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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88%ED%83%80%EC%9D%B4%EB%84%88%20%EB%B6%84%EA%B2%AC%EA%B5%B0
슈타이너 분견군
슈타이너 분견군()은 야전군보다 작고 군단보다 규모가 큰 임시 편제로 1945년 4월 21일 베를린 공방전 당시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서류상으로만 편성된 부대였다. 이 분견군의 지휘관은 펠릭스 슈타이너 SS대장이었다. 히틀러는 슈타이너 SS대장이 동 분견군을 이끌고 베를린을 목표로 하고 있던 소련군의 북쪽 주공점에 효과적인 역공을 가하길 바랐었다. 4월 22일 작전 회의 당시 히틀러는 실제로 그 역공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자 눈물까지 흘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전쟁에 패배했다고 선언하고 장군들을 비난했다. 그리고 함락될 때까지 베를린에 머물겠으며, 그후에는 자살하겠다고 밝혔다. 베를린 공방전 둘째날인 4월 17일, 바익셀 집단군 사령관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상급대장은 집단군 예비 부대인 슈타이너 SS대장의 3 SS 기갑 군단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자랑했던 11 SS 의용 기갑척탄병 사단 노르트란트와 23 SS 의용 기갑척탄병 사단 네데르란트 두 사단을 차출했다. 하인리치 상급대장은 테오도어 부세 보병대장의 9 군에 두 사단과 3 SS 기갑 군단에 속해 있던 여타 부대 대부분을 배속시켰다. 노르트란트 사단은 9 공수 사단이 수비하고 있던 젤로 고지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헬무트 바이틀링 포병대장의 56 기갑 군단에 배속되었다. 네데르란트 사단은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 남서쪽으로 보내져 5 SS 산악 군단에 배속되었으며, 할베 전투에서 괴멸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인리치 상급대장은 젤로 고지를 돌파한 후 베를린을 포위 중에 있던 주코프 원수의 소련 제1 벨로루시 전선군으로부터 3 기갑군의 남익을 방어하기 위해 3개 대대와 한줌의 전차로 줄어버린 제3 SS 기갑 군단에 어떻게든 병력을 그러모아 핀노 운하를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4월 21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던 아돌프 히틀러는 전력이 피폐해진 부대들을 슈타이너 SS대장 휘하에 모아 슈타이너 분견군을 조직했다. 그리고 슈타이너 SS대장에게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의 돌파에 의해 생긴 거대 돌출부의 북익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와 동시에 제9군이 돌출부 남쪽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이 공격을 위해 슈타이너 SS대장은—핀로 운하 북쪽에 배치되어 있던—제9군 소속의 4 SS경찰기갑척탄병사단, 5 경보병 사단, 25 기갑척탄병 사단 3개 사단을 배속받았다. 바이틀링 포병대장의 56 기갑 군단은 베르노이헨 바로 아래 북익을 둔 채 베를린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북익에 있던 앞서 언급한 3개 사단은 에버스발데(베를린 동쪽 24킬로미터)에서 남쪽에 위치한 제56 기갑 군단 방향으로 공격해 나아가 1 벨로루시 전선군의 돌출부를 분단할 예정이었다. 슈타이너 SS대장은 하인리치 상급대장에게 전화해 제5 경보병 사단과 제25 기갑척탄병 사단을 방어 임무에 투입해야 하고, 2 해군 사단이 내륙에 도착해 교대하기 전까지는 두 사단을 빼낼 수 없다며 계획의 실행이 불가능함을 알렸다. 이를 제외하고 작전에 동원 가능한 건 무장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4 SS 경찰 기갑척탄병 사단의 2개 대대뿐이었다. 하인리치 상급대장은 육군 참모총장인 한스 크렙스 보병대장에게 전화해 계획의 불가함을 말하며 히틀러에게 계획의 재고를 요청했지만, 총통이 바쁘다는 소리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4월 22일 오후 작전 회의에서 히틀러는 슈타이너 SS대장이 공격을 가하지 않을 걸 확신하고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격분하고 말았다. 그는 전쟁에 패배했다고 선언하고 장군을 비난했다. 그리고 종말이 올 때까지 베를린에 머물겠으며, 그후에는 자살하겠다고 밝혔다. 4월 22일 이후 슈타이너 분견군은 총통 벙커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더 보기 11 SS 기갑군은 바익셀 집단군 소속으로 슈타이너 SS대장 지휘하에 1945년 2월 당시 오데르 강 동안에서 전투를 벌였다. 1945년 3월 동군은 11 군으로 개칭 및 재편되어 서방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서부 전구 총사령부에 배속되었다. 슈타이너 SS대장은 3 SS 기갑 군단장으로 복귀했고, 동 군단은 11 군에서 바익셀 집단군 소속의 3 기갑군으로 전속되었다. 1945년 당시 슈타이너 SS대장이 11 군을 지휘했기 때문인지 종종 슈타이너 분견군과 혼동되고 있다. 참고 문헌 Beevor, Antony. Berlin: The Downfall 1945, Penguin Books, 2002, Ziemke, Earl F. Battle For Berlin: End Of The Third Reich, NY:Ballantine Books, London:Macdomald & Co, 1969. 각주 1945년 설립 1945년 폐지 무장친위대의 야전군 베를린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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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C%BD%94%ED%83%84%EC%84%AC
시코탄섬
시코탄섬(, , )은 쿠릴 열도의 남동쪽 끝에 있는 섬이다. 아이누어로는 최고의 장소라는 의미이다. 현재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고 있으나,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2016년 기준 인구는 2,917명이다. 여름에는 짙은 안개와 한랭한 냉대 습윤 기후 때문에 작물 재배가 어려운 편으로, 어업이 주민 생계의 주가 된다. 크게 2개의 마을이 있는데 섬의 중심지로서 시코탄(斜古丹)으로 불리던 말로쿠릴스코예와 아나마(穴澗)로 불리던 크라보자보츠코예이다. 같이 보기 쿠릴 열도 분쟁 사할린 한민족 남쿠릴 열도 네무로반도 노삿푸곶 하보마이촌 쿠나시르섬 이투루프섬 하보마이 군도 카부섬 쿠릴 열도 남쿠릴 열도 일본의 영토 분쟁 러시아의 영토 분쟁 쿠릴 열도 사할린주 영토 분쟁 섬 아시아의 영토 분쟁 소련-일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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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82%AC%EB%8B%AC
아사달
아사달(阿斯達)은 고조선(古朝鮮)의 수도로 전해지는 지명이다. 백악산 아사달(白岳山阿斯達), 궁홀산(弓忽山) 금며달(今㫆達)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가 인용한 《고기(古記)》에 따르면, 단군이 평양성에 고조선을 세웠다가 아사달로 도읍지를 옮겨서 약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며, 이후 기자(箕子)를 피해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다고 한다. 아사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개요 아사달(阿斯達)은 단군이 세운 고조선(古朝鮮)의 수도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유사》가 인용한 《위서》(魏書)에 따르면 아사달은 단군조선의 도읍지이며 아사달에 도읍하고 나라를 건국한 시기는 중국 신화 속의 제왕인 요(堯)와 같은 시기라고 한다. 한편 이어서 인용된 《고기(古記)》에 따르면 단군이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였다가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로 옮겨 1,500년 동안 다스렸으며, 기자조선이 성립되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고조선은 도읍지를 여러 차례 옮긴 것이 된다. 한편 《삼국유사》와 더불어 단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인 《제왕운기》는 《본기(本紀)》라는 현전하지 않는 기록을 인용하여 단군이 상나라 무정 8년에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국통감》과 《동사강목》은 《제왕운기》의 기록을 중심으로 하여 아사달을 단군이 은거하여 신이 된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위치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아사달의 위치에 대하여 무엽산(無葉山), 백악(白岳) 등 산으로 이해하여 백주(白州,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로 비정하는 기록과 개성 동쪽의 백악궁(白岳宮, 현재는 위치 미상)으로 비정하는 기록을 함께 전하고 있다. 《제왕운기》에는 황해도 구월산으로 비정되어 있다.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는 신지선인(神誌仙人)의 비사(秘詞)에 있는 백아강(白牙岡)에 대한 설을 인용하여 지금의 평양을 아사달로 비정하고 있기도 하다. 윤내현은 《고조선 연구》에서 아사달 및 고조선의 중심지 위치가 다섯 차례 이동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사학계에서는 아사달은 신화 속의 장소이므로 실제 위치가 어디인지를 굳이 고증하지 않는다. 어원에 대한 견해 아사달이 조선(朝鮮)을 의미하는 고유어라는 견해도 있다. 이병도는 아사달의 뜻을 '아침의 땅', '아침의 산', '빛나는 아침의 땅' 등으로 해석하고, 아침 조(朝)자와 빛날 선(鮮)자를 합쳐서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아사달의 '아사'는 아침의 한국 고대어일 것이며, '달'은 양달(陽地)·응달(陰地)의 '달'(地)과 같이 땅을 뜻하는 것으로 아사달은 조양(朝陽) 또는 조광(朝光)의 땅이라는 뜻인데, 이것이 한자로 조선(朝鮮)으로 표기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같이 보기 고조선(古朝鮮) 단군(檀君) 평양성(平壤城) 장당경(藏唐京) 고조선의 건국 신화 각주 단군 고조선의 수도 한국 신화의 장소 신화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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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6%AC%EC%B9%B4%EB%A5%B4%EB%8F%84%20%EC%83%A4%EC%9D%B4
리카르도 샤이
리카르도 샤이(, 1953년 2월 20일 ~ )는 이탈리아의 지휘자이다. 경력 밀라노에서 작곡가 루치아노 샤이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음악이론과 작곡 등을 배웠다. 이어 페루자와 밀라노의 음악원에서 수학했고, 동시에 시에나 음악원에서는 프랑코 페라라에게 지휘를 배웠다. 스무 살 때인 1973년에는 고향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음악감독을 맡고 있던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부지휘자로 발탁되어 경험을 쌓았고, 1978년에 같은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자로 공식 데뷔했다. 이어 빈 국립 오페라 극장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런던의 코번트 가든 왕립 오페라,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등에 객원 출연해 신예 오페라 지휘자로 절찬을 받았다. 오페라 외에 콘서트 지휘자로도 활동을 시작해, 1980년에 27세의 나이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5번을 영국의 데카 레코드에 취입해 화제가 되었다. 1982년에는 서베를린 방송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했고, 이어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와 볼로냐 시립 극장의 지휘자를 겸임했다. 베를린 재임기에는 당시 상당히 뜸하게 다루어지던 브루크너의 초기 교향곡들이나 푸치니의 관현악 작품들, 말러의 미완성 유작인 교향곡 제10번의 데릭 쿡 연주회용 보완판을 과감히 공연하고 녹음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8년에는 콘세르트헤바우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발탁되었고, 이 때도 베를린 시절부터 계속 작업해오던 브루크너와 말러의 교향곡 녹음을 계속 이어서 진행해 전집 세트를 완성시켰다. 동시에 악단을 네덜란드 오페라단 공연의 호스트 관현악단으로도 출연시켜 오페라 연주 경험을 쌓게 하였으며, 힌데미트와 메시앙, 바레즈 등 근현대 음악의 보급과 녹음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9년에는 밀라노를 기반으로 한 신생 관현악단인 밀라노 주세페 베르디 교향악단의 초대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이 악단과도 로시니와 베르디, 푸치니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나 근래에 새로이 발굴된 작품들을 모은 음반을 시리즈로 출반하는 등 독자적인 기획물을 계속 내놓았다. 또 2002년에 임기가 끝날 예정이었던 콘세르트헤바우와도 2년 연장 계약을 맺었고, 2004년 퇴임한 후에는 악단으로부터 명예 지휘자 직함을 받기도 했다. 2005년에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카펠마이스터와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음악 총감독에 임명되었고, 게반트하우스 취임 연주회에서 공연한 멘델스존의 교향곡 제2번 《찬미가》는 전속 음반사인 데카에서 실황으로 발매되었다. 이어 말러가 재편곡한 슈만의 교향곡 전집 등 이채로운 레퍼토리들을 계속 공연하고 녹음하고 있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야니너 얀선이나 피아니스트 넬손 프레이레와 멘델스존, 브루흐, 브람스의 여러 협주곡들도 음반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2008년 5월에는 당초 2010년까지로 되어 있던 게반트하우스의 카펠마이스터 계약을 2015년까지 연장해 악단과의 좋은 관계를 드러내기도 했으나, 겸임하던 라이프치히 오페라 에서는 경영진과의 불화가 심해져 오히려 사임했다. 비슷한 시기에는 심장 이상이 겹쳐 잠시 입원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회복되어 계속 게반트하우스를 주축으로 공연하고 있다. 1980년부터 시작한 데카와의 계약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으며, 상임 지휘자 등 주요 직책을 맡은 악단과의 녹음들 외에도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쇼스타코비치의 '댄스 앨범' 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녹음하는 등 객원 자격으로도 다른 악단과 작업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요 직책의 악단에 각별히 집중하는 작업 스타일 때문에 객원 지휘 횟수나 녹음은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 매우 적은 편이다. 에피소드 클래식 음악에 전념하고 있지만, 한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는 소년 시절 용돈을 벌기 위해 주말마다 리듬 앤 블루스 밴드에서 드럼 연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1984년 11월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순회 공연 때 객원 지휘자 자격으로 처음 내한했다. 이때 피아니스트 이경숙과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을 협연했는데, 공연 중에 이경숙이 일시적으로 악보를 기억하지 못해 연주가 중단될 뻔한 일이 한국 언론에 보도됐다. 서훈 1994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2등급(Grande Ufficiale OMRI) 1998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1등급(Cavaliere di Gran Croce OMRI) 각주 외부 링크 195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밀라노 출신 이탈리아의 지휘자 프랑스계 이탈리아인
126682
https://ko.wikipedia.org/wiki/%EC%95%85%EC%83%81%EC%96%B4
악상어
악상어(학명: Lamna ditropis)는 몸길이가 최대 3.36m 내외로, 암컷과 수컷이 멀리 떨어져 살다가 번식기에 만나 짝짓기하는 습성이 있는 상어다. 다른 악상어과의 상어와 마찬가지로 역류 열교환 시스템을 갖추어 주변의 수온보다 높은 체온을 유지한다. 가까운 친척인 비악상어(Pobeagle 학명: Lamna nasus)와 동종으로 여겨지다가 최근에 다른 종으로 분류되었다. 난폭해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사람을 공격한 보고는 없다. 연승 어업으로 어획되는데, 고기와 기름은 식용한다. 일본에서는 악상어의 심장을 회로 먹기도 한다. 각주 악상어과 1947년 기재된 물고기 태평양의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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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B%84%EA%B2%BD
후경
후경(侯景, ? ~ 552년)은 북위(北魏) · 동위(東魏) · 양(梁)의 장군이며, 자는 만경(萬景)이다. 갈족(羯族) 출신이며, 삭방군(朔方郡) 또는 안문군(雁門郡) 태생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추존한 원황제(元皇帝) 후표(侯標)이며, 할아버지는 후을우주(侯乙羽周)이다. 생애 524년 육진의 난이 발생하자 갈영(葛榮)을 따라 활약했으며, 이후 하음의 변으로 북위(北魏)의 이주영(爾朱榮)이 실권을 장악하자 휘하로 들어가 528년 부구(滏口)에서 갈영을 공격할 당시 갈영을 사로잡는 등의 공을 세워 정주자사(定州刺史)에 임명되었다. 이후 북위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된 이후에는 동위의 고환(高歡)의 밑으로 들어갔으며, 사도(司徒) 및 하남대행대(河南大行臺)를 더해 하남(河南) 방면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 뒤 고환이 사망하자 아들인 고징(高澄)이 후경을 살해하려 하였고, 이에 후경은 반란을 일으켜 서위의 우문태(宇文泰)를 의지하였다. 하지만 반란이 한궤(韓軌)에 의해 토벌되자 547년 양나라(梁)의 무제(武帝)에게로 귀순하였고, 아내 및 장남 후화(侯和) 등이 살해되었다. 이후 무제의 후원을 받아 하남왕(河南王) · 대장군(大將軍) · 지절(持節)을 제수받았으며, 고징이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후경의 토벌을 지시하자 정양후(貞陽侯) 소연명(蕭淵明)과 함께 군대를 이끌었으나 패배하여 소연명은 동위의 포로가 되었다. 그 뒤 양나라와 동위의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소연명과 후경의 맞교환이 추진되자 반란을 일으켰으며, 548년 왕위(王偉)와 소정덕(蕭正德)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뒤 양나라의 수도인 건강(建康)을 공격하였다. 이후 건강의 외성이 함락되자 소정덕을 황제로 추대하였고, 549년 건강의 내성까지 함락된 이후 무제가 분사(憤死)하자 후경은 태자였던 간문제을 옹립하고 소정덕을 폐위시켰다. 그 뒤 스스로 상국(相國) · 우주대장군(宇宙大將軍) · 도독육합제군사(都督六合諸軍事)에 올랐으며, 간문제의 딸인 율양공주(溧陽公主)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간문제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551년 간문제를 살해하고 예장왕(豫章王) 소동(蕭棟)을 제위에 올렸으며, 후경은 한왕(漢王)을 자칭하였다. 이후 같은 해 소동을 핍박해 구석(九錫)을 누렸으며, 다시 같은 해 선양(禪讓)을 받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한(漢)이라고 하고 연호를 태시(太始)로 정해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552년 상동왕(湘東王) 소역이 보낸 진패선(陳霸先)과 왕승변(王僧辯)에게 패해 수도가 함락되었으며, 후경은 자기 자식들을 익사시킨 뒤 한 척의 배를 타고 도주하였으나 부하인 양곤(羊鵾)에 의해 살해되었다. 사망 이후 후경의 유해는 갈기갈기 찢기고, 목은 강릉(江陵)의 성문에 걸렸으며, 왕승변이 후경의 두 팔과 두 다리를 잘라 북제(北齊)의 문선제(文宣帝)에게 보냈다. 또한 후경의 시체는 건강 시장 바닥에 버려졌으며, 건강의 서민들은 후경의 시체를 회로 떠 먹었다. 같이 보기 후경의 난 생년 미상 552년 사망 중국의 황제 양 (남조)의 섭정 양 (남조)의 대장군 북위의 장군 남북조 시대의 사도 남북조 시대의 사공 중국의 참주 중국의 망명자 6세기 중국 사람 6세기 중국의 군주 창업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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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D%99%98%20%28%EB%B6%81%EC%9C%84%29
고환 (북위)
제 고조 신무황제 고환(齊 高祖 神武皇帝 高歡, 496년 ~ 547년 2월 13일(음력 1월 8일))은 강태공의 50세손이자 강태공의 후손인 11세손 고혜(강혜)의 39대손이다. 중국 북제의 추존 황제다. 생애 초기 고환의 6대조 고은(高隱)은 서진(西晋) 현도군(玄菟郡)의 태수(太守)였다. 고은의 아들 고경(高慶), 고경의 아들 고태(高泰), 고태의 아들 고호(高湖) 삼대는 모용씨(慕容氏)를 섬겼다. 고호의 아들 고밀(高謐)은 회삭진(懷朔鎭)으로 쫓겨났기에, 후세는 회삭진에서 나왔다. '대대로 북변에 있었기에 그곳의 풍속을 익혀 관습을 지키는 것이 선비와 같았(累世北邊, 故習其俗, 遵同鮮卑)'기에, 집안 대대로로 '선비화'되었다. 『북제서(北齊書)』 「신무(神武)상」에 의하면, 고환은 '눈에 광채가 있고 머리가 길고 뺨이 높았으며 이는 옥처럼 희었다. 젊어서부터 인걸의 풍모를 띠었다. 생각이 깊고 뜻이 컸으며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사인을 중시하였으며 사인들과는 두루 사귀고 호협으로부터는 존경을 받았다(目有精光, 長頭高顴, 齒白如玉, 少有人傑表, 深沉有大度, 輕財重士, 廣結士人, 爲豪俠所宗)고 하였다. 고환의 모친 한기희(韓期姬)는 고수생(高樹生)의 정실이었으며, 고환 출생 직후에 사망하였다. 고수생은 고환을 고환의 누이 고루근(高婁斤)과 자부 위경(尉景)에게 맡겨 키웠다. 육진의 난(六鎭之亂)이 발발하자, 앞뒤로 두락주(杜洛周), 갈영(葛榮)에 투항하였고, 후에 이주영(爾朱榮)에게 투항하였다. 고환은 이주영에게 호태후(胡太后)의 친신 정엄(鄭儼)과 서흘(徐紇)을 토벌하고 '청군측(淸君側, 군주 주변의 간신을 숙청)'하는 계략을 제출했다. 이로 인해 이주영이 고환의 능력을 알아봤다. 하음의 변(河陰之變) 이후에는 이주영이 조정을 장악하였고, 고환은 진주자사(晋州刺史)에 임명되었다. 창업 후에 북위 효장제(孝莊帝)가 이주영을 죽이자, 이주씨는 군대를 일으켜 효장제를 토벌하여 사살하였다. 이주씨는 장광왕(長廣王) 원엽(元曄)을 황제로 세웠다. 고환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후에 고환은 육진의 난을 진압하면서 얻은 항복 병사들을 통솔하여 파견하게 해달라고 이주조(爾朱兆)를 설득하였고, 더불어 그들을 데리고 하북(河北)으로 갔다. 이주씨는 잔인하였기에 고환은 이주씨를 토벌하려 하였다. 이때 이주조는 모용소종(慕容紹宗)의 건의를 듣고 고환을 없애려 했다. 그러나 고환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고, 이주조와 자신이 형제의 의를 맺게 되었고, 방비를 하지 않았다. 이주도률(爾朱度律)이 원엽을 폐하고 절민제(節閔帝)를 세웠으며, 고환을 발해왕(渤海王)으로 봉하였으며, 그를 불러들여 입조하게 하였다. 고환은 계략이 있을 것을 알고 거절하였다. 이윽고 고환은 신도(信都)에서 기병하여, 관할 내 종실인 발해태수(勃海太守) 원랑(元朗)을 황제로 삼았으며 공식적으로 이주씨를 토벌하였다. 1년의 전투 동안 한릉 전투(韓陵之戰)라는 대전을 거치면서, 고환은 이주조, 이주세륭(爾朱世隆), 이주언백(爾朱彥伯), 이주천광(爾朱天光) 이주도률(爾朱度律), 이주중원(爾朱仲遠) 등을 격파하였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모용소종이 항복하였고 고환은 그를 중용하였다. 고환은 원랑의 세계가 한미하여 황제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다른 황제를 세우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절민제를 받들고자 하여 복야(僕射) 위란근(魏蘭根)을 파견하여 절민제를 관찰하게 하였다. 그러나 절민제는 풍채가 뛰어나서 위란근은 후에 다루기 어렵다고 보았고, 이에 고건(高乾) 형제와 황문시랑(黃門侍郞) 최릉(崔㥄)과 함께 절민제는 이주씨가 옹립하였으니 받들면 기병의 명분이 없다고 하여 고환에게 폐위할 것을 건의하였다. 고환은 다시 여남왕(汝南王) 원열(元悅)이 북위 효문제(北魏孝文帝) 원굉(元宏)의 아들이기에 그가 계승할 만하다 여겼고, 이에 원열에게 옹립의 뜻을 보였지만 원열은 성품이 가볍과 광폭하며 행동에 과실이 많았기에, 고환은 옹립 계획을 포기하였으며, 절민제와 원랑을 폐하고 효문제의 손자 원수(元修)를 세웠으니, 그가 북위의 북위 효무제(孝武帝)였다. 절민제는 불사에 수감하였다. 고환은 대승상천주대장군태사세습정주자사(大丞相·天柱大將軍·太師·世襲定州刺史)가 되었고 15만호로 증봉되었으나, 천주대장군(天柱大將軍)을 거절하여 5만호를 감하였다. 고환이 대권을 독점하면서 효무제는 불만을 가졌다. 효무제는 하발악(賀拔岳)과 연합하여 고환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고환의 친신 사공(司空) 고건(高乾)이 고환에게 효무제의 생각을 몰래 고하였다. 그 결과 고건은 효무제에게 죽임 당하였다. 고환은 울면서 '천자가 사공을 함부로 죽였다(天子枉害司空)'고 말하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또한 고건이 대표하는 한인 호족 세력은 고환의 적계가 아니었으며, 그 죽음 역시 고환이 고의로 차도살인한 것이라고도 봄) 고환은 후막진열(侯莫陳悅)에게 하발악을 죽이게 하였고 후경(侯景)을 파견하여 하발악의 부대를 접수하게 하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하발악의 부하가 우문태(宇文泰)를 주인으로 받들면서 후경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우문태는 하발악의 복수를 명분으로 거병하였고 격문을 작성하여 고환을 토벌하게 하였다. 534년 효무제는 관중(關中)으로 도주하여 우문태에게 투항하였으나, 고환은 원선견(元善見)을 다시 옹립하였으니, 이가 효정제(孝靜帝)이다. 이후 고환은 업(鄴)으로 천도하였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동위(東魏)라고 한다. 고환은 동위의 재상이 되었다. 그해 12월, 우문태가 효무제를 죽이고 원보거(元寶炬)를 황제로 세웠으며 장안(長安)을 도읍으로 삼았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서위(西魏)라 한다. 이로써 동위와 서위가 대치하게 되었다. 쾌도난마의 고사 고환이 하루는 아들들의 재주를 시험할 목적으로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는 어지럽게 뒤엉킨 삼실 한뭉치씩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풀도록 하였다. 고환의 다른 아들들은 모두 한올 한올씩 뽑아내느라 진땀을 흘렸으나, 둘째 아들인 고양은 칼 한자루를 들고 와 삼실을 베어버리며 어지러운 것은 베어 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고환은 고양이 장차 큰일을 할 인물이라 생각하며 기뻐하였다. 고양은 뒤에 효정제를 몰아내고 북제의 문선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백성들을 탄압하는 폭군이 되었다. 출신 논쟁 고환 가문은 한족 문벌 발해고씨(渤海高氏)에서 나왔다는 인식이 고대에는 의문시되지 않았으나, 일본학자 하마구치 시게쿠니(濱口重国)가 최초로 사서에 기록된 고환 가문의 족속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1938년 하마구치는 「高斉出自考———高欢の制霸と河北の豪族高乾兄弟の活跃」라는 논문을 냈고, 여기에서 그는 고환 가문이 원래 발해고씨 출신이 아니며, 사서에서 고환의 증조부 고호를 발해고씨 일족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고윤(高允)의 부친 고도(高韜)의 동생으로 한 것이 위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문벌을 중시하는 세태로 인하여 무명 가문 출신인 고환이 발해고씨를 사칭하여 가문의 지위를 높여야 했으며, 특히 고환이 이주씨를 대상으로 반기를 들면서 기주(冀州) 일대 호족, 특히 고건 형제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발해고씨 일족의 세계 및 조부 고호가 고윤의 부친 고도의 동생이라는 것을 사칭했다는 것이다. 하마구치는 고환의 가문이 한족 출신이라는 것에도 의구심을 보이며, 고호의 자손 대부분이 선비식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고밀을 포함한 고호 자손의 거주지가 하주(河州)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고밀은 하주에서 회삭진으로 이사하였을 가능서이 높지만, 하마구치의 주장은 추측에 불과하다. 중국 학자 요미원(姚薇元), 주일량(周一良), 무월(繆鉞) 등이 모두 북제 황실 세계 족속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역사 문헌의 기재에 대하여 질의를 제기했다. 요미원은 사학계에서 북조 호성(胡姓) 문제를 연구하는 가장 권위 있는 학자로, 고환의 선대는 선비족에서 나온 누씨(樓氏)라고 주장하였다. 20세기 중엽 이후 관련 논저 중에 고씨 세계 족속 문제에 대하여 많이 다뤘으며, 또한 이에 대해 재차 탐구한 글도 많다. 왕중락(王仲犖)의 『위진남북조사(魏晋南北朝史)』는 고환 족속 문제에 대하여 진술한 바,,그는 한편으로 고환 가문은 선비족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또한 사서에 기재된 바, 고환이 '죄를 지어 북진으로 이주한(坐法徙居北鎭)' 고밀의 자손이라는 기록에 대해서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으며, 동시대 학자인 오카자키 후미오(岡崎文夫), 진인각(陳寅恪), 전목(錢穆) 등은 고환 가문은 한족 출신이라고 주장하였다. 선비출신론에 대하여 장금룡(張金龍)은 부정하면서, 북위와 북주 통치자는 호인(胡人) 출신이라고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고환은 가보를 위조할 필요도 없었기에 고환은 확실히 한족 출신이나 선비문화를 크게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가족 관계 부모 부친 : 문목황제(文穆皇帝) 고수생(高樹生) 모친 : 문목황후(文穆皇后) 한기희(韓期姬) 후비 왕자 왕녀 각주 496년 출생 547년 사망 북위의 섭정 북위의 태사 북위의 장군 북제의 추존황제 5세기 중국 사람 6세기 중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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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기아
펄기아는 포켓몬스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가공의 캐릭터 (몬스터)이다. 특징 공간을 조종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공간의 연결을 자유롭게 조종하여 먼 장소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 진주를 연상시키는 구체가 어깨에 박혀 있다. 밝고 불그스름한 바탕색의 몸에 자주빛 줄무늬가 있다. 등에는 날개 모양의 지느러미 한 쌍이 달려 있다. 작품 내의 신화에서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시간의 신이라 불리는 디아루가와 함께 신오지방을 창조했다고 전해진다. 디아루가의 대립점에 있는 포켓몬이고 암컷과 수컷이 없다. 키는 4.2m에 몸무게는 336kg이다. 물, 드래곤 타입이다. 교차되는 곳이 없이 늘어선 공간의 틈새에 산다고 전해진다. 게임에서의 펄기아 《포켓몬스터 DP 디아루가/펄기아》중 《포켓몬스터 DP 디아루가》 버전에서는 등장하지 않으며, 《포켓몬스터 DP 펄기아》 버전에서는 천관산에서 출현한다. 잡을 때에는 레벨이 47이고 기술은 물의파동, 원시의힘, 드래곤크루, 공간절단을 사용한다. 또한 전용 아이템인 백옥을 지니게 하면 펄기아가 사용하는 물타입과 드래곤타입 기술의 위력이 올라간다. 포켓몬스터Pt 기라티나에서는 디아루가와 함께 레벨 70으로 나온다. 전용기술은 공간절단이다. 《포켓몬스터 DP 디아루가/펄기아》 중에서 《포켓몬스터 DP 펄기아》에서만 잡을 수 있는 포켓몬이다. 《포켓몬 고》에서 2019년 2월 한달동안 5성 레이드 배틀에 나오고 2020년 7월말 8월초에 개최된 드래곤 위크에서 디아루가, 기라티나 어나더폼, 오리진폼과 함께 5성 레이드에 등장했다. 포켓몬스터 샤이닝 펄 버전에서 등장을 하였다. LEGEND 아르세우스에서 오리진폼이 등장했다. 애니메이션에서의 펄기아 《포켓몬스터 DP》 오프닝에서 디아루가와 루카리오와 함께 등장. 《포켓몬스터 DP》 4기에서 디아루가와 같이 태홍이 가진 붉은쇠사슬의 힘에 조종당한다. 포켓몬 더 무비 XY: 후파: 광륜의 초마신에 등장한다. 그 외에서의 펄기아 《디아루가 vs 펄기아 vs 다크라이》에서는 디아루가와 치열한 결투를 벌이다 현세의 아라모스 타운에 강림을 했다. 그런데 지우가 오라시온이라는 음반을 시공의 탑에 들려주자 디아루가는 사라지고 펄기아는 시간과 공간을 되돌려 놓았다. 그래서 세계를 멸망시킬 뻔했다. 여기서 펄기아가 아라모스에 나타난 이유는 디아루가가 펄기아의 진주를 깨뜨려 공격을 피하려다가 공간을 아라모스타운으로 피했기 때문이다. 《아르세우스 초극의 시공으로》에서 디아루가와 그가 11기에서 끌여들인 기라티나와 환상의 포켓몬인 아르세우스와 더불어 싸운다. 같이 보기 포켓몬스터 포켓몬의 목록 4세대 포켓몬 목록 드래곤 포켓몬 물 포켓몬 전설 포켓몬 제4세대 포켓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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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나주 (브라질)
파라나주()는 브라질 남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주로, 마투그로수두술주, 상파울루주, 산타카타리나주과 이웃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남회귀선이 지나는 파라나에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아열대 숲 중 하나인 아라우카리아 숲이 남아 있다. 아르헨티나와의 국경에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이구아수 국립공원이 있다. 파라과이와의 국경에서 40km 떨어진 곳에 세계에서 가장 큰 댐인 이타이푸 수력 발전 댐이 건설되었다. 브라질 기준으로 범죄율은 낮은 것으로 간주되며 브라질은 국내 총생산에서 리우데자네이루, 상파울루, 미나스제라이스 주 다음으로 4위를 차지하는 가장 발전된 주 중 하나이다. 주요 도시 쿠리치바 론드리나 마링가 포스두이구아수 폰타그로사 카스카베우 구아라푸아바 파라나구아 인구 파라나 주 사진 모음 각주 외부 링크 브라질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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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民族解放民衆民主主義革命論, )은 1980년대 초부터 형성된 대한민국 학생운동권의 혁명이론이다. 그 골자는 대한민국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보면서 그 식민지성때문에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는 반봉건사회(나중에 반자본주의 사회로 성격규정을 변경)로 보는것, 즉 식민지반봉건사회로 보는 것이다. 학술적으로는 마오쩌둥 사상과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자민통-NL노선'과 '제독-PD노선'으로 분화되었다. 분파 식민지반봉건론 '자민통-NL노선'으로 요약된다. 대한민국 사회를 일제 시기와 같은 수준의 구식민성을 갖춘 미국의 식민지로 보고, 당대 혁명의 단계를 민주주의혁명으로 본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을 더 우위에 두며, 이에 따라 반제투쟁에서 노동계급의 주도성을 부정하고, 민족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중시하였다. 그 이론의 핵은 라틴 아메리카의 종속이론이었으며, 주체사상의 영향도 미미하게 받았다.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제독-PD노선'으로 요약된다. 대한민국 사회를 일제 시기와는 다른, '신식민지사회'(新植民地社會)로 규정한다. 신식민지사회는 '예속의 심화'에 기반한 자본주의발전을 불러오며, 1980년대 시점에서 한국자본주의 정도는 그 착취성에 따라 독점자본주의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민족모순은 남아 있기에 대한민국은 본질적으로 반식민반자본주의사회이며, 따라서 역시 당대 혁명의 단계를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보았다. 이론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의 일부분 영향을 받았다. 참고자료 각주 대한민국의 역사 대한민국의 정치 대한민국의 운동권 민족해방파 민중민주파 정치 이념 대한민국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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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텅구리 헛물켜기
〈멍텅구리 헛물켜기〉는 한국 최초의 네컷 만화 및 연재만화이며, 또한 한국 최초로 분업적 만화 창작을 거친 만화인 동시에 한국 최초로 영화로 각색된 만화이다. 개요 《조선일보》에 1924년 10월 13일부터 3면에 노수현의 〈멍텅구리 헛물켜기〉가 연재되어 2년 5개월 동안 총 501회가 연재되었으며, 1927년 3월 11일 막을 내렸다. 멍텅구리 헛물켜기는 천리구(千里駒) 김동성(金洞成)이 기획하고 줄거리는 이상협(李相協)과 안재홍(安在鴻)이 구성하였다. 이때 김동성은 노수현의 만화 스승이기도 하다. 당시 새로운 지면 구성을 강구하던 《조선일보》의 간부들이 생각을 모아 만들어냈다. 그때 미국에서 유행하던 조즈 맥마너스의 가정만화 〈매기와 지그스〉가 합작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실마리를 얻어 각자 여러 분야로 분업하여 만들어낸 작품이다. 주요 등장인물에는 최멍텅과 신옥매, 윤바람이며, 제목 〈멍텅구리 헛물켜기〉는 주제명 ‘멍텅구리’에 단원명 ‘헛물켜기’로 이루어져 있다. 한 단원이 끝날 때까지는 매일 소재마다 제목이 붙었다. 제1회 소제목은 ‘초대면’인데, 이는 독자에게 만화를 처음 선뵌다는 뜻이다. 당시에는 이 만화의 주인공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으며, 1926년 반도 키네마에서 영화 《멍텅구리》로 각색하여 인사동에 있던 조선극장에서 상영하였다. 이때의 배우로는 신인이었던 이필우와 박덕양을 출연시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각주 일제강점기의 만화 일제강점기의 영화 작품 네 컷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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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서
소방서(消防署, )는 화재를 예방·경계하거나 진압하고 화재, 재난·재해, 그 밖의 위급한 상황에서의 구조·구급 활동 등을 통하여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을 보호하는 공공 기관이다. 대한민국의 소방서는 소방기본법 및 대통령령인 지방소방기관 설치에 관한 규정, 광역자치단체별 조례에 의하여 설치된다. 대한민국의 소방관서 조직 소방기관이란 소방장비, 인력 등을 동원하여 소방업무를 수행하는 소방서·119안전센터·119구조대·119구급대·119구조구급센터·항공구조구급대·소방정대(消防艇隊)·119지역대를 말한다. 본서 대한민국의 소방관서는 행정업무(소방행정, 예방검사교육, 구조구급통계, 신고접수 등)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서장 직속으로 과를 두고, 각 과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과장 직속의 팀을 둔다. 위의 조직을 본서라 칭하는 경우가 많다. 본서는 소방서의 규모에 따라 2개 ~ 4개의 과를 둔다. 대개 소방행정과(또는 지원과), 예방과, 구조구급과(또는 방호구조과)를 두고 있다. 119안전센터 화재·구급업무에 대응하기 위해 119안전센터를 둔다. 본서와 같은 곳에 위치한 안전센터를 직할119안전센터, 그 외 읍면동에 위치한 안전센터를 외곽119안전센터라 부른다. 기존의 소방관들은 '소방파출소'라 부르던 관성이 남아있어 직할119안전센터를 직파(직할소방파출소의 준말) 또는 중파(본서에 위치한 직할센터를 두고 하는 말/중앙 파출소의 준말)로, 외곽119안전센터를 외파(외곽소방파출소의 준말)로 부르기도 한다. 119지역대 소방수요가 있으나 119안전센터를 설치할만한 수요가 아닌 경우에는 인근 119안전센터 산하에 119지역대를 두어 관할하게 한다. 상대적으로 직할119내 안전센터는 인구밀집지역인 경우가 많아 보유차량과 인원이 많고, 외곽119안전센터는 상대적으로 보유차량과 인원이 적다. 119지역대의 경우 소방관 2명이 2조2교대로 근무하는 경우도 있다. 이전 명칭은 소방파견소, 소방출장소, 소방대기소이다. 119구조대 구조 업무에 대응하기 위해 119구조대를 둔다. 구조대는 각 소방서에 1개 내지 2개를 두며, 소방서가 관할하는 구역을 모두 담당한다. 현장대응단 소방본서 직할119안전센터, 119 구조대를 통합해 출범한 조직으로 2009년 3월 23일 전남 목포소방서가 최초로 현장대응단을 신설했다. 소방서를 배경으로 하는 TV 프로그램 소방서 옆 경찰서 (SBS 금토 드라마 - 2022년 하반기 방영작) 같이 보기 소방본부 중앙소방본부 대한민국의 소방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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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2004-05%EB%85%84%20UEFA%20%EC%B1%94%ED%94%BC%EC%96%B8%EC%8A%A4%EB%A6%AC%EA%B7%B8
2004-05년 UEFA 챔피언스리그
2004-05년 UEFA 챔피언스리그(2004-05 UEFA Champions League)는 유럽 축구 연맹(UEFA)의 최상위 클럽 축구 대회인 유럽 축구 연맹(UEFA)의 최상위 클럽 축구 대회인 UEFA 챔피언스리그의 50번째 시즌으로, 대회 명칭이 유러피언컵에서 UEFA 챔피언스리그로 바뀐 이후의 13번째 시즌이다. 이번 대회는 리버풀이 결승전에서 밀란을 전반 종료 때까지 3-0이라는 점수차를 극복하고 승부차기 끝에 물리치고 5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 리버풀의 주장인 스티븐 제라드는 결승전과 챔피언스리그에서의 활약으로 발롱도르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리버풀은 트로피의 영구 보관 및 UEFA 명예의 배지를 받았다. 새 트로피가 2005-06 시즌부터 만들어져 사용하게 된다. 예선전 1차 예선전 |} 2차 예선전 |} 3차 예선전 |} 1 PAOK는 마카비 텔아비브와의 1차전 경기에서 부적격 선수를 출전시킨 사실이 발각되어 0-3 몰수패(원래는 마카비 텔아비브의 2-1 승리로 기록되었음)를 당했다. 조별 리그 3차 예선전의 승리팀 16팀과 1~10위 협회의 리그 우승 팀 10팀, 1~6위 협회의 리그 준우승 팀 6팀, 총 32개 팀이 한 조당 네 팀씩 총 여덟개 조로 나뉘어 조별 리그를 진행한다. 각 조의 상위 두 팀은 16강전으로 올라가게 되고 각 조의 3위 팀은 UEFA컵의 3회전으로 가게 된다. 만약 동점팀이 나올경우 다음과 같은 규칙에 의해 순위를 정한다. 상대전적에서 더 많은 승점을 얻은 팀 상대전적에서 다득점을 한 팀 상대전적에서 원정골을 기록한 팀 전체 조별리그에서의 골 득실차 전체 조별리그에서의 총 득점 더 높은 UEFA 점수를 가진 팀 A조 B조 2 로마와 디나모 키예프의 경기는 하프타임에 심판이 관중들이 던진 물건에 맞아 부상을 당하면서 중단되었다. 경기가 중단되던 당시에는 디나모 키예프가 1-0으로 앞서고 있었다. UEFA는 해당 경기를 로마의 0-3 몰수패로 처리했으며 로마에게는 UEFA 주관 대회 2경기를 관중 없이 치르도록 명령했다. C조 D조 E조 F조 G조 H조 토너먼트 16강전 |} 8강전 |} 3 인테르나치오날레와 밀란의 경기는 후반 27분에 밀란의 지다 선수가 관중들이 던진 폭죽에 맞아 부상을 당하면서 중단되었다. 경기가 중단되던 당시에는 밀란이 1-0으로 앞서고 있었다. UEFA는 해당 경기를 인테르나치오날레의 0-3 몰수패로 처리했으며 인테르나치오날레에게는 UEFA 주관 대회 4경기를 관중 없이 치르도록 명령했다. 준결승전 |} 결승전 득점자 같이 보기 2004-05년 UEFA컵 외부 링크 UEFA 홈페이지의 2004-05 챔피언스리그 RSSSF의 2004-05 챔피언스리그 UEFA 챔피언스리그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UEFA 챔피언스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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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20%EC%A7%80%EB%B0%A9%EB%B2%95%EC%9B%90
대한민국의 지방법원
대한민국의 지방법원은 민사 및 형사 사건을 1심으로 재판한다. 1심의 재판은 원칙으로 단독 판사의 관할로 하고, 특히 중요하다고 법률이 정하고 있는 사건은 합의부의 관할로 한다. 또한 지방법원 본원의 합의부는 단독 판사의 판결에 대한 항소 사건과 단독 판사의 결정·명령에 대한 항고 사건을 2심으로서 재판하는데, 이러한 합의부를 합의항소부라고 한다. 전국의 지방법원 수는 18개이며, 지방법원은 지방법원장과 대법원 규칙으로 정한 수의 판사로 구성된다. 지방법원의 사무 일부를 처리하기 위하여 그 관할구역 내에 지원과 소년부지원, 시·군법원 및 등기소를 둘 수 있다. 또한 지방법원과 동급법원으로 가정법원 8개소(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울산, 인천, 수원), 행정법원 1개소(서울), 각 사단(함대,비행단)급 이상 부대의 보통군사법원이 있다. 이러한 법원들은 일부 특수한 사건에 대하여만 업무를 처리한다. 현황 서울고등법원 소속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동부지방법원 서울서부지방법원 서울남부지방법원 서울북부지방법원 춘천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의정부지방법원 수원고등법원 소속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여주지원 평택지원 안산지원 안양지원 수원가정법원 성남지원 여주지원 평택지원 안산지원 안양지원 부산고등법원 소속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서부지원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거창지원 진주지원 밀양지원 통영지원 울산지방법원 광주고등법원 소속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장흥지원 순천지원 해남지원 광주가정법원 목포지원 장흥지원 순천지원 해남지원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정읍지원 남원지원 제주지방법원 대전고등법원 소속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원 논산지원 서산지원 천안지원 홍성지원 대전가정법원 공주지원 논산지원 서산지원 천안지원 홍성지원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 제천지원 영동지원 대구고등법원 소속 대구지방법원 서부지원 안동지원 포항지원 경주지원 김천지원 영덕지원 상주지원 의성지원 같이 보기 대한민국 대법원 대한민국의 가정법원 대한민국의 고등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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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역
노령역(Noryeong station, 蘆嶺驛)은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등천리에 위치한 호남선의 철도역이다. 인근에 다원시스 정읍공장이 있다. 연혁 1970년 1월 16일 : 신호장으로 개업 1971년 3월 20일 : 여객 취급 개시 1984년 6월 1일 : 여객취급 개시 1987년 6월 18일 : 호남선 복선화로 역사 이전 신축 1988년 1월 25일 : 배치간이역으로 승격 1989년 11월 6일 : 화물취급 개시 1991년 11월 14일 : 운전피제어역으로 지정(제어역: 천원역) 2004년 12월 10일 : 무배치간이역으로 격하 2008년 1월 1일 : 여객 취급 중지 각주 전라북도의 철도역 정읍시의 교통 정읍시의 건축물 1970년 개업한 철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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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마호
사로마 호()는 오호츠크해 해안의 기타미시, 도코로 군 사로마정, 몬베쓰 군 유베쓰정에 걸쳐 있는 호수이다. サロマ湖라는 표기 말고도 한자를 차용하여 佐呂間湖나 猿澗湖 등으로도 표기한다. 면적은 약 152km2로 홋카이도 내에서 가장 넓은 호수이고, 비와호, 가스미가우라호에 이어 일본에서 3번째로 넓다. 기수호 중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넓은 호수이다. 호수의 명칭은 아이누어 사루오마토에서 유래된 것으로 갈대밭이 있는 호수라는 의미를 지녔다. 지리 홋카이도 북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아바시리 국정공원에 속해 있다. 면적은 151.86km2, 둘레는 87km, 최대수심은 19.6m에 이른다. 사로마 호는 석호로 바다와 맞다아 있으며, 사로마 호와 오호츠크해를 가르는 것이 호수 전방에 위치한 폭 200 ~ 700m의 사취이다. 호수는 동서로 긴 형태이며 남쪽에는 동쪽으로 기운 기무아넷프 곶이 자리잡고 있다. 기무아넷프 곶 부근이 호수 중 얕은 부분에 속한다. 이 기무아넷프 곶을 기준으로 동과 서로 호수분지를 나눌 수 있다. 서쪽의 큰 호수분지에는 하로 강, 게로치 강 등이 흘러 들어와 신호구(新湖口)로 빠져나간다. 동쪽의 작은 호수분지에 흐르는 사로마베쓰 강은 유입하천 중 규모가 가장 큰 강으로 하구의 삼각주에는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바다와 호수를 가르는 길이 25km의 사취는 식물자원의보고로 원생화원을 이루고 있다. 특히 호수 동쪽에 위치한 왓카 원생화원은 홋카이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호수 주변은 명승지로 그중 남동쪽의 기타미 시 도코로 정 사카에우라에서 바라본 일몰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유입하천 : 사로마베쓰 강, 하로 강, 데이네 강, 시부시 강, 게로치 강, 도코탄 강, 온네토카로치 강, 돗부시베쓰 강, 나니와 강, 이와미 강, 아넷부나이 강, 호로이와고센자와노 강, 라이토코로 강 유출하천 : 수로(水路) 홋카이도의 호수 일본의 석호 기타미시 사로마정 유베쓰정 기타미시의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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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9%94%EC%8B%9C%EC%97%90%2032
메시에 32
