンロール/마지스카 로큰롤 ポニーテールとシュシュ/포니테일과 슈슈 マジジョテッペンブルース/마지여고 정상 블루스 ヘビーローテーション/헤비 로테이션 ラッキーセブン/럭키세븐 野菜シスターズ/야채 시스터즈 - 야채 시스터즈 명의 Beginner 「チャンスの順番」/찬스의 순서에 수록 予約したクリスマス/예약한 크리스마스 ラブ・ジャンプ/러브 점프 - 팀B 명의 桜の木になろう/벚꽃 나무가 되자 誰かのために -What can I do for someone?-/누군가를 위해서 Everyday、カチューシャ/Everyday, 카츄샤 フライングゲット/플라잉 겟 青春と気づかないまま/청춘을 깨닫지 못한 채 アイスのくちづけ/아이스 입맞춤 野菜占い/야채 점 - 야채 시스터즈 2011 명의 風は吹いている/바람은 불고 있다 「上からマリコ」/위로부터 마리코에 수록 ノエルの夜/노엘의 밤 呼び捨てファンタジー/반말 판타지 - 팀B 명의 GIVE ME FIVE! 羊飼いの旅/양치기 여행 - 스페셜 걸즈B 명의 真夏のSounds good !/한여름의 Sounds good! ちょうだい、ダーリン!/줘, 달링! 君のために僕は…/너를 위해 나는... ギンガムチェック/깅엄체크 夢の河/꿈의 강 UZA 孤独な星空/고독한 별하늘 - 팀A 명의 「永遠プレッシャー」/영원 프레셔에 수록 とっておきクリスマス/소중한 크리스마스 永遠より続くように/영원보다 오래 가길 - OKL48 명의 So long ! Ruby - 시노다 Team A 명의 さよならクロール/안녕 크롤 イキルコト/산다는 것 - Team A 명의 恋するフォーチュンクッキー/사랑하는 포춘쿠키 涙のせいじゃない/눈물 탓이 아니야 ハート・エレキ/하트 일렉트릭 キスまでカウントダウン/키스까지 카운트다운 - Team A 명의 「鈴懸の木の道で「君の微笑みを夢に見る」と言ってしまったら僕たちの関係はどう変わってしまうのか、僕なりに何日か考えた上でのやや気恥ずかしい結論のようなもの」/플라타너스 나무 길에서 "너의 미소를 꿈에서 본다"고 말해 버린다면 우리들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나 나름대로 며칠간 생각한 조금 부끄러운 결론 같은 것에 수록 Mosh&Dive Party is over 前しか向かねえ / 앞 밖에 보지 않아 ラブラドール・レトリバー / 래브라도 리트리버 Bガーデン / B 가든 - Team B 명의 今日までのメロディー / 오늘까지의 멜로디 心のプラカード / 마음의 플래카드 教えてMommy / 가르쳐줘 Mommy セーラーゾンビ / 세일러 좀비 - 밀크 플래니트 명의 望的リフレイン / 희망적 리프레인 ロンリネスクラブ / 론리네스 클럽 - 팀B 명의 Green Flash 春の光 近づいた夏 / 봄의 빛 다가온 여름 履物と傘の物語 / 신발과 우산 이야기 僕たちは戦わない / 우리는 싸우지 않아 君の第二章 / 너의 제2장 ハロウィン・ナイト / 할로윈 나이트 一歩目音頭 / 첫걸음 선창 唇にBe My Baby / 입술에 Be My Baby 365日の紙飛行機 / 365일의 종이비행기 金の羽根を持つ人よ / 금날개를 가진 자여 - 팀 B 명의 背中言葉 / 등 너머로 하는 말 君はメロディー / 너는 멜로디 翼はいらない / 날개는 필요 없어 恋をすると馬鹿を見る / 사랑을 하면 손해를 본다 - 팀 B 명의 NO NAME 명의 希望について/희망에 대해서 夢は何度も生まれ変わる/꿈은 몇번이고 다시 태어난다 虹の列車/무지개 열차 この涙を君に捧ぐ/이 눈물을 너에게 바친다 主なきその声/주요한 그 목소리 少女たちよ/소녀들이여 NO NAME ver. 大声ダイヤモンド/큰 소리 다이아몬드 NO NAME ver. てもでもの涙/해도 해도 눈물 NO NAME ver. 앨범 CD 선발곡 『神曲たち』/신곡들에 수록 Baby! Baby! Baby! 自分らしさ/나다움 君と虹と太陽と/너와 무지개와 태양과 《ここにいたこと 여기에 있던 것》에 수록 少女たちよ/소녀들이여 恋愛サーカス/첫사랑 서커스 - 팀B 명의 わがままコレクション/제멋대로 컬렉션 ここにいたこと/여기 있다는 것 《1830m》에 수록 ファースト・ラビット/퍼스트 래빗 ノーカン/노카운트 - 팀B 명의 アボガドじゃね〜し…/아보가도 아니라구... 大事な時間/중요한 시간 いつか見た海の底/언젠가 본 해저 - Up-and-coming girls 명의 行ってらっしゃい/다녀오세요 青空よ 寂しくないか?/푸른 하늘이여 외롭지 않은가? 《次の足跡 다음 발자국》에 수록 After rain 確信がもてるもの / 확신하는 것 - 팀 A 명의 僕は頑張る / 나는 노력한다 Stoicな美学 / 스토아 미학 《ここがロドスだ、ここで跳べ!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에 수록 愛の存在 / 사랑의 존재 To goで / To go로 - 팀 B 명의 純情ソーダ水 / 순정 소다수 《0과 1의 문》에 수록 ミュージックジャンキー / 음악 중독자 - 팀 B 명의 クリスマスイブに泣かないように / 크리스마스 이브에 울지 않도록 극장 공연 유닛곡 팀B 1st Stage "청춘걸즈" 공연 비의 동물원 끈적이는 여름 팀B 2nd Stage "보고 싶었어" 공연 한탄의 피규어 물가의 CHERRY 등 뒤에서 껴안아줘 리오의 혁명 ※전원 참가 곡이지만 "스커트, 펄럭이며"에서는 프론트 멤버(스카히라 세븐)로 등장한다. 팀B 3rd Stage "파자마 드라이브" 공연 파자마 드라이브 팀B 4th Stage "아이돌의 새벽" 공연 유감소녀 AKB48 in 시어터 G로소 "꿈을 죽게 할 수는 없어" 공연 첫 젤리빈즈 ※ 마에다 아츠코, 치카노 리나, 스즈키 시호리의 스탠바이 팀B 5th Stage "극장의 여신" 공연 첫사랑이여 안녕 시노다 팀 A 웨이팅 공연 스커트 히라리 유리의 I LOVE YOU 요코야마 팀A 웨이팅 공연 캔디 팀B 6th Stage 「파자마 드라이브」 공연 해도해도의 눈물 팀B 7th Stage 「지금 연애 중」 공연 봄이 올 때까지 출연 TV 프로그램 AKB 1시 59분! (2008년 2월 21일 ~ 3월 27일, 닛폰 TV) AKB 0시 59분! (2008년 4월 7일 ~ 9월 29일, 닛폰 TV) AKB48 네모우스 TV (패밀리 극장) Season1 (2008년 7월 27일·10월 12일) Season2 (2009년 7월 31일 · 8월 7일 · 9월 11일 ) 스페셜 2009 (2009년 12월 28일 ) Season5 (2010년 10월 24일 · 31일) 스페셜 ~프로젝트 AKB in 마카오~ (2010년 12월 26일) Season7 (2011년 10월 2일 · 10월 9일) 스페셜 ~뉴질랜드에서 본 환상의 우주~ (2012년 6월 10일) Season14 (2014년 2월 9일 · 2월 23일 · 3월 23일) Season16 (2014년 7월 27일) Season17 (2014년 11월 16일 · 12월 21일) Season17 번외편 (2015년 1월 25일 · 2월 8일 · 2월 15일) Season18 (2015년 4월 5일 · 5월 3일 · 5월 17일 · 5월 24일) Season20 (2016년 1월 3일) Season21 (2016년 2월 21일) AKBINGO! (2008년 10월 1일 ~ 부정기 출연, 닛폰 TV) 주간 AKB (2009년 7월 10일 ~ 2012년 11월 30일 부정기 출연, TV 도쿄) 나루호도! 하이 스쿨(2010년 5월 30일 · 10월 9일 · 2011년 4월 21일 - 2012년 3월 8일, 닛폰 TV) AKB-급 구르메 스타디움 (2010년 7월 4일 · 8월 15일, 음식과 여행의 후디즈 TV) AKB와 ××! (2010년 8월 10일 · 12월 23일, 요미우리 TV) AKB48 콩트 "미묘~" (2011년 9월 29일 · 10월 6일 · 13일 · 27일 · 11월 17일 · 12월 1일, 히카리 TV) HaKaTa 백화점 (2012년 10월 21일 일본 TV) 제너레이션 천국 (2013년 1월 28일 ~ 2014년 3월 10일 부정기 출연, 후지 TV, 망고세대(유토리 세대) 대표) AKB 영상센터 "마유유의 테이블보 빼기" (2013년 5월 6일, 후지 TV) AKB48 SHOW! (2013년 10월 5일 ~ 부정기 출연, BS 프리미엄) 연애 총선거 (2014년 4월 3일 - 2014년 9월 25일 부정기 출연, 후지 TV) UTAGE! (2014년 4월 21일 ~ 2015년 9월 29일, TBS) - 진행 도우미 AKB에서 아르바이트 (2014년 7월 2일 ~ 12월 24일 부정기 출연, 후지 TV) ※ AKB 조사 (2015년 3월 26일, 후지 TV) 우리가 생각하는 밤 (2015년 7월 16일 ~ 30일, 후지 TV) Momm !! (2015년 10월 19일 ~ 부정기 출연, TBS) 정열대륙 - 와타나베 마유 편 (2015년 6월 14일, TBS) 텔레비전 드라마 마지스카 학원 (TV 도쿄) - 네즈미 역 벚꽃으로부터의 편지 ~AKB48 각각의 졸업 이야기~ (2011년 2월 26일 ~ 3월 6일, 닛폰 TV) 마지스카 학원 2 (2011년 4월 15일 ~ 7월 1일, TV 도쿄) - 네즈미 역 사바돌 (2012년 1월 13일 ~ 4월 6일, TV 도쿄) - 주연 우사 시지미 역 메구땅은 마법 사용할 수 있는 거야? 제19화 (2012년 11월 17일, 닛폰 TV) - 마유땅 역 So long! 제1화 (2013년 2월 11일, 닛폰 TV) - 카와카미 후타바 역 WONDA×AKB48 쇼트 스토리 "포춘 쿠키" (2013년 7월 7일, 후지 TV) - 타나베 미카 역 세일러 좀비 (2014년 4월 19일 ~ 7월 5일, TV 도쿄) - 먀유 역 싸우다! 서점 걸 (2015년 4월 14일 ~ 6월 9일, 후지 TV) - 주연 키타무라 아키 역 AKB 호러나이트 아드레날린의 밤 (2015년 10월 29일, TV 아사히) - 마유미 역 TV 애니메이션 ※ 굵은 글씨는 주연 짱구는 못말려 (2012년 3월 9일·16일, TV 아사히) - 마유유 역 AKB0048 (2012년) - 소노 치에리 역 AKB0048 next stage (2013년) - 소노 치에리 역 마법사 프리큐어! (2016년 10월 23일, 아사히 방송) - 마유 역 라디오 AKB48 내일까지 좀 더. (2008년 4월 28일 ~ 2012년 3월 26일 · 비정기 출연, 분카 방송) 와타리로카 하시리타이의 푸른 미래에 첫사랑 대쉬!! (2009년 1월 3일 ~ 6월 27일, CBC 라디오) ON8(2012년 2월 27일 bayfm) CM 인텔 "Ultrabook" HP 엄청 얇은 울트라 편 (2012년 7월 14일 ~ ) - 마츠이 쥬리나, 시마자키 하루카, 이리야마 안나, 오오바 미나, 나가오 마리야와 공동 출연 겡키스시 (2013년 8월 ~ , 홍콩) - 카토 레나와 공동 출연 영화 스리 데이 보이즈 (2009년 7월 4일 개봉, FREAK ENTERTAINMENT) 퍼시 잭슨과 올림포스의 신/마의 바다 (2013년 11월 1일, 20세기 폭스) - 아나베스 체이스 (알렉산드라 다다리오) 역 (일본어 더빙) 애니메이션 영화 노려진 학원 (2012년 11월 10일 공개, 마츠다케) - 나츠키 역 (주연) 서적 잡지 연재 주간 영 점프(2010년 8월 19일-, 슈에이샤) - 사시하라, 카시와기, 키타하라와 함께 "AKB48당번 연재 구루구루 4". 