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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IT839%20%EC%A0%84%EB%9E%B5
IT839 전략
IT839는 2004년 3월 국민 소득 2만달러 조기 달성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정보통신부가 수립한 IT산업 개발 전략이다. 새롭게 부각되는 8대 신규 서비스, 3대 인프라, 9대 신성장 동력으로 구분하고 이들 간의 유기적인 연계를 통해 오는 2007년 IT 연간 생산 380조원, 수출 1100억달러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전략의 핵심은 IT 산업의 ‘가치사슬 효과를 극대화’ 하는 것이다. 8대 신규서비스에는 ▲휴대인터넷 ▲DMB ▲홈네트워크 ▲텔레매틱스 ▲RFID활용 서비스 ▲WCDMA ▲지상파 디지털TV ▲인터넷전화가 포함되고, 3대 인프라는 ▲광대역통합망 ▲유비쿼터스센서네트워크 ▲인터넷주소체계 IPv6를 말한다. 한편 9개 신성장동력 사업은 ▲차세대 이동통신 ▲디지털TV ▲홈네트워크 ▲IT Soc ▲차세대PC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디지털콘텐츠 ▲텔레매틱스 그리고 ▲지능형로봇을 들 수 있다 같이 보기 진대제 대한민국의 과학과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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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5%BC%EC%9E%A5
논장
논장(論藏)은 삼장(三藏)의 하나이다. 각 부파는 각기 경(經)과 율(律)을 중심으로 하는 성전이나 규범을 집대성한 다음 이들의 이해를 깊게 하기 위하여 교설과 어의(語義) 등에 주석이나 해설을 달고 그 중에서 자파의 교리학설을 체계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중에서 율에 대한 해설은 율장 속에 포함되어 전하여졌으나 경, 즉 교법에 대한 연구해석(對法)은 독립적으로 논(論:아비달마)이라 불리었고 그것이 집대성되어 논장이 된 것이다. 이 논장도 경율 2장(經律二藏)과 마찬가지로 여러 부파마다 자파의 독립적인 교리체계로서 각각 소유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오늘날까지 그것이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팔리어로 된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의 7론(七論)과, 같은 상좌부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體有部)의 한역 7론(七論)이다. 유부(有部)는 부파불교의 사상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낸 대표적 존재이며 그 교리의 전거(典據)가 된 것은 기원전 2세기에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가 지은 이다. 이것은 그 후에 나온 6론(六論)과 함께 '6족발지(六足發智)'라고 불리었으며, 이들 7론에는 다른 부파의 교리 인용과 그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종류 팔리 논장 7론 팔리 삼장에 포함된 논장은 이 7론이 전부이다. 이외의 논서는 주석서나 장외로 취급한다. 담마상가니(, 법취론(法聚論), 법집론(法集論), Ds) 비방가(, 분별론(分別論), Vibh) 다뚜까타(, 계설론(界說論), 계론(界論), Dhātuk) 뿍갈라빤띠(, 인시설론(人施設論), Pp) 까타왓투(, 논사론(論事論), Kv, Kvu) 야마까(, 쌍대론(雙對論), 쌍론(雙論), Yam) 빳타나(, 발취론(發趣論), Paṭṭh) 설일체유부 6론과 7론 《아비달마집이문족론(阿毘達磨集異門足論)》(집이문족론, 집이문론, , K.946, T.1536) 《아비달마법온족론(阿毘達磨法蘊足論)》(법온족론, 법온론, , K.945, T.1537) 《시설론(施設論)》(아비달마시설족론(阿毘達磨施設足論), 시설족론, , K.1484, T.1538) 《아비달마식신족론(阿毘達磨識身足論)》(식신족론, 식신론, , K.0947, T.1539) 《아비달마계신족론(阿毘達磨界身足論)》(계신족론, 계신론, , K.0948, T.1540) 《아비달마품류족론(阿毘達磨品類足論)》(품류족론, 품류론, , K.0949, T.1542) 《아비달마발지론(阿毘達磨發智論)》(발지론, , K.0918, T.1544) 《발지론》을 제외한 6경을 6론 또는 6족론()이라고 부르고, 《발지론》을 포함해서 7론 또는 6족발지라고 부른다. 같이 보기 경장 율장 참고 문헌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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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7%B9%EB%8F%88
이극돈
이극돈(李克墩, 1435년 ∼ 1503년 2월 27일)은 조선 시대 전기의 문신, 정치인, 학자, 외교관이다.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의 아들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극배의 동생이다. 무오사화의 원인 제공자로 유자광에 의해 지목되어 사림파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복권 여론이 나타났다.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관에 녹선되고, 광원군(廣原君)에 봉군되었다. 자(字)는 사고(士高)이고 호는 사봉(四峯)이며 시호는 익평(翼平),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그의 부친 이인손과 형 이극배, 동생이극균 3부자가 정승을 지내고 나머지 형제들도 판서를 지냄으로써 형제가 모두 작위를 받고 봉군되어 형 이극배, 이극감, 이극증, 동생 이극균과 함께 봉군되어 5군으로 불렸으며, 종형제인 이극규, 이극기, 이극견 등을 포함하여 8극으로 불리기도 하며, 광주 이씨는 당대 제일의 가문이 되었다. 생애 출생과 가계 사봉 이극돈은 1435년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다섯아들중 네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고려시대 말기에 신진사대부와 교류하던 둔촌 이집 (遁村 李集)의 후손으로, 탄천 이지직(李之直)의 손자이다. 그의 형 이극배, 이극감, 이극증, 동생 이극균이 5형제 모두 대과에 급제하여 고려말기에 그의 증조부였던 둔촌 이집 (遁村 李集)의 5형제가 모두 등과하였던 연유로 5자 등과 집안으로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으며, 종형제인 이극규, 이극기, 이극견 등과 함께 고위 관직에 활동해 8극으로 불렸다. 그의 다섯 형제들 모두 봉군되어 5군으로 불렸으며 그들이 살았던 신문로2가 부근이 해방후까지 5군골로 불려왔다. 금부도사로 연산군의 모후 폐비 윤씨의 사약을 들고 갔다가 멸문당한 이세좌는 이극돈의 조카였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영민하였다.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1457년(세조 3)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관료 생활 관료 생활 초기 그 뒤 전농시주부 임명되고, 이어 성균관직강, 예문관응교, 세자시강원필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글을 잘 지어 칭찬을 들었으며, 경전과 고전의 지식이 해박하였다. 특히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의 글을 잘 지었다. 1467년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1468년(세조 14년) 2월 중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2월초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외삼촌 현득리(玄得利)에게 양육되었으나 뒤에 송사를 제기한 류양춘(柳陽春)을 규탄하고, 허통을 취소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류양춘(柳陽春)은 어릴 때에 그의 어미의 아우인 현득리(玄得利)에게 붙여 양육되었으니, 은혜가 아비와 같은데도, 이에 장고(狀告)를 발하여 꾸짖고 욕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굴복함이 없었습니다. 그 아비가 양(羊)을 훔쳤다고 아들이 증언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류양춘은 경박한 행동을 한 사람이니, 청컨대 시험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만약 그 재주로써 시험에 나아가기를 허락한다면 장차 무엇으로 권려하고 경계를 보이겠읍니까? 또 신 등은 듣건대 한 사람을 상(賞) 주어서 천만 인(千萬人)을 권려하고, 한 사람을 벌(罰)주어서 천만 인을 두렵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류양춘과 같은 자는 심행(心行)이 불초(不肖)하니, 허통(許通)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어 양사의 관원들과 함께, 전횡을 부리고 노비를 시켜 사람을 살해하고, 감옥에 갇힌 여죄수를 강간한 공신 홍윤성(洪允成)의 잘못을 탄핵, 치죄할 것을 청하였다. 3월 죄인 김석을산(金石乙山)에게 벌을 주려다가 의혹이 있자 왕명을 받고 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예조 판서(禮曹判書) 임원준(任元濬)·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조간(曹幹) 등과 함께 심문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홍윤성의 잘못이 처벌되지 않자 그는 계속해서 홍윤성의 처벌을 청하는 탄핵 상소를 올렸다. 왕은 홍윤성을 처벌하지 못했으나 이극돈을 위시한 언관들을 초청하여 그 뜻이 가상함을 위로하고 연회를 베풀어 어사주를 하사하였다. 국서 편찬, 언관 활동 1468년 3월 한명회(韓明澮)에 의해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에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 후 동년 6월 통정대부 예조참의로 승진하였으며, 1469년(예종 1년)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계감청 당상(繼鑑廳堂上)의 한사람이 되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편수하였다. 동년 4월 한성부우윤이 되어 1계급 특진과 제집사(祭執事)직을 겸직하였다. 그해 9월 다시 한성부우윤, 10월 수 사헌부 대사헌(守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성종 즉위 초 부패와 전횡을 일삼는 관리들과 문제있는 신려들을 탄핵, 규찰하였다. 1470년(성종 1년)초에 자신의 형 이극배(李克培)는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고, 셋째형 이극증(李克增)은 도승지(都承旨)인 점을 들어 스스로 상피를 청하여 사퇴하였다. 바로 사헌부대사헌, 동지사(同知事)를 거쳐 왕명으로 가선 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471년(성종 2년)에는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관에 녹훈되었고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 외교 활동과 지방관 1472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광원군(廣原君)에 임명되었다. 그해 처당숙인 권호(權瑚)의 일에 연루되어 사헌부 장령 허적(許迪)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473년 호조 참판을 거쳐 동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聖節使)로 연경에 다녀왔고, 1474년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1476년 예조참판으로 폐비 윤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책봉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7년 가선 대부(嘉善大夫) 광원군(廣原君), 1478년 병조참판, 가선 대부(嘉善大夫) 광원군(廣原君)을 거쳐 1479년 다시 예조참판이 되었다. 1481년 이조 참판(吏曹參判),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고 이때 한명회, 양성지 등의 비행을 규찰하여 탄핵하였으며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48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는등 여러 차례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 사림파와의 갈등 이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강원도·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세조비 정희왕후(貞憙王后)의 국상중에 술에 취해 장흥(長興)의 기생과 어울렸다는 소문을 김일손(金馹孫)이 듣고 이를 사초(史草)에 기록하려한 일로 사이가 나빠졌다. 이후 경상도·영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487년(성종 18년)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1494년 이조판서에 이어 병조판서, 호조판서, 5도의 관찰사를 차례로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과 우찬성을 거쳐 다시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를 겸하였으며, 의정부의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는 성종때부터 훈구파의 대표적인 학자로 신진 사류인 사림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1497년 경연지사, 의정부좌찬성, 의금부 당상을 지냈다.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 당상관을 역임하였다. 1498년 실록청 당상관으로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사초를 정리하다가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 弔意帝文〉과 훈구파의 비위사실을 기록한 것을 발견하고는 총재관(總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고했으나 효과가 없자,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유자광(柳子光)에게 이를 알렸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 이는 이극돈이 죽은 이후 중종반정 이듬해 삼사의 탄핵을 받은 유자광에게 무오년의 일에 대해 문초하자 유자광이 처음에는 허침에게서 들었다고 하여 그럴리없다고 추국하자 이극돈이 알려줬다고 토설한 진술로인해 사림으로부터 유자광과 함께 이극돈이 무오사화의 원인제공자 지목되었다. 무오사화때 유자광은 김종직의 저서들도 구하여 조의제문 사본을 의금부와 형조의 형관들에게 제출하고, 원본에 해석과 주석을 달아 연산군에게 전달하면서 사태가 확대되었으며, 연산군은 김종직이 세조의 부름을 받아 세조의 녹을 받았으면서 주인을 배신했다며 사림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한다. 그러나 어세겸·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김전(金詮) 등과 함께 이극돈 또한 사관으로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보고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사화가 있은 뒤 파직을 당하였다가, 다시 복권되어 광원군에 봉하여졌다. 죽음 1469년(예종 1)에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편찬, 완간하였으며, 성종때에도 왕명을 받들어 1483년(성종 14) 강목신증(綱目新增), 1485년(성종 16)에 성종의 서거정(徐居正)·정효항(鄭孝恒)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 을 편찬, 발간하였다. 1501년(연산군 7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1503년(연산군 9년) 1월 병조의 업무가 중함을 들어 스스로 병조판서에서 사퇴하고, 그해 2월 27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향년 68세였다. 죽은 뒤 익평(翼平)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뒤에 관직과 함께 추탈되었으나 중종6년 이세정의 상소에 의해 환급되었다. 사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산3-1 대원근린공원 뒤 능선에 안장되어있다. 그의 묘소와 아들 이세정의 묘소는 그의 할아버지 탄천 이지직의 묘소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1511년(중종 6년) 6월 아들 병조 참의 이세정(李世貞)이 그를 신구, 변호하며 억울함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중종이 특명으로 그의 직첩을 되돌려주었다. 바로 홍문관 부제학 이세인(李世仁)이 작첩 환급의 불가함을 상소했으나 왕이 거절하였고, 6월 16일 예문관 봉교(奉敎) 유중익(兪仲翼)은 그가 유자광을 사주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켰다며 환급의 반대를 상소했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이후 양사에서 작첩 환급의 불가함을 계속 상소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으며 추후 다시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이지직(李之直, 1354 - 1419, 호는 탄천(炭川), (태종)이조참의, 정몽주의 문인) 아버지 : 이인손(李仁孫, 우의정, 1373년 ~ 1463년 윤 7월 13일) 형님 : 이극배(李克培, 영의정 광릉부원군) 형님 : 이극감(李克堪, 형조판서 광성군, 시호는 문경, 영의정을 지낸이준경의 증조부) 형님 : 이극증(李克增, 우찬성 광천부원군) 동생 : 이극균(李克均, 좌의정 광남군, 5대손은 영의정 덕형(德馨))) 부인 : 안동권씨(安東權氏) 아들 : 이세전(李世銓, 부사) 아들 : 이세경(李世銓, 돈령부 첨정) 아들 : 이세정(李世貞, 1461 - 1529, 도승지,전라감사) 손자 : 이수완(李秀莞, 판관) 손자 : 이수진(李秀蓁) 딸 : 광주이씨(廣州李氏, 1470년 ~ 1553년)윤탁연, 이용의 처조모, 임진왜란 때 순절한 윤경원의 외증조모 사위 : 송수(宋壽, 1470년 ~ 1517년 9월) 외손자 : 송맹경(宋孟璟) 외손자 : 송숙경(宋叔璟) 외손자 : 송말경(宋末璟) 평가 세조, 성종 대에 유능한 정치가이자 행정관으로 중용되었을 뿐 아니라 국방, 외교, 내치에 골고루 업적을 남긴 관료였다. 글을 잘 지었으며, 전례(典禮)에 밝고 경학과 사장(詞章)에 능하였다. 실록에는 '사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었고 관리의 행정을 환하게 습득했으며, 옛일을 익숙하게 알고 모든 일을 자세히 생각하여, 이르는 곳마다 업적이 있어서 한때의 추앙한 바가 되었지만, 성격이 너무 까다로워 털끝만한 일도 파고들었다.'고 평하였다. 이극돈이 살았던 시기는 역사상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정국을 이어갔던 때였다. 아울러 정치적으로 홍문관,사헌부,사간원으로 대표되는 삼사의 역할과 위상이 고조되어 의정부,육조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국정운영의 한축으로 떠올랐던 시기였으며, 조선 건국의 경제적 배경이 되었던 과전법이 붕괴되어 가는 시점이기도 했다. 이렇듯 혼란한 정국속에서 훈구세력을 대표한다고 알려진 인물이 다름 아닌 이극돈이었다. 이극돈이 성종 초기에 사헌부 대사헌 신분으로 시무12조라 일컫는 상소문을 올려 왕으로 하여금 국정전반에 걸친 폭넓은 개혁을 주창하였으며 차서를 구애하지말고 발탁하여 등용 할 것 등을 요구한것은 당시대의 사대부가에서는 상상하기힘든 진보적인 주의주장이라 할 것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왕으로 하여금 국가 원로등이 총 동원되어 사안별로 검토케 했으며 국정운영에 적극반영되게한 실천적 리더십으로 당시 정국을 주도했던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이극돈은 조선 초기 훈구와 사림세력의 갈등 구조 속에서 훈구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 하고 있는데, 그가 죽은 이후에는 사림세력들이 집권하여 정권을 유지해 갔기에, 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면들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무오사화의 발단을 제공한 인물로 알려졌으나 도리어 국왕에게 미리 실록의 내용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는 점은 역사 평가 작업이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은 것을 최초로 발설한 인물인 유자광에게 성종실록에 조의제문이 실린것을 알려준 인물로 유자광에 의해 지목되어, 연산군 4년 무오사화의 원인제공자로 알려져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중종 때인 1511년 아들 이세정의 상소에 의해 복권되었으나, 조광조 등 사림의 진출과 1565년(명종 20년) 훈구파가 정계에서 몰락하고 그의 후손인 이이첨이 인조반정에 의해 실각하면서 비판과 부정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에 대한 동정 여론과 복권 논의가 나타난 것은 1910년(융희 4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부터였다. 무오사화의 원흉인가?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에 기사를 정리하다가, 당시 실록청 당상이었던 윤효손으로부터 사림파의 지도자인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에 대한 처리 방안을 협의 받고, 그는 이 〈조의제문〉이 성종대의 역사에 세조의 행적을 싣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어 사초를 봉하고 일체 발설치 말 것을 당부하였으나, 다음날 유자광,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등이 연산군에게 秘事(비사)를 아뢰기를 청하면서 도승지 신수근으로 하여금 출납을 관장하게 하고, 사관의 참여를 막아서 유자광등이 어떤 경로를 통해 '세조조의 일'이 김일손의 사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았는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즉 임금에게 보고 하면서 '언제 어떻게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가?'하는 문제는 당연히 보고 되었을것인즉 자광이 사초의 일을 연산에게 말했다면 이극돈이 연산으로부터는 즉시 보고치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삭탈관직에 4개월간 유배생활을 당하기보다는 상을 받았을 것이나, 사림파들로부터는 무오사화의 원흉으로 몰렸었다. 연산군 일기와 중종실록 등 역사에 의하면 무오사화로부터 피해자인 그가 가해자로 몰린 아이러니는 사림과 훈구의 갈등속에 사림파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은 까닭이 아니었나 싶다. 기타 광해군 때의 북인 중진 이이첨은 그의 5대손이었다. 그러나 훈구파가 몰락하면서 그가 부정적으로 묘사, 연루되어 이이첨의 일족들은 선대 둔촌이집으로부터 9대에 걸쳐 한번도 빠짐없이 문과 급제를 한 조선역사에 보기 드문 내력의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세간으로부터 무시와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다. 오성과 한음의 주인공이기도 한 한음 이덕형은 이극돈의 동생 이극균(李克均)의 5대손이었다. 번역, 출판 작업 세조때부터 성종조에 이르기까지 경국대전편찬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세조실록의 편수관으로, 성종실록 편찬시 지관사로 참여했으며, 예종때는 무정보감을 직접편찬했고, 신목강증을 노사신 이경동 등과 함께 편찬했다. 무정보감은 조선 건국초부터 예종당대까지 발생했던 국내의 정변과 전쟁, 외침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책인데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1492년(성종 23)에유양잡조(酉陽雜俎)·당송시화(唐宋詩話)·유산악부(遺山樂府)와 국내 저작인 파한집(破閑集)·보한집(補閑集)·태평통재(太平通載) 등의 책을 인쇄, 발간하는데 참여였다. 또한 1494년(성종 25)에 노사신 등과 계몽의두(啓蒙議頭) 등의 책과대명률(大明律)을 대조해 미비한 것을 참작해 쓸 것을 청하였던 것과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에 참여하여 서문을 직접썼으며, 감수에도 참여하였다. 작품 * 왕과 비 - 변희봉 같이 보기 무오사화 갑자사화 조의제문 계유정난 세조 찬위 이극감 이극균 이극배 임사홍 신숙주 한명회 김종직 김일손 김숙자 조광조 사림파 권람 임사홍 한명회 정철 폐비 윤씨 남이의 옥사 봉석주 박원형 이극증 이세좌 이수경 이준경 이윤경 이중경 이이첨 박원종 유자광 이광식 이감 이기 홍윤성 홍달손 양정 한치인 박원종 이색 심통원 김안로 윤임 윤지임 윤원형 윤필상 한확 한치형 사육신 생육신 참고 자료 이극돈: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이극돈:네이버 참고 문헌 세조실록 예종실록 성종실록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대동야승 국조방목 연려실기술 1435년 출생 1503년 사망 과거 급제자 조선의 문신 조선의 정치인 조선의 유학자 조선의 외교관 조선의 역사가 조선의 작가 조선의 저술가 갑자사화 관련자 무오사화 관련자 병사한 사람 좌리공신 광주 이씨 경기도 출신 훈구파 15세기 한국 사람 16세기 한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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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B%A5%B4%EB%82%98%EC%9A%B8
바르나울
바르나울()은 러시아 알타이 지방의 중심지이다. 5개의 극장, 3개의 박물관, 10개의 음악학원이 있다. 오비 강이 흐르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시베리아에 있다. 1739년에 지어졌다. 인구 2003년 1월 1일의 인구는 66만6,300명이다. 1835년 — 9,100명 1860년 — 1만1,600명 1897년 — 2만9,400명 1916년 — 7만1,200명 1939년 — 14만8,200명 1979년 — 32만3,000명 2002년 — 60만3,500명 행정구역 5개의 구가 있다. 젤레즈노도로주니 구(Железнодорожный) 인두스트리알니 구(Индустриальный) 레닌스키 구(Ленинский) 옥탸브리스키 구(Октябрьский) 중앙구(Центральный) 교통 공항이 바르나울에서 17km지점에 위치해 있다. 기후 자매 도시 미국 플래그스태프 스페인 사라고사 중국 바이청 시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2007) 카자흐스탄 외스케멘 (2012) 각주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바르나울 알타이의 관광 러시아의 도시 알타이 변경주 러시아의 변경주의 행정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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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8B%9C%EC%95%84%C2%B7%ED%83%9C%ED%8F%89%EC%96%91%20%EC%A7%80%EC%97%AD%20%EC%9D%B8%ED%84%B0%EB%84%B7%20%EA%B5%AD%EA%B0%80%20%EB%8F%84%EB%A9%94%EC%9D%B8%20%EA%B4%80%EB%A6%AC%EA%B8%B0%EA%B4%80%20%ED%98%91%ED%9A%8C
아시아·태평양 지역 인터넷 국가 도메인 관리기관 협회
아시아·태평양 지역 인터넷 국가 도메인 관리기관 협회(APTLD, Asia-Pacific Top Level Domain Association)는 아태지역의 도메인 이름 등록정책 및 관련 기술 정보 교류를 목적으로 지난 1998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2003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법인이 설립되어 운영중이다. 영문 약칭 APTLD로 많이 불린다. 인터넷 관련 단체 도메인 네임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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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9D%B5%EC%84%A0%EC%83%9D%EB%AC%98
이익선생묘
이익선생묘(李瀷先生墓)는 경기도 기념물 제40호로 안산시 일동 555에 있다. 수원-인천간 산업도로가 바라보이는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묘소의 석물로는 묘비(墓碑)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봉분의 규모는 600×550×220cm이다. 묘소로 오르는 길은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무덤 앞에 안내판이 있다. 묘소 우측에는 사당이 있다. 그의 묘는 직계 후손이 없어 방치되었으나 1967년 5월 성호이익추모회에 의해 묘역이 정비되고 묘비와 향로석·망주석 등이 새로이 세워졌다. 같이 보기 이익 (1681년) 참고자료 경기도의 기념물 상록구 조선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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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8%88%EC%84%B1%EB%A9%B4
금성면
금성면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금성면(錦城面)은 충청북도 제천시의 면이다. 금성면(錦城面)은 충청남도 금산군의 면이다. 금성면(金城面)은 전라남도 담양군의 면이다. 금성면(金城面)은 경상북도 의성군의 면이다. 금성면(金城面)은 경상남도 하동군의 면이다. 금성면(金城面)은 강원도 김화군의 면이었다. 현재 북측의 김화군의 중심지가 되어 면중심부가 김화읍 (김화군)이 되어있다. 같이 보기
19546
https://ko.wikipedia.org/wiki/1510%EB%85%84%EB%8C%80
1510년대
1510년대는 1510년부터 1519년까지를 가리킨다. 사건과 동향 1510년 - 삼포 왜란이 일어남.
13838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9A%B0%EC%8A%A4%EB%8B%A4%EC%BD%94%ED%83%80%EC%A3%BC
사우스다코타주
사우스다코타주()는 미국 중서부의 주이다. 1889년 11월 2일 노스다코타주와 함께 연방에 가입했다. 사우스다코타주는 북쪽으로 노스다코타주, 동쪽으로 아이오와주와 미네소타주, 남쪽으로 네브래스카주, 서쪽으로 와이오밍주와 몬태나주와 접한다. 러시모어 산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역사 초기의 역사 백인 탐험가들이 처음으로 도착하기 전에 사우스다코타 지방에는 4개의 주요 인디언 종족들이 살았다. 키오와 족은 블랙힐스 지방을 차지하고, 아리카라 족은 샤이엔 강의 입구 근처에 있는 미주리 강을 따라 살았다. 샤이엔 족 인디언들은 북동부로부터 이 지방으로 건너와 화이트 강과 블랙힐스 지역으로 이동하여 키오와 족을 강제 퇴거시켰다. 수족 혹은 라코타 족과 다코타 족은 1700년대의 시작에 현재의 미네소타로부터 사우스다코타로 건너왔다. 그들은 들소 떼를 따라다닌 사냥꾼과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결국 수많은 다른 인디언 단체들을 사우스다코타 밖으로 밀어냈다. 탐험과 모피 교역 1682년 르네-로베르 카블리에 드 라 살은 미시시피강 시스템에 의하여 배수된 모든 대지를 프랑스를 위한 주장을 하였다. 이 광대한 영토는 미주리 강의 물이 미시시피 강으로 흘러가는 이유로 현재의 사우스다코타를 포함하였다. 프랑스계 캐나다인 탐험가들 프랑수아와 루이-조제프 라 베른드리는 사우스다코타 지역을 방문한 첫 백인들로 알려졌다. 1743년 두 형제는 자신들이 거기에 있었음을 증면하는 데 오늘날 포트피어 대지 근처에 납 접시를 묻었다. 1913년 학교 어린이들이 그릇을 찾고 사우스다코타주립 역사 박물관이 지금 소유하고 있다. 1762년 프랑스는 미시시피 강 서부의 대지를 스페인에게 주었다. 1800년 스페인은 프랑스에게 반환하였다. 1803년 미국은 루이지애나라 불리는 이 영토를 프랑스로부터 매입하였다. 1785년경 프랑스의 모피 교역인 피에르 도리옹이 현재 양크턴 근처에 있는 제임스 강 유역 하류에 도착하였다. 그는 사우스다코타 지방에서 영구적으로 정착한 첫 백인이 되었다. 1804년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루이지애나 준주를 탐험하고 태평양으로 향하는 산길을 가리키는 데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를 보냈다. 8월에 탐험가들은 현재 엘크포인트 근처에 처음으로 사우스다코타 지방에 야영을 쳤다. 그들은 지방을 통하여 미주리 강을 따라갔다. 루이스와 클라크는 1806년 태평양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다시 지방을 지나갔다. 지방에서 풍족한 모피를 지닌 동물들에 관한 그들의 보고들은 증가하는 모피 교역자들의 수를 끌어들였다. 탐험가들은 또한 많은 인디언 종족들과 우호적 관계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포트피어의 대지에 배드 강의 입구에서 1817년 가장 중요한 교역지가 지어졌다. 이 홀로의 교역지는 사우스다코타에서 첫 영구적 정착지가 되었다. 그 교역지는 프랑스의 교역인 조제프 라 프랑부아즈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사우스다코타 인디언들에 대항하는 첫 큰 규모의 군사 활동이 1823년에 시작되었다. 아리카라 종족은 미주리의 부총독 윌리엄 애쉴리 장군이 이끄는 모피 교역파들을 공격하였다. 연방 정부는 종족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헨리 리번워스 대령 아래의 군인들을 보냈다. 아리카라 족의 전통적 원수인 수 족이 군인들에게 가입하였다. 1831년 옐로보트 증기선이 세인트루이스로부터 포트테쿰셰로 들어가는 데 미주리 강을 항해하였다. 그 일은 증기선들이 미주리 강 상류를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모피 교역은 몇년 동안 번영하였으나 1850년에 쇠퇴하였다. 모피를 지닌 동물들의 수가 감소하기 시작하고 실크가 더욱 유행적이 되면서 모피를 위한 요구는 떨어졌다. 농업적 정착 노스다코타와 사우스다코타가 된 대지는 1812년과 1834년 사이에 미주리 준주의 일부였다. 동부 부분은 후에 차례로 미시간, 위스콘신, 아이오와와 미네소타 준주들에 속하였다. 서부 부분은 1854년 네브래스카 준주의 일부가 되었을 때에 미주리 준주의 일부로 남아있었다. 1850년대 이전에 사우스다코타에서 모든 백인 정착지들은 미주리 강을 따라 모피 교역에 관계를 지어왔다. 농업적 정착이 185년대 후반에 동부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1857년 미국 의회는 미네소타가 주로 승격되는 선언을 통과시켰다. 이 선언은 빅수 강 동부의 새로운 주의 서부 경계를 세웠다. 그러나 미주리 강으로 서부로 향하는 풍족한 농장 지대들에 대하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비지니스인과 정치인들은 돈을 만드는 기회를 보았다. 그들은 빠르게 대지 회사들을 형성하고, 선택적인 위치들의 통치를 얻고, 타운 지대를 설계하였다. 정착지들은 수폴스, 메더리, 플랜드로와 다른 포인트들에 설립되었다. 1858년 양크턴 수 족이라 불리는 수 족의 단체가 빅수 강과 미주리 강 사이에 있는 남도부 모퉁이에서 자신들의 대지를 포기하는 데 정부와 조약을 맺었다. 이 대지의 개장은 사우스다코타 지방에 더 많은 정착자들을 끌어들였다. 양크턴, 버밀리언과 본홈이 1859년에 창립되었다. 준주 시대 의회는 1861년 다코타 준주를 창조하였다. 그 준주는 오늘날의 노스다코타와 사우스다코타, 그리고 몬태나와 와이오밍의 거의를 포함하였다. 윌리엄 제인이 다코타 준주의 초대 총독이었고, 양크턴이 수도였다. 인디언 전쟁들은 1860년대 동안에 준주의 재빠른 정착을 예방하였다. 가장 중요한 전쟁들 중에 하나는 수 족의 지도자 레드 클라우드의 이름을 딴 레드 클라우드 전쟁이었다. 정부는 몬태나의 새롭게 발견된 금광으로 파우더 강 컨트리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레드 클라우드는 도로가 인디언들의 사냥터들을 망치리라고 믿었다. 1866년 수 족은 도로를 위하여 검사하는 데 보내진 군인들을 공격하였다. 인디언들은 1869년 정부가 그들의 요구들을 만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급슥을 하였다. 그해에 포트래러미 조약에서 정부는 파우더 리버 컨트리에서 그 군사 주둔지들을 포기하는 데 동의하였다. 정부는 또한 인디언들에게 돈을 내지 않고 지역을 통하여 아무 도로들을 건설하지 않는 것을 약속하였다. 조약은 미주리 강 서부에 있는 오늘날의 사우스다코타에 있는 모든 대지를 덮은 그레이트 수 족 보호구역을 창조하였다. 1874년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군사 원정대가 수 족이 포트래러미 조약의 폭력으로 믿은 블랙힐스로 들어왔다. 정부는 요새를 위한 어울리는 지대를 찾는 데 탐험에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은 오늘날의 커스터 근처에서 금을 발견하였다. 그 소식은 지역에 시굴자들의 돌진을 가져왔다. 1876년 투기자들은 오늘날 리드와 데드우드 사이에서 더욱 풍부한 금의 매장량을 발견하였다. 또다른 앞을 다투면서 달아나는 금의 추구자들이 이어졌다. 데드우드의 타운은 광업 운영의 중심지로서 치솟았다. 그 타운은 국경 지방에 법률이 없는 평판과 함께 떠들석하고 넓게 열린 타운이 되었다. 와일드 빌 히콕, 캘러미티 제인과 데드우드의 다른 시민들은 유명한 서부의 인물이 되었다. 백인 정착자들에 의한 블랙 힐스의 침입은 크레이지 호스와 시팅 불이 이끄는 인디언들의 반란들을 일으켰다. 1877년 미국 정부는 수 족 인디언들로부터 블랙힐스의 소유를 차지하였다. 주 족의 대부분은 항복하고 미주리 강 서부의 보호구역들에 정착하였다. 보호구역들에서 수 족은 들소를 따라가는 자신들의 낡은 생활 스타일을 포기하여야 했다. 1889년 워보카라 불리는 파이유트 인디언이 유령의 춤이라 불리는 종교적 운동을 시작하였다. 많은 수 족들이 인디언들의 낡은 생활 방향을 복구하는 데 약속한 이 운동에 연루되었다. 정부의 공무원들은 유령의 춤을 오역하였다. 그들은 백인 정착자들에게 위협으로 숙고하여 군대를 불러들였다. 1890년 인디언 경찰은 시팅 불을 체포하는 데 보내졌다. 그의 어떤 부하들은 샤이엔 강에서 수 족 단체의 빅 푸트 추장에게 가입하였다. 연방군들은 인디언들과 만나 그들을 운디드 니 크리크에 기마대 캠프로 데려갔다. 총소리가 들리자 군인들은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빅 푸트 추장을 포함하여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주 지위 거대한 대지의 붐이 블랙힐스에서 금의 발견을 따라갔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금을 추구하러 왔다. 그러나 많은이들은 사우스다코타의 다른 부분에 있는 농장들로 더 많이 왔다. 1878년 거대한 대지의 돌진이 시작되었다. 1878년과 1887년 사이에 농부들과 투기꾼들이 사우스다코타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정부에 의하여 제공된 공공 대지의 2천 4백만 에이커 이상을 얻었다. 1870년 지방은 12,000명 이하의 인구를 가졌다. 1890년으로 봐서 인구는 348,600명으로 올랐다. 정착자들의 대부분은 이웃하는 주들에서 왔으나, 많은 이들은 독일, 노르웨이, 러시아, 영국과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왔다. 철도 건설도 또한 이 시기에 붐을 일으켰다. 1880년으로 봐서 2개의 철도들이 사우스다코타 동부에서 미주리 강으로 가로질렀다. 많은 타운들이 철도 선들을 따라 솟아 올랐다. 1870년대 후반과 1880년대에 소의 방목자들이 미주리 강 서부의 대지들로 들어왔다. 광부와 상인들의 블랙힐스로 돌진과 인디언 대리들과 군사 주둔지들의 필요함들은 육류를 위한 거대한 요구를 창조하였다. 1870년대에 다코타 준주를 2개의 부분들로 나누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주요 인구의 중심지들은 준주의 북동부와 남동부의 모퉁이에서 멀리 떨어졌다. 정착자들의 두 단체는 갈라진 정부들을 개발하는 것을 원하였다. 1889년 2월 의회는 오늘날 사우스다코타와 노스다코타 사이의 경계를 세웠다. 1889년 11월 2일 노스다코타와 사우스다코타는 각각 39번째와 40번째의 주로서 합중국에 가입하였다. 사우스다코타 주민들은 공화당 소속의 아서 C. 멜레트를 초대 주지사로 선출하였다. 사우스다코타가 주로 승격된 후 피어가 주도로 되었다. 1900년대 초반 사우스다코타주의 인구는 주로 승격되면서 거의 350,000명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주로서의 첫 10년 동안에 적은 번창이 일어났다. 엄한 가뭄이 1889년에 시작되어 1897년까지 계속되었다. 1890년 그레이트 수 족 보호구역의 일부는 정착지로 열렸으나 약간의 정착자들이 왔다. 1900년대 초반에 사우스다코타주에 번영이 돌아왔다. 가뭄이 끝나고 농산물의 가격들이 좋았다. 정부는 서부에 더 많은 인디언의 대지들을 열고 수천명의 정착자들이 사우스다코타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대지의 어떤 것은 거대한 대지의 추첨 분배를 통하여 제공되었다. 주민들은 대지를 위하여 등록하고 만약 추첨 분배에서 행운이라면 주장들을 받았다. 특별한 훈련들이 추첨 분배를 차지하는 데 미국의 모든 부분에서 온 주민들을 데려왔다. 1910년으로 봐서 인구는 거의 584,000명으로 치솟았다. 1900년과 1910년 사이에 철도들이 주에서 트랙의 1,100 마일(1,770 킬로미터) 이상을 추가하였다. 트랙의 대부분은 주의 자라나는 양과 소의 방목지들을 봉사하는 데 미주리 강 서부에 놓였다. 경제의 붐과 파산 사우스다코타주의 역사를 통하여 주의 경제의 붐과 파산은 그 개발에 영향을 주었다. 1900년대의 첫 10년간 경제의 붐은 1911년 또 다른 가뭄이 시작되면서 끝났다. 주 정부는 곧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는 데 디자인된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1915년 주의 입법자들은 은행 예금의 안정을 보증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후에 주는 농부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빌려주었다. 그 일은 탄광을 가져오고, 시멘트 공장을 세우고 우박에 의한 손해에 대항하는 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사우스다코타주는 1930년대 안으로 이 비지니스들의 대부분을 유기하였다. 1910년대 후반 동안에 다른 경제의 붐이 시작되었다.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에 사우스다코타주의 농산물 가격이 증가하였다. 1920년대에 수확물이 잘 재배되었다. 1925년 주의 경제는 낮은 농산물 가격과 은행의 실패의 이유로 고통을 겪었다. 그러고나서 1930년 주의 역사상 최악의 가뭄과 메뚜기의 재앙이 시작되었다. 1932년과 1935년에 어떤 구제를 제외하고는 가뭄이 10년간 지속되었다. 그 일은 블랙 블리자드라고 불리는 황진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추가로 전국이 대공황에 의하여 타격을 받았다. 사우스다코타주의 농산물 가격이 더욱 낮게 떨어졌다. 1930년 사우스다코타주의 인구는 692,849명으로 도달하였다. 1940년으로 봐서 인구가 642,961명으로 떨어졌다. 연방 정부는 곤란받는 농부들을 도우는 데 돈과 직업들을 마련하였다. 민간 산림 보호대는 블랙힐스의 숲들에서 수천명의 젊은이들에게 직업들을 주었다. 공공 사업 촉진국은 다리, 건물과 다른 프로젝트들을 건설하는 데 돈을 마련하였다. 정부는 또한 뿌리가 물기를 위하여 깊숙히 도달하는 잔듸들과 함께 밀을 재배하는 주의 농부들을 도왔다. 주의 다른 곳들에서 고통에 굳은 대조에서 리드와 데드우드는 1930년대에 번영을 경험하였다. 금의 가격에서 연방 정부에 의하여 증가는 홈스테이크 광산에서 작은 붐을 제웠다. 많은 실업자 남성들이 거기에 직업을 찾았다. 1900년대 초반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에 사우스다코타주의 농부들은 식량 공급에서 생산 기록들을 깼다. 증가하는 농기구 사용은 농부들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하였으나 동시에 많은 종부들이 할 일이 없게 되었다. 수천명의 농부들이 직업을 찾으로 타운이나 도시들로 이주하였으나 많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결과로서 주민의 큰 수, 대부분 젊은이들이 주를 떠났다. 농사에 의지를 감소시키는 데 사우스다코타주는 그 경제를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이 효과는 미주리 강 분지를 개발하고 관광업을 증가하여 새로운 산업을 끌어들이는 것을 포함하였다. 1944년의회는 미주리 강 분지 프로젝트를 위임하였다. 이 큰 프로그램은 분지를 통하여 전력, 홍수 조절과 관개를 마련하는 데 디자인되었다. 프로젝트의 일부는 미주리 강에 4개의 수력 발전 댐의 건설을 요구하였다. 댐들은 프랜시시 케이스, 루이스 앤드 클라크, 오어헤와 샤프 호수들을 창조하였다. 많은 새로운 고속도로들들 따라 이 호수들은 주에 추가적인 관광객들을 끌어들였다. 관광업은 농업에 이어 사우스다코타주에서 2번째로 가장 큰 산업이다. 냉전의 시기 동안에 정부는 사우스다코타주에서 국방 프로젝트들의 수를 지었다. 이 프로젝트들은 래피드시티 근처에 있는 엘즈워스 공군 기지를 포함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1990년대의 첫 절반에 모든 미사일들을 치웠다. 1972년 대량의 비가 래피드시티의 캐니언 레이크 댐이 터지는 원인을 일으킨 후, 홍수가 래피드시티와 둘러싸인 지역을 휘쓸었다. 238명의 주민들이 사망하고 1억 6천 5백만 달러의 재산 피해를 일으켰다. 1873년 운디드 니의 마을은 아메리카 인디언 운동의 회원들을 포함한 대략 200명의 무장한 인디언들에 의하여 포획되었다. 활동은 인디언들을 근심시키는 연방 정책들에 대항하는 데 디자인되었고 또한 오글랄라 수 족과 테턴 수 족들 중에 종족의 논쟁의 결과를 가져왔다. 영유 기간 동안에 영유자와 연방 권위자들 사이에 총 싸움이 일어났다. 영유는 71일 동안 계속되었고 2명의 사망과 300명 이상의 체포의 결과를 가져왔다. 공무원들은 항의자들의 고소들을 공부하는 데 약속하였다. 1900년대 후반 1970년대에 젊은이들의 떠남이 느려졌으나 지속적으로 근심을 남겼다. 주는 경제를 넓히고, 새로운 직업들이 상업과 산업에 창조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 농업은 저가격과 높은 이득 비율로부터 고통을 겪었다. 어떤 농부들은 자신들의 대지를 잃었다. 1990년대 초반으로 봐서 농부들의 소득들이 다시 오르기 시작되었다. 1980년 미국 대법원은 8개의 수 족 인디언 종족들에게 대략 1억 5백만 달러를 내는 명령을 내렸다. 지불은 1877년 정부에 의하여 포획된 블랙힐스에 있는 인디언 대지를 위하였다. 1987년 사우스다코타주는 주의 분배 추첨을 시작하였다. 1989년 데드우드는 카지노 도박을 입법화하였다. 1990년대에 입법적인 도박에 세금들은 주의 세입의 중요한 근원이 되었다. 21세기 2003년 전 주지사이자 주의 단 1명의 하원 윌리엄 J. 쟁클로가 교통 사고로 오토바이 운전자를 살해했다. 그는 살인, 무모한 운전과 속력을 내는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04년 그는 벌금을 내고 징역 100일을 선고받았다. 그는 하원으로부터 사임하고 주는 그의 자리를 대신하는 특별 선거를 치렀다. 지리 사우스다코타는 미국의 중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미국통계국에 의해, 미국 중서부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대평원의 북쪽에 위치한 노스다코타와 북부를, 네브래스카와 남부를, 아이오와와 미네소타와 동부를, 그리고 와이오밍과 몬태나와 서부가 인접해 있다. 로키산맥의 동쪽 앞에 있는 경계를 이룬 6주 중 하나이다. 서부의 문화, 경제 및 지형이 중서부보다 서쪽에 가깝다. 총 면적은 199,743 km2이며, 미국 50개 주 중 17위이다. 해발 2,207m의 하니봉이 주내 가장 높은 지점이며, 해발 294m의 빅 스톤 호수가 주내 최저 지점이다. 미국의 지리적 중심지가 버트 카운티의 캐슬 락의 서쪽 27km에 자리를 잡고 있다. 북미 대륙의 도달 불능 극점이 알렌과 카일 사이에 있고 가장 가까운 해안선에서 거리는 1,638 km이다. 미주리 강이 사우스다코타의 중앙부를 통해서 남북으로 흐르고 있으며, 이 강은 주 내 가장 크고 긴 강이다. 미주리 강 동부는 빙하로 형성된 낮은 언덕과 많은 호수가 있다. 비옥한 농장 지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주리 강 서쪽은 깊은 계곡과 기복하고 계속 평원으로 구성된 지역이다. 미주리 강에 건설된 댐은 오아헤 호수, 샤프 호수, 프랜시스 케이스 호수, 루이스 앤 클라크 호수 등 대형 인공 호수를 형성하고 있다. 기타 하천으로 샤이엔 강, 제임스 강, 빅 수 강 및 화이트 강이 있다. 지역과 지질 사우스다코타는 일반적으로 동부, 서부 및 블랙 힐스의 세 지역으로 분류된다. 미주리 강이 지형, 사회 및 정치적 측면에서 동부와 서부의 경계를 분할하고 있다. 서부에 있는 블랙 힐스 주변은 분명히 다른 외형의 특징으로 분류된다. 주민들은 블랙 힐스를 서부에 포함, 미주리 강 서쪽을 웨스트 리버, 동쪽을 이스트 리버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부는 대체로 서부보다 강우량이 많고, 낮은 지형이다. 더 세분하면, 코토 데 프레리(고원), 디섹티드틸 평원, 그리고 제임스 강 계곡 유역이 있다. 코토 데 프레리는 동쪽 미네소타 강에서 서쪽 제임스 강 유역 사이에 있는 고원이다. 그 서쪽은 제임스 강 분지이며, 대체로 낮고 평평하고 깊이 침식된 땅이고, 주 내를 남북으로 흐르는 제임스 강을 따라 있다. 디쎅티트틸 평원은 굴곡진 언덕과 비옥한 토양의 지역이며, 아이오와 주와 네브래스카의 대부분과 사우스다코타의 남동쪽 구석에 펼쳐져 있다. 약 200만년 전에 시작한 플라이스토세에 퇴적된 층이 주 동부의 대부분을 덮고 있다. 주내에는 가장 새로운 바위침전물층이 있고, 틸로 알려진 큰 바위와 토양이 퇴적된 연속된 빙하작용으로 형성되었다. 대평원은 주내 서쪽 3분의 2의 대부분을 덮고 있다. 미주리 강 서안에서 더 건조한 바위 지형이, 굴곡진 구릉, 평원, 계곡, 그리고 측면이 험난하고 정상이 편평한 버트라는 언덕이 있다. 생태계 블랙 힐스 사우스다코타의 대부분은 온화한 초원형 생물군계이다. 초원과 경작지가 지역의 대부분을 덮고 있지만 느릅나무와 버드나무 같은 활엽수가 강 근처 또는 방풍림으로 보인다. 국립공원과 보호구역 미국 국립공원국의 관할 지역은 다음을 포함한다: 윈드 케이브 국립공원, 1903년 지정 배드랜드 국립공원, 1978년 지정 주얼 케이브 국립기념공원 루이스와 클락 국립역사길 기후 사우스다코타는 대륙성기후를 가지고 있고, 사계절이 분명하여 서늘하고 건조한 겨울과 덥고, 약간 습도가 높은 여름이 있다. 여름의 평균 최고 기온은 32°C에 육박하는 경우도 많지만, 밤에는 16°C 근처까지 내려 간다. 매년 여름에는 37 °C 보다 매우 덥고 건조한 날이 계속될 때도 많다. 겨울은 서늘해서 1월의 평균 최고 기온은 영하이며, 최저 기온은 -12 °C 이하가된다. 과거 최고 기온은 2006년 7월 15일 유스타에서 기록된 49°C, 과거 최저 기온은 1936년 2월 17일에 매킨토시에서 기록된 -50°C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아건조의 북서부에서 381mm, 다소 습한 남서부에서는 635mm 정도이지만, 블랙 힐스의 리드를 중심으로하는 지역은 762mm에 달하기도 한다. 여름은 강풍과 천둥과 우박을 동반하는 뇌우되는 경우가 많다. 주 동부는 토네이도 영향권에 들어 있어, 매년 평균 30회의 회오리가 발생한다. 겨울에는 눈보라와 폭풍우를 동반한 열악한 기상 조건이 될 때도 있다. 경제 서비스업 서비스업은 사우스다코타주의 국내총생산과 고용에서 대략 5분의 4를 차지한다. 서비스업들은 주의 대도시들에 중심을 잡았다. 수폴스는 주의 지도적인 금융의 중심지이다. 미국에서 가장 큰 금융 서비스 회사 시티그룹이 수폴스에 기지를 둔 어떤 운영을 가졌다. 몇몇의 다른 금융 회사들도 도시에 기지를 두었다. 주의 많은 모텔과 식당들은 수폴스 근처와 러시모어 산 같은 관광지들에 집중되어 있다. 연방 정부는 인디언 보호구역, 래피드시티 근처의 엘스워스 공군 기지와 주의 국립 공원 지대에 많은 주민들을 고용한다. 나라에서 가장 큰 인디언 보호구역의 2개가 사우스다코타주에 있다. 트럭 회사와 철도들은 주가 대부분의 주요 시장들로부터 거대한 거리에 놓여있는 이유로 주요 역할을 한다. 제조업 사우스다코타주의 제조업은 거의 주의 농산물을 가공하는 데 봉납된다. 식품은 주의 제조품들 중의 지도적인 타입이다. 정육 가공과 포장의 공장들은 수폴스와 양크턴에 있다. 낙농제품의 공장들은 사우스다코타주의 동부에서 운영된다. 컴퓨터는 노스수시티에서 만들어진다. 전자 득점 개시판과 다른 전자 디스플레이 시스템들은 브루킹스에서 만들어진다. 교통 수단의 주요 타입들은 트럭 트레일러와 자동차 부품을 포함한다. 농업 농장지대는 사우스다코타주 대지 지역의 대략 90 퍼센트를 덮고 있다. 주의 동부에 작은 농장들이 놓여 있는 동안에 주의 서부와 중부에는 큰 농장들이 놓여있다. 관개는 주에서 많은 농장들에 쓰이고 있다. 수확물은 주의 농업 소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옥수수, 콩과 밀은 사우스다코타주의 지도적인 수확물이다. 주의 동부는 옥수수와 콩 재배를 위한 주요 지방이다. 봄밀은 사우스다코타주의 북부에서 주로 생산되고, 겨울밀은 주의 중부에서 주로 재배된다. 사우스다코타주는 봄밀 생산에서 지도적인 주들 중에 랭킹으로 들어와있다. 사우스다코타주는 또한 아마 씨, 건초, 귀리, 호밀과 해바라기 씨의 주요 생산 주들 안에 랭킹에 들어와 있기도 한다. 가축과 축산물은 사우스다코타주 농장 소득의 절반 이하를 차지한다. 사우스다코타주는 육우, 돼지, 양의 지도적인 사육지이다. 육우는 서부 부문에 있는 방목지들에서 떼를 모여 산다. 방목자들은 가끔 자신들의 송아지와 1년된 소들을 주의 동부 혹은 이웃하는 주들에 있는 사육자들에게 운송한다. 사육자들은 소들을 시장으로 보내기 전에 살을 찌우는 편이다. 양은 사우스다코타주를 통하여, 특히 주의 북서부에서 사육된다. 주는 양모의 지도적인 생산지이다. 주의 닭, 달걀, 거위와 칠면조의 대부분은 동부에서 생산·사육된다. 농부들은 동부를 통하여 젖소를 기르고 우유는 농장 소득의 중요한 근원이다. 광업 사우스다코타주의 중요한 광물들은 시멘트, 깨진 돌, 천연가스, 석유와 모래와 자갈이다. 점토와 석회암이 섞여 이루어진 시멘트는 페닝턴에서 생산된다. 깨진 돌은 주의 남동부와 남서부에서 생산된다. 모래와 자갈의 대부분은 주의 동부에 있는 구덩이들로부터 왔다. 커스터, 폴스리버와 하딩 카운티는 사우스다코타주의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의 중심지들이다. 주민 2000년 미국 인구 조사국은 사우스다코타주의 인구가 754,844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주의 인구는 1990년으로 본 696,004명에서 8.5 퍼센트나 증가하였다. 2000년 조사국에 의하면 사우스다코타주는 인구에서 50개의 주들 중에 46위로 들어와있다. 사우스다코타 주민의 대략 40 퍼센트는 메트로폴리탄 지역들에 산다. 주는 3개의 메틀폴리탄 지역들이 있다 - 래피드시티, 수시티 (아이오와주)와 수폴스. 사우스다코타주는 대도시들의 번창에 자극하는 데 거대한 제조업이 없다. 애버딘, 래피드시티, 수시티와 워터타운 만이 20,000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들이다. 대부분의 타운들은 둘러싸인 농업 지방들에 복무하는 데 설립되었고 주의 주요 농장 지대인 미주리 강 동부에 있다. 많은 타운들은 한번 광업이 번영하고 관광업이 번창한 블랙힐스에서 자라났다. 사우스다코타 주민의 8 퍼센트 이상은 아메리카 인디언 계통이며 알래스카주와 뉴멕시코주를 제외한 여러 주보다 더 높은 퍼센티지를 가지고 있다. 사우스다코타주의 다른 큰 인구 단체들은 독일, 노르웨이, 아일랜드와 영국 계통의 주민들이다. 아시아인과 히스패닉은 주 인구의 3 퍼센트 이하를 차지한다. 각주 외부 링크 사우스다코타 주정부 홈페이지 미국의 주 미국 중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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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A%B9%EC%84%B1%20%EC%83%81%ED%83%9C%20%ED%95%A8%EC%88%98