M32(NGC 221)는 안드로메다자리에 있는 왜소 타원 은하이며 안드로메다 은하(M31)의 위성은하이다. 1749년 Le Gentil에 의해 발견되었다. M32는 지구에서 258±8만광년 떨어져 있다. 겉보기 등급은 9등급, 시직경은 8.7× 6.5분으로 크기는 약 6,500광년으로 작은 편이다. 후퇴 속도는 -200±6km/s이다. 대부분의 타원 은하와 마찬가지로, 가스나 먼지가 없는, 늙은 붉고 노란 별들로 이루어져있다. M32의 생성과정은 일반적인 은하 생성 모델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최근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안드로메다 은하의 강력한 조석력에 의해 나선 은하에서 타원 은하로 변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왜소타원은하 안드로메다자리 032 0221 국부은하군 1749년 발견한 천체 002555 00452 안드로메다 준은하군 168 위성 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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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88%ED%85%8C%EB%A5%B8-%EA%B2%8C%EB%A5%BC%EB%9D%BC%ED%9D%90%20%EC%8B%A4%ED%97%98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은 원자의 자기 모멘트와 스핀이 양자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실험이다. 오토 슈테른과 발터 게를라흐()가 1922년에 실시하였다. 양자역학의 가장 근본적인 실험 가운데 하나다. 설명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에서는 진공에서 전기적으로 중성인 은을 기화하여, 이를 정렬된 슬릿을 통과하게 하여 은 원자 빔()을 만든다. 이 은 원자로 이루어진 빔은 불균일한 자기장을 통과한 뒤, 차가운 유리판 위를 향하게 한다. 은 원자는 자기 모멘트를 지니므로 자기장에 영향을 받는다. 불균일한 자기장을 사용하는 이유는 균일한 자기장에서는 은 원자는 세차 운동만 겪으며 그 진로가 변하지 않지만, 불균일한 자기장의 경우에는 은 원자의 진로가 휘기 때문이다. 이 때에 휘는 정도와 방향은 불균일한 자기장과 그 안에 있는 원자의 쌍극자 방향과의 관계에 따라서 자기 모멘트와 자기장의 기울기 사이의 힘에 따라 변한다. 은 원자의 진로가 휘는 정도는 은이 유리판 위에 쌓인 자취를 통해 측정할 수 있다. 고전적으로 자기 모멘트는 연속적인 값이므로, 유리판 위의 자취는 연속적인 모양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실험을 해 보면, 자취는 두 개의 서로 떨어진 점이다. 즉, 자취가 불연속적이고, 은의 자기 모멘트는 두 개의 양자화된 값 가운데 하나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은의 자기 모멘트는 그 각운동량에 비례한다. 따라서 은의 바닥 상태에서 가능한 각운동량 값이 두 가지다. 양자역학적으로, 이는 은 원자 안의 전자의 스핀의 임의의 성분이 두 가지의 값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양자역학 스핀트로닉스 물리학 실험 1922년 과학 초기 양자역학 양자 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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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666
666
666(육백육십육)은 자연수 665보다 크고 자연수 667보다 작은 자연수이다. 수학 544번째 합성수로, 그 약수는 1, 2, 3, 6, 9, 18, 37, 74, 111, 222, 333, 666이다. 36번째 삼각수이다. 즉 1에서 36까지를 모두 더하면 666이 된다. (1 + 2 + 3 + 4 + ... + 35 + 36 = 666) 2부터 17까지의 모든 소수들의 제곱의 합이다. 기타 666은 악마를 뜻한다. 왕상 10:14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요 대하 9:13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요 스 2:13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육십육 명이요 기독교에서 짐승의 숫자로 부른다. (요한 묵시록 13:18) 로마 숫자로 썼을 때, 666 (DCLXVI)은 1에서 500을 나타내는 여섯 글자가 모두 한번씩 크기의 역순으로 나타난다. (D = 500, C = 100, L = 50, X = 10, V = 5, I = 1). 666은 기독교 대박해자인 폭군 네로 황제의 이름을 수치화시킨 것이다. 666은 둠 게임을 네트워크로 할 때 쓰는 TCP 포트 번호이다. 레밍즈의 스테이지 중 All the 6's ........는 맵 구조가 666 모양으로 되어 있는 스테이지이다. 666은 N.EX.T의 6번째 정규 앨범이다. 6e02 666 수비학 수비학에 관한 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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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80%EC%B9%98%ED%95%84%EB%93%9C
핀치필드
핀치필드는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 농장》에 나오는 농장 이름이다. 이 농장의 주인 프레드릭은 히틀러를 상징하며, 따라서 이 농장은 나치 독일을 상징한다. 이 농장은 필킹턴의 폭스우드보다 작지만 관리가 매우 잘 되어있다. 동물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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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C%BC%93%ED%8F%AC
로켓포
로켓포(로켓砲, rocket artillery)는 로켓탄이 발사되는 포(砲)이다. 로켓포의 범주에는 다연장 로켓포도 포함한다. 영화에서는 번역이 됐을 때 RPG-7을 미군들이 로켓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역사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최초의 로켓은 중세 중국에서 화약으로 추진하여 쏜 불화살로 추측된다. 이 아이디어는 한국의 고려시대 최무선이 응용하여 주화(走火)를 제작하게 되었고 한국의 조선시대 초 신기전이 개발되는 데 한몫한다. 이 중세의 로켓포는 몽골족에게 포획되어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흘러들어가 유럽 침공에 사용된다. 17세기, 유럽인들도 로켓포의 사용법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후반까지 사용하지 않다가, 마이소어의 티푸 술탄이 이끄는 인도군이 영국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철로 된 로켓포를 개발하였고, 영국군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콘그리브 로켓을 만들어낸다. 그 이후로 19세기 동안 영국군은 여러 종류의 로켓포를 사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 현대 로켓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의 네벨베르퍼와 소비에트 연방의 카추사 로켓포에서 시작되었다. 분해하면 오르간을 닮았다하여 '스탈린의 오르간'이라 불리던 카추사로켓포는 트럭이나 경전차에 장착하여 견인식이던 독일의 네벨베르퍼보다 기동성이 뛰어났다. 독일은 판저베르퍼와 부르프라멘 40를 개발했다. 이 두 로켓포는 반궤도 기갑 전투 차량에 설치되어 사용되었다. 그리고 ' 6호 전차 티거 1의 차체에 380 mm 로켓박격포를 장착한 로켓티거를 만드는 계획도 있었다. 전쟁 말기에 영국군과 캐나다군은 랜드 매트리스라는 이름의 견인식 로켓발사기를 사용하였고, 미국군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소수의 T34 칼리오페 로켓 전차를 사용하였다. 1945년 초에 영국군은 셔먼에 2 문의 60 파운드 RP3 로켓을 장착하여 사용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스라엘은 셔먼에 여러 가지 로켓포를 부착하였다. 독창적으로 개발한 AGM-45 슈리케 ARM을 발사하는 킬숀(삼지창이라는 뜻)이 있다. 소비에트 연방은 냉전 중 카추사 로켓포를 개량하여 여러 지역에 수출하였다. 미국의 M270 MLRS 등의 로켓포는 자주포처럼 높은 기동성을 지니고있다. 로켓포 vs 일반포 포탄이 발사될 때 일반 재래식 포는 크게 반동하나 로켓포는 반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반 포는 반동을 견딜 버팀대가 있고 , 장전 시간이 필요하다. 로켓포는 이동하며 포격할 수 있었기에 피격률도 낮다. 로켓포는 명중률이 낮고 포격 속도를 일정히 유지할 수는 없었지만, 한번에 엄청난 수의 폭약을 쏟아부어 목표가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서 괴멸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현대의 컴퓨터 조종식의 재래식 포도 MRSI 시스템을 통하여 이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로켓포는 일반적으로 크게 포염을 내뿜으며, 포연이 진하게 남아 포의 위치를 쉽게 알 수 있으나 포격 시간을 짧게 하면, 이런 위험은 줄어든다. 일반포는 명중률을 높이기 위하여 관측병을 이용하지만 로켓포는 관측병이 필요하지 않다. 일반 포탄은 일반적으로 로켓보다 값이 싸고 크기가 작다. 그러므로 더욱 많은 양의 화력을 보유하거나 더 적은 비용으로 부대를 구성할 수 있다. 일반포는 포탄이 로켓보다 작기는 해도, 로켓포의 사정거리에 범접하려면 포 자체가 매우 커야 한다. 그에 비하여 로켓발사기는 크기가 작기 때문에 차량이나 기체에 장착할 수 있다. 파리 포나 슈베러 구스타프 등의 초장거리 포는 장거리 미사일로 인하여 더이상 쓸모없게 되었다. 높은 명중률을 지닌 재래식 포는 아군과 가까이 있는 적군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방어할 때에는 로켓포보다 재래식 포가 더욱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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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D%80%ED%9D%AC
이은희
이은희는 다음 사람 등을 가리킨다. 이은희(1964 ~ ): 대한민국의 공무원. 기업인 이은희(1976 ~ ): 필명 '하리하라'. 대한민국의 작가이자 칼럼니스트 이은희(1977 ~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출신 방송인. 이병헌의 친동생 이지안의 본명 이은희(1979 ~ ):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 이은희(1979 ~ ): 대한민국의 탤런트 이은희(1986 ~ ): 대한민국의 탁구 선수 이은희(1981 ~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이은희(1977 ~ ): 대한민국의 희극인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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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5%84%EC%9A%B0%20%28%EC%98%81%ED%99%94%20%EA%B0%90%EB%8F%85%29
이필우 (영화 감독)
이필우(李弼雨, 1897년 11월 27일~1978년 10월 20일)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영화 기술인이다. 한국 최초의 영화 촬영기사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서울 중구 을지로 지역에서 시계포를 하던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시계포를 물려받았다가 사진 재료와 축음기를 들여놓고 판매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사진과 환등기, 활동사진 기계를 접하면서 그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1913년에 우미관 영사기사의 조수로 들어가 일을 배우다가 일본에 건너갔다. 여러 지역에서 실무를 익히며 촬영 기술을 배운 뒤 데이코쿠키네마에 입사하여 촬영기사로 일했다. 간토 대지진으로 귀국한 뒤 《전성여자정구대회》, 《장화홍련전》, 《쌍옥루》 등을 촬영했다. 이후 발성 영화 촬영에 뜻을 두고 다시 일본에 가서 녹음기술을 배워와 조선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1935)을 내놓았다. 동생인 이명우가 감독을 맡고 촬영과 녹음은 이필우가 담당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영화 감독들이 세대 교체 흐름을 주도하면서 이필우는 이러한 흐름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신진 세력과 갈등을 일으킨 끝에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만주 지역을 떠돌며 소일하였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 미군정 지역으로 돌아와 미군 502대 부대와 그 후신인 미 공보원에서 영화기술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국 전쟁 초기에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는 인공 체제에 협조하여 국립영화촬영소 남조선지부 책임자를 맡기도 했으나, 인민군이 후퇴한 뒤 미 공보원에 복귀했다.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가 흥행에 실패한 《생명》(1958) 녹음에 참여한 것이 마지막 이력이다. 같이 보기 이명우 각주 및 참고 문헌 외부 링크 1897년 출생 1978년 사망 일제강점기의 영화감독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일제강점기의 영화 촬영기사 대한민국의 영화 촬영기사 서울특별시 출신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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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SSD%20%28%EB%8F%99%EC%9D%8C%EC%9D%B4%EC%9D%98%29
SSD (동음이의)
SSD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과학, 기술 생물학, 의학 전사인자(Signal-sensing domain) 성적 이형성(Sexual size dimorphism) 신체형통증장애(Somatic symptom disorder) 컴퓨팅 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Solid-state Drive): 컴퓨터의 보조기억장치 중의 하나 시스템 시퀀스 다이어그램(System sequence diagram): UML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다이어그램의 종류 예술,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SSD (밴드) : 미국 보스턴에서 1981년부터 1985년까지의 록 밴드 슈퍼 스타 디스트로이어: 《스타 워즈》 세계관에 나오는 은하 공화국, 은하제국의 주력함 기타 남수단의 ISO 3166-1 코드 국가안전보위부(State Security Department):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보 기관이자 비밀경찰 스콰 이어 샌더스 & 뎀시(Squire, Sanders & Dempsey): 미국 법률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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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천시
여천시(麗川市)는 전라남도 남동쪽 여수반도에 위치했던 시이다. 1998년 4월 1일에 여천군과 함께 여수시에 병합되었다. 역사 1986년 1월 1일 : 구 여천군 쌍봉면, 삼일읍 자리에 설치 1998년 4월 1일 : 여수시에 병합 행정 구역 구 여천시의 행정 구역의 명칭과 범위는 삼일동과 상암동을 제외하고는 현재 행정 구역의 명칭과 범위와 일치하다. 묘도동 삼일동 상암동 (1999년 삼일동에 병합) 시전동 쌍봉동 여천동 주삼동 같이 보기 여천시의 국회의원 여수시 여천시장 선거 1986년 설치 1998년 폐지 전라남도의 폐지된 행정 구역 여천시 대한민국의 폐지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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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
엄항섭(嚴恒燮, 1898년 10월 15일 (음력 9월 1일) ~ 1962년 7월 3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중화민국의 공무원이며,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영월(寧越), 호는 일파(一波)이며, 가명은 아호를 따서 엄일파라 하였다. 임시정부 선전부장을 지냈고 광복 뒤에는 한국독립당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30년부터는 백범 김구(金九)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귀국 제1진으로 귀국, 한국독립당의 국내지부 건설과 김구를 도와 신탁통치 반대 운동, 미소공위 반대 운동 등에 참여하였으며 1948년 김구의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 그 뒤 남북협상 실패 후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 안공근과 함께 김구의 최측근이었으며 이승만의 측근인 이기붕,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인척이었다. 생애 생애 초기 엄항섭은 1898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에서 엄주완과 김규식의 딸 청풍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엄세영(嚴世永)으로 농상공부아문 대신 판중추부사,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아버지는 승지 주완(柱完)이다. 어머니 김씨는 김규식의 1남 3녀 중 둘째 딸이며, 외할아버지 김규식은 규장각 제학과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나 단발령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단발령에 저항하는 성리학자들에게 암살당했다. 형제로는 형 엄승섭(嚴承燮), 동생 엄홍섭(嚴弘燮) 등이 있다.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보성고등보통학교(보성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3·1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예관 신규식을 찾아가서 비밀결사인 동제사의 요원으로 활동을 했으며, 조선인 최초로 1911년 중국 공화(신해)혁명에 참가한 예관 신규식의 공화주의 항일 독립혁명을 지원하는 신아동제사의 본부가 있었던 항주의 지장대학을 입학하게 되었다. 중국망명 당시에는 일명 예빗·엄이라고도 불렀다. 중국에 망명해서는 일파(一波)라는 호를 주로 사용했고, 필명으로 대위(大衛)를 사용한 적도 있다. 엄항섭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1920년 항저우(杭州)에 있는 지장대학(芝江大學)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선생은 지강대학에서 중국어·영어·불어 등 어학을 공부하였다. 어학을 공부한 것이 후일 그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데 주요한 자산이 되었다. 1922년 지강대학을 졸업한 후, 선생은 상해로 돌아왔다. 그동안 상해의 임시정부는 크게 변해 있었다. 수립 초기 국내외에서 많은 인사들이 모여들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미국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은 상해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국무총리 이동휘도 떠났다. 그리고 각원들도 대부분 사퇴하였다. 시일이 지나면서 젊은 청년들 역시 임시정부에서 멀어져 갔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정부로서의 조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김구와 이동녕을 비롯한 몇몇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사람만 떠난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워졌다. 수립 초기에는 임시정부에 대한 기대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이와 함께 독립자금도 적지 않게 들어왔다. 그러나 사람이 떠나면서 자금도 함께 줄어들었고, 임시정부 청사의 집세를 내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있던 김구·이동녕 등의 인사들조차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 곤궁은 극심한 형편이었다. 선생은 임시정부는 어떻게 해서든 유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편으로 선생은 불란서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하였다. 자신이 월급을 받아 그 돈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의 끼니를 해결하고, 또 일본영사관에서 한인들을 체포하려는 정보를 얻어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의 사정을 김구는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엄항섭군은 유지청년으로 지강대학 중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자기 집 생활은 돌보지 않고, 석오 이동녕 선생이나 나처럼 먹고 자는 것이 어려운 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을 하였다. 그가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倭)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하여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 중 범죄자가 있을 때 편리를 도모해주는 것이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이후 상하이(上海)에서 언론활동을 하다가 1929년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중앙위원이 되었다. 상하이의 불조계 프랑스 공무국에 근무하면서 김구(金九)를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투신했다. 이후 그는 김구를 극진히 대우하였고, 김구의 생활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이후 임시정부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어도 임정을 떠나지 않고 김구를 보좌하면서 김구의 신뢰를 얻었다. 1930년 한국독립당, 1935년 한국국민당 창당에 참가했으며, 1932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한국독립당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등을 거쳐 이후 광복 시점까지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 1940년 한국국민당과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3당이 통합되면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44년 임시정부 선전부장, 각주(김구) 판공비서에 임명되었다. 김구가 미국 육군 OSS 특무대와 합동 작전으로 조선 진공계획을 추진함에 따라 그는 김구와 미국에 있는 이승만 사이의 연결을 주선하며 OSS 훈련 유치를 위한 활동, 공작에 나선다. 1942년 임시의정원 외무분과위원장이 되었다. 해방 이후 정치 활동 귀국 직후 광복 후 11월 3일 임시정부 환국 제 1진의 한사람으로 상하이 비행장을 출발해 비행기편으로 김포공항에 착륙하였다. 귀국해서도 김구를 따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선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취임사에서 그는 '우리 소년군은 오늘과 같이 길러온 유지들을 중심으로 진행할 방침인데 일반 사회에서도 많은 원조를 해주기 바란다.'라고 발표하였다. 이후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946년 1월 1일 미군정청에 소환되어 경고를 받기도 했다. 그 해 1월 3일 다시 복귀할 것을 명하는 김구의 교서를 낭독하였다.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12월 이후 김구가 남북협상으로 전환하면서 그 역시 노선을 전환, 1948년 4월 20일 남북협상에서 한국독립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남북 협상에 참여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김구가 이승만과 결별하자 김구를 따라 1948년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함께 참가하는 등 계속 김구의 측근으로 활동하다가 김구 사후에는 지인들과 멀리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해 갔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입북했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임위원 겸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엄항섭은 임정 요인으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간 인물들 중 50대 초반으로서 비교적 나이가 젊고 건강한 편이었기에, 1958년 구 우익 계열의 재북 인사들이 김일성을 지지하며 결성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의 제1진으로 환국하여 경교장(京橋莊)을 중심으로 조완구(趙琬九)와 함께 김구의 유일한 측근으로 김구를 보좌하였으며, 문장에 뛰어나서 김구 명의로 발표하는 모든 성명이나 국민에게 발표하는 호소문을 거의 기초하였다. 김구가 작성하여 발표하는 각종 글을 번역하는 것도 선생의 몫이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의거를 주도하였던 김구는 두 사람의 의거를 세상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 하나로 김구는 이봉창이 사형에 처해진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봉창이란 인물의 행적과 그가 결행한 일황저격의거의 경과와 사실을 「동경작안지진상(東京炸案之眞相)」이란 제목으로 작성하였다. 국한문 혼용으로 된 이 글을 엄항섭이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이 글은 중국의 《신강일보(申江日報)》와 《중앙일보(中央日報)》에 「진동전세계 동경작안지진상(震動全世界 東京炸案之眞相)」이란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건국실천원양성소 활동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는 1947년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주이었던 김구(金九)가 귀국한 뒤 국가 건설에 따른 인재의 필요성을 느껴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하였다. 특히 이 단체는 김구의 자주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임시정부가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로 하였다. 건국강령은 제1장 총칙, 제2장 복국(復國), 제3장 건국으로 구성되었고, 그 내용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한 발전을 통하여 복국(復國), 건국(建國), 치국(治國),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독립운동 과정 중 복국의 단계에서 광복군(光復軍)이 필요했던 것처럼, 건국의 단계에서는 건국의 동량이 필요했고, 이 필요에 의하여 1947년 3월 이 양성소가 설립되었다. 명예소장에 이승만(李承晩), 소장에 김구(金九), 이사장에는 장형(張炯)으로 출발한 이 양성소는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다. 이러한 인재 양성의 발상은 청년들이 국가를 건설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김구 개인의 신념에서 나왔다. 양성소의 매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마지막 교육을 받은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1948년 12월 제5기 수료생 명부에 따르면 명예소장 이승만, 소장 김구, 부소장 엄항섭, 이사장 장형으로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강사는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신익희(申翼熙)·지청천(池靑天)·나재하(羅在夏)·김성주(金成柱)·김경수(金敬洙)·최호진(崔虎鎭)·김정실(金正實)·양주동(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嚴詳燮)·엄항섭(嚴恒燮)·김학규(金學奎)·설의식(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각주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안재홍(安在鴻)·정인보(鄭寅普)·황기성(黃基成)·이인(李仁)·김활란(金活蘭)·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이은상(李殷相)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이때 엄항섭은 친분이 있던 김정실, 양주동과 함께 강사로 참여하였다. 이러던 차에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살해된 김구암살사건(金九暗殺事件)이 발생하여 김구가 암살된 후,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체되고 건물 원효사는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됐다. 김구 사망과 6·25 전쟁 중 납북 광복 후인 1945년 11월 23일, 엄항섭은 임시정부와 함께 환국하였다. 그 뒤 국내에서도 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하며 김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끝내 국토는 38선으로 분단되었고, 미군정하에서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과 여건도 없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엄항섭은 이를 반대하며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통일된 정부수립을 갈망하였지만,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시기에 정신적 지주로 모시던 김구가 동족의 흉탄에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희망을 잃고 비통해 하였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엄항섭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았다. “엄항섭 군은 자기 집을 돌보지 않고 석오 이동녕 선생이나 나처럼 먹고 자는 것이 어려운 운동가를 구제하기 위해 불란서(프랑스) 공무국에 취직을 하였다. 그가 불란서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였다. 하나는 월급을 받아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일본)영사관에서 우리를 체포하려는 사건을 탐지하여 피하게 하고 우리 동포 중 범죄자가 있을 때 편리를 도모해 주는 것이었다.” 김구가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그림자처럼 동행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사람이 바로 엄항섭 지사였던 것이다. 민족의 분단은 전쟁을 불러왔고, 엄항섭은 1950년 9월 납북되었다. 1958년 9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통일방안이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판단한 북한당국은 납북인사들을 탄압, '엄항섭, 명재세, 노일환' 등에 반혁명분자라는 혐의를 씌어 연행한다. 이것이 바로 북측이 자행한 '엄항섭(嚴恒燮) 사건'으로 엄항섭 등을 체포하자 함께 납북됐던 조소앙은 조작이라며 이에 항의하여 단식투쟁을 벌였다. 단식투쟁 중 병을 얻어 1958년 9월 10일 조소앙은 타계했다고 알려져 있다. 엄항섭은 북한에서도 통일을 위해 진력한 것으로 알려졌고 1962년 7월 30일 외롭게 숨을 거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임위원 겸 집행위원을 지냈다. 1989년 대한민국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이 서훈되었다. 사후 1988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북측에서는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입북 논란 입북 과정에 대해서는 대체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납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막내딸의 출생지가 김구의 거처인 경교장일 정도로 김구와 가깝던 엄항섭이 1949년 그가 암살된 후 정치적 기반을 잃었고 대통령 이승만과는 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자진 월북했다는 소문도 오랫동안 나돌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건국훈장 독립장이 조금 늦은 편인 1989년에 추서되었다. 유해는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어 있다. 1948년 10월 엄항섭이 간행한 김구각주 최근 언론집도 이승만정권에 의해 반국가적 반민족적 행동으로 간주되어 경찰에 압수조치가 가해지기도 하였다. 가족 부인인 연미당과 맏딸 엄기선도 임시정부에서의 활동을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독립운동가이다. 해방 정국부터 이승만의 비서를 지낸 이기붕은 그와 인척이었다. 할아버지 : 엄세영(嚴世永) 아버지 : 엄주완 어머니 : 청풍김씨,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규식(동명이인)의 딸 형 : 엄승섭(嚴承燮) 동생 : 엄홍섭(嚴弘燮) 부인 : 연미당 장녀 : 엄기선 인척 : 이기붕, 김규식 외척 : 김규식, 외조부 김규식과는 또다른 동명이인 상훈 198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 엄항섭을 연기한 배우 박광남 - 1981년 (제1공화국) MBC 드라마 최정훈 - 1985년 (새벽) KBS1 드라마 김동현 - 2002년 (야인시대) SBS 드라마 같이 보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조완구 조소앙 이승만 한국독립당 김규식 이기붕 허정 장면 장준하 각주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1898년 출생 1962년 사망 여주시 출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렬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 수상자 중국의 외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 광복군 관련자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대한민국의 정치인 한국 전쟁 관련자 영월 엄씨 반공주의자 보성전문학교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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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어린 양
하느님의 어린양, 또는 하느님의 어린 양()은 미사와 감사성찬례 등에서 쓰이는 미사통상문의 일부다. 기독교의 신학적 관점으로는 하느님에게 바쳐지는 거룩한 제물인 예수, 인간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사의 제물이자 세상의 죄를 없애는 그리스도인 예수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가사 아뉴스 데이의 유래로는, 교황이 트룰로 공의회의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한 결정에 반발하여 미사경문에 넣은 것으로 알려지며, 마지막 "평화를 주소서" 부분은 꽤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교파별 선호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마지막 고유미사문의 이름으로도 쓰인다. 성공회 감사성찬례에서는 성찬전례 집전시 사제가 예수의 거룩한 몸인 면병을 나눔으로써 기독교인들은 서로 생각과 환경은 다르지만,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깨우치게 하는 성찬의 나눔 다음에 하느님의 어린양을 부르며, 루터회에서는 목사의 성만찬 인도 전후에 상투스(Sanctus), 시므온의 노래(Nunc dimittis)등과 함께 하느님의 어린양을 부른다. 같이 보기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 기독교 도상학 기독교 용어 모양 종교와 동물 양에 대한 비유 서방 기독교 요한의 복음서 요한 묵시록 기독교 음악 가톨릭 기도문과 전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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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서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년? ~ 기원전 104년)는 중국 전한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로 신도국(信都國) 광천현(廣川縣)(현재는 허베이성 징 현 (헝수이 시))출신이다. 한나라 초기의 사상계가 제자백가의 설로 혼란하고 유교가 쇠퇴하였을 때, 도가의 설을 물리치고 유교 독립의 터전을 굳혔다. 무제(武帝)를 섬겨 총애를 받아 유교를 채용하고 교육 행정으로 공헌하였다. 이로써 뒷날 중국의 정신적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동중서의 사상적 특징은 재이설(災異說)이다. 생애 젊어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배우고 경제 때 박사(博士)가 되었다. 무제는 즉위하면서 전국에서 현량(賢良)과 문학의 선비를 불러서 시무를 논하였는데 동중서도 현량의 자격으로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는 그때 성인(聖人)은 천명(天命)을 받아서 정치를 행하는 자로 교화(敎化)에 의하여 백성의 본성(本性)을 갖게 하고, 제도에 의하여 백성의 정욕을 절제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교화에 있어서는 유학만을 정통적 학문으로 정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으로 한나라의 정부는 법가나 종횡가의 말을 물리쳐 채택하지 않고 오경박사를 설치하는 등 유학의 정신이 정책에 반영하게 되었다. 무제 건원(建元) 원년(기원전 140년) 음력 겨울 10월, 무제가 조서를 내려서 현량하고 방정하며 직언하고 극간(極諫)하는 선비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이때 무제가 직접 옛날과 오늘날의 잘 다스리는 도리(治道)에 관한 대책을 물었더니, 대답한 사람이 100여 명이었다. 그중 동중서가 아래와 같이 대답하였다. 무제는 그 대책을 훌륭하다 하여서 동중서를 강도(江都, 치소는 광릉, 강소성 양주시)의 재상으로 삼았다. 동중서는 젊어서 춘추를 공부하여 효경제 때에 박사가 되었는데, 나아가고 물러가며 받아들이고 그만두는 것에서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아니하여 학자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삼고 존경하였다. 강도국(江都國)의 재상이 되자 역왕(易王)을 섬기게 되었다. 역왕은 황제의 형이라 평소 교만하고 혈기 있으며 용감한 것을 좋아하였는데, 동중서가 예를 가지고 바르게 고쳐주니, 왕도 그를 존경하고 중히 여겼다. 그는 무제에 대한 상주 후에 강도왕(江都王)의 상(相) 대신으로 전출되었는데 《춘추》의 재이(災異)의 기사를 응용하여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동의 고조묘(高祖廟)의 화재 등에 대한 말 때문에 일단 사형까지 선고받았으나, 조칙에 의하여 용서되고 이후는 재이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승상 공손홍은 같이 《춘추》를 익히고 있었으나 학력이 동중서에 미치지 못함을 시기하여 다시 그를 교만하기로 이름나 있는 교서왕 유단의 상(相)으로 전출시켰다. 그는 얼마 후에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이후 집에 거처하면서 저술과 교수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처리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나면, 정위 장탕이 직접 그의 집에 찾아가 해결 방법을 물었다고 한다. 잔혹한 법률의 집행으로 유명한 장탕과 순수한 유학자인 동중서와의 결부는 일견 기묘하지만, 한대의 정치는 그와 같이 유학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행해졌던 것이다. 저서 기록에 의하면, 동중서가 최초로 집필한 저서로 동중서백이십삼편(董仲舒百二十三篇), 문거(聞舉), 옥배(玉杯), 번로(蕃露), 청명(清明), 죽림(竹林)등 여러 저서가 있고,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公羊董仲舒治獄十六篇) 등이 있다.(동중서백이십삼편은 동중서가 상소등 여러 문서를 모은 것이다. 한서 동중서전에 수록된 현랑대책(賢良對策)은 아마도 동중서백이십삼편의 일부로 보인다.) 문거(聞舉), 옥배(玉杯), 번로(蕃露), 청명(清明), 죽림(竹林)등 여러 저서는 주로 춘추의 득과 실을 저술한 것이다.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은 춘추공양전의 글의 내용을 따라서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단죄를 하였던 재판기록 모음집이다. 《춘추번로》 현재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는 책인 춘추 번로(春秋繁露)는 동중서의 저작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런데 현존 춘추번로는 한나라 시대와 동시에 흩어졌던 동중서의 저술서를 남북조 시대에 누군가가 재편집한 설이 있다. 그 중에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 만은 춘추번로에는 수록되지 않았고.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은 다른 학자들의 책 속에 인용과 주석으로 전해지고 있어서 나타난 설이다. 참고 문헌 각주 외부 링크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동중서 기원전 176년 출생 기원전 104년 사망 한나라의 정치인 한나라의 철학자 전한의 유학자 중국의 사상가 기원전 2세기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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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
정남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인명 실존 인물 정남(1970 ~ )은 문화방송 성우이다. 정남(鄭男, 1941 ~ 2012)은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허 정남: 허나라의 남작 가공 인물 수줍은 연인의 등장인물 정의 등장인물 자매들의 등장인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등장인물 아이 캔 스피크의 등장인물 대립군의 등장인물 열 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의 등장인물 숨바꼭질의 등장인물 비치하트애솔의 등장인물 꽃손의 등장인물 러브 인 메모리 2 - 아빠의 노트의 등장인물 썸: 은밀한 이야기의 등장인물 어떤 개인 날의 등장인물 지명 정남면 정남 나들목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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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데라민
알데라민(세페우스자리 알파, α Cep)은 세페우스자리 방향으로 지구로부터 약 49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항성이다. 이 별은 밤하늘에서 2등급 밝기로 보인다. 명명법 이 별의 전통적인 이름 알데라민은 아랍어 구문 الذراع اليمين (알-디라 알-야민, ‘오른쪽 팔’)의 축약어이다. 이 명칭은 2016년 국제천문연맹 소속 항성명칭심의위원회(WGSN)에 의해 정식 고유명칭으로 인정 및 등재되었다. 다른 이름인 세페우스자리 알파는 바이어 명명법으로 표기한 것이다. 플램스티드 명명법에 따르면 세페우스자리 5로 표기한다. 가시성 알데라민의 위도는 북위 62도로 북반구에 거주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관측할 수 있다. 최고고도가 지평선 바로 위쪽이기는 하지만, 남반구의 경우 남위 27도 거주자까지는 알데라민을 관측할 수 있다. 북아시아, 캐나다, 미국, 유럽 등 북반구 대부분 지역에서는 주극성으로 보인다. 겉보기 등급은 약 2.5로 맨눈으로는 물론이고 광공해가 존재하는 도심지에서도 이 별을 쉽게 볼 수 있다. 북극성 알데라민은 세차 경로 근처에 자리잡고 있어서 현 폴라리스처럼 주기적으로 세차 경로에 3° 이내로 접근, 북극성이 될 수 있다. 알데라민은 서기 7500년 경 북극성이 될 것이다. 물리적 특성 알데라민은 분광형 A의 주계열성이며 항성 내부의 수소가 고갈되어 가면서 주계열 단계를 떠나 준거성으로 진입하고 있다. 진화가 심화되면 적색거성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07년 알데라민의 겉보기 등급이 2.5141로 조정되었으며 이와 함께 연주시차는 66.50 ± 0.11 밀리초각으로 갱신되었는데 이로부터 항성까지의 거리는 약 49 광년(약 15 파섹)으로 수정되었다. 표면 온도는 7740 켈빈으로 이 값에 기초하여 항성모형들을 이용하여 얻은 광도는 태양의 약 17 배이다. 알데라민의 반지름은 태양의 2.3 배, 질량은 태양의 1.74 배이다. 같은 분광형의 다른 별들과 마찬가지로 알데라민은 0.06 등급의 진폭만큼 밝기가 미세하게 변하며 방패자리 델타형 변광성으로 분류된다. 알데라민은 초속 246 킬로미터 속도로 아주 빠르게 회전하고 있어 1회 자전하는 데에 12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처럼 빠르게 돌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조건의 다른 항성들처럼 알데라민 역시 항성 내부의 화학 원소들이 분화(分化)되지 않고 있다. 태양의 경우 1회 자전에 거의 한 달 가까이 걸린다. 알데라민은 태양과 비슷하게 상당한 양의 X선 복사를 방출하고 있다. 이는 빠르게 회전하는 항성으로서는 예외적인(그러나 희귀한 경우는 아님) 현상으로 이 별이 강력한 자기장 활동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명칭의 유래 및 문화적 중요성 울루그 베그는 알데라민을 알피르크(세페우스자리 베타), 알키드르(세페우스자리 에타)와 함께 ‘알-카와키브 알-피르크’(الكواكب الفرق)로 불렀으며 그 뜻은 ‘(짐승) 무리의 별들’이다. 동아시아 중화권에서 이 별은 위수 중 천구(, , ‘하늘의 갈고리’)에 속한다. 천구의 구성원은 알데라민, 세페우스자리 4, HD 194298, 세페우스자리 에타, 세타, 크시, 세페우스자리 26, 이오타, 오미크론으로 알데라민 자체 이름은 ‘천구오’(, , 천구 중 다섯 번째 별)이다. 이름 용례 USS 알데라민 (AK-116)은 미국 해군 크레이터급 화물선으로 이 별의 이름을 딴 것이다. 각주 외부 링크 세페우스자리 A형 주계열성 북극성 바이어 천체 플램스티드 천체 A형 준거성 변광성 후보 카스토르 운동성단 203280 8162 0826 105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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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국기