사진집 마유유(2011년 5월 13일, 슈에이샤) 와타나베 마유 교복 도감 마지막 교복(2013년 4월 19일, 슈에이샤) 달력 B.L.T. U-17 summer(2008년 8월 7일 도쿄 뉴스 통신사) BLTU-17 Vol.11 sizzleful girl 2009 summer(2009년 8월 5일, 도쿄 뉴스 통신사) 와타나베 마유 2011년 달력(2010년 10월 10일, 하고로모) 와타나베 마유 2012년 달력(2011년 11월 19일, 하고로모) 와타나베 마유 2012 TOKYO데이트 캘린더(2011년 11월 29일, 하고로모) 벽 AKB48-13와타나베 마유 달력 2013년(2012년 11월 30일, 하고로모) 탁상 AKB48-145와타나베 마유 달력 2013년(2012년 12월 7일, 하고로모) 벽 와타나베 마유 달력 2014년(2013년 12월 6일, 하고로모) 탁상 와타나베 마유 달력 2014년(2013년 12월 6일, 하고로모) 벽 와타나베 마유 캘린더 2015년 (2014년 12월 13일,하고 로모) 탁상 와타나베 마유 캘린더 2015년 (2014년 12월 13일,하고 로모) 벽 와타나베 마유 2016 AKB48 B2 달력 (2015년 12월 31일, AKS) 탁상 와타나베 마유 2016 AKB48 달력 (2015년 12월 31일, AKS) 작품 싱글 앨범 본인 명의가 아닌 CD 수록곡 完璧ぐ〜のね/완벽구노네~에 수록 風のバイオリン/바람의 바이올린 アッカンベー橋/아캉베다리에 수록 やさしくさせて/상냥하게 대해줘 青春のフラッグ/청춘 플래그에 수록 軟体恋愛クラゲっ娘/연체연애해파리 아가씨 廊下は走るな!/복도는 뛰지마!에 수록 麻友のために/마유를 위해서 バレンタイン・キッス/발렌타인 키스에 수록 夕陽のいじわる/석양의 장난 へたっぴウィンク/서투른 윙크에 수록 未来の恋人/미래의 연인 希望山脈/희망산맥에 수록 恋は心配性/사랑은 걱정 타이업 각주 외부 링크 와타나베 마유 공식 웹사이트 AKB48 그룹의 전 일원 그라비아 아이돌 사이타마현 출신 1994년 출생 일본의 아이돌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일본)의 음악가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여자 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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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B%B9%97%20%28%EC%86%8C%EC%84%A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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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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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은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의 작품으로 호빗 빌보 배긴스(Bilbo Baggins)의 모험을 다룬 소설이다. 내용 샤이어에 사는 호빗 빌보 배긴스의 집에 어느 날 마법사 간달프가 찾아오고, 그에 의해 난쟁이들과 모험을 떠나게 된다. 그들은 함께 무서운 용 '스마우그'가 빼앗아간 보물을 되찾으러 가는데 모험의 길에서 빌보는 위기 때마다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점점 발견하게 된다. 결국 용의 둥지로 잠입할 묘수를 짜내던 빌보는 골룸이 간직하던 반지를 얻게 되고 스마우그의 화를 돋구어 둥지밖으로 나온 스마우그는 인간 지도자에 의해 죽는다. 또한 호빗에는 반지의 제왕의 절대반지를 빌보 배긴스가 갖게 된 경위가 설명되어 있다. 가운데땅 이야기와의 연관성 톨킨의 가운데땅의 역사를 다룬 소설 중에서 제일 먼저 집필된 소설이다. 당초 톨킨은 호빗을 가운데땅과 연관시키려고 하지 않았으나, 이후 후속편에 해당하는 반지의 제왕이 집필되면서 호빗의 내용은 제3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반지전쟁과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호빗은 초판본과 이후 판본에 내용의 차이가 있다. 초판본에서 주인공인 빌보 배긴스는 골룸으로부터 절대 반지를 선물로 받지만, 이후 판본에서는 동굴을 헤매는 도중에 반지를 줍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국어 번역판 호비트, 김종철, 열음 (1979) 호비트 모험, 공덕용, 동서문화사 (1988, 1992) 호비트의 모험 1~2, 최윤정, 창작과비평사 (1989, 개정판 1991) 꼬마 호비트의 모험, 이동진, 열린 (1991) 호비트 1~2, 김석희, 시공주니어 (1999) 완역 반지제왕 0 호비트, 공덕용, 동서문화사 (중판 2002) 톨킨의 호빗, 데이비드 웬첼 그림, 이재우, 양소현, 비앤비 (2판 2002) 호빗 (일반), 이미애, 씨앗을뿌리는사람 (2002) 호빗 (양장), 이미애, 씨앗을뿌리는사람 (2002) 호비트의 모험, 공덕용, 동서문화사 (2004) 호빗 (일반), 이미애, 씨앗을뿌리는사람 (개정판 2007) 호빗 (만화), 데이비드 웬젤 그림, 이미애, 씨앗을뿌리는사람 (2009) 호빗 (양장), 이미애, 씨앗을뿌리는사람 (개정판 2010) 외부 링크 The official Harper-Collins Tolkien website Collection of edition covers, 1937–2007 The Hobbit covers around the globe – gallery Every UK edition of The Hobbit Guide to U.S. editions of Tolkien books including The Hobbit 1966 Gene Deitch 12 minute version of The Hobbit 가운데땅 책 영국 소설 1937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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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4%BC%EC%B9%B4%EB%94%9C%EB%A6%AC%EC%84%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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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딜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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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딜리 선 (Piccadilly Line) 은 런던 지하철의 노선 중 하나이며, 노선도상에서 남색으로 표시된다. 연간 승객 수로 보았을 때 런던 지하철에서 다섯 번째로 이용객이 많은 노선이기도 하며, 센트럴 선 다음으로 노선의 길이가 길다. 대부분이 고심도의 노선이며, 런던을 남에서 웨스트 런던으로 가로지른다. 52개의 역 중 25개가 지하역이다. 런던의 주요 관광지인 하이드 파크, 버킹엄 궁전, 피카딜리 서커스, 레스터 스퀘어와 코벤트 가든 등을 경유하며, 런던에서 가장 큰 공항인 런던 히드로 공항까지 운행한다. 역사 피커딜리(Piccadilly) 노선은 1906년 그레이트 노던 피커딜리 엔드 브롭든 레일웨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역명은 해머스미스,바론스 코트,얼스 코트, 글로스터 로드,사우스 캔싱턴, 브롭튼 로드, 나이트브릿지,하이드 파크 코너, 다운 스트리트, 도버 스트리트(현재 그린 파크),피커딜리 서커스, 레스터 스퀘어, 코벤트 가든, 홀본, 러셀 스퀘어, 킹스 크로스, 요크 로드, 캐날로디안 로드, 홀로웨이 로드,길리스필 로드(현대 아스날),핀스버리 파크였다. 1907년 현재 폐역된 홀본-알드위치 지선이 개통되었다.1932년 피커딜리 노선이 해머스미스에서 엑튼 타운으로 논스톱, 하운슬로 웨스트까지 디스트릭트 노선과 같은 철로를 사용했다. 1932년 핀스버리 파크부터 아노스 그로브 역까지 개통되었다. 1933년 아노스 그로브에서 오크우드까지 연장되었다. 1933년 말 오크우드애서 콕포스터즈까지 연장되었다. 1933년 말 엑튼 타운에서 옥스브리지 지선이 개통되었다.1960년경 턴함 그린역이 생겼다(자세한 내용은 밑 참고) 1977년 하운슬로 웨스트에서 히드로 센트럴 역까지 연장 되었다. 1986년 히드로 터미널 4역이 생겼다. 2008년 히드로 터미널 5역이 생겼다. Turnham Green( 턴함 그린 역) 턴함 그린 역은 디스트릭트,피커딜리 노선이 정차하는 곳인데 피커딜리 노선은 출근시간,퇴근시간만 운영한다. 