특성 상태 함수
통계역학에서 특성 상태 함수(characteristic state function)란 어떠한 앙상블의 분배함수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만약 분배함수 P가 또는 로 주어지면 Q는 P라는 앙상블의 특성 상태 함수라 불린다. 예 작은 바른틀 앙상블은 를 만족한다. 따라서, 작은 바른틀 앙상블의 특성 상태 함수는 온도와 엔트로피의 곱 다. 정성적으로 말하면 이 양은 특정 온도에서의 엔트로피의 에너지를 나타낸다. 바른틀 앙상블은 을 만족하므로 특성 상태 함수는 헬름홀츠 자유 에너지가 된다. 큰 바른틀 앙상블은 를 만족하므로 특성 상태 함수는 큰 퍼텐셜 다. (균일한 계의 경우는 다.) 등온-등압 앙상블은 를 만족하므로 특성 상태 함수는 기브스 자유 에너지다. 통계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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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B9%B4%EC%95%BC%EB%A7%88%EC%84%B1
오카야마성
오카야마성()은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에 있는 평산성으로 국가지정 사적이다. 다른 이름으로 우성(烏城), 긴우성(金烏城)이다. 에도 시대에는 오카야마번의 번청으로 사용되었다. 개요 성곽의 형식은 제곽식 평산성이다. 오카야마 평야 중심을 흐르는 아사히가와 강을 천연의 해자로 이용하고 있다. 오카야마 성의 천수는 검은 옷으로 칠해진 판자에서 까마귀성이라는 뜻의 우성이라 불리었고, 하리마의 백로성으로 불리는 히메지성과 대비된다. 이 천수는 4중6계의 복합형식으로 아즈치성의 천수를 모방한 것이라 전해진다. 메이지 시대에 어전, 망루, 문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공습을 받아 천수, 이시야마 문이 소실되었다. 현재는 망루, 돌담, 내측 해자가 남아 있다. 재건한 천수, 아카즈노 문, 로카 문, 로쿠쥬이치간기우에 문, 담의 일부가 존재한다. 현존하는 쓰키미 망루, 니시노마루 니시테 망루는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있고,《오카야마 성터(岡山城跡)》로서 사적에도 지정되어 있다. 그 밖, 교바시고 문이 오카야마 시 오쿠시에 이축되어 현존한다. 현재 성터는 우조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 주위에는 니노마루 터에 산요방송, 하야시바라 미술관, 오카야마 시민회관 등이 있다. 산노마루 터에는 오카야마 현청, 오카야마 현립 도서관이 있다. 또, 인접해 있는 다이묘 정원인 고라쿠엔은 미토시의 가이라쿠엔, 가나자와시의 겐로쿠엔과 나란히 일본 3대정원으로 유명하다. 최근 혼마루 어전의 재건이 검토되었지만, 2005년도 시점에서 재건 전망은 그리 밝지는 않다. 역사 남북조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쇼헤 연간(1346년 ~ 1369년) 우와가미 다카나오가 이시야마타이(오카야마)에 성을 축성했다고《비전군기(備前軍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 후, 센고쿠 시대에 가나미쓰씨가 거성으로 삼았다. 1570년 우키타 나오이에가 가나미쓰 무네타카를 모살하고, 1573년 입성, 성주로 되었다. 나오이에는 오카야마에 성 밑 마을을 조성하고, 오카야마성을 개축했다. 1590년 ~ 1597년 나오이에의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는 도요토미정권하에 57만4천 석의 대 다이묘가 되었다. 그래서, 이에 상응해 성도 8년에 거쳐 개수한다. 이렇게 해서 근대 성곽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에도 시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후, 서군에 속했던 히데이에는 하치조지마 섬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52만 석으로 오카야마 번의 번주로 임명되어 입성한다. 그리고, 성의 수리와 바깥의 해자를 팠다. 바깥의 해자 공사에 농민뿐만 아니라 무사도 공사에 참여해 불과 20일 만에 완성했다. 이 일을〈하쓰카보리(二十日堀)〉라고 부른다. 2년후 히데아키가 아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고바야가와 가문은 대가 끊기었다. 1603년 이케다 다다쓰구가 28만 석에 입봉되어 입성한다. 1615년 다다쓰구의 동생 다다카쓰가 31만 5천 석에 입봉되어 아와지시마 섬에서 오카야마 번으로 옮기게된다. 성곽을 수리하고, 혼마루 어전을 조성하고, 오데 문을 수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문화재인 쓰기미 망루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1632년 다다카쓰의 아들 미쓰나카가 돗토리로 전봉되어, 이케다 미쓰마사가 31만 5천 석에 입봉되어 돗토리로부터 오카야마로 오게된다. 이후 막부 말기까지 미쓰마사계 이케다씨의 거성이 되었다. 1687년 미쓰마사의 아들 쓰나마사가 14년에 걸쳐 고라쿠엔을 조성한다. 메이지 시대 이후 1873년(메이지 6년) 폐성령에 따라 천수, 쓰키미 망루, 니시노마루 니시테 망루, 이시야마 문을 남기고 그 밖에 다른 건축물은 파괴되었다. 쇼와 초기 천수, 쓰키미 망루, 니시노마루 니시테 망루, 이시야마 문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1945년(쇼와 20년) 6월 29일 오카야마 공습으로 천수, 이시야마 문이 소실되었다. 1950년(쇼와 25년) 문화재 보호법 재정에 따라 남아있는 쓰키미 망루, 니시노마루 미시테 망루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64년 ~ 1966년 천수를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한다. 동시에 아카즈노 문, 로카 문, 로쿠쥬이치간기우에 문, 담의 일부도 그때 재건되었다. 1987년(쇼와 62년)〈오카야마 성터〉로해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96년(헤세 8년) 축성 400년 기념사업으로 창건당시와 같은 금색의 샤치호코를 천수에 설치했다. 샤치호코에는 금박을 입혔다. 2006년(헤세 18년) 4월 6일 일본 100대 명성으로 선정되었다. 교통 JR 서일본 오카야마역 하차, 오카야마 전기궤도 히가시야마(東山) 행, 시로시타(城下) 역 하차 도보로 5분 외부 링크 오카야마 성 오카야마현의 성 오카야마시의 건축물 오카야마현의 중요문화재 일본 100 명성 1597년 완공된 건축물 미노 이케다씨 우키타씨 고바야카와씨 오카야마현의 박물관 기타구 (오카야마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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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2%B4%EB%B2%8C%EB%A6%AC
킴벌리
킴벌리(Kimberly, Kimberley)는 영어권에서 쓰이는 이름이다. 지명 킴벌리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노던케이프 주의 주도 킴벌리 (노팅엄셔주) 킴벌리 (노퍽주) 킴벌리 (브리티시컬럼비아주) 킴벌리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오스트레일리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에 속하는 9개 지역 가운데 하나 인명 존 우드하우스 (킴벌리 최초의 백작) (1826–1902) 킴벌리 백작 킴벌리 엘리스: 미국의 배우 킴벌리 와이엇: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댄서, 모델 킴벌리 윌리엄스페이즐리: 미국의 배우 킴벌리 브룩스: 미국의 성우 킴벌리 데릭: 미국의 쇼트트랙 선수 킴벌리 닉슨: 웨일스의 배우 킴벌리 월시: 잉글랜드의 싱어송라이터 킴벌리 스튜어드: 미국의 영화 프로듀서 킴벌리 로크: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모델 킴벌리 길포일: 미국의 앵커, 사회자, 변호사 킴벌리 크로스먼: 뉴질랜드의 영화 배우, 영화 각본가, 영화 프로듀서 킴벌리 데이비스: 오스트레일리아의 배우 킴벌리 퀸: 미국의 배우, 영화 프로듀서, 각본가, 영화배우, 텔레비전 배우 킴벌리 J. 브라운: 미국의 배우, 연극 배우, 텔레비전 배우, 영화배우, 성우 킴벌리 아마토: 미국의 배우, 텔레비전 배우, 영화배우 킴벌리 페이지: 미국의 배우, 댄서, 프로 레슬링 선수, 매니저, 영화배우 킴벌리 컬럼: 미국의 배우, 텔레비전 배우, 영화배우 킴벌리 케이츠: 미국의 배우, 텔레비전 배우, 영화 프로듀서, 영화배우 기타 킴벌리 공항: 킴벌리에 위치한 공항으로 국내선 노선만 운항한다 킴벌리 프로세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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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4%89%EB%8D%95%EC%97%AD
봉덕역
봉덕역(Bongdeok station, 鳳德驛)은 전라남도 순천시 황전면 봉덕리에 위치한 전라선의 역이다. 전라선 개량 공사로 선로가 직선화되면서 내구역이 봉덕역으로 개명되고, 역 위치가 이설되었다. 연혁 1960년 3월 11일 : 무배치간이역 등급으로 내구역(內九驛) 영업 개시 1973년 3월 11일 : 을종승차권대매소로 지정 1987년 6월 1일 : 역원무배치간이역으로 변경 1999년 2월 25일 : 전라선 복선 전철화 시행으로 신역사로 이전하며 봉덕역으로 역명 변경 2008년 1월 1일 : 여객 취급 중지 각주 전라남도의 철도역 순천시 (전라남도)의 건축물 순천시 (전라남도)의 교통 1960년 개업한 철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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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682%EB%85%84
1682년
1682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연호 동녕(東寧) 영력(永曆) 36년 청(淸) 강희(康熙) 21년 일본(日本) 덴나() 2년 후 레 왕조(後黎朝) 찐호아(正和) 3년 기년 동녕(東寧) 조왕 정극상(潮王 鄭克塽) 원년 류큐(琉球) 쇼테이왕() 14년 청(淸) 성조 강희제(聖祖 康熙帝) 21년 조선(朝鮮) 숙종(肅宗) 8년 후 레 왕조(後黎朝) 희종(熙宗) 7년 사건 탄생 2월 25일 -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병리학자 조반니 바티스타 모르가니. 사망 조선의 문신 및 학자 미수 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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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9%80%EC%95%84%EB%B9%84%EA%BD%83%EB%8C%80%EA%B3%BC
홀아비꽃대과
홀아비꽃대과(-----科, , 학명: )는 속씨식물군의 단형 목인 홀아비꽃대목(-----目, 학명: )에 속하는 유일한 과이다. 이 과는 본래, 열대와 아열대 지방에 존재하는 초본 또는 목본 식물로 모두 4개 속에 수십 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과의 구성원들은 방향성과 특이한 톱니 모양의 가장자리를 지닌 마주나기잎과 잎자루 사이의 턱잎(꼭두서니과(Rubiaceae)에서 발견되는 턱잎와 비슷한)을 가지며, 꽃은 작고 빛깔이 엷으며 꽃차례가 달려 있다. 꽃잎은 이 과에서는 없으며, 때로 꽃받침이 있다. 꽃은 자웅동체 또는 자웅이체일 수 있다. 과일은 하나의 심피로 이루어진 핵과와 비숫하다. 홀아비꽃대과는 어떤 다른 과와도 밀접한 관계가 없으며, 속씨식물에서 아주 초기에 분기된 계통으로, 진정쌍떡잎식물도, 외떡잎식물도 아니다. 하위 분류 죽절초속(Sarcandra Gardner) 홀아비꽃대속(Chloranthus Sw.) Ascarina J.R.Forst. & G.Forst. Hedyosmum Sw. 계통 분류 2016년 APG IV 분류 체계에서는 홀아비꽃대과만을 포함하는 홀아비꽃대목을 속씨식물군 아래에 분류하며, 이는 2009년 APG III 분류 체계의 분류와 동일하다. 2003년 APG II 분류 체계 및 1998년 APG 분류 체계에서는 홀아비꽃대목을 두지 않고, 속씨식물군 아래 목 없이 홀아비꽃대과를 인정했다. 1992년 손 분류 체계는 홀아비꽃대과를 목련강(Magnoliopsida[=속씨식물]) 목련아강(Magnoliideae[=쌍떡잎식물]) 목련상목(Magnolianae) 목련목(Magnoliales)아래에 분류했다. 1981년 크론퀴스트 분류 체계는 홀아비꽃대과를 목련문(Magnoliophyta[=속씨식물]) 목련강(Magnoliopsida[=쌍떡잎식물]) 목련아강(Magnoliidae) 후추목(Piperales) 아래에 분류했다. 1980년 달그렌 분류 체계에서는 홀아비꽃대과를 목련강(Magnoliopsida[=속씨식물]) 목련아강(Magnoliideae[=쌍떡잎식물]) 목련상목(Magnolianae) 홀아비꽃대목(Chloranthales) 아래에 분류했다. 각주 식물의 과 1820년 기재된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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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한
홍익한(洪翼漢, 1586년 12월 31일(음력 11월 22일) 출생 ~ 1637년 3월 30일(음력 3월 5일) 순국)은 17세기 시절 조선 인조 시대의 문신(文臣) 겸 관료 출신이며 시조 시인 겸 수묵 서화가 등으로도 활약했던 서예가 겸 정치인 출신으로 1636년 당시의 병자호란(丙子胡亂) 시절의 3대 항쟁 열사였던 삼학사(三學士)의 일원이었다. 개명(改名)하기 이전의 아명(兒名)은 홍습(洪霫)이며, 자(字)는 택원(澤遠)·백승(伯升)이고, 아호(雅號)는 화포(花浦)·운옹(雲翁)이며, 그의 본관(本貫)은 남양(南陽)이고, 시호(諡號)는 충정(忠正)이다. 그의 친인척 가운데 허윤(許玧, 장인은 홍익한 내외의 맏사위 심익선.)은 외손녀사위(외손서)이다. 생애 1591년(선조 25년)에서부터 큰아버지(홍대성)의 양자로 출계된 그는 훗날 장성하여 1615년(광해군 8년) 식년생원시에 갑과 2등 입격하여 9년간의 생원이 된 후 1624년(인조 2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사서(司書)를 거쳐 1626년까지 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다. 그 후 1628년까지 2년 동안을 경상도 고령현감까지 지냈지만 현감으로 있으면서 목민(牧民)의 방식에 어긋나는 다수 부적절 행습을 자행하고 있다는 김육(金堉)의 탄핵으로 인하여 1628년, 고령현감을 스스로 사퇴하였으며 결국 강화유수부 향리로 낙향하여 장래의 후진(후학)의 양성에만 전념하고 있었었고 1629년 당시 평안도 평양 서윤으로 잠시 임명되었지만 이듬해(1630년)에 차라리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6년 후,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상당히도 모욕적인 조건을 내세워 사신(용골대)을 보내오자, 청 사신을 죽임으로써 차라리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의 주화론을 극구 반대하였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왕(인조 이종)이 홍타이지(청 태조 숭덕제)한테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으로써 항복하자, 자신의 두 제자 윤집·오달제 등과 함께 청군(淸軍)들한테 끌려갔고, 그것으로 하여금 결국 청나라에 잡혀가 사살됨으로써 죽음을 당하니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였다. 사후 죽은 후 동료 병자호란 항쟁 열사 김익겸(남한산성의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정축하성이 유발되기 직전에 강화산성의 남문에서 분신 순절)과, 그리고 같은 이역만리 타국의 장소에서 자신과 함께 꼿꼿한 기개가 넘치는 죽음의 절개로써 순절한 두 제자 윤집·오달제 등과 모두 함께 죽음의 충절 등을 높고 길이 평가받음과 동시에 절박스럽던 우국충정 등을 사후 인정받아, 결국 병자호란 관련 항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4명은 모두 대광보국숭록대부 및 영의정에 추서(추증)되었다. 가계 증조부 : 홍서주(洪叙疇) - 관찰사 역임. 조부 : 홍애(洪磑) 아버지 : 홍이성(洪以成) - 진사 출신. 어머니 : 부여 김씨 - 김임(金琳, 김림)의 딸 생가 친형 : 홍침(洪𩂈) 생가 친제 : 홍붕(洪䨜) 생가 친제 : 홍회(洪𩆁) 양부(백부) : 홍대성(洪大成) - 큰아버지 홍대성 부부의 외동딸(1녀 남양 홍씨, 1580~1588)은 어린 시절에 질병으로 인하여 요절. 양모(백모) : 신평 이씨 - 이선(李宣)의 딸 부인(초배) : 양천 허씨 - 군수 허식(許寔)의 딸 딸(장녀) : 남양 홍씨(1604~1675) 사위 : 청송 심씨 심익선(沈翼善, 1612~1668) - 영의정 심지원(沈之源, 1593~1662)의 아들, 황해도 풍덕부사 역임. 부인(계배) : 능성 구씨 - 진사 구곤원(具坤源)의 딸 딸(차녀) : 남양 홍씨(1617~1691) 사위 : 예안 이씨 이방(李炐, 1622~1694) - 이환(李瓛, 1591~1648, 생원 이국량(李國亮, 1572~ ?)의 아들)의 아들. 관련 문화재 홍익한 택지 - 강화군 향토유적 제17호 같이 보기 병자호란 삼학사 남한산성 오달제 윤집 심지원 각주 1586년 출생 1637년 사망 조선의 문신 강화군 출신 과거 급제자 유교인 조선 인조 조선 효종 장원 급제자 조선의 교육인 조선의 시인 조선의 화가 조선의 정치인 16세기 한국 사람 양자 병자호란 관련자 17세기 한국 사람 조선의 서예가 사형된 정치인 총살형된 사람 화기에 죽은 사람 남양 홍씨 (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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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루크 술탄국
튀르크국(), 통칭 맘루크 술탄국() 혹은 맘루크 왕조는 1250년부터 1517년까지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를 통치하던 맘루크계 술탄국이다. 맘루크는 노예라는 뜻의 아랍어이다. 역사 아이유브 술탄국의 술탄인 살리흐가 죽자 그의 아내 샤자르 알두르가 통치하였다. 그는 아랍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통치자로, 당시 맘루크 총사령관 아이박과 재혼하여 이집트 일대를 함께 통치하여 맘루크 술탄국을 시작하였다. 5대 술탄 바이바르스는 실질적인 맘루크 술탄국의 전설기를 이끌었다. 그는 아바스 칼리파국의 마지막 칼리파의 친척을 카이로에서 보호하며 칼리파로 추대하였다. 이로 인해 "카이로의 아바스 왕조" 시대가 시작되어 1517년 맘루크 술탄국이 멸망할 때까지 함께 명맥을 이어갔다. 이로써 "허수아비 칼리파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맘루크는 노예였고 노예를 해방시켜주는 권리는 칼리파에게만 부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칼리파는 술탄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자로 전락하였다. 정치 초기에는 바흐리 왕조가 맘루크 술탄국을 통치(1250년-1390년)하였는데, 이들은 투르크 및 몽골족 출신의 맘루크들이다. 후기에는 부르지 왕조가 맘루크 술탄국을 통치(1382년-1517년)하였는데, 이들은 카프카스 지방 출신의 맘루크들이다. 멸망 맘루크 술탄국이 쇠망한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지나친 사치, 흑사병, 지리적 이점의 상실 등이 있다. 맘루크 술탄국 말기, 무능한 술탄들이 즉위해 사치에 빠져들게 된다. 이로 인해 맘루크 술탄국의 국민들에게 지나치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민심 이반을 불러오고 만다. 한편 치명적인 흑사병이 맘루크 술탄국을 덮쳤는데, 맘루크 술탄국의 수도 카이로에서만 하루에 1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으며 원래 이집트 출신이 아니었던 맘루크들은 토착 이집트인보다 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졌다. 맘루크 술탄국이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지리적 이점에 있었다. 홍해를 남하해 아라비아 반도를 우회하면, 인도와 교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498년에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캘리컷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맘루크 술탄국이 누려 온 지리적 이점은 사라지고 만다. 결국 맘루크 술탄국은 1517년에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인 셀림 1세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다. 역대 술탄 바흐리 왕조 샤쟈르 알두르(여성군주)(재위:1250년) 무이즈 아이바크(재위:1250년 - 1257년) 만수르 알리(재위:1257년 - 1259년) 무자파르 쿠투즈(재위:1259년 - 1260년) 자히르 바이바르스(재위:1260년 - 1277년) 사이드 바라카한(재위:1277년 - 1279년) 아딜 사라미슈(재위:1279년) 만수르 카라운(재위:1279년 - 1290년) 아쉬라프 하릴(재위:1290년 - 1293년) 나스르 무하마드(재위:1293년 - 1294년) 아딜 키트브가(재위:1294년 - 1296년) 만수르 라진(재위:1296년 - 1299년) 나스르 무하마드(복위)(재위:1299년 - 1309년) 무자파르 바이바르스(재위:1309년 - 1310년) 나스르 무하마드(복위)(재위:1310년 - 1341년) 만스르 아브 바쿠르(재위:1341년) 아쉬라프 쿠주크(재위:1341년 - 1342년) 나스르 아흐마드(재위:1342년) 사리프 이스마일(재위:1342년 - 1345년) 카밀 샤반(재위:1345년 - 1346년) 무자파르 하지(재위:1346년 - 1347년) 나스르 하산(재위:1347년 - 1351년) 사리프(재위:1351년 - 1354년) 나스르 하산(복위)(재위:1354년 - 1361년) 만수르 무하마드(재위:1361년 - 1363년) 아쉬라프 샤반(재위:1363년 - 1377년) 만수르 알리(재위:1377년 - 1381년) 사리프 하지(재위:1381년 - 1382년) 자힐 바르크크(재위:1382년 - 1389년) 사리프 하지(재위:1389년 - 1390년) 부르지 왕조 자힐 바르크크(재위:1390년 - 1399년) 나스르 파라즈(재위:1399년 - 1405년) 만수르 아브드 아르아즈즈(재위:1405년) 나스르 파라즈(복위)(재위:1405년 - 1412년) 무아이야드 사이프(재위:1412년 - 1421년) 무자파르 아흐마드(재위:1421년) 자히르 타타르(재위:1421년) 사리프 무하마드(재위:1421년 - 1422년) 아쉬라프 바르스바이(재위:1422년 - 1438년) 자히르 쟈크마크(재위:1438년 - 1448년) 아지즈 유스프(재위:1448년) 자히르 쟈크마크(복위)(재위:1448년 - 1453년) 만수르 우스만(재위:1453년) 아쉬라프 이날(재위:1453년 - 1460년) 무아이야드 아흐마드(재위:1460년 - 1461년) 자히르 후스카담(재위:1461년 - 1467년) 자히르 야르바이(재위:1467년 - 1468년) 자히르 티무르부가(재위:1468년) 아쉬라프 카이트바이(재위:1468년 - 1495년) 나스르 무하마드(재위:1495년 - 1498년) 자히르 칸스프(재위:1498년 - 1499년) 아쉬라프 쟈바라트(재위:1499년 - 1501년) 아딜 트만바이(재위:1501년) 아쉬라프 칸스프 가우리(재위:1501년 - 1516년) 아쉬라프 트만바이(재위:1516년 - 1517년) 각주 내용주 출처주 참고 문헌 무슬림 왕조 이슬람의 역사 리비아의 역사 이집트의 역사 레바논의 중세사 시리아의 중세사 요르단의 중세사 팔레스타인의 중세사 13세기 설립 15세기 폐지 14세기 이집트 15세기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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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S 44
OTS 44는 카멜레온자리에 있는 갈색왜성으로, 지구로부터 약 550광년 떨어져 있다. Cha 110913-773444가 발견되기 전까지 가장 질량이 작은 갈색왜성이었다. OTS 44의 질량은 목성의 15배 정도로, 태양 질량의 약 1.4% 수준이며 반지름의 정확한 수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태양의 23~57% 정도로 추정 된다. OTS 44의 주변에는 먼지와 얼음 조각으로 된 원시행성계원반이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원시행성계원반은 행성계로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읽어보기 SCR 1845-6357: 적색 왜성과 갈색 왜성으로 이루어진 쌍성계 Cha 110913-773444: 원시행성계 원반으로 보이는 물질로 둘러싸여 있는 천체 외부 링크 천문학자들이 '조그만 태양계'가 태어나는 것을 발견하다 (스피처 우주 망원경) 갈색왜성 카멜레온자리 어두운 적색왜성 1998년 발견한 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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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99%ED%88%AC%EC%95%88%20%ED%94%84%EB%9E%91%EC%88%98%EC%95%84%20%ED%91%B8%EB%A5%B4%ED%81%AC%EB%A3%A8%EC%95%84
앙투안 프랑수아 푸르크루아
앙투안 프랑수아 푸르크루아(, 1755년 6월 15일 ~ 1809년 12월 16일)는 프랑스의 화학자이다. 생애 1755년 파리에서 오를레앙 공 집안의 자손이자, 약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 그는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어 뜻을 잃게 되었고 결국 화학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1784년 그는 왕의 정원(, 지금의 Jardin des Plantes)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견해를 따른 최초의 화학자 중 한 명이었으며, 라부아지에의 저술 작업을 돕기도 하였다. 그는 화학 논문도 많이 썼지만 생리학, 병리학 관련 논문도 많이 제출하였고, 이러한 논문에 있어서 푸르크로아는 독창적인 발명가이기보다는 지도자나 편집자로 많은 기여를 하였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공공교육 및 공공안전위원회의 일원이기도 하였고, 나폴레옹 집권 이후 교육부장관이 되었다. 그는 학교 설립에 있어 많은 역할을 하였고 과학 교육에는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프랑스 제국으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수여받은 1809년 12월 16일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비난 푸르크로아는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처형을 방조하였다는 것으로 인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물학자 조르주 퀴비에 등은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 푸르크로아를 옹호하기도 하였다. 1755년 출생 1809년 사망 프랑스의 화학자 프랑스의 곤충학자 파리 출신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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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다노바바역
다카다노바바역()()은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에 있는 철도역이다. 타는 곳 동일본 여객철도 출발 신호음은 2003년 3월 1일부터 만화 우주소년 아톰의 주제곡이 쓰이고 있다. 테즈카 오사무가 사장을 맡은 데즈카 프로덕션이 다카다노바바에 있었으며, 만화의 배경 중 한 곳이 이곳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선정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일정기간 동안만 틀어놓을 계획이었으나, 지금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세이부 철도 4번 타는 곳 은 평일 아침(7:00~9:30)에 승객하차 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문이 4개 있는 차량만 해당. 특급이나 문이 3개 있는 차량은 해당되지 않음.) 도쿄 지하철 역세권 정보 와세다 대학 니시와세다 캠퍼스(이공학부) 가쿠슈인 여자대학 역명 유래 역명은 아코 로시 47인의 한사람인 호리베 타케츠네의 전설이 있는 다카다노바바의 결투 (1694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현재는 강담 등의 소재가 되고 있던 "다카다노바바 (타카다바바)"에서 가지고 왔다. 현지에서는 당시의 지명을 따라 「토츠카마치 역」 「스와쵸역」 「스와노모리 역」 등을 희망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어째서 현재의 역명이 채택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읽는 법은 「타카다 바바」가 아니고 「타카다노바바」라고 불리는 까닭도 밝혀지고 있지 않다. 역사 1910년 9월 15일 : 일본 국유철도 야마노테 선역 개업. 1927년 4월 16일 : 세이부 철도 역 개업. 1945년 4월 13일 : 태평양 전쟁 중 미군 공습으로 역사 전소, 1964년 12월 23일 : 도영 지하철 도자이 선 개통. 1987년 4월 1일 : 국철 민영화.(동일본 여객철도) 2003년 3월 1일 : 야마노테 선 출발신호음 변경(아톰 주제곡) 2004년 4월 1일 : 영단 지하철 도자이선 민영화(도쿄 메트로 도자이 선으로 변경) 사진 인접역 도쿄 지하철의 철도역 동일본 여객철도의 철도역 신주쿠구의 철도역 야마노테선 1910년 개업한 철도역 일본국유철도의 철도역 세이부 철도의 철도역 도쿄 메트로 도자이선 세이부 신주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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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체
물리학에서 다루는 물체(物體)는 물질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물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물체로 다루어지는 야구공은 여러 종류의 물질들로 이루어진 사물이다. 물체는 고전역학, 양자역학 등의 물리학에서 실험 및 측정의 대상으로 다룬다. 고전역학이나 양자 역학에서는 물체의 위치, 상태, 운동과 에너지에 의한 변화를 관찰, 실험하여 그 원리를 밝히는 이론을 세운다. 고전 역학 고전역학에서 물체를 다루어 연구하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자유낙하운동 아이작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개념을 정리하였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지구와 물체 사이의 중력 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운동이다. 들고 있는 물체를 가만히 놓았을 때 관찰할 수 있다. 자유낙하 운동이 일어날 때 작용하는 가속도를 중력 가속도라 하며 흔히 g로 표기한다. 진자운동 실에 매달린 추의 흔들림과 같은 운동을 진자운동이라 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관찰한 뒤 시계에 응용했다는 일화가 있다. 푸코의 진자가 유명하다. 진자가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을 주기 T 라고 하고 중력가속도는 g 진자의 실의 길이를 l이라하면 T= 2π√(l/g)의 식을 따른다. 포물선운동 던져진 물체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이러한 운동의 성질을 이용하여 총탄이나 포탄의 궤적을 연구하는 학문을 탄도학이라고 한다. 양자역학 양자역학에서 물체를 다루어 연구하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흑체 복사 빛을 온전히 흡수하는 물체를 흑체라 한다. 완전 밀폐된 공동이 일정한 온도에 있을 때 일어나는 내부 복사는 같은 온도의 흑체에서 일어나는 복사와 같다. 우주 역시 일종의 동공으로 취급되며 우주에서 일어나는 복사를 배경 복사라 한다. 같이 보기 인체 물리학 개념 형이상학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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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성 (1890년)
민병성(閔丙晟, 1890년 5월 21일 ~ ?)은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의 법조인, 법관으로, 호는 당암(棠庵), 본관은 여흥,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익선동이며 전라남도 해남군 출신이다. 미군정기 때 초대 검찰 차석검사, 청주지법 검사장을 역임했다. 생애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원호리 출신이며 후일 경성으로 주소지를 옮겼다. 1914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한 뒤 장기간 조선총독부 검사로 근무했다. 학교 졸업 직후 대구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생으로 이력을 시작하여 1916년에는 고등관 8등의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 검사로 승진했다. 1918년에 해주지방법원 검사, 1922년에는 평양지방법원 검사를 지냈다. 1924년 1월 13일 부산지방법원 검사로 발령,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검사와 부산지방법원 본청 검사를 역임하다가 1930년에 경성지방법원 검사로 이동했다. 경성지방법원 검사를 지내던 1935년에 조선총독부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여 선정한 표창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1933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 서보장을 받고 종5위에 서위되는 등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다. 1936년 7월 2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 검사로 부임하여 1941년까지 재직했다. 그해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발령받았다. 창씨개명 당시에도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민병성이라는 본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경성복심법원 검사로 재직하던 1943년을 기준으로 정5위 훈4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1945년 광복 직후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초대 미군정 대법원 차석검사로 임명됐다. 1946년 5월 16일에는 청주지방법원 검사장으로 부임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판검사 부문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사법 부문에 모두 수록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참고자료 1890년 출생 몰년 미상 대한제국 사람 일제강점기의 검사 한국의 군정기 변호사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해남군 출신 여흥 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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Ё
Ё,ё는 키릴 문자의 하나이며 로마 문자 E에 트레마가 붙은 모양이다. ‘요’로 부르며 또는 발음이 난다. 컴퓨팅 코드 같이 보기 Е Є Э О 그리스 문자 Ε 로마 문자 E Е¨ 모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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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성곽(城郭, )은 성, 요새, 거주지 따위의 요새화된 장소에서 방어 대상지역을 둘러치는 구조물이다. 초기 요새 선사시대부터 중세 초기까지 다양한 유형의 초기 요새는 요새화된 장소나 정착지의 외부 경계선을 방어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외부 도랑과 함께 흙 성벽을 사용했다. 모두 도랑과 성벽 방어를 활용했으며 원형 성벽의 특징이다. 방어벽을 사용하면 성벽을 강화하고 높이를 높일 수 있다. 이러한 배치는 중세 초기 북유럽의 모트앤베일리 성의 특징이었다. 고전 요새 고전 시대에 사회는 돌이나 벽돌로 높은 성벽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정교해졌으며 방어자가 미사일을 던질 수 있는 플랫폼이나 벽 통로와 공격자가 던진 미사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난간이 제공되었다. 고전적인 석조 성벽의 잘 알려진 예로는 하드리아누스 성벽과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있다. 중세 요새 유럽에서 로마 제국이 몰락한 후 11세기까지 지속된 토공사 성벽의 광범위한 사용으로 복귀했다. 그 예로 노먼 모트(Norman Motte) 및 베일리성 등이 있다. 중세와 근대 초기에 성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성벽은 계속해서 방어벽의 일부를 형성했지만 이제는 총안 모양의 난간이 있는 두꺼운 벽으로 구성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장 조사에서는 상대적으로 일시적인 특성으로 인해 흙 성벽을 계속해서 활용했다. 고고학적 중요성 군사 전술과 기술의 발전을 나타내는 이러한 성벽의 즉각적인 고고학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이러한 유적지에는 종종 요새가 건설될 당시의 지역 상황을 가리키는 역사적 중요성이 있는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외부 링크 방어용 건축의장 성관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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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로망스어
갈리아-로망스어는 프랑스, 이탈리아 북부, 스페인 동부 등에 걸쳐 사용되는 로망스어군의 한 언어 집단이다. 분류 오일 제어 프랑스어 피카르디어 갈로어 왈롱어 프랑코 프로방스어 옥시타니아 로망스어 갈리아 이탈리아어 라이티아 로망스어 외부 링크 에스놀로그 : 갈리아로망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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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3%BC%EB%B6%80%20%EA%B5%AD%EC%A0%9C%EA%B3%B5%ED%95%AD
주부 국제공항
주부국제공항(, , )은 일본 아이치현 도코나메시 앞 이세만의 인공섬에 만든 공항이다. 약칭으로 센트레아(, )로 부른다. 2005년 2월 17일 개장하였다. 기존 고마키 공항을 대체할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며, IATA 부호와 ICAO 부호 모두 고마키 공항의 것을 이어받았다. 나고야 등 일본 주부 지방의 관문 공항이다. 역사 나고야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약 35km, 지타 반도의 아이치현 도코나메시의 앞바다 약 1.5km의 이세만 해상의 인공 섬에 위치하고 24시간 운용이 가능한 길이 3,500m의 활주로를 가진, 간사이 국제공항에 이어 일본 국내 제2의 해상 공항으로 2005년 2월 17일에 개항했다. 나리타 국제공항, 간사이 국제공항과 함께 국제 항공 노선에 필요한 국제 거점 공항으로 그 항공 수요를 담당할 것을 나라의 항공 정책 평가된다. 국제 항공 운송 협회(IATA)보다 혼잡 공항으로서 국내의 간사이 국제공항, 신치토세 공항과 함께 수준 2의 지정을 받고 있다. IATA공항 코드는 NGO에서 개항 전에 나고야 공항(코마키)에서 사용되던 것을 계승하고 있다. 항공 업계의 평가 회사인 스카이트랙스의 공항 종합 평가 조사에서 공항 시설, 공항 직원 등에 의한 서비스 제공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인 "5스타 포트"(THE WORLD'S 5-STAR AIRPORTS)으로 인정 받고 있다("5스타 포트"인정 공항은 이 공항을 포함 세계에 7공항). 또 2019년 3월 스카이트 랙스는 세계의 공항의 등급을 매기고"더·월즈·베스트·에어 포트·오브·2019"에서 2018년 제7위에서 순위를 올리고 홍콩 국제 공항에 이어 제6위로 선출하고"세계 제일의 지방 공항"으로도 선출했다. 건조물의 평가에서는 "주부 국제공항 여객 터미널 빌딩"이 그 유니버설 디자인의 실천 등이 평가된 2005년 굿 디자인 어워드(건축·환경 디자인 부문-건축 디자인)수상 작품이다. 애칭인 "센트레어(Centrair)" 은 영어로 중부 지방을 뜻하는 central와 공항을 뜻하는 airport를 조합한 조어로 일반 공모 중 선정됐다. 상표로 등록되고 있으며(상표 등록 번호: 제4566713호 외), 공항 섬의 주소 표기(동명)공항 내의 시설 명칭 등에 부가되어 있다. 또 비행장 이름 표지에 필요한 공항의 영어 명칭에도 사용되면서 항공 교통 관제의 해당 공항의 무선 교신의 호출 명칭에도 "센트레아 타워""센트 레아 접근"처럼 사용되며 호출 명칭에 공항 설치 이전의 지명이 아닌 명칭을 사용하는 국내 유일의 사례로 약칭으로 중부 공항, 중부로 일컬어지는 것도 있으며, 시간표나 발착 안내에서 도시 이름과 병기할 때는 나고야 공항(코마)와 명확히 구별하기 위해"나고야(중부)"등으로 기술된다. 연혁 1985년 : 주부 국제공항의 건설을 위한 조사가 개시 1989년 : 공항 후보지로 이세 만 동부 지역이 결정 1997년 : 정부 예산에 주부국제공항 사업비가 포함 편성됨 1998년 5월 1일 : 주부국제공항 주식회사 설립 2000년 8월 1일 : 공항섬 본격적 착공 2000년 8월 19일 : 주부국제공항 기공식 2001년 : 공항섬 매립 공사 착공 2002년 1월 6일 : 터미널 빌딩 착공 2004년 6월 24일 : 국토교통성 항공국의 항공기가 비행장 검사를 위해 첫 착륙 2004년 10월 5일 : 터미널 빌딩 준공 2005년 1월 29일 : 나고야 철도 공항선 개통 2005년 2월 12일 : 훈련을 위해 전일본공수 항공기가 여객기로서 첫 착륙 2005년 2월 14일 : 뮌헨 국제공항과 자매 결연 2005년 2월 17일 : 정식 개항 2005년 2월 22일 : 노스웨스트 항공72편 타이어 파열로 개항 후 첫 활주로 폐쇄 2005년 7월 3일 : 유압 계통의 문제로 인해서 콘티넨탈 미크로네시아 975편이 개항 후 첫 긴급 착륙 2006년 5월 25일 : 개항 후, 첫 결산으로 흑자 달성 2019년 9월 20일: 제2터미널 개항 운항 노선 국제선 국내선 화물 노선 교통 철도 나고야 철도 나고야 철도 공항선 특급(뮤스카이) 나고야철도 2000계 전동차가 사용되며 전차량 특별차량으로 특별차량 요금 360엔을 운임에 더해야 한다. 도코나메 선과 나고야 본선 등에서 운행하며 메이테쓰나고야 발착 열차는 모두 뮤스카이이다. 일부 신우누마 행 열차와 메이테쓰기후 발착 열차가 뮤스카이로 운전된다. 이누야마에서 일부 열차가 신카니로 직통하기도 한다. 정차역(메이테쓰나고야 착발) 주부코쿠사이쿠코(주부국제공항) - 도코나메 - 진구마에 - 가나야마 - 메이테쓰나고야(메이테츠 나고야) 정차역(메이테쓰기후 착발) 주부고쿠사이쿠코 - 도코나메 - 진구마에 - 가나야마 - 메이테쓰나고야 - 고노미야 - 메이테쓰이치노미야 - 메이테쓰기후 정차역(신우누마 착발) 주부고쿠사이쿠코 - 도코나메 - 진구마에 - 가나야마 - 메이테쓰나고야 - 이와쿠라 - 고난 - 이누야마 - 이누야마유엔 - 신우누마 특급 나고야 철도 2200계 전동차가 사용되며 1호차와 2호차가 특별차이고 3호차부터 6호차까지는 일반차량이다. 뮤스카이보다 정차역이 많으며 거의 모든 열차가 메이테쓰기후 행으로 운전되나 일부 신우누마 행 열차도 있다. 일반차량에 탑승할 경우 승차권만으로 탑승할 수 있기 때문에 공항 이용객뿐만 아니라 도코나메 선과 나고야 본선 연선에서도 이용객이 많다. 특별차량에 탑승할 경우 똑같이 360엔의 특별차량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정차역 주부코쿠사이쿠코 - 도코나메 - 신마이코 - 아사쿠라 - 오와리요코스카 - 오타가와 - 진구마에 - 가나야마 - 메이테쓰나고야 - (스카구치) - 고노미야 - 메이테쓰이치노미야 - 신키소가와 - 가사마쓰 - 메이테쓰기후 괄호 안은 일부 열차만 정차하는 역이다. 신우누마 행 열차의 정차역은 신우누마 행 뮤스카이의 메이테쓰나고야 - 신우누마 구간의 정차역과 같다. JR 도카이 나고야역 환승 시 도카이도 신칸센 : 규슈 신칸센, 산요 신칸센, 조에쓰 신칸센, 도호쿠 신칸센 도카이도 본선 : 산노미야역, 오사카역, 교토역, 마이바라역, 미카와안조 역 도로 이 일대의 도로에 종단하고 있는 아이치현도 제522호선이 이 공항에 접근한다. 택시 나고야의 택시는 운행 지구별로 색깔이 다르기 때문에, 이용자는 목적지에 해당하는 택시 승강장에서 승차하면 된다. 주부국제공항에서는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택시가 갈 수 있다. 배 센트레아 까지는 쓰에서 고속선이 운항되고 있다. 선착장에서 여객터미널 빌딩까지는 연락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도바에서 공항 건너편 린쿠초까지 페리도 운항되고 있다. 통계 각주 외부 링크 2005년 개항한 공항 2005년 설립 도코나메시의 건축물 도코나메시의 교통 일본의 인공섬 이세만 인공섬 공항 주부 지방의 공항 아이치현의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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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9E%90%20%EC%9A%B0%EC%9B%94%EB%A1%A0
한자 우월론
한자 우월론(漢字優越論)이란 표의문자, 표어문자인 한자가 다른 표음 문자에 비해 뛰어나다는 주장 또는 생각을 말하며, 소수설로 전혀 인정되고 있지 않거나 심각한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일부 중국인이 한자 우월론의 관점을 취하고 있으며, 때로는 대한민국에서 한글 전용이나 한자 폐기 등에 대한 주장이 나올 때 거기에 반대하는 근거로 한자 우월론이 이용되기도 한다. 주요 주장 대한민국의 한글 전용 정책을 편협한 민족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주요 반론 우선 문자로서 "한자"가 표의문자, 표어문자라는 통념과 달리, 한자 역시 중국어의 음을 표기하는 표음문자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한자는 다른 표음문자와 달리, 문자와 발음의 관계가 극히 희박하고 추상적인 표음문자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한자가 가진 시각적 상징성도 한자만의 특징이 아니며, 한글의 낱자나 영어 알파벳도 상징성을 띠는 경우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낫", "낯", "낱" 등 발음이 같으면서 기저음에 따라 형태소 표기가 각기 다른 형태주의 표기법이 이런 상징성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어, 좡어 등의 언어에서, 한자를 쓰지 않아도 언어생활에 큰 불편을 겪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각주 같이 보기 국한문혼용 한글의 우수성에 관한 논란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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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AD%EC%A0%9C%EA%B3%A0%EB%93%B1%ED%95%99%EA%B5%90%20%28%EA%B4%91%EC%A3%BC%29
국제고등학교 (광주)
국제고등학교(國際高等學校)는 광주광역시 북구 삼각동에 위치한 국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66년 11월 19일 : 학교법인 한남학원 설립인가, 설립자 황영석 선생 1966년 11월 29일 : 학교법인 희수학원 이사장에 이희대수 선생 취임 1985년 11월 7일 : 광주한남양성학교 설립 인가 1986년 3월 1일 : 초대 교장 이희수 선생 취임 1986년 3월 5일 : 한남양성학교 개교 및 입학식 1990년 3월 3일 : 국제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2005년 3월 1일 : 2005 푸른숲 가꾸기 선정 2019년 9월 1일 : 제6대 교장 임호영 선생 취임 2022년 2월 4일 : 제34회 276명 졸업(총 13,293명) 2022년 3월 2일 : 신입생 270707070707070명 입학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광주 북구의 고등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광주광역시의 사립 고등학교 남녀공학 고등학교 1986년 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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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사