《십이국기》()는 오노 후유미의 원작 소설과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다. 세계관 자세한 사항은 12국 목록참조 십이국기에는 산해경에 등장할 법한 신선이나 요괴가 등장하며 타이틀대로 열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문화, 정치형태는 고대 중국(특히 주나라)와 비슷하며 봉건제도의 성격을 띄고 있다. 하지만 왕위는 세습되지 않으며 12국에 각각 기린이 천의(天意)에 따라 고른 왕에 의해 다스려진다. 왕은 제후를 임명하여 각 지역을 다스리게 하며, 왕이나 고위 관리, 신선 등은 선적(仙籍)에 그 이름이 올라 불로장생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영원불멸한 삶을 산다는 것은 아니고 동기(冬器)로 목을 베거나 몸통을 둘로 나누면 죽게 된다. 또는 국왕이 폭정 혹은 도의에 어긋난 정치를 행하면 기린은 실도(失道)의 병에 걸려 죽게 되며 기린이 죽으면 왕 또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된다. 작품 속에서는 이러한 왕과 왕을 선택한 기린, 그리고 천의란 무엇인가를 시리즈의 큰 주제로 그리고 있다. 특히 여러 나라의 왕들과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복잡하게 등장하면서 다양한 군상의 캐릭터와 그 내면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사이드 스토리로 맨 처음 집필된 《마성의 아이》는 식에 의해 교차하는 이 세계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 개입했을 때의 공포를 공포 소설로 그리고 있고, 달콤한 이세계(異世界)의 환상에 어울리지 않는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등장인물 자세한 사항은 12국기의 등장인물참조 시리즈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주인공은 없으나 각 작품의 주인공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관계를 맺거나, 어떤 작품의 주인공이 다른 작품에 협력적인 관계로 등장하기도 한다. 아래는 작품별 주인공과 협력관계로 등장한 다른 작품의 주인공을 나타낸다. 《마성의 아이》 : 타이키 코우리 ・・・ 쇼류(이름만) 등장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경왕 세키시 ・・・ 쇼류 등장, 코우리(이름만) 등장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타이키 코우리 ・・・ 쇼류 등장 《동의 해신 서의 창해》 :연왕 쇼류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경왕 세키시 ・・・ 쇼류, 슈쇼우 등장 《도남의 날개》 : 공왕 슈쇼우 《황혼의 물가 새벽의 하늘》 :리사이 ・・・ 코우리, 세키시, 쇼류 등장 《화서의 유몽》: 경왕 세키시, 쇼류, 타이키 코우리 등장 TV 애니메이션 맨 처음에는 39화로 기획되었으나 2003년 3월에 2시리즈 방영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45화로 일단락 지어졌으며 NHK는 원작이 미완결임을 이유로 캐릭터를 생생하게 그려나갈 수 없기 때문에 속편 제작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각본가인 아이카와 쇼가 집필한 애니메이션 각본집에 의하면 원래 2 시리즈는 《동의 해신 서의 창해》에 이어 《도남의 날개》, 《황혼의 물가 새벽의 하늘》까지 제작하여 애이메이션 자체에서 결말을 지을 구성이었다고 한다. 원작과 애니메이션의 차이점 기본적인 내용은 원작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소설과 애니메이션 판의 표현방법이 다르다보니 일부분이 바뀌거나 오리지널 요소가 추가되었다. 애니메이션 각본집에 의하면 스토리 상 원작과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차이점인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의 모험 부분에서 십이국에 건너온 사람이 한 명이 아닌 세 사람인 것은, 원작자가 소설을 발표하기 전에 구상한 것에서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고유명사는 전부 원작자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각본을 작성 할 때 《황혼의 물가 새벽의 하늘》이 아직 발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에서 처음으로 밝혀진 내용은 원작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그 때문인지 아이카와는 40화 이후 《동의 해신 서의 창해》의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방영작품 방영 날짜는 일본 기준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1장~12장 (제 1화~ 제 12화) 2002년 4월 9일~ 7월 2일 종장 (제 13화) 2002년 7월 9일 전장 (제 14화) 2002년 7월 15일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1장~5장 (제 15화~ 제 19화) 2002년 9월 3일~ 10월 1일 종장 (제 20화) 2002년 10월 8일 전장 (제 21화) 2002년 10월 15일 서간 (제 22화) 2002년 10월 22일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1장~8장 (제 23화~제 30화) 2002년 10월 29일~12월 17일 전장 (제 31화) 2003년 1월 7일 9장~15장 (제 32화~제 38화) 2003년 1월 14일~ 3월 4일 종장 (제 39화) 2003년 7월 5일 승월 (제 40화) 2003년 7월 5일 동의 해신 서의 창해 1장~3장 (제 41화~43화) 2003년 7월 26일~8월 16일 종장 (제 44화) 2003년 8월 23일 전장 (제 45화) 2003년 8월 30일 등장 캐릭터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캐릭터명 - 성우 (일) / 성우 (한) 순 나카지마 요코 - 히사카와 아야/이현선 스기모토 유카 - 이시즈 아야 /소연 아사노 이쿠야 - 우에다 유지 / 전광주 게이키 - 코야스 타케히토 / 김승준 아오자루 - 오카노 코스케 / 사성웅 라크슌 - 스즈무라 켄이치 / 변현우 로쿠타 - 야마구치 캇페이 / 사성웅 각왕 - 하시 타카야 / 온영삼 코우린 - 사사키 유코 / 조영미 죠가쿠 - 후지타 토시코 / 배주영 죠에이 - 코야마 마미 / 은미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타이키 - 쿠기미야 리에 / 정소영 타카사토 사나메 - 오카노 코스케 / 안용욱 하쿠산시 - 카츠키 마사코 / 조영미 고우란 - 우에다 유우지 / 변현우 요우카 - 유카나 / 김혜주 테이에이 - 토요구치 메구미 / 배주영 쇼류 - 아이자와 마사키 / 최석필 벽안현군 교크요 츠다 쇼코 / 배정민 견랑진군 - 이시다 아키라 / 전광주 렌린 - 토마 유미 / 사쿠 교소우 - 후지와라 케이지 / 홍시호 리사이 - 신도 나오미 / 소연 경왕 요코 - 히사카와 아야 / 이현선 케이키 - 코야스 타케히토 / 김승준 스기모토 유카 - 이시즈 아야 /소연 타카사토 스구루 - 사카구치 다이스케 / 변현우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경왕 요코 - 히사카와 아야 / 이현선 케이키 - 코야스 타케히토 / 김승준 쇼케이 - 쿠와시마 호우코 / 조영미 오오키 스즈 - 와카바야시 나오미 / 소연 엔호 - 니시무라 토모미치 / 변현우 코우칸 - 노무라 켄지 / 강구한 사이보우 - 호리카와 진 / 칸타이 - 마츠모토 야스노리 / 김승태 코쇼우 - 니시 린타로 / 홍승표 셋키 - 노지마 켄지 / 안용욱 란교쿠 - 카와카미 토모코 / 케이케이 - 치바 치에미 / 겟케이 - 타나카 마사히코 / 변현우 공왕 슈쇼우 - 야마자미 와카나 / 은미 쿄우키 - 오오카와 토오루 / 변현우 세이슈 - 히라마츠 아키코 / 배정민 리요우 - 타카야마 미나미 / 배정민 채왕 코우코 - 스즈키 레이코 / 사이린 - 아사노 루리 / 배주영 천관장 - 키요카와 모토무 / 최석필 하관장 - 사사키 켄 / 이상헌 추관장 - 킨게츠 마미 / 배정민 아사노 이쿠야 - 우에다 유지 / 전광주 세이쿄 - 사사키 세이지 / 사성웅 가호우 - 나카타 카즈히로 / 전광주 쇼코우 / 쿄우키 - 오오카와 토오루 / 강구한 쇼류 - 아이자와 마사키 / 최석필 로쿠타 - 야마구치 캇페이 / 사성웅 라크슌 - 스즈무라 켄이치 / 변현우 동의 해신 서의 창해 쇼류 - 아이자와 마사키 / 최석필 로쿠타 - 야마구치 캇페이 / 사성웅 코우야 - 이시다 아키라 / 김승준 아츠유 - 오오쿠라 마사아키 / 송준석 인하쿠타쿠 - 아리모토 킨류 / 리비 - 카츠키 마사코 / 배정민 쇼코우 - 오오카와 토오루 / 강구한 이탄 - 호우키 카츠히사 / 온영삼 세이쇼 - 마도노 미츠아키 / 김승태 모우센 - 히고 마코토 / 경왕 요코 - 히사카와 아야 / 이현선 라크슌 - 스즈무라 켄이치 / 변현우 스탭 원작: 오노 후유미 캐릭터 원안 : 야마다 아키히로 감독: 코바야시 츠네오 각색: 오이카와 쇼 (1화~40화) 후지마 세이야 (41화~45화) 음악: 양방언 캐릭터 디자인: 타나카 히로토, 쿠스모토 유코 컨셉 디자인: 모리키 야스히로, 와카바야시 아츠시(1화~18화), 宮川治雄(5~45화),清水恵子(19·20화·24화~45화) 미술감독: 히가시 쥰이치 음향감독: 카시와쿠라 츠토무 색채설정: 佐藤祐子 촬영감독: 松本敦穂 오프닝 테마: 《12환몽곡》 작곡·편곡:양방언 엔딩 테마: 《월미풍영》 작사:호쿠카와 리에코, 작곡·편곡: 吉良知彦 노래: 아리사카 미카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 피에로 제작: NHK 관련상품 책 최초에 출판사 고단샤(講談社)를 통해 출판되었다. 2012년 4월에 신쵸샤(新潮社)로 이적하여 새롭게 단장하고 재발간된다고 발표되었고 같은 해 7월부터 신장판이 출판되고 있다. 2012년 현재 미완결 상태이며 문고본 누적 판매량은 750만 부 이상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목록 신쵸 문고 마성의 아이 (1991년 9월 25일 신쵸샤) 고단샤 X문고판 (한국어판 제목) 십이국기 1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2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3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십이국기 4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십이국기 5 동의 해신 서의 창해 십이국기 6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십이국기 7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십이국기 8 도남의 날개 십이국기 9 황혼의 물가 새벽의 하늘 십이국기 10 황혼의 물가 새벽의 하늘 2 십이국기 11 화서의 꿈 고단샤 문고판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상)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하)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동의 해신 서의 창해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상)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하) 도남의 날개 황혼의 물가 새벽의 하늘 화서의 유몽 |新潮社(신쵸사)| yom yom 히쇼의 새 (vol.6) 락조의 감옥 (vol.12) 한국어판 조은세상에서 2002년부터 고단샤 책을 바탕으로 11권까지 펴냈으나 번역상 문제가 많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외전격인 의 경우 조은세상이 아닌 한겨레출판사와 북스피어 측에서 연이어 냈고 조은세상에서는 내지 않는 등 원활하지 않은 출판이 이루어졌다. 2014년부터 신쵸샤의 신장판을 바탕으로 문학동네 소속사인 엘릭시르에서 재판을 하기 시작했다. 조은세상 1,2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3,4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5 동의 해신 서의 창해 6,7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8 도남의 날개 9,10 황혼의 물가 새벽의 하늘 11 화서의 꿈 엘릭시르 0 마성의 아이 1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2 바람의 바다 미궁의 기슭 3 동의 해신 서의 창해 4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上,下 5 히쇼의 새 6 도남의 날개 7 화서의 꿈 8 황혼의 기슭 새벽의 하늘 외부 링크 십이국기 데이터 베이스 십이국기 공식 사이트 라이트 노벨 2002년 애니메이션 2003년 애니메이션 라이트 노벨의 애니메이션화 작품 NHK의 애니메이션 대원방송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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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 서브마린
옐로 서브마린(Yellow Submarine)은 다음을 가리킬 수 있다: 영화 노란 잠수함 - 1968년 발매된 애니메이션 영화 음악 Yellow Submarine (노래) - 1966년 발매된 앨범 《Revolver》에 수록된 곡 Yellow Submarine (음반) - 영화 "노란 잠수함"의 사운드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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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인
무어인(Moor)이란 용어는 이슬람계인으로서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으며, 그들은 아랍계와 베르베르족의 후손들이다. 현재까지도 스페인의 이슬람계는 무어인을 닮은 흔적이 있다. 종교 관계 코르도바 칼리파국의 지배하에 이베리아반도에 머물던 무어인들은 대개 같이 살던 타종교인들에 대해 관용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유태교인들이 추방되고 기독교인들이 2계급으로 쇠퇴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편이다.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1031년 멸망하자 북아프리카의 무어인 왕조였던 알모라비드 왕조가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된다. 건축 스페인의 코르도바(Córdoba, Spain)에 있는 빨간색과 흰색의 줄무늬 아치를 한 코르도바 대사원은 무어인 건축의 절정에 해당한다. 이베리아반도에 있었던 무어인들은 도시 행정에 있어 따라올 자가 없었다. 역사가들의 기록을 보면 코르도바는 471개의 모스크와 300개의 공중목욕탕이 있으며 평민들과 호족 지주들의 집과 별장만도 200,077개, 63,000개에 달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그들은 코르도바에 8만 개 이상의 가게가 있고 산에서 떨어지는 물이 사방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순금으로 된 파이프를 통해 물이 호수로 흘러가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묘사가 과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무어인들의 건축양식은 분명 인상적이었으며 당시 유럽 어느 도시보다도 가장 아름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명칭의 기원 ‘무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로 검다, 아주 어둡다를 뜻하는 ‘Mauros’에서 유래하였다. 로망스 어(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에서는 그 기원이 ‘모로’(moro), ‘누와르’(noir) 혹은 ‘모르’(mor)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단어에서 뻗어나온 단어들이 현대어에서 쓰이고 있다. 단어의 명사화가 이루어지면서 검은 색깔을 담고 있는 사물 예를 들면 흑베리, 흑올리브, 흑포도, 흑발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데도 쓰인다. 스페인어에서 ‘모레노’(Moreno)라는 것은 ‘선탠을 한 사람’을 뜻하며 쿠바에서는 흑인을 지칭하기도 한다. 중세 때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무어인들은 검은 피부를 지닌 사람 따위로 막연하게 인식되어 왔다. 웹마스터 사의 신세계 사전을 보면 무어인에 대한 항목이 아랍인과 베르베르 족에 속한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아프리카 인들과 무어인들의 관련성을 무시한 처사이다. 베르베르인이 수많은 유목종족들의 혼혈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의미가 중첩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모로코 일대와 모리타니 지역의 사람들을 일컫는다. 스페인어의 용법에서 무어("Moor")는 훨씬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단순히 무슬림을 지칭하는 한편 모든 어두운 색깔에 적용될 수 있기도 하다.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작은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루도비코 일 모로(Il Moro)라고 불리기도 했다. 현재 역사적인 맥락에서 무어인이 차지하는 의미란 이슬람계의 공화국(모로코, 서사하라, 알제리, 모리타니, 말리) 등을 지칭한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스페인 구어에서 "Moro"라는 말이 모로코 혹은 알제리계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나 이슬람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또한 포르투갈어에서는 "Mouro"라는 말이 북부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지칭한다. 이러한 의미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도 아직까지 쓰이고 있다. 필리핀 남부의 섬에는 무슬림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슬람계 주민들을 "모로스 Moros"라고 부른다. 스리랑카에 살고 있는 아랍계 주민들 또한 무어인이라고 불린다. 스페인의 역사 스페인의 민족 베르베르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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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004%EB%85%84
1004년
연호 북송(北宋) 경덕(景德) 원년 요(遼) 통화(統和) 22년 일본(日本) 조호() 6년 / 간코() 원년 전 레 왕조(前黎朝) 응티엔(應天) 11년 기년 북송(北宋) 진종(眞宗) 7년 요(遼) 성종(聖宗) 23년 고려(高麗) 목종(穆宗) 7년 전 레 왕조(前黎朝) 대행제(大行帝) 25년 사건 송나라와 요나라가 전연의 맹을 맺음(1004년) 탄생 사망 고려(高麗) 문신(文臣) 한언공(韓彦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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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81%EA%B4%91%EC%97%AD%20%28%ED%8F%89%EC%96%91%29
영광역 (평양)
영광역(榮光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중구역에 있는 평양 지하철도 만경대선의 역이다. 부역명은 평양역, 학생영화관이며, 근처에 평양역이 있다. 역 구조 승강장은 1폼 2선인 섬식 승강장이다. 지하철역이지만 역사는 지상에 있다. 승강장의 위치는 지하 50~100미터이다. 개찰구로부터 승강장까지는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한다. 샹들리에나 대리석 기둥 등 호화로운 장식이 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승강장 승강장 번호는 없다. 사진 역 주변 고려호텔 김책공업종합대학 양각교 평양역 평양역전백화점 1987년 개업한 철도역 만경대선 평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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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5%98%ED%81%90%EC%96%B4%ED%8C%8C
류큐어파
류큐어파(, ) 또는 류큐 제어()는 류큐 제도에서 주로 류큐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군으로 일본어족의 한 갈래이다. 류큐어를 독립된 언어로 보지 않고 일본어에 속한 류큐 방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류큐어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한 학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섯 개의 언어로 나누는 견해, 11개로 나누는 견해 등 다양하다. 구분 류큐어는 보통 크게 북류큐 방언(북류큐어군)과 남류큐 방언(남류큐어군)으로 분류된다. 북류큐어군은 크게 아마미 제도의 아마미어, 오키나와 제도 북부의 북오키나와어, 오키나와 제도 중·남부의 오키나와어로 나뉜다. 북류큐어군 아마미 제어: 아마미 제도에서 사용되는 제어. 사용자수 130,000. 기카이어 (Kikai) 아마미오시마어 (Amami Ōshima) 도쿠노시마어 (Tokunoshima) 북오키나와 제어: 오키나와 제도의 북쪽 지역들(오키나와섬의 북부 및 인근 도서)에서 사용되는 제어. 사용자수 약 10,000. 오키노에라부어 (Okinoerabu) 요론어 (Yoron) 구니가미어 (Kunigami) 오키나와어: 오키나와섬의 중·남부 및 인근 섬들에서 사용되는 언어. 슈리어(Shuri)로도 불리며 류큐제어 중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됨. 사용자수 900,000. 남류큐어군 미야코어: 미야코 제도에서 사용되는 언어. 사용자수 68,000. 야에야마어: 야에야마 제도의 대부분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 사용자수 47,600. 요나구니어: 야에야마 제도의 요나구니섬에서 사용되는 언어. 사용자수 400. 다음은 류큐어파를 6개의 언어로 나누는 유네스코 소멸위기언어와 11개의 언어로 나누는 에스놀로그·ISO 639-3의 방식 간의 대응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특징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음은 /a/, /i/, /u/ 의 세 개로 이루어져 있어, ‘’는 ‘’가 된다. 그러나 /e/, /o/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일본어의 ハ행(/h/)이 많은 지역에서 パ행(/p/)이나 ファ행(/f/)으로 변한다. 이것은 헤이안 시대 이전의 일본어 발음과 일치한다. 예를 들면 미야코 제도와 야에야마 제도 지역에서는 다음의 음운 규칙이 적용된다. イ행에서는 k음, t음이 구개음화해서 ch음이 된다. 일본어와 류큐어의 대응 류큐어의 예 ‘오키나와’를 위의 음운 변화에 따라서 변화시키면 ‘우치나’가 된다. 다음은 오키나와어의 예이다. →アミ(,아미) →フニ(후니) →クム(쿠무) →フェー(훼:) →メー(메:) →オーサン(,오:산) →コーユン 언어 자격 류큐어는 류큐 제도를 제외한 일본 본토의 일본어와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다. 또한 류큐어 자체도 마찬가지로 하위에 있는 ‘방언’들 간에 의사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류큐 제어라 하여 단일한 언어가 아니라 여러 개별 언어의 집합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에스놀로그는 류큐 제어 밑에 11개의 개별 언어가 있는 것으로 분류하였고, 유네스코는 6개의 개별 언어로 취급하였다. 2009년 유네스코가 일본 내 ‘언어’들 중에 8개를 소멸위기언어로 추가하였는데 그 중 6개가 류큐어의 방언이다. 각주 일본어족 일본의 언어 류큐 제도 오키나와현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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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한서》(漢書)는 반고가 편찬한 전한의 역사를 서술한 역사서로, 중국 이십사사에 포함된다. 《전한서》라고도 한다. 다루는 시대는 한 고조 유방이 전한을 창건한 기원전 206년부터 왕망의 신나라가 망한 24년까지이다. 총 100편 12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기전체 형식으로 쓰여져, 제기(帝紀) 12권, 연표 8권, 지(志) 1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되어 있다. 자료가 풍부하고 사실(史實)의 정확함이 특색이다. 《사기》와 함께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내용 본기(本紀) 표(表) 지(志) 열전(列傳) 한국어 번역 대동상업고등학교(현 대동세무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진기환 씨가 번역한 한서 15권이 2016년 9월부터 2021년 5월까지 간행되었고, 조선일보 기자를 지낸 이한우 씨가 번역한 한서 10권이 2020년 4월 간행되었다. 저술가이자 번역가인 신경란 씨가 열전 부분을 번역해 2021년 4월에 민음사에서 발간되었다. 총 3권으로 나왔고 전체 쪽수는 이 3권을 합해 3612쪽에 달한다. 각주 외부 링크 wikisource - 한서 (한자원문) 이십사사 한나라의 문학 기전체 2세기 역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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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장기협회
대한장기협회(大韓將棋協會, Korea Janggi Association)는 민족고유의 기예인 장기를 계승보존하고 장기도의 건전한 발전과 보급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1999년 7월 6일 설립된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사단법인으로 프로 장기 기사의 입단, 저작권, 컨텐츠관리, 장기 기전의 운영등 장기와 관련된 제반 업무를 총괄한다. 사무실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문화로 136 (지번 평창동 66-50) 5층에 있다. 역사 정신강화 스포츠인 전통장기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1956년 장기계의 뜻있는 고수들이 모여 장기의 기도를 확립하고 장기의 오묘성을 더 높이고 보다 체계적으로 장기의 기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당시 조선 8도 고수들인 임제민, 이정석, 안성흥 등 8명의 팔도 고수들이 모여 만든 '한국기도원'을 창설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1967년에 한국장기원으로 개명을 하였고, 1973년에 다시 한국장기협회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30년동안 임의단체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1986년 6월 23일 사단법인 한국장기협회가 정부로부터 승인받았으나 1993년 8월 법인체가 해산되어 다시 임의단체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협회는 약 5년간 양분화 체제로 유지되었다. 1994년 김응술9단이 주축이 되어 대한장기협회를 창설 문화체육부로부터 사단법인으로 허가 받아 출발하였으며 1개월 뒤 최사정씨의 민속장기협회가 뒤이어 법인체 허가를 받음으로써, 장기협회는 2개의 단체로 양존하게 되었다. 이후 5년만인 1999년 5월, 양 단체 대표(최사정, 김응술)의 합의하에 두 단체를 합친 새로운 유일 단체인 (사)대한장기협회로 1999년 7월 새롭게 출발하였다. 현재 회장은 2015년 5월에 취임한 6대 회장 김승래九단이 현재 활동중이다. 그러나 현재 대한장기연맹과 대한궁장기연맹이 설립되어 3개의 장기협회가 있게되었다. 연혁 1956년 10월 9일 한국기도원 창립 1967년 한국장기원 개명 1973년 한국장기협회 개명 1986년 6월 23일 사단법인 한국장기협회 등록 (문교부 539호) 1993년 8월 사단법인 한국장기협회 해산. 1994년 5월 16일 사단법인 대한장기협회 창립 1994년 6월 20일 사단법인 한국민속장기협회 창립 1999년 5월 10일 한국민속장기협회와 대한장기협회 통합 1999년 7월 사단법인 대한장기협회 허가 취득 주요 사업 장기의 역사 탐구, 보존, 발전 전문기사(프로)와 동호인 육성, 발굴 및 통솔. 단급제도의 제정 및 육성, 규칙제정, 저작권, 컨텐츠 관리. 입단, 승단, 승급, 기타 장기대회 주최 및 주관. 장기에 관한 도서출판 및 보급. 장기 보급 발전을 위한 홍보및 교육사업. 해외지부 설립 및 대회후원, 주최, 주관. 통일에 대비하여 장기로 민족 동질성 회복에 기여. 전기 각호에 관계되는 부대사업 일체. 역대 회장 임의 단체 1956년 초대회장 현태호 한양대 교수 1957년 2대회장 손도심 국회의원 1965년 3대회장 임제민 장기인 1965년 4대회장 이정석 장기인 1976년 5대회장 손도심 국회의원 1976년 6대회장 정성철 고려인삼 대표 1976년 7대회장 권용필 장기인 1983년 8대회장 백용운 장기인 1983년 9대회장 윤성호 장기인 1984년 10대회장 김천석 장기인 1986년 11대회장 류규상 장기인 사단법인 한국장기협회 1986년 초대 회장 류규상 장기인 역임. 1988년 2 대 회장 이일훈 장기인 역임. 1990년 3 대 회장 이일훈 장기인 역임. 1993년 4 대 회장 최사정 장기인 역임. 사단법인 대한장기협회 1994년 초대 회장 김응술 장기인 역임. 사단법인 한국민속장기협회 1994년 초대 회장 최사정 장기인 역임. 1999년 사단법인 대한장기협회와 한국민속장기협회 통합. 사단법인 대한장기협회 1999년 초대 회장 김응술 장기인 역임. 2002년 2 대 회장 김응술 장기인 역임. 2006년 3 대 회장 김응술 장기인 역임. 2010년 4 대 회장 김응술 장기인 역임. 2014년 5 대 회장 전만황 장기인 역임. 2015년 6 대 회장 김승래 장기인 현역 소속 프로 장기 기사(기사 목록) 각주 외부 링크 대한장기협회 공식 홈페이지 대한민국의 사단법인 1956년 설립 장기 사단법인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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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C%BC%EA%B6%8C%EB%B2%95%EC%A0%95%EC%A3%BC%EC%9D%98
물권법정주의
물권법정주의(物權法定主義)란 법률에 규정이 있는 물권만이 허용된다고 하는 원칙이다. 민법 (민법 185조)는 물권은 법률(민법 기타의 법률) 또는 관습법에 의하는 외에는 임의로 창설하지 못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물권법정주의를 선언하고 있다. 그 결과 채권법에서와 같이 '계약자유의 원칙'이 인정되지 않는다. 근대법이 이 원칙을 채용하는 이유는 첫째 근대법의 이상에 따라 자유로운 개인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토지에 관한 복잡한 봉건적인 여러 권리를 정리해서 소유권을 중심으로 하는 간단한 물권관계를 만들려고 하는 데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공시의 원칙'을 관철하려는 데 있다. 전자는 연혁적인 이유에 불과하며 현재에서는 후자가 훨씬 중요하다. 즉 물권은 배타적인 지배권이므로 거래의 안전과 신속을 위하여 이를 공시한다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데, 점유 또는 등기라는 공시방법을 당사자가 임의로 창설하는 모든 물권의 공시방법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또는 기술상 매우 곤란하다 따라서 점유와 등기는 물권을 제한하여 당사자의 자유로운 선택만으로 가능하다 의미 한국의 민법 185조에 의하면 '물권은 법률 또는 관습법에 의하는 외에는 임의로 창설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법률 또는 관습법이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과 또한 법률이 인정하는 물권에 법률이 정하는 것과 다른 내용을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법 185조는 강행규정이므로 이에 위반하는 행위는 무효가 된다. 한편 민법이 관습법에 의한 물권의 성립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물권도 특정의 공시방법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법률은 헌법상 의미의 법률만을 가리키고 명령이나 규칙은 포함되지 않는다. 관습법은 관행이나 관례가 일반적으로 인정된 법적 확신에 의하여 법규범으로 된 것을 말한다. 창설이란 전혀 새로운 물권을 만드는 것과 기존의 물권에 법률이나 관습법이 인정하지 않는 내용을 부여하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이와 같은 입법의 취지는 봉건적 물권을 폐지하고 그 부활을 저지함으로써 자유로운 소유를 확보하는 것과 공시를 용이하게 하는 두 가지 점에 있다. 관련판례 관습법상 물권의 인정가능성 온천에 관한 권리는 관습상의 물권이나 준물권이라 할 수 없고 온천수는 공용수 또는 생활상 필요한 용수에 해당되지 않는다. 관할행정청으로부터 도시공원법상의 근린공원 내의 개인소유 토지상에 골프연습장을 설치할 수 있다는 인가처분을 받은 데 하자가 있다는 점만으로 바로 그 근린공원 인근 주민들에게 토지소유자에 대하여 골프연습장 건설의 금지를 구할 사법상의 권리가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미등기 무허가건물의 양수인이라 할지라도 그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받지 않는 한 건물에 대한 소유권을 취득할 수 없고 그러한 건물의 취득자에게 소유권에 준하는 관습상의 물권이 있다고 볼 수 없다. 민법 제185조는 물권법정주의를 선언하고 있고 물권법의 강행법규성은 이를 중핵으로 하고 있으므로 법률이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물권을 창설하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한다. 미국 대륙법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한국과는 달리영미 부동산법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미국에서는“물권법정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계약자유의 원칙이 최우선적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부동산에 관한 권리가 당사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각주 같이 보기 물권 대한민국 민법 제185조 물권법 민법 법률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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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C%82%AC
기사
기사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기사(記事)는 신문이나 잡지 등에 실린 글을 말한다. 기사(技士)는 차량이나 기계 등을 운전하는 사람을 말한다. 기사(技士)는 국가기술자격의 한 등급이다. 기사(棋士/碁士)는 바둑이나 장기 등을 전문적으로 두는 사람을 말한다. 바둑 기사, 장기 기사, 체스 기사, 오목 기사, 쇼기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기사(騎士)는 말을 탄 무사를 말한다. 기사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이다. 기사(己巳)는 육십간지의 하나이다. 기사(騎射)는 말 위에서 화살을 쏘는 행위를 가리킨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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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B%8F%84%EC%88%98%EA%B5%B0%ED%86%B5%EC%A0%9C%EC%82%AC
삼도수군통제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水軍)을 총지휘하는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관품은 종2품이다. 지휘 관청과 해군 기지로 삼도수군통제영을 두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그 직책 특성상 수군 총사령관급이며, 육군과 수군을 아우르는 전군 총사령관에 대응되는 도원수의 부하이다. 단, 도원수는 전쟁 발발 또는 사변이 있을 때만 임명되는 임시 관직이며, 삼도 수군 통제사는 항상 유지되는 상설 관직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통제영에서 삼도수군통제사를 보좌하는 바로 아래 관직은 정3품 수군 우후이다. 통제영 부사령관 또는 참모장에 해당한다. 하삼도 하삼도(下三道)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일컫는 말이다. 이 지명은 《고려사》에도 등장한다. 따라서 그 이전에도 쓰였던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경상좌수영 경상좌수영은 경상좌도수군 절도사의 진영으로, 주로 왜구의 침입경로인 낙동강에서 경주지역까지의 수로 방어를 담당하였다. 최초로 설치된 곳은 부산 동래현이었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이전하였다가, 1592년 동래 남촌으로 옮겨갔다. 1635년 인조 13년에는 최초의 장소인 감만이포로 옮겼다가 왜관과 가깝다는 이유로 1652년 효종 3년에 다시 동래 남촌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임란 당시에는 박홍이 맡았지만 일본군에 의해 와해되면서 임란이 끝날 때까지 경상좌수영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전 옥포만호 이운룡이 맡았으나 원균의 칠천량 해전 이후 삼도 수군이 전멸하자 경상좌수군은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육전에 참가하였다. 경상우수영 경상우수영은 경상우도수군 절도사의 진영이다. 경상도 우수영은 처음에 거제에 두었다가 1604년(선조 37년) 고성(固城 : 지금의 통영시)으로 옮겼다. 경상우수영은 삼도수군통제영으로 기능하였으며, 이순신과 원균이 통제사를 역임한 임진왜란 기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경상우수사가 통제사를 겸임하였다. 전라좌수영 1479년 성종 10년 전라도 수군절도사영이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으로 분리되면서 내례만호진 자리(현재 여수)에 설치되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5관(순천, 흥양, 광양, 낙안, 보성), 5포(사도, 여도, 녹도, 방답, 발포)를 둔 작은 수군기지였지만 이순신이 연전연승을 하고, 통제사를 겸하게 되면서 통제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순신의 후임인 이시언 수사까지는 통제영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류형이 신임 통제사로 부임한 이후에는 경상우수영에 그 지위를 넘겨 주게 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전라우수영 1377년 고려 우왕 3년에 무안 당곶포에 수군이 처음 설치된 후, 1440년 세종 22년에 해남 황원관으로 옮겼다. 1465년 세조 11년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억기가 전라우수사로 재임하였으며 이억기가 칠천량 해전서 전사한 다음에는 김억추가, 명량 해전 직후 거제현령 안위가 승진하여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 명량 해전의 주요 본거지가 되었다. 대동지지에 따르면 7관 18포로 구성되어 있어 임란 당시 조선 수군 군영 중 가장 규모가 컸다. 충청수영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잦은 지역이었고, 간단한 형태의 방어진만 존재하다가 1447년 세종 29년 대마도 정벌과 함께 수군과 기지를 정비하고, 충청수영의 체계를 갖추었으며, 1466년 세조 12년에 충청수군절도사로 승격하였다. 왜구의 침탈로부터 방어하고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임란시에는 정걸과 선거이가 재임하였다. 정걸이 재임하던 당시 그는 행주대첩 당시 권율에게 화살등 물자를 지원하여 승리에 기여하였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최호가 맡았지만 그가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여 후임으로 임란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휘하의 장수였던 전 경상우수사 권준이 맡았다. 현재의 오천항 지역에 해당한다. 같이 보기 도원수 여수시 통영시 이순신 우치적 이운룡 원균 홍남주 이준한 이홍술 이재항 이당 이국현 이재봉 심낙신 수군절도사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대한민국의 해군참모총장 유명수군도독(有明水軍都督) 각주 외부 링크 조선의 수군-수군진영 이순신 프로젝트 조선의 관직과 칭호 조선의 군사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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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C%B9%A0%EC%9D%BC
삼칠일
삼칠일(三七日) 또는 세이레는 산모가 아기를 낳은 후 행동을 조심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산모와 아기는 되도록 외부인과 접촉을 하지 않고 미역국을 먹으며 몸조리를 한다. 예전에는 출산을 하면 삼칠일 동안 금줄을 쳐서 잡인의 출입을 막았다. 같이 보기 한국의 산후조리 산후조리 통과의례 한국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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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E%9C%ED%83%81%EC%8A%A4%20K%20%EB%A7%88%EC%9A%B4%ED%8A%B8
펜탁스 K 마운트
펜탁스 K 마운트()는 펜탁스가 35 mm SLR 카메라를 위해 개발한 렌즈 마운트이다. 1976년에 개발되었으며, 이 후 펜탁스의 모든 35 mm 필름 SLR 카메라 및 디지털 SLR 카메라에 사용되었다. K 마운트를 기초로 하여 KF, KA, KAF, KAF2 등과 같이 새 기능들이 추가된 마운트가 개발되었다. 같이 보기 니콘 F 마운트 캐논 EF 마운트 M42 마운트 렌즈 마운트 사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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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90%EA%B5%AC%EC%83%9D%ED%99%9C
탐구생활
탐구생활은 한국교육개발원이 개발하여 초등학생의 방학시 과제물로 배포하던 학습교재이다. 개요 방학 중 학습 교재로는 일제강점기에 하휴(夏休)학습장 또는 동휴학습장이라는 이름의 교재가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겨울공부,겨울학교등의 이름으로 초등학생용 방학교재가 간행되었다. 탐구생활 탐구생활은 1979년 여름방학에 처음으로 발간하여 무료로 배포되었으며, 과학과 관련된 내용을 절반 이상 배정하여 자연 속에서 동·식물을 탐구하고 자발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설명되었다. 내용은 일(日) 단위로 구별되어 있으며, 라디오의 〈학교방송〉에 맞추어 진도를 나가도록 짜여져 있었다. 이후 1997년(일부 지역은 1998년, 1999년)까지 약 20년 동안 초등 방학과제물의 대명사로 통했다. 학교방송 1989년부터는 텔레비전에서도 학교방송 프로그램이 방영되었고, 라디오는 그 후신인 교육방송에서 주로 담당했으며 마지막으로는 MBC가 잠깐 맡기도 하였다. 2000년대 이후로는 교육방송에서 대체 프로그램이 만들어짐에 따라 탐구생활의 후신격이 되었고 방학숙제 자율화에 따라 점차 의미가 사라져갔다. 각주 같이 보기 교육방송 원격 교육 외부 링크 위드키드의 탐구생활 정보 대한민국의 교육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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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
원광(圓光, 542년 ~ 640년)은 신라 진평왕 시대의 유명한 승려이자 학자이다. 세속에서의 성은 박씨이다. 중국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이름이 높았던 원광은 신라로 돌아 온 후 《여래장경사기(如來藏私記)》《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등을 지어 신라에 새로운 불교 지식을 전하였다. 한편, 교화활동에 힘써 국민도덕 및 사회윤리를 선양하는 일을 도모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제정이다. 진평왕 30년(608년)에는 왕명으로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 생애 원광의 생애에 대해서는 13세기 초에 만들어진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 간략히 나와 있다. 제자백가(諸子百家)사서삼경(四書三經)《춘추(春秋)》《사기(史記)》 등을 읽고 불경을 공부하여 진흥왕 27년(566년) 승려가 되었다. 진지왕 3년(578년) 진(陳)에 건너가 《열반경》, 《성실론(成實論)》을 배우고 여러 불경을 연구하고 강의하여 이름이 높았다. 또한 원광은 수나라에 가서 여러 경전을 배웠다. 589년에 수나라에 건너가 11년간 유학하면서 그는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 양쪽의 불경을 모두 공부하였다. 그는 수나라의 승려 담천(曇遷)혜원(慧遠)영유(靈裕) 등을 만나 《열반경(涅槃經)》《성실론(成實論)》《구사론(俱舍論)》《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웠다. 진평왕 22년(600년)에 신라로 돌아와 대승 불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여래장경사기(如來藏私記)》《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등을 지어 신라에 새로운 불교 지식을 전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해 복잡한 용어를 사용하기보다 평범한 말들로 표현하였다. 귀산(貴山)등에게 화랑도 세속5계(世俗五戒)를 지어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왕명을 받아 수나라에 보내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었고 황룡사 백고좌회에서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법하였다. 원광은 대승불교의 진호국가사상(鎭護國家思想)을 화랑도 및 근왕사상(勤王思想)과 연결시켜 국가 이념으로 정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사상 불교 학자로 한국 고대 불교를 연구한 고익진은 자신의 저서 《한국 고대불교 사상사》에서 원광의 사상은 다음 인용문에 나오는 것처럼 유식 계통의 섭론학이라고 하였다. 세속 오계 원광은 진평왕 22년(600)에 귀국한 후 《여래장사(如來藏私記)》·《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를 찬술하는 한편 교화활동에 힘써 국민도덕 및 사회윤리를 선양하는 일을 도모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제정이다. 그는 귀산(貴山)과 추항 두 청년에게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윤리강령(倫理綱領)을 가르쳐 당시 신라 청소년들이 지켜야 할 실생활의 윤리를 제시하였다. 세속오계는 ① 사군이충(事君以忠), ② 사친이효(事親以孝), ③ 교우유신(交友有信), ④ 임전무퇴(臨戰無退), ⑤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이 덕목들은 후에 화랑(花郞)의 실천덕목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정신적인 큰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세속오계 중 특히 살생에 대한 조항은 불교 이념에 위배되는 조항이지만, 당시 고구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고 백제와 항쟁을 계속하던 신라로서는 필요불가결한 행동 윤리로 요청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원광의 현실주의적 불교관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걸사표 원광은 진평왕 30년(608년) 왕명으로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 원광이 등장한 작품 《화랑전사 마루》(KBS, 2006년~2006년, 배우:이대로) 《연개소문》(SBS, 2006년~2007년, 배우:이원용) 《대왕의 꿈》(KBS, 2012년, 배우 : 이대로) 같이 보기 화랑 세속오계 진흥왕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원광 542년 출생 640년 사망 신라의 승려 불교 철학자 6세기 한국 사람 7세기 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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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6년
연호 원(元) 지정(至正) 26년 일본(日本) 남조(南朝) 쇼헤이() 21년 일본(日本) 북조(南朝) 조지() 5년 쩐 왕조(陳朝) 다이찌(大治) 9년 기년 원(元) 혜종(惠宗) 34년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5년 쩐 왕조(陳朝) 유종(裕宗) 26년 사건 전민변정도감 설치 카스티아 내전이 시작됐다. 탄생 4월 3일 - 잉글랜드의 왕 헨리 4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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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역형
징역형(懲役刑)은 형법에 규정된 형벌의 한 종류로서, 범죄자를 교도소에 일정기간 동안 구금하는 방식이며, 자유형 중 가장 대표적인 형벌이다. 특징 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강제노역을 한다. 작업을 과하지 않는 금고와 다르다. 징역형은 보통 파렴치범(예:강도, 강간, 절도, 사기죄 등)에, 금고형은 비파렴치범(예:양심수 등)이나 과실범에 주로 과하여지나, 금고형 수감자도 작업을 하려는 경향과 함께, 금고형에 대한 비판론이 있기에 징역형이 확대되려는 경향을 보인다. 참고로 2010년 10월 25일 법무부에서 밝힌 형법개정안에 따라, 자유형의 경우, 금고는 폐지되고 징역형으로 단일화 될 예정이다. 유기징역과 무기징역이 있고 이 중 무기징역은 종신형이 원칙이나, 모범수로서 제대로 생활하면 가석방되어 나올 수 있고, 대통령의 사면, 복권 조치로 인해 나올 수도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 4월 15일 개정된 형법에 따르면 유기징역은 1개월 이상 30년 이하의 징역으로서, 최대 50년까지 형을 가중할 수 있다. 반대로 형을 감경할 때에는 처벌 기간의 1/2까지 감경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과 영미법국가와는 달리, 100년형 또는 500년형은 선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입법주의는 500년 형은 사실상 종신형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이름만 유기징역이고 실제는 무기징역이 아니냐는 비판에 의한 것이다. 이 형을 선고받는 사람에게는 자격상실이나 자격정지가 부과될 수도 있다. 징역은 병역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징역을 선고받은 기록이 있으면 장교나 부사관으로의 지원은 아예 막히고, 형량이 6개월 미만이면 현역 복무, 6개월 이상 1년 6개월 미만이면 사회복무요원 대상이 되고, 1년 6개월 이상 6년 미만이면 전시근로역 대상이 되며 6년 이상인 경우 아예 군적이 말소된다. 경합범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둘 이상의 죄를 범한 경우나, 혹은 그 죄를 경합범(競合犯)이라고 한다. 판결이 확정된 죄와 그 판결이 확정되기 이전에 범한 죄 사이에도 경합범 관계가 성립한다. 경합범의 종류에는 실체적 경합범과 상상적 경합범이 있는데, 실체적 경합범은 복수의 죄를 지었을 경우를 말하며, 상상적 경합범은 한번의 행위가 복수의 죄에 해당하는 경우를 말한다. 경합범의 처벌은 흡수주의, 가중주의, 병과주의 이렇게 세가지가 있다. 먼저, 흡수주의는 여러개의 복수의 죄 중에서 가장 중한것을 형량으로 정해서 처벌하는 것이고, 가중주의는 복수의 죄 중에서 가장 무거운 죄에 가중해서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병과주의는 각각의 죄에 해당하는 형을 합산해서 처벌하는 것이다. 서양권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 징역 수백년, 수천년 그 이상의 형벌이 나오는 이유도 병과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가중주의를 기본으로 처벌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흡수, 병과도 사용하기도 한다. 교도소에서 유기 징역을 선고받을 경우, 복수의 죄 중에서 가장 중한 죄의 반을 합산해서 선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복수의 죄 중에서 가장 중한 죄가 10년이라면 15년까지 선고할 수 있다. 흡수주의를 사용하는 경우는, 복수의 죄 중에서 가장 중한 죄의 형이 사형,무기징역,무기금고가 포함되어 있을 경우이다. 예외적으로, 병과주의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가장 중한죄의 1.5배가 여러 복수의 죄의 형량을 초과할 경우, 여러 복수의 죄를 합산한다. 예를 들어서, A죄가 6년, B죄가 1년 6월, C죄가 1년일 경우, 가장 중한죄의 반을 가중하면 징역 9년이 되지만, A,B,C죄의 합산이 8년 6월이므로 8년 6월까지 선고할 수 있다. 참고로 과료, 몰수는 징역과 더불어 병과할 수 있다. 형벌 자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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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고시원
중화민국 고시원(中華民國 考試院)은 중화민국의 모든 공무원의 채용 시험이나 임용, 관리등의 인사 관리 등을 실시하는 정부 기구이다. 고시원장, 부원장 각 1명, 고시 위원 19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시 위원의 임기는 6년으로 입법원의 동의를 거쳐 총통이 임명하고 있다. 모든 중화민국의 공무원은 고시원이 실시하는 채용시험과 자격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법에 명시되어 있다. 같이 보기 오권분립 외부 링크 1930년 설립된 단체 원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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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시선
다이시선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게이힌 급행 전철 다이시선 도부 철도 다이시선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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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 인식