기반시설 노선 미래 외부 링크 런던 지하철 노선 공항철도 1906년 개통한 철도 노선 브렌트구의 교통 시티오브웨스트민스터의 교통 엔필드구의 교통 이즐링턴구의 교통 일링구의 교통 캠던구의 교통 켄징턴 첼시 왕립구의 교통 하운즐로구의 교통 해로구의 교통 해링게이구의 교통 해머스미스 풀럼구의 교통 해크니구의 교통 힐링던구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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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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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612%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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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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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수(隋) 대업(大業) 8년 신라(新羅) 건복(建福) 29년 기년 수(隋) 양제(煬帝) 8년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34년 고구려(高句麗) 영양왕(嬰陽王) 23년 백제(百濟) 무왕(武王) 13년 사건 7월(음력) -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나라 군사 격퇴. 살수 대첩 임신서기석 건립(신라 진평왕) 문화 탄생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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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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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8%98%EB%87%A8%EA%B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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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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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뇨관 (輸尿管, ureter)은 콩팥이 배출한 오줌을 방광까지 운반하는 관이다. 수뇨관은 신문 내부에서 시작되는데, 그곳은 상당히 넓은 방처럼 되어 있어 신반 또는 신우라고 한다. 수뇨관은 전체 길이가 약 30 cm, 직경 약 3~4 mm로, 신문을 나와 후복벽을 하행하여 방광의 아래쪽인 방광저에 도달한다. 요관도 소화관 등과 마찬가지로 가장 안쪽 층에 점막, 이어서 근육층, 가장 바깥층에 결합 조직으로 된 막이 있다. 점막은 이행 상피라고 하며, 요관과 방광에서만 볼 수 있으며, 특수한 세포 구조를 갖고 있다. 이 점막에는 소화관과 달리 세로 주름이 발달해 있다. 근육층은 소화관과 반대로 내종층과 외륜층으로 되어 있으며, 일부는 외륜층 바깥에 외종층을 볼 수 있는 곳도 있다. 오줌은 이들 근육의 적극적인 작용에 의해 방광으로 보내진다. 비뇨계 배 (해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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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719%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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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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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당(唐) 개원(開元) 7년 일본(日本) 요로() 3년 발해(渤海) 천통(天統) 22년 / 발해(渤海) 인안(仁安) 원년 기년 당(唐) 현종(玄宗) 8년 신라(新羅) 성덕왕(聖德王) 18년 발해(渤海) 고왕(高王) 22년 / 무왕(武王) 원년 사건 발해, 건국 시조 대조영(고왕) 세상을 떠나고 장남 대무예가 무왕으로 왕의 자리에 오름. 연호는 인안(仁安)이라 함. 문화 탄생 사망 발해(渤海)의 초대 태왕(太王) 고왕 대조영(高王 大祚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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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D%95%EC%A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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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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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德宗)은 동아시아 제왕의 묘호 중 하나이다. 덕종(德宗, 742~805, 재위 779~805)은 당나라의 제9대 황제이다. 덕종(德宗, 1016~1034, 재위 1031~1034)은 고려의 제9대 국왕이다. 덕종(德宗, 1087~1143, 재위 1124~1143)은 서요(카라 키탄)의 초대 황제이다. 덕종(德宗, 1438~1457)은 조선 세조의 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로 추존국왕이다. 덕종(德宗, 1871~1908, 재위 1874~1908)은 청나라의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묘호이다. 같이 보기 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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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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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85%EC%9D%BC%EA%B3%84%20%EB%A3%A8%EB%A7%88%EB%8B%88%EC%95%84%EC%9D%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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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계 루마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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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계 루마니아인()은 단일한 민족 집단은 아니다. 그들을 언어, 문화, 역사 등으로 나누자면 여러 개로 나뉘는데, 가장 큰 집단은 트란실바니아 작센인과 바나트 슈바벤인이다. 그들은 중세 시대에 이 지역에 정착했다. 1988년까지만 해도 약 70만 명의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존재해 루마니아 전체 인구의 약 3%를 차지했으나, 1980년대말부터 독일로의 이민이 급증해 1990년 한 해에만 6만 명이 독일로 이주했다. 그 결과, 2011년에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독일인은 3만 7천 명으로 감소했다. 루마니아 도시의 독일어 지명 헤르만슈타트 (Hermannstadt, 루마니아어: 시비우) 크론슈타트 (Kronstadt, 루마니아어: 브라쇼브) 비스트리츠 (Bistritz, 루마니아어: 비스트리차) 클라우젠부르크 (Klausenburg, 루마니아어: 클루지나포카) 메디아슈 (Mediasch, 루마니아어: 메디아슈Mediaş) 뮐바흐 (Mühlbach, 루마니아어:세베슈) 셰스부르크 (Schässburg, 루마니아어: 시기쇼아라) 연도별 인구 (각 년도 인구센서스 결과) 1887년 - 50,000명 1930년 - 745,421명 (+1390.8%) 1948년 - 343,913명 (−53.9%) 1956년 - 384,708명 (+11.9%) 1966년 - 382,595명 (−0.5%) 1977년 - 359,109명 (−6.1%) 1992년 - 119,436명 (−66.7%) 2002년 - 59,764명 (-50.0%) 2011년 - 36,884명 (-38.3%) 루마니아의 민족 오스트리아계 루마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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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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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C%8B%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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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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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는 다음 여러가지를 뜻한다. 