원효사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원효사 -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산 92에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 원효사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846에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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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564
564
564(오백육십사)는 563보다 크고 565보다 작은 자연수이다. 수학 합성수로, 그 약수는 1, 2, 3, 4, 6, 12, 47, 94, 141, 188, 282, 564이다. 과학 기타 연도: 564년 기원전 564년 5e02 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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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비
수제비(, )는 밀가루를 이용하여 만드는 전통 음식이다. 손으로 적당히 뜯은 밀가루 반죽에 다양한 채소를 곁들여 끓여먹는 국이다. 맛과 조리법은 칼국수와 유사하나, 칼국수는 밀가루 덩어리가 아닌 기다란 국수로 만든다는 차이가 있다. 빈대떡과 함께 비 오는 날에 먹는 음식으로도 알려져 있다. 멸치, 조개, 다시마 등이 재료로 사용되며, 오랜 시간에 걸쳐 국물을 낸 뒤 국수를 더하고 동박, 감자나 김치를 곁들인다. 기원 밀가루로 만드는 수제비와 국수는 고려 시대부터 먹기 시작했으나, 수제비라는 단어 자체는 조선 중기에 만들어졌다. 손을 뜻하는 한자 수(手)와 접는다는 의미의 '접'이 합쳐져서 '수접이'라 부른데서 나왔다. 조선 시대 이래 한국인은 다양한 목적에서 다양한 형태의 수제비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현재는 평범하고 서민적인 음식으로 간주되나, 과거에는 그리 흔히 먹을 수 없어 돌잔치와 같은 잔치 때 먹는 특별한 음식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수제비 대신 밀가루뜨더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밀가루를 뜯어 만든 국'이라는데서 나온 말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수제비를 가리키는 이름은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같이 보기 칼국수 빈대떡 한국의 국수 각주 외부 링크 Brief information and recipe of Spinach and Carrot Sujebi The Korean people's food, Sujebi from Chosunilbo Information about “Samcheongdong Sujebi” from Korea Tourism Organization 덤플링 한국 요리 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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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A0%EB%93%9C%EC%82%AC%EC%9A%B4%EB%93%9C
애드사운드
애드사운드(AD Sound)는 대한민국 최초로 방송 및 각종 기업의 서비스로 품질의 우수성을 널리 인정받고 있는 성우 녹음 전문회사이다. 음성녹음을 대표하지만 효과음 및 음악 또한 제작하며 개인 및 회사용 비즈링(통화연결음)까지 제작을 하고 있다. 애드사운드는 또한 자체적으로 자연번역센터를 운영하여 이제 한발 더 나아가 번역과 녹음을 한 묶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로컬라이징 회사로 발전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협회 및 언더성우와는 대부분 연계되어 있으며 국내 음성데이터 구축은 상당한 수준에 있다. 이제는 글로벌 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해 국내 뿐 아니라 세계 주요 언어의 성우 및 음성데이터 그리고 번역가와 감수자 정보를 확대 및 확보하였다. 품목 음성 콘텐츠: 비즈링, 통화연결음, 음성/효과음 벨, 음성드라마, 축전 메시지 전문 음성 데이터베이스: 음성 합성, 음성 인식, 텔레매틱스 게임 효과음: 모바일 게임, 온라인 게임, 기타 게임 효과음 음향 효과: 자동교환 녹음, ARS, VMS, UMS, CTI, 녹음 메시지 예문 음성기술 전문 디지털 녹음기술: 현재 대한민국 500여 기업 및 기관, 각종 단체 ARS, UMS, VMS, CTI 주요 음성 안내 시스템 저장 및 개발 차세대 핵심 녹음기술: 음성합성, 음성인식, 텔레매틱스 시스템 개발, 음성 데이터베이스 구축 녹음 성우 녹음 성우는 각 방송회사 성우극회를 참조하기 바란다. 문화방송 성우극회 한국방송 성우극회 교육방송 성우극회 온미디어 성우극회 대교방송 성우극회 대원방송 성우극회 기독교방송 성우극회 가톨릭평화방송 성우극회 관련 문서 한국성우협회 홈페이지 애드사운드 홈페이지 애드사운드 영문홈페이지 비즈링 홈페이지 자연번역센터 홈페이지 대한민국의 매체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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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는 1712년(숙종 38년)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을 정하기 위하여 세워진 경계비이다. 정계비의 위치 정계비가 세워진 곳은 백두산 장군봉(將軍峰, 2,750m)과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사이 대략 중간지점인 해발 2,150m 고지(高地)로, 백두산 천지(天池)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져 있다. 이 비는 만주사변이 발발하기 두어 달 전인 1931년 7월에 사라졌는데, 일본군이 철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비의 원래 위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세운 표지석과 비의 설치 당시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쌓았던 돌무더기의 흔적만 남아 있다. 정계비의 내용 비면에 대청(大淸)이라고 크게 우횡서로 쓰고, 그 밑에 그보다 작은 글씨로 “烏喇摠管 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 五十一年 五月十五日”이라고 세로로 각서하였다. 이는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지를 받들어 변계를 조사하고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상에 돌에 새겨 명기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이라는 내용이다. 설치 배경과 과정 백두산 정계(定界)가 문제가 된 것은 청나라의 강희제 때이다. 강희제는 백두산을 만주족의 발상지로 여겨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1677년 음력 12월에는 백두산을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에 봉하여 제를 지내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후 강희제는 전국적인 지리지 편찬 사업을 추진하면서 백두산 일대에 대한 자체적인 지리 조사와 더불어 조선에 대해 사계(査界)를 비공식적으로 계속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영고탑 회귀설 등 대청(對淸) 위기의식의 불안감으로 이를 거부하다가 1712년에 강희제가 황명으로 공식적으로 요청하자 받아들이게 된다. 1712년(숙종 38년)에 청나라는 목극등을 사신으로 파견하고, 조선 측에서는 함경부사 이선부와 참판 박권이 접반사로 혜산진에서 맞이하였으며, 목극등은 이의복·조태상 등과 함께 음력 5월 15일 백두산에 올랐다가 천지(天池)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찾아내고, 산정(山頂)의 남동쪽으로 4km 지점인 해발 2,150m 지점의 분수령에 비를 세웠다. 그러나, 청(淸)의 목극등이 사계(査界)를 한 이후에 조선 측은 '정계비로부터 동쪽 수계(水界)까지' 설책(設柵)을 하는 과정에서 목극등이 정한 수계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문제를 발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파견한 북평사 홍치중은 설책 공사를 중지하라고 하였지만, 정계(定界)에 참여한 이들이 정계를 잘못한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목극등이 정한 수원(水源)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새롭게 설책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청나라가 알게 되면 목극등이 견책 받고 청의 다른 사신이 와서 영토가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 설치의 의의 조선과 청나라 양국이 국경을 명확히 비(碑)로 명문화하였고,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 육지 지역인 백두산의 천지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청나라는 이 비의 설치로 1689년에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북만주 국경을 안정시킨 데 이어 조선과의 남만주 국경을 안정시키고, 청조의 발상지로 여겼던 백두산 등 봉금 지역의 국경을 명확히 하게 되었다. 비의 설치 이후 조선에서는 백두산에 대하여 숭배(崇拜) 의식과 영토 인식이 더욱 확고해졌고, 당대에는 영고탑회귀설 등에서 벗어나 청나라에 대한 불안감이 종식되게 되었다. 정계비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 19세기 후반,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동위토문(東爲土門)'을 서로 달리 해석하면서 간도에 대한 귀속 문제가 불거졌다. 즉, 정계비의 위치상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의 한 지류'이므로 이른바 동간도 일대가 조선의 영토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설치 당시의 토문강에 대한 조선의 인식 숙종 시기의 이조참의 이광좌에 따르면 "황지의 이른바 토문강이란 화어(華音 : 중국말)로 두만강을 말합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정계비를 설립한 당시에 청나라 사신 목극등을 접대하기 위해 조선에서 정한 '差官接待事宜別單(차관접대사의별단)'에도 토문(土門)과 두만(豆滿)은 같은 단어이므로 주의해야 할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과 같은 저술서를 보아도 정계비 설치 당시 조선에서는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사계(査界) 당시의 실록의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조선의 입장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아 천지(天池)의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계비 수립 당시에 청나라 사신 목극등이 조선의 경계에 대해 묻자 역관 김지남이 '천지 이남은 조선의 경내'라고 답한 데 대해 목극등이 이를 크게 다투거나 힐책하지 않은 것을 두고, 접반사 박권이 기뻐하며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즉 당시 조선에서는 천지(天池)의 이남, 즉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삼아서 이를 조선의 경내로 하는 데 합의한 것을 매우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설치 이후의 사정 변화 정계비의 해석은 비가 설치된 후 170여 년이 지난 고종 집권기인 1880년대에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당시 간도에는 세도정치의 수탈과 학정(虐政), 대흉년 때문에 19세기 초부터 이주한 조선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간도 일대가 청의 봉금 지역이어서 1677년 이후 약 200년 동안 만주족이 아니면 청나라 사람들조차 거주가 금지되어 청나라 주민의 수가 매우 적었고, 아편 전쟁 ·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청나라의 힘이 약해진 데에서 기인했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에 외만주를 빼앗기고 동해바다 진출이 불가능한 청나라는 만주 개발을 위해 1881년에 '봉금령'을 폐지하고 지린의 장군 명안과 흠차대신 오대장을 보내어 간도 개척에 착수하였다. 이에 조선은 1883년에 '월강금지령'을 폐지하고 어윤중·김우식에게 정계비와 그 주변 지형을 조사하게 하여 송화강의 한 지류로 토문강이 있음을 확인한 뒤,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즉, 정계비 설치 당시 조선에서는 '토문강은 곧 두만강'이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간도에 조선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고 청나라가 쇠퇴한 1880년대 이후 조선은 '동위토문(東爲土門)'의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며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토문 혹은 두만의 의미를 둘러싼 최근의 연구 최근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동위토문”의 어원은 여진어로 구멍·동굴·샘·협곡 등을 뜻하는 보통명사라고 한다. 즉 토문강이라고 불리는 강은 특정된 하나의 강이 아니라 이런 특징을 가지는 하천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와도 같다. 이렇게 본다면 송화강의 한 지류로서의 토문강이 존재한다고 하여도 동위토문의 토문강이 두만강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같이 보기 간도 조중 변계 조약 간도 협약 연변 조선족 자치주 장백 조선족 자치현 녹둔도 참고 자료 숙종실록 강석화,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세원, 2000년. 이광원, 〈조선 초 기록 중 '두만' 및 토문의 개념과 국경인식〉, 문화역사지리 제19권 제2호(2007년) 45~57쪽. 이화자, 〈17~18세기 월경문제를 둘러싼 조청 교섭〉,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논문, 2003년. 조병현·이범관·홍영희, 〈지적학 측면에서 본 백두산정계비의 역할연구〉, 한국지적한회지 제23권 제1호 2007.6(1) : 17~28쪽. 각주 1712년 한국 1712년 중국 1712년 조약 한국의 비문 조선의 조약 청나라의 조약 조선-청나라 관계 중국-한국 관계 국경 조약 영토 분쟁 간도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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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atles (음반)
《The Beatles》는 비틀즈의 아홉 번째 정규 앨범이다. 보통 "White Album"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앨범 커버에 흰색 바탕과 함께 The Beatles라는 글자만 쓰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흰색 LP로 된 앨범도 존재했었다. 이는 대중 예술가 리처드 해밀턴이 디자인한 것이다. 이 앨범은 비틀즈의 인기가 최절정에 달해있을 때 발매되었고, 대중 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긴 앨범으로 추앙받는다. 본래 제목은 《A Doll's House》였다. 이 앨범은 1997년, HMV의 "새 천년의 음악"이란 투표에서 역사상 10번째로 위대한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1998년에 실시된 《Q》 매거진의 "100대 영국 음악 앨범" 독자 투표에서 17위, 2000년에는 7위에 올랐으며, 2003년 VH1에선 역사상 11번째로 위대한 앨범에, 《롤링 스톤》의 500대 앨범에는 10위에 등극하였다. 미국의 음반 산업 협회 RIAA에 따르면, 《The Beatles》는 1900만 장이 팔려, 역대 비틀즈 앨범 중 최고로 많이 팔렸으며, 미국에서 9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라고 한다. 하지만 RIAA의 집계는 더블 앨범을 2장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이를 1장으로 해서 다시 계산하면, 《The Beatles》는 비틀즈의 음반 중 4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 된다. 해체의 서곡 《The Beatles》의 녹음 동안 비틀즈를 해체로 몰고간 몇몇 이유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에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와의 관계 및 멤버들간의 긴장의 발생 등을 포함한다. 독창적 작곡 양식의 증가 이 앨범에서 4명의 멤버는 각자의 재능과 고유의 양식이 드러나는 곡들을 많이 작곡했다. 이는 후에 궁극적으로 각자의 솔로 활동으로 표출되었다. 존 레논은 〈Julia〉를 통해서 진솔한 음악을, 〈Eveybody's Got Something to Hide Excect Me and My Monkey〉에선 음악적 광기, 〈Sexy Sadie〉에선 신랄한 비판의식을, 〈Revolution 1〉과 오노 요코와 함께 만든 〈Revolution 9〉에선 그의 정치적 관점을 제시했다. 레논은 이런 식으로 가사에서 성격이 달라지는 음악을 지은 반면, 폴 매카트니는 악상적으로 다른 음악을 만들었다. 〈I Will〉에선 섬세한 팝 발라드를, 〈Helter Skelter〉에선 헤비 메탈을, 〈Martha My Dear〉에선 피아노 팝을, 〈Back in the U.S.S.R.〉에선 록을, 〈Honey Pie〉에선 뮤지컬 형식의 음악을 선보였다. 조지 해리슨은 〈Long, Long, Long〉에서 그의 인도 만투라를,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에선 절절한 애상에 대한 종교적 고백을, 〈Savoy Truffle〉에선 빈정거림을, 〈Piggies〉에서는 사회적 논평을 제시했으며 심지어 링고 스타도 〈Don't Pass Me By〉를 통해 자신의 곡으로 참여했다. 녹음 작업 《The Beatles》의 녹음 작업은 1968년 5월 30일부터 1968년 10월 14일까지 애비 로드 스튜디오(주요 작업)와 트라이던트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작업 과정은 효율적이긴 했지만, 멤버 간의 긴장감과 화를 더욱 고조시켰다. 그 원인 중 하나는 레논의 새 연인이자 예술적 동반자인 오노 요코가 꾸준히 작업실에 나타났던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원인은 서로간의 단절이었다. 다른 멤버들에 대한 레논의 불만과 마약 사용의 증가가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매카트니는 들어갈 수 있는 공백이 생겼다. 그는 레논이 다른 방에서 작업하는 종종 스튜디오 안에 혼자 들어가서 다른 엔지니어와 함께 작업하곤 했다. 이러한 긴장감은 이후 앨범들과 1969년 초 촬영했던 필름 프로젝트(Let It Be)에까지 연장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역겨움을 느낀 조지 마틴은 크리스 토머스를 프로듀서로 대신 맡긴 채 휴가를 떠나기도 했다. 작업에서의 기술적인 변화로는, 4트랙 녹음에서 8트랙 녹음으로 넘어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66년에서 67년 사이에 등장한 여러 트랙을 한 트랙에 합성하는 기술은 녹음에서의 제한에서 자유롭게 했다. 당시 애비 로드 스튜디오는 아직 8트랙을 녹음할 수 있는 기계를 설치하진 않았기 때문에(당시 EMI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는 그 기계를 사용할 만한 전원을 마련하지 못했었다), 비틀즈는 좀 더 최신 시설을 갖춘 트라이던트 스튜디오에서 일부 작업을 진행했다. 링고 스타의 일시 이탈 《The Beatles》의 레코딩 작업 중, 링고 스타는 스튜디오를 나갔다가 다른 세 멤버의 설득 끝에 2주 후에 돌아왔다. 이 기간 동안 작업한 〈Back in the U.S.S.R.〉과 〈Dear Prudence〉의 드럼은 폴 매카트니가 맡았다. 그가 돌아 왔을 때 조지 해리슨이 그에게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한 환영의 표시로 링고의 드럼 세트를 꽃으로 장식했다. 노래 《The Beatles》에 수록된 많은 노래는 재귀적이며 개인적이다. 예를 들어 〈Dear Prudence〉는 여배우 미아 패로의 언니 프루던스가 구금을 당한 후 바깥 출입에 공포를 느끼자, 그녀를 진정시키고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는,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대부분 1968년 봄에 있었던 (불행한) 인도 여행 중에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Glass Onion〉과 같은 노래에서는 여러 숨은 뜻이 있어서, 팬들은 이에 대한 탐구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곡들의 장르는 전형적인 팝/록인 〈Birthday〉와 〈Back in the U.S.S.R.〉, 하드 기타에 기반한 록인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영국식 블루스인 〈Yer Blues〉, 헤비 메탈의 시초가 된 〈Helter Skelter〉, 스카(레게의 초기 형식) 풍의 〈Ob-La-Di, Ob-La-Da〉, 실험적인 음성 몽타주로서 영향을 미친 〈Revolution 9〉, 어쿠스틱 발라드인 〈Blackbird〉와 〈Julia〉등 전반적으로 넓은 영역에 걸쳐 있다. 인도 여행 중 그들이 쓸 수 있덨던 서양 악기라곤 어쿠스틱 기타뿐이었다. 당시 지어진 노래는 〈Dear Prudence〉, 〈Julia〉, 〈Blackbird〉, 〈Mother Nature's Son〉등이 있는데, 이 노래들은 앨범 녹음 당시도 혼자 혹은 두세 명이서 녹음을 끝냈다. 오노 요코는 패티 해리슨, 린다 이스트먼과 함께 〈Birthday〉의 배킹 보컬로 처음으로 작업에 참여했으며, 〈The Continuing Story of Bungalow Bill〉에서도 배킹 보컬로 참여했다. 그리고 레논의 뮈지크 콩크레트 작품인 〈Revolution 9〉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에릭 클랩튼은 해리슨의 초청으로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에 리드 기타로 참여를 했다. 해리슨은 후에 크림의 마지막 앨범 《Goodbye》의 곡 〈Badge〉에 참여해 답례를 했다. 역시 에릭 클랩튼은 존 레논의 초청으로 더티 맥에 가입해 〈Yer Blues〉에 리드 기타로 참여를 했다. 롤링 스톤스에 키스 리처드는 더티 맥에서 음악 생활중 전무후무하게 베이스를 연주하였다. 그 이유는 에릭 클랩튼이 기타리스트이기 때문이다. 《The Beatles》의 작업 기간 동안 몇 개의 곡들이 더 작곡되었으나(이에 대해선 아래의 "수록되지 않은 곡들"을 참고하라)수록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곡들은 후의 앨범이나 부틀랙, 비틀즈 앤솔리지 등에서 등장한다. 《The Beatles》의 프로듀싱과 오케스트라는 조지 마틴이 맡았으며 애플 레코드를 통해 발매된 첫 번째 앨범이기도 했다. 그리고 비틀즈의 유일한 더블 앨범이기도 하다. 마틴은 개인적으로 이러한 더블 앨범 반매에 대해 불만스러워 했고, 멤버들에게 수록곡을 줄이자고 충고를 했으나, 멤버들은 이를 거절했다. 곡의 배열에는 약간의 규칙과 균형을 감안해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Wild Honey Pie〉는 앨범 전체 곡을 순행으로 배열했을 때 5번째에 위치하며 〈Honey Pie〉는 역순행 배열시 5번째에 위치하게 된다. 또한, 3개 곡은 동물의 이름으로 제목이 지어졌는데(〈Blackbird〉, 〈Piggies〉, 〈Rocky Raccoon〉), 이 곡들은 디스크 1의 11~13번 트랙에 모여있다. 마지막으로 〈Savoy Truffle〉은 앞 곡인 〈Ob-La-Di, Ob-La-Da〉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다. 싱글 〈Hey Jude〉는 원래 앨범에 포함되기로 했으나, 대신 독립된 싱글로만 발매하기로 결정되었다. 〈Revolution 1〉의 다른 버전인 〈Revolution〉은 싱글 〈Hey Jude〉의 B 사이드로 수록되었다. 이 곡들을 제외한 《The Beatles》의 다른 곡들은 싱글로 발매되지 않았다. 모노 버전 《The Beatles》는 비틀즈의 독창적인 모노 믹스로 발매된 마지막 앨범이다(영국에선 이후 하나의 앨범이 추가로 모노로 발매되었다). 수록곡 30곡 중 〈Revolution 9〉를 제외한 29곡은 모두 공식 모노 믹스 버전이 있다. 《The Beatles》이후 모든 비틀즈의 앨범들은 (영국에서 발매된 《Yellow Submarine》을 제외하곤) 스테레오로 발매되었다. 몇몇 국가들에 한해 모노로 발매되긴 했지만, 이는 스테레오 믹스를 그냥 섞어서 모노로 만든 것일 뿐이다. 발매 당시 미국에선 모노 음반은 이미 사장된 상태였기 때문에, 《The Beatles》는 미국에서 스테레오로 발매된 첫 번째 비틀즈 LP가 되었다. 앨범 표지 《The Beatles》의 표지는 리처드 해밀턴이 디자인했다. 해밀턴의 디자인은 피터 블레이크가 디자인한 전(前)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화려한 컬러 표지와는 정 반대의 것이었다. 순백색 바탕에, 돋움(엠보싱)으로 처리된 밴드의 이름 "The BEATLES"가 새겨져 있는 이 표지에는 또한 고유의 일련 번호가 적혀 있었다. 이는 마치 한정판을 구입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자 한 해밀턴의 생각이었다. 후에 미국에서 발매된 비닐 레코드부터는 "The BEATLES"가 회식 글짜로 바뀌었다. CD 역시 초기판은 일련 번호가 적혀 있었으나, 후에 발매된 CD들은 이것이 없어졌고, 제목은 "The BEATLES"를 검은색 혹은 회색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앨범 내에는 포스터와 가사, 1968년 가을에 존 켈리가 촬영한 사진들이 들어가 있었다. 《The Beatles》는 1978년에 두 번 발매되었는데(한 번은 캐피톨 레코드, 한 번은 팔로폰), 백색 비닐 레코드로 만들어져 말 그대로 "백색 앨범"(white album)의 모습을 갖추었다. 1985년에는 일렉트롤라/EMI가 독일에서 DMM(다이렉트 메탈 마스터드) 백색 비닐 레코드를 출시했으며 이 중 많은 수는 미국으로도 수출되었다. 또 다른 백색 비닐 레코드는 프랑스 산이 있다. 이들 중에서는 1978년 팔로폰의 백색 비닐 레코드판과 독일 DMM 판이 최고의 음질을 가지고 있다 평가받는다. 이러한 음질의 원인, 1978년 앨범은 노이먼제 컷팅기로 만들어졌고 1985년은 DMM 가공을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The Beatles》의 표지는 비틀즈의 앨범 중 유일하게 멤버가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곡 목록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모든 곡들은 레논-매카트니 작곡이다. 디스크 1 디스크 2 수록되지 않은 곡들 다음 곡들은 마지막 믹싱 작업 전 수록곡에서 빠진 곡이다: 〈What's The New Mary Jane〉 〈Not Guilty〉 참고: 〈Hey Jude〉는 처음부터 싱글로만 발매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에 이 앨범에서 "빠졌다"고 볼 수 없다.( 145쪽). 다음 곡들은 해당 곡들의 초기 판(작업이 많이 진행되지 않았던 상태)이었거나 앨범에 수록하는 것에 대한 고려가 없었던 곡들이다: 〈Junk〉 (당시엔 "Jubilee"(쥬벌리)라고 불렸다. 이 노래는 후에 폴 매카트니의 첫 번째 솔로 앨범인 《McCartney》에 수록되었다.) 〈Circles〉 (후에 조지 해리슨의 솔로 앨범 《Gone Troppo》에 수록되었다.) 〈Sour Milk Sea〉 (후에 재키 로맥스가 녹음했다.) 〈Mean Mr. Mustard〉 (후에 《Abbey Road》에 수록되었다.) 〈Polythene Pam〉 (후에 《Abbey Road》에 수록되었다.) 〈Child of Nature〉 (존 레논의 히트곡 〈Jealous Guy〉의 초기판) 발매 기록 인증 각주, 참고 자료 외부 링크 녹음 정보와 앨범 커버 등에 대한 정보 앨범 가사 각 곡들에 대한 비틀즈 멤버들의 평 "2006년 Q 독자 선정 100대 음반" 《The Beatles》에 대한 각종 리뷰들 1968년 음반 비틀즈의 음반 애플 레코드 음반 캐피틀 레코드 음반 조지 마틴이 프로듀싱한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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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슈타인
람슈타인()은 독일의 헤비메탈 밴드이다. 약 1,500만장의 음반판매량을 기록하였다. 밴드명의 유래 ‘람슈타인(Rammstein)’이란 이름은 1988년 서독 람슈타인 공군기지에서 열린 에어쇼의 막바지에 일어난 사고에서 유래됐다. 당시 이탈리아 공군 곡예비행단의 연습기 3기가 불시착 하였으며, 이중 한기는 주변에 밀집된 군중 한복판으로 추락하여 50명이 넘는 사람이 즉사하고 10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리하르트 크루스페와 틸 린데만은 후에 밴드의 이름이 람슈타인 에어쇼 참사로부터 나온 아이디어라 밝힌 바 있다. 또한 밴드 람슈타인의 데뷔곡 "Rammstein" 의 가사는 1989년의 람슈타인 에어쇼 참사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밴드 연혁 밴드의 결성과 초기 활동 (1994년 이전) 람슈타인은 밴드의 기타 연주자 리하르트 크루스페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크루스페는 1989년 서독으로 망명하였고, Orgasm Death Gimmicks라는 펑크밴드를 결성하였다. Orgasm Death Gimmicks 활동 시절 크루스페는 미국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하며, 그가 영향을 받은 미국 밴드로는 KISS 등이 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이후 크루스페는 틸 린데만이 바구니직공으로 일하며 First Arsch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고 있던 구 동독의 슈베린으로 돌아오게 된다. 슈베린으로 돌아온 리하르트 크루스페는 The Inchtabokatables의 올리버 리델과 Die Firma의 크리스토프 "둠" 슈나이더와 함께 살게되었다. 두 사람과의 동거중 크루스페는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음악활동이 스스로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크루스페가 원하는 것은 기계적인 소리와 무거운 기타음을 결합한 종류의 음악이었다. 올리버 리델, 크리스토프 슈나이더, 그리고 리하르트 크루스페 이 세 음악인들은 새로운 밴드 프로젝트에 착수하게 된다. 금세 크루스페는 작곡과 작사를 한꺼번에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로 인해 틸 린데만이 람슈타인에 참여하게 된다. 크루스페는 틸 린데만이 일하는 도중 노래부르는 것을 듣고 린데만의 재능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1994년 베를린에서 비전문가 밴드를 위한 경연대회가 열렸다.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밴드에게는 네 곡짜리 데모앨범을 전문 녹음실에서 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회였다. 크루스페, 슈나이더, 리델, 그리고 린데만 네명으로 이루어진 밴드가 경연에 참가하여 우승하였고, 이는 파울 란더스의 관심을 끌게 된다. 현 람슈타인의 기타리스트 파울 란더스는 초기 람슈타인의 시범 트랙을 듣고 큰 관심을 보이며 4인 밴드 람슈타인에 참여하게 된다. 소리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람슈타인은 파울 란더스와 Feeling B라는 펑크밴드에서 활약하던 건반 주자 크리스티안 로렌츠에게 합류를 권유하게 된다. 처음 로렌츠는 합류제안을 탐탁치 않아했지만, 결국 수락하게 된다. Herzeleid (1995-1997) 1995년 3월, 프로듀서 제이콥 헬너와 함께 람슈타인은 그들의 첫 번째 정식 스튜디오 앨범인 Herzeleid (영어: Heartbreak)의 제작에 착수한다. 람슈타인의 첫 번째 싱글 Du Riechst So Gut (영어: You Smell So Good) 은 8월 17일 발매되었으며 Herzeleid 앨범은 1995년 9월 24일 발매되었다. 같은해 말 람슈타인은 Clawfinger와 함께 바르샤바와 프라하로 공연 투어를 떠난다. 12월 2일부터 22일까지 람슈타인은 독일 내에서 17번의 공연을 하였으며, 이는 독일내 람슈타인의 인지도가 치솟는 계기가 된다. 1996년 초 람슈타인은 몇 번 정도의 공연 투어를 더 가졌으며, 1996년 1월 8일 그들의 두 번째 싱글 Seemann (영어: Sailor)를 내놓게 된다. 3월 27일 람슈타인은 런던 MTV 프로그램 Hanging Out 의 무대에 오른다. 이는 람슈타인의 첫 번째 영국 공연이 되었다. 뮤직 디렉터 트렌트 레즈너 가 람슈타인의 "Heirate Mich" (영어: Marry Me) 와 "Rammstein" 두 곡을 데이빗 린치 감독의 영화 Lost Highway 사운드 트랙에 추가 하면서 독일 바깥에서 람슈타인의 인지도는 다시한번 크게 올라간다. 영화 Lost Highway 의 사운드트랙은 1996년 가을 미국에서 발매되었으며, 1997년 4월 유럽 각지에서 발매되었다. 그 후 람슈타인은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스위스를 아우르는 긴 투어를 1996년 9월부터 10월까지 가지게 된다. 투어 도중 9월 27일 람슈타인은 "100 Years of Rammstein"이라는 기념공연에서 공연한다. "100 Years of Rammstein" 공연에 초청된 게스트 뮤지션들 중에는 영국 일렉트로닉 뮤직 뮤지션 Moby 와 Bobo, 그리고 베를린 세션 오케스트라 등이 있었으며, 베를린 디렉터 게르트 호프가 라이트쇼의 연출을 맡았다. Sehnsucht, Live Aus Berlin (1996년 후반-2000) 1996년 11월 몰타의 템플 스튜디오에서 람슈타인의 두 번째 정규앨범 Sehnsucht (독일어: Longing) 이 시작되었다. 제이콥 헬너가 다시 한번 프로듀싱을 맡았다. Sehnsucht 앨범의 첫 번째 싱글 "Engel" (영어: Engel) 은 1997년 4월 1일 발매되었으며, 같은해 5월 23일 독일 내 음반 세일즈 차트에서 골드를 기록하게 된다. Engel 의 성공은 Engel 의 팬 버전인 Engel Fan Edition 의 발매로 이어졌다. Engel Fan Edition 은 이전에 발표되지 않았던 두 곡인 "Feuerrader" (영어: Catherine Wheel) 와 "Wilder Wein" (독일어:Virginia Creeper) 을 포함하고 있다. 정규앨범 Sehnsucht의 두 번째 싱글은 "Du Hast" (영어: You Have)였으며, 이 곡은 1997년 8월 독일 싱글차트에서 5위를 기록하게 된다. 1997년 여름 람슈타인의 투어 도중 8월 22일에 Sehnsucht 앨범이 발매되었다. Sehnsucht는 발매 2주 만에 차트 1위를 석권한다. 동시에 람슈타인의 첫 번째 정규앨범이었던 Herzeleid, 그리고 Sehnsucht 앨범의 두 싱글 Du Hast 와 Engel 이 독일내 음반 세일즈 차트 20위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1997년 9월, 10월, 그리고 11월 내내 람슈타인의 투어는 매진되었다. 1997년 투어 직후 람슈타인은 독일 전자음악 그룹 크라프트베르크의 곡인 "Das Modell" (영어: The Model)의 리메이크에 착수하였고, 이 싱글앨범에는 람슈타인이 이전에 내놓지 않았던 곡인 "Kokain" (영어: Cocaine) 이 추가되어 있다. 1997년 12월 5일 람슈타인의 KMFDM과 함께 밴드의 첫 번째 미국 투어에 착수하게 된다. 1998년 8월 22일부터 23일간 람슈타인은 베를린 Wuhlheide 에 모인 17,000명의 팬들 앞에서 공연하였다. 그 1998년의 베를린 공연은 그때껏 람슈타인이 가진 공연들 중 가장 큰 규모였다. 보조 뮤지션들로는 단치히 (Danzig), 니나 하겐 (Nina Hagen), 요아힘 비트 (Joachim Witt), 그리고 알라스카 (Alaska) 가 있었다. 얼마 안있어 발매될 라이브 DVD 인 Live Aus Berlin 에 사용하기 위하여 공연의 전부가 전문가들에 의해 녹화되었다. 1998년 9월부터 10월 말까지 람슈타인은 Korn, Ice Cube, Orgy, 그리고 림프비즈킷 (Limp Bizkit)과 함께 "Family Values" 투어를 가진다. 람슈타인의 미국내 성공을 증명하는 계기로 Sehnsucht는 11월 2일 미국 음반 세일즈 차트에서 골드를 기록하였다. 람슈타인은 MTV 유럽 음악 시상식 (MTV European Music Awards)에서 최고 락밴드 부문 (Best Rock Act) 에 지명되어 1998년 11월 12일 라이브로 Du Hast 의 공연을 가진다. 1999년에도 람슈타인의 성공은 지속되어, 그해 2월 42번째 그래미 상 (Grammy Awards) 에 최고 메탈음악 부문 (Best Metal Performance) 에 지명되었다. 실제 공연 1년 후닌 1999년 8월 30일 Live Aus Berlin 의 라이브 공연이 CD로 제작되어 발매되었다. Live Aus Berlin 은 더블디스크의 한정판으로도 판매되고있다. 발매개시 2주 후 Live Aus Berlin 라이브 앨범은 독일 앨범차트 1위에 들어갔다. 1999년 9월 13일에는 VHS 비디오테이프 버전이, 같은해 11월 26일에는 DVD버전의 Live Aus Berlin 공연 영상이 발매되었다. Mutter (2000-2002) 정규 음반 Mutter (영어: Mother)는 2000년 5월부터 6월까지 남프랑스에서 이루어졌으며, 같은해 10월 스록홀름에서 믹스되었다. 2000년 크리스마스에 람슈타인은 신곡 "Links 2-3-4" (영어: Left 2-3-4)의 MP3 을 공개하였다. 2001년 한 해는 밴드에게 있어서 매우 바쁜 한 해였다. 2001년 1월과 2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Big Day Out 축제에서 공연 하였으며, 1월 13일부터 15일까지는 포츠담의 Babelsberger 필름스튜디오에서 새 싱글 "Sonne" (영어: Sun)의 뮤직 비디오가 촬영되었다. Sonne의 뮤직 비디오는 2001년 1월 29일 공개되었다. Sonne 의 싱글 앨범은 같은 해 1월 12일 유럽 각지에서 발매되었으며, 이 싱글 음반에는 Sonne의 인스트루멘탈과 Clawfinger 의 두 리믹스, 그리고 Mutter 앨범에 포함될 곡인 "Adios" (영어: Farewell) 가 수록되어 있다. Mutter는 2001년 4월 2일 발매되었다. Mutter 의 발매와 함께 람슈타인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아우르는 투어를 시작하였다. Mutter 앨범의 두 번째 싱글 "Link 2-3-4" 가 2001년 5월 14일 발매되었으며, 뮤직비디오는 5월 18일 공개되었다. 6의 우럽 투어를 마치고 람슈타인은 2001년 6월에서 8월까지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멕시코 투어를 가졌다. Mutter 의 세 번째 싱글 "Ich Will" (영어: I Want)는 2001년 9월 10일 발매되었다. 투어 에디션의 Mutter 앨범도 동시에 발매되었는데, 이 앨범은 다른 형태의 커버디자인과 "Ich Will," "Links 2-3-4," "Sonne," 그리고 "Spieluhr" 의 라이브 음원이 추가되어 제작되었다. 2002년 1월 8일부터 12일까지 람슈타인은 영화 xXx 의 한 씬을 촬영하기 위해 프라하로 이동했다. 영화 xXx 속 람슈타인은 인트로 부분에서 그들의 곡 "Feuer Frei!" (영어: Fire At Will!)를 관중들로 가득 찬 클럽에서 부르는 모습으로 나온다. "Feuer Frei!"는 전 유럽에서 영화 트리플 엑스 사운드 트랙의 첫 번째 곡으로 릴리즈 되었다. 람슈타인은 이후 같은 곡의 두가지 리믹스를 내놓았다. Feuer Frei! 의 싱글 앨범에는 추가로 Battery 밴드의 커버 버전인 "Du Hast" 와 "Buck Dich" (영어: Bend Over) 가 수록되었다. Feuer Frei! 의 뮤직 비디오는 Rob Cohen 에 의하여 편집되었으며, 뮤직 비디오는 람슈타인의 영화속 공연 장면과 영화 내 여러 클립들로 이루어져 있다. Reise, Reise (2003-2005) 2003년 11월부터 12월 두 달 동안 람슈타인의 세 번째 정규음반 "Reise, Reise" (영어: Voyage, Voyage - Arise, Arise의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가스페인 남부의 엘 꼬르띠호 스튜디오 (El Cotijo)에서 녹음되었다. 녹음된 음반은 후에 스톡홀름의 토이타운 스튜디오 (Toytown)에서 2004년 4월부터 5월까지 믹스되었다. 2004년 7월 26일에는 Reise, Reise 의 첫 번째 싱글 "Mein Teil" (영어: My Part) 이 공개되었다. Mein Teil 의 뮤직 비디오는 베를린 Treptow 지역구의 아레나에서 촬영 되었으며, 추가적인 야외촬영은 Bismarckstrasse 의 U-Bahn 역에 위치한 도이치 오페르 (Deutsche Oper) 오페라 하우스에서 이루어졌다. "Links 2-3-4" (영어: Left 2-3-4) 뮤직비디오의 감독을 맡은 Zoran Bihac 가 Mein Teil 비디오의 감독을 맡았다. 2004년 8월 6일부터 7일까지 이틀동안 베를린 근처 뤼데르스도르프 (Rüdersdorf)의 폐기처분 된 건설구역에서 Jorn Heitman 감독의 지휘 하에 "Amerika" (영어: America; 미합중국을 뜻함)의 뮤직비디오가 촬영되었다. Jorn Heitman 감독은 "Ich Will" (영어: I Want) 및 다수의 다른 뮤직 비디오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Amerika" 뮤비에 등장하는 우주복세트는 할리우드에서 빌려왔으며 240톤의 재가 뮤비 속 달표면의 표현을 위해 공수되었다. 뮤직비디오는 2004년 8월 20일 공개되었다. Reise, Reise 앨범의 두 번째 싱글 "Amerika"는 2004년 11월 13일 발매되었다. 앞서 9월 27일 발매된 Reise, Reise 앨범과 함께 Amerika 싱글은 유럽 음악순위 10위권에 진출하였다. 빌보드차트 (Billboard Charts) 에 의하여 람슈타인은 그때까지의 독일 밴드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밴드로 명명되었다. 2004년 11월 과 12월 동안 람슈타인은 독일투어를 가졌으며, 투어 도중 11월 22일 "Ohne Dich" (영어: Without You) 싱글 앨범이 발매되었다. 2005년 2월, 람슈타인은 유럽투어를 한번 더 가지게 된다. 2005년 2월 28일에 이르러 람슈타인은 10개국 총 합계 200,000 명의 관중 앞에서 21번의 콘서트를 가지게 되었다. 이 투어 도중 람슈타인은 몇 번인가의 기소를 받게 되는데, 관중석의 일부 관중이 장시간 고열에 노출되어 부상을 입은 데 그 이유가 있다. "Keine Lust" (영어: I Don't Feel Like It) 은 Reise, Reise 앨범의 네 번째 싱글이었으며, 2005년 2월 28일 발매되었다. 2005년 5월 27부터 7월 30일까지 람슈타인은 유럽 각지의 축제에서 공연 하였다. 이 공연들중 촬영된 영상들은 이후 2006년 11월 발매된 람슈타인의 라이브 공연 DVD 인 Volkerball (영어: Folk Ball) 에 추가 되었다. 월드 투어의 일환으로 2005년 8월 10일 올림픽 공원에서 내한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7월 30일 스웨덴 고센버그 공연에서 틸 린데만이 무릎부상을 입어 공연이 취소되었다. Rosenrot, Völkerball (2005-2006) 2006년 8월, 람슈타인은 밴드의 최신 앨범 "Rosenrot" (영어: Red Rose)의 이름을 공개하였다. 새 음반 Rosenrot 의 첫 번째 싱글 "Benzin" (영어: Benzin) 은 2005년 10월 5일 발매되었으며, 뮤직비디오는 같은해 9월 16일 공개되었다. Rosenrot 앨범은 전 세계에서 동시에 2005년 10월 28일 발매되었다. 밸매즉시 Rosenrot 앨범은 전작인 Reise, Reise 의 성공가도를 따르며 20개 국가의 음반 판매 차트에서 10위권에 안착하였다. Rosenrot 앨범의 타이틀 트랙인 "Rosenrot" 의 싱글 앨범이 2005년 12월 16일 발매되었다. "Mann Gegen Mann" (영어: Man Against Man) 싱글의 뮤직 비디오는 2006년 2월 6일 공개되었으며, Mann Gegen Mann 싱글앨범은 같은해 3월 3일 발매되었다. 2006년 2월 19일 밴드 람슈타인의 이름을 따서 혜성 110393 Rammstein 의 명칭이 정해졌다. 1998년에 발매된 Live Aus Berlin 라이브 공연 영상 이후 처음으로 2006년 11월 17일 또다른 람슈타인 라이브 공연 영상 Volkerball 이 발매되었다. Volkerball에는 영국, 프랑스, 일본, 그리고 러시아에서 가진 람슈타인의 공연 영상이 수록되어 있으며, 스페셜 에디션의 두 번째 DVD 디스크에는 Mathilde Bonnefoy 감독의 다큐멘터리 "Anaconda In The Net" 과 람슈타인의 기타리스트 파울 란더스가 감독한 "Making Of The Album Reise, Rese" 가 수록되어 있다. Volkerball 라이브 영상의 한정판은 큰 사이즈의 검은색과 흰색의 사진첩으로 제작되었으며, 람슈타인의 투어를 옆에서 함께 한 사진작가 Frederic Batier 가 찍은 공연 사진들이 포한되어 있다. 사진첩 모양의 한정판은 두 장의 DVD와 두 장의 라이브 앨범 CD로 이루어져 있다. Liebe Ist Für Alle Da (2007-현재) 2006년 잠시 공백기를 가진 람슈타인은 2007년 다시 음반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람슈타인의 싱글 "Amerika"의 Electro Ghetto 리믹스를 녹음 한 독일 래퍼 Bushido 가 가진 2007년 1월 21일 자 인터뷰에 따르면, 람슈타인은 Bushido와 함께 "Vergiss Uns Nicht" (영어: Don't Forget Us)의 녹음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같은 인터뷰에서 Bushido 가 밝힌 내용에 따르면, "Vergiss Uns Nicht" 가 람슈타인의 베스트 앨범에 추가 될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람슈타인의 베스트 앨범이 첫 번째로 언급된 일은 이 인터뷰가 처음 이었으며, 람슈타인의 새 앨범에 관한 언급이 행하여진 것도 이 인터뷰가 처음이었다. 크리스티안 로렌츠가 언급한 정보에 따르면 2008년 람슈타인의 신보가 발매되었어야 하지만, 2008년 1월 Talking Metal Podcast 에 출연한 리하르트 크루스페에 의하면 현재 람슈타인은 새로운 앨범의 제작중에 있으며, 발매 후 미국을 포함한 큰 규모의 월드투어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2008년 11월 4일 람슈타인은 베를린에서 새 음반의 초기작업을 마치고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Henson Studio에서 막바지 작업에 들어갔다. 그 후 7주 동안 드럼, 기타, 그리고 대부분의 보컬파트가 녹음되었다. 2009년 8월 새로운 앨범의 11트랙이 수록이 확정됐으며 앨범의 믹싱도 스톡홀름에서 마무리 지었다. 2009년 9월 1일 새 앨범(사랑은 모두를 위한 것)의 첫 싱글 의 프로모셔널 비디오가 공개되었다. 2009년 10월 16일(EU 기준) 새 앨범 Liebe Ist Für Alle Da가 발매되었다. 2019년 11월 18일에 폴 란더스와 리하르트 크루스페가 "올해 12월에 새로운 앨범의 믹싱이 있을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또, 약 3년간 투어일정을 계획중이라고도 하였다. 2022년 마지막 앨범 Zeit를 발매하였다. 그리고 2023년 유럽 투어를 마치고 음악계에서 은퇴할 예정이다. 음악 성향 넓게 볼 때 람슈타인은 Neue Deutsche Härte 움직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만, 키보드를 이용하여 현악기, 성가대, 그리고 피아노 음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첨부하는 밴드로서 람슈타인의 음악은 펑크록, 팝음악, 고딕 록의 영향을 받은 인더스트리얼 록, 하드록, 헤비메탈, 그런지, 그리고 전자음악까지 포함하는 장르를 뛰어넘는 그들만의 고유한 사운드를 표방한다. 람슈타인의 사운드에 영향을 끼친 밴드로는 슬로베니아의 신고전주의 인더스크리얼 록 그룹인 Laibach가 있다. Oomph!와 Ministry 도 람슈타인의 사운드 형성에 영향을 끼친것으로 보여지나, 람슈타인의 개성 강한 곡들인 "Du Riechst So Gut," "Bestrafe Mich," "Ohne Dich," "Te Quiero Puta!" 등에서 볼 때 기존의 분류방식 으로는 람슈타인이 정확히 어떤 장르에 속하는지 알 길이 없다. 대다수의 경우 간단하게 인더스트리얼 메탈 그룹으로 정의한다. 라이브 쇼와 뮤직 비디오에서 보이는 람슈타인의 코스튬은 독특하기로 유명하다. "Keine Lust" 의 뮤직 비디오 에서는 크리스티안 로렌츠를 제외한 밴드 멤버 전원이 비대하게 살찐 모습으로 등장한다. "Amerika" 의 뮤직 비디오에서는 밴드 멤버 전원이 우주복을 입고 등장한다. 라이브 공연에서 람슈타인의 도전정신은 더 높아진다. "Volkerball"공연에서 틸 린데만은 각각의 곡에 맞춰 제작한 서로 다른 의상을 입고 공연했다. 그 예로 "Mein Teil" 에서의 요리사 의상, "Reise, Reise" 에서의 선원 의상 등이 있다. 음반 정규 음반 Herzeleid(1995년) Sehnsucht(1997년) Mutter(2001년) Reise, Reise(2004년) Rosenrot(2005년) Liebe ist für alle da(2009년) Rammstein(2019년) Zeit(2022년) 라이브 음반 Live Aus Berlin(1999년) Völkerball(2006년) Rammstein In Amerika(2015년) 각주 외부 링크 공식 웹사이트 공식 영어권 웹사이트 1994년 결성된 음악 그룹 독일의 음악 그룹 독일의 헤비 메탈 밴드 인더스트리얼 메탈 밴드 헤비 메탈 인더스트리얼 메탈 인더스트리얼 록 월드 뮤직 어워드 수상자
35035
https://ko.wikipedia.org/wiki/%ED%83%81%EC%9D%8C
탁음
탁음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낸다. 일본어의 탁음(). 중국어의 탁음(). 같이 보기 청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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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파역
닛파역()은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고호쿠구에 있는 철도역이다. 타는 곳 역세권 정보 역사 1993년 3월 18일: 영업 개시. 2007년 4월 21일: 스크린도어 사용 개시. 사진 인접역 고호쿠구의 철도역 1993년 개업한 철도역 요코하마시 교통국의 철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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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
간다라(, , )는 현재의 파키스탄 북부와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자리하였던 고대 왕국 (마하자나파다스) 가운데 하나의 이름이다. 간다라는 주로 페샤와르 계곡, 포토하르 고원과 카불 강 유역에 위치하였다. 그 주요 도시로는 '인간의 도시'란 뜻의 푸르샤푸라(현대의 페샤와르)와 탁샤실라(현대의 탁실라)가 있다. 간다라 왕국은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518년까지 지속했으며, 간다라 왕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간다라는 쿠샨 왕조의 왕들 아래에서 불교 문화의 중심지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서기 1021년 가즈나 왕조의 마흐무드가 정복하고서 간다라라는 지명은 사라졌다. 무슬림 시대 이 지역은 카불 또는 라호르의 통치자가 지배했고, 무굴 제국 시대에 카불 주 일부가 되었다. 간다라 미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으로 인하여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미술로 그리스-불교미술 혹은 로마-불교미술이라고도 칭하였다. 이 미술은 대월지족이 세운 쿠샨 왕조에서 카니슈카 왕의 통치 아래서 가장 번성하였다. 간다라 미술은 인물의 생김새가 사실적이고 개성적이며 매우 자연스럽고, 감각적이다. 사진첩 같이 보기 칸다하르 인도의 역사 박트리아 쿠샨 제국 고대 인도 파키스탄의 고대사 파키스탄의 유적 아프가니스탄의 불교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사 십육대국 베다 시대의 왕국 라마야나의 왕국 마하바라타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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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86%8C%20%EC%A0%84%20%ED%8D%BC%ED%85%90%EC%85%9C%20%EC%97%90%EB%84%88%EC%A7%80%EC%9D%98%20%EC%9B%90%EB%A6%AC