패턴 인식()은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과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분야에 속하는 문제 중 하나이다. 인지과학은 심리학, 컴퓨터 과학, 인공지능, 신경생물학과 언어학, 철학을 이용하여 지능과 인식의 문제를 다루는 포괄적인 학제적 과학 분야를 말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학습능력과 추론능력을 인공적으로 모델링하여 외부 대상을 지각하는 능력, 나아가 자연언어와 같은 구문적 패턴까지 이해하는 능력 등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하는 기술을 말한다. 인공지능에 관한 연구는 현재 지능형 시스템(Intelligence System)이라는 인공지능에 기반한 정보 시스템 분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정보화 시대에 쉽게 얻을 수 있는 수많은 데이터들을 적절히 가공하는 것은 물론 정보의 표현과 처리에도 지능형 시스템이 적용되고 있으며 금융, 제조, 스포츠, 서비스 분야 등의 비정보기술 부문에까지 널리 이용되고 있다. 패턴 인식은 공학적 접근법을 이용하여 인공지능의 실제 구현 문제인 센싱된 대상을 인식하는 문제를 주로 다룬다. 패턴인식을 여러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계산이 가능한 기계적인 장치(컴퓨터)가 어떠한 대상을 인식하는 문제를 다루는 인공지능의 한 분야"라고 정의한다. 같이 보기 특징 추출 수치 해석 소프트웨어 기계 학습 예측 분석론 광학문자인식 외부 링크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Pattern Recognition List of Pattern Recognition web sites Journal of Pattern Recognition Research Pattern Recognition (Journal of the Pattern Recognition Society) Pattern Recognition Using NeuralNetworks : A Sample Project in Microsoft.NET Pattern Recognition Source Code and Tutorials 통계분석연구회 분류 알고리즘 기계 학습 인공지능 형식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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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징병거부 폭동
뉴욕 징병거부 폭동(New York City draft riots)은 남북 전쟁이 일어난 동안 새로운 연방 징병제에 노동자 계급의 뉴욕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을 때 1863년 7월에 일어나 5일간 미국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가장 파괴적인 일부였다. 수백명의 주민들이 살해되었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심각하게 부상을 입었으며 흑인 뉴욕 시민들이 가끔 폭동인들의 폭력의 목표였다. 남북 전쟁 전에 뉴욕의 분할 미국의 비지니스 수도로서 중요한 교역 상대로서 뉴욕은 남부를 잃는 것을 의미하면서 남북 전쟁의 시작을 환영하지 않았다. 목화는 뉴욕의 상인들을 위하여 극도로 가치 있는 생산물이었는 데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목화는 도시의 항구에서 출하되는 모든 상품들의 40 퍼센트를 대표하였다. 1808년 노예 무역이 불법으로 만들어진지 오랜 후에 도시의 노예의 지하 시장은 지속적으로 번창하였다. 1861년 남북 전쟁이 발발했을 때 심지어 뉴욕주가 합중국으로부터 탈퇴하는 얘기도 나와 맹방주들과 도시의 비지니스 이익에 관하여 너무 얽혀있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뉴욕의 반전 정치인들과 신문들은 많은이들이 아일랜드 혹은 독일 이민자들이었던 그 근로자 계급의 백인 시민들에게 해방은 남부로부터 해방된 수천명의 노예들에 의하여 노동력에서 그들의 대체를 의미할 것을 계속 경고하였다. 1862년 9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선언을 공고하여 노동자들의 최악의 두려움을 확인하였다. 당시 해방을 위한 링컨의 결정은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이 아닌 합중국을 보존하는 데 가입한 뉴욕주 연대들의 군인과 장교들은 물론 도시에서 노동자들 사이에 항의를 일으켰다. 화를 촉발한 새로운 연방 초안 법 1863년 초순에 극심한 인력 부족을 향한 링컨의 정부는 20세와 35세 사이의 전체 남성 시민들과 35세와 45세 사이의 전체 미혼 남성들을 병역 의무 대상으로 만든 엄격한 새 징병법을 통과시켰다. 모든 적격 남성들이 추첨에 들어갔어도 그들은 대체자를 고용하거나 300 달러 (오늘날 대충 5,800 달러)를 정부에 지불하면서 위험에서 벗어나는 길을 살 수 있었다. 당시 그 합계는 평균 미국인 노동자를 위하여 연봉이었고 가장 부유한 남성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징병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문제를 복잡하게 한 흑인 남성들은 자신들이 숙고되지 않은 시민들로서 징병으로부터 면제되었다. 징병제에 폭동들은 디트로이트와 보스턴 같은 다른 도시들에서 일어났으나 뉴욕에서 일어난 것 만큼 나쁜 곳은 없었다. 반전 신문들은 새로운 징병법에 대한 공격을 게시하여 7월 11일 도시의 첫 징병 추첨에 이르는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를 부채질하였다. 폭동들이 시작되며 추첨이 있던 첫 24시간 후에 도시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했으나 7월 13일 월요일 아침 일찍이 폭동이 시작되었다. 주로 아일랜드인과 아일랜드계 미국인이었던 수천명의 백인 노동자들은 군사와 정부 건물들을 공격하면서 시작하여 경찰관과 군인들의 불충분한 수를 포함하여 그들을 막으려고 한 사람들에게만 폭력적이 되었으며 도시의 지도자들은 시초적으로 그들을 반대하는 데 집결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흑인 시민들, 주택과 비지니스들을 목표로 이동하였다. 하나의 악명 높은 예로서 수천명의 사람들, 그중에 어떤이들이 곤봉과 방망이로 무장한 폭도가 42번가 근처 5번가에 있는 200명 이상의 어린이들을 수용한 4층 건물 유색인 고아원을 습격하였다. 그들은 침구, 식량, 옷과 다른 물건들을 가져가고 고아원에 불을 질렀으나 도시의 사설 구빈원들 중의 하나로 강제로 이동한 어린이들에게 폭행을 멈추었다. 폭력과 유혈 사태를 일으킨 폭동들 흑인들 자신에 추가로 폭도들은 분노를 백인 노예폐지론자들과 흑인 남성들에게 결혼한 여성들에게 돌렸다. 1863년 초순 선착장에 흑인 노동자들을 기용한 고용인들에 대한 시위는 폭력적으로 변하여 자신들과 나란히 선착장에 일을 하던 흑인 남성들에게 오랫동안 반대한 백인 항만 노동자들은 흑인 노동자들을 만족시킨 선착장들 근처에 많은 비지니스들을 파괴하고 도시에서 흑인 노동자 계급을 없애는 데 자신들의 노력의 일환으로 그들의 주인들을 공격하는 기회를 얻었다. 여태까지 최악의 폭력은 충격적인 잔인함으로 린치를 당하거나 맞아 죽은 흑인 남성들을 위하여 예약되었다. 전체적으로 살해된 사람들의 실제 숫자 추정이 1,200명 만큼 높이 도달하였어도 뉴욕 징병거부 폭동의 발표된 사망자 수는 119명이었다. 폭동의 종말 뉴욕의 지도자들은 징병거부 폭동 진압 임무와 분투하였으며 뉴욕주지사 호레이쇼 시모어는 징병법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폭동에 동정적으로 보였던 평화민주당원이었다. 뉴욕의 공화당 시장 조지 옵다이크는 연방군들을 보내는 데 미국 전쟁부에 유선으로 연결했으나 폭동으로 응답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에 망설였다. 7월 15일 항의의 셋째 날 폭동은 브루클린과 스태튼아일랜드로 확산되었다. 이어진 날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싸운 뉴욕 연대들로부터 4,000명 이상의 연방군들 중에 첫번째가 도착하였다. 오늘날 머리힐 이웃인 곳에 폭도들과 충돌한 후, 군인들은 결국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고 7월 16일의 자정까지 뉴욕 징병거부 폭동은 종지부를 찍었다. 여파와 유산 사망자 수에 추가로 폭동들은 재산 피해에 수백만 달러를 발생시켰고 도시의 흑인 거주민들 중에 3,000명을 노숙자로 만들었다. 뉴욕 징병거부 폭동은 미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폭동으로 남아 로스앤젤레스 폭동 (1992년)과 디트로이트 폭동 (1967년)보다 더욱 최악이었다. 폭동 후에 유색인 고아원이 똑같은 현장에 재건을 시도했을 때 이웃하는 부동산 소유자들이 항의하였고 고아원은 결국적으로 이후에 할렘이 될 도시의 북부에 드물게 정착지로 이전할 것이었다. 폭동들에 의하여 기절한 뉴욕에서 노예 폐지 운동은 천천히 되살아났고 징병거부 폭동 발생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1864년 3월 뉴욕은 북군에서 전흑인 지원병 연대가 허드슨강에서 자신들의 배에 타기 전에 거리들을 통하여 화려함과 상황에 따라 행렬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 의미있는 승리에 불구하고 징병거부 폭동은 도시의 흑인 공동체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1860년 인구 조사는 12,414명의 흑인 뉴욕 시민들을 기록했던 동안 1865년까지 도시의 흑인 인구는 9,945명으로 감소하여 1820년 이래 가장 낮은 숫자였다. 대중문화에 나타난 뉴욕 징병거부 폭동 마틴 스코세이지가 감독한 《갱스 오브 뉴욕》의 마지막 장면이 이 폭동 사건을 다루고 있다. 폭동의 전개 과정이나, 당시 상류층의 둔감함의 일면을 볼 수 있다. 같이 보기 남자만의 병역의무 부과 사건 양성평등 자유주의 남성주의 외부 링크 The New York City Draft Riots of 1863 New York Draft Riots The Library of Congress First Edition Harper's News Report on the New York Draft Riots Draft Riots 1863 New York City Draft Riots 1863년 7월 1863년 살인 사건 미국의 폭동 미국의 정치사 뉴욕의 역사 미국 남북 전쟁 자유주의 뉴욕 시경찰국 미국의 징병제 1863년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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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각론
채권각론(債權各論)은 채권법 중에서 계약과 사무관리, 부당이득, 불법행위 등을 다루는 분야이다. 대한민국 민법의 제527조에서 제766조가 이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계약 총론 계약총론(契約總論)은 대한민국 민법 제527조부터 제562조까지의 계약 총칙에 대한 부분으로서, 계약의 성립, 계약의 효력, 계약의 해지와 해제에 대한 내용이다. 계약 각론 증여 증여는 계약으로서, 증여자가 아무런 대가 없이 재산을 상대방인 수증자에게 수여할 의사표시를 하고, 수증자가 이를 승낙함으로써 성립된다.(대한민국 민법 제544조) 계약이기 때문에 물론 수증자가 거절하면 증여는 성립하지 아니한다. 또 증여자와 수증자 사이에서 자유로이 증여의 형식·내용을 결정할 수가 있다. 증여계약은 별반 문서를 교환하지 않아도 구두약속(口頭約束)만으로 유효하게 성립하지만(불요식계약), 구두약속뿐인 증여는 효력이 약하다(대한민국 민법 제555조). 증여에서 중요한 점은 증여자가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는다(무상계약이자 편무계약에 속함)는 것이다. 물론 증여가 행하여지는 배경에는 사은(謝恩), 장래의 봉사에 대한 기대 등의 동기가 있을 것이나 법률적으로는 위의 동기는 계약 내용에 나타나지 않는 한 평가되지 않는다(즉 무상계약인가 아닌가는 전적으로 계약내용에 의하여 결정된다). 증여 계약은 일시적 계약에 속한다. 증여되는 재산은 유형(有形:동산·부동산 등, 무형(無形:채권이나 그 밖의 권리 혹은 勤勞의 제공 등)의 양편이 있을 수 있다. 또 타인의 재산이라도 무방하다고 되어 있다(타인으로부터 매입하여 수증자에게 주면 되기 때문이다). 증여계약이 성립하면 증여자는 수증자에게 약속한 재산을 주어야 할 채무를 부담하게 된다. 그러나 증여자는 약속한 재산에 결함이 있어도 원칙적으로 바꾸어 준다거나 수리하는 의무 또는 수증자에 대하여 손해를 배상하는 의무도 부담하지 않는다(약속한 재산을 주면 그것으로써 채무를 이행한 것이 된다). 증여가 계약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단독행위인 유증(대한민국 민법 제1074조 이하)와 구별된다. 매매 매매는 당사자의 일방(매도인, 賣渡人)이 어떤 재산권을 상대방(매수인, 買受人)에게 이전하기로 약속하고 상대방이 이에 대하여 그 대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대한민국 민법 제563조)이다. 간단히, 재화와 금전의 교환이 매매이다. 즉 어떤 물품(物品)을 산다고 하는 것은 그 물품의 소유권을 산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말할 필요도 없이 소유권 이외의 재산적 가치가 있는 권리도 타인에게 양도 가능한 것인 이상 모두 매매의 목적이 될 수 있다(예;채권:대한민국 민법 제449조 참조, 지상권이나 질권(質權)과 같은 물권, 광업권이나 채석권(採石權), 특허권이나, 실용신안권·저작권, 고객과의 거래관계에 관한 권리 등 일체의 권리의 양도 등). 매매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매매에 의한 권리의무관계는 각각 상이하게 전개된다. 교환 교환은 당사자가 서로 금전 이외의 재산권을 이전하기로 약정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대한민국 민법 제596조)이다. 매매에서는 재산권의 양도에 대한 반대급부가 대금인 데 반하여, 교환에서는 반대급부도 역시 재산권의 양도이다. 그러므로 교환계약에 기초해서 두 개의 양도행위가 행하여지며 양자는 서로 상환성·대가성을 갖는다. 양당사자가 서로 금전 이외의 재산권을 이전시키는 점이 매매와 다른 점이다(매매에서는 당사자의 일방은 금전을 지급한다). 금전의 보충지급을 약정한 때 매매대금에 관한 규정이 준용되게 된다(567조). 교환 계약은 유상계약, 쌍무계약, 일시적 계약이다. '환금(換金)'은 금전의 소유권을 상호간에 이전시키는 것이므로 법률적으로는 매매도 아니며 교환도 아니다. 그러나 어떻든지 일조의 유상계약이므로 매매의 규정이 준용된다(567조 참조). 교환은 역사적으로는 매매보다도 먼저 발달한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눈에 띄게 그 이용이 적어졌다. 소비대차 소비대차는 당사자의 일방(貸主)이 금전 기타 대체물(代替物)의 소유권을 상대방(借主)에게 이전할 것을 약정하고 상대방이 동종·동질·동량(同量)의 물건을 반환할 것을 약정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민법 598-608조)이다. 예컨대 돈이나 쌀 등을 빌려 소비하고, 나중에 다른 돈이나 쌀로 갚는 경우와 같다. 차주(借主)가 빌린 물건 그 자체를 반환하지 않고 다른 동종·동질·동량의 것으로 반환하는 점에서 사용대차나 임대차와 구별된다. 사용대차 사용대차는 당사자의 일방(貸主)이 상대방(借主)에게 무상으로 사용·수익하게 하기 위하여 목적물을 인도할 것을 약정하고 상대방은 이를 사용·수익한 후 그 물건을 반환할 것을 약정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이다(609조). 사용대차 계약은 무상계약, 편무계약, 낙성계약, 계속적 계약에 속한다. 대한민국의 구 민법에서는 낙성계약이 아닌, 요물계약이었다. 사용대차는 빌린 물건 그 자체를 반환한다는 점에서 소비대차와 다르고 임대차와 같으며, 사용·수익의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점에서 임대차와 다르다. 사용대차는 무상으로 동산·부동산으로부터 금전이나 유가증권까지 목적으로 할 수 있으므로 친근하고 특수한 관계에 있는 자 사이에서만 많이 성립하게 되어 이 점에서 법률관계로서의 문제는 적다. 사용대차는 낙성계약이므로 대주는 목적물을 차주에게 인도할 의무가 있다. 또한 그 뒤에도 대주는 차주에게 목적물의 사용·수익을 허용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임대인과 같이 목적물을 수선하여 이용에 적합하도록 해줄 적극적인 의무는 없다. 또 무상이기 때문에 대주의 담보책임은 증여자와 같이 가볍다(612조). 차주는 물건을 사용·수익하고 사용대차의 종료 후에는 원상으로 회복하여 목적물을 반환하여야 한다(615조). 임대차 임대차는 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게 목적물을 사용·수익하게 할 것을 약정하고, 상대방이 이에 대한 대가로서 차임을 지급할 것을 약정함으로써 그 효력이 생기는 계약이다.(대한민국 민법 제618조) 임대차계약은 유상계약, 쌍무계약, 낙성계약, 계속적 계약에 속한다. 고용 고용은 고용되는 자(근로자·피용자)가 고용하는 자(사용자·고용주)에 대하여 노무를 제공할 것을 약정하고 고용하는 사람이 그 노무에 대하여 보수(報酬:임금)를 지급할 것을 약정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655조)을 말한다. 고용계약은 노무의 제공과 보수의 지급이 대가적·교환적 관계에 서는 것이므로 쌍무계약, 유상계약, 계속적 계약에 속한다. 본래는 불요식(不要式)의 낙성계약이다. 고용계약에 의하여 반대급부로서 대부분 금전의 지급이 이루어지므로 금전채권이 발생한다. 고용 계약에 의하여도 대리권이 발생할 수 있다. 고용은 도급이나 위임과 더불어 계속적인 노무 공급계약의 일종이긴 하지만 사용자의 지휘에 따라 노무 자체의 공급을 목적으로 하는 점에 특징이 있으며 오늘날의 경제사회에서 갖는 역할은 크다. 그런데 민법은 고용을 피용자와 사용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자유로이 노동조건 등의 일체를 결정할 수가 있다는 주의 아래 서고 있으나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과 같이하여 사용자와 피용자 간의 실력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 현재에서는 공평하고 올바른 계약 내용을 실현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고용은 이른바 종속적(從屬的)인 관계에 서는 것으로서 그 사이에 공정한 계약 관계를 실현하기 위하여는 국가의 근로자 보호를 위한 적극적인 간섭이 필요하게 된다. 노동조합법이나 노동쟁의조정법(勞動爭議調整法)·근로기준법(勤勞基準法) 등에 의한 새로운 노동법 질서가 이것이며, 고용에 관한 법이론의 중점은 민법에서 노동법으로 옮겨졌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일반적인 노무공급에 대한 고용관계에 관하여는 광범하게 근로기준법이 적용되고 있으며 민법은 겨우 가사 사용인(家事使用人)에 대하여 적용되고 있는 상태가 되고 있다(근로기준법 제10조 참조). 도급 도급은 어떤 일의 완성을 부탁받은 자(수급인)가 일을 하기로 약정하고, 부탁한 자(도급인)가 그 일이 완성되면 보수(報酬)를 지급할 것을 약정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664조)이다. 도급계약은 쌍무계약, 유상계약에 속한다. 고용과 같이 노무의 제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노무를 가지고 어떤 일을 완성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점에 특징이 있다. 토목공사나 건축의 경우가 보통인데, 치과의나 정형외과의(整形外科醫)의 수술이나 운송의 계약 등도 도급이다. 도급은 노무의 결과인 일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일은 반드시 수급인 자신이 할 필요는 없으며 금지의 특약이 없는 한 수급인은 다시 그 일을 제3자에게 도급할 수 있다. 이것을 하도급(下都給:下請)이라고 한다. 도급제도는 중소 건축업으로부터 토건(土建)·조선(造船) 등의 기업에 걸쳐서 광범하게 사회적 기능을 달성하고 있는데, 특히 토건업(土建業)의 도급관계는 노동관계의 근대화를 방해하고(下都給에 대한 중간착취), 또 수급인의 기술적 무능이나 해태(懈怠)가 도급인뿐만 아니라 일반공중의 안전에 관계가 깊다(건물의 안전확보, 漏電화재의 방지의 필요). 따라서 하도급관계에서 특별법인 '하도급거래공정화에 관한 법률'에 의해 중간착취의 배제(근기 8조)나 건설업법에 의한 도급의 통제시책(統制施策:건설업자의 면허제, 건설공사의 계약방식의 규제, 기술자의 수준확보의 조치 등)이 취하여지고 있다. 도급 계약에 의하여도 대리권이 발생할 수 있다. 현상광고 현상광고는 광고자(廣告者)가 어떠한 지시행위(指示行爲)를 한 자에게 일정한 보수를 지급할 것을 표시하고, 이에 응한 자(응모자)가 그 광고에 정한 행위를 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675조)이다. 현상광고는 유상·편무계약이며, 민법이 인정하는 유일한 요물계약이다. 현상광고의 법률적 성질에 관해서, 이를 단독행위로 보는 견해(단독행위설)와 계약으로 보는 견해(계약설)로 나뉘나 후자가 통설이다. 현상광고는 사람이나 물건을 찾는다든가 범죄자의 적발, 학술적 발명의 장려에 널리 행하여지고 있으며, 사회의 진전 특히 매스컴의 비상한 발달로 그 사회적 의의는 매우 크다. 예컨대, 행방불명이 된 자기 집 개를 데려오는 사람에게 1만원의 사례금을 주겠다는 등의 광고이다(675조). 광고란 불특정 다수인(不特定多數人)에 대한 의사표시이므로 관념의 통지(사원총회 소집공고 등)나 특정인에 대한 의사표시는 광고가 아니다. 구인광고와 같은 청약의 유인과도 다르다. 광고는 신문·잡지 등의 간행물이나 게시 기타의 서면에 의하든 방송 또는 구두(口頭)에 의하든 그 방법에 제한이 없다. 광고에 지정된 행위의 완료자는 보수청구권을 획득한다(676조). 광고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지정 행위를 완료한 때에는 계약이 성립되었다고 볼 수 없으나, 이런 때에도 계약이 성립을 인정하여 보수청구권을 인정하는 특별규정을 두었다(677조). 위 사례에서 현상광고가 있음을 모르고서 그 집 개를 데려온 사람에게도 광고를 낸 사람은 보수를 지급할 채무를 부담한다(675조, 677조). 현상광고는 지정행위를 완료한 자가 있기 전에는 철회할 수 있으나 이를 모르고 지정 행위를 완료한 자가 있으면 그에게 보수를 지급하여야 한다(679조). 광고 속에서 지정행위를 할 기간을 정한 때에는 광고를 철회할 수는 없으나 그 밖의 경우에는 지정행위를 완료한 자가 없는 한 전기한 광고와 동일 방법에 의하여 철회할 수가 있다(679조 2항·3항). 또 현상광고에는 지정행위를 완료한 자 가운데서 우수한 자에게만 보수를 지급하는 우수현상광고(優秀懸賞廣告)도 있다(678조). 위임 위임은 당사자의 일방(委任人)이 상대방에 대하여 '사무(事務)의 처리'를 위탁하고, 상대방(委任人)이 이를 승낙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이다(680조). 이것은 노무 공급계약의 일종이지만 일정한 사무의 처리라고 하는 통일된 노무를 목적으로 하는 점에 특색이 있다. 위임 계약은 계속적 계약에 속한다. 위임의 목적은 '사무처리의 위탁'에 있는데 그 사무처리의 위탁은 수임인으로 하여금 그의 재량에 의하여 사무를 처리케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수임인이 독립성(獨立性)을 갖는 것을 전제로 한다. 또한 위임인과의 사이에 일종의 신임관계(信任關係)가 성립한다. 보수는 위임의 요소는 아니지만(무상이 원칙이며, 이 점 고용·도급과 다르다) 특약이 있으면 물론 묵시의 의사표시 또는 관습에 의하여 보수가 있는 경우가 많다(686조). 또한 상법상의 위임에는 보수청구권이 있다:상법 61조 참조). 또 위임계약에 의하여 대리권(代理權)이 수여되는 일이 많고, 대한민국 민법은 대리권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위임 이외에는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불가분 일체라고 하여 입법된 것 같으나 대리권은 고용이나 도급, 조합계약에 의해서도 발생한다. 위임과 대리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대리). 그러나 실제에는 양자는 여전히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거래의 관행은 위임이 있으면 당연히 대리권의 수여가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해석상, 위임은 그 사무처리에서 제3자와 관계를 갖게 되는 한, 대리권의 수여를 수반한다고 새겨지고 있다. 즉 특약 기타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때에만 대리권이 없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임치 임치는 당사자의 일방(任置人)이 상대방에 대하여 금전이나 유가증권 기타의 물건의 보관을 위탁하고, 상대방(受置人)이 이를 승낙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639조)이다. 역(驛)의 수하물의 일시보관, 호텔의 클로크룸(所特品保管), 창고업(倉庫業) 등은 임치이며 은행의 예금도 소비임치(消費任置)라고 불리는 일종의 임치이다. 임치는 소비대차나 사용대차와 마찬가지로 낙성계약이다. 대한민국의 구 민법에서는 낙성계약이 아닌, 요물계약이었다. 그리고 임치는 계속적 계약에 속하고, 일종의 노무 공급계약이며 수치인의 노무는 임치물을 '보관'하는 것인데 그것은 목적물의 원상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목적의 달성에 필요한 노무에 한한다. 임치가 다른 노무공급 계약과 다른 점은 단순히 노무의 공급만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임치물의 반환 의무가 결합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임치에는 보관료를 지급하는 경우(특약이 있는 때)와 지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전자는 유상·쌍무계약이며, 후자는 무상·편무계약이다. 그 어느 것이냐에 따라서 수치인의 보관 의무의 경중(輕重)이 다르게 된다(695조). 전술한 바와 같이 물건의 보관이 임치 요소인데 '보관'이란 물건을 보존하여 파손되거나 분실되지 않도록 보전의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서, 맡은 물건을 이용하거나 개량(改良)할 수는 없다. 반환할 때에는 원상 반환함이 원칙이나 맡은 물건은 써버리고 그 물건과 동종·동액의 물건을 반환하면 되는 특수한 임치도 있다(소비임치). 오늘날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하에서는 임치의 중요한 것은 대부분 상인(商人) 사이의, 특히 창고에 임치하는 형식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많다. 그것들은 상법의 규정을 적용받으며(상 62조 이하, 693조 이하 참조), 예금(은행) 등 특수한 임치에 관하여도 '은행법(銀行法)' 등의 적용을 받는 것으로서, 민법상의 임치의 규정은 겨우 인간의 생활용품에 관한 것뿐으로 적용의 여지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조합 조합(組合)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자금이나 노력을 모아 공동으로 사업을 경영하기 위하여 단체를 만드는 계약(703조) 또는 그 계약을 통해 형성된 단체를 말한다. 조합 계약은 쌍무계약, 유상계약, 계속적 계약에 속한다. 조합은 사업을 경영한다는 공동목적 때문에 여러 사람의 당사자(조합원)가 결합하여 단체를 형성하는 것이 특징으로서 같은 계약이라 하더라도 다른 매매나 대차 등의 계약과는 매우 다르다. '조합계약'에 의하여 '조합'이라는 사업단체가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조합대리에 의하여 대리권이 발생할 수 있다.(→조합대리 참조) 종신정기금 종신정기금은 당사자의 일방(終身定期金債務者)이 특정인(자기, 상대방 또는 제3자)의 종신까지 정기적으로 금전 기타의 물건을 상대방 또는 제3자에게 지급할 것을 약정함으로써 성립하는 계약(725조)이다. 이것은 특히 보험적 작용을 나타내는데, 실제로는 사인(私人)간에 잘 행해지지 않는 제도이다. 종신정기금 계약은 무상(無償), 또는 유상(有償)인 수도 있다. 처음부터 아무런 대가를 받음이 없이 정기금을 지급하는 때에는 정기급부를 목적으로 하는 증여(560조)의 일종으로서 증여의 규정이 적용된다. 한편 유상인 경우(예;매매대금이나 고용임금 등의 지급방법으로 이 계약을 맺은 경우)에는 유상계약에 관한 규정이 적용된다. 정기금채무에 불이행이 있을 때에는 채무불이행의 일반 원칙에 따라 손해배상 청구권·계약해제권 등 일반적 효과가 발생함은 물론, 계약해제에 의한 정기금 원본의 반환청구에 관하여는 특칙이 있다(727조). 또 채무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계약종료의 기준이 되는 자(前記의 특정인)가 사망한 경우에는 법원의 선고에 의해 '상당한 기간' 존속하는 것으로 된다(729조 1항). 화해 화해는 당사자가 상호 양보하여 그들 사이에 일어난 다툼을 그만둘 것을 약속하는 계약(731조)이다. 예를 들면 A·B간에 택지의 경계선을 놓고 A는 울타리의 선이라고 주장하고, B는 도랑의 선이라고 주장하여 다툼이 벌어졌을 경우, 등기부상으로도 명확하지 아니하고 기타의 증거도 확실하지 아니하다고 하는 경우에, A·B가 서로 양보하여 울타리와 도랑의 중간선을 경계로 정하고 다툼을 그만 두자는 약속을 하는 것 등이 화해이다. 화해 계약은 쌍무계약, 유상계약에 속한다. 보통 법률상의 다툼이 있을 경우에는 재판에서 그 흑백을 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재판은 제소한 사항에 대하여 일도양단적(一刀兩斷的)인 해결을 하는 것이어서 당사자간에 두고두고 나쁜 뒷맛을 남기게 되며 인정에 알맞은 해결을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특히 계속 계약관계나 이웃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러한 관점에서 재판 이외에 조정이나 중재의 제도가 마련되고 있는 것인데 당사자가 스스로 자유로운 의사로서 양보하여 다툼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여기서 계약으로서 화해제도가 인정되는 의의가 있다. 화해가 되면 법률관계는 그 내용에 따라 확정된다. 당사자는 화해에 의하여 정하여진 의무를 이행하고 권리를 승인하여 종전의 주장은 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뒷날 화해의 내용이 진실에 반하다는 증거가 나타나더라도 화해의 효력에는 영향이 없다(732조). 사무관리 법률적인 의무 없이 남을 위하여 그의 사무를 처리하는 일. 민법에서는 본인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 한 본인과 사무 관리를 행하는 사람 사이에 위임(委任)에 준하는 채권 관계가 발생한다. 부당이득 법령을 위반하는 부당한 방법으로 남에게 손해를 주면서 얻는 이익. 손실자의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은 법정채권이기 때문에 통상 10년의 소멸시효에 걸린다.(대한민국 민법 제162조 제1항) 상행위를 기초로 발생한 부당이득반환채권의 소멸시효기간은 5년이다.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 2002.6.14.선고 2001다47825, 대한민국 상법 제64조) 불법행위 불법행위라 함은 고의 또는 과실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하는 위법행위이다. 위법으로 발생케 한 타인의 손해는 전보(塡補)함이 정의에 합치되므로 불법행위는 손해배상채권의 발생원인이 된다. 계약이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사의 합치에 의한 채권발생원인인 반면, 불법행위는 법률의 규정에 의한 채권발생원인이다. 그러므로 불법행위는 손해배상청구권을 발생시키는 법정채권발생원인이다. 각주 채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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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E%90%EB%B0%9C%EC%A0%81%20%EC%9D%B8%EB%A5%98%EC%A0%88%EB%A9%B8%20%EC%9A%B4%EB%8F%99
자발적 인류절멸 운동
자발적 인류절멸 운동()이란 자발적으로 인류의 절멸을 주장하는 단체이다. 미국의 레스 나이트가 창립하였다. 자발적 인류절멸 운동은 지구가 인류가 없을 때 더 나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이 때문에 인류는 출산을 하지 말야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이 물리력을 동원하여 사람들이 강제로 출산을 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자살 혹은 살인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오래 살고 죽자() 각주 외부 링크 1991년 설립된 단체 환경 단체 환경 운동 포틀랜드 (오리건주)의 단체 반출생주의 인구 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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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D0%A5
Х
하(Х х)는 키릴문자의 하나로, 그리스 문자 Ξ, Χ에서 따 왔으며, 로마 문자 X를 닮았다. 음가는 대부분 언어에서 /x/이다. 컴퓨팅 코드 같이 보기 Χ(그리스 문자) Ξ(그리스 문자) X(로마 문자) 키릴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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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A%B8%EC%A7%84%20%ED%9B%84%EC%A0%95%EB%A6%AC%20%ED%96%A5%EB%82%98%EB%AC%B4
울진 후정리 향나무
울진 화성리 향나무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에 있는 향나무이다.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외부 링크 울진 죽변리의 향나무 - 남북의 천연기념물 울진 죽변리의 향나무 - 문화재청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에 있는 사진 경상북도의 천연기념물 후정리 향나무 유명한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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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E%88%EB%82%98%ED%83%80%EC%99%80%EB%8B%A4%EC%97%AD
히나타와다역
히나타와다역()은 일본 도쿄도 오메시에 있는 동일본 여객철도 오메 선의 역이다. 요시노바이고 매화 축제(요시노바이고) 기간에는 원래 정차하지 않는 홀리데이 쾌속열차(주말 및 휴일 운행)도 임시로 정차한다. 2003년도부터 위탁역으로 운영되고 있다. 인접역 동일본 여객철도의 철도역 오메시의 철도역 1895년 개업한 철도역 일본국유철도의 철도역 오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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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키예루키
벨리키예루키()는 프스코프 주 벨리콜룩스키 군의 중심지로 로바티강에 접해 있다. 이름은 "위대한 건축가"에서 유래되었고 인구는 10만4,979명 (2002년)이다. 프스코프에서 남동쪽으로 313km지점에 위치해 있다. 벨리키예루키는 연대기에서는 1166년 이래에 최초로 언급되었다. 1211년에 요새로 지어진 이후에 벨리키예루키는 프스코프와 노브고로드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1478년에 벨리키예루키는 위대한 이반에 의해서 모스크바 대공국에 합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과 소련군은 1941년에서 1942년 사이에 이곳에서 격렬하게 싸웠다. 1942년 말부터 7,000명의 독일군은 이 요새를 둘러쌓았다. 1943년 1월에 독일군은 이 도시를 빠져나갔다. 이곳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웅인 알렉산드르 마트로소프가 묻힌 곳이었다. 소비에트 연방 육군 원수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가 이 도시에서 태어났다. 같이 보기 벨리키예루키 전투 외부 링크 ( 공식 웹사이트) ( 벨리키예루키 시 사이트) 러시아의 도시 프스코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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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F%84%EB%AF%B8%EB%85%B8%ED%94%BC%EC%9E%90
도미노피자
도미노피자(Domino's Pizza, Inc. 또는 간단히 Domino's)는 미국의 피자 배달 전문 브랜드이다. 현재 전 세계 70개국, 1만 개 이상의 점포를 두고 있다. 역사 1960년, 현재 도미노피자의 창립자인 톰 모너건이 미국 미시간주 입실랜티에서 한 대의 폭스바겐 비틀만을 이용해 배달을 시작한 도미닉스 피자(Dominick's Pizza)를 차린 것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톰 모너건이 3개의 점포를 운영하던 중 1965년 현재의 사명인 "도미노피자"로 개명하고, 1967년에 처음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후 1983년에 캐나다 위니펙에 해외 1호 점포를 개설하였다. 대한민국에는 1990년에 첫 점포인 송파구 오금점이 문을 연 후, 1999년 100호점을 돌파했고 2003년에는 200호점, 2008년에는 300호점을 돌파하여 2017년 현재 전국 438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아시아에서는 1964년 최초로 일본에 진출하여, 그 해 3월 창립한 것이 시초이다. 논란 가격 인상 후 기만적 할인 홈페이지에서 주문을 할 경우 기본적으로 30% 할인을 해준다. 또한 수시로 50% 등의 할인 이벤트를 연다. 처음부터 정가를 과도하게 높게 매겨놓고 기만적으로 할인 이벤트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기부 이벤트 2010년 10월 기부 이벤트를 진행하였다. 소비자가 피자 한 판을 15% 할인 가격에 구매하면 소비자에게는 반 판만 배달되고 나머지 반을 기부하는 형식이다. 또한 회사 측에서 반 판을 부담하여 기부 수혜자는 온전한 한 판을 받게 된다. 얼핏 보면 소비자와 회사가 절반씩 부담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소비자는 모바일 앱이나 통신사, 카드사 등을 이용하여 15% 이상의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15% 할인은 장점이 아니다. 또한 소비자 측에서는 피자 반 판의 가격을 온전히 부담하는 것이지만, 회사 측에서는 피자 반 판의 정가의 50% 정도로 알려진 제조 원가만큼을 부담하는 것이고 그 또한 고객에게 판매하여 얻은 수익으로 상쇄되고도 남기 때문에 회사 측에서는 사실상 부담하는 금액이 없는 것이다. 각주 외부 링크 도미노피자 대한민국 홈페이지 Global Domino's DAY 미국의 피자 체인 미국의 다국적 기업 미시간주의 음식점 다국적 식품 기업 피자 전문점 1960년 설립된 기업 뉴욕 증권거래소 상장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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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85%B8%20%ED%8F%B4%EB%82%98%EB%A0%88%ED%94%84
미셸 폴나레프
미셸 폴나레프(, 1944년 7월 3일)는 프랑스 가론 주 네락 출신의 샹송 가수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의 시대를 풍미했으며, 현재도 상업적으로 미미하지만 여전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가정은 예술적 재능을 지닌 가족으로, 어머니는 댄서였으며, 아버지는 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함께 일했다. 다섯 살때 피아노를 배웠으며 음악에 매우 재능을 보였다. 학업과 병역 및 짧은 보험업계의 일을 마치고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에 있는 사크레 쾨르 사원에서 기타연주를 하였다. 그의 곡 "Qui a tué grand maman" (누가 할머니를 죽였나?) 은 대한민국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리는 민중가요 "오월의 노래"로 번안되었고, 피아니스트 이루마가 편곡하여 드라마 《겨울연가》에 삽입되었다. 1944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프랑스의 남자 가수 러시아계 프랑스인 유대계 프랑스인 우크라이나계 프랑스인 프랑스어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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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F%A8%EB%A1%B1%20%EC%9E%A5%EB%B2%BD
쿨롱 장벽
쿨롱 장벽(Coulomb barrier)은 두 원자핵이 핵융합을 일으킬 정도로 가까워지기 위해 극복해야 할 정전기력을 의미하며, 물리학자 샤를 드 쿨롱의 이름을 따서 이름 지어졌다. 에너지 장벽 이 에너지 장벽은 정전기 위치 에너지에 의해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 여기서, k는 쿨롱 상수이며, 8.9876×109 N m2 C−2; ε0은 공간의 유전율; q1, q2 은 두 입자의 전하량; r은 두 입자의 거리이다. 양수 U 값은 척력을 의미하며, 두 입자는 가까워질수록 높은 에너지 준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수 U 값은 인력으로 인한 속박상태를 나타낸다. 쿨롱 장벽은 원자번호, 즉 원자핵의 양성자의 수와 함께 증가한다. 여기서 e는 기본 전하이며 1.602 176 53×10−19 C이며, Zi는 해당 원자번호이다. 쿨롱 장벽을 극복하고 핵융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강한 상호작용이 일어나서 두 원자핵을 서로 구속할 정도로 가까워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원자핵은 빠른 속도로 충돌해서, 운동 에너지가 쿨롱 장벽을 극복하여 할 정도로 높아야만 한다. 가스의 운동 이론에 따르면, 가스의 온도는 가스 내부 입자의 평균 속도의 측정치일 뿐이다. 일반적인 가스에서, 맥스웰-볼츠만 분포는 가스 온도에 대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 입자의 분포를 제공하며, 쿨롱 장벽을 넘는데 충분한 속도를 지니는 입자 분포 역시 계산 가능하다. 실제로 쿨롱 장벽을 넘기위한 온도는 양자역학에서 게오르기 안토노비치 가모프가 제시한 양자 터널링 효과로 인해 계산된 온도보다 낮다. 터널링을 이용한 장벽 돌파 및 속도 분포에 대한 고찰로 인해 핵융합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의 좁은 범위가 밝혀졌으며, 이는 가모프 창이라고 한다. 핵물리학 핵융합 핵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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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0%AC%EB%9E%80%ED%95%9C%20%EC%97%AC%EB%AA%85
찬란한 여명
《찬란한 여명》(燦爛한 黎明)은 KBS1에서 1995년 10월 28일부터 1996년 11월 23일까지 방영한 대하 드라마이다. 이 작품의 첫 방영일은 1995년 9월 30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충북 옥천의 야외 녹화장이 홍수로 물에 잠기는 바람에 촬영이 연기되어 같은 해 10월 28일로 늦춰졌다. 방송사의 대규모 물량 투입과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10%대의 시청률을 보였다. 이에 대해서는 고증이나 자문을 무시한 일방적인 역사 해석이 있다는 비판이 있기도 했다. 등장 인물 개화파 인물 이정길 : 유홍기 역 정보석 : 김옥균 역 김갑수 : 이동인 역 박병호 : 박규수 역 왕실 인물 변희봉 : 흥선대원군 이하응 역 하희라 : 명성황후 역 조재현 : 고종 역 이재식, 이대원 : 순종 역 조민희 : 영보당 귀인 이씨 역 이주화 : 내안당 귀인 이씨 역 오지영 : 순헌황귀비 엄씨 역 이시은 : 귀인 장씨 역 김용림 : 신정왕후 조씨 역 박현 : 이재선 역 백성현 : 완화군 역 운현궁 식구들 김창숙 : 여흥부대부인 역 이주실 : 박마르타 역 이문환 : 흥친왕 이재면 역 이신재 : 흥인군 이최응 역 김진태 : 김응원 역 박종설 : 하정일 역 조재훈 : 안필주 역 최용욱 : 장순규 역 하대경 : 천희연 역 강신조 : 이준용 역 김정균 : 이지용 역 유종근 : 허욱 역 양형호 : 최진수 역 개화파 보조 인물, 유홍기 가족 정동환 : 오경석 역 이민우 : 박영효 역 이광기 : 유길준 역 임혁주 : 김홍집 역 이세창 : 홍영식 역 정하완 : 서광범 역 이병욱 : 서재필 역 이규준 : 지석영 역 이종길 : 윤치호 역 박진형, 정태우 : 오세창 역 권오성 : 무불 탁정식 역 정영숙 : 최씨 부인 (유홍기의 처) 역 김경아 : 진령군 효옥 역 김현석 : 유운두 (유홍기의 아들) 역 최석구 : 강창균 (유홍기의 제자) 역 최정원 : 유다슬 (유홍기의 장녀) 역 정수계 : 유지혜 (유홍기의 차녀) 역 김준모 : 이승준 (유홍기의 사위) 역 반문섭 : 최우동 (유홍기의 집사) 역 홍정욱 : 김문호 (유홍기의 제자) 역 여흥 민씨 인물 최명수 : 민치구 역 안영주 : 한산부부인 이씨 역 남성훈 : 민승호 역 홍승일 : 민태호 역 이상용 : 민규호 역 서영진 : 민겸호 역 황원, 이승호 : 민치상 역 김용준 : 민영익 역 최흘 : 민영위 역 심우창 : 민긍식 역 이승호 : 민영목 역 박상규 : 민응식 역 박상만 : 민영준 역 김경재 : 민승호 아들 역 조정 인물 정운용 : 김병학 역 김흥기 : 홍순목 역 박영목 : 최익현 역 양영준 : 이경재, 이재원 역 최길호 : 조두순 역 원석연 : 윤웅렬, 이혁주 역 곽경환 : 유후조 역 권혁호 : 조성하 역 김형일 : 조영하 역 김주영 : 홍계훈 역 김해권 : 이유원 역 임병기 : 이세보 역 한범희 : 홍만식 역 김경하 : 신관호 역 허기호 : 정기회, 한규직, 조인희 역 김봉근 : 강로 역 맹호림 : 한계원 역 김종결 : 김기수 역 태민영 : 어윤중 역 강만희 : 황정연 역 이영재, 김창봉 : 안기영 역 서학 : 김윤식 역 윤덕용 : 심순택 역 이대로 : 윤자승 역 이종만 : 신헌 역 양재성 : 윤태준 역 박승규 : 이조연 역 황일청 : 김병시 역 이원종 : 조병직 역 윤관용 : 이용숙 역 유병한 : 심상훈 역 서상익 : 안경수 역 강태기 : 이범진 역 노영국 : 이완용 역 민욱 : 이윤용 역 한근욱 : 이경직 역 제너럴 셔먼 호 관련 김영인 : 이현익 역 장기용 : 신태정 역 남성식 : 박춘권 역 백찬기 : 백낙연 역 국정환 : 이팔행 (제너럴 셔먼 호의 청나라 통역관) 역 양요 관련 김기현 : 이용희 역 허기호 : 조기수 역 반석진 : 지홍관 역 김수일 : 이인기 역 정상철 : 이시원 역 장정국 : 양헌수 역 최승철 : 이지원 역 이운우 : 어재연 역 황덕재 : 어재순 역 오성열 : 김재헌 역 김상훈 : 이공렴 역 이강수 : 한성근 역 김태형 : 김진성 역 최상일 : 이기조 역 오페르트 도굴 관련 장칠군 : 최선일 역 김창봉 : 이종신 역 이용진 : 신철균 역 임오군란 관련 전병옥 : 김춘영 역 선동혁 : 유복만 역 김경응 : 유춘만 역 김태형 : 정의길 역 배도환 : 강명준 역 김종구 : 김장손 역 이한위 : 호리모토 역 갑신정변 관련 차철순 : 윤경순 역 정의갑 : 신복모 역 강민석 : 이은종 역 이경영 : 이인종 역 이재연 : 이은석 역 신용규 : 양홍재 역 윤진호: 윤경완 역 이용진 : 장사 역 미상 : 루시어스 푸트 역 동학농민운동 관련 김경응 : 전봉준 역 권병길 : 최시형 역 김영식 : 손병희 역 김상훈 : 조병갑 역 조정국 : 김경천 역 최상길, 박유승 : 동학교도들 역 서창호 : 동학군 참모 역 을미사변 관련 미상 : 존 시르 역 미상 : 매킨타이어 다이 역 미상 :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 역 왕실 군식구들 이두섭 : 내관 이민화 역 유태술 : 내관 유재현 역 김대원 : 내관 김태수 역 홍영자 : 김 상궁 역 배미자 : 최 상궁 역 유명순 : 수랏간 큰상궁 역 조양자 : 장 상궁 역 기타 인물 신종섭 : 최윤식 (유홍기의 친구) 역 서상익 : 최준명 역 오영갑 : 조긍식 역 윤덕용 : 이경직 (유길준의 외조부) 역 박해상 : 유진수 (유길준의 부친) 역 이일웅 : 왜학훈도 안동준 역 박승규 : 동래부사 정현덕 역 김영선 : 왜학훈도 현석운 역 함석훈 : 정대식 역 송희남 : 현제순 역 박경득 : 동래부사 박재관 역 박용식 : 노승 (민승호 폭탄 테러 연루) 역 이참 : 묄렌도르프(목인덕), 오페르트 역 김원배 : 남효원 역 이원직 : 김주복 역 이필수 : 고영근 역 이현두 : 동래부사 홍우창 역 김상훈 : 김세균 역 한현배 : 심동신 역 김경하 : 이만손 역 임종순 : 우범선 역 하환근 : 이용익 역 박칠용 : 최성학 역 장기용 : 이일직 역 송호섭 : 홍종우 역 이원발 : 정난교 역 이기철 : 이규완 역 서동재 : 이필희 역 장인한 : 무공선사 (봉원사 주지, 동인의 스승) 역 고설봉 : 전등사 주지 역 권기선 : 평양기생 수련 역 이경아 : 평양기생 미향 역 김영옥 : 무당 해당제일 (효옥의 양모) 역 황민 : 박수무당 역 김세원 : 전등사 근초 역 김리우 : 전등사 사미승 역 김창환 : 봉원사 사미승 역 김동찬 : 범어사 사미승 역 손호균 : 의금부 관원 역 손종범 : 칠성 역 남정희 : 남씨 역 김정민 : 산홍 역 오기환 : 피난민, 왕실 어의 역 안형식, 유병준, 곽정희, 신수강 : 백성들 역 서영진 : 시체 운반꾼 역 이승호 장순국 : 신철균 부장 역 진운성 최상길 양형호 유순철 송금식 이경영 김기복 전원주, 이효정, 허길자 : 주모들 역 유병한 박유승 양재원 심훈보 신원균 이용진 최상일 권오균 서창호 이재연 김태형 배도환 강민석 오기환 이종길 이환지 김세원 정승곤 정진화 이원직 윤용덕 장순국 허정규 오영순 강영하 이기철 장행섭 김대환 고광우 박희진 이영재 문홍식 전병옥 김동완 청나라 인물 손호균 : 원세개 역 홍성민 : 이홍장 역 안병경 : 오장경 역 임병기 : 황준헌 역 조명남 : 하여장 역 반석진 : 정여창 역 전국근 : 마건충 역 최헌철 : 오조유 역 김상수 : 이경방 역 김동완 : 마건상 역 미상 : 주복 역 미상 : 진수당 역 일본 인물 임혁 : 오쿠무라 엔신 역 이성웅 : 미우라 고로 역 노영국 : 메이지 천황 역 박영지 : 하나부사 요시모토 역 안광진 : 아이라 마사키 역 김성원 : 이토 히로부미 역 강성욱 : 이노우에 가오루 역 백인철 : 구로다 키요타카 역 이재연 : 스즈키 중좌 역 이채후 : 다나카 소좌 역 안대용 : 모리야마 시게루 역 고희준 : 곤도 마스케 역 신귀식 : 후쿠자와 유키치 역 송윤아 : 오쿠무라 이오코 역 김병기 : 다케조에 신이치로 역 황범식 : 스기무라 후카시 역 김윤형 : 쓰지 가쿠사부로 역 이원용 : 오카모토 류노스케 역 박해상 : 야마가타 아리토모,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이토 스케유키 역 이동주 : 사이온지 긴모치 역 나성균 : 고무라 주타로 역 기정수 : 우치다 료헤이, 미야모토 고이치 역 오승룡 : 무쓰 무네미쓰 역 송종원 : 오시마 요시마사 역 한규희 : 오토리 게이스케 역 장정국 : 구스노세 유키히코 역 이한승 : 스노하라 준메이 역 김인태 : 오타니 고쇼 (大谷光照) 역 차두옥 : 시마무라 히사시 역 양재원 : 이노우에 가쿠고로 역 김원배 : 시바 시로 역 윤성국 : 아다치 겐조 역 신원균 : 가이스 중위, 무라카미 대위 역 한태일 : 히라노 게이스이 역 이경영 : 가사마 히로다데 역 배도환 : 히로쓰 히로노부 역 나기수 : 마에타 서기관 역 그 외 인물 양동재 김성실 장영주 이승빈 류대성 이경실 최건호 기타 원래 고종 역은 당초 홍학표가 낙점되었으나 조재현으로 변경되었다. 비과학적인 생활을 조장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극중 박영효 역을 맡았던 이민우가 갑작스런 신병으로 방송활동을 중단하자 부랴부랴 대본을 수정했다. 결방 사유 및 시간대 변경 1995년 12월 30일 - 9시 40분부터 특선영화 《이연걸의 보디가드》 편성으로 결방 1995년 12월 31일 - 9시 40분부터 특선영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편성으로 결방 1996년 2월 18일 - 9시 40분부터 특선영화 《사랑과 영혼》 편성으로 결방 1996년 3월 24일 - 8시 55분부터 1996년 하계 올림픽 남자 축구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일본 VS 사우디》 중계 편성 관계로 11시에 방영 1996년 5월 12일 - 신TV문학관 1화 《길 위의 날들》 편성으로 결방 1996년 6월 30일 - 9시 45분부터 《위성시험방송 개시 기념 전야제》 편성 때문에 결방 위기였지만 갑작스러운 비 탓으로 정규 편성됐고, 《위성시험방송 개시 기념 전야제》는 11시부터 60분간 진행됨 1996년 7월 21일 - 9시 35분부터 《부토 파키스탄 총리 특별회견》 편성 관계로 10시에 방영 1996년 7월 27일 - 9시 30분부터 1996년 하계 올림픽 여자 하키 《한국 VS 스페인》 중계 편성으로 결방 1996년 7월 28일 - 9시 30분부터 《오늘의 애틀란타》 등의 편성으로 결방 1996년 8월 3일 - 9시 30분부터 《오늘의 애틀란타》 등의 편성으로 결방 1996년 8월 4일 - 7시 40분부터 1996년 하계 올림픽 남자 마라톤 중계 편성 등으로 결방 1996년 9월 1일 - 9시 45분부터 《브라질 카르도주 대통령 회견》 편성 관계로 10시 5분에 방영 1996년 9월 8일 - 9시 45분부터 신TV문학관 2화 《슈퍼마켓에서 길을 잃다》 편성으로 결방 1996년 9월 28일 - 9시 35분부터 추석명화극장 《붉은 10월》 편성으로 결방 1996년 9월 29일 - 9시 35분부터 추석특선영화 《케이프 피어》 편성으로 결방 1996년 10월 27일 - 9시 40분부터 신TV문학관 3화 《천지간》 편성으로 결방 각주 같이 보기 명성황후 (드라마) 외부 링크 찬란한 여명 유튜브 채널 - 풀영상(멤버십 전용) 1995년 드라마 1996년 드라마 한국방송공사 대하드라마 조선 역사 드라마 신봉승 시나리오 작품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작품 1995년에 시작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1996년에 종료한 대한민국 TV 프로그램 199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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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1%9D%ED%9E%88%EB%93%9C%20F-117%20%EB%82%98%EC%9D%B4%ED%8A%B8%ED%98%B8%ED%81%AC