고시(高試)는 고등고시의 준말이다. 고시(告示)는 글로 게시하여 널리 알리는 일로, 주로 행정기관에서 일반 국민들에게 알리는 경우를 말한다. 고시(古詩)는 한시에서 후한 이전의 시, 한시에서 형식이 자유로운 고체시이다. 고시(考試)는 공무원 등의 임용 자격을 결정하는 시험이다. 고시(考試)는 과거 시험 성적으로 등수를 정하는 것이다. 지명 고시역: 일본 군마현 이세사키시에 있는 역 고시국: 일본의 옛 구니 중 하나 인명 고시( Aurobindo Ghosh)는 인도 사상가, 독립운동가이다. 호소노 고시: 일본의 정치인이자, 희망의 당 소속 중의원 의원 고시 히로카즈: 일본의 축구 선수 오쿠보 고시: 일본의 축구 선수 사얀타니 고시: 인도의 배우, 모델, 댄서 루키 고쉬: 사모아 축구 국가대표팀과 루프 올레 소아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모아 축구 선수 리투파르노 고쉬: 인도의 영화 감독, 각본가, 배우, 작가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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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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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90%ED%86%A0%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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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동음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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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교토부(京都府)는 일본 긴키 지방에 있는 행정 구역이다. 교토시(京都市)는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의 수도였으며, 현재는 교토 부의 부청 소재지이다. 교토 의정서(京都議定書)는 교토시에서 채택된 지구온난화에 관한 의정서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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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B%A8%ED%8C%8C%20%EC%88%98%EC%8B%A0%EA%B8%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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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파 수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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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파 수신기(短波受信機, )는 3MHz ~ 30MHz 사이의 주파수대인 단파를 청취할 수 있는 장치 등을 말한다. 종류 단파 수신기는 주파수 동조 방식에 따라 다이얼 튜닝식과 신시사이저식으로 나뉜다. 다이얼 튜닝식은 주로 저가 기종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주파수 선택을 더욱 원활하기 위해 단일 밴드가 아닌 스프레드 방식을 채택한 경우가 많다. 장점으로는 편리한 밴드 스캔 기능과 효율적인 소비전력이지만, 단점으로는 현재 수신하고 있는 주파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이 있다. 한편 신시사이저식은 버튼을 이용하여 튜닝하는 방식으로 주파수가 액정에 표시되어 나오기 때문에 정확한 주파수를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전력 소모가 많으며, 전파차폐설계가 잘 되어 있지 않은 경우 수신기 내부 잡음이 생길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고급 기종은 직접 키 튜닝 기능(숫자 키를 입력하여 특정 주파수에 바로 주파수를 맞추는 기능), SSB 모드 수신, 수신 필터 대역폭 설정, 동기 검파 기능 등이 있다. 또한 고가 기종으로 갈수록 1,711kHz~29,999kHz 전 영역 수신이 가능한 경우가 많으며, 중급형은 기기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으나 모든 영역 대신 정규 대역(2,300kHz~26,100kHz)만 수신이 가능한 것이 있다. 크기 및 용도에 따른 분류 단파수신기는 크기와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포터블(portable) - 휴대가 가능한 수신기로, 보통 사람들이 인식하는 '단파라디오'는 이 형태이다. 카세트 사이즈의 작은 것부터 영영사전 크기의 큰 것까지 크기가 다양하다. 탁상용(tabletop) - 탁상용으로 고안된 수신기로 크기가 크며, AC 전원, 외부 안테나 단자 등이 있다. 포터블 수신기에 비해 자잘한 기능이 포함되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 통신용(professional communications) - 이 경우 사실 '업무용 통신기'라고 해야 하는데, 탁상용 수신기의 일종이라 할 수 있으며 단파수신만 염두에 둔 것이 아닌, 업무용 통신에 고안된 것이다. PC 장착형(PC-controlled) - 일반 PC에 장착하는 형태로 영어권에서 볼 수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는 매우 드문 형태이다. 어떤 것은 DRM(디지털 단파방송)을 수신할 수 있다. 주파수 동조 방식에 따른 분류 다이얼 튜닝 방식 - 말 그대로 다이얼을 돌려서 주파수를 맞추는 방식으로 주로 저가 또는 구형 기종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정확한 주파수를 알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소비전력이 상대적으로 적고 밴드 스캔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요즘에 나오는 것들은 선국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해 단일 밴드가 아닌, 여러 밴드(SW1, SW2 등의 여러 영역)로 나뉜 스프레드 방식이 대부분이다. 신시사이저 튜닝 방식 - 수정(quartz)과 반도체로 동조하는 방식으로 요즈음의 고가 기종은 거의 대부분 이 방식이다. 경우에 따라서 PLL 동조방식의 수신기로 불리기도 한다. 정확한 주파수를 알 수 있으며, 주파수를 저장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경우에 따라 전화기 버튼 누르듯 바로 원하는 주파수로 맞추는 기능도 있다. 단점은 상대적으로 전력 소모가 많으며 전파차폐설계가 잘 되어 있지 않은 경우 수신기 내부 잡음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DSP 수신기도 이쪽에 속한다. 가성(假性) 신시사이저 튜닝 방식 - 일부 저가/초저가 중국제 기종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액정 화면에 주파수 숫자가 나오는 것은 맞으나 실제 동조는 수정(quartz)이 아닌 일반 바리콘(variable capacitor)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주파수 저장 기능은 없으며, 1~5kHz 정도의 오차가 발생한다. 중간 주파수 전환 횟수에 따른 분류 중간주파수 전환횟수에 따라 단파수신기를 싱글 컨버전, 듀얼 컨버전, 또는 다중 컨버전으로 나눌 수 있다. 싱글 컨버전 - 중간주파수 전환횟수를 1번만 하는 방식으로 AM부는 중간주파수(IF)가 대개 455kHz이다. 이 방식은 저가 기종에 많다. 생산단가가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튜닝 안정도와 선택도가 듀얼 컨버전에 비해 떨어지며 자신이 수신하는 주파수에서 910kHz 아래로 이미지가 생기는 문제점이 있다. 예를 들면 7140kHz에서 하고 있는 방송을 6230kHz로 맞춰놓아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상치 못한 주파수에서 방송을 수신하였을 때는 이 주파수가 실제 방송 주파수가 아니라 이미지 신호일 수도 있다. 듀얼 컨버전 - 싱글 컨버전 수신기에 발생하는 영상방해(이미지)의 영향을 감소시키기 위해 중간주파수 전환을 2번하는 방식이다. 1차 중간주파수는 기종에 따라 다른데 보급형은 10.7MHz, 중급은 약 22MHz, 고급형은 약 55MHz이다. 2차 중간주파수는 대개 455kHz이다. 싱글 컨버전에 비해 이미지 현상이 적으나, 기종에 따라 차폐정도에 따라 이미지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특히 신호가 너무 강할 때) 다중 컨버전 - 중간주파수 전환횟수를 3번 이상하는 방식으로 통신형 기종이나 (과거에는) 고급형 탁상용 수신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직접변환 방식 - 중간주파수(IF) 변환없이 바로 신호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DSP 수신기에서 쓰이는 방식이다. 