최소 전 퍼텐셜 에너지의 원리
최소 전 퍼텐셜 에너지의 원리(Minimum total potential energy principle)는 구조역학 에너지 원리 가운데 하나로, 탄성 구조물 또는 물체는 전(全) 퍼텐셜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변형 또는 변위를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발 속에 들어있는 구슬은 사발의 맨 아랫쪽으로 이동해 멈출 것이며, 눈이 쌓여 있는 나뭇가지는 아랫쪽으로 쳐지게 된다. 가장 아랫쪽은 최소의 에너지를 갖는 위치이며, 평형을 만족하는 안정된 형태이다. 이 원리는 구조해석과 고체역학에서 많이 사용된다. 전 퍼텐셜 에너지 는 변형된 물체에 저장되는 탄성 변형 에너지(elastic strain energy) U와 가해진 힘의 퍼텐셜 에너지 V의 합이다. 이 에너지는 극미량의 변이는 에너지에 변화를 끼치지 않는 정류점 상태에 있다: 최소 전 퍼텐셜 에너지의 원리는 보존힘이 작용하는 선형 시스템에 대한 가상일의 원리의 특별한 경우로도 유도될 수 있다. 가상의 변위로 인한 외적 가상일과 내적 가상일은 같다: 여기서 = 변위 = 표면의 영역에 작용하는 힘 = 물체의 내력(body force) 이다. 탄성체의 경우, (3)의 우변은 실제 변이의 극미량의 변화로 인한 탄성 변형 에너지(U)의 변화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외력이 보존힘이라면, (3)의 좌변은 작용하는 힘들의 퍼텐셜 에너지 함수 V의 변화로 생각할 수 있다. 이 함수 V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여기서 음의 부호는 작용하는 방향으로의 힘의 변위에 따른 퍼텐셜 에너지의 감소를 의미한다. 이러한 두 보조 조건을 사용하면, (3)은 로 표현되는데, 이는 (2)와 같다. (2)의 변형식은 유한요소법의 기본이 된다. 같이 보기 가상일의 원리 열역학 고체역학 구조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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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9D%BC%ED%83%80%20%EC%A0%9C%EA%B5%AD
마라타 제국
마라타 제국() 또는 마라타 연맹은 18세기 인도 아대륙의 상당 부분을 다스렸던 국가이다. 1674년에 시바지 보살레가 차트라파티, 즉 황제로 즉위하며 공식적으로 건국되었으며, 1818년에 페슈와(대재상) 바지라오 2세가 영국 동인도 회사 군대에게 패배하며 멸망하고 말았다. 마라타 제국을 세운 마라타인들은 인도에서 무굴 제국의 통치를 끝내는 데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마라타인들은 현재의 마하라슈트라 지방의 서부 데칸 고원에서 발원한 전사 부족들로, 17세기에 '인도에서 외세를 몰아내자'라는 뜻의 '힌다비 스와라지야(Hindavi Swarajya)'를 주장하며 크게 세력을 불렸다. 마라타인들은 탁월한 지도자 시바지 보살레의 영도 하에 비자푸르 술탄국에 반란을 일으키며 급성장하였으며, 시바지 보살레는 라이가드를 수도로 삼아 왕국의 기틀을 다졌다. 시바지 보살레의 아버지였던 사하지 보살레는 일찍이 탄자부르를 점령하였는데, 이 영토는 시바지 보살레의 형제였던 에코지 본슬레가 상속받아 이 곳에 탄자바르 마라타 왕국을 세웠다. 마라타인들은 그들의 강점이었던 기동성을 잘 활용하여 이후 무굴 제국과의 전쟁에서 우세를 점했고, 결국에는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707년에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 황제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시바지 보살레의 손자인 샤후 보살레 1세가 무굴 제국에게서 풀려나 마라타로 돌아왔고, 그의 이모였던 타라바이 보살레와의 권력 투쟁 끝에 마라타의 권력을 틀어쥐었다. 이 때 샤후 보살레는 발라즈 비슈와나트와 다나즈 자드하브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후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하여 발라즈 비슈와나트와 그의 후손들은 페슈와, 즉 왕국의 대재상으로 임명하여 대대손손 이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발라즈와 그의 후손들은 마라타 제국의 확장에 크나큰 역할을 하게 된다. 마라타 제국의 최전성기에는 남쪽으로는 타밀나두, 북쪽으로는 파키스탄에까지 이르렀다. 마라타인들은 이 때에 델리에 잔존하던 무굴 제국의 황실을 없애 버리고 그 자리에 페슈와들을 임명하는 방안을 고려하였을 정도였다. 1761년에는 마라타 제국의 군대가 제 3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 제국에게 패배하자 마라타 제국의 동부 확장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파니파트 전투 약 10년 후,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가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폈고, 마라타 제국은 북인도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다시 확립하였다. 마라타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하여 지방의 기사들에게 반쯤 자율성을 부여하였고, 이들을 모아 연맹을 만들었다. 1775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는 페슈와 계승 다툼에 간섭하였고, 이로 인하여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마라타 제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마라타 제국은 1805년과 1818년 사이에 일어난 2차와 3차 전쟁에서는 영국에게 패배하였고, 결국 이로 인하여 대영제국이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점거하게 되었다. 마라타 제국의 영토 상당수는 해안에 접하고 있었기에, 마라타 제국은 막강한 해군을 육성하여 이를 보호하려 하였다. 마라타 해군은 무역을 하는 상선들을 보호하였으며, 외국의 군함들과 상선, 그들 중에서도 특히 영국과 포르트갈의 배들이 오직 허가받은 항구에만 입항하여 있도록 하는 데에 성공적이었다. 마라타 제국은 해안에 강력한 요새들을 세워 항시 감시하였으며, 강력한 군대를 주둔시켜 국경을 보호하였다. 이름 마라타 제국은 대개 마라타 연맹이라고도 불린다. 저명한 역사학자 바바라 라무삭이 말하기를, '마라타 제국'이라는 이름은 주로 힌두 민족주의자들에 의하여 사용되며, '마라타 연맹'은 주로 영국인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사용된다고 한다. 다만 그녀는 두 단어가 모두 부정확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제국'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중앙집권화된 체제를 의미하고 '연맹'이라는 단어는 느슨하게 묶여 있는 주권국들을 의미하는데, 둘다 마라타 제국의 정치 체제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현재 '마라타'라는 단어는 특히 특정한 전사와 연맹 계급을 뜻하는 데에 사용되지만, 과거에는 모든 마라타인들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역사 건국 마라타인들은 서부 데칸 고원에서 살아가는 민족들이었다. 17세기 중반 무굴 제국에 열렬한 무슬림 황제 아우랑제브가 즉위함에 따라, 인도를 엄격한 이슬람법 지배체제 아래에 두고 비이슬람교도들을 법으로 혹독하게 다스리게 된다. 이에 힌두교도들이 다수인 마라타족은 무굴 제국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마라타인들은 '힌다비 스와라자야', 즉 힌두인들에 의하여 지배되는 인도를 주장하며 세를 불려나갔다. 이후 귀족 출신 시바지 보살레가 마라타의 지도자로 떠올랐고, 라이가드를 수도로 하여 마라타 제국을 세웠다. 1674년에는 차트라파티, 즉 황제로도 즉위하였다. 당시 마라타 제국은 인도 대륙의 4.1%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곧 빠르게 확장하여 그가 죽을 즈음에는 300여 개의 요새, 40,000여 명의 기병, 50,000여 명의 보병들을 거느린 상당한 크기의 왕국이 되었다. 이때 무굴 제국은 라지푸트족들과도 분쟁이 있었는데 이와 함께 마라타의 반기로 남북 양면의 협공을 받게 된다. 다만 아우랑제브의 치세 전반기는 주로 북쪽 지역에 관심을 두었기에, 남쪽 데칸 지역의 업무는 총독을 두어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마하라슈트라 지역의 마라타인들이 시바지 보살레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되고 점차 독립적인 성향을 띠게 되며 데칸의 정치적 상황은 갈수록 복잡하게 되었다. 황제 아우랑제브는 처음에 마라타인들의 세력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바지 보살레가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가자 군대를 보내 제압하려 했지만, 도리어 패배하고 마라타 세력은 오히려 이전보다 강성해졌다. 시바지는 1663년 푸나 지역 근처를 점령했고 1664년 무굴 제국의 중요한 항구도시 수라트를 차지하며 점차 힘을 키워나갔다. 시바지 보살레에게는 삼바지 보살레와 라자람 보살레, 이 두 명의 후계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이복형제였으며, 그들 중 더 나이가 많은 삼바지 보살레가 더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1681년에 시바지 보슬레가 사망한 후에 삼바지 보살레 1세가 제위에 올랐고, 확장 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하였다. 삼바지 보살레는 와디야르 왕조와 포르투갈 군대를 무찔렀으며, 아우랑제브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황제의 아들 악바르와 동맹을 맺었다. 아우랑제브는 이 동맹을 깨고 아들을 무릎꿀리기 위하여 1681년에 5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남진하였고, 비자푸르 술탄국 등을 정복하며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후 삼바지 보살레는 8년 동안이나 아우랑제브의 무굴 군대와 맞서싸웠는데, 탁월한 용병술로 인하여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고 전한다. 1689년 초, 삼바지 보살레는 군사 회의를 열어 무굴 군대를 어떻게 부술 지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하였다. 허나 무굴 제국의 군대가 이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고 회의장을 급습, 몇 명의 호위군만 데리고 있던 삼바지 보살레를 생포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결국 1689년 2월 1일에 삼바지 보살레와 그의 조언자인 카비 칼라시가 생포되었으며, 반역죄로 1689년 3월 21일에 무굴 제국에 의하여 처형당했다. 삼바지 보살레가 죽은 이후, 그의 이복형제였던 라자람 보살레가 왕위를 승계하였다. 허나 그가 왕위에 오른 직후에도 무굴 제국은 여세를 몰아 수도인 라이가드를 맹공하였고, 라자람 보살레는 결국 피난을 가야만 하였다. 이후 마라타 군대는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였고, 빼앗긴 요새들을 무굴 제국군대의 손아귀에서 다시 탈환하였다. 1697년에는 아우랑제브 황제에게 화친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황제의 강경자세 때문에 거절당했다. 라자람은 1700년에 신하가드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사후에 그의 아내였던 타라바이가 아들인 시바지 2세의 이름을 빌어 대신 통치하였다. 타라바이는 남편의 적대 정책을 이어 받았으며, 나중에는 나르마다 강을 건너 무굴 제국의 영토로 진입하기도 하였다. 1707년에 아우랑제브 황제가 서거한 이후, 삼바지 보살레의 아들이었던 샤후 보살레 1세가 새롭게 무굴의 황위에 오른 바하두르 샤 1세로부터 풀려나는 데에 성공했다. 다만 샤후 보살레 1세가 고향으로 돌아가 무굴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의 모친은 여전히 잡아두었다. 한편 샤후 보살레 1세는 풀려난 직후 고국으로 귀환하여 황위를 요구하였고, 타라바이와 시바지 2세에게 도전하였다. 이후 내전이 발발하였는데, 이 내전에서 샤후는 명신인 발라즈 비슈와나트를 재상격 관직이었던 '페슈와'에 임명하였다. 이후 발라즈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무굴 제국에게서 샤후가 유일한 마라타 제국의 황제라는 인정을 받아내었고, 나중에는 무굴 제국에 포로로 잡혀있었던 샤후의 어머니 예수바이도 돌아오게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후 샤후 보살레 1세는 타라바이와 그 아들을 물리치고 유일한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의 치세기에 라그호지 본살레 장군이 국경을 동쪽으로 크게 확장하였으며 현재의 벵갈 지역까지 이르렀다. 또한 나중에는 힘을 키워 국경을 구자라트 지방까지 넓히기도 하였다. 페슈와의 시대 "페슈와"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어 "پیشوا(pēshwā 페슈워, '지도자, 통솔자')"에서 유래하였다. 1674년 시바지 1세가 차트라파티가 된 후 공적이 많은 장군 모로판트 트림바크 핑갈레에게 이 칭호를 내린 것이 페슈와직의 시초이다. 원래는 세습이 가능한 비세습직이었으나, 바트 가문의 발라지 비슈와나트 이후 바트 가문이 세습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이들의 권한이 워낙 강력해져 제국의 사실상 지배자가 되었으며, 1772년까지 군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다. 이들의 통치기에 마라타 제국은 워낙 번성하여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통치하였다. 샤후 보살레 1세는 그의 즉위에 공로가 컸던 발라지 비슈와나트에게 1713년에 페슈와직을 내렸다. 이 시기부터 페슈와는 황제 다음가는 최고위직이 된 것이다. 발라지 비슈와나트의 가장 큰 업적들 중 하나는 1714년에 당시 서부 해안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던 해적 칸호지 앙그리아와 로나발라 협약을 맺어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나중에 칸호지 앙그리아는 샤후 1세를 황제로 인정하기도 하였다. 1719년에는 무굴 제국의 수도인 델리로 진군하여 황제를 쫓아내고 꼭두각시를 세워 자신들의 마음대로 하기도 하였다. 무굴 제국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마라타 제국의 봉신국 비슷하게 전락하게 된다. 1720년 4월에 발라지 비슈와나트가 죽은 이후, 샤후 1세는 그의 뒤를 이어 바지라오 1세를 새로운 페슈와로 세웠다. 그는 마라타 제국의 영토를 현대 인도의 3%에서 30%로 늘리는 등 엄청난 군사적 공로를 세우며 제국의 세를 크게 늘렸다. 그는 1740년 4월에 죽을 때까지 41번이 넘는 전투를 치렀으며, 그 전투들 가운데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였다. 1728년 2월 28일에는 팔케드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바지라오 1세는 아사프 자흐 1세를 꺾었으며, 하이데바라드의 니잠을 무릎꿇리는 데에 성공하였다. 1737년에는 델리 전투를 벌여 무굴의 수도인 델리 인근을 약탈하였는데, 무굴 제국의 봉신들이 제국을 구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였으나 보팔 전투에서 결국 패배하였다. 마라타 제국은 이후 무굴 제국에게 막대한 양의 조공을 요구하였으며,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여 말와 지역을 할양받았다. 바지라오 1세의 시대에는 뭄바이 북쪽 50km 부근에 있는 해안 마을 바사이에서 포르투갈 지배자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기도 하였다. 이 전투는 바지라오 1세의 형이 직접 이끌었으며, 바지라오 1세 시대의 주요 군사적 업적이기도 하다. 바지라오 1세가 죽은 이후에는 그의 아들인 발라즈 바지라오가 다른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승인을 얻어 페슈와가 되었다. 이후 발라즈 바지라오도 그의 아버지의 전철을 밟아 수많은 군사 원정을 벌였으며,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며 국력을 신장하였다.마라타는 본슬레 가문의 라구지 본슬레의 지휘 하에 남부와 동부로 세력 확장을 계속하는데, 라구지 본슬레는 1741년의 티루치라팔리 전투에서 일단 카르나타카 나와브를 제압한 다음, 1741 ~ 1751년간 벵골 나와브의 영토를 6차례에 걸쳐 침공하여 오디샤를 점령, 합병하고 벵골을 봉신국으로 만든다. 이 때 마라타 제국은 벵골을 무자비하게 통치하며 한때 풍요로웠던 벵골 지역을 완전히 망쳐놓는데, 사람들에게 돈을 바치게 한 다음 내지 못하거나 미납한 자가 있으면 죽여버리는 등 포악한 공포정치를 펼쳤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기록에 의하면 최소한 40만 명의 벵골인들이 이 때 마라타에 의하여 학살되었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벵골 현지에서는 마라타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으며, 토착 지도자들인 나바브들에 대한 지지가 갈수록 높아졌다. 발라즈 바지라오는 농업을 장려하였으며, 국가의 안정화를 추진하여 마라타 제국의 내치를 잘 다스렸다. 이제 마라타 제국과 무굴 제국의 권력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 1752년에는 마라타가 아프샤르 왕조의 후신인 두라니 왕조에 위협받는 무굴과 무굴의 수도 델리를 보호해준다는 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그런데 1757년 초 두라니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북인도를 침공하고 델리를 점령한 후, 델리 침공 과정에서 무굴을 배신하고 두라니에 붙은 로힐라족의 장군이자 웃드의 나바브(웃드 지역의 통치자를 의미)를 델리의 통치자로 남겨두고 물러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라타는 마침 1757년 초부터 전투를 벌이는 등 두라니와 적대 관계에 있었고, 이에 대응하여 동년 웃드의 나바브 공격해 물리치고 마침내 델리 및 근교를 점령하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1750년대 후반 마라타가 두라니 지배하의 인도 북서부 펀자브와 카슈미르를 공격해 점령한다. 바야흐로 마라타가 인도 아대륙의 절반가량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으로, 그 옛적의 사타바하나 왕조 및 라슈트라쿠타 왕조에 필적하는 데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왕조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후 마라타 제국은 인도 북서부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시작하였고, 1758년의 아톡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해 5월 8일에는 페샤와르 전투에서 승리하며 페샤와르를 손에 넣는 데에 성공했다. 제3차 파니파트 전투가 일어나기 바로 직전인 1759년, 마라타 제국군은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에 있는 붉은 요새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1759년, 바지라오 1세의 조카인 사다시브라우 바우는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 왕조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인도 북부로 다시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사다시브라우 바우 지휘 하의 마라타 제국은 즉시 대항군을 편성하였고, 1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데리고 진군하여 1760년 8월에 다시 델리를 되찾았다. 이 때 이미 델리는 수많은 전쟁을 거치며 거의 잿더미로 변해버린 상태였는데, 마라타 군대는 부족한 보급품을 채우기 위하여 이미 쇠락한 델리를 또다시 약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델리를 수복한 마라타 군의 사령관 사다시브라우 바우는 아예 이번 기회에 무굴 제국의 황계를 자신의 조카이자 페슈와의 아들이었던 비스와스라오로 대체할 생각도 하였다. 1760년에는 하이데라바드의 군대를 데칸에서 무찌르며, 마라타 제국의 권세는 그 하늘을 찌르며 최고조에 다다랐다. 그러나 마라타의 기세는 전열을 가다듬은 두라니와의 제3차 파니파트 전투(1761)에서 잠시 꺾였다. 두라니측 지휘관으로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 웃드의 나바브가, 마라타 측 총지휘관으로는 사다시브라오 바우가 참가하였으며, 두라니 측 병력 약 10만, 마라타 측 병력 약 5만이 뒤섞여 싸운 대전투가 마라타의 대패로 끝난 것이다. 마라타의 패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중 아와드 나바브 슈자 웃다울라가 아와드의 이권을 잠식한 마라타에 앙심을 품고 두라니 측에 물자 보급을 지원하는 한편 마라타의 보급을 방해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마라타 제국이 워낙 같은 힌두교를 믿는 나라들에게까지 혹독한 대우를 하였기에, 이에 앙심을 품고 이 전투에서 마라타를 지원하지 않았던 반면 이슬람교측 세력은 두라니 왕조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던 것이다. 마라타는 패배의 결과로 수틀레지 강 이북 펀자브 지역의 종주권을 두라니에 넘기고 더 이상의 북인도 확장을 중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전쟁은 마라타 측뿐 아니라 두라니 측에도 엄청난 국력 소모를 강요했으므로 두라니는 마라타의 팽창을 억제하는 선에서 더 이상 마라타와의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델리를 비우고 떠난다. 이후 마라타 제국은 전투 때 자신들을 돕지 않았던 민족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리는 것으로 보복하였다. 제 3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잠시 기가 꺾인 이후, 마라타 제국은 4번째 페슈와인 마다브라오 1세의 재위기에 다시 중흥기를 맞았다. 그는 분열된 마라타를 다시 하나로 묶으려 노력하였으며, 마라타 제국의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남부 지방으로 옮겨 마이소르와 하이데라바드 등을 쳐 국경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는 북부 국경도 신경을 썼기에, 장군들을 보내 국경을 확립하려 하였고 1770년대 초에 다시 다시 마라타 제국의 권위를 북부에서도 확고히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허나 마다브라오 1세는 1772년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고, 이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마라타 제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연맹기 8세기 중반까지 인도 내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마라타 제국이었지만, 그 시기는 서양의 강력한 영국의 세력이 인도로 뻗어오던 시기였다. 인도 반도의 관점에서 영국(영국 동인도회사)은 원래 17세기 중반부터 남동인도의 첸나이(마드라스, 1639년부터 점유, 비자야나가르 제국 지방관의 승인으로 획득)와 남서인도의 뭄바이(봄베이, 1661년부터 점유, 포르투갈로부터 찰스 2세와 카타리나 디 브라간사의 결혼 지참금으로 넘겨받음)를 거점으로 삼고 무역을 하던 세력이었으나, 18세기 중반 벵골 지역의 지방정권을 굴복시키고 사실상 벵골을 점령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마이소르 왕국과 전쟁을 하고 하이데라바드 및 카르나타카에도 개입하는 등 이제는 남인도, 동인도에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마라타는 18세기 중반의 확장기까지는 영국과 별다른 정치적 대립이 없었지만(벵골과 오디샤에 대해 간접적인 알력이 있기는 했다), 이때부터는 영국과의 관계가 마라타의 흥망에 주요 변수로 떠오르게 된다. 1772년 마라타 제국 내부에서는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가 사망하고, 바지라오의 손자 나라얀라오가 페슈와가 되었으나, 나라얀라오와 라구나트라오가 페슈와직을 놓고 치열한 권력 투쟁을 전개한다. 처음에는 라구나트라오가 나라얀라오를 암살하고 페슈와 자리를 차지하는가 싶더니(1773), 부정한 방법으로 자리를 차지한 라구나트라오에 대한 반발로 라구나트라오는 마라타의 조신들에 의해 1년 만에 자리에서 쫓겨나고 나라얀라오의 젖먹이 아들 마다브라오 2세(1774 ~ 1795)가 명목상의 페슈와로 옹립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마라타 제국은 페슈와 중심의 체제에서 마다브라오 1세가 임명한 지방관들의 독립성이 강해져 지방분권적인 연맹체(마라타 연합, 마라타 동맹)로 변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권력 중심에서 밀려난 라구나트라오의 일파가 봄베이에 있던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기회다 싶었던 영국은 이에 응하고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1775 ~ 1782)이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는 프랑스가 외교적으로 끼어들어 영국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게 된다. 잠시 권력 투쟁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고는 해도, 다시금 강성해져 있던 마라타 동맹은 출중한 장군 마하다지 신데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영국과 맞섰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의 방해도 있는데다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과도 맞물려 있던 관계로 힘겨운 상태였고, 결국 1782년 당시 영국의 초대 인도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는 마라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살바이에서 마라타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야무나 강을 경계로 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점령한 영토를 마라타에 반환했고, 대신 마라타는 영토 내에 프랑스의 항구 설치를 허가하지 않기로 약조하였다. 영국과의 영토 문제에서 합의를 본 마라타의 마하다지 신데는 무굴 제국 황제의 섭정이자 총사령관직을 수행하며 라지푸트와 펀자브를 영향권에 두는 등 북인도에서의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힌두교도가 무굴 제국의 최고위직을 겸하는 상황에 무굴 궁정의 이슬람교도가 반발했고, 1787년 랄소트 전투에서 라지푸트족의 암베르-마르와르 연합군에 마하다지 신데가 패배하자 마하다지는 무굴 궁정에서 일시적으로 실각한다. 1788년에는 과거의 로힐라족 세력과 연합한 무굴 제국의 독립파 장군 이스마일 벡의 항쟁이 일어났는데, 로힐라족의 굴람 카디르는 일시적으로 델리를 점령하고 마라타에 순종적인 샤 알람 2세를 폐위한 후 눈멀게 한다. 이에 무굴 궁정에서는 일시적 실각 상태였던 마라타의 마하다지 신데가 개입하여 이스마일 벡과 로힐라족을 분쇄하고, 델리 재점령 후 샤 알람 2세를 무굴 황제로 복위시킨다. 이에 따라 마하다지 신데는 다시 무굴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1790년에는 샤 알람 2세에게 페슈와 마다브라오 2세를 무굴 황제의 대리인으로 임명하도록 한다. 한편 마라타는 인도 남부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마이소르 술탄국의 세력과 대립에 들어가, 1770년대부터 간헐적인 전투를 벌였다. 초기의 국지전은 마이소르의 하이데르 알리가 마라타가 점령한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가 발생한 1777년의 사운시 전투에서 꽤 큰 규모의 전투로 발전했는데, 하이데르 알리는 뛰어난 전술적 판단으로 마라타의 지휘관 콘헤르 라오(Konher Rao)를 죽이고 다른 지휘관 파두랑 라오(Padurang Rao)를 포로로 붙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마라타와 마이소르 간에는 한동안 소강 상태가 지속되었으나, 1780년대에 마라타가 하이데라바드와 마이소르에 대항한 군사 동맹을 맺고 마이소르에 대항한 경계를 강화하자 마이소르의 티푸 술탄이 1785년 마라타를 침공하여 본격적인 마라타-마이소르 전쟁이 시작되었다. 1787년까지 2년간 지속된 이 전쟁에서 티푸 술탄은 놀라운 지휘를 펼쳐 연전연승하였고, 마라타는 전체적으로 전투에서는 패배하고 있었으나 마이소르의 국력 및 마이소르와 영국 세력 간의 적대 관계를 감안할 때 전쟁이 계속되면 최종적으로는 마라타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결국 티푸 술탄은 1787년 1월의 바하두르벤다 포위전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둔 뒤 1787년 4월 가젠드라가드 조약을 맺어 마이소르가 마라타에 약간의 공물을 바치고 선대 하이데르 알리가 마라타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냈다. 확실한 승리 없이 시간을 끌던 마라타는 예상한 것보다 적은 이득을 거둔 상황이었고, 결국 몇 년 후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1790 ~ 1792) 때 영국 동인도회사, 하이데라바드 니잠 정권과 동맹하여 마이소르를 협공해 일부 영토를 점령해온다. 그러나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마이소르는 결정적으로 약화되고, 동인도회사의 세력만 강성해져 결과적으로 이는 마라타에 실책이 되었다. 1795년에는 마라타가 하이데라바드와 다시 대립하여 전쟁에서 카르다 전투의 대규모 회전을 승리하고 하이데라바드의 영토를 빼앗았는데, 하이데라바드는 지속적으로 친영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영국과 마라타의 관계는 다시 벌어지게 된다. 18세기가 끝나고 19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마라타의 전체적인 세력은 절정에 달하고 있었으나, 코친, 하이데라바드, 트라방코르, 아와드, 카르나타카 나와브를 길들이고 제4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에서 승리(1799)해 남인도, 동인도를 평정한 영국의 앞을 막아서는 중부 인도의 대세력은 이제 마라타가 유일했다. 19세기 초 마라타 동맹은 페슈와, 가에크와드, 신데, 홀카르, 본슬레 등 다섯 세력들로 나뉘어 서로 간에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된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영국은 페슈와 및 신데 가문과 군사동맹을 맺은 후 마라타 연합 세력을 분열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실패하고 만다. 그런데 1802년 10월 디왈리 축제 기간 중에 홀카르가 페슈와, 신데 연합군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게 된다. 이에 당황한 페슈와 바지라오 2세가 영국군과 군사 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의 보호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곧이어 신데와 본슬레가 영국과 전쟁을 벌이는데(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1803 ~ 1805), 전쟁 초기 1803년의 아사예 전투와 라스와리 전투 등에서 신데-본슬레 연합군이 영국에 패배하고, 동년 12월 본슬레와 신데는 차례로 영국과 강화를 맺고 전선을 이탈한다. 전쟁 도중 신데 가문의 세력권에 있던 델리가 영국에 점령당하였으며(1803년의 델리 전투), 무굴 제국은 1803년부터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홀카르 세력의 지도자 야슈완트라오 홀카르는 1804년 초 영국과의 협상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전쟁에 들어갔다. 7월 무쿤드와라 고개의 전투에서 야슈완트라오는 영국군에 승리를 거두었고, 계속해서 9월까지는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마침내 10월 8일, 홀카르군은 영국 지배하의 무굴 황제를 보위하기 위해 델리를 포위공격하나, 영국군의 기습에 당해 큰 타격을 입고 패배한다. 이를 기점으로 전황은 홀카르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고, 야슈완트라오는 홀카르의 동맹 바랏푸르 왕국의 영토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이를 추격한 영국군은 1805년 1월 바랏푸르 왕국의 수도 바랏푸르를 포위하였지만, 홀카르-바랏푸르 연합군의 호수비로 패배한다. 부담을 느낀 바랏푸르 왕국은 동년 4월 영국과 강화 조약을 맺고 전선을 이탈하였으나, 야슈완트라오의 선전은 북중부 인도 전역에서 추종자를 낳았고 신데와 본슬레는 재참전 채비를 하였으며, 자이푸르 왕국과 마르와르 왕국도 홀카르를 지원하였다. 바랏푸르에서 철퇴한 야슈완트라오는 시크 왕국으로 가서 시크의 란지트 싱을 끌어들여 영국에 대항하기를 시도하였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지원을 약조하였던 란지트 싱은 곧 배반하고 영국 측으로 돌아서게 된다(1805년 12월). 군사적으로는 이처럼 홀카르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나, 야슈완트라오의 분전으로 장기화된 전쟁이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한복판에 있던 영국에 엄청난 전비 부담을 안겼으므로, 영국 총독 리처드 웰즐리가 본국으로 강제 소환되고, 영국 측은 야슈완트라오에게 강화를 요청한다. 이에 야슈완트라오가 응하여, 1805년 12월 24일 펀자브의 라지가트에서 라지가트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홀카르-영국의 무승부 형태로 마무리된다. 1806년 초에는 라지가트 조약이 개정되어 홀카르 피점령지가 반환됨으로써 홀카르는 군사적, 외교적 명예를 얻었으나, 전 마라타의 입장에서는 패배였고, 이후 마라타는 라자스탄 일대의 라지푸트족에 대한 지배권을 대부분 상실했다. 페슈와 바지라오 2세와 장군 바푸 고칼레는 끝까지 항쟁하였으나, 1818년 1월 1일의 코레가온 전투 등에서 패배하고, 이어진 2월의 전투에서 바푸 고칼레는 페슈와를 지키다가 사망한다. 페슈와는 4개월가량 더 추격전을 벌이다 결국 힘이 다함을 자각하고 영국에 항복한다. 바지라오 2세가 이 항복 문서에 조인함으로써 마라타 동맹은 공식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바지라오 2세는 페슈와 직할령을 몰수당하고 비투르(현재의 칸푸르 주변 칸푸르 현에 속함)에서 연금 수급자로 생활하게 되었으며, 과거 신데-홀카르의 지배 하에 있던 라지푸트 왕국도 1818년 말까지 번왕국화됨으로써 마라타의 구 영토는 전부 영국의 손 안에 들어간다. 명목상의 왕이었던 차트라파티 프라타프 싱 세력은 전쟁 와중에 영국의 보호 하에 들어가, 영국 지도 하에 구 차트라파티를 왕으로 하는 사타라 번왕국이 수립되었으나, 프라타프 싱의 아들(정확히는 양자) 샤하지가 아들 없이 1848년 사망함으로써 1849년 사타라 번왕국의 영토는 영국 직할령으로 흡수된다. 나나 사힙(1824 ~ 1859?)은 바지라오 2세의 처조카로 1827년 비투르에 살던 바지라오 2세의 양자가 되었다. 1851년 바지라오 2세가 사망하였으나 영국이 입양에 의한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아 바지라오 2세의 여러 작위와 연금을 상속받지 못했다. 1853년 이 문제를 탄원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사절을 보내나 거부당하고 1855년 사절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사힙은 자신의 명예를 실추당한 것으로 여기고 영국에 반발심을 품게 되었다. 1857년 사힙은 마라타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세포이 항쟁 시기 군사를 일으켜, 세포이 반란군과 합세해 6월 칸푸르를 점령하고 자신을 정당한 페슈와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래 가지 못했고, 같은 해 말 다시 영국군이 칸푸르를 점령한 후 도피하였는데 이후 사힙의 행방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네팔 도피설, 시호르 도피설 등)만 무성할 뿐이다. 1858년 6월, 다른 많은 항쟁 지도자들도 나나 사힙을 페슈와로 인정하였다. 푸네에 있는 페슈와 기념물에 간혹 나나 사힙이 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이 덕분에 마라타 동맹은 인도 힌두교도의 자부심의 상징이 되었다. 행정 아슈타 프라단(8인 위원회)는 8명으로 이루어진 회의기구로, 마라타 제국의 최고 행정 기구였다. 이 기구는 제국의 시조인 시바지 보살레가 직접 고안한 것으로, 이 곳에서 나오는 문서와 행정명령들은 모두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졌다. 이 곳의 구성원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페슈와 - 총리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황제 바로 아래의 최고 권력자였다. 마줌다르 - 현대의 재무장관으로, 제국의 예산안을 심의하였다. 사키브 - 황제의 비서관으로, 황실 칙령을 반포하였다. 만트리 - 현대의 내무장관으로 정보와 간첩 행위를 총괄하였다. 세나파티 - 현대의 국방장관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국경을 방위하는 일을 맡았다. 수만트 - 현대의 외교장관으로, 타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조정하였다. 냐야드햐크스 - 현대의 사법장관으로, 정의와 법에 관련된 일을 맡아보았다. 판디트라오 - 최고 종교 지도자로, 내부의 종교적인 사안들을 다루었다. 종교 문제를 다루는 판디트라오와 법적인 사안을 다루는 나야드햐크스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위원들은 모두 강력한 군사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행정적으로도 상당한 권력을 누렸다. 마라타 제국 후기에는 갈수록 황권이 약화되고 신권이 강력해짐에 따라 봉건적인 구도가 형성되며 페슈와를 중심으로 한 관료제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페슈와는 현재의 총리와 비슷한 직위로, 제국의 창건자 시바지 보살레가 마라타 제국의 성장기 동안에 더 효과적인 정책 발효가 가능하도록 일부러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였다. 1749년 이전가지 보통 한 명이 8년에서 9년 정도 임기를 맡았으며, 마라타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로 활동하였다. 1749년부터 1818년까지는 심지어 황제들보다도 힘이 강력해져 제국의 사실상 지배자로 떠올랐다. 마라타 제국은 유능한 페슈와들과 실무진들, 외교관들의 보좌 하에 인도 대륙 대부분을 통치하는 거대한 제국이었는데, 나중에 1818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에 의하여 멸망당할 때까지도 페슈와들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었다. 페슈와들은 거의 대부분 종교의 자유를 허가하였으며, 세속적인 방법으로 제국을 통치하였다. 마라타 제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사용하여 무굴 제국의 상선이나 서양의 배들을 약탈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유럽인들이 이같은 조치에 항의하였을 때에도 마라타 제국 측에서는 이들이 제국의 적인 무굴과 이슬람 국가들과 거래하고 있다는 이유로 합법적인 공격 대상이라고 일변하였다. 나중에 유럽이 마라타 제국과 협약을 맺고 나서야 이같은 습격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역대 군주 차트라파티 시바지 1세(시바지 보살레, शिवाजी भोसले, Shivaji Bhosale, 1627? ~ 1680, 재위 1674 ~ 1680) 삼바지(삼바지 보살레, संभाजी भोसले, Sambhaji Bhosale, 1657 ~ 1689, 재위 1681 ~ 1689) 라자람 1세(라자람 라제 보살레, राजाराम राजे भोसले, Rajaram Raje Bhosale, 1670 ~ 1700, 재위 1689 ~ 1700) 시바지 2세(1696 ~ 1726, 재위 1700 ~ 1707 (차트라파티), 1710 ~ 1714 (콜하푸르 왕국)) 타라바이(1675? ~ 1761, 섭정 재위 1700 ~ 1708; 라자람 1세의 왕비이며 시바지 2세의 어머니) 샤후 1세(1682 ~ 1749, 재위 1707 ~ 1749) 라자람 2세(1726 ~ 1777, 재위 1749 ~ 1777) 샤후 2세(1763 ~ 1808, 재위 1777 ~ 1808) 프라타프 싱(1793 ~ 1847, 재위 1808 ~ 1819 (차트라파티), 1819 ~ 1839 (사타라 번왕국)) 샤하지(1839 ~ 1848, 재위 1839 ~ 1848 (사타라 번왕국)) 페슈와 트림바크 핑갈레(1620 ~ 1683, 1647년 시바지 1세 세력에 가세, 페슈와 재직 1674 ~ 1683) 모레슈와르 핑갈레(? ~ 1689, 트림바크 핑갈레의 아들, 페슈와 재직 1683 ~ 1689) 닐칸드 바와데카르(1650 ~ 1716, 페슈와 재직 1689 ~ 1708) 바히로지 핑갈레(페슈와 재직 1708 ~ 1711) 이하는 모두 바트 가문의 페슈와들이다. 푸네는 바트 가문의 세력권에서 페슈와의 본거지로 기능하며 제 2의 수도 기능을 하였으며, 본격적으로 페슈와가 황제를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바지라오 1세 시대부터는 한동안 마라타의 수도 기능을 하였다. 바지라오 1세는 1732년 푸네에 재상궁 샤니와르 와다를 짓고 사실상 마라타의 통치자로서 군림하기도 하였다. 발라지 비슈와나트(1662 ~ 1720, 페슈와 재직 1711 ~ 1720) 바지라오 1세(1700 ~ 1740, 페슈와 재직 1720 ~ 1740) : 마라타 팽창기의 주요 집권자. 발라지 바지라오(1721 ~ 1761, 페슈와 재직 1740 ~ 1761) 마다브라오 1세(1745 ~ 1772, 페슈와 재직 1761 ~ 1772) : 마라타 부흥기의 주요 집권자. 나라얀라오(1755 ~ 1773, 페슈와 재직 1772 ~ 1773) 라구나트라오(1734 ~ 1783, 페슈와 재직 1773 ~ 1774) 마다브라오 2세(1774 ~ 1795, 페슈와 재직 1774 ~ 1795) : 꼭두각시 페슈와로서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 바지라오 2세(1775 ~ 1851, 페슈와 재직 1796 ~ 1818) : 퇴위 후에는 칸푸르 근처의 비투르에서 연금 생활자로 살다가 사망. 각주 참고 자료 외부 링크 마하라슈트라주 인도의 옛 군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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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B%82%98%20%EC%95%84%EB%A0%8C%ED%8A%B8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 , 1906년 10월 14일 ~ 1975년 12월 4일)는 독일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작가, 정치 이론가이다. 종종 정치 철학자로 평가되지만, 아렌트 자신은 항상 철학은 "단독자인 인간"에 관심을 갖는다는 이유로 그러한 호칭을 거절했다. 아렌트는 대신에 자신을 정치 이론가로 묘사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업적이“‘한 인간’이 아닌 ‘인류’가 지구에 살며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공헌은 20세기와 21세기 정치 이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생애 아렌트는 당시 독립적이었던 린덴(지금은 하노버의 일부)에서 세속적 유대인 집안에 태어났으며 쾨니히스베르크(이 도시는 이마누엘 칸트의 고향이었다)와 베를린에서 자랐다.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하이데거의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그와 길고 산발적인 연애 관계에 있었는데, 이후 나치에 적극 협력하던 그에게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되어 그를 떠나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카를 야스퍼스의 지도를 받아,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입각하여 사랑의 개념에 대한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1929년에 출판되었으나, 아렌트는 1933년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 자격 취득(하빌리타치온; 독일에서의 교수 자격 취득)을 금지당했으며, 따라서 독일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도 좌절되었다. 그래서 독일에서 피신하여 파리시로 갔다. 파리에서 문학 평론가이며 마르크스 신비주의자인 발터 벤야민과 친구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아렌트는 유대계 망명자들을 돕기 위해 일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한 뒤 독일이 프랑스 일부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유대인이 수용소에 강제 이송되게 되자, 아렌트는 프랑스에서 도주해야 했다. 1940년에, 아렌트는 독일 시인이자 철학자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결혼했다. 1941년에는 아렌트를 포함하여 2500명 정도 되는 유대계 망명자에게 불법으로 비자를 발행해 준 미국 외교관 하이램 빙엄 4세의 도움으로 남편과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 뒤 독일 출신 유대인 공동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주간 《아우프바우》(Aufbau)지에 기고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렌트는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회복했으며, 독일 비(非)나치스화 청문회에서 하이데거를 위해 증언했다. 이는 평소 하이데거를 깊이 존경하던 남편 하인리히 블뤼허의 권유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으나, 후일 하이데거의 정부로 대학 시절부터 불륜 관계였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비록 그가 나치에 협조하였다는 과오가 있었을지라도 그의 사상과 철학이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 증언했다고 하나, 이것이 거짓이라는 주장도 있다. 1950년에 미국 귀화 시민(naturalized citizen)이 되었으며, 1959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전임 교수직에 지명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성과 아렌트의 업적은 권력(power)의 속성 및 정치, 권위(authority), 그리고 전체주의와 같은 주제들에 관한 것이다. 업적의 상당한 부분은 집단적 정치 행동과 같은 의미로서의 자유의 개념을 긍정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자유는 정치가 끝나는 데서 시작한다”는 자유주의의 가정에 대항하여, 아렌트는 자유를 공적이고 연합적인 것으로 이론화하였으며, 이러한 자유의 개념을 보여 주기 위해 그리스의 폴리스와, 미국 군구(township), 파리 코뮌과 시민권 운동들(특히 1960년대의)의 예를 들었다. 《뉴요커》에 낸 아이히만 공판에 대한 보고서(나중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발전하게 된다)에서 악이 근본적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진부함(banality;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활동이나 비(非)활동이 낳을 결과에 대한 비판적 사고 없이 명령에 복종하고 다수 의견에 따르려 하는 경향)의 작용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아렌트는 순전한 무사유, 생각없음(thoughtlessness)이 결과적으로 악의 진부함을 낳는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는 철저히 파편화되고 소외된 개인들과 그들의 수동적이고 마치 죽어 있는 듯하며 ‘생각없이’ 모든 것을 안이하게 수용하는 생활에 던져진 강렬한 메시지로 작용하였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도 집필했는데, 공산주의와 나치주의의 뿌리와 그들의 반유대주의와의 연관성을 추적하였다. 이 책은 어떤 사람들은 모순된 것으로 믿는 두 주제를 비교한 까닭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아렌트의 주요 저서들 외에도, 그는 《과거와 미래 사이》(1961),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1968), 그리고 《공화국의 위기》(1972)를 포함한 문집들을 출판했다. 한나 아렌트는 1975년에 사망하여, 남편이 오랫동안 강의한 뉴욕주 허드슨 강 유역 애넌데일(Annandale-on-Hudson, New York)에 있는 바드 대학에 묻혔다. 정치 이론과 철학 체계 아렌트가 일관성있는 정치이론을 발전시킨 적이 없고 그녀의 글이 분류가 쉽지 않은 반면, 아렌트와 가장 밀접하게 동일시되는 사상의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토크빌에 이르는 고전적 시민공화주의(Classical republicanism)이다. 그의 정치 개념은 시민 참여와 집단 숙의를 강조하는 적극적인 시민 정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아렌트는 현대 사회가 행정 관료제의 상대적 안락함을 위해 민주주의의 자유로부터 자주 후퇴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나쁜 정부라도 결코 인간의 자유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데 성공할 수 없다고 믿었다. 아렌트의 정치적 유산은 점점 더 자유로워지지 않는 세계에 맞서 자유를 강하게 방어한 것이다. 그는 하나의 체계적 철학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혁명, 자유의 본질, 사고력과 판단력을 포함하는 다양한 주제에 걸쳐 있다. 그는 전체주의와 악의 본질인 "어두운 시대"에 대한 연구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인류의 본질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혁명론(1963) 아렌트의 책 혁명론은 18세기의 두 가지 주요 혁명인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비교하고 있다. 그는 잘 연구되고 종종 모방되는 프랑스 혁명은 재앙이었으며, 크게 무시된 미국 혁명은 성공했다고 주장하면서, 맑스주의와 좌익적 견해의 공통된 인상에 반대한다. 프랑스 혁명의 전환점은 지도자들이 대중에 대한 연민을 얻는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자유의 목표를 거부했을 때 발생했다. 미국에서 창립자들은 자유 헌법의 목표를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렌트는 그 사람들의 혁명 정신이 상실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정신을 회복하기 위한 적절한 제도로서 "의회 제도"를 옹호한다. 전체주의의 기원(1951) 아렌트의 첫 번째 주요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1951)은 스탈린주의와 나치주의의 근원을 연구했다.