록히드 F-117 나이트호크
록히드 F-117 나이트호크()는 록히드 해브 블루 스텔스 시제기 계획을 이어받아 스텔스 기술을 기체 전체에 적용하여 록히드 사가 설계하고 개발했으며, 세계 최초로 실전 배치된 스텔스 공격기이다. 임무 및 용도상 공격기에 해당하지만 미 공군의 식별 부호는 전투기를 뜻한다. F-117A는 미국의 파나마 침공 당시 처음 실전에 투입된 이래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보스니아 전쟁 등 미국이 개입된 모든 전쟁에 참전했다. 2008년 4월 22일 마지막 비행을 끝으로 퇴역하였지만 다시 재취역을 한다. 역사 1991년 2월 13일, 걸프전 당시 미국은 바그다드 교외 아미리아 방공호 공습으로 민간인 400명 이상을 죽였다. 록히드 F-117 나이트호크 스텔스 폭격기 2대가 2000 파운드 GBU-27 페이브웨이 III 폭탄 한발씩을 각각 투하했다. 이때 사용된 '스마트 폭탄' GBU-27 페이브웨이 III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철근이 3중으로 겹쳐있는 콘크리트 지붕을 뚫고 들어와 지하에 위치한 방공호에서 폭발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새벽에 폭격이 이루어져서 사망자 대부분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불에 타 숨졌다. 까맣게 타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 대부분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숨은 부녀자와 아이들이었다. 내부무장창 F-117A는 2개의 내부무장창에 모두 5,000 파운드 (2,300 kg)의 폭탄을 장착할 수 있다. F-35는 2개의 내부무장창에 모두 5,700 파운드 (2,600 kg)의 폭탄, 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다. 가장 덩치가 큰 F-22는 4개의 내부무장창 중에서 2개는 공대공 미사일 전용이고, 나머지 2개의 내부무장창에 각각 1,000 파운드의 폭탄을 장착할 수 있다. 스텔스 폭격 능력만 보면, F-35가 가장 뛰어나다. F-117A, 5,000 파운드 (2,300 kg)의 폭탄 F-22A, 2,000 파운드 (907 kg)의 폭탄 F-35A, 5,700 파운드 (2,600 kg)의 폭탄 아이언볼 록히드 U-2 정찰기, SR-71 정찰기, F-117 폭격기, F-22 전투기에 칠한 레이더 흡수 물질(RAM)을 "아이언볼"이라고 부른다. 미국 공군은 F-22 전투기의 스텔스 성능을 대리석(marble) 수준의 RCS라고 발표했는데, 보통의 대리석은 15 mm 두께이며, 이 경우의 RCS는 대략 -37.45 dBsm (= 0.00018 m2) 수준이다. 대한민국 F-117 공격기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매년 순환배치의 일환으로 한반도에 배치되어 왔다. 2006년에는 배치되지 않았다. 2007년 1월 한반도에 전진 배치됐던 미 공군의 스텔스 전폭기 1개 대대(12대 이상)가 3개월 간의 임무를 마치고 뉴멕시코주 홀로먼 공군기지로 귀환했다고 미 공군이 밝혔다. 한미연합 전시 증원연습(키 리졸브 훈련) 기간에 맞춰 배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5년 5월, 미국이 F-117 스텔스 전폭기 15대를 한국에 배치한 것을 두고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새로운 대북 압박정책이라는 미국 언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이에 북한도 "전쟁을 예고하는 극히 위험한 신호"라고 주장하며 긴장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이번 F-117 전폭기 배치는 1993년과 1996년, 2003년, 2004년에 이은 다섯 번째로 2004년에는 7월부터 11월까지 군산공군기지에 배치됐다. 2019년 2월 2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R-2508 사격장에서 F-117A 4대가 F-16 전투기 편대와 공동으로 훈련했다. 공군 전문가들은 "F-117A는 적 영토에 은밀히 침투해 지하의 견고한 표적을 레이저 유도 벙커버스터로 폭격한다. 최신예 스텔스기인 F-22 랩터와 F-35는 벙커버스터 같은 대형 폭탄을 달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이 지하의 북한 지도부 은신처나 핵시설을 타격하기 위해 2008년에 퇴역한 스텔스기를 다시 등판시켰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은 F-117A 스텔스기를 운용하던 시절부터 수시로 북한 영공을 드나들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여러 차례 북한 영공에서 임무를 수행한 F-117A 파일럿 마이클 드리스콜 미 공군중령의 언론 인터뷰를 통해 확인되었는데, F-117A가 퇴역한 뒤에는 F-22A가 이 임무를 승계해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격추 1999년 3월 27일, 08시 15분에 코소보 공습 도중 유고슬라비아 육군을 공습하던 F-117A 폭격기가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었다. 화력관제레이더에 13 km 떨어져 있었고, 고도는 8 km였다. SA-3 고아 미사일 2발이 발사되었다. F-117A 폭격기가 폭격을 위해 내부무장창을 열자 레이더에 잡혔다. 발사된 여러발의 미사일 중 한 발의 근접신관이 폭발했다. 조종사는 탈출했고, 6시간 뒤에 미공군 탐색구조팀에 구조되었다. 러시아 전문가가 잔해를 조사해 25년의 스텔스 기술 격차를 따라잡았다. 잔해가 중국으로 흘러갔다는 정황들이 포착되었다. 조종사 신원은 처음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Capt Ken 'Wiz' Dwelle"라는 이름이 잔해의 조종석에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1999년 4월 30일, 같은 작전에서 F-117A 폭격기 한 대가 더 손상되었다. 기지에 복귀는 했지만, 다시는 날 수 없었다. 제원 같이 보기 참고자료 외부 링크 Air Force Link - Fact Sheet : F-117A Nighthawk The 49th Fighter Wing at Holloman Air Force Base U.S. Air Force F-117A Nighthawk - Wallpaper CNN - U.S. plane shot down, pilot rescued - March 27, 1999 CNN - Downed NATO pilot rescued, U.S. officials say - March 27, 1999 CNN - Stealth Nighthawk downed in Yugoslavia - March 28, 1999 CNN - NATO stealth missions continue after crash - March 28, 1999 - comprehensive site FAS F-117A Nighthawk F-117 In Action NY Times - U.S. Stealth Fighter Is Downed in Yugoslavia Interception of F-117 by Austrian Airforce German article about interception of F-117 Venik's Aviation — A US F-117 Night Hawk stealth bomber shot down over Yugoslavia 공격기 스텔스기 1981년 첫 비행한 항공기 쌍발 제트기 록히드 항공기 저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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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A%B3%BC%EC%8A%A4%EC%B9%BC%EB%A6%AC%EC%97%94%ED%85%8C%EC%8A%A4%EC%A3%BC
아과스칼리엔테스주
아과스칼리엔테스주()는 멕시코 중북부에 위치한 주로 주도는 아과스칼리엔테스이며 면적은 5,616km2, 인구는 1,237,675명(2012년 기준), 인구 밀도는 220명/km2이다. 1857년 10월 27일에 사카테카스 주에서 분리되어 신설되었으며 11개 지방 자치체를 관할한다. 북쪽으로는 사카테카스주, 남쪽으로는 할리스코주와 접한다. 주 이름은 스페인어로 "온탕"을 뜻한다. 인구 각주 외부 링크 아과스칼리엔테스 주 공식 홈페이지 멕시코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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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르트
요구르트(←)는 유목민들이 동물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고대의 건강식품이다. 요구르트는 우유나 염소젖 등을 살균하여 반쯤 농축시키고, 이에 유산균을 번식시켜 발효, 응고시킨 음료를 가리킨다. 액체일 때도 있고 고체일 때도 있으며, 그에 따라 마시기도 하고 숟가락으로 떠서 먹기도 한다. 흔히 야쿠르트라고 하는 살구색 음료수는 요구르트가 아니다. 요구르트에는 여러 미생물이 있는데, 그 중 인체에 해롭지 않는 대장균, 죽어가는 식물을 살릴 수 있는 내생균, 장내세균, 건강에 도움을 주는 장속 세균을 총칭하는 프로바이오틱스 등이 존재한다. 요구르트는 식중독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원과 발음 영어로 요거트라 발음하지만 한국 표준어로는 요구르트이다. 단어 "요구르트"는 "요우르트"()라는 터키어 단어에서 비롯되었으며, "응고하다" 또는 "걸쭉해지다"라는 뜻을 가진 튀르키예어 동사인 "요우르-마크"()나 어근 "요우르-", 접미사 "-t"와도 관련되어 있다. 요구르트의 어원이 된 터키어 단어 "yoğurt"는 "요구르트"라는 발음이 아닌 "요우르트"라는 발음이 난다. 고대 터키어에서 이 글자는 유성 연구개 마찰음 을 가리키며, 현대 터키어에서 후설 모음 사이에서는 거의 없는 듯이 발음된다. 현대 터키어에서 요구르트는 ‘요우르트’ 또는 ‘요으우르트’로 발음된다. 역사와 건강적 효과 요구르트는 인도-이란 문화권에서 첫 기록이 발견되는데 요구르트에 꿀을 더한 음식을 신들의 음식이라고 하였다. 고대 페르시아인들과 아랍 유목민들은 요구르트를 동물 젖의 우수한 양분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여겼다. 발효 과정에서 생산되는 유산균은 젖이 부패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러시아의 세균학자 엘리 메치니코프가 요구르트를 다량 포함하고 있는 식사를 하는 불가리아의 농민들이 평균 87세까지 산다고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음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영양과 건강 장수를 촉진한다는 주장에 더하여, 몇몇 연구원들은 요구르트가 소화기 질병, 고콜레스테롤 수치, 심지어 암과 같은 종양에 대한 치료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요구르트에 있는 유산균 발효는 단백질 발효가 아닌 탄수화물 발효(유당 발효)이다. 유당이 유산균에 의해 소화, 분해되는 단당류 형태이기 때문에 젖당불내증 환자에게 우유 대신 섭취할 수 있는 영양식이 되기도 한다. 우유에 유산균을 넣어 만들면 우유의 성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시판되고 있는 요구르트는 그렇지 않다. 매일 요구르트를 섭취하면 알츠하이머병 증상을 어느 정도 호전시킬 수 있다. 생균과 효모가 함유된 프로바이오틱 요구르트가 뇌 기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옥스포드 연구팀에서 요거트 섭취와 심혈관 질환 예방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적절한 요거트 섭취는 심혈관 질환 위험률을 낮춰준다는 연구 결과가 밝혀졌다. 또한 우유의 지방산인 부티레이트와 공액리놀레산(CLA)은 장내 환경을 개선시킬 뿐 아니라, 당뇨병의 위험율을 예방해 준다. 이와 관련 우유로 만든 유제품이 제2형 당뇨병 위험 요인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 연구 결과로 밝혀졌다. 변형 오늘날 플레인, 과일 혼합, 칼슘 강화 등의 형태로 생산되며, 특히 맛을 가미하지 않은 요구르트는 저열량 식품으로 인기가 있다. 또한 건강식 밀크셰이크를 만드는 데 사용되거나 아이스크림처럼 얼려 먹기도 한다. 중동에서는 물에 요구르트를 조금 넣어 점성이 없는 상태로 소금을 약간 넣어 마신다. 이를 아이란(Ayran)이라 한다. 같이 보기 프로즌 요구르트 프로바이오틱 야쿠르트 각주 및 참고 문헌 외부 링크 간식 발효 유제품 불가리아 요리 즉석식품 튀르키예 요리 튀르키예어 낱말 후식 스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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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미나코
혼다 미나코.(, 본명: 구도 미나코(), 1967년 7월 31일 ~ 2005년 11월 6일)는 일본의 가수이다. 그녀는 영국의 음악 그룹, 퀸의 브라이언 메이(Brian May)이나 게리 무어(Gary Moore) 등 다른 나라 뮤지션과 함께 일을 했던 적이 있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2004년 혼다 미나코의 획수가 31획이 되도록 이름 뒤에 마침표(.)를 찍었다. 198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아이돌 가수이며, 1990년대 이후에는 주로 뮤지컬 배우로 활약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클래식과의 크로스오버에 도전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혔다. 생애 데뷔까지 1967년 7월 31일 오전 11시 17분 도쿄도 이타바시구 가미아카쓰카 정(현 나리마스)의 나리마스 산원에서 체중 2.76kg로 태어났다. 출생에 관해서는 라디오에서 방송된 그날 태어난 신생아를 소개하는 코너에서였다. 이 방송은 전국에서 수신가능했다. 당시 그녀는 도쿄 도 가쓰시카구 시바마타에 살았지만, 유아였을 무렵 사이타마현 아사카시로 이사해 이 곳의 아사카 시라유리 유치원생으로 입학한 후, 줄곧 아사카 시에서 생활했다. 가수가 되기를 꿈꾸었던 모친의 영향으로 미나코는 어릴 무렵부터 항상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아사카 시립 아사카 제6 초등학교의 졸업문집에도“여배우 혹은 가수가 되면 좋겠다.”라고 소망을 적고 있다. 아사카 시립 아사카 제1중학교 시절에는《스타 탄생!》이라는 오디션에 응모했고, 결선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프로덕션에서의 스카우트 제의는 없었다. 1983년 4월 도쿄 도 기타구의 도쿄 세이토쿠 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동년 7월 하라주쿠를 배외하다가, 쇼조타이(少女隊/소녀대)의 멤버를 탐색하고 있던 본도 기획의 스텝에 스카우트되어 연예계에 입문한다. 사장이었던 다카스기 게이지는 본도 기획이 도산한 후에도 혼다 미나코의 성공에 힘입어 재기에 성공한다. 당초 쇼조타이의 멤버로 발탁된 것과 달리, 그녀의 가창력을 높이 사 솔로 가수로 활동하게 된다. 1984년 9월 그녀가 고등학교 2학년때에 제8회 나가사키 가요제에 본명으로 출전해〈꿈꾸는 소녀(夢少女)〉를 불러 그랑프리를 수상한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레코드를 취입했다. 1985년 4월 20일 도시바 EMI부터《살의의 방카스》란 싱글로 데뷔한다. 캐치프레이즈는“미나코, 당신과 처음”과“좋아한다고 말해요”의 2패턴이었다. 그 후, 4번째 싱글《Temptation》이 히트하는 것 외에도 12월 7일에는 신인가수로서는 이례적으로 일본 무도관에서 콘서트를 해 흥행에 성공했다. 또, 같은 해에 다수의 신인상도 수상했다. 1986년 2월 5일《1986년의 마리린》이란 싱글이 발매되었고, 크게 히트를 쳤다. 배꼽을 노출시킨 의상과 자극적 허리춤 등은 당시 아이돌 가수로서는 이례적인 연출이었고, 이는 세간에 혼다라는 이름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이 싱글에 수록된 곡은 지금도 그녀의 가장 유명한 곡 중의 하나이다. 1988년 여성만으로 구성된 록밴드〈MINAKO with WILD CATS〉를 결성했고, 싱글《당신과 열대》앨범《WILD CATS》등을 발매했다. 같은 해 9월 11일 SHOW-YA가 기획한 여성 록커 만의 조인트 라이브〈NAON의 YAON〉에 출연했다. 그녀가 속한 록밴드는 다음해인 1989년 가을에 해산한다. 뮤지컬에서의 활약 1990년 뮤지컬《미스 사이공》의 오디션을 받아, 약 1만5천명 중에서 히로인 킴 역에 선정되었다. 1992년 5월 5일《미스 사이공》을 초연한 후, 1년반 동안 장기공연을 해 그녀의 가창력, 연기력이 높게 평가받았다. 1992년 제30회 골던 애로우 상, 연극 신인상을 수상한다. 1994년《지붕위의 바이올린》에서 호델 역으로 출연한다. 9월 24일 앨범《JUNCTION》을 발매했고, 1995년 6월 25일에는《맑은 후 때때로 흐림》을 발매해 레코딩 아티스트로도 활동한다. 1996년《왕과 나》에서 텁팀 역으로 출연했다. 1997년《레미제라블》에서 에포느 역으로 출연했고, 초연할 때, 에포느 역을 연기했던 시마다 가호가“세계 제일의 에포느”로 칭할 정도로 평판을 얻었지만, 혼다도 이에 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평가와 인기를 얻었다. 이후에도 반복해서 에포느 역을 연기했고, 에포느는 혼다에 맞는 배역이었다. 1998년 에이즈 자선 콘서트에서 오페라 나비부인의 아리아〈어떤 개인 날〉을 불렀다. 2000년 3월 20일 사린 사건 자선 콘서트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를 불렀다. 같은 해 6월 19일 시드니 올림픽을 기념해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일본·오스트레일리아 친선 콘서트에서는〈Time to Say Goodbye〉와 아리아〈어떤 개인 날〉을 부르는 등, 이 무렵부터 클래식에 심취한 경향이 강했다. 10월 13일에는 데뷔 15주년 기념 콘서트《가혁명(歌革命)》을 열어, 자신의 싱글·메들리 외에도 엔카〈아마기고에〉와 아리아〈어떤 개인 날〉등을 불렀다. 2002년《히메유리》에서는 기미 역으로 출연했으며, 일본에서 제작된 뮤지컬에서는 첫 출연이었다. 클래식·크로스오버로의 진출 2003년 5월 21일 첫 클래식 앨범《AVE MARIA》를 발매했다. 소프라노와 같은 창법으로 노래했으며, 곡에 일본어 가사를 붙여 노래해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개척했다. 같은 해 도호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십이야》를 토대로 제작한 뮤지컬《십이야》에서 고양이 역으로 출연한다. 원작에는 없는 역으로 대사 외는 것에 약한 그녀를 위해 특별히 배려해 만든 역이었다. 2004년 지큐고자스에서 제작한 뮤지컬《클라우디아》에서 히로인인 클라우디아 역으로 출연했다. 8월 29일《N향 홋토 콘서트》에서 NHK 교향악단과의 공연에서〈신세계〉와〈시칠리아노〉를 불렀다. 11월 25일 앨범《도키(時)》를 발매했으며, 12월 1일에는 일본 무도관에서《Act Against AIDS》에 출연했다. 여기서〈주피터〉와〈1986년의 마리린〉을 불렀다. 이 무렵 이미 병의 징후가 있었다. 백혈병으로 사망 2004년 말 무렵부터 감기와 비슷한 증상이 좀처럼 낫지 않아 2005년 1월 병원에서 정밀 검사 결과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병명이 확인되어 입원한다. 3번에 걸친 화학요법 후, 5월 제대혈을 이식받았고, 7월 말에는 일시 퇴원할 정도로 호전되었지만, 겨우 1개월 후 8월 31일 염색체이상이 확인되어 9월 7일 재입원한다. 10월 다시 일시 퇴원하지만, 21일 염색체이상이 다시 확인되어 3번째 입원한다. 11월 3일 폐에서 합병증으로 중태에 빠져 11월 6일 오전 4시 38분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나이 38년 3개월이었다. 법명은《샤쿠 유쇼(釋 優聲/석 우성)》이다. 음악 여러 장르에서의 활약 엔카 가수로의 의향 처음 가수로 데뷔할 때, 엔카 가수로의 의향이 있어 오디션에 앞서 준비한 곡은 엔카였다. 소속사무소 본드 기획에서는 엔카 가수를 키운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아이돌 가수로 데뷔하였지만, 예정된 첫 번째 싱글《좋아한다고 말하세요》보다 어른스러운《살의의 바캉스》를 첫싱글로 데뷔했다. 또, 록밴드가 해산된 후 재차 솔로로 활동하였고, 이 무렵 엔카 가수로의 전향을 진지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실제 이 시기 출연한 TV프로에서 기모노를 입고 엔카를 부른 것 외에도 엔카 가수로 활동할 것이라 보도가 메스컴에서 있었다. 실제 앨범《JUNCTION》에 엔카 풍의〈풍류풍령초연표〉이 수록된 것 외에도 콘서트에서도 엔카를 부르곤 했다. 결과적으로 엔카 가수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엔카에 대한 혼다의 의향으로 볼 때, 엔카는 그녀의 가수활동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아이돌 가수로의 활동 1985년 4월 20일 첫 싱글《살의의 바캉스》로 데뷔하였고, 여러 신인가수와 달리 가창력과 가련한 외모로 어필하여 순조로이 인기를 얻는 데 성공했다. 4번째 싱글《Temptation(유혹)》의 히트로 혼다는 그 해 각종 가창상 신인상을 받았다. 1986년 2월 5일《1986년의 마릴린》의 빅 히트와 그녀의 배꼼을 드러낸 허리춤으로 세간에 주목을 끌었다.《Temptation(유혹)》이 각종 순위에서 10위권 이내에 도달하지 못하자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기위한 의도였다고 회고했다. 싱글《1986년의 마릴린》에서 아키모토 야스시가 작사를 맡았고, 쓰쓰미 교헤이가 작곡을 맡았다. 그 후 이들 콤비는 그녀의 음반작업에 많이 참여하였다.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같은 해 7월 23일 발매된 싱글《HELP》의 수록곡〈HELP〉가 공익광고에 삽입곡으로 사용되었다.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혼다였지만, 1987년 드라마《아빠는 뉴스캐스터》에 본인인 혼다 미나코 역으로 출연했으며, 그녀의 곡〈Oneway Generation〉역시 주제가로 사용되었다. 같은 해 영화《패신저 지나간 나날》에서도 가수 역으로 출연해, 극중 사고로 사망한 레이서의 형을 추모하는〈고독한 허리케인〉을 불렀다. 이들 3곡은 오리곤 차트 2위에 올랐고, 이는 그녀 생에 최고 순위였다. 서구음악에서의 영향 원래 혼다는 서구음악에는 그다지 자세히 알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데뷔 후 소속사무소 사장 다카스기의 권유로 메릴린 먼로와 마돈나 등의 외국 서구스타 영상을 반복해 보았고, 이를 연출에 참고했다. 데뷔 후 그 다음해 발표한《1986년의 마릴린》의 안무와 의상은 그들 영상의 영향이다. 그 해 게리 무어로부터 악보를 제공받았으며, 게리 무어자신도 제작에 참여하여 싱글《the Cross -사랑의 십자가-》를 9월 3일 발매했다. 게리 무어도 다음해 발표한 자신의 앨범《Wild Frontier》에〈Crying in the shadows〉이란 타이틀로 수록한다. 아울러 게리 무어는 런던에서 레코딩 작업을 하였고, 런던에 머물고 있을 때, 그룹 퀸의 콘서트에 초대된 적이 있을 정도로 교류가 있었다. 1987년 브라이언 메이가 그녀의 싱글 앨범《CRAZY NIGHTS/GOLDEN DAYS》의 프로듀스로 참여하였다. 이는 혼다가 일본 무도관 콘서트에서 프레디 머큐리의〈I Was Born to Love You〉를 불렀고, 이 콘서트의 라이브 앨범과 데뷔 앨범을 런던 EMI를 통해 브라이언에 보낸 것이 계기였다.《CRAZY NIGHTS/GOLDEN DAYS》의 영어판은 영국을 비롯 유럽 20개국에서 발매되었다. 같은 해, 라 토야 잭슨의 일본 공연에 혼다의 소속사 본드 기획이 프로모터를 맡았고, 이 인연으로 혼다와 라 토야 잭슨의 조인트 콘서트가 열리게 된다. 이를 계기로 혼다는 잭슨 패밀리와 친분을 갖게 된다. 로스앤젤레스의 마이클 잭슨 자택에 초대되어 잭슨의 프로듀스와 함께 앨범작업을 하였고, 앨범《OVERSEA》는 미국에서도 발매되었다. 아울러 이 앨범의 수록곡의 가사는 모두 영어로 되어있다. 7월 자메이카를 방문하여 슬리 앤드 로비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참가해〈HEART BREAK〉와〈EYE 고토바와 LOVEY〉를 불렀다. 이와 같이 여러 해외 음악가들과의 교류가 두드러졌다. 록밴드에서의 활동 혼다는 여성만으로 구성된 록밴드를 구상해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오디션을 보았고, 1988년 1월“MINAKO with WILD CATS”를 결성했다. 그녀와 이 같은 시도를 하게 된 배경에는 아이돌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와 해외 록스타와의 공연 및 국내의 밴드품의 영향이 컸다. 이 시기 인기와 평가는 좋지 못했지만, 록밴드의 리더로서의 경험은 그녀가 가수로서 성장하는 데 있어 성장통과 같은 것이라 짐작된다. 그룹 SHOW-YA을 중심으로 열린 록 페스티벌〈NAON의 YAON〉에 프린세스·프린스와 함께 출연해 이 시대 여성 록커로서의 기념비를 세웠다. 이 시기에 처음 혼다 자신이 곡에 작사도 하였기 때문에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뮤지컬 배우로의 전향 록밴드에서의 활동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1989년 가을 해산해 혼다는 솔로 가수로 돌아선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인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이 시기 혼다로서는 가장 큰 시련기였다. 그녀는“걸어가고 있던 길이 돌연, 절벽으로 되어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였다.”라며 그 시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노래에 대한 미련을 끊을 수 없었던 혼다는 버라이티 프로의 출연을 계속 거부했고, 드라마와 영화에도 최소한으로 출연했다. 도호의 프로듀서 사카이 기이치로로부터《미스 사이공》의 오디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전편이 노래로 구성된 뮤지컬이란 소리에 마음을 바꿔 의욕을 나타냈다고 한다. 1990년 가을부터 시작된 오디션에 참가하여 1991년 1월 13일 킴 역으로 발탁된다. 이에 혼다는 3월 이후에 예정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공연준비에 치중한다. 개막에 있어서“나는 무대에서 연기하지 않으니까요. 살아야하니까요. 강하게 살아남아 보여야 하니까요.”라고 포부를 밝혔다. 아이돌출신인 그녀의 역량으로는 위태롭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혼다는 일년 반 동안 롱런했으며, 히로인 킴 역을 소화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공연동안 혼다는 발가락 골절을 당했지만, 참고 공연을 무사히 끝내기도 했다. 이후에도《지붕위의 바이올린》,《왕과 나》, 《레미제라블》에 출연했고, 실력파 여배우로서의 입지를 세운다. 태평양 전쟁 중 오키나와 전투의 비극 그린 뮤지컬《히메유리》에서 히메유리 학도대 일원인 히로인 기미 역을 열연했다. 이는 도호에서 제작한 뮤지컬이 아닌 작품으로는 처음이었다. 또, 혼다는 본 프로그램에 게재된 메시지에“회장에 몸소 오신 여러분에게 전쟁의 두려움, 평화의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느껴주신다면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셰익스피어의《십이야》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십이야》에서 프로듀서인 사카이가 대사에 약한 혼다를 고려해 원작에는 없는 고양이 역을 그녀에게 맡겼고, 이에 사람역이 아닌 것에 당황했지만, 말은 못하지만, 인간의 대화는 이해할 수 있는 역이라는 점에서 응해 자신만의 색깔을 나타냈다. 이 작품이 출연 할 즈음에는 이미 그녀가 클래식 곡에 심취하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이 점에서 그녀의 파트는 소프라노 창법으로 설정해 제작되었다. 사잔 올스타즈의 명곡을 베이스로 구와타 게이스케가 첨삭하여 만든《크라우디아》는 기시타니 고로와 데라와키 야스후미가 주최하는 연극 단체 지큐고쟈스에 의해 처음 뮤지컬화되었다. 이 작품에 혼다가 출연한다. 이전에 그녀가 출연한 뮤지컬과는 다른 스탭이었으며, 제작방법 또한 달랐다. 또, 연습 때의 매트 운동 등으로 육체적으로도 고달팠다. 그러나, 동료의식을 가장 우선시 하는 기시타니의 방침에 동감하여 최선을 다한다. 기시타니는 혼다를“가련하지만, 지지 않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이 뮤지컬은 혼다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녀는 히로인 크라우디아를 연기했다. 뮤지컬 활동 중 스튜디오 녹음 혼다는 주로 뮤지컬에서 활동했지만, 적지 않게 스튜디오에서 녹음하여 CD 몇장을 발표하곤 했다. 특히 머큐리 레코드사 재적시 제작된 2장의 앨범에 가치가 있다. 록밴드 시절 앨범《표적(TARGET)》이후 5년만인 1994년 9월 24일 발매된 앨범《JUNCTION》제작에 있어서는 영화《패신저 지나간 나날》에서 음악감독을 맡았던 시부야 모리히사와《미스 사이공》에서 가사의 번안을 맡았던 이와타니 도키코를 프로듀서로 영입해 작업을 진행했다. 앨범 타이틀“JUNCTION”의 뜻 결합이란 말 그대로 다양한 음악 장르를 접목시킨다는 의도하에 제작되었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번안한 곡과 엔카를 비롯 샹송, 파두, 찰스턴으로 분류되는 곡들을 수록했다. 앞서 5월 25일 발매했던 싱글《날개》는 그녀의 대표곡으로 알려져 있고, 팬들 사이에서도 친숙한 곡중 하나이다. 1995년 제작된《맑은 후 때때로 흐림》에서는 마키타 가즈오를 프로듀서로 맞이 하였고, 야마나시 료헤이, 미야자와 가즈후미, 구스노세 세이시로에게서 곡을 제공받았다. 그 중 구스노세와는〈Fall in love with you -사랑에 빠져-〉란 곡을 듀엣으로 불렀다. 이 곡은 11월 6일 싱글로 재발매되었고, 그 중 싱글에 실린〈당신과 I love you〉는 혼다 자신이 작사 작곡을 한 첫곡이었다. 작업을 함께했던 마키타와는 그 후 강한 신뢰관계를 형성해 남매처럼 지내는 사이가 된다. 클래식 크로스오버에 도전 혼다는 1996년 출연한 텔레비 프로에서“최근 처음 오페라《나비부인》에서 노래했다”고 밝힌다. 그녀가 처음 클래식 곡을 부른 것은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여기서 언급한 오페라일 가능성도 있다. 앞서 서술한 대로, 2000년을 전후해 클래식으로의 뜻을 둔 혼다였지만, 본격적으로 클래식 곡을 노래하게 된 계기는 2002년 8월 31일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에서 개최된〈그라치에·콘서트〉에서였다. 콜롬비아 뮤직의 프로듀서 오카노 히로유키는 클래식 곡을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부르는 가수를 탐문했고, 히로유키는 이 콘서트에 참관한 후, 혼다에게 앨범제작을 의뢰했다. 전부터 이분야 관심이 있던 혼다는 흔쾌히 허락해 제작에 들어간다. 콜롬비아 뮤직내에서는 그녀가 아이돌 출신이란 점에서 거부감을 나타냈지만, 히로유키의 설득으로 일이 진행된다.《미스 사이공》이후 혼다의 은사였던 이와타니 도키코가 일본어 가사를 첨삭했고, 경우에 따라선 가사에 맞게 선율을 조정하는 등 혼다를 전면적으로 지원했다. 편곡은 이노우에 아키라가 맡았다. 프로듀서 히로유키는 너무 곡에 심취하지 않는 이노우에와 곡에 심취하기 쉬운 혼다와의 균형을 고려해 이노우에를 기용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한편 혼다가 히로유키에게“손수 만들어 보고 싶다. 자신이 요리를 하는 것처럼, 신중하게 부딪혀 만들어 나가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보지 푸치분카무라 2002년 8월호에 투고한 에세이〈작은 행복을 소중히···〉란 본문 중에도“하지만, 최근 슬픈 일은 사랑과 마음과 열정으로 음악을 손수 만드는 사람이 드물어 졌어요.”로 적고 있음을 볼 때 혼다에 있어“손수 만들고 싶다.”란 말의 의미는 그녀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말임을 유추할 수 있다. 수록곡 100곡 이상의 후보 중 실제 노래하면서 그녀가 마음에 든 곡을 선정했고, 노래 녹음 이외의 작업에서도 모두 참석해 함께 노래를 불렀고, 연주의 흐름에 따라 노래르 불러 연주가를 편안하게 했다. 이런 연유로 단번에 OK사인을 받아 녹음된 경우도 있다. 그녀의 크로스오버 가수로서의 데뷔 앨범《AVE MARIA》는 이렇게 완성되어 2003년 5월 21일에 발매되었다. 2004년 11월 25일 2번째 앨범《도키(時)》가 발표되었고, 그녀가 죽은 후에 발표된 앨범을 포함하면 그녀의 음원은 앨범 3장 분량에 육박한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클래식의 명선율을 역사적 배경과 관계없이 현대의 감각에 맞추어 노래한 것과 결코 남에게 관심을 끌려고 기교를 부리지 않고 악곡 그대로의 살린 점이다. 특히 일본어로 불렀다는 것도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이다. 재즈로의 끝나지 않은 꿈 혼다는 2001년 NHK에서 방송된 TV 드라마《하트》에 미국에서 귀향한 재즈 싱어 역에 출연했다. 극중 라이브 씬에서 혼다는 재즈 피아니스트 니시 나오키가 이끄는 밴드와 공연해〈A Natural Woman〉과〈I Feel the Earth Move〉를 재즈 풍으로 불렀다. 아마도 이 때의 인연으로 나오키의 앨범《JAZZ BREEZE -스위트 메모리즈-》의 수록곡〈SWEET MEMORIES〉에 스캣으로 참여했다. 예능 리포트 이노우에 고조는 혼다의 죽음 후 코멘트에서 그녀가 40대가 되면 재즈를 부르겠다고 소회했다고 한다. 음반 싱글 앨범 라이브 앨범 베스트 앨범 외부 링크 혼다 미나코 홈페이지 1967년 출생 2005년 사망 일본의 여자 가수 일본의 여자 배우 일본의 아이돌 사이타마현 출신 호리코시 고등학교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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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C%B4%EC%82%AC%EC%8B%9C%20%28%EA%B2%A9%ED%88%AC%EA%B8%B0%20%EC%84%A0%EC%88%98%29
무사시 (격투기 선수)
무사시(영어: Musashi, 일본어: 武藏, 1972년 10월 17일 ~ )는 일본의 킥복싱 선수이다. 생애 출생 본명은 모리 아키오()다.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의 베이스는 킥복싱이며 최근에는 노쇠화로 성적이 좋지 못하지만 오랫동안 세계무대에서 통하는 일본인 선수로서 일본 입식 격투가의 에이스 자리를 지켰다. 정보 키 185cm에 몸무게 103kg의 체격을 가진 선수다. 원래는 80kg대의 체급에서 활동하던 선수였으나 무제한급인 K-1에서 활약하기 위해 오랜 기간 체중을 불렸다. 소속팀은 K-1을 탄생시킨 단체라고 할 수 있는 정도회관이며 많은 선수들이 이 곳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K-1 WGP 03년, 04년 결승까지 진출하나 두번 다 네덜란드의 레미 본야스키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게 된다. 태권파이터 박용수와 경기에서는 박용수가 로블로 이후, 터치 글러브를 하려는 무사시에게 비매너 킥공격을 가하자 흥분한 무사시가 평소와 다르게 압박전진 하여 펀치 KO로 이긴 적이 있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무자지이다. 최근에는 한국 격투기 팬들 사이에서 '동타(동양의 타이슨)'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인기를 회복하고 있다. 2008년 9월 27일 개막전 출전선수를 가리는 팬투표에서 순위에 들게 되어 서울에서 일본 그랑프리 대회 우승자인 에베르통 테이셰이라와 시합을 갖지만 판정으로 패하고 만다. 제롬 르 밴너와의 은퇴경기를 갖고 K-1 무대를 떠나게 된다. 입식 타격 전적(2005년 이후) 21전 11승 10패 (5 KO) 외부 링크 MUSASHI-STYLE.COM —무사시류— - 오피셜 사이트 K-1 선수 데이터 197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일본의 남자 킥복싱 선수 사카이시 (오사카부)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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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9%A0%EC%A7%80%EB%8F%84
칠지도
칠지도(七支刀)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 중인 길이 74.9cm의 양 옆으로 모두 6개의 가지가 뻗은 철제 칼로 칼에는 표면(앞면)에 35자, 이면(뒷면)에 27자로 총 62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X-레이 촬영결과 앞면에 十(십)자가 숨겨져 있음이 발견되어 1자가 늘었다.) 명문(銘文)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해석 문제는 광개토왕릉비와 더불어 임나일본부설의 실재 여부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발견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육차모(六叉鉾)’라는 명칭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1873년 신궁의 궁사에 의해 명문이 발견되었고, ‘칠지도’로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형태 74.9 cm 중 칼날 부분이 65cm이고 나머지는 칼자루다. 칼 좌우로 3개씩 가지가 뻗어있으며 주 몸통과 더불어 7개의 가지로 보고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에서는 이 때문에 이 칼이 실제 전투용으로서보다는 의식용으로 보고 있다. 내용 1977년과 1978년에 찍은 확대 근접사진과 1981년 NHK에서 촬영한 X-레이 사진을 통해 보면 年(연)자와 月(월)자 사이에 十(십)자가 검출되어 그동안 五月(5월)로 보았던 명문을 十一月(11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학자 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지만, 대개 앞면과 뒷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앞면 뒷면 주요 연구 1945년 이전의 연구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에 언급된 칠지도가 실재함으로 일본서기와 신공황후에 대한 신빙성을 증명하는 것에 사용되었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에 대한 증거로 채택되어 한반도 병합의 역사적 이유로 이용되었다. 칼이 너무 오래되어 부식되어 철의 녹과 상감의 박락때문에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칠지도 명문에 대한 해석이 본격화된 것은 1945년 이후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의 연구에 따라 명문이 61자인 것이 확인되었고, 이 칠지도가 한일 고대사의 중요한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사료로서 가치가 인정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로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니혼쇼키) 신공기 52년조에 언급되고 있는 "칠지도"로 해석하여 이 칼이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헌상했다고 주장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이 칠지도는 연구되지 않았으나 196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대학의 김석형이 오히려 이 칼의 명문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고대 삼국이 일본(당시 왜)에 식민지 국가인 분국을 세웠다는 이른바 삼한 삼국 분국설을 주장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김석형은 1963년에 발표한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과 이 논문을 보완하여 1966년에 발표한 《초기조일관계사》라는 저서에서 칠지도가 백제가 일본 천황에게 바쳤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고 오히려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하사했다고 주장했다. 김석형의 삼국분국설은 현재 많은 부분이 수정되거나 파기되었지만, 백제 왕이 칠지도를 하사한 것이라는 학설은 남북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당시 유물의 상감 기법 등으로 제작 연대가 6세기로 추정되며 가지가 실제로는 7개가 아닌 6개라는 등 칠지도를 《일본서기》의 내용에 맞추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2009년 고려대연구원인 홍성화는 NHK의 X-레이 촬영으로 칠지도의 명문의 연(年)자와 월(月)자 사이에 十(십)자가 검출됨에 따라 제작일을 11월 16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11월16일이 병오(丙午)의 일간지(日干支)를 가진 연도를 산출하면 칠지도 제작연대는 369년이 아니라 408년이 되어 백제의 전지왕(腆支王)4년 11월16일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명문(銘文)의 '泰□四年'은 전지왕 4년으로 추정할 수 있어 백제가 연호를 썼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또한 명문의 '侯王'(후왕)도 백제에 신속(臣屬)하고 있던 후왕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칠지도는 백제왕세자(百濟王世子)인 구이신(久爾辛)이 진귀하게 태어난 것을 계기로 왜왕에게 하사된 칼이라고 주장했다. 같이 읽어보기 임나일본부설 광개토왕릉비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 외부 링크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칠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Topsecret 일본 고대의 역사 각주 한국의 도검 일본의 국보 (고고·역사자료) 백제 일본-한국 관계 나라현 삼국 시대의 문화 근초고왕 고대의 도검 도검 유물 고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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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D%98%EB%B0%A9
이의방
이의방(李義方, 1121년~1175년 1월 12일(1174년 음력 12월 18일)은 고려의 무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170년(고려 의종 23년) 정중부, 이고와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켜 응양용호군(鷹揚龍虎軍)의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고, 무신정권을 수립한 뒤 대장군(大將軍) 전중감(殿中監) 겸 집주(執奏)에 임명되었다. 좌승선(左承宣)으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던 중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에 의해 피살되었다. 생애 출생과 가계 이의방은 전라도 전주에서 대장군 이용부(李勇夫)와 이씨(李氏, 정승 이형(李珩)의 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전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토착 세력으로 전주의 호족이였다. 위로 형 이준의가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 1명과 남동생 이린, 이거가 태어났다. 또한 그의 숙부 이단신(李端信)은 문하시중을 지냈다고하나, 씨족원류에서는 호장(戶長), 비록 조선시대에는 지방세력들이 격하되어 오해하는 이들이 있지만 고려시대에 호장(戶長)은 과거 당대등(黨大等)이라는 직책으로 그 지역 토호들이 임명되는 최고위직이였으니, 호장(戶長)을 지낸 이궁진(李宮進)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기록된 '고려사'에서는 이의방과의 관계를 숨기고자 함인지 등장하지 않는다. 의종(毅宗) 말에 군관직인 산원으로 출사하여 견룡행수(牽龍行首)에 올랐다. 정치 활동 무신 정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무신인 정중부(鄭中夫)에게 수염을 태우며 횡포를 부린 일과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빰을 때린 일로 무신들이 분개하여, 1170년(고려 의종 23년) 견룡행수로 재직 중 정중부, 이고(李高), 채원, 이의민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정변에 성공하자 의종(毅宗)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응양용호군(鷹揚龍虎軍) 중랑장에 임명되고, 그의 형 이준의(李俊儀)는 승선으로 승진시켰다. 이어, 고려 제19대 국왕 명종(明宗)을 추대하자 명종을 왕위에 옹립한 공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었으며 그 뒤 대장군을 거쳐 전중감 겸 집주를 지냈다. 숙청과 권력 장악 이어 무신정변에 반대하는 한순(韓順), 한공(韓恭), 신대여(申大輿), 사직재(史直哉), 차중규(車仲規) 등의 무신들을 숙청하는데, 이때 자신과 평소 친분이 있던 차중규는 목숨을 유배보내고 나머지는 참살한다. 이고가 악소(惡少) 패거리들과 법운사(法雲寺)의 승려 수혜(修惠), 개국사(開國寺)의 승려 현소(玄素) 등과 결탁하여 분수에 넘치는 뜻을 품자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 뒤 이고가 그를 제거하려 하자 1171년 이고를 제거하고, 순검군을 풀어 그의 어머니와 여당을 죽였으나, 그 아버지는 일찍이 자식인 고가 불초함을 미워하여 자식으로 삼지 않았으므로 귀양보냈다. 이어 중방(重房)을 강화하여 고위 무신들을 끌어들이고, 문신들만 임명했던 지방관에 하급 무신들도 임명하여 그들을 회유하였다. 그해 4월 채원(蔡元)의 정변기도를 사전에 적발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한층 강화하였다. 그러나 유력 견제세력이 몰락하면서 그 자신도 방만한 행동을 보이게 되는데 1173년에 왕녀를 봉하여 궁주(宮主)를 삼는데, 이의방이 기생들을 데리고 중방(重房)에서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떠들며 북치는 소리가 대궐에까지 들려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거리낌이 없었을 정도였다. 권력 강화와 갈등 1173년 무신 김보당(金甫當)이 동경에서 의종의 복위를 주장하며 난을 일으키자 토벌대를 보내 김보당의 난을 평정하였고, 후환을 제거하고자 이의민(李義旼)을 보내 의종을 시해하도록 시켰다. 이후 위위시경(衛尉侍卿)과 흥위위섭대장군 지병부사(興威衛攝大將軍知兵部事)를 지냈으며 1174년 4월 귀법사(歸法寺)의 승려 100명이 그를 죽이겠다고 습격하자 이들을 격퇴했으며, 중광사(重光寺), 홍호사(弘護寺) 등의 승려 2000명이 그를 죽이려고 몰려오자 이들을 죽이고 중광사·홍호사·귀법사·용흥사(龍興寺)·묘지사(妙智寺)·복흥사(福興寺) 등 여러 절을 불사른뒤, 절의 재산을 모두 빼앗았다. 이의방은 그 해에 권력자가 되었음에도 자신에 대한 대접이 소홀한 것에 불만을 품은 형 이준의(李俊儀)와 대립하였다. 그의 형 이준의가 그를 꾸짖어 "너에게 삼대악(三大惡)이 있으니, 그 하나는 임금을 쫓아내어 죽이고 그 저택과 희첩(姬妾)을 취함이요, 그 둘은 태후의 여동생을 위협하여 간통함이요, 그 셋은 국정을 마음대로 함이다."라고 하자, 그는 크게 노하여 사병들을 시켜 형 이준의를 죽이려 하였으나 문극겸(文克謙)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딸을 명종(明宗)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어 태자비로 삼았는데,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켰다. 1174년 북계 40여 성이 가담한 조위총(趙位寵)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서북면으로는 도원수 윤인첨을, 동북면으로는 도지휘사 최균을 보냈다. 그렇지만 서북면으로 향하던 윤인첨이 매복에 걸려 대패하고, 동북면으로 향하던 최균은 죽게 되었다. 다시 동북면으로는 두경승을 보내어 진압하였으나, 서북면에서는 조위총의 군대가 개경 턱밑까지 도착하였다. 대노한 이의방은 내통을 의심하여 서경 출신 상서 윤인미(尹仁美), 대장군 김덕신(金德臣), 장군 김석재(金錫才) 등 여러 사람을 죽여 저자에 효수하였다. 이후 이의방 자신이 직접 출정하니 예성강을 넘어 최숙을 선발대로 보내어 적을 혼란에 빠뜨린 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대동강까지 이르렀으나, 조위총의 군대가 성으로 들어가서 공성전을 펼치며 추위로 인해 전황이 어려워지자, 조위총의 아들을 포로로 잡고 개경으로 귀환하였다. 실각과 죽음 1174년 12월 서경으로 재출정을 준비하던 중, 선의문 밖에서 정중부의 아들 정균과 그의 사주를 받은 승려 종참 등에게 암살당한다. 형 이준의(李俊義)등 가족과 고득원(高得元) 등도 처형되었으며, 그의 딸도 태자비에서 축출된다. 훗날 그의 딸과 혼인했던 태자가 즉위하니 바로 강종(康宗)이다. 이의방의 딸은 복위되었고, 사평왕후(思平王后)로 추존된다. 사후 사후 2년이 지난 1176년 그의 문객이기도 했던 장군 이영령(李永齡)과 별장 고득시(高得時), 대정(隊正) 돈장(敦章) 등이 정중부를 죽여 이의방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나,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귀양가게 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와 이준의는 다른 무신 집정들과 함께 고려사 반역 열전에 실렸고, 전주 이씨 족보에서도 사라졌다. 조선 왕조가 들어서고 정중부는 세간에 그 이름이 오르내린데 반하여, 이의방과 이준의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금기시되어 언급이 금지되었다. 1970년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국역으로 간행하는 과정에서 이의방의 동생 이린이 문극겸의 사위라는 점과 내시집주를 역임한 점의 유사성이 확인되었다.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6대손인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가족 관계 조부 : 호장 이궁진(戶長 李宮進) 조모 : 김씨(金氏) 또는 이씨(李氏) 아버지 : 무신 이용부(武臣 李勇夫) 어머니 : 이씨(李氏) - 정승 이형(李珩)의 딸 형 : 승선 이준의(承宣 李俊儀, ?~1174년) 동생 : 이린(李隣) 동생 : 이거(李琚) 매제 :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우학유(于學儒, ? ~1179년 5월 갑자일) - 아버지 우방재(于邦宰) 부인 : 부인 조씨(夫人 曺氏) 장녀 : 사평왕후 이씨(思平王后 李氏) 사위 : 강종(康宗, 1152 ~ 1213) 외손녀 : 수령궁주(壽寧宮主, 1174 ~ ? ) 가계도 이의방이 등장한 작품 《무인시대》(KBS 드라마, 2003년~2004년, 배우:서인석) 기타 문극겸은 그의 두 딸을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 이거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러나 문극겸은 이의방을 특별하게 대해지도 않았고, 무인들에게 아부하지도 않았다. 중립의 자세를 유지하였으므로 이의방의 두 동생에게 딸을 보내 장인이 되었지만 무신정변 이후에도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같이 보기 무신정변 김보당의 난 조위총의 난 고려 강종 고려 고종 이준의 이린 이양무 이단신 문극겸 이고 채원 김돈중 김부식 이거 고려 의종 고려 명종 사평왕후 이양무 이양익 경대승 경진 김군수 최충헌 조위총 정지상 김보당 두경승 이의민 고려 강종 고려 고종 우학유 관련 서적 고려사 고려사절요 만성대동보 동사강목 각주 1121년 출생 1174년 사망 12세기 한국 사람 고려의 무신 고려의 군인 고려의 정치인 고려의 장군 고려의 공신 한국의 섭정 대량 살인자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 쿠데타로 축출된 지도자 무신정권 전주시 출신 전주 이씨 살해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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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법무부