수신신호처리 방식에 따른 분류 재래식 수신기 - DSP 수신기의 상용화 이전의 모든 수신기가 이에 해당하며, 지금도 상당수의 단파라디오는 DSP식이 아닌 재래식이다. DSP 수신기에 비해 미약신호 대처능력은 뛰어나나 회로가 비교적 복잡하고 필터 처리에서 보다 많은 기술이 필요하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부속품의 변형의 영향을 받는다는 단점이 있다. DSP 수신기 - 재래식 수신기와 다르게 수신신호를 디지털로 변환, 처리하는 수신기. 감도, 선택도가 뛰어나며 회로 구성이 비교적 간단하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디지털 필터 기능은 재래식 수신기의 경우 일부 고가의 고급 수신기에서만 구현할 수 있었던 필터 대역폭 설정기능을 중저가형 기종에서도 구현할 수 있게 해준다. 재래식 수신기에 비해 외부잡음에 대한 내구성이 뛰어난 편이다. 특히 FM방송의 경우 이미지 신호 대처능력이 매우 우수하다. 다만 Soft Muting 기능 때문에 미약신호 수신할 때나 페이딩이 심할 때 거슬리는 경우가 있으며, 디지털(AD-DA) 변환을 거쳐 중파, 단파방송의 경우 특유의 음색 때문에 선호와 비선호가 갈리는 경우가 있다. DSP 수신칩은 미국의 Silicon Lab 사가 주로 생산하며, 2009년부터 일반적인 포터블 단파수신기에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수신기 제조업체 과거에는 소니, 파나소닉, 아이와, 도시바같은 일본 회사들과 그룬디히, 필립스 등 유럽권 가전업체들이 여러 단파수신기를 발매하였으나 1990년대 후반 이후 단파방송의 퇴조로 이들 업체들이 2018년에 소니를 끝으로 단파라디오 시장에서 전면 철수하였다. 2018년 기준으로는 텍선(TECSUN), 데겐(DEGEN), 산진(SANGEAN)과 같은 중화권 전자제품 제조업체들이 단파수신기를 생산, 발매하고 있다. 텍선 (TECSUN) 1994년 중국 광둥성 둥관시에서 창업한 기업이다. 2000년대 초반에는 가성비 좋은 단파수신기로 주목을 받았고(PL-757, R-911 등),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DSP 기반의 기종들(PL-380, PL-310ET, PL-880, PL-990 등)이 절찬리에 발매 중이다. 재래식 PLL 방식의 기종인 PL-660 등은 소니 ICF-SW7600GR의 좋은 대체 기종으로 꼽힌다. 산진 (SANGEAN) 1974년에 설립하여 수십년 간 단파수신기를 생산해 온 대만의 전자 기업으로, 신베이시 중허구에 본사가 있다. 현재 ATS-909X2가 플래그십 기종으로 꼽힌다. 다만 2020년대에 들어선 후에는 단파라디오 모델의 비중이 크지 않으며, 현재 나오고 있는 단파라디오는 아날로그식인 SG-622, 디지털식인 ATS-405/ATS-909X2가 전부다. 405와 909X2는 모두 DSP식 단파라디오며, 909X2가 올 밴드 단파라디오이고 405는 정규 단파 대역만 수신이 가능하다. 소니 오랜 기간동안 포터블 단파수신기 시장에서 명성을 떨치던 일본 가전업체였으나, 2018년 2월 ICF-SW7600GR를 마지막으로 단파수신기의 생산을 전면 종료하였다. 주요 기종으로는 ICF-SW11, ICF-SW22, ICF-SW7600GR, ICF-SW1S, ICF-SW100S, ICF-SW55, ICF-SW77 등이 있었다. 1970년대에는 스카이센서 시리즈로 널리 알려졌다. 1987년에 출시된 ICF-SW1S는 카세트 테이프 사이즈의 초소형, 다성능에 호화 패키지가 특색이었고, 1994년에 출시된 ICF-SW100S는 SSB와 같은 고급기능까지 집약하여 전자사전 크기의 초소형 사이즈로 압축한 것이 특색이었다. 2001년에 출시된 ICF-SW7600GR은 최후의 플래그십 기종으로서 2018년까지 발매되었다. 파나소닉 소니와 다르게 파나소닉은 1990년대 후반부터 사실상 철수에 가까운 수준을 보였고, 그 명맥은 2010년 RF-B11의 단종으로 완전히 끊겼다. 과거에는 Proceed 시리즈, Cougar 시리즈로 어느정도 인지도가 있었다. 기타 업체 독일의 그룬디히(Grundig)는 2003년 부도 이전에는 Satellit 시리즈(준탁상용 고급기종)와 Yacht Boy 시리즈(포터블 기종)로 북미, 유럽시장을 중심으로 상당한 인지도와 매출이 있었다. 이후 그룬디히의 단파라디오 분야 브랜드는 미국의 eton사에 인수된 상태이며, eton사 인수 이후에 출시된 기종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전직 우주비행사 버즈 올드린이 개발과정에 참여한 Grundig G6 Aviator가 있다. 중국의 데겐(DEGEN)은 2000년대 중반에 발매된 DE1102, DE1103 기종으로 인지도를 얻었다. 중국의 Kchibo는 저가, 저성능의 단파수신기를 양산해왔다. 대한민국에서는 롯데알미늄에서 나오는 아날로그식 라디오인 핑키-250/260이 유일한 단파라디오다. 같이 보기 단파 단파 청취 각주 외부 링크 미국 소니 웹사이트(영어) 일본 소니 웹사이트(일본어) 대만 산진 홈페이지(영어/번체자 중국어) 중국 텍선 영문 홈페이지 중국 데겐 영문 홈페이지 통신공학 전파수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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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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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AC%ED%8C%90%EC%A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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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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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적(裁判籍, venue)이란 미국의 민사소송법의 개념으로 사건이 처리되는 장소 곧 법원을 뜻한다. 예를 들어 연방 복수 주간 분쟁의 경우에 재판적은 피고와 원고가 같은 주에 살고 있다면 그 주의 연방법원이 될 것이고 혹은 분쟁이 많은 부분이 발생한 곳의 법원이 재판적이 될 것이다. 재판적은 관할권과 차이를 가지는데 재판적은 헌법적인 충족사항을 가지고 있지 않다. 관할권이 주로 헌법적 기술적인 문제라면 재판적인 편의를 목적으로 한다. 고려대상 피고의 주소지 사건이 발생한 곳(예: 불법행위로 인하여 손해가 발생하거나 계약이 체결된 장소 혹은 계쟁물 토지가 위치한 장소) 피고가 일하거나 사업을 벌이고 있는 곳 참고 문헌 서철원, 『미국 민사소송법』. 법원사, 2005. 조상희, 『법학전문대학원 민사소송법 기본강의』. 한국학술정보(주), 2009. 같이 보기 보통재판적 특별재판적 영미법 미국의 법 민사소송법 법률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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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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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38M%20%ED%86%A8%EB%94%9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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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M 톨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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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디 경전차는 스웨덴 L-60B 전차에 기초하여 개발된 헝가리의 경전차였다. 이 전차는 14세기 헝가리의 가상 기사인 미클로스 톨디의 이름을 땄다. 톨디 경전차는 스웨덴의 AB 란트스베르크와 면허 생산 계약을 체결하고 헝가리에서 1939년부터 1942년까지 202대가 생산되었다. 제원 길이 : 4.75m 넓이 : 2.14 m 높이 : 1.87 m 중량 : 8.5 t (I), 9.3 t(IIa) 노상 속도 : 47 km/h 항속 거리 : 200 km 주요 무장 : 20mm 기관포 (톨디I 및 톨디II), 40 mm 포 (톨디IIa 및 톨디III) 부무장 : 1 x 8 mm 기관총 최대 장갑 : 20 mm (I), 35 mm (II) 엔진 : 155 hp (116 kW) 승무원 : 3 변형 톨디I - 20mm 기관포를 장착한 첫 번째 모델. 총 80대가 생산됨 톨디II - 전면 장갑을 보강한 개량형. 110대가 생산됨 톨디IIa - 1942년에 무장을 40mm 포로 교체한 것이다. 초기 생산형 중에서 80대가 개량되었다. 톨디III - 최종형. 겨우 12대만 생산되었다. 실전 기록 톨디 경전차는 1940년에 헝가리군에 배치되기 시작하여 첫 전투를 독일군과 함께 1941년에 유고슬라비아 왕국 침공에 사용되었다. 1941년 6월 이후에 이 전차들은 1941년 ~ 1944년까지 소련과 전쟁에 투입되어 경장갑 및 무장, 우수한 통신기기 성능을 활용하여 주로 정찰 임무에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헝가리 전차 경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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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A7%8C%EC%9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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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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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일(金萬日, 1944년 ~ 1947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주석이었던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난 2남 1녀 중 차남이고, 김정일의 남동생이다. 