아렌트는 전체주의가 단순히 정치적 적수가 아닌 대중을 제압하기 위해 테러를 가했다는 점에서 "폭정, 압제, 독재와 같은 다른 형태의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된다"고 주장했다.아렌트는 또한 유대인이 홀로코스트의 중요 요소가 아니라 단지 편의상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했는데, 나치즘은 유대인을 박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공포와 일관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칸트의 구절인 "악의 급진성"을 사용하여 폭정을 설명했다. 이후 판본에서 그녀는 《이념과 공포: 새로운 형태의 정부》와 헝가리 혁명에 대한 자신의 저작을 포함하기 위해 본문을 확장하였으나, 후자를 따로 출판하였다. 기원에 대해, 종종 히틀러주의와 스탈린주의라는 두 운동을 똑같이 폭군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비판점이 있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1968) 이 선집은 발터 벤야민, 카를 야스퍼스, 로자 룩셈부르크, 헤르만 브로흐, 교황 요한 23세 및 카렌 블릭센과 같은 20세기의 일부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인물의 지적 전기를 보여준다. 공화국의 위기 (1972)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는 《정치에서의 거짓말》, 《시민 불복종》, 《폭력론》, 《정치와 혁명에 대한 소고: 하나의 주석》의 네 논문으로 구성된 아렌트의 선집 중 세 번째 작품이다. 이 논문들은 현대 미국 정치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직면한 위기를 다룬다. 《정치에서의 거짓말》은 "펜타곤 문서(1945~67년 미-베트남 관계: 국방부 연구문서)"의 누출에 관한 논문이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트루먼~존슨 대통령까지의 4개 행정부의 기만(확전을 원하지 않는다고 거짓말했으나 고의적으로 전쟁을 연장한 것)에 대한 설명이다. 《시민 불복종》은 반대 운동을 연구하고, 《정치와 혁명에 대한 소고: 하나의 주석》은 세 번째 논문 《폭력론》에 대한 인터뷰 형식의 논평이다. 《폭력론》에서 아렌트는 폭력이 집단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권력을 전제로 함을 입증한다. 따라서 그는 폭력에서 파생된 지배적인 권력 개념과 단절한다. 한나 아렌트가 1975년에 사망했을 때, 그는 주요 작업을 미완으로 남겼고, 이는 나중에 1978년에 정신의 삶(Life of the Mind)으로 출판되었다. 그 이후로 주로 제롬 콘(Jerome Kohn)의 편집 하에 일부가 수집 및 출판되었다. 권력론 아렌트에 있어 권력은 ‘한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은 집단이 함께 유지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으로서 그리고 타인의 의지에 반하는 경우에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수단으로서 권력은 폭력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아렌트는 폭력과 정치적 지배의 양식으로서 권력을 엄격히 대비시킨다. 즉,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의사소통이 갖는 합의를 통해 나오는 힘인 권력과 타인의 의지를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만들 수 있는 힘인 폭력은 구분되어야만 한다고 보고 있다. 폭력은 집단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지도자가 규범적 결정에 도달하고 집행하게 되는 것으로서 자원들에 대한 조작이나 강제적 수단을 지칭하며, 권력은 집합적 목표를 위해 동원되는 피지배자들이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작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년) 《라헬 바른하겐 : 유대인 여성의 삶》(Rahel Varnhagen : The Life of a Jewish Woman, 1958년)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1958년) 《과거와 미래 사이》(Between Past and Future, 1961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1963년) 《혁명에 관하여》(On Revolution, 1963년)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Men in Dark Times, 1968년) 《공화국의 위기 : 정치에 있어서 거짓말》(Crises of the Republic: Lying in Politics, 1969년) 《시민적 불복종》 (Civil Disobedience, 1969년) 《폭력의 세기》 (On Violence, 1969년) 《정신의 삶》(The Life of the Mind, 1978년) 영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2014년 8월 22일에 개봉한 영화이다. 감독은 마가레테 폰 트로타이며, 한나 아렌트 역은 바바라 수코와가 맡았다.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가 1960~1964년까지 겪었던 실화를 다루었다. 한나는 나치 전범인 칼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내용을 보며, “악의 평범성”을 개념화한다. 하지만 아렌트의 행동은 가족, 유대계 커뮤니티와 사상계 등 모든 사람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각주 참고 Young-Bruehl, Elisabeth, Hannah Arendt : For Love of the World, Yale University Press (1982). . (Paperback reprint edition, September 10, 1983, ; Second edition October 11, 2004 .) 설명 ( 김필재TV) 외부 링크 Hannah Arendt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The American Library of Congress has The Role of Experience in Hannah Arendt's Political Thought: Three Essays by Jerome Kohn, Director, Hannah Arendt Center, New School University. With link to Arendt's papers. European Graduate School - Hannah Arendt Hannah Arendt at Jewish Virtual Library Hannah Arendt: Biography at FemBio Article on Hannah Arendt (in French) 1906년 출생 1975년 사망 20세기 철학자 독일의 철학자 독일의 사회학자 독일의 정치학자 독일의 정치철학자 독일의 국제법학자 독일의 형법학자 독일의 불가지론자 미국의 철학자 미국의 사회학자 미국의 정치학자 미국의 정치철학자 미국의 국제법학자 미국의 형법학자 미국의 불가지론자 사회철학자 대륙철학자 정치 이론가 반국민주의자 역사철학자 실존주의자 독일의 망명자 하노버 출신 쾨니히스베르크 출신 프린스턴 대학교 동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동문 마르부르크 대학교 동문 뉴 스쿨 교수 예일 대학교 교수 웨슬리언 대학교 교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교수 노스웨스턴 대학교 교수 시카고 대학교 교수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 독일계 미국인 유대계 미국인 20세기 사회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프랑스에 거주한 독일인 독일의 역사가 기술철학자 과학철학자 도덕철학자 20세기 역사가 캘리포니아주의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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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보귬
시보귬(←, )은 화학 원소로 기호는 Sg(←), 원자 번호는 106이다. 1974년 발견되었으며 1997년 미국의 화학자 글렌 T. 시보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명명 이전에는 "운닐헥슘"(unnilhexium, Unh)이나 "러더퍼듐"(rutherfordium)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시보귬은 인공 원소로 가장 안정적인 동위 원소인 266Sg의 반감기는 1.9분이다. 화학적 성질은 텅스텐이나 몰리브데넘에 가깝다. 가속기에서 캘리포늄과 산소의 핵반응으로 생성된 원소이다. 발표 당시에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을 따 명명된 최초의 원소이다. 외부 링크 시보귬 - WebElements.com 전이 금속 인공 원소 화학 원소 인명이 포함된 화학 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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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57%EB%85%84
157년
연호 후한(後漢) 영수(永壽) 3년 기년 후한(後漢) 환제(桓帝) 11년 신라(新羅) 아달라 이사금(阿達羅泥師今) 4년 고구려(高句麗) 차대왕(次大王) 12년 백제(百濟) 개루왕(蓋婁王) 30년 사건 신라, 음력 2월에 감물현(甘勿縣)·마산현(馬山縣)을 두기 시작하였다. 신라의 아달라 이사금, 음력 3월에 장령진(長嶺鎭)을 순행하여, 변방 주둔지의 병졸을 위로하였고, 각자에게 징포(徵布)를 하사하였다. 문화 탄생 조조 휘하의 모사 순유 위나라 학자 화흠 사망 참고 문헌 김부식 (1145), 《삼국사기》 〈권2〉 아달라 이사금 조(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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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D%94%BC%EB%93%9C%EC%BD%94%EC%96%B4
스피드코어
스피드코어(Speedcore)는 하드코어 테크노(Hardcore Techno)의 한 형태로서, 250BPM 이상의 빠르기와 공격적인 사운드가 특징이다. 이와 비슷한 하드코어 테크노의 하위 장르로는 개버(Gabber), 노이즈코어(Noizecore), 테러코어(Terrorcore) 등이 있다. 스피드코어 컴필레이션 음반 독일의 콰드로폰 레코드에서는 정기적으로 "Speedcore Inferno"라는 컴필레이션 음반을 발매하고 있다. 대표곡 Disciples of Annihilation - N.Y.C. Speedcore : 경쾌한 기타 소리와 잘게 분절된 절규하는 듯한 보컬이 인상적인 곡으로, 스피드코어의 효시와도 같은 작품이다. Gabba Front Berlin - Lacrima Est Mosa : 단조의 도입부가 지나고 빠른 비트가 듣는 사람의 감정을 더욱 격하게 한다. DJ Noisekick vs Kerberos - 666 BPM : 머리를 뒤흔들 듯한 공격적이고 빠른 비트가 특징이다. The Quick Brown Fox - The Big Black - 360.3 BPM The Quick Brown Fox - Big Money - 280.25 BPM Diabarha - Uranoid - 2560BPM 엑스트라 톤의 경우 1000BPM은 기본이다. 전자 음악 장르 하드코어 테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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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각형
칠각형(七角形,Heptagon)은 7개의 변으로 둘러싸인 다각형이다. 꼭짓점과 각도 각각 7개씩 가지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내각의 크기가 120°보다 커지고 외각이 60°보다 작아지어서 세 내각의 크기가 360°보다 더 커지기 때문에 이 도형(정다각형)과 그후로는 정다면체나 정다각형 타일링이 될 수 없다(내각의 크기가 180°인 정다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변의 길이가 인 정칠각형의 넓이는 다음과 같다. 작도 방법 한 내각의 크기가 이며, 7은 페르마 소수는 아니지만 피어폰트 소수이므로 일반적으로는 작도가 불가능하지만 눈금이 있는 자로는 작도가 가능하다. 이런 작도를 뉴시스(Neusis) 작도라 한다. 다각형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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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집
김문집(金文輯, 일본식 이름: 大江龍之介(오에 류노스케), 1907년 7월 7일 ~ ?)은 한국의 문학평론가이다. 아호는 화돈(花豚)이다. 생애 대구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제국대학 문과에서 수학했다. 일본인 소설가 요코미쓰 리이치() 문하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1935년 귀국했다. 귀국한 해에 발표한 콩트 〈동정의 낭만파〉가 등단작이나, 이후 평론가로 주로 활동했다. 김문집은 비평의 문학성과 창조성을 중시했으며, 비평의 과학성을 강조한 최재서, 카프 계열의 이원조 등과 논쟁을 벌인 일이 유명하다. 중학교 때부터 일본에서 수학한 김문집은 일본 문학이론을 수입해 와 한국문학의 전통을 부정하는 친일적인 성향을 초기부터 보였다.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과 간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촉탁을 맡는 등 친일 단체에도 가담했다. 1941년 도일한 뒤 돌아오지 않았고, 일본에 귀화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이 명단을 정리한 2002년까지 발견된 친일 저작물 수는 1939년 발표한 〈축하할 죽음〉 등 3편이다. 참고 자료 대산문화재단,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화제 개최 (2007년 5월) 각주 1907년 출생 몰년 미상 20세기 일본 사람 일제강점기의 문학 평론가 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대구광역시 출신 한국계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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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C%97%BC%EC%84%B1%ED%95%B4%EB%A9%B4%EC%83%81%EB%87%8C%EB%B3%91%EC%A6%9D
전염성해면상뇌병증
전염성해면상뇌병증(傳染性]海綿狀腦病症, transmissible spongiform encephalopathy, TSE)은 포유동물의 뇌가 프리온(prion)이라는 단백질이 이상 증식하여 스폰지처럼 되어 알츠하이머 증상과 유사한 증상과 전신 경련을 일으키고 끝내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불치병으로, 2007년 일본 기후 대학 연구팀이 프리온 병을 억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GN8' 인자를 발견하는 등 진단과 치료를 위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프리온 병은 일반적으로 프리온 입자를 받아들인 후 수 년 내에 발병하나, 수 십년후 발병할 수도 있다. 프리온이 일으키는 병은 소의 광우병(MCD/BSE), 양의 진전병(scrapie), 인간의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vCJD), 쿠루병(kuru) 등이 있다. 참고 문헌 This entry incorporates public domain text originally from the National Institute of Neurological Disorders and Stroke,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and the U.S. National Library of Medicine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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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망카
살라만카()는 스페인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카스티야이레온 지방에 속하는 주인 살라만카 주의 주도이다. 지형 살라만카 시는 토르메스 강 옆 산에 위치한다. 이 강엔 길이 150 m의 교각이 존재하고, 총 26개의 아치 중 15개는 고대 로마 시대에 세워졌다. 나머지는 16세기에 완성된 것들이다. 역사 이 도시는 두에로 강의 주변 영토를 지키기 위한 켈틱 부족(바떼오스)의 요새들 중 하나로, 고대 로마 시대 이전에 설립되었다. 기원전 3세기, 카르타고가 로마공화국에 의해 멸망하고, 상업적 허브로 발전하게 된다. 그때 당시, 엘만티카(Helmantica), 살만티카(Salmantica)라고 불렸다. 712년, 살라망카는 무어인에 의해 포위된다. 방어적인 도시 성벽은 한 층 강화되고, 모사라베(무슬림 지배하의 기독교인들)들은 성벽 밖으로 쫓겨난다. 이 시기엔, 어쨌든, 아스트르-레오네세왕국들(the Astur-Leonese kingdoms) 간 끊임없는 싸움이 이어졌고, 이 도시는 아무도 살지 않는 도시로, 북쪽의 기독교와 남쪽의 무슬림에의 사이에 놓이게 된다. 11세기 후반, 기독교세력의 라몬 데 보르고아(알폰소 6세-카스티야왕의 사위)에 의해 재정복된다. 살라만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는, 1218년 알폰소 9세가 살라만카 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곧, 이 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하고 명문의 대학이 되었다. 나폴레옹군대의 반도 전쟁의 1812년 7월 22일의 살라만카 전투는, 프랑스군에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서쪽 1/4이 파괴된 살라만카군에게는 힘이 쇠약해진 전투였다. 이 전투는 수천만의 사람이 한 장소에서 대포에 의해 짧은시간동안 대학살된 군대 역사상의 유명한 순간이다. 관광 . 살라만카는 마드리드에서 기차로 2시간반의 거리에 있다. 마요르 광장(es:Plaza Mayor) 펠리페 5세(스페인 국왕)이 건설한 광장. 까떼드랄(es:Catedral Vieja、es:Catedral Nueva) 12세기의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구까떼드랄과 16세기부터 18세기에 추가 설립된 고딕 건축 양식의 신까떼드랄이 있다. 살라만카 대학 대학정문의 양각(릴리프)가 볼만 하다. 조개의 집(es:Casa de las Conchas) 15세기에 세워진 기사의 집이다. 지금은 도서관과 식당으로 이용된다. 산 에스테반 수도원(es:Convento de San Esteban) 17세기에 세워진 도미니크회의 수도원 문화와 스포츠 2002년 벨기에 브뤼허와 함께 유럽 문화 수도로 지정되었다. 살라만카는 관광객들에게 특히 여름에 인기가 많다. 관광은 이 도시의 주요 수입원이다. 살라만카는 작은 도시 분위기에 대도시의 편리함을 제공한다. 1923년에 생긴, UD 살라만카 팀이 있다. 살라만카는 2008년 정치 스릴러 벤티지 포인트의 배경장소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멕시코에서 촬영되었다. 살라만카의 전통 음식 챠레리아(Charreria)는 카세롤에 조리된 콩 요리다. 살라만카의 전통 축제는 루네스 데 아구아스(Lunes de Aguas)이다. 부활절 후의 일요일 다음 월요일이다. 원래 이 축제는 사순절과 부활절 후에 도시로 창녀들을 법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생겨났다.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고, 살라망카 사람들은 시골에서 오르나또라는 파이의 일종을 먹기 위해 소풍을 간다. 기후 자매결연 도시 코임브라, 포르투갈 님, 프랑스 뷔르츠부르크, 독일 브루헤, 벨기에 케임브리지, 영국 각주 외부 링크 스페인의 도시 살라망카도의 자치체 스페인의 도청 소재지 스페인의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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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520%EB%85%84%EB%8C%80
520년대
520년대는 520년부터 529년까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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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D%8F%AC%EC%A7%88
세포질
세포질(細胞質, )은 세포 내부를 채우고 있는 균일하고, 일반적으로는 투명한 점액 형태의 물질이다. 세포질은 세포핵을 제외한 세포액과 세포소기관으로 이루어진다. 세포액은 수분, 염분, 세포소기관을 이루는 분자, 그리고 반응 촉매로 작용하는 효소로 구성된다. 세포질은 세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세포막으로 둘러 싸여 있는 이른바 "분자 수프"를 구성하며, 그 속에서 세포핵 및 세포소기관이 서로 뭉쳐있을 수 있게 해준다. 세포질의 구성 세포질의 최대 80%까지 차지하는 액체 성분은 이온 및 용해되어 있는 효소, 탄수화물, 염, 단백질, RNA와 같은 거대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 세포질의 액체 성분은 투명질이라고도 불린다. 액체 성분은 주변 상태나 세포의 활동 상태에 따라 젤 형태나 액체 형태일 수 있다. 젤 상태일 경우, 세포 젤이라고 불리며, 점성의 단단한 덩어리이다. 액체 상태일 경우는 세포액이라고 불리며, 유동성 있는 액체이다. 일반적으로 세포의 가장자리는 젤과 비슷한 상태이며, 세포 내부는 액체 상태이다. 세포질 내부의 비용해성 구성 요소로는 미토콘드리아, 엽록체, 리보솜, 과산화소체, 리보솜과 같은 세포소기관 및 일부 액포, 세포골격 등이 있으며, 소포체나 골지체와 같은 복잡한 세포막 구조 역시 구성 요소의 하나이다. 세포에 따른 세포질의 차이 모든 세포는 세포질을 가지고 있지만, 생물 분류에 따라 그 특성은 매우 다르다. 동물 세포에서는 세포질이 거의 세포 부피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식물 세포에서는 액포의 존재로 인해 세포질이 훨씬 적은 부피를 차지한다. 기능 세포질은 세포의 모양 및 항상성을 유지하며, 세포소기관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대개 물질대사에 사용되면서 생명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화학 물질을 저장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질 세포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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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9%84%EC%A3%BC%EA%B5%B0%EC%9D%98%20%EA%B5%AD%ED%9A%8C%EC%9D%98%EC%9B%90
완주군의 국회의원
행정구역 변천 1945년 8월 15일 전라북도 완주군 1957년 11월 6일 초포면·우전면이 전주시에 편입 1983년 2월 15일 상관면 일부가 전주시에 편입 1987년 1월 1일 조촌읍이 전주시에 편입 1989년 1월 1일 용진면 일부·구이면 일부가 전주시에 편입 1990년 8월 1일 이서면 일부가 전주시에 편입 완주군의 역대 국회의원 일람 같이 보기 전주시의 국회의원 임실군의 국회의원 김제시의 국회의원 진안군의 국회의원 무주군의 국회의원 장수군의 국회의원 각주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목록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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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산오리
레이산오리(Anas laysanensis)는 하와이 제도에 서식하는 오리의 일종이다. 화석기록에 따르면 한때 이들은 하와이 제도 널리 서식하였지만, 이제는 외진 섬에서만 서식하고 있다. 이름은 이들이 발견된 레이산 섬의 이름을 따랐다. 원래 레이산오리는 천적이 없었으며, 훗날 서식지에 인간이 정착하면서 쥐, 돼지들이 들어와 많은 수가 죽었다. 날수는 있지만 섬 사이를 이동하기에는 역부족이며, 도입된 지상동물에게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현재는 종의 복원계획이 세워져 실시되고 있으며, 2019년까지 심각한 멸종위기종에서 벗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오리과 1892년 기재된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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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救世軍士官大學院大學校, The Salvation Army Graduate University For Officer Training)는 경기도 과천시에 위치한 대학원대학이다. 영문 약칭으로 GUFOT를 쓴다. 구세군은 성직자를 '사관'(Officer)으로, 평신도는 '병사'(Soldier)로 부르는 군대식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구세군 교회(Corps)와 군국본영(Territorial Headquarters/THQ)에서 학습하는 후보생(Candidate) 과정을 거쳐 구세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면 사관이 되어 지역을 떠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사역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제국 말엽인 1910년 2월 15일에 서울 종로구 평동에 성경대학이 문을 열면서 구세군사관학교가 세워졌다. 학교의 명칭은 1912년에 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사관학교 학생들은 전원이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수업 연한은 2년이다. 2015년부터 대학원대학으로 개편하였다. 서울시 중구 정동 1-23에 1928년 지어진 구세군사관학교의 옛건물이 있다. 건축양식의 특징과 역사성을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연혁 1910년 2월 15일 구세군성경대학 개교 1912년 8월 1일 구세군사관학교로 교명 변경 1917년 10월 24일 대한민국 성직 양성기관 최초로 여성에게 신학 교육 시작 1928년 9월 13일 서울특별시 중구로 교사 이전 1942년 3월 6일 신사참배 반대로 폐교 1947년 10월 15일 해방 후 재개교 1985년 11월 27일 경기도 과천시 현 교사로 이전 1986년 1월 31일 각종학교로 개편 2014년 10월 2일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설립 2015년 2월 28일 구세군사관학교 폐교 2015년 3월 1일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개교 교육편제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는 석사과정만 제공한다. 기독교학과(Th.M) 목회신학과(M.Div) 저명한 동문 같이 보기 구세군 대한본영 윌리엄 부스 각주 외부 링크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홈페이지 구세군대한본영 홈페이지 국제구세군 홈페이지 과천시의 학교 1910년 설립 1910년 개교 1942년 폐교 1947년 개교 2015년 폐교 2015년 개교 대한민국의 개신교 대학 대한민국의 신학교 구세군 대한민국의 대학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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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삼국지》(三國志)는 서진의 진수가 쓰고 송나라의 배송지가 내용을 보충한 중국 삼국시대의 사찬(私撰) 역사서이다. 후한 말기부터 서진 초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기》, 《한서》, 《후한서》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리며 이십사사(二十四史) 중의 하나이다. 총 6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으로 구성돼 있다. 본래의 표제는 위지(魏志), 촉지(蜀志), 오지(吳志)인데, 송나라 이후 위서, 촉서, 오서라는 표제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삼국지는 '사기', '한서'의 체계를 따라 기전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앞의 두 책과는 달리 연표를 담은 표(表)나 당시의 경제·문화를 기록한 지(志 혹은 書)가 없다. 삼국지는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보고 쓰여진 역사서이다. 진수는 황제들의 전기인 본기를 위나라의 황제들로 엮었으며, 촉과 오의 황제는 열전에 편입시켰다. 무제(武帝, 조조), 명제(明帝, 조예) 등의 제호를 붙인 것은 위나라뿐이며 촉의 유비와 유선은 각각 선주(先主)와 후주(後主)로 기술하였고, 오의 제왕들은 주(主)를 붙여 기술하거나 심지어 이름을 그대로 적기도 했다. 이러한 체계는 진수가 벼슬을 하던 진나라가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아 세워진 나라이기에 위를 정통으로 삼고 촉과 오를 비정통으로 본 데에 따른 것이다. 진수의 이러한 사관은 훗날 습착치의 《한진춘추》나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이 촉을 정통으로 보면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조위/촉한정통론에 대해서는 정통론을 참조하라.) 배송지주 《삼국지주》(三國志注) 또는 《배송지주》(裴松之注)는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문제가 역사학자 배송지에게 명하여 삼국지에 주를 단 것으로 “배주”(裴注)라고도 하고 원문과 함께 칭할 때는 “수지배주”(壽志裴注)라고도 한다. 진수가 참고한 자료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책을 수집하여 주를 달게 한 것이다. 본래 주(注)는 본문의 말뜻을 주해하는 것이나 배송지는 누락된 사료를 기록하는 데 힘을 기울여 약 200여 권이 넘는 여러 사서를 인용하여 사실을 보충하고 고증하였으며 본문의 몇 가지 오류나 모순을 지적하고 시정하였다. 자신이 인용한 자료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며 진수의 인물평과 함께 자기 자신의 평을 넣기도 하였다. 현재 전해지지 않는 많은 자료들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는 사료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삼국지와 더불어 삼국지 평화, 삼국지 연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배송지주의 양과 관련하여 20세기 양익양이 삼국지의 글자수에 대해 정문이 20만 자, 주(註)가 54만 자로 주가 세 배에 가깝다고 하여 삼국지의 주가 정문을 그 양에 있어 압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 왕정흡과 오금화가 정확히 글자를 세어 본 결과 정문(본문)의 글자수가 약 36만 8천 자 주의 글자수가 약32만 2천 자로 본문의 글자가 약간 더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위서는 본문이 약 20만 7천 자 주가 약 21만 5천자, 촉서는 본문이 약 5만 7천 자 주가 약 4만 2천 자, 오서는 본문이 약 10만 3천 자 주가 약 6만 5천 자이다. 목차 위서(魏書) 본기 열전 오환선비동이전 서술이 간결하고 분명하여 명저라 일컬어져 왔다. 또한 위서의 마지막 30권인 위서 동이전(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는 순서별로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揖婁), 예(濊), 한(韓), 왜인 등의 동양 민족 고대사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연구 자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인 혼란 때문에 사료의 수집이 어려워 많은 사료를 참고하지 못하였다. 진수가 주로 참고한 사료는 왕침(王沈)의 《위서(魏書)》, 위소(韋昭)의 《오서(吳書)》,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으로 알려져 있다. 부여전(夫餘傳) 부여전(夫餘傳)은 총 930자(字)이며, 중국 정사(正史) 중 부여에 관한 최초의 열전(列傳)으로 그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 내용은 부여의 위치와 강역을 비롯하여 관제·의식(衣食)·의례(儀禮)·풍속·산물(産物) 등 부여의 생활습속에 관한 상세한 상태기술과 현도군·후한(後漢)·공손씨(公孫氏) 등 중국의 제(諸) 세력과의 관계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문헌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사의 1/3 정도가 《위략(魏略)》기사와 관련된 것인데, 진수가 참고한《위략(魏略)》은 배송지 주(注)에 인용된《위략(魏略)》과는 다른 이본(異本)이나, 원위략(原魏略)에 의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위략(魏略)》의 부여와 고구려 공통의 습속 기사는 생략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부여전은 종래의 과대한 평가와는 달리 전체적으로는 두찬(杜撰)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위략(魏略)》이 멸실된 현재 부여전은 배송지 주(注)에 인용된《위략(魏略)》 기사와 함께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다른 어떠한 사서(史書)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촉서(蜀書) 오서(吳書) 위의 목차는 송나라 이후에 보편화된 삼국지 목록 체계에 따른 것이다. 관련 도서 참고서 청나라: 전대소(錢大昭)의 삼국지변의(三國志辨疑)(3권), 양장거(梁章鉅)의 삼국지방증(三國志旁證)(30권), 항세준(杭世駿)의 삼국지보주(三國志補注) 최근: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고적출판사 간, 1957, 65권+보권 2권), 소연뢰(蘇淵雷)의 삼국지 금주금역(三國志今注今譯)(호남사범대학교출판사, 1991) 우리말 번역 첫 번역: 김원중 옮김, 《정사 삼국지》(전 4권), 민음사, 2007 개정 번역: ″, 《정사 삼국지》(전 4권), 휴머니스트, 2018 진기환 번역 《삼국지》(전 6권) 명문당, 2019 같이 보기 중국의 삼국 시대 삼국지 게임 시리즈 정통론 정사 및 연의 삼국지 인물 전체 목록 후한서 진서 각주 외부 링크 wikisource - 후한서(後漢書) wikisource - 삼국지(三國志) wikisource - 자치통감(資治通鑑) 이십사사 진나라 (위진)의 문학 명수 3 기전체 3세기 역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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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인
이종인(李宗仁,1556 ~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며 本貫은 개성이다., 1580년 무과 급제 후 임진 왜란에 참전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나주 남평에서 태어났다. 생애 임진왜란 이전의 생애 출생 이종인은 나주 남평 출신이며 本貫은開城. 성격이 굳세었고 절조가 있었다. 무과에 합격 하였다. 키는 8척 장신이었으며 외모가 수려하였다. 일찍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는 데다가 평소 무인이 될 자질을 연마하였다. 원래 그는 학문 연구에 뜻을 두고 퇴계 이황의 문인이 되었으나 그 뒤 타고난 기질이 대담하고 호방하여 무예를 연마하게 된다. 무과 급제와 관료 생활 1580년(선조 13년) 별시무과(別試武科)에 응시해 급제하였다. 이후 군관으로서 북방을 지키게 되었는데 1583년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서 경원(慶源)이 함락되어 당시 함경도 병마절도사인 이제신(李濟臣)이 그에 대한 죄를 지고 의주 인산진(麟山鎭)으로 유배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토벌군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이후에도 북방 수비에서 수차례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과 제2차 진주성 전투 임진왜란때 김해 부사로써 방어하는 일에 많은 조치를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성일의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1593년 음력 4월 김해부사를 제수받았다. 그해 음력 6월 지난해(1592년)의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한 왜군이 무슨 일이 있어도 진주성을 함락시키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엄명을 받아 5대(隊) 92,972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하자, 진주성에 합류하여 왜군과 싸워 뛰어난 용맹을 발휘하여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였다. 음력 6월 28일 왜군이 총공격을 가해 성의 방어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왜병 다섯을 쳐죽여 근처의 왜병들이 겁을 먹고 달아났으며, 그날 밤 초경에 왜군이 신북문 쪽으로 공격해오자 직속 수하들을 거느리고 싸워 이를 물리쳤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제1차 전투와 달리 진주목사인 서예원(徐禮元)이 나약하고 장수의 자질이 부족하여 조선측은 일괄적으로 통제되지 못하고 관군과 의병을 이끄는 여러 장수들의 개별적인 역량에 의지해 싸워야 했다. 28일 서예원이 야경을 소홀히 하여 적이 성 밑을 파서 성벽이 무너지게 되자 이종인은 몹시 노하여 서예원을 꾸짖기도 했다. 이날 전투에서 진주성 사람들이 크게 믿고 의지하던 충청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이 죽고 황진과 더불어 이름이 높았던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도 죽자 조선 측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으며, 왜군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고안한 공성 병기 귀갑차(龜甲車)가 조선 측 몰래 성 밑을 파서 성벽이 무너졌다. 1593년 6월 왜군은 10만 명이라는 대군을 거느리고 제2차로 진주성을 향해 쳐들어왔다. 왜군의 대병력이 무너진 성벽 틈으로 쳐들어오자 조선군과 의병들은 급격히 밀리기 시작했고 치열한 전투를 치르던 중 6월 28일 황진이 전사하게 된다. 이종인은 동료 장수이자 절친한 친구인 황진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한 뒤 용감히 싸워 많은 왜군들을 죽이고 전사했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등 여러 장수들이 죽고 백성 6만여 명은 전투 후 왜군에게 모두 학살되었다. 이종인의 죽음에 대해서 왜군의 탄환에 맞아 죽었다(선조실록·난중잡록)는 기록도 있고, 분전하다 마지막 순간에 왜군 두 명을 양 옆구리에 끼고 "김해부사 이종인이 오늘 여기에서 죽는다"라고 외치고 남강에 투신하였다(선조수정실록·국조보감·연려실기술)는 기록도 전한다. 사후 이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어 처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증직되었다가 다시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가족 관계 성명: 李 宗仁, 본관:開城 (父); 武亨, 모(母); 정선全氏, 배(配); 밀양朴氏, 자(字)伯春 위패: 晉州 影烈祠, 기타: 旌忠祠 碑,에도 기록이 있슴 각주 정조23년(1779년) 발간된 호남 절의록 참조 (원본 서울 국립 중앙 도서관 재중. 번역본은 남산 도서관 재중) 김세곤 저 임진왜란과 호남인 항쟁역사 참조 남산도서관 호남절의록에도 본관은 開城이씨로 되어있습니다(전주이씨 이종인은 김해부사가 아니고 내금위였슴. 전주이씨 종친회에 손해배상 청구예정임) 연관 항목 선원록 선조실록 국조인물고 호남절의록 무과방목 위 도서중 이종인이 전주이씨라 되어있는 책자가 있으면 개성이씨종친회 (010ㅡ3730ㅡ1160)로 연락바람 각주 생년 미상 1593년 사망 조선의 무신 조선의 군인 육군 군인 과거 급제자 조선의 임진왜란 관련자 한국의 장군 살해된 사람 작전 중 사망자 화기에 죽은 사람 개성 이씨 나주 남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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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4일
11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18번째(윤년일 경우 319번째) 날에 해당한다. 사건 1819년 - 앨라배마주가 미국의 22번째 주로 연방에 가입. 1945년 - 볼리비아, 유엔 가입 1955년 - 미국과 일본, 원자력협정 조인 1980년 - 대한민국, 언론 통폐합 결정. 1985년 - 원양어선 광명 87호의 전제용 선장이 인도양에서 조업을 마치고 회항 중 말라카 해협을 지나다 표류하던 보트피플(베트남 난민) 96명을 구출했다. 2009년 - 부산 실내사격장 화재 사고가 일어났다. 2010년 -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에 60대 남성이 인분을 투척함. 2015년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도심에서 10만명이 참여한 1차 민중총궐기 시위 개최. 프랑스 파리 전역에서 연쇄 폭탄 테러가 발생. 200명 이상이 사망. 문화 1915년 - 아인슈타인 특수 상대성이론 발표 1921년 -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 월하의 맹서 제작. 1922년 - BBC 첫 라디오 방송. 1971년 - 홋카이도에서 세이칸 터널의 기공식을 가지다. 1973년 - 호남-남해고속도로 개통. 1984년 - 동작대교가 개통됐다. 1990년 - 지상파 민영 상업 방송사 SBS 설립. 1994년 - 현대자동차, 태양광 자동차 개발 . 1996년 - SBS 파워FM 개국. 1998년 - 정보통신운동단체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식 출범. 2000년 - 마지막 비둘기호 열차가 증산 - 구절리 사이를 운행함 2016년 - 1948년 이후 68년 만에 슈퍼문이 뜨다. 2019년 -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시행되었다. 탄생 1650년 - 잉글랜드 국왕이자 네덜란드 오렌지 공작 윌리엄 3세. (~1702년) 1719년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레오폴트 모차르트. (~1787년) 1765년 - 미국의 공학자이자 발명가 로버트 풀턴. (~1815년) 1775년 - 독일의 법학자 파울 폰 포이어바흐. (~1833년) 1797년 - 영국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 (~1875년) 1840년 -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모네. (~1926년) 1889년 - 인도의 독립운동투사, 정치인 자와할랄 네루. (~1964년) 1917년 - 대한민국의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1979년) 1924년 - 한국계 일본인 프로레슬러 역도산. (~1963년) 1929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국승록. (~2023년) 1946년 - 미국의 배우 서신 리틀페더. (~2022년) 1948년 - 찰스 왕세자, 영국 왕세자. 차기 왕위 계승 서열 1위. 1951년 - 미국의 음악가 앨릭 존 서치. (~2022년) 1954년 - 그리스 출신 미국의 작곡가 야니. 1962년 대한민국의 성우 이재용. 대한민국의 성우, 연극배우 최아란. 1963년 - 일본의 대식가 스가와라 하츠요. (~2023년) 1964년 - 대한민국의 배우 박정학. 1970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한상권. 1972년 - 폴란드의 가수 에디타 구르니아크. 1982년 - 대한민국의 성우 김태리. 1984년 -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선수 리사 디 배나. 1987년 - 대한민국의 재즈 피아니스트 진보라. 1988년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유오성 1990년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이봄이. 1992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태영. 1993년 프랑스의 축구 선수 사뮈엘 움티티. 일본의 배우 노무라 슈헤이. 1996년 - 미국의 배우 메이슨 구딩. 1997년 - 대한민국의 육상 선수 고승환. 2000년 - 대한민국의 가수 시연 (프리스틴). 사망 565년 -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1612년 - 일본의 센고쿠 시대 무장 롯카쿠 요시하루. 1716년 -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1831년 - 독일의 철학자 헤겔. 1847년 - 체코의 작가 요세프 융만. 1908년 - 중국의 황제 광서제(光緖帝). 1938년 - 덴마크의 생물학자 한스 크리스티안 그람. 1972년 - 대한민국의 소설가 주요섭. 1993년 - 대한민국의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 2016년 - 대한민국의 가수 조덕환. 2017년 - 대한민국의 군인 이대용. 대한민국의 정치인 서인석. 2018년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장석화. 2020년 -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의 정치인 하산 무라토비치. 아르메니아의 영화배우 아르멘 지가르하냔. 2021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이동원. 2022년 - 대한민국의 법조인 윤관. 2022년 - 과들루프의 카리브인 장 필리프 오모툰드. 2022년 - 일본의 성우 야나다 키요유키. 기념일 세계 당뇨병의 날(World Diabetes Day; WDD) 같이 보기 전날: 11월 13일 다음날: 11월 15일 - 전달: 10월 14일 다음달: 12월 14일 음력: 11월 14일 모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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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군정
통군정(統軍亭)은 평안북도 의주군에 위치한 정자이다. 통군정은 모양이 정사각형처럼 생겼다. 임사홍기에서 이 정자에 대한 설립연대가 밝혀져 있어서, 지어진 시기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1538년에 수리하다가 한국 전쟁 때 파괴되었다. 전후에는 복구되었다. 중국 랴오닝성과 마주보이는 지역에 위치해 있다. 특징 관서팔경 가운데 하나에 속해 있다. 이웃해 있는 관광지 삭주온천 동림폭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관광지 의주군 평안북도의 누정 10세기 완공된 건축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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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대 기후
냉대 기후(冷帶氣候) 또는 아한대 기후(亞寒帶氣候)는 중위도 지역 북부와 고위도 지역에서 발달하는 쾨펜의 기후구분의 기후대 중 하나이다. 기호는 D로 저위도부터 4번째에 위치함을 나타낸다. 플론의 기후구분에서는 냉대(기호:6)와 아한대(기호:6a)는 구별된다. 플론의 기후구분의 경우, 냉대(6)는 쾨펜의 기후구분의 툰드라 기후(ET)에 상응하며, 아한대(6a)는 쾨펜의 기후구분의 아한대·냉대와 일치한다. 정의 최한월의 평균 기온이 -3℃ 미만일 것(겨울철 내린 눈이 봄까지 녹지 않을 것). 최난월의 평균 기온이 10℃ 이상일 것(수목이 자랄 수 있을 것). 연평균 강수량이 건조 한계 이상일 것. 기후구 쾨펜 '쾨펜의 기후구분'도 참조 쾨펜은 비가 많이 오는 계절에 따라 3개의 기후로 구분하고, 여름 기온에 따라 각각 4가지로 분류하였다. 냉대 습윤 기후 (Dfa,Dfb,Dfc,Dfd) 냉대 동계 소우 기후 (Dwa,Dwb,Dwc,Dwd) 고지 지중해성 기후 (Dsa,Dsb,Dsc,Dsd) f는 습윤(feucht), w는 겨울에 건조(wintertrocken), s는 여름에 건조(sommertrocken)의 독일어 약자이다. 트러타 트러타(Trewartha)는 쾨펜이 하위 구분으로 사용한 여름 기온에 따라 4개 기후구로 나누었다. 습윤 대륙성 기후 (Dfa,Dwa,Dsa,Dfb,Dwb,Dsb) 아한대 기후 (Dfc,Dwc,Dsc,Dfd,Dwd,Dsd) ⇒북반구의 한극(寒極,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지점)이 있다. 겨울이 길고 춥지만, 사계절의 변화를 보이고 식물의 생육기간이 길어서 농목업이 가능한 혼합림형(Da,Db)과 짧은 여름과 혼합림형보다 더 길고 추위가 심한 겨울로 인해 토양이 메말라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침엽수림형(Dc,Dd)로 구분된다. 특징 온대 기후에 비해 겨울이 상대적으로 더 춥고 혹독하다. 온대 기후에서는 아무리 추워도 영하로 거의 내려가지 않지만, 냉대기후는 겨울에 영하로 내려간다. 그렇기 때문에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언다. 온도를 기준으로 보면 최한월 영하 3C° 이하 영하 35c° 이상의 기후대를 의미한다. 대신 최난월 기후는 영상 10c° 이상으로 올라가, 여름에는 상당히 더운 경우가 있다. 한대 기후와는 달리 특정 시기에만 혹한이 찾아온다. 수림(樹林) 기후 중에서는 한란(寒暖)의 차이가 가장 큰 기후이다.(연교차가 크다.) 시베리아 동부 내륙 지역 등에서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빙설 기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추위가 나타나는 때가 있어 세계적인 연교차를 이루고 있다. 수목의 생육 및 여름철 농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한대기후에 비하면 많은 인간이 거주한다. 농업·임업·축산업과 같은 산업 외에 근대 이후 홋카이도, 유럽 동부나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 부근에는 고도의 산업 집적이 이루어져 많은 도시가 있다. 분포 지역 중화인민공화국 북동부, 한반도 중부 및 북부, 일본 홋카이도, 러시아 대부분, 독일 동부부터 동유럽까지, 알프스산맥 주변, 캅카스산맥 주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 발트해 연안 국가들, 미국 북부에서 캐나다에 걸친 지역 등 주로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의 대략 위도 40° 이상(대륙 서안에서는 50-60° 이상)의 고위도 지역이나 고고도 지역에 비교적 넓게 분포한다. 아이슬란드 남부나 일본 북부는 몇 안 되는 냉대에 속하는 섬나라다('섬'이라면 캐나다 동쪽 끝의 케이프 브레턴섬이나 뉴펀들랜드섬도 이 기후대에 속한다). 남반구에서는 이 위도에 육지가 적고 남아메리카 남쪽 끝의 푸에고섬 등 몇 안 되는 육지에서는 연교차가 작은 해양성 기후가 되어 오히려 여름 기온에서, 즉 최한월 평균 기온이 영하 3℃ 미만이 되지 않고 최난월 평균 기온이 10℃ 이상이냐 미만이냐에 따라 온대인지 한대인지 구분되기 때문에 육상에 냉대가 나타나는 것은 북반구뿐이다. 식생과 토양 트러타에 의한 세분에 따라 냉대 지역의 식생과 토양을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습윤 대륙성 기후(Da, Db)에 속하는 지역(주로 남부)에서는 침엽수림과 활엽수림의 혼합림이 펼쳐져 비옥한 갈색 삼림토가 분포하고 있다. 아한대 기후(Dc, Dd)에 속하는 지역(주로 북부)에서는 타이가라는 침엽수 단순림(단일 수종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삼림)이 형성되어 한랭한 기후 때문에 유기물 분해가 진행되지 않고 용탈작용에 의해 산성의 포졸이라는 척박한 회백색 흙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하에는 일 년 내내 얼어 있는 영구동토가 펼쳐진다. 지구 온난화의 진행과 함께 영구 동토가 녹아 갇혀 있던 유기물이 분해되어 강력한 온실 효과 물질인 메탄이 되어 대기 중으로 방출되는 악순환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주요 농작물 봄밀, 호밀, 감자 등. 땅이 메말라 곡물 생산 등 농작물 재배에 적합하지 않거나 월평균 기온이 10℃ 이상인 상태가 3개월 이하(Dc, Dd 기후) 지속되는 지역에서는 방목과 낙농이 이뤄진다. 지역에 따라서는 서늘한 기후에 강한 감자·호밀·메밀 등이 재배되기도 한다. 홋카이도와 중국 동북부 등 비교적 저위도에서 여름철 따뜻하고 습윤한 지역에서는 벼농사도 이루어지고 있다. 낙농은 주로 큰 소비 지역과 가까운 지역, 방목은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같이 보기 냉대 습윤 기후 냉대 동계 소우 기후 고지 지중해성 기후 습윤 대륙성 기후 아극 기후 각주 참고 문헌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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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9E%80%EC%9D%98%20%EA%B5%AD%EC%9E%A5