미국 법무부(美國法務部, )는 미국 연방 정부의 법무 행정 기관이다. 수장은 미국 법무장관이며, 미국 대통령이 미국 상원의 인사청문회에서 조언과 동의를 통해 임명한다. 미국 내각의 구성원이다. 역사 1789년 법원조직법(Judiciary Act of 1789)으로 임명한 미국 법무장관(U.S. Attorney General)은 1인만으로 구성한 파트타임 직위였다. 미국 연방 정부의(U.S.) 최고위직 변호사(Attorney General)라는 의미이다. 미국 대통령과 미국 의회에 법률자문을 하였다. 1819년 미국 의회에 대한 법률자문은 중단되었다. 미국 의회는 1830년과 1846년에 미국 법무장관을 풀타임 직위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1868년 윌리엄 로런스 미국 하원 법사위원장은 미국 법무장관이 수장인 법무부 창설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70년 2월 25일 토마스 젱크스 하원의원이 제안한 2차 법률안이 미국 상원과 미국 하원을 통과했다. 1870년 6월 22일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이 법률안에 서명해 법률로 확정했다. 1870년 7월 1일 미국 연방 법무부가 개설되었다. 조직 장차관 사무실 한국은 법무장관만 국회 인사청문회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미국 법무부는 서열 4위까지 미국 상원의 조언과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미국 법무장관(Attorney General) 사무실 미국 법무부 부장관(Deputy Attorney General) 사무실 미국 법무부 법무차관(Associate Attorney General) 사무실 미국 법무부 송무차관(Solicitor General) 사무실 부서 반독점부(Antitrust Division) 1933년 창설 민사부(Civil Division) 1933년 창설 인권부(Civil Rights Division) 1957년 창설 형사부(Criminal Division) 1919년 창설 천연자원부(Environment and Natural Resources Division) 1909년 창설 사법행정부(Justice Management Division) 1945년 창설 국가안보부(National Security Division) 2007년 창설 세무부(Tax Division) 1933년 창설 전쟁부(War Division) 1942년 창설, 1945년 폐지 산하 기관 연방수사국 (FBI):주로 주단위 사건에 관한 범죄 관련 업무, 혹은 중대한 사건을 맡는다. 마약단속국(DEA):마약 감시/통제 전담기관이다. 폐지된 기관 미국 이민국 (INS): 미국 국토안보부로 이관 사건 대한민국과의 사건 2007년 9월, 한국에서 MS의 끼워팔기에 대한 경쟁규제기관의 제재가 과도한 처벌이였다고 주장했다. 2007년 8월, 대한항공의 화물기 운임 단합사건에 3억달러를 벌금으로 부과했다.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국제형사경찰기구 가맹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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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청
태청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태청 (전량)(太淸)은 전량(前凉) 도공(悼公)의 연호이다. 태청 (양)(太淸)은 양(梁) 무제(武帝)의 연호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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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2세
교황 요한 2세(, )는 제56대 교황(재위: 533년 1월 2일 ~ 535년 5월 8일)이다. 470년 로마에서 프로엑투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첼리오 언덕에 있는 산 클레멘테 성당의 주임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533년 1월 2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본명이 메르쿠리우스(Mercurius)였던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자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요한 2세가 되었다. 그 이유는 메르쿠리우스라는 이름이 고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메르쿠리우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교황의 이름으로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이교적이었기 때문이다. 요한 2세는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본명이 아닌 교황으로서의 새 이름을 사용한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 이 당시에는 교황 선출이나 주교들의 서임 과정에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 사이에 이따금씩 성직매매가 성행하였던 시기였다. 교황 보니파시오 2세가 선종한 후 2개월 동안의 사도좌 공석 기간에도 뻔뻔스럽게도 성직매매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었으며, 미사 때 사용하는 제구들이 패물들과 같이 매매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문제는 원로원에 상정되었으며, 원로원은 이 문제를 동고트 왕이 거주하는 라벤나로 보냈다. 교황 보니파시오 2세 역시 생전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교황 선출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직매매를 금지하는 법령을 내렸다. 교황과 원로원의 법령은 동고트의 왕 아탈라릭으로부터 확인받았다. 533년 아탈라릭은 이 법령을 성 베드로 대성전 안마당 대리석에 새길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이는 로마 원로원에서 규정한 마지막 법령(세나투스 콜술툼)이 되었다. 아탈라릭은 추가적으로 로마 사제단과 신자들이 성직매매에 연루될 경우, 라벤나의 고트족 법정에 출두하여 재판을 받도록 처리하고, 만약 유죄가 입증되면 벌금으로 3천 솔리두스를 내도록 하는 법령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벌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용도로 사용할 것을 지시하였다. 요한 2세는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아탈라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로부터 정통 신앙 고백을 받아내었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는 단성설이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동로마 황제의 신앙 고백은 그 의미가 더욱 깊다. 프로방스에 있는 리에즈의 콘투멜리오수스 주교가 간통 행위로 악명을 떨친다는 소식을 들은 요한 2세는 갈리아 지역의 주교들에게 그를 체포해 수도원에 구금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새로운 주교로 아를의 주교를 임명하였다. 535년 아리우스주의에 빠졌던 주교들이 회개할 경우, 성직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해야 할지 아니면 평신도로 환속시켜야 할지에 대한 문제로 주교 217명이 카르타고에 모여 교회회의를 한 결과, 교황 요한 2세에게 판단을 요청하였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재신임 문제로 노바시아노주의와 도나투스주의가 출현하게 되면서 혼란스러운 상태가 이어졌다. 요한 2세가 535년 5월 8일 선종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후임자인 교황 아가피토 1세가 대신하게 되었다. 요한 2세의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각주 470년 출생 535년 사망 6세기 교황 6세기 이탈리아 사람 로마 출신 이탈리아 출신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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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사회학(社會學)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와 왜 그렇게 사는지를 사회와 연관지어서 설명하는 학문이다. 사회학에서는 다양한 사회 연구 기법을 이용하여 경험적인 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분석한다. 사회학은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서 다루어진다. 사회학의 목표는 인간 사회를 연구하여 미시사회학인 부분에서부터 거시적인 단계에 이르기까지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회학은 방법론이나 탐구 주제 면에서 매우 광범위한 학문이다. 전통적으로 사회학은 양적 연구 방법을 통하여 계량적인 방법으로 계급과 같은 사회 계층, 사회 이동성, 종교, 세속화, 법률, 문화, 일탈, 근대성 등을 연구했다. 근래에 들어서 사회학의 연구 분야는 의학, 군사, 처벌과 같은 각종 사회 제도와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사회관계, 과학 지식과 같은 지식 체계에까지 확장되고 있다. 연구 분야가 광범위 한 만큼 연구의 기법 역시 다양하여 언어적 방법, 문화적 방법, 이해사회학, 철학적 방법 등이 사회학 연구에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에이전트 기반 모형이나 사회 네트워크의 분석을 위해 수학적 방법과 컴퓨터 연산 기법 등이 사용되고 있다. 정의 사회학이 어떠한 학문인가를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학이 무엇을 대상으로 하며, 이 대상을 어떠한 방법으로 연구하는가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사회학의 내용이나 과제에 대해서도 상당히 모호한 점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져 있다고 생각되는 까닭이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간단히 사회학의 정의를 내린다면, 인간과 사회의 관련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적인 공동생활의 이법(理法)을 밝히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사회의 구조와 변동 및 그 밑바닥에 있는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연구하는 한, 특수 사회과학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우리들의 사회적인 공동생활을 살펴보건대, 거기에는 경제·정치·법·교육·도덕·종교·예술 등 갖가지 영역이 있고, 이들 영역을 통하여 다종다양한 집단이나 제도가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이들 집단이나 제도는 인간의 행위가 지탱되면서 존속하며 또 변동한다. 경제학·정치학·법학 등의 학문은 이와 같이 서로 관련하는 여러 영역을 각각 칸막이하여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말하자면 '세로로 자르는' 학문인데 반해, 사회학은 그들 여러 영역에 걸쳐서 그 밑바닥에 있는 집단·제도·행위에 연구의 초점을 둔다는 뜻에서 말하자면 '가로로 자르며 보는' 학문이라 하겠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학의 관점(초점)은 처음부터 사회생활의 전반에 걸친 '생활의 공동'에 있으므로, 여러 사회과학 안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경제학이나 정치학 등이 서로 교착(交錯)하면서도 그 인식의 중심점으로 보아, 평면적으로 대상영역을 나누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회학은 이들 대상면 전체에 나타나 있는 인간생활의 공동을 인식과제로 삼는 까닭에 다른 사회과학들과 달리 대상을 입체적으로 나누는 셈이다. 그러므로 사회학은 경제학·정치학·법학·교육학 등 여러 과학과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연구를 수행하여야만 한다. 사회학의 기본적인 문제는 사회와 개인의 문제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지난날에 양극적(兩極的)인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개인을 사회에 우선시키는 사회명목론(社會名目論)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를 인간적 개체를 초월하는 것으로 보는 사회실재론(社會實在論)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입장은 오늘날 모두가 극복된 듯하다. 개인의 실재는 물론 부정할 수 없는 일이나, 그 개인 자체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퍼서낼러티를 가지고 집단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회적 인간이며, 이 사회적 인간이 그를 형성하며 제약하고 있는 사회를 역사적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기본적 관점으로부터 사회학의 연구내용은 구조적으로 크게 나눠, 퍼서낼러티·집단·문화(제도) 등 3측면으로 형성되고 있다고 하겠다. 사회학 연구의 첫 출발점은 구체적인 인간의 사회적 행위의 분석이다. 이 사회적 행동양식의 연구가 인간의 퍼서낼러티 형성의 이론이 되며, 나아가서 사회적 성격(예:민족적 성격·직업적 성격)의 이론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둘째는 사회학의 중심적 과제라고도 할 만한 집단의 연구이다. 인간의 사회적인 공동생활은 실은 여러 가지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행하는 생활인 까닭이다. 사회학은 여러 가지 집단에 대하여 유형에 따라 분석하는 동시에 집단과 집단 사이의 관련도 밝히려 한다. 특히 '집단 분출(噴出)'의 시대라고도 불리는 현대의 사회가 한편으로는 인간을 대집단으로 조직화하며 관료제화(官僚制化)를 진행시키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사회학적 상황(狀況)을 가져오고 있는 문제점은 오늘날의 사회학에 대하여 중요한 연구내용이 된다. 셋째 부문은 사회의 문화적인 측면에 대한 연구이다. 즉, 사회적 소산으로서의 문화와 사회와의 관련이 문제가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화는 넓은 뜻의 문화이거니와, 기술혁신이 행해지고 매스컴(대중전달)의 기능이 더욱 주목되어 오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는 문화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문제도 끝이 없다고 하겠다. 사회학은 이상과 같은 내용을 실증적(實證的)으로 연구하려고 한다. 실증적 연구는 실증주의를 표방한 초창기 이래의 사회학의 전통이다. 1920년대 이후 미국에서 특히 발전되어 온 사회조사법(social research)은 사회학의 '실증과학'적인 성격을 높이기 위하여 더욱 다듬어져야만 하는 연구법인 것이다. 바야흐로 이른바 관리사회(管理社會) 또는 정보화사회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것은 공업화와 도시화가 끊임없이 진행되는 가운데 인간이 스스로 필요한 정보를 얻고 이에 기반해 판단 행동할 수 있는 사회이거나, 기구(機構)의 톱니바퀴처럼 되어 가는 사회이며, 방대한 양의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모아지며 처리되는 사회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다운 생활을 제대로 영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현대의 사회생활에 대한 과학적인 식견을 넓히고 올바른 진단을 바탕삼아 적절한 치료를 베푸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데, 이 경우에 사회학적인 사물관찰이나 대처방식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연혁 사회학은 근대사회의 과학적 자각으로서 태어났다. 사회학의 성립에 대하여는 학자에 따라 견해가 갈라져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프랑스의 콩트가 그의 저서 『실증철학강의』(전 6권, 1830-1842)의 제4권에서 비로소 '사회학(sociology)'이란 학문명칭을 사용하고, 의식적으로 이것을 체계화하였을 때에 성립하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리하여 발족한 사회학은 영국에서는 스펜서에 의하여, 독일에서는 슈타인과 섀플레(A. Schaffle)에 의하여, 시대는 좀 뒤지나 미국에서는 워드(L. Ward)에 의하여 발전의 초석이 놓여졌다. 콩트에서 시작하는 이들 초기의 사회학은 대부분이 자연과학 특히 생물학의 영향을 받아서 사회를 생물유기체와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사회유기체설'을 취하고, 해부학·생리학에도 비할 만한 사회정학(社會靜學)과 사회동학(社會動學)이란 2부문으로 구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학에 있어서 진화론적인 사회발전의 법칙을 구하려 하였고, 사회개조에의 실천적 의도를 다소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 점과도 관련되지만, 사회현상의 포괄적인 인식을 목표삼고, 사회학을 사회과학 그 자체 또는 사회과학 전체의 기본과학이라 생각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종합사회학이라 불린다. 그러나 종합사회적인 초기의 사회학은 폭이 넓을 뿐 내용은 비었다고 하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고, 사회를 생물유기체와 비교하여 논하는 데에도 무리가 있었다. 그 때문에 사회학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크게 전환해야만 했다. 생물학적인 방침에 의한 사회유기체설이 무너지는 동시에 생기는 '심리학적 사회학'과 종합사회학에의 반성적 비판의 결과로 나타나는 개별과학으로서의 사회학, 이 2가지가 그 후의 발전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사회를 인간심리의 상호적 교섭으로서 파악하는 입장은 사회학을 심간(心間)심리학이라 본 프랑스의 학자 타르드에 의하여 터전이 놓여졌다. 이같은 심리학적 사회학은 영국에서는 호브하우스(L. Hobhouse), 미국에서는 기딩스(F. Giddings)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의 개념으로 유명한 퇴니스의 사회학,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이해한다고 하는 뜻에서 '이해사회학'이라 불린 [[막스 베버|베버의 사회학 등도 넓게 보면 심리학적인 사회학이라 할 수 있겠다.그런데 초기의 종합사회학은 '형식사회학'을 창시한 지멜에 의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에 의하면, 사회학이 독립된 과학이 되려면 다른 여러 사회과학이 '사회의 내용'을 다루는 데 반해 '사회화(社會化)의 형식'을 다루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생각은 극단적인 것이라 하겠고, 이 시대에도 뒤르켐처럼 '사회학주의'의 입장에서 여러 사회과학을 사회학의 한 분과로 보며 종합사회학의 전통을 남긴 학자도 있다. 그러나 그 흐름은 심리학적으로 사회를 설명하고, 어떤 형으로든 사회학을 사회과학의 하나로 보는 입장이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고 하겠다. 이리하여 사회학은 훌륭히 학문으로서 진보하여 왔다고 하겠는데, 현대의 사회학은 20세기 전반(前半)의 성과 위에서 착실히 전진하고 있다. 20세기의 30년대까지는 어느 편인가 하면 유럽, 그 중에서도 독일이나 프랑스의 사회학이 학설의 무게로 보아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나치 때문에 억압받아 온 독일사회학의 쇠퇴도 작용하고 해서 사회학 교직자가 얼마 되지 않았던 유럽은 점차로 사회학의 연구상 많은 미개척분야를 가지며, 대학에서 다수의 사회학자를 보유할 수 있었던 미국에 압도당하게 되었다. 현대의 사회학에서는 사회학 왕국으로서의 미국의 영향이 아주 강하다. 심리학적인 방침은 계속 우세하며, 사회심리학과 사회학은 서로 스며들고 있다. 문화인류학 또는 사회인류학과의 교류도 현저하다. 또한 사회조사법의 진보로써 실증과학에의 경향이 강하며, 단편적인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론없이 행해져 온 경향도 이름있는 학자들(T. Parsons, 머턴(R. K. Merton) 등)에 의하여 계속 시정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사회학은 연구자가 많아짐에 따라서 그 내부에 분업을 낳고 있다. 즉, 연구영역에 따라 각종의 분과사회학이 전개된다(도시사회학·농촌사회학·가족사회학·산업사회학·교육사회학·법사회학·정치사회학·종교사회학 등). 동양권에서 사회학의 시작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되면서 신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으며 일본에서 동양에 존재하지 않던 개념인 Society의 번역을 사회로 하여 사회학이 되었다. 현대사회학의 이같은 발전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라 전 세계에 미치고 있다. 2차 대전 후에 조직된 국제사회학협회(Internat­ional Sociological Association)에는 세계 각국의 사회학자들이 참가하고 있는데, 대한민국도 1966년에 가입하였다. 사회유기체설 사회의 구성을 생산유기체와 유사한 것으로 보고, 이에 입각하여 유추적으로 사회의 구조와 기능을 설명하려고 하는 사회 실재론의 한 형식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제거하고 새로운 질서화를 위해 등장하였다. 사회물리학 콩트가 사회학을 지칭하여 사용한 용어이다. 자연과학을 모델로 삼아 경험적·실증적 연구 방법을 취하였기 때문에 사용한 용어이다. 심리학적 사회학 사회현상의 결정요인 또는 설명요인으로서 심리적 요인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입장의 사회학이다. 프랑스에서 이 입장을 대표한 타르드는 모든 사회현상 중에서 사회학의 대상이 될 '순수하게 사회적인 것'을 빼내어 이것을 두 사람 사이의 심적(心的) 관계로 설명했다. 이 관계는 한 사람이 타인을 반영하는 관계, 즉 모방인 것이다. 따라서 타르드는 모방이 있는 곳에 사회현상이 있다고 했다. 미국의 경우 기딩스의 동류의식(consciousness of kind)에 의하여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설명하려 하였고, 쿨리(C. H. Cooley)는 사회현상은 원래 의식현상이므로 내면적으로 고찰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 이외에도 미국에 있어서는 이 입장을 취하는 학자를 많이 볼 수 있다. 이 입장은 엄밀한 뜻으로 보면, 종합사회학이 쇠퇴한 후 차차 사라지고 그 계열은 사회현상의 심리적 측면을 중시하면서 이런 연구에 자기를 한정시키는 개별과학으로서의 사회심리학에 흡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해사회학 베버의 관점에서 사회학은 '사회적 행위를 해석하면서 이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경과와 여러 결과를 인과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과학'이다. 이해사회학이라 불리는 베버학설의 특색은 '행위자에 의하여 주관적으로 생각된' 의미의 이해에 있다. 여기에 그는 이른바 '이념형(Idealtypus)'의 개념을 만들어 냈는데, 그것은 가치적인 어떤 견지에서 현실의 현상을 이념적으로 뽑아내어 형성되는 것이다. 형식사회학 초기의 사회학에 나타나는 백과전서적·종합과학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서,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의 20년대에 걸쳐서 독일을 중심으로 특수개별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을 확립하려 하여 생긴 사회학의 한 유파(流波). 지멜을 창시자로 하여 피르칸트(A. Vierkandt), 비제로 이어졌는데, 미국에서도 로스(E. A. Ross)와 같은 학자의 입장이 이에 속한다. 지멜은 사회학의 독특한 대상을 '사회화의 형식', 즉 심적 상호작용에서 찾았다. 그것은 사회의 내용을 이루는 경제·법·정치·종교 등으로부터 빼내어진 공통의 형식으로, 이를테면 상하관계·투쟁·경쟁·모방·분업·교환·대표 등이다. 현실의 사회는 내용인 여러 관심과 사회화의 형식인 심적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며,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개념적으로는 구별하여 고찰할 수 있다.과학이 일면적인 개념적 추상에서 성립하는 한, 기하학이 자연현상인 소재(素材)에는 관계없이 그 형식을 대상으로 삼는 것처럼, 사회학은 사회화(社會化)의 형식을 대상으로 함으로써 내용을 대상삼는 다른 사회 여러 과학에 대해 개별과학으로서의 독특한 고유영역을 가질 수가 있다. 형식사회학은 이와 같이 하나의 전문과학으로서 확립은 되었지만, 한편 사회적 현실로부터 떨어지고, 비생산적인 관념유희(觀念遊戱)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문화사회학 형식사회학의 비생산성·비현실성에 대해 사회학에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주며, 또 실천에 소용되는 학문이 되려는, 말하자면 현실과학화로의 움직임이 제1차대전 후의 격동기에 독일에서 문화사회학을 먼저 성립케 하였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문화를 그 사회적 존재로부터의 제약에 있어서 이해하려 하는 사회학을 말하는데, 문화와 사회의 종합적 파악은 결국은 역사적·사회적인 실재의 전체적 파악, 역사적 세계의 일반적 구조론을 전개하는 것이라 하겠다. 독일의 문화사회학은 따라서 동시에 역사사회학이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 학자는 베버, 만하임, 셸러였다. 그들에게 공통적인 점은 단지 형식사회학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당시의 독일의 사상계나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주목할 조류(潮流)로 되어 있던 마르크스주의와 대결하여 이것을 극복하려는 데 있었다. 이를테면, 만하임은 그의 지식사회학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를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수정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변혁기에 있어서의 인간과 사회』 등 여러 저서에서 그는 인텔리겐차(지식계급)의 역할을 크게 다루었는데, 이것은 오늘의 한국에서는 다분히 시사적이라 하겠다. 한편 미국에서는 문화인류학과의 접근·교류에 의한 문화주의적인 사회학이 등장하였다(1920년대-1930년대). 그것은 심리학적 사회학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고, 문화의 객관적 또는 준객관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이 입장의 사회학자로서는 오그번(W. F. Ogburn), 행킨스(F. H. Hankins), 토머스(W. I. Thomas) 등을 들 수 있다. 문화를 행위양식 또는 생활양식이라 보는 미국의 문화사회학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과학적으로 밝히려고 하는 실증적 방법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예술 사회학 음악, 미술 등의 예술 분야에 대해 사회학적 관점으로 접근한 학문이다. 즉 예술 행위, 현상을 사회 현상의 하나로 간주하는 것이다. 특히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연구가 예술과 사회의 관련성을 밝히는 것이었다면, 그 후의 연구는 예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해석하고 더욱 학문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예술 사회학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학자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했던 하우젠슈타인이다. 예술 사회학이 발전하게 된 데에는 전위 예술가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전위예술이란 모더니즘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상징주의,입체파, 표현주의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전위예술의 특징은 문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났다. 특히 전위 예술의 영향은 음악이나 미술에서 특히 컸는데 음악과 미술이 현대 음악,미술과 상당히 흡사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위 예술가는 흔히 프랑스말로 아방가르드(Avant-garde)라고 불린다. 아방가르드는 전쟁에서 척후병 역할을 하는 군사를 뜻하는 말로 기존의 체계를 거부하고, 혁신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산업혁명 이후 바뀐 산업구조로 인해 사회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바뀌면서 마르크스 유물사관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와 정신을 창조하려고 한 것이다. 전위 예술은 음악, 미술 등의 분야에서 많이 나타났으며 백남준 등이 대표적인 전위 예술가이다. 모더니즘 시대의 상징으로 전위 예술이 사용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것들을 부정했던 모더니즘 시대이후 전위 예술이 자리잡게 되면서 예술 사회학도 발전해 갔다고 할 수 있다. 음악 사회학 음악 사회학이란 예술 사회학의 한 갈래로써 음악과 사회의 관련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음악을 심미적이나 감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사회 문화 체계 속에서 만들어진 소리로 이해하는 것이 음악사회학의 성격이다. 음악 사회학이 학문적으로 발전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베버 이후로 여겨진다. 음악과 사회와의 관계를 처음 인식하고 언급한 학자는 플라톤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당시의 음악과 사회의 관련성에 대한 해석은 학문적 접근이 아닌 당시 유력한 정책이나 의견에 따른 해석이었다. 음악학에 대한 연구는 18세기에 왕성하게 일어났지만 음악과 사회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는 오히려 위축되었다. 베버 이후 아도르노가 등장해 음악 사회학을 발전 시켯으며 1969년 그의 사망이후 음악 사회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으며 그 후의 사회학자들은 음악 사회학을 수용 방법에 따라 다른 접근을 시도했다. 실증주의 음악 사회학, 마르크스주의 음악 사회학 등이 그 예이다. 실증주의 사회학은 경험주의 또는 실증주의에 뿌리를 두어 음악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증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질버만과 블라우코프가 대표적인 실증주의 사회학자이다. 한편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들은 계급분석 이론에 기초를 두고 음악의 생산,소비의 부분에서도 계급적인 특성을 찾으려 한다. 즉, 역사적 시점, 계급에 의해서 음악의 생산, 소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전제되는 것이다.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음악 사회학을 독립적인 학문으로 인정해야 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고있으며, 학문적 위치가 불안정하다는 것이 평설이다. 사회학주의 사회현상을 규정할 때에 특히 '사회학적'인 요인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것은 제1차 대전 이전의 프랑스에서 뒤르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는 사회적 사실을 사물(chose)로서 고찰한다. 그에게는 그것은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객관적 존재물이며, 또 그것은 생리현상이나 심리현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실재(實在)였다. 그는 이의 예로서 '집합표상(集合表象)'의 객관적 성격을 사회적 강제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뒤르켐 학파의 사람들은 사회연구의 모든 분야에 객관주의적인 이러한 방법을 널리 적용하였다. 사회심리학·사회학·문화인류학의 관계 이 셋은 모두 인간의 사회생활을 가로로 잘라 분석하는 것이나, 사회심리학은 개인의 퍼서낼러티의 수준에서 개인의 의식과 행동이 사회적 환경에 의해 어떻게 변용되며 또 사회환경을 어떻게 바꿔가는가를 살피고 사회적 행동의 일반이론을 수립하려 한다.이에 반하여 사회학은 사회체계의 수준에서 집단 및 사회의 구조와 기능, 나아가서는 그것들의 변동의 법칙을 밝히고, 마지막에는 집단과 사회의 일반이론을 수립하려 한다고 하겠다. 사회학도 퍼서낼러티나 문화 등을 다루지만, 그 마지막 초점은 사회체계로 모아지고, 이것에 관련하는 한에는 그것들을 다룬다고 하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문화인류학은 종래의 연구상황으로 보아 미개민족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인 듯하지만, 그것은 결국 문화의 일반이론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3학문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한국의 사회학 한국에 사회학이 소개된 것은 8·15 광복 이전의 일이다. 경성제국대학의 윤리학과의 부 전공으로 처음 사회학과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경성제국대학이 전신이었던 서울대학교에서 1946년 법문학부안에 사회학과가 설립되었으며, 그후 1954년 경북대학교에 두 번째로 사회학과가 설치되었다. 대표적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 오귀스트 콩트는 실증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사회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실증주의 철학'과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명명하였다. 몽펠리의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프랑스 혁명 이후 파리의 이공과대학에서 진보적인 교육을 받았다. 생시몽의 비서로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의 발전을 위해 그와 밀접히 공동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관계에서 물러난 그는 생계를 위해 수학교사가 되었고, 1848년에는 실증주의협회를 창설하였다. 그의 철학은 생시몽의 사상의 실증주의적 측면을 정교화시켰다고 할 수 있는데, 프랑스에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던 시기에 질서와 진보를 찾고저 했다. 그는 평등주의, 개인주의, 정치적 주권주의와 같은 철학에 반대했는데, 이 철학들이 혁명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저작에는 당시의 보수주의(과학, 혁명, 개혁에 반대하는)와 급진주의(과학과 산업의 새로운 황금기임을 주장하는) 사이의 긴장이 나타나고 있다. 콩트는 공동가치의 체계로서 사회질서의 보수적 개념을 인정하고 있었다. 유럽의 전통적 가치와 종교적 가치의 쇠퇴가 사회적 위기를 창출하고 있다는 신념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실증주의를 통하여 사회개혁의 전제가 되며 합의를 재건하는 윤리적, 지적 개혁을 추구했다. 이러한 부분적 변화 때문에 실증주의가 사회의 객관적 개념으로부터 개혁주의, 인류주의, 종교에 대한 주관적인 강조로 옮겨 간 급진적 변화라고 잘못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콩트의 실증주의를 '과학주의'와 동일시하는 과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콩트의 실증주의는 단순한 경험주의로 환원될 수 없다. 콩트는 고전경제학이 메마른 추상, 형이상학적 사고, 경제적 사실을 부당하게 고립시켰다고 주장하여 비판을 가한다. 콩트주의 사고는 프랑스의 레비브륄(Lévy Bruhl), 뒤르켐, 알랭(Alain)과 모라(Mauras), 영국의 스펜서, 밀, 레키(Lecky), 몰리(Morley), 독일의 역사학자인 몸젠과 그로트(Grote), 그리고 스페인, 포르투갈, 남아메리카의 학문적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사회 재조직을 위한 과학적 작업』(1822), 『실증철학』 6권(1830~42), 『실증정치의 체계』 4권(1848~54), 『실증정신론』(1844) 등의 사회학적 저술이 있다. 아르놀트 하우저 아르놀트 하우저는 1892년 5월 8일 헝가리 티미쇼아라(Temesvar)라는 작은 도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와 베를린, 빈에서 미술사를 공부하였고 부다페스트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하였다. 부다페스트에서는 루카치, 만하임, 발라츠 등과 함께 '일요서클'이라는 지식인모임을 형성하였는데 하우저의 예술사 연구에서 사회학적 연구방법과 영화와 극예술에 대한 연구 등이 모두 이 일요서클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헝가리 소비에트 정권이 무너지자 오스트리아 빈으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다시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영국에 머물면서 생활고로 어려움에 처했지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를 집필하였고 1951년 영어, 1954년 독일어로 출간하였다. 이후 하우저는 20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되었다. 영국 리드대학에서 강의하였고 교환교수로 미국에서도 강의하였다. 1978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사망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예술연구의 방법론 Methoden der Kunstbetrachtung 1960》, 《현대예술과 문학의 근원 Der Ursprung der modernen Kunst und Literatur 1964》, 《예술의 사회학 Soziologie der Kunst 1974》, 《루카치와의 대화 Im Gesprach mit Georg Lukacs 1978》등이 있다. 에밀 뒤르켐 뒤르켐 이전에 콩트의 실증주의 사회학이 존재했지만, 콩트는 자신의 사상을 온전히 발전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콩트의 사유는 뒤르켐에 와서 명확한 근거를 얻기 시작했다. 실제로 콩트는 사회학이라는 용어로 만들어내긴 했지만, 신학적 단계-형이상학적 단계-실증적 단계로 이어지는 그의 역사발전 도식은 과학성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뒤르켐은 사회학을 ‘경험적 근거’ 위에 올려놓고자 노력했다. 뒤르켐은 사회실재론의 입장을 천명했다. 그는 사회의 법칙이 자연과학의 법칙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으며, 사회를 개인들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사물(things)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사실을 사물로 취급하라” 이것이 뒤르켐의 명제이다. 따라서 사회는 객관적인 관찰 방법으로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사실은 개인 외부에 존재하며(외부성), 개인에게 구속력을 가진다(강제성). 예를 들어 도덕적 의무감도 개인의 순수한 자발적 신념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사실이라는 게 뒤르켐의 혁신적인 생각이다.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생각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그러한 생각조차 이미 사회적 사실로서 외부에서 개인에게 주어지며 강제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사회를 인간들의 단순한 총합으로 볼 수 없게 한다. 인간들이 모인 사회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속성을 획득한다. 따라서 생물학이나 심리학에서 주장하듯 인간본성을 가지고 사회의 성격을 설명할 수도 없다 막스 베버 막스 베버는 역사파의 계통에 속해 있으나, 학문 방법론에서는 리케르트의 영향하에 신 칸트 파의 입장을 취하였다. 근대 자본주의 특징을 프로테스탄티즘과 관련하여 밝힌 것은 그의 뛰어난 업적이다. 그의 학문적 활동은 사회학·경제학·역사학·법학 등 매우 폭이 넓었으며, 근대의 가장 위대한 사회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베버의 주요 저작들은 종교 사회학, 정치 체제, 조직 이론, 행위의 합리화를 다루고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술은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그는 종교 사회학에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책에서 베버는 서방과 동방 문화가 각자 발전하는 방식의 여러 원인 가운데 종교가 한 요소였다고 주장하며, 금욕적 칼뱅주의라는 특정한 성격이 서구의 합법적 권위, 관료제, 자본주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음을 강조한다. 또 여기서 그는 자본주의가 마르크스주의적 맥락에서 순수하게 유물론적이지 않고 소유 관계, 기술, 지식의 발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 이상과 관념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여 개신교가 자본주의의 발흥에 끼친 영향을 검토한다. 그의 또다른 주요 저작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베버는 국가를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도록 주장하는 독립체로 규정하였으며, 이는 현대 서구 정치 과학 연구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베버는 경제와 사회에서 했던 관료제 분석은 현대의 조직 연구에서 아직도 중심적이다. 그의 유명한 업적을 "베버 명제"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는 처음으로 사회적 권위의 다양한 측면을 인식하여, 카리스마적 권위, 전통적 권위, 법적 권위로 범주화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관료제를 분석하면서 근대 국가 조직이 합리적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썼다. 카를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헤겔의 철학에서 출발했고 헤겔의 사고 방식에서 큰영향을 받았지만 헤겔이 주장한 세계 정신의 관념, 즉 우리가 헤겔의 관념론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물질적인 삶의 조건이 우리의 생각과 의식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물질적 삶의 조건의 변화가 역사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한사회의 정신적인 상황이 물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물질적인 상황이 정신적인 상황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특히 한사회의 경제적인 힘이 다른 모든 분야에 변화를 일으켜 역사를 발전시킨다고 강조했다. 사회학의 주변 학문 철학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생물학 예술 음악학 참고 저서 앤서니 기든스, 김미숙 외 역, 현대사회학, 을유문화사 김경동, 현대의 사회학, 박영사 루이스 A 코저, 신용하 박명규 역, 사회사상사, 일지사 노명우, 아방가르드, 책세상 쟈네트 윌프, 이성훈 역, 미학과 예술사회학, 이론과실천 현택수, 예술과 문화의 사회학, 고려대학교출판부 아놀드 하우저, 백낙청 역,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창비 참고 자료 같이 보기 문화 이론 사회학자 목록 정치사회학 탈공업 사회 사회 이론 사회심리학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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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정 프로젝터
액정 프로젝터(LCD 프로젝터)는 비디오, 그림, 컴퓨터 데이터를 어느 화면 또는 평평한 화면 위에 표시하기 위한 영상 프로젝터의 하나이다. 현대에는 슬라이드 영사기 또는 오버헤드 프로젝터의 현대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개요 일반적인 액정(LCD) 프로젝터에서는 3 장의 LCD 패널(영상 신호의 빨강, 초록, 파랑의 각 성분 마다 한 장씩)에 금속 할로겐 램프 (Metal halide lamp)의 빛을 통해 영상을 표시한다. 편광시킨 빛이 패널을 통과하고, 화소마다 빛의 투과 여부를 제어하여, 다채로운 빛깔을 투영할 수 있다. 금속 할로겐 램프가 쓰이는 까닭은 색 온도가 이상적이고 색 너비이 넓기 때문이다. 또, 크기에 비해 빛의 양이 크기 때문이다. 현재의 프로젝터들은 평균 약 2,000 ~ 15,000의 ANSI 루멘을 지원한다. 영상을 프로젝션 스크린으로 영사하는 데에 있어서, DLP나 LCOS와 같은 보다 새로운 기술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떠한 기술이 쓰인다 해도, 통틀어 "액정 프로젝터"라고 불리는 일이 많다. 투영 표면 금속 할로겐 램프가 소형인 것과 투영하는 평면을 고르지 않는 등의 까닭에, 다른 영사 시스템보다 소형이고 운반하는 데에 적절하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양호한 화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흰색 또는 회색이 표면에 투영되면 알 수 있기 때문에, 전용 스크린이 쓰이는 경우가 많다. 프로젝터의 품질이나 투영 표면은 투영한 영상이 어떠한 색으로 인식되는지에 따라 평가된다. 자연스러운 색조에 최적인 것은 하얀 표면이기 때문에, 많은 기업이나 학교에서는 일반적으로 흰 투영 표면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영상 안에서 가장 검은 부분의 재현은 검정 수준에 따라 정해지기 위해, 대비를 높게 얻을 수 있는 회색의 스크린이 일부에서는 선호되고 있다. 그 대상으로 검은 배경에서는 색조가 뒤떨어지게 된다. 프로젝터의 설정으로 색을 조정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흰 배경을 사용했을 경우와 동일한 정도로 엄밀하게 조정하지는 못한다. 역사 초기의 LCD 시스템은 기존의 오버헤드 프로젝터와 함께 쓰이고 있었다. 이 시스템에서는 스스로 광원을 가지지 않고, OHP 시트 대신에 큰 "플레이트"를 프로젝터에 싣는 것이었다. 이것은 컴퓨터가 표시 장치로 그만큼 보급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 일시적인 물건이지만 액정 프로젝터가 주류가 되기 전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기술은 비용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중간 정도 크기(대각선으로 40 ~ 50 인치)의 뒷면을 확대하는 영상 장치가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홈 시어터 시장에서는 작은 사이즈의 직시형 LCD 패널이나 큰 사이즈의 DLP 프로젝터라는 분야에서 비용, 성능 개선이 기대되기 때문에, 수명은 그다지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대화면 텔레비전에 이 LCD 시스템을 사용하는 경우 다른 장점으로는 60인치의 텔레비전보다 화질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 액정 프로젝터와 같은 계열의 LG 100인치 액정 텔레비전은 원형(프로토타입) 단계이지만 프로젝터 크기에 크게 가까워지고 있다. 일반적인 경험의 규칙에서 보면 액정이 커지면 화질이 나빠진다. 이것을 막으려면, 액정 파넬을 작게 하고 화질을 떨어뜨리는 일 없이(대비는 나빠지겠지만) 렌즈로 확대해 프로젝션 스크린에 투영하는 것이다. 2004년과 2005년에는, 다이나믹 아이리스(dynamic iris)가 추가됨에 따라 대비가 DLP 수준까지 개선된 프론트 프로젝션 방식의 액정 프로젝터가 등장했다. 저만의 DIY 프로젝터를 자작하는 애호가들은 LCD 프로젝터의 기본 설계를 자주 응용한다. 기본적인 기술로 높은 CRI의 HID 램프와 안정기를 콘덴서 렌즈나 컬렉터 렌즈와 조합하고, LCD는 일반 컴퓨터 디스플레이에서 떼어내어 사용한다. 같이 보기 CRT 프로젝터 프로젝터 DLP 프로젝터 각주 프로젝터 영상 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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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4%B7%EC%8A%A4%EC%BC%80%EC%9D%B4%ED%94%84%20%EB%A9%94%EC%8B%A0%EC%A0%80%209
넷스케이프 메신저 9
넷스케이프 메신저()는 넷스케이프가 개발한 독립실행형 크로스 플랫폼 이메일 및 뉴스 클라이언트이다. 2007년 6월 11일에 넷스케이프 머큐리()라는 이름으로 처음 알려진 이 프로그램은 모질라의 선더버드를 기반으로 하며, 웹 브라우저인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9와 함께 할 목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원래의 이름인 머큐리(Mercury)는 로마의 상업과 교역의 신인 머큐리(메르쿠리우스)에서 따왔으며, 넷스케이프 4.0판 ~ 7.2판에 포함되었던 넷스케이프 메일 & 뉴스그룹을 대체하는 것이다. 2007년 11월 15일에는 리눅스, 맥 OS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첫 알파 버전이 공개되었다. 2007년 12월 28일에는 넷스케이프 개발진이 AOL이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9와 메신저 9에 대한 지원을 2008년 2월 1일부터 중단할 것이라고 알렸다. 특징 넷스케이프 메신저는 모질라 선더버드 2.0.0.9의 모든 기능을 포함하고 있으며, 거기에 AOL 인스턴트 메신저 주소록과의 통합 기능이 추가되었다. 또한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9와 같이 사용자 인터페이스 스킨을 꾸밀 수 있다. 출시 기록 넷스케이프 메신저 9.0a1 - 2007년 11월 15일 (모질라 선더버드 2.0.0.9 기반) 각주 외부 링크 넷스케이프 메신저 홈페이지 넷스케이프 메신저 커뮤니티 지원 게시판 이메일 클라이언트 2007년 소프트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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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둔
탄둔 (; 1957년 8월 18일 ~ , 중국 후난성 창사시 출생)은 중국의 작곡가이다. 작품 1997년에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을 때, 탄둔은 요요 마를 위한 작품인 《Symphony 1997: Heaven Earth Mankind》을 위촉 받아 작곡하였다. 1998년 작품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그라베마이어 상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서거 2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Water Passion after St. Matthew》를 작곡하였다. 영화 《와호장룡》의 음악 작곡으로 2000년 아카데미 상을, 2002년 그래미 상을 받았다. 1957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담씨 중국의 영화 음악 작곡가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자 창사시 출신 컬럼비아 대학교 동문 중국의 클래식 작곡가 20세기 클래식 작곡가 21세기 클래식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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녕변군