본관은 전주. 본명인 김만일보다 소련식 이름인 "슈라(Шура, Shura)"로 불렸다고 한다. 김만일의 이름을 김수라(金受羅)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어릴 때 "유라(Юра, Yura)"라는 소련식 이름으로 불렸던 김정일을 매우 잘 따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여름 평양시에 있는 김일성 관저에 있던 연못에서 김정일과 함께 놀다가 익사했다. 당시 4세였던 김만일의 죽음은 김정일이 여동생 김경희를 매우 아끼는 계기가 되었다. 김정일 동생 이름이 김평일(金平日)이었다는 주장 김정일의 동생 이름이 김만일 아닌 김평일(金平日)이라는 주장도 있다.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이었고, 소련군 제88독립보병여단 부여단장이었던 이조린(李兆麟)의 아내 김정순(金貞順, 조선족)의 증언이다. 김정일 동생 슈라는 한국식 이름이 없었다 흔히 일찍 죽은 김정일의 동생의 이름이 김만일(金萬日) 또는 김평일(金平日)이었다고 하나, 그는 소련에서 태어날 당시부터 슈라로 불렸으며, 일찍 죽었으므로 한국식 이름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방 직후 김일성은 집에 고바야시 카즈코(小林和子) 등 2명의 일본인 여성을 하녀로 두었다. 고바야시는 일본으로 돌아와 1970년에 쓴 『나는 김일성 수상의 하녀였다 (私は金日成首相の小間使いだった)』라는 글에서 김일성의 두 아들 이름을 유라와 슈라로 칭하고 있다. 당시 이들에게는 한국식 이름이 없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3월 1일에 부산의 국제신보는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의 증언을 보도하는데, 김일성의 자녀로 11세된 아들 김유라와 5세인 딸 김경자가 있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김정일은 한국전 당시까지도 김유라로 불리고 있었으며, 동생 김경희의 처음 이름은 김경자일 가능성이 있다. 1951년까지도 김정일이 소련식 이름 유라로 불리고 있었다면 1947년에 죽은 동생도 죽을 때까지 한국식 이름 없이 슈라로 불렸을 것이다. 김정일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남산고급중학교를 다녔는데, 동창생의 후일 증언에 의하면 당시 그의 이름은 '김유라'였다고 하며,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할 때인 1960년 7월에 처음으로 김정일(金正一)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 후 1980년 후계자로 결정될 때 다시 김정일(金正日)로 한자를 고쳤다. 김정일이 김만일을 죽였다는 주장 일각에서는 김만일이 김일성 관저 연못에서 놀고 있는데 김정일이 김만일의 등을 떠밀었고 그 때문에 김만일이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같은 동생이라 하더라도 김경희는 여자였기 때문에 일단 후계선상에서 논외로 간주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꼈고 반면 김만일은 남자였기 때문에 김일성의 후계자 계승을 놓고 경쟁해야 하므로 김정일이 김만일을 죽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시 김정일은 고작 7살에 불과했으며 김만일 역시 4살에 불과해 후계 문제를 고려할 정도의 나이가 되지 못하므로 근거없는 주장이다. 같이 보기 1946년의 김일성 가족 사진 : 슈라(김만일)가 나오는 사진. 金万一 : 일본어 위키백과 Kim Man-il : wikipedia 가계 각주 1944년 출생 1947년 사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 익사한 사람 전주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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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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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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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Q, Eq, eq는 다음 뜻을 가지고 있다. EQ에는 지능 지수(IQ)와 관련한 다음 두 가지가 있다. 교육지수(educational quotient)의 약자 EQ. 감성지수(emotional quotient)의 약자 EQ - 인간의 정서적인 능력을 재는 척도를 말한다. '같음'(EQ, equal) - 프로그래밍 언어 혹은 논리 연산에서 같음을 나타내는 연산자로 사용된다. 이퀄라이저(equalizer) 당량(equival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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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VALENTI%20%28%EB%85%B8%EB%9E%9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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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TI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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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NTI〉는 가수 보아가 일본에서 발매한 6번째 싱글이다. 싱글의 타이틀 〈VALENTI〉의 작곡은 〈LISTEN TO MY HEART〉를 작곡한 하라 가즈히로가 다시 맡았다. 제목의 "VALENTI"는 포르투갈어로 "용감하다"라는 뜻이다. 강렬하고 흥겨운 라틴 댄스 곡으로, D3 Publisher의 게임 《PROJECT MINERVA》의 광고 음악으로 사용되었다. 뮤직 비디오는 곡 분위기에 맞게 붉은 민소매 옷을 입은 보아가, 바닷가가 보이는 방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댄서들과 노래에 맞춰 춤을 추거나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주 부분 이후에는 배경이 밤으로 바뀌며, 보아의 팔과 다리에서 불꽃을 일으키기도 한다. 뮤직 비디오를 촬영할 때 너무 춤을 열심히 춰 다음 날 움직일 수 없었다는 일화가 있다. 커플링 곡은 한국 2집 앨범 《No.1·늘..》의 수록곡이었던 〈Realize (stay with me)〉가 일본어판으로 번안되어 수록되었다. 〈VALENTI〉는 발매 이후 상당한 인기를 끌게 되어, 2003년 1월 29일 발매되었던 일본 정규 2집 앨범의 타이틀도 《VALENTI》로 정해졌고, 첫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또한, 발매 직후 한국어판으로 번안되어 한국 스페셜 앨범 《MIRACLE》의 타이틀 곡으로 수록되었으며, 2005년 발매된 첫 베스트 《BEST OF SOUL》에도 수록되었다. 태고의 달인에서도 수록(아케이드판 5). 트랙 리스트 CD VALENTI Realize (stay with me) VALENTI (English Version) VALENTI (Instrumental) 차트 기록 〈VALENTI〉는 오리콘 일간 차트에서 첫날 4위를 기록했지만, 순위가 계속 상승하며 2위까지 기록했고, 발매 첫주 순위도 결국 2위를 기록했다.(당시 1위는 히라이 켄의 〈〉가 차지했다.) 이후 안정적인 하락폭을 기록하며 3주 후에는 다음 싱글인 〈奇蹟ㆍNO.1〉과 함께 오리콘 주간 차트 5위권 내에 진입했다. 보아의 싱글들 중 유일하게 20만장을 돌파한 싱글이자,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다. 오리콘 싱글 차트 각주 2002년 싱글 보아의 노래 2002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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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EC%95%BC%EA%B5%AC%EC%9C%84%EC%9B%90%ED%9A%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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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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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야구위원회 또는 KBO(Korea Baseball Organization), 또는 KBO 사무국(Office of the Commissioner, KBO)은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사단법인으로 KBO 리그를 총괄하는 기구이다. 