이란의 국장
이란의 국장은 1980년 5월 9일 루홀라 호메이니에 의해 제정되었다. 아랍 문자로 "알라"를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네 개의 곡선과 한 개의 칼로 이루어져 있다. 네 개의 곡선은 "알라"를 나타내는 문자를 형상화했으며, 다섯 개의 부분은 이슬람교의 교리를, 칼은 국력과 독립국임을 의미한다. 또한 이란의 국장은 붉은 튤립을 형상화하기도 했는데, 이는 이란을 위해 희생한 젊은이를 추모한다는 것을 뜻하며, 붉은색은 순교자의 피를 뜻한다. 역대 이란의 국장 기타 이란의 국장은 유니코드에 포함되어 있으며, 코드 번호는 U+262B(☫)이다. 같이 보기 이란의 국기 국장 국장 1979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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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B%B2%A0%EB%A5%B4%EB%89%B4
오베르뉴
오베르뉴(, )는 프랑스 중남부에 위치한 레지옹으로 중심 도시는 클레르몽페랑이며 면적은 26,013km2, 인구는 1,341,000명(2008년 기준)이다. 동쪽으로는 론알프, 남쪽으로는 랑그도크루시용(현재의 옥시타니), 남서쪽으로는 미디피레네(현재의 옥시타니), 서쪽으로는 리무쟁(현재의 누벨아키텐), 북서쪽으로는 상트르발드루아르, 북동쪽으로는 부르고뉴(현재의 부르고뉴프랑슈콩테)와 접한다. 4개 주(알리에주, 오트루아르주, 캉탈주, 퓌드돔주)를 관할한다. 현재의 레지옹인 오베르뉴에 포함되어 있는 지역은 역사적으로 오베르냐로 간주되던 지역보다 크다. 현재 오베르뉴에 포함되는 지역들은 다음의 옛 프로뱅스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맥과 휴화산의 영향으로 인해 비옥한 호수와 목초 지대가 발달했으며 풍부하고 깨끗한 지하수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2016년 1월 1일을 기해 시행된 레지옹 개편에 따라 오베르뉴와 론알프가 오베르뉴론알프로 합병되었다. 외부 링크 오베르뉴 공식 홈페이지 마시프상트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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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0%9C%EC%8B%9C%20%EC%8A%A4%ED%8E%9C%EC%84%9C
제시 스펜서
제시 고든 스펜서(, 1979년 2월 12일 ~ )는 《하우스》의 로버트 체이스 역으로 알려진 오스트레일리아의 배우이다. 어린 나이부터 연기를 했다. 첫 작품은 1994년 타임 트랙스라는 드라마이다. 하우스에 출연하기전 1994년에서 2000년까지 드라마 《네이버즈》에서 빌리 케네디의 역을 맡아 영국과 호주에서 이름을 알렸다. 《네이버즈》에서 하차한 후 미국에서 《스위밍 업스트림》과 《업타운 걸》에 출연했다. 2006년 스펜서는 피플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 100인"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가족 관계 스펜서는 멜버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 로빈과 로드니 스펜서는 극우 단체 추가이민을 반대하는 호주인의 창시자이다. 스펜서의 아버지와 남매는 모두 의사이다. 형들의 이름은 타니와 루크이고 1982년에 태어난 여동생 폴리가 있다. 어릴 때 캔터버리 초등학교와 말번중앙학교와 스카치 칼리지를 재학했다. 10학년 당시 빌리 케네디라는 배역을 위해서 오디션 했다. 1997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006년 12월 23일 파리 시에서 제니퍼 모리슨에게 청혼을 했고 약혼을 한 사이였지만 2007년 8월 약혼을 취소했다고 밝혔다. 출연 작품 《타임 트랙스》 (1994) 《네이버즈》 (1994 -2000) 《탈리스만의 저주》 (제레미) (2000) 《위닝 런던》 (2001) 《스트랜디드》 (2002) 《스위밍 업스트림》 (2003) 《업타운 걸》 (2003) 《하우스》 (2004 - 2012) 《시카고 파이어》 (2012-) 각주 외부 링크 1979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오스트레일리아의 남자 영화 배우 오스트레일리아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멜버른 출신 배우 오스트레일리아의 남자 어린이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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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4%BC%ED%84%B0%20%EB%8B%88%EC%BD%9C
피터 니콜
{| border=1 align=right cellpadding=4 cellspacing=2 width=280 style="margin: 0.5em 0 1em 1em; background: #f9f9f9; border: 1px #aaaaaa solid; border-collapse: collapse; font-size: 85%; clear:right" |+Peter Nicol |- | align=center colspan="2" | |- | 국적: || 영국 |- | 거주지: || 런던 |- | 신장: || 1.8 미터 |- | 플레이: || 좌측 |- | 프로 전향: || 1992년 |- | 최고의 세계 랭킹: || 1 ('98년2월, '99년 10월, '00년 2월, '01년 8월, '02년 1월, '04년 5월) |- | PSA 투어 타이틀: || 52개 |- | PSA 투어 결승진출: || 68번 |}피터 니콜'''(, 1973년 4월 5일 ~ )은 스코틀랜드의 프로스쿼시 선수이다. 영국 연방의 첫 스쿼시 선수로 알려져 있다. 애버딘셔의 인버루어리에서 태어났다. 1998년에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활약할 당시 그는 영국 연방 출신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세계랭킹 1위에 올랐다. 또한 1번의 월드 오픈 타이틀과 2번의 브리티시 오픈 타이틀, 그리고 4번의 코먼웰스 게임 금메달을 획득했다. 선수활동 시기의 니콜은 어려운 경기를 뒤집는 탁월한 경기운영능력으로 유명하다. 그의 라이벌격인 캐나다출신의 조나돈 파워는 스쿼시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선수이다. 니콜은 2002-2003 시즌을 제외한 24개월 연속을 포한해서 총 60개월 동안 랭킹 1위의 자리에 군림하였다. 1997-1998시즌 월드 오픈에서의 2위를 차지한 후에 1999년 니콜은 이집트 출신의 암드 바라다를 15-9 15-13 15-11의 스코어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2002년까지 월드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었다. 2000과 2001년 남자 월드오픈은 경기주최 보안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개최되지 못하였다. 스코틀랜드 대표로 활동한 이후에 스코틀랜드 스쿼시 협회의 효율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 그는 2001년 잉글랜드 대표로 자리를 옮겼다. 니콜은 1998년 메달스포츠로 변한 커먼웰스 게임즈에서 스코틀랜드 대표로 성공하였다고 인정받고 있다. 그는 남자 개인에서 금메달(조나돈 파워를 결승에서 패퇴) 남자복식에서 금메달(파트너 리 비칠)을 목에 걸었고, 2006년 잉글랜드 대표로 다시 출전하여 우승하여 남자개인에서 금메달(결승에서 데이비드 파머를 격퇴) 그리고 리 비칠과 다시 호흡을 맞추어 또다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다른 눈부신 수상경력으로는 3번 연속으로 슈퍼 시리즈 파이널즈 타이틀(1999-2001) 획득, 2번의 PSA 마스터즈 타이틀 (2000 & 2004), 3번의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즈 타이틀 (2001 & 2003-4) 그리고 2번의 브리티시 내셔널 선수권 타이틀 (1996 & 2003) 획득 등이 있다. 2006년 7월 니콜은 9월에 있을 2006 월드 오픈에서 은퇴를 한다고 공표하고, 티에리 랭쿠와의 4강 경기에서 패한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였다. 월드 오픈 결승전 전적 브리티시 오픈 결승전 전적 커먼웰스 게임즈 결승전 전적 서훈 1999년 대영 제국 훈장 5등급(MBE) 수훈 같이 보기 스쿼시 선수 목록 각주 외부 링크 psa-squash.com의 프로필 squashinfo.com의 프로필 squashpics.com의 피터 니콜 페이지 니콜의 스코틀랜드에서 영국으로 이적을 다룬 squashtalk.com의 기사 니콜의 은퇴발표를 다룬 squashtalk.com의 기사 squashsite.co.uk 니콜의 은퇴에 관한 기사 니콜의 은퇴 발표를 다룬 BBC의 기사 197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스코틀랜드의 스쿼시 선수 대영제국 훈장 구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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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C%9B%90%EA%B3%A1%EC%84%A0
타원곡선
대수기하학에서 타원곡선(橢圓曲線, )은 간단히 말해 형태의 방정식으로 정의되는 대수 곡선으로서, 첨점이나 교차점 등의 특이점이 없는 것이다. (계수체(coefficient field)의 표수가 2나 3인 경우 이 정의는 모든 비특이 3차 곡선들의 동형류를 포함하지 않는다.) 이는 대수기하학과 수론의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중근을 갖지 않는 임의의 3차 혹은 4차 다항식 P에 대해 y2 = P(x)는 곡면 종수 1의 비특이 평면 곡선의 방정식이며, 이 식으로 정의되는 곡선 또한 타원곡선이라 한다. 보다 일반적으로는 종수가 1인 임의의 비특이 대수 곡선을 타원 곡선이라 한다. 복소수체 상의 타원곡선은 원환면을 복소 사영 공간에 매장한 것에 대응된다. 이는 임의의 체로 일반화할 수 있으며, 각 체 상의 타원곡선의 점들은 아벨 군을 이룬다. 즉, 타원곡선은 1차원 아벨 다양체이다. 정의 가 체라고 하자. 타원곡선은 다음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원점이 주어진, 에 대한 사영 대수 곡선이다. 특이점을 가지지 않는다. 곡면 종수가 1이다. (즉, 복소수체의 경우 위상수학적으로 원환면이다.) 적어도 하나의 유리점을 가진다. 즉, 대수 곡선을 정의하는 식을 만족시키는 점 가 적어도 하나 존재한다(이 점은 무한대에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원점이 주어진 대수 곡선이란 순서쌍 (, 은 대수 곡선)을 의미한다. 임의의 체의 표수에서, 타원곡선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같은 꼴의 식의 해의 집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만약 체의 표수가 2나 3이 아닌 경우, 타원곡선은 다음과 같은 꼴의 식의 해의 집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는 사영 평면의 동차좌표이다. 이렇게 나타낸 경우, 원점은 이 된다. 이 점은 평면에서의 무한대에 해당한다. 즉, 평면에 무한대를 추가하여 사영 평면을 취한 뒤, 타원곡선을 사영 평면 속의 곡선으로 간주한다. 만약 체의 표수가 3인 경우, 일반적인 타원곡선은 다음과 같은 꼴의 식의 해의 집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체의 표수가 2인 경우는 위의 일반적인 표현을 사용하여야 한다. 대표적인 체에 대한 타원곡선 실수체 위의 타원곡선 실수체 상에서, 타원곡선은 실수 a와 b에 대해 방정식 y2 = x3 + a x + b 로 정의되는 평면 곡선이다. 1이 아닌 3차항의 계수와 0이 아닌 2차항의 계수는 x,y를 다시 정의함으로써 흡수시킬 수 있기 때문에, 우변이 임의의 x의 3차식이면 언제나 이 형태로 만들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식을 바이어슈트라스 방정식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다음의 그림들은 방정식 y2 = x3 − x와 y2 = x3 − x + 1로 정의된 실수체 상의 타원곡선의 그래프이다. 타원곡선의 정의에는 이 곡선이 비특이하다는 조건이 포함된다. 기하학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곡선의 그래프가 첨점이나 교차점이 없다는 뜻이다. 또한, 이는 판별식 Δ = −16(4a3 + 27b2) 이 0이 아니라는 대수적인 조건과 동치이다(이 판별식 표현에서 −16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타원곡선을 깊이 공부하다보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비특이 대수 곡선은 판별식이 양수일 경우 두 개의 연결 성분을 가지고, 음수일 경우에는 하나의 연결 성분만을 가진다. 예를 들자면, 위의 그래프에서 첫 번째 곡선의 판별식은 64, 두 번째 곡선의 판별식은 −368이다. 복소수체 위의 타원곡선 복소수체에서의 타원곡선은 1차원 아벨 다양체이다. 종수가 1이므로, 기하학적으로 이는 원환면의 모양을 하고 있다. 임의의 타원곡선 가 주어졌다면, 이를 다음과 같이 원환면으로 여길 수 있다. 복소 구조를 갖춘 원환면은 격자 에 대한 몫공간 으로 여길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원환면에서 타원곡선으로 바이어슈트라스 타원함수 를 사용해 다음과 같은 사상을 정의할 수 있다. 바이어슈트라스 타원함수는 다음과 같은 항등식을 만족시킨다. 따라서 이는 인 타원 곡선과의 동형사상이다. 수체 위의 타원곡선 유리수체를 비롯한 다른 대수적 수체에 대한 타원곡선은 수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경우, 수체에 대한 타원곡선의 점들은 보통 유리점이라고 한다(이는 유리수체가 아닌 다른 수체에도 사용된다). 주어진 수체 에 대하여, 타원곡선 의 -유리점들의 집합 는 아벨 군을 이룬다. 모델-베유 정리에 따라서, 타원곡선의 유리점군 는 항상 유한 생성 아벨 군이며, 따라서 그 계수와 꼬임 부분군에 의해 주어진다. 유리점군의 계수는 버치-스위너턴다이어 추측에 의하여 이에 대응하는 하세-베유 L-함수의 영점의 차수에 의하여 주어진다고 믿어지나, 아직 이는 증명되지 않았다. 유리수체의 경우, 유리점군의 꼬임 부분군은 메이저 꼬임 정리에 따라 15가지의 가능한 군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수체의 경우에도 메이저 꼬임 정리와 유사한, 가능한 꼬임 부분군 목록들이 존재한다. 유한체 위의 타원곡선 유한체 에 대한 타원곡선은 유한 개의 점들로 이루어지며, 이들은 유한군을 이룬다. 이 경우, 점의 개수를 세는 것은 일반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이며, 수론의 주요 연구 분야 가운데 하나이다. 하세 정리()에 따라서, 그 수는 다음과 같다. 위의 타원곡선 에 대하여, 그 점의 수 는 다음과 같은 상계 및 하계를 가진다. 유한체에 대한 타원곡선의 점들이 이루는 유한군은 항상 두 순환군의 곱이다. 예를 들어, 유한체 에 대한 타원 곡선 은 72개의 점 (71개의 아핀 점과 무한대에서의 점)을 갖고, 그 군 구조는 2차 순환군과 36차 순환군의 곱이다. 유한체에 대한 타원곡선은 타원곡선 암호를 정의하는 데 사용된다. 역사와 어원 타원 적분()에서 그 이름을 땄다. 이름과는 달리, 타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특히, 타원은 2차 곡선이므로, 곡선으로서 타원 곡선(3차 곡선)이 아니다. 오늘날 타원곡선으로 불리는 대상은 디오판토스가 최초로 다뤘다. 디오판토스는 꼴의 타원곡선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이후 피에르 드 페르마와 아이작 뉴턴,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앙리 푸앵카레 등이 타원곡선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존 테이트 등이 타원곡선 이론을 수론과 연관지었다. 앤드루 와일스는 타원곡선에 대한 모듈러성 정리(의 상당 부분)을 증명하여, 이를 통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였다. 또한, 오늘날 유한체에 대한 타원곡선은 암호론에서 타원곡선 암호를 정의하는 데 사용된다. 응용 타원곡선은 수론에 등장한다. 예를 들어, 타원곡선에 대한 정리인 모듈러성 정리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유한체에 대한 타원곡선은 암호론에 응용된다. 이를 타원곡선 암호라고 한다. 참고 문헌 수론 및 암호학 중심 외부 링크 The Mathematical Atlas: 14H52 Elliptic Curves 수론 대수기하학 해석적 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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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B6%80%ED%8F%89%ED%96%A5%EA%B5%90
부평향교
부평향교(富平鄕校)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에 있는 조선시대 향교이다. 1990년 11월 9일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12호이다. 개요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려 인종 5년(1127)에 계양산 아래에 지은 부평향교는 병자호란(1636)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여러 차례의 수리가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동재·서·동무·내삼문 등이다.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제사공간인 대성전을 뒤에 둔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향교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으로, 다른 향교에 비해 간소한 구조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역사 고려 시대인 인종 5년 (서기 1127년)에 건립되었으며 병자호란 당시에 화재로 소실되다가 숙종 14년에 재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징 문헌에 따르면 부평향교는 일반적인 향교 건물 배치인 대성전, 동·서 양무, 동·서 양재 이외에 전사청, 공수고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향교 내 건물 배치는 명륜당 등 교육시설을 앞에 놓고 그 뒤에 대성전과 문묘 시설을 배치하는 전형적인 전당후묘(前堂後廟)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같이 보기 인천향교 경인교육대학교 각주 참고 자료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인천 계양구의 문화재 인천 계양구의 건축물 인천광역시의 향교 1127년 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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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1077%EB%85%84
1077년
연호 북송(北宋) 희녕(熙寧) 10년 요(遼) 대강(大康) 3년 일본(日本) 조호() 4년 / 조랴쿠() 원년 서하(西夏) 대안(大安) 3년 리 왕조(李朝) 아인부찌에우탕(英武昭勝) 2년 기년 고려(高麗) 문종(文宗) 31년 북송(北宋) 신종(神宗) 10년 요(遼) 도종(道宗) 23년 서하(西夏) 혜종(惠宗) 11년 리 왕조(李朝) 인종(仁宗) 6년 사건 1월 28일 카노사의 굴욕 탄생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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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A%A8%EB%85%B8%ED%8F%B4%EB%A6%AC%20%28%EA%B2%8C%EC%9E%84%29
모노폴리 (게임)
모노폴리()는 1903년 미국에서 시작된 보드 게임의 한 종류이다. 현재의 클래식 버전은 1933년 찰스 대로(Charles Darrow)가 발명하고 1935년 파커 브라더스에 권리를 팔았다. 게임의 진행은 플레이어가 주사위를 굴려 보드판 위를 이동하며 부동산을 구입하면서 그 부동산에 도착한 다른 플레이어에게 임대료를 받고, 같은 색의 부동산을 독점하여 건물을 짓고 개발하며 지배한다. 또한 독점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플레이어와 거래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임대료를 받으면서 모든 플레이어를 파산시키면 승리한다. 현재 미국 최대 완구 회사인 해즈브로에서 저작권 권리를 가지고 생산한다. 현재까지도 인기를 얻고 있다. 같이 보기 부루마불 - 모노폴리와 유사한 대한민국의 게임 각주 외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주사위 이동식 보드 게임 다인용 게임 미국의 발명품 해즈브로 애틀랜틱시티 1935년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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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7%BC%EC%8A%A4%ED%83%80%EC%BD%94%EB%B9%84%EC%B9%98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소비에트 연방의 작곡가. 막심 쇼스타코비치 : 소비에트 연방의 음악가. 드미트리의 아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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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4%BC%EC%A7%84
피진
피진(pidgin) 또는 피진어는 서로 다른 두 언어의 화자가 만나 의사소통을 위해 자연스레 형성한 혼성어를 부르는 말이다. 피진이 뿌리내려 모국어로서 사용되는 말을 크리올이라 한다. 피진은 식민지 지역이었던 현지에 확립된 언어가 없는 곳에 많이 있다. 피진은 교역에 따른 언어접촉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으므로 어휘는 단순하고 격 변화 따위의 복잡한 문법규칙이 없다. 서로 만나는 두 언어 가운데 어휘는 상층어에서, 문법구조는 하층어에서 따오게 되며 전체적으로 단순해진다. 두 집단의 교류가 약화되면 저절로 사라지고, 접촉빈도가 더 잦고 세지면 상위어를 직접 배우게 되므로, 불안정한 언어이다. 피진은 언어 공동체의 모국어가 아니며 대신에 제2언어로 학습된다. 기원과 어원 ‘피진(pidgin)’은 중국 피진 영어로 ‘일(business)’을 뜻하는 단어였으며, 19세기에는 언어인 중국 피진 영어 자체를 부르는 말로도 쓰이다가 이후 혼성어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피진(pidgin)은 Hebrew어 단어인 'pidjom' (trade or exchange) 라는 의미에 어원을 두고 있거나, 2개의 중국 한문인 pei + tsin이 합쳐져 'paying money'라는 의미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2가지 가설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인 특성 일반적인 특성일 뿐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주어-서술어-목적어의 어순이다. 복문이 없다. 음절 축약이 잦다. 문자 삽입 등에 따라 자음군이 허물어진다. 기본모음만 쓰는 경향이 있다 . 억양 등 초분절요소를 쓰지 않는다. 시제를 나타내는 별도 어휘를 동사 앞에 놓는다. 복수나 최상급 등을 나타내기 위해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음운 변화가 거의 없다. 각주 사회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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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8%88%EB%A0%88%EB%AF%B8%EC%95%BC%EC%84%9C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서(-書, , , )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이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았다고 전해지는 구약성경의 예언서이다. 자신의 동족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박해를 받으면서 기록했으며 자신의 설교들과 표적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만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선포했다. 예레미야의 발생과 편찬 예레미야가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다가 다시 고쳐주실 날을 기대하면서, 땅을 샀다고 말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침공으로 몰락한 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바룩이 대필하였고, 보관한 기록들이 훗날 집대성할 만큼의 권위를 얻은 것으로 보아야한다. 구조 예레미야를 구분하는 방법으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1:1-19, 예레미야의 소명 2:1-6:30, 심판에 대한 선포와 회개의 촉구 7:1-10:25, 이스라엘의 예배에의 불성실 11:1-20:18, 언약에서의 불성실; 하나님과 예레미아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항하여 투쟁함 21:1-24:10, 유다 왕과 예언자의 타락 25:1-38, 바빌론을 통한 하나님의 모든 열방을 향한 심판, 그리고 바빌론을 심판하심 26:1-29:32, 바빌론 패권의 조짐 30:1-33:26, 위로의 책 34:1-36:32, 유다 왕과 사람들이 예레미아의 전하는 말씀을 거부함 37:1-39:18, 유다의 멸망 40:1-45:5, 남은 자들의 운명 46:1-51:64, 열방에 대한 계시 52:1-34,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보충 설명, 성전 파괴 서론격인 1장은 예레미야의 신상과 예언자로서의 부름과 그가 받은 지침 등을 묘사하고 있다. 2-45장에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비유들과, 설교들, 상징적 행동을 통한 교훈 등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전달되었다. 12편의 설교들에서 예레미야는 유다의 임박한 심판들의 원인을 열거하고 있다. 우상을 따름으로써 백성들은 그들의 공허한 고백과 하나님의 언약(계약)에 대한 불순종, 우상숭배,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다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자만등으로 인해 질책을 받았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했지만 그들의 죄는 너무나 극심했으므로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예레미야는 포로로 사로잡혀가는 사건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거짓 평화를 외치면서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던 거짓 예언자들의 메시지와는 반대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이 지속될 것을 선포했다. 그의 메시지 때문에(2:25), 예레미야는 치욕과 반대를 겪었다. 또한 그는 백성들에게 새 언약 아래서 누리게 될 회복과 소망을 확신시켜 주었다. 46~51장은 이방 아홉 개 국가들을 향한 일련의 예언적 경고들로 이루어졌다(이집트,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다마스쿠스(시리아), 아라비아, 엘람, 바빌론 등). 52장은 40년에 걸친 예레미야의 심판의 선포는 마침내 한 사건에 의해 확증되었는데(열왕기하 25장, 역대하 36장, 예레미야 39장, 52장), 예루살렘은 포위되고 파괴되었으며 약탈을 당했다. 지도자들은 죽임을 당했고 포로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내용 예루살렘 성전은 멸망하지 않는다면서 즉, 여호와(야훼)의 심판은 없을 것이라며 마음놓고 죄 짓던 사람들 앞에서 외롭게 외친 심판설교가 주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하시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을 경고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출신배경 예레미야 예언자는 제사장 성읍이자 솔로몬 왕과 아도니야와의 권력투쟁(왕자의 난)에서 패한 아비아달계 제사장들의 귀양지였던 아나돗 태생의 제사장으로, 제사장 힐키야의 아들이다. 요시야 13년(기원전 627년)에 활동을 시작했으며, 여호아하스,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기야왕시대에 살았다. 그는 아시리아의 멸망과 바빌로니아의 부흥이라는 서아시아의 정세변화와 이로 인해 유다가 멸망한 시대에 살았으며, 망명자들에 의해 강제로 이집트로 끌려갔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설교는 이집트에서 했다.(예레미야 44장) 시대 배경 당시 앗시리아 제국의 멸망 과정에서 다른 제국들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그 사이에 유다 왕국도 멸망의 길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갈그미스 전투에서 느부갓네살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이후 페르시아 발흥까지 전 세계는 바벨론의 손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유다에서는 요시아에 의해서 발견된 율법책을 따라서 개혁을 시작했고, 이집트와 바벨론의 세력 확장의 틈바구니에서 요시아는 이집트의 느고에게 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때로부터 여러 왕들이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를 오가며 추종하며 살아남기 위한 작전을 벌였으나, 결국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반기를 든 대가로 바벨론에 의해 586년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예레미아는 유다가 주변 국가들의 제국주의적인 야망의 부활과 결강(결괴) 속에서 자신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그 격동의 시절을 목도 하였다. 예레미아는 애국주의, 친 바벨론계와 친 이집트계의 갈등,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투쟁 등을 생생하게 잘 묘사하고 있으며, 이런 세월 속에서 예레미아 자신이 소명을 받았다. 잘못된 신학에 저항한 심판설교 예레미야서는 유다 왕국의 암흑기 때에 유다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들 중 한 사람의 심판설교에 대한 기록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불멸의 존재로 여기며 하나님 말씀을 마음놓고 어기던 유다를 향해 있을 야훼의 심판을 40년 동안 충실하게 선포했고, 그 대가로 박해 ,폭력 격리, 수감 등을 당했다. 흔히 예레미야에 대해 유다의 타락과 임박한 운명을 슬퍼한 '눈물의 예언자','섬세한 여성적인 예언자'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오해이다. 히브리 성서에 나오는 예레미야는 잘못된 성역에 맞선 역동적인 예언자,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성전을 불멸의 존재로 여기던 잘못된 통념에 성전설교로 도전한 용감한 예언자였다. 다윗 이후로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집중시킨 조치는, 야훼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토라는 경건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방법으로 전락했으며, 현상을 유지하는 방책으로 사용되었다. 예레미야는 이 거짓된 지혜를 규탄했다. 그리고 모세에게 주어졌던 신명기적 계약 신앙의 부활을 꾀했다. 타협없는 야훼의 말씀 전달 바빌론 침략을 통한 야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그의 강력한 설교 내용 때문에, 심한 박해를 겪어야 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윗 왕조와 맺으셨다는 언약에 근거, 야훼의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자만했는데,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너희가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서 죄를 짓는 생활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심판이 있을 것이라며 유다 백성들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위협을 받았고,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하나님의 심판은 없다는 거짓 예언을 하면서 대중들의 비위를 맞추는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서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으며, 여호야김 왕에게 위협을 느껴 도피했고, 거짓 평화를 외치는 예언자인 하나냐에 의해서 공적으로 모욕을 받았으며 웅덩이에 던져지기도 했다. 예레미야는 예언활동 초기로부터 여호야김 왕 4년에 이르기까지의 자신의 모든 예언들을 기록하도록 그의 서기였던 바룩에게 구두로 서술했다. 기록 연대와 배경 예레미야는 스바니야(스바냐), 하바꾹(하박국), 다니엘, 에제키엘(에스겔) 등과 동시대인이었다. 그의 예언 활동은 대략 기원전 627년으로부터 580년까지에 걸쳐 나타났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치세 동안 순조롭게 활동했다. 요시야 왕은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에 의해 기원전 609년에 죽음을 당했다. 예레미야의 예언서에서는 야훼 하나님은 인내가 많고 거룩하신 심판을 늦추시며 너무 늦기 전에 그의 백성들로 회개하도록 촉구하시는 분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없을 것이라면서 자만하는 자들을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서 경고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해석 구약성서 학자 오택현 영남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했다. 사회적 약자를 외면한 채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므로 심판받지 않는다"라면서 기복신앙과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교회는 "우리는 야훼를 섬기므로, 교회에 다니므로 안전하다"라며 스스로 성역화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성역화되어버린 교회에 대해 "나의 교회를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다"라며 책망하실 것이다. 갈등해소를 위해 기도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갈등을 부추기는 모습은 예레미야 시대의 종교 귀족들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 대상은 없다. 교회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심판받는다. 하나님은 죄를 묵인하는 분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과 실로 성소를 파괴하는 심판으로 유다 백성의 죄를 심판하신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각주 기원전 6세기 책 원경전 네비임 70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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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현체학
발현체학은 생물학에서의 세포내에서 일어나는 RNA와 단백질등과 같은 생명객체들의 발현을 조사하고 그 양을 측정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세포의 기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것은 DNA 칩 분석과 단백질 칩 분석등을 포함한다. 발현체학의 대표적인 분야가 전사체학(transcriptomics)라고 할 수 있다. 전사체학은 DNA칩을 주로 분석하는 것이라고 기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DNA칩은 마이크고 어레이와 올리고칩 계열로 크게 나뉘는데, 현재는 올리고칩쪽이 유력한 분야로 이해되고 있다. 발현체학은 발현된 RNA, 단백질양을 분석하는 학문으로, 발형체학 (Phenome)과는 조금 다르다. 발형체학은 발현된 분자들의 결과로 특정한 타입(형)이 나올때, 그 형들의 총합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의 위계를 그리면, 유전체=> 발현체 => 발형체 의 순서가 된다. 같이 보기 전사체학 유전체학 단백체학 게놈 발형체학 외부 링크 Expressomics.org: 발현체학 포탈 사이트 생물정보학 유전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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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역
동두천역(Dongducheon station, 東豆川驛)은 경기도 동두천시 동두천동에 있는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전철역이며, 1912년 7월 25일 처음에는 동두천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이후 1983년 동안역으로 역명을 변경하였다가 2006년 12월 15일 다시 동두천역으로 역명을 환원하였다. 현재는 광역전철이 운행되며 여객, 화물, 승차권발매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있다. 심야에 2편성이 주박하며, 해당 전동열차는 다음 날 새벽에 소요산역으로 회송하여 운행을 시작한다. 개요 경원선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전철역 기능을 수행한다. 급행을 포함한 일부 전동차는 이 역에서 시·종착 운행하고, 나머지는 다음역인 소요산역까지 운행한다. 1984년 2월 10일에 동안역(東安驛)으로 역명을 변경했고, 동두천시청과 시가지에서 가까운 어수동역이 동두천역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이 역에서 종착하는 전동차의 행선안내가 동안보다는 동두천이라는 역명으로 표출되는 것이 대내외적으로 동두천을 알리는 데 효율적일 것이라는 의견이 있어, 기존의 동두천역을 동두천중앙역으로, 기존의 동안역은 동두천역이라는 역명으로 환원하였다. 역사 1912년 7월 25일 : 동두천역으로 영업 개시 1945년 8월 24일 : 38선 분단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경원선 남한 구간의 종착역이 됨 1984년 2월 10일 : 시가지 남하로 동안역(東安驛)으로 역명 변경 2006년 12월 15일 : 수도권 전철 1호선 연장 개통과 함께 동두천역(東豆川驛)으로 역명 환원 2011년 7월 28일 : 2011년 7월 한국 중부 집중호우로 인한 선로 유실로 인하여 통근열차 영업 일시 중지 2012년 3월 21일 : 초성철교 완공으로 통근열차 운행 재개와 동시에 편도 기준 1일 6편 감편 2012년 7월 1일 : 통근열차 운행 편수 증편 2012년 11월 20일 : 신탄리역 - 백마고지역 구간 연장 개통으로 동두천역 - 백마고지역 구간 통근열차 9회 운행, 신탄리역 8회 운행 총 34회 운행 2013년 4월 1일 : 백마고지ᆞ신탄리행 매시 정각 출발 2014년 8월 1일 : 평화열차(DMZ train) 운행 개시 2018년 7월 2일 : 경원선 연천 ~ 백마고지 구간 선로 개량 공사로 인한 통근열차·평화열차 연천역까지 운행. 2019년 4월 1일 : 경원선 소요산 ~ 연천 전철화 공사로 인한 운행 일시 중단. 일 46회 대체버스 운행. 역 구조 배선도 소요산역과 동두천역의 배선도는 다음과 같다. 승강장과 맞닿아 있지 않은 선로를 제외한 총 3면 6선 중 수도권 전철이 2면 4선(쌍섬식 승강장), 2번 승강장과 3번 승강장이 본선으로 설정되어 있다. 다만, 의정부역과는 달리 소요산 출발 열차나 급행을 포함한 일부 시·종착 열차는 대부분 2번 승강장에 들어오고, 회차 외에도 소요산발 열차가 1번 승강장에 들어올 때가 가끔 있다. 4번 승강장은 소요산역에서 종착한 열차가 공차 회송하여 주박한다. 출구는 총 2개가 있다. 전철 승강장에 4번 승강장을 제외하고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1호선 열차는 소요산역에 종착한 열차가 공차로 이 역까지 회송하여 주박한다. 소요산행으로 운행하는 막차 2개 편성과 광운대행으로 운행하는 막차 이전 열차 1개 편성까지 총 3개 편성이 심야에 주박하며, 다음날 다시 소요산역으로 공차 회송하여 소요산발 인천행 열차로 운행하거나 동두천발 인천행 열차로 운행한다. 승강장 역 주변 1번 출구 동양대학교 북서울캠퍼스 미군 2사단 소요동행정복지센터 소요파출소 2번 출구 동두천지방산업단지 동보초등학교 신흥중학교 신흥고등학교 이용객 변동 2006년 자료는 개통일인 2006년 12월 15일부터 12월 31일까지인 17일 기준으로 환산한 것이다. 인접한 역 사진 각주 외부 링크 한국철도공사 동두천역 경기도의 철도역 동두천시의 전철역 1912년 개업한 철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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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A2%EC%9D%B4%20%EC%82%AC%EB%8A%94%20%EC%9D%B4%EC%95%BC%EA%B8%B0
낢이 사는 이야기
《낢이 사는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만화가 서나래가 연재하고 있는 웹툰이다. 일상생활에서 공감할 수 있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주된 소재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주인공인 낢, 가족인 엄마·언니·식이(동생)·아빠, 은근남 등이 있다. 네이버 만화에서 연재를 하였으나, 2004년부터 출시되었고, 2008년 12월 30일을 끝으로 시즌 1이 완결되었다. 2010년 9월 30일부터 2012년 5월 31일까지 시즌 2가 연재되었다. 2013년 4월 1일 시즌 3 예고편이 올라왔으며, 시즌 3가 2014년 1월 31일에 끝났다. 서나래 작가는 시즌 3에서 자신의 결혼 소식을 밝혀 화제가 되었으며, 5월 말에 결혼한다는 소식을 남기고 시즌 3를 마감했다. 2013년까지 여덟 권의 단행본으로 출시된 상태이다. 2015년 2월 18일부터 시즌 4 연재를 하고 있다. 시즌 단행본 《낢이 사는 이야기 1: 아침에 일어나면 열두 시》 (2006년), (2010년) 《낢이 사는 이야기 2: 내 방은 예전부터 쓰레기》 (2008년), (2010년) 《낢이 사는 이야기 3: 그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잔소리》 (2011년) 《낢이 사는 이야기 4: 방 꼴이 이게 뭐! 넌 천하의 게으름뱅이야》 (2011년) 《낢이 사는 이야기 2부 1: 인생의 거칠기가 사포의 그것과 같다》(2011년) 《낢이 사는 이야기 2부 2: 혼자 살다 갈 수도 있겠구나》(2012년) 《낢이 사는 이야기 2부 3: 그런 시절도 있었더랬다》(2012년) 《낢이 사는 이야기 2부 4: 하지만 언젠가 봄이 오리라》(2013년) 외부 링크 《낢이 사는 이야기》 네이버 웹툰 네이버 웹툰 대한민국의 만화 코미디 웹 만화 일상물 웹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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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RNP%20%28%EA%B0%80%EC%88%98%29
RNP (가수)
RNP(알앤피, 1977년 6월 7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본명은 김정주이다. 2006년 1집 《그 사람의 연애방식》으로 데뷔하였다. 독특한 저음 랩핑과 서정적인 가사가 특징이다. 소속사는 RNP가 직접 설립하고 운영중인 언더그라운드 레이블 Rainbeat Company이다. 앨범 2006년 《1집 - 그 사람의 연애방식》 2007년 《2집 - 2nd Story》 2008년 《2.5집 - 달콤한 거짓말》 2008년 《미니앨범 - In The Rainbeat》 2009년 《싱글 - 일상의 기록 PT.1》 2010년 《싱글 - 일상의 기록 PT.2》 2010년 《알앤피루스(RNPuls) 연주곡 싱글 - Fallen leaves》 2010년 《싱글 - 싸움》 2011년 《알앤피루스(RNPuls) 연주곡 1집 - 상처속에 남은건 그리움》 2011년 《싱글 - 너와함께 알앤피 부르스》 2011년 《싱글 - 9th Story》 2011년 《3집 - 10th Story》 2011년 《알앤피루스(RNPuls) 연주곡 싱글 - 그늘진 낙원》 2012년 《싱글 - 슬픔을 피우는 나무》 2012년 《알앤피루스(RNPuls) 연주곡 싱글 - Mahaken da pepeldomoon.》 2012년 《알앤피루스(RNPuls) 연주곡 싱글 - 기다림의 끝은 이별이다.》 2012년 《싱글 - 12th Story》 2012년 《4집 - 향기로운 이별》 2012년 《싱글 - 너보다 더 예쁜 여자를 만날 거야》 2012년 《싱글 - 너 닮은 모습에서》 2012년 《싱글 - 너랑 나랑 우리 둘이》 2013년 《싱글 - 일반화의 오류》 2015년 《싱글 - 18th Story》 2015년 《싱글 - 19th Story》 2016년 《5집 - 20th Story》 1977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남자 가수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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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향음성학
음향음성학은 음성학의 한 분야로 말소리의 음향적 특성을 연구하는 분야이다. 음향음성학은 기본 주파수, 지속 시간, 한 파형의 평균 제곱 진폭 등 파형의 물리적 특성과, 파형을 주파수 영역으로 변환했을 때의 스펙트로그램의 특성 등을 연구하며 이러한 특성이 조음음성학 또는 청취음성학에서 논의되는 특질들과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연구한다. 더 나아가서는 음소, 구, 발화 등의 추상적인 언어학 개념과 말소리의 음향적 특질이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연구한다. 음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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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드레이퍼
헨리 드레이퍼(Henry Draper, 1837년 3월 7일 ~ 1882년 11월 20일)는 미국의 의사이자 천문학자이다. 헨리 드레이퍼의 아버지 존 윌리엄 드레이퍼는 성공한 의사이자 화학자, 식물학자, 뉴욕 대학교 교수였으며, 1839년 말에서 1840년 초까지의 겨울 기간에 망원경을 통해 최초로 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사람이기도 했다. 드레이퍼의 어머니는 브라질 황제 주치의였던 안토니아 코에타나 데 파이바 페레이라의 딸이었다. 헨리 드레이퍼는 1857년 20세 때 뉴욕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 그는 처음에는 벨뷰 병원의 의사로 일했으며 이후 뉴욕 대학교의 의학 학장 및 교수로 시무했다. 1867년 드레이퍼는 부유한 사교계의 명사 안나 매리 파머와 결혼했다. 드레이퍼는 천체 사진술의 개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872년 흡수선을 보여주는 첫 번째 천체 스펙트럼을 찍었으며, 1874년 금성의 일면 통과 현상을 관측하기 위한 탐험대를 지휘했다. 또한 1880년 9월 30일 오리온성운을 11인치 '클라크 형제 사진용 굴절 망원경'을 이용하여 50분의 노출 시간을 주어 촬영했다. 드레이퍼는 여러 상을 받았는데, 예를 들면 뉴욕 대학교와 위스콘신 매디슨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학위를 받았으며, 1874년 금성 일면통과 촬영단을 지휘한 공로로 의회에서 메달을 받았다. 또한 미국 국립과학원와 독일 천문학회(Astronomische Gesellschaft)의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미국 예술과학 학회, 미국 철학회, 미국 사진 협회, 미국 과학진흥협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헨리 드레이퍼는 늑막염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했으며, 미망인은 헨리 드레이퍼 메달(천체 물리학에 기여가 큰 천문인을 뽑아 수상하는 제도)과 고성능 망원경 구입에 자금을 투자한다. 이 망원경은 이후 스펙트럼에 따라 항성을 분류한, 헨리 드레이퍼 목록을 작성하는 데에 사용된다. 이 망원경은 현재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대학 소속의 토룬 천문학 센터(폴란드 피우니스 소재)에 있다. 달 표면의 드레이퍼 충돌구는 그를 기려서 붙인 이름이다. 참고 문헌 미국의 천문학자 미국의 의사 1837년 출생 1882년 사망 뉴욕 대학교 동문 뉴욕 대학교 교수 브라질계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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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
디오게네스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인명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 (기원전 460년경)는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이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 (기원전 412년경 ~ 기원전 323년경)는 키니코스 학파(견유학파)의 철학자이다. 바빌로니아의 디오게네스 (기원전 230년경 ~ 기원전 150년경)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3세기경)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전기 작가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아드는 그리스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이다 생물학 디오게네스속 (Diogenes)은 디오게네스과에 속하는 소라게 속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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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D%BC%EB%B8%8C%EB%9D%BC%EB%8F%84%20%ED%9B%84%EC%9E%91%20%ED%8E%98%EB%93%9C%EB%A1%9C%20%EA%B3%A0%EB%A9%94%EC%8A%A4