녕변군(寧邊郡,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동남부에 있는 군이다. 1428년(세종 10) 평안도의 연산부와 무산현을 병합하여 영변대도호부라 하면서 생성되었으며, 평안도병마절도사가 한동안 녕변의 지방관직을 겸직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영변도호부에서 영변군으로 개편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녕변군"이라 부름에 따라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96년에 13도제가 시행되면서 평안북도에 속했고, 1897년부터는 평안북도관찰사영의 소재지이자 1921년 신의주로 평안북도청이 이전될 때까지 평안북도의 도청 소재지였다. 지리 평양에서 북쪽으로 약 80km 거리에 있다. 청천강의 북안에 있으며, 그 지류인 구룡강이 군내를 가로지르고 있다. 최고봉은 북부에 있는 향적산(805m)이다. 구릉에 둘러싸인 지형이다. 서쪽으로 박천군·태천군, 북쪽으로 운산군, 동쪽으로 구장군과 인접하고 남쪽은 평안남도에 접한다. 역사 고대에는 고구려·발해의 영역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연주(연산부)·무주로 불렸다. 1012년에는 고려의 강감찬이 거란과 싸웠고, 1216년에는 김취려가 금나라군과 싸웠다. 조선시대에는 연산도호부·무산현이 설치되었고 1428년에 양자를 아울러 영변대도호부가 놓여졌다. 1428년(세종 10년) 조선 세종의 명으로 부사(府使)와 판관(判官)을 두고, 병마도절제사로 하여금 부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이후 한동안 평안도병마절도사가 영변대도호부사직을 겸직하였다. 이듬해 3월 26일에는 조선 세종의 명으로 서반 토관직(土官職)을 설치하여 변민(邊民)을 이주시키고, 큰 진(鎭)을 설치하였다.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의 무대가 되었다. 1895년, 부군제(23부제)에 의해 평양부 영변군으로 개편되었다. 이듬해인 1896년에 13도제가 시행되면서 평안북도에 속했고, 1897년에 평안북도의 관찰사영(도청)이 정주에서 영변으로 이전하였다. 1921년에 신의주로 이전될 때까지, 영변은 평안북도의 도청 소재지였다. 1952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 재편에 의해 구장군·향산군이 분할되었다. 1980년대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핵관련 시설의 건설이 시작되면서 북핵 문제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지명이 되었다. 행정 구역 현재 녕변군의 행정 구역은 녕변읍(寧邊邑)과 팔원로동자구(八院勞動者區), 26리로 구성되어 있다. 산업 예부터 견직물의 생산지로 알려졌다. 관광 철옹성 - 구룡강과 산에 둘러싸인 읍성이다. 약산동대 - 녕변읍내에 있는 기암과 철쭉의 명소이다. 시인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에 등장하는 "영변 약산동대의 진달래"로 알려져 있다. 천주사 서운사 북수구문터 같이 보기 녕변 원자력 연구소 북핵 문제 각주 외부 링크 녕변군 지도 평안북도의 군 1897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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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시스
픽시스(Pixies)는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다. 1986년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결성. 결성당시의 성원은 블랙 프랜시스, 조이 산타아고, 킴 딜, 데이비드 로버링. 1993년 격한 불화 끝에 해산되었지만, 2004년 재결성. 이후 2013년 킴 딜의 탈퇴 후 킴 섀턱을 베이시스트로 고용. 그리고 그해 다시 파즈 렌천틴으로 재교체했고 2016년 이후 정식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1990년대의 얼터너티브 록의 대유행에 일조했으며 펑크 록과 서프 록을 섞은 듯한 음악성이 특징. 아울러 "시끄럽다가 조용해지는" 다이나믹한 음조 및 곡 구조가 또한 특징. 픽시스의 작곡은 주로 블랙 프랜시스가 맡아 한다. 외계, 근친상간, 성서적 폭력 등 이색적 소재를 다루는 것이 그의 작곡의 특징. 정작 주무대였던 미국에서는 잠잠했던 데 반해 유럽에서는 꽤 인기를 모았다. 영향이 불어넣어진 밴드로는 너바나, 라디오헤드, 스매싱 펌킨스, 위저 등. 픽시스의 인기는 해산 이래로 쭉쭉 성장해서는 재결성될 당시의 월드 투어는 전석매진을 기록할 정도였다. 역사 형성기 (1986년) 기타리스트인 조이 산티아고와 작곡가인 블랙 프랜시스는 매사추세츠 대학교 애머스트를 다닐 때 서로 옆집에 살았다. 산티아고는 프랜시스가 음악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종종 함께 합주를 하곤 했다. 그러다가 프랜시스는 스페인어를 배우려고 푸에르토리코에 교환 학생으로 갔었고 6개월 후 돌아와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프랜시스와 산티아고는 1984년 보스턴 지역의 창고에서 함께 일했고 프랜시스는 어쿠스틱 기타로 곡을 만들며 전철에서 가사를 썼다. 이 둘은 1986년 1월 밴드를 만든다. 그리고 2주 후 프랜시스는 베이시스트를 찾는 광고를 내었는데 포크음악인 피터, 폴 앤 메리와 얼터너티브 록 밴드인 휘스커 뒤(Hüsker Dü) 둘 다를 좋아하는 사람을 구했다. 유일하게 광고에 응답했던 이가 킴 딜이었는데 오디션에 베이스 기타도 안가져왔을 뿐 아니라 아예 연주해 본 적도 없었다. 프랜시스가 쓴 곡들을 좋아했던 그녀는 일단 밴드에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베이스 기타를 구하고 나서 이들은 킴 딜의 아파트에서 리허설을 하기 시작했다. 킴 딜은 자신의 자매인 켈리 딜에게 보스턴으로 오는 비행기표를 사주며 밴드의 드러머로 오디션을 보라고 했다. 프랜시스는 좋다고 했지만 켈리는 드럼 연주에 그리 자신이 없었고 그보다는 킴이 만든 노래를 연주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결국 켈리는 나중에 킴이 만든 밴드 브리더스에 합류한다. 한편 킴의 남편은 결혼 피로연에서 만난 적이 있던 데이비드 러버링을 섭외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면서 밴드는 결성된다. 밴드의 이름은 산티아고가 사전에서 무작위로 뽑은 단어로 글자 조합의 모양새와 "장난꾸러기 작은 요정"이라는 뜻이 맘에 들어 정했다. 픽시스는 이후 1986년 중반쯤 연습 장소를 러버링 부모 집의 차고로 옮기고 보스턴 지역에서 술집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1987년) 픽시스는 쓰로잉 뮤지스(Throwing Muses)와 함께 공연을 하다가 제작자 개리 스미스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이 밴드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질 때까지 자신은 잠도 안자고 일하겠다고 했다. 곧 이들은 17곡의 데모를 만들었는데 테이프의 커버가 보라색이었기에 팬들은 이를 이라 부르고 있다. 프랜시스의 아버지가 1,000 달러를 투자했고 녹음 작업은 3일만에 마무리되었다. 지역에서 공연 섭외를 하던 켄 고스가 밴드의 매니저가 되었고 그는 데모를 인디 레코드 레이블인 4AD의 사장인 이보 와츠-러셀에게 건네 준다. 와츠-러셀은 이들이 너무 평범한 록앤롤 밴드라고 느꼈고 그냥 넘기려 했는데 여자 친구의 설득으로 계약을 맺게 된다. 4AD와 계약한 후 에서 뽑은 8곡으로 미니 LP 을 만들었고 이것이 픽시스의 첫 발매곡들이었다. 프랜시스는 푸에르토리코에 있던 경험을 바탕으로 "Vamos"와 "Isla de Encanta"를 썼는데 스페인어를 섞어서 그곳의 빈곤을 묘사했다. 그리고 에 담긴 종교적인 가사들은 그의 부모가 오순절 교회에서 거듭난 기독교인으로 신앙 생활을 하던 시절을 기반으로 했다. 음악 평론가인 해더 파레스는 이 곡들 가운데서 성적 좌절("I've Been Tired"), 근친 상간("Nimrod's Son"과 "The Holiday Song")과 같은 주제들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와 (1988–1989년) 에 이은 픽시스의 정규 앨범 는 2주만에 만들어져서 1988년 초에 발매되었다. 이 앨범으로 픽시스는 유럽에서 인기를 얻으며 와 에서 주는 "이 해의 앨범"에 뽑히게 된다. 미국에서도 평은 긍정적이었으나 그리 야단법석을 떨지는 않았는데 이런 기조는 픽시스의 활동 내내 대부분 유지된다. 이 앨범은 2005년이 되어서야 미국에서 골드 음반을 달성했다. 앨범 발매 이후 이들은 쓰로잉 뮤지스의 유럽 투어에 합세하여 런던에서부터 공연을 펼쳤고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유명해져서 미디어의 주목을 받으며 인기 몰이를 했다. 이 투어에서는 재미로 곡들을 알파벳 순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픽시스는 미국 유통을 위해 메이저 레코드 레이블인 엘렉트라와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이 시기에 영국 제작자인 길 노턴을 만나게 되고 그가 두 번째 정규 앨범 의 제작을 맡아 1988년 마지막 6주간에 걸쳐 녹음을 했는데 이전 앨범들의 거친 사운드에서 탈피하게 된다. 의 사운드는 더 깨끗해 졌는데 이는 제작자 노턴과 제작비로 받은 4만 달러가 큰 몫을 했다. 이는 이전 앨범인 의 네 배가 되는 금액이었다. 싱글 "Here Comes Your Man"은 그동안 픽시스의 음악과는 좀 다른 말쑥하고 팝 같은 곡이었다. 미국 얼터너티브 라디오에서는 "Monkey Gone to Heaven"을 많이 틀어주었는데 빌보드 모던 록 차트에서 10위에 올랐곡 영국에서는 100위 안에 진입했다. 와 같이 도 팬들과 평론가들 모두에게 환영받았다. 앨범으로 픽시스는 처음으로 빌보드 200 차트에 들어섰고 98위까지 올랐고 영국에서는 더욱 인기가 있어 앨범 차트 8위에 올랐다. 휴지기 (1989–1990년) 앨범 이후 킴 딜과 프랜시스 사이의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고 (예를 들어 공연 중 프랜시스는 기타를 킴에게 던지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킴이 공연을 거부하면서 거의 밴드에서 쫓겨날 뻔하기도 했다. 산티아고는 모조와의 인터뷰에서 킴에 대해 매우 고집이 세며 자신의 곡들을 앨범에 집어넣고 싶어했고 또 자신의 세계를 더 펼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고 했다. 결국 킴은 프랜시스가 보컬이며 밴드의 음악적 방향에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프랑크푸르트의 사건 이래 이 둘은 서로 거의 말을 섞지 않게 되었다. 이후 미국 투어에서 이들은 매우 지쳤고 멤버들 간의 다툼은 그치지 않았다. 뉴욕에서 투어 마지막 날 너무 지친 나머지 투어 쫑파티에도 참가하지 않고 곧이어 휴지기를 선언했다. 이 시기에 산티아고와 러버링은 휴가를 떠났고 프랜시스는 짧은 솔로 투어를 가지면서 개스비를 벌어 미국 횡단 여행을 했다. 딜은 쓰로잉 뮤지스의 탄야 도넬리와 퍼펙트 디재스터의 조세핀 윅스를 베이스로 하여 브리더스라는 새로운 밴드를 만들었고 이들의 데뷔 앨범 가 1990년 발매되었다. 와 (1990–1992년) 1990년 멤버들은 킴 딜이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러버링과 산티아고 프랜시스는 이미 이사를 했는데, 그곳에 녹음 스튜디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 앨범들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좀 있었고 블랙 프랜시스는 대부분의 곡들을 스튜디오에서 썼다. 싱글 "Velouria"와 "Dig for Fire" 등을 담은 앨범 는 미국에서 70위에,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영국에서는 3위까지 올라갔다. 픽시스는 투어를 진행하는 와중인 1991년 앨범을 출시했는데 이것이 1차 해체 이전 나온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같은 해 픽시스는 레너드 코언 헌정 앨범 에서 "I Can't Forget" 리메이크로 참여했다. 그리고 투어를 이어갔는데 유럽에서는 스타디움에서, 미국에서는 비교적 작은 공연장에서 진행되었다. 또한 U2의 1992년 투어에 참여하기도 했다. 멤버들 간의 갈등은 고조되었고 그 해 말 픽시스는 안식년을 갖기로 하고 각자의 프로젝트에 집중하게 된다. 해체와 솔로 프로젝트들 (1993-2003년) 1993년 초, 블랙 프랜시스는 BBC 라디오 5와 와 인터뷰하며 픽시스는 이제 끝났다고 했는데 다른 멤버들과의 상의는 없던 상태였다. 그는 당시 아무 해명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산티아고에게는 전화로 연락하고 딜과 러버링에게는 팩스로 통보했다. 해체 이후 멤버들은 각자의 프로젝트들을 시작했다. 블랙 프랜시스는 이름을 프랭크 블랙으로 바꾸고 몇 장의 솔로 앨범을 냈다. 여기에는 플랭크 블랙 앤드 더 캐톨릭스의 앨범들도 포함된다. 킴 딜은 이전에 시작한 프로젝트인 브리더스로 돌아와 1993년 히트곡인 "Cannonball"이 담긴 플래티넘 앨범 를 만들었고 이후 수년에 걸쳐 몇 장의 앨범을 더 냈다. 또한 앰프스라는 밴드도 잠깐 하면서 한 장의 앨범을 냈다. 산티아고는 프랭크 블랙의 솔로 앨범들 담긴 다수의 곡들에서 리드 기타를 연주했고 그 외에도 여러 아티스트들의 작업에 참여했다. TV 드라마인 음악이나 영화 의 주제가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아내 린다 말라리와 함께 마티니스라는 이름으로 2004년 이란 앨범을 냈으며 같은 해 소설가이자 음악가인 찰스 더글라스의 앨범 에 리드 기타로 참여했다. 한편 러버링은 마술사로 변신하여 "과학적 현상주의"라고 자신이 명명한 스타일의 마술들을 선보였다. 그는 잠시 마티니스에도 합류하였으며 크랙커라는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기도 했다. 4AD와 엘렉트라 레코드는 계속해서 픽시스의 음반을 출시했는데 베스트 앨범인 (1997년), 필 세션 모음집인 (1998년)과 를 냈고 2002년에는 17곡 짜리 최초의 데모 테이프가 이란 제목의 EP로 출시되었다. 블랙도 위의 레이블들을 통해 솔로 앨범과 캐톨릭스와의 앨범들을 출시했다. 재결합 (2003-2012년) 픽시스 해체 이후 블랙은 재결합에 대한 소문을 부정해 왔으나 캐톨릭스와 공연할 때면 픽시스의 곡들을 다수 포함시키곤 했으며 산티아고와도 그의 솔로 작업들에 참여해 왔고 러버링의 마술쇼를 자신의 공연 오프닝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그러다 2003년, 멤버들 간에 통화들이 있었고 조용히 리허설을 시작하면서 조만간 재결합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2004년 2월에 투어 계획이 발표되었고 티켓들은 그야말로 수 분 내에 매진되었다. 픽시스의 재결합 공연은 2004년 4월 13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파인 라인 뮤직 카페에서 문을 열었다. 이어 미국과 캐나다에서 워밍업 투어를 가진 이후 2004년 대부분을 브라질, 유럽, 일본, 미국 투어로 보냈다. 2004년 재결합 투어는 1천4백만 달러 어치의 티켓을 판매했다. 2004년 6월, 픽시스는 신곡 "Bam Thwok"을 아이튠즈를 통해 독점 발매했고 이는 영국 공식 다운로드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4AD는 베스트 모음집 와 함께 DVD를 출시했다. 2005년 픽시스는 롤라팔루자와 뉴포트 포크 페스티발 등에 참여하며 2006년과 2007년에 걸쳐 계속 공연을 벌이고 처음으로 호주에서도 공연을 가졌다. 프랜시스는 새 앨범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킴 딜이 주저하면서 아마 힘들 수도 있다고 했다. 앨범 20주년을 맞아 픽시스는 앨범 전곡과 함께 B-사이드 곡들을 연주하며 2009년 10월 투어를 개시했다. 유럽에서 시작된 투어는 미국에서 이어졌고 이후 2010년에 남미, 호주, 뉴질랜드, 유럽 각국을 거쳐 다시 북미에서 마감되었다. 킴 딜의 탈퇴와 (2013-2015년) 2013년 6월 14일 픽시스는 킴 딜이 밴드를 떠났다고 발표했다. 2013년 7월 픽시슨는 킴 딜의 자리에 머프스와 판도라스의 기타리스트이자 보컬인 킴 샤턱이 합류하여 2013년 유럽 투어를 함께 한다고 발표했다. 9월에는 새로운 곡들을 담은 EP 이 출시되었고 11월에는 샤턱이 밴드로부터 해고되었다고 밝혔고 12월에는 2014년 투어를 위해 엔트랜스 밴드와 퍼펙트 서클의 베이시스트인 파스 렌찬틴이 합류한다고 발표했다. 2014년 1월, 두 번째 EP인 를 통해 더 많은 신곡들을 선보였고 싱글 "Blue Eyed Hexe"가 라디오 전파를 탔다. 그리고 과 가 3월에 나왔다. 2014년 4월, 세 장의 EP는 라는 제목을 가지고 LP 포맷의 하나의 앨범으로 출시되었다. 이는 20년만에 나온 픽시스의 앨범이다. 2015년 픽시스는 로버트 플랜트의 북미 투어에 참여했다. 와 (2016–2020년) 2016년 7월, 픽시스는 파스 렌찬틴이 정식 멤버가 되었다고 발표하며 이어 여섯 번째 앨범 를 발표했으며 2019년에 일곱 번째 앨범 가 나왔다. 2022년 2월 블랙 프랜시스는 다음 앨범을 위해 40곡을 써놓았다고 했고 3월에 싱글 을 발표했다. 음악 스타일 픽시스는 서프 록과 펑크 록의 요소들을 도입하였고 특히 강약의 대비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매거진은 "서프 음악과 스투지스의 만남으로 중간에 곡을 멈추거나 조요함과 시끄러움을 잘 조합했다"고 평했다. 또 이들의 음악은 "서프 음악과 펑크 록의 비정통적 결합으로... 블랙의 곤두선 듯한 가사와 쭈뼛거리는 고양이 소리같은 보컬, 킴 딜의 속삭이는 듯한 하모니와 벌처럼 쏘는 베이스 라인, 조이 산티아고의 섬세한 기타, 데이비드 러버링의 지속적인 울컥거림의 드럼으로 특징된다"고 묘사되기도 했다. 이들의 음악은 극단적인 강약 대비로 특징지어지는데 이에 대해 프랜시스는 1991년에 "이는 록 음악의 두 가지 기본 요소다... 꿈결 같은 면과 때려부수는 면. 땀범벅이 되거나 편안하게 기대 앉은 쿨한 요소 둘 뿐이다. 우리는 강약을 표현하려 했는데 사실상 이는 일종의 바보들의 강약이다. 그것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없다. 우리는 시끄럽거나 조용하게만 연주할 수 있다. 단지 그뿐이다"라고 했다. 영향 픽시스는 다양한 아티스트와 장르에서 영향을 받았다. 각 멤버들의 음악적 배경도 다양하다. 픽시스를 위한 곡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할 당시 프랜시스는 휘스커 뒤, 캡틴 비프하트, 이기 팝의 노래만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앨범을 만들 즈음에는 R.E.M.의 앨범 를 엄청 많이 들었는데 그는 이 앨범이 자신의 작곡에 있어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앨범 제작 당시에는 비틀즈의 을 많이 들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압축된 작곡 스타일의 모델로 버디 홀리를 들었다. 그는 16살이 되어서야 펑크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주로 60년대 음악들과 종교 음악, 에머슨, 레이크 & 파머 ... 토킹 헤즈, 등등이다. 산티아고는 블랙 플래그을 비롯한 70-80년대 펑크 음악을 즐겨 들었드며 그 외에 데이비드 보위와 티렉스도 좋아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기타리스트로는 지미 헨드릭스, 레스 폴, 웨스 몽고메리, 로 리드, 조지 해리슨 등이 있다. 킴 딜의 음악적 배경은 포크 음악과 컨트리 음악이었다. 십대 시절 자매와 함께 컨트리-포크 밴드를 만들기도 했고 에벌리 브라더스나 행크 윌리엄스의 곡들을 불렀다. 그 외에 킴 딜은 XTC, 갱 오브 포, 엘비스 코스텔로의 음악을 들었다. 러버링은 밴드 러시의 팬이다. 픽시스에게 영향을 준 것들 중에는 영화도 있다. 프랜시스는 초현실주의적 영화인 와 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덧붙여 그는 초현실주의 소설을 읽을 만큼 인내심은 없지만 영화는 그보다는 보기가 쉽다고 했다. 작곡과 보컬 대부분의 픽시스의 곡들은 블랙 프랜시스가 쓰고 노래했다. 평론가인 스티븐 토마스 얼와인은 프랜시스의 곡에 대해 "우주, 종교, 섹스, 신체 훼손, 대중 문화에 대한 괴상한 조각들"이라고 표현했다. 의 "Dead"와 "Gouge Away" 같은 곡들은 성경의 폭력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들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고 나는 그들에게 사로잡혀 있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또한 프랜시스는 의 수록곡인 "Caribou"는 환생에 관한 것이라고 했고 앨범의 다수의 곡들에서는 외계인에 대한 내용들이 있다. 킴 딜은 에 담긴 곡 "Silver"를 프랜시스와 함께 썼고 하모니와 보컬을 번갈아 불렀다. 의 "Gigantic"도 그렇다. 이 곡은 존 머피 부인이 쓴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당시 그녀가 결혼한 상태이기도 했고 일종의 페미니스트 농담이었다고 한다. 한편 2004년에 나왔던 디지털 싱글 "Bam Thwok"은 킴 딜이 혼자 썼다. 그녀가 보컬을 맡았던 곡으로는 "Into the White"과 닐 영의 곡을 리메이크한 "Winterlong"이었는데 둘 다 B-사이드 곡이었다. 러버링은 의 "La La Love You"와 B-사이드 곡인 "Make Believe"를 불렀다. 음악적 유산 픽시스의 첫 앨범 는 골드 레코드를, 은 백만장 이상을 판매하여 플래티넘을 받았고 1990년대에 걸쳐 특히 다수의 얼터너티브 록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의 제작을 맡았던 개리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앨범들을 구입한 이들이 많지는 않지만 샀던 이들은 모두 밴드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 생각에는 픽시스도 그렇다. 이들의 비밀 무기는 그리 비밀이라고 할 수 없었고 얼마 안 있어 모든 종류의 밴드들이 대비적인 강약을 차용했고 "Smells Like Teen Spirit"이 차트를 뚫고 올라가면서 이는 일종의 새로운 팝 공식이 되었다. 너바나의 멤버들도 그 곡은 마치 픽시스의 노래와 같다고 했을 정도였다.사운드 면에서 픽시스는 극단적인 강약과 스톱-스타트 타이밍을 얼터너티브 록에 불어넣었다. 픽시스의 곡들은 조용하고 절제된 구절들과 폭발적이고 울부짖는 코러스 구성으로 특징지어진다. 픽시스의 팬이거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이들 중에는 데이비드 보위, 매트 노베스키, 라디오헤드, PJ 하비, U2, 너바나, 스트록스, 앨리스 인 체인스, 위저, 부시, 아케이드 파이어, 페이브먼트, 에버클리어, 킹스 오브 리언, 매튜 굿 등이 있다. U2의 보노는 픽시스에 대해 "미국의 위대한 밴드들 중 하나"라고 했고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는 픽시스가 "내 삶을 바꾸었다"고 했다. 프랜시스와 산티아고가 대학생 시절 영향을 받았다는 보위는 "픽시스가 80년대 전반에 걸쳐 가장 설득력있는 음악을 만들었다"고 평했다. 커트 코베인이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이 픽시스의 스타일을 의식적으로 따라했다고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994년 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최고의 팝송을 쓰려고 했고 사실 기본적으로 픽시스를 베끼다시피 했다. 그것은 인정해야 한다 (웃음). 내가 픽시스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강한 유대감을 느꼈고 내가 그 밴드에 속했어야만 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최소한 픽시스 커버 밴드에도 들어가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부드럽고 조용하다가 시끄럽고 강력한 이들의 강약 스타일을 차용했다"고 했다. 코베인은 가 가장 중요한 음악적 영향력을 준 앨범 중 하나라고 했고 특히 자연스럽고 강력한 드럼 사운드에 감명을 받았는데 이는 스티브 알비니에게 공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알비니는 이후 너버나의 1993년 앨범 에 코베인의 요청으로 제작자로 참여하게 된다. 음반 목록 구성원 현 멤버 블랙 프랜시스 (Black Francis) – 보컬, 리듬 기타, 어쿠스틱 기타 (1986–93년, 2004년-현재) 데이비드 러버링 (David Lovering) – 드럼, 퍼커션, 백보컬 (1986–93년, 2004년-현재) 조이 산티아고 (Joey Santiago) – 리드 기타, 백보컬 (1986–93년, 2004년-현재) 파즈 렌천틴 (Paz Lenchantin) – 베이스, 바이올린, 보컬 (2014년-현재) 전 멤버 킴 딜 (Kim Deal) – 베이스, 보컬 (1986–93년, 2004–13년) 킴 섀턱 (Kim Shattuck) – 베이스, 보컬 (2013년; 2019년 사망) 외부 링크 픽시스 공식 웹사이트 픽시스 - Last.fm 각주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보스턴 출신 음악 그룹 4인조 음악 그룹 1985년 결성된 음악 그룹 1993년 해체된 음악 그룹 1986년 결성된 음악 그룹 2004년 재결성된 음악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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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D%8B%B8%EB%A6%AC%ED%8B%B0
유틸리티
유틸리티()는 다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제학에서 효용 유틸리티 소프트웨어 야구에서 내야 전 포지션을 가리킨다. 야구에서 외야 전 포지션을 가리킨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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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81%EB%82%A8%EA%B3%A0%EB%93%B1%ED%95%99%EA%B5%90
영남고등학교
영남고등학교(嶺南高等學校)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35년 4월 1일 : 대구 실수 학원 설립 1944년 4월 1일 : 대구 농공 실무 학원으로 개편 1951년 8월 31일 : 영남고등학교 설립 인가, 초대 교장 주덕근 선생 취임 1990년 12월 20일 : 달서구 상인동 70번지로 이전 2006년 9월 14일 : 제9대 재단 이사장 주철은 선생 취임 2009년 6월 19일 : 우정학사(기숙사) 신축 2010년 3월 2일 : 잔디구장 완공 2017년 2월 2일 : 제66회 졸업식 거행 2021년 9월 1일 : 제12대 교장 주원순 선생 취임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영남고등학교 홈페이지 대구 달서구의 고등학교 대구광역시의 사립 고등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대한민국의 남자 고등학교 1935년 개교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골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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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XML-RPC
XML-RPC
XML-RPC란, RPC 프로토콜의 일종으로서, 인코딩 형식에서는 XML을 채택하고, 전송 방식에서는 HTTP 프로토콜을 사용하고 있다. XML-RPC는 매우 단순한 규약으로서, 작은 데이터 형식이나 명령을 정의하는 정도로만 사용하고 있으며, 사양서도 A4 2매 정도로 꽤나 단순한 편이다. 이건 대다수의 RPC 프로토콜 시스템이 수많은 규격을 규정하고, 실제 사용할 때에도 엄청난 양의 코딩을 요구하는 것과 비교하면 눈에 띄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프로토콜은 1998년 데이브 위너(Dave Winer)의 UserLand Software Ltd.가 마이크로소프트와 공동으로 개발하였다. 이후에 이 프로토콜에 좀 더 부가적인 기능을 추가한 SOAP 프로토콜이 개발되었으나, 보통 SOAP 보다 단순하고 사용하기 쉬운 XML-RPC를 더욱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RPC 계열 프로토콜로는 JSON-RPC 프로토콜이 존재한다. 자료형 사용 예 XML-RPC Call 형식의 예제 examples.getStateName 40 XML-RPC Response 형식의 예제 South Dakota XML-RPC Fault 형식의 예제 faultCode 4 faultString Too many parameters. 관련 항목 원격 프로시저 호출 JSON-RPC REST 웹 서비스 외부 링크 XML-RPC Homepage Forum Tutorials Technology Reports Citations from CiteSeer Jabber-RPC Jabber 프로토콜 상에서의 XML-RPC pyJabberXMLRPC : Python용 (Jabber 상에서의 XML-RPC) Secure Apache XML-RPC RemObjects SDK SOAP 등을 위한 XML-RPC RealThinClient SDK: Delphi/C++용 XML-RPC in Flash ActionScript 2.0 XML-RPC.NET: .NET용 Redstone XML-PRC Library Java용 오픈소스 라이브러리 XML 기반 표준 분산 컴퓨팅 인터넷 프로토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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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9C%EC%84%B1%20%EA%B9%80%EC%94%A8
개성 김씨
개성 김씨(開城 金氏)는 황해도 개성(開城)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이다. 혹칭 개령 김씨(開寧 金氏)라 한다. 역사 시조 김용주(金龍珠)는 경순왕의 후예로 1054년(고려 문종 8) 문과에 급제하고 여진족 정벌에 공을 세워 추충공신에 책록되고, 개성부사 평장사에 오르고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시조에 대해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 등의 문헌에는 시조가 정신공 김준(金晙)으로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부·예부·이부상서를 지내고 고려 예종 때 여진을 평정한 공으로 평장사에 올랐으며 시호가 정신공(貞愼公)이라 한다. 동성 동본에 대하여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 개성 김씨 시조는 신라 김알지의 후예로 고려 시대 장군을 지낸 김현선(金玄繕)이라 한다. 『개성김씨 세계보』: 고려의 인물로 김현기(金玄器)·김현덕(金玄德)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현선(金玄繕)은 그들과 같은 형제로 개성 김씨에서 개령 김씨로 분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씨 분관록》: 개성 김씨를 혹칭 개령 김씨라 하며 시조가 김현선(金玄善) 또는 김준(金晙)이라 한다 《증보문헌비고》: 개성 김씨와 개령 김씨를 별도 성씨라 하고, 개성 김씨 시조는 김준(金晙)이며, 개령 김씨 시조는 김현선(金玄善)이라 한다. 분적 설성 김씨(雪城 金氏) : 시조 김지선(金之宣)은 고려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정신공 김준(金晙)이다. 발상지에 대하여 아래 발상지(강원도 홍천군 남면)에 관한 내용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경순왕계 개성김씨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며, 고려 태조 왕건의 후손들이라는 개성 왕씨의 일부가 조선 이씨 왕조가 펼친 왕씨 말살정책 속에 살아남기 위하여 성을 김씨로 고쳤다는 설로 이에 대한 고증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일반적인 개성김씨는 개성왕씨와 무관하며 발상지는 본관과 동일한 개성(충의공 김용주가 개성군으로 봉해짐)이다. 개성 왕씨 후손이라 불리는 개성 김씨는 600여년 전 고려가 망하고, 이씨 왕조가 들어서면서 고려의 왕족인 왕씨 일가를 섬멸시키는 과정에 송도(개성)에서 강원도 홍천군 남면 시동리 삼은 마을로 피난하여 생활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고개너머 시동 4리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는데 너무 광활하고, 방어 할 수 있는 은신처와 망을 볼 수 있는 산이 없어서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여져 있고 협소하여 방어도 쉽고 뒤에 뾰족한 산이 있어 사주 경계도 가능한 삼은 지역에 정착했다고 한다. 삼은 마을이란 동은(동쪽으로 잠깐 거쳐간다, 은신했다 가다), 서은, 하은을 말하는데 동네에선 동거른다리, 서거른다리, 아랫거른다리 라고 보통 부르고 있다. 망덕산은 동은 마을 뒷산에 아주 뾰족하게 생긴 산인데 이곳에 올라가 노심초사하여 항상 망을 보며 살았고 매월 1일과 15일에는 개성을 향해 망향제를 지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산을 고려가 망했으니 패망산이라고 했다가 개성이 그리워서 개성에 있는 산 이름인 덕물산이라고 했다가 어느 날 소승이 와서 자고 가면서 '망덕산이라고 하십시오' 그 후부터 지금까지 망덕산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고려 왕족의 후예이기 때문에 왕씨라고 하면 죽으니까 본관을 개성에서 왔기 때문에 개성 김씨로 만들어놓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 주민들은 개성 김씨 또는 왕 김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일대의 땅과 산이 거의 개성 김씨의 소유였었는데 이들이 다 망하여 외지로 가고 일부 산에 묘소만 많이 남아 있는데 개성 김씨의 종손 김수혁(경기도 청운명 도원리 풀무산)이 경향 각지의 종친들의 의견을 모아 조상들의 위패 봉안실을 망덕산 입구에 돔식으로 굴을 파서 15평 남짓한 곳에 "개성 김씨 위패 봉안실"이라고 써 붙여 놓은 시설을 하였다. 그리고 가을에 시제를 모시고 있는데, 이곳이 개성 김씨의 발상지라고 한다. 본관 개성(開城)은 고려의 수도였으며, 현재 황해북도 중서부에 있는 개성시이다. 삼한시대 대방의 옛터였던 개성은 고구려 때 부소갑으로 불렸으며, 신라 때는 송악군으로 개칭되었다. 919년(태조 2) 고려 태조가 송악지역에 도읍을 정한 다음 개성군을 합병해 개주라고 했으며, 신라를 복속한 후 국도가 되었다.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개성유후사를 설치하였다가 1438년(세종 20) 개성부로 고쳤다. 1914년 송도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30년 개성부로 개칭되었다. 광복 후 1949년 개성시가 되었다가, 1953년 7월 휴전협정으로 인해 북한지역이 되었다. 인물 고려 김준(金晙): 여진 평정, 이부상서, 평장사, 정신공 김지선(金之宣): 보문각 대제학 김지경(金之慶): 상서 김원(金源): 상장군, 문원공 김남보(金南寶): 판도판서, 조선조 영의정 증직 김남의(金南義): 사복경 조선 김자양(金自陽): 창원부사 김황(金滉): 문과 급제, 군수, 중봉 조헌 스승, 임진왜란 거병 김유(金濡): 문과 급제, 임진왜란 거병 김지(金漬): 문과 급제, 공주목사, 임진왜란 의병장 김절(金節): 임진왜란 의사(義士), 금산전투 순절 김여량(金汝亮): 1633년(인조 11) 문과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 음성현감, 김제군수, 창원부사, 승지 등을 역임 김응환(金應煥): 조선 후기 화가 김득신(金得臣): 조선 후기 화가 김석신(金碩臣): 조선 후기 화가 김재근 (1920~1999) - 평안남도 용강,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1937), 경성제국대학 예과(1941),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1943), 미국 MIT Visiting Fellow(1954-1955), 서울대학교 조선공학 박사(1958), 서울대학교 조선공학과 교수(1969~1985) 같이 보기 경주 김씨 의성 김씨 광주 김씨 고령 김씨 설성 김씨 각주 개성 김씨 김씨 개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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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가의 기법
《푸가의 기법 바흐 작품 번호 1080》()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작곡한 14곡의 푸가와 4곡의 카논으로 된 곡집이다. 전곡은 하나의 기본주제와 그 변형에 기초해서 만들어지며, 대위법 기술의 총결산이라고도 할 만한 작품이다. 작곡자의 안질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최종 푸가인 제239마디에서 중단되고 미완성인 채로 후세에 전해졌다. 대부분의 곡에는 악기의 지정이 없고, 매우 추상적이며 난해한 음악이다. 일견 대위법기술의 교과서처럼 생각되지만, 그 밑바닥에는 심원한 예술성이 깔려 있어, 바흐 최고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작곡 후 180년을 경과한 1927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외부 링크 각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 대위법 미완성 음악 작품 타인이 완성한 음악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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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전송 프로토콜
파일 전송 프로토콜(File Transfer Protocol, FTP)은 TCP/IP 프로토콜을 가지고 서버와 클라이언트 사이의 파일 전송을 하기 위한 프로토콜이다. 파일 전송 프로토콜은 TCP/IP 프로토콜 테이블의 응용 계층에 속하며, 역사는 오래 되었지만 지금도 인터넷에서 자주 사용된다. 최초의 FTP 클라이언트 애플리케이션들은 운영 체제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추기 이전에 개발된 명령 줄 프로그램이었으며, 대부분의 윈도우, 유닉스, 리눅스 운영 체제에 현재도 기본 포함되어 있다. 그 뒤로 수많은 FTP 클라이언트 및 오토메이션 유틸리티들이 데스크톱, 서버, 모바일 장치, 하드웨어용으로 개발되고 있으며, FTP는 웹 페이지 편집기와 같은 생산성 응용 프로그램들에 통합되고 있다. FTP 서버의 역사 원래의 FTP에 대한 사양은 Abhay Bhushan이 작성하였으며, 1971년 4월 16일 RFC 114로 게시되었다. 1980년까지 FTP는 TCP/IP의 전신인 NCP 위에 실행되었다. 이 프로토콜은 나중에 TCP/IP 버전인 RFC 765 (1980년 6월), 그리고 현재의 사양인 RFC 959 (1985년 10월)으로 대체되었다. 제안된 일부 표준들은 RFC 959를 개정하였는데, 이를테면 RFC 1579 (1994년 2월)는 방화벽 친화 FTP (수동 모드)를 활성화하며, RFC 2228 (1997년 6월)은 보안 확장을 제안하며, RFC 2428 (1998년 9월)은 IPv6 지원을 추가하고 새로운 종류의 수동 모드를 정의한다. 프로토콜 개요 HTTP와는 달리 연결의 종류는 2가지가 있다: 명령 연결: 먼저 제어 포트인 서버 21번 포트로 사용자 인증, 명령을 위한 연결이 만들어지고, 여기를 통해 클라이언트에서 지시하는 명령어가 전달된다. 데이터 전송용 연결: 실제의 파일 전송은 필요할 때 새로운 연결이 만들어진다. 능동 모드(액티브 모드): 서버가 자신의 데이터 포트인 20번 포트에서부터 클라이언트가 지정한 지점으로의 데이터 연결을 만든다. 클라이언트가 지정하는 포트는 주로 1023 보다 큰 번호가 매겨진 포트이다. 클라이언트가 방화벽, NAT(IP 마스킹) 등을 사용하는 환경일 때에 잘 동작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때 수동 모드를 이용하면 된다. 수동 모드(패시브 모드): 클라이언트가 서버가 지정한 서버 포트로 연결할 수 있게 한다. 이 때에는 보통 양쪽 포트 모두 1023 보다 큰 포트를 사용한다. 어느 모드에서도 2개의 연결을 만드는 점은 다르지 않다. 하지만 FTP 포트를 변경하게 되고 방화벽이 있는 경우, 방화벽 Inspection 모드 설정에 따라 FTP 통신은 정상적이지만, get 명령이나 ls 명령 등 FTP-DATA포트를 이용한 통신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보안 FTP는 보안 프로토콜로 계획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보안 취약점이 존재한다. 1999년 5월에, RFC 2577 저자들은 다음의 문제에 대한 취약점을 나열하였다: 무차별 대입 공격 FTP 바운스 어택 패킷 가로채기 포트 훔치기 (다음에 열릴 포트를 추측하여 적절한 연결을 빼앗는 것) 스푸핑 공격 사용자 이름 열거 파일 전송 프로토콜은 서버의 파일을 바꾸거나 지울 수 있기 때문에 전송하기 앞서 사용자 이름과 암호를 묻는 인증 과정이 필요하다. 보통 FTP에서는 암호가 암호화되지 않아 위험하기 때문에 원 타임(한 번만 묻는) 암호를 이용한 인증을 이용하며, 아니면 보안을 더욱 철저하게 하려면 아예 SFTP, SCP 등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파일을 전송한다. 파생 FTPS FTPS는 FTP 표준의 확장으로, 클라이언트가 FTP 세션이 암호화되도록 요청할 수 있게한다. SSH 파일 전송 프로토콜 SSH 파일 전송 프로토콜(SFTP)은 파일을 전송하고 사용자를 위한 비슷한 명령을 갖추고 있으나, 시큐어 셸 프로토콜(SSH)을 사용하여 파일을 전송한다. 트리비얼 파일 전송 프로토콜 심플 파일 전송 프로토콜 심플 파일 전송 프로토콜(Simple File Transfer Protocol, SFTP)은 RFC 913에 의해 정의되어 있다. FTP 명령어 같이 보기 SFTP FTPS TCP 래퍼 참고 문헌 RFC 697 – CWD Command of FTP. July 1975. RFC 959 – (Standard) File Transfer Protocol (FTP). J. Postel, J. Reynolds. October 1985. RFC 1579 – (Informational) Firewall-Friendly FTP. February 1994. RFC 1635 – (Informational) How to Use Anonymous FTP. May 1994. RFC 1639 – FTP Operation Over Big Address Records (FOOBAR). June 1994. RFC 1738 – Uniform Resource Locators (URL). December 1994. RFC 2228 – (Proposed Standard) FTP Security Extensions. October 1997. RFC 2389 – (Proposed Standard) Feature negotiation mechanism for the File Transfer Protocol. August 1998. RFC 2428 – (Proposed Standard) Extensions for IPv6, NAT, and Extended passive mode. September 1998. RFC 2577 – (Informational) FTP Security Considerations. May 1999. RFC 2640 – (Proposed Standard) Internationalization of the File Transfer Protocol. July 1999. RFC 3659 – (Proposed Standard) Extensions to FTP. P. Hethmon. March 2007. RFC 5797 – (Proposed Standard) FTP Command and Extension Registry. March 2010. RFC 7151 - (Proposed Standard) File Transfer Protocol HOST Command for Virtual Hosts. March 2014. IANA FTP Commands and Extensions registry – The official registry of FTP Commands and Extensions 각주 외부 링크 FTP Server Test (Online) FileZilla Server (Windows) Pure-FTPd (Unix) VsFTPd (Unix) ProFTPd (Unix) 인터넷 표준 인터넷 프로토콜 인터넷의 역사 OS/2 명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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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B2%A0%EB%AF%BC%20%28%EC%9C%A0%EB%8F%84%20%EC%84%A0%EC%88%98%29
박철민 (유도 선수)
박철민(朴哲民, 1982년 9월 21일 -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도 선수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남자 유도 66kg이하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1982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자 유도 선수 올림픽 유도 메달리스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2008년 하계 올림픽 유도 참가 선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올림픽 유도 참가 선수 2008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 2006년 아시안 게임 유도 참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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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여자고등학교
원화여자고등학교(源花女子高等學校)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에 위치한 사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55년 1월 14일 : 재단법인 조양회관 설립 인가(문보 제2879호) 1955년 1월 14일 : 초대 법인 이사장 동암 서상일 선생 취임 1955년 2월 25일 : 학교 설립 인가(6학급, 문보 제446호) 1955년 2월 25일 : 이응창 선생 초대 교장 취임 1956년 2월 7일 : 『원화』교지 제1호 발행(창간호) 1956년 2월 28일 : 제1회 졸업식(졸업생 수 22명) 1957년 3월 31일 : 대신동 교사 별관 2층 6개 교실 신축 1962년 3월 17일 : 학급 증설 인가(15학급 주간 12학급, 야간 3학급) 1980년 7월 24일 : 원화중․고 학교법인 통합(조양회관) 1981년 2월 1일 : 학교 위치 변경 인가(성당동 644번지) 1981년 3월 1일 : 성당동 현 교사로 학교 이전 1982년 9월 21일 : 학급 감축 인가(45학급, 2부 폐지) 1982년 10월 15일 : 동암기념관 준공 개관 1985년 10월 15일 : 창주 이응창 선생 시비 제막 1988년 10월 14일 : 동암 서상일 선생 동상 제막 1999년 6월 28일 : 학교 급식 조리시설 완공 2004년 3월 29일 : 운동장 우레탄 트랙 및 잔디 구장 완공 2012년 12월 17일 : ‘갤러리 조양’ 개관 2013년 1월 31일 : 급식시설 현대화 사업 공사 준공(3층, 연면적 1,699.25m2) 2020년 9월 2일 : '도서관 현대화 시설 및 미래교육공간(나리터)' 준공 2022년 1월 19일 : 이욱 선생 학교법인 조양회관 제8대 이사장 취임 2022년 2월 10일 : 제67회 졸업식 거행(졸업생 수 319명, 총 졸업생 수 36,065명) 2022년 3월 1일 : 이영세 선생 제7대 교장 취임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원화여자고등학교 홈페이지 대구광역시의 사립 고등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대구 달서구의 고등학교 대한민국의 여자 고등학교 1955년 개교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골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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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8%8C%EB%A1%9C%EB%8D%94%EB%B2%88%EB%93%9C
브로더번드
브로더번드 소프트웨어(Brøderbund Software)는 미국의 컴퓨터 게임과 교육용 소프트웨어, 그리고 프린트 샵의 개발 회사였다. 교육용 게임인 카멘 센디에고를 창안했다. 미국 오레건주 유진에서 설립되었고, 캘리포니아 산 라파엘로 옮겨졌고, 또 캘리포니아 노바토로 옮겨졌다. 1998년 브로더번드는 러닝 컴패니에 매각되었다. 대표적인 작품 촙 리프터 카멘 센디에고 시리즈 캡틴 굿나잇 로드런너 Myth 프린트 샵 분노의 날개 (Wings of Fury) 페르시아의 왕자 게이파티 가라테카 (Karateka) 초프리프터 회사 이름 brøderbund라는 말은 원래 없는 말이고, 형제애라는 영어단어 band of brothers와 비슷한 뜻을 의도했다. 스웨덴어나 덴마크어에 있는 ø를 넣은 이유는 컴퓨터 코딩시 숫자 0을 ø처럼 쓰기 때문이었다. 사원들은 브루더번드라고 처음에 불렀지만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브로더번드라고 발음했다. 외부 링크 공식 사이트 역사 Classicgaming.com 회사 소개 모비게임즈 프로필 미국의 비디오 게임 기업 비디오 게임 개발사 비디오 게임 배급사 없어진 비디오 게임 기업 1980년 설립된 기업 1998년 해체된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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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전 나들목
북대전 나들목(N.Daejeon IC)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화암동, 관평동에 걸쳐 있는 호남고속도로지선의 7번, 그리고 서산영덕고속도로의 나들목이다. 이곳에서 정부대전청사와 엑스포과학공원, 대덕연구단지, 국립중앙과학관, 한국과학기술원, 한국기계연구원 등으로 갈 수 있으며, 인근에는 한국원자력연구원과 대덕연구개발특구가 있다. 명칭 1992년 나들목 건설 계획 당시에는 화암동 나들목이라는 가칭으로 계획되었으며 1993년 개통할 때는 대전 엑스포 행사장으로 바로 진입하는 관문 역할을 하기 위해 이 나들목이 개통되었기 때문에 엑스포 나들목이라는 명칭이 병기된 방식으로 개통되었다. 1993년 11월 7일 대전 엑스포가 끝난 이후 2001년 4월에 병기 명칭이 대덕밸리로 변경되었고, 2006년에는 대덕테크노밸리(대덕특구)를 홍보하기 위해 병기 명칭이 현재의 대덕특구로 변경되어 요금소에 표기하고 있다. 연혁 1992년 3월 16일 : 화암동 나들목 건설로 인해 대전직할시 유성구 화암동 ~ 용산동 1.4km 구간 도로구역 변경, 유성 나들목 요금소 차선 확장으로 인해 대전직할시 유성구 장대동 ~ 노은동 260m 구간 도로구역 변경 1993년 7월 20일 : 엑스포(북대전) 나들목으로 개통 2001년 4월 : 병기 명칭을 대덕밸리로 변경 2001년 8월 25일 : 호남고속도로지선의 나들목으로 변경 2006년 10월 : 병기 명칭을 대덕특구로 변경 구조물 정보 위치: 대전광역시 유성구 화암동, 관평동 영업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호남지선고속도로 51 (화암동) 접속하는 도로 대덕대로 (국가지원지방도 제32호선, 국가지원지방도 제57호선) 교통량 정보 각주 국가지원지방도 제32호선 국가지원지방도 제57호선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나들목 대전광역시의 도로 구조물 대전광역시의 교통 대전 유성구의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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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리그
아메리칸 리그()는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리그 중 하나이다. 1973년부터 지명타자제를 실시하고 있다. 다른 하나의 리그는 내셔널 리그이다. 현재까지도 연봉 상한제가 없다. 아메리칸 리그 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1901년 설립된 스포츠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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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귀옥