야구를 통하여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고 각종 국제 대회의 참가로 국제친선에 공헌할 목적으로 1981년 12월11일 창립 총회를 열고 출범하였다. 원년출범부터 한국야구위원회(韓國野球委員會)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2015년 브랜드 통합에 따라 명칭을 KBO로 변경하고 리그와 구분하기 위해 KBO 사무국이라는 명칭도 사용된다.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남대로 278에 있다. 연혁 1981년 12월 11일 창립 1982년 3월 2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개막전으로 리그 시작 2011년 1월 1일 기준으로 게임회사인 엔씨소프트에서 2012년에 2군 퓨처스리그 참가 및 2013년에 1군리그 참가를 목표로 통합 창원시에 제9구단을 창단하겠다고 선언했다.2011년 2월 8일자로 KBO로부터 창단승인을 받아 2013년 NC 다이노스라는 팀명으로 9번째 구단으로 프로리그에 참여하고 있다. 2013년 통신회사인 KT가 경기도 수원시에 제10구단 창단을 선언하고 KBO가 창단을 승인하여 팀명 kt 위즈로 정식창단하였다. 2014년까지 2군 리그 참가 후 2015년부터 1군 리그에 정식 참여하고 있다. 2020년 5월 5일에 개막한 2020년 KBO 리그는 미국 ESPN과 일본 SPOZONE를 통해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지역에 생중계되었다. 조직 한국야구위원회는 총재를 정점으로 사무총장과 운영본부장이 관할하는 사무국, 마케팅 사업을 벌이는 자회사 KBOP, 심판위원회, 기록위원회, 기술위원회, 육성위원회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비상설 기구로 상벌위원회, 규칙위원회와 야구원로자문위원회(위원장 어우홍)를 두고 있다. 총재 KBO 총재는 KBO를 대표하고, 관리 통할하는 자리이다. 임기는 3년이며 "총재가 결정하는 지시, 재정, 재결, 제재는 최종 결정이며 위원회에 속하는 모든 단체와 개인에게 적용"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다. 역대 총재 사무총장 역대 사무총장 주요 활동 KBO 리그 관리, 통괄 페넌트레이스, 올스타전,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KBO 한국시리즈 주최 야구 경기 기록, 관련 자료의 수집과 조사 및 분석 연구 국제 야구 활동 교류 추진 아마추어 야구의 발전을 위한 제반 지원 활동 TV 및 라디오 방송중계권 계약 활동 야구 기술의 개발 및 지도 보급 야구 관계자의 상벌 및 복지 사업 회원 간의 연락 및 친선 야구 박물관, 도서관 및 회관의 설치 운영 한국 프로 야구 연감 및 간행물 발간 한국야구위원회 재산/회계 관리 기타 목적 달성에 필요한 사업 관련 문서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KBO 리그 KBO 퓨처스리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각주 외부 링크 1981년 설립된 스포츠 단체 대한민국의 스포츠 단체 대한민국의 스포츠 행정 기구 대한민국의 야구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야구 단체 사단법인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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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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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AC%EC%A7%80%EA%B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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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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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가(龟旨歌)는 영신가(迎神歌)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삼국유사 가락국기 권2에 기록된 고대 한국의 민요이다. 구지가는 서기 42년에 창작되었으며, 지금까지 문서로 확인되는 최초의 한국 민요이다. 이 노래는 고대 가야인들이 신의 명을 받아 신을 맞이하기 위해 구지봉에서 흙을 파낼 때 불렀던 노래이다. "삼국유사 기이"는 "구지가"와 매우 흡사한 "해가(:zh:海歌)"를 수록하고 있다. 이 노래는 구조와 가사가 구지가와 매우 유사하지만 내용과 형식이 더 풍부하다. 내용 참조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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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A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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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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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P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ALP (자동차)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Australian Labor Party): 오스트레일리아의 중도좌파 정당 액세스 리눅스 플랫폼(Access Linux Platform) 르장드르 연관 함수(Associated Legendre polynomials) AlP: 인화 알루미늄의 분자식 알칼리성 인산가수분해효소(Alkaline phosphatase): 효소 액시온 계열 입자 알레포 국제공항(Aleppo International Airport): 시리아의 국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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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C%AD%EC%A7%93%EC%A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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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짓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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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에서 꼭짓점 또는 정점(-點, 頂點, , , )은 다양한 뜻을 가진다. 평면 기하학에서의 꼭짓점 평면 위의 1점 O를 끝점으로 하는 2개의 반직선 OA, OB를 그 평면 위에 그었을 때, ∠AOB의 점 O를 각의 꼭짓점이라 한다. 또, 2개의 반직선 OA, OB를 각의 변이라 한다. 다각형에서는 둘레의 두 변이 만나는 점이 꼭짓점이며, 1개의 꼭짓점에서 만나는 2개의 변이 이루는 내부의 각을 내각(內角)이라 한다. 내각을 때로는 꼭지각이라고도 한다. 또, 이등변삼각형에서 꼭짓점이라고 할 때는 2개의 등변이 만나는 점을 말하며, 이 꼭짓점에 대한 내각을 특히 꼭지각이라 한다. 각뿔과 원뿔에서 보통 꼭짓점이라고 할 때는 밑면에 대한 꼭짓점을 말한다. 즉, 각뿔의 측면에 있는 각 삼각형의 공통인 꼭짓점을 각뿔의 꼭짓점, 또 원뿔의 밑면 위에 없는 축의 끝점을 원뿔의 꼭짓점이라 한다. 또, 포물선과 그 축과의 교점을 포물선의 꼭짓점이라 한다. 쌍곡선에서는 2개의 초점을 지나는 직선과 곡선과의 교점이 꼭짓점이며, 2개 가지고 있다. 타원에서는 장축과 단축이 곡선과 만나는 4점이 꼭짓점이다. 폴리토프의 꼭짓점 다각형 · 다면체와 같은 폴리토프에서 꼭짓점은 차원 폴리토프의 개 이상의 차원 (초)면들이 교차하는 점이다. 다각형의 경우, 꼭짓점의 수로 분류한다. 예를 들어, 다각형은 개의 꼭짓점을 갖는다. 그래프 이론에서의 꼭짓점 그래프는 꼭짓점과 변으로 구성되어 있는 수학적 대상이다. 다면체의 변과 꼭짓점은 그래프로 볼 수 있으므로, 이는 폴리토프의 꼭짓점의 개념의 일반화이다. 외부 링크 유클리드 기하학 그래프 이론 다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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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SPC%EC%82%BC%EB%A6%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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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삼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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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C삼립(SPC三立, SPC Samlip Corporation)은 대한민국의 제빵 전문 식품회사로 본사는 경기도 시흥시 공단1대로 101(정왕동)에 있다. 