라브라도 후작 페드로 고메스
페드로 고메스 라브라도, 통칭 라브라도 후작(Pedro Gómez Labrador, Marquis of Labrador, 1755년 - 1852년)은 에스파냐의 정치인·외교관이다. 빈 회의에서 에스파냐의 입장을 대변했으나 뜻한 바를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당대의 인물들이 그에 대하여 한 평가로부터 미루어보건데, 이러한 목표 달성 실패는 그의 능력 부족에 기인할 가능성이 크다. 생애 1798년 8월, 국왕 카를로스 4세의 명을 받아 프랑스군을 피해 피렌체로 피난해 있던 교황 비오 6세를 방문하는 것으로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교황이 프랑스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그 또한 교황을 따라 항복을 거부했고 베르티에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다. 비오 6세가 죽고 그의 조국 에스파냐가 제1차 대프랑스 동맹에 고집스럽게 가담한 결과 파멸하자 그도 석방되어 교황령의 전권대사를 거쳐 에트루리아 왕국의 수도 피렌체에 부임했다.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이 에스파냐를 해방시키자 카디스 의회의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추천하여 수상으로 삼았다. 라브라도 후작은 자유주의자들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다. 그는 페르난도 7세에게 자유주의적 헌법을 철저히 파괴하도록 조언했다(→에스파냐 반란). 나폴레옹 전쟁의 뒷처리를 위하여 소집된 빈 회의에 그는 에스파냐를 대표하여 참석했다. 그의 조국 에스파냐는 기진맥진한 상황 속에서도 우연히 높은 위상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승전국들의 모임인 4국위원회(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려는 것을 저지하려는 탈레랑이 8국위원회의 위상을 높이려 시도한 것의 어부지리에 불과했다. 에스파냐는 프랑스, 포르투갈, 스웨덴과 함께 8국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브라도 후작은 탈레랑과 메테르니히와 같은 노련한 인물들에게 회의 기간 내내 여지 없이 농락당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 프랑스가 에스파냐로부터 빼앗아 미국에 매각한 루이지애나가 다시 에스파냐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완전히 무시됐다. 메테르니히는 교황령과 동맹을 맺으려는 그의 노력을 무산시켰다. 캐슬레이는 에스파냐의 포르투갈에 대한 어떠한 권리 주장에도 반대했다. 웰링턴 공작은 후작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멍청하다(stupid).」. 게다가 사람들을 만나고 만찬 따위에 참석하는 것을 꺼리는 그의 성격은, 빈 회의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노력이 파국에 도달할 것임을 예정하고 있었다. 라브라도 후작의 마지막 권리 주장이었던 이탈리아의 부르봉 왕가령에 대한 주장마저 거부되자, 에스파냐는 빈 최종의정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절했다. 또한 에스파냐는 올리벤차의 포르투갈로의 반환을 거부하고 나서는 등 빈 회의의 합의사항에 대해 저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유럽의 이등국가로 전락한 에스파냐가 언제까지나 빈 최종의정서를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에스파냐는 결국 1817년 5월 7일, 빈 최종의정서에 서명했다. 라브라도 후작은 외교적 참패에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각주 같이 보기 빈 회의 에스파냐 반란 나폴레옹 전쟁 1755년 출생 1852년 사망 스페인의 정치인 스페인의 외교관 스페인의 후작 살라망카 대학교 동문 카세레스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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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D%99%8B%EC%B9%B4
나홋카
나홋카(, )는 러시아 연해주의 항구 도시이다. 인구는 약 15만 명이다. 기후 몬순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여름에는 바람이 부는데, 겨울은 북풍이, 여름에는 남풍이 분다. 연 강수량은 740mm이고, 그 중 60%는 7월에서 9월 사이에 집중된다. 1월 평균기온은 -13°C이고 8월에는 17°C다. 자매도시 오타루(일본) 오클랜드(미국) 벨링햄(미국) 동해시(대한민국) 지린(중화인민공화국) 각주 외부 링크 공식 사이트 나의 도시의 "나홋카"설명 나홋카 시 설명 러시아의 도시 프리모르스키 변경주의 행정 구역 러시아의 항구 도시 러시아의 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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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역
화산역(Hwasan station, 花山驛)은 대한민국의 철도 노선인 중앙선의 역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유성리에 있다. 1938년에 영업을 시작할 당시에는 경북화산역으로 개업했고, 1986년에 역사를 신축했다. 현재 여객 열차는 정차하지 않는다. 2024년 12월에 도담 - 영천 구간이 완공되면 폐역될 예정이다. 역명 유래 조선시대에 신령군 소속 아촌면(牙村面)과 대량면(代良面), 영천군 소속 지림면(淽林面) 등으로 나뉘어 있다가 1914년에 아촌면, 대량면, 지림면과 북습면(北習面), 명산면(鳴山面) 일부를 합쳐 신령의 옛 이름인 화산(花山)면으로 개칭한데서 비롯되었다. 연혁 1938년 12월 1일 : 경북화산역으로 영업 개시 (무배치간이역 등급) 1942년 4월 1일 : 역사 준공 1948년 8월 1일 : 보통역으로 승격 1955년 7월 1일 : 화산역으로 역명 변경 1977년 5월 1일 : 화물 취급 중지 1977년 5월 16일 : 수소 화물 취급 중지 1986년 9월 21일 : 현재의 역사 준공 1997년 6월 1일 : 배치간이역으로 격하 2007년 6월 1일 : 일반 열차 통과 2011년 10월 10일 : 무배치간이역으로 격하 2024년 12월 : 중앙선 복선 전철화 구간이 완공 폐역예정 사진 각주 경상북도의 철도역 영천시의 교통 영천시의 건축물 1938년 개업한 철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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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98%81%EB%AF%B8
최영미
최영미는 다음 사람을 가리킨다. 최영미(1961년 ~ )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최영미(崔英美, 1962 ~ )는 대한민국의 방송인이며, 前 KBS 아나운서이다. 최영미(1994년 ~ )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U-20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의 선수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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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1864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연호 태평천국(太平天國) 14년 청(淸) 동치(同治) 3년 일본(日本) 분큐() 4년 / 겐지() 원년 응우옌 왕조(阮朝) 뜨득(嗣德) 17년 기년 태평천국(太平天國) 천왕 홍수전(天王 洪秀全) 14년 / 유천왕 홍천귀복(幼天王 洪天貴福) 즉위년 류큐(琉球) 쇼타이왕() 17년 청(淸) 목종 동치제(穆宗 同治帝) 3년 조선(朝鮮) 고종(高宗) 원년 응우옌 왕조(阮朝) 사덕제(嗣德帝) 17년 사건 5월 29일 -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이 처음 멕시코 땅을 밟다. 8월 22일 - 제네바 협약이 맺어지고 그 결과 적십자가 탄생하다. 미국 스와스모어 대학교 설립. 탄생 1월 7일 - 대한제국 시기 언론인이자 독립협회의 주역 필립 제이슨 (1951년 사망) 4월 21일 - 독일의 사회경제학자 막스 베버 6월 11일 -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6월 22일 독일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 조선의 기업가 박승직. 9월 8일 - 영국의 철학자 레너드 홉하우스 11월 11일 - 프랑스 소설가 모리스 르블랑 11월 24일 -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 툴루즈 로트렉 사망 1월 13일 - 미국 작곡가 스티븐 포스터. 1월 16일 -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 4월 15일 - 조선의 천도교 창시자 최제우. 5월 12일 - 미국 남북전쟁 남부동맹의 장군 젭 스튜어트. 달력 음양력 대조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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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B4%EB%B4%89%EC%82%B0%EC%97%AD
굴봉산역
굴봉산역(Gulbongsan station, 屈峰山驛)은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산면 백양리에 있는 경춘선의 전철역이다. 부역명은 제이드가든이며, 인근에 제이드가든 수목원이 있다. 경춘선 복선 전철이 개통되기 전까지는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에 몇회정도 정차하다가 2010년 12월 21일에 경춘선 복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역사가 백양리로 이전되었고, 이와 함께 인근에 있는 산의 이름을 딴 굴봉산역(屈峰山驛)으로 역명이 변경되었다. 전철로 대체됨에 따라 무궁화호 열차는 더 이상 운행하지 않으며, 2012년 2월에 개통한 ITX-청춘 열차 역시 정차하지 않고, 무정차 통과한다. 역명 유래 본래 춘천시 남산면 서천리에 위치해 있다하여 서천역(西川驛)이라는 역명으로 개업하였으나, 충청남도 서천군에 위치한 서천역(舒川驛)과 발음상으로 동일하기에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경기도(京畿道)와 강원도(江原道)가 만나는 지점이라는 뜻의 경강역(京江驛)으로 개칭하였다. 2010년 수도권 전철 경춘선 개업과 함께 역사가 이전하게 되면서 인근에 있는 해발 395m의 굴봉산(屈峰山)의 이름을 따 굴봉산역으로 다시 개칭하였다. 부기역명의 제이드가든 수목원은 역에서 차로 약 4 km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무료 셔틀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꼴로 운행하고 있다. 역사 1939년 7월 20일 : 춘천군 남산면 서천리 230번지에서 서천역이라는 이름으로 보통역으로 영업 개시 1955년 7월 1일 : 경강역으로 역명 변경 1958년 6월 10일 : 역사 준공 1963년 6월 13일 : 배치간이역으로 격하 1980년 7월 15일 : 보통역으로 승격 2004년 9월 1일 : 화물 취급 중지 2010년 12월 21일 : 경춘선 복선 전철화 사업 개통으로 성북 기점 62.2 km에서 망우 기점 54.7 km로 변경 및 굴봉산역으로 역명 개정, 백양리로 역사 이전, 수도권 전철 경춘선의 전철역이 됨. 철도승차권 단말기 철거. 역 구조 2면 2선의 상대식 승강장을 갖춘 고가역이다. 스크린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승강장 특징 대중문화에서의 굴봉산역은 철도 터널 두 개 사이에 끼어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천마산역과 같다. KBS2 주말드라마인 신사와 아가씨에서 제이드가든은 이영국(지현우)의 집이 등장했었다. SBS 호기심 천국에서는 사람이 제일 간이역으로 소개된적이 있다. 드라마 천국의 계단과 사랑과 야망 에도 등장하였고,예능 프로그램 1박 2일 이 다녀간 곳이 되었다. 무한도전에서는 시크릿 바캉스 특집에서 길을 버리고 가는 몰카를 실패하는 장면으로 굴봉산역 과 강촌역이 잠깐 등장했다. 이설 직전에는 사진으로 남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던 역이었다고 한다. 이용객 변동 2010년 자료는 개통일인 2010년 12월 21일부터 12월 31일까지인 11일치만이 반영된 것이다. 사진 신 역사 구 역사 인접한 역 각주 외부 링크 한국철도공사 굴봉산(제이드가든)역 춘천시의 전철역 강원특별자치도의 철도역 1939년 개업한 철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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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5%AC%EC%84%B1
구성
글에서 구성(構成)이란 글의 소재 등을 주제와 목적에 맞추어 엮어가는 작업이다. 구성의 의미 아무리 좋은 쓸 거리, 즉 소재나 재료를 많이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글이 되지 않는다.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준비된 재료들을 효과적으로 짜 맞추어 나가야 하는데, 이렇게 필요한 재료들을 주제와 목적에 맞추어 엮어가는 작업을 구성이라고 한다. 건축가가 건축 재료를 기초로 그것을 어떻게 맞추어 세우느냐에 따라 건축의 형태와 기능에 차이가 있듯이, 글의 재료를 어떻게 연결해 가는가에 따라 글의 성격은 달라진다. 따라서 작문에서의 구성의 과정은 준비된 재료를 이용하여 필자가 목적한바 주제를 나타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구성의 방법은 크게 자연적 구성 방법과 논리적 구성 방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자연적 구성 방법은 다시 시간적 순서에 따른 구성과 공간적 순서에 따른 구성의 방법으로 구분되고, 논리적 구성은 다시 일반에서 특수로, 특수에서 일반으로, 원인에서 결과로, 결과에서 원인으로, 점층적 방법, 중요도의 순서에 따른 방법, 기지에서 미지로, 호감도의 순서에 따르는 방법 등으로 구분된다. 구성의 형태 자연적 구성 시간적 순서에 따른 구성 자연적 순서에 따른 구성이란 어떤 사건이나 상태를 서술해 갈 때에는 일어난 모습을 자연적 조건 그대로에 맞추어 서술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중 시간적 순서에 따른 구성이란 어떤 사건이나 일이 진행되어 가는 시간적 순서에 따라 재료를 배열하는 구성법을 말한다. 이 구성 방법은 가장 초보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시간적 순서에 따른 구성은 사건의 진행 절차에 따라 기술해 나가는 방법이기 때문에 특별한 작문상의 기교 없이도 수월하게 쓸 수 있으며, 오랜 시간 동안의 체험이나 기억을 정리하는 일 등에는 매우 편리하고도 적합한 방법이다. 기행문, 체험기, 회의록, 전기문, 역사적 기록 등은 대개 이 방법을 택하고 있으며 ‘∼하는 방법’ 및 ‘∼의 제작법’ 등을 실제성 있게 설명해 나가는 데에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이 구성법은 문장에 중심점이 없기 쉬워 문장의 인상 내지는 호소력이 강하지 못한 결점이 있다. 또한 시간적 순서에 따라 쓰인 일련의 사건은 그것이 전체적으로는 흥미가 있는 사건일지라도 그 하나하나의 세부적 재료가 모두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문장 전개 과정에서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따라서 단위 사건 하나하나가 사건 전체의 맥락에서 파악되지 못한다는 결점이 있으므로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구성 방법을 사용할 때는 처음에 결말을 제시하여 회상의 형식으로 전개시키거나, 특히 강조하는 부분을 내세워 읽는 사람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공간적 순서에 따른 구성 공간적 순서에 따른 구성이란 일정한 공간을 동적(動的)인 관점에서 보아 전개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지리적 여건, 생물의 형태, 기계나 도구의 구조, 기관이나 단체의 구조 등을 설명하고 기술하는 데 많이 쓰인다. 공간적 순서에 따른 구성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일정한 방향에 따라 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밖에서부터 안으로, 안에서부터 밖으로,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등의 순서를 정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임의로 정할 수 있으나,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그에 따라 일관성 있게 서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방법은 먼저 전체의 윤곽을 밝히고 점차 각 부분이 그 전체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방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체 속에서 부분들의 유기적인 관련성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공간적 순서에 따른 구성 방법 역시 비교적 손쉬운 구성 방법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변화가 없고 단조롭다는 느낌을 주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이 방법은 다른 구성 방법과 함께 병행해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논리적 구성 일반에서 특수로 시간 및 공간의 순서가 자연의 순서라면, 이 항목 이하의 구성은 논리적 순서에 해당한다. 즉 먼저 소재를 검토하고, 각각의 논리적 관계를 밝힌 다음 소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일반에서 특수로 향하는 이 순서는 가장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논리 전개의 방식으로서 구체적·개별적인 것을 논하기에 앞서, 전체의 개관 내지 일반적 특징을 말함으로써 독자에게 전체를 예측하게 하는 방법이다. 식물학 개론서나 문학 개론서는 이와 같이 일반에서 특수로 향하는 순서를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테면 문학사에서는 시대의 개관 → 각 장르의 경향 → 개개의 작품 등의 순서로 전개하여 나간다. 이 구성법은 글의 처음에서 이미 앞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독자에게 이해되기 쉽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연역형이란 것도 글의 구성법이라는 면에서 보면, ‘일반에서 특수로’ 전개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연역형은 수학과 논리학에서 가장 선명한 체계로 나타나지만, ‘일반에서 특수로’ 향하는 글의 전개 방식은 그보다 덜 선명하나 역시 연역형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수에서 일반으로 이 방법은 ‘일반에서 특수로’의 방법을 뒤바꾸어 놓은 것으로 구체적·개별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일반적 진리로 논리를 진전시켜 나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대상을 이해할 때에는 개별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그 하나하나를 비교·검토하여 차츰 공통되는 특성을 추상해 나가는 과정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식물학자는 먼저 개개 식물을 관찰하는 일에서 출발할 것이며, 문학가는 개개 작품의 감상과 비평에서 출발할 것이다. 따라서 특수에서 일반으로 향하는 순서는, 사고(思考)의 과정과 일치하고 있으나, 글의 구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반드시 적절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독자의 이해는 전체와 부분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인식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예측할 만한 것을 미리 암시하지 않고 특수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이해를 방해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에서 특수로 향하는 방법이 많이 쓰이며, 또 글의 구성으로서도 알기가 쉽다. 물론 학술 논문이나 연구 보고 등에서는 개개의 현상에서 일반 법칙을 귀납하는 방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처음에 연구의 목적, 문제, 가설, 방법 등을 제시하여 전체를 개관해 두어야 한다. 즉 독자가 어느 부분에 대해서 그것이 전체 가운데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를 알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특수에서 일반으로’ 진행되는 글의 전개 형식을, 논리학에서는 귀납형이라고 한다. 즉 구체적인 사실을 먼저 들고, 다음에 그 속에 숨어 있는 진리를 끌어내는 방식을 가리킨다. 이 경우 유의할 점은, 개별적인 자료가 충분히 수집되면 거기에 법칙이나 이론의 가설을 세워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인에서 결과로 이것은 먼저 원인을 말하고, 거기서 발생하게 될 결과를 찾아나가는 방법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성립되는 것이므로 역사적 인과관계를 말할 때 이 방법이 많이 쓰인다. 가령 산업혁명이 현대 사회에 끼친 영향이라는 문제라면, 산업혁명이라는 원인으로 시작하여 이것이 현대 산업의 여러 국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연대적으로 추구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와 미래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보, 예상, 경고 등 장래의 일을 추정하는 글에도 이 방법을 사용하는 일이 많다. 기상학자는 오늘의 일기도에 의거하여 기압, 지역, 풍위, 풍속 등의 상호 관계에서 지금부터 미칠 가능한 예정을 추정하고, 내일은 물론 한 달 정도 앞날의 일기를 예보한다. 이 두 가지 예는 모두 원인을 분석하여 거기서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결과에서 원인으로 이것은 ‘원인에서 결과로’의 순서를 뒤바꾸어 놓은 것으로, 결과에서 출발하여 원인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배탈이 나면 무엇을 먹었기 때문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어떤 일을 생각할 경우 우리는 결과를 알고 그 결과가 무슨 원인으로 생겼느냐는 식으로, 결과에서 원인을 찾는 일이 보통이다. 이와 같이 사고의 순서에서 말하면 결과에서 원인을 찾게 되지마는, 글의 구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역사의 기술을 비롯하여 원인에서 결과로 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점층법 중요성이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나아가게 하는 순서로서, 마지막을 가장 강조해야 한다는 글의 원칙이다. 중요한 일을 알고 나면 작은 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므로 처음에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서 시작하여 차츰 중요도를 더하여 끝에 불꽃을 튀게 하는 것이 점층법이다. 점층법은 시·소설·희곡 등에서 많이 쓰이는 방식으로, 작문에서는 중요한 것을 끝에 두어야 한다는 원칙에 유념한 방법이다. 중요도의 순서 이것은 점층법과는 반대로 중요한 것을 먼저 몇 가지 제시하고 의견을 간단히 말할 경우나, 혹은 신문의 뉴스 기사를 전개할 경우에 사용되는 형식이다. 그 중요한 사항 하나하나가 반드시 긴밀한 관계를 가질 필요도 없고, 또 글의 발전이 논리적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구성이 간단하고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에 국한할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고 효과도 있다. 아는 것에서 모르는 것으로 독자가 아는 것에서 모르는 것으로 글의 순서를 전개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면 독자는 읽을 의욕을 잃고 읽기를 포기할 것이다. 이 순서의 전형적인 예는 ‘유추’에 의해서 글을 진전시켜 나가는 경우로서 먼저 독자가 알고 있는 일을 보이고, 다음에 그것에 근거하여 독자가 모르는 일은 이해시키는 방법이다. 가령 독자가 알고 있는 태양계의 구조에 비유하여, 미지의 미립자 세계를 설명하는 따위와 같은 것이다. 호감도의 순서 글의 주장이 독자에게 공감되기 어렵거나 반발을 살 우려가 있을 경우, 그 주장을 처음부터 내세우는 일이 없도록 한다. 처음부터 공감되지 않는 내용의 글이라면 누구나 그 글을 읽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와 같은 주장의 글을 쓰려면 처음에는 독자에게 호감을 주거나 공감될 만한 말을 신중히 고려하여 써나가다가, 독자가 그 주장을 반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되는 단계에 가서 그 주장을 펴나가는 것이 ‘호감도의 순서’에 따르는 방법이다. 같이 보기 문장 글 참고 문헌 문학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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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B%A7%88%20%EC%9A%94%EC%8B%9C%ED%83%80%EB%84%A4%20%281765%EB%85%84%29
소마 요시타네 (1765년)
소마 요시타네(, 1765년 7월 20일 ~ 1816년 7월 14일)는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소마 나카무라번의 9대 번주이다. 관위는 종5위하, 이나바노카미()이다. 8대 번주 소마 모로타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765년에 태어났지만 나이를 높이기 위해 막부에는 1761년에 태어났다고 알렸다. 1768년에 맏형 노부타네가 죽고, 1773년에는 둘째 형 나리타네가 병으로 폐적되자, 1774년 음력 8월 9일에 적자가 되었고, 1777년 음력 4월 1일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알현하였다. 이듬해 관위를 서임받았으며, 1783년에는 아버지가 은거하면서 번주 자리를 이었다. 임기 중에 덴메이 대기근이 발생하자, 번 영내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1784년, 막부에 금 5천 냥을 빌렸다. 이에 막부 측에서는 기근 준비를 미리 하지 못한 실정을 물어 요시타네에게 출사 정지 명령을 내렸다. 1788년에는 채무 반제 기한을 연기해줄 것을 막부에 요청하여 이로 인해 다시 출사 정지 조치를 받았다. 1801년, 은거하여 장남 무라타네에게 가문을 계승하게 했다. 1816년에 사망하였다. 1765년 출생 1816년 사망 소마씨 소마 나카무라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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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650%EB%85%84
650년
연호 당(唐) 영휘(永徽) 원년 신라(新羅) 태화(太和) 4년 일본(日本) 다이카() 6년 / 하쿠치() 원년 기년 당(唐) 고종(高宗) 원년 신라(新羅) 진덕여왕(眞德女王) 4년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臧王) 9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10년 사건 신라에서 중국의 정삭(正朔)을 시행, 관제를 중국식으로 하고 독자 연호를 폐지하다. 이슬람, 동로마 제국의 아라두스(현재의 루아드)를 빼앗다. 문화 탄생 사망
114348
https://ko.wikipedia.org/wiki/10%EC%A1%B1%20%EC%9B%90%EC%86%8C
10족 원소
10족 원소는 주기율표의 열번째 족에 속하는 화학 원소이다. 백금이 속해 백금족이라고도 한다. 주기율표 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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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C%9A%94
강요
강요죄(強要罪) 또는 폭력에 의한 권리행사방해죄(暴力-權利行使妨害罪)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죄이다.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324조). 본죄의 보호법익은 의사결정 내지 행동의 자유이다. 폭행 또는 협박은 각각 폭행죄 또는 협박죄에 해당할 만한 것이면 충분하고,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할 정도의 것임을 요하지 아니한다. “권리행사를 방해한다”라는 말은 법률상 허용된 작위 또는 부작위를 방해하는 것. 즉 법률상 허용된 행위를 행하지 못하게 하거나 법률상 의무 없는 행위를 행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 행위가 법률행위이든 사실행위이든 묻지 아니한다. 폭행·협박과 권리행사 방해와의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음을 요한다. 유사 범죄 미인계 강제 신용 사기 테러리즘 같이 보기 강요된 행위 대한민국 형법 제324조 뇌물 영국 뇌물수수법 이해충돌 해외부패방지법 유럽 평의회 콤프로마트 조직범죄 정치 부패 본인-대리인 문제 랜섬웨어 관세 국제 투명성 기구 대한민국 형법상 범죄 자유에 대한 죄 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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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옹 뒤귀
레옹 뒤귀(Leon Duguit, 1859년~1928년)는 프랑스의 공법학자이다. 사회 현상을 경험적으로 취급하여 형이상학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입장에서 전통적인 공법 논리, 특히 권력주의적인 독일의 이론과 개인주의적인 프랑스의 이론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사회적 근본 사실인 사회 연대 관계를 기초로 하여 주권의 관념과 권리의 관념을 부정해서 공무의 관념을 중심으로 공법 이론의 구성을 시도했다. 저서로는 《공법변천론》(1912년), 《법과 국가》(1917년~1918년), 《헌법론》 5권(1921~1925년)〉 등이 있다. 프랑스의 법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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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공군기지
수원 공군 기지(水原空軍基地, IATA:SWU, ICAO:RKSW)는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및 화성시 일원에 걸쳐 있는 공군 기지이다. 대한민국 10전투비행단이 주둔하고 있다.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말 : 일본군이 건설 1950년 : 수원비행장 전투 1954년 : 대한민국 공군에 관할권 이양 2006년 5월 5일 : 어린이날 행사를 위해 마련한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의 곡예비행 중 A-37 항공기 1대가 비행장 활주로 남쪽 끝에 추락, 조종사 1명 사망. 같이 보기 성남공군기지 오산 공군기지 주한 미군의 시설 목록 각주 대한민국 공군의 기지 주한 미국 공군의 기지 비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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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역
청령역(Cheongnyeong station, 靑令驛)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청령리에 있는 동해선의 역이었다. 한국철도공사에서 운영하였으며 죽동역과 양자동역처럼 1면 1선의 단선 승강장을 갖추고 있었다. 역사 1967년 5월 27일 : 무배치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 1967년 9월 1일 : 을종승차권 대매소로 지정 1988년 4월 10일 : 을종승차권 대매소 중지(차내취급) 2007년 6월 1일 : 여객 취급 중단 2013년 11월 7일 : 부산진 기점 118.5km로 변경 2016년 4월 29일 : 부산진 기점 117.8km로 변경 2021년 8월 26일 : 부산진 기점 116.9km 로 변경 2021년 12월 28일 : 폐역 사진 각주 경상북도의 폐지된 철도역 경주시의 교통 경주시의 건축물 1967년 개업한 철도역 2021년 폐지된 철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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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원
이봉원(李俸源, 1963년 8월 5일~ )은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이다. 본관은 합천(陜川)이다. 생애 1984년 KBS 개그콘테스트 2기로 데뷔했다. 1991년 10월 SBS로 자리를 옮긴 간판급 개그맨에 속한 개그우먼 박미선과는 1993년에 결혼하였다. 1995년 초 SBS 개그맨 실장으로 선출됐으나 그 해 가을 프리랜서를 선언하면서 개그맨 실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또한, 당시 공동 MC로 활동해 온 진행도 그만뒀다. 한참 활동할 무렵 1999년 3월 코미디 연출을 공부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1년간 일본어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나서 2006년 4월에 2년제 전문학교인 도쿄비주얼아트 연구과에 입학했다. 귀국 후에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프로덕션을 설립해 직접 연출도 하고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후배들의 연기를 지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가을 귀국한 뒤 컴백작으로 선택한 프로그램이자 메인 MC를 맡았던 SBS 가 시청률 난조로 9회 만에 조기종영된 후 한동안 방황하였다. 2002년 가을 시작된 iTV 를 통해 방송활동을 재개했으며 그 이후에는 iTV 위주로 활동했는데 이 프로그램 포함하여 iTV에서 호흡을 맞춘 후배 개그맨 김학도의 데뷔 노래를 본인(이봉원)의 초등학교-중학교 선배인 가수 김범룡이 작곡하기도 했다. 이주일 성대모사를 이주일에게 인정받았고, 이로 인해 2008년 흥국쌍용화재 자동차보험 이유다이렉트 CF에서 이주일의 목소리를 연기하였다. 유머일번지 동작그만에서 '곰팽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실패한 사업을 가지고 박미선의 유머코드로 많이 사용하였으며, 자의적으로 사업 실패의 아이콘인 '누수맨'이라는 별명도 있다. 한편, 무종교로 알려졌으나 선배 개그맨 최양락과 함께 예전에 故 김수환 추기경을 만난 데다 1993년 말 본인(이봉원)이 속해 있었던 SBS 개그맨실과 자매결연을 맺은 천주교 복지재단 작은 평화의 집을 최양락 김은우를 비롯한 동료 개그맨들과 SBS 시절 매년 방문하는 등 천주교와 인연이 있기도 했다. 학력 서울용강초등학교 졸업 수도중학교 졸업 유한공업고등학교 졸업 장안실업전문대학 일본어학과 전문학사 졸업 도쿄 비주얼 아트 연구과 전문학사 별명 곰팽이 참새대가리 음주봉원 출연작 및 음반 예능 《가족오락관》 패널 (KBS) 《아내가 뿔났다》 (채널A) 《맛있는 원샷》 (채널 뷰) 《대한민국 창업프로젝트 천지창조》 (KBS) 《스타 다이빙 쇼 스플래시》 (MBC) 《자기야 - 백년손님》고정 패널 (SBS) 《유머 1번지》동작 그만, 물장수, 밤이면 밤마다 (KBS) 《쇼! 비디오 자키》시커먼스, 니캉내캉 (KBS) 장두석 과 공동출연 《행운의 일요특급》 (KBS) 《황금어장 - 라디오스타》 - 이봉원편 (MBC) 《황금어장 - 무릎 팍 도사》 - 이봉원편 (MBC) 《세상발견 유레카》 - 진행자 (TJB) 《미워도 다시 한번》 - 진행자 (SBS PLUS) (부인 박미선과 공동진행) 《세대공감 토요일》 (KBS) 《심형래 쇼》 (KBS) 《코미디쇼 7080》 (KBS) 《차렷! 동작그만》 《뺀질이와 곰팽이의 쫄병시절》 《부채도사와 홍길동》 《삼중성》 《파렴치한》 (SPICE TV) 《코미디쇼 코코》 (TV조선)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 (tvN) 《인간의 조건》 (KBS) 《위기탈출 넘버원》 (KBS) 《해피투게더 3》 (KBS) (2015년 2월 19일 목요일 설날특집 박미선과 공동진행) 《세상발견 유레카》 (TJB) 《전국 톱 10 가요쇼》 (KNN → ubc) 《SNL 코리아 (시즌 6)》 (tvN) 《노다지쇼 팡팡팡》 (MBN)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 (SBS)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MBC) - 이상한 나라의 에이스 《아이돌잔치》 (TV조선) 《전국노래자랑》 초대가수 (KBS) 《쑈! TV유랑극단》 초대가수 (KNN) 《노래가 좋아》 초대가수 (KBS) 《코미디의 전당》 진행 (KBS2) 《신발벗고 돌싱포맨》 (SBS) 《코미디 전망대》 (SBS) 《꾸러기 대행진》 (SBS) 최양락 과 공동진행 《초특급 꾸러기 대행진》 (SBS) 최양락 과 공동진행 《깜짝 비디오 쇼》 (SBS) 최양락 과 공동진행 《좋은 친구들》 (SBS) 최양락 과 공동진행 《토요일 7시 웃으면 좋아요 》 (SBS) 철없는 아내 박미선 과 공동출연 영화 《뺀질이 행국이와 곰팽이의 쫄병 시절》 (1990년) 《차렷! 동작그만》 《부채 도사와 홍길동》 (1991년) ... 홍길동 역 《삼중성》 (1991년) 《그림 도사와 홍길동》 (1991년) 《하늘의 용사 이글맨》 (1991년) 《터미네이터의 형사 곰팽이》 (1991년) 《황금칼과 홍길동》 (1992년) 《홍길동 도사학교》 (1993년) 《망치를 든 땡구와 땡칠이》 (1998년) 《소년, 천국에 가다》 (2005년) 《돼지 같은 여자》 (2015년) 드라마, 시트콤 1998년 SBS 일일시트콤 《순풍산부인과》 (특별출연) 2002년 SBS 일일시트콤 《똑바로 살아라》 (특별출연) 2004년 SBS 일일시트콤 《압구정 종갓집》 (특별출연) 2005년 EBS 드라마스페셜 《겨울아이》 2009년 MBC 일일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 - 봉실장 역 2012년 KBS 2TV 드라마스페셜 《국회의원 정치성 실종사건》 - 이순경 역 2016년 MBC 창사55주년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옥중화》 - 양동구 역 2017년 MBC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도둑놈, 도둑님》 - 남종합 역 라디오 2005년~2007년 SBS 러브FM 《이봉원의 낭만시대》 2008년~2010년 SBS 러브FM 《이봉원 박미선의 우리집 라디오》 2010년~2011년 SBS 러브FM 《이봉원 박미선의 와와쇼》 CF 1987년 오리온 밀크 캬라멜 1988년 팔도 국시방 - "유머 1번지 - 물장수" 팀으로 출연. 1988년 남양유업 남양 요구르트 - "쇼 비디오 자키 - 시커먼스" 팀으로 출연. 1988년 롯데제과 룸바 - 조금산, 이경애와 함께 출연. 1989년 빙그레 짜장스낵 1989년 ~ 1990년 롯데제과 메가톤 바 1990년 샤니 밤꼬밤꼬 - "쇼 비디오 자키 - 시커먼스" 팀으로 출연. 1991년 한일약품 식카린S 1991년 롯데제과 찰떡 아이스 1991년 비락 비락 일품 알파 단팥죽 - "유머 1번지 - 밤이면 밤마다" 팀으로 출연. 1992년 해태제과 점보 부라보콘 1994년 태진음향 뮤지콤 2008년 애경 아이린 자연초 2010년 삼성테스코 홈플러스 뮤직비디오 2000년 태진아 《사랑은 아무나 하나》 음반 2016년 7월 《중년의 청춘아》 홍보대사 2004년 한국애견연맹 명예홍보대사 2009년 중소기업청 전국공동 전통시장 상품권 홍보대사 2009년 서울시복지재단 홍보대사 2010년 산림청 홍보대사 2013년 동촌CC 천사라운드 홍보대사 2017년 서울서부경찰서 젠더폭력 예방 홍보대사 수상 경력 1987년 제 1회 KBS 코미디 연기 대상 남자 신인상 1990년 제 4회 KBS 코미디 대상 남자 조연상 1993년 제 20회 한국방송대상 남자 코미디언상 가족 관계 아버지 : 이종철(李鍾撤, 음력 1938년 5월 17일 ~ 2021년 1월 12일) 어머니 : 고정선(高貞善, 1937년 ~ ) - 장흥(長興) 고씨 누님 : 이영순(李永順, 1955년 ~ ) 자형 : 최인선(崔仁宣), 경주 최씨 누님 : 이영혜(李永惠, 1962년 ~ 2009년) 배우자 : 박미선 (朴美善, 1967년 3월 10일 ~ ) - 밀양 박씨 , 1993년 11월 13일 결혼 장남 : 이상엽(李相燁, 1997년 ~ ) 장녀 : 이유리(李瑜莉, 1995년 ~ ) 각주 같이 보기 이용식 김학래 이상운 김정렬 최양락 황기순 서울용강초등학교 동문 수도중학교 동문 유한공업고등학교 동문 1963년 출생 살아있는 사람 거창군 출신 대한민국의 남자 희극인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 창극 배우 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 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 장안대학교 동문 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합천 이씨 싸이더스HQ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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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마 쇼잔
사쿠마 쇼잔(, 1811년 3월 22일~1864년 8월 12일)은 에도 시대의 일본의 정치가이자 학자로, 사쿠마 조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하급 무사의 아들로, 오늘날의 나가노현인 신슈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히라키(啓, ひらき), 타이세이(大星, たいせい). 자는 시메이(子明, しめい), 통칭 슈리(修理, しゅり). 호가 쇼잔(象山)인데 나가노 지역에서는 조잔이라고 읽는다. 생애 1811년 2월 28일, 시나노 마쓰시로 번사 사쿠마 이치가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쇼잔은 청년기에 경학과 수학, 특히 수학에 흥미를 가져 열심히 배웠다. 이같이 그가 청년기에 수학에 깊이 몸을 담은 것은 이후의 서양 학문 흡수에 큰 이익이 되었다. 1833년, 에도에 나와, 당시 유학의 제일인자였던 사토 잇사이(佐藤一斎)에게 주자학을 배워, 야마다 호코쿠와 함께 ‘2걸’이라 칭해지기에 이른다. 사쿠마는 주자학자였지만 사토는 양명학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불만이 있어 사토에게서는 경서강의를 받지 않고 문장만을 배웠다. 당시의 쇼잔은 서양에 대한 인식은 싹트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지식인이었다. 1839년에는 에도에서 '사숙・쇼잔서원'을 열었지만, 이곳에서 쇼잔이 가르치고 있던 것은 어디까지나 유학이었다. 그러나 1842년, 상황이 일변하여 쇼잔이 있는 마츠시로 지방의 영주 사나다 유키쓰라가 로주 겸임 해상 방어 담당(海防掛)에 임명되었다. 번주는 서양 학문에도 일가견이 있던 쇼잔을 고문으로 기용했고, 그는 양학에 견식이 깊고, 이미 해상 방어에 실적을 올리고 있었던 에가와 히데타쓰 아래에서 병학을 공부하였다. 온후하고 생각이 깊었던 에가와는 쇼잔을 싫어하고 있던 것 같지만, 여하튼 쇼잔은 에가와 아래에서 병학의 소양을 몸에 익히는 데에 성공했다. 이 시기 사쿠마는 아편전쟁에 관한 보고서를 쓰고 해방팔책(海防八策)을 작성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에가와나 다카시마 슈한의 기술을 취하면서 대포의 주조에 성공해, 그 이름을 크게 떨쳤다. 1844년부터 네덜란드어를 배운 그는 병학뿐만 아니라 서양의 학문 그 자체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유리의 제조나 지진예지기의 개발에 성공해, 더욱 종두의 도입을 꾀하고 있었다. 1851년부터 포술을 가르치면서 명성이 알려졌다. 가쓰 가이슈,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등이 제자로 입문하거나 찾아왔다. 1853년에 매슈 페리가 우라가에 내항했을 때, 당시 쇼잔은 우라가의 땅을 시찰 중이었다. 로쥬 아베 마사히로에게 급무십조(急務十条)를 보고했다. 그러나 1854년, 다시 내항한 페리의 함대와 밀항하려던 제자 요시다 쇼인의 계획이 실패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쇼잔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한동안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 후 1862년까지, 마쓰시로에서의 칩거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 독서와 양학 연구를 진행하여 화혼양재와 공무합체론을 발전시킨다. 1862년에 칩거가 해제되었다. 1864년, 쇼잔은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초대되어 입성, 그에게 공무합체론과 개국론을 전했다. 그러나 당시 교토는 존황양이파 지사의 잠복 거점이 되고 있어, 서양물이 들었다는 인상이 널리 알려져 있던 쇼잔에게는 그와 같은 행동이 너무나도 위험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교토의 거리를 다닐 때도 동행자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벌건 대낮에 사람들 눈에 띄도록 서양식 안장을 한 말을 타고 돌아다녔다.). 같은 해 7월 11일, 산조 기야마치에서 마에다 이에몬, 가와카미 겐사이의 손에 암살되었다. 향년 54세. 현재, 암살 현장에는 조난비가 세워져 있다. 인물·일화 쇼잔은 자신을 내세우는 경향이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오만한 면이 있어 주위에 적이 많았다. 수많은 실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쇼잔의 평가가 낮은 것도 그의 성격에서 유래한 것이 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 있어서 쇼잔은 의심할 여지 없는 서양 학문의 일인자였다. 그를 참살한 가와카미 겐사이가, 후에 쇼잔의 내력을 알고 아연해하며 이후로는 암살을 그만두고 말았다는 일화에서도 그를 엿볼 수 있다. 그의 제자로는 정치에 뛰어난 요시다 쇼인을 시작으로 고바야시 도라사부로(小林虎三郎), 가쓰 가이슈(勝海舟), 가와이 쓰기노스케(河井継之助),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内),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岡見清熙、、山本覚馬、、北沢正誠 등 훗날 일본을 이끌어간 인물이 대다수로, 에도 막부 말기의 동란기에 지대한 영향을 준 건 사실이다. 스스로 자신을 "국가의 재산"(国家の財産)이라고 믿었으며, 사카모토 료마에게 "나를 피를 이은 아이는 반드시 대성한다"면서 "나의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있을 것 같은, 큰 엉덩이를 가진 여성을 소개해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로 유일한 성인 자식이었던 미우라 게이노스케도 쇼잔 같이 행실이 나빠 대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신센구미를 탈주했다. 신센구미에 가입한 것은 아버지 쇼잔에 대한 복수를 위해서였는데, 신센구미 내에서 안하무인한 행동을 반복한 끝에 탈주, 고향 마쓰시로(松代)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신센구미의 이름을 팔아 행패를 부리다 투옥되었고, 가쓰 가이슈가 보다 못해 그를 게이오기주쿠에 입학하도록 주선해 주었지만 여자 문제로 퇴학당하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재판관에게 행패를 부리다 투옥되기도 하는 등, 대성은커녕 가는 곳마다 실수를 거듭해 가쓰 가이슈나 사이고 다카모리 등 아버지를 보고 자신을 여러 가지로 후원해 준 사람들에게 종종 폐를 끼쳤다고 한다.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없으나, 페리 제독이 유일하게 고개를 숙인 일본인이라고 한다. 가쓰 가이슈는 자신의 여동생 슌(順)이 가에이 5년(1852년)에 쇼잔과 혼인하여 처남 매부 지간이 되었지만, 오만한 쇼잔을 높게 평가하진 않았다. 『영천청화』(氷川清話)에서 가이슈는 쇼잔에 대해 「그건 그것일 뿐인 사내로, 꽤나 경망스럽고, 덜렁덜렁한 남자였다. 하지만 시세에 내몰렸다」(あれはあれだけの男で、ずいぶん軽はずみの、ちょこちょこした男だった。が、時勢に駆られて)라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쇼잔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덮을 영웅」(蓋世の英雄)이라고 평가하고 「앞으로 내가 또 누구한테 이야기하겠는가. 국가를 위하여 통분하며 책략으로 흉중을 채우고 다녔는데 모두 그림 속의 떡이 되어버렸다」(この後、吾、また誰にか談ぜむ。国家の為、痛憤胸間に満ち、策略皆画餅。)라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으며,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나 야마오카 뎃슈(山岡鉄舟)를 「어른」(殿), 「씨」(氏)라고 불렀으나, 쇼잔에 대해서만큼은 「선생」이라고 경칭하였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호로 삼았던, 쇼잔이 휘호한 「가이슈 서실」(海舟書屋)의 편액을 계속해서 내세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어서 가쓰 가이슈의 사쿠마 쇼잔에 대한 평가는 예사롭지 않다. 단가나 한시, 서화에 솜씨가 공교했으며, 기시베 시게오(岸辺成雄)가 쓴《에도 시대의 금사 이야기》에 따르면, 칠현금이나 일현금도 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에이 4년(1851년) 마쓰마에 번(松前藩)의 의뢰로 주조한 서양식 대포의 연습이 에도에서 실시되었는데, 포신이 폭발하고 대포는 완전히 무너져버려 주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도열해 있던 마쓰마에 번 관리들은 모두 「주조하는 데 들어간 돈만 날렸다」며 몰아세웠다. 그러나 쇼잔은 태연하게 "실패 때문에 성공이 있다"(失敗するから成功がある)고 말했다 한다. 나아가 「지금의 일본에서 서양식 대포를 제조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으니, 여러 다이묘는 좀 더 나에게 돈을 투자해서 (대포를) 연습시켜야 한다.」고 호언하며 관리들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이를 비웃는 낙수(落首)로 「大玉池 砲を二つに 佐久間修理 この面目を なんと象山」라는 것도 있었다. 「大玉池」는 당시 쇼잔이 거주하던 「오타마가이케」(お玉が池)에 「おおたまげ」을 빗댄 익살이었다. 그는 "외국과 정말로 싸우고 싶으면 나라를 개방하고, 해군을 키워야 한다" 고 말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영향을 받아 외국 문물의 습득을 위해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한다. 가족 아들 : 미우라 게이노스케 처남 : 가쓰 가이슈 저서 1854 성건록省諐録 匆卦, 砲卦(ほうけ) 하란어휘荷蘭語彙 기타 요시다 쇼인 이토 히로부미 가쓰 가이슈 사카모토 료마 미우라 게이노스케 각주 1811년 출생 1864년 사망 사쿠마씨 일본의 정치인 일본의 사상가 일본의 교육학자 일본의 암살된 정치인 에도 시대 사람 일본의 유학자 일본의 발명가 막말 마쓰시로번 사람 일본의 인물신 (막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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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고등학교