권귀옥( ~ )은 희극 배우 겸 성우로 활동했었던 대한민국의 배우 겸 도예가이다. 생애 1968년 연극배우 첫 데뷔 후 같은 해 1968년 MBC 공채 3기 성우 데뷔하였으며 2년 후 1970년 MBC 공채 2기 탤런트로써 본격적으로 TV 방송국에 발을 들였다. 2년 남짓을 탤런트로 들어와 연기를 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순발력과 위트감각을 보였으나, 1972년 6월 교통사고로 얼굴, 다리 등을 크게 다쳐 1년 동안 활동을 쉬었다. 병상에 있을 당시 코미디계의 대부로부터 희극배우를 권유받았고 코미디언으로 전향하였다. 성형수술만도 6차례 받은 뒤 재기하여 73년 10월 《웃으면 복이와요》에 출연하며, 이기동과 콤비를 이뤄 '땅딸이 이기동과 늘씬미녀 미스 권'으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165cm의 큰 키와 미모로 '한국의 루실 볼'로 불리기도 했다. 한창 인기 절정이던 1980년 7월, 결혼을 위해 모든 활동을 접고 미국행을 택했다. 1981년 첫번째 귀국하였으며 1985년, 두번째 일시 귀국하여 강석과 함께 《라디오 가요 퀴즈》를 진행했으며 1988년에도 일시 귀국하여 《코미디 극장》에 출연한 바 있다. 활동 휴지 기간 동안 패션 대리점을 경영하였고 지점토 사범증, 제과사 자격증을 딴 바 있다. 이혼 후 딸과 함께 돌아왔으며 1999년에 19년 만에 드라마에 출연하였다. 그 후, 아이들을 위한 사회운동가, 도예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학력 동래여자중학교 한양대학교 가정학과 경력 수양부모협회 후원회장 출연 드라마 《강변살자》(1970년, MBC) 《장희빈》(1971년, MBC) 《수사반장》 (1972~1973년, MBC) 《막내 며느리》 (1978년, MBC) - 첫째 며느리 역 《우주탐험대》 (1978년, MBC) 《하얀 민들레》 (1979년, MBC) - 진숙 역 《전원일기》(1981년, MBC) - 금동이 친엄마 역 일요베스트 《즐거운 여자》 (1999년, KBS2) - 평자 역 《여왕의 조건》 (2005년, SBS) - 오영순 역 《애정만만세》 (2011~2012, MBC) - 크리스탈 박과 골프치는 여자 역 《산 너머 남촌에는 2》 (2012년, KBS2) - 정은옥 역 영화 《아리송해》 (1979년) 예능 《쇼 반세기》 (1971년, MBC) 《웃으면 복이와요》 (1973~1976년, MBC) 《부부만세》 (1974~1975년, MBC) 《유쾌한 청백전》 (1974~1975년, MBC) 《코미디대행진》 (1975년, MBC) 《스타쇼》 (1975년, MBC) 《에야디야》 (1976년, MBC) 《이밤을 즐겁게》 (1976년, MBC) 《두더지대작전》 (1976년, MBC) 《비실이와 띨띨이》 (1977년, MBC) 라디오 《라디오 가요 열차》 (1977년, MBC) - 공동 DJ 《싱글벙글쇼》 (1978년, MBC) - 진행 《저녁의 희망가요》 (1980년, DBS) - 진행 《다시 듣고 싶은 노래》 (1980년, DBS) - 진행 《라디오 가요 퀴즈》 (1985년, MBC) - DJ 《가로수를 누비며》 (1985년, KBS) - DJ 수상 경력 1976년 MBC 코미디 부문 최우수 연기상 참고 사항 1978년, 탤런트협회에 재가입하고 드라마에 다시 출연하기 시작하였다. 1979년, 여자 코미디언 부문 조사에서 61%로 1위를 차지하였다. 각주 대한민국의 여자 라디오 배우 대한민국의 여자 희극인 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 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 대한민국의 도예가 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동래여자고등학교 동문 한양대학교 동문 1950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부산광역시 출신 배우 대한민국의 불교도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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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옥세틴
플루옥세틴(Fluoxetine)은 미국 일라이 릴리 앤드 컴퍼니가 개발하여, 프로작(Prozac)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계열의 항우울제이다. 화학 공식은 C17H18F3NO이다. 플루옥세틴은 우울증, 강박 장애, 폭식증, 공황장애, 월경 전 불쾌장애(PMDD)의 치료에 널리 사용된다. 역사 1970년 브라이언 몰리(Bryan Molly)와 로버트(Robert Rathbun)가 일라이 릴리 앤드 컴퍼니에서 발견을 시작했다 그 당시 항히스타민제 디펜히드라민은 항우울효과를 보여주었다 디펜히드라민과 닮은 구조 3-phenoxy-3-phenylpropylamine은 출발 물질인데 몰리는 이것의 유도체 몇 개를 합성했다. 이합성물의 심리적 테스트를 했는데 선택적 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억제제(이하 SNRI)인 니속세틴이 그것인데 최근에 이것은 생물실험에 널리 쓰인다. 그 뒤에 세로토닌재흡수억제제(이하 SSRI)도 개발하려던 가운데 일라이릴리의 데이비드 옹(david wong)이 이를 발견해냈다. 먼저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 다시테스트했다 이 테스트에서 종 서 홍(jong-sir horng)이 1972년 5월 플루옥세틴을 발견했다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이다. 옹은 1974년 첫 기사를 실었다 1년 뒤에 성분명 플루옥세틴 상품명 프로작으로 되었다. 1977년 2월 이 약을 만든 일라이릴리 컴퍼니는 FDA에 허가신청을 했다. 부작용 플루옥세틴의 흔한(1% 이상 빈발하는) 부작용은 메스꺼움, 두통, 불면증, 설사, 피로감이 있다. 2004년이 되면서 항우울제에 대한 수많은 소송과 수사가 진행되었고, 기자와 전문가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결국 FDA는 항우울제 제조업체에게 반드시 제품 설명서에 자살 성향 및 자살 충동에 대한 주의사항을 기재할 것을 법적으로 의무화시켰다. 특히 아동과 청소년에게 자살 성향 및 자살 충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2003년 영국 식품의약국은 미성년자에게 항우울제를 처방하는 것을 위법 행위로 규정해 의사들을 집중 단속했다.) 2007년이 되면서 식품의약국은 특히 18~24세 청년 복용자에게서 부작용이 발생할 확률이 가장 높다는 점을 강조했다. 2009년에는 나이와 무관하게 모든 환자들에게 자살 성향 및 자살 충동의 위험성을 거듭 강조했다. 주요 우울증은 조울증의 초기 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다. 통제된 시험을 통해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조울증의 소지가 있는 환자에게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항우울제를 투여할 경우, 조울증의 혼재성 삽화나 조증 증상이 촉발될 수 있다. 우울증을 보이는 환자들한테 항우울제를 투여시, 환자가 조울증 등 공존 질환에 대한 위험성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자살, 조울증(양극성 장애), 우울증 등 가족력이 포함된 공존 질환 여부를 선별하도록 의무화했다. 항우울제인 웰부트린(Wellbutrin) 에도 동일한 문구를 제품사용설명서에 넣도록 했다. 종류 물질 및 용도 특허 만료 이후, 국내 업체인 명인제약의 '푸록틴캡슐'을 비롯해서, 환인제약의 '폭세틴캡슐'이라는 제네릭 의약품으로 1998년에 출시되었으며, 세로운 제형으로 출시한 릴리의 '푸로작 확산정'과 국내 업체인 명인제약의 '푸록틴 확산정'의 경우, 물이나 음료에 바로 타서 간편하게 복용할 수 있다. 같이 보기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참조 외부 링크 항우울제의 부작용으로 자살 성향 및 자살 충동을 저지른 사례 항우울제 세계 보건 기구 필수 의약품 GABAA 양성 알로스테릭 조절자 니코틴 대항제 페놀 에터 식욕억제제 항경련제 5-HT2C 대항제 5-HT3 길항제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애브비의 제품 이차 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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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이화시
쑤이화(, )는 헤이룽장성에 위치해 있는 도시이고 하얼빈에서 100km 떨어져 있다. 역사 옛 이름은 북단림자(北團林子)였고 청의 1885년 11월 20일에 수화로 개칭했다. 독자적인 행정구역이 처음으로 설치된 것은 1956년 3월 6일의 쑤이화 전구(绥化専区)로, 헤이룽장성 직할인 쑤이화, 하이런, 왕쿠이, 베이안, 더두, 쑤이링, 톄리, 칭안, 후란, 란시, 바옌, 무란, 퉁허의 13현을 관할했고 행정 관서는 쑤이화 현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1958년에 쑤이화 전구가 폐지되어 쑤이화, 왕쿠이, 쑤이렁, 하이런, 칭안, 퉁허, 무란, 란시, 바옌의 9현은 쑹화장 전구(松花江専区)에, 베이안 현은 넌장 전구(嫩江専区), 후란 현은 하얼빈시에 각각 이관되었고 톄리 현은 칭안 현에, 더두 현은 베이안 현에 편입되었다. 1965년, 쑹화장 전서가 하얼빈 시에서 쑤이화 현 쑤이화 진으로 이전하면서 쑤이화 전서로 개칭되었고 안다 현이 설치되어 쑤이화, 쑤이링, 하이런, 칭안, 자오둥, 밍수이, 란시, 왕쿠이, 자오위안, 자오저우, 칭강, 톄리, 안다의 13현을 관할했다. 1967년 5월, 헤이룽장성 혁명 위원회는 쑤이화 전서를 쑤이화 지구 혁명위원회로 개편하기로 결정했고, 1970년 4월에 톄리 현이 이춘 지구로 이관되어 12현을 관할하게 되었다. 1978년 11월,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쑤이화 지구 혁명위원회는 쑤이화 지구 행정공서로 개편되었다. 1992년 12월 1일에는 자오저우, 자오위안이 다칭 시로 이관되었다. 1999년 12월 28일, 쑤이화 지구 및 현급시인 쑤이화 시(1982년, 쑤이화 현에서 승격)를 폐지하고 새로운 지급시인 쑤이화 시를 설치했고 옛 쑤이화 시 지구에는 베이린 구가 설치되었다. 경제 쑤이화의 GRDP는 2015년 1272억 2천만 위안이다. 석유화학, 직물, 기계 등이 중요 산업이다. 기후 인구 2000년의 국세 조사에서는 인구가 5,055,541명이고, 1인당 인구 밀도 당 143.58명/km2이다. 행정 구역 시할구 베이린 구(北林区) 현급시 안다 시(安达市) 자오둥 시(肇东市) 하이룬 시(海伦市) 현 왕쿠이 현(望奎县) 란시 현(兰西县) 칭강 현(青冈县) 칭안 현(庆安县) 밍수이 현(明水县) 쑤이링 현(绥棱县) 교통, 통신, 전력 교통 쑤이화는 성 전체의 중요 교통 중심지이자, 하얼빈 이북의 지역 중심도시로, 하얼빈에서 91km 떨어져 있다. 경내에는 허하(鹤哈), 쑤베이(绥北) 두 고속도로, 하이(哈伊), 하헤이(哈黑) 두 국도 및 6개 고등급 도로가 교통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으며, 하자(哈佳), 빈베이(滨北) 두 철도가 합류한다. 시 동부의 타이핑로(太平路)와 베이린로(北林路) 사이에 위치한 쑤이화 역은 여객운송 종합의 1급 편성역이다. 버스를 통해 다칭, 치치하얼 등 헤이룽장성의 다른 도시간을 연결한다. 통신 쑤이화시 전기통신국, 이동통신국은 전성(全省) 8대 전기통신망센터국 중 하나로, 시내전화, 팩스, 국내외 장거리 이동통신 시설이 완비되어, 770개 지역과 182개의 국가·지역 직통전화가 가능하다. 전력 전력 공급은 국망(国网)에서 끌어모아, 송전 전압 220,000V의 변전소를 통해, 시가지 및 주변 10여개 시·현에 충분한 전력을 공급한다. 각주 외부 링크 쑤이화 시 인민정부 헤이룽장성의 지급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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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키 (동음이의)
하키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하키(Hockey, en)는 단단한 공을 막대기로 쳐서 상대방 골에 넣는 단체경기이다. 필드하키 아이스하키 인라인하키 하키 - 대한민국의 인디 뮤지션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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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 (후한)
정환(程奐, ? ~ ?)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 한복(韓馥)의 부하로,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생애 한복 수하의 도독종사(都督從事)로, 한복의 명령으로 동료 조부(趙浮)와 함께 수백 척의 병선과 1만 명의 노병을 데리고 하양(河陽)의 맹진(孟津)에 주둔하고 있었다. 초평(初平) 2년(191년) 한복이 원소(袁紹)에게 기주(冀州)를 양도하려 하자, 조부와 함께 급히 한복에게 돌아갔다. 이때 원소가 조가(朝歌)의 청수구(淸水口)에 있었는데, 정환은 원소를 쫓아가 군사들로 정연히 북을 치며 행군하게 했고, 원소가 머무는 영채 바로 앞을 가로질러 가며 그를 위협하였다. 이에 원소는 조부,정환등의 의도를 알고 그들을 심히 증오하였다고 한다. 한복에게 돌아간 정환은 조부와 함께 한복에게 원소를 칠 것을 진언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한복은 원소에게 기주를 양도하였다. 삼국지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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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동위원회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US-Soviet Joint Commission)는 1946년 3월 20일부터 1947년 10월 21일까지 한반도의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개최한 회의이다. 개최 초기부터 미국과 소련의 의견차이로 인해 갈등을 빚었으며 결국 제2차 위원회까지 열렸으나 아무런 성과 없이 종결되었다. 배경 자주적 독립국가 수립의 시도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의 무조건 항복 선언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고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하였다. 당시 한국은 이미 김구, 김규식 등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같은 임시정부를 운영하고 있었고 독립운동과 병행하여 해방 후의 건국강령 등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국내에서는 1944년 8월부터 건국동맹이 활동하고 있었다. 건국동맹은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선인민공화국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가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은 그동안 함께 항일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우파의 탈퇴와 주석인 이승만이 국외에 있었던 점,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불참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또한 우파 세력의 불참과 박헌영, 안재홍간의 반목 역시 건준위를 취약한 조직으로 몰고 갔다. 미소 군대의 주둔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이미 냉전이 시작되고 있었고 결국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측에는 미군이 북측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진주는 무조건 항복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것이었으나 점차 자국의 이익을 위한 주둔으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1945년 12월 16일 미국, 영국, 소련은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외무장관 회의를 개최하였다. 흔히 모스크바 삼상회의로 불리는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으나 결국 의견을 조율하여 12월 27일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라는 이름의 합의문을 발표하였다. 이 합의문에서 세 나라는 한반도의 정부수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임시정부를 건설한다.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은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2주일 이내에 미·소 사령부의 대표회의를 개최한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과는 곧바로 한반도에 전해졌으나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분열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처음에는 좌우익 모두 삼상회의 결정에 반대노선을 표명하였으나 이후 좌익은 1946년 1월부터 3상회의 결정에 동의하였고 우익은 그런 좌익을 반민족주의로 규정, 좌파의 반대 슬로건으로 신탁통치 반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 둘은 그 내실적으로는 모두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정치를 위한 대립의 성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우익인 한민당의 입장을 대변했던 당시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고 보도하여 사회적으로 반탁운동이 일어나는 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이러한 보도는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정확히 반대로 보도한 오보였으며(신탁통치 실시는 미국 측이 강하게 주장했고 소련은 반대) 결정서의 내용을 왜곡한 것이었다. 예비 회담 1946년 1월 16일 서울 덕수궁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예비회담에서는 남북교류문제가 처음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문제가 주로 토의된 이 회담 중에서 미국 대표가 38도선의 설정으로 남·북간에 발생한 행정상 그리고 사회경제문제에 협력할 수 있는 길을 토의하자고 하면서 소련측 대표에게 다음과 같은 점의 협의를 제안하였다. ① 한국으로부터의 중요물자 반출, ② 38도선의 재래의 도(道)경계선에 의존한 변경, ③ 방송망의 일원화와 양지구를 통하여 신문의 자유로운 배포를 가능케 하는 문제, ④ 양지구간의 전화통신 재개, ⑤ 통화(通貨)의 통일 등. 소련측도 상기와 같은 미국측 제의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소련측은 이런 문제는 남·북간에 통일정권만 수립되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면서 정치문제의 우선해결을 주장하였다. 비교적 상호타협이 어렵지 않은 비정치적 영역, 즉 사회·경제분야에서 남북이 협력하는 데 성공한다면 거기서 얻은 협조무드와 정신의로서 궁극목적인 통일정권 수립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와 같이 미·소는 남북교류문제에 입장의 차이를 보였으나 소련 역시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남북교류를 위한 중요한 제안의 하나로 남·북간의 원료교환을 제의한 사실이 있다. 북한에서 석탄을 비롯해서 남한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보낼테니 남한의 쌀과 교환하자고 하였던 것이다. 이 소련측 제안에 대해서는 미국측이 남한에도 전재민(戰災民)이 많아서 쌀의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기 때문에 결국 물자교환에 관하여서도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우익 진영의 반대 1946년 3월 20일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 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 이에 임정 주석 김구는 미소공위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와 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은 김구에게 공동성명 5호에 서명할 것을 종용하면서, 서명이 곧 신탁문제에 언질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특별성명 등을 발표한다. 그리하여 이승만, 한민당 측에 이어 김구가 서명에 동의하자 소련측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5월 초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 이승만은 서명에 동의하지 않다가 미군정의 압력으로 서명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의는 끝내 결렬된다. 1946년 5월 19일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불참할 것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했고, 김규식은 반박성명을 내고 전체 애국자는 적극 미소공위에 참가하라고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이승만의 측근이던 박용만은 “김규식 박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소공동위에 끝까지 불참을 표명했던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은 애국자가 아니고 자기만이 애국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라며 비난하였다. 경과 한반도에서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이 거세지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합의의 실천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었다. 최초의 회의는 1946년 3월 20일 덕수궁에서 열렸으며 이후 1947년 10월 27일 소련의 철수까지 계속되었다. 회의 기간 내내 미국과 소련의 대립, 남한 내 제 정치 세력 간의 갈등 등으로 결국 어떠한 합의도 도출하지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주요 일정은 다음과 같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1946년 3월 20일 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6년 4월 18일 미소공동위원회에 협력하면 과거 반탁운동을 불문에 붙이고 협의대상으로 참여시키겠다는 공동성명 5호 발표 1946년 5월 6일 무기 휴회 1946년 6월 정읍발언 1946년 7월 좌우합작 운동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 선언 1947년 5월 21일 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7년 6월 13일 추가위원확대 1947년 6월 23일 남북 재 정당 사회 단체의 청원서 제출 1947년 7월 1일 평양 회의 개최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암살 1947년 8월 28일 미국, 한국 문제를 미,소,영,중 4개국 회담에 맡기자고 제안 1947년 9월 17일 한국 문제 유엔 상정 1947년 9월 26일 소련, 미·소 양군의 동시 철군 제안 1947년 10월 18일 미국,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 제안 1947년 10월 21일 소련의 대표단 철수로 미소공동위원회 해산 1947년 11월 유엔총회 남북한 총선거 결의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 남한단독 선거안 가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처음에 어느정도 진전이 되는듯한 기미가 보였으나 '신탁통치'안 문제가 논의되는 순간 다시 난항을 겪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좌우합작에 의한 중도적인 정부를 수립하려는 운동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으나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과 결국 1947년 10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마저도 성과 없이 결렬되고 해산되었다.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UN 소총회로 이관함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가속화되었고 결국 남한과 북한은 각각 단독정부 수립 확정에 이르게 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 해산이후 한반도의 정부수립 문제는 미국 주도의 국제연합으로 논의의 장이 옮겨졌고 1947년 11월 14일 유엔은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가결하였다. 그러나 남한에 비해 인구가 적은 북한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소련은 결의안을 거부하였다. 이후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남한 단독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김구 등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불참하였고 제주도에서는 4월 3일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로당의 시위와 함께 그것을 진압하기 위한 경찰과 극우 세력의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8월 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을 선포하였고 북조선에서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남북의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이러한 분단은 결국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의 도화선이 되었다. 남북 분단은 1945년 9월 초 스탈린이 하바로프스크 88여단에서 5년간 교육시킨 진지첸(김일성) 대위를 모스크바로 불러 면담하고 그를 소련이 점령한 북한 지역의 지도자로 내정한 순간에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이어 9월 20일에 스탈린은 북한에 부르조아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려보냈는데, 그 후의 소련 군정의 정책은 이 지령의 실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진행되었다.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시작되기도 전인 1946년 2월 9일 북한에 사실상 정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키고, 3월 5일에 토지개혁을 단행하는 등 이미 남북의 이질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통일정부 수립은 사실상 불가능해져 있었다. 그 후의 신탁통치 논란이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논의 등은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 올 수 없는 남북간, 미소간의 신경전 수준이고, 소련의 북한 분할 계획은 처음부터 스탈린이 예정했던 수순으로 진행되어 간 것이다. 소련은 북한 지역에 국민들의 동의없이 자신들의 대리인 김일성을 집권자로 내세워 공산체제를 구축해 나가면서 이에 반대하는 그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았다. 미군정이 소련과 달리 좌우 여러 정파들과 언론의 활동을 허용하고 있는 남한의 상황을 악용하여 혼란과 갈등을 조장하고 정부수립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하는 것이 대화에 나서는 목적이었으므로 미소공동위원회의 파행은 예정된 것이었다. 각주 같이 보기 신탁통치 반대 운동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좌우합작운동 좌우합작위원회 크리슈나 메논 유엔 한국위원회 미 군정 소련 군정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 허헌 원세훈 김약수 이오시프 스탈린 프랭클린 루즈벨트 조셉 매카시 더글러스 맥아더 테렌티 스티코프 존 하지 버나드 버치 아치볼드 더글러스 김성수 김원봉 이승만 윤치영 엄항섭 이철승 장덕수 장택상 장건상 장면 조소앙 한국의 군정기 1946년 한국 1946년 미국 1946년 소련 미국-한국 관계 소련-한국 관계 미국-소련 관계 1946년 남북 관계 1947년 남북 관계
16021
https://ko.wikipedia.org/wiki/941%EB%85%84
941년
연호 후진(後晉) 천복(天福) 6년 요(遼) 회동(會同) 4년 일본(日本) 덴교() 4년 남한(南漢) 대유(大有) 14년 민(閩) 영륭(永隆) 3년 후촉(後蜀) 광정(廣政) 4년 남당(南唐) 승원(昇元) 5년 기년 후진(後晉) 고조(高祖) 6년 요(遼) 태종(太宗) 15년 고려(高麗) 태조(太祖) 24년 사건 탄생 사망 고려(高麗)의 명장 유금필(庾黔弼)
257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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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중배수
하중배수는 항공기 날개에 걸리는 실제 하중의 크기를 기본하중(비행기 중량)으로 나눈 수치이다. 선회를 하는 경우 경사(bank)에 따라 날개에 가해지는 힘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되는데 경사 60도인 경우 벡터 계산에 의해 배 정도가 증가하게 된다. 하중배수는 항공기 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비행 시 주의가 필요하다. 같이 보기 하중계수 비행 역학
93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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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윅 트윅
트윅 트윅(Tweek Tweak)은 《사우스 파크》 만화영화 시리즈에 나오는 가상의 등장인물이다. 트윅은 17091 Bonanza 거리에 있는 갈색집에서 살고 있다. 트윅은 2 시즌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맷 스톤이 목소리를 맡았다. 그의 이름은 메탐페타민(각성제)을 사용하는 사람을 언급하는 속어에서 가지고 왔다. 개요 과잉 활동적 트윅은 과잉 활동아로 그려지며, 헝클어진 금발머리와, 일반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풀색의 단추달린 셔츠와, 감청색 바지를 입고 있다. 트윅은 기발한 버릇을 가지고 있는데;트윅은 자존감이 낮아 소심하고, 신경과민이며, 보통 카페인을 과량 섭취를 하고 있는데, 이건 그를 과대 망상증과, 과잉 활동적으로 만들고 있다. 게다가 그가 "난 잠을 거의 못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의 목소리는 보통 긴장되어있고,공포에 떠는 경항이 있는데, "악! 이건 나에게 너무 과도해, 나는 할 수 없어!" 아니면, 여기서 약간 변이된 말을 주로 한다. "Osama Bin Laden Has Farty Pants" 에피소드에서는 트윅은 숙명론을 실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커피 트윅의 부모님은 Tweek Bros. Coffee 라는 가게를 운영하며, 트윅이 불안해 할 때마다 그를 커피로 진정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커피는 오히려 카페인 수치를 증가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정서불안의 영향을 미치는 것에도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누구도 커피가 트윅의 정서불안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트윅은 티미하고 비슷하게 엉터리 ADHD진단을 받게 되는데, 티미하고 다른점은, 트윅이 정신병적인 증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딱 한번 Gnomes 에피소드에서 스탠이 트윅에게 커피가 정서불안의 원인이 아니냐고 그의 부모님께 물어본 적이 있다. 여담으로, Free Hat 에피소드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경호원 중 한 명이 트윅을 코카인 중독자로 부르는 점이 흥미롭다. 주목할 만한 등장 "Gnomes" 에피소드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트윅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커피숍인 "Tweek Bros. Coffee"가 거대한 커피 소매 업체인 "Harbucks" - 스타벅스의 패러디 - 로부터 사우스 파크에 가게를 열게, 그의 가게를 팔라는 압박을 받았고, 트윅의 아버지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 한편, 트윅은 자신의 팬티를 훔져가는 작은 요정들을 보게 되고, 요정들이 팬티를 다 가져가게 될까봐 불안해한다. 같은 과제 조원인 스탠, 카일, 카트만은 처음에 요정을 환각이라며 믿지 않았지만, 결국 그것이 환각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을 알게 된다. Tweek Vs. Craig 에피소드에서 트윅은 크레이그와 싸우게 된다. 후에 크레이그와는 Tweek X Craig 에피소드에서 사귀게 된다. 4명의 아이들은 리얼리티 쇼를 풍자한 선택을 하게 되고, 스탠과 카일, 카트만은 버터스를 그들의 무리에서 몰아낸다. 그리고 트윅이 시즌6의 6번째 에피소드에서 스탠, 카일, 카트만 무리의 일원이 된다. "Bebe's Boobs Destroy Society" 에피소드에서, 카트만은 그를 자신이 속해있는 무리에서 몰아내기로 결심한다(그는 버터스와 교체되었고, 버터스는 케니와 교체되었다). 하지만 카일은 "트윅은 멋져" 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를 몰아내자는 제안에 반대했다. 스탠 역시 카일의 말에 찬성하여 결국 트윅 대신 카트만을 그들 무리에서 몰아낸다. 이렇게 트윅은 계속 그들의 친구로 남아있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 에피소드 이후로 카트만은 다시 무리에 어울린다.) "Free Hat" 에피소드에서, 트윅은 조지 루커스와 스티븐 스필버그가 "레이더스"를 바꾸려는 것을 막는 캠페인에 동참하게 된다. 후에 스탠과 카일, 카트만이 그들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자, 트윅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레이더스"의 바뀐 버전을 RPG-7로 부숴버리겠다고 스티븐 스필버그를 협박한다. (레이더스의 패러디. 레이더스에서는 인디아나 존스가 성궤를 파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나, 협박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트윅은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포로로 붙잡혀서 "레이더스"의 수정판 시사회를 보게 되는 처지에 놓이고 만다. 잡다한 상식 트윅은 예전에 티미와 지미랑 중국에 가본 적이 있다. 트윅은 이전에 감기약 중독자였다. 트윅은 사우스 파크 야구단에서 12번 유니폼을 입고 있다. 그는 크레이그의 메트로섹슈얼 갱단 중 한 명이다. 시즌6 이후로 스탠, 카일, 카트만 무리에서 나와 크레이그 패거리 또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트윅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게임에서 노움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트윅은 성당에 갈 때 정확하게 녹색 대신에 파란색 셔츠를 입고 간다. 사우스 파크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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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A%80%EB%A5%B4%ED%82%A4%EC%98%88%EC%9D%98%20%EC%97%AD%EC%82%AC
튀르키예의 역사
이 문서는 기원전 6,50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현 튀르키예 지역에 있던 국가들을 설명한다. 하티, 히타이트, 프리기아, 우라르투, 리키아, 리디아, 이오니아, 아케메네스 제국, 마케도니아 왕국, 로마, 비잔티움 제국,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은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고대 유적은 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각각의 문화의 특징이 존재한다. 선사 시대, 고대와 중세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6,500년에 차탈회윅()이라는 최초의 부락이 만들어졌다. 기원전 1900년경부터 아나톨리아 지역은 원래 인도유럽어족 인종과 아시리아와 같은 셈족 인종들이 살고 있었으며 히타이트라는 인도유럽어족의 국가가 건국되었다고 추측된다. 히타이트는 메소포타미아 반도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히타이트는 기원전 1200년경에 멸망했다. 그 후 아나톨리아의 서남부 지역 일부는 프리지아인과 리디아인이 살고 있었다고 추정되며 동부지역 일부는 우라르투 왕국 통치 아래 남게 되었으며 나머지 지역들은 스키타이 부족들이 살게 된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기원전 6세기 중반에 이 지역의 남부를 차지했으며, 그것을 이어받은 헬레니즘 제국이 아나톨리아 반도 남부의 일부분만을 세력권 안에 편입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사산왕조가 아나톨리아에 진출하였고 로마가 아나톨리아를 일부에 진출하였다. 대아르메니아 왕국은 서쪽의 비잔티움 제국, 동쪽의 파르티아 제국과 사산 제국 사이의 완충국으로 남아 있었다. 기원후 5세기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시기 아나톨리아 지역이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으나 아나톨리아에 사는 인종들은 셈족과 페르시아인, 인도유럽어족인들과 아랍인 등 여러 인종이 살고 있었다. 6세기 중반 돌궐족은 중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까지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중국을 속국으로 만들었고 아나톨리아에 자리를 잡게 된다. 11세기 중반에는 투르크의 한 집단인 오구즈족이 동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왔다. 이 무렵 최초의 무슬림 왕조인 셀주크 제국(튀르키예어: Selçuklular 셀주크룰라르, 페르시아어: سلجوقيان 살주키얀; 아랍어 سلجوق 살주크, 또는 السلاجقة 알-살라지카)이 등장하게 된다. 셀주크 제국은 11세기 중반부터 12세기 후반까지 중앙 아시아와 중동 일대를 다스린 수니파 무슬림 왕조이며, 중앙아시아의 부족연합체에서 발흥하여 중동에서 투르크 세력의 시조를 이루었다. 12세기 말에 수많은 토후국으로 분할된다.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오스만 터키어 : دولت عالیه عثمانیه Devlet-i Âliye-yi Osmâniyye, 현대 터키어 : Osmanlı İmparatorluğu)은 오스만 가문을 왕가로 하여, 현재 터키의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을 수도로 정하여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러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다민족 제국이다. 13세기 말에는 오구즈족의 일파인 카이족이 아나톨리아의 동부와 중부를 차지하고, 카이족의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왕조를 세웠다. 그들이 영토를 확장하는 초기 단계에 오스만 일족이 투르크족의 가지스(ghazis:비잔틴 제국에 대항해 싸우는 이슬람교 전사들)를 지도했다. 14세기 후반 오스만족은 마침내 서부 아나톨리아와 남동부 유럽의 비잔틴 영토를 차지하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발칸 국가들을 점령하였으며, 동부 아나톨리아의 투르크멘 공국을 점령했다. 15세기 초반 오스만 제국은 발칸 속국들을 직접 통치하고, 특히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유프라테스 강(동쪽)과 헝가리(서쪽)까지 영토를 넓혔다. 16세기 후반에는 발칸 반도와 중앙 유럽의 헝가리, 중동, 북아프리카 거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한구석에서 건국한 소 군후국으로부터 발전한 이슬람 왕조인 오스만 왕조는 14세기 후반 동유럽의 불가리아 제국을 점령한것을 시작으로 15세기 중반에는 동로마 제국로 대표되는 기독교 제국의 상징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고, 16세기 초반에는 맘루크 왕조를 정복하여 서아시아·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제국까지 정복하여 지중해 세계의 과반을 차지한 세계 제국인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과거 히타이트 제국의 영광을 모두 회복한다. 그러나 술탄 쉴레이만 1세(1494년 ~ 1566년)의 통치 이후로는 정치적·행정적·재정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718년경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에서 투르크족을 축출했으며, 러시아는 1783년에 크리미아를 합병했다. 그리스(1830년, 왕국)도 영국의 지원을 받고 독립하였다. 1881년에는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독립하였으며(루마니아는 1861년부터 공국) 1908년에는 불가리아(1879년부터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 1912년에는 알바니아가 독립하였다. 19세기 말에는 세계 정세의 변화로 4세기동안 소수 민족과 소수 종교분파에게 지방자치를 용인했던 밀레트(비이슬람 종교자치제) 체제가 완전히 붕괴하면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이 일어나고 만다. 1908년에 청년 투르크당 일파가 제국을 되살리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발칸 제국에서의 군대와 영토 상실로 인한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터키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가담했다. 전후 아라비아의 여러 속주와 일부 지역을 잃었지만 격렬한 시민전쟁과 그리스와의 전쟁 결과 1923년 로잔 조약으로 지금의 국경선이 생겼고, 케말 아타튀르크를 대통령으로 한 터키 공화국이 탄생했다. 술탄제와 칼리프제는 폐지되고 아타튀르크의 지도 아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터키 공화국의 성립과 현대의 터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정치·경제·사회체제 전반에 대한 급진적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이슬람의 지배적 역할을 축소하고, 튀르키예어를 아랍 문자 대신 라틴 문자로 쓰도록 함으로써 터키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을 축소시켰다. 또한 이후 오랫동안 영향력이 지속된 국가통제 방식의 경제발전 정책을 마련했다. 1938년 아타튀르크 사망 후 불안정한 기간과 짧은 군부 통치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정치 및 다당제가 정착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아직도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역사에서 국가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을 유지하다 1945년 2월 23일 독일, 일본에 선전 포고했다. 전후 서유럽과 제휴하고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다. 1952년에는 NATO에 가입했으며, 1953년에는 발칸 협정의 조인국이 되었다. 또한 바그다드 조약(1955, 후에 CENTO로 이름이 바뀜)과 유럽 경제협력기구(OEEC) 및 유럽 의회에 가입했다. 1959년에는 그리스와의 3년에 걸친 키프로스 분쟁을 잠정적으로 해소했다. 1961년 터키 제2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새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1963년에 유럽 공동시장의 준회원국이 되었다. 1963년말 키프로스에 거주하는 그리스인과 터키인들 사이의 분쟁으로 키프로스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그리스와 터키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어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유엔의 압력으로 전쟁이 억제되었다. 1987년과 1996년에는 영토분쟁으로 재차 갈등이 빚어졌다. 1974년 키프로스에서 그리스 군사정부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에 맞서 터키군은 북키프로스를 점령했다. 그 후 국내정세 불안과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1980년 군부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2년 후 새 헌법이 대다수 유권자들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1983년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계엄령은 점차 해제되었다. 1983년 과격한 쿠르드족 분리주의 운동의 출현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지속적인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터키는 조국당의 투르구트 외잘 총리 재임기간(1983년 ~ 1989년)중에 비교적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1990년대 들어서는 친이슬람계 복지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가 증가하는 가운데 중도파 정당들이 집권했다. 2010년 2월 22일 터키의 군부가 이슬람 지향주의로 넘어가는 정부를, 세속적으로 바꾸기 위하여 전복을 기도하나, 발각. 터키의 군부 인물 49명이 긴급 체포되었다. 2012년 10월 29일에는 공화국의 날을 맞아 총리 부인이 히잡을 쓸 수 있게 허가한 것과 함께 이슬람주의 대 세속주의의 논란으로 튀르키예에서 수천여명이 종교중립 정치요구시위가 일어났고, 시위해산과정에서 터키경찰은 시위대에게 물대포를 쐈다. 2013년 6월 1일에 이스탄불에서 탁심 광장을 지키려는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정부시위가 터키전역으로 퍼졌고 이스탄불과 앙카라를 포함한 지역에서 2천명이상의 부상자가 발생되었다. 각주
99797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B%82%98%EB%AF%B8%EC%B9%B8%ED%86%A0
미나미칸토
미나미칸토 지방()이란 간토 지방을 남북으로 구분했을 때, 남쪽을 가리킨다. 주로 도네 강 이남의 도쿄도·가나가와현·지바현·사이타마현의 1도 3현을 가리키지만, 특정한 경우에는 이와 다른 범위를 지칭할 때도 있다. 대의어는 기타칸토 지방이다. 중심은 도쿄 도 구 지역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범위 미나미칸토 지방은 여러 가지 명칭을 가지고 있어, 각각의 목적이나 용도에 따라 나눌 수 있다. 행정 1도 3현 (도쿄도·가나가와현·지바현·사이타마현) 2006년 7월 1일을 기준으로 도쿄 도의 구 지역의 인구가 852만 명에 도 전체는 1263만 명, 가나가와 현이 883만 명, 사이타마 현이 707만 명, 지바 현이 607만 명으로 총 3460만 여명이다. 이 주변의 현의 인구가 300만명대 이하인 점을 감안하면, 눈에 띄게 많은 인구이다. 행정에서는 이들 1도 3현이 인구 밀집으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나, 정책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미나미칸토라고 칭하고 있다. 경제에서는 이 1도 3현을 ‘수도권’이라고 칭하므로, 행정상에서도 수도권이라고 하는 경우는 있지만 법률상의 수도권의 범위와는 다르다. 중의원 선거에서의 미나미칸토 (가나가와현·지바현·야마나시현) 간토 지방의 밀집된 인구는 일본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므로, 선거에서의 비례구에서는 분할되어 있다. 도쿄도의 구 지역과 다마 지방, 이즈·오가사와라 제도 전역을 묶어 도쿄 도 지역으로 정한다. 수도권의 나머지 현은 도쿄 이북이 기타칸토 구역, 도쿄 이남이 야마나시현을 비롯한 미나미칸토 구역으로 되어 있다. 지형적인 이유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명목상 기타칸토·도쿄·미나미칸토로 나눌 수 있다. 방위 도쿄 도 이남 (도쿄도·가나가와현·지바현) 도쿄 도 남쪽의 1도 2현. 도쿄 대도시권 이남 (도쿄도·가나가와현·지바현·사이타마현) 도쿄 대도시권 남쪽의 1도 3현. 이바라키현의 남서부 지역은 도쿄 대도시권의 일부지만, 이바라기 현 전체로 볼 때는 면적이 3분의 1이기 때문에 제외한다. 경제 도쿄권 (도쿄 도심으로부터 동심원상의 70킬로미터 이내의 지역) 도쿄의 도심으로 통근·통학하는 인구를 기준으로 할 때, 경제적인 연관이 깊은 지역을 도쿄권이라고 한다. 도쿄의 도시권은 종전 이후 확대되는 경향으로, 시기에 따라 범위는 다르지만 2000년의 인구 조사를 기준으로 할 때 도쿄 도심으로부터 70킬로미터 이내의 지역을 가리킨다. 이때 중심점으로는 신주쿠구로 이전하기 전의 구 도쿄 도청사(도쿄도 지요다구)를 가리킨다. 오사카권이나 나고야권도 비슷한 거리권을 설정하고 있으며, 중심점은 각 시의 시청이 된다. 이 두 권역은 50킬로미터 이내를 범위로 하므로, 이와 비교할 때는 도쿄 50킬로미터 이내의 범위를 가리킬 때도 있다. 도쿄권은 간토 지방의 남부를 가리키므로, 미나미칸토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1988년에 제정된 〈다극분산형국토형성촉진법〉에서는 ‘도쿄도, 사이타마현, 지바현, 가나가와현 및 이바라키현의 구역 중, 도쿄 도의 구지역과 이와 사회·경제적으로 일체에 있는, 정령으로 정하는 광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3대도시권 킬로미터권 인구 - 도쿄 70킬로미터권 인구 : 3439만 4178명 (2000년) 도쿄권의 인구 추이 (1885년부터 2000년까지) 도쿄 대도시권 (도쿄 특별구의 10퍼센트 통근권) 도쿄 구지역(구 도쿄시)로 통근하는 인구를 기준으로 하는 도시 고용권. 간토 지방의 남부에 해당하므로, 도쿄 대도시권을 미나미칸토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시권이므로 도현단위가 아닌 시구정촌 단위. 대도시 고용권 지도 (1995년) 대도시 고용권 인구 - 도쿄 대도시권 : 3172만 9844명 (2000년) 간토 대도시권 (도쿄 구 지역과 근교 정령시의 1.5퍼센트 통근·통학권) 간토 대도시권이란 도쿄도의 구 지역과 정령지정도시인 요코하마시 및 가와사키시(가나가와현), 지바시(지바현), 사이타마시(사이타마현)를 중심 자치단체로 하는, 1.5퍼센트 통근·통학권을 기준으로 한 시정촌 단위의 복합도시권을 말한다. 사이타마시가 정령지정도시로 지정되기 전에는, 총무성에서 게이힌요 대도시권(京浜葉大都市圏)이라고 불렀다. 간토 지방의 남부에 해당하므로, 간토 대도시권(게이힌요 대도시권)을 가리켜 미나미칸토라고도 한다. 7대도시권과 5대도시권의 통계 간토 대도시권 : 4,330만 3,058 명 (2018년) 게이힌요 대도시권 : 3449만 3466명 (2000년) 같이 보기 태평양 벨트 기타칸토 광역 간토권 간토 지방 일본의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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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타
나리타()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지명 나리타시 나리타 국제공항: 일본 지바현 나리타 시에 위치한 국제공항 나리타 공항역: 일본 지바현 나리타 시에 위치한 동일본 여객철도 · 게이세이 전철의 철도역 나리타역: 일본 지바현 나리타 시에 있는 동일본 여객철도 나리타 선의 역 나리타선: 일본 동일본 여객철도의 철도 노선 인명 나리타 후미오: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 나리타 겐 나리타 켄 (성우): 일본의 성우 나리타 리사 나리타 료: 일본의 배우, 패션 모델 다카키 나리타: 일본의 축구 선수 나리타 교스케: 일본의 축구 선수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