국민간식으로 인기있는 호빵, 크림빵 등으로 잘 알려진 SPC삼립은 코레일유통에서 판매하는 제빵업과 관련된 제분, 계란, 육가공 등의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하는 한편 식품유통과 물류, 컨세션 사업 등의 신규사업을 확대하고 있으며 1977년 창업주 허창성의 장남 허영선에게 경영권이 넘어갔고, 허영선 회장은 1980년대와 1990년대 들어 회사의 주력 분야인 제빵 분야의 매출이 점차 줄어들자 리조트와 외식업 등 다양한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아 부도를 내고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며 1999년 국찐이빵이 대 히트를 쳤으나 과거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결국 1994년 출범한 태인샤니그룹 계열 샤니에 2002년 인수되었고, 샤니는 2004년 SPC그룹을 출범시켜 해당 기업(당시 삼립식품)의 역사까지 승계했다. 한편, 기린과의 제휴를 통해 영남시장에서 기린이 삼립빵을 생산,판매토록 하면서 직접 진출을 미뤘으나 업체간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1989년 1월 대구공장이 가동됐다. 아울러, 1972년 대일유업과 기술제휴를 맺었다가 1976년 6월 기술제휴가 종료되어 한국에서 철수한 퍼모스트 아이스크림을 1988년 4월 재상륙시켰으나 배스킨라빈스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자 1994년을 끝으로 한국에서 철수했다. 연혁 1945년 10월 28일 제과공장 상미당(賞美堂) 설립 1959년 3월 삼립제과공사 설립, 용산공장 가동 시작 1961년 10월 삼립산업 제과공사로 상호 변경 (비스켓류, 빵생산 개시) 1966년 4월 삼립산업 제빵공사로 상호 변경 1968년 6월 28일 삼립식품공업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1969년 4월 구로구 가리봉동 산 67의 2에 신사옥 준공 1971년 10월 호빵 출시 1979년 5월 청주공장 준공 1989년 1월 대구공장 가동 1995년 1월 삼립식품공업(주)에서 (주)삼립G.F로 상호 변경 1995년 3월 시화공단 내 신공장 준공 1997년 3월 14일 (주)삼립G.F에서 (주)삼립식품으로 상호 변경 1997년 3월 15일 그간 해왔던 관광사업 등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외환위기를 앞두고 부도를 맞고, 회사정리절차에 돌입했다. 1999년 2월 회사정리절차 종료를 하였고 기사회생으로 돌입했다. 1999년 3월 국찐이빵 출시 2002년 11월 25일 파리크라상 컨소시엄의 인수 확정 2004년 4월 1일 삽립 크림빵 출시 2006년 2월 고급 떡 프랜차이즈 '빚은' 사업 개시 2010년 2월 고급 떡 프랜차이즈 '빚은', 키자니아 서울 내 '떡집' 체험관 오픈 2011년 4월 (주)샤니와 영업양수도 계약 체결 2012년 12월 지배회사의 종속기업인 (주)밀다원 인수 2013년 7월 그릭슈바인(구 알프스식품) 인수 2014년 7월 주식회사 삼립GFS(현 SPC GFS) 분할설립 2015년 3월 삼립 리듬타는 꿀호떡 출시 2016년 10월 28일 (주)삼립식품에서 (주)SPC삼립으로 상호 변경 2016년 12월 1일 삼립 롤케익 출시 2018년 7월 3일 주식회사 밀다원, 에그팜, 그릭슈바인 흡수합병 2020년 9월 26일 토요일 일요일 통화 가능 2020년 10월 5일 그동안 단종되었던 삼립호빵 골드 재출시 2020년 11월 13일 삼립호빵 판매50주년 기념으로 서체글 선보여 2022년 3월 삼립 포켓몬 빵 재출시 2023년 5월 1일 이데일리TV 방송국 계약 확정 본점 및 지점 현황 본점 : 경기도 시흥시 공단1대로 101 (정왕동) 신대방지점 : 서울특별시 동작구 신대방16다길 14 (신대방동) 성남지점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둔촌대로457번길 13 (상대원동) 부산지점 : 부산광역시 사상구 장인로 3 (감전동) 광주지점 :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산단5번로 67 (장덕동) 천안지점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대흥로 239 (대흥동) 서초지점 : 서울특별시 서초구 강남대로 369 (서초동) 인천지점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석정로 339 (도화동) 대전지점 :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로738번길 104 (신탄진동) 김천지점 : 경상북도 김천시 농소면 경부고속도로 193 공장 현황 청주공장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산단로 88 (송정동) 대구공장 :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논공중앙로54길 7 충주공장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주덕농공길 73 세종공장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진동길 15 서천공장 :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종천공단길14번길 52 성남2공장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갈마치로244번길 15 (상대원동) 계열사 SPC그룹 파리바게뜨 비알코리아 배스킨라빈스 던킨 도너츠 샤니 SPC GFS SPC캐피탈(2021년 1월 매각) 파리크라상 각주 외부 링크 SPC삼립 공식 홈페이지 제과공장 상미당 제과공장 상미당 삼립산업제과 삼립산업제과 삼립산업제과공사 삼립산업제과공사 삼립산업제빵공사 삼립산업제빵공사 삼립식품공업 삼립식품공업 삼립G·F 삼립G·F 삼립식품 삼립식품 2016년 설립된 기업 SPC의 자회사 대한민국의 식품회사 베이커리 전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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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6%98%EC%B2%9C%20%EC%B9%A0%EC%B8%B5%EC%84%9D%ED%8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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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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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칠층석탑(春川 七層石塔)은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소양로 2가에 있는, 고려시대의 칠층석탑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77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춘천 시가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조선 인조 때 이곳의 현감이었던 유정립이 인조반정으로 파직당하고 낙향하여 이 탑 부근에 집을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충원사(忠圓寺)’라는 글이 새겨진 그릇을 발견하여, 충원사 내에 속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한국전쟁 때 심한 손상을 입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기단의 일부가 지하에 파묻혀 있었는데, 지난 2000년에 시행된 전면적인 보수공사로 기단부의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 석탑은 아랫부분을 발굴 조사한 결과 2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이 놓여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윗층 기단도 탑몸돌에 비하여 제법 넓어 안정감이 있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널판돌을 놓아 1층 탑몸돌을 괴고 있다. 7층에 이르는 탑신(塔身)은 위로 올라가면서 그 크기가 적당히 줄고 있는데, 기단이 넓은 것에 비해 몸돌이 작아 주목되지만 7층이나 되는 높이가 비례의 불균형을 보충하여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까지가 6단이고 4층 이상은 5단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경쾌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 중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진 상태여서 아쉬움을 주고 있고,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거의 파손된 상태이다. 참고 문헌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에 있는 사진 강원특별자치도의 보물 칠층석탑 고려의 석탑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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