사직고등학교(社稷高等學校)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학교 연혁 1983년 1월 20일 : 사직고등학교 설립 인가(학년당 10학급, 계 30학급) 1983년 3월 1일 : 초대 정병로 교장 취임 1983년 3월 2일 : 부곡동 소재 동현중학교에서 개교 1983년 3월 5일 : 제1회 신입생 입학식(608명 입학) 1983년 7월 4일 : 현 교사로 이전(사직2동 632-8번지) 1986년 2월 13일 : 제1회 졸업생 581명 배출 2000년 9월 1일 : 1, 2, 3학년 각 10학급, 총 30학급(남녀공학)으로 학칙 변경 2004년 6월 30일 : 웅비관(신관) 완공 2012년 3월 1일 : 교육과학기술부 지정 자율형 창의경영학교 2019년 3월 4일 : 제37회 신입생 입학식(252명) 2020년 2월 4일 : 제35회 졸업식(288명, 총 17,253명) 2022년 3월 1일 : 제16대 정권순 교장 취임 학교 동문 참고 자료 외부 링크 사직고등학교 홈페이지 1983년 개교 일반계 고등학교 남녀공학 고등학교 부산광역시의 공립 고등학교 부산 동래구의 고등학교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농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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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A%B7%80%EB%A5%BC%20%EA%B8%B0%EC%9A%B8%EC%9D%B4%EB%A9%B4%20%28%EB%A7%8C%ED%99%94%29
귀를 기울이면 (만화)
《귀를 기울이면》()은 일본의 만화가인 히이라기 아오이의 만화 작품이다. 만화 귀를 기울이면 〈리본〉 1989년 8월호 ~ 11월호에 연재. 1990년, 리본 마스코트 코믹스에서 단행본화. 2005년, 문고본(코믹판) 발매. 전 1권. 〈귀를 기울이면~행복한 시간~〉 동시 수록. 귀를 기울이면 행복한 시간 〈리본 오리지널〉 1995년 8월호에 게재. 1996년, 리본 마스코트 코믹스에서 단행본화. 전 1권. 〈도라지꽃이 필 무렵〉 동시 수록. 등장인물 츠키시마 시즈쿠 목소리 - 혼나 요코 주인공. 무카이하라 중학교 3학년(만화판은 중학교 1학년) 《고양이의 보은》은 그녀가 쓴 이야기라는 설정이다. 아마사와 세이지 목소리 - 타카하시 잇세이 무카이하라 중학교 3학년 문 시즈쿠가 도서관에 갈 때 같은 전차에 탔던 고양이. 츠키시마 세이야 목소리 - 타치바나 타카시 시즈쿠의 아버지. 45세. 츠키시마 아사코 목소리 - 무로이 시게루 시즈쿠의 어머니. 43세. 츠키시마 시오 목소리 - 야마시타 요리에 시즈쿠의 언니. 18세. 대학교 1학년. 훈베르트 폰 짓킨겐 남작 목소리 - 츠유구치 시게루 니시 시로가 독일에서 가져온 고양이 인형. 통칭 바론. 시즈쿠가 쓴 이야기의 주인공. 《고양이의 보은》에도 재등장한다. 니시 시로 목소리 - 코바야시 케이쥬 치큐야의 주인으로, 세이지의 할아버지. 80세. 키타 목소리 - 스즈키 토시오 니시의 친구. 70세. 미나미 목소리 - 이노우에 나오히사 니시의 친구. 60세. 코사카 선생님 목소리 - 타카야마 미나미 무카이하라 중학교의 보건실 선생님. 하라다 유코 목소리 - 요시야마 마이코 시즈쿠의 친구. 무카이하라 중학교 3학년. 14세. 스기무라 목소리 - 나카지마 요시미 시즈쿠의 친구. 무카이하라 중학교 3학년으로, 야구부 소속. 14세. 하라다 유코의 아버지 목소리 - 나카무라 하루히코 유코의 아버지. 키누요 목소리 - 이이즈카 마유미 시즈쿠의 친구. 무카이하라 중학교 3학년. 나오 목소리 - 치바 마이 시즈쿠의 친구. 무카이하라 중학교 3학년. 영화 소설 히이라기 아오이의 만화를, 타나카 마사미가 소설화한 것으로, 1995년 6월에 슈에이샤 코발트 분코로부터 출판되었다. 같이 보기 다마시 게이오 전철 세이세키사쿠라가오카 역 무사시노시 Take Me Home, Country Roads 이로하자카 쿠라가오카 각주 1989년 만화 일본의 만화 다마 지역을 배경으로 한 작품 도서관을 배경으로 한 작품 중학교를 배경으로 한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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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년
연호 위(魏) 경초(景初) 2년 촉(蜀) 연희(延熙) 원년 오(吳) 가화(嘉禾) 7년 / 적오(赤烏) 원년 기년 위(魏) 명제(明帝) 12년 촉(蜀) 후주(後主) 16년 오(吳) 대제(大帝) 17년 신라(新羅) 조분 이사금(助賁泥師今) 9년 고구려(高句麗) 동천왕(東川王) 12년 백제(百濟) 고이왕(古爾王) 5년 사건 동천왕, 위나라 군대를 도와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킴. 황제 막시미누스를 로마 원로원이 국가의 공적으로 선포하고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추대함. 문화 탄생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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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82%AC%EC%B9%B4%EC%99%80%20%EC%9C%A0
아사카와 유
아사카와 유우(/Yuu Asakawa, 1975년 3월 20일 ~ ) 일본의 여자 성우다. 아트비전에 처음 입사한 이래 그대로 소속되어 있는 몇 안되는 성우 중 하나(대부분의 성우가 아트비전 사건 이후 소속사를 옮겼다). 일본 나레이션 연기 연구소에서의 예력이 있다. 주로 남자 아이, 남자 소년 캐릭터와 여자 쿨한 캐릭터 분위기 연기하는 경우가 많다. 인물소개 인물 취미는 게임, 술, 영화감상 술은 거의 언제나 마시고 있는 듯 하다. 최근 특히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 빠져있다. 자신의 블로그에서 ‘출몰지: 과거, 아르자비’, ‘출신지: 바스토크 공화국’,‘최근 빠져있는 것: 스키라게(スキラゲ=スキル上げ,Skill up)’등의 프로필을 게시해 팬들을 당황시킨 이력이 있으며 그 프로필은 지금까지도 쭉 유지중이다.(2012년 1월 현재) TV는 잘 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런것치고는 최근 일본 드라마 특명 계장 타다노 히토시의 주인공인 타카하시 카츠노리에 빠져있는 듯하여 신빙성이 떨어짐. 특기는 영어 회화로 꽤 실력이 좋다. 자신의 트위터는 모두 영어로 기록하고 있으며 해외의 팔로워들도 다수 보유중이다. 외국인들에게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소개하기 위한 방송인 Otaku Verse Zero(OVZ)에서 발군의 영어회화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능숙한 영어실력으로 AX2010(Anime Expo 2010)의 게스트로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OVZ를 계기로 메이드 복장, 메구리네 루카 코스프레 등 다양한 코스프레를 하게 되어 몇몇 팬들에게 ‘나이를 생각해라!’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일단 쑥쓰러워하는 면도 있지만, 본인은 은근히 즐기고 있는 듯 하다. 존경하는 성우는 노자와 마사코(OVZ에서 언급) VOCALOID2 메구리네 루카의 목소리를 담당했으며 ‘같은 VOCALOID인 하츠네 미쿠보다 가슴도 크고 스타일도 좋은데 어째서 미쿠보다 인기가 없는걸까’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언젠가는 루카의 곡인 Just Be Friends 등을 영어로 불러 직접 녹음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트위터) 대인 관계 주로 귀여워할 수 있는 사람과의 친분이 깊은 듯 하다. 사나다 아사미를 작은 애완동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마음껏 귀여워하고 있다. 사나다 아사미 본인으로부터 ‘최근 아사카와분이 부족해요’라는 이야기를 들어 만나고 온 뒤 ‘해바라기씨나 호두같은 것을 주면 먹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언제나 자신을 언니(おねーさま)라고 부르는 토모나가 아카네를 강아지라고 말하며 자매와 같이 생각한다. 이토 시즈카와는 자주 같이 밥을 먹거나, 낚시를 가거나, 술을 마시는 등 각별한 친분을 가지고 있다. 최근 같이 식사하다가 가게 주인에게서 ‘두 사람 자매에요? 미인이네! 여배우?’라는 말을 들어, 블로그를 통해 그녀와 같은 착실한 미인 여동생이 있다면 좋겠다고 언급이다. 같은 VOCALOID 성우인 후지타 사키, 시모다 아사미등과도 자주 어울린다.(OVZ에서 언급) 최근에는 모리쿠보 쇼타로와 2007년 2월 22일 결혼했으나 성격 차이등의 문제로 2009년 1월 이혼했다. 1월 14일자 본인의 블로그에 이혼 사실을 담담히 발표하여 팬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아무래도 결혼은 절대로 안할려고 한다. 출연작 TV 애니메이션 ※굵은 글자는 주요, 메인 캐릭터 1997년 엘프를 사냥하는 사람들(레오 오닐) 1998년 아키하바라 전뇌조(히가시쥬조 츠구미) 버블검 크라이시스 도쿄 2040(프리스 아사기리) 폭주형제 렛츠&고 Max(쿠사나기 진, 쿠사나기 젠) 로도스도 전기~영웅기사전~(시리스) 성 루미나스 여학원(카트린느) 1999년 세라핌콜(쿠레나이 카스미) 고쿠도군 만유기(라냐) 버키와 투투(알리바바) 우주해적 미토의 대모험 두명의 여왕님(신) 신 팔검전(레이) 2000년 러브히나(아오야마 모토코) 반드레드 (쥬라 베실 엘덴)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키리마 나기) 방가방가 햄토리(톤가리군) 2001년 히카루의 바둑(미타니 유키) 격투! 크러시기어 TURBO(타키 히로오미) 폭전슛 베이블레이드(라쥬) 2002년 아즈망가 대왕(사카키) 라제폰(미와 시노부) 초중신 그라비온(미즈키 타치바나) 아케이드 게이머 후부키(쥬몬지 치즈루) 2003년 스트라토스 포(크리스 카르망) 금색의 갓슈벨(키노야마 츠쿠시) 모험유기 플러스터 월드(카나메 토우마) 크러시기어 Nitro(스티비 레스프렌드롯소) 2004년 스쿨럼블(오사카베 이토코) 스위트 발레리안(팝) 기동전사 건담 SEED DESTINY(크리스타 오베르크) 사무라이7(사나에) 푸규루(카나토) 2005년 스타쉽 오퍼레이터즈(사토미 렌나) 격투미신 우롱(럭키 시모다) 건퍼레이드 오케스트라(쿠도 모모카) 츠바사 크로니클(카르디나) 2006년 러브돌~Lovely Idol~(카타기리 사유키) 새벽녘 전보다 유리색인 Crescent Love(카렌 크라비우스) 페이트/스테이 나이트(라이더) 스파이더 라이더스~오라클의 용사들~(비레인, 호타라) 우에키의 법칙(카푸쇼) XXX Holic(카르디나) 2007년 일기당천 Dragon Destiny(조운 자룡) 뱀부 블레이드(코니시) Prism Ark(시스터 헬) 2008년 일기당천 Great Guardians(조운 자룡) 네가 주인이고 집사가 나(나토세) 오늘의 5학년 2반(이마이 코우지) 우리 집의 여우신령님(시스터 엔쥬) 2009년 극상! 인기폭발 반장(사카시타 마키) 11eyes(쿠사카베 미스즈) FLAG(라웰 스민) 2010년 케이온!!(카와구치 노리미) 2011년 진지하게 날 사랑해! (카와카미 모모요) 괴도천사 트윈엔젤 (사이죠우 여사) RIO RainbowGate! (퀸) 프리징(아넷 맥밀란) 2012년 Brave10 (아나스타시아) 아마가미SS+ (츠카하라 히비키) 사랑과 선거와 초콜릿 (시노노메 사츠키) OVA 2001년 엔젤 블레이드(네일카이저) 2002년 머나먼 시공 속에서 자양화의 꿈(세프르) 2003년 머나먼 시공 속에서 2 백룡의 무녀(카즈히토) 2004년 엔젤 블레이드 푸니시!(엘피 엘프먼) 2005년 원반황녀 왈큐레 성령절의 신부(네스티) 2006년 원반황녀 왈큐레 시간과 꿈과 은하의 연회(네스티) 오늘의 5학년 2반 (이마이 코우지) 극장판 2001년 아즈망가 대왕 극장판(사카키) 2019년 페이트/스테이 나이트 헤븐즈필 제2장 로스트 버터플라이(라이더) 게임 1997년 파랜드 택틱스2 시간의 이정표 (사라) 1998년 도쿄마인학원검풍첩 (사쿠라이 코마키) 2000년 머나먼 시공 속에서 (세프르) 2001년 머나먼 시공 속에서2 (카즈히토) 2002년 도쿄마인학원외법첩 (사쿠라이 코스즈) 아머드 코어3 (레인 마이어즈) 물망초 ~Forget-me-Not~ (에어리오) : 무네카와 쿄 (宗川梗) 명의 아즈망가 돈자라 대왕 (사카키) Ever17 -the out of infinity- (코마치 츠구미) 기간틱 드라이브 (쿄노 사키) 2003년 스타오션3 Till the End of Time (넬 젤파) SAKURA ~설월화~ (쿠즈와) 바텐 카이트스 끝나지 않는 날개와 없어진 바다 (에이메) D→A:BLACK (미도 마이) 2004년 귀무자3 (미셸 오벨) 잭X댁스터2 (애슬린 프락시스) 심포닉 레인 (코델 베르드나시) 전생학원환창록 (이치노세 시즈키, 호쇼 린) 푸른 눈물 (스즈메) 슈퍼 로봇 대전GC (타치바나 쇼) 슈퍼 로봇 대전XO (타치바나 쇼) 머나먼 시공 속에서3 (타이라노 키요모리) Peace@Pieces (데스 선생) : 무네카와 쿄 (宗川梗) 명의 2005년 마법선생 네기마! 1교시 꼬마 선생님은 마법사! (에이코) 러브돌 ~Lovely Idol~ (카타기리 사유키) 프린세스 윗치즈 (아스나) : 나카야마 메구미 (なかやまめぐみ) 명의 요인 (이시즈카 카오루) : 嬉野祥子 명의 머나먼 시공 속에서3 십육야기 (타이라노 키요모리) 새벽녘보다 유리색인 (카렌 클라비우스) : 羽桜涼子 명의 2006년 건퍼레이드 오케스트라 백의 장 ~아오모리 펭귄 전설~ (쿠도 모모카) 더지 오브 켈베로스 파이널 판타지VII (샤르아 루이) 마브러브 올터네이티브 18금판 (무나카타 미사에) : 隅谷直海 명의 머나먼 시공 속에서3 운명의 미궁 (팬텀) 일곱빛깔★드롭스 (야에노 나데시코) : 무네카와 쿄 (宗川梗) 명의 그로우 랜서V (세리스) 머나먼 시공 속에서 무일야 (세프르) 마브러브 올터네이티브 전연령판 (무나카타 미사에) Quartett! ~THE STAGE OF LOVE~ (시니나 비노테크) 서몬 나이트4 (아로에리) 새벽녘보다 유리색인 ~Brighter than dawning blue~ (카렌 클라비우스) 2007년 월광의 카르네바레 (펠라) : 新内紀里 명의 루미너스 아크 (마비) 파이어 엠블렘 새벽의 여신 (요파) Fate/stay night [Realta Nua] (라이더) 네가 주인이고 집사가 나 (나토세, 쿠키 아게하) : 神代岬 명의 트러스티벨 ~쇼팽의 꿈~ (론드) Bullet Butlers (엘네스터 디트리히) : 嬉野祥子 명의 마브러브 ALTERED FABLE (무나카타 미사에) : 隅谷直海 명의 페이트/타이거 콜로세움 (라이더) 일곱빛깔★드롭스 pure!! (야에노 나데시코) 건담 배틀 크로니클 (로자미아 바탐) SD건담 GGENERATION SPIRITS (로자미아 바탐) 2008년 네가 주인이고 집사가 나~시중들기 일기~ (나토세) PRISM ARK -AWAKE- (시스터 헬) 11eyes -죄와 벌과 속죄의 소녀- (쿠사카베 미스즈) : 하루카(はるか) 명의 우리들의 태양 Django&Sabata (비티) 2009년 진지하게 날 사랑해! (카와카미 모모요) : 카미시로 미사키 (神代岬) 명의 라디오 미나토 스테이션 라디오 ~카자마 패밀리편~ - 코니시 카츠유키와 공동진행. (인터넷 라디오, 2010년 4월 2일 - ) 그 외 2009년 VOCALOID2 - 메구리네 루카의 음성을 담당 일본의 여자 성우 도쿄도 출신 1975년 출생 성인 게임 성우 살아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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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라링☆레볼루션
《키라링☆레볼루션》()은 나카하라 안 원작의 인기 만화로, 일본 쇼가쿠칸의 만화 잡지인 《챠오》에서 2004년 3월호부터 연재되기 시작하여 14권으로 완결되었다. 챠오 2004년 12월호의 부록 CD에 드라마가 수록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으며, 2007년 1월에 제52회 쇼가쿠칸 만화상 아동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5년 12월 이후부터 대원씨아이에서 같은 제목으로 한국어 번역판 만화책을 출간하였다. TV 애니메이션의 경우, 제작에 참여한 지앤지엔터테인먼트가 지적재산권을 확보해 KBS와 계약을 하고《라라의☆스타일기》라는 이름으로 한국어 더빙판을 방영되었다. 그러나 지앤지엔터테인먼트는 제작에 참여하지 않은 분량은 지적재산권을 확보하지 못하여 2기까지 방영 후 종영되었다. 개요 2005년에 애니메이션 제작이 결정되었고, 방영은 2006년 4월 7일부터 TV도쿄 계열 방송사에서 시작되었다. 당초 51화 완결로 1년간 방송하기로 기획되었으나 예상 밖의 인기에 고무된 제작사측이 2기를 추가 제작하여 2년간 방송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1기는 Stage 1, 2기는 Stage 2로 분류되는데, 여기까지는 각본/연출 등의 내용적 측면을 일본의 쇼가쿠칸 프로덕션이, 원화/동화/배경/채색 등의 실제작 측면을 대한민국의 G&G 엔터테인먼트가 맡는 합작 형태로 제작되었고, 제작 방식은 2D 평면이었다. 그리고 2008년 4월 4일부터는 Stage 3가 방영되고 있는데, 여기서부터는 공동 제작이 아닌 일본측의 단독 제작으로 바뀌었다. G&G 엔터테인먼트는 더 이상 제작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또한 3기부터는 제작 방식이 기존의 2D 평면영상에서 3D 입체영상으로 변경되었다. 한편으로는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 '츠키시마 키라리' 역을 맡은 쿠스미 코하루()가, '츠키시마 키라리 starring 쿠스미 코하루 (모닝구무스메。)'()라는 주제곡 CD를 발매하였고, 최근에는 큐트 소속의 아이돌 하기와라 마이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인 '미츠키 히카루'역으로 출연하면서 쿠스미 코하루와 함께 주제곡을 부르는 등, 어린이 및 여자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미디어 믹스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원작의 내용을 지나치게 배제함으로 인해, 2006년 첫 방송 당시 4~5%를 기록했던 시청률이 2007년에는 1~2%대로 곤두박칠쳤다. 하지만 관련 상품의 매출에는 큰 변화가 없기 때문에 방송 기간이 또 다시 1년 연장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2005년 12월에 대원씨아이에서 《키라링☆레볼루션》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기 시작하여 2007년 12월 현재 10권까지 출간되었으며,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제작에 참여한 지앤지엔터테인먼트가 한국방송공사와 계약하여 2007년 2월 23일부터 KBS 1TV를 통해 《라라의☆스타일기》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녹음판 방송이 개시되었다. 녹음 과정에서 일부 고유명사들이 한국식으로 번안되었다. 2008년 2월 28일까지 총 52화로 1기를 방영되었으며 이후 동년도 4월 2일부터 2009년 4월 8일까지 KBS 2TV를 통해 2기를 방영되었다. 그러나 ㈜지앤지엔터테인먼트가 제작에 참여하지 않은 분량은 지적재산권을 확보하지 못한데다 한국 만화영화의 의무 편성 규정 등의 요인이 겹치면서 방영되지 못 하였다. 2007년 12월 14일부터 2008년 2월 3일까지 '콘서트 뮤지컬 라라의 스타일기'가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동 테크노마트 공연장에서 열린 바 있다. 방송정보 일본 : 2006년 4월 7일 ~ 2009년 3월 27일(매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TV도쿄) 대한민국 시즌 1(1~52화) KBS 1TV / 2007년 2월 23일 ~ 2008년 2월 28일 투니버스 / 2007년 7월 30일부터 수시 편성 애니맥스 / 2007년 9월 14일부터 수시 편성 시즌 2(53~102화) KBS 2TV / 2008년 4월 2일 ~ 2009년 4월 8일 카툰네트워크 / 2008년 9월 1일부터 수시 편성 투니버스 / 2008년 수시 편성 애니맥스 / 2008년 12월 11일부터 수시 편성 일본 153화(TV도쿄 기준), 대한민국 102화(KBS 기준) 방영 줄거리 평범하게 지내던 여중생 키라리(라라)가 우연히 만나게 된 세이지(가람이)라는 소년에게 한눈에 반하게 되고, 그가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2인조 가수 그룹 SHIPS(MAX)의 멤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키라리는 세이지의 곁에 있고 싶어 연예계에 뛰어들게 되고, 이후 펼쳐지는 연예인 생활을 다루고 있다. 연예인 생활을 하던도중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연예인을 계속하게 되고, 점점 SHIPS(MAX)와 여러사람들의 도움을 받게된다. 처음에는 히로토(신성)이 심술맞게 굴었지만 점점 마음을 열고 잘 해주게되는데... 이계기로 점점 키라리(라라)의 마음이 세이지(가람이)에서 히로토(신성)으로 마음이 바뀌는도중에 히로토(신성)는 이런 마음도 모르고 계속 키라리(라라)가 세이지(가람이)를 좋아하는줄알고 둘을 이어주려고하는데, 그때문인지 점점 키라리(라라)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게 되는데.... 등장인물 등장인물의 이름 및 성우는 일본 방영판 / 대한민국 방영판순으로 기술함. 등장인물 소개 내용 중 괄호는 대한민국 방영판임. 츠키시마키라리() / 홍라라 동료:SHIPS 좋아하는사람: 히와타리세이지, 카자마히로토. 코드가잘맞은사람: 히와타리 세이지. 직업:솔로가수 소속그룹:키라☆피카&MilkyWay 7월 7일생, O형. 츠키시마 집안의 소녀로 압도적인 식사량을 자랑하는 씩씩하고 활발한 14세(15살) 여중생. 인기 그룹 SHIPS(MAX)의 세이지(가람)에게 한눈에 반하게 되고, 결국 세이지의 곁에 있기 위해 연예계에 데뷔하여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현재는 특유의 끈기와 열정으로 CF모델, 가수, 배우로 활약하고 있다. 노래선생들이 감독을 거부할 만큼 지독한 음치였으나 아이돌 지옥훈련 같은 천신만고를 거쳐 가수가 되었다. 본래 세이지(가람)를 좋아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히로토(신성)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가고 있다. 옷을 세련되게 입는 멋쟁이여서, 패션잡지에서 라라를 모델로 한 특집을 기획한 적도 있다. 성우 - 쿠스미 코하루 / 배정미 색깔 - 파란색, 노란색, 분홍색 나-상 / 나봉 키라리의 애완동물로, 고양이지만 요리면 요리, 빨래면 빨래, 별의별 일을 다 할 줄 아는 만능 고양이. 항상 키라리를 올바르게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지만, 붕어빵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점에서 키라리와 죽이 잘 맞는 상황도 있다. 형제로는 나야(다봉), 먀(봉봉) 등이 있으며 쿠스미 코하루의 뮤직비디오에서도 잠깐 나온다. 성우 - 이케다 치구사 / 이현주 히와타리 세이지() / 가람 동료: 츠키시마키라리. 좋아하는사람: 츠키시마키라리. 코드가잘맞은사람: 츠키시마키라리. 소속그룹: SHIPS 인기그룹 SHIPS(MAX)의 멤버로 상냥하고 포근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간혹 키라리만큼 엉뚱할 때가 있어 코믹한 면도 있다. 원작에서는 갈수록 '거북이 오타쿠'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카메상(꼬부)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우 - 호시 소이치로(1~102화) / 카나이 시코우(103화~153화) / 유동균 카메상 / 꼬부 세이지의 애완용 거북이. 카자마 히로토() / 강신성 동료: 츠카시마키라리. 좋아하는사람: 츠키시마키라리. 소속그룹: SHIPS 인기그룹 SHIPS의 멤버이다. 세이지와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굉장히 말투가 거칠고 짜증을 많이 낸다. 키라리를 구박하고 핀잔을 주면서도 어느새 키라리를 도와주고 있다. 알고 보면 굉장히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 5형제의 장남이기도 하다. 성우 - 스야마 아키오(1~102화) / 이데 타쿠야(103화~153화) / 박찬희 오구라에리나 / 티나 키라리(라라), SHIPS(MAX)와 같은 기획사 소속인 아이돌. 매사에 키라리를 질투하고 방해를 하려 하지만 결국 뒤끝이 좋지 않다. 초반에는 키라리의 라이벌로서 가능성이 엿보였으나,회를 거듭할수록 그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 성우 - 죠 마사코 / 소연 무라니시사장 / 한상혁 30대의 젊은 나이에 키라리, SHIPS, 에리나가 속한 무라니시 사무소(한스기획)를 이끌고 있으며 SHIPS의 매니저를 겸하고 있다. 사장이라는 지위가 무색할 정도로 주책스런 면이 약간 있다. 성우 - 치바 스스무 / 홍승섭(평상시) / 윤동기(10년 전의 한상혁 - 38화) 츠키시마타카시 / 홍진욱 키라리의 아버지로 과거에 아내가 집을 나간 이후로 혼자서 키라리(라라)를 돌봐왔다. 꽤 힘들 테지만 그럼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긍정적인 삶을 산다. 나-상(나봉)을 키우게 되면서 집안일의 부담이 꽤 줄어든 듯. 굉장히 자상하지만 때로는 엄한 아버지. 키라리가 연예계에 데뷔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지만 결국에는 승낙하게 된다. 성우 - 야마와키 쵸메노리 / 홍진욱 할머니 키라리의 할머니로 히로토의 열렬한 팬. 덕분에 히로토(신성)에게 정체불명의 오한이 엄습한다. 할머니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약간은 주책스러운 면을 보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키라리에게 뼈있는 충고를 던지기도 한다. 할머니가 히로토를 좋아하는 이유는 오래전에 사별한 키라리의 할아버지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다. 키라리가 원래 음치였던 이유는 할머니를 닮은 것이라고 한다. 성우 - 노자와 마사코 / 송도영 이 인물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쿠모이카스미 / 강지수 키라리의 매니저로, 매사에 키라리에게 면박을 주지만 실제로는 키라리의 활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10년 전에 '호시노 카스미'(아이리스)라는 예명으로 아이돌 활동을 한 적이 있으나,오피스 히가시야마(이스턴 컴퍼니)의 당시 전무이사였던 히가시야마 카오루코(나혜리)의 계략으로 결국 아이돌 활동을 못하게 되어 꿈을 접게 되었다. 이후 매니저였던 무라니시와 함께 독립하여 무라니시와 함께 아이돌 발굴에 주력하고 있다. 평소에는 안경을 쓴 깐깐한 캐리어 우먼이지만, 안경을 벗으면 굉장히 눈부신 미모를 자랑한다. 최근에는 무라니시 사장을 놓고 히가시야마 사장과 삼각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라라가 슬럼프에 빠지자, 영업사원, 프로듀서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라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슬럼프에 빠지지 말라고 격려한다. 성우 - 네야 미치코 / 송도영 이 인물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로, 원작에서는 9권부터 등장한다. 히가시야마카오루코 / 나혜리 연예계 최대의 영향력을 가진 오피스 히가시야마(이스턴 컴퍼니)를 이끌고 있는 미모의 30대 여성. 무라니시 사장이 하는 일, 특히 인기세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키라리에 관련된 일을 철저하게 방해하고 있다. 사실 10년 전 오피스 히가시야마의 매니저였던 무라니시를 마음 속으로 좋아하고 있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신인 아이돌 호시노 카스미(아이리스)에게만 신경을 쓰고, 급기야 독립하여 자신의 곁을 떠나게 된 것에 앙심을 품은데서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계속 무라니시 사장에게 냉랭한 눈빛을 보내고, 무라니시 사무소를 눈엣가시로 여겼지만, 최근에는 무라니시 사장을 두고 쿠모이 카스미와 미묘한 삼각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평소 키라리를 견제할때는 음흉한 표정을 짓지만,무라니시 사장을 생각할 때는 꽤나 순진한 표정이 된다. 성우 - 마츠이 나오코 / 이현주 이 인물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로, 원작에서는 9권부터 등장한다. 토도후부키 / 리나 오피스 히가시야마 소속의 아이돌. 원래 모델 출신이지만 갑작스럽게 가수로 데뷔하여 아이돌 활동을 하게 되었다. 굉장히 도도하고 콧대가 높아서 키라리를 대놓고 무시하지만, 키라리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이후로는 약간 얌전해진 듯.(물론 키라리를 깔보는 특유의 웃음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성우 - 시타야 노리코 / 전숙경 아마미야아라시 / 마해일 국내 마술사 중에서는 최초로 세계 마술 대회에서 3연속 우승을 기록한 천재 마술사. 과거 키라리(라라)와 소꿉친구였다가 오사카(부산)으로 전학을 갔었다. 갑자기 나타나 키라리를 연예계에서 은퇴시키려다가, 키라리의 열정을 보고는 응원해준다. 하지만 키라리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해 가끔 키라리 앞에 나타나 대소동을 일으킨다. 간사이 사투리가 심한 편이나, KBS 방송분에서는 표준어만 구사한다. 성우 - 카와카미 다카후미 / 변현우 나야 / 다봉 아라시의 애완 고양이로, 마술사 조수 역할을 잘해내고 있다. 형제인 나-상의 포스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슈퍼캣이라고 볼 만하다. 아라시의 말에 의하면, 나야는 동전을 위해서라면 신칸센(KTX)보다도 더 빠르게 움직인다고 한다. 성우 - 코우즈키 미와 / 전숙경 츠키시마스바루 / 홍주노 12월 25일생, O형. 키라리의 친오빠로 미국에서 연기 수업 중이다. 잘난 척이 너무 심해 매번 오디션에서 탈락하지만 나름대로 끈기를 갖고 계속 도전하고 있다. 키라리와 너무나 닮은 탓에 다른 이들이 헷갈려 하는 일도 있고, 오랜만에 도쿄(서울)에 왔을 때는 키라리로 변장하고 방송에 나가는 짓까지 했었다. 가끔 키라리보다 더 심한 일을 저지를 때도 있다. 성우 - 아사누마 신타로 / 변현우(20화) / 윤동기(31화 이후) Mr.냐오 / 미나 스바루(주노)가 뉴욕 5번가에서 주운 새끼 고양이로, 피자와 콜라를 너무나 좋아한다. 형제인 나-상이나 나야에 비해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지만 굉장히 귀엽다. 아마카와이즈미 (연예계 활동시), 이즈미 효타로 / 핑키(연예계 활동시),우영) 56화에서 첫 등장한 수수께끼의 미소녀. 자신이 히로토의 애인이라고 주장하고, 히로토와 친한 키라리에게 온갖 해코지를 한다. 그러나 이즈미의 정체는 사실 남자였던 것이다. 성우 - 유즈키 료카 / 소연 미즈키히카루 / 오은찬 소속그룹:키라☆피카 62화에서 첫 등장.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대중 기피증(대중 공포증)이 있어 무대에 서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해내기 위해 키라리(라라)와 '키라☆피카(캣츠☆아이)'를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많은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독립 활동하고 있다. 73화(77화)를 끝으로 키라☆피카가 해산, 독립 활동에 따라 현재는 키라피카 활동 때보다 비중이 많이 준 상태이다.라라의 스타일기 2기 16화(68화) 끝부분에 '고은찬'이라 표기되어 있다. 성우 - 하기와라 마이 / 박지윤 이 인물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키리사와아오이 / 송채린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아이돌 가수로, 매사에 예의바르고 겸손한 자세다. 키라리가 많이 존경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89화(93화)에서 연예계 은퇴를 선언하고 현재는 노래에만 전념하고 있다. 성우 - 사이토 치와 / 전숙경 이 인물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티나거랜드 / 캐리갈랜드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고있는 아이돌, 일본에도 그녀를 알고있는 사람이 있을정도이며 노래와 춤에 능하고 일본어 역시 능숙하게 구사한다. 키라리(라라)와는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지만 오해가 풀린 이후엔 친한 친구가 되었다. 성우 - 츠네마츠 아유미 / 이현주 이 인물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쿠로키 아키라 / 아라곤카이(혹은 아르곤 카이) 패션계에 정상에 서있는 디자이너. 슈퍼 노바(퀸 디바)를 앞세워서 연예계를 노리기 시작했으며 블랙우드라는 기업을 창설, 본격적으로 연예계에 혁명을 만들기 위해 행동한다. 그러나 그의 방식에는 여러가지의 문제점이 잠재되어있는데…. 성우 - 키리이 다이스케 / 사성웅 이 인물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루나 할리우드에서 돌연 톱스타로 떠오른 정체불명의 여배우. 확실한건 그녀가 일본인(한국인)이라는 점과 아이돌스타(신인스타) 키라리(라라)의 친엄마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영화를 찍기위해 일본(한국)으로 오게되고, 키라리(라라)가 그영화의 오디션에 합격하면서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성우 - 시마모토 스미 / 이선 이 인물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유키노노에루 () 소속그룹:MilkyWay 103화에서 첫 등장. 키라리와의 축구 경기를 통해 아이돌로 데뷔하게 된다. 성우 - 키타하라 사야카 색깔 - 파란색 이 인물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나사키코베니() 소속그룹:MilkyWay 103화에서 첫 등장. 엑스트라로 나갔다가 데뷔. 점 치는 것이 특기이다. 성우 - 킷카와 유우 색깔 - 노란색 이 인물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캐릭터로,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에피소드 (대한민국 KBS 기준) 애니메이션 뒷이야기 일본 2006년 7월 21일 방송된 제16화에서는 쿠스미 코하루가 소속된 모닝구무스메의 당시 리더인 요시자와 히토미가 본인 역으로 등장하였으며, 모닝구무스메 역시 실명으로 언급되었다. 츠키시마 키라리 역에 쿠스미 코하루를 성우로 기용한 것 외에도, ℃-ute 소속의 하기와라 마이를 투영한 미츠키 히카루라는 오리지널 캐릭터가 한동안 등장했었다. 또한 103화 이후로는 킷카와 유우를 투영한 하나사키 코베니, 그리고 키타하라 사야카를 투영한 유키노 노에루, 여기에 쿠스미 코하루의 츠키시마 키라리가 MilkyWay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되는데, 오프라인에서도 음반 활동을 하고 있는 등, 현재는 원작의 내용을 완전히 배제한채 아이돌과의 유기적인 미디어믹스에 치중하고 있다. 키라링☆레볼루션 Stage3로 바뀌면서 Ships의 성우들도 하로프로젝트가 소속된 업프런트 에이전시 (현 업프런트 프로모션) 소속의 성우로 바뀌었고 실제로 SHIPS란 그룹으로 활동 중이다. 대한민국 대한민국판의 OP 및 ED 노래는 일본판을 개사하지 않고 독자 제작하였다. 그러나 극중에 나오는 노래는 전부 일본판을 그대로 개사하였으며 해당 인물의 성우가 불렀다. 시즌 1의 OP/ED 노래는 베이비복스 리브의 황연경이 불렀다. 시즌 2에서도 9회(61화) 더 쓰였다. 시즌 2의 OP/ED 노래는 미셸 퍼플이 불렀다. 시즌 2 제10화(제62화)부터 방송되었다. 제16화에서 언급된 모닝구 무스메와 요시자와 히토미의 경우, '모모걸스'와 '윤혜미'라는 가상의 명칭으로 처리되었다. 제20화에서 언급되었던 ℃-ute의 경우, 큐티라는 가상의 명칭으로 처리되었다. 기획 방송사 및 우리말 제작사가 표기되지 않다가, 제40화부터는 [우리말 제작 - KBS 미디어]와 [기획 - KBS]가 추가되어 방영되었다. 관련 홈페이지가 방송에서 표기되지 않다가, 제41화부터는 본편 마지막에 KBS 홈페이지와 공식 홈페이지가 나란히 기재되고 있다. 무라니시 사장의 이름의 경우, 시즌 1 방영 초기에는 그 역할의 성우와 같은 이름인 '홍승섭'이었으나, 홈페이지에 개재되어 있을 뿐 실제로 불린 적은 없다. 현재의 이름인 '한상혁'은 시즌 1 중반경부터 불리게 된다. 아오이의 이름의 경우, 시즌 1 1화에서 '박영미'라는 이름이다가, 7화 이후부터는 현재의 이름인 '송채린'으로 불리게 된다. 그 이유는 한국내 방송 전에 '박영미'라는 이름으로 내정되었다가 이후에 이름을 바꿨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2007년 2월 23일 첫 방송 이후 4월 13일까지는 매주 금요일 오후 4시 30분에 방영되었으나, 학원 등으로 인해 시청이 어렵다는 시청자들의 민원으로 인해 4월 21일부터는 매주 토요일 오전 7시 40분으로 조정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간이 너무 이르다는 불만이 제기되었고, 이에 5월 5일부터 8시로 조정하였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등교시간과 겹친다는 불만이 많았다. 한동안 이 시간이 유지되어 오다가 11월 8일부터는 매주 목요일 오후 4시 30분으로 변경, 사실상 처음 방송 때의 시간으로 환원되어 2008년 2월 28일까지 유지되었다. 시즌 2는 매주 목요일 오후 5시 30분으로 기존과 거의 동일한 시간대였다. 하지만 제 84화가 방영된 2008년 11월 19일부터는 수요일 오후 4시 30분으로 변경,사실상 시즌1 처음/마지막 방송시간과 비슷해졌다. KBS에서 1차로 방영한 1~52화 중에서 내용상 51화가 종영하기 적절한 관계로, 52화의 경우 KBS에서는 36화로 편성되어 방영되었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 : 1화, 2화, 3화, 4화, ....... , 35화, 36화, 37화, ...... , 51화, 52화 (총 52개) 한국 : 1화, 2화, 3화, 4화, ....... , 35화, 52화, 36화, ...... , 50화, 51화 (총 52개) KBS 이외 방송사의 경우, 투니버스 / 애니맥스에서 시즌 1이 수시 편성되었고, 카툰네트워크에서 시즌 2가 수시 편성되었다. 원작과 애니메이션의 차이점 나-상, 나야, 먀 3형제의 출생과 관련된 배경이 다르다. 원작에서는 '키라리네 옆집에서 새끼고양이가 많이 태어나, 거기서 키라리(라라)가 나-상(나봉)과 나야(다봉)를 얻고, 나고야에 살고 있는 후부키는 아버지가 그집 사람과 친구 사이여서, 먀(봉봉)를 얻었다'는 내용이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외진 곳에 위치한 마담 네코히게 저택에서 나-상 3형제가 태어났고 후부키는 우연히 가게 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키리사와 아오이(송채린), 할머니, 탄탄(뭉치,티나가 데리고 다니는 불독)등은 애니메이션에서만 출현하는 오리지널 캐릭터이며, 쿠모이 카스미(강지수[아이리스])와 히가시야마 카오루코(나혜리) 등은 애니메이션에서만 등장하다가 뒤늦게 원작에 등장하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애니메이션은 원작의 내용을 반영한 에피소드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에피소드가 병행되고 있다. 그리고 원작의 내용을 반영한 에피소드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같지는 않고, 설정을 새롭게 추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원작 2권의 맨 마지막 부분과 애니메이션의 30화는 키라리가 한 고등학교 축제에 가게 된다는 설정은 동일하지만, 원작에서는 즉흥적으로 붕어빵 냄새에 솔깃하여 붕어빵 많이 먹기에 참가하게 되는 반면 애니메이션에서는 파파라치들이 키라리의 망가진 모습을 취재하기 위해 기획한 크레이프 많이 먹기 대회에 일부러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 히가시야마 카오루코(나혜리)의 음모에 의해 파파라치들이 동원되지만 원작에는 그런 설정이 없다는 점 또한 다르다. 최근 애니메이션에서는 미츠키 히카루(은찬)가 키라리와 함께 '키라피카(캣츠아이)'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한 바 있는데, 이것은 애당초 '평범했던 한 소녀가 아이돌 생활을 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라는 원작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의 애니메이션은 원작의 내용을 예전에 비해 많이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각주 그 외 남코 발매의 음악게임 태고의 달인 시리즈 《태고의 달인 11》에 키라링☆레볼루션의 주제곡 〈チャンス!〉가, 《태고의 달인 12》와 《태고의 달인 12 증량판》에서는 〈アナタボシ〉가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バラライカ〉는 창작판에만 나온다.(니코니코 동화에서 확인) 외부 링크 일본 키라링 레볼루션 공식 홈페이지 - 일본측 제작사 대한민국 라라의 스타일기 공식 홈페이지 - 싸이월드 미니홈피 라라의 스타일기 공식 홈페이지 - 쥬니어 네이버(무료 VOD 제공) 라라의 스타일기 시즌1 공식 홈페이지 - KBS 1TV(무료 VOD 제공) 라라의 스타일기 시즌2 공식 홈페이지 - KBS 2TV(무료 VOD 제공) 라라의 스타일기 - 미만부(가사 제공) 한국방송공사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일본의 만화 소녀 만화 2004년 만화 챠오의 만화 작품 아이돌을 소재로 한 만화 2006년 애니메이션 2007년 애니메이션 2008년 애니메이션 2009년 애니메이션 2000년대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일본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TV 도쿄 계열 애니메이션 SynergySP 로맨틱 코미디 만화 드라마 만화 코미디 만화 중학교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 아이돌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투니버스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애니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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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르기
알레르기(, ) 또는 앨러지()는 면역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보통 사람에게는 별 영향이 없는 물질이 어떤 사람에게만 두드러기, 가려움, 콧물, 기침등 이상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한편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같은 경우에서처럼 심한경우 호흡곤란,급성저혈압 및 쇼크 등 생명징후(VS)에 위험한 증상을 일으킬수있다. 어원 알레르기는 "과민 반응"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어 낱말 allos가 어원이며, 이는 "변형된 것"을 뜻한다. 알러지 또는 앨러지는 영어 발음, 알레르기는 독일어식 발음으로 한국어에선 둘 다 혼용되어 통용되나 표준어는 알레르기이다. 역사 "알레르기"라는 개념은 1906년 오스트리아 빈의 소아청소년과학자 클레멘스 폰 피르케가 그의 환자들 가운데 몇몇이 먼지, 꽃가루, 특정 음식과 같은 일반적으로 무해한 실체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소개하였다. 기전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물질을 알레르겐 또는 항원이라고 한다. 꽃가루나 항생제가 한 예이다. 식품이 일으키는 알레르기를 식품 알레르기라고 한다. 항원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항체가 만들어지고 항원항체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알레르기의 증상이 생긴다. 항체의 종류에 따라 I, II, III, IV, V 형 다섯가지로 분류한다. 한냉 알레르기, 햇빛 알레르기도 있다. 즉 차가우면 알레르기가 생기거나 햇빛에 노출되면 알레르기가 유발되는 것이다. 알레르기는 접촉성 피부염이나 과민 반응, 혹은 독반응이나 부작용과 구별되어야 한다. 면역 과민 반응에는 알레르기 반응, 접촉성 피부염, 과민성 쇼크 반응 등 5가지로 나누며 약간씩 유발의 원인이 되는 항원-항체 반응이 다르다. 그러나 치료는 비슷하다. 면역 과민 반응이란, 보통 사람은 항원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을 항원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인체는 해로운 물질을 항원으로 인식하고 항체를 만들어 이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보통사람은 항원으로 인식하지 않는 물질을 항원으로 인식하여 항원-항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모든 육류, 즉 단백질에 항원-항체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고기만 먹으면 항원-항체 반응, 알레르기가 유발된다. 가장 많은 항원 물질은 단백질이다. 진화학에 따르면, B세포나 T세포가 분자적인 방법으로 외부의 물질을 제거할 수 없을 때, 물리적인 힘을 이용해서 외부의 병원균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기전(메커니즘)으로 보기도 한다. 즉, 외부에서 유해한 물질이 들어 왔는데 분자적인 기작을 통해 제거할 수 없으므로 물리적으로 재채기 등을 하게 하여 밖으로 방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분류 I 형 : 급성반응과 초급성반응, 아나필락시스, 혈관부종, 기관지경련 II 형 : 항체 의존 세포독성-용혈성 빈혈, 간질성신염 III 형: 면역 복합체 질병-혈청병 IV 형: 세포매개,혹은 지연성 과민 반응-접촉성피부성, 항원 노출 48 ~ 72시간 뒤에 반응이 나타난다. V 형 : 특발성 황반 발진(idiopathic Maculopapular rash), Stevens-Johnson syndrome(스테븐-존슨 증후군) 치료 유발 항원 회피=항원이 될 수 있는 물질과 접촉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예방이다. 미국소아과학회(AAP) 지침에 근거해 만들어진 기존 권고의 주된 이유는 '너무 일찍부터 땅콩 제품을 먹이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국립보건원(NIH) 산하 국립 알레르기 및 감염질환연구소(NIAID) 은 "알레르기 관련 개정 지침"에서 땅콩알레르기에 걸릴 위험성이 있는 아기는 생후 4~6개월부터 땅콩이 든 식품을 먹이는 것이 알레르기 예방에 좋다고 권고하였으나 식이 섭취량의 조절과 의료전문가의 관찰등 임상적 과정과 의학적 조건이 전제로 제시되었다. AAP는 "우유ㆍ달걀ㆍ땅콩ㆍ생선ㆍ견과류 등 식품이 알레르기를 일으키기 쉬운 식품임을 전제로 알레르기 유발식품의 섭취를 늦추도록 권할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입장을 바꿨지만 이러한 새로운 가이드라인 역시 임상적 과정과 의학적 조건을 다룰수있는 의료전문가의 관찰하에 진행되야한다는점을 전제하고있다. 항히스타민 주사. 정주, 근주, 피하 주사, 혹은 경구 투여 스테로이드 주사 심하게 가려워 잠을 못잘 정도면 수면제 처방을 할 수도 있다 예외는 있으나 피부를 시원하게 해주면 덜 가렵다. 항체 주사를 맞으면서 알레르기 반응을 줄이는 면역 치료법이 있으나, 장기간 치료가 필요하며, 비용도 비교적 비싼 치료법이다. 기존 권고의 주된 이유는 '너무 일찍부터 땅콩 제품을 먹이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의 사항 대개의 두드러기는 처음 주사를 맞으면 곧 좋아지지만, 다시 하루 이틀 내에 재발하기도 한다. 그리고 옻이 항원이면 한 달 이상 증상이 계속 되기도 하므로 유의하여야 한다. 한편 알레르기로 인한 주요 식품의 섭취제한은 성장기 발달 및 세포성장 그리고 에너지대사에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알레르기 유발 식품에 대한 대체 식품의 섭취로 영양분을 보충하는 균형있는 식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같이 보기 알레르기성 비염(화분증) 투베르쿨린(결핵 검사) 유제품 알레르기 각주 외부 링크 항히스타민제의 기전 네이버 캐스트 - 알레르기와 기생충 호흡기 질환 피부과 면역학 면역계 호흡계 독일어계 외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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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주
곽영주(郭永周, 1924년 1월 10일 ~ 1961년 12월 21일)는 대한민국의 경찰관으로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장인 경무대 경찰서장(경무관)이었다. 이정재, 유지광과 더불어 이천 3인방으로도 불렸다. 이승만의 비호를 받아 많은 권력을 갖고 행패를 부린 것으로 유명하다. 생애 1924년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율현리에서 태어났다. 유지광과 이천소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8세때 서울의 경성공립직업학교(지금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일본 제국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하사관 계급 중 하나인 군조(軍曹)에 올랐다. 해방 후 수도경찰학교를 수료, 1947년에는 경무대 경비경찰로 들어가 이듬해 경무대경찰서 경호대 경위로 승진, 1951년에는 경감으로 승진해 경무계장을 맡는다. 1955년에는 치안국 경무과 총경으로 승진, 이듬해인 1956년에는 경무대경찰서 서장직을 맡게된다. 1957년에는 치안국 경무관이 된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 학생들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하자, 곽영주가 이승만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학생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 경무대 앞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발포 명령 사실이 알려지지 않고 이정재와 엮여 비판을 받았다. 4월 26일에는 2급 깡패들을 모두 석방하라 지시하였고, 4월 30일에 사표를 제출한다. 이후 임화수에 의한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의 주동자임이 밝혀지고, 경무대앞 시위군중에 대한 발포명령 혐의로 구속된 뒤 단기형 판결을 받는다. 재판은 1961년 1월 13일에 계획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들것에 실려와 심리하지 못하여 19일로 연기, 급성간염과 위궤양의 사유로 26일로 다시 연기하여 성모병원에서 재판한다. 이 때 권리행사방해를 사유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발포명령권자에 대한 참고인 조사에서는 곽영주가 이승만의 "발발이"였다는 증언도 나왔으나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는다. 구속된 동안 장남 곽승근이 매석환에 의해 유괴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정치깡패 비호와 권력남용, 4.19 혁명 당시 경무대 일원 발포명령의 책임으로 서울 일원에 대한 발표명령 책임의 홍진기와 함께 법정에서 사형선고 판결을 받았다. 1961년 12월 21일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곽영주를 연기한 배우들 임문수 - 《제1공화국》(1981년) MBC 드라마 홍성민 - 《산하》(1987년) MBC 미니시리즈 이동신 - 《제2공화국》(1989년) MBC 드라마 이운우 - 《무풍지대》 (1989년) KBS 드라마 남성진 - 《야인시대》 (2003년) SBS 드라마 같이 보기 이정재 유지광 최인규 홍진기 이기붕 이승만 임화수 각주 1924년 출생 1961년 사망 이천시 출신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현풍 곽씨 사형된 정치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동문 국방대학교 동문 혁명재판 기결수 이승만 대한민국에서 교수형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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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여뀌
이삭여뀌는 한반도 각처의 산이나 들에 나는 마디풀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생태 높이 50~80cm이다. 전체에 거친 털이 펴져 나고, 마디가 굵다. 잎은 어긋나며 타원형, 긴 타원형, 도란형, 난형으로 길이 7~15cm이다. 가장자리는 밋밋하고, 양 면에 털이 있으며, 표면에 검은색 반점, 잎자루는 짧다. 턱잎은 원통형이며 가장자리에 수염털이 있다. 꽃은 줄기 끝에 달리는, 길이 20~40cm의 이삭꽃차례이며 꽃이 드문드문 달리고, 적색이다. 꽃받침은 4장, 수술 5개, 씨방은 나상 원형, 암술대 2개이다. 열매는 수과, 9~10월경에 맺고 길이 0.2cm로 납작한 난형으로 암갈색이며, 꽃받침에 싸여 있다. 관리 및 번식법 관리법 : 반그늘이고 바람이 잘 통하는 화단에 심는다. 번식법 : 10월에 받은 종자를 저장 후 이듬해 봄 화단에 뿌리거나 새싹이 올라올 때 뿌리부분을 여러 개로 나누어 심는다. 각주 외부 링크 국가 표준식물 목록 국가생물종 지식정보시스템 USDA GRIN Taxonomy for Plants 마디풀과 광엽초본 1